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국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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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제2장 메카 - 연안 1 - 연안 댓글:  조회:899  추천:1  2014-06-24
 제2장 메카—연안 연안   여기가 연안입니다. 연안에 도착했습니다… 연안—욱복(郁馥)한 황하문명의 발상지지만 직관적인 조망은 그렇게 아름다운 곳은 아니다. 연안은 산림이 울창한 곳도 아니고 평원도, 초원도 아니다. 섬북땅에서 태연하게 서식하는 산양의 밸같이 답답하게 뻗은 골짜기들과 그 골짜기가 이색적으로 만들어낸 황색등고선아래에 자리잡고있었다. 어디에서 시작되고 어디에서 끝이 날지 대중할수 없는 수천갈래의 만(湾)들속에 자리잡은 자그마한 진이기도 했다. 하지만 이런 지리적인 여건은 수천년동안 황색먼지가 날리는 고원우에서 세거를 고집하면서 살아가는 사람들과 대를 이어 세세대대로 생활하면서 이룩해놓은 고원문명에서도 가장 우뚝한 존재인 황하문명을 창출하는데는 아무런 무리도 없었다. 주덕해일행이 서안에서 연안에 도착한 시기는 1939년 9월말이라고 보면 무난하다. 1939년 3월에 쏘련(로씨야) 모스크바 동방대학을 떠나 서역땅인 신강 우룸치에 도착한후 근 반년간 초대소에서 머물렀으니 시간적으로 이런 추이가 나온다. 주덕해에게 쏘련 왕복행은 격동과 고달픔 그 자체였다. 북만에서 떠날 때 극동의 울라지보스또크(해삼위)에서 바다갈매기 울음소리를 무심하게 들으며 반년동안 “모쁘르”에서 모스크바 향발소식을 애타게 기다렸고 이번 귀국차 역시 크게 곡선을 그렸는데 그것도 낯선 서역땅에서 애꿎은 모래바람을 맞으면서 6개월 동안 머물렀다. 쏘련 왕복행에 중국의 동북과 서북 량극에서 꼬박 일년을 멋없이 허비한 셈이다. 연안에 도착한 주덕해일행은 도합 10명이였는데 리천부(방호산), 장복, 전우(全宇)1), 주춘길, 진반수, 류경룡, 진욱, 리림, 리권무2) 등이다. 그날 저녁 8로군 총부 후근부에서 마련한 동굴집에 짐을 풀었다. 서안에서 오는 도중 이런 동굴집에 짐을 풀고 숙식을 했던이들에게는 이제 섬북의 동굴집이 낯설지가 않았다. 이들은 팔로군총부 초대소에서 “국제주의전사”, “조선인”으로 불리우면서 연안의 첫날밤을 맞았다. 동굴집과 동굴집 사이에 간벽을 파고 거기에 석유등잔을 놓았는데 그 등불이 두 동굴집안을 밝히고있었다. 이런 두칸짜리 동굴집은 가운데 갱도 같은 통로를 만들었는데 당시 모택동, 주덕을 비롯한 중앙령도들이 거처하는 동굴집 역시 이런 구조였다. 하루종일 걸었지만 로독이 나지 않았고 잠도 오지 않았다. 추운 겨울이 물러가는데도 땅바닥에 악착하게 달라붙은 3월의 잔설을 꿈속같이 일별하면서 모스크바—얄마따—이리—신강—란주—서안판사처— 거기에서 다시 연안으로 걸어서 들어온 일행은 목적지에 도착했다는 안도감보다 꿈과 같은 흥분에 빠졌다. 중국에서 모스크바 동방로동자대학으로 갈 때부터 학원들은 중국공산당의 지시에 따라 모든 인적사항들을 비밀에 붙이고 혁명사업에 페가 되는 행위를 근절했지만 3년간의 학원생활에서 이들은 두터운 인간적인 우정을 맺는데는 아무런 지장이 없었다. 주덕해는 방호산전우, 리권무를 비롯한 동기생들과 모두 가깝게 보냈다. 주덕해는 말솜씨가 느릿느릿한것만치 워낙 인품이 중후하고 포용성이 후더워서 동기생사이에서 절대적인 신임을 얻고있었다. 주덕해곁에는 방호산이 누웠다. 이들은 모두 말이 없지만 궁형으로 만들어진 요동천정에서 어룽거리는 석유등잔불빛을 보면서 섬북의 밤하늘과 그아래 연안의 초라한 주거지의 온갖 밤소리를 조용히 듣고있었다. “여기서 우리 만주까지 얼마나 멀가?” 방호산이 물었다. 함경북도 태생인 방호산은 주덕해처럼 전형적인 투박한 함북말투를 구사하고있었다. “왜 고향생각 나나?” 주덕해는 방호산보다 2살 년상이다. 주덕해는 방호산이 몰라서 묻는것이 아니라는것을 알고있었다. 모스크바 동방로동자대학에서 군사과목을 학습하고 성적이 우수했던 방호산은 서안팔로군판사처에서 만든 지도에서 연안과 북만땅과의 거리를 비례척으로 계산하고있었다. “저녁에 협리원이 소개하는걸 듣자니 조선의용대가 태항산에 있다고 하던데 태항산은 여기서 먼가?… 래일 총부에 가서 다시 지도를 찾아봐야겠군.” “연안에 오자부터 좋은 소식만 들어서 기분이 좋구만… 여기에 ‘연안송’과 ‘팔로군행진곡’을 만들어서(작곡) 온 연안과 팔로군을 들썩하게 만든 인물이 있는데 조선사람이라 하더구만.” “팔로군행진곡”의 작곡가는 정률성이였지만 이들은 아직 정률성(郑律成)3)의 존재를 파악하지 못하고있었다. “나도 들었소. 우리가 연안으로 먼저 들어왔는가 했더니 언녕 많은 조선인들이 들어왔더군… 참으로 대단해.” “아무렴, 대단하지. 여기까지 온걸 보면… 이제 시간을 타서 꼭 찾아보기요.” 주덕해는 서두르지 않고 응수했다. 이들은 서안판사처에 머물고있을 때 화북청년동맹과 조선의용군 소식을 들었고 그 당시 크게 흥분했다. 그런데 연안까지 조선인들이 진출했다니 그저 경이롭기만 했다. 밖에서 바람이 후르르 소리를 지르면서 지나갔다. 고향에 있을 때 문을 나서면 산이고 그 산과 산발에 무수히 늘어선 나무숲이 먼저 바람을 맞으면서 쏴— 저항이 거세찼지만 여기에서는 아무런 저항도 없이 그저 헐겁게 흘러가고있었다. “우리가 모스크바에서 연안으로 나왔다면 조선의용대(군)도 어느땐가는 연안으로 들어올수도 있지 않을가…” “그럴수도 있겠지.” 주덕해가 나지막하게 막연한 소리를 했다. 기실 섬북과 연안에는 홍군출신인 양림4)과 무정이 먼저 들어왔고 그후에 조선인으로 유일하게 서안사변에 참가했고 당시 “항일군정대학” 적공훈련반 주임인 서휘5), 항일군정대학 교원 최창익, 항일군정대학 의무실에서 사업을 협조하고있던 허정숙이 있었다. 당시 허정숙은 항일군정대학 학생이였으니 몸이 허약하여 잠시 의무실에 가서 사업을 협조하고있었다. 그리고 로신예술학원에는 음악교원으로 사업하던 정률성이 있었고 중앙당교에서 학습중인 진광화6)도 있었다. 그외에도 항일군정대학 제5기 2대대 제8련 학원들인 리유민, 리홍염, 김웅(왕자인), 허금산, 한모, 홍임, 송운산, 리철중, 김란영, 장경련, 항일군정대학 제1대대 7련 학원 신억(한청) 등 도합 17명이 연안에 있었다.7) 하지만 이 시각 연안에 금방 도착한 주덕해일행은 아직 이 사실을 모르고있었다. 두 사내는 잠시 말을 하지 않고 저마다 궁싯거리기만 했다. 건조한 섬북고원의 가을밤은 수분기 한점 없이 청징했고 그속에서 서식하는 풀벌레들이 악착같이 울어댔다. 연안에서의 첫날밤은 철없이 깊어만 갔다. “뭘 생각하나? 만주 고향생각 하나?” 방호산이 다시 나직하게 말했다. “고향이야 어찌 잊겠나?… 쏘련에서부터 연안으로 오던 그 걸음을 다시 회고해보는거지.” 주덕해가 돌아누우면서 대꾸했다. “고생이 많아도 다시 생각해보면 꿈만 같지?” “그래, 꿈이라두 좋은 꿈이였지…” “래일 보탑산에두 가보구 당중앙이 주재해있다는 왕가평쪽으로 가볼가?” 방호산은 잠이 오지 않았다. “그러지.” 주덕해도 잠기가 말끔하게 달아났다. 원동의 울라지보스또크의 “모쁘르”에서 반년, 모스크바 동방로동자대학에서 다시 2년, 그후 서역에 귀국하여 신강에서 또다시 반년… 다음 란주, 서안을 거쳐 연안으로의 회정을 돌이켜보면 한마디로 지구를 반바퀴 도는 위대한 원정이기도 했다. 이 원정의 귀착지는 연안이였고 조선혁명가들의 정치적인 귀착지이기도 했다. 1939년 3월에 주덕해일행은 귀국하기 시작했다. 이들의 대학과정은 원래 4년제였지만 1938년에 동방대학이 페교되는 바람에 겨우 2년 동안만 배운 이들은 드디여 귀로에 오르게 되였다. 주덕해일행은 함께 모스크바역에서 기차를 타고 까자흐스딴공화국 수도 아스따나에 도착한후 그곳에서 다시 자동차를 바꿔타고 중쏘변경을 넘어 신강경내에 들어섰다. 1937년부터 1941년까지 신강지역에는 국제교통선이 두갈래로 있었는데 남부교통선은 카스에서 툴판, 하미지역을 거쳐 다시 란주로 내려오는것이다. 북부교통선은 두갈래가 있었는데 한갈래는 과얼과스를 통과하는것이고 다른 한갈래는 파극도로 통했는데 두갈래 모두 까자흐스딴으로 통했고 신강의 우수지역에서 합치면서 적화(우룸치)를 경유, 툴판, 하미지역으로 통하는 길이였다. 남북교통선은 모두 툴판에서 합쳐서 하미로 통했다. 모래바람이 세찬 서역이였지만 그래도 중국땅에 들어섰다는 사실에 일행은 모두 감동했다. 여기서는 일본군대를 볼수 없었고 천편일률적으로 중국군대들뿐이였다. 하지만 그 격동은 잠간이였다. 주덕해일행이 우룸치에 도착해보니 내지로 통하는 길이 막혀있었다. 주덕해일행에게는 비밀리에 행동하라는 지시가 떨어졌다. 때는 비록 2차 국공합작시기였지만 이곳의 국민당군대들도 쏘련으로부터 귀국하는 중국공산당사업인원들을 감시하고있었다. 일행은 신강변방독반 성세재의 관할하에 있는 특별초대소에 후송되여 그곳에 머물러있으면서 란주로 가는 로씨야비행기를 기다렸는데 무려 반년동안이나 이 초대소에 죽치고 앉아 무료한 나날을 보낼줄을 누구도 상상 못했다. 신강에서의 생활은 말 그대로 초조한 세월속의 초조한 기다림뿐이였다. 이들은 초대소에서 무려 봄, 여름을 지내고 9월에 드디여 란주로 가는 비행기에 앉아 서안으로 향발했다. 1939년, 이해 중국으로 놓고 말하면 불확실한 해였다. 동아시아에서는 이미 조선과 대만을 식민지로 삼은 일본은 중국 동북을 침공하여 언녕 괴뢰정부인 만주국을 세웠다. 하여 국제련맹은 일본에 대하여 제재조치를 취하려 했으나 일본은 국제련맹을 탈퇴했다. 국제련맹을 탈퇴하면서 영국, 프랑스 등 기존 렬강들과의 본격적인 갈등이 시작되자 일본은 중일전쟁을 일으켰으며 독일, 이딸리아와 방공협정을 맺음으로써 추축국에 가입하게 되였다. 일본은 륙군성의 팽창으로 북진을 주도하려고 선후로 훈춘일대의 장고봉에서, 5월에는 몽고변계 노몬한에서 쏘련군과 시탐적인 무력충돌을 했다. 하지만 두개의 전장에서 패퇴했다. 주덕해일행이 서안에서 연안으로 떠날쯤인 9월에 량국은 정전협정에 조인하였다.  
