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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둥글둥글 살아봅시다/외 2수 /가사 댓글:  조회:1343  추천:0  2019-11-30
고성리 내 고향   산 좋고 물 맑은 두메산골 내 고향은 하늘아래 첫 동네 고성리라오 뻐꾹새 종달새 정답게 지저귀고 상천벌 하천벌 황금가을 불러오오 이깔나무 백양나무 어서 오라 반겨주고 머루 다래 앵두 돌배 탐스럽게 열리는  아, 그립고 그립소 군함산아래마을 꿈에도 가고 싶은 고성리 내고향 경치 좋고 인품 좋은 보배 세상 내 고향은 하늘아래 첫 동네 고성리라오  아가씨들 산나물 입안에 군침돌고 남정네들 반디질 소천어국 얼큰하오 신랑각시 소꿉놀이 숨박꼭질 신나던곳 산에 들에 강기슭에 어디 가나 정다운 아,  그립고 그립소 홍기하폭포소리 언제나 가고 싶은 고성리 내 고향       둥글둥글 살아보세 지지고 볶고 사는 인생살이 이것저것 따져서 무엇하리오 저기 저 푸른 하늘 제비처럼 나래 펴고 훨훨 날면서  둥글둥글 살아보세. 지지고 볶고 사는 인생길에 니것내것 따져서 무엇하리오 저기 저 넓은 바다 하얀파도 처럼  출렁출렁 헤염치면서 둥글둥글 살아보세. 정이란 뭐길래 정이란 뭐길래  겨우겨우 들인정  이 정을 어떡하나 애초에 이럴줄 알았다면은  정들지나 말것을 정이란 뭐길래  정이란 뭐길래  정때문에 울고 정때문에 웃고  정 때문에 웃는다 정이란 뭐길래  이미 깊이 들인정  이 정을 어떡하나 누구는 맘대로 정들여 놓고  이제는 내탓이란다 정이란 뭐길래  정이란 뭐길래  정때문에 울고  정때문에 웃고  정 때문에 웃는다. 。。。。。。  프로필 최선숙 (崔善淑)   필명:은주(殷朱) 中国 길림성 화룡 출생   연변대학 조선언어문학학부 연변과학기술대학AMP 제1회 로신문학원 연변창작강습반수료 "내 삶의 보따리" "자식농사" "배신 "등 수필 소설 시 20여편발표. "열혈모녀 축구팬 "   해란강닷콤 우수상.  “정향숲을  찾기까지”  제5기 중국조선족 효사랑글짓기 공모 우수상 문학블로그:  邮箱:18844309877@163.com 핸드폰: 18844309877  
17    [ 단편소설 ] 배 신 댓글:  조회:1879  추천:0  2019-11-30
    1   한가한 저녁, 윤희는 딸 혜단이가 헤집어놓은 옷장을 정리하느라 바쁘다. 안 입는 옷들을 걷어내고 계절별로 나누어 차곡차곡 개여놓느라니 몇해전에 리혼수속을 끝내고 짐을 싸가지고 집을 나오던 때가 떠오른다. 그날이 어제 같은데… 아무렇게나 볼품없이 나딩구는 불쌍한 옷보따리들을 바라보노라니 리혼하고 집을 나온 자기의 신세처럼 더없이 가련하고 초라해보였다. “두번 다시 너희들을 초라하게 하지 않을게, 미안해. 너희들도 나도 더 이상 구질구질해지지 말자.” 윤희는 말 못하는 보따리들을 측은한 눈길로 바라보며 혼자소리로 중얼거렸다. 딸애까지 자기처럼 초라해지는게 싫어서 잘사는 아빠와 함께 좋은 집에서 살라고 그처럼 얼리고 닥치고 했는데도 기어이 엄마를 따라나섰다. 사춘기때의 쌀쌀맞던 그 서슬은 어디로 갔는지? 자기를 두고 갈가봐 이사짐차에 먼저 올라타고는 겁 먹은 눈으로 엄마만 하염없이 쳐다보던 딸애. 대체 초라함의 극치는 어디까지일가? 불쌍한 내 새끼. 불쌍한 내 보따리. 불쌍한 윤희. 배짱을 부리며 갑자기 리혼을 하고보니 집도 없고 돈도 없어 살길이 막막하였다. 남편이 일년씩이나 미루면서 리혼수속을 해주지 않아서 지칠대로 지친 윤희, 사람이 정 떨어지니 하루라도 빨리 해탈하고싶은 마음뿐이였다. 하여 윤희는 자기 몫의 가게외에는 아무것도 가지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리혼수속을 끝냈던것이다. “살기 싫은데 그깟 재산이 뭐 필요해? 마음 편히 살아야지, 돈이야 다시 벌면 되지.” 매일 BMW를 몰고 여유작작하게 출근하던 일용잡화점 사장인 윤희는 몇년만에 다시 일원짜리 공공뻐스를 리용하여 출퇴근할수 밖에 없었다. 세집살이도 십몇년만에 다시 하게 되였다. 장사도 이상하게 내리막질한다. 돌려쓸 돈도 없어서 달마다 신용카드를 긁을수 밖에 없다.  대부금에, 보험비에, 애 학잡비에… 경제적압력도 대단하다.  전에는 친구들 모임에서 아무 근심걱정 없이 기분에 따라 취하고싶으면 취하고 놀고싶으면 놀고 했는데 혼자가 되고보니 마음대로 취할수도 놀수도 없다. 책임져야 할 일들이 너무 많아서 길을 지나다가 혹시 교통사고라도 당할가봐 조심스럽다. 혼자 살면 힘들것이라고 예상은 했지만 막상 겪어보니 생각밖으로 산 넘어 산이다. 모든것이 가난했던 옛시절로 돌아간것 같다. 전에는 한해에도 두세번씩 친척, 친구들의 잔치집 둘러리를 섰댔는데 인제는 결혼식에 가서 춤 추기도 저어된다. 딸애를 보면 죄 없는 딸애가 불쌍하고 다시 남편한테 되돌아가서 살자니 자기 자신이 불쌍했다. 게다가 설상가상으로 친척과 친구들이 업신여기는것 같아 늘 신경이 쓰이고. 웬간한 정신력으로는 정말 버텨내기 힘들다. 리혼이 진짜 할짓이 아니라는것을 세포 하나하나로 느끼게 된다. 흔히 돈이 별거 아니라고 우아하게들 말하지만 정작 돈이 궁해봐야 돈이란 물건이 얼마나 잔인하게 사람을 무시하고 괴롭히고 초라하게 만드는지 알수 있다.     2   “준걸아, 저녁에 선약이 없지? 술이나 한잔 할가? 다섯시 반까지 김삿갓꼬치집으로 슬슬 걸어오렴. 나도 그 시간에 맞춰 갈게.” “알았어.” 동주가 저녁을 같이 먹자고 준걸이한테 전화를 걸어왔다. 어릴 때부터 한동네에서 자란 둘은 커서도 자별한 사이다. 3년전에 귀국한 준걸이는 마음이 늘 허전하게 보냈다. 십년 동안이나 미국에 있다가 돌아오니 “신생사물”이 너무 많아서 일이 손에 잡히지 않고 늘 다른 세상에 온것처럼 어리벙벙하다. 물가는 또 어찌나 치솟았는지 백원짜리 한장을 터뜨리면 도적을 맞히기라도 한것처럼 금방 거덜이 났다. 맥주집이나 커피점도 거리에 총총하고 밤문화도 미국 못지 않았다. 가족끼리 려행도 다니고 친구들끼리 파티도 벌리고 모두들 제법 사는 멋이 있어보였다. 거리에는 외제차들이 굴러다니고 친구들도 여유 있게 잘살고있다. 아무리 외국에서 돈을 많이 번것 같아도 제고장에서 출근하면서 발전한 친구들과 비교도 되지 않았다. 친구들이 잘사는 모습을 지켜보노라니 애초에 직장을 버리고 나온 자기가 바보 같았다. 그래도 동주가 외국에서 고생한 준걸이가 아직 국내생활에 적응이 되지 않아서 외로와한다면서 자주 술장소에 불러주었다. 물론 준걸이도 미국에서 돈을 꽤나 벌었노라고 상황에 따라 술값을 척척 치렀다. 윤희는 친구들이 남편을 위로해주는건 고마왔지만 가족을 제쳐놓고 남자들끼리 너무 붙어다니니 탐탁치 않았다. 아니, 야속했다. 사실 오래동안 헤여져 산 준걸이네 부부는 서로 소통이 필요하였다. 헌데 남편이 쩍하면 밖으로 나돌아 얼굴을 보기마저 쉽지 않았다. 매양 그때마다 윤희는 속수무책으로 한숨을 토해내며 독수공방할수 밖에 없었다. 윤희에게는 딸애랑 남편이랑 함께 세식구가 오붓하게 가족분위기를 한껏 누리며 해보고싶은 일들이 너무 많았다. 등산, 캠핑, 가족려행, 축구구경… 다 다니고싶다. 또한 원없이 집에서 함께 뒹굴면서 그동안 그리웠던 이야기, 고생스러웠던 이야기도 나누고싶다. 윤희의 그런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남편은 남편대로 굴레 벗은 말처럼 바깥생활을 즐기느라 안해의 기분이나 정서 같은건 관심도 없었다. 남편이 외국에 가있는 동안 윤희는 집에서 열심히 일해서 돈도 잘 벌고 육아교육에도 열중하고 사업체도 탄탄하게 키웠다. 요즘 같은 세월에 보기 드문 녀자였다. 그래서 마누라를 잘 만났다고 남편의 친구들도 부러워했다. 착하지, 돈 잘 벌지, 능력이 있지. 그만큼 윤희에게는 가족과 가게가 전부였다. 그런데 남편이 돌아온후부터 상황이 달라졌다. 남편이 친구가 더 중해서 밖으로만 나도는데 나라고 혼자서 가족타령만 부를수 없잖아. 놀면 좋은줄 누가 몰라? 윤희도 점차 친구모임이나 동창모임에 열성을 보이기 시작했다. 남편이 미국에 있을 때에는 지인들을 만나 늦게까지 수다를 떨다가 와도 눈치 볼일이 없었다. 그런데 지금은 남편이 먼저 집에 돌아와서 기다리는것 같아서 송곳방석에 앉은듯 편하지를 않다. 그래서 아예 일찍 집에 돌아오군 하였다. 그런데 윤희가 모임에 참가하고 와도 남편은 늘 집에 없었다. 또한 남편은 어디에 가서 무얼 하며 놀았는지 묻지도 않았다. 반겨주는 따뜻한 가족이 없고 남편의 사랑을 못 받는 윤희는 외로왔다. 그날도 윤희가 동창들과 노래방까지 거치고 집에 돌아오니 역시 남편은 아직 귀가하지 않았다. “여보, 애타게 서방님이 오길 학수고대하는 바보 한명 있으니 일찍 오면 안되겠슴까?” “금방 갈게. 다른 친구들의 안해는 전화가 오지 않는데 왜 당신만 자꾸 전화질이야? 창피하게.” “다른 친구들은 당신처럼 외국에서 금방 돌아온게 아니니깐 전화 안하겠지. 전번에 부부동반으로 단풍구경을 한번 가자고 하니 친구들이 거의다 외토리라며? 딱 한명만 마누라가 있는데 한국 간지 6년째 되도록 기별도 없다고 했잖슴까? 그러니 다른 친구들은 빨리 집에 오라고 전화할 사람이나 있겠슴까? 가족이 없는 사람처럼 친구만 친구라고 나다니다가는 당신도 외토리신세가 되지 않나 보쇼. 내가 지금 벼르는중이니 조심하쇼 예. 그리고 우리 친구들은 모임할 때 혹시 남편이 전화라도 오면 짐짓 나무라는척하며 은근히 재밌게 산다고 자랑합디다. 따지고보면 아직까지 당신의 행처를 관심하는 사람이 있다는게 얼마나 행복한 일입니까? 전화하는게 불편하다면 이젠 다시 전화하지 않을거니깐 남편에게 관심 없다, 섭섭하다, 이런 말 하지 마쇼 예.” “재수없이 말하지 마. 그 패들이 아니고 지금은 다른 친구들과 있단 말이야.” 말투가 신경질적이다. 외국에 가있더니 성격이 완전히 괴벽해졌다. 성낼 일도 아닌데 성을 내는가 하면 재수없다는 말은 아예 입에 달고 산다. 보살펴야 할 가족은 관심도 하지 않고 완전히 자아중심적이 되여버렸다. 남자들도 갱년기가 있다더니 갱년기일가? “재수없다는 말 그만하면 아이됨까? 그 말을 입에 달구 사니 재수없는 일들이 자기넬 부르는줄 알고 당신만 자꾸 따라다니지. 듣는 나까지 막 재수없어지려 하네.” 윤희는 밸이 난김에 콱 쏘아붙였다. “됐어, 금방 갈게. 당신 전화할 때마다 돈을 떼워. 내가 돈 다 잃으면 좋겠어? 마작 놀 때 다시는 전화하지 마.” “빨리 오쇼 예. 12시를 넘기면 문을 안으로 잠그고 열어주지 않겠슴다. 집이 없는 사람처럼 맨날 밖에서 살면서.” 10시에 전화했을 때 금방 온다던 남편은 밤 12시가 넘었는데도 오지 않았다. 가끔씩 조용한 아빠트복도에서 울리는 발걸음소리가 제 집 문어구로 오는듯하다가도 웃층으로 올라갔다. 늦게 귀가하는 사람들이 많기도 하다. 한 사람, 두 사람, 세 사람… 허지만 아무리 귀를 기울여도 남편의 발걸음소리는 아니다. 바깥동정에 너무 신경을 도사렸더니 머리가 지끈지끈 아파났다. 생물시계가 잘못됐는지 와야 할 사람이 오지 않으니 잠도 오지 않았다. 이리 뒤척, 저리 뒤척 하노라니 별의별 생각이 다 들었다. 매일 노래처럼 일찍 돌아오라고 해도 서울에 감투부탁이였다. 미국에서 돌아오길 애타게 기다렸는데 정작 돌아오니 여러가지로 생활습관이 맞지 않아 늘 부딪쳤다. (마작판이 끝나 밤참 먹으러 갔을가? 이렇게 자지 못하는줄 알면서 일찍 올거지…) 그러다가 비몽사몽간에 어렴풋이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가만히 손더듬으로 핸드폰을 집어들고 시계를 보니 새벽 한시였다. 남편은 조용조용 들어와서 TV를 켜놓고 객실 쏘파에 누워서 잠을 청했다. 사업때문에 저토록 늦게까지 바삐 돌아친다면 윤희가 얼마나 감지덕지해할가? 윤희는 일어나서 그동안 열번도 더했을 얘기를 곱씹었다. 이러다가 연설가가 되는게 아닌가싶다. “매일 만나는 친구들인데 저녁 먹고 10시쯤 되면 그동안 외국에 가있어서 안해와 얘기도 많이 나누지 못했는데 좀 일찍 들어가서 안해를 동무해줘야겠다면서 엉뎅이를 떼고 일어서면 친구들도 말리지 않을게 아임까. 그리고 슬슬 뭔가 해서 제고장에서 기반을 닦을 타산을 해야지 매일 밖으로만 나도니… 벌어온 돈을 다 써버리면 또다시 외국에 나가겠슴까?” “집에 와서 그새 좀 놀았다고 벌써 바가지를 긁소?” “그게 아니라 뭔가를 하면서 놀라는 말이지. 그렇게 논게 이젠 몇년째임까?” “당신 돈 잘 번다구 작작 너덜거려.” “남들은 월급은 월급대로 타면서 휴일에만 마작을 노는데 당신은 월급이 있슴까? 아니면 돈이 나오는 사업체가 있슴까? 무시를 당하면서 힘들게 벌어온 돈을 그렇게 값없이 쓰겠슴까? 당신 눈에 안해와 자식이 보이기나 함까? 가족은 둘째 치구 당신 자신의 인생을 위해서라도 이렇게 살면 아이되잼까? 한 나이 젊었을 때 로후대책을 세워야지.” “미국에서 어떤 고생을 했는지 당신이 알기나 해?” “미국에 가서 일한 당신만 고생하구 집에서 부모와 애를 돌본 나는 놀았슴까? 어쩜 늘 자기만 고생했다고 말함까? 그래 나는 낮에는 가게에서 일하고 저녁에는 마작치기 간 남편이 언제 돌아오나 멀뚱멀뚱 기다려야 됨까? 립장을 바꿔서 생각해보쇼. 그동안 애면글면해서 남부럽지 않게 갖출거 다 갖추고 이제 좀 살만한데 왜 우리는 비 오는 날이 해가 난 날보다 더 많슴까? 제발 좀 서로 아끼면서 살기쇼.” 그러거나말거나 남편은 무거운 짐을 윤희 혼자만 지고 가라는듯 모르쇠를 댔다. 어쩌다 이런 남자를 만났는지 이대로 나간다면 조만간에 미쳐버릴것 같았다. 안해가 열심히 맞벌이를 해서 잘살자고 애를 쓰는데 한 가정의 기둥인 남편이란 사람이 허구한 날 마작판에만 빠져있으니 윤희로서는 도저히 마음의 평형을 잡을수 없었다. 지금이 어떤 세월인데? 나다녀보면 종종 초라해진다. 상대적빈곤감! 남들이 잘사는걸 보면 기분이 상해 못살겠다. 요즘 같은 세월에 애 학잡비, 생활비, 상업보험, 대부금, 거기에다 부조돈까지… 돈 쓸 일들이 줄을 쳐서 기다린다. 돈 없으면 촌보난행이라는 말에 완전히 공감이 간다. 준걸이는 오늘도 마작판에서 돈을 꽤 떼웠다. 아침부터 바가지를 긁은 안해탓이였다. 그동안 미국에서 그 잘난 개도 안 먹는 돈을 버느라 굽신거리며 살아왔었다. 오죽했으면 돌아올 때 미국쪽에 대고 오줌도 안 싼다고 맹세했겠는가. 그런데 정작 집에 돌아오고보니 할 일이 마땅치 않았다. 답답한 마음에 마작판에 다니기 시작했는데 이젠 어느새 푹 빠져버리고말았다. 그동안 미국에서 업수임을 당하면서 악착같이 번 돈을 야금야금 마작에 거의다 탕진하였다. 미국에 가지 말고 여기서 아무 일이라도 시작했더라면 지금쯤은 기반이 잡혔을텐데 10년 외국생활때문에 모든것이 수포로 돌아가고말았다. 안해가 몇년째 백수생활을 한다고 구박해도 속수무책이다. 이러다가 돈이 다 떨어지면 울며 겨자먹기로 다시는 안 간다던 외국으로 나갈수 밖에 없다.     3   -나와요, 문앞에 다 왔어요. -집에 가더니 벙어리가 됐나? 련락이 없네. 마누라가 무섭긴 무서운가보네. 일일드라마도 다 봤겠다, 뉴스도 끝났겠다. 야심한 밤 마작 놀러 간 남편이 돌아오자면 한창 이른 시간인지라 윤희는 객실 쏘파에 누워 이리 뒤척, 저리 뒤척 잠을 청하다가 남편이 미국에서 사용했던 핸드폰을 뒤적거렸다. 종교를 믿는 사람들이 자기가 숭배하는 신(神)에 집착하듯 남편이 외국에 가있는 동안 문학에 깊이 빠진 윤희는 시간만 나면 책이든 핸드폰의 메시지든 손에 잡히는대로 몰입해 잘 읽었다. 그런데? “어이쿠 망칙해라. 이게 무슨 메시지람?” 날씨예고거나 명절인사 같은것으로 가득찼을줄 알았던 메시지창엔 지우지 않은 이상야릇한 문자들이 한달 사이에 무려 200여개나 저장되여있었다. 대화내용으로 보아서 가정이 있는 불륜남녀가 매일 시도 때도 없이 수시로 주고받은 닭살 돋는 내용였다. 윤희는 너무도 뜻밖의 메시지에 두눈이 휘둥그래졌다. 소설에서만 보아오던 애매한 관계에 호기심을 잔뜩 품고 단숨에 쭉 내리읽었다. 오- 남편이 미국에 있을 때 다른 사람이 사용하던 핸드폰을 가졌다더니 그 핸드폰주인이 애인이 있었던 모양이네. 쯔쯔, 이 녀자 나쁜 녀자네. 남편이 있으면서 다른 남자와… 어머, 이 녀자 말발 괜찮네… 헌데 남자도 꽤 재밌게 맞장구치고있지 않는가? -안해가 왔어, 이만하자. 래일 또 봐. -알았어 준걸씨, 싸(사)랑해, 내 꿈 꿔. 마지막 메시지를 읽는 순간에야 윤희는 비로소 그 주인공이 다른 사람이 아닌 바로 자기 남편임을 알게 되였다. “와아- 세상에…” 자기가 되려 나쁜짓을 하다가 들킨것처럼 심장이 콩닥콩닥 뛰였다. 갑자기 날벼락이라도 맞은듯 머리가 뗑해나면서 뭐가 뭔지 도무지 갈피를 잡을수 없었다. “어… 어떻게 내 남편이?”  일부러 뒤를 캐려고 한것이 아니라 무심결에 재미로 들춰본 남편의 핸드폰에서 이런 메시지를 발견하다니? 윤희는 괜히 남편을 억울한 사람으로 만들가봐 두번, 세번 다시 메시지를 훑어보았다. 무뚝뚝한 남편의 인간성을 굳게 믿고있었는데 오늘 보니 완전히 다른 사람이 아닌가? 표달도 잘하고 랑만도 넘치고 련애경험도 꽤 있는것 같았다. 상대는 남편과 여라문살 나이차이가 나는, 가정이 있는 한회사의 녀직원이였다. 엄연한 사실앞에서 윤희는 괴롭고 가슴이 아릿해났다. 배신자! 윤희도 가끔 남자동창들과 모임도 가지고 만나서 별의별 우스개도 다하지만 거기까지였다. 요즘 같은 세상에 녀자가 끼이지 않는 술자리가 어디 있는가? 이렇게 나름대로 개방된 사유를 가지고있었던 윤희였다. 남편도 그 정도일거라 믿고있었는데… 남편은 미국에서 일편단심 민들레처럼 한회사에만 출근하였는데 사장의 두터운 신뢰를 얻어 꽤 높은 직위에 있었다. 상대녀자는 그런 남편에게 돈개나 있는줄 알고 유혹하였고 남편은 그걸 즐기고 리용하였던것이다. “있어보이고싶었을가? 놀고 자빠졌네.” 윤희는 머리가 폭발할것 같았다. “앞집 영자네 남편은 어떤 여우같은 녀자와 눈이 맞아서 밖에다 집까지 사놓고 몇해 같이 살았다오. 당사자만 모르지 두 사람이 영자네 시집에 가서 인사까지 해서 그 친척들도 다 알고있다오. 입만 벌리면 우리 남편, 우리 남편 하며 남편 잘 만났다고 으시대더니만 울 일이 나졌지. 이제 영자가 알게 되면 속이 괘번저져서 어찌 살겠소?” 옆집에 사는 정은이 엄마한테서 이런 얘기를 듣고 남편한테 “당신은 그래도 바람을 피우지 않아 내가 그런 속을 태우지 않게 해줘서 고마워.”라고 감지덕지해했던게 불과 며칠전이 아니였던가? 자기도 오쟁이를 진줄을 모르고. 문득 며칠전의 일이 떠올랐다. 남편이 밖에 나가려고 복도에 나섰다가 핸드폰을 깜박했다며 갖다달라고 해서 얼핏 봤더니 핸드폰화면에 자기 사진도, 딸애 사진도 아닌 웬 낯모를 예쁜 녀자 사진이 떡하니 떠있었다. “웬 녀자 사진임까? ” 윤희가 올롱하니 눈을 치뜨고 물었다. “엽서에 이쁜 녀자 사진이 있길래 올렸어. 왜? 안돼?” “당신 눈에 나보다 더 이쁜 녀자두 있슴까?” “당신도 좋아하는 남자연예인 많잖아?” “하긴 뭐.” 남편이 너무 태연스럽게 말하길래 그때는 그냥 그런가보다 하고 무심히 지나쳤는데 지금에 와보니 그게 아니였다. 윤희가 또 뭔가 짚이는 구석이 있어 다시 남편 핸드폰의 사진첩을 뒤져보니 그 녀자 사진이 수두룩하였다. -요즘 몸이 더 살쪘어요. 얼굴이 막 네모꼴이 되고… -자기야, 나한테 호박 같은 아들 낳아주렴. -집에 마다매보구 낳아달라 하세요. (여우같은 년, 벼락이나 콱 맞아라.) 농촌태생인 윤희가 자식욕심이 많아서 아들이든 딸이든 애 하나 더 낳자고 애걸하다싶이 할 때는 귀머거리인척 외면하더니. 윤희는 사실 둘째를 낳고싶은 욕심이 아직도 사라지지 않았다. 헌데 남편이 이런 여우같은 년과 애까지 낳겠다고? 쓰레기 같은것들. 윤희의 친정엄마가 늘 당부했었다. 열길 물속은 알아도 한길 사람속은 모른다고. 믿던 도끼에 발등 찍힌다더니 윤희야말로 그 꼴이 되였다. -저녁에 바다바람 쐬러 갈가? -우와, 신난다. 집에 돌아온후로 마작판에 붙어있지 않으면 친구들과만 만나면서 윤희의 요구를 일언지하에 거절하던 남편이 애인과는 별의별 랑만을 다 누리고있지 않는가? 이름을 밝혔으니망정이지 윤희는 정말 죽었다 깨여도 메시지내용의 주인이 남편인줄을 몰랐을것이다. 미국에서 가족을 위해 개고생한다고 울부짖던 남편, 윤희도 남편이 정말 불쌍하다고 생각했었다. 2000년에 미국에 가서 10년 동안 분투하여 그 어마어마한 빚을 다 갚고 50만원(인민페)이나 집에 보냈다. 그만큼 고생했으니 집에 돌아오면 고이고이 받들어모셔야겠다고 생각했었는데 그사이에 앙큼한짓을 저지르다니? 겉 다르고 속 다른 인간. 누구누구는 애인한테 차 사줬대, 집 사줬대, 애까지 밖에서 낳았대… 이런 얘기들을 심심치 않게 들었다. 그때마다 기가 막혔었다. 허지만 세상 남자들이 다 바람을 피운다 해도 자기 남편만은 그러지 않을거라고 철석같이 믿었었다. 그래서 모든 부동산을 다 남편명의로 등록하였다. 물론 남편이 미국에서 고생한것도 있지만 더우기는 남들이나 친척들 앞에서 학력이 낮은 남편의 위신을 세워주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뭐가 잘났다고 중년에 이 지랄이야? 배운게 있나, 돈이 있나, 능력 있나? 무식해도 말없이 살아줬는데 배은망덕도 유분수지. 열심히 살아온 하루하루가 후회스러웠다. “꼬라지하곤… 어디 두고보자.” 윤희는 잠시 내색을 하지 않고 일단 하회를 계속 지켜보기로 마음 먹었다. 한편 남편이 믿을수 있는 해석을 해주기를 간절히 바랐다. 오해였으면 하는 바람과 함께. 어쩌면 그냥 악몽이였으면 얼마나 좋을가? 남편과 그닥 감정이 좋은건 아니였지만 그동안 안온한 생활에 길들여져있어서 좋은 집, 좋은 가게를 포기할 용기는 없었다. 진실이 궁금하다. 무엇때문에? 뭐가 모자라서? 아, 그때 그랬었지. 44살이라고… 3년전, 금방 미국에서 돌아온 남편과 하늘땅이 뒤번져지게 다투었다. 오래동안 서로 갈라져있어서 생각하는게 서로 극과 극이였다. 그 무슨 잘못이라도 저질러서 저주를 받는건 아닐가? 하루하루가 지옥 같았다. 남편은 늘 “당신이 어찌 외국 가서 쿨리처럼 개고생하면서 산 사람들의 설음을 알겠어? 말하면 다 눈물이거든…” 하고 윤희에게 한풀이를 하면서 쩍하면 바깥에서 흥청망청 마시고 놀고는 밤중에 집에 와서 술주정을 부렸다. 윤희는 “그렇게 남의 나라에서 힘들게 일하고 무시를 당했으면 제 나라에 와서 빨리 자리를 잡을 생각을 해야지.”라고 늘 남편을 다독여주군 하였다. 기실 일년 365일 치고 쉬는 날 없이 애를 돌보랴, 부모님들 보살피랴, 가게를 운영하랴 천방지축 달려온 윤희는 여기서 아무 고생 없이 안온한 생활을 하고 자기만 가족을 위해 고생했다는 론리였다. 그러던 어느날, 남편은 또 외박하고 아침 5시가 다되여서야 슬글슬금 집으로 기여들었다. 온밤을 하얗게 지새운 윤희는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었다. “당신 이젠 집에 오지 마쇼. 차라리 밖에서 사쇼.” “친구들끼리 밤참 먹고 안마방에 가서 안마받고 홀 잠든게 이제껏 잤어. 눈을 떠보니 아침이더군. 그래서 내친김에 친구들끼리 죽집에 가서 죽까지 먹고 왔어.” 남편은 히쭉히쭉 웃으며 구렁이 담 넘어가듯 은근슬쩍 넘기려 하였다. “내가 보기엔 당신은 가족이 필요 없는 사람임다. 제멋대로 놀고싶은거 다 놀고 거기다 외박까지 하는 사람이 가족을 해서 뭐하겠슴까? 혼자 사쇼.” 윤희는 시악을 쓰며 계속 련주포를 쏘아댔다. “남편이란 사람이 맨날 마작판에 붙어있는데 내 혼자 버둥거려서 뭐하겠슴까? 밑굽 빠진 항아리에 물 붓는 격이지. 이젠 가게를 남에게 임대해주고 나도 아예 집에서 놀겠슴다. 저녁엔 외박두 하구. 있는 돈을 같이 펑펑 쓰다가 없으면 당신이 알아서 벌겠지. 내가 혼자서 애면글면할게 뭐가 있슴까? 