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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수

검색날짜 : 2017/01/1

전체 [ 4 ]

4    1월은 희망의 달 댓글:  조회:5329  추천:6  2017-01-01
1월은 희망의 달                           김희수   희망찬 2017년 새해가 밝았다. 새해를 맞을 때마다 우리는 “희망찬”이란 단어를 새해앞에 붙인다. 누구나 새해를 맞으면 괜히 설레이고 황금빛 희망에 부풀게 된다. 그만큼 새해는 기분이 좋고 무엇이나 다시 시작할수 있다는 희망을 품고 더 큰 도약을 위해 더 큰 계획을 세우고 더 큰 목표를 향해 더욱 신나게 달려보고싶을것이다.   지난해로 말하면 누구에게는 아프고 힘들었던 한해였을것이고 또 누구에게는 뜻깊고 보람찬 한해였을것이다. 누구에게는 슬프고 괴로웠던 한해였을것이고 또 누구에게는 즐겁고 행복한 한해였을것이다. 누구에게는 허송세월한 한해였을것이고 또 누구에게는 열심히 달려온 한해였을것이다. 그러나 지난해가 어떠한 한해였던지를 막론하고 누구나 새해에는 새로운 희망을 가지고 새 출발을 하려고 할것이다.   지난해에 이루지 못했던 아쉬움이 남았다면 새해에는 꼭 이루겠다는 희망을 가지게 될것이고 지난해에 불쾌했거나 불행했던 일로 좌절했거나 절망했다면 새해에는 기쁜일과 좋은 일이 생길것이라는 희망을 가지게 될것이다. 투병생활을 했다면 몸이 건강하기를 바랄것이고 사업에서 실패했다면 일이 뜻대로 되였으면 하는 희망을 품게 될것이다.   그래서 새해의 첫달인 1월을 새 출발을 시작하는 희망의 달이라고 할수 있다. 1월은 비록 소한, 대한의 맵짠 추위가 잠시 맹위를 떨치기도 하지만 따뜻한 봄이 시작된다는 립춘이 곧 오게 되고 대동강이 풀린다는 우수, 경칩이 눈앞에 있기에 봄이 멀지 않다는 희망을 가지게 되는 명실상부한 희망의 달이다.   아이들은 나이를 한살 더 먹었다고 자랑하고 로쳐녀, 로총각, 고령의 로인들은 나이를 한살 더 먹었다고 탄식도 하겠지만 누구나 모두 새로운 희망에 가슴이 더 벅차오를것이다. 나이 한살을 더 먹는다는것은 그만큼 더 성숙된다는 뜻이다. 그래서 세상을 살아가는 지혜를 터득하고 새해에는 역경속에서도 희망을 가지고 지혜롭게 위기를 벗어나 성공하는 사람으로 성장할것이다.   지난해에는 나에게도 안 좋은 일이 있었다. 어머니가 갑자기 병으로 쓰러진 뒤 누워서 일어나지 못하게 되였다. 새해에는 어머니의 건강이 회복되고 좋은 일이 많이 생기는 한해가 되였으면 하는 희망을 품고 희망의 달 1월부터 새롭게 시작해 보련다.   거지도 재벌이 되는 이 세상에서 새로운 한해에는 돈에 울던 백수는 취직을 하고 사랑에 속던 총각은 장가를 가고 글 읽던 학생은 대학 가고 병마에 시달리던 환자는 완치가 되고 배고파 우는 저 나라 아이들은 배불리 먹고 음식 가지고 장난하는 장사군은 뒈지고 가짜약 만드는 놈은 감옥에 가고 부지런히 일하는 사람은 부자가 되기를 기원한다.   새해 2017년은 이 세상에 사는 누구나 다 몸과 마음이 건강하고 돈을 많이 버는 한해가 되기를 기원한다. 그리고 누구나 행복하고 즐겁고 화목하고 만복이 깃드는 한해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3    모택동: 끌고 나가 총살하시오! 댓글:  조회:8052  추천:2  2017-01-01
