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변개황
지리위치:
연변조선족자치주는 중국 내 조선족의 주요한 집거구이다. 길림성 동남부에 위치하고 있는 연변은 북위 41도에서 44도, 동경 127도에서 131도 사이에 있으며 동쪽으로는 소련의 연해주 하산지구와 이어져 있고 남쪽으로는 도문강을 사이하고 조선의 함경북도와 마주하고 있으며 서쪽으로는 길림성 교하, 화전, 무송 등 현과 접해있고 북쪽으로는 흑룡강성의 동녕, 영안, 해림, 오상 등 현과 붙어있다. 자치주내의 국경선 총 길이는 755.2Km이다. 자치주 면적은 4만 2700 ㎢로서 길림성 총면적의 약 4분의 1을 차지한다. 이는 대만의 1.2배, 1개 네덜란드, 40개 홍콩과 같다.
기후특징:
연변은 북반구의 중온대에 위치하고 있다. 지형이 복잡한 데다가 아시아대륙과 태평양 고저기압 계절변화의 영향을 받으며 또 여러 가지 기단세력의 성쇠 및 전선대계정이동의 과도지구에 처해있기 때문에 연변기후는 중온대 습윤계절풍 기후에 속한다. 주요 특성은 계절풍이 뚜렷하여 봄은 건조하고 바람이 많이 불며 여름은 덥고 비가 많이 오며 가을은 서늘하고 비가 적게 오며 겨울은 춥고 긴 것이다. 연변은 동부에 바다가 가까이 있고 서부와 북부의 높은 산들이 천연적인 병풍으로 되어 있어 성내의 같은 위도, 같은 해발 높이의 지역에 비하여 겨울기온이 보다 높고 여름기온이 보다 낫다.
연변의 태양복사량은 110-120 키로카로리/평방c미터이고 연일조시수는 2150-2500이며 농작물 생육기 일조시수는 900-1100시간이고 성숙기 일조시수는 350-400시간이다. 년평균기온은 섭씨 2-6도이다. 극단 최고기온은 섭씨 34-38도이고 극단최저기온은 섭씨 영하 23-38도이다. 1년 가운데 가장 더운 달은 7월인데(훈춘은 근해지역이어서 8월이 제일 덥다) 평균기온이 섭씨 20-22도이고 극단최고기온이 섭씨 34-38도이다. 기온은 일반적으로 해발의 높이와 위도의 증가에 따라 낮으며 동부가 서부보다 높고 분지가 산지보다 높다.
무상기는 100-150일이며 동부로부터 서부에 이를수록 짧다. 가을 첫 서리는 대부분 9월 중순과 하순에 내리고 봄얼굼(해빙기)은 5월 상순에 끝난다. 결빙기는 11월부터 이듬해 3월까지 5개월이나 된다.
강수량은 일반적으로 400-700 미리미터이며 백두산의 강수량은 1000-1400미리미터로 길림성 첫 자리를 차지한다.
지형지모:
연변은 산지의 비중이 크며 비옥한 하곡분지가 산령사이에 분포되어 있다. 분지 변두리와 산령이 교차되어 있는 곳은 구불구불 기복을 이룬 구릉지대로 되어 있다. 기후가 좋고 땅이 비옥하여 농업생산에 유리하다.
산맥: 연변은 동북 동부산지의 중단에 위치하여 있으며 장백산계에 속하여 있다. 지세는 서남, 서북, 동북쪽으로부터 동남쪽으로 경사가 져 있는데 서남부와 서북부는 높고 동남부는 낮으며 훈춘 일대는 가장 낮다. 연변 산지면적은 3만 2000여 ㎢이며 전 주 총면적의 약 76%를 점한다. 산령이 구불구불 기복을 이루고 있고 험준한 산이 첩첩이 울퉁불퉁 이어져 있으며 삼림이 무성하다. 자치주의 산구는 백두산 화산구, 줄건싸이령(张广才岭) 산구, 노야령(老爷岭) 산구, 목단령(牡丹岭)- 남강(南岗) 산구 등으로 나눈다.
구릉: 이런 산지의 변두리에 분포되어 있는 구릉은 주향이 일정하지 않으며 그 대부분이 해발 300 - 500m 되고 경사도가 보통 15도 좌우 된다. 연변내의 한전 량곡 작물과 황색종 담배, 과일류 등은 대부분 이 구릉지구에서 생산된다.
분지: 연변 산맥 사이로 나뭇가지 모양의 하천들이 많이 흐르고 있다. 이런 하천의 양안에는 크고 작은 하곡분지들이 분포되어 있으며 분지와 분지 사이에는 산지와 구릉이 가로놓여 있다. 연변 하곡분지 면적은 크지 않다. 이러한 하곡분지는 자치주의 서부지구와 동남부지구에 산재해 있으며 비교적 큰 것으로서는 목단강, 부르하통하, 해란강, 훈춘강, 가야하, 수분하 등 하곡분지들이 있다. 해발 400-500m 되는 분지로는 돈화, 관지, 흑석, 액목, 사하, 화룡, 대전자, 라자구 등 분지가 있고 해발 300m 이하 되는 하곡분지로는 명월, 연길, 평강, 구수하, 동성, 백초구 등 분지가 있으며 해발 25-35m 되는 낮은 분지로는 훈춘, 경신 등 분지가 있다. 이러한 분지들은 여러 하천들의 충적평원으로서 땅이 비옥하고 관개에 유리하며 수전이 집중된 지역으로 되었다. 주내의 도시들은 대부분 이곳들에 집중되어 있다.
하천: 연변에는 하천망이 보다 밀집되어 있으며 수계가 발달되어 있다. 유역면적이 100㎢ 이상 되는 137갈래의 하천이 도문강, 이도송화강, 목단강, 수분하 등 4대 수계에 나뉘어 속해있다. 자치주는 중온대(中温带) 계절풍구에 처해 있어 계절에 따라 하천수의 변하가 현저하지만 갈수기는 없으며 매년평균 경류량(径流量)이 130억 ㎥이다. 하천보다 보통 4개월 좌우 되는 보다 긴 결빙기를 가지고 있다. 하천의 중상류는 모두 산간협곡을 흐르기에 물살이 세고 낙차가 크며 풍부한 수력자원을 가지고 있어 저수지를 수축하며 수력발전과 관개사업 발전에 유리한 조건을 지어주고 있다.
연변은 지표수자원이 풍부할 뿐 아니라 지하수자원도 아주 풍부하다. 년평균 지하수천연자원량은 12.8억 ㎥이며 년평균 지하수 천연 급수량은 19.5억 ㎥이다. 지표수의 보충수원인 지하수는 관개와 공업, 생활 등 용수문제를 해결하는 면에서 갈수록 큰 작용을 일으키고 있다.
토양:
연변 근대토지개척의 역사는 백여 년밖에 안 된다. 오랜 세월을 두고 지형, 기후, 모암, 피복과 인류의 생산 활동의 영향을 받아 특히 여름에 따뜻하고 비가 많이 내려 토양이 점성화 (粘性化)하고 또 토양표층의 부식질이 누적되어 지대성 토양이 형성되었다. 연변의 토양 종류는 아주 많아 200여 종이 된다.
암갈색삼림토 주로 룡정시, 연길시, 화룡시의 구릉지대에 분포되어 있으며 기타 현에는 대부분 백장토(白浆土)와 교차하여 분포되어 있다. 이 토양은 토층이 두텁고 뚜렷한 회화(灰化层)과 정적층(沈积层)이 없다. 흑토증(黑土层)의 부식질함량은 2-5%이고 토질이 푸실푸실하며 물이 잘 스며들고 공기가 잘 통하여 봄에 일찍 녹고 물과 양분을 잘 보존한다. 그러므로 종자 발아가 보다 빠르고 농작물의 성숙도 일찍하며 낟알이 공골차 생산량이 비교적 높다. 이 토양은 전주 경작지 면적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보다 크며 연변 주요한 한전 토양이며 또 과수재배에도 적합하다. 암갈색 삼림토의 다른 한 가지 종류인 회갈색 삼림토는 뚜렷한 흑토증과 임용층(洗净层), 정적층을 가지고 있다. 회갈색 삼림토는 연변 여러 산지에 분포되어 있는데 그 면적이 가장 넓으며 임업생산에 적합한 자연토이다.
