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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백산》문학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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홈 > 2017년 제1기

전체 [ 6 ]

6    <장백산>2017.1 루계211 댓글:  조회:709  추천:0  2019-07-16
장백산 총211호 2017 제1호 기획조명-작가와 작품 한락연평전(장편인물평전,련재1)              김혁 필끝에 건곤세상 있나니(련작칼럼,련재1)  김혁   작가를 말하다 고향을 쓰는 작가(대담)     최국철 김홍란   제10회 중한작가회의 특집(1) 사랑시(단편소설)          김인순(중국)                            천년목 옮김 하얀 운동화(단편소설)     왕가심(중국)                           권혁률 옮김 회전식당에서 들려준 이야기(단편소설)  구소빈(중국)                                       김견 옮김 이장동화(단편소설)        김주영(한국) 인터넷 대중과 문학적 실천(평론)       김주연(한국) 정님이(시,외5수)          이시영(한국)   조광명소설코너 두팔을 펼치면 날개인것을(단편소설)    조광명   소설광장 블랙 블랙 블랙아웃(단편소설)          조원 새로운 체계로의 진입을 위한 의도적 블랙아웃(소설평)  리태복   시인 시전 마늘(시,외5수)    리상학 그리움의 울타리 그리고 추억(시평)   김몽   계렬수필 지하철 오감도(수필)  리은실 랭면 쏘나타(수필)    리은실 데지 않을만큼,춥지 않을만큼...(수필)  리은실   창작마당 개미(단편소설)   장학규 고개 숙인 벼이삭들을 보면서(수필)  강효삼 멈추면 비로소 보이는것들(수필)     김점순 락화(시,외2수)   김정권 겨울밤을 걷습니다(시,외1수)  임은숙   장편소설련재 산귀신(장편소설,련재13)      림원춘 해볕이 춥다(장편소설,련재2)  구용기 무소유(장편소설,련재11)      정용호  
5    김혁: 왕붓으로 돋을새김할 그 이름들 댓글:  조회:460  추천:0  2019-07-16
왕붓으로 돋을새김할  그 이름들 김혁   십여년전부터 나는 내 고향 룡정의 력사와 인물을 정리하는 작업에 투신하기 시작했다. 중국조선족문화의 발상지이자 민족의 독립과 반일의 전초였던 룡정에 대한 긍지와 자호감을 머금고 시작한 벅찬 작업이였다. 휴일을 타서 혼자거나 혹은 동인들을 휘동하여 력사전적지 수십여곳을 일일이 답사하고 수백명의 관련 증인, 유가족, 학자들을 찾아 취재한 끝에 50만자에 달하는 장편력사기행 “일송정 높은 솔 해란강 푸른 물”을 집필하여 대형문학지에 3년간 련재를 마쳤다. 그 와중에 한락연이라는 이름과 다시금 만나게 되였다. 비록 예전의 력사총서들에서 한락연에 대해 접하지 않은것은 아니지만 룡정의 대사기, 룡정이 배출한 인걸들의 력사를 세세히 쫓는 가운데서 나는 한락연은 응당 기행문의 한단락으로 쉽게 묘사할 인물이 아니라 대서특필해야 할 인물, 작은 글체로써가 아니라 대문자로 돋을새김해야 할 인물임을 황연대오(恍然大悟) 느끼게 되였다. 한락연, 그를 지칭하는 칭호는 많다. “인민예술가”, “정치활동가”, “반파쑈투사”, “동북지구 공산당의 초기 창시자”, “조선족 첫 공산당원”, “중국의 피카소”… 여러가지 타이틀로 력사의 갈피에 그 이름이 우람하게 적혀있다. 한 사람을 두고 이렇듯 평가가 다채로운것은 그가 살아온 인생이 그만큼 다채롭다는 방증이다. 이주민의 후예로서 룡정에서 출생한 한락연은 짧은 생을 살았지만 그의 행동반경은 실로 종횡무진이였다. 세상의 모습을 올곧게 그려내는 한편 그는 그림에만 매달리는 다른 화가와 달리 좁은 화폭안에서 살아가는 화가로 만족하지 않았다. 민족의 독립과 해방의 사명을 짊어지고 거대한 중국대륙을 무대로 혁명투쟁에 혼신을 바쳤으며 국공량당의 통전사업에도 커다란 기여를 했다. 또한 서역의 문화재 발굴에 선구자적인 업적을 남기기도 하였다.  한락연은 그야말로 예술가로서, 열렬한 사회활동가로서, 굳건한 “력사문물의 지킴이”로서 시대적사명에 충실한 지성인들의 귀감이였다  .  그 생애에 초연이 피여오르는 력사의 현장에서 수많은 역경을 겪어왔지만 운명의 굴레에 짓눌려 지내지 않고 예술가적 기질을 보이고 실천한 동시에 고매한 혁명가적 기질로 커다란 업적을 남긴 한락연을 통해 우리는 예술에 대한 그의 순수한 열정과 고난을 대하는 그의 락관주의적 풍모를 대할수 있을것이다.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비록 그가 살았던 세상과는 상전벽해라고 할 정도로 많은것이 바뀌여버렸지만 그가 보여준 진취적인 삶과 정신만은 여전히 유효하다고 생각해본다. 주은래총리가 생전에 “왜 한락연을 위한 전기물이 나오지 않냐”고 애석해했듯이 그에 대한 조명은 여러모로 진행되고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 완정한 인물전의 결여로 그의 생애는 편파적으로 알려져있으며 이로써 커다란 유감을 남기고있었다. 중국에서도 그에 대한 추모문집 한두부가 나왔을뿐이고 해외에서도 그에 대해 조명한 문장이 더러 있으나 겨우 수만자 미만, 몇편 정도의 미비한 량에 그쳐있었다.  중국조선족의 수많은 인걸들중에서도 혁혁한 인물인 그에 대한 체계적인 인물평전조차도 없다는것은 어찌보면 우리 후세로서는 결례요, 실책이라 말해야 할것이다. 그리하여 한 고향의 위인에 대한 숭모의 감정을 품고 인물전기 집필에 열정을 불살라 착수했다.  2008년부터 사비를 털어 한락연의 자취를 찾아 심양, 할빈, 치치할, 상해, 중경 등 지역을 답사하였다.  그를 바탕으로 한락연 관련 신문기사, 인물소개들을 다각적인 쟝르를 동원하여 수차 간행물들에 기고, 발표하였고 《연변일보》 《종합신문》 주간에 그의 인물전기를 8개월간 련재하였다. 그리고 청소년을 대상으로 한 한락연 인물전기를 책자로 묶었다.  한락연이라는 인물에 천착되여 관련 연구를 감행한지도 어언 8년 철이다. 그만큼 힘든 시간, 벅찬 시간들이였다. 그리고 속필을 자랑하는 나였지만 감불생심 평전에 필을 대는 가벼움이나 서두름을 보이지 않았다. 아직도 한락연의 일대기에 대한 나의 집필은 선인들의 연구를 바탕으로 진지함을 기하는 진행형이라 해야 할것이다.    근년래 우리 문단에서도 뒤미처 인물전기서들의 “보물”이 터진듯하다.  문학적 감동과 학술적 객관성을 함께 지닌 묵직한 분량의 인물전기들은 침체화, 단일화 경향을 보이던 우리 문단에 새로운 활력소를 주입해주고있다. 품격이 두드러진 인물전기 수작(秀作)을 읽을수 있기를 우리의 출판과 독자들은 바라고있다.  그에 편승하여 이 십여년동안 나는 한락연외에도 자치주 창립의 산파인 주덕해, 겨레의 창공에 “별”처럼 빛나는 민족시인 윤동주, “조선족문단의 거목” 김학철, 상해와 태항산을 주름잡으며 일제와 싸운 항일녀걸 리화림, 무성영화시대 오렷한 소리와 자취를 남긴 “영화황제” 김염 등 우리들의 자랑스러운 인걸들을 장편소설, 인물평전, 청소년전기 등 픽션과 논픽션물로 재현하는 작업에 몰두하여 관련서적들이 이미 출간되였거나 바야흐로 출간중에 있다.  수십년동안 매체의 기자와 소설가로서의 삶을 병행해 살았던 나에게 있어 “문학적 다큐멘터리”로 특징지을수 있는 저널리즘적 글쓰기가 남들과 차별화된 나만의 창작성향이라고 말하고싶다.   사학자들은 력사란 “인간이 거쳐온 모습이나 인간의 행위로 일어난 사실을 말하는 단어”라고 정의하고있다. 력사의 물줄기를 바꾼 개인의 삶을 통해 우리는 한 시대와 만나고 그 시대의 공과를 헤아려볼수 있다. 변화의 시대를 보아내고 넉넉한 삶을 예시하는 새로운 눈을 인물전기들은 갖게 한다. 여기에 인물전의 매력이 있다.  시대에, 제반 분야에 굵직한 획을 그은 우리의 위인들을 조명하는 작업은 현재 변혁기의 소용돌이에 꺼둘리고있는 민족의 발전과 우리의 삶에 기气를 불어넣고 비젼을 제시하는 좋은 작업으로 될것이라고 나는 믿어의심치 않는다. 그리하여 오늘도 나는 왕붓을 무겁게 고누고 만방에 자호할 우리네 인호(人豪)들의 진영(真影)을 한획, 한자 경필(劲笔)로 그리고있다. 굵다랗게 돋을새김하고있다.    출처:2017 제1호
4    리은실: 지하철 오감도(수필, 외2편) 댓글:  조회:444  추천:0  2019-07-16
지하철 오감도 리은실   사시장철 끝도 없이 늘어선 지하철역의 출근족 대오는 우리 나라 수도 북경의 한폭의 풍경선이다. 손에 “유툐(油条)”, 콩물 등 아침 먹거리를 들고 선 사람들, 아직 잠이 덜 깨 연신 하품을 하고있는 사람들… 이들은 모두 어디론가 향하여 가고있는 사람들이다.  곁눈질을 할 여유가 없이 달려가고있는것이다.   아침 지하철은 이같이 아직 해가 뜨기전부터 한무리의 사람들을 맞으며 비로소 하루를 시작한다.  지상에서 달리는 차들은 변수에 로출되기 쉽다. 교통체증을 만난다거나 교통사고가 일어난다거나 혹은 갑자기 다이야가 터져버린다거나 하는 등등이 모두 그 변수이다. 그러나 지하철은 매우 온건하게 정해진 시간에 정해진 사람들을 정해진 곳까지 여간해서는 변수가 없이(상대적으로) 빠르게 데려다준다.  그것이 이 도시 출근족들이 지하철을 애용하는 절대적인 리유이다. 서로에게 눈길 한번 줄 여유도 별로 없는 고단한 인생들의 집합체인 지하철안에는 그래서 별의별 사연과 이야기들이 담겨있다.   이야기 하나 직장의 파견을 받고 나는 오늘부터 해정구(海淀区)에 있는 교육기지로 닷새동안 연수받으러 다녀야 한다. 어떤 리유로든 출근을 하지 않는다는건 매우 설레고 행복한 일인줄 알았다. 지하철에 오르기전까지는…   습관처럼 매일 서던 위치에 가서 줄을 섰다. 멀리서 전동차가 달려오는걸 넋 놓고 바라보다 그제서야 아차- 하고 놀랐다. 오늘 가야 할 연수기지는 회사와는 정반대쪽 방향이 아닌가? 서둘러 씩씩거리며 반대쪽으로 달려갔다. 이쪽도 줄이 길기는 마찬가지다. 예상대로 첫 차에는 탑승을 못했다. 두번째 차가 오자 이번에는 어떻게든 올라타야지 마음 먹고 령장류의 어떤 동물처럼 날렵하게 렬차안으로 몸을 던져넣고는 손잡이를 단단히 잡았다. 다음역은 “룡택(龙泽)”역. 역에 도착하자 또 한무리 사람들이 아등바등 올라탄다. 내 몸은 간신히 손잡이에 매달려 무기력하게 휘청이고있을뿐. 심장이 옥죄여드는것만 같았다. 그다음은 “서이기(西二旗)’역이다… 아, 이렇게 촘촘한 인파는 일찍 본적이 없다. 콰악 밀치며 서너명의 녀자가 뿌려져 들어왔다. 뭉클한 가슴으로 나를 압박해온 녀인은 표준적인 녀장부였다. 