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국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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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    [민속기행] <늑대와 춤을> (최국철) 댓글:  조회:1474  추천:0  2012-07-31
민속문화기행69 "늑대와 춤을" 최국철 1 리영순선생이 집필한 《동물과 수로 본 우리문화의 상징세계》에서 작 자는“…동물들에게는 우리배달민족이 불어넣은 문화적 의미가 있고…우리 민 족의 커다란 문화적 상징의 숲에는 동물을 중심으로  하여 이루어진 동물 상징의 숲도 있는데…”이런 상징은 우리민족의 유구한 삶과 력사를 갈라 놓을수 없다고 했다. 그러면서 우리민족에 늑대에게 부여한 문화상 징적인 의미는 “위험과 잔혹성, 음흉함, 간교함,그리고 정력과 남성”등 도합 네가지라고했다. 일반화된 늑대의 문화상징이기도 하다. 필자가 소장한 해적판 씨디(CD)에는 미국의“늑대와 춤을”영화도 있다. 이 영화는1990년 미국에서 제작된 서사영화로서 미국의  남북전쟁과 서부개척시대를 배경으로 문명과 자연의 만남과 동화, 그리고 자연이 문명 의 파괴적인 힘 앞에 무력하게 사라지는 슬픈 풍경을 거친 서 부풍격 의 영화에 깊게 내장해서 전했다는 평을 듣는다. 영화에서 정절발전에 매개 물로 등장한  늑대가 가장 인상적이다. 지난해 필자가 섭렵한 책중에서 가슴을 시리게 엄습해온 서적이 무언인가 묻는다면 서슴없이 장룡이 쓴《늑대토템》이라고 대답할것이다. 장장 1천2백쪽에 가깝고 자수로 1백50여만자에 달하는 상하권을 몇칠동안에 독파했으니 스피드향연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것이다. 이 소설은 중국에 서 1800만부를 판매한 실적을 갖고 신화적인 소설이라고 격찬을 한것만치 초원의 늑대세계를 철저하게, 그리고 적라라하게 까밝히면서 일찍히 유라시아를 정복한 칭기스칸과 초원의 전사들이 늑대에게서 사냥법, 포위, 전쟁의 모든 기술을 배웠다고 쓰고 있다. 우리민족의 늑대상징과는 위대하다 할 만치 다르다. 작자는 책의 전반을 통해서  초원의 사람들은 늑대에게서 자연과 그 자연이 배태하는 열정을 배웠고 늑대 토템에서 세상을 이끄는 강인한 정신력과 불굴의 생명력을 배운다고 절규하다 싶이 쓰고 있다. 하기에 작가는 늑대를 초원의 혼으로 상정했고 늑대무리의 생존 방식, 본성과 본능,강한 단결정신 가족에 대한 책임감, 지혜와 용맹스러움과 초원의 군사를 길들이고 초원의 생태를 보호해왔다는 사실에 감동하고 있다.그리고 수천년동안 이어 온 유목민의 늑대 숭배와 유목민 족의  신비로운 토템의식에서부터  늑대와 인간의 벌이는 생존의 전쟁과 두뇌싸움, 그리고 유목민족의 전통적인 삶의 방식이야 말로 하늘과 통하는 태초본연의 모습이고 에너지가 넘치는 사회의 본래 모습이라고 열창하고 있다.산야의 바람을 가르던 늑대의 영혼찬가이고 늑대토템의 승화다. 생물 학적인 늑대이면서도 인문학적인 늑대, 현실의 늑대인 동시에 력사속의 늑대라고 문학평론가들이 칭찬 할만도 하다. 유목민족의 후예라고 자칭하는 우리민족은 늑대에 대한 상징은 야비할만큼 린색하다. 그리고 이런 늑대를 우리들은 흔히 승냥이라고 통칭한다.하지만 학명으로 볼때 승냥이와 늑대는 다르다. 동물학자들 사이에 분류학적인 론란이 있지만 일반적으로 승냥이는 체대, 몸무게에서 늑대보다 작고 가볍다고 보면 된다. 민간에서 지금도 육식을 좋아하는 사람이거나 행동이 민첩한 사람을 일컬어서“말 승내(말 승냥이)”라는 별명으로 많이  표 현 하는데 여기에서“말승내”가 늑대다.우리민족은 늑대라는 말보다 승냥 이라는 명칭에 더 익숙했고 늑대, 승냥이라고 엄격하게 분류하지도 않았고 통털어서 승냥이라고 불렀다. 분포지역을 보면 승냥이가 중국을 비릇한 남아세아 지역이라면 늑대는 만국적인 범위로 분포되여 있다. 지난 세기 시골에서 제일 사납고 잔인한 산짐승을 꼽으라면 아마 승냥이를 첫째로 꼽을것 같다. 그만치 승냥이는 돼지를 기르는 농가에서 철저하게 경계해야하는 해로운 짐승이였는데 흔한 무리를 지어서 마을을 습격했다. 그 시절 이른아침 콩밭기음 매러 가면 승냥이를 만났고 무심결에 집에서 사육하던 개가 따라 왔나 생각했다가 반가운 기색이 없는 개가 이상해서 다시 살펴보니 승냥이더라는 이야기는 아주 흔했다. 이런 승냥이가 집 돼지를 너무 습격하여 돼지우리 울짱을 높게 세우고 다시 그 우에 새끼로 촘촘한 그물을 떠서 덮었다. 문화대혁명시기 우리 마을에 창섭이라 이름한 겁 모르는 강강한 청년이 있었는데 서리가 내린 늦가을 새벽녘에 집에서 기르던 돼지를 물고  논밭을 거쳐 산으로 퇴각하는 승냥이무리를 향해 벼짚단에 불을 달고 추격해서 끝내 빼앗아 온 일도 있다. 그 당시 어른 들은 산에서, 혹은 인적기가 없는 들길에서 승냥이를 만나면 절때로 승냥이에게 등을 보이지 말고 정면으로 마주서라고 했다. 승냥이는 뒤로 덮치는 음흉한 근성을 있다고 했다. 호랑이와 곰이 우리민족의 구전문화속에서 성수(圣兽)로 대접받았다면 늑대는 간교함, 녀자를 울리고 바람을 잡는 남자의 부정적인 상징을 남기면서 인간들이 멸종위기라고 출시한 적색목록에 1급 리스트로 이름을 올렸고 절멸될 위기에 몰려서 아슬아슬하게 외줄타기를 하게 되였다. 우리 들은 이때에야 관용을 베풀면서 늑대의 존재를 아련하게 추억했고 좋은짐승, 나쁜짐승으로 편가르기를 했던 그제날을 참회했다. 특히 이 근년에 메돼지가 기하급수로 늘어나면서 부터 농장물에 피해를 주자 시골사람들은 늑대를 외우기 시작했다. 메돼지의 천적은 호랑이와 늑대였 다. 이렇듯 동물숭배, 멸시, 경시는 매우 포괄적인 개념같은것이고 민족의 다름에 따라 부동한 문화상징과 의미지를 바탕으로 하기에 민속문화적으로 접근이 가능한것이다. 올해는 유엔이 정한 “생물다양성의 해”다.  인류위주로만 편성되는 헐거운 자연에서 공생과 조화의 자연으로 다시 변천될 때면 “늑대와 춤을” 이 영화제목이 영화주인공 이름만이 아니고 진짜로 늑대와 춤을 추는 그런 청평세계가 올것이다.
26    독서무한 댓글:  조회:1181  추천:0  2012-07-31
연변문화현장 투시-11 독서무한 최국철 연변일보 문화부장 1                                                                    세초부터 인민넷 문화채널에서는 네티즌들의 투표로 지난 1년간 중국 문화계의 10대 빅뉴스 평의활동을 벌리는데 지난 1년동안에 발생한 대표적인 20대 빅뉴스가 후선에 올랐다. 그중에 열번째 빅뉴스가 “독서사회를 건설, 중앙지도자들이 독서를 관심, 국무원 명년(2010년) 전민독서절 정립의안 제출” 뉴스인데 자세한 내용을 살펴보면  중앙선전부, 국가신문출판총서에서 전민독서를 권장하고 범사회적으로 독서풍토를 고양하기 위하여서 련합으로 “전민독서활동을 추진할데 관한 통지”를 발부했다는것이 첫째 평의 리유고 둘째로는 호금도총서기가 간부들에게 한 독서관련 지시와 국무원 총리 온가보가 4월 23일 세계독서의 날에 참가하여 전민들에게 보낸 독서관련 메세지다. 그리고 4월 25일 국가출판서 서장 류빈걸이 제19기 전국책박람회에 국무원은 2010년을 “전민독서절”로 결정하고 의안을 전국인민대표대회에 이첩할것이라는 소식이 세번째 평의 리유였다.    분명 독서형사회를 건설하려는 관방의 굳은 의지로 읽혀지는 대목이다. 2 4월 23일 “책의 날”은 지난 세기 1995년 유엔총회국제련합교육과학문화기구(유네스코)가 세계인의 독서 증진을 위해 정한 날이다. 공식명칭은 “도서와 저작권의 날”이고 “독서의 날” 혹은 “책의 날”이라고 부르기도 한다.만국은 현재도 책의 날을 맞으면서 독서관련 각양각색의 캠페인을 조직하는데 유네스코로부터 시작하여 국가별, 기관별, 형태별, 주체별로 각양각색이다. 유네스코 사무총장, 아프리카련합 사무총장, 유럽의회 사무총장 및 각국 관계 장관(부장) 및 유명인사들의 독서관련 메시지를 발표하고 기념우표,포스터(홍보물),책기증, 독서관련 주제토론회 개최,네트워크 활용, 특별판대마련, 서점과 도서관이 합작하여 작가와 함께 하는 TV토론회, 저자의  책기증행사 , 기념콘서트  ,페스티벌, 포럼 및 출판관련 세금감액등 독서진흥기금조성사업까지 밀착되면서 켐페인은 고봉으로 치달아오른다.한마디로 관방,문화계, 출판계를 비릇하여 민중들의 독서의식을 고양시키자는 취지의 행사다. 중국도 례외가 아니다. 중국은 독서의 날이 정해지기전부터 관방주도로 전민독서 캠페인을 벌리고 범사회적 독서문화풍토를 고착시키는 일련의 조치들을 출법시켰다.  연변지역에서도 이 날을 기점으로 10월 23일까지 독서절로 명명하고 6개월 동안 관방형 독서 관련 종합문화캠페인을 주도한지 지난해로 세번째를 맞는데 4월 23일을 기점으로 연변지역은 독서절에 진입했고 같은 해에 성과를 긍정하는 페막식까지 치렀다. 관방의 주도한 이번 독서캠페인은 사회적인 독서대를 구축하고  넓은 마당 쓸기를 하여 민중들의 큰 호응을 이끌어냈다는 측면에서 후한 점수를 따고있다. 하지만 아직까지 세부적인 조치가 따라서지 못하고 이벤트식으로 연변사회의 구석구석까지 미치지 못하고 소외되는 지역, 군체들이 많아 파급효과가 미비했다는 촌평에서는 자유롭지 못한다는게 필자의 아쉬움으로 남는다. 쇼핑가는 군상들로 흥성거리고 립추의 여지도 없는데 비해 문화선도구역인 서점가나, 도서관은 쌩한 가을바람이 일고있다. 단적으로 서점가가 흥성거리고 서점주인들의 주머니가 불룩해지는 시점이면 범사회적인 독서형사회라고 볼수도 있겠다. 3 근대는 물론 고전에는 오늘의 현실에서도 독서관련 지침서로 되는 서적들과 고사성구들이 참으로 많다. 공자의 위편삼절(韦编三绝), 맹자의 독서상우(读书尚友)는 물론 월광독서, 재가독서 등 수많은 개념용어가 있어 일일이 거론하면 오히려 메마른 구호식으로 전락되기 십상이다.현시대는 온라인, 오프라인 등 각종 경로를 통한 각종 정보가 가리로 쏟아지고 지식선택의 성역이 무변광범하다. 하지만 독서풍토라는 사회적인 코너를 엿보면 큰게 비탄하고 버럭할만치 궁페하다. 서적매대에서 정예한 인문학적 서적이 외면받고 인격도야를 위한 위인평전, 인생의 가치를 알려주는 지침서 책뚜껑에는 먼지가 부옇게 올라있는 실정이다.  우리 민족지역의 일그러진 독서문화형상만이 아닌 중국 전역에서 류행병으로 앓는 독서풍토이다. 서점가는 아무 때 보아도 한가롭게 하품하는데 연길의 어느 꽤 큰 서점에서는 필자 혼자만이 기웃거려본 외로운 기록도 있다. 유네스코에서 선도하고 글로벌화로 번져지는 독서캠페인을 요란하게 자랑하는걸로 미루어보면 독서문화의 황페함은  지구촌의 남북동서촌에서 통약적으로 앓고 있는 질병 같다. 연변에는 관방의 웹사이트를 비릇하여 각종 동호회가 재글재글 끓고있고 온라인카페를 비릇한 각종 사이트가 비온 뒤 죽순같이 솟구쳐나오지만 유독 독서동호회, 독서카페, 독서모임, 독서와 인생의 관련토론회 같은 온라인, 오프라인 고급단체들은 눈에 뜨이지 않는 삭막한 실정이다. 4 중국청년보 웹사이트1월 5일자 소개에 의하면 중국도 이제 출판,인쇄업의 민영화를 적극 추진하고있다고 밝혔는데 정책이 정하는 범위내에서 민간기업은 각종 인쇄와 출판물 간행, 그리고 출판,인쇄물 판매를 위한 영업활동이 허용돼 국유기업과 경쟁할수 있는 공정한 기회를 보장받게 된다고 밝혔다.작년에 중국은 신문출판업 매출액에서 1조원을 돌파했다. 현재 신문이 1943개, 간행물은 9549종에 달하고 국유도서출판 기업이 580개, 그외에도  민영, 외자 관련 기업이 총 12만여개에 달한다.이리하여 도서출판, 신문,멀티미디어출판  품종과 총수는 5년 동안 련속적으로 세계 제1위를 차지한다고 했다. 하다면 이런 방대한 출판물은 방대한 독서군체와 황금 파트너 관계를 설립해야 비로소 소화할수 있지 않겠는가. 이제는 팔짱을 끼고 난 모르오 시대가 아니다. 독서가 당위론적인 문화 대세로 앞장서자면 우리들에게는 다시 스타트를 정하고   독서교육을 다시 정비해야 하는 과업이 우선적으로 남는다.범사회적으로 해맑은 독서문화를 창달해야 하고 지역적인 문화의 연실력을 자랑해야 한다. 독서는 실력으로 새 시대를 탄생시키고   자신의 인격을 함양하고 완성하는 자신만의 고급문화활동이라고 인지하고  독서는 내가, 우리가 평생 해야 하는 숙명적인 직업이라고 인지 할때면 독서무한이라는 진리를 깨칠것이다.  
