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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백산》문학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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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전한나: 목소리의 색상(수필) 댓글:  조회:477  추천:0  2019-07-08
목소리의 색상   전한나     우연하게 휴대폰 파일을 정리하다가 저장된 음성 파일들을 발견했다. 통화할 때 어찌하다 자동저장이 된듯한데 찍힌 날자를 보니 최초에 록음된 파일은 2014년 1월18일로서 4년 전이다. 버튼을 눌러서 확인해보니 딸애와의 통화 시 저장된 파일이다. 색이 바랜듯 약간 갈리고 울림도 없는 그레이 컬러灰色 목소리, 귀에 너무 설었다.   딸애와의 통화에 무슨 상사의 업무지시 같이 목소리를 깔고 대화한 목소리 파일도 있고 질풍노도처럼 격하게 소리치는 그레이에서 블랙 컬러로 치닫는 목소리 파일도 있었다. 이상하게 들리는 음성 파일이 나에겐 일종 충격으로 안겨왔고 그게 왜 그렇게 이상하게 들리는지 뒤늦게나마 그 소이를 대강 짐작할 만도 했다. 늘 완벽을 추구하고 승승장구하는 모습만 보고 싶어했던 나는 딸애에게 닫는 말에 채찍질하면서 늘 높은 목표를 제시하군 했었다. 단지 엄마라는 자격으로, 다 너를 위한다는 명목으로 딸애한테 훈계도 하고 가끔은 다급해서 소리를 지르기도 했다. 참 못됐다. 곁에서 조용히 지켜봐주는 여유가 없었던 것이 못내 아쉬웠다. 마음이 여린 딸애가 상처를 많이 받았을 것 같아서 가슴이 아릿해나면서 울컥했다.    다른 사람이랑 대화할 때, 즉 육성이 입으로부터 발성돼서 다시 귀에 전달될 때의 목소리와 휴대폰에 록음된 나의 목소리는 완전히 다르다는 느낌과 더불어 록음된 목소리가 제 목소리임을 인정하기가 싫었다. 그저 싫은 정도가 아니라 경악 그 자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나도 어렸을 때는 음악선생님의 지도를 받으며 노래공부를 좀 해서 지인들로부터 은방울 같은 목소리라는 칭찬을 꽤 들어왔다. 늘 목소리 하나 만큼은 자부심을 지녔던 나인데 지금 내가 듣고 있는 휴대폰 속의 이 목소리 임자는 은방울하고는 쌀의 뉘 만큼의 련관성도 없어보이는데 나의 거라고? 허나 기기는 기기다. 기기는 사람을 속이지 않는다.   고향을 떠나 머나먼 광주에 있을 때도 가끔씩 엄마께 전화를 드렸다. 이상하게도 나는 신날 때보다 심한 생리통으로 침대에서 베개를 안고 뱅뱅 돌 때거나 힘들 때면 숨 넘어가는 소리나 푹 가라앉은 목소리로 항상 엄마를 찾아서는 통화한 일이 많았던 것 같다. 엄마가 걱정하지 않게 밝고 명랑한 목소리로 말하지 못한 것이 후회스러울 뿐이다.    요즘에도 나는 가끔 멀리 떨어져있는 딸애랑 통화하면서 딸의 잠에 취한 목소리나 기분 좋아서 해빛 찬란한 활기찬 화이트 컬러의 목소리를 금방 가려들으면서 그 분위기에 일희일비할 때가 많다.   그래서인지 나는 갈수록 목소리에도 색상이 있다고 믿는다. 얼굴 본 적 없는 사람과 통화를 할 때 상대방의 목소리 톤과 억양과 리듬에 따라 그 사람에 대한 이미지를 그려보고 상상을 하게 된다. 우아한 리듬을 타고 오는 목소리, 자성磁性이 묻어나고 카리스마가 느껴지는 목소리는 경쾌한 블루 컬러이다. 이와는 반대로 하이톤 목소리는 빨강색 신호등을 련상케 하기에 항상 다른 사람들에게 긴장감을 불러일으키고 불필요한 오해를 낳을 여지도 다분하다.   목소리는 또한 장소와 상대에 따라서 다르게 작용을 한다. 한국의 스타 강연자, 리창욱씨와 김미경씨처럼 정감이 두둑한 오렌지 컬러 목소리는 감동과 유머와 위트风趣가 넘쳐 청중들로 하여금 빨려들게 하는 마력魔力이 있다. 사랑에 빠진 커플 사이 달콤하고 깨를 볶는 핑크 컬러의 러블리한 목소리는 사랑에 자석 역할을 한다. 엄마가 부르는 연록색 자장가 소리는 세상에서 제일 아름다운 멜로디이다. 아직도 공공장소에서 손사래까지 치면서 대화하고 통화하는 블랙 컬러의 목소리를 가끔 만나게 되는데 다른 사람들한테 민페인 줄도 전혀 모르는 그런 목소리는 소음이다.   리듬이 적절하고 톤이 알맞춤한 말소리는 듣는 이에게 안정감을 준다. 그래서 나는 간절해지는 생각이 하나 있다. 나는 나의 목소리가 여유로우면서도 차분하고 따뜻한 옐로우 컬러 목소리였음 좋겠다. 그래서 대화할 때마다 전화할 때마다 상대로 하여금 나의 목소리에서 편안함을 느끼게 했으면 좋겠고 나의 목소리 때문에 행복해하는 사람들이 있었음 좋겠다.    따스한 온도도 담고 다정한 정감과 기운찬 기분도 오롯이 느낄 수 있는 목소리, 신났을 때 너무 시끄럽게 업调高되지 않고 기분이 다운下调됐을 때 너무 우울하지 않고 항상 여유를 잃지 않는 예쁘고 부드러운 그런 목소리를 갖고 싶다. 출처:2019 제1호  
9    나경: 그녀와 ‘일기일회一期一会’(수필) 댓글:  조회:378  추천:0  2019-07-08
그녀와 ‘일기일회一期一会’   나경       2년 전에 있었던 일이지만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그 날 나는 나보다 열살 이상인 그녀와 남한산성에서 ‘데이트’했다.    데이트의 사전의미는 ‘이성과의 만남 또는 그 약속’이라고 한다. 그것이 남녀간의 사랑이나 교제를 위한 수단의 일종인데 두 녀자가 만난 것을 데이트라고 하는 데는 그럴 만한 리유가 있는 것이다.    나와 그녀의 만남은 마치 첫눈에 반해서 사랑에 빠진 남녀 같았다. 아침나절에 정자 휴식터에서 초면으로 만나서 건강과 요가에 대해 이야기했고 점심에는 남한산성에 있는 ‘산성민속집’에서 함께 묵밥과 청국장을 나눠먹고 오후에는 산성 북문에서 남문까지 재밌게 소담하면서 걸었다.    그 때 심선암 환자인 그녀는 암수술 한 지 1년 8개월, 항암치료를 받지 않고 건강식과 명상, 적당한 건강단련으로 어려운 고비를 잘 넘기고 정상적인 생활을 하고 있었다. 시부모와 어른들을 모시고 40여년간 오로지 가족만을 위해 살아온 그녀는 자신의 혀 밑에 암이 자라고 있는 것을 알았을 때, 자식들에게 부담을 주어서는 안된다는 생각에 가족을 속이고 2년을 버텨냈다고 한다.    마지막에 자식들이 알고 병원에 강제 입원시켰을 때는 이미 암 3기였다. 뼈를 깎는듯한 아픔과 죽음의 고비를 넘어온 그녀는 지나온 이야기를 남의 일을 말하듯이 담담히 이야기하였는데 그 자신이 그걸 밝히지 않으면 누구도 그가 암환자인지 알아챌 수 없을 것이다.    그것은 아마도 그녀가 우아한 옷차림에 조금은 가날퍼보였으나 너무도 락관적이고 밝은 얼굴로 사람을 대하고 인생에 대해 달관적이였기 때문이였으리라. 그녀는 자기가 하도 건강하고 병에 걸려본 적 없이 일 밖에 모르고 있으니까 하느님이 쉬라고 병에 걸리게 한 것 같다고 했다. 병원에서 퇴원한 후부터 그는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을 하고 먹고 싶은 것을 먹고 가고 싶은 곳에 가서 인생을 즐기고 있다고 했다.    나는 지금까지 주위에서 암환자들이 항암치료를 받고 머리가 싹 빠지고 몇년 고생하다가 저세상으로 가버리는 것을 너무 많이 봐왔던 탓인지 몰라도 암환자인 그녀의 인생 태도가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왔다. 아주 절망적인 암병에 걸렸어도 이렇게 사는 법도 있을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 감동도 줄 수 있구나. 나는 그녀가 참으로 우아해보이고 위대해보이기까지 했다. 나는 그 날 점심을 각자 돈 내고 먹으면 편하다고 그렇게 하자고 했지만 그녀는 오늘은 처음이니까 반드시 자기가 사야 한다고 우기는 바람에 한끼 잘 얻어먹고 말았다.    그 후 얼마간 지나서 나는 그녀를 따라 서울 성동구에 있는 ‘길상사’에 갔다. 나는 이번에는 내가 밥을 사야지 하고 따라갔는데 웬걸 점심 때가 되니 절에서 무료로 점심을 주는 게 아닌가. 그 덕에 나는 난생처음 절의 음식을 먹어보게 되였고 길상사가 법정스님의 ‘무소유’와 관련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였다. 길상사가 지어진 후에도 나는 여러번 서울에 다녀왔건만 그런 곳이 있는지조차 전혀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그녀를 통해서 길상사를 알게 되고 길상사에 법정스님의 유골이 묻힌 곳을 찾아보았고 길상사에서 법정스님의 화상과 생전의 유물을 전시한 곳을 돌아보고 깊은 감동을 받았다. 내가 라는 글이 우리 학생들의 교재에 본문으로 수록되여있어서 특히 인상이 깊다고 했더니 그녀는 자기도 법정스님의 책을 좋아한다고 하면서 나에게 책 한권을 선물하겠다고 했다.    길상사에 갔다 온 그 날 나는 그녀한테서 《일기일회一期一会》라는 법정스님의 법문집을 선물로 받고는 귀국 날자가 박두해서 그녀와 더 만날 시간을  갖지 못했다.    일기일회는 ‘지금 이 순간은 생애 단 한번의 시간이며 지금 이 만남은 생애 단 한번의 인연’을 뜻하는 말이라고 한다. 그녀는 나에게 선물한 책 뒤페지에 다음과 같이 썼다.    “좋은 인연이 되여 감사해요. 하고 싶은 일 맘껏 하면서 현재 지금 행복하세요. 건강이 최고랍니다.”   나는 귀국한 후 383페지 되는 《일기일회》를 거의 단숨에 읽다 싶이 다 읽었다. 마음에 와닿는 글들이라서 읽을수록 좋아졌다. 그 책에 대해 젊은 친구와 이야기하다가 기회가 생겨 법정스님의 《무소유》 수필집을 빌려볼 수 있게 되였다. 다 읽고 심금을 울리는 글귀들이라 책을 복사해두고 보기로 한 건 그 뒤일이다.    그 후 그녀는 성남시 분당의 번화한 도회지를 떠나 아늑한 숲이 가깝고 공기 좋은 곳으로 이사갔다. 그 곳에서도 그는 매일 피아노를 치고 좋아하는 책을 읽고 붓글씨를 쓰기도 하고 단련을 적당히 하면서 건강을 회복한다고 했다.    전화를 통해 그녀의 소식을 들을 때마다 전화 저편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를 들으며 빨리 건강을 회복하기를 간절히 기도하였다. 그 때마다 직접 달려가서 만나보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지만 매번 여건이 안돼서 만날 수 없었다.    법정스님은 “모든 것이 일기일회입니다. 모든 순간은 생애 단 한번의 시간이며 모든 만남은 생애 단 한번의 인연입니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무수한 ‘단 한번의 인연’으로 이루어지는 인생에 한평생 잊을 수 없는 인연, 더우기 세상에서 가장 순수하고 우아하고 아름다운 ‘데이트’처럼 느껴지게 하는 ‘인연’이 몇번이나 있을 수 있을가…   인터넷과 스마트폰으로 세계가 지구촌이 된 오늘날 ‘일기일회’는 우리들에게 새로운 의미로 다가온다. 우리의 생애에 한번 밖에 없는 매 순간을 어떻게 보내고 있으며 위챗을 통해 매일 이루어지는 만남들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 생각해보게 한다.   그녀와의 우연한 것 같았지만 운명적이였다고 할 수 있는 ‘데이트’ 덕분에 나는 건강하게 살아있는 하루하루를 더욱 감사하게 생각하게 되였고 이런 저런 불평이 얼마나 가소로운 일인지를 돌이켜보게 되였고 새삼스레 자신의 인생을 성찰하게 되였다.   글을 쓰는 이 순간도 내 머리 속에는 70을 넘은 리경자 녀사가 암병을 이겨내고 씩씩하게 삶을 즐기고 있는 환한 모습이 한폭의 그림처럼 선명하게 떠오르고 있다.   그 때 우리의 황홀했던 ‘데이트’의 불꽃이 계속 타올라 한번, 두번, 수많은 ‘일기일회’의 만남의 궤적을 이어갈 수 있기를 기대하면서… 출처:2019 제1호
8    연서: 와인 마시는 녀자(단편소설) 댓글:  조회:347  추천:0  2019-07-08