10    제1장 인간의 려정 9 - 주덕해의 실각—“문화대혁명” 댓글:  조회:1274  추천:11  2014-06-01
주덕해의 실각—“문화대혁명” 주덕해는 민족지역사회에서 정치, 경제, 문화 제반 분야를 거치면서 민족사회발전을 획책하고 가장 충실한 삶을 살았다. 연변의 광활한 하늘과 산과 강하는 한결같이 주덕해를 향해 활짝 열려져있었다. 하지만 특정년대에 진입하면서 주덕해는 비운을 면치 못했다. “문화대혁명”은 인간의 선으로 향한 진화를 가로막고 악으로 향한 퇴보를 종용한 대형인재이다. 이 시기 중국은 무뢰한들이 저돌적으로 사회를 찬탈하고 공략함으로써 중국을 비운으로 몰고 갔다. “문화대혁명”은 연변이란 하늘과 땅에서 주덕해란 존재가치를 훼멸하였다. “문화대혁명”기간에 주덕해에게는 “한사코 자본주의길로 나아가는 집권파”, “지방민족주의분자”, “특무”, “매국적”, “반역자” 등 듣기에도 해괴한 갖은 죄명이 다 들씌워졌다. 지금도 연변의 수많은 사람들은 주덕해가 연변2중 체육장에서 세상을 모르는 홍위병들에게 끌려다니면서 인간이하의 시달림을 받던 비참한 정경을 잊지 못하고있다. “문화대혁명”은 주덕해에게 있어서 가슴이 시리고 추웠고 애처로움을 주는 “혁명”이였다. 주덕해는 공덕을 바쳐 성립한 자치주에서 인간세상에 실질적으로 편재하지 못하고 연변 외곽에서 헛도는 초상으로 전락되면서 정치생애를 마쳤다. 중국조선족은 두만강을 건널 때부터 그 생활 자체가 새로운 환경에 끊임없이 적응되여왔다. 공화국 성립이후에 중국의 선진적인 소수민족정책과 소수민족의 특수위치로 인해 매 성원들에게 정치적으로 보장되는 사회무대로 진출할수 있는 기회가 부여되였다. 말하자면 조선족구성원끼리의 경쟁에 의한 사업성공의 기회가 주어진것이다. 하기에 개인적인 리해관계의 갈등은 주로 민족내부사이에서 발생했으며 조선족사이에 파벌과 불신을 가져오는 요인으로 작동하기도 했다. 이것이 바로 지위의식과 민족적한계성이기도 하다. 주덕해 역시 지위의식의 충돌의 피해자로서 반우파투쟁시기 “지방민족주의자”로 전락될번하기도 했다. 그 시기부터 사실상 주덕해의 머리우에 비운의 징조가 나타난 셈이다. 지금까지 주덕해의 실각과 불운한 운명을 “사인무리” 모원신, “문화대혁명”에 밀어버리고있지만 주덕해의 불운을 문화적으로 접근해보면 부분적으로 우리 민족 자신이 공유하고있는 한계성에서도 문제를 찾을수 있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중국의 민족간부에게 가장 경계해야 하는 “지방민족주의자”란 모자는 우리 민족 자신들도 앞장서서 씌우려 했다는 사실, 타의적으로라도 “주덕해 타도”를 웨쳤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된다. 하기에 주덕해의 실각과 비운에서 우리 민족들은 통회(痛悔)를 공감해야 한다. 민족의 발전은 이런 자아성찰의 과정을 통하여 발전하는것이다. 주덕해는 생전에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 제8기 후보위원, 전국인민대표대회 대표, 중공길림성위 상무위원, 길림성정부 부성장, 중공연변조선족자치주위원회 제1서기 겸 자치주 주장, 연변군분구 제1정위로 사업하면서 “연변조선(민)족자치구(주)”를 성립하고 제반 사업을 궤도에 올려놓는데 기반을 다진 가장 주요한 공로자의 한 사람으로서 연변의 모든 수리시설, 연변의 논밭, 연변의 사과와 사과배, 연변소, 연변대학, 연변병원, 연변체육, 연변교육, 연변가무단, 모아산숲, 연길공원, 신문출판방송 등 오늘날의 조선족의 정치, 경제, 문화, 교육, 스포츠를 비롯한 제반 사업의 기석을 다진 공로를 인정받고있다. 상술한 몇가지 단계를 거치면서 우리들은 주덕해라는 인간의 정치사상과 신념의 확립과정을 지켜보았다. 동시에 진정한 공산주의자의 성격형성을 수립하는 계기를 의식하고 주덕해의 인간적인 덕성을 접하면서 연변조선족자치주라는 지역사회에서 인간구성원들의 화합의 장을 마련하고 그것을 사업화, 생활화로 만드는 간략적인 과정과 륜곽을 접했을것이다. 그러면서 완성된 민족간부—주덕해의 모델을 수긍할수 있는 실천적인 계기를 큰 그림으로 읽었다. 주덕해—그는 격정년대에 가장 충실한 삶을 산 민족지도자로 인생이란 대단원에서 단계를 거듭할수록 격조를 승화하면서 명실상부한 정치가, 혁명가, 교육행정가 그리고 인간으로 자신을 완성했다.
9    제1장 인간의 려정 8 - 연변의 문화 댓글:  조회:852  추천:1  2014-05-25
제1장 인간의 려정 연변의 문화 연변의 문화는 이민들이 월강하면서 지니고 왔던 무형의 민족관습, 민족 동질성과 전통성이 민족집단생활운행기제를 고착시켰는데 그것은 문화성으로 표현되기도 했다. 하기에 이런 문화에는 타관땅을 개척했던 이주민들의 동질성확보와 정체성이 고집스레 고스란히 녹아있었다. 초기 조선족농촌문화전통은 이런 측면에서 고찰할수 있다. 당시 동북지역에 거주한 조선인(족)들의 생활현실을 너무도 잘 료해했던 주덕해는 관성적인 민족문화에 기초하여 문화선전사업에도 커다란 중시를 돌렸다. 그것은 연안시기부터 정률성과 친구로 지내면서 문예창작을 지켜보았고 할빈에 진주하면서부터《전투보》를 꾸렸고 1948년 동북행정위원회 민정부 민족사무처의 기관지로《민주일보》를 창간하면서 실천적으로 표현되였다. 그후 연변에 진출하면서 특정지역 민족특색에 맞는 신문, 방송, 출판 등 기구를 규범적으로 만들면서 연변문화특색을 최대한으로 살렸다. 무릇 규범은 과학적인것이다. 제3지대출신인 연변대학 예술학원 전임 원장 김삼진은 “제3지대가 금방 성립되였을 때 주덕해정위에게는 처리해야 할 사무가 많았지만 그런 힘든 정황에서도 부대선전대를 내왔는데 이는 주정위의 가슴속에 자리잡은 문화사업체계이기도 했습니다. 그후 민족사무처에서 사업할 때 우리 부대가 전선에 나갔고 주덕해정위는 할빈에 남아있었는데 그때도 문예인재를 요구해서 문공단을 꾸렸습니다. 주정위처럼 정치를 하면서도 문화사업을 중시한분은 드물겁니다.”라고 밝혔다. 장만련은 “제3지대는 주덕해정위의 지시로 1946년에 선전대를 조직하였고 하반년부터 제3지대 선전대는 북만 여러 지역을 다니면서 문예 공연과 선전을 동시에 진행하여 농촌지역 군중들의 절찬을 받았다.”고 회억했다. 이 문화선전대가 현재의 문화예술의 모태라도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연변에 부임되여온후에 주덕해는 또 인차 연변가무단을 창립하였다. 연변가무단은 공화국초창기 북경, 상해, 광주를 비롯한 중국의 대도시와 민족지구를 순회하면서 민족문화예술의 진수를 활기차게 자랑했다. 조선족의 중국관내진출은 사실 문화예술단이 선두에 섰고 이렇게 조선족의 존재가 알려지기 시작했다. 주덕해는 특히 문화인재에 대한 관심과 배양에 큰 중시를 돌렸다. 조득현은 저명한 무용가로서 주덕해가 제3지대에 있을 때 선전대에 있었고 그후에 민족사무처 문공단에서 사업하였으며 주덕해가 연변에 올 때 함께 왔다. 그후 병치료차로 조선에 나간후 조선전쟁으로 소식이 끊어지자 주덕해는 “조득현무용가는 100개의 교향악단과도 바꿀수 없는 존재다.”라고 하면서 조득현을 찾기 위해 조선으로 사람을 파견하면서 문화인재에 대한 지지와 성원을 아낌없이 보냈다. 조득현은 연변에 온후 연변가무단 부단장직을 맡아하면서 연변의 문예사업발전에 큰 공헌을 하였다. 1957년 “연변예술학교”가 창립되였는데 주덕해의 공로와 갈라놓을수 없다. 그때 전국적으로 지구급이 꾸리는 예술학교는 “연변예술학교”가 유일했다. “연변예술학교”는 연변가무단과 주내 각 현, 시 그리고 동북3성 예술단체들에 해마다 많은 인재들을 양성해주었다. “연변이 노래와 춤의 고향으로 된 바탕과 기틀은 주덕해가 마련해놓았다고 평가할수 있습니다.” 박문일 전 연변대학 교장의 평가이다. 연변문화예술사업은 민족특색이 선명하고 변방지구의 문화예술발전가능성을 무한하게 시사하고있다. 뿐만아니라 문화대외교류의 현장도 마련되여 날이 갈수록 자신의 민족적, 지역적 특색을 더욱 선명하게 부각해나가고있다. 이 모든것은 주덕해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다. 17년 동안의 연변사업시기 주덕해는 정치적인 소속을 완성하면서 민족지역의 정치, 경제, 문화 제반 건설을 정상적인 궤도에로 진입시키던 시기이기도 하다. 하기에 사실상 연변이란 특정지역에서 가장 큰 성과를 따내던 시기였고 따라서 공산주의자의 격조 높은 품덕을 구가하던 시기이고 주덕해라는 인간전설을 구가하던 시기이기도 하다. 완성된 주덕해는 이렇게 인간적으로 연변사람들의 기억속에 영존하기 시작했다.