25    선도구와 콘텐츠화 댓글:  조회:1160  추천:0  2012-07-31
선도구와 콘텐츠화 ■ 최국철 국무원에서 장춘-길림-두만강지역 개발개방 프로젝트를 국가급으로 격상시키면서 두만강류역  개발개방이 탄력을 받게 되고 동북아 경제벨트를 구성하면서 물류전진기지화로 나가게 되였다. 현재까지 국가에서 유일하게 비준한   변경개발개방지역이라면 이미 국가전략으로 되였음을 이미한다. 하지만 국가에서 승인하였다고 하여  선도구가 단시간내에 뚝딱  거칠게 만들어지는것이 아니고 경제적인 여건만 완성되여 되는것도 아니다. 정치, 경제는 물론 종국적으로 문화적인 내함이 적절하게 혼합되고 경,연성적인 전진문화가 뒤바침하는 등 여건들이 앞서가야 비로소 가능하다는게 필자가 이 글에서 말하려는 요지가 되겠다. 선도구에서의 경, 연성문화환경의 적극적인 재조합이라는 설명이다. 특히 연변지구- 두만강지역은 예로부터 변도, 오지라는 대명사가 붙은것만치 변두리문화의 속성이 상징적으로 따르고 와류(涡流)가 발생할  지역문화적인 제한성을 갖고 있어 처처에 허점들이 잔존한다. 두만강지역의 문화가 껄끄럽다는 촌평에서도 자유롭지 못하다. 하지만 민족지구의 특성과 지리적인 특성을 고스란히 간직하여 현재 이런 특성들이 오히려 경제건설에 접목되고 관광에 한몫을 할수있다는게 전문가들이 평이다. 이런 특성들은 기존의 경, 연성 문화환경에 고스란히 내재하고 있는데 이것을 부추기고 적극 살리자는 말이다. 그러자면 여러가지 방면에서 종합적인 대책을 출시해야 하겠지만 여기에서 지적하고 싶것은 문화콘텐츠화를 들수 있겠다. 콘텐츠화는 내지는 물론 국외인들에게 가장 빠르게 접수되는 문화대상으로서 인터넷이나 컴퓨터 통신 등을 통하여 제공되는 각종 정보나 산업적인 내용물을 말한다. 두만강지역의 경, 연성 문화환경과 민족특성, 관습이나 창조물을 집약하고 총체화하는데 여기에는 선도구 인문환경소개, 홍색관광, 민속관광 등 경성문화환경도 포함된다. 이런 인문환경을 현대적인 기기를 통하여 만방에 알리고 더불어 경제적인 부를 창출하는 것이다. 상기한 내용을 실현하자면 문화콘텐츠란 개념을 탑재하고 인재 육성부터 시작해야한다. 정부에서는 먼저 콘텐츠 산업인재 육성 과제를 완성하여야 하는데 연변의 교육환경에서는 이런 인재를 얼마든지 육성할수 있다. 선도구의 문화 내함은 이렇게 완성되여 간다.  
24    두레는 우리에게 무엇을 남겼나 댓글:  조회:1318  추천:0  2012-07-31
두레는 우리에게 무엇을 남겼나최국철두레란 원시적 유풍인 농촌공동로동체 조직이다. 다시 말하면 로동협력, 상호부조, 농악놀이, 등 살아가는데 유조함을 목적으로 마을 단위로 운영되는 조직체이다. 농사철에는 서로 협조하여 농사에 힘썼고 여느 조직원에게 경조사가 생겼을 때에는 여러가지 놀이를 하며 함께 즐겼고 함께 슬퍼하기도 했다.하지만 현재 조선반도 농촌의 두레조직은 사회특징으로 이미 사멸되였다고 보아도 무리가 없을것 같다. 그저 지금 한국에서, 연변에서 성행하고 있는 자잘한 동호회가 두레의 유물이 아닌가 의심해 볼수도 있다.    조선족들은 이주후에도 두레조직을 운영했다. 가장 대표적인 두레가 상여두레인데  왕청현 천교령진 태양촌에는 현재까지 상여두레가 존재하고 있다. 그 외에도 마을마다 기음매기, 길쌈 등 각종 로동에도 자잘한 두레가 성행했는데 우리의 이민1-2세들이 가장 흔히 사용한 낱말이였다. 하지만 광복이나고 공화국이 창건되면서부터 농업생산로동의 집단화로 되고 자영민이 사라지면서 두레조직도 송두리채로 사라져버려 지금의 사람들은 두레란 명사도 잘 알지 못하고 있다. 하지만 아이러니한것은 지난세기 80년대초 농촌농업집단화가 사라지고 개인영농이 창제되면서 슬그머니 두레조직이 재발했는데 현재까지 가장 대표적으로 남아 있는 농촌두레는 탈곡두레이다. 다른 말로는 품앗이라고도 할수 있는 이 탈곡두레의 출현은  영농법의 발전과 그 특징에 의해 출현된것이다. 파종으로부터 김매기까지(현재는 화학살초)는 기계힘을 빌면 되지만 한전곡식탈곡은 아직까지 기계가 동원되더라도 여러사람들의 참여와 협력이 없으면 도저히 안되기때문이다. 탈곡철이 다가오면 여러집들은 사전에 협의를하고 탈곡은 두레로한다. 이와 같이 협업의 성격을 띤 공동로동은 연변의 농촌에서 현재까지 잔존하는 자원로동조직이다. 옛날의 두레는 대체로 모내기, 기음매기, 추수를 마친 뒤 공동작업에 직접 참여한 사람들이 모여 막걸리를 마시고 농악에 맞추어 한복자락을 휘날리면서 -화쟈쟈- 둥기당-여러 가지 연희를 곁들여 뛰고 놀았고 농사로 인한 로고를 잊고 지속적인 결속을 재확인했다면 현재는 두레는 일이 끝나 풍물을 잡거나 즐기는 자리는 사양되였다.이성이 어울려야 흥이나는 농악은 기형적인 연변농촌현실과 그 사정으로 인해 참여도가 미비해졌다.그리고 옛날의 두레는 마을의 모든 농민이 그 마을의 경작지에 대해 자타의 구별 없이 일제히 조직적으로 집단작업을 했고 각 집의 경지면적과 노동력에 따라서 나중에 임금을 결산하여 주고 받는 공동노동의 형태로 나타났다면 현재의 두레는 그 복사범위가 크게 위축되였다고 보아야하고 아주 가벼운 형식으로 잔존한다. 기계의 동음만 울리는 현재의 농사는 가대기도 사라졌고 기음매기도 사라졌다. 모든것이 기계로 대체되였다. 두레가 존재할수 있는 토양이 사라졌다는 설명이다.   기실 두레는 조선의 고대사회로부터 대내적으로는 로동단체,도의단체,유흥단체(농악)의 의의를 가졌고 대외적으로는 반항단체의 뜻을 가졌었다. 이것이 공통체의 힘이고 두레가 존재할수 있는 리유였다. 하기에 농촌에 파급되고 상술한 두레를 파생시킨 것이다. 근대사회이전의 농민은 국가적인 규제보다 강력한 촌락의 규제, 즉 두레 아래에서 생활하였고 농민의 기본적인 생산,생활의 령역은 그러한 촌락규제에 의하여 장악되어 있었기 때문에 두레를 떠나서는 생활이 보장되지 않았다고 볼수  있다. 현시대 공동체란 개념은 애매하고 여러가지 뜻으로 파생하고 있다. 하지만 두레의 공동체는 그 힘은 무시하지 못한다. 하기에 두레가 우리들의 생활민속에서 협력을 약속한 조직체였다는 점, 그리고 기계혁명이 출현되지 못한 당시 농촌과 농업발전에 유조했다는 점을 잊지 말아야할것이다. 
23    “말” 달리는 금추(金秋) 댓글:  조회:989  추천:0  2012-07-31
“말” 달리는 금추(金秋)최국철 소설가 연변일보 기자1 가을, 다른 말로 금추(金 秋)라고도 부르는데 이는 옛 사람들이 오행의 하나인 금(金)을 가을과 짝을 지어 부르게 된것이다. 춘초가 싹트고 만물이 소생하는 새봄에도 “금춘”으로 격상시키지 않았지만 가을만은  금추라면 가을의 풍성한 이미지를 구가한셈이다. 일반적으로 가을이라 하면 북반구에서는 천문학적으로는 9월 23일 추분부터 12월 21일 동지까지를 말하나 절기에서는 립추(8월 7일)부터 립동(11월 7일) 전까지를, 기상학에서는 9월-11월을 가을이라 한다. 그런데 여기에서 지나칠수 없는것은 남반구의 가을은 반년이 어긋나서 3∼5월이 된다는 점이다. 우리들의 가을묘사는 참으로 색채가 다양하고 단풍잎같이 울긋불긋 아름답게 묘사되는데 가을철에 가장 많이 동원되는 사자성어가 이른바 천고마비 (天高馬肥)라는 성어다. 말그대로 하늘이 쪽빛으로 열리고 말이 살진다는 계절이다. 기실 가을에 접어들면 강수량이 줄고 공기중의 습도가 낮아져 맑은것도 있지만 정확하게 말하면 대기의 대류가 여름보다 약해서 먼지가 고공으로 올라가지 못하기때문에 가을하늘이 코발트색으로 맑고 높아보인는것이다. 2치심상존이라는 성어는 어렸을 때의 마음이 그냥 남아있다는 말이 된다. 대개 어렸을 때 보고 겪은 일상들이 가장 진하게 남아있는데 그중에는 “찬개”라고 일컫던 가요도 기억되는 대목들이 많다.가장 기억에 남은  노래중에는 “약소민족해방가”라는 노래와 제목도 모르는 노래가 한수 있는데 가사는 대략 아래와 같다. //가을 하늘 청명하고 달은 밝은데 //외기러기 짝을 잃고 헤매고있다//…첫 구절이 대개 이렇게 흘러나오고 뒤이어 만주벌판이 어찌고 저쩌고 하는걸  미루어보면 “선구자의 노래” 와 거의 비슷한 시기에 창작되지 않았나싶어지고 독립군시절이나 항일계렬의 애정가요와 비슷해서 “중국조선족민간음악집”과 “중국조선족가요대전”을 뒤적거려보았지만 끝내 찾지 못했다. 이 노래는 나의 고향에서 항일련군에 참가했던 지부서기어른이 오락놀이에서 많이 불렀는데 소야곡계렬 같이 음률이 애조적인 색조를 띠여서 금추라는 계절적인 이미지와는 상충된다. 지금도 가을이 되면 이 노래의 음률이 떠오르면서 계절병을 앓는다.  가공망상이라도 정서의 조률이나 도야가 없다면 자칫 가을을 타는 고독한 사람으로 전락되기 십상이다.3가요가 어찌되였던간 가을은 금추가 옳고 “말”이 달리는 계절이 옳다. 온통 황금색으로 칠한 촌야로 소슬한 가을바람이 서산에서 자락을 펼치고 후루루 “말” 달리면 가을하는 농부들의 등짝에 찬바람이 스쳐지나고  그 뒤엔 가을의 저녁색조가 서산에 걸터앉으며 빨간 고추가 타는 초가집지붕우를 희롱한다. 하얀 새초가 역광속에서 찬란하게 빛나고 그 아래 돈들락밑에 누런 풍경이 장단치면서 여울치는 곳, 연변의 어느 산야에서도 흔히 볼수 있는 한자락 가을풍경이다. 평생 농사일에 찌든 농부들에게는 이런 풍경이 랑만이 될리 없고 되려 잔인한 세월의 빠른 류속과 야속뿐으로 비쳐진다. 뒤이어 가을이 시작되는데 가을중에서도 벼가을이 가장 진풍경이다. 이때면 남녀로소가 떨쳐나선다. 가을에서의 연장은 낫이다. 일솜씨가 잰 사내일수록 낫을 선들선들하게 세우는데 낫이 날이 잘 서면 일이 쉽고 능률도 올린다. 하지만 낫을 갈줄 모르는 아낙네들이 경우 무뎌진 낫때문에 사내들에게 지청구를 들이댄다. 헌 바가지거나 잔뜩 쭈그러져 개밥그릇하기도 변변찮은 알루미늄그릇에 물을 준비하고 나간 사내들은 쉴참이면 낫을 갈아달라고 줄레줄레 찾아드는 녀성들 성화때문에 담배도 마음놓고 피울수 없다. 첫시작에는 그래도 정성껏 갈아주다가 마지막쯤에는 싫증이 나서 숫돌에 침을 탁 뱉고 둬번 문대는체하고 대충 숫돌물을 묻히면  녀성들은 멋도 모르고 낫이 잘 든다고 했다.그러면 사내들은 가만히 킬킬거린다. 벼가을에는 새참처럼 준비하는것이 있는데 그것은 무우다. 미처 준비하지 못하면 논밭머리쯤에 심어놓은 무우를 서리하는데 낫으로 대충 껍질을 쳐내고는 우썩우썩 먹는다.4가을이 끝나는쯤이면 9월부터 시작된 미꾸라지잡이가 절정을 이루는데 습지거나 물이 고인 곳을 찾아서 물을 퍼내고 물통으로 미꾸라지를 잡는다. 재수가 좋은면 한루에 한마대씩 잡을 때도 있었다. 그것을 소금물에 씻어서 다시 헌 까래우에 말리우는데 한낮이면 그래도 따스해서 쉬파리들이 몰려든다. 이때면 싸리나무막때기 한끝에 헝겊을 달아서 쉬파리를 쫓는데 이런 일은 대개 허리가 꼬부라진 할머니들의 몫이다.제일 불쌍한것이 잠자리들이다. 여름하늘을 덮으며 씽씽 날아다니던 잠자리들은 후줄군해지는데  찬 이슬이 내린 아침이면 들녘의 쑥밭에 무리로 매달려서 비실거린다. 잠자리와 함께 담약한 새떼를 희롱하던 전야의 허수아비는 종적을 감춘다. 가을은 이렇게 여물어간다.격조가 높은 삶과 격절되고 궁페했던 그 시대의 가을은 쥐여짜는 농부가만이 질펀했지만 그래도 아름다운 추억으로 남고 그 가을날이  편린들만이 아니라 온통 완정한 세계가 되여 지금도 기갈처럼 몸속을 그냥 파고든다.온갖 “말”이 가을이 성채가 되여 달리는 가을은 이래서 금추인지도 모른다.
