륙도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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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 [ 61 ]

21    국물(신달자) 댓글:  조회:649  추천:0  2019-08-19
제28회 정지용문학상 국물 당선자 | 신달자 당선일 | 2016-04-25 국물 메루치와 다시마와 무와 양파를 달인 국물로 국수를 만듭니다 바다의 쓰라린 소식과 들판의 뼈저린 대결이 서로 몸 섞으며 사람의 혀를 간질이는 맛을 내고 있습니다 바다는 흐르기만 해서 다리가 없고 들판은 뿌리로 버티다가 허리를 다치기도 하지만 피가 졸고 졸고 애가 잦아지고 서로 뒤틀거나 배배 꼬여 증오의 끝을 다 삭인 뒤에야 고요의 맛에 다가옵니다 내 남편이란 인간도 이 국수를 좋아하다가 죽었지요 바다가 되었다가 들판이 되었다가 들판이다가 바다이다가 다 속은 넓었지만 서로 포개지 못하고 포개지 못하는 절망으로 홀로 입술이 짓물러 눈감았지요 상징적으로 메루치와 양파를 섞어 우려낸 국물을 먹으며 살았습니다 바다만큼 들판만큼 사랑하는 사이는 아니었지만 몸을 우리고 마음을 끓여서 겨우 섞어진 국물을 마주보고 마시는 그는 내 생의 국물이고 나는 그의 국물이었습니다
20    호미로 그은 밑줄 댓글:  조회:700  추천:0  2019-08-19
호미로 그은 밑줄          문무학 한평생 흙 읽으며 사셨던 울 어머니 계절의 책장을 땀 묻혀 넘기면서 호미로 밑줄을 긋고 방점 꾹, 꾹 찍으셨다 꼿꼿하던 허리가 몇 번이나 꺾여도 떨어질 수 없어서 팽개칠 수 없어서 어머닌 그냥 그대로 호미가 되셨다. 문무학 시집 『누구나 누구가 그립다』에서
19    향수(정지용) 댓글:  조회:772  추천:0  2019-08-19
향수/정지용 넓은 벌 동쪽 끝으로 옛이야기 지줄대는 실개천이 휘돌아 나가고 어룩배기 황소가 해설피 금빛 게으른 울음을 우는곳. 그 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질화로에 재가 식어지면 빈 밭에 밤바람 소리 말을 달리고 엷은 졸음에 겨운 늙으신 아버지가 짚베게를 돋아 고이시는곳. 그 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흙에서 자란 내 마음 파란 하늘빛이 그립어 함부로 쏜 화살을 찾으러 풀섶 이슬에 힘초롬 휘적시던곳 그 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전설 바다에 춤추던 밤물결 같은 검은 귀밑머리 날리는 어린 누이와 아무렇지도 않고 예쁠 것도 없는 사철 발 벗은 아내가 따가운 햇살을 등에 지고 이삭줍던곳. 그 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하늘에는 성근 별 알 수도 없는 모래성으로 발을 옮기고 서리 까마귀 우지짖고 지나가는 초라한 지붕 흐릿한 불빛에 돌아앉아 도란도란 거리던곳. 그 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18    노자의 시 창작 강의 댓글:  조회:603  추천:0  2019-08-19
노자의 시 창작 강의 / 이진우 아름답다 말하는 시는 추하고 한 목소리로 좋다는 시는 나쁘다 한눈에 읽히는 시는 믿을 수 없고 믿으라는 시는 두 번 읽히지 않는다 착하다고 시를 잘 쓰는 것이 아니고 시를 잘 쓴다고 착하지 않다 지혜롭다고 시를 많이 아는 것이 아니고 시를 많이 안다고 지혜롭지 않다 시를 아는 이는 시를 말하지 않고 시를 말하는 이는 시를 알지 못한다 그러니 시를 쓸 때는 작은 생선 굽듯 조심하라 힘주고 싶을수록 낮추거나 감추고 뽐내고 싶을수록 뒤로 물러나며 작고 하찮은 사물을 크게 보고 적고 힘없는 사람을 높이 여기며 어려운 표현은 쉬운 단어에서 찾고 복잡한 상황한 평범한 일상에서 시작하며 모두가 욕심내지 않는 것을 욕심내고 모두가 배우지 않는 것을 배워서 사람들이 잊고 사는 진실을 드러내라 뛰어난 솜씨는 서툰 듯 화려한 말솜씨는 더듬는 듯 시는 나날이 덜어내는 것 덜어내면 차고 더하려면 오히려 모자라는 듯 천하에 시보다 부드러운 것은 없으나 단단하고 강한 것을 이기기에 이만한 것이 없나니 -  『현대시학』 2014년 7월호 발표
17    빗물 사발 댓글:  조회:803  추천:0  2019-08-19
빗물 사발 길상호 아무런 기적도 없이 가랑비가 내리던 날이었다 누가 거기 두고 갔는지 이 빠진 사발은 똑, 똑, 똑, 지붕의 빗방울을 받아 흙먼지 가득한 입을 열었다 그릇의 중심에서 출렁이며 혀가 돋아나 잃었던 소리를 되살려 놓는 것 둥글게 둥글게 물의 파장이 연이어 물레를 돌리자 금 간 연꽃도 그릇을 다시 향기로 채웠다 사람을 보내 놓고 허기졌던 빈집은 삭은 입술을 사발에 대고 모처럼 배를 채웠다 프로필 길상호 : 충남 논산, 한남대 대학원 국문과, 한국일보 신춘문예 당선, 시집[모르는 척] 외 시 감상 늦장마가 많이 내렸다. 다행히 하천의 범람이나 큰 홍수로 인한 피해는 예년에 비해 적었다. 비 덕분에 칠월도 그나마 덥지 않게 보냈다. 비는 숲과 땅이 가두어 두고 쓸 만큼만 왔다. 어려운 시절엔 비가 내리면 천장에서 빗물이 떨어졌다. 양동이와 그릇을 밑에 받치면 툭툭, 낙숫물 소리. 그 소리가 무척 그립다. 본문처럼 물의 파장이 되살려놓은 지나간 날의 아련한 향수가 아련하다. 지금보다 못 살았어도 때론 낭만적이고 때론 정의롭고 때론 콩 한조각도 나눌 수 있는 ‘정’이 그득한 시절이었는데, 빗소리가 참 미쁘다. [글/ 김부회 시인, 평론가]
16    누에 댓글:  조회:596  추천:0  2019-08-19
누에 장유정(군포) 수백 년 전 누에의 분묘가 발굴되었다 모서리죽임 같이 흙으로 쌓아올린 사각기둥 실을 짓던 시간들이 뭉쳐있었다 무한한 옷 한 벌 품은 실들이 껍질 속에 있었다 집을 바라는 열의의 모형처럼 타임캡슐엔 우주에 관련한 보고서도 발견되었다 집 한 채 따로 들고 나앉듯 방안에는 숨을 뽑아 날개를 만들고 있었다 좁은 침낭 속에 들어 잠을 자는 듯 죽어있는 누에고치 자기만의 중심축으로 한곳에 치우침 없이 부드러운 곡선 속에 계속 굴러가는 방향지시등처럼 마찰계수가 작았을 것이다 뾰족한 끝이 보이고 자꾸만 균형 잃고 흔들릴 때 세상과 닿는 유연한 포장 쉼 없이 돌고 도는 지구의 자전처럼 모서리가 둥글다 잠자는 머리를 어느 쪽으로 돌리지 않은 것들은 화려한 변태를 겪을 수 있다는 듯 미사일저장고를 개조하듯 우주선 캡슐에 건전지 넣는다 긴급 피난형 집처럼 누에가 고치를 짓고 있다 우화등선처럼 손끝에는 하얀 벌레가 한 마리씩 꿈틀거렸다 [제19회 수주문학상 심사평] 수주문학상에 응모한 작품들의 수준이 전반적으로 높게 고르고, 개별적으로는 고유한 특징들을 갖추고 있어 심사하는 일이 즐거우면서도 쉽지 않았습니다. 최종적으로 논의된 작품들은 ‘첫차’외 4편, ‘대장간 칼’ 외 4편, ‘서큘레이터’ 외 4편, ‘방충망’ 외 4편, ‘누에’ 외 4편이었습니다. 시 ‘첫차’는 겨울 저녁 한 사람의 영면을 추모하기 위해 들른 장례식장에서 망자와의 스치듯 맺은 한때의 인연을 담담하게 떠올리는 작품입니다. 그러나 영정사진 속 망자의 그 뻐드렁니가 뜻하는 것의 시적 내용이 다소는 불분명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시 ‘대장간 칼’은 전생에서 후생으로 이어지는 시간의 흐름을 보여줍니다. 그러면서 시적 화자의 미래(내생)의 정체성이 만들어지는 공간으로서 단철장이 제시되고 있습니다. 