백장토 주로 돈화분지, 송강분지, 황청현 라자구와 훈춘분지 주위에 분포되어 있으며 기타 각 현, 시에도 띄엄띄엄 분포되어 있다. 백장토는 보통 흑토증, 백장층, 정적층과 모암층을 가지고 있고 토층 계선이 뚜렷하다. 백장토는 흑토증이 아주 엷고 백장층이 보다 두터워 물이 잘 스며들지 못하고 공기가 잘 통하지 않으며 토질의 점성이 강하여 비가 오면 물이 스며들지 않아 수토가 쉽게 유실되고 가물면 땅이 굳어 농작물의 뿌리가 깊게 박히지 못하는 저생산성 토양이다.
흑토 흑토는 주내에 널리 분포되지 못하였고 면적이 크지 않다. 주로 룡정시, 화룡시와 연길시 경내 구릉비탈 하부에 분포되어 있고 대부분 습초원흑토(湿草原黑土)에 속하며 부식질층이 두텁다. 룡정시 동서남부 구릉비탈과 연길시 흥안동북부 구릉비탈하부의 흑토층의 두께는 50-100cm이며 화룡시 동가구릉비탈의 흑토증의 두께는 거의 2미터이다. 흑토는 자역비옥도와 인공비옥도가 높고 단림(团粒)구조가 발달하였으며 공기가 잘 통하고 물이 잘 스며들어 수부노가 양분을 잘 보존하며 경작성이 좋고 고생산성 토양이다.
습초원토 습초원토는 습초원피복 아래에서 직접 지하수의 침윤을 받아 발육하고 형성된 반수성(半水城) 토양이다. 주로 도문강, 가야하, 부르하통아, 해란강, 목단강 유역의 늪은 범람지와 제1급단구(段区)에 분포되어 있다. 토층이 보다 두터워 보통 50cm 좌우이고 가장 두터운 것은 1m 이상 된다. 습초원토는 유기질 함량이 아주 많고 적수성(适水性)과 지수성(持水性)이 좋은 고생산성 토양이다.
충적토 충적토는 주내 각 하천 양안과 낮은 범람지에 분포되어 있다. 하천의 흙모래, 범람과 홍수로 밀려내려온 유기물질이 퇴적되어 이루어진 이 충적토는 전 주 경작지 면적 가운데서 일정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토층은 감탕층, 사층(砂层), 석력층(石砾层)이 있으며 층이 분명하다. 토층의 두께는 고르지 않아 두터운 것은 몇 십 cm나 되고 엷은 것은 몇 cm밖에 안 된다. 수분, 유기물, 공기, 열랑이 적합하고 땅이 냉하지 않고 비료공급이 좋으며 무솔지도 않고 굳지도 않아 가물과 장마에 견디고 토질이 성기어 밭갈이하기 쉬우므로 합리적으로 시비만 하면 안전 다수확을 낼 수가 있다.
소택토 소택토는 지세가 낮고 지하수위가 높으며 지면에 물이 많아 토양이 계절적 또는 장기적으로 언제나 물에 싸여 형성된 수성토이다. 소택토는 주내에 좀 널리 분포되어 있는데 대부분은 산간곡지와 하천 양안의 저습지에 분포되어 있으며 물이 고인 곳에는 거의 다 있다. 소택토의 주요한 특성은 자연영양분이 많고 유효영양분이 적으며 잠육화(潜育化)가 돌출하고 토양이 차서 농작물이 흔히 늦채우게 되는 것이므로 물을 빼야 한다.
니탄토 니탄토(泥炭土)는 대부분이 하천 양안의 저습지와 물이 잘 빠지지 않는 산곡지대에 있는데 돈화시와 안도현 경내의 산간곡지에 많이 분포되어 있다. 돈화시의 니탄토 매장량은 전성의 니탄토 매장량의 절반을 차지한다. 니탄토의 두께는 보통 50cm를 넘으며 두터운 것은 2m 이상이나 된다. 니탄토는 질소와 린의 함량이 아주 높으나 칼륨의 함량이 아주 낮으며 지하수위가 높아 지온이 낮고 공기가 잘 통하지 않기 때문에 한전농사에 적합하지 않다. 니탄토는 토량 개량의 좋은 재료이며 화학공업의 전도 있는 원료이다.
논토양 논토양(水稻土)은 인류의 수경숙화(水耕熟化) 과정 중에서 형성된 특수한 토양이다. 논토양은 주로 도문강, 훈춘강, 가야하, 해란강, 부르하통하 유역의 범람지와 제1급, 제2급 단구 위에 분포되어있다. 연변의 논토양은 토양형성시간이 길지 않아 표층토를 제외하고는 여전히 기원토양의 특성을 가지고 있다.
자연자원:
삼림자원 장백산구는 중국의 주요한 림구 중 하나이다. 장백산구에는 120여종 목본식물이 있는데 그중에는 홍송, 백송, 가문비나무, 전나무, 분비나무, 종비나무, 장백낙엽송, 적송 등 침엽수종과 들메나무, 황경피나무, 당페칸, 달피나무, 고로쇠나무, 단풍나무 등 활엽수종과 같은 경제적 가치가 높은 30여 종의 용재수종(用材树种)이 있다.
약재자원 연변에는 500여 종의 약용식물이 생장하고 있는데 그 중에는 인삼, 당삼, 황기, 평패모(平贝母), 세신(细辛), 천마, 북오미자. 동북가시오갈피나무(东北刺五加), 으름덩굴(木通), 백산차(杜香), 서향나무(长白瑞香), 원호(元胡), 부채마, 방풍(防风), 누르종덩굴, 토황련 등 아주 이름 있는 진귀한 약재들이 있다.
야채, 야생과일자원 연변 산구의 적송림 속에서는 송이버석이 많이 난다. 림구에는 또 느타리, 검정버섯, 개암버섯, 느릅나무버섯, 닭알버섯, 나팔버섯, 댑싸리버섯, 왕돌버섯, 돼지버섯, 큰 들버섯 등이 많이 난다. 이외에 백여 종의 산나물들이 있는데 이런 산나물들은 맛이 좋을 뿐 아니라 남새(식용식물)로서는 비길 수 없는 보건효능을 가지고 있다. 연변에서 많이 나는 고사리는 이전부터 국내외에 이름이 높다. 고비는 영양가나 맛이 고사리만 못지않다. 기름고비도 고사리류의 한 가지인데 기름고사리라고 부른다. 두릅은 강장효능을 가지고 있는 오갈피나무과의 일종이다. 쇠채와 도라지는 양생근채류이다. 참취, 당삽주, 잔잎미나리도 사람들이 먹기 좋은 산나물이다. 야생과실 중에서 식용 또는 유료로 되는 것은 잣, 개암, 호두 등이다. 장백산 림구에는 들쭉자원이 보다 많다. 들쭉은 생식할 수도 있고 건과로 만들 수 있으며 또 삶아서 과일즙이나 색깔이 붉고 맛좋은 고급술을 만들 수 있다. 머루 자원도 아주 풍부하다. 머루는 생산량이 높은 야생과일로서 색깔이 진붉고 맛이 향기로운 홍포도주를 만들 수 있다. 연변에는 또 다래, 돌배, 찔광이, 생열귀, 동배, 금앵자, 나무딸기 등 야생과일도 나는데 이런 야생과일을 가공하여 과일즙, 과일술, 보양품(건강식)을 만들 수 있다.
식물과 화초 자원 림지와 산림, 산비탈, 습초원에는 화본과(禾本科)와 콩과를 주로 하는 500여 종 야생사료식물이 있는데 이는 목축업 발전에 풍부한 사료를 제공하고 있다. 또 연변에는 아름다운 두송, 전나무, 장백 미인송과 같은 첨엽수와 진달래, 대목화(带棉花), 꽃정향나무, 해당나무, 들쭉나무와 같은 화목류 그리고 하늘나리, 복풀, 포대작란화, 함박꽃, 패랭이, 과꽃, 용담, 동자꽃과 같은 이름 있는 화초가 많다. 피나무와 싸리나무 등 300여종 식물도 널리 분포되어 있는데 이런 식물들은 대부분 개화기가 오래고 당분함량이 높아 양봉업의 귀중한 자원으로 되고 있다.