콱 같이 망해버리기쇼.” 밸이 꼬일대로 꼬인 윤희는 흥분한 나머지 손에 잡히는대로 이것저것 마구 쥐여서 던졌다. 남편이 제일 애지중지하는 정교한 도자기술잔들도 미련없이 바닥에 쾅쾅 박살을 냈다. TV를 켜놓고 잠자코 있던 남편이 갑자기 꽥 소리치며 발딱 일어나더니 윤희의 멱살을 거머쥐고 면상에 주먹을 안겼다. “앗!” 윤희는 눈을 싸쥐고 그 자리에 널부러졌다. 그러고도 성차지 않았는지 남편은 윤희의 머리채를 휘여잡고 성난 사자마냥 울부짖으며 벽에 짓쪼아놓았다. 윤희는 몸을 옹송그리고 손을 허우적거리며 간신히 저항하였지만 이미 미치다싶이 한 남편의 힘을 당할 길이 없었다. 한참후에야 겨우 제정신이 든 남편이 구타를 멈추었다. 윤희는 머리가 삼검불같이 헝클어지고 눈언저리가 퍼렇게 멍이 들었다. “내가 이렇게 매를 맞고 당신과 살것 같슴다? 아이 삼다, 아이 살아. 지금 당장 민정국으로 가기쇼. 리혼하기쇼.” 리지를 잃은 윤희는 소리소리 지르며 길길이 뛰였다. 리혼이라는 말에 놀라서 남편이 잠시 멍해졌다. 남편이 미국에 갈 때까지만 해도 어려워 감히 대들지 못하던 윤희가 십년 세월에 완전히 이악스러운 아줌마로 변하였다. “지친다 지쳐. 너도 지치고 나도 지치고…” 이렇게 대판으로 싸운 뒤면 남편은 하는수없이 일년 내내 하루도 빠짐없이 다니던 마작판에 나가지 않았다. 안해가 밸이 풀릴 때까지 참아야지 안 그러면 보따리를 싸가지고 가출해버리는수가 있었던것이다. 또한 그 가출이 몇주가 될지, 몇달이 될지… 뒤수습을 하기가 더 어려웠다. 매번 윤희가 가출할 때마다 남편은 저지른 죄가 있는지라 처가집에 찾아가서 손이야 발이야 성근하게 빌군 하였다. 이때다싶어 윤희는 남편에게 각서를 씌웠다. 첫째, 둘째, 셋째… 다 자기에게 유익하게 작성하였다. 남편은 서명할 권리밖에 없었다. 그렇게 어렵사리 풍파가 지나가면 한동안은 아기자기 평화로왔다. 그러다가 며칠이 지나고 몇달이 지나서 윤희의 마음이 다소 가라앉으면 남편은 눈치껏 낮에만 마작판에 다니다가 조금씩 용감해져서 밤에까지 드나들었다. 윤희의 히스테리가 또 폭발하면 남편은 언제 그랬느냐 싶게 금방 자라목처럼 움츠러들었다. 이렇게 반복하기를 몇해인지 모른다. 너무 신물이 나서 어느 하루 윤희는 답답한 마음에 앞날을 예측한다는 철학관을 찾아갔다. 점쟁이할머니는 윤희의 생년월일을 물어보더니 이렇게 말했다. “이제 44살이 고비가 될거야. 그 시기만 잘 넘기면 리혼은 하지 않아.”   지난 세기 90년대에 윤희는 외삼촌의 도움으로 어렵게 대학을 졸업했다. 허지만 도시에 남아서 직업을 찾기란 하늘의 별따기나 다름없었다. 그즈음에 친구의 소개로 우람진 몸매에 인물도 시원스럽게 생기고 성격도 호방한 준걸이라는 남자를 만났다. 고중을 졸업하고 직장생활을 하는 준걸이는 일곱 형제중 막내였는데 형제들 몇은 유럽에 가있었고 부모님들은 모두 로간부였다. 어려운 가정에서 나서 자란 윤희는 준걸이만한 조건이면 괜찮은 상대라고 생각되여 선선히 결혼하였다. 결혼뒤 둘은 그럭저럭 무난한 나날들을 보냈다. 일년뒤엔 귀여운 딸애까지 태여나 행복의 도가니에 빠졌다. 그런데 몇년 뒤부터 남편의 단위 사정이 점차 어려워졌다. 그때 마침 출국바람이 불어 남편도 거액의 돈을 브로커에게 주고 미국으로 가게 되였다. 윤희는 집에서 딸애와 부모님들을 보살피면서 일용잡화점을 운영하였다. 낮에는 가게에 출근하고 퇴근후엔 대충 저녁밥을 지어먹고 또 자전거에 커다란 짐을 싣고 야시장에 가서 적치된 물품들을 팔군 하였다. 애를 키운다는 핑게로 집에서 놀수도 있었지만 시골태생인 윤희는 천성적으로 일하기 위해 세상에 태여난 사람처럼 비가 오나 바람이 부나 남편이 미국에 가면서 진 빚을 조금이라도 갚으려고 부지런히 일했다. 윤희의 친정엄마가 마을에서 “꼬리 없는 소”라고 불렸는데 윤희도 바로 그러했다. 허지만 윤희는 고달픈줄을 몰랐다. 그는 오매불망 부부가 하루빨리 다시 모여 오붓하게 살 날이 오기만 손꼽아 기다렸다. 그런데 청천벽력이라더니 남편이 신고를 당하여 본전도 못 벌고 반년만에 붙잡혀 중국으로 강제송환될줄이야. 하늘이 무너졌다. 온 여름밤 야시장에서 목이 쉬도록 물건을 팔면서 아글타글 일했는데 남편이 십몇만원이나 되는 빚도 갚지 못한채 돌아오니 너무도 허무하였다. 왜 하필 남편한테만 액운이 떨어졌는지 하느님이 원망스러웠다. 그렇게 돌아온 남편은 또다시 밀입국으로 여러 나라를 거쳐 재차 미국땅을 밟았다. 두번의 출국수속에 처넣은 돈이 얼마인지 모른다. 허지만 그들에겐 오직 그 길만이 살길이였다. 천문수자와 같은 빚을 걸머진 그들은 한 사람은 미국에서, 다른 한 사람은 중국에서 억척스럽게 일하였다. 청춘과 바꾼 10여년 세월, 그들은 갖은 풍상고초를 다 겪었다. 쥐구멍에도 볕 들 날이 있다고 윤희네는 마침내 빚을 다 물었다. 나중에는 집도 사고 차도 사고 재산도 많이 늘었다. 윤희는 이젠 알콩달콩 재밌게 살줄로 알았다. 헌데 세상살이가 그렇게 록록치 않았다. 학수고대하였던 남편의 귀국은 결국 행복이 아니라 시한폭탄이였다.     4   며칠간 윤희는 탐정처럼 남편이 없는 사이에 핸드폰을 들춰보군 하였다. 과연 남편과 그 녀인은 매일 메시지를 주고받고있었다. 긴가민가하던 의혹은 점점 더 확실해졌다. 남편의 두 핸드폰에 다 메시지기록이 남아있었다. 그렇다면 남편은 왜 이런 기록을 지워버리지 않고 그대로 보관하고있을가? 혹시 윤희가 뒤져보고 먼저 리혼하자고 제기하길 바라서 올가미를 늘인건 아닐가? 아니면 윤희가 핸드폰을 들춰보려니 생각지 못해서일가? 정직한줄로만 알고 시름 놓고 살던 남편의 배신은 소금으로 아린 상처를 씻어내는것 이상의 아픔이였다. 문이 덜컹 열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남편이 들어왔다. 윤희는 잠결에 놀라 깨여났다. 밤 12시다. 이어서 쏴- 샤와소리가 들리더니 텔레비죤을 켜놓고 객실 쏘파에 누워 누군가와 핸드폰으로 메시지를 주고받는듯했다. 그녀겠지, 바로 남편의 애인. 그녀와는 다정다감하게 굴면서도 안해와 딸애가 자는 방은 기웃거리지도 않는 남편이였다. 내가 어쩌다 이 신세가 됐지? 몇해 같이 살지도 못했다. 남편이 오래동안 외국에 가있다나니 함께 한 시간이 불과 5년 밖에 안된다. 이튿날 아침, 윤희가 출근하려는데 면도를 하고있던 남편이 턱에 거품이 가득한채로 다가와서 손을 내밀었다. “여보, 요즘 재수에 옴이 붙었는지 놀면 지기만 하는데 돈이나 존 주라. 쉬 좀 붙게…” “이달에만 이미 3,500원 줬는데 또 달라면 우리 식구는 뭘 먹고 삼까? 너무함다. 주지 않은것도 아니고.” “돈을 따면 돌려줄게.” “안됨다.” “그럼 이 목걸이 팔아서 쓸거야.” “정신이 나갔잼까? 전번에 집 살 때 3만원이 모자라도 아까와서 팔지 않은 목걸이인데… 팔기만 해보쇼. 큰일날줄 아쇼.” 윤희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엄포를 놓았다. 그로부터 며칠뒤 윤희가 장판을 닦다가 어망결에 쏘파에 앉아있는 남편을 쳐다보니 늘 보기 좋게 목에 걸려있던 싯누런 24k짜리 금목걸이가 보이지 않았다. “어머, 목걸이가 안 보이네. 정말 팔았슴까? 얼마에 팔았슴까?” “만 륙천.” “당신 바봄까? 그거 시가로 3만원짜린데 왜 그렇게 눅거리로 팜까? 사채라도 쓴게 아임까?” “당신이 돈을 주지 않으니 어쩔수 없었소.” “미쳤구나 미쳤어.” “당신이 날 미치게 했잖아? 남자는 호주머니가 비면 별짓을 다해.” “그래서 녀자도 끼고 다님까? 전번날 저녁에 하두 심심해서 당신의 핸드폰을 뒤적이다가 본의 아니게 당신이 애인과 나눈 메시지를 우연히 봤슴다. 그동안 미국에서 점잖게 지낸줄 알았는데 이제 보니 별짓을 다했습디다. 그러고도 내앞에선 얌전한 고양이처럼 수염 쓱 씻고…” 남편은 깜짝 놀라더니 큰 눈을 희번득거렸다. “왜 남의 휴대폰을 함부로 뒤지고 그래?” “보길 잘했지. 안 봤더라면 내가 언제까지 바보처럼 당하고있었을지 누가 암까?” “애인은 무슨 개코같은 애인, 그냥 심심해서 장난 좀 친거 가지구.” “뻔뻔스럽게 하나도 당황해하지 않고 둘러붙이는걸 봐. 세살짜리 애하고나 그렇게 말해보쇼. 믿는가? 참, 이제는 하다하다 별짓을 다하네. 한회사 직원?… 나 원 어이가 없어서. 그리구 뭐 나를 마다매라구? 애까지 낳아달라구? 로망이 났나.” “난 장난으로 그런것뿐이야. 큐큐에 들어가봐. 요즘 모두들 취미로 그렇게 장난치며 놀아.” “흥, 장난? 웃기고 자빠졌네. 장난인데 그 녀자 사진을 가득 저장해두고 봄까? 어리숙한줄 알았는데 치밀하기까지 하네. 당신이란 사람 참 대단함다. 내 사진이나 애 사진은 한장도 없더구만. 하긴 그렇게 둘러댈수 밖에 없겠지. 안 그러면 사람이 얼굴 가지구 어떻게 그런짓을 저지를수 있겠어. 애 아빠가 돼가지구 도덕이 거지 발싸개구만.” “믿지 않겠지만 분명 장난이야. 내가 어떻게 감히 돈 잘 버는 안해를 배신할수 있겠어?” “그 말을 내가 믿을줄 암까?” “하, 이거 버선목이니 뒤집어보이겠는가?” 윤희네 동창들도 워이신에서 별의별 육담을 다한다. 특히 모임때마다 육담을 잘하는 친구가 있다. 자기는 웃지도 않으면서 어찌나 술술 생동하고 구수하게 얘기하는지 모두 허리 부러지게 낄낄 웃어댄다. 하지만 우스개는 어디까지나 우스개일뿐이다. 유감스럽게도 남편의 메시지는 그런 유머가 아니였다. “당신 애까지 낳고싶을 정도로 좋아하는 녀자가 있어 잘됐네. 내가 깨끗하게 자리 내줄게.” “아니야. 당신이 오해할만해. 잘못했어. 당신한테 속죄하는 마음으로 내가 정말 잘할게.” “아니, 아무리 마음이 좋아도 이것만은 용서 못하겠슴다. 자존심 하나로 버텨왔는데… 마음 떠난 사람을 붙잡고 사는 그런 불쌍한 녀자는 되기 싫슴다.” “정말 아니란데… 증거도 없잖아.” “무슨 증거가 필요함까? 녀자들은 느낌이란게 있슴다. 길 가는 사람들을 붙잡고 물어보쇼. 누가 당신을 믿어주나?” “나는 그냥 외국에서 고독했을뿐이야.” “쳇, 고독하다구 그래도 됨까? 나두 혼자서 지내기 고독해서 외간남자를 찾았다면 당신 바람 핀 안해와 살수 있겠슴까?” “어떤 상황이였나 봐야지.” “흥, 말도 안되는 소리. 당신은 될수 있겠는지 모르지만 나는 안됨다.” “이젠 다시 련락하지 않을게.” “집에서도 손에서 핸드폰을 놓을세라 항상 쥐고 다니는 당신의 그 말을 믿으라고? 차라리 팥으로 메주를 쑨다는게 낫지. 나도 내가 바보였으면 좋겠슴다. 알고도 모르는척하는 바보 말임다.” “……” “나는 부처님이 아님다. 너무너무 분하고 억울하고 재수없어 미치겠슴다. 오쟁이를 지고 창피해서 어떻게 삼까? 지금껏 고이 지켜온 내 자존심이 한방에 무너져버렸슴다. 당신의 경솔함이 이제 당신의 소중한 모든걸 앗아갈검다.” “……” “그렇게 억울한 표정 짓지 마쇼. 세상엔 용서할 죄가 있고 용서 못할 죄가 있슴다. 이 세상 어느 녀자도 바람 피운 남편과 살려고 하지 않을검다. 우리 인연은 여기까짐다. 나를 원망하지 마쇼. 저절로 제 무덤을 판거지.” “……” “사실 살면서 나는 당신한테 늘 섭섭했슴다. 하지만 모자라면 모자란대로 평생을 당신과 함께 하려 했슴다. 애 아빠니깐. 아버지가 없이 자란 나에게 제일 큰 한이 아버지라는 이름을 불러보지 못한거였슴다.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이 얼마나 컸으면 꼭 시아버지가 있는 집안에 시집 가려 했겠슴까? 그런데 이젠 어쩔수없이 내 새끼를 또 나처럼 아버지가 없는 아이로 키우게 되였으니… 정말 힘들었슴다. 일찍 집에 돌아오쇼, 제발 도박을 놀지 마쇼, 술을 적게 마시쇼… 빌다싶이 애원했지만 당신은 귀등으로 흘려버렸슴다. 허지만 다시는 그런 일이 없을검다. 이젠 당신이 살고싶은대로 사쇼. 도박도 놀고 녀자도 사귀고… 애는 내가 키우겠슴다.” “혜단이 엄마, 애를 봐서라도 딱 한번만 용서해주오. 내 각서 쓸게. 무릎 꿇고 빌게. 집에서 노예처럼 살게. 믿어줘.” “서랍에 당신이 쓴 각서가 넘쳐남다. 기념으로 두고두고 보쇼.”     5   어디서 소식을 들었는지 큰시누이가 만나자고 몇번 전화가 왔다. 그래, 만나지 못할것도 없지 뭐. 아무튼 이 집안 누군가에게는 이야기해야 할것 같았다. 그동안 왜서 그렇게 다투며 살았는지? 지금은 왜서 리혼하려 하는지? 다른 가족들에게 어떻게 가감이 되여 전달이 될지는 모를 일이지만 꼭 교대는 해야 할것 같아서 시누이를 만났다. 평소에 언니처럼 잘 보살펴주고 배려와 포용으로 도닥여주던 맏이다운 시누이였다. “애를 봐서라도 다시한번 생각해보오. 나도 준걸이한테서 들었는데 별일은 없는것 같습데. 안 그러면 어떻게 돈을 집에 보낼수 있었겠소? 여우같은 년과 붙었다면 돈을 다 써버렸을게 아니요? 믿기요. 본인이 절대 아니라지 않소. 리혼하면 애한테 얼마나 큰 충격이요? 또 세상 편견이 얼마나 무서운데. 리혼한 녀자라면 남들이 다 손가락질하오. 마음이야 아프겠지만 제발 혜단이를 위해서라도 다시한번 잘 생각해보오…” 간절한 눈빛으로 절절히 말하는 큰시누이의 권유는 진심이였다. 허지만 윤희의 눈에는 아니꼽게 보였다. 흥, 가재는 게편이라더니 누가 한피줄을 타고난 남매가 아니랄가봐. 만약 자기 녀동생이 이런 일을 겪었다면 어떻게 할가? 한편 윤희는 자기에게도 무작정 편을 들어주는 언니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누이가 만약 자기 언니라면 “너 그동안 정말 마음고생 많이 했구나.” 하면서 남편을 같이 욕하기도 하고 또 서로 부둥켜안고 울기도 할것이다. 헌데 윤희에게는 오빠들만 주렁주렁 넷이 있었다. 언니 하나만 있어도 그동안 억울했던 일들을 쫑드르르 달려가서 하나부터 열까지 미주알고주알 일러바치련만. 그런대로 오빠들이라도 찾아가서 말할수 밖에 없었다. 친구들과 말하면 흉밖에 날게 없을것 같고 말하지 않고 혼자 삭히자니 병이 날것 같았다. 사업가인 작은오빠는 무조건 윤희 편을 들어주었는데 대학교수인 셋째오빠는 가만히 듣고만 있다가 차분하게 타일렀다. “내가 볼바엔 너에게도 잘못이 있어. 자기는 다 잘한것처럼 말하지만 너도 뭔가 잘못했기에 남편이 그러지. 녀자가 너무 영악스러우면 못써. 세상에 완벽한 사람이 어데 있니? 서로 용서해주고 양보하면서 사는거지. 네 남편도 그만하면 괜찮아. 그동안 외국에서 고생했는데 한번 봐줘라…” “머리로는 살고싶은데 마음이 못살겠다 하오. 오빠가 재간이 있으면 나도 설복시키지 못하는 내 마음 설복시켜보오.” 결혼이 한 가족과 가족의 만남이라면 리혼은 정든 가족과의 잔인한 리별임을 윤희는 가슴 아리게 깨달았다. 이튿날 아침, 윤희는 보따리를 싸기 시작했다. 이사짐회사에 련락해 짐들을 친정집에 가져갈 타산이였다. 남편은 무슨 급한 일이 있는지 밖에 나가면서 “기분이 상하면 며칠 친정집에 가서 놀다 오오. 허지만 짐은 절대 가져가지 마오.”라고 건성으로 당부하였다. 자기한테서 마음이 떠난지 오랜데 아직도 안해인줄로 아는 모양이였다. 안해가 리혼하겠다고 보따리를 싸들고 집을 나가는 마당에 별로 할 일도 없는 사람이 무슨 중요한 용건이 있어서 외출하는지? 아무튼 남편은 늘 그랬다. 주요한것과 차요한것을 잘 구별하지 못하는 사람이였다. 예전처럼 자기의 버릇을 고쳐주자고 가출하려는줄로 착각하는것 같았다. 많은 재산을 제쳐두고 안해가 리혼을 선택할리 없다고 배포 유하게 생각하고있는듯하였다. 사실 윤희도 재산때문에 방황했었다. 아글타글 일궈놓은 재산. 아깝다. 좋은 집, 좋은 차… 재산이 자꾸 발목을 잡는다. 꾹 참고 살가? 전에도 윤희는 몇번 가출을 했었다. 하지만 짐들을 그대로 둔채로 몸만 가출을 했었다. “가출한 딸을 집에 들이지 말고 돌려보내야지…” 그때마다 남편은 자기 잘못은 승인하지 않고 윤희의 친정엄마만 나무람하였다. “당신이 잘했더라면 내가 가출을 했겠슴까? 도박 놀구, 외박하구… 사실 엄마집에 가면 정말 불편함다. 가출한 그날부터 당신이 빨리 와서 데려가주기를 기다림다. 허지만 이렇게라도 시위하지 않으면 문제해결이 안되니까. 좋게 말해서 당신이 어느 한가지 들어준적이 있슴까? 자기 잘못은 뉘우치지 않고 누굴 탓함까?” 남편은 본전도 못 찾고 윤희에게 코만 떼우군 하였다. 헌데 이번에는 아니다. 정작 리혼하려고 마음 먹으니 남편에 대한 섭섭함과 원망이 가득 밀려왔다. 여태껏 선물 하나 안 사준 남편, 생일 한번 챙겨주지 않은 남편… 랑만과는 한참 동떨어진 남편이 야속해났다. 그래도 윤희는 늘 바깥일로 바삐 보내다나니 남편을 제대로 챙겨주지 못한것이 미안해서 리혼하려고 각방을 쓰면서도 속을 풀라고 아침마다 숙취해소에 좋은 명태국을 끓여올렸다. 윤희가 애지중지하는 옷들, 가방들, 신들… 자기와 같이 가출하게 될 불쌍한 소지품들을 보노라니 측은하기 그지없었다. 어쩌다가 이 지경에까지 이르렀는지? 사실 리혼이 앞으로 윤희의 인생을 어떻게 바꾸어놓을지 그 자신도 모른다. 보따리를 싸놓고 이사짐회사에 전화를 하니 득돌같이 달려와서 반시간도 안되여 이사짐을 차에 실었다. 마지막으로 그동안 지지고 볶고 싸우던 집을 둘러보았다. 남편이 미국에서 보낸 돈에 자기가 번 돈을 보태서 윤희는 도시중심에 낡은 집들을 몇채 사놓았었다. 그것도 당시 미국에 있는 남편이 반대해서 입이 닳도록 설복해서야 겨우 사놓은 집들이였다. 재작년에 그 집들이 파가이주범위에 들어 가격이 몇곱으로 뛰여오르는 바람에 윤희네도 일약 벼락부자가 되였다. 윤희네는 그 돈으로 집도 사고 차도 사놓았다. 새집은 남쪽 베란다에 나가면 부르하통하가 한눈에 안겨오고 북쪽창문을 열면 낮은 산언덕이 바라보였다. 인테리어는 유럽풍으로 설계하여 궁전처럼 화려하였다. 게다가 아빠트단지내의 풍경도 좋아서 마치 공원에서 사는듯한 느낌이였다.  남편도 “이젠 집 바꾸지 말고 죽을 때까지 여기서 살자.”고 하였었다. 그런데 새집에 이사 와서 딱 일년만에 이런 일이 터지고말았다. 남편은 그동안 강경하게 리혼을 고집하는 윤희를 얼리고 닥치고 하면서 별의별 노력을 다하였다. 가족도 지키고 밖에서 즐기고도 싶은것이 남편의 진심이였을것이다. 처가집에도 찾아가서 제발 좀 윤희를 말려달라고 부탁하였다. 바보. 그런 부탁보다는 자기의 진심어린 사과가 더 필요한줄을 모르고… 필경 자식 낳고 산 남편인데 별나게 온갖 정이 다 떨어졌다. 설레이던 시절도, 두근두근하던 시절도 있었건만… 누군가 부부사이도 가꿔야 된다더니 과연 맞는 말이였다. 윤희도 사실 남고싶었다. 어떤 리유를 붙이면 남을수 있을가? 차라리 남편의 비밀을 몰랐더라면 좋았을걸… 친정집에서는 극력 반대하였다. “집만 몇채요. 돈나무(摇钱树) 같은 가게도 있겠다, 고급아빠트에, 고급차에, 어마어마한 저금까지… 게다가 애 아빠가 미국에서 번 돈을 다 갖다바쳤다며. 그러면 되지 뭘 더 바라겠소. 언젠가는 꼭 후회할 날이 있을거요.” 평생 농사를 지은 형님의 충고다. 그랬다. 먹고사는 문제가 중요할 때는 남편이 잘해주든 못해주든 그런 감수따위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생활형편이 나아지니 이런저런 투정을 부리는것 같다. 윤희의 큰오빠도 마찬가지였다. “아무리 바람을 피웠대두 그렇지. 이제 리혼하면 너도 다른 남자 만날거 아니야? 어차피 숫총각이 아닌 이상 애 아빠한테 한번 기회를 줘라. 남자들이 어쩌다 그럴수도 있지. 한번만 눈을 질끔 감고 같이 살아라. 두번 다시 그럴 때에는 내가 가만 놔두지 않을게. 애가 불쌍하지두 않니?…” 딸애도 처음에는 펄쩍 뛰였다. “엄마아빠, 내가 학급 일등도 아니고 전 학년 일등을 해서 장학금까지 타게 되였는데 꼭 이렇게 축하해줘야 되겠어요? 래년에는 대학시험인데 날 위해 조금만 참고 살아주면 안돼요? 우리 반에도 엄마아빠가 리혼한 불쌍한 애들이 많은데 나도 기어이 그속에 가담시켜야 되겠어요? 이 세상에서 제일 행복한 아이로 키운다고 약속했잖아요. 그런데 어른들부터 그 약속을 깨요? 지키지도 못할 약속이라면 아예 하지도 말거지.” 윤희의 가슴이 터지는것 같았다. 하지만 자기의 마음을 설복할 길이 없었다. 윤희와 남편은 딸애앞에서 죄 지은 사람이 되여 고개를 떨구었다. “혜단아, 네 맘대로 해라. 아빠 같이 있겠으면 있고 엄마따라 가겠으면 가고. 엄마아빠가 헤여져도 너는 여전히 우리 딸이야. 그리고 우린 이 세상에서 널 제일 사랑하는 사람들이구.” 말이 씨가 된다고 쩍하면 리혼을 들먹이던 그들은 끝내 민정국에 가서 그동안 괴롭히던 혼인에 종지부를 찍었다. 리혼증을 받아쥐니 점심때가 되였다. 남편이 랭면이나 먹고 가잔다. 가지 뭐. 반년동안이나 지구전을 벌려 원하던 리혼증을 손에 쥐였으니 해방을 축하해야지.     6   리혼한 뒤 윤희는 시간과 정력을 모두 자신에게 투자하여 여러 단체에서 활약하다보니 활동이 많아졌다. -심술이 나게 당신은 많이 행복해보이네. 워이신에 여러가지 활동사진을 올린걸 보고 외국에 가있는 전남편 준걸이한테서 문자가 날아왔다. -가족이 소중한줄도 모르고 맨날 밤 12시를 넘겨서야 집을 려관처럼 찾아오고 마작과 녀자에만 빠져있을 때는 언제구 지금에 와서 이런 말을 해. 저녁마다 일찍 돌아와달라고 애걸할 때는 외면하더니… 있을 때 잘하지. -그래 맞어. 내가 너무했지. 벌받아 마땅해. -어쭈, 나이가 들더니 솔직해졌네? 잘못을 인정할줄도 알고. 며칠전에 준걸이가 윤희 오빠한테 전화를 걸어와서 윤희한테 많이 미안하다고 하더란다. 사실 리혼한 뒤 몇년간 윤희도 고민하지 않은게 아니였다. 주위 지인들의 진심어린 권고도 있고 또 자기가 직접 부닥쳐보니 리혼이라는것이 배짱치기로 할 일이 아니였다. 비록 용서할수 없는 남편의 치명적인 결함때문에 리혼을 선택했지만 서로 아량을 베푼다면 넘지 못할 산이 없을것 같았다. 그깟 결혼증이 뭐 그리 대단해? 마음으로 사는거지. 사실 같이 살 때 남편은 놀러 다니는게 미안해서 그러는지 집일을 많이 거들어주었었다. 빨래하고 장판 닦고 쓰레기 버리는것은 모두 남편의 몫이였다. 그래서 윤희가 시름 놓고 장사를 할수 있었는지도 모른다. 지금 생각해보니 남편에게도 우점이 꽤 있었다. 그 사람과 헤여졌다고 해서 그 사람에 대한 전부를 부정해서는 안된다. 남편의 가까운 친구한테서 전해들은데 의하면 요즘 그는 친구들과 같이 노래방에 가면 “있을 때 잘해”만 부른다고 한다. 그토록 절절하고 간절하게. 나름 사연이 있는 사람들에겐 가슴을 후비는 노래다. 시간이 약이긴 약인가보다. 그도 불쌍하고 딸애도 불쌍하고 윤희도 불쌍하고…     《연변문학》 2016년 12호 -------------  프로필 최선숙 (崔善淑)   필명:은주(殷朱) 中国 길림성 화룡 출생   연변대학 조선언어문학학부 연변과학기술대학AMP 제1회 로신문학원 연변창작강습반수료 "내 삶의 보따리" "자식농사" "배신 "등 수필 소설 시 20여편발표. "열혈모녀 축구팬 "   해란강닷콤 우수상.  “정향숲을  찾기까지”  제5기 중국조선족 효사랑글짓기 공모 우수상 문학블로그:  邮箱:18844309877@163.com 핸드폰: 18844309877      
16    에버랜드! 오 우~그 스릴 댓글:  조회:1347  추천:0  2019-11-30
