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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지기-죽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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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새 래일을 갈망, 아우성 칠 때 새 래일의 주인공이 된다"... 댓글:  조회:2999  추천:0  2019-11-01
최신기사 민족을 위해 살다간 '떠돌이' 문동환 목사의 삶 | 2019-03-10       6.15공동행사 해외측 준비위 공동위원장이었던 고인이 2005년 인천공항을 통해 입국하는 모습. 2005.8.13. [연합뉴스 자료사진] (서울=연합뉴스) 강종훈 기자 = 3월 9일 별세한 문동환 목사는 스스로 '떠돌이 목자'라 불렀다. 고인은 목사이자 교육자, 신학자였고, 민주화운동가이자 정치인이기도 했다. 세상은 고인이 한곳에 머무르게 두지 않았지만, 어느 곳에서든 그는 민족과 고통받는 민중을 위해 떠돌이의 삶을 마다하지 않았다. 민주화운동과 통일운동을 펼친 늦봄 문익환(1918~1994) 목사의 친동생으로 알려졌지만, 고인 역시 큰 족적을 남긴 한국 근·현대사의 증인이다.   고인은 일제를 피해 고국을 떠난 이들이 모여 기독교 신앙을 바탕으로 독립운동을 한 근거지였던 북간도 명동촌의 지도자 김약연 목사를 보며 6세 때 목사가 되겠다고 다짐했다. 어린 나이였지만 민족을 위해 살겠다는 꿈을 품었다.   윤동주의 외삼촌인 김약연 목사는 명동촌을 일구고 명동교회와 명동학교를 세웠다. 명동학교는 윤동주, 문익환, 송몽규, 나운규 등을 배출했다. 고인은 어린 시절을 그들과 함께 보냈다. 고인은 명동촌에서 1921년 문재린 목사와 여성운동가 김신묵의 3남 2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CBS TV가 지난 1월 방송한 다큐멘터리 '북간도의 십자가'는 당시 북간도 출신 마지막 생존 인사였던 고인의 육성을 담았다. 고인은 "김약연 목사는 목사인 동시에 교사였고 만주 일대 한국인의 지도자였다"며 "목사가 되겠다는 것은 민족을 위해서 그렇게 살고 싶다는 말과 같은 것"이라고 말했다. 또한 그는 "진지하게 살면 역사와 통하게 되고 예수님하고 교류하게 되는 경험을 가진다"며 "내가 영웅적으로 살았다는 게 문제가 아니라 역사가 나를 그렇게 끌고 갔다"고 했다. 어린 시절 말한 대로 목사가 된 고인은 교회 안에 머물지 않고 세상에 뛰어들어 역사와 통하는 삶을 살았다. 1961년 한신대학교 교수로 부임한 그는 군부독재에 맞서 민주화운동을 이끌다가 유신정권의 탄압으로 1975년 해직됐다. 해직 교수들과 함께 새로운 교회 운동을 펼치던 그는 생명문화 공동체 '새벽의 집'을 열었다. '나'보다 '우리'를 소중히 여기고 서로 나누고 섬기며 살겠다는 시도였다. 고인은 명동성당에서 긴급조치 철폐와 의회정치의 회복을 요구한 3·1 민주구국선언 사건으로 1976년 김대중 전 대통령, 문익환 목사 등과 함께 구속됐다. 2년여간 수감생활을 하면서 고인은 명상기도와 성서를 통해 "어둠이 빛을 이긴 적이 없다"는 깨달음을 얻었고, 일반 죄수들의 비참한 현실에 눈뜨면서 민중신학의 실마리를 잡았다. 출옥 이후 '새벽의 집'은 민주화운동의 둥지가 됐다. 고인은 김대중 전 대통령과 문익환 목사 등 구속자 석방을 위한 농성과 시위를 벌였고, 1979년 동일방직 및 와이에이치(YH) 노조원의 투쟁을 지원하다 다시 투옥됐다. 그 해 10·26으로 유신정권이 막을 내리면서 대학으로 돌아갔지만, 신군부에 의해 또다시 해직됐다. 미국으로 망명했다가 1985년 한신대 교수로 복직한 고인은 1988년 김대중 전 대통령의 권유로 정치인의 길을 걷게 된다. 고인은 1988년 전국구 의원으로 국회에 진출하고 평화민주당 수석부총재까지 지냈지만 1992년 유학 시절 만난 미국인 아내 페이 핀치백(한국명 문혜림)과 함께 다시 미국으로 떠났다. 미국에서도 세계 현안과 한국의 현실로부터 눈을 떼지 않았고, 말년까지 성서 연구와 집필에 매진했다. 고인은 2009년 자서전 '문동환 자서전 - 떠돌이 목자의 노래'를, 2012년 '바벨탑과 떠돌이'를 펴냈다. 90대 중반 나이에도 '예수냐, 바울이냐' (2015년), '두레방 여인들'(2017년) 등을 출간했다. 고인은 80대에 접어들면서 민중신학을 넘어 '떠돌이 신학'을 펼쳤다. 고인은 저서에서 "성서에서 새 역사를 창출한 이들은 우리가 그동안 생각해온 민중과 다르다"며 "강자들로 말미암아 역사에서 완전히 밀려난 떠돌이들"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떠돌이라는 개념을 현대 사회의 문제점과도 접목해 설명했다. 고인은 "자본주의 산업 문화가 극성을 부리는 오늘날 전 세계를 통하여 떠돌이들이 양산되고 있다"며 "그들이 떠돌이라는 것을 명확히 깨닫고 새 내일을 갈망하면서 아우성을 칠 때 새 내일의 주인공이 될 수 있다"고 강조했다.   ///연합뉴스 ==============================/// ‘살아있는 근현대 박물관’ 문동환 목사 별세 2019-03-09  페이스북 트위터 공유 스크랩 프린트 크게 작게   거짓과 싸워온 개혁가이자 공동체운동가 일제강점기 이후 현대사 100년 온몸 겪어 북간도 명동촌에서 태어나 해방 직후 월남 형 문익환 목사와 민주화운동…투옥·망명 한때 정치 참여…5·18특위 위원장 맡기도 “안으론 따뜻했지만 밖으론 단호했던 분” 자료사진" src="http://img.hani.co.kr/imgdb/resize/2019/0309/00500465_20190309.JPG" style="border: 0px; margin: 0px; padding: 0px; width: 590px;" title="생전의 문동환 목사. 자료사진" /> 생전의 문동환 목사. 자료사진 ‘살아있는 근현대 박물관’으로 불렸던 문동환 목사가 3월 9일 오후 5시50분께 별세했다. 향년 98.     고인은 해사스런 귀공자형의 외모처럼 편하게 한평생을 살 수도 있었지만, 한맺힌 민중들을 놓을 수 없어, 그 자신의 표현대로 ‘떠돌이’를 자청한 삶을 살았다. 또한 그는 일제시대 북간도 한인사와 독립운동사, 교육사, 민중사, 민주화운동사, 기독교사를 온몸으로 겪은 인물이었다. 그러면서도 그는 100살이 다 되도록 과거에 머물지 않고 끊임없이 자신을 혁명하면서 거짓들과 싸운 종교개혁가이자 공동체적 삶을 실천하려는 공동체운동가였다.   고인은 1921년 북간도 명동촌에서 기자이자 목사였던 부친 문재린과 여성운동가였던 모친 김신묵의 3남2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고인은 그곳에서 형 문익환, 윤동주 시인 등과 어린시절을 보냈다. 명동촌은 한국적 개신교의 맹아였을 뿐 아니라 민족교육의 산실로 독립운동의 근거지가 됐던 곳이다. 명동촌은 문동환의 고조부인 문병규와 김약연 등 네가족 142명이 함경도에서 두만강을 넘어 옛 고구려땅에 정착해 개간했던 한인집단공동체였다. 그곳에 세운 명동학교에서 문익환, 윤동주, 나운규 등이 공부했고, 일제의 탄압으로 폐교된 뒤 용정에 연 은진중학교에서 문동환과 안병무, 강원용 등이 수학했다. 은진중 교목이 기독교장로회와 한신대 설립자인 김재준이었다.   