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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감동의 스승님 김수철교수(김수철전 5) 댓글:  조회:3519  추천:3  2019-12-01
나는 연변농학원 제3기 졸업생이다. 나는 김수철교수의 제자로 연변농학원을 졸업한후 연변농업과학원에 배치되여 연구원으로 사업하다가 정년퇴직을 하였다. 나는 “길림신문”에 실린“감동인물”을 즐겨보는 독자인데“감동인물”이 어떤 경로와 추천을 통해 신문에 발표되는지를 모른다.  나는 “감동인물”을 읽을 때마다 아쉬움이 있었다. 왜냐면 우리 조선족의 동아급(東亞級)식물학자로 “21세기의 리시진”이라 불리는 김수철교수는 왜 “감동인물”에 오르지 못하는가는 의문 때문이였다. 김교수는 93세를 넘은 고령학자로서 학자의 책임감과 식을 줄 모르는 사업 열정으로 “내가 죽기전에 못다한 일을 끝까지 마무려야 한다”며 사모님마저 불편하다며  딸집에 보내고 혼자서 자취하면서 식물을 채집하고 연구하며 많은 저서를 출판한 저명한 식물학자이다. 1947년에 김수철은 룡정의과대학 입시시험에 합격되였다가 정치심사에서 가정성분이 “규편중농”라는 원인으로 학생자격을 취소당했다. 그후 연변대학이 선후 연변대학 농학부 수의학과에 입학 하였는데 모종 윈인으로 연변대학 농학부를 농업전과로 격을 낯주니 학생들이 동맹휴학을 하면서 반대한 원인으로 학교당국에서 농학부를 취소하고 농학부학생들을 다른 학부로 전학시켰는데 그때 김수철선생은 다른 한 친구와 함께 할빈에 있는 동북농학원에 입학하고 얼마간을 다니다가 동행한 친구가 한어교학이 힘들다며 중퇴하려니 부득불 함께 연변으로 돌아 왔다. 얼마후 연변대학 농업전과 학부에서 김수철을 식물학 실험원으로 배치하였다. 김수철선생은 대학공부를 1년밖에 못하고 말단 실험원으로 열심히 독학을 하면서 식물을 채집하여 실험표본을 만들고 그림도면을 그리면서 식물학을 전공 하였다. 노력의 뿌리는 쓰지만 노력의 열매는 달았다.  1952년 학교지도부에서는 김선생을 교단에 올려 식물분류학을 강의하게 하였다. 식물분류학은 많은 식물을 세분하게 갈라야하고 영어, 라틴어, 중국어, 조선어, 로씨아어, 일본어 등 여러 나라의 언어를 장악해야 하는 과목인데 그때 김선생은 로어공부를 하면서 교학을 시작하였다.  그는 밤을 새우면서 공부하며 열심히 비과를 하였기에 우리가 강의를 받을 때 그의 얼굴을 보면 늘 수척해 보였고 두눈이 침침한 상태였다. 그때의 나의 인상에 (저 선생님이 교학을 위하여 얼마나 열심히 준비하였기에 저렇게 피곤해 보일까?) 는 느낌이 머리속에 자리를 하였다. 나에게는 식물분류학과목이 제일 어려웠다. 왜냐면 식물분류학은 소유의 식물종류의 분포, 식물이 속하는 과, 속, 식물의 학명, 특성… 등을 암기해야 할 내용이 너무나 많기 때문이다. 나는 김선생님의 강의를 두 학기를 받으면서 시험에 겨우 통과되였다. 그래도 그만한 기초가 있었기에 공작에 참가한후 1956년에 길림성수리보편조사단의 단원으로 주내 하류량안의 토양조사임무를 맡고 전 주내를 답사하면서 연변의 토양류형, 식물피복, 지질모질(地質母質)을 훌륭히 집필하여 해당부문의 충분한 긍정을 받았다. 허나 졸업후의 세월은 김선생님과 나의 연구분야가 다르기에 자주 접촉할 기회가 없었다.  세월은 흘러 지금은 스승님은 93세, 나는 86세의 로인이 되였다. 지난 2016년의 어느하루, 나는 연변대학 농학원 리퇴직교원 몇몇 분들과 함께 김수철선생님의 평생연구기지인 룡정시 조양천진 삼성촌을 처음 방문한 적이 있다.  그때 몇 십년만에 만났는데 그의 옥체가 너무나도 건강하기로 정말 감동적이였다. 교수님은 비록 허리가 구불었으나 정신상태, 기억력, 눈정신은 모두가 우리 제자들보다도 훨신 좋았다. 방안의 네 벽은 몽땅 책무지로 막혔고 구들도 온통 책무지와 식물그림으로 널려 있었다. 그는 로친이 곁에 있으면 불편하다며 딸집에 보내고 혼자서 자취를 하면서 계속하여 식물연구를 하였다. 나는 그때 김선생님이 왜 이렇게까지 자기의 사업을 열애하고 그렇게도 열심히 일을 할가!? 그는 만년에 왜 아빠트를 떠나서 이 산골의 외딴집에서 고생을 찾아 하는가에 정말 믿어지지 않았다. 선생님은 여태껏 중국에서 이름난 교수도 아니고 신문지상에 뻐젓이 소문난 학자도 아니건만 90고령에도 아직 하려는 일을 못 끝냈다면서 그렇게도 열심히 일을 할가? 는 생각으로 선생님을 쳐다보기마저 부끄러웠다. 정년퇴직후 나를 포함한 많은 사람들이 무슨 일을 할 념을 안하고 그럭저럭 세월을 보내는데 저 로인의 꿈은 도대체 무엇일까?  나의 머리속에는 이런저런 미지의 물음들이 줄지어 떠올랐다. 김생님은 평생 남들의 앞에서 자기를 나타내지 않았고 꼬물만치의 승급욕이 없는 사람으로 그의 인생철학을 어떻게 평가하면 좋을지 나로서는 답이 없다. 김선생님은 지난세기 5, 60년대 우리나라 경제곤난시기에 얼마도 안되는 봉금으로 집살림을 유지하면서 자식들을 뒤바라지를 하였고 한눈도 팔지않고 교학에만 정력을 몰부었다. 후에 생할이 펴워도 남들처럼 편히 행복한 생활을 하려는 생각은 추호도 없이 식물학에 미쳐버렸다. 길을 가면서 길가의 식물에만 눈을 팔았고 약용식물을 찾는데만 정신을 팔았다. 김교수는 꾸준한 독학으로 국제학술론문발표회에서 영어, 일어, 한어, 조선어로 학술론문을 발표하고 장백산자원식물연구로  세계식물학술계의 중시를 받았다. 김교수는 명문대학도 다니지 못했고 말단 실험원으로부터 강사, 부교수, 교수로 부상 되였다. 교수님의 바람은 오직 하나 ㅡ “내가 아직까지 채 하지 못한 일을 끝까지 하고 죽어야  한다”는 학자의 고상한 책임감을 지키고 실현하는 것이다. 스승님은 진정 사람을 감동시키는 교수, 식물학자로 우리 삶의 영원한 본보기이다. 제자는 스승님의 건강장수를 기원한다.   서규쳘                                 2018년 3월 2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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