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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중국고전장편소설] 서유기 머리말 댓글:  조회:407  추천:0  2023-06-28
[중국고전장편소설] 서유기        머리말 1       《서유기》는 대략 명조중엽인 16세기 70년대에 책으로 완성되였다.《서유기》는 앞서 나온《삼국연의》,《수호전》그리고 그후에 나온《유림외사》, 《홍루몽》과 함께 우리 나라 명청시기의 가장 대표적이고 가장 우수한 장편소설이다. 중국고전소설예술의 휘황한 성과의 징표이기도 한 이러한 소설들은 중국인민, 나아가서는 세계인민이 즐겨 읽는 고전문학작품으로 되였다.     고전소설《서유기》도 자체의 특점을 갖고있는바 이 소설을 읽을 때 아래와 같은 점을 반드시 리해해야 한다.     첫째,《서유기》는 일반 고대소설들과는 달리 신화와 동화의 성질과 특점을 다분히 지니고 있다. 모택동 동지는 “신화중의 허다한 변화”, “《서유기》에 나오는 손오공의 72변이라든가《료재지이》에서 나오는 허다한 귀신과 여우들이 사람으로 변한 이야기”에 대해 언급할 때 다음과 같이 지적하였다.     “이러한 신화에서 말하는 모순의 호상변화는 결코 구체적 모순이 나타낸 구체적 변화가 아니라 무수하고 복잡한 현실적 모순의 호상변화가 사람들에게 일으킨 유치하고 사상적이고 주관환상적인 변화인 것이다.” —모택동 “모순론”     “그것은 결코 현실에 대한 과학적 반영이 아니다. 다시 말하면 신화나 동화에서의 모순구성의 제 측면은 결코 구체적 동일성이 아니라 환상적 동일성일 따름이다.” —동상서     모택동 동지는 여기에서 신화나 동화류의 문학예술창작의 구체적 성질과 특점을 지적하였는 바 이는 우리가 소설《서유기》를 리해하는 데 있어서 매우 중요한 지도적 의의를 갖고있다.     다 알고있다싶이 “관념형태로서의 문예작품은 모두 일정한 사회생활이 인간의 두뇌에 반영되여 생긴 것이다.” —모택동 "연안문예좌담회에서 한 강화” 신화 및 신화소설《서유기》와 같은 작품들도 하나의 관념형태로서 역시 일정한 사회생활을 반영하고있다.     《수호전》,《홍루몽》중에서 묘사된 인문과 사건 및 모순투쟁은 극 소부분이 종교적 미신과 문학적 환상을 반영한 것 외에 대부분은 현실생활속에서 존재하거나 존재할 가능성이 있는 것들이다. (물론 문학작품은 예술적 가공을 거친 것이다.)《서유기》에서 묘사한 손오공, 저팔계, 옥황상제, 신선, 요괴 그리고 손오공이 천궁을 소란시킨다거나 지구에 돌입하고 룡궁을 란장판으로 만든다거나 이랑신과 지혜를 겨룬다거나 백골정을 세번 쳤다든가 하는 이야기 줄거리들은 현실생활에 있을 수도 없고 존재할 가능성도 없는 것들이다. 그러나 이야기속에 있는 많은 문학적인 환상적 인물과 사건들은 역시 현실생활과 동떨어질 수가 없는 것들로서 작자가 사회현실속에서 장악한 자료와 사회생활에서 얻은 감수, 리해를 그 창작적 토대로 삼고있는 것이다.     《서유기》는 랑만주의로 충만된 환상적인 필치로 손오공이라는 이 신화적 영웅인물의 신통력과 변화를 그려내고있다. 작품에서 손오공은 승천입지도 하고 호풍환우도 하며 변하고 싶은대로 변하는 데 심지어 토지묘로도 변할 수 있다. 그리고 근두운을 타면 단번에 십만 팔천리를 날 수 있고 금고봉을 수놓이바늘만큼 작게 변화시켜 귀안에 넣을 수도 있고 사발아구리만큼 굵고 몇장 길이로 길게 변하게 할 수도 있다. 그럼 이런 것들이 현실생활에서 가능한 일일가? 물론 어림도 없는 일이다. 하지만 독자들은 이렇게 활발하고 지혜롭고 락관적이며 투쟁정신과 무궁한 재주를 가진 인물을 좋아할 뿐만아니라 그 신비스럽고 대단한 위력을 가진 금고봉마저 좋아하고있다. 이것은 무엇때문인가? 그것은 손오공이 천궁을 소란시키고 요마들과 싸우는 등 환상적인 이야기속에 우리가 능히 리해할 수있는 현실적인 내용이 들어있으며 또 이런 이야기들이 모종의 사회비판적 의의를 갖고있기때문이다. 뿐만아니라 이러한 랑만적인 묘사방법은 작품이 나타내는 예술세계에서는 합리적인 것이다. 그러므로《서유기》를 읽을 때 우리는 이 소설은 신화소설의 성질과 특점을 가진 소설임을 반드시 명심하고 읽어야 이 작품의 사회적 내용과 의의를 정확히 인식할 수 있다. 과거에 오일자, 오원자 등 사람들은《서유기》를 “담선(谈禅)”, “석도(释道)"의 책이라고 말하였고 그 후에 호적은 이 책이 “완세주의(玩世主义)”를 표현했다고 했는 데 이런 평가들은 모두 이 작품의 사회적 내용과 의의를 말살하고 외곡한 오유적인 평가들이다.     둘째, 《서유기》는 작가 개인이 창작하고 완성시킨 그런 작품들과는 달리 고대민중들의 창작과 작가 개인의 창작이 결합되여 완성된 작품이다. 중국고전소설들중에서 《서유기》는《유림외사》,《홍루몽》등과 같은 순 작가 개인에 의해 창작된 작품과는 다르다. 이 작품은 처음부터 어느 한 개인에 의해 창작된 것이 아니라《수호전》,《삼국연의》등 작품들처럼 긴 시간을 내려오면서 많은 사람들의 기술과 창작에 의해 형성되였다가 나중에 한 사람에 의해 총화성적으로 재창작되고 책으로 마무리된 것이다.     당승의 취경이야기는 력사적으로 실지 존재했던 사실이다. 당태종 정관년간(기원 627년부터 기원 649년까지)에 중 진현장은 불경의 교의를 정확하게 전하기 위하여 천축(인도)에 경을 구하러 가기로 작심했다. 그는 전후하여 17년이란 긴 시간을 거쳐 수만리 길을 걸었으며 갖은 고생을 겪으면서 끝내 6백여부의 불경을 얻어가지고 장안에 돌아왔다. 귀국 후 현장은 성지에 의하여 불경 번역작업을 받아하는 한편, 서역에서 보고들은 일들을 구술로 전했다. 그의 제자 변기(辩机)가 그의 구술에 근거하여 《대당서역기(大唐西域记)》를 써서 서역 여러 나라들의 불교유적과 토산물, 풍속 등 정황에 대해 소개했다. 후에 또 그의 제자들인 혜립(慧立)과 언종(彦悰)이《대당대자은사삼장법사전(大唐大慈恩寺三藏法师传)》을 써 현장이 서역에 다녀온 이야기를 상세히 기록하였다. 이 두 책은 모두 실제로 있은 사람과 사실을 쓴 것이지만 전자는 불교의 발원지에 대한 견문을, 후자는 불교도의 전기를 쓴 것인만큼 신비한 종교적 색채가 많았다. 특히《서역기》에서는 더 많은 종교적 풍문과 불경속의 이야기를 기술하고있다. 또한 교통이 극도로 불편한 당시 정황으로 볼 때 현장이 홀몸으로 서역에 가서 경을 얻어온 것 자체가 모종의 전기성적인 색채를 띠고있었다. 이리하여 당승의 취경이야기는 민간에 류전되기 시작하였으며 그 과정에 점점 별의별 신비한 내용들이 보태지게 되였다.     송조때에 이르러 취경이야기는 이미 민간에 광범위하게 류전되였는 바 이야기군들의 주요한 이야기거리로도 되였다. 현존하고있는《대당삼장취경시화(大唐三藏取经诗话)》가 바로 남송시기의 이야기군들이 사용하였 던 화본이다. 이 책은《대당대자은사삼장법사전(大唐大慈恩寺三藏法师传)》처럼 실지로 있은 력사적 인물과 사건을 기록한 것이 아니라 후행자(猴行者)가 백의수사(自衣秀士)로 변하여 당승을 보호하면서 도중에 요괴를 때려 잡는 이야기를 쓴 것이다. 이 책은 이야기 줄거리가 조잡하고 예술적 상상력과 문장조직 등이 오승은의 《서유기》에 비해 많이 못하지만 처음으로 취경이야기를 문예창작에 도입하고 주인공을 현장이 아닌 후행자로 한 것이 주목된다. 이 책에서 나오는 후행자와 심사신(深沙神)은 후에 나온《서유기》의 손오공과 사화상임이 틀림없다. 그리고 저팔계라는 인물은 아직 출현하지 않고있었다.     원조때에 이르러 취경이야기는 더 크게 발전하였다. 