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국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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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9    문인상경(文人相轻)과 문인상경(文人相敬) 댓글:  조회:339  추천:0  2019-07-19
문인상경(文人相轻)과 문인상경(文人相敬) 최국철   1 - 돋보기 거울 속에 수염이 거칠한, 조금만 건드리면 덜걱덜걱 각이 물러앉을 것 같은 낡은 얼굴이 나나탔다. 그것도 돋보기를 건 얼굴, 돋보기를 투과해 드러난 몰골을 자세히 보니 수염발도 이제 하얗게 바랜 터덜거리는 몰골. 뭐냐! 당장 거울을 박살내고 싶은 충동이 드는 건 나 또래 중년들이 어느 날 아침인가 공동으로 느꼈을 억하심정이였으리라. 이런 걸 망녕이라 하겠지. 그런데 곤궁에서 헤여나올 수 있을 지탱점 하나 발견된다. 과학의 발명품인 돋보기가 아니라면 낡아빠진 얼굴의 해상도가 기분 흐리게 높게 나올 리도 없을 텐데… 돋보기가 문제로다. 책임을 떠미는 인간의 고약한 본성에서 보면 돋보기는 하등의 보탬이 안된다. 돋보기가 아니라면 로화기(老化期)가 들기 시작하는 낡은 얼굴이 픽셀(像素)이 높은 사진처럼 고화질로 거울 속에 나타나는 일도 없으렷다. 돋보기가 그 원형을 확대, 눈앞에 놓인 물체를 명시거리(明视距离)에 놓아 육안으로 보는 것보다도 큰 시각(视角)으로 볼 수 있게 하는 획기적, 실존적 발명품이라는 긍정적인 측면에서 인류의 문화적인 진보를 촉진하는 생필품이라는 점은 부인 못한다. 하지만 부정적인 측면에서는 물체를 볼록렌즈의 초점거리 안에 놓아 터무니없이 확대, 원형을 무시하고 허상을 만들기도 한다고 해석할 수도 있다. 한마디로 전자는 우점을 보는 것이고 후자는 결점을 보는 것이라고 하겠다. 돋보기와 반대로 가까운 것은 잘 보고 먼 것은 잘 보지 못하는 일, 그런 사람이 쓰는 안경은 졸보기라고 한다. 무릇 사물의 량면성에서 돋보기라는 물건은 모순체이기도 하다. 하지만 긍적적인 측면에서 돋보기가 발명되였으리라는 점은 의심할 나위가 없다. 남의 우점을 돋보기로 보고 결점을 졸보기라고 웨쳐보면 눅거리 구호가 될가?   2 - 상경(相敬) 남들이 언녕 씹어놓은 것을 재해석해야 하는 화제 속에는 문인상경(相轻)이란 말이 있다. 문인들간의 트러블이 자주 발생하면 문인상경이라고, 예로부터 문인들은 상호 그랬다고 얼버무린다. 왜 무인, 과학자, 교수, 상인도 아닌 문인만이 상경(相轻)해야 하는지 필자는 그 답을 찾을 길 없다. 예로부터 문인들이 서로 경멸하고 자기 글만 과신하고 동료들의 글솜씨를 과소평가하는 경향이 있어 문인상경(相轻)이라고 했다면 현대 문인들은 상경(相敬)해야 하지 않을가. 사상은 발전하고 인성도 진화할 수가 있다. 문학은 인문학으로서 과학이 아니기에 공식이 없다. 하기에 한편의 글을 읽은 독자들의 감수는 다다소소 차이가 난다. 좋다, 나쁘다로 극명하게 갈리기도 한다. 하지만 문인들이 가장 초탈하지 못하는 관문은 동인(同仁)의 쓴 글에 대한 객관성의 결여다. 하기에 누군가가 상을 받으면 자신의 글과 비교해서 별로 뾰족하지도 못한데 하며 억울해하고 걸핏하면 공정, 공평, 더 나아가서 문단권력을 운운하는데 필자는 지금까지 무엇이 문단권력인지 모르겠다. 열받지 말고 그저 그렇겠거니 가볍게 넘어가라는 충고를 많이 받는다.   3 - SNS시대 요즈음은 SNS메신저를‘소셜 네트워크(社交网络服务)’라고도 부르더라. 2010년부터 제공한 글로벌 모바일 메시지 서비스로 데이터 통신 기능을 리용, 료금 없는 메시지 기능을 활용하여 편의성을 높였고 그 이듬해부터 스마트폰의 급격한 확산과 함께 사용자가 급증하여 현재 사용자만 몇억명을 헤아리는 초대형 메시지로 둔갑했다. 중국식으로 위챗(微信)이라 한다. 그룹채팅, 보이스语音, 페이스(视频通话), 게임, 아이템스토어(单品商店) 등 많은 기능을 탑재한 모바일 플래트홈으로 령역을 확대하고 있다. 중국에서 가장 인기 있는 위챗의 좋은 점과 나쁜 점은 무엇인가요? 이렇게 묻는다면 컴퓨터는 SNS의 우점과 결점을 아래와 같이 밝히고 있다. 좋은 점:당신은 다양한 사람들과 새로운 관계를 맺을 수 있고 시간과 장소에 상관 없이 빠르게 정보를 나눌 수 있습니다. 나쁜 점:SNS에 올린 개인정보가 범죄에 리용될 수 있고 거짓정보나 근거 없는 소문이 다른 사람들에게 쉽게 전해질 수 있으며 빠르게 확산합니다. 어떤 주장이거나 말을 조심해야 할 리유다. 그 외에도 좋은 점과 나쁜 점이 허다하지만 우리 작가들이 다 알고 있는 사안이라 필묵을 랑비하지 않겠다. 나쁜 점이 있다 해서 위챗을 부정할 수는 없다. 우점을 편리하고 합리하게 리용해서 결점을 상쇄하는 몫을 문인들이 앞장서 완성해야 한다는 취지다. 출처:2017 제6호
98    모히칸족(부족) 댓글:  조회:298  추천:0  2019-07-18
모히칸족(부족) 최국철   올해처럼 인간이 사회적인 존재라는 간단한 개념을 상기해본 적이 일찍 없었다. 아침에 눈 뜨고 나면 간밤에 은근하게 닥쳐온 말 못할 불편한 진실들이 소속감과 절체성 고민으로 굳어지고 식자우환이라던 선인들의 어록이 먹먹하게 가슴에 마쳐보기도 올해가 처음인것 같다. 필자는 작가협회로 전근해서 행정일을 맡으면서 문단사회학이라고 이름한 계렬칼럼을 십여편 써보았는데 그중에는 란 글이 있다. 이번의 글이 내용상 비슷한 것이여서 글을 쉽게 쓰려 한다는 질책도 각오하고 잠시 서두 부분을 빌려오기로 하자. 모히칸(Mohegan, 莫西干), 알곤킨어족(语族)에 속하는 북아메리카 인디안으로 모히칸족이라고도 한다. 미국 코네티컷주 동부 및 뉴욕 허드슨강 류역에 살았다. 그러나 백인세력이 밀려들자 토지를 팔고 코네티컷의 뉴런던 카운티의 템스강 류역의 보호지에 집결하였으나 주민의 수도 크게 줄어들었다. 대다수는 뿔뿔이 흩어져 다른 인디안 부락에 합류했고 다른 종족과의 혼혈자손들이 겨우 남아있다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소설가 J.F.쿠퍼의 《모히칸족의 최후》(1826)는 스릴이 넘치는 작품으로 서부극의 원조元祖로 인세에 널리 알려졌지만 소설제목에서 풍기는 ‘최후’라는 낱말은 체공감을 안겨준다.  이 소설은 소책자 비슷한 규모로서 하얀판 책가위에 험상궂은 모히칸 사내가 정수리에 말갈기 머리를 한 채 연장을 들고 전투태세를 갖추었던 기억이 난다. 이 머리형이 현재에 이르러 신형의 모히칸머리형(莫西干发型)으로 재탄생하고 있다. 지금 보면 소설가 J.F.쿠퍼의 《모히칸족의 최후》는 미국 인디안전쟁이라는 큰 배경에서 찾으면 될 것 같다. 미국 인디안전쟁은 1622년-1890년 사이에 미국 백인 정착민과 미국 원주민인 아메리칸 인디안 사이의 정복전쟁을 총칭하는 말이다.  윈드 토커(风语者) 필자는 영화마니아는 못돼도 미국 서부 영화, 2차세계대전 주제 영화 그리고 윁남전쟁, 중국의 항일전쟁, 국내혁명전쟁 주제 영화와 드라마는 대개 낯선 화면이 없다고 자부한다. 책 읽고 글 쓰는 데도 시간이 모자라는 판에 무슨 영화와 드라마에 빠지는가 물으면 개인적 취향은 곧 시간이고 여유라고 대답할 수 있다. 영화와 드라마에 빠지면서 스케일이 큰 료심, 평진, 회해 전역을 다룬 중국 영화가 로씨야의 2차세계대전 당시를 반영한 《해방》과 흐름이 비슷한 걸 발견했고 특히 미국의 스케일이 큰 영화에 빠지면서 《라이언일병 구하기》와 《진주만》, 《풍어자(风语者)》는 몇번이나 다시 봤다. 이중 《풍어자(风语者)》는 니콜라스 케이지가 주인공인 앤더스 역을 맡아서 더 역성 부리기도 했지만 거기에 깨끗한 아침이슬만 먹는다고 자호감을 가진 나바호라는 인디안의 부족들이 주인공으로 출전해서 더 흥미를 느끼기도 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국은 일본과 치른 태평양전쟁(사이판)에서 새로운 암호체계를 만들어낸다. 미군이 선택한 것은 북아메리카 인디언제어(诸语)중 가장 많이 쓰이는 아타바스카어족의 아파치어파(语派)에 속하는 나바호어로 미국의 애리조나, 뉴멕시코, 유타주에 사는 나바호족들이 주로 사용한다. 나바호족의 도움으로 미군은 결국 누구도 해독할 수 없는 암호체계를 완성하는 데 성공한다.  이 영화는 중국에서는 ‘风语者’라고 번역했는데 제목을 그대로 풀이하면 헛소문을 퍼뜨리는 자로 번역된다. 하지만 한국에서는 ‘윈드 토커’라고 음역했다. ‘윈드’란 대체적으로 맑은 공기와 바람을 뜻하는 단어이고 ‘토커’란 대개 말이 많은 사람, 말 잘하는 사람을 이르는 말이라 두 단어가 합성하면 전파와 련관된다고 볼 수도 있겠다. 전쟁시기 무전의 암호체계는 소통과 명령 체계를 전달하는 수단으로 일단 대방에게 독파되면 전쟁에서 패하게 된다. 이 점을 잘 아는 미군은 태평양전쟁 당시 일본군과 상대해서 아직 널리 알려지지 않은 인디안의 복잡한 언어체계에 중시를 돌리고 그중에서도 나바호족 언어를 암호체계에 직접 도입하여 일본군이 해독할 수 없는 암호체계를 만들었는데 이는 나바호족 언어의 희소성과 우수성과 련관된다. 그러니 중국어 대로 절대 헛소문을 퍼뜨리는 풍어자(风语者)는 아닐 게다.    자페증 사전에 오르지 못한 신조어편에는 ‘국가 자페증’이란 덩치가 큰 신조어가 등재되였던데 정치권과 일반국민(인민) 사이에 놓인 총체적 소통장애를 병증에 빗대여 이르는 말이라고 해석했다. 국가의 자페증이 국가운영시스템이 문제라면 작가 자페증은 작가 정신의 결여가 그 발병 원인 같다. 문학은 작가가 이 세계와의 소통에서 배운 어떤 암호를 문자화로 풀이한 것일 게다. 자기가 모르는 할 수 없는 행위를 남에게 종용하는 것은 관료적인 페습이고 자기가 하고 싶지만 하기 어려운 걸 교대해주는 건 소통이다. 작가의 자페증을 주제로 한 글의 내용이 ‘모히칸족의 최후’, ‘윈드 토커’ 같은 내용으로 이상하게 비탈렸으니 이 두개의 동이 닿지 않는 암호 속에 상관관계가 있는가 하는 고민은 독자들의 몫으로 남긴다. 필자의 할머니는 세상을 떠나면서 말을 개떡같이 해도 비단같이 들으라는 위대한 유산을 남겼다. 그래서 필자의 우상은 할머니였다. 출처:2017 제4호
97    문학도 기획이 관건이다 댓글:  조회:278  추천:0  2019-07-17
문학도 기획이 관건이다 최국철   사전에 오르지 못한 신조어편에는 ‘귀차니스트병’이 등재되였다. ‘귀찮으즘’이라고 달리 표현되기도 하는 이 현대병은 귀찮은 일을 싫어하고 혼자 시간을 소비하는 사람을 지칭하는데 진종일 방안에서 TV와 리모컨, 컴퓨터, 핸드폰만 만지작거리는 사람들을 일컫는 말이다. 세상과 소통하는 ‘귀차니스트’의 경로가 기기 뿐이라는 말이다.  문화가 기획이 관건이라는 제기법은 필자가 처음으로 제기한 것이 아니다. 신문사 기자 시절 월요일 아침마다 열렸던 부서 주임 회의 주제는 일주일 간 기사내용과 취재기획에 대한 합평이였다. 심층취재 기사와 뉴스대상에 대한 기획은 신문의 생명력이다. 그 시기 ‘기자는 발로 글을 써야 한다’는 말이 신문사 울안에서 유령처럼 배회했다. 기자는 부지런해야 취재 원천을 확보한다는 말이다.  그럼 문학은? 문학은 언어예술이라는 점에서는 신문기사와 구별되고 다른 예술령역과 차이점이 있지만 필경 문화의 한 조성부분이다. 이런 특수한 령역을 다루려면 작가마다 자기의 창작기획이 있어야 한다. 그런데 기획은 부지런함이 따라야 한다. 올해 중국작가협회는 또다시 기층에 내려갈 작가 명단을 확보하려고 산하의 문학단체에 작가들의 신청을 접수하게 했다.  연변작가협회에 배당한 명액이 10명이지만 신청한 작가는 모두 5명이였다. 그중 조선족 작가로는 필자가 유일했다. 그것도 주석이니 안될 것도 고려하면서 앞장서야 한다는 강박관이 작용한 것이다. 그 외 4명은 모두 한족 작가였다. 연변작가협회에 대개 조선족 작가는 700여명이고 한족 작가는 100여명 좌우다. 이런 비례라면 조선족 작가는 30여명이여야 한다. 작가라고 하는 회원수가 많아도 진정 총대를 메고 전장에서 활약하는 작가가 백명도 안된다는 게 우리 문단 현황이다. 번역과 출판에 대한 부축대상 신청에는 너도나도인데 고생스럽다는 조건인지 호응도가 저조했다. 작가에게 생활경력이 얼마나 중요한지는 작가마다 모르는 이가 없을 것이다. 그런데도 새로운 생활에 대한 도전이 없다. 우리는 사석에서 문단유사를 화제로 들먹일 때마다 아무개와 아무개가 고료를 제일 많이 받았다고 말한다. 그중에는 고 류연산 작가도 있다. 류작가는 두만강 천리, 압록강 2천리 송화강 5천리, 흑룡강 7천리를 발로 뛰면서 답사했고 4부작으로 된 다큐멘터리를 그 시기 《서울신문》에 3년 간 련재하면서 지금 봐도 꽤나 두둑한 고료를 획득했다. 이건 류작가의 문학기획이 우선이고 부지런함이 두번째다. 필자도 그 시기 류작가를 따라 두만강을 두번 답사했는데 그의 부지런함에 탄복했고 그가 얻은 문학소재로 라는 소설을 쓰기도 했다. 책을 출판해달라는 청탁은 여기저기에서 들어오지만 작가협회에서 자기가 생활체험 차로 어디로 가겠으니 도와달라는 청탁은 없다. 차 타고 시골을 한번 휙 돌아보고 처녀 총각 그림자도 없소, 아이 울음소리 한점도 없는 유령농촌이 됐소, 개탄하면서도 페쇄적 농경사회에서 산업화로 이행하는 길목에서 우리 민족들이 겪는 과잉적 아픔, 리별과 리혼, 결손가정과 그 아이에 단마디 동정론으로 끝낸다. 급진적, 가변적인 우리 민족들의 다층차적 삶과 불확실성이 가져다주는 자의성을 문학적으로 승화하려는 노력의 흔적이 희미하다. 민족사회의 총체적인 륜곽은  민족 구성원들의 진실한 삶의 집합체이고 거기에 작가들이 그려야 하는 좌표가 있다. 굳이 습주석의 “군중속에 들어가라”는 지시를 들먹이지 않더라도 작가에게 생활이 얼마나 중요한가는 문학력사가 증명했다. 필자의 연길 상경은 이제 10년 째를 맞는데 채바퀴 도는 듯한 생활 속에는 소설적인 발견과 흥분점이 제로다.  출근도 생활이고 사업도 생활일진대 왜서 생활이 없다고 하는가? 답은 작가들이 이미 다 알고 있다. 지난 호에 《도라지》에 등재한 리여천선생의 글이 독자들에게 꽤나 많은 반향을 일으킨 줄로 안다. 한국의 ‘3D’현장을 발로 뛰고 몸으로 부딪치면서 소재를 축적했을 작가 나름의 진실을 읽으면서 리여천선생의 작가적인 항쟁사에 탄복이 갔다. 진실을 찾지 못할망정 편단적인 사실이라도 캐내서 글로 만들면 문학적인 가치는 차치하더라도 사료가치는 남을 게 아닌가! 다방의 커피를 홀짝거리고 다방맛을 지절대는 ‘신도시인’, ‘귀족화’로 변해버리는 작가들이 점차 ‘귀차니스트’로 진화를 재촉하는 것 같은 우려가 드는 게 나만의 호들갑은 아닐 게다.  …뭔가 움직여야 짹소리라도 나올 게 아닐가? 출처:2017 제3호