이 단철장이 낫과 같은 날카로운 금속의 공구를 만드는 곳이라는 데에서 화자의 절망과 번민은 생겨납니다. ‘낫’-‘꽃’, ‘전생’-‘후생’, ‘나’-‘그’의 대비가 상징과 암시를 만들어내고 있지만 산문적 진술이 긴장을 떨어뜨리는 형국입니다. 시 ‘서큘레이터’ 외 4편의 작품들은 시 창작의 경험이 많아 보였고, 또 조리가 있게 하나의 시상을 직조하는 능력을 보여주었습니다. 다만 시 ‘서큘레이터’'에서 보여지 듯 “나는 바람의 생산자. 버튼을 누르면 나의 심장은 뛰지”로 곧바로 진술이 옮겨가도 좋을 것임에도 불구하고 진술의 보폭을 겹쳐가면서 비좁게 옮겨감으로써 읽는 편에서 갑갑증을 느끼게 한다는 점을 지적하고 싶습니다. ‘방충망’ 외 4편의 작품들은 수상작과 마지막까지 경합했다는 것을 밝혀둡니다. 상상력이 참신하고 탄력이 느껴졌습니다만 작품들의 수준에 편차가 있었다는 점이 열세에 놓이게 했습니다. ‘누에’ 외 4편의 작품들은 유려한 생각을 드러내되 중량감이 있고 또 안정감을 느끼게 했습니다. 특히 시 ‘누에’는 과거의 시간을 불러내고, 옛 시간이 쌓인 공간 즉 분묘를 누에의 공간으로 바라보지만, 그 유택에 보관된 시간만큼은 둥글고 유연한 것으로 해석하는 부드러운 상상력이 특별했습니다. 개성적인 시안을 갖추었다고 생각합니다. 수상을 축하드립니다. 심사위원 : 문효치(시인, 한국문인협회 이사장), 문태준(시인
15    조문 댓글:  조회:709  추천:0  2019-08-19
조문 / 이서연 빈 방에 남아 빈 방을 닦고 있는 거울처럼 그 집의 벽들은 아직 비에 젖고 있다 현관 앞에 쓰러진 우산이 있고 지붕을 넘어 개 짖는 소리가 들린다 누군가 소리 내어 운다 나는 꽃을 들고 있다 이른 새벽 청소부가 올 때까지 쓰레기봉투처럼 웅크리고 싶은 밤이 있다 자동차가 달리는 8차선 도로를 천천히 가로질러 죽어가는 밤과 죽은 뒤의 밤을 죽은 사람 곁에 앉아 산 사람이 지샌다 삶이 죽음으로 옮겨가는 낮을 지나 죽음이 삶을 전염시키는 밤으로 눈을 감고 있으면 생각 없는 몸이 어딘가로 간다 생각만 남아 몸을 생각한다 엎어진 화분처럼 방문을 쥐고 있는 젖은 손이 있다 손잡이를 말아 쥔 둥근 손등만 보인다 창문이 없는 방에 바람이 들이쳤다 먹구름과 흰 구름이 방 안을 지나간다 감은 눈 안으로 구름은 어떻게 들어 왔을까? ................................................. 심사평 / 심사위원 이하석, 장옥관 시인. 언어 몰고가는 힘 놀랍고 삶과 죽음 관계 새로운 인식 이끌어 예심에서 올라온 10명의 작품으로 우리 시단의 변화를 실감했다. 흔히 보아왔던 개인적 발화에 가까운 소통부재의 언술이나 실험이라는 방패 뒤에 숨은 책임방기(責任放棄)의 시편들이 확실히 줄어들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대신 새로움을 보여주는 시편들보다 익숙함이라는 달갑지 않은 현상이 눈에 띄어 안타까움을 지울 수 없었다. 두 심사자는 당선권에 든 작품으로 나동하씨의 ‘계단들’과 손명이씨의 ‘전모(全貌)’, 그리고 이서연씨의 ‘조문’을 최종 선정했다. 손명이씨의 작품은 ‘달’이라는 원형상징을 변주하면서 시상을 엮어가는 수법이 눈여겨볼 만했다. 그러나 관념을 구체성에 얹는 데 힘이 부치는 감이 있었다. 나동하씨의 작품은 ‘계단’이라는 대상을 삶의 보편적 국면으로 이어내는 인식의 깊이를 보여주었다. 대상을 치열하게 파고드는 힘, 긴밀한 구성력과 치밀한 묘사력도 두루 갖추고 있었다. 이서연씨의 작품은 참신한 비유와 더불어 언어를 몰고 가는 힘이 놀라웠다. 무엇보다 행간을 건너뛰는 경쾌한 어법이 신인의 예기(銳氣)를 느끼게 했다. “죽어가는 밤과 죽은 뒤의 밤을/ 죽은 사람 곁에 앉아 산 사람이 지샌다/ 삶이 죽음으로 옮겨가는 낮을 지나/ 죽음이 삶을 전염시키는 밤으로”와 같은 구절에서 보듯 활달한 어법을 통해 삶과 죽음의 관계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이끌어내고 있다. 구성의 측면에서 안정감을 주고 있다는 점도 이 작품의 또 다른 자랑거리다. 대상에 직핍해 들어가 인식의 상투성을 뒤집어내는 나동하씨의 작품과 감각적이고 개성적인 화법으로 일상 언어의 범박함에서 벗어난 이서연씨의 작품을 두고 논의 끝에, 두 심사자는 신춘문예 당선자에게 요구되는 새로움이라는 덕목에 좀 더 부합된다고 판단되는 이서연씨의 작품 ‘조문’을 당선작으로 결정했다. 신춘문예 당선자의 영광은 단 하루다. 이 작은 성취에 머물지 말고 당선자는 언어의 모험에 기꺼이 몸을 던져 천 년을 버티는 교목이 되길 바란다.
14    다른 구멍에 넣다 댓글:  조회:641  추천:0  2019-08-19
  다른 구멍에 넣다 / 최영철 현금 인출기에 카드를 밀어 넣는데 구멍이 카드를 밀어낸다 자꾸 넣어도 자꾸 밀어낸다 구멍이 자기를 밀어낸다는 걸 알았는지 구멍이 밀어내기도 전에 카드가 먼저 비집고 나온다 몇 번을 그러고 있는데 뒤에 줄 선 아주머니 내 어깨를 툭툭 친다 아차 누가 이 많은 구멍을 만들었을까 현금 카드를 넣는다는 게 전화카드를 넣어버렸다 아주머니가 웃고 나는 얼굴이 빨개졌다 변창렬  (길림시)서울: 비누 / 강초선 그의 몸은 물에 닿으면 반드시 녹는다 그러나 젖은 제 몸의 향기를 지극히 사랑하는 까닭에 한순간의 生이 뜬금없는 거품일지라도 오래 전 세상 눈뜨기 전부터 키워온 제 몸의 향기를 흐르는 물에 아낌없이 게워낼 줄을 안다.
13    바깥에 같히다 댓글:  조회:671  추천:0  2019-08-19
  바깥에 갇히다 정용화 우리 집 현관문에는 번호키가 달려있다 세 번, 비밀번호를 잘못 누르면 가차 없이 문이 나를 거부한다 쓰레기를 버리러 나왔다가 지갑도 휴대폰도 없이 제대로 바깥에 갇히고 말았다 안과 밖이 전도되는 순간 열리지 않는 문은 그대로 벽이 된다 계단에 앉아있는 30분 동안 겨울이 왔다 바람은 골목을 넓히려는 듯 세차게 불고 추위를 모르는 비둘기는 연신 모이를 쪼아댄다 내 것이면서 내가 어쩌지 못하는 것이 어디 문뿐이겠는가 낡을 대로 낡아버린 현수막이 바깥에 갇힌 나를 반성도 없이 흔든다 걸터앉은 계단이 제멋대로 흩어지는 길 위의 낙엽이 새들이 자유롭게 풀어놓은 허공이 나를 구속하고 있는 바깥이라니! 안으로 들어갈 수 없는 나는 지금 바깥이다 프로필 정용화 : 충북 ,동대 대학원 문창과, 대전일보 신춘문예 당선, 시집[바깥에 갇히다]외 다수 시 감상 어느 때 외출했다가 당혹할 때가 있다. 손에 아무것도 쥔 것이 없다. 현금도, 카드도, 전화기도, 차 열쇠도, 밀려드는 공포. 나는 여기에 이렇게 있는데, 세상의 밖에 나 홀로 있는 듯한 느낌. 어쩌면 나는 현금, 카드, 전화기, 열쇠로만 존재했던 것은 아닌지? 아니면 애초부터 나는 없었고 다만, 한 여름 땡볕에 울렁거리는 저 그림자가 진짜 ‘나’인지? 분명한 것은 바깥은 안의 반대가 아니라는 것이다. 내가 지금 바깥이라는 것이다. [글/김부회 시인, 평론가] 변창렬  (길림시)서울: 7월의 바다 / 황금찬 아침 바다엔 밤새 물새가 그려 놓고 간 발자국이 바다 이슬에 젖어 있다. 나는 그 발자국 소리를 밟으며 싸늘한 소라껍질을 주워 손바닥 위에 놓아 본다. 소라의 천 년 바다의 꿈이 호수처럼 고독하다. 돛을 달고, 두세 척 만선의 꿈이 떠 있을 바다는 뱃머리를 열고 있다. 물을 떠난 배는 문득 나비가 되어 바다 위를 날고 있다. 푸른 잔디밭을 마구 달려 나비를 쫓아간다. 어느새 나는 물새가 되어 있었다. .
12    소금인형 댓글:  조회:741  추천:0  2019-08-19
소금인형 / 류시화   바다의 깊이를 재기 위해 바다로 내려간 소금 인형처럼 당신의 깊이를 재기 위해 당신의 피 속으로 뛰어든 나는 소금인형처럼 흔적도 없이 녹아 버렸네 .