와인 마시는 녀자   연서       1   녀자는 느긋하게 와인을 마시고 있었다.   와인을 마실 때면 녀자는 항상 미끈한 다리를 테이블 우에 제멋대로 올려놓고 의자에 비스듬히 기대곤 했다. 그게 가장 부드럽고 편하게 와인을 즐길 수 있는 자세다. 하지만 지금 와인바에서 우아하게 와인잔을 들고 있는 녀자의 모습은 사뭇 다르다. 다소 진지하게 느껴지기도 하지만 천천히 음미하면서 한잔 한잔 천천히 넘기고 있는 모습이 기품 있으면서도 근사했다.   사실 녀자는 와인을 마시는 것보다는 향과 여운을 맡는 데 큰 의미를 두곤 했는데 마치 새로운 자신의 령역을 만나보는 필사적인 탐구 같아보였다. 그러니까 사실 녀자는 와인을 마신다기보다는 향기에 흠뻑 취해 또 다른 경지로 향하고 싶었던 것이다. 넉넉한 외인잔 어구에 코끝을 대고 빙글빙글 잔을 움직이면서 와인의 고유한 향기가 녀자 후각을 파고드는 것을 허락했다. 그리고 유독 맛과 향이 깊은 레드와인을 고집했다. 퐁 하는 소리와 함께 코르크마개를 따면 어김없이 뿜어져나오는 와인의 향기, 후각 만큼이나 원초적 욕구를 자극하는 그 특유의 마성적 향기가 참 좋았나 보다. 마치 아구리에서 뿜어져나오는 향긋한 향기가 요정들로 둔갑하여 너울너울 춤추면서 절도 있게 그녀의 후각을 파고드는 것 같았다. 와인에 푹 빠진 녀자는 마트에서 새로운 레드와인을 발견하기만 하면 신대륙을 발견한듯 경이로운 눈빛으로, 타인의 손이 닿지 못하도록 비밀스레, 다치면 톡 하고 터질 것만 같은 꽃망울을 대하듯 정성스레 맞이했다.    그녀를 사모하는 한 남자가 미리 그녀가 술을 즐긴다는 정보를 얻어내고 일부러 데이트 장소를 고급진 일식집으로 잡았다. 주된 술이 청주였으니 당연히 녀자는 구미가 동하지 않았다. 청주 같은 흰술에 매력을 느낄 리 없었다. 녀자는 오로지 붉은색 와인을 좋아했고 이제 막 숙성되여 화려하게 퍼져나가는 향을 좋아했으니 말이다. 가능한 평화롭고 조용한 분위기 속에서 사색하며 온전히 감미로운 조화를 즐기고 싶었던 게다.  흰술은 어딘가 신명나는 맛이 없었다. 독하고 탁한 액체가 식도를 타고 내려가면 뜨겁기만 하고 위를 자극하여 속이 쓰리기만 했다. 가끔 어쩔 수 없이 선물로 받아온 그런 주류의 술은 구석에서 방치되여 꿔다 놓은 보리자루 신세를 면치 못했다. 실제로 녀자는 한가롭기만 하면 가지런히 진렬된 와인수납장 앞에 서서는 사랑하는 련인을 바라보듯 그윽한 눈빛으로 “자, 오늘은 누구를 마음껏 마셔볼가?” 하면서 행복한 고민에 빠져있었다. 한껏 설레임으로 가득차올라 불그레 볼까지 빨개졌다. 와인은 녀자를 파라다이스에 실어다주고 오아시스를 만나게 하는 신비로운 마력을 지니고 있었다.    날씨가 꾸질꾸질한 날이면 잠시 모든 일상을 접고 녀자는 빨간색 실크잠옷을 걸치고 쏘파에 기대여 와인을 벌컥벌컥 마셔댔는데 녀자의 주관에 의하면 이것은 일종 ‘와인세례’를 향수하는 특별한 수행이라는 것이였다. 그동안 사놓고 바쁘다는 핑게로, 피곤하다는 리유로 채 마시지 못했던 와인들을 이런 기회에 한잔이라도 더 맛볼 수 있다는 희열과 특수성 뿐만 아니라 꼭 축제날이나 기념일에 정식으로 일정한 격식을 갖추고 추하지 않게 마셔야 한다는 고정관념이나 강박증에서도 벗어나 자유로와지면서 하루하루 반복되는 지겨운 일상에서 조금이나마 즉흥적인 경험을 하는 게 무엇보다 좋았다. 숨겨둔 애인도 아닌, 쿵짝이 잘 맞는 친구도 아닌 한낱 와인 따위에게 시간을 할애하는 녀자 주변을 뱅뱅 도는 남자들은 그래서 하나같이 남존녀비의 사상을 들먹이며 보잘 것 없어보였던 취미를 질책하며 헤여지는 기회로 간주하고 하나 둘씩 그녀 곁을 떠났다.    처음 녀자는 화이트와인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편이였다. 슴슴하고도 가벼운 맛이 마치 무뚝뚝하고 깊이 없는 남자 같았기 때문이다. 게다가 대체적으로 레드와인은 포도의 껍질과 함께 발효시키는 반면 화이트와인은 쥬스만 발효를 시켜 마치 어린애들 동화책 서두처럼 간결하고 얕아 녀자로 하여금 편견일 수 있겠지만 깊은 마력으로 각인을 받지 못하고 쉽게 잊혀지고 말았다. 그래서 딱 한번인가 호기심으로 구입한 화이트와인은 한잔도 채 마시지 못한 채 수납장 구석에 박혀버렸다. 그런데 지금 녀자가 와인바에서 여유롭게 마시고 있는 와인이 바로 화이트와인이였다. 왠지 훨씬 산뜻하게 화려하게 그녀의 혀를 감돌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오늘따라 녀자는 감미로운 맛에 취해 화이트와인을 끈질기게 손에서 놓지 못하고 있었다.    테이블에 마주앉은 남자는 현재 리혼소송 중이라고 했다. 그 사연을 녀자는 친구의 남자를 통해 알게 되였다. 전국 여러군데 가맹점을 보유하고 있는 이 남자는 막대한 재산을 보유하고 있었는데 주변에 녀자도 많다는 소문이였다. 그녀도 만나고 있는 녀자들 중 한 사람일 것이였다. 능청스럽게도 남자는 마치 그녀한테만 빠져버린 척 상황을 연출해나가고 있었는데 바로 그런 진지해보이는 모습이 녀자는 일단 싫지는 않았다. 어쨌든 그녀 뿐만 아니라 해도 그런 자상한 진심이 녀자 역시 마주한 남자 외에도 여러 남자가 있었는데 그것은 지나치게 파격적이면서도 도전적인 의지로 기인된 것이였다. 스릴 넘치게 모든 만남이 따로따로 이어지든, 한마디로 스토리 전개가 없는 게임이였든, 그러니까 녀자는 남자들을 순번으로 만나오면서 몇번이나 원점으로 돌아가 결론적으로 지나가는 바람이라는 존재를 확인했다. 녀자가 볼 때 그 만남들은 장편소설이 아닌 결말을 빠른 속도로 예측할 수 있는 단편소설과 진배없었다. 모든 만남은 식상했고 아무런 의미를 담고 있지 않았다. 단지 자신의 매력이 아직까지는 사라지지 않았다는 사실을 증명할 수 있는 론거라고 할 수 있었다. 다만 중간중간 혼선이 겹치면서 얼마 안 지나 수면으로 떠오를 비밀들이 밝혀질 것 같아 순간순간 불안했던 것이다. 녀자 자신도 왜 이 남자를 만나고 있는지 잘 알 순 없지만 굳이 리유를 따져본다면 아직까지 남자는 그녀가 가장 소중한 존재라며, 그래서 녀자가 만취한 날, 온전히 그녀를 챙겨줄 수 있었던 유일무이한 남자였기 때문이였을 것이다.   녀자는 그가 거짓말을 하고 있더라도 지금 눈앞의 보이는 것들을 진실이라고 믿고 싶었다. 생각해보니 허구 같은 건 어디까지나 소설에서나 볼 법한 것들이니까. 그런데 어긋나는 부분들을 일일이 상기시켜보면 가끔 거짓말의 냄새가 묘하게 풍겨나오고 있었다. 더군다나 남자가 처음에는 뜨겁게 구애하다가 뜸해지면서 사라지는 전략을 취하고 있었기 때문에 요즘 녀자는 작가의 글 속에서 존재하는 거짓말쟁이들의 세계를 떠올려보았다. 하지만 어떤 면에서는 선의적인 거짓말은 나쁘지 않았다. 녀자는 그들의 거짓말 같은 고백을 받으면서 자신 또한 기막히게 완벽한 존재로 멈춰있거나 아니면 거짓말 같은 환상에 빠져보고 싶었던 것이였다. 하지만 녀자 본연의 모습은 무기력하고 피동적인 편이였다. 그래서 거짓말이든 거짓말 같은 일이든 행동에 옮길 용기가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래도 어쩐지 녀자는 자꾸 그런 거짓말을 너무 사랑한 그 결말이 궁금해서라기보다는 살짝 미치는 것도 나쁜 일은 아니라는 생각이 갈마들었다. 마치 오늘이 마지막인듯 치렬하게 거짓말 속으로 녹아들어도 좋을 사람처럼 말이다.    주변에서는 주로 녀자를 사근하고 부드러운 사람이라는 투로 인식하는 것 같았지만 실제 녀자가 아는 자신은 자존감이 낮고 억눌려있으며 될 수 있는 한 지금보다 더욱더 무언가로부터 부지런히 탈피하고 싶은 인간이였다. 어쩌면 지금껏 남자들이 녀자를 떠난 리유도 술은 핑게일 뿐 녀자의 대책없는 기피증 때문일지도 모른다. 아마도 녀자 자신은 심각한 문제를 떠안고 있는 모양이다. 원래 소극적인 녀자가 갑자기 진취적이고 심지어 지구력 있어보인다는 건 녀자가 언제부터인가 남들 앞에서 자기의 그런 모습을 은연중 어필하려 한다는 증거였다. 지금껏 살아온 삶이 너무 바보 같이 느껴져 견딜 수 없었고 앞으로는 지금과 판이한 삶을 시작하려고 다짐했지만 정작 한편으로는 어디서부터 시작할지 착잡했다. 돌이켜보면 지난 일상들이 대부분 최대한 생산성 없는 하루하루를 보내왔다. 그렇다고 잊어버리려 해도 아직까진 그것이 극심한 고통으로 자극해왔고 그래서 새로운 삶으로 갈아엎어야 할 필요성을 극심하게 느꼈다.   사람들에게 보여지는 녀자와 자신이 아는 녀자는 줄곧 겹치는 교차점 없이 평행을 이루었다. 실제에 더 가까운 녀자의 배역에서 진행되는 각본이 지루하고 뻔하게 느껴질 때면 녀자는 쏘파 맞은켠 벽에 걸린 그림 속 집시녀인처럼 긴 손톱을 기르고서는 와인을 들이켰다.   벽 그림 속 집시녀인은 잠들어있다. 동굴도 아니고 그냥 거친 들판에 담요 한장만 깔아놓고 자고 있다. 그 뒤로 강인지 호수인지 모를 큰 물이 흐르고 꽤 높아보이는 산들이 이어져있으며 검푸른 하늘에는 창백할 정도로 차거운 달이 대지를 비추고 있다. 녀인의 손에는 지팽이가 하나 쥐어져있다. 긴 려행길 지친 몸을 가누는 도구로 보여졌다. 머리맡에는 물병이 덩그러니 놓여있고 옆에는 만돌린처럼 생긴 악기 하나가 려행자의 분신인듯 같이 잠들어있다. 빨강, 파랑, 노랑, 록색, 주황 등 화려한 색 줄무늬가 있는 그녀의 옷이 달빛을 받아 무지개처럼 밝게 빛나면서 녀자의 눈을 즐겁게 해주고 있다. 어쩌다 취기가 잔뜩 오른 날 녀자는 그 화려한 옷을 입고 만돌린의 경쾌한 선률에 맞춰 춤을 추고 있다는 착각에 빠져들었다. 그리고  입버릇처럼 나도 저리 곤히 잠들 수만 있다면… 하면서 되뇌이곤 했다. 사실 녀자는 눈을 뜨고 있는 순간에도 특별히 하고 싶은 일은 딱히 없었다.    여기까지는 별로 의문스러운 점이 없었다.  집시녀인이 려행중 들판에서 잠을 자는 모습일 뿐이였고 사자 한마리가 그림을 더욱 생경하게 만들고 있었다. 사자는 꼬리를 세운 채 녀인의 냄새를 맡고 있다. 그런데 그림의 제목이 이다. 녀자는 그림의 설정으로 봐서는 ‘사자의 공격을 받고 있는 집시’ 정도로 제목을 붙여야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사자의 아가리 밑에 위태롭게 누워있는 녀인을 그려놓고 라니…   그녀가 훌쩍 떠난 국내려행에는 위태로운 장면이거나 기억에 오래 남는 추억이 별로 없이 무난했다. 우연히 와인바 옆에 미술관이 눈에 띄여 자연스럽게 그 곳에 들어가서 달라지는 화면들에 시선을 준 것 뿐이였다. 왜 매번 녀자가 가는 곳마다 미술관이 존재하고 있는지 몰랐으나 어쨌든 녀자는 그 때마다 규격화된 삶을 거부하는 집시 그 그림보다 더욱 인상 깊은 그림을 찾아내지 못했다. 그래서 언제나 새로운 그림들을 스쳐지나기만 했다.   보석 같은 별이 쏟아지는 밤, 녀자는 〈잠자는 집시〉에 대한 루소의 해설을 떠올렸다.    -만돌린을 연주하며 방랑하는 흑인녀인이 곁에 물항아리를 놓고 피로에 지쳐 잠들었다. 때마침 지나가던 사자가 그녀를 발견하고 그녀의 냄새를 맡아보지만 잡아먹지 않았다. 집시녀인은 동양적 의상을 입었으며 삭막한 사막에는 달빛이 시적인 효과를 내고 있다.   그리 대단한 그림도 아니였고 대단한 해설도 아니였다.   녀자는 매번 려행지에 막 다달아 와인바로 발길을 옮길 때마다 마치 애초부터 목적지는 와인바였을 거라는 현념 속에 잠겨버렸다. 녀자가 가고 싶은 곳은 어쩌면 세상 곳곳에 널려있는 와인바 천국이였을 것이다. 그러니 갑작스레 시작된 와인바 려정은 녀자가 새로운 자신을 만나보려는 필사의 노력이기도 했다. 더 완미해질 것도, 더 다른 무언가를 갈구할 것도 없이 녀자는 지금보다 더더욱 녀자 자신과 거리를 줄이고 싶었는데 와인바를 돌아다니는 행위는 무엇보다도 녀자 본능에 가까웠다. 녀자는 틈만 나면 휴대폰으로 일일이 검색하면서 그 곳들을 사뿐히 들려서 레드와인을 맛보았다.   와인바는 저마다 독특한 분위기를 연출했다. 어떤 와인바는 은은한 조명 아래 감미로운 재즈음악이 깔려있었고 투명한 잔들이 가지런히 진렬되여있었으며 어떤 와인바는 복층 형태로 꾸며졌는데 전체적으로 인테리어 하나하나 무심한듯하면서도 고풍스러운 느낌을 살렸고 칠레산 하우스와인이 가장 인상 깊을 정도로 맛이 산뜻하고 음식들과도 찰떡궁합이여서 좋았다. 그러면 녀자는 한동안 칠레산 와인만 유독 마셨고 어차피 그건 녀자의 신앙과도 같은 일이니 일말의 시간랑비 따위 없이 새로운 와인들을 들이켜고 싶다는 생각에만 젖어들었다. 어떤 와인바는 규모가 작고 메뉴도 적지만 무슨 리유에서인지 그 곳에서 오랜 시간을 보내고 싶었고 어떤 와인바는 발을 들여놓는 순간부터 마음이 닿지 않아 곧바로 나와버리고 싶었다. 대체적으로 거기 손님들의 인수와 무관했는데 그녀에게 직접적인 피해를 끼치지 않아도 왠지 거기 있는 게 불편했고 마음이 안착되지 않는 곳이 있었다. 녀자는 입구에 발을 들여놓는 순간부터 다리가 후들후들 떨려나고 불안정한 호흡으로 하여 공연히 우왕좌왕 망설일 것 없이 그 바를 바로 뜨는 게 상책이라고 여겨졌다. 그런 곳에는 대개 손님들의 성별을 막론하고 콕 집어낼 순 없어도 개인적 취향이 돋보이는 와인바라기보다는 일종의 이상한 기류가 흐르는 곳이였다. 어쨌든 묘하게 기분이 나빠서 바로 뒤돌아서 문을 박차고 나오고 싶은 충동을 느끼게 하였다. 반면, 들어서는 순간부터 로비가 탁 트이고 독특하고 새로운 와인들이 정연하게 진렬된 곳이라면 아주 자연스럽게 곧추 들어가 달빛이 잘 드는 창가로 착석했다. 녀자는 주변 련인들이 행복한 미소를 머금고 와인잔을 쨍그랑 하며 사랑을 숙성시키고 있는 장면을 자주 목격하곤 한다. 하지만 녀자에게 오히려 그런 주변은 문제가 되지도 않을뿐더러 그들 곁에 있으면 온몸에 엔돌핀이 감돌았다. 어쨌든 성소수자를 상대로 혼이 나간듯 굳어진 표정으로 마지못해 구석진 곳에 앉아있기보다는 유리로 되여있는 창가자리, 조금 낮은 테이블, 와인을 좋아하는 련인들을 이웃하여 자리하는 게 훨씬 더 편했다. 대체적으로 그런 와인바들은 둘이서 오붓하게 앉아서 마시기에 최적화된 와인바들이였고 당연히 새로운 레드와인들이 륙속 등장하는 곳이기도 했다.   녀자의 구미 대로라면 녀자가 즐겨찾을 곳은 몇군데 정해져있었는데 오늘 녀자가 와인을 마시고 있는 곳은 그중 가장 마음에 드는 곳이였다. 그렇다면 굳이 남은 와인바들을 계속 더 탐색할 필요가 있는지 녀자는 이 려정을 이쯤에서 그만둘가도 진중하게 고민해봤지만 한편으로는 새로운 얼굴을 만나보는 게 더 바람직해보였다. 그것은 와인바의 인테리어나 그 안에 있는 손님들과 상관없이 와인바 스스로 떠안고 있는 탄탄한 내용물들이 존재해있었고 내포하고 있는 내용들을 한번씩 샅샅이 훑어볼 가치는 충분했다. 외딴 곳에 덩그러니 위치한 바를 어렵사리 찾아갔는데 막상 문을 떼고 들어가보니 녀자가 즐기는 레드와인도 몇 없고 까탈스런 그녀 입맛을 충족시켜주지 못할 것 같은, 딱 봐도 허름한 곳일지라도 와인바의 특유의 단단한 얼굴이 있다면 높은 천정과 카운터의 특유의 풍경에 넋을 잃고 오랜 시간 서있어도 좋다. 그럴 때마다 녀자는 주섬주섬 휴대폰을 꺼내 포토샵 모드로 설정하고 가급적 예술적인 각도로 그 아련한 공간들을 빈틈없이 기념으로 남기곤 하였다. 그런 곳은 비록 완벽한 구조를 구비하지 않아도 종종 들려서 멍하니 앉아 몽상에 빠져도 좋을 법한 공간이였다. 아마도 이런 곳에 앉아있으면 그동안 차겁게 식어있던 령감의 원천이 물고를 트면서 쏟아지는 무엇인가를 부지런히 쓰지 않으면 안될듯했다. 녀자는 와인 한잔의 여유가 넘치는 공간 만큼이나 그동안 업악되였던 감정의 선들을 한올한올 풀어헤치며 그 속에서 어떤 진솔한 언어들이 자연스레 흘러나오게끔, 차마 그것들을 쓰지 않고는 못 배길 공간을 이제까지 간절히 원했던 것이다.                                                                                     2   바람결 한가운데서 적요의 염기서렬은 재배치된다        어떤 뼈가 박혀있길래   저리 미친 피리인가          들꽃의 음은 천갈래로 비산한다   돌의 비명은 꼬리뼈 쯤에서 새여나온다   현수막을 찢으면서는 처음 듣는 母語를 내뱉는다          생사를 넘나드는 음역은 그러니까 눈에 보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최후에는 공중에 뼈를 묻을지라도   후미진 골목에 입을 댄 채 쓰러지더라도          저 각골의 력사에 인간의 사랑이 속해있다   그러니까 모든 뼈마디가 부서지더라도 가닿아야 한다는 것이다   파렬은 생각처럼 슬픈 일은 아니다          하루종일 풍경은 바람의 뼈를 분다   來世에는 언젠가 잠잠해지겠지만   한없이 스산하여 망연하여 그리움이라든지 애달픔이라든지   그런 음계에 이르면 오히려 내 뼈가 깎이고 말겠지만         한 사람의 귀불을 스쳐오는 소리   이제는 이 세상에 없는 음성을 전해주는 바람소리   그대와 나 사이에 인간의 말을 웅얼거리며 가로놓인 뼈의 소리       저것은 가장 아픈 악기다   온몸에 구멍 아닌 구멍이 뚫린 채   떠나가거나 속이 텅 비여야 가득해지는                                         - 중에서        녀자는 와인 한잔을 굽내면서 지난날에 대한 유서 같은 회억록을 쓰고 싶어졌다. 