나보다 키가 한뼘은 더 큼직한 그녀는 내 얼굴쪽을 향해 거친 숨을 내뿜었다. 아침메뉴는 닭알과 부추로 소를 넣은 만두를 드셨는가보다! 눈을 감았다. 코를 막는게 더 시급하지만 사람들 사이에 꽉 끼인 내가 할수 있는건 재빠르게 눈을 감는 일밖에는 없다. 그런 상황이 “상지(上地)”, “오도구(五道口)”까지 지속되였다. 회사로 가는 길은 그나마 편한것이였구나 하는 위안이 마음 한구석을 찾아들었다. 이 고행을 앞으로 나흘동안 여덟번을 오가며 해야 하다니 눈앞으로 시커먼 구름이 몰려오는듯하다…   이야기 둘  조금 일찍 떠나서 그런지 오늘은 어제보단 사람이 좀 적은것 같다. 그러나 웬걸, “룡택(龙泽)”역에서부터 밀물처럼 밀려들기 시작했다. 급기야 “서이기(西二旗)”역에 도착해서부터는 좌석쪽으로 밀려오기 시작한다. 겨우 발을 딛고 서보니 어딘가 요상한 그림이 연출되고말았다. 좌석에 앉은 한 남자는 생각없이 다리를 벌리고있었을테고 밀리운 나는 그 다리사이에 밀려들어가게 된것이다. 이건 무슨 상황이지? 한발 물러서려고 했지만 그럴 틈이 없다. 괜히 이 남자에게 미안해진다. 뒤에 멘 가방때문에, 밀고닥치는 사람들때문에 몸은 자꾸 앞으로 쏠린다. 필사적으로 손잡이를 꽈악 잡았다. 이두박근 삼두박근이 놀라 뛰고 어깨에 뭉친 근육들이 쩍쩍 찢어지는 소리가 들리는듯하다. 팔에 힘이 풀려 약간이라도 느슨해지면 앞으로 쏠린 내 상반신에 그 남자의 머리가 포근히 안길, 정말이지 위험천만한 사태였다. 안되기는 이 남자도 마찬가지다. 다리는 왜 벌려가지고 이 “쩍벌남”의 교훈도 만만치 않을것이다. “우리”는 어쩔수없이 야릇한 포즈를 취한채 “상지”를 지나 “오도구”까지 10여분을 그런 상태로 함께  했다. 한시간 같은 10분이였다.   이야기 셋 오늘은 출근 체크를 하는 날이다. 가장 붐비는 시간대의 지하철을 타는 날이기도 하다. 집문을 나서면서부터 굽 높은 구두를 신은것에 대한 후회가 밀려들기 시작했다. 운 좋으면 좌석 하나 얻어 걸릴지도 몰라 하는 일말의 기대를 가지고 지하철에 올랐는데 내 꿈이 너무 야무졌다는 사실을 곧바로 깨달았다. 매의 눈으로 쫙- 관찰을 했다. 좀 피곤한듯 하품을 하는 저 남자는 아무래도 먼곳까지 갈것 같다. 그옆에 창밖을 부산스레 내다보며 무릎우에 놓인 아이패드를 케이스에 접어 넣는 녀자가 보인다. 곧 내릴것 같다. 그앞에 가서 섰다. 그 녀자의 정수리만을 응시하며 다음역에서 내릴것이라고 굳게 믿었는데 그옆에서 하품하던 남자가 일어설줄이야…내 예상은 한번도 적중한적이 없다. 머피의 법칙인가? 창밖을 부산스레 내다보던 녀자는 그 다음역에서 올라오는 동료로 짐작되는 다른 녀자를 향해 손짓하더니 자기 앞으로 불렀다. 동료 녀자가 밀고 들어오고 급기야 난 설자리마저 잃었다. 심각한 판단오류이다. 줄을 잘 서야 한다는게 이런건가? 정말 담번부턴 줄을 잘 서야겠다. 매번 얻는 교훈이다. 어느 역에서 내릴지 목에 명찰 같은걸 달면 안되려나? 그럼 많은 사람들이 한곳에만 몰릴테지? 눈썰미가 없는 나 자신이나 탓할노릇이다.   이야기 넷 고봉기를 살짝 피했더니 지하철안이 거짓말처럼 한적하다. 앉을 좌석이야 물론 없지만 다리를 어깨너비로 충분히 벌리고 서도 방원 50센치메터안은 거칠게 없다 간만에 독서나 해볼가나? 가방에서 책을 꺼내 펼쳐들었다. 왼쪽에 선 남자의 높은 목소리가 귀를 때린다. 커플싸움의 중재자인듯하다. 둘이 사는게 뭐 있냐며 사소한 일은 넘기라며 조언을 하고있다. 그 남자가 거의 전화를 끝낼무렵 오른쪽에 선 녀자의 고음이 오른쪽 귀를 때린다. 목소리가 매우 날카롭다. 전화상대는 친정엄마인듯하다. 새로 찾은 직장은 야근도 없고 상사도 좋은 사람이라는 이야기를 꼭 저렇게 높은 소리로 해야 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뒤편에서 웅글진 목소리로 전화통화를 하는 남자는 보험설계사인것 같다. 보험내용을 고객에서 설명해주고있다.   엿들으려는 의도는 전혀 없었다. 워낙에 목소리가 너무 컸다. 심호흡 한번 하고 책을 덮었다. 이 수준들하고는, 한 나라 국민의 목소리의 높낮이가 경제수준에 반비례한다던 남편의 말이 떠올랐다. 이 순간만큼은 남편의 일가견이 지구는 둥글다고 했던 코페르니쿠스의 정의만큼 위대하게 느껴졌다. 진동모드로 해놓은 주머니속 휴대폰이 징~ 하고 진저리를 친다. 택배기사의 전화다. 닷새전에 보낸 택배건에 대한 문의이다. 갑자기 짜증이 솟구쳤다. 이게 어느때냐고? 아직도 배송을 안한거냐고? 다른 택배회사 알아볼거라고 역정을 냈다. 앞에 앉아 꾸벅꾸벅 조는듯이 보였던 아줌마가 졸음이 채 안 가신 눈으로 나를 올려다본다. 내 생각보다 소리가 컸던가보다. 나는 “저기, 아주머니, 저는 소리를 지를만한 상황이였거든요.”라는 측은한 눈빛을 보냈다. 남을 비난하기에 앞서 나부터 잘해야지. 갖가지 소음들로 떠들썩한 아침 지하철안에서 깨우친 교훈이다.   매일 두시간 넘게 출퇴근길에서 보내야 하는 도시인의 삶은 고단하다. 그러나 지하철안에는 힘들고 지친 이야기만 있는것이 아니다. 가끔 가다 랑만도 있다. 임신때 내게 자리를 양보했던 붉은 넥타이 맨 소학생 꼬마도 있었고 무거워보이는 내 가방을 받아주었던 할머니도 계셨고 키가 작은 나에게 손잡이를 양보해주고 짐짓 모른척해주던 멋진 키다리남자도 있었다.   다람쥐 채바퀴 도는듯한 내 생활에 지하철은 멍하니 생각을 쉬울수 있는 공간이기도 하고 가끔은 일과 육아에 지친 내가 독서를 할수 있는 소중한 공간이기도 하다. 앞으로 몇십년을 더 지하철을 타야 할지는 모르겠다. 아마 지하철을 안 타도 되는 때는 내 육신이 세월의 년륜을 새기며 저 멀리 황혼의 언덕을 바라보는 시기일것이다. 단지 목적지가 같다는 리유 하나만으로 한 시공간에 던져진채 오감을 공유해야 하는 지하철안은 어쩌면 우리네 삶의 한 축소판이기도 하다.  살과 살을 비비고 체취를 공유하면 또 어떠하리… 이 거대하고도 비좁은 지구 어디인들 우리네 사는 모습이 다 그러하지 않은가.     랭면 쏘나타   북경으로 간 연길 랭면 사무실 동료 선생님들이 자주 찾는 랭면집이 있다고 했다. 그 랭면을 얘기할 때면 저마다 눈가가 촉촉해서는 입을 다시길래 저으기 호기심이 동했다. 랭면의 종가라 불려도 좋을만한 평양랭면, 연변랭면, 계서랭면을 제치고 그 맛이 단연 랭면중 으뜸이라고 하는 선생님도 계셔서 내 호기심에 더욱 불이 붙었다. 그러던 어느날, 사무실 뒤자리 동료 선생님이 고맙게도 그 맛을 느끼게 해주시겠다며 나를 데리고 그 식당으로 갔다. 시내뻐스를 타고 흔들흔들, 북경 2환의 고풍스러운 전통적인 옛 거리를 지나, 전혀 랭면집이 있을것 같지 않은 골목에 “화천연길”이라 씌여진 록색 간판이 눈에 띄였다. 낯선 북경의 옛 주택구에서 우리 글을 보니 퍼그나 정겨웠다. 식당으로 들어가니 입이 떡 벌어진다. 빼곡이 놓여진 테이블마다에 사람들로 꽉 찼고 카운터앞에서부터 입구까지 랭면 먹으러 온 손님들이 줄 지어 서있는것이였다. 겨우 자리를 찾아 앉고 간단히 랭면 두그릇에 고향 연변의 랭면집에선 듣도보도 못한 장졸임 비슷하게 생긴 반찬을 주문했다. 음식을 시키고 식당내를 휘휘 둘러보니 그래도 조선족 음식점임을 고집하는 장치들이 곳곳에 보였다. 벽에 걸린 민속풍경화가 그랬고 한족 복무원의 몸에 입혀진 개량한복이 그랬다. 이윽고 랭면이 상에 올랐다. 아, 고향에서 먹었던 랭면도 이랬던가? 북경 왕징에 있는 평양식당의 랭면도 이랬던가? 그래도 랭면이라고 하면 사리를 곱게 틀어서 말간 육수에 댕그랗게 놓고 우에는 엷게 썬 사과나 배, 채 썬 오이, 삶은 닭알 등 고명을 보기 좋게 올려놓은 그런 모습 아니던가? 간장물 같은 거무튀튀한 육수에 면가락은 제멋대로 늘어져있고 또 일부는 그릇벽에 붙어 존재감을 뽐냈으며 투박하게 썰어놓은 사과조각도 미관에 상관없이 육수에 둥둥 떠다니고있었다. 면발은 또 왜 이렇게 굵은지, 좀 과장한다면 아기손가락 굵기만큼한 면발이 랭면임을 한껏 뽐내는듯도 했다. 한가닥 집어 입에 넣었다. 바오라기 같은 면발을 씹으니 밀가루맛이 물씬 풍겨온다. 차지도 뜨겁지도 않은 육수에서는 진한 간장맛과 고추장맛이 은은히 풍겨오고 육수를 한술 떠서 마셔보니 뜨겁지도 차지도 않은 그 육수맛 또한 텁텁하니 요상하다. 랭면도 온면도 아닌 “미면“(미지근한 면)이라 하면 어떨는지…   “선생님은 진심 이 랭면이 맛있습니까?” 참지 못하고 마주앉은 선생님께 물었더니 “나도 처음엔 뭐 이런 랭면이 다 있나 그랬어. 근데 먹을수록 생각나는 맛이야. 맛은 없는데 맛이 있어. 한동안 안 먹으면 그 맛이 생각나고 말이야.” 하고 아리송한 대답을 한다. 거 참, 맛이 없는데 맛있는 맛이란 도대체 어떤 맛이지…   너희가 랭면 맛을 알아? “화천연길”이라는 이 연변음식점은 1943년도에 북경에 섰다고 한다. 리씨 성을 가진 한 조선족 할머니가 몇몇 북경의 젊은이들과 함께 랭면을 해서 팔다가 후에 연길식당으로 이름을 고치고 경영했다고 한다. 오랜 력사를 자랑하는 북경의 연변음식점인셈이다. 지난 세기 80년대에 대학입학으로, 취직으로 북경에 온 조선족 젊은이들에겐 어려우나마 고향음식을 맛볼수 있는 귀한 곳이였다고도 한다. 지금처럼 한국음식점들이 많지도 않았을 때고 주머니사정도 여의치 않았던 그들은 삼삼오오 이 가격 착한 랭면집을 찾아 랭면을 먹었을테고 그것으로 향수를 달랬을것이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고 처음엔 받아들이기 힘들었던 타향의 랭면맛에 점차 길들여지다보니 그만 이 랭면을 사랑하게 되였다고 한다. 점차 조선족의 대도시 진출이 용이해지고 또 북경에도 왕징이라는 코리안타운이 형성되면서 민족음식점은 예전처럼 귀한 존재가 아니다. 마음만 먹으면 반시간 정도 차를 타고 나가 정통 평양랭면을, 연변랭면을 어렵지 않게 맛볼수 있게 되였다. 그러나 직장의 50대, 60대 로선배님들은 아직도 이 집 랭면맛이 최고라고 추켜세우신다. 음식은 맛만으로 먹는게 아닌가보다. 남의 주관적인 느낌을 감히 짐작해보겠다는 주제넘는 생각을 해본다면 그들에게 이 랭면은 추억이고 향수이지 않았을가? 젊은 시절에 대한 추억과 고향에 대한 향수 그 모든것이 이 랭면에 들어있지 않았을가? 북경 생활 8년차인 나는, 결핍의 시대를 겪지도 않았던 나는 아직 모르겠다. 그 맛의 소중함을… 얼마전 조선족이 꾸린 한 위챗계정에서 이 집 랭면에 대해 신랄하게 비판했다고 한다. 조선족의 정통랭면도 아니면서 한족들 입맛에 맞게 변질된 랭면을 갖다가 조선족랭면이라고 하는것은 명백한 사기 행위라는 지적이였다고 한다.  달리 생각해본다. 한 음식이 그곳 사람들의 입맛에 맞게 토착화되고 또 그 사람들이 사랑하는 음식으로 자리매김되였다면 음식의 정통성 여부가 그때에도 중요한것일가? 랭면을 먹기 위해 길다랗게 줄 지어선 사람들을 보며 그런 충동이 일었다. “여러분이 지금 먹으려는 랭면은 오리지널이 아니요. 더 맛있는 우리 민족의 정통랭면을 맛보세요.” 