11    댓글:  조회:691  추천:0  2019-08-19
멍/인은주   그러지 말자 하고 기다리다 들뜬 저녁 그이는 오지 않고 노을이 덮쳤다 넘어진 무릎 아래로 붉은 피가 모였다 핏빛이 붉어야 하는 그 이유를 아는 순간 노을은 다급하게 어둠과 섞이고 이 세상 다 무너진듯 돌아보지 않았다   ㅡ『정형시학』(2019, 여름호)
10    현수막 댓글:  조회:738  추천:0  2019-08-19
바람과 현수막 / 이해리   빌딩에 매달린 현수막이 미친 듯 울부짖는다 바람 세차게 부는 날 귀신 곡하는 소리를 낸다 퍽퍽 벽을 때리며 돌덩이 던지는 소리를 낸다 ​어마어마하다 무섭고 괴상하다 ​머물지 않으려는 자를 억지로 품어 안은 자의 괴로움, 들어 주기엔 지나치게 사납다 ​죽어도 떠나야겠다는 자와 죽어도 못 보내겠다는 이의 팽팽한 절규   ​사랑에는 더 집착하는 이가 약자, 온몸이 얇은 가슴뿐인 현수막 차라리 내 가슴 찢어놓고 가라 사생결단 울부짖는 소리 귀 얇은 내 잠은 밤새 안절부절이다
9    수평선 댓글:  조회:707  추천:0  2019-08-19
수평선 / 배한봉 저 빨랫줄 참 길게 눈부시다 태양을 널었다가 구름을 널었다가 오징어 떼를 널었다가 달밤이면 은빛으로 날아다니는 갈치 떼를 널었다가   옛날에는 귀신고래도 너끈하게 널었다는 그래도 아직 단 한 번 터진 적 없는 저 빨랫줄 한라산과 백두산이 가운데 쯤 독도를 널어놓고 이쪽, 저쪽에서 팽팽하게 당겨주는 참 길게 눈부신 저, 한국의 쪽빛 빨랫줄
8    성냥 댓글:  조회:695  추천:0  2019-08-19
성냥 / 이세룡 감옥 속에는 죄인들이 가득하다 머리통만 커다랗고 몸들이 형편없이 야위었다 세계를 불태우려고 기회를 엿보는 어릿광대들 물 한 모금 마시지 못하고 일생을 감옥에서 보낸다
7    갱년기 댓글:  조회:656  추천:0  2019-08-19
갱년기   안현미   국숫집에 와보니 알겠다 호르몬이 울고 호르몬이 그리워하고 호르몬이 미워하고 다 호르몬이 시키는 일이라는 걸   매일매일 죽지도 않고 찾아와 죽고 싶다고 말하는 나는 누구인가?  
6    택배 댓글:  조회:667  추천:0  2019-08-19
택배 / 박승연 어머니가 보내신 택배가 1박 2일 여행을 마치고 도착했다 서둘러 박스를 열어보니 당신의 투박한 손으로 꾹꾹 눌러 담은 채소가 자식 향한 어머니 마음처럼 부풀어 오른다 더운 공기에 시든 푸성귀를 다듬어 목욕시키니 당신의 푸른 미소로 살아난다 저녁상에 상추 쑥갓 담아내니 당신의 잊고 살아온 세월이 떠오른다 인고의 세월 견뎌내며 흙처럼 사신 당신 둥지 떠나 암 수술한 자식을 위해 산수(傘壽)에도 여전하신 사랑에 말할 수 없는 고마움이 넘쳐난다 상추 한 잎 입에 넣으니 밭 매시던 모습이 아른거린다 아! 가까이 계시나 언제나 그리운 당신 야채처럼 싱싱한 세월을 택배로 되돌려 보내드리고 싶다 .
5    댓글:  조회:708  추천:0  2019-08-19
꿈 / 김미경 파지사과를 한 입 베어 물자 갇혔던 비명이 서걱 씹힌다 혀를 지그시 눌러 오래 씹어도 낯설지 않은 질감 버림받는 일에 익숙한 내가 버려진 너를 아낌없이 먹는 일은 서로를 달래는 의식 살만하게 살지 않아 다행이라는 말에 진심을 걸고 외면당한 많은 것에 과감한 애정을 표하기로 하였으니 누구의 신부였던 조신한 가면은 더 과감하게 뜯어 버린다 이제는 절망이 절망을 끌어들여도 적막이 적막을 덮어버려도 아니 그럴수록에 나의 고민은 깊어져 걱정이 사라질 것이고 발끝에 뿌리내린 지독한 병이 지금의 결핍을 치유하고 더 비릿하고 질긴 슬픔에 전부를 빠뜨릴 것이다 비로소 뚜렷해진 나의 초상
4    좋은 시 묶음 댓글:  조회:1122  추천:0  2019-07-19
채소를 다듬다가 / 강초선 채소를 다듬어본 사람은 알리라 밭에서 갓 캐어 왔다는 채소를 다듬다 보면 먹을 수 있는 속잎보다 먹을 수 없는 겉잎이 더 많았을 때, 속상했던 기억을... 한 뿌리에서 돋아나 속잎과 겉잎으로 갈라지는 채소, 우리네 삶의 가지에도 진짜와 가짜는 태어나는 법 그래, 어쩌면 꼭 필요한지 몰라 속잎을 보호하기 위한 겉잎으로... 진짜와 가짜, 예부터 귀하고 소중한 것은 깊은 곳에 꼭꼭 숨겨두었던 우리의 조상들 그 얼이 지나친 탓일까 세상 어느 장소 어디를 가도 가짜가 진짜의 주름잡고 화려한 조명발 받는 세상 사라져가는 것은 쓸쓸한 진짜들의 뒷모습 잃어버린 진짜들의 설 자리 바람과 햇살이 부족한 이 땅에서 볓 안되는 속잎마저 말라버린다면 속잎이 없는, 먹을 수 없는 겉잎으로만 자라나는 쓰레기밭을 가꾸는 세상이 될까 그 것 이 두 렵 다   비누 / 강초선 그의 몸은 물에 닿으면 반드시 녹는다 그러나 젖은 제 몸의 향기를 지극히 사랑하는 까닭에 한순간의 生이 뜬금없는 거품일지라도 오래 전 세상 눈뜨기 전부터 키워온 제 몸의 향기를 흐르는 물에 아낌없이 게워낼 줄을 안다.     다른 구멍에 넣다 / 최영철 현금 인출기에 카드를 밀어 넣는데 구멍이 카드를 밀어낸다 자꾸 넣어도 자꾸 밀어낸다 구멍이 자기를 밀어낸다는 걸 알았는지 구멍이 밀어내기도 전에 카드가 먼저 비집고 나온다 몇 번을 그러고 있는데 뒤에 줄 선 아주머니 내 어깨를 툭툭 친다 아차 누가 이 많은 구멍을 만들었을까 현금 카드를 넣는다는 게 전화카드를 넣어버렸다 아주머니가 웃고 나는 얼굴이 빨개졌다   경배 - 김소연   나쁜 짓을 이제는 하지 않아 나쁜 생각을 너무 많이 하기 때문이지 좋아하는 친구가 베란다에서 키운 부추를 주어서 나란히 누운 부추를 찬물에 씻지 좋아하는 친구가 보내준 무쇠 프라이팬에 부추전을 부치지 젓가락을 들고 전을 먹는 동안에 나쁜 음악을 이제는 듣지 않아 나쁜 생각들을 완성하는 데에 방해가 되기 때문이지 부추를 먹는 동안엔 부추를 경배할 뿐 저편 유리창으로 젓가락을 내려놓는 너의 모습이 보였는데 왜 그렇게 맨날 억울한 얼굴이니 병이 멈추었니 비명이 사라졌니 나의 병으로 너의 병을 만들던 짓을 더 해주길 바라니 예의를 다해 평범해지는 일을 너는 경배하게 된 거니 참 독하다 참 무섭다 하면서 너를 번역해줄 일이 이제는 없겠다 모든 게 끔찍한데 가장 끔찍한 게 너라는 사실 때문에 너는 누워 잠을 자버리지 다음 생에 깨어날 수 있도록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했는데 모든 것에 익숙해져버렸지 익숙해져버린 나를 적응하지 못한 채 절절매지 젓가락을 들어 올려 전을 다 먹을 뿐 만약 이 세상이 대답이었던 것이라면 그 질문은 무엇이었을까 더 강하고 더 짙은 이 부추였을까 병이 멈추어버린 병은 어떻게 아픈 척을 해야 할까 부추를 받고 귀여운 인형을 친구에게 건넸지 무쇠 프라이팬을 받고 예쁜 그림책을 친구에게 건넸지 귀엽고 예쁘게 여리고 선량하게 혼자 있을 때마다 나쁜 것들만 떠올리는데 나쁜 짓은 더 이상 하지 않아 가지런한 부추들 파릇한 부추들 경배 / (김소연. 2015년 여름호.) ㅡㅡㅡㅡㅡ 오랜만에 제가 좋아하는 풍의 좋은 시를 만났습니다 시인은 아픈 소리를 한 마디도 내지 않고 세상의 아픔을 말하네요 날도 더운데 "그"  초록의 부추처럼 다들 오늘도 싱싱해지시기 바랍니다 오전 근무를 하고 플룻 레슨을 받고 산에 올라왔는데 시 올리느라 잠시 숲속 벤치에 앉았습니다 산새소리와 바람 속에서 한 잎의 온도             금시아 나뭇잎 한 장, 빙판에 갇혀 있습니다   반대편의 아이 하나, 피켓을 들고 침묵합니다   이파리 쪽으로 모여들거나 햇살 쪽으로 모이는 온도가 있습니다 초록도 온기도 없는 겨울이 짧은 햇살을 따라 저녁으로 갑니다   지구의 시간이 녹아내리고 금요일의 아이들 등교를 거부합니다   나뭇잎 주위의 얼음이 조금씩 녹고 있습니다 아무리 하찮은 한 잎의 곁도 흔들리는 촛불만큼의 온기가 있습니다 세상의 체감온도가 한 잎의 온도라면   금요일의 피켓은 창백한 지구의 어조입니다   얼음의 이불 같은 마른 나뭇잎 한 장, 지구를 걱정하는 어린 피켓 하나, 어쩌면 겨울의 숨통이거나 따듯한 봄의 근처들이겠지요   어떤 금요일의 약속에는 측정 불가능한 수치 밖의 온기가 있습니다   ㅡ『미네르바』(2019, 여름호)  ------------------------------------ 금시아 : 1961년 광주 출생. 2014년 《시와 표현》으로 등단. 