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단되였던조선여행길이4년만에다시열렸다.
중국절강성국제여행국에서조직한조선여행단체가2010년4월20일저녁전문열차로온주에서떠나주지.항주등역에서여행객을싣고떠났다.
나는이번400여명의여행객들과함께9박10일을보냈다.
여행객대다수가온주,주지,항주지역인들중유독저와남편이교포이고또항미원조지원군에참가했거나혹은지원군가족들도많이있었다이번많은여행객들은국내외여행을많이다녀왔고 이제는 조선을한번가보고싶었다고한다.
나는한민족의핏줄이그립고또힘들고어렵게살아가고있다는조선에대한애착심에이번여행에나셨다.
여행열차는4월23일오후4시중국단동역에도착했다.
열차에서시달린여행객들은단동역광장에서흘러나오는환영군악나팔소리에정신을차렸다. 중국에서첫조선여행단체이기에단동시정부에서환영식을거행했고그수백명의저녁만찬파티까지열어주었다.
丹東시는다민족도시이다. 한족, 만족, 몽고족, 회족, 조선족, 희박족등29개민족이있고한족이외의소수민족중에만족이인구가제일많은소수민족이며전도시총인구의32%를차지하고있다. 요동반도경제개발구동남부압록강과황해가합류하는위치에있으며동북아경제권중심지대로조선의신의주와압록강을사이에두고바라보고있다.
환영식을마치고“항미원조기념관”을참관하였다. “항미원조기념관”은부지면적이18만평방메터,건축면적이13790평방메터인데기념탑, 진렬관, 파노라마그림관과 노천무기진렬장으로구성되였다.기념탑은화강암재료로 높이가53메터, 거기에는등소평의 비문제사가새겨져있기도한다.
진렬관은《品》자형의3층건물인데건물높이가19.4메터, 건축면적이5800평방메터이다. 진열관에는4개의주제로10개의진열실에 귀중한 력사사진500여장과 1000여건의물품들이진렬되여있었다.
파노라마그림관은높이가24메터이고 직경이44메터인 원주형건물이다. 건물안에는현대과학기술수단으로그림, 플라스틱모형, 불빛과음향을하나로융합시켜《청진강전멸전》의 격전장면을 생동하게재현시켜놓았다. 파노라마그림관내의화폭은높이가16메터, 둘레길이가132메터, 참관자들이전동회전식스탠드에 서기만하면 당시치열한전쟁분위기와 지원군전사들의영웅적전투장면을직접감수할수있었다.
노천무기진렬장은면적이2000평방메터로항미원조전쟁중에투용되였던 비행기, 야전포, 레이다, 땅크, 중형무기와전쟁에서로획한적들의중형무기장비들이질서있게 진렬되여있었다.
항미원조전쟁기념관은1958년9월29일처음건설되였는데 지금의기념관은1993년7월27일조선전쟁정전협약 40년을계기로원지원군지휘부유적지이였던영화산(英华山)에새롭게신축되였다고한다.
애국교육기지로지정된기념관은무료참관을실행해오면서개관이래100여만명의참관자들이답사하였다고한다.
나는기념관을다돌아보면서내내맘이아팠다. 어떤원인으로왜전쟁을했던간에무고하게죽어나간사람들의그아픔소리가,,,귀에서방불히들려오는것만같았다.
“항미원조기념관”을보고난후우리민족의아픈흔적으로남은압록강단교(鸭绿江断桥) 로향했다. 압록강단교아래서는오늘날평화의혜택을누리며삶을즐기는국내외관광객들을실은유람선들이“도라지”의조선민요곡조속에서여유롭게오가고있었다. 중국의여러도시를경유하면서살았지만 조선민요가락이온도시에울려퍼지는이런정경은처음으로목격했던거같다.
금빛노을이아름다운압록강에어둠이드리워지면서단동과신의주의야경은더욱극명해졌다. 압록강강물은더욱짙은어둠속으로침잠한다.
유사이래크고작은전투로끊임없이붉은피로물들었던압록강. 새로운나라의탄생과멸망을묵묵히지켜봐야했던압록강. 다리가끊기고생살이찢기는아픔에절규했던압록강. 그래도압록강은그아픔과상처를보듬은채흐름을멈추지않았다.
