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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21세기의 '리시진' 김수철 전"( 련재 18) 댓글:  조회:2251  추천:2  2020-08-01
18. 나, 일본학자 그리고 일본행 나와 일본과의 인연은 동북림업대학 류삼규 박사가 맺어주었고 또 그를 통해 돈독히 하였다. 동북림업대학에서는 자주 국제학술보고회를 조직하였는데 류박사는 일본의 저명한 학자들이 오기만 하면 꼭 나를 초청하군 하였다. 그럴 때마다 나는 일본학자들과 류창한 일어로 식물학지식들에 관해 교류를 하군 하였다. 그리고 일본교수들은 저들의 박사연구생들을 나에게 맡겨 실습지도를 받게 하였다. 일어에 능숙한 나는 어느새 그들과 우스개도 주고받는 허물없는 사이로 되였고 그들과 려행도 하면서 즐거운 시간을 보내기도 하였다. 그뿐이랴! 나는 청소년시기에 읽었던 일본문학작품들을 떠올리면서 그들과 일본문학작품에 대해 교류를 진행하기도 하였다. 내가 청년 때에 일본문학작품을 읽으면서 접했던 사이죠 야소(西条八十), 야마다 비묘우(山田美妙), 오자끼 시로우(尾崎士郎), 미끼 로흐우(三木露风) 등 일본작가들에 대해 언급하자 젊은 일본학자들은 그 자리에서 핸드폰으로 검색해보고는 “아! 그런 작가들이 있었습니다!” 하며 나의 일본문학지식에 대해 감탄을 금치 못했다. 그 후 나는 류박사 덕분에 일본행도 할 수 있었다. 박사연구생―아베(阿部) 동북림업대학에 드나드는 일본 동경대학 학술단 단원들중에는 이이야마(饭山)라는 가장 년로하고 저명한 학자가 있었다. 그는 동경대학 교수로 있을 때 자기의 박사연구생 아베를 흑룡강성 안달에 있는 류삼규 박사의 실험지로 데리고 와서 나한테 맡기며 실습지도를 부탁하였다. 나는 아베를 온종일 풀밭에 데리고 다니면서 교학지도를 하였다. 하루는 식물실습을 끝낸 후 나와 아베 단둘이서 길가에 걸터앉아 한담을 하고 있는데 실습지의 식당을 관리하는 한 아가씨가 우리에게 포도를 건네주며 먹으라는 것이였다. 나는 포도를 껍질을 뱉지 않고 대강 씹어서 삼켜버렸지만 아베는 포도즙만 빨아먹고는 껍질과 씨는 뱉아버리는 것이였다. 그래서 나는 롱담조로 아베에게 말을 걸었다. “아베야, 포도는 야만인처럼 먹어야 몸에 좋단다. 껍질에는 즙보다 더 진한 안토시아닌과 활성물질이 있어 버리면 랑비란다. 그리고 씨는 미끌미끌하여 통째로 삼키기 쉽단 말이야. 씨에는 영양분이 그닥 많지는 않지만 넘기면 위벽과 장벽 청소도 해주고 변배출도 촉진하는 역할을 하지.” 총명한 아베는 나의 말이 떨어지기 바쁘게 “참 옳은 말씀입니다. 좋은 일은 서둘러서 실행하라고 했으니 저도 선생님처럼 먹어보겠습니다.” 하며 내가 알려준 대로 먹기 시작했다. 꾸밈이 없고 순박한 그의 마음이 기특하게 느껴졌다. 그 후 내가 요청으로 동경대학에 갔을 때 마침 아베가 다까노 데쯔오(高野哲夫) 교수의 학생으로 박사공부를 하였기에 우리는 서로 만나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있었다. 아베가 그 때 포도를 먹던 이야기를 꺼내 우리는 한바탕 폭소를 터뜨렸다. 오매불망하던 일본행 1) 나의 일본행 조건 류삼규 박사와 일본학자들의 노력으로 나는 2007년에 일본 동경대학에서 조직한 ‘장백산야생자원식물세미나’에 참석하게 되였다. 