22    두만강- 여기에서 굽이친다 댓글:  조회:1006  추천:0  2012-07-31
  2009 연변문화순례(2) 1도문시의 문화주제는“두만강문화”다. 두만강 좌안의 제1도시, 통상구도시라는 타이틀에 걸맞는 도문의 문화적인 강세다. 올해도 이들은 도문시안을 중심으로 우익으로 월청진, 좌익으로  량수진을 작위적으로 련대하여 두만강이라는 이 자연물에 문화색채를 덧칠하는 작업을 두두러지게 해냈다.  올해 이들은 동해시와 련대하여 제9차 사진전을 개최하고 학생작문콩클을 개최하는 등 두만강국제문화교류활돌을 빈번하 게 진행하고 두만강의 억겁의 세월을 흐르면서 개석한 땅과 그 우에서 선인들이 창조한  유형,무형문화재 발굴사업에 총력을 기울였다.금년만해도 5월에 7가지 문화대상이 주급무형문 화재로 등록되였고 6월에도 5가지문화대상이 성급명록에 올랐는데 이는 전주에서 첫자리를 차지한다. 몇년동안 이들은 총20개에 달하는 유,무형문화재를 발굴했는데 그 중에서 1가지대상이 국가급명록에 올랐고 성급에 11가지, 주급이 12가지에 달해 전주에서 첫자리를 농치지않고 있다. 유,무 형문화재 발굴과 등록사업에 템포를 맞추어  이들은 두만강 공원에 문화재 박물관을 새롭게 신설했다. 이들은 문화재가 문화에서의 차지하는 비중을 민감하게 깨치고 먼저 북경박물관, 농업전시관을 둘러보면서 문화적인 시야를 넓히기도했다. 이 박물관의 시설과 전람대청은 현대적으로 설계되였는데 총편적이 3000평방메터에 달한다. 목전 중국에서 유일한 조선족 유, 무형문화재 전람관이기도하다. 이 전시관에는 8개류 총 52가지의 문화재가 전시되고 있다. 군중성적인 문화활동에서도 두만강문화의 주제를 살리는데 힘썼다. 정부차원에서 두만강 지역에 위치한 농촌마을에 대한 문화촌신설을 추진,현재까지 4개진(향) 49개를 조사하고 그중에서15개 마을에 문화촌 (지역)을 건설했는데 그중 두만강변에 자리잡은 월청진백룡촌은 성문화청에 의해 “2009년 길림성 문화촌 (구역) 시점촌”으로 명명되기도 했다.문화건설에서 독서는 가장 앞자리에 차지하는 고급 문화활 동이다. 도문시는 두만강문화건설이라는 주제에서 농촌에 도서 를 보내는 활동을 아주 중시했다. 올해 상반년까지 이들은 두만강지역의 농촌에 29개(소)에 달하는 농촌도서실을 신설해 주었고 60만원에 달하는 서적을 보내주어 농민들이 독서난을 해결해주었다.                       2문화와 관광은 련인(联姻)관계다. 하여 문화광광이란 새로운 문화활동을 배출했다. 도문시는 두만강이란 자연물을 문화관 광자원에 접목시키고 뒤따라 두만강문화 인프라에 대한 홍보를 뒤바침하면서 국제, 국내 관광객들을 손짓, 입맛에 맞는 특단의 조치를 출시하여 효과를 거두기도 했다. 도문시의 사회발전 에서 문화와 관광의 련인(联姻)관계는 이제 특수한 사회 효과로 나타나고 있다. 도문시의 관광활동은 두만강문화의 내함을 필수로 하고 있고 도문시의 제분야에 걸쳐서 실행되고 있는데 이 중에서 두만강국제문화관광절만큼 피부로부터 당장 효과가 나타날만큼 뚜렸한 문화관광산업도 드물다. 도문시의 문화 관광은 두만강문화가 주최다. 도문시는 문화관광에서 최대한도 에서 두만강이 창출한 유형,무형문화유산을 리용하였 는데 가장 대표적인 례로 량수 두만강온성다리홍색관광, 두만강 을 굽어보는 일광산 생태광관, 통상구관광, 두만강표류, 두만강공원, 두만강유보도를 들수 있다. 문화관광은 사회경제 발전의 단계로서 인류문명의 부단한 진보에서 생성한 종합성적인 산업으로 사람들이 관광 활동에서 주체라면 문화인프라로자원은 객체이다.도문에는 이런 특정한 객체가 구비되여 있다. 하기에 도문시의 두만강문화자원은 인문경관자원으로 관광객들에게 날이 갈수록 흡인력을 더해주고있다.상반년 도문시에 다녀간 광관객 인수(차)로 총9만6천명을 호가하여 작년 동시기보다 큰 증장률이 보였다. 두만강이 굽이 도는 일관산 산림공원건설은  기초건설단계를 마쳤는데 이미 일관산 환형공로건설을 이미 개통했고 길림성중점관광지로 지정되였다. 일광산사찰건설에서도 대문,천왕전,대웅보전,장경 류 등40대주체 공정을 이미 마쳤고 불상을 비룻한 사찰 부속물 주체공정도 이미 끝냈다. 이는 두만강문화에서의 기념비적인 공정이다. 량수진에 위치한 단교(온성대교)는 홍색광광지로 60만원을 투자하여 음식, 휴식, 오락, 기숙을 일체화한 총합관 광지역으로 부상했다.  도문에서의 문화광광은 두만강이 굽이치 는 통상구에서 량수온성다리,다시 월청에 들어오면 맛있는 민속음식이 기다린다. 도문시는 두만강문화의 중심지 하나다. 이 중심문화를 지키기 위해 도문시는 이근년래 두만강 문화자원개발과 건설에 총력했고 좋은 효과를 거두었다. 앞으로 도문시의 두만강문화가 도문시만이 아닌 동북아두만강개발에서 문화지렛대 역활을 하리라고 기대해본다.  연변일보   글/사진 최국철 허성 기자
21    문화유산의 보호와 관광산업 댓글:  조회:1098  추천:0  2012-07-31
문화유산의 보호와 관광산업최국철문화유산이란 고고학,선사학,력사학,문학,예술,과학, 민속 등에서 문화적가치가 있다고 인정되는 인류문화활동의 소산으로 나라마다 분류법이 다르지만 대개 유형, 무형으로 크게 두가지로 볼수 있다.유형문화유산이 형체가 있는 문화적유산,력사상 예술상의 가치가 큰 건조물, 회화,조각,공예품, 책, 문서따위라면 형태로 헤아릴수 없는 문화적인 소산인 무형문화유산은 시대나 장소에 관계없이 가치가 높은 음악 무용, 공예기술 및 놀이 등 물질적으로는 정지시켜 보존할수 없는 문화류형 전반을 두고 이르는 말이다.문화유산에 관한 국제적인 인식은 제2차세계대전후 유네스코 (유엔교육과학문화기구)에서 1954 년에 제정한 무력분쟁시의 문화재보호를 위한 조약가운데서 문화재의 정의를 그 근원 또는 소유자의 여하를 불구하고 각 나라 국민이 계승하여야 할 문화적유산으로 확대하면서부터 문화적인 아이콘으로 부상했다. 진정 유네스코다운 선진발상이라 볼수도 있겠다.이에 비해 우리 나라는 템포가 늦음셈이지만 2005년 7월에 국가문물국 전 고문이였던 사진생을 위수로 서을, 오량용 등 11명 학자가 련명으로 호금도총서기에게 “문화유산의 날”을 건의하면서부터 당해 12월 국무원에서 “문화유산의 날”을 설정할데 관한 통지를 발부, 그 이듬해인 2006년 6월의 두번째 토요일을 첫회로 “문화유산의 날”을 출범시켰고 올해로 연 4회를 맞았다. 그외에도 이 특수한 날의 의미를 환기시기기 위해 2008년 7월 1일 “력사문화 유명도시(名城), 유명향진(名镇), 유명 명촌(名村) 보호조례”를 반포하기도 했다. 이 보호조례는 국가문화유산을 보호할데 관한 법률적인 장치를 시동한것으로 리정표가 아닐수 없다.하지만 “신경보사이트”와“시나넷”에서 전국의 네티즌 1351 명을 상대로 설문조사를 한 결과 88%의 네티즌이 “문화유산의 날”을 모르는걸로 나타났다.아직도 우리들은 문화유산에 대한 개념과 이미지를 탑재하지 못했다는 추이가 나온다. 과학적발전관의 핵심내용은 인간본위의 조화사회 구축과 전면적인 협조, 지속적인 발전을 강조한다.사회발전의 구성요소는 정치, 경제,문화이다. 이중에서 문화의 작용은 날따라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있다. 문화유산은 일정한 력사시기와 일정한 지역환경에서 특정한 인간군체(족)들의 생존상태이고 생활방식과 사유방식의 외적, 내적 형식으로 그것은 유형, 무형으로 나타났다.하기에 자자손손 대를 이어  력사적인 기억과 감정의 추구로 나타났다. 비록 문화령역에서 문화유산은 특정문화에 속하지만 문화의 진정한 원류이고 지혜의 결정체이기도 하다.우리 주 문화재 발굴과 보호는 전 성에서도 앞자리를 차지하고있다. 제 1차, 제2차로 출시된 연변의 무형문화재는 9개의 종류에  64개인데 그중에서 상모춤, 그네, 널뛰기, 조선족악기제작,조선족복장 등 10개가 국가급명록에 등록되였다. 이는 우리 성 국가급무형문화재의 43%를 차지하고 성급에서는 전 성의 30%를 차지한다. 현재 우리 주에서는 문물(유형) 유적지가 1000곳(개)에 달하는데 그중에서 국가급 문물보호 단위가 7곳(개) 이고 성급 중점보호단위가 35곳(개) ,주급 중점문물보호단위가 45곳(개), 시급(현) 중점문물보호단위가 101곳(개)으로서 지금까지 문화유산에 대한 발굴과 조사 사업이 활발하게 진행중인것으로 알려지고있다. 수적으로 보면 연변의 문화재는 만방에 자랑할만한 수준에 이른다. 하지만 발굴, 보호에만 그쳐서는 안된다는게 필자가 이 글에서 말하고싶은 가장 절실한 주제이다.문화유산은 문화시대의 아이콘으로 연변의 또 하나의 인문환경이라는 개념부터 탑재하고 이에 걸맞는 대책이 필요한 시점에 이르렀다는 설명이 나온다. 홍색관광에 대한 관방의 추진은 이런 맥락에서 나온다. 문화재보호는 관광과 밀접하게 련대해야 한다. 그러자면 이제 문화유산이란 문화인프라에 대한 홍보조치가 뒤따라가야 하고 사람들의 입맛에 맛는 특단의 조치를 출시해야 한다.