시집 『툭,의 녹취록』 『금시아의 춘천詩_미훈微醺에 들다』. 한 잎의 온도             금시아 나뭇잎 한 장, 빙판에 갇혀 있습니다   반대편의 아이 하나, 피켓을 들고 침묵합니다   이파리 쪽으로 모여들거나 햇살 쪽으로 모이는 온도가 있습니다 초록도 온기도 없는 겨울이 짧은 햇살을 따라 저녁으로 갑니다   지구의 시간이 녹아내리고 금요일의 아이들 등교를 거부합니다   나뭇잎 주위의 얼음이 조금씩 녹고 있습니다 아무리 하찮은 한 잎의 곁도 흔들리는 촛불만큼의 온기가 있습니다 세상의 체감온도가 한 잎의 온도라면   금요일의 피켓은 창백한 지구의 어조입니다   얼음의 이불 같은 마른 나뭇잎 한 장, 지구를 걱정하는 어린 피켓 하나, 어쩌면 겨울의 숨통이거나 따듯한 봄의 근처들이겠지요   어떤 금요일의 약속에는 측정 불가능한 수치 밖의 온기가 있습니다   ㅡ『미네르바』(2019, 여름호)  ------------------------------------ 금시아 : 1961년 광주 출생. 2014년 《시와 표현》으로 등단. 시집 『툭,의 녹취록』 『금시아의 춘천詩_미훈微醺에 들다』.
3    좋은 시 묶음(1) 댓글:  조회:1324  추천:0  2019-07-19
채소를 다듬다가 / 강초선 채소를 다듬어본 사람은 알리라 밭에서 갓 캐어 왔다는 채소를 다듬다 보면 먹을 수 있는 속잎보다 먹을 수 없는 겉잎이 더 많았을 때, 속상했던 기억을... 한 뿌리에서 돋아나 속잎과 겉잎으로 갈라지는 채소, 우리네 삶의 가지에도 진짜와 가짜는 태어나는 법 그래, 어쩌면 꼭 필요한지 몰라 속잎을 보호하기 위한 겉잎으로... 진짜와 가짜, 예부터 귀하고 소중한 것은 깊은 곳에 꼭꼭 숨겨두었던 우리의 조상들 그 얼이 지나친 탓일까 세상 어느 장소 어디를 가도 가짜가 진짜의 주름잡고 화려한 조명발 받는 세상 사라져가는 것은 쓸쓸한 진짜들의 뒷모습 잃어버린 진짜들의 설 자리 바람과 햇살이 부족한 이 땅에서 볓 안되는 속잎마저 말라버린다면 속잎이 없는, 먹을 수 없는 겉잎으로만 자라나는 쓰레기밭을 가꾸는 세상이 될까 그 것 이 두 렵 다   비누 / 강초선 그의 몸은 물에 닿으면 반드시 녹는다 그러나 젖은 제 몸의 향기를 지극히 사랑하는 까닭에 한순간의 生이 뜬금없는 거품일지라도 오래 전 세상 눈뜨기 전부터 키워온 제 몸의 향기를 흐르는 물에 아낌없이 게워낼 줄을 안다.     다른 구멍에 넣다 / 최영철 현금 인출기에 카드를 밀어 넣는데 구멍이 카드를 밀어낸다 자꾸 넣어도 자꾸 밀어낸다 구멍이 자기를 밀어낸다는 걸 알았는지 구멍이 밀어내기도 전에 카드가 먼저 비집고 나온다 몇 번을 그러고 있는데 뒤에 줄 선 아주머니 내 어깨를 툭툭 친다 아차 누가 이 많은 구멍을 만들었을까 현금 카드를 넣는다는 게 전화카드를 넣어버렸다 아주머니가 웃고 나는 얼굴이 빨개졌다   경배 - 김소연   나쁜 짓을 이제는 하지 않아 나쁜 생각을 너무 많이 하기 때문이지 좋아하는 친구가 베란다에서 키운 부추를 주어서 나란히 누운 부추를 찬물에 씻지 좋아하는 친구가 보내준 무쇠 프라이팬에 부추전을 부치지 젓가락을 들고 전을 먹는 동안에 나쁜 음악을 이제는 듣지 않아 나쁜 생각들을 완성하는 데에 방해가 되기 때문이지 부추를 먹는 동안엔 부추를 경배할 뿐 저편 유리창으로 젓가락을 내려놓는 너의 모습이 보였는데 왜 그렇게 맨날 억울한 얼굴이니 병이 멈추었니 비명이 사라졌니 나의 병으로 너의 병을 만들던 짓을 더 해주길 바라니 예의를 다해 평범해지는 일을 너는 경배하게 된 거니 참 독하다 참 무섭다 하면서 너를 번역해줄 일이 이제는 없겠다 모든 게 끔찍한데 가장 끔찍한 게 너라는 사실 때문에 너는 누워 잠을 자버리지 다음 생에 깨어날 수 있도록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했는데 모든 것에 익숙해져버렸지 익숙해져버린 나를 적응하지 못한 채 절절매지 젓가락을 들어 올려 전을 다 먹을 뿐 만약 이 세상이 대답이었던 것이라면 그 질문은 무엇이었을까 더 강하고 더 짙은 이 부추였을까 병이 멈추어버린 병은 어떻게 아픈 척을 해야 할까 부추를 받고 귀여운 인형을 친구에게 건넸지 무쇠 프라이팬을 받고 예쁜 그림책을 친구에게 건넸지 귀엽고 예쁘게 여리고 선량하게 혼자 있을 때마다 나쁜 것들만 떠올리는데 나쁜 짓은 더 이상 하지 않아 가지런한 부추들 파릇한 부추들 경배 / (김소연. 2015년 여름호.) ㅡㅡㅡㅡㅡ 오랜만에 제가 좋아하는 풍의 좋은 시를 만났습니다 시인은 아픈 소리를 한 마디도 내지 않고 세상의 아픔을 말하네요 날도 더운데 "그"  초록의 부추처럼 다들 오늘도 싱싱해지시기 바랍니다 오전 근무를 하고 플룻 레슨을 받고 산에 올라왔는데 시 올리느라 잠시 숲속 벤치에 앉았습니다 산새소리와 바람 속에서 한 잎의 온도             금시아 나뭇잎 한 장, 빙판에 갇혀 있습니다   반대편의 아이 하나, 피켓을 들고 침묵합니다   이파리 쪽으로 모여들거나 햇살 쪽으로 모이는 온도가 있습니다 초록도 온기도 없는 겨울이 짧은 햇살을 따라 저녁으로 갑니다   지구의 시간이 녹아내리고 금요일의 아이들 등교를 거부합니다   나뭇잎 주위의 얼음이 조금씩 녹고 있습니다 아무리 하찮은 한 잎의 곁도 흔들리는 촛불만큼의 온기가 있습니다 세상의 체감온도가 한 잎의 온도라면   금요일의 피켓은 창백한 지구의 어조입니다   얼음의 이불 같은 마른 나뭇잎 한 장, 지구를 걱정하는 어린 피켓 하나, 어쩌면 겨울의 숨통이거나 따듯한 봄의 근처들이겠지요   어떤 금요일의 약속에는 측정 불가능한 수치 밖의 온기가 있습니다   ㅡ『미네르바』(2019, 여름호)  ------------------------------------ 금시아 : 1961년 광주 출생. 2014년 《시와 표현》으로 등단. 시집 『툭,의 녹취록』 『금시아의 춘천詩_미훈微醺에 들다』. 한 잎의 온도             금시아 나뭇잎 한 장, 빙판에 갇혀 있습니다   반대편의 아이 하나, 피켓을 들고 침묵합니다   이파리 쪽으로 모여들거나 햇살 쪽으로 모이는 온도가 있습니다 초록도 온기도 없는 겨울이 짧은 햇살을 따라 저녁으로 갑니다   지구의 시간이 녹아내리고 금요일의 아이들 등교를 거부합니다   나뭇잎 주위의 얼음이 조금씩 녹고 있습니다 아무리 하찮은 한 잎의 곁도 흔들리는 촛불만큼의 온기가 있습니다 세상의 체감온도가 한 잎의 온도라면   금요일의 피켓은 창백한 지구의 어조입니다   얼음의 이불 같은 마른 나뭇잎 한 장, 지구를 걱정하는 어린 피켓 하나, 어쩌면 겨울의 숨통이거나 따듯한 봄의 근처들이겠지요   어떤 금요일의 약속에는 측정 불가능한 수치 밖의 온기가 있습니다   ㅡ『미네르바』(2019, 여름호)  ------------------------------------ 금시아 : 1961년 광주 출생. 2014년 《시와 표현》으로 등단. 