그리고 이란 론문을 발표하기로 하였다. 론문의 필자로는 나외에 류삼규, 오명근, 다까노 데쯔오 등 교수들이였다. 론문의 키워드와 요점은 영어로, 그 외의 것은 일어로 서술하였는데 론문 전부를 나절로 컴퓨터로 타자해야 하였다. 일문타자는 처음 해보는 일이라 걱정이 앞섰으나 마음을 먹고 해보니 크게 어렵지는 않았다. 론문은 A4용지로 6페지에 달했다. 보고할 때 환등편도 30장을 준비하였다. 이 작업은 오명근 박사가 협조하기로 하였다. 일본 동경대학에서 요청한 목적은 바로 내가 직접 론문을 발표하는 것이였으므로 나의 론문작성이 내가 일본행을 할 수 있은 가장 관건적인 요건으로 되였다. 나의 출국수속은 처음부터 오명근 박사가 책임지고 했고 나는 그와 함께 2007년 5월에 연길에서 떠나 대련에서 하루밤을 체류하고 이튿날에 일본행 비행기에 탑승하였다. 2) 창공에서 본 일본 흐린 날씨였지만 비행기가 구름 우로 오르니 기내는 개인 날처럼 해볕이 쬐였다. 비행기가 황해를 날아 산동반도에 이르더니 거기서 다시 가없는 푸른 바다를 동행하며 서울을 지나 부산을 경유했는데 현해탄을 건널 때 나는 꾸벅꾸벅 졸기까지 하였다. 그런 와중에 얼마쯤이나 지났을가. 나는 그만 화뜰 놀라 정신을 차리고 하늘 아래를 부감했다. 마침 후지산(富士山)이 흰머리를 구름 밖에 내놓고 위용을 떨치고 있지 않겠는가! 아! 후지산! 내가 어려서부터 들었던 후지산에 관한 이야기들이 눈사태처럼 밀려와 나의 머리를 황홀케 했다. 하지만 아쉽게도 그렇게 매혹적인 후지산도 눈 깜빡할 사이에 지나갔다. 비행기에서 본 일본의 산야는 푸르른 록지였다. 곳곳에는 깨끗하고 네모난 논밭과 네델란드에서나 볼 수 있는 넓고 울긋불긋한 꽃밭들이 경관을 이루었다. 해안선을 따라 날던 비행기가 내륙으로 향하더니 낮게 뜨며 잠간 사이에 나리다공항에 착륙했다. 모든 입국수속을 끝마치고 출구로 나오니 류삼규, 다까노 데쯔오, 장흔흔(张欣欣) 등이 마중을 나와 반기며 짐을 차에 실어주었다. 다까노 데쯔오 박사가 중형 승용차를 몰고 동경대학을 향해 달렸다. 3) 국제교육기지에서 일본엔 황사가 없는지 길가의 초목들이 한결 더 푸르러보였다. 게다가 무상기가 긴 때문인지 나무가지는 우리 동북보다 더 길게 자라서 나무의 모양들이 달라보였다. 천백년에 이르는 고목들이 도처에서 위용을 떨치고 있었다. 목적지에 도착하여 내리니 그 곳은 동경대학 농장과 실험교학청이 즐비하게 들어선 원림지였다. 우리의 숙소는 다까노 데쯔오 박사의 연구소 부근에 있는 이층회관에 정해졌다. 회관의 길쭉한 강당은 미닫이로 칸막이를 하여 평시의 리용에 편리를 주었다. 바닥은 일본 특유의 다다미로 깔았는데 다다미는 길게 자란 골풀로 짠 돗자리와 벼짚을 한데 꿰매여 다진 것이였다. 이부자리는 포근한 비단이불과 비단요였다. 그 넓은 방을 나와 오명근 박사 단둘이 차지하였다. 회관을 관리하는 50대 남성인 다까노 데쯔오(高野哲夫) 교수가 자주 와서 우리에게 도움을 주군 하였다. 그는 생각 밖으로 내가 일본말을 잘하는 것을 알게 된 후부터는 더 자주 드나들면서 얘기를 주고받았고 지어는 롱담까지 하면서 허물없이 지냈다. 동경대학 아시아환경자원연구중심이 바로 여기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 다까노 데쯔오 교수는 우리들에게 자기의 연구실을 구경시켰다. 