20    화전과 농심 댓글:  조회:1242  추천:0  2012-07-31
조선반도에서의 화전이  조선후기에 와서 크게 확산되였다면 우리의 이민 1세들의 화전도 역시 그 시기를 첫시작으로 보아도 무리가 없다. 다르다면 지역이 다르고 월강해서 화전을 일구었다는 점이다. 이 시기에 중국으로 이주한 조선인들은 땅을 소유하기 위해서 치발역복한 력사도 있는데 여기에서는 이런 력사를 회피하고 그저 서민들의 화전 력사만 언급해보자. 화전이란 밭이 될만한 산비탈이거나 평지에 먼저 불을 지르고 다음 밭을 일구는것을 일컫는데 말그대로 불이 붙은 밭이다. 이런 화전에 의거하여 농사짓는 농민들을 화전민이라고도 불렀는데 조선족들의 선조가 화전민들이라고 해도 무리가 없는줄로 안다. 화전밭을 조선에서는 부대밭이라고도 이름했고 개간지, 처녀지, 신개지, 화대기란 다른 이름으로도 불렀다. 조선의 장편소설《철쇄를 마스라》중에서 화전밭을 일구는 리얼한 묘사 한단락이 있는데 서간도에 이주한 이민 1세들이 화전밭을 일구는 풍경이다. “…련일 산불이 일어서 신개지가 터지는바람에 한쪽에서는 씨붙임을 한 곡식이 퍼렇게 돋아나고있는데도 사람들은 계속 부대밭을 뚜져댔다.올해는 철수가(절기) 늦다고들 하지만 봄소나기가 온지도 오래였다.봄비를 맞은 밭들에는 봄보리가 퍼렇게 푸르러가고 올감자싹도 어방지게 갸웃이 머리를 내여밀더니 새까맣게 독을 질렀다.해볕을 받아 밭들은 연록으로 물들어갔다. 그런데도 아직 새로 부대밭을 내는데서는 시꺼멓게 타다남은 등걸에서 불이 일었고 새까만 땅에서 재가 날렸다.사람들은 기를 쓰고 늦은 별감자,넓적감자따위 감자눈을 박았고 귀밀과 찰조씨,기장씨따위를 묻어나갔다…”너무도 핍진하게  그려서 눈앞에서 보는듯하다. 필자는 이 단락을 암송하다싶이 하고있다. 이 장면은 우리의 이민 1세들의 당시의 생활상이기도 하고 우리 선조들의 농심(农心)이였다. 다시말하면 농경사회의 농심을 극대화한 전통생활상이였고 자기의 번지수가 박힌 땅에 대한 화전민들의 무한한 욕구였다. 어른들의 회상에 의하면 그 시기는 호림방화라는 개념이 전무했기에 련일 산불이 나도 무심했고 오히려 신개지가 터진다고 기뻐했다. 더우기 산불이 지나간 자리에 봄에 고사리가 많이 난다고 흥얼거렸다니 화전과 화전민들간의 력학관계도 엿볼수 있다.  화전은 명줄이기도 했다.밭자리를 셀 때의 단위는 필지라고 한다. 의존명사인 필지는 구획된 논이나 밭,  림야,  대지따위를 세는 단위지만 시골에서는 지금도“자리” 라는 사투리로 단위를 쓴다. 산비탈의 한필지의 밭을 일구기 위해서 우리의 이민 1세들은 사활을 거는 대가를 치렀다.  2년전에 기자가 방천 촌을 취재했는데 방천촌은 20세기 초엽까지 버들숲만 우거졌다고 했다.  19세기 중엽부터 조선월강민들에 의하여 순차적으로 “헤무즈”,“양관 평”으로 두리뭉실하게 불리우던 이곳 방천의 촌사는 두만강 우안의 함경도이주민들이 화전민으로 건너오고 화전밭을 개간하면서부터 시작되였다.  선인들의 입으로 전해져오는 개척전 방천의 모습은 강가와 벌판에 버들숲이 우거지고 간혹 변방군인들의 눈길을 피해 가만히 월강한 조선변민들이 일군 화대기밭 몇필지에서 피만 푸르게 자랐다고 했다.  피농사,  보리농사,  감자농사만 알던 그 시절 피농사는 변민들이 해해년년으로 익숙히 짓던 농사다. 방천촌의 력사를 캐고들면 우리는 “곡선월경”이란 낯선 력사와 만난다. 방천촌으로의 조선이주민들의 이주는 대개 청정부가 봉금령을 실시하던 시기 로씨야 극동지구 하싼지역으로 먼저 건너갔다가 다시 중국으로 이주 정착했다고 하는데 월강하여 이침에 건너와서 농사하고 저녁에 돌아가면서 유격농사를 하는 과정에서 방천지역사정을 잘 알기에 결국 로씨야- 중국이라는 곡선이주를 택하고 두개의 국경을 넘은셈이다. 방천촌의 개척사는 우리 민족들의 이주초 개척축소판이다. 두만강 좌안지구 즉 연변의 력사는 깊은 산골의 화전밭으로 시작되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말하자면 동만땅은 우리 민족들의 불을 놓고 다시 화전밭을 일구었다는 추이가 나온다. 하지만 이 시기에 건너온 이주민들은 민간에서 흔히 “골치”라고 불렀다. 말하자면 상놈이라는 뜻이지만 량반이든 상놈이든 모두가 농경사회의 화전민이였고 “농부일생무한…농사천하지 대본”을 근본으로 아는 농심들이였다.   그 농심으로 산비탈과 들에 수천필지의 화전밭을 일구었고 오늘 우리들이 경작하는 밭이 있게 했다. 우리 조선족들의 전통생활에서 화전밭 개념은 개척이라는 이미지로 다가오게 되고 고난의 이주력사를 공증하는 견증자로 남는다. 우리 선조들의 삶속에는 오늘을 반성하는 소재들이 무진장하게 묻혀있는데 이 속에는 화전밭이란 목록도 끼여있다. 화전민이 개척정신이 전통의 바탕으로 되는 리유는 여기에 있는것이다.
19    단오명절의 확인 댓글:  조회:1118  추천:0  2012-07-31
2005년 11월 25일,  한국의 강릉단오제가 “유네스코 세계인류구전 및 무형문화유산걸작”에 등록되면서 국내의 네티즌들이 단오를 빼앗겼다고 발끈한 일도 있다. 오해와 갈등이지만 다른 측면에서는 자기의 전통문화에 대한 보수적인 확인으로도 볼수 있다. 그런데 가만히 보면 한국의 강릉단오제는 음력 4월 5일—5월 8일까지 50여일에 걸쳐 진행되는 축제로 산신제와 성황제,  봉안제, 단오굿,  관노가면극 등의 독특한 강릉의 무형유산이 어우러진 오랜 전통의 민속축제이고, 중국은 룡선경주와 주악(쫑즈) 먹기 등 민속을 중심으로 단오절 세시풍속이 형성되였는데 민속문화 측면에서 동일한 면과 부동한 측면을 가지고있다.  중국의 학자들은 중국의 문화제도를 운운하면서 단오명절은 단지 중국인들만의 보물이 아니라고 주장하면서 다른 지역,  나라 사람들의 일상생활속에 융화되여 정신생활을 풍요롭게 하고 세계문화 다원화, 다극화를 위해 기여하기를 바라고있다.  단오명절에 대한 문화적인 확인이다.단오는 중국 한대의 문헌에도 나타나는데 옛날부터 5월은 비가 많이 오는 계절로 접어드는 달로 나쁜 병이 유행하기 쉽고, 여러 가지 액(厄)을 제거해야 하는 나쁜 달로 보아, 예방조치로서 여러가지 미신적인 풍습이 생겨났다. 중국의 옛 문헌인 《형초세시기》에 따르면 단오에는 약초를 캐고, 재액을 예방하기 위하여 쑥으로 만든 인형,호랑이를 문에 걸었다고 한다. 또 전국시대 초나라 시인 굴원이 멱라강에 빠져죽었다는 고사에서 그의 죽음을 슬퍼하는 뜻으로 대나무통에 쌀을 넣고 소태나무잎으로 감아 물속에 던지던 풍습이 변하여 지금은 대나무잎으로 싸서 찐 주악을 먹는 풍습이 되였다고 한다. 또 굴원을 배로 구한다는 뜻의 놀이이기도 하다.굴원에 대한 문화적인 확인이라 보아도 무리가 아니다. 단오가 우리들에게 전통명절로 회귀한 시점은 작년부터였다. 작년부터 원래의 법정휴가일(양력설,   음력설,   5.1절,   국경절)에서 전통명절인 청명,   단오,  추석이 들어가면서 국가적인 명절에 편입되였다.  경제적인 측면에서 황금련휴로 구매력을 높여 내수를 확대하고 민속문화적인 측면에서  전통명절을 부활시켜 명절문화의 내함을 크게 구축시키자는데 그 목적이 있었다.  국가적인 확인작업이다.우리 민족 단오의 가장 대표적인 놀이는 녀성들의 그네뛰기와 남성들의 씨름이다. 궁핍했던 그 세월 우리들에게는 아무런 놀이도 없었다. 이 무렵에는 남자들에게는 본능과 파워를 자극하는 씨름이 단연 각광받았고 녀성들에게는 사랑을 구가하는 그네가 류행되였다. 현재의 민속학자들은 무병장수를 기원하고 신체를 단련하기 위하여 이런 놀이가 발전되였다고 하지만 따지고보면 전통명절에 대한 민중적인 확인이라고 봐야 한다.문화는 지속적인 확인을 전제로 발전하고 전통명절 역시 부단한 확대재생산과 고층차적인 확인을 거듭해야 지속적으로 발전할수 있다. 하기에 국가적으로 전통명절을 부활시켰다는 점에서 민중들의 호응도가 높다.  전통명절은 민중들의 문화적인 결집력을 높이고 확인작업으로 련계해야 비로소 명절문화의 가치와 내함을 구축할수 있다.
18    독서절 유감(有感) 댓글:  조회:1077  추천:0  2012-07-31
1책의 날은 지난 세기 1995년 국제련합총회에서 국제련합교육과학문화기구(유네스코)가 세계인의 독서 증진을 위해 정한 날이다. 공식명칭은 “도서와 저작권의 날”이고 “독서의 날” 혹은 “책의 날”이라고 부르기도 한다.4월 23일로 정한것은 에스빠냐 카탈루냐지방에서 책을 읽는 사람에게 꽃을 선물하던 “세인트 조지” 축일과 1616년 쎄르반테스와 쉑스피어가 동시에 사망한 날이 바로 이 날인데로부터 유래했다. 현재 책의 날의 기원국인 에스빠냐를 비롯해 전세계 100여개 국가에서 이날을 기념하고있다. 에스빠냐에서는 책과 장미의 축제가 동시에 펼쳐지고 영국에서는 이날을 전후해 한달간 부모들이 취침전 자녀들에게 20분씩 책을 읽어주는 “잠자리 독서” 캠페인(계몽, 홍보 운동)을 벌리기도 한다.  중국도 례외가 아니다. 이 독서의 날이 정해지기전부터 중국관방에서는 독서절 캠페인을 벌리고 독서문화풍토를 고양시켰다.  연변지역에서도 이날을 기점으로 10월 23일까지 독서절로 명명하고 6개월 동안 관방형 독서 관련 종합문화캠페인을 주도한지 올해로 세번째를 맞는데 사회적인 공감대를 구축하고 민중들의 큰 호응을 이끌어냈다는 측면에서 후한 점수를 따고있다. 어제(23일) 기점으로 연변지역은 독서절에 진입했다.2우리들의 고전에는 오늘의 현실에서도 지침서로 되는 고사성구들이 참으로 많다. 위편삼절(韦编三绝)이란 성구가 있다. 여기에서 위편은 가죽으로 맨 책끈을 말하는데 그 가죽끈이 세번이나 닳아 끊어졌다는 뜻이다. 이것은 “사기” 공자세가에 공자가 만년에 주역을 너무 즐겨 읽어서 책을 엮은 가죽끈이 세번 끊어졌다는데로부터 비롯된 말로서 공자 같은 성인도 학문연구를 위해서는 피나는 노력을 한다는 비유이다.  “사기”에 위편삼절이 있다면 “맹자(孟子)”만장하편에는 독서상우 (读书尚友)란 성구도 있다. 독서하면 옛사람들과도 벗이 될수 있다는 뜻으로 책을 많이 읽어 현인의 사상을 깨닫고 살아있는 벗처럼 성현을 만날수 있다는것을 말한다. 현시대는 기계문명의 활기찬 발달로 각종 정보가 무더기로 쏟아지고 지식 선택의 성역이 무변하다. 하지만 독서풍토를 살펴보면 실망하고 좌절할만큼 황페하다. 설사 독서를 한다 해도 그속에는 인문학적인 지식이 없고 인격도야를 위한 서적, 인생의 가치를 그린 서적들이 외면되고 미디어들의 추종구매로 가십,렵기 위주의 서적들에 현혹되여있는 단면도 있다. 얇삭한 상업주의와 인터넷이 경제도모를 꾀하여 결탁한 단편적지식들이 정보화로 둔갑하고 지극히 치희적인 유희문화가 앞장서서 달랑거리는 형국이다. 새 천년 우리 연변지역의 일그러진 독서문화이다. 3연변지역의 서적가나 도서관의 출입문이 한가롭게 하품을 하는 현실에서 굳이 서적구매량과 도서관출입인수에 대한 통계수자를 라렬하기도 부끄럽다. 외국의 모 대학에서 학생들에게 독서량을 수자로 배정,숙제를 주고 완성 못하면 류급처분을 주고 초과로 독서한 경우 등록금을 탕감해주는 혜택까지 베푼다는걸로 미루어보면 독서문화의 황페함은 연변지역에서만의 가난한 문화현상만이 아니라 아주 글로벌화로 지구촌의 이촌, 저촌에서 통약적으로 존재하는 문화형상 같다. 중국관방의 통계를 보더라도 새 천년에 독서량이 지난 세기보다 하강선을 긋는다고 한다. 독서가 당위론적인 문화흐름으로 앞장서자면 우리들에게는 지속적인 독서교육이 필요하다. 사회, 학교, 가정이 삼위일체가 되여 새 천년의 새로운 독서문화를 창달해야 한다. 정보화라는 보호산을 밀어내고 새로운 독서풍토를 확보하고 지속적인 홍보가 따라가야 한다. 독서는 새로운 시대와 만나고 개인적인 지식이 사회와 련대하면서 자신의 인격을 함양하고 완성하는 고급문화활동이다. 독서만이 책의 반란을 평정할수 있다는 명제는 시적이라기보다 철학적인 측면이 다분하다.이제는 관방주도형 독서켐페인을 팔짱을 끼고 외면해서는 안된다. 독서는 내가, 우리가 평생 해야 하는 직업이다.그래서 책은 책이상이라고 말하는것이다. 당신은 독서를 하는가? 그렇다면 당신은 삶의 모든 필요한것은 갖춘셈이다. 
