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훈이의 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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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어린이명절 선물 –“정토” 댓글:  조회:1459  추천:1  2015-05-28
6월 1일은 어린이명절입니다. 어린이명절이 오면 부모들은 자식에게 줄 명절선물에 대해 무척 신경을 쓰게 됩니다. 베이징 석간에 실린 한 학부모의 글이 너무 인상적이어서 언급해봅니다. 그 학부모는 어린이명절을 맞아 어린이들을 상대로 출간하는 간행물을 정기구독하도록 정해주었습니다. 그런데 어린이들을 상대로 한다는 그 간행물에 어린이들이 보지 말아야 할 내용들이 실렸고 그 뿐만 아니라 폭력과 비행을 묘사한 글까지 실려 그 학부모의 분개를 자아냈습니다. 그 학부모는 이런 간행물은 어린이들에게는 하나의 정신오염이라고 쓰면서 어린이들에게 오염되지 않은 “정토”를 마련해주자고 호소했습니다. “정토”란 말은 불교에서 나오는 말입니다. “정토”란 티 없이 깨끗한 곳, 말하자면 극락정토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오염되지 않은 깨끗한 환경을 어린이들에게 마련해주자는 것이 그 학부모의 뜻이겠지요. 지금 사람들은 어른들의 생활공간을 오염시키고 있을 뿐만 아니라 어린이들의 생활공간까지도 오염시키고 있습니다. 이 시대를 오염시키는 금전만능, 도덕상실, 향락주의, 폭력, 마약 등 사회악은 어린이들에게도 그 해를 끼치고 있습니다. 사회악뿐만 아니라 어른들의 일거일동마저도 어린이들에게 영향을 끼치고 있습니다. 얼마전 지하철에서 이런 광경을 목격하게 되었습니다. 한 어린이가 노인에게 자리를 양보하느라고 일어서자 그 곁에 섰던 한 청년이 제꺽 그 자리를 차지해버렸습니다. “어른이 애들보다 못하다”는 말이 이래서 생겨났는지도 모릅니다. 시체 멋을 낸 그 청년은 주변의 시선이 따갑게 쏠려오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가방에서 책을 꺼내들었습니다. 그 청년이 읽는 책은 컴퓨터와 관련된 전문 서적이었습니다. 어린이가 양보한 자리를 차지하고도 털끝만치라도 미안한 마음도 없이 전문서적을 들여다보는 그 청년을 보면서 저는 이런 생각을 해봤습니다. 장차 그 청년이 성공해서 컴퓨터회사의 사장이 된다고 할지라도 그 내면 세계는 “먹이를 보면 제 배부터 채우겠다고 혈안이 되어 날치는 동물 세계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할 것이리라. 한심한 생각이 들면서 한편으로는 자리를 양보한 어린이가 그 청년의 행실을 어떻게 받아들이겠는가가 궁금했고 혹시 그 어린이가 그 청년의 행실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서 장차 커서 그 청년의 행실을 다시 되풀이 할가바 걱정이 앞섰습니다. 어린이들 생활공간에 티 없이 깨끗한 “정토”를 마련해주자면 먼저 어른들의 생활공간을 정리하고 깨끗하게 가꿔야 하고 미래주인공인 어린이들의 세계에 다문 한 뙈기라도 “정토”를 마련해 주어야겠죠. 그것이 바로 어린이명절에 주는 가장 큰 선물이 아닐까싶은 생각이 듭니다.