이미 발견된 자료에 근거하여 우리는 원조부터 명조초기에 이미《대당삼장취경시화》보다 더 성숙된《서유기》 화본소설이 나타났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가석하게도 지금은 그 때의《서유기》화본소설을 볼 수 없고 다만 명조 영락년간(기원 1403년부터 기원 1424년까지)에 편찬된《영락대전(永乐大典)》에서 “위징이 꿈에서 경하의 룡을 베다”라는 제목으로 된《서유기》에서 발취했다는 1,200여 자 되는 문장을 볼 수 있을뿐이다. 이 단락의 문장에서 쓴 이야기내용은 현존 세덕당본(世德堂本)《서유기》 제9회 “원수성(袁守诚)은 용케도 무사곡(无私曲)을 알아 맞히고 룡왕은 어리석게 하늘의 법을 범하다”와 제10회 앞부분의 내용과 맞먹는다. 이밖에 조선고대의 한어교과서인《박통사언해(朴通事谚解)》에서도 “당삼장서유기”라고 제목을 단 평화(平话)를 여러 곳에서 인용하였다. 비록《박통사언해》에서 인용한 문장이 그 화본의 원문이 아니고 옮긴 이의 간략된 문장이기는 하겠지만 거기에서 우리는 그 화본에는 이미 많은 취경이야기들이 실려있었음을 알 수 있다.     취경이야기는 아주 오래전부터 무대우에서 공연되였다. 일찍 금원본(金院本)에는《당삼장》이 있었고 원잡극(元杂剧)에는 오창령의 《당삼장서천취경(唐三藏西天取经)》이 있었으나 지금은 모두 실전되였다. 현재 존재하고 있는 것으로는 원조말기, 명조초기 때의 사람 양경현(杨景贤)이 쓴《서유기》 잡극이 있다. 이 책에서는 당승이 태여난 이야기는 다루었으나 위징이 꿈에 경하의 룡을 벤 이야기와 당태종이 명계에 들어갔다 나온 이야기는 없다. 이 책의 주인공 역시 손오공이긴 하지만 그 후의《서유기》에서 묘사한 손오공의 인물형상과는 비할 수가 없으며 오승은의 붓끝에서 묘사된 손오공의 형상과는 본질적인 차이가 있다.     당조 때 현장이 경을 가져오고 《대당대자은사삼장법사전》, 《대당서역기》 등 책이 나타난 후로부터 송조, 원조, 명조초기까지 이 몇백년 사이에 취경이야기는 구전전설, 화본소설 및 잡극 등 여러가지 경로와 예술형식을 통하여 부단히 발전하여 왔다. 또 취경이야기는 오랜 시간을 거처 류전되는 과정에 많이 변화되였다. 인민들은 원래의 이야기 줄거리를 부단히 고치고 보태고 하였으며 동시에 봉건통치계급과 봉건사회에 대한 자신들의 관찰과 인식을 이야기속에 주입하였을 뿐만아니라 이야기를 통하여 봉건사회 악세력에 대한 비판과 투쟁을 반영하였고 자연을 정복하려는 리상과 소망도 반영하였다. 오승은의《서유기》는 취경이야기를 다룬 민간문학의 제재를 직접 계승하였을 뿐만아니라 거기에서 풍부한 사상적 자양분을 섭취하여 이 신화소설로 하여금 생동하고 재미있는 묘사의 갈피갈피에 왕왕 귀중한 사상이 번뜩이게 하였다. 례를 들면 소설 제45회에서 손오공이 한무리의 뢰전풍우신들에게 명령을 내리는 장면을 아래와 같이 묘사한 것이다.     “이 금고봉만 지켜보다가 내가 이 금고봉을 우로 처들면 곧 바람을 일으키란 말이요.”     풍로파와 손이랑은 지체없이 대답했다.     “네, 알겠습니다.”    “두번째로 처들면 구름을 펴구.”     추운동자와 포우랑군도 인차 대답하였다.     “네, 네, 구름을 펴드리지요.”    “세번째로 처들면 우뢰와 번개를 치구.”     뢰공과 전모는 이구동성으로 대답을 했다.     “네, 네, 명령대로 따르겠습니다."     “네번째로 쳐들면 비를 내리구.”     “네.”     룡왕들은 일제히 대답하였다.     이러한 묘사들은 신들앞에서의 손오공의 위풍과 강대한 위력을 충분히 보여주고있다. 이런 랑만주의 예술적 상상은 자연을 정복하려는 고대인민들의 강렬한 념원을 아주 생동하게 반영하고있으며 인간의 노력이 하늘을 이길 수 있다는 락관적인 정신을 반영하고있다. 또 이것은 고대인민들이“상상과 상상력을 빌어 자연을 정복하고 자연의 힘을 지배하려 했음을” —맑스 “정치경제학비판서론” 표현하기도 한다.     《서유기》는 우리 나라 고대인민군중들의 집단창작과 작가의 개인창작이 결합하여 탄생된 것으로서《서유기》에 관한 민간문학이 없었더라면 오승은의 《서유기》도 없다고 말할 수 있다. 고대인민군중들의 집단창작으로 된 이 기초우에서 간단하고 조잡한 내용을 재창작을 거쳐 예술적 특점이 더욱 성숙되고 내용이 더욱 풍부해진 한 부의 고전신화소설이 탄생되게된 것은 아주 당연한 일이며 또한 작가 오승은의 공헌이다.     셋째, 비록 오승은은 작품속에서 당시의 암흑한 봉건사회현실에 대하여 신랄하게 풍자하고 비판하였지만 그저 사회가 변화되기를 바랐을뿐 봉건통치제도를 뒤엎으려는 것은 아니였다.     오승은 자는 여충(汝忠)이고 호는 사양산인(射阳山人)이며 회안부 산양현(지금의 강소 회안)사람이다. 그는 소관료에서 소상인으로 몰락한 가정에서 태여나 명조중엽인 약 기원 1500년부터 기원 1582년 사이에 생활하였다. 증조부와 조부는 련속 2세대가 작은 문관직에 있었으나 이름을 날리지 못하였고 채색실과 비단등속 장사를 하는 아버지는 경영에는 소질이 없는 소상인이였다. 그의 아버지는 비록 글읽기를 즐겨했으나 관리들에게 자주 협잡을 당했으며 이로 인하여 사회현실에 늘 불만을 품고 있었다.     오승은에 대하여 이전 사람들은 아래와 같이 평가하였다.     “어려서부터 문학적 재질이 뛰여나 회안일대에 이름을 날리였다.”     “민첩하고 지혜로우며 많은 책을 읽어 지식이 해박하다. 붓을 들면 시가 나오고… 또 해학적인 극을 창작하는데도 재간이 있었는 데 그가 쓴 여러 편의 잡기들은 한시기 이름을 날렸다.”     이러한 평가들에 의하여 우리는 오승은 일생의 한 측면을 리해할 수 있다. 오승은의 과거길은 그리 순탄하지 못하여 40여 세가 되여서야 겨우 “세공생(岁贡生)”을 얻었다. 순탄치 못한 과거길과 어려운 처지 등 원인으로 하여 그는 늘 가난한 생활을 하였으며 세도가들의 웃음거리로 되였다. 이런 환경속에서 그는 정계와 과거제도의 부패상에 대하여 더 깊이 료해하게 되였으며 변덕스러운 사회세태를 인식하고 비판하게 되였다. 그는 성격이 강직하고 아첨할 줄 몰라 60여 세가 되여서 부득이 작은 관직을 맡았는데 그것도 허리를 굽혀 권세에 아부하려 하지 않는 성격때문에 얼마 못 가서 그만두었다. 그는 한평생 많은 작품을 썼으나 생활이 째지게 가난했고 또 이어받을 자식이 없는 등 원인으로 대부분이 실종되고 현재 실존하고있는 것은《서유기》외에 후세사람들이 다시 정리한《사양선생존고(射阳先生存稿)》가 있을 뿐이다.     순탄하지 못한 과거길로 하여 오승은은 사회현실에 불만을 품게 되였다. 오승은은 “왕도(王道)”와“덕치(德治)”를 결합하여 봉건통치질서를 유지할 것을 주장하였는바 이것이 그의 기본적인 정치사상과 주장이였다. 그의 이런 주장들은《사양선생존고》에서 엿볼 수 있다. 례를 들면 이 책에 “명당부(明堂赋)”라는 작품이 있는데 이것은 당대 황제의 공덕을 구가한 전형적인 작품이다. 여기에서 그는 명세종 가정황제를 숭고하고 위대한 천자라고 칭찬하였으며 그의 통치를 “인심에 맞고 천심을 따른” 통치로서 “백성들은 해빛아래에서 생활하고 상하가 합심되여 화기애애하다”고 칭찬하였다. 물론 이것은 “왕도”와 “덕치”를 결합하여 통치할 것을 바라는 작가의 환상이지 결코 현실을 제대로 반영한 것은 아니다. 기실 가정황제는 도교를 숭상하여 오래동안 정사는 돌보지 않고 궁전에 들어박혀 단약이나 만들어 먹으면서 불로장생을 바라는 아주 어리석은 황제이다. 일부 사람들이 그에게 이런 어리석은 일을 그만둘 것을 권하였지만 그는 듣지 않았으며 도리여 진언을 한 사람들을 박해하였으며 지어 곤장을 쳐 죽이기까지 하였다. 그는 정사를 엄숭(严嵩) 일당에게 맡겼다. 엄숭 일당은 탐욕스럽고 횡포하며 남을 해치는 무리들이기에 그때 통치는 말할 수 없이 부패하였다. 때문에 오승은은 이런 현실생활을 실제적으로 관찰하고 명조의 실상을 “군대가 날로 무기력해지고 가렴잡세가 날로 늘어나며 허위적인 것이 흥행하고 사기를 치는 기풍만 늘어간다.”라고 지적하였다. 