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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백산》문학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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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    도옥: 너를 보면 내가 보인다(시, 외5수) 댓글:  조회:399  추천:0  2019-07-17
너를 보면 내가 보인다 도옥   꽃 본 듯이 너를 보면 내가 보인다 내 안에 꽃처럼 들어온  너의 향기가 나를 신사로 만든다 지난 겨울 낡은 외투에 티끌의 세월은 시원히 사라지고 상긋함의 겨울길이 환하다 너를 보면 내가 보인다 살아온 날보다 살아갈 날들 눈송이처럼 너에게 내리고 싶다 망설임 없이 서성댐이 없이 화려한 타개로 령롱한 눈빛 지니리 너를 보면 앞길이 환하다!     떠나는 그대에게    잠시 떠난다고 말하라 봄이 꽃을 피우고 잠시 땅속에 스며들듯이 눈물자리에 꽃을 피워놓고 떠나는  그대여 잠간 갔다 돌아온다고 말하라 슬픔의 꽃은 지고 열매가 오듯 향기론 그대의 꽃말 속에도 계절은 가고 펑펑 그리움은 눈이 되여 내린다 눈사람 되여 하얀 발자국 심고 떠나는 그대여 잠간 갔다   돌아온다고 말하라 강남 갔던 제비새 돌아오듯이 봄강물 여울치는 여기가  네 태초의 모태라고 말하라.  떠나는 그대여!     어둠과 빛 사이 사랑이   기다림이 어둠이란 사실을 그대를 잠간 보내고 알았습니다   어둠에서 익어 무르익어 태여난 빛이 그대와의 만남임을  깊은 밤 별빛을 쌓아올리며 느꼈습니다   빛과 어둠 사이 그대와 나 어둠과 빛 사이 나와 그대   시간은 소리가 없습니다 모든 진동이 우주의 바퀴를 굴려가듯 밝음으로 오는 사랑은 당신입니다   그대의 빛나는 아침을 위하여  저는 창창 어둠의 새벽을 불타는 폭포처럼 뛰여내립니다   당신은 빛의 신입니다  저는 당신을 받쳐올리는 거대한 어둠의 그릇 되겠습니다   어둠과 빛 사이 흔들리며 피여오르는 한송이 꽃이여!     매돌   돌밭에서 하얀 세월 기여나왔다 해살이다 사랑이다 빙글빙글 돌아가는 세월 속 눈물의 강물 굽이쳐가고 엄마의 눈물 어린 꿈들 새파랗게 파도쳐갔다 아이 눈망울에 붉은 저녁이 익어 슬픈 그림자 흔들며 돌아서고 할아버지 하얀 기침소리 노란 옛말 하얀 모국어로 사립문가 하얀 향기로 피여올랐다   활화산 설설 끓던 전설 천지인 가슴가슴 굽이쳐 쇠물로 흐르다가 비탈길 진붉은 진달래 피워내고 강물에 조약돌 쟁쟁한 노래로 살다가 향수처럼 온돌방에 올라서 구름석가래 틀고 앉아 빙빙 둥그렇게 돌아갔다 세월이 돌아갔다 수레바퀴가 돌아갔다 천년이 돌아갔다     바다에서 온 것들이 돌아가고 땅에서 온 생명들 다시 부활하는 자리에서 빙글빙글 우리가 돈다 베옷이 돈다 흰 넋이 돈다 오천년 화려한 오방색 무궁화가 어진이 하얀 마음 하얀 평안 하얀 전설로 빙글빙글 찬란한 옛말 속에 매돌은 하얗게 앉아 돌아간다…     흙의 재해석   우주의 먼지들이 모여앉아 역설의 열매를 빚다 죽은 공룡의 뼈가 나무로 서서 감탄으로 문명을 연출하고 웅녀의 마지막 밤이 꽃으로 피여나 인간을 노래했다 흙의 반역 난바다 벽파도 새벽하늘 작은 희망 걸어놓고 다시 돌아온 아침 우리는 시퍼런 삽날로 흙 속에 진리를 파내고 있다 검은 태양과 붉은 달 어제로 돌아가는 수레바퀴가 데굴데굴 굴러와서 풍화된 세월 회색으로 메웠다 하얗게 멈춰선 시간들이 다시 돌처럼 굳어져 우리의 오늘 새겨넣고 있었다     마음   어느 날 시가 나에게로 왔다    가만히 돌아보니  시는 그대와 내 눈빛 사이  해살 같이 내려와 있었다    그 해살 한줌 너에게 쥐여주었다    어둡던 너의 미소가  빛을 머금고 있었고  주변이 황홀해지기 시작하였다   너는 그 해살  주머니에 집어넣고 돌아섰다    그 날 이후  우리는 늘 함께 있었다    그것은 그 날 내가 너에게 준  마음 한줌 때문이였다!   출처:2017 제3호
89    김혁: 필끝에 건곤세상 있나니(칼럼, 련재끝) 댓글:  조회:455  추천:1  2019-07-17
필끝에 건곤세상 있나니(련재) 김혁   마른 붓, 적실 먹이 없소이다 -원고료의 인상   대회 기간 개막식과 작가협회 장정 심의, 위원 선발 등 정례적인 일정 외에 거의 모든 시간은 분조토론으로 이어졌다.  분조토론 기간 가장 도마에 오른 문제의 하나는 바로 작가들의 원고료 문제였다.  원고료의 상향조절에 대해 대표들은 앙분한 모습으로 열변을 토했는데 그 와중에 절강의 모 잡지사 녀주필의 발언은 그야말로 메가톤급이였고 우리는 그만 ‘경성에 온 촌닭’ 격으로 어안이 벙벙해지고 말았다. “새해부터 우리 잡지에서는 고료를 매 천자에 1,000원 표준으로 올리게 됩니다.” 우리에게는 ‘강건너 꽃’과 같은 그 경상과 바닥에서 굼닐고 있는 우리들의 고료 표준을 비해보며 조선족 대표들은 그만 씁쓰름한 미소를 머금을 수 밖에 없었다.  원고료 문제에 대한 열규(热叫)는 작금의 일이 아니다. 대표들의 열띤 토의에 귀를 기울이며 다시 한번 우리 문단에서는 ‘뜨거운 감자’와도 같은 원고료 문제에 대해 환기해보았다.    옛적부터 청고함으로 무장한 문인들은 돈에 대해 말하기를 꺼렸다. 그래서 원고료라는 말도 제 입으로 번지기 싫어 ‘그것’이라고 두리뭉실하게 불렀다. 그러다 자못 아치(雅致)한 이름인 ‘윤필(润笔)’이라 바꾸어 지칭했다.  ‘윤필’이라는 말은 맨 처음 《수서권삼십팔·정역전(隋书卷三十八·郑译传)》에서 연유되여 나왔다.  어느 한번, 수나라의 수문 황제가 천하의 문장가 고영더러 조서를 지으라고 불러들이였다. 하지만 고영은 선뜻 나서지 않았다. 그러면서 찾아온 궁중사자에게 “소생은 필이 말랐소이다”고 답했다. 그러면서 “조서를 지어 먹을 살 돈냥도 안되는데 어찌 필을 적시겠나이까?” 하고 덧붙여 말했다고 한다. 그때로부터 원고료를 가리켜 필을 적신다는 뜻에서 ‘윤필’이라고 이름해 불렀다고 한다.  남송시대의 학문을 집대성한 경전고서인 《용재수필(容斋随笔)》에서 “윤필은 진나라 때부터 있었고 당나라 때 흥성했다. 문장을 지어주면 인사를 받았다.”고 적고 있는데 원고료 제도가 오래전부터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어찌되여 자고로부터 글 읽는 사람은 가난하기만 했다. 청고를 품덕으로 알았던 문인들은 체념하고 가난을 숙명으로 받아들였다. 가난하면 정신이 맑고 뷰유하면 정신이 혼탁하다고 생각했다. 령혼에 살이 붙으면 필이 둔감해지고 사물의 본질을 꿰뚫지 못한다고 그렇게 생각했다. 그래서 “선비란 무릇 가난한 법이니 가난이 곁에 있음을 근심하지 말라”고 서로를 이르기도 했다.   글쟁이들의 형편이 곤궁한 것은 어제오늘의 흥감스러운 문제가 아니였다.  조선시대 시인들의 작품을 집대성한 《풍요속선(风谣续选)》을 보면 이런 발문으로 시작된다.     “아! 이 《풍요속선》에 이름이 나란히 렬거된 사람이 삼백여명이나 되고 시가 칠백여수가 되지만 불우함을 슬퍼하고 의식을 걱정하는 사람이 거의 삼분의 이가 되니 선비가 글을 잘하면 곤궁하게 되는 것인가? 아니면 처지가 곤궁한 뒤라야 글을 잘하게 되는 것인가?” 비탄(悲叹)으로 가득한 이 발문에서 시를 숭상했던 조선시대에도 문인으로 살아가기란 만만치 않았음을 알 수 있다.    돌아보면 근, 현대에 이르러서도 수두룩한 천재문인들이 가난에 숨통을 옥죄이며 살아갔고 가난을 못이겨 스러져갔다.   가까이 전례를 봐도 지난 30년대 연변 일대에서 활동했던 프로레타리아문학의 대표인물인 최서해, 강경애도 지독한 가난을 벗어나지 못했다.  가난한 나머지 최서해는 일습을 개비하지 못하여 여름에도 두꺼운 겨울옷을 입고 다녔고 강경애는 경성을 놀래운 유명한 녀문인이라지만 내내 빠진 앞이발도 해넣지 못하고 처량한 웃음을 남겼다. 그래서 그들은 민족문학사의 한획을 그은 문호들임에도 ‘체험문학’, ‘빈궁문학(贫穷文学)’이라는 새로운 문체의 대표자로 각인되기도 한다.  그렇게 이들에게서 글은 리상이였지만 막상 먹고 입고 자는 것은 현실이였다.  최서해, 강경애가 전설로 된 오늘에 이르기까지도 글만 쓰며 살아가기란 여전히 어렵다. 누구나 한번 쯤은 시인과 작가를 꿈꾸지만 글은 밥이 될 수 없음은 여전히 엄혹한 어제이자 현실이다. 오늘날에도 문학은 살아나가는 실용적인 방편이 돼주지 못한다. 꿈이 아무리 아름답다 손 쳐도 현실의 밥과는 달리 먹을 수가 없다. 그리하여 문인들은 글로는 앞장서 달리며 세상을 향해 ‘사자후’를 내지르지만 현실에서는 생존의 대렬에서 뒤처져 그저 끼리들이 고담준론을 소곤거릴 뿐이다.   글품을 파는 사람들 치고 누구나 한번 쯤 자신의 처지를 돌아보며 개탄을 뿜어봤을 것이다. 글의 갈피에도 적어봤을 것이다.  조선족 문인들은 작가협회에 회원으로 등록된 이만 해도 전국에 600여명은 더 된다. 여기에 협회에 가입하지 않고 문필생활을 하는 이들도 적지 않아 인구비례수로 말하면 조선족 문인수는 여타 민족에 비해 월등하게 많은 편이다.  하지만 이들 가운데 글만 써서 생계를 유지하는 문인은 한손 손가락으로 꼽을 만큼도 없다. 아예 전무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원고료 수입만으로 생활을 영위할 수 있는 작가는 전무, 0%라는 랭혹한 수치다.  제도적 혜택도 있고 기업가들의 간혹 되는 지원이 있다고 하나 그것은 ‘덴 손에 침 바르기’요, 추위에 들썩이는 헌옷을 림시로 꿰매기로 미봉책(弥缝策)이다.  우리 말로 된 월간, 격월간으로 발행되는 간행물은 수십종이 넘는다. 순 문학지만 해도 4종이나 된다.  하지만 원고료는 일률적으로 낮다. 어섯눈 금방 뜬 신인이건 수십년 필밭에서 등허리 휜 원로건 구분 없이 낮다.  가난한 잡지사에 가난한 작가들 뿐인 우리들의 엄연한 현실이다.  일개 문인으로서 글은 쓰되 원고료는 받지 않아도, 적게 받아도 괜찮다고 말했던 사람도 있었다. 글에 열성을 보이는 신진들은 원고료를 별로 못 받아도 흔쾌히 작품을 기고한다. 글 쓰는 일에 마음을 앗겨, 자신의 작품을 빛 보이기 위해 보수 먼저 글을 내미는 신출내기 작가들의 심정을 나무랄 일만은 아니다. 하지만 요즘 세상에 붓대에 기대여 이슬만 먹고 살려는 그런 선비는 과연 몇이나 될가! 글을 쓴 대가로 원고료를 받는 것은 당연한 일인데 그것을 말하는 일이 부끄러운 일처럼 되고 있으니 뭐가 잘못돼도 한참 잘못된 것이다.  원고료 문제를 의안에 올린 지 어림 30년이 흘렀다. 그런데도 여전히 우리 문인들은, 우리 문학은 절규하고 있다.   우리 말 간행물들에서는 전대미문의 동란이 결속되고 문인들이 옥죄인 질곡에서 벗어나 자유로이 필을 달리던 1970년대 말께부터 문학원고료를 지불하기 시작했다. 당시 1,000자 당 원고료가 5원 좌우였다. 그때의 평균로임 수준 40원을 참조하면 표준이 엄청 높은 편이였다.  필자의 경우 1985년에 발표한 처녀작 단편소설 이 75원의 고료를 받았다. 지금도 보풀이 일어 나달나달해진 당시의 원고지를 간직하고 있는데 자수가 1만 8,000자 가량이였다.  당시 스팀관과 하수도 덮개를 만드는 룡정 주물공장의 용광로 앞에서 위험과 로역(劳役)을 감수하며 일했던 필자의 급여가 한달에 겨우 30원 정도였다. 그에 비하니 필대 하나로 벌어들인 원고료가 금맥이라도 만난 듯 일확천금 같은 액수였다. 그 원고료로 난생처음 양복을 맞추어 입었고 편집선생들을 근사한 식당에 청하고도 30원 가량, 내 한달 급여 만큼의 액수가 남았다. 당시 열아홉살 신출내기였던 나는 처녀작의 발표로 인한 기쁨보다는 굉장한 액수의 원고료에 당혹스러워 두 눈을 호동그랗게 치떴던 기억이 남아있다.  당시 젊은이들이라면 거개가 문학애호가로 자처했다. 종합지는 물론 문학지의 말미에 어김없이 등장했던 혼인구애광고에 ‘문학을 애호함’이라는 조건을 현요한 위치에 적었는데 그것은 요즘의 ‘집과 차가 있음’이라는 홍보물보다 더 강력한 유혹이였다. 따라서 문학지는 문전성시요, 잡지의 발행부수도 천정부지로 높뛰였다. 《천지》와 같은 주요 문학지는 8만부라는 전무후무의 발행 진기록까지 남겼다.  문학에 몰부어진 광휘는 단 그때 뿐이였다. 90년대 이후, 문학과 문인들의 처지와 위상은 추락을 거듭했다. 당년에 문단의 상아탑 우에서 광택이 빤드르르했던 우리의 문필가들은 현실의 바닥에 사정없이 내동댕이쳐졌다. 그에 따라 우리의 원고료도 볼썽사납게도 성장판이 닫힌 주유(侏儒) 꼴이 되고 말았다. 우리 사회는 산업화의 거대한 물결에 휩쓸려 생산과 효률을 무엇보다 우에 놓고 최고의 가치로 떠받드는 시대를 향해 흘러갔다. 오로지 공명과 리욕에만 사팔뜨기가 된 근시안의 시대에, 문화도 수익산업으로 인정받아야 살아남는 시대에 문인들이 표방하는 순 문학주의는 무용한 열정으로 치부되고 말았다. 그로 인해 얻은 것은 높은 효률이였지만 잃은 것은 문학과 예술이였다.  이러한 풍토에서 문인들에게 부여되는 보수는 ‘붓을 적실’ 량도 못되였다. 문학도 돈이 돼야 살아남는 시대, 문인들에게는 쥐꼬리 만한 원고료라는 것이 늘 마음에 차지 않았다. 1999년 에서 제정한 원작, 개편과 번역 작품의 표준은 1,000자당 원고료가 각기 30-100원, 10-50원, 20-80원이였다. 하지만 그것도 중국 문단, 내지의 문단의 표준이고 조선족 문단의 표준은 이 규정에서 가장 하위인 30원에 머물렀고 간혹 조금 웃도는 표준이였다. 그 표준을 우리는 내내 정량(定量)으로 알고 잡지사들에서는 게면쩍게 고수해왔고 작가들은 온곱게 받아들였다.  이제는 근 20년도 되는 때에 제정한 기본 원고료 표준으로 현재의 수입수준, 소비가격지수 및 물가 상승폭도를 감안해 따져보면 이는 현실과 엄중하게 탈절되여 간극 나아가 괴리를 초래했다. 따라서 문학작품의 응분의 가치를 제대로 구현할 수 없게 되였다. 게다가 일부 잡지사들에서는 이런 낮은 표준마저 리행하지 못했거나 아예 체불까지 하는 현상도 적지 않았다. 필자의 경우 과거 받지 못한 원고료가 정작 따지고 들면 예상 외로 많다. 하지만 문학에 옹근 생을 기약한 사람으로서 큰소리로 채문하지도 못하고 그저 벙어리 랭가슴 앓듯했을 뿐, 이제는 꿩 구워먹은 소식이 되였을 뿐이다. ‘돈을 꾼 자는 기억 못하지만 꾸어준 자는 기억’하는 꼴이 된 것이다. 나처럼 이렇게 랭가슴을 앓아본 이들이 우리 문인들중에 한두 사람이 아닐 것이다.  그럼에도 내내 정열을 삭이지 않고 비 내리지 않는 척박한 땅에 필 보습을 대고 문학이라는 사래 긴 밭을 그악스럽게 갈고 두엄 주고 씨 뿌리고 풀 잡고 하며 부지런을 떠는 우리 작가들이야말로 경의로움의 대상이 아닌가!  작가들의 뜨거운 열정에 찬물을 끼얹는 낮은 원고료의 ‘방자’함은 창작대오를 위축시키고 정품창작을 정체시키고 문학후비군의 단절을 초래하는 ‘도미노 효과’를 초래했다. 하지만 체념에 빠진 우리 작가들은 그 진동도 괴멸도 느끼지 못하고 있는 초미(焦眉)의 형국이다.  2013년 9월 국가지적재산권국은 드디여 을 발포해 원고료 표준 및 판권세률을 높였다. 희보에 의하면 원작 작품의 원고료 표준은 매 1,000자 당 100-500원, 개편, 번역 작품은1,000자 당 각기 30-150원, 80-300원이였다.  “에헤야, 원고료가 세배, 네배 껑충 뛰여올랐네.”라며 문단은 희열을 감추지 못했다. 하지만 그 희열은 또다시 남의 몫, ‘강건너 꽃’이였다. 기타 소수민족들 신강, 서장, 내몽골, 청해 등 지역의 원고료는 130-300원으로 새로운 표준에 보조를 맞추었다. 하지만 왜서인지 우리 조선족 문단만은 잠잠했다. 그냥 18년 전의 원고료 표준이 시행되였다. 도저히 생활의 방편으로 못되는 ‘조족지혈(鸟足之血)’ 즉 ‘새발의 피’ 같은 얄팍한 원고료를 우리 작가들은 무가내로 그를 받아들이는 수 밖에 없었다.  잡지사가 좋은 원고를 기고한 작가에게 높은 원고료를 주는 일은 지극히 당연한 일인데 지극히 당연한 이 일이 오래동안 외면되고 정례화처럼 받아들여진 현실이 참담했다.  따라서 존립하고 있는 문학지 모두가 원고료 발부에 대해 오래동안 고심해왔다. 우리 말 기본 원고료 지불 표준을 장기간 매우 낮게 책정한 탓으로 잡지사들도 난감함을 금치 못하고 있으며 열성을 다하는 작가들에게는 내내 미안쩍은 마음들이다. 작품을 게재해준 것만 해도 시혜를 베푼 것으로 착각하고 목에 힘을 주는 잡지사나 편집자들이 요즘 들어 찾아볼 수 없게 되였다. 주눅이 들어 조심스럽게 작가들에게 원고 청탁하는 그들의 심경은 착잡할 것이고 로고 또한 만만치 않을 것이다. 조선족 작가들의 최악의 원고료 문제는 인민대표대회, 정협회의에도 상정되였던 현안이였다. 우리의 작가들은 수차 정협회의에 을 내놓았고 “정부에서 시대발전에 따른 원고료 표준을 제정해 소수민족 문학 발전을 추진하기를 바란다”는 제안을 수차 간했다.                   연변작가협회 최국철 주석의 지론에 따르면 《연변문학》, 《도라지》, 《장백산》 등 대표적인 주류 문학지가 일년에 지불하는 원고료가 모두 합쳐 20만 좌우라고 한다. 거기에 《송화강》, 《연변일보》 ‘해란강’문학부간을 비롯하여 《길림신문》, 《흑룡강신문》, 《료녕신문》 문예부간들의 원고료를 모두 합쳐도 30만원에 못미치는 액수이다.  “요즘 개인집들에서 갖출 수 있는 자가용 한대 값 정도인데 한두 사람도 아니고 전반 문단을 아우른다고 할 때 이만한 액수조차 해결할 방법이 없냐”고 최국철 주석은 안타까움과 개탄을 내비쳤다.  순 문학의 성질로 볼 때 무작정 시장경제에 투신해서 그 사명을 완수하기가 어렵다. 때문에 우리의 지도간부들이 소외된 문인들의 신음에 귀 기울이고 조선족 언어문자 신문, 출판, 방송에 중시를 돌려 ‘문학의 배고픔’을 덜어줘야 한다. 문인들의 사기진작과 창작의욕을 고취시키는 기본적인 원고료 문제부터 해결하여 우리의 문인들이 보다 나은 환경에서 문학의 꽃을 더 화려하게 오래도록 피울 수 있도록 정부와 기업, 더 많은 이들의 관심과 성원과 배려가 있기를 오늘도 주문해본다.    반가웁게도 작가대표대회가 끝난 지 두달도 못되여 랑보(朗报)가 들려왔다.  60년 경륜을 자랑하는 우리 말 문학지 《연변문학》이 참으로 오랜만에 원고료를 상향조절한 것이다. 새로 출두한 연변작가협회 지도부가 더 직접적으로 문인들에게 혜택을 줄 수 있는 새로운 지원제도를 만들고저 고심을 거듭하고 파워 있게 진척한 기꺼운 결과이다.  새해 첫기 톱자리에 소설과 칼럼을 발표했던 필자는 행운스럽게도 수십년 동안의 불문률을 깬 문단희사의 첫 수혜자로 되였다. 평소보다 3배나 더 높은 원고료를 받아드니 첫 원고료를 받아들고 가슴 높뛰던 문학도 시절 때처럼 문학의 의미와 작가의 자세에 대해 생각하는 시간을 새로웁게 가져보았다.  비록 원고료가 조금 인상은 되였지만 아직 한곳의 문학지 뿐이고 중국 문단이나 타민족 문단에 비하면 우리의 원고료는 아직도 턱없이 적은 액수이다. 그 인상은 미흡하지만 작가들의 창작의욕을 고취시키기 위한 긍정적인 발상이요 바람직한 과정이라고 문단은 일단 갈채를 보내고 있다.  차거움을 밀어내는 훈풍과 더불어 우리의 작가, 편집들이 고개를 쳐든 원고료와 함께 더 높은 곳을 지향해야 함이 제기되고 있다.  작가대표대회 기간 어느 한 대표가 원고료를 두고 한 생동한 지론을 인용해본다. “원고료 인상은 중국 축구와 마찬가집니다. 높은 보수로 주가가 높은 선수를 들여왔다면 단기간 슛하는 수자는 늘 테지요. 하지만 장원한 관점에서 보면 이는 중국 축구의 발전에 그닥 큰 작용을 놀 수는 없을 겁니다. 현저한 본질의 제고를 가져오기 어려워요. 문제는 전반 팀의 기술의 높이와 더불어 축구시장 기제의 원숙함과 수준 높은 팬들의 부응이 따라가야 하니깐요.” 원고료의 인상이 문학의 생존현황을 당장에 개변하기는 어렵다. 따라서 우리의 작가들이 더욱더 필을 진중하게 들고 우리의 문학지들이 정품으로 꾸며져야 날로 높아가는 독자들의 맛망울과 시장의 수요에 부응할 수 있고 잡지가 생존할 수 있으며 작가들의 높은 원고료 또한 장기적인 보장을 가져올 수 있을 것이다.  대표대회 기간 예언을 보였듯이 올 들어 중국 문단에서는 기본 원고료 표준이 또 한번 큰 폭으로 껑충 상향될 전망이다. 중국의 주요 매체들이 라는 표제로 사설을 발표, 이 한 변화에 긍정을 표했다.  원고료를 올리는 것은 이미 문단의 대세로 대두하였다. 아무리 시장경제가 선점하고 있는 현실이라 해도 문학에 대한 요구와 소비는 계속될 것이다. 때문에 원고료의 인상은 문인들을 위무해주고 격려해주는 ‘청심환’이며 문화에 대한 존중의 후례厚礼가 아닐 수 없다.  분조토론이 끝난 후의 오찬시간, 호텔 식탁에서 강소의 작가 소동과 마주쳤다. 지난 1997년 석가장에서 열린 전국청년작가창작회의에서 유일 조선족 대표로 참가한 나와 소동은 회의 기간 내내 이웃좌석이였다.  장예모의 영화 《붉은 등롱 높이 걸렸네》의 원작 소설 작가로 널리 알려진 소동은 나보다 두살 손우였지만 막언, 여화, 필비우와 더불어 전국에 문명文名을 떨치고 있었다. 그때 소동이 원고료 문제에 대해 얘기하는 걸 들은 적 있다. 당시 소동은 《신 란세가인》이라는 텔레비죤드라마의 씨나리오를 역시 문명이 하늘로 치솟아있던 왕삭과 함께 기획, 창작한다고 했다. 그때 소동이 원고료를 한회 당 30만원씩 받는다고 곁에서 소곤거렸다. 그 후 《신 란세가인》은 전국의 여러 텔레비죤 채널에서 방영되며 브라운관을 달구었다. 향항의 톱스타들이 대거 출연한 드라마는 저그만치 33부의 장편드라마였다. 그러면 그 원고비는? 나는 그만 아득함에 부지중 짧은 탄식을 내뱉고 말았다. 그런 문인, 그런 풍토가 부러웠다.  20년 전의 치기로 얼룩졌던 생각이 오늘날 문단 정상의 자리에 오른 소동을 다시 만나는 순간 또 한번 떠올라 나는 감회의 미소로 그와 인사를 나누었다.    우리 조선족 문단도 지금 ‘가장 낮은 원고료’라는 불명예와 불문률의 봉인을 뜯어젖혔고 작가들은 의욕을 보이며 소명에 답하는 마음으로 ‘소매를 걷고’ 있다.  바야흐로 높은 원고료를 지급하는 문학지가 더 많이 생겨나 문인들의 자긍심과 용기를 심어주었으면 한다. 앞으로는 원고료 지급 경쟁이 일었으면 하는 욕심 아닌 바람을 가져본다. 이제 원고료를 주며말며가 아니라 얼마나 많이 주느냐에 따라 얼마나 많은 작가들이 마른 붓을 적시고 얼마나 당찬 작품을 내놓느냐로 경쟁의 구도와 내용이 바뀔 터이니 말이다. 이런 ‘우후개화(雨后开花)’의 날이 우리 문단에 하루빨리 정착되기를 기대해본다.  (련재끝) 출처:2017 제3호
88    <장백산>2017.2 루계212 댓글:  조회:757  추천:0  2019-07-17
장백산 총212호 2017 제2호 기획조명-작가와 작품 상냥한 친구들(단편소설)  금희 단편소설의 서사적 특징(작품평)  김영옥   작가를 말하다 조선족문학,그 사랑에 빠지다(대담)  김홍란&오상순   기획련재 한락연평전(장편인물평전,련재2)   김혁 필끝에 건곤세상 있나니(련작칼럼,련재2)  김혁   제11회 중한작가회의 특집(2) 아버님 산소(시,외5수)     장홍파(중국)                           연영 옮김 9월이면 끝나리(시,외5수)  임백(중국)                           연영 옮김 “미霉”자로 단어를 만들어보세요(단편소설)  왕소왕(중국)                                          천년목 옮김 사랑의 꿈1(시,외6수)       정현종(한국) 사랑보다 낯선(단편소설)     박상우(한국) 오늘의 한국시와 타자의 언어(평론)   오생근(한국)   시인 시전 락조(시,외5수)    리임원 리임원의 시가 닿은 사랑과 평화의 경지(시평)   최삼룡   계렬수필 나를 부탁해(수필)         주향숙 나의 별것 아닌 날들(수필) 주향숙 어떤 기다림(수필)         주향숙 자신을 향한 내밀한 반성  강혜라 세상을 향한 따스한 시선(수필평)   창작마당 미미(단편소설)  해주 채소밭에서 수확한 사색쪼각(수필)  신기덕 흔적(수필)      김광영 비상하는 것은 날개가 있다(수필) 김옥화   장편소설련재 산귀신(장편소설,련재14)     림원춘 해볕이 춥다(장편소설,련재3) 구용기 무소유(장편소설,련재12)     정용호
87    김혁: 필끝에 건곤세상 있나니(칼럼, 련재2) 댓글:  조회:435  추천:0  2019-07-17
필끝에 건곤세상 있나니(련재2) 김혁   셋째도련님의 등장 -제9차 전국작가대표대회 수감록(4)   대회에 참석한 대표들 중에 이색적인 이름 하나가 있었다. 이색적이다 못해 듣는 이들로 하여금 당혹감의 눈초리를 쳐들게 할 이름이였다.  ‘당가삼소(唐家三少)’-‘당씨네 셋째도련님’이라는 무협지나 사극 드라마에나 나올 법한 이름이 대표명단에 올라있었다. 관변적이고 정례적인 전국작가대표대회에서 이런 파격적인 이름의 출현은 그야말로 ‘이단아’의 등장이나 다름 아니였다.  사실 ‘당씨네 셋째도련님’은 인터넷 문학계에서 언녕 그 문명을 알리고 있었다. 이름이 있었을 뿐더러 거의 ‘신화’적 존재로 ‘존앙’받고 있었다.  ‘당가삼소’는 본명이 장위(张威), 1981년 북경에서 태여났다. 현재 현세당문문화투자유한회사(炫世唐门文化投资有限公司)의 리사장 직을 맡고 있다.  하북대학 정법학원을 졸업한 그였지만 전공을 버리고 문학 쪽에로 매진했다. 명문가의 도련님처럼 하얀 피부에 훤칠한 키꼴의 귀골스러운 30대의 청년은 기성문단이 어딘가 외면하는, 온라인에서 맹활약하는 ‘군주’로 떠올랐다.  ‘당가삼소’는 대표작인 인터넷소설 《콘드라 대륙(斗罗大陆)》의 출판수익 및 각종 판권 계약으로만 약 1,680만딸라를 벌어들였다. 미국 일간 뉴욕타임스(NYT)는 “중국에서는 온라인문학이 큰돈이 된다”며 성공한 인터넷 소설가로 당가삼소(唐家三少)의 사례를 전문 소개, 이는 세계적 베스트셀러 작가인 스티븐 킹 등에 견줄 만한 수준이라고 찬탄했다.   12월 3일에 결속된 대표대회에서 ‘당가삼소’의 이름은 또 한번 그의 작품과도 같은 최다 클릭수를 보였다. 이 온라인의 ‘도련님’이 중국작가협회 주석단 위원으로 당선된 것이다. 중국 문단에서 인터넷 작가로는 처음이고 주석단 위원으로서도 가장 어린 나이였기에 그 파장은 컸다. 미모의 녀작가 철응이 두번 련속 작가협회 주석으로 당선된 이슈에 못지 않은 인기였다.  그 날 저녁, 여러 매체의 취재를 받는 ‘당가삼소’가 뉴스에 나타났다.  “인터넷문학대오의 성장은 중국문학의 판도를 바꾸고 있습니다.”라고 말머리를 뗀 ‘당가삼소’는 중국 인터넷문학의 전망에 대해 락관을 표했다.  “인터넷문학은 대중문학 소비의 다른 한 의미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또한 인터넷문학의 건실한 성장은 중국문학에 유력하고 방대한 후비력량을 보충해주고 있다고 봐야겠지요. 몇십년래 우리 나라에는 몇백만에 이르는 인터넷작가들이 나타났는데 이는 세계문단에 놓고 봐도 그 어느 나라도 흉내낼 수 없는 가관적인 수자일 것입니다.  문학이 발달했다는 나라들로 봐도 겨우 몇백명, 몇천명에 이를 뿐 이처럼 방대한 작가군체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지요.”   대표대회에 참석했던 북경대학의 진효명(陈晓明)교수도 동감을 표했다. 진교수는 이 몇백만명의 인터넷작가들 중에 “백분의 일, 천분의 일만 정품을 내놓아도 놀라운 수자이며 중국문학은 희망이 보일 것”이라고 했다.  ‘당가삼소’는 “인터넷문학군체는 마치 하나의 탑을 방불케 합니다. 탑의 기초가 깊을수록 탑은 더 높게 솟을 겁니다.”며 인터넷문학이 평지로부터 고봉에로 치달아오르기를 희망했다.   인터넷문학에서의 활약은 이 ‘셋째도련님’ 뿐만이 아니다. 일전 중국 인기 온라인 소설작가들의 2015년 판권가격이 공개됐다. ‘당가삼소’의 2015년 판권수입은 1억 1,000만원으로 1위, 랭킹 2위인 천잠감자(天蚕土豆)는 4,600만원, 3위 양진동은 3,800만원을 각각 벌어들인 것으로 집계됐다. 상위 10위 작가들은 모두 천만원이 넘는 판권수입을 올려 사회의 부호대렬에 합류했다. 불과 3년 전인 2012년에 비해 이 인기작가들의 판권가격은 무려 17배 수준으로 폭등했다. 놀라운 것은 이들 대부분이 1980년 이후 태여난 20, 30 대 젊은 작가들이라는 점이다. 이들은 감각적인 필력으로 인터넷시대, 모바일시대 독자들의 감성을 파고 들며 일약 명문을 알렸거니와 부호의 대렬에 합류했다. 최근 보도에 따르면 중국 인터넷 소설작가의 수는 현재 200만명이며 그들에 의해 매년 7만부의 작품이 새로 탄생하고 있다고 한다. 인터넷작가들이 창작한 인터넷소설은 또 영화, 게임, TV드라마 등으로 만들어지며 수천만원의 수익을 내는 다양한 문학, 인문 콘텐츠로 떠오르고 있다. 현재 우리 나라에서 모바일 독서앱을 통해 전자책을 내려받아 읽는 독자층은 무려 7억에 육박한다고 한다. 거대한 전자책 독자층들은 중국 전자책 시장을 미국에 이은 세계 2위에 올려놨다.  한편으로는 온라인 작가들을 신흥의 백만장자로 거듭나게 하고 있다. 그들의 작품이 영화나 TV드라마, 게임으로 만들어져 국내 혹은 해외 시장에서 흥행에 성공할 경우 작가들은 말 그대로 ‘돈벼락’을 맞는 것이다. 글솜씨 하나로 1년에 수백만원에서 수천만원을 벌어들이는 온라인 소설가들이 부지기수이다. 이 몇년 간 서점가를 강타하고 브라운관을 달군 베스트셀러, 인기 드라마인 《무덤도굴기(盗墓笔记)》, 《서장의 비밀코드(藏地密码)》, 《두라라 승진기(杜拉拉升职记)》, 《견환전(甄嬛传)》, 《보보경심(步步惊心)》, 《랑아방(琅琊榜)》, 《화천골(花千骨)》, 《청운지(青云志)》 등이 모두 이들 인터넷작가들의 손을 거쳐 나온 작품들이다.  중국의 오락게임 사이트인 성대(盛大)가 운영하는 기점중문(起点中文)넷에는 하루 1,100명의 작가가 글을 쓴다. 그처럼 인터넷 주가를 올리고 있는 문학사이트들인 진강晋江넷과 홍수첨향(红袖添香)넷에는 매일 3,400만자의 새로운 글이 쏟아져 나오고 독자들의 하루 클릭수도 4억회에 육박하고 있다고 한다. 성대문학 사이트는 고정 고객만 3,500만명을 보유하고 있고 이중 400만명은 유료 고객이다. 중국 작가들에게 요즘 인터넷 창작공간은 돈이 쏟아지는 화수분이다. 중국문단에는 더 이상 ‘글쟁이는 청빈하게 산다’는 말이 통용되지 않는다.  알리바바의 회장 마운도 문학시장에 눈을 돌리고 있다. 영화, 드라마 회사와 계약을 하며 투자를 하던 데 이어 인터넷문학의 플래트홈까지 그 투자를 확장하고 있다. 중국을 움직이는 거대 기업가도 이미 인터넷 사이트와 손을 잡은 것이다.    인터넷이 새로운 창작공간으로 정착한 것은 중국문단으로 말하면 하루이틀의 일이 아니다.  일찍 1998년 이후 인터넷소설이 등장했고 그 후 우후죽순으로 성장해나가기 시작해 현재까지 강한 상승세를 이어가고 있다. 인터넷소설은 재빨리 동영상, 애니메이션, 게임 등과 같은 문화산업의 령역과 융합했고 따라서 인터넷 문학산업의 영향력은 점점 커지고 있다. 각 지역마다 인터넷소설협회가 생겨나고 있으며 정부의 관심 또한 높아지는 추세이다.  이번 제9차 전국작가대표대회에 발탁된 900여명의 대표들 중 인터넷작가는 30명을 넘겼다. 그 전기인 제8차 전국작가대표대회에서 인터넷작가 수는 고작 ‘당가삼소’ 한사람 뿐이였다. 이는 인터넷문학의 지명도와 중시도를 보여주고 있다.    세계적으로 이 만한 무대가 없다 싶을 정도로 해마다 발전하며 한층 성숙해지는 모습을 실감할 수 있는 인터넷문학이다. 작품이 경박해지고 정통문학에서 멀어진다는 걱정과 별개로 인터넷세대들의 문학코드는 명징하다. 그 소재로 력사, 무협, 공포, 미스터리물들이 주로이지만 직장인들의 애환과 성공, 사회의 음양을 그려낸 력작도 적지 않다. 이들의 인터넷 문학작품들에서 달콤한 로맨스나 칼과 검이 수풀처럼 일어서는 무협지 등이 단골소재만이 아니라 지금 사회의 일단면도 신랄하게 엿볼 수 있다.  ‘셋째도련님’도 인터뷰에서 자신은 작품 속에 시종 “계시적인 인문관심을 관통하려 했다”고 그 창작의 자세를 표명하였다.  지난해 중국 내에서 가장 권위있는 문학상의 하나인 ‘모순矛盾’문학상에 처음으로 인터넷소설 《무덤도굴기》가 거론되였고 ‘당가삼소’가 중국작가협회 위원으로 선거되는 등 이젠 엄숙하게 문학의 형성을 주도하고 있는 중국작가협회에서도 인터넷소설을 지체높은 문학의 ‘상아탑’에 들이고저 하는 분위기이다. 중국을 대표하는 작가들도 최근 인터넷 발전과 함께 급속도로 류행하고 있는 중국의 인터넷문학이 정통문학에 큰 위협이 되지 않는다고 평가했다.  중국 현대문학을 대표하는 인물들이 오래전부터 인터넷문학에 대한 긍정과 수긍의 자세를 보였다. 원로작가 왕몽(王蒙)과 작가협회 주석 철응은 몇해 전에 이미 북경국제미디어센터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이 같은 견해를 밝혔다.  철응은 “최근 발달한 인터넷문학은 정통문학과 공존하고 있지만 치명적인 타격이나 실질적인 위협이 되고 있지는 않다”고 말하면서 “그러나 닉명성을 특징으로 한 인터넷문학이 중국인의 삶을 풍부하게 하고 문학의 다양성을 제고하고 있다”며 긍정적인 역할이 있음을 인정했다.  왕몽 역시 “한번도 인터넷이 진지한 정통문학을 창작하는 작가들에게 위협이 된다고 말해본 적이 없다”면서 “인터넷문학과 정통문학은 서로를 자극해 상생하는 측면이 있다”고 인정하면서도 “정통문학과 인터넷문학의 일부 작품들은 수준에 못 미치는 경우가 적지 않기 때문에 이는 문학계가 지불해야 할 대가”라며 원로로서의 걱정을 드러내기도 했다.    중국문단이 인터넷 공간을 자신들의 시스템 안에 적극 끌어들이고 있는 것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과거 문학지들을 통해 작품을 발표하던 시절과 달리 문학의 만남이 기존 무대의 기능에 그치지 않고 다른 무대를 마련해주고 있는데 그에 따른 새로운 접근방식이 필요하다. 문학이 인터넷으로 옮겨왔을 때 새로운 내용과 형식에 대한 고민이 필요한 시점이다. 미디어의 변화가 작가들의 창작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에 대해 우리는 따져봐야 한다. 