10    어머님께 드리는 가장 좋은 선물 댓글:  조회:1907  추천:1  2015-05-09
   어느 때부터 생겨난 말인지는 딱히 모르지만 《발렌타인데이에는 장미꽃이요 어머니명절엔 카네이션》이란 유행어가 있습니다. 아마 장미꽃은 열렬한 사랑을 상징하기에 연인에게 주는 가장 적합한 선물이고 오래 피는 카네이션은 건강과 장수를 상징하기에 어머니명절에 우선 선택하는 선물이라는 뜻에서 이 유행어가 생겨난 것 같습니다.  또 이런 말이 있습니다. 《장미꽃에 비하면 카네이션은 외면당하는 편이다》. 뜻인즉 발렌타인데이에 장미꽃을 찾는 사람이 많지만 어머니명절에 카네이션을 찾는 사람들이 상대적으로 적다는 얘깁니다. 어머니명절에 즈음해 어머니의 크고 깊은 은혜에 보답하라고 가르치는 불교 경전, 부모은중경(父母恩重經)에 나오는 이야기 하나 떠올려 봅니다. 부처님이 어느날 길을 가다가 제자 아난에게 길가의 뼈 무더기를 여자의 뼈와 남자의 뼈로 나누라고 명했다. 아난이 난색을 표하자 부처님은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남자의 뼈는 희고 무겁지만 여자는 아기를 한번 낳을 때마다 서말 서되의 피를 흘리고 여덟섬 네말의 젖을 먹여야 하므로 뼈가 검고 가벼우니라” 이어 부처님은 어머니의 은혜로 10가지를 꼽았습니다. “임신 후 아기를 태 중에 잘 보호해준 은혜, 산고를 겪으며 아기를 낳아준 은혜, 자식을 낳고 나면 모든 고통을 잊어버리는 은혜, 입에 쓴 것은 자신이 먹고 단 것만 자식에게 먹이는 은혜, 마른자리에는 자식을 눕히고 젖은 자리에는 자신이 눕는 은혜, 젖을 물려 키워준 은혜, 손발이 닳도록 깨끗이 씻어준 은혜, 자식이 먼길 떠나면 내내 걱정해주는 은혜, 자식을 위해서라면 나쁜 일도 마다 않는 은혜, 자식을 끝까지 염려하고 사랑해주는 은혜”   그럼 자식들이 어머니에게 드리는 가장 좋은 선물은 무엇이겠습니까?  80고령인 한 어머니는 자식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어머니명절이 따로 없다. 어머니에게 주는 가장 좋은 선물은 오늘을 열심히 살아가는 너들의 모습이다.》 자기 인생을 열심히 살아가는 것이 어머니에게 드리는 가장 좋은 선물이라면 또한 자식에 대한 어머니의 유일한 바람이라면 어머니의 바람을 항상 명기하고 그 바람을 행동에 옮기는 것이 자식으로서 어머니 은혜에 보답하는 현명한 처사기 아니겠습니까.  어머니명절을 맞아 조용히 불러봅니다. “어머니, 고맙습니다. 사랑합니다!”
9    사진에 얽힌 한복 이야기 댓글:  조회:2683  추천:4  2015-02-18
  새해를 앞두고 "중국민족" 잡지사 서정옥주필님이 전화로 한복에 관한 특별기고를 부탁했습니다. “전 이날 이때까지 한복을 입어본적이 없는데요.” 제가 잘라 말하니 서주필님은 언젠가 잡지에서 저의 딸이 어린이 한복을 입은 사진을 본적이 있고 저의 아버님이 한복을 즐겨 입는줄 알고 있다고 하면서 꼭 “숙제”를 해서 바치라고 “엄명”을 내렸습니다.    사진 말이 나오니 언뜻 떠오르는 사진 한 장이 있었습니다. 그 사진이 바로 제가 한돐을 맞으며 찍은 기념사진입니다. 사진첩을 들춰보니 아하, 59년전 제가 멋진 어린이 한복을 입고 기념사진을 찍었더군요. 그 사진을 부서의 후배들에게 돌려보이니 후배들이 누구 사진인가고 물었습니다. 제가 롱조로 “50여년전 작가 지망생”이라고 했더니 모두 그 때도 이렇게 이쁜 어린이 한복이 있었는가고 놀라는 것이였습니다. 제가 보기에도 지금 어린이들이 입는 고운 한복에 뒤지지 않는 한복이였습니다. 제가 어린시절 어린이 한복을 “꼬까옷”이라고 했습니다. 