하고 웨치고싶다. 그러나 그들은 이미 이 “변질”된 랭면맛에 길들여진 사람들이다. 맛이란 가히 주관적인것이다. 북경 생활 8년차, 내 입맛도 서서히 변하고있다. 두눈 튀여나올 정도로 얼얼하게 매운 음식을 좋아하던 내가, 뒤골이 뗑~ 해지도록 차거운 얼음물을 좋아하던 내가 더 이상 그것들을 안 찾게 되였다. 갓 북경에 왔을 때, 질질 끓는 북경의 여름을 뜨거운 차물을 불어 마시며 견디기란 여간 힘든 일이 아니였다. 그러나 3년이 지나고 4년이 지나고 어느새 나는 그것을 받아들이고 즐기게 되였다. 시원한 맛에 마신다는 맥주를 뜨뜨미지근한것으로 마시니 처음에는 입맛이 무척 썼지만 차차 시간이 지나니 구수한 호프의 맛을 더 잘 느낄수 있어 그 맛 또한 새롭다. 10년, 20년, 앞으로 이제 내 입맛은 또 어떻게 변할지 모르겠다. 변해간다는것이, 나를 잃어가는것 같아 저으기 서글퍼지기도 하지만 다시 또 다른 나를 찾아가는 작업이 아닐가 하는 생각이 가슴에 맞혀오기도 한다. 그러나 간장 고추장 육수속에서도 굵은 면발을 자랑하며 랭면의 “정체성”만은 잃지 않으려 했던 이 집 랭면처럼, 북경의 전통 옛 거리에서도 우리 글 간판을 걸고 한족들 몸에 어울리지 않는 한복을 입고서라도 우리 민족 식당임을 애써 지켜보려는 이 음식점처럼 그 무엇인가는 상실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리고 변했다면, 그 변한만큼의 차이가 바로 내가 이 타향에 발 붙이고 살기 위해 애썼던 노력의 흔적들이 아닐가 하고 생각한다.     데지 않을만큼, 춥지 않을만큼…   어쩌다가 여러가지 조건들이 맞물려서 한국에서 몇달간 생활할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 집이라고 터를 잡고 살아보니 전에 몇번 관광으로 왔을 때와는 사뭇 다른 느낌으로 젖어왔다. 말로 다 할수 없는 살가움과 무작정 내 맘을 끄는 감성들이 한국이라는 나라를 퍼그나 정답게 느끼게 해주었다. 아이를 데리고 근처 공원에라도 나가면 공원 벤치에 앉아 한담을 나누시던 아주머니들이 아이가 예쁘다고 말을 걸어주시고 간혹 과자 같은것도 건네주며 친절을 베풀었다. 인간의 탈을 쓴 몇몇 못된 놈들의 아동랍치사건으로 전체적인 사회분위기를 흉흉하게 만들어 아이를 밖에 데리고 나가도 필요이상으로 경각심을 높여야 하는 북경과는 딴판이였다. 한국은 “정”의 문화라더니 아니나다를가, 그 따뜻한 “정”에 감격스러웠다. 그렇게 매일 근처 공원에 나간지 며칠만에 자주 마주치는 한 아주머니랑은 안부도 주고받는 사이가 되였다. “새댁은 중국서 왔어?” 나의 어눌한 한국말 억양에서 바로 티가 났나보다. “네. 북경서 왔어요.” 하고 곱게 대답하니 “신랑도 같이 왔어?” 하고 물으시길래 “네. 세 식구 다같이 왔어요.” 하고 대답했다. “신랑은 어느 직장 다녀?” 한참후, 신랑 직장에 나이까지 줄줄이 고백하는 나를 발견했다. 첩보요원도 아니고 딱히 비밀에 붙일것까지야 없다지만 이런 개인사까지도 말해도 되나싶은 생각이 번쩍 들어 머쓱하게 웃음을 지어보이며 “그럼, 이만 가볼게요.” 하고 말하고는 어수선하게 그 자리를 떴다. 이튿날부터는 왠지 그 아주머니를 피하고싶어졌다. 콕 집어 말할수 없는 불편한 느낌이 들었다. 근처 정육점에서 고기를 어쩌다 한번 사게 되였는데 정육점 주인 아저씨 또한 열정적인분이셨다. 그 열성스러움에 처음 간 날 생각에도 없는 삼겹살 두근을 덜컥 사버리고말았다. 그후로 아저씨는 나만 보면 특유의 그 충청도 억양으로 “어디 가슈?” 하며 반갑게 인사를 걸어오고 가끔은 아들애에게 장난감도 쥐여주었다. 그럴 때면 나는 괜히 고기를 사지 않는것에 자책감까지 가지게 되였다. 근처에는 이틀에 한번 집으로 반찬을 배달해주는 열정적인 반찬가게 아주머니도 계셨다. 배달을 오실 때면 아들애 이름을 친절하게 불러주기도 하고 손을 꼬옥 잡아주기도 했다. 세살짜리 아들애가 크레용을 들고 마구 설치면 아이에게 흰종이를 주어 락서를 하게 하라고 조언을 주시기도 하고 아이를 따라다니며 밥을 먹이는건 옳지 못한 육아법이라고 따끔히 지적도 해주셨다. 분명 좋은 말씀들인데 어딘가 불편한 느낌은 아주머니가 다녀가신후에야 스멀스멀 찾아왔다. 그후로는 그 아주머니가 배달을 오신다 하면 괜히 긴장해졌다. 집이 어질러져있지는 않나? 아들애가 오늘은 장난을 많이 치지 말아야 할텐데 하면서 괜한 걱정까지 하게 되였다. 남편에게 이 이야기를 했더니 “혹시 그분들 나름의 마케팅전략 아닐가? 고기나 반찬을 더 팔려는 그런 전략?” 하고 반문해왔다. 그분들의 따뜻한 진심에 대해선 의심하고싶지 않았다. 그분들은 진심으로 중국에서 온 이 동포 새댁에 관심을 가졌을것이고 천방지축으로 허둥대보이는 어린 새댁에게 진심어린 조언을 하고싶었을것이다. 그러나 그런 따뜻함에 조금씩 피로감이 느껴지는건 나도 어쩔수가 없었다. 차번호 하나 따기가 하늘에 별따기만큼 어려운 북경에서 자가용 차가 없는 우리는 외출할 일이 있으면 등씨 성을 가진 한 기사아저씨의 택시를 자주 리용하군 하였다. 수없이 많은 차가운데서 그 기사의 택시만 4년 넘게 리용한데는 나름의 리유가 있었다. 크고작은 일에 4년 넘게 그 차를 리용했지만 등씨 성을 가진 그 아저씨는 한번도 개인사에 대해 물어본적이 없었다. 북경에서 택시를 타보면 우리끼리 하는 얘기를 듣고 기사님들이 곧잘 하는 질문이 있다. “당신들은 어디에서 왔냐?” 하는것이다. 방언도 아닌것 같고 그렇다고 외국사람도 아닌것 같은데 당신들이 하는 말을 자기는 한마디도 못 알아듣겠다고 하면서 호기심에 물어올 때가 많다. 조선족이라고 하면 일부 기사들은 알은체를 해오며 “쓰쌘주마?(是鲜族吗?)”라고 하신다. 그냥 무시해버리면 좋으련만 또 틀린걸 보면 지적해줘야 직성이 풀리는 내 성격에 “선족”에 대한 유래를 설명하고 반드시 “조선족”이라 불러야 한다며 꼬치꼬치 지적을 해주고나면 급피곤이 몰려오군 하였다. 그런 번거로움을 여러번 겪다보니 그런 질문따위를 일체 하지 않는 등씨 성을 가진 그 기사아저씨를 유난히 선호하게 되였다. 오래동안 자주 만나다보면 가끔은 옛다, 기분이다 하고 에누리를 해줄법도 한데 등아저씨는 언제나 칼 같았다. 거스름돈 받기가 번거로와 더 드려도 엄격하게 계산해서 돌려주었고 가끔은 좀 깎으려고 해도 언제나 그렇듯이 단호했다. 그 기사아저씨의 신상정보에 대해서는 아는것이 전무했지만(등씨 성을 가졌다는것만 알뿐) 우리는 누구보다 그 아저씨를 신뢰하고있었다. “정”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는 차거운 등아저씨를… 새삼 한국의 “정”문화에 대해 다시 생각해본다. 서로 돕고 상부상조하는 삶속에서 형성된 “정”문화, 그것은 이 힘든 세상을 헤쳐가는데 빛이고 소금이였을것이다. 서로를 걱정해주고 다독여주는 따뜻함. 그런데 나는 왜 그 따뜻함에 데기라도 한듯 몸을 움츠리는것일가? 어린 시절 내가 살던 향진의 작은 마을은 그 시절 다들 그랬듯이 따뜻하고 화기로왔다. 이웃들은 맛있는 음식이 생기면 함께 나누었고 걱정이 있어도 함께 나눴다. 비 오는 날, 엄마가 만든 오그랑죽을 들고 뒤집 해화언니네 집에 가져가다 엎어져 온몸이 죽범벅이 된채 울음보를 터뜨리던 내 모습도 기억에 선하다. 남편에게 손찌검을 당해 울면서 집에서 뛰쳐나온 새댁을 자기 집에 숨겨주고 그 남편을 찾아가서 화통하게 욕사발을 안겨주던 옆집 아주머니도 계셨다. 그 새댁이 이튿날 바로 남편곁으로 달려가서 그 아주머니를 머쓱하게 만들기도 했지만 멀리 왕청 춘화라는 곳에서 시집 와서 친정 식구도 하나 없는 타향에서 새댁이 혹시나 서러워하지나 않을가싶어서 아주머니가 나선것이였다…  요즘 같았으면 주책이라고 손가락질 받고도 남을 일이다. 간섭은 어쩌면 관심의 또 다른 표현일지도 모르겠다. 그 시절에는 누구도 그것을 간섭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없었고 모든게 조화로왔던것 같다. 언제부턴가 사람들은 저마다 칸을 치고 자기만의 방을 만들어놓고 빗장을 닫고 산다. 관심은 자칫하면 간섭으로, 부담으로 여겨지기가 일쑤이다. 이웃간에 따뜻한 떡그릇 오가던 그 옛날의 추억은 추억일뿐일지도 모르겠다. 개인의 프라이버시가 무엇보다 중요하게 간주되는 현대사회에 불쑥불쑥 예고없이 떡을 들고 이웃집 문을 노크하고 찾아가는것도 어쩌면 비현실적인 일이기때문이다. 서글픈 일이다. 유리벽을 친 각자의 방에서 우리는 먼발치서 서로를 바라보며 외롭지 않으려고, 고립되지 않으려고 발버둥을 치고있는것은 아닌지… 그렇다면 이 외로운 현대인을 구원할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가? 역시나 서로에 대한 따뜻한 관심만이 그 해답이 아닐가? 그렇다면 그 따뜻함의 적정 온도는 몇도쯤 될가? 50도? 60도? 따뜻함을 유지할수 있는 적당한 거리는 얼마나 될가? 데이지 않을만큼, 춥지 않을만큼의 적당한 온도와 거리는 도대체 어느만큼일가?   어쭙잖게 이 외로운 현대인들을 구원하고싶은 돈끼호떼스러운 생각을 해본다. 서로의 온기를 따뜻하게 나누기에 가장 적당한 랭정과 열정사이의 그 어느 지점을 찾아 돈끼호떼의 마음으로 갑옷 입고 투구 쓰고 나서볼가싶다. 나랑 동행할 사람 게 누구 없소?  나지막이 지기들을 입속으로 불러본다. 출처:2017 제1호
3    리상학: 마늘(시, 외5수) 댓글:  조회:399  추천:0  2019-07-16
마늘 리상학   마늘을 보면  어머니가 생각난다   사랑손에 뜯기워 한쪼각 마늘이 된 당신   그리움을 세워서  울바자 두르고 고독함을 뒤번져 밭고랑 내시고   사랑의 패말 단 터밭에  자신을 심어 여린 싹 하나 손에 든채 세상을 살아온 당신    당신은 검은 흙으로 사라졌지만 당신이 계셨던 곳에는  오붓한 둥근달동네 살고있다   마늘을 보면  어머니가 그리워진다     비 내리는 날    비 내리는 날 강변을 거닐면 물결을 두드리는 비방울  다듬질소리 물안개로 펼친다   강물도 두드리면  파도의 구김살 펴지는걸가   강물도 두드리면 살갗에 부드러움 심어주는걸가   강물도 두드리면 하얀 마음이 물드는걸가   투닥투닥  투닥투닥 옥구슬로 부서지는 비방울의 다듬질소리   세월의 강 저편에서 추억의 비줄기  고향집 창문 두드려 메아리 부른다     저녁 강   죽은듯 숨어있던 불빛  창문으로 뛰여내려   더위를 씻어내느라 몸을 비틀어댄다     수영선수가 된 차들은  눈에 불을 켜고 다리가 그어놓은 코스 따라 등수를 다투기에 여념이 없다   석양이 풀어놓은 붉은 물속에 화사한 꽃은 허리 굽혀 머리 염색에 바쁜데   짝을 찾은 물새 한마리 수면을 가르는 즐거움 뾰족한 화살로 달려간다   엉덩이 반쯤 드러낸 아낙네 세월을 두드리는 방치소리 타고 어둠이 전하는 별의 종소리 수심속에 수놓이에 바쁘다     지게   지게는 둘 사람이 둘   사람이 둘이건만  바로 설수가 없어 언제나 막대기에 의지해야 엎어질듯이 설수 있고 다리가 둘이건만  걷지를 못해 아버지 등에  업혀다녔다 언제나    마을 북망산 기슭에 울음소리가 흙무지를 이룰 때 주인 잃은 지게는 헛간 깊숙이 자신을 묻었다   지게는 둘 사람이 둘   하나는 나 그리고 하나는…     쓰러진 백양나무   간밤에 하늘이 울었다 땅을 치며 울었다   그 모진 슬픔의 몽둥이에  자식들을 주렁주렁 키우던  직장앞의 백양나무가 쓰러졌다   아픔이 바늘로 돋아난 곳에 집 잃은 개미들의 아우성 새까맣다   쓰러진 생명의 마지막 숨결 허공속으로 시나브로 사라진다 배고픔을 달래는 잎새들 싸늘한 시체의 젖줄기 물고 미풍속에서 바들바들 떨고있다     겨울산   폭삭 늙은 겨울산 치매를 앓고있다   싱싱한 채색 기억들 고향을 등진채 타향에서 부서지고    하늘 향해 뻗은 수많은 추억의 말초신경 정을 찾아 울부짖고    엉치에 청진기 꽂은 다람쥐 한마리 이 나무 저 나무 오르내리며 병진단에 드바쁘다   문병 온 까마귀떼 꺼억꺼억 괴로움 울며 우정을 한소끔 쏟고있는데   말없는 소나무 파란 빗 들고  겨울산의 흩어진 머리  빗고 빗는다  출처:2017 제1호  
