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균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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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진언수상록 100) 현대의 풍경 댓글:  조회:242  추천:0  2018-08-10
                                             현대의 풍경                                                      진 언       사람은 물질을 창조하지 못하지만 물질가치는 창조할수 있다. 이런 가치창조는 지극히 인간적인것이다. 그런데 돈이 말하는 시대, 가공할만한 가지가지 풍경들이 사 람들을 곤혹에 빠지게 한다. 물은 고기를 위해 존재하지 않으며 고기도 물을 위해 사는것은 아니듯 돈은 사람들의 경제활동의 편리를 위해 만들어진건데 종당에 사람이 돈의 노예로 되고 말았으니 자업자득치고 너무 비참한 결과라 할것이다.     인도의 야무나공원에 마하트마 간디의 추모공원에 간디가 말한 일곱가지 악덕 (철학이 없는 정치, 도덕이 없는 경제, 로동이 없는 재부, 인격이 없는 교육, 인간성 이 없는 과학, 륜리가 없는 쾌락, 헌신성이 없는 종교.)이 적혀있는데 무릇 고관이든, 억만갑부이든, 밀차를 밀며 폐품을 줏는 사람이든, 농사짓는 사람이든 누구에게나 심사숙고를 자아내는 경세지언이라 할것이다.        그러나 돈이 “만능”인 시대에 다른 말은 다 허드레 잡소리로 되여있다. 돈만 많으면 잘사는 집, 돈이 없으면 못사는 집으로 판정된다. “잘 산다”는 말을 엄격한 의미에서 따지면 부유한집,부자집, 돈많은 사람 등으로 표현해야 맞지만 누가 그런걸 일일이 캘것인가? 오로지 돈만 많으면 되는 판인데,     일찍 주작인은 한남자의 합격, 불합격을 판정하려면 녀자와 불교에 대한 태도에서 보아야 한다고 하였는데 이 기준은 당시 중국남자들의 실정에서 판정한것이지만 현대시점에서 남녀를 불문하고 진정한 인격력량은 돈과 권력, 감각적행동에서 가늠되여야 한다고 말할수 있겠다.     남자의 능력과 인격력량은 지갑에서 나오고 과시욕도 돈다발에서 체현되는바 명함장은 자가용의 열쇠로 설명이 된다나, 젊은남자들의 인생자세가 그러니 젊은녀자 들도 현숙함대신 돈에 대한 추구가 공중전을 하며 자신들의 실제보다 턱없이 높고 류행보다도 더 빨리 회전하고 있는 기관을 창출하고있다.     남녀간의 사랑도 원초적인것과는 일만팔천리로 동떨어지게 된 오늘, 고급식당에 가서 와인을 따르고 하루 몇번씩 옷을 갈아입고 외제차를 굴리여 호화별장에 가서 침대유희로 절정을 이루고 그것을 선망하여 앞뒤를 가리지 않게 된 현대인부자들이다.  돈지갑이 엷은 남자는 3등공민, 무능력자로 점찍히는것은 이 시대의 아이디어인가?     돈이 말하는 시대, 의리도, 도덕도, 량심도, 우정도, 사랑도, 혈육의 정도 일종 부호로 되였다. 눈에 보이는것은 돈으로 포장된 자기 리익뿐이다. 공공의 리익은 공익이라 하고 국가리익을 국익이라 말하면 어페가 없는데 개인의 리익은 “개익”이라 하면 되우 웃기는 표현일게다. 그런들 어떠랴, 리익만 챙길수 있다면 만사대길이다.     맞다. 그래서 중국에는 가난은 비웃을수 있어도 매음하는것을 비웃을수 없다는 관념까지 굳어진것이다. 인간의 관념이 이렇다보니 돈과 권력이 야합하기에 이르렀다. 오사모는 누구의 머리에나 쉽게 씌워지는것이 아니다. 두 눈을 한껏 부릅뜬 권력의 눈은 밑창을 알수 없는 블랙홀같이 사람들을 빨아들인다. 그도 그럴것이, 권력한자락 쥐고있으면 호풍환우할수 있고 주지육림에서 자맥질할수 있으니 말이다.     이런 인문환경에서 돈을 물처럼 퍼쓰며 산해진미를 먹겠지만 결국 분변으로 배출되고 하루 몇번씩 옷을 갈아입어봐야 외형의 변화일뿐이지 환골탈태는 못된다고, 쉽고 빠르게 얻은 성취는 오래 지속되는 경우가 거의 없다고, 자신의 행동이 만들어 낸 가치로 자신을 판정해야 마음이 튼실하다고 설교한다면 전혀 웃기지도 않는 머저리같은 롱담이 되여진 이 시대이다.     