사람들이 그걸 읽다가 식상한 스토리 때문에 이 작가는 어쩌다 운 좋게 이런 걸 책이라고 뻔뻔스럽게 출판할 수 있었나 싶어 팽개쳐버리려다 그래도 일말의 호기심을 갖고 결말까지 읽어내려가줬으면 하는 바람이다.    그러고 보니 녀자는 사랑받는 기술보다는 서로의 교감과 호흡에 더욱 의미를 두고 있었다. 밀고 당기기에 능숙하지도 못했고 늘 밀고 당기기에 귀차니즘을 느꼈다. 모든 만남은 끝이 있다면 만남 자체는 스쳐지나가는 바람일 테고 이리저리 불어치다 사라지면 그만이다.    와인을 거하게 마신 뒤 녀자는 경건한 마음으로 다시 ‘바람’에 대해 생각했다. 그러니까 다가올듯 말듯하면서 결국에는 엉뚱한 방향으로 슬슬 새여가다 가뭇없이 사라지는 존재들, 무형의 공간을 거슬러 부풀었던 욕망의 포획망 속으로 표연히 종적을 감추었다. 바람은 기록이 없는 계절에 그리움으로 자꾸만 부풀리다 지는 향기이기도 했다. 어디든 어디든 무엇이든 무엇이든 향기는 온통 바람이라고 스스로 단정했다.    처음에 녀자는 적절한 공간이 절실히 필요했다. 추억의 편린들이 목구멍 깊이까지 파고들 만큼의 공간이 필요했다. 미로의 길을 헤매는 열망처럼 나아갔다 되돌아오더라도, 뭔가 꼭 이루어지지는 않더라도 그렇게 간절하게 사는 것이 꽤나 바람직한 일이라고 간주했다. 하지만 예상컨대 사람들은 무언가에 진지하고 나면 금세 허무맹랑해져서 이내 체념을 해버린다. 끝내는 모든 게 슴슴하고 무의미해져 결국 단념하고는 드라마거나 영화를 통해 대리만족하면서 살게 될지도 모른다. 그러니 뭔가에 집착하기보다는 기대를 버리고 닥치는 대로 사는 게 가장 최선일지도 모른다.        녀자는 자신조차 실체도 형체도 없는 바람으로 시작해서 언젠가 삶의 려정을 마치게 될 거라는 사실이 문득 느껴져 슬퍼졌다. 죽어서 한줌의 재가 되면 지금 쯤 땅 어딘가에 묻혀져있거나 우주 가운데 하나의 점으로 사라질 것이다.    반짝반짝 빛나는 와인을 찾는 사람들 중 한사람이 이 세상에서 줄어든다는 건 어쩐지 쓸쓸한 일인 것 같다. 녀자는 튤립형 와인잔을 마치 하나의 얼굴이기라도 한듯 볼에 대고 애틋하게 비벼보았다. 비비다가 한잔 마시고 그러다가 또다시 상념에 빠졌고… 녀자는 잔과 이미 한몸이 되여 와인 속으로 녹아들고 있는 중일 것이다.   녀자는 애초부터 인위적인 발란스보다는 긴장을 풀어주는 술이 더 좋았다. 녀자와 사귄 남자들은 그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각양각색의 반응을 보였는데 그중에는 의아한듯 빤히 쳐다보는 남자도 있었다. 또 어떤 남자는 새삼 경이로운 눈빛으로 녀자를 바라보기도 했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녀자는 오히려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고 그런 반응에 무심한듯 지나쳤다. 어떤 사람들은 그런 녀자를 눈꼴 사납게 보기도 했는데 그런 때도 녀자는 극히 자연스레 무시했다. 녀자가 지금까지 살아온 세상은 아무나가 너무 많았고 아무나가 아닌 사람은 너무 적었다. 이 녀자가 죽기 전에 이 세상 좋은 와인을 다 맛볼 수 없을 정도로 와인은 날마다 새롭게 생산되고 있다. 게다가 가소로운 사람들 틈에 치여 소중한 순간들을 빼앗기는 바람에 정작 녀자가 좋은 와인들을 즐기지 못한다는 건 너무나 비참한 일이였다. 녀자는 더 이상 지체하지 않고 와인들을 즐기는 데 대부분 시간을 할애하기로 계획했다.    녀자는 와인을 마시면서 오르가슴 비슷한 황홀경을 경험할 수 있었다. 잔뜩 마시고 나면 배만 더부룩이 나오는 맥주보다는 차라리 지금처럼 살짝 미친듯 와인의 포로가 되여주는 게 훨씬 생산적인 일이였다.       늦은 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어두운 청사를 지나치게 되였다. 달빛 속에 우두커니 서있는 청사는 마치 누군가 고의적으로 루락한 물건 같았다. 녀자에게 실망감만 안겨주던 이곳은 며칠 전 서류를 출시하면서 새로운 ‘자유’를 획득하였던 곳이기도 했다.    현관으로 들어서자마자 이어지는 휴게실에는 남녀들이 인감도장을 찍고 있는 모습이 보였고 녀자가 그 곳에서 증명사진을 찍을 동안 일하는 직원 한명이 위자료며 양육비며 재산분할에 관한 사항들을 아주 사무적인 어투로 설명했다. 무엇보다 2층에 있는 합의실까지 올라갔을 때에는 밖을 향해 탁 트인 전망 좋은 창가도 회색빛으로 감돌고 있었다. 녀자는 그 암울한 회색빛 창가에 앉아 저 멀리 멀어져가는 것들을 막연하게 바라보았다…       잠이 오지 않는 밤, 녀자는 와인이 필요했다. 한잔, 두잔으로부터 시작하여 뼈속까지 젖어든 취기가 서서히 그녀를 천국으로 이끌어주었다. 표연히 가정주부의 배역에서 벗어나 하늘하늘 치뜨는 느낌이 좋았다. 짙은 어둠의 한순간 꿈을 맘껏 부풀리고 싶었다. 녀자는 마침내 와인을 떠날 수 없는 존재로 되고 말았다.   녀자에게는 유일하게 와인바 그리고 와인바 주변마저도 더욱 친절하게 느껴질 때가 종종 있었다. 그럴 때마다 녀자의 걸음은 홀린듯이 와인바가 자리하고 있는 방향을 향하고 있었다.    와인바 주변에는 하얀 이팝나무가 눈이 내린듯 둘러져있었고 그 너머로 음산한 기운을 뿜고 있는 호수가 보였다. 호수 가운데로 물결이 일렁이고 있었고 그 속에 몸을 박고 있는 나무들이 많았다. 뿌리는 산에 박혀있는데 가지는 물에 드리워있어 얼핏 환상 속의 나무처럼 느껴졌다.    밤하늘 아래 호수로 향하는 녀자의 발걸음은 서서히 느려지고 머리 속은 점점 가벼워졌으며 자연의 은총을 받고 있는 것 같아 기분이 한결 맑아졌다. 두손에 사탕 한가득 쥐고 마냥 즐거워하는 아이처럼 녀자는 훔쳐온 것 같은 이 순간을 홀로 만끽하며 걸었다.    호수는 무척이나 음산했다. 녀자는 이름 모를 마력에 이끌려 호수의 깊은 곳으로 걸어들어갔다. 모든 게 다 어둠 속으로 차츰차츰 묻혀지고 있었다. 녀자는 갑자기 발걸음을 멈추고 가냘픈 몸으로 한참을 우두커니 서있었다. 바야흐로 결핍의 계절이 흐르고 있는 이 호수에서, 이 어둠 속에서 녀자는 려정을 끝내야 할 것 같았다.        결혼하고 나서 남편은 왜 그랬는지 늘 녀자를 투명인간 취급하면서 밖으로만 나돌았다. 남편을 보면 마치 같은 지붕 아래 다른 꿈을 꾸는 이방인 같았다. 남편으로 인해 녀자 존재 자체가 어쩌면 허상일지도 몰랐다. 녀자에게 남편은 겉도는 행성이였다. 그런가 하면 세살배기 딸애는 녀자 혼자 키우다 싶이 했는데 부시시한 산발로 늘 분주히 움직여야 했다. 누구나 그러하듯 녀자 역시 누군가 인생을 대신 살아줄 수는 없었기에 그런 자기 인생이 얼마나 정처 없는지에 대해 구체적으로 알길 없었다. 다만 무슨 리유에선지는 알 수 없었으나 어린 시절에도 녀자는 부성애를 거의 느끼지 못했고 부친은 그녀가 의지할 대상이 되여주지 못했다. 정확히 말하면 태여난 순간부터 남자에 대한 기대감이 전혀 존재하지 않는 사실이 녀자에게 그야말로 충격적이였다. 유독 또래에 비해 일찍 셈이 든 녀자는 늘 취한 아버지의 신발을 챙겨드리고 밥가마에 밥을 안치고 바닥을 쓸고 사발을 씻는 등 눈에 보이는 가사일이라면 두팔을 걷어붙이고 했다.  모친은 어쩐지 칭찬에 린색하였다. 그러니 고작 열살짜리 꼬마가 집안청소를 척척 하는 게 칭찬받는 일로 되지 못했다. 그러다가 일찌기 학교를 그만두고 여러군데 취직을 했다. 녀자는 평범한 련애를 했고 따뜻한 자궁에 한점의 생명이 생기자 서둘러 민정국으로 찾아가 등기만 했다. 하지만 시간이 남아돌지 않았는지 나중에 결혼식조차 치르지 못한 채 곧 육아에 전념하게 되였다. 그리고 전업주부로 눌러앉은 녀자는 짙은 향수를 뿌리며 한껏 치장에 신경쓰고 외출하는 남편을 창백한 얼굴로 바라보면서도 저지시키지 못했다. 남편은 ‘가장’으로서의 의무를 망각한 채 이미 녀자의 얼굴을 쳐다보지 않은 지도 한참 되였다. 녀자는 한치의 어긋남이 없는 불길한 예감으로 남편의 외도를 알아챘다. 거울 속으로 녀자는 군데군데 살찐 영낙없는 아줌마의 모습을 보았다.        이제 한발 걸음만 앞으로 내디디면 생명의 위협을 받을 것 같은 령역이였다. 스스로도 자신이 어딘가 미쳐가고 있다고 생각했다. 아니, 녀자는 지금보다 더욱더 치렬하게 미쳐보고 싶었다. 자신이 어디까지 미칠 수 있을지 그 한계를 체험해보고 싶었다. 그러다가 차겁게 서있는 운명의 벽을 마주하게 된다면 그 벽을 넘고서 저 하늘을 훨훨 높이 날아보고 싶었다.   녀자는 검푸른 어둠 속에서 손을 내밀어 더듬어보았다. 순간 이곳은 어둠의 퍼즐들로 맞추어놓은 세계에 들어선 것 같았다.   이윽고 녀자는 한발 더 내디뎌보았다. 그리고 웃옷을 한겹한겹 벗어버렸다. 정지된 어둠 속으로 쿵쾅거리는 심장소리가 울려퍼졌다. 녀자는 오래동안 묶어둔 무거운 세상을 훌훌 털어내듯 억눌렀던 가슴을 활짝 폈다. 그리고 비장한 가슴으로 호수의 시린 감촉을 맞받으며 신성하게 눈앞의 세상을 바라보았다.    갑자기 호수에서 파도 같은 물결이 세차게 일렁이고 있었다. 쏴-쏴- 가슴을 향해 솟구치는 물결은 쉬임없이 녀자를 관통하였고 마침내 공허감을 뚫고 시원하게 통과하였으며 녀자의 귀속으로 더 이상 아무 것도 들리지 않았다.  출처:2019 제1호  
7    리해연: 꿈꿀 권리(시평) 댓글:  조회:336  추천:0  2019-07-08
꿈꿀 권리   리해연       도시도 농촌도 피기를 잃은 사람처럼 모든 것이 꽁꽁 얼어붙은 채 희부옇게 변해버린 계절, 무질서하게 피여오르는 매연 때문에 숨쉬기조차 어려운 난방의 계절이다. 뜨거운 커피의 온기마저 순식간에 빼앗아버리는 이 랭혹한 계절, 동면에 가까운 일과를 보내던 어느 날 나는 김동진 시인의 시를 읽고난 뒤 내 육신에 다시 활기가 차오름을 느낄 수 있었다. 굳어버렸던 뇌가 다시 가동되기 시작했고 주체할 수 없는 힘에 끌려 저도 모르게 컴퓨터를 마주앉아 자판을 두드리지 않을 수가 없었다.     오세영 시인에게 락엽은 생의 끝자락이였고 리오덕 시인에게 락엽은 죽음이였다면 김동진 시인에게 락엽은 재생 그 자체였다. 2인칭 시점의 이야기 형식으로 된 는 독자가 이야기의 주인공이 되고 화자는 독자에게 독자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관계를 형성하고 있다. 화자는 독자로서의 ‘너’-‘락엽’이 가는 ‘길’을 ‘묻지 않으련다’라고 반복하면서 그 ‘길’이 도대체 어떤 ‘길’이기에 이토록 완강히 거부하는지 의문을 자아냈다. 그리고는 바로 ‘길’이라는 명사의 반복으로 ‘길’의 정체를 밝혔다. 그 ‘길’은 “우수수 떨어지며 날”렸다가 바람에 치여 “마구 뒹굴며 밟”혔다가 “후미진 곳에 두툼히 쌓”였다가 “천천히 부서지고 썩”어가는 말 그대로 ‘락엽’의 ‘일생’ 그 자체인 것이다. 그러면 화자는 왜 이토록 ‘락엽’이 가는 ‘길’을 ‘묻지 않’겠다고 했는가? 그것은 “락엽의 길”은 “억겁의 흙에로 다가서고 / 만년의 뿌리를 찾아가는” 로정이였고 이는 죽음을 향해 걸어가는 ‘길’이 아니라 재생으로 향해 가는, ‘꿈’이 있는 ‘길’이였기 때문이다. ‘락엽’은 그토록 힘든 세월의 모대김 속에서도 ‘꿈’을 잃고 “슬퍼한 적 없”이 꿋꿋이 자신의 길을 걸어갔다. 하여 화자는 “순리를 따르”려는 ‘락엽’의 삶에 대한 강직한 태도를 긍정하고 그 뜻 역시 바람직하다고 여기기에 아무 것도 “묻지 않으련다”고 반복하면서 자신도 “락엽의 길”을 따라 걸어가야겠다는 강한 의지를 보여주었다. 이로써 독자와 화자는 완전한 하나가 되고 시인은 독자로서, 또 화자로서 삶과 죽음에 대한 태도와 자신이 지향하는 인생의 로정을 시 속에 고스란히 담아내고 있다.      이러한 시인의 삶에 대한 태도는 에서도 살펴볼 수 있었다. ‘억새’는 돈과 명예를 쫓아 물불을 가리지 않고 덤벼드는, 좀비같은 인간들이 득실거리는 속세를 벗어나 “청빈으로 살아온 올곧은 마음자락 / 저 푸른 하늘벽에 기대고 싶어 / 스스로 아픈 뼈마디 뽑아올리고 / 가까스로 기인 목 추켜”들며 “고요가 락엽처럼 깔린 골안”-“후미진 곳”에 터를 잡고 “누렇게 퇴색한 잡초와 이웃하여” 삶을 살아간다. 그러나 ‘억새’는 절대로 현실을 도피하거나 자아를 버린 적이 없다. 오히려 “해달을 그리는 붓이 되”고 “흰갈기 날리는 백마가 되”며 “생명을 노래하는 기발이 되”리라는 “찬란한 꿈”을 갖고 있다. 부귀공명을 탐하는 현실의 속인들과 달리 처사处士의 풍모를 억새라는 이미지를 빌어 표현한 이 시는 부동한 침묵의 미학에 람루와 기아를 초탈하는 안빈락도安贫乐道의 청빈사상으로 도고한 삶을 살면서 동시에 자아완성을 실현하려는 시인의 삶의 태도가 보여지는 작품이다. 또한 이 작품은 시인이란 무엇이고 시인은 왜 시를 쓰는가 하는 물음에 던지는 대답이기도 하다. 시인이란 시를 쓰는 사람이고 시인마다 시를 쓰는 리유가 다르겠지만 대체적으로 보면 시인은 현실이 싫어서, 못마땅해서, 욕망이 충족되지 않아서 시를 쓰고 이 결핍이, 이 고독이, 이 욕망이 시 쓰기의 동기로 된다. 물론 현실을 수용하면서 돌아가는 세상에 비위를 맞춰가며 살아가는 시인들도 많다. 그러나 고금동서를 막론하고 훌륭한 시인들은 현실과 타협하지 않고 자살하거나 현실에서 도망가는 길을 택했고 이 도망의 리면에는 현실에 대한 부정과 보다 나은 미래에 대한 꿈이 있었다.    역시 꿈을 꾸는 어떠한 대상을 그린 작품이다. 