17    김치움의 전설 댓글:  조회:1118  추천:0  2012-07-31
겨울의 피빛노을이 야트막한 서산의 가둑나무우둠지에 걸릴쯤이면 거기에서부터 불시에 찬 겨울바람이 아우성을 지르면서 잔인하게 내달린다. 부부싸움과 겨울바람은 밤이 되면 멈춘다지만 피빛 저녁해를 등진 서산의 바람은 대한추위에 잔뜩 웅크리고 떨고있는 촌락의 초가지붕우을 핥으며 잔설을 희롱하면서 말 달리며 지나간다.산촌의 겨울저녁은 이렇게 시작된다. 춥다고 낮동안 부엌아궁이에 도목나무를 지피고 찰옥수수죽을 삶는다.  이때면 구들목은 엉뎅이가 델 지경으로 뜨겁고 집안은 훈기가 감돈다. 옥수수죽에는 동치미와 배추김치가 궁합이다. 어머니가 밥상에 죽사발을 떠놓을쯤에는 고모가 아버지의 헌 솜옷을 걸치고 김치움으로 내닫는다. 15와트짜리 어두운 전등불아래에서 입에 착착 감기는 찰옥수수죽을 걸탐스레 먹고 배를 슬슬 만지며 게트림을 할 무렵에 겨울밤 마지막 바람이 초가집과 김치움을 둘러싼 섶나무울타리를 휘감으면서 후루루 지나간다. 이것이 필자의 어린시절 겨울저녁 의 한자락 풍경이고 시골김치움과 김치에 대한 기억의 편린들이다. 도시의 저녁이 온갖 아크릴간판들이 명멸하면서 열린다면 시골의 겨울저녁과 저녁밥상은 움안의 김치가 밥상에 오르면서 찬란하게 열린다. 그만큼 김치움은 시골의 겨울 밥상을 풍미했다.움이란 식품을 저장하기 위해 만든 구조물인데 김치움이라면 당연 김치를 저장하기 위해 만든 움이다. 땅에 구뎅이를 파고 그우에 짚으로 지붕을 만들어 덮은것으로 겨울철 랭해나 비바람의 피해를 막고 식품을 장기간 저장하기 위해 설치한다.움의 규모에 따라 작은것은 뼈대가 없는 구조로 만들기도 했지만 연변에서의 김치움은 대개 장방형으로 구뎅이를 파고 기둥을 세우거나 봉분처럼 둥그렇게 흙을 덮었다.  시골에서 나그네를 알자면 뒤간부터 보라는 말이 있고 한걸음 더 나아가 그 집 김치움을 봐라는 말도 있다. 손탁이 드세고 가정을 알뜰하게 영위할줄 아는 사내들은 김치움안에 참나무로 귀틀을 맞추어 경고성과 영구성을 보장하여 10년쯤은 무난하게 지우는데 반해 게으른 사내들은 해마다 아낙네의 성화에 못 이겨 고생스레 김치움을 새로 파고 만든다. 그것도 대충 엉성하게 만들어놓아 김치를 가지러 들어가던 아낙네가 김치움계단에서 굴러떨어져 다리나 팔이 골절되는 불상사도 불러왔다.  예로부터 고추장과 김치는 옆집것이 맛이 더 좋아보이는 법,  슬그머니 옆집으로 흘러들어가 김치를 서리해먹는 일도 보통이였다. 그러다가 지식청년들이 시골로 내려오면서 서리라 하기엔 너무 벅찰 정도로 소래로 김치를 퍼가서 한동안은 움에 자물쇠를 채우는 진풍경이 벌어지기도 했다. 그런데 여기서 지나칠수 없는건 조선반도 남쪽과 북쪽의 김치움문화에서 구조가 약간씩 틀린다는 점이다.  이미 퇴직한 일보사의 한 선배는 어릴 때에 흑룡강성 오상현에서 살았는데 그의 소개에 의하면 거기에서는 “문화대혁명”시기까지 김치움을 모르고 개별적으로 땅에 김장독을 8할쯤 묻어서 발효시켰다고 했는데 이런 생활습관은 현재 반도 남반부에서 볼수 있는것이다.  그러니 오상현의 남반부 후예들은 그 생활습관을 대륙의 추운 땅에서도 고스란히 간직했다는 설명이 된다. 다른 점이라면 김장항아리가 언다고 그우에 짚북데기를 두툼하게 덮어준다는것이다.  남도의 김치움이 대륙땅에서의 전형적인 변형이다. 상술한 움들이 김치저장용이라면 무우와 감자를 전문 저장하는 움도 따로 있다.  “무끼움 혹은 감재움”이라는 방언으로 두루뭉실하게 불린 움은 늦가을 땅이 얼기전에 파는데 대개 지름이 1-2메터쯤 되고 원형으로 2메터쯤 깊이로 판다. 거기에 감자, 무우를 저장하고 짚북데기를 덮고 다시 흙으로 묻는데 감자와 무우가 숨을 쉬라고 수수대를 묻어서 심지처럼 박는다. 이듬해 해토가 되는 청명을 전후해서 다시 파헤치는 데 움안이 기온이 높았다면 무우나 감자는 싹이 난다. 하지만 상관이 없다.저녁에 한가마를 삶는데 감자맛은 이때 최고에 달한다. 비철인것도 있지만 겨우내 땅속에 묻혔던 감자는 새로운 맛으로 다시 태여난다. 이때쯤이면 움안의 김치가 너무 숙성하여 시여가기 시작한다. 이 신맛을 시골에서는 “군냄새”하고 하는데 삶은 감자에 신 김치가 궁합이기도 했다. 이런 생활사는 조선족들만의 특유한 생활사다.대륙의 풍토에서 조선족 특유한 민속으로 변형, 존재한것이 가장 가치가 있는것이다.
16    기러기는 백년의 수를 갖는다 댓글:  조회:1043  추천:0  2012-07-31
                               1리순신장군이 쓴 “한산도 야음”이란 시에는 “한 바다에(수국이라고도 함) 가을빛 저물었는데 찬바람에 놀란 기러기 높이 떴구나…”라는 시구가 있다.충무공의 우국충정이 담긴 시에 등장한 기러기는 나라일을 걱정하는 리순신장군의 수심을 담아내는 대상물로 등장했지만 계절로 “가을빛 저문데”는 추색을 이르는 말이고 “찬바람에 놀란 기러기 높이 떴구나”는 남쪽으로 날아가는 기러기라고 봐도 무방하다.그러니깐 충무공이 이 시를 쓴 시기는 소슬한 가을바람이 떨어지는 가을쯤이 된다.이렇듯 그 기러기는 봄에는 북으로, 가을에는 남으로 날아가는 철새다. 이제 경칩도 지나고 바야흐로 춘분, 청명절기로 들어서는데 이 시기엔 여기에서는 어김없이 인(人)자형 대렬을 이루고 끼륵-끼륵 울음을 떨구면서 북으로 흘러가는 기러기떼를 본다. 어딘가는 구슬프기도 하고 심란함을 더해주는 기러기의 특유한 울음소리를 들으면 먼 기다림으로 도시소녀를 기다리던 소년으로 돌아가게 되고 약간은 우울하게 된다.하지만 나만의 여린 감수와는 상관없이 기러기만큼 우리 민족에게 대접받은 철새도 없다. 흔히 철새는 인간사에서 지조가 없이 흔들리는 사람들에게 따라 붙는 대명사이기도 하지만 동물에서의 철새는 원초적인 생존본능으로밖에는 볼수 없고 인간들에게 의해 왈가왈부할 아무런 하자도 없다.                                2기러기에게는 몇가지 덕목이 있다고 보아야 한다. 기러기는 사랑의 약속을 철저히 지킨다. 보통 수명이 150~200 년인데 짝을 잃으면 결코 다른 짝을 찾지 않고 홀로 지낸다.그리고  수직과 횡적 질서를 드팀없이 지키고 날아갈 때도 행렬을 맞추며 앞서가는 코기러기가 끼륵- 울면 질서를 잡고 뒤따라가는 놈도 끼륵-화답을 하여 례를 지킨다. 기러기는 자기가 왔다는 흔적을 분명히 남기는 속성이 있다. 이러한 기러기를 본받아 인간세상발전에 큰 힘이 되는 업적을 남길수 있는 사람이 되라는 상징으로도 쓰인다.그래서 기러기는 인간들에게 가장 웅후한 대접을 받는다. 예로부터 기러기의 정절과 고절은 필요이상으로 찬양일변도를 달려왔다.현대에 이르러 고절은 이미 퇴색했다고 정평되고있지만… 흔히 사랑의 상징은 원앙새라 하지만 과학가들의 연구에 의하면 원앙새는 정절을 지키지 못하고 자기의 짝을 피해 가만히 다른 짝과 바람을 피운다고 한다. 하지만 기러기는 아니다. 기러기에게는 다른 짝을 곁눈질하는 일, 배반하는 일은 결코 없다. 우리 민족의 속담에는“기러기는 백년의 수를 갖는다”라는 말이 있다.새도 그만큼 오래 사는것이니 남을 함부로 욕보이거나 얕보지 말라는 뜻으로 쓰인다. 하지만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면 기러기의 수명이 길다는 말도 된다. 이만큼 우리 민족에게는 기러기가 자고로부터 익조로 알려지고있고 더구나 변치 않은 사랑을 상징하는 새로 알려지고있다. 이런 원인에서 기러기는 혼례청으로까지 날아왔다. 우리 민족의 전통혼례에는 전안례라는 절차가 있다. 혼례상에 기러기목각이 오르는것이다. 아주 오래전에는 산 기러기로 치렀다고 했지만 근대에 와서 나무로 만든 목각기러기로 치렀다는 말이 되겠다.                              3기러기는 가을에 조선반도를 비롯한 동남아서 겨울을 지내고 봄에 시베리아, 사할린, 알래스카 등지로 가서 여름을 보내는 철새로 강, 바다, 늪지에서 사는 오리과에 딸린 늘씬한 새다지난 세기 80년대 중국의 영화중에는 《돌아가고싶은 마음이 화살같다》라는 영화가 있다. 일제시기 항일련군의 한 전사가 일본군과의 전투에서 부상을 입고 홀로 대오에서 떨어지게 되고 산골의 한 녀인(스친꼬와 역)에 의해 구원된다. 이 가운데서 두 사람은 어느덧 사랑하게 된다. 여기에서 가장 고조부분이 바로 추색이 깃든 심산에서 끼륵-끼륵 남으로 날아가는 기러기떼를 바라보면서 갈등하는 주인공이다. 더구나 이 고조를 이끄는데 한몫 하는것은 영화 삽곡인데 “기러기가 남으로 날아가네 기러기가 남으로 날아가네…”를 반복하는 정서적인 가사다. 찬바람이 후루루 떨어지는 심산유곡에서 공중에서 음울한 울음소리를 떨구며 날아가는 기러기떼를 보면서 사랑하는 녀인의 곁을 떠나기 싫은건 인지상정이다. 이 영화를 보면서 주인공의 심란한 마음을 대변하는 상징물로 기러기를 대용한것이 참 멋지다는 생각을 했다. 어느 글에서 한 사냥군의 수기를 읽은 기억이 나는데 남으로 날아 가다가 잠시 쉬려고 내린 무리중에서 한놈을 쏘았는데 다른 기러 기들은 다 날아갔지만 유독 남편이 되는 수컷만은 날아가지 않고 죽어가는 암컷의 곁을 지켰다는 사연을 보면서 인간의 잔인함을 질타하다가 죽어가는 짝을 지키면서 함께 죽어가야 하는 기러기의 그 사랑이 뭉클함을 이중적으로 감수해보았다. 그 이중성은 오늘도 변함없이 감수하게 된다. 우리 민족사회에서 행하는 장난식 부부 리별과 리혼, 산만한 가정생활, 그로 인기된 사회적인 불안들은 이제 작금년간에 회자된 현안들이 아니다. 우리 민족사회의 쇠퇴는 이런 가정불안들이 중첩되고 루적되면서 벼랑끝으로 올라가기 직전이다. 감정동물이기에 가능하다고 잠시 너그럽게 넘기다가도 다른 한편 고급동물이기에  리지도 없는 저급동물의 정절을 성찰해 볼 필요가 있지 않을가 기웃거리게 됨은 나만의 이중적인 조급함이 아닐것이다.하기에 오늘 우리 민족사회에 기러기란 철새를 다시 한번 정중히 추천해본다.