시집 『툭,의 녹취록』 『금시아의 춘천詩_미훈微醺에 들다』.   내가 만난 사람은              모두 아름다웠다                                         이기철 잎 넓은 저녁으로 가기 위해서는 이웃들이 더 따뜻해져야 한다 초승달을 데리고 온 밤이 우체부처럼 대문을 두드리는 소리를 듣기 위해서는 채소처럼 푸른 손으로 하루를 씻어놓아야 한다 이 세상에 살고 싶어서 별을 쳐다보고 이 세상에 살고 싶어서 별 같은 약속을 한다 이슬 속으로 어둠이 걸어 들어갈 때 하루는 또 한번의 작별이 된다 꽃송이가 뚝뚝 떨어지며 완성하는 이별 그런 이별은 숭고하다 사람들의 이별도 저러할 때 하루는 들판처럼 부유하고 한 해는 강물처럼 넉넉하다 내가 읽은 책은 모두 아름다웠다 내가 만난 사람은 모두 아름다웠다 나는 낙화만큼 희고 깨끗한 발로 하루를 건너가고 싶다 떨어져서도 향기로운 꽃잎의 말로 내 아는 사람에게  상추잎같은 편지를 보내고 싶다   서울의 우울 5                       김승희 오늘의 날씨, 모기가 힘이 없어요 우리는 일회용 건전지가 아니다 우리는 크리넥스 티슈가 아니다 우리는 편의점 나무젓가락이 아니다 우리는 당일치기 풍선이 아니다 말할수록 야위어가는 메아리가 아니다 모기에게 대포를 쏘지 말아달라 왜 우리는 불안한가 밥을 먹고 있어도 불안하고 약을 먹고 있어도 불안하고 일을 하고 있어도 불안하고 일이 없어 놀고 있어도 불안하고 아침에도 불안하고 저녁에도 불안하고 죄라면 열심히 일한 죄밖엔..... 유능해도 불안하고 무능해도 불안하고 낮에도 불안하고 밤에도 불안하고 왜 우리는 쥐새끼처럼 늘 불안한가 왜 이 도시엔 이렇게 골목마다 어린 소녀를 따라가는 성추행범이 많은가 성폭행하고 손목까지 잘라 유리컵에 꽂아놓는 미친놈이 많은가 왜 이 도시엔 이렇게 손바닥 뒤집는 거짓말이 많으며 왜 손바닥 뒤집는 그 손바닥들로 하늘이 자욱한가 왜 나의 하늘을 누가 가리고 누가 뒤집는가 왜 이 도시엔 이렇게 법이 허전한가 정녕 모기에게 대포를 쏘지 말아달라   ■  '나의 시론' / 장석주 건강한 시인, 잘 사는 시인, 당당한 시인보다 어쩐지 가난하고 병약해 보이는 시인들의 시에 더 이끌린다. 나는 박용래나 김종삼, 천상병이나 김관식의 시들이 좋다! * 자연 예찬의 시들이 순수하다고 말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자연 예찬의 시들은 정치성을 배제함으로써 교묘한 방식으로 당대 정치를 암묵적으로 승인한다. 자연 예찬의 시는 두드러지게 탈정치적이다. 탈정치적인 태도는 그 자체로 나쁜 것도 좋은 것도 아니다. 다만 탈정치적인 게 순수하다고 말하는 것은 사실을 왜곡하는 일이다. 자연 예찬의 시는 정치를 배제하는 방식으로 정치에 개입하는 것이다. * 순수시의 표상으로 꼽는 시인이 말년에 1980년 5월 광주 민중 학살의 원흉인 민정당 소속 국회의원으로 나선 것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다. * 시인의 정체성은 의인(義人)이 아니다. 어쩌면 시인의 정체성은 거지, 바보, 천치, 쪼다, 못난이에게서 더 많이 발견된다. 한심하고 하염없는 이들! 생물학적 이득에 아무 도움이 되지 않는 시에 자기를 던진 이들! 이들에겐 농경 정착민보다 변방인, 외부자, 밀입국자, 난민, 떠돌이 광대가 더 잘 어울린다  * 페르난두 페소아는 자기에겐 아무 야망도 욕망도 없다고, 그는 자신이 시인이 된 건 야망이 아니라 ‘내가 홀로 있는 방식’이라고 고백한다. 그는 죽는 날 이런 시를 남겼다. “오른손을 들어, 태양계에 인사한다. /하지만 잘 가라고 말하려고 인사한 건 아니었다. /아직 볼 수 있어서 좋다고 손짓했고, 그게 다였다.” * 김혜순 시집 『날개 환상통』(2019)을 읽는다. 김혜순 시는 이 시대 젊은 시인들의 시에서 보이는 낯섦과 그로테스크함의 배후다. 김혜순 시는 ‘시적인 것’에 대한 인습적 이해를 부수고 그 경계를 넓혀왔다. 김혜순 시의 언어는 본질적으로 문법적 단일성에 대한 금지와 위반의 언어다. 김혜순 시의 어떤 구절이 보여주는 정신의 도약과 폭발은 인습적인 사유의 그물로는 포획되지 않는다. 김혜순 시를 읽는 게 불편하다고 말하는 당신은 자기 안에 있는 인습적 사고와 싸우기를 멈춘 사람이다. * 김혜순은 이번 시집에서 자꾸 새장을 탈출한 새로 변신하려고 시도한다. 몸의 증상은 곧 새의 증상이다. 새가 된 기분을 느껴보려는 걸까? “그 새의 신발끈은 풀어져 땅에 끌리고/그 새의 머리끈은 풀어져 측백나무를 칭칭 감고//하지만 나는 나는 것이 좋아/먼 길 떠나는 것이 좋아”. * 김혜순의 시가 다 어려운 것은 아니다. 때로는 이렇게 쉽게 다가오는 구절도 쓴다. “자아(自我)라는 이름의 뚱뚱한 소녀를 생각한다/그녀를 오늘 밤 굶겨 죽여야 한다”.   * 우리 시인 중에도 페르난두 페소아 같이 자기 본명을 감추고 필명이나 이명을 쓴 시인들이 있다. 김정식(金廷湜, 1902~1934)은 ‘김소월’로 더 알려져 있고, 김해경 (金海卿, 1910~1937)은 ‘이상’으로 더 유명하다. 이들에겐 끊임없이 자기 정체성을 부정하려는 무의식의 심리가 숨어 있다. 이들은 자기를 부정함으로써 비로소 자기로 돌아간다. 필명은 이들이 선택한 정신적 망명지라고 할 수 있다. * 언어는 시를 이루는 기초 성분이다. 시는 언어를 매개로 성립하는 예술이다. 언어-도구는 시라는 물고기를 잡기 위한 통발이다. 고기를 잡은 뒤에는 통발은 더 이상 쓸모가 없다. 좋은 시인은 시를 얻은 뒤 그 언어를 벗어나 그 너머로 나아가고자 한다. 하지만 언어를 벗어나는 순간 그 언어에 기대어 숨 쉬던 시도 사라진다. 그런 뜻에서 언어는 시의 숙명이자 한계다. * 시가 없어도 우리는 살아남는다. 시 한 편 읽지 않아도 먹고 사는 일에 지장은 없다. 하지만 시를 모른다면 세상의 불확실성에 머리를 쿵 하고 박는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시와 담 쌓고 지내는 사람이라면 세상이 얼마나 캄캄한 은총 속에 있는지를 깨닫지 못하고, 봄철 벚나무 가지마다 만개한 꽃잎 난분분 떨어져 온통 하얗게 만든 길바닥을 자동차가 짓이기고 지나가도 무감각할 수밖에 없다. * 세사르 바예호(1892~1938)는 “인간은 슬퍼하고 기침하는 존재”라고, “음습한 포유동물, 빗질할 줄 아는 존재”라고 노래한다. 여기에 무슨 말을 더 보탤 것인가! 인간을 규정하는 말을 늘어놓으면 책 한 권으로도 모자랄 테다. 하지만 시인들은 간략하게 말한다. 축약하고 비약하되 할 말은 다하는 것이다. * 배고파 우는 자식들은 어머니가 거두는 거지들이다. 어린 짐승 새끼들은 수시로 어머니에게 먹을 것을 내놓으라고 울며 보챈다. 세사르 바예호는 어린 시절을 어머니를 떠올리며 이렇게 노래한다. “셀 수도 없을 만큼 많이, 달걀노른자로만/과자를 구워주시던 따스한 제과기, 어머니”라고! 