96    작가들의 권익 댓글:  조회:293  추천:0  2019-07-17
작가들의 권익 -작가들의 권익이란 작가가 지켜야 할 사회적, 도덕적 책임을 완성할 때만이 지켜진다 최국철 작가협회로 전근한 후 필자는 8기 주석단에서 제일 먼저 제정한 규칙이 표절에 대한 처벌세칙이고 그 후 9기 주석단에서 두번째로 만든 것이 작가들의 권익을 보호할 데 관한 공문이라고 할 수 있다. 각 방송사에 이첩한 공문에는 작가들의 문장을 방송할 경우 꼭 해당 작가의 동의를 거치고 원고비를 주어야 한다는 게 그 골자다. 정당한 원고비 청구는 작가들의 권익이다. 언제 원고비를 보고 글을 쓰는가 하던 시대는 지나갔다. 사람이 좋게 보이는 듯한 이런 말은 실제적으로 자기의 문학에 대한 부정일 수도 있고 문학가들의 권익에 대한 자동포기일 수도 있다.  심사위원으로 불리워 가서 작품을 보는 일이 푸술하다. 그런데 이제는 평의심사를 하는 일이 겁난다. 나만의 거부반응은 아닐 게다. 심사위원에게는 작품의 질을 가늠하기 앞서 어느 단락이 표절이 아닐가 하는 의심부터 해야 하는, 당사자들이 알면 대단히 기분이 상할 ‘비밀경찰’적 행위가 슬그머니 가첨된 것이다. 심사위원들은 헌병이 아니다. 좋은 작품을 보면 대뜸 입이 귀에 걸리고 후한 점수를 주는 선한 사람들이다. 그런데 이런 작품을 의심해야 하는 것이 얼마나 더러운 행위인가… 이제 표절도 승격되여서 여러편의 문장에서 교묘하게 짜깁기를 한다. 결과 작품의 언어전달이 유연하고 작가의 ‘창조성’이 높은 점수를 받게 된다. 심사위원들이 이것을 발견해 내지 못하면 문제가 어떻게 되였든 간에 심사위원들이 치렬하지 못했다는 작가들의 따가운 시선에서 자유로울 수가 없다. 심사위원들이 그것도 발견해 내지 못하냐, 추상같이 질의해도 변명할 거리가 없이 궁핍해 진다. 심사위원들만의 고민이 아닐 게다. 문학잡지사 편집들에게도 비상이 걸렸을 것이다. 어느 때부터 우리 문단에 표절이란 부당함에 대해서 면역력을 상실했는지 뒤에서 아무개… 쉬쉬해도 정작 앞에 선뜻 나서길 주저하고 책임과 꾸중의 몫은 작가협회에 밀어버린다. 원칙적으로 맞는 말이여서 이런 글이 어떤 작가들이 더러 곁불을 맞을 수도, 타격이 될 수도 있다는 점이 가슴 아프지만 이왕 작가협회 행정을 책임졌으니 필자가 총대를 메고 욕 먹으러 나섰다. 그런데 이제는 작가협회 행정적인 힘만으로 완치가 불가능한 현안으로 남았다는 것을 부끄럽게 고백한다. 지난해 모 방송사의 응모작에 두 초학자가 표절에 참여한 것을 보고 악연히 놀랐다. 표절에 대한 처벌세칙들이 약한가 고개를 갸웃거리게 된다. 처벌이 능사가 아니다. 문학상에 대한 욕심과 자기 문장을 잘 꾸미고 싶은 욕심으로 자의나 타의적으로 은밀히 이루어지는 표절들은 아주 우려스러울 지경으로 진화했다. 이제는 작가라는 그 이름의 도덕성에 맡겨야 한다. 한 로시인은 필자에게 아래와 같은 이야기를 했다. 이 로시인은 어느 시기에 어떤 가사학습반을 꾸렸는데 결과 그야말로 노다지를 발굴했다고 한다. 가사를 이렇게 잘 쓰다니…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작곡가들에게 넘어간 가사들이 이미 발표된 가사들이라는 항의가 온 것이다. 이런… 로시인은 격분해서 따지고 들었는데 학생들의 대답이 어려서부터 선생님이 쓸 줄 모르면 타인의 작문을 베끼라고 했단다. 이런 비도덕적인 행위에 면역이 된 작가후보군들은 타인의 작품을 임의로 훔쳐오는 일에 전혀 죄의식이 없는 듯하다. 이 사실의 진실 여부를 떠나서 문단에서 표절에 대해 너무도 관대하지 않은가 하는 개탄이 앞선다. 작가들의 권익이란 말 그대로 권리와 리익이다. 작가들의 권리 속에는 넘지 말아야 할 파이어링라인底线이 있다. 이것을 지킬 때만이 충분한 권익을 향수할 수 있다는 점과 표절의 후유증이 무겁다는 점을 결코 잊지 말아야 한다. 출처:2017 제2호
95    [대담] 고향을 쓰는 작가 댓글:  조회:328  추천:0  2019-07-16
고향을 쓰는 작가 최국철&김홍란   -편집자의 말- 2017년 1호부터 “작가를 만나다”라는 코너를 신설한다. 대담형식의 이 코너는 그동안 주옥같은 작품으로 우리 문단을 빛내며 창작활동을 활발하게 해온 중견작가는 물론, 문학이 도외시되는 시대에 돈이 안되는 문학을 대담히 선택하여 우리 문학의 대를 잇고있는 젊은 작가, 그리고 창작을 하는 한편 각종 형식으로 조선족문학사업의 발전에 기여를 해온 문학인들을 만나게 될것이다. 쟝르 구분없이, 세대순차별이 아닌, 문학현장에서 열심히 창작의 필을 갈고있는 작가와 또 우리 문학의 발전을 위해 애를 끓이고있는 문학인 한분 한분을 만나 문학을 담론하면서 작가 개인의 창작인생을 조명하는 한편 조선족문단 전반을 되짚어보는것으로 우리 문학의 보다 나은 앞날을 기하는 계기를 만들어보고저 한다.      초대작가: 최국철(소설가, 연변작가협회 주석) 진행자: 김홍란(《도라지》잡지사 전임 주필)   일시: 2016년 12월 26일 장소: 연변작가협회 사무실 김홍란(이하 김): 안녕하세요? 《장백산》잡지사의 부탁으로 신설 코너 “작가를 만나다”의 진행을 맡게 되였습니다. 첫 초대작가로 그동안 독특한 창작풍격으로 우리 문단의 중견역할을 톡톡히 해온 최국철작가님을 모시게 되여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최국철(이하 최): 《장백산》에서 새롭게 이런 코너를 마련했다니 반갑습니다. 제 기억에 오래전 타잡지에서도 이런 코너를 마련했지만 생명력이 길지 않았던것 같은데 《장백산》에서는 저뿐만 아니라 우리 문단의 유명한 작가들을 재조명하는 좋은 일을 오래동안 견지했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김: 네, 그러도록 노력해야겠죠. 소설가 최국철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것이 이주문학의 대표적인 작가, 대량의 방언 사용과 민속의 재현으로 굵직한 작품들을 수두룩 써냄으로서 자기만의 독특한 창작개성을 구축한 작가, 뭐 이런것들이 아닐가요? 선생님의 수많은 중단편소설이 그렇고 장편소설이 그렇듯이 우리 민족의 애환과 아픔과 력사가 민속적인것, 전통적인것과 잘 결합된채 소설속에 고스란히 녹아있어 그 연구가치가 더구나 크다고 봐요. 작품에 대한 얘기를 나누기에 앞서 먼저 선생님에 대해 알아보는 시간을 가지려고 합니다. 선생님은 1962년 두만강변의 남대촌이라는 곳에서 태여나셨다죠? 최: 제 고향은 현재의 도문시 량수진 남대촌이예요. 저의 소설에서 나오는 남대천이 바로 남대촌이죠. 남대촌은 일명 남대동이라고도 부르는데 지난 세기 80년대 초까지 도문이나 훈춘역에서 기차표를 사면 남대동(南大洞)으로 찍혀 있었어요.  연변의 향진들이 청정부시절부터 중화민국, 간도성시절을 거치면서 행정 소속을 련속부절히 바꾸었는데 그중에서도 저의 고향만큼 다사하게 이름을 변경하고 소속 관계를 변경한 곳은 드물어요. 모얼하전자, 큰골, 남대동, 남대려, 영호촌, 남대촌... 고향 명칭이 바뀐것만큼이나 량수진도 행정관할소속이 수없이 바뀌였는데 훈춘청(厅)- 왕청현- 훈춘현- 그러다가 현재의 도문시 행정관할소속으로 자리잡고있죠. 그래서 저는 여간해서는 도문출신이라는 말을 잘 안해요. 전 훈춘출신입니다. 량수진은 조선의 온성과 마주한 분지로서 석탄과 목재가 풍부하고 농사가 잘되는 고장이예요. 저의 고향 역시 광산마을인데 1934년 일본사람들이 집단부락을 만들 때 억지로 세운 안전부락이죠. 제가 중학교를 다닐 무렵까지 “토창밖(토성바깥)”, “토창안”이라는 낱말이 어른들 입에서 자주 오르내렸고 실제로 허물어진 토성자리에 검스레 퇴색한 황토흔적이 남아있었어요. 이런 실제 풍경들이 제 소설에 많이 나왔죠. 땅밑에 3기 갈탄이 무진장하게 매장되여 광산마을이라 이름지어지기도 했지만 비만 오면 찰진 황토흙으로 도배되군 하여 안해 없인 살아도 장화 없인 못산다는 그런 구차한 동네였어요. 그런 동네에서 저는 4남매의 맏이로 태여났어요. 석탄을 줏으며 가난을 배웠고 눈 오는 겨울이면 새 착고를 놓고 참새, 메새 떼를 좇으며 소년시절을 보냈죠. 어려서부터 저는 부지런을 떨기 무척 즐겼고 큰아들로서의 종가적인 책임감을 몸으로 배우면서 자랐어요. 저의 문학은 바로 이런 구차한 동네에서 시작되였죠.  김: 선생님께서 문학지망생이 되는데는 어떤 계기가 있으셨나요? 그리고 작가로 성장하기까지 독학으로 문학을 배우셨다고 들었어요. 최: 독학의 개념이 어떤것인지 개념상에서 정리가 잘 안되지만 만약 김선생님이 말한 독학의 개념이 제가 생각하는 독학과 같은 개념이라면  저는 문학은 독학에서 시작되고 독학에서 끝나는 학문이라고 봅니다. 그런 의미에서 문학가는 고독하고 문학은 개인적이라고 생각해요.  저는 가난한 농민의 자식으로 태여났고 구차하게 자랐지만 어렸을 당시는 우리가 구차하다는걸 몰랐어요. 다른 집들도 다 우리와 비슷했으니까. 참조물이 있어야 뭐 구차하다, 가난하다 그런걸 알게 아닌가요. 하지만 못산다는건 배고프다는것과 직결되니까 배고픈 고생 없도록 쌀이 많았으면 하는 바램은 들었고 문학에 미치면서부터는 책을 마음대로 살수 있는 돈이 없다는 현실만은 알았어요.  소학교 3학년때,  《고옥보》라는 책을 읽고는 장차 나도 이런 글을 써야겠다는 욕심이 생기면서 문학에 빠져들었죠. 지금 보면 격조가 없는 책이였음에도 그 당시엔 그토록 유혹이 컸었어요. 돌이켜보면 어린 나이에 너무도 일찍 자신의 미래를 설계했다는게 조금은 놀랍기도 하고요… 그러면서 할머니의 이갸기를 들으며 문학적인 감성을 가지기 시작했던것 같아요. 책이 저의 첫번째 계몽선생이라면 글 한자 모르시는 할머님은 저의 두번째 계몽선생님인셈이죠.  김: 《천지》(《연변문학》)월간사의 김창석선생님은 일찍 최선생님 댁에 가보시고 선생님이 대단한 독서가이고 장서가라고 하셨어요. 읽을만한 책이 적었던 시절, 문학공부를 위해 지어 조선에서 문학책을 밀수로 구입하여 읽었다고까지 하는데 재미난 에피소드가 많으실것 같네요. 최: 그 당시 연변의 모든 농촌이 그러하듯 정보가 꽉 막혔고 여간해서는 책을 구할수가 없었죠. 저의 고향이 두만강과 몇리 사이를 두고있다보니 전 두만강 건너에 친구들이 없었어요. 그러다가 사회에 진출한후 량수공사 소재지마을에서 친구들을 사귀면서부터 온성도(사이섬, 혹은 샛섬이라고도 함)에 나가 거기로 일하러 다니는 조선사람들과 접촉하게 되였고 거기서 온성 도서관에 남편이 있다는 녀인과 만나면서 책을 밀수하기 시작했죠. 돈이 없으니까 그 당시 한참 류행하던 분홍색 내의까지 벗어서 책과 밀수한적 있어요.  그렇게 밀수한 책을 읽으면서 조선문학에 심취되였어요. 하기에 저는 조선문학의 영향을 결정적으로 받았다고 할수 있죠. 지금도 조선의 장편소설들을 보관하고있어요. 조선작가동맹기관지 《조선문학》을 그냥 구독했었는데 그게 지난 세기 80년대 말까지 가능했던거 같아요. 그 시기 저는 친구들과 사귀면서 사회를 알아가기 시작했고 의리에 눈 떴어요. 저의 사회생활에서 가장 돌출한 변곡점(变曲点)을 찍은 시기가 그때라고 봐요. 제가 정부기관으로 출근하게 된 결적적인 계기도 그런 친구들과 접촉했기에 가능했고요.  저는 친구들이 보여주었던 의리를 가슴으로 배웠어요. 남을 배반하지말고 끝까지 의리를 지켜야 한다는건 나쁜 일이 아니지요. 제가 책에 너무 미쳐있으니까 친구들은 어디 가서든 눈에 책이 보이면 저한테 주겠다고 마구 걷어다 주는 의리를 보였죠. 그들이 책을 얻어다 주면 저는 돈이 없어 술은 못사니까 대신 련애편지 수백장을 써줬는데 방언으로 말하면 와늘 소문 떨쳤지요.(웃음)  김: 재미난 경력이시네요. 어느 글에선가 선생님께서는 “고향의 풍토와 인정은 나의 가장 큰 자산이다.”라고 하셨죠. 그런 선생님을 보고 어떤 분은 선생님한테는 고향이 “후근기지”나 다름없다고 했습니다. 아마 그래서 선생님은 2006년 연변일보 문화부 주임으로 전근하신 후에야 겨우 고향을 떠나오셨나봐요. 최: 딱히 그렇다고 할수는 없고, 솔직하게 말해 가난했으니까 도시에 들어와 집을 장만할 형편이 못됐죠.(웃음) 2008년에야 연길로 상경했으니 거의 50년을 시골에서 살은셈이예요. 제가 지속적으로 고향 남대천(남대촌)을 소설무대에 세우고 고향 사람들을 많이 쓰는걸 보고 이젠 고향 사람과 고향 이야기에서 떠나라는 조언도 많이 들었어요. 하지만 제 주견을 굽히지 않았어요. 사실 고향이란 협의적으로 말하면 자기가 태여난 곳이지만 광의적인 의미에서는 우리 민족의 생존현장의 축소판이 아닌가요. 거기에서 사는 사람들, 잘 알고있는 사람들을 그려야 한다고 생각해요. 막언이 “고밀향”을 써서 노벨상을 받은후로는 그런 조언을 하는 분들이 없어졌어요. 글쟁이에게 있어서 고향의 하늘과 땅은 가장 근원적인 령혼의 장소이며 글의 주제적인 발견, 흥분점이 무진장하게 깃들어 있는 곳이죠.  김: 네, 사실 누구에게나 고향은 정이 가는 곳이고 영원한 정신적 안식처이죠. 그런중에도 선생님의 고향은 그 누구의 고향보다 력사적으로도, 환경적으로도, 위치적으로도 선생님의 창작에 좋은 영양 공급지가 된것 같아요. 