1943년 일본 유학에서 돌아와 교사로 근무했던 용정 명신여중 교정에 서 있는 문동환 목사. 1946년 5월 ... 월남하기 직전의 모습이다. 고인은 어린시절 나라와 민족을 위해 헌신한 김약연 같은 이가 되고 싶어 목사가 될 꿈을 꿨다고 한다. 평생의 사표였던 김약연은 ‘간도의 대통령’으로 불린 독립운동가이자 교육자이자 목사였고, 안중근이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하기 전 명동촌 뒷산에 권총 연습을 할 은거지를 제공한 것으로 알려진다.   고인은 1938년 은진중학교를 마치고 은사인 김재준의 안내로 일본에 유학해 도쿄신학교와 일본신학교에서 공부한 뒤 고향 용정 만보산초등학교와 명신여중고에서 3년간 교사로 재직했다. 해방 후 1946년엔 김재준이 설립한 조선신학교를 1년간 다닌뒤 경기도 장단중학교와 서울 대광중고에서 교편을 잡았다. 그는 신학교를 다니면서도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신성에 회의가 생겨 7년간 씨름했다고 한다. 그러다 형 문익환과 여행 중 경상도 금오산을 지나면서 너무도 함들게 살아가는 민초들을 보고서 ‘고난받은 민초들의 삶의 현장으로 내려가는 게 구원’이라는 확신을 얻었다고 훗날 회고한바 있다. 그는 그 이후 거제도 아양리라는 농촌으로 내려가 1년간 목회했다. 이어 한국전쟁이 발발한 이후 1951년 미국 유학을 떠나 박사학위를 받고 1961년 모교인 한신대 교수로 초빙받아 귀국길에 올랐다. 유학중 만난 평생의 반려자인 미국인 부인 페이문(문혜림)과 함께였다.   1961년 12월16일 서울 경동교회에서 올린 결혼식에서 신부 문혜림과 함께 기념 케이크를 자르는 문동환 목사. 맨오른쪽이 주례를 한 은사 김재준 목사다. 부패한 이승만 정권이 물러나고 박정희 독재가 시작된 암울한 현실 속에서도 고인은 남다른 교육관으로 학교 현장과 학생들의 삶을 변화시켰다. 특히 번지르르한 말만을 배우지 않고, 제대로된 가치관을 심어서 신앙인이기에 앞서 사람다운 사람이 되도록 이끌었다.   ‘아무리 교실에서 그럴 듯한 소리를 하고, 강단에서 감명 깊은 설교를 한다 해도 그의 생이 사람답지 못하면 자신과 남을 위해서 비참한 일이다. 한국에 있어서 비극 중의 비극이 여기 있다고 생각한다. 큰소리를 하는 사람일수록 흔히 그 생이 더 냄새가 난다는 것. 대중 앞에 나설 때, 앞에 마이크가 많은 사람일수록 뒤에서는 연막을 더 쳐야 하다는 사실이다.’   그가 1972년 낸 이란 책의 서문에 쓴 글이다. 그는 토론하고 발표해 자기 생각을 가지고 이를 실천케하는 새로운 수업방식을 도입했다. 그의 제자였던   정호진 목사는 “고인의 라는 수업은 일방적인 강의가 아니라 철저하게 학습자가 중심이 되는 혁명적 전환으로 스스로 세계와 역사에 대한 관점을 가지고 이를 실천케 해 새로운 존재로 태어나게 했다”고 회고했다.   고인의 특별한 점은 관념에 머무르지 않고 늘 실천이 뒤따랐다는 것이다. 그는 학생들이 삶을 배우기 원했고, 캠퍼스 자체가 민주적 삶의 체현장이 되도록 했다. 이를 위해 그가 학생과장으로 재직 때 학생, 교수, 직원, 교수부인들까지 동원해 만든게 캠퍼스생활위원회였다. 이 생활공동체를 통해 학생들과 교직원들이 평등의식과 참여의식을 배우고 실천케 한 것이다.   1980년 3월1일 사면 복권 소식을 듣고 부인 문혜림(왼쪽 둘째), 딸 영미(오른쪽 둘째)씨 등 가족들에 싸여 기뻐하고 있는 문동환 목사. 그가 주도적으로 만든 게 선교신학대학원이었다. 이곳에서 그는 세가지를 통해 배우도록 했다. 첫째 선각자의 글과 이야기를 듣고 배우고, 둘째 그들과 대화하는 가운데 배우고, 세째 현장에서 일하면서 사회현실과 부딪친 것을 다시 대화하면서 배우라는 것이었다. 그가 교수로 있으면서 1972년 만든 ‘새벽의집’ 공동체도 실천의 장이었다. 새벽의집에서는 6가정 50여명이 개인 집들을 처분하고 가족연합체를 만들어 살았다.   그러나 전태일의 분신과 박정희 정권의 삼선개헌 파동, 유신헌법 공포는 그를 더욱 세상으로 이끌어냈다. 삭발을 하며 투쟁을 하다 1975년 해직됐던 그는 동료 해직교수인 서남동, 안병무, 이문영 등과 갈릴리교회를 설립해 민중교회의 모태가 되게 했다. 1976년 3월1일엔 함석헌, 윤보선, 김대중, 이문영, 서남동, 문익환, 이우정 등과 함께 ‘3·1민주구국선언’에 서명해 긴급조치 9호 위반혐의로 22개월간 옥고를 치렀다. 와이에이치(YH)사건으로 다시 구속되었다가 유신정권의 몰락 시점에 출옥해 복직했지만 전두환 신군부의 폭압이 시작되자 미국 망명길에 올랐다. 그는 80년 이른바 내란음모 조작사건으로 신군부에 의해 사형선고를 받았다가 풀려나 미국에 온 김대중을 만나 도움을 준 인연으로, 1988년 평화민주당에 수석부총재로 참여하고 국회 5·18광주민주화운동진상조사특별위원회 위원장으로 활동했다. 3당 합당에 반대해 정계에 은퇴한 뒤 1992년 미국으로 건너가 살다가 2013년 귀국했다.   자료사진" src="http://img.hani.co.kr/imgdb/resize/2019/0309/00500473_20190309.JPG" style="border: 0px; margin: 0px; padding: 0px; width: 600px;" title="1987년 2월 군부 정권의 고문으로 숨진 서울대생 박종철군 추모와 규탄 시위에 참가한 문동환 목사가 부인 문혜림(왼쪽), 형수인 문익환 목사 부인 박용길(오른쪽)씨와 함께 종로 거리에서 입마개를 쓴 채 최루가스를 견디고 있다. 자료사진" /> 1987년 2월 군부 정권의 고문으로 숨진 서울대생 박종철군 추모와 규탄 시위에 참가한 문동환 목사가 부인 문혜림(왼쪽), 형수인 문익환 목사 부인 박용길(오른쪽)씨와 함께 종로 거리에서 입마개를 쓴 채 최루가스를 견디고 있다. 자료사진 그는 90대 중반까지도 집필 작업을 하면서 끊임없이 예수정신을 드러내려 애썼다. 그 대표적인 것이 4년전 출간한 다. 그는 책에서 바울이 예수의 본정신을 망친 인물로 질타했다. 예수를 메시아로 만든 바울의 영향을 받은 콘스탄티누스의 황제신학에 의해 기독교인들이 권력과 야합해 식민지 쟁탈과 이방인 살육에 앞장서면서 메시아와 왕조, 절대권력, 권위주의, 선민의식을 거부한 예수의 정신과는 다른 종교제국주의를 만들었다는 것이다.   그는 진보 개신교계에도 쓴소리를 아끼지 않았다. 그는 “80살이 지나면서 민중신학에도 회의가 생겼다”면서 “한 자리 차지하기 위해 투쟁하는 민중을 민중이라고 말하기 어렵다”고 비판하기도 했다. 그러면서도 그는 영화 을 본 뒤 “우리가 있는 자리에 안주하지 말고 우리 주변에서 아우성치는 사람들의 음성을 듣고 노무현이 거기에 응한 것처럼 우리도 응해야 이 험악한 세상에 변화가 올 것”이라고 했다.   문동환(뒷줄 왼쪽 넷째)·문혜림(왼쪽 다섯째)씨 부부가 형수 박용길(왼쪽 여섯째), 조카 문성근(앞줄 맨왼쪽), 딸 문영미(앞둘 왼쪽 둘째)씨 등 가족들과 2002년 2월 중국 룡정시 동커우의 생가터를 둘러보고 있다.   고인은 마지막까지 공동체적 삶에 대한 열정을 잊지 않았다. 그는 공동체를 이루려 했던 자신의 꿈을 실현해 가는 서울 수유동 밝은누리를 방문해 최철호 목사 등을 만난 자리에서 “자기들끼리만 멋있게 사는 것이 아니라 깨닫고, 기존의 잘못된 삶을 단호히 끊은 젊은이들이 집단적 예수, 집단적 모세가 되어 새로운 문화권을 만들어내는 것이 우리의 과제”라고 말했다.   그의 한신대 제자였던 김경재 한신대 명예교수는 “안으로는 동병상련의 따뜻한 심성을 지닌 분이었다”며 “밖으로는 대형교회의 성장 축복 신앙을 맘몬 숭배로 규정하고 현대사회 악의 본질을 분명히 깨닫고 이를 끊어내기 위해 개인과 집단의 단호한 회개를 주창하며 새벽을 열었던 분”이라고 추모했다.   고인은 2008년 7월21일~10월3일 ‘길을 찾아서-떠돌이 목자의 노래’를 연재하고 이듬해 같은 제목으로 으로 펴내기도 했다.   유족으로는 부인 문혜림씨와 아들 창근·태근, 딸 영혜·영미(이한열기념관 학예실장)씨, 사위 정의길( 선임기자)씨 등이 있다. 문성근(영화배우)씨가 조카이다. ...   /조현 기자 