마법의 성  에버랜드 /최선숙 자아소개 :연길시 성보호텔 2층 4호에서 한국의류매장을 운영하고 있는 최선숙입니다.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포곡읍 에버랜드로 199 (포곡읍) 京畿道龙仁市处仁区蒲谷邑爱宝乐园路199 전화 031ㅡ3205000 《에버랜드 ㅡ 나무 위키》ㅡ 검색 자연 농원 시대 1976ㅡ1996 에버랜드시대 1996ㅡ현재 서울에서 40공리  에버랜드는 이병철 삼성 그룹 창업주 이 경기도 용인군 포곡면 일대 야산을 매입한것은 1971년 당시 구입토지는  450여만평 .대부분 관리없이 방치되던 곳 .자연농원은 그 가운데 20만평.46억원의 비용을 들여 조성   명칭을 바꾼것은 개장 20주년 때였다 . 글로벌 태마파크로 도약하기에 더 적정한 이름을 찾으면서 에버랜드로 이름 바꾸었다. 원 용인 자연 농원 30여년 발전을 거쳐 종합적이 유러장소 ㅡ 놀이터 ㅡ끝없는 매력과 환상  찡쌘과 자극   시적인 랑만 과 풍경이 공존하는 곳임다 .요즘은 한국에서 제일 각광받고 제일  많은 유람객들에게 알려져 있느 테마파크로 등극  ...등등 현재 에버랜드는 45만평으로 규모를 확장. 2013년 누적 관람객 2억명 돌파.  5개 테마로 구성 야생 동물원 .유럽 모험구 .머환 락원  미주 모험구 . 지구촌 거리 (주토피아 /동물왕국,로스트 벨리 ,사파리월드,로맨틱 일루미네이션 ㅡ 에버랜드 하이라이트) 명절 때 여러가지 행사 ■다른 한가지 특점 .문화와 풍격이 서방 테마파크와  다름. 자기만의 독특한 풍격과 경영 관리 모식 ,서비스와 고객만족, 고객 감동 ,마케팅 분석,경쟁사 분석을 중점으로 《별에서  온 그대 》《 천국의 계단 》회전목마.《내 딸 금사월 》장미원  촬영지 ■가는방법 :강남역 6번출구 (신분당선 )에서 내려서 양재방향으로 가는 버스 5002 타면 50분 만에 도착 (에니게이션 ,또항치 길 잘 모르면 엄청 고생 ) 시외 공용버스 이용 방법.용인 공용버스터미널에서 내려 85.5002.시외 8487.8862 번 버스를 이용해 에버랜드 주차장까지 가는 방법이 있다.무료셔틀 버스로 이동 ■자유이용권 23,900원 구매하면 입장료 포함 된거로 알고 있습니다 .여러가지 놀이기구 동물원 다 포함  후조로 사면 좀 더 싸다는 얘기 들었어요. 여러가지 삼성카드 . BC 카드.하나카드 .kB 카드.   외환카드 50% 할인에 들어가는지 물어 지방 초등학교나 중학교에서 소풍을 가게 되면 높은  확률로 가게 되는 수학 여행 단골지 환상의 나라  마법의 도시 에버랜드 감탄이 절로 나오는 브랜드 유람지, 아기들 천지 ,한창 연애하는 젊은이들 천지 ,커플 천지, 동물세계, 동화세계, 놀이 기구 세계,또한  에버랜드 직원들의 서비스에 감탄 세절적인 모든것에 감탄하게 돼요 . 전부 다 너무 창의적이고 선진적이고 체계가 쭉 다 잡혀입고 .서비스도 너무 좋아요 . 언제나 많은 손님들의 사랑을 받는 에버랜드 그곳에 있느라면 나두 40대가 아니라 동심에로 돌아간듯한  기분 .마침 딸애가 18살이여서 얘가 호기심 가는거는 다 하기로 했어요 .딸애 18살 나두 18살 ,애가 고등생  나두 고등생  된것 같았어요 . ■제일 인상 깊은건  1.티 익스프레스 (제일 인기 높은 놀이기구) 등등 놀이기구 싹쓸이 ,2.동물세계 , 3.동화극 관람 , 도전 모험 짜릿함 만끽한 유람이 였던것 같습니다 사파리공원이나. 물개쇼 .동물원 주력 볼거리. 기타 . 메인.테마곡 ■환상이 나라 .모험의나라  즐거운 축제가 열리는 곳 영원한 행복의 나라 좋거나 선진적이건 다 인입 물건 구입 일정도 빠듯하고 오뉴월에 감기까지 걸려서  어디 나다니기보다 , 호텔에서 편하게 쉬고 싶어서 딸애가 그렇게  잡아끄는데도"너 언니들 같이 가서 잘 놀구 와 "이렇게 싫다구 싫다구 거절하다못해 애가 너무 가자고 닥달해서 끌려갔댓어요 . 그런데 정작 가서는 애보다 내가 더 즐거웠던것 같애요 .그래서 딸애가" 엄마 안 왔더면 어쩔뻔 했슴까 ? 오기를 잘했지 ."라고 하더군요 .어떻게 비유하면 적절할가요 ? 춘절만회나 어떤 파격적인 무엇을  현장에서 시청한 느낌 이랄가 ? 영원히 잊혀지지 않을 감동 그 자체였습니다. ●1.딸애와 나는 먼저  가이드가 소개하는 일정에 맞춰서  먼저 놀이기구 타기로 했어요 . 도전해볼가 무서울 같은데 ...자극 궈인 제일 자극적이고 인기높은  놀이기구부터 타자 .놀이기구는 싹쓸이 하면서  전 부 타고 줄 서 기다리는 인내만 있으면 다 탈수 있어요 . 제일 인기 놀이기구 기본대기시간이 2시간입니다 . .자유 이용권 에 다 들어가 있어요 .제일 무섭고 자극적인게. 티 익스프레스.인 같애요. 티 익스프레스는 국내 최초 목재 롤러코스트로 만들어 졌는데  세계에서 가장 스릴있는 목재 롤러코스트로 선정 되기도 하였어요 .90도로 수직 하강하면서 ,그  놀라움 그  짜릿함 .지금까지 제가 타본 놀이기구 중 제일 무섭고 자극적이였던것 같아요. 자극적인거로 부터  过蘟거기엔  너무 놀라서 감기가 다 달아났는지 아프지도 않았어요 .아니면 싫다구 싫다구 거절하다가 못이겨 따라가 가지고 애마냥  제일 좋아하며 놀아서  감기가  달아난건지 매직 마운틴에서 즐기는 래프팅 모험 야호 ~ 스릴 만점 후룸 라이드의 반전 매력 와우 ~뒤로 떨어지는 후룸라이드(배) 썬더폴스 짜릿하고 시원하고 즐거웟담니다 놀이기구 플라잉 레스큐 . 온가족이 즐기는 하늘 여행 허리케인 .꿀 잼있는거 .진짜 신나는 놀이기구 엄청 많아요 강추 ●2.그리고 동물원 구경이 가장 호기심 있게  관심잇게 보는곳인것 같애요. 동물 친구들 보려고 해도 또 한시간 넘게 줄서서 기다려야 했어요. 길게는 한시간 짧게는 반시간  아마 줄서 기다리는 시간을 아마 다 합치면 몇시간은 되는같애요. 오래동안 줄서 기다려서 봐야 됐던 기억이  그 사간이 좀 제일 아쉬워요. 삼성에서는 이에 해결책이 없는지.지금 은행에서처럼 표제를 하면 좋겠구만 . 거기까지는 생각 못햇는지 아님 알면서 어떤 배포로 무시하는건지 ? 줄서서 기다리는게 어떤 홍보효과가 있다고 그러는지 ,아무튼 ... 볼거리를 제대로 즐길수 있는 다양한 체험 프로그램 .사파리월드(탐험세계) ㅡ호랑이 사자.불곰 등 맹수들이 사는 사파리월드(탐험세계 ), 주위를 거니는 맹수의 왕 호랑이와 ,사과 고구마 등 먹이가 가득한 굴과  놀이터에서 활발하게 활동하는 불곰들을 ,사파리버스에 탑승한채 가까이에서, 현장에서 생생하게  맹수들을 관찰하고 체험할수 있어요 . 우리에 갇힌 동물들이 아니라 버스에서 가까이에서 볼수 있는 게 넘 좋아요 .가이드가 맹수들에게 특히 불곰들에게 다 자기개성과 잘 어울리는 이름을 짛어 줬어요.   재는 이름이 뭐고 어떤 개성이 있고 ,이렇게 이름를 말하면서 동물들의 일상과 그들의 개성을 ,동화속에 들어온것처럼 이 친구,  저 친구 ,얘는, 재는 ,재밋는 스토리를 엮어서, 대화를 하느식으로  설명해주니 ,그 구수한  입담에 ,정말 한결 더 가까이 다가갈수 있는것 같았어요 . ■가까이에서 막 먹이주고 "돌아 ""일어서" 이러면 사람말 다 알아듣고 앉앗다 서기도 하고 돌기도 하고 귀엽게 버스가 지나가니깐 막 따라오고 꺅 ~ 귀요미,  곰이 두벌로 서서 걸으니  사람같기도 하고 사자 자는 사자,우릴 바라보는 사자 ,정말 신기하고 귀엽구 그랬어요 강추 한시간 넘게 줄서 기다리던 짜증이 어느사이에 다 달아나고 기다린 보람이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더군요 . 에버랜드의 직원들 거의다 30전후반 돼보이는데, 톡톡 튀는 센스며 ,재치있는 유머며 ,서비스 정신이며, 자칫 지루할것 같은 유람에 생기와 감동을 불어넣어주는 같애요 .에버랜드 크잖아요. 거기 직원복 입은 분들과 누구하고나 길 물어봐도 공항에서처럼 깍듯하게 자상하게 알려주는게 제일 기본임다. ■특히 동물원의 "가이드들이 동물들을 진짜로 친구로 착각하는게 아닐까 ?" 고 생각할 정도로 동물들과 끈끈하고 절절한 애정을 가지고 있는것 같았어요 .정말 가식이 없는 동물들에 대한 애정, 매일 유람객들에개 소개하면서 정 들었나 ?자기가 키운 애완견을 사랑하는 주인의 애완견 사랑 같았어요 .그런것들이 다른 곳들과는 비교되게 나에겐 너무 강하게 안겨왔습니다 . 직원 교육을 참 잘시켰다는 생각을 하게 돠더군요. ●3. 물개쇼,등등 여러가지 쇼,  동화극이나  뮤지컬, TV에서 보는 동화편처럼  직접 동물들이 출연해요 .어쩌면 뮤지컬 같으고 동화편을 현장애서 보는 느낌 ,너무 감동입니다 . 여기는 20분에서 반시간 정도로 시간  안배가 참 잘 돼 있어요 ,자유이용권으로 다  들어갈수 있어요. 여기 절목 끝나서 나가면 저쪽 공연이 금방 또 시작 .유람객들의 시간 잘  맞춰서 안배한듯 합니다. ●4.길옆에 바라보이는 곳마다 하트모양 장식물 연인들 오기 제격,또 유람객들의 감성을 자극하는 공감하고 감동하고 사색하게하고 긴 여운을 남기는 길지 않고 짤막짤막한  구절들  " 보고있어도 보고싶은 "한국에는 그런게 참 잘 돼 있잖아요. 우리 중국에는  "화단을 아끼자 "이렇게 말들이 좀 딱딱하잖아요.  여기저기 아기들을 데리고 유람하기 좋게 편안한 시설들 정말 세절적인  모든것에  저절로 감탄이 쏟아지게 탄복하지 않을래야 탄복하지 않을수 없게  해놓았어요. ●연인들 세계, 아기들 세계, 마법의성 에 한번 놀러가보세요 . 4D가상현실체험 미디어게임과 함께 역사의 한가운데 들어가 생생하고 흥미진진하게 역사와 문화유산도 어트랙션처럼 신나게 체험할수 있어요 .디지털 기계로 머리에 눈에대보니 와우 ~아름다운 독도가 눈앞에 풍경으로 입체적으로 펼쳐지네요 ."활의전설 "4D 영화도 관람 할수 있어요 ,바람 물도 나오고 의자가 흔들리면서 아주 잼있었담니다. 현대 시설의 옛날 장수들이 화살 쏘면 화면에서 내가 어느지정한 위치에서 그 동작하면 화면에서 같이나오고 쭈욱~ 다 보고 나오면서 정말 갈때에는 별로 기대하지 않고 갔었는데 돌아올때는 힘들고 지쳤지만 짜릿한 반전드라마를 본듯한 오래동안 그  탄복을 금치 못했던 뜻깊던  하루에서 헤여나오기 바쁜 그런 큰 충격을 받았어요. 여행을 떠나는 가족들에게 주는 즐거움 추천하고 싶 은 곳 , 마법의성  에버랜드 ,듣던대로 명불허전 입니다. 세절적인 모든것에 감탄할거예요.  꼭 잊지못할 여행이 될겁니다. ■우리는 가게때문에 거의 한달에 한번씩 한국에  다녀오는데  어쩌다 다니는  사람들은  유혹이 크겟지만 직업이 다달이 비행기 타고 다니는 사람 즐거울수가 없죠 .그래서 유람을 늘 회피합니다. 그래서 물건 구입 떠날때  연길 공항에서 리륙할때에는 늘 "이젠 물건구입 다하고 이게 착륙  이랬으면 얼마나 좋을 가?"고  생각해요. 나다니는게 그렇게 싫어요. 어느날 내가 이직업을 바꾸면 그거는 정말 비행기 타구 다니기 너무 싫어서입니다. 늘 연착 되지 ,눈만 좀 와도 폭설이 와서 착륙못한다고 지연되지 ,언제 한번은 대련공항에 도착햇는데 착륙하라는 신호가 안 와서 거의 한시간 정도 하늘에서 원래는 한시간 정도 비행이 두시간이 된적도 있어요 . 나는 내가 나다니는게 싫어서 여직껏 애를 데리고 바깥유람 별로 안갔었는데 이젠 18살 되니 너무 가겟다고 닥달해서 떠났어요 . 돌아오면서 "방학에 어디어디 갔었다고 반에가 자랑하렴" 하고 물어보니 "엄마 이런건 자랑거리두 아님다. 지금 애들은 다 가봣음다 " 하네요 . 워낙 여행사 코스대로 다니게 하자 햇는데 여행사 직원이 애 나이가 얼만가요?"하기에  ,18살이라고 말하니, 그만한 애들은 저희들 끼리 놀러보내라 하네요. 그래서 "나는가게때문에 못가니 친구들같이 가라고."했어요. "엄마는 내가 빨리 자립하기를 바래서  이렇게  내보내자는데 다른 집 부모들은 시름놓구  내 놓는집 없어요."  자기두 그러구 싶은데 엄마처럼  생각하는 부모가 없대요 . 그리고 애들끼리 다니면 어떤 나쁜 사람들의  표적이 된다네요.  그래서 바쁜 일정으로 어쩔수 없이 오랜만에 한  여행, 지금은 참 아름다운 추억으로 남았어요 . 자칫 지루했을것 같은 여행이 반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아름다운 기분 좋은 추억으로  늘 그날을 생각하면 놀이기구 타면서 너무너무 놀랐던 기억 ,가이드의 재치넘치는 입담,세절적인 모든것에 감탄했던 기억 , 참좋은  곳에 유람하는건 참 좋은 힐링이 되는 같애요 . 애보구 앞으로 친구들 같이, 혹은 혼자라도,아무때나 놀러가구 싶은곳 다 다니라고 해요. 우리 애들은 그 어떤 성취욕보다는 ... 편안함 속에서 즐거움을 찾을수 있는 그런 인생을  즐기며 살게 하구 싶어요 여행은  마음의 여유가 있을때 가족이나 친구랑 같이 하는게 좋을거 같애요.하지만 요즘 주위분들을 보면 스트레스 날리기 위해 여행 하시는 분들이 많아요 .다 자기 개성이겠요.  이제 나이가 들고보니 즐길건 놓치지 말고 다 즐겨야 되겠다는 생각 전에는 돈 모으는 재미라면 지금은 즐겨야 겠다는 생각 , 방학마다 놀러갈 타산입니다. 최선숙 (崔善淑)   필명:은주(殷朱) 中国 길림성 화룡 출생   연변대학 조선언어문학학부 연변과학기술대학AMP 제1회 로신문학원 연변창작강습반수료 "내 삶의 보따리" "자식농사" "배신 "등 수필 소설 시 20여편발표. "열혈모녀 축구팬 "   해란강닷콤 우수상. “정향숲을  찾기까지”  제5기 중국조선족 효사랑글짓기 공모 우수상 문학블로그:  邮箱:18844309877@163.com 핸드폰: 18844309877
15    엄마 힘내!내가 잘할게 댓글:  조회:1215  추천:0  2019-11-30
엄마, 힘내! 내가 잘할게 / (연변2중) 김은주 아침출근시간이 다 되였건만 엄마는 이불속에서 나올념을 않고 궁시렁댄다. "언제부터면 니가 나가 벌고 나는 집에서 실컷 낮잠이나 자겠니. 심심하면 한가하게백화점에 가서 마음대로 카드 긁으며 여유롭게 쇼핑도 하고 말이야. 5년뒤면 될가 ?" 나는 아무 주저도없이 대답한다. "네에~!" "호호~ 그래, 말만이라두 고맙구나." 나의 말 한마디에 엄마는 힘을 얻었는지 누웠던 자리에서 일어나 주섬주섬 옷들을 주어입고 "그래 너만 믿고 이제 한 5년만 더 분투해 볼란다."하고는 싱글벙글 웃으며 출근하신다. "엄마 힘들어, 은주야, 엄마한테 위로의말 좀 해주렴." 엄마한테서 걸려온 전화다. "네, 엄마, 힘내! 내가 잘할게. 엄마, 오늘도장사 대박나세요" 장사군의 딸이 아니랄가봐 내 입에서 어느새 엄마 마음에 쏙쏙 드는 달콤한 말들이 줄줄 쏟아진다. 하긴 이게 어디 한두번인가. 가끔씩 아니, 아주많이 매번 힘들때마다 엄마는 나한테서 위로를 받고 싶어 한다. 피장파장이다. 나도 공부가 힘들때마다 엄마한테 힘들다고 아우성이니깐. "엄마 이번 시험에 성적이 내려갔어. 속상해." "괜찮아, 그럴때도 있지뭐, 너라고계속 시험 잘 치라는 법은 없지. 세상은 워낙 그 래.맑은 하늘에 먹장구름이 꽉 덮일때도 있고 모든 일이 계속 다 잘 풀릴수는 없어. 꼭 참고 차분하게 견디느라면 또 다시 맑은 하늘이 너를 반겨줄거야. 넘어진 자리에서 다시 일어설수 있는 사람이 진짜 강자야,우리 모녀 같이 노력해보자. 아자아자, 화잇팅!" 40 대인 엄마는 동갑내기친구들이 다 좋은 고급차들을 굴리고 다닌다고 늘 부러워하신다. 그럴때면 내가 또 엄마에게 호언 장담한다 "엄마 걱정마, 내가 대학졸업하고 돈 많이 벌어서 엄마한테 빠라리(法拉利) 사줄게." 그러면 엄마는 허허 웃으면서 얘기한다. " 벌써 가진것 같네. 허허  그때가서 너나 사달란 말을 안해두 고맙겠다." 전번 주말에는 백화점에서 천원좌우되는 운동복 한벌 사입었다. "나도 이런 비싼 옷 사주는 사람이 있었으면 좋겠다"라고하며 못내 부러워하신다. 시장에서 장사하시는 엄마는 시장옷을 선호하는 타입이라 내가 어쩌다 한계절에 한벌씩만 백화점 옷을 사입겠다고 해도 울상이 되여 따라나선다. 그래도 어떡해! 시장가보다 몇배는 비싸지만 브랜드를 선호하는 우리 세대들을 엄마가 어떻게 리해할수 있을가? 다른 애들은 모자부터 신발까지 모두 다 유명브랜드인데 그렇다고 말하면 엄마가 또 속상해 할가봐 나는 목구멍까지 올라온 말을 삼킬수밖에 없다. 나는 어쩌다 캐주얼 한벌만 갖추자 해도 이렇게 엄마와 한바탕 싱갱이질 해야 되니, 참 빨리 커서 나절로 벌어 사고 싶은걸 다 사야지 하는생각이 갈마든다 . 그래서 나는 또 " 이제 내가대학졸업하고 출근하게 되면 엄마에게 카드 하나 만들어 줄테니깐 그때가서 엄마 마음대로 백화점에가서 사고 싶은걸 다 사요." 라고 말했다. 엄마는 진짜로 카드 손에 지기라도 한것처럼 밝게 웃으시며 "그게 언제쯤이면 될가? 정확히 몇년 뒤면 되겠어? 난 좀 급한데."라고 묻는다. 나는 "아마 10년 뒤면 비슷할거야 "라며 너스레를 떤다. 엄마는 금방까지 천진하게 웃으시더니 금방 또 실망한듯이 새초롬해서 "엄마나이 60이 되면 이쁜 옷을 입어 뭐하게. 그때는 건강이 더 중요하지 "라고 하며 서글픈 웃음을 짓는다. 내가 세상에 태여나기전부터 옷가게 해왔다는 엄마는 평생 소원이 백화점에 그럴듯한 명품가게 하나 차리는것이라고 늘 말한다 . "네가 잘돼서 엄마한테 백화점에 가게 하나 챙겨주렴 " 라고 롱담 반  진담 반으로 말하면 나는 드라마대사로 능청스럽게 대꾸한다. "얼마면 되겠어요?" 엄마는 어이없다는듯 웃으면서"50만원이면 돼."라며 받아친다. 나는 또 "그래요? 그 정도면 내가해줄수 았지."하고 허풍을 친다. 이럴때 보면 누가 엄마인지 누가 딸인지 모르겠다. 뭘 사줄때마다 "앞으로 네가 벌게 되면 다 받아낼거야, 몇곱절 이자까지 합쳐서 받아낼거야."라고 곱씹는 엄마이지만 그 말이 나는 듣기 싫지도 않거니와 늘 나를 편달할수 있어 너무 좋다. 심지어 너무 들어서 이젠 노래마냥 정겹기까지 하다. 헌데 엄마, 엄마는 그거 모르지. 내가 잘 되라고 늘 이런 식으로 말하는 엄마의 마음을 내가 알면서 모르는척 속아주는걸. 아무튼 엄마와의 약속이 한두가지가 아니다. 언제면 출근해서 엄마 소원을 다 풀어줄수 있을가? 오늘도 나는 앞으로 내가 잘 돼서 엄마입이 귀에 걸리는 모습을 그려보면서 살포시 꿈나라를 찾아간다. «연변녀성» 2016년6기
14    자식은 부모의 <<작품 >> 댓글:  조회:952  추천:0  2019-11-30
"바닥만 다 펴구 공부하게요." 딸애는 핸드폰 게임에 집중하면서 뭔가 찔리는지 이렇게 말한다. " 몇분이며 되니? 벽지는 안발라두 돼?옷장에 옷은 정리안해두 되구?" 꾸지람하고 공부하라고 닥달할 대신 이렇게 말했더니 이외라는듯 나를 빤히 쳐다보다가 키득거린다. 엄마인 내가 바보여서 애가 게임 놀게 가만히 놔둘가? 말리다 못해 방법이 없는 방법, 매일이다싶이 "이젠 그만하구 공부해라" 를 웨치다못해 "전략"을 바꾸어 보았더니 평소에들었는둥 말앗는둥 하던 딸애가 반응을 보였다. 고중생인 애가 게임에빠졌있으니 엄마인 내 속은 얼마나 타들어 가는지 미치고 환장하겠다. 밤 10시까지 학교에서 저녁자습을 할때에는 그나마 속이 덜 탔는데 지금은 밤자습이 취소되는 바람에 저녁마다 딸과 입씨름을 해야 한다. 어느 부모나 자식에 대한 희망사항은 많고도 많을것이다. 나도 마찬가지이다. 이제막 고중에 다니는 딸애에게 품는 기대가 밤을 자고나면 새로워지고 우수한 사람을 보면 우리 딸도 저렇게 커줬으면 하고 그 기대가 또 부풀어 오르고기대가 샘물처럼 자꾸 솟아난다. 하지만 자식은 부모의기대를 잘 따라주지 않는다. 고분고분 말을 잘듣기에 잘하는줄로만 알고 방심하고 있었는데 요즘 곁에서 지켜보니 엄중한 문제점이 한두가지가 아니다. 밤늦게까지 게임을 놀고 잔다던지, 늦어 본 자식이라고 집안에서 누구나 곱다고 했더니 아직도 버릇없이 반말을쓴다던지... 어릴때에는"고래도 칭찬하면 춤춘다"고 해서 늘 "잘한다, 잘한다" 하고 격려하면서 키웠다. 그러다 요즘 드는 생각이 칭찬만 받고 자란 딸애가 앞으로 사회생활을 하게 되면 별의별 사람을 다 만날텐데 마냥 순진하고 마음이 약해 빠지면 안될것 같아 가끔 일부러 딸애에게 "태클"을 걸군 한다. 그때마다 딸애는 놀라서 낯선 사람 보듯하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끝까지 밀어 붙인다. 어쩌면 약간 억지스럽기도 하지만 딸애가 험한 세상을 지혜롭게 헤쳐나가기 바라는 마음에서 내가 선택한 방법이다. 딸애를 사랑하는 엄마의 마음을 더 말해 무엇하랴. 모든일이 잘못 되더라 할지라도 자식일만은 잘되길 바라는게 천하부모의 마음이라하겠다. 엄마야 어떻게 자식때문에 여차여차 인생까지 바쳐가며 희생하던지 나 몰라라 자기 고집만 부리는 애들, 훌륭하게 키우느라 벼라별 노력과정성을 다 몰붓지만 정말 홀로 사랑이다. 그래서 요즘은 사춘기 딸애와 갱년기 엄마의 전쟁으로 우리 집안에 포연이 자욱할때가 많다. "너두 이제 꼭 너같은 딸애를 키워봐. 그때면 이 엄마의 마음을 알게될거다."라고콕 쏘아 붙히고는 뒤돌아 앉으면 속상한게 부모의 마음이다. 이렇게 엄마를 괴롭히던 딸님, 싸울때는 화끈하게 싸우고 의논할 일이 있으면  또 언제 그랫냐 싶게 어김없이 나에게 다가든다. "엄마, 나는 지리와 력사가 참으로 어려워요.락제는 면하긴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문과쪽은 아닌것 같아요.그래서문과할가? 리과할가? 최종선택 하기전에 엄마의 조언을 좀들어보고 싶어요"라고 제법 진지하게 나온다. "곰곰히 잘 생각하고 네가 더 잘하는 쪽으로 선택하는게 좋지 않을가?엄마도고중때 스스로 리과쪽에 소질이 있다고 착각하고 리과를 선택해서 고중3학년에 올라가서 뒤늦게야 문과반에 넘어가 문과로 대학시험을 봤어. 그때 애초에 문과를 선택하지 않은것이 얼마나 두고두고 후회되던지… 그러니깐 너는 절대 엄마같은 잘못을 저지르지말고 옳은 선택하길 바란다." 나는 교훈을 말해주면서 딸애의 판단과 결정에 맡겼다. 이럴때 후회없는 선택을할수 있게 확실하게 도와 줄수 있는 유식한 엄마가 아니여서 참으로 미안하다. 살면서 중요한 선택을 해야할 경우가 얼마나 많은데.딸애가 당장 코앞에 닥친 문제도 그렇지 않은가?어느지역,어떤 대학,어떤전업을 선택해야 할지? 고민끝에 딸은 리과를 선택하겠다고 했다. 나 개인 욕심에는 문과쪽을 택했으면 하고 바랬었다. 이럴줄 알았으면 애가 어릴적부터 집 벽마다에 중국지도와 세계지도 도배해 놓으면서라도 지리과에 취미를 붙혀 줬을걸. 력사드라마도 같이 보고 명승고적들도 유람 다니면서 력사에 재미를 붙혀줬을걸… 지금에 와서 후회막급이다. 사춘기여서 찬바람이 쌩쌩 불게 쌀쌀 맞기만 하던 딸애가 요즘은 해가 서쪽에서 뜨는지 잠들기전에 한 십여분씩 속심말을 들려줘서 얼마나 고마운지 모르겠다 .덕분에 즐거웠던 일들을 말할때는 오랜만에 평화를 찾아서 히히~호호~ 웃다가 잠이 들어서 꿈마저도 달콤하다. 솔직하게 자기의 고민을 털어 놓을때는필경은 부모이기에 애가 말하는 그 한마디 한마디를 그냥 무심히 흘려 들을수 없다. 이럴때에는 어떻게도닥여 줘야될가?어떻게 인도해 줘야 될가? 걱정하다가 잠이드니그런 날 밤은 영낙없이 꿈자리까지 뒤숭숭하다. 애를 키워보니 어떤때는기대 그 이상으로 참 잘하는데 또 어떤때는 너무도 엉망이여서 무척 속상하다. 그래서 "자식 키우는 부모들 남의 자식 흉 허물 하지 말라"고한것 같다. 어떤 일은 비록 남의 집 일이지만 사실 또 남의 일 같지 않을 때가 많으니 말이다. 참 자식이 뭔지… 오만가지 상념에서헤여나와 창밖을 바라보니 어느새 흐드러지게 피여난 정원의예쁜 꽃들이 오가는 행인들을 반겨주어 바라보는 내 마음까지 화사하다. 부모로서 바로잡아줄수 있는데까지 바로잡아주어야 되겠다. 감수성이 제일 좋은 나이에 잘 배워서 앞으로의 인생을 지혜로운 사람으로 차분하게 쉽게쉽게 살아가길 바라는 부모된 마음이다. 그래! 이렇게 야금야금 노력해 보는거다. 아름다움과 즐거움을 함께하는 소중한 시간과 힘차게 전진하는 기쁨 넘치는 하루하루를 축적하여 딸애에 대한 나의 희망사항들을 하나하나 막연하지 않은 현실로 이어지게 하리라. 어느날 딸애가 엄마생일이라고가게에 예쁜 장미 한 묶음을 보내왔다. 어느새 이러 센스를 배웠을까? 센스도하나의 학문이라면 학문인데 ... 정말 너무 뜻밖의 서프라이즈에 나는 멍해졌다. 잔잔한 감동의 물결이 넘실넘실. 그래, 이런게 자식 키우는 멋이겟지. 조금이나마 위안이되는건 내 자녀교육이 너무 비관적인 실패는 아닌것 같다. 삶이 힘들다고 주저앉지말고 희망이 묘연하다고 포기하지 말자. 엄마로서 내 인생의 무대도 멋지게 장식하고 평생동안 정성들여 만들어낸 자식이라는 "작품"도 어디에 내놓아도 부끄럽지 않게 하려고 최선을 다하는 부모가 되여야겠지.