그런 고향을 가진건 작가로서의 선생님에겐 행운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선생님에게 작가적 혜안과 사색과 고민이 있었기에 그 소중한 소재들을 작품속 적재적소에 잘 녹여내실수 있었다고 봐요. 우에서도 선생님께서 잠간 말씀하셨지만 선생님의 창작은 또 할머님을 빼놓고 얘기가 안될 정도로 선생님의 작가인생에 할머님이 주신 영향이 아주 크시다고 들었어요. 최: 네. 키가 아주 작은 분이셨고 운신하기 힘들 정도로 몸이 불편한 분이셨지만 이야기를 참으로 잘하셨고 정감이 세심하고 은정이 많은 분이셨죠. 구차했던 그 시절 저에게 돌리셨던 은정이라고 해봐야 가만히 감춰두셨던 사탕 몇알이 고작이고 제가 앓으면 이마를 살뜰하게 짚어주시고 어머니에게 정통편약을 먹이라고 분부하시고 일본화로를 후후 불면서 뜨더국을 끓여주시는 등 사소한것들이지만 그 정을 생각하면 지금도 눈물이 나요. 장손인 제가 밥을 굶으면 안된다고 늘 당신에게 차려졌던 밥을 가만히 덜어주시군 했죠. 만년에는 저를 련인 기다리듯 하셨어요. 찾아뵐 때마다 용돈을 드렸는데 그 당시 50원짜리가 큰돈이라며 받지 않으셔서 그 돈을 다시 10원짜리로 바꿔서 드려야만 받으시군 했죠. 할머니에게 용돈을 드리던 그때를 생각하면 지금도 저는 가슴이 저려납니다. 처음으로 하는 말이지만 저는 뭐가 모성앤지 잘 몰랐는데 이런게 모성애가 아닐가요? 할머니는 저에게 당신이 시집살이를 하시던 그 시절을 수많이 이야기 해주셨는데 그 시기가 바로 지난 세기 30년대쯤이였어요. 그래서 저는 첫 장편소설로 30년대를 그렸던거죠. 저는 두 부모님에 대해서는 글을 쓴 일이 별로 없지만 할머님에 대해서는 정말 많이 썼어요. 그만큼 할머님은 제 인생의 큰 스승이시죠. 지금까지 저는 고향에 관련된 얘기를 많이 썼는데 저의 문학은 결국 할머니와의 공동작업이고 고향과 민족과의 공동적인 작업이라고 생각해요. 김: 네, 선생님 마음안에 계신 할머님이 참 거룩하시다는 생각이 드네요. 선생님은 일찍 문학자서전에서 “고향의 색바랜 사진들이 내 혈관속에서 끊임없이 인화되여 나오고 그 사진들속에는 찬란한 ‘명’보다는 어두운 ‘암’이 더 많으며 나는 울면서 문학을 하고 울기 위해 글을 긁적거린다.”고 하셨어요. 그만큼 선생님은 대중들에게 가까이 다가서있고 특히 최하층 빈곤한 사람들의 아픔을 그려오며 그들의 대변인이 되고자 모지름썼다는 말씀이 되지 않을가요? 그것이 처음부터 작가님의 작품에 여실히 체현되였다고 할수 있죠. 선생님은 1986년 《천지》 12호에 발표한 처녀작 “시골의 빛갈”부터 독자들의 주목을 확 끈걸로 알고있어요. 처녀작 한편을 읽고도 《천지》월간사의 김창석선생님이 “우리 문단의 노다지”를 발견했다며 흥분을 감추지 못하셨을 정도로 선생님은 유망한 작가로서의 가능성을 충분히 보여주신거죠.  당시 원고지도 아닌 그냥 백지에 원고를 써서 보내온 무명작자의 소설을 읽으며 편집선생님들은 이색적인 감정과 반색의 감정이 교차되여 흥분을 금치 못했다고 들었는데, 그때까지 문단과도 그 어떤 작가와도 아무런 연분 없은 백지와도 같았던 선생님은 그렇게 하얀 백지에 대담히 “시골의 빛갈”을 진하게 색칠해놓으신거죠. 최: 제가 장가간 이듬해였는데 안해가 옆에서 자고있었고 저는 베개를 가슴에 고이고 엎드린채 석현종이라는 누런 백지에 소설이랍시고 긁적거렸어요. 마음에 들지 않아 안보낼가 하다가 안해가 길고 짜른건 대봐야 안다고 하길래 큰 기대없이 투고했죠. 글자수도 7천자밖에 안됐어요. 후에 발표된 글을 보니까 미흡한데가 있어서 그걸 보완하느라고 자매편으로 쓴게 바로 “봄날의 장례”였어요. 김: 선생님은 소설을 읽으면서 생활의 본질을 들여다보는 작가적 안목을 키우셨고 또 그것을 소설로 조리해낼줄 아는 작가적 재능을 키워오셨다죠. 한편 풍부한 인생체험이 없다면 아무리 출중한 문학적재능을 갖추었다고 해도 작품에서 깊은 인생철리를 보여주지 못한다고 봐요. 선생님은 이 량자를 다 갖춘 “준비된 작가”였기에 일단 첫 작품을 터뜨리자 일사천리로 달리며 우리 문단을 놀래우는 수작을 륙속 뽑아내실수 있었던거. 처녀작을 발표하신지 1년만인 1987년  《천지》 12호에 발표한 “봄날의 장례”는 단박에 히트를 치며 《천지》문학상, 연변작가협회 제1회 화림신인문학상, 연변자치주정부 진달래문예상, 전국소수민족문학 신인상을 련이어 수상하면서 초기 창작의 대표작이 되지 않았습니까?  최: 후날 읽어보니 마음에 썩 들지 않았지만 그 당시 우리 사회의 공간이 그쯤이였고 그 공간을 확장하는 재간이 그쯤이라고 자아위안하죠. 그 소설속 내용은 저의 고향에서 생긴 진실한 모티브였어요. 그 소설을 쓰면서 고향을 써야겠다는 생각을 굳힌것 같아요. 지금 보면. 김: 그후 1997년, “최국철소설연구세미나”를 개최한걸로 알고있어요. 11년이란 짧은 창작경력을 갖춘 작가의 소설세미나를 개최했다는건 전 문단적으로도 이슈가 아닐수 없어요. 그것도 새파랗게 젊은 30대 중반의 작가가 문단의 집중조명을 받은건 지금까지 선생님이 유일하지 않을가싶네요. 그것을 가능하게 했던건 데뷔해서부터 짧은 11년간 선생님이 “시골의 빛갈”, “봄날의 장례”, “묘자리를 파는 사람들”, “흘러가는 겨울”...등 수많은 인기작을 발표하시면서 독자들과 평론계의 강렬한 반향을 불러일으켰기때문이라고 봐요. 최: 지금 보면 세미나는 창졸하게 진행됐어요. 제가 주인공인데 제때에 소식도 받지 못해서 늦잠을 자다가 아주 창황하게 연길로 달려왔지만 이미 세미나 일정을 절반도 넘게 소화하고있더군요. 그래서 회의 참가자들은 신랑 없는 결혼식을 치렀다는 우스개를 하기도 했죠. 하지만 그 당시의 문단상황에서 보면 30대 중반 작가의 작품세미나를 한다는건 대단한 일이였지요. 김: 그럼요. 그래서 제가 이슈라고 하잖아요. 선생님, 어떻게 말하면 인물형상 부각은 소설의 성공여부를 좌우지한다고 할수 있겠죠? 수많은 소설의 수풀속에서 선생님의 소설이 두드러질수 있었던건 그만큼 선생님이 인물개성화 작업에서 남다른 재기를 보여주며 자기식세계를 구축하셨기때문이라고 봐요. 또한 주인공은 물론 부차적인 인물 모두를 살아움직이도록 그려내면서 끝까지 책임지고 가는데, 결코 쉽지 않은 이 작업을 선생님은 참 잘 완성하셨죠. 그리고 개혁개방의 시기를 맞은 조선족은 그 어느 민족보다 격변기의 앞장에서 달리다보니 의식의 변화, 생활의 양상과 절주의 변화들이 빨랐어요. 그런 좌충우돌속에서 조선족 농민들이 겪었던 아픔과 좌절과 기회와 도전을, 그들의 생생한 삶의 현장을 선생님은 많은 소설속에 담아내면서 과도기적 인물형상을 그려내셨어요.  최: 과찬입니다. 전 지금도 첫 장편인 《간도전설》을 참괴하게 생각하는데 그중 첫째 원인이 크게 시작했다가 작게 끝난것때문이예요. 처음에 수많은 인물들을 어리둥절하게 불러왔는데 정작 장편 한부라는 작은 공간에서 이 인물들을 다 끌고 다니면서 소화해내는게 너무 부담스러웠어요. 그래서 사건 하나를 만들어놓고 거기에서 등장인물들을 죽게 했죠. 첫 독자인 안해가 왜 죽이는가며 안타까워 하길래 나한테 위신 없으면 다 죽인다고 했어요. 독자들에게 작중인물을 교대해야 한다는 부담감이지요. 저는 소설이란 결국 인물에서 시작하고 인물에서 끝난다고 봐요. 그래서 소설은 인물형상화 작업이고 개성화 작업이라고 말하고싶어요.  김: 장기간 우리의 문학은 천편일률적으로 사실주의 창작방법만을 고집해왔었죠. 그러다 서방으로부터 여러가지 문학사조를 받아들이면서 우리의 창작방법도 다양한 실험을 시도하게 됐어요. 이에 적지 않은 작가들이 고민하고 방황하고 갈등을 느끼기도 했고요. 선생님의 짧은 글(혹은 락서》)인  “이것이 소설이 옳은가?”를 보면 줄곧 사실주의 창작방법을 견지해오던 선생님도 잠간의 방황을 하신것 같은데 그러한 갈등을 어떻게 이겨내셨는지요? 최: 지난 90년대 초부터 각종 사조의 영향으로 수많은 실험작들이 출시되였고 수많은 쟁론들이 오갔지만 결국 소설은 인물이다로 회귀했다고 봐요. 리론적으로 문학사조란 한 시대의 문학사상의 어떤 흐름이라고 정리하겠지만 쉽게 해석하면 독자들의 구미에 맞는 양식이라고 해석해도 과언이 아닐거예요. 그런데 사실주의 문학창작방법은 수백년 혹은 수천년을 거치면서 이미 검증되였다고 보는 반면 다른 창작방법은 아직까지 흥쾌한 상태가 아니라는거죠.  저도 창작방법에서 많은 고민을 해봤어요. 소설쓰기 버전을 새롭게 해야 하는가?... 감각과 새로움, 실험적인것 등등 기웃거리다가 결국 이미 배운 “구관이 명관식”이라고 사실주의 창작방법에로의 귀환이 저한테는 알맞는 창작방법이라고 결론내린거죠. 이른바 시류에 편승하지 못하면 주류에서 밀려난다는 “위기”를 나름으로 넘긴겁니다.  한국작가들이 간혹 우리 문단을 진맥하면서 자기들의 지난 세기 70년대를 재현한다고 해서 우리 작가들이 열을 받는데 저는 그럴 필요가 없다고 생각해요. 창작방법에 무슨 새로운게 따로 있고 낡은게 따로 있겠어요. 한시기 저는 한국작품을 많이 읽었는데 이제는 중국작가들의 작품을 많이 읽는쪽이예요. 작품은 우선 재미가 있어야 하거든요. 재미가 없는 작품을 어떻게 읽죠? 이건 대중소설, 혹은 대중문학과는 별개의 개념입니다. 작품창작은 독자들과의 합동호흡을 노리고 “눈높이”를 맞추려는 고민을 해야 해요. 현단계 독자들의 문학작품 리탈현상속에는 문학작품속에 실은 난해성(예술성), 정체성(무게) 같은 독자들을 피곤하게 할수 있는 요소들의 존재가 일정부분 작용하고있는것만은 부정할수 없어요. 김: 네, 맞는 말씀입니다. 한 작가에게 있어서 민족의식 또한 자못 중요한 역할을 하는 부분이 아니겠어요. 선생님은 소설에서 강렬한 향토애와 뚜렷한 민족적기질을 지닌 인물형상을 대량 창조해내셨죠. 그만큼 선생님은 민족의식과 민족애가 누구보다 강하신 작가라고 할수 있겠습니다. 최: 결국 그런 셈이지요. 저는 제가 조선족으로 태여난것을 가장 큰 자랑으로 생각하고 모어로 글을 쓴다는 점에 자긍심을 가지고있어요. 현재 우리 문단에서는 한족 문단을 주류, 우리 문단은 비주류라고 하며 주류문단에 진출하려면 번역이 따라가야 한다고 하는데 그게 틀린 말이 아니여서 다른 주해를 달 필요는 없지만 그러나 주류문단 진출에는 회의적입니다. 현재 한국에서 중국의 유명작가 작품들을 번역해서 출간하는데 가평요의 《페도》 한국어 번역본을 보고 크게 놀랐고 최근에 중국작가협회기관지인 《인민문학》 작품들을 한국어로 번역 출간한 《등불》을 읽으면서 거의 락망했어요. 중국의 유명한 작가 맥가의 작품은 지난 세기 중국농촌의 생산대와 “문혁”이 배경으로 나오는건데 번역작품에서는 그게 잘 드러나지 않고 문학적인 분위기를 찾아볼수 없었어요. 일전 중국작가협회 제9차 전국대표대회에서 맥가를 만나 그 번역작품에 관련해 대화를 좀 나눴는데 그 자신도 이런 점을 더러 알고있더군요. 다시말해서 문화적인, 작가 특유의 감정색채와 문학적인 분위기가 없다는거예요. 그렇다면 조선어를 중국어로 번역할 때도 이런 페단이 없다고 장담할수가 없겠죠. 제가 이런 말을 하면 번역가들이 반발할수도 있겠는데 존재하는 문제에서는 랭정해야 합니다. 중국어로 쓰면 몇만부를 거뜬하게 찍을수 있는것에 비해 모어로 창작한 작품은 겨우 천부 정도라고 자탄하는 현실이지만 저는 이런 현실은 모어로 창작하는 우리 조선족 작가들의 운명이라고 생각해요. 김: 네. 그럼 계속 선생님의 작품 얘기를 해볼가 해요. 한마디로 선생님의 초기창작의 경우 단편소설의 예술적분위기가 다분히 남성적이고 민속적인것으로 특징지어진다면 중편소설은 작품의 진실성으로 특징지어지며 그래서 단편소설에서는 독특한 서정성을 보여주는 반면 중편소설에서는 문학적으로 짜여진 서술성이 세련된 감을 보여주었다는 평을 받고있죠.     하지만 뭐니뭐니 해도 선생님의 대표작은 우리 민족의 이주사를 다룬 장편소설 《간도전설》(제1부)과 《광복의 후예들》(제2부)이라고 봐요. 《간도전설》은 흑룡강신문 제5회 신춘문예 수상작으로 1998년도 흑룡강신문에 련재되였으며 그후 2005년 연변자치주정부 제5회 진달래문예상을 수상하는 등 우리 문단에서 큰 반향을 불러일으킨 작품이였죠. 선생님이 중단편소설에서 현실세계에 주목하셨다면 장편소설은 력사제재를 발굴하면서 민족의 굴곡 많은 이주사를 돌이켜보는것으로 한결 성숙된 단계에 들어서게 되지요.  《간도전설》은 1936년 한해를 다룸으로써 수많은 긴박하고 리념적인 력사사건들이 소설속으로 들어오는것을 거부하였고 공산주의를 중심으로 한 수많은 리념과 이데올로기를 원천적으로 봉쇄하였죠. 대신 우리 민족의 전통적인 풍속, 인정세태, 언어를 대량 사용함으로써 계급적시각에서 력사를 바라보던 도식화에서 벗어났어요. 최: 작품에 이데올로기가 개입해서는 안된다고 강변하지 않겠어요. 우리들의 지난 력사는 이데올로기가 개입할수 있는 개연성이 충분합니다. 저는 이런것을 재론하지 않겠어요. 단 한부의 문학작품은 력사의 검증을 받게 되고 세례를 거친다고 봐야 합니다. 모든것은 다 변하게 되여 있어요. 다시 말하면 인간의 사상이나 의지는 단계별로 차이가 있다는거죠. 하지만 인간의 고유한 생존방식이거나 인간의 가장 위대한 창조의식, 사랑 같은건 변하지 않아요. 작가의 시선은 우선 인간에 맞춰져야 한다고 생각해요. 《간도전설》은, 조선족작가들은 30대에 장편을 못쓴다는 편견을 깨보겠다고 총망하게 쓴것이기도 합니다. 김: 시장경제의 충격에 의해 문학은 사회생활의 중심에서 점차 변두리로 밀려나고 작가들은 곤혹과 방황을 겪게 되죠. 그러다 90년대 중반기에 이르러 작가들은 다시 차분한 분위기속에서 한층 성숙된 모습을 보여주기 시작했고 문학 본체로의 접근을 시도하게 되였으며 창작에서 단일성, 단순성, 통일성을 극복하고 복잡성, 다양성, 모순성을 추구하게 되였죠. 영웅의 시대가 사라지고 평민의 시대가 도래됨과 하께 우리 문단의 소설은 “세속화현상”이 그 기본특징을 이루었어요. 그렇다면 선생님의 《간도전설》도 이상과 같은 맥락에서 창작되였다고 봐도 될런지요?  최: 그런셈이죠. 