3    [그것이 알고싶다] - 나운규와 아리랑을 부른 가수... 댓글:  조회:2839  추천:0  2019-11-01
연예스타 나운규 '아리랑' 첫 상영 가수는 유경이 페이스북 트위터공유하기 최종수정 2019.10.01  구글번역 아시아경제  뉴스듣기 인쇄하기스크랩RSS 폰트축소폰트확대     [아시아경제 이종길 기자]서울 종로 단성사에서 1926년 10월1일 나운규의 ‘아리랑’이 처음 상영했을 때 ‘아리랑’을 부른 가수가 유경이로 확인됐다. 한겨레아리랑연합회는 단성사가 발간한 ‘조선영화소곡집’에 실린 자료를 통해 이 같은 사실이 드러났다고 1일 전했다. 이 자료에는 아리랑의 악보와 유경이의 사진이 실려있다. 사진에는 ‘유경이양(劉慶伊孃)’이라는 이름과 함께 ‘스테이지에서 노래한 분입니다’라고 적혀 있다. 아리랑은 민족의식과 항일정신이 담긴 무성영화다. 변사가 해설하고 가수가 노래를 부르는 방식으로 상영됐다. 재상영에서는 김연실 등 가수 다수가 참여했다. 연합회 측은 “첫 상영 당시 관객들이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며 “영화 필름이 없는 현재 이를 통해 개봉 당시 인기를 짐작할 수 있다”고 했다. 이어 “조선영화소곡집이 단성사 영화구락부에서 발행된 책이라는 점 또한 의미가 있다”고 했다.   ///아세아경제  /이종길 기자 
2    [그것이 알고싶다] - 나(라)운규와 영화 "아리랑" 댓글:  조회:2680  추천:0  2019-11-01
죽기 전에 꼭 봐야 할 한국영화 1001 아리랑   [ Arirang ] 해설   나운규가 직접 각본·각색하고 출연한 첫 번째 연출 작품. 이 작품은 당국의 검열을 피하기 위해 감독·각본을 김창선(金昌善)이라는 한국명을 갖고 있던 일본인 쓰모리 히데카츠를 내세웠다(안종화, 『한국영화측면비사』, 현대미학사, 1998년, p.104). 첫 장면에 앙숙을 상징하는 개와 고양이가 등장하고 자막이 사라지면 주인공 영진과 오기호가 서로 노려보며 클로즈업 된다. 영진은 정신이상자로 나온다. 또한 영진의 환상을 통해 톨스토이의 ‘부활’에서 네플류도프 백작과 카투사가 이별하는 장면, 사막에서 두 청춘 남녀가 목말라 애타는 장면, 진시황의 죽음에 관한 대사 등을 적용하여 억압받는 조선과 억압하는 일본, 즉 침략자의 패망과 독립에의 열망을 암시하고 있다. 개와 고양이는 일제의 억압을 상징적으로 드러낸 컷이며 네플류도프와 카투사, 사막에서 물병의 물을 쏟아버리는 장면 등 몽타주 기법 삽입은 당시로써는 기발한 발상으로 평가되고 있다. 여동생 역으로 출연한 신일선은 당시 16세의 어린 소녀로 나운규가 발탁했다. 본명은 신삼순이며 아리랑 출연 때는 신홍련(申紅蓮)이라는 예명을 썼다. 조국을 잃은 백성의 울분과 설움을 보여준 이 영화는 우리 전래민요의 가사 내용을 모티브 삼아 일제시대 시달림을 받던 민족의 비애를 비탄의 극치로 이끌고 있다. 영화 상영 중 관객은 단성사 관현악단이 편곡한 “청천 하늘에 별도 많고 이내 가슴에 수심도 많다”라는 아리랑 4절을 합창하여 객석을 눈물바다로 만들어 놓았고 개봉 첫날 단성사 앞은 경찰 기마대까지 동원되는 등 표를 못산 사람들이 표를 사기 위해 아수라장을 이루었다. 그러다가 영화를 보고 나온 사람들이 눈물을 흘리며 아리랑을 합창하면 기다리던 사람들도 함께 노래를 부르며 조선독립 만세를 외쳤다고 한다(조희문, 『나운규』, 한길사, 2005년). 당시 관객은 15만 명선, 1980년대 후반과 1990년대 초반에 만 명 단위 관객 동원이 흥행으로 기록된 것을 감안하면 그 숫자가 얼마나 대단한가를 짐작할 수 있다. ‘아리랑’은 2년 이상 관객을 끌어 모았고 그로써 얻은 수입은 개봉 흥행 때의 몇 배를 능가하는 액수다. 이 영화는 1927년 일본에서도 상영되었다. 춘사(春史) 나운규(1902~1937)는 함북 회령 출신으로 중국 간도 명동(明東)중학 재학 중 3·1운동에 참가, 1923년 신극단 예림회(藝林會)의 배우가 되어 북간도 일대를 순회공연했고, 부산 조선키네마에 입사하면서 1925년 ‘운영전’으로 단역 데뷔했다. 그가 출연하거나 각본을 쓰고 감독한 작품은 총 27편, 그중 각본·출연·편집을 겸하면서 연출한 작품은 ‘오몽녀’(1937)까지 16편이다. 그동안 국내에서 제작된 ‘아리랑’ 연보는 1926년 나운규의 ‘아리랑’을 필두로 1930년, 이구영의 ‘아리랑 그 후 이야기’, 1935년, 홍개명의 ‘아리랑 고개(문예봉, 노재신, 문수일, 이춘하, 출연)’, 1936년 발성영화 시대를 맞아 나운규의 ‘아리랑 3편’은 1937년 제 1회 조선일보 영화제에서 최우수작(총 4,947표)으로 선정되었다. 그 외 1954년 이강천의 ‘아리랑(허장강 데뷔)’, 1957년 김소동의 ‘아리랑’, 1968년 유현목의 ‘아리랑(박노식, 남궁원, 홍세미)’, 1974년 임원식의 ‘아리랑(신성일, 박지영, 허장강)’, 1977년 정인엽의 ‘아리랑아’, 1997년 안태근의 ‘아리랑’, 2002년 이두용의 ‘아리랑’ 등이 있다. 줄거리   서울에서 전문학교에 다니던 영진(나운규)은 3·1 운동 때 독립만세를 부르다가 왜경에게 끌려가 심한 고문을 당한 끝에 정신이상자가 되었다. 정신이상자가 되기 전까지는 친구인 현구(남궁운)의 기타 반주에 맞춰 하모니카를 불기도 했던 건강한 청년이었다. 영진의 동생 영희(신일선)는 오빠의 친구인 현구를 사랑하고 있다. 한편 악덕 지주의 머슴 오기호(주인규)는 영진네 빚을 빌미로 영희에게 흑심을 품는다. 그해 추수가 끝나고 마을에서 농악제가 열리던 날, 오기호는 혼자서 집을 보는 영희를 범하려 든다. 마침 영진을 찾아 왔던 현구가 영희를 구하기 위해 오기호에게 달려들고 정신이상자인 영진은 아무것도 모른 채 두 남자의 격투를 구경할 뿐이다. 그러다가 영진은 사막에 쓰러진 한 쌍의 연인이 지나가는 대상(隊商)에게 물을 달라고 애원하는 환상을 본다. 상인이 물 한 모금 대신 여자를 끌어안으려 하자 영진은 순간적으로 낫을 들어 상대방을 후려친다. 영진의 낫에 찔려 쓰러진 것은 고약한 오기호였다. 영진은 비로소 제정신을 되찾는다. 그 자리에 영진의 아버지, 교장선생, 악덕지주, 일본 순사와 마을 사람들이 모여든다. 영진의 손에 포승이 묶여지자 사람들은 영진을 에워싸고 오열한다. 그때 영진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여러분, 울지 마십시오. 이 몸이 삼천리 강산에 태어났기에 미쳤고 사람을 죽였습니다. 지금 이곳을 떠나는, 떠나려는 이 영진은 죽음의 길을 가는 것이 아니라 갱생의 길을 가는 것이오니 여러분 부디 눈물을 거두어주십시오 ···” 일본 순사에게 잡혀 아리랑 고개를 넘어가는 영진의 뒤로 청년회 깃발을 든 청년들이 말없이 따른다. 민요 ‘아리랑’이 울려 퍼진다. 