류삼규 교수의 비서역할을 담당하고 있는 동북림업대학의 장흔흔도 다까노 데쯔오 교수의 도움으로 일본 문부성(文部省) 국비류학생으로 여기에서 박사공부를 하고 있었다. 장흔흔의 부모님들은 흑룡강성 대경에서 살고 있었는데 장흔흔은 무남독녀로서 부모님들이 금이야 옥이야 하며 키웠다. 여기는 장흔흔을 비롯한 세계 여러 나라에서 온 박사연구생들로 운집된 학부였다. 장흔흔외에 인도네시아에서 온 녀박사연구생도 있었는데 내가 “만나게 되여 반갑소.”라고 했더니 그녀도 “저도 교수님을 만나니 반갑습니다.”라고 인사를 받는 것이였다. 내가 다시 그녀의 이름을 묻자 그녀는 “저의 이름은 엘리자예요.”라고 수집어하면서 대답하는 것이였다. 따라서 여기가 바로 높은 국제적인 차원의 교육기지임을 감수할 수 있었다. 이럴 때 쯤에 물찬 제비마냥 호리호리한 몸매의 한 처녀애가 달려들어오는 것이였다. 찬찬히 보니 아베였는데 다까노선생의 제자로 여기에 와서 박사공부를 하고 있는 중이였다. 이이야마 교수가 쯔꾸바(筑波)세계농업연구소의 소장으로 전근하니 아베도 여기에 오게 되였고 한다. 너무나도 반가웠다. 우리는 또 안달에서 포도를 먹던 얘기를 나누면서 웃음꽃을 피웠다. 4) 국제학술보고회 2007년 6월 3일은 내가 평생 잊지 못할 날이다. 그것은 내가 아시아의 최고학부인 동경대학에서 조직한 ‘장백산야생자원식물세미나’에서 론문발표를 하기 때문이였다. 청중들 모두가 대학 교수, 저명한 학자, 박사였을 뿐만 아니라 여러 나라에서 온 우수한 박사연구생들로서 ‘학술보고를 일삼으면서 학술생애를 이어가는 사람들’이였다. 때문에 학술보고 수준의 여하를 가늠하는 론문평론에서 신경이 바늘끝마냥 예민하고 또 야박할 정도로 보고서의 내용을 족집게질 하는 청중들인 것 만큼 일언반구라도 틀린다면 그보다 더 체면이 깎일 일은 없을 것 같았다. 그래서 어떻게 하면 이 어려운 고비를 넘길 수 있겠는가 하는 생각으로 나만이 갖고 있는 절대적인 우세를 하나씩 더듬어보기 시작했다. (1) 나에게는 한국자원식물학회에서 주최한 국제학술보고회에서 여러 차례 보고를 한 국제무대의 경험과 단련이 있다. (2) 나는 식물의 일어명칭을 많이 알고 있고 능숙한 라틴어와 영어로 식물학명을 말할 수 있다. (3) 나는 장백산식물현지답사를 많이 했었기에 돌연적인 질문을 받더라도 잘 응부할 자신이 있다. (4) 일어가 능숙하기에 나의 의사를 막힘없이 표달할 수 있다. (5) 류삼규 박사와 오명근 박사가 나를 많이 고무격려해주고 기술적으로도 많이 협조해줄 것이다. 오박사가 식물환등방영을 담당하기에 뒤심이 든든하다. (6) 보고의 조직자이며 사회자인 다까노 데쯔오 박사가 나를 적극적으로 지지해줄 것이다. 이러고 보니 나는 모든 조건에서 절대적인 우세를 차지하고 있는 것 만큼 겁나하고 잘하지 못할 리유가 거의 없었다. 나는 우선 영문과 일문으로 된 서면학술보고 100부를 대회에 참석한 사람들에게 발부하였다. 학술보고가 시작되였다. 얼핏 둘러보니 청중들이 50~60명은 잘되는 것 같았다. 나 한 사람 때문에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금쪽같이 귀중한 시간을 빼앗긴다고 생각하니 너무나 감격스럽고 죄송스러웠다. 다까노 데쯔오 박사가 연단에 올라 나를 소개하고 나서 청중들에게 부탁까지 하였다. “중국의 저명한 식물학자이신 김수철 교수가 동북아에서도 가장 전형적인 식물의 수직분포와 우리 나라의 후지산과 많이 류사한 중조변경에 자리한 장백산식물에 대한 보고를 하십니다. 