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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연변식 광장무가 주는 계시(박영일) 댓글:  조회:2539  추천:0  2017-11-16
얼마 전 연길시 TV에서 연룡도광장무 경연을 보게 되었다. 통일된 복장과 경쾌한 음악, 잘 정리되여 있는 프로그램, 어느 하나 나무랄 때 없는 완벽한 예술경연을 보는 느낌이였다. 특히 정부 주도로 그 규모 또한 작지 않아서 매우 인상적이었다.   각 나라와 도시는 각각의 독특한 문화를 가지고 있는데, 중국도 마찬가지로 특색적인 사회주의 모습을 담고 있는 이색적인 춤의 향연을 거리와 광장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그 중 광장무라고 불리는 단체춤 문화가 그 중 으뜸이라고 할 수 있다. 주로 아줌마들이 중심으로 음악을 틀어놓고 단체로 춤을 추는데 일종의 체육활동과 유사하다는 특징을 지녔다. 이 광장무는 광장건강댄스 또는 광장류행무용이라고도 하는데 남녀노소 가릴 것 없이 누구나 쉽게 따라서 출 수 있는 것에 그 묘미가 있다. 동반하는 음악 또한 재미있으면서도 누구나 따라서 부르기 쉽고 누구나 잘 알고 있는 경쾌하고 빠른 리듬을 지닌 류행가요들을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있다는 점이다. 따라서 자체적으로 강한 전파력과 흥취를 유발하는 중독성을 지녔다는 특성이 있다. 거기에 중국국가체육총국이 주도로 12가지 건강체조댄스를 전국적으로 보급하고 있다는 점도 광장무 보급에 큰 작용을 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호남사범대학의 황용군(黄勇軍) 교수는 이러한 광장무에 대한 현상을 문화대혁명 시절 홍위병과 같이 집단행동을 중시하던 사회풍토 속에서 살아온 세대들이 광장무를 추면서 집단 속에서의 안정감을 느낄 뿐만 아니라 자기의 존재감을 다시금 발견하면서 만족감을 느끼기 때문에 류행하고 있는 것으로 분석하고 있다. 충분히 타당성이 있는 분석으로 이해된다. 물론 또 다른 분석으로 이른 시기 북쪽의 앙가무용, 남쪽의 태극권과 같은 무술과 기공을 기초로 한 광장문화의 한 변형으로 볼 수도 있다는 주장도 있다. 무엇보다도 광장무의 특징은 주민들의 자발적인 참여를 통해 집단 춤의 아름다움과 즐거움을 함께 담아낸다는 특색이 있다. 또한 광장이라는 개방된 공간을 통해서 사람들이 한데 모이고 자유롭게 자신을 표현하는 개방감을 느낄 수 있다.   그러나 이번 연길 TV에서의 광장무 경연에서 보이는 특징은 중국 다른 지역에서 보아왔던 광장무와 엄연한 차이점들이 눈에 띈다. TV나 길가에서 보던 중국식 광장무는 가장 간단하고 익숙된 음악에 아마추어적인 에오로빅 정서의 무용동작과 군중건강체조 느낌이 물씬 풍긴다. 그런데 이번 광장무는 정갈하고 딱맞는 옷을 걸친 것처럼 짜임새가 있었다. 그럴수록 기존의 광장무처럼 대중들한테  인간미 넘치고 자연스럽고 사랑스러운 느낌을 주는 자연스러움이 차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특히 성적위주, 순위위주의 각 단위별 경쟁을 유도하다보니 광장무에 전문적인 예술성과 테크닉이 들어가는 모습이 보였다. 이러한 상황들은 광장무의 보급과 전파 및 유행에는 도움이 안 된다고 생각한다.   광장무의 원조는 군중들이 자발적으로 조직한 집체무용의 한 형태였다. 또한 류행적인 요소와 민족적인 특색이 있는 다원화적인 무용형식이다.  때문에 사람들이 자발성으로 진행되는 모습이 광장무의  정체성이 아닌가 생각한다. 그렇다고 광장무가 전문화되고 고급예술로 발전하는 모습에 대해 무조건 잘못되었다고 비판하기도 아이러니한 점이 있다.  이러한 난제를 타개하기 위해  자발적 참여를 독려하고 보다 전문적인 광장무의 발전을 이끌어내는 정부주도의 광장무를 활성화시키는 것이 어떨가 제안한다. 