15    연변 문화콘텐츠산업을 말하다 댓글:  조회:961  추천:0  2012-07-31
—문화현장투시6 최국철                             1새벽에 눈을 뜨고보니 어제의 세상이 아니더라는 말이 이제는 과장이 아닌 현실로 대두했다.어느때부터인가 연변의 대학가나 지식계에서 심심찮게  연변문화콘텐츠발전에 관한 화제가 회자되고있는데 가장 대표적인 글로 연변대학 김관웅교수의 “연변의 콘텐츠산업의 육성과 인재양성”을 례로 들수 있겠다. 그만치 이제는 그저 간과할수 없는,절박한 시점으로 왔다는 설명이다. 한국 같은 나라에서는 이제 대학에 음반, 영화, 출판에 관련된 400개가 넘는 문화콘텐츠학과를 설치하고 문화콘텐츠관련 인재를 대량으로 육성하고있고 따라서 서적가에도 콘텐츠관련 서적들이 쏟아져나오고있는 실정이다. 하지만 연변은 대학가에도 아직 콘텐츠학과가 없다고 하니 연변 문화콘텐츠에 관한 성적표가 거이 령에 가깝다고 보아도 무리가 없는줄로 안다. 강건너 불보듯이란 우리 속담은 이제 맛이 간지도 오라다. 문화콘텐츠가 발전한 나라나 지구의 전유물로만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 글로벌이라는 이 대명제 앞에서 우리들은 늦장을 부릴 권리가 없고 문화산업화란 이 “실행파일”앞에서 일제히 도렬하고 응전태세를 갖추어야 한다. 더구나 문화콘텐츠산업이 고부가가치를 창출한다는 점에서 “황금알을 낳는 거위”에 비견되는 현실에서 지역적으로 변연에 자리잡은 연변지역은 태평소(새납)를 불면서 “농경가”를 부를 여가가 없다.                            2  그럼 문화콘텐츠는 무엇인가. 인터넷이나 컴퓨터 통신 등을 통하여 제공되는 각종 정보나 산업적인 내용물을 말한다. 즉 문화콘텐츠는 현대인들의 능력으로 산생된 관습이나 창조물을 집약하고 그 총체를 인터넷이나 컴퓨터 통신 등 현대적인 기기를 통하여 경제적인 부를 창출하는것이다. 문화가 라틴어로서 재배, 경작을 의미하다가 현시대에 이르러 그 이미가 광의적으로 변화된것만치 콘테츠도 이제 점차 사전적의미를 잃으면서 이제 산업이라고 정의를 굳혀가고있다. 소프트파워시대에 이르면서 문화는 본연의 이미지에서 탈피하여 새로운 고부가가치의 원천으로 자리매김하였고 엄청난 잠재력과 희망적인 전망을 가지게 되였다. 문화콘텐츠는 문화영역과 미디어기술의 복합 융합체로서 산업적 측면이나 사회적 측면에서 매우 중요한 산업으로 부상하고 있다. 하기에 우리들은 우선적으로 문화콘텐츠란개념을 탑재하는 일부터 시작해야 한다.  다음 문화콘텐츠가 고부가치를 창출할수 있는 산업으로 알고 연변지역문화특색에 알맞는 거시적인 발전비전을 책정하고 콘텐츠산업투자를 유치하여 점차 문화콘텐츠의 발전에 디딤판을 마련해야 한다. 일자리창출, 연변지역 홍보, 경제발전에 집장(执 杖) 역할을 하게 하고 고도를 높이 잡아 뛰게 만들어야 한다는 말이다. 그러자면 제품화를 지원하고, 콘텐츠기업용 기반시설구축, 콘텐츠제작, 유통기반조성, 판로 개척 등 구체적인 업무에서 정부행위가 가장 관건이다. 이 고리가 풀리면 정부주도형과 민간형간의 상생협력 네트워크가  구축되고 그러면 연변을 콘텐츠산업의 메카로 육성, 콘텐츠 창작 유통 등 문화콘텐츠산업가치 사슬 전반에 걸쳐 경쟁력을 확보할수 있다.                         3연변은 문화콘텐츠지역으로 거듭나기 위해 절대적으로 필요한것 가운데 하나가 “연변적문화콘텐츠” 창출이다. 연변적문화콘텐츠의 창출의 출발점은 “우리 민족 예술의 콘텐츠화”에 있다. 우리 예술의 콘텐츠화의 성공 여부는 소비령역을 정하고 눈 높이를 어찌 정하냐는 프로젝트의 능률적인 실천에 달려있다. 이제는 “좋은 작품이 나와야 드라마를 찍을수 있다”라는 무책임한 말을 삼가해야 한다. “좋은 작품”은 우선 투자가 전제되여야하고 지속적인 후원이 이루어져야 비로소 가능한 일이다.연변지역의 문화콘텐츠화에 대한 론의는 필연적으로 특색문화의 산업화론을 전제할수밖에 없다. 이를테면 대형광장무에 대한 콘텐츠화가 이를 증명한다. 중국에서만 있는 민족특색의 대형광장무, 아리랑 등 예술종목들은 인력과 물력이 많이 드는 종목이지만 이것을 문화콘텐츠화로 문화산업으로 접목하면 해마다 반복적으로 인력과 물력을 소비할 필요가 없고  연변지역문화브랜드로 창출, 류통에서 산업적인 가치를 달성할수 있다. 정부주도형 현실에서 이제 정부에서는 문화콘텐츠를 산업이라는 개념을 만재하고 그에 관련된 모든 분야에서 만부하 투자를 선행하여야 한다.연변일보
14    족보의 훼절을 슬퍼한다 댓글:  조회:999  추천:0  2012-07-31
분서갱유가 중국 진나라의 시황제가 학술, 사상의 통일방안의 일환으로 강행했다면 현대판 “분서갱유”는 문화대혁명시기에 무지막지하게 강행되였다. 이 시기 민간에 대량으로 소장되여 귀중한 유산으로 남았던 수많은 서적들과 민간문화가 훼절되였는데 그중에는 가족의 계통과 혈통 관계를 적어 기록한 가치 있는 족보도  훼절품목에 오른다.6년전 필자는 “가보(족보)”라고 제목한 중편소설을 쓰면서 일년 동안 족보를 뒤적거렸는지라 족보에 관해 민감한 반응을 보이는편이다. 보첩, 세보, 세계… 등등 여러가지 이름으로 불려진 족보는 나라의 사승(史乘)과 같은것으로 친인척의 종적, 횡적 관계를 규정하고 족보에 함자를 올리는 후손들에게 종족을 알려주고 종족번창을 주문하는 문서이다. 하지만 지금 보면 존비, 항렬, 적서(嫡庶 처, 첩 후대)의 구별을 명백히 하고 인간 격차를 두었다는 한조목에서는 후한 점수를 줄수 없다.족보는 중국에서 비롯된것으로 추정하고있는데 우리 민족들에게는 계층이 분화됨에 따라 문벌과 가풍을 존중하는 사상이 높아진 육조시대에 이르러 족보의 작성 및 보학이 발달했다고 보면 무리가 없다. 족보에도 갈래가 복잡한데 일반적인 족보는 이른바 종보에 해당하는것이며 여기에서 분파된 가정계통에 대해서는 지보, 파보(派譜)라도 했다. 하지만 다 족보에 해당한다. 족보의 기록내용은 족보의 종류와 크기에 따라 다르지만 대개는 권두에 족보 일반의 의의와 그 일족의 근원과 내력 등을 기록한 서문이 있다. 이 글은 대개 일족가운데 학식이 뛰여난 사람이 기록하는것이 상례이다. 다음에는 시조나 중시조의 사전을 기록한 문장이 들어가고 다음에는 시조의 분묘도와 시조 발상지에 해당하는 향리지도 등을 나타낸 도표가 들어가며 그 밑에 범례가 있다. 끝으로 족보의 중심이 되는 계보표가 기재된다. 이것은 우선 시조에서 시작하여 세대순으로 종계를 이루며 같은 항렬은 횡으로 배렬하여 동일세대임을 표시한다. 기재된 사람은 한 사람마다 그 이름, 호(號) , 시호, 생년월일, 관직,봉호,훈업,덕행, 충효, 문장, 저술 등을 기록한다.필자의 본관은 진산으로서 문화대혁명의 세례속에서도 살아남은 족보가 있는데 현재 진산최씨문중의 한 어른이 정히 보관하고있다. 진산최씨는 조선족의 성과 본에서도 그 등재가 루락된 희본인데 족보를 들추어보니 그 시조를 최치원으로 두고있었다.그런데 경주최씨 또한 시조가 최치원이라 했으니 종계가 얼마나 복잡한가. 필자가 일년쯤 보관하고 보아왔던 족보는 흐르르한 고려종의에 붓으로 기록한것인데 붓글씨가 어찌나 정교한지 인쇄체버금 갔다. 오래동안 농짝에 보관하다보니 좀이 먹어서 군데군데 구멍이 났다.도합 6권이였는데 문중의 어른이 나를 믿지 못해 나한테서 도로 가져가버렸다.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는 종족관념이 점점 희미해간다. 간혹 종친회라는 친목조직을 볼수 있는데 이 종친회는 족보를 뿌리로 둔 성과 본관이 같은 사람들의 모임이다. 말하자면 혈연으로 뭉친 모임이라는 말이다. 본관은 흔히 본(本)이라고 하는데 현대 젊은이들에게 본이 무엇이요 물으면 십중팔구는 본을 모른다고 대답한다. 관향,  본적,  관적,  선향으로도 불려진 본은 대개 혈연 지연에 매여 살던 그 시절 부계로 련결되고 그 조상의 거주지를 나타낸것이다. 고려 초기에 지배층과 일반에게 성이 보급되면서 차츰 본관제도가 정착되기 시작했다. 지금도 우리들은 아래우가 없고 버릇이 없는 사람을 일컬어서“본을 모르고 자랐소”라는 말로 표현한다. 여기에서 말하는 본이 바로 본관을 이르는 말이다.종족간의 친목을 도모하고 사랑을 가르친 족보는 분명사회의 문명발전에 유익한 민간문화였고 인간의 가장 기초적인 삶의 개념을 탑재하게 만드는 삶의 지침서이다. 그래서 족보의 훼절을 슬퍼하는것이다.
13    허수아비에게도 그림자가 있다 댓글:  조회:926  추천:0  2012-07-31
우리 민족 구전민요중에는 파랑새란 민요가 있다. 새야 새야 파랑새야 //녹두밭에 앉지 마라.//녹두꽃이 떨어지면 //청포장수 울고 간다. 이 민요는 동학농민운동의 주동자인  녹두장군 전봉준의 실패를 한탄하고 민중의 실망을 우의적(愚意的)으로 나타낸 민요로 알려지고있다. 이 민요는 선률이 애수적이고 아주 비탄적이라 할 정도로 쓸쓸하게 흐르는데 민요를 부르노라면 파랑새와 청포장수간의 상관관례를 제일 먼저 떠올리고 파랑새를 녹두밭에 앉지 못하게 하려면 허수아비를 세워야 한다는 련상법칙도 작용하게 된다. 허수아비를 세워 녹두밭을 기습하는 파랑새를 막고 청포장수를 울리지 말아야 한다는 걱정스러움에 허수아비를 련상한다는 말이 되겠다. 이만치 우리들은 곡식밭을 덮치는 새떼를 보면 새들의 담을 희롱하기엔 족할 허수아비를 상상하게 된다. 술상에서 저가락장단에 맞추어 새타령을 열창하다가도 다음날 허수아비를 세워 새를 희롱하는 우리 민족이다.아이러니같지만  우리 민족의 넉넉한 민속문화를 엿볼수 있는 대목이다. 허수아비란 짚으로 사람 모양의 인형을 만들어 논이나 밭 같은데 새를 쫓기 위해서 세워 놓는것을 말하는데 지금도 시골의 전야에서 흔히 볼수 있다. 몇년전 필자가 프포라이터로 량수진에 가서 멧돼지들에 의한 농작물피해를 현장조사했는데 당시 옥수수밭머리에 세워 놓았던 수많은 허수아비를 보고 서글프게 웃었던 기억이 난다. 헌옷으로 대충 만든 지저분한 허수아비가 사람도 무서워하지 않는 현대의 메돼지에게 먹혀들겠냐 해서다.하지만 문화적, 민속적인 측면에서 다시 보면 허수아비는 한낟 추레한 허수아비라고 심상하게 스쳐지날수 없을만치 소속감이 뚜렸하고 존재가치를 자랑한다.허수아비에 관한 설화, 야담은 지금도 푸르게 살아있다.허수아비는 헛거(거짓말)라는 뜻의 허와 아버지의 낮춤말인 아비가 합하여 만들어진 이름이라는것이 정설이다.하지만 야담을 소급해보면 가설일지라도 신라시대로 올라가리만치 문화적인 가치를 자랑한다.  통일신라가 후삼국으로 나뉘어지기전 혼란이 계속 되였고 귀족들의 폭압으로 하층민들의 삶은 궁핍해진다. 이 시기에 어느 시골에 가난한 부녀가 있었다. 그 딸의 이름은 허수이고 허수의 아버지는 술주정뱅이인데다가 새를 너무 좋아했다. 새를 너무 좋아한 나머지 허수가 곡식을 얻어오면 그것을 새 먹이 주는데 써버렸다. 하지만 집안사정은 여이치 못하고 세를  못내고 빚지게 되였다. 그리하여 어느 날엔가는 신라병정들에게 빚 대신 허수가 잡혀간다. 허수의 아버지는 울분을 토하며 새장을 바라보다가 새장을 열어 새를 잡기 시작했다. 그러나 새는 도망치고 허수의 아버지는 새를 쫓으면서 논밭에서 허수야 …허수야 …하면서 새를 쫓았다. 사람들은 이때부터 허수의 아버지를 허수아비라고 하였고  새를 쫓는다고해서 논에 허수아비인형을 세우게 되였다는 야담이다. 권선징악으로 일관된 우리민족의 야담이거나 설화에 비해 스토리가 끝까지 서글프다.이런 야담과 설화가 있는 허수아비라 허수아비란 아동전용놀이도 있었는데 현재는 민속으로 분류할만치 허수아비문화로 자리잡고있다  어렸을 때 필자도 많이 놀았던 놀인데 먼저. 가위, 바위, 보로 술래를 정한다.  술래가 눈을 가리우고 팔을 벌린채 허수아비처럼 선다. 이때 놀이군들은 술래곁에 나가가서 별이별 해괴한 장난을 다 부리지만 눈을 가린 호수아비는 보지 못한다. 이러다가 허수아비에게 몸 어느 부위를 다치면 다시 원래의 허수아비는 술래에서 풀려나고  잡힌 아이가 허수아비가 되여 놀이를 지속한다.《멧마당(탈곡장)》에서 해가 서산너머로 사라지는줄 모르고 허수아비놀이를 하다가 서구밖에 나와 저녁을 먹으라고 부르던 어머니의 그 부름소리가 지금도 환청같이 들린다.따지고 보면 허수아비는 새를 쫓아야 한다는 인간들의 념원을 대신하는 표상물일뿐 담약한 새도 쫓지 못하고있다. 인간들과 생존을 함께 하면서 생존법을 배운 새들도 진화를 거듭하고 먹이를 찾는 활동에서 허수아비에 제동장치가 없다는것을 알고있다. 이제는 허수아비우에 앉아 재잘거리면서 즐기고있다. 어쩌면 허수아비도 제구실을 한다는 속담도 이제 색이 바랬는지도 모른다.인간들은 이제 먹거리가 풍성해지면서 가각했던 인심에서 벗어나 새들따위가 농작물을 해치는것에 관용을 보이고있고 공존을 약속하는 시점까지 직진했다. 원두막과 나란히 밭가운데서 빈소매자락을 펄럭거리던 허수아비의 존재는 농경문화의 한쪼각의 아름다운 풍경일뿐, 이제는 허수아비의 물리적인 작용은 무시되고있다.  하지만 다냥한 가을 해볕이 내려 앉아 재글거리는 황금들녁에는 온갖 새들이 속삭이고 그 속에 청승맞게 서 있는 허수아비가 이제 관광객을 부르는 시골특유한 문화가 될수도 있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문화속에서 경제를 찾으라는 말은 허수아비같은 문화적인 존재를 두고 유효한 말이다.허수아비에게도 그림자가 있다.연변일보