저는 중국 할빈에서 김교수님을 자주 만나보았고 또 지금까지 친하게 지내고 있습니다. 여러분께서 박수를 아끼지 맙시다.” 나의 보고는 오명근 박사의 능란한 컴퓨터조종환등기술로 원만히 마무리를 하였다. 보고가 끝나자 한 청년이 일어나서 나에게 질문했다. “장백산이라면 산꼭대기에 일년 내내 흰눈이 덮여있겠지요?” “눈은 7~8월이면 거의 녹고 9~10월이 되면 또 내립니다. 장백산은 산봉이 흰 부석이기 때문에 눈이 없어도 그냥 하얗게 보입니다.” 이어 나는 말했다. “땅은 사시장철 내내 얼어있는 동토대(冻土带)구요.” 이 때 또 한 청년이 일어나서 질문했다. “우리 나라의 후지산엔 키가 2m에 달하는 왕엉겅퀴가 있는데 그런 식물이 장백산에도 있는지요?” “그건 정말 굉장히 큰 엉겅퀴입니다. 내가 래일 후지산으로 가는데 그걸 찾아보려고 합니다. 그걸 천추만대 후세에 남겨줄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우리 장백산에도 엉겅퀴가 있지만 그렇게 큰 종류는 없고 다만 그에 비교할 만한 것으로 도깨비엉겅퀴가 있는데 귀엽고 아름다워 등산자들의 사랑을 많이 받는답니다.” 내가 대답하자 바람으로 다까노 데쯔오 박사가 페회를 선포했다. 그리고는 연단에서 내려오는 나를 마중하며 두 손을 힘껏 잡아주더니 흥분에 넘쳐 찬사까지 보내주었다. “학술보고가 아주 성공적이였습니다! 축하합니다!” 이날 보고에 대해 나보다도 더 걱정한 분들이 있었으니 그들이 바로 류삼규 박사와 오명근 박사였다. 보고가 끝나자 그들은 나의 손을 굳게 잡으면서 격동에 못이겨 이렇게 말했다. “보고가 정말 성공적이였습니다!” 5) 축하파티 한국자원식물학회에서는 매번 국제학술보고회가 끝날 때마다 어김없이 꼭 축하파티를 열었다. 이런 파티는 대회의 성공을 축하하려는 것이 목적이였지만 보고회 참가자들의 호상간의 친목을 도모하려는 목적도 없지 않아 있었다. 이번 국제학술보고회는 아시아에서 최고학부로 손꼽히는 동경대학에서 열렸으므로 그 축하파티도 당연히 동경대학에서 치르게 되였다. 시장에서 여러가지 해산물과 육류, 과채, 조미료를 구입해왔다. 점잖아보이는 다까노 데쯔오 박사가 친히 팔을 걷고 나서자 수하의 젊은 교수, 박사, 연구생들도 그저 보고만 있을 수가 없었다. 결국엔 식당 아줌마까지 모두 동원되여 파티준비에 나섰다. 저녁때가 되여서야 축하파티가 시작되였다. 술에 얼근히 취한 지식인들이 평소의 침묵을 깨고 이야기꽃을 피우기 시작했다. 나는 다까노 데쯔오 박사와 다정하게 마주앉아 마음을 주고받기 시작했다. 나는 술기운을 빌어서 아시아차원의 생태환경과 자원식물연구, 그리고 인재양성에 대한 다까노 데쯔오 박사의 공로를 극찬하였다. 따라서 나는 중한수교를 수립함에 있어서 위훈을 떨친 한국의 애국화교인 한성호 박사가 북경대학에서 웅변을 토할 때 “중국사람들은 웃음과 박수에 너무 린색하다.”고 하며 남을 칭찬하기를 싫어하는 중국사람들의 린색함을 지적했다는 글을 읽은 적이 있는지라 중국사람들도 린색하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자주 박수를 보내며 웃음꽃을 피웠다. 좋은 점은 서로간 찬양하고 앞으로 서로 버팀목이 되며 속심을 털어놓을 수 있는 이러한 파티는 무성한 줄기와 잎으로 되여 보다 아름답고 큰 꽃을 피울 것이며 보다 크고 쓸모 있는 열매를 맺게 할 것이다. 