관련영화   크게보기 아리랑(1926) 평점 9.98  개요 한국 | 19261001 | 0분 | 감독 나운규 출연 나운규       관련이미지 출처: EBS 어린이 지식e (촬영: )   [네이버 지식백과] 아리랑 [Arirang] (죽기 전에 꼭 봐야 할 한국영화 1001)   =============================///   시사상식사전 나운규의 아리랑               1926년 춘사 나운규가 만든 영화. 은 일제강점기 나라 잃은 통한을 겨레의 항일정신으로 집약해 반영한 작품으로 한국영화가 도약하는 전환점을 마련한 흑백 무성영화이다. 1926년 10월 1일에 단성사에서 개봉되었는데 상상을 초월할 정도의 선풍적인 인기를 모았으며 주제가 '신아리랑'도 대중적으로 널리 알려졌다. 주인공 영진 역은 나운규가 맡았고 영진의 동생 영희 역은 신일선, 영진의 친구이자 영희의 연인인 현구 역은 남궁운, 악덕 지주의 청지기인 오기호 역은 주인규가 각각 연기했다. 촬영은 이명우가 맡았다. 주연을 맡았던 여배우는 당시의 정황에 대해 '관객들이 너무나 감동이 벅차서 목놓아 우는 사람, 아리랑을 합창하는 사람, 심지어 조선독립만세를 외치는 사람까지 그야말로 감동의 소용돌이' 였다고 표현할 만큼 영화 이 전국 구석구석까지 상영되어 온 겨레에게 준 충격은 상상을 초월한 것이었다.  나운규의 은 강렬한 민족주의와 자유주의를 영상화하여 진정한 한국영화의 효시가 되었으며, 비로소 한국영화를 예술로 끌어올리게 되었다. 당시 고작해서 신파물이나 모방적인 번안물을 만들어 내던 때에 나운규의 영화는 리얼리즘을 기초로 그 안에 당시 일제에 억눌리고 있었던 민족의 울분을 영화로 대신 승화시킨 것이다. ■ 아리랑의 줄거리 '3·1운동 실패의 충격으로 미친 영진은 광인 특유의 사랑으로 여동생 영희를 아끼는데, 영진을 찾아온 영진의 친구 현구는 영희와 애틋한 사랑에 빠진다.  악덕지주의 머슴이자 친일파인 기호는 농악제가 벌어지던 날 영희를 겁탈하려 하는데 이를 본 현구는 영희를 구하기 위해 기호와 난투극을벌인다.  실성한 영진은 오히려 이 모습을 재미있게 여긴다. 이때 갑자기 환상에 빠져든 영진은 반사적으로 낫을 휘둘러 기호가 그 낫에 찔려 죽고 그 충격으로 영진은 맑은 정신으로 돌아온다. 일본경찰에게 끌려가는 영진의 뒤로 민요 이 울려 퍼지며 영화는 끝난다.' [네이버 지식백과] 나운규의 아리랑 (시사상식사전, pmg 지식엔진연구소) ======================///   인물한국사 나운규 [아리랑]을 만든 우리나라 영화의 선구자 [ 羅雲奎 ] 출생 - 사망 1902.10.17. ~ 1937.8.9.   1926년 10월 1일에 서울의 단성사에서 첫 개봉된 흑백 무성 영화 [아리랑]. 영화가 끝날 무렵 극장 안은 눈물바다가 되었고 관객 모두가 영화의 주제곡인 ‘아리랑’을 따라 불렀다. 영화 [아리랑]은 일제강점기 민족의식과 항일 정신을 고취시키는 작품이었다. 첫 개봉 이후, 영화 [아리랑]은 당시로써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흥행하여 전국 구석구석까지 상영되었으며 사회적으로 큰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이 영화를 만든 사람은 각본, 감독, 배우 1인 3역을 맡아 종횡무진 활약한 당시 20대 중반의 나운규(羅雲奎, 1902~1937)였다. 민족을 울린 영화 [아리랑] 1920년대 전국적인 돌풍을 일으킨 영화 [아리랑]의 줄거리는 이러하다. 실성한 영진에게 옛 친구 현구가 방문하고 현구는 영진의 여동생 영희와 사랑에 빠진다. 악덕 지주의 마름이자 친일파인 오기호는 마을 축제의 어수선한 틈을 타 영희를 겁탈하려 하고 이를 말리던 현구와 난투극을 벌인다. 지켜보던 영진은 갑자기 환상에 빠지고 환상 끝에 낫을 휘둘러 기호를 죽인다. 붉은 피를 본 영진은 충격으로 다시 맑은 정신이 돌아오지만, 살인 혐의로 일본경찰에 체포된다. 끌려가는 영진의 뒤로 민요 ‘아리랑’이 울려 퍼지며 영화는 끝이 난다. 미치광이 영진역은 이 영화의 각본과 감독을 겸하고 있던 나운규가 맡았고 영희역은 신일선, 오기호역은 주인규가 맡았다. 영화 [아리랑]은 핍박받던 농촌의 현실과 일제에 고통받는 민중의 모습을 그대로 담고 있어 많은 사람들의 공감을 불러일으켰다. 주인공에 감정이입한 관객들에 의해 영화 주제가 ‘아리랑’은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 전국에 퍼져 나갔다. 주연을 맡았던 여배우 신일선은 당시 상황을 이렇게 회고했다. 관객들이 너무나 감동이 벅차서 목놓아 우는 사람, 아리랑을 합창하는 사람, 심지어 조선독립만세를 외치는 사람까지 그야말로 감동의 소용돌이였다. 나운규. [아리랑]을 만든 한국영화의 선구자. 일제치하 암흑기 고통받던 우리 민족의 한과 슬픔이 그대로 표현된 영화 [아리랑]은 서울에서 성공한 이후, 전국 곳곳에서 상영되었는데. 평양에서는 관객이 너무 많이 들어서 극장의 들보가 부러지는 소동이 벌어지기도 했다. 일제는 [아리랑]의 성공에 당황했지만 너무 많은 사람들이 아리랑을 보고 공감했기 때문에 통제가 거의 불가능했다고 한다. 이 영화는 프롤로그에 '고양이와 개'라는 자막을 넣어 속박하는 자와 속박당하는 자의 대립을 암시하였고, 주인공 영진이 실성한 사람인 것은 나라를 빼앗겨 온전한 정신이 될 수 없었던 우리 민족을 상징한 것이었다고 한다. [아리랑]은 당시 신파물이나 외국작품의 번안물이 넘쳐나던 시절, 사실주의에 바탕하여 민족의 문제를 영상화함으로써 한국 영화를 예술의 경지로 끌어 올렸다는 평을 받았다. 배우로 출연한 것 외에 각본과 감독 데뷔작이기도 한 이 작품으로 나운규는 일약 한국 영화계의 총아로 떠올랐으며 이후, 한국영화를 이끌어 가는 선구자가 되었다. 안타깝게도 [아리랑]의 필름은 현전하고 있지 않다. 항일운동을 하던 청년의 영화계 입문 나운규는 함경북도 회령에서 구한말 군인이던 나형권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한말의 어수선한 상황에서 낙향하여 고향에서 한약방을 하면서 후학들을 키우기도 하였다. 나운규는 회령보통학교를 졸업한 후, 신흥학교 고등과를 거쳐 1918년 만주 북간도 용정에 김약연이 세운 명동중학에 입학하였지만 일제 탄압으로 학교가 폐교되자 북간도와 만주 일대를 떠돌았다. 그는 3.1운동에 참여하기도 하였고 만주에서는 독립군 단체에 투신하기도 하였는데, 1920년에는 북간도에 사는 한국인들이 만든 대한국민회(혹은 간도국민회)에 가입하였다. 그는 비록 미수사건에 그쳤지만 일제의 수비부대 간의 교통을 차단하기 위해 회령-청진간 철로 폭파임무를 맡기도 하는 등, 적극적으로 항일 운동에 참여하였다. 회청선 폭파 미수사건으로 나운규는 일제에 체포되어 1년 6개월간 수감되기도 하였다. 이때 나운규는 감방의 동료로부터 춘사(春史)라는 호를 얻었다고 한다. 영화 [사랑을 찾아서]의 한 장면. 이 영화는 노골적인 저항의식을 담고 있어 상영 닷새 만에 중단되었다가 많은 장면이 가위질 된 채 재개봉되어, 우리 영화사 사상 최초의 검열 사건으로 회자된 작품이다. 1923년 출감 이후 나운규는 당시 지방 순회공연을 하던 신극단 예림회에 들어가게 되고 그곳에서 안종화를 만났다. 나운규와 동갑내기인 안종화는 이듬해 부산으로 내려가 한국 최초의 영화사인 조선키네마창립에 관여하게 되고 나운규를 부산으로 불러들였다. 1924년에 설립된 조선키네마는 부산에 거주하던 일본인 실업가들이 20만 원의 자본금을 공동 출자해 세운 영화 제작사였다. 