8    제1장 인간의 려정 7 - 민족공업 댓글:  조회:679  추천:0  2014-05-24
제1장 인간의 려정 민족공업 연변의 공업은 너무도 락후하고 조악했다. 해방초기 연변에는 석현과 개산툰의 제지공장, 천보산광산과 로투구탄광밖에 없었다. 1951년에 열린 전국 제1차 수공업생산합작회의이후에 연변 각 소도시들에서는 수공업합작사를 세웠다. 1953년에 33개였던 수공업합작사는 1956년에 와서 143개로 발전하였고 합작사에 참가한 인원은 수공업자 총수의 93.6%를 차지하였으며 따라서 규모가 비교적 큰 21개의 합작사가 지방 국영기업소에 들어감으로써 수공업에 대한 사회주의적개조가 기본적으로 실현되였다. 뒤이어 사인공상업에 대한 사회주의개조도 원만히 마쳐 연변공업에서의 유연한 과도기를 거쳤다. 그후 경제복구시기, 제1차 5개년계획시기와 제2차 5개년계획시기, 제3차 5개년계획시기까지 이어진 연변경제건설에서 공업은 에네르기, 야금, 기계, 화학, 삼림, 건축재료, 방직, 식품공업이 전면적으로 복구되였거나 새롭게 선을 보이면서 변두리지구의 공업발전가능성을 시사했고 민족지구공업발전의 가능성과 길을 모색했다. 주덕해는 “우리 나라 공업분야에는 부문이 많다. 일반적인 공업제품은 내지로부터 들여올수 있으나 민족제품은 자체의 힘으로 해결하여야만 한다.”라고 하면서 복구시기부터 제1차, 제2차, 제3차 국가경제발전 5개년계획시기에 연변의 당정지도자로 공업과 함께 숨을 쉬고 공업건설의 정초식을 치렀다. 주덕해는 발빠르게 움직여 심양에 있는 “동농고무공장”을 연변의 로투구에 옮겨오게 했고 전문적으로 조선족들이 신는 고무신을 만들어 공급하였고 후에는 연변고무공장으로 공장규모를 확장했다. 연변의 민족특수용품생산기지화는 주덕해의 공로와 갈라놓을수 없다. 1962년에 주은래총리가 연변에 왔을 때 주덕해는 총리에게 “조선족녀성들은 비단옷을 입기 좋아하며 뉴똥으로 지은 옷과 모본단이불은 조선족처녀들이 시집갈 때 가지고 가야 할 지참품이고 어린애들이 첫돌생일을 쇨 때면 습관적으로 칠색단꽃저고리를 입는데 주내에서 해결할수 없다.”고 회보하면서 해결해줄것을 청시했다. 그후 주총리의 비준을 거쳐 “연변민족비단공장”이 서게 되였다. 그밖에도 “민족침직공장”, “민족알루미니움공장”, “민족도자기공장”, “민족고무공장”, “민족악기공장” 등 민족계렬공장들이 선후로 건설, 가동되여 연변은 초보적인 규모를 갖춘 민족공업체계를 이루었다. 주덕해는 연변의 “민족특점, 변방특점, 산구특점, 자원이 많고 인구가 적은 특점, 면적이 넓고 경작지가 적은 특점”에 맞추어 실사구시적으로 일관된 사업작풍으로 농업에서는 기계화, 수리화, 림업, 축산업, 과학적영농수준을 크게 제고시켰고 공업에서는 민족공업을 중심으로 팔프, 제지 공업을 발전시켰다. 하기에 바람이 세차게 불어치던 연변의 산과 강하에는 주덕해의 족적이 고스란히 남아있었고 망치소리가 뚱땅거렸던 공장구역내에도 주덕해의 초상이 푸르게 남아있다.  
7    제1장 인간의 려정 6 - 농업 댓글:  조회:827  추천:0  2014-05-23
제1장 인간의 려정 농업   중국의 농업력사는 토지개혁을 거치면서 해방후 초급사, 고급사, 합작화, 인민공사, 대약진 등 생산발전을 가로막았던 정치운동식세례를 거치면서 농업 제반 분야가 제자리답보를 종용했다. 이런 인위적인 악조건에서 연변의 농업실정 역시 “극좌”편향의 “쓰나미”에 밀려 좌초했다. 농업발전은 빈 구호로 도모하는것도 아니다. 농업 자체의 과학적인 발전모식이 따로 있는데 우선적으로 가장 필요한 조건은 기본적인 토대로 작용하는 경성적인 농업기반시설이였다. 연변의 농업 제반 시설은 령적이였고 정적이기도 했다. 도시와 농촌의 격차가 심했고 농업인구와 토지가 실조되여있었다. 수확고가 헥타르당 100킬로그람도 되지 못한 연변농업현실에서 대체 어디에서부터 착수할것인가? 상상도 할수 없는 이 간고한 시기에 주덕해는 실사구시의 원칙에 립각하여 농촌에 내려가 조사연구에 몰두했고 농업생산을 진두에서 지휘했다. 주덕해는 간부들에게 사무실에 앉아서 큰소리만 치지 말고 농촌에 내려가 조사연구를 하고 대중과 기층간부들의 의견을 귀담아들으며 그 지역에 부합되는 구체적인 대책을 세우라고 지시했다. 주덕해는 연변농업현실에서 농업을 발전시키려면 우선 농업경성기반시설들을 먼저 건설하고 수리분야부터 착수하는것이 관건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농촌동력문제를 해결해야 했다. 주덕해의 비서출신인 손중사는 “다 알다싶이 주덕해서기는 농업을 중점적으로 틀어쥐였습니다. 그는 중앙과 성에 가서 회의하고 돌아오면 당사업은 요흔부서기를 비롯한 부서기들에게 일임하고 정부사업은 전인영부주장과 기타 부주장들에게 일임한후 대부분 시간은 농촌에 내려가 조사를 하고 현지에서 사업을 지도하군 하였습니다. 일년에 근 절반 시간은 농촌에서 보냈습니다.”라고 회억했다. 주덕해의 장녀 오영채는 “어렸을 때부터 우리 형제들은 아버지와 함께 오손도손 이야기할 때가 별로 없었습니다. 아버지처럼 농촌에 붙어있은 간부도 드물겁니다… 평소에 아버지를 볼수 없었는데 몇달씩 보지 못할 때도 있었습니다. 그것이 습관이 되여 아버지가 집에 있는 날이 되려 신기했습니다… 당시 어렸던 저와 동생들은 연변에서의 아버지에 대한 기억보다 무한53농장시절 일반농장원으로 계셨던 아버지를 잘 기억하고있습니다. 53농장에서 아버지는 버림을 받은 평민이였으니 연변시절과는 달랐습니다. 그때만은 아버지가 세대주라는 의식이 들었지요.” 하고 소회를 밝히기도 했다. 천하지대본으로 일컫는 농업은 그 중심에 소와 가대기만 잔존해있었다. 연변은 평원이 적고 산지가 많기때문에 수리시설을 건설하고 농업기계화를 실현하자면 시간이 걸려야 했다. 주덕해는 원시적인 영농법에 의거하여 농업생산을 발전시킴에 있어서 소가 주요한 동력으로 된다고 인정하였다. 1961년에 당중앙에서 “농촌인민공사의 목전 정책문제에 관한 중공중앙의 긴급지시”를 발포하였다. 그가운데는 가축사양관리에 관한 전문적인 규정도 한조목이 들어있었다. 대약진시기와 3년재해를 거치면서 연변소는 공화국 창건초기 8만 5천여마리에서 1만 5천여마리나 줄어들었다. 이런 악재를 돌려세우기 위하여 1961년부터 선후로 주덕해는 사업일군들을 조직하여 연길시 의란공사(진) 류채대대(촌)에 가서 두달 동안 묵으면서 소사양관리에 대한 조사사업을 하였고 그후 훈춘현 마천자공사(진) 5.2대대(촌)에 가서도 연변소발전설계도를 완성했다. 연변의 농업발전에서 주덕해는 룡정만무과원, 대소과수농장, 고동하인수공정을 비롯한 대형 농장과 수리시설수축에서, 훈춘벼농사, 연변소를 비롯하여 연변의 농업발전에서 대단원을 완성했다. 연변의 사과배와 사과도 주덕해와 떨어질수 없는 과일이다. 연변의 벼생산지구는 주로 해란강과 부르하통하, 가야하, 훈춘강, 두만강 류역에 분포되여있는데 강의 류량이 적어 늘 가물의 위협을 받게 되였다. 주덕해는 화룡현 원봉평원을 답사하고나서 주, 현의 련합측량조를 보내여 측량하게 하고 1956년 10월부터 원봉언제공사를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1958년 9월까지 2년 동안에 공사를 끝마쳤다. 원봉수리공사의 뒤를 이어 고동하수리공사도 시작되였다. 화룡현 오도양차 화집령에 산굴을 뚫어 고동하의 물을 해란강에 끌어들이는 대형수리공정이였다. 이 공정은 1959년 9월 18일에 준공되여 수원을 충족시켰다. 그후 안도저수지공사, 화룡현 아동저수지, 석국저수지가 련이어 시공의 발파소리를 울렸다. 주덕해는 농업인재유치, 농업인재양성에도 진력했다. 연변의 “미츄린” 최창호, 사과전문가 관치승, 농업간부 김시룡, 벼육종가 최죽송, 육종가 류창은, 려근택 등은 모두 “주덕해호”에 편승하여 연변의 농업바다에서 힘차게 노를 저은 저명한 농업기수들이다. 농민들에게 기울인 주덕해의 관심은 지극히 인간적이여서 조화사회를 열창하는 오늘의 현실에서도 귀감이 된다.  