13    아홉과 바꾸고 싶은 하나의 유혹 댓글:  조회:949  추천:0  2019-11-16
나는 문학반에 다니면서 미자씨를 알게 되였다. 모임이 끝난 뒤면 집에 돌아가는 길이 같아서 우리는 늘 얘기를 나누며 걸어서 가군 하였다. 이 얘기 저 얘기 나누다보니 서로를 많이 알게 되였고 많은 공동언어도 생겼다. 매양 집에 돌아가 잠자리에 누워 그녀의 말을 되새겨보면 참 좋은 책 한권을 읽은듯한 잔잔한 감동까지 받는다. 그렇게 인연이 닿아서 몇번 미자씨 주변의 친구들 모임에도 합석해보고 미자씨에 대해서도 좀씩 깊이 알아갔다. 그런데 웬 일인지 미자씨한테서 종래로 녀자들이 입에 달고있는 “우리 남편”이란 말은 없었다. 궁금증을 참지 못하는 나는 어느날 끝내는 조심스레 물어봤다 “남편은 어디 출근해요?” 미자씨는 시무룩이 웃으며 대답했다. “헤여졌어요.” 나는 남의 아픈 상처를 건드린것 같아 더 이상 묻지 않고 그냥 의외라는 표정만 지었다. 미자씨는 그런 내 마음을 알기나 한듯이 담담히 웃으며 얘기했다 “사람들은 그냥 입버릇처럼 좀만 언짢아도 리혼하자고 오기를 부리는데 정말 말이 씨가 된다는걸 절실하게 느꼈어요. 저도 필경 오래동안 자기 사업을 해온 사람이라 배짱이 좀 두둑해요. 남편에게 의지해 사는 연약한 녀자라면 혹시 이런 선택을 하지 않았을지도 모르죠.” 리혼을 후회하는 목소리일가? 어쩌면 그런것 같기도 하고… 그녀는 차분하게 그동안 살아온 과정을 나에게 들려주었다. 남편은 외국에 가 십년 있었다고 한다. 남편이 외국에 간지 처음 얼마간은 앞으로 어떻게 혼자 살겠나 걱정이 태산같았는데 어쩌다보니 장사도 남편이 있을 때보다 더 잘되였고 외롭다보니 여기저기 모임에 다니며 친구들도 많이 사귀였고 경제적으로나 시간적으로 여유가 있어 이런저런 학습반도 다니며 지식면도 많이 넓어졌다 어떤 일은 미리 예고되여있는듯하다 남편이 10여년만에 귀국했다. 서로 다른 환경에서 십여년 갈라져있은데다 한 사람은 엄청 성장하고 다른 한 사람은 제자리걸음을 하다보니 두 사람 사이에 제일 기본적인 공동언어가 없어졌다. 대화도 대화지만 생각의 차이, 습관의 차이, 관념의 차이 거의다 극과 극 같았다. 한국에서 십년동안 남의 밑에서 시키는 체력로동만 하다 돌아온 남편은 뭘 마땅히 할수 있는 일이 없다는 핑게로 매일같이 마작판에 빠져 새벽이 다돼서야 집에 돌아오군 했다. 남편이란 사람이 하루이틀도 아니고 매일 놀음을 밥 먹듯한다면, 또 그런 상황이 몇년씩 이어진다면 어느 안해인들 감당할수 있을가? 게다가 십년씩 한국에서 독신생활을 해온 남편은 내놓은 들말이나 다름없었다. 오래동안 외국생활에 가족분위기도 그리웠으련만 전혀 그런 눈치가 없이 늘 어중이떠중이 친구들이 더 좋고 마작에 대한 유혹이 더 컸으며 일찍 집에 돌아와야 된다는 개념 자체가 없이 밤 12시를 넘기기가 일쑤였다. 아무리 타이르고 각서를 씌워보고 해도 그 상이 장상이였다. 그래서 다투기도 많이 다투었다. 물론 다툰 뒤 며칠은 마작 놀러 안 가는척했지만 며칠 안 지나서 마누라 화가 좀 풀렸다싶으면 또 마작판에 “출근”했다. 남편은 자기가 한국에서 벌어온 돈을 다 집에 들여놓았다며 떵떵댔지만 사실 그 돈들은 집 살 때 선불금으로 충당되였다. 게다가 외국에서 돈 벌어왔노라고 자기 소비돈은 얼마나 펑펑 써대는지… 막무가내였다. 미자씨는 매일같이 마작판에 빠져있는 남편, 친구밖에 모르는 남편과 다투는 일도 지긋지긋해났다. 전에 그나마 애틋했던 정도 싹 사라질만큼 십여년간 서로 다른 문화권에서 살아온 부부사이의 격차는 상상 그 이상이였다. 종이로 불을 쌀수 없다더니 일은 끝내 터지고말았다. “단지 자식만을 위한다는 책임감에서 이렇게 문제투성이인 사람과 결혼이라는 멍에를 지고 계속 함께 살아야 할가요? 남보기야 좋을지 모르겠지만 누구에게 보여주기 위해 사는게 아니잖아요. 내가 전혀 행복하지 않은데 자기 감정을 속이고 사는 자체가 비극이잖아요. 하물며 친구도 맘이 통하지 않으면 발길을 돌리는 판에 평생 같이 갈 부부사이가 이래서야 될가요?” 미자씨가 나를 빤히 쳐다보며 하는 얘기, 그동안 얼마나 마음속으로 갈등이 심했을가? 이런걸 일컬어 감정이 깨졌다고 하나보다. 미자씨는 한때는 그래도 타향에서 고생하는 남편이 불쌍하여 귀국하면 잔소리 말고 잘 대해줘야겠다는 마음도 있었는데 귀국해서 5년 동안 놀고 먹고 마작에 빠져있는 남편이 너무 정 떨어져서 더 이상 련민의 정도 생기지 않더라고 한다. 세상에서 제일 많이 싸우는게 부부사이라 하더니 그 말이 맞는것 같다. 하긴 제일 가깝고 또 제일 많은 시간을 함께 부대끼기때문이겠지. “사람이 그런것 같아요. 부부사이에 다툰다는건 또 다른 의미에서 보면 잘못된 부분을 고치면서 잘살자는것인데 그것도 모르고…” 어느날부터인가 미자씨는 더는 일찍 집에 오라, 마작 제발 좀 그만 놀아라, 고향에서 뭐든 시작해서 기반을 잡아나가라 등등 잔소리를 뚝 멈추었다. 대신에 헤여지자고 조용히 그러나 드세게 밀어붙였다. 어떤 사람들은 자식을 보더라도 좀 참고 살라고 권고했지만 미자씨로서는 이제는 자기 인생을 살고싶었다. 정말 단 하루를 살아도 정이 가는 사람과 살고싶었다. 남들이 리기적이라고 손가락질한다 해도 무서울게 없었다. 남들한테 보여주기 위해서 사는건 아니라고 확신했다. 자신의 행복도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앵돌아진 마음을 다시 돌려세우기가 쉽지 않더란다. 고민끝에 미자씨는 단호히 리혼을 결심하게 되였던것이다. 자기 인생이니 누구와 상론할수도 없고 상론해봤자 무슨 정답 같은게 있을가? 정말 어느날 후회해도 자기가 한 선택이니 스스로 감당할수 밖에 없었다. 그녀가 기어코 리혼을 고집하자 그제야 정신이 들었는지 남편은 죽어도 리혼을 못해준다고 나누웠다 돈 잘 버는 기계로만 보이던 안해의 반란이 이 정도로 강력하게 리혼까지 가려니는 생각지도 못했을것이다. 남들이 그렇게 부러워하는 그 많은 재산도 다 포기하고 안해가 정말 단지 이런 리유들로 리혼하자고 나설가? 남편은 리해 못하는 눈치였다 다툰 뒤면 안해가 종종 리혼을 들먹이긴 했지만 그것이 정말 현실로 이어지려니는 예상을 못했던것 같았다. 하지만 미자씨는 남편한테서 이미 떠나버린 마음을 돌려세울수 없었다. 반년만에 끝내 두 사람은 남남이 되였다. 그동안 잘살아보겠다고 애면글면 모아놓은 재산은 혼인의 결속과 함께 가차없이 두쪽으로 나뉘여졌다. 가슴이 아팠다. 실제로 한 가정이 깨지기까지는 이런 과정, 이런 이야기들이 있는거구나 실감했다! 그럼 리혼후의 생활은 어떠했을가. 과연 생각처럼 행복했을가? 현실은 그게 아니였다. 미자씨는 리혼한 뒤 한 1년간은 홀가분하게 살았다. 예전처럼 늦게 귀가하는 남편때문에 잠을 설칠 일도 없고 일찍 들어오라 잔소리할 일은 더더구나 없었다. 그동안 가끔씩 소개 들어오는 사람도 만나보았다. 그러던 어느날 미자씨는 지인의 소개로 한 남자를 만나보았다. 그 사람은 학벌도 있고 직위도 있고 단위도 괜찮은데다 가정부담도 없었다. 인물체격이 좋은데다 녀자를 이뻐해주고 유머감각도 있었다. 이 나이, 이 조건에 어쩌다 이런 호박이 넝쿨채 굴러들었냐 싶을 정도로 너무나 완벽했다. 그야말로 신데렐라가 된 기분이였다. 세상에 어쩜 이 같은 행복이… 미자씨는 이제야 고생 끝, 행복 시작이라고 생각하며 속으로 무등 기뻤다. 그런데 그 남자가 서서히 본색을 드러냈다. 술만 마셨다 하면 누구나와 걸고들어 시비를 걸었다. 그 남자의 못된 술버릇에 질린 친척이나 지인들은 모임에 아예 그를 부르지도 않았다. 참으로 어이없었다. 그러나 미자씨는 조건 좋은 그를 쉽사리 포기하고싶지 않았다 자기 같은 조건에 어디 가서 이만한 조건의 사람을 만나랴 싶었다. 그래도 사람이 인정스러운 면이 많았고 한편으로는 불쌍한 생각이 들기도 했다. 전남편과는 부부정이라고는 모르고 살았지만 이 남자는 그나마 자기를 이 세상의 전부로 알아주고 그렇듯 소중하게 여겨주었던것이다. 정이 뭔지 모르고 살아온 그 세월, 외롭게 살다가 어쩌다 자기를 아껴주는 사람을 만나니 쉽게 잃고싶지 않았다. 그래서 어떡하나 주풍을 바로잡아주고 같이 살고싶었다. 그런데 그게 그리 생각처럼 쉽지 않았다. 술을 안 마실 때는 순한 양 같다가도 술만 마시면 야수같이 돌변했다. 이중성격자인지 정신이 든 다음엔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했다. 하늘이 야속했다. 전남편은 도박군, 두번째로 만난 남자는 주정뱅이… 여태 살아오면서 남한테 해코지 한번 하지 않고 착실히 살아왔는데 어쩜 남편복이 이토록 없단 말인가. 때로는 차라리 전남편과 회복하고싶었다. 도박군이 주정뱅이보다는 나을듯싶었다. 이 남자는 만날 술에 취해있다보니 언제 맑은 눈동자를 서로 마주보며 얘기를 나눌수도 없었다. 그제는 정신상태도 좀 이상해진듯했다. 결국엔 마음을 모질게 먹고 헤여지기로 작심했다. 그런데 갈수록 심산이라더니 그렇게 온순하던 남자가 헤여지자고 하니 죽여버리겠다고 협박했다. 전남편은 그래도 자식이라도 있으니 막 나가지는 않았는데 이 남자는 달랐다. 어찌나 무섭게 나오는지 당하면 어데 가서 해볼데도 없었다. 그제는 손톱만큼의 미련도 안 남았다. 정말 갖은 수단을 다해 겨우 그 남자와 헤여졌다. 그렇게 두번째 혼인에서까지 실패하고나니 그녀는 인생에 회의가 들었다. 게다가 요즘 들어 시집 갈 나이가 다된 딸애한테 부모가 리혼했다는 말이 꼬리표처럼 따라다닐것을 생각하니 죄책감이 더 커졌다. 그래서 그녀는 말한다. 애가 있는 부부들은 웬만하면 극단적인 선택을 하지 말라고. 세포 하나하나로 깨달은 그녀의 인생담, 어둡고 소름 끼치는 기나긴 턴넬 그끝까지 가본 사람의 절절한 부탁이였다. 요즘 사람들은 돈보다, 명예보다 더 그리운게 감정인가보다. 그렇게 풍족하게 살았었지만 감정이 없으니 못살겠더라는 미자씨는 가지고있던 소중한 아홉가지로 바꾸고싶은 한가지가 바로 부부정이라고 했다. 요즘 세월 돈벌이때문에 부부가 서로 떨어져 사는걸 보면 서글퍼진단다. 자기네도 잘살겠다고 떨어져 살다가 결국엔 이렇게 되였다면서 눈시울을 붉혔다. 처음엔 내 집 마련을 위해 아글타글, 그뒤에는 더 많은걸 갖추느라 다람쥐 채바퀴 돌듯 살다보니 부부감정따위엔 신경 쓸 사이도 없었는데 어느날 문득 정신을 차리고보니 서로간에 제일 중요한 정을 무시하고 살았던것이다. 미자씨의 비극이 우리 시대의 비극이 아닐가싶다. 요즘은 부부사이에 정이 다 사라져 리혼하는 경우가 훨씬 더 많다고 한다. 부부사이에 좀더 대화를 가지고 부부감정을 차곡차곡 다져간다면 이러한 비극은 피할수 있지 않았을가. 매일같이 코를 맞대고 사는 부부들은 가깝기때문에 더구나 서로의 감정따위를 무시하면서 사는 경우가 흔하다 소 잃고 외양간 고치는 격은 돠지 말자. 내것이라고 이름 짛었던 내 남편 내 안해도 당신의 무관심과 외면속에서, 거듭되는 실망으로 남남이 될수도 있다는 점을 기억했으면 좋겠다. 서로를 소중하게 여기고 가족을 소중하게 여기며 살자. 일단 정말 비극이 일어나면 제일 상처받는건 당신과 당신의 가장 소중한 가족이다.   미자씨 인생담이 좋은 귀감이 되였으면싶다. 연변녀성 2015년 10기
12    제로도 아니고 마이나스로 시작한 인생수업 댓글:  조회:1897  추천:0  2019-11-16
남들은 사는게 다 행복해 보인다 가끔씩 아주 가끔씩 간간히 속탄다는 얘기들을 하고 있지만 내가 들어볼바엔 별 일도 아닌 일때문에 속탄다고들한다. 그럴때면 나는 속으로 “그대들은 진짜 속이 탄일, 진짜 설음이 뭔지나 알기나 해?” 라고 혼자말로 중얼댄다. 요즘 샐러리맨들의 일상화장법을 배워주는 강습반에 다니면서 여러분야의새로운 분들을 알게 되였다. 모두들 참 예쁘기도 하다. 반달같이둥근 눈섭,짙고 긴 눈초리, 예쁜 눈매,오똑한 코, 섹시한 입술,아기 피부같은 살결, 꽁꽁 들어박힌 단정한 오관,한마디로 젊고 이쁘고 같은 녀자인내가 봐도 황홀하기 그지없다 어느새 입가에 튕겨나오는 감탄. 엮시녀자는 이뻐야 돼! 그게 자산이구나! 그 분들을 지켜보노라니 또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내 부모들은 잘 살지도 못해서 내가 그토록가고싶어하는 대학공부도 다 못시켜 평생 한이 맺히게 하였는데 이쁘게나 좀 나주시지. 하지만 인츰 또 허허 허구픈 웃음을 웃게된다. 내가 부모가 되여보니 그게 어디 부모 마음대로 되는 일인가? 그런줄뻔히 알면서도 가슴속 한켠으로는 은근히 섭섭함을 떨쳐버릴수 없다. 예쁘게 나주면 좀 좋아! 하지만 그 서운함도 잠시 잠간 순간뿐이다. 다시 잘 생각해 보니 늘씬한 체격도, 예쁜 얼굴도 매력적인곳이라고는 한곳도 찾아볼수 없는 아주 수수한 사람으로 태여나서 가진것 하나없이 낳아 주었지만 그래서 많고많은 고생들을 거듭했지만 과정이야 여하하튼 지금은그래도 결과적으로 행복하게 잘살고 있지 않은가? 지금은 이렇게 이쁘고 지성미 있고 여유넘치는 이들과같이 또 다른 아름다움과 취미생활을 즐기고있는 내가 아닌가? 이렇게 생각하니 어느새 원망은 봄눈 녹듯 사르르 없어지고 감사가 샘물처럼 솟구친다. 힘든 가정형편때문에 너무 일찍부터 고생의 쓴맛을 알았고 어려서부터 저절로 분투할 생각을 했었고 누구나 다 다닐수 없는 고생이라는 명패 "대학"을 나와서 돈주고는 절대 바꿀수 없는 소중한 자산, 좋은경력들을 쌓았고 뒤 돌아 볼사이도 없이 책임감 하나로 오늘날까지 분투해온 덕분에 지금은 저절로도 조금 아니 아주 만족한 인생을 살고 있지 않는가? 물질적으로 풍족한 부모의 그늘밑에서 자랐다면 아마오늘날의 이런 성취들은 없었을것이다. 반듯하게 키워준것외에는 부모로부터 얻어가진것이라고는 눈꼽만치도 없고 오히려 숱한 보따리만 지워주었던 내 가족, 밑바닥인 제로도 아니고 마이나스로부터 시작해야만했던 나의 인생수업, 그래도 그 많은 고생들을 하나하나 용케도 이겨내고 지금은 얼마나 행복하게 잘 살고있는가? 하나부터 열까지 나의 휘황한 성취와 나의 전성기에는 나의 노력과 분투의 땀방울이 슴배여있지않은게 없다. 그런 힘들었던 나날들 그런 과정 과정들이 쌓여서 오늘같은 사업의 성공과 함께 내 생에봄날을 맞이한게 아닐가? 이렇게 생각하니 내가 겪었던 고생들과 그 과정 하나하나가모두 감사하기 그지없다 이쁘지 않으면 좀 어때,녀자는 가꾸기에 달렸다는말도 있잖아. 그래 많이 가꾸면서 살자.내적 미도 외적미도 지성미도 가지고 있는 모든거에 늘 감사한 삶을 살련다 생각을 바꾸니 내 삶도 참으로 행복해 보인다. 어느새 내 마음속에서 감사의 샘물이 솟아오르고 이런웨침이 메아리 되여 울려퍼진다 “부모님들이여! 반듯하게 키워주셔서 감사합니다. 그것하나로 저희는 평생을 만족하며 살렵니다.”
11    행운의 로또 보따리 댓글:  조회:712  추천:1  2019-11-16
시골에서 자란 나는 사남매 셋째딸로 아래에 남동생 하나 두고있다. 그런데 이 남동생이 나에게 엄청난 부담을 가져다주는 애물단지 보따리가 되였던적이 있다.  피줄을 나누어 가진 혈육으로 그냥 내쳐버릴수도 없고 그렇다고 끌어안자니 내 힘이 부치여 눈앞이 캄캄하고 숨이 막히던 시간이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 애물단지 보따리가 지금에 와서 나에게 둘도 없이 소중한 보배단지 보따리가 되였다.  이야기를 시작하자면 지난 90년대로 거슬러 올라가야 할것이다. 그때 나는 집 한칸 있고 매달 먹고쓰는데 부족하지 않게 벌어다 주는 남편을 만나 그냥 그런대로 잘 살고 있었다. 거기에 자그마한 가게 하나 차려놓아 다달이 푼돈도 생기게 되여 그야말로 더 이상 바라는것없이 무지무지 만족하며 살았다. 그러다가 너나가 다 한국가는 세월에 애아빠도 좀 더 잘 살아보겠다고 한국으로 돈벌이를 떠나고 나는 집에서 애나 키우면서 하던 가게일을 계속 보며 그럭저럭 보냈다. 그러던 어느날 시골중학교에서 교원으로 일하던 남동생이 찾아왔다. 시골학교여서 학생수가 점점 줄어들다가 학교문마저 닫게되였다며 이젠 하루 아침에 백수가 될일만 남았다고 한숨을 풀풀 내쉬는것이였다. 그러면서 이제와서 다른 길이 없는데 어떻게 좀 누나와 같이 장사나 할수 없겠냐며 마구 들이대는것이였다. 장사를 해본 사람들은 다 알겠지만 말이 장사지 그거 어디 아무나 하는 일인가. 그거 누구나 다 하는것이라면 세상 사람들이 모두 장사해서 못 사는 사람이 하나도 없을것이니 말이다. 나도 이제야 겨우 밥벌이나 하는 장사인데 동생이 와서 거기에 숱가락을 얻고 같이 밥을 나눠먹자고 한다. 그러나 답답하지만 물에 빠진 사람 짚오라기잡는 심정으로 없는 비위까지 쓰며 매달리는 동생을 보니 차마 거절할수 없었다. 나는 기실 오래전부터 동생에게는 부모나 다름없는 존재였다.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시고 홀어머니손에서 자라면서 나는 시집오기전까지 못해본 고생이 없었다. 시골에서 어렵게 고중을 졸업하고 대학시험을 치렀으나 락방하였다. 그 다음해 보습반에 들어가 재수하자면 그때 돈으로 500원만 더 내면 다닐수 있었다. 그런데 당시 우리집에 그 돈 500원은 천문수자나 다름없어서 나의 학비로 선뜻이 낼수 있는 형편이 아니였다 세살 터울인 남동생이 금방 내 뒤를 따라 고중에 붙다나니 혼자 살림을 도맡아 하시는 어머니께는 아무래도 무리일수밖에 없었던것이다. 어머니는 그래도 차마 넌 다니지 말라는 말씀은 못하시고 어떻게 하나 어디서 돈을 구해보겠으니 포기하지말고 다시 한번 시험을 쳐보라고 격려해주셨다. 하지만 누구보다도 집안형편을 빤히 알고 있는 나는 계속 보습반을 다니겠다고 어머님께 말씀드릴수 없었다. 그리고나서 혼자 궁리한것이 나절로 돈을 벌어 학비를 마련한다는 계획이였다. 상학기엔 사회에 나가서 돈을 벌고 그 돈으로 후학기에 보습반을 다시 다녀 대학시험을 한번 더 쳐보려고 마음 먹었던것이다. 그런데 말이 쉽지 정작 사회에 나오고 보니 다시 학교에 다니기가 쉽지 않았다. 더구나 어머니는 금방 고중에 붙은 남동생의 학비도 제때에 대주지 못하는 형편이셨다. 나는 내가 고중다닐때 집에 돈이 없어 학비도 제일 마지막에 내다나니 몸과 마음이 늘 초라해나던 생각이 들어 사내자식인 동생만은 그렇게 기가 죽어 학교를 다니게 하고싶지 않았다. 잘 먹이고 잘 입히지 못하더라도 사내자식의 기만은 살려주고 싶었던것이다. 그러나 보습반 후학기만 다니고 다시 한번 대학시험을 쳐보자했던 애초의 나의 생각이 얼마나 천진한 생각이였는지 그리고 이것이 나에게 있어서 평생 동안 얼마나 후회하고 한이 맺히게 하는 일이 되고 말았는지를 얼마 안가서 금방 깨닫게 되였다. 만약 시계바늘을 되돌려 나더러 지금 다시 선택하라고 한다면 난 엄마의 다리라도 잡고 어디가서 돈을 꿔서라도 기어코 다시 한번 대학시험을 칠 기회를 달라고 매달리며 애원했을것이다. 그런데 환장할것은 그렇게 내가 모든 설음을 혼자 씹으면서 애면글면 뒤바라지하여 고중공부를 마친 동생이 나중에는 글쎄 대학에 붙고도 붙지 못했다고 거짓말을 한것이다. 동생은 자기에게 날아온 입학통지서를 남몰래 감춰놓았던것이다. 나는 그런줄도 모르고 늘 동생을 탓했다. 이 누나가 내 인생 내 꿈을 다 포기하면서까지 힘들게 너를 공부시켰는데 대학문앞에 가지도 못했다고 나무랐다. 그때마다 동생은 벙어리가 된듯이 눈만 껌벅껌벅거렸다 그렇게 동생이 힘들게 살때마다 늘 원망하였는데 그로부터 거의 십년이 지났을까 어느날 동생이 더는 참지 못하고 실토정했다. "사실 그때 입학통지서는 받았는데 아무리 생각해봐도 내놓을수 없었어."라고 말이다. 순간 나는 몽둥이에 한매 되게 얻어맞은 기분이였다. "왜, 왜서? 통지서를 감췄단말이냐!" 나는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었지만 동생이 그때 그런 선택을 했을땐 그로서 리유가 있었을것이다라고 생각하면서 흥분을 최대한 자제하고 차분하게 물었다 ”내가 대학 가면 그 뒤바라지는 누가 해주겠어. 그때까지는 누나가 뒤바라지해준 돈으로 어렵게 고중공부는 마쳤지만 이제 시집갈 나이가 다 된 누나한테 더는 보따리가 되고싶지 않았어. 그리고 내가 대학을 다녀봤자 우리집에 뒤를 봐줄도 사람 하나 없는데 사회에 나와서 또 뭘 어쩌겠나.” ”남자로 태여나서 왜서 그렇게 옹졸하게 생각했느냐. 멀리 보고 길게 생각해야지. 네가 그때 입학통지서만 내 놨어도 우리는 얼마든지 대책을 강구하였을것이야. 아버지의 생전단위에서도 네가 대학에 입학했다면 꼭 돌봐줄거고. 대학을 졸업하고 멋있게 사는게 누나의 고생에 대한 보답인걸 왜 몰랐나? 형제사이에 신세질땐 신세를 지고 잘 돼서 잘 살아주면 되는게 아니였나.” 나는 동생을 애면글면 뒤바라지 해줬기에 배신감이 더 들었는지도 모른다 "좋은 대학을 졸업했더면 지금쯤은 좋은 직장에 출근하고 떵떵거리며 살수 있지 않겠어. 지금처럼 고중만 졸업하고 시골에서 선생질하다가 백수가 되는 일은 없지 않겠어. 바보 팔푼이라구. 저 절로 제 눈을 찔렀지. 그 년대에 대학생이 얼마나 받들렸는데." 나는 아무리 생각해도 바보짓을 한 동생이 야속하기만 했다 . 그렇게 가시든 내 살점처럼 아픈 내 남동생, 그런 동생의 간절한 부탁으로 동생몫으로 가게를 하나 더 내서 동업하였다. 그런데 하늘이 무심치 않아서인지 기댈 언덕이라곤 없는 우리 남매에게 대박이 터질 기회를 주었다. 적은 돈으로 시작해서 열심히 한 장사가 몇해 안되는 사이에 눈덩이처럼 불고 불어 우리가 생각하기에도 어마어마하게 커져버린것이다. 때로는 어린 자식들을 조롱조롱 넷씩이나 둔채 너무도 일찍 하늘나라에 가신 아버지가 저 세상에서 우리 남매를 돕는게 아닐가? 하는 엉뚱한 생각이 들 정도로 말이다. 누가 그저 부조해 주듯이 해석이 불가능한 어떤 힘이 우리를 돕는듯 말이다. 이런걸 행운이라 하지 않을가? 아마 행운에도 이런 행운은 더없을것이다. 완전히 로또에 당첨되면 이럴가. 그야말로 나도 대박, 동생도 대박이라 내가 마음 잘 쓴 대가를 톡톡히 받아낸 행운의 로또당첨자같았다. 장사가 잘 된날은 온 저녁 달콤한 마음에 생각할수록 고맙고 또 고마웠다. 래일 또 이런 마음에서 우러러나오는 고마움으로 가득 차면 좋겠다. 집평수도 늘이고 자동차도 사서 반평생을 홀몸으로 우리 사남매를 키우시면서 고생하신 어머니를 모시고 고향벌의 저기 끝까지 씽씽 달려보고도 싶었다. 매일 퇴근한 뒤엔 모아산에 올라가 시원한 공기도 마시며 여유도 즐기고 싶고 내 힘 내 능력으로 열심히 벌어서 사고싶은 모든걸 다 사고 싶다. 돈 많이 벌어서 내 인생의 가치도 실현하고 내 부모형제의 언덕이 되여주고도 싶다. 장사에서 대박이 터져서 자금이 풍족한데다 머리가 좋은 동생이 좋은 아이디어를 자꾸 대주고 나에게 경험까지 좀 있어서 그 뒤에도 장사는 계속 즐거움의 련속이였다. 이렇게 우리 남매는 자그마한 가게장사군으로부터 이제는 사업가로 불릴만하게 발돋음을 한 셈이다 그때 만약 동생을 "애물단지 보따리"로만 보고 외면하고 내쳤더라면 그리고 동생한테 도움의 손길을 내밀지 않았다면 어쩌면 나는 지금까지도 그냥 한달에 삼사천원이나 버는 작은 가게장사군으로 만족하는 삶을 살았을지도 모른다. 지금와서 되돌아보니 동생은 그야말로 "보배단지” 보따리가 되고 내 인생의 귀인이 된것이였다. 이런 생각이 나에게 세상을 다시 보는 계기가 되여서 나는 시골에 있는 오빠들도 모두 같은 방식으로 도와주면서 살았고 그 길에서 또 우리를 도와주는 많은 귀인들을 만났다. 결국 내가 덩달아 톡톡히 혜택을 본셈이 되는것이다. 그래서 지금 나는 늘 감개무량하게 지인들과 얘기한다. 못 사는 부모형제들일지라도 절대로 그들를 외면하지 말라고. 그들이 꼭 당신이 상상할수도 없는 복을 가져다줄것이라고. 세상은 꼭 그렇더라고. "덕은 쌓은대로 가고 죄는 지은 대로 간다”더라고. 오늘도 나는 내 가족을 위해서 내 능력을 아낌없이 쏟아부을것이다. 꼭 축복받는 인생을 선물받으리라는 기대보다도 온 가족이 행복하니 내 마음도 더 없이 행복하니깐말이다. 가족과 함께한 책임감이 오늘날 내 성취의 황금열쇠가 아니였던가? 여기까지 쓰고 나니 머리속에는 이런 시구가 저절로 떠오른다. 팽개치고 싶은  보따리 외면하고 싶은 보따리 어쩔수 없는 내 몫이라네 무거운 보따리 힘겹게 지고  높은 산 오르느라 불만이 얼마였던가? 하지만  보따리덕에 마음씨 좋은 동행자들 돕고 도우며 산마루에 올랐거니 굽어보니 혼자 오르는 이들  까마득히 산중턱에서 헤매고 산밑에서 맴돌더라 정상에 이른 동행자들  감지덕지 하였노라 애초에 내동댕이치지 않은 보따리를 두고
10    풍년든 전야를 바라보는 농부의 심정이 얼마나 흐뭇할가? 댓글:  조회:2146  추천:8  2019-11-16