즉 아마추어 전략과 프로화 전략을 이분화하여 서로 공존하는 광장무를 활성화시키는 것이다. 지금의 순위위주로 참여하는 방식은 자제하되 광장무 전문가는  육성할 필요가 있다.  연길시는 2004년부터 가두를 단위로 한 광장무콩클을 실시하고 있다.  단지 군중예술관과 가두 등 기관 중심으로 한정한 광장무 보급에는 한계가 있다.   연변의 광장무는 일부 지역사회의 광장무가 아닌 연변전체의 광장무가 되어야 할 것이다. 따라서 자발적인 흥(兴)을 가지고 참가하는 동네 아줌마들, 우리네 아줌마들의 광장무가 되어야 한다. 기관주도의 광장무 보급을 지속하는 동시에 민간의 자발적인 참여를 유도하는 노력을 병행해야 할 것이다. 자발성을 잃게 되면 광장무의 특성을 잃게 된다. 자발성을 지키고 프로화를 통해서 고급화를 이루는 전략을 짜야한다. 아마추어 대회와 프로 대회를 따로 개최하고 평가기준도 서로 다르게 하는 것도 한 방법일 것이다.   연변의 특수성이 결합한 광장무의 프로화가 필요하다. 연변은 여러 소수민족과 한족이 융합되여 사는 조선족 자치주이다.  게다가 조선족 문화에 대한 배려와 존중하는 문화가 잘 발달한 곳이다.기존의 광장무에 조선족풍미가 첨가된다면 보다 다원화적인 광장무가 될 것이고, 무용전문가들에 의해 잘 다듬어져 대중들에게 보급된다면 문화적으로 더욱 융성하는 연변의 거리가 될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연변 각 거리에 울려퍼지는광장무 효과는  ‘연변 브랜드’를 더욱 가치있게 만들게 될것이다. 정부차원에서 의도적으로 콩클 등 다양한 수단으로 광장무의 보급과 참여를 유도하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다. . 따라서 각 기관 단체들은 광장무 전문가들의 양성과 아울러 우리만의 대중화된 광장무의 창작과 보급을 위한 전문팀을 꾸리는 것이 필요할 것이다. 여기에 기존의 자발적인 광장무의 색채를 잃지 않도록 아마추어 광장무군체를 함께 양성하는 것도 바람직하다고 여겨진다. 연변일보 2017.11.14
1    연집강과 연길(허성운) 댓글:  조회:3720  추천:2  2017-11-16
지금까지 연길지명을 두고 많은 국내외 학자들은 나름대로 의미를 풀어내고 그 안에 담긴 뒷이야기를 적어왔었다. 하지만 연길지명에는 사람을 경악케 하는 섬뜩한 이미지가 음밀하게 숨겨져 있다는 사실은 잘 알려지지 않고 있다.   일본어로 연길을 음역하면 엔기쯔로 발음되나 훈독하면 노부요시로 발음된다. 여기서 말하는 노부요시라는 단어는 옛날에 보검을 만드는 일본장인 이름으로서 그가 만든 류몬노부요시라는 보검은 일본에서 오래전부터 국보로 지정되어 있다. 노부요시라는 언어에는 무사가 기를 칼끝에 응집시켜 그 기가 검을 타고 밖으로 뻗어 나오게 되여 예리한 칼날이라는 숨은 뜻이 배여 있다. 이런 이야기가 있다. 광복 전에 룡정에 별명이 노부요시라는 한 일본 경찰서 서장이 있었는데 늘 자신의 군도가 노부요시 보검처럼 단단하고 예리하여 대적할 적수가 없다고 자랑하며 다녔기에 그 별명이 붙여졌다. 1945년 가을 쏘련군에게 잡혔다가 구치소에서 남모래 뛰쳐나온 경찰서장은 집으로 돌아와 어린 딸을 총으로 쏴 죽인 후 주택에다가 불을 지른 후 군도로 할복하여 자살하는 끔찍한 일을 저질렀다. 그가 놓은 불은 이튼 날에 가서야 겨우 진화되었다.   그럼 이런 일본 검의 섬뜩한 그림자는 어떻게 되여 연길지명에 비껴졌을까. 역사를 거슬러 연길지명을 꼼꼼히 캐고 보면 1900년 로씨아가 만주에 침입하여 중국동북지구를 짓밟고 1901년 일본을 비롯한 열강 세력이 청 정부를 압박하여 신축조약을 체결한 뒤 이듬해 10월 26일 청 정부가 연집강(煙集崗)에 연길청(延吉廳)을 세우면서 연길이란 지명이 등장한다. 연집(煙集)이라는 한자음의 소리를 바탕으로 연길(延吉)이라는 문자로 고치여 표기한 것이다. 그리고 연길이라는 지명이 본격적으로 사용하기 시작한 것은 1909년 연길청을 연길부로 고치고 1912년 연길현으로 개명한 후에 여러 력사 기록에 대량으로 나타난다. 