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장
인간의 려정
동방로동대학과 연안
다음은 쏘련(로씨야) 모스크바 “동방로동자공산대학”시절이다. 1936년 6월 중공벌리현위는 중공만주성위의 지시를 받고 주덕해를 쏘련에 파견했다. 중공중앙과 제3국제당주재 중공대표단은 우수한 항일간부들을 모스크바주재 “동방로동자공산대학”에 파견하여 중국혁명의 지도자와 간부들을 대량 양성했다. 동북에서도 많은 우수한 청년혁명가들을 추천하여 동북의 항일투쟁을 령도할 유격간부를 양성, 훈련시켰는데 주덕해도 여기에 선발되였다.
모스크바 “동방로동자공산대학”은 극동거주 쏘련인과 아시아인을 대상하여 공산주의운동의 지도자를 양성하기 위하여 1921년 10월 21일 제3국제공산당에 의해 설립됐다. 이 대학교는 “모스크바공산대학”, “극동공산대학”, “동방로동대학”으로도 불리웠다. 이 대학교는 중국, 조선을 비롯한 아시아나라들과 중동, 유럽 국가의 공산주의운동의 성장에 많은 영향을 끼쳤고 따라서 정치적인 거목들을 많이 양성하기도 했다. 명목상으로는 로씨야국립으로 되였지만 실제로는 경비 및 입학생 선별, 대학운영 등 모든 면에서 제3공산국제의 지시를 받는 산하기관이였다. 설립되여 몇년후 로씨야 국내학생 동방부와 국제부로 나눴는데 국제반은 조선어, 중국어, 일어, 토이기어, 프랑스어 등 7개 언어반이 있었다. 조선어는 1928년부터 개설했는데 연변대학의 전임 부교장 림민호와 박헌영의 안해 주세죽이 있었다.
모스크바 동방로동대학에 입학하려면 원칙적으로 해당 국가의 공산당 추천을 받아야만 하는데 주덕해를 비롯한 동북출신들은 중공만주성위의 추천을 받았다. 주덕해일행은 1936년 6월에 먼저 로씨야의 원동항구도시 울라지보스또크(해삼위)에 있는 “국제혁명가구원회”에 머무르면서 모스크바로 향발하라는 다음 지시를 기다렸다. 로씨야어로 “모쁘르”라고 부르는 이 기구는 세계의 혁명가들을 원조하는 단체였다. 울라지보스또크에 도착해서 향발소식을 기다렸지만 소식이 바이없었다. 조직의 지시대로 밖으로 시름놓고 나가지 못하고 비밀을 지키려고 사람들과의 접촉도 피하면서 중국 동북에서 오는 다른 팀들이 오기를 기다렸다.
울라지보스또크란 “동방을 지배하라”라는 뜻으로 로씨야 동해연안의 최대항구도시 겸 군항이다. 북극해와 태평양을 잇는 북빙양항로의 종점이며 씨비리철도의 종점이기도 하다. 1903년 씨비리철도가 완전히 개통됨으로써 모스크바와도 이어지게 되였다. 주덕해의 고향도 로씨야의 극동지구로서 여기에서 멀지 않은 도베야란 촌이였다. 하기에 주덕해에게는 낯선 이국땅은 아니였다. 철썩— 처절썩— 기슭을 때리는 바다의 파도소리를 들으면서 주덕해는 어머니 손에 끌려 조선으로 나가던 그 맨발의 시절을 아프게 회억했다. 슬프게 울리던 배고동소리속에서 마구 덤벼치면서 따라오던 바다갈매기와 파도소리는 아버지를 여의고 조선으로 다시 나가던 주덕해에게는 가장 아픈 기억으로 남아있었다.
아름다운 해변도시에서 주덕해와 리춘근은 동행들과 함께 반년동안의 지루한 기다림과 근 한달동안의 려정을 허비하다보니 그 이듬해인 1937년 1월에 끝내 “모쁘르”의 안내로 광막한 씨비리를 횡단하여 모스크바에 도착, 그 걸음으로 “동방로동자대학”에 입학했다.