남보다 옷이 값싼것이라 느껴지면 창피하고 남들이 자가용을 굴릴 때 나만 없으면 창피하고 남들이 돈쓰는만큼 못쓸 때 창피하다 생각하는 리유는 사람들 서로에게 가하는 가진자와 없는자의 심리적차별이 있기때문이다. 서로 극심하게 경쟁하면서 뭐 하나라도 뒤지면 차별시하기때문에 마음들에 안정이 깃들수 없게 된것이다.     천박한자는 돈지갑이 불룩하면 오히려 경박해진다. 마치 가득 불궈놓은 고무풍선처럼 둥둥 정처없이 날아간다. 풍선이 잘 뜨는것은 속에 아무것도 없기때문이다. 외국에 가서 명품, 사치품을 싹쓸이 하며 호기를 피워봤대야 자기 감각의 우물안에 팽창일뿐이다. 우물은 넘쳐나는 법이 없고 강물을 범하는 법이 없을터,     모든 판단착오, 시행착오는 궁극적으로 착각에서 일어난다. 인생의 초행길에서 대번에 꿀떡을 얻은것은 행운이라할세 처음부터 달디단것만 맛보며 살다가 난데없이 들이닥치는 인생고를 맛볼때 그 쓴맛을 감당해낼수 있을것인가? 과거와 현재는 미래를 위해서 존재한다. 성공은 마침표를 한송이 꽃으로 변화시키고 실패는 쓰디쓴 약 으로 변화시킨다. 고진감래라 할가, 흥진비래라 할가?     허세는 더 요란한 허세를 낳을뿐이다. 허세에서 진정이 나오기를 바라는것은 너구리가 사향노루가 되기를 바라는것과 같다. 허세가 인격력량이 아니지만 많은 사 람들이 그렇게 착각하고있다. 당신은 못보는가? 공방형의 금사슬에 목을 매달았던 탐욕자들이 일조일석에 원점으로 돌아온것이 아니라 일패도지하는것을, 만악의 근원이라는 돈이 내린 결론이 자기를 너무 따르면 그렇고 그렇다는것인가?     그러나 세상에 절대경은 없다. 인촌에서 화복이 뒤바뀌기는 한순간이다. 예수가 칼을 쓰는자는 칼로 망한다고 했듯이 돈에 목숨을 걸었던 사람들은 끝끝내 그 돈으로 하여 잘나가던 신세를 망치고만다. 작금에 추풍락엽처럼 락마한 크고작은 락마관들이 돈베개를 베고 돈타령을 흥얼거리다가 미끼통에 지렁이 신세가 되지 않는가?     물론 돈만 바라본다는 관념의 본의는 절대적으로 나쁜것이 아니다. 국가경제가 증장하여 백성들의 행복하게 살기를 원하는것은 인지상정이니 사람마다 돈을 바라지 않을수 없는것이다. “일체는 돈을 향하여”가 되다보니 보이는것, 들리는것이 돈, 돈이 될수밖에 없고 돈이 제일 발언권이 있는 시대가 된것은 당연지사인것이다.    그러나 제중태를 채우기 위하여, 소수인의 리익을 위해서 눈이 뒤집혀 국계민생도 거꾸로 보인다면 결국 비극은 엮어질것이다. 아니, 비극은 이제 고조에 달했다. 환언한다면 돈을 바라본다는 관념이 리기의 대명사가 되였기에 결국 사단이 일어날수 밖에 없다. 문명개화한 인간이 마침내 돈-공방형의 노예가 된것이다. 이는 희사인가? 비극인가? 돈많은 자들에겐 너털웃음이 나오는 희극일것이요 돈을 갖지 못한  한한 사람들에겐 통곡해도 시원치 않은 사회비극이 되였다.     가난하여 무시당하는 리유는 “못배우고 못났기…”때문이라는 사람들이 많다. 강자, 부자들이 돈나오는 구멍은 다 차지하다보니 아무리 등골이 휘게 일해도 가난은 가난대로 세습되는 현실, 열심히 농사지어도 가난모자를 벗어던지지 못했던 농민들에게 가난이 운명으로 고착되였다. 아무리 아글타글 일해도 부자가 되기는커녕 가난을 면치못하는 사람들의 한숨소리가 높아지고 “못나고” 못배웠기때문에 기시당하고 천대받으며 살아야 한다며 체념하고 사는 운명론자들의 절망으로 넘치는 현실…     “누구나 열심히 분투하면 부자도 될수 있고 출세할수 있다”는 말은 실증된 진리가 못된다. 가진자와 없는자의 량극분화가 극에 이른 세상에 기회균등이니 평등한 사회건설이니 하는 말이 가당하기나 한가? “족쇄”가 풀린 금전만능주의는 “탐욕” 이 좋다는 슬로건아래 사회불평등과 빈부격차를 가속화하는 악과를 무르익히고있다. 이것이 괄목할만한 현대의 진풍경이다.                                                                    2015년 7월 18일
1    ((진언수상록 98) 약자영탄곡 댓글:  조회:166  추천:0  2018-08-10