일요일 어머님이 나한테 “꼬까옷”을 입혀가지고 나들이 나가면 내 또래 애들이 시샘이 났는지 저한테 “꼬까옷”이란 별명을 달아주었습니다. 그 별명을 듣기 싫어 저는 한복 입기를 거부했습니다. 나들이 가기전 어머님이 저한테 한복을 억지로 입혀주면 저는 밖에 나가 옷에 흙탕물을 끼얹었습니다. 그러면 어머님은 하는수없이 다른 옷을 갈아입혔습니다. 억지다짐으로 저한테 한복을 입히던 어머니는 제가 소선대 중대장이 되면서부터 한복을 입히지 않았습니다. 저의 왼팔에 달린 붉은 줄 두 줄이 그어진 소선대 중대장 표식이 그렇게 대견스러워 보였던지 가족사진을 찍을 때면 동생들은 꼭 한복을 입히면서도 저만은 교복을 입히고 중대장 표식이 달린 왼팔을 앞으로 쑥 내밀게 했습니다. 제가 소선대 대대장이 된후로는 어머니는 시간만 나면 저를 데리고 다녔습니다. 어머니가 그처럼 대견스러워했고 자랑거리였던 대대장 표식은 문화대혁명이 터지면서 아버님이 반동학술권위로 투쟁받은 그 이튿날 가차없이 떼이고 말았습니다. 그때로부터 저의 동년의 꿈은 풍비박산이 나고 15살 어린 나이에 “지식청년”으로 시골에 가서 농사를 짓기를 3년반 하던 중 한복이 저의 눈앞에 다시 등장하는 “사변”이 일어났습니다.    당시 문화대혁명이 한창 진행되던 중이여서 한복을 더군다나 남자가 한복을 입는다는 것은 상상도 못하는 시절에 저의 할아버지가 하얀 한복차림을 하고 나섰습니다. 그 날은 저보다 10살위인 삼촌이 장가가는 날인데 집 마당에서 기념촬영이 있었습니다. 꼭 한복을 입으셔야 할 할머니는 그냥 밭일을 하고 돌아오는 농촌 할머니 차림새였지만 할아버지는 평소에 입지않던 한복을 꺼내 입으셨습니다. 허연 턱수염을 길게 기룬 할아버지가 한복을 입으시니 한결 늠름해보였습니다.  훗날 아버님이 쓰신 자서전을 읽어보니 할아버지에겐 한복은 자존심의 상징이였습니다. 이런 일화가 있습니다. 18살 나이에 목에 엿판을 메고 동냥길에 나섰던 할아버지는 우연하게 울산에서 일본 어선에 올라 일본으로 건너가 어부로 되였습니다. 할아버지는 몇 년 험한 바다에서 생사를 걸고 일하다가 고향에 점 찍어놓은 색시를 데리려 환고향 했는데 그날 할아버지는 양복차림에 넥타이까지 매고 거기에 시골에선 보지도 못한 승용차에 앉아 고향마을에 들어섰습니다. 촌사람들은 할아버지가 대부자가 되였다고 부러워했고 딸 가진 부모들은 사위로 삼았으면 세상 좋을 일이라고 생각했답니다. 그 후로 할아버지는 몇년 일본, 대만을 전전하다가 손에 돈이 쥐여지니 환고향해 땅 몇 뙈기 사서 농사를 지었는데 하루는 공출을 바치라고 하는 일본 순사한테 대들었다가 피터지게 맞고 며칠 유치장에 갇혔습니다. 강직한 성격인 할아버지는 며칠후 훌쩍 고향을 떠나 만주땅을 밟았습니다. 할머니 얘기로는 그때로부터 할아버지는 양복을 아예 입지않고 항상 하얀 옷차림을 하고 다녔다고 합니다. 하얀 옷차림이란 한복으로 말하면 서민들이 입는 그런 평상복입니다. “양복쟁이”가 “백의민족”으로 변신한것입니다. 산에 나무하러 갈때나 약초 캐러 갈때도 하얀 옷차림을 하였는데 한번은 할머니가 산에도 왜 그런 옷차림으로 가는가고 하니 과묵한 할아버지는 “이 옷을 입으면 호랑이도 피해 가.”라고 무뚝뚝하게 한마디 했답니다. 무심히 던진 한마디지만 깊은 의미가 담긴 말씀입니다.  한복을 즐겨 입으신 아버님 사진을 일별해보니 문화대혁명전 한복 입으신 사진이 한장도 없었습니다. 영문을 물으니 아버님은 기자 취재 자주 나가고 이런 운동, 저런 운동에 말려들다나니 한복 입을 겨를이 없었다고 했습니다. 아버님이 한복을 입기 시작한건 문화대혁명이 끝나고 아버님 명예가 회복된후부터입니다. 