모택동: 끌고 나가 총살하시오!     1950년 3월 4일에 북경을 떠난지 88일이 되는 모택동은 중국당정대표단을 거느리고 중남해로 돌아왔다. 이틑날에 리은교는 향산에 가서 안해 한계형을 데려왔다. 당시 20대초반인 리은교는 무당파(武当派)의 속가제자이며 모택동의 경호원이였다. 모택동은 특별히 료리사에게 몇가지 료리를 더 부탁해서 한계형을 대접했다.   식사후 모택동은 한계형에게 향산의 일부 정황에 대해 상세하게 물어보았다. 한계형은 무의식중에 한 중앙령도간부가 기관에서 향산의 산비탈에 건축공사를 하는 기회를 타서 자신의 2층집도 지었는데 입주하지 않았을뿐이라는 이야기를 했다. 그 말을 들은 모택동은 삽시간에 얼굴빛이 변했다. 한계형은 더 말하지 못했다.   이틑날 오후에 리은교는 국향서옥에서 향산에 자택을 지었다는 그 령도간부를 만났다. 리은교는 그를 데리고 모택동의 있는 곳으로 갔다. 모택동의 응접실에는 주은래와 섭영진이 있었다. 모택동은 두손으로 허리를 집고 서서 그 사람의 아래우를 훑어보며 마음속의 화를 억누를수 없어 큰소리로 고함쳤다.   “당신의 위엄이 여간 아니군. 내 보기엔 당신은 과거의 왕후장상과 비슷하군!” 그 령도간부는 놀라서 식은땀을 흘렸다. 그는 감히 머리를 머리를 들어 모택동을 보지도 못했다.   모택동은 뒤짐을 지고 큰 걸음으로 방안을 왔다갔다 하더니 갑자기 그 령도간부를 향해 손가락질 하며 물었다.   “당신이 이렇게 하는게 공산당간부다운 일이요? 백성들이 뒤에서 우리를 뭐라고 욕하겠소? 내가 일찍 승리한후 리자성을 닮지 말라고 말하지 않았소? 당신은 왜서 바보인척 하는거요?”   도탄에 빠진 백성들을 구하겠다고 일떠서 명나라황제를 뒤엎은 리자성은 북경을 점령하자 승리에 도취되여 부화방탕한 생활을 하면서 도리여 백성들의 고혈을 빨아먹었다. 모택동은 이를 경계하라고 여러번이나 말했었다. 당시는 국민당을 몰아내고  갓 중화인민공화국을 세운지 반년도 안되는 때였다.   겁에 질린 그 사람은 머리를 푹 숙이고 가슴이 한줌만 해서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주석님, 제…제가 잘…잘못했습니다…”   “당신이 잘못했다구? 집을 지을때는 그것이 잘못이란걸 몰랐소? 내 보기엔 당신은 알고도 범한것 같소. 수중에 권력이 있다구 마음대로 휘들러서야 되겠소?” 모택동은 담배를 입에 물고 불을 붙이느라고 잠시 말을 끊었다. 주은래와 섭영진은 서로 쳐다보며 누구도 말을 못했다. 갑자기 모택동이 두모금 빨고 힘껏 비벼끄더니 손을 흔들며 엄하게 소리쳤다. “끌고 나가 총살하시오!”   그 말에 리은교는 깜짝 놀랐고 주은래와 섭영진도 놀라서 쏘파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 령도간부는 바지에 오줌을 쏘며 주저앉았다. 모택동은 리은교를 보고 명령했다. “이 자를 끌고 나가시오! 끌고 나가 총살하시오!”   리은교는 주은래와 섭영진의 눈치를 살폈다. 주은래와 섭영진은 사태가 이 지경까지 되자 부득불 앞에 나서서 한마디씩 했다. “주석님, 먼저 화를 누르십시오!” “이 문제는 먼저 조사를 똑똑히 한후 엄하게 처리해야 합니다!” 모택동은 계속 화를 내며 말했다.   “우리 공산당원은 인민을 위해 복무해야지 향수를 누리려고 여기에 오지 않았습니다. 탐오부패는 더구나 허락할수 없습니다! 이렇게 향수부터 누리려고 하면 리자성이 될것입니다!”   주은래와 섭영진은 그 령도간부를 꼭 엄하게 처리하겠다고 말했다. 그제야 화가 좀 가라앉은 모택동은 섭영진에게 그 령도간부에 대한 처리를 맡겼다. 현재 습근평이 부패척결을 추진하고있는 이때에 이 이야기는 매우 좋은 교재로 되고있다.           