그렇다면 인터넷과 문학의 접속은 어떠한 사회적 맥락에서 일어나고 있는 것일가? 이것이 우리 조선족문학에 미치는 영향은 또 무엇일가? 조선족의 온라인 활용 상황을 살펴보면 사용자의 태반이 해외의 사이트를 리용하는 외 조선족이 직접 일군 사이트도 적지 않다. 일반 대중들은 이러한 사이트들을 리용해 메일로 친지, 친우들과 편지를 주고받는 것이 통상적인 활용법이다. 그중 ‘모이자’, ‘조글로’, ‘조선족문화통신’ 등 용량이 큰 사이트가 근년래 활약 상을 보이고 있다. 이러한 사이트들은 저 마다 문학코너를 공간을 크게 할애해 마련하고 있다.  거기에 작가 개인이 스스로 개설한 블로그와 문학까페를 더해보면 제법 작지 않은 ‘인터넷문학공간’이 마련되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사이트들에서는 기성작가의 문학작품이나 명사들의 칼럼을 싣고 또한 네티즌 독자들이 직접 참여할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하고 있다. 한달에 20-30여편, 기성작가 뿐만 아니라 신진, 문학지망생들의 작품도 올라오고 있는데 누리군들의 호응이 높다.   인터넷문학이 본격화된 것은 잡지사, 출판사들의 운영 전략과 작가들의 욕구가 맞아떨어진 결과라는 게 일반적인 평가다. 문학을 지향하는 신진들은 문학지 등을 통해 확보하고 있는 기존 문학무대에 재빨리 진입하기가 쉽지 않다. 인터넷 공간은 이런 측면에서 데뷔의 벽을 낮췄다. 그만큼 이야기도 다양하고 쟝르도 다양하다. 우리가 듣지 못한 낯선 작가도, 낯선 작품도 많다. 기성 작가와 아마츄어 작가가 온라인 우에서 격세지감을 떨치고 동등하게 활동을 펼친다.  다른 한편으로 우리의 문학지들은 변혁기의 소용돌이 속에 부대끼는 와중에 작자와 독자의 급감으로 기존방식으로는 시장의 변화를 따라잡을 수 없게 됐다. 여기에 문학지 이외에는 소설을 발표할 지면을 얻기가 어려웠던 신진작가들의 욕구가 겹치면서 인터넷문학이 문학인구가 적은 우리 문단에도 조용히 수용되였다고 봐야 할 것이다. 또 종이책의 비싼 출간비용 때문에 출간을 엄두 못 내고 주저하던 작품을 온라인에서 전자책으로 출간하면서 그 출간의 소망을 이룰 수도 있다. 종이책의 경우 편집자와 잡지사 출판사의 엄격한 기준의 자대를 거쳐 출간된다. 그러다 보니 투고되는 원고의 많은 부분이 세상에 빛을 보지 못하고 만다. 하지만 온라인에서는 그 출판이 오프라인에 비해 손쉬워진 것이다.  인터넷과 책이 련결될 것처럼 보이지 않았는데 결과를 놓고 보면 오히려 인터넷을 통해 문학이라는 이름으로 재빨리 현시되고 다시 출판계와 책으로 이어지게 된다. 다르다면 해외나 중국 문단의 경우 인터넷으로 인기를 얻은 작품들이 책으로 만들어지는 데 반해 우리 문단은 책으로 출간된 다음 다시 인터넷에 작품이 뜨는 ‘역행’적인 경우가 보통이다.    필자의 경우, 수상의 혜택으로 겨우 몇백부 인쇄되여 서점가에도 오르지 못했던 첫 장편소설 《마마꽃, 응달에 피다》가 인터넷과 위챗을 통해 다시 절찬을 받으며 련재되여 더 많은 독자를 확보하기도 했다.  인터넷문학의 또 다른 특징은 다양한 작품을 무료로 열람할 수 있다는 점이다. 이렇게 인터넷독서를 체험한 독자들이 그 작품이 종이책으로 출간된 후 확장구매하는 경우가 많다. 인터넷에서 먼저 선보여 독자가 재빨리 접하고 평가하는 시스템이다. 때문에 해외에서는 인터넷을 통해 베스트셀러 작가가 태여나고 기존의 출판 관문을 이미 넘은 기성작가들도 인터넷이라는 관문을 다시 넘어야 할 수 밖에 없다.  우리의 경우는 이와 많이 다르다. 인터넷에 나간 작품이면 종이지면을 절대 탈 수 없다고 어떤 편자들은 우직한 자대를 들이댄다.  필자 역시 개인 블로그에 먼저 게재됐다는 리유로 어떤 편집들로부터 야박한 거절을 당한 적 있다. 하지만 그 거절당한 작품이 다른 잡지의 톱에 버젓이 실렸던 경우도 있었다.  이처럼 편집자들과 수많은 누리군들이 소통에 동참하면서 작가를 격려하고 집필과 발표, 출간에도 긍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다. 문학작품에 대한 독자들의 접근성을 높이면서 종이매체를 통해서는 쉽지 않았던 독자들과의 쌍방향 소통을 보일 수 있는 것이다. 종이책과는 달리 댓글을 통해 누리군들의 반응을 실시간으로 접하게 되는 인터넷 공간이 작가들의 작업방식에 영향을 미친다는 점은 간과할 수 없다.  누리군들의 대부분 댓글은 작가들을 격려하는 내용이다. 그러나 부수적인 효과도 있다.  댓글을 달지 않는 현상을 가리켜 ‘무플’이라고 한다. 인터넷 공간에 떠오른 우리 작가들의 많은 글은 ‘무플’로 괴잠잠하다. 그만큼 문학에 대한 대중의 반응이 시큰둥하다는 현상으로 읽을 수 있겠다. 문제는 그보다 악플 수도 만만치 않다는 것이다.  우리 문단에 악플러도 분명 있다. 성숙하지 못한 누리군들이 닉명이라는 인터넷의 특성을 악용해 작품에 대해 딴죽을 걸거나 악플을 다는 경우도 많다. 때로 사이트 편집자들이 특정 작가에게 몰부어지는 밤새 떠오른 악플 지우기에 힘들다는 고소도 있다. 그 때문에 자신의 코너를 페쇄한 작가도 한둘이 아니다. 댓글이 도를 지나쳐 악플러의 아이피를 추적하여 잡은 경우도 있다.  그 와중에 이미 충분한 대중적 인지도와 숙련된 기량을 갖추고 있는 중견작가들이 인터넷시대 문학의 변화와 새로운 가능성을 감지하고 인터넷작품을 긍정하는 립장이라면 젊은 작가들의 경우 작품을 발표할 지면이 늘어났다는 점을 인터넷문학의 장점으로 꼽는다. 예전에는 문학지 겨우 몇개로 지면이 한정돼 있는데다가 문단의 인지도가 있어야만 작품발표의 기회를 얻을 수 있었다. 하지만 인터넷 공간은 젊은 작가들에게도 기회를 균등하게 제공한다는 점에서 아주 고무적이다. 문학의 위상이 바닥으로 떨어져 독자인구가 가련할 정도로 적고 절대부분의 작가들이 문학을 생계를 유지하는 방편으로 삼을 수 없는 우리 문단의 상황에서 사이트의 문학공간은 지속적으로 작품을 생산할 수 있게 하는 ‘지레대’ 구실을 은연중에 하고 있다.  인터넷문학을 비롯한 쟝르문학 작품들은 우리가 갖고 있던 작품에 대한 정의와 가치기준으로 보면 맞아떨어지지 않는 경우가 많다. 우리가 인식하고 있는 기존의 문학이나 소설에 대한 정의, 역할 등 면에서 현격한 관점의 차이를 보이면서 기존의 양식과 구분되고 있다. 요즘의 인터넷문학을 보면 인터넷작가들만의 환상작인 소재, 파격적인 구성방식, 그들만이 오가는 은어, 전용어 즉 축약되거나 변용된 부호의 인용, 마치 삽화처럼 사용되고 있는 이모티콘 등으로 그들만의 창작방식이 있다. 하지만 우리의 인터넷 문학작품들에서는 그러한 요소들이 거의 보이지 않았다. 오프라인에서 온라인에 오른다고 해서 그것이 인터넷문학인 것은 아니다. 그런 만큼 인터넷문학 또한 인터넷이라는 미디어의 장점을 최대한 리용할 수 있는 형태의 문학을 탐구하는 작가들이 더욱더 많아져야 한다.  우리 문단에서 20대, 30대는 물론 50대까지는 인터넷 활용이 그나마 능란하다고 봐야 할 것이다. 이들은 조선족 유명 사이트들에서 개설해준 자체 코너를 가지고 있는가 하면 스스로 개설한 개인 블로그를 가지고 있고 까페도 운영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 인터넷문학 세대는 60대부터 편을 가른다고 봐야 할 것이다. 물론 70대의 작가들 중에도 컴퓨터를 두드려 창작하고 메일을 사용하여 작품을 투고하는 이들도 있지만 인터넷문학 공간을 폭넓게 활용하는 작가는 한손에 꼽을 정도로 극히 적다. 우리 문단의 문학세대의 구분에 대해 고민하는 평론가들을 보았는데 이 또한 하나의 구분점이 아닐가 생각해본다.       기존의 문인들은 이를 문학의 정통을 헤집는 불편한 도구 쯤으로 보고 있는 시각도 있다. 아직도 이메일조차 사용할 줄 모르는 작가도 분명 있다. 손글씨라도 자신의 글이 나간다며 인터넷을 ‘시들방귀’로 폄하하는 작가들도 있다. 인터넷세대들이 그들의 문법으로 쓰고 읽고 류통하는 방식에 기성세대도 관심을 가져야 한다. 이제 우리의 기성작가들은 적극 이 마당으로 뛰여들어야 한다. 문단의 기존 성과나 명망에만 집착할 게 아니라 요즘 독자들과 새로운 사유, 새로운 기기와 소통해야 할 것이다. 인터넷문학에는 신진들의 가벼운 글 뿐만 아니라 순수 작가들의 힘있고 진중한 언어도 필요하기 때문이다. 중후하게 이어져 내려온 만년필과 원고지 뿐만 아니라 인터넷 또한 문학의 또 다른 도구일진대… 그 와중에 초기의 우려와는 달리 지금의 인식은 인터넷이라는 공간이 잡지라는 전통적인 산물을 배제하고 우리 문학에 부수적인 영향을 끼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욱 확산시키고 발전시킨다는 긍정적인 인식이 자리를 잡아가고 있다. 인터넷문학은 작가들이 작품을 발표할 수 있는 기회를 생산한다는 측면에서 보더라도 긍정적 측면으로 읽힌다. 더우기 우리 문학처럼 위축된 지금의 상황에서 말이다. 전통문학과 인터넷문학의 결합은 축하할 일이지 결코 배척과 매도할 일이 아니다.    그렇다고 우리의 인터넷문학이 긍정적인 측면만 있는 것은 아니다. 어느 한 비평가는 ‘인터넷문학은 량날의 검’이라고 했다. 부면적인 영향도 작지 않게 표출되고 있다.  몇몇 방송 사이트들에서는 인터넷매체의 장점을 살려 유명 작가들의 시작품들을 육성으로 랑독한 오디오 파일도 올리고 있다. 인터넷이나 핸드폰으로 우리 작가들의 작품이 전파되는 모습을 자못 ‘므흣(기쁘거나 만족된 감정상태를 표현하는 말을 뜻하는 인터넷의 신조어)’하게 바라본 적 있다. 하지만 유감스러운 것은 우리의 유명 문학지들이 자체의 사이트조차 없다는 점이다. 이는 중국문단의 거의 모든 문학지들이 사이트를 용유하고 있는데 비하면 락오된 인식의 차이로 볼 수 밖에 없다. 독자와 작가, 작가와 잡지사들 지간의 온라인과 오프라인의 쌍방향 소통이라는 점에서 이러한 전문 사이트의 개설은 필요할 뿐더러 중요한 플래트홈 작용을 할 것이온데…  기존 문학지와 인터넷 사이의 ‘역할분담’은 앞으로 그냥 풀어나가야 할 숙제다.  존속을 위해 몸부림치는 우리 문단과 출판계에 있어서 이러한 새로운 시도, 소통과 소비가 획일화로 결과되던 우리 문학에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은 과히 나쁜 발상은 아닐 것이다. 사회적 영향이나 위세가 점점 약화되고 있는 우리 문학의 처지에서 인터넷의 원활하고 우수한 가능성에 지금보다 더 적극적으로 다가갈 필요가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인터넷에 떠오르는 작가들의 창작자세가 많이 도마에 오르고 있다. 작가들의 편의에 따라 량산되는 작품들 중에 진중한 이야기보다는 가벼운 이야기로, 다듬어진 문체보다는 쉬이 필을 댄 조잡한 글들이 란무하는 경향이 있다.  지면이 많고 쉽게 지면을 가질 수 있다보니 작품을 람발하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탄생하는 작품들이 과거의 기존의 투고와 발표의 형식으로 굳혀져온 관례에 비해 더 높은 수준을 유지하고 있는가에 대해서는 아직 지켜봐야 할 일이다.  몇해전에 우리 문단에서 참으로 반갑게 전문 인터넷문학상이 공모되였는데 심사위원의 한 사람으로서 응모에 오른 작품들을 읽으면서 생각되는 바가 많았다. 인터넷문학이라는 쟝르문학의 요소에 거의 근접하지도 못한 작품들이 대부분이였기 때문이다. 안타깝지만 심사위원들 대부분이 우리의 인터넷작가들의 문학 전반에 대한 리해와 예술적 안목이 성숙되지 않았다는 정평을 내리지 않을 수 없었다.    참여의식과 열기는 보였지만 우리의 인터넷문학이 문단에서 하나의 새로운 력량으로 자리매김한다는 것은 아직 성급한 판단이라고 본다. 해외에서도 학자들이 인터넷소설을 부정적으로 보는 시각에는 “기존의 소설양식이 가지고 있는 구성의 치밀성과 예술성이 떨어지고 언어에 대한 투철한 자각이 결여되여있어 민족어의 상실과 그로 인한 민족의 정체성이 위협받는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는데 우리의 인터넷문학에도 적용되는 말이라 생각된다.   이렇게 여러모로 아직도 독자와 편자, 평단 사이의 성숙의 궤도에 오르지 못한 우리 인터넷문학의 병페를 살펴보면서 인터넷문학이 먼 도정 우에 있는 우리 문학의 또 하나의 플래트홈으로 자리잡기를 소망해보는 것은 필자 한사람만의 넓은 오지랖이 아닐 것이다. 다만 인터넷이 문학에 끼친 각종 영향을 평가하고 향후 문학과 인터넷이 상생하며 발전할 수 있는 방안을 연구해야 하는데 우리 문단에서 이러한 테마의 평론이 전무한 것이 안타까운 일이다. 우리 문단에서 인터넷문학이 언제면 제자리를 찾을 수 있을 것인지? 안타깝지만 당장은 어려워보인다.  새로운 지면이 사라지고 태여나는 현상에 대해 우리 작가들은 어떤 립장을 취해야 할가?  우리 문단에서 이러한 당혹은 아직도 진행형이다. (다음호에 이음) 출처:2017 제2호
86    <장백산>2017.1 루계211 댓글:  조회:714  추천:0  2019-07-16
장백산 총211호 2017 제1호 기획조명-작가와 작품 한락연평전(장편인물평전,련재1)              김혁 필끝에 건곤세상 있나니(련작칼럼,련재1)  김혁   작가를 말하다 고향을 쓰는 작가(대담)     최국철 김홍란   제10회 중한작가회의 특집(1) 사랑시(단편소설)          김인순(중국)                            천년목 옮김 하얀 운동화(단편소설)     왕가심(중국)                           권혁률 옮김 회전식당에서 들려준 이야기(단편소설)  구소빈(중국)                                       김견 옮김 이장동화(단편소설)        김주영(한국) 인터넷 대중과 문학적 실천(평론)       김주연(한국) 정님이(시,외5수)          이시영(한국)   조광명소설코너 두팔을 펼치면 날개인것을(단편소설)    조광명   소설광장 블랙 블랙 블랙아웃(단편소설)          조원 새로운 체계로의 진입을 위한 의도적 블랙아웃(소설평)  리태복   시인 시전 마늘(시,외5수)    리상학 그리움의 울타리 그리고 추억(시평)   김몽   계렬수필 지하철 오감도(수필)  리은실 랭면 쏘나타(수필)    리은실 데지 않을만큼,춥지 않을만큼...(수필)  리은실   창작마당 개미(단편소설)   장학규 고개 숙인 벼이삭들을 보면서(수필)  강효삼 멈추면 비로소 보이는것들(수필)     김점순 락화(시,외2수)   김정권 겨울밤을 걷습니다(시,외1수)  임은숙   장편소설련재 산귀신(장편소설,련재13)      림원춘 해볕이 춥다(장편소설,련재2)  구용기 무소유(장편소설,련재11)      정용호  
85    김혁: 왕붓으로 돋을새김할 그 이름들 댓글:  조회:464  추천:0  2019-07-16
왕붓으로 돋을새김할  그 이름들 김혁   십여년전부터 나는 내 고향 룡정의 력사와 인물을 정리하는 작업에 투신하기 시작했다. 중국조선족문화의 발상지이자 민족의 독립과 반일의 전초였던 룡정에 대한 긍지와 자호감을 머금고 시작한 벅찬 작업이였다. 휴일을 타서 혼자거나 혹은 동인들을 휘동하여 력사전적지 수십여곳을 일일이 답사하고 수백명의 관련 증인, 유가족, 학자들을 찾아 취재한 끝에 50만자에 달하는 장편력사기행 “일송정 높은 솔 해란강 푸른 물”을 집필하여 대형문학지에 3년간 련재를 마쳤다. 그 와중에 한락연이라는 이름과 다시금 만나게 되였다. 비록 예전의 력사총서들에서 한락연에 대해 접하지 않은것은 아니지만 룡정의 대사기, 룡정이 배출한 인걸들의 력사를 세세히 쫓는 가운데서 나는 한락연은 응당 기행문의 한단락으로 쉽게 묘사할 인물이 아니라 대서특필해야 할 인물, 작은 글체로써가 아니라 대문자로 돋을새김해야 할 인물임을 황연대오(恍然大悟) 느끼게 되였다. 한락연, 그를 지칭하는 칭호는 많다. “인민예술가”, “정치활동가”, “반파쑈투사”, “동북지구 공산당의 초기 창시자”, “조선족 첫 공산당원”, “중국의 피카소”… 여러가지 타이틀로 력사의 갈피에 그 이름이 우람하게 적혀있다. 한 사람을 두고 이렇듯 평가가 다채로운것은 그가 살아온 인생이 그만큼 다채롭다는 방증이다. 이주민의 후예로서 룡정에서 출생한 한락연은 짧은 생을 살았지만 그의 행동반경은 실로 종횡무진이였다. 세상의 모습을 올곧게 그려내는 한편 그는 그림에만 매달리는 다른 화가와 달리 좁은 화폭안에서 살아가는 화가로 만족하지 않았다. 민족의 독립과 해방의 사명을 짊어지고 거대한 중국대륙을 무대로 혁명투쟁에 혼신을 바쳤으며 국공량당의 통전사업에도 커다란 기여를 했다. 또한 서역의 문화재 발굴에 선구자적인 업적을 남기기도 하였다.  한락연은 그야말로 예술가로서, 열렬한 사회활동가로서, 굳건한 “력사문물의 지킴이”로서 시대적사명에 충실한 지성인들의 귀감이였다  .  그 생애에 초연이 피여오르는 력사의 현장에서 수많은 역경을 겪어왔지만 운명의 굴레에 짓눌려 지내지 않고 예술가적 기질을 보이고 실천한 동시에 고매한 혁명가적 기질로 커다란 업적을 남긴 한락연을 통해 우리는 예술에 대한 그의 순수한 열정과 고난을 대하는 그의 락관주의적 풍모를 대할수 있을것이다.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비록 그가 살았던 세상과는 상전벽해라고 할 정도로 많은것이 바뀌여버렸지만 그가 보여준 진취적인 삶과 정신만은 여전히 유효하다고 생각해본다. 주은래총리가 생전에 “왜 한락연을 위한 전기물이 나오지 않냐”고 애석해했듯이 그에 대한 조명은 여러모로 진행되고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 완정한 인물전의 결여로 그의 생애는 편파적으로 알려져있으며 이로써 커다란 유감을 남기고있었다. 중국에서도 그에 대한 추모문집 한두부가 나왔을뿐이고 해외에서도 그에 대해 조명한 문장이 더러 있으나 겨우 수만자 미만, 몇편 정도의 미비한 량에 그쳐있었다.  중국조선족의 수많은 인걸들중에서도 혁혁한 인물인 그에 대한 체계적인 인물평전조차도 없다는것은 어찌보면 우리 후세로서는 결례요, 실책이라 말해야 할것이다. 그리하여 한 고향의 위인에 대한 숭모의 감정을 품고 인물전기 집필에 열정을 불살라 착수했다.  2008년부터 사비를 털어 한락연의 자취를 찾아 심양, 할빈, 치치할, 상해, 중경 등 지역을 답사하였다.  그를 바탕으로 한락연 관련 신문기사, 인물소개들을 다각적인 쟝르를 동원하여 수차 간행물들에 기고, 발표하였고 《연변일보》 《종합신문》 주간에 그의 인물전기를 8개월간 련재하였다. 그리고 청소년을 대상으로 한 한락연 인물전기를 책자로 묶었다.  한락연이라는 인물에 천착되여 관련 연구를 감행한지도 어언 8년 철이다. 그만큼 힘든 시간, 벅찬 시간들이였다. 그리고 속필을 자랑하는 나였지만 감불생심 평전에 필을 대는 가벼움이나 서두름을 보이지 않았다. 아직도 한락연의 일대기에 대한 나의 집필은 선인들의 연구를 바탕으로 진지함을 기하는 진행형이라 해야 할것이다.    근년래 우리 문단에서도 뒤미처 인물전기서들의 “보물”이 터진듯하다.  문학적 감동과 학술적 객관성을 함께 지닌 묵직한 분량의 인물전기들은 침체화, 단일화 경향을 보이던 우리 문단에 새로운 활력소를 주입해주고있다. 품격이 두드러진 인물전기 수작(秀作)을 읽을수 있기를 우리의 출판과 독자들은 바라고있다.  그에 편승하여 이 십여년동안 나는 한락연외에도 자치주 창립의 산파인 주덕해, 겨레의 창공에 “별”처럼 빛나는 민족시인 윤동주, “조선족문단의 거목” 김학철, 상해와 태항산을 주름잡으며 일제와 싸운 항일녀걸 리화림, 무성영화시대 오렷한 소리와 자취를 남긴 “영화황제” 김염 등 우리들의 자랑스러운 인걸들을 장편소설, 인물평전, 청소년전기 등 픽션과 논픽션물로 재현하는 작업에 몰두하여 관련서적들이 이미 출간되였거나 바야흐로 출간중에 있다.  수십년동안 매체의 기자와 소설가로서의 삶을 병행해 살았던 나에게 있어 “문학적 다큐멘터리”로 특징지을수 있는 저널리즘적 글쓰기가 남들과 차별화된 나만의 창작성향이라고 말하고싶다.   사학자들은 력사란 “인간이 거쳐온 모습이나 인간의 행위로 일어난 사실을 말하는 단어”라고 정의하고있다. 력사의 물줄기를 바꾼 개인의 삶을 통해 우리는 한 시대와 만나고 그 시대의 공과를 헤아려볼수 있다. 변화의 시대를 보아내고 넉넉한 삶을 예시하는 새로운 눈을 인물전기들은 갖게 한다. 여기에 인물전의 매력이 있다.  시대에, 제반 분야에 굵직한 획을 그은 우리의 위인들을 조명하는 작업은 현재 변혁기의 소용돌이에 꺼둘리고있는 민족의 발전과 우리의 삶에 기气를 불어넣고 비젼을 제시하는 좋은 작업으로 될것이라고 나는 믿어의심치 않는다. 그리하여 오늘도 나는 왕붓을 무겁게 고누고 만방에 자호할 우리네 인호(人豪)들의 진영(真影)을 한획, 한자 경필(劲笔)로 그리고있다. 굵다랗게 돋을새김하고있다.    출처:2017 제1호
84    리은실: 지하철 오감도(수필, 외2편) 댓글:  조회:447  추천:0  2019-07-16
지하철 오감도 리은실   사시장철 끝도 없이 늘어선 지하철역의 출근족 대오는 우리 나라 수도 북경의 한폭의 풍경선이다. 손에 “유툐(油条)”, 콩물 등 아침 먹거리를 들고 선 사람들, 아직 잠이 덜 깨 연신 하품을 하고있는 사람들… 이들은 모두 어디론가 향하여 가고있는 사람들이다.  곁눈질을 할 여유가 없이 달려가고있는것이다.   아침 지하철은 이같이 아직 해가 뜨기전부터 한무리의 사람들을 맞으며 비로소 하루를 시작한다.  지상에서 달리는 차들은 변수에 로출되기 쉽다. 교통체증을 만난다거나 교통사고가 일어난다거나 혹은 갑자기 다이야가 터져버린다거나 하는 등등이 모두 그 변수이다. 그러나 지하철은 매우 온건하게 정해진 시간에 정해진 사람들을 정해진 곳까지 여간해서는 변수가 없이(상대적으로) 빠르게 데려다준다.  그것이 이 도시 출근족들이 지하철을 애용하는 절대적인 리유이다. 서로에게 눈길 한번 줄 여유도 별로 없는 고단한 인생들의 집합체인 지하철안에는 그래서 별의별 사연과 이야기들이 담겨있다.   이야기 하나 직장의 파견을 받고 나는 오늘부터 해정구(海淀区)에 있는 교육기지로 닷새동안 연수받으러 다녀야 한다. 어떤 리유로든 출근을 하지 않는다는건 매우 설레고 행복한 일인줄 알았다. 지하철에 오르기전까지는…   습관처럼 매일 서던 위치에 가서 줄을 섰다. 멀리서 전동차가 달려오는걸 넋 놓고 바라보다 그제서야 아차- 하고 놀랐다. 오늘 가야 할 연수기지는 회사와는 정반대쪽 방향이 아닌가? 서둘러 씩씩거리며 반대쪽으로 달려갔다. 이쪽도 줄이 길기는 마찬가지다. 예상대로 첫 차에는 탑승을 못했다. 두번째 차가 오자 이번에는 어떻게든 올라타야지 마음 먹고 령장류의 어떤 동물처럼 날렵하게 렬차안으로 몸을 던져넣고는 손잡이를 단단히 잡았다. 다음역은 “룡택(龙泽)”역. 역에 도착하자 또 한무리 사람들이 아등바등 올라탄다. 내 몸은 간신히 손잡이에 매달려 무기력하게 휘청이고있을뿐. 심장이 옥죄여드는것만 같았다. 그다음은 “서이기(西二旗)’역이다… 아, 이렇게 촘촘한 인파는 일찍 본적이 없다. 콰악 밀치며 서너명의 녀자가 뿌려져 들어왔다. 뭉클한 가슴으로 나를 압박해온 녀인은 표준적인 녀장부였다. 나보다 키가 한뼘은 더 큼직한 그녀는 내 얼굴쪽을 향해 거친 숨을 내뿜었다. 아침메뉴는 닭알과 부추로 소를 넣은 만두를 드셨는가보다! 눈을 감았다. 코를 막는게 더 시급하지만 사람들 사이에 꽉 끼인 내가 할수 있는건 재빠르게 눈을 감는 일밖에는 없다. 그런 상황이 “상지(上地)”, “오도구(五道口)”까지 지속되였다. 회사로 가는 길은 그나마 편한것이였구나 하는 위안이 마음 한구석을 찾아들었다. 이 고행을 앞으로 나흘동안 여덟번을 오가며 해야 하다니 눈앞으로 시커먼 구름이 몰려오는듯하다…   이야기 둘  조금 일찍 떠나서 그런지 오늘은 어제보단 사람이 좀 적은것 같다. 그러나 웬걸, “룡택(龙泽)”역에서부터 밀물처럼 밀려들기 시작했다. 급기야 “서이기(西二旗)”역에 도착해서부터는 좌석쪽으로 밀려오기 시작한다. 겨우 발을 딛고 서보니 어딘가 요상한 그림이 연출되고말았다. 좌석에 앉은 한 남자는 생각없이 다리를 벌리고있었을테고 밀리운 나는 그 다리사이에 밀려들어가게 된것이다. 이건 무슨 상황이지? 한발 물러서려고 했지만 그럴 틈이 없다. 괜히 이 남자에게 미안해진다. 뒤에 멘 가방때문에, 밀고닥치는 사람들때문에 몸은 자꾸 앞으로 쏠린다. 필사적으로 손잡이를 꽈악 잡았다. 이두박근 삼두박근이 놀라 뛰고 어깨에 뭉친 근육들이 쩍쩍 찢어지는 소리가 들리는듯하다. 팔에 힘이 풀려 약간이라도 느슨해지면 앞으로 쏠린 내 상반신에 그 남자의 머리가 포근히 안길, 정말이지 위험천만한 사태였다. 안되기는 이 남자도 마찬가지다. 다리는 왜 벌려가지고 이 “쩍벌남”의 교훈도 만만치 않을것이다. “우리”는 어쩔수없이 야릇한 포즈를 취한채 “상지”를 지나 “오도구”까지 10여분을 그런 상태로 함께  했다. 한시간 같은 10분이였다.   이야기 셋 오늘은 출근 체크를 하는 날이다. 가장 붐비는 시간대의 지하철을 타는 날이기도 하다. 집문을 나서면서부터 굽 높은 구두를 신은것에 대한 후회가 밀려들기 시작했다. 운 좋으면 좌석 하나 얻어 걸릴지도 몰라 하는 일말의 기대를 가지고 지하철에 올랐는데 내 꿈이 너무 야무졌다는 사실을 곧바로 깨달았다. 매의 눈으로 쫙- 관찰을 했다. 좀 피곤한듯 하품을 하는 저 남자는 아무래도 먼곳까지 갈것 같다. 그옆에 창밖을 부산스레 내다보며 무릎우에 놓인 아이패드를 케이스에 접어 넣는 녀자가 보인다. 곧 내릴것 같다. 그앞에 가서 섰다. 그 녀자의 정수리만을 응시하며 다음역에서 내릴것이라고 굳게 믿었는데 그옆에서 하품하던 남자가 일어설줄이야…내 예상은 한번도 적중한적이 없다. 머피의 법칙인가? 창밖을 부산스레 내다보던 녀자는 그 다음역에서 올라오는 동료로 짐작되는 다른 녀자를 향해 손짓하더니 자기 앞으로 불렀다. 동료 녀자가 밀고 들어오고 급기야 난 설자리마저 잃었다. 심각한 판단오류이다. 줄을 잘 서야 한다는게 이런건가? 정말 담번부턴 줄을 잘 서야겠다. 매번 얻는 교훈이다. 어느 역에서 내릴지 목에 명찰 같은걸 달면 안되려나? 그럼 많은 사람들이 한곳에만 몰릴테지? 눈썰미가 없는 나 자신이나 탓할노릇이다.   이야기 넷 고봉기를 살짝 피했더니 지하철안이 거짓말처럼 한적하다. 앉을 좌석이야 물론 없지만 다리를 어깨너비로 충분히 벌리고 서도 방원 50센치메터안은 거칠게 없다 간만에 독서나 해볼가나? 가방에서 책을 꺼내 펼쳐들었다. 왼쪽에 선 남자의 높은 목소리가 귀를 때린다. 커플싸움의 중재자인듯하다. 둘이 사는게 뭐 있냐며 사소한 일은 넘기라며 조언을 하고있다. 그 남자가 거의 전화를 끝낼무렵 오른쪽에 선 녀자의 고음이 오른쪽 귀를 때린다. 목소리가 매우 날카롭다. 전화상대는 친정엄마인듯하다. 새로 찾은 직장은 야근도 없고 상사도 좋은 사람이라는 이야기를 꼭 저렇게 높은 소리로 해야 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뒤편에서 웅글진 목소리로 전화통화를 하는 남자는 보험설계사인것 같다. 보험내용을 고객에서 설명해주고있다.   엿들으려는 의도는 전혀 없었다. 워낙에 목소리가 너무 컸다. 심호흡 한번 하고 책을 덮었다. 이 수준들하고는, 한 나라 국민의 목소리의 높낮이가 경제수준에 반비례한다던 남편의 말이 떠올랐다. 이 순간만큼은 남편의 일가견이 지구는 둥글다고 했던 코페르니쿠스의 정의만큼 위대하게 느껴졌다. 진동모드로 해놓은 주머니속 휴대폰이 징~ 하고 진저리를 친다. 택배기사의 전화다. 닷새전에 보낸 택배건에 대한 문의이다. 갑자기 짜증이 솟구쳤다. 이게 어느때냐고? 아직도 배송을 안한거냐고? 다른 택배회사 알아볼거라고 역정을 냈다. 앞에 앉아 꾸벅꾸벅 조는듯이 보였던 아줌마가 졸음이 채 안 가신 눈으로 나를 올려다본다. 내 생각보다 소리가 컸던가보다. 나는 “저기, 아주머니, 저는 소리를 지를만한 상황이였거든요.”라는 측은한 눈빛을 보냈다. 남을 비난하기에 앞서 나부터 잘해야지. 갖가지 소음들로 떠들썩한 아침 지하철안에서 깨우친 교훈이다.   매일 두시간 넘게 출퇴근길에서 보내야 하는 도시인의 삶은 고단하다. 그러나 지하철안에는 힘들고 지친 이야기만 있는것이 아니다. 가끔 가다 랑만도 있다. 임신때 내게 자리를 양보했던 붉은 넥타이 맨 소학생 꼬마도 있었고 무거워보이는 내 가방을 받아주었던 할머니도 계셨고 키가 작은 나에게 손잡이를 양보해주고 짐짓 모른척해주던 멋진 키다리남자도 있었다.   다람쥐 채바퀴 도는듯한 내 생활에 지하철은 멍하니 생각을 쉬울수 있는 공간이기도 하고 가끔은 일과 육아에 지친 내가 독서를 할수 있는 소중한 공간이기도 하다. 앞으로 몇십년을 더 지하철을 타야 할지는 모르겠다. 아마 지하철을 안 타도 되는 때는 내 육신이 세월의 년륜을 새기며 저 멀리 황혼의 언덕을 바라보는 시기일것이다. 단지 목적지가 같다는 리유 하나만으로 한 시공간에 던져진채 오감을 공유해야 하는 지하철안은 어쩌면 우리네 삶의 한 축소판이기도 하다.  살과 살을 비비고 체취를 공유하면 또 어떠하리… 이 거대하고도 비좁은 지구 어디인들 우리네 사는 모습이 다 그러하지 않은가.     랭면 쏘나타   북경으로 간 연길 랭면 사무실 동료 선생님들이 자주 찾는 랭면집이 있다고 했다. 그 랭면을 얘기할 때면 저마다 눈가가 촉촉해서는 입을 다시길래 저으기 호기심이 동했다. 랭면의 종가라 불려도 좋을만한 평양랭면, 연변랭면, 계서랭면을 제치고 그 맛이 단연 랭면중 으뜸이라고 하는 선생님도 계셔서 내 호기심에 더욱 불이 붙었다. 그러던 어느날, 사무실 뒤자리 동료 선생님이 고맙게도 그 맛을 느끼게 해주시겠다며 나를 데리고 그 식당으로 갔다. 시내뻐스를 타고 흔들흔들, 북경 2환의 고풍스러운 전통적인 옛 거리를 지나, 전혀 랭면집이 있을것 같지 않은 골목에 “화천연길”이라 씌여진 록색 간판이 눈에 띄였다. 낯선 북경의 옛 주택구에서 우리 글을 보니 퍼그나 정겨웠다. 식당으로 들어가니 입이 떡 벌어진다. 빼곡이 놓여진 테이블마다에 사람들로 꽉 찼고 카운터앞에서부터 입구까지 랭면 먹으러 온 손님들이 줄 지어 서있는것이였다. 겨우 자리를 찾아 앉고 간단히 랭면 두그릇에 고향 연변의 랭면집에선 듣도보도 못한 장졸임 비슷하게 생긴 반찬을 주문했다. 음식을 시키고 식당내를 휘휘 둘러보니 그래도 조선족 음식점임을 고집하는 장치들이 곳곳에 보였다. 벽에 걸린 민속풍경화가 그랬고 한족 복무원의 몸에 입혀진 개량한복이 그랬다. 이윽고 랭면이 상에 올랐다. 아, 고향에서 먹었던 랭면도 이랬던가? 북경 왕징에 있는 평양식당의 랭면도 이랬던가? 그래도 랭면이라고 하면 사리를 곱게 틀어서 말간 육수에 댕그랗게 놓고 우에는 엷게 썬 사과나 배, 채 썬 오이, 삶은 닭알 등 고명을 보기 좋게 올려놓은 그런 모습 아니던가? 간장물 같은 거무튀튀한 육수에 면가락은 제멋대로 늘어져있고 또 일부는 그릇벽에 붙어 존재감을 뽐냈으며 투박하게 썰어놓은 사과조각도 미관에 상관없이 육수에 둥둥 떠다니고있었다. 면발은 또 왜 이렇게 굵은지, 좀 과장한다면 아기손가락 굵기만큼한 면발이 랭면임을 한껏 뽐내는듯도 했다. 한가닥 집어 입에 넣었다. 바오라기 같은 면발을 씹으니 밀가루맛이 물씬 풍겨온다. 차지도 뜨겁지도 않은 육수에서는 진한 간장맛과 고추장맛이 은은히 풍겨오고 육수를 한술 떠서 마셔보니 뜨겁지도 차지도 않은 그 육수맛 또한 텁텁하니 요상하다. 랭면도 온면도 아닌 “미면“(미지근한 면)이라 하면 어떨는지…   “선생님은 진심 이 랭면이 맛있습니까?” 참지 못하고 마주앉은 선생님께 물었더니 “나도 처음엔 뭐 이런 랭면이 다 있나 그랬어. 근데 먹을수록 생각나는 맛이야. 맛은 없는데 맛이 있어. 한동안 안 먹으면 그 맛이 생각나고 말이야.” 하고 아리송한 대답을 한다. 거 참, 맛이 없는데 맛있는 맛이란 도대체 어떤 맛이지…   너희가 랭면 맛을 알아? “화천연길”이라는 이 연변음식점은 1943년도에 북경에 섰다고 한다. 리씨 성을 가진 한 조선족 할머니가 몇몇 북경의 젊은이들과 함께 랭면을 해서 팔다가 후에 연길식당으로 이름을 고치고 경영했다고 한다. 오랜 력사를 자랑하는 북경의 연변음식점인셈이다. 지난 세기 80년대에 대학입학으로, 취직으로 북경에 온 조선족 젊은이들에겐 어려우나마 고향음식을 맛볼수 있는 귀한 곳이였다고도 한다. 지금처럼 한국음식점들이 많지도 않았을 때고 주머니사정도 여의치 않았던 그들은 삼삼오오 이 가격 착한 랭면집을 찾아 랭면을 먹었을테고 그것으로 향수를 달랬을것이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고 처음엔 받아들이기 힘들었던 타향의 랭면맛에 점차 길들여지다보니 그만 이 랭면을 사랑하게 되였다고 한다. 점차 조선족의 대도시 진출이 용이해지고 또 북경에도 왕징이라는 코리안타운이 형성되면서 민족음식점은 예전처럼 귀한 존재가 아니다. 마음만 먹으면 반시간 정도 차를 타고 나가 정통 평양랭면을, 연변랭면을 어렵지 않게 맛볼수 있게 되였다. 그러나 직장의 50대, 60대 로선배님들은 아직도 이 집 랭면맛이 최고라고 추켜세우신다. 음식은 맛만으로 먹는게 아닌가보다. 남의 주관적인 느낌을 감히 짐작해보겠다는 주제넘는 생각을 해본다면 그들에게 이 랭면은 추억이고 향수이지 않았을가? 젊은 시절에 대한 추억과 고향에 대한 향수 그 모든것이 이 랭면에 들어있지 않았을가? 북경 생활 8년차인 나는, 결핍의 시대를 겪지도 않았던 나는 아직 모르겠다. 그 맛의 소중함을… 얼마전 조선족이 꾸린 한 위챗계정에서 이 집 랭면에 대해 신랄하게 비판했다고 한다. 조선족의 정통랭면도 아니면서 한족들 입맛에 맞게 변질된 랭면을 갖다가 조선족랭면이라고 하는것은 명백한 사기 행위라는 지적이였다고 한다.  달리 생각해본다. 한 음식이 그곳 사람들의 입맛에 맞게 토착화되고 또 그 사람들이 사랑하는 음식으로 자리매김되였다면 음식의 정통성 여부가 그때에도 중요한것일가? 랭면을 먹기 위해 길다랗게 줄 지어선 사람들을 보며 그런 충동이 일었다. “여러분이 지금 먹으려는 랭면은 오리지널이 아니요. 