동물자원 지금까지 알려진 바에 의하면 연변에는 포유동물 50여 종, 조류 200여 종이 있으며 또 파행류와 양서류, 어류 등 동물이 300여 종이 있다. 야생포유동물 중 가장 진귀한 모피수인 검은담비는 털이 길고 두터우며 가볍고 견디어 국제시장에서 질 좋은 것으로 성망이 높다. 그리고 수달, 시라소니, 동북범, 표범, 다람쥐, 청서도 있다. 연변에서 생산되는 귀한 동물성 약재로는 녹용, 녹태, 사향, 웅담, 수달피열, 너구리 기름, 하스마유 등이 있다. 식용할 수 있는 야생포유동물로는 메돼지, 꽃사슴, 말사슴, 노루 등이 있으며 뀡은 국제시장에서 아주 잘 팔리는 산짐승요리재료이다. 200여 종 조류 가운데서 160여 종은 딱따구리, 두견새, 박새와 같은 식충조류이다.
광물자원 연변에는 금속광물이 50여 종, 비금속광물 40여종이 있다. 개발 가능한 광산물은 39종, 2009년 전주 청광석 매장량은 2.2억 톤, 석탄 보유저장량은 9.2억 톤, 연길분지에 1억톤 이상 석유가 있다.
금속광물은 주로 금, 연, 아연, 은, 동, 망강 등이다. 산금(山金)과 사금광의 분포 면은 아주 넓으며 사금은 주로 훈춘하, 고동하, 대사하, 가야하 유역에 분포되어 있고 산금은 안도현의 양강, 영경, 룡정시의 팔도, 개산툰, 훈춘시 마적달, 화룡시 토산자 등지에 분포되어 있다. 동, 연, 아연은 룡정시 천보산, 훈춘시 소서남차 등지에 매장되어 있다. 천보산광산은 역사가 오래며 동북에서 이름난 대형 연, 아연광산의 하나이다. 이외에 화룡시 장항과 장인의 니켈, 돈화시 따푸차이러의 수은과 망간, 왕청현 라자구 월프람 등 지하자원이 있다.
비금속광물 매장량도 비교적 많다. 석탄은 연변에 널리 분포되어 있고 비교적 많이 매장되어 있다. 주요한 탄전은 화룡시의 복동, 송하평, 오명, 사금구와 훈춘시 묘령, 영안, 양수 그리고 룡정시의 삼도만 등지에 있다. 훈춘현의 석탄매장량은 전 성에서 첫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룡정시의 지신, 왕청현의 라자구 등지에는 유혈암이 있으며 특히 라자구에 많이 매장되어 있다. 이외 연변에는 또 석회석, 석면, 내산석, 대리석, 활석, 흑영, 석영, 수정, 운모, 붕사와 규토, 고령토 등의 매장량도 아주 풍부하다.
연변의 역사연혁:
2만 6000여 년 전 구석기시대 말기에 연변에는 “안도인”이 살고 있었다. 후에 수렵과 농업에 종사하는 씨족공동체의 부족들이 점차 도문강과 그 지류 그리고 목단강과 수분하의 상류일대에 분포되어 있었다. 예로부터 동북지구의 여러 민족의 조상들은 자기의 두 손으로 이 땅을 개척하면서 함께 찬란한 고대문화를 창조하였다.
중국 고대문헌에 따르면 제일 먼저 연변에 산 민족은 예맥(穢貊)이다. 한(汉)나라 때 북옥저(北沃沮: 즈구루하고도 함)는 남으로 도문강, 동으로 동해, 북으로 흥개호 부근에 이르는 지역에 분포되어 있었다. 고구려는 기원전 37년에 건국되었다. 기원전 27년 고구려왕은 “부위훈”(扶尉勋)을 파견하여 옥저를 멸망시켜“ 훈춘 경내에 “책성(柵城: 城邑)”을 설치하였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태조대왕 50년 가을 8월에 사자를 파견하여 책성을 위무하였다.“ 고고자료의 실증에 의하면 연길시 장안 성자산성(城子山城)옛터와 화룡시 장인강(长仁江)북쪽의 옛무덤들은 모두 고구려 옛터이다.
수, 당 시기 남북조시기에 읍루(挹婁)를 물길(勿吉) 또는 말갈(靺鞨)이라 개칭하였는데 모두 7개부가 있었다. 속말부(粟末部)는 송화강의 중상류에서 활동하였고 백산부(白山部)는 연변지구에서 활동하였는데 모두 고구려에 속해 있었다. 668년 당조가 고구려를 멸망시키자 여러 부들이 분산되었다. 698년에 대조영(大祚榮)이 료하 일대에서 군사를 일으켜 당조에 대항하다가 후에 동모산성(東牟山城: 오늘 돈화시 부근)을 거점으로 하여 속말말갈, 백산말갈의 각 부와 고구려 유민들을 지배하였다. 그해에 진국(震國)을 세우고 지금의 돈화시 오동성(敖東城)에 도읍을 세웠다. 713년 당조는 대조영을 발해군왕으로 책봉하였다. 이때로부터 진국은 발해국으로 고쳐지고 당조에 예속되었다.
발해국은 강성시기에 5경, 15부, 62주를 두었다. 연변지역은 모두 발해국 경내에 속해 있었다.
요, 금, 원 시기 916년 거란족의 두령 야률아보기(耶律阿保机)가 황제로 자처하고 거란국을 세웠다. 947년에 이르러 료라 개칭하고 임황(临潢)에 도읍을 정하였다. 926년 발해를 멸망시킨 거란은 그곳에 동단국(东丹国)을 세우고 황태자 배(倍)를 왕으로 책봉하였다. 연변 일대는 거란의 동단국에 속해 있었다. 928년 동단국은 도읍을 동경(东京:현 요양)에 옮기고 연변지역의 발해인들을 강제로 요양 일대에 이주시켰다. 982년 요는 동단국을 폐지하고 전체 지역에 5개 도(道)를 두었는데 연변은 동경도에 속하였다. 발해인들이 이주해 간 후 연변과 그 주변지역에는 여진족이 많이 모여 살았다. 요는 이곳에 푸루모둬부대왕부(蒲卢毛朵部大王府), 장백산여진대왕부(长白山女真大王府)등을 두고 이 지역을 관할하였다.
1115년 여진 완안부(完颜部)의 아구다(阿骨打)는 황제로 자칭하고 국호를 대금(大金)이라 하였다. 1121년 대금은 요를 멸한 다음 전국에 6경(京), 19(路)로를 설치하였다. 연변지역의 동남부는 허란( 曷懒:해란)로에 속하였고 서북부와 서남부는 회령부(會寧府)에 속하여 상경로(上京路)의 관할 하에 있었다. 『금사 지리지』에 기재된 데 의하면 해란로에 총관부(总管府)를 두었고 1153년에 총관을 윤(尹)이라 고치고 여전히 본로의 병마도총관을 겸하게 하였으며 1198년에 병마총관을 두었다. 화룡시 동고성 부근에서 금나라 시기의 “지심계원사인(知审计院事印)”, “상경로만호일자호인(上京路万户釰字号印)”과 많은 문물들이 발견되었다. 연길, 화룡, 훈춘 등 시에서 발견된 맹안(猛安), 모극(谋克)의 여러 개 옛 도장들이 설명해주는 바와 같이 금나라는 해란로 경내에서도 군사기구와 지방행정기구가 결합된 맹안모극제도를 실시하였다.
1206년 몽골족의 두령 테무진이 오논강반에서 몽골 대커칸(大汗)으로 추대되어 나라를 세우고 1271년 국호를 원(元)이라 하였다. 1215년 10월 금나라의 요동순무였던 포선만노(蒲鲜万户)가 동경 요양에서 천왕으로 자칭하고 국호를 “대진(大真)”이라 하였으며 년호를 “천태(天泰)”라 고쳤다. 1216년 몽골과 금나라 장군 야률류가(耶律留哥)의 련합군에게 격파된 포선만노는 동쪽으로 밀리어 개원(开原)에 옮겨왔다. 그 후에 그는 남경에 와서 국호를 “동하(东夏)”(东真이라고도 함)라고 고쳤다. 동하는 남경, 솔빈, 개원 등 로를 두고 동으로는 대해, 북으로는 송화강, 서로는 야률류가영지에 이르는 광활한 령토를 지배하고 있었다. 연변지역은 그때 동하 경내에 속하여 있었다. 1233년 9월, 남경을 공락한 몽골군은 포선만노를 사로잡았으며 동하를 멸망시켰다. 연변지역은 원조의 판도에 속하게 되었다. 그 후 원조는 저눅에 10개 행성을 두고 그 아래에 로를 설치하였다. 동북지구에 요양행성을 두고 그 산하에 6개 로와 한 개 부를 설치하였는데 연변지역은 요양행성 개원로에 속하였다. 1928년 화룡시에서 “개원로퇴회흔초인(开原路退毁昏巢印)”이 발굴되었다.