그는 또 “허리를 굽혀야 바라오를 수 있고”, “겉으로는 웃으나 속에는 칼을 품고 서로 다른 당파들을 배척하며”, “세력을 위해서 파리나 쥐처럼 행동하고 리익을 위해서는 물여우처럼 행동하는” 추태들을 폭로하면서 “지금의 상황으로서는 많은 말들을 참지 않으면 안된다.”고 한탄하였다.     오승은은 비록 당시의 암흑한 사회현상을 폭로하고 비판하기는 하였지만 의연히 “간사한 사람들을 멀리하고 옛날로 돌아가기”를 바라는 정치적 환상을 버리지 못하였다. 장시《이랑수산도가(二郎搜山图歌)》에서 그는 자신의 사회에 대한 견해와 정치적 포부를 충분히 밝히였다. 이 시에서 오승은은 화가의 높은 예술적 기교에 대해 높이 평가하면서 이를 빌어 명조사회에 대한 자신의 견해와 리상을 표현하였다. 시에서 그는 “의관”을 관료사대부에 비유하고 “원학(猿鹤)”과“사충(沙虫)”을 각각 고상한 사람과 비렬한 사람에 비유하였으며 “오귀(五鬼)”와“사흉(四凶)”을 각각 송조시기와 요순시기의 간악한 인물에 비유하였다. 오승은은 많은 시작품을 통하여 자신은 이러한 종류의 간악한 무리들을 제일 중오한다는 것을 반복적으로 보여주었다.     그는 작품《희대선생간원주의발(熙台先生谏垣奏议跋)》에서 반희대(潘熙台)가 관리를 할 때 모륜(毛伦), 녕고(宁杲), 강빈(江彬), 전녕(钱宁) 등 네 사람과 과감히 싸운 것에 대해 특별이 칭찬하면서 이 네 사람이 바로 명조의 “오귀"와 “사흉”이라고 지적했다.     《이랑수산도가(二郎搜山图歌)》에서는 아래와 같은 작가의 기본적인 정치관념이 반영되였다. 즉 백성들이 재난에서 허덕이는 원인은 사회에 추악한 현상이 존재하기 때문이며 통치자가 사람을 제대로 쓰지 못하여 이리 같은 간신배들이 욱실거리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때문에 그는 “왕도”로서 봉건통치의 만년대업을 유지할 것을 바랐다. 그러나 다만 한탄만 하였을 뿐 실제행동으로는 옮기지 못하였다.     오승은은 현실생활중에서 자신의 정치적 리상을 실현할 수 없음을 심심히 느꼈으며 또 당시의 “오귀”, “사흉”따위 무리들에 대해 증오는 하나 자신이 무력함을 느꼈다. 하여 그는 민간에서 류전된 신화이야기를 기초로《서유기》라는 신화소설을 창작하였다. 그는 자신의 정치적 리상을 손오공이라는 인물에 기탁하였으며 그의 손에 들려있는 대단한 위력을 갖고있는 금고봉으로 당시 요괴와 같은 존재의 부패한 간신배들을 소탕하였다. 오승은의 이러한 사상은 소설의 총체적인 사상내용이 제고된 데서 보아낼수 있을 뿐아니라 소설의 세부묘사와 인물의 언어묘사에서도 보아낼 수 있다. 례를 들면 소설의 제45회에서 손오공이 신들에게 구름을 펴고 우뢰를 울고 비를 내리게 할 때 뢰공 등천군에게 다음과 같이 말한다.     “등천군! 거기서 잘 살펴 뢰물을 받아먹고 법을 어기는 벼슬아치들과 부모들께 불효막심한 후례자식들을 몇놈이라도 더 쳐죽여주오!”     소설에서 손오공이 제일 증오하는 것은 “뢰물을 받아 먹고 법을 깨뜨리는 벼슬아치들”이다. 이것은 오승은의 많은 시에서 표현된 탐관오리들을 적대시하는 사상과 완전히 일치되는 것이다. 이 실례는 오승은이 손오공이라는 주인공을 빌어 자신의 정치적 리상을 표현했음을 충분히 설명해준다.     오승은은 어렸을 적부터 야사나 민간이야기 같은 것들을 즐겼으며 고대신화전설이나 민간전설에 익숙하였다. 그는《우정지(禹鼎志)》라는 지괴소설을 쓴 적이 있는데 이에 대하여 그는 “비록 이 책은 지괴소설에 속하기는 하지만 완전히 귀신에 대해 쓴 것만은 아니다. 이것은 이 시기 인간사회의 변이에 대한 지괴소설이나 쓰면서 우화적 의미를 더한 것이다.”라고 말하였다. 이것은 그의 신화소설들은 비록 신선이나 귀신에 대해 썼지만 역시 “인간사회"를 반영하였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런 창작은 환상적인 형식과 현실적인 내용으로서 사실은 작가의 사회현실에 대한 평론과 비판이다. 물론 작가의 이런 비판은 사회가 개량되기를 바랄 뿐이였지 근본적으로 봉건사회제도를 부정한 것은 아니다.   2       명조중엽이후 환관들이 정권을 잡고 밀정들이 행악하여 정치가 더욱 부패해졌다. 명무종 주후조(明武宗 朱厚照)는 사람을 쓸 줄 모르고 정사에 어두웠는바 류근(刘瑾)등 간신배들이 정사를 마음대로 쥐락펴락하였다. 그들은 살인과 방화를 마음대로 하면서 백성들을 압박하였으며 재산이 황실보다도 더 많으면서도 백성들의 고열을 짜내기에 급급하였다. 류근은 뢰물을 먹이지 않은 자에 대해서는 관직에서 내쫓고 뢰물을 먹인 자에 대해서는 벼슬을 높여주면서 강압적으로 뢰물을 요구하였다. 명세종 주후총(明世宗 朱厚熜)때에 와서는 탐관들이 득실거리고 백성들이 살기 힘들 게 되였다. 엄숭(严嵩), 엄세번(严世蕃)부자는 왕법을 무시하고 재주가 어떠하든지 뢰물을 먹이는 량에 따라 관직을 봉해주었다. 하여 “장수가 승진하려면 병졸들을 못살 게 굴어야 하고 관리가 득세하려면 백성들의 고혈을 짜내지 않으면 안되였다”. 따라서 군사들은 흩어지고 백성들은 류리걸식하는 현상이 나타났다.《서유기》에서 다룬 것은 비록 귀신들의 이야기이긴  하지만 이것은 그 당시 명조 사회현실을 그대로 반영한 것이다.     《서유기》는 암흑하고 부패한 봉건사회와 어리석고 흉폭한 통치자들에 대해 심각하게 폭로하고 비판하였다. 작품속에서 묘사된 천국이나 인간세계는 어느 하나 깨끗한 곳이 없다. 천궁이나 지부는 보기에는 아주 신성하고 위엄있어 보이지만 실은 겉치레일 뿐 그 속은 부패하고 추악하기 그지없다.     당태종의 혼이 지부에 갔을 때 판관 최각은 선황의 신하였고 또 그는 당대의 재상이자 그의 절친한 친구인 위징의 편지를 받은 원인으로 생사부의 기록을 고쳐 당태종의 수명을 20년이나 더 늘구어 혼을 이승에 보내주었다.     당승 일행이 간난신고를 거쳐 서방 극락세계에 도착하였지만 아난과가엽은 경을 공짜로 주려 하지 않았다. 당승은 진경을 얻기 위하여 부득이 오는 길에서 동냥할 때 쓰던 자금바리대를 내놓지 않으면 안되였다.     오계국의 사리요괴는 국왕을 죽여버리고 국왕으로 변하여 왕위를 독점하였으나 그가 신이나 염왕들과 잘 아는 사이이기 때문에 오계국 국왕은 억울해도 하소연할 곳조차 없었다.     이러한 묘사들은 바로 관리들끼리 한통속이 되여 왕법을 무시하고 탐오회뢰하는 당시 사회의 부패상을 그대로 반영한 것이다.     이와 동시에《서유기》는 어리석고 무능하며 조폭하고 음란한 통치계급을 비판하였다.     소설속에서 나오는 인간세상의 제왕들은 도교나 숭상하고 녀색에나 빠진 어리석은 군왕들이고 천국의 옥황상제마저도 옳고그름을 가리지 못하는 우매하며 독재적인 인물이다. 그는 손오공을 제압하기 위하여 태백금성과 태상로군 등 일당들의 지지하에 음모를 꾸미고 수단을 부리면서 안하는짓이 없다. 이러한 통치자들의 형상에서 우리는 인간사회 봉건제왕과 관료들의 어리석고 탐욕스러우며 세도를 부리는 반동적인 면모를 보아낼 수 있다.     《서유기》에서 당승이 취경길에서 만나는 많은 요괴와 악마들은 험난한 자연환경의 신화적인 표현이기도 하겠지만 많이는 인민을 해치는 사회악세력들을 상징한 것들로서 사회현실에 대한 반영이다. 제44회에 나오는 호력대선 등 세 대선은 요술로서 차지국의 국왕의 신임을 사고 중들을 해치는 데 중들은 더러는 죽고 죽지 못한 사람들은 노예로 되였다. 죽지 못한 나머지 중들은 포도군사들이 사처에 깔려서 도망을 칠래야 칠 수가 없고 죽음래야 죽을 수도 없는 처참한 처지에 있었다. 뿐만아니라 중이 아니라 하더라도 머리카락이 적거나 빠진 사람들도 중으로 몰려 도망치기 어러웠다.     이것은 명조시기 시정배가 살판을 쳐 길을 다니기도 겁이 나고 한집이 죄를 지으면 옆집까지 벌을 받아야 하는 련좌를 당해야 했던 사회현실을 그대로 반영한 것이다.     