동경대학에서의 학술보고는 나의 학술연구에서 종지부가 아닌 시발점으로 되였다. 자만자족하면 종착점이 되고 허심탐구하면 시발점이 되니깐. 6) 아, 후지산! 오매불망 바라던 것이 그 어떤 우연한 기회에 이루어지게 되는 메커니즘은 그 누구도 모를 것이다. 동경대학에서 학술보고를 끝낸 이튿날, 연변농학원 졸업생인 장거현(张巨贤)이 찦차를 몰고 우리 거처에 왔다. 후지산으로 놀러 가자는 것이였다. 나의 평생소원이 류삼규 박사의 배려로 이뤄진 것이였다. 영원히 잊지 못할 시각이였다. 나, 오명근, 류삼규는 장거현이 운전하는 찦차에 앉아 후지산을 향해 출발했다. 꿈이냐 생시냐를 가리려고 눈을 지긋이 감았더니 일전에 꾼 남가일몽(南柯一梦)이 떠오른다. …어느 한번 나는 장백현성에 가게 되였는데 도착하자 바람으로 그 곳의 절경인 고탑공원을 거닐게 되였다. 그 때 놀랍게도 고탑 아래에서 ‘문화대혁명’ 때 우리 농학원에서 대자보를 제일 많이 쓴 ‘혁명용사’ 친구를 만나게 되였다. 내가 천리타향에서 친구를 만나자 너무 반가워 인사를 했더니 그 친구는 반가워할 대신 이렇게 나를 훈계하는 것이였다. “당신은 왜 그냥 그 모양 그 꼴인가? ‘문화대혁명’ 때도 ‘백전(白专)’도로를 걷더니 지금도 일본사람들과 어울려 돌아다니다니 원… 내가 그렇게 충고를 했는데도 말이야… 응?” 친구는 나를 훈계하고 나서 나의 변명을 들을 념도 하지 않고 안개처럼 사라지는 것이였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남가일몽이였다. 기회를 엿보아 정치적인 야욕을 채우려 했던 그 때 그 친구의 훈계가 일본행인 지금까지도 나의 머리에서 떠날 줄을 몰랐다. 이젠 후지산으로 왔으니 후지산에 대해 얘기해보자. 중국의 장백산은 올라가는 곳이 북파(北坡), 서파(西坡), 남파(南坡) 세곳뿐이다. 동파(东坡)에는 장백산으로 올라가는 길이 없다. 그런데 후지산은 사방이 자기들의 땅이기에 등산길이 13갈래나 된다고 한다. 그러기에 등산객들이 장백산처럼 붐비지도 않고 등산료금도 받지 않으며 곳곳에 안내패말이 세워져 등산객들에게 필요한 정보를 제공해준다. 나는 안내패말이 하도 많아 너무 신기해 찰칵찰칵 사진기렌즈에 담았다. 내가 첫눈에 반한 것은 후지산 기슭과 허리에 울창하게 서있는 침활혼성림이였다. 장백산은 침엽수보다 활엽수가 많다. 6월초의 후지산은 하얀 눈으로 덮였고 눈 아래는 돌바다(石海)를 이뤘다. 그리고 6월이였지만 웬일인지 개화한 꽃들이 별로 눈에 띄지 않았다. 하지만 6월초의 장백산에서는 여러가지 꽃들이 만발해있음을 볼 수 있다. 학술보고에서 그 질문자가 말했던 유명한 ‘왕엉겅퀴’의 웅장한 모습도 나의 시각을 파고들었다. 아직은 꽃봉오리조차 없는데도 말이다. 후지산은 자연보호구였으므로 나는 일초일목(一草一木)에도 손을 대지 않았다. 표본으로 채집하고 싶고 기념으로 남기고 싶은 초목들이 수없이 많았지만 바쁜 일정이라 일일이 사진으로 남길 수도 없었다. 기슭에 있는 매점으로 들어가니 천연식물들로 만든 기념품들이 적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속히 동경으로 가야 했으므로 관계일군들과 몇마디 인사말을 건넸을 뿐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는 식물로 만든 그 미묘한 공예품들은 더 구경할 수 없었다. 