김: 한마디로 조선이주민들의 삶을 리얼하게 다룬 《간도전설》은 우리 문단의 대표적소설로 되기에 손색 없습니다. 그후 꼭 10년이 지나 선생님은 《간도전설》의 후속작인 장편소설 《광복의 후예들》을 2008년부터 《연변문학》에 2년간 련재하고 2011년 출간하게 됩니다. 《광복의 후예들》은 객관화된 시각으로 해방후에 일어난 일련의 사건을 다루었으며 토지개혁이라는 특정시기에 계급분화가 진행되는 과정을 통해 인간에 대한 폭력과 인간의 존재적인 비극을 표현했다는 점에서 이민제재소설의 새로운 시각을 열어주었고 이주민들의 해방후 생활의 단면을 객관적으로 표현하여 중국조선족이주사의 문학화를 새로운 단계에로 승화시켰다는 평을 받고있습니다.  최: 과찬인걸 알지만… 제가 읽은 토지개혁관련 소설들은 일색으로 송가와 긍정이 위주였어요. 저는 작가란 지난 력사에 대한 시각이 랭정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다시 말하면 제 3자의 시각이거나 공증성이죠. 중국은 광복후부터 1978년 개혁개방까지 30여년간 무려 50여차례나 되는 운동을 치렀거든요. 이중에서 제일 첫번째 운동이 토지개혁운동이죠. 《광복의 후예들》의 무대가 바로 토지개혁이예요. 아주 어려운 배경을 택한셈이죠. 저는 토지개혁을 객관화해야 한다는 쪽입니다. 토지개혁뿐만 아니라 중국의 모든 지난 운동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예요. 저는 《간도전설》에서도, 그 자매편인 《광복의 후예들》속에서도 그 주인공으로 지주를 등장시켰어요. 광복이라는 거대한 변혁속에서 지주라는 인물의 인생변곡점, 다시 말하면 거대변혁속에서 다른 계급에 속한 한 인간의 비참한 추락사를 그리자고 했고 인간의 도덕이 어떻게 변이되는가를 그리자고 했어요. 전쟁만큼 영웅과 겁쟁이를 빨리 읽어낼수 있는 사회현상은 없죠. 수학에 대입이라는 용어가 있는데 문학에서도 마찬가지로 그 어떤 변혁의 장을 만들고 거기에 인간을 대입시켜보면 인차 알수 있지 않을가요. 말해놓고보니 비유법이 좀 이상하지만… 김: 아니요, 선생님의 뜻을 잘 알겠어요. 《간도전설》과 《광복의 후예들》에서 보여준 사라져가는 민족의 풍속과 방언을 토대로 한 민족어에 대한 천착은 타의 추종을 불허할만큼 성숙했다는 평을 받고있어요. 선생님의 소설들에는 잡지사나 출판사의 편집인들이 난해와 어려움을 겪을 정도로 우리의 고유한 방언들이 뭇별처럼 깔려있으며 그만큼 선생님은 순수한 우리 언어를 지키는 파수군이 되고저 안간힘을 쓰시면서 자신만의 독특한 언어특점으로 우리 문학에 아름다운 풍경을 그리고있죠. 최: 편집들과 많이 마찰이 있었는데 대부분 문학언어 사용과 련관되죠. 지금껏 많은 문학언어를 수집했는데 무려 십여권에 달해요. 그외에도 장편을 쓰면서 함경도 방언에 대해 농후한 흥취를 가졌죠. 많은 분들은 제가 대화에서 방언을 다량 사용하니까 지문에서도 맘대로 방언이거나 토착어를 사용하는가고 오해하시는데 저는 지문에서는 철저한 문화어를 사용하고 또 꼭 다른 문학작품에서 얻은 단어를 사용하지 나름대로 창조하진 않아요. 문학은 과학이 아니지만 저는 지문에서만은 꼭 “과학적인” 창작방법을 고집해야 한다고 생각하거든요. 김: 《연변문학》 2016년1호부터 선생님은 또 새로운 장편소설 《공화국의 후예들》을 련재하셨잖아요. 이번의 장편소설이 앞서 발표한 두편의 장편소설과도 어떤 뉴대관계가 있는지요? 이번 장편소설이 그려갈 내용과 작가가 소설을 통해 보여주고저 하는바는 무엇이며 창작상에서는 또 어떤 형식을 취하고있는지요? 최: 《공화국의 후예들》속의 인물들은 대부분 《간도전설》과 《광복의 후예들》 속에 나오는 인물들의 후예들인데 이 소설은 매장마다 각기 다른 인물들이 등장하는게 구별점이예요. 소설의 서두에서도 밝혔지만 창작을 하면서 제가 남대천이란 실명을 밝히고 쓴 소설중 관련인물들의 동선을 다시 그리는 작업이예요. 일종의 련작인셈이지요. 김: 세권의 장편 자매편을 쓰기 위한 자료 수집도 만만치 않았을텐데요. 여기에는 고향에서 들은 이야기와 독서를 통한 력사공부와 수많은 현지답사와 취재과정의 로고가 있었을거라 생각되요. 그만큼 작품자체가 다루고있는 내용이 거창하니까요. 최: 따로 특별히 자료 수집하지는 않았고 두만강을 두번 답사하고 관련서적을 읽고 당안실을 몇번 찾은게 고작이예요. 하지만 소설외 두권의 평전을 쓰면서 자료를 많이 수집했어요. 또 기자시절에 제가 많은 곳을 답사하고 취재를 했는데 그게 또 좋은 자료가 된것 같아요. 김: 세월이 흘러 선생님께서 문단에 등단하신지 꼭 30년이 되셨네요. 그동안 선생님은 중단편소설 70여편, 수필 150여편, 신문원고 400여편을 써냈어요. 그리고 소설집 《여름은 더운 계절이 아니다》(1999), 장편소설 《간도전설》(1999)과 《광복의 후예들》(2011), 장편인물평전 《주덕해평전》(2012 조, 한문)과 《석정평전》(2015), 산문집 《중국조선족민속문화기행》(2014) 등 다량의 작품집을 출간했으며 장편소설 《공화국의 후예들》은 이제 련재가 끝나 출판되는 시점에 이르렀어요. 그사이 선생님은 전국소수민족문학 신인상, 길림성정부 장백산문예상, 연변자치주정부 진달래문예상, 연변작가협회 실화문학상, 《민족문학》 소설상 등 굵직굵직한 문학상을 포함한 각종 문학상 수십차례를 수상하는 화려한 문학경력을 쌓아오셨어요. 이제는 자신만의 독특한 풍격으로 우리 문단에서 자기식을 구축했는데 그만큼 성취감도 크시겠지만 책임감도 무거울거라 생각해요. 선생님의 문학관, 문학적주장을 들어보고싶습니다. 최: 저에게는 이런 말을 하는것만치 어려운게 없다고 생각돼요. 현재 저는 창작보다 작가협회 행정직무에 얽매여서 자유로운 몸이 아니지만 그래도 이런 때일수록 창작을 견지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칼럼 같은 청탁이 들어오는데 꼭 잘 써주고 소설창작도 할거예요. 사실 저는 문학창작을 하는 동안 문학관점이거나 주장에 대해서 작가들과 거의 대화를 못했어요. 작가협회에 들어온후 그런 기회가 있긴 하지만 저는 문학창작에 한해서는 모든 류파를 존중해야 한다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어요. 자기의 독서취향을 끼워서 타인의 작품을 평하지 말아야 하고 존재하는 류파나 사조에 대해서 잘 알고 소통해야 한다고 봐요. 이건 되고 저건 안된다는 식이면 곤난하죠. 모든것을 포옹하는게 문학관련 단체의 립장이고 그 단체장의 립지라고 인지합니다. 김: 기층 공무원과 신문사 기자 사업을 거쳐 선생님은 현재 연변작가협회 주석직에 몸담고있는데 그냥 작가로 글을 쓸 때와 작가협회 주석이란 중임을 맡고난후의 생각에는 어떤 차이가 있으신가요? 그리고 조선족문단 현황을 어떻게 보시는지 궁금합니다. 최: 문단의 현황에 대한 진맥은 피하겠습니다만 한가지만은 짚고 넘어 가죠. 이제 칼럼에서도 밝히겠지만 문학가는 첫째도 둘째도 장인정신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책 몇권 읽고 강의 몇번 듣는것으로는 절대로 작가라고 할수 없어요. 우리 문단의 가장 취약점은 독서수준입니다. 독서가 뒤따르지 않는한 문단풍경선은 절대로 밝을수가 없어요. 우리들의 선배작가들속에는 장인정신을 투철하게 소화해낸 작가들이 많지만 반대로 아래세대들속에서는 그렇게 명랑하지 않아요. 글을 잘 쓴다는건 많은 글을 읽었다는 반증이죠. 김: 네, 지당한 말씀입니다. 선생님과는 작가와 편집인의 사이로 작품을 통한 교류를 해오다 15년전 어느 우연한 기회에 선생님으로부터 다른 작가에게서는 볼수 없는 강한 리드력을 보아내게 되였으며 그때 받은 인상이 참 깊었댔어요. 선생님은 또 소탈하고 진심으로 사람을 대하며 의리심 또한 강한걸로 잘 알려져 있죠.  최: 하하, 아닌것 같은데요. 김: 그리고 현재 선생님 삶에서 가장 큰 행복을 느끼는건 쌍둥이 딸애들이라고 하셨다죠. 젖먹이 애기때부터 의지가지 없는 쌍둥이 녀자애들을 데려다 지금까지 12년동안 딸처럼 키우신다고 들었어요. 최: 사실 이 글을 우리 쌍둥이 딸들이 읽으면 안되는데 조심해야겠네요. 지금까지 쌍둥이들은 우리 부부를 친부모로 알고있는데… 제가 고상했다기보다 누구나 이런 일에 접하면 다 할수 있다고 생각해요. 저는 집에서 좋은 아빠역을 하고 집사람은 악역을 맡고있어요. 집사람은 딸애들의 모든것을 챙기니까 잔소리도 자연 많죠. 이젠 딸애들이 집사람보다 저를 더 챙깁니다. 술을 마시지 말라, 담배를 적게 피우라… 매일마다 빨리 퇴근하라는 재촉전화가 와요. 아들과 딸은 이래서 다른가봅니다. 쌍둥이들을 키우면서 저는 낳은 정보다 기른 정이 더 크다는 리치를 알았어요. 김: 네, 덕을 쌓으신만큼 행복을 오래오래 누리시길 바래요. 그럼 선생님께서 앞으로도 작가로서 보다 좋은 작품을 많이 써내시길 기대하며 한편 작가협회 주석으로서도 많은 수고가 있으시리라 믿습니다. 선생님의 문학인생과 작품을 둘러싼 대담은 저에게 좋은 공부의 시간이 되였어요. 감사합니다. 최: 네, 저도 감사합니다. 출처:2017 제1호
94    문학상 잡담 댓글:  조회:220  추천:0  2019-07-08
문학상 잡담 최국철(연변작가협회 주석, 소설가)         1 “문학상이라면 골치가 아프다.” 문학단체(문학잡지사)를 이끄는 행정주관이라면 누구나 한번 쯤은 내뱉아본 말이다. 한차례의 문학상을 치르면 홍역을 치른 것 같다는 생각은 나만의 ‘품위’ 없는 감각은 아닐 게다.  중국에서 문학상에 불이 붙은 건 이른바 문화령역의 해방과 그 맥락을 같이했다고 보는 게 정설 같다. 지난 세기 70년대 중국작가협회 주관으로 제정된 ‘전국우수단편소설상’과 ‘전국우수중편소설상’ 등을 시작으로 뒤를 이어 모순茅盾문학상, 로신鲁迅문학상이 출현했고 그 뒤 이름도 어리둥절한 ‘문학상춘추전국시대’가 도래하면서 작년부터 중국작가협회와 중앙선전부에서 급기야 ‘혼란한’ 문학상 시장市场을 정돈하는 데까지 이르렀다. 결과적으로 연변작가협회의 석연치 못했던 세개의 문학상과 문학활동이 취체되고 민간 문학단체에서 제정하는 모든 문학상은 심사를 거치라는 지침도 떨어졌다. 백번 잘한 결책이라고 본다. 언녕부터 손봐야 할 문학상 시장이다. 그래도 관성적으로 진행해오던 전통적인 문학상은 욕심을 부린 덕으로 살아남았다.  문학상의 본연의 취지는 문학의 육성과 발전이다. 그런데 호사다마다. 뒤끝은 언제나 시끌시끌하고 말썽이 많다.    2                 우리가 익숙하게 알고 있는 성구에는 문인상경이란 말이 있다. 문인들도 가장 많이 하는 말이기도 하다. 문인들 간의 트러블이 자주 발생하고 예로부터 문인들이 서로 경멸하고 자기 글만 과신하고 동인들의 글솜씨를 과소 평가하는 경향이 있어 문인상경이라고 했을 것이다. 동업자는 원쑤라는 상업적인 성구와 일맥상통한 것 같다. 문학은 인문학으로서 과학이 아니기에 등호를 친 공식이 없다. 하기에 한편의 글을 읽은 독자들의 감수는 차이가 난다. 가끔은 좋다 나쁘다로 극명하게 갈리기도 한다. 하지만 문인들의 가장 초탈하지 못한 관문이 바로 문학상을 론할 때 동인이 쓴 글에 대한 객관성을 상실하는 것이다. 하기에 누군가가 상을 받으면 자신의 글과 비교해서 별로 뾰족하지도 못한 데 억울해하고 걸핏하면 공정, 공평 더 나아가서 문단권력을 말한다. 부엌에 가면 며느리 말이 맞고 안칸에 가면 시어미 말이 맞다는 식으로 어느 쪽의 말도 일리가 있어보인다. 주최측은 행정력을 동원해서 여기저기 뛰여다니면서 겨우 얻은 돈으로 진행한 문학상이 수상작품 평의와 선정과정, 진행절차까지 질의를 받고 폄하되면 위안을 받지 못해서 서운해하고 이의를 드린 쪽은 행정을 책임지면 그만한 일도 안하겠는가? 나아가서 문단의 민주를 말하고 학술적인 견해일 뿐이라고 자기합리화를 한다. 우리 문단 풍경만이 아닌 중국주류문단, 나아가서 만국에서 공통으로 존재하는 제 현상 같다. 2년 전 중국주류문단에서 로신문학상 수상작품으로 포털사이트를 후끈 달군 일도 있다. 스웨덴에서 주최하는 국제적인 노벨문학상도 그 뒤끝이 말썽은 피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현재 각국의 이름난 문학상으로 미국의 ‘퓰리처상(보도, 문학, 음악)’, 프랑스의 ‘공쿠르상’, 영국의 ‘맨부커상’, 일본의 ‘아쿠타가와상’, 한국의 ‘현대문학상’이 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외연이 넓고 자랑할 만한 문학상이 많지 않다.    3 “문단은 왜 이리 말썽이 많은가? 글을 쓰는 작가들은 모두가 신사先生들인가 했는데 그것도 아니구만.” 민족사회에서 흔히 듣는 촌평이다. 이런 질의에 제일 호쾌한 대답이 “작가들이니까 그럴 수도 있지므”다.  좋게 해석하면 “작가들이니까 개성이 뚜렷하지므”다. 그저 개성 하나로 얼버무릴 현상이 아니다. 개인적인 리익을 전제로 하는 자기합리성은 문단의 통합과 합의를 끌어내지 못한다. 요사이에는 “시시비비가 싫어서 ‘된장’을 못 담그랴” 위안하는 주최측의 립지에 후한 점수를 주면서도 시비 많은 문학상 기금을 원고료에 충당하거나 작가들의 책 출판 경비로 돌리면 더 유조하지 않을가?‘막장 치는’생각도 드는 걸 어쩔 수 없다. 그러면서 조선족 학교 학생수가 해마다 줄어들고 농촌 학교엔 한둘의 학생이 고작인 텅 빈 교실 현장을 작가들이 직접 체험했으면 하는 동이 닿지 않는 생각도 들면서 가슴으로 민족우환의식을 다시 새겨보았으면 바라는 마음도 든다. 우리가 한낱 문학상으로, 생산성이 결여된 화제로 세월을 헛되이 소모할 계제가 되는가고, 그럴 시간이면 글 한편 쓸 수도 있지 않겠느냐고.  민족작가란 스스로 “저는 작가입니다.”라고 목청을 높여서가 아니라 그 작가의 글을 읽고 “그렇구나.” 무릎을 치고 작가의 일상적인 고품격을 지켜본 독자들이 자랑차게 “그는 작가입니다.” 이런 평을 받을 때만이 작가라고 정의하고픈 것이 틀렸을가?   