이들은 총포 화약상인 다카사 간조를 사장으로 내세우고 일본에서 기술자들을 데려와 영화를 찍기 시작하였는데 이 영화사에 우리나라 배우와 제작자, 연출가들도 참여하게 되었다. 안종화의 소개로 나운규는 조선키네마에서 단역배우로 배우 인생을 시작하였다. 윤백남 감독의 [운영전]에 대사 없는 가마꾼으로 출연했던 나운규는 이듬해 윤백남이 조선키네마를 나와 세운 백남프로덕션의 첫 번째 작품 [심청전]에 심봉사로 출연하여 연기파 배우로 성장하였다. 또 조선키네마에서 만든, 자유연애에 대한 이야기를 다룬 이규설 감독의 [농중조(새장 속의 새)]에 조연으로 출연하여 연기에 절찬을 받으면서 명배우로 뛰어올랐다. [농중조]에 주연 여배우로 출연한 복혜숙의 회고에 따르면 [농중조]를 찍을 무렵 나운규는 이미 자신의 감독 데뷔작 [아리랑]을 구상하고 있었으며 [농중조] 촬영현장에서도 배우의 역할뿐만 아니라 연출부분 스태프 역할도 자진해서 했다고 한다. 마침내 1926년 나운규는 조선키네마프로덕션의 자본으로 자신이 구상하고 각본을 쓴 [아리랑]을 감독하면서 주연으로 출연하는 1인 3역의 역할을 해냈다. [아리랑]은 개봉하자마자 요새 말로 하면 그야말로 대박(!)이 났다. 한국영화의 선구자 나운규가 출연한 [임자 없는 나룻배]의 한 장면. 이 영화는 일제 강점기 뱃사공 부녀가 겪는 비극적 현실을 그린 1932년 한국 흑백 무성영화이다. 나운규가 주연으로 나왔다. [아리랑]과 함께 일제시대 문제작으로 손꼽힌다. 민족저항영화로서 조선총독부의 검열에서 도끼로 철로를 찍는 부분 등이 삭제당하였다. [아리랑]의 성공 후 나운규는 1927년 고향 친구였던 윤봉춘 등과 함께 ‘나운규프로덕션’을 설립하고 여러 편의 영화를 제작하였다. 이 ‘나운규프로덕션’에서 [옥녀]·[사나이]·[사랑을 찾아서]를 만들었고 1929년에는 한국 최초의 문예영화라 할 수 있는 [벙어리 삼룡]을 제작하였다. 그러나 나운규의 개인적 인기와는 달리 ‘나운규프로덕션’은 경영이 순조롭지 못했다. 결국, 영화사는 해체되었고 나운규는 원방각사 박정현의 자본으로 [아리랑 후편]과 [철인도] 등을 만들었지만 그다지 큰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한때 경제적인 궁핍에 시달리던 나운규는 돈 때문에 일본 ‘도야마 프로덕션’의 작품에 출연하여 대중의 지탄을 받기도 하고, 생활고를 해결하고자 배구자의 악극단을 따라다니며 무대에 출연하기도 하였다.1931년 일본 영화계를 돌아보고 온 나운규는 영화 [개화당이문]을 만들었지만 일제의 검열 때문에 많은 중요 장면들이 잘려나가 결국 흥행에 실패하였다. 대신 그는 이규환 감독의 [임자 없는 나룻배]에 출연하여 오랜만에 관객들의 가슴에 남을 좋은 연기를 보여주었다.이후에도 나운규는 비록 [아리랑] 만큼의 선풍적인 인기를 끌지는 못했지만 여러 편의 영화를 제작하고 감독하고 출연하여 한국영화의 중심에 있었다. 1936년 나운규는 [아리랑]의 성공 이후 우리 영화사에 또 하나의 기록이 될 시도를 하였다. 그는 새로 제작하는 [아리랑 3편]을 당시 막 인기를 끌기 시작한 발성영화로 제작한 것이다. 이때부터 한국영화는 변사가 대신 대사를 말해주던 무성영화시대에서 벗어나 배우가 그대로 대사를 하면서 연기하는 유성영화 시대로 들어가게 되었다. 나운규는 문학작품의 영화화를 선호하였다. 1937년 나운규는 이태준의 소설 [오몽녀(五夢女)]를 영화화하여 큰 성공을 거두었다. 이 작품으로 그는 그동안의 침체에서 벗어나 흥행과 예술성 면에서 두 마리 토끼를 잡았다. 그러나 오랫동안의 생활고와 영화촬영 시의 과로 등이 겹쳐 지병인 폐결핵이 악화되면서 35세라는 아까운 나이에 요절하고 말았다. 나운규는 영화계에 입문해 활동한 약 15년 동안 29편의 작품을 남겼고, 26편의 영화에 출연했으며, 그중에서 직접 각본·감독·주연을 맡은 영화가 15편이나 된다. 그는 투철한 민족정신과 자유로운 영화예술관을 가진 최초의 시나리오작가이자 감독 그리고 배우였으며 초창기 한국영화를 이끈 영화계의 선구자였다. 관련링크 인물사 연표 보기      관련이미지 41                                   나운규알제강점기에 활동한 영화인. 민족영화의 선각자이며, '아리랑';이라는 불후의 명작을 남겼다. 한국영화진흥공사 제공. 이미지 갤러리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 [네이버 지식백과]나운규 [羅雲奎] - [아리랑]을 만든 우리나라 영화의 선구자 (인물한국사, 김정미, 장선환)    
1    [그것이 알고싶다] - "아리랑"... 댓글:  조회:3088  추천:0  2019-11-01
창악집성 아리랑     요약 「아리랑(본조아리랑)」은 경기 민요다. 일반적으로 「아리랑」이라고 한다. 분류 경기소리 - 민요 목차 노랫말과 풀이 해설 관련항목 노랫말과 풀이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고개로 넘어간다] 나를 버리고 가시는 임은 십리(十里)도 못 가서 발병 난다 청천(靑天) 하늘엔 별도 많고 이내 가슴엔 수심(愁心)도 많다 풍년이 온다네 풍년이 온다네 이 강산 삼천리 풍년이 온다네 산천초목은 젊어만 가고 인간의 청춘은 늙어만 가네 [  ] 부분은 후렴 해설 「아리랑」은 우리나라를 상징하는 민요다. 그 종류가 매우 많으나 우리나라뿐 아니라 전 세계로 널리 퍼진 「아리랑」은 1926년에 나온 나운규의 영화 『아리랑』의 주제가였던 「아리랑」이다. 이를 다른 「아리랑」과 구분하기 위해 「본조(本調)아리랑」이라 한다. 본조란 본바탕이란 의미보다는 서울 본바닥이라는 의미다. 수많은 「아리랑」의 원조격에 해당하는 「아리랑」은 강원도 지방의 토속민요인 「정선아리랑(정선아라리)」이다. 「정선아리랑」은 「정선긴아리랑」과 「정선엮음아리랑」으로 구분된다. 조선말 경복궁을 중건할 때 강원도 지방의 인부들이 부른 「정선아리랑(정선아라리)」이 영향을 미쳐 서울 · 경기제의 「긴아리랑(서울긴아리랑)」과 「서울자진아리랑」이 나타난다. 이 「서울자진아리랑」을 변주한 새로운 아리랑이 바로 나운규의 「아리랑」이다. 나운규의 「아리랑」을 「본조아리랑」이라 부르기로 함에 따라 「서울자진아리랑」은 「구조(舅調)아리랑(구아리랑)」이라 부른다. 한편 1930년대 이후 「정선아리랑」을 변주한 신민요풍의 새로운 「아리랑」이 나타나는데 이를 「강원도아리랑」이라 부른다. 또한 「정선엮음아리랑」을 서울 · 경기제로 부른 「정선엮음아리랑(서울 · 경기제)」도 있다. 이밖에도 수많은 「아리랑」이 새롭게 형성되었는데 대표적인 것이 「진도아리랑」, 「밀양아리랑」, 「해주아리랑」 등이다. 「아리랑」은 우리 민족의 대표적인 민요로 여러 지방에서 수많은 「아리랑」이 있고, 새로운 「아리랑」이 계속 만들어지고 있다. 이를 도표화 하면 다음과 같다. 관련항목 「정선아리랑」, 「긴아리랑(서울긴아리랑)」, 「구조(舅調)아리랑」, 「강원도아리랑」, 「정선아리랑(서울 · 경기제)」, 「진도아리랑」, 「밀양아리랑」, 「해주아리랑」 참고문헌 이창배. 『한국가창대계』. 홍인문화사, 1976. 국립민속박물관. 『한국민속문학사전(민요 편)』. 