륙도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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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    한국시(5) 댓글:  조회:1447  추천:0  2019-11-27
네가 오는 동안 황지우 네가 오기로 한 그 자리에 내가 미리 가 너를 기다리는 동안 다가오는 모든 발자국은 내 가슴에 쿵쿵거린다 바스락거리는 나뭇잎 하나도 다 내게 온다 기다려본 적이 있는 사람은 안다 세상에서 기다리는 일처럼 가슴 애리는 일 있을까 네가 오기로 한 그 자리, 내가 미리 와 있는 이곳에서 문을 열고 들어오는 모든 사람이 너였다가 너였다가, 너일 것이다가 다시 문이 닫힌다 사랑하는 이여 오지 않는 너를 기다리며 마침내 나는 너에게 가고 아주 먼데서 나는 너에게 가고 아주 오랜 세월을 다하여 너는 지금 오고 있다 아주 먼데서 지금도 천천히 오고 있는 너를 너를 기다리는 동안 나도 가고 있다 남들이 열고 들어오는 문을 통해 내 가슴에 쿵쿵거리는 모든 발자국 따라 너를 기다리는 동안 나는 너에게 가고 있다. ■감상노트   개인적으로 연시는 취향이 아니지만 감정의 배설이 절제된 시를 만나면  어느 시절의 언덕으로 양떼 구름을 몰고 사랑,  그 사그락 거리는 사랑의 추억으로 발을 더듬는 내가 보인다 사랑하는 사람을 기다리는 시간은 어쩌면 가장 눈부시게 설레이는 기다림일지 모른다 그시간만큼은 시선이 머무는 어느 곳에도 꽃이 만발하게 핀다 그 사랑이란 이름 앞에 설레이지 않은 사람 은 없을 것이다 사랑은 지독한 묘약이 두가지 있는데 눈을 멀게 하는 것과 먹어도 먹어도 배가 고프다는 것이다 류시화 시인의 시집 타이틀처럼 그대가 곁에 있어도 그대가 그립다 는 것이리라 별이 내려 오는 어느 저녁의 벤치에서 연인의 입술을 뜨겁게 훔쳐본 사람은 안다 그 설레임이 스미게 번지는 감전 같은 전율을ᆢᆢᆢ 사랑은 서로에게 천천히 스미는 의식이겠는데 사랑은 오래오래 서로에게  꽃을 피워대는 일이 겠는데 시인의 /너를 기다리는 시간 동안/시를 읽는 동안 사랑 그 몽의 틈에서 간신히 덜커덩거리며 빠져나온다 너는 여기서 우리가 또 간절히 바라는 이름일지도 [문정완] 동사목(凍死木)    [2020 부산일보 신춘문예-시조] 진 헤어살롱/장남숙 스팸메일 지우듯 싹둑싹둑 잘라내도 낮 불 밝은 살롱은 루머(rumor)가 크는 온실 엉터리 가짜뉴스가 물들이며 치장이다 오랜 날 기다린 듯 끈 풀린 수다들이 해가 긴 오후만큼 끝없이 늘어지고 미용사 장갑 낀 손만 귀 닫고 한창이다 친친 감는 머리카락 뜬 소문 리플레이 들통 난 통화내용 진짜라도 어쩔 건지 까맣게 염색한 세상 알고 보면 새치다   아름다운 책 / 공광규 어느 해 나는 아름다운 책 한 권을 읽었다 도서관이 아니라 거리에서 책상이 아니라 식당에서 등산로에서 영화관에서 노래방에서 찻집에서 잡지 같은 사람을 소설 같은 사람을 시집 같은 사람을 한 장 한 장 맛있게 넘겼다 아름다운 표지와 내용을 가진 책이었다 체온이 묻어나는 책장을 눈으로 읽고   서울역 / 공광규 서울역 4번 플랫홈에서 부산행 고속열차를 기다리다가 발견한 화강암에 새긴 서울발 이정표 조각물 서울역에서 출발하면 닿을 수 있는 거리가 음각되어 있다 내가 오늘 가려는 부산까지 441 킬로미터 목포까지 414 킬로미터 강릉까지 374 킬로미터 그런데 평양까지는 겨우 260 킬로미터로 표시되어 있다 인천까지는 38킬로미터인데 내가 살고 있는 일산에서 개성까지는 더 가까울 것이다 부산보다 조금 더 먼 신의주가 496 킬로미터 나진은 부산 가는 거리보다 두 배 더 먼 943 킬로미터이다 그렇더라도 고속열차로 간다면 6시간이면 닿을 수 있는 거리이다 내가 못 가본 저곳들은 얼른 가보고 싶은 곳들이다 대동강 건너 신의주에서 국경을 넘어 이베리아반도까지 나진을 거쳐 광활한 시베리아를 지나 북해의 어디쯤에 닿고 싶다 어느 날 배낭을 꾸려서 떠났다가 몇날 며칠을 묵으며 깨끗한 술 한 잔 하고 돌아오고 싶은 곳이다 혀로 넘기고 두 발로 밑줄을 그었다 책은 서점이나 도서관에만 있는 게 아닐 것이다 최고의 독서는 경전이나 명작이 아닐 것이다 사람, 참 아름다운 책 한 권   아름다운 사이 공광규   이쪽 나무와 저쪽 나무가 가지를 뻗어 손을 잡았어요 서로 그늘이 되지 않는 거리에서 잎과 꽃과 열매를 맺는 사이군요 서로 아름다운 거리여서 손톱을 세워 할퀴는 일도 없겠어요 손목을 비틀어 가지를 부러뜨리거나 서로 가두는 감옥이나 무덤이 되는 일도 이쪽에서 바람 불면 저쪽 나무가 버텨주는 거리 저쪽 나무가 쓰러질 때 이쪽 나무가 받쳐주는 사이 말이에요 되돌아보는 저녁/공광규 자동차에서 내려 걷는 시골길 그동안 너무 빨리 오느라 극락을 지나쳤을지도 모른다는 생각 어디서 읽었던가 인디언들은 말을 타고 가다가 영혼이 뒤따라오지 못할까봐 잠시 쉰다고 발등을 스치는 메뚜기와 개구리들 흔들리는 풀잎과 여린 꽃들 햇볕에 그을린 시골동창생의 사투리 푸짐한 당숙모의 시골밥상 어머니가 나물 뜯던 언덕에 누이가 좋아하던 나리꽃 군락 나비가 되어    공광규 어젯밤에는 내가 나를 아주 깊이 안아주며 잤어 이렇게 팔을 엇갈려 네가 나를 안아주듯 내가 나를 안아주었어 그리운 너의 체온 감자알처럼 고구마 뿌리처럼 만져지는 내가 나를 만지는 슬픔 그러다 손목을 엇갈려 가슴에 얹고 뻗어가는 슬픔 꾹꾹 누르다 잠들었어 나비가 되어 펄럭펄럭 너에게 다녀오려고 ―월간 《시인동네》 2019년 6월호 완행버스를 탔다 / 공광규 오랜만에 광화문에서 일산 가는 완행버스를 탔다 넓고 빠른 길로 몇 군데 정거장을 거쳐 대도시에서 신도시로 직행하는 버스를 보내고 완행버스를 탔다 이 길 저 길 좁은 길을 거쳐 사람이 자주 타고 내리는 버스를 타고 가며 남원추어탕 집도 지나고 파주옥 앞도 지나고 전주비빔밥 집도 지나고 스캔들양주 간판과 희망맥주 앞을 지났다 고등학교 앞에서는 탱글탱글한 학생들이 기분 좋게 담뿍 타는 걸 보고 잠깐 졸았다 어느새 버스는 뉴욕제과를 지나서 파리양장점 앞에서 천국부동산을 향해 가고 있었다 천국을 빼고는 이미 내가 다 여행 삼아 다녀본 곳인데 완행버스를 타고 가며 남원, 파주, 전주, 파리, 뉴욕을 다시 한 번 다녀온 것만 같다 고등학교도 다시 다녀오고 스캔들도 다시 일으켜보고 희망을 시원한 맥주처럼 마시고 온 것 같다 직행버스를 타고 갈 수 없는 곳을 느릿느릿한 완행버스로 다녀왔다 나쁜 짓들의 목록 / 공광규 길을 가다 개미를 밟은 일 나비가 되려고 나무를 향해 기어가던 애벌레를 밟아 몸을 터지게 한 일 풀잎을 꺾은 일 꽃을 딴 일 돌멩이를 함부로 옮긴 일 도랑을 막아 물길을 틀어버린 일 나뭇가지가 악수를 청하는 것인 줄도 모르고 피해서 다닌 일 날아가는 새의 깃털을 세지 못한 일 그늘을 공짜로 사용한 일 곤충들의 행동을 무시한 일 풀잎 문장을 읽지 못한 일 꽃의 마음을 모른 일 돌과 같이 뒹굴며 놀지 못한 일 나뭇가지에 앉은 눈이 겨울꽃인 줄도 모르고 함부로 털어버린 일 물의 속도와 새의 방향과 그늘의 평수를 계산하지 못한 일 그중에 가장 나쁜 것은 저들의 이름을 시에 함부로 도용한 일 사람의 일에 사용한 일   욕심 / 공광규 뒤꼍 대추나무 약한 바람에 허리가 뚝 꺾였다 사람들이 지나며 아깝다고 혀를 찼다 가지에 벌레 먹은 자국이 있었나? 과거에 남 모를 깊은 상처가 있었나? 아니면 바람이 너무 드셌나? 그러나 나무 허리에선 아무것도 찾아내지 못했다 다만 너무 많은 열매를 나무는 달고 있었다.   서울역 / 공광규 서울역 4번 플랫홈에서 부산행 고속열차를 기다리다가 발견한 화강암에 새긴 서울발 이정표 조각물 서울역에서 출발하면 닿을 수 있는 거리가 음각되어 있다 내가 오늘 가려는 부산까지 441 킬로미터 목포까지 414 킬로미터 강릉까지 374 킬로미터 그런데 평양까지는 겨우 260 킬로미터로 표시되어 있다 인천까지는 38킬로미터인데 내가 살고 있는 일산에서 개성까지는 더 가까울 것이다 부산보다 조금 더 먼 신의주가 496 킬로미터 나진은 부산 가는 거리보다 두 배 더 먼 943 킬로미터이다 그렇더라도 고속열차로 간다면 6시간이면 닿을 수 있는 거리이다 내가 못 가본 저곳들은 얼른 가보고 싶은 곳들이다 대동강 건너 신의주에서 국경을 넘어 이베리아반도까지 나진을 거쳐 광활한 시베리아를 지나 북해의 어디쯤에 닿고 싶다 어느 날 배낭을 꾸려서 떠났다가 몇날 며칠을 묵으며 깨끗한 술 한 잔 하고 돌아오고 싶은 곳이다   헛간을 짓다가 / 공광규 장마에 무너진 시골 헛간을 헐고 다시 짓는데 동네사람들이 지나가며 한 마디씩 한다. - 어라, 광규 이 사람, 주춧돌을 놓을 줄 모르는구먼. - 어허, 그 나이 먹도록 기둥 한 번 안 세워봤구먼. - 어이구, 지금 짓는 게 개집이여 뭐여. 동네사람들 말을 듣고 이렇게 저렇게 해보다가 한나절이면 될 것을 하루 종일 기둥도 못 세웠다. 저녁을 먹고 마루에 나와 별을 보는데 내가 지금껏 이렇게 살아왔다는 생각이 든다. 남의 말만 듣고 살아서 평생 헛간 같은 집 한 채도 못 짓고 있는 것이다.   얼굴 반찬 공광규(1960~) 옛날 밥상머리에는 할아버지 할머니 얼굴이 있었고 어머니 아버지 얼굴과 형과 동생과 누나의 얼굴이 맛있게 놓여있었습니다 가끔 이웃집 아저씨와 아주머니 먼 친척들이 와서 밥상머리에 간식처럼 앉아있었습니다 어떤 때는 외지에 나가 사는 고모와 삼촌이 외식처럼 앉아있기도 했습니다 이런 얼굴들이 풀잎 반찬과 잘 어울렸습니다 그러나 지금 내 새벽 밥상머리에는 고기반찬이 가득한 늦은 저녁 밥상머리에는 아들도 딸도 아내도 없습니다 모두 밥을 사료처럼 퍼 넣고 직장으로 학교로 동창회로 나간 것입니다 밥상머리에 얼굴 반찬이 없으니 인생에 재미라는 영양가가 없습니다 동사목 김광규(1941~) 유달리 추웠던 지난겨울 영하17도의 혹한을 비껴갈 수 없이 뒷동산 언덕배기에 뿌리박은 채 꼿꼿이 서서 얼어 죽은 나무들 전기톱으로 잘라내는 소리 비명처럼 들린다 산 아래 첫 집 담 너머 우리 마당에도 누렇게 얼어 죽은 낙엽송과 단풍나무 한여름 녹음 속에 처연하게 숨 멎은 동사목 두 그루 살아 있는 나무들만 바람에 수런거리고 마른 잎을 떨어버릴 수 있다는 수목의 유언에 귀 기울이며 말 없는 미라를 보듯 두고두고 바라보기만 할 뿐   엄마 걱정  기형도   열무 삼십 단을 이고 시장에 간 우리 엄마 안 오시네, 해는 시든 지 오래 나는 찬밥처럼 방에 담겨 아무리 천천히 숙제를 해도 엄마 안 오시네. 배추잎 같은 발소리 타박타박 안 들리네, 어둡고 어두워 금간 창 틈으로 고요히 빗소리 빈방에 혼자 엎드려 훌쩍거리던 아주 먼 옛날 지금도 내 눈시울을 뜨겁게 하는 그 시절, 내 유년의 윗목   담장을 허물다    공광규 고향에 돌아와 오래된 담장을 허물었다 기울어진 담을 무너뜨리고 삐걱거리는 대문을 때어냈다 담장 없는 집이 되었다 눈이 시원해졌다 우선 텃밭 육백평이 정원으로 들어오고 텃밭 아래 사는 백살 된 느티나무가 아래 둥치째 들어왔다 느티나무가 그늘 수십평과 까치집 세채를 가지고 들어왔다 나뭇가지에 매달린 벌레와 새 소리가 들어오고 잎사귀들이 사귀는 소리가 어머니 무릎 위해서 듣던 마른 귀지 소리를 내며 들어왔다 하루 낮에는 노루가 이틀 저녁엔 연이어 멧돼지가 마당을 가로질러 갔다 겨울에는 토끼가 먹이를 구하러 내려와 방콩 같은 똥을 싸고 갈 것이다 풍년초 꽃이 하얗게 덮인 언덕의 과수원과 연못도 들어 왔는데 연못에 담긴 연꽃과 구름과 해와 별들이 내 소유라는 생각에 뿌듯하였다 미루나무 수십그루가 줄지어 서 있는 금강으로 흘러가는 냇물과 냇물이 좌우로 거느린 논 수십만마지기와 들판을 가로지르는 외산면 무량사로 가는 국도와 국도를 기어다니는 하루 수백대의 자동차가 들어왔다 사방 푸른빛이 흘러내리는 월산과 청태산까지 나의 소유가 되었다 마루에 올라서면 보령 땅에서 솟아오른 오서산 봉우리가 가물가물 보이는데 나중에 보령의 영주와 막걸리 마시며 소유권을 다투어볼 참이다 오서산을 내놓기 싫으면 딸이라도 내놓으라고 협박할 생각이다 그것도 안 들어주면 하늘에 울타리를 쳐서 보령 쪽으로 흘러가는 구름과 해와 달과 별과 은하수를 멈추게 할 것이다 공시가격 구백만원짜리 기울어가는 시골 흙집 담장을 허물고 나서 나는 큰 고을 영주가 되었다  - 공광규 시집 『담장을 허물다』 (창비, 2016) ​ 1960년 충남 청양 출생 동국대 국문과와 단국대 대학원 문예창작과 졸업 1986년 ≪동서문학≫ 등단 1987년 《실천문학》에 현장시들을 발표 2009년 제4회 윤동주상 문학부문 대상 2010년 제1회 김만중문학상 시부문 금상 2011년 제16회 현대불교문학상 시부문  시집 『대학 일기』 『마른 잎 다시 살아나』 『지독한 불륜』 『소주병』『말똥 한덩이』『담장을 허물다』 『신경림 시의 창작방법 연구』『시 쓰기와 읽기의 방법』『이야기가 있는 시 창작 수업』등   손가락 염주 공광규 (1960~) 밥상을 차리고 빨래를 주무르고 막힌 변기를 뚫고 아이들과 어머니의 똥오줌을 받아내던 관절염 걸린 손가락 마디 이제는 굵을 대로 굵어져 신혼의 금반지도 다이아몬드 반지도 맞지가 않네 아니, 이건 손가락 마디가 아니고 염주알이네 염주 뭉치 손이네하하허허 하하하호" 내가 모르는 사이에 아내는 손가락에 염주알을 키우고 있었네   소주병 공광규 술병은 잔에다 자기를 계속 따라 주면서 속을 비워 간다 빈 병은 아무렇게나 버려져 길거리나 쓰레기장에서 굴러다닌다 바람이 세게 불던 밤 나는 문 밖에서 아버지가 흐느끼는 소리를 들었다 나가보니 마루 끝에 쪼그러져 않은 빈소주병이었다 가재미                                                문태준-                                                           김천의료원 6인실 302호에 산소마스크를 쓰고 암투병중인 그녀가 누워 있다. 