귀로에서 차창 밖으로 보이는 신기한 식물들, 알고 싶은 식물들이 우리의 차가 멈춰서기를 기다리는 듯하였다. 하지만 무심한 차는 앞으로 앞으로 달릴 뿐 좀처럼 멈춰설 줄을 몰랐다. 이번 후지산려행은 너무 급한 걸음이라 아쉬움만 남겨주었다. 만약 일주일이란 시간을 더 줬더라면 아주 만족스러운 려행으로 되였을 텐데. 우리의 장백산처럼 후지산 역시 일본의 명산이며 동북아의 명산이다. 나는 누가 또 나에게 후지산으로 가는 기회를 만들어준다면 만사를 제쳐놓고 한달음에 뛰여가 아쉬움만 남겨놓은 후지산을 만긱할 것이다. 일본사람들은 후지산이 없으면 살 재미가 없다고 한다. 상품도 후지산상표가 있으면 잘 팔린다고 한다. 우리 백의동포들이 장백산을 선조들의 령산으로 숭배하고 있는 것처럼 일본사람들도 후지산을 령산으로 여기고 있다. 나는 이런 감정으로 후지산행을 바라고 또 바랐건만 이번 후지산행은 나에게 아쉬움만 남겨주었다. 김수철 (2016년 10월 25일 저녁)  
1    묵향 천리, 덕향 만리 댓글:  조회:2138  추천:0  2020-08-01
김응준 시인은 고희를 넘었지만 쏟아져나오는 사랑시를 보면 자못 놀랍기도 하다. ‘시인은 영원한 청춘’이라는 말은 그를 두고 하는 말인가 싶다.                                                                         2020-07-31 09:11:14     1988년 여름, 상해 황포강 나루터에서 저자 고 김응준 시인)과 그의 우연이라 할가 아니면 인연이라고 할가, 시인 고 김응준 은사님과 교분을 쌓아온 지도 어언 61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 1959년 훈춘고중시절 한어과임이셨던 고인의 선정을 받아 한어과 대표를 맡아 하면서부터 은사님과 정분을 다져왔고 줄곧 은사 삼아, 형님 삼아 공경해오던차 지난 7월 7일 불행히 타계하셨다는 비보를 접하고 그냥 굳어져버렸다. 지난해 11월 중순 내가 치료차 일본으로 떠나기 전날, 병석에 계시는 은사님을 찾아뵌 것이 아마 그와 생전 맑은 정신상태에서 가진 마지막 대화일 것이다. 그때만 해도 그는 내가 귀국하는 대로 함께 손잡고 리수일과 신순애의 사랑을 노래한 씨나리오를 쓰자고 약속하셨다. 하지만 귀국 후 코로나사태로 하여 찾아뵙지 못하다가 사망 전날 병상을 찾았을 때, 둘째 딸 홍심이가 혼미중인 아버지의 귀에 대고 “장춘삼촌 오셨어요.”라고 알리자 즉시 눈을 뜨고 악수를 청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 악수는 분명 은사님의 영면 전 우리 사제간 사귀여온 60여년 긴 세월의 마지막 석별에 찍은 종지부였다. 돌이켜보면 과연 ‘탄지일휘간(弹指一挥间)’이라고, 1959년 선생님께서 북경대학 중문학부 연수를 마치고 25세의 꽃나이 총각선생으로 훈춘고중 한어과임교원으로 부임되여 온 후 그의 검소한 차림새와 소탈한 성격, 더우기 생활 면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학생들에 대한 특별한 관심과 배려가 학생들의 호감을 자아내면서 자석마냥 끄당겨 따르게 하였다. 수업 또한 인기 만점, 한어교연조의 한족교원들도 뺨칠 정도로 한자어 발음 성조(声调)표기 하나 틀림없이 확실하게 가르쳐주시던 그 모습 아직도 생생하게 떠오른다. 