관련이미지 47 이미지목록 이전                                       이미지목록 다음 이미지 이전 아리랑, 한국의 서정민요(Arirang, lyrical folk song in the Republic of Korea)© 2010 by Korean Traditional Performing Arts Foundation 원본보기 출처: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 [네이버 지식백과]아리랑 (창악집성, 2011. 07. 04., 하응백)   ====================================/// 한국민속예술사전 : 음악 아리랑     아리랑 목차 정의 역사 내용 특징 및 의의 정의 1926년 나운규 감독의 영화 의 주제곡으로 만들어져 널리 불리게 된 신민요의 제목 또는 그 이전부터 한반도 여러 지역에서 불리던 아리랑 계통의 악곡과 그 이후에 만들어져 불리는 다양한 아리랑 계통 악곡 모두를 포괄적으로 지칭하는 이름. 역사 은 ‘아리아리’, ‘아라리’, ‘아라성’, ‘아리랑’ 등의 입타령으로 된 후렴을 수반하는 장절형식의 민요군을 가리키며, 그 제목에 주된 전승 지역의 이름을 붙여 ‘○○아리랑’ 또는 ‘○○아라리’ 등으로 부르는 경우가 많다. 오늘날 아리랑 계통 악곡으로는 향토민요로 전승되는 노래를 포함하여 통속민요와 신민요, 나아가 대중가요나 예술가곡 작품으로 만들어진 악곡까지를 포함하기도 한다. 이 중 통속민요로 전승되는 아리랑은 , , , , , , , 등이 있다. 또한 이들 노래의 가락을 조금 변형하거나 가사를 다양하게 붙여 부르면서 제목을 달리하는 많은 노래들이 전승되고 있다. 함경도의 이나 평안도의 ·를 아리랑계 악곡으로 보려는 경우도 있으나, 이들 노래의 후렴에는 아리랑계 입타령이 들어 있지 않으므로 일반적으로 아리랑 계통 악곡에 넣지 않는다. 오늘날 아리랑으로 불리는 대표적인 악곡은 경기민요의 하나인 이다. 이 곡은 1926년 나운규감독의 영화 의 주제곡으로 만들어졌다. 그 이전과 이후의 다양한 아리랑계 악곡들과 구별하기 위하여 또는 이라 불리다가, 성경린·장사훈의 『조선의 민요』(1949)에서부터 이라 불리게 되었다. 내용 다양한 갈래의 아리랑계 악곡 중 향토민요로 전승되는 것은 강원도 지역의 노래들이다. 강원도 대부분 지역에서는 ··· 등으로 불리는 노래가 널리 전승된다. 3소박 3박을 기본 리듬으로 하고, 메나리토리의 선율로 구성된 이들 악곡은 비교적 느리게 불리기 때문에 흔히 라 부른다. 강원도의 중에서는 정선 지방의 노래가 널리 알려져서 흔히 이 노래를 또는 이라 부른다. 정선 지역에서는 를 부르다가 중간에 해학적인 내용을 담아 사설을 길게 확대하고, 이를 빠른 속도로 촘촘하게 엮어 부르기도 한다. 이 같은 노래를 라 한다. 반면에 강원 영동 지역에서는 2소박과 3소박으로 구성된 혼소박 리듬의 가 등의 노동요로도 불린다. 이 노래는 강원 영서 지역뿐만 아니라 경기도 동부와 충청북도, 경상도 북부 지역에 이르기까지 광범한 지역에서 불리고 있다. 오늘날 전승되는 아리랑계 악곡 중 향토민요(토속민요)로 확고한 전승 기반을 지닌 노래는 강원도에 바탕을 둔 위의 세 가지 아리랑이다. 따라서 다양한 아리랑계 악곡의 원형은 이들 세 아리랑이라 할 수 있다. 강원도 지역에 전승되던 향토민요 아라리계 악곡들이 조선 후기에 유희요로 통속화되면서 후렴의 ‘아라리’ 또는 ‘아리아리’라는 말이 ‘아리랑’이라는 말로 변하여 , , 등으로 그 명칭이 굳어진 것으로 보인다. 이 노래들이 경기 명창들의 공연용 악곡으로 수용되면서 은 , 은 이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다. 강원도 정선 지방에서 향토민요로 불리는 과 경기 명창들이 부르는 은 사설을 엮어 부르는 방법에 차이가 있어, 이를 구분하기 위하여 경기 명창들의 노래를 이라 부르기도 한다.  위의 경우는 전문 음악인인 경기 명창들이 강원도 지역의 향토민요를 수용하여 자신들의 공연종목으로 삼은 경우이다. 전문 음악인들은 음악적인 훈련을 거쳐 뛰어난 음악성을 지니고 있으므로, 자신에게 익숙하지 않은 음악어법의 노래도 본래의 모습에 가깝게 부를 수 있으나, 음악적인 훈련을 받지 않은 일반 서민·대중은 다른 지역의 음악어법으로 된 노래를 그대로 부르기는 쉽지 않다. 따라서 강원도 지역의 아리랑계 악곡들이 주변 지역으로 전파되면서 음악어법이 변화되어 새로운 노래를 만들게 되는데, 이 같은 변화가 활발하게 일어난 시기는 조선 말기로 보인다. 흥선대원군의 경복궁 중건에 따라 많은 인력을 필요로 하게 되자, 강원도 지역의 인력도 경복궁 중건 공사에 참여하게 되었다. 특히 목재의 주된 생산지였던 강원도에서는 다량의 목재를 뗏목으로 엮어서 남한강수운水運을 이용하여 서울 지역으로 수송할 인력을 필요로 하였다. 이 무렵 대표적인 뗏목의 출발 지역인 강원도 정선 지역의 인력이 대거 한양으로 진출하게 되었고, 이들에 의하여 강원도의 향토민요 아리랑이 서울·경기 지역에 전파된 것으로 보인다. 강원도의 아리랑이 서울·경기 지역에 전해지면서 본래 강원도의 음악어법인 메나리토리로 짜였던 노래가 서울 지역의 보편적인 음악어법인 경토리(진경토리)로 변화되어 불린 것으로 보인다. 그러한 변화의 과정은 1896년 헐버트H. Hulbert, 1863~1949가 채보한 에서 잘 드러나고 있다. 현재 경기 통속민요 중 이라는 곡명으로 전승되는 곡이 헐버트 채보의 과 같은 곡임을 볼 때, 이 곡은 19세기 말경에 서울·경기 지역에서 흔히 불렸음을 알 수 있다. 아리랑의 전승 과정에서 전환점이 되는 곡은 영화 음악인 이다. 1926년 나운규 감독의 영화 의 주제곡으로 만들어진 이 곡은 나운규 감독이 단성사 악단에 편곡을 의뢰하여 완성한 것이라 한다. 편곡자는 당시 단성사 극장의 변사이자 영화감독이었고, 작곡가이기도 하였던 김영환金永煥, 1898~1936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나운규는 고향인 함경북도 회령에서 청진까지 이어지는 철도 공사를 위하여 남쪽에서 온 노동자들이 부르던 가락을 기억하였다가 이를 바탕으로 영화 음악을 만들어 줄 것을 부탁하였다고 하는데, 영화 음악 의 후렴 선율을 살펴보면 강원도 지역의 선율 구조가 그대로 드러난다. 즉 메나리토리로 된 후렴 구절의 선율을 경토리로 변화시킨 것이 영화 음악 후렴구의 선율과 같다. 결국 나운규가 고향에서 들었다고 하는 선율은 함경도의 남쪽인 강원도 지역의 였을 가능성이 매우 크다. 강원도 지역의 메나리토리 곡조인 이 서울지방의 진경토리로 변화되어 경기민요 이 되었고, 강원도 이 전문 음악가의 편곡을 통하여 영화 음악 이 된 것이다. 그런데 메나리토리 구성음 중 최저음이 종지음이 되는 는 진경토리에 잘 맞았지만, 메나리토리의 중간음 ‘라’로 종지하는 는 진경토리와 달리 ‘솔·라·도·레·미’의 5음 음계 중 중간음인 ‘도’가 종지음이 되어 마치 서양 음악의 5음 음계 도선법, 즉 일본 음악의 요나누키 장음계와 같은 음계 구조를 갖게 되었다. 영화 의 대중적인 인기와 더불어 영화 음악 도 짧은 시간 안에 전국적으로 크게 유행하게 되었다. 이 노래는 당시 식민지 조선인의 정서를 대변하는 노래로 민족적인 감성의 표현인 동시에, 피압박 민족의 저항의식까지를 드러내는 노래로 한민족의 정서적 동질감을 형성하는 촉매 역할을 하게 되었다. 1930년대에 녹음된 유성기 음반의 아리랑 곡조들은 서양 악기의 반주에 창가식 창법으로 불렀으며, 전통민요가 지니고 있는 고유한 창법이나 시김새 등은 분명하게 드러나지 않는 경우가 많다. 