한마디로 격동 그 자체였다. 10월혁명이 성공하고 사회주의가 정착된 쏘련, 그 사회주의를 이끄는 유서깊은 궁전과 붉은 광장, 아름다운 도시와 그속에서 여유를 즐기면서 살아가는 쏘련공민들… 쏘련땅은 열렬한 공산주의자들이 오매불망 그리는 메카였고 그만큼 성공한 사회주의의 성지로 성큼 솟았다. 수많은 서구의 진보적지식인들과 동방의 공산주의자들이 모스크바를 방문하고있었다. 그들은 자국에서 전혀 볼수 없던 사회리념과 가치들을 발견할수 있었다. 그리고 지주를 축출한 꼴호즈(집체)농장에서 농민들이 당당하게 국가의 주인으로 등장하는데 깊은 감명을 받았다. 더구나 비바람이 휘몰아치는 북만땅에서 일제에 저항했던 주덕해와 같은 열혈항일청년들에게는 격동의 나라였고 자유로운 “해방구 하늘”이였다. 주덕해와 같은 조선청년들뿐만이 아니였다. 혁명가라면 모두가 꿈꾸는 사회주의락원이였다.
실제로 모스크바는 세계혁명요람의 요람이였다. 윁남, 조선, 인도 같은 식민지의 반제운동가는 물론이요 중국, 일본, 중동… 등지의 공산주의자들까지 받아들여 특별례우를 해주고있었다.
동방로동대학은 우수한 공산당원들을 확보하고저 자질이 뛰여난 신진인물들을 흡수했다. 이 시기에 조선인들도 중국공산당 및 고려공산청년회의 추천을 받아 동방로동대학에 대거 입학하여 직업적혁명가의 길로 입문했다. 동방로동대학은 선후로 조선인학생 150여명을 배출했고 이들은 졸업한 뒤 국내 또는 조선에서 공산당활동에 주력하였다. 그외에도 이 학교는 선후로 류소기, 임필시, 소경광, 우란부, 채창, 하자진, 엽정과 같은 중국혁명의 거물급인물들을 배출했다. 1928년 조선반이 따로 개설되면서 림민호가 조선인들중에서 제일 먼저 입학한것으로 알려지고있다.
동방로동대학에 입학한 조선인들로는 선후로 림민호, 조봉암, 주세죽, 허정숙, 주덕해, 방호산, 리림, 리한무, 주춘길, 김일, 전우, 진반수, 진옥, 김삼 등이 있다. 동방로동대학은 쏘—독전쟁 발발직전인 1938년에 페교되였는데 주덕해는 제일 마지막 졸업생이다. 이 학교 졸업생들은 후에 대부분 연안조선혁명군정학교에서 다시 만났다.
주덕해가 동방로동대학에 입학할즈음에 페병이 도졌다. 하여 모스크바의 한 병원에서 한동안 치료하고 호전되여 다시 학교에 들어갔다. 주덕해의 이 병은 2년전(1935년 3월) 동북인민혁명군 제4군 제1사에 입대할 때 걸렸는데 밀산에서 료양하고 한동안 재발하지 않았지만 이때에 다시 도진것이다. 주덕해는 이 병이 자신의 생명을 해치는 지병이 될줄은 꿈에도 생각 못하고 다시 학교에 입학했다.
주덕해는 처음엔 중국반에 편입되였다. 하지만 동방로동대학교측에서는 주덕해를 비롯한 중국출신 조선인학원들이 중국어강의를 듣기 어려운 상황을 고려하여 8호청사로부터 12호대청에 있는 조선반으로 전학시켜주었다. 이 시기 주덕해의 한어구사능력은 차했다. 조선반에는 조선과 중국, 만주 등지에서 온 학생 20여명이 있었는데 그가운데는 방호산(李天富), 장복(림해), 리림, 전우, 주춘길, 리권무, 진반수, 유경룡, 진옥, 김일, 김상 등이 있었다. 대부분의 학생들은 성분이 복잡했는데 조선에서 직접 온 학생들도 있고 국내에서 추천된 학원들도 있었지만 신분과 소속, 배경 같은 인적사항들은 체크되지 않았고 모두 비밀이였다. 학생들도 당의 지시대로 엄격하게 규률을 준수하고있었다.
주덕해일행이 이 학교에 올 때에는 학교이름이 “모스크바 동방식민지반식민지리익연구학원”으로 고쳐졌는데 복잡한 학교명칭인것만큼 학원들의 신분과 소속국가도 복잡했다. “…산하에는 8개의 분원이 설치되여있고 중국반, 조선반, 윁남반, 필리핀반, 일본반 그밖에 일부 중동국가의 반들도 있었다. 학생들이 서로 다른 국가에서 오다보니 언어, 피부색갈, 생활 등이 차이가 심했고 정치, 사회, 문화 등 사회 제 분야에 대한 리해도 다각도였고 다층차였다…”
조선반과 중국반은 제8분원에 귀속되고 고급반과 초급반으로 나뉘여졌는데 주덕해는 고급반 즉 제1반에서 학습하였다. 혁명가양성을 목적으로 꾸려진 대학교는 기초적인 지식전수가 목적이 아니였다. 하기에 초급반은 말 그대로 문화정도가 매우 차한 학생들로 꾸려졌다. 하지만 코민테른에서는 국제학생들에 대한 대우를 중시했고 혁명후보들의 모든 편리를 제공해주었다.