바닥에 바짝 엎드린 가재미처럼 그녀가 누워 있다. 나는 그녀의 옆에 나란히 한 마리 가재미로 눕는다. 가재미가 가재미에게 눈길을 건네자 그녀가 울컥 눈물을 쏟아낸다. 한쪽 눈이 다른 한쪽 눈으로 옮아 붙은 야윈 그녀가 운다. 그녀는 죽음만을 보고 있고 나는 그녀가 살아온 파랑 같은 날들을 보고 있다. 좌우를 흔들며 살던 그녀의 물 속 삶을 나는 떠올린다. 그녀의 오솔길이며 그 길에 돋아나던 대낮의 뻐꾸기 소리며 가늘은 국수를 삶던 저녁이며 흙담조차 없었던 그녀 누대의 가계를 떠올린다. 두 다리는 서서히 멀어져 가랑이지고 폭설을 견디지 못하는 나뭇가지처럼 등뼈가 구부정해지던 그 겨울 어느 날을 생각한다. 그녀의 숨소리가 느릅나무 껍질처럼 점점 거칠어진다. 나는 그녀가 죽음 바깥의 세상을 이제 볼 수 없다는 것을 안다. 한쪽 눈이 다른 쪽 눈으로 캄캄하게 쏠려 버렸다는 것을 안다. 나는 다만 좌우를 흔들며 헤엄쳐 가 그녀의 물속에 나란히 눕는다.       산소호흡기로 들이마신 물을 마른 내 몸 위에 그녀가 가만히 적셔 준다.     오해(誤解) 박만엽 내가  그대 가슴에  돌을 던졌나요. 가슴으로 나눈  대화이기에 증거를 댈 수 없을 뿐 난 그저 그대 가슴에 사랑이 담긴 꽃가루를 뿌렸을 뿐이라오. 11월  - 고은   낙옆을 연민하지 말아라 한자락 바람에 훨훨 날아가지 않느냐 그걸로 모자라거든 저쪽에서 새들도 날아가지 않느냐 보아라 그대 마음 저토록 눈부신 것을... 20년 박관서 ​ ​ 기차가 내 안으로 들어온다 기차는 진입 전에 장내신호를 출발 전에는 출발신호를, 통과 후에는 개통취급을 제대로 해줘야 하는데 ​ 요즘엔 기차가, 아무런 신호도 받지 않고 아무런 취급도 해주지 않아도 내 안으로 진입해 들어와 출입문을 열어, 사람들을 내리고 짐보따리를 내리고 비척비척 눈 비비는 강아지까지 풀어놓곤 한다 ​ 더불어 노란 봄 햇살도 함께 따라와 개찰구 아래 손바닥만 한​ 뙈기 화단에 새아기 눈곱처럼 돋아 있는 채송화 개불알꽃 얼레지까지 함박웃음 짓게 하나니 ​ 아 아득한 무엇 하나 부럽지 않고 밉지 않고 무엇 하나 못나 보이지 않는 햇살 내리는 봄날의 간이역 생전 처음 보는 아늑한 풍경을 선물로 주고 가나니 ​ 내 안으로 들어온 기차가, 땀이었고 눈물이었고 한숨이었고 오기였고 버팀이었던 그 기차가, 이제야 ​ -박관서 시집, 『기차 아래 사랑법』, 푸른사상(2014)   구두 송찬호 나는 새장을 하나 샀다 그것은 가죽으로 만든 것이다 날뛰는 내 발을 집어넣기 위해 만든 작은 감옥이었던 것 처음 그것은 발에 너무 컸다 한동안 덜그럭거리는 감옥을 끌고 다녀야 했으니 감옥은 작아져야 한다 새가 날 때 구두를 감추듯 새장에 모자나 구름을 집어넣어 본다 그러나 그들은 언덕을 잊고 보리 이랑을 세지 않으며 날지 않는다 새장에는 조그만 먹이통과 구멍이 있다 그것이 새장을 아름답게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나는 오늘 새 구두를 샀다 그것은 구름 위에 올려져 있다 내 구두는 아직 물에 젖지 않은 한 척의 배 한때는 속박이었고 또 한때는 제멋대로였던 사람의 한켠에서 나는 가끔씩 늙고 고집 센 내 발을 위로하는 것이다 오래 쓰다 버린 낡은 목욕통 같은 구두를 벗고 새의 육체 속에 발을 집어넣어 보는 것이다 송찬호 시인, '10년 동안의 빈 의자' (문학과지성사, 1994)   놋쇠황소    박지웅 놋그릇에 뼈다귀 하나 건져내 나 구석구석 빠는 놈, 나는 허둥지둥 빠는 놈, 나는 침을 묻히는 놈 밥뚜껑에 쌓이는 뼈들 한때 소의 한 축이었으나 그림자도 없다 세상에 무덤덤한 일이 어디 있나 이 놋그릇이 소에게는 생지옥이다 옛 팔라리스왕은 나를 놋쇠황소에 집어넣고 배 밑에 장작을 때어 내 몸에 있는 춤을 모두 꺼내었다 훗날 왕도 형틀에 들어가 춤을 추었다 국물을 들이키며, 뼈도 못 추린 이야기 국물도 없는 가난한 생을 떠올리다 문득 저세상의 바닥까지 깨끗이 비우는 게 산목숨이라니 그럴 줄 알았다 여기가 지옥이다 벽에 붙은 도가니탕 얼마 꼬리곰탕 얼마 수육 얼마 망자의 가격이 매겨진 비문을 훑으며 입을 벌린다, 아아 나는 나의 뱃속을 돌고 돌았구나 밥자리에 다소곳이 따라붙는 놋쇠 그림자   불타는 글자들    박지웅 도서관에는 쓸데없이 많은 정숙이 근무하고 있다 이곳을 이용하는 시민은 그들을 선량한 직원으로 여기지만 사실 그들은 국가에서 심어놓은 비밀요원이다 바닥에 매설된 요원 사이를 통과하지 못한 자들 힘차게 걷던 한 시민의 발목은 화단에서 발견되었다 보라, 우리가 국가를 불렀을 때 국가는 우리에게 와 꽃이 되어 주었다 캄캄한 꽃, 침통한 꽃이 피어 있는 국가 국가의 지하에서 자란 꽃들이 낭자하게 피어 있는 사월 깨어진 글자들이 유리조각처럼 깔려 있는 사월 우리는 격실에 갇혀 서로에게 안부를 묻고 호출하였으나 정숙에 적의를 드러내지 않은 것은 치명적인 실수였다 사월에 국가는 묵음이었으니 사월에 국가는 침대에 누워 꽃이나 피웠으니 이제 누가 창을 깨고 들어가 침몰한 사월을 인양할 텐가 소곤거리는 사이에 정숙은 어김없이 나타나 엄숙하게 경고하고 바닥에 매복한다 경솔하게 움직이지 마라 제자리를 지키고 지시에 따르라 아, 살아 있는 것이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움직이는 것만이 살아 있는 것이다 불타는 글자를 종이컵에 담고 우리는 행진한다 적막이 낭자한 이 사월에 —《시사사》 2015년 5-6월호   고향  조말선  벗어놓은 외투가 고향처럼 떨어져 있다 내가 빠져나간 이후에 그것은 고향이 되었다 오늘 껴입은 외투와 나의 관계에 대해서 생각하면 한 번 이상 내가 포근하게 안긴 적이 있다는 것이다 나는 비로소 벗어놓은 외투를 찬찬히 살펴보는 것이다 내가 빠져나가자 그것은 공간이 되었다 후줄근한 중고품 더 이상 그 속에 있지 않은 사람의 언어   애인들  김찬옥   누가 내 몸에 수없이 구멍을 뚫어 놓았다  몸이 사막으로 변하면서 애인이 바뀌었다  술친구도 적당히 멀리하고 지천명에 몸 붙이려는 순간  숨 가쁘게 나를 호출하는 것들이 있다   내 전부를 탐하려는 듯  화곡역에서 집까지 늘어서 있는 애인들  걸핏하면 내 속을 들여다보는 이종현 내과  눈을 까뒤집고 말라버린 눈물 줄기를 찾아내는 백상춘 안과  엇나간 지층의 뼈대를 살살 구슬리는 선 정형외과  선인장 가시로 사정없이 모래언덕을 찔러대는 김대근 한의원  골짜기에서 시들어 버린 붉은 꽃송이를 똑똑 따 내는 황세영 산부인과   이들은 전생에 또 어떤 인연이었길래  내 몸 속 오랜 지천명의 시간을 달려와  서로 내 애인이 되겠다고 시샘하는 것일까  하지만 이들이 한통속이 되어 머리 맞대고 궁리하는 일이라곤  내 몸속에 숨어있는 바람과 모래를 거래하는 일이다   난 요즘 김대근 한의원과 눈이 맞았다  대낮부터 하얀 시트 위에서  바지를 벗어 내리고 맨살로 누워있다  그는 긴 손가락으로 맥을 꼭꼭 눌러가며 샘을 찾는다  초음파, 고주파, 이 기구들은 단번에 내 성감대를 알아 버렸고  막힌 수맥이 터졌는지 허리와 어깨가 짜릿짜릿하다 어제는 부항이 굶주린 짐승처럼 목 뒷덜미를 물어뜯어  옷 밖으로 빨간 입술자국이 기어 나왔다   비가 추적추적 내린다  이런 날이면 내 몸을 뜨겁게 열어주던  소주 한 잔, 그 달던 밤은 사라지고  낯선 침대위에 사막 한 채 시린 구멍을 웅크리고 있다 매미가 울면 나무는 절판된다 / 박지웅 붙어서 우는 것이 아니다 단단히 나무의 멱살을 잡고 우는 것이다 숨어서 우는 것이 아니다 반드시 들키려고 우는 것이다 배짱 한 번 두둑하다 아예 울음으로 동네 하나 통째 걸어 잠근다 저 생명을 능가할 것은 이 여름에 없다 도무지 없다 붙어서 읽는 것이 아니다 단단히 나무의 멱살을 잡고 읽는 것이다 칠 년 만에 받은 목숨 매미는 그 목을 걸고 읽는 것이다 누가 이보다 더 뜨겁게 읽을 수 있으랴 매미가 울면 그 나무는 절판된다 말리지 마라 불씨 하나 나무에 떨어졌다 먼산 같은 사람에게 기대고 싶어라       김재진(1955~ )     감잎 물들이는 가을볕이나 노란 망울 터드리는 생강꽃의 봄날을 몇 번이나 더 볼 수 있을까.   수숫대 분질러놓는 바람소리나   황사 / 송찬호 요즘 이곳 시골에서 혼례를 올리기 위해서는 바다 건너 사막 너머 먼 데서 신부를 데려와야 한다 예식은 읍내 식장까지 갈 필요가 없다 창밖 지붕 너머 들판과 냇가 건너 멀리 앞산까지 온통 뿌연 예식장 드디어 신부가 온다 누우런 면사포로 얼굴을 가리고 산 넘어 신부가 날아온다 신부의 가는 허리에서 방울 소리 울리고 속눈썹은 회초리처럼 길고 양털 가죽신을 신은 걸 보아 신부는 유목의 바람 세찬 곳에서 오나 보다 혼례는 하루 종일 계속된다 이 잔치를 거들고 즐기느라 목련과 산수유도 종일 눈이 따갑고 목이 아프다 그런데 혼수용으로 신부를 따라온 염소구름은 어떻게 한다지? 이 뿌우연 봄날, 고삐를 매지 않으면 금방 사라져 버릴 터인데 , 문학과지성사, 2009 쌀 안치듯 찰싹대는 강물의 저녁인사를 몇 번이나 더 들을 수 있을까.   미워하던 사람도 용서하고 싶은, 그립던 것들마저 덤덤해지는, 산사의 풍경처럼 먼산 바라보며 몇 번이나 노을에 물들 수 있을까.   산빛 물들어 그림자 지면 더 버릴 것 없어 가벼워진 초로의 들길 따라 쥐었던 것 다 놓아두고 눕고 싶어라.   내다보지 않아도 글썽거리는 먼산 같은 사람에게 기대고 싶어라.   천돌이라는 곳    정끝별 목울대 밑 우묵한 곳에 손을 대면 그곳이 천돌 쇄골과 쇄골 사이 뼈의 지적도에도 없이 물집에 싸인 심장이 벌떡대는 곳 묶였던 목줄이 기억하는 고백의 낭떠러지 와요, 와서 긴 손가락으로 읽어주세요 아무나가 누구인지 무엇이 모든 것인지 묻어둔 술통이 따뜻해질 즈음이면 잉크빛 목소리들이 저녁 안개처럼 스며들고 혼잣말을 하며 헤매는 발자국이 하나둘 늘어나요 어떤 이름은 파고 또 파고 어떤 이름은 묻고 또 묻고 애초에 없었던 어떤 이름은 바람에 밟히기도 해요 심었다 쓰러지는 함몰된 희망에 호미 자루가 먼저 달아나기도 하는데요 그럴 때면 눈물의 밀사가 관장하는 물시계 홈통에 물 듣는 소리가 들려요 와요, 어서 와서 중지의 지문을 대주세요 지도에도 없는 천 개의 돌을 열어주세요 발소리도 없이 들었다 잠시의 별을 피워냈던 서리 입김 유리컵처럼 내던져진 너라는 텍스트의 파편과 인도코끼리만큼이나 무거운 오해의 구름들, 그리고 지리멸렬에 두 발이 묶인 지지리한 기다림이 기억의 물통에 채워질 때마다 망각의 타종 소리가 맥박처럼 요동치는 곳 뜻밖의 지금을 살게 한 천돌이라는 그곳 어떤 이름을 부르려 달싹이는 입술처럼 천 개의 숨이 가쁜 내 고통의 숨통    —《현대문학》 2017년 9월호   섶섬이 보이는 방 나희덕(1966~) 서귀포 언덕 위 초가 한 채 귀퉁이 고방을 얻어 아고리와 발가락군은 아이들을 키우며 살았다 두 사람이 누우면 꽉 찰, 방보다는 차라리 관에 가까운 그 방에서 게와 조개를 잡아먹으며 살았다 아이들이 해변에서 묻혀온 모래알이 버석거려도 밤이면 식구들의 살을 부드럽게 끌어안아 조개껍데기처럼 입을 다물던 방, 게를 삶아 먹은 게 미안해 게를 그리는 아고리와 소라껍데기를 그릇 삼아 상을 차리던 발가락군이 서로의 몸을 끌어안던 석회질의 방, 방이 너무 좁아서 그들은 하늘로 가는 사다리를 높이 가질 수 있었다 꿈 속에서나 그림 속에서 아이들은 새를 타고 날아다니고 복숭아는 마치 하늘의 것처럼 탐스러웠다 총소리도 거기까지는 따라오지 못했다 섶섬이 보이는 이 마당에 서서 서러운 햇빛에 눈부셔 한 날 많았더라도 은박지 속의 바다와 하늘, 게와 물고기는 아이들과 해질 때까지 놀았다 게가 아이의 잠지를 물고 아이는 물고기의 꼬리를 잡고 물고기는 아고리의 손에서 파닥거리던 바닷가, 그 행복조차 길지 못하리란 걸 아고리와 발가락군은 알지 못한 채 살았다 빈 조개껍데기에 세 든 소라게처럼   사투리   박목월 우리 고장에서는 오빠를 오라베라 했다. 그 무뚝뚝하고 왁살스러운 악센트로 오오라베 부르면 나는 앞이 칵 막히도록 좋았다. 나는 머루처럼 투명한 밤하늘을 사랑했다. 그리고 오디가 새까만 뽕나무를 사랑했다. 혹은 울타리 섞에 피는 이슬마꽃 같은 것을...... 그런 것은 나무나 하늘이나 꽃이라기보다 내 고장의 그 사투리라 싶었다 참말로 경상도 사투리에는 약간 풀냄새가 난다. 약간 이슬냄새가 난다. 그리고 입안에 마르는 황토(黃土)흙 타는 냄새가 난다. *************   물음표(?)