6    제1장 인간의 려정 5 - 민족교육의 청사진 댓글:  조회:656  추천:0  2014-05-18
제1장 인간의 려정 민족교육의 청사진   《중국조선민족사료집》(제2권) 354페지에는《주덕해를 회억하여》란 책을 사료로 제출하면서 주덕해가 꾸린 야학교를 다음과 같이 소개했다. “1935년 봄, 주덕해는 동북인민혁명군 제1퇀에서 류수처(留守处)사업을 하였다. 5월에 부대는 벌리현으로 전이하였는데 주덕해는 병(페염)으로 부대를 따라 떠나지 못하고 벌리현 관할밑에 있는 소석향 수전촌에 머물러 병치료를 하게 되였다. 그해 7월에 그는 수전촌 태창수농민네 집에 있으면서 비밀리에 유격대의 조직사업을 하는 한편 태창수의 집을 교실로 항일야학을 꾸렸다.” 주덕해가 북만땅에 꾸린 야학교는 당시 최용건이 보청현에 꾸린 “군정강습소”, 조상지가 바랑허골짜기에 꾸린 “제3군 사령부 전신학교”, 허형식이 방정현에 꾸린 “단기훈련반” 등 위인들이 꾸린 초기교육시설과 나란히 일제강점시기 중국공산당이 령도한 항일교육기초시설에 편재하여 사책에 기입되였다. 일찍 주덕해는 할빈제3지대시절부터 북만땅에서 이름난 “상지중학교”를 창설했고 연변진출후에는 연변대학 창건자의 한 사람으로 선후로 연변농학원, 연변의학원, 연변제1고급중학교, 연변제2고급중학교, 연변한어사범학교, 연변위생학교, 연변재정무역학교, 연변예술학교 등 고등학교와 중등전문학교를 창설하여 여러 분야의 민족 간부와 전문인재를 양성하는데 정책적인 지지를 했다. 연변대학은 우리 나라 소수민족지역에서 가장 일찍 설립한 민족대학이다. 일찍 1948년 연변전원공서 림춘추와 주덕해의 제의로 설립되기 시작하고 주덕해가 제2임 교장(1임 교장과 2임 교장에 관한 자세한 기록은 뒤장에서 따로 언급하기로 함)이 되였다.《중국조선민족교육사료집》 제2권에는 연변대학 창립경과에 대한 원시적인 사료가 있는데 거기에는 연변대학 창립경과보고, 창립선언, 준비위원회 등 일체 사료가 구전하게 등재되였다. 그중 창립경과에는 아래와 같은 대목이 있는데 그 당시를 가장 여실하게 반영하는 원시기록이기도 하다. “…그리하여 今番社會의 需要와 中國共産黨議 正確한 民族政策과 林專員(림춘추), 朱政委(주덕해) 두 首長의 熱誠的인 努力과 全東北人民의 원성으로 因하여 東北朝鮮人民의 熱狂的인 歡呼속에서 創設되게 되였다.” 연변대학의 창립경과보고서와 창립선언은 전반 연변민족교육의 창립선언이기도 했다. 하기에 연변대학은 연변의 문화교육사업발전의 축소판이기도 했다. “민족문화발전에서 첫째도 둘째도 교육이 선행되여야 한다.” 이는 주덕해의 일관적인 교육사상이다. 주덕해는 일찍 조선의용군 제3지대 정치위원으로 사업하던 1946년부터 시작하여 북만조선인집거지역에는 촌마다 소학교가 있게 되였고 목단강, 할빈 등 큰 지역에는 민영중학교까지 세워지게 되였다. 하지만 이 시기 국공내전시기라 민영학교의 운영은 정상적이 되지 못했다. 이러한 정황에 비추어 주덕해는 과감하게 분산된 민영중학교를 집중하여 공립학교를 세우는 조치를 취했다. 하여 1946년말에 할빈조선중학교 등 5개 중학교를 합쳐 조선족이 비교적 집중된 상지현 하동촌에 “송강성립제1조선인중학교”를 설립하였다. 흑룡강성 상지시조선족중학교 원 부교장 김진봉은 이렇게 말했다. “주덕해동지가 우리 3지대를 책임지고 제일 첫번째로 하신 사업가운데 큰 사업이라고 보면 우선 교육을 먼저 틀어쥐였고 우리 민족이 중국의 큰 땅에서 공산당의 령도아래서 일어설 때 교육으로부터 시작했다는 점을 먼저 부각시켜야 한다고 봅니다. 그 간고한 정황하에서 동북에서 공산당이 령도하는 첫번째 공립조선인중학교를 처음 세웠다는것이 쉽지 않고 제일 감수가 깊습니다.” 연변대학 박문일 전 교장은 “연변대학 교장을 겸했던 주덕해서기는 중공길림성위를 대표하여 종합대학인 연변대학을 4개 대학으로 독립분원제를 실시한다는것을 선포하였습니다. 그리고 전달이 끝난후 미리 준비해두었던 간판들을 주덕해교장이 직접 각 학원에 달아주었습니다. 그후의 력사가 증명하고있는바 당시 특정된 력사단계에서 연변대학이 4개 대학으로 분립된것이 이 지구의 대학교육발전에 큰 의의를 가지는 일이였다고 생각됩니다.”고 밝혔다. 연변에 부임되여온후 주덕해는 기초교육도 틀어쥐였는데 연변은 유치원교육으로부터 시작하여 대학교육에 이르기까지의 완전한 교육체계를 확립하고 건전히 함으로써 지적능력을 개발하며 인재를 양성하기 위하여 좋은 토대를 닦아놓았다. 해방초기 연변의 교육은 일정한 토대를 가지고있었지만 통일적인 포치가 없고 구성이 합리하지 않으며 교원이 모자라고 고급중학교가 한개소도 없었다. 게다가 자금난도 극심했다. 하지만 물러설수 없었다. 주덕해는 주당위 전문회의를 열고 고급중학교를 건립할것을 지시하였다. 긴장한 준비사업을 거쳐 마침내 연변고중이 창립되였다. 이 학교가 바로 오늘의 연변제1고급중학교이다. 1952년에 연변제2고급중학교가 마침내 창립되였다. 이렇게 되여 연변의 조선족과 한족의 교육구성이 비례를 맞추었고 평행으로 발전할수 있었다. 1952년 2월에 연변지구 조선족소학교 교육이 보급되였고 1958년에 연변지구 조선족초급중학교 교육이 보급되여 전국적으로 교육이 가장 발전한 지구의 하나로 되였다. 1965년에 이르러 소학교와 초급중학교가 각기 1274개소와 276개소로 늘어 연변은 전국에서 제일 처음으로 문맹이 없는 지구로 되였다. 공화국 창건과 동시에 설립된 민족교육현장인 연변대학과 연변의 중소학교들은 반세기를 넘는 세월을 지나오면서 거족적인 발전을 했고 “교육태평세대”를 구가하고있다. 주덕해가 마련한 민족교육터전은 세류속에서 부단한 개혁과 발전을 거쳤다. 유치원, 소학교, 중학교, 대학에 이르는 교육현장의 사슬고리가 단단해졌고 련동적인 효과로 교육대계가 형성하였다.  
5    제1장 인간의 려정 4 - 연변에서(1949—1967년) 댓글:  조회:791  추천:5  2014-05-17
제1장 인간의 려정   연변에서(1949—1967년) 중공길림성위원회에서는 공화국이 창건되던 해인 1949년 3월 20일에 주덕해를 연변에 파견하였고 그해 5월 22일 주덕해, 왕록, 문정일, 최채, 림민호 등 9명으로 중공연변지방위원회를 구성하고 주덕해를 중공길림성위원회 위원, 중공연변지방위원회 서기로 임명하였다. 그리고 두달이 지난 7월 13일에 동북국 농림부 비서장으로 전근한 문정일 뒤를 이어 주덕해를 연변행정독찰전원공서전원(주정부 전신)으로 임명하였다. 중국인민정치협상회의 연변위원회는 1956년 8월에 설립되였는데 도합 4기의 위원회를 구성하였으며 주덕해가 주석을 련임했다. 이렇게 되여 주덕해는 연변에 파견되면서부터 연변의 당정사업을 총괄하는, 명실상부한 당정지도자 제1인자 반렬에 올랐다. 이것으로 주덕해는 민족관을 실행하고 완성할수 있는 정치적인 지위를 확립했다. 공화국이 창건되기 직전인 1949년, 전국을 향해 진군할데 대한 주덕의 “중국인민해방군총부명령”이 하달되면서 전 중국의 해방은 초읽기에 진입했다. 1949년 6월 15일부터 19일까지 정치협상준비위원회가 북평(북경)에서 제1차 전체회의를 소집했다. 이 회의에는 전국적으로 중국공산당, 각 민주당파, 각 인민단체, 각 지구, 인민해방군, 각 소수민족지구 23곳(지구)에서 134명의 대표가 참가하였는데 이 회의에서 제1기 전국정치협상회의에 참가할 각 성, 시, 지구와 참가인원을 제정해 정치협상회의 조례와 공동강령, 정부방안과 선언을 기초하였다. 그리고 새 중국의 국기, 국가, 국장 도안을 제정했다. 주덕해는 134명속의 일원으로 북경에 가서 전국정치협상회의 준비회의에 참석했다. 이건 주덕해 본인에 대한 북경의 정치적인 “결재”이자 주덕해를 대표로 하는, 조선민족에 대한 중공중앙의 인정이기도 했다. 주덕해는 그해 9월 21일부터 30일까지 열린 전국정치협상회의 제1기 전국위원회의에도 참가하였다. 이 회의에서 180명의 전국위원회 위원이 탄생하였는데 주덕해도 위원으로 선거되였다. 중국은 다민족국가로서 합리하고 선진적인 민족정책시스템을 잘 제정하고 국책에 반영해야 장구적인 국가운영이 가능하다. 중공중앙은 새 중국이 건립하기전부터 민족문제를 정확히 처리할 결책을 제정하였다. “중국인민협상회공동강령”을 제정할 당시 모택동을 비롯한 당중앙은 다방면으로 론증하고 반복적으로 고려한후 민족자치를 실시할것을 결정하였다. 1951년 주덕해는 북경으로 가서 건국 2돐 경축활동에 참가하게 되였다. 그때 주덕해는 전국정치협상회의에서 “연변은 조선족자치구를 건립할수 있는 주관조건과 객관조건이 다 구비되였다. 때문에 중앙정부에서는 우리의 요구를 비준하여줄것을 바란다.”고 중앙에 반영하였다. 그리고 돌아오자 바람으로 연변조선(민)족자치구(주)주비위원회를 설립하고 사업을 다그치기 시작했다. 우리 나라의 고전민족리론에 근거하면 민족이란 같은 언어, 공동령역, 공동경제생활 그리고 공동문화생활을 통해 력사적으로 형성된 공동심리소질이 안정된 사람들의 공동체이다. 중국의 민족식별(확정)사업은 전후로 30년이란 시간을 거쳤으며 대체로 3개 단계로 구분할수 있겠다. 제1단계는 새 중국 성립부터 1954년까지인데 이 시기 주요하게 조사를 진행하는 동시에 1차적으로 민족성분을 확정지었다. 이중에는 이미 확정된 몽골족, 회족, 장족, 위글족 등 소수민족을 제외하고도 조선민(족)족, 장족, 바이족, 따이족, 리수족, 오르쳔족 등 38개 민족을 이 단계에서 확정지었다. 주덕해의 노력으로 조선민족은 제1단계에서 조선민족(1955년후부터 조선족)이란 민족적칭호를 확정지었다. 1952년 8월 9일 “중화인민공화국 구역자치실시요강”이 공포된후 8월 29일에 길림성 연변조선족자치구 제1차 각족 각계 인민대표회의가 소집되였다. 이 회의에서 연변조선족자치구를 성립하고 항일전쟁승리기념일인 9월 3일을 자치구 성립일로 선포하였다. 주덕해는 회의에서 중공연변지위를 대표하여 “길림성 연변조선족자치구인민정부 시정방침에 관한 건의”를 제출하였다. 주덕해는 “연변조선민족자치구는 중화인민공화국의 구성부분이며 연변조선민족자치구인민정부는 1급지방정권기관으로서 공동강령과 상급 인민정부의 결의, 지시, 법령에 근거하고 민족구역자치실시요강의 규정에 따라 자치구내에서 자치권리를 행사하며 사업을 진행한다. 연변조선민족자치구인민대표회의와 곧 성립될 연변조선민족자치구인민정부의 임무는 민족특징을 돌보며 민족형식을 통하여 민족평등정책을 관철하며 여러 민족 인민을 단합시켜 체계적으로 절차를 밟아 정치, 경제, 문화 건설을 진행하는것이다.”고 밝혔다. 이 대회에서 주덕해는 연변조선족자치구 제1임 주석으로 선거되였다. 연변조선민족자치구의 성립은 우리 당의 민족구역자치정책구현의 축소판으로 동북지역에 거주하는 광범한 조선민족들의 지지를 받았다. 자치구의 설립이 “나무를 심은것”이라면 자치주의 간부양성문제는 “나무를 가꾸”는것으로 된다. 주덕해는 민족간부의 문화자질문제가 민족정책을 집행하는 주요한 고리라는것을 간파하고 간부들과 간부양성사업에서 솔선수범했다. 주덕해는 민족구역자치정책을 집행하는 관건이 자치구 여러 민족이 정치, 경제, 문화 등 제반 분야에서 정치, 경제의 평등을 쟁취하고 연변을 조화로운 민족단결자치구로 건설하는것이라고 보고 거시적으로 민족간부등용, 민족간부비례 등 정책적인 정면과 세부적인 측면에서도 한치의 루락도 없이 철저히 집행할것을 요구했고 또 그 자신이 앞장섰다. 그는 한족간부와 한족지식인을 연변에 모셔오고 여러 면으로 보살펴주었는데 특히 과수기술원, 양잠기술원 같은 농업인재류치에 적극적이였다. 주덕해의 발의하에 1954년부터 연변에서는 해마다 9월을 민족단결선전월로 정하고 민족정책을 관철한 상황을 검열하고 민족단결모범을 표창하였는데 현재까지 정부행정에서는 그 전통을 이어가고있다. 주덕해는 여러 민족이 잘 단합되도록 하자면 주당위의 지도성원부터 잘 단합되여야 하고 본보기를 보여주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주덕해와 전인영, 요흔 등 한족간부들과의 사이에 맺어진 동지적우의는 현재를 살아가는 민족간부들의 귀감으로 되고있다. 민족간의 단합을 추진하기 위해서 주덕해는 중앙의 지시를 령활하게 집행하였다. 3년 곤난시기에 국무원에서는 주덕해의 요구에 근거하여 조선민족의 생활습관을 돌보아 조선족들에게는 사람당 입쌀 3근씩 더 공급하라고 지시하였다. 주덕해는 국무원의 이 배려를 한족을 비롯한 주내의 여러 민족에게 고루 돌렸다. 민족을 불문하고 주내의 60세 이상의 로인과 3살 이하의 어린이에게는 몽땅 입쌀을 공급하였다. 그리고 특정시기 조선족에게 더 주는 3자의 천표도 그 절반을 기타 민족에게 돌렸다.  
