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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다ㅡ수남편
2014년11월19일   조회:2189   추천:0   작성자: 水南村



수남촌 동쪽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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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5년 출판된 연변지명록을 펼쳐보면 연변지역에서 촌명이 물수(水)자로 시작된 촌이 대충 세여보아도 23개나 된다. 그중에는 수남촌, 수북촌, 수동촌, 수서촌… 아주 가관이다. 말하자면 물을 중심으로 동서남북으로 구색을 맞추고있는셈이다. 그런데 재미있는것은 옛날 로인들은 일반적으로 한어직역인 수(水)보다 우리 고유어인 물을 사용하여 물남이란 고유어와 “물람”(남)이란 토착어를 잘 사용한것이다.

수남촌- 어느 촌인들 력사의 흔적이 희미하련만 도문시 석현진 수남촌은 민족항쟁의 터전으로 전적지 봉오동이 소재하여 반일의 기가 펄럭이는 곳이다. 더우기 봉오동전투의 부장인 최진동(일명 최명록)이 본거지이고 군무도독부의 근거지여서 선인들의 발자취가 선연하게 찍힌 곳이다. 수남촌은 도문시에서 서북쪽으로 7킬로메터쯤 상거해있는곳이라 연길에서도 멀지 않은 곳이다. 수남촌 리병춘서기 (48세, 당지부서기 3년차)가 촌사무실에서 우리를 맞았다. 지난 세기 60년대초에 흑룡강성 벌리현에서 이사왔다는 리병춘서기는 수남촌이 고향이라도 과언이 아니라면서 여태껏 수남촌을 떠나본적이 없는 토박이라고 자신을 소개했다.

도문시경제개발구와 길 하나를 사이에 둔 수남촌은 도문에서 석현, 왕청으로 가는 길목에 자리잡은 고장으로 전 촌 경작지면적이 200헥타르, 그중에서 수전이 35헥타르, 4개의 자연촌, 8개의 촌민소조, 총호수가 207호, 인구가 654명으로 알뜰한 조선족 집성촌이였다. 수남촌의 특징은 교통이 편리하고 도문시개발구와 이웃으로 되면서 토지징용에서 혜택을 받았다. 촌동쪽편에 봉오동저수지가 있고 촌행정구역내에 연변범서방비닐유한회사도 자리잡고있고 려행, 레저, 미식, 숙박을 경영하는 시설이 다섯집이나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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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남촌은 현재 4개의 자연부락으로 형성되고있는데 이는 력사적인 취락취명의 연장으로 남아내려온것이다. 토성리, 신선툰, 고려툰, 수남 이 네개의 자연촌으로 형성되여 오늘의 수남으로 통칭된것이다. 위만주국이 서기전까지 봉오동계곡에는 하촌, 상촌, 마촌, 태촌, 박촌, 조촌 강촌 같은 10여개의 올망졸망한 촌들이 자리잡았지만 1930년대초에 일본사람들의 강제적인 이주로 이른바 안전촌, 집단부락으로 되면서 연변지역 여타의 촌처럼 오늘의 군집촌으로 형성되였다. 지금도 수남촌 서구밖에는 일본사람들이 세운 자위단보초막자리가 남아있다. 여느 집인가 개바자를 둘러막고 풋마늘을 심어 흔적이 없었지만 촌으로 들어오는 유일한 통로를 감시할수 있는 위치라는것만은 알수 있었다. 그리고 봉오동저수지도 하촌, 상촌… 같은 여러개의 자연부락흔적들을 수물시켜 그 흔적을 깡그리 지웠다. 현재 고려툰, 신선툰을 합쳐서 흥진이라 칭하지만 수남촌사람들은 지금도 습관적으로 고성리, 신선툰, 고려툰이라고 명토를 박아서 부른다. 수남촌에는 지금도 위만주국경찰서 건물이 있다. 비가 샌다고 지붕만은 새롭게 기와를 얹었을뿐 건축양식은 여전히 남아있다.