나비는 날개로 운다 이근배 날개가 있다는 것만으로는 이 봄 산과 들을 뒤덮고 있는 저 꽃들을 다 찾아다닐 수는 없다 내 어리석은 더듬이로는 한사코 쏟아내는 질탕한 향기를 다 맡아낼 수도 없는 것 알에서 애벌레로 다시 번데기로 거듭 몸 바꾸기를 하면서 우주의 빛깔을 모두 담아 짜낸 비단날개로 하늘을 휘저으며 아지랑이 더불어 춤을 추는 것이나 나의 발은 허공에 더욱 시리고 달디단 황홀을 빠는 입맞춤은 혀끝에 죽음처럼 쓰다 겨우 봄 한 철도 못 건너고 적멸로 돌아가는 나의 가녀린 목숨 붉은 볼로 서럽게 웃는 저 어리고 아리따운 것들 속에서 어느 것 하나 내 몫으로 챙기지 못하고 헤프게 꽃가루로 날려버린 사랑 나는 춤으로 운다 날개를 바스러트리며 바스러트리며 쭈그러진 술 주전자   김인덕   먼저는 생업에 뛰여들기도 전에 이유 없이 주인의 망치에 흠씬 뚜들겨 맞았다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홀에 호출되였다가 여기저기 술상 모서리에 맞히고 멋도 모르고 사정없이 땅바닥에 나동그라지고 상처를 훈장처럼 주렁주렁 가슴에 단 쭈그러진 술주전자   밤새도록 낯선 손에 목덜미를 잡히고 다람쥐 챗바퀴 돌듯 술잔을 오가며 귀때로 열물을 토했다   온갖 짓거리에 머리가 욱신거리고 몸마저 노근하다가 짓궂은 나그네의 육담에 잠시 마음이 설레이기도 했다   자정이 되여서야 시렁구석에 납작 엎드려 아무 것도 먹지 못한 빈속을 달래며 잠을 청한다   마침내 새벽이 가도록 잠을 이루지 못한 쭈그러진 술주전자끼리 부둥켜안고 스며드는 한점의 찬바람에 휘파람을 분다   쭈그러진 술주전자는 누구나 가슴에 쓰고 농렬한 소주쯤은 품고 사는 거라고 눈물이 마를 때까지 몸으로, 몸으로 말한다      박은영 ​ 아버지 몸엔 뾰족한 것으로 가득했다​ 아무도 찾아내지 못할 것 같았는데 친구들은 보자마자 어깨선에 숨겨둔 낫을 찾았고 바짓단에서 호미를 들춰냈다 바늘, 송곳, 펜촉, 압정…하나씩 찾아낼 적마다 나는 손톱 물어뜯는 버릇이 생겼다 몇 해 전 양지 바른 뒷산에 엄마를 숨겼을 때처럼 때때로 예상을 뒤엎기도 하였다 산새 우는 밤이 덥수룩한 턱수염에서 나오고 나란히 선 아버지와 나 사이 녹슨 열쇠가 잠긴 기억을 열고 윤곽을 드러냈다 체육시간에 잃어버린 실내화 한 짝처럼 눈 씻고도 보이지 않는 화상(畫像) 뒷장의 아버지를 훔쳐보았다 동그라미로 표시된 왼쪽 가슴 셔츠 주머니 가장자리에 양초가 숨겨져 있었다 나는 어둡고 누추한 그림자 속으로 숨어 들어가 촛농을 떨어뜨렸다 귓바퀴에 웅크려 있던 새가 울부짖고 낮달이 희미하게 보이는 학부모 모임날 아버지는 눈앞에 두고도 숨은 그림 하나를 찾아내지 못했다 ​ ​-제9회 조영관문학창작기금 수혜작.   폭탄 돌리기                     -신미균- 심지에 불이 붙은 엄마를/ 큰 오빠에게 넘겼습니다 심지는 사방으로 불꽃을 튀기며/ 맹렬하게 타고 있습니다 큰오빠는 바로 작은 오빠에게/ 넘김니다 작은 오빠는 바로 언니에게/ 넘김니다 심지가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언니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바로 나에게 넘김니다 내가 다시 큰오빠에게 넘기려하자/ 손사레를 치며 받지 않겠다는 시늉을 합니다 작은 오빠를 쳐다보자 곤란하다는 눈빛을 보냅니다 언니는 쳐다보지도 않고/ 딴청을  부립니다 그 사이 내손에 불이 붙었습니다 깜짝놀라 엉겹결에 들고 있던 폭탄을 공중으로 던져버렸습니다 엄마의 파편이 머리위로 분수처럼 쏟아집니다   물소의 뒷굽은 거룩하다 라고 / 정태중 시의 설계는 간혹 시어들이 떠나버리기도 해서 부도난 공사장 같기도 하였는데 공사장으로 신의 선물이랄까 하는 물음들이 녹슨 창으로 푸르게는 올라오기도 하였다 하얀 배꽃들이 지난 시간을 입었던 듯 옷들이 누렇게 먼저 바래고는 있는 듯 신문 기자의 탁본이 바래고는 있는 듯 배들이 어떤 문장들로 하여서 배가 불러오기도 한 점심시간이 지나자 부리나케 삐뽀삐뽀로 기선 잡는 불자동차와 헛배에 힘 잔뜩 부린 부도난 공사장 방귀와 상관도 없이 해는 쨍쨍 내리다가 굵은 빗방울 쏟아져 공사장을 내려치는데 부도난 말들이 튕겨 오르는 것이 풀들을 잡고 있는 눈물 같기만 하였는데 불화 가득 늙은 수소 큰 눈이 어리둥절 휘청이다가 눈물을 흘려주다가 음~매 라고 몇 번을 풀을 토악질하였다   사랑은                      채호기 1 사랑은 그렇게 왔다 얼음 녹는 개울의 바위틈으로 어린 물고기가 재빠르게 파고들듯이 사랑은 그렇게 왔다 알 수 없는 차가움이 눈을 투명하게 한다. 사랑은 그렇게 왔다 발가벗은 햇빛이 발가벗은 물에 달라붙듯이 사랑은 그렇게 왔다 수양버드나무의 그늘이 차양처럼 물을 어둡게 한다 사랑은 그렇게 왔다 할 말 없는 수초가 말 잃은 채 뒤엉키듯이 사랑은 그렇게 왔다. 가라앉아도 가라앉아도 사랑은 바닥이 없다. 2 사랑은 그렇게 갔다. 미처 못다 읽은 책장을 넘겨버리듯이 사랑은 그렇게 갔다. 말하려고 입 벌리면 더러운 못물이 목구멍을 틀어막았다. 사랑은 그렇게 갔다. 날아가며 남겨둔 여린 가지가 자지러지며 출렁이듯이 사랑은 그렇게 갔다. 손이 닿지 않는 곳에서만 꽃들은 예쁘게 피어났다. 사랑은 그렇게 갔다. 이미 범람해버린 강물이 지루하게 제 수위를 회복해가듯이 사랑은 그렇게 갔다. 사랑이 어루만진 부위에 홍수가 휩쓸고 간 잔해가 남았다. 3 사랑은 그렇게 왔다. 사랑은 그렇게 갔다. 기포가 떠오르고  말할 수가 없다.   새를 만나다       이화영 ​ ​ ​ 새 울음이 들려와 빨래를 널었습니다 펄럭이는 자락이 작은 깃 같아서 가만 귀를 기울였습니다 ​ 다시 볼 수 없는 대상은 다정합니다 적당히 마른 야생의 문장은 빨래사람 짓을 합니다 ​ 새에게 안녕하고 인사를 한 날은 불안하고 두려웠습니다. 안녕이란 단어를 싫어하는 감정이 습관을 이기지 못했습니다 안녕에게 정복당하고 안녕에게 정보를 얻는 시간입니다 ​ 새의 이니셜은 고독합니다 나는 빨래를 걷어 무생물에 감정을 더할 것입니다 ​ 빨래의 오른 뺨에 대한 해석이 필요합니다 상처 있는 사과를 한 줄로 깎아먹었습니다 ​ 동이 터 옵니다 새하얀 눈발 같은 노래가 쏟아집니다 며칠 빨래를 하지 않을 것입니다 ​ ​웹진 '시인광장' 2019년 6월호   초대시 말하지 않은 말 / 유안진 말하고 나면 그만 속이 텅 비어버릴까봐 나 혼자만의 특수성이 보편성이 될까봐서 숭고하고 영원할 것이 순간적인 단맛으로 전락해버릴까봐서 거리마다 술집마다 아우성치는 삼사류로 오염될까봐서 '사랑한다' 참 뜨거운 이 한마디를 입에 담지 않는 거다 참고 참아서 씨앗으로 영글어 저 돌의 심장 부도 속에 고이 모셔져서 뜨거운 말씀의 사리가 되어라고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초대시 오래 말하는 사이/ 신달자     가족의 재구성                                         김연종   세상의 모든 호칭은 이모와 언니 오빠로 재편집 되었다 여보당신은 이미 삭제되었고 한 때 유행하던 자기야도 자취를 감추었다 할아버지 할머닌 고려장 모텔에 장기투숙 중 아빠는 아직까지 귀가하지 않고 엄마는 막장 드라마에 칩거 중이다   오랜만에 가족나들이를 간다 이모가 앞장서고 언니 오빠가 뒤따른다 매표소에도 마트에도 이모 투성이다 식당에 들러 맨 먼저 이모를 부른다 아줌마는 자취를 감춘지 오래고 너무 젊은 이모는 슬쩍 언니로 대체된다 뒤처리와 계산은 모두 오빠 몫이다   가로등에 가물거리는 식구들을 들여다본다 할아버지 할머닌 유령처럼 토닥거리고 엄마 아빠는 서로의 손톱자국 사이로 슬며시 빠져나간다 언니 오빠는 각기 다른 채널로 재빨리 발길을 돌린다 달빛에 취한 이모마저 슬쩍 酒房으로 사라지고 나면 룰루랄라 모텔의 네온 간판은 나른하거나 불안하다   - 웹진『시인광장』 2012년 9월호   말레이시아 클럽 황주은 참사랑회는 스무 명으로 시작했다 회원이 줄자 이름을 바꾸자는 의견이 나왔다 어린이집 봉고를 운전하는 7년 언니가 동그라미회가 어떠냐고 제안했다 가슴을 떼어 낸 언니들이 주로 반대했다 도배 다니는 9년 언니의 의견이 신선했다 우리 모두 찰고무같이 질기게 살아야 하니 세계최대 고무 생산국가 이름을 따자고 주장했다 참사랑의 본질도 생고무와 같다고 모두 주억거렸다 우리는 말레이시아 클럽의 언니들이 되었다 3년 언니와 5년 언니는 샘물요양원을 거쳐 영구 탈퇴를 했고 8년 언니는 소원대로 애인의 포도밭에 묻혔다 그녀의 애인은 고위 공직자라고 했다 우리 클럽의 강령은 '늦지 마, 죽지 마, 신입회원은 항시 환영!'