오승은은 명조 명세종 시기에 생활했던 인물이다. 력사기재에 의하면 명세종은 도교를 매우 숭상하였는 바 선후하여 소원절(邵元节), 도중문(陶仲文) 두 도사를 “진인”으로 봉하고 례부상서 관직을 주었다. 그리고 자기 스스로에게 그 무슨 “령소상청통뢰원양묘일비현진군(灵霄上清统雷元阳妙一飞玄真君)"이라는 도호를 붙이였다. 제40회에서 나오는 요괴 홍해아의 잔혹한 행위는 사람들의 마음을 섬찍하게 할 정도이다. 그는 산신들을 박해하여 어느 산신 하나 배불리 먹고 변변히 입지 못하게 할 뿐만 아니라 산신과 토지신들을 잡아다가는 아궁지기나 문지기로 부려 먹고 밤이면 야경까지 세웠으며 지어는 그놈의 졸개들까지도 산신과 토지신들에게 돈을 풍기였다. 만약 그런것마저 보내지 못하게 되면 그놈들은 몰려와 절간을 마스고 옷을 벗겨가기 때문에 토지신과 산신들은 한시도 편안한 날이 없었다. 이것은 바로 명조시기 백성들이 압박과 착취를 받고도 하소연 할 곳마저 없으며 먹을 것 입을 것이 없어 허덕이는 사회현실을 그대로 반영한 것이다.     《서유기》에서는 인민을 해치고있던 요괴들이 모두 신선이나 보살들과 관계가 있음을 폭로하였다. 비구국의 국장(国丈)은 원래 수성이 타고있던 흰사슴이고 평정산의 금각대왕과 은각대왕은 태상로군의 금로와 은로를 살피던 동자이며 통천하의 요괴는 관음보살이 련꽃못에서 기르던 금붕어이며 소뢰음사의 황미대왕은 미륵보살의 황미동자이다. 또 사타산의 첫째 마왕과 둘째 마왕은 문수, 보현 두 보살이 타던 청사자와 흰코끼리이고 셋째 마왕 대붕은 여래와 연관이 있으며 함공산 무저동의 요정은 리천왕의 의녀이고 완자산 흑송림의 황포괴는 하늘의 이십팔수 가운데의 하나인 규목랑이 하계에 내려온 것으로서 손오공의 말을 빈다면 “하늘에서 내려 온 요괴”이다. 이런 요괴들은 신선과 보살의 부하가 아니면 그들의 친척으로서 매 번 손오공이 그들을 없애려고 할 때면 그들의 주인이 나타나 귀순시킨다는 명의하에 그들을 보호해 주군 한다. 례를 들면 요마 새태세는 원래 관음보살의 금빛털의 늑대였는 데 주자국의 황후를 빼앗고 궁녀를 죽였으며 국왕도 하마트면 목숨을 잃을번 하였는 데도 보살은 도리여 그가 주자국 국왕을 재난에서 구해주었다고 말하였다. 또 이 관음보살은 온갖 죄악을 저지른 홍해아를 문하에 들이여 선재동자로 봉하였다. 이 책에서 쓴 신과 요괴의 관계는 사실상에서 봉건사회에서 통치자들이 서로 결탁하여 인민들을 압박하고 착취하는 현실사회의 반영이였다.     소설 《서유기》는 종교에 대하여 특히는 도교에 대하여 신랄하게 조롱하고 풍자하였다. 소설에서는 도사를 부정인물로 부각함으로써 요술의 허망함과 도교의 가소로움을 폭로하고 질타하였다. 소설에는 또 저팔계가 복성, 록성, 수성의 면전에서 그들을 “종놈”이라고 희롱하는 장면이 있다. 소설은 불교에 대하여 비교적 높이 받들기는 하였지만 역시 여러 곳에서 불교를 풍자하였다. 례를 들면 손오공은 여래의 앞에서 여래를 “요괴의 조카”라고 말했는 데 이는 신에 대한 대담한 풍자이다. 또한 소설에서는 불교에 대한 불경스런 언어를 사용하고 또 구체적인 묘사를 통하여 불교의 일부 교의에 대하여 비판하였다. 취경길에서 손오공과 당승은 늘 사람을 잡아먹는 요괴를 대하는 문제때문에 모순이 생기군 한다. 손오공은 요괴를 때려죽일 것을 주장하고 당승은 늘 “착한 마음을 잃지 말아야 한다”면서 요괴를 죽이지 말것을 주장하나 나중에는 손오공이 옳고 당승이 틀렸음이 증명된다. 이것은 불교 교의중에서 “생명을 해치지 않는다”는 교의는 믿을 것이 못되며 위해가 크다는 것을 말해주며 이런 교의를 믿는 것은 더욱 아둔한 것임을 말해준다.     반드시 지적해야 할 점은《서유기》의 종교와 신권에 대한 비판은 당시 사회의 암흑성과 긴밀히 련관되여 있다는 것이다. 책에서는 도교에 대해 제일 날카롭게 비판하였는 데 이는 가정년간에 도교가 통치계급사이에 성행하면서 사회가 뒤죽박죽이 되였던 원인으로 작가가 이에 대해 특별히 반감을 가졌기 때문이다.     오승은이 봉건사회와 봉건통치계급 및 종교에 대하여 일정한 비판을 한 목적은 통치계급에게 “교훈”을 제시해주어 그들이 틀린 것을 고치고 바른길에 들어설 것을 호소하기 위함이였으나 우리는 작품을 통하여 명조사회의 암흑성과 봉건통치계급의 부패상을 료해할 수 있다. 《서유기》는 도대체 무엇이 봉건통치이고 무엇이 봉건사회인지를 인식하는 데 우리에게 생동하고 형상적인 자료를 제공해주고있다.     《서유기》에서는 손오공이라는 반항적이고 신화적인 영웅형상을 부각하고 찬양하였다. 소설에서 손오공은 대담하고 투쟁정신이 강하며 어떤 면에서는 심지어 “무법천지”라는 느낌을 주는 인물이다. 그는 신성불가침이라고 말하는 천궁도 근본 안중에 없었다. 금고봉을 들고 마음대로 령소보전을 들부시고 도솔궁을 침범하여 천궁을 란장판으로 만들어 놓았다. 그는 또 “생사정수(生死定数)”, “륙도륜회(六道轮回)”설법도 무시한 채 유명부에 쳐들어가 생사부에 있는 원숭이 족속들의 이름을 모두 지워버렸다. 그는 “천자는 존귀한 존재이고 아래사람은 웃사람을 범하면 안된다”는 따위의 교리를 무시하고 천궁의 존귀한 신들을 완전히 념두에 두지 않았으며 천상지존인 옥황상제 앞에서도 “이 손오공”이라고 칭하며 반말을 썼다. 손오공은 대담하게 들부시고 욕할 뿐만아니라 투쟁중에서 무서워하거나 후퇴하는 법이 없다. 그는천병에게 겹겹이 포위되였을 때에도 지혜와 용기로써 끝까지 싸웠으며 붙잡혀 로군의 단로안에서 49일 단련되여 눈알이 빨갛게 되였어도 비관하지 않았다. 단로안에서 뛰쳐나오자 바람으로 귀안에서 금고봉을 꺼내 사발아구리만큼 크게 만들어 손에 들고 다시 천궁을 분탕하러 쳐들어갔다. 서천으로 가는 길에서도 가지각색 요괴들을 만났지만 두려워하지 않고 맞서 싸웠으며 하늘에 오르든지 땅에 들어가든지 요괴의 래력을 알아낸 뒤 제거해버렸다. 이렇게 아무리 큰 난관도 손오공을 막지 못하였다. 한번은 그가 사타산에서 요괴의 “음양이기병”속에빨려들어가 하마트면 목숨을 잃을번하였으나 이발을 사려물고 아픔을 참으며 갖은 방법을 다해 도망을 쳐 다시 싸움을 벌렸다. 소설에서 천궁을 소란시키고 지부를 쳐들어가는 손오공의 대담한 반역적인 행동과 용감하고 지혜로운 성격은 독자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겨준다.     용감히 투쟁하고 곤난을 두려워하지 않는 손오공의 정신은 당승과 저팔계와의 비교에서 더욱 뚜렷이 나타난다. 소설중에서 당승과 저팔계는 그 자신이 가지고있는 전형적인 의의외에 작품중에서 손오공이라는 인물을 더욱 뚜렷이 부각해주는 역할을 한다. 작가는 당승의 연약함을 비판하면서 손오공의 대담히 투쟁하려는 정신을 더욱 뚜렷이 하였고 또 신심과 의지력이 결핍하고 쩍하면 짐을 나누어서 헤여지자고 하며 싸움에서 도망칠 구멍만 찾고있는 저팔계의 결점을 비판면서 곤난을 두려워 하지 않고 투쟁을 견지하려는 손오공의 형상을 더욱 뚜렷이 부각하었였다.     봉건사회에서 통치계급은 늘 자기에게 대항하는 자들을 홍수, 맹수와 비기면서 대역무도한 죄인으로 취급했다. 이러한 정황하에서 《서유기》는 천궁과 지부의 통치자에 과감히 대응하는 예술형상을 부각하였는 데 이는 그 당시 력사조건에서 볼 때 일정한 의의를 갖고있다. 우리가 손오공의 투쟁정신을 긍정하는 것은 그가 대적하는것이 어리석고 횡포한 봉건통치자와 인민을 해치는 요괴들이며 인민에 대해서는 관심을 갖고있기 때문이지 무턱대고 긍정하는 것은 아니다. 작가는 제44회에서 인간사회의 불만을 평정하고 곤난하고 위험에 처한 사람을 돕는 손오공의 행동을 중들의 입을 빌어 찬미하였다. 취경길에서 손오공은 인민을 해치는 요괴에 대해서는 절대로 용서하지 않고 없애버림으로써 인민들을 위해 해를 제거하였다. 