2    고강 림표가 항미원조를 반대했는가? 댓글:  조회:4310  추천:2  2017-01-01
고강 림표가 항미원조를 반대했는가?     1954년에 중국공산당 제7기4중전회에서 고강, 요수석사건에 대해 결정을 내린후 고강이 항미원조에 출병할것을 반대했다는 설법이 있었다. 1971년의 “9.13”사건후에도 또 림표가 항미원조출병을 반대했다는 설법이 있었다. 20세기 90년대말까지 항미원조전쟁에 대해 언급한 개별적인 저작에서 이런 설법이 있었다. 그럼 고강과 림표가 정말로 항미원조출병을 반대했는가?   고강과 림표가 항미원조출병을 반대했다는 설법은 근거가 부족하다. 1950년 6월 하순에 미국이 무장으로 조선내전을 간섭하고 대만해협을 침입하자 중공중앙에서는 항미원조에 출병하고 대만해방을 뒤로 미루기로 결정했다. 이 결정은 당시 각 중앙국의 주요지도자들중 고강이 제일 먼저 알고있는 사람중의 하나였다.   1950년 7월 7일에 중앙군위에서 동북변방군을 조직할데 대한 문제를 연구했고 그 이듵날에 변방군에 편입된 부대는 즉시 광주, 중원 등지로부터 동북으로 집중되였다. 이미 확정된 변방군 사령원 겸 정치위원 속유, 부사령원 소경광, 부정치위원 소화는 병으로 잠시 와서 직무를 맡을수 없었다. 1950년 7월 22일에 주은래와 섭영진은 련명으로 모택동에게 “변방군을 먼저 동북군구에 귀속시켜 고강사령원 겸 정치위원의 지휘를 받게 하는게 어떻겠습니까”하고 건의했다. 모택동은 그 건의를 비준했다.   동북변방군의 공급과 참전에 수요되는 물자준비, 장비의 보충과 수리, 운수, 전방동원 등 참전준비는 모두 동북군구 사령원 겸 정치위원인 고강의 직접적인 지도하에서 진행되였다.   1950년 8월중순후에 조선전쟁은 작아대치국면이 나타났다. 그해 8월 31일에 고강은 모택동에게 조선전쟁상황과 변방군준비사업에 대한 몇가지 구체적인 문제에 대해 보고했다.   “현재 아군의 어떤 간부들중에는 일본군이나 국민당군과 싸울 때의 안광으로 오늘의 적을 보는 경향이 있습니다. 적들의 전술, 공군, 대포 등 특점에 대해 잘 알지 못하면서 말입니다. 또 일부 간부들은 미국공군에 대해 속수무책인데 전문가들을 조직하여 적의 작전특점을 연구할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그래야만이 작전시 적을 소멸할 파악이 있게 됩니다.”   모택동은 1950년 9월 3일에 고강에게 “반드시 현대전쟁의 관점으로 부대를 교육해야 합니다. 절대 적을 경시해서는 안됩니다. 당신의 의견은 정확합니다. 그 문제에 대해 연구해봅시다”라는 내용의 답장을 보냈다. 이는 고강이 동북변방군의 작전준비사업에 대해 적극적이고 주동적으로 나섰다는것을 말해준다.   주은래와 팽덕회가 그후에 했던 보고에서도 볼수 있다싶이 중공중앙정치국에서 항미원조출병에 대해 토론할 때 확실히 부동한 의견이 있었다는것을 알수 있다. 양상곤신변에서 사업했던 일군의 말에 의하면 양상곤은 “당시 출병에 대해 찬성하는 사람은 소수였습니다. 출병을 하지 말자거나 잠시 출병을 하지 말자는 의견이 다수였습니다”라고 말한적이 있었다. 중앙정치국회의에서 결정을 내리기전에 고강이 출병하는데 찬성하지 않았다고 해도 그가 혼자 아니였을것이다. 찬성했건 반대했건 모두 당내의 민주체현으로 정상적인것이였다. 더구나 어떤 의견이든 모두 당과 국가의 리익을 책임지기 위해 고려한것이였다. 때문에 누가 찬성하지 않는다는 의견을 내놓았다고 해서 항미원조출병을 반대했다고 하는것은 공정하지 못한것이다. 