그런 점에서 영화 음악 은 그 초기에는 민요라는 인식보다는 새롭게 만들어진 노래의 하나로 여겨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 음악 은 대중적인 지명도를 바탕으로 하고, 경기민요의 일반적인 특성인 5음 음계 진경토리와 구성음을 공유한다는 음악적 유사성을 더하여 ‘신민요’의 하나로 인식되기 시작하였으며, 전통음악을 연주하던 민요 명창들이 을 자신들의 공연 종목으로 수용하고, 유성기 음반에 녹음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다양한 아리랑계 악곡과의 구별을 위하여 이 곡을 이라는 이름으로 부르게 되었다. 여기서의 ‘본조’란 모든 아리랑의 근본이 된다는 의미가 아니라, 민요 명창들이 부르는 통속민요 아리랑계 악곡 중 서울 지방의 음악어법을 지닌 주된 아리랑이라는 의미로 보인다. 이 시기 식민지 조선을 떠나 해외로 이주한 동포들은 고향 땅을 떠나던 무렵에 전국적으로 불리던 을 조국의 상징처럼 여기게 되었으며, 타향에서 고향을 떠 올릴 때면 으레 아리랑을 부르면서 망향의 한을 달랬다. 이후 아리랑은 한민족 해외 이주민들에게는 조국의 상징이 되었으며, 제2의 국가처럼 온 한민족의 민요를 대표하는 노래의 위치에 서게 되었다.  이 무렵 서울 지역에서 활동하던 경기 명창들은 이나 등의 노래를 음반에 남기기도 하였으며, 강원도의 곡조를 바탕으로 이라는 이름의 노래를 유성기 음반에 녹음하기도 하였다. 이후 경기 명창들은 혼소박계통의 악곡인 강원도 를 수용하여 부르게 되었는데, 이 노래가 오늘날의 통속민요 이 되었다. 한편 경상남도 밀양 출신의 박남포는 의 선율을 차용하고, 밀양 지역의 설화 등을 토대로 노랫말을 붙여 을 만들었다. 다른 아리랑계 악곡에 비하여 경쾌하고 씩씩한 느낌의 이 곡은 광복군의 군가처럼 불리면서 이라는 이름도 갖게 되었다. 의 모곡으로 보이는 은 오늘날 이라는 이름으로 전승되고 있으나, 해주 지방과의 관련성은 없는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전라남도 진도 출신의 대금 명인 박종기는 1930년대에 의 곡조를 짰는데, 이 곡은 전라도 지역에서 불리던 향토민요 의 선율에 ‘아리아리랑 쓰리쓰리랑 아라리가 났네……’의 후렴을 붙인 것이다. 이후 전국 각 지역에서는 저마다 자기 고장의 전설이나 유명한 소재를 노랫말로 지어 다양한 아리랑 선율에 얹어 부르면서, 자기 고장의 이름을 앞에 넣어 ‘○○아리랑’이라 부르게 되었다. 이처럼 다양한 제목의 수 많은 아리랑이 있으나, 이들 악곡의 모곡이 된 것은 주로 , , , 등이다. 특징 및 의의 강원도의 향토민요였던 아리랑 계통 노래가 서울·경기 지역에 전해지고, 영화 의 주제곡으로 거듭나면서, 한민족의 민요를 대표하는 악곡이 되었다. 그리고 각 지역을 대표하는 아리랑계 악곡을 생성하는 전기를 마련하였으며, 수많은 아리랑계 악곡의 모곡이 되기도 하였다. 오늘날 아리랑은 단순한 민요의 차원을 넘어 세계 속에서 한국과 한민족을 상징하는 문화코드가 되었으며, 이제 아리랑은 세계 도처에 흩어져 사는 한민족을 하나로 묶는 구심점 역할을 하고 있다. 참고문헌 민요 아리랑에 대한 북한의 인식 태도(김영운, 한국 음악연구54,한국국악학회, 2013), 북한에 전승되는 민요 아리랑 연구(김영운, 한국민요학39, 한국민요학회, 2013), 아리랑소리의 근원과 변천에 관한 음악적 연구(이보형, 한국민요학5, 한국민요학회, 1997), 아리랑소리의 생성문화 유형과변동(이보형, 한국민요학26, 한국민요학회, 2009), 아리랑 형성과정에 대한음악적 연구(김영운, 한국문학과 예술7, 숭실대학교 한국문예연구소, 2011) 집필자 김영운(金英云) 갱신일 2019.01.22. 관련이미지 2                               이미지 이전 아리랑   [네이버 지식백과]아리랑 (한국민속예술사전 : 음악)   ===============================///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 아리랑, 한국의 서정민요   [ Arirang, lyrical folk song in the Republic of Korea ] 아리랑, 한국의 서정민요(Arirang, lyrical folk song in the Republic of Korea)원본보기 목록구분 대표목록 등재연도 2012년 국가 대한민국(Republic of Korea) 목차 지역 정보 본문 예능보유자 / 기능보유자 전승 정보 무형유산의 의미 한국의 대표적인 민요인 아리랑은 역사적으로 여러 세대를 거치면서 한국의 일반 민중이 공동 노력으로 창조한 결과물이다. 아리랑은 단순한 노래로서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오’라는 여음(餘音)과 지역에 따라 다른 내용으로 발전해온 두 줄의 가사로 구성되어 있다. 인류 보편의 다양한 주제를 담고 있는 한편, 지극히 단순한 곡조와 사설 구조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즉흥적인 편곡과 모방이 가능하고, 함께 부르기가 쉽고, 여러 음악 장르에 자연스레 수용될 수 있는 장점이 있다. 전문가들에 따르면 ‘아리랑’이라는 제목으로 전승되는 민요는 약 60여 종, 3,600여 곡에 이르는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인간의 창의성, 표현의 자유, 공감에 대한 존중이야말로 아리랑이 지닌 가장 훌륭한 덕목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다. 누구라도 새로운 사설을 지어 낼 수 있고, 그런 활동을 통해 아리랑의 지역적·역사적·장르적 변주는 계속 늘어나고 문화적 다양성은 더욱 풍성해진다. 아리랑은 한민족 구성원들에게 보편적으로 애창되며 사랑받고 있다. 그와 동시에 각 지역사회와 민간단체 및 개인을 포함하는 일단의 지방 민요인 아리랑 전수자들은 해당 지방 아리랑의 보편성과 지역성을 강조하면서 대중화와 전승을 위해 적극적으로 노력하고 있다. 아리랑은 또한 영화·뮤지컬·드라마·춤·문학 등을 비롯한 여러 다양한 예술 장르와 매체에서 대중적 주제이자 모티프로 이용되어 왔다. 국내에서든 해외에서든 한민족을 하나로 묶고 소통을 가능하게 하는 힘을 가진 아리랑은 심금을 울리는 한민족의 노래이다. 지역 정보 아리랑은 한민족의 가장 대표적 민요로서 널리 알려져 있다. 한국에서 가장 유명한 아리랑은 강원도의 ‘정선 아리랑’, 호남 지역의 ‘진도아리랑’ 경상남도 일원의 ‘밀양아리랑’ 등 3가지이다. 아리랑은 해외에서도 널리 알려져 있어 세계 어디에 거주하든 한국인과 대한민국, 또 한국인과 다른 한국인 사이를 이어주는 문화의 탯줄과 같은 역할을 하고 있다. 이러한 감정적인 연결 끈은 특히 20세기 초 일제강점기에 이주하여 한국인들이 많이 살고 있는 일본·중국·러시아 및 중앙아시아 국가들에서 가장 뚜렷하게 확인된다. 아울러 비교적 최근에 이민을 통해 이주한 브라질·독일·미국·캐나다·오스트레일리아·뉴질랜드 등지의 한국인들 사이에서도 아리랑은 활발하게 전승되고 있다. 본문 한민족이라면 거의 모두가 아리랑을 알고 즐겨 부른다. 아리랑은 단일한 하나의 곡이 아닌 한반도 전역에서 지역별로 다양한 곡조로 전승되었다. 전문가들은 ‘아리랑’이라는 제목으로 전승되는 민요의 수가 약 60여 종, 3,600여 곡에 이르는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아리랑은 기본적으로 단순한 노래로서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오’라는 공통적으로 반복되는 여음과 지역에 따라 다른 내용의 사설로 발전했다. 