  한밤에 놀라 깨여났다. 찜통 더위때문인지 어떤 꿈을 꾸었던지 그렇게 잠을 깨고보니 다시 잠이 안온다. 이리뒤척 저리뒤척… 잠이 안오는 깊은 밤에 이런 저런 생각들을 떠올리다가 두서없이 적어본다 . 얼마전 고중입학시험을 치른 딸애가 있는 나는 그 시험을 거치면서 참 많은것을 경험했다. 시험이란것은은 정말 독이 있는것같다. 시험날 아침, 나는 일찍 일어나 새벽시장에 나가서 찰떡을 사다가 딸애가 붙고저하는 중점고중 대문에 척 붙혀놓았다. 그뿐만이 아니다. 시험기간 내내 꽃만 피면 그 꽃이 모두 다 열매를 맺는다는 가지를 사서 료리를 해서 먹이고 며칠 내내 시험장에 따라다니면서 학부모로서 할수있는 모든 노력을 아끼지않았다 . 시험을 치고 나서는 성적이 발표되기를 애타게 기다리고 또 록취점수선이 나오기까지 너무도 바질바질 속태웠다. 다른집애들이 시험쳤다는 소식을 전해들을땐 시간이 빠르기만 하더니 막상 제집애가 시험치니 이렇게 느릴까? 사람은 이런 고비에 너무 속태워서 폴싹폴싹 늙는것 같다. 애도 몹시 속타는 모양이였다. 이런 애탄 과정에 이런 시점에서 나는 애를 타이르는걸 잊지 않았다. 어쩌면 딱 요런 시기에 이런 타이름이 더 효력이 있을지도 모를일이니깐 “대학시험칠때엔 제발 이런 속 태우지 말게 시험을 좀 더 잘 쳐달라.”고 절절하게 부탁했다. 애도 엄마가 속태우는게 안스러워서인지 아니면 깊이 깨달았는지 그래야하겠다고 선선히 대답한다. 그 대답이 시원하여 삼년뒤에 대학시험은 정말 속 태우지 않아도 될것처럼 믿음을 주는 애가 고맙기까지하다. 하지만 솔직히 나는 애가 평소에 기초가 좋기때문에 자기성적으로 꼭 붙을것이라고 예산은 했지만 그래도 록취선이 어떻게 나올지는 모를 일이여서 장담은 하지 못하고 마음속으로 꼭 붙을수 있기만을 간절히 기도했다. 록취선이 나온뒤에야 애는 해방되였다. 나도 같이 해방받았다. 가장의 정성이 하늘을 감동시킨건지, 아니면 애 실력이 그래도 좋은 편이여서인지 록취선을 훨씬 넘긴 성적으로 그렇게 붙기 바쁘다는 중점고중에 붙었다. 진짜로 날듯이 기뻤고 세상을 다 가진듯 행복하고 뿌듯했다. 정성으로 자식 키워본 이들은 다 알것이다. 여기가지 오기가 얼마나 쉽지 않은지를. 돌이켜보면 오늘 기쁨의 미소를 짛을수 있기까지 얼마나 많은 가장의 피타는 노력이 숨어있는지 모른다. 그동안 참 많이 애간장 태우고 마음 졸이고, 속상하고, 노하고, 기쁘고, 슬픈 과정을 모두 겪었었다. 애가 원하는 중점고중에 붙었다고 말하면 지인들 모두 "공부 잘 시켰네." 하면서 마음으로 축하해주는데 그때는 정말 뿌듯하다. 그런데 애가 좋은 학교에 붙어서 행복을 느끼는건 그 며칠뿐이다. 개학날, 입학생들의 학부형회의를 마치고나니 또 앞으로 관건적인 고중삼년을 어떻게 공부도 잘 시키고 인간성도 좋고, 다른 필요한 소질을 잘 구비하게 교육해야 할지, 학부모로서의 책임감 때문에 고민이 더 많다. 앞으로 삼년, 애들의 인생에서 또 한번의 고비라면 고비라는 생각에 마음이 벌써 무거워진다. 그래서 한주일씩 숙사에 가있고 주말마다 오는 애가 그동안 어떤 일을 겪었으며 어떤 애들과 어울리는지, 어떤 생각들을 하는지를 늘 체크한다. 그리고 이번 주말에 만나면 요것은 꼭 각인시켜야겠다는것들, 어떤 것은 확실하게 심어줘야겠다는건 꼭꼭 메모해 놓는다. 어디에서 들은 얘기들도 애한테 필요한 교육같으면 꼭 메모했다가 들려준다. 그러나 엄마가 너무 길게 말하면 아이는 아예 시끄러워 들으려하지도 않는다. 사춘기여서 그렇겠지, 때론 기대 이상으로 눈물나게 감동을 주기도 하고 때론 때려주고싶을 정도로 정 떨어지게 쌀쌀 맞기도한 럭비공같은 사춘기애들, 가급적이면 최대한 간단명료하게, 하지만 머리에 깊은 여운이 남게 새겨듣게 얘기해줘야 할것이다 . 그래서 애를 키우면서 나 자신이 더 어른이 되는 같기도 하고 철학가가 되는같기도 하다. 애가 성장하는 과정이 또한 나의 성숙과정이기도 하다. 겸손해지고 배려할줄 알고 마음이 여유로와지고 용서를 배우는 과정, 그런 과정의 연속이다. 또한 즐거운 추억의 한 페이지 한 페이지이기도 하다. 돌이켜보면 딸애는 그래도 나를 흐뭇하게 해줄때가 더 많은것 같다. 딸과 나는 종종 이런식으로 대화를 한다. 엄마: 너 고중에 가게 되면 아이들이 모두 각 학교에서 뽑힌 우수한 애들이라 "산위에 산있고 하늘밖에 하늘 있다.(山外有山 天外有天)"는걸 터득하게 될거다. 딸: 학원에 다니면서 여러 학교에서 온 애들과 어울렸기에 나는 언녕부터 그걸 느꼈슴다. 엄마: 이번에는 시험을 잘 쳐서 장학금을 탔는데 어쩌다 한번 말구 쭈욱~ 잘 치기 바란다. 류성이 되지 말고 항성이 되거라.(不要当流星,当恒星吧.) 딸 :알았어유. “OK” 엄마: 전번에 니가 길에서 만난 갸가 예쁘던데 공부는 잘해? 딸: 그 애는 공주병두 있구 자기밖에 모름다. 공부는 잘함다. 하지만 모를 문제를 물어보면 알아두 모른다구 함다. 엄마: 자사자리하군 ... 딸: 학교에서 운동회 하는데 엄마가 좀 음료랑 풍막이랑 협찬해주쇼. 엄마: 그러지 뭐, 너희 반 애들 가장중에 엄마보다 경제력이 더 좋은 사람이 많을거다. 엄마는 돈이 많아서 협찬해주는게 아니야, 너한테 좋은 본보기 보여주기 싶어서지. 없어도 나눌줄 아는 사람, 책임감이 있는 사람이 되거라. 앞으로도 니가 능력 있어야 없는 사람들을 보살펴 줄수 있단다. 꼭 많이 배워서 베풀수 있는 여유있는 사람이 되거라. 딸: 엄마, 숙사에서 뻐스타구 오는 길에서 이런 글을 봤는데 참으로 음미해볼만해요. "당신이 인물이 될지 페물이 될지는 당신이 지금 뭘 하는가에 달렸다.(你是人物, 还是废物, 看你现在干什么.) " 엄마:와 ~~ 대박 멋있네 ! 엄마: 이젠 반에서 간부하지말고 공부만 열심히 잘하자. 좋은 대학에 가려면 이제부턴 공부에만 올인해야 돼 . 딸: 아니요 난 어릴때부터 리더십을 배우고 싶어요. 성취감을 느끼며 살고싶어요. 엄마인 내가 흐뭇한 미소를 짛는다. 내가 이 멋에 산다. 애가 이렇게 훌륭하게 성장하는 과정을 지켜보는게 나에게는 천금가는 향수이다. 요즘엔 또 "혜영이는 뭘 자꾸 자랑함다. 할아버지는 산이 있다구 자랑, 언니는 일본회사에 출근하는데 노트 3 두 사주구, 카메라두 사주구, 핸드폰은 몇천원 짜리 쓰구, 엄마 아빠는 한국에 있는데 한주 소비돈은 몇백원씩 가지구. 그래서 난 소박한 한족애들과 놀기 좋슴다."라고 덧붙힌다 . 언제부터 아이콘 사달라고 투정질하는걸 이 구실 저구실 대면서 안 사주니 억지는 쓰지않고 엄마를 설복하려고 진지하게 얘기하니 내 마음이 좀 알싸~해났다 . 좋은 학교에 붙은 상으로 사줄만도 하건만 그런식이라면 앞으로 모든게 그런식으로 대가를 요구할가봐 그저 아무런 의미도 붙이지않고 그냥 슬쩍 사주는게 나을것 같아 적절한 시기에 알아서 사주려고 시치미 떼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날 함께 합숙하는 애가 모든걸 다 그것도 다 좋은 브랜드가지고 유용하고 령활하게 그리고 저절로 잘 절제하면서 이용하는걸 본뒤 나절로 설득되여 두말없이 사주게 되였다. 안 사줘도 억지는 쓰지 않고 최대한 부모를 설득해보려는 딸애의 마음이 기특하기도하고 대견스럽기도 하고 이런 제품을 잘 다루는것도 공부라면 공부일것 같아서 또한 그냥 시대 떨어진 책벌레로만 되지말기 바래서 공부도 잘하고 다른 모든것 즉 종합사유능력, 세밀한 분석력, 정확한 판단력, 차분한 인내력, 좋은 기질, 좋은 성격, 좋은 생활습관, 자신감… 모두 다 잘 구비한 따분하지않고 해박하면서도 지혜롭고 행복한 아이로 자라길 바라는 마음에서… 이것이 또한 부모가 자식에게 물려줄수있는 천금보다 더 값가는 재부가 아닐까 ? 아이폰을 사주니 그렇게 좋아하던 딸애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사줄수 없는 형편도 아니건만 저렇게 좋아하는걸 뒤늦게야 사준 미안함에 나는 혼자 조용히 눈물을 흘렸다. 내가 애한테 참으로 지독하게 굴었구나, 애가 공부에 올인하길 바래서 독하게 마음 먹구 안사줬는데 이렇게 나를 마음이 아프게 하다니! 한편 내 기대에 어긋나지 않게 소박하면서도 반듯하게 멋지게 잘 자라준 딸애가 대견하고 흐뭇하다. 아무튼 부모된 립장에선 나름대로 애가 훌륭하고 우수하게 잘 자랄수 있게 최선을 다할수밖에… 다음은 애들 자신의 몫이겟지. 애를 키우면서 부모는 진짜 애들의 좋은 본보기여야 되겠다는걸 내 세포하나하나로 깨닸게 된다. 아이들의 거울인, 모델인, 본보기인, 우리 부모부터 만물의 근원인 뿌리부터 변하자. 쇼를 해도 좋고 다 좋으니 제발 우리 부모부터 행실 바르고 마음 바르고 이 사회, 이 시대에 아이들에게 뒤떨어지지 않는 소질이 있고 품위가 있고 인간성이 좋은 부모로 거듭나자. 행복을 느끼는데는 각자 추구에 따라 여러가지가 있다. 서로 잘 맞는 부부로 만났다던지, 사업이 번창 하다던지, 벅찬 명예나 권력을 가졌다던지, 부모복, 형제복, 친구복이 있다던지… 물론 다 중요하구 다 갖고 싶다. 하지만 변화무쌍한 이 시대에 잠 자고 나면 또 변하고 사람마음도 갈피 잡을수 없이 복잡다단하지만 그 중에서도 꼭 붙잡아야 할 핵심이 있다면 자식교육만은 절대로 소홀히 할수 없다는것이다. 애들 교육만큼만은 "무식"하지않은 "유식"한 부모가 되자. 나도 어쩔수 없이 “소 팔아 공부시킨다.”는 우리 조선민족의 피줄을 그대로 고스란히 물려받았나 보다. 이 시각 풍년든 전야를 바라보는 농부의 심정이 얼마나 흐뭇할까하고 상상해본다. 우리도 한번 대지의 그 풍요로움을 만끽해보자. 우리 다 같이 "자식농사" 잘하는 "실농군"이 되여 오곡이 무르익는 그 가을엔 감사한 마음으로 수확의 열매를 한껏 즐겨보자. —————— 최선숙 (崔善淑)   필명:은주(殷朱) 中国 길림성 화룡 출생   연변대학 조선언어문학학부 연변과학기술대학AMP 제1회 로신문학원 연변창작강습반수료 "내 삶의 보따리" "자식농사" "배신 "등 수필 소설 시 20여편발표. "열혈모녀 축구팬 "   해란강닷콤 우수상.  “정향숲을  찾기까지”  제5기 중국조선족 효사랑글짓기 공모 우수상 문학블로그:  邮箱:18844309877@163.com 핸드폰: 18844309877
9    동네 아이 댓글:  조회:1333  추천:0  2019-11-16
"친엄마가 아니예요?" 딸애는 종종 의문스럽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나에게 이런 질문을 던진다. 그때마다 나는 "응? 어떻게 알았지? 내가 고아원에가서 건강하고 나 닮은 너를 데려다 입양한줄을." 이렇게 짐짓 정색해서 되묻는다. 그러면 딸애는 "거짓말, 그럼 사람들이 왜서 나를 엄마 꼭 빼 닮았다 해? 난 엄마 친딸이야." 말이 났으니 하는 말인데 나이 삼십이 다 되여 딸애를 본 우리는 애가 그렇게 귀여울수가 없었다. 쥐면 부서질가 놓으면 날아날가? 금지옥엽으로 키우면서 애아빠도 나도 다 애한테만 사랑을 쏟고 애가 없었던 나날들은 어떻게 살았던가 싶을 정도로 아기에게 엄청 집착하였다. 뒤늦은 아이의 탄생은 그 전에는 상상하지도 못했던 완전히 다른 즐거움과 쾌락을 안겨주어 우리는 세상의 행복을 다 가진것처럼 만족하며 살았다. 그러던 어느날 고중 다닐때 한 숙사에서 제일 가깝게 보내던 동창생이 상해에서 연길로 출장왔던 길에 아기도 볼겸 그 동안 헤여져 살았던 회포도 풀겸 겸사겸사 우리집에 와서 며칠 묵어가게 되였다. 친구는 그동안 애 키우는데 아직은 천방지축인 나를 도와 이런저런 자질구레한 일들을 거들어주면서 자기가 먼저 애를 키워보았노라고 이런 저런 주의점들을 말해주면서 친정언니인양 자상하게 잘 알려주었다. 기저귀도 매일 깨끗하게 씻어서 꼭 땡볕에 말리워 소독시켜 주고 태교때처럼 아기한테 늘 은은한 음악을 띄워주어 감성을 키워주고 아기방은 구석구석 늘 깨끗하게 청결해주고 방안을 늘 시원한 바깥공기로 환기시켜줘야 한다고 했다. 그러던 어느 하루 아기가 너무 이뻐서 물고 빨며 좋아서 어쩔 줄 모르는 우리부부를 보더니 나에게 이렇게 따끔한 충고 한마디 했다. "애가 돐이 지나면 옷가게를 다시 시작하겠다하면서 애한테 너무 살뜰하게 굴지마. 그렇게 해야 이제 애하고 떨어져 출장다녀도 너도 애도 다같이 적게 힘들거야." 그때에는 다는 리해하지 못했지만 그 말에 어느 정도 도리는 있는것 같아서 나는 차츰 많이 아쉽지만 많이 자제하고 의식적으로 조금씩조금씩 거리를 두고 키웠다. 그렇게 어느덧 애는 한돐이 지나고 나도 가게에 나가 장사를 다시 시작하게 되었다. 의류업에 종사하는 나는 한달에 한번씩은 꼭 외지에 물건구입을 다녀야 했다. 돐이 지나서까지 모유수유했던 애를 집에 떼두고 외지에 출장갔는데 이것 참, 글쎄 때때로 "살인"미소로 쓰러지게 만들고 옆에서 살갑게 굴던 딸애가 눈에 삼삼해 미치겠는데 애를 먹이던 젖까지 띵띵 부어서 참기 어려울 정도로 아파나 죽을 지경이였다. 한쪽으로 짜버릴수록 점점 더 불어나는 젖때문에 갔던 일도 제대로 보지 못하고 몸도 마음도 지칠대로 지쳐서 이튿날 곧바로 집에 돌아올수 밖에 없었다 그렇게 지금 생각해도 가슴이 저려나는 잊혀지지 않을 고생을 하며 집에 돌아와보니 애는 다행히 아무일도 없이 태평무사하게 할머니와 짝짜그르르~ 쾌활하게 잘 놀고 있었다. 그 친구의 말이 감동으로 안겨오는 순간이였다. 과연 애와 사이를 두고 키웠더니 엄마가 출장가도 크게 의식하지 못하고 평소처럼 유쾌하게 잘 놀고 있었던것이다. 얼마나 그 친구한테 고맙던지. 그 때에서야 그 친구의 한마디가 얼마나 나와 애한테 도움이 되는가? 절실하게 느끼게 되였다. 그 뒤에도 늘 출장이 잦은 직업이여서 나는 그 친구의 말을 잊지 않고 애한데 시종일관하게 그 원칙을 고집하며 키웠다. 그 덕에 지금은 "엄마가 오늘 한국에 물건구입 갔다 와, 한주일 걸릴지 모르겠어, 그 동안 집에서 애 먹이지 말고 잘 노세용"하면 딸애는 "그래요, 엄마 무사히 잘 다녀오세요" 하면서 뒤도 돌아보지 않고 자기 놀음에 빠져 논다. 순간 조금은 섭섭하지만 그래도 "엄마 가지마, 보고싶어 안돼."하면서 칭칭 매달리며 떨어지지 않으면 우리 모녀는 서로 엄청 더 힘들것 같다. 며칠 출장중에 차분하게 처리해야 할 일들을 잘 처리하고 돌아와도 "엄마 그 동안 그리웠어."하며 감겨드는 다른 집 "공주"나 "왕자"들과는 다르게 무탈하게 아빠랑 할머니랑 동네 이웃들과 잘 보내고 있었다. 그렇게 어릴때부터 둥글둥글 성격 좋게 동네의 누구나 잘 어울려서 "동네아이" 라는 이름까지 가지고. 그렇게 애가 크는 동안 나는 늘 애를 마음으로만 이뻐하고 겉으로는 무관심인척 키우고 있다. 저녁 늦게 돌아와도 그때까지 기다리며 자지 않으면서도 자는 척, 아침에 학교갈때 "내 새끼 장하다. 오늘도 화잇팅 !"하고 싶으면서도 짐짓 다른 일 보는 척, 무덤덤하게 "잘가..." 좀 컨디션이 좋지 않은것 같으면 출근해서 온 하루 애 걱정에 일이 손에 잡히지 않는 나, 큐큐에 올리는 글을 어느 하나 빠뜨리지 않고 제일 먼저 읽어보고 학교에서 친구사이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 세부까지 속속들이 꿰고 있는 나, 대학진학을 앞두고 어떤 학교 어떤 전업이 평생에 혜택을 입을수 있는 전공일지? 만나는 사람마다 좋은 조언을 요청하는 나는 영낙없는 친엄마이건만. 겉보기에는 다른 집 엄마들처럼 섬세하지도 살뜰하지도 못하고 늘 랭혹하고 엄격한 나를 보며 아주 많이 "엄마, 친엄마가 아니지요? 친엄마 맞어?"라고 의혹에 가득 차 묻는 딸. "그래 맞어, 나는 친엄마가 아니야, 너는 저기 고아원에서 입양했거든." “그런데 왜 난 엄마를 꼭 빼닮았어요?" "엄마가 나를 닮은 애를 뽑아서 데려오다나니 나 닮아보이는거야." 딸애는 허허 웃으면서 "쳇, 엄마 언제부터 거짓말 이렇게 잘해 " 종종 낯설게 굴고 차갑게 구는 내가 친엄마인게 도무지, 믿어지지 않는 모양이다. 그러다 우리모녀는 하하하~ 웃음보를 터뜨린다. 애는 늘 "친엄마가 어찌 이럴수 있냐?"고 애매하다는 표정이다. "나의 이런 무관심속에서 너는 홀로 서기 달인이 되였잖아." 딸애가 열아홉살 되는 해에 나는 딸애에게 나의 그 동창얘기를 해주었다. 깜짝 놀라는 눈치더니 "네가 알다싶이 엄마가 늘 출장해도 그 친구의 충고대로 마음으로만 이뻐했기에 너는 이렇게 무난하게 잘 커줬단다."고 말했다. 눈 깜짝하지 않고 듣던 딸애가 어른처럼 리해된다는듯 "의미심장"하게 고개를 천천히 끄덕인다. 다시 생각해봐도 정말이지 그 말 한마디의 혜택을 나는 평생 입으며 살았다. 그래서 애를 힘들이지 않고 무난하게 참 잘 키울수 있었다. 덕분에 딸애는 앞으로의 대학생활 회사생활도 거뜬하게 보낼수 있을것같다 . 나도 또 많은 샐러리맨후배엄마들에게 "힐링육아"에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라고 이 경험을 얘기 했었다. 지금 생각해도 나의 상황엔 그 말이 참 적시적인 보약이였던것 같다. "고마워 친구야, 나 두고두고 이 은혜 잊지 않을게. 그리고 꼭 이 '원쑤'갚을게."
8    알랑방구 딸애의 성장 노트 댓글:  조회:1385  추천:0  2019-11-16
1탄 어디선가 이런 말을 들은적있다. 부모는자녀를 키우는 과정에서 이미 재미와 즐거움을 만끽하였기에 다 큰 뒤엔 자식한테서 뭘 더 바라지 말라 이말은 도리가 있는것 같다. 그러나 애를 키우면서 그래도 뭔가 희망을 품고 바라며 사는 삶이 행복하지않을가? 하는 미련을 떨쳐저릴수 없다.애들 때문에 더 많이 벌고 싶고, 더아끼고 싶고, 다 해주고 싶은 것이 부모마음이 아닌가? 학교의 운동대회나 학부형회의 때는 학부형들이 가게에 와서 옷들을 잘도 사간다. 자기집 애들이 부모님들이 옷을 잘 입고 오라고 신신당부 해서 그런단다. 그래서 나도 한번 애와 물어본적이 있다. "엄마도 학부형 회의때에 멋지게 차려 입구 갈까?" "괜찮아요, 옷가게 하는 엄마는 언제 봐도 멋지니까." 엄마기분을뛰워 줄줄 아는 딸애의 능청스러운 대답이다  "좋네, 엄마 기분 짱이야." 나 또한은근 슬쩍 받아 주고. 하긴 요즘은 부모들은 거의 외국에 나가 있으니 학부형회의에 가보면 거의 다할머니나 할아버지들께서 오시다 보니 그냥 젊다는 리유 하나만으로도 될 것 같았다  예쁜 옷까지 굳이챙겨입지 않아도 애 눈에는 엄마가 제일 멋질 법도 하지. 헌데 어제는 별 생각 없이 애 만나러 학교에 갔는데 낯선 사람 보듯이 눈이휘둥그래서 엄마를 바라본다. 왜 냐고 물었다. "엄마 오늘 너무 멋져." 그런 멋진모습을처음 보는듯 탄성까지 지르면서... 그러고 보니 오늘 좀 차려 입긴 했었다. 나는그저 피씩 웃고는 이렇게 말을 받았다. "그래, 멋진 엄마가 너 보러 오니 기분이 어때?” "넘 좋네." 딸애가 히쭉웃으며 엄지 손가락을 내민다. 우리는 히히 호호 웃으며 같이 밥먹으러 학교 부근의 음식점에 갔다. 밥 먹으면서도 처음으로 그렇게 많은 속심 얘기, 학교 동학들 얘기, 선생님 얘기들을 한다. 다 먹은 뒤 나와서 학교대문까지 같이 가면서반에 동학들도 몇 명 만나게 되였다. 딸애는 자기 동학들에게 엄마라고 이전과는 다르게 주동적으로 그리고 그처럼 자랑스럽게 인사시켜 주었다. 제 엄마가 무슨 시위서기라도 되는것처럼. 덕분에 나도 애들과 한참 서서 몇마디 즐거운 롱담도 하고... 애와 헤여지고 차에 앉아 집에 돌아오면서 마음이 얼마나 즐거운지 모르겠다. 애들한테 자랑스레 소개해주던딸애의 그 표정때문에 아마 난 며칠동안, 아니 몇달동안 기분이 좋을것 같다. 앞으로 딸애의 그 자랑스러운 표정을 위해서라도 더 예쁜 엄마가 돼야 될겄같네. 부모를 울리고 웃기는 새끼란 뭐길래? 2탄 요즘 슬그머니 후회하고 있는 한가지일이 있다. 개학초부터 고중 2학년에 다니는 딸과 이런 계약을 체결했던 것이다.  "이제 대학에 가면 너절로 돈을 계획적으로 써야 되기에 달마다 한달치의 소비돈을 한꺼번에 다 줄테니깐 이제부터 이렇게습관하구 적응해보자." 이렇게 애와 토론하고 설득하고 옴니암니 격렬한 흥정끝에 한달 소비돈 겸 식비를 1000 원으로 결정하고 매달 은행카드에 입금시키기로 약속했다. 그런데 웬걸 줄돈을 다 주니 그동안 돈이라도 달라고 자주 걸려오던 전화기가아예 벙어리로 되여버렸다 적게 자주 줄때는 그나마 대화라도 할수 있었는데 이렇게 되니 이젠 아예 소식두절이 되여 버렸다. 애초 그 계약이 후회되여서 내가 또 먼저 다시 고치자고 제안 했다. 고려할사이도 없이 안된다고 딱잘라 말하는 따님, 돈이라도 달라고 전화할때가 좋았는데, 울며 겨자 먹기로 속수무책이되여 속맘 끙끙 앓고 있는데 어느날 아침일찍 따님한테서 걸려오는 전화벨소리! "엄마 은행카드를 도저히 못찾겠어, 저녁에 퇴근뒤에 돈 좀 갖다주라." “얼씨구~절씨구~”, 딸님 만날수 있어 좋구 좋네. 이제 카드 내가 먼저 찾아서 아예 꽁꽁 숨겨버려야겠다. 내가 자식키워보니 자식 타향에 보내놓고 그리워하는 부모님들의 그 마음을 그나마 알것같다. 3탄 아침에 딸애가 학교가면서 혼자말로 중얼거린다. "이번 운동대회는 장거리달리기를 하자 말아야겠어, 등수에도 들지 못하는데." "너무 등수에 연연하지 마, 등수에 드는건 별문제야 참여가 중요하지." 이 말에나는 제꺽 동을 달며 이렇게 받아 말했다. 그리고 하마터면 급하다 못해 이번 달리기에 참여하면 엄마가소비돈도 더 많이 주고 상까지 주겠다고 말해 또 한번 다른 나쁜 습관을 키워줄뻔했다. 선생님이나 동학들 립장에선 등수에 못들면 많이들 아쉽겠지만 딸애의 앞으로의 인생에는 하나의 경험이 되고 얼마나 좋은 자신감의 바탕이 될지 잘 알기에 엄마인 나의 욕심에서볼 때 도시락 사들고 다니며 응원해주고 싶은 일이다 요즘 다 큰 딸애를 지켜보면서 아쉬운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분명 내 잘못이 더 큰것 같아 후회막급이다. 늘 일이 바쁘다는 핑계로그때그때 바로 잡아 줬어야 할 부분들을 바로 잡아 주지 못한 후회로 지금은 몇 곱절 더 공력을 들여야 그런 습관을 고쳐줄수 있지않을까? 하는 생각들을 하게 된다 ■ 일단은 아침 일찍 잃어나는 습관, 달리기나줄뛰기 운동을 견지하는 습관을 했더면 좋았을걸. ■ 편식하지 말고 여러가지 음식을 다 잘 먹을수 있게 키웠어야 했을걸. ■ 낮에 학교 가서는 이런 저런 애들과 잘 어울릴수 있는 좋은 성격의 소유자로키웠어야 했을걸. ■ 어릴때부터 애에게 그 년령때에 맞는 동요 동시 동화를 읽어줌으로써 일찍부터애의 감성을 키워줬어야 했을걸. ■ 어릴때부터 이곳저곳 유람을 다니면서 애한테 앞으로 커서 자연의 오묘와더불어 넓은 흉금을 가질구 있게 했더면 좋았을걸. ■ 부모의 존엄 즉 애들이 부모가 무서운 줄 알게 키웠어야 했을걸. 곱다구만 어루 만지며 키워 가지고 집집마다 애들이 왕이요 밖에 나가면 안하무인.애들이 어린 집 학부모들은 부디 나같은 유감을 남기지 말길 바라는 마음이다. 4탄 방학동안엔 여행을 다녀오자고 너무나도 닥달해서 그 성화에 못이겨 딸애와 한국행을떠나게 되였다. 평소엔 제법 컸느라고 엄마인 나의 말을 무시할때가 참 많았다. “무릎아래 자식”이라고 어릴때 잘 길들였어야 되는데 이제 훌쩍 크고보니부모의 눈으로 볼바엔 하는 일들이 어이없고 눈에 거슬릴때가 참 많다. 그런데 요즘은 상황이 좀 다르다 처음 같이 여행을 떠나다나니 곰상곰상 엄마말을 들을수밖에 내 지휘를 들을수밖에 없었다. 생각하면 속으로 웃음주머니가 흔들흔들했다. (이 참에애한테서 그 동안 무시당한 봉창을 든든히 해야지. 나 원 깨 고소해서 못살겠네.) 특히 비행기표 끊는 일부터 나는 모든 여행과정진행을 애한테 맡겼다. 정확히 비행기표 끊은날부터 딸애는 설걷이 하라면 설걷이 하고 채소사오라면 채소 사오고 방바닥 닦으라고 해도다 하고 옷장정리와 기타 심부름을 싫단 말을 안하고 곰상곰상 다 해줬다. 길 떠나서 주의해야 할 일상상식들을말해주면 귀가 솔깃해서 듣는다. 예전과는 완전 다른 딸애의 모습을 보면서 나는 진짜 저렇게 원하는걸못해준 자책감도 어느 정도 들었다. 요즘은 애들 교육을 위해서 이런저런곳에 데리고 다니며 여행하는 가족들이 많은데 나는 늘 시간에 쫓기다보니 애 데리고 려행 한번 못갔으니 애한테 여간만 죄스럽기 그지없다. 그래서 떠나게 된 여행로정은 연길에서 기차로 심양까지 가서 다시 심양도선공항에서 인천으로, 올때는인천공항에서 북경공항으로 북경에서 삼박사일 명승고적 즉 력사공부 좀 시키고 연길로 돌아오기로 일정을 잡았다. 여행떠나는 날에도 나는미리 두시간 전에 기차짬에 데리고 가서 기다렸다. 한시간 전인줄 알고 따라왔던 딸애는 너무 일찍하다며툴툴댄 뭐나 미리하기 좋아하는 습관이 있는 나는 애한테도 뭐나 확실하게 하는 습관을 심어주고 싶어서앞으로 혼자 하는 여행도 미리미리 다니게 하고 싶어서 일찍 나왔었다. 여행하는 내내 모든 일은 애한테맡기고 내가 도리여 애마냥 따라다니기만 했다. 누구처럼 "바보엄마 역할, 무식한 엄마 역할, 나약한 엄마 역할"을 완벽하게 소화해냈다. 딸애는 여기저기 뛰여 다니면서 앞으로혼자라도 아무데나 다 찾아 다닐수 있게 모든 일들을 척척 잘도 해나갔다. 때론 네가 엄마를 무시할만도하겠다는 생각까지들 정도로. 다 키워놓았구나 하는 뿌듯함까지 들게 한다. 이번 여행은 나와 딸, 모두에게 즐거운 힐링이 되였다. 그리고 돌아오면서 (다시 연길에 가면 애는 열심히 공부할거고 나는즐거운 일터에서 재부를 창조, 돈을 많이 벌어야 되겠다.)라고다짐했다. 힐링하고 왔으니 새로운 목표를 위해 오늘부터 빡세게 일하자. 아자!아자!화잇팅!