에 대하여  복효근 오늘 아침 찌갯감 일본산 생명태 아가리 속에는 낚시바늘 하나 박혀있다 살기 위해 삼켰으나 결국은 거기에 매달려 죽었으리라 그래서 낚시바늘은 물음표를 닮았다 옷장 밖에선  먹이를 찾아  낚시바늘을 삼키고 있는 몸을 상징하듯 관을 닮은 옷장을 열면 몸이 빠져나간 옷들은 물음표 하나씩 달고 있다 살게 한 것도 물음표였으나 죽게 한 것도 물음표라는 듯  물음표는 낚시바늘을 닮았다   능소화 / 전선경 가슴으로 피어올라 아픈 사랑이 되었구나 내가 죽고 네가 살 수 있다면 너의 자존을 지키기 위해 한 줌의 흙이 되어 필 수만 있다면 네 곁에서 향기 발할 수만 있다면 너의 웃음소리 들을 수만 있다면 내 모든 것 주어도 아깝지 않기에 너의 소리 없는 눈물을 받아먹고 이리 애닯게 피었구나 널 향한 그리움 담장을 훌쩍 넘었구나 네 소리가 되고자 흐드러진 여러 귀가 되어 열렸구나 네 서러움 담아내고자 이리도 곱게 피었구나 너에게만은 참 미소 보여 주고자 저리 붉게 피었구나 너의 심장 가까이에서 끊임없이 속삭여 주는구나 널 사랑한다고   풀의 정신 김형로 ​ 한갓 발길이 두려워서야 풀이 아니리 밟혀도 풀, 커봤다 풀 헝거리 정신으로 바람결에 쉐도우 복싱을 하고 있는 풀들 ​ 이름 모를 풀을 보면 당신은 잡초라고 퉁, 치지만 그것은 당신의 자유 그들에게도 철학이 있다 ​ 바랭이는 당신을 위해 방석을 깔고 어디 한 번 밟아보라며 펑퍼짐한 엉덩이를 내민다 밟을수록 좋다고 댓거리한다 ​ 질경이는 함부로 당신 발에 밟히는 순간 긴 혀를 내두르며 말한다 오, 내가 지구를 짊어졌구나 ​ 당신은 풀 한둘 뽑을 수 있지만 저 무성한 풀의 정신은 죽일 수 없다 배짱 없이 풀일 수는 없다고 풀풀한 풀의 함수를 사람은 풀 수가 없다 ​ 겨울이면 사그라들 것들의 힘이란 어디서 오는 건지 밟혀도 풀, 커봤다 풀인 것들이 나무도 못 되는 것들이 거대한 생각의 씨를 심고 있다 ​ 풀의 가문엔 약골이 없다    섬걱선         이성부   가까이에 있는 산은 항상 아내 같다 바라보기만 해도 내 것이다 오르면 오를수록 재미있는 산 더 많이 변화를 감추고 있는 산 가까이에서 더 모르는 산 그래서 아내 같다 거기 언제 그대로 있으므로 마음이 놓인다 어떤 날에는 성깔이 보이고 어떤 날에는 너그러워 눈물 난다 칼바위 등걸이나 벽이거나 매달린 나를 떠밀다가도 마침내 마침내 포근히 받아들이는 산 서울 거리 어디에서도 바라보기만 하면 가슴이 뛰는 산 내 것이면서 내가 잘 모르는 산 이성부. ㅡ ㅡ 삼각산 -시집『자연 속에서 읽는 한 편의 시 05』(국립공원, 2007)   감기/박후기 숙주를 파고드는 병과 함께 누워 약을 먹는 밤은 쓰다 목에 걸린 알약처럼 삼킬 수도 뱉을 수도 없는 육신아 물 한 모금 겨우 눈물 한 모금 겨우 삼키며 너를 안고 너를 앓는다 누가 내 안에 들어와 기어이 사흘 밤낮을 울고 간다     종이는 나무의 유전자를 가지고 있다 -박후기 싱크대 옆 선반 위 물이 담긴 유리그릇 속에서 감자 한 알이 소 눈곱 같은 싹을 틔운다 똑똑한 아기 낳는 법, 이라고 씌어진 두툼한 책장을 넘기다 말고 고추장 김치 돼지고기가 들끓는 찌개 곁에서 아내가 입덧을 한다 햇볕이 잠시 문 밖에서 서성이다 돌아가는 지하 단칸방 식탁 위 선인장이 우울하다 아내는 이곳을 판도라의 상자라고 부르지만 나는 그냥 상자라고 부른다 내 몸은 지상의 모든 발 아래 놓여 있어 늦은 밤 사람들의 발소리가 뚜벅뚜벅 내 깊은 잠 속까지 걸어 들어온다 내가 살고 있는 상자는 산 아래 큰 강가의 60층 빌딩보다 높은 곳이지만 주인집 은행나무 뿌리보다 낮은 곳이어서 외벽에 기댄 은행나무 뿌리가 내벽에 금을 만든다 땅 속 어디선가 은행나무의 발가락들이 꼼지락거리며 벽을 긁고 있는 것이다 아내의 배 위로 불거진 핏줄이 한 가닥 금을 긋는다 아내의 뱃속에는 꼼지락거리는 손가락이 열 개 발가락이 열 개 그리고 바위의 안부를 묻는 빗방울처럼 쉬지 않고 내세는 두드리는 희망이라는 유전자가 하나 1968년 경기도 평택 출생 서울예술대 문예창작과 졸업 2003년 작가세계 등단 시집 『종이는 나무의 유전자를 갖고 있다』 『내 귀는 거짓말을 사랑한다』『격렬비열도』『엄마라는 공장 아내라는 감옥』등   낙엽   이생진 한 장의 지폐보다 한 장의 낙엽이 아까울 때가 있다 그때가 좋은 때다 그때가 때묻지 않은 때다 낙엽은 울고 싶어 하는 것을 기억하고 있기 때문이다 낙엽은 편지에 쓰고 싶은 것을 쓰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낙엽을 간직하는 사람은 사랑을 간직하는 사람 새로운 낙엽을 집을 줄 아는 사람은 기억을 새롭게 갖고 싶은 사람이다   손님 백무산   내가 사는 산에 기댄 집, 눈 내린 아침 뒷마당엔 주먹만 한 발자국들 여기저기 어지럽게 찍혀 있다 발자국은 산에서 내려왔다, 간혹 한밤중 산을 찢는 노루의 비명을 삼킨 짐승일까  내가 잠든 방 봉창 아래에서 오래 서성이었다 밤새 내 숨소리 듣고 있었는가 내 꿈을 다 읽고 있었는가 어쩐지 그가 보고 싶어 나는 가슴이 뜨거워진다 몸을 숨겨 찾아온 벗들의 피묻은 발자국인 양 국경을 넘어온 화약을 안은 사람들인 양 곧 교전이라도 벌어질 듯이 눈 덮인 산은 무섭도록 고요하다  거세된 내 야성에 피를 끓이러 왔는가 세상의 저 비루먹은 대열에 끼지 못해 안달하다 더 이상 목숨의 경계에서 피 흘리지 않는 문드러진 발톱을 마저 으깨버리려고 왔는가 누가 날 데리러 저 머나먼 광야에서 왔는가 눈 덮인 산은 칼날처럼 고요하고날이 선 두 눈에 시퍼런 불꽃을뚝뚝 떨구며 그는 어디로 갔을까 커피를 내리며  허영숙 커피를 내리는 일처럼 사는 일도 거를 수 있었으면 좋겠다 둥글지 못해 모난 귀퉁이로 다른 이의 가슴을 찌르고도 아직 상처를 처매주지 못했거나 우물 안의 잣대 품어 하늘의 높이를 재려한 얄팍한 깊이로 서로에게 우를 범한 일들 새벽 산책길 이제 막 눈을 뜬 들풀을 무심히 밟아댄 사소함까지도 질 좋은 여과지에 거를 수 있었으면 좋겠다 사는 일은 유리벽을 사이에 두고 마주 보는 것처럼 마음과 마음의 온도 차이로 성에를 만들고 닦아내지 않으면 등을 보여야 하는 슬픈 배경 가끔은 아주 가끔은 가슴 밖 경계선을 넘어와서 눈물나게 하는 기억들 이 세상 어디선가 내게 등을 보이고 살아가는 사연들이 있다면 걸러내서 좋은 향기로 마주하고 싶다 커피 여과지 위에 잊고 산 시간들이 따뜻하게 걸러지고 있다   할미꽃   허영숙 그늘 드는 마음 눌러보자고 나갔다가 너를 보았다 봉긋하게 내린 그림자를 환하게 바라보는 햇솜 같은 얼굴 누가 이 꽃을 그늘진 마음으로 보겠는가 누가 함부로 이마를 치켜들고 이 꽃을 보겠는가   투명 / 하린 인공눈물을 화분 속에 떨어뜨리고 싹트길 기다려 볼까요 개밥바라기별을 처음 사랑한 사람이 나였으면 하고 서쪽 하늘이 무표정을 버릴 때까지 우는 시늉을 해볼까요 혼자 밥을 먹는데 익숙해지는 허무를 위해 D-day를 표시하며 하루에 세 번 웃어볼까요 바짝 마른 그리움을 풀어 국을 끓이고 숨이 적당히 죽은 외로움을 나물로 무쳐내고 꼬들꼬들한 고독을 적당히 볶아 식탁을 구성해 볼까요 빈 의자와 겸상해볼까요 자, 이제 주말연속극이 시작됩니다 고지식한 시어머니나 파렴치한 악처를 옹호해볼까요 두 사람이 짧은 식사를 하는 것보다 한 사람이 긴 식사를 하는 것이 더 낭만적이라고 다짐해볼까요 입맛을 다시거나 잃어갈 필요가 없습니다 독백을 방백처럼 늘어놓으며 접시를 지속적으로 더럽혀 볼까요 다리를 떨면서 신문을 봐도 먹기를 멈춘 채 눈물을 흘려도 잔소리할 사람 없습니다 시계를 보며 과장되게 늦은 척을 해 볼까요 예감이나 확신을 믿지 않게 해준 당신 공백은 있어도 여백을 찾을 수 없게 만든 당신 오늘 차려놓은 투명한 기척, 눈물 나게 웃으며 먹어볼까요   토란 잎 우산 / 이지엽 가을비 그제부터 시슴사슴 내리더니 오늘은 작정한 듯 나절가웃 내리신다 누에들 뽕잎 쓸듯이 속삭이듯 내리신다. 당숙모 어딜 가시나 토란 잎 우산 쓰고 또로롱 또르르 구르는 빗방울 봐라야 천연 방수다 더 좋은 거 너 봤냐 막내가 손바닥 들고 뛰어간 방둑길 건너 초록하늘 펼쳐들고 단풍물빛 차려입고 비 맞는 어깨와 큰 등짝 뒷모습 내내 애릿하다   나그네 / 이지엽 사람 사이의 길 끊어질 때 사람은 나그네 됩니다 돈 미움 시기 질투 마침내 길 끊어져 외로워집니다. 그가 걸어가는 길 늘 허공입니다 절벽입니다 많은 이 가운데 혼자이고 웃고 있지만 울고 있습니다 밥 먹을 때도 혼자이고 말을 할 때도 혼자입니다 아무에게도 말할 수 없어 자기에게 혼자 말해 본 적 있으십니까 하루 온종일 말을 안해 본적 있으십니까 나그네 미워마세요. 사람 사이 길 끊길 때 우리 모두 나그네 입니다 -시집  4집   하문(下問)  / 문성해 이 길고 멀고 오래된 것은 어디서 오나 이 차고 습습하고 묵은내 나는 내 철들자 맞기 시작한 어떤 상담교사보다도 더 귀에 쏙 맞는 말씀을 담아주는 이것은 내 어미가 싱싱한 허벅지를 걷고 한바탕 헌칫솔로 시멘트 마당을 벗기고 나면 꼭 들이닥치던 이것은 내 아비가 장롱 손잡이에 혁대를 걸고 면도칼을 갈며 바라보던 이것은 내 이마를 지나 코끝을 지나 장미 꽃잎을 지나 땅에서 난민처럼 버글거리는 이것은 먼산도 넓은 벌도 앞 도랑도 막 매달리기 시작한 포도도 착하게 맞고 있는 이것은 마침내 자두맛 참외맛 수작맛도 다 업어가는 이것은​      자기 시를 검토하는 열 가지 기준(10-10) 윤석산 마지막 열 번째로 내 작품이 문학사에서 어떤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가를 검토해 보라고 권유하고 싶다. 물론 '나는 커다란 야심이 없이 쓰는 것이 즐거워 그냥 쓰여지는 대로 쓸 뿐이다'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말한다고 이 질문에서 벗어났다고 생각해서는 안 될 것이다. 작품을 쓰고, 발표하는 행위는 이다. 그러므로, 작품을 책상 서랍 속에 넣어두고 혼자 읽거나 같은 수준의 사람들끼리 동인회를 조직해서 돌려 읽을 게 아니라면 통시적(通時的)으로 그리고 공시적(共時的)으로 자기 작품이 어떤 변별성을 지녔는가를 따져봐야 할 것이다. 그리고, 한국 시인들 전체는 세계 문학 가운데 우리 시가 어떤 독자성을 지니고 있으며, 그 위치가 어디쯤인가를 따져봐야 할 것이다. 아마, 이 열 가지 문제를 검토해본 시인들은, 그렇다면 시란 시론을 공부한 사람만 쓰란 말이냐고 이의를 제기하고 싶을 것이다. 그리고, 다시 네 시 수준은 어느 정도인데, 그렇게 건방을 떠느냐고 말하고 싶을 것이다. 그러나, 죄송하게도 첫 번째 이의에 대한 필자의 대답은 '그렇다'이다. 그리고, 두 번째 질책에 대해서는 '죄송스럽습니다' 이다. 그렇다고 새삼스레 대학을 가고, 대학원을 가라는 이야기가 아니다. 선대와 동시대의 작품들을 꼼꼼히 읽어 보고, 그 작품이 좋다면 왜 좋은가를 생각해 보고, 받아들일 것이 있으면 받아들이고, 못마땅한 것이 있으면 자기 작품에는 그런 것이 없나를 살펴보면서, 자기의 감수성과 문학관을 경신하라는 권유일 뿐이다. 문학 작품은 이론대로는 쓰여지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론은 자기 작품 가운데에 어떤 요소가 모자라고 과잉되었는가를 분석하고 가다듬도록 안내하는 길잡이가 된다는 사실만은 분명하다. 그러므로, 일정 기간 시를 쓴 사람들은 자기 작품을 재검토하고 또 새로운 시학의 수립에 전념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그래도 못마땅하신 분들이 있다면 용서를 빈다.()   술보다 독한 눈물 박인환 눈물처럼 뚝뚝 낙엽지는 밤이면 당신의 그림자를 밟고 넘어진 외로운 내 마음을 잡아 보려고 이리 비틀 저리 비틀 그렇게 이별을 견뎠습니다. 맺지 못할 이 이별 또한 운명이라며 다시는 울지 말자 다짐했지만 맨 정신으론 잊지 못해 술을 배웠습니다. 사랑을 버린 당신이 뭘 알아 밤마다 내가 마시는건 술이 아니라 술보다 더 독한 눈물이였다는 것과 결국 내가 취해 쓰러진건 죽음보다 더 깊은 그리움이였다는 것을   몸 관악기 ㅡ ㅡ 공광규 "당신, 창의력이 너무 늙었어!" 사장의 반말을 뒤로하고 뒷굽이 닳은 구두가 퇴근한다 살 부러진 우산에서 쏟아지는 빗물이 굴욕의 나이를 참아야 한다고 처진 어깨를 적시며 다독거린다 낡은 넥타이를 끌어당기는 비바람이 술집에서 술집으로 걸레처럼 끌고 다니는 밤 빗물이 들이치는 포장마차 안에서 술에 젖은 몸이 악보도 연주자도 없이 운다.   