4월24일단동역에서 단동-신의주열차가떠났다. 이번조선여행을하면서한국재품과사진기,컴퓨터,비디오,헨드폰등물건은갖고갈수없다고해서많은물건은단동호텔에맏겨놓고떠났지만유독사진기만은 고집하고갖고떠났다. 가이드도사진기를조선통관할때빼앗길수도있다고귀띰을해주었지만,,
열차는신의주역에도착했다. 모든여행객들은북한군인들이열차에올라오자,,,갑자기잠잠하고긴장해졌다.무시무시했던거같다. 군인들의검사에서무사히사진기를뺐기지않고통과하여안도의숨을쉴수가있었다.
한2시간의통관수속을마친후“신의주-평양”열차는 떠났다. 그동안신비하게만느껴졌던나라, 조선여행이이제부터시작되였다. 조선땅에서 이몸이열차를타고평양으로가고있다는게 꿈만같았다. 지나고지나도똑같은마을,똑같은논팥이한눈에안겨왔다. 저멀리에서어렴풋이보이는나물캐는사람들을바라보는순간나는눈물이핑돌았다.
한국에처음갔을때도,,똑같이눈물을흘렸었다. 한국은부모님들이태여난고향땅이여서그렇게그리워하던나라였다. 살아생전한국을가보고싶어외우고외웠지만편안하게한국을오갈수없었던연대에돌아가셨으니, 부모님생각에눈물을흘렸다. 이번조선여행하면서울었던것은 아마한민족이기에흘러오는감격이였으리라, 오후5시가넘어서열차는평양역에도착하였다. 평양의햇볕은뜨거웠고, 공기는맑았다.
평양땅을밟은여행객들의얼굴하나하나에서열차안에서보았던것과는또다른감회가엿보였다. 반가움, 신기함, 놀라움, 호기심, 긴장감등등의눈빛이햇볕에부딪쳐번뜩이는듯했다. 나에게도역시그런비슷한감회가교차되어다가왔다.한복을차려입은가이드처녀의웃음때문인지조금더편안해진마음으로창밖을바라봤다.
신이주에서평양근교까지지형이나토목화초모두가안내자의말처럼실제로‘고향에왔다’는느낌이들었다. 물론북한에서만난시골풍경은조금남달랐다. 그러니까굳이표현하자면현재중국에도엄연히존재하는시골을방문한느낌이라기보다내가살았던,그러나이제는거의사라진, 어린시절의시골고향집에와있는느낌이었다.
조선에서특급이라는양각도호텔에투숙하였다. 호텔에서3일투숙하는동안식사는 내가좋아하는음식들이많아서아주좋았다. 호텔도생각이상으로불편함을느낄수가없었다. 호텔방에서평양의야경을내려다볼수가있었다. 좀어둡긴하지만나름대로잔잔한아름다움이슴베여있었다.
4월25일 이른아침관광뻐스는 개성시판문점으로향했다. 판문점입구에들어서자 또무시무시했다. 군인들의안내를받으면서판문점을관람하였다. 가깝게보이는조선국기와멀리서날리고있는한국태극기를번갈아보면서나는깊은생각에잠겼다.
언제가면이두나라가하나로통일되는그날이올가? 분단의아픔은 이번여행객들속에서조선족으로살아가고있는나에게제일큰거같다. 지난날부모님들이살아계셨을때늘부르던“삼팔선아가거라”이유행가가떠오르면서분단전머리에보자기를이고어깨에짐을지고옆집다니던우리민족이오고가던그모습이되새겨지면서그때가그리워졌다……나는속으로한국과조선의통일을위하여묵묵히기도하면서판문점을떠났다.
판문점을참관한후오전11시쯤고려박물관에도착했다. 민족복장을곱게받쳐입은안내원이고려박물관에서여행객들을맞아주었다.고려박물관은개성특급시에위치한유일한박물관인데조선에유일하게 남아있는옛날건물이라고한다. .고려시대부터조선시대까지최고의교육기관이였던성균관의모습을본따서만들었는데1987년에개관되였다. 12동의본관, 6동의분관으로구성되어있으며총면적은7만평방미터이다. 내부는약천여건의역사적인유물,외부는석탑등이전시되어있다..
중국여행객들은가는곳마다쇼핑하는데정신이없었다. 물건을많이사주는게조선을돕는다는 헌신적인생각에서일가? 처음으로 개성시에서살고있는조선시민들을멀리서나마바라볼수있었다. 이쁘게차려입은한복을받쳐입은여인들이많이보인다. 가는날이장날이라고이날이건군절이라거리의분위기도한결더흥성해보였다.