7    열혈모녀 축구팬 댓글:  조회:855  추천:0  2019-11-16
열여덟살 딸아이 라디오에서 나는 축구 승전 소식을 들으면서 슬그머니 눈물을 훔친다. 어김없는 이 엄마의 모습이다. 나는 쓰윽~ 웃으면서 "너 우는거야 허허~" 딸애는 "네에~진짜 감동입니다" 한다. 그러면서 "엄마, 이번주 토요일 축구표 석장을 끊어주세요, 친구들 같이 응원을 가겠습니다. 엄마, 스티브 선수의 싸인을 받고 싶은데 무슨 좋은 방법이 없을까요? 엄마 인맥 다 동원해 보세요"라고 한다. 고중2학년인 딸애와 나는 축구때문에 울고 웃는 열혈모녀축구팬이다. 딸애는 요즘 스티브선수의 싸인을 받겠다고 엄마를 못살게 굴며 온갖 애교를 다 부린다. 전번날 북경 북공과의 홈장경기에서 5:0 으로 이겼을때 일이다. 나와 딸애는 축구경기 내내 너무 박수를 쳐서 손바닥이 다 얼얼해나고 너무 좋아 목청껏 웨치다나니 상반전에 이미 목이 다 쉬여버려 후반전부터는 안타깝지만 소리도 못치고 그저 두손을 높이쳐들고 기립박수로 환호하고 응원할수밖에 없었다. 목이 아프고 쉬여서 허스키한 목소리로, 맥이 없을때까지 딸애는 계속 응원했다. 그래도 애들은 애들이다. 그날 돌아와서 며칠동안 목캔디를 쭉~ 먹고서야 목상태가 좀 나아졌다 . "2륜 앞당겨 슈퍼리그에로의 진출!" 라디오에서 일년 내내 안타깝게 조바심을 태우며 기다리고 기다리던 좋은 소식이 전해진다. 박태하감독은 매체에서 “우승과 준우승은 의미가 다르다”고 한다. 어느새 코등이 찡~해나고 눈가에 눈물이 핑~돈다. 이런 알싸한 감정이 어디 나뿐일가? 29륜 경기때 보라. 눈물범벅이 되여 구경하는 관람자들을, 지금 생각하도 속이 뭉클하다. 예로부터 축구는 우리 민족의 자랑이였다. 특히 연변축구는 명실공히 우리 연변 조선민족의 자존심뿐만이 아닌 지구촌 조선민족의 자부심이다. 하기에 조선민족이라면 세계 어느 나라에서 생활하든 너나없이 다 눈물을 머금고 맞이한 가슴 뿌듯한소식이였을것이다. 나는 늘 하던대로 가게에서 바쁜 일손을 멈추고 연변축구가 갑급리그에서 슈퍼리그에로 진출한 소식을 흥분에 겨워서 위쳇모멘트에 옮기느라, 이그룹, 저그룹에 전하느라 여념이 없다. 누가 월급 주는것도 아니고 칭찬하는것도 아닌 일에 이렇게 성수나고 즐거울수가 있을까? 아마 올 일년을 "기자"가 아닌 "기자"로 묵묵히 축구소식을 제일 먼저 모멘트에 올리느라 돌아쳤던것 같다. 올 한해는 연변축구와 희로애락을 함께 한 한해이다 “10년이면 강산이 변한다”고하는데 다시 슈퍼리그로 등극하기까지는 장장 15년 만이다. 기쁘고 울컥하고 내 마음을 통째로 앗아간 연변 축구, 홈장에서 프로축구가 주는 즐거움은 정말 하나의 예술이고힐링이다. 선수들이 헤딩하는 멋진 동작, 악착스레 상대팀 한테서 공 뺏는 의지와 노력, 개인기술, 전략들, 축구팬들을 축구에 미치도록 빠져들게 하는 매력인 같다. 꼴이터질때마다 느끼게 되는 그 짜릿함, 그냥 세상이 이대로 멈췄으면 좋겠다. 이 순간 만큼은 모든 세상의 번뇌와 스트레스 싹 잊고 축구삼매경에 빠져보자. 바로 그 멋에 얼마나 많은 나와 같은 무명축구팬들이 축구와 같이 울고 웃었던가? 그래서 요즘 나는 상대가 축구에 대해서 알고 모르고 관심있고 없고를 떠나서 축구얘기만하는 축구수다쟁이가 되고 말았다. 축구 하면 빠뜨릴수 없는 축구팬들의 의리 또한 잔디밭에서 열정을 쏟아 붓는 축구선수 못지 않게 짠~하게 안겨오는 감동이다. 축구팬 그룹의 숨은 축구해설자들, 전략가들, 분석가들, 소식통들 덕분에 나는 올 한해 여러 시각으로 축구를 즐길수 있게 되였고 조금은 더 "박식"한 축구팬이 되였다. 축구가 있는 날과 축구 있기 전날은 축구팬 위쳇그룹의 명절 날이다. 축구를 사랑하는 사람들로 모아진 위쳇 축구팬그룹의 구호는 “이겨도 내 형제 져도 내 형제”, “승리하자 우리 연변”이다. 삼복철 해볕이 쨍쨍 쬐는 땡볕에도 그늘도 없는 10구역, 15구역에서 경기 두세시간 전부터 기발 들고, 플래카드 들고, 북 들고, 빨간 유니폼을 통일로 차려입은 이들이 보인다. “아리랑”을 높이 부르면서 경기만 시작하면 아낌없는 응원으로 축구선수들에게 홈장에서의 우세를 마음껏 누리게끔 사기를 불어준다. 그 의리에 코등이 시큰시큰해나고 그 기세에 가슴이 찡~저려나게 감동을 먹게 된다. 그 분위기에 빠져보느라면 내 마음속 깊은 곳에서도 이런 울림이 들리는듯하다 "박태하 감독님 감사합니다 !" “연변축구여 ! 비상하라!” 올 한해의 축구시즌을 마무리하며 올 일년 연변 장백산 축구때문에 받은 신선한 충격들, 재미있는 에피소드들이 지금 이 시각, 어제일처럼 떠오른다. ● 하태균 선수가 이적할가봐 열혈 축구팬들이 모멘트를 도배하던 일… 체육장에서제일 열심히 뛰는 찰든과 스티브의 노력에 아낌없는 응원의 박수를 보내던 일… ● 축구가 완승한 날에는 꼴넣는 장면들이 자꾸 눈앞에 얼른거려서 달콤한 흥분에 잠들수 없던 일… ● 할빈팀과의 경기에서 무패행진 기록이 깨지게 되니 너무 기분 상한 나머지 웬지 내 장사도 같이 슬럼프를 겪던 일, 그 이후로는 쭉 홈장이 아닌 집에서 텔레비로 시청할때에도 빨간유니폼을 입고 옹근 마음으로 응원 하던 일… ● 지금은 기실 스티브팬이 되였지만 애초엔 하태균이 여차여차 멋있는 미남이라고까지 벼라별 유혹을 다 주면서 고2인 딸애를 축구팬으로 만들기 위해 축구장에 데리고 다녔던 일… 그 덕에 지금 딸애는 엄마를 초월하는 진짜축구팬이 되여 친구들과 같이 홈장경기는 빼놓지 않고 다니는 축구장 개근생이 되였다. "엄마 축구는 종료 되기 일 분전에도 꼴이 터질까 조마조마하게 손에 땀을 쥐고 봐야되지, 선제꼴이 선수들에게 사기도 돋구어주고 대개는 그 날 축구의 승패를 결정하는 같습다. 축구는 기세가 참 중요한것 같습다" 늘 내곁에서 축구 얘기다. 그래서 요즘 딸애와 공동언어가 더 많아졌다. 주력선수, 핵심선수,체력, 끈기, 투지, 흐름, 진공, 방어, 수비 온통 축구전문용어들이다 . "최고의 파트너와 최고의 합작만이 슬기롭게 이길수 있는 비결인것 같습다." 애들이 분석력도 참 빠르다. "26골로 득점왕의 영예를 딴 하태균, 금년에 반짝반짝 빛나는 별이고 올해 슈퍼리그로의 진출에 제일 큰 공신"이라고 한다. 또 뿌리는 알아가지고 늘 연변 FC 주축인 본토선수들 즉 김파, 손군, 리훈, 배육문, 강홍권, 박세호, 최민, 조명, 오영춘 이름도 줄줄, 개성도 줄줄, "축구는 박지성 같은 해결사 역할을 하는 사람도 있어야 되겠지만 전체를 잘 다독여 줄줄 아는 맏형 같은 사람도고종훈처럼 뽈을 조직해주는 역할도 있어야 됨다." 문뜩문뜩 전하는 말들이 완전히 전문가처럼 얘기하니 온집안 가족 어르신들이 희귀해하고 기분좋아서 더 난리다. 축구선수들의 개성을 잘 나타낼수 있는 정어린 별명들도딸한테서 들어보니 정말 재밌다. "하신- 하태균, 찰떡 -찰튼, 양고기 뀀을 좋아하는스티브는- 쵈티브, 거미손 ㅡ지문일!" "하태균, 찰튼과 스티브 등 외적 용병도 중요하지만 축구의 주축을 이루는 본토선수들이 협력이 없다면 연변축구를 누가 애정을 가지고 보기나 하겠습까? "라고 딸애는 말한다. 그러면 나도 "우리 축구팀, 연변 장백산호랑이가 래년 슈퍼리그에서도 천시,지리, 인화(天时, 地理, 人和)로 잘 조합되여 올해보다 더 휘황한 기적을 맞이하길 바란다"고 웃으며 맞장구친다. 축구팬 엄마에 축구팬 딸, 올해 기적같은 축구승전소식만큼 나도 딸아이도 진정한 축구팬이 된게 너무 흐뭇하다. 온 여름 땀벌창이 되여 홈장에 앉아 응원한 노력이 탐스러운 열매를 맺은것 같다. 앞으로도 쭉~우리 모녀는 열혈축구팬이 되여 장백산 호랑이 기상을 떨치는 연변축구와 희로애락을 함께 할것이다. 글/최선숙 —————— 최선숙 (崔善淑)   필명:은주(殷朱) 中国 길림성 화룡 출생   연변대학 조선언어문학학부 연변과학기술대학AMP 제1회 로신문학원 연변창작강습반수료 "내 삶의 보따리" "자식농사" "배신 "등 수필 소설 시 20여편발표. "열혈모녀 축구팬 "   해란강닷콤 우수상.  “정향숲을  찾기까지”  제5기 중국조선족 효사랑글짓기 공모 우수상 문학블로그:  邮箱:18844309877@163.com
6    이쁜 옷 한 벌 골라주오 댓글:  조회:1701  추천:0  2019-11-16
우리 옷가게에는 굳이 옷을 사지 않아도 쇼핑만 나오면 잠간씩 들려서 이야기도 나누며 시간을 보내시다가시는 할머니 한분이 계신다. 나이 칠십에 가까워 보이는 할머니는 성정이 온화하고 매무새도 꽤 세련되여 보였다. 오늘은 내가 골라드린 옷이 당신 마음에 딱 든다면서 값을 좀 더 싸게 해달라고 넌짓이 말씀하셔서 나 또한 쾌히 응낙하고 기분좋게 드렸다. 할머니는 포장해드린 옷을 조심스레 챙기고나서 가게에 손님이 뜸한것 같으니 좀 더 앉아서 얘기하고 싶다고하셨다. 그래서 나도 아예 가게의 쏘파에 마주앉아서 할머니와 이런저런 세상돌아가는 얘기를 나누게 되였다. 이 얘기 저 얘기 나누면서 다시 찬찬히 살펴보니 너무 튀지도 않게 무난하면서도 이쁘장하게 화장을 잘 하셔서 그 년세의 세대분들과는 다르게 품위가 있어보였다. 나는 웃으면서 한마디 건넸다. “무도장에라도 다니십니까? 젊어서는 예쁘다는 말씀을 많이 들었겠습니다.” "령감두 없는데 무도장엘 다녀야지." 할머니는 히죽이 웃으면서 이렇게 대답하셨다. 그러면서 이런 말씀을 이어가셨다. "내 나이 서른살에 병으로 첫 남편을 저 세상에 보내고 마흔아홉살에 또 차사고로 두번째 남편을 저 세상에 보내지 않았겠소. 그래서 이제 또 찾으면 무고하게 불쌍한 사람만 저 세상에 보낼것같아서 남은 생은 령감을 더 찾지 않기로 했소..." 예기치 않았던 얘기에 나는 깜짝 놀랐다. 예전에 우리 마을에서도 어떤 곱상한 아주머니가 40대에 남편이 먼저 병으로 돌아가니 동네사람들이 수군대던 기억이 난다. “녀자가 살이 세면 남편을 잡아먹는다. " 오~ 그래서 할머니의 눈빛이 어딘가 모르게 애처로와 보였구나! 지금은 별일아닌것처럼 담담하게 말씀하시지만 나는 "할머니가 참 모질게 마음고생 하셨겠구나."하는 생각에 마음이 짠~ 해났다. 기분좋게 수다나 떤다는게 어쩌다 아픈 상처를 건드리는 이런 얘기가 나와서 나는 괜히 미안한 마음에 송구해났다. 그러다가 갑자기 옛날에 들은 어느 아는 분의 이야기가 떠올라서 얼른 말머리를 돌렸다 "제가 잘 아는 분한테서 들은 얘긴데요. 그 분은 처녀시절에 만난 남자가 병이 많아서 오래 살지 못할줄을 뻔히 알면서도 온 가족의 결사반대를 무릅쓰고 결혼했고 신랑은 또 워낙 환자라 예상대로 몇해 못살고 돌아갔대요. 세상 편견이야 여하하든 단 하루 살아도 사랑하는 사람이랑 살고싶었대요.분명 자기가 원래 있던 병때문에 저 세상에 갔는데 녀자가 살이 세서 남편을 잡아먹은게 아니잖아요. 아픈 사람인줄 뻔히 알면서도 결혼해주고 죽을 때까지 사랑해준 그녀의 순결한 사랑과 용기는 응당 세인들의 찬송을 받아야되지 않을가요. 이같이 상대가 오래 살지 못할줄 뻔히 알면서도 결혼까지 해줄수 있는 사람이 세상에 과연 몇명이나 될가요?" “그렇지. 하루 살아도 좋아하는 사람과 살아야지..." 할머니는 내 말이 마음에 와 닿으셨는지 연신 고개를 끄덕이신다. 그 순간 나는 그 동안 살면서 겪은 난처함과 억울함의 발로인듯 할머니 눈가에 초롱초롱 맺히는 이슬방울을 또렷이 보았다. 그리고 슬그머니 돌아앉아 눈굽을 찍으시는것도 나는 보았다 이 할머니에게도 분명 범상치 않은 감동스런 사랑의 로맨스가 있는듯 했다. 할머니한테는 어떤 이야기가 있을까? 혹시 내가 들려준 지인의 이야기와 같은 이야기는 아닐까? 나는 할머니가 궁금해 났다. "남들이 남이 말을 해보았자 사흘 초과 못한다고 하니깐요. 남의 말을 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이 다른 사람을 헛뜯지 못해 하는 그런 행실에 자신을 괴롭히지 마세요. 대신 예쁘게 차려입고 무도장에도 다니시고 멋쟁이할아버지도 친하시며 자기방식대로 즐겁게 행복하게 건강하게 오래오래 사세요." 할머니는 언제 눈물 흘렸나 싶게 빙그레 웃으시면서 말씀을 이으셨다. "그럼 그럼. 그래야지, 나도 이제부턴 그렇게 살겟소..." 이때 어디서 려행온것 같은 손님들이 왁자그르르 떠들며 가게안에 모여들었다. 할머니는 고맙다는 얘기를 연신 하시면서 앞으로 자주 찾아오시겠다며 돌아가셨는데 나는 그분의 눈가에 초롱초롱 맺혔던 이슬이 아무래도 잊혀지지 않는다. 가게 들어올때까지만하여도 밝게 웃으시며 오신 할머니가 어찌하다나니 의도치 않게 그분의 마음속 아픈 상처를 건드려 괜히 미안해 죽겠다. 그 할머니가 다녀가신뒤에도 나는 오래동안 그 할머니가 잊혀지지 않았다. 그런데 한 두어달이나 지났을가? 그 곱게 나이드신 할머니가 다시 찾아오셨다. 그런데 이번엔 뒤에 키가 구척이나 되는 멋쟁이할아버지 한분이 따라 오셨다. 나는 사뭇 놀랍고도 반가운 표정으로 또 의문스런 표정으로 할머니를 바라보았다. 할머니는 웃으시면서 나에게 다가오시더니 이렇게 귀속말로 얘기하셨다. "저녁에 할아버지 자식분들과 인사하는 장소에 나가려하니 이쁜 옷 한벌을 골라주오." 나는 대뜸 상황파악을 하고 할머니에게 우리 가게에서 제일 고급스럽고 세련된 옷으로 또 십년은 족히 젊어보이는 옷으로 한벌 골라드렸다. 그 동안 외롭게 살아온 보상을 더하고 또 더하여 오래오래 사랑받으시라는 마음도 함께 담았다. 내가 골라드린 옷을 보시던 할머니는 요즘 젊은이들처럼 쿨하게 한방에 "오케이"하셨다. 젊어서는 참 멌있었을것 같았고 아직도 풍채가 좋으신 멋쟁이할아버지는 가게에 들어오셨다가 돌아가실때까지 그냥 할머니만 바라보셨다. 할아버지의 정겨운 눈길은 할머니에게서 조금도 떨어지지 않았던것이다. 그 아름다운 정경을 훔쳐보며 나도 이렇게 속으로 외워보았다. “아무렴 그렇지. 해바라기에게는 밝은 해가 있어야 제격이지.”
5    내 고향 화룡 고성리 댓글:  조회:1462  추천:0  2019-11-16
내 고향 화룡 고성리 (연변라지오방송국  려행스케치) [아] : 방송국 아나운서 [최] : 최선숙 [아]: 안녕하세요, 먼저 자아소개 부탁드릴게요. [최]: 저는 연길성보백화 2층 4호에서 20년째 한국숙녀복장 매장을 운영하고 있는 최선숙입니다. [아]: 오늘 어디로 갈까? 코너에서 청취자여러분께 소개해드릴 곳이 숭선이라고 들었습니다. [최]: 맞습니다. 요즘은 생활수준이 제고됨과동시에 모두 자가용차가 있어 문화생활도 이전과는 많이 달라졌습니다. 가족끼리, 친구끼리, 지인끼리, 모두려행을 떠나기를 즐기죠, 하지만 그곳 지리를 잘 몰라서 제대로 즐기지 못하고 돌아오는 경우가 많아서참 아쉽더라구요, 그래서 언젠가 기회가 된다면 제 고향의 모든걸 잘 소개해 드리고 싶었었는데 오늘이바로 그때인것 같습니다. 숭선하면 생소하게 생각되는 분들도 계시겠지만 화룡에 거주한 분들이라면 아마 다 아실겁니다. 숭선은정말 말 그대로 산 좋고 물 좋고 경치 좋은 곳입니다. 게다가 시골 사람들 인품까지 좋은 곳이죠. 바라보는 곳마다 다 수려한 한폭의 생생한 수채화를 방불케 합니다. 어려서는느끼지 못했는데 지금 와서 보니 아~ 나는 이렇게 좋은 그림속, 동화속, 풍경화속에서 자랐구나. 딱 한국 노래 "강촌에 살고 싶네"에 가사처럼 좋은 곳에서 자랐음을새삼 느끼게 되더라구요. 또한 고향이여서 그런지 바라 보이는 곳마다 동년의 추억이 묻혀있어 많이 설레이고 연길에 있으면서 한동안 잊고 살다가 오랜만에 가보았더니향항이나 어느 유럽에 간것 보다 더 좋았습니다. 고향이여서 그런지 내 몸안에 모든 세포들이 편안해하는게느껴졌어요. 숭선은 너무나도 깊은 심심산골이여서 그 속에 서있느라면 고요함을 깨뜨리는 새들의 지저귐소리, 매미나 베짱이들의 절주있는 노래소리, 나무와 풀들의 속삭임소리 들리는듯합니다. 새소리, 벌레소리, 개구리울음소리가하나의 아름다운 자연 합주곡이 되여서 들려오는데 그야말로 국가급 대자연 생태 향진임을 금방 피부로 느낄수 있도록 눈이 즐겁고 귀가 즐겁습니다. [아]: 그래요, 대자연과 함께하는 그 기분저도 참 그립습니다. 계속해서 말씀주시죠. [최]: "손에 가시가 들어 다치면 아프다. 고향너는 내 가시든 살점" 유명한 김철 작가가 쓴 의 한구절인데요, 백번 공감이 갑니다. 40대에 접어드니 고향에 대한 집착이 엄청 커지는것 같습니다. 정에목말라 있는 현대인들 쫓고 쫓기는 힘든 일상에서 탈출하여 힐링하기 딱 좋은 곳인데요, 깊은 산, 깊은 골, 싱그러운 흙 냄새, 맑은두만강, 닥시싹, 뽕구대,삽지, 애고사리, 애곰치… 자연의 선물이 이리 좋은 고향을 지척에 두고도 자주 가볼수 없어서 참 많이 아쉽습니다. 일상이 지치고 힘들때면 마음으로라도 늘 여행다녀옵니다.   숭선은 가족들, 친구들, 동창들, 회사직원들, 끼리끼리 어울려서 서로의 우의를 돈독히하는 들놀이, 강놀이 가기가 딱 좋은 힐링장소입니다. 먼곳 려행이나 해외여행도 좋지만 짧은 주말같은 경우는 가까운 곳에 가서 생태가 그대로 보존되여 있는 대자연을 만끽해 보시면서 산의정기를 듬뿍 받아 보심은 어떨가요? 꼭 하시는 사업들이 더 번창하실거라 믿습니다. [아]: 그럼 숭선은 화룡 어느 부근에 위치해 있나요? 그곳까지가려면 어떻게 가야 되나요? [최]: 숭선은 화룡 4개 변강 향진가운데 하나로서화룡남쪽 변경지대에 위치하여 있습니다. 숭선까지 가려면 3가지방법이 있는데요. 그중 한가지 방법은 굽이굽이 12고개라는전설이 있는 유명한 소골령 넘어서 가는 방법이 있고, 두번째는 차창에서 남평쪽으로 새아스팔트길이 만들어져서그쪽으로 선경대 구경도 하면서 무산철광도 구경하고 호곡에 있는 리욱시인의 시비도 둘러보면서 가셔도 되구요. 세번째방법은 새길, 즉 소골령에 오르기전 차창에서 옥석림장 통해 가는 길도 있습니다. 지금 중도에서 내리는 사람이 없으면 뻐스도 그렇게 간다더라구요. 숭선은 우수한 자연조건으로 록색입쌀, 콩, 남새, 과일, 사과배가 그렇게 잘 자란답니다. 2012년 성급 생태향진으로, 2013년 국가급 생태보호구로 성정되였습니다. 12개성급 직속 기관, 네개 행정촌 ㅡ숭선, 대동구, 상천, 죽림이고2013년 중외고객 8521명, 2014년 7851인 유람객이 다녀갔습니다. [아]: 숭선에는 또 어떤 볼거리가 있을가요? [최]: 숭선에 가 보았다면 숭선마을 북쪽에 병풍처럼 우뜩 서있는 군함산과 마을과 좀 떨어진곳에 있는 홍기하폭포를 꼭 보셔야 되고 홍기하표류도 꼭 하셔야 되고 산천어, 세천어 국은 꼭 드시고와야 당지인으로서 숭선에 갔다 왓다는걸 인정할수 있지요. 바삐바삐 당일로 갓다 오시지 말고 느슨하게시간적 여유를 가지고 그 곳에서 묵으면서 생태 자연과 하나가 되여 오감륙정으로 자연을 만끽해 보시는게 좋다고 생각됩니다. 상세하게 말씀드리면, 1, 숭선의 상징ㅡ군함산입니다. 깍아지른듯한 절벽 그 모양새가 군함처럼 웅위롭고 장관이고순 자연 명물이기에 군함산이라 명칭했습니다. 그 산 앞에서 꼭 인증샷 남기셔야 됩니다. 군함산 남쪽 길로 산 정상에 오르면 숭선마을과 조선 삼장마을이 한눈에 안겨오구요. 정상에 오르거나 내릴때 산 중턱에서 서쪽에 있는 상천 벌판을 바라보는라면 특히 가을에는 황금 벌판이 펼쳐지는데누구나 입이 딱 벌어질 정도입니다. 너무 멌있어서 당신에게 감성이 없더라도 시 한구절쯤은 쉽개 떠오를겁니다.   두만강 중조변경 첫다리는 숭선에 있구요. 다음은 남평다리, 승선에서 또 조선의 강물과 두 갈래 강물 합수목에 삼장이라는 조선 마을이 있습니다. 숭선과 조선 삼장마을은 두만강을 사이두고 있습니다. 2, 홍기하폭포는 천렵하기 제일 좋은 곳이라 할수 있어요. 낚시하기도 좋고 산 좋고 물맑고 경치 좋은것이 신선이 따로 없을 만큼 대자연속의 하나의 힐링장소입니다. 그리고 2시간 정도 소요하는 짜릿한 홍기하표류도 꼭 즐기셔야 하는 코스입니다. 깍아지른듯한절벽사이로 유유히 흐르는 홍기하 물길을 따라 내려오면서 강 량쪽에 풍경을 감상하느라면 별 세상에 온것 같은 느낌입니다. 홍기하 표류의 전체길이는 8.5공리입니다. 2시간정도 소요되고 산골짜기로 홍기하물따라 표류하는데 그 두 시간 정도 배에 앉아서 깍아지른듯한 기암괴석 여러 가지 이름 모를 꽃과 풀, 나무, 고목 등을 감상하느라면 정말로 꿈속을 노니는듯 신비스럽고또한 잊지 못할 아름다운 추억이 될수 있습니다. 숭선유람에서의 첫손 꼽히는 하이라이트라고 할수 있지요. 상천마을에 서쪽산 언덕을 넘으면 멀지 않은 곳에 자연이 선물한 거인동굴이라고 불리우는 곳도 있는데요, 동굴안 전체 벽면이 까맣고 반질반질한데 거인의 손으로 주물러 놓은듯한 손자국, 어느 조각예술가가의식적으로 만들어 놓은듯한 인체의 어느 부분을 담은듯한 형태의 벽면들, 그냥 반질반질하면 신기하지 않겟지만어떤 거인이 앉았다 난듯한 자리며, 거인의 손자국같은 자국이며 참 미스터리한 흔적들 천지입니다. 어떻게 이런 동굴이? 분명 인간이 손댄건 아닌 자연산물인데 해석불가능하게 참 신비롭습니다. 현지인들만 아는 동굴이죠. 그리고숭선에 가면 이전에 금을 캐느라 팠던 동굴들이 여러 곳에서 보입니다. 3, 숭선에 가셨다면 얼큰한 세천어 국과 산천어국은 꼭 드시고 와야 그래도 숭선에 가보았다고 자랑할수 있다고 우에서 말했죠. 그리고 근당 150원~180원좌우하는 이면수는 먹어보면 연길에와 다른 물고기 국은 먹을수 없을 만큼 죽여주게 맜있답니다. 국을 끓여주는분들이 있다고 합니다. 어떤 분들은 전문 이런 산천어탕이나 이면수탕 먹으러 숭선에 가기도 해요. 둘이 먹다가 하나 죽어두 모릅니다. 그리고 20ㅡ30원씩 하는 돌쫄개로 어죽을 해먹으면 또 쫑기쫑기한게 별맛입니다 화룡에는 로리커호, 선경대 등등 명승지가 많지요. 숭선에도좋은 곳들이 너무 많은데 그중 잘 알려지지 않은 숭선 동쪽에 위치한 간부료양소는 당지 중소학교 학생들이 산보 가는 지정지입니다. 그리고 군함산 동쪽에는 가마뚜껑을 방불케 하는 가마뚜껑산, 그 뒤에는민간이야기에 나오는 옥녀늪과 금녀늪이 길 하나 사이두고 사이좋게 있구요. 그리고 옥석, 시만, 그 쪽은 더 인적이 드문 원시림이고, 옥석 첨치는 그 곳 기후에서만 자랄수 있는 명물입니다. 다음 인삼장, 광평농장,장군님낚시터는 자연을 좋아하시는 분들은 진짜로 둘러 볼만한곳들입니다. 이 밖에도 당지 노인들이 알고 있는 좋은 곳은 더 많고도 많습니다. 그래서 우리마을 동창들이 모이면 앞으로 숭선에 경로원 지어놓고 거기가서 다같이 어릴때처럼 행복한 로년을 보내자고들해요 . 성급 생태 향진인 숭선에서 자란 오곡은 모두 유기농입니다. 특히 숭선의 입쌀은 록색입쌀로써 5근씩 정교하게 포장하여 보통쌀의 몇 배로 비싼 가격에 팔리고 또 선물용으로도 드러났습니다. 숭선 입쌀은 자잘한데 밥해놓으면 윤기나고 한번 잡숴보신 분들은 다시 찾게 돼 있어요. 너무도 좋으니깐요. 논밭이 거의 산 우에 있는데 두만강물을 끌어올려수전농사 짓습니다. 시골의 맑은 공기와 맑은 두만강물로 농사 지어서 그런지 숭선 입쌀은 참으로 맛있고영양가 높고 녹색이 되기에 손색이 없습니다. 숭선같이 깊은 산골 공기 좋은 곳에서 자란 남새며 입쌀의가치는 비할수도 없는 유기농입니다. 숭선은 하도 깊은 산골이여서 사람들의 손길이 미치지 못한 곳이므로생태가 그대로 잘  보존되여 있습니다. 마을에서좀 걸어 산 하나만 넘어도 더 눈이 휘둥그래지는 놀라운 원시림이나 깊은 산속 정취를 그대로 느낄수 있어요. [아]: 숭선에서 조금 올라가면 원봉 홍기하가 있다고 하던데요. 어떤 곳이죠? [최]:홍기하표류의 시발지가 원봉 홍기하인데 그곳의 물은 또 더 맑아서 유명 한 서호처럼모래알을 다 셀 정도이고 물안의 유유히 헤염치는 고기들이 다 보일 정도입니다. 들에는 나리꽃, 함박꽃과 각종 이름 모를 꽃들이 이쁘게 피여 싱그러운 풀 향기가 코를 찌르는것 같습니다. 일본에 어느 학자 분이 얘기하는 말이 시골에서 풀과 나무며 벌레와 새들 등 자연현상들을 지켜보면서 큰 애들은머리가 엄청 비상하대요. 그래서 늘 애들을 시골에 데려가서 산의 풍경들 자연의 섭리를 체험하게 하고싶어요. 우리는 정말 그런 풍경에서 자랐어요. 새벽안개 짙은여름 아침, 문을 활짝 열어놓고 자다가 아침에 눈 뜰때면 처절썩~ 두만강파도소리가 귀맛 좋게 들려오고 새벽안개 헤치면서 물동이 이고 강에 가서 물을 길어 아침밥을 짓고 소학교때는 외워내야 될 부분은 책을 가지고 이른새벽에 강가에 가서 커다란 돌우에 앉아서 외우면서 풍요로운 자연을 만끽하면서 자랐지요. 그래서 여기서경영만 몰두하다가 작년부터 글을 쓰기 시작했는데 제 글에는 늘 고향의 한 단락 한 단락 시골풍경들이 늘 핵심이고 주제이고 하이라이트입니다. [아]: 어렸을때 이곳의 어떤 기억이 가장 인상에 남던가요? [최]: 제 기억에 70ㅡ80 년대 개구쟁이일때 우리 마을 두만강지역에는 록음이 우거진 여름이면 늘 화가들이 자리를 잡고 온종일 그림 그리는광경을 볼수 있었습니다 . 제가 소학교 다닐 때에는 뱀장어, 산천어, 가자미 등을 마을 남자분들이 반디를 들고 잡으러 다녔습니다. 그리고고기잡이에 더 능수인 분들은 그물을 쳐서 잡는 방법도 있어요. 또 어떤 마을 어르신들은 물가운데 크고작은돌들로 돌담처럼 쌓아서 물골을 만들고 버들나무가지같으것으로 키, 즉 방언으로 소보치처럼 결어서 고기를잡는데 이를 채발이라고 합니다. 아무때나 고기가 밭자리에 걸려드는데 특히 비가 내린 새벽에 가면 고기가엄청 많이 걸려들어요. 부지런한 어르신들이 이렇게 산에 포수들이 파놓은 함정처럼 두만강같은 강에는 밭자리로고기 잡기가 좋아요. 개구쟁이오빠따라 아침 일찍 밭자리에 고기 건지러 다닌적도 있어요. 잡힌 고기를 빨리 가져 오지 않으면 또 다른 역빠른 사람들이 거두어 갈때도 있어요. 고기가 많이 잡힌 날에는 당지 식당에 좋은 가격에 팔기도 하고 어떤 환갑이나 생일이 있는 집들에서는 개인적으로고기를 잡아달라고 부탁해서 직접 거래가 이루어지기도 합니다. 중소학교때 우리는 방학만 되면 오전 10시좌우부터 (안그러면 물이 너무 차가우니깐요)두만강에 가서 개발헤염치며 놀다가 물에서 놀기 싫으면 또 산에 올라가 놀고 산에가서는 또 북조선 삼장 건너 마을이다보니북조선노래 "경치도 좋지만 살기도 좋은"을목 터지게 웨치다가 더우면 또 두만강에가 헤염치면서 놀았습니다. 