명조시대 1368년 주원장은 명조를 세우고 1388년 전체 동북지역을 평정하였다. 명조는 동북에 선후하여 요동도지휘사사(辽东都指挥使司)와 눌간도지휘사사(努尔干都指挥使司)를 두고 산하에 위, 소 등을 두었다. 눌간도사는 1409년 섰는데 연변지역은 이 도사의 관할하에 있었다. 『길림통지』에 기재된 데 의하면 명조초기 길림성내에 설립한 기미위가 70여개 되었는데 지금의 길림시 부근과 연변일대에 집중되어 있었다. 1403년 훈춘과 도문강 유역에 건주위가 설치되었는데 후에 혼하, 소자하 유역에 옮겼다. 건주좌위는 1412년 도문강 유역에 설치되었는데 후에 여러 차례 이동하다가 정통(正统)초에는 소자하 유역에 이동해갔다. 건주위와 건주좌위 그리고 후에 갈라 설치된 건주우위는 건주여진의 핵심이었다.
청조시대 1616년 건주여진의 두령 누르하치는 허투아라(赫图阿拉:현 신빈)에서 커칸(大汗)으로 되고 국호를 대금(大金)이라 하였는데 후금(后金)이라 불리웠다. 1635년 황태극(皇太极)은 여진을 만주라 고치고 1636년 국호를 대청(大清)이라 하였다. 그때 연변지역은 동해여진의 와얼카와 쿠얼카 등 부가 거주하고 있었다. 1598년 누르하치는 안도 이도강 일대의 안추라쿠로와 송화강 상류의 내하로를 수복하였고 1607년 어무허슈루(현 돈화시 액목) 등을 수복하였다. 그해에 와얼카의 페이유성(斐优城: 현 훈춘시 서부)의 성주 무터허(穆特赫)가 누르하치에게 귀속되었다. 1611년 누르하치는 또 차쿠타(扎库塔)성을 공략하였다. 누르하치 시기에 연변지역은 후금의 통치하에 있었다.
1644년 청조 군대는 산해관을 넘어 자기 조상의 발상지를 보호한다는 구실로 흥경(현 신빈)으로 이동, 이통주 이남, 도문강이북 지구를 봉금지역으로 만들었다. 그 후 장백산봉금구에 설치한 난황 사냥터는 태반이 연변지역이다. 청조에서는 관부만이 이 사냥터에서 진주를 채집하며 인삼을 캐며 돼지, 사슴, 삵, 범 등을 잡아 황실에 바치게 하였다. 청조는 동북지역에서 특별한 통치제도를 실시하였다. 청조는 선후하여 성경, 영고탑, 애훈 등 3장군을 설치하여 만주 8기 관병을 통솔하여 지역을 나누어 관할하였다. 영고탑 장군은 1653년 영고탑에 설치되었는데 선후하여 앙방장경,(昂邦章京) 영고탑진수장군(宁古塔镇守将军)이라 불리웠으며 1676년에 길림 우라성(乌拉城)으로 이주하고 1757년 길림장군이라 개칭하였다. 장군 아래에는 부도통(副都统), 협령(协领), 좌령(左领) 등을 두었다. 1714년 연변에 훈춘협령을 설치하고 영고탑부도통에 예속하여 군사를 통솔하여 방비하게 하였다. 『길림외기(吉林外记)』에 기재된 데 의하면 훈춘협령 아래에 카륜(卡伦) 15개소가 있었다. 1736년 어무러소로참(站)에 좌령을 두었다.
1859년 훈춘협령을 부도통급으로 승급시켰다. 1880년 돈화현을 설치하고 현소재지를 어둬리성(鄂多里: 현 돈화시가지)에 두었으며 도문강 북부, 고려령 서부지역을 관할하였는데 1886년 후 부터는 할바령(哈尔巴岭)서부지역만 관할하였다. 1881년 훈춘협령을 훈춘부도통으로 승급, 연변 대부분 지역을 관할하게 하였으며 그해에 변무독판(边务督办)을 두고 훈춘 등 지방의 변경사무를 처리하게 되었다 1902년 연길청(延吉厅)을 설치하고 연집강(烟集岗: 현 연길시)에 소재지를 두고 민정사무를 처리하게 하였으며 화룡욕(和龙峪:현 룡정시 지신)에 분방을 설치하여 도문강 북부 월간지를 관할하게 하였다. 1909년 2월 훈춘부도통을 취소하고 길림동남로병비도태공서(吉林东南路兵备道台公署)를 설치하였는데 후에 연길로 옮겨와 길림 순무에 예속되었다. 그리고 훈춘청 무민동지(扶民同知)를 증설하고 밀강참동부지역을 관할하게 하였다. 이해에 연길청을 연길부로 승급시키고 왕청하류역에 왕청현을 증설하였으며 화룡욕분방을 화룡현으로 고치어 어무허소로에 액목현을 설치하였다. 같은 해에 연길부, 영안부, 훈춘청, 동녕청 그리고 돈화, 목릉, 액목, 왕청, 화룡 등 5개 현은 동남로에 속하였다. 안도현도 그해에 섰는데 냥냥쿠(娘娘库:송강진)에 소재지를 정하고 봉천성에 속하였다.
민국시기
1911년 10월 신해혁명이 일어났고 이듬해 중화민국이 성립되었다. 1913년 2월 길림성 동남로병비도태공서(东南路观察署)를 길림성 동남로 관찰서로 고치고 연길, 화룡, 왕청, 돈화,액목, 영안, 동녕 등 8개 현을 관할하게 하였다. 1914년 6월 동남로관찰서를 연길도윤공서(延吉道尹公署)로 고치고 여전히 8개현을 관할하였으며 1920년 연길진수사로 고치고 변방사무를 관리하게 하였다. 1929년 2월 연길도윤공서를 취소하고 연길교섭서(延吉交涉署)를 설치하여 연길, 훈춘, 화룡, 왕청 등 4개현에 행정사무와 외교사무를 감독하게 하였다. 그해 9월에 연길교섭서를 취소하고 연길시정준비처(延吉市政准备处)및 연길, 훈춘, 화룡, 왕청 등 4개 현의 행정감독공서(行政监督公署)를 설치하여 여전히 4개 현의 행정사무와 외교사무를 관리하게 하였다.
일제와 괴뢰만주국 시기 1931년 일제는 동북을 강점하고 1933년 3월 1일 괴뢰 만주국을 세웠다, 1931년 9월 길림성임시정부는 연길시정준비처와 4개현의 행정감독공서를 철폐하고 연길주재 길림성특파행정정원임시판사처(吉林省特派行政专员临时办事处)를 설치하였으며 여전히 4개현의 행정사무를 관할하게 하였다. 1933년 8월 길림성 연변행정독찰전원공서(延边行政督察专员公署)로 고쳤다. 1934년 12월 위 간도성(间岛省)을 세우고 성소재지를 연길에 정하였으며 연길, 훈춘, 화룡, 왕청, 안도 5개 을 관할하게 하였다. 현 아래의 기층에는 여전히 구, 촌, 보갑제를 실시하였다. 1937년 현 관할하의 진에는 가를 두고 농촌에는 촌을 두었다.
1938년 위 왕청현공서(汪清县公署)를 배초구로부터 대두천에 옮겨오고 대두천을 왕청가(汪清街)라고 개칭하였다. 1940년 7월에 위 화룡현공서를 대립자로부터 삼도구에 옮겨오고 삼도구를 화룡가(和龙街)라고 개칭하였다. 1943년 원 연길현 관할하에 있던 연길가를 “간도시”로 고치고 “간도성”직할시로 만들었다. 그해 10월부터 한때 총성제(总省制)를 만들어 “간도성”은 “동만총성(东满总省: 소재지를 목단강에 두었다.)의 관할하에 귀속되었다. 1944년 총성제를 취소하고 간도성을 회복하였다.
건국 후 1945년 8월 일제기 투항한 후 중국공산당은 인민정권을 건립하였으며 같은 해 11월 연변행정독찰전원공서(延边行政督察专员公署)를 성립, 1952년 9월 3일 민족구역자치를 실시, 연변전원공서를 취소하고 연변조선민족자치구를 성립하였다. 1955년 12월 연변조선족자치주로 개칭, 1시 5개현을 관할하였다. 1958년 돈화현이 귀속되고 1965년 도문시를 신설하였다. 1985년, 1987년, 1993년 돈화, 룡정, 훈춘, 화룡을 시로 변경하였다. 현재 연변조선족자주는 연길, 도문, 돈화, 훈춘, 룡정, 화룡 6개시와 왕청, 안도 2개현을 관할, 수부는 연길시에 있다.