억울한 루명을 쓰고 감옥에 4년이나 갇혀 있으면서 삶의 용기를 버리지 않은 리유에 대해 아버님은 “내 마음속에 시가 있고 가족의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버님이 수감된 기간 구상한 장편서사시가 바로 우리 민족의 항일투쟁사를 구현한 “동틀무렵”이였습니다. 그 뒤를 이어 많은 시집이 출간되였는데 시집에 실린 아버님 사진중 가장 잘 된 사진은 한복을 입고 찍은 사진입니다. 아버님의 한복에 대한 애정은 그때로부터 열을 올렸습니다. 아버님과 어머님이 한복을 마음껏 입지 못한 한을 푼다고 70을 넘긴 나이에 한국의 춘향의 고향에 가서 리도령과 춘향으로 분장하고 찍은 사진은 지금 봐도 웃음이 절로 나오면서 어쩔수없이 노래 “청춘을 돌려다오”가 떠올려집니다.    이 글을 쓰면서 갑자기 뇌리를 강하게 치는 느낌이 하나 있습니다. 그 느낌이란 “한복에도 가족사가 깃들어 있을줄 미처 몰랐네”입니다.    저의 경우엔 한복을 입고 싶은 충동을 크게 받는적이 한번 있습니다. 저는2008년 자그마한 수술을 받다가 의외로 의료사고가 나서 하마트면 하늘나라로 갈번했습니다. 세번 수술까지 받고 나니 세상만사가 다 헛것으로 보이고 단지 한 생각만 굳혔습니다. 내 자식이 시집, 장가 갈 때까지 꼭 살아야 하겠다는 일념으로 열심히 먹고 운동했습니다. 하루는 친구 아들 잔치에 갔다가 친구가 한복차림을 한 것을 보고 나도 아들, 딸 잔치엔 한복을 입어야 하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날 집에 돌아와 언젠가 선물로 받은 한복을 꺼내 입고 사진을 찍어 미국에 있는 안해에게 보냈더니 내 나이에 격이 맞지 않는 한복이라고 하면서 한국이나 고향인 연길에 가면 좋은 한복으로 한벌씩 맞추자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안해는 아들과 딸이 장차 미국에서 결혼식을 올리게 될 것 같은데 그때 양복보다 멋진 한복차림으로 미국인들 앞에 나서자고 했습니다.  미국인들 얘기가 나오니 미국인들이나 유럽인들이나 예전엔 우리 민족의 한복을 “코리안 기모노”라고 했답니다. 기모노는 일본 전통의상입니다. 왜 하필 우리 민족의 전통의상에 기모노를 붙혀야 합니까? 외국인들에게 한복의 진미를 알려주려고 한국의 한 패션 전문가가 로스앤젤레스에서 한복 패션쇼를 가졌는데 그 분이 하신 말씀이 아주 명언입니다. 그 분은 우리 민족의 전통미를 상징하는 한복은 세계적으로도 그 아름다움을 인정받는 우리 민족에게 가장 잘 어울리게 만들어진 하나의 과학이라고 했습니다.  우리 민족의 만들어낸 하나의 과학이라는 한복을 입고 당당하게 외국인들 앞에 나설 그날을 기대해봅니다.
8    해마다 설날이 오면 댓글:  조회:2332  추천:2  2014-01-29
     또 설이 왔네요. 설이 오면 오십을 훌쩍 넘긴 나이인 지금도 항상 떠올리게 되는 겨울철 과일 하나가 있습니다. 그 과일이 뭔가 하면 언감입니다. 노란 감을 그냥 얼궈놓은 건데 이발이 들어가지 않을 정도인 언감을 조금 녹이고 먹으면 사각사각하면서도 꿀맛같은 그 맛, 상상만해도 군침이 돕니다. 제가 어릴적 설이 오면 할아버지는 언감을 사왔습니다. 그 시절 겨울철 과일이란 언감, 언배, 찔광이를 사탕물에 발라 얼군 삥탕쿨러 정도였습니다.  어느해인가 저는 언감을 너무 먹어 배탈이 나서 배침까지 맞았습니다. 그 뒤로 저는 언감을 먹지않았습니다. 그러나 할아버지는 설이 오면 그냥 언감을 사왔습니다. 언젠가 제가 할아버지에게 왜 언감만 사오는가고 했더니 할아버지는 말씀이 없었습니다. 