12    기축년에 부치는 만필 댓글:  조회:967  추천:0  2012-07-31
기축년에 부치는 만필최국철전통의 힘을 무시하고 우리 말 용어에서조차 낡투, 새것의 계선을 가르 면서 첨단을 달리는듯한 모양새를 보이는 요즘 풍토에서도 기축년, 소해 라는 용어들만은 용케 살아남아서 기원을 표시하는데 일조한다. 끊임없이 륜회를 거듭하는 세월속에서 새해의 벽두가 가까와오면 우리의 문화풍토에서는 어김없이 새해벽두만필, 단상 등 제목의 글들이 흘러나오고 서기스러운 새해를 축복하고 사회 제반 분야에서 해야 할 일을 제시하고 독려한다. 무자년에는 쥐를 말한다면 기축년에는 소를 말하는것이 이제 문화류행으로 되였다. 소는 파워와 억척스러움의 상징이고 대명사이다. 부리망이란 말이 있다. 주전부리를 막을 요량으로 소의 주둥이에 씌우는 물건을 말한다. 부리망이란 소를 부릴 때 소가 햇풀이나 곡식을 뜯어먹지 못하게 하려고 소의 주둥이에 씌우는 물건인데 가는 새끼거나 철사로 그물같이 엮어서 만든다. 이 부리망을 조선북부에서“꾸레미”라 했으니 연변쪽에서도 단연 “꾸레미”라 했다. 그 꾸레미가 변형되여 민간에서는 “쇠꺼레”,  “투레”라 했고 돈화쪽에서는 “다부제”라고도 불리웠다. 지역적으로 이름이 달라도 부리망의 그 제동장치는 한결같았다. 파워가 무진장하고 호랑이도 겁나지 않은 강강한 소라지만 자그마한 부리망을 씌우면 굶어죽어도 부리망을 해체할 아무런 방도도 없다. 지구의 력사가 고급동물이 저급동물에 대한 억제고 간섭이라 볼 때 아주 자연스러운 일일듯하다. 소는 햇풀을 먹으려 하고 인간은 그 풀을 못먹게 막는 장치를 발명한것이다. 철저한 인간위주의 사고이다. 2   관습이란 무섭다.  낯선 길을 걷거나 등산을 하다보면 뒤사람이 꼭 앞사람의 발자취를 따르게 된다. 가로질러나가면 빠르고 앞선 사람이 낸 길보다 더 평탄해보인다고 의식했는데도 결국 잠재적인 무의식에서 해탈하지 못하고 그냥 뒤따르게 된다. 소도 마찬가지다. 수레를 끌고 산으로 들어가보면 꼭 동종류의 발자국을 따라서 가는것을 볼수 있다. 관방에서 사상해방을 캠페인 벌리듯 주도한지 오래다. 그런데 지역사회에서 진정으로 사상을 해방하고 경제,  문화 등 사회 제 분야에서 파격적인 모습을 보이고 해방됐는지 기웃거리게 되는 요즘 세월이다.특히 문화령역에서 우리들은 처처에서 자신들이 만든  “부리망”을 쓰고 함구로 일관하고 길을 가로질러 나가거나 독창적으로 길을 열려는 기미도 없다. 관습과 전통은 룰이 다른 완전히 다른 개념이다. 전통이란 어떤 집단이나 공동체에서 지난 시대에 이미 이루어져 계통을 이루며 전하여 내려오는 사상, 관습, 행동따위의 양식을 말한다면 관습이란 어떤 사회에서 오래동안 지켜내려온 질서나 풍습을 말한다. 이 질서에 문제가 있다는 말이 된다. 20세기에 지켜왔던 하드파워적인 질서를 문화라는 파워로 혁파해야 한다는 말이 되겠다. 그 혁파는 가장 기초적인 인간문화행위로부터 시작된다는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사촌이 기와집 사면 배 아프기식 문화”,  “소집단리익문화”,  “남의 뒤담화문화”,  “안면봐주기문화”가 그 특례다. 연변은 이 문화에서 가장 자유롭지 못한 지역으로 남았다.  이런 “무자년문화”가 기축년에도 지속된다고 생각해보면 가슴이 아프다. 3   음력설 제야 밤하늘의 천정을 샹들리에처럼 장식하고있는 별자리가 있다. 오리온 자리의 북서쪽에 놓인 부자형의 별들은 성난 황소의 뿔이 되고 6~7개로 이루어진 별무리들이 황소의 머리를 이룬다. 초원에서 지축을 흔들며 마구 달리는 소와 같이 생겼다고 해서 황소자리라고 하는 이 별자리의 주인공은 제우스신이고 황도 12궁 가운데 두번째에 해당하는 별이다.그렇다면 소는 전 인류적인 토템으로 승격하지 않았나 의심할수도 있다. 차마고도에서 등에 짐을 지고 묵묵히 설산을 넘는 서장의 모우를 보노라면 인류가 소를 토템으로 신성시했는지를 단적으로도 알수 있을것 같다. 소가 가장 겁나하는 곤충은 시골에서 “쏘개”라고 이름한 까만 곤충이다.  검은 개미보다 약간 큰 날아다니는 이 곤충은 6~7월사이에 소를 습격하는데 이때면 소는 꼬리를 빳빳이 추켜세우고 네발뜀을 하면서 발광한다.  곤충학자들이나 알것 같은 이 곤충은 소에게는 가장 위협적인 존재이다. 혹 밭에서 후치질을 하다가 이 곤충의 습격을 받으면 소는 후치멍에를 멘채로 뛰는데 이때 생둥이라면 보습날에 소 발뒤축을 뭉청 끊어서 소를 도살하게 만드는데 경험자들은 소가 뛸 기미가 알리면 보습날을 깊게 박아서 가대기를 부러뜨려 소의 목숨을 살린다. 농경사회에서 소의 가치고 사랑이다. 부리망도 좋고 황소자리도 좋다. 산업화로 달리는 현시대에서 우리는 소란 동물이 내재한 하드파워에 사랑과 문화라는 옷을 입히고 소를 습격하는 “쏘개”가 되지 말고 현대적인 지역문화의 창출에 시선을 돌린다면 기축년이 더 뜻깊지 않을가 속삭여본다.   
11    연변,지역소프트파워시대 열어가는가? 댓글:  조회:1067  추천:0  2012-07-31
연변문화현상투시 4연변,지역소프트파워시대 열어가는가?최국철 연변일보 기자소프트파워란 간단하게 말하면 정보, 과학,  문화, 예술 등이 행사하는 영향력을 의미하는 용어다. 물리적인 힘으로 표현되는 하드파워에 대응되는 개념으로서 관례적으로 강제가 아닌 매력을 통해,  명령이 아닌 자발적 호응에 의해 얻어지는 능력을 말하는것이다. 21세기는 소프트파워가 주도하는 시대가 될것으로 전망되면서 지구촌은 부국강병을 토대로 한 물리적인 하드파워,  즉 경성(硬性)국가(지역)의 시대로부터 문화를 토대로 한 소프트파워, 즉 연성 (軟性)국가(지역)의 시대로 접속했다.이제 소프트파워란 개념은 신대륙 같은 의미지로 각인되였고 따라서 지역마다 정보,  교육, 학문, 예술, 과학, 기술 등 인간의 리성, 감성적 에너지로 구사되는 산물과 련관된 모든 분야에서의 움짐임도 활발하다. 그럼 연변지역의 소프트파워는 현재 어느 단계까지 왔을가?  한마디로 용어가 생소하리만치 초급단계라고보면 비슷할것 같다. 몇년전에 관방에서 주도한 연성환경건설은 템포가 빠른 경제발전을 념두에 두고 부상시킨것 같지만 따지고보면 소프트파워 건설이란 맥락에서 나온것이다. 작년에 연변지역에서 치른 중국북방관광교역회 및 중국연변민속문화관광박람회를 기점으로 관방주도형 소프트행위가 치러지고 파워로 세인들의 눈길을 끌었다지만 이런 단기적인 행위로는 역부족이다. 연변으로 다녀간 내지인들의 별볼일이 없다는 뒤담화가 껄끄러운건 두말없고 외국인들에게는 아직도 연변지역은 촌스럽다는 평에서는 자유롭지 못하다. 나름이 평이겠지 홀가분하게 지나칠수없는 일이다.한마디로 연변지역의 소프트파워의 미달로 생긴 따가운 시각들이다. 연변지역 가치와 인프라가 잘되지 못하고 그로 인해 소프트파워를 추진할 주,객관적인 엔진박동이 미약하다는 설명이 나온다.현재 중국의 180여개에 달하는 도시(지역)들은 모두가 국제화 대도시를 꿈꾸며 총력전을 기울이고있다. 이들 도시들의 좌표는 경제발전을 전제로 한 소프트파워라고 불리는 문화도시경쟁력이다. 그 경쟁력에 참여하려면 문화도시발전에서 필수조건으로 되는 기술과 인재집결,그리고 지역과 도시의 문화관용을 떠날수 없다. 여기에서 가장 관건은 인재유치다.하지만 연변은 가장 선결조건으로 되는 인재유치가 활발하지 못하고있다.연변은 상당기간 중국의 변연지구에 속하고있는만큼 변두리문화의 속성에서 해탈할수 없고 선진문화와의 접속에서 자주 와류(涡流)가 발생할  지역문화적인 제한성을 갖고 있다. 이런 불리한 여건에서 현재 진행형인 중국도시들의 소프트파워 경쟁에 참여하려면 정보와 인재,기술, 문화와 예술 등 각 방면에서도 저자세의 위치에서 탈출하기도 어렵다.하지만 이런 불리한 여건이라도 마냥 손을 놓고 기다릴수도 없다. 우리들도 “기름 한방울 없기에 초대형유조선을 만드는”긍정적인 자세를 가져야 한다. 다시말하면 연변이라는, 연길이라는 지역의 특성, 민족집거지란 특성에 맞게 우리들만의 문화적 어메니티(어메니티란 사람들에게 휴양적.심미적 가치를 제공해주는 지역의 특징적인 모습들을 총칭하는 용어, 지역 고유의 민족특성, 민족건축물, 공동체의 독특한 문화나 전통 등이 포함된다)를 창출하자는것이다.연변지역특성, 민족집거지특성, 이런 말은 이제 너무도 들먹거려서 신선감을 잃었지만 문제는 신선감이 아니라 민족지역특성을 만들어가는 인식과 행위자체가 관건이다. 입으로만 특성을 살릴수 없다. 몇년전부터 공무원들의 민족복장화가 추진되고 모퉁이에서나마 의(衣)에서 지역적인 특성이 구현되는것 같더니 이제 그런 작은 움직임도 미비해졌다. 소프트파워는 이런 기초적인 행위로부터 시작된다는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타지역인들이 연변에,연길에 온후의 첫 감상이 중국의 중형도시(지역)와 비해 새로운것이 없다는 평에서 해탈하자는 설명이 되겠다. 민족지구에서 타지역인들에게 강렬한 어메니티를 발산하지 못하면 이건 분명 우울한 일이다.우리들에게는 연변(연길)이란 변두리 지역특성에 걸맞는 민족문화적인 만족감, 쾌적함을 창출할수 있는 힘이 있다.물론 이런 문화인프라와 친화적인 문화환경의 창출은 단시간내에 이룩되는것이 아니다. 하지만 이제부터라도  의욕적으로 밀어붙쳐야 한다. 세계인은 부르지 못하더라도 자국인들의 시각을 자극할만한 부대시설, 우리들에게만 있는 문화와 예술의 발전에 힘을 모아야 한다. “문화와 예술이 당장은 돈이 안돼서 안되오”는 한치보기 발상이다. 연변은 민족특색구현이란 무형의 상징자본이 있기때문에  절대 그 자본을 그저 흘려보내서는 안된다. 소프트파워는 거리의 간판이 민족어라해서 되는것도 아니고 민속촌을 건설해서 되는 일도 아니다.유형,무형 문화의 집합체고 독특한 민족공통체의 발전상과 그에 걸맞는 전통이 적정선에서 결합해야 한다.도시의 문화품위를 제고하고 부가가치를 창출하고 사람들을 오라고 손짓하면서 보여줄것도, 자랑할것도 만들지 못하면 그것은 1차적인 경제소비행위로 그치고만다.연룡도를 연변지역발전 경제발전청사진으로 설계할 때 소프트파워라는 설계도를 꼭 부착해야 한다.우리에게만 있는 가치와 민족정신을 담아내는 지역(도시)이 되고 민족문화적인 향기가 있고 민족특색이 물결치는 지역(도시)이라고 할 때에야 우리의 연변은 소프트파워지역으로 변신할수 있고 지역경제의 지속적인 발전을 미리 약속할수 있을것이다.