이다 투병 연도를 앞에 붙여 이름 대신 부른다 닭발을 팔던 19년 언니도 들국화를 꽂고 우주로 포장마차를 몰았다 그해 겨울, 클럽에는 눈 대신 하얀 진액이 떨어지는 날이 많았다 우리들 가슴에는 구더기가 끓었다 말레이시아 클럽 가입은 무료다   ㅡ『문예바다』(2019, 봄호) ------------------------------- 황주은 : 경북 예천 출생.  2013년 격월간《시사사》로 등단.     거울 / 조용숙 가까이 다가오면 무엇이든 덥석덥석 삼켜버리는 나는 온몸이 입이라네 헛배만 불렀다 꺼지는 상상임신처럼 먹어도 배가 부르지 않다네 거침없이 입에 넣은 것들이 깊은 망각의 늪에 떨어질 때면 나는 먹은 만큼 더 허기가 진다네 먹이를 찾아 나설 발이 없어 늘 뱃가죽이 납작하게 붙어 있는 나에겐 영양결핍에서 오는 폭식 습관이 있다네 늘 허겁지겁 삼켜봐도 먹을 수 있는 건 항상 생의 외피뿐이어서 깊이와 무게는 삼킬 수가 없다네 지독한 편식주의자인 나는 언젠가부터 만성 빈혈을 앓고 있다네 . .   걸레 / 이기순 몸으로 닦아준다 접근할수록 쌓여가는 삶의 흔적 겸손으로 핥고 지나간다 잔재 깊숙한 아픔까지 안으로 흡수시키는 나, 흥건하게 어두워진다 비웃지 마라 뒤엉킨 시간 속에 너덜거리는 세상의 먼지 뒤집어 쓴 건 내가 아닌 너다 네가 게워낸 삶의 잔재 몸으로 쓸어안고서도 흔쾌히 가슴을 여는 나, 인간이 만들어낸 시커먼 속내 기꺼이 들이마신다 하여 너는 나를 비웃을 자격이 없다   #디카시 꽃등심              김세연 등에 문신처럼 새겨진 문양이라 했다 살아서는 볼 수 없는 접시 위에 고이 핀 저 붉은 꽃   (           )                  안도현 내 애인은 바위 속에 누워 있었지 두 손 가슴에 모으고 눈을 감고 있었지 누군가 정으로 바위의 문을 두드리는 소리 들렸지 내 애인은 문을 밀고 바깥으로 걸어나왔지 바위 속은 환했지만 바깥은 어두웠지 내 애인은 옛날부터 나를 알아보지 못했지 - 안도현, '익산고도리석불입상' 전문 누구에게나 사랑은 맹목, 눈 먼 석불 나에게도 눈 먼 석불이 있지 부모에게는 자식이 눈 먼 석불이요 칸트에게는 철학이 눈 먼 석불이지 한용운의 님이 모든 기리운 이의 눈 먼 석불이듯이 모든 사랑하는 이의 가심에는 하나의 눈 먼 바위가 있지 천 년이 가도 어두운 석불입상, 네Du가 있지......   민들레 저작권   김서하 ​ 꽃을 베끼는 복제의 계절 들뜬 바람이 열린 창문으로 들락거린다 틈을 보이면 위험한 시뮬라크르의 세상 원본을 밝히지 않는 강을 건너온 바람의 옷소매에서 물냄새가 났다 가벼운 생일수록 뿌리는 질기다 제멋대로 분양된 흰 민들레 그런데 너는 알고 있을까 이번 달에 월세 계약이 끝난다는 것을 봄의 작품들 발신지를 몰라 저작료를 지불할 필요 없으니 끝까지 꽃대를 밀어 올린다마는 너를 안고 궁핍의 페이지를 한 번 더 옮긴다. 시집『가깝고 먼』2019. 고요아침 열린선           상징법 그동안 기초적인 것과 좋은 습관 들이기 그리고 쉽게 시를 이해시켜 드리기 위해 한번에 하나씩만 정확히 전달하려 노력했습니다.오늘 공부하고자 하는 것은 상징법인데 시의 참 맛을 이제부터 알아가시게 됩니다 지난 시간에 원관념과 보조관념에 대해 말씀드렸는데요 상징법은 원관념을 숨기고 보조관념을 활용하여 사유를 깊게 하는 것입니다. 이때 보조 관념으로 사용하는 사물과 원래 쓰고자 하는 원관념의 공통점을 어떻게 잘 풀어내는가가 관건이 됩니다. 지난 주와 마찬가지로 저의 졸시 배롱나무를 예로 들겠습니다.        배롱나무 /  김시호   너 없이 피고 지는 것은 생각할 수 없는 일이라 나는 배롱나무가 되었다 중구난방 피는 너를 안고 밑둥이 허예지도록 나는 야위웠는데 시든 날에 여름은 가고 내 모르는 눈물이 동강에 섞이었다 희나리처럼 설운 나는 먹빛 하늘에 살 수 없었으나 명패가 삼문三問인지라 마음만은 겹겹으로 지키었다 사는 것이 한 생만은 아니라서 나는 봄마다 너를 안고 일어나 햇불이 무색하도록 꽃 피게 하리라 지난 주에 이 글에서 너는 원관념 피는 꽃은 보조관념                  나는 원관념 배롱나무는 보조관념이다라고 말씀드렸는데요 사실은 원관념인 너와 나를 숨긴 것이지요. 눈치채셨겠지만 이 글은 단종애사를 쓴 시입니다.. 즉 원관념 너는 단종이고, 나는 성삼문입니다 그래서 독자에게 힌트를 주기 위하여 본문에 삼문이라는 단어를 집어 넣은 것입니다.. 그러면 원관념인 성삼문과 보조관념인 배롱나무는 어떤 유사성이 있을까요..? 제가 이 글을 쓸 때는 처음 배롱나무를 한참 관찰하고 그다음 집으로 돌아와 배롱나무와 관련된 자료를 찾다가 우연찮게 성삼문이 좋아한 꽃이란 것을 알게되어 시나리오 구성을 위해 단종애사를 읽었습니다 그런다음 다시 배롱나무 앞에 앉아 성삼문을 생각하면서 나무를 보고 쭉 쓴 것입니다.. 첫 연의 너 없이 피고 지는 일은 생각할 수 없는 일이라 (주군에 대한 신하의 도리) 나는 배롱나무가 되었다 (성삼문의 일편단심) 중구난방 피는 너를 안고 (주관적이지 못한 어린 단종에 대한 표현이면서 동시에 고문을 당할 때 전신에서 터져나오는 피와 실제 배롱나무꽃 피는 모양을 공통분모로 표현) 밑둥이 허얘지도록 나는 야위었는데 (실제 배롱나무의 밑둥은 허였기도 하며 옛날 고문 과정에서 정갱이 뼈가 하얗게 드러나는 것을 묘사) 시든 날에 여름은 가고 (수양대군의 찬탈) 내 모르는 눈물이 동강에 섞이었다 (동강이 흐르는 영월에서 단종의 죽음) 희나리처럼 설운 나는 (비통한 신하의 심정) 먹빛 하늘에 살 수 없었으나 (주인을 버리고 세조 밑에서 살수는 없었다) 명패가 삼문인지라 마음만은 겹겹으로 지키었다 (삼문을 독자들에게 힌트를 제공하기도 하였고 문을 세겹으로 빗장을 걸어 충성심을 지켰다) 사는 것이 한 생만은 아니라서 나는 봄마다 너를 안고 일어나 (다시 살아나더라도 나는 변함없이 주군을 모실 것) 햇불이 무색하도록 꽃 피게 하리라 (다시 태어나서라도 충성을 다하여 기어코 주인을 지키겠다) *요기서 잠깐 논란이 있었던 햇불은 김시호식 조탁입니다 흔히들 횃불의 오타가 아닌가 하셨는데 그것이 아니고 한 여름 이글거거리는 태양을 제나름으로 표현 한것입니다)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원래는 시에 대한 해설은 확장성에 제한을 받기 때문에 직접 설명하지 않습니다. 