연자(延字)가 ,길자(吉字)가 ,연희(延喜)정, 연평(延平)교 등 연길의 주요 거리 다리 건축물 이름도 일본인들의 속셈에 따라 연길지명에 초점을 맞추어 표기되어 있다.   사실 연길의 최초의 지명을 따지고 보면 개척초기에 화전민들이 화전 밭을 일구면서 연기와 안개가 자오록이 덮여 있었다는 의미로 연집강(煙集崗)이란 땅 이름이 기원되어 있는데 그 후 사용한 연길지명과 뒤섞이면서 화전민의 력사는 운무 속에 가리어 오늘날까지도 이렇다 할 력사기록 한줄 남기지 못한 채로 세월의 비바람 속에 씻기여 사라지어 가고 있음을 발견할 수가 있다. 예로부터 연집강 구역은 뒤로 깃대봉을 사이에 두고 두 평풍(병풍의 방언)산이 둘레를 감싸고 바람을 막아주는데다가 그 안에 경사도가 완만한 구릉지가 곳곳에 자리 잡고 있어 그야말로 천혜의 화전적지로 손꼽힌다. 완만한 경사지를 따라 개척초기에는 땅막집들이 감자처럼 여기저기에 박혀있고 그 사이로 석인골 태암 등지에서 흘러내리는 냇물이 남계마을 부근에서 연집강을 이루며 굽이굽이 휘돌아 남으로 부르하퉁하에 흘러든다. 경사진 화전 밭은 한쪽 발을 아래로 펴 딛고 한쪽 발은 구부려 허리를 펴고 일하는 모양이 되어 일 하는데 덜 피로 할뿐만 아니라 땅의 경사도에 따라 화전 불길이 세어지거나 약하게 조절 할 수 있기 때문이다.   19세기말 뾰죽산아래 안방마을이라는 옛 동네에는 불붙이고래 라고 부르는 지명이 있었는데 최씨 성을 가진 사람이 화전을 하다가 산불을 내여 그 불이 평풍산을 타고 타올라 몇 십리까지 불길이 번진 적이 있다고 한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이 마을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화전을 할 때 습기가 있는 눅눅한 날 밤을 골라 불꾸러미를 만들어 불을 지른다. 밤바람이 산 정상에서 아래로 불기 때문에 그리고 날이 어두워야 날아오르는 불티가 보이여 불길을 공제하기가 쉽다고 한다. 불을 생솔가지로 두드려서 막는데 밭 절반 넘어 불이 내려가면 밑에서 위로 맞불을 놓아 불이 잘 타오르게 하고 두 불길이 만나는 지점에서 저절로 불이 꺼지게 하였다.   연집강 구역은 화전민의 삶의 문화가 무르녹아 흐르던 곳이다. 이 지역의 숫둘고래 부싯돌밭 삼밭고래와 같은 명칭들은 지난세기까지 해도 사람들 입에서 입으로 널리 알리어졌던 땅 이름들이다.   그 옛날 화전민은 떠돌이 삶을 살면서 약초도 캐고 짐승도 잡았다. 이 지역 황초고래 방초고래 같은 지명은 오래전부터 사냥과 채집을 하면서 생겨난 명칭들이다. 연집강 구역은 두만강 강변과는 달리 생산된 작물을 회령 종성 온성으로 옮기는데 시간과 비용 그리고 위험이 따르기에 아예 산 여불때기(함경도 방언 비탈진 산기슭)밭 가장자리에 감자 움 같은 굴을 깊이 파서 저장하였고 겨울철에는 잡은 곰 가족을 벗겨 옷을 해 입고 곰처럼 구새 먹은 통나무 속에 들어가 잠을 자기도 하였다고 전해 내려오고 있다.   연무가 자오록이 뒤덮여 있는 연집강 지명에는 혹독한 세상과 맞서 치열하게 살아왔던 옛 선인들의 꺼지지 않는 삶의 불씨가 깜빡이고 빨갛게 연분홍 천지꽃이 물드는 산언저리에 안녕을 기원하던 화전민의 그 순박한 눈동자가 어리여 있다.   만일 석인골에 묻혀있던 돌사람이 입이 달려서 엉키고 설키여 있는 연길지명을 묻는다면 과연 어떤 답이 나올까. 하지만 석인골 있던 그 돌사람도 반세기 전에 어디론가 가뭇없이 사라지어 행적조차 묘연하니 연길지명 속에 감추어진 그 정체는 언제가야 사람들 앞에 드러날까.   화전민들의 파란만장한 력사가 아로새겨진 연집지명이 일제 침략자의 칼자루에 휘둘리어 연길지명으로 뜯어 고쳐지는 과정은 서글픈 우리 과거사가 숨겨져 있는것이다. 연변일보 2017.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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