93    유령 정차난 댓글:  조회:707  추천:0  2017-03-06
요즘 우리 직장의 한 직원이 새차를 뽑았다. 새차를 둘러 보면서 “돈 팔고 골치 덩어리를 갖추었군”,축하한다는 덕담이 악담으로 튕겨 나온것이다.무슨 말인지 모르는 새차 주인의 표정을 지켜 보면서 "자네도 이제 차를 굴리 노라면 서서히 스트레스가 쌓이게 될것이고 폭발할걸세"라고 말해주고싶은걸 꾹 참았다.   19세기 60년대 르노(프랑스)가 내연기관을 개발하면서 부터 21세기까지 무려150여년동안 자동차들은 4행정 사이클로 작동하는 가스기관, 자석점화장치, 광폭타이어,압축공기가스터빈 정착, 에어-백 및 안전벨트 장력 시스템 도입, 전자 유압식 브레이크,전자제어 가솔린분사장치,위성과 련결되는네비게이션를 개발함으로서 오늘의 자동차 문전 성시를 이루었고 차 성능이 하루가 다르게 격상되였다. 그동안 일찍부터 자동차문화가 발달한 선진국들은 새롭게 변화되는  자동차 성능에 걸맞게 도로와 도시거리마다 자동차의 원활한 움직임을 보장했다.    자동차의 움직임은 도로에서의 주행만을 념두에 둔 말이 아니라 자동차가 편안하게 쉴수 있는 공간을 확보 한다는 합성적인 의미이기도 하다. 하지만 우리 나라는 이런 자동차 문화를 대비한 소프트 웨어와 하드 웨어가 정착되지 못하고 있다 마찬가지로 우리 연변의 도시들도 중국의 모든 도시들과 마찬가지 양상을 보이고 있다.아빠트 지하주차장이 겸비 되지 못한 점울 보더라도 자동차 시대를 맞을 준비가 허술했다는 점을 단적으로 말해준다.   차가 밀려서 어쩌나 ,차를 댈데없어요,도착해서 몇바퀴 돌았어요, 한국인들의  이런 푸념을 들으면서 이 사람들이 자가용 끌고 끄덕거리면서 말도 안되는 비명소리를 질질거린다고 은근히 비웃었는데 불과 십년도 안되여 우리들도 불만이 폭발하하는 시점으로 직진했고“말도 안되는 푸념을” 진진하게 늘여 놓는다.그때 한국인들은 인구 5천만에 차가 1천 4만여대가 있다고 으시댔는데 중국은 현재 억대를 자랑하고 있다. 게임도 안된다.그런데도 차를 댈곳이 없다. 차를 가진 연변 사람들치고 시내안에서 판을 모르고 아무 곳에나 차를 댔다가 벌금해본 경험들은 언녕 통감했으리라. 1차성벌금형으로 끝내는 “불법주차”,주차장이 없어 임의로 차를 대면 기다렸다는듯 인차 벌금이 따르는 이런 처벌형은 어찌 보면 관계부문에서 자동차들이 불법 주차를 하라고 함정을 파고 있지 않는가 엉뚱한 추론이 드는게 나 혼자만이 다혈질적인 예단이 아닐게다. 모르고 범하는 “불법주차” 과연 이런 처벌이 운전 기사들만이 잘못이란 말인가? 벌금형을 당하고도 차 주인들“주차장이 없는데 어디에 차를 대란 말인가” 한마디 불평도 못한다. 혼자의 힘으로는 해결이 불가능한 현안이다.뒤에서 불평불만이 회자 되는걸 모르는지 무시해 버리는건지 관계부처들이 근본적으로 해결해 보려고 애쓰고 고민하는 흔적이 별로 보이지 않는다. 필자가 소식 경로가 협소해서 그런지 우리 연변의 도시들중에 공용 주차장이 있다는 소릴 들어 본적이 없다. 중국의 생산자료 소유권 특성상 정부에서 마음 먹으면 얼마든지 해결 가능한 일이다. 공지가 나면 상업빌딩, 아빠트 단지만 들어설뿐 시민들의 쾌적한 휴식을 도모할수 있는 소형 공원이거나 집체무를 출수 있는 공간은 별로 많지가 않다. 몇년전에 구글어스로  미국의 도시들을 내려다 보았는데 거기에서 제일 먼저 눈에 안겨 오는 공지가 축구장 몇개를 합친것 만큼 광활한 주차장이였다.그런데 우리 중국의 도시들은 우중충한 건물들 외에 주차장 모습은 전무했다.기동차는 달마다 해마다 기하급수로 늘어만 가는데 이런 차를 어디에 정차 시킨단 말인가?기존의 주차장을 풀가동해도 수요를 만족시킬가 말가인데 원래부터 공용주차장도 없으니 문제가 점점 사회문제로 이슈화되고 루적되고 있다.이런 사회문제들은 방치하면 이제  압축된 불만들이 꼭 폭발하게 돼 있다.차가 억대라면“자동차족도”억명으로 헤아린다는 말이 된다.어느사이에 무시할수 없는 강자형 군체가 되여 있다.해당부문과 관련부처에서 하루빨리 대책들을 출시해야 한다.   자동차 관련글을 쓰려고 자료를 찾다가 “유령 체증”이란 단어를 검색했다.갑자기 옆 차로로 옮겨간 앞차를 보고 뒤차가 브레이크를 밟아 속도를 줄이는데, 이때 약 1초 정도의 "반응시간 지체 현상"이 일어난단다.뒤이어 오던 차들도 연속적으로 브레이크를 밟고, 이 지체 시간이 쌓여 뒤로 갈수록 차가 막히다가 결국 멈춰 서게 된다.우리들도 이런 현상을 모두 경험했을것이다. 까닥모르게 흘러가던 차 행렬이 정체되면서 운전기사들이 모두 두덜거리게 되고 다혈질들은 악담부터 내 뱉는다.유령 체증이 있다면 “유령 정차난, 유령정체난”이 없으란 법이 없다. 이런 현상을 개변하려면 지금이라도 땜질식으로 공지를 확보하고 시내안 도로옆 사각지대를 사유지라고 으시대는  “주인”들을 설복하고 공용부지로 만들고 합법정차 라인을 긋는일에 관련부분들에서 떨쳐 나서야 한다. 무게가 한톤이 넘는 자동차를 지고 다닐수는 없지 않는가. 연변일보 2017-3-1
92    [단편] 어느 여름날 댓글:  조회:1739  추천:1  2016-04-02
  단편소설   어느 여름날 최국철 1     북으로 급하게 날아가던 기러기의 끼륵- 울음소리가 바람같이 후르르 떨어지던 소리가 어제 같이 들렸는데 어느덧 여름이 찾아 왔다.   새벽을 털고나면 빈터만 늘어나고 여망없는 지경마을의 여름은 터무니없이 무덥기만했다. 개가 가난한 주인을 꺼리지 않듯 세월도 가난하고 찌그러져가는 깡촌을 그저 스쳐지날 줄 모르고 여름의 온갖 교태와 성채를 몰고 온다.   이제는 약한 비라도 한줄금 내려서 더위를 몰아갔으면 좋으련만 사방산기슭을 휩쓸며 덮쳐든 중복의 무더위는 황소불알을 삶을 지경으로 맹위치고 있다. 범이 새끼를 쳐도 모르게 무성한 쑥대만이 키높게 자란 지경마을 길에는 뜨거운 해빛만이 제멋에 내려 앉아 화로같이 달구었고 쑥대만 멋없이 키워댔다. 밤마다 옥수수가 퍼런 잎사귀를 이들거리며 쑥쑥 크는 소리를 들어도 컹컹- 자지러지게 짖어대던 동네개들마저 돌담밑을 찾아서 혀를 길다랗게 빼물고 십리 마라톤을 하기라도 하듯 요란스레 헐떡거렸다. 암탉만 보면 괜히 심술끼가 발동해서 돌담우로 내쫓으며 담약한 암탉을 식겁하게 만들더니 지금은 암탉이 코밑으로 유유히 스쳐지나도 숫제 못본척한다.   "켁켁…왈헝(형) 이게 무슨 노름질이우? 수캐덜마저 세떼(혀를) 가루 물고 암캐두 못쫓구 쫠- 네각 뻐더뿌리구 늘어졌는데 매나네 (괜히)개고생을 사서 하는게 아니우?"   왕싼에게는 왈룡이가 왈헝으로 불려진다. 한손에 검은 비닐봉지를 든 왕싼이 돌담 곁에 뻗은 자드락 길에 나타날 무렵은 오후의 해가 서편으로 기우는 시각이다. 왕싼이는 자드락 길에 시름없이 뻗어 나온 호박 줄기를 발로 툭툭 건드리면서 건들거리며 다가왔다. 이 자드락 길은 아낙네들이 마을뒤 "서싸위재"라 이름한 밭에 심은 풋 옥수수를 뜯으러 다니던 길인데 이제는 망태기나 버들광주리에 풋옥수수를 담아 이고 내려 오는 아낙네들도 눈에 뜨이지 않는다.   아침에 손잡이뜨락또르부품 사러 진정부 소재지 마을 합촌으로 내려갔던 왕싼은 합촌에 있는 산동출신형제들과 술이라도 한잔 걸친 모양 취기가 도도하다. 질척거리는 눈귀에는 취기가 잔뜩 매달렸고 누렇게 싹아빠지는 뻐덩이 쯤 사이에 벌건 고추가루 몇개가 렴치없이 매달려 있었다. 비밀봉지안에는 커다란 돼지고기 한덩이와 보기에도 느끼한 비게덩어리들이 들어 있었다. 왕싼이는 비게를 녹혀서 식용유 대신으로 쓰는데 그 냄새로 하여 그의 잡안에서는 사철 쿰쿰한 기름냄새가 가셔질줄 모른다. 지경마을 사람들은 이런 냄새를 "산동냄새"라고 두루뭉실하게 이름했다. 아주 폄훼에 가까운 조크였지만 사람좋은 왕싼은 대수로운 기색이 아니다.   석수쟁이 돌을 보고 그냥 지나칠수 없다. 아침에 내려 갈 때에는 맨정신이라 뱀을 잡는다고 육중한 선바위밑굽을 파내는 왈룡이를 보고 속으로 황소보다 더 우둔한 놈이라고 픽픽 비웃으며 알은체도 않더니 거나하니까 사설쟁이로 둔갑해서 수작을 걸어 온다. 갖바치가 남이 신만 살피고 야장쟁이는 쇠철만 찾는다더니 왕싼은 왈룡이가 파내는 바위를 살피면서 이 커다란 바위를 쪼개면 20장의 비석을 깎을 수 있다고 번개같이 타산하고 있었다. 어느 때부터 세월이 때가 묻어 더 단단한 이 선바위를 욕심냈지만 땅에 허리까지 박힌 큰 화강암이라 섣불리 손을 쓰지 못하고 속으로만 끙끙 앓았다. 그런데 구성이 나타난것이다. 자기의 마음을 알아주기라도 하듯 왈룡이가 지금 바위주위를 전호를 파듯 파고드니 품이 엄청드는 토역공사를 면했다고 속으로 즐거운 비명지르고 있었다. 비석같은 정교로운 물건은 산에 올라가서 만들기보다 마을안이라 만들면 도둑을 맞힐 근심도 없다. 그리고 사방산으로 올라가는 다리품이 덜 든다. 황차 산에서도 이런 바위를 만나면 바위 주위를 덮은 흙을 파내야 한다.   "젠장헐 썩을 얼방뒤눔이 어디서 똥물이라두 한잔 후려쳤꾸마 (마시 다) 시방 난 세떼(혀를) 가루 빼물게 탈탈 바쁘니까 쉬여빠진 헌소릴 작작 허구 그냥 지나가. 돌떼(덩이) 보니 또 쪼아서 돈벌 궁리나냐"   얼결에 이쪽으로 올라오는 왕싼이를 본 왈룡이는 왕싼쪽을 거들떠보지 도 않고 삭정이를 부러뜨리는듯한 꺽꺽한 소리로 맞대꾸했다. 지경마을 사람들은 한족인 왕싼이가 조선말을 얼음우에 박밀듯히 잘한다고 《얼방 뒤》라고 부른다. 대개 혼혈아라는 의미다. 광복전후에 로씨야군인들을 "마우재"라고 부르더니 이제 조선말을 잘한다는 한조건으로 되지도 않는 "얼방뒤"로 몰아간다. 어디에서는 혼혈아를 "튀기"라하더니 여기서는 얼빤한 사람을 일컫던 "얼방뒤"가 된다.   "시끄럽다 고마 가라"   왈룡이 입에서 잔디같은 상냥한 말이 흘러나올리가 만무하다. 헌렁 닝구까지 벗어낸친 왈룡의 웃몸는 아프리카 흑인들도 우리 조상님 올시다 를 련발할만큼 까마귀 같이 검고 반들거린다. 초여름부터 웃몸은 뜨거운 해볕에 로출되여서 동면에서 금방 깬 검은 곰 같다.   "와차 맨삽으루 이런 큰 구뎅이를 파냈수…대단하우."   왕싼은 입을 딱 벌렸다. 왈룡이 같은 우둔한 사내만이 발상이다. 커다란 바위 주위를 파낸 토역공사는 장난이 아니다. 뱀을 잡는다고 벌린 역사치고는 도저히 상상이 안되는 무리한 공정이다. 혼자 힘으로 이런 역사를 벌이다니 …사람이 아니라 우둔한 황소라니까   "이 돌째기(바위)는 이제 내꺼니까 수캐수작질 말어…"   이?…왈룡이헝(형) 가만보니 그저 바지저고리거나 맨물한바가지로만 봤다가는 큰코 다친다니까.   "헤헤헤…무신소리우 사방산에 가문 숱한 돌인데 욕심안내우…헤헤헤 왈헝(형) 저녁에 돼지괴기나 삶아 놓구 한잔 후려치지무."   왕싼은 왈룡이에게 타박 당했는데도 대들줄 모르고 벙글거린다. 왈룡 이가 괜히 심술을 부려보는것 같지만 이 선바위는 왕싼이 차지가 되는건 시간문제다. 왕싼의 잔머리라도 몇마디에 왈룡이를 나긋하게 구워 삶을수 있다. 저녁 편쯤 왈룡이를 술상에 끌어들이면 이 선바위는 당장에서 왕싼이 차지가 될것이다. 왕싼이는 속이 단단하지 못한 왈룡의 속내를 너무도 잘 알고 있다. 생각지도 못한 호떡이 차려졌어   "켁… 이 지경마을에서 누가 왈헝이 힘을 누가 당한다우 당체(최)… 근데 이 돌밑에 정말 무리뱀굴이 있단 말이우?"   왈룡이는 지금 집채같은 선바위의 허리쯤을 파내면서 연신 쾡이로 뱀을 놀라게 하느라고 탕-탕- 요란하게 때리고 있었다. 