뿐만 아니라 한어작문과 문학에 뜻을 둔 제자들을 별도로 이끌어 문학의 꿈을 키워주신 은사님, 그래서 더욱 제자들의 존경과 사랑을 독차지하다싶이 하였다. 특히 생활난으로 어려운 제자들에게 사랑과 용기와 희망을 안겨주시던 그 시절 감격스러운 일화가 어찌 한두가지 뿐이랴! 지난 세기 50년대 후반 되게 어려웠던 년대에 은사님 가정형편도 초근목피로 겨우나 생계를 유지하는 상황이였지만 가끔가끔 시골에서 온 이 제자를 자기 집으로 불러주었다 “이거라도 배불리 먹기요, 숙소에서 배곯기보다는 나을 거요…” 된장 한숟가락 떼여 수수밥에 발라주시던 은사님, 지금도 그 사랑, 그 정에 목이 메군 한다. 수수밥이나 두병밥으로 기아를 달랜 후 선생님의 침실에 들어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는 와중에 선생님의 공부비결도 발견하게 되였다. 이미 중국 명문대인 북경대학 연수까지 마친 상당한 수준이였지만 선생님의 침실 3개 벽면과 천정은 온통 친필로 쓴 한어 사자성구(成语)로 도배가 되여있으니 앉으나 서나 누우나 겨를만 있으면 한어성구의 내용을 음미하면서 암기할 수 있었다. “아, 공부는 이렇게 하고 지식은 이렇게 쌓는구나…” 현 상태에 만족하지 않고 열심히 공부하는 비법까지 배웠으니 어찌 은사님을 숭배하지 않고 또 따르지 않을 수가 있으랴! 1962년 6월, 중앙민족대학 입시를 앞두고 은사님은 반달 동안 무등 신경을 쓰시며 까근히 작문지도를 해주었다. 지어 연길로 시험을 치러 가는 날 아침 뻐스역까지 바래주면서 시험을 칠 때 우선 작문 출제를 제대로 포착하라고 재삼 당부하셨다. 이렇듯 인생의 전도에 관련된 관건적 시각에 친동생마냥 깐깐히 챙겨준 그 은혜 영원히 잊을 수 없었다. 하여 세월이 가고 점차 ‘철’이 들면서 내 나이 칠십이 된 해부터 매년 음력설이면 빠뜨리지 않고 은사님께 ‘강다짐’ 세배를 올려왔다. 은사님께서는 또 매년 방학이면 100리, 200리 길도 마다하지 않고 도보로 춘화, 경신, 량수 등 오지에 사는 제자들 가정을 찾아 방문하셨다. 훈춘 시골 촌락 골목길에 은사님의 발자국이 찍혀졌고 반세기가 지난 오늘까지도 제자들과 학부모들은 여전히 그이를 ‘우리 선생님’이라고 친절히 부르고 있다. 새삼스레 위챗에서 읽었던 명언 두 구절이 떠오른다. “좋은 사람과의 인연은 소중하고 또 오래갑니다.” “란향백리(兰香百里) 묵향천리(墨香千里) 덕향만리(德香万里).” —백화문체로 풀이하면 “란의 향기는 백리를 가고 묵의 향기는 천리를 가지만 덕의 향기는 만리를 간다네.” 고 김응준 은사님이야말로 1954년에 발표한 처녀작을 시작으로 문단 데뷔 66년 동안 무려 7000여수의 시가 창작과 더불어 저서 23부를 펼쳐내면서 천리(에 날린) ‘묵의 향기’를 《시향만리》(연변시인협회 간행물 제호)로 승화시키고 아울러 모든 제자, 친지, 동료들에게 믿음과 배려와 사랑을 베풀어온 만리(에 날린) ‘덕의 향기’임에 손색이 없다. 6년 전 2014년 8월 9일 연길 국제호텔에서 가진 ‘김응준 시인 탄신 80돐, 문단 데뷔 60돐 및 최신작 《사랑으로 가는 길》 출판 기념회’에서 올린 축사 한 대목이 새삼스레 떠오른다. 그날 옛 훈춘고중 7기 졸업생들이 대거 참석한 가운데 내가 50여명 동창생들의 마음을 담아 은사님께 강태공(姜太公)에 관한 옛 전설 한토막을 들려드렸다. 옛날 강태공이 주무왕(周文王)을 도와 80세 되는 해에 상(商)나라를 무너뜨리고 주(周)나라를 세운 후 80년을 더 살아 160살을 누리였다고 하여 후세인들은 강태공의 인생을 ‘전(前)80, 후(后)80’이라고 불렀단다. 