더 맛있는 우리 민족의 정통랭면을 맛보세요.” 하고 웨치고싶다. 그러나 그들은 이미 이 “변질”된 랭면맛에 길들여진 사람들이다. 맛이란 가히 주관적인것이다. 북경 생활 8년차, 내 입맛도 서서히 변하고있다. 두눈 튀여나올 정도로 얼얼하게 매운 음식을 좋아하던 내가, 뒤골이 뗑~ 해지도록 차거운 얼음물을 좋아하던 내가 더 이상 그것들을 안 찾게 되였다. 갓 북경에 왔을 때, 질질 끓는 북경의 여름을 뜨거운 차물을 불어 마시며 견디기란 여간 힘든 일이 아니였다. 그러나 3년이 지나고 4년이 지나고 어느새 나는 그것을 받아들이고 즐기게 되였다. 시원한 맛에 마신다는 맥주를 뜨뜨미지근한것으로 마시니 처음에는 입맛이 무척 썼지만 차차 시간이 지나니 구수한 호프의 맛을 더 잘 느낄수 있어 그 맛 또한 새롭다. 10년, 20년, 앞으로 이제 내 입맛은 또 어떻게 변할지 모르겠다. 변해간다는것이, 나를 잃어가는것 같아 저으기 서글퍼지기도 하지만 다시 또 다른 나를 찾아가는 작업이 아닐가 하는 생각이 가슴에 맞혀오기도 한다. 그러나 간장 고추장 육수속에서도 굵은 면발을 자랑하며 랭면의 “정체성”만은 잃지 않으려 했던 이 집 랭면처럼, 북경의 전통 옛 거리에서도 우리 글 간판을 걸고 한족들 몸에 어울리지 않는 한복을 입고서라도 우리 민족 식당임을 애써 지켜보려는 이 음식점처럼 그 무엇인가는 상실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리고 변했다면, 그 변한만큼의 차이가 바로 내가 이 타향에 발 붙이고 살기 위해 애썼던 노력의 흔적들이 아닐가 하고 생각한다.     데지 않을만큼, 춥지 않을만큼…   어쩌다가 여러가지 조건들이 맞물려서 한국에서 몇달간 생활할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 집이라고 터를 잡고 살아보니 전에 몇번 관광으로 왔을 때와는 사뭇 다른 느낌으로 젖어왔다. 말로 다 할수 없는 살가움과 무작정 내 맘을 끄는 감성들이 한국이라는 나라를 퍼그나 정답게 느끼게 해주었다. 아이를 데리고 근처 공원에라도 나가면 공원 벤치에 앉아 한담을 나누시던 아주머니들이 아이가 예쁘다고 말을 걸어주시고 간혹 과자 같은것도 건네주며 친절을 베풀었다. 인간의 탈을 쓴 몇몇 못된 놈들의 아동랍치사건으로 전체적인 사회분위기를 흉흉하게 만들어 아이를 밖에 데리고 나가도 필요이상으로 경각심을 높여야 하는 북경과는 딴판이였다. 한국은 “정”의 문화라더니 아니나다를가, 그 따뜻한 “정”에 감격스러웠다. 그렇게 매일 근처 공원에 나간지 며칠만에 자주 마주치는 한 아주머니랑은 안부도 주고받는 사이가 되였다. “새댁은 중국서 왔어?” 나의 어눌한 한국말 억양에서 바로 티가 났나보다. “네. 북경서 왔어요.” 하고 곱게 대답하니 “신랑도 같이 왔어?” 하고 물으시길래 “네. 세 식구 다같이 왔어요.” 하고 대답했다. “신랑은 어느 직장 다녀?” 한참후, 신랑 직장에 나이까지 줄줄이 고백하는 나를 발견했다. 첩보요원도 아니고 딱히 비밀에 붙일것까지야 없다지만 이런 개인사까지도 말해도 되나싶은 생각이 번쩍 들어 머쓱하게 웃음을 지어보이며 “그럼, 이만 가볼게요.” 하고 말하고는 어수선하게 그 자리를 떴다. 이튿날부터는 왠지 그 아주머니를 피하고싶어졌다. 콕 집어 말할수 없는 불편한 느낌이 들었다. 근처 정육점에서 고기를 어쩌다 한번 사게 되였는데 정육점 주인 아저씨 또한 열정적인분이셨다. 그 열성스러움에 처음 간 날 생각에도 없는 삼겹살 두근을 덜컥 사버리고말았다. 그후로 아저씨는 나만 보면 특유의 그 충청도 억양으로 “어디 가슈?” 하며 반갑게 인사를 걸어오고 가끔은 아들애에게 장난감도 쥐여주었다. 그럴 때면 나는 괜히 고기를 사지 않는것에 자책감까지 가지게 되였다. 근처에는 이틀에 한번 집으로 반찬을 배달해주는 열정적인 반찬가게 아주머니도 계셨다. 배달을 오실 때면 아들애 이름을 친절하게 불러주기도 하고 손을 꼬옥 잡아주기도 했다. 세살짜리 아들애가 크레용을 들고 마구 설치면 아이에게 흰종이를 주어 락서를 하게 하라고 조언을 주시기도 하고 아이를 따라다니며 밥을 먹이는건 옳지 못한 육아법이라고 따끔히 지적도 해주셨다. 분명 좋은 말씀들인데 어딘가 불편한 느낌은 아주머니가 다녀가신후에야 스멀스멀 찾아왔다. 그후로는 그 아주머니가 배달을 오신다 하면 괜히 긴장해졌다. 집이 어질러져있지는 않나? 아들애가 오늘은 장난을 많이 치지 말아야 할텐데 하면서 괜한 걱정까지 하게 되였다. 남편에게 이 이야기를 했더니 “혹시 그분들 나름의 마케팅전략 아닐가? 고기나 반찬을 더 팔려는 그런 전략?” 하고 반문해왔다. 그분들의 따뜻한 진심에 대해선 의심하고싶지 않았다. 그분들은 진심으로 중국에서 온 이 동포 새댁에 관심을 가졌을것이고 천방지축으로 허둥대보이는 어린 새댁에게 진심어린 조언을 하고싶었을것이다. 그러나 그런 따뜻함에 조금씩 피로감이 느껴지는건 나도 어쩔수가 없었다. 차번호 하나 따기가 하늘에 별따기만큼 어려운 북경에서 자가용 차가 없는 우리는 외출할 일이 있으면 등씨 성을 가진 한 기사아저씨의 택시를 자주 리용하군 하였다. 수없이 많은 차가운데서 그 기사의 택시만 4년 넘게 리용한데는 나름의 리유가 있었다. 크고작은 일에 4년 넘게 그 차를 리용했지만 등씨 성을 가진 그 아저씨는 한번도 개인사에 대해 물어본적이 없었다. 북경에서 택시를 타보면 우리끼리 하는 얘기를 듣고 기사님들이 곧잘 하는 질문이 있다. “당신들은 어디에서 왔냐?” 하는것이다. 방언도 아닌것 같고 그렇다고 외국사람도 아닌것 같은데 당신들이 하는 말을 자기는 한마디도 못 알아듣겠다고 하면서 호기심에 물어올 때가 많다. 조선족이라고 하면 일부 기사들은 알은체를 해오며 “쓰쌘주마?(是鲜族吗?)”라고 하신다. 그냥 무시해버리면 좋으련만 또 틀린걸 보면 지적해줘야 직성이 풀리는 내 성격에 “선족”에 대한 유래를 설명하고 반드시 “조선족”이라 불러야 한다며 꼬치꼬치 지적을 해주고나면 급피곤이 몰려오군 하였다. 그런 번거로움을 여러번 겪다보니 그런 질문따위를 일체 하지 않는 등씨 성을 가진 그 기사아저씨를 유난히 선호하게 되였다. 오래동안 자주 만나다보면 가끔은 옛다, 기분이다 하고 에누리를 해줄법도 한데 등아저씨는 언제나 칼 같았다. 거스름돈 받기가 번거로와 더 드려도 엄격하게 계산해서 돌려주었고 가끔은 좀 깎으려고 해도 언제나 그렇듯이 단호했다. 그 기사아저씨의 신상정보에 대해서는 아는것이 전무했지만(등씨 성을 가졌다는것만 알뿐) 우리는 누구보다 그 아저씨를 신뢰하고있었다. “정”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는 차거운 등아저씨를… 새삼 한국의 “정”문화에 대해 다시 생각해본다. 서로 돕고 상부상조하는 삶속에서 형성된 “정”문화, 그것은 이 힘든 세상을 헤쳐가는데 빛이고 소금이였을것이다. 서로를 걱정해주고 다독여주는 따뜻함. 그런데 나는 왜 그 따뜻함에 데기라도 한듯 몸을 움츠리는것일가? 어린 시절 내가 살던 향진의 작은 마을은 그 시절 다들 그랬듯이 따뜻하고 화기로왔다. 이웃들은 맛있는 음식이 생기면 함께 나누었고 걱정이 있어도 함께 나눴다. 비 오는 날, 엄마가 만든 오그랑죽을 들고 뒤집 해화언니네 집에 가져가다 엎어져 온몸이 죽범벅이 된채 울음보를 터뜨리던 내 모습도 기억에 선하다. 남편에게 손찌검을 당해 울면서 집에서 뛰쳐나온 새댁을 자기 집에 숨겨주고 그 남편을 찾아가서 화통하게 욕사발을 안겨주던 옆집 아주머니도 계셨다. 그 새댁이 이튿날 바로 남편곁으로 달려가서 그 아주머니를 머쓱하게 만들기도 했지만 멀리 왕청 춘화라는 곳에서 시집 와서 친정 식구도 하나 없는 타향에서 새댁이 혹시나 서러워하지나 않을가싶어서 아주머니가 나선것이였다…  요즘 같았으면 주책이라고 손가락질 받고도 남을 일이다. 간섭은 어쩌면 관심의 또 다른 표현일지도 모르겠다. 그 시절에는 누구도 그것을 간섭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없었고 모든게 조화로왔던것 같다. 언제부턴가 사람들은 저마다 칸을 치고 자기만의 방을 만들어놓고 빗장을 닫고 산다. 관심은 자칫하면 간섭으로, 부담으로 여겨지기가 일쑤이다. 이웃간에 따뜻한 떡그릇 오가던 그 옛날의 추억은 추억일뿐일지도 모르겠다. 개인의 프라이버시가 무엇보다 중요하게 간주되는 현대사회에 불쑥불쑥 예고없이 떡을 들고 이웃집 문을 노크하고 찾아가는것도 어쩌면 비현실적인 일이기때문이다. 서글픈 일이다. 유리벽을 친 각자의 방에서 우리는 먼발치서 서로를 바라보며 외롭지 않으려고, 고립되지 않으려고 발버둥을 치고있는것은 아닌지… 그렇다면 이 외로운 현대인을 구원할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가? 역시나 서로에 대한 따뜻한 관심만이 그 해답이 아닐가? 그렇다면 그 따뜻함의 적정 온도는 몇도쯤 될가? 50도? 60도? 따뜻함을 유지할수 있는 적당한 거리는 얼마나 될가? 데이지 않을만큼, 춥지 않을만큼의 적당한 온도와 거리는 도대체 어느만큼일가?   어쭙잖게 이 외로운 현대인들을 구원하고싶은 돈끼호떼스러운 생각을 해본다. 서로의 온기를 따뜻하게 나누기에 가장 적당한 랭정과 열정사이의 그 어느 지점을 찾아 돈끼호떼의 마음으로 갑옷 입고 투구 쓰고 나서볼가싶다. 나랑 동행할 사람 게 누구 없소?  나지막이 지기들을 입속으로 불러본다. 출처:2017 제1호
83    리상학: 마늘(시, 외5수) 댓글:  조회:404  추천:0  2019-07-16
마늘 리상학   마늘을 보면  어머니가 생각난다   사랑손에 뜯기워 한쪼각 마늘이 된 당신   그리움을 세워서  울바자 두르고 고독함을 뒤번져 밭고랑 내시고   사랑의 패말 단 터밭에  자신을 심어 여린 싹 하나 손에 든채 세상을 살아온 당신    당신은 검은 흙으로 사라졌지만 당신이 계셨던 곳에는  오붓한 둥근달동네 살고있다   마늘을 보면  어머니가 그리워진다     비 내리는 날    비 내리는 날 강변을 거닐면 물결을 두드리는 비방울  다듬질소리 물안개로 펼친다   강물도 두드리면  파도의 구김살 펴지는걸가   강물도 두드리면 살갗에 부드러움 심어주는걸가   강물도 두드리면 하얀 마음이 물드는걸가   투닥투닥  투닥투닥 옥구슬로 부서지는 비방울의 다듬질소리   세월의 강 저편에서 추억의 비줄기  고향집 창문 두드려 메아리 부른다     저녁 강   죽은듯 숨어있던 불빛  창문으로 뛰여내려   더위를 씻어내느라 몸을 비틀어댄다     수영선수가 된 차들은  눈에 불을 켜고 다리가 그어놓은 코스 따라 등수를 다투기에 여념이 없다   석양이 풀어놓은 붉은 물속에 화사한 꽃은 허리 굽혀 머리 염색에 바쁜데   짝을 찾은 물새 한마리 수면을 가르는 즐거움 뾰족한 화살로 달려간다   엉덩이 반쯤 드러낸 아낙네 세월을 두드리는 방치소리 타고 어둠이 전하는 별의 종소리 수심속에 수놓이에 바쁘다     지게   지게는 둘 사람이 둘   사람이 둘이건만  바로 설수가 없어 언제나 막대기에 의지해야 엎어질듯이 설수 있고 다리가 둘이건만  걷지를 못해 아버지 등에  업혀다녔다 언제나    마을 북망산 기슭에 울음소리가 흙무지를 이룰 때 주인 잃은 지게는 헛간 깊숙이 자신을 묻었다   지게는 둘 사람이 둘   하나는 나 그리고 하나는…     쓰러진 백양나무   간밤에 하늘이 울었다 땅을 치며 울었다   그 모진 슬픔의 몽둥이에  자식들을 주렁주렁 키우던  직장앞의 백양나무가 쓰러졌다   아픔이 바늘로 돋아난 곳에 집 잃은 개미들의 아우성 새까맣다   쓰러진 생명의 마지막 숨결 허공속으로 시나브로 사라진다 배고픔을 달래는 잎새들 싸늘한 시체의 젖줄기 물고 미풍속에서 바들바들 떨고있다     겨울산   폭삭 늙은 겨울산 치매를 앓고있다   싱싱한 채색 기억들 고향을 등진채 타향에서 부서지고    하늘 향해 뻗은 수많은 추억의 말초신경 정을 찾아 울부짖고    엉치에 청진기 꽂은 다람쥐 한마리 이 나무 저 나무 오르내리며 병진단에 드바쁘다   문병 온 까마귀떼 꺼억꺼억 괴로움 울며 우정을 한소끔 쏟고있는데   말없는 소나무 파란 빗 들고  겨울산의 흩어진 머리  빗고 빗는다  출처:2017 제1호  
82    진요휘: 장백산에 봄이 깃들었네(권두언) 댓글:  조회:424  추천:0  2019-07-16
장백산에 봄이 깃들었네 진요휘 (陈耀辉) | 길림신문그룹 총편집   화창한 봄이 오니 푸른 폭포 계곡을 울리고 찬연한 노을이 만년백설을 녹여주네 골짝마다 호랑이와 사슴들이 기지개를 켜노니 천지의 맑은 물 구름속에 거울처럼 걸려있노라 봄이 오면 장백산은 마치 한마리의 아름답고 신비로운 사슴이 자유분방하게 뛰노는 모습과도 같이 현란하고 눈부신다. 밝은 해가 울울창창한 장백의 밀림을 감싸안으면 천봉만학들이 금시 꿈속에서 깨여나듯 기지개를 켜고 동서남북 어디서나 룡트림하는 변화무쌍한 정경을 연출한다. 높은 산발과 험준한 령마루우로 뭉게뭉게 피여오르는 구름과기상천외하게 펼쳐지는 노을은 마치 선경에 다달은듯한 느낌을준다. 천년을 잠자던 백설은 긴긴세월 만고의 풍상을  겪다가 봄이 오면 순한 온천으로 둔갑하거니 장백산 천지의 조화는 마냥 성스러우면서도 신비롭기만 하다. “사슴의 울음소리에 깨여나는 이 봄날,  비파를 치고 저대를 부니 꼭마치 산신령들이 내려서 잔치하는 분위기가 완연하여라!” 장백산의 봄은 실로 초목이 울창하고 겨울의 적막이 물러간 자리마다에는  새로운 생명의 싹들이 기지개를켜면서 우리의 가슴가슴에  따뜻함과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어주고있다. 장백산은 수천년전,예로부터 북방 부족들의 신성한 성지로 이름을 날렸다.  춘추전국시기의 저작 《산해경》에는 다음과 같이 기재되여있다. “동북쪽에는 바다가 있는 외에도 아득히 먼곳에 큰 산 하나가묵묵히 도사리고있으니 그 산을 숙진의 나라가 가지고있었다.” 여기에서 말하는“그 묵묵히 도사리고있는 큰 산”이 바로 오늘의 장백산을 말한다. 우리 나라 북방에 거연히 솟아있는 이 장백산은 청나라시기에 아주 신성한 성지로 여겨졌다. 하여 강희황제는 아래와 같은 조령을 내린적도 있다. “장백산은 북방의 중요한 요충지로서 기이한 괴석도 많고많으니산을 령의 경전으로 영원히 봉인하노라.” 새해가 밝아오니 이 세상 모든것들이 새롭게 새록새록 다시 태여난다. 《장백산》은 중국조선족문학사업의 중요한 활무대로 떳떳하게 자리잡고있는바 새해에도 더욱 알차고 무게 있는 작품들을 선보이기를 진심으로 기대한다. 우리는 2017년에도 《장백산》잡지에 발표되는 작품들이 성스러운 장백산 기상과 더불어 독자들을 황홀하고 다양한 문학의 새로운 경지에로 이끌어주기를 다시한번 미리 축복드린다. 출처:2017 제1호
81    김혁: 필끝에 건곤세상 있나니(칼럼, 련재1) 댓글:  조회:366  추천:0  2019-07-16
필끝에 건곤세상 있나니(련재1) 김혁   수도에서 열리는 문학성회에 다녀왔다. 중국작가협회 제9차 전국작가대표대회가 11월 30일 북경 인민대회당에서 개막식을 시작으로 성황리에 열렸다.  길림성 연변조선족자치주 대표단은 연변작가협회 최국철주석을 비롯해 장계신, 정봉숙, 김혁, 김영건, 김홍란, 채시봉 등 조선족작가와 문화계 사업일군들이 대표로 선정되여 참석했다.  습근평 등 당과 국가 지도자들이 대회 개막식에 출석한 가운데 중국 각지의 문학계 엘리트들이 참석한 대회는 제8차 중국작가협회의 사업보고를 심의채택하고 “중국작가협회 규정”을 수정하였으며 철응을 주석으로 한 중국작가협회 차기 지도기구를 선출하였다 대회는 12월 3일에 페막, 5박 6일간의 대회일정을 원만히 마치고 대표들은 귀환했다. 10대로부터 지금까지 오로지 글밭만 경운해온 작가로서 중국대륙의 문학계를 대표하는 기라성 같은 거장, 엘리트들이 운집한 전국작가대표대회에 대표의 일원로 참석하게 된것을 행운과 자호감으로 생각한다. 20여년전부터 전국청년작가회의 등 전국적인 문화행사에 적지 않게 다녀왔다. 하지만 이번의 성회는 여느때와는 또 다른 농도와 줄기의 계시와 감수를 안겨주었다. 그리하여 회의기간 나는 매일 핸드폰으로 간명하나마 그날그날의 수감을 일지로 적어 위챗에 올리고 나의 문학블로그에도 올렸다.   스모그로 몸살하던 북경이였지만 그 며칠만은 초동 들어 가장 화창한 날씨의 련속이였다.   그처럼 “가슴속에 대의를 품고 마음속에 대중을 담아야 하며 어깨에 책임을 짊어지고 필끝아래 건곤을 적어내리기를 바란다(胸中有大义、心里有人民、肩头有责任、笔下有乾坤).” 라는 회의의 주제문구는 작가들의 마음벽을 울려주고 우리 문학의 화창한 봄날을 제시하는듯했다.  성회에서 받은 감수와 사색을 편단으로나마 테마별 적어본다.    자신감을 소환하다 -제9차 전국작가대표대회 수감록 (1)     은은한 광택이 돋보이는 옥색 저고리우에 감색 마고자를 받쳐입었다. 헌활하게 통이 트인 바지를 떨쳐입고 발목에 대님을 조여 고풍스러운 멋을 강조했다. 저고리의 섶이 약간 들린 품이 나래를 펼치려는 학의 그것과도 같다.  간결함과 섬세함이 매치된 선이 아름다운 실루엣을 그려낸다. 오방색 수공의 옷은 단아하고 아취가 있다.  마음은 싱그럽고 발길도 가벼워 건들건들 걸으니 자신감이 그윽하다.  오랜만에 입어보는 한복이다.    전국작가대표대회 개막식이 열리던 날 아침, 나는 참말로 오랜만에 한복을 떨쳐입고 나섰다. 15억의 작가들을 대표하는 성회에서 민족대표로 선정된 기쁨으로 처음 민족복장을 맞추어 입었다.  역시 한복을 떨쳐입고 나선 녀성대표들인 김홍란, 정봉숙 역시 여느때보다 청초한 모습이다.  많은 사람들의 시선과 기자들의 카메라의 앵글이 우리 복장이 주는 운치에 맞추어져있었다. 연변대표단의 대표들은 인민대회당의 가장 현요한 앞자리에 자리배당이 되여 있었다.  우리는 부풀은 한복처럼 한껏 부풀은 마음으로 총서기와 중앙의 지도자들, 전국 각지에서 온 민족작가들과 만났다.  개막식에서 한 총서기의 예술변증법과 과학정신으로 일관된 강화는 새로운 문화리념을 우리에게 전달해주었다. 관점의 밀도가 농후하고 새로운 용어로 가득한 그 강화에서 몇줄을 임의로 뽑아내도 느낀바가 많았다.  그중에서도 “문화자신감”이라는 용어를 나는 정중하게 뽑아보았다.    “문화자신감은 기초로 되고 더 광범위하고 심후한 자신감으로 되여야 하며 기본으로 되고 지구적인 힘으로 되여야 합니다.  문화적자신감을 갖는것은 국운의 흥망성쇠와 관련되며 문화의 안전, 민족정신의 독립성에 관련되는 큰 문제입니다.  문화자신감이 없이는 골기가 있고 개성이 있으며 풍채가 보이는 작품을 써낼수 없습니다.”    자신감이라는 용어에 대해 이렇게 새삼스럽게 생각해보기는 근년 들어 처음이였다. 우리는 언제부턴가 자신감이라는 이 단어를 잊고있었다. 잃어버리고있었다.  근년래 중국조선족은 변혁기의 소용돌이속에서 부침해오고있으며 따라서 “위기론”, “비관론”도 머리를 쳐들고있다.  도시진출, 출국붐에 잇달아 가꾸며 살던 터전이 비여지고 인구가 마이나스 성장률이라는 최악의 상태를 기록하고 학교들이 줄줄이 페교되고 독서인구가 급락되고 잡지사와 출판사가 불황을 겪는 악순환이 지속되여왔다. 그에 따라 작가들은 바닥까지 실추된 문학의 위상에 설 자리를 잃고 방황과 고민을 거듭하고있다.  그리고 조선족작가들은 전국 여러 도시에서 가장 낮은 최악의 고료를 받고있다. 물론  “오두미배요(五斗米拜腰)” 즉 쌀과 돈에 허리를 굽히지 않는것을 작가들의 지조로 알고있지만 작가들에게 문학은 먹고 살아나갈 삶의 방편이 못되였다.  이렇게 위축의 일로를 걷고있는 사회상을 바라보며 작가들에게 자신감이란 운운도 할수 없었다.    하지만 근년래 우리의 문학계는 조금의 미묘한 변화를 감지할수 있었다.  그 감지는 독자층과 문학애호가들로부터 왔다. 미약하나마 독자와 문학애호가들이 전에 비해 상당히 붇고있음을 놀라웁게 발견할수 있었다. 시가지들에서 단지 커피나 음료를 팔던 청일색의 다방, 까페들로부터 책을 읽을수 있는 북카페가 나타나기 시작하고 민간에서 “책읽기 동아리”가 하나둘 속출하고있다.  연변작가협회에서 몇해에 한번씩 정기적으로 조직하는 문학강습반도 몇해전에는 참가수가 너무 적어서 개강을 하지 못한적도 있었지만 올해는 신청자가 넘쳐나서 그 인원을 제한하기까지 했다.  해외문화와의 충돌로부터 정체성에 대한 재인식, 소실되여가는 민족언어에 대한 우려, 출국인원들의 귀향후 재정착에 대한 고민 등등에서 유발된 사고, 개개인의 노력을 수반으로 한 생활수준의 제고와 질적인 삶의 변화, 경제가 발전한 선진국의 수준 높은 문화생활에서 배운 지식들이 이러한 변화를 촉구한것이 아닐가 생각해본다. 이로써 책을 외면하던 사람들이 인생에서의 지식경영의 중요성을 스스로 자각하고 다시금 책을 들고있는것이다.  비록 아직은 작은 파문에 불과할터이지만 이제 좀더 큰 이랑을 이루기 시작한다면 이는 우리 민족에게는, 우리 문화계 인사들에게는 대단히 고무적인 파고(波高)의 높이가 아닐수 없다.    주지하다싶이 문화는 한 나라, 한 민족의 령혼이다. 문화생명력에 대한 신심은 리성인식에서의 고도로 성숙된 정신적인 면모라 할수 있다. 할진대 문화의 자신감은 그 혼의 기초로 되여야 하며 광범위하게 더 깊게 더 지구적인 힘으로 되여야 하는것이다. 이러한 문화자신감으로서 자신의 작품의 품위를 높이고 력사사명감을 자각하고 심령을 정화하고 민족의 인문소양을 높여야 한다.    여기서 바로 원견과 지명의 “자신감”이 소요된다.  자신감을 바탕으로 일사불란하게 보조를 흐트리지 않으며 나아가야 한다.  발에 채이는 비관의 돌덩어리들을 치우면서 스스로의 길을 모색해야 한다.    중국조선족이라는 우리의 정체성은 앞으로 형성될 새로운 세상의 질서에서 그 립지를 강화하는 요인으로 작용할것이다. 우리는 지정학적으로 변강소수민족이라는 특유의 위치와 특수한 문화환경을 용유(拥有)하고있다. 우리 중국조선족공동체는 조선반도 문화와 중국 문화의 사이에 있는 변연문화의 특징을 지니고있다. 변연문화계통은 그 특수한 다중문화구조로 인해 새로운 문화요소를 창출할수 있다는 점에서 일반적인 문화계통보다 더 강한 문화적기능을 나타낼수 있다.  거기에 한국과 조선 두 나라 가운데 끼여있는 조선반도에서의 민족의 교두보 역할도 무시 못한다.  이러한 민족적우세를 도약의 바탕으로 삼아야 한다.  조선족 공동체사회의 발전은 궁극적으로 중국과 조선반도간의 교류, 협력에 필히 긍정적인 역할을 미칠것이고 중국과 조선반도간 광범위한 교류의 진일보는 동북아 국제협력이라는 중국의 대동북아전략에도 영향을 미치게 될것이다. 따라서 조선족사회 발전을 위한 문화전략의 구축과 실행 과정은 정부의 직접적인 참여를 필요로 한다. 그 와중에 정부에서 소수민족에게 돌려지는 점점 더 원활해지고있는 무양(?량?)한 특혜도 우리는 적극 활용할줄 알아야 한다.   현정세에 대한 바른 리해를 토대로 자신의 립장과 토대를 굳건히 설정해나가면서 우리의 오래된 가치관에 자신감을 덧입히고 그것을 미래 지향적인 동력으로 삼아야 한다. 그리고 그것이 우리 제반 분야의 바탕이 되도록 하여 우리의 얼을 살려야 한다. 그러한 저력이 근로용감한 우리의 문화전통에 잠재하고있다는 사실에 자부심을 가져도 좋을것이다. 목전의 진통을 극복하면서 모색속에 새로운 대안을 찾는 험준한 과정에 비관을 엎누르는 자신감이 우리에게는 무엇보다 절실한 때이다.   대회의 개막식과 페막식에서 초겨울의 추위도 무릅쓰고 우리는 한복을 입고 북경의 장안가, 인민대회당앞 광장에서 포토타임을 가졌다.  외성의 대표들과 매체 기자들이 다투어 우리들의 현란한 색조를 향해 카메라의 초점을 맞추었다. 우리 복장의 단아함과 민족작가로서의 자호감 머금은 자세에 타성의 대표들과 행인들이 찬탄의 소리를 보냈다. 소슬한 겨울바람이 한복의 자락을 스치나 우리는 모두 다 상기된 얼굴, 더워나는 가슴을 느꼈다.  그야말로 자신감을 소환해본 시간이였다.   문호들의 고향  - 관씨, “마”씨 그리고 최씨 -제9차 전국작가대표대회 수감록 (2)     대회기간 문단의 거목, 기라성 같은 문인들을 가까이할수 있다는건 아직도 문학도의 초심과 정열을 온곱게 갈무리하고있는 나에게는 행운이 아닐수 없었다. 회의장에서, 이동하는 셔틀뻐스에서, 호텔 로비에서, 지어 엘레베터속에서도 마음속 우상들과 꿈결처럼 만날수 있었다.   그중에서도 막언선생과 함께 할수 있은건 크낙한 기쁨이였다. 나는 80년대 중기 막언의 출세작 “붉은 수수”를 스크린에서 본 뒤로 그의 전부의 작품을 소장해 읽었고 영화, 드라마로 각색된 영상물도 모두다 갖출 정도로 그의 “골수팬”이다. “백구 그네대(白狗秋千架)”와 같은 그의 단편소설을 조선말로 번역했었고 언감 평문도 달아보았으며 그의 노벨문학상 랑보(朗報)가 터져오르자 곧 평론, 대담, 칼럼, 방송 등 다쟝르를 동원해 그의 작품들을 조선족독자들에게 소개하기도 했었다.  나는 한국에서 번역된 그의 작품에 대해 소개해드리면서 그이와 합영도 하고 회의노트에 싸인도 받았다. 노벨문학상 계관을 쓴 문호임에도 막언선생은 차림새가 지극히 소박했고 말수 또한 적었다.  “고향이 어디지요?” 사진을 남기고싶다는 간청에 흔쾌히 카메라, 핸드폰 앞에 서면서 문호는 나지막한 소리로 나에게 물었다.  “연변입니다, 조선족작가입니다” 그 몇마디뿐이였다.  막언의 본명은 관모업(管谟业), 필명인 막언은 “말이 없다”라는 뜻이라 한다. 그래서인지 시종 과언(寡言)이였다. 그저  합영이나 싸인을 청하는 문학팬들에게 인자한 흙좌불(坐佛)처럼 소리없는 미소로 화답하곤 했다.  호텔로 돌아와 흥분을 곰삭이노라니 그 평범하기 그지없는 물음이 왠지 막중하게 떠올랐다. “고향이 어디지요?” 나는 은연중 고향이라는 의미에 대해 다시금 곱씹어보고있었다.  막언 소설의 또렷한 특점이라면 거의 모든 작품마다 민중의 삶을 중심으로 한 서사를 펼쳐나간다. 그리고 다작의 그의 작품속에는 어김없이 “동북 고밀향(高密)”이라는 고향이 등장한다. 시간적배경은 중국 근현대사의 굵직한 사건이 일어났던 시기이고 공간적 배경은 자신의 고향을 문학적으로 확장한 “고밀향”이다. 그의 작품속에서 중국의 대약진운동, 반우파투쟁, 문화대혁명으로 이어지는 굵직굵직한 력사적사건들을 배경으로 민담과 습속의 화려한 색채를 입은 “고밀 동북향”의 이야기들이 줄레줄레 펼쳐진다. 막언은 일찍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고향은 아주 중요한 창작의 원천”이라고 고백했었다. 그는 “소설속의 고향은 실제 고향과는 좀 다르지만 그 소설속 고향에는 나의 리념, 사상, 상상력이 부과돼있다"고 말했다. 그리고 "나는 민속예술과 민속문화와 함께 성장했으며 어린 시절 고향에서 목격한 문화적요소들에 영향을 받았다”며 “창작을 위해 펜을 들었을 때 고향이 불가결하게 내 소설에 스며들어 영향을 줬고 문학스타일을 결정했다”고 력점을 찍어 말했다. 30년 넘게 왕성하게 글을 써왔지만 그의 창작의 안목은 여전히 낡은 치벽지인 고향 고밀향에 머물러 고향사람들의 생명력 넘치는 삶과 그 력동성을 낡지 않게 그려내고있다. 고향인 “고밀향”을 대상으로 중국적인 력사와 삶의 가치문제에 천착해오고있는것이다. 그의 모든 작품에는 이렇게 고향으로 징표되는 민간의 립장과 시선에서 중국만의 독특한 문화와 민속이 그려져있다. 이는 바로 막언 문학의 핵심적요소이다.  1981년 단편소설 “봄밤에 내리는 소나기”로 등단한 이래 “고밀향”이 단순히 고향이란 의미를 넘어 막언 창작의 밑그림과 같은 문학적공간으로 설정되기 시작했다. 최근작 《개구리》에 이르기까지 막언의 거의 모든 소설은 “고밀향”에서 진행되거나 그것을 기초로 한 가상공간에서 펼쳐진다.  “제 소설속 고향은 이미 문학적인 개념입니다. 실제지명을 기초로 하였지만 허구의 공간으로 확장된것이죠.“ 막언은 북경에 거주하면서 문학행사와 해외에 다니는 일이 잦지만 창작에 집중할 때는 수수가 붉게 익어가는 고향에 내려간다고 한다.  막언은 중국의 전통이라는 씨줄과 창작이라는 날줄을 엮어 그 매듭의 지점에서 “고밀 동북향”을 발견했다. 고향의 신화와 전설 그리고 그에서 나타나는 원초적 생명력, 그속에서 이루어지는 민중의 삶과 죽음이 그가 즐겨 다루는 소재이다. 그 원초적 공간과 근대적 변화라는 력사공간을 마주세우고 겹치면서 성찰의 주추돌을 쌓는다. 따라서 막언은 “중국적인것을 가장 잘 담아내는 작가”로 불린다. 막언은 "내 작품들은 세계문학의 일부인 중국문학이고 중국인의 삶과 중국의 독특한 문화 및 민속을 보여준다"고 하면서 한편으론 “내 소설들은 지역과 종족을 넘어선다"고 설명했다. 막언은 고향사람들의 가난한 현실을 직설적으로 라렬하는데만 머물지 않고 “마술적(魔幻) 리얼리즘”을 가미해 작품을 “촌스러움”에서 해방시킨다. 그렇게 재구성한 작가의 작품은 극히 다채롭다. 사실적이지만 풍자적이며 때로 잔혹하다가 문뜩 환상적이고 몽상적이여서 타의추종을 불허하는 나름의 독특한 풍격을 이루고있다. 여기서 중요한것은 막언이 자신의 독특한 문체로 고향이라는 이 협애한 향토적개념을 초월하려 시도한것이다. 그 개념은 좁게는 고향에서 비롯된것이지만 넓게는 중국의 농경문화, 더 넓게는 동아시아 문화에서 비롯된것인데 여기서 그의 작품의 거대한 스타일과 깊이를 감지할수 있다.     막언은 일찍부터 남미의 마술적사실주의 소설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고백했다. 남미의 문호 마르케스에게서 막언은 의식류소설의 시공간의 처리수법과 “마환현실주의” 소설의 구조방식에 대해 배웠다.  그래서 유럽에서는 막언에 대해 지칭할 때 “중국의 마르케스”로 통하며 그의 작품들은 “중국적인 ‘마술리얼리즘’의 정수를 보여준다””는 정평을 받는다. 일관된 창작태도, 민족적인 토양과 그에서 삶을 영위하고있는 인간들의 령혼상태에 대한 탐색, 예술형식에서의 락오를 허용치 않는 쉼 모르는 실험정신, 그러한 큰 그릇에 담겨져있는 사회의 통증과 인간의 삶에 대한 천착, 인간을 억압하는 계급사회에 대한 신랄한 비판, 고난속에서도 결코 놓지 않는 인간이 지닌 아름다움과 삶에 대한 희망… 이러한 요소들이 바로 중국인들의 오래동안의 숙원을 이룩하면서 막언이 노벨문학상의 견고한 대문을 드디여 열어젖히게 된 중요한 요소라 하겠다.    막언이 심취되였고 그의 창작에도 막대한 영향을 끼쳤던 남미작가 가르시아 마르케스 작품에서도 고향은 앵콜 레파토리처럼 거듭 나온다. 막언보다 30년 먼저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는 “20세기 가장 중요한 작가중 한명”으로 자리매김되고있다. 《백년고독》, 《콜레라시대의 사랑》 등 명작을 남긴 그를 거론하지 않고서는 지금의 현대소설을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이다. 현실과 환상을 넘나드는 “마술적리얼리즘”의 창시자로서 그가 현대문학에 끼친 영향은 지대하다. 마르케스는 1927년 봄, 콜롬비아 북부의 작은 해안 마을에서 태여났다. 생계때문에 고향을 떠나야 했던 부모님과 떨어져 8살때까지 외할머니 슬하에서 살았다. 외할머니에게서 들은 환상적인 이야기들은 그의 문학적 자양분이 됐다. 그의 고향은 적도의 해빛이 격렬하게 정수리를 비추는 곳, 악사들이 손풍금과 기타로 흥겹고 강렬한 리듬의 “바예나토(Vallenato)”을 튕겨내는 곳이다. 외할머니가 들려준 콜롬비아의 력사, 온갖 신기하고 기괴한 이야기들은 “부엔디아” 가문의 흥망성쇠를 통해 중남미 력사를 그려낸 그의 대표작 《백년고독》의 바탕으로 되였다. 그의 소설속 “마콘도”라는 가상의 마을 이름은 외가에서 기차로 10분 거리에 있는 바나나농장 이름에서 따온것이라 한다.  첫 소설이 출판사에서 퇴짜를 맞은 뒤 작가로서 좌절에 빠졌던 그는 기자로서 먼저 두각을 드러냈다. 유럽 특파원으로 발령되였고 반평생을 타향에서 떠돌면서도 고향을 잊지 못해했다. 기자로서의 경험과 그의 어린 시절 고향의 추억이 뒤얽혀 라틴아메리카의 력사와 원시 토착신화를 결합한 “마술적리얼리즘”이라는 특이한 쟝르를 낳았다. 그렇게 창작된 작품들은 남미뿐만아니라 미국 등 세계적인 베스트셀러에 올라 독자들의 사랑을 받았다. 드디여 1967년 발표한 《백년고독》으로 1982년 노벨문학상을 받았다. 3년뒤 내놓은 《콜레라시대의 사랑》 역시 세계 35개국 언어로 번역돼 5천만부가 팔려나가고 영화로 각색되며 전작에 못지 않은 커다란 성공을 거뒀다.  평론가들은 “민초들의 사랑과 애환을 담은 그의 고향은 사실과 환상이 뒤섞인 이야기들이 끝없이 중첩되는 《백년고독》과 같은 서사구조를 가지고있다”며 “현실에서는 도저히 일어날수 없는 놀랍고도 신비로운 일들로 가득한 작가의 작품세계는 그의 고향 열대지역의 자연과 문화가 빚어낸것”이라고 말했다.  마르케스가 들으며 자랐던 “바예나토” 음악은 민담이나 사랑이야기를 빠른 템포로 구연(口演)하듯 부르는“옛날옛날에”로 시작한다고 한다. 동네방네의 자질구레한 일들을 아주 자연스러운 말투로 랩같이 리듬있게 전개해나간다.  고향은 마르케스에게서 “옛날옛적에”로 운을 떼는 오래된 음악과 같은 마술적리얼리즘의 원형이였다. 마르케스는 력사와 생활의 관찰자로서 우리앞에 시대를 넘나드는 이야기를 펼쳐보였다. 그 필법속에 그가 마법처럼 부린 환상의 세계는 무한한 진실로 통하는 문을 거쳐 다달은 고향이였다.    막언에게 동북 “고밀향”의 이야기가 있고 마르케스에게 “마콘도”의 이야기가 있다면 우리에게는 “남대천”의 이야기가 있다. 이번 전국작가대표대회에 연변작가대표단을 휘동하고 나선 연변작가협회 주석 최국철소설가의 작품 역시 이러한 맥락에서 짚어볼수 있다.  최국철의 이미지와 련관지어 기억들을 끄집어낸다면 그 기억들은 그의 소설에서 심심찮게 등장하는 “남대천”과 직결되여있다. 최국철소설가의 3부의 장편소설을 비롯해 20여부의 중단편소설들은 모두다 남대천을 무대로 그려진것이다.  조선족문단의 대표작가의 한 사람으로 최국철소설가는 지난 60년대 바로 이곳 남대촌에서 5남매의 맏이로 태여났다. 소설가의 필끝에 고향이 많이 묘사되였지만 이제 고향 남대촌을 말할라치면 막상 소설가를 빼놓을수 없을것이다.  “작가에게 있어서 고향의 하늘과 땅은 가장 근원적인 령혼의 장소이고 소설적인 발견, 흥분점이 무진장하게 깃들어있는 곳이다. 그래서 자고로 고향은 남녀간의 사랑주제만큼 지속적이고 영구적으로 격조높게 그려져온것이다”고 소설가는 말한다.  