쇠붙이가 돌에 마치는 특유한 파찰음은 바위밑에 숨어 있는 뱀을 놀라게하기엔 족했다.   "있지…옛날부터 많았다구 소만났네라. 그래서 장난이 험차란 애덜두 이 선바위 근처에는 얼씬두 안했니라 … 벌써 몇마릴 후무렸지무(잡다)…"   왈룡이가 허리를 펴는 사이에 바위밑에서 재빛에 검은 줄무니가 건너간 살모사 한마리가 불쑥 기여나왔다.   "이크!…이크!…"   구덩이 우에 선 왕싼은 살모사가 구덩이 벽을 타고 자기한테로 다가오기라도 하듯 얼른 한발 피하면서 사색이 되였지만 고무장화를 신은 왈룡이는 구덩이 안에서 빠질 구멍을 찾느라 갈팡질팡 기여다니는 뱀을 내려다보며 서두르지 않고 기회를 보다가 재빠르게 살모사의 뒤꼬리를 쥐여들고 몇번 휘둘렀다. 그리고는 뱀이 기절할 무렵 재빨리 비밀주머니 안에 쑤셔 넣었다. 왈룡이는 지경마을 사람들이 정평대로 뱀을 무서워하 지않는 사내가 옳았다.   스르륵- 스르륵- 비닐봉지안에서 되살아난 뱀들이 나오려고 발악하는 소리가 소름끼친다. 겁을 모르고 둔감한 황소도 뱀을 만나면 흠칫 몸을 떨면서 놀란다. 짐승중에서 돼지만은 뱀을 무서워하지 않고 사냥해서 우적우적 씹어 삼킨다 왈룡이도 돼지 못지않게 용감하게 뱀잡이를 하고 있다.   "이거…이거 선바위가 무리뱀이 굴이라던게 정말이구마. 왈헝이사 똥담이 크니까 이런 잽이라두 하지 이 지경마을에서 뉘기 감히 겝나서 달려나 든다우. 당최 비실거리지무"   왕싼은 듣기에도 가소로운 아첨을 하면서 가만히 웃었다. 왈룡이가 제일 듣기 반가워하는 소리라는걸 잘 아는 왕싼이라 왈룡의 가려운데를 슬슬 긁어주고 다독여주는데는 명수다.   "아적에(아침) 나와서 두마릴 잡구 점심먹구 나와서 세마릴 줴겼거든(잡았다) 헤헤헤… 백원벌이 했어 오눌(늘)은 재수 좋치므"   기계가 할 방대한 토역공사를 하고 목숨을 볼모로 뱀잡이를 하면서도 백원벌이에 크게 만족하는 왈룡이다.   왕싼의 예상이 적중함은 인차 드러났다. 왈룡이는 왕싼이 둥실둥실 춰주는 가소로운 말에 대뜸 입이 귀에 걸리면서 흙과 땀으로 번뜩이는 얼굴에 찬란한 웃음을 피워 올렸다.   "이제 이 선바위밑을 다 파내느라문 왈헝은 이 지경마을에서 왕부자가 될게우 흐흐흐…저녁편이 꼭 오우. 이 도투괴기루 안주해서리 술이나 왕창 후려치기우(마시자)"   왈헝- 이라는 당치도 않는 호칭을 빼면 왕싼의 조선말은 한구석도 나무랄데 없다. 어려운 속담이나 관용구 에서도 막힘이 없다. 하기에 모르는 사람들은 조선사람으로 착각한다.   "체나라(물러나라) 펄펄 끓는 삼복철에 뉘기 똥배주나 후려친다구 그래두 말오줌이(맥주) 좋치무…갈 때 뒤병 사가지구 갈게"   맥주가 좋다면서 고작 두 병이다. 하루 벌이 백원에 입이 귀에 걸리는 왈룡의 호주머니 사정으로는 맥주로 배를 불리기에는 아직 무리다. 두병을 사는것이 마치 값비싼 양주라도 사는듯 뿌듯한 기색이다.   "켁 왈헝두 량로반네 뱀탕집으루 불이 펄펄 나게 댕기더니 이제 피쥬거품에 입맛을 들였수? 봄까지만해두 피쥬가 쇠오줌같아서리 못 마신다고 흑흑 거리더니 …헤헤헤 어저는(이제) 입이 와늘(정말) 꼬지(고급)구먼"   "그려그려… 뭐 그리 됐다이…"   왈룡이는 어깨를 으슥해보이고는 다시 허리를 굽히고는 선바위밑에 드러난 잔돌들을 부지런히 밖으로 내던졌다. 이제 허리께 만큼 파들어간 둥근 구덩이는 뱀이 기여 오르게 힘들 정도로 가파로웠다. 우둔한 왈룡이지만 구덩이가 깊어야 뱀이 도망치지 못한다는 도리를 잘 알고 있었다. 평생 지경마을에서 살아 온 왈룡이는 너구리 사냥군들이 날이 저물면 너구리가 굴안에서 달아나지 못하게 입구를 든든하게 틀어막는다는 사냥법을 잘 알고 바위밑으로 통한 뱀굴을 건드리면 구덩이가 깊어야 밤사이에 기여 나온 뱀이 밖으로 도망치지 못하고 구덩이안에서만 맴돈다는것을 도리는 알고 있었다. 뱀사냥에서는 번지수가 환하다.   "내 먼저가서 괴기를 푹 삶아 놓을터이 저녁편에 오우."   "도투괴긴 칼판에 왕소금 뿌리고 주둥이가 델 지경으루 뜨거울때 답새겨야(먹어야) 흠흠하지무"   왈룡이는 생각밖에 생긴 공짜 저녁으로 약간 흥분했다.   "알았수"   왕싼이는 히쭉 웃어보이고는 오던길을 따라 휘적휘적 돌담을 따라 내려 갔다.     2   지경마을의 공식촌명은 태양촌이다. 왕청현 천교룡진에 있는 태양촌은 일제시기 집단이주로 일본사람들이 지어준 촌명이라면 왈룡이가 사는 태양촌은 문화대혁명시기에 정치적인 색을 가미해서 지은 촌명이다. 이 시기 연변의 수많은 촌들이 촌명을 바꾸었는데 홍기촌, 흥진촌, 홍광촌 으로 요란했다. 사람의 이름도 문혁, 홍철, 문자 등등으로 구색을 맞추었다.   태양촌-촌명으로는 나무람 할수 없다. 당양지지에 자리잡은 지경촌 에 어울리는 촌명이다. 하지만 촌민들과 토지사용계약서는 체결할 때 벌건 인장에나 박힌 촌명이다. 사람들은 공식촌명보다 오래전부터 입에 오른 지경촌을 더 선호한다. 지경촌의 이웃마을은 지변촌, 사방대산너머 마을은 지서촌이다. 땅 한필지가 없던 옛날에 지(땅)에 대한 욕심으로 피해의식이 생겨서 지은 촌명들 같다.   지경마을은 1930년대 일본사람들의 집단부락화와 안전촌 정책으로 마을 밖에 돌담을 쌓아서 원래의 산재촌과 지경(경계)를 그었다고 지경촌 으로 되였다는 일설도 있지만 캐고보면 그것만은 아니다. 이 지경촌은 조선에서 이주한 조선인 최씨와 박씨가 귀화입적해서 땅을 사들이고 그 땅에 자기의 번지수를 올리면서 생겨난 촌명이다. 말하자면 최씨와 박씨가 밭지경으로 대를 물려오면서 연장싸움하면서 생겨난 촌명이다. 부자간에도 논물싸움은 연장 싸움으로 번진다고 했는데 피가 다른 남남끼리 밭지경 싸움은 인명을 볼모로 하는 큰 싸움이고 세대를 이어오면서 연장되는 싸움이다. 그 싸움은 마지막에 왈룡이가 뱀잡이를 하는 선바위를 중심으로 거기에서부터 경계선으로 돌담을 쌓으면서 끝을 내렸다. 선바위는 마을에서 뒤편에 자리 잡았는데 그 뒤로는 야트막한 둔덕이고 그 둔덕을 넘어서면 "서싸우재라고"이상한 지번이 붙은 사래긴 밭이 펼쳐진다. 그러니까 그 돌담 서편은 최씨가 차지 했고 동편은 박씨가 차지한것이다. 돌담을 계선으로 이렇게 서편동편에도 동네가 생겼는데 동편에 인가가 집중하면서 본마을이 되고 서편은 최씨를 비릇한 최씨집성촌이 되였다. 일본사람들은 집단부락화를 할 때 최씨에게서 뒤돈을 챙겨 먹은 모양 최씨지주가 사는 동네를 그대로 남겼고 그 동네가 결국 왈룡이가 사는 서지경마을로 되였다. 지금도 동지경마을은 태양촌의 본마을이고 왈룡이가 사는 서지경마을은 본촌마을에 딸린 부속동네로 전락되였다. 행정규모로는 툰으로 하향조절된 서지경마을이라 겨우 10여호만이 달랑 산다. 대약진 시기와 문혁시기까지만 해도 50여호나 되였지만 현재는 10여호만이 미희미한 문패를 달고 숨소리를 죽이고 조용하게 살아간다. 어린이 첫돐 생일 잔치도 한번 없고 로인들의 회갑잔치도 없는 서편지경마을이라 동지경마을사람들에게도 잊혀가는 아득한 섬 마을로 되였다. 그것도 알뜰한 최씨집성촌이 아니고 여기저기에서 모여들었던 잡성후예들이 사는데 어느덧 왕씨성을 가진 한족 두 호까지 끼여 있었다. 최씨집성촌은 퇴색했지만 그래도 최씨들이 남긴 배타적인 정통성만은 완강했다. 서지경마을에서는 한족들이라면 당초에 곁에서 얼씬거리지도 못하게 했지만 조선말을 얼음에 박밀듯하는 왕씨네 세째와 네째의 두 형제의 천입은 결국 막지 못했다. 왕청 십리평 쪽에 온 왕씨 두 형제는 산동 후예들이였는데 그 쪽에서도 조선족집성촌에서 살아 온 경력으로 조선말에 막힘이 없었다. 이들은 서지경마을에 들어 설때 알뜰한 홀아비 석수쟁이 신분이였다. 동지경마을과 서지경마을에도 아래턱 수염이 더부룩한 로총각들만이 서성거리는지라 홀아비는 흠결이 아니였다. 왕씨 형제는 농사도 모르고 매일과 같이 정대와 망치를 메고 사방산에 올라가서 똑딱 돌만 쪼개는지라 지경사람들과 아무런 트러불도 없이 사이좋게 살아갔다.   왈룡이는 왕씨형제와 사이좋게 어울렸는데 서지경마을은 물론 동지경마을에서 호랑이 만큼 세도가 있었다. 그의 세도란 아무런 시비도리도 무시하고 불문곡직하고 멧돼지같이 저돌적인데서 호랑의 위상을 세웠다. 기실 사람들은 그를 진정으로 무서워서 두려워한것이 아니라 상대하기 싫어서 피한것뿐이였지만 왈룡이만은 그것도 모르고 밤낮으로 지경마을에서 버럭버럭 힘 자랑을 했다. 호랑이는 원색적인 방뇨를 통하여 자기의 존재와 세력범위를 시위한다면 지능적인 인간도 결국 물리적인 통치수단을 통하여 자기의 존재와 가치를 통보하는 모양이다. 원색적인 물리수단의 귀천을 떠나서 생존욕과 그 생존을 뒤에서 밀어주는 수단에서는 높낮이가 따로 없고 동물이란 범주를 벗어나지 못하나 본다. 머리회전이 빠른 사람들이 베바지에서 방구가 새나가듯 슬그머니 떠나간 지경마을에서 지능적이지 못한 왈룡의가 사람들의 입에 가장 많이 오르는 인물로 부상되는건 자연스러운 일이 아닐수 없다.   형님 우리 집 탈곡을 좀 해주오- 이런 청이 오면 왈룡이는 당장에서 흥- 하고는 외면이다. 말도 안돼 이 왈룡이가 누군데 네따위 집에 가서 먼지 먹으면서 너절한 일을 해주냐   하지만 같은 청이라도 왈룡이가 선뜻히 나설 때가 있다. -지경마을에 서야 형님만큼 탈곡을 잘하구 힘이 쎈 나그네가 어디에 있수 형님이 안 오면 우리집 탈곡은 해를 넘기우- 이 따위로 지껄이면 월룡이는 급하던 일도 집어 던지고 당장에서 팔을 걷고 달려 간다. 그리고는 죽을둥 살둥 모르고 일한다. 이것뿐이 아니다. 술상에서 간혹 왈룡이 비위를 건드렸다 면 그 상대는 어느때던지 소똥벼락을 맞고 컴컴한 밤에 어디에서 날아오는 몽둥에에 뒤통수가 깨질지도 모른다. 왈룡이는 이런 위인이다. 이래서 지경마을 사람들은 왈룡이를 모두 송총을 피하듯 한다. 왈룡이라면 부부간의 싸움을 그칠만큼 왈룡이는 지경마을의 두억시니다.   이런 왈룡에게도 두려운 상대가 있으니 바로 그의 절름발이 마누라다. 왼다리로 동그라미를 긋으면서 힘겹게 걸어야하는 그의 마누라는 병신 몸인데도5년전에 35섯살 먹은 로총각인 왈룡에게 재가하면서도 11살 나는 아들한놈을 데리고 오만한 표정으로 왈룡이 한테 시집왔다. 녀자를 모르는 숫총각한데 시집오면서도 아주 득세를 한듯히 뻐기면서 마지못해 시집온 상통이다. 머리회전이 좋은 녀자는 자기의 병신몸도 알고 아들이 딸린 신세도 잘 알고 있지만 녀자라는 조건하나로 왈룡이같은 로총각 에게는 넘쳐날만한 신분이라는것을 잘 알기에 남편의 첫 그루부터 단단하게 박아서 주동권을 거머잡았다. 녀자에게는 살만한 시기가 왔다고 너스레를 떨어도 과하지 않지만 아무래도 물리적인 힘보다는 지능적인 머리가 우선이라는 말이 맞다. 왈룡의 병신 마누라는 첫시작부터 왈룡이를 손안에 넣고 살살 얼리고 닥치면서 왈룡이를 꼭두각시같이 조종하는데 설화에서 나오는 평강공주와 바보 온달이 따로 없었다. 말 그대로 칠종칠금이다. 자기의 피줄도 아닌 이붓아들 부양책은 알뜰한 왈룡이 힘이 의거했다. 은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지만 왈룡의 병신안해는 낮색한번 변할줄 모르고 집에 앉아서 마술같은 힘으로 왈룡이를 쉬엿,차렷을 시켰 고 왈룡이는 마누라 말이라면 그저 머리를 백번 주억거려도 아깝지 않은 기색이였다. 신통해…신통하다니까 왈룡이가 마누라를 무서워하다니… 마을사람들은 뒤에서 가만히 킥킥 거렸다.   왈룡이가 마누라를 이긴다고 할 때면 억척으로 술을 마시고 곤두레로 취할 때 뿐이다. 