2    진요휘: 장백산에 봄이 깃들었네(권두언) 댓글:  조회:423  추천:0  2019-07-16
장백산에 봄이 깃들었네 진요휘 (陈耀辉) | 길림신문그룹 총편집   화창한 봄이 오니 푸른 폭포 계곡을 울리고 찬연한 노을이 만년백설을 녹여주네 골짝마다 호랑이와 사슴들이 기지개를 켜노니 천지의 맑은 물 구름속에 거울처럼 걸려있노라 봄이 오면 장백산은 마치 한마리의 아름답고 신비로운 사슴이 자유분방하게 뛰노는 모습과도 같이 현란하고 눈부신다. 밝은 해가 울울창창한 장백의 밀림을 감싸안으면 천봉만학들이 금시 꿈속에서 깨여나듯 기지개를 켜고 동서남북 어디서나 룡트림하는 변화무쌍한 정경을 연출한다. 높은 산발과 험준한 령마루우로 뭉게뭉게 피여오르는 구름과기상천외하게 펼쳐지는 노을은 마치 선경에 다달은듯한 느낌을준다. 천년을 잠자던 백설은 긴긴세월 만고의 풍상을  겪다가 봄이 오면 순한 온천으로 둔갑하거니 장백산 천지의 조화는 마냥 성스러우면서도 신비롭기만 하다. “사슴의 울음소리에 깨여나는 이 봄날,  비파를 치고 저대를 부니 꼭마치 산신령들이 내려서 잔치하는 분위기가 완연하여라!” 장백산의 봄은 실로 초목이 울창하고 겨울의 적막이 물러간 자리마다에는  새로운 생명의 싹들이 기지개를켜면서 우리의 가슴가슴에  따뜻함과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어주고있다. 장백산은 수천년전,예로부터 북방 부족들의 신성한 성지로 이름을 날렸다.  춘추전국시기의 저작 《산해경》에는 다음과 같이 기재되여있다. “동북쪽에는 바다가 있는 외에도 아득히 먼곳에 큰 산 하나가묵묵히 도사리고있으니 그 산을 숙진의 나라가 가지고있었다.” 여기에서 말하는“그 묵묵히 도사리고있는 큰 산”이 바로 오늘의 장백산을 말한다. 우리 나라 북방에 거연히 솟아있는 이 장백산은 청나라시기에 아주 신성한 성지로 여겨졌다. 하여 강희황제는 아래와 같은 조령을 내린적도 있다. “장백산은 북방의 중요한 요충지로서 기이한 괴석도 많고많으니산을 령의 경전으로 영원히 봉인하노라.” 새해가 밝아오니 이 세상 모든것들이 새롭게 새록새록 다시 태여난다. 《장백산》은 중국조선족문학사업의 중요한 활무대로 떳떳하게 자리잡고있는바 새해에도 더욱 알차고 무게 있는 작품들을 선보이기를 진심으로 기대한다. 우리는 2017년에도 《장백산》잡지에 발표되는 작품들이 성스러운 장백산 기상과 더불어 독자들을 황홀하고 다양한 문학의 새로운 경지에로 이끌어주기를 다시한번 미리 축복드린다. 출처:2017 제1호
1    김혁: 필끝에 건곤세상 있나니(칼럼, 련재1) 댓글:  조회:362  추천:0  2019-07-16
필끝에 건곤세상 있나니(련재1) 김혁   수도에서 열리는 문학성회에 다녀왔다. 중국작가협회 제9차 전국작가대표대회가 11월 30일 북경 인민대회당에서 개막식을 시작으로 성황리에 열렸다.  길림성 연변조선족자치주 대표단은 연변작가협회 최국철주석을 비롯해 장계신, 정봉숙, 김혁, 김영건, 김홍란, 채시봉 등 조선족작가와 문화계 사업일군들이 대표로 선정되여 참석했다.  습근평 등 당과 국가 지도자들이 대회 개막식에 출석한 가운데 중국 각지의 문학계 엘리트들이 참석한 대회는 제8차 중국작가협회의 사업보고를 심의채택하고 “중국작가협회 규정”을 수정하였으며 철응을 주석으로 한 중국작가협회 차기 지도기구를 선출하였다 대회는 12월 3일에 페막, 5박 6일간의 대회일정을 원만히 마치고 대표들은 귀환했다. 10대로부터 지금까지 오로지 글밭만 경운해온 작가로서 중국대륙의 문학계를 대표하는 기라성 같은 거장, 엘리트들이 운집한 전국작가대표대회에 대표의 일원로 참석하게 된것을 행운과 자호감으로 생각한다. 20여년전부터 전국청년작가회의 등 전국적인 문화행사에 적지 않게 다녀왔다. 하지만 이번의 성회는 여느때와는 또 다른 농도와 줄기의 계시와 감수를 안겨주었다. 그리하여 회의기간 나는 매일 핸드폰으로 간명하나마 그날그날의 수감을 일지로 적어 위챗에 올리고 나의 문학블로그에도 올렸다.   스모그로 몸살하던 북경이였지만 그 며칠만은 초동 들어 가장 화창한 날씨의 련속이였다.   그처럼 “가슴속에 대의를 품고 마음속에 대중을 담아야 하며 어깨에 책임을 짊어지고 필끝아래 건곤을 적어내리기를 바란다(胸中有大义、心里有人民、肩头有责任、笔下有乾坤).” 라는 회의의 주제문구는 작가들의 마음벽을 울려주고 우리 문학의 화창한 봄날을 제시하는듯했다.  성회에서 받은 감수와 사색을 편단으로나마 테마별 적어본다.    자신감을 소환하다 -제9차 전국작가대표대회 수감록 (1)     은은한 광택이 돋보이는 옥색 저고리우에 감색 마고자를 받쳐입었다. 헌활하게 통이 트인 바지를 떨쳐입고 발목에 대님을 조여 고풍스러운 멋을 강조했다. 저고리의 섶이 약간 들린 품이 나래를 펼치려는 학의 그것과도 같다.  간결함과 섬세함이 매치된 선이 아름다운 실루엣을 그려낸다. 오방색 수공의 옷은 단아하고 아취가 있다.  마음은 싱그럽고 발길도 가벼워 건들건들 걸으니 자신감이 그윽하다.  오랜만에 입어보는 한복이다.    전국작가대표대회 개막식이 열리던 날 아침, 나는 참말로 오랜만에 한복을 떨쳐입고 나섰다. 15억의 작가들을 대표하는 성회에서 민족대표로 선정된 기쁨으로 처음 민족복장을 맞추어 입었다.  역시 한복을 떨쳐입고 나선 녀성대표들인 김홍란, 정봉숙 역시 여느때보다 청초한 모습이다.  많은 사람들의 시선과 기자들의 카메라의 앵글이 우리 복장이 주는 운치에 맞추어져있었다. 연변대표단의 대표들은 인민대회당의 가장 현요한 앞자리에 자리배당이 되여 있었다.  우리는 부풀은 한복처럼 한껏 부풀은 마음으로 총서기와 중앙의 지도자들, 전국 각지에서 온 민족작가들과 만났다.  개막식에서 한 총서기의 예술변증법과 과학정신으로 일관된 강화는 새로운 문화리념을 우리에게 전달해주었다. 관점의 밀도가 농후하고 새로운 용어로 가득한 그 강화에서 몇줄을 임의로 뽑아내도 느낀바가 많았다.  그중에서도 “문화자신감”이라는 용어를 나는 정중하게 뽑아보았다.    “문화자신감은 기초로 되고 더 광범위하고 심후한 자신감으로 되여야 하며 기본으로 되고 지구적인 힘으로 되여야 합니다.  문화적자신감을 갖는것은 국운의 흥망성쇠와 관련되며 문화의 안전, 민족정신의 독립성에 관련되는 큰 문제입니다.  문화자신감이 없이는 골기가 있고 개성이 있으며 풍채가 보이는 작품을 써낼수 없습니다.”    자신감이라는 용어에 대해 이렇게 새삼스럽게 생각해보기는 근년 들어 처음이였다. 우리는 언제부턴가 자신감이라는 이 단어를 잊고있었다. 잃어버리고있었다.  근년래 중국조선족은 변혁기의 소용돌이속에서 부침해오고있으며 따라서 “위기론”, “비관론”도 머리를 쳐들고있다.  도시진출, 출국붐에 잇달아 가꾸며 살던 터전이 비여지고 인구가 마이나스 성장률이라는 최악의 상태를 기록하고 학교들이 줄줄이 페교되고 독서인구가 급락되고 잡지사와 출판사가 불황을 겪는 악순환이 지속되여왔다. 그에 따라 작가들은 바닥까지 실추된 문학의 위상에 설 자리를 잃고 방황과 고민을 거듭하고있다.  그리고 조선족작가들은 전국 여러 도시에서 가장 낮은 최악의 고료를 받고있다. 물론  “오두미배요(五斗米拜腰)” 즉 쌀과 돈에 허리를 굽히지 않는것을 작가들의 지조로 알고있지만 작가들에게 문학은 먹고 살아나갈 삶의 방편이 못되였다.  이렇게 위축의 일로를 걷고있는 사회상을 바라보며 작가들에게 자신감이란 운운도 할수 없었다.    하지만 근년래 우리의 문학계는 조금의 미묘한 변화를 감지할수 있었다.  그 감지는 독자층과 문학애호가들로부터 왔다. 미약하나마 독자와 문학애호가들이 전에 비해 상당히 붇고있음을 놀라웁게 발견할수 있었다. 시가지들에서 단지 커피나 음료를 팔던 청일색의 다방, 까페들로부터 책을 읽을수 있는 북카페가 나타나기 시작하고 민간에서 “책읽기 동아리”가 하나둘 속출하고있다.  연변작가협회에서 몇해에 한번씩 정기적으로 조직하는 문학강습반도 몇해전에는 참가수가 너무 적어서 개강을 하지 못한적도 있었지만 올해는 신청자가 넘쳐나서 그 인원을 제한하기까지 했다.  해외문화와의 충돌로부터 정체성에 대한 재인식, 소실되여가는 민족언어에 대한 우려, 출국인원들의 귀향후 재정착에 대한 고민 등등에서 유발된 사고, 개개인의 노력을 수반으로 한 생활수준의 제고와 질적인 삶의 변화, 경제가 발전한 선진국의 수준 높은 문화생활에서 배운 지식들이 이러한 변화를 촉구한것이 아닐가 생각해본다. 이로써 책을 외면하던 사람들이 인생에서의 지식경영의 중요성을 스스로 자각하고 다시금 책을 들고있는것이다.  비록 아직은 작은 파문에 불과할터이지만 이제 좀더 큰 이랑을 이루기 시작한다면 이는 우리 민족에게는, 우리 문화계 인사들에게는 대단히 고무적인 파고(波高)의 높이가 아닐수 없다.    주지하다싶이 문화는 한 나라, 한 민족의 령혼이다. 문화생명력에 대한 신심은 리성인식에서의 고도로 성숙된 정신적인 면모라 할수 있다. 할진대 문화의 자신감은 그 혼의 기초로 되여야 하며 광범위하게 더 깊게 더 지구적인 힘으로 되여야 하는것이다. 이러한 문화자신감으로서 자신의 작품의 품위를 높이고 력사사명감을 자각하고 심령을 정화하고 민족의 인문소양을 높여야 한다.    여기서 바로 원견과 지명의 “자신감”이 소요된다.  자신감을 바탕으로 일사불란하게 보조를 흐트리지 않으며 나아가야 한다.  발에 채이는 비관의 돌덩어리들을 치우면서 스스로의 길을 모색해야 한다.    중국조선족이라는 우리의 정체성은 앞으로 형성될 새로운 세상의 질서에서 그 립지를 강화하는 요인으로 작용할것이다. 우리는 지정학적으로 변강소수민족이라는 특유의 위치와 특수한 문화환경을 용유(拥有)하고있다. 