그 다음해 설에도 할아버지는 또 언감을 사오셨습니다. 할아버지가 왜서 해마다 설이면 언감을 사가지고 오셨는지 그 까닭을 저는 어른이 다 돼서 할아버지 고향을 찾아서야 알게 됐습니다.  1989년 저는 할아버지 고향인 한국 전라남도 곡성군 입면 삼오리를 찾았습니다. 할아버지 고향집 뒤 뜰에는 감나무 세 그루가 있었습니다. 늦가을이라 잎이 떨어진 감나무에는 까지밥으로 남긴 감 몇 알만 대룽대룽 달려있었습니다. 그 감을 보는 순간 저는 왜서 할아버지가 해마다 설이면 언감을 사오셨는지 알수 있었습니다.  할아버지는 18살 엿판을 메고 고향을 떠난 뒤로 일본, 대만을 전전하다가 중국 대륙에 정착했습니다. 광복이 나서 고향으로 가려던 할아버지는 조선반도 분단 비극으로 귀성길이 막히고 말았습니다. 타향살이 근 반세기가 흐르는 속에 망향의 슬픔을 안고 사는 사람에겐 눈을 감아도 지척에 다가서는 것이 고향이랍니다. 그리움이 지나치면 한스러움만 남는다고 시인인 저의 아버지는 “고향이 원수인 줄을 미처 몰랐네”라고 고향에 대한 애수를 읊었습니다. 할아버지에게 있어선 감은 그리운 고향에 대한 향수였습니다. 할아버지에겐 감 맛은 그대로 고향의 맛이었을 것입니다. 비록 할아버지는 고향에 대해 일언반구도 하지 않았지만 언감으로 손자에게 못 잊을 고향을 맛보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올해도 차례상에 올릴 과일로 언감을 만들었습니다.  해마다 청명, 추석, 설에는 저는 차례를 지냅니다. 조상들의 명복을 빌고 새해의 소망을 가져봅니다. 이 글을 보시는 여러분들께서도 올해가 마냥 거침없는 한 해가 되시고 건강 장수하시길 기원합니다. 감사합니다.    
7    새해 덕담 댓글:  조회:3881  추천:4  2013-12-31
 설 세시풍속에서 중요한 풍속의 하나가 덕담을 나누는 것입니다. 덕담이란 말그대로 새해 축복입니다. 지금은 전화, 연하장, 메일, 미니 블로그, 웨이신, 카카오톡을 이용해 축복을 전하지만 제가 어린 시절  동네 어르신네들은 그냥 집집을 돌면서 서로이 새해 축복을 나누셨습니다. 서로 마주 보면서 설 인사를 나누고 기분나면 술잔을 들면서 덕담을 나눈데 비해 지금 덕담을 주고받는 방식이 조금은 인정이 말라간다는 느낌이 없진 않지만 어떤 방식으로 나누든 덕담은 어디까지나 최고의 측복입니다. 설날 아침, 할아버지 뒤를 따라 다니며 보면 어르신네들이 나누는 새해 덕담은 대체로 건강장수, 다자다복, 소원성취였습니다. 동네 어르신들에게 절 인사 드리면 그때는 세배돈보다 사탕, 과자가 많이 차려졌습니다. 어르신네들이 우리한테 하시는 말씀은 대개 “부모님 공경하고 선생님 존경하고 공부 잘해라”였습니다.  지금은 덕담이 아주 다양해졌고 의미도 깊어졌습니다. 시대적인 변쳔이라고 할가요. 유행되는 덕담 몇 개 골라봤습니다. “새해는 열어보지 않은 선물입니다. 새해 선물이 희망의 선물, 사랑의 선물이 되길 기원합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큰 기쁨은 새롭다는것입니다. 해는 어제와같이 떠올라도 해빛은 어제의 해빛이 아닙니다. 날마다 새로움을 맞는 한 해가 되길 기원합니다.” “미래가 좋은것은 그것이 하루하루 다가오기 때문입니다. 새해가 당신에게는 하루하루가 사랑과 행복으로 채워지길 기원합니다.” “좋은 사람들과 함께 살아간다는것은 참 행복한 일인것 같습니다. 새해도 변함없이 함께 행복한 한 해가 되시길!”  들으면 가슴이 뭉클해지는 새해 덕담입니다. 저의 덕담은 아주 간단한데 해마다 변함없이 써오고 있습니다. “새해도 마냥 거침없는 한 해가 되길 기원합니다!”   