최국철 소설가네 남대천은 “마을 외곽에는 토벽자리가 황페하게 남아있었고 그 토벽우로 헌 삿자리 낡은 고무신짝들이 걸려서 스산한 풍경을 자랑하는, 토벽아래로 호성하가 소오줌 같이 지줄거리는, 비가 한줄금만 내려도 황토길이 질척거리고 안해가 없이 살아도 장화가 없으면 못산다는, 외눈박이 개딸년도 주기 싫어하는 빈한한 마을”이였다. "찰떡처럼 찰진 황토땅, 그것은 내 고향의 슬픈 표상이다."고 소설가는 말한다.  이런 동네어서 소설가는 “석탄을 주으며 가난을 알았고 새차꼬를 놓아 참새와 메새를 잡으며 소년시절을 보냈다. 그리고 길가에 아무렇게나 나뒹구는 소똥을 차고 지저분한 마을길을 오르내리며 문학청년의 꿈을 키웠다.” 나날이 문학수련을 거쳐 점차 완숙하게 벼려진 그의 필끝아래 고향의 정경은 그야말로 한폭의 그윽한 민속화처럼 그려진다.  그의 필아래 그려지는 고향은-  “모내기철이면 이랴 끌끌 나래를 놓고 점심이면 두렁밑에서 캔 미나리에 벌건 고추와 식초를 팍팍 무쳐 술안주로 해서 아버지와 동생들과 마주앉아 재미있게 술을 마시는”,  “호미 메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버들방초가 우거진 석골개천에 숨어들어 홀랑 벗고 저락저락 물을 끼얹고는”,  “해거름녘이면 앞마당에 짚멍석을 깔고 앉아 늙은 어머니가 버들조리에 쪄주는 가지와 풋고추, 깨잎을 맛나게 먹으며 검푸른 잎을 이들거리며 우긋이 자라오른 강냉이와 처마사이에서 집을 짓는 거미를 재미있게 구경”하는,  “장마비에 기세가 오른 버들숲에서 그윽그윽 간신히 톺는 황소의 영각소리, 온갖 풀벌레소리도 가만히 들”리는,  “헐어서 바늘로 꿰맨 코신을 겨우 끌고 마당에 나선 조모가 앞마당의 곰삭은 나무바자를 짚고 서서 서산에서 후르르 달려 내려오는 가을 저녁바람에 흰 머리카락을 날리면서 ‘단풍이 깊어가는구나’ 하면서 서글픈 탄식을 하던”,  “두만강에 황어가 거슬러오를 때 콩의 떡잎부터 먼저 들고 다시 차례로 산으로 오르고 나무잎에 옮겨 타면서 단풍이 드는”,  “입안에 착착 감겨드는 찰옥수수죽에 하얀 무우동치미를 얹어 게걸스레 먹어”대다가,  “추위에 얼어빠진 달이 구름사이로 어망치망 달려가는 모습을 지켜보며 남대천에서 쩡쩡 얼음이 갈라터지는 소리를 듣는” 그런 곳이다.  그 누구도 흉내낼수 없는 독보적인 문체로 풍경이면 풍경, 인물이면 인물, 풍속이면 풍속, 정서면 정서를 어렸을적 모두가 보고 겪었던것처럼 생생하게 그려내는 솜씨는 실로 경탄을 자아낸다.  모던한 기교도, 화려한 장식적인것도 없이 자연스러운 그의 붓터치는 때로는 크고 툽상스러운 륜곽선으로, 때로는 세세한 국부로 삶의 순간을 굵은 결의 캔버스에 봉선화 물들듯이 정감스레 옮겨내고있다.  그야말로 최국철만의 미덕이 엿보이는 작품들이며 최국철이기에 가능한 그만의 감성과 력량이다. 최국철 소설의 미학은 바로 고향 내지 자연이 지닌 의미성을 천착해내는것이다. 그것속에 그의 인생관과 나름의 철학을 투영화시킨다. 이는 호방하면서도 온유한 성격의 그가 살아온 삶 그 자체였다. 그 삶이 거짓말 못하는 어린애의 순진한 대답처럼 서사적으로 표현되고 어릴적으로부터 싹터온 강한 호기심과 적극적 삶에의 용기로 작품속에서도 그의 성정만큼이나 깊고 강하게 나타난다. 최국철소설가가 단절된 고향의 풍경속에서 전통적인 가치에 대한 우리의 목마름을 추겨준 작품을 량산하면서 고향의 자연풍경을 문학적인 예술공간에 복원하는데 성공할수 있었던것은 고향에 대한 그의 남다른 정감과 향수때문이기도 하겠지만 그것을 토속적인 방언으로 다시 빚어낸 너스레, 투박함, 감칠맛이 혼재되여있는 조어(造語)들의 연금술적인 효과덕도 톡톡히 입었던때문이 아닐가싶다.  "고향은 나에게 고향 자체만은 아니다. 그것은 끈끈한 민족의 삶이 적취된 터전이다. 그 원천적인 터전을 등지면 민족작가에게는 보람이 없고 문학사상을 운운할수 없다."고 작가는 적고있다. 최국철소설가의 고향 남대천에 대한 사랑은 나이가 들어도, 삶의 터전이 시가지로 옮겨도 변하지 않고있다. 고향 남대천은 그에게 피와 살을 준 곳임과 함께 그에게 령혼을 부여하고 작가적인 삶을 영위하게 해준 자궁이자 요람이였다. 한 작가의 성장과정에 지배적으로 영향을 주는 자연환경과 작가의 의식세계를 형성하는 하나의 토대가 곧 고향이다. 때문에 그는 지금도 고향 남대천에 대한 그리움을 버리지 못해 늘 향수에 젖어있고 그 향수는 진한 사념의 절주가 되여 키보드장단속에 가락 맞는 고향타령을 두다려대고있는것이다.    그러나 요즘의 현대인들에게는 “고향”이라는 단어조차도 낯설어지고있는듯하다. 작가들은 저마다 피페화되여가는 고향에 대한 안타까움을 토로한다. 고향의 상실이라는 문제는 현대인들의 심리속에도 깊은 그늘을 드리우고있다. 이는 현대인들이 자아를 잃고 정체성을 확보하지 못하는 리유의 하나가 되기도 하는것이다. 이제 새로이 태여날 세대에게 고향의 문제를 어떻게 일깨워줄것인지 우리의 문학은 그것을 새롭게 고민해야 할 때가 되였다고 하겠다.  문학작품에서 고향은 작품의 줄거리를 동반한 정서로 미화되거나 작품의 후경으로 보조역할을 한다. 작중인물에게 고향이 차지하는 심리적배경도 큰 의미를 갖는다. 때문에 문학작품에 드러난 공간과 배경의 의미는 작품 연구와 구분해서 다룰수 없을 정도로 중요한 가치를 가지고있다.  현대인들은 물리적공간으로서의 고향을 상실했을뿐문아니라 인류의 근원적인 고향으로서의 심적공간도 상실해가고있는 현실이다. 그 점에서도 우리 문학속에서의 고향의 의미에 대하여 검토해보는 일은 그 자체만으로도 소중한것이다.    세상은 넓지만 세상 어디에도 없는 반드시 그곳이여야만 했던 문호들의 문학적 본향, 그곳의 어제와 오늘, 그속 인간 존재들의 속됨과 아름다움, 우환과 희망을 망라하는 그곳만의 이야기가 파노라마로 펼쳐지기에 독자들의 향수와 더불어 그 작품은 명저의 반렬에 오를수 있은것이 아닐가! 이 한 면에서 관씨, “마”씨, 최씨의 작품들은 우리에게 좋은 보기가 되지 않냐고 스모그가 자욱한 수부에서 고향의 파란 하늘을 그리며 새삼스러운 향수 한자락 머금어보았다.    쟝르, “낭떠러지”에서 “바람소리”를 듣다 -제9차 전국작가대표대회 수감록 (3)     대회기간 연변작가협회대표단은 절강성대표단, 중경대표단과 분조토론(分组讨论)을 함께 하기로 배치되여있었다. 그중 절강성대표단의 명단을 본 나는 저도 모르게 환성을 터뜨렸다. 그 명단속에 소설가 맥가(麦家)가 우리와 같은 조에 있었던것이다.  작가대표대회에 오기전까지도 나는 마침 맥가의 소설 《칼날우를 걷다(刀尖)》를 읽고있었다.  맥가는 그의 동명소설을 각색한 영화 “바람소리”를 보면서 홀딱 반하게 되였다.  주신, 황효명, 리빙빙, 장함여, 소유붕 등 중국과 대만의 톱스타들이 대거 출연한 영화는 원체 영화광인 나를 매료시키에 충분했다. 그후 원작을 찾아 읽으며 그의 작품에 홀딱 빠져 한부, 두부 그의 모든 작품을 소장하고 읽고있다.  《바람소리(风声)》는 2차대전시기 일본의 침략에 맞서 활동했던 중국 스파이들의 활약을 그린 작품이다.  1942년, 일본군은 “유령”이라 불리는 정보부 내부의 첩자를 잡아내기 위해 가짜 암호를 내보내고 암호에 접근할수 있었던 5명의 중국 내부요원을 외딴섬에 감금한다. 한명씩 차례로 고문과 회유를 통해 심문하지만 끝끝내 첩자를 잡아내지 못한다. 작품은 전쟁을 배경으로 한정된 공간과 한정된 인원 그리고 정해진 시간이라는 흥미로운 설정속에 침략자 일본과 그에 맞선 중국 엘리트들 사이의 두뇌싸움이라는 심리 스릴러를 흥미진진하게 풀어가고있다. 긴장감 넘치는 심리전속에 국가를 위한 희생이라는 대의명분과 우정과 배신으로 얽힌 개인적인 감정이 교차되면서 놀라운 감동을 선사한다. 맥가의 출현은 문학계에 작지 않은 충격을 불러왔다. 그의 소설은 쟝르문학과 본격문학의 중간쯤에서 흥미있는 스토리를 박진감 있게 엮어나가는 품이 기존소설의 문법을 확연하게 뛰여넘는다. 그의 작품을 첩보소설, 추리소설의 형태로 귀납할수 있지만 암호의 고안과 파해, 신비한 직업을 둘러싼 미스테리를 소재로 한 작품구성에 만족하지 않고 맥가는 이 신비로운 세계속의 개인의 생존상태에 더욱 주목한다. 이것이 곧 그의 작품이 추리소설이나, 정탐소설보다 초월적인 품격을 갖춘 품격의 높이이다. 맥가는 이제 순 문학의 리념과 쟝르소설을 가장 훌륭하게 성공적으로 결합시킨 전범으로 자리매김되였다. 해외 주요 언론들에서도 그에 대해 주목하기 시작했다. 뉴욕타임스는 작가 탐방기사를 장문으로 실었고 월스트리트저널이나 옵서버 같은 주류 매체에서 “가독성과 문학성이 뛰여나다”고 호평했다.  한 문학잡지는 “1980~1990년대의 막언, 여화, 소동, 왕안억 이후 단 한명을 꼽으라면 바로 맥가이다”라고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이번 대회기간 분야의?? 쟝르를 능수능란하게 다루는 또 한분의 작가를 만날수 있었다.  지난해 우리 문단의 최고액의 상인 “단군문학상”을 수상한 전용선소설가였다. 흑룡강대표단으로 온 전용선은 인민대회당에서 특별히 연변대표단의 좌석을 찾아와 우리와 악수를 나누고 담소를 나누었다.  전용선은 1966년 흑룡강성 가목사에서 태여났다. 북대황문공단 창작원, 《삼강석간》신문사 기자로 근무했고 중한수교 이전 한국 파주의 한 공장에서 힘든 고역을 했던 경력도 가지고있다. 이후 34세가 되던 해 꿈을 안고 북경에 올라온 그는 로신문학원과 북경 영화학원에서 공부하며 비로소 작가로서의 길을 내딛게 되였다. 주요작품으로는 중편소설 “흰 태양 붉은 태양”, 장편소설 《독신자》, 소설집 《소화 18년 (昭和十八年)》등이 있다. 드라마창작에도 매진하여 “세월”, “눈속의 승냥이(雪狼)”, “어머니” 등 드라마를 통해 관객들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그러다 첩보드라마 “낭떠러지”로 드디여 중국문단에 크게 문명을 떨친것이다.  요즘 TV채널을 열면 온통 첩보드라마 열풍이다. 몇해전 첩보드라마 "잠복(潜伏)"이 공전의 히트를 해 묵직한 상도 받았고 조선에까지 수출되여 인기리에 방영되였다. “중국드라마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알린 드라마의 시작”이라고 관객과 전문가들은 첩보드라마의 출현을 반겼다.  그를 선두로 몇해간 중국의 거의 모든 채널에서는 다투어 첩보드라마 열풍이 일었는데 가히 토네이도 급이다. 주요 방송국에서 황금 시간대에 방영된 드라마 200여편중, 항일전쟁드라마가 70편 넘게 차지했는데 그중 과반수가 첩보드라마이다. 지난해 절강성의 유명한 드라마 촬영지인 횡점(横店)스튜디오에서는 동시에 50작품이나 되는 항일전쟁 드라마가 촬영되였는데 일본군 배역을 도맡다싶이하는 한 전문 배우는 최대 하루에 10여번이나 죽는 장면을 찍었다는 후문이다.  이 활기찬 항일전쟁드라마, 첩보드라마의 배후에는 성숙한 영업, 판매 생산 라인과 정의의 애국이라는 정서와 무대가 뒤받침하고있다. 그것은 문화의 트렌드와 자본의 추구로 인해서 생겨난 산물인 동시에 중국인들의 항일전쟁시기에 대한 특수한 정감과 력사관에서 유래한것으로 단순한 오락의 세계와는 완전히 다른 성질이 드라마 작품들이였다. 하지만 그렇게 량산된 드라마중에는 단순한 열풍에 편승한 싸구려수준의 드라마가 란무하였고 수작이란 몇부밖에 되지 않았다. 그 수작들중에서도 장가락으로 솟아오른 작품은 단연 전용선의 "낭떠러지(悬崖)"가 아닐가 생각한다. 드라마는 일본의 침략과 국민당의 횡포에 맞서 싸우는 공산당의 특공인원 주을(周乙)의 활약을 시종 팽팽한 긴장감속에 사랑과 증오, 음모와 배신을 현념과 액션을 곁들인 프레임으로 그려내고있다. 여느 드라마에 비해 총격전이나 동작씬 같은것이 적고 미녀들의 선정적인 유혹도 없지만 30여집 내내 마음 졸이며 보게 하는 영화, 극작가가 심혈을 쏟아부은 탄탄한 스토리와 주연들의 웅숭깊은 연기가 돋보인 드라마이다.  “낭떠러지”는 “제18회 상해  TV 페스티벌”에서 “최우수드라마 작가상”을 수상했고 이밖에 “최우수작품상”, “녀우주연상”등을 휩쓸며 그해 중국 최고의 드라마로 선정됐다.  “낭떠러지”는 전용선의 장편소설 《호바트거리(霍尔瓦特大街)》를 개편한 작품이다. 2012년 1월부터 상해동방위성TV, 흑룡강위성TV, 천진위성TV에서 동시에 저녁황금시간대에 방영했다. 상영 3일만에 관객들의 열띤 론의를 불러일으켰고 시청률은 으뜸을 차지했으며 시장점유률은 새해 대형드라마가운데서 최고에 달했다. 이에 중앙TV 제1프로에서 인차 황금시간대에 방송을 했고 중앙TV 종합프로에서도 뒤이어 역시 황금시간대에 재차 방송했다. 드라마가 방영된후 중국TV예술위원회에서 “낭떠러지”에 대한 연구토론회를 조직했다. 회의에서는 근간에 막다른 골목에 이른듯 식상함을 보이고있는 첩보전드라마창작에 있어서 “낭떠러지”는 “하나의 좋은 돌파구를 제시했다”, “슈제트로 승부한것보다는 인물, 인성으로부터 출발하여 인물의 내심세계와 세부의 진실로 승부했다”고 높이 평가했다.    사실 우리 문단에서 전용선을 극구 알린 장본인은 필자라고 감히 말해본다. 필자는 전용선의 씨나리오 “낭떠러지”와 그 본인을 소개하는 글들을 수차 여러 간행물과 웹사이트에 실었고 그의 《소하 18년》, 《한사(恨事)》 등 작품들을 번역했으며 그의 대표작인 “낭떠러지”를 DVD물로 여러부 구입해 동인들에게 나누어주기도 했다. 그가 “단군문학상”에 입상되자 평심위원의 한 사람으로서 그 누구보다 기뻐했던 나였다. 내가 그에게 흠뻑 빠진 또 다른 원인은 중국의 주류문단과 드라마계에 진출하여 모두를 놀래운 그가 다름아닌 조선족이라는 동질성 어린 정감에도 있었다.  전용선은 근래 출간문의가 비발치는 이 미완의 장편소설 《호바트거리》를 완수하여 드라마에서의 아쉬운 점을 보완하려 한다고 했다.   하지만 하늘로 치솟은 인기에도 불구하고 우리 문단에서 맥가 그리고 전용선의 작품들은 알려지지 않고있다. 그들을 아는 사람이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것이다. 맥가의 작품 《바람소리》가 제6회 중국어문학미디어 대상을, 《해밀(解密)》이 국가도서상을, 《암산(暗算)》이 심지어 제7회 모순문학상이라는 중국문단 최고의 상들을 수상했음에도 그를 모른다.  바로 이들이 추리문학이라는 특정된 소재를 다룬다는 쟝르적특성때문이 아닌가싶다.    우리 문단에서 추리소설은 찬반론이 심하게 엇갈리는 쟝르이다.  그럼에도 일찍 80년대에 우리 주변에서는 이미 추리소설 열독붐이 일었다. 당시 일본작가로는 모리무라 세이이찌, 한국작가로는 김성종 그리고 미국작가로는 시드니 쉴던(西德尼·谢尔顿)의 작품들이 거의 서점가를 독점하다싶이 했다. 그리고 애거서. 크리스티(阿加莎·克里斯蒂)의 추리소설을 각색한 영화 “나일강 살인사건(尼罗河上的惨案)”과 “동방특급렬차 살인사건(东方快车谋杀案)”이 중국말로 더빙되여 나와 인기를 끌었다.  조선족작가들에게 소개된 작품들로는 모리무라 세이이찌의 “인간의 증명”, 김성종의 “피아노살인”, “제5의 사나이”, 시드니 쉘던의 “가령 래일이 오면” 등이 있다. “가령 래일이 오면”은 당시 《천지》문학지에서 꾸리던 문학애호가들의 통신간물 《개간지》에까지도 련재된적 있다.  김성종의 추리소설은 그후로도 거의 20년 가까이 서점가를 강타했고 모든 간행물들에서 그의 소설들을 다투어 련재했었다. 우리의 번역가들에 의해 김성종의 많은 소설들이 중문으로 번역되였는데 불과 몇해까지만도 진설홍, 윤금단 등 번역가들에 의해 김성종의 소설이 중문으로 번역되여 서점가에 올랐다. 사실 우리 조선족문단에도 오래전에 추리소설과 같은 쟝르문학이 나왔다는 주장이 있다. 1960~70년대에 이미 인물설정과 플롯구성에서 탐정소설화 현상이 나타났다고 하는데 아주 흥미로운 부분이다. 그 황당한 년대에 계급투쟁의 주제는 우리 소설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기 시작했고 숨은 계급의 적을 수색하고 그들의 반동적인 음모를 밝혀내는 과정이 소설의 플롯을 형성한것이였다. 따라서 탐정적인 요소가 가마되기 시작했다.  장춘식평론가의 평문에 따르면 “김지훈의 단편 ‘첫 근무’(1976)와 김청송, 황하성의 ‘철벽’(1976)은 상당히 정교한 탐정소설의 구조를 갖추고있다.” 그리고 이처럼 본격적인 탐정소설 혹은 추리소설이 아닌 일반작품들도 탐정소설의 구조를 갖추고있는 작품이 적지 않았는데 “김희철의 중편소설 ‘전우의 딸’(1976)과 ‘림해의 풍파’(1977)”가 대표적이다. 당시는 이른바 “3돌출원칙”이라는 좌적인 철쇄에 매여 모든 작품들이 소재나 구성면에서 천편일률적인 자유롭지 못한 상황임에도 이러한 창작경향이 슬그머니 일었는데 평론가들은 두가지 측면에서 그 현상을 해석해본다. 하나는 많은 금지구역이 존재하였기때문에 작가들이 리용할수 있는 플롯구성의 방식에 별로 여지가 없었던 사정과 관련되고 다른 하나는 문화대혁명전에 우리 글로 번역소개되였던 쏘련의 탐정소설 《구리단추》 등 작품들이나 70년대 중반 중국에서 방영되였던 조선 영화 “숨길수 없는 정체”, 쏘련영화 “발자욱”, 그외 알바니아와 로므니아의 탐정영화가 준 영향과 무관하지 않다는것이다. 탐정영화, 당시에는 흔히 “반특”영화라 불렀는데 몇편 안되는 혁명적 본보기극 영화들만이 란무하던 그시절, 단일한 제재의 반복에 식상했던 그 시대 사람들의 문화생활에 이채를 보태여준 제재라 볼수 있겠다. 개혁개방이 시작되면서 계급투쟁주제의 소설은 점차 자취를 감추나 소설 플롯구성에서의 이와 같은 탐정, 혹은 추리적인 수법의 관성은 여전히 이어졌다. 그후 《아리랑》총서에 몇회에 나뉘여 련재되였던 김경련의 중편소설 “흉수는 누구?”, 리만호의 “국장과 나리꽃” 등 몇부의 소설들이 추리소설, 통속소설의 형태를 띠고 창작되여 당시로는 작지 않은 센세이숀을 일으켰다. 그외에도 추리소설에 대한 전문창작시도를 보여준 작가들도 몇분 있었다. 연변 로투구출신의 윤송이라는 젊은 작가도 있었고 경찰계통에서 사업했던 룡정의 전강이라는 작가가 추리소설을 몇부 내놓았다. 하지만 량적으로 적었고 수작을 내놓지 못했기에 쟝르문학 창작군을 뭇기에는 그 기세가 판부족이였다. 부끄러운 고백이지만 필자도 80년대에 추리소설을 발표하려 고심한적 있었다. “꿈의 변두리”라는 제목으로 4만자 되는 꽤 큰 편폭으로 창작했는데 여러 문예지들에서 퇴짜를 맞고 나중에는 당시 번역작품들을 전문 싣다가 페간된 《갈피리》라는 잡지에 그나마 실려 추리소설 창작에 대한 감질난 창작욕구를 무마한적 있다. 이 와중에 크게 느낀바이지만 우리 문단에서 쟝르문학에 대한 수용태도는 그닥 원활하지 못하다는것이다. 때문에 추리소설외에도 쟝르소설의 주류를 이루고있는 무협이나 과학환상소설, 판타지 같은것은 아예 전무하다싶이 되여있다. 과학환상은 아이들을 상대로 한 환상동화가 그런대로 몇편 나왔지만 성인을 상대로 한것은 리태학선생이 《아리랑》지에 발표한 겨우 한두부로 알고있다. 무협형태의 작품 역시 80년대 내부간행물인 《개간지》에 당시 문학통신원 출신의 젊은 작가였던 류순호씨에 의해 겨우 한편이 나왔다.     오래동안 탐정소설을 비롯한 추리소설들은 중국 정통문학 및 정통독서계 그리고 주류 미학관에서 부자연스러운 위치에 처해있어왔다. 막상 추리소설을 좋아해도 그것을 인정하기는 꺼린다. 특히 품위 있다는 문화인, 엘리트 지식인이 그렇다. 추리소설은 로맨스, 무협 등의 소설과 마찬가지로 통속적이며 격조가 높지 않다고 생각하기때문이다. 이런 류의 소설을 좋아하는 부류도 사회문화수준이 어떠하든 본질적으로 취미가 낮은 사람으로 찍힌다. 이러한 쟝르에 대한 거부와 폄하가 쟝르문학의 정체를 빚어내고있다고 해야겠다. 우리 문단에서도 마찬가지이며 외려 그 편향적인 시선이 더 강하다고 해야 할것이다.    몇해전 필자가 추리소설에 좀 필묵을 돌려보려 한다고 창작의향을 밝히자 어느 선배작가는 술까지 사주면서 극구 만류했고 어느 잡지사 편집은 아예 그런 쟝르는 우리 잡지의 관문을 넘을수 없다고 엄포를 놓기까지 했다.  또 어느 한번 문학도들을 위한 특강의 자리에서 나는 편협한 독서의 범위를 넓혀 추리소설 같은 쟝르소설도 읽으면 플롯이나 구성에서 도움이 될수 있다고 말했었다. 그런데 그 자리에 동석했던, 해외에서 학위까지 따내고 왔다는 한분이 벌떡 일어서더니 “추리소설을 읽지 마세요. 쓰레기입니다”고 벌겋게 흥분한 목소리로 나의 특강을 무질러버리는것이였다. 특강이 끝난후 식사자리에서 나는 “뿌쉬낀, 스티븐슨, 월리엄 포크너 같은 순 문학의 대가들도 모두 추리소설을 창작한적 있습니다. 레이먼드 첸들러의 추리작품을 읽었나요? 순 문학보다 더 깊습니다.” 하고 진지하게 반문하며 그 편견을 깨려다 돌아온건 “난 그런 작품들을 읽은적도 없고 그 작가들 이름조차 모르오” 라며 한사코 머리를 가로젓는 거부의 표정이였다.  이처럼 우리의 일부 작가들과 주류문학 연구자들은 자신들이 추천하고 언급하고 연구하는것만을 배타적으로 문학으로 간주하면서 쟝르문학 같은것은 순수문학으로부터 배제된 "상업주의문학”, 지어 “하위문학”이라고 락인을 찍고있다. 이러한 쟝르가 우리가 흔히 접해온 근대소설의 외양과 다르다고 해서 쉽게 배척하는것은 변조하고있는 문학을 대체하는 게으름과 무지의 소산이 아닐가고 감히 말해본다. 이렇게 쟝르문학을 “수준 낮은 문학”으로 치부하는 시선들이 있기때문에 쟝르문학에 아예 근접해보지도 못하고 쟝르문학이 정체되는 리유중 하나일것이다.  우리 문단의 작가들과 독서성향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어보면서 근년래 쟝르문학의 최고봉으로 꼽는 조앤 롤링의 “해리포터”나 댄 브라운의 “다빈치코드”, 톨킨의 “반지의 제왕”조차 읽은 사람이 몇사람 되지 않을 정도여서 그 독서량의 편식에 놀란적도 있었다. 사실 필자는 국외의 쟝르문학 작품들을 대량 사들여 소장하고 읽으면서 나름 쟝르문학 창작에서 시도를 많이 해보았다. 아동력사소설에 미스터리와 무협요소를 가미한 “거북구술”과 “신라의 검”을 발표했고 “환을 말하다” 라는 평론을 게재하여 판타지문학의 추세에 대해 분석도 해보았고 순 문학지에 호러작품 몇편도 발표하여 평론가들의 찬반의 평론을 이끌어내기도 했다. 그리고 판타지작품 “불의 제전”을 발표하여 《연변문학》 윤동주문학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당시 문단의 첫 판타지였음에도 그 새로운 쟝르를 존중해 큰상에 뽑아준 심사위원들에 감사를 느꼈지만 10여년이 지난 오늘까지도 판타지작품은 아직도 거의 한편도 보이지 않아 갑갑한 마음이다. 그만큼 이렇게 이야기를 담아내는 새로운 매체나 틀이 등장하였을 때 관습적인 서사형태로 독점적 권한을 행사하던 우리 작가들과 평론가들은 불편한 심기를 드러내는 경우가 잦았다.    해외의 경우“순수문학”과 “쟝르문학” 사이의 경계조차 허물어지고있다. 이 경계가 허물어지고있다는 이야기가 나오기 시작한게 벌써 십년 저쪽의 일이다. 추리, 과학환상, 판타지, 로맨스, 무협 같은 쟝르소설들이 본격문학의 령역안으로 대거 밀고 들어오는 한편 순수문학쪽과의 대화를 시도하고있다. 그리고 태고적에 칼날을 휘두르고 은하계밖에서 날아예고 피투성이의 복수극을 펼치던 쟝르문학이 이제는 사회속으로 깊이 들어가고있다. 쟝르문학 전문작가들은 그 시대의 사회문제를 포착하고 민감하게 의식하고있고 대중들도 관심을 가질만한 우리 사회의 다양한 문제들을 작품에 담아내고있다. 해외작가들중에서 쟝르문학에 심취한 순 문학가들로는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프랑스의 앙드레 지드, 《인간의 굴레》의 저자인 영국소설가 서머셋 모옴 등이 그 대표적인 인물들이다. 특히 서머셋 모옴은 “미래에 살아남는 문학은 추리소설뿐이다. 책방에도 도서관에도 추리가 넘쳐날것이다”고 예견하기도 했다. 한국의 경우에는 순수문학과 대중문학의 구분이 엄격한 그들의 문학풍토에서 쟝르문학 시장이 활성화함에 따라 일부에서는 하위쟝르로 폄하되던 쟝르소설들이 미래의 문학을 이끌어갈지도 모른다고 조심스레 점치기도 한다. 추리소설이 단순한 추리가 아니고 “소설”의 체제를 갖춘 추리요, 추리를 위한 “소설”인만큼 문학의 쟝르임에 틀림없으며 문학의 쟝르인 한 문학성을 부정할수는 없다. 만약 문학성을 완전히 배제하고 순전히 추리에 대한 문제의 제시와 해답만을 기술한다면 그것은 소설은커녕 원고지 몇장이면 충분한 퀴즈풀이에 지나지 않을것이다.   그런데 또 하나 중요한 요소, 즉 작가들이 다양한 쟝르에 손 댈수 있는 욕구가 필요한데 조선족문단에서는 이것이 너무 미약하다 할수 있다. 다양한 쟝르의 창작에 관심을 가질수 있는 가장 강력한 욕구는 독서시장의 요청과 밀접한 관련을 가진다. 그런데 우리 작가들이 그것도 자비로 출판한 책들이 겨우 300부를 소화하기도 버거운 우리 말 출판시장과 독서시장의 부재는 오래된 현상이다. 게다가 가련할 정도로 적은 우리의 독자들조차 중국이나 외국의 영화나 텔레비죤 영상물 그리고 인터넷쪽에 경도되여있다. 작은 시장, 엷은 독자층을 가진 우리 문단, 하기에 더욱더 생존의 길을 뚫어야 한다. 생존화하려면 다양화 그리고 분화할수 밖에 없다. 그렇다면 쟝르문학을 바로 분화, 다양화의 한가지 중요한 방식으로 봐도 무방할것이다.  “오늘의 시대는 대중이 문화의 중심에 위치하고 대중에 의해 문화가 창조된다.”고 전문가들은 말한다. 이러한 정론은 쟝르문학에 대한 긍정적인 시선을 가지게 한다. 독자들의 흥미를 무시하고 독자를 외면하며 씌여진 작품은 비록 작품성이 뛰여나다 할지라도 “읽히지 않는 소설”이라는 모순에서 벗어날수 없을것이다. 때문에 우리의 문단은 편협한 변두리사유에서 벗어나 첨단 다매체시대에 걸맞게 활용매체에 부합되고 대중적으로 어필하는 소통전략을 필요로 해야 할것이다. 그런것이 하루아침에 되진 않겠지만 서서히 극복하고 넘어서는것이 우리 문학의 다양화와 정체의 극복 나아가 비전을 위해선 상당히 중요한 고리가 아닐가 하고 생각해본다. 번역인재들을 적극 동원하여 우리의 수작들을 번역하여 주류문단에 소개하는 한편 우리 말의 동질성을 갖고있는 한국을 포함시킨다면 물론 작은 시장은 아닐터이다. 중국조선족이라는 우리만의 특유의 정서와 소재로 한번 승부사를 던져본다면 가능성이 없는것도 아니지 않을가? 근년래 외려 한국에서 우리의 소재를 활용하여 책도 내고 영화도 만들고있다. 그 와중에 상업효과만 쫓아가고 조선족에 대한 리해의 결핍때문에 상업의 맛망울을 따라가며 내놓은 작품들이 조선족을 심하게 왜곡해 독자와 관객들의 불평의 소리도 크게 들린다. 여기서 우리 조선족작가들이 해외에서 사뭇 선호하는 쟝르문학에 대한 연구와 동참의식에 대해 한번 호출해보는것도 무리가 아닐것이다.   쟝르문학이 가지고있는 오락성은 분명 순수문학의 엄숙성과는 구분지어질 특징이라 할만도 하다. 그러나 쟝르문학의 가치 전부가 부정적으로 판단될 성격의것은 아니라고 본다. 교훈적이기보다는 오락적인 재미를 얻기 위해 소설을 접하는 독자들에게 이른바 순수문학이 추구하는 목적달성의 “일석이조”의 효과도 줄수 있다면 쟝르문학의 가치를 작지 않게 매길수 있다고 생각한다. 몇해전에 《도라지》에 발표한 호러작품 “산장”에서 필자는 단지 공포물이라는 취미로 쟝르문학에 접한것이 아니라 이를 통해 변혁기 농촌사회의 붕괴와 그 와중에 겪게 되는 농촌총각들의 실의와 아픔에 대해 다루려 했다. 그리고 《연변문학》에 발표한 판타지 “불의 제전”에서는 민족의 렬근과 분단의 아픔에 대해 말하려 꾀했다. 오래동안 엄숙한 자세로 소설창작에 림해온 작가로서 필자는 기존의 본격소설은 쟝르문학과 같은 다양한 자양분을 수용해야 그 지평을 넓힐수 있다고 생각한다. 궁극적으로는 더 많은 독자들을 섭렵하고있는 쟝르문학의 흥미가 종국에는 순 문학으로 이끄는 힘이 되길 바라마지 않고있다. “호불호”가 엇갈릴지라도 현재의 디지털시대를 살아가는 독자들의 양식과 감각은 사회를 구성하고 문화의 양상을 결정짓는다는 점에서 쟝르문학은 결코 가볍게 보아서는 안될 중요한 령역이다. 쟝르문학에 대한 새삼스러운 환기와 구구한 담론은 산업화시기에 맞닥뜨려 어딘가 무력해진 우리 문학의 현황과 그 문학의 생존을 갈망하는 열정때문이라고 말하고싶다. 탈변에 탈변을 거듭하는 과정에서 문학은 더욱 문학답게 정련될것이며 그것만의 절대적인 기능을 갖게 될것이라고 나는 믿고싶다.    추리소설은 이미 충분한 호소력을 갖고있다. 그것은 나날이 성숙해지고있으며 작가, 도서, 출판사에서부터 독자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추리소설을 많은 문학과 이데올로기의 혼돈에서 이끌어내 하나의 명확한 문화상품이 되게 하였다.  추리물은 또 중국의 유명 작가들이 다투어 애호하는 서사양식으로 되고있다. 북경작가 왕삭(王朔)은 몇몇 소설에서 추리물의 서사모델을 채택했다. 그는 전통 추리소설속의 정의, 지혜, 제도와 질서를 해소시키는 대신 세속적이며 경멸적인 태도로 숭고하고 정통적인 모든 사물을 조롱했다. 중국의 대표적인 작가 여화(余华)에 대해서도 언급해야 한다. 그는 창작초기에 몇편의 추리물과 미스테리물을 쓴바 있다.  모순문학상을 수상한 상해 녀류작가 왕안억(王安忆)의 근작 장편소설 《닉명》도 역시 추리소설의 형태를 띠고있다.  중국을 대표하는 쟁쟁한 순 문학 작가들이 쟝르소설적 틀과 장치를 적극 활용한 작품들을 다투어 내놓고있다. 그들은 “문학의 외연을 넓히고 독자와 정면승부하자는게 취지”라고 창작의취에 대해 설명하고있다. 그중 맨 선두주자로 달리고있는 맥가가 바로 전형적인 례이다.  대표대회가 열리는 기간 중국의 유명 순 문학잡지인 수확(《收获》)에서 추리소설상을 공모한다고 발표, “순 문학과 쟝르문학의 경계를 가르련다”고 선언했다. 사실 중국문단에서 중요한 소설상의 하나인 욱달부(郁达夫)소설상의 단편부문상 역시 올해에는 추리소설가 채준(蔡骏)의 추리작품 《눈물의 돌(眼泪石)》에 돌아갔다. 우리 문단의 경우 권위 문학지 《연변문학》에서 올해의 대미를 장식하는 12월호에 참으로 오랜만에 큰 편폭을 할애해 추리소설을 실었는데 기꺼운 시도라 본다.     전통적으로 추리소설은 의식적으로 자신과 순수문학의 신분을 갈랐으며 일반대중을 상대로 자신의 “서자(庶子)”와 같은 명분을 정해왔다. 이제 좁고 추운 별채에서 소박받던 그 “서자”가 궁궐 같은 본채로 들려 한다.  그럼에도 중국문단에서 이러한 자리매김은 아직도 “낭떠러지”우에서 소슬한 “바람소리”를 듣고있다고 해야 할것이다. 아직도 산자락에서 서성이는 상태, 산봉에 오르기까지는 등반의 모험을 수반한 긴 시간과 각오가 수요된다고 해야겠다. 우리 문학에서는 더 긴 등반이 수요될듯하다… (다음호에 이음) 출처:2017 제1호
80    <장백산> 2018.6 루계222 댓글:  조회:822  추천:0  2019-07-16
장백산 총222호 2018년6호   권두칼럼 림원춘        작가는 탁상머리를따나야한다   기획조명-작가와 작품 주향숙        당신 (시, 외10수)  주향숙        가슴에 무한한 바람을 안고서 (작가노트) 주향숙        나는 너의 밖에서 (수필, 외3편) 우상렬        아, 그 향긋함…(작품평) 한영남        ‘그날처럼’(작가평)   기획련재 김  혁          한락연평전 (장편인물평전 련재 끝)   박초란소설코너 박초란       이기다의 선물(단편소설) 김홍월       정주와떠돔을소멸시키는여섯개의편린들(소설평)   소설광장 조  원         좌망, 빛이 기다리는 곳으로(단편소설) 조영욱       주체할 수 있는 욕망(소설평)   계렬수필 허룡석       녹쓴철길우에서(수필) 허룡석      새빨간거짓말과새하얀거짓말(수필) 허룡석      아픔이진주를낳는다(수필) 최삼룡       고향에 대한 상실감과 진주로 거듭나기(수필)       시인 시전  남철심    고요한 밤(시, 외5수) 손경란    고통과 성찰이드러나는남철심시인의시적세계(시평)   창작마당 김경희         옥상에 걸린하늘(단편소설) 엄정자         같은하늘아래다른땅(수필) 김경화         길목에서서(수필) 김명숙         언어의에너지(수필) 박장길         어둠의 혼 (시, 외2수) 류은종         빨래줄(시, 외1수) 김재연         가야금(시, 외1수) 리금화         초가삼간(시, 외1수)   8090문학코너  현청화         이모(단편소설) 리은실         나는 필요하다, 고로 존재한다?(수필) 리  미           품는 화분(수필) 김  연           곧 오색 음악이 흐를 것이다(시, 외2수)   기행문 류재순         '해가지지않는나라’ 옛훈장이빛나는-영국을 가다(기행문)   중국문학       마   분          회성인물淮城人物5인전 (단편소설 / 김견 옮김)     장편소설련재 김혁            무성시대(장편소설 련재6) 구호준        여백(장편소설 련재4)
79    마분马犇: 회성인물淮城人物 5인전(단편소설) 댓글:  조회:460  추천:0  2019-07-16