“…이들은 쏘련공산당사, 세계혁명운동사, 정치경제학, 사회발전사 등을 배웠고 군사학 과목으로는 주로 게릴라(유격)전술과목을 배웠다. 당시 중국반과 조선반은 코민테른 중국대표단(중국지부라고도 함)의 지도를 받았다. 중국대표단의 성원들은 왕명, 강생, 락보(洛浦), 왕가상, 진운 등이였다. 중국대표단의 책임자였던 강생도 한동안 이 학교에서 생활하였다.”
1923년 손중산은 더 이상 비밀결사나 군벌에 의존해서는 중국혁명이 성공할수 없다고 판단하고 국민당의 혁명의식을 고취하기 위해 공산당과 쏘련에 정치적제휴를 제안하였다. 쏘련과 중국공산당은 이에 적극 호응하여 1925년 10월 모스크바에 손중산의 이름을 딴 “손중산대학”을 설립하였는데 이는 선차적으로 쓰딸린이 제의했고 국공합작의 산물이기도 했다. “손중산대학”이 창립되자 동방로동대학의 부분적인 교원들과 학생들이 “중산대학”으로 전학했다. 당시 쏘련도 경제적인 여건이 시원치 않았지만 “동방로동자공산대학”과 “중산대학”에 대량적인 물력과 인력을 쏟아부었다. 로씨야측의 자료기재에 의하면 당시 두 대학교에 퍼부은 돈이 천만루블이였고 그외에도 당시 시세가 높았던 외화를 풀어 학원들에게 방학시에 집으로 오가는 경비로 충당해주었다고 했다. 중산대학에는 중국공산당의 거물급인물들인 등소평, 왕평, 박고, 장문천, 엽정, 왕약비, 채창, 하자진, 양상곤 등이 있었다.
1930년 “중산대학”이 페교되자 동방대학에서는 다시 중국반을 설치했다. 1937년 동방로동자대학은 다시 쏘련 국내학생만 입학시키는 동방대학과 외국학생만 수용하는 “민족식민지문제연구소”로 나누었는데 1938년에 이르러 모두 페교되였다. 4년제 동방로동자대학에서 주덕해는 2년 동안 학습했다.
“동방로동자공산대학”시기 주덕해는 성공한 쏘련사회주의모델을 가슴으로 익히면서 공산주의신념을 더한층 굳혀주는 계기를 마련했고 따라서 중국혁명과 조선혁명을 국제적인 시야에서 폭넓게 바라볼수 있는 시야를 가졌다. 하기에 동방로동자대학은 주덕해가 혁명가, 정치가로 성장하는 중요한 “병참기지”였고 제1정거장이였다.
다음은 1939년부터 1945년까지의 연안시절이다. 당시 연안은 중국혁명가들에게는 성지였다. 연안출신이라면 누구나 우러러보던 이 시기 주덕해는 보탑산아래 연하기슭에서 “…중국의 광활한 땅에서 조선의 젊은이들 행진하네…”를 힘차게 부르면서 연안에서 중국혁명의 특수성과 승리에 대한 필승의 신념을 가슴에 담았고 국제공산주의혁명속에서 중국혁명의 필연성과 승리를 확신하면서 충실한 혁명가로 성숙했다. 주덕해는 팔로군 359려 718퇀의 한 특무련에서 지도원으로 군복무를 했고 8퇀에서 공급처 지도원으로, 다시 조선혁명군정대학에서 관리처장으로 일하면서 특정시기 민족의 지도자로 자라나는 과정을 밟아나갔다.
주덕해는 중국공산당원으로 항일련군출신이였기에 중국혁명에 대한 섭렵과 접수력이 빨랐고 자신을 인차 용해시켰으며 자신이 처한 민족과 중국의 운명적인 련대점을 알아가기 시작하였다. 그러면서 조선혁명군정대학에서 항일투사들과 의용대출신들이 연안에서 합류하고 다시 연안의 혁명기류에 편승하는 과정을 지켜보면서 중국혁명과 조선혁명의 련대적인 관계와 특수모식에 고민했다. 주덕해의 이런 자각은 필연적으로 민족의 정치 소재와 지위 그리고 번지수(국가소속)를 고민하는 결과를 낳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