6    겨울의 명상 댓글:  조회:2063  추천:1  2013-12-01
완연한 겨울입니다. 고향에는 첫 눈으로 폭설이 내렸다네요. 설경을 그냥 사진으로만 보는 유감만 씹을 뿐입니다. 그 유감 달래려고 언젠가 아버님이 쓰신 시 한 수 "겨울의 명상"을 떠올렸습니다. 눈은 땅에 떨어져 움직이지 않는다 그의 몸에선 하-얀 피가 흐르고 있다   이제 돌풍이 일면 그는 또다시 비상할거야   잿불에 감자를 굽던 만보 할배가 광복 전 한겨울 지독하게 추웠던 밤 이야기를 사랑방 새끼줄처럼 꼬아갈 적에 밖에서 문뜩 함성이 들린다 어허, 눈이 다시 잠을 깼나봐…  
5    중양절 단상 댓글:  조회:3346  추천:1  2013-10-12
  음력으로 9월 9일은 중양절입니다. 중양절을 중구절이라고도 합니다. 중양이란 양수가 겹친 날이란 뜻이고 중구란 홀수 9가 중복된다는 의미입니다. 예로부터 중양절은 양수중복일 풍속의 하나로 가을의 정취에 취해 수확의 계절의 풍요로움을 만끽하는 날로 되어 왔습니다. 중국과 한국은 중양절이나 단오, 3월 삼짇날처럼 홀수(양수)가 두 번 겹치는 날을 큰 명절로 여겨 왔습니다. 음력으로 3월 3일인 삼짇날이 제비가 강남에서 날아오는 날이라면 음력으로 9월 9일 중양절은 제비가 도로 강남으로 날아가는 날이라고 합니다.    중양절의 세시풍속을 보면 이날 가을의 꽃인 국화구경을 하고 중양절 시절음식의 하나인 국화주를 마시며 산에 올라 단풍놀이를 즐기는 풍속이 행해집니다. 중양절에는 또한 추석 때 성묘를 못한 사람들은 조상의 선산을 찾기도 합니다. 중국에서는 한대(汉代)로부터 중양절의 세시풍속이 행해졌다고 전해 내려오고 있습니다. 기재에 의하면 당(唐), 송(宋)대 와서는 중양절은 관리들이 휴가를 즐기는 명절로 되었다고 합니다.      중양절 세시풍속에는 또한 시주(诗酒)라는 행사가 있습니다. 시주란 술 마시며 시를 주고받는다는 뜻입니다. 시인, 묵객들은 중양절에 술과 음식을 마련해 국화꽃잎을 술잔에 띄워 마시며 시를 주고받으며 즐겼다고 합니다. 이러한 중양절전통은 가을 소풍이나 단풍놀이, 국화구경, 등산으로 지금까지 이어내려 오고 있습니다.       옛날에 비해 다른 점이라면 지금의 중양절은 노인절이기도 합니다. 때문에 중양절은 자식들이 부모님께 효도하는 날입니다. 지금 이날이면 부모님들을 모시고 가을소풍을 떠나거나 선물을 들고 부모님들을 찾아가 효도를 보이는 분들이 많습니다.   예로부터 부모님께 효도하는 것은 사람이 해야 할 일 중에서 으뜸 되는 일이라고 했습니다.   효도에 대해 해석이 수없이 많지만 그 많은 해석들을 모두어 보면 부모님께 효도하는 것은 거창한 일을 하라는 것이 아니라 낳아주고 길러준 부모님께  부모님께 걱정을 끼치지 않고 부모님을 기쁘게 해드리며 마음 편하게 해드리는 것입니다. 단적인 실례로 인터넷에 오른 한 어머니가 맏아들에게 띄운 메일을 보여드리겠습니다. 그 어머니는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첫 자식이란 이유하나만으로 제일 많이 사랑했고  또 제일 많이 매로 꾸짖고 혼내준 큰아들이어서 그렇게 한 만큼 기대와 바램도 커, 늘 엄마의 짧은 생각에 기대에 못 미치는 아들을 보는 것 같아 늘 화가 나고 섭섭한 마음뿐이었는데 이제 너도 40세가 되어 가는 한 가정의 아버지요, 남편으로써  부모에게 손 벌리지 않고 열심히 살아가는 모습을 볼 때 대견스럽고 부모에게는 그것만으로도 효자인 셈이다.   늘 너희 곁에는 이 어미가 있다는 것 염두에 두고 살아가면서 도움의 말이 필요하다면 찾아 주고 이 어미를 소외된 늙은이로 만들지 말아 다오. 하는 일 마다 잘 되고 건강했으면 좋겠다. 건강을 잃으면 모든 것을 잃으니까 건강이 우선임을 명심해라. 큰아들에게 엄마가 씀》  어머니는 편지에서 오히려 자식의 건강에 대해 염려하고 있습니다. 