점심은궁중요리를먹었다. 점심을먹고난후모처럼조선사람들과대화를나누는시간을가졌다. 점심에먹은궁중요리값이얼마인지? 궁금해물었더니값이얼마인지? 모른다는것이다. 왜냐하면일반평민들이먹을수없는요리라서값을모른단다. 지나치는시민들은모두다우리여행객들을멀리서쳐다보고만있었다. 북한여행시주의할점에시민들과대화를나누지못하도록되여있어서,,,다가가고싶었지만절제할수밖에얿었다. 나는충분히그들과대화를나눌수있었음에도불구하고,,,,
점심을먹고난후여행뻐스는평양방향으로달렸다. 길옆에피여난진달래가끊없이보여반갑게여행객들을맞아주었다. 조선땅에도착해서부터쓰레기라고는 찾아볼수가없었다. 순간“아환경오염이없는유일한나라,우리조상때부터깨끗함을지켜온한민족이구나!”라는 생각이머리를스쳐지나갔다. 쓰레기는커녕지저분한종이쪼각하나찾아볼수가없었으니,,,실로탄복이되였다. 한국에처음갔을때도깨끗한도시환경에감탄했었다.
뻐스는평양대동강에도착했다. 대동강모래톱에는제너럴셔먼호미국배한척이보였다.1966년(고종3년)음력7월12일대동강을거슬러올라가평양에서통상을요구하며행패를부리던미국상선제너럴셔먼호를평양군민들이반격하여태워버린사건이다.
셔먼호배를참관하고나서 평양지하철에도착했다. 평양지하철은100미터깊이로만들어진고심도지하철이다. 1968년에건설이시작되였고1973년9월에개통되였다. 총길이는34키로미터이다. 평양지하철은지하궁전이라고불릴정도로화려하고내부는대리석으로되여있다. 다른나라에서는지하철이여행지로구경시킬리가만무하지만유독평양에서는 지하철이 여행관광지로뜨고있다.
평양지하철을관람하고나서는만경대에도착하였다. ‘만경대’는이름그대로만가지경치를감상할수있는곳’이었고, ‘김일성장군생가’가있는곳이기도했다.
평양시내를어느정도벗어나대동강을만났고, 대동강가를따라제법서쪽으로가다가빠져나와‘만경대’에도착했다. ‘김일성생가’에서도확연히느꼈지만 조선사람들의마음과그마음이발현되는행동에
한결같이하나의거대한‘중심’이존재하고있다는사실을어렵지않게발견할수있었다.
바로김일성전주석에대한경외심과충성심이다. 생가를소개하는 안내자들이설명중간중간울먹거리며혼신의힘을다해소개하는모습에서더더욱극명하게드러났다.
그런존재였기에‘그’가태어난이곳생가는 조선주민들에게최고의순례지이자성지와다름없었다.
4월26일오전10시쯤묘향산에도착하였다. 가이드말에의하면묘향산은북한북부의평안남도, 자강도와평안북도의접경지에위치해있는북한에서이름난관광명승지로서4대명산중의하나이고. 산세가기묘하고신비하며산우에측백이향기를뿜고있어묘향산이라불렀다
고한다. 북한에서이름있는국제우의전람관이묘향산에위치해있었다.묘향산에도착해서처음여행코스가바로김일성국제우의전람관을관람하였다. 여기에는세계의수많은국가와조직및개인이김일성과김정일에게증정한선물21.3만건중일부분이전시되여있다. 그중에서중국의기증품수량이제일많았다.
국제우의전람관은김일성국제우의관(본관)과김정일국제우의관(별관)으로구성되였으며전자는후자보다큰여러층의대형조선식건물이며멀리서보면목조건물같지만사실은콩크리트건축이다. 관내에서는사진, 촬영과떠드는것을금지하며승강엘레베이트와계단이있으며전람청이많고정결하게구분되여있었다.
묘향산지구에는향산호텔(특급)과청천호텔(2급) 등두개호텔이있었다.