왈룡이가 황소눈을 부릅뜨고 꺽-꺽 희나리가 부러지는 소리로 괜히 트집을 잡으면서 알지도 못할 말을 지껄일 때면 그의 병신 마누라는 입에 함박꽃같은 웃음을 피여 올리면서 왈룡의 까진머리를 어린애 다루듯히 살갑게 만져주고 털이 부숭부숭한 다리를 살뜰하게 만져준다. 꿀물 마시고 어서 자우- 왈용이는 어느듯 봄버들가지처럼 해나 른해 나면서 쿨쿨 자버린다. 결국 왈룡이는 꼭두각시였다.      3      한편 왈룡곁을 떠난 왕싼은 곧추 왈룡이네 집으로 향했다. 술은 색기를 부르는 음식이다. 왈룡이가 당장 집으로 오지 않는다는것을 제눈으로 보고 잘 알고 있기에 망설이거나 겁을 내는기색도 없다. 여름 오후의 무더위가 쏟아지는 마을길는 인기척 하나 없이 적요하게 비여 있다.   왈룡이네 집은 옛날 생산대 시절에 우사로 쓰던 기다란 집이였는데 벽돌로 지은 집이라도 처마를 낮게 만든데다 쓸모 없이 크고 길기만 해서 한칸만 막아서 집으로 쓰고 소 구유를 걸었던 통칸은 아직 간벽도 막지 않고 그대로 두었다. 대낮에도 우둑스레한 통칸에서는 쥐들이 요란하게 뛰여 다녔다. 거기에는 쟁기, 연장, 쌀뒤주 같은 농사일에 필요한 잡동사니들이 흙이 뿌옇게 묻은 채로 아무렇게나 뒹굴고 있었다.   형수 있나?… 왕서방이 인기척을 냈다. 밖에서는 염천같이 끓어번지는데도 추운지 개떡같은 포대기로 아래배를 가리고 낮잠을 자던 왈룡이 마누라가 눈을 떴다. 누구?… 왕싼이구만 … 손님을 알아 본 추월 이는 불편한 다리를 겨우 가누고 허치럭거리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왼 쪽다리가 터무니 없이 마르고 짜른 병신 몸이다.   "무슨일루?… 그 양반은 뱁잡이루 선바위루 나갔는데… 물이라두 떠 달라우?"   추월이는 상기된 왕싼의 기색을 보고 모든걸 알아챘지만 모르는체 시치미를 뗐다. 왕싼이가 남편보다 아래여서 반말지걸이 아니라 한족들에게는 자질구레한 례절이 따로 없기에 그냥 시름없이 만발을 깐다. 왕싼이가 왜 왔는지 번히 알면서도 시치미를 떼는 추월이라고 보면 가슴도 웬간히 차고 묘하다. 추월이는 포대기를 대충 개여 한켠에 밀어 놓고는 자리에서 겨우 일어 났다. 그리고는 절룩거리면서 물독에 다가가 비밀뚜껑을 열고 비닐바가지에 더위에 미지근해진 물을 듬뿍 떠서 왕싼에게 내밀었다. 추월이 뒤모습을 보니 왼편 엉덩이까지 풀썩 꺼진 짝궁덩이다.   꿀떡-꿀떡 물을 마시고 난 왕싼은 등디목에 놓았던 비닐봉다리를 불쑥 내민다. 추월의 짝궁둥이를 볼때마다 추월이란 녀자가 싫어지고 매번 그녀의 몸을 가진 후 화대를 챙겨주면서 다시는 오지 않겠다고 속으로 맹세하지만 시간이 흐르면 또 이렇게 느닷없이 찾아 온다. 곁에 녀자가 없는 왕싼에게는 짝궁둥이 추월이는 그저 녀자라는 조건으로 정염을 달래는 도구뿐이다. 왕싼은 왈룡이에게 술안주로 삶아먹자던 향약을 잊고 있었다.   머유?… 돼지 고기…픽 추월이는 랭소를 던지면 돼지고기를 받을념도 하지 않는다. 왕싼이 입에서 마구 풍기는 문맷내( 술을 마신 사람에게서 나는 구취)에 속이 울런거린다. 잠 을 금방 깨서 얼굴에 약간 붓기가 있어도 자색은 그만하면 밉상은 아니다. 이놈이 돼지고기 한점으로 공짜를 노릴것이다. 추월이는 순간적으로 계산을 마쳤다. 어림도 없지…그까지 돼지고기 한점으루 어림두 없소   "이거 조선족녀자들 되게 무섭다. 하루 이틀도 아닌데… 맨날 돈을 내야만 하우? 이제 이만해두 정이 들었다 할수 있는데"   형수로부터 조선족 녀자들로 바뀐다. 불륜이라도 이런 불륜이 어디 있을가 그러니까 왕싼의 눈에도 왈룡이가 무서운 존재는 아니다. 앞에서는 왈헝-이라고 잔뜩 추켜세우지만 뒤에서는 단판이다. 진정 왈룡이가 무섭다면 애초부터 왈룡이에게 오쟁이를 지우지 않을것이다.   "왕싼이 이 병신 묌을 보면서두 그런소리가 나우? 나뚜 뜨거운 밥이라두 먹게 벌아야 할 묌이 아니우. 그리구 핵교 댕기는 아들의 뒤바라지는 뉘기 하우 이 동네 보우 몸이 성한 녀편네들치구 다 돈벌려구 밖으루 튀지 않았수 나야 이 묌으루 무슨 돈을 벌겟수? 남편이라두 단단하면 모르지만두…싫으면 말구 나두 이런 짓이 귀찮수"   추월의 말은 거짓말이 아니다. 추월의 가슴에는 온통 아들만이 차서 남편인 왈룡의 존재를 담을 여유도 없었다. 오다가다가 아들의 뒤바라지를 계산으로 만난 남편이 알고보니 우직한데다 단단하지도 못한 위인이다. 그러니 정이 들리가 만무하다. 이제 당장 대학으로 진학할 아들의 뒤바라지가 제일 큰 거정거리다.   "알았수… 알았다니까"   왕싼이 대답하자 녀인은 대뜸 왕싼의 코앞으로 손가락 세개를 쭉 펴들었다.   "아무턴 대단하우! 대단해"   왕싼은 홑바지호주머니 손을 넣어서 지전 몇장을 더듬어 냈다. 모두가 빨각거리는 10원짜리 지전들이다. 개가 혀를 내밀듯 혀를 내밀고 때가 묻은 손가락으로 침을 찍고는 돈이 겹치기라도 하듯 꼼꼼하게 두장을 헤여서 녀인에게 건넨다.   "두장? 한장만 더 얹수 난 지금 몸이 불편해서 그럴 맴이 올챙이만두 없수. 돈 받아두 난 기생은 아니우. 무슨 말인지 알지?"   "무슨 소릴? 두장만(20원) 아니였나?"   "왕서방 이보꽈이 맨날 뚝떡거리면서 돌째기를 깨서리 꽉지루 돈을 긁어 모으면서두 발발 떨긴… 이 서지경동네서 형제끼리만 벽돌집 쓰고사는 남정네가 뉘긴데 그만한 돈 갖구 떨긴…나뚜 생각 없으니까 그만두기우 "   "이거 나뚜 이제 빨리 아무 녀자라두 얻어와야지…왈룡이 좋은 노릇만 한다이"   왕싼은 아쉬웠지만 분수처럼 솟아나는 정염을 달랠길 없어서 진전 한장을 녀자의 손바닥에 더 얹었다. 그리고는 즉석에서 허리띠를 풀면서 성큼 구들우에 올라섰다.   "아니 여기서? 대낮인데 남편이라두 들어 오문 어쩐다구"   "그렇찬아두 내 왈헝이한테서 오는 길이우 지금 쯤은 무리뱀을 잡구 있을걸"   "그래두…동네서 뉘기 불숙 들어 오기라두 하면 어쩌우…   동네눈이 겁나는것이 아니라 아들이 알가봐 제일 겁난다. 공부를 잘하는 똑똑한 아들에게는 끝가지 단정한 어머니 역으로 남고 싶다.   "그램 어디서?"   "먼저 텃밭 오이밭으루 나가우 내 뒤따라 나갈께"   겁을 내긴… 사내는 투덜거리면서도 선선히 밖으로 나갔다. 찌는듯한 무더위는 덕대를 맨 오이 밭속으로 새여들어 왔다.   조금 후에 검은 주름치마만 달랑 입은 왈룡이 마누라가 절뚝거리면서 오이 밭으루 들어 왔다. 밀페된 공간이거나 사위가 막힌 이런 풀색밭은 불륜을 저지르는 시골남녀들에게는 그야말로 락원이나 다름없다.   고슴도치만이 가만히 출몰하는 오이밭숙에 웅크리고 앉았던 왕싼은 녀인이 절뚝거리면서 다가오자 굶은 승냥이처럼 병신녀인의 몸을 희롱하기 시작했다. 오이밭속에서 이를 앙다문 녀인의 비명소리와 거친 남자의 소리가 흘러 나왔다.      4     집에서 마누라와 왕싼이가 블랙거래를 하는줄 까맣게 모르는 왈룡이는 이 시각 부지런히 바위밑에 깔린 잔돌을 주어 냈다. 얼굴에서 땀에 이겨진 흙물이 줄줄 흘러 내렸다.   시골에서 뼈를 굳혀 온 왈룡이는 전야에서 득실거리는 뱀이 돈이 될줄은 까맣게 몰랐다. 어려서 드문드문 잡은 뱀이 껍질을 쳐내고 구워먹어 봤지만 지금처럼 화려한 별장에 간판을 달고 뱀탕이란 료리까지 개발될줄 몰랐다. 그리고 그렇게 비싼 값으로 팔릴지도 몰랐고 그 뱀탕을 먹으려고 시내의 돈많은 량반들이 개미처럼 줄을 이어서 내려 올 줄도 몰랐다. 아무튼 시내 사람들은 싱겁다니까.   봄에 지경마을 앞으로 흐르는 석개울앞에 대형굴착기가 들어오고 불도저가 밤낮으로 땅바닥을 밀고 깎아내더니 뒤이어 건축자재를 산더미 같이 박아 실은 대형트럭들이 부르렁거리면서 풀방구리에 생쥐 나들듯 부리런을 떨어댔다. 연길의 돈 많은 량씨 부자가 신작로에서 지경마을로 통하는 석개울 가녁에 별장을 짓는다고 했다. 시골사람들의 머리로는 상상도 할수 없는 집이다.   시내사람들은 별장이라 하지 않고 유식하게 펜션를 짓는다고 했다. 유럽에서부터 불어친 펜션 바람이 이제 연변이란 변연지역까지 기세차게 분다. 호텔의 고급화와 콘도의 편리성과 민박의 가정적 분위기를 모두 갖춘 새로운 유럽형 시설이지만 지경마을 사람들은 무슨 집인지도 몰랐다. 펜션은 유럽에서 로인들이 은퇴 후 여생을 민박 경영으로 보내는 것에서 그 이름이 붙은 별장형 펜션으로 식당도 한다고 했다.   철근기둥이 수풀처럼 일어서고 건축공들이 개미처럼 모여들자 처음에는 멋도 모르고 기신기신 다가가서 기웃거리며 구경하던 지경마을 사람들은 어머어머한 집터 규모와 기초가 자리잡는 지번에 눈길을 돌리면서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누구 땅에 이런 별장이 서는가? 시골사람 들에게는 도시사람들의 머리로는 도저히 따를수 없는 계산이 있는데 그것인즉 땅에 관한 문서다. 땅문서에 한해서는 지지콜콜 따지고 철저한 시골사람들이다. 안돼 …말도 안돼. 누군 땅인데 함부로 이런 집을 짓는다냐…촌장이 승낙해도 안된다. 우리가 이름 박아서 선거하지도 않은 촌장이 뭘 믿고 함부로 우리땅을 내주냐…지경마을 사람들은 쉬쉬거렸지만 누구도 선뜻히 나서서 자가용을 타고 꺼덕거리는 량보스(지경마을 사람들은 량로반이라고 두루뭉실하게 불렀다)와 대거리 하길 싫어했다. 누군가는 나서서 말려야한다. 사람들은 별장주인 량보스와 맞설 인물을 물색하기 시작했다. 누군가는 꼭 부딫쳐야하고 지경마을 사람들의 억울함 을 풀어주고 빼앗긴 땅을 되찾아야한다.   왈룡이는 서지경마을과 동지경마을을 통털어서 힘이 제일 좋은 사내고 누구도 그를 이길수 없다. 한낮에 도적이 출몰해도 감히 나서서 말릴수 없을 정도로 청년들이 씨가 말라서 료료하고 장정들도 주름살만 늘어가고 쇠약해지는 마을이라 왈룡이가 적임자인건 당연하다. 성이 나면 메돼지처럼 저돌적이고 불물을 안 가르고 연장을 쥐고 달려드는 왈룡이를 누가 감히 엇서겟는가.   왈룡의 저돌과 파워가 빛낼 무렵은 연길에서 온 량보스가 별장의 골조를 다 세운 무렵이다.   이보게 왈룡이만 믿는다네 저 연길넘이 중대가리 촌장만 믿구 우리의 땅에다 제 맘대루 집을 짓는데 아무리 처박아두어 놀고먹는 강변모 래땅이라두 우리 지경촌이 땅이 아닌가. 저 연길넘이 우리지경마을사람 알길 개코같이 안다니까- 마을 중년들과 로인들은 우직한 왈룡이를 만나면 괜히 역증내면서 비분강개한 표정을 보였고 왈룡이를 앞장에 나서라고 개를 추기듯히 추겼다. 이 지경마을에서 왈룡이가 나서야 가망이 있다니까.   "어디서 저런 씨팔같은 개새끼가 겨들와갖구 "   드디여 왈룡이가 폭발했다. 병신 몸이라도 밖에서 돌아가는 마을 형편을 잘 알고 날자가는 줄 잘 아는 추월이는 남편이 나서 슬픈 제물이 될가봐 나서지 말라고 신신당부했지만 술을 마시고 얼빤한 기분이 된 왈룡이는 비가 추적거리는 어느날 기세가 충천해서 벽력같은 고함을 지르고 끝내는 폭발했다. 그리고는 당장에서 달구지에 흐물거리는 소똥을 박아싣고 석개울을 건넜다. 왈룡의 뒤로는 지경마을 늙은사람들이 슬금슬금 뛰따랐다. 왈룡이는 지경사람들의 감탄속에서 자랑스러운 표정을 짓고 별장의 골조와 기초돌우에 번질거리는 소똥으로 매질했다. 투닥- 투닥 박수 소리까지 터졌다. 우리왈룡이 참 잘이 헌다. 잘이허네   펜션 골조를 세우던 외지 인부들은 왈룡이가 소똥벼락을 안기자 제지시킬념도 못하고 물끄럼히 지켜보면서 이상한 표정을 보였다. 미친 사람인가? 