우리 중국조선족공동체는 조선반도 문화와 중국 문화의 사이에 있는 변연문화의 특징을 지니고있다. 변연문화계통은 그 특수한 다중문화구조로 인해 새로운 문화요소를 창출할수 있다는 점에서 일반적인 문화계통보다 더 강한 문화적기능을 나타낼수 있다.  거기에 한국과 조선 두 나라 가운데 끼여있는 조선반도에서의 민족의 교두보 역할도 무시 못한다.  이러한 민족적우세를 도약의 바탕으로 삼아야 한다.  조선족 공동체사회의 발전은 궁극적으로 중국과 조선반도간의 교류, 협력에 필히 긍정적인 역할을 미칠것이고 중국과 조선반도간 광범위한 교류의 진일보는 동북아 국제협력이라는 중국의 대동북아전략에도 영향을 미치게 될것이다. 따라서 조선족사회 발전을 위한 문화전략의 구축과 실행 과정은 정부의 직접적인 참여를 필요로 한다. 그 와중에 정부에서 소수민족에게 돌려지는 점점 더 원활해지고있는 무양(?량?)한 특혜도 우리는 적극 활용할줄 알아야 한다.   현정세에 대한 바른 리해를 토대로 자신의 립장과 토대를 굳건히 설정해나가면서 우리의 오래된 가치관에 자신감을 덧입히고 그것을 미래 지향적인 동력으로 삼아야 한다. 그리고 그것이 우리 제반 분야의 바탕이 되도록 하여 우리의 얼을 살려야 한다. 그러한 저력이 근로용감한 우리의 문화전통에 잠재하고있다는 사실에 자부심을 가져도 좋을것이다. 목전의 진통을 극복하면서 모색속에 새로운 대안을 찾는 험준한 과정에 비관을 엎누르는 자신감이 우리에게는 무엇보다 절실한 때이다.   대회의 개막식과 페막식에서 초겨울의 추위도 무릅쓰고 우리는 한복을 입고 북경의 장안가, 인민대회당앞 광장에서 포토타임을 가졌다.  외성의 대표들과 매체 기자들이 다투어 우리들의 현란한 색조를 향해 카메라의 초점을 맞추었다. 우리 복장의 단아함과 민족작가로서의 자호감 머금은 자세에 타성의 대표들과 행인들이 찬탄의 소리를 보냈다. 소슬한 겨울바람이 한복의 자락을 스치나 우리는 모두 다 상기된 얼굴, 더워나는 가슴을 느꼈다.  그야말로 자신감을 소환해본 시간이였다.   문호들의 고향  - 관씨, “마”씨 그리고 최씨 -제9차 전국작가대표대회 수감록 (2)     대회기간 문단의 거목, 기라성 같은 문인들을 가까이할수 있다는건 아직도 문학도의 초심과 정열을 온곱게 갈무리하고있는 나에게는 행운이 아닐수 없었다. 회의장에서, 이동하는 셔틀뻐스에서, 호텔 로비에서, 지어 엘레베터속에서도 마음속 우상들과 꿈결처럼 만날수 있었다.   그중에서도 막언선생과 함께 할수 있은건 크낙한 기쁨이였다. 나는 80년대 중기 막언의 출세작 “붉은 수수”를 스크린에서 본 뒤로 그의 전부의 작품을 소장해 읽었고 영화, 드라마로 각색된 영상물도 모두다 갖출 정도로 그의 “골수팬”이다. “백구 그네대(白狗秋千架)”와 같은 그의 단편소설을 조선말로 번역했었고 언감 평문도 달아보았으며 그의 노벨문학상 랑보(朗報)가 터져오르자 곧 평론, 대담, 칼럼, 방송 등 다쟝르를 동원해 그의 작품들을 조선족독자들에게 소개하기도 했었다.  나는 한국에서 번역된 그의 작품에 대해 소개해드리면서 그이와 합영도 하고 회의노트에 싸인도 받았다. 노벨문학상 계관을 쓴 문호임에도 막언선생은 차림새가 지극히 소박했고 말수 또한 적었다.  “고향이 어디지요?” 사진을 남기고싶다는 간청에 흔쾌히 카메라, 핸드폰 앞에 서면서 문호는 나지막한 소리로 나에게 물었다.  “연변입니다, 조선족작가입니다” 그 몇마디뿐이였다.  막언의 본명은 관모업(管谟业), 필명인 막언은 “말이 없다”라는 뜻이라 한다. 그래서인지 시종 과언(寡言)이였다. 그저  합영이나 싸인을 청하는 문학팬들에게 인자한 흙좌불(坐佛)처럼 소리없는 미소로 화답하곤 했다.  호텔로 돌아와 흥분을 곰삭이노라니 그 평범하기 그지없는 물음이 왠지 막중하게 떠올랐다. “고향이 어디지요?” 나는 은연중 고향이라는 의미에 대해 다시금 곱씹어보고있었다.  막언 소설의 또렷한 특점이라면 거의 모든 작품마다 민중의 삶을 중심으로 한 서사를 펼쳐나간다. 그리고 다작의 그의 작품속에는 어김없이 “동북 고밀향(高密)”이라는 고향이 등장한다. 시간적배경은 중국 근현대사의 굵직한 사건이 일어났던 시기이고 공간적 배경은 자신의 고향을 문학적으로 확장한 “고밀향”이다. 그의 작품속에서 중국의 대약진운동, 반우파투쟁, 문화대혁명으로 이어지는 굵직굵직한 력사적사건들을 배경으로 민담과 습속의 화려한 색채를 입은 “고밀 동북향”의 이야기들이 줄레줄레 펼쳐진다. 막언은 일찍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고향은 아주 중요한 창작의 원천”이라고 고백했었다. 그는 “소설속의 고향은 실제 고향과는 좀 다르지만 그 소설속 고향에는 나의 리념, 사상, 상상력이 부과돼있다"고 말했다. 그리고 "나는 민속예술과 민속문화와 함께 성장했으며 어린 시절 고향에서 목격한 문화적요소들에 영향을 받았다”며 “창작을 위해 펜을 들었을 때 고향이 불가결하게 내 소설에 스며들어 영향을 줬고 문학스타일을 결정했다”고 력점을 찍어 말했다. 30년 넘게 왕성하게 글을 써왔지만 그의 창작의 안목은 여전히 낡은 치벽지인 고향 고밀향에 머물러 고향사람들의 생명력 넘치는 삶과 그 력동성을 낡지 않게 그려내고있다. 고향인 “고밀향”을 대상으로 중국적인 력사와 삶의 가치문제에 천착해오고있는것이다. 그의 모든 작품에는 이렇게 고향으로 징표되는 민간의 립장과 시선에서 중국만의 독특한 문화와 민속이 그려져있다. 이는 바로 막언 문학의 핵심적요소이다.  1981년 단편소설 “봄밤에 내리는 소나기”로 등단한 이래 “고밀향”이 단순히 고향이란 의미를 넘어 막언 창작의 밑그림과 같은 문학적공간으로 설정되기 시작했다. 최근작 《개구리》에 이르기까지 막언의 거의 모든 소설은 “고밀향”에서 진행되거나 그것을 기초로 한 가상공간에서 펼쳐진다.  “제 소설속 고향은 이미 문학적인 개념입니다. 실제지명을 기초로 하였지만 허구의 공간으로 확장된것이죠.“ 막언은 북경에 거주하면서 문학행사와 해외에 다니는 일이 잦지만 창작에 집중할 때는 수수가 붉게 익어가는 고향에 내려간다고 한다.  막언은 중국의 전통이라는 씨줄과 창작이라는 날줄을 엮어 그 매듭의 지점에서 “고밀 동북향”을 발견했다. 고향의 신화와 전설 그리고 그에서 나타나는 원초적 생명력, 그속에서 이루어지는 민중의 삶과 죽음이 그가 즐겨 다루는 소재이다. 그 원초적 공간과 근대적 변화라는 력사공간을 마주세우고 겹치면서 성찰의 주추돌을 쌓는다. 따라서 막언은 “중국적인것을 가장 잘 담아내는 작가”로 불린다. 막언은 "내 작품들은 세계문학의 일부인 중국문학이고 중국인의 삶과 중국의 독특한 문화 및 민속을 보여준다"고 하면서 한편으론 “내 소설들은 지역과 종족을 넘어선다"고 설명했다. 막언은 고향사람들의 가난한 현실을 직설적으로 라렬하는데만 머물지 않고 “마술적(魔幻) 리얼리즘”을 가미해 작품을 “촌스러움”에서 해방시킨다. 그렇게 재구성한 작가의 작품은 극히 다채롭다. 사실적이지만 풍자적이며 때로 잔혹하다가 문뜩 환상적이고 몽상적이여서 타의추종을 불허하는 나름의 독특한 풍격을 이루고있다. 여기서 중요한것은 막언이 자신의 독특한 문체로 고향이라는 이 협애한 향토적개념을 초월하려 시도한것이다. 그 개념은 좁게는 고향에서 비롯된것이지만 넓게는 중국의 농경문화, 더 넓게는 동아시아 문화에서 비롯된것인데 여기서 그의 작품의 거대한 스타일과 깊이를 감지할수 있다.     막언은 일찍부터 남미의 마술적사실주의 소설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고백했다. 남미의 문호 마르케스에게서 막언은 의식류소설의 시공간의 처리수법과 “마환현실주의” 소설의 구조방식에 대해 배웠다.  그래서 유럽에서는 막언에 대해 지칭할 때 “중국의 마르케스”로 통하며 그의 작품들은 “중국적인 ‘마술리얼리즘’의 정수를 보여준다””는 정평을 받는다. 일관된 창작태도, 민족적인 토양과 그에서 삶을 영위하고있는 인간들의 령혼상태에 대한 탐색, 예술형식에서의 락오를 허용치 않는 쉼 모르는 실험정신, 그러한 큰 그릇에 담겨져있는 사회의 통증과 인간의 삶에 대한 천착, 인간을 억압하는 계급사회에 대한 신랄한 비판, 고난속에서도 결코 놓지 않는 인간이 지닌 아름다움과 삶에 대한 희망… 이러한 요소들이 바로 중국인들의 오래동안의 숙원을 이룩하면서 막언이 노벨문학상의 견고한 대문을 드디여 열어젖히게 된 중요한 요소라 하겠다.    막언이 심취되였고 그의 창작에도 막대한 영향을 끼쳤던 남미작가 가르시아 마르케스 작품에서도 고향은 앵콜 레파토리처럼 거듭 나온다. 막언보다 30년 먼저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는 “20세기 가장 중요한 작가중 한명”으로 자리매김되고있다. 《백년고독》, 《콜레라시대의 사랑》 등 명작을 남긴 그를 거론하지 않고서는 지금의 현대소설을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이다. 현실과 환상을 넘나드는 “마술적리얼리즘”의 창시자로서 그가 현대문학에 끼친 영향은 지대하다. 마르케스는 1927년 봄, 콜롬비아 북부의 작은 해안 마을에서 태여났다. 생계때문에 고향을 떠나야 했던 부모님과 떨어져 8살때까지 외할머니 슬하에서 살았다. 외할머니에게서 들은 환상적인 이야기들은 그의 문학적 자양분이 됐다. 그의 고향은 적도의 해빛이 격렬하게 정수리를 비추는 곳, 악사들이 손풍금과 기타로 흥겹고 강렬한 리듬의 “바예나토(Vallenato)”을 튕겨내는 곳이다. 외할머니가 들려준 콜롬비아의 력사, 온갖 신기하고 기괴한 이야기들은 “부엔디아” 가문의 흥망성쇠를 통해 중남미 력사를 그려낸 그의 대표작 《백년고독》의 바탕으로 되였다. 그의 소설속 “마콘도”라는 가상의 마을 이름은 외가에서 기차로 10분 거리에 있는 바나나농장 이름에서 따온것이라 한다.  첫 소설이 출판사에서 퇴짜를 맞은 뒤 작가로서 좌절에 빠졌던 그는 기자로서 먼저 두각을 드러냈다. 유럽 특파원으로 발령되였고 반평생을 타향에서 떠돌면서도 고향을 잊지 못해했다. 기자로서의 경험과 그의 어린 시절 고향의 추억이 뒤얽혀 라틴아메리카의 력사와 원시 토착신화를 결합한 “마술적리얼리즘”이라는 특이한 쟝르를 낳았다. 그렇게 창작된 작품들은 남미뿐만아니라 미국 등 세계적인 베스트셀러에 올라 독자들의 사랑을 받았다. 드디여 1967년 발표한 《백년고독》으로 1982년 노벨문학상을 받았다. 3년뒤 내놓은 《콜레라시대의 사랑》 역시 세계 35개국 언어로 번역돼 5천만부가 팔려나가고 영화로 각색되며 전작에 못지 않은 커다란 성공을 거뒀다.  평론가들은 “민초들의 사랑과 애환을 담은 그의 고향은 사실과 환상이 뒤섞인 이야기들이 끝없이 중첩되는 《백년고독》과 같은 서사구조를 가지고있다”며 “현실에서는 도저히 일어날수 없는 놀랍고도 신비로운 일들로 가득한 작가의 작품세계는 그의 고향 열대지역의 자연과 문화가 빚어낸것”이라고 말했다.  