시의 시작부분에서 시인은 중국의 광활한 령토에서 하늘과 가장 가까이 살고 있는 ‘서장사람들’을 통해 ‘겨울나무’를 련상하였다. 그러나 여기서 ‘겨울나무’는 절대로 서장사람들의 상징이 아니다. “살을 에이는 칼바람의 숲을 헤치고” 꼿꼿이 서서 “멋스러운 동작”으로 “땅보다 먼저” 하늘에서 날아내리는 “하얀 천사”를  맞이할 준비를 마친 ‘겨울나무’, 그것은 바로 ‘백모시’를 입은 우리 민족의 상징이였다. 여기서 간과할 수 없는 ‘멋스럽다’는 우리 민족의 고유한 것이기도 하고 우리 민족의 리념과 정서가 배양한 그 어떤 미적 요소가 아닌가. 시인이 의도적으로 숨겨놓은 우리 민족의 숨결을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는 작품임이 확실하다. “얼어붙은 겨울하늘과 / 무성의 대화를 나누면서 /  정감소통의 꿈길을 걸어가는” ‘겨울나무’-우리 민족은 “밤이나 낮이나 오직 한 생각”- “이 겨울을 함께 지낼 / 하얀 천사를 기다리는 것”만 할 뿐이다. 여기서 “얼어붙은 겨울하늘”, “무성의 대화”,“정감소통의 꿈길”, 이것들의 내면에 숨겨진 의미는 무엇일가? 수많은 상상을 던져주고 있다. “백명의 독자에게는 백명의 햄리트가 있다”고 하지 않았던가. 나머지는 독자들의 해석에 맡기도록 하겠다.    우의 시가 우리 민족의 삶의 태도와 미래에 대한 지향을 암시적으로 표현한 작품이였다면 는 직설적인 화법으로 우리 민족의 전통무용인 칼춤을 눈앞에서 보는듯 생동하게 묘사하면서 그 속에 민족적 절개를 담아내고 있다. 과거의 정형시나 현대의 자유시에서 행과 련은 기본적인 리듬을 표출하는 방식이다. 과거의 정형시는 외형적으로 행과 련을 통해 리듬감을 조성하였다면 현대의 자유시는 비록 과거의 행과 련의 정형적인 외형적 형식을 타파하였지만 그 대신 내적 형식 즉 내재률로 리듬감을 조성하고 있다. 음악성을 추구하는 시는 소설이나 산문처럼 서두와 결말이 하나로 이어진 완결된 형태의 이야기 문장이 아니라 마디마디로 느낌을 토해내는 감정적인 문장이기 때문에 행과 련마다 독립적인 형태를 취하며 그 속에는 리듬이 있고 호흡이 있다. 이 시는 정형시의 요구에 따라 행과 련을 나누고 있고  3.4 , 4.4조의 음수률을 기본형식으로 하고 있다. 즉 형식상으로 볼 때 정형시의 형식과 조선민족의 전통시가의 기본 형식을 따르고 있고 내용상으로 볼 때 민족적 정서가 다분한 작품이라는 말이다. 따라서 이 시는 현대시의 향보다는 민족전통시가의 향이 짙은 작품으로 시인이 짙은 민족적 정서를 기본 바탕으로 하여 음악성, 표현성이라는 두마리 토끼를 다 잡으려는 노력이 충분히 엿보이는 작품이라 할 수 있다.    다시 돌아와 시인은 를 통해 또다시 꿈을 이야기하고 있다. 자연에서 태여나 자연을 모방하면서 진화하고 발전한 인간이지만 자연을 정복하려는 욕망으로 오래동안 자연을 파괴하여왔다. 그러나 자연은 인간이 정복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인간은 자연의 법칙에 따라 인간으로서의 삶을 살아야 하고 이로써 자연과 인간의 화합을 이룰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시인은 “겨울의 대문이 열렸으니 / 이제부터 낮이 짧아지고 / 밤이 길어지”는 것은 자연법칙이니 당연한 일이고 “한동안 밤이 길다고 하여 / 괜히 슬퍼할 것도 없고 / 절망할” 필요가 없다고 했다. 따라서 “이 밤도 꿈길 가듯이 / 희망의 푸른 손가락은 / 달빛 드리운 창가에서 / 밤하늘에 초롱초롱한 / 별을 헤”다 보면 긴 밤이 지나고 낮이 길어지는 때가 오니 “결코 절망은 없다”고 하였다. “인간만사 새옹지마”라고 화가 있으면 복이 따르는 법이고 복이 오면 화도 따라오는 게 아니겠는가. 겨울의 긴 밤이 지나면 새벽이 찾아오고 낮이 길어지는 여름도 오기 마련이니 꿈을 가진 자라면 그 꿈을 위해서는 절망하거나 포기하지 말라는 시인의 메시지가 담긴 작품이다.     이상으로 김동진 시인의 시들을 두루 살펴보았다. 그의 시들은 어느 하나도 복잡한 창작기법이나 화려한 어휘로 독자들을 현혹시키려 하지 않았고 소박한 언어로 조용하지만 날카로운 표현으로 독자들의 마음을 울렸다. 동시에 시인은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민족에게 꿈을 가질 것을, 그 꿈을 위해서 강인하게 살아갈 것을 호소하고 있다. 바슐라르가 “물질적 상상력을 통한 언어의 마술이 그림과 조각과 판화에 또 다른 창조의 빛갈을 입히고 시와 소설의 새로운 초월적 깊이로 독자들을 초대하여 몽상 속에 존재의 모순과 통일성을 변증법적으로 드러내며 미술, 문학, 몽상에 대해 펼쳐내는 단상들을 독자와 함께 나누고저 했”듯이 시인은 시를 통해 꿈꿀 권리가 있고 독자 역시 시인을 통해, 그의 시를 통해 꿈꿀 권리를 갖는 것이다. 새로운 한해가 시작되는 시점에서 시인도, 따라서 독자도 자아를 위한, 나아가 타자를 위한 오색찬란한 꿈을 꿀 권리가 있기를 기대해본다.  출처:2019 제1호  
6    살춘각:춘천 나들이(기행수필) 댓글:  조회:347  추천:0  2019-07-08
춘천 나들이   살춘각           3박4일로 그녀가 나를 보러 왔다. 중국에서 비행기 타고 한국에 있는 나를 말이다. 주말임을 감안한다 하더라도 하루 정도는 청가를 맡아야 할 터이니 그녀로서도 쉽지 않은 결정이였을 것이다.    “어디로 갈가?”    한국이 처음인 나는 울산에 가본 게 다였고 서울에서는 길상사를 돌아본 게 전부였다. 반대로 그녀는 해마다 한번씩은 한국을 드나들었으니 거의 못 가본 데가 없었다.    “춘천 못 가봤는데요.”    “좋았어!”    그렇게 려행지는 춘천으로 결정이 났고 이튿날, 백반집에서 간단히 아침식사를 마친 다음 우리는 고속터미널에서 춘천으로 가는 일반뻐스에 올랐다.    료금은 한화로 8,000원, 소요시간은 대략 세시간이다.        소양강처녀   부산에 ‘부산갈매기’가 있다면 춘천에는 ‘소양강처녀’가 있다는 것을 알 만한 사람은 다 알 것이다. 따라서 우리의 1호 려행지는 소양호일 수 밖에 없었다.    남춘천역에서 대충 짜장면으로 떼우고 나오니 시간은 오후 한시가 훨 넘어있었다.    남춘천역에서 소양강댐까지는 12번 뻐스가 배정돼있었다. ‘소양강처녀’를 보러 가는 사람이 많은 모양, 뻐스는 순식간에 다 차버렸다. 빠르면 40분, 늦어도 한시간이라 했으니 시간에 쫓길 것 같지는 않았다.    한 20분 달렸을가. 왼쪽 옆구리 쪽으로 커다란 동상 하나가 파고들고 있었다. 얼핏 봐도 큰 강인데 강 우에 세워진 모습을 보니 쩍 말 없는 소녀상이였다. 하다면 이 강이 소양강이고 소녀상은 ‘소양강처녀’상이란 말인가?    종착역에 이리 빨리 다달을 수는 없을 텐데 하고 고개를 갸웃하는 사이 뻐스는 소녀상을 뒤로 내던지고 소양2교를 건너 강변도로를 내달리고 있었다.    뻐스 안이지만 소녀상을 찬히 보지 못한 게 아쉬웠고 돌아올 땐 잊지 말고 여기 꼭 들려야지 생각했다.    노래 는 원 제목이 였다고 한다. 그런데 어감이 둔탁스럽다고 하여 어감이 괜찮은 로 고쳤다는 것이다. 반야월이 작사하고 리호가 작곡한 이 노래는 1970년, 가수 김태희가 부르면서 전국을 휩쓸었고 앨범은 10만장 넘게 팔리는 호황을 누렸다고 한다. 가히 한국인의 국민 대표곡 1호라 할 수 있었다.    반야월은 본명이 박창오朴昌吾였는데 진방남秦芳男이란 이름으로 가수 데뷔를 했고 , , 등으로 유명세를 타기도 했다. 반야월半夜月은 작사활동을 시작하면서 가진 이름인데 군국가요 관련 활동도 해서 공식사과를 한 적도 있었다. 1990년대 이후 그는 한국 가요계의 대표적인 원로로 부각되기도 했다. 그만큼 그는 인기가요들을 많이 발표했고 대중가요의 정체성 확립과 권익 다지기에 기여를 했다. 조선전쟁 이후 월북 작사가들의 작품이 금지대상으로 지목되자 그는 또 개사작업을 주도하기도 했다. 이 때 쓴 필명들이 추미림秋美林, 박남포朴南浦이다.    노래 는 실제 모델이 있었다. 1953년생 가수지망생 윤기순尹基顺이 그녀다.    1995년 춘천시에서는 소양강과 소양강댐에 더 많은 유람객을 유치하기 위해 노래비를 세우기로 결정했다. 이 자리에 작사가 반야월을 모셨고 “열여덟 딸기 같은 어린 내 순정”의 모델이 있으면 공개해줄 것을 간절히 요청했다. 그렇게 되여 수면 우로 떠오른 윤기순은 파출소의 인터넷망을 통해 찾아냈는데 찾았을 당시 아직도 가수의 꿈을 버리지 못하고 윤미라라는 무명가수로 광주의 어느 한 야간업소에서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1968년, 가수라는 화려한 꿈을 안고 서울로 상경한 윤기순은 가요작가 김종한의 무료 레슨을 받으며 명보극장과 가까운 ‘한국가요 반세기 가요작가 동지회’ 사무실에서 일했다. 6월에 윤기순은 사무실의 선생들을 소양강변의 갈대숲으로 초청했다. 아버지가 그 곳에서 고기잡이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때 동행했던 선생들로는 회장 반야월을 비롯해서 김종한, 월견초, 류농완, 고명기 등이였다.    천렵하고 돌아오는 길에 한차례 소나기가 쏟아졌고 저녁 무렵 옅은 물안개가 피여올랐다고 한다. 그 때 그 풍경이 절경이여서 반선생이 가사를 쓴 것 같다고 후날 윤씨는 회억했다.        해 저문 소양강에 황혼이 지면   외로운 갈대밭에 슬피 우는 두견새야   열여덟 딸기 같은 어린 내 순정    너마저 몰라주면 나는 나는 어쩌나   아아 그리워서 애만 태우는 소양강처녀       동백꽃 피고 지는 계절이 오면   돌아와주신다고 맹세하고 떠나셨죠   이렇게 기다리다 멍든 가슴에   떠나고 안 오시면 나는 나는 어쩌나   아아 그리워서 애만 태우는 소양강처녀       달 뜨는 소양강에 조각배 띄워   사랑의 소야곡을 불러주던 님이시여   풋가슴 언저리에 아롱진 눈물   얼룩져 번져나면 나는 나는 어쩌나   아아 그리워서 애만 태우는 소양강처녀       그런데 뜻밖의 사람이 나타났다.     “내가 바로 노래 의 주인공이다.” 라고 밝히면서 2007년 국민일보에 반야월과의 사진 등을 증거자료로 내놓은 사람은 현재 충남 계룡시에 살고 있는 박경희라는 녀인이였다.    박경희의 회억에 따르면 당시는 윤기순보다도 일년 먼저인 67년도였고 반야월은 작사체험을 한답시고 그녀 아버지가 운영하던 소양1교 부근 ‘호수려관’에 한달간 체류하고 있었다. 아버지는 려관 외에도 선박업을 하고 있었는데 소양강댐 건설로 지금은 없어진 강 상류에 있는 고산이라는 작은 섬에로 반야월을 나루배로 데려다주라고 박경희에게 몇차례 일렀다는 것이다.    춘천녀고 3학년에 재학중이던 박경희는 소양강에 산다는 리유로 사생들 사이에서 그 때 벌써 별명이 ‘소양강처녀’였다고 한다. 이른 련애를 했던 박경희에게는 남자친구가 있었는데 거제도에서 일을 하고 있었다. 어느 날 반야월을 모시고 고산으로 관광을 가던 중 박경희는 이렇게 물었다.    “선생님, 동백꽃은 어떤 꽃이죠?”    거제도로 일하러 간 남자친구의 편지내용 중에 “여긴 지금 동백꽃이 한창이다” 라는 구절이 있었던 것이다.    “동백나무에 피는 빨간 꽃이고 꽃은 가지 끝에 하나씩 피지.”    반야월은 아는 만큼 동백꽃에 대해 소상히 설명해주었다면서 박경희는 춘천에서는 볼 수 없는 동백꽃이 노래 2절에 나오는 리유가 그것이라고 했다.    한달간의 작사체험을 마치고 떠나면서 반야월은 “너의 사연을 노래말로 썼으니 나중에 레코드가 만들어지면 너한테 전해주마. 음반이 성공을 하면 꼭 찾으마.” 하고 약속을 했지만 약속을 지키지 않았을뿐더러 박경희가 나타나자 오히려 는 주인공이 없다, 어쩌면 모든 녀성이 주인공일 수도 있다면서 강한 부정을 보였다.    하지만 춘천시에서는 두 사람을 다 의 모델로 인정을 하였고 2005년도에는 소양2교 옆에 노래비를 건립하였으며 2015년에는 최문순 춘천 시장의 주선으로 박경희, 윤기순 두 사람은 처음으로 만남을 가졌다.    여기서 나는 잠간 웃었다. 청마 유치환의 ‘련애편지’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랬다.    통영녀중 국어교사였던 38살 유부남 청마는 같은 학교 가사교사인 시조시인 정운丁芸, 리영도李永道를 만났던 것이다. 21살에 남편과 사별하고 딸 하나 키우면서 우체국 근처에서 수예점을 운영하고 있었던 정운은 청마보다 9살 아래였다. 청마는 수예점이 내려다보이는 우체국 창가에 기대서서 정운에게 20여년을 매일같이 편지를 썼다고 한다.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   님은 물같이 까딱 않는데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   날 어쩌란 말이냐       하지만 이렇게 절절한 청마의 ‘그리움’ 앞에서도 정운은 어쩔 수 없었으니-       오면 민망하고 아니 오면 서글프고   행여나 그 음성 귀 기울여 기다리며   때로는 종일을 두고 바라기도 하니라       정작 마주앉으면 말은 도로 없어지고   서로 야윈 가슴 먼 창窓만 바라보다   그대로 일어서 가면 하염없이 보내니라       정운 역시 청마를 사랑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청마의 편지는 편편마다 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였다. 그렇게 청마는 20여년에 걸쳐 정운에게 5,000여통의 편지를 보냈다.    그러던 어느 날 청마는 교통사고로 련애편지를 쓰던 펜을 영원히 놓게 된다.    “근배, 니 부산 좀 내려오거래이.”    뜻밖에도 정운이한테서 리근배에게 전화가 걸려왔단다. 문패의 먹도 채 안 마른 새로 생긴 중앙출판사 편집장으로 취직했던 리근배는 그 소리에 잡담 제하고 달려갔다.    ‘애일당爱日堂’이라 이름지은 리영도의 집은 동래 금정산 기슭 양지바른 터에 꾸며져있었는데 규방에는 청마가 준 사랑의 시를 손수 수놓은 열폭 병풍이 둘러져있었다고 리근배는 회억했다.    그 날은 부산 문인들이 청마 추모 문학제를 지내는 날이였는데 정운 말고도 소복 입은 녀인들이 다섯이나 앞줄에 앉아있었다고 했다. 