국제우의전시관을관람하고난후보현사로이동하였다. 보현사는묘향산에위치한불사이고지금은북한불교의종교적인역할을담당하고있다. 가이드말에의하면불교신자가약만명좌우되고기독교신자도한만명정도된다고한다. 묘향산을구경하고 내려오는데소낙비가억수로내리기시작했다.비는평양에도착해서도계속내렸다. 중조우의탑을올라가면서많은중국여행객들은“하늘도슬퍼서운다”면서중조우의탑에헌화를하였다.
이어서만수대소년궁으로향했다. 어린이들은오전에는공부하고오후에는소년궁에와서과외활동에참가한다고하였다. 어린이들의생기발랄한과외활동은여행객들의맘을기쁘게해줬고특히만수대소년궁어린이들의공연은여행객들의박수갈채를받았다. 사람들은문화앞에서는환한웃음과박수갈채를보내게되는데과연무엇때문일가? 나는공연을보면서많은생각에잠겼다…….
이제21 세기가문화의세기라는말은벌써낡은말이되었다.
이처럼오늘날우리들에게문화는삶의본질이며내용이자미래의비전이되어있다. 따라서문화는곧우리시대의시대사조라고할수있을것이다. 조선의수도평양에서상상하기어려울정도인10만명이함께벌이는아리랑축제의문화를체험했다. 그리고대한민국에는 4천만의국민이한마음이되어월드컵축구경기에집중하는모습을보았다.
이것이바로우리민족의힘이다우리는이엄청난에네르기를앞으로어떻게집중시키며미래의비전에활용할것인가를활발히논의해야한다고생각한다그런데나는이문제에대해남북이함께쏟아야할우리의역량이나에너지는바로양측의화합과통일에있다고생각한다. 그러나그길은통일과같은거창한구호가아니라아주소박하고친근하게접근하며서로의동질성을찾아내고확인하며그것을함께성장시켜나가야한다고믿는다. 이러한힘이나방법이바로문화이다.
우리는원래둘이아니었기에‘본래하나이던것을다시하나로’ 만들면되는것이다. 그힘의바탕이이문화속에있음을나는확신한다.
4월27일도평양시는비바람에휩싸였다. 중국여행객들은조선여행을마치고평양-신의주열차에몸을싫었다. 열차는 평양시김일성김정일동상. 그리고주체사상탑을멀리하면서,,,,,신의주역에도착했다.
갑자기울리는나팔소리소고소리에정신이번쩍들었다. 단동에서처럼우리를환송해주는환송식이기다리고있는줄알았는데…자세히보니신입군대환송식이신의주에서진행되고있었다. 처음으로그렇게많은사람들이오르락내르락기차밑으로많은사람들이왔다갔다는데저는한참멍했다이것이무슨관경인지….기차차창밖에서흐르는비줄기를바라보면서신의주기차역에모였던사람들의생활이궁금해졌다. 혹시어둠과배고픔에떨고있지는않는지?. 이번여행에서 농민들의생활을볼수없어서유감이였다.
열차가신의주역을벗어나중국단동으로들어서는그순간, 저도모르는사이에그렇게맘이편할수가없었다. 여기가바로내가사는중국이구나! 하는생각이들면서 온몸에긴장이확풀렸다.
여행을가면사람들은집에안부전화를하느라법석이지만북한에있는동안에는아무데도전화를할수가없으니그또한단절된공간이며고립된시간이아니겠는가? 소음과공해와교통체증으로뒤범벅이된우리의삶에서이모두가갑자기조용해진아름다운진정한휴가여행이기도했다.
떠나기전조선에대한많은생각들이 실제로조선여행을하면서 안내자들의언행, 식당종업원들의서비스, 평양시내의면모등등이 훨씬많이밝아보인것도사실이다. 이번의첫여행으로그변화의양상을다알길이없었지만단한가지- 우리민족은꼭앞으로부강해질것이며한국, 북한, 또세계에널려살아가고있는재외동포들의지혜와힘을합친다면한반도의통일도머지않아꼭이뤄질것임을확신한다.
이번여행은나로하여금많은것을깨닫게하였다.
나는재중동포로살아가고있는조선족이다. 큰바다를이루는데하나의작은물방울에불과한존재이지만방울방울의물이모여서바다가되듯이우리모두가“우리서로하나되자”라는이념과정신으로뭉친다면통일의배는결코한강과대동강에서뜨고말것이라믿는다. 그날을위해바위틈에서싱싱하게자라는소나무를바라보면서더강하고보람된삶을살리라!/안귀선
중단되였던조선여행길이4년만에다시열렸다.