서시 -나희덕 단 한 사람의 가슴도 제대로 지피지 못했으면서 무성한 연기만 내고 있는 내 마음의 군불이여 꺼지려면 아직 멀었느냐   의 자   /  이정록 병원에 갈 채비를 하며 어머니께서 한 소식 던지신다 허리가 아프니까 세상이 다 의자로 보여야 꽃도 열매도,그게 다 의자에 앉아 있는 것이여 주말엔 아버지 산소 좀 다녀와라 그래도 큰애 네가 아버지한테는 좋은 의자 아녔냐 이따가 침 맞고 와서는 참외밭에 지푸라기도 깔고 호박에 똬리도 받쳐야겠다 그것들도 식군데 의자를 내줘야지 싸우지 말고 살아라 결혼하고 애 낳고 사는 게 별거냐 그늘 좋고  풍경 좋은 데다가 의자 몇 개  내놓는 거여   폭설 류근 그대 떠난 길 지워지라고 눈이 내린다 그대 돌아올 길 아주 지워져버리라고 온밤 내 욕설처럼 눈이 내린다 온 길도 간 길도 없이 깊은 눈발 속으로 지워진 사람 떠돌다 온 발자국마다 하얗게 피가 맺혀서 이제는 기억조차 먼 빛으로 발이 묶인다 내게로 오는 모든 길이 문을 닫는다 귀를 막으면 종소리 같은 결별의 예감 한 잎 살아서 바라보지 못한 푸른 눈시울 살아서 지은 무덤 위에 내 이름 위에 아니 아니, 아프게 눈이 내린다 참았던 뉘우침처럼 눈이 내린다 그대 떠난 길 지워지라고 눈이 내린다 그대 돌아올 길 아주 지워져버리라고 사나흘 눈 감고 젖은 눈이 내린다   섶섬이 보이는 방 나희덕(1966~) 서귀포 언덕 위 초가 한 채 귀퉁이 고방을 얻어 아고리와 발가락군은 아이들을 키우며 살았다 두 사람이 누우면 꽉 찰, 방보다는 차라리 관에 가까운 그 방에서 게와 조개를 잡아먹으며 살았다 아이들이 해변에서 묻혀온 모래알이 버석거려도 밤이면 식구들의 살을 부드럽게 끌어안아 조개껍데기처럼 입을 다물던 방, 게를 삶아 먹은 게 미안해 게를 그리는 아고리와 소라껍데기를 그릇 삼아 상을 차리던 발가락군이 서로의 몸을 끌어안던 석회질의 방, 방이 너무 좁아서 그들은 하늘로 가는 사다리를 높이 가질 수 있었다 꿈 속에서나 그림 속에서 아이들은 새를 타고 날아다니고 복숭아는 마치 하늘의 것처럼 탐스러웠다 총소리도 거기까지는 따라오지 못했다 섶섬이 보이는 이 마당에 서서 서러운 햇빛에 눈부셔 한 날 많았더라도 은박지 속의 바다와 하늘, 게와 물고기는 아이들과 해질 때까지 놀았다 게가 아이의 잠지를 물고 아이는 물고기의 꼬리를 잡고 물고기는 아고리의 손에서 파닥거리던 바닷가, 그 행복조차 길지 못하리란 걸 아고리와 발가락군은 알지 못한 채 살았다 빈 조개껍데기에 세 든 소라게처럼   사랑 정끝별 나오는 문은 있어도 들어가는 문은 없는 뜨겁게 웅크린 네 늑골 저 천길 맘속에 들어앉은 수천 년의 석순 끝 물 떨어지는 소리를 내며 너를 향해 한없이 녹아내리는 몸의 꽃이 만든 몸의 가시가 만든 한번 열려 닫힐 줄 모르는 다 삭은 움막처럼 바람속에서 발효하는 들어가는 문은 있어도 나오는 문이 없는 그 앞에서 언제나 오줌이 마려운 그림 일기 ​   진은영 ​ 그런 날이면 창백한 물고기에게 황금빛 수의를 땅이 내준 길만 따라 흐르는 작은 강물에게 거미의 다 리를 무엇에 차이기 전에는 아무 데도 가지 못하는 돌멩이 에게 이쁜 날개를 한 번도 땅의 가슴을 만져본 적 없는 하늘에게 부드러 운 손가락을 높은 곳에서 떨어져본 마음을 더 높은 곳에서 떨어지는 마음 받아주는 두 팔을 높은 곳에 올라가기 전에 네 곁으로 가는 다리를 그러나 높은 곳에서 떨어져 이미 삐뚤어진 입술을 그 입술의 미세한 떨림을 그 떨림이 전하지 못하는 신음을 크게 그려줘 내 몸에 곱게 새겨줘 그런 날이면 망친 그림을 잘못 그려진 나를 구기지 말아줘 버리지 말아줘 잘못 그려진 나에게 두껍게 밤을 칠해줘 칼자국도 무섭지 않아 대못도, 동전 모서리도, 그런 날이면 새로 생긴 흉터에서 밑그림 반짝이는 그런 날    양파 공동체 / 손미   그러니 이제 열쇠를 다오. 조금만 견디면 그곳에 도착한다. 마중 나오는 싹을 얇게 저며 얼굴에 쌓고, 그 아래 열쇠를 숨겨 두길 바란다.   부화하는 열쇠에게 비밀을 말하는 건 올바른가?    이제 들여보내 다오. 나는 쪼개지고 부서지고 얇아지는 양파를 쥐고 기도했다. 도착하면 뒷문을 열어야지. 뒷문을 열면 비탈진 숲, 숲을 지나면 시냇물. 굴러떨어진 양파는 첨벙첨벙 건너갈 것이다. 그러면 나는 사라질 수 있겠다.    나는 때때로 양파에 입을 그린 뒤 얼싸안고 울고 싶다. 흰 방들이 꽉꽉 차 있는 양파를.   문 열면 무수한 미로들.   오랫동안 문 앞에 앉아 양파가 익기를 기다리고 있다.    나는 때때로 쪼개고 열어 흰 방에 내리는 조용한 비를 지켜보았다. 내 비밀을 이 속에 감추는 건 올바른가. 꽉꽉 찬 보따리를 양손에 쥐고     조금만 참으면 도착할 수 있다.   한 번도 들어가 본 적 없는 내 집.    작아지는 양파를 발로 차며 속으로, 속으로만 가는 것은 올바른가. 입을 다문 채 이 자리에서 투명하게 변해 가는 것은 올바른가. 서늘함 / 신달자 주소 하나 다는 데 큰 벽이 필요 없다 지팡이 하나 세우는 데 큰 뜰이 필요 없다 마음 하나 세우는 데야 큰 방이 왜 필요한가 언 밥 한 그릇 녹이는 사이 쌀 한 톨 만한 하루가 지나간다 -시집 「북촌』, 민음사, 2016   국물          신달자   메루치와 다시마와 무와 양파를 달인 국물로 국수를 만듭니다 바다의 쓰라린 소식과 들판의 뼈저린 대결이 서로 몸 섞으며 사람의 혀를 간질이는 맛을 내고 있습니다 바다는 흐르기만 해서 다리가 없고 들판은 뿌리로 버티다가 허리를 다치기도 하지만 피가 졸고 졸고 애가 잦아지고 서로 뒤틀거나 배배 꼬여 증오의 끝을 다 삭인 뒤에야 고요의 맛에 다가옵니다 내 남편이란 인간도 이 국수를 좋아하다가 죽었지요 바다가 되었다가 들판이 되었다가 들판이다가 바다이다가 다 속은 넓었지만 서로 포개지 못하고 포개지 못하는 절망으로 홀로 입술이 짓물러 눈감았지요 상징적으로 메루치와 양파를 섞어 우려낸 국물을 먹으며 살았습니다 바다만큼 들판만큼 사랑하는 사이는 아니었지만 몸을 우리고 마음을 끓여서 겨우 섞어진 국물을 마주보고 마시는 그는 내 생의 국물이고 나는 그의 국물이었습니다   식당풍경/ 신달자 용산 기차역 식당에서 내 앞에 마주 앉아 국수를 먹고 있는 한 쌍의 남녀, 마흔이 갓 넘어 보이는 남자와 여자는 조금은 누추하고 겉늙어 보인다 일터에서 잠시 몸을 빼 기차 타는 여자를 보러 나온 남자는 여자의 입에 자꾸만 국수 가락을 넣어 주고 있다 답례인지 여자도 국수 한 가락을 남자의 입안에 아 하고 넣어주는데 킥킥 웃음도 함께 넣어 주는데 이마가 닿을 듯 말 듯 그사이 그들의 고된 생이 환하게 국물처럼 흘러내린다 여자의 국수 가락 끝으로 깊은 강 하나가 쑥 뽑혀 올라오다 김 속으로 사라진다 든든하다 포도나무 처럼 무릎을 서로 꿇은 채 사과처럼 익어 가는 저 풍경 무릎이 닳아 사막이 될 때 만난 사이인가 기운 인연이 다 터지고 엎지러진 물을 담듯 서로 만난 인연인가 눈을 마주하고 얼굴을 마주하고 이마를 마주하고 운명을 마주하고 절대로 누가 먼저 돌아서지 않을 것 같은 저들 가난한 인연들에게 국수 한 가락 건져 올려 그들 목에 리본이라도 매어 주고 싶다   배추꽃 / 박성우 시골집 다녀오는 길에 텃밭에서 겨울을 난 배추를 캐왔다 겉절이를 하거나 쌈을 싸는 저녁은 생각만으로도 달았지만 노모가 챙겨준 반찬만 꺼내도 저녁 식탁은 어지간히 푸짐했다 비닐봉지에 들어있던 봄동, 배추는 그새 꽃대를 내밀고는 겉절이도 쌈도 거부하고 지 맘대로 꽃으로 돌아갔다 꽃대 당당히 밀어올리고는 고추장이나 된장 따위 말고 화병과 물을 내놓으라 했다 꽃병이 어디 있더라, 하루 걸러 물 갈아주지 않으면 유리병 뿌옇게 까탈을 부렸다 배추를 캐온 게 아니라 까탈스러운 꽃을 모셔왔구나, 물이 탁해진다 싶으면 얼른 병 씻고 물 바꿔줘야 했다 배추꽃은 배추꽃답게 꽃대 겨드랑이 사이로 새 꽃대 내밀어댔다 아침에 일어나 커튼을 걷어주면 순식간에 몰려온 햇살이 앵앵 왱왱, 샛노란 배추꽃에 달라붙었다 햇살의 분별력 / 안도현 감나무 잎에 내리는 햇살은 감나무 잎사귀만 하고요 조릿대 잎에 내리는 햇살은 조릿대 잎사귀만 하고요 장닭 볏을 만지는 햇살은 장닭 볏만큼 붉고요 염소 수염을 만지는 햇살은 염소 수염 만큼 희고요 여치 날개에 닿으면 햇살은 자르륵 소리를 내고요 잉어 꼬리에 닿으면 햇살은 첨버덩 소리를 내고요 거름 더미에 뒹구는 햇살은 거름 냄새가 나고요 오줌통에 빠진 햇살은 오줌 냄새가 나고요 겨울에 햇살은 건들건들 놀다 가고요 여름에 햇살은 쌔빠지게 일하다 가고요   우리가 눈발이라면 / 안도현   우리가 눈발이라면 허공에서 쭈빗쭈빗 흩날리는 진눈깨비는 되지 말자. 세상이 바람불고 춥고 어둡다 해도 사람이 사는 마을 가장 낮은 곳으로 따뜻한 함박눈이 되어 내리자. 우리가 눈발이라면 잠 못 든 이의 창문가에서는 편지가 되고 그이의 깊고 붉은 상처 위에 돋는 새살이 되자.   처음 시를 쓰던 날'/ 손홍규 “외로웠다. 돌아보건대, 생은 늘 외로웠다”로 시작하는 한 편의 글을 읽었다. 외롭다는 말에 무심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첫 문장부터 돌부리에 걸린 듯 멈추지 않을 수 없었다. 생을 돌아보아야 할 만큼 나이를 먹은 건 아니라고 여기지만 생을 돌아보기에 좋은 나이가 따로 있는 것도 아닐 테니 이런 문장 앞에서는 잠시 숨을 고르며 머물러도 괜찮을 듯했다. 기억을 더듬어 보니 내가 쓴 최초의 시도 외로움에 대한 것이었다. 그 시를 쓴 건 초등학교 6학년 때였다. 담임 선생님은 우리 학교에 부임한 지 몇 해 안되었지만 인기가 많은 분이어서 다른 반 동급생들의 부러움을 샀다. 첫인상은 좀 무시무시했다. 키가 크고 비쩍 마른 분이어서 까다로운 성격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눈이라도 마주치면 절로 고개를 숙이게 되었으니까. 6학년이 되기 전부터 동네 형들과 누나들에게 선생님에 대한 이야기를 숱하게 들었던 터라 잔뜩 긴장한 탓도 있었다. 나만 그런 게 아니라 우리 반 친구들은 다들 그런 듯했다. 그렇지만 며칠 안되어 왜 인기가 많은 선생님인지를 알게 되었다. 당신은 어린 학생들이라고 해서 함부로 대하는 법이 없었고 집이 가난하다고 해서 공부를 못한다고 해서 차별하지도 않았다. 그런 차별이 흔하다 못해 당연하게 여겨지던 시절이었는데 말이다. 선생님은 수업 운영 방식에서도 남달랐다. 일주일에 세 시간인 작문 시간을 다른 반 선생님들은 보통 자습 시간 삼아 적당한 요일로 한 시간씩 떨어뜨려 놓았지만 우리 반은 달랐다. 오전 수업만 있던 토요일은 오롯이 작문 시간으로 채워졌다. 우리 반 친구들은 매주 토요일 홀가분한 마음으로 학교에 갔고 책을 읽거나 시를 쓰거나 좋은 시가 무엇인지를 설명하는 선생님의 차분한 목소리를 들으며 일 년을 보냈다. 날이 갈수록 그 시간을 즐기게 됐고 돌아보니 아마도 그때 나는 외로웠던 것 같다. 초등학교 6학년도 외로울 수 있는 법이다. 세 해 전에는 할머니가 돌아가셨고 바로 전해에는 아버지가 탈곡기에 손가락 하나를 잃었다. 나는 형제자매가 많은 친구들이 부러웠다. 집에 돌아가면 아무도 없었다. 적막과 고요만이 나의 형제였다. 그 시간을 늦추기 위해 학교에 오래 머무는 날이 많아졌다. 내가 홀로 찾아들어 시간을 보내던 곳은 도서관이었다. 거기에 도서관이 있다는 사실조차 모르는 학생들이 대부분이었을 만큼 쓸쓸한 곳이었다. 그 사실이 퍽 마음에 들었다. 서가 사이 마룻바닥에 앉아 책장을 넘기면 창으로 스며든 햇살이 재단한 허공에서 속삭임처럼 책 먼지가 들끓었다. 외로움은 그처럼 숨죽인 채 내 곁에 머물렀다. 그러던 내가 처음으로 시를 쓰게 된 거였다. 도서관에서만 위안을 찾을 수 있던 한 아이가 꾸미지 않아도 괜찮다고 어른의 말투를 흉내 내지 않아도 좋다고 무엇을 느끼든 내가 느낀 걸 쓰면 그게 바로 시라는 선생님의 격려를 받으며 시를 끄적이게 된 거였다. 그렇게 한 해를 보낸 우리는 각자 두 편의 시를 제출했고 선생님은 그 시들로 문집을 엮어 졸업하던 날에 한 권씩 나눠주었다. 나는 지금도 고향집에 가면 ‘미리내’라는 제목의 이 문집을 가끔 들여다본다. 그 시절에 내가 느껴야 했던 외로움을, 사실 무어라 불러야 할지 몰라 한 번도 발설하지 못했던 감정이 서투르지만 결백한 언어들로 행을 이루어 잠에서 깨어나는 걸 본다. 문집에 실린 다른 친구들의 시에서도 내가 느꼈던 것과 전혀 다르지 않은 감정들을 본다. 어쩌면 그 아이들의 가슴속에서 난생처음 이끌려 나와 부신 눈을 깜박이고 있을 그것들을. 그로부터 삼십여년이 지난 지금 그해 일 년 동안 우리에게 시를 가르쳐주고 용기를 불어넣어 주고 문학을 알게 해준 당신도 우리와 마찬가지로 외로워하던 사람이었음을 알게 되었다. “외로웠다. 돌아보건대, 생은 늘 외로웠다”(최명표)로 시작하는 당신의 글을 읽었다. “그날 처음으로 눈곱이 산 자가 저승으로 가기 전에 마지막으로 몌별하느라 밤새 빚어낸 사리인 줄 깨달았다”라는 문장처럼 당신 역시 외롭고 높고 쓸쓸했음을 알았다. (경향신문/ 손홍규 소설가) 꽃의 권력 / 고재종      제15회 영랑시문학상 수상작   꽃을 꽃이라고 가만 불러보면 눈앞에 이는 홍색 자색 연분홍 물결 꽃이 꽃이라서 가만 코에 대보면 물큰, 향기는 알 수도 없이 해독된다 꽃 속에 번개가 있고 번개는 영영 찰나의 황홀을 각인하는데 꽃핀 처녀들의 얼굴에서 오만 가지의 꽃들을 읽는 나의 난봉은 벌 나비가 먼저 알고 담 너머 대붕(大鵬)도 다 아는 일이어서 나는 이미 난 길들의 지도를 버리고 하릴없는 꽃길에서는 꽃의 권력을 따른다   -시집『꽃의 권력』 (문학수첩, 2017)   개의 정치적 입장 / 배한봉 개들이 짖는 소리를 개소리라 한다. 그것은 개들의 대화이기도 하고 개들이 달을 보고 하는 뻘짓이기도 하다. 사람끼리 가끔 개소리한다고 할 때가 있다. 사람 안에 개가 들었다는 말이다. 개들도 그럴 때가 있을까. 개 안에 사람이 들어 울부짖으면 사람소리 한다고 개들끼리 수군거릴까. 그러면 그것은, 욕설일까, 정치일까, 철학의 한 유파를 형성할 수 있을까. 벽에는 커다랗게 얼굴 사진을 새긴 포스터가 일렬횡대로 붙어 웃고 있다. 벽보 앞을 지나가다 나는 개 짖는 소리를 듣는다. 이것은 정치적 혐오일까, 무관심일까, 참여일까. 골목 앞, 신들린 무당집 개가 아무나 지나갈 때마다 컹컹컹, 컹컹 자꾸 묻는다. ㅡ《시사사》(2018년 9-10월호) ~~~~~~~~~ 배한봉 경남 함안 출생, 1998년 '현대시' 등단 시집 『흑조 』『우포늪의 왁새 』『악기점 』 『잠을 두드리는 물의 노래 』『주남지의 새들』   [감상] 실존 철학에 기반을 둔 모더니즘 문학은 자신과의 싸움을 기저로하는 자기투쟁의 문학이고 이 자기투쟁은 사회 부조리를 있는그대로 받아들이되 좀더 나은 인간 본연의 세계로 창조하는 것이라 한다. 여기에 바탕을 두고 태동한 문학이 앙가지망 문학이다. 앙가지망 문학을 한마디로 정의 한다면 참여 문학으로 정의한다. 여기서 참여란 사회부조리를 바라보는 눈이 좀더 나은 사회로 개선시키위해 역설적으로 반항하는 저항의식을 담아 일반인에게 각성을 촉구한다. 이 시 개의 '정치적 입장'도 앙가지망의 성격을 지닌 시로 오늘날의 한국 정치사회를 일타하고 있다. 