풍속습관
복장
조선족은 흰옷을 즐겨 입기에 "백의민족"이라 부른다. 조선족 옷의 특징은 옷섶이 길고 단추를 채우지 않고 고름을 매게 되어 있다. 남자들은 올방자를 틀고 앉기 편리하도록 가랑이를 너르게 만든 바지를 입고 바지의 발회목에 닿는 부분을 대님으로 졸라매며 위에는 저고리에 색 조끼를 받쳐 입기 좋아하며 나들이를 할 때에는 그 위에 두루마기(양식은 저고리와 같다)를 입는다. 청장년들은 일반적으로 흰 의복을 입지 않고 많이는 회색이나 검은 색 바지를 입으며 남녀가 입는 저고리의 깃 위에 흰 천으로 동정을 단다. 이 동정을 어느 때나 늘 씻어서 달 수 있기 때문에 옷이 깨끗하다. 젊은 색시나 소녀들이 입는 저고리는 끝동, 깃을 고운 비단 천으로 꾸민다. 저고리고름도 붉은 빛, 자주 빛, 남빛 비단으로 꾸민다. 이러한 저고리를 "반회장저고리"라고 한다.
늙은 여성들은 흰 치마를 입기 좋아하며 머리에 흰 천으로 만든 머릿수건을 두르는데 습관되었다. 겨울에는 겉은 비단 천에 안은 양털을 댄 등거리를 더 입는다. 중년여성이나 노년여성들은 통치마를 입지 않고 꼬리치마를 많이 입는다. 꼬리치마를 입을 떄에는 꼭 흰 속치마를 입어야 한다. 통치마는 양쪽 선단이 없어 통으로 지은 치마이지만 다른 민족의 통치마와는 같지 않다, 허리에 맞게 주름을 잘게 잡고 앞가슴 쪽에 단추를 채우게 된 흰 조끼를 만들어단다. 입을 때에는 머리 위로부터 아래쪽을 잡아당겨 입는다. 통치마는 무릎 아래까지 드리우기 때문에 일하거나 길을 걷는데 편리하다. 그러므로 여성들이 일할 때에 통치마를 많이 입는다.
조선족처녀들과 젊은 여성들이 입는 저고리와 치마는 울긋불긋하고 눈부시게 아름다워 짙은 민족적 특색을 띠고 있다. 어린이들의 저고리의 팔소매는 대부분 칠색 단으로 짓는다.
조선족의 신발은 변화과정을 가지고 있다. 초기에는 대부분 나막신, 갖신을 신었으나 후에 와서는 짚신, 삼신을 신었다. 고무신을 신은 것은 근대 자본주의적 공상업이 발전한 이후의 일이다. 남자들은 대부분 바닥이 평평한 흰 고무신을 신고 여성들은 대부분 흰 코신이거나 하늘색코신을 신는다. 근년에 와서는 일반적으로 바닥이 고무로 된 헝겊신이거나 가죽신을 신는다.
음식 조선족의 음식은 평소에 먹는 음식과 특별히 만든 음식으로 나눈다. 평소 먹는 음식에는 밥, 국, 반찬 등이 포함된다. 밥은 이밥, 조밥, 보리밥, 수수밥, 감자밥, 보리수수밥, 콩밥, 팥밥, 강냉이밥, 비빔밥 등이 있으며 밥은 조선족의 하루 세끼의 기본주식으로 되었다. 조선족은 밥을 상추, 김, 취 같은 것에 싸먹기를 좋아한다.
국
국에는 토장국, 곰국(곰탕), 미역국 등이 있다. 국은 끼니마다 밥상에 오르는데 그 구수한 맛으로 하여 조선족이 즐겨먹는 부식물의 하나이다. 조선족들은 국 가운데서도 토장국을 제일 즐겨 먹고 미역국도 잘해 먹는다. 미역국은 일반사람들에게도 좋지만 산모들에게는 필수 음식으로 된다. 조선족은 무더운 여름철에는 시원한 냉국도 해먹는다. 냉국은 잘게 썬 오이와 파, 썬 마늘, 냉수 게다가 간장(또는 된장), 식초, 깨 등으로 만든다. 삼복지간에 냉국을 마시면 시원하고 더위를 덜 수 있다.
장
조선족 장은 간장, 된장, 고추장, 담수장, 즙장, 막장, 청태장, 청국장 등이 포함된다. 그중에서도 간장, 된장, 고추장이 많이 이용된다. 조선족의 음식은 거의 모두 간장, 된장, 고추장으로 간을 맞추었기에 장은 음식 맛을 좌우하는 기본요인으로 되었다. 장은 콩을 불궈 쪄서 발효시켜 만든 것인데 그 영양가가 매우 풍부하다. 고추장은 찹쌀가루를 묽게 반죽하고 거기에 고춧가루, 장떡(또는 된장), 꿀이나 물엿(또는 사탕가루), 참깨, 참기름 등 여러 가지 조미료를 넣어 만든다. 고추장은 먹으면 맵고 향기롭고 달다.
김치
김치는 조선족이 창조한 부식물 중 가장 이채를 돋구는 음식이다. 배추김치를 담그는 방법은 지방 습성에 따라 여러 가지이다. 지금까지 유행되는 방법은 10여 가지가 있다. 연변지구에서는 일반적으로 아래 방법으로 김치를 담근다. 먼저 가을배추 중 속이 잘 앉은 것을 골라서 떡잎을 떼어버리고 깨끗이 씻은 다음 소금물에 담갔다가 며칠 후에 꺼내어 맑은 물로 깨끗이 씻은 다음 배추 속을 헤치고 양념을 고구 바른다. 이러한 양념은 소금, 짓찧은 마늘, 생강, 고춧가루와 기타 향료를 버무려서 만든다. 조건이 허락되면 배추김치 속에다 신선한 해산물, 예컨대 새우, 젓갈, 굴, 명태, 조기 등(비린내가 없거나 적은 어류를 넣는다)을 넣으며 또 소고기, 배, 사과 등도 넣을 수 있다. 이렇게 양념을 버무린 김치소를 넣은 김치를 큰 독안에 넣고 꼭 덮은 다음 약 반달동안 두면 먹을 수 있다. 그밖에 무, 갓, 영채를 주요한 원료로 하여 담근 김치도 있다.
특식
조선족의 특별음식에는 약밥, 오곡밥, 떡, 떡국, 개장, 신선로, 국수, 불고기, 묵, 묵무침, 순대, 막걸레, 엿, 유밀과 등 여러 가지가 있다.
떡
떡은 조선족이 즐겨 먹는 영양가가 높고 맛있는 특별음식중 하나이다. 떡에는 쌀로 만든 떡과 쌀가루로 만든 떡이 있다. 쌀로 만든 떡은 찰떡인데 그것은 찹쌀 또는 차좁쌀을 쪄서 떡구유나 떡돌에 놓고 떡메로 쳐서 만든다. 다음 먹기 좋게 일정 크기로 잘라서 고물에 묻혀먹는 떡이다. 떡고물에는 콩고물, 깨고물, 록두고물, 팥고물, 잣고물, 대추고물, 밤고물 등 여러 가지가 있다. 찰떡은 그 떡감에 따라 이차떡, 조차떡, 기장떡 등으로 나눈다. 이차떡은 찹쌀로 만든 찰떡인데 색깔이 쌀색갈과 같이 희다. 조차떡은 차좁살로 만든 찰떡이고 기장찰떡은 기장쌀로 만든 찰떡이다. 조차떡과 기장찰떡은 쌀 색과 같이 색깔이 누르다. 이차떡은 주로 수전지구에서 많이 해먹는다. 이러한 찰떡은 일반적으로 설이나 추석 같은 명절이거나 잔치 때에 쳐서 먹었으며 오랜만에 만난 친구거나 귀한 손님이 왔을 때에도 쳐서 먹었다. 지금 시장에는 기계로 쳐서 파는 찰떡과 떡메로 쳐서 파는 찰떡이 있어 평소에 수시로 먹을 수 있다. 조선족 속담에 "여름에 까마귀 머리만한 찰떡을 먹어도 황소 같은 힘을 쓴다."는 말도 있다. 가루음식에는 "증편", "시루떡", "송편" 등이 있다. 송편은 쌀가루를 반죽하고 그것을 작게 밀어서 그 안에 팥, 강낭콩, 참깨 또는 들깨, 밤, 사탕 등으로 소를 넣고 조개모양으로 빚어서 가마에 넣고 찐다.