례를 들면 비구국에서 그는 백록정을 항복시킴으로써 1,111명의 아이들의 생명을 구했고 은무산에서는 표범요정을 때려 죽이고 나무군의 생명을 구해주었다. 또 천방백계로 파초선을 구해 화염산의 불을 끔으로써 사제일행이 서천길을 계속 갈 수 있게 했을 뿐만아니라 당지의 백성들을 위하여곤난을 덜어주었다.     손오공의 요괴를 처단하는 정의적인 행동과 승천입지하며 호풍환우하는 신통한 재주는 당시 인민군중들의 소박한 념원을 반영하고 있으며 자연을 정복하려는 고대인민들의 리상을 안받침해 주고있다. 바로 이러한 원인으로 하여 몇 백년을 내려오면서 손오공이라는 인물은 사람들의 마음속에 하나의 사랑스런 신화 영웅 형상으로 자리잡을 수 있었던 것이다.     모택동 동지는 그의 유명한 시편 “칠률 ·곽말약 동지에게 화답함(七律•和郭沫若同志)”에서 백골정을 세번 친 손오공의 이야기를 쓰면서 손오공의 과감히 투쟁하는 정신과 요괴를 소탕하는 행동에 대해 찬양하였으며 손오공이라는 예술적 형상이 가지는 의의를 제시하였다. 손오공이 천궁을 소란시키고 요괴들을 때려 없애는 투쟁내용은 사회비판적인 적극적인 내용을 표현하는 바 이는 사회투쟁에서의 일부 경험을 객관적으로 반영한 것으로 된다. 우리는 이러한 것들을 맑스주의 관점으로 분석, 비판하고 개괄함으로써 새로운 내용을 더하여 옛것을 오늘의 현실에 맞게 할 수 있다. 례를 들면 손오공은 천궁과 천궁의 통치자들이라는 어마어마한 것들을 대하면서도 조금도 무서워하지 않고 금고봉을 들고 쳐들어 감으로써 옥황상제를 벌벌 떨게 만들었고 천병들을 혼비백산시켰는 데 이는 이 세상의 어떤 것들은 겉보기에는 신성하고 강대하여 불가침인 것 같아도 과감히 대응하면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고있다. 또 제27회에서 손오공이 백골정과 싸우는 내용은 실제상에서 모 종의 투쟁지식과 경험을 보여주고있다. 백골정은 당승의 고기를 먹기 위하여 아릿다운 소녀로 변하기도 하고 파파늙은 할머니와 할아버지로 변하기도 하면서 당승일행을 속이려 들었지만 손오공의 “화안금정(火眼金睛)”만은 속이지 못하였으며 결국은 손오공의 금고봉에 맞아 한무더기의 해골로 되였다. 이것은 우리에게 교활하고 변덕스러운 “요괴”들에 대해 언제나 경계심을 갖고 정확하게 판단하여야 하며 손에 든 무기를 놓아서는 안된다는 것을 알려준다. 소설속에는 이러한 이야기들이 많은 데 이는 지금까지도 우리를 계발해주는 역할을 한다.     《서유기》는 우리 나라 고전문학작품중에서 민주성을 띤 작품의 정화이기는 하지만 필경은 봉건시대 산물이다. 소설은 종교적 내용으로 충만된 취경이야기가 발전한 것이고 또 나중에는 봉건사대부의 지식인 손에서 완성된 것이기 때문에 뚜렷한 시대적, 계급적 제한성을 가지고 있으며 봉건적인 찌꺼기가 존재하고 있는바 우리는 이런 것들에 대하여는 비판적으로 대하고 제거해버려야 한다.     작가 오승은은 비록 암흑한 봉건사회에 대하여 폭로하고 비판하기는 하였지만 근본적으로 봉건제도와 군권(君权)제도의 합리성에 대해 의심하지 못하였으며 “왕도”로서 리상적인 봉건왕조를 건럽할 데 대한 환상을 버리지 못하였다. 소설의 제88회에서 나오는 옥화왕은 백성을 자식같이 사랑하고 옥화국은 도시가 번성하고 오곡이 풍성한“극락세계”와 같은 곳이다. 이는 바로 작가의 리상적인 봉건왕조를 건립하려는 사상을 반영한 것이다.     소설《서유기》에서 우리는 작가가 봉건왕조의 최고 통치자를 다른것과는 비교할 수 없는 “진룡(真龙)”이라 하면서 자신의 희망을 그들에게 기탁하였음을 보아낼 수 있다. 작가는 봉건제왕들의 유치함과 무도함을 폭로하고 비판하면서도 그들을 위해 변호하였다. 소설 속에서 나오는 군주들은 일시적으로 생각을 틀리게 하고 사람을 잘못 쓴 원인으로 어리석고 무도한 군주로 된 것이므로 그들을 잘 인도하여 옳바른 길에 들어서게 한다면 다시 정사를 바로잡고 백성을 아끼는 현명한 군주로 될 수 있다고 여겼다. 례를 들면 비구국의 사람을 잡아먹는“마왕”까지도 악한 것을 버리고 바른길로 들어설 수 있는 것과 같은 것이다. 이러한 것들은 작가는 봉건제도를 비판함에 있어서 군권을 완전히 부정한 것이 아니라 “현명한 군주”가 “어리석은 군주”를 대신해주기를 희망했음을 보여주고 있다.     봉건사회에서 옥화국과 같은 “극락세계”가 출현하기를 바라는 것은 환상에 지나지 않으며 “어리석은 황제”가 일단 현명해지면 천하가 태평하게 될 것이라는 것도 근본적으로 실현될 가능성이 없는 것이다. 비록 “어리석은 군주”와 “현명한 군주”는 그 차이가 있지만 그들의 계급적지위는 결코 그들이 인민의 리익을 대표할수 없음을 결정해주며 그들은 최고통치자이자 착취자임을 결정해준다. “구세주는 종래로 존재한 적이 없으며 신선이나 황제에 의지해서는 안된다”. 로동인민이 신세를 바꾸는 방법은 오직 일떠나 모든 착취제도를 뒤엎는 길 뿐이지 다른 출로는 없다.     소설《서유기》에서는 신권에 대해 일정하게 풍자하기는 하였지만 결코 종교나 신권을 완전히 부정한 것은 아니다. 작품은 여러곳에서 “일음일탁은 전생에서 전해지느니”, “인간의 그 어떤 생각도 하늘땅은 모조리 꿰뚫어보거니 만일 선과 악에 보응이 없다면 그것은 하늘땅에 사심이 있음이라.”와 같은 실례로써 불법의 무변함과 인과보응의 사상 , 숙명론 등 종교적 미신사상을 선양하였다. 독자들에게 특별히 해를 끼치는 것은 많은 곳에서 구체적인 사건과 묘사를 통하여 이런 미신을 구체적으로 설교했다는 점이다. 례를 들면 오계국 국왕은문수보살을 공경하지 않았기 때문에 3년 동안을 죽어야 하는 벌을 받아야 했고 구원외는 성심성의로 불교를 신봉했기에 지장왕보살이 그의 수명을 연장해 준것 등등이다. 또 소설의 제8회부터 제11회까지의 당승이 경을 얻으러 가게 된 원인을 쓴 이야기는 종교미신사상을 더욱 돌출히 하고있다.     계급투쟁의 경험으로 볼 때 종교는 인민을 마취시키는 정신적 아편이다. 때문에 레닌은 종교를 “세계에서 제일 밉살스러운 물건의 하나” —레닌《레브 똘스또이는 로씨야혁명의 거울이다》라고 말했다. 봉건통치계급이 신권과 종교를 떠벌인 것은 그들의 반동통치를 유지하고 공고히 하기 위해서이다. 그들은 신권을 떠벌이면서 자기 자신들을 신격화하면서 소위 “하늘로부터 소명을 맡아” 신의 위탁으로 만민을 통치한다고 하였다. 그들이 설교하고있는 “불법무변(佛法无边)”이라든가 모든것은 상제의 뜻에 좇아야 된다는 것들은 바로 자기들 자신이 “구세주”이며 누구도 거역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말해주기 위한것이다. 그들은 또 “인과보응”리론과 숙명론을 떠벌이면서 인민들이 받는 가난과 고통이나 자신들이 누리는 부귀와 영화는 모두 운명이 정해진 것이지 계급적 압박과 착취에서 오는것이 아니므로 인민들은 하늘이 정해진 운명대로 살아야지 반항하면 좋은 결과가 없을 것이라고 설교하였다. 통치계급은 이러한 “긴고주(紧箍儿)”를 인민의 머리에 씌워놓아 인민들의 반항의식을 속박하였으며 인민들을 꼼짝 못하게 만들었다. 소설속의 “삼교합일”의 사상 역시 지주계급의 통치를 공고히 하기 위한 수단이다. 례를 들면 제47회에서 손오공은차지국 국왕에게 “스님도 공경하고 도사도 공경할 뿐아니라 또한 인재를 길러 쓰십시오. 그런다면 나라는 영원토록 반석같이 될 것입니다.”라고 말한 것이다.     신권사상과 종교관념은 인류사회보다 높은 위치에 있는 일종 무형의 물질이 인류사회를 지배한다고 주장하는 철두철미한 유심주의 리론으로서 맑스주의 세계관과는 근본적으로 대립된다. 통치계급은 이것을 인민을 기만하고 피압박계급의 반항의식을 탄압하는 사상도구로 삼았다.     우리는《서유기》에서 반영된 종교미신사상을 포함하여 모든 각양각색의 유심론에 대해서는 철저히 비판하여야 한다.     