10    우리의 거리문화 이래도 되는가? 댓글:  조회:1017  추천:0  2012-07-31
우리의 거리문화 이래도 되는가?최국철 연변일보 기자외국인들이거나 외국에서 몇년 생활하다가 귀국한 사람들의 제일 처음의 평가가 우리들의 란잡한 거리문화다. 무슨 말이냐 하면 규범과 질서를 무시한 대중들의 보행문화가 이제는 용서해줄수 없는 시점까지 박두했다는 말이다. 지금 이 시각도 연변의 각 도시, 특히 연길의 거리에서는 임의로 차량전용도로를 마구 질러나가면서 질주하는 차량들과 “게릴라전”을 펼치는 행인들의 모습이 연출되고있다. 건널목도 마찬가지다. 적색, 록색 신호등을 무시한 행인들의 용감한 행진은 계속되고있다.  손에 땀을 쥐게 하는 오염된 무질서지만 우리들은 이젠 이런 진풍경에 너무도 익숙해져서 그저 그렇거니 아무렇지도 않게 지나친다. 적색, 록색, 오렌지색으로 점멸하면서 십자거리거나 건널목에서의 차량통행을 지휘하고 행인들의 행보를 지휘하는 신호체계는 그것을 발명한 인간들에 의해 깡그리 무시된다는 설명이 되겠다. 교통에서의 적색과 록색은 사회적인 인간의 행보를 규정해주고 질서를 지키게 만드는 지시등이지만 이 지시등은 우리한테서는 무색해지게 된다.    엄격히 말하면 우리들은 규범을 엄격하게 지켜야 하는 사회인이고 거리에 나서는 순간부터 길문화를 지켜야 할 의무감을 가지고있다.가장 기초적인 사회도덕이다. 객관적으로 이런 현상의 출현은 우리의 도로에 아직도 인간들을 위주로 편성되거나 만들어진 행인전용 건널목의 부재, 인교, 공중, 지하통로 등 각종 부대시설이 부재한데서 원인을 찾아볼수 있고 주관적으로는 우리들의 길문화의식이 전무함에서도 문제를 찾아 볼수 있다. 공중질서의식의 보편화는  초창기에는 홍보도 필요하겠지만 무질서를 규제하고 제한하는  조치도 따라가야 할 필요가 있다. 그러자면 지금의 교통경찰의 힘으로는 부족하다.  민관합동정리가 필요할 시점까지 왔다.교통정리는 일자리를 창출할 수도 있다. 정부에서 자금을 내고 로약자들에게 일자리를 만들어줄수도 있다는 말이 나온다. 건널목에 교통질서를 지휘하는 안전원들이 포진해서 행인들의 질서를 바로잡아주고 강박관념을 주문하느라면 교통문화에 대한 사람들의 의식과 관념에 저도 모르게 획기적인 변화가 생기고 그 변화가 시간이 흐르면 행위를 규범하는 질서의식으로 다시 자리잡을것이다. 이런 질서의식은 다시 타인들에게 아름다운 모식으로 전염된다. 사회의 규범의식과 행위의식은 이렇게 문화로 자리잡는 과정을  요하게 된다. 강대한 국가 건설의 제일 마지막 관문이 인간들의 자질과 문화의식, 질서의식이라는 점을 다시 상기시키고싶다.
9    연변의 축제 무엇이 문제인가 댓글:  조회:892  추천:0  2012-07-31
연변의 축제 무엇이 문제인가최국철 연변일보 문화부 부장, 소설가겨울을 잡아들면서 연변의 각 현시의 축제가 잠시 소강상태로 접어들면서 휴면기에 진입했다. 올해 처음으로 벌인 연변의 축제는 연변을 대외에 홍보하고 지역민들의 동질성을 확인하고 정부행위에 대한 응집력형성에 매개물 역활을 했다고 나름으로 정면긍정을 하고 싶다. 그러면서도 이제 지속적으로 진행시킬 축제를 문화함양이 높고 관광산업과 접목하고 연변특색의 축제로 자리매김할 그날을 미리 그려보면서 문화적, 경제적인 측면에서 축제를 재조명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축제란 국가, 지역이나 공동체에서 그 어떤 대상을 기리여 제를 지내거나 경축하여 벌이는 큰 잔치나 행사를 이르는 말이였지만 현시대에 이르러 제란 토템적인 의식은 거의 퇴색되고 축이라는 현대풍만이 활발하게 남아 있는 규모적인 문화행사라고 보면 무리가 없다. 오늘날 세계각국에서는 수천 수만가지의 종종별별의 축제가 다양하게 벌어지고 있는 실정이다. 특히 유럽은 축제를 창출한 지역답게 세계적으로도 유명한 축제문화가 활발하게 벌어지면서 세인들이 눈길을 사로잡고 있다.산업화가 빠른절주로 진행되는 현시대 생활문화가 바뀌고 고도의 물질문명을 창출하면서 국가, 지역에 따라 전통문화를 발전시키기 위해 독특한 축제를 만들고 있다는 말이 되겠다. 올해 연변에는 진달래 축제, 련꽃축제 ,사과배축제, 송의버섯축제 ,민속음식축제, 두만강문화관광축제 등등 다양한 축제가 벌어져 세인들의 눈길을 사라잡기도 했다. 연변이라는 지역공동체의 력사적. 문화적. 상업적 특성과 관련된 것이여서 기쁘다.특히 연변이란 특수지역의 동질성에 한획을 긋고 정부주도형 축제가 응집력형성과 복지에 한몫 단단히 했다고 본다. 하지만 옥테 티라 할가 우리들의 초동축제에는 이제 미봉해야 할 구멍들도 처처에 상존해있다.축제문화의 련속성과 영구성적인 고착을 위하여 한단계 엎그레이드 해야 한다고 본다. 축제라면 우선은 문화가 선도되여야 하고 특색이 구비되여야 한다. 행정명령이나 주먹구구식은 외발배기 효과밖에 못낸다.련속성을 보장할수 없다. 진달래 축제는 연변의 축제브랜드로 되기엔 손색이 없는 축제지만 이 축제는 축제문화를 연구하는 학자들이나 지성인들에 의해 외면되고 있다. 정부주도로 진행시키는 진달래 축제에서 찰떡치고, 그네뛰고 온갖 민속들을 총동원한다.진달래축제에 민속을 접목시켜서는 안된다는 말은 아니지만 연변은 아름다운 우리민속을 너무도 랑비하고 뒤섞어서 오히려 민속문화를 퇴색시키지 않나 하는 우려심이 든다.그런데다 일견에는 장족들의 하다 같은 수건까지 출시하여 하다가 아닌가 하는 시시비비에 말려들었다. 이름이 진달래 축제인데 진달래를 부각시키는것이 비미하고 단조롭고 보여주기 위한 이벤트행사라는 인상만은 지울수 없다. 진달래란 브랜드 상품과 진달래에 유관된 행사목록을 더 첨부해야 한다. 품을 더 들이더라도 진달래아가씨선발대회같은 응집력에 도움이 되는 행사를 첨부하고 가까운 국내로부터 멀리 타국에 까지 아가씨들을 손짓하는 등 축제의 영구적인 고착에 한몫을 할 수 있는 행사를 다양하게 조직했더라면 하는 아쉬움도 남아 있다. 올해 진행된 각 현시의 축제는 모두가 상기지적한 경향들이 상존했고 정도부동하게 보여주기 위한 이벤트식 , 임무를 완성하는 행사라는 지적에는 자유스럽지 못할것이다. 특히 송이버섯축제와 사과배축제는 동시에 치러서 대상이 분명하지 못하고 참가자들도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는 헤프닝까지 벌어졌다. 축제는 말그대로 춤과 노래로 일색하지만 그냥 보아 오던 춤과 노래뿐들이라 이제 식상하다. 다행이 외국 가수들을 불러오고 이국적인 분위기가 사이사이에 첨가되여 축제를 고저에 끌어 올리는데 도움도 되였지만 이것도 한번이면 족하다. 우리들이 지역적인 축제는 지역특색이 우선되고 축제대상이 분명해야하고 지역의 문화가 선도되여야한다. 중국에서 가장 대표적인 축제는 연등제와 하르빈의 빙등축제를 꼽을 수 있다.이미 영구성적으로 고착된 빙등축제는 국내는 물론 해외에 까지 널리 알려진데는 북방겨울이라는 계절적인 원인이 첫째라지만 거기에는 지속적인 시간대와 자연이 부여해준 자연적인 얼음의 세계를 북방인들이 고층차적인 문화상품으로,예술창작품으로 그 얼음을 신비와 몽환의 경지로 창출하는 로동에 그 맥이 있다.북방특색이다. 그리고 축제와 관광의 접목이다.현대의 축제는 그 핵이 부의 창출이라해도 과언이 아니다.이미 축제문화가 고착된 타지역의 축제내역들을 보면 한마디로 부의 창출을 겨냥하고 있는것이 많다.한마디로 에서 볼거리를 만들어 놓았으니 와서 구경해줍시사 하는것이 바로 축제이고 여기와서 돈주머니를 풀어달라는것이 기본 내역이라해도 과장은 아니다. 축제에서의 부를 창출하자면 볼거리가 우선이 되여야하고 참신성과 특색, 참가자 참여도가 우선이 된다. 독일 뮌헨의 맥주축제,스페인의 토마토축제는 매개인들의 직접적인 참여에 그 생명이 있는것이다. 우리에게는 아직까지 참여적인 축제가 전무하지만 이왕 축제라고 하면 볼거리가 풍성해야한다.그리고 그 볼거리를 소유하기 위하여 돈가방을 풀게 만들어야한다. 한바탕 북치고 꽹과리나 치고 춤추고 노래하는 단순무식을 피해야한다. 축제의 주체신분도 이제 다양해야 한다.관, 민이 합작하고 나아가서 정부주도형에서 민간기업에 맡겨 경제효과를 꾀해보는것도 축제문화를 고양하는 수단이라고 본다.그 외에도 행정과 지식계의 련합이다. 적어도 축제문화에 대한 지식계의 자문이 필요하다는 말이다.그 외에도 언론과 매체를 동원하여 대외에 대한 대대적인 홍보를 해야 한다. 한마디로 축제는 항상 화려하고 대규모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고예산 이벤트식 축제문화보다는 지역적인 특성을 고려하고 주머니 사정을 고려하여 소규모 저예산이라 하더라도 그 축제가 의미하고 지향하는 바를 분명히 하고 알차게 해야한다.사전의 준비가 충실해야 한다는 말이다. 축제를 위한 지역 전체가 호응하고 지속적인 의미를 갖고 있을 때 연변축제의 미래는 밝다고 할 수 있다. 연변 지역 주민들도 자기 지역문화에 대한 자부심을 갖고 질 높은 문화 축제가 될 수 있도록 개개인들이 참여도 자못 중요하다. 정부의 주도라고 팔짱만 끼고 간건너 볼구경하는 일 만은 피해야한다. 연변의 축제는 상기한 지적들을 피하고 진정 지역문화로 승화 시켜나갈 때만이 진정한 연변축제로 자리 매김할수 있고 련성성, 영구성을 고착할 수 있다고 본다.
8    [문화기행8] 물레야 빙빙 돌아라 (최국철10) 댓글:  조회:1045  추천:1  2012-07-31
[문화기행9] 물레야 빙빙 돌아라  최국철   물레는 민요에서 보다 싶이 빙빙 돌려서 날실을 뽑는게 특징이다. 물레야 아 물레야 빙빙 돌아라...시어머니 오면 매 맞겠구나.닭이야 울며는 이 밤이 새건만 물레는 울어두 샐 줄 모르네 ... 민요에서 보다 싶히 물레 역시 애원의 민구이다. 물레란 솜이나 털을 자아서 실을 만드는 틀인데 한어로 방거 혹은 방차(紡車)라고도 한다 나무로 된 여러 개의 살을 끈으로 얽어 보통 6각의 둘레를 만들고 가운데에 굴대를 박아 손잡이로 돌린다. 회전축을 이용하는 물레는 용도에 따라서 삼과, 목화실을 뽑았고 피나무 껍질로 바를 꼬기도 한다. 청동기시대로부터 사양하기 시작한 물레는 베틀과 나란히 가장 많이 쓴 민구이기도 하다. 베틀이 정교하다면 물레는 엉성한 편으로 제작공예가 간단하고 베틀에 섬기는 날실을 공급하는 기초용기이기도 하다. 어려서 보았던 물레들은 다 세월이 때가 검스레 내려앉아 지금 보면 추레한 물건이 틀림없다 .하지만 한뭉치의 솜이 술술 풀려서 물레바퀴에 감기는 전경을 추억해 보면 물레 역시 우리들의 의(衣)에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한 민구가 틀림없다. 연변의 시골에서 60년대까지 집에서 물레로 솜실을 뽑았고 고급편직물이 나날이 보급되면서 둔중한 물레는 자취를 감추면서 그 대신 란 간편한 민구가 물레는 대신하게 되었다. 질그릇 깨진 것을 모를 죽여서 대충 동구랗게 만들고 중간에 구멍을 뚫어 나무 추를 넣고 손으로 돌리게 만들었는데 말하자면 방추인 셈이다. 시골에서 아낙네들이 모이는 장소마다 이런 가 등장하는데 아낙네들이 저마다 솜실을 늘구어서 그때면 온 집안에 솜먼지로 뿌옇게 되었고 이런 고역을 거쳐서 다시 양말이나 적삼을 뜨기도 했다. 우리세대가 어렸을 때 신은 양말이나 적삼은 다 이런 덕이다.그 를 자꾸 건드려서 솜실을 끊어 놓아 어머니들에게 볼기짝을 맞으면서 성장한 우리들이다. 이번에 이 민속문화기행을 련재하면서 우리연변의 각 현시 문물관리부문에서 우리민족들의 민구 소장에도 눈길을 돌려 봤음하는 바램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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