사적으로 수남촌은 기자의 외가가 살았던 곳이다. 그래서 어려서부터 “봉꼴” (봉오동)이란 투박한 촌명을 익히고 살았고 7살무렵 지금의 도문시경제개발구가 자리잡은 곳에서 10여리를 걸어서 “봉꼴” 외가편으로 걸어가면서 어머니의 만류도 무릅쓰고 물이 줄어든 내가에서 물고를 잡던 기억이 그들먹하게 남아있다. 물고기가 얼마나 많았으면 7살짜리에게 잡힐가 생각하면 그무렵엔 이 내가에 물고기가 많았던건 사실이다. 저녁무렵 외가에서 전기불이 없어서 어둑한 석유등장불밑에서 풋옥수수와 가지를 쪄먹던 일, 쑥단으로 대충 막아 만들었던 뒤간, 그때까지 아직 어렸던 사촌이모가 부엌에서 부지깽이로 장난치면서 두덜거리던 기억, 외가 어른들이 늦은 밤중까지 둘러앉아서 두런두런 봉오동전투, 최명록 (최진동) 같은 인물들을 떠올리던 기억들을 생생하게 회생하고있어 봉오동이라면 낯선 고장도 아니다. 더우기 최진동은 기자와 동성동본으로서 어깨를 살구고 “량반의 뿌리요, 관방에서 벼슬했소” 등등 자기 선조의 업적을 은근히 들먹거리던 옛날 최명록은 우리 진산최씨가문에서 가장 큰 인물로 상징되여 후세에 널리 알려지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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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병철서기는 도문시선전부와 석현진정부의 통지를 받고 수남촌력사에 빠삭한분을 모셨다고 했다. 리서기와 여러말을 주고받고있을라니 촌사무실로 가방을 멘 40대 초반의 젊은이가 들어섰다. 리서기가 자기가 청한분이라고 소개했다. 그럴리가…반신반의했다. 여직껏 취재를 하면서 모두가 년륜이 지긋한 로인들을 대상으로 취재해봤지만 로인들을 제치고 젊은이를 소개한다니 미심쩍었다. 하지만 몇마디 대화로 지인을 만났다는 포만감이 들었다. 라철룡이라 부르고 올해로 44살인 라선생은 알뜰한 수남촌태생으로서 현재는 도문시내에서 살고있다고 했다. 봉오동전투에 투입된 반일부대의 병력과 배치는 물론 일군의 병력, 추격대장 야스가와 소좌까지 얼음우에 박밀듯 알고있었다. 게다가 독립군의 발자취를 따라서 봉오동 상류 십자구, 왕청현 대감자, 화룡현 청산리 배운평, 와룡의 천수동 어랑촌까지 답사했다니 그저 경악할뿐이다. 인간력사에 특별한 흥취가 있어서 어려서부터 고향의 연혁을 거슬러 여러모로 파고들면서 무한한 재미를 느낀다는 라선생은 고향에 대한 책을 저술하자고 그러느냐는 기자의 물음에 답을 피하고 그저 시무룩이 웃을뿐이였다. 그러면서 최진동의 무덤이 있다는 토성리언덕으로 우리를 안내했다. 몇그루의 백양나무가 서있고 벽돌공장으로 된 이곳에는 최진동의 묘자리가 있었다고 소개했고 최진동은 고성리에서 살았다고 했다. 그리고 수남촌의 취락취명에 대한 소개를 이어갔다. 수남촌(물남)으로 취명될시 현재 북쪽산기슭을 감돌아흐르는 봉오동벽계수가 마을언덕밑을 감돌아흘렀고 그 언덕에 마을이 있었고 거기에서 수남(물남)이란 부락명이 나오면서 오늘의 수남촌으로 되였다고 했다.

봉오동이란 북봉오동을 통칭하는데 수남촌으로부터 동북방향으로 뻗어간 깊은 계곡을 통털어 일컫는다. 여기에는 10여개의 자연촌락이 있었고 수백에 달하는 조선인들이 화전밭을 일구면서 살았다. 1920년 6월 7일 세인들이 다 아는 전투가 여기에서 터졌고 우리들은 이 전투를 봉오동전투 혹은 봉오동저격전이라고도 부르고있다. 봉오동전투에 대한 소개를 이미 지상에 반복적으로 나갔다는 사안을 감안해서 여기에서 상세한 소개를 피한다.

단 조선인반일부대가 일제와 맞서 처음으로 치른 최초의 전투였다 점 그리고 최진동장군의 군무도독부군, 홍범도장군의 대한독립군, 안무장군의 대한국민회가 련합하여 중국연변땅에서 처음으로 치른 저격전이였다는 점을 부각하고싶을뿐이다.

수남촌의 력사는 최진동이란 인물의 력사를 배제하면 완전한 력사가 될수 없다. 1910년대초부터 최진동은 봉오골 전체를(수남) 매입하고 수남촌을 중심으로 석현, 대감자, 곡수, 도문, 남양툰 등지의 외각 땅도 매입하여 완전한 무력항쟁의 근거지기초를 닦아 놓았다. 라철룡의 말에 의하면 최진동이 봉오골로 들어오기전 이 일대에는 조선 함흥에서 온 원씨네, 강씨네, 김씨네가 제일 먼저 터를 잡고 화전밭을 일구었다고 했다. 어려서부터 옛말듣기와 력사이야기에 심취되였던 라철룡은 밤마다 마을로인들을 찾아가서 수남촌의 과거지사를 들었다고 했고 그런 이야기를 들으면서 장차 사람들이 살아가는 이야기를 책으로 쓰고싶은 학자가 되는 꿈도 키웠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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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통계에 따르면 수남촌은 403호, 총인구가 1205명이라 했다 하지만 불과 몇년사이에 호수가 207호로 감소되고 인구가 654명으로 무려 절반으로 줄어드는 양상을 보였다. 연변 여타의 농촌처럼 수남촌에도 산업화가 구가하는 긍정적인 혜택과 “악재”를 동시에 맞았다. 농업로력의 “로령화,” 시골인구의 “공성화”…이에 따르는 피페화를 효과적으로 차단할 방책이 유효하게 발효하지 못한 상황이다. 하지만 농촌을 지켜선 사람들에게는 시대적인 “과정”이거나 숙명적으로 대할수 있는 자세가 필요하다. 농촌인구의 절감은 반드시 피페화로만 볼수도 없다. 오히려 토지의 집중과 규모경영에서 불필요한 마찰을 피할수 있고 국가적으로 권장하는 규모영농을 실현할수 있는 지름길이기도 하다. 수남촌에서는 도문시경제개발구와 이웃으로 나란히 지내는 우점을 살려 농민살림집구역을 건설할 구상도 하고있고 촌기초시설도 잘 다지고있는 상황이다.

수남촌에는 지금도 민족의 혼, 항쟁의 기가 살아있고 그 혼과 기를 이어받은 후세들이 아름다운 삶을 영위해가고있다. 그래서 오늘의 수남 촌과 래일의 수남촌은 항시 “여기 려명은 고요” 할것이다. 수남촌은 창성 할것이다.

글/사진 연변일보 최국철기자/2008년 07월 0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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