손오공이라는 인물을 분석함에 있어서 우리는 두개 측면으로 분석하고 비판하여야 한다. 즉 그의 투쟁이 가지는 적극적인 사회적 의의를 보아내는 동시에 이 인물형상에는 작가의 사상락인이 깊이 찍혀 있으며 시대와 계급적인 국한성이 있음도 보아내야 한다. 소설에서 손오공은 천궁을 소란시키고 심지어 “황제를 번갈아 가면서 하자”고 웨쳤지만 결코 “황제”가 “천궁”을 통치해야 한다는 것은 부인하지 않았으며 후에는 자신이 천궁을 소란시킨 데 대해 잘못을 뉘우쳤다. 그는 관음보살에게 “저도 이젠 모든 것을 뼈저리게 느꼈습니다.”라고 말하였고 후에는 옥황상제 앞에서 신으로 칭하면서 “소신은 보살님의 가르침을 받고 불문에 귀의하여 그분의 제자가 되였사오매 더는 량심을 속이고 페하를 거슬리는 일을 하지 않고있사옵니다.”라고 말했다. 이런 정황에 대해서 우리는 가히 리해할 수 있다.     작품에서 볼 수 있는바 손오공이 여러 번 천궁을 소란한 것은 옥황상제가 현명하지 못하여 사람을 쓸 줄 모르기 때문이다. 한 마디로 말하면 옥제가 어리석기 때문에 손오공은 반기를 들었고 자기절로 “제천대성”으로 칭하고 천궁에 반항을 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여래와 옥황상제는 역시 “강자”였고 오공은 오행산 밑에 깔리여 죄값을 치러야 했다. 손오공은 자신이 더는 기만을 당하지 않을 것이고 오행산의 속박에서 벗어날 수 있으며 당승을 도와 경을 얻어 동녘땅의 중생들을 구원하여 정과를 얻을 수 있다고 생각되여 자연적으로 불문에 귀의하였다. 손오공은 “어리석은 황제”를 반대하였을 뿐 황제 자체를 부정하지 않았다. 옥화국에서 백성을 사랑하는 현명한 군주인 옥화왕을 만났을 때 그는 “그를 스승으로 삼고 재간을 배워 나라를 지키려는”세 왕자의 청을 흔쾌히 들어주고 열심히 그들에게 자신의 재주를 가르쳤다. 이로부터 우리는 손오공이 천궁을 소란하고 지부를 들부시면서 옥황대제와 염라대왕을 멸시하고 그들에게 반항하였지만 그의 머리속에서는 봉건제도와 봉건왕권을 철저하게 부정할 수 없음을 알 수 있다. 이것은 마치 그가 근두운을 타고 한 번에 십만 팔천리를 날 수 있지만 여래의 손바닥을 못 벗어나 듯이 아무리 몸부림을 쳐도 봉건제도의 울타리를 벗어날 수 없으며 그의 사상도 “긴고주"라는 봉건사상의 속박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결국 이것은 작가의 세계관의제한성의 반영이며 시대적, 계급적 제한성의 결과물이다.     총적으로 말하면 《서유기》의 사상내용은 비교적 복잡하고 모순적인 것으로서 그 속에는 민주적 성질의 정화도 있으며 봉건적인 찌꺼기도 있다. 고전 문학작품으로서의 《서유기》는 총적으로 긍정적인 영향을 가진 작품이다. 소설은 기이한 문학적인 환상을 통하여 봉건사회의 암흑성을 넓은 범위로 폭로하고 비판하고 천궁과 지옥의 통치자와 인민을 해치는 요괴들에 대한 반항투쟁을 찬양하였으며 자연을 정복하려는 고대인민의 리상과 념원을 반영하였다.     당시의 력사적 조건하에서 볼 때 이 작품은 진보적인 의의를 가지는 작품이다. 우리는 이 작품에 대한 분석과 비판을 통하여 력사와 그 시대의 사회를 료해할 수 있다.     《서유기》의 총적인 사상적 의의와 예술적 가치에서 볼 때 이 작품은 우리 나라 문학사에서 뿐만아니라 세계 문학사에서도 하나의 우수한 신화 문학작품이다.   3       우리 나라 고전 랑만주의 작품으로서의《서유기》는 그 예술성과가아주 크다. 작품에 대한 분석과 판단을 통하여 우리는 작품의 우점에 대해서는 본보기로 삼고 작품의 결점에 대해서는 거기서 교훈을 섭취할 수 있다.     《서유기》의 예술적 처리, 형식과 기교 방면을 아래와 같이 분석할 수 있다.     1. 현실에 기초하였으나 현실을 초월하였고 랑만주의 환상적 색채를 띠였으나 취경이야기의 기본 줄거리를 보류하였다.     문학작품은 현실에 기초할 것을 요구하면서도 현실을 초월할 것을 요구한다. 《서유기》가 신화소설인 관계로 작가는 더욱 과감하게 예술 상상력을 발휘하였으며 전반 소설은 랑만주의 환상과 색채로 충만되였다. 소설속의 인물이나 사건은 더는 현실생활에 대한 일반적인 묘사나 개괄이 아니라 리상화되고 환상화된 것이다. 《서유기》는 보기 드물게 풍부한 예술상상력을 표현하였다. 우리 나라 문학사에서는 아직 이보다 더 생동하게 완정한 신화세계를 묘사한 작품이 없으며 이처럼 황홀한 신화와 동화이야기를 창조하고 손오공, 저팔계와 같이 생동한 예술형상을 부각한 작품이 없다. 총적으로 말하면 소설은 아주 환상적으로 씌여지기는 하였지만 사회현실을 떠나지 않았으며 인물과 사건을 묘사할 때 비록 신기하고 유모아적이고 재미있게 쓰기는 하였지만 일정하게 사회현실의 내용을 포함하고있다. 때문에 이 작품은 하나의 사회적 의의를 가지고있는 신화소설이지 아무 의의가 없는 황당무계한 소설이 아니다.     취경이야기의 원래의 사상내용을 과감히 개조한 것은 오승은의 예술창조성의 돌출한 표현의 하나이다. 력사인물로서의 현장은 《서유기》속의 예술형상으로서의 당승과는 너무나 다른 인물이다. 력사기재에는 현장에 대해 칭찬한 말들이 아주 많다. 그의 제자들은 그에 대하여 “경전의 오묘함을 통달하”고 “옛것과 현인을 사랑”하며 “총명이 남보다 훨씬 뛰여났”고 학문을 즐겨 늘 침식을 잊어가며 학문에 몰두하였으며 불경을 배움에 있어서 “한 번 읽으면 그 뜻을 리해하고 한 번 보면 단단히 기억한다”라고 말하였다. 봉건 력사학자들은 그에 대하여 “박심함이 뛰여나고 설교에 능하며 불교의 오묘함을 잘 해석하여 멀리 토번에서도 원근과 귀천을 가리지 않고 그를 존중하였다.”라고 칭찬하였으며 당태종은 그를 당시의 “불문의 령수”라고 청찬하였다. 또한 곤난을 두려워하지 않고 혼자서 먼길을 떠나 갖은 곤난을 이겨낸 현장의 정신은 자연히 사람들의 존경과 탄복을 받았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소설《서유기》속에서는 찾아볼 수 없다. 소설속에서 당승은 취경길에서 난관에 맞다들면 울기나 하는 얼떨떨한 사람으로 부각되였다. 소설속에서 그는 귀구멍만 넓고 “선”에 대해 정확히 구분할 줄도 몰라 늘 요괴를 좋은 사람으로 빗본다. 뿐만아니라 손오공의 권고도 듣지 않고 도리여 “긴고주”를 외우는 잔인한 수단으로 오공이 요괴를 죽이지 못하게 한다. 그러다가 재난을 당하여 혼이 난 다음에야 자신이 틀렸음을 인정한다.     당승은 우매하지만 가르쳐 줄수 있기에 반면인물은 아니다. 그러나 작품에서 돌출하게 한 것은 무능하고 어리석은 당승의 인물형상이라는 것이다.     작가는 왜 이렇게 당승의 형상을 변화시켰으며 취경이야기중에서의 당승의 주역지위를 실제상에서 존재하지도 않는 손오공에게 주었으며 그를 열렬히 찬미하였을가? 만일 그저 력사기재와 당태종 등 사람들의 당승에 대한 평가를 근거와 출발점으로 한다면 작품은 그저 하나의 예술작품형식으로 된 “고승전(高僧传)”이나 “성승전(圣僧传)”으로 밖에 되지 않을 것이며 작품의 주요내용도 그저 불교와 불교교도에 대한 찬미가 되였을 것이다. 그러나 만일 이러지 않고 다른 방법으로 즉 수백년간 내려온 구전전설과 화본을 창작적 기초로 삼고 이 기초에서 예술적인 재창작을 진행한다면 실제 인물과 실제 사건의 속박에서 벗어날 수 있다. 또 손오공이라는 신화적 인물을 이야기의 주인공으로 하고 신화적 환상과 예술형식을 결합하는 것을 통하여 현실적 내용을 더욱 넓게 표현할 수 있었으며 추악한 사회현실에 대해 폭로하고 비판할 수 있었다. 오승은은 소설을 창작할 때 두번째 방법을 선택하였으며 또한 이것은 소설 《서유기》의 예술적 처리에서 성공한 점이기도 하다.     그러나 《서유기》는 필경 당승의 취경이야기를 벗어날 수 없으며 따라서 이 이야기는 종교적인 내용과 색채를 갖게 된다. 