그러니 “은사님께서도 이미 80년을 살았으니 오늘 이 기념행사를 시점으로 ‘김응준 후(后)80년’ 생을 시작하셔야 하지 않겠습니까”라고 제언을 하였다. 과연 은사님께서는 제언을 받아들이신 듯 탄신 80돐 기념회 후 즉시로 여생의 최종작품이라면서 장편서사시 《희비 쌍곡선》 창작에 살손을 대셨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2년 후인 2016년 9월 급작스레 뇌혈전에 걸려 입원치료를 받게 되였다. 하지만 그는 생명이 경각에 놓인 상황에서도 이미 시작한 글이 중도이페될 수도 있다는 비장한 각오로 시각을 다투어 혼신의 ‘피를 쏟아, 뼈를 갉아, 생명을 바쳐가며’(《희비 쌍곡선》 머리말) 무려 36만자에 달하는 작품을 마무리하여 2018년 7월 드디여 세상에 내놓으셨다. 이러한 백절불굴의 정신으로 만년에 로익장을 과시하면서 시가 창작 한 우물만 파온 고인에 대해 원로시인 김철옹은 그를 ‘시에 미친 사람’이라 평했고 연변대학 우상렬 교수는 고인의 장편서사시 《희비 쌍곡선》 서평에서 “우리 겨레의 시문학을 위해 열심히 뛴”, “한뉘 시를 위해 분투한 투사”라고 높이 평가하였다. 다사다난한 인생을 마감한 고 김응준 시인은 조년에 아버지를 여의고 중년에 안해를 잃고 만년에 딸자식을 앞세웠지만 완강한 의지로 파란만장한 인생고를 딛고 오직 시가 창작에 혼신을 다한 다수확 시인이다. , 등 500여수의 가사와 , 등 500여수의 애정시들은 고 김응준 시인의 대표작이 되기에 충분하다. 원로시인 김철은 《김응준시선집》 머리말에서 김응준 시인은 “고희를 넘은 사람이지만 쏟아져나오는 사랑시를 보면 자못 놀랍기도 하다. ‘시인은 영원한 청춘’이라는 말은 그를 두고 하는 말인가 싶다.”고 높이 평가하였다. 은사님은 시인이면서 또한 번역에도 상당히 능한 다재다능한 분이시다. 2009년부터 국가출판총서 ‘대중화문고(大中华文库)’의 특별위탁에 응해 중국의 고대명작 《론어》, 《당시선집》 및 수십만자에 달하는 장편소설 등 수많은 한문저서들을 조선문으로 번역하여 우리 민족 문화발전 창달에 한몫을 감당하였다. 시가 창작과 고한문 번역 자질을 겸비한 그이는 중국조선족 시가문단치고 흔치 않은 출중한 존재로 각인되여있다. 고 김응준 시인의 타계에 연변작가협회 김영건 부주석은 “중국조선족 문단에 ‘큰별’ 하나가 떨어졌다.”고 애석함을 표했고 연변시인협회 전병칠 회장은 “중국조선족 시단은 훌륭한 시 스승을 잃었고 연변시인협회는 덕재 뛰여난 코기러기를 잃었다.”고 깊은 애도를 표하였다. 고 김응준 은사님께서는 80여성상을 그렇듯 젊고 빛나고 보람차게 살아오면서 항상 여러모로 우리의 귀감이 되였다. 수십년간 고인을 은사로, 형님으로 고이 받들어 모시게 된 긍지와 자랑을 맘속 깊이 새기면서, 재삼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비는 바이다.                     림장춘                                     (필자는 “연변일보”사 선임 부사장, “연변일보”선임 부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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