머지않아 총선이 다가 오고 벌써 부터 정치 입지자들의 사전 선거 운동이 전개되고 언론에서는 여기에 촛점을 맞춰 연일 뉴스의 대다수를 할애하고 있다. 역설로 개의 정치적 입장이 개판 정치의  입장으로 발상전환이 되어 개짖는 소리의 다양한 의미 전달을 통해 깊은 사유로 상상을 확장시키고 있다. ㅡ ㅡ 펌   사랑 / 홍관희 우리가 사랑이란 이름 하나로 굳게 만나 말 못하는 내가 그대의 다리가 되어 주고 걷지 못하는 그대가 나의 입이 되어 준다면 지평선 너머까지라도 가고픈 길을 우리는 하고픈 말을 하면서 갈 수 있겠네 우리가 사랑이란 이름 하나로 만나 팔 못 쓰는 내가 그대의 길이 되어 주고 앞 못 보는 그대가 나의 팔이 되어 준다면 빛이 들끓는 그 곳까지 가고픈 길을 우리는 보고픈 것들을 보면서 갈 수 있겠네 그대의 어려움이 나의 사랑으로 풀리고 나의 어려움이 그대의 사랑으로 풀리며 우리가 굽힘없이 한 길 되어 꿋꿋이 나아간다면 척박한 이 세상도 꿈을 꾸며 살아갈 수 있겠네.   담쟁이 / 도종환 저것은 벽 어쩔 수 없는 벽이라고 느낄 때 그때 담쟁이는 말없이 그 벽을 오른다 물 한 방울 없고 씨앗 한 톨 살아남을 수 없는 저것은 절망의 벽이라고 말할 때 담쟁이는 서두르지 않고 앞으로 나아간다 한 뼘이라도 꼭 여럿이 함께 손을 잡고 올라간다 푸르게 절망을 다 덮을 때까지 바로 그 절망을 잡고 놓지 않는다 저것은 넘을 수 없는 벽이라고 고개를 떨구고 있을 때 담쟁이 잎 하나는 담쟁이 잎 수천 개를 이끌고 결국 그 벽을 넘는다   류근 그대 떠난 길 지워지라고 눈이 내린다 그대 돌아올 길 아주 지워져버리라고 온밤 내 욕설처럼 눈이 내린다 온 길도 간 길도 없이 깊은 눈발 속으로 지워진 사람 떠돌다 온 발자국마다 하얗게 피가 맺혀서 이제는 기억조차 먼 빛으로 발이 묶인다 내게로 오는 모든 길이 문을 닫는다 귀를 막으면 종소리 같은 결별의 예감 한 잎 살아서 바라보지 못한 푸른 눈시울 살아서 지은 무덤 위에 내 이름 위에 아니 아니, 아프게 눈이 내린다 참았던 뉘우침처럼 눈이 내린다 그대 떠난 길 지워지라고 눈이 내린다 그대 돌아올 길 아주 지워져버리라고 사나흘 눈 감고 젖은 눈이 내린다 사랑 정끝별 나오는 문은 있어도 들어가는 문은 없는 뜨겁게 웅크린 네 늑골 저 천길 맘속에 들어앉은 수천 년의 석순 끝 물 떨어지는 소리를 내며 너를 향해 한없이 녹아내리는 몸의 꽃이 만든 몸의 가시가 만든 한번 열려 닫힐 줄 모르는 다 삭은 움막처럼 바람속에서 발효하는 들어가는 문은 있어도 나오는 문이 없는 그 앞에서 언제나 오줌이 마려운 그림 일기 ​   진은영 ​ 그런 날이면 창백한 물고기에게 황금빛 수의를 땅이 내준 길만 따라 흐르는 작은 강물에게 거미의 다 리를 무엇에 차이기 전에는 아무 데도 가지 못하는 돌멩이 에게 이쁜 날개를 한 번도 땅의 가슴을 만져본 적 없는 하늘에게 부드러 운 손가락을 높은 곳에서 떨어져본 마음을 더 높은 곳에서 떨어지는 마음 받아주는 두 팔을 높은 곳에 올라가기 전에 네 곁으로 가는 다리를 그러나 높은 곳에서 떨어져 이미 삐뚤어진 입술을 그 입술의 미세한 떨림을 그 떨림이 전하지 못하는 신음을 크게 그려줘 내 몸에 곱게 새겨줘 그런 날이면 망친 그림을 잘못 그려진 나를 구기지 말아줘 버리지 말아줘 잘못 그려진 나에게 두껍게 밤을 칠해줘 칼자국도 무섭지 않아 대못도, 동전 모서리도, 그런 날이면 새로 생긴 흉터에서 밑그림 반짝이는 그런 날   
40    좋은시 묶음3 댓글:  조회:1351  추천:0  2019-08-19
카드 키드     박성우     카드가 사준 정장을 입고 카드가 사준 구두를 신은 출근길은 벅차다 어쩌다 카드가 사주는 저녁은 근사하고 카드가 큰맘 먹고 들여준 침대는 푹신하다 카드가 현금서비스 해준 축의금을 들고 다녀오는 직장 동료의 결혼식은 처연하게 찬란하다 입사 삼년차 카드 키드, 야근에 지쳐 귀가하는 밤은 카드가 카드론으로 얻어준 원룸이 있어 아늑하다 카드 키드가 되기 위한 지난날은 아름다웠다 스펙에 내준 대학생활은 교양 없이 품위 있었고 자기소개서 속으로 들어간 스펙은 뻔뻔하게 자랑스러웠다 서류전형에서 번번이 떨어지던 입사시험, 처음으로 면접 통보를 받던 날은 팬파이프 같은 빛이 눈앞으로 쏟아져내리는 것 같았다 카드가 사주는 패스트푸드는 먹을 만하고 카드가 지켜주는 직장생활은 아직 견딜 만하다 정기적금을 해약해 카드에게 이체하고 남은 돈, 지방에 사는 양친께 부쳐드리던 손은 대견하다 월급날 받은 급여는 어김없이 카드에게 옮겨간다 '언제 취직할 거니'를 지나 '언제 결혼할 거니'까지 기적적으로 와 있는 카드 키드, 카드는 희망 복근을 키워보는 건 어떠냐며 헬스클럽을 권유한다   시인은 시적으로 지상에 산다 / 천양희 원고료를 주지 않는 잡지사에 시를 주면서 정신이 밥 먹여 주는 세상을 꿈꾸면서 아직도 빛나는 건 별과 시뿐이라고 생각하면서 제 숟가락으로 제 생을 파먹으면서 발 빠른 세상에서 게으름과 느림을 찬양하면서 냉정한 시에게 순정을 바치면서 운명을 걸면서 아무나 말할 수 없는 것들을 말하면서 새소리를 듣다가도 ‘오늘 아침 나는 책을 읽었다’*고 책상을 치면서 시인은 시적으로 지상에 산다 시적인 삶에 대해 쓰고 있는 동안 어느 시인처럼 나도 무지하게 땀이 났다 * 연암 박지원의 글 에서 최영미 시 ㅡ 너에게로 가는 길 누구도 모른다 ​ 그리하여 이 시대 나는 어떤 노래를 불러야 하나 창자를 뒤집어 보여줘야 하나, 나도 너처럼 썩었다고 적당히 시커멓고 적당히 순결하다고 버티어온 세월의 굽이만큼 마디마디 꼬여 있다고 그러나 심장 한귀퉁이는 제법 시퍼렇게 뛰고 있다고 동맥에서 흐르는 피만큼은 세상모르게 깨끗하다고 은근히 힘을 줘서 이야기해야 하나 살아남은 자의 슬픔을 나도 충분히 부끄러워 할 줄 안다고 그때마다 믿어달라고, 네 손을 내 가슴에 얹어줘야 하나 내게 일어난 그 모든 일에도 불구하고 두 팔과 두 다리는 악마처럼 튼튼하다고 그처럼 여러번 곱씹은 치욕과, 치욕 뒤의 입가심 같은 위로와 자위끝의 허망한 한 모금 니코틴의 깊은 맛을 어떻게 너에게 말해야 하나 양치질할 때마다 곰삭은 가래를 뱉어낸다고 상처가 치통처럼, 코딱지처럼 몸에 붙어 있다고 아예 벗어붙이고 보여줘야 하나 아아 그리하여 이 시대 나는 어떤 노래를 불러야 하나 아직도 새로 시작할 힘이 있는데 성한 두팔로 가끔은 널 안을 수 있는데 너에게로 가는 길을 나는 모른다 ​ - 시집 『서른 잔치는 끝났다』(창비, 1994)   2017 세계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빅풋/석민재   군함처럼 큰 발을 끌고 아버지가 낭떠러지까지 오두막집을 밀고 갔다가 밀고 왔다가 왼발 오른발 왼발 오른발 스텝을 맞추며 말기 암, 엄마를 재우고 있다 죽음을 데리고 놀고 있다 죽을까 말까 죽어줄까 말까 엄마는 아빠를 놀리고 있다 아기처럼 엄마처럼 절벽 끝에서 놀고 있다 ​   < 2017 한라일보 신춘문예 당선작 > 점등 / 오경 가슴에서 플러그를 뺐다 젖이 멈췄다 벽등의 스위치를 켰다 나는 밤이 들킨 것 처럼 호들갑을 떤다 떨다가 아슬아슬하게 걸친 검은 브래지어를 떨어뜨린다 어둠이 활처럼 휘어진다 순간 배고프다는 생각이 든다 나는 허기를 달래려고 더 진한 화장을 하고 더 긴 속눈썹을 붙이고 스타킹을 벗는다 갑작스런 빛이 사방을 삐거덕거리게 한다 아기 유령들이 셔플 댄스를 추다가 천장에서 추락했을지도 모른다 길 잃은 시조새 한 마리 비상하다가 태양의 모서리에 부딪쳐 날개가 부러졌을지도 모른다 나는 문을 나서고 싶지 않았다 아니 불을 켜고 싶지 않았다 보이지 않는 것의 아주 작은 세포를 만지며 느껴 보고 싶었을 뿐 식탁 위엔 주인 없는 고통이 가열하지 않은 채 날것으로 있다 함성에 금이 간 어둠이여 다시는 변명에 목을 걸지 말 것 목숨 걸어야 할 곳이 어디 한 두 곳인가 식탁 아래 한때 눈부셨던 대낮의 그림자가 꽁무니를 빼느라 허둥지둥이다 지금은 어둠을 수습하기 위해 차단이 필요한 순간이다 찰나를 포착한 순발력 매년 일간지 신춘문예로 등단하는 시인이 30명 이상이다. 이 중에서 과연 몇 명이나 살아남아 계속 활동할까. 이러한 질문은 열정적이고 패기 넘치는 응모작들을 접하는 동안 우려보다는 새로운 기대로 바뀌었다.  올해 한라일보 신춘문예의 시 부문 예심을 거친 응모자는 10명이었다. 이를 다시 검토한 결과 김려원의 '애월의 얼룩', 김미경의 '먹돌쌔기', 이도훈의 '중절모', 오경의 '점등' 등 4편이 최종까지 남았다.  이 네 사람의 작품은 비슷한 수준이지만 서로 다른 작품 경향을 보여주었다. 김려원은 언어를 구사하는 솜씨가 예사롭지 않을뿐더러 어떤 소재도 시적 대상으로 수용해내는 역량이 돋보였다. 그러나 호흡이 다소 산만하고 불안하였다. 김미경의 시는 긴 호흡의 내용도 거침없이 소화해 내는 능력을 높이 살만했지만, 익숙한 자신의 틀에 갇혀 개성이 드러나지 않는다는 점이 아쉬웠다. 이도훈의 시는 서툰 듯 낯선 표현이 되레 참신하게 느껴졌다. 특히 전봇대에 지은 새집을 중절모로 비유한 표현은 눈길을 오래 붙잡았다. 그렇지만 응모작 간 격차가 드러난다는 사실이 선택을 망설이게 했다. 반면 오경의 시는 식상하거나 미흡한 표현들이 더러 눈에 띄었음에도 불구하고, 작품들 수준이 대체적으로 고르며 응모자 자신의 목소리를 갖고 있다는데 심사위원들의 견해가 일치했다. 미숙한 점이 노정된다는 것은 그것을 극복해나가야 하는 숙제가 주어진다는 의미이다. 심사위원들은 그 긍정적인 가능성을 인식하고, 논의 끝에 '점등'을 당선작으로 결정했다.  당선작 '점등'은 주방의 벽등을 켜는 순간을 개성적으로 묘사하면서 사색한다. 빛이 들어와 어둠이 사라지는 찰나는 거의 동시에 이루어지지만, 이때 존재하는 소재와 상상들을 순발력 있게 포착해 역동적으로 제시하는 대목에서 당선자의 기량을 엿볼 수 있었다.  당선자에게 축하를, 또한 상세히 언급하진 못했지만 예심을 거친 모든 분께도 응원을 보낸다. 그들 모두 똑같은 출발점에 다시 서 있다는 사실을 잊지 않았으면 한다   스며드는 것                       안도현 꽃게가 간장 속에 반쯤 몸을 담그고 엎드려 있다 등판에 간장이 울컥울컥 쏟아질 때 꽃게는 뱃속의 알을 껴안으려고 꿈틀거리다가 더 낮게 더 바닥 쪽으로 웅크렸으리라 버둥거렸으리라 버둥거리다가 어찌할 수 없어서 살 속에 스며드는 것을 한때의 어스름을 꽃게는 천천히 받아들였으리라 껍질이 먹먹해지기 전에 가만히 알들에게 말했으리라 저녁이야 불 끄고 잘 시간이야   바깥에 갇히다 정용화 우리 집 현관문에는 번호키가 달려있다 세 번, 비밀번호를 잘못 누르면 가차 없이 문이 나를 거부한다 쓰레기를 버리러 나왔다가 지갑도 휴대폰도 없이 제대로 바깥에 갇히고 말았다 안과 밖이 전도되는 순간 열리지 않는 문은 그대로 벽이 된다 계단에 앉아있는 30분 동안 겨울이 왔다 바람은 골목을 넓히려는 듯 세차게 불고 추위를 모르는 비둘기는 연신 모이를 쪼아댄다 내 것이면서 내가 어쩌지 못하는 것이 어디 문뿐이겠는가 낡을 대로 낡아버린 현수막이 바깥에 갇힌 나를 반성도 없이 흔든다 걸터앉은 계단이 제멋대로 흩어지는 길 위의 낙엽이 새들이 자유롭게 풀어놓은 허공이 나를 구속하고 있는 바깥이라니! 안으로 들어갈 수 없는 나는 지금 바깥이다 프로필 정용화 : 충북 ,동대 대학원 문창과, 대전일보 신춘문예 당선, 시집[바깥에 갇히다]외 다수 시 감상 어느 때 외출했다가 당혹할 때가 있다. 손에 아무것도 쥔 것이 없다. 현금도, 카드도, 전화기도, 차 열쇠도, 밀려드는 공포. 나는 여기에 이렇게 있는데, 세상의 밖에 나 홀로 있는 듯한 느낌. 어쩌면 나는 현금, 카드, 전화기, 열쇠로만 존재했던 것은 아닌지? 아니면 애초부터 나는 없었고 다만, 한 여름 땡볕에 울렁거리는 저 그림자가 진짜 ‘나’인지? 분명한 것은 바깥은 안의 반대가 아니라는 것이다. 내가 지금 바깥이라는 것이다. [글/김부회 시인, 평론가]   물소의 뒷굽은 거룩하다 라고 / 정태중 시의 설계는 간혹 시어들이 떠나버리기도 해서 부도난 공사장 같기도 하였는데 공사장으로 신의 선물이랄까 하는 물음들이 녹슨 창으로 푸르게는 올라오기도 하였다 하얀 배꽃들이 지난 시간을 입었던 듯 옷들이 누렇게 먼저 바래고는 있는 듯 신문 기자의 탁본이 바래고는 있는 듯 배들이 어떤 문장들로 하여서 배가 불러오기도 한 점심시간이 지나자 부리나케 삐뽀삐뽀로 기선 잡는 불자동차와 헛배에 힘 잔뜩 부린 부도난 공사장 방귀와 상관도 없이 해는 쨍쨍 내리다가 굵은 빗방울 쏟아져 공사장을 내려치는데 부도난 말들이 튕겨 오르는 것이 풀들을 잡고 있는 눈물 같기만 하였는데 불화 가득 늙은 수소 큰 눈이 어리둥절 휘청이다가 눈물을 흘려주다가 음~매 라고 몇 번을 풀을 토악질하였다  
39    병문안 / 병문안 댓글:  조회:1111  추천:0  2019-08-19