4    제1장 인간의 려정 3 - 갈림길에서 댓글:  조회:787  추천:1  2014-05-10
제1장 인간의 려정 갈림길에서 이 고민은(1945년 하반년부터 1949년 2월까지) 할빈에서 제3지대 정치위원으로 사업하면서 실천속에서 하나하나 행동으로 풀어가기 시작했고 동북행정위원회 민정처소속 민족사무처 처장으로 사업하면서 민족성격이 성숙되기 시작했다. 그 첫째 발단은 무산된 조선진출이라 할수 있다. 연안에서 주덕의 6호명령을 받고 조선진출을 목표로 심양까지 나왔다가 “포츠담선언”에 부딪치면서 무산되였는데 이는 사실상 “조선민족해방의 선봉대, 중국항일전쟁가운데서의 국제종대 선봉대”의 정치성격을 “격하”시키는 사건의 발단으로 되기도 한다. 주덕해에게도 민족공동체 활로와 소속에 대한 고민을 한층 성숙시키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무산된 조선진출은 주덕해에게는 일종의 선언이였다. 이 시기부터 주덕해는 중국항일출신의 민족간부가 자기가 소속한 민족(조선인)군체들이 조선으로의 이주만이 생존수단이 아니라는 구체성과 중국공산당의 령도아래 중국에서의 영원한 정착과 중국공민으로의 전환을 설파했던 시기이기도 하다. 이것은 사실상 민족군체가 중국에서의 소속감을 인정받고 나아가 정치, 경제, 문화 등 제반적인 사회지위를 확보해야 한다는 선언이였다. 주덕해의 이런 선언은 제3지대 정위로 사업하면서 민운사업에 뛰여들고 국민당과의 싸움에서, 민족군체들의 삶의 현장을 직접 눈으로 확인하면서 더 확고해졌다. 김정순의 회고에 의하면 할빈 제3지대 사업기간에 김정순을 비롯한 많은 교도대대 대원들이 할빈시구역과 그 주변의 방정현, 연수현, 주하(상지)현 등지에 거주하는 조선인들의 생활실태조사를 했다고 한다. 사실 광복전 동북에 거주하던 조선인들이 조선으로의 이주를 50만명으로 추정하는데 광복전이 1차 이주라면 광복후가 2차 이주로 고봉기에 달했다. 광복전후 이주민은 대략 백만으로 헤아린다. 이 민족대이동을 주덕해가 눈으로 확인한것이다. 특히 북만은 상대적으로 안정한 동만(연변지구)과 달리 이 시기 이주가 급물살을 탔다. 주덕해는 북만땅에 익숙한 사람이였고 민족의 생존환경개선이 민족공동체의 운명을 결정하는 요인으로 작용한다는것을 잘 알고있었다. 북만에서의 우리 당의 소수민족“정강”과 민족구성원들의 삶의 현장에서 주덕해는 조선인들의 생활상을 잘 파악했고 그런 현장을 통하여 중국 동북땅에 거주하는 민족공동체가 중국에서의 정착이 가능하고 중국공민으로 자리를 잡을수 있다고 인정하면서 실천적인 노력을 기울였다. 중국에서 사는 조선인들은 이주하면서도 습관적으로 자기를 이국에 와서 사는 교민으로 간주하는 경향성을 내재하고있었다. 하지만 토지개혁시기, 토지분여 여부를 두고 조선민족은 조선의 교민인가, 아니면 중국의 공민인가 하는 정치적인 지위와 실존적인 문제에 봉착하게 되였다. 이 문제에 대하여 주덕해는 아주 실제적으로 똑똑히 해명하였다. 연변텔레비죤방송국 전임 국장 김희관은 “…선친(김문보)은 생전에 주덕해서기에 대해 제일 탄복해했고 주덕해서기의 청백을 죽음으로 항거하리만치 주덕해서기에 대한 변호가 강경했는데 민족문제에 대한 주덕해의 공로에서 민족의 정치적인 지위확보에 기울인 노력이 첫째 공로라고 말씀하시군 했습니다… 주덕해서기의 이 노력이 결국 조선(민)족자치구 (주)창립이라는 결실을 맺었는데 따지고보면 조선족의 정치지위의 확보는 여기에서 완성된것입니다… 어느땐가 제가 어머니를 회억하는 수필을 쓴적도 있지만 어머니가 생전에 제일 처음으로 들은 연설이 1946년 상지하동으로 내려온 주덕해서기의 연설이였습니다. 이 시기 주덕해서기는 무턱대고 조선으로 나가는 길만이 생존의 길이 아니고 땅을 무상으로 나누어주는 중국에서의 생존이 오히려 더 실존적인 민족생존의 길이라고 력설했는데… 그 당시 조선으로 나가기 싫은 어머니에게는 주덕해서기의 그 연설이 그렇게도 귀에 쏙쏙 들어왔다고 늘 회상했습니다. 어머니의 이런 회억은 어머니 개인에게만 있었던 기억이 아니라 당시 동북땅에 거주했거나 중국에 남았던 모든 조선민족들의 공동한 감수가 될것입니다.”라고 말했다. 주덕해는 할빈으로 진출한후 자신의 민족관을 민중들에게 끊임없이 설파했다. “…우리들은 특정시기 이주민입니다. 하지만 이주민이라서 다시 조선으로 나가야 한다는 주장은 편면적입니다. 동북에 있는 대다수 조선인들은 농사지으러 이 땅으로 왔습니다. 하기에 이 땅은 우리들(민족)의 삶의 근간으로 됩니다. 이런 근본을 잊고 자기가 이 나라의 주인이란것을 부정한다면 무슨 자격으로 토지를 분여받을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승리의 과실은 우리 자신이 총을 들고 지키고 나아가서 이 나라의 공민으로 자기의 정치권리를 떳떳이 행사해야 합니다. 나라가 주인들에게 부여한 의무이기도 합니다.” “조선인(민족)들은 중국에 거주한지 이미 반세기도 훨씬 넘고 한족과 기타 다른 민족들과 더불어 이 땅에서 신개지를 터뜨려 밭을 개간하고 어렵게 생활터전을 닦아나갔습니다. ‘내가 이 땅의 주인공이다’라는 의식과 자세가 가장 중요합니다. 자기가 자기를 믿어야 비로소 남들이 믿어주는것입니다. 조선민족의 번영과 발전은 이런 자세가 기초로 되여야 합니다.” 그 당시 주덕해가 가장 심혈을 기울인 사업은 조선(족)인들의 국적문제였다. 당시 조선민족의 국적에 대한 관점은 여러가지로 엇갈렸다. 신중국이 성립된후에도 어떤 사람들은 “무산계급의 조국은 쏘련이고 민족의 조국은 조선이며 현실의 조국은 중국이다.”라는 다조국론을 제기하였다. 얼핏 듣기에는 현실에 안주한 “조국론” 같지만 제기법 자체가 특정군체(조선민족)들의 소속감을 상실시키는 위험한 발상이기도 했다. 주덕해는 미래지향적인 관점으로 “다조국론”을 반박했다. “…조선사람(조선민족)들은 다른 형제민족과 함께 광활한 북만, 동만, 남만 지구를 개척하였고 여러 민족 인민들과 함께 반제, 반봉건 투쟁을 벌려왔으며 중화인민공화국의 창건을 위하여 공동체의 힘을 기여하였습니다. 우리 민족의 이런 영광스러운 력사를 그 누구도 부인할수 없습니다. 조선사람들(민족)은 중화민족의 떳떳한 가족입니다.” 조선(족)인들은 백년을 넘는 세월을 거치면서 중국 동북지역에서 공동생활을 함으로써 정치, 경제는 물론 언어, 풍속 등 각종 문화내용을 집단적으로 공유했고 중국내에서 집단귀속감정을 공유한 문화공동체로 자리잡았다. 주덕해는 중국에 거주하는 조선인을 조선민족(족)이라고 호칭해야 하며 중화인민공화국의 기타 소수민족과 동등한 권리를 향수하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는 당시 중국에 거주한 200만 조선민족의 공동의 념원이기도 했다. 1948년 조선의용군 제3지대 정치위원으로 있던 주덕해는 정세발전의 수요에 따라 그해 4월에 동북행정위원회 민족사무처 처장으로 임명되였다. 이때로부터 주덕해는 중국에서의 민족문제와 민족사업의 중요성과 특수원리를 깊이 연구하였으며 중국에 사는 조선인들의 력사와 현실을 정시하고 민족문제에서의 정답을 찾기에 진력했다. 이 시기 주덕해는 민족문제에서의 과도기적인 사상을 완성하는 시기로서 1948년 12월 민족사업좌담회에서 민족구역자치안을 제출하면서 정부의 인정을 받게 되였다. 1948년 12월 주덕해는 길림성 성장 주보중이 주최한 민족사업좌담회의에 참석하였다. 동북행정위원회에서 길림성위에 위탁하여 주로 연변 및 동북 기타 지구의 조선인들의 문제를 토의하기 위해 마련된 회의였고 주최자인 주보중은 2년전(1946년) 길림성민족사업회의에서 “조선민족은 중화민족의 어엿한 일원”이라는 연설을 할만치 민족문제에 큰 중시를 돌린 사람이였다. 공화국 창립전야인 1949년 8월, 운남성으로 전근되여가기전에 중공중앙 모택동주석에게 편지를 보내여 “먼저 연길지구에서 민족자치를 실현”할것을 건의하기도 했다. 이 자리에는 주덕해외에 연변에서 림춘추와 림민호 등 민족지도자들이 자리를 함께 했다. 주덕해는 이 회의에서 당시 연변의 민족지도자인 림민호를 비롯한 연변, 길림, 심양 지구에서 온 민족지도자들과 처음 만났다. 림민호는 주덕해보다 8년 먼저 모스크바 동방로동자대학을 다닌 선배로서 일찍 룡정지구에서 반일에 투신했던분이기도 했다. 이 회의에서 조선민족의 귀속문제를 두고 세가지의 각기 다른 의견이 제기되였다. 림춘추를 대표로 하는쪽은 연변을 조선에 귀속시켜야 민족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할수 있다고 주장하였고 림민호측은 쏘련의 련방방식에 좇아 연변을 장차 자치공화국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의견이였다. 주덕해는 이 두가지 의견에 다 동의하지 않았다. 량측의 의견 모두 연변경내에 사는 조선민족의 력사와 현실에 립각하지 못한 주관적인 시각으로 중국의 실정에서 실현될수 없는 공론에 불과하였기때문이였다. 조선귀속여부는 국가간의 문제로서 이 회의에서 토의될수 있는 성질의것이 아니였고 자치공화국을 세우자는 생각은 중국국정에 맞지 않을뿐더러 민족 자체 발전을 위해서도 불리하였다. 주덕해는 중국이라는 이 땅에서 중국공산당의 령도를 받고 중국의 한 민족으로 살아가는 대전제에서 구역자치안만이 최선책이라고 력설했다. 구역자치안은 주보중성장의 대폭적인 지지를 받았다. 주덕해는 “문화적으로 조선인(민족)들은 이 땅을 개척하는 그 시기부터 중국이라는 특정구역안에서 생활근거를 계속 공유해온 민족으로 이러한 특성이 조선인들로 하여금 강한 민족적정체의식을 유지할수 있게 하였던 배경의 요인이 되였고 초기이민들이 지켰던 민족집단적인 관습이 소속군체들의 문화거주지를 고착시켰다. 그것은 배타성과 족장적인 관습이 아니라 타관땅을 개척했던 소집단체의 동질성확보와 정체성에 대한 부단한 확인으로 보아야 한다. 다시말하면 조선인들의 소속근거는 중국에서 땅을 개척하는 그 시각부터 시작되였기에 구역자치만이 중국현실체제에 적응되고 생존에 부합되며 우리 민족의 정치적인 지위를 확보할수 있다.”고 명토를 박았다. 따지고보면 조선민족의 정체성은 중국의 특정환경에 대한 지속적인 적응으로 발전되여왔다. 새로운 정치체제와 국가의 탄생은 새로운 규범과 생활환경의 개변 그리고 정치적인 권리욕구를 배출했다. 중국의 너그러운 풍토에서만이 가능한 소수민족집단체의 본능적인 집단행위이기도 하다. 중국의 조선민족은 대부분이 소집단, 대집단으로 마을을 이루거나 특정지역에 모여 산다. 특히 동북의 광대한 농촌지역에서는 거의 대부분의 조선민족은 공동체를 구성하여 생활했다. 연변은 조선민족이 집거한 구역으로 구역자치가 필요한것이다. 이는 당시의 정치와 사회풍토에서 조선민족으로 하여금 동질성을 유지시키고 민족의식을 고양시키는 기본요소인 동시에 전제조건이기도 하다. 이 민족회의가 주덕해를 연변으로 나오게 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였다. 그로부터 석달이 지난 1949년 3월 20일 동북행정위원회에서는 연변지구에 대한 지도력량을 강화하고 동북조선민족에 대한 통일적지도를 강화하기 위하여 길림성위의 요구에 따라 주덕해를 연변에 보내기로 결정하였다.  