동시에 작가 오승은이 비록 명조사회의 현실에 대한 감수로부터 출발하여 작품을 창작하고 종교에 대하여 특히는 도교에 대하여 일정하게 비판을 하였지만 그의 사상속에는 의연히 인과보응, 숙명론 등과 같은 유심론적 사상의 찌꺼기가 존재하고 있으며 이러한 것들은 《서유기》의 예술처리와 예술형식에서 표현되고있다. 례를 들면 작품에서는 시, 송, 게, 찬등 많은 것들로써 종교관념을 선전하였고 “외도는 진성을 매혹하고 원신은 본심을 도와주다”, “의마”, “심원”, “도심”, “선성” 등과 같은 것들을 설교하였으며 어떤 때에는 이야기의 줄거리와 인물성격 발전의 수요를 떠나 “권선징악(劝善惩恶)”을 설교하였다. 이미 80가지의 난을 렬거했음에도 불구하고 소위 “여든하나의 수가 다 차야만 근본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불교의 교의에 의하여 81번째 난을 보충하였고 소설속에서 두번씩이나 “황당무계한 불경 목록”을 쓰고 보살들의 명단을 복잡하게 렬거한 것이 그 실례로 된다. 이러한 것들은 문학작품을 딱딱하고 지루하게 만들고 작품내용에 유심론적인 찌꺼기가 섞이게 만들었다. 이것은 예술적으로 볼 때에도 실패한 것이다.     2. 모순충돌속에서 신화적 예술형상을 뛰여나게 조각하여 손오공과 저팔계의 선명한 성격을 묘사하였지만 일부 예술형상들은 창백하고 무력하다.     《서유기》에서는 능숙하게 이야기줄거리와 결부하여 모순투쟁 속에서, 행동 중에서, 전투 중에서 주요인물의 형상을 부각하였다. 손오공의 락관적이고 지혜롭고 용감하며 굳센 성격과 신통력은 천궁을 소란하고 룡궁과 지부를 들이치고 신선, 룡왕, 요괴들과 투쟁하는 것과 긴밀히 련결된 것이다. 손오공이라는 인물을 떠나면 이러한 이야기들은 생동한 예술적 광채를 잃게 되고 반대로 이런 이야기를 떠나서는 손오공이라는 생동한 예술형상도 없게 된다. 이 돌속에서 태여난 돌원숭이는 태여나자마자 “눈에서는 두줄기의 금빛광선이 뿜겨나오고 그 빛발은 하늘에까지 뻗쳐” 사람들로 하여금 이 원숭이가 절대로 본분이 나지키는 원숭이가 아님을 느끼게 하는데 후에 불문의 정과를 얻은 후에도 남들과 다른 “투전승불(斗战胜佛)”이라는 칭호를 얻는다.     작가는 긴장하고 격렬한 투쟁이야기를 능숙하게 다루면서 손오공의 성격특점과 신기한 재주를 돌출히 표현하였다. 그렇게 위엄있는 천궁에서 법력이 높은 천장들이 얼마 있든지 관계치 않고 손오공은 대담히 투쟁하여 구요성들은 급급히 문을 꽁꽁 닫아걸고 나오지 않았고 사대천왕들도 겁을 먹고 어디론가 자취를 감추게 만들었고 화과산에서는 리천왕이 거느린 천장들과 십만 천병을 대하고도 낯색 하나변하지 않고 대항하였다. 백골정을 세번 때려잡고 라찰녀와 싸우는 장면을 쓸 때 작가는 여러가지 모양으로 위장한 요괴를 “화안금정”으로 간파하고 적의 배속에 들어가서 적을 항복시키는 손오공의 재간을 돌출하게 묘사하였으며 이랑진군과 싸우는 장면에서는 그의 림기웅변능력과 종잡을 수 없게 변하는 신통력도 충분히 표현하였다. 그는 때로는 키를 만장이나 늘구어 진군과 악전하고 때로는 변신술을 부리며 적과 싸우는 데 어떤 때는 큰 가마우지로 변하여 하늘을 찌르다가도 어떤 때는 물고기로 변하여 물속에서 헤염친다. 그는 참새, 물뱀, 너새로 변할 수도 있고 심지어 토지묘로도 변할 수 있었다. 쩍 벌린 입은 대문이 되고 이발은 문살이 되고 혀는 보살이 되고 눈은 창문이 되여 진군을 한입에 삼켜버릴 준비를 하고있었는 데 다만 꼬리만은 어떻게 할 수가 없어 기대로 만들어 절간뒤에다 세워놓았는데 그 꼬리때문에 진군에게 발각되였다. 그러자 손오공은 화닥닥 몸을 솟구쳐 하늘로 날아오르더니 어디론가 자취를 감추어 진군의 그 “봉의 눈”마저도 손오공을 찾을 수 없었다. 원래 손대성은 리천왕의 천라지망을 별로 대단하게 여기지 않고 은신법을 써서 포위망을 벗어났던 것이다. 그리고 이랑신의 모양을 해가지고 관가구  진군묘로 가서 귀졸들의 절까지 받았다. 이런 눈부신 변신술은 이야기를 더욱 긴장하고 재미있게 전개해주며 손오공의 지혜롭고 락관적이며 익살스러운 성격과 변화무쌍한 재간을 남김없이 표현하였다.     작가는 인물형상을 부각함에 있어서 인물의 사상성격을 동물의 자태, 습관과 교묘하게 결합시킴으로써 《서유기》의 인물과 이야기를 신화적이고 동화적인 색채를 띠게 하였으며 이 방면의 예술처리에서 개성화 창작에 주의를 돌렸다. 례를 들면 손오공과 저팔계를 모두 동물로 부각한 것인데 손오공은 원숭이로, 저팔계는 돼지로 부각하였다. 원숭이는 “뾰족한 얼굴에 홀쪽한 볼, 금정화안(金睛火眼)”의 외모에 활발한 동물이다. 이것은 손오공의 72가지 변신술을 가진 신통하고 기민하고 가만히 있지 못하는 성격을 표현할 수 있다. 그러나 돼지로서의 저팔계는 코가 쀼죽하게 길고 귀가 크며 행동이 우둔하고 먹기를 좋아하고 잠자기 좋아하는 체형적 특점과 성격적 특점을 가지고있다. 이것은 작가가 저팔계라는 인물의 성격특점을 부각하려는 수요에 부합된다. 심지어 손오공과 저팔계는 사용하는 무기마저 그 차이가 있는 데 하나는 크기를 마음대로 할 수 있고 변화무쌍한 금고봉이고 하나는 거칠고 든든한 아홉가닥의 갈퀴이다. 이것은 두 인물의 서로 다른 성격, 애호에 부합된다. 재미있는 것은 작가는 이 두 인물의 변신술에 대해 쓸 때 둘 다 변신술을 부릴줄 알게 썼지만 그 차이점을 두었다는 것이다. 손오공은 남자든 녀자든 큰 것이든 작은 것이든 무엇이든지 모두 변할 수 있을 뿐만아니라 똑같게 변할 수 있다. 그러나 저팔계는 이와 달리 돌이나 언덕, 코끼리, 락타 등 크고 우둔한 것으로는 변할 수 있지만 작고 깜찍하고 예쁜 것으로는 변할 수 없다. 한번은 녀자애의 모양으로 변했는데 겨우 얼굴은 변했지만 배만은 여전히 뚱뚱해서 일칭금을 닮지 못했다. 이런 변신술의 차이는 두 인물의 재주의 차이를 표현하기도 하였지만 동시에 두 인물의 개성의 차이를 표현하였다, 이는 인물성격을 전형적으로 부각함에 있어서 아주 고명한 수법이다.     《서유기》에서 손오공과 저팔계라는 인물형상은 성공적으로 부각하였으나 당승과 사화상에 대한 예술형상을 부각함에 있어서는 그리 성공적이지 못하다.     소설에서의 당승은 정신면모와 성격이 나약한 인물로 부각된다. 그러나 작가는 그의 성격특징을 묘사함에 있어서 단조롭고 중복된 수법을 사용하였다. 례를 들면 그의 나약하고 무능하며 담이 작고 곤난앞에서 위축된 모습을 쓸 때 “눈물을 흘린다”든가 “혼비백산” 하였다고 묘사하지 않으면 “제대로 말안장에 앉지 못하여 말에서 굴러떨어졌다”고만 묘사하였다. 또한 사화상의 형상을 묘사함에 있어서는 더욱 희미하게 묘사하여 선명한 개성이 없게 만들었다. 그리고 수량적으로 많은 신이나 보살, 요괴의 형상을 묘사할 때에는 어떤 것은 비교적 개성이 있게 묘사하여 사람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겨주었으나 어떤 형상들에 대해서는 필력을 들이지 않아 인물이 전형적으로 부각되지 못하였으며 사람들에게도 깊은 인상을 주지 못하였다.     이로부터 볼 때 작가 오승은은 신기하고 생동한 이야기를 쓰는 데 묘필이기는 하지만 시내암, 조설근처럼 독자들이 잊지 못해하는 많은 인물을 선명한 예술적 형상으로 부각한 데 비해서는 뒤떨어지는 바 이는 선명한 예술적 형상창조에서《서유기》가 손색이 가는 점이기도 하다.     3. 작품은 전반적으로 볼 때 재미있고 유모아적이며 풍자적이고 해학적이기는 하지만 어떤 것은 용속하고 무료한 점도 있다.     유모아적이고 풍자적인 수법과 랑만주의적 환상이 결합하여《서유기》의 독특한 예술풍격을 구성하였다.     《서유기》는 생동하고 재미있는 서술과 신랄한 풍자를 통하여 추악한 사회현실에 대해 폭로하고 비판하였다. 