병문안                                    김사이   죽음에 기저귀를 채우고 껌벅껌벅 나는 이순례입니다 내 이름은 이순례입니다 부시게 푸르른 하늘도 스산한 오후의 비도 순간 입맞춤처럼 지나가리니 분노는 늙고 눈물은 낡아서 운다 촛불이 켜져도 슬픔이 마르지 않는 몸뚱이는 가난한 땅에서 쉴 틈 없이 닳고 닳아 덮어쓴 껍데기 속으로 순하게 주무신다 휙 던져져 바람의 먹이로 사라지는 우렁각시 지구의 뚱뚱한 나이만큼 오래된 일상 짐짝처럼 끌려갈 때도 지키지 못한 영혼들 가까스로 살아온 환향녀는 화냥년이 되었다 오래된 일상이 너무 오래되어 나는 죄가 되었다 더는 목구멍으로 삶을 삼킬 수 없는 시간 죽음에 이르러서 되찾은 이름 나는 여자 이순례입니다 -《창작과 비평》2017년 겨울호       /     김종배 당신 얼굴에 쓰여진 난해한 문자 나 지금 토라졌으니 토닥여달란 건지 이젠 정말 끝이니 사라져달란 건지 당신이 쓰고 있는 또 다른 당신 깨진 거울의 파편을 들여다보는 난독증의 사내     사바(娑婆)                                 김사인 이것으로 올해도 작별이구나. 풀들도 주섬주섬 좌판을 거두는 외진 길섶 어린 연둣빛 귀뚜리 하나를(생후 며칠이나!) 늙은 개미가 온 힘을 다해 끌고 간다. 가는 팔다리를 허우적거리며 아직 산 놈이면 봐주는 게 어떻겠는가,하자 한사코 죽은 놈이라 우긴다. 놓지 않는다. ㅡ 시집『어린 당나귀 곁에서』 창비, 2015년  쥐   김기택 구멍의 어둠 속에 정적의 숨죽임 뒤에 불안은 두근거리고 있다 사람이나 고양이의 잠을 깨울 가볍고 요란한 소리들은 깡통 속에 양동이 속에 대야 속에 항상 숨어 있다 어둠은 편안하고 안전하지만 굶주림이 있는 곳 몽둥이와 덫이 있는 대낮을 지나 번득이는 눈과 의심 많은 귀를 지나 주린 위장을 끌어당기는 냄새를 향하여 걸음은 공기를 밟듯 나아간다 꾸역꾸역 굶주림 속으로 들어오는 비누 조각 비닐봉지 향기로운 쥐약이 붙어 있는 밥알들 거품을 물고 떨며 죽을 때까지 그칠 줄 모르는 아아 황홀하고 불안한 식욕       의자 / 이정록 병원에 갈 채비를 하며 어머니께서 한 소식 던지신다 허리가 아프니까 세상이 다 의자로 보여야 꽃도 열매도, 그게 다 의자에 앉아 있는 것이여 주말엔 아버지 산소 좀 다녀와라 그래도 큰애 네가 아버지한테는 좋은 의자 아녔냐 이따가 침 맞고 와서는 참외밭에 지푸라기도 깔고 호박에 똬리도 받쳐야겠다 그것들도 식군데 의자를 내줘야지 싸우지 말고 살아라 결혼하고 애 낳고 사는 게 별거냐 그늘 좋고 풍경 좋은 데다가 의자 몇 개 내놓는 거여 .
38    좋은시 묶음 2 댓글:  조회:895  추천:0  2019-08-19
도토리 두 알 / 박 노 해 산길에서 주워든 도토리 두 알 한 알은 작고 보잘 것 없는 도토리 한 알은 크고 윤나는 도토리 나는 손바닥의 도토리 두 알을 바라본다 너희도 필사적으로 경쟁했는가 내가 더 크고 더 빛나는 존재라고 땅바닥에 떨어질 때까지 싸웠는가 진정 무엇이 더 중요한가 크고 윤나는 토토리가 되는 것은 청설모나 맷돼지에게나 중요한 일 삶에서 훨씬 더 중요한 건 참나무가 되는 것   상현 (上弦)                                                                       나희덕      차오르는  몸이  무거웠던지    새벽녘  능선  위에  걸터앉아  쉬고  있다      神(신)도  이렇게  들키는  때가  있으니!      때로  그녀도  발에  흙을  묻힌다는  것을    외딴  산모퉁이를  돌며  나는  훔쳐보았던  것인데    어느새  눈치를  챘는지    조금  붉어진  얼굴로  구름  사이  사라졌다가    다시  저만치  가고  있다      그녀가  앉았던  궁둥이  흔적이    저  능선  위에는  아직  남아  있을  것이어서    능선  근처  나무들은  환한  상처를  지녔을  것이다    뜨거운  숯불에  입술을  씻었던  이사야처럼                                 --  시집  [어두워진다는 것]  (2001)     말들의 후광 / 김선태 세상 모든 것들은 서로 관심 속에서 빛이 나는 것인가. 오랜만에 뿌옇게 흐려진 거실 유리창 청소를 하다 문득 닦다, 문지르다, 쓰다듬다 같은 말들이 거느린 후광을 생각한다. 유리창을 닦으면 바깥 풍경이 잘 보이고, 너의 얼룩을 닦아주면 내가 빛나고, 마음을 닦으면 세상 이치가 환해지듯이 책받침도 문지르면 머리칼을 일으켜 세우고, 녹슨 쇠붙이도 문지르면 빛이 나며, 아무리 오랜 기억도 문지르면 생생하게 되살아나듯이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면 얼굴빛이 밝아지고, 아픈 마음을 쓰다듬으면 환하게 상처가 아물며, 돌멩이라도 쓰다듬으면 마음 열어 반짝반짝 대화를 걸어오듯이 닦다, 문지르다, 쓰다듬다 같은 말들 속에는 탁하고, 추하고, 어두운 기억의 저편을 걸어 나오는 환한 누군가가 있다. 쓸수록 빛이 나는 이 말들은 세상을 다시 한 번 태어나게 하는 아름다운 힘을 갖고 있다. .   모자 모델하우스    김효은   내 머리 위 모자 속으로 놀러오세요 비 바람 눈 구름 따위 재해를 피하거나 그보다 더럽고 거센 인재 따위를 피하러 들어오세요 단지 숨기 장소로도 적합하죠 발걸음과 숨소리가 거슬린다구요 음소거 버튼도 있어요 고요를 원한다면 빨간 버튼을 사운드를 원한다면 노란 버튼을 날아갈 것 같은 불안에 날마다 시달리신다구요 그렇다면 초록 버튼을 누르세요 볼륨과 중량은 원하시는 만큼 눌러드려요 꽃발 딛고 서 있는 종아리가 매력적이라구요 살랑거리는 꼬리와 지느러미가 길고 날씬하고 예쁘다고요 자주 그리워하면 당신도 길게 늘어나요 하늘은 어떻게 보냐고요 일단 땅을 뚫어져라 쳐다봐요 그러다가 심호흡을 깊게 하면 가슴이 천장이 시선이 쩍 하고 어느 순간 아가미처럼 활짝 열리기도 합니다 내가 누구냐고요 나는 당신이 깜빡한 어제의 점심 약속입니다 어느 주말 아침부터 급히 상가에 가느라 못 챙긴 밀린 늦잠입니다 때로 방금이고요 가끔 이따가도 됩니다 챙 넓은 모자를 눌러 쓴 난쟁이입니다 당신이 지워버린 원고지의 빈 칸입니다 당신이 버린 봉제 인형입니다 당신이 휴가 때 버린 유기견입니다 언제든 찾아와 충전기를 꽂고 무기한 쉬어가도 좋을 버스터미널 공용 콘센트입니다 그러나 방전되기 전에 오세요 길고양이 한 마리도 개미 한 마리도 그냥 보내지는 않을게요 단 당신이 살아 있어야만 올 수 있어요 모자를 눌러 쓴 채 온종일 당신이 오기만을 기다려요 묘지를 머리에 이고 다니는 보부상 아니냐고요 내 머리 위 모자 속이 궁금하신가요 비밀 보따리 속에 보물이 잔뜩 들어 있냐구요 물론입니다 이따금 고객들은 검은 공단 소재의 불행이 드리운 챙을 주문하거나 희망의 분홍 레이스만을 고집하기도 합니다만 죽음의 상장만은 팔지 않습니다 내가 누구냐구요 풀옵션 묘지 모델하우스입니다 전방에 근사한 언덕 하나가 보인다고요 목적지 근처입니다 커다란 모자가 보이시나요 그 모자 안으로 들어오세요 혹자는 코끼리를 삼킨 보아뱀 아니냐고 묻기도 하지만 맞기도 하고 아니기도 합니다 죽음의 모델하우스 모자 모델하우스로 오세요 당신의 두상에 꼭 맞는 예쁘고 멋진 모자를 제작해 드립니다 처음이라 어색하시다구요 그렇다면 머리에 살짝 얹고만 다니시다가 죽음이 임박하거나 자신의 주검이 익숙하게 만져질 때쯤 푹 눌러 쓰시면 됩니다 결제는 일시불은 언제나 불가능하고요 오로지 평생 상환 할부만 가능합니다 천천히 구경하세요 오늘의 메인 모자 콘셉트는 도서관, 도서관입니다 유난히 책 좋아하는 당신, 책으로 근사한 모자를 만들어드립니다 면류관 보다 멋진 도서관 묘지를 씌워드립니다   내 사랑은 신응순 누군가를 사랑하면 일생 섬이 된다 유난히 파도가 많고 유난히 바람이 많은 섬 그래서 가슴에는 평생 등불이 걸려있다  러시아 격언에 '바다에 나가기 전에는 한 번, 전쟁터에 나가기 전에는 두 번, 결혼하기 전에는 세 번 기도한다'고 하였다. 부부생활의 어려움을 아주 잘 새긴 시조로 섬이 된 가슴에 등불 밝히고 서로 비추며 삶을 행복하게 해야할 것이라 하였다. 전병태 시조시인   ―《문장 웹진》 2019.6월호     사랑한다는 것                            안도현 길가에 민들레 한송이 피어나면 꽃잎으로 온 하늘을 다 받치고 살듯이 이 세상에 태어나서 오직 한 사람을 사무치게 사랑한다는 것은 이 세상 전체를 비로소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차고 맑은 밤을 뜬눈으로 지새우며 우리가 서로 뜨겁게 사랑한다는 것은 그대는 나의 세상을 나는 그대의 세상을 함께 짊어지고 새벽을 향해 걸어가겠다는 것입니다.   나는 작고 보잘 것 없는 도토리를 멀리 빈 숲으로 힘껏 던져주었다 울지마라, 너는 묻혀서 참나무가 되리니   폭설                                        윤제림   싸락눈으로 속삭여봐야 알아듣지도 못하니까 진눈깨비로 질척여봐야 고샅길도 못 막으니까 저렇게 주먹을 부르쥐고 온몸을 떨며 오는 거다. 국밥에 덤벼봐야 표도 안 나니까 하우스를 덮고, 양조장 트럭을 덮는 거다. 낯모르는 얼굴이나 간지럽혀봐야 대꾸도 없으니까 저렇게 머리채를 흔들며 집집을 때리는 거다. 점, 점......으론 어림도 없으니까 삽시에, 일순에! 떼로 몰려와 그리운 이름 소리쳐 부르는 거다. 어른 아이 모다 눈길에 굴리고 자빠뜨리며 그리운 이의 발목을 잡는 거다. 전화를 끊고 우체국을 파묻는 거다 철길을 끊고 정거장을 파묻는 거다. 다른 세상으론, 비행기 한 대 못 뜨게 하는 거다.   내가 던진 물수제비가 그대에게 건너갈 때                                         권혁웅 ​ 그날 내가 던진 물수제비가 그대에게 건너갈 때 물결이 물결을 불러 그대에게 먼저 가 닿았습니다 입술과 입술이 만나듯 물결과 물결이 만나 한 세상 열어 보일 듯했습니다 연한 세월을 흩어 날리는 파랑의 길을 따라 그대에게 건너갈 때 그대는 흔들렸던가요 그 물결무늬를 가슴에 새겨 두었던가요 내가 던진 물수제비가 그대에게 건너갈 때 강물은 잠시 멈추어 제 몸을 열어 보였습니다 그대 역시 그처럼 열리리라 생각한 걸까요 공연히 들떠서 그대 마음 쪽으로 철벅거렸지만 어째서 수심은 몸으로만 겪는 걸까요 내가 던진 물수제비가 그대에게 건너갈 때 이 삶의 대안이 그대라 생각했던 마음은 오래 가지 못했습니다 없는 돌다리를 두들기며 건너던 나의 물수제비, 그대에게 닿지 못하고 쉽게 가라앉았지요 그 위로 세월이 흘렀구요 물결과 물결이 만나듯 우리는 흔들렸을 뿐입니다 ​       둥근 발작                       조말선                                              사과 묘목을 심기 전에 굵은 철사줄과 말뚝으로 분위기를 장악하십시오 흰 사과꽃이 흩날리는 자유와 억압의 이중구조 안에서 신경증적인 열매가 맺힐 것입 니다 곁가지가 뻗으면 반드시 철사줄에 동여매세요 자기 성향이 굳어지기 전에 굴종을 주입하세요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것은 성장억제입니다 원예가의 눈높이 이상은 금물입니다 나를 닮도록 강요하세요 나무에서 인간으로 퇴화시키세요 안된다, 안된다, 안된다 부정하세요 단단한 돌처럼 사과가 주렁주렁 열릴 것입니다 하지 마, 하지 마, 하지 마 억누르세요 뺨이 벌겋게 달아오를 것입니다 극심한 일교차가 당도를 결정한다면 극심한 감정교차는 빛깔을 결정합니다 폭염에는 모차르트를 우기에는 쇼스타코비치를 권합니다 한 가지 감상이 깊어지지 않도록 경계하세요 나른한 태양, 출중한 달빛, 잎을 들까부는 미풍 양질의 폭식은 품질을 저하시키는 원입니다. 위로 뻗을 때마다 쾅광 말뚝을 박으세요 열매가 풍성할수록 꽁꽁 철사줄에 동여매세요 자유와 억압의 이중구조 안에서 둥근 발작을 유도 하세요   양철  지붕에  대하여                                                                        안도현       양철  지붕이  그렁거린다, 라고  쓰면   그럼  바람이  불어서겠지, 라고   그저  단순하게  생각해서는  안  된다     삶이란,   버선처럼  뒤집어  볼수록  실밥이  많은  것     나는  수없이  양철  지붕을  두드리는  빗방울이었으나   실은,  두드렸으나  스며들지  못하고  사라진   빗소리였으나   보이지  않기  때문에   더  절실한  사랑이  나에게도  있었다     양철지붕을  이해하려면   오래  빗소리를  들을  줄  알아야  한다   맨  처음  양철  지붕을  얹을  때   날아가지  않으려고   몸에  가장  많이  못  자국을  두른  양철이   그  놈이  가장  많이  상처  입고  가장  많이  녹슬어  그렁거린다는  것을   너는  눈치  채야  한다     그러니까  사랑한다는  말은  증발하기  쉬우므로   쉽게  꺼내지  말  것   너를  위해  나도  녹슬어  가고  싶다, 라든지   비  온  뒤에  햇볕  쪽으로  먼저  몸을  말리려고  뒤척이지는  않겠다, 라든지   그래,  우리  사이에는  은유가  좀  필요한  것  아니냐?     생각해  봐   한쪽  면이  뜨거워지면   그  뒷면도  함께  뜨거워지는  게  양철  지붕이란다    
37    감자꽃 / 이재무 댓글:  조회:799  추천:0  2019-08-19
감자꽃 / 이재무 차라리 피지나 말걸 감자꽃 꽃 피어 더욱 서러운 여자 자주색 고름 물어뜯으며 눈으로 웃고 마음으론 울고 있구나 향기는, 저 건넛마을 장다리꽃 만나고 온 건달 같은 바람에게 다 앗겨 버리고 아무도 눈길 주지 않는, 비탈 오지에 서서 해 종일 누구를 기다리는가 세상의 모든 꽃들 생산에 저리 분주하고 눈부신 생의 환희를 앓고 있는데 불임의 여자. 내, 길고 긴 여정의 모퉁이에서 때 묻은 발목 잡고 퍼런 젊음이 분하고 억울해서 우는 내 여자, 노을 속 찬란한 비애여 차라리 피지나 말걸, 감자꽃 꽃 피어 더욱 서러운 여자, . .