회성인물淮城人物 5인전 마분       표구사裱画师  서씨 회성은 자고로 수많은 문인 묵객들을 배출한 고장인 만큼 표구소裱画所가 꽤 많았다. 표구 하면 흔히들 수묵화를 떠올리지만 서예작품 표구 또한 그 범주에 포함된다.  표구소들에서는 본토 작품은 물론 타지역 작품과 여타 수선이 필요한 소장품들을 두루 취급하다 보니 표구시장은 꽤 흥성한 편이였다. 가끔 가다 후계자가 없는 고로 문을 닫게 되거나 또는 기계표구 기술을 인입하면서 대가 끊기는 가게들도 더러 있었지만 말이다. 하지만 남들이야 어찌하든 오로지 수공예 기술만을 고집하는 표구소들도 여럿 있었으니 회성 남문대가 동쪽 골목에 위치한 서씨네 표구소 ‘념로재念芦斋’가 그 대표적인 일례였다. 수십대째 대물려내려온 ‘념로재’는 어느 한 조상대에 이르러 어쩌다 변수민边寿民과 인연이 닿게 되였는데 그 작품들을 표구해주고 친분을 쌓으면서 상호 교감하고 가르침도 받고 한 덕에 그 조상할아버지는 표구는 물론 그림과 전각篆刻 기술 등에 두루 능한 기술자로 린근에 이름깨나 알려졌는데 지금 와서는 서씨가 그 기술들을 고스란히 전수받은 유일한 후손인 셈이였다.  변수민은 시와 서화에 두루 능해 정판교郑板桥, 금농金农 등과 비견되는 인물로 갈대와 기러기 그리기를 각별히 좋아해 일명 ‘변로연边芦雁’이라 불리기도 했다. 그리고 한때 회성 천비궁天妃宫 린근 갈대밭 언덕에 기거해 살면서 위간거사苇间居士라는 호를 얻기도 했다. 그런 연유로 서씨네 조상은 변수민과의 인연을 기리는 의미에서 표구소 이름을 ‘념로재’라고 지었던 것이다.  옛말에 ‘서화작품 3할에 표구가 7할’이라고 했을 정도로 서화작품에 있어서 표구는 상당한 비중을 차지한다. 표구는 그 절차가 아주 복잡다단하고 까다로울 뿐만 아니라 표구사의 종합적 자질에 대한 요구 또한 상당히 엄격한 작업이다. 서씨네 표구소에는 세가지 철칙이 있었는데 하나는 그림을 분실하지 말 것, 둘은 모조품에 손 대지 말 것, 셋은 공들인 만큼 수금하되 명인의 작품이라 해서 돈을 많이 요구하지 말라였다. 일부 그림을 잘 모르거나 또는 멋모르고 조상으로부터 진귀한 그림을 물려받은 경우라면 가장 사기당하기 쉬운 사람들이였다. 한번은 남대문 서쪽 변두리에 사는 사람이 그림 한점 들고 표구하러 찾아왔는데 그림을 자세히 살펴보고 난 서씨는 아무 내색 않고 그림 임자를 다시 한번 훑어보고 나서 가격을 말해주고 언제 쯤 찾으러 오라 하고는 손님을 보냈다. 그 그림은 사실 서위徐渭의 유작이였다. 어려서부터 사의写意화법을 제법 익혔고 특히 화초 그리기에 능한 서씨였다. 그리고 모사临摹실력도 상당해서 전문가가 아닌 이상 그 진위를 구분해내기 어려웠다. 그러나 서씨는 그 그림을 앞에 두고 이왕보다 좀 오랜 시간을 두고 감상했을 뿐 감상을 마치고 나서는 례사 그림을 표구할 때처럼 차근차근 작업에 림했으며 표구를 마친 다음에는 후일 불필요한 분쟁을 예방하는 차원에서 눈에 잘 띄지 않는 권축卷轴 부분에 자그마한 날인을 남겼다. 그리고 약속날자가 되여 그림 임자가 돈을 지불하고 그림을 찾아갔는데 며칠 안 지나서 그 일은 곧 표구업계의 우스개로, 멍청한 표구사의 전형사례로 ‘회자’되였다.  표구에는 원표구原裱와 게표구揭裱가 있는데 원표구는 표구한 적 없는 그림을 처음 표구하는 것을 이르는 말이고 게표구는 이미 표구했던 그림을 다시 표구하는 것을 이르는 말이다. 게표구는 아주 까다로운 작업이였던 만큼 웬만해서는 아무도 주문을 받으려 하지 않았다. 반면 일부 기술이 뛰여난 악당들로 말하자면 게표구는 모조품을 얻을 수 있는 더없이 좋은 기회이기도 했다. 선지宣纸는 여러층으로 분리해낼 수 있어서 표구사가 마음만 먹으면 그림 한장을 여러층으로 분리해 여러장으로 복제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복제해낸 그림은 색채가 원작에 비해 연해지기 마련인데 그러면 거기에 ‘보완’작업을 한 연후에 다시 낡아보이게 하는 구제작업을 하는 것이다. 그렇게 그림 한장을 감쪽같이 여러장으로 복제해서는 암시장에 내다 파는 것이다.  회성에는 소장가들도 꽤 있었는데 오래된 그림들에 습기가 차거나 좀먹거나 하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였다. 그것도 장마철이면 더 심해지기 마련. 해서 장마철만 되면 회성에서 게표구 작업이 필요한 거의 모든 그림들이 ‘념로재’에 맡겨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였다. 그렇게 한해 여름 동안 서씨 손을 거쳐야 하는 게표구 작업건만 해도 천건 남짓했지만 서씨가 실수로 그림을 훼손했다거나 모조품을 만들어 안속을 챙긴 일은 단 한번도 없었다. 하기에 설령 고개지顾恺之나 전자건展子虔과 같은 대가들의 유작이라 하더라도 일단 ‘념로재’에 맡겨놓았다 하면 아무 걱정 안해도 되였던 것이다.  단 한가지 아쉬운 점이라면 자녀들 모두 해외로 이주해간 바람에 더 이상 가업을 이어갈 후계자가 없어서 년로한 서씨 혼자서 가게를 운영하고 있다는 것이였다.  그런데 그렇게 별탈 없이 조용히 여생을 마무리하는구나 싶었는데 그것마저도 여의치 못했다.  개혁개방 이후, 회성에도 남방에 가서 장사를 시작한 이들이 생겨나면서 이들 중 서화장사가 돈 번다는 것을 알고 모조품, 짝퉁 시장에 눈독을 들인 이들이 있었다. 이들은 자연 고향마을의 표구사 서씨를 떠올리게 되였고 서씨가 표구는 물론 회화 실력도 뛰여나다는 것을 잘 알고 있는지라 불법통로로 원작을 얻어다가 서씨한테 게표구를 시켜 복제품을 만들거나 또는 명화를 모사하게 하거나 혹은 아예 명화를 날로 그려내게 했다. 그 같은 요구에 순순히 응할 서씨가 아니였지만 놈들이 자식들을 앞세워 협박하는 데는 어쩔 도리가 없었다. “해외에 있는 자식들이 무탈하길 바란다면 고분고분 시키는 대로 하는 게 좋을걸유.” 그렇게 서씨가 놈들의 요구 대로 위조품을 만들어주면 놈들은 그것들을 남방에 가져다 팔아넘겼는데 발 없는 말이 천리 간다고 몇참 못 가 그 일은 들통나고 말았고 사실을 알게 된 사람들은 그렇게 고상한 척 점잖을 빼더니 늘그막에 들어 돈에 눈이 멀었다고 서씨를 비난했다.  그러던 얼마 후, 서씨가 크게 한번 앓더니 돌연 세상을 떴다. 그리고 며칠 후에는 위조그림 장사를 해먹던 일당들이 일거에 체포되면서 회성 전체가 떠들썩했다.  사람들 모두 영문을 몰라 쉬쉬하는 중, 경찰에서 지방신문을 통해 사건 경위를 공개했다. 신문기사에 따르면 서씨가 죽기 전에 공안국에 편지 한통 부쳤는데 편지에서 서씨는 전반 사건의 경과를 진술하고 나서 자기 손으로 위조한 그림들의 족자 겹층 안쪽에 “핍박에 못 이겨 그린 위조품임”이라는 글귀를 남겼다는 설명과 함께 그 몇몇 악당들의 용모특징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초상화까지 그려두었다는 것이였다.  그렇게 ‘념로재’는 회성의 관광명소로, 수많은 관광객들과 회성 사람들이 오며 가며 종종 머물다 가는 유적지로 되였다.    오삼전吴三钱 중국문학사에서 조설근을 빼놓을 수 없듯 오국통吴鞠通이라 하면 중의학계에서 빠뜨릴 수 없는 대표적 인물이다. 오씨가 경성 의학계에서 명망 높은 의원이라는 소문이 회성까지 전해지자 수많은 회성 사람들이 중의공부를 하는 대오에 합류했다. 그렇게 아침엔 유학경전을, 저녁엔 의학경전을 읽으라는 말이 생겨날 정도로 유년시절부터 의학공부를 중시하는 풍기가 형성되다 보니 회성에는 대대손손 명의가 나와 오씨의 리론과 의술을 전승하였는데 력사에서는 이들을 ‘산양의학파山阳医派’라고 부른다. 오삼전은 오국통의 후손으로 그는 평생 경성은 고사하고 회성 성문 밖 한번 나가보지 못한 채 평생을 환자들을 위해 바친 사람이였다. 진료소를 운영하려면 우선 이름이 있어야 하는데 조상들이 운영하던 ‘문심당问心堂’은 일찍 전란시기에 파괴되였던 터, 그냥 문심당이라는 이름을 그대로 쓰라고 권유하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오삼전은 완연히 거절했다. 원체 겸손한 위인이였던 터, 행여 자기 수준 미달로 선인들 얼굴에 먹칠하는 일이라도 생길가 저어되였던 것. 해서 고민 끝에 결국 ‘양심당养心堂’이라 이름하기로 하였다.  겨우 한글자만 바꿨다지만 그 의지는 분명해서 말하자면 최선을 다해 자신과 환자들의 마음 그리고 조상들로부터 전수받은 의술, 의덕을 잘 가꾸어가겠다는 확고한 의지가 고스란히 드러나는 이름이였던 것이다. 식이료법에 능한 오삼전은 어떤 한가지 식재료를 그대로 약으로 쓰거나 또는 식재료에 중약을 배합해 처방하는 경우가 많았다. 기침 치료법으로 대부분 의사들이 설탕과 배를 처방하지만 오삼전의 처방은 독특했다. 말하자면 날계란 한알을 사발에 까넣고 거기에 얼음사탕을 살짝 뿌린 뒤 휘젓지 말고 그대로 솥에 넣어 응고될 때까지 쪄서 복용한다. 그렇게 두세번만 복용하면 기침은 가뭇없이 사라진다는 것이다.  녀인들의 산후조리에 관해서도 그만의 처방이 있었는데 소량의 흑설탕을 탄 물에 본고장 특색음식 ‘참깨기름꽈배기’를 곁들여먹는 게 그 처방이였다. 꽈배기를 만드는 점포는 많지만 그는 하하河下 북쪽 끄트머리 가게 아니면 읍내 중심가에 위치한 진회루 1층에 있는 가게 혹은 남문부학 옆에 위치한 가게 등 세집에서 만든 꽈배기를 추천했다. 구전으로 전해진 처방이라지만 요즘도 회성에 가면 이 처방으로 산후조리를 하는 녀인들을 심심찮게 찾아볼 수 있다. 여름철이면 강물이 범람하고 읍내 곳곳에 건물이 침수되기 마련이요, 간신히 홍수를 지나보내고 나면 또 역병이 들이닥치기 일쑤였다. 그러던 어느 한번은 숱한 민가들이 물에 잠긴 데다 전염병까지 번져서 동서남북 성문들 할 것 없이 매일같이 송장이 들려나가고 있었다. 그 무렵, 오씨는 마침 그 옛날 오국통이 경성에 있을 때에도 전염병이 크게 번져 경성에 있는 회안회관에서 수많은 환자들을 죽음의 문턱에서 구해냈다는 기록을 읽고 있었다.  더 이상 좌시할 수 없다고 생각한 오삼전은 그 자리로 의약상자를 둘러메고 제자들을 이끌고 나가 서에서 남으로, 동에서 북으로 도성을 전전하며 수많은 위급환자들을 돌보느라 수일째 밤잠 한번 제대로 자보지 못했고 신발이 해지고 발이 까져 발톱 몇개가 떨어져나가기도 했다.  부득불 오씨는 제자들에게 들려 ‘양심당’으로 돌아가게 되였고 제자들이 그를 대신해 돌아다니며 환자들을 돌보았다. 그러던 하루는 제자들이 아무리 약을 쓰고 지극정성으로 돌봐도 효험을 보지 못하고 간들간들 숨만 붙어있는 환자가 있었다. 맥을 버린 환자 가족에서는 이제 후사를 치를 준비까지 마친 상태였다. 그 환자 가족은 과거 오씨네가 신세진 적이 있는 집안으로 이는 제자들 모두 ‘양심당’에 입문할 때 스승으로부터 들어 알고 있는지라 제자들은 환자에게 태만할 수도 없었거니와 또 ‘되든 안되든 한번 시도는 해보자’는 생각으로 환자를 일단 ‘양심당’으로 모시기로 했다.  이윽고 절룩거리며 나타난 오삼전이 극도로 지친 두눈을 간신히 비벼 뜨고 환자를 살피다가 다시 지그시 눈을 감은 채 깊은 생각에 잠기는가 싶더니 마침내 떨리는 손으로 약처방을 써내려가기 시작했다. 이윽고 제자가 약을 지으려고 받아보니 그것은 전钱 단위까지 소상하게 적혀있는 처방이였다. 자고로 의학계에는 역병 기간에는 어떤 사람에 한해서도 돈을 받지 않는다는 불문률이 있었다. 환자 가족들이 그 앞에 무릎 꿇고 사의를 표하자 오삼전은 사력을 다해 몸을 일으켜 그만 돌아가보라고 손짓으로 배웅하고는 제자들의 부축을 받으며 안채로 들어갔다.  사흘이 지나자 그 환자는 언제 그랬던가 싶게 말끔히 나아 밭에 나가 일할 수 있었고 고마운 마음에 오삼전의 고명한 의술을 칭송하는 내용의 편액을 만들어 들고 온 가족과 함께 ‘양심당’을 찾아왔다. 구경을 나왔던 동네사람들도 집에서 북이며 꽹과리, 새납까지 들고 나와 편액 증정식에 가세하였다. 그런데 도착해 보니 ‘양심당’은 대문이 굳게 닫혀있고 가만히 귀를 강구고 들어보니 뒤울안에서 아녀자들과 아이들의 울음소리가 들려오기에 황급히 문을 두드리니 제자 한명이 문틈으로 머리를 내민 채 좀 조용히 하라는 것이였다. 알고 보니 오삼전은 그 며칠 동안 너무 무리했던 탓에 과로로 사망했다는 것이였다. 그에 편액을 들고 온 사람들이며 이웃들 모두 엉엉 울면서 편액이라도 관과 함께 묻어달라고 그리고 거기 모인 사람들 모두 오삼전의 령전을 지키게 해달라고 간청했다. 그에 제자들이 편액은 받을 수 없다고 한사코 마다했고 이웃사람들한테는 그 마음 충분히 고맙지만 제발 그만 돌아들 가시라고 간절히 부탁하는 것이였다. 편액을 들고 온 사람들이 아무래도 납득할 수 없다는 눈치였고 그렇게 한창 실랑이가 벌어질 무렵 한 제자가 죽다 살아난 그 환자 귀가에 뭐라고 속삭이자 그 사내는 군말 없이 일행을 이끌고 편액을 둘러메고 돌아가는 것이였다. 일행이 집으로 돌아와 그 제자가 일러주던 대로 대문 안쪽 벽돌 한장을 들고 보니 그 밑에서 편지 한장이 나왔다. 편지에는 “지금 쯤이면 쾌차했으리라 믿네만 내게 고마워할 건 없네. 내 처방을 잘못 쓰는 바람에 약재 한가지가 3전이나 더 들어갔지 뭔가. 비록 큰 지장은 없었겠지만 처방에 차질이 생긴 건 틀림없는 일인즉 자네 병환은 내가 치료한 거라 할 수 없으니 내 심심히 사과하는 바네.” 편지에 피가 묻어있는 것으로 보아 제자의 말 대로 그것은 오삼전이 숨을 거두기 전, 잠시 정신이 맑아진 틈에 쓴 편지였다.  그 소문은 곧 회성 전체에 퍼져나갔고 오삼전이라는 호칭도 사실 그 때 생겨난 것이였다. 그로부터 오삼전은 회성 모든 의원들의 보기로 되였으며 회성 사람들 모두 몸이 고단하거나 병환에 시달릴 때면 자연스레 그 이름을 떠올리곤 했다.    대필자 빙冯씨  대필은 꽤 오래된 업종으로 우전국 주변에 가면 적어도 한두명, 많으면 일여덟명씩 대필자들이 책상을 마주하고 앉아있는 풍경을 심심찮게 볼 수 있다.  대필은 준비물도 크게 필요 없어서 책걸상과 종이, 필기구만 있으면 그만이다. 그나마 격식을 좀 지킨다 하는 이들은 전용편지지에 붓과 먹을 마련해두지만 보통 보면 필기장 따위를 북 찢어내거나 학교, 기업 등 기관단체의 사무용지에 만년필로 쓰는 이들이 상당수다.  편지를 대필해주는 일이 대부분이고 간혹 가다 소송장이라든가 유서, 전기, 가족사 따위를 대필해주는 경우도 있다. 편지 대필은 대개 손님이 대체적인 내용을 구술하면 그걸 받아 써주면 된다. 간혹 일자무식인 사람들이 편지를 들고 찾아오는 경우도 있는데 그럴 때는 손님이 편지 내용을 충분히 알아듣게끔 차분히 읽어주고 나서 답장할 내용을 구술하기를 기다려 답장을 써주면 그만이다.   빙씨가 대필자 노릇을 시작한 게 지난 세기 80년대 초반이였으니 린근에선 아마 가장 오래된 대필자 중 한명일 것이다. 그러나 빙씨가 대필 업종을 선택한 것은 결코 공장에서 퇴직한 원인만은 아니였다.   별로 대단할 것도 없는 일이라지만 빙씨는 자기 직업원칙을 엄수했다. 어떤 내용의 편지든 대필을 마감해서 봉투에 넣는 즉시로 그 내용을 일절 되새기지 않았고 대필 과정에서는 손님이 생각하고 있는 바를 극력 정확하게 전달하도록 애썼으며 게다가 요구하는 대필 비용 또한 시종여일 변동이 없었으므로 자연 그를 찾는 사람들이 제일 많았다. 여타 대필자들보다 좀 다른 점이라면 빙씨는 대만에 부치는 편지를 대필할 때면 사전에 그 손님과 “제가 봉투 뒤면에 제 가게 로고 하나 그려넣게 해주시오.”라고 청을 넣곤 하는 것이였다. 그러면 손님들 대부분은 군말 없이 그 청을 들어주었다. 그럴 만도 한 것이 로고 하나가 아니라 봉투 앞뒤면 가득 로고를 그려넣는다 하더라도 우편료금이 더 붙거나 하는 일은 없을 것이였으니 말이다.  빙씨의 대필소所 로고는 순무였는데 순무 아래쪽에는 ‘순무·빙’이라는 싸인이 있었다. 보다 쓰기 간편하고 식별하기 쉽게 하기 위해 빙씨는 그 로고 문양으로 된 전용도장을 새겨두었다.  해방 전, 회성에는 남경에 가서 국민당에 입당한 사람들이 꽤 많았는데 장개석이 패전하여 대만으로 건너갈 무렵 수많은 회성 출신 국민당 장교들이 가족, 친지들을 데려가기 위해 고향에 다녀갔었다. 그런 연유로 회성 사람들이 써보내는 편지들 중 상당수는 대만으로 부치는 편지들이였다.  빙씨는 아직도 여섯살 나던 그 해 가을의 정경을 생생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 날은 국민당 장교인 외삼촌이 간만에 왔다가 안채에서 아버지랑 대작하고 있었다. 마당에서 놀던 빙씨와 그보다 네살 터울인 형이 호기심에 안채 쪽을 기웃거리는 중, 외삼촌이 손짓으로 형을 불렀고 그렇게 외삼촌한테로 쫑드르 달려가던 형과 글쎄 50년 남짓 생리별하게 될 줄이야 꿈엔들 알았으랴. 지난 세기 80~90년대, 해협 량안에는 리산가족 찾기 붐도 불고 했지만 그러나 고향의 길거리며 골목들 이름만도 벌써 수차 바뀌였으니 설령 형이 옛날 집주소로 편지를 했다 하더라도 진작에 반송되였을 것이였고 빙씨로서는 형의 주소를 알 길이 없었던 것이다.  형제간 모두 평생 잊지 못할 기억이라면 어쩜 순무짠지 밖에 없을 것이였다. 어린 시절 집에는 순무짠지를 담그는 꽤 큰 작업장이 있었는데 골목길 저쪽 끝에 들어서면 벌써 순무짠지의 특유의 향기가 물씬 풍겨오곤 했던 것이다.  때는 다들 생활이 궁핍하던 때였으므로 순무짠지는 거의 모든 가정의 주메뉴였고 좀 어렵긴 했지만 락관적인 회성 사람들은 좀더 ‘정제된’ 순무짠지를 만들기 위해 여러 모로 많은 시도를 해봤다. 그리고 순무짠지를 담그는 간수老卤를 무슨 대물림보물인 양 고이 남겨두었다가는 대대로 내려오며 항아리에 저장해두었고 그렇게 해묵은 간수로 순무짠지 담그는 일은 이곳 민속풍경으로 자리잡기에 이르렀다.  그 시절 간수순무짠지는 단조로운 밥상에 이채를 더해주었을 뿐만 아니라 곤궁한 삶에 생기를 불어넣는 역할도 했다. 그런 고로 생활형편이 넉넉해진 요즘에도 간수순무짠지는 여전히 밥상에 없어서는 안될 회성 사람들의 추억거리로 남아있으며 차츰 다른 지역들에 알려지면서 명품짠지로 거듭나게 되였다. 해서 회성에는 “순무는 반찬이 아니라 길 떠나는 이들의 필수품이다.”라는 속설도 있다. 회성 전통극 에서는 순무짠지를 보다 직설적으로 노래하고 있다. “하북에서 소문난 순무짠지 향기에 녕호宁沪 상인들 벌떼처럼 모여들고 트럭 가득 박아싣고 부두까지 가서는 선박 가득 싣고 가네. 멀리는 남경, 상해, 양주며 진강镇江까지 실어간다오. 하북에 가면 사람마다 짠지전문가요, 집집마다 짠지항아리 즐비하다오.” 이 에 나오는 하북은 하하河下 고진 북쪽에 위치한 하북촌을 이르는 말이요, 빙씨가 바로 이 마을 출신이고 어린 시절 끼니마다 순무짠지에 밥을 먹었던 그들 세대였다.  그렇게 10여년 동안 대필해준 편지가 수백통에 달했고 어느 겨울날 량씨가 대만에 있는 친척이 부쳐왔다며 편지 한통 들고 왔다. 빙씨가 편지를 읽어주려고 봉투를 뜯어보니 량씨 앞으로 보낸 편지 말고 선지에 붓글씨로 정히 쓴 편지 한장이 더 들어있었는데 내용인즉 이러했다. 근년 들어 몇몇 회성 출신 친구들이 종종 한자리에 모이곤 하는데 고향의 순무짠지 얘기가 좌중의 화제가 되곤 한다는 것, 그러다 한번은 량형梁兄이 고향에서 부쳐온 편지 한통 꺼내더니 봉투 뒤면에 찍혀있는 순무 모양의 로고를 보여주면서 하는 얘기가 회성에 있는 여느 대필소 로고인 것 같은데 대만으로 부쳐오는 편지들 모두 그 대필소에서 대필해주는 모양인지 편지마다 봉투 뒤면에 순무 문양 밑에 ‘순무·빙’이라는 싸인이 박혀있는 로고가 찍혀있더라는 것이다. 그 말을 듣고 그 대필소 주인이 행여 내 동생이 아닐가 하는 요행심리에 오늘 량형의 편지와 동봉하오니 답장만 고대한다는 내용이였다.  편지를 읽는 내내 빙씨의 량볼로 눈물이 걷잡을 수 없이 흘러내렸다. 궁여지책으로 고안해낸 그 막연한 방법으로 정말 형을 찾게 될 줄은 미처 생각지 못했던 것이다. 하여 우선 량씨를 위해 답장을 써준 뒤 그 자리에서 단숨에 10여장 되는 답장을 형한테 써보냈다. 그로부터 형제간은 빈번하게 편지를 주고받게 되였고 90년대 말에는 형이 고향을 탐방하여 수일간 머무르면서 50년 만에 형제간의 해후상봉이 이루어졌다. 빙씨가 고향 특색료리들로 푸짐한 상에 마지막으로 간수순무짠지를 올리자 형이 배낭에서 아직 개봉하지 않은 자그마한 단지를 꺼내 올려놓는 것이였다. 그것은 과거 외삼촌을 따라 떠나던 날, 어머니가 보따리 속에 넣어둔 순무짠지였던 것이다. 그렇게 형제간이 마주앉아 순무짠지를 씹으면서 옛추억을 곱씹고 있노라니 마음속 깊은 곳에서 알싸한 향기가 피여오르며 눈물이 앞을 가렸다.    당唐목수 “남자는 관음보살, 녀자는 부처님”이라는 말은 몸에 지니는 패물을 두고 하는 말이요, 그 패물은 대체로 금이나 은, 옥돌, 수정 등속으로 된 것은 많아도 나무로 된 패물은 극히 드물다. 그런데 소이는 언제 봐도 항상 마작쪽 만한 크기의 그 나무목걸이를 목에 걸고 다녔다.  그것은 얼핏 보면 그저 민숭민숭한 나무쪽 같지만 가까이서 보면 볼수록 정교하고 예쁜 도안이 눈길을 사로잡는 목걸이였다. 그 자그마한 나무쪽에 지금 막 피여나고 있는 것 같은 정교하고 섬세한 국화꽃 세송이나 새겨져있었던 것이다. 그 목국木鞠의 래력을 알아내기 위해 사람들은 소이가 어린 시절에는 사탕공세를, 나중에는 술공세를 들이대며 무진 애를 썼지만 소이는 단 한번도 그 비밀을 발설한 적이 없었다.  한가지 확실한 것은 그 목국은 소이 할아버지의 작품임에는 틀림없다는 점이였다. 회성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번 쯤 들어봤음직한 노래가락이 있다.  “최고의 목수가 누구인지 알고 싶으면 회성에서 제일 바삐 보내는 이를 찾으시오. 부리부리 두눈에 우뚝한 코, 말수는 적고 성은 당씨라오.”  노래가락에서 말하는 당목수가 바로 소이의 할아버지였고 대부분 사람들이 그 실명이 무엇인지는 몰라도 소이가 목에 걸고 다니는 그 목걸이가 다름 아닌 당목수의 작품이라는 것 정도는 짐작하고 있었다. 말하자면 당목수에 관한 전설에 가까운 이야기 또한 노래가락과 마찬가지로 누구나 익히 들어 아는 이야기였던 것이다.  당목수는 나무의 크기와 재질, 량에 따라 그에 상응한 물건을 만들곤 했는데 도면도 필요 없이 목재를 눈대중으로 보기만 하고는 바로 작업을 시작하곤 했다.  필통이며 책꽂이, 접이의자, 책걸상, 옷궤, 침대 등 못 만드는 게 없었을 뿐만 아니라 젊은 시절엔 나무집도 지었다고 한다. 고용주가 정해놓은 부지와 그 요구조건에 따라 즉석에서 면적을 추산하여 목재를 사오게 하는데 집이 준공된 다음에 보면 널판자 하나 보태지도 남아돌지도 않았다고 한다. 간혹 남아도는 나무토막이나 자투리가 있더라도 그것들을 활용하여 부삽이나 바가지, 국자 등을 만들었고 톱밥들도 모조리 담아두었다가 땔감으로 쓰게 하였다는 것이다. ‘추산’능력이 뛰여난 외 조각기술 또한 신기에 가까웠다고 한다. 흔히 말하는 통나무로 룡머리를 조각한다거나 그 입속에 자유로이 움직일 수 있는 구슬을 조각해넣는다던가 또는 통나무로 여러 고리들이 맞물려있는 형태의 나무목걸이를 만든다던가 하는 건 말할 나위도 없었고 뭐니 뭐니 해도 당목수는 미세조각에 가장 능했는데 호박씨 크기의 나무쪼각으로 주산을 만들면 그 주산알들은 깨알보다 작아도 어느 하나 들놀지 않는 게 없을 정도였다고 한다.    그러나 인간의 ‘끝없는 욕심’은 ‘주산’에서 만족할 수 없었던 모양, 한번은 이웃사람 두명이 찾아와서 한 사람은 열쇠를 내놓으며 나무열쇠를 ‘복제’해달라 청들었고 다른 사람은 이쑤시개를 내놓으며 거기에 풍경화를 그려달라고 했다. 그러나 결국 두 사람 모두 뒤가 부옇게 돌아가야 했고 다시는 당목수를 괴롭힐 엄두를 못 냈다고 한다. 한편 당목수는 그 나무열쇠와 이쑤기개를 자그마한 함에 간직해둔 채 그것을 “기예를 갈고 닦는 데 게을리하지 말자”는 지침으로 삼았다고 한다. 이 이야기는 한때 회성 사람들이 누군가의 뛰여난 기예를 평가하는 기준이 되였고 아울러 망신을 자초하는 이들을 조롱하는 사례가 되기도 했다. 목수라면 의례 연필이나 먹으로 나무에 표기를 해놓고 그 선을 따라 나무를 켜고 자르기 마련인데 당목수는 종래로 귀등에 연필을 꽂거나 먹선 긋는 공구를 갖고 다니는 법이 없었다. 당목수한테는 두눈이 곧 공구였고 그렇게 눈대중으로 켜놓은 목재는 종래로 비뚤거나 모자라거나 넘치는 법이 없었다. 그러다 나중에는 자조차도 쓰는 일이 거의 없이 엄지와 식지, 중지를 리용하여 뼘으로 재면 그만이였다. 그러다 간혹 고용주가 재촉하기라도 하면 뼘으로 재지 않고서도 종래로 어떤 차질이 생기는 일이 없었다.  소이가 걸고 다니는 그 목국에 대한 사람들의 억측은 끊일 줄 몰랐고 당목수가 죽은 뒤로는 궁금해하는 사람이 더 많아졌다. 그러던 하루는 금탕사우나에서 소이가 옷궤에 넣어둔 목걸이가 사라지는 사건이 발생했다. 자나 깨나 항상 목에 걸고 다니다가 목욕할 때만 벗어놓곤 하는 목걸이였다. 금탕사우나는 꽤 오래된 사우나로 과거 당목수도 종종 즐겨 찾던 곳이였고 사우나를 수차 개조하는 과정에서 나무로 된 물건들 중 어느 하나 당목수의 손길이 닿지 않은 게 없을 정도였다.  설마 새로 온 웨이터의 소행인가? 소이가 후끈 달아서 발을 동동 구르고 있을 무렵, 마침 새로 온 웨이터가 달려오더니 이실직고했다. “손님, 저들이 제가 그 목국을 가져오지 않으면 오늘 당금 쫓겨날 거라고 으름장을 놓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갖다 주었습니다. 전에 다른 웨이터들한테도 시켰지만 그 사람들 모두 응하지 않아서, 그래서 금방 와서 멋모르는 저를 시켰던 것 같습니다.” “그래, 또 뭐라고 하던가?” “저보고 목걸이는 그냥 잠시 보관해드리는 것이니 걱정 마시라고, 이제 그 목걸이의 래력을 소상히 말해주면 그대로 돌려드릴 것이라고 그렇게 전해드리라고 했습니다.” “가서 래일 아침 다들 사우나 문앞에 모이라고 전하게.” 소이가 그렇게 쉽게 나오리라고는 그 사람들 역시 예상 밖이였다.  이튿날 아침, 사우나 문앞에 모인 사람들은 하나같이 의뭉스런 얼굴들이였다. 이윽고 소이는 사람들을 이끌고 곧추 교외 쪽으로 걸어갔다. 가는 내내 말 한마디 없었고 그에 사람들은 한층 불안한 표정이였고 개중에는 여차 하면 중도에 빠져나갈 기회를 엿보는 이들도 있었다.  몇참 안 가서 교외에 이르렀고 중학교 문앞에서 걸음을 멈춘 소이가 학교 이름이 새겨진 편액을 가리키며 입을 열었다.  “자, 이게 바로 ‘목걸이’의 래력입니다.” 그에 사람들은 그게 무슨 말도 안되는 소리냐며 웅성거렸다. 그러자 소이가 사람 몇을 시켜서 그 편액을 약간 들어내여 뒤면과 벽 사이에 틈이 생기게 하고 다시 몇사람보고 그 뒤면에 새겨진 조화雕花를 확인하라 하고는 말했다.  “평생 동안 목수 노릇을 하신 저희 할아버지는 만년에 계획경제시대를 맞이했고 아시다 싶이 때는 목재가 귀한 시기라 회성 교외의 일부 농민들은 관널을 도적질해서 목재가 필요한 이들에게 팔아넘기곤 했지요.” “관널은 알짜 좋은 목재만 쓴다는 것을 잘 아는 그들이였고 그 목적은 물론 관널이였습니다. 물론 내친 김에 삽으로 항아리를 깨고 금품 따위가 있으면 훔쳐가는 이들도 간혹 있었지만 말입니다.” “이 교외 중학교의 목수일은 저희 할아버지가 사람들을 이끌고 진행한 공사입니다. 그런데 개학을 며칠 앞둔 어느 날 학교에서 할아버지보고 학교 이름이 새겨진 편액을 만들 것을 주문했고 구매 담당자는 어쩔 수 없이 관 도적들 손에서 목재를 사와야 했습니다. 녹나무로 된 이 편액에는 섬세한 조화까지 새겨져있습니다. 그리고 찬찬히 보면 조화 중앙부분에 당승중이라고 저희 증조부 이름이 새겨져있습니다. 당시 그걸 본 할아버지는 말 그대로 칼로 가슴을 저미는 것 같았지만 사람들의 기대 어린 눈길 속에서 차마 물러설 수도, 눈물을 흘릴 수도 없었던 것입니다.” 소이가 축축해진 눈가를 손등으로 찍어내며 말을 이었다. “그래서 할아버지는 몰래 그 관널 귀퉁이 부분을 살짝 잘라내여 손에 꼭 쥔 채 일을 계속했고 꽃 문양과 이름자를 지우지 않고 그 뒤면에 학교 이름을 새겨넣었습니다. 우리 동네에는 ‘조상 무덤이 털리면 절대 소문 내지 말라’는 설이 있는데 할아버지는 저한테 이 일을 절대 발설하지 말 것과 이 ‘목걸이’를 자손 대대로 전해갈 것을 당부하셨습니다.” “그 날 집에 돌아오신 할아버지는 낮에 잘라낸 나무쪼각에 국화꽃 세송이를 새겨넣은 뒤 제 목에 걸어주고 얘기 몇마디 하시다가 그렇게 조용히 눈을 감으셨습니다.” 비로소 사람들은 그 ‘목걸이’를 소이한테 돌려주었고 무척 미안한지 저마다 고개를 떨군 채 “미안하오, 미안하네.”라고 나직이 속삭였다.    견삼공犬三爷 견삼공 하면 딱 들어도 별명임을 알 수 있다. 그런데 그 별명이 불려진 지는 어언 30년도 더되였다. 그 별명을 붙여준 것은 동네 꼬마들이였고 처음에는 개삼공이라 부르던 것을 후일 어른들이 좀 완곡하게 견삼공이라 고쳐부르게 된 것이다.  견삼공이 있는 곳엔 언제나 개가 따라다녔고 견삼공은 개가 무슨 지팡이라도 되는 양 개가 없이는 한발자국도 움직일 수 없는 사람처럼 하루종일 개들과 붙어다니곤 했다. 그 종류로는 늙은 개에서부터 강아지에 이르기까지, 암컷과 수컷, 토종과 서양종 그리고 종일 짖어대는 놈에서 종일 가다 몇번 짖지 않는 놈에 이르기까지, 비대한 놈에서부터 비루먹은 놈에 이르기까지 정말 없는 것 말곤 다 있었다.  견삼공의 일과 또한 모두 개들과 련관된 것들이여서 언제 어디에서 보나 이놈에게 먹거리를 주고 있지 않으면 저놈 등을 긁어주고 있었고 이놈을 데리고 산책하지 않으면 저놈을 끼고 해바라기를 하고 있었다. 그렇게 견삼공이 수양한 유기견들은 날이 갈수록 늘어나 그 먹이에 들어가는 돈만 해도 만만치 않았다.  비용을 절감하기 위해 견삼공은 회성 읍내에서 가장 큰 식당 청소부로 취직을 했고 월급은 한푼도 필요 없으니 자기와 개들의 하루 세끼만 보장해달라고 자기가 한두끼 쯤 거르는 건 괜찮지만 개들은 절대 굶겨서는 안된다는 조건으로 계약을 했다. 다행히도 식당에서 매일 버려지는 고기, 뼈다구 등속은 그 개들의 먹거리로 충분했고 이제 몇마리 더 추가하더라도 별문제 없을 것 같았다.  한편 그런 견삼공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눈빛은 의문으로 가득했고 30년 전, 견삼공이 무슨 일로 갑자기 개한테 홀딱 반하게 되였는지 무척 궁금해했다. 30년 전의 견삼공은 집에서 개 한마리 기르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골목에서 이웃집 개와 마주쳐도 종래로 눈길 한번 주는 일이 없는 위인이였던 것이다.  연유야 어찌 됐든 누구나 다 아는 견삼공의 외모특징, 그것은 사실 애초 견삼공이라는 별명이 붙게 된 중요한 근거이기도 했다. 견삼공은 오른쪽 눈이 왼쪽 눈보다 컸고 동공이 작고 흰자위가 큰 오른쪽 눈은 언제 봐도 정기 없고 멀건 빛을 띠였으며 눈을 깜빡일 때도 아주 어색해보였는데 사실 그 눈은 개눈이였다. 그런데 견삼공이 개눈을 이식하게 된 경위에 대해서는 아무도 아는 이가 없었다. 누군가 빈말로라도 견삼공이 수양한 개들의 안부를 물으면 견삼공은 그 사람과 더없이 친근하게 굴었지만 그 반대의 경우라면 절대 그냥 넘어가지 않았다. 간혹 장난꾸러기 꼬마들이 견삼공이 안채에 들어간 틈을 타서 담장에 기여올라 개들한테 돌총질하곤 했는데 돌 맞은 개가 울부짖는 소리가 들리면 견삼공은 득달같이 튕겨나와 비자루를 휘두르며 꼬마들을 뒤쫓았고 꼬마들은 그게 재미있다고 와 하고 함성을 지르며 뿔뿔이 달아나곤 했다.  외인은 그렇다 치고라도 그 아들과 손자마저 개들을 싫어하는 것은 어쩌면 견삼공이 거의 모든 정력을 개들한테만 기울이고 가족들한테 소원하는 탓이였다. 그 아들 역시 아버지가 개들한테 그토록 끔찍하게 구는 리유를 모르긴 매한가지, 외인들보다 좀더 아는 게 있다면 30년 전 아버지가 개눈을 이식해 넣게 된 경위를 알고 있을 뿐이였다. 30년 전의 어느 날 아침, 견삼공이 트럭을 몰고 이웃 현으로 화학비료 실으러 가는 길이였다. 도로에는 온통 자갈이 널려있었는데 아마 린근 공사장으로 자갈을 나르던 트럭이 지나가면서 흘려놓은 모양이였다. 그런 울퉁불퉁한 도로를 덜렁거리며 운전해가느라 심성이 불편해진 견삼공은 누구라 없이 투덜거리며 운전하던 중, 갑자기 자갈 하나가 눈앞으로 튕겨오는 바람에 엉겁결에 두눈을 꼭 감으면서 급브레이크를 밟았다. 눈을 떠보니 병원이였고 아들이 곁을 지키고 있었다. 아들은 아침에 아버지가 급히 나가면서 공장 소개신을 두고 간 것을 발견하고 급히 아버지를 뒤쫓다가 그런 사고현장을 목격하게 되였던 것이다. 그렇게 공장에서 화학비료를 사라고 준 돈은 비료는 고사하고 전부 병원비용으로 밀어넣게 되였다. 그런데 그보다 황당한 것은 오른쪽 눈알이 자갈에 맞아 터진 것이였다. 그것도 어처구니 없게도 누군가 의도적으로 그랬다거나 인위적인 사고가 아닌, 견삼공이 몰고 가던 차 바퀴에 깔려서 튕겨오른 자갈이 오른쪽 차창을 뜷고 들어와 눈알에 박힌 것으로 교통사고사상 류례를 찾아볼 수 없는 참으로 황당무계한 사고였던 것이다.  일부에서는 개눈알을 이식하고 나면 자연스레 개습성을 갖게 되고 지어 안목까지도 개를 닮아가는 것 아니냐고, 그래서 견삼공이 갑자기 개들과 친밀해진 게 아닐가 하고 억측하는 이들도 있었지만 가만 생각하면 그 말은 어불성설이였다. 왜냐면 때는 의료조건이나 사람들의 수입상황 등이 제한된 시절에 눈알을 다쳐서 개눈알을 이식해 넣는 사례가 회성에만도 여럿 있었으며 다만 사후에 견삼공처럼 개를 극진히 대하는 사례가 없었을 뿐이였다.  그러구러 수년이 지나고 견삼공이 중병으로 몸져눕게 되였는데 다들 이제 설을 넘기기는 글렀다고 맥 놓고 있는 중이였다. 한편 견삼공은 병상에 누워서도 자기 몸 따위는 아무래도 상관없다는듯 오직 개들 걱정 뿐이였다. 그러던 하루는 다들 잠든 야심한 시각에 아들과 손자를 조용히 불러놓고 이야기 하나 들려주면서 어떻게든 개들을 잘 돌봐야 한다고, 그리고 남의 집 개한테라도 절대 못되게 굴지 말 것을 당부했다.  사실 견삼공은 어린 시절 툭하면 고무새총으로 동네집 개눈을 쏴 멀게 하는 악당이였는데 그로 인해 한동안은 동네 개들 전부가 애꾸눈이 된 때도 있었다. 그러나 동네사람들은 아무도 그 원인을 알아채지 못했고 나중에는 약속이나 한듯 아무도 더 이상 개를 기르려 하지 않았다. 개를 기르기에 적절치 않은, 뭔가 사특한 기운이 도는 동네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한편 견삼공은 자기가 눈먼 돌에 맞아 눈이 먼 것을 꼭 인과응보라고 단언할 수는 없었지만 죄는 지은 데로 간다는 생각이 두고두고 마음속 응어리로 맺혀있었던 것이다.  이야기를 듣고 난 아들과 손자는 연신 머리를 끄덕이며 시름 놓으라고 견삼공을 안심시켰고 그제야 견삼공은 비로소 안온한 미소를 머금은 채 숨을 거두었다. 아들과 손자는 슬픈 눈길로 망자의 얼굴을 이윽토록 바라보고 있었다. 한쪽 눈만 감겨져있고 커다랗게 뜬 채로 있는 다른 한쪽 개눈은 아직도 마당에 있는 개들 걱정으로 감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았다.  (김견 옮김)   출처:2018 제6호
78    김연: 곧 오색 음악이 흐를 것이다(시, 외2수) 댓글:  조회:350  추천:0  2019-07-16