제일 더운 삼복에는 아마 온 하루 강에서놀았던것 같아요. 겨울에는 마을에 남녀로소가 스케트도 타고 그때그때는 참 좋았죠. [아]: 지금도 이곳으로 놀러가는 분들은 많나요? [최]: 화룡에 각 단위는 물론이고 연길, 주내각 현시 정부 각 단위 지정된 봄 들놀이 가기 좋은 곳이라고 할수 있지요 특히 봄, 여름, 가을, 세 계절에숭선에 천렵오시는 분들 어찌 많은지 덕분에 우리 엄마네독보조분들은 륜번으로 올라가서 산천어국, 소천어국등등 여러 가지 국을 끓여주고 받은 수고비를 받아 북경려행도 다니고 또 여기저기 좋은 곳에 려행을 많이 다녔어요. 홍기하폭포아래 정자에서 엄마들이 고추장에 내기를 푹 넣고 끓인 얼큰한 소천어국, 이면수국, 산천어국, 버들치, 돌쫑개국, 어죽을 맛보고 온다면 숭선에 다녀왔다고 할수 있죠. 지금이야 모두좋은걸 부럼없이 드셔가지고 별로 딱히 먹고싶은 탐을 내지 않지만 숭선강역에서 이렇게 천렵해보시면 한다하는 미식가들도 엄지손가락을 내밀게 맛있구요먼 후날에도 자꾸 다시 가고싶은 충동이 들게 할것입니다. 참 재미있는건 시내분들이 가서 분위기좋게 반디질도하지만 대부분 분들은 고기 잡을줄 잘 몰라요. 그래서 현지 식당에 부탁해서 고기를 사다가 끓여 드실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꼭 미리 부탁해서야 살수 있으니 가기전에 꼭 전화라도 하셔서 부탁하세요. 곳구경도 좋지만 강역에가 얼큰한 고기국도 꼭 드시고 와야 유감이 없습니다. 수요가공급을 초과하니 숭선에 소천어나 돌쫑개, 버들개, 모래밑이, 산천어, 이면수는 화룡이나 연길시내에서보다 휠씬 더 비싼 가격에팔려요. 산천어는 한근에 150원정도 하는데 지금은 대동구에서양식하기도 해요. 거기에서 나오는 샘물로 양식하는데다 공기 좋은 곳에서 키우기에 자연산과 같습니다. [아]: 숭선은 그야말로 대자연인데 어떤 다양한 식물이나 곤충들이 있나요? [최]: 숭선에 산과들 강에 보물들을 자랑하고 싶어서 이곳 지리를 잘 아는 제 남동생과같이 정리해 보았는데 가지수가 너무 많아서 엄청 놀랐습니다. 어릴때 듣던 숭선에만 있는 나물들도참 많더라구요. 산나물류들로는 첨치, 참치, 우정금, 기름고비, 쇠투리, 다섯싹, 민들레, 반짜개, 달리, 개나리, 들잎, 도라지, 고사리, 내기, 참내기, 더덜기, 약재로는 인삼, 삽지, 개삼, 만삼, 구름. 버섯류는 송이버섯, 검정귀버섯, 노랑버섯, 솔나무 버섯, 이깔나무버섯, 나무류는 홍송, 싸리나무, 이깔나무, 봇나무, 소나무, 버드나무, 참나무, 느릅나무, 백양나무, 사시나무 과일이나 열매류는 들쭉, 찔그배, 오미자, 딸기, 깸, 살구,  돌배, 앵두, 포도, 사과배, 달맞이꽃, 까마귀열매. 새종류는 뻐꾹새, 종달새, 딱따구리, 꿩, 까치, 콩새, 두만강 물고기류는 산천어, 뱀장어, 가자미, 버들치, 돌쫑개, 깡쫑개, 세지, 물론 우리가 다는 모르지요. 그냥 조금 정리해보았는데 이 정도이면 전문가들이 정확한 수자야더 말할것도 없겠지요 봄에는 뽕구대, 민들레, 여러가지이름 모를 나물들로 우리 음식상을 풍요롭게 만들어 준다면 7-8월에는 깸 월그배, 찔그배, 등 열매로 풍요로운 대자연의 혜택을 그대로 입으며 자라서인지시골분들은 심성이 착하고 마음이 넉넉해요. 아]: 네, 참 뭐가 많네요. 이제 저도 한번 기회가 된다면 숭선의 대자연의 아름다움을 직접 느껴보고 싶네요. [최]: 산과 강을 벗 삶아 자란 나의 동년시절, 청년시절, 대책도 없이 구질구질 가난하기도 했었지만 그때 그 시절이 왜 이토록 그리운건지, 두메산골 내 고향이 차분하고 인내할줄 알고 감사할줄 알고 자신감 넘치는 긍정적인 오늘의 나를 만든것 같아요. 그래서 늘 내 삶의 뿌리인 고향에 감지덕지 하답니다. 여러분도 기회가된다면 꼭 대자연의 왕국, 보물나라 숭선에 놀러가셔서 자연의 정기를 듬뿍 받고 오신다면 앞으로 쭈욱~ 좋은 일들만 가득할것입니다  [아]: 좋은 얘기 감사합니다. 수고 하셨습니다. [최]: 네~ 감사합니다. ------———— 프로필 최선숙 (崔善淑)   필명:은주(殷朱) 中国 길림성 화룡 출생   연변대학 조선언어문학학부 연변과학기술대학AMP 제1회 로신문학원 연변창작강습반수료 "내 삶의 보따리" "자식농사" "배신 "등 수필 소설 시 20여편발표. "열혈모녀 축구팬 "   해란강닷콤 우수상.  “정향숲을  찾기까지”  제5기 중국조선족 효사랑글짓기 공모 우수상 문학블로그:  邮箱:18844309877@163.com 핸드폰: 18844309877        
4    미워.고양이 이모티콘 댓글:  조회:1212  추천:0  2019-11-16
“아침부터 이런 이모티콘을 보내나.” 출장중인 남편이 안해가 저녁마다 무슨 여기 송년모임 있소, 저기 파티에 참가하오, 하면서 매일같이 바깥돌이 한다고 참고 참다못해 속이 탄다고 눈물을 똑~똑~ 떨구는 고양이 이모티콘을, 그것도 명절아침에 보내왔다. 그래서 기분이 잡칠때로 잡친 연희도 아침에 왈 ~ 같이 폭발하고 말았다. 가뜩이나 요즘 장사가 여의치 않아서 스트레스투성인데 소위 장사집남편이 그것도 명절날 아침부터 이렇게 하루 기분을 엉망으로 만들어 놓다니 참을래야 참을수 없는 일이였다. 속이 깊은 연희는 평시에는 남편이 자기 일이 여의치 않을때 속상해서 보내는 스트레스를 푸는 문자나 이모티콘은 그런대로 잘 받아주지만 오늘 아침같은 경우는 진짜로 참을수 없었다 . 년하남편을 만나 사는 연희는 웬간한 일은 굳이 옴니암니 따지지 않고 모든 일에서 자기가 그냥 양보하며 산다. 그만큼 집안에 모든 대소사는 당연히 연희가 더 많이 걱정하고 연희손을 거쳐야만 원만한 해결을 볼수 있다. 게다가 남편을 끔찍이 사랑하는 연희이기에 평소에 다투는 일이 거의 없는 그들인데 오늘은 생뚱같은 이모티콘 때문에 대판 싸움이 붙었던것이다. “당신은 참 너무 자사 자리해. 장사하는 사람 아침 컨디션이 중요하다고 평소에 얼마나 말했는데 그새 그걸 잊었나. 가만히 지켜보면 당신늠 언제나 자기밖에 몰라. 배려심이라구는 손톱만큼도 찾아볼수 없다구…” 늘 져주기만 하다가 연희도 성이 나니 어망결에 그동안 속에 쌓였던 원망이 터뜨리고 말았다. “당신이 적게 나 다니나? 그러기에 내가 그렇게 배우라는 집안일도 못 배우지. 당신은 당신이 좋아하는 취미공부나 하면서 밤마다 밖에서 보내시구려, 녀자가 어떻게 매일같이 밖에서 그것도 밤에 그렇게 헤매도냐. 나가는데도 정도가 있어야지. 내 정사같은걸 생각이나 한번 해 봤어?” 남편도 뒤질세라 참아왔던 원망을 터뜨린다. “요즘엔 장사가 잘 안돼서 가게를 밑지면서 내 놓느라 내 마음이 마음이 아니건만 남편이란 사람이 위로는 할줄몰라도 어떻게 이렇게 안해의 기분을 망쳐놓다니. 나는 그래 낮에는 소처럼 일하고 밤에는 고슴도치처럼 집구석만 지켜야 돼냐구? 신경질이 나도 나다니지 말구 비관만 하구 당신이 보낸 고양이 이모티콘처럼 집구석에서 울기만 하면 될가? 남편이 돼 가지고 매너가 참 좋아요. 됐어요, 말하지 맙시다. 짜증나, 어유 못 참겠어.” 아침부터 한바탕 다툼질이로 하루가 다 지나고 퇴근하고 집에 와서 까지도 가라앉지 않았다. 이모티콘 때문에 붙은 부부싸움에 누구도 양보하려 하지 않았다. “내 말이 어디 그 뜻인가. 나다니는 일이 도를 넘으면 나쁘다는 말이지. 취미공부를 하면서 나가면 그만큼 다른 장소는 거절할건 거절할줄도 알아야지. 어찌 누가 부른다고 하나도 안 빼놓구 쫑도르르 다 다니나? 차라리 밖에 나가서 살렴. 가정을 해 뭐해? 당신은 지금 정신이 너무 들떠있어, 정상이 아니거든. 자기의 취미생활과 친구를 사귀는건 좋은 일입니다. 하지만 때와 시간과 가족을 헤아려 균형을 잡으며 하는게 좋을상 싶은데요. 안 그래요? 우리 사장님이 아직도 반성을 모르는구만.” “그래요. 나도 집에 일찍 들어오면 좋은줄 알아요. 하지만 저렇게 취미공부라도 하면서 친한 분들이 가게에 와서 옷 한벌이라도 사주면서 때로는 식사도 같이 하자고 하는데 어떻게 거절해요. 장사하는 사람이 여러 사람들과 둥글둥글 어울리지 않고 그렇게 꼿꼿하면 주변에 사람이 몰리겠어?” 이렇게 그동안 하고 싶던 소리 다 하고나니 속이 다 후련하기 그지없었다. 너무도 시원해서 이제부터는 안 좋은 일들을 가슴에 멍이들게 속에 차곡차곡 쌓아두지 말고 그때그때 다 터뜨려버려야 되겠다는 생각까지 하게 된다. 소심해서 늘 참고 살던 연희이지만 이번 일만은 절대 쉽게 용서하고 싶지 않았다. 아니 용서하더라도 혼뜨검은 좀 든든히 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모질지 못한 사람이 모질게 나서자니 자기는 또 얼마나 힘드냐. 그렇게 한바탕 다투고 이튿날 가게에 나갔는데 컨디션 탓인지 온 하루 옷 한벌도 못 팔았다. 좋은 연희는 그걸 다 거절 못하고 정말 거의 매일같이 밖으로 나다녔다. 출장중이여도 매일 연희한테 전화하는 습관이 있는 남편은 그게 좋을리가 없고 연희 자신도 사실 련속 며칠 연회상에 앉고 맥주를 마셨더니 머리가 흐리멍텅해지고 아무것에도 집중할수 없고 환각의 세계에 빠져 사는것 같았다. 진짜로 마약하는 사람들이나 알콜중독자들의 생활을 체험하는것 같았다. 자기절로도 자기 생활이 막 리해 안 되는데 출장중에 멀리서 그걸 묵묵히 지켜보기만 하는 남편은 속이 뒤번져질건 뻔한 일이다. 그러고보니 자기가 참 너무했다는 생각에 자책감이 슬그머니 들었다. 반성을 하고보니 연희는 남편에게 진심으로 부끄럽고 창피하고 미안했다. 애를 봐도 또 얼마나 불쌍한가? 퇴근해서 집에와 지지고 볶고 저녁 챙겨먹고 설거지까지 하면 아홉시를 훨씬 넘는데 매일같이 해야 할 집안일들을 련속 며칠이나 미뤄났으니 집안이 또 어떤 아수라장이 되였을까? 친구 만나 밤 늦게까지 수다떨고 이튿날 가게에 나가면 또 어떤가? 련 며칠씩 술 마셨으니 피곤해서 잠만 오지 따져보면 바깥돌이해서 좋은게 별로 없었다. 남편은 남편대로 삐져버리지, 애는 애대로 뿌루퉁해 하지, 자기는 자기대로 힘들지, 게다가 장사는 또 엉망이지… 연희는 가슴 아리게 반성을 했다. 안해, 엄마로서, 소위 가게사장으로서, 정말 너무했구나 싶었다. 이제부터라도 생활방식을 고쳐야겠어. 바깥돌이며 취미생활은 적당하게 하고 자기 가족에게 더 많은 애정을 몰부어야 되겠다고. 자기 잘못을 알게되니 금방 사과부터 하고싶었다. 끝내는 연희쪽에서 먼저 진심을 담아 사과문자를 날렸다. “자기야, 정말정말 미안해, 앞으로 밖에 나다니는 일 많이 자제하게. 다시는 당신을 피곤하게 굴지않으게. 신경 쓰게 해서 미안해. 사랑해~” 문자와 함께 하트 날려보낸다. 인차 남편한테서도 메시지가 날아왔다. 아마 안해의 사과메시지를 기다린듯 했다. “여보, 나도 명절날에 너무했어, 내가 그만 욱~ 하는 성질에 참지 못하고 아침부터 장사하는 사람의 기분을 망쳤으니 미안해. 앞으로 자기한테 더 잘 하는것으로 립공속죄할께.” 문자와 함께 “하트 뿅뿅” 이모티콘 보내왔다. 헐~ 닭살이야. 평소에 늘 안해의 랑만을 잘도 받아주는 년하남편이다. 아껴도 다 아끼기 아까운 내 남편인데 다시는 피곤하게 들볶지 말아야지. 연희도 련이어 “뽀뽀 백개”, “하트 백개” 이모티콘을 날려보낸다. 언제 다퉛나 싶게 혼자서 히~히~ 웃으면서… 남편과 화해의 메시지를 주고받고나니 신기하게도 방금까지도 꽉~ 막혔던 가슴이 뻥~ 뚫리듯 후련했다. 신이 인간을 참 묘하게 만든것 같다. 안 좋은 일들을 금방금방 잊을수 있게 또 금방 용서할수 있게 해줘서. 신의 능력에 감탄한다! 오늘도 좋은 날이길!
3    정향숲을 찾기 까지 댓글:  조회:4782  추천:0  2019-11-15
차갑게 페부를 훑는 듯한 선들바람이 나의 머리결을 흩날린다. 가을의 느낌은 마냥 처량하다. 자전거를 타고 일자리를 찾아다니기 시작한 것이 벌써 여러날째다. 거리의 골목골목을 누비면서 하루종일 정신없이 발품을 팔다보니 어느새 하늘은 어두컴컴해지고 있었다. 거리의 가게들은 경쟁이라도 하듯 하나둘씩 불을 밝히기 시작했는데 그중에서 유독 환한 불빛을 뽐내고 있는 한 가게로부터 “복무원 모집”이라고 씌여진 글이 내 시야에 들어왔다.자전거를 비스듬히 세워놓고 한참을 못박힌듯 서있다가 쭈뼛거리면서 식당안으로 들어갔다. 초췌한 얼굴에 퀭한 눈, 주근깨가 다닥다닥한 녀자가 야울야울 웃음을 포개면서 맞이해주었다.  “어서 오세요. 뭐 드시겠어요?” “저기요. 이 식당에서 복무원 받아요?” “식당일은 해봤소?” “네에.” “조선족이 돼서 좋은데 어려서 써빙 밖에 못하겠구만. 한달 월급은 80원이고 숙식은 제공해주오. 매출 올려주면 보너스도 있소. 어떻소? 할 의향이 있소?” “네에, 열심히 해보겠습니다.”  나는 찬밥 더운 밥을 가릴 신세가 아니였다. 얼마전까지 출근했던 복장공장에서는 몇달동안 급여를 미지급하다가 막무가내로 문을 닫아버려서 그만 락동강 오리알 신세가 되였기 때문이다. 동생과 합숙하고 있던 세집 집세도 몇달째 밀리고 있는 상태였다. 당장 추위가 들이닥칠 텐데  석탄 살 돈도 없고 이대로라면 설이 되여도 작년처럼 집에 갈 뻐스표 살 돈 20원이 없어서 동생과 둘이 찬 방에서 무우말랭이에 감자국을 끌여놓고 설을 보내야 할지도 몰랐다. 동창들은 교원이요, 사업단위이요 하면서 폼 나게 살고 있는데 나는 몇년을 이렇게 이 식당 저 식당, 이 복장공장 저 복장공장을 전전긍긍하면서 아는 사람들 특히 동창들을 만날가봐 골목길로만 출퇴근하면서 하루살이와 같은 이십대 초반을 보냈다. 갑과 을의 관계, 돈깨나 있다고 인간 대접이란 뭔지도 모르는 주인에게 언제까지 자기 기분은 싹 다 죽이고 깍듯이 굽석거려야 되는지? 그나마 남의 집 가게에서 수모를 당하며 견딜 수 있었던 것은 법인대표가 나 자신인 나의 가게를 오픈하려는 당찬 꿈과 희망이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모든 기술이라고 짐작되는것들을 어깨너머로 열심히 배웠다. 옛일들을 떠올리면 초라하던 기억 밖에 없다. 그 때문인지 기억을 상실한 사람처럼 현실은 생생한데 거짓말처럼 옛일들이 잘 떠오르지 않는다. 동창들이 모여앉아 이런저런 추억을 이야기할 때면 아, 맞어 그땐 그랬었지. 하면서도 그만큼에서 그치면서 더 이상의 추억을 더듬기 싫다. 더 들추면 그냥 울음이 터질 것 같아서… 울며 산 동년, 설음 밖에 없는 나의 20대 추억 중에는 그렇게 잊고 싶지만 결코 잊혀지지 않는 파란만장한 일대기가 있다. 심청이 아버지 젖 동냥하듯 이집 저집에 가서 학비를 꾸어대며, 학기마다 같은 고충을 반복하며 나는 억지로 고중을 마쳤다. 어렵사리 공부를 했으면 어느 책에서처럼 공부나 잘할 것이지 못나게도 대학시험에서 락방되였다. 방학이 되여 집에 돌아갔을 때에는 풍경화 같았던 고향도 백수로 되여 돌아가니 아무런 감흥도 불러일으키지 못했다. 하늘이시여! 사면이 산으로 꽉 둘러쌓인 이 산골에서 내가 평생을 살아야 한단 말입니까? 별이 무더기로 쏟아지는 밤 하늘을 쳐다보며 나는 울부짖었다. 1976년 되던 그 해, 아버지는 15살인 큰 오빠와 11살인 작은 오빠 그리고 7살인 나와 4살짜리 코흘리개인 동생을 엄마에게 유산처럼 남겨놓고 무정하게 하늘나라로 가셨다. 아버지는 떠나면서 애들을 엄마 혼자 다 못 키운다면서 세 아들은 다 남에게 주고 딸인 나만 데리고 재가하라는 유언을 남기셨다. 그때 엄마는 39살로서  예쁘고 생기가 넘치셨다. 처녀시절 엄마는 인물 체격이 좋은 덕분에  항미원조에 나가셨다가 고위간부가 되여 금의환향한 아버지한테 시집가게 되였다. 문화대혁명때 아버지는 자진하여 장백산 아래 광평농장에 하방하셨다가 거기서 박해를 받으시고 세상을 떠나셨다. 누구보다도 멋지고 인자하셨던 아버지는 생전에 외지로 회의하러 갈 때거나 당교에 학습하러 갈때면 늘 딸인 나만 찌프차에 앉혀 데리고 다니군 했다. 나의 어릴때 추억중에 그 추억만 지금까지 제일 달콤한 추억으로 남아있다. 아버지가 세상 뜨고 3년 후, 고위급 간부가 엄마에게 재혼을 요청해 왔다. 이 사람 외에도 조건이 좋은 사람들이 인물 좋은 엄마를 넘 보는 사람이 많다고 한 마을 엄마들이 수군거리는 소리를 귀동냥해 들었다. 하지만 엄마는 중매군들이 아무리 감언리설로 설복을 해도 번번히 제 새끼를 어떻게 남 주냐면서 매몰차게 재가를 거절하였다. 네 자식을 끌어안고 빌어먹을 지언정 굶어죽어도 엄마 품에서 굶겨 죽인다고 엄마는 고집하셨다. 하지만 엄마 혼자 우릴 다 껴안고 있다고 해서 우리가 행복했을가? 이붓아버지 밥을 먹이지 않는다고 우리가 행복했을가? 가난이 숨통을 조여오는데, 잘 먹이지도 잘 입히지도 못하고 공부시킬 돈도 없으면서…가난에서 파생되는 초라함,그게 얼마나 사람을 기죽게 하는지 엄마는 몰랐을가? 주렁주렁 돼지같은 자식 넷이 직업을 얻어야 할 나이에 직업도 없이 좁은 집안에서 부대끼며 지낼 때 나는 세상물정에 어두운 엄마가 못내 원망스러웠다. 국장 이붓아버지한테 재가했더라면 엄마는 어떨지 몰라도 자식들 일자리는 근심걱정이 없을텐데. 고중을 졸업하고 림시직으로 복장공장에 출근하기 시작하면서 나는 내가 못다한 공부 소원을 풀어달라는 부탁과 함께 달마다 나오는 월급 전부를 동생에게 지원해주며 자원해서 소녀가장이 되였다. 나는 동생이 고중을 졸업하자 시집을 갔다. 동생 뒤바라지에 적금 없이 돈을 탈탈 털어쓰다 보니 거의 빈몸으로 시집을 갔다. 그래서 시어머니는 또 얼마나 대놓고 나를 무시했던지… 내가 시집가던 날, 자기 뒤바라지 하느라 고생한 누나에게 록음기 하나 못 사주는게 속에 내려가지 않아서 동생이 그토록 섧게 울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썩 후에 친정에 놀러가니 시골 중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던 동생이 시골학교 학생이 적어서 페교되면서 집에서 빈둥빈둥 놀고 있었다. 그때 엄마가 나에게 말했다. 동생이 집에서 자꾸 이 노래만 부른다고.     나의 누나는 좋았지     언제나 방긋이 웃어주던 그 얼굴이… 그때 나는 그래도 우리 집에서 제일 많이 바깥세상을 본 내가 일어서야 되겠구나는 사명감 비슷한 것이 생겼다. 순간 어머니와 동생을 데리고 연길에 자그마한 음식점을 차리면 우리 셋의 일자리는 해결할 수 있지 않을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내 생각을 말했더니 오빠들이 흔쾌히 동의하면서 여기저기서 돈을 꾸어서 내 장사자금을 마련해주었다. 그렇게 “김삿갓 음식점”이 오픈했다. 료리사와 복무원 각각 한명씩 채용하고, 엄마는 주방 일, 동생은 구입을 맡았다. 다행히 장사가 잘 되였다. 순풍에 돛을 단 배처럼, 바람을 만난 연처럼. 믿을 언덕이라고는 없이 음식점 하나에 매달린 우리 세 식구는 최선을 다했다. “촌빠이” 라고 이마에 써붙인 것처럼 투박하고 순수해서인지, 넉넉한 시골 인심 덕분인지 한번 식당을 찾았던 손님들은 거의 단골로 되였다. “으흠, 요즘 같은 세월에 맛으로 승부하는 가게도 있네.” 그때 우리 가게를 찾는 손님들의 한결 같은 평가였다. 조건이 우월한 이웃 식당들에는 손님이 없어 직원들이 홀에서 빈둥대는데 우리는 준비한 재료들이 다 팔려서 이웃 식당에 빌리러 다녔다. 그때는 내가 아마도 장사체질인 모양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 선생님들이 나를 대학생은 만들지 못해도 훌륭한 장사군으로 만들었구나 하는 생각도 들고 어릴때 고생도 눈물나게 감사하고… 별게 다 감사했다. 하지만 영업은 그야말로 예상치 못했던 변수들의 집합체이다. 그것을 잘 관리하려면 넉넉한 자금이 가장 효과적인 처방전이였다. 거기에 죽어나는건 가족이였다. 마냥 좋을 것만 같던 엄마도 오래동안 돈을 만져보지 못하자 사사건건 나와 시비를 걸기 시작했다.    “엄마.” 그날도 두사람이 겨우 서서 일할 수 있는 비좁은 주방에서 올망졸망 새로 구입해온 야채며 고기들을 씻을 건 씻고 랭장고에 넣을 건 넣으며 분주히 돌아치다가 문득 밥가마를 열어보니 밥가마가 텅텅 비여있었다. 놀라서 허둥대며 홀에 대고 큰 소리로 엄마를 불렀다. 당장 손님이 쓸어들어올 시간인데 어디에 가 있는 거야? 복무원이 주방에 뛰여오더니 출입문 쪽을 슬쩍 눈치질하며 거기에 있다고 알려주었다. 마음이 급한 나는 앞치마에 두손을 쓱쓱 문지르며 출입구 쪽을 향해 달려나갔다. 식당으로 들어오는 정문 옆에 엄마가 고개를 푹 수그리고 맨 봉당에 스님처럼 올방자를 틀고 앉아있었다. 나는 급히 엄마 팔을 붙잡고 일으키며 퉁명스레 내쏘았다. “엄마 안쪽에 들어가 앉으쇼. 손님들이 올 시간인데 문앞에 앉아있으면 남들이 뭐라겠슴까?” 엄마가 고개를 들고 뚫어지게 나를 쏘아보았다. “너도 내가 업신 보이냐? 직원들 월급은 꼬박꼬박 다 챙겨주면서 왜 나와 니 동생 월급은 안 주니?” 나는 흠칫 놀라 뒤로 한발자국 물러서며 물었다. “자금이 돌지 않아서 힘들어하는게 엄마 눈에는 안 보임까? ” “점심, 저녁 손님이 가득 차는데 돌릴 돈이 없다니 그게 말이 되는 소리야??”     “집세, 세금관리비, 직원들 월급, 그날 쓸 음식재료들을 구입하고 나면 돈이 다 나가는거 모름까? 술과 음료를 다 외상으로 들여왔잼까?” “언제면 돈이 남아서 우리도 남들처럼 돈이나 만져 보겠니? 난 어째 아무리 해두 그새 장새일 것 같다. 일해봤자 밑굽 빠진 항아리에 물붓기인데 난 집에 갈란다.“ 나는 엄마가 가겠다는 소리에 깜짝 놀라서 즉시 톤을 낮추면서 말했다. “엄마, 좀만 참으쇼. 지금은 림시 바빠서 못 주지만 그 돈 안 떼먹구 아무 때건 꼭 다 주겠슴다.” 엄마는 길게 한숨을 내쉬더니 가게 안에 들어가 종업원과 마주앉아 야채를 다듬는 남동생을 불러냈다. “철아 우린 그만 집에 가자. 누나 혼자 장사해서 콱 잘 먹구 잘 살라구 해라.” “엄마 정말 이럴래김까?…” 급해난 내가 엄마 등뒤에 대고 앙칼지게 소리쳤다. 나도 경영경험도 없고 풍족한 자금도 없이 자기 가게라고 꾸려놓고 스트레스가 쌓일 대로 쌓여 폭발 직전이였던 것이다. “자기 힘으로 악착같이 벌어서 잘 살려고 아글타글하는데  엄마가 해준게 뭐 있슴까? 엄마도  녀자이면서 남존녀비 사상만 머리에 가득차 가지고 오빠나 동생은 공부도 시키고 직업도 근심하면서 하나 뿐인 이 딸은 언제 빈말로라도 공부걱정 직업걱정 해본적 있었슴까? 나도 엄마한테 쌓인게 너무 많슴다.”  끝내 내 광기가 폭발하였다. 이웃 가게들에서 구경거리가 생겼다고 뛰쳐나와 보고 길 지나던 행인들도 걸음을 멈추고 지켜보았다. “아들이든 딸이든 다 내 살점인데 누구를 더 고와하구 누구를 더 미워했겠니?” 엄마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식당문어구에 두었던 큰 보따리를 들고 몸을 기우뚱 거리며 걸어갔다. “엄마 이렇게 가면 난 이제 친정두 없고 부모 형제도 없음다. 이후부터 날 볼 생각 마쇼.” 엄마를 막아서며 내가 기어이 모지락스럽게 퉁바리 놓았다. “내 자식교육이 실패구나.” 엄마 얼굴이 서서히 무섭고 보기 흉하게 일그러졌다. 얼굴에 한가닥 실망의 빛을 감추지 못했다. 어릴때부터 졸래졸래 내 뒤를 따라다니며 그렇게 나를 잘 따르던 동생도 방 한쪽 구석을 지키던 자기 짐을 넙적 들고 씨엉씨엉 엄마 뒤를 따라갔다. 제 편인 줄로만 알고 있던 소중한 가족으로부터 오는 랭대에 나는 된 몽둥이에 얻어맞은 것처럼 눈앞이 아찔해나 그 자리에 폴싹 주저앉고 말았다. 료리사와 복무원이 뛰쳐나와 나를 부축해 직원 휴식실에  눕히고 얇은 이불을 덮어주며 한잠 자라고 하고는 나갔다. 한바탕 행악을 쓰며 쌓였던 불만을 토하고 나니 속이 후련한것 같기도 했다. 그런데 자꾸 눈물이 났다. 자리에 누운채 팔꿈치로 쓱쓱 눈물을 닦으며 속으로 원망했다. 저들이 나한테 해준 게 뭐가 있다고, 어우 시원섭섭해. 나는 애써 내가 잘했다고 위로했다. 그런데 아니지… 가슴속 깊은 곳에서 터져나올 것 같은 이 홍수 같은 설음은? 사막에 혼자 버려진듯한 이 느낌은?…그게 무슨 감정인지 가난하고 보잘 것 없는 가족이라도 그 사람들의 사랑을 잃었다는 게 너무 슬펐다.  얼마나 지났는지? 밖에서 왁작지껄 떠들어대는 소리와 함께 손님들이 시작이라도 부른 듯이 들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아, 밥가마에 밥도 없었지. 될 대로 되라고 누워있다가 밥이 없던 생각이 불시에 떠올랐다. 이대로 누워 있을 수는 없다. 꾼 돈도 못 갚았는데. 나는 눈물을 닦을 새도 없이 손님들 심부름에 주방일에 홀과 주방을 정신없이 뛰여 다니며 그날 점심고봉기를 넘겼다. 오후 재료를 구입하러 나갔다 늦게 돌아오니 홀에서 료리사와 복무원이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냥 이렇게 바쁘면 다른 가게로 옮길 예산이라고 했다. 나는 직원들을 찾아 마음을 안정시켰다. 빠른 시일 내에 엄마가 돌아오게 하던지 아님 직원을 더 쓰던지 대책을 마련하겠다고… 하지만 이는 장구지책이 아니였다. 무슨 돈으로 또 직원을 쓴단 말인가? 나는 슬프게 웃었다. 갑갑한 마음에 식당을 나가 점심에 엄마가 앉았던 것처럼 맨 땅에 올방자 틀고 앉아 하늘을 쳐다보았다. 내가 뭘 위해 이렇게 아글타글하지? 엄마도 나와 같은 이런 느낌이였을가? 너덜너덜 혼백은 바람을 타고 어디론가 사라지고 허무가 쓰나미처럼 몰려왔다. 불소나기처럼 볕을 쏟아붓던 태양이 하루 일과를 마치고 퇴근하는 사람들과 함께 서서히 어둠의 장막으로 사라진다. 저 사람들도 나처럼 힘든 삶의 이야기가 있을가? 상처입은 내 마음을 누가 토닥여주지? 어느새 나를 괴롭히는 트라우마들이 슬로우모션으로 내 시야에 하나 둘 안겨온다. 