36    블랑카의 하소 / 김혜천 댓글:  조회:726  추천:0  2019-08-19
블랑카의 하소                        김혜천 저 한국에 온지 몇 년 되었어요 봉숙이 만나 결혼도 했어요 처음 왔을 때 한국은 간식도 너무 무서운 것 같았어요 저 점심 먹고 왓을 때 과장님이 블랑카, 입가심으로 개피사탕 먹을래 했어요 한국사람들 소피국 먹는 건 알았지만 개피까지 사탕으로 먹는 줄 몰랐어요 드라큐라도 아니고 무슨 개피로 입가심을 하냐고 했더니 그럼 눈깔사탕 어때 하였어요 저 너무나 놀라서 그거 누구꺼냐고 하였더니 과장님 씨익 웃으며 내가 사장 꺼 몰래 빼왔어 했어요 저 기절했어요 눈 떠보니 저보고 기력이 약해졌다고 몸보신해야 한다고 자기 집으로 가자고 했어요 저 너무 불안해서 무슨 보신이냐고 했더니 과장님 제 어깨 툭 치면서 가서 우리 마누라 내장탕 먹자고 했어요 저 3일간 못 깨어 났어요 식당 간판 보고 더 놀랬어요 할머니 뼈다귀 해장국~ 저 미칠뻔 하였어요 근데 이거보고 완전 돌아버렸어요 할머니 산채비빔밥!!! 무서운 한국 음식 나빠요
35    트레이싱 페이퍼 / 김윤이 댓글:  조회:792  추천:0  2019-08-19
트레이싱 페이퍼             잘 마른 잎사귀가 바스락거리며  나를 읽네   몇 장 겹쳐도 한 장의 생시같은   서늘한 바람 뒤편   달처럼 떠오른 내가 텅 빈 아가리 벌리네   지루한 긴긴 꿈을 들여다 봐 주지 않아  어둠이 흐느끼는 밤   백태저럼 달무리 지네   일순간 소낙비   가로수 이파리 눈꺼풀이 축축하게  부풀어 오르고   거리마다 지렁이가 흘러넘치네   아아 무서워 무서워   깨진 잠처럼 튀어오른 보도블록   불거져 나온 나무뿌리   갈라진 혓바닥이 배배 꼬이네   비명이 목젖처럼 달라붙어 꿈틀대네   나는 이 길이 맞을까 저 길이 맞을까   손바닥에 침을 퉤퉤 뱉고 싶지만  손금이 보이지 앓는 손   금밟지않기 놀이 하듯 두 다리가 버둥대네   두 동강 난 지렁이 이리저리 기어가고   구름을 찢고 나온 투명한 달  내 그림자는 여태도록 나를 베끼고 있네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김윤이 1976 서울 출생. 서울여대 및 명지대 문창과 졸업 2007년 조선일보 신춘문예로 작품활동 시작. 시힘 동인. 시집, [흑발 소녀의 누드속에는] [ 독한 연애 ] 가 있다 감상. 기름종이는 기름을 먹인 종이. 기름과 종이가 한몸이 된 종이. 그것은 제 자체가 용도가 아니다. 대상을 투영시키거나 비추는 용도다. 화자는 기름 종이가 되어 자기의 내면 위에 몇 겹으로 얹혀져 있다. 기묘하고도 재미있는 이 놀이는 소낙비 내린 거리로 표현되어 자기와 거리가 묘하게 뒤섞여 있다. 묘사와 상상이 뒤섞인 이 상태의 풍경을 묘한 거리로 그려낸다. 내 그림자가 여태도록 나를 베끼고 있다는 것, 이 마지막 행이 시를 중층구조로 만들었다. 소낙비의 순간을 잡아 채 트레이싱 페이퍼로 바꾸는 시인의 역동적 상상이 놀랍다.
34    그 사랑에 대해 쓴다 / 유하 댓글:  조회:681  추천:0  2019-08-19
그 사랑에 대해 쓴다 유하 ​ ​ 아름다운 시를 보면  그걸 닮은 삶 하나 낳고 싶었다  노을을 바라보며  노을빛 열매를 낳는 능금나무처럼  ​ 한 여자의 미소가 나를 스쳤을 때  난 그녀를 닮은 사랑을 낳고 싶었다  점화된 성냥불빛 같았던 시절들, 뒤돌아보면  그 사랑을 손으로 빚고 싶다는 욕망이  얼마나 많은 열정의 몸짓들을 낳았던 걸까  그녀를 기다리던 교정의 꽃들과  꽃의 떨림과 떨림의 기차와  그 기차의 희망,  내가 앉았던 벤치의 햇살과  그 햇살의 짧은 키스  밤이면 그리움으로 날아가던  내 혀 속의 푸른 새  그리고 죽음조차도 놀랍지 않았던 나날들  ​ 그 사랑을 빚고 싶다는 욕망이 나를 떠나자,  내 눈 속에 살던 그 모든 풍경들도 사라졌다  바람이 노을의 시간을 거두어 가면  능금나무 열매의 환한 빛도 꺼지듯   
33    나비는 날개로 운다 / 이근배 댓글:  조회:635  추천:0  2019-08-19
나비는 날개로 운다     이근배      날개가 있다는 것만으로는 이 봄 산과 들을 뒤덮고 있는 저 꽃들을 다 찾아다닐 수는 없다 내 어리석은 더듬이로는 한사코 쏟아내는 질탕한 향기를 다 맡아낼 수도 없는 것 알에서 애벌레로 다시 번데기로 거듭 몸 바꾸기를 하면서 우주의 빛깔을 모두 담아 짜낸 비단날개로 하늘을 휘저으며 아지랑이 더불어 춤을 추는 것이나 나의 발은 허공에 더욱 시리고 달디단 황홀을 빠는 입맞춤은 혀끝에 죽음처럼 쓰다 겨우 봄 한 철도 못 건너고 적멸로 돌아가는 나의 가녀린 목숨 붉은 볼로 서럽게 웃는 저 어리고 아리따운 것들 속에서 어느 것 하나 내 몫으로 챙기지 못하고 헤프게 꽃가루로 날려버린 사랑 나는 춤으로 운다 날개를 바스러트리며 바스러트리며
32    쭈그러진 술 주전자 /김인덕 댓글:  조회:618  추천:0  2019-08-19
쭈그러진 술 주전자   김인덕   먼저는 생업에 뛰여들기도 전에 이유 없이 주인의 망치에 흠씬 뚜들겨 맞았다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홀에 호출되였다가 여기저기 술상 모서리에 맞히고 멋도 모르고 사정없이 땅바닥에 나동그라지고 상처를 훈장처럼 주렁주렁 가슴에 단 쭈그러진 술주전자   밤새도록 낯선 손에 목덜미를 잡히고 다람쥐 챗바퀴 돌듯 술잔을 오가며 귀때로 열물을 토했다   온갖 짓거리에 머리가 욱신거리고 몸마저 노근하다가 짓궂은 나그네의 육담에 잠시 마음이 설레이기도 했다   자정이 되여서야 시렁구석에 납작 엎드려 아무 것도 먹지 못한 빈속을 달래며 잠을 청한다   마침내 새벽이 가도록 잠을 이루지 못한 쭈그러진 술주전자끼리 부둥켜안고 스며드는 한점의 찬바람에 휘파람을 분다   쭈그러진 술주전자는 누구나 가슴에 쓰고 농렬한 소주쯤은 품고 사는 거라고 눈물이 마를 때까지 몸으로, 몸으로 말한다  
31    폭탄 돌리기-신미균- 댓글:  조회:784  추천:0  2019-08-19
폭탄 돌리기                     -신미균- 심지에 불이 붙은 엄마를/ 큰 오빠에게 넘겼습니다 심지는 사방으로 불꽃을 튀기며/ 맹렬하게 타고 있습니다 큰오빠는 바로 작은 오빠에게/ 넘김니다 작은 오빠는 바로 언니에게/ 넘김니다 심지가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언니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바로 나에게 넘김니다 내가 다시 큰오빠에게 넘기려하자/ 손사레를 치며 받지 않겠다는 시늉을 합니다 작은 오빠를 쳐다보자 곤란하다는 눈빛을 보냅니다 언니는 쳐다보지도 않고/ 딴청을  부립니다 그 사이 내손에 불이 붙었습니다 깜짝놀라 엉겹결에 들고 있던 폭탄을 공중으로 던져버렸습니다 엄마의 파편이 머리위로 분수처럼 쏟아집니다
30    물소의 뒷굽은 거룩하다 라고 / 정태중 댓글:  조회:779  추천:0  2019-08-19
물소의 뒷굽은 거룩하다 라고 / 정태중 시의 설계는 간혹 시어들이 떠나버리기도 해서 부도난 공사장 같기도 하였는데 공사장으로 신의 선물이랄까 하는 물음들이 녹슨 창으로 푸르게는 올라오기도 하였다 하얀 배꽃들이 지난 시간을 입었던 듯 옷들이 누렇게 먼저 바래고는 있는 듯 신문 기자의 탁본이 바래고는 있는 듯 배들이 어떤 문장들로 하여서 배가 불러오기도 한 점심시간이 지나자 부리나케 삐뽀삐뽀로 기선 잡는 불자동차와 헛배에 힘 잔뜩 부린 부도난 공사장 방귀와 상관도 없이 해는 쨍쨍 내리다가 굵은 빗방울 쏟아져 공사장을 내려치는데 부도난 말들이 튕겨 오르는 것이 풀들을 잡고 있는 눈물 같기만 하였는데 불화 가득 늙은 수소 큰 눈이 어리둥절 휘청이다가 눈물을 흘려주다가 음~매 라고 몇 번을 풀을 토악질하였다
29    뻐꾸기가 운다 ㅡ 이재경 댓글:  조회:743  추천:0  2019-08-19
뻐꾸기가 운다  ㅡ  이재경   비명이다 몸을 벗어나는  울음의 윤곽 몸은 무덤이다   울음은 몸을 벗어나 멀리 날아간다 흙에 속한 몸은 흙으로 스민다 물같이 흐르고 다시 형체를 버리는 바람같이 울음은 그렇게 흐르는 하나의 갈망이다 몸은 하나의 시작점일 것일 것이다 그 울음이 다시 노래가 될 몸으로 그 노래는 건축이 되고 물과 바람도 빛의 노래였더라
28    모텔 / 이재무 댓글:  조회:706  추천:0  2019-08-19
모텔 이재무   사랑을 훔친 쾌락의 밀림을 찾는다 감각의 제국, 상한 짐승끼리 만난 상처의 부위 미친 듯 혀로 핥으며 밑구멍 열어놓은 연탄불처럼 타오르다 하얀 재로 쓰러지는 허무의 불꽃 에로의 폭탄주 파멸의 오르가즘 성내고 보채는 불륜의 악마를 달래기 위해 모텔에 간다 뱀이 되어 엉킨 시련의 몸에서 솟는, 설탕처럼 달콤하고 아교처럼 끈적거리는 땀 성긴 밧줄 되어 나무토막이 된 지 오래인 생을 묶는다 사랑의 정거장, 사랑의 고아원, 사랑의 간이 휴게소, 불안한 영혼의 지명수배자들이 찾는 은밀한 도피처, 삶의 채무로부터의 도망 잠시잠깐 그렇게 황홀한 지옥을 살다가 출구에서 서성거리는 도덕과 순결 챙겨 도시의 익명 속으로 재빠르게 스며든다 공광규 지음 『이야기가 있는 시 창작 수업 』에서
27    스며드는 것 / 안도현 댓글:  조회:636  추천:0  2019-08-19
스며드는 것                       안도현 꽃게가 간장 속에 반쯤 몸을 담그고 엎드려 있다 등판에 간장이 울컥울컥 쏟아질 때 꽃게는 뱃속의 알을 껴안으려고 꿈틀거리다가 더 낮게 더 바닥 쪽으로 웅크렸으리라 버둥거렸으리라 버둥거리다가 어찌할 수 없어서 살 속에 스며드는 것을 한때의 어스름을 꽃게는 천천히 받아들였으리라 껍질이 먹먹해지기 전에 가만히 알들에게 말했으리라 저녁이야 불 끄고 잘 시간이야
26    점등 / 오경 댓글:  조회:705  추천:0  2019-08-19
< 2017 한라일보 신춘문예 당선작 > 점등 / 오경 가슴에서 플러그를 뺐다 젖이 멈췄다 벽등의 스위치를 켰다 나는 밤이 들킨 것 처럼 호들갑을 떤다 떨다가 아슬아슬하게 걸친 검은 브래지어를 떨어뜨린다 어둠이 활처럼 휘어진다 순간 배고프다는 생각이 든다 나는 허기를 달래려고 더 진한 화장을 하고 더 긴 속눈썹을 붙이고 스타킹을 벗는다 갑작스런 빛이 사방을 삐거덕거리게 한다 아기 유령들이 셔플 댄스를 추다가 천장에서 추락했을지도 모른다 길 잃은 시조새 한 마리 비상하다가 태양의 모서리에 부딪쳐 날개가 부러졌을지도 모른다 나는 문을 나서고 싶지 않았다 아니 불을 켜고 싶지 않았다 보이지 않는 것의 아주 작은 세포를 만지며 느껴 보고 싶었을 뿐 식탁 위엔 주인 없는 고통이 가열하지 않은 채 날것으로 있다 함성에 금이 간 어둠이여 다시는 변명에 목을 걸지 말 것 목숨 걸어야 할 곳이 어디 한 두 곳인가 식탁 아래 한때 눈부셨던 대낮의 그림자가 꽁무니를 빼느라 허둥지둥이다 지금은 어둠을 수습하기 위해 차단이 필요한 순간이다 찰나를 포착한 순발력 매년 일간지 신춘문예로 등단하는 시인이 30명 이상이다. 이 중에서 과연 몇 명이나 살아남아 계속 활동할까. 이러한 질문은 열정적이고 패기 넘치는 응모작들을 접하는 동안 우려보다는 새로운 기대로 바뀌었다.  올해 한라일보 신춘문예의 시 부문 예심을 거친 응모자는 10명이었다. 이를 다시 검토한 결과 김려원의 '애월의 얼룩', 김미경의 '먹돌쌔기', 이도훈의 '중절모', 오경의 '점등' 등 4편이 최종까지 남았다.  이 네 사람의 작품은 비슷한 수준이지만 서로 다른 작품 경향을 보여주었다. 김려원은 언어를 구사하는 솜씨가 예사롭지 않을뿐더러 어떤 소재도 시적 대상으로 수용해내는 역량이 돋보였다. 그러나 호흡이 다소 산만하고 불안하였다. 김미경의 시는 긴 호흡의 내용도 거침없이 소화해 내는 능력을 높이 살만했지만, 익숙한 자신의 틀에 갇혀 개성이 드러나지 않는다는 점이 아쉬웠다. 이도훈의 시는 서툰 듯 낯선 표현이 되레 참신하게 느껴졌다. 특히 전봇대에 지은 새집을 중절모로 비유한 표현은 눈길을 오래 붙잡았다. 그렇지만 응모작 간 격차가 드러난다는 사실이 선택을 망설이게 했다. 반면 오경의 시는 식상하거나 미흡한 표현들이 더러 눈에 띄었음에도 불구하고, 작품들 수준이 대체적으로 고르며 응모자 자신의 목소리를 갖고 있다는데 심사위원들의 견해가 일치했다. 미숙한 점이 노정된다는 것은 그것을 극복해나가야 하는 숙제가 주어진다는 의미이다. 심사위원들은 그 긍정적인 가능성을 인식하고, 논의 끝에 '점등'을 당선작으로 결정했다.  당선작 '점등'은 주방의 벽등을 켜는 순간을 개성적으로 묘사하면서 사색한다. 빛이 들어와 어둠이 사라지는 찰나는 거의 동시에 이루어지지만, 이때 존재하는 소재와 상상들을 순발력 있게 포착해 역동적으로 제시하는 대목에서 당선자의 기량을 엿볼 수 있었다.  당선자에게 축하를, 또한 상세히 언급하진 못했지만 예심을 거친 모든 분께도 응원을 보낸다. 그들 모두 똑같은 출발점에 다시 서 있다는 사실을 잊지 않았으면 한다 ********************************** 이시는 나는 이해가 불가다 그래도 어떤 시인들에게는 도움이 될런지 해서 여기 올린다 하오니 도움이 되였음 좋겠다