                                                                  약자 영탄곡                                                                       진 언       강약은 절대개념이 아니다. 종래로 약자에 대한 정의가 없는바 “약” 은 근근히 일종 비교급일뿐, 나보다 사회지위가 낮고 나보다 못사는 사람은 상대적으로 “약자” 이다. 쉽게 말하면 나의 눈에 강대하게 보이는 요소의 반면이 곧 “약”이다. 조물주가 억조창생을 내실 때 강약의 본성까지 금그어 주었다고 할지라도 “약자”에게 잘못이 없고 사회가 불공평한 탓이라는 말은 약자들을 각성시키는 의의를 띠고있다.     지금은 온갖 매체에서 보이고 들리느니 잔인한 가해와 피터지는 피학대에 대한 뉴스인데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강자와 약자로 나뉘여 폭력을 행사하는 인간비극이 비일비재인게다. 가정폭력, 교내폭력, 군내폭력, 국제적 비피린 폭력과 죽음…더구나 약육강식의 인생현장에서 약자였던 자가 제보다 더 약한 사람을 찾아 공격하는것으로 “봉창”을 하는 악순환이 빚어진 참담한 인간세상이다.        일컬어 잘난자, 똑똑한자, 부자, 지자, 권세자를 강자라 하고 못난이, 빈자, 우자, 무식자, 권세없는자, 그리고 게으른자, 의지가 박약한자를 약자라 할것이로되 그게 운명적이라면 누가 시비할수 있으랴? 약자는 선량하다는 전통관념이 약자들의 자아위 안이 되였던가? 약자가 선량하지 않으면 어쩔테란 말인가?     자고로 주먹은 가깝고 법은 멀다고 했다. 힘센놈이 왕질하던 아이적에는 단주먹에 상대를 코피나게 한 놈이 완력이 센 놈이었다. 주먹심아래에서는 아무리 머리좋고 공부를 잘해도 가나오나 뛸데없이 침먹은 지네가 되였다. 사실 어른들 사이에 분쟁이 생기면 일단 믿는것이 주먹이다.주먹이 약하면 제집에 들어온 강도에게 두눈을 펀히 뜨고도 란타질을 당하며 굴욕을 삼켜야 한다.     가령 서로를 배려하는 마음이 우선시되는 인간사회라면 강자와 약자로 극명하게 갈리지 않을것이고 강자는 강자대로 으시대고 약자는 약자대로 기시, 릉멸, 불안이라는 구름아래서 살지 않아도 되였으련만 정글법칙아래 운행되는 인간사회도 약육강식이 상식이 되고 강자독식이 합리화되였다. 약자의 눈물을 씻어줄 사람이 이 세상에 없고 약자의 심병을 치유할 약이 이 세상에 없다.     약육강식은 야만시대의 잔습으로서 동물에게 한한것이라고 할수 있으나 우승렬패는 분명히 합리화되고있는 현실이다. 그것이 자연의 법칙이나 또는 인생의 원리냐? 아니냐? 하는것은 별개로 하되 이는 력사가 증명하는바이다. 약자가 원한다고 세상이 원하는 데로 흘러가지 않는다. 그런 력사란 기록된적이 없다. 강자가 힘으로 지배할 때 약자는 강자에게 무조건 굴종해야만 생존이 가능하였다.“인류에게 하나밖에 없는 진정한 원칙은 정의이며 약자에 대한 정의는 보호와 친절이다.”라는 명언이 있더라만 자유와 평등은 공백수표처럼 공리공담이다.     진정한 강자는 약자의 아픔을 리해하고 어루만져주는 사람이여야 하는데 우수한 자는 렬등한자를 무시하고 박대하며 부자는 빈자를 향하여 “왜 그리 가난하냐 ?”고, 강자는 약자에게“그렇게 약해 빠질것이 무엇이냐 ?”라고, 학자는 무식한 자를 대놓 고 “너무 무식하지 않냐 ?”하고, 건강한 자는 병자를 대하여“어찌 그리 약골로 태여났냐?”라고 빈정거려도 재하자는 유구무언(在下者有口無言)이라, 강자들의 시각에서 약자의 천성이란 무엇일가? 역경속에서 인생고를 읽고 새로운 삶의 계기를 발견하려는 자는 생활의 강자로 보고 불행과 고통속에서 마냥 위축되여 보이는것도 안보려고 눈을 감는 자를 현실도피자라 한다. 약자가 역경에 위축되고 강자앞에서 기가죽고 무력해지는것이 천성이라면 불행한 운명이다. 그래서 약자는 자기보다 강한 자들의 생각을 빌려 생각하고 그들의 입을 빌려 말할수밖에 없다.     선량함은 약자의 덕성이 될수는 있어도 이 험난한 인생길에 통행증일수는 없다. 