중공중앙정치국에서 중국인민지원군을 조직하여 “항미원조, 보가위국”의 결정을 내린후 출병을 찬성하는 고강의 태도는 견결했고 매우 적극적이였다.   1950년 10월 8일에 모택동이 중국인민혁명군사위원회 주석의 명의로 서명한 중국인민지원군을 조직할데 관한 명령중의 규정에는 “중국인민지원군은 동북행정구를 총후방기지로 한다. 총후방기지는 모든 후방사업과 조선을 지원할데 대한 사무를 담당한다. 동북군구 사령원 겸 정치위원 고강동지가 총부방사업의 배치를 지휘하고 책임진다”는 내용이 있다. 그날 고강은 방금 지원군 사령원 겸 정치위원직을 맡은 팽덕회와 함께 심양으로 날아갔다. 1950년 10월 9일에 고강은 팽덕회와 함께 지원군 군이상간부회의를 열고 출국작전에 대해 상의했다.   1950년 10월 8일에 주은래는 모택동과 중공중앙의 위탁을 받고 림표더러 쏘련에 가서 쓰딸린 등 쏘련지도자들에게 중공중앙정치국회의에서 출병을 결정한 정황을 통보하고 쏘련측에서 무기장비와 공중엄호를 제공해줄것을 요구하라고 부탁했다. 쓰딸린은 쏘련공군이 준비가 되지 않았다면서 3개월내에는 중국지원군작전을 엄호할수 없다고 대답했다.   이 소식이 북경에 전해지자 모택동은 1950년 10월 13일에 다시 중공중앙정치국위원회의를 소집했다. 그번 회의에서 고강은 항미원조에 출병하는 대해 태도가 매우 견결했다. 고강과 팽덕회는 쏘련에서 공군이 출동하지 못한다고 해도 우리는 반드시 출병해야 한다고 표시했다. 모택동은 그날 주은래에게 보내는 전보에서 “고강, 팽덕회동지 그리고 기타 정치국동지들과 상의한 결과 우리 군은 반드시 항미원조에 출병해야 한다고 일치하게 인정했습니다”하고 썼다.   1950년 10월 14일 3시에 모택동은 다시 주은래에게 전보를 보내여 “팽덕회와 고강동지는 모두 괴뢰군과의 싸우면 승산이 있다고 인정했습니다. 그들과 나는 모두 참전이 꼭 유리하다고 인정했습니다.   첫째, 지원군이 출동한후 팽덕회는 동북총후방기지의 사업에 만족을 표시했다. 팽덕회는 항미원조전쟁기간에 “지원군이 전선에서 승리한데는 두 사람의 공로가 크기에 응당 그들에게 감사를 드려야 합니다. 그중 한사람은 고강이고 다른 한사람은 홍학지(지원군 부사령원 겸 지원군후방근무사령부 사령원직을 맡았음)입니다.   둘째, 중공중앙정치국에서 중국인민지원군을 조직하여 항미원조, 보가위국의 결책을 내온후 고강의 태도와 행동을 보면 고강이 항미원조에 대해 태도가 견결했고 적극적이였다는것을 알수 있다.   셋째, 1951년 11월에 고강과 림표는 동시에 중앙군위 부주석으로 임명되였다. 림표가 항미원조출병을 반대했다는 설법은 주요하게 그가 병을 핑계로 지원군통수직을 맡지 않겠다고 한것과 관계된다. 그리고 또 중공중앙정치국에서 항미원조출병을 결정한후에도 림표가 의연히 출병을 반대했다는것이다.   모택동은 확실히 림표에게 지원군통수직을 맡기려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 1950년 8월 31일에 고강은 변병군이 출동후 해당문제 대해 모택동에게 보낸 편지중에는 “부대를 지휘하는 통수와 전문인재가 빨리 동북에 올것을 건의합니다. 그래야 충분히 준비할수 있습니다”라는 내용이 있었다. 모택동은 1950년 9월 3일에 고강에게 회답편지를 보냈다.   “림표와 속유는 병이 있고 또 두 사람은 이 기간에 해야 할 사업이 있어서 잠시 나가지 못할것입니다. 아마 몇개월후에야 가능할것 같습니다.”   모택동의 이 편지에서 림표는 확실히 병이 있었다는것을 알수 있다. 때문에 한달후에 중국인민지원군을 조직하여 항미원조에 출병할 때 림표는 지원군 통수를 맡을수 없었던것이다. 