편지에 쓰인 대로 부모님들은 자식이 열심히 살아가는 삶 자체를 세상에 둘도 없는 큰 효도로 보고 있습니다. 다음은 아들이 병환에 계신 아버님에게 보낸 메일입니다.  《아버님 새벽 1시와 3시 사이 어김없이 아버지의 기침소리가 가족들을 잠에서 깨웁니다. 오늘도  아버님은 잠을 이루지 못하시며 심하게 기침을 하십니다. 언제부턴가 아버님께서는 말을 하기조차 힘들어하십니다.   아버님 왜 이렇게 힘들어하세요. 언제나 너무 강해 자식들로 하여금 다가설 수 없던 아버지 왜 이리 나약해 지셨나요. 〈남에게 피해주지 말아라〉,〈언제나 건강해라 〉 하시던 나의 아버님, 얼른 자리를 차고 일어나서 예전처럼 무섭던 아버님의 모습을 보여 주세요. 얼른 돌아와 주세요 예전에 무섭던 그 아버지의 모습으로. 사랑합니다 아버님...》   언젠가는 자식에겐 호랑이 같은 무서운 존재였지만 무섭던 그 옛 모습을 회복하라고 기원하는 자식의 마음에 아버님은 병석에서 일어났을 것입니다.   이런 말이 있습니다. 사실 효도는 대를 이어 내려가기 마련이다. 내가 부모에게 효도를 하면 그것이 은연중 교육이 되어 내 자식이 또한 훗날 나에게 효도를 하게 되는 것이다. 너에게서 나간 것은 너에게로 돌아온다는 말이 있듯이 효도가 바로 그런 윤리이다.   중양절과 관련해 저에게 깊은 인상을 주었던 효도의 윤리를 새삼스럽게 떠올려 보았습니다.        
4    가을 서정 댓글:  조회:2718  추천:1  2013-10-10
{아버님이 계절을 읊은 시입니다.)     계절소묘            김 철 땅에서 관내가 날 때 매미가 따갑다고 몸살 나게 울어쌌는다   소나기 지나가며 북치는 소리 어디서 날아왔나 빠알간 고추잠자리 물어온 불씨 하나 뚝 떨구니 불이야! 가을이 놀라서 불 끄러 간다
3    추석 유래 댓글:  조회:4084  추천:2  2013-09-19
 중국 음력으로 8월15일, 즉 중국에서 가장 중요한 전통적인 명절인 추석입니다. 이날이면 중국사람들은 함께 달을 감상하고 서로 행복을 축원합니다. 추석은 달과 긴밀한 관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중국음력으로 8월은 가을철의 중간에 처해있으며 15일은 또 8월의 중간쯤에 있으므로 8월15일은 중추, 즉 추석이라고 합니다. 중국의 음력은 달이 지구를 에돌아 한바퀴를 돌때 한달로 합니다. 매달 보름이면 사람들은 지구에서 제일 둥근 달을 볼수 있습니다. 가을철에 하늘이 높고 공기가 씨원하기 때문에 사람들이 추석에 본 달은 가장 밝은 달입니다. 중국민간에서 추석을 쇠는 활동도 달을 둘러싸고 진행되는데 달에 제사를 지내고 달에 세배를 올리며 달을 감상하는것 등입니다.  추석의 유래에 관해 많은 고전적 전설이 있습니다. 그중 (嫦娥奔月)가 제일 널리 전해지고 있습니다. 전설에 의하면 상아의 남편인 후예(后羿)는 영웅입니다. 둘은 장생불로하여 영원히 다정하게 살아가기를 원했습니다. 하여 후예는 천신만고를 겪어 천후에게서 장생불로의 신선약을 얻었습니다. 후예의 제자가 이것을 알게 된후 8월15일날 후예가 집에 없는 틈을 타서 신선의 약을 내놓으라고 상아에게 협박하였습니다. 상아는 핍박에 의해 약을 삼켜버렸습니다. 약을 삼켜버린 상아는 가벼운 연기마냥 하늘로 날아올라 월궁에 자리잡은 선녀로 되여 후예와 영영 갈라지게 되였습니다. 후예는 집에 돌아간후에야 사정을 알게 되였으며 더없이 슬퍼 뜨락에 과일과 식품을 차려놓고 상아에 대한 그리움을 되새겼습니다. 마을사람들은 후예와 상아간의 감정을 귀중히 여기고 분분히 후예를 모방하여 달에 세배를 올렸습니다.   사실 추석은 제일 먼저 중국에서 옛날 달에 제사를 지내는데서 비롯되였습니다. 