중국절강성국제여행국에서조직한조선여행단체가2010년4월20일저녁전문열차로온주에서떠나주지.항주등역에서여행객을싣고떠났다.
나는이번400여명의여행객들과함께9박10일을보냈다.
여행객대다수가온주,주지,항주지역인들중유독저와남편이교포이고또항미원조지원군에참가했거나혹은지원군가족들도많이있었다이번많은여행객들은국내외여행을많이다녀왔고 이제는 조선을한번가보고싶었다고한다.
나는한민족의핏줄이그립고또힘들고어렵게살아가고있다는조선에대한애착심에이번여행에나셨다.
여행열차는4월23일오후4시중국단동역에도착했다.
열차에서시달린여행객들은단동역광장에서흘러나오는환영군악나팔소리에정신을차렸다. 중국에서첫조선여행단체이기에단동시정부에서환영식을거행했고그수백명의저녁만찬파티까지열어주었다.
丹東시는다민족도시이다. 한족, 만족, 몽고족, 회족, 조선족, 희박족등29개민족이있고한족이외의소수민족중에만족이인구가제일많은소수민족이며전도시총인구의32%를차지하고있다. 요동반도경제개발구동남부압록강과황해가합류하는위치에있으며동북아경제권중심지대로조선의신의주와압록강을사이에두고바라보고있다.
환영식을마치고“항미원조기념관”을참관하였다. “항미원조기념관”은부지면적이18만평방메터,건축면적이13790평방메터인데기념탑, 진렬관, 파노라마그림관과 노천무기진렬장으로구성되였다.기념탑은화강암재료로 높이가53메터, 거기에는등소평의 비문제사가새겨져있기도한다.
진렬관은《品》자형의3층건물인데건물높이가19.4메터, 건축면적이5800평방메터이다. 진열관에는4개의주제로10개의진열실에 귀중한 력사사진500여장과 1000여건의물품들이진렬되여있었다.
파노라마그림관은높이가24메터이고 직경이44메터인 원주형건물이다. 건물안에는현대과학기술수단으로그림, 플라스틱모형, 불빛과음향을하나로융합시켜《청진강전멸전》의 격전장면을 생동하게재현시켜놓았다. 파노라마그림관내의화폭은높이가16메터, 둘레길이가132메터, 참관자들이전동회전식스탠드에 서기만하면 당시치열한전쟁분위기와 지원군전사들의영웅적전투장면을직접감수할수있었다.
노천무기진렬장은면적이2000평방메터로항미원조전쟁중에투용되였던 비행기, 야전포, 레이다, 땅크, 중형무기와전쟁에서로획한적들의중형무기장비들이질서있게 진렬되여있었다.
항미원조전쟁기념관은1958년9월29일처음건설되였는데 지금의기념관은1993년7월27일조선전쟁정전협약 40년을계기로원지원군지휘부유적지이였던영화산(英华山)에새롭게신축되였다고한다.
애국교육기지로지정된기념관은무료참관을실행해오면서개관이래100여만명의참관자들이답사하였다고한다.
나는기념관을다돌아보면서내내맘이아팠다. 어떤원인으로왜전쟁을했던간에무고하게죽어나간사람들의그아픔소리가,,,귀에서방불히들려오는것만같았다.
“항미원조기념관”을보고난후우리민족의아픈흔적으로남은압록강단교(鸭绿江断桥) 로향했다. 압록강단교아래서는오늘날평화의혜택을누리며삶을즐기는국내외관광객들을실은유람선들이“도라지”의조선민요곡조속에서여유롭게오가고있었다. 중국의여러도시를경유하면서살았지만 조선민요가락이온도시에울려퍼지는이런정경은처음으로목격했던거같다.
금빛노을이아름다운압록강에어둠이드리워지면서단동과신의주의야경은더욱극명해졌다. 압록강강물은더욱짙은어둠속으로침잠한다.
유사이래크고작은전투로끊임없이붉은피로물들었던압록강. 새로운나라의탄생과멸망을묵묵히지켜봐야했던압록강. 다리가끊기고생살이찢기는아픔에절규했던압록강. 그래도압록강은그아픔과상처를보듬은채흐름을멈추지않았다.