25    빅풋/석민재 댓글:  조회:762  추천:0  2019-08-19
2017 세계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빅풋/석민재   군함처럼 큰 발을 끌고 아버지가 낭떠러지까지 오두막집을 밀고 갔다가 밀고 왔다가 왼발 오른발 왼발 오른발 스텝을 맞추며 말기 암, 엄마를 재우고 있다 죽음을 데리고 놀고 있다 죽을까 말까 죽어줄까 말까 엄마는 아빠를 놀리고 있다 아기처럼 엄마처럼 절벽 끝에서 놀고 있다 ​ 당선 소감     누구나 그렇듯이 쓸모없는 하나님이 제게도 있습니다. 감사와 은총보다는 원망과 타박이 필요할 때 종종 요긴합니다. 그런데 가끔 산타클로스처럼 선물을 주실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이번 크리스마스 선물은 좀 놀랍습니다. 아니 많이 놀랍습니다. 다른 사람에게 줄 선물을 잠깐 혼동하신 게 아니었나 할 정도로. 마치 어린 여자아이가 받은 성인용 브래지어·팬티 선물세트처럼 당선 통보는 신기하고 민망하고 설렜습니다.   고백하건대 저는 시를 잘 모릅니다. 내가 써놓고도 잘 모릅니다. 아무리 봐도 가짜 같아서 어디다 버젓이 내놓을 만한 물건이 못 됩니다. 하지만 가끔 자해공갈단처럼 내 시를 중인환시에 던져놓고 싶었습니다. 온갖 모욕과 모멸을 참담하게 당하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기다리고 있던 수모 대신 누군가가 칭찬을 해줄 때는 하나님처럼 난감합니다. 그 칭찬을 긍정할 수도 부정할 수도 없어서 혼란스럽습니다. 지금이 그렇습니다. 그렇게 간절하게 꿈꾸던 농담이지만 비현실적입니다.   무슨 군말이 필요하겠습니까. 앞으로 잘 써야지요. 이렇게 겨우 시를 흉내 내는 데도 얼마나 많은 분들에게 빚졌는데요. 특히 진주의 김언희, 유홍준 선생님, 하동의 김남호 선생님께 감사드립니다. 선생님들이 아니었으면 산타클로스는 저를 알아보지도 못했을 겁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말기 암으로 투병 중이신 친정의 어머니와 극진한 간병인이신 아버지께 이 선물을 고스란히 드립니다. 잠시 효도한 것 같아 위안이 됩니다.   끝으로 뽑아 주신 김사인, 황인숙 선생님과 세계일보에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제 한 줄의 약력을 쓸 때마다 상기하겠습니다. 이 어색한 소감문은 얼른 끝내고 서둘러 나를 학대하러 가야겠습니다.   석민재 시인    △1975년 경남 하동 출생 △2015년 ‘시와 사상’ 신인상 2017 신춘문예] “해학·역설의 묘미 살려 삶의 애환 잘 갈무리” 신춘문예 (시) 심사평 - 김사인·황인숙   본심에 올라온 작품들은 전반적으로, 좋게 말하면 말과 느낌을 적절히 짜 맞추는 솜씨들이 상당해서 안정감이 있었다. 그런데 한 발 떨어져서 보면 평면적이고, 어딘가 낯익은 형언과 방식에 기대어 있는 느낌이다. 그런 가운데 석민재씨의 응모작 ‘계통’ 외 2편은 단연 돋보였다. 그의 시들은 수월하게 읽히면서 수려한데 그 속에 삶의 애환이 갈무리돼 있다. 또 근년의 젊은 시인들에게서 보암직한 축조방식으로부터도 자유로이, 시를 다루는 방식이 신선하다. 좋은 시의 길을 가고 있는 것이다.   응모한 세 편의 시들이 각기 다른 매력을 지니고 있다. ‘이건 빨강 네가 아무리 우겨도 빨강/파랑 같아도 이건 빨강/노랑 같아도 이건 빨강’으로 시작되는 시 ‘계통’은 빛깔 이미지들과 이응의 음성상징이 공처럼 통통 튀면서 설사 내용을 모르더라도 읽으면서 기분이 좋다. 그의 시 ‘빅풋’을 당선작으로 기쁘게 뽑는다. ‘빅풋’은 무지무지하게 슬픈 상황인데 아버지의 당당함(‘군함처럼 큰 발을 끌고’)과 쾌활(‘왼발 오른 발 왼발 오른발 스텝을 맞추며’), 그리고 엄마의 해학(‘죽을까 말까 죽어줄까 말까’)으로 상황을 뒤집어 보여준다. 상상력의 전복, 역설의 묘미를 깔끔하게 끌어낸 시다.   함인우(‘아스피린’ 외 3편), 의현(‘여유가 있다면’ 외 2편), 김순철(‘복숭아’ 외 2편)의 응모작들도 놓치기 아까운 작품들이었다. 특히 이미지를 첩첩 겹쳐 연결시키는 힘이 여간 아니며 변두리 주변인에 대한 연민과 공감이 뛰어난 함인우의 시들이 그러하다. 약국이라는 작은 공간을 그 이름이 ‘우주’인 것을 빌려 우리네 작은 세상의 삶과 죽음을 우주에 병치시키는 ‘아스피린’이나 피아노와 노파와 파를 음계와 연계시키며 펼치는 ‘버려질 것을, 산다’나 삶의 통증과 페이소스로 자욱하다. 당선자께 커다란 축하를, 세 분께 안타까움을 전한다. ​
24    카드 키드 댓글:  조회:792  추천:0  2019-08-19
카드 키드     박성우     카드가 사준 정장을 입고 카드가 사준 구두를 신은 출근길은 벅차다 어쩌다 카드가 사주는 저녁은 근사하고 카드가 큰맘 먹고 들여준 침대는 푹신하다 카드가 현금서비스 해준 축의금을 들고 다녀오는 직장 동료의 결혼식은 처연하게 찬란하다 입사 삼년차 카드 키드, 야근에 지쳐 귀가하는 밤은 카드가 카드론으로 얻어준 원룸이 있어 아늑하다 카드 키드가 되기 위한 지난날은 아름다웠다 스펙에 내준 대학생활은 교양 없이 품위 있었고 자기소개서 속으로 들어간 스펙은 뻔뻔하게 자랑스러웠다 서류전형에서 번번이 떨어지던 입사시험, 처음으로 면접 통보를 받던 날은 팬파이프 같은 빛이 눈앞으로 쏟아져내리는 것 같았다 카드가 사주는 패스트푸드는 먹을 만하고 카드가 지켜주는 직장생활은 아직 견딜 만하다 정기적금을 해약해 카드에게 이체하고 남은 돈, 지방에 사는 양친께 부쳐드리던 손은 대견하다 월급날 받은 급여는 어김없이 카드에게 옮겨간다 '언제 취직할 거니'를 지나 '언제 결혼할 거니'까지 기적적으로 와 있는 카드 키드, 카드는 희망 복근을 키워보는 건 어떠냐며 헬스클럽을 권유한다  
23    시인은 시적으로 지상에 산다 /천양희 댓글:  조회:708  추천:0  2019-08-19
시인은시적으로 지상에 산다 ㅡ 천양희ㅡ 원고료를 주지 않는 잡지사에 시를 주면서 정신이 밥 먹여 주는 세상을 꿈꾸면서 아직도 빛나는 건 별과 시뿐이라고 생각하면서 제 숟가락으로 제 생을 파먹으면서 발 빠른 세상에서 게으름과 느림을 찬양하면서 냉정한 시에게 순정을 바치면서 운명을 걸면서 아무나 말할 수 없는 것들을 말하면서 새소리를 듣다가도 ‘오늘 아침 나는 책을 읽었다’*고 책상을 치면서 시인은 시적으로 지상에 산다 시적인 삶에 대해 쓰고 있는 동안 어느 시인처럼 나도 무지하게 땀이 났다 * 연암 박지원의 글 에서
22    매미 / 안도현 댓글:  조회:701  추천:0  2019-08-19
여름 풍경 매미 / 안도현 여름이 뜨거워서 매미가 우는 것이 아니라 매미가 울어서 여름이 뜨거운 것이다 매미는 아는 것이다 사랑이란 이렇게 한사코 너의 옆에 뜨겁게 우는 것임을 울지 않으면 보이지 않기 때문에 매미는 우는 것이다 7월의 한 가운데, 본격적인 여름에 들어와 있다. 앞으로 한 달 남짓이 가장 무더운 여름날들이 될 것이다. 작년 여름 전대미문의 극심한 무더위가 우리를 힘들게 했던 탓인지 올해는 아직은 견딜 만하다고들 한다. 그래도 여름은 장마와 무더위의 계절이다. 기후 패턴이 바뀌어 장마철에도 비가 별로 내리지 않는 지역이 있지만, 통상적으로 우리나라의 여름은 연간 강수량의 절반가량이 집중적으로 내리는 계절이다. 7월 하순에 장마가 끝나면 본격적으로 무더위가 몰려온다. 각급 학교는 방학을 한다. 많은 도시 사람들은 시원한 강과 바다와 산과 숲으로 피서를 간다. 그러나 농촌이나 산업현장에서는 구슬땀을 흘리면서 열심히 일하는 사람들도 많다. 모든 것은 때가 있기 때문이다. 어린 시절 여름 풍경을 기억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 중 하나가 매미소리이다. 와가리, 닐니리매미, 매얌매미, 귓속매미, 찐매미, 쓰름매미.... 제대로 된 이름을 모르던 우리들은 매미의 울음소리를 그대로 이름으로 지어 불렀다. 지금 도시에서는 한 두 종류의 매미소리만 들을 수 있는데, 산이 많은 나의 고향에서는 적어도 여섯 종류의 매미가 있었다. 매미는 여름의 상징이었다. 무더위를 피해 개울에서 발가벗고 헤엄치던 일도 있었고, 원두막에서 참외와 수박을 먹으면서 더위를 식히기도 했다. 어느 정도 자랐을 때는 어른들과 함께 콩밭을 매며 땀을 비 오듯이 흘린 일도 있고, 밤이면 모닥불 피워놓은 마당에 멍석을 깔아놓고 누워 쏟아져 내릴 듯이 출렁이며 흐르는 은하수와 찬란하게 반짝이는 별들을 바라보면서 꿈을 키우기도 했다. 여름은 풍성한 열매의 계절이다. 여름은 ‘열매’의 방언이기도 하다. 이른 봄에 꽃을 피운 버찌, 앵두, 살구, 자두, 복숭아, 알로에 등 여름 과일은 벌써 익었고, 수박, 참외, 오이, 가지, 호박 등 열매채소와 잎채소가 무럭무럭 자라며 익어가고 있다. 가을에 익어 수확하게 되는 벼와 각종 과일도 여름에 충분하게 자라 살이 올라야 한다. 여름에는 일조량과 강우량이 풍부하기 때문이다. 무더위와 장마 때문에 사람들이 살아가기에는 불편함이 많지만 여름이 없으면 풍성한 먹거리를 얻을 수 없다. 이 여름 우리도 몸과 마음이 지치지 않도록 적절한 활동과 휴식의 균형을 이루면서 건강하게 보내야 할 것이다. 김준태 님의 은 여름 풍경을 멋진 추상화로 환상적으로 그려내고 있다. 김성호 님은 에서 여름 풍경을 여러 가지 악기 소리로 노래하고, 아동문학가 권오삼 님의 은 의성어와 의태어를 알맞게 써서 어린이의 눈높이에서 볼 수 있는 여름 풍경을 잘 그려내고 있다. 권오범 님의 은 모든 것이 바쁜 여름을 재미있게 풍자하고 있다. 정일근 님의 는 그리움을 남기고 떠나는 여름 풍경을 연상케 한다. 고향의 여름 / 김준태 새들이 하늘을 한 점씩 물고 날아오른다 개똥벌레가 젖은 흙에 떨어진 시간을 몇 알갱이씩 짊어지고 기어가고 꽃들이 땅의 젖꼭지를 빨며 핀다 하얀 모래들이 속삭이는 강 언덕 어머니의 손을 잡은 소년이 흰 구름 속으로 걸어 들어가 노래한다 여름환상곡 / 김성호 반짝반짝 빛나는 개울의 물빛은 플룻의 소리를 내고 앞산 언덕배기 숲에 숨어 그리움을 토해내는 뻐꾸기 소리는 호른을 연주하고 신작로 가에 열병해 있는 미루나무에 숨어서 여름의 한가운데를 노래하는 매미는 바이올린 주자다 토담 너머로 할머니를 부르시는 할아버지의 목소리는 낡은 오보에 대신이고 방학책 들고 신나게 달려 나오는 초등생들의 가벼운 발걸음은 경쾌한 피아노 소리를 연주한다. 여름 / 권오삼 해는 활활 매미는 맴맴 참새는 짹짹 까치는 깍깍 나뭇잎은 팔랑팔랑 개미는 뻘뻘 꿀벌은 붕붕 모두 모두 바쁘데 구름만 느릿느릿 여름 / 권오범 모든 것이 바쁘다 해는 화끈하게 삶고 싶고 장마는 구름에 물 적셔와 세상 물바다 만들고 싶고 그 등쌀 아랑곳없이 살아남아 기어이 대를 이으라고 바람이 초목들 위해 동분서주하느라 후덥지근하게 지쳐버린 중복허리 사람도 덩달아 수고로워야 한다 햇볕 피하랴 비 피하랴 시들고 물손받은 먹을거리들 어떡하든 살려내랴 선풍기 냉장고 에어컨 부채라고 해서 마음놓고 쉴 새 있겠는가 누워 빈둥대지 말고 하다못해 모기라도 쫓아야지 하루살이들 이별파티 때문에 가로등마저도 여름편지 / 정일근 여름은 부산 우체국 신호등 앞에 서 있다 바다로 가는 푸른 신호를 기다리며 중앙동 플라타너스 잎새 위에 여름 편지를 쓴다 지난 여름은 찬란하였다 추억은 소금에 절여 싱싱하게 되살아나고 먼 바다 더 먼 섬들이 푸른 잎맥을 타고 떠오른다 그리운 바다는 오늘도 만조이리라 그리운 사람들은 만조 바다에 섬을 띄우고 밤이 오면 별빛 더욱 푸르리라 여름은 부산 우체국 신호등을 건너 바다로 가고 있다 나는 바다로 돌아가 사유하리라 주머니 속에 넣어둔 섬들을 풀어주며 그리운 그대에게 파도 소리를 담아 편지를 쓰리라 이름 부르면 더욱 빛나는 7월의 바다가 그대 손금 위에 떠오를 때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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