가장 널리 알려진 대표적인 아리랑의 가사(사설)는 인간의 보편적인 감정을 표현하고 있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를 넘어간다. (여음) 나를 버리고 가시는 님은 십리도 못 가서 발병 난다. (사설)” 아리랑의 사설은 특정 개인의 창작물이 아니라 여러 세대에 걸쳐 한국 일반 민중이 공동으로 창작한 결과물이다. 따라서 사랑, 연인과의 이별, 시집살이의 애환, 외세에 맞선 민족의 투쟁 등 민중이 삶의 현장에서 느끼는 희로애락의 감정을 노랫말에 담았다. 아리랑에 대한 관심과 애정은 한국의 전통음악이라는 영역을 넘어 초현대적인 한국 문화의 모든 장르에서도 확인되고 있다. 아리랑은 발라드·로큰롤·힙합 등의 다양한 현대의 대중가요 장르는 물론이고 관현악곡 등으로도 편곡되어 폭넓은 청중에게 호소하며 한민족의 심금을 울리고 있다. 이런 이유로 아리랑은 한국의 비공식적 국가(國歌)로 묘사되기도 한다. 올림픽 금메달리스트인 김연아 선수는 2011년 세계피겨스케이팅 선수권대회에서 아리랑 선율을 주제로 편곡한 ‘오마주 투 코리아(Homage to Korea)’라는 음악을 배경으로 피겨스케이트 프로그램을 연기하기도 하였다. 한국의 가장 대표적인 문화 상징의 하나이기도 한 아리랑은 영화·연극·텔레비전 드라마의 소재로, 상품명이나 식당 이름, 방송국 회사 이름 등으로 폭넓게 이용되고 있다. 예능보유자 / 기능보유자 아리랑은 한민족이 보편적으로 애창하는 곡이다. 그와 동시에 각 지역사회와 민간단체 및 개인을 포함하는 지방 아리랑 전수자들은 해당 지방 아리랑의 보편성과 지역성을 강조하면서 아리랑의 대중화와 전승을 위해 적극적으로 노력하고 있다. 이와 같은 공적·사적 영역에서의 노력은 동시다발적이고 열정적이며 또한 상호보완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중앙 정부 및 각 지방 자치단체는 예능보유자 및 기능보유자 또는 단체를 국가무형문화재 예능보유자, 또는 시·도 무형문화재 예능보유자 (‘인간문화재’)로 지정하고 있으며, ‘문화재보호법’에 따라 이들의 기예가 전승될 수 있도록 전수교육을 지원하고 있다. 따라서 전수 단체 및 개인은 미래 세대에게 아리랑을 전승할 특별한 책임을 지고 있다. 아울러 지역의 많은 민간단체들은 해당 지방 아리랑의 보존을 위해서 헌신하고 있다. 대부분 해당 지역의 명창이 주도하고 있는 아리랑 보존회들은 전문 소리꾼, 그리고 특별 프로그램에 따라 훈련받은 연구자들이 있다. 아리랑 보존회는 공연, 전수교육, 홍보, 해당 지방 아리랑의 고유한 특징을 강조하는 등 다양한 활동을 수행하면서 해당 아리랑의 보존 및 전승에 힘쓰고 있다. 이들 단체 중에서도 특히 정선아리랑 보존회, 진도아리랑 보존회, 밀양아리랑 보존회 등이 대표적이다. 전승 정보 한국인이라면 요람에서부터 아리랑을 배운다. 그러나 한국을 대표하는 민요로서 아리랑의 폭넓은 인기는 일상생활에서의 지속적인 노출과 광범위한 공교육 프로그램의 힘이 컸다. 명창, 각종 보존회, 전문 음악가, 초등학교·중학교 및 국립국악원 등은 아리랑의 보급 및 전승을 위한 여러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다. 아울러 이들의 노력 뒤에는 그에 상응하는 대중의 요구와 열정이라는 원동력이 존재한다는 점 역시 의심할 여지없는 사실이다. 국가가 지원하는 무형문화재 전수교육 및 전승 프로그램은 아리랑의 세대 간 전승을 위해 주력한다. 국가 공인 예능보유자들은 주민의 열정적인 참여 속에 1주일에 1번 또는 2번 단위로 정규 전수 교육을 실시하고 있다. 또한 매년 새로운 공연을 기획하고 선보임으로써 사회의 문화적 소외 계층에게도 다가가고 있다. 공교육 기관에서도 아리랑을 광범하게 교육하고 있다. 아리랑은 초등학교·중학교 음악 수업 및 방과 후 활동의 의무 교과 과정에 포함되어 있다. 각 지방 자치단체에서 운영하는 지역 문화센터에서는 아리랑 보존회와 명창을 초청하여 아리랑을 교육하거나 관련된 문화 체험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최고 기량의 한국 전통 음악인들의 전당인 국립국악원은 참신한 전통 음악 축제를 통하여 아리랑 홍보활동에 기여하고 있다. 그 분원인 국립부산국악원과 국립남도국악원(진도 소재) 역시 수준 높은 공연을 통하여 국내외 아리랑의 홍보에 있어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무형유산의 의미 2006년 6월 대한민국 정부는 설문조사를 토대로 한국을 대표하는 ‘100대 민족문화상징’ 중 하나로 아리랑을 선정했다. ‘시간적·공간적으로 가장 널리 불리는 민족의 노래’라는 것이 선정 이유였다. 근대 이전의 아리랑은 전통 사회의 서민들이 느끼는 기쁨과 슬픔을 담고 있었다. 일제강점기에는 한민족이 겪어야 했던 개인적·국가적 차원의 고난, 가슴속에 품은 독립을 향한 열망을 표현하는 수단이었다. 한국인들이 부르는 아리랑의 가락을 타고 전달되는 이러한 희망과 바람 덕분에 아리랑은 여전히 살아 숨 쉬는 문화유산으로서 현 세대에서 다음 세대로 면면히 전승되고 있다. 오늘날 아리랑은 한민족의 통합에 있어서도 한몫 하고 있다. 2000년 시드니 올림픽 개회식에서는 남한과 북한의 대표팀은 올림픽 경기장에 공동 입장하면서 함께 아리랑을 불렀다. 2002년 한국 - 일본 월드컵 경기가 진행되는 동안 한국 축구 국가대표팀을 응원하는 열정적인 응원단체인 ‘붉은 악마’는 아리랑을 날마다 불렀다. 이처럼 국가적으로 매우 중요한 의미 있는 매순간에 한민족을 하나로 묶어 주는 힘을 지닌 아리랑은 심금을 울리는 민족의 노래라고 여겨져 왔다. 해외에서 거주하는 한국인들이 아리랑을 함께 부를 때마다 그들의 민족 정체성을 재확인하는 한편, 고국의 동포들은 각 지방의 아리랑이 해당 지방의 정체성을 더욱 돈독하게 한다고 믿고 있다. 아리랑은 또한 영화·뮤지컬·드라마·춤·문학 등을 포함하는 여러 다양한 예술 장르와 매체에서 대중적인 주제이자 모티프로 이용되어 왔다. 해외에서 일고 있는 한국 대중음악 열풍과 함께 오늘날의 아리랑은 한국을 가장 명확하게 대표하는 문화 상징이자 음악적 영감의 순수한 원천으로서 전 세계인에서 알려질 것으로 보인다. 관련이미지 47 이미지목록 이전                                       이미지목록 다음 이미지 이전 아리랑, 한국의 서정민요(Arirang, lyrical folk song in the Republic of Korea)© 2009 by Jeongseon Arirang Research Institute 원본보기 출처: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 [네이버 지식백과]아리랑, 한국의 서정민요 [Arirang, lyrical folk song in the Republic of Korea]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 인류무형문화유산(영/불어 원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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