중국 고대서적의 기재에 의하면 일찍 2천여년전 고대 제왕들속에서 이미 봄에 해에 제사를 지내고 가을에 달에 제사를 지내 풍작을 기원하는 행사들이 있었습니다. 고대사람들은 달이 이슬을 베풀지 않으며 달의 차고 이즈러움에 의해 농사철을 계산하지 않으면 풍작을 이룩할수 없다고 여겼습니다. 베이징의 유명한 건물인 월단이 바로 명나라때 황실에서 달에 제사를 지내던 장소였습니다.   추석에 달을 감상하는 활동으로 전변된것은 7세기 당나라때부터였습니다. 전설에 의하면 재능이 있는 풍류인물인 당명황제는 달을 감상하기 좋아했습니다. 어느 해 8월 15일 당명황제는 달을 쳐다보다가 갑짜기 달나라로 한번 올라갔으면 하는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그래서 그는 신선술을 의해 달나라에 올라 라고 씌여있는 궁전앞에서 선녀들이 아름다운 선률에 따라 너울너울 춤을 추는것을 보았습니다. 당명황제는 이에 도취되고 말았습니다.인간세상으로 돌아온후 그는 달나라에서 들은 음악을 아름다운 (霓裳羽衣曲)으로 지어 전세의 명작으로 만들었습니다. 이와 같이 풍류하고 우아한 이야기가 전해지자 민간에서도 분분히 이를 모방하여 달이 찰때면 한자리에 모여 인간의 아름다운 경치를 함께 감상하였습니다. 세월이 흘러감에 따라 엄숙한 제사가 가벼운 달 감상 명절로 전변되였습니다.   가을이 농민들의 수확의 계절이여서 농민들에게 있어서 추석은 실제에 있어서 추수절입니다. 이날이 오면 농민들은 술을 마시고 춤을 추면서 즐겁게 풍작을 경축합니다. 왕공귀족들과 문인서생들은 추석을 랑만적인 명절로 간주하고 잔치를 차리고 가무를 감상하며 시를 읊어 밝은 달을 빌어 감정을 토로합니다.하지만 귀족이건 서민이건 할것없이 모두 달을 감상하는것을 즐거운 일로 여깁니다.중국 각지에 지금까지 (拜月壇)과 (拜月亭) ,(望月樓)과 같은 많은 유적이 보존되여있습니다.   추석은 또한 중국사람들 마음속의 깊은 정감을 담아있습니다. 중국사람들은 둥근달을 모임의 상징으로 여깁니다. 사람들은 추석에 달을 감상하고 달에 세배를 올릴때 집안식구들이 한자리에 모여 행복을 기원하기 를 즐깁니다. 때문에 사람들은 추석을 로 부르기도 합니다. 이 날 집안식구들의 주요한 활동은 월병을 먹는것입니다. 월병은 둥글게 생긴 다과로서 둥근 달을 상징할뿐만 아니라 단원을 의미합니다. 월병안에는 설탕과 깨,계화,땅콩, 팥 등을 넣고 월병표면에 달과 상아 등 정밀한 도안, 또는 과 같은 글자를 새겨두어 밝은 달을 상징합니다. 그리고 집안의 좌상은 월병을 집안식구에 따라 칼로 베여 사람마다 한 덩어리씩 나누어준다면 집에 없는 사람에게도 남겨 집안의 단원을 상징합니다. 그리고 타지방에 간 사람들은 추석날이면 더없이 친인들을 그려 분분히 밝은 달로 그리운 정을 표달합니다.   당나라시인 장구령의 시로 이 글 마무리합니다.
2    새해도 마냥 거침없는 한 해가 되길 기원합니다! 댓글:  조회:3074  추천:0  2012-12-31
1    격려 한마디 댓글:  조회:2406  추천:1  2012-11-16
그때 그 선생님의 격려 한마디 한 사람의 꿈을 이루기 위해서는 많은 조건들이 필요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한마디의 격려가 아닐까. 어릴 적 부모님의 따스한 한마디, 선생님의 신뢰어린 격려 한마디로 인생의 좌표를 굳게 설정한 위인들이 얼마나 많은가.   사람을 변화시키려면 비록 작고 사소한 일일지라도 격려의 말을 아끼지 말아야 한다. 작은 물결이 모여 큰 물결이 되고, 그 힘은 일찍이 꿈꾸지도 못했던 거대한 제방을 허물어뜨린다.   - 데일 카네기의《생각이 사람을 바꾼다》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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