이 글에서도 성삼문과 관련하여 시작을 하였으나 중의적으로 연인관계에서 일편단심 부모의 자식사랑에 대한 부분도 비쳐질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상집법에 대한 이해가 되셨나요..?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한가지 당부드리고 싶은 것은 너무 원관념을 숨기는 것에 급급하다보면 아무도 이해할 수 없는 우주의 말이 됩니다 많은 시인들이 이런 오류에 빠집니다..   별들이 모여 사는 마을                        김찬옥   지호가 유치원에서 올 시간이다 가방을 받아들고 집 앞 편의점에 들려 마이쭈를 사고 새콤달콤한 얼굴로 아파트 정문을 들어섰다 마당에 핀 꽃들이 오늘따라 유독 한가해 보인다 봄은 꽃들에게 먼저 왔건만 경비병보다 더 지루해진 오후, 한참 졸고 있을 꽃들에게 지호를 소개시켜 주기로 했다 "저 나무는 목련이라고 해, 꽃이 뭐 같아 보여?" "응 꽃잎이 하얀 날개 같으니까 백조 같아요" "그래 정말 백조 같네, 큰 소리로 말하면 백조 떼가 우르르 날아가 버릴지도 몰라" 지호는 살금살금 목련나무 아래로 걸어갔다 적막한 봄은 달아올라 모이를 쪼듯 연신 물어댄다 "저 건 벚나무인데 저 꽃은 뭐 같아?" "응 벚꽃나무 뒤에 하늘이 있으니 밤하늘 별자리 같아요 별들이 함께 모여 사는 아름다운 마을이 나무에 걸려있네요" "응 정말 그러네, 지호의 눈은 진짜 상상님이 주셨나 봐" 지나던 바람이 귀를 세우고 지호의 말을 알아듣기라도 한 것일까 백조 몇 마리 땅으로 내려앉아 날개 속에 부리를 감추자 지호의 머리 위에도 발등 위에도 낮 별들이 호호호 쏟아져 내렸다   ㅡ『시현실』(2019, 여름호) ------------------------------- 김찬옥 : 1996년 등단. 시집『물의 지붕』『벚꽃 고양이』등. 수필집『사랑이라면 그만큼의 거리에서』.    지문 김유진 여긴 무대인데 너무 누워 있는 건 아닌가 마지막 희극일 수도 있고 흥행하는 연극일 수도 있는데 너무 오래 액션이 없는 건 아닌가 침묵도 대답이라고 누군가가 말하지 않았다면 그냥 한 번쯤 움직였을 텐데 무언가를 계속 적는 관객 앞에서 나는 사물 여긴 무대인데 너무 대사가 뻔한 건 아닌가 특이사항 없음이라 적고 간호사가 포도당에 비타민을 타는 게 형식적인 건 아닌가 그러거나 말거나 여전히 나는 사물 사물은 감정을 드러낼 수 없으니 역할을 하루 더 연장하는 수밖에…… 여긴 무대인데 조명이 너무 식상한 건 아닌가 조명 주위로 벌레들이 모여드는 것도 예정된 방치처럼 티 나게 노골적인 건 아닌가 암전되거나 말거나 천천히 어두워지거나 말거나 감은 눈은 더 이상 뜰 필요 없지 사물의 대사는 사물 속에 있을 테니까 - 격월간 《현대시학》, 2017년 11•12월호.       해설 어느 순간 당신은 이런 상상도 할 것이다. 내가 만약 식물인간이 된다면 나는 과연 무엇으로 존재할까? 식물일까? 아니면 동물일까? 아니면 식물적 동물일까? 동물적 식물일까? 다른 사람은 나를 인식하지 못하더라도 나는 나를 인식할 수 있을까? 만약 나 혼자만 나를 인식한다면 과연 나는 존재하고 있는 것인가? 아니면 방치되고 있는 것인가? 이런 질문에 의해 김유진 시인의 「지문」은 탄생했을 것이다. 그동안 식물인간에 대한 시는 많이 창작되어 왔다. 위에서 언급한 대로 창작된 시들은 공통적으로 식물인간의 존재성을 어떻게 인식할 것이냐 하는 존재론적인 문제를 파고들어 시적으로 형상화했다. 그럴 때 식물인간이 주체자가 되어 적극적으로 발화하는 경우는 흔하지 않았다. 그런데 「지문」에 나온 화자는 주체자로서의 발화가 거리낌이 없고, 자신의 존재성에 대한 인식이 매우 능동적이다. 어차피 타자들이 식물인간인 ‘나’를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면 ‘나’는 나름대로의 ‘나’를 표출하는 수밖에 없다 라는 의지가 돋보인다. 화자는 지금 연극에서 나쁜 역할을 맡았을 뿐이다. 그런데 이 연극에서 화자에게 부여된 지문은 지극히 제한적이다. “마지막 희극일 수도 있고/ 흥행하는 연극일 수도 있는데/ 너무 오래 액션”이 없이 생각만 하고 있다. 움직임은 없고 생각은 자유로운 것이 화자에게 주어진 역할이다. 역할의 본질은 ‘생각하는 사물’. 관객들은 ‘생각하는 사물’을 관찰하고 기록한다. 사물(事物)인지 사물(死物)인지 관찰하다 “특이사항 없음이라 적고” “포도당에 비타민을 타는” 형식적인 조치를 취한다. 마치 죽어가는 식물에 액체 비료를 투입해주는 식이다. 화자는 죽을 때까지 ‘사물’ 역할을 맡아야 한다. “그러거나 말거나”, “사물은 감정을 드러낼 수 없으니”, “감은 눈은 더 이상 뜰 필요” 없으니 “예정된 방치처럼” 노골적인 관객들에게 최선을 다해 “역할을 하루 더 연장”하는 모습을 보여주어야 한다. 화자가 끝까지 저항하면서 보여주려는 것은 무엇인가? ‘노골적인’ 가족들의 방치인가? ‘노골적인’ 의사와 간호사의 역할인가? 아니면 자신에게 주어진 ‘지문’에 대한 확고한 입장표명인가? 시인은 스스로 비참함에 비참함을 더하는 식물인간인 의지를 연극이라는 코드를 활용해 「지문」에서 미학적으로 보여주었다. 식물인간에겐 존재성을 나타내는 주체의 결핍이나 욕망의 환유가 없다. 그저 마지막까지 그들에게 주어진 한정된 역할을 수행할 뿐이다. 의학적인 조치를 통해 생명연장을 하기에 과학적으로 보면 식물인간은 분명 피동적이다. 그러나 시인의 눈에 비친 그것은 주체적이다. 당신의 눈엔 어느 쪽으로 비치는가?(하린 시인)   28회 정지용문학상 국물 당선자 | 신달자 당선일 | 2016-04-25 국물 메루치와 다시마와 무와 양파를 달인 국물로 국수를 만듭니다 바다의 쓰라린 소식과 들판의 뼈저린 대결이 서로 몸 섞으며 사람의 혀를 간질이는 맛을 내고 있습니다 바다는 흐르기만 해서 다리가 없고 들판은 뿌리로 버티다가 허리를 다치기도 하지만 피가 졸고 졸고 애가 잦아지고 서로 뒤틀거나 배배 꼬여 증오의 끝을 다 삭인 뒤에야 고요의 맛에 다가옵니다 내 남편이란 인간도 이 국수를 좋아하다가 죽었지요 바다가 되었다가 들판이 되었다가 들판이다가 바다이다가 다 속은 넓었지만 서로 포개지 못하고 포개지 못하는 절망으로 홀로 입술이 짓물러 눈감았지요 상징적으로 메루치와 양파를 섞어 우려낸 국물을 먹으며 살았습니다 바다만큼 들판만큼 사랑하는 사이는 아니었지만 몸을 우리고 마음을 끓여서 겨우 섞어진 국물을 마주보고 마시는 그는 내 생의 국물이고 나는 그의 국물이었습니다    
2    토지 댓글:  조회:1721  추천:0  2010-11-06
토지 로위평/시 토지는 나를 한평생 지치게 만들었다 토지는 내가 허릴 펴기 어려울 때에 높다란 수수를 키워내여 나는 저주하려다가 송가를 부른다 토지는 내가 한평생 고수해낸 안해로서 사랑한다고 말 못해도 떼여버릴순 없어 토지는 한그루 나무로써 나를 걱정해 살아가자면 뿌릴 박아야 한다고 토지는 한포기 풀로써 나를 위안해 아무리 비천해도 머리 들어 하늘을 보며 웃음으로 풍운에 맞서려고 사랑과 미움 뒤얽힌 토지여 세월이 나를 저버릴 때면 토지는 나중에 나를 받아주고 나의 뼈를 린빛 반짝이게 할것이니 이것이 바로 한 시골사람 한생의 빛발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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