곧 오색 음악이 흐를 것이다(외2수) 김연   나무잎들이 술렁인다    스쳐가는 바람이    낯설단다       온몸을 시퍼렇게 달구고도 모자라   바람의 부축을 받던 여름은   어디 갔을가       이 가을에    여름이야기는 하고 싶지 않은데    이 계절에    지난 계절은 묻고 싶지 않은데      여름 한웅큼이라도 잡았던 걸   해빛 한줌이라도 숨겼던 걸    지지리도 미운 땀방울이라도    한두방울 챙겼던 걸        갈 때가 되여서 가는 거겠지   어쩜 아직도 피여있는 저 꽃들이   여름이 남기고 간 입김이 아닐가    꽃들 꽃들 우로 제비 제비가 지나간다    가을비가 오시려나 보다    더 완연한 가을을 싣고 오시려나 보다        그러고 보니 나무잎 너희들    춤사위마저 다르구나      가고 오는 길목   맞고 바래는 련습   춤사위가 많이 다채로와졌구나…           일기예보    하늘이 쿨쩍거린다    걸려있어야 할 해가    종적을 감추었다      바람은 온 거리를 뒤지며    샅샅이 냄새까지 맡는다    창문에 매달려있던 마지막 온기가    슬그머니 피해간다      말의 온도가 식어갔다    발걸음 온도가 높아갔다      거리가 북적인다    침방울이 떨어진다      올칵 !    해는 소나기를 토해냈다           퇴색    이가 없는 바람이    해빛을 잘라먹고 있다    내동댕이쳐진 껍질들이    한구석에 모여 재생을 기다린다    어데서 온 개미들인지    그 껍질이 먹거리인양    집안으로 끌어들인다      열린 문으로 바람이    긴 혀를 내밀어 아예 개미 채로    삼켜버리고 아무 일 없듯 사라지면    비는 기꺼이 그 흔적들을 지워준다      나무잎들이 떨어지고    꽃들이 흐느적인다    지나가는 할머니의 하얀 머리카락   설명을 못한 채 그저 바람 따라 간다      태양을 잃어버린 하늘    달과 별에게 넉두리 늘여놓는 사이    6월은 색 바래고    곧 다가올 7월이 입술을 내민다 출처:2018 제6호
77    리미: 품는 화분(수필) 댓글:  조회:344  추천:0  2019-07-16
품는 화분 리미   무게도 안 가는 먼지들이 그렇게 묵직하게 앉아있는 줄 미처 몰랐다. 옅은 색에서부터 어느 순간 점점 진하게 변하더니 집안의 공기마저도 탁하게 만들어버렸다. 그제서야 난 그것들에 주의를 가졌다. 무질서하게 뻗은 나무잎들을 담은 화분들이였다.  언제 사놓았는지 알 수 없는 화분들이 집안의 바닥을 에돌고 있었다. 이쁨은 둘째 치고, 전자파를 막아준다는 명목하에 사놓은 뾰족한 다육이도 보이고 풍수에 좋다는 각가지 화분들은 집안의 또 다른 오아시스마냥 벽에 기대있었다. 누구나 처음 사온 화분에 대한 첫 만남을 기억할 것이다. 그다지 화려하지도 그다지 흥분되지도 않는 아주 잔잔한 만남을 말이다. 필경 살아움직이는 애완견이 아니기에 우리의 만남은 강렬한 떨림이나 화려함은 간략되였다. 그럼에도 좋은 흙 속에서 가끔씩 내리받는 해빛쪼임, 그리고 내가 주는 수분을 머금으면서 그들의 무성한 성장을 바랐다. 일종의 마음에 품고 있었던 작은 바람들이 그 잎 하나하나에 품어져있다고 생각했다. 잎이 번창하게 피여오르면 나의 옹송거렸던 소망도 같이 커질 것 같은 심리적 작용이 일었다. 시간이 날 때면 생명의 물을 그들에게 쏟아줄 것을 나 자신에게 무언의 약속을 했다.  여전히 나는 아침 6시 반의 알람에 몸을 일어세우고 허겁지겁 미완성이 된 화장으로 아침을 채우고 출근시간을 보낸다. 출근시간의 따분한 일분 일초는 이상하게도 퇴근 후면 눈 깜짝할 새에 다시 침대에 누워야 할 시간이 되고 만다. 그런 평범한 하루하루를 보내고 가끔씩 찾아오는 회식자리나, 술자리 지인들과 며칠을 보내고 나면 어느새 달력은 그 다음달을 가리키고 있었다. 어쩌다 여유가 생기니 집안에 초록색 눈을 하고 있는 그들이 보였다. 말도 없고 표정도 없는 그들이지만 과연 그들에게 또한 감정이 있음을 축 처진 이파리에서 느꼈다. 식사시간이 지난 후 놓인 밥상 우의 반찬과 국처럼 촉촉한 물기 대신 빼빼 말라버린 그들이 시무룩하게 나를 맞이했다. 며칠 동안 다이어트 때문에 굶주렸던 나의 허기짐을 상상해보았다. 미안함에 벌컥벌컥 그들에게도 충족하리 만큼의 물을 부어주었다. 그동안 나의 무관심에 대한 죄책감에 한꺼번에 몇주일 동안의 감정을 보상해주었다. 일방적으로 내가 그렇게 하는 것으로 내가 준 보상의 물기를 흡수하고 다시금 푸른 기운을 낼 수 있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일방적인 무관심과 일방적인 베품이 그들의 마음을 움직이지 못했다는 건 불과 몇분이 지나기도 전에 난 축축해진 바닥을 보고 알아버렸다. 물을 흡수하기에는 너무도 말라있었던 화초들의 ‘탈수’현상 때문이였다. 오랜 시간 동안 품어야 할 충분한 수분과 영양소를 흡수하지 못했던 그들에게 몰아주기식 베품은 매몰차게 외면을 받았다. 그래도 우선은 좀 기다려보기로 했다. 그들이 처량해진 다음에야 난 그들에게 좀더 관심을 가졌던 것 같다. 여전히 수분기 하나 없는 화분들이였지만 그 때라도 잘 보살핀다면 다시금 싱싱한 푸름을 되찾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 후의 한달을 짬짬이 여전히 말라버린 그들에게 조금이나마 관심을 쏟았지만 그들은 여전히 묵묵부답이였다. 인터넷으로 찾아보니 수분과 영양소가 조금이나마 남아있을 때 주었더라면 죽지는 않았을 거라고 씌여져있었다. 잘 보살펴주리라 했던 무언의 약속은 여유라는 조건이 생겨야만 보살피는 것으로 되였고 그 핑게 같지 않은 변명의 결과물은 말라버린 화분이였다. 더 초췌해진 나무잎 우로 줄기줄기 뻗은 선들은 나의 고즈넉한 감정선을 동요하기에 충분했다. 생각해보니 화분을 다룬다는 건 어쩌면 인생을 다루는 것과 같은 것 같다. 탐탁치 않은 진한 토색의 토양과 그 안에 뿌리를 박은 초록색 가지들을 어떻게 거창한 인생살이와 비교를 한단 말인가? 하지만 소소한 행복감, 수평선을 향하는 만족감, 닿을듯 말듯한 인연 여부가 우리의 인생이라는 늪에서의 감정선이 아니겠는가. 굳이 거창한 포장으로 인생을 포장할 필요는 없다고 본다. 그 작은 점들이 모여 인생이라는 긴 려정을 그려냈을 뿐, 또한 매개 점들이 내뿜는 관심과 수요를 제때에 포옹해줘야만이 그나마 좀더 윤택한 삶이 되리라는 걸. 머피의 법칙도 아니고 우리가 마주한 감정이든, 인연이든 참 오묘하게 우리를 비껴갈 때가 많다. 안심하고 있던 찰나에 두터웠던 감정이 와르르 무너져갈 때가 있다. 타인과 나 사이의 감정 뿐만 아닌, 나와 내 자신의 감정 또한 그 흐름을 빗겨가기가 어려울 때가 있다. 우리는 흔히들 그런 말을 자주 내뱉곤 한다.  “어머나, 하는 게 없이 하루가 지났네, 일주일이 지났네…” 마치 주어진 시간의 매개 틈새에 무언가를 꽉꽉 채워야 산 것 같다는 강박감을 주는 요즘 사회다. 아무튼, 손에 남은 거라곤 줄어든 시간 밖에 없어진 우리는 여전히 바쁘게 사는 현대인임은 틀림이 없다. 바쁘다는 의식 속에 무작정 앞만 보고 달리다 보니 정작 자신이 원하는 건 무엇인지, 행복해지고는 있는지, 그 때 채 아물지 못했던 감정은 괜찮아졌는지… 많은 보살핌이 필요한 중요한 것들에 대해서는 저기 한구석에 방치해둔 적이 많은 것 같다. 달리다 어느 순간 한발작 쉴 수 있는 여유가 생길 때 뒤돌아보니 저만치 남겨놓고 온 그들이 애처롭게 나를 바라보고 있다. 정작 필요한 행복감, 챙겨야 할 사람들, 토닥거림이 필요한 감정들이 목말라있을 때 허겁지겁 다시 부여해주려 하곤 한다. 바쁘다는 핑게 속, 너무 무관심했던 탓에 정작 행복해지는 방법을 잊은듯한 우리다. 뿌리부터 말라버린 저 구석진 화분들처럼 뒤늦은 후회를 안고 돌아갔을 땐 아무 것도 없을 뿐이다. 무턱대고 주는 건 누구나 할 수 있다. 훅 던져주면 그만이니깐 말이다. 하지만 품는 건 일정한 열정의 온도를 머금은 채 가슴 밑 어느 한 구석에서 치솟아오르는 그 무언가와 함께 행해야 하는 것이다. 돌이켜보니 어긋났었던 관계, 자꾸 덧나는 상처덩어리 등등을 보면 우리는 늘 일방적이였고 품기보다는 대처식이였다. 받은 상처를 더 들추어보기가 무서워서 그냥 일방적으로 덮었고 같은 상황이 돌아왔을 땐 몇십배 더 아프게 되였던 것 같다. 맴맴 도는 시간에 마음마저도 맴맴 돌며 그 모든 걸 얼렁뚱땅 지나가고 말았다. 요즘 읽고 있는 책 중에서의 한구절이 나의 마음을 치고 갔다. ‘관통식의 감정’을 느끼라는 것이다. 즉 대수 지나치지 말고 그들이 당신 심장의 과녁을 뚫고 지나갈 만큼 아픔이나 기쁨 어떠한 것을 철저하게, 처절하게 느껴야만이 우리는 그 밑바닥까지 보아내면서 다시 일어설 수 있다는 것이다. 역시나 그러했다. 우리는 왕왕 느껴야 할 부분, 생각을 되뇌여야 할 부분을 묵과하고 나중에 다시 일방적인 보상을 해주리라는 다짐을 하곤 한다. 삶이라는 게 우리가 의도치 않게 상처를 주는 단락이 있는가 하면 우리가 그 상대방이 되는 경우도 있다. 친구들에게 소울메이트라고 소개를 해주고 싶었던 사람이 있었다. 가히 최고의 행복을 느끼게 해줬으니 그 다음 행보도 행복의 마무리를 할 것만 같았다. 여태껏 글에서는 뒤늦은 후회를 품은 화분이였다면 나의 최근은 품었어도 결국 말라버린 그 어떠한 슬픔의 연장선이였다. 그 관계에서 일방통행적이였던 나의 노력이 상대방의 구미에 맞지 않아서일가, 모호해진 감정선은 결국 일정한 온도와 관심을 건넸음에도 불구, 오히려 나에게 상처만 더 안겨주었다. 무언가 채 마르지 않은 세멘트 공정 속, 꾸역꾸역 우에 덧발라서 표면상으로는 이미 다 굳어버린 세멘트덩어리지만 사실 속은 채 마르지 않은 슬픔의 끈적함 같은 비스름한 표현이 그 때 내 마음이였던 것 같다. 그 때 다시금 깨달았다. 인생의 구석구석 감정선은 내가 보살펴야 될 시기를 놓쳐서 끝나버리는 것도 있고 화분을 보살필 때 일방적인 물주기식 같은 일방적인 관심도 답이 없을 수 있다는 걸. 무작정스러운 관심, 혹은 여유가 생길 때만이 쏟는 일방적인 베품 그것만으로는 인생의 매개 굴곡진 점들은 쉽사리 우리와 타협하려 하지 않는다. 오직 알심들여 그 관심과 사랑을 애틋하게 품어줄 뿐더러 서로 다같이 노력해야만 그 어떠한 결과물도 우리한테 안기려 할 것이다. 치유도 좋고 어긋남도 좋고 우리가 진정 원하는 건 무엇인지 시간을 품어서 나만의 온도로 품어보자, 그들을. 출처:2018 제6호
76    김명숙: 언어의 에너지 (수필) 댓글:  조회:380  추천:0  2019-07-16
언어의 에너지  김명숙   천성적으로 아름다움을 소유하고 세상에 태여난 꽃은 사람들의 눈을 풍요롭게 호강시켜주는 즐거운 감상물로 널리 알려져있다. 대화가 필요 없고 동행자도 필요 없으며 표정관리에도 구애 없이 울적하고 괴로운 마음 그대로 소통을 가질 수 있는 상대가 있다면 그것이 바로 꽃이 아닐가? 꽃의 매력은 누구에게라 없이 똑같이 웃어주고 반겨주고 예쁨을 선사하는 대공무사함에도 있겠지만 그보다도 그가 소유하고 있는 특이하고 감미로운 향기가 그 어여쁨을 소리없이 받쳐주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처럼 대자연의 황후로 떠받들리여 위인들의 사랑을 독차지하는 예뿐 꽃들 속에도 빛나는 그 이름과는 무관하게 사람들의 랭대를 받으며 생존하는 꽃도 세상에 알려지고 있다. 인도네시아에서 자라고 있는 라플레시아는 세계적으로 제일 큰 꽃으로서 꽃 중의 왕으로 불리우지만 인간을 혼절시킬 만큼 심한 악취를 발산시키는 바람에 ‘악마의 혀’ 또는 ‘부두교의 백합’이라고도 불리운다. 라플레시아는 흔히 볼 수 없는 희귀한 식물중의 하나이지만 사람들에게 아드레날린을 발산시켜 자기의 소중한 이미지를 잃어가기에 거의 멸종위기에 처해있다고 한다.  우리는 살면서 많은 사람들과 소통을 하게 된다. 그런 소통을 통하여 서로가 알아가고 익숙해지고 친해지면서 함께 원하는 뜻을 이루기도 한다. 소통의 주요한 요소는 서로 지간에 주고받는 대화들로서 그러한 언어들이 바로 소통의 지름길로 되고 있다. 향기에 따라 이미지가 달라지는 꽃들처럼 같은 언어라도 그 표현이 다름에 따라 의미가 달라지는가 하면 타인에게 주는 감수에도 차이를 보이고 있다. 일찍 세종대왕이 발명했다는 우리 문자는 못 나타낼 뜻이 없고 못 나타낼 소리가 없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매력적인 언어라고 하지만 아해 다르고 어해 달라 사람들을 울게도 하고 웃게도 하며 지어 누군가를 험한 곤경에 빠뜨리기도 한다. 삶에 충실하고 부모한테 둘도 없는 극진한 효녀로 소문난 한 녀성의 이야기는 부정적인 언어의 위해성을 더더욱 명백히 깨우쳐주고 있다. 그녀는 일찍 사고로 하나 밖에 없는 아들을 잃었고 50대 초반에 또 장대 같은 남편까지 잃었다. 억장이 무너지는 아픔을 안고 하루하루 눈물로 절망의 나락에서 헤매이고 있을 때 일부 사람들은 그녀를 두고 살이 센 녀자라 뒤공론을 했고 또 일부 사람들은 사나운 팔자여서 하늘이 벌을 내렸다고 터무니 없는 날조를 퍼뜨렸다. 가슴이 찢기는 아픔에 부대끼는 그녀에게 명석한 두뇌로 세상을 바라보기까지는 그 당시 너무나 막연한 일이였다. 그녀는 정말로 자신을 팔자가 나쁘고 살이 센 녀자로 착각하면서 밤이면 악몽에 시달리였고 점차 삶의 의욕마저 잃고 말았다. 한 사람의 소중한 존재가 이렇게 누군가가 아무렇게나 놀려버린 혀자루에 찔려 서서히 무너지고 있었다. 절벽의 나락에서 헤매이는 그녀로 하여 주위의 고마운 사람들은 모두가 손에 땀을 쥐고 긴장에 떨었으며 그녀의 마음을 돌려세우기까지 얼마나 많은 대가를 치렀는지 모른다. 가정에 불화가 생긴 건 우연한 사고일 뿐 누구의 잘못이 아니다. 이 한 불행 앞에서 당연 위로의 말로 힘과 용기를 주어 상대로 하여금 시급히 극심한 고통 속에서 헤여나오게 하는 것이 천만 바람직한 일이 아닐가? 병은 치료하고 싸움은 말리라는 말이 있다. 굳이 아드레날린 같은 악취를 발산시켜 한 사람을 천길 나락에 빠드리는 건 인간으로 허용할 수 없는 일이다. 한치의 혀가 석자의 칼보다 더 무섭게 사람을 죽일 수 있다는 말이 이런 일을 두고 하는 말인듯 싶다. 이 얼마나 소름 끼치는 일인가? 사람들은 가끔 이런 말을 하군 한다. 부정적인 언어를 늘 사용하는 사람에게는 부정적인 현실이, 그리고 긍정적인 언어를 많이 사용하는 사람에게는 긍정적인 삶이 따른다고 한다. 주먹을 부르쥐고 열심히 뛰여도 딸리는 게 시간인데 뒤뜰에 앉아서 남의 험담이나 일삼으며 허송세월하는 사람들의 뒤에 구경 무엇이 따를가? 무심하게 뱉은 한마디 말이 가지를 치고 잎이 무성하게 자라면 어떤 악과가 초래될지 생각이나 해 보았는가? 타인에게 잘못 날린 한가닥 화살이 몇십개로 불어나 자신에게로 되돌아갈 수 있다는 점 생각이나 해보았는가? 높은 언어수양을 갖추려면 우선 인성적인 바른 자세를 갖추어야 한다. 소유하고 있는 지식과 재능이 뛰여나다 하더라도 타인에 대한 긍정, 배려, 존중의 가치를 깨치지 못한다면 천부적인 재능도 저층 바닥에서 나뒹굴 수 있고 나중에 돌이킬 수 없는 악과를 빚어낼 수도 있다. 일찍 진秦나라에 진시황을 도와 중국 최초 통일 제국을 이룩한 인물이 있었는데 바로 ‘이사’라는 승상이다. 이사는 문자와 각종 도량형을 통일하고 제도와 법률을 제정하여 진나라(통일제국)를 건설하였다. 이사는 법가사상으로 유명한 한비와 함께 순자를 스승으로 모시고 동문수학하였다. 한비는 한나라 왕족으로 진나라에 온 한나라의 사절의 역할을 맡은 인물이였다. 순자의 문하에서 함께 수학한 이사는 간지奸智에 뛰여난 변설가辩说家인 반면 한비는 타고난 말더듬이였으나 두뇌가 매우 명석하여 학자로서는 이사가 도저히 미칠 바 못되였다고 한다.  진나라의 시황제는 한비의 《고분》과 《오두》의 론설을 보고 “한비와 교유할 수 있다면 죽어도 한이 없겠다”고 감탄하였고 그 후 한비를 만나자 크게 기뻐하며 그를 진나라에 머물게 하려고 하였다. 진왕이 그를 총애하게 될 것을 념려한 이사는 한비의 재능을 몹시 질시하였다. 드디여 이사는 한비에게 법에 어긋나는 행위를 하도록 하고는 시황제에게 참언谗言하여 한비를 옥에 가두게 한 후 한나라로 돌려보내면 반드시 후환后患이 있을 거라고 모함까지 하여 한비에게 사약死药을 내려 자살하게 하였다. 이사는 자신의 처지를 개선하여 권력과 부귀를 얻었을망정 공덕이 없었던 인물이다. 동문수학했던 한비도 비정하게 죽이는 친구였고 결국에 자신도 허리가 잘리는 참수를 당하였다고 한다. 권력과 부귀를 탐하여 생긴 지나친 질시는 종당에 소중한 자신마저 해치고 말았다.  언어란 잘 다루면 무궁무진한 에너지를 발산시켜 가물에 시들었던 꽃이 샘물을 듬뿍 먹고 생기를 되찾은듯 우리의 고달픈 삶에 좋은 영양소로 될 수 있다. 내가 살던 고향에 ‘효원’이라는 양로원이 있는데 친구들과 함께 봉사활동으로 겨울 김장일을 도와준 적이 있다. 아담하고 산뜻하게 꾸며진 ‘효원’이 좋은 환경으로 소문이 높은 것도 있겠지만 그보다는 이른아침부터 밝은 웃음으로 로인들을 위한 봉사를 시작한다는 젊은 부부의 아름다운 소행이 더더욱 ‘효원’의 아름다운 풍경으로 되고 있다. “간밤 잘 주무셨어요?” “불편한 점 없으셨어요?” 모진 풍상에 부대끼고 지쳐서 머리에 하얀 서리를 이고 계시는 로인들, 멀리 떠난 자식들을 하염없이 그리며 기다리며 마음에 골병이 들 대로 들었지만 하루도 빠짐없는 그들 부부의 살뜰한 대화로 기분 좋게 하루를 시작하군 한다. 서로 다른 지방에서 모여왔고 서로 다른 성격의 소유자로 때로는 애들처럼 옴니암니 다투기도 하고 때로는 마음의 불화를 못 이겨 장내가 떠들썩하게 말썽을 부리기도 한다는 로인들이지만 하냥 따뜻한 말로 위로하고 달래드리다 보면 점차 마음의 안정을 찾고 얼굴에 웃음이 흐른다고 하였다. 저물어가는 황혼의 령마루를 바라보는 마음만으로도 서글프고 벅찰 것인데 힘도 딸리고 정력도 딸리는 만년에 믿고 의지할 데 하나 없이 부득이 낯선 곳에 정착해야 하는 그들의 허전한 마음 얼마나 쓰리고 아플가?  “할아버님, 오늘 참 멋지고 씩씩하신데요! 꼭 좋은 일이 생길 것 같아요.” “할머님. 어쩜 머리를 그렇게 이쁘게 빗으셨어요? 10년이나 젊어지셨어요.”  무궁무진한 에너지를 발산하는 언어의 매력이란 바로 이런 것이 아닐가? 한창 젊은이들에게는 싫증나고 아부가 거나하게 담겨진 귀찮은 존재로만 들릴지 모르지만 인생 마지막 종착역에서 허물어지는 담벽을 떨리는 손으로 부여잡고 간신히 버텨가는 로인들에게는 천금을 주고도 살 수 없는 명약으로 그리고 생명의 연장선을 이어가는 값진 에너지로 될 수 있지 않을가? 금방 걸음마를 타기 시작한 애들에게는 힘겨운 한자국을 용감히 디딜 수 있도록 에너지를 부어주는 한마디가 무엇보다 소중하고 출국 바람이 적셔간 이 땅에서 따뜻한 엄마품을 잃고 울먹이는 애들에게는 엄마의 마음을 대신할 수 있는 한마디가 여린 마음을 굳혀주는 좋은 에너지로 될 것이다. 100년도 살기 힘든 우리의 삶에서 서로가 주고받는 언어의 가치는 무엇보다 소중한 것이다. 희로애락을 동반하는 짧은 삶 속에서 천성이 부드러운 혀끝을 굳이 날카롭게 세워가지고 소중한 인간을 무참히 찌르기보다는 바른손을 내밀어 감싸고 보듬고 베풀면서 응원을 준다면 세상은 얼마나 밝고 아름다울가! 정을 담은 따뜻한 말 한마디는 봄날의 순수한 꽃들마냥 내 주위를 포근하게 감싸주면서 서로의 마음을 무난하게 윤활시켜 삶의 참뜻을 멋지게 부각시켜줄 것이다. 아름다운 꽃이 한순간 내 주위를 황홀하게 빛내줄 수 있다면 아름다운 언어는 평생 나를 포옹해줄 수 있는 넓은 터전으로 되여준다. 산밑에 가면 그 산의 높이를 알 수 있듯이 한 사람의 언어수준을 보면 그 사람의 성품과 학식까지도 보아낼 수 있다. 겸손하고 수양을 갖춘 진정이 담긴 언어는 자신에 대한 존중이고 품위이며 타인에 대한 배려이고 또 그 사람의 삶의 모습이다.  꽃이 아름다와도 가시가 있을 수 있고 매력적인 언어에도 독이 있을 수 있으니 그 속에서 발산하는 에너지를 얻고 잃음은 자신이 할 탓에 달렸다. 계절에는 엄동설한이 있고 울퉁불퉁 인생길에는 모래길도 자갈길도 있으니 힘을 부어주는 동행자의 에너지가 얼마나 소중한가 하는 것은 누구나 다 아는 도리이다. 인생은 홀로 가는 것이 아니고 여럿이 어우러져 가는 길인 것 만큼 솔선적으로 누군가에게 선뜻 마음을 열어보라. 그리고 봄날의 아름다운 꽃을 감상하는듯한 즐거운 마음으로 따뜻함을 전해보라. 그러노라면 당신의 고달픈 삶에 늘 값진 에너지가 투자되여있을 것이다! 출처:2018 제6호
고통과 성찰이 드러나는 남철심 시인의 시적 세계  -를 읽고 손경란   고통은 우리가 누구나 살면서 보편적으로 체험하는 감정이다. 고통의 류형은 육체적 고통, 내면적 고통, 세계의 부정으로 발생하는 사회적 고통, 력사적으로 인식하는 고통이 있다.  이들 중에서 남철심 시인의 시에서 보이는 고통의 류형은 내면적 고통이 지배하며 그 원인은 그리움과 고독, 소외감, 상실감, 혐오감에서 비롯되고 있다. 시에서 시인은 고통의 순간을 자기 인식의 세계로 끌어들이고 깊은 성찰에 이른다. 남철심 시인의 시를 말하면서 고통의 문제를 먼저 떠올리게 된 것은 그의 시에서 시적 화자의 내면의 고통이 때로는 잔잔하게 때로는 격하게 울렁이고 있기 때문이다. 본고에서는 남철심 시인의 시 를 통해 고통과 성찰이 드러나는 그의 시적 세계에 접근해보고저 한다.    1.  그리움- 령혼으로 보는 고요의  소리  먼저 첫번째 시 을 읽어보자. 밤은 고요하다. 그래서 고요를 즐기는 사람은 밤을 찾는다. 한개 련으로 된 이 시에서 시적 화자는 밤이 와야만 찾아오는 어둠의 세계 속에서 찾아오는 존재를 만난다.  시의 첫행 “고요가 뜯어먹은 밤의 가장자리에서”라는 표현은 시적 화자가 처해있는 현재 시점은 고요한 밤의 끝자락 시간임을 말해준다. 화자는 온밤 깊은 생각으로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다가 밤이 다 지나가는 시간에 이르러서야 “한걸음씩 사색이 물러가”게 되고 주위의 메뚜기, 꽃, 별 등 자연물들을 바라보게 된다. 어둠을 배경으로 우주 속의 만물은 잠들어있다. “여름을 만지며 놀던 / 메뚜기의 발가락도 잠들었고”  “꽃들이 꽃들의 모양을 하고 / 입 다문 별들을 본다”. 어둠은 모든 상황의 정지이며 쉼이며 묵언임을 일깨워준다. 이런 어둠을 통해 먼 은하에서 출발해 망막에 하나 둘 착상된 별빛은 시적 화자의 그리움을 불러오며 “서러운 이름 하나”를 기억해낸다. 그 이름은 이내 “흐르는 바람결과 어우르며” 시적 화자의  슬픈 추억을 불러일으키고 리별의 순간을 기억하게 한다. 만물이 잠든 밤의 고요 속에서 움직여 살아나는 추억을 “흐르는 바람결”에 “흔들리는 잎새”로의 비유적 표현이 기발하다. 또한 추억에 대한 동적인 묘사는 밤의 고요와 대조적인 분위기를 자아내며 추억의 감정을 고조시킨다. 인간은 태여나면서 모태와의 리별을 첫 경험으로 그 후의 삶 속에서 부단한 리별과 만남으로 살아가면서 리별의 아픔을 숙명적으로 맞아야 한다. 수많은 리별 가운데서 “생의 약속들을 날리며 / 하늘보다 먼 나라로 떠나는” ‘죽음’이라는 리별 앞에서 시적 화자는 생의 약속들이 부질없이 가벼운 것이였음을 느끼며 삶에 대한 성찰에 이른다. 그나마 위로가 되는 것은 “정교한 유리알을 굴리며” 창밖을 보는 집고양이의 동반이다. 또 전반 시에서 ‘메뚜기’, ‘꽃’, ‘별’, ‘고양이’ 그리고 시적 화자가 하나의 풍경으로 스크랩되고 있다. 서로가 서로에게 감응하고 조응하는 인간과 자연이 융화된 모습 속에서 동기감응하는 자연의 질서를 돋보이게 한다.    2. 소외감- 작은 존재에 대한 응시와 공감  두번째 시는 들꽃의 한 종류인 을 시적 대상으로 쓴 시이다. 좁쌀꽃의 ‘좁쌀’ 이름만으로 좁쌀꽃을 상상해보면 아주 작은 꽃이 상상될지 모르겠지만 사전적 해석을 보면 좁쌀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꽃이 크다고 한다. 물론 또 다른 꽃들과 비교하면 그리 큰 꽃은 아니다. 잘 익은 좁쌀의 색갈을 간직하고 피여난 꽃, 아마도 다닥다닥 꽃망울이 모여있는 모습이 마치 좁쌀이 모여있는듯해서 좁쌀꽃이라는 이름이 붙은 것은 아닌가 싶다.  이 시는 3련으로 되여있는데 1련의 첫 두행 “어디를 닮았는지 기억나지 않지만 / 나를 닮은 풍뎅이 길에서 꽃이 핀다”라는 도입부의 시적 표현을 보면 화자는 강변의 야산이나 들판에 서식하는 15-21mm 크기의 작은 곤충인 풍뎅이와 자신을 부분적으로 동일시하는데 이는 독자들에게 구경 어디를 닮았을가 하는 궁금증을 자아내며 좁쌀꽃 밭으로 독자들을 이끈다. 3행과 4행에서의 “큰 것들 눈에는 보이지 않는 / 야리야리 서있는 노오란 좁쌀꽃”은 좁쌀꽃의 가늘고 노오란 식물적 속성을 강화하여 시각적 이미지를 부각시키고 독자들의 시선을 좁쌀꽃에 집중시킨다. 그러면서 “큰 것들 눈에는 보이지 않는” 좁쌀꽃이라고 강조한다. 다시 말하면 ‘큰 것들은 보지 않는다’는 뜻과 함께 ‘작은 것들은 본다’라는 뜻을  함축함과 동시에 화자가 숨기고 있던 풍뎅이와의 류사성이 실은 ‘작은 존재’라는 점을 넌지시 암시하며 독자들의 궁금증을 해소해준다.  2련의 첫 두행 “같이 온 계절의 겨드랑이에 끼워 / 훌 불면 날릴듯 가녀린 모습”은 1련에서 제기한  ‘야리야리 서있는 좁쌀꽃’에 대한 의인화적 표현이다. 좁쌀꽃은 수많은 꽃들이 만발하는 계절에 단지 “겨드랑이에 끼워”서 찾아오는 작은 존재로, 또 “가녀린 모습”의 약한 존재로 의인화되여 표현되며 이로부터 화자는 좁쌀꽃에서 “시집간 누이”의 뒤모습, 즉 “작은 등”을  발견한다. 뒤이어 좁쌀꽃은 또 “아지랑거리는 태양의 눈물”로 승화된다. “시집간 누이의 작은 등”과 “아지랑거리는 태양의 눈물”은 1련의 4행에서 제기한 원관념인 좁쌀꽃의 보조관념으로서 은유적인 표현이다. 즉 한개의 원관념 “좁쌀꽃”이 “시집간 누이의 작은 등”과  “태양의 눈물” 등 두개의 보조관념으로 전이되여 의미의 변용과 확대가 이루어지고 있다. “누이의 작은 등”이 좁쌀꽃의 “야리야리한 모습”과 동일시되였다면 “태양의 눈물”은 좁쌀꽃의 ‘태양빛’을 닮은 노오란 빛갈과 ‘눈물’의 방울크기와 같은 작은 물리적 속성에 대한 시각적 이미지화로서 경이로운 표현이다. 또한 ‘눈물’ 이미지는 좁쌀꽃의 ‘슬픈 존재’를 부각시키는 역할을 한다.  3 련에 이르러 세월의 흐름과 더불어 기억 속에서 가물가물해진 좁쌀꽃의 ‘잃어버린 애모쁨’의 모습을 되찾고저 하는 감정이 고조되며 시적 화자의 그리움이 솟구쳐 흐른다. 2련의 시적 정서가 3련에서 이어져 좁쌀꽃과 동일시된 누이에 대한 그리움도 혼재해있기에 그 감동이 독자들에게 더 절실히 다가온다. 3련의 1행과 3행에서 ‘다시’라는 낱말을 반복하여 사용함으로써 좁쌀꽃에 대한 시적 화자의 그리움의 정서가 더욱더 간절히 드러난다. 풍뎅이 길에 피였던 좁쌀꽃은 이미 시적 화자의 가슴속으로 고스란히 옮겨져있다.  4련은 1련과 호응을 이루며 화자의 정서는 계속해서 고조된다. “노오란 좁쌀꽃”은 작고 여리지만 “가볍잖은 생의 무게를 / 고스란히 껴안고” 살아가는 외유내강의 존재이다. 여기서 “노오란 좁쌀꽃”은 축자적인 의미 뿐만이 아니라 사회적으로 힘없이 살아가는 ‘누이’를 포함한 소외된 인간존재에 대한 상징적 의미도 함께 내포하고 있다.  시 에서 시적 화자는 작고 소외된 존재에 대한 응시와 공감을 통해 소외된 자들과 하나가 되고저 한다. 이는 인간존재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망각한 채 서로 소외시키고 또 소외당하는 삶을 살아가는 현대인들의 무의식을 일깨우는 행위이기도 하다.    3. 상실감-몸안에 갇힌 상처  세번째 시의 제목은 주방의 의미를 나태내는 외래어 이다. 주방은 음식을 료리하는 물리적인 공간이다. 이 시에서는  ‘밥짓기’가 계기가 되여 현실과 환상을 넘나드는 시적 상상력을 펼치는 공간이다.  “금방까지 배고프다고 조르더니 / 부엌에서 밥 짓는 사이 / 그 사람은 홀랑 죽어버렸다”라는 표현에서 시적 화자는 밥 할 시간이 되여 주방에 들어간 것이 아니라 배가 고파 주방에 들어간다. 아마도 굶어있었던 모양이다. 무슨 사연이 있었을가? 바로 이어지는 “밥 짓는 사이 / 그 사람은 홀랑 죽어버렸다.”라는 표현하에 갑자기 팽팽히 긴장되고 음산한 강박감이 흐른다. 이어 독자의 시선을 칼도마 우에서 죽은 잉어 우로 옮겨간다. “칼도마 우에서 팔딱거리던 / 잉어 대가리도 / 썰어놓은 고수풀 옆에서 / 눈도 못 감은 채 죽어있었다”. 화자는 잉어의 눈빛에 시안을 집중한다. 잉어는 림종시에 풀지 못하는  한이 있어 차마 눈을 감지 못하는 것일가? 정지된 생선의 눈빛에서… 죽임을 당한 잉어에게서 아찍 꺼지지 않은 기운을 느낄 수 있다. 잉어를 죽이면서 “피를 먹어 인자한 칼을 내려놓”는다. 밥을 지을 때 칼은 늘 사용하는 도구이다. 칼은 사물을 자르거나 분할하여 가르는 역할을 하지만 칼자루를 쥔 자는 칼의 힘으로 권력이나 부나 욕망을 쟁취하기도 한다. 이러한 물리적인 칼이 아닌 인간의 마음속에도 칼이 있다. 화자가 한자루의 칼을 가지고 마음대로 휘두르는 리유는 무엇일가? 이어 “손바닥을 펴보니 / 손가락이 없다 / 눈을 비벼도 하나에서 열까지 / 손가락이 없다”. 인체의 중요한 부위로서 ‘손가락’의 상실은 육체적 불구를 의미한다. 이어서 “혼자 생각하던 담배불이 / 눈을 껌벅이며 / 터지려는 오줌을 참고 있다”라는 시적 표현으로 넘어가는데 그제야 안도의 숨이 나간다. 여기서 담배불은 화자를 가리키고 화자는 잉어를 죽이면서 칼자루에 묻어난 피를 보면서 ‘죽이고 싶은’ 좀더 정확히 말하면 ‘기억에서 내려놓고 싶은’ 누군가를 잊고 싶었던 것이다. 그리고 “누군가 더 죽여야 할 시간인데 / 누군가 하나만 더 / 죽여야 할 시간인데”라는 표현은 화자가 죽여야 하는 존재는 아직도 마음속에 하나, 둘 더  존재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이 시의 공포를 자아내는 이미지들은 결코 실재 대상의 재현이 아니다. 시인의 내면세계 속에 존재하는 이미지들이다. 이 시는 의식과 무의식의 층위를 오고가는 시적 특징을 보이기 때문에 다소 난해하고 해괴하여 독자들로 하여금 한창 시 속에 머물며 서성이게 한다. 또한 행간의 이미지는 어떤 론리에 의해 형상화되는 것이 아니라 시적 화자의 내면세계의 갈등과 모순의 이미지화이다. 이에 시적 표현을 다시 음미해보면 ‘홀랑 죽어버린 사람’은 기억에서 지워버리고 싶은 상대, ‘잘린 손가락’은 자아상실감, ‘더 죽여야 할 누군가’는 상실로 인한 주위 사물들에 대한 귀찮음의 정서로 볼 수 있다. 외부세계를 상실한 상황에서 시인이 보는 것은 다름 아닌 자기 자신 곧 자신의 내면세계이다. 전반 시는 화자의 내면세계의 강렬한 충동을 충격적으로 묘사하고 현실적 시공간과 환상이 뒤섞이면서 시적 긴장을 이루고 있다.    4. 고독감-페쇄된 시간과  공간 속에서 느끼는 환청  네번째 시 이란 시는 “재수 없는 날이면 / 고장난 세탁기가 돌아간다 / 베란다 구석에서 소리치며”라는 전도적 표현으로 시작된다. 세탁기가 고장났으니 재수가 없긴 없다. 고장난 세탁기의 소음 진동소리에 생각하며 그리워하던 누군가의 이름이 씻겨간다. “하얀 기억이 새롭게 표백된다”. 하얗게 희미해진 기억이 더 희미해진다. 기억과 그리움을 차단시키는 고장난 세탁기 소리가 그야말로 재수가 없긴 없다. “너무 오래 가리우고 살아온 / 슴슴한 일상의 냄새에 섞여 / 마지막 남았던 이름마저 / 비뚤어진 배수구로 도망간다”라는 표현은 일상사에 쫓기우고 또 시간의 흐름과 더불어 가슴 깊숙한 자리까지 내밀려있던 누군가의 기억이 고장난 세탁기의 소음소리에 단절되였다는 의미이다. 원망과 아쉬움이 내재해있다. 하얗게 무색해진 기억은 화자가 떠올리고저 하는 아름다운 내면풍경이다.  2련에서 “아주 가끔씩 / 세탁기가 돌아가는 날이면 / 고장난 전화기가 울린다 / 걸어오는 사람도 없이 / 혼자 울린다”라는 시적 표현을 보면 고장난 전화기가 울릴 수 없다. 화자는 환청을 경험한 것이다. 세탁기가 돌아가는 소음소리에 혹시라도 울릴지 모르는 전화소리를 듣지 못할가 안절부절 못했거나 아니 누군가 전화를 걸어오기를 기다렸다고 말하는 편이 더 나을 것이다. 그러다 환청을 한 것이다. 전화기를 들고 일본어로 “모시모시(여보세요)”라고 인사를 해서야 확실히 잘못 들었음을 확인한다. 화자는 심심풀이를 세탁기를 돌리는 것으로 해소한다. 심심해서 세탁기가 돌아갈 때 환청하는 귀를 두고 ‘고장났다’라는 표현을 쓴다. 누군가를 애써 기억하고 누군가의 목소리를 애타게 기다리는 시간과 페쇄된 공간인 집에서 홀로 느끼는 고독과  외로움의 극치가 아니겠는가?!   5.‘부드러운’ 육체를 통한  자아 및 인간에 대한 성찰  다섯번째 시 를 보자. 욕조는 우리가 하루의 일상을 마치고 따뜻한 물에 몸을 풀면서 휴식을 취하는 공간이기도 하며 알몸으로 들어서는 공간이다. 있는 그대로를 맡기는 공간이다. 가식이 필요없이 투명하게 물과 만날 수 있는 공간이다.    시의 첫련 “뜨거운 욕조 속에 들어가면 / 아무렇게라도 이야기는 시작되겠지”라는 도입부의 추측적인 표현은 화자가  욕조 속의 ‘어떤 이야기’를 기대하고 있음을 말해주며 동시에 독자들에게 ‘무슨 이야기를 기대할가’라는 궁금증을 불러일으킨다. 이어서 2련 “몸의 중심에 달린 그것도 / 흐드러지고 희미해지고 흔들거린다 / 연하고 부드러운 것들은 / 다 녹여 하나로 되더니 / 손가락도 발가락도 거기도 / 길게 비뚤어져 녹을 것처럼 / 흐물거리다가 그대로 있다”라는 표현을 보면 화자는 육체와 물과의 교합 속에서 욕조 속의 알몸을 세심하게 관찰한다. 이 때 몸은 뜨거운 욕망의 그릇이 아니라 자아를 포함한 인간을 성찰하는 시적 대상으로 기능하다. “모든 물상들 다 불러 / 함께 담그고 싶은데”라는 표현은 사람들과 더불어 살고저 하는 화자의 념원을 드러내지만 바로 “단단하고 각이 나서 맞히면 아프다” 라고 하면서 단념한다. 많이 부딪쳐 아픔을 겪은 기억 때문이다. 마지막 련은 돌연적으로 “사람 하나 사랑하기가 이리 어려운데 / 사람 하나 미워하기가 얼마나 힘들가”라는 독백으로 끝을 맺는데 이는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살아가면서 그 속에서 서로 사랑하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미워하는 일도 쉬운 일이 아니라는 인간관계에 대한  성찰에 이르면서 독자들의 공감을 자아낸다.  경제적 론리에 따라 사고하고 움직이는 현대 인간관계 속에서 사람들은 늘 쉽게 상처를 주거나 받는다.  전반 시의 흐름에는 욕조 속에 놓인 녹아든 ‘부드러운’ 몸에 대한 응시를 통해 더불어 살고저 하는 시인의 무의식적 사고가 내재해있다.    6.혐오감- 현대문명과 인간에 대한 비판 마지막 시 를 읽어보도록 하자. 긴자 욘쵸메는 일본 제일 번화한 쇼핑가로 고급 매장과 백화점이 자리잡고 있으며 고급 유흥업소들도 많다고 한다. 세련되고 아담한 상점과 레스토랑 등이 즐비하고 찬란한 네온사인이 인상적인 곳, 현대 문명을 자랑하는 도꾜의 상징적 거리이기도 하다.  허나 이 시의 도입부에서는 일본의 현대문명과 부를 대표하는 가장 번화한 거리를 “银座四丁目 / 오줌싸개들의 거리”라고 단도직입적으로 비하한다. 오줌은 인체의 배설물로서 오줌싸개는 아무데서나 배설하는 추태를 보이는 행위를 말한다. 즉 추잡한 인간상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  2련에서의 “고귀한 것들이 / 다 모여 / 오줌을 싸는 거리”라는 표현은  ‘고귀’한 존재에 대한 반어적 비판과 조롱이다. 3련과 4련은 전도적 표현수법으로 되여있다. “숫구멍이 두개 달려 / 조금은 부실해보이는 / 착한 내 령혼을 / 유쾌히 짓밟으며 / 이쁜 종아리들이 지나가고 / 가랭이를 적시며 / 바람난 고양이도 지나가고”라는 표현은 긴자 욘쵸메에서 목격한 장면을 형상화한 것이다. “이쁜 종아리들”은 이쁜 녀성을 말하고 떠돌이 고양이를  ‘바람났다’고 표현한다. 그리고 긴자 욘쵸메의 주류 풍경과는 어울리지 못하는 자신의 처지를 ‘조금은 부실해보이는’ ‘모자라는’ 존재로 자조한다.  5련에서의 “미쳐버리도록 아릿다운 / 아래도리들의 정서를 만지작거리며”라는 표현은 인간의 원초적인 욕구나 욕망들을 말하는 것으로서 번화가에서 다들 점잖게 오가지만 내면엔 성적인 원초욕망이 우글거리고 있음을 의미한다. “밤은 이미 / 꽃의 변두리까지 오고 있다”라는 표현은 옥타비오 파스가  “섹스가 뿌리라면 에오티시즘은 줄기이고 사랑은 꽃”이라고 한 비유적 이미지와 맞물리는 시적 표현이라 생각된다. 인간의 원초적 욕망으로서의 성욕은 우리 삶의 아름다움이기도 하고 온갖 추한 악의 근원이기도 하다.  6련과 7련의 “가랭이를 벌리면 / 시간이 털처럼 일어서는 / 銀座四丁目 / 아릿다운 것들이 / 다 모여 / 오줌을 싸는 거리”라는 표현은 소위 신사와 갑부들의 버젓한 외모와  대조되는 그들의 추태를 대조적으로 비판하고 조롱하면서  ‘아름다움과 고귀한 것’에 대한 사색을 독자들에게 던진다.  이상 남철심 시인의 를 읽으면서 가끔은 시인의 상상의 날개를 따라 자유롭게 노닐다가도 난해한 시적 표현에 이르러서는 한참 동안 시 속에 머물면서 머뭇거리게 된다. 또한  그 머뭇거림 때문에 읽을 재미가 더해지고 탐정미를 느낄 수 있었으며 시인의 진실한 령혼의 시세계를 만끽해 볼 수 있었다.  출처:2018 제6호