4월24일단동역에서 단동-신의주열차가떠났다. 이번조선여행을하면서한국재품과사진기,컴퓨터,비디오,헨드폰등물건은갖고갈수없다고해서많은물건은단동호텔에맏겨놓고떠났지만유독사진기만은 고집하고갖고떠났다. 가이드도사진기를조선통관할때빼앗길수도있다고귀띰을해주었지만,,
열차는신의주역에도착했다. 모든여행객들은북한군인들이열차에올라오자,,,갑자기잠잠하고긴장해졌다.무시무시했던거같다. 군인들의검사에서무사히사진기를뺐기지않고통과하여안도의숨을쉴수가있었다.
한2시간의통관수속을마친후“신의주-평양”열차는 떠났다. 그동안신비하게만느껴졌던나라, 조선여행이이제부터시작되였다. 조선땅에서 이몸이열차를타고평양으로가고있다는게 꿈만같았다. 지나고지나도똑같은마을,똑같은논팥이한눈에안겨왔다. 저멀리에서어렴풋이보이는나물캐는사람들을바라보는순간나는눈물이핑돌았다.
한국에처음갔을때도,,똑같이눈물을흘렸었다. 한국은부모님들이태여난고향땅이여서그렇게그리워하던나라였다. 살아생전한국을가보고싶어외우고외웠지만편안하게한국을오갈수없었던연대에돌아가셨으니, 부모님생각에눈물을흘렸다. 이번조선여행하면서울었던것은 아마한민족이기에흘러오는감격이였으리라, 오후5시가넘어서열차는평양역에도착하였다. 평양의햇볕은뜨거웠고, 공기는맑았다.
평양땅을밟은여행객들의얼굴하나하나에서열차안에서보았던것과는또다른감회가엿보였다. 반가움, 신기함, 놀라움, 호기심, 긴장감등등의눈빛이햇볕에부딪쳐번뜩이는듯했다. 나에게도역시그런비슷한감회가교차되어다가왔다.한복을차려입은가이드처녀의웃음때문인지조금더편안해진마음으로창밖을바라봤다.
신이주에서평양근교까지지형이나토목화초모두가안내자의말처럼실제로‘고향에왔다’는느낌이들었다. 물론북한에서만난시골풍경은조금남달랐다. 그러니까굳이표현하자면현재중국에도엄연히존재하는시골을방문한느낌이라기보다내가살았던,그러나이제는거의사라진, 어린시절의시골고향집에와있는느낌이었다.
조선에서특급이라는양각도호텔에투숙하였다. 호텔에서3일투숙하는동안식사는 내가좋아하는음식들이많아서아주좋았다. 호텔도생각이상으로불편함을느낄수가없었다. 호텔방에서평양의야경을내려다볼수가있었다. 좀어둡긴하지만나름대로잔잔한아름다움이슴베여있었다.
4월25일 이른아침관광뻐스는 개성시판문점으로향했다. 판문점입구에들어서자 또무시무시했다. 군인들의안내를받으면서판문점을관람하였다. 가깝게보이는조선국기와멀리서날리고있는한국태극기를번갈아보면서나는깊은생각에잠겼다.
언제가면이두나라가하나로통일되는그날이올가? 분단의아픔은 이번여행객들속에서조선족으로살아가고있는나에게제일큰거같다. 지난날부모님들이살아계셨을때늘부르던“삼팔선아가거라”이유행가가떠오르면서분단전머리에보자기를이고어깨에짐을지고옆집다니던우리민족이오고가던그모습이되새겨지면서그때가그리워졌다……나는속으로한국과조선의통일을위하여묵묵히기도하면서판문점을떠났다.
판문점을참관한후오전11시쯤고려박물관에도착했다. 민족복장을곱게받쳐입은안내원이고려박물관에서여행객들을맞아주었다.고려박물관은개성특급시에위치한유일한박물관인데조선에유일하게 남아있는옛날건물이라고한다. .고려시대부터조선시대까지최고의교육기관이였던성균관의모습을본따서만들었는데1987년에개관되였다. 12동의본관, 6동의분관으로구성되어있으며총면적은7만평방미터이다. 내부는약천여건의역사적인유물,외부는석탑등이전시되어있다..
중국여행객들은가는곳마다쇼핑하는데정신이없었다. 물건을많이사주는게조선을돕는다는 헌신적인생각에서일가? 처음으로 개성시에서살고있는조선시민들을멀리서나마바라볼수있었다. 이쁘게차려입은한복을받쳐입은여인들이많이보인다. 가는날이장날이라고이날이건군절이라거리의분위기도한결더흥성해보였다.