마르케스가 들으며 자랐던 “바예나토” 음악은 민담이나 사랑이야기를 빠른 템포로 구연(口演)하듯 부르는“옛날옛날에”로 시작한다고 한다. 동네방네의 자질구레한 일들을 아주 자연스러운 말투로 랩같이 리듬있게 전개해나간다.  고향은 마르케스에게서 “옛날옛적에”로 운을 떼는 오래된 음악과 같은 마술적리얼리즘의 원형이였다. 마르케스는 력사와 생활의 관찰자로서 우리앞에 시대를 넘나드는 이야기를 펼쳐보였다. 그 필법속에 그가 마법처럼 부린 환상의 세계는 무한한 진실로 통하는 문을 거쳐 다달은 고향이였다.    막언에게 동북 “고밀향”의 이야기가 있고 마르케스에게 “마콘도”의 이야기가 있다면 우리에게는 “남대천”의 이야기가 있다. 이번 전국작가대표대회에 연변작가대표단을 휘동하고 나선 연변작가협회 주석 최국철소설가의 작품 역시 이러한 맥락에서 짚어볼수 있다.  최국철의 이미지와 련관지어 기억들을 끄집어낸다면 그 기억들은 그의 소설에서 심심찮게 등장하는 “남대천”과 직결되여있다. 최국철소설가의 3부의 장편소설을 비롯해 20여부의 중단편소설들은 모두다 남대천을 무대로 그려진것이다.  조선족문단의 대표작가의 한 사람으로 최국철소설가는 지난 60년대 바로 이곳 남대촌에서 5남매의 맏이로 태여났다. 소설가의 필끝에 고향이 많이 묘사되였지만 이제 고향 남대촌을 말할라치면 막상 소설가를 빼놓을수 없을것이다.  “작가에게 있어서 고향의 하늘과 땅은 가장 근원적인 령혼의 장소이고 소설적인 발견, 흥분점이 무진장하게 깃들어있는 곳이다. 그래서 자고로 고향은 남녀간의 사랑주제만큼 지속적이고 영구적으로 격조높게 그려져온것이다”고 소설가는 말한다.  최국철 소설가네 남대천은 “마을 외곽에는 토벽자리가 황페하게 남아있었고 그 토벽우로 헌 삿자리 낡은 고무신짝들이 걸려서 스산한 풍경을 자랑하는, 토벽아래로 호성하가 소오줌 같이 지줄거리는, 비가 한줄금만 내려도 황토길이 질척거리고 안해가 없이 살아도 장화가 없으면 못산다는, 외눈박이 개딸년도 주기 싫어하는 빈한한 마을”이였다. "찰떡처럼 찰진 황토땅, 그것은 내 고향의 슬픈 표상이다."고 소설가는 말한다.  이런 동네어서 소설가는 “석탄을 주으며 가난을 알았고 새차꼬를 놓아 참새와 메새를 잡으며 소년시절을 보냈다. 그리고 길가에 아무렇게나 나뒹구는 소똥을 차고 지저분한 마을길을 오르내리며 문학청년의 꿈을 키웠다.” 나날이 문학수련을 거쳐 점차 완숙하게 벼려진 그의 필끝아래 고향의 정경은 그야말로 한폭의 그윽한 민속화처럼 그려진다.  그의 필아래 그려지는 고향은-  “모내기철이면 이랴 끌끌 나래를 놓고 점심이면 두렁밑에서 캔 미나리에 벌건 고추와 식초를 팍팍 무쳐 술안주로 해서 아버지와 동생들과 마주앉아 재미있게 술을 마시는”,  “호미 메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버들방초가 우거진 석골개천에 숨어들어 홀랑 벗고 저락저락 물을 끼얹고는”,  “해거름녘이면 앞마당에 짚멍석을 깔고 앉아 늙은 어머니가 버들조리에 쪄주는 가지와 풋고추, 깨잎을 맛나게 먹으며 검푸른 잎을 이들거리며 우긋이 자라오른 강냉이와 처마사이에서 집을 짓는 거미를 재미있게 구경”하는,  “장마비에 기세가 오른 버들숲에서 그윽그윽 간신히 톺는 황소의 영각소리, 온갖 풀벌레소리도 가만히 들”리는,  “헐어서 바늘로 꿰맨 코신을 겨우 끌고 마당에 나선 조모가 앞마당의 곰삭은 나무바자를 짚고 서서 서산에서 후르르 달려 내려오는 가을 저녁바람에 흰 머리카락을 날리면서 ‘단풍이 깊어가는구나’ 하면서 서글픈 탄식을 하던”,  “두만강에 황어가 거슬러오를 때 콩의 떡잎부터 먼저 들고 다시 차례로 산으로 오르고 나무잎에 옮겨 타면서 단풍이 드는”,  “입안에 착착 감겨드는 찰옥수수죽에 하얀 무우동치미를 얹어 게걸스레 먹어”대다가,  “추위에 얼어빠진 달이 구름사이로 어망치망 달려가는 모습을 지켜보며 남대천에서 쩡쩡 얼음이 갈라터지는 소리를 듣는” 그런 곳이다.  그 누구도 흉내낼수 없는 독보적인 문체로 풍경이면 풍경, 인물이면 인물, 풍속이면 풍속, 정서면 정서를 어렸을적 모두가 보고 겪었던것처럼 생생하게 그려내는 솜씨는 실로 경탄을 자아낸다.  모던한 기교도, 화려한 장식적인것도 없이 자연스러운 그의 붓터치는 때로는 크고 툽상스러운 륜곽선으로, 때로는 세세한 국부로 삶의 순간을 굵은 결의 캔버스에 봉선화 물들듯이 정감스레 옮겨내고있다.  그야말로 최국철만의 미덕이 엿보이는 작품들이며 최국철이기에 가능한 그만의 감성과 력량이다. 최국철 소설의 미학은 바로 고향 내지 자연이 지닌 의미성을 천착해내는것이다. 그것속에 그의 인생관과 나름의 철학을 투영화시킨다. 이는 호방하면서도 온유한 성격의 그가 살아온 삶 그 자체였다. 그 삶이 거짓말 못하는 어린애의 순진한 대답처럼 서사적으로 표현되고 어릴적으로부터 싹터온 강한 호기심과 적극적 삶에의 용기로 작품속에서도 그의 성정만큼이나 깊고 강하게 나타난다. 최국철소설가가 단절된 고향의 풍경속에서 전통적인 가치에 대한 우리의 목마름을 추겨준 작품을 량산하면서 고향의 자연풍경을 문학적인 예술공간에 복원하는데 성공할수 있었던것은 고향에 대한 그의 남다른 정감과 향수때문이기도 하겠지만 그것을 토속적인 방언으로 다시 빚어낸 너스레, 투박함, 감칠맛이 혼재되여있는 조어(造語)들의 연금술적인 효과덕도 톡톡히 입었던때문이 아닐가싶다.  "고향은 나에게 고향 자체만은 아니다. 그것은 끈끈한 민족의 삶이 적취된 터전이다. 그 원천적인 터전을 등지면 민족작가에게는 보람이 없고 문학사상을 운운할수 없다."고 작가는 적고있다. 최국철소설가의 고향 남대천에 대한 사랑은 나이가 들어도, 삶의 터전이 시가지로 옮겨도 변하지 않고있다. 고향 남대천은 그에게 피와 살을 준 곳임과 함께 그에게 령혼을 부여하고 작가적인 삶을 영위하게 해준 자궁이자 요람이였다. 한 작가의 성장과정에 지배적으로 영향을 주는 자연환경과 작가의 의식세계를 형성하는 하나의 토대가 곧 고향이다. 때문에 그는 지금도 고향 남대천에 대한 그리움을 버리지 못해 늘 향수에 젖어있고 그 향수는 진한 사념의 절주가 되여 키보드장단속에 가락 맞는 고향타령을 두다려대고있는것이다.    그러나 요즘의 현대인들에게는 “고향”이라는 단어조차도 낯설어지고있는듯하다. 작가들은 저마다 피페화되여가는 고향에 대한 안타까움을 토로한다. 고향의 상실이라는 문제는 현대인들의 심리속에도 깊은 그늘을 드리우고있다. 이는 현대인들이 자아를 잃고 정체성을 확보하지 못하는 리유의 하나가 되기도 하는것이다. 이제 새로이 태여날 세대에게 고향의 문제를 어떻게 일깨워줄것인지 우리의 문학은 그것을 새롭게 고민해야 할 때가 되였다고 하겠다.  문학작품에서 고향은 작품의 줄거리를 동반한 정서로 미화되거나 작품의 후경으로 보조역할을 한다. 작중인물에게 고향이 차지하는 심리적배경도 큰 의미를 갖는다. 때문에 문학작품에 드러난 공간과 배경의 의미는 작품 연구와 구분해서 다룰수 없을 정도로 중요한 가치를 가지고있다.  현대인들은 물리적공간으로서의 고향을 상실했을뿐문아니라 인류의 근원적인 고향으로서의 심적공간도 상실해가고있는 현실이다. 그 점에서도 우리 문학속에서의 고향의 의미에 대하여 검토해보는 일은 그 자체만으로도 소중한것이다.    세상은 넓지만 세상 어디에도 없는 반드시 그곳이여야만 했던 문호들의 문학적 본향, 그곳의 어제와 오늘, 그속 인간 존재들의 속됨과 아름다움, 우환과 희망을 망라하는 그곳만의 이야기가 파노라마로 펼쳐지기에 독자들의 향수와 더불어 그 작품은 명저의 반렬에 오를수 있은것이 아닐가! 이 한 면에서 관씨, “마”씨, 최씨의 작품들은 우리에게 좋은 보기가 되지 않냐고 스모그가 자욱한 수부에서 고향의 파란 하늘을 그리며 새삼스러운 향수 한자락 머금어보았다.    쟝르, “낭떠러지”에서 “바람소리”를 듣다 -제9차 전국작가대표대회 수감록 (3)     대회기간 연변작가협회대표단은 절강성대표단, 중경대표단과 분조토론(分组讨论)을 함께 하기로 배치되여있었다. 그중 절강성대표단의 명단을 본 나는 저도 모르게 환성을 터뜨렸다. 그 명단속에 소설가 맥가(麦家)가 우리와 같은 조에 있었던것이다.  작가대표대회에 오기전까지도 나는 마침 맥가의 소설 《칼날우를 걷다(刀尖)》를 읽고있었다.  맥가는 그의 동명소설을 각색한 영화 “바람소리”를 보면서 홀딱 반하게 되였다.  주신, 황효명, 리빙빙, 장함여, 소유붕 등 중국과 대만의 톱스타들이 대거 출연한 영화는 원체 영화광인 나를 매료시키에 충분했다. 그후 원작을 찾아 읽으며 그의 작품에 홀딱 빠져 한부, 두부 그의 모든 작품을 소장하고 읽고있다.  《바람소리(风声)》는 2차대전시기 일본의 침략에 맞서 활동했던 중국 스파이들의 활약을 그린 작품이다.  1942년, 일본군은 “유령”이라 불리는 정보부 내부의 첩자를 잡아내기 위해 가짜 암호를 내보내고 암호에 접근할수 있었던 5명의 중국 내부요원을 외딴섬에 감금한다. 한명씩 차례로 고문과 회유를 통해 심문하지만 끝끝내 첩자를 잡아내지 못한다. 작품은 전쟁을 배경으로 한정된 공간과 한정된 인원 그리고 정해진 시간이라는 흥미로운 설정속에 침략자 일본과 그에 맞선 중국 엘리트들 사이의 두뇌싸움이라는 심리 스릴러를 흥미진진하게 풀어가고있다. 긴장감 넘치는 심리전속에 국가를 위한 희생이라는 대의명분과 우정과 배신으로 얽힌 개인적인 감정이 교차되면서 놀라운 감동을 선사한다. 맥가의 출현은 문학계에 작지 않은 충격을 불러왔다. 그의 소설은 쟝르문학과 본격문학의 중간쯤에서 흥미있는 스토리를 박진감 있게 엮어나가는 품이 기존소설의 문법을 확연하게 뛰여넘는다. 그의 작품을 첩보소설, 추리소설의 형태로 귀납할수 있지만 암호의 고안과 파해, 신비한 직업을 둘러싼 미스테리를 소재로 한 작품구성에 만족하지 않고 맥가는 이 신비로운 세계속의 개인의 생존상태에 더욱 주목한다. 이것이 곧 그의 작품이 추리소설이나, 정탐소설보다 초월적인 품격을 갖춘 품격의 높이이다. 맥가는 이제 순 문학의 리념과 쟝르소설을 가장 훌륭하게 성공적으로 결합시킨 전범으로 자리매김되였다. 해외 주요 언론들에서도 그에 대해 주목하기 시작했다. 뉴욕타임스는 작가 탐방기사를 장문으로 실었고 월스트리트저널이나 옵서버 같은 주류 매체에서 “가독성과 문학성이 뛰여나다”고 호평했다.  한 문학잡지는 “1980~1990년대의 막언, 여화, 소동, 왕안억 이후 단 한명을 꼽으라면 바로 맥가이다”라고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이번 대회기간 분야의?? 쟝르를 능수능란하게 다루는 또 한분의 작가를 만날수 있었다.  지난해 우리 문단의 최고액의 상인 “단군문학상”을 수상한 전용선소설가였다. 흑룡강대표단으로 온 전용선은 인민대회당에서 특별히 연변대표단의 좌석을 찾아와 우리와 악수를 나누고 담소를 나누었다.  전용선은 1966년 흑룡강성 가목사에서 태여났다. 