중공중앙의 결정에 의해 림표는 쏘련에 가서 치료를 받았다.   당시 림표는 중공중앙정치국 위원이 아니였다. 양상곤의 일기와 그번 회의에 참가했던 박일파에 따르면 림표는 1950년 10월 4일 오후와 5일 오후에 중공중앙정치국확대회의에 참가했다.   림표가 회의에서 무슨 의견을 발표했던 항미원조출병을 반대했다고 말할수 없다. 중공중앙정치국에서 항미원조출병을 결정한후에도 림표가 항미원조출병을 반대했다는 설법은 증거가 없어 믿음성이 없다. 그러나 1951년 11월 5일에 중앙인민정부위원회 제13차회의에서 고강과 림표를 동시에 중앙인민정부 인민혁명군사위원회 부주석으로 보충선거했다.   1951년말과 1952년초에 림표가 3개월간 중앙군사위원회의 일상사업을 주최했다. 항미원조는 당시 중국공산당과 중국인민에게 첫째가는 대사였기에 만약 고강과 림표가 항미원조출병을 반대했다면 모택동과 중공중앙에서 그들을 그토록 신임하지 않았을것이고 항미원조가 시작되여 1년이 지난후 그들을 중앙군위 부주석으로 보충선거하지 않았을것이다.      
1    죽음도 갈라놓지 못한 한무제와 리부인의 사랑 댓글:  조회:4134  추천:2  2017-01-01
죽음도 갈라놓지 못한 한무제와 리부인의 사랑     서한때에는 황제와 항후의 릉을 나란히 배치를 하였는데 황제릉은 서쪽에 황후릉은 동쪽에 위치했다. 그런데 무릉(한무제의 무덤)만은 동쪽에 있어야 할 황후의 릉이 없다. 한무제에게 진황후와 위황후 두명의 황후가 있었다. 하지만 진황후는 페위되였고 위황후는 억울한 고소를 당해 자살하고말았다. 이런 까닭에 황후의 릉이 없고 대신에 한무제가 말년에 의지했던 리부인의 묘가 있다. 그런데 리부인은 황후의 서렬에 오르지 못했기에 그녀의 무덤은 동쪽에 위치하지 못하고 무릉의 서북쪽에 위치해있다. 리부인은 비천한 출신이였다. 그녀의 오빠인 리연년(李延年)은 노래와 춤에 뛰여난 배우였다. 작곡에 뛰여난 자질이 있어서 감미로운 선률로 변주곡을 만들어 불렀는데 한무제는 물론 신하들이 모두 좋아했다. 어느날에 리연년은 한무제앞에서 춤추며 노래를 부를 기회가 생겼다.   북방에 아름다운 미인이 있어(北方有佳人) // 세상 제일의 미모를 독차지 했구나(絶世而獨立) // 한번 웃음 지으면 온 성이 무너지고(一顧傾人城) // 두번 웃음 지으면 온 나라가 기울어지네(再顧傾人國) // 성과 나라가 기우는것을 어찌 모르랴마는(寧不知傾城與傾國) // 천하의 아름다운 미인은 다시 얻기 어려운 법(佳人難再得).   이 노래를 들은 한무제는 리연년의 누이동생이 노래의 주인공임을 알고 탄복하여 그날부터 리부인을 애첩으로 삼았다. 하지만 미인박명이라는 말처럼 리부인은 젊은 나이로 요절했다. 리부인은 입궁한지 몇년이 되지 않아 앓기 시작하더니 결국 병이 더이상 치료할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리부인이 병상에서 일어나지 못한다는 말을 들은 한무제는 리부인을 보러 찾아왔다. 경국지색에 대한 황제의 사랑은 식을줄 몰랐는데 사랑하는 녀인을 보내야 했으니 황제의 가슴은 얼마나 미여졌겠는가? 어여쁜 얼굴을 한번 보고싶어 찾아왔으나 리부인은 보여주지 않았다. 황제가 온것을 본 리부인은 급히 이불로 얼굴을 가리우고 말했다. “첩이 병으로 얼굴이 망가져 페하를 뵙지 못하겠나이다. 제가 죽은후 저의 식구들을 보살펴주십시오.” “부인이 병이 위중하지만 약으로 치료할수 있는데 어찌 짐을 다시 보지 못한단 말이요?” 한무제는 기어코 리부인의 얼굴을 보려고 이불을 들어올렸다. 리부인은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울었다. 