74    조영욱: 주체할 수 있는 욕망(소설평) 댓글:  조회:406  추천:0  2019-07-15
주체할 수 있는 욕망 조영욱   1. 들어가며 이 작품을 받았을 때 제목이 참 특이하다는 생각을 했다. 소설 제목이 아니라 노래 제목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전반부에는 흔히 다룰 수 있는 주제를 다루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다 읽고 나자 무언가가 암시하고 말하고저 하는 바가 있다고 느꼈다. 요즘 깨달은 도리이지만 시인은 말하고저 하는 바를 함축 혹은 비틀어서 표현하고 소설가는 사실적으로 말하고저 하는 바를 표현한다. 다시 말하면 시의 정수精髓는 상징이고 소설의 정수는 리얼리티이다.  조원의 단편소설 를 읽으면서 뒤로 가면 갈수록 시적이라는 느낌을 받았다. 그래서 비록 학이비재学而非才하지만 한번 다루어보려고 한다.    2. 플롯의 문제 아리스토텔레스는 《시학》에서 플롯은 사건의 결합이라고 했다. 이 작품도 여러가지 사건들로 이루어져있다.  구스타프 프라이타크(Gustav Freytag)의 5막극 구성법은 작품을 도입부(제시부: exposition), 상승행동(rising action), 위기(정점: climax), 하강행동(귀환: falling action), 파국(resolution)으로 나눈다. 이런 5막극의 구성을 따르는 드라마나 이야기, 연극이 많다. 이 작품도 거의 이런 구성에 잘 들어맞는다고 봐야 할 것이다.   도입부 이 작품의 도입부는 길다. 대개 십분의 일의 편폭으로 도입부를 구성하고 있다.  주로 주인공 ‘나’에 대해서 소개를 하고 있다. 작품은 시작부터 현대인의 곤혹을 말하는 것으로 시작하고 있다. 바로 이른바 ‘월요병’이다. ‘나’는 샐러리맨은 아니지만 ‘월요병’이 있는듯하다.  여기서 카메라가 등장한다. ‘내’ 직업은 이른바 인테리어 사업자 즉 시공기술자다. 잘 생각해보면 ‘나’는 카메라가 필요없다. 물론 인테리어에는 사진을 찍는 작업이 필요하다. 그러나 요즘 같은 시대에 일반적인 인테리어사업자는 거의가 다 스마트폰의 카메라를 리용한다. 스마트폰의 카메라를 리용하지 않고 여기에 DSLR카메라가 등장하는 것은 “‘나’는 일반 인터리어사업자가 아니다”라는 것을 보여준다. 뒤에 나오지만 ‘내’가 쓰는 카메라는 2017년에 출시된 캐논 EOS 800D라는 것이 이를 증명한다. 그리고 또한 뒤에 카메라 때문에 어떤 사건이 있음을 암시하고 있다.    ‘나’는 ‘월요병’이 있고 작업실과 거주공간이 따로 없이 하나이며 카메라와 같은 취미도 있고 또한 차에 있는 물건을 도적맞힐가봐 걱정하는 전형적인 현대인이다. 그러나 ‘내’ 이야기는 전형적이지 않고 특별하다.    상승행동 내가 웅이네 집에 도착하면서 상승행동은 시작된다.  ‘나’는 ‘녀인’의 전원주택의 다락방 증축공사를 맡았다. 다락방에 있던 물건을 옮기다가 ‘나’는 우연하게 ‘녀인’의 손을 터치하게 된다. 일을 하면서 곽명은 나에게 ‘녀인’에 관한 소문을 얘기해주게 된다. 그중에 한 소문은 ‘녀인’이 ‘나’와 “그렇고 그런 사이”라는 것이다. ‘나’는 이를 거부하면서도 내심 무언가를 기대한다. 곽명은 ‘나’와 ‘녀인’을 위해 자리를 피해 그 집을 떠난다.   위기 그러다가 나는 우연하게 ‘녀인’의 사적인 공간에 들어가 잠옷 바람의 ‘녀인’과 조우하게 되며 그의 반라상태의 신체를 보게 된다. 그러나 “녀인은 입가에 희미한 웃음을 짓”는다.   하강행동 ‘나’는 ‘녀인’으로부터 아들 웅이를 유치원에서 데려다 달라는 부탁을 받는다. 그런데 웅이는 낮에 쓰레기 수거 수업을 하다가 어떤 물건을 주었는데 알고 보니 그 물건은 ‘나’의 것과 모델이 같은 카메라다. 그 카메라를 복원해보니 한 “남자와 녀자의 무릎 아래 종아리와 발” 사진과 일분 이십삼초짜리 동영상이다. 나는 타인의 사생활 속으로 잠간 빠져들었다가 SNS에 카메라 주인을 찾는 게시글을 올린다.    파국  카메라의 주인은 ‘나’에게 “오후 세시, 좌망바다가 좌망커피숍에서 만나”자고 한다. 그런데 그 카메라 주인은 바로 그 ‘녀인’이다. 이럼으로써 위기는 해소된다.   ‘내’가 속살을 보았을 때만 해도 주인공인 ‘내’가 이 분명히 남편이 있을 유부녀와 어떤 ‘위험한 불장난’에 빠져들 것만 같았지만 뒤에는 그렇지가 않다. 무언가가 보다 복잡한 현상이 보인다.    3. 욕망의 문제 주인공 ‘나’는 분명 이 작품에서 주체다. 주체는 욕망이 있다. 또한 타자가 있다. 그 타자는 ‘녀인’이다.  이 욕망은 ‘녀인’에게 통제당하고 있다. ‘나’는 곽명이 말해주는 것을 애써 거부한다. 곽명은 두가지 소문을 ‘나’에게 말해주었다. 하나는 ‘녀인’이 고위층 관리의 정부情妇라는 것이고 두번째는 ‘내’가 ‘녀인’과 그렇고 그런 사이라는 것이다. ‘나’는 이 두 소문을 다 부정하고 있다. 왜냐 하면 ‘녀인’이 소문을 거부하기 때문이다. 거부 혹은 외면하고 있는 것이다. ‘녀인’에게 통제당하는 욕망도 이를 거부 혹은 외면하고 있다. ‘나’는 그 ‘녀인’과의 조우에서 무력감이 있다. 그래서 웅이를 데려다 달라는 부탁을 수락하고 만 것이다. 무력감 때문에 거부하지 못했다. 거부하지 못하는 부탁은 사실 명령이다. 관음증의 경향을 보이고 있는 ‘나’는 ‘녀인’에 대한 무력감 때문에 욕망을 억압하고 있으며 억압받고 있다.   ‘나’는 이 욕망을 카메라로 전이하고 있다. ‘나’는 주어온 카메라를 정성스럽게 청소한다. 왜냐 하면 거기에는 그 ‘녀인’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셀로판지에 포장된 물건”의 정체에 대해서 상상을 하고 그래서 우연히 짧은 실크 잠옷 차림의 ‘녀인’과 그 속살을 보았을 때 ‘나’는 당황했고 ‘녀인’은 “입가에 희미한 웃음”을 지었다.  또한 카메라를 다 청소하고 나서 안에 들어있는 동영상을 보다가 그 연장으로 마루바닥에 있는 ‘녀인’의 “빨간 발톱 우에 박혀있는 큐빅”을 발견하고 있는 것이다. 이어서 ‘녀인’이 등장해 ‘머리카락’으로 나를 괴롭혔던 것이다. 여기에 웅이가 등장한다. 이 작품에서 웅이는 어떤 존재일가? 단지 ‘내’ 욕망의 대상인 ‘녀인’의 아들일가? 특이한 것은 이 ‘녀인’이 전반 작품에서 ‘녀인’으로 등장하기도 하고 ‘웅이네’로 불려지기도 한다는 것이다.  웅이는 사실 내 사상写像이며 내 분신이라고 할 수 있다. 대상에 대해 ‘나’의 욕망을 대리만족시켜주는 존재이기도 하면서 조력자다. 혹은 ‘나’와 웅이는 하나다.  웅이가 주은 카메라 모델은 ‘내’가 가지고 있는 카메라와 같다. 욕망 전이용 도구 혹은 욕망 만족 도구의 모델이 같음으로써 어떤 동질감이나 일체감을 가진다.  작품이 시작되는 데에서 “오늘은 웅이네 전원주택”이라고 했다. 여기서 ‘웅이네’는 그 ‘녀인’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웅이의 집’으로 해석된다. 웅이를 아주 피붙이거나 가까운 사람처럼 호칭하고 있는 것에서도 이를 엿볼 수 있다. ‘나’는 ‘녀인’을 탐하려는 욕망이 있지만 스스로를 억압하고 있고 웅이는 그 욕망의 대상과 한집에 있다. 그래서 작품에도 나오지만 나는 웅이네 집 다락방에 집착한다. ‘내’가 일하는 장소는 주로 다락방이다. 또한 ‘나’는 다락방에 대해서 공간적으로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다락방에서 일을 하면서 나는 아래층 녀인의 시간을 함께 나누어쓰는듯한 착각에 빠져들었다.   역경易经에서는 세상만물을 음양阴阳의 법칙으로 본다. 양은 우에 있고 음은 아래에 있다. 양은 남자이고 음은 녀자이다. 다시 말하면 남자는 우에 있고 녀자는 아래에 있다. 이 세상을 구성한 인간들 모두 남자가 우에 있고 녀자가 아래에 있는 체위体味에 의해서 생산된 것이다. 집 구조 자체가 그렇게 설계돼있다. 우층 다락방에는 남자-‘내’가 있고 아래층에는 녀자-‘녀인’이 있다.  해빛이 잘 들기 때문에 다락방은 양이기도 하다. 다락방은 누구의 공간인가? 나의 공간이기도 하면서 웅이의 공간이다. 그래서 웅이가 “다락방의 주인은 자신”이라고 했다. 앞에서도 얘기했지만 ‘나’는 동일화된 웅이를 통해서 ‘녀인’과 성행위를 하며 무의식적으로 욕망을 배출하고 있다.  그렇다면 ‘나’는 어머니를 범할 수 있다는 데서 오이디푸스적이다. 오이디푸스는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를 욕보이게 했다. 이 작품에서도 아버지에 대한 서술이 나온다. 이 ‘녀인’은 고위층 관리의 정부일 가능성이 있다. 그렇다면 웅이는 이 고위층 관리의 아들이다. 나는 이 관리와 경쟁자다. 곽명의 입을 통해서 들은 소문은 두가지였다. 이 ‘녀인’이 관리의 녀자이거나 ‘나’의 녀자라는 소문이다. 소문끼리도 경쟁하고 있지만 ‘나’도 무의식중에 관리와 경쟁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웅이와 일체다. 그렇다면 ‘나’는 웅이를 통해 관리와 오이디푸스적인 경쟁을 하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웅이가 주은 카메라에는 한 남성의 “무릎 아래 종아리와 발”만 등장한다. 론리적으로 분석하면 이 남성은 바로 그 관리이다. 웅이가 주어온 카메라의 사진과 동영상을 복원시켜놓고 감상하는 것은 욕망을 분출하는 행위이다.  욕망은 결국엔 카메라로 전이되였다. 그 카메라의 주인을 찾으려고 한다. 그것보다 아마 카메라에 등장하는 남성과 녀성이 누군지 확인하고 싶었다는 것이 더 맞을 것이다. 그 녀성은 다름 아닌 ‘녀인’이였다. 결국 분산된 욕망들이 하나로 회귀되였다. 이로써 오이디푸스적 인간이 완성되였다.     4. 욕망의 중개자의 문제 르네 지라르(Rene Girard)는 삼각형 욕망이라는 력동적인 리론을 제기했다. 대부분의 허구작품들은 자연발생적인 주체의 욕망을 대상으로 이어지는 간단한 직선으로 표현한다. 그러나 이 직선 우에 주체와 대상 쪽으로 동시에 선을 긋고 있는 중개자가 있다. 이는 삼각형이다.  이 작품에서 주체는 ‘나’이다. 대상은 ‘녀인’이다. ‘나’는 ‘녀인’에게 욕망이 있다. 일반적인 소설 같으면 ‘내’가 ‘녀인’에게로 직접 련결(직선)되면 된다. 그러나 ‘나’는 그렇게 하지 않고 어떤 중개자를 통하여 련결되고 있다. 이 작품에서 중개자는 여러 모습으로 나타난다.  먼저 웅이가 중개자다. 웅이가 카메라를 주어서 ‘나’한테 줬다. 카메라에 ‘녀인’이 있으므로 여기서 대상은 ‘녀인’인 동시에 카메라라고 할 수 있다. ‘나’는 주로 웅이의 암시를 받으며 ‘녀인’에게 카메라의 진상으로 한걸음 한걸음 다가가고 있다. 지라르는 이 삼각형에 대해 특이한 해석을 했다. “욕망의 삼각형은 이등변삼각형이다. 중개자가 욕망하는 주체에 가까이 접근할수록 욕망은 점점 더 강렬해진다.” 이를 어느 학자가 풀이했다. “주체와 중개자 사이의 거리가 멀면 대상과 중개자 사이의 거리도 멀고 주체와 중개자 사이의 거리가 가까우면 대상과 중개자 사이의 거리도 가까워진다. 중개자와 주체 사이의 거리가 가까워질 경우 대상과 중개자를 구분할 수 없게 되고 욕망도 강렬해진다.” 앞에서도 봤지만 ‘나’는 웅이와 일체다. ‘나’와 웅이가 가까워져서 구분할 수 없게 될 때 욕망이 더욱 강렬해지는 것이다. 이 중개자는 웅이 외에도 곽명과 장위이기도 하다. 특히 ‘나’는 곽명으로부터 ‘녀인’에 대한 암시를 받는다. 곽명은 ‘내’가 욕망을 실현하는 조력자다. 돈키호떼에게 충성하는 산초처럼 ‘나’와 곽명 사이에는 경쟁관계가 없다. 곽명은 ‘내’가 ‘녀인’에게 다가가기를 진심으로 바라고 나한테 ‘녀인’에 관한 정보를 제공하기도 하며 ‘나’와 ‘녀인’을 위하여 자리를 비켜주기도 한다. 지라르는 주체와 중개자가 경쟁관계이면 이를 내면적 간접화(mediation interne)라 하고 경쟁이 없으면 이를 외면적 간접화(mediation externe)라고 했다. ‘나’는 ‘녀인’을 욕망하지만 직접 하는 것이 아니고 다른 존재 즉 중개자와 경쟁을 통해서 욕망하고 있다. 오늘날 시장경제체제에서 생성된 소설은 그럴 수 밖에 없다. 특히 이 작품에서 ‘나’는 ‘녀인’과 경제적 관계로 이어졌다. 그래서 여러 중개자가 나타날 수 밖에 없다. 웅이, 곽명, 장위, 웅이의 아버지로 추측되는 관리, 심지어 카메라도 어떻게 보면 중개자다.    5. 공간의 문제 작품의 제목은 이다. 이 작품의 배경이 되기도 하는 ‘바다마을 좌망’은 대체 어디인가?  소설에서 공간 혹은 배경은 앞으로 발생할 일을 암시하거나 분위기 조성용이라고 여러 문학리론가들은 말한다. 이 작품도 마찬가지다. 도입부에 “나는 단순하게 살기로 했”는데 좌망과 여러 도시에 있는 “내가 손을 댄 건물”을 보니 존재감을 느낀다고 했다. 어떤 존재론적인 사고를 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이를 도입부에 위치함으로써 정서적 분위기를 이루고 있다. 뒤이어 ‘바다마을 좌망’에 대한 묘사가 있다. 이 마을은 “모여있는 것이 아니라 휘여진 해안을 따라서 주택들이 산비탈에 제멋대로 앉아있”다. 모여있어서 둥그런 모양이 아니라 해안을 따라서 형성된 마을이기 때문에 기형적이다. 첫 시작에 나는 샐러리맨에 가까운 평범한 생활을 하는 청년, 그래서 ‘월요병’이 있는 청년이지만 이 이야기는 뒤에 가서는 결코 ‘나’처럼 평범하지 않다는 것을 암시한다. 로신의 소설에는 S성S城이 등장한다. 이 S성은 로신의 고향 소흥绍兴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좌망은 현실에서 어디인가? “시내에서 동쪽으로 40키로메터 떨어진” 바다가 마을이라고 했으니 중국의 청도와 같은 어느 해안도시인가? 아니면 한국 동해안의 어느 해안마을인가? 모티브는 현실에서 가져왔겠지만 중국이나 한국이나 어디에도 좌망이라는 마을은 찾아볼 수 없었다. 그렇다면 좌망은 분명 허구적인 장소다.  김승옥의 에서 무진은 현실의 공간 서울과 대립되는 허구의 공간이다. 무진은 분명 주인공이 머무를 수 있는 도시지만 허구다. 주인공은 거기서 불륜도 저지르는 몽환적인 행위를 한다. 욕망을 실현하는, 현실(서울)에서는 불가능한 행위를 하는 공간이다.  이 작품에서의 좌망도 그러한 곳으로 보인다. ‘나’의 “작업실이자 거주공간인 집”은 현실의 공간이라고 할 수 있다. “웅이네와 나는 같은 동네에서 살고 있”다고는 했지만 ‘나’의 집이 더 이상 현실적일 수 없기 때문에 그러하다. 물론 이 작품에서는 에서처럼 두 대립되는 공간을 강조하지는 않았다. 좌망에 치중점을 두었다. 좌망은 ‘내’가 욕망을 하는 공간이다. 마지막에 ‘나’는 카메라 주인 ‘녀인’과 좌망 바다가 좌망커피숍에서 만나 이야기를 마무리한다. ‘녀인’은 나에게 그에 관한 소문을 믿느냐고 질문하면서 “편견과 맞서는 데는 오만 뿐만이 아니겠지요? 단순하게, 아주 단순하게 타인의 시선에서 멀어져서 나를 잊으면서 살 수 없을가요?”라면서 중얼거린다. ‘시내에서 동쪽으로 40키로메터 떨어진’ 마을에 사는 리유를 설명하는듯하다. 소문은 전부 다 사실이 아니며 자신은 빛, 그러니까 보다 편안하게 살 수 있기 위해 이 공간에 와있다는 말인 것 같다. 이를 ‘나’는 좌망坐忘하고 있을 따름이다. 슬라보예 지젝(Slavoj zizek)은 진리는 저쪽에 있다고 한다. 그래서 앉아서 욕망의 대상을 보고만 있는 것일가? ‘녀인’은 존 밴빌의 《바다》를 보고 있었다. 그리고 메모지에 무엇인가를 적었다. 《바다》는 안해를 잃은 주인공이 예전의 로맨스로 려행을 떠나는 내용이다. 그렇다면 카메라 속의 남자는 진정으로 전남편이였던 것일가? 이 전남편은 그 “탐오혐의로 조사받고 있는 고위층 관리”였을가? 그래서 메모에 “그는 / 철창 밖, 그 어두운 방에서 숨을 고른다”고 했던 것일가? 그가 ‘철창 밖’에 있다면 ‘녀인’은 철창 안에 있다는 얘기가 된다. 어떤 도착증 증세도 보이고 있다. 그래서 ‘바다’를 ‘어두운 방’이라고도 한 것이다.   6. 나가며  이 작품은 결국 따지고 보면 산업화와 시장경제가 고도로 발달한 오늘날의 현실사회에서 일상생활을 연명해나가는 우리의 자화상이다. 평범해보이는 일상생활 속에서 우리는 누구나 다 욕망이 있다. 이 욕망은 에로틱한 것일 수도 있고 다른 어떤 것일 수도 있다. 이 욕망은 전자기기들에 로출이 되여 간접화되고 있다. 이러한 욕망들은 평범한 욕망이란 없다. 다 특별하고 싶다. 전자기기를 통한 욕망이 더욱 그러하다. 그러나 나중에는 이러한 욕망이 헛된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되고 결코 특별하지 않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그래서 허무감을 느끼게 되며 실존의 문제에 대해 사고하게 된다. 이러한 느낌과 생각이 문학으로 승화된다.  이러한 문제들을 좀더 깊게 들어가고 심각하게 다루었더라면 어땠을가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출처:2018 제6호
정주와 떠돔을 소멸시키는 여섯개의 편린들 김홍월   1. 삶과 존재의 본질 정주定住와 떠돔에 갈 수조차 없음을 일깨우는 박초란의 여섯개의 소설들은 각자의 밀당이 많았다. 정주와 떠돔을 줄다리기시키며 끝없이 밀고 당겨 끝내 소멸시키는 과정, 다시 말하면 정주와 떠돔 사이의 끈을 팽팽히 당겼다가 끝내 끊어버리는 과정을 겪을 수 있다. 정주와 떠돔 어느 쪽에도 안착할 수 없는 것이 인간의 비극이고 또한 삶과 존재의 본질이다. 정주와 떠돔 어느 쪽에도 긍정성만 있는 것이 아니라 부정성도 함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정주와 떠돔 사이의 문제 속에서 항상 헤매고 있다. 이러한 삶과 존재의 본질을 박초란은 , , , , , 을 통해 전하고 있다. 이 여섯개의 소설에서는 정착의 긍정적인 면과 부정적인 면은 물론 떠남의 긍정적인 면과 부정적인 면까지를 모두 보여주고 있다.    2. ,  존재하지 않는 욕망의 끝 사물에 구속되지 않고 자연에 맡겨둔다는 뜻으로 아버지는 ‘재유在宥’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 재유는 《장자庄子》에서 따온 것인데 아버지가 아들에 대한 교육방침이기도 하다. 재유는 한국 류학을 갔다 와서 북경에 자리를 잡게 된다. 그런 그가 몸이 아프다는 어머니의 소식으로 고향에 오게 된다. 서른이 되기 전 결혼을 하기로 마음먹은 재유는 별로 련락이 없었던 고향 동창 김인후의 생일 초대에 선뜻 대답을 한다. 김인후의 안해 서해영의 친구인 묘와 재유는 그렇게 만났다. 묘는 성이 장씨이고 이름이 미묘연인데 사람들은 그를 고양이 ‘묘’라고 부른다. 한국에서 류학을 마치고 귀국한 재유와 달리 묘는 한국으로 류학을 갈가 망설이는 중이다. 고향에서 중학교 교사로 근무하고 있는 묘는 더 큰 세상을 떠돌고 싶어한다. 한국에 머물고 있는, 하지만 이미 마음이 떠나버린 남자친구를 찾아가고 싶어하는지도 모른다. 재유와 묘는 고향을 벗어나도 고향이 그리워지고 고향에 와도 고향을 벗어나고 싶어지는 사람을 각자 대표하는 것이다.  재유와 묘는 김인후의 집에서 나와 사우나로 향한다. 사우나에서 재유는 이름도 나이도 배경도 모르는 묘에게 갑자기 키스를 하고는 “내가 널 책임질게. 우리 결혼하자.”고 한다. 그리고 원한다면 북경에서 집도 장만해주겠다고 한다. 묘는 그런 재유의 행위에 어이없어한다. 다음날, 묘가 깨여나 휴대폰을 보니 둘이 키스한 장면을 찍어 누가 위챗에 올린 것을 발견한다. 그렇게 둘은 사우나에서 헤여지고 묘는 련락이 두절된다. 묘에 대해서 일말의 료해도 없는 재유가 묘에 대한 급격한 태도는 자칫 개연성이 떨어져보일 수 있다. 사실 재유는 나비가 꿈을 꿔서 장자가 되였듯이 고향을 떠나있다 보니 고향이 무조건적으로 좋아져서 고향의 묘에게 느닷없이 청혼한 것이다. 고향에 돌아온 재유가 고향을 떠나고저 하는 묘를 희구하는 것은 장자가 꿈에 나비가 되였다가 나비가 꿈을 꿔서 다시 장자가 되는 것과 같다.    “지하철 안에는 이미 콩나물시루 같이 사람들로 꽉 찼는데 자꾸만 사람들을 밀어넣는 거야. 꽉꽉 더 차야 출발할 수가 있다는듯이… 너무 덥고 숨까지 막혀. 깨고 보니 꿈이였는데 너무 더운 거야. 아버지가 그래도 오랜만에 온 아들이 추워할가봐 아궁이에 장작을 많이 밀어넣은 거지…”   재유는 고향에서 자신이 북경의 지하철 안에 있는 꿈을 꾼다. 깨여보니 아버지가 불 땐 뜨거운 방에 누워있었다. 이는 대체 자신이 꿈속에서 북경에 있는 것인지, 북경에서 고향의 불 때는 방을 그리워하는 것인지, 마치 장자가 나비인지 장자인지를 구분할 수 없는 것처럼 재유는 정체성을 잃은 것처럼 보인다. 장자가 나비인지 장자인지 정체성을 잃은 것처럼 재유는 자신이 찾아헤맨 대상이 고향을 상징하는지 타지를 상징하는지 알 수 없게 되였다. 즉 추구하는 바가 무엇이며 자기 정체가 무엇인지를 잃어버린 것이다.  두터운 책 속의 삽화 하나가 떠올려졌다. 나비꿈을 꾸는 장자의 삽화. 나비꿈을 꾸고 있는 장자의 침대나 나무밑둥이나 그늘 속에 혹은 동자 하나가 꾸벅꾸벅 졸고 있는 차를 끓이는 화로 뒤쪽 어딘가 보이지 않는 곳에 고양이 한마리가 숨어서 하품을 하다 늘어지게 잠을 자고 있을 것만 같았다. 삽화 속 어디에도 없는 고양이 한마리를 재유는 정말이지 너무 찾아내고만 싶었다. 그 때 재유는 왜 하필 고양이였는지, 왜 보이지도 않는 고양이를 찾고 싶었는지를 알지를 못했다. 뒤이어 재유의 휴대폰으로 끝없이 이어진 위챗 알림소리가 사정없이 울리기 시작했다.   재유는 아무리 ‘고양이’를 찾고 싶었으나 고양이는 어디에도 없었다. 묘, 다시 말해서 욕망의 끝은 장자의 꿈과 같이 우리의 인생 어디에도 없는 것이다. 이는 어디에도 결혼으로 상징되는 행복, 욕망의 끝은 없다는 것이다. 고양이를 찾는 재유에게 련락이 한꺼번에 오는 것은 자기를 찾는 정체성에 대한 질문이 한꺼번에 쏟아지는데 더 이상 아무 대답도 할 수 없는 상태가 되였다는 의미이다.    3. ,  이방인이 아닌 토착민 ‘나’는 서른여섯의 나이에 퇴직을 하고 유명한 출판사 편집 직을 사직한 ‘그녀’와 북경 교외에 나와서 살아가고 있다. 그런 ‘그녀’가 갑자기 말도 없이 사라진다. ‘나’는 ‘그녀’가 좋아하는 배낭을 메고 배낭려행을 떠나기 시작한다.   나는 이 동네에서는 제일 근사해보이는 호텔 입구에서 민박집 따거가 와서 나를 데려가기를 기다린다. 나는 누군가를 기다리고 서있는 시간들이 싫다. 아니, 불안하다. 그녀가 내 어린 시절을 비난했던 것도 그 때문이였다. 어릴 때 사랑을 못 받고 자라서…   ‘나’는 어릴 적 상처로 누군가를 잃어버리거나 누군가를 기다리며 그리워하는 것에 상처를 입고 불안한 사람이라는 것을 드러낸다. ‘나’는 가족과 함께하듯 사람들과 따뜻하게 함께할 수 없다는 어릴 적 상처로 인해 사람이 그립지 않은 것처럼 교외로 가기도 하며 외롭게 살아가려고 한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상처 때문에 만든 거짓 자신이였다는 것이 드러난다.    젊은이와 아이들은 보기가 힘들었고 양지바른 곳에는 로인들이 몇몇이 앉아서 지나가고 있는 나를 신기한듯 쳐다보았다. 간혹 뭐 하러 온 거냐고 먼저 물어오는 로인네들도 있긴 했다. 꽤 유명한 려행지인 수장성과 가까워질수록 사람들은 낯선 사람들에 알은 척도 하지 않았다.   사람은 겉으로는 낯선 사람을 두려워한다. 그러나 마음속으로는 누구나 사람을 그리워한다. ‘나’가 그러했던 것처럼. 그리고 사람이 낯선 사람을 경계한다면 사람은 더더욱 사람을 그리워할 것이다. 따라서 ‘나’는 교외의 산골 마을에서 조용히 살아가려고 하였으나 사실 마음 깊은 곳의 진짜 자신은 보통사람들처럼 사람을 그리워하고 있다.    문득 나는 내 삶에서 모든 것이 빠져나간 뒤에 결국은 사람이 남는다는 걸 깨달았다. 그동안 대도시의 인파 속에서 정작은 사람이 그리웠다는 걸 알았다. (…중략…) 이제 돌아가면 그녀를 위해서 무화과나무 한그루를 심으리라 마음먹었다. 그녀가 좋아하는 무화과가 주렁주렁 열리도록. 꽃이 피지 않는 과실이라고 해서 무화과라고 하나 실제는 과실 안에서 꽃이 핀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어졌다.   ‘그녀’가 떠나간 후 사람과 함께하는 것이 완전히 끝났다고 생각되는 순간에도, 새 가족을 꾸렸던 어머니까지도 ‘그녀’와 함께 돌아오듯이 사람과 사람 사이는 쉽게 갈라지지 않고 끈끈하게 이어져있는 것이다. ‘나’는 자신이 무화과 같은 꽃이 없는 이방인인 줄 알았는데 무화과를 좋아하는 ‘그녀’를 통해 알고 보니 무화과에는 열매가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열매는 맛있었다. 즉 자신은 차거운 이방인이 아니라 열매가 있는 따뜻한 사람인 것이였다. 그런 점에서 ‘나’는 다시 어머니 그리고 ‘그녀’를 받아들일 수 있게 되였다.    4. ,  의미 있음의 의미 없음 누군가의 분주함이 좋다. 수저와 그릇, 컵을 정연하게 격식 대로 차려놓고 차 한잔을 따라주는 그런 잘 짜여진 서비스에 익숙한 몸짓마저도. 결국 깨닫게 된 건 그런 와중에 나는 내가 살아있다는 것을 생생히 느끼고 있다는 점이다. 누군가의 움직임, 그래서 서로가 영향을 주고 서로가 긴밀히 련결되여있는 것일지도…   낯설지 않은 사거리동네에 있는 모임장소에 도착한 ‘나’는 바쁘게 움직이는 누군가를 보고 있는 것을 즐겁게 여기고 있다. 자신이 살아있다는 것을 생생히 느끼게 해주기 때문이다. 그런 모임에서 누군가가 남경대학살 때 조선인들이 앞장서서 살육을 했다는 화제를 던지고는 토론을 벌인다. 한 사학자가 그것은 포털사이트에 떠도는 근거 없는 류언비어라고 주장한다.  모든 사건은 련결된다. 그 먼 남경대학살과도 우리는 모두 관계된다. 지금은 풍요로운 시대라 관계 없어보여도 학살의 끔찍한 진실과 현재의 삶은 관련이 있고 우리는 그 관련 만큼 책임을 갖는다. 그 관련, 관계에 대한 인식이 있을 때 진짜 살아있는 삶이 되는 것이다.  ‘나’는 북경에서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동업자이자 남자친구인 율과 창평昌平구의 사거리동네에서 서점을 오픈한다. 창평구에 있는 친구인 한과 ‘나’는 서점 근처에 위치한 초향로草香芦 가게에 들린다. 워낙 념주를 좋아하는 한은 평소에도 한두개를 꼭 몸에 하고 다녔다. 한의 손목에 금강보리념주가 감겨져있는 것을 보고 가게 주인은 “아무리 좋은 것이라도 하나일 때가 더 좋은듯해서요. 좋은 것도 너무 많으면 소중하지가 않거든요…”라고 한다. 이것은 가게주인의 입을 빌어 우리들의, 현대인들의 보편적인 생각의 틀을 보여준 것이다. 즉 지금의 행복이 너무 과해지면 그것은 남경대학살과 같은 불행하고 어두운 삶의 면을 잊게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셋의 인연은 시작된다.    우리는 정신적인 것들이 물질적인 것보다 더욱 위대하고 중요하다고 믿고 있는 부류에 속했다. 아직까지 한번도 처절한 가난도 굶주림도 전쟁의 상처나 느닷없이 찾아든 불행 따위를 겪어보지 못했다. 의미 있음의 의미 없음에 대해서도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다. 의미 없음의 의미 있음을 알지 못했던 것처럼.   의미만 쫓는 것은 허무한 탁상공론과 같다. 삶은 의미와 실천이 병행될 때, 정신적인 것과 물질적인 것이 잘 호응할 때 가치를 지닌다. 정신적인 것만 따지는 것은 의미 있음의 의미 없음과 같다는 것이다.  한편, 율은 출장 간다는 핑게로 ‘나’의 돈을 빼서 달아난다. 이십대 대부분을 들여 모은 돈도 그리고 사랑이라고 믿고 있었던 것도 한순간에 사라진다. 서점을 정리하고 집에만 숨어있는 ‘나’에게 초향로 주인은 수제향을 만드는 일을 가르쳐준다. ‘나’는 그녀를 따라 향을 만들고 향기를 맡는 과정에서 점차적으로 심적 안정감을 되찾기 시작한다. 그렇게 보내고 있던 어느 날 갑자기 한이 남경대학살에 관한 얘기를 꺼낸다.    “누군가의 롱간일 수도 있어.” 그녀였다. 잠자코 듣고 있던 그녀가 입을 열었다. 나는 그런 그녀가 고마웠다. “혹여 그렇다 하더라도 쟤 잘못은 아닌 거잖아.” 그녀가 아까부터 걸고 있던 향낭을 걸며 한마디 더 붙였다.   이 같은 생각은 현재의 물질적 풍요에 만족해서 과거의 아픔, 즉 그 아픔의 실제를 잊어버리는 것과 같다. 즉 ‘쟤 잘못은 아닌 거잖아’ 하면 과거와의 관련을 외면하는 편의주의로서 ‘우리의 잘못은 아니다’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당장의 윤택한 시대와는 별 상관 없어보인다는 리유로 남경대학살을 구체적으로 살피지 않고 편리하게 있을 수도 없을 수도 있는 흐릿한 과거로 치부하면 과거의 아픈 력사라는 실제를 버리는 것과 같다. 실제를 외면하는 정신적 편의주의 사고에 대한 비판인 것이다. ‘쟤 잘못은 아닌 거잖아’는 과거를 잊어버리는 태도에 해당한다. 따라서 ‘나’가 향을 맡고 있는 것은 향을 맡으면서 율이 떠난 것을 정신적으로 잊어버리기 때문이다. 즉 율의 실제 일을 잊어버리는 것이다. ‘나’가 향을 피우며 향에 취해서 실제 사건을 잊어버리는 것은 실제 사건에서 정신적으로 도피하는 행위이다.  향은 보이지 않는 것이고 날아가버리는 것이기에 안온한 정신에 대한 상징이고 벽은 존재하는 것이기에 어두운 실제를 상징한다. 어떤 문제 앞에서 벽은 현실적인 문제에 해당하고 향은 정신적인 도피에 해당한다. 남경대학살이라는 실제 사건 그리고 율이 돈을 훔치고 도망간 실제 사건을 두고 우리는 ‘쟤 잘못은 아닌 거잖아’라고 하거나 향을 피우며 잊어버리는 행위를 한다. 이것은 정신적인 것만 따지는 것이다. 즉 의미 있음의 의미 없음이다.   5. ,  락원의 불가능성 은 왕건의 아버지가 일하다 죽었던 것처럼 죽어서도 ‘일’을 해야 한다는 우리 삶의 비극이 잘 나타나는 소설이다. 어릴 적 왕건은 시골을 떠나려면 대학에 가야 한다는 것을 알고 열심히 공부를 한다. 그는 원하던 대학에 붙었고 조부모님과 부모님은 모든 저축을 학비로 보낸다. 왕건의 대학 뒤바라지를 위해서 부모님은 집을 팔았고 아버지는 곧바로 한국으로 나가서 일을 한다. 왕건이 대학을 졸업할 즈음 할아버지는 세상을 떠났고 왕건이 대학원을 마친 그 다음해 아버지는 출근하던 길에서 쓰러져 다시는 일어나지 못했다. 왕건이 취직을 해서 겨우 북경에서 안정될 만할 때 할머니도 세상을 떠났다. 어머니는 한국으로 갔고 왕건이 결혼을 하면서 집을 살 때 어머니의 도움이 컸다.  이렇듯 왕건은 ‘떠남’의 련쇄로 나은 삶을 찾았지만 돈에 허덕이지 않는 삶과 행복은 없었다. 