그 자리에서 정운은 련서 보따리를 선뜻 내주었고 아동문학가 최계락과 리근배는 그 편지들을 대충 추려갖고는 서울에 와서 서한집 《사랑하였으므로 행복하였네라》를 묶어냈다고 한다. 5,000통에서 200통을 골라냈다고 하니 상상도 아니 갈 노릇이였다. 덕분에 주문이 밀어닥치는 베스트 셀러가 됐고 중앙출판사는 일약 명성을 떨치게 되였다고 한다.        오늘도 나는 에메랄드빛 하늘이   환히 내다뵈는 우체국 창문 앞에 서서   너에게 편지를 쓴다       중략…       사랑하는 것은   사랑을 받느니보다 행복하니라   오늘도 나는 너에게 편지를 쓰나니       그리운 이여 그러면 안녕!   설령 이것이 이 세상 마지막 인사가 될지라도   사랑하였으므로 나는 진정 행복하였네라   참으로 명편이다. 이렇게 아름다운 시가 어떻게 저런 편지 속에 들어있을 수 있단 말인가!    그런데 정운이가 자다가도 놀라 벌떡 일어날 일이 생겼다.    이 사랑의 서한집이 출판되자 청마의 편지를 갖고 있다는 녀인들이 여기저기서 자고 일어나면 한명씩 나타났던 것이다. 20여년간 자기 한사람만 꼬박 사랑해왔다고 생각했던 것이 그게 아니였던 것이다. 뒤통수라도 이런 뒤통수가 없었다.    “그게 정말이세요?”    “아이러니지.”    종착역에 내리니 꽤나 찬바람이 불어왔다. 여기서부터 댐까지는 반시간 푼히 올리걸어야 한다. 내려올 때는 십오분이면 족할 것이다.    나와 그녀는 천천히 걸었다. 락엽들이 어지러이 나뒹굴었다. 시월도 막 가는 때라 하늘은 건뜻 높이 들려있었다.    “내 주변에도 그런 녀석이 있어.”    “어떤 녀석요?”    “사랑시 한수를 써서는 이 녀자 저 녀자한테 위챗으로 날리는.”    “이 시 너를 위해 쓴 거다, 그래요?”    “빙고~”    “녀자들 그대로 믿겠네요.”    “완전 감동이겠지? 이 세상에서 저 혼자만 녀자인듯. 저 혼자만 특별한듯.”    “나쁘네요!”    소양강댐은 높이가 123메터, 제방 길이는 530메터, 총 저수량은 29억톤으로 진흙과 돌로써 만들어진 사력 다목적 댐이다. 한국에서는 제일 큰 것이라지, 아마.    양구군과 인제군의 3개 시, 군, 6개 면, 38개 리의 4,600세대가 이주하였으며 수몰된 논밭만 해도 약 2,700헥타르라고 한다.    해발이 얼마나 되는지는 알 수 없지만 풀이 잘 자라지 못하고 나무도 비뚜름히 성장한 것으로 보아 기온이 차다는 것은 짐작할 수 있었다.    봄에 피여야 할 개나리가 철없이 몇송이 핀 걸 보고 그녀가 웃었다. 그녀의 손엔 올라올 때 내가 꺾어준 들꽃 한묶음이 그대로 들려져있었다.    “이제 슬슬 내려갈가?”    “그래요. 추워서 어디 유람선이나 타겠나요.”    우리는 ‘소양강처녀’ 동상을 보는 것이 더 급했던 것이랄가.    동상을 보려면 소양2교에 닿기 전인 근화동에서 내려야 했다.    동상은 다리 중심가에 세워져있었는데 다리에서 내려 강쪽으로 백여보 걸어야 했다. 소양강이 조선의 강으로 합류하는 바로 그 합수목이다.    한화로 5억 5,000만원을 들였다는 그 동상은 높이가 7메터로서 오고가는 관광객들의 발길을 묶어두기에 손색이 없었다. 다리 중앙 동상 소개비 옆에는 스피카가 있었는데 노래가 쉬임없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동상을 올려다보며 나는 연신 찬탄을 금치 못했다. 동상이 웅장하기도 하려니와 그 때 마침 검은 구름이 몰려와 강물을 덮고 있어서 비바람 속에 서있는 처녀상을 더욱 돋보이게 해주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한가지 아쉬웠던 점은 춘천까지 갔으면서 정작 윤기순씨를 못 만나고 왔다는 것이다. 광주의 밤무대 생활을 접고 일본에 갔던 윤기순은 2006년도에 춘천으로 돌아와 부모님의 가업을 이어받았다. 사북면 자암리 잡다리골의 ‘풍전가든’이라는 민박집이 그것이다. 봄엔 개나리 벚꽃이 있고 여름에는 느티나무 록음이 있으며 가을에는 단풍이 아름다운 그 곳은 겨울에는 상고대가 있어 외롭지 않단다. 젊었을 때도 결혼 안한 내가 지금이라고 하겠는가고 말하는 윤기순이야말로 진정 ‘소양강처녀’가 아닐가 싶다. 다음에 춘천에 오면 내 꼭 ‘풍전가든’에 가보리라.    “만약에, 내가 만약에 쌤하고 결혼을 하자고 한다면…”    처녀상을 다 보고 소양2교를 벗어나 얼마간 걸었을 때 그녀가 문득 걸음을 멈추었다.    “쌤은 할 생각이 있으세요?”    그녀는 나를 쌤이라고 부르고 있었다. 그 바람에 나도 걸음을 뚝 멈추었다.    그녀는 나의 두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나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하다면 그녀는 비행기를 타고 예까지 온 것이 결국 이걸 확인하기 위해서인가.    사실 이미 결혼에 실패했던 나는 다시 결혼할 생각이 없었다. 결혼이라는 두 글자조차도 입에 올리기 싫었다. 그만큼 나는 혼인에 대해 철저히 실망하고 있었고 녀자에 대해 믿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나의 입에서 이상한 소리가 나가고 있었다. 정반대의 말을 내뱉고 있었던 것이다.    “너라면!”    “알았어요.”    그녀가 다가와 나의 팔을 잡았다.    그렇게 얼마나 걸었을가. 단풍 든 락엽이 한벌 깔린 숲공원에 왔을 때였다. 갑자기 그녀가 또 물어왔다.    “쌤은 지금까지 사귄 녀자가 몇명이나 되죠?”    “한 삼십명 되나 모르겠어, 세여보지 않아서.”    탁, 그녀가 잡았던 나의 팔을 탁 놓았다.    어, 이건 뭥미? 하는 사이에 그녀는 어느새 공원 안으로 저만치 걸어들어가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순간, 그녀는 내가 꺾어준 꽃묶음을 숲 밖의 락엽더미에 활 내던지고 있었다.    나는 숲 밖에 나가 떨어진 꽃을 바라보면서 멍하니 서있었다.            굿바이, 유정!   춘천에 왔다가 ‘소양강처녀’만 보고 갈 순 없었다. 이왕에 왔으니 더 돌아볼 판이다. 춘천에 어디 명물이 ‘소양강처녀’ 뿐이겠는가.    남춘천역 뻐스정류소에서 이 역 저 역 둘러보는데 ‘김유정문학촌’이라는 역이름이 눈에 들어왔다.    金裕貞.    김유정이라면 , 을 쓴 유명한 작가가 아닌가. 29살에 돌아간 비운의 천재. 2년 동안에 30여편의 소설을 답새겨낸 ‘구인회’ 멤버.    그 곳이라면 안 갈 수가 없지. 흥분된 나는 동의를 구하는 눈치로 내 옆의 그녀를 바라보았고 그녀는 내가 가는 곳이라면 어디든 따라가겠다는 제스처를 해왔다.    김유정은 1908년 2월에 강원도 춘천 실례마을에서 2남 6녀 중 일곱째로 허약하게 태여났다. 유아기에 서울로 이사했는데 7살에 어머니를 여의고 9살에 아버지를 잃는 등 부성 모성 결핍으로 말더듬이로 되였다고 한다. 크면서 점차 나아졌는데 휘성고보를 졸업할 당시에는 덩치도 좋아졌고 말더듬증도 사라졌다고 하지만 그 때문에 후날 몹시 과묵했다고 한다.    1930년 연희전문학교 문과에 입학했고 1933년에는 잡지 《제일선》에 와 《신녀성》에 를 발표한 뒤 1935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소설 로 1등상을, 가 《조선중앙일보》에 가작으로 입선함으로써 본격적인 작품활동을 시작한다.    지하철을 리용하면 두정거장이면 된다는데 뻐스로 가려니까 여러 역을 거친다. 그리고 이리저리 에돌아가다 보니 25분이나 걸리는 것이였다. 문학촌에 도착했을 때는 열시가 넘어있었다. 구경을 마치고 점심을 먹으면 딱 안성맞춤이리라.    문학촌 어구에 이르니 커다란 안내표시판이 나온다. 찬찬히 훑어보다가 우선 전시장부터 들려보기로 했다. 전시장과 생가만은 입장료를 받는다고 했다. 2, 000원.    헌데 웬걸. 기념관 문이 꽁꽁 닫겨있는 게 아닌가. 옆에 있는 별채들도 닫겨있는 건 마찬가지였다. 그렇다면 생가도 닫았을가. 멀리 생가 있는 쪽을 건너다 보니 미상불 거기도 닫혀있는 상 싶었다. 그래도 혹시 모른다는 생각에 그쪽으로 가보기로 했다.    별채와 별채 사이에는 너른 공터가 많았는데 운동장 서너개를 합친 것보다 더 커보였다. 공터에는 여러가지 조형물이 많았다. 아기 업은 아낙네에 지게를 멘 남정들, 할아버지와 손주… 그리고 특히 소흑판 같은 조형물이 많았는데 가서 들여다보면 김유정 작품 속 이야기 몇단락씩 씌여져있었다. 이라거나 , 이나 등등.        점심을 먹고 나무를 하러 산으로 올라서려니까 등뒤에서 닭의 홰소리가 야단이다. 점순네 수탉이 우리 닭을 쪼아서 피가 뚝뚝 떨어졌다. 나흘 전에 점순이는 울타리 엮는 내 등뒤로 와서 더운 김이 홱 끼치는 감자를 내밀었다. 나는 고개도 돌리지 않고 일하던 손으로 그 감자를 도루 어깨 너머로 쑥 밀어버렸다. 쌔근쌔근 독이 오른 점순이가 나중에는 눈물까지 어리는 것을 보고 놀랐다. 다음날 점순이는 자기 집 봉당에 걸터앉아 우리 집 씨암탉을 붙들어놓고 때리고 있었다.    하루는 나도 우리 집 수탉에게 고추장을 먹이고 점순네 닭과 싸움을 시켜놓고 천연스레 호드기를 불고 있었다. 지게 막대기로 점순네 수탉을 때려죽이고 멍하니 섰다가 점순이가 매섭게 눈을 흡뜨고 닥치는 바람에 뒤로 벌렁 나자빠졌다.    가만히 생각을 하니 점순네는 마름집이라 이제 땅이 떨어지고 집도 내쫓기고 해야 될는지 모른다. 얼김에 엉, 하고 울음을 놓았다. 이담부터 안 그럴 테냐는 점순에게 그래, 하고 대답을 했는데 점순이는 뭣에 떠다 밀렸는지 나의 어깨를 짚은 채 그대로 픽 쓰러진다. 그 바람에 나의 몸도 겹쳐서 쓰러지며 한창 퍼드러진 노란 동백꽃 속으로 푹 파묻혀버렸다. 알싸한 그리고 향긋한 그 냄새에 나는 땅이 꺼지는듯이 고만 아찔하였다.        “여기서 말한 동백꽃이 저 꽃이야.”    나는 조형물 속의 문장을 읽고 있는 그녀에게 노란 잎이 반짝거리고 있는 생강나무를 가리켰다.    “여기 패말에 생강나무라고 써있는데요?”    “강원도에서는 생강나무를 동백이라고 불러. 저기 문장에도 노란 동백꽃 속이라고 표현을 했잖아. 봐, 생강나무가 노랗잖아.”    “아, 네.”    우리는 김유정 생가 쪽으로 스적스적 걸음을 옮겼다. 가면서 나는 장인어른이 점순이가 키가 작아서 시집을 안 보낸다 해서 점순이가 키가 크기를 4년이나 기다렸다는 얘기랑 해주었다. 그녀는 옛날 사람들 글을 써도 참 능청스럽게 쓴다면서 깔깔거렸다.    “뽀뽀라는 낱말 있잖아.”    “네.”    “뽀뽀가 처음으로 등장한 문학작품이 김유정의 작품이야.”    “네에?”    “란 작품에 ‘입이나 좀 맞추고 뽀! 뽀! 뽀!’ 하는 장면이 있고 라는 작품에 ‘오, 우지 마, 우리 아가야, 하고 그를 얼싸안으며 뺨도 문대고 뽀뽀도 하고 할 수 있는, 그런 큰 행복과 아울러 우리는 흠씬 즐길 수 있는 것입니다.’ 라는 구절이 있어.”    “그럴 수가요?”    “1961년에 편찬된 리희승의 《국어대사전》에 ‘뽀뽀’가 처음으로 올랐으니 그렇게 말할 수 밖에. 그 전의 사전들엔 다 없었으니까.”    유정생가는 아니나 다를가 대문을 꾹 닫고 있었다.    “이런, 장사나 해먹겠다.”    내가 투덜거리는데 그녀가 담장 옆의 바위돌을 가리켰다.    “저거라도 딛고 들여다보세요.”    생가는 안방과 대청마루, 사랑방, 봉당, 부엌, 고간으로 이뤄진 전형적인 ‘□’자 형태였다. 조카 김영수와 한때 유정이 가르쳤던 금병의숙 제자들의 고증에 의해 복원된 것이란다.    독특하게 ‘□’자 구조의 집을 짓고 기와집 골격에 초가를 얹었던 것은 당시 헐벗고 굶주렸던 사람들로부터 내부를 감추고 또 외부에서 오는 위험으로부터 가족을 보호하기 위함이라고 하였다. 그만큼 유정이네는 경성에도 백여칸 되는 집을 가지고 있을 정도로 천석지기 지주였다. 후날 집안을 도맡아 관리하던 유정의 형이 주색잡기로 다 말아먹기는 했지만.    마당에는 《동백꽃》의 주인공들인 점순이와 내가 닭싸움을 시키는 조형물이 비치되여있었다. 남자는 청석돌 우에 앉아서 지켜만 보는 반면 녀자 점순이는 자기네 닭을 부둥켜안고 기어이 상대 닭을 이기려는 악착같은 모습을 보인다. 실소가 저절로 터지게 하는 조형물이였다.    “김유정은 어떤 사람이였나요?”    내가 담에서 내려오자 그녀가 물었다.    “오면서 내내 궁금했어요. 장가는 갔는지… 자식은 있는지…”    “작가로 말하면 천재, 사람으로 치면 스토커.”    “스토커요?”    “왜, 작가도 작가이기 앞서 사람이야. 동물적 본능을 가진 사람이라구. 작가로 성공해서 가려져서 그렇지 유정은 스토커라도 아주 악랄한 악질 스토커라 할 수 있지.”    “헐~”    유정이 21살 나던 무렵, 그러니까 1928년이 되겠다.    연희전문학교를 다니던 그가 어느 날 종로 어느 목욕탕 앞에서 목욕을 금방 마치고 문앞에 서있는 어머니를 닮은 어떤 녀자를 만났다. 유정보다 세살 더 많은 기생 박녹주였다.    박녹주 하면 판소리계의 명창으로 김소희, 박송희, 조순애, 장영찬, 박초선, 성창순, 성우향, 한농선, 일일주, 조상헌, 일옥천 등 굵직굵직한 예능보유자 제자들을 길러낸 명창 중의 명창임은 다 알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큰 획을 그은, 그것도 당대 슈퍼스타인 박녹주를 김유정이 감히 첫눈에 반해버린 것이였다. 열혈 21살이라는 나이에.    그 해 봄, 조선극장에서 8도 모창대회에 박녹주가 출연한다는 소식을 들은 유정은 수소문 끝에 그녀의 대기실에 찾아갔다. 거기서 대화를 나눠본 유정은 더욱 깊이 빠지게 되고 이튿날부터 하루가 멀다 하게 편지를 써서 보냈다. 레코드판에서 박녹주의 사진을 뜯어내서는 그 밑에다 “당신을 련모합니다. 저의 사랑을 받아주십시오.” 라는 편지까지 도착하자 더 이상 안되겠다 싶어 박녹주는 드디여 행랑어멈을 시켜 유정을 데려오게 하였다. 앞에 앉혀놓고 “학생은 오로지 공부에 전념해야지 다른 생각을 하면 아니된다.” 하고 자신은 기생신분임을 내세워 타일러보았지만 이미 사랑에 눈이 먼 유정은 그냥 편지를 가져다 넣었다. 