국수
국수는 맛깔스럽고 영양가가 높으면서도 잡곡으로 만들기 때문에 많이 해먹었으며 손님대접이나 행사 때에도 많이 쓰인다. 조선족의 국수는 17-19세기 전반기에 널리 보급되었는데 『동국세시기』에는 이런 기록이 있다. "메밀국수를 무김치, 배추김치에 말고 돼지고기를 섞은 것을 냉면이라 한다, 또 잡채와 배, 밤, 소고기, 돼지고기 썬 것과 기름, 간장을 메밀국수에다 섞은 것을 골동면(비빔국수)이라 한다."
국수는 만드는 원료에 따라 메밀국수, 밀국수, 농마국수, 강냉이국수, 수수국수 등으로 나누며 조리방법에 따라 냉면, 온면, 비빔국수로 나눈다. 이런 국수들 가운데서도 분틀에 누른 메밀국수가 제일이며 그 중 냉면이 가장 널리 보급되었다. 메밀로 만든 냉면은 오리가 질기고 소고기국물이나 닭고기국물 또는 동치미국물에 말기 때문에 시원하면서도 단맛과 세큼한 맛이 잘 어울려 감칠맛이 나는 것이 특징이다. 육수를 만들 때에는 반드시 고기국물이 다 식은 다음에 기름을 떠내야 한다. 냉면에다는 참기름, 후추가루, 고춧가루, 맛내기 등 양념을 놓아야 하며 게다가 소고기꾸미, 가늘게 썬 닭알지짐 또는 닭알 반 개, 사과 또는 배를 썰어놓으면 더욱 입맛을 돋군다. 지난날에는 정월 초나흗날 점심에 냉면을 먹는 습관이 있었다. 국수는 "장수국수"라고 불리운다. 지금은 일 년 사시절 다 먹을 수 있다. 겨울에 냉면을 먹기 싫으면 "온면"을 먹을 수 있다.
당과류
당과류에는 엿, 태식, 유밀과, 다식과, 전과 등이 있다. 엿은 양곡으로 만든다. 양곡의 종류에 따라서 찹쌀엿, 차좁쌀 엿, 수수엿, 강냉이 엿 등으로 나눈다. 태식은 쌀가루에 엿이나 꿀을 버무려서 만든다. 이러한 태식은 달고 맛이 있으며 허기를 면하게 할 수 있기 때문에 과거에 먼 길을 떠나는 사람들이 많이 가지고 다니었다. 유밀과는 절반 익은 쌀가루나 밀가루를 반죽하여 여러 가지 모양으로 얇게 밀어서 말리운 다음 그것을 기름에 튀기어 겉에 꿀이거나 물엿을 바르고 입쌀튀기거나 참깨를 묻힌다. 이것은 일반적으로 잔치나 상사, 명절 같은 때에 상차림으로 쓰인다. 전과는 여러 가지 과일이나 연뿌리, 생강, 도라지, 인삼 등을 꿀이나 사탕가루에 넣어 끓여 만든 식품으로서 흔히 간식으로 쓰인다.
요리
조선족의 요리는 종류가 퍽 많다. 주요 요리는 “열구자탕”, “매운탕” “불고기”, “소고기회”, “화채”, “수정과” 등이 있다. “열구자탕(悅口子湯)”은 일명 신선로라고도 하는데 육회와 여러 가지 저냐, 채소를 넣고 호두, 은행, 군밤, 실백잣, 석이, 표고, 닭알 지짐, 실고추 등 알고명을 한 후 장국을 부어 끓여 먹으며 사람마다 좋아하는 것을 골라 넣을 수도 있다. 매운탕은 본래 장국에 고추, 남새 등을 넣어 만든 간편한 국이다. 연변지역에서 유행되고 있는 매운탕은 원래의 매운탕과 “열구자탕”의 혼합물이다. 이것을 만들 때에는 먼저 소고기, 닭고기, 바닷물고기 등을 맑은 물에 넣어 끓인 다음 거기에다 두부, 감분국수, 콩나물, 무, 버섯 등을 넣으며 또 닭알 지짐과 실고추를 넣는다, 이런 국에 술을 마시면 뜨겁고 맛이 있기 때문에 잘 취하지 않는다.
“화채”는 음료의 한 가지이다. 먼저 끓인 오미자국에 꿀이나 사탕을 타고 또 과일 쪽이나 먹는 꽃잎과 실백잣을 넣는다. 맛을 맞추기 어렵기 때문에 민간에서는 일반적으로 화채를 만들지 않는다.
술
술로는 백주 외에 민간에서 고은 곡주, 청주, 탁주가 있다. 탁주란 “막걸리”로서 농촌에 의연히 유행되고 있는 술의 한 가지이며 만들기 간편한 술이다.
고기류
조선족은 양고기, 오리고기, 게사니 고기 그리고 기름기 있는 음식물을 먹기 싫어하고 소고기, 닭고기, 해어 등을 먹기 좋아한다.
개고기
개고기는 조선족이 먹기 좋아하는 육식의 일종이다. 개장국은 개고기를 고아 끓인 국인데 영양가가 매우 높고 보신에도 이롭다. 옛 문헌 『동국세시기』에는 개장에 대하여 이렇게 서술했다. “개를 삶아 파를 넣고 푹 끓인 것을 개장이라 한다. 닭이나 죽순을 넣으면 더욱 좋다, 또 개장국에 고춧가루를 타고 밥을 말아서 시절음식으로 먹는다. 그렇게 하여 땀을 흘리면 더위를 물리치고 허한 것을 보충할 수 있다. 그러므로 시장에서도 이것을 많이 판다. 생각건대 「사기」에 ”진덕공 2년에 비로소 삼복제사를 지냈는데 성인 4대문에서 개를 잡아 충재를 막았다.“고 했다. 그러므로 개잡는 일이 곧 ”복“날의 옛 행사요, 지금 풍속에도 개장이 삼복중의 가장 좋은 음식으로 된 것이다.” 또 옛문헌 『열양세시기』에서는 “개를 잡아 국을 끓여 양기를 돕고 팥죽으로써 려역을 예방한다.”고 하였다. 개장은 “보신탕”이라고도 하였다.
개장즙은 개장의 맛을 돋구는데 있어서 매우 중요하다. 개장즙은 개의 내장 일부와 개밸에 붙은 비곗살을 슬쩍 익힌 다음 잘게 썰어서 파, 들깨, 고추, 고수풀 등과 함께 기름에 넣고 볶아서 만든다. 개장즙은 소금, 간장, 맛내기 등을 넣어 간을 조절하고 맛을 돋군다.
조선족은 무더운 날에 개고기를 먹으면 보신한다고 생각하기에 일반적으로 삼복 간에 개장을 먹는다. 개장을 먹은 다음에는 냉수를 마시지 않으며 찬 구들에서 자지 않는다. 지금은 계절을 가리지 않고 개장을 먹는다. 그러나 잔치, 상사 때나 명절에는 개를 잡지 않으며 개고기를 먹지 않는다. 지금 연변의 한족도 개고기를 즐겨 먹으며 연변 외 타 지역에서도 개장국을 팔고 있다.
조선족의 취사도구와 음식그릇은 자체의 독특한 점을 가지고 있다. 밥가마는 마치 한족밥가마 위에 시루를 씌워 놓은 것 같으며 가마 밑이 비교적 평평하다. 가마뚜껑은 쇠로 만드는데 가운데에 원주형으로 된 손잡이가 있다. 조선족은 보통 가마를 두 개씩 거는데 하나로는 밥을 짓고 다른 하나로는 국을 끓이거나 반찬을 볶는다. 가마를 세 개나 네 개 거는 집도 간혹 있다. 조선족이 쓰는 밥상은 장방형과 원형 두 가지가 있으며 여러 사람이 먹게 된 것도 있고 혼자서 먹게 된 것도 있다. 혼자서 먹게 된 상은 노인들이 많이 쓰고 있다. 조선족 대부분은 구들에 앉아서 식사하기 때문에 밥상 다리가 모두 짧다. 밥을 먹을 때에는 주로 숟가락을 쓰며 젓가락은 반찬을 집을 때에만 쓴다. 밥그릇은 지난날 놋그릇, 사기그릇을 썼고 질그릇과 나무그릇도 썼다. 놋그릇은 지금 보기가 아주 드물다.