북대황문공단 창작원, 《삼강석간》신문사 기자로 근무했고 중한수교 이전 한국 파주의 한 공장에서 힘든 고역을 했던 경력도 가지고있다. 이후 34세가 되던 해 꿈을 안고 북경에 올라온 그는 로신문학원과 북경 영화학원에서 공부하며 비로소 작가로서의 길을 내딛게 되였다. 주요작품으로는 중편소설 “흰 태양 붉은 태양”, 장편소설 《독신자》, 소설집 《소화 18년 (昭和十八年)》등이 있다. 드라마창작에도 매진하여 “세월”, “눈속의 승냥이(雪狼)”, “어머니” 등 드라마를 통해 관객들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그러다 첩보드라마 “낭떠러지”로 드디여 중국문단에 크게 문명을 떨친것이다.  요즘 TV채널을 열면 온통 첩보드라마 열풍이다. 몇해전 첩보드라마 "잠복(潜伏)"이 공전의 히트를 해 묵직한 상도 받았고 조선에까지 수출되여 인기리에 방영되였다. “중국드라마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알린 드라마의 시작”이라고 관객과 전문가들은 첩보드라마의 출현을 반겼다.  그를 선두로 몇해간 중국의 거의 모든 채널에서는 다투어 첩보드라마 열풍이 일었는데 가히 토네이도 급이다. 주요 방송국에서 황금 시간대에 방영된 드라마 200여편중, 항일전쟁드라마가 70편 넘게 차지했는데 그중 과반수가 첩보드라마이다. 지난해 절강성의 유명한 드라마 촬영지인 횡점(横店)스튜디오에서는 동시에 50작품이나 되는 항일전쟁 드라마가 촬영되였는데 일본군 배역을 도맡다싶이하는 한 전문 배우는 최대 하루에 10여번이나 죽는 장면을 찍었다는 후문이다.  이 활기찬 항일전쟁드라마, 첩보드라마의 배후에는 성숙한 영업, 판매 생산 라인과 정의의 애국이라는 정서와 무대가 뒤받침하고있다. 그것은 문화의 트렌드와 자본의 추구로 인해서 생겨난 산물인 동시에 중국인들의 항일전쟁시기에 대한 특수한 정감과 력사관에서 유래한것으로 단순한 오락의 세계와는 완전히 다른 성질이 드라마 작품들이였다. 하지만 그렇게 량산된 드라마중에는 단순한 열풍에 편승한 싸구려수준의 드라마가 란무하였고 수작이란 몇부밖에 되지 않았다. 그 수작들중에서도 장가락으로 솟아오른 작품은 단연 전용선의 "낭떠러지(悬崖)"가 아닐가 생각한다. 드라마는 일본의 침략과 국민당의 횡포에 맞서 싸우는 공산당의 특공인원 주을(周乙)의 활약을 시종 팽팽한 긴장감속에 사랑과 증오, 음모와 배신을 현념과 액션을 곁들인 프레임으로 그려내고있다. 여느 드라마에 비해 총격전이나 동작씬 같은것이 적고 미녀들의 선정적인 유혹도 없지만 30여집 내내 마음 졸이며 보게 하는 영화, 극작가가 심혈을 쏟아부은 탄탄한 스토리와 주연들의 웅숭깊은 연기가 돋보인 드라마이다.  “낭떠러지”는 “제18회 상해  TV 페스티벌”에서 “최우수드라마 작가상”을 수상했고 이밖에 “최우수작품상”, “녀우주연상”등을 휩쓸며 그해 중국 최고의 드라마로 선정됐다.  “낭떠러지”는 전용선의 장편소설 《호바트거리(霍尔瓦特大街)》를 개편한 작품이다. 2012년 1월부터 상해동방위성TV, 흑룡강위성TV, 천진위성TV에서 동시에 저녁황금시간대에 방영했다. 상영 3일만에 관객들의 열띤 론의를 불러일으켰고 시청률은 으뜸을 차지했으며 시장점유률은 새해 대형드라마가운데서 최고에 달했다. 이에 중앙TV 제1프로에서 인차 황금시간대에 방송을 했고 중앙TV 종합프로에서도 뒤이어 역시 황금시간대에 재차 방송했다. 드라마가 방영된후 중국TV예술위원회에서 “낭떠러지”에 대한 연구토론회를 조직했다. 회의에서는 근간에 막다른 골목에 이른듯 식상함을 보이고있는 첩보전드라마창작에 있어서 “낭떠러지”는 “하나의 좋은 돌파구를 제시했다”, “슈제트로 승부한것보다는 인물, 인성으로부터 출발하여 인물의 내심세계와 세부의 진실로 승부했다”고 높이 평가했다.    사실 우리 문단에서 전용선을 극구 알린 장본인은 필자라고 감히 말해본다. 필자는 전용선의 씨나리오 “낭떠러지”와 그 본인을 소개하는 글들을 수차 여러 간행물과 웹사이트에 실었고 그의 《소하 18년》, 《한사(恨事)》 등 작품들을 번역했으며 그의 대표작인 “낭떠러지”를 DVD물로 여러부 구입해 동인들에게 나누어주기도 했다. 그가 “단군문학상”에 입상되자 평심위원의 한 사람으로서 그 누구보다 기뻐했던 나였다. 내가 그에게 흠뻑 빠진 또 다른 원인은 중국의 주류문단과 드라마계에 진출하여 모두를 놀래운 그가 다름아닌 조선족이라는 동질성 어린 정감에도 있었다.  전용선은 근래 출간문의가 비발치는 이 미완의 장편소설 《호바트거리》를 완수하여 드라마에서의 아쉬운 점을 보완하려 한다고 했다.   하지만 하늘로 치솟은 인기에도 불구하고 우리 문단에서 맥가 그리고 전용선의 작품들은 알려지지 않고있다. 그들을 아는 사람이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것이다. 맥가의 작품 《바람소리》가 제6회 중국어문학미디어 대상을, 《해밀(解密)》이 국가도서상을, 《암산(暗算)》이 심지어 제7회 모순문학상이라는 중국문단 최고의 상들을 수상했음에도 그를 모른다.  바로 이들이 추리문학이라는 특정된 소재를 다룬다는 쟝르적특성때문이 아닌가싶다.    우리 문단에서 추리소설은 찬반론이 심하게 엇갈리는 쟝르이다.  그럼에도 일찍 80년대에 우리 주변에서는 이미 추리소설 열독붐이 일었다. 당시 일본작가로는 모리무라 세이이찌, 한국작가로는 김성종 그리고 미국작가로는 시드니 쉴던(西德尼·谢尔顿)의 작품들이 거의 서점가를 독점하다싶이 했다. 그리고 애거서. 크리스티(阿加莎·克里斯蒂)의 추리소설을 각색한 영화 “나일강 살인사건(尼罗河上的惨案)”과 “동방특급렬차 살인사건(东方快车谋杀案)”이 중국말로 더빙되여 나와 인기를 끌었다.  조선족작가들에게 소개된 작품들로는 모리무라 세이이찌의 “인간의 증명”, 김성종의 “피아노살인”, “제5의 사나이”, 시드니 쉘던의 “가령 래일이 오면” 등이 있다. “가령 래일이 오면”은 당시 《천지》문학지에서 꾸리던 문학애호가들의 통신간물 《개간지》에까지도 련재된적 있다.  김성종의 추리소설은 그후로도 거의 20년 가까이 서점가를 강타했고 모든 간행물들에서 그의 소설들을 다투어 련재했었다. 우리의 번역가들에 의해 김성종의 많은 소설들이 중문으로 번역되였는데 불과 몇해까지만도 진설홍, 윤금단 등 번역가들에 의해 김성종의 소설이 중문으로 번역되여 서점가에 올랐다. 사실 우리 조선족문단에도 오래전에 추리소설과 같은 쟝르문학이 나왔다는 주장이 있다. 1960~70년대에 이미 인물설정과 플롯구성에서 탐정소설화 현상이 나타났다고 하는데 아주 흥미로운 부분이다. 그 황당한 년대에 계급투쟁의 주제는 우리 소설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기 시작했고 숨은 계급의 적을 수색하고 그들의 반동적인 음모를 밝혀내는 과정이 소설의 플롯을 형성한것이였다. 따라서 탐정적인 요소가 가마되기 시작했다.  장춘식평론가의 평문에 따르면 “김지훈의 단편 ‘첫 근무’(1976)와 김청송, 황하성의 ‘철벽’(1976)은 상당히 정교한 탐정소설의 구조를 갖추고있다.” 그리고 이처럼 본격적인 탐정소설 혹은 추리소설이 아닌 일반작품들도 탐정소설의 구조를 갖추고있는 작품이 적지 않았는데 “김희철의 중편소설 ‘전우의 딸’(1976)과 ‘림해의 풍파’(1977)”가 대표적이다. 당시는 이른바 “3돌출원칙”이라는 좌적인 철쇄에 매여 모든 작품들이 소재나 구성면에서 천편일률적인 자유롭지 못한 상황임에도 이러한 창작경향이 슬그머니 일었는데 평론가들은 두가지 측면에서 그 현상을 해석해본다. 하나는 많은 금지구역이 존재하였기때문에 작가들이 리용할수 있는 플롯구성의 방식에 별로 여지가 없었던 사정과 관련되고 다른 하나는 문화대혁명전에 우리 글로 번역소개되였던 쏘련의 탐정소설 《구리단추》 등 작품들이나 70년대 중반 중국에서 방영되였던 조선 영화 “숨길수 없는 정체”, 쏘련영화 “발자욱”, 그외 알바니아와 로므니아의 탐정영화가 준 영향과 무관하지 않다는것이다. 탐정영화, 당시에는 흔히 “반특”영화라 불렀는데 몇편 안되는 혁명적 본보기극 영화들만이 란무하던 그시절, 단일한 제재의 반복에 식상했던 그 시대 사람들의 문화생활에 이채를 보태여준 제재라 볼수 있겠다. 개혁개방이 시작되면서 계급투쟁주제의 소설은 점차 자취를 감추나 소설 플롯구성에서의 이와 같은 탐정, 혹은 추리적인 수법의 관성은 여전히 이어졌다. 그후 《아리랑》총서에 몇회에 나뉘여 련재되였던 김경련의 중편소설 “흉수는 누구?”, 리만호의 “국장과 나리꽃” 등 몇부의 소설들이 추리소설, 통속소설의 형태를 띠고 창작되여 당시로는 작지 않은 센세이숀을 일으켰다. 그외에도 추리소설에 대한 전문창작시도를 보여준 작가들도 몇분 있었다. 연변 로투구출신의 윤송이라는 젊은 작가도 있었고 경찰계통에서 사업했던 룡정의 전강이라는 작가가 추리소설을 몇부 내놓았다. 하지만 량적으로 적었고 수작을 내놓지 못했기에 쟝르문학 창작군을 뭇기에는 그 기세가 판부족이였다. 부끄러운 고백이지만 필자도 80년대에 추리소설을 발표하려 고심한적 있었다. “꿈의 변두리”라는 제목으로 4만자 되는 꽤 큰 편폭으로 창작했는데 여러 문예지들에서 퇴짜를 맞고 나중에는 당시 번역작품들을 전문 싣다가 페간된 《갈피리》라는 잡지에 그나마 실려 추리소설 창작에 대한 감질난 창작욕구를 무마한적 있다. 이 와중에 크게 느낀바이지만 우리 문단에서 쟝르문학에 대한 수용태도는 그닥 원활하지 못하다는것이다. 때문에 추리소설외에도 쟝르소설의 주류를 이루고있는 무협이나 과학환상소설, 판타지 같은것은 아예 전무하다싶이 되여있다. 과학환상은 아이들을 상대로 한 환상동화가 그런대로 몇편 나왔지만 성인을 상대로 한것은 리태학선생이 《아리랑》지에 발표한 겨우 한두부로 알고있다. 무협형태의 작품 역시 80년대 내부간행물인 《개간지》에 당시 문학통신원 출신의 젊은 작가였던 류순호씨에 의해 겨우 한편이 나왔다.     오래동안 탐정소설을 비롯한 추리소설들은 중국 정통문학 및 정통독서계 그리고 주류 미학관에서 부자연스러운 위치에 처해있어왔다. 막상 추리소설을 좋아해도 그것을 인정하기는 꺼린다. 특히 품위 있다는 문화인, 엘리트 지식인이 그렇다. 추리소설은 로맨스, 무협 등의 소설과 마찬가지로 통속적이며 격조가 높지 않다고 생각하기때문이다. 이런 류의 소설을 좋아하는 부류도 사회문화수준이 어떠하든 본질적으로 취미가 낮은 사람으로 찍힌다. 이러한 쟝르에 대한 거부와 폄하가 쟝르문학의 정체를 빚어내고있다고 해야겠다. 우리 문단에서도 마찬가지이며 외려 그 편향적인 시선이 더 강하다고 해야 할것이다.    몇해전 필자가 추리소설에 좀 필묵을 돌려보려 한다고 창작의향을 밝히자 어느 선배작가는 술까지 사주면서 극구 만류했고 어느 잡지사 편집은 아예 그런 쟝르는 우리 잡지의 관문을 넘을수 없다고 엄포를 놓기까지 했다.  