했으나 아무리 편지를 넣어도 답이 없자 유정은 박녹주의 집을 찾아가 대성통곡을 하기에 이른다. 이를 보다 못한 박녹주의 동생 박태술이 유정을 자기 방으로 데려갔고 둘은 그걸 계기로 친구로 되였다. 유정으로서는 태술을 핑게로 박녹주의 집에 드나들 수도 있고 편지도 전할 수 있어서 좋았다.    “당신이 무슨 상감이나 된듯이 그렇게 고고한 척하는 거요. 보료 우에 앉아서 나를 마치 어린애 취급하듯한 것을 생각하면 지금도 분하오. 그러나 나는 당신을 사랑할 것이오. 당신이 사랑을 버린다면 내 손에 죽을 줄 아시오.”    김유정이 박녹주를 죽이겠다고 협박편지를 한 것은 이 때가 처음이였다. 박녹주를 부르는 칭호도 급속히 달라져갔다. 처음에는 ‘선생’이라 하더니 ‘당신’이라 변했고 나중에는 ‘너’라고 자기 부인을 칭하듯 불렀다.    1929년 5월 2일자 《매일신보》에 박녹주가 아버지의 학대와 조선극장 지배인이였던 신모씨와의 애정문제로 자살소동을 벌였다는 소식이 대서특필되였다. 신문을 읽은 김유정은 연희전문학교부터 자퇴하고 다짜고짜 박녹주가 입원중인 병실을 찾아가서 자신과 결혼하자고 프로포즈를 하였다. 그러나 박녹주의 대답은 의외로 단단했다. “나는 이제 더 이상 남자를 믿을 수 없다. 그러니 기대 말고 돌아가라.” 다음날 박녹주의 집앞에서 방성통곡하는 김유정의 모습이 목격되였다고 한다.   그런데 남자에 대해 믿을 수가 없다던 박녹주가 원산의 부호 남백우와 살림을 차렸다는 소식을 전해들은 유정은 아, 내가 돈이 없어서 그런 것이였구나 하고 개탄하더니 본격적인 스토킹을 하기 시작했다.    “오늘 너의 운수가 좋았노라. 그 길목에서 너를 기다리기 3시간, 만일 나를 만났으면 너는 죽었으리라.”    “엊저녁에는 네가 천향원으로 간 것을 보고 문앞에서 기다렸으나 나오지를 않았다. 만일 그 때 너를 만났다면 나는 너를 죽였을 것이다. 그러나 좋아하지 마라. 단 며칠 목숨이 연장될 따름이니까.”    섬뜩했다. 그 편지는 잉크가 아닌 피로 쓴 것이였기 때문이다. 그러다 어느 날에는 끝내 유정이가 박녹주가 타고 있던 인력거에 접근해 몽둥이로 기절시켜 랍치하려 한 사건이 벌어지고 만다. 이에 식겁한 녹주가 다음날 직접 유정을 불러 “나는 나이도 돈도 따지지 않습니다. 단지 당신에게 마음이 가지 않는 것도 내 잘못이란 말입니까?” 라고 한소리 하여 돌려보냈다. 그게 박녹주가 유정을 마지막으로 본 것이라고 한다.    유정이는 그 때부터 술을 마셨다고 문우들이 회억했다. 그리고 터질듯한 마음을 달랠 길이 없어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고. 그런 의미에서 보면 박녹주가 김유정을 만들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박녹주가 유정을 걷어차지만 않았어도 오늘날 작가 김유정이 있었을 건가.    그런데 유정은 또 한사람의 녀자를 만난다. 박봉자라는 유정이보다 한살 어린 녀자다.    1936년 봄, 유정은 《녀성》이라는 잡지사로부터 라는 원고청탁을 받는다.        “…나는 숙명적으로 사람을 싫어합니다. 사람을 두려워합니다. 그 버릇이 결국에 말 없는 우울을 낳습니다. 그리고 상당한 페결핵입니다. 매일같이 피를 토합니다. 나와 똑같이 우울한 그리고 나와 똑같이 피를 토하는 그런 녀성이 있다면 한번 만나보고 싶습니다… 초가삼간 집을 짓고 한번 살아보고 싶습니다. 단 사흘만 깨끗이 살아보고 싶습니다.”        라고 썼다. 그런데 그 옆에 나란히 실린 문장이 있었는데 그건 다름 아닌 란 박봉자의 글이였다.        “…장래의 내 남편을 리해 많은 문학가라고 생각을 고쳤습니다. 문학가는 세상을 잘 알고 사람을 잘 압니다.”        몸과 마음이 쇠약해질 대로 쇠약해진 유정은 그 글을 보자 대뜸 매료되였다. 낯도 코도 모르는 박봉자에게 유정은 우발적으로 련모한다는 편지를 쓰게 되였고 답장이 없자 박녹주에게 썼던 편지보다 더 절절한 고백을 했다고 한다. 그런데도 답장이 없자 유정은 서른통도 넘는 혈서까지 써보냈다고 한다.    그러던 다음 달 6월 1일, 유정은 신문소식란에서 이화녀전을 졸업하고 《동아일보》 기자가 된 박봉자가 유정과도 친한 친구 문학평론가 김환태와 결혼했다는 기사를 읽고 큰 실의에 빠지고 말았다. 박봉자는 또한 시인 박용철의 녀동생이기도 했다.    결국 유정은 가족들의 권유로 고향 춘천으로 내려갔고 거기서 야학을 꾸리면서 들병이들과 어울리며 집 밖으로 나올 생각을 아니하였다. 하지만 일제의 탄압에 의해 야학도 얼마 못 가 강제 해체되고 유정이는 륵막염에 페결핵, 치질까지 더 심해져 움직이기도 어렵게 된다.    “그렇게 죽었나요? 김유정은?”    “아니. 고향으로 돌아와서 미친듯이 창작하였는데 죽기 전까지 10개월 사이 무려 8편의 소설을 써내게 돼. 정말로 놀라운 열정이지.”    “몸이 배겨내나요? 강철이라 해도 안되겠어요.”    1937년 다섯째누이 김유흥의 과수원집 토방에서 투병생활을 하던 유정은 휘문고보 동창이자 소설가인 절친 안회남에게 쓴 편지를 끝으로 3월 29일 새벽 달빛 속에 하얗게 핀 배꽃을 바라보며 생을 마감한다.        “필승아, 나는 몸이 꺼진다. 이제는 자리에서 일어나기조차 자유롭지 못하다. 밤에는 불면증으로 하여 괴로운 시간을 원망하고 누워있다. 그리고 맹열이다. 아무리 생각하여도 딱한 일이다. 이러다가는 안되겠다. 달리 도리를 차리지 않으면 이 몸을 다시는 일으키기 어렵겠다. 필승아, 나는 참말로 일어나고 싶다. 지금 나는 병마와 최후의 담판이다. 흥패가 이 고비에 달려있음을 내가 잘 안다. 나에게는 돈이 시급히 필요하다. 그 돈이 없는 것이다. 필승아, 내가 돈 백원을 만들어볼 작정이다. 동무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네가 좀 조력하여 주기를 바란다. 또다시 탐정소설을 번역해보고 싶다. 그 외에는 다른 길이 없는 것이다. 허니, 네가 보던 중 아주 대중화되고 흥미 있는 걸로 두어권 보내주기 바란다. 그러면 내 50일 이내로 역译하여 너의 손으로 가게 하여주마. 하거든 네가 극력 주선하여 돈으로 바꿔서 보내다오. 필승아, 물론 이것이 무리임을 잘 안다. 무리를 하면 병을 더친다. 그러나 그 병을 위하여 무리를 하지 않으면 안되는 나의 몸이다. 돈이 생기면 우선 닭 30마리를 고아먹겠다. 그리고 땅군을 들여 살모사, 구렁이를 10여마리 먹어보겠다. 그래야 내가 다시 살아날 것이다. 그리고 궁둥이가 쏙쏘구리 돈을 잡아먹는다. 돈, 돈, 슬픈 일이다. 필승아, 나는 지금 막다른 골목에 맞닥뜨렸다. 나로 하여금 너의 팔에 의지하여 광명을 찾게 하여다오. 나는 요즘 가끔 울고 누워있다. 모두가 답답한 사정이다. 반가운 소식 전해다오. 기다리마.”        삶을 다할 때까지 박녹주에 대한 집착을 버리지 못했는지 김유정의 방안에는 “녹주, 너를 련모한다”는 혈서가 붙어있었다.    김유정의 장례식을 치른 날, 술에 만취한 안회남이 박녹주의 집에 쳐들어가서는 “당신이 박녹주요? 내 친구는 당신이 죽인 거요. 죽을 때까지 당신을 잊지 못하고 갔단 말이오!” 원망했고 박녹주 또한 김유정에게 신물이 날 대로 났음에도 불구하고 “김유정에게 너무 박절하게 대하여 내가 슬하에 자식 없이 살았나 보다. 손이라도 한번 잡게 해줄 것을…” 라는 회고록을 남겼다.    “충격이예요.”    “뭐가?”    “김유정의 사랑이 너무 기구해서요.”    “운명인 거지.”    “임자를 만나지 못해서 그런 건 아닐가요?”    “만나봤자 또 차이겠지.”    “그러면 또 스토킹을 해야겠네요. 이번엔 손목을 그을가요?”    “손목 가지고 되겠나. 목 정도는 내놓아야지.”    “하필이면 무정한 두 박씨를 만나가지고. 쌤은 이후에라도 박씨들과 놀지 마요.”    “하하하하.”    그 바람에 나는 귀가 너덜너덜해지도록 입을 크게 벌리고 웃었다.    “김유정, 박무정.”    “덕분에 한국은 천재소설가 한명을 얻었잖아.”    “사랑이란 게 뭘가요? 뭔데 이렇게 고통스러울가요?”    “사랑은, 음~ 사랑한다는 것은 다시 태여난다는 것이지. 김유정이처럼!”            강덕수라는 사람   점심 먹기에는 아직 이른 시간이였다. 그렇다고 문이 땅땅 잠겨있는 문학촌을 더 둘러볼 멋도 없는 일. 내다보니 뉘엿하게 휘여진 앞산 등허리로 구불떡하니 길이 나있다.    “올라가볼가?”    우리는 천천히 이 말 저 말 하면서 올라갔다.    바람이 고왔다. 앞산에서 내려온 바람이 잦나무에 걸터앉았다가는 살사리꽃을 흔들어놓고 우리의 발치 앞에서 살포시 잠들어버린다. 여기는 강원도라 내가 살던 연변과 기온이 거의 비슷하다.    한참 올라가니 왼손편으로 무우밭이 나왔다. 무우 옆엔 배추도 심었는데 그 옆엔 연변에서는 못 보던 농작물도 있었다.    스쳐지나려는데 그녀가 채소밭으로 난 길을 따라 걸어들어가는 것이였다.    뭐가 있길래?    나는 들어가지 않고 채소밭 어구에서 기다렸다.    담배 한대 태우고 있자니까 그녀가 나를 보고 오라고 손짓한다. 그녀의 손에는 방울도마도 몇알 쥐여져있었다. 빨갛게 잘 익어있었다. 시월도 다 가는데 방울도마도라니. 그래서 보니 그녀의 뒤에 비닐하우스가 있었다. 그녀는 하우스 안에 들어갔다 나왔던 것이다.    “이거 드셔보세요. 맛 괜찮아요.”    나는 잽싸게 주위를 살펴보았다.    “사람이 없어요.”    없기는.    사람이 올라오고 있었다. 없다던 사람이 발에 군용 가죽구두를 신고 밭 아래쪽에서부터 우리를 향해 올라오고 있었다. 밭주인인 것 같았다. 나이는 어림잡아 고래희.    “저게 어째 내 눈에는 사람처럼 보이는데? 옷도 입고 구두도 신고.”    “안경도 걸었는데요.”    “모자도 비싼 거 썼구만, 전모자.”    “아까는 없었어요.”    “귀신은 아니겠지?”    “귀신이 왜 낮에 나와요.”   “그럼 천사겠군.”    “저렇게 못난 천사도 있어요?”    “그렇다면 사람이 맞네.”    “어디서 나타났을가요?”    “뒤간에 숨어있었겠지.”    “있네요, 사람이…”    그 사람이 앞에 와 서자 나는 얼른 허리를 굽혀 인사했다. 입안에 방울도마도가 굴러다니고 있었으므로 인사말은 생략했다.    “어디서 온 손님들이오? 난 이 밭 주인인데 강덕수라 한다오.”    갱핏한 체구를 가진 그 사람은 선명한 얼굴에 꽤 날카로운 눈매를 가졌다. 넉넉한 웃음을 짓는 표정이 인상에 좋았다.    “서울에서 왔는데요, 지나가던 걸음에 무우밭을 보고 들어왔습니다. 주인장 허락도 없이 들어와서 죄송합니다.”    “아니요. 저기 도마도도 있고 머루도 있으니 맘껏 드시오. 뭐 필요한 것 있으시면 말만 하시오. 얼마든지 드리리다.”    “네. 말만 들어도 고맙습니다.”    “점심식사들은 하셨소?”   “아직요. 방금 문학촌을 돌아보고 시간이 남았길래 여기로 올라왔습니다. 좀 이따 내려가서 점심 겸 저녁을 먹어야죠.”    “그랬구만. 그래 무슨 좋은 구경들은 하셨소?"    “어제는 ‘소양강처녀’를 보았구요, 오늘은 ‘김유정’을 만났었습니다. 그런데 김유정문학촌은 왜 개방을 안하는 겁니까?”    “수지가 안 맞으니까. 찾아오는 손님도 없는데 인건비를 감당해낼 수 있겠소? 허허허.”    “책이라도 한권 사들고 가려 했더니… 아쉽네요.”    “오늘만 봐도 그렇잖은가. 손님이 달랑 두명.”    그러더니 나한테 채소밭 가운데 있는 정자처럼 생긴 오두막을 가리킨다.    “그런데 술은 좀 마실 줄 알란가? 저기 내가 담궈놓은 과실주랑 많은데이?”    “많이는 못 마시는데 조금은 마실 줄 알아요.”    내가 말하려는데 그녀가 앞질러 말해버렸다.    “그럼 됐네. 젊은 처자는 거기서 안주감이나 좀 갖춰오게나.”    그의 안내 대로 오두막정자로 들어가보니 취사하는 곳까지 다 마련돼있고 제법이다. 상도 장방형 탁자에 긴 의자 두개, 둘러앉으면 손님 열명이라도 칠 수 있을 것 같았다.    마른 안주 둬가지에 도마도, 오이. 술상은 간소하게 차려졌다. 오두막 옆으로는 채소를 심지 않은 빈 공터도 있었는데 달래도 보이고 냉이도 보였다. 벌통도 몇개 있었다.    “저기 저 잦나무가 있는 곳까지 나의 밭인데 한헥타르는 족히 되지.”    “많네요. 채소는 심어서 파는가요?”    “더러는 재미로 심고 대부분은 다 나눠준다오. 친구들이 잘 놀러 오거든.”    그의 집은 할아버지 적부터 이곳에 살았다고 했다. 그래서 이곳에 땅도 많고 정도 붙어 아버지가 돌아가자 고향으로 돌아와 신선처럼 살고 있다고 했다.    “지난해인가 저 길 건너편에 서울사람이 내려와서 10억 주고 땅을 사더니 철조망만 턱 쳐놓고 풀만 잔뜩 웃자래워놓았지 뭐요. 뭐 거기다 무슨 펜션을 짓는다나 뭐라나.”    말할 때 그의 톤은 매우 낮았는데 귀를 거의 갖다대야 들을 수 있는 정도였다.    “오면서 볼라니까 배추밭 옆에 포도넝쿨이 있던데요?”   “아, 그거, 그게 포도가 아니라 머루라오. 머루농사를 지어서는 다 와인을 담궈버리지. 내가 담근 와인을 한번 마셔볼라나?”    그는 과실주도 내놓고 머루와인도 꺼내놓았다. 과실주는 35도짜리 담금주로 했고 와인은 순수한 머루로써 알콜을 한방울도 쓰지 않았다고 했다.    과실주보다 머루와인이 더 맛있었다. 농도가 짙었음에도 불구하고 마신 뒤끝이 산뜻하니 가벼웠다. 생각 같아서는 실 것 같았는데 단맛이 훨씬 강했다.    “오늘 그걸 다 마시고 가게.”    그는 술을 못 마신다고 했다. 대신 담배는 즐겼다. 내가 피우는 담배를 건네주자 그는 신기한듯이 이리저리 비춰보는 것이였다.    “중국담배인데 ‘로빠둬’라고 한답니다. 한국담배보다 좀 독할 겁니다.”    “어? 그러면 교포인가?!”    “네. 중국 연변에서 왔어요.”    “아, 그러길래. 말투가 우리 강원도랑 많이 닮았소. 여기 춘천도 남춘천은 말투가 좀 달라. 북춘천이 이북과 비슷하지. 그런데 참으로 용하이. 연변사람이 김유정은 어찌 알고 찾아왔을가?”    “제가 문학에 좀 관심이 있어서요. 이런 데를 잘 찾아다닙니다.”    “오~”    그제서야 그는 뭐가 리해가 되는지 머리를 끄덕끄덕했다. ‘로빠둬’를 피우면서 그는 연신 담배맛이 좋다고 극찬했다. 담배가 지니고 있는 고유의 향이 입안 전체에 퍼지고 있어서 기분이 좋다고 했다. 