가옥
조선족은 마을을 앉힘에 있어서 전형적인 배산임수의 자세를 택하고 있으며 양지바른 산기슭에 남향한 집을 짓는다. 일반적으로 나무를 기본재료로 하며 네 면이 경사지게, 벼짚, 조짚 혹은 기와로 지붕을 잇는다. 벽은 흙과 모래로 바르게 회칠을 한다. 생활수준이 향상됨에 따라 벽돌집과 기와집이 날로 늘어났다. 살림집은 일반적으로 3간(조건이 허락되면 4간 집을 짓는다)으로 되어 있고 중간 방이 제일 큰데 그 중간방의 3분의 2에는 구들을 놓고 나머지 3분의 1은 부엌간으로 쓰고 있다. 부엌간과 통하게 문을 낸 부엌바깥 큰 간은 구들을 놓지 않고 고간으로 쓴다. 중간 큰 간의 웃 간은 전부 구들을 놓고 중간을 가로막아 양지쪽 간을 손님방으로 쓰며 북쪽간은 아들딸들의 침실로 쓴다. 손님이 오면 남성손님은 손님방으로 들어가고 여성손님은 정지로 들어간다.
방에는 방문이 하나씩 달려 있다. 방문은 위로부터 아래에 이르기까지 살대를 가로세로 네모나게 맞추고 그 위에 창호지를 발라 햇빛을 받아들이게 하는데 지금은 대부분 유리문을 단다. 온 집안이 다 구들로 되었기에 방으로 들어갈 때는 신을 벗어야 한다. 과거에는 농촌집들에서 구들에 갈대나 수수대로 노전을 결어서 깔았으나 지금은 대부분 구들에 인조섬유판을 깔거나 장판지를 바르고 그 위에 장판기름을 바른다. 장판을 경상적으로 걸레로 닦아 윤택이 나게 깨끗하게 거둔다.
혼인풍속
지난날 조선족 혼례는 일반적으로 혼의, 납채, 납페, 친영 등 절차로 이루어졌다. 혼의란 혼사를 논의함을 말한다. 지난날 조선족의 혼례에서 중매인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 남자 측과 여자 측은 중매인을 통하여 서로 대방의 인물, 학식, 건강, 인품, 가정형편 등을 요해하면서 혼담을 교환한 후 결혼가능성을 구체적으로 토의하기 위하여 선을 보게 되는데 선보기가 끝난 다음 두 집에서 혼사를 치를 의향이 있게 되면 궁합을 보고 궁합이 맞으면 약혼이 합의된다.
납채는 혼담이 합의되면 허혼한다. 신랑 집에서 먼저 편지를 보내고 신부 집에서는 이에 회답편지를 보내는 절차를 밟는다.
납페란 혼례식 날자가 정해지면 신랑 집에서 신부 집에 예장을 보내는 것을 말한다. 예장은 일반적으로 청단, 홍단으로 된 치마 저고리 감으로 하는데 짝을 맞추지 않고 치마 한 감에 저고리 두 감이 아니면 치마 두벌에 저고기 세 감으로 한다.
친영이란 신부를 맞이해온다는 뜻으로서 지난날 혼례식에서 가장 중요하고 복잡한 행사이며 의식이다. 친영에서 처음으로 행해지는 것이 전안례이다.
다음으로 신랑신부 교배례가 있다, 교배상에는 붉은 초대 한쌍과 대추, 밤, 유과를 각각 두 그릇씩 담아놓고 콩, 팥을 각각 두 그릇씩 놓으며 웅동자서로 닭을 놓는다. 교배상 소반에는 청실홍실을 맨 술잔, 주전자와 꼭지숟가락을 놓는다. 교배례에서 신랑은 서쪽에서 동쪽으로 서고 신부는 동쪽에서 서향으로 선다. 신부가 신랑에게 큰절을 두 번하면 신랑은 신부에게 큰 절을 한 번하되 다시 신부가 신랑에게 큰 절을 두 번하면 신랑은 신부에게 큰절을 한번 한다. 교배례가 끝나면 신랑은 첫날 큰상을 받는다. 신부는 여기서 큰상을 받지 않고 신랑집에 가서 큰상을 받는다. 큰상에는 입에 붉은 고추를 물린 삶은 닭을 놓는다. 그 유래는 귀신을 쫓는다는 데서 기인된 것이라 하고 또 아들을 소망한다는 뜻이라 전해진다.
신부가 신랑집에 와서 큰상을 받으면 신부가 시아버지와 시어머니에 대한 의례로 구고례를 행한다. 구고례는 가문에 따라 당일에 하기도 하고 이튿날에 하기도 한다.
이밖에 조선족혼례의 연장으로 삼일, 동상례, 반살미 등이 있다. 지금 조선족혼례식은 예식장에서 하는데 큰상 받기 전통은 여전히 보존되고 있으나 구식혼례의 전안례와 교배례는 없어졌다.
회갑
조선족은 태어나서 만 60세가 되면 회갑을 쇠게 된다. 회갑은 "육심갑자가 돌아온다"는 뜻이며 지방에 따라 환갑, 주갑, 화갑이라고 한다. 회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헌수이다. 헌수란 자녀들이 큰상을 차려놓고 회갑을 맞이한 이들에게 술을 올리고 절하면서 축수하는 것을 말한다. 회갑을 맞는 사람의 부모가 생전이면 먼저 부모 앞에 큰상을 차려놓고 회갑을 맞는 사람(부부)이 술을 올리고 절을 한다. 그리고 자기 자리에 앉아서 자녀들로부터 헌수를 받는다. 헌수할 때 맏아들 내외부터 시작하는데 부모에게 술을 올리고 절하며 축수를 한다. 이런 형식으로 직계손과 근친자 각각 가까운 순위대로 한다.
경로풍속 조선족은 노인에게 존칭의 말을 쓴다. 그렇지 않을 경우 본인은 물론 부모들까지도 사람들의 질책을 받는다. 노인에게는 하루 세끼 독상을 올리며 노인들이 수저를 든 다음에야 아래 사람들이 수저를 든다. 맛있는 음식은 노인께 먼저 대접하며 노인들 앞에서 술을 마시지 않는다. 노인이 술을 권하면 돌아앉아서 잔에 손을 대고 조심스레 마신다. 담배도 노인 앞에서 마음대로 피우지 않는다.
노인들이 외출할 때에는 집사람들이 나와 인사한다. 노인과 함께 길을 갈 때 젊은이는 뒤에서 걷고 노인이 앞에서 걷는다. 집안 노인들 앞에서 항상 자세를 바로하며 무릎을 꿇고 앉는다. 조선족은 장자가 부모를 부양한다.
첫돌
아기가 태어나서 만 1년이 되는 날을 첫돌이라 한다. 첫돌에는 원근친척과 인근 친지들이 모여 큰잔치를 베풀며 즐긴다. 이날 돌쟁이에게 새옷을 입히고 돌상을 차려 돌잡힌다. 남자애일 경우 돌상에 쌀, 떡, 국수, 실과, 활, 화살, 책, 붓, 먹, 종이, 돈 등을 놓으며 여자애일 경우 돌쌍에 쌀, 떡, 국수, 붓, 먹, 종이, 실과, 돈, 자, 가위, 인두, 바늘 등을 놓는다. 어린애가 돌상에서 무엇을 먼저 혹은 두 번째로 잡느냐에 따라 그 어린이의 장래나 성격을 예측한다. 돌잡히기를 마치면 음식을 친척과 이웃들에게 대접한다. 돌떡은 친척과 이웃들에 나누어주는데 돌떡을 받은 집에서는 그 그릇에 쌀, 돈, 실, 수저 혹은 밥그릇, 장난감 등을 담아 돌려보내면서 아기의 수복을 빌어준다.
상사와 장례
조선족은 집안에 상사가 나면 친척들과 벗들 그리고 동네사람들이 모여와 조상을 하는데 먼저 유체에 세 번 절을 하고나서 상주와 절을 하면서 위안하는 말을 나눈다. 조상하러 가는 사람들은 약간한 물품들을 가지고 가는데 지난날에는 초 한두 봉지를 가지고 갔으나 지금은 대부분이 술을 가지고 간다. 지난날에는 기수 날을 택하여 장례하였으나 지금은 그런 습관이 없어졌다. 지금 도시에서는 화장을 하나 농촌에서는 여전히 옛 관습대로 매장한다. 지난날에는 어른인 경우 3일 또는 5일, 7일 만에 출빈하였으나 지금은 일반적으로 2일장 또는 3일장을 지낸다.