점심은궁중요리를먹었다. 점심을먹고난후모처럼조선사람들과대화를나누는시간을가졌다. 점심에먹은궁중요리값이얼마인지? 궁금해물었더니값이얼마인지? 모른다는것이다. 왜냐하면일반평민들이먹을수없는요리라서값을모른단다. 지나치는시민들은모두다우리여행객들을멀리서쳐다보고만있었다. 북한여행시주의할점에시민들과대화를나누지못하도록되여있어서,,,다가가고싶었지만절제할수밖에얿었다. 나는충분히그들과대화를나눌수있었음에도불구하고,,,,
점심을먹고난후여행뻐스는평양방향으로달렸다. 길옆에피여난진달래가끊없이보여반갑게여행객들을맞아주었다. 조선땅에도착해서부터쓰레기라고는 찾아볼수가없었다. 순간“아환경오염이없는유일한나라,우리조상때부터깨끗함을지켜온한민족이구나!”라는 생각이머리를스쳐지나갔다. 쓰레기는커녕지저분한종이쪼각하나찾아볼수가없었으니,,,실로탄복이되였다. 한국에처음갔을때도깨끗한도시환경에감탄했었다.
뻐스는평양대동강에도착했다. 대동강모래톱에는제너럴셔먼호미국배한척이보였다.1966년(고종3년)음력7월12일대동강을거슬러올라가평양에서통상을요구하며행패를부리던미국상선제너럴셔먼호를평양군민들이반격하여태워버린사건이다.
셔먼호배를참관하고나서 평양지하철에도착했다. 평양지하철은100미터깊이로만들어진고심도지하철이다. 1968년에건설이시작되였고1973년9월에개통되였다. 총길이는34키로미터이다. 평양지하철은지하궁전이라고불릴정도로화려하고내부는대리석으로되여있다. 다른나라에서는지하철이여행지로구경시킬리가만무하지만유독평양에서는 지하철이 여행관광지로뜨고있다.
평양지하철을관람하고나서는만경대에도착하였다. ‘만경대’는이름그대로만가지경치를감상할수있는곳’이었고, ‘김일성장군생가’가있는곳이기도했다.
평양시내를어느정도벗어나대동강을만났고, 대동강가를따라제법서쪽으로가다가빠져나와‘만경대’에도착했다. ‘김일성생가’에서도확연히느꼈지만 조선사람들의마음과그마음이발현되는행동에
한결같이하나의거대한‘중심’이존재하고있다는사실을어렵지않게발견할수있었다.
바로김일성전주석에대한경외심과충성심이다. 생가를소개하는 안내자들이설명중간중간울먹거리며혼신의힘을다해소개하는모습에서더더욱극명하게드러났다.
그런존재였기에‘그’가태어난이곳생가는 조선주민들에게최고의순례지이자성지와다름없었다.
4월26일오전10시쯤묘향산에도착하였다. 가이드말에의하면묘향산은북한북부의평안남도, 자강도와평안북도의접경지에위치해있는북한에서이름난관광명승지로서4대명산중의하나이고. 산세가기묘하고신비하며산우에측백이향기를뿜고있어묘향산이라불렀다고한다. 북한에서이름있는국제우의전람관이묘향산에위치해있었다.묘향산에도착해서처음여행코스가바로김일성국제우의전람관을관람하였다. 여기에는세계의수많은국가와조직및개인이김일성과김정일에게증정한선물21.3만건중일부분이전시되여있다. 그중에서중국의기증품수량이제일많았다.
국제우의전람관은김일성국제우의관(본관)과김정일국제우의관(별관)으로구성되였으며전자는후자보다큰여러층의대형조선식건물이며멀리서보면목조건물같지만사실은콩크리트건축이다. 관내에서는사진, 촬영과떠드는것을금지하며승강엘레베이트와계단이있으며전람청이많고정결하게구분되여있었다.
묘향산지구에는향산호텔(특급)과청천호텔(2급) 등두개호텔이있었다.