태여난 지 얼마 되지 않은 딸을 위해 수입이 안해보다 적은 왕건은 직장을 그만둔다. 대도시에서 돈 버는 일도 아이 키우는 일도 어느 하나 쉬운 것이 없다. 게다가 딸 지운은 아토피를 앓고 있었다. 바다와 가까운 산골동네에서 농장을 경영하고 있는 다형이 생각이 난 왕건은 지운을 데리고 찾아가본다.   다형의 농장은 웅기중기 들어선 산 밑에 있었는데 아득하니 넓었다. 낮다란 블루베리나무들이 줄지어 서있었다. “가서 맘껏 따먹으렴.” 다형이 나무 밑에 지운을 내려놓았다. 산자락 아래로 멀리 잔잔한 바다가 바라보였다. 구수하게 몸안 깊숙이 파고드는 흙냄새, 모든 게 싱그러웠다. 지운은 벌써 몇개째 블루베리를 따먹었는지 손바닥까지 보라빛이다. 한가롭게 그냥 나무그늘 밑에서 누워자고만 싶은 오월의 끝자락이였다. 다형과 나란히 블루베리나무 밑에 앉았다. 블루베리밭 아래로 비닐하우스가 일여덟개 이어져있었고 거기엔 겨울채소와 딸기를 심는다고 했다. (…중략…) “초창기라서 수입은 적지만 이제 다음해부터는 블루베리도 대량으로 판매하게 되면 수입도 꽤 될걸세. 자신이 하고 싶은 생활을 하면서 돈걱정 없이 살 수가 있다는 게 참 행복이지 않겠니?”    농장은 다형네 부부 뿐 아니라 화가부부도 함께 경영하고 있었다. 왕건은 딸이 화가부부의 쌍둥이 아들과 블루베리농장에서 뛰여다니는 모습을 보고 흐뭇해한다. 그리고 자신의 가족에게 가장 어울리는 곳을 찾은 거라고 확신한다. 왕건과 안해 해도는 북경의 집을 팔고 시내 변두리의 자그마한 아빠트를 사고는 아주 간추린 살림으로 농장에 입주한다. 그리고 남은 90만원에서 50만원을 떼여 농장의 투자로 다형에게 건넨다. 그들은 농장에서 ‘행복한’ 생활을 하는듯하였다. 하지만 농장의 어려운 사정이 이내 드러난다. 농장 경영을 반대했던 다형의 안해는 남편이 모든 재산을 농장에 넣는다는 것을 계기로 다형에게 리혼을 요구한다. 화가부부는 2년 뼈빠지게 일을 했건만 투자한 돈은 한푼도 받지 못했거니와 일한 보수도 받지 못하였다. 그들은 쌍둥이 아들을 학교에 보낼 형편도 안된다. 이처럼 시골에서조차 돈문제에 허덕이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은 어디에도 돈에 허덕이는 삶을 피할 락원은 없다는 것을 드러낸다. 왕건이 대학을 다닐 때도, 대학원을 마칠 때도, 직장을 얻었을 때도 행복이 없었던 것처럼. “엄마, 민수오빠한테 나 시집갈 거야!” 지운은 쌍둥이들과 잘 어울려 다녔다. 민수는 쌍둥이 형제 중 형이였다. 동생은 민석이였다. “왜 민수오빠야?” 해도가 목욕수건으로 아이의 몸을 닦아주다가 물었다. “민수오빠 멋있어.” “그래? 민수랑 민석이랑 똑같이 생겼잖아. 그럼 민석오빠도 멋있지.” “아냐, 민수오빠가 더 멋있어.” “뭐가?” “음… 민수오빠가 수제비 날리는 거 더 멋있어요.”   아이들은 돈 문제에 허덕이거나 돈에 욕심을 갖지 않고 순수하게 수제비 잘 던지는 것을 좋아하고 관심을 갖는다. 수제비는 순수한 어린 시절 그리고 그 어린 시절의 순수한 욕망에 대한 상징인 것이다. 그런 순수한 아이들이 어둠이 옅게 깔릴 때까지 바다가에서 놀던 중, 민수는 보이지 않는다. 아이가 죽은 것은 어디에도 없는 ‘락원’을 찾느라 그리고 돈 문제에 허덕이느라 아이로 상징되는 ‘미래’를 우리 사회가 놓친다는 의미이다.    6. ,  찾게 된 욕망의 근원 청도에서 광주로 광주에서 심수로 옮겨다니는 ‘나’는 여기저기 직장을 기웃거리며 저축 같은 것 해본 적이 없고 늘 돈이 모자라는 삶을 살아가고 있다. 카드빚을 갚아달라고 언니에게 몇번 도움을 청하나 언니마저 련락을 끊어버린다. 그런 ‘나’를 북경으로 부른 건 중학교 동창 신희이다. ‘나’는 시내에서 멀리 떨어진 지저분한 동네에서 사는 조촐한 옷차림의 신희를 못마땅해한다. 하지만 그녀의 적금통장을 보았을 때에 ‘나’는 신희가 결코 궁색하지도 결핍하지도 않다는 것을 확신한다.   내게 빡빡한 이 세상을 신희는 즐기면서 살고 있듯했다. 여기저기 떠돌아다니면서 마음 붙이지 못하고 살아온 나와는 완연 다른 삶의 자세였다. 내가 그동안 무엇을 놓치고 있었는지 그 순간 분명하게 알게 되였다. 나는 다른 사람들을 탓하고 이 불공평한 세상과 운명을 탓하느라 온 기운을 모조리 소모해왔다는 걸.   세상이 뒤틀려있고 불공평해보이지만 우리는 그 세상에서 벗어날 수도 없고 또한 똑 부러진 신희가 의외로 술만 마시면 짐승이 되여버리는 전남편과 다시 함께 살아갈 수도 있는 것이 바로 그 ‘세상’이다. ‘나’가 명품을 쫓으며 ‘불공평한 세상과 운명을 탓하느라’ 기운을 소모한 것은 어릴 적 상처와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다섯살 때, 어머니는 일년 월급보다 훨씬 많은 돈으로 ‘나’에게 피아노를 사주었고 집안의 수입 대부분은 피아노 레슨비로 들어갔다. 한겨울에도 어머니는 ‘나’를 데리고 피아노 레슨을 받으러 다녔다. 눈이 많이 내리던 날, 어머니와 함께 레슨을 받고 귀가하는 길에 ‘나’는 눈구덩이에 빠진다. 어머니는 주저없이 눈구덩이 안으로 뛰여들고 ‘나’를 올려보내고는 사람들을 데려오라고 한다. 어머니가 아래서 손을 저으며 ‘나’에게 지은 웃음이 마지막 웃음이였다. 그 후 아버지는 피아노를 불살라버리고 ‘나’와의 대면도 대화도 회피한다. ‘나’가 사치를 부리는 것은 아버지에게 사랑받지 못한 것, 피아노가 불타버린 것에 대한 대리만족일 수도 있다. 하지만 아버지는 사실, ‘나’가 미운 것이 아니라 단지 죽은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과 아픔이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따라서 ‘나’가 사치를 부리는 대리만족은 아버지에 대한 원망이 리해로 바뀔 때, 어릴 적 욕망의 대상이였던 피아노를 다시 찾게 될 때 진정으로 해결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이러한 해결을 하려는지 ‘나’는 어릴적 상처가 되였던 불타버린 피아노를 대체해 고급 피아노를 산다. 즉 어릴적 상처의 중심, 그 피아노에 다시 접근한 것이다.    호흡을 다잡고 피아노를 치기 시작했다. 달빛을 타고 선률이 흐른다. 애잔한 음들이 어둠을 간지럽힌다. 이제 고조로 치닫기 시작한다. 눈먼 소녀가 달빛 아래서 춤을 춘다. 눈물이 나올 것 같은데 어느새 나는 웃고 있었다. 손가락 끝마다 뼈에 사무치는 행복이 부딪쳐서 찡찡 맞혀온다. 그리고 춥다. 그 때였다. 창문이 탁 열려젖혀지는 소리가 나더니 머리 꼭대기에서 웬 사내의 술 취한듯한 거친 욕설이 우박처럼 투두둑 하고 피아노 우로 내 정수리로 쏟아져내렸다. “몇시야! 잠이나 퍼질러 자자. 좀! 할 지랄이 없어? 미친 년!” 거의 동시에 창문을 걷어닫는 소리도 여기저기서 텅텅 울렸다. 나는 미친듯이 정말이지 달빛 아래서 춤이라도 추어대고 싶어졌다.   어쩌면 ‘나’는 신희가 전남편을 리해하고 다시 만나듯 아버지를 다시 생각하고 원망스런 세상을 리해하고 받아들인다는 의미로 생각해볼 수 있을 것이다. 신희의 소개로 아르바이트로 피아노를 친 적이 있지만 오로지 자신을 위하여 친 것이 아니다. 더 이상 타인이 아닌 오로지 ‘나’를 위해서 타인의 손가락질까지 받아가며 이루는 연주, 그것은 진정한 ‘나’의 욕망이다.    7. ,  ‘기다’와 ‘이게 아니다’ 사이에서  은 이기다라는 도시에서 네티와 네티가 처음 만나는 데서부터 시작된다.   “어떻게 된 거지?” 네티는 자신의 팔다리를 차례로 쓰다듬어보고 배와 가슴께를 쓸어본다. 그러다가 생각난듯 꽉 닫힌 창문을 들여다보았다. “앗!” 네티는 가볍게 비명소리를 냈다. (…중략…) 네티가 자그마한 소리로 불렀다. “네티!” 꼬마 네티가 그 부름소리에 화답이라도 하듯 잠결에 샐쭉 웃었다. 티없이 맑은 이슬 같은 얼굴이였다. 네티는 꼬마 네티를 이슬이라고 부르고 싶다는 충동을 그 순간 느꼈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 네티의 입가에도 웃음이 상현달 같이 걸렸다. 그것이 네티와 네티의 첫 만남이였다.   이기다에서는 영아가 어머니를 필요치 않는다. 다시 태여남으로써 자신이 원하는 삶을 다시 한번 살 수 있다. 모두가 그렇게 새로 태여난다. 이기다는 그런 도시이고 이기다는 모든 불만이, 모든 결함이 만족스럽게 변할 수 있는 희망의 자궁이다. 이기다의 네티는 이기다의 다른 주민들과 마찬가지로 이미 스물일곱번째의 네티로 거듭나고 있다. 하지만 스물일곱번째 네티와 스물여덟번째 네티의 만남은 전에는 한번도 없던 일이다. 안교수가 이기다의 모든 사람들 중 유일하게 자궁을 가지고 있는 네티를 인간의 유일한 희망이라고 여기고 아이 네티를 잉태시킨 것이다. ‘네티’는 벗겨없애는 과정을 통해서 본질에 도달할 때까지는 ‘이게 아니다’라는 뜻이다. 안교수는 2천년 전 생명과학원의 교수였고 한 녀자의 남편이였다. 11년간 아이를 가지기 위한 노력을 하였으나 안해의 자궁은 아이를 잉태하기를 거부했다. 몸도 정신도 힘들어가는 안해는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안해의 이름은 ‘기다’였다.  안해는 ‘기다’이고 네티는 ‘이게 아니다’이다, 안해는 현실의 보통 사람이고 네티는 리상적으로 만든 존재이다. 불완전하지만 실제 우리의 삶은 ‘기다’, 즉 ‘맞다’라는 수긍의 삶이고 ‘이게 아니다’라는 것처럼 모든 것을 부정하는 것, 그 부정하는 것을 리상적인 삶이라고 생각한다. 리상적인 삶, 즉 ‘이게 아니다’라는 네티를 이기다에서 만들어냈다. 네티는 양파 같이 계속 벗겨도 새로운 것이 나오는 ‘이게 아니다’이다.   “한겹한겹 다 벗겨내고 나니 마지막에 이게 남았어. 네티도 이렇겠지?” 나는 엄마의 텅 빈 손바닥을 들여다본다. 엄마는 거기 소중한 것이 담겨져있기라도 하듯 두 손바닥으로 떠안고 있다. “이걸 기억해야 돼. 언젠가 너도 양파처럼.” 엄마가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엄마의 눈동자 안에서 양파 하나를 보았다. 알 수 없는 분노가 치밀었고 내가 엄마에게 쏘아붙였다. “싫어. 나는 양파가 아니란 말이야!”   양파는 이것이 양파다 혹은 어떠한 성질을 가지고 있다고 말하는 순간 한껍질 더 벗기면 그게 아닌 것이 된다. 이거다고 하면 한껍질 더 벗기면 이게 아니다가 되여버린다. 그런 련속적인 부정의 의미로 네티가 ‘이게 아니다’라는 뜻이 되여있는 것이다.  이처럼 뭐든지 무조건 긍정하지 말고 비판적으로 사고해야 한다는 것을 드러낸다. 그것이 리상적인 삶이고 제대로 된 삶이다. 그리고 ‘기다’, 즉 무조건 맞다고 생각하고 무비판적으로 수긍만 하면 안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수긍해야 되는 것이 우리의 현실의 삶이고 수긍하고 싶지 않은 것이 우리의 리상적인 마음일 수 있다. 우리는 사실 수긍하고 싶지 않을 수도 있다. 현실을 수긍하고 싶지 않을 때 리상이 생긴다. 리상은 만족하지 않을 때 꿈꾸는 것이기 때문이다. 만족하는 삶은 수긍하는 삶이다. 따라서 ‘기다’, 즉 맞다라는 것은 수긍할 수 밖에 없는 현실의 삶을 뜻하고 ‘이게 아니다’는 수긍하지 않고 부정하는 리상의 삶을 뜻한다.  그래서 엄마 네티는 자신을 억압하는 안교수를 죽이게 된다. 네티라는 의미는 부정의 의미이다. 리상이라는 의미도 있지만 그 리상은 부정으로서의 리상이다. 현실을 수긍하지 않고 현실을 부정할 때 리상이 생기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로 작자는 네티라는 리상적 존재를 설정한 것이다. 네티의 본질은 부정이다. 그래서 자신을 속박하는 안교수를 부정해서 죽인다. 그리고 아이 네티는 그런 자신을 낳았던 엄마조차도 부정해서 죽인다. 부정의 련속인 것이다. 즉 리상적 세계는 부정의 련속이다는 의미이다.  수긍하는 삶, 혹은 수긍할 수 밖에 없는 삶이 현실이고 현실을 수긍할 수 없을 때 리상이 생긴다. 현실에 완전히 만족하면 리상은 생길 수 없다. 그런 의미에서 작자가 리상의 본질을 부정이라고 본 것이다. 그리고 양파처럼 까도 까도 계속 새롭게 갱신되는 부정만 해야 되는 부정의 련속, 그것이 리상의 본질이다.    8. 정주와 떠돔의 단면들 이처럼 여섯개의 소설은 모두 정주와 떠돔이라는 테마로 얽혀있다. 이들은 정주와 떠돔에 관한 주제로 여러 단면을 보여주었다. 정주와 떠돔 사이의 문제는 곧 삶과 존재의 본질이다. 정주의 부정성, 떠돔의 부정성이 인간의 비극이다. 또한 정주와 떠돔 어느 것에도 안착할 수 없는 것도 인간의 비극이다. 정리를 하자면 에서의 재유는 고향을 그리워하는 반면, 고향에 있는 묘는 타지로 떠나려고 한다. 즉 안에 있으면 밖이 그립고 밖에 있으면 안이 그립게 되는, 그러니까 인간의 마음은 계속 떠도는 것이고 인간은 정주하고 안착할 곳이 없다는 것을 드러낸 소설이다. 인간이 정주할 수 있는 욕망은 없고 정주할 수 있는 정체성도 없다. 사람의 욕망은 자꾸 바뀌기 때문이다. 재유는 고향이 그리워서 고향으로 왔는데 고향의 묘는 타지로 가고 싶어한다. 욕망이 정주하지 못하는 것이다.  혼자 외로이 부유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 사이에 정착하고 싶은 욕망을 드러낸 소설은 이다. ‘나’는 사람은 혼자라고 생각하다가 혼자가 아니라 사람과 함께 있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사람과 가족을 꾸려서 함께 살고 싶은 욕망이 생긴다. 처음에는 스스로 외면했을 뿐이며 이는 자기 방어적인 외곡이였다. 무화과나무는 꽃이 없는 나무이다. ‘나’는 무화과 같은 꽃이 없고 외로운 인생을 살 줄 알았는데 ‘그녀’를 통해서 무화과에는 열매가 있었다는 것을 발견한다. 그래서 무화과를 무조건 이방인의 성격으로 바라보지 않게 되고 자신도 더 이상 이방인이 아닌 정주하는 토착민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이처럼 에서는 사람 사이에 정착이라는 정주의 긍정성, 긍정적인 면을 보여준다. 정주의 긍정성은 떠돔의 부정성과도 같다.  반면, 정주의 량면성에서 부정성, 부정적인 면을 보여주는 소설은 이다. ‘벽’이라는 것은 실제 사건과 ‘나’ 사이를 가로막는 벽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니까 은 제목 자체에서 드러나듯이 향기만 맡고 살면 마치 아편에 취해 살듯이 실제 세계와 벽을 치고 살게 된다는 뜻에서 비롯된 것이다. 다시 말하면 향기는 정신적인 것에 취함, 벽은 실제 세계를 외면한다는 의미이다. 정신적인 것에 취하면 실제 세계를 외면하게 된다. 그래서 의미 있음의 의미 없음에 대한 비판이다. 즉 실제를 외면하는 정신적 편의주의 사고에 대한 비판이다. 정신적 편의주의, 거기에만 정주하는 것이다. 향기 같은 정신적인 것에만 정주하면 그것은 편의주의일 수 있다. 현실을 외면하고 당장의 편안함에만 향기에 취하듯 정착하고 있기에 이 소설은 안온한 정신에만 취한 부정적 정주를 보여주는 것이다.  에서 욕망은 정주하지 못하는 것을 표현하였다면 에서는 이 사회에 정주할 곳은 없다, 즉 떠돔의 련쇄성을 다루었다. 왕건은 시골에서도, 대학교와 대학원을 다닐 때도, 북경에서 직장을 얻었을 때도 행복을 느끼지 못하였다. 그런 그가 바다가에 있는 농장은 정주할 수 있는 아주 좋은 곳인 줄 알았는데 그 곳도 락원은 아니였다. 이렇듯 이 소설은 어디에도 우리가 정주할 곳은 없고 반복하는 떠돌이의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을 드러낸다. 에서는 테마가 두개다. 하나는 과소비이고 다른 하나는 떠돌이 삶이다. ‘나’는 결핍의 근원을 잃어버려 결핍의 본질을 몰라서 정주하지 못하고 부유하는 삶을 살게 된다. ‘나’가 결핍한 것은 어렸을 때의 트라우마 속에 나온다. 아버지가 피아노를 불태워버린 후, 아버지의 사랑 그리고 피아노의 꿈을 모두 잃어버렸다. ‘나’는 그 본질을 모른 채 상처를 회복하기 위해 과소비와 떠도는 삶으로 채우려고 한다. 이렇듯 이 소설은 정주하지 못하는 리유를 설명해나간다. 어릴 적 상처의 근원을 치료하지 않으면 밑 빠진 독에 물 붓기와 같은 삶을 살 수 밖에 없어서 우리는 영원히 독에 물을 채울 수 없고 따라서 영원히 정주할 수 없게 되는 것이다. 정주하지 못하는 리유는 진짜 ‘나’를 찾지 못해서 생겨난 것이다. 정주를 위한 진짜 방법은 결핍의 근원을 찾는 것이다. 진짜 욕망을 찾지 못하는 리유로 정주의 불가능성, 혹은 떠돔이 생겨난다. 에서는 ‘기다’, 즉 수긍이라는 정주와 ‘이게 아니다’, 즉 부정이라는 부유가 선명한 대비를 이룬다. 정주와 떠돔의 원론적 문제, 즉 인지의 기초 차원에서 정주와 떠돔을 설명한다.  무조건 정착이 좋거나 떠남이 좋은 것이 아니다. 우리의 삶과 존재의 본질은 정착과 떠남, ‘기다’와 ‘이게 아니다’ 사이의 문제 속에서 항상 헤매고 있는 것이다. 처럼 인간의 욕망의 끝은 보이지 않는 것, 즉 내면에서의 정주의 불가능성이 있고 처럼 이 사회에 정주할 곳은 어디에도 없다는 것, 즉 외면에서의 정주의 불가능성이 존재한다. 그리고 와 은 긍정적 정주와 부정적 정주를 보여주는데 또한 떠돔의 부정성과 떠돔의 긍정성에 해당되기도 한다. 에서는 정주를 위한 방법을 제시한다. 그리고 에서는 정주와 떠돔의 본질적 관계, 즉 정주와 떠돔 어디에도 갈 수 없는, 그래서 끝내 소멸시키는 과정을 극명하게 잘 보여준다.  출처:2018 제6호
72    <장백산> 2018.5 루계221 댓글:  조회:761  추천:0  2019-07-15
장백산 총221호 2018 제5호   권두칼럼 최홍일   위기에 처한 우리 문학   기획조명-작가와 작품 한영남   손톱(단편소설) 한영남   문학주름 만들기(작가노트) 우상렬   우리들의 일그러진 자화상- 리호원   병든 개의 교활한 문학(작가평)   기획련재 김혁     한락연평전(장편인물평전 련재11)   박초란소설코너 박초란   월광곡月光曲(단편소설)   계렬칼럼 김병민   대학정신과 교장 그리고 보직자들(칼럼) 김병민   학문은 인격으로 한다(칼럼) 김병민   교수는 먼저 한우물을 잘 파야 학문에서 대성한다(칼럼) 김병민   ‘인재쟁탈전’과 ‘양귀비꽃’(칼럼)   시인시전 심명주   탈춤(시 외7수) 미주     아방가르드한 시의 향연(시평)   창작마당 장학규   개미 투(단편소설) 김경화   알바트로스(중편소설) 전향미   뜻밖의 쪽지(단편소설) 김두필   꿈은 깨고 나니 또 ‘꿈’(수필) 송련희   라목(수필) 김정권   상처(시 외1수) 방태길   신선 같은 세월(시 외1수) 장향화   6월 련서(시 외2수)   8090문학코너 조은경   한낮의 맥노리(단편소설) 김화     다녀茶女(시 외2수)   문학과 비평 손경란   양치기 처녀와 양떼들의 풍경에 매혹된 령혼의 메아리(평론) 리해연   리상각,그는 누구인가(평론)   중국문학 김인순   고려와 나(단편소설/왕염려 옮김)   장편소설련재 김혁     무성시대(장편소설 련재5) 구호준   여백(장편소설 련재3)
71    리해연: 리상각, 그는 누구인가(평론) 댓글:  조회:478  추천:0  2019-07-15
리상각, 그는 누구인가 리해연     들어가는 말 리상각(李相珏 1936-2018)은 해방 후 중국조선족사회의 전개와 변화과정을 온몸으로 체험하고 그것을 작품으로 승화시키면서 각고의 노력으로 끊임없이 창작활동을 진행한 시인으로서 중국 조선족 시문학 발전에 큰 기여를 하였다. 뿐만 아니라 그는 30여년간 문학잡지 편집사업에 종사하면서 민족문학의 발전을 위해 청춘을 불태웠고 동시에 후대양성을 위한 사업에도 열정적으로 참여하였다. 근 반세기 동안 시인으로서, 문학잡지 편집일군으로서 많은 업적을 쌓아온 리상각시인은 2018년 8월 17일 생을 마감하였다.  본고는 리상각시인이 걸어왔던 발자취에 따라 그의 삶을 돌아보고 그 속에 내포된 시인의 인생과 문학에 대한 태도를 두루 살펴보는 데 목적을 두었다.    1. 후대양성과 민족문학의  발전을 위한 발걸음   리상각은 1936년 조선 강원도 양구 해안면 만대리(조선전쟁 전에는 북에 속했고 전쟁 후에는 분계선의 변동으로 남에 속하게 됨)에서 태여났다. 그의 아명은 리상봉으로 리백설이라는 필명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1938년, 세살 된 리상각은 부모님의 등에 업혀 두만강을 건넜고 중국 길림성 도문图们을 거쳐 흑룡강성 목단강 마도석磨刀石에 정착하였다. “만주에 가서 3년 동안 농사를 지어 부자가 되여 고향으로 돌아가자”던 리상각 일가의 꿈은 년년이 흉년이고 재난의 련속이라 환향은커녕 목숨을 부지하기도 어려웠다. 극심한 생활고로 리상각의 부모는 중쏘中苏변경인 부금현富锦县 대면성촌으로 거처를 옮겨야만 했고 친척 할머니들과 고모는 다시 강원도로 돌아갔다. 1945년 고향땅은 광복을 맞이하였으나 리상각 일가는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했고 혈육들과 영원히 생리별을 하였다.  리상각은 1943년 1월, 흑룡강성 부금현 대면성소학교에, 1949년 1월, 밀산密山중학교에 입학을 하였고 그 곳에서 스승 한창립선생님을 만나게 되였다. 어려서부터 아버지의 슬하에서 문학에 흥취를 가졌던 그는 스승의 지도하에 문학창작 능력을 제고할 수 있었는데 1950년 3월에는 그가 창작한 서사시 〈백설〉과 우화 〈메기와 붕어〉가 중학교 작문 1등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1951년 흑룡강성 상지尚志에 있는 사범학교에 입학한 그는 교내의 등사본 잡지인 《동학》의 주필을 담당하면서 잡지를 3기까지 출간했다. 어린 나이에 부모가 그립고 고향마을이 그리웠던 리상각은 편지를 써서 고향 친구들에게 띄우기도 했고 방학이면 집으로 돌아갈 차비가 없어 학교에 남아있으면서 도서관에서 문학서적을 빌려보기도 했다. 겨울방학 동안 50권의 문학서적을 읽을 정도로 문학에 흥취를 갖고 있던 그는 오래전부터 시인이 될 준비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졸업 후인 1954년 8월 리상각은 벌리현勃利县조선족중학교에서 교편을 잡기 시작했고 교육사업에 종사하면서도 창작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1956년에는 처녀작 시 〈아침〉을 《연변문예》에 발표하였고 1957년 7월에는 시 〈수수밭에서〉를 사천성의 《별星星诗刊》 잡지에 한문으로 발표하였다. 같은 해 8월 연변대학교 조문학부에 입학한 리상각은 시문학단체인 ‘시와 랑송’이라는 써클을 조직하였고 등사본 잡지인 《대학생》의 주필을 담당하면서 잡지를 출간했다.  1961년 대학교를 졸업한 뒤 리상각은 《연변문학》 월간지의 편집부에 취직하였고 1981년부터 16년 동안 《연변문학》의 총편집 직무를 맡게 되였으며 1996년에는 36년간의 근무생활을 끝마치고 정년퇴직을 하였다. 격변하는 시대 속에서도 문학에 대한 애착과 열정으로 들끓었던 리상각은 30여년을 하루와 같이 후대양성과 민족문학 발전을 위해 청춘을 불태웠다.   열정의 사나이였던 리상각은 깊은 산골과 농촌에서 농사일을 하면서 문학창작을 진행하던 작가들을 발굴하기 위해서 동분서주했다. 1962년 이른봄, 그는 시공부를 착실하게 하던 허흥식을 찾아 동불사향 영승촌으로 갔고 1963년에는 동요창작과 구전민요를 정리하던 나젊은 리룡득을 찾아 차조구로 갔으며 같은 해 겨울에는 한수동편집과 함께 몇십리의 눈길을 걷고 달려 숭선골안에 있는 차룡순을 찾아갔다. 그 외 연길현 태양공사 횡도대대에 살던 서광억, 연길현 팔도구 쌍봉촌의 김재권, 화룡 룡호촌의 정세봉 등 ‘숨어있는 별’들을 찾아 연변주 내 곳곳을 이리저리 뛰여다녔다. 그는 또 문학을 배우고저 하는 후대들을 위해 배움의 터전을 만들어주기도 했다. 1984년 5월, 《천지》 월간사에서 꾸린 문학창작 통신학부가 정식으로 개학을 맞이하였는데 리상각은 통신생들의 작품들을 《천지》와 《개간지》에 실어줄 것을 약속하면서 학생들의 문학열과 창작열을 북돋아주었다. 뿐만 아니라 중한 수교 이후 그는 한국의 학자, 시인들과 부지런히 교류하면서 중국 조선족 시문학의 발전을 위한 일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그는 한국의 저명한 문학평론가이며 마광수의 지도교수인 연세대학교 신동욱교수와 한국의 저명한 시인 황송문선생을 연변대학교에 초청하여 특강을 조직하는 등 문학도들에게 학술적 시야와 사유체계를 넓힐 수 있는 기회를 창조해주기도 했다.  리상각은 문학잡지사에 편집으로 배치를 받으면서부터 민간문학 수집 활동에 나섰다. 그는 조선족 민간문예 수집조 성원으로 있으면서 9개월 동안 발품을 팔아 민족민간문예 자료들을 수집, 정리하였다. 그는1980년에 《중국조선족구전민요집》을 출간(1995년에는 한국에서 재판)하였고 2000년에는 《북간도유머집》을 출간했으며 2007년에는 《조선족문단리면록》을 《연변문학》에 련재하였다. 뿐만 아니라 ‘민생단사건’에 대한 자료를 수집, 정리한 기초에서 그것을 작품화하여 2011년부터 2013년까지 잡지 《문학사계》(한국, 제38호부터 48호)에 《동만혈전비사东满血战秘史》를 련재하기도 했다. 력사적 사실로 인정된 사건임에도 불구하고 많은 작가와 시인들이 과감히 언급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리상각은 오랜 시간 동안 끈질긴 노력과 용기로 그것을 작품으로 승화시켰다.   리상각은 또 전통시조의 창작기법을 준수하는 기초상에서 현대시조를 창작할 것을 고수하면서 시인들을 동원하여 시조 창작에 열을 올렸다. 1989년 8월 15일, 한국 《시조생활》잡지사의 사장과 발행인 류성규박사가 연길을 찾아 《천지》 월간사와 결연을 맺었고 연변에서는 한국의 시조와 론문을 소개하였으며 시조 창작에 궐기하기 위해 몇차례에 걸쳐 시조묶음을 편찬하였다. 1990년부터 《도라지》와 《천지》는 서로 협력하면서 잡지에 시조를 대량적으로 실어내기 시작했다. 시조창작열이 고도로 팽창되면서 리상각은 시조문학단체를 결성하려는 의지가 강해졌고 시조선집을 출간하려는 념원이 갈수록 굳어졌다. 1990년 봄에는 송정환이 연변으로 와서 리상각에게 시조단체를 결성하자고 제의했다. 허룡구, 리해산 두 교수가 준비사업에 착수했고 500수에 달하는 시조를 묶어 《시조선집》을 민족출판사에 교부했다. 1994년에는 민족출판사를 통해 《중국조선족시조선집》을 출판하였으며 1993년 10월에 연변시조시사를 정식으로 설립하였다. 1994년 《천지》는 8월까지 65수의 시조를 발표했고 《료녕일보》에서도 시조와 시조평론을 자주 실었다. 리상각은 이처럼 20여년간 한국의 시조단체 및 시조시인들과 교류하고 중국조선족시인들과 련합하며 동료와 후배들에게 시조를 창작할 것을 제기하면서 중국 조선족 시문학의 발전을 위해 노력하였다.  어릴 적부터 고집불통이라고 소문이 난 그는 민족문학을 위한 사업이라고 인정되는 일이라면 그 어떤 고난과 역경이 닥쳐도 무조건 밀어붙이고 실시하였다. 그가 발품을 팔아 수집하고 정리했던 민간문학 자료들은 문학적 가치에 대한 평가를 떠나 그 자체가 갖는 사료적 가치를 따져볼 때 리상각은 중국조선족의 민족사와 민족문학사 발전에 큰 기여를 하였다고 평가할 수 있다.    2. 시적 주장과 창작의 자세 시란 무엇이고 시를 어떻게 써야 하며 시인은 무엇을 써야 하는가? 이는 모든 시인들의 공통된 고민이다. 인간은 자신의 인생에 대한 견해와 세계에 대한 견해를 가지기 마련인데 시인은 보통 이런 인생관과 세계관을 삶의 기본토양으로 하여 울울창창한 시의 숲을 창조해낸다.  리상각은 시란 ‘언어의 그림’이고 ‘인생의 거울’이라고 했다. 그는 “시인이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은 인생의 고통, 슬픔, 고뇌, 추악한 것을 불사르기 위함이고 인간미를 찬양하기 위함이며 따라서 시인은 반드시 인생을 열렬히 포옹하고 인간미를 찬양하는 일에 자기의 령혼을 불태워야 한다”고 주장했다. 리상각은 사랑의 감정과 서정의 미를 보여주는 것을 자신의 시의 천직으로 삼고 이를 통해 자신의 미학관을 표출하였다. 문학창작은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로동으로서 로동자로서의 작가와 시인은 창작에서 자기만의 신념이 있어야 한다. 리상각에게 있어서 시란 인생의 희로애락을 그대로 그려주는 예술이지만 그 속에 숨쉬는 인생의 꿈과 환상과 신념을 시를 통해 보여주는 것이였다. 그는 “가령 나에게 청춘이 사라지고 사랑과 인정이 말라버리고 희망이 떠나버리면 시신도 나를 저버리고 말 것”이라고 하면서 희망적이고 미래지향적인 시를 쓸 것을 주장했다. 리상각은 인생의 끝자락에서 삶을 돌아보면 행복했던 순간보다 슬펐던 순간들이 더 많게 느껴진다고 했다. 그러나 그는 삶의 고독과 절망, 방황과 우울 등으로 시를 비극적으로 다루기보다는 시련과 고통을 딛고 열정과 희망과 신념을 불어넣기를 강조했다. 그는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어도 결코 절망하거나 비관하지 않았다. “인생살이가 아무리 지옥 같은 것일지라도 꿈을 잃지 않고 분투하면 나아갈 길이 열린다.”라고 말했던 리상각은 오히려 곤경 속에서 더욱 강해지고 희망적인 미래를 위해 살려고 노력하였으며 그것을 작품을 통해 표출하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그는 문학창작을 하면서 민족혼을 기본으로 하고 밝고 긍정적인 마음으로 사실을 있는 그대로 쓰기를 제창하였다. 그는 “시는 언어예술이지 말장난이 아니며 심장으로 뿜어내는 진실한 감정을 감명깊게 그려주는 예술이므르 시인은 언제나 추호의 허풍도 떨어서는 안된다”고 하면서 시를 쓰되 그 속에 시대의 변혁을 쓸 것을 호소했다.  이처럼 자신만의 확고한 시적 주장을 수립하고 창작활동을 진행해온 리상각은 1956년부터 반세기가 넘는 동안 총 642수에 달하는 시, 442수의 시조, 147수의 가사, 338편의 산문과 실화문학 및 평론, 단편소설과 장편소설 각각 1편을 창작하였다. 그는 1980년 처녀시집 《샘물이 흐른다》를 시작으로 시집 14권, 시조집 6권, 가사집 1권, 수필집 2권, 문집 4권, 시론 1권, 민간자료집 1권 등을 중국과 한국의 출판사를 통해 출판하였다. 이상의 사실들로 알 수 있듯이 리상각은 다산작가로 불리기에 손색이 없다.  리상각은 일생에 거쳐 향토적 서정시, 랑만주의적 경향의 사랑시와 송가, 현실비판과 자아반성의 풍자시들을 대거 창작함과 동시에 시조 창작과 그 발전을 위한 일에서 그 어느 시인보다도 적극적인 모습을 보였고 풍자시 창작에서도 선두주자로 나섰다. 일찍 리상각은 올곧은 성격 탓에 늘 ‘바른 소리’를 잘하여 가끔은 타인들의 미움을 받은 적이 있다고 밝힌 적이 있다. 이러한 시인의 올곧은 성격이 바로 그가 사회에 존재하는 문제를 예리하게 직시하는 데 도움을 주었고 깊숙한 곳까지 파고들어 문제의 근원을 찾아내는 받침돌이 되는 것이다. 평생 동안 열정적이고 희망적으로 삶을 대하며 미래지향적 정서를 작품에 담아냈던 리상각은 시대의 변화와 함께 변화되는 인간사회와 민족문단의 상황을 지켜보면서 그 속에 존재하는 문제들을 바로잡아 보다 건전하고 밝은 사회가 되기를 바라고 있었다. 하여 그는 사회의 부조리와 인간의 추한 내면을 작품 속에 담아냈던 것이고 이러한 작품들은 개혁개방 후기의 우리 민족 사회의 한 면을 보아낼 수 있는 좋은 증거가 되였다. 리상각은 해방전 강원도 시골마을에서 태여나 흑룡강성을 거쳐 연변에 정착하기 시작하였으며 제3의 고향인 연변에서 수많은 작품들을 산출하였고 평생을 문학창작과 민족문학 발전과 후대양성을 위해 살아왔다. 반세기가 넘는 동안의 그의 작품들은 중국조선족문학사를 연구함에 있어서 중요한 자료로 된다.  나가는 말 리상각은 암울한 일제식민시기에 조선에서 태여나 국경을 넘어 중국에 정착하여 평생을 중국조선족으로 살아왔다. 그의 삶에는 식민지시대의 잔상과 격변했던 중국 당대사의 흔적들이 고스란히 남아있고 따라서 그의 작품에는 해방 후 중국조선족문학의 발전력사, 중국조선족의 정치적, 사회적 특성 및 주체의식이 여실히 반영되였으며 향토적, 민족적 색채가 다분하며 디아스포라로서의 의식형태가 잘 드러나고 있다. 리상각은 현대시와 시조를 대량적으로 창작한 동시에 가사와 수필은 물론 오체르크, 단편소설과 장편소설도 창작하였으며 민간문학 수집 정리에도 열정을 쏟아부었다. 뿐만 아니라 그는 반평생 문학창작과 문학잡지사 편집사업을 병행하면서 후대양성을 위한 사업에도 열정적으로 참여하였다. 그는 중국조선족문학의 발전을 위해 고뇌하고 사색하면서 방법을 모색하였는바 반평생을 시인으로서, 문학잡지 편집일군으로서의 사명감을 온몸으로 실천하였다. 일찍 “잊어다오 나를 / 나는 민들레 / 무덤가에 조용히 / 피였다 마는 / 못 본듯이 가다오 / 그대 갈길을.”(〈묘비에 쓴 시〉 중에서, 1992.)라고 했던 리상각시인, 그는 잊어달라 했으나 후세인들은 그를 잊지 못할 것이다. 중국조선족문학의 발전을 위해 평생 자신의 정열을 불태우면서 지속적인 노력을 경주하였던 리상각시인, 그는 떠났지만 떠난 것이 아니다. 앞으로 시인과 그의 작품에 대한 전문적인 연구를 더욱 활발히 진행할 것을 약속하면서 또한 이러한 작업이 많은 연구자들에 의해 진행되기를 기대하며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빈다. 출처:2018 제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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