3    제1장 인간의 려정 2 - 동방로동대학과 연안 댓글:  조회:863  추천:1  2014-05-03
제1장 인간의 려정 동방로동대학과 연안 다음은 쏘련(로씨야) 모스크바 “동방로동자공산대학”시절이다. 1936년 6월 중공벌리현위는 중공만주성위의 지시를 받고 주덕해를 쏘련에 파견했다. 중공중앙과 제3국제당주재 중공대표단은 우수한 항일간부들을 모스크바주재 “동방로동자공산대학”에 파견하여 중국혁명의 지도자와 간부들을 대량 양성했다. 동북에서도 많은 우수한 청년혁명가들을 추천하여 동북의 항일투쟁을 령도할 유격간부를 양성, 훈련시켰는데 주덕해도 여기에 선발되였다. 모스크바 “동방로동자공산대학”은 극동거주 쏘련인과 아시아인을 대상하여 공산주의운동의 지도자를 양성하기 위하여 1921년 10월 21일 제3국제공산당에 의해 설립됐다. 이 대학교는 “모스크바공산대학”, “극동공산대학”, “동방로동대학”으로도 불리웠다. 이 대학교는 중국, 조선을 비롯한 아시아나라들과 중동, 유럽 국가의 공산주의운동의 성장에 많은 영향을 끼쳤고 따라서 정치적인 거목들을 많이 양성하기도 했다. 명목상으로는 로씨야국립으로 되였지만 실제로는 경비 및 입학생 선별, 대학운영 등 모든 면에서 제3공산국제의 지시를 받는 산하기관이였다. 설립되여 몇년후 로씨야 국내학생 동방부와 국제부로 나눴는데 국제반은 조선어, 중국어, 일어, 토이기어, 프랑스어 등 7개 언어반이 있었다. 조선어는 1928년부터 개설했는데 연변대학의 전임 부교장 림민호와 박헌영의 안해 주세죽이 있었다. 모스크바 동방로동대학에 입학하려면 원칙적으로 해당 국가의 공산당 추천을 받아야만 하는데 주덕해를 비롯한 동북출신들은 중공만주성위의 추천을 받았다. 주덕해일행은 1936년 6월에 먼저 로씨야의 원동항구도시 울라지보스또크(해삼위)에 있는 “국제혁명가구원회”에 머무르면서 모스크바로 향발하라는 다음 지시를 기다렸다. 로씨야어로 “모쁘르”라고 부르는 이 기구는 세계의 혁명가들을 원조하는 단체였다. 울라지보스또크에 도착해서 향발소식을 기다렸지만 소식이 바이없었다. 조직의 지시대로 밖으로 시름놓고 나가지 못하고 비밀을 지키려고 사람들과의 접촉도 피하면서 중국 동북에서 오는 다른 팀들이 오기를 기다렸다. 울라지보스또크란 “동방을 지배하라”라는 뜻으로 로씨야 동해연안의 최대항구도시 겸 군항이다. 북극해와 태평양을 잇는 북빙양항로의 종점이며 씨비리철도의 종점이기도 하다. 1903년 씨비리철도가 완전히 개통됨으로써 모스크바와도 이어지게 되였다. 주덕해의 고향도 로씨야의 극동지구로서 여기에서 멀지 않은 도베야란 촌이였다. 하기에 주덕해에게는 낯선 이국땅은 아니였다. 철썩— 처절썩— 기슭을 때리는 바다의 파도소리를 들으면서 주덕해는 어머니 손에 끌려 조선으로 나가던 그 맨발의 시절을 아프게 회억했다. 슬프게 울리던 배고동소리속에서 마구 덤벼치면서 따라오던 바다갈매기와 파도소리는 아버지를 여의고 조선으로 다시 나가던 주덕해에게는 가장 아픈 기억으로 남아있었다. 아름다운 해변도시에서 주덕해와 리춘근은 동행들과 함께 반년동안의 지루한 기다림과 근 한달동안의 려정을 허비하다보니 그 이듬해인 1937년 1월에 끝내 “모쁘르”의 안내로 광막한 씨비리를 횡단하여 모스크바에 도착, 그 걸음으로 “동방로동자대학”에 입학했다. 한마디로 격동 그 자체였다. 10월혁명이 성공하고 사회주의가 정착된 쏘련, 그 사회주의를 이끄는 유서깊은 궁전과 붉은 광장, 아름다운 도시와 그속에서 여유를 즐기면서 살아가는 쏘련공민들… 쏘련땅은 열렬한 공산주의자들이 오매불망 그리는 메카였고 그만큼 성공한 사회주의의 성지로 성큼 솟았다. 수많은 서구의 진보적지식인들과 동방의 공산주의자들이 모스크바를 방문하고있었다. 그들은 자국에서 전혀 볼수 없던 사회리념과 가치들을 발견할수 있었다. 그리고 지주를 축출한 꼴호즈(집체)농장에서 농민들이 당당하게 국가의 주인으로 등장하는데 깊은 감명을 받았다. 더구나 비바람이 휘몰아치는 북만땅에서 일제에 저항했던 주덕해와 같은 열혈항일청년들에게는 격동의 나라였고 자유로운 “해방구 하늘”이였다. 주덕해와 같은 조선청년들뿐만이 아니였다. 혁명가라면 모두가 꿈꾸는 사회주의락원이였다. 실제로 모스크바는 세계혁명요람의 요람이였다. 윁남, 조선, 인도 같은 식민지의 반제운동가는 물론이요 중국, 일본, 중동… 등지의 공산주의자들까지 받아들여 특별례우를 해주고있었다. 동방로동대학은 우수한 공산당원들을 확보하고저 자질이 뛰여난 신진인물들을 흡수했다. 이 시기에 조선인들도 중국공산당 및 고려공산청년회의 추천을 받아 동방로동대학에 대거 입학하여 직업적혁명가의 길로 입문했다. 동방로동대학은 선후로 조선인학생 150여명을 배출했고 이들은 졸업한 뒤 국내 또는 조선에서 공산당활동에 주력하였다. 그외에도 이 학교는 선후로 류소기, 임필시, 소경광, 우란부, 채창, 하자진, 엽정과 같은 중국혁명의 거물급인물들을 배출했다. 1928년 조선반이 따로 개설되면서 림민호가 조선인들중에서 제일 먼저 입학한것으로 알려지고있다. 동방로동대학에 입학한 조선인들로는 선후로 림민호, 조봉암, 주세죽, 허정숙, 주덕해, 방호산, 리림, 리한무, 주춘길, 김일, 전우, 진반수, 진옥, 김삼 등이 있다. 동방로동대학은 쏘—독전쟁 발발직전인 1938년에 페교되였는데 주덕해는 제일 마지막 졸업생이다. 이 학교 졸업생들은 후에 대부분 연안조선혁명군정학교에서 다시 만났다. 주덕해가 동방로동대학에 입학할즈음에 페병이 도졌다. 하여 모스크바의 한 병원에서 한동안 치료하고 호전되여 다시 학교에 들어갔다. 주덕해의 이 병은 2년전(1935년 3월) 동북인민혁명군 제4군 제1사에 입대할 때 걸렸는데 밀산에서 료양하고 한동안 재발하지 않았지만 이때에 다시 도진것이다. 주덕해는 이 병이 자신의 생명을 해치는 지병이 될줄은 꿈에도 생각 못하고 다시 학교에 입학했다. 주덕해는 처음엔 중국반에 편입되였다. 하지만 동방로동대학교측에서는 주덕해를 비롯한 중국출신 조선인학원들이 중국어강의를 듣기 어려운 상황을 고려하여 8호청사로부터 12호대청에 있는 조선반으로 전학시켜주었다. 이 시기 주덕해의 한어구사능력은 차했다. 조선반에는 조선과 중국, 만주 등지에서 온 학생 20여명이 있었는데 그가운데는 방호산(李天富), 장복(림해), 리림, 전우, 주춘길, 리권무, 진반수, 유경룡, 진옥, 김일, 김상 등이 있었다. 대부분의 학생들은 성분이 복잡했는데 조선에서 직접 온 학생들도 있고 국내에서 추천된 학원들도 있었지만 신분과 소속, 배경 같은 인적사항들은 체크되지 않았고 모두 비밀이였다. 학생들도 당의 지시대로 엄격하게 규률을 준수하고있었다. 주덕해일행이 이 학교에 올 때에는 학교이름이 “모스크바 동방식민지반식민지리익연구학원”으로 고쳐졌는데 복잡한 학교명칭인것만큼 학원들의 신분과 소속국가도 복잡했다. “…산하에는 8개의 분원이 설치되여있고 중국반, 조선반, 윁남반, 필리핀반, 일본반 그밖에 일부 중동국가의 반들도 있었다. 학생들이 서로 다른 국가에서 오다보니 언어, 피부색갈, 생활 등이 차이가 심했고 정치, 사회, 문화 등 사회 제 분야에 대한 리해도 다각도였고 다층차였다…” 조선반과 중국반은 제8분원에 귀속되고 고급반과 초급반으로 나뉘여졌는데 주덕해는 고급반 즉 제1반에서 학습하였다. 혁명가양성을 목적으로 꾸려진 대학교는 기초적인 지식전수가 목적이 아니였다. 하기에 초급반은 말 그대로 문화정도가 매우 차한 학생들로 꾸려졌다. 하지만 코민테른에서는 국제학생들에 대한 대우를 중시했고 혁명후보들의 모든 편리를 제공해주었다. “…이들은 쏘련공산당사, 세계혁명운동사, 정치경제학, 사회발전사 등을 배웠고 군사학 과목으로는 주로 게릴라(유격)전술과목을 배웠다. 당시 중국반과 조선반은 코민테른 중국대표단(중국지부라고도 함)의 지도를 받았다. 중국대표단의 성원들은 왕명, 강생, 락보(洛浦), 왕가상, 진운 등이였다. 중국대표단의 책임자였던 강생도 한동안 이 학교에서 생활하였다.” 1923년 손중산은 더 이상 비밀결사나 군벌에 의존해서는 중국혁명이 성공할수 없다고 판단하고 국민당의 혁명의식을 고취하기 위해 공산당과 쏘련에 정치적제휴를 제안하였다. 쏘련과 중국공산당은 이에 적극 호응하여 1925년 10월 모스크바에 손중산의 이름을 딴 “손중산대학”을 설립하였는데 이는 선차적으로 쓰딸린이 제의했고 국공합작의 산물이기도 했다. “손중산대학”이 창립되자 동방로동대학의 부분적인 교원들과 학생들이 “중산대학”으로 전학했다. 당시 쏘련도 경제적인 여건이 시원치 않았지만 “동방로동자공산대학”과 “중산대학”에 대량적인 물력과 인력을 쏟아부었다. 로씨야측의 자료기재에 의하면 당시 두 대학교에 퍼부은 돈이 천만루블이였고 그외에도 당시 시세가 높았던 외화를 풀어 학원들에게 방학시에 집으로 오가는 경비로 충당해주었다고 했다. 중산대학에는 중국공산당의 거물급인물들인 등소평, 왕평, 박고, 장문천, 엽정, 왕약비, 채창, 하자진, 양상곤 등이 있었다. 1930년 “중산대학”이 페교되자 동방대학에서는 다시 중국반을 설치했다. 1937년 동방로동자대학은 다시 쏘련 국내학생만 입학시키는 동방대학과 외국학생만 수용하는 “민족식민지문제연구소”로 나누었는데 1938년에 이르러 모두 페교되였다. 4년제 동방로동자대학에서 주덕해는 2년 동안 학습했다. “동방로동자공산대학”시기 주덕해는 성공한 쏘련사회주의모델을 가슴으로 익히면서 공산주의신념을 더한층 굳혀주는 계기를 마련했고 따라서 중국혁명과 조선혁명을 국제적인 시야에서 폭넓게 바라볼수 있는 시야를 가졌다. 하기에 동방로동자대학은 주덕해가 혁명가, 정치가로 성장하는 중요한 “병참기지”였고 제1정거장이였다. 다음은 1939년부터 1945년까지의 연안시절이다. 당시 연안은 중국혁명가들에게는 성지였다. 연안출신이라면 누구나 우러러보던 이 시기 주덕해는 보탑산아래 연하기슭에서 “…중국의 광활한 땅에서 조선의 젊은이들 행진하네…”를 힘차게 부르면서 연안에서 중국혁명의 특수성과 승리에 대한 필승의 신념을 가슴에 담았고 국제공산주의혁명속에서 중국혁명의 필연성과 승리를 확신하면서 충실한 혁명가로 성숙했다. 주덕해는 팔로군 359려 718퇀의 한 특무련에서 지도원으로 군복무를 했고 8퇀에서 공급처 지도원으로, 다시 조선혁명군정대학에서 관리처장으로 일하면서 특정시기 민족의 지도자로 자라나는 과정을 밟아나갔다. 주덕해는 중국공산당원으로 항일련군출신이였기에 중국혁명에 대한 섭렵과 접수력이 빨랐고 자신을 인차 용해시켰으며 자신이 처한 민족과 중국의 운명적인 련대점을 알아가기 시작하였다. 그러면서 조선혁명군정대학에서 항일투사들과 의용대출신들이 연안에서 합류하고 다시 연안의 혁명기류에 편승하는 과정을 지켜보면서 중국혁명과 조선혁명의 련대적인 관계와 특수모식에 고민했다. 주덕해의 이런 자각은 필연적으로 민족의 정치 소재와 지위 그리고 번지수(국가소속)를 고민하는 결과를 낳았다.  