국제우의전시관을관람하고난후보현사로이동하였다. 보현사는묘향산에위치한불사이고지금은북한불교의종교적인역할을담당하고있다. 가이드말에의하면불교신자가약만명좌우되고기독교신자도한만명정도된다고한다. 묘향산을구경하고 내려오는데소낙비가억수로내리기시작했다.비는평양에도착해서도계속내렸다. 중조우의탑을올라가면서많은중국여행객들은“하늘도슬퍼서운다”면서중조우의탑에헌화를하였다.
이어서만수대소년궁으로향했다. 어린이들은오전에는공부하고오후에는소년궁에와서과외활동에참가한다고하였다. 어린이들의생기발랄한과외활동은여행객들의맘을기쁘게해줬고특히만수대소년궁어린이들의공연은여행객들의박수갈채를받았다. 사람들은문화앞에서는환한웃음과박수갈채를보내게되는데과연무엇때문일가? 나는공연을보면서많은생각에잠겼다…….
이제21 세기가문화의세기라는말은벌써낡은말이되었다.
이처럼오늘날우리들에게문화는삶의본질이며내용이자미래의비전이되어있다. 따라서문화는곧우리시대의시대사조라고할수있을것이다. 조선의수도평양에서상상하기어려울정도인10만명이함께벌이는아리랑축제의문화를체험했다. 그리고대한민국에는 4천만의국민이한마음이되어월드컵축구경기에집중하는모습을보았다.
이것이바로우리민족의힘이다우리는이엄청난에네르기를앞으로어떻게집중시키며미래의비전에활용할것인가를활발히논의해야한다고생각한다그런데나는이문제에대해남북이함께쏟아야할우리의역량이나에너지는바로양측의화합과통일에있다고생각한다. 그러나그길은통일과같은거창한구호가아니라아주소박하고친근하게접근하며서로의동질성을찾아내고확인하며그것을함께성장시켜나가야한다고믿는다. 이러한힘이나방법이바로문화이다.
우리는원래둘이아니었기에‘본래하나이던것을다시하나로’ 만들면되는것이다. 그힘의바탕이이문화속에있음을나는확신한다.
4월27일도평양시는비바람에휩싸였다. 중국여행객들은조선여행을마치고평양-신의주열차에몸을싫었다. 열차는 평양시김일성김정일동상. 그리고주체사상탑을멀리하면서,,,,,신의주역에도착했다. 갑자기울리는나팔소리소고소리에정신이번쩍들었다. 단동에서처럼우리를환송해주는환송식이기다리고있는줄알았는데…자세히보니신입군대환송식이신의주에서진행되고있었다.
처음으로그렇게많은사람들이오르락내르락기차밑으로많은사람들이왔다갔다는데저는한참멍했다이것이무슨관경인지….기차차창밖에서흐르는비줄기를바라보면서신의주기차역에모였던사람들의생활이궁금해졌다. 혹시어둠과배고픔에떨고있지는않는지?. 이번여행에서 농민들의생활을볼수없어서유감이였다.
열차가신의주역을벗어나중국단동으로들어서는그순간, 저도모르는사이에그렇게맘이편할수가없었다. 여기가바로내가사는중국이구나! 하는생각이들면서 온몸에긴장이확풀렸다.
여행을가면사람들은집에안부전화를하느라법석이지만북한에있는동안에는아무데도전화를할수가없으니그또한단절된공간이며고립된시간이아니겠는가? 소음과공해와교통체증으로뒤범벅이된우리의삶에서이모두가갑자기조용해진아름다운진정한휴가여행이기도했다.
떠나기전조선에대한많은생각들이 실제로조선여행을하면서 안내자들의언행, 식당종업원들의서비스, 평양시내의면모등등이 훨씬많이밝아보인것도사실이다. 이번의첫여행으로그변화의양상을다알길이없었지만단한가지- 우리민족은꼭앞으로부강해질것이며한국, 북한, 또세계에널려살아가고있는재외동포들의지혜와힘을합친다면한반도의통일도머지않아꼭이뤄질것임을확신한다.
이번여행은나로하여금많은것을깨닫게하였다.
나는재중동포로살아가고있는조선족이다. 큰바다를이루는데하나의작은물방울에불과한존재이지만방울방울의물이모여서바다가되듯이우리모두가“우리서로하나되자”라는이념과정신으로뭉친다면통일의배는결코한강과대동강에서뜨고말것이라믿는다. 그날을위해바위틈에서싱싱하게자라는소나무를바라보면서더강하고보람된삶을살리라!/안귀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