이런 담배 참으로 오랜만이라고 했다.    술 마시는 사이 그녀는 방울도마도를 한번 더 뜯어왔다. 술이 한 반병 쯤 내려갔을가. 내가 물었다.   “혹시 김유정을 만나보신 적 있으신가요?”    “내가 태여났을 땐 김유정이 이미 돌아간 뒤이니까 나야 못 보지. 우리 큰형은 봤다고 그러더군.”   “그렇겠군요. 김유정이 37년도에 돌아가셨으니…”    “우리 큰형 말로는 김유정이 체대도 좋고 날파람도 있었다오. 우리 큰형보다 썩 웃또래였는데 웬만한 사람하고는 말도 하지 않았다 하더군.”    “36년도였겠군요. 박봉자와 헤여지고 나서요.”    “박봉자인지 박녹주인지는 모르겠고 36년도는 맞는 것 같소. 서울에서 내려온 김유정이 금광사업에 손을 댔나 봐요. 김유정의 형은 부화방탕한 생활로 가산을 거의 탕진한 상태였다지. 그 때가.”    “금광도 했었나요? 야학을 한 건 아는데…?”    “한번은 김유정이 저 아래 주막에서 들병이와 술을 마시는데 이웃마을 쏠쏠이패들이 내려왔나 봐요. 그 주막을 접수하러. 그 주막 원래 다른 마을 건달들이 차지하고 있었는데 김유정이 오면서 자리를 내줬나 보더라구. 그래서 김유정이를 내쫓고 자기네가 차지하려는 거였지.”    “싸움이 일어났습니까?”    “일어나다마다. 김유정이가 2층에서 술을 마시는데 아래층에서 몹시 부산하게 왁자지껄 떠들더라요. 그래 도저히 술을 못 마시겠어서 좀 조용히 하라고 여기 니들만 있는 게 아니라고 달랬다는가. 그런데 이놈들이 와르르 마당에 몰려나가더니 김유정 보고 내려오라고 고래고래 소리질러댔다겠지. 원래 사람 싫어하고 말하기 싫어하는 김유정은 싸우기 싫었지만 하도 고아대니 안 나올 수 없었다고. 보니까 이쪽은 김유정 혼잔데 저쪽은 저그만치 아홉명이였다나.”    “1대 9요?”    “김유정은 싸우기 싫었으니까 돌아가라고 달랬다오. 그런데 저쪽에선 수자를 믿고 그냥 막 밀고 들어왔다지 뭐요. 순간 화가 난 김유정이 펄쩍 뛰여올랐는데, 순식간에 여섯명을 밟으면서 걷어찼다는게 아니겠는가. 함께 온 동료 여섯명이 쓰러지는 것을 본 나머지 세명이 뒤돌아서 내빼려는 걸 김유정이 불러세웠다오. 너부러진 놈들을 데리고 빨리 꺼지라고. 다시는 남이 술 마시는데 와서 행패 부리지 말라고 점잖게 타일렀다지.”    “김유정이 그렇게 잘 싸웠나요?”    “나는 못 봐서 모르지만 우리 큰형이 본 바로는 그렇다고 했소. 그만큼 동네에선 김유정한테 대들 자가 없었다고 했소.”    그럴 수도 있으리라. 박녹주한테 했던 행태만 보더라도 짐작은 가는 일이였다. 물론 과장된 전설이긴 하겠지만 말이다. 김유정은 그러고도 남을 인물이였다.    “만석부자집 아들이라 받들려 자란 것도 있겠지. 누가 감히 쳐다나 봤겠소.”    “안하무인 격으로 자랐겠네요. 제 하고 싶은 걸 다하면서.”    “옛날 잘사는 집 자제들은 버릇 없는 건 있었지. 지금도 그렇지만.”    말하다 보니 머루와인 한통이 거의 굽나고 있었다. 그녀도 그의 이야기에 심취되여 열심히 경청하고 있었다.    “술은 걱정 마시게. 여기 가득하니까. 갈 때 갖고 가도 돼요.”    그러면서 또 한통 꺼내놓는다. 이러다가 오늘 서울로 돌아 못 갈지도 모르겠다. 취기가 서서히 피여오른다.    “적게 마셔요.”    그녀가 내게 주의를 주었다.    “그런데요, 춘천 하면 작가가 또 한사람 있지 않습니까. ‘춘천의 들개’요. 혹시 만나신 적은 있으십니까?”    내가 술잔을 들다 말고 물었고 강덕수씨는 담배 피우던 손을 놓고 놀란 표정을 지었다.    “리외수도 아는가? 암, 만나보다마다. 외수하고는 너나들이 하는 친구지. 허허.”    “그래요?!”    나는 바짝 귀맛이 당겨 몸을 당겨 다가앉았다.    “그러엄! 외수가 화천으로 간 다음부터 못 만났으니 못 본 지 꽤 됐구만. 그 녀석도 참 재미있는 친구지.”    “부인 전영자씨도 글을 잘 쓰던데요?”    “부인은 만나 못 봤고 그들이 어떻게 만나게 되였나 하는 경위는 알고 있지.”    “얘기해주세요.”    그녀가 흥미가 당겨했다. 녀자들이 남의 련애사에 관심이 많은 건 알아줘야 한다.    “외수 원래 들개였어요. 너무 가난해서 들개처럼 쏘다녔다고 붙여진 별명이야. 외가에서 자랐다고 외수고. 들개는 아무거나 주어먹지. 언 똥도 가리지 않고 말이야. 진짜 외수는 밥을 얼려서 덩이로 만들어서 목숨을 연명했던 적도 있었다오.”    “들었습니다.”    “외수가 소설가로 뜨고 나서 잔뜩 기고만장해졌을 때였지. 어느 날 음악다방에서 잔뜩 폼을 잡고 앉아있는데 어떤 아가씨가 들어왔다는 거요. 갑자기 눈앞이 환해지더라나 뭐라나. 외수는 아무 고려도 안하고 그 아가씨한테 다가갔다오. 가서는 ‘너 어차피 나를 좋아할 것 같은데 지금부터 좋아해주라’ 했다는 거지 뭐요. 아가씨가 놀라 자빠지지 않은 게 다행이지. 거지라도 어디서 저런 상거지가… 목욕도 잘 안하지. 머리라는 게 텁숙하지. 그 아가씨가 전영자여.”    “듣자니 집장촌에서 기생들과 살았다면서요. 거기서 터득한 기술이 거시기를 서라면 서고 가만히 얌전하게 있으라 하면 얌전하게 있는 거라면서요?”    “그건 외수의 희떠운 소리고. 대마초도 피웠구 기생들한테 얹혀살았던 것도 사실인 건 맞는 것 같소.”    “그래서 혼외자 풍파도 생긴 거군요.”    “내가 외수를 만난 건 서울의 한 식당에서였지…”    강덕수씨가 그들의 첫 만남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눈을 지그시 감고 히죽이 웃고 있는 모습이 사뭇 즐거운 표정이였다.    하루는 강덕수씨가 식당에서 밥을 먹고 있는데 바로 옆좌석에서 어떤 꾀죄죄한 놈이 친구 한놈 앞에 앉혀놓고 하늘이 낮다고 열변을 토하고 있더라는 것이다. 마치 온 세상을 다 가진듯, 래일이면 대통령이라도 될듯 그렇게 큰소리를 쳐대더라는 것이다. 그 소리가 어찌나 높은지 강덕수씨는 귀가 다 아플 정도였다고 했다.    참다 못해 강덕수씨가 “야, 좀 살랑살랑 말하면 안되겠냐?” 했더니 그 꾀죄죄한 놈이 “이게 어디서 굴러온 개뼉다구가 남이 술 마시는데 이래라 저래라야!” 하면서 손에 들었던 숟가락을 탕 내던지더란 것이였다. 그 때까지만도 강덕수씨는 리외수가 술만 마시면 뭔가 내던지는 버릇이 있다는 걸 몰랐단다.    “이 새끼가?!”    강덕수의 주먹이 리외수의 얼굴 정면으로 날아갔다.    리외수가 벌떡 일어섰다. 강덕수도 일어섰다. 다음 둘은 밖으로 나갔다.    말도 없이 둘은 원투와 훅을 몇주먹씩 나눠가졌고 깨진 쪽은 리외수였다.    얼굴의 피를 닦고 나서 리외수가 겸상을 요청했다.    “너 주먹이 세다. 내 인정한다. 그런데 넌 누구냐? 난 리외수라고 한다. 우리 친구로 사귀자.”    “수구동 강덕수다. 너 빼빼 마른 놈이 깡다구는 좀 있더구나.”    “앞으로 대한민국 소설계를 평정할 대소설가님을 친구로 사귀게 된 것을 영광으로 생각하라. 함부로 주먹질할 생각은 하지 말고. 내가 지금 굶어서 몸이 안돼 그렇지…”    “한주먹도 안되는 게 입은 살아가지고…”    “너 우리 집 가서 살자. 우리 집에 쌀 많다!”    알고 보니 리외수는 《강원일보》 신춘문예에 소설 이 당선되였던 것이다. 그 상금으로 쌀 몇가마니 사놓고 너무 격동되여 친구와 축하파티를 즐기던 중이였던 것이다. 쌀가마니를 앞에 놓고 너무 좋아 어쩔 줄을 몰라하는 리외수의 모습을 눈앞에 보는 것만 같았다.    “이 기쁜 날에 너한테 얻어터진 건 억울하다만 그래도 쓸 만한 친구를 만난 것 같아서 마음은 즐겁다. 너 앞으로 이 리외수가 있는 한 배를 곯을 걱정은 안해도 될 것이다. 나만 굳게 믿어라.”    그 때가 지지리도 배고팠던 1972년 겨울이였단다.    “재밌네요. 호호호.”    그녀가 손벽을 짝 쳤다.    나도 웃으며 마지막 잔을 입안에 털어넣었다.    “행주처럼 말라비틀어진 놈이 맥아리 하나도 없더군. 허깨비 같았소. 내가 사정을 많이 봐줬지라.”    얘기하다 보니 시간은 어느덧 오후 세시를 넘어있었다. 나는 그녀를 바라봤다.    “이젠 일어나 가봐야겠는데요.”    “좋은 얘기도 듣고 맛있는 와인도 먹고 잘 놀았습니다.”    강덕수씨가 따라나왔다.    “무랑 배추랑 뽑아줄가? 들고 갈 텐가?”    “못 들고 가요. 대접받은 것만도 황송한데. 래년에 다시 와서 그 때 많이 가져갈게요.”    그녀가 손사래를 쳤고 나는 넌지시 강덕수씨를 향해 물었다.    “혹시 여기 일군이 필요하진 않으십니까? 제가 농사일은 잘합니다.”    “일군은 필요없고 나눠주는 재미로 사는 것이라오. 허허허.”    강덕수씨와 나는 만난 기념으로 사진 한장을 남겼다.     “들어가십시오.”    “그래, 래년에 또 봄세.”    가다가 돌아보니 강덕수씨는 인상 좋은 얼굴에 웃음을 가득 싣고 우리를 향해 손을 흔들어주고 있었다.            춘천닭갈비   춘천 하면 대표음식이 막국수와 닭갈비다. 연변랭면을 먹다가 한국에 오니 한국국수는 당최 밍밍해서 못 먹겠다. 그래서 대표음식이고 뭐고 막국수는 빼버렸다.    닭갈비는 볶음료리로, 토막낸 닭을 포를 뜨듯이 도톰하게 펴서는 고추장, 간장, 마늘, 생강 등으로 양념을 재웠다가 고구마, 당근, 양파, 파, 떡, 양배추 등의 재료와 함께 철판에 볶아먹는 료리이다.   지금의 중앙로 2가 18번지에 판자로 지은 자그마한 장소에서 돼지고기로 영업을 하던 김영석씨가 1960년의 어느 날 돼지고기를 구하기가 너무 어려워 대신 닭을 사용한 것이 원조였단다. 닭을 발려서 양념하여 12시간 재워 숙성시킨 다음 닭갈비라는 이름으로 판매하였다는 것이다. 당시 춘천에는 양계업이 활발히 진행되고 있어서 닭고기 만큼 싼 것도 드물었다고. 1970년대 들어 번화가 명동의 뒤골목을 중심으로 유명해지기 시작하여 휴가 나온 군인들과 대학생들로부터 값 싸고 배불리 먹을 수 있어서 각광을 받았다고. ‘군인갈비’, ‘대학생갈비’, ‘서민갈비’ 등 여러가지로 불리웠다고.    춘천닭갈비는 과연 그 곳의 대표음식이라 불리울 만했다. 먹어보니 양배추와 배합이 그렇게 잘 맞을가 싶었다. 춘천에 왔다가 닭갈비를 안 먹고 가면 춘천에 안 와본 거나 마찬가지일 거란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런데 여기에 이 글을 더 이상 쓰지 못하게 됐다. 약속한 분량을 벌써 많이 넘어섰기 때문이다. 아쉽지만 이 부분은 다음 기회로 미루어야겠다.    춘천에 와서 비록 살아있는 ‘소양강처녀’ 윤기순씨는 만나보지 못했지만 김유정과의 대화가 즐거웠고 강덕수씨를 알게 된 것을 영광으로 생각한다. 거기다 ‘춘천닭갈비’를 ‘참이슬’에 적셔 배부르게 먹었으니 이보다 더한 행복이 없다.  출처:2019 제1호  
5    조정철: 아버지의 고향은 감옥이였다(단편소설) 댓글:  조회:366  추천:0  2019-07-08
아버지의 고향은 감옥이였다   조정철           아버지한테는 고향이란 건 도주하기 위하여 생긴 감옥 같은 것이였슴다.   자아감각이 마구 팽배해서 정치착오를 범하고 장사하신다고 마구 쌀개다가 인명사고가 나서 저레 갚을 저에조차 안 나는 막대한 빚을 지시고 아버지는 태여난 지 한달도 안되는 나를 안고 폴싹 맥을 놓아버린 어머니를 데리고 한보따리 밖에 안되는 이사짐을 소수레에 싣고 그 해살 찬연한 태양촌으로 이사를 갑니다. 가져갈 건 빚군들이 다 가져가서 정말 말 그대로 숟가락 두개, 저가락 두개, 사발 두개, 세수소래 하나, 너덜옷 몇견지 가지고 이사를 했담다.   태양촌에 가서는 술은 날마다 이 집 저 집 찾아다니메 질탕 마시고 사흘이 멀다 하게 동네 나그네들과 뚜들래기를 하고 밭 매기가 싫다고 대대에서 발급한 호미를 홱홱 돌구어서 멀리 내팽개쳐서 도랑에 처넣고… 남들이 일하는데 혼자 밭두렁에 척 누워서 남이 일하는 거 지휘만 함다.   입에 달고 다니는 소리가 “못 배우고 덜 깬 애들과 같이 놀 사람이야?”임다.   12년이란 장장 긴 시간 어머니가 아득바득해서 빚을 다 물고 또 농촌 치구는 출세를 해서 둘 다 학교 선생님이 되고 아버지는 교장이 됨다. 뭐 선생님이 딱 세분임다.    어느 날, 아버지는 술 마시고 또 동네 나그네와 뚜들래기를 해서 어머니가 “이래자무 뭘 하러 날 찾아와 못살게 굴메 결혼을 했슴까… 우리 애들은 그래 이렇게 평생 촌놈으로 살고 촌놈으로 죽슴까?” 했더니…   문 박차고 나가더니 며칠 동안 집에 안 들어옴다. 불쑥 들어와서 하는 말이 “우리 향진마을 복흥으로 이사가자. 내 거기 중학교 교도주임으로 가기로 했다.” 정말 사흘 후에 짐을 싸서 아버지가 외상으로 사놓은 복흥 집에 이사를 갔슴다.   그럼 고향 복흥은 정다운 고향일가요? 아임다. 거기도 아버지한테는 감옥임다. 가자마자 거기 한족 교장을 뚜들겨패고 이젠 주임이란 명의로 공공연하게 식당에 다니메 술을 마셔댐다. 보는 사람마다 다 무식하다고 삐뚤써 보구 술상에서 남은 말 못하게 하고 자기만 장편대론을 하면서 남을 훈계함다. 또 관리범위가 엄마 출근하고 내 다니는 복흥소학교까지 되여서 소학교 교장도 뚜들겨팸다. 은화 아버지도 뚜들겨패서 은화 하마트면 나하고 절교할 번도 했슴다.   력사를 가르친다고 뭐 또 막 쇼를 하시다가 내 니 같은 이런 것들 놓구 무슨 력사를 가르친다구 난시를 하니 하면서 책도 막 찢었슴다. 확실히 또 그 반 애가 무식하기도 함다.   복흥에서 날마다 술 마시고는 이튿날에 하시는 말이 “너무 갑갑해서 술 마신다… 이 감옥 같은 데서 요까짓 노릇 하는 게 정말 사람 말려죽인다…” 그러더니 또 술 마시고 출근 안하더니 하루는 저레 가서 학교선생 노릇을 사직해버렸슴다. 그것도 회의실에 온 학교 선생 다 모아놓구 내 이제 정치하러 갈 테니깐 니네나 이런 짓거리 하고 있어라 했담다. 엄마가 지내 와늘 막 펄펄 뛰고 집에서 밥사발 물고뿌 다 깨버리고 야단을 하셨는데 태연하게 담배 피우시더니… “내 흑룡강 갔다 올게. 그리고 이사하자.” 이러곤 또 행방이 묘연해졌슴다. 며칠 후에 나타나서 “우리 조양천 이사가자. 집 다 봐뒀다. 거기 선전부장으로 가기로 했다.” 내 심장이 덜컹했슴다. 은화와 생리사별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니깐 까무러칠 번했슴다.   