엄마가 집으로 간 뒤부터 가슴이 답답해나며 시도 때도 없이 한숨이 폴폴 나갔다. 창업해서 제일 힘든 일년을 엄마와 우직한 동생이 나를 믿고 따라주던 일들이 줄줄이 생각나면서 내 고요한 마음에 거센 파문을 일으켰다. 장사 잘 된 날은 입이 귀에 걸려 세상을 다 가진듯 행복하게 웃으며 표정관리를 하기 어려웠는데 지금은 돈 한묶음 쥐고도 웃음이 나오지 않았다. 손님이 많을 때는 앉을 자리가 없이 몰리다가도 어떤 날은  어느 신선을 노엽혔는지 들어오는 손님은 없고 파리만 기세차게 날아다닐 때가 있었다. 돈 고생이 끝나는가 하면 또 다른 생각지도 않던 문제가 생겨서 골머리를 앓아야 했다. 그때마다 엄마와 동생이 든든한 버팀목이 되여주어서 나는 용케도 하나하나 이겨나갔다. 가게를 시작해서부터 지금까지 자기 몫의 돈이라고는 쥐여보지도 못하면서도 영업시간이 다가올 때마다 “오늘도 장사 잘될거야.” 라고 밝게 웃으며 좋은 마음으로 주문을 걸어주던 엄마, 방안 그 어디에서나 웃어주던 엄마, 해바라기처럼 나만 바라보던 엄마, 엄마의 무조건적인 사랑이 그리워 나는 어느새 입을  피쭉거리며 울고 있었다.   내가 얼마나 더 잘 살겠다고 내 인생에 비타민이 돼주고 디딤돌이 돼주고 반석처럼 지켜주던 내 엄마한테 그렇게 퍼붓고 그것도 모자라서 제 부모형제와 인연을 끊는다는 말까지 매몰차게 했는지? 그땐 내 마음속에 악마가 들어앉아있었나봐. 아홉번 잘하다 한번 돈 좀 달랬다고 내가 어떻게 제 친엄마를 그렇게 모지락스럽게 괄시 할수 있단 말인가? 할 말 안 할말 다 했으니 내가 봐도 나는 참 못돼먹었지. 내가 미쳤나봐. 그렇게 엄마 기를 채워주는 딸이 하늘 아래 몇이나 될가? 그리고 그리고…. 후회가 폭풍처럼 몰려오기 시작했다. 전화도 흔하지 않던 시대라 나는 내 진심을 담아 엄마에게 편지를 썼다. 엄마, 그동안 고향집에서 잘 보내십니까? 엄마와 동생이 없는 식당은 한마디로 범벅입니다. 요즘 혼자 바삐 돌아치면서 구석구석 알아서 틈새없이 모든 일을 잘해주던 엄마의 손길이 무척 그립습니다. 그동안 헌 바자 바람 막는 줄을 모른다고 나 혼자 잘해서 잘 되는 줄 알고 설쳐됐습니다. 내가 일어서야 내 형제 돈도 갚아줄 수 있고 내 가족도 사는 것이라 독하게 마음 먹고 엄마나 동생돈을 먼저 댕겨쓰고 돈이 생기면 곱으로 갚아주리라 마음 먹었는데 엄마가 간 뒤 곰곰히생각해보니 내가 정말 리기적이였습니다. 엄마 도움이 절실하지만 아무리 허물없는 내 엄마라도 오라는 말은 미안해서 못하겠어요. 편지와 함께 돈을 엄마에게 보내드립니다. 식당은 나 혼자 것이 아니라 엄마, 동생, 나 우리 셋의 식당입니다. 그동안 모아뒀던 전부를 세몫으로 나누어서 엄마와 동생몫을 부쳐보냈습니다. 그리고 오빠들이 꿔준 돈도 같이 보냈어요. 우리 지금까지 아무 것도 없이도 화목하게 살지 않았습니까? 돈을 위해서 우리 가족이 다투고 산산조각이 난다면 이 돈을 해서 뭐하겠어요. 돈은 없어도 되지만 가족은 없으면 안됩니다. 그리고 가게를 빠른 시일 내에 임대하겠습니다. 임대비는 가게를 오픈해서부터 지금까지 함께 수고한 엄마와 동생에게도 꼭 같은 몫으로 세 등분해서 보내겠습니다. 꼭 내 힘으로 당당하게 선 모습을 엄마와 우리 가족, 그리고 고향사람들에게 보여주고 싶어요. 일곱살에 아버지를 잃은 최씨네 셋째 딸이 지금은 연길에서 그렇게 잘 살고 있더라고. 믿으세요. 꼭 멋진 딸로 엄마에게 효도 한번 잘 할게요... 필경은 가족이다. 엄마와 동생이 돌아왔다. 그야말로 꿈 같았다. 시골의 맑은 공기와 푸른 초목의 싱긋한 향기를 그대로 가지고 느긋하게 웃으며 갈 때보다 더 큰 보따리를 들고 식당에 나타났다. 동생도 소품배우 조본산처럼 크고 작은 보따리를 이고 지고 나타났다. 나는 너무 반가워서 “와!” 하고 환성을 질렀다. 직원들도 벌떡 일어나며 환호했다. 보따리를 헤치니 전부 농촌의 풋옥수수며 가지며 풋고추, 떡호박과 같은 유기농야채들이였다. 그리고 두만강의 특산인 세치네도 있었다. “나는 네가 궁리없이 돈을 다 퍼주구 있는 것 같아서 억지로라도 경제권을 빼앗아서 돈관리를 해주자구 그랬다. 그런데 알고 보니 바쁠 때를 예산하고 온천하게 돈 다 모으고 있었더구나. 돈 독이 올라 부모형제를 모르는가 했더니 이번에 일 처리 하는걸 보니 사람냄새두 나구… 이번에 니가 보낸 돈과 집에 좀 있던 돈을 다 가져왔다. 네가 투자하고 싶은데 마음대로 투자해라. 다른 업종으로 바꿀 생각을 하지 말고 우리 힘을 모아 세 식구가 같이 할 수 있는 이 가게를 계속 해보자.” 헤픈 내 눈물이 또 비오듯 쏟아졌다. 시련을 딛고 마음이 합쳐지니 가게가 나날히 흥성했다. 인맥은 없어도 단골들의 입소문을 통해 또 새로운 단골이 생기고 또 그 단골들이 새 단골을 묻혀오고 하면서 손님걱정은 없었다. 하지만 어찌된 영문인지 돈은 늘 딸리였다. 기대이상으로 일들이 잘 풀릴 때도 있고 간절하게 꿈 꾸었는데 이루지 못한 일들도 있는 가운데 나는 야금야금 녀장부로 성장해갔다. 그렇게 몇년동안 경영하다가 가게를 다른 사람에게 임대를 해주고 번 돈을 셋이서 세 몫으로 나눠 가졌다. 동생은 그 돈에 대부금을 내서 집 한채 사고 나는 그 돈을 종자돈으로 옷가게를 차렸다.   저자 최선숙 옷가게를 운영할 때에도 엄마는 어려서 못해준 사랑을 보상이라도 해주려는듯 묵묵히 다해주었다. 딸애가 태여나자 십년동안 우리 집에 와서 보모 아닌 보모노릇 해주면서 딸애를 봐주었다. 나는 남자들처럼 엄마가 챙겨주는 밥을 먹고 엄마가 빨아주는 옷을 입고 어려운 일에 부딪히면 엄마와 토론하면서 나의 경영의 길을 걸어갔다. 건강한 몸을 주어서 고맙고 트인 사유를 주어서 고맙고 고마움을 알게 해줘서 고마운 엄마 덕분에 나는 전성기에 전성기를 거듭하며 승승장구하였다. 시골에 있는 오빠들도 한국에 나가 돈을 벌수 있게 경제적으로 지원해주었고 앞선 생각으로 형제들 모두 좋은 항목에 투자하여 돈을 벌수 있게 집안의 해결사 역할도 담당하였다. 언제 고향에 살던 동생 친구가 우리 집에 놀러와서 보더니 눈이 휘둥그래졌다. “누나 언제 이렇게  富婆가 됐소?” 덕지덕지 기운 바지를 입고 코를 풀쩍이며 아버지 없이 자란 우리에게도 옛말하며 살 날 들이 왔다. 때론 강하게 때론 약하게 때론 잔잔하게 들려오는 비소리를 인생 전주곡처럼 들으며 오늘도 나는 82세의 백발이 된 엄마를 조수석에 앉히고 고향으로 향한다. 반평생을 시골에서 산 엄마,나이가 들어서 감성도 예전 같지 않지만 대자연속에만 묻히면 애들처럼 신나 하신다. 나는 즐거워하는 엄마의 그 모습에 홀려 늘 바쁜 일정을 뒤로 미루고 엄마와 함께 산향길을 즐긴다. 조용히 창밖을 주시하다가 어디를 보나 추억인 익숙한 고향길에 접어들기만 하면  엄마의 생방송이 시작된다. 나는 흐뭇하게 웃으며 열번도 더 들었을 엄마의 레퍼토리를 들어준다. 그런 엄마가 오늘은 창밖을 보면서 혼자소리로 자꾸 누군가를 욕한다. “무저리 같은게 일찍 갈 택이 뭐야? 좋은 날도 못 보고. 무저리 같은게…” “엄마 누구를 욕함까?” “누기를 욕하긴 누기를 욕하개? 무저리 같은 네 애비지.” “갑자기 왜 저 세상 간 아버지를 욕함까?” “이 좋은 세상에 누릴 것도 못 누리고 넘 일찍 간게 원망스러워서 그런다.” 당신 자식 차에 앉으니 남편 생각이 나나 보다. 39세 꽃나이에 생과부로 홀로 나서 조롱조롱 자식 넷을 키우느라 얼마나 힘들었을가? 창문을 여니 바람에 나무잎이 한들거리는 것이 보여서 마음이 상쾌해졌다. 어디에선가 그윽한 정향향기가 은은하게 풍겨온다. 어디 가까이에 정향숲이 있나보지. 어쩌면 이리도 그윽할가? 아무런 대가도 보상도 없이 한결같이 주기만 하는 엄마의 원초적이 사랑처럼… 나는 비 온 뒤의 청신한 정향숲을 찾아 차머리를 돌린다.   2019년 8월 29   최선숙 (崔善淑)   필명:은주(殷朱) 中国 길림성 화룡 출생   연변대학 조선언어문학학부 연변과학기술대학AMP 제1회 로신문학원 연변창작강습반수료 "내 삶의 보따리" "자식농사" "배신 "등 수필 소설 시 20여편발표. "열혈모녀 축구팬 "   해란강닷콤 우수상.  “정향숲을  찾기까지”  제5기 중국조선족 효사랑글짓기 공모 우수상 문학블로그:  邮箱:18844309877@163.com 핸드폰: 18844309877
2    축복받은 가족 댓글:  조회:3294  추천:0  2019-11-14
           요즘은 위쳇덕에 모멘트에서 가담가담 남들이 사는 모습들을 심심치 않게 들여다볼수있다. 사람사는 냄새가 나는 삶의현장들, 그 가운데 내가 제일 부러운 그림은 그래도 명절때에 가족들과 친척들이 오손도손 모여앉아 재미있게 식사하는 모습이다. 세월이 흘러도 가까운 친척끼리 풍성한 음식상에 모여앉아 명절을 즐기는 인정세태는 변하지 않은듯하다.       언제부터인가 나는 친구들이 모여서 아버지는 유명한 누구요, 어머니는 또 누구요, 오빠와 삼촌에 사돈에 팔촌까지 가족의 화려한 신분을 드러내며 세력이 있는 집안이라 자랑하는데 귀가 솔깃해졌다. 그리고 우리 가문, 내 가족에 대해서 진지하게 고민해보게 되였다. 그래서 공부하는 조카들을 앉혀놓고 소위 “정치”를 할때가 많았다. 우리 세대는 이 정도밖에 안되지만 너희들은 공부를 잘해서 좋은 대학에 진학하여 배운자의 여유, 능력자의 여유, 있는자의 여유를 즐기면서 살라고 말이다. 가족끼리 형제끼리 쇠고리식으로 서로 돕고, 서로 뭉치면서, 밀어주고, 당겨주고, 잡아주면서 되는 집안이 되라고... 늘 잔소리 아닌 잔소리를 하게 된다. 그러고보니 우리 부모님들은 왜서 그때 우리에게 이런 교육을 시키지 않았을까? 언녕 이런 감각을 키워주었더라면 나도 혹시 이를 악물고 악착스레 분투해서 지금쯤은 내 조카들의 얼굴을 세워줄수 있는 어마어마한 빽이 되여있지 않았을가 ?       곰곰히 생각해보니 내 주변의 이웃, 동료, 친구들이 지금이나마 나에게 이러한 깨달음을 가질수 있게 진실한 감동을 준 잊을수 없는 몇가지 교과서같은 이야기들이 있다       처음 하고 싶은 얘기는, 전에 우리 마을에 형편없이 구차한 한 가정이 있었는데 어머니 혼자 여섯자매를 키웠었다. 어찌보면 세상은 그래도 공평한것 같다. 이렇게 탈망살이가족에 글쎄 자식 여섯명이 련이어 줄줄히 대학에 붙는 영광도 있으니 말이다. 그것도 깊고깊은 두메산골에서 공부한 애들 여섯명이 다 대학에 붙다니. 그 세월에 누구나 인정할수밖에 혀를 찰수밖에 없는 마을의 경사이고, 온 동네의 일등 화제였었다. 그래서 집집마다 그 집을 부러워했고 애들이 애먹일때면 자연히 "그집 애들을 봐라, 못살아도 얼마나 공부는 잘하는가?"는 식으로 교육했다. 늘 그집 여섯형제들이 온 마을사람들의 선망의 대상이였다. 그 덕에 그집 어머니도 여기저기 요청받아 어떻게 자식교육을 잘해서 여섯명이 다 대학에 붙은 경험담을 지금 우리가 유명한 교수님 요청해서 강의듣듯이 했다. 그때 난 어려서 한번도 들은적이 없지만 이야기를 들은 마을 어르신들이 하나같이 혀를 끌끌 차며 찬사를 아끼시지 않던 모습은 지금도 눈에 선하다. 상상만 해도 마음에 와닿는 진실하고 좋은 사례들이였을것 같다. 우리 어머니도 한번 가 들으시더니 어려운 살림에 우리에게 책 사주는 돈은 아끼지 않으셨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 집 어머니는 시골엄마지만 참으로 똑똑하고 사리밝고 해박한 여인이였다. 그리고 그 형제중 맞이가 리더역할을 잘했다고 들었다. 되는 집안이 되기까지 부모님 교육도, 집안의 맏이 역할도, 참 중요한것같다.       다음 얘기는, 내가 금방 시집왔을때 일이다. 우리 옆집에는 딸 두명이 있었는데 모두 병원에 출근했다. 그러다가 먼저 큰딸이 병원을 나와서 여행사에서 가이드를 하였다.이삼년 지난뒤 같은 여행사 동료와 결혼하고 상해에 가서 여행사를 맡아하더니 몇년뒤엔 그 큰 도시에 살림집도 사고 영업집도 사게 되였다. 여행사도 점점 번창하더니 고정직업의사인 여동생네 부부도 데려다 사업을 점점 통 크게 벌려나갔다. 그러다가 사촌형제들도 데려가고 또 퇴직하신 부모님에 사돈에 팔촌까지 다 데려다 여행사산하의 호텔, 약방, 특산품판매점... 등등에 써주면서 온 가족의 취업문제도 해결하고 자기사업도 탄탄하게 키워나갔다.       내가 집에서 애 키우는 불과 몇년 안되는 사이에 이웃집은 큰딸 덕분에 빛의 속도로 번창해졌다. 그때 절실히 느낀점이라면 한 가족에 “영웅”이 한명만 나와도 온 가족이 떵떵거리며 살수 있구나는 깨달음, 이웃집의 번창한 발전 과정이 나에게는 평생 잊을수 없는 생생한 교과서로 되였다. 이젠 이십년 세월이 흘렀지만 그때 내가 받은 감동메세지는 지금까지도 오래도록 잊혀지지 않는 긴 여운을 남기는 드라마를 본듯이 생생하다.       한 가족의 해결사, 한 가족의 자랑, 한 가문의 영광, 되는 집안. 그래서 나는 이 얘기를 주위사람들에게 참 많이 했고 그 만큼 내 인생에 큰 계발을 받았다.       그 다음은 우리 가게에서 일하는 직원의 이야기인데 어느날, 그분이 이렇게 자랑했다. 여덟형제에 부부가 모두 공무원이며 한가족도 이혼한 가족이 없고 부부중 어느 한명이 먼저 돌아간 집도 없고 집집마다 자식들을 좋은 대학에 보냈으며 80고령의 부모님도 아주 건강하다는것이다. 그 직원한테서 이 얘기를 듣는 순간 나는 입이 딱 벌어졌다. 와~ 세상에 어떻게 이렇게 큰 축복을 받을수 있나? 이건 진짜 자랑할만한 가족이다. 하나도 거짓말이 없는 진짜로, 그 직원도 퇴직하고 우리 가게에와서 출근했는데 큰 언니, 작은 언니가 늘 우리 가게에 놀러와서 익숙한 사이가 되였었다. 그들이 오고가는 얘기를 들어보면 모두 경제적으로 풍족한편은 아니지만 형제사이 우애가 깊고 화목한 집안임은 틀림이 없었다. 요즘 세월에 이렇게 산다는게 그것도 여덟형제가 모두... 오우 ~ 진짜로~ 내 나이 사십을 넘기니 이런 집안이 부럽기 그지없다.   또 다음 이야기로 넘어가보자. 여기서 잠깐 내 얘기도 곁들여 볼가. 옷가게를 운영한지 20여년 되는 나는 사장이라고 땡땡이치는 법이 없이 초심을 잃지 않고 늘 시계바늘처럼 제 시간에 출근해서 제시간에 퇴근하는 노력파이다. 오래 하다보니 이젠 그 만큼 여유로와져서 좀 쉬여도 괜찮긴 하지만, 이제는 몸에 밴 체질이 된 습관때문에 전에는 돈버는 멋이였다면 지금은 돈보다 고객과 서로 소통하면서 자기 가치도 창출하는데 초점을 두고 즐기면서 한다. 이러한 내가 요즘은 무슨 친구복이 터져가지고 벼라별친구, 혹은 친한 선배, 친한 후배가 많기고 하다. 큰일을 하지 않아서, 어떻게 인맥을 이용하지 못하는게 안타까울 정도로 많은 친구들, 지인들, 그래서 본의 아니게 퇴근시간이 출근시간 이상으로 바쁜 사회활동때문에 몸도 마음도 많이 지쳐있다.        또 요즘 위쳇은 이런 저런 그룹이 많이들 성행되는듯하다. 그룹 이름들도 가지각색 “미녀들 수다”, “동네쉼터”, “시크릿 가든”, “사랑과 우정사이”, “그대는 꽃”... 등등 개성시대와 더불어 얼기설기 거미줄 처럼 엉키고 성킨 인맥의 시대. 하지만 우리 가게에서 나와 같이 몇년간 일한 언니는 자기가족끼리만 그룹을 만들어가지고 제집식구끼리만 논다고 한다. 즉 그룹성원으로는 15년 가까이 외국에 있는 남편과 다 커서 외지에서 취직한 아들과 며느리... 낮에는 혼자다보니 심심하다며 쉬지도 않고 매일 가게에 출근하고 저녁엔 가족끼리 대화하고...       상대적으로 사회활동이 잦은 나는 처음에 그 언닌데서 "나는 친구모임엔 별로 가지 않소 저녁에 퇴근한뒤엔 우린 집식구들끼리 그룹채팅하면서 노오 ..."라는 얘길 들었을때 요즘같은 세월에 그게 너무 희구해서 눈물까지 찔끔찔끔 짜면서 허리 부러지게 웃었었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내가 서글퍼지면서 그 언니가 참 똑똑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회활동을 하다보면 참으로 즐거운듯 하다. 쫓고 쫓기는 힘든 일상속에서 탈출하여 힐링한답시고 퇴근후엔 친구만나서 수다떨고, 집에 와서는 위쳇으로 수다 떨고, 어쩌면 남들보기엔 인생을 참 여유있게 멋있게 사는것 같아 보인다.       그런데 나를 포함한 요즘의 많은 사람들이 사회활동이나, 인맥은 얼마나 휘황하고 거창한지 모르겠지만, 자기 가정에 들어가서는 너무나도 메마른 삶을 살고 있음을 발견하게 되였다. 잦은 사회활동때문에 가정에 와서는 대화할 시간도, 가족 분위기를 느낄 시간도, 서로 소통할 사이도 없게 되여 적지 않은 가정들이 조금씩조금씩 황막한 사막으로 변해가고 있다. 가정이 얼마나 소중한 의미인데, 그것도 모르고 여북하면 "있을때 잘해"라는 노래까지 성행할까?   부부가 오래 같이 살다보면 공동언어도 없고, 재미도 없고, 설레임도 없이, 권태를 느낀다고들 한다. 조금만 언짢아도 제꺽하면 헤여지는 요즘같은 세월에 10여년 갈라져 있어도 서로에 대한 믿음과 사랑을 바탕으로 여전히 금슬 좋은 언니네 부부, 나이보다 훨씬 젊어보이고 세련되기까지 한 언니, 언니라고 어찌 나가 놀고 싶지 않았을까?... 외로워서라도 자기 취미생활을 하고 싶었을것이다. 아무 부담도 없는 언니를 나가 사화활동을 즐긴다고 해도 누가 뭐라할 사람 또한 하나도 없을거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직 남편만을 위해 자식만을 위해 가족을 위해 자기 인생을 헌신한 언니가가족이 자기 인생과 생활의 전부인 이 언니가 너무나 돗보인다. 그 누구보다도 이 언니와 같은 안해들 엄마들의 헌신이 없다면 어찌 되는집안 대대손손 번창한 집안이 있을까? 인간은 성공을 추구한다고 부산을 떨지만 실상 최대의 성공은 행복한 가정을 구축하는것이다. 이 언니처럼 일편단심 민들레 같은 형님이 우리가문에도 많았으면 좋겠다. 남의식구가 잘 들어오는 복도 그 집안, 그 가문의 덕이라고 들었다.         “사람은 덕이 없으면 서지못하고 나라는 덕이 없으면 흥하지 못한다(人无德不立, 国无德不兴)”고 한다. 되는 집안이 되기위해서 지금부터라도 많은 덕을 쌓아야겠다. 막연한 기대보다는 되는 집안이 될수밖에 없는 현실적인 노력을 해야겠다. 되는 집안, 안되는 집안, 내세울게 아무것도 없는 집안, 우리 조상들이 우리에게 남긴 유감을 다시 내 후대들에게 물려주지 말아야겠는데 어른이 된 우리 애들이 어디가서 기를 펴고 가문을 진정으로 자랑스럽게 여기는 집안이 되기 위해 가족의 매 구성원 한사람 한사람 다 우리 가문의 영광이 되게 해달라고 해결사역할을 하게 해달라고 대대손손 번창하게 해달라고 나는 늘 기도할것이다. 그리고 그 중심에 서서 밀어주고 잡아주고 큰 언덕이 되여주리라. ------———— 프로필   최선숙 (崔善淑)   필명:은주(殷朱) 中国 길림성 화룡 출생   연변대학 조선언어문학학부 연변과학기술대학AMP 제1회 로신문학원 연변창작강습반수료 "내 삶의 보따리" "자식농사" "배신 "등 수필 소설 시 20여편발표. "열혈모녀 축구팬 "   해란강닷콤 우수상.  “정향숲을  찾기까지”  제5기 중국조선족 효사랑글짓기 공모 우수상 문학블로그:  邮箱:18844309877@163.com 핸드폰: 18844309877  
1    샐러리맨의 행복은 댓글:  조회:1153  추천:1  2019-11-14
                                                                                                                                .     퇴근 뒤에는 늘 충전하러 다닌답시고 한 주 내내 밖에서 헤매기가 일쑤이다. 낮에도 바쁘다는 이유로 길가에 휘늘어진 그 멋진 가로수 한번 제대로 쳐다볼 사이도 없이 몇 년을 살았다. 위챗에서도 새로 추가한 어느 누구와 따뜻한 대화 한번 길게 나눠보지 못하고 그렇게 나는 몇 년을 살았다. 진짜 돌아버릴 것 같다. 막 어디론가 도망가고 싶다. 휴가라도 무작정 떠나고 싶다. 그렇게 위챗 모멘트에도 '출장 중'이라고 도장을 콱 찍고는 잠적 생활을 하고 싶다. 연예인들이나 정치인들이 늘 외우는 은퇴, 요즘 나도 어딘가 누구도 찾지 못하는 그런 곳에 꽁꽁 숨어버리고 싶다. 누구도 친하기 싫고, 모르는 사람은 더더욱 만나기 싫고, 불편한 자리는 더더욱 가기 싫고, 소심해졌다고 할까? 누구의 무심한 한마디에 괜히 상처 입고 너무 예민 해진 걸까? 그 누구나 공인하는 산만하고 늦은 절주의 태평스러운 성격좋은 여자가 언제부터, 왜서 이렇게 변해가고 있을까? 다행히 오늘은 누구에게도 불려가지 않고 조용히 집에 돌아왔으니 너무 좋다. 매일같이 이어지는 크고 작은 미팅, 겨우 선의의 거짓말로 둘러 붙이고 누가 볼세라 가만가만 제집 문에 들어섰다. 후우, 안도의 숨을 내쉰다. 룰루랄라, 원래는 퇴근한 뒤에 곧게 집에 오면 이렇게 좋은걸. 늘 바쁘다고 아우성이었는데 내게도 원래 이렇게 많은 내게 속하는 휴식시간이 있었었네. 대체 왜서? 뭐 잘못한 일도 없으면서 도적고양이처럼 숨어서 퇴근해야 되지? 자기 주도적인 삶을 살아야 하는데 어쩌다 나니 나는 이런 신세가 되였을까? 허위적이고 지인 만나기에 부대끼고. 이게 어디 향수인가? 매일같이 불려 다니는 게 지겹다 지겨워. 이 모든 허황된 짓거리 안 하면 못사는 걸까? 집에 들어서자 바람으로 살짝 위챗부터 눈팅한 다음 최대한 편한 캐주얼로 갈아입는다.  옷가지들을 세탁기에 돌리고 밥가마에 밥을 안치고 장보러 재래시장으로 향한다. 낮에는 바람이 기승을 부리더니 저녁에는 언제 그랬나 싶게 수그러들어 밤길 걷기가 딱 좋은 날씨다. 오랜만에 찾은 퇴근 뒤의 자유를 만끽해보려고 재래시장이며 슈퍼며 여기저기 기웃거린다. 한가하게 이것저것 뒤적거리다 싱겁쟁이처럼 길가에 장사꾼들과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여유 있게 흥정하는 사이 바구니에는 싱싱한 남새며 고기류로 가득 찬다. 돌아오는 길에 일용잡화점에 들려서 뭐 또 살 게 없는가 이리저리 살펴보다가 늘쩡 늘쩡 팔자걸음으로 집에 돌아왔다. 간만에 느껴보는 행복한 저녁시간이다. 소도 아침에 일밭으로 나갈 때는 늘쩡늘쩡 늦장을 부리다가도 하루 일이 끝나고 집에 돌아올 때는 걸음이 그토록 빠르다고 엄마가 늘 말해주셨다. 그냥 무심히 들었던 그 말이 요즘은 그렇게 내 마음에 와닿는다. 그래서 나도 늘 허허 웃으며 퇴근 시간 때마다 직원들과 이 얘기를 한다. "오늘 많이 팔진 못했지만 퇴근 시간이 되니 정말 좋다"고. 그리고 하루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소처럼 가벼운 발걸음으로 가게를 나선다. 애는 친구집에 놀러 간 지 며칠째 된다. 우리가 자랄 때에는 제집에 형제 서너 명, 어떤 집들은 형제 일곱 여덟 명 되는 집들도 있었지. 한 집안에 한 형제라도 성격은 저마다 제 각각이었지. 그렇게 많은 형제들과 부대끼며 자라다 보니 우리 세대들은 그나마, 서로 어울릴 줄 알고 배려할 줄 알고 양보할 줄 알지만 지금의 애들은 어디 그런가? 혼자 자라서 자기중심적이고 자기밖에 모르고. 그래서 나는 애가 놀러 가겠다고 하면" 무조건 가서 잘 놀다 와" 라고 한다. 태신없는 아이로 키우느라 천방백계로 노력한다 다행히 자기 앞에 공부는 하니깐 망정이지. 종래로 공부 잘하란 말은 해본 것 같지 않다. 늘 "너 친구들과 잘 어울리니? 한 반에 애들과는 잘 어울리니? 밥 같은 것도 누가 사준다고 그냥 얻어먹지만 말고 너도 가끔씩 다른 사람들도 사줘야 돼. 친구들 앞에서 너무 뽐내지는 않겠지? 그러면 다 미워해, 그러느라면 금방 왕따 당해." 그렇게 때로는 애 엄마이면서도 또 애 친구로 때론 엄격한 선생님으로 각양각색의 역할 담당하며 애 교육만은 절대 게을리하지 않는다. 가끔씩 대화가 불가능할 때에는 위챗으로 편지도 보내주고. 이렇게 가족들이 다 놀러 나간 사이 홀가분한 나 혼자만의 저녁 시간이다. 혼자지만 밥도 짓고 요리도 맛있게 볶아서 예쁜 접시에 담아놓고 은은한 음악도 띄워놓고 목이 가늘고 긴 근사한 와인잔에 여우작작 와인도 한 모금씩 음미하며 이 저녁의 고독을 즐겨보려 한다. 드라마도 보며 가끔씩 위챗그룹에서 지인들과 담소도 하고 옷장 정리, 서랍 정리를 하면서 간만에 편안한 일상을 보내니 얼마나 행복한지 모르겠다. 여자로 살고 싶다. 여자로 산다는 게 이렇게 행복한 짓인 줄을 내가 왜 인제야 알았을까? 어떤 이들에게는 지긋지긋한 가무노동일지 모르겠지만 샐러리맨으로 20여 년 살아온 나에게는 이런 시간들이 그토록 부러운 사치이다. 어쩌다 찾아온 한가한 저녁 더없이 행복한 일상, 물론 가족성원들이 다 같이 하는 저녁이면 금상첨화이겠지. 앞으로도 나는 종종 이런 저녁 시간을 쟁취하련다. 친구들과의 우정도 좋겠지만 더 많은 시간은 가족 분위기를 느끼면서 사랑하는 내 가족을 위해 보내련다. 여름에는 가족들이랑 여행도 다녀오고 근사한 서양 음식점에 가서 분위기 잡고 와인도 기울이면서. 가족과 함께하는 소소한 행복들. 20여 년 성취욕으로 잃어버린 소중한 가족과의 따뜻한 소통을 지금부터라도 되찾아 곱절로 갚아주리라. 이렇게 나는 여자로 살고 싶다. 편집︱흥경선비 —————— 최선숙 (崔善淑)   필명:은주(殷朱) 中国 길림성 화룡 출생   연변대학 조선언어문학학부 연변과학기술대학AMP 제1회 로신문학원 연변창작강습반수료 "내 삶의 보따리" "자식농사" "배신 "등 수필 소설 시 20여편발표. "열혈모녀 축구팬 "   해란강닷콤 우수상.  “정향숲을  찾기까지”  제5기 중국조선족 효사랑글짓기 공모 우수상 문학블로그:  邮箱:18844309877@163.com 핸드폰: 188443098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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