2    제1장 인간의 려정 1 - 소년시기와 청년시기 댓글:  조회:1049  추천:1  2014-04-26
    차   례   CONTENTS                 제1장 인간의 려정                                    1 제2장 메카—연안                                    36 제3장 북방대륙에서                                  92 제4장 연변의 하늘과 땅(1949—1967년)               205 제5장 고향산기슭에서 노래하리                       247 제6장 주덕해와 민족공업                            384 제7장 주덕해와 문화                                404 제8장 가슴이 시린 “문화대혁명”                      486 제9장 연변으로 돌아온 영령                          526 주덕해프로필                                       534 참고문헌                                           537 참고문장                                           541 제1장 인간의 려정 소년시기와  청년시기 주덕해의 원명은 오기섭(吴基涉)으로서 1911년 3월 5일(음력) 로씨야 원동지구의 한 시골마을에서 출생했다. 1920년 3월부터 길림성 화룡현 수동촌1)에서 소년기를 보내고 청년기부터 선후로 흑룡강성의 동녕, 동경성, 림구, 밀산 등 북만2)일대에서 항일에 투신하면서 1930년 중국공산주의청년단에 가입했고 1931년 중국공산당에 가입하였다. 1932년 흑룡강성 녕안현 동경성 우가툰공청단 특별지부 서기, 밀산현 전촌 당지부서기사업을 하고 1933년 8월 서대림자지부 서기, 1935년 2월 동북인민혁명군(항일련군) 제3군 신편 2퇀 류수처당지부 서기를 맡아하면서 후날 항일련군출신이라는 금빛경력을 쌓았다. 그후 1936년 제3공산국제(코민테른)에서 쏘련 수도 모스크바에 꾸린 “동방로동자공산대학(동방로동대학이라고도 함)”을 거치고 1939년에 다시 중국혁명의 중심인 연안, 동북의 할빈, 다시 연변으로의 회정(回程)을 보이면서 격조 높은 인생원정을 마쳤다고 하면 무난하련만 “문화대혁명”시기 실각하면서 무한이란 타관땅에서 불운한 생을 마감했다. 이것이 그의 비운의 프로필이기도 하다. 혁명가, 정치가, 교육가, 민족의 지도자로서 정립(挺立)된 주덕해의 비운은 그 시대가 산출한 비장함 그 자체였다. 주덕해의 인생려정을 축약해보면 대체적으로 몇개 단계를 거쳐 오기섭이란 원명으로부터 주덕해(1934년부터)라는 전사(战士)로, 인간으로, 혁명가로 거듭나고 완성하는데 이 몇단계에서 주덕해의 정치사상과 신념 그리고 민족사랑은 단계를 거듭하면서 승화되였고 종국적으로 인간 주덕해와 공산주의자 주덕해를 재탄생시켰다. 이는 격조 높은 중국혁명실천과 밀접하게 련계되고있다. 말하자면 중국혁명이란 이 실천의 장(场)은 수많은 주덕해를 산출했고 품덕이 고상한 인간들을 육성한것이다. 하기에 주덕해의 성장과 완성은 혁명력사와 민족지구라는 큰 그림에서부터 찾아야 할것이다. 그 첫번째 단계가 대체적으로 1922년부터 1936년 4월까지의 소년기, 청년기이다. 이 시기는 주로 오기섭으로 불리웠다. 소학교를 다니면서 룡정에서 김광진3)에 의해 초기공산주의를 접수하는 과정이 인생행로에서의 첫번째 전환점이기도 했다. 1917년 로씨야 10월사회주의혁명은 중국, 조선의 민중들을 각성시키는 거대한 사변으로 다가왔다. 1920년 초기부터 맑스—레닌주의가 여러 경로를 거쳐 중국, 조선에 파급되였고 연변지역으로 전파되였다. 이런 사회운동은 먼저 매체가 전위대로 등장했는데《공산당선언》을 필두로《로씨야공산당정강》,《우리 무산계급의 진로》,《빠리꼼뮨》 등 서적들과《공산》,《서광》,《새 세계》 등 신문잡지들이 룡정일대로 흘러들었고 그중에서도 선진사상을 가장 빨리 접수하는 대성중학교, 동흥중학교, 사립명동중학교로 먼저 흘러들었다. 당시 룡정일대는 조선공산주의자들의 활동무대였다. 엠엘파4)는 1926년 조선공산당 형성이후 화요파가 대세를 잡자 그에 대응하여 만들어진 분파로 조선공산주의운동은 한동안 엠엘파, 화요파, 서상파의 3파전이 진행되였고 연변지구에서는 대개 화요파와 엠엘파들이 활동했다. 엠엘파의 주요인물로는 김근, 안광천, 양명, 한위건, 고경흠 등이 있었는데 조선공산당이 와해된 이후에도 엠엘파는 만주활동을 재개, 당재건을 위해 노력했다. 룡정일대에는 엠엘파 공산주의자들의 활동이 가장 활발했는데 여기에는 김광진, 황기범5), 오원서(주덕해 숙부)가 있었다. 이 세 사람은 주덕해가 계몽을 거쳐 초기공산주의사상에 입문하는데 결정적인 작용을 한 “정치적인 멘토”로 알려져있다. 1927년 16살에 난 오기섭은 소학교를 졸업하면서 운명적으로 김광진을 만난다. 당시 김광진은 학교를 꾸리면서 반일애국사상을 널리 섭렵하고있었다. 김광진은 김약연6)이 창립한 사립명동중학교출신이다. 명동중학교는 수많은 반일민족독립운동가들과 사회주의운동가들을 배출했는데 “김광진은 시인 윤동주, 영화배우 라운규 등과 함께 유명한 반일애국주의자들이였다.”7) 김광진은 조선공산주의자, 후기에 항일련군에 참가했는데 주덕해에게 가장 결정적인 영향력을 행사했던 인물로 알려지고있다. 김근, 김현으로 변성명하기도 했던 김광진은 룡정일대에서 널리 알려진 인물로서 고려공산당인들이 조직한 반제애국단체인 청년회에 가입하면서 반일민족교육가로 성장했다. 1928년에 김광진은 룡정 대성중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는데 이 시기부터 김광진과 주덕해는 충실한 사제관계로서 주덕해는 김광진에 의해 공산주의사상을 섭렵하게 된다. 당시 김광진은 뜻이 맞는 7명의 청년들과 련계를 달아 “철혈단”을 조직하였으며 일본의 군정요인, 특무 및 친일주구들을 암살하려고 가만히 무기를 준비하기도 했다. 그 시기 김광진은 이미 중공녕안현위와 련계가 있었으며 북만지구의 일본 경찰과 헌병의 세력이 비교적 박약하여 항일무장을 조직, 건립하는데 편리하다는것을 료해하게 되였다. 그리하여 주덕해 등 6명의 청년에게 가짜“가정”을 이루어 녕안현 화련구에 가서 자리를 잡게 했다. 주덕해의 북만행은 김광진에 의해 행해졌고 이 길은 한층 더 치렬해지는 항일의 길이기도 했다. 그다음은 황기범이다. 중공만주성위의 직접적인 령도를 받은 황기범은 “붉은5월투쟁 행동위원회”지도부에 편입될 정도의 당골간으로서 몇년후 북만땅에서 주덕해의 직접상급으로 항일련군 정치위원으로 사업하기도 했다. 그리고 숙부 오원서가 있다. “…오원서는 교통이 편리하고 적들의 이목이 잘 미치지 않는 승지촌(당시 화룡현 용신사 수동골 동량어구)에 자기 친척의 이름으로 세집 한채를 맡고 투도구방면의 폭동지휘 최형익과 차정숙(친척사이)을 가짜부부로 살림을 차려주어 사람들의 이목을 흐려놓게 하였다. 집은 승지촌에서 좀 떨어진 독립가옥이여서 지하활동으로 쓰기가 편리했다. 이리하여 이곳은 당시 연변특별지부와 ‘붉은5월투쟁’지휘부 성원들의 비밀거점으로 되였다. 1930년 4월 24일, 승지촌 오원세(서)네 집에서 ‘5.1’에 대한 사업결의를 집행하러 연변에 파견되여온 중공만주성위 특파원 박윤서와 마준, 중공연변특별지부 서기 왕경(일명 리완룡), 위원 이복해(伊福海), 조선공산당(엠엘파) 동만도 책임자 김근, 원 조선공산당 당원 김철, 엠엘파계렬의 고려청년회 동만도책임간부 등이 참석한 련석회의가 열리였다.”8) 이 회의에 오기섭의 삼촌인 오원서외에 황기범도 참가했다… 이런 생활환경으로 미루어보면 주덕해의 소년시기와 성장시기에 주변인물들이 끼친 영향력을 알수 있다. 그후 동녕과 밀산을 거쳐 주덕해는 점차 각성한 혁명청년으로 성장된다. 이 시기 지하항일투쟁의 수요로 반일전사들이 다 변성명하듯 오기섭도 주덕해라고 이름을 바꾸었고 미구하여 제3공산국제(코민테른)의 결정에 의해 조선공산당이 해산되면서 일국일당의 원칙에 의해 중국공산당에 가입했다. 그리고 지하항일활동에 투신했다. 주덕해의 청년시기는 항일, 항전이라는 키워드가 가장 중요했다. 그리고 이 시기는 우리에게 현재화되여있는 근대성이 배태된 공간이다. 주덕해는 청년시기의 삶을 북만이라는 공간에 헌신하고 항일실천으로 투쟁의 진리를 이야기했다. 조선공산주의자들의 중국공산당가입은 중국혁명에 직접 참가하는 동시에 조선혁명의 완성을 념두에 두어야 하는 2중사명을 부여하기도 했다. 후날 주덕해의 프로필에서 이 시기의 한 단락의 력사로 인해 “문화대혁명”시기 반역자라는 억울한 루명을 쓰기도 했다. 반면 이 단락의 력사로 하여 프로필 첫장에 항일련군출신이라는 락인을 찍어주었고 항일련군계렬로 분류되기도 했다. 연안출신, 조선의용군앞에 항일련군출신이라는 주석이 따라붙은것이다. 당시 조선인 재중 혁명가들의 출신과 성분이 대개 비슷했지만 주덕해는 황포계, 태항산(의용군)출신은 아니였다. 하기에 주덕해의 일생에서 이 과정이 주덕해라는 인간의 사상과 신념을 주입하는 가장 전환기적인 과정이고 중국의 소수민족—조선(민)족 지도자로, 정치가, 혁명가, 교육가로 성장되는 기초적인 정치생활의 바탕이 된다.