끝내는 숫말이 새끼 낳는 맨 매짠 녀자들 설화랑 김연이랑 세화랑 치마자락 휘날리는 조양천에 입성했슴다. 촌놈이 이쯤이면 출세를 했지요. 엄마가 막 친척 다 모아놓고 그 사이 눈물 겨운 분투사를 이야기하고 술도 제일 비싼 생맥주를 열개 단위로 막 정시나게 올리며 칭커를 했지요.   그런데 조양천은 좀 큰 감옥일 뿐이지 그래도 감옥이였슴다…   이사 가서는 진장을 이층 식당에서 발로 차서 떨어뜨리고 또 막 그 집에 가서 발로 목대티를 밟고 서서 집을 내놓으라고 야단쳤슴다. 그래서 집을 가지고 남자는 정치를 해야 해 하며 또 매짠 공무원 녀자들과 같이 틀거지를 내면서 며칠 출근하더니만… “내 이 더러운 촌구석 간부 노릇 못해먹겠다. 무식한 것들과 말이 안 통한다.” 이러더니 또 어머니가 말릴 새도 없이 정부에서 내부퇴직内退해버렸슴다.   정말 이번 감옥탈출 시도 때문에 어머니 저레 앓아누웠슴다. 아버지가 난데없이 창업을 한다고 승용차를 판다고 집에 돈 다 끌어가서는 어느새 또 새파란 비서까지 데리고 장춘에 가버렸슴다. “이사할 준비 하고 기다리오… 어지간히 일이 되면 장춘에서 살아야지…” 질겁한 나와 동생이 다 장춘 안 간다고 막 발버둥질 치고 어머니는 거의 실성상태에 빠졌슴다.       장춘에서는 일이 어지간하게만 됐겠슴까. 뭐 석달도 못 뻐치고 가져간 돈 몽땅 사기당해서 떼우고 어벌때기 크게 꾼 돈을 착 빚으로 만들어서 수염이 텁수룩해서 돌아왔슴다. 어머니가 살살 얼리메 빚은 같이 갚으면 되고 제발 정부 돌아가서 일 다시 해라 하니까 아버지가 비장한 표정을 하더니만 “내 생각해봤는데 요번은 운이 나빴소. 집 이미 저당잡혀서 돈 꺼냈으니 생활비로 좀 남길게…” 요러곤 잔돈 당그라니 남겨놓고 또 목재장사를 한다고 떠나버렸슴다. 새로운 감옥탈출 작전이였죠.   목재장사를 한다고 항주, 녕파 막 돌아다니던 게 전화 와서 하는 말이 “좀만 기다리오. 내 와보니 항주 정말 살기 좋은 곳이요. 어지간히 되면 항주 이사오기오…” 항주 이사가자던 어지간히가 또 은을 내서 이번에는 가져간 돈 몽땅 날리고 집까지 날려버리고 또 척 배짱 좋게 돌아왔슴다. 뭐 말이 청산류수인 그 입으로 어머니를 마구 위로하고 그러는데 주제가 촌놈들과 오래 놀았던 게 좀 둔해져서 남방애들한테 얼리웠다 이것임다. 엄마가 막 죽는다 산다 하면서 야단치고 그러니깐 이젠 밖에 안 돌아다니시고 집에서 애들 모아놓구 올림픽수학 강의를 시작했슴다.   엄마가 처음에는 신경질 쓰시다가 좀 지나 발견한 게 올림픽수학 강의해서 버는 돈이 학교 출근하는 돈의 세배가 되니깐 잔소리 안하게 되였지요. 그러고 다니며 말하시는 게 “그 나그네 밖에만 안 돌아댕기면 사고를 안 쳐서 내 영 속이 든든하다.” 하셨슴다…   그런데 하루는 집에 돌아오니깐 아버지가 무려 학생이 스무명이나 되던 보도반을 해산해버렸슴다. 대사가 또 “내 촌놈 촌구석 애들과 같이 놀 사람이야?”   그러고 수학보도책 딱 두권과 갈아입을 옷 한벌 가지구는 혼자 연길 갔슴다. 어떻게 찾으셨는지 윤련순 아나운서네 아들 올림픽수학 가정교사 노릇을 하게 되였슴다. 그 집 아들이 그 해 희망컵 수학경기希望杯数学竞赛에서 전국 일등을 한 게 아버지가 저레 또 어머니 보구 “연길 이사오라. 집 이미 맡아놓았다.” 라는 것임다.   드디여 조양천 감옥탈출 성공.   연길에 와서 애들 대여섯 올림픽수학奥数 가르치면서 막 어머니와 말씀하시는 게 “내 개인 학교 세울 타산이다. 애들 한 몇백명 모아서 수준 따라 반을 나누고 과기대 선생 초빙해서 영어 가르치게 하고 연대 애들 데려다가 선생질 시키겠다.” 엄마가 또 쓰겁드레해서 “제발 일 크게 만들지 마쇼. 지금 애들 대학 붙었는데 이제 사고 치면 정말 못삼다…”   그래서 뭐 학교 세우는 거창한 일은 안 실행했는데 일년이 지나니깐 학생 륙십명으로 늘었슴다. 집 세개 세맡아서 애들 교실로 사용하고 과기대에서 영어선생 모셔다가 애들 영어도 가르치고 아버지가 수학 물리를, 그 영어선생과 시간 딱딱 맞추메 강의를 반을 나누어서 했슴다.   입말이 또 “내 이런 촌구석에서 촌놈들과 같이 놀며 썪는다는 게 답답하다.” 이러셨지만… 나와 동생 본과 졸업할 때까지는 오솝스레 과외보도를 하시면서 그 돈으로 년년생 두 대학생 공부시켰슴다. 동생이 북경에 과학원 석사 추천받았다니깐 아버지 막 저레 “북경 이사가자. 북경에는 무슨 애들 공부를 안 시킨다니.” 이러면서 또 연길 감옥탈출 작전을 개시할 작정이였는데…   동생이 “내 과학원에서 일하는 게 아니고 공부를 함다. 여기서 공부하고 일본 가겠슴다. 그 때 일본에 따라와도 늦지 않슴다.” 그래서 예상 밖에 순순히 탈출 작전 시도를 포기했슴다. 동생이 석사 졸업하기 전 집에 전화 와서 “아버지, 내 동경 감다. 이미 추천서 확보했고 거기 교수님까지 학생으로 받을 걸 허락했슴다.” 하셨더니 막 뛸 것처럼 기뻐하실 거로 예상했던 아버지가 갑자기 조용해지더니 “응… 가서 잘 공부해라. 오늘은 좀 복잡하니 래일 길게 말하자…” 이러는  것임다.   어머니가 저레 집에다 한상 푸짐히 차리고 아버지와 거의 막 울먹거리는 목소리로 “내 딸 출세하는 것 보니깐 왜 그렇게 돌아보기도 싫던 태양촌이 막 생각나고 그리워진다.” 이랬더니 아버지가 술 쭉 완샷하시고는 “내 이젠 정실이 따라 동경 못 갈 것 같다. 가고 싶어도 맘대로 갈 수 없는 곳도 있구나.” 하셨슴다.   술 좀 과해서 물 마시러 새벽에 일어나니깐 아버지가 술 꺼내서 혼자 마시는데 울고 있습디다… 울고 있는 아버지를 처음 보아서 내가 또 효녀 심청처럼 술 부어주니깐… “니는 외국 안 나가겠니? 내 태양촌 살 때 한번은 북경대학 붙은 정희가 우리 집에 놀러 왔는데 걔가 막 자부심에 들떠서 나 보고 ‘삼추이는 뭐 자기 앞 이름자나 쓰오… 이런 구석에 박혀살며 뭐 할 말이 그리 많소…’ 하더라. 내 그래서 속으로 결심했다. 우리 자식은 꼭 공부 제대로 시켜 정희보다는 더욱 출세하게 하겠다. 정희가 미국 갔으면 정실이도 미국 갈 거다…”   정말 그 말이 적중해서 지금 동생이 그 사촌누나 정희와 같은 뉴욕에 살고 한 아빠트에 살고 있슴다. 동생이 가니 막 안고 울더람다. “니네 아빠 엄마 그렇게 딸 공부시킨다고 노력하더니…  니가 뉴욕까지 오게 될 줄은 생각 못했다…”   작년에 동생이 전화 와서 “아버지 뉴욕 와보겠슴까? 여기도 감옥임다. 그런데 여기서 또 탈출하면 정말 달나라 가게 됨다.”라고 했슴다. 뉴욕 간다고 아버지 두날에 한번씩 모아산 등산해서 체력 올리고 미국 소개하는 비디오를 엄청 많이 사들이고 또 그 나이에 중풍 맞은 몸으로 당최 배워본 적이 없는 영어를 가정교사 모셔서 막 배우고 했슴다.   수속도 별 애로 없이 진행되였는데 예전 주치의사가 “조형, 미쳤소? 그 몸으로 어찌 10시간 비행기 타오?” 해서 미국행 포기했슴다. 전화 와서 태연한네 하시면서 “내 거기 뭐 별로 가보기도 싶지 않았다. 내 북경이나 가야겠다. 뭐 양키놈들이 사는 동네 거기가 거기지무…” 집에 가보니깐 그 많던 비디오 몽땅 불태워버려서 하나도 안 남았습디다.    초췌해진 모습으로 우두커니 서있으며 고향 감옥탈출 시도를 포기한 아버지를 보는 게 가슴이 찢어졌슴다… 출처:2019제1호  
4    <장백산> 댓글:  조회:2145  추천:1  2013-10-18
    《장백산》소개       《장백산》잡지는 1980년 5월에 창간되여 40년의 력사를 걸어왔습니다. 우리 말로 된 대형 격월간 문학지로서 주로 장편소설, 장편실화, 장편인물전기를 비롯한 문학작품으로 우리 민족의 인간과 삶을 관조, 기록하는 장편련재 위주의 문학지로 자리매김되고 있는 바 중단편소설, 수필, 시, 평론 등 다양한 문학장르도 함께 다루고 있습니다. 창간 이래《장백산》잡지는 줄곧 문학성, 민족성, 가독성을 추구해왔으며 우리 민족의 삶을 그린 훌륭한 작품을 많이 발표하는 것으로 민족문화를 고수하고 조선족 문학을 발전시키는 데 의바지하여왔으며 길림성10대간행물(1999년, 2005년), 북방지역우수간행물(2004년), 제3회국가백종중점간행물(2005년), 길림성정품간행물 50강(2014년), 중국작가협회 소수민족문학학위원회에서 수여한 ‘원정상(园丁奖)’, 중국조선문신문출판문화대상 우수잡지상(제5회,  제6회) 등 영광을 지니기도 했습니다. 현하, 《장백산》잡지는 종이잡지 뿐만 아니라 전자판(电子版)을 개통하여 종이잡지를 온라인으로 간편하게 구독할 수 있고 위챗판(微信专刊)을 개통하여 종이잡지 이외에 더욱 많은 우수한 문학작품들을 독자들에게 선사하도록 노력하고 있습니다. 많은 조선족 문학 애호가들의 아낌없는 관심과 주목을 부탁드립니다.     《장백산》소개       《장백산》잡지는 1980년 5월에 창간되여 40년의 력사를 걸어왔습니다. 우리 말로 된 대형 격월간 문학지로서 주로 장편소설, 장편실화, 장편인물전기를 비롯한 문학작품으로 우리 민족의 인간과 삶을 관조, 기록하는 장편련재 위주의 문학지로 자리매김되고 있는 바 중단편소설, 수필, 시, 평론 등 다양한 문학장르도 함께 다루고 있습니다. 창간 이래《장백산》잡지는 줄곧 문학성, 민족성, 가독성을 추구해왔으며 우리 민족의 삶을 그린 훌륭한 작품을 많이 발표하는 것으로 민족문화를 고수하고 조선족 문학을 발전시키는 데 의바지하여왔으며 길림성10대간행물(1999년, 2005년), 북방지역우수간행물(2004년), 제3회국가백종중점간행물(2005년), 길림성정품간행물 50강(2014년), 중국작가협회 소수민족문학학위원회에서 수여한 ‘원정상(园丁奖)’, 중국조선문신문출판문화대상 우수잡지상(제5회,  제6회) 등 영광을 지니기도 했습니다. 현하, 《장백산》잡지는 종이잡지 뿐만 아니라 전자판(电子版)을 개통하여 종이잡지를 온라인으로 간편하게 구독할 수 있고 위챗판(微信专刊)을 개통하여 종이잡지 이외에 더욱 많은 우수한 문학작품들을 독자들에게 선사하도록 노력하고 있습니다. 많은 조선족 문학 애호가들의 아낌없는 관심과 주목을 부탁드립니다.
3    장백산 2010.4 (7-8월호) 루계172 댓글:  조회:2965  추천:2  2010-07-19
장백산  2010.4(7-8월호) 루계 172 차례 작가초대석 김영건/ 도옥시선 11편 한   춘/ 현대삶속에 숨어있는 신화만들기(작품평) 최룡관/ 도옥(刀玉)의 시행로(诗行路)(작가평) 김성호/ 우주를 날아예는 비취새(작가평)   장편소설련재 림원춘/ 그날의 25시(련재4)   김병민코너 김병민/ 와룡산일지(련재6)   기행문 김  훈/ 김훈미국견문록(련재2)   소설문학 김청화/ 출발 한련분/ 사라진 돈 박영옥/ 안개낀 강(외1편)   수필문학 정옥선/ 안해의 마음 량고범/ 아버지의 홰나무그늘 엄정화/ 딸 떠나기 류일복/ 내가 꿈꾸는 영원 리경자/ 눈으로 마시는 록차 김춘식/ 나는 하루살이를 배우며 산다 리영해/ 생활은 평범한것이다   시문학 김응준/ 해남과 달님은(외3수) 김철우/ 명화 한폭(외3수) 류문홍/ 저울질합니다(외2수) 유재익/ 오솔길 한오리(외2수)   대학생코너 리광원/ 바람빛 저변의 풍경 리명자/ 나는 이런 내가 좋다 전옥화/ 록차 한잔 진익희/ 흔적   중국문학 부  석/ 청자기(련재10) 채수문/ 심수의 홍수림(수필)   한국문학 구석본/ 어느 생애(시) 서종택/ 구부러진 산(시) 서지월/ 골무(시) 고희림/ 지평선에서의 하루밤(시) 정이랑/ 해바라기는 평강벌을 바라본다(시) 고안나/ 천리향(시) 김남희/ 내 마음의 부적(시) 손채주/ 사채시장의 녀인들(소설, 련재4)   유영선/ 표지설계 정일평/ 본지삽도  
2    장백산 2010.2(3-4월호) 루계 170 댓글:  조회:2441  추천:3  2010-05-18
장백산  2010.2(3-4월호) 루계 170  차례  작가초대석  리홍규/ 운명에 도전장을 던져라(수필,외1편)  서영빈/ 남성수필에서의 철학과 서정(수필평)  리홍규/ 높은 곳(외 6수)  산  천/ 끝없는 삶의 지향성(시평)  구용기/ 곁에서 보아온 문학인 리홍규(작가평)  장편소설련재  림원춘/ 그날의 25시(련재2)  인물전기  김정애/ 85세, 영원한 "항일빨찌산 녀전사"  김병민코너  김병민/ 와룡산일지(련재4)  김미란/ 지성과 사랑이 여무는 캠퍼스(독후감)  기행문  강순화/ 미국서부 기행  소설문학  김금희/ 노마드(중편)  최동일/ 비오는 날의 그 아픔(단편)  수필문학  김의천/ 생묘의 마을에서  산  천/ 세월과 함께 늙어가다 류연산/ 척하기  량고범/ 뵙고싶은 나의 선생님  시문학  강효삼/ 산이 되여 강이 되여  김기덕/ 봄밤(외1편)  서정순/ 여름꽃시  전병칠/ 성형수술청구서  허동식/ 바야하르  김승광/ 안개  대학생코너  윤서화/ 황사현상(수필,길림대학)  김은화/ 기다리는 마음(수필,민족대)  진익희/ 슬픔(시,동북사대)  양빙빙/ 친구란...(시, 동북사대)  중국문학  부  석/ 청자기(련재8)  한국문학  손채주/ 사채시장의 녀인들(련재2)  유영선/ 표지설계  정일평/ 본지삽도  
1    장백산 2010.3(5-6월호) 루계 171 댓글:  조회:1823  추천:3  2010-05-17
장백산  2010.3(5-6월호) 루계 171 차례 작가초대석 서정순/ 2월의 비(수필,외2편) 서정순/ 봄꽃시 10수 김창영/ 꽃과의 대화속에 꽃으로 피여나는 시인(평론) 산  천/ 향기로운 녀심이 퍼올린 훈훈한 인성 장편소설련재 림원춘/ 그날의 25시(련재3) 김병민코너 김병민/ 와룡산일지(련재5) 기행문 김  훈/ 김훈미국견문록(련재1) 소설문학 박선석/ 석양련가남영선/ 게절따라 피는 인생이라지만김태현/ 길레네수필문학 김두필/ 놀부의 인정신기덕/ 정월에 해남도에 다녀오다김  정/ 행복이란...서애홍/ 유혹의 비극 시문학 김  파/ 시를 낚으며(외3수)허승호/ 인식의 력사김동진/ 누님의 꽃불(외1수)리창현/ 실속(외1수)김미란/ 찢겨진 사랑로  연/ 어제와 오늘 그리고 래일 대학생코너 리호옥/ 돼지꿈(수필,민족대) 리  향/ 꽃잎 하나 눈물 한방울(수필,연대) 곽  효/ 침묵의 바다(시,동북사대) 중국문학 부  석/ 청자기(련재9) 한국문학 손채주/ 사채시장의 녀인들(련재3) 유영선/ 표지설계 정일평/ 본지삽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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