또 어느 한번 문학도들을 위한 특강의 자리에서 나는 편협한 독서의 범위를 넓혀 추리소설 같은 쟝르소설도 읽으면 플롯이나 구성에서 도움이 될수 있다고 말했었다. 그런데 그 자리에 동석했던, 해외에서 학위까지 따내고 왔다는 한분이 벌떡 일어서더니 “추리소설을 읽지 마세요. 쓰레기입니다”고 벌겋게 흥분한 목소리로 나의 특강을 무질러버리는것이였다. 특강이 끝난후 식사자리에서 나는 “뿌쉬낀, 스티븐슨, 월리엄 포크너 같은 순 문학의 대가들도 모두 추리소설을 창작한적 있습니다. 레이먼드 첸들러의 추리작품을 읽었나요? 순 문학보다 더 깊습니다.” 하고 진지하게 반문하며 그 편견을 깨려다 돌아온건 “난 그런 작품들을 읽은적도 없고 그 작가들 이름조차 모르오” 라며 한사코 머리를 가로젓는 거부의 표정이였다.  이처럼 우리의 일부 작가들과 주류문학 연구자들은 자신들이 추천하고 언급하고 연구하는것만을 배타적으로 문학으로 간주하면서 쟝르문학 같은것은 순수문학으로부터 배제된 "상업주의문학”, 지어 “하위문학”이라고 락인을 찍고있다. 이러한 쟝르가 우리가 흔히 접해온 근대소설의 외양과 다르다고 해서 쉽게 배척하는것은 변조하고있는 문학을 대체하는 게으름과 무지의 소산이 아닐가고 감히 말해본다. 이렇게 쟝르문학을 “수준 낮은 문학”으로 치부하는 시선들이 있기때문에 쟝르문학에 아예 근접해보지도 못하고 쟝르문학이 정체되는 리유중 하나일것이다.  우리 문단의 작가들과 독서성향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어보면서 근년래 쟝르문학의 최고봉으로 꼽는 조앤 롤링의 “해리포터”나 댄 브라운의 “다빈치코드”, 톨킨의 “반지의 제왕”조차 읽은 사람이 몇사람 되지 않을 정도여서 그 독서량의 편식에 놀란적도 있었다. 사실 필자는 국외의 쟝르문학 작품들을 대량 사들여 소장하고 읽으면서 나름 쟝르문학 창작에서 시도를 많이 해보았다. 아동력사소설에 미스터리와 무협요소를 가미한 “거북구술”과 “신라의 검”을 발표했고 “환을 말하다” 라는 평론을 게재하여 판타지문학의 추세에 대해 분석도 해보았고 순 문학지에 호러작품 몇편도 발표하여 평론가들의 찬반의 평론을 이끌어내기도 했다. 그리고 판타지작품 “불의 제전”을 발표하여 《연변문학》 윤동주문학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당시 문단의 첫 판타지였음에도 그 새로운 쟝르를 존중해 큰상에 뽑아준 심사위원들에 감사를 느꼈지만 10여년이 지난 오늘까지도 판타지작품은 아직도 거의 한편도 보이지 않아 갑갑한 마음이다. 그만큼 이렇게 이야기를 담아내는 새로운 매체나 틀이 등장하였을 때 관습적인 서사형태로 독점적 권한을 행사하던 우리 작가들과 평론가들은 불편한 심기를 드러내는 경우가 잦았다.    해외의 경우“순수문학”과 “쟝르문학” 사이의 경계조차 허물어지고있다. 이 경계가 허물어지고있다는 이야기가 나오기 시작한게 벌써 십년 저쪽의 일이다. 추리, 과학환상, 판타지, 로맨스, 무협 같은 쟝르소설들이 본격문학의 령역안으로 대거 밀고 들어오는 한편 순수문학쪽과의 대화를 시도하고있다. 그리고 태고적에 칼날을 휘두르고 은하계밖에서 날아예고 피투성이의 복수극을 펼치던 쟝르문학이 이제는 사회속으로 깊이 들어가고있다. 쟝르문학 전문작가들은 그 시대의 사회문제를 포착하고 민감하게 의식하고있고 대중들도 관심을 가질만한 우리 사회의 다양한 문제들을 작품에 담아내고있다. 해외작가들중에서 쟝르문학에 심취한 순 문학가들로는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프랑스의 앙드레 지드, 《인간의 굴레》의 저자인 영국소설가 서머셋 모옴 등이 그 대표적인 인물들이다. 특히 서머셋 모옴은 “미래에 살아남는 문학은 추리소설뿐이다. 책방에도 도서관에도 추리가 넘쳐날것이다”고 예견하기도 했다. 한국의 경우에는 순수문학과 대중문학의 구분이 엄격한 그들의 문학풍토에서 쟝르문학 시장이 활성화함에 따라 일부에서는 하위쟝르로 폄하되던 쟝르소설들이 미래의 문학을 이끌어갈지도 모른다고 조심스레 점치기도 한다. 추리소설이 단순한 추리가 아니고 “소설”의 체제를 갖춘 추리요, 추리를 위한 “소설”인만큼 문학의 쟝르임에 틀림없으며 문학의 쟝르인 한 문학성을 부정할수는 없다. 만약 문학성을 완전히 배제하고 순전히 추리에 대한 문제의 제시와 해답만을 기술한다면 그것은 소설은커녕 원고지 몇장이면 충분한 퀴즈풀이에 지나지 않을것이다.   그런데 또 하나 중요한 요소, 즉 작가들이 다양한 쟝르에 손 댈수 있는 욕구가 필요한데 조선족문단에서는 이것이 너무 미약하다 할수 있다. 다양한 쟝르의 창작에 관심을 가질수 있는 가장 강력한 욕구는 독서시장의 요청과 밀접한 관련을 가진다. 그런데 우리 작가들이 그것도 자비로 출판한 책들이 겨우 300부를 소화하기도 버거운 우리 말 출판시장과 독서시장의 부재는 오래된 현상이다. 게다가 가련할 정도로 적은 우리의 독자들조차 중국이나 외국의 영화나 텔레비죤 영상물 그리고 인터넷쪽에 경도되여있다. 작은 시장, 엷은 독자층을 가진 우리 문단, 하기에 더욱더 생존의 길을 뚫어야 한다. 생존화하려면 다양화 그리고 분화할수 밖에 없다. 그렇다면 쟝르문학을 바로 분화, 다양화의 한가지 중요한 방식으로 봐도 무방할것이다.  “오늘의 시대는 대중이 문화의 중심에 위치하고 대중에 의해 문화가 창조된다.”고 전문가들은 말한다. 이러한 정론은 쟝르문학에 대한 긍정적인 시선을 가지게 한다. 독자들의 흥미를 무시하고 독자를 외면하며 씌여진 작품은 비록 작품성이 뛰여나다 할지라도 “읽히지 않는 소설”이라는 모순에서 벗어날수 없을것이다. 때문에 우리의 문단은 편협한 변두리사유에서 벗어나 첨단 다매체시대에 걸맞게 활용매체에 부합되고 대중적으로 어필하는 소통전략을 필요로 해야 할것이다. 그런것이 하루아침에 되진 않겠지만 서서히 극복하고 넘어서는것이 우리 문학의 다양화와 정체의 극복 나아가 비전을 위해선 상당히 중요한 고리가 아닐가 하고 생각해본다. 번역인재들을 적극 동원하여 우리의 수작들을 번역하여 주류문단에 소개하는 한편 우리 말의 동질성을 갖고있는 한국을 포함시킨다면 물론 작은 시장은 아닐터이다. 중국조선족이라는 우리만의 특유의 정서와 소재로 한번 승부사를 던져본다면 가능성이 없는것도 아니지 않을가? 근년래 외려 한국에서 우리의 소재를 활용하여 책도 내고 영화도 만들고있다. 그 와중에 상업효과만 쫓아가고 조선족에 대한 리해의 결핍때문에 상업의 맛망울을 따라가며 내놓은 작품들이 조선족을 심하게 왜곡해 독자와 관객들의 불평의 소리도 크게 들린다. 여기서 우리 조선족작가들이 해외에서 사뭇 선호하는 쟝르문학에 대한 연구와 동참의식에 대해 한번 호출해보는것도 무리가 아닐것이다.   쟝르문학이 가지고있는 오락성은 분명 순수문학의 엄숙성과는 구분지어질 특징이라 할만도 하다. 그러나 쟝르문학의 가치 전부가 부정적으로 판단될 성격의것은 아니라고 본다. 교훈적이기보다는 오락적인 재미를 얻기 위해 소설을 접하는 독자들에게 이른바 순수문학이 추구하는 목적달성의 “일석이조”의 효과도 줄수 있다면 쟝르문학의 가치를 작지 않게 매길수 있다고 생각한다. 몇해전에 《도라지》에 발표한 호러작품 “산장”에서 필자는 단지 공포물이라는 취미로 쟝르문학에 접한것이 아니라 이를 통해 변혁기 농촌사회의 붕괴와 그 와중에 겪게 되는 농촌총각들의 실의와 아픔에 대해 다루려 했다. 그리고 《연변문학》에 발표한 판타지 “불의 제전”에서는 민족의 렬근과 분단의 아픔에 대해 말하려 꾀했다. 오래동안 엄숙한 자세로 소설창작에 림해온 작가로서 필자는 기존의 본격소설은 쟝르문학과 같은 다양한 자양분을 수용해야 그 지평을 넓힐수 있다고 생각한다. 궁극적으로는 더 많은 독자들을 섭렵하고있는 쟝르문학의 흥미가 종국에는 순 문학으로 이끄는 힘이 되길 바라마지 않고있다. “호불호”가 엇갈릴지라도 현재의 디지털시대를 살아가는 독자들의 양식과 감각은 사회를 구성하고 문화의 양상을 결정짓는다는 점에서 쟝르문학은 결코 가볍게 보아서는 안될 중요한 령역이다. 쟝르문학에 대한 새삼스러운 환기와 구구한 담론은 산업화시기에 맞닥뜨려 어딘가 무력해진 우리 문학의 현황과 그 문학의 생존을 갈망하는 열정때문이라고 말하고싶다. 탈변에 탈변을 거듭하는 과정에서 문학은 더욱 문학답게 정련될것이며 그것만의 절대적인 기능을 갖게 될것이라고 나는 믿고싶다.    추리소설은 이미 충분한 호소력을 갖고있다. 그것은 나날이 성숙해지고있으며 작가, 도서, 출판사에서부터 독자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추리소설을 많은 문학과 이데올로기의 혼돈에서 이끌어내 하나의 명확한 문화상품이 되게 하였다.  추리물은 또 중국의 유명 작가들이 다투어 애호하는 서사양식으로 되고있다. 북경작가 왕삭(王朔)은 몇몇 소설에서 추리물의 서사모델을 채택했다. 그는 전통 추리소설속의 정의, 지혜, 제도와 질서를 해소시키는 대신 세속적이며 경멸적인 태도로 숭고하고 정통적인 모든 사물을 조롱했다. 중국의 대표적인 작가 여화(余华)에 대해서도 언급해야 한다. 그는 창작초기에 몇편의 추리물과 미스테리물을 쓴바 있다.  모순문학상을 수상한 상해 녀류작가 왕안억(王安忆)의 근작 장편소설 《닉명》도 역시 추리소설의 형태를 띠고있다.  중국을 대표하는 쟁쟁한 순 문학 작가들이 쟝르소설적 틀과 장치를 적극 활용한 작품들을 다투어 내놓고있다. 그들은 “문학의 외연을 넓히고 독자와 정면승부하자는게 취지”라고 창작의취에 대해 설명하고있다. 그중 맨 선두주자로 달리고있는 맥가가 바로 전형적인 례이다.  대표대회가 열리는 기간 중국의 유명 순 문학잡지인 수확(《收获》)에서 추리소설상을 공모한다고 발표, “순 문학과 쟝르문학의 경계를 가르련다”고 선언했다. 사실 중국문단에서 중요한 소설상의 하나인 욱달부(郁达夫)소설상의 단편부문상 역시 올해에는 추리소설가 채준(蔡骏)의 추리작품 《눈물의 돌(眼泪石)》에 돌아갔다. 우리 문단의 경우 권위 문학지 《연변문학》에서 올해의 대미를 장식하는 12월호에 참으로 오랜만에 큰 편폭을 할애해 추리소설을 실었는데 기꺼운 시도라 본다.     전통적으로 추리소설은 의식적으로 자신과 순수문학의 신분을 갈랐으며 일반대중을 상대로 자신의 “서자(庶子)”와 같은 명분을 정해왔다. 이제 좁고 추운 별채에서 소박받던 그 “서자”가 궁궐 같은 본채로 들려 한다.  그럼에도 중국문단에서 이러한 자리매김은 아직도 “낭떠러지”우에서 소슬한 “바람소리”를 듣고있다고 해야 할것이다. 아직도 산자락에서 서성이는 상태, 산봉에 오르기까지는 등반의 모험을 수반한 긴 시간과 각오가 수요된다고 해야겠다. 우리 문학에서는 더 긴 등반이 수요될듯하다… (다음호에 이음) 출처:2017 제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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