1    《주덕해평전》머리말 댓글:  조회:2140  추천:6  2014-04-19
머리말 여기에 심원하고 깊은 이야기가 있다. 이 이야기는 지극히 평범하면서도 지극히 립지전적(立志传的)인 인간고사(故事)이다. 필자는 지난해 년초부터 공화국 창건과 더불어 연변을 위해 살았던 민족의 지도자—주덕해가 남긴 족적을 찾아 선후로 구릉이 파도치는 섬북의 황토고원, 로혁명근거지인 연안의 라가평, 남니만, 서안 그리고 북경, 천진을 거쳐 진한 안개가 휘전거리는 장강연안지구—호북의 53농장, 삭풍이 어지럽게 휘몰아치는 할빈과 그 주변의 현성들을 휘젓고 다녔고 연변의 6개 시, 2개 현, 4만 2천 7백평방킬로메터 되는 땅과 산과 강하를 주름잡으며 오르내렸다. 그러면서 끊임없이 위인의 인간에 감동했고 격조 높은 품덕에 격동했다. 그리고 그날의 주덕해와 그와 동시대를 살았던 그 사람들의 진실한 력사화폭을 복원하는 작업을 시작했다. 그러면서 사실속에 숨은 진실과 공덕, 인덕의 기를 날린 주덕해의 평전을 어떻게 쓸가 고민하기도 했다. 적절하게 말해서 어느 선에서 평전을 쓸것인가를 고민한것이다. 지금까지 연변의 산천에 편재하고 숨쉬였던 선인들치고 주덕해만큼 인덕이 웅후(雄厚)한 인물도 드물다고 생각했다. 충성, 로고와 애환으로 그려진 초상과 그 인덕이 따스하고 후덕한 사람도 드물었다. 그 인덕은 진한 삶이 휘황하게 작동했고 여러가지 불협화음이 가미되지 않은 순수한 “인물화” 그 자체였다. 흔히 연변사람들은 각종 잡지와 매스컴 그리고 민중들속에서 구전으로 전파된 주덕해의 위인을 알고있다고 자신한다. 하지만 정작 캐고보면 연변조선족자치주 당정지도자였다는 점, 자치주 성립의 기틀을 마련한 주요한 공로자였다는 점, 정무감각이 훌륭하고 매사에 공리성, 합리성과 실천성을 앞세우면서 공덕을 쌓았다는 지극히 막연하고 지극히 추상적인 이미지 그 자체뿐이였다. 따라서 그가 남긴 구체적인 업적과 인간적인 덕성에 대한 세부적인 료해가 희미했다. 한마디로 주덕해라는 그 이름에 그저 경원스러운 추존의 이미지만 부여하는 풍토가 일반화된것이다. 하기에 이제는 민중들에게 주덕해라는 구체성과 실체를 다시 교대하고 일목료연하게 펼쳐보이는 작업만이 남았다. 읽을수 있는, 그래서 볼수 있는 립지전적인 주덕해의 전설은 이렇게 탄생을 예고했다. 하지만 그것은 말처럼 쉬운 공정이 아니였다. 특히 주인공이 없는 현실에서, 주덕해란 인간에 대한 숙지도가 미약한 상태에서 무턱대고 추정하여 재생시킬수 없었다. 그리고 주덕해의 친우, 동사자들이 대부분 떠나간 현실에서 책과 잡지, 신문 같은 미디어에 반복되여 등재된 기사에서 그저 좋은 사람, 훌륭했던 사람, 연변조선족자치주 설립과 연변초창기를 함께 한 혁명가, 정치간부, 민족교육가라는 정평된 평가만으로 피와 살이 뛰는 생생한 주인공을 그리기도 힘들었다. 연변이란 지역의 무대에서 희로애락을 연출했던, 웃고울던 주덕해를 쓰고싶었다. 하지만 간혹 현재 생존중인 로동지들은 대개 주덕해의 당정 공적에 대해서는 열렬하게 소재를 제공해주거나 진심으로 공명했지만 정작 그의 구체적인 생활세부화에서는 말을 아꼈다. 간혹 글쟁이앞에서 말실수라도 해서 그것이 책으로 나갈 경우의 불필요한 구설수와 파장을 우려하고있는지도 모른다. 벽에 부딪친다는 말은 이런 경우를 두고 생겨난 말일것이다. 취재대상들의 불필요한 함구는 너무 각박했다. 주덕해는 혁명가, 정치가, 교육가이지만 역시 자연인의 범주를 벗어나지 못한다. 주덕해는 공산주의자였고 혁명가, 교육행정가였지만 필경 자연인으로 해석할수 있는 필연의 순환을 거듭하면서 인간을 완성한것이다. 주덕해에게도 결함이 상존했을것이고 사업상 착오도 있을건 자명한 일이다. 이런 인간 결함과 착오가 있기에 완정한 주덕해형상이 완성되는것이다. 하기에 주덕해란 인간적인 측면에서 접근하는것이 일종의 순서다. 평전의 매력 역시 인간을 그린다는데 의미가 있는것이기도 하다. 현재 우리들은 흔히 공산주의자를 너무 완미하게 표현하는 좌적인 관습에 길들여져있다. 한 혁명가의 년대기를 일정부분 인간적으로 접근하여 그린다는 자체가 대단히 어려울수 있다. 우리 당은 창건되면서부터 당원들에 대한 덕성을 매우 중시했다. 이 덕성은 민중을 위하는 본위적인 덕성으로 표현되였고 사업, 가정 및 제 분야에 모두 침투되는 가장 기본적인 소질이기도 했다. 이것은 흔히 인성화로 표출되고 백성들은 그 인성화 유무에 따라 당정간부들을 평가하는 시대가 도래했다. 우리 당은 과거로부터 공무원에게 륜리교육을 의무적으로 리수(履修)하라고 행정명령을 내리고 륜리교육을 받도록 각 기관과 지방정부에 지시하고있다. 소급해보면 류소기의《공산당원의 수양을 론함》 역시 륜리교육과 덕성교육이 주요 골자를 이루는것이다. 하기에 현재도 정부의 주요 지도자, 민생담당 공무원, 공산당원들에 초점을 맞춰 국가와 인민에 대한 충성(공덕), 책임감과 정직성을 고양하는데 주안점을 두고있다. 그만큼 덕성과 륜리는 공산주의자들의 기초적인 자세이다. 하여 필자는 취재시에 여기를 돌파구로 삼았고 꾸준하게 파헤쳤지만 필경 증인들의 부재와 시대의 차이점 등 각종 제한으로 예기한 목표에 도달하지는 못했다. 하지만 그래도 아직까지 알려지지 않은 주덕해의 덕성으로 일관된 진실을 조금이라도 파내서 그것으로 안심한다. 주덕해의 몸에서 연변이란 지역과 그 지역에서 살았던 연변사람들의 삶의 력사를 근원적으로 볼수 있다면 그리고 주덕해를 통하여 공화국 창건과 지구건설을 위해 일생을 바친 수많은 “주덕해”들을 볼수 있고 그들의 정신세계를 조금이라도 엿볼수 있다면 필자는 그것으로 만족할것이다. 가로세로 엮어진 주덕해의 인생려정은 중국혁명과 연변조선족자치주 그리고 우리 민족사 등 제반 분야에 축약되여있었고 이것이 이 책에 담긴 진정한 이미지일것이다. 이 책을 쓰면서 일찍 주덕해집필조에서 출간한《주덕해 일생》(연변일보사 기자 강창록, 중국핵공업부 관리간부대학 교수 일천, 주덕해 부인 김영순, 작가 리근전)이 있어 많은 도움이 되였다는 점을 밝혀둔다. 이에 특히 강창록, 일천 선생을 비롯한 집필조선생님에게 감사를 드리는 동시에 이 책을 쓰도록 물심량면으로 독려해준 길림성 당위와 정부, 연변조선족자치주 당위와 정부, 주당위 선전부 리흥국부장을 비롯한 박창욱, 위아려 부부장, 연변인민출판사 리성권사장과 북경민족출판사 우빈희사장, 주정협 문사자료위원회 허혜숙주임, 연변일보사, 연변라지오텔레비죤방송국, 주도서관 그리고 취재에 기꺼이 응해준 주덕해 생전의 전우들과 령도자들, 선생님들에게 감사를 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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