례를 들면 아난과 가엽은 당승들에게서 선물을 갖지 못하게 되자 당승 사제들에게 글자 없는 백지종이의 “무자진경"을 주었다. 당승사제들이 이 일을 여래에게 말했을 때 여래는 웃으면서 이미 알고있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경문은 경솔하게 전해서는 안되거니와 빈손으로 가져가도 안되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면서 “이전에 몇몇 비구승들이 경을 령산아래로 가지고 내려가 사위국의 조장로집에서 한번 외워 그 집 식구들의 안전과 망자의 제도를 보장해주었지만 올적에 서말 서되의 쌀과 몇알의 금싸래기를 받아왔었다. 난 그 때에도 독경값이 그렇게 싸고서야 후손들의쓸 돈이 없게 되지 않겠느냐고 했었다.”라고 “경을 싸게 판”일을 말해주었다. 겨우 남을 위하여 경을 읽어주고 쌀과 금싸래기들을 받고도 돈을 적게 받았다고 푸념하니 이 여래의 탐욕도 참 끝이 없다.     이러한 것들을 풍자할 때 작가는 아주 생동하게 썼다. 아난이 당승에게서 자금바리대를 받고 그저 빙그레 웃을 때 옆에 있던 힘장사들과 료리사들이 놀리자 “부끄러워 얼굴이 일그러졌지만 자금바리대만은 손에서 놓지 않았다”. 또 최판관이 생사부에 당태종의 수명이 “정관 13년(一十三年)”이라 씌여져있는 것을 보고 “속으로 꿈틀 놀라며 급히 붓에다 진한 먹을 듬뿍 묻혀‘一’자 우에에다 가로 두줄을 더 그었다”. 이러한 문자들은 아주 생동하고 활발하여 인물의 행동과 심리상태를 잘 표현하고있으며 작가가 풍자하려는 것을 더욱 유모아적이고 신랄하게 표현하며 아주 예술적이다.     오승은은 신선, 불교도, 요괴들에 대해 풍자하고 비판하였을 뿐만아니라 취경대오 속의 인물에 대해서도 풍자하고 비판하였다. 례를 들면 작품 속에서는 생동하고 재미있는 이야기를 통하여 저팔계의 거짓말을 하기 좋아하는 데 대해 비판하였다. 저팔계더러 산을 순찰하라고 보낸 손오공은 담이 작고 게으른 이 녀석이 산은 순찰하지 않고 거짓말을 하여 얼려넘길 것을 알고 벌레로 둔갑하여 팔계의 귀에 붙어 팔계를 미행했다. 과연 팔계는 얼마를 가지 않고 오공들을 “너희들은 모두 거기서 편안히 쉬고있으면서 나만은 이렇게 부려먹는다”고 욕한다. 그리고는 풀숲에서 한잠을 자고 깨나서는 바위 세개를 놓고 스승, 사형, 사제를 대한다고 생각하고 자문자답하면서 거짓말을 꾸며댔다. 즉 요괴가 있던가고 물으면 있다고 하고 산은 무슨 산이던가고 물으면 석두산이라고 하며 동굴은 무슨 동굴이던가고 물으면 석두동이라 하고 문은 어떤 문이던가고 물으면 큰 쇠못을 박은 철문이다고 대답하기로 거짓말을 꾸며놓고는 “그리고 만약 대문에 못이 얼마나 박혀있더냐고 물으면 그것만은 이 팔계가 미처 세여보지 못했노라고 하면 그만이야. 이만큼 거짓말을 꾸며놓았으니 이젠 가서 필마온 녀석을 속여먹어야지!”라고 한다. 그리고는 그 거짓말들을 잊어버릴 가봐 돌아오는 길에서 고개를 폭 숙이고 부지런히 입속으로 외운다. 물론 이 모든 것은 손오공에게 발각되고 손오공은 먼저 돌아와 당승에게 일러바쳤다. 과연 팔계는 돌아와서 그대로 거짓말을 꾸며댔으나 인차 손오공에 의해 폭로되였으며 팔계는 궁지에 몰리게 되였다. 이 바보는 거짓말을 너무 어설프게 꾸며댔기에 인차 들통이 난것이다. 이 이야기는 팔계가 거짓말을 꾸미는 과정을 생동하게 묘사함으로써 이 바보의 가소로운 행위와 심리상태를 상세하게 표현하였으며 이는 저팔계라는 인물의 총적인 성격특점에 부합된다. 작가는 이러루한 창작수법을 여러 곳에서 응용하여 저팔계더러 자신이 원하는대로 되지 못하게 하고 참새가 방아간을 지나는 격으로 만들어 저팔계의 색을 좋아하고 작은 리익을 탐내며 담이 작고 자사자리한 성격특징을 표현하였다. 작품에서는 재물을 탐내고 색을 좋아하는 저팔계의 이런 사상행위를 조소하고 비판하는 동시에 그의 일부 우점을 표현하기도 하였다. 례를 들면 그는 로동을 사랑하고 아무리 더럽고 힘든 일도 가리지 않고 열심히 하며 취경대오가 무사히 형극령을 넘고 희시동을 지나가게 장애를 없애 공을 세웠으며 무거운 짐도 그가 서천까지 메고간 것 등등이다. 또 작가는 저팔계의 언어를 묘사함에 있어서 생동하고 재미있게 묘사하여 희극적인 예술형상으로 충만되게 하였으며 농후한 풍자적, 비판적 의의를 갖게 했다.     《서유기》의 이런 생동하고 재미있는 이야기는 인물의 행동, 언어와 심리상태를 포함하고 있으며 이것이 생동하게 재미있게 묘사되여 있기에 소설의 무미건조함을 극복하고 희극성적인 예술효과를 거두었으며 독자들의 사랑을 받게 되였는 바 이는 이 작품이 예술상에서 거둔 성공적인 점이다. 그러나 소설은 어떤 면에서 너무 괴이한 것을 추구하였는 데 이로 하여 소설은 사회적 의의와 적극적인 내용을 잃었으며 해학적이고 재미있어야 할 것도 진지하지 못하고 저속하고 무료한 것으로 되고 말았다. 례를 들면 제53장 “삼장은 내물을 잘못 마셔 잉태를 하고 오정은 우물을 길어다 태를 없애주다”에서는 당승과 저팔계가 자모하의 물을 잘못 마시고 잉태하였다가 “파아동 락태천”의 물을 마시고 겨우 락태를 하고 아픔이 멎은 이야기를 썼다. 기실 이는 근본적으로 아무 적극적인 의의가 없는 괴상하고 황당한 이야기이다. 그러나 작가는 이 이야기를 쓰면서 손오공과 평시에 말이 적던 사화상까지 포함하여 소설속의 인물들이 서로 놀리고 무의미한 말을 하게 했다. 이런 것들은 작가가 창조한 정면적인 예술형상에 손상을 주며 일종의 엄숙하지 못한 렬악한 창작경향이라 할 수 있다. 이것은 우리에게 “해이지언(解颐之言)”은 사회적 의의가 있는 것이여야 하며 그렇지 못한 것은 쓰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알려준다. 비록《서유기》에서의 이런 용속하고 무료하며 진지하지 못한 것은 의의가 있고 유모아적이고 풍자적인 것에 비할 때 첫자리를 차지하는 것은 아니지만 독자들은 의연히 이 점에 대하여 주의를 돌리고 비판적으로 대해야 한다.     상술한 3가지 특점 이외에 반드시 제기하여야 할 것은《서유기》가 예술형식상에서 민간문학의 특점을 보류하고 있다는 점이다. 례를 들면 작품에서 언어는 민간설창과 구두어의 정화를 흡수하여 산문과 운문을 섞어썼는 데 이는 우리 나라 송원시기의 설화예술에서 발전해온 것이다. 《서유기》에서 사용한 언어는 보통 구두어로 된 것으로서 비교적 생동하고 활발하며 표현력이 강하다. 주요인물들사이의 대화도 비교적 잘 되였으며 언어의 개성화에 주의를 돌렸다. 소설에서는 민간의 어휘와 속담을 대량으로 선택하여 비교적 자연스렵게 응용하였다. 비록 작품속에 작가의 고향방언(소북방연)이 많이 사용되기는 하였지만 총적으로 통속적이고 리해하기가 쉽다. 소설에서 사용된 운문을 볼 때 소수의 잘된 것을 내놓고는 종교의 현리를 말했거나 투쟁장면이나 산수의 풍경을 묘사한 운문은 대부분이 평범하고 공식화된 결함이 존재한다.     총적으로《서유기》의 예술성에 대해 평가할 때 우리는 이분법의 방법으로 분석하고 비평해야 한다. 설사 소설의 예술경험과 예술기교가 성공적으로 되였다 할지라도 이 작품 자체의 구체적인 성질과 특점때문에 성공적으로 된 것이므로 만약 다른 작품을 이 작품의 성질과 특점처럼 쓴다면 꼭 성공적이라고 말할 수 없음을 고려해야 한다. 때문에 우리는 이러한 것들에 대해서 참고로 해야지 무턱대고 그대로 옮겨다 쓰면 안된다.       화동사범대학 고전문학 교연조 곽예적, 간무림 집필     1972년 6월 초고, 1978년 수정  (1973년 예적이 재수정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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