입관하고 영구를 지키는 기간에는 매일 아침저녁으로 죽은 사람에게 상식을 떠놓고 “상제”가 근친들을 데리고 곡을 하며 상식제를 지낸다. 영구를 내가기 전에 곡을 하고 제를 지낸 다음 출빈한다. 과거에는 관을 상여에 얹고 마을의 청장년들이 메고 출빈하였다. 그러나 지금은 일반적으로 상여를 쓰지 않는다. 지금은 농촌에서는 소수레를 쓰며 도시에서는 자동차를 쓴다.
지난날에 풍수를 모셔다 묘자리를 택하였으나 지금은 그런 습속이 없어졌다. 제례에 있어서는 과거에는 신분과 등급에 따라 같지 않은 요구가 있었다. 지금은 직계친척이 사망하면 이일반적으로 3년 동안 제를 지낸다. 삼년이 지난 다음에는 “기제”와 “속절제”를 지낸다.
명절 조선족의 민간명절은 설, 정월 대보름, 한식, 삼짇날, 사월초파일, 단오, 류두, 추석, 중구, 동지 등이 있는데 설, 한식, 단오, 추석 등 명절을 4대 명절이라 한다.
설:
음력으로 정월 초하루 날을 설(구정)이라 한다. 설을 맞이하기 위해 섣달 그믐날에 집안팎을 깨끗이 소제하고 저녁에는 부녀자들이 세찬을 마련하느라 밤을 새우며 아이들은 섣날 그믐날 밤에 자면 눈섶이 희여진다 하여 자지 않고 윷놀이를 하거나 이야기를 듣는다. 또 이날 밤에 방, 뜰, 부옄, 고간, 변소 등에 불을 켜놓고 날을 새우는데 이를 수세라고 한다.
설날에는 아침 일찍 일어나 세수하고 미리 마련해놓은 새 옷을 입는데 이를 세장이라 한다. 다음 설날아침차례를 지낸다. 아침세례에는 사당에 모신 4대 조상의 신주에만 제사를 지낸다. 차례가 끝나면 새해의 첫인사로 절을 올리는데 이를 세배라 한다. 가족세배에서는 세배를 받는 웃 어린이 아이들에게 세배돈을 조금씩 주고 시부모가 새로 시집온 며느리에게 돈 혹은 화장품이나 댕기 같은 것을 주기도 한다. 가족세배가 끝나면 차례지낸 음식으로 아침식사를 하고 끝나면 일가친척이나 이웃어른들을 찾아가 세배를 드린다. 설날의 세찬으로는 떡국, 설기, 이찰떡, 절편, 송편 등이다. 섣날부터는 여러 가지 민속놀이가 벌어지는데 널뛰기, 윷놀이, 연띄우기 등이 대표적이다.
정월 대보름: 정월 대보름에는 아침 일찍 일어나 밤, 호두, 잣 같은 것을 깨무는데 이를 부럼이라 한다. 아침에 술을 마시면 귀가 밝아진다고 하여 남녀로소 불문하고 모두 술을 한잔씩 마시는데 이를 귀밝이술이라 한다. 주식으로는 약밥, 오곡밥을 먹기도 하고 어떤 지방에서는 국수를 먹는다, 장수한다는 뜻에서이다. 민속놀이로는 줄 당기기, 연 띄우기, 다라 밟기, 돌싸움, 홰불싸움, 지신밟기, 놋다리밟기 등이 있다. 정월 대보름날에 달이 뜨는 것을 먼저 보면 좋다하여 높은 산에 올라가 달뜨는 것을 구경하기도 하고 달집에 불을 단후 춤추고 노래하며 즐겁게 놀기도 한다.
옥곡제:
대보름날 아침에 더위팔기, 부럼깨물기, 귀밝이술을 마신 후 다섯가지 곡식으로 지은 밥을 먹는다. 이 오곡밥을 먹기 전에 행사가 있다. 신라궁중에서는 “오기지일”이라 하여 까마귀에게 제사를 지냈다. 궁안에서는 까마귀 우는 소리를 따라간데서 나라의 재화를 면하게 되었다 하여 국법으로 오곡제를 지내게 되었다. 옥곡제가 민간에 전해지면서 다섯 “오”자와 곡식 “곡”자로 바뀌어져서 다섯 가지 밥을 지어먹는 습관으로 변했다. 조선족은 지금도 대보름날에는 오곡밥을 지어 먹는다.
한식:
한식은 동지부터 105일에 해당되는 날을 말한다. 이날에는 술, 과일, 떡, 포, 전육 등 여러 가지 음식을 마련한 후 산소에 가서 제사를 지낸다. 이날 조상의 분묘가 헐었을 경우 그것을 개축하고 잔디를 다시 입히는데 이것을 개사초라 한다.
단오:
음력 5월 5일이 단오이다. 단오를 수리날이라고도 하는데 이는 단오에 수리모양의 쑥떡을 만들어 먹는데서 유래되었다. 단오날에는 창포를 삶은 물에 머리를 감고 창포뿌리를 깎아 비녀를 만들기도 한다. 또 단오날에는 익모초와 쑥을 뜯는 풍습도 있는데 이는 단오날에 뜯는 익모초와 쑥의 약효가 좋다고 하기 때문이다.
추석:
음력으로 8월 15일을 추석, 중추절 혹은 한가위날이라 한다. 추석때가 되면 농사일도 거의 끝나 한숨을 돌릴 수 있고 과일이 풍성하며 햇곡식도 먹을 수 있다. 추석엔 아침 일찍 일어나 새 옷을 갈아입고 햇곡식으로 빚은 송편 등 떡과 술, 각종 과일을 차려놓고 조상에게 차례를 지낸다. 아침 후에는 어른들을 앞세우고 조상들의 묘를 찾아가서 성묘를 하며 음식을 이웃들과 나누어 먹는다. 추석날에는 지방에 따라 소놀이도 하고 씨름판을 벌리기도 한다. 저녁이면 먼 곳에서 온 친척과 이웃둘이 모여앉아 떠오르는 달을 쳐다보면서 여러 가지 놀이도 하고 음식도 나누어 먹으면서 이야기꽃을 피운다. 추석의 대표적인 음식은 송편이다. 마을에서는 부녀자들이 “강강수월래”, “길쌈놀이”등을 한다.
전통적인 명절 외 중국조선족에게는 그들만이 즐겨 맞는 명절이 있다. 8.15노인절, 9.3자치주성립명절, 6.1아동절 등이다.
인구구성
연변은 다민족 집거구로서 한족, 조선족, 만족, 회족 등 4개 민족과 기타 소수민족이 있다. 2009년말까지 전주 총인구는 217.9만명, 그중 한족 59.9%, 조선족 36.7%, 만족 2.9%, 회족 0.3%, 기타 소수민족이 0.2%를 점한다. 한족인구는 돈화, 안도, 왕청에 주로 분포되었고 조선족인구는 룡정, 연길, 도문; 만족인구는 훈춘, 왕청, 안도; 회족인구는 돈화, 연길, 훈춘에 주로 분포되었다. 연변인구밀도는 51명/㎢이다.
국민경제지표
연변 주 총생산액은 545억원(2010년 숫치, 이하 동)이다. 전반 통계범위내의 재정수입은 88억 원, 그중 지방 급 재정수입은 41억 3000만원이다. 고정자산투자는 738억원, 사회소비품 총매출액은 261억 원에 달하며 대외무역 총수출입금액은 15억 2000만이다.
규모이상 공업 총생산액을 585억 원이며 공업 증가가치는 213억 원이다. 식품(담배), 에너지광물, 림산, 의약 4대 기둥산업의 증가가치는 153억 원이다. 규모이상 공업의 리윤세금은 71억 원에 달한다. 통계범위 내 민영경제 주요경영수입이 24.3% 늘어난 870억 1000만원에 달한다. 량곡총생산량이 100만 1000톤에 달하며 농촌경제 총수입은 86억 원에 달한다. 전문농장과 규모경영 재배농가가 210호에 달하며 8700 여 헥타르의 토지가 이전되었다. 제3산업 증가가치는 240억 4000만원이다. 국내외 관광객 연 719만 명을 접대하고 관광총수입 83억 원이다. 도시 주민 인당 가처분소득은 1만 4780원에 달하고 농민 인당 순소득은 5736원에 달하게 됩니다. 도시 등록실업률은 3.9%이다.
제공: 조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