영원한 리별을 앞두고 한무제는 얼굴을 보여달라고 거듭 사정했지만 리부인은 끝내 보여주지 않았다. 황제는 속상해하며 떠났다. 그 자리에 있던 리부인의 누이동생이 리부인을 탓했다. 그러자 리부인이 말했다. “페하께서 알고계신 얼굴은 예전의 내 모습이다. 그런데 이제 이렇게 추한 모습을 보이면 황제는 놀라서 우리 식구들을 절대로 보살펴주시지 않을것이다.” 며칠후 리부인은 세상을 떠났다. 일의 결과는 과연 리부인이 예상대로 되였다. 리부인이 한무제에게 얼굴을 보이지 않은것은 그녀에 대한 황제의 무한한 그리움을 자아냈다. 그리하여 황제는 명화가를 청하여 그녀의 화상을 그려 감천궁에 걸어놓았다. 그리고 리부인이 죽자 한무제는 리연년을 악부의 장관인 협률도위(協律都尉)에 임명했다. 그리고 또 한명의 오빠인 리광리(李廣利)를 이사장군(貳師將軍)으로 삼았다. 리부인에 대한 한무제의 애틋한 사랑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제나라의 방사 소옹(少翁)을 시켜 리부인의 혼령을 불러오게 하고 황제는 애절함에 겨워 노래까지 불렀다.   “부인이오, 아니오?(是邪非邪) // 내 멍하니 서서 그대만을 바라보노니(立而望之) // 어이 이다지 나폴나폴 더디게만 오시는가(偏何姗姗其來遲).   뛰여난 문인이였던 한무제였기에 리부인의 죽음은 그를 시인으로 만들기에 충분하였다. 총희(寵姬) 리부인에 대한 한무제의 애타는 마음이 한편의 부(賦)에서 절절하게 나타났다.   저토록 밝은 세상 두고(去彼昭昭) // 어둠의 세계로 떠나갔구려(就冥冥兮) // 신궁으로 내려가면(旣下新宮) // 다시는 옛터로 돌아오지 못하나니(不復故庭兮) // 아아, 애달프도다!(嗚呼哀哉) // 그리운 혼령이 이토록 아른 하거늘(想魂靈兮).   사랑은 권력보다 강하다. 권력은 처음 잡을 때에는 무한한 힘을 가지나 시간이 지날수록 가벼워진다. 사랑은 다르다. 처음엔 밋밋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애틋한 그리움이 수시로 요동쳐 보고픈 마음은 한시도 식을줄을 모른다. 권력은 사랑을 버릴수 있지만 사랑은 권력마저도 포기하게 만든다. 가장 아름다운것이 사랑이지만 가장 두려운것도 사랑이다. 천하의 제왕 한무제도 평생 많은 녀인을 거느렸다. 그러나 진정한 사랑이 그리웠다. 많은 녀인들속에서 한무제가 원하는 사랑은 리부인이였다. 하지만 정들 무렵에 리별이라면 그 사랑은 애가 끊어지는 처절함이 된다. 천하의 권력을 다 가졌다고 한들 무슨 소용이 있단 말인가? 크지 않은 리부인의 묘가 광활한 벌판에 홀로 다소곳하게 누워있다. 한무제는 그녀의 죽음을 슬퍼하여 황후에 준하는 장례를 치르고 그녀의 묘를 “영릉(英陵)”으로 불렀다. “꽃”처럼 어여쁘고 “옥”처럼 귀한 녀인이 잠든 곳이라는 의미이다. 한무제의 애끊는 사랑이 최고의 례우를 해준것이다. 그러나 리부인묘는 그러한 례우에 개의치 않고 일편단심 동남쪽의 무릉만 바라보고있다. 산같은 무릉도 고적한 동풍이 싫어 서북쪽의 영릉을 향해 앉았다. 525메터의 오작교가 없는 벌판엔 철책이 가로막고있다. 살아서도 죽어서도 손잡고 있을수 없어 애틋한 그리움으로 오늘도 영원히 마주보아야만 하는 사랑, 그 사이를 오가는 바람만이 흐느낌과 애절함으로 사랑의 언어를 전하고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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