약자라해서 무조건 동정심을 쏟을 필요가 없다는 사실도 슬픈 조우이다. 약자들이 자신이 대면하고 있는 세상이나 상대방을 아주 작은 크기로 축소시켜놓고 그 앞에서 제 크기의“충분함”에 자족한다면 그것은 확실히 그들의 저렬한 근성이다.     많은 “약자”들은 종종 자신을 긍정하는 강자들과 혼동하며 그런 자신을 스스로 강자라고 착각한다면 구제불능이다. 이들이 알고 있다고 믿으며 보는 세계란 자기가 사는 작은 동네에 지나지 않는다. 능력 있는 난쟁이란 알수 없는 어떤것을 아주 익숙한 자기 동네의 별것 아닌 소품으로 만들어버리는 인물들이다.     그들은 운명이 걸린 대결조차 전쟁놀이로 만드는 골목대장같은 자들이다. 이들과 만날 때 세상은 불행해진다. 저도 모르게 그들의 크기만큼이나 작아지기때문이다. 난쟁이의 어이없는 자신감과 갖잖은 교만은 꼴불견이다. 실속없이 환상적인 “강자” 는 상대방의 강점과 대결하려하면 유부가 되기십상이다. 약자들은 거개 자기의 유약함을 증오심으로 전환시켜 다른 약자에게 성풀이 한다. 이것은 약자들의 렬질품성이다.     약자들은 위축된 마음으로 세상이나 상대자의 크기를 과대평가하여 그와 마주선 자신의 크기를 지나치게 축소시키는 내면적소인이라면 난쟁이는 근거없는 자신감으로 세상이나 상대방의 크기를 축소시켜 그와 비교되는 자신의 크기의 충분함을 긍정하는 내면적“거인”이다. 전자가 세상을 착각함으로써 자신의 능력을 보지 못한다면 후자 는 자신의 무능력을 잊기 위해 세상을 전도시킨다.     약자에게는 강자들 속에서 살아남는 수단인 유연성이 다행일지 모른다. 강자가 약자들앞에서 개잡은 포수처럼 으시대는 심리가 생기는것은 이때문일것이다. 누구를 압제하지도 누구에게 굴욕당하지도 않을 때 사회에 조화가 영주한다는것을 진실로 아는자는 오직 약자들속에 있지만 그런 속절없는 하소연에 누가 귀를 기울일가?     선천적으로 구제불능의 약자는 자기보다 강한 자들에게서도 약점이나 단점을 찾아 자위한다. 강자는 어디서나 공격성을 앞세우지만 약자는 어디서나 비난거리를 찾는다. 강자에게 강하고 약자에게 약한 자가 진정한 강자이건만 그런 강자는 가물에 콩싹처럼 희소하다. 이는 약자가 강자와 공생해야 하는 불편한 진실로 되였다.     누군가 나에게 가장 통탄스러운 일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약세군체의 숙명이요 인생에서 가장 큰 비애가 뭐냐고 자문하면 약자의 비애이라고 대답할것이다. 아마도 태생적으로 육체적강자가 못되고 후천적으로 지적인 강자로도 못된 자신이기에 처처에서 새여나 오는 약자의 “영탄곡”에 비애를 느끼며 공감하게 되고 동조하게 되는지 모른다. 그리고 묻지 않더라도 내가 절치부심 미워하는 무리들은 약자들을 기탄없이 짓밟으며 가장 기본적인 인권을 유린해 온 “강자”들이라고 말할것이다.     약자가 자기를 위안할수 있는 유일한 론거는 “세상에 상승장군이 없다는 사실이다. 말하자면 나뽈레옹도 워털루에서 패전하지 않았나?”하는것이다. 사실이라도 약자에게 가장 어울리지 않는 단어는 “용서, 관용” 이다. 용서와 관용은 강자들의 특허이다. 약자에게는 용서받을 자격은 있되 누구를 용서하고 말고 할 권리란 없다. 힘이 약하면 인애로 감화시키라고 하지만 전혀 통하지 않는 세상이다.     자고로 약자의 평화적“공생”의 구호가 그들 자신의 권익을 보장해 준적이 없다. 힘의 론리가 종횡무진하는 세상에서 무조건 강해지고 볼일이다. 강력하다는것과 선량함은 상충되지 않는다. 선량함과 나약함이 결코 등호로 되지 말아야 한다. 오직 자강의 길밖에 없다. 정글법칙이외엔 모두 공리공담이다.      “약자여,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이 호소가 약자영탄곡의 미성이다.                                  2015. 10. 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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