왜 저런더니…   이튿날 연길에서 소식을 듣고 내려 온 량보스는 소똥으로 칠한 자기의 별장골조와 기초돌을 돌아보면서 누가 그랬나 갈범같이 으르렁거렸다. 그리고는 그 걸음으로 자가용을 몰고 석개울의 간너 마을에 들와서 큰소리 쳤다. 어느놈이 그랬냐? 나와바라!어느놈이야? 나서라!   "좇같은 시키 내가 그랬다! 어쩔테냐? 그 개털같은 촌장 이 뉘 아덜이냐 그런 새끼만 믿구 지경땅에 개집 지어? 안될 일이지 "   누군가 소식을 전하자 왈룡이가 썩 나섰다. 연길놈이 내가 없는 사이에 큰 소릴 쳤다면서? 어른이 그랬다 어쩔테냐?   씩씩거리면서 누가 그랬냐 추적하던 량보스는 하늘에서 떨어진듯 불시에 나타난 시커먼 사나이가 날이 시퍼런 삽을 들고 겁기 한점 없이 대들자 당장에서 굳어졌다. 겁이 난것이 아니라 미친듯히 달려드는 사내의 기상을 보고 싫어졌다. 지경마을에 이런 사내가 숨었다니 …   량보스는 뒤걸음쳤다. 정면으로 승부해서 촌사람들의 버르장 머리를 고치겠다던 분기를 누르고 뒤로 한발 물러서는 아량을 보였다. 이런무 지막한 시골놈과 정면으로 대들면 자기의 외제승용차가 분풀이 대상이 되여 왕창 깨지는건 둘째치더라도 혼자서 대들다가 면상이나 할퀴워서 생채기라도 나면 이건 평생으로 통탄한 일이 될것이다. 산전수전을 다 겪은 량보스는 돈이 많고 파워가 강해도 앞뒤를 잘 계산해서 유리하게 둘러 맞추는 사내다.   두고 봅시다- 한마디를 남기고 표연히 사라진 량보스는 그날 오후에는 시내바닥에서 껌이나 씹고 주먹깨나 날리는 어깨 몇을 불러 다시 내려왔다. 주먹에는 주먹이 맞서야한다.   이쯤 되면 웬간한 시골사람들은 사지가 쫄아들어서 겁을 내겠지만 왈룡이 한테는 그게 통할리가 없었다. 맞짱을 뜰 상대를 만나면 폭팔하고 흥분하는게 왈룡의 제일 큰 장끼다.   "연길이 개털조무래기덜이 내려왔구나 헤헤… 한넘만은 이 삽날에 목가지가 날아나야 겟다"   왈룡이는 끄무레한 기름내가 진동하는 왕싼네 집 부엌에서 날이 선들거리는 시퍼런 한족식칼을 찾아서 허리에 차고 날이 선 삽을 비껴들 고 죽을둥 살둥 모르고 달려들었다. 조자룡이 헌창을 꼬나들고 장판파에서 좌충우돌하듯 한점이 겁도 없이 돌격하는 그 기세에 시내에서 내려 온 젊은 주먹들도 눈치를 보면서 슬슬 물러났다. 시골놈이 미쳤구나. 미치지 않고서는 이렇게 나서서 목숨까지 내걸고 대들리가 없다. 제정신으로 사는 놈이 아닌것 같았다. 아주 어설픈 촌놈으로 알고 귀뺨이나 둬개 박아 위혁해서 구석에 대동이쳐 찌그러뜨리자고 작정하고 가벼운 마음으로 시골에 내려 왔는데 어디에서 이런 미친곰같은 놈을 만나다니…   왜 달려들어봐라-세상을 모르는 시골에서 부실한 넘인줄로만 알고 흔들거리며 내려 왔다가 오히려 당하는 꼴이 되였다. 어수룩한 촌놈과 상대해서 이겨도 망신 져도 망신이다. 상대할놈이 아니니 그만두기오. 소문난 주먹들은 실실 웃으면서 미친놈이 휘두르는 삽날에 억울하게 맞을가 슬슬 피했다. 거기에다 기죽었던 장정들까지 은근히 왈룡이를 도와나서자 싸움은 시작도 못하고 일방적인 승리도 끝을 보았다. 그날 밤 왈룡이는 그 여세를 몰아서 기초돌을 마구 허물면서 지경촌촌민들에게 큰 끼쁨을 안겨주었다.   이거 큰 우환거리 만났네. 량보스는 그저야 촌사람이라고 어수룩하게 봤던걸 후회하면서 다시 촌장을 찾았다. 아무래도 촌장이 나서서 말려 주오 공안국에 친구들도 있지만 그들이 나서면 그 후과가 더 안좋을 가봐 촌장을 찾아 온거요. 촌장은 중학교 중퇴생인데 까까머리를 슬슬 만지면서 자기는 감히 나서지못하고 왈룡이를 대처할 방법을 가만히 알려주었다.   이튿날 마을사람들의 눈을 피해 날이 저물기를 기다렸던 량보스는 숱한 술과 온갖 식품을 담은 꾸레미를 왈룡이네 집으로 보내주었고 덤으로 돈 500원까지 가만히 찔러넣어주었다. 그 외에도 왈룡이를 연길에 끌고 가서 내내 왈룡이가 제일 듣기 좋아하고 귀가 간질거리는 소리만 골라서 늘여놓아 절반 시래기로 만들었다. 다음 녀자들이 애교소리만 넘쳐나고 향수내가 진동하는 어떤 휴식센터로 데리고 들어가서 이쁜 처자까지 안겨주었다. 왈룡이는 남자다 처음에는 뚱한 표정을 짓고 눈을 뜨부럭거리던 왈룡이는 무슨 갈래판인지 인차 알았다.   후후후 이런…   병신마누라를 만나면서 녀자의 궁둥이가 모두 짝궁둥인가 착각하면서 살았던 왈룡이는 회벽같이 하얀 녀자의 대칭되는 온근 엉덩이를 처음으로 만지면서 세상이 노래졌다. 참으로 세상은 크고도… 크구나 세상에…이 왈룡이도 이렇게 이쁜처자도 안을수 있는 날이 오다니…   난생 처음으로 받은 향응에 왈룡이가 당장에서 입이 귀밑까지 째지면서 헤헤헤를 련발했고 량보스앞에서 햇솜같이 포근해졌다. 왈룡이는 이렇게 량보스의 사탕앞에서 물먹은 담벽 무너지듯 무너졌다.   왈룡이는 남자가 옳았다 아무리 헤식어도 녀편네 앞에서는 시내에서 안아본 이쁜처자의 사연은 입을 다물었다.   왈룡이가 지금 하는 뱀잡이도 량보스가 제의하면서 시작되였다. 왈룡이가 뱀을 무서워안하는 포획능수라는것까지 알고 이제 펜싱에 뱀탕 집을 하면 다른 사람들보다 배로 값을 쳐준다고 했다.   "량로반(주인)근심 놓아 번지라구 여기 지경촌에서야 이 왈룡이 한마디면 필이지 뉘기 대든다구"   왈룡이는 당장에서 때오른 가슴을 탕탕 치면서 감동했다. 그리고는 당장에서 형 동생 사이가 되였다.   왈룡이를 하늘같이 믿고 밀어주었던 지경촌 사람들은 왈룡이가 중도에서 하산하고 배신을 때리자 또 달콤한 말에 넘어 갔다고 한탄했다. 거페생페라고 억울함을 호소하려다가 되려 순진한 왈룡이만 망치고 량보스편으로 밀어버린것이다. 그러니까 왈룡이는 바지랑대와 같은 꺽꺽함에는 강하지만 사탕발림에는 약한 그런 무른 사내였다. 왈룡이는 이렇게 량보스의 대리인이 되였고 앞잡이가 되였다. 맹장을 잃은 지경마을 사람들은 다시는 량보스와 대놓고 엇서지못했다.   초가을이 되자 지경마을사람들이 난생 처음으로 보는 화려한 펜션이 들어섰다. 지경마을사람들은 대리석으로 감싼 별장을 감히 들어가서 구경할 념을 못내고 철책너머로 안을 기웃거리면서 드러내놓고 부러워했다. 왈룡이만은 주인처럼 버젓히 출입했다. 전동기까지 안장하고 자동으로 여닫는 대형출문 옆에는 보기에도 머리털이 곤두서는 세퍼드 한마리가 매여져 드나드는 사람들에게 흠흉하게 쏘아보다가 행식이 초라하거나 자기식구가 아닌 사람이면 사정없이 으르렁거리지만 왈룡이만 보면 꼬리를 치면서 은근히 추파를 보냈다. 이런 왈룡이게게 주인은 이것저것 잔것들을 잘 챙겨주었다. 마당에 세멘트를 하라면서 세멘드 한톤을 공짜로 보내주었고 펜션을 짓다 남은 고급건축자재들도 보내주었다. 지경마을 사람들은 왈룡이만은 덕을 보았다고 은근히 질투를 했지만 왈룡이가 왈칵 할가 겁나서 아는체 하지도 못했다. 잘사는 주인에게는 먹다 남은 떡부스 러기지만 왈룡이게는 평생 잊지못할 감지덕지한 은혜로 남았다. 왈룡이 짝궁둥이 안해는 건축자재보다 돈을 달라고 은근히 부추겼다. 하지만 정직한 왈룡이는 돈을 달라는 말만은 하지 않았다.   그림처럼 아름다운 지경촌과 그 앞을 감돌아 흐르는 석개울을 끼고 앉은 펜션은 인테리어가 고급스러워 대중음식이 아니고 부자들의 돈주머니만 노리는 뱀탕료리집으로 쓰기에는 알맞았다. 철책으로 둘러친 앞마당에는 거금을 들여 만든 인공못이 있는데 여기에는 주인이 친구들이 매일몰려와서 낚시로 세월을 보냈다.   초여름을 잡으면서 뱀탕집간판이 붙으면서 영업이 시작되였다. 량보스네 펜션에는 시내에서 내려 온 갑부들로 밤낮으로 들컹거렸고 비단으로 온몸을 칠한 녀자들의 달콤한 목소리가 고달픈 남대천의 하늘과 그 하늘 아래에서 허위허위 위태롭게 살아가는 인간들은 무차별적으로 희롱했다.     5     다시 새로운 하루가 시작되고 그 하루가 왈룡이에게는 두둑한 금전을 향약하는 좋은 하루가 되였다. 어제 잡은 뱀을 팔아서 200월을 번 왈룡이는 오늘은 새벽부터 출동했다.   마을사람들은 선바위가 지경마을의 수호신이고 광복전에 동신제를 지내던 곳이라 선바위를 건드리면 안된다고 뒤에서 쉬쉬했지만 누구하나 감히 드러내놓고 말리는 사람이 없었다.   왈룡이는 바위돌밑을 부지런히 파냈다. 점심때가 다가 올무렵 벌써 30십여마리나 잡았다. 그냥 바위밑을 뚜지면 이제 얼마 더 나올지 대중할수 없다. 이렇게 잡다보면 오늘 수입은 어제보다 더 짭짤할것이다.   왈룡의 병신 마누라까지 나와서 독전하고 있었다. 어제 왕싼에게서 30월을 받아 하루 벌이를 한 추월이는 남편이 하루에 200원을 벌자 이게 무슨 떡이냐 부끄럼도 없이 손수 나와서 현장지휘를 했다.   눈치 코치가 제로인 왈룡이는 죽을 때까지도 자기의 비밀을 알리 없다고 장담하고 있는 추월이는 날이 갈수록 대담해지고 남편에게 품었던 미안감이 삭막해져갔다. 옳거니 그것도 한두번이면 낮이 간질거리지만 그런 일도 자꾸 번복하면 얼굴에 철판이 깔리는건 어쩔수도 없는 일이렸다. 처음에는 왕싼이 동생인 왕쓰를 먼저 받아주었는데 왕쓰가 작년에 산동에서 온 녀인과 결혼하면서부터 왕싼이 그 뒤를 이어서 추월이 몸을 탐하고 있다. 실리적인 녀인이라 동생이든 형이든 비밀이 보장되고 돈만 주면 아무런 상관도 없다.   "자꾸 그쪽을 뚜지지 말구 웃쪽편을 들추오"   남편인데도 존대를 무시하고 평어를 쓴다.   "어디? 여기?… 여긴 안돼 이러다가 돌이 무너지는데"   오쟁이를 지고도 안해의 기생행각을 모르는 둔재지만 일에서는 묘기가 트였고 수순을 잘 안다.   "에구 뼈대가 꽛꽛한 나그네가 겝두 많네 이 큰바위가 그렇게 헐이 무너질가…안쪽에 잔돌이 많은데 뱀덜은 돌이 많은곳에 많습지비. 사방산에 왜 뱀들이 득실거림두 그게 다 돌이 많어서입지"   그럴가…왈룡이는 안해의 말에 안된다는 토를 달줄 모른다. 어찌돼서 병신안해에게 덜미를 쥐여 꼼짝못하는 왈룡이가 되려 측은스럽기까지하다.   달그락- 달그락- 기다란 쇠파이프로 바위를 건드리자 또다시 뱀 한마리가 기여 나왔다.   "보라니까 내말이 틀리나"   추월이는 징그러운 뱀이 기여 나왔는데도 눈한번 감짝이지도 않는다. 왈룡이는 눈깜작 할 사이에 맨손으로 뱀을 잡았다.   하지만 이것으로 왈룡의 뱀잡이는 영원히 끝났다. 잡은 뱀을 주머니에 쑤셔넣고 다시 쇠파이프를 들이밀고 낑낑 힘을 주는데 바위가 서서히 움직이고 있었다. 큰 바위가 움직이는지라 이들 량주의 반응은 둔감했다.   "이쿠!날래 물러 나우!… 바위가 굴러내리우! "   그래도 병신안해의 눈치가 빨랐다.   "???"   이때까지 영문을 모른 왈룡이는 엉거주춤 앉은 맵시로 당황한 마누라만 뒤돌아본다. 왜 그래?   "날래 구뎅에서 올라오라는데!우-!!!"   추월이 경황한 웨침이 끝나지도 않았는데 음직이기 시작한 돌은 왈룡이가 판 구덩이쪽으로 굴러내리면서 왈룡이를 종이장같이 가볍게 깔아 뭉갰다.   "으…이…잉"   왈룡이는 영문도 모른채 괴음소리를 길게 흘리면서 집채같은 바위돌에 깔렸다. 왈룡이가 판 구덩이는 널찍하지 못해서 바위가 반바퀴도 구을지 않아서 멈추었지만 피할길 없는 왈룡이는 이 세상에 무서운 괴음 한마디를 토하고는 안해가 보는 눈앞에서 죽어갔다.   왈룡이를 살려주오! 왈룡이가 죽어가오!   추월의 실성한 웨침소리를 듣고 지경마을 사람들은 하나 둘 득달같이 달려 왔다. 대낮에 이게 무슨 변이라우.   밖에 드러난 왈룡의 얼굴은 피가 통하지 못해서 거멓게 죽어갔고 퉁퉁 붓기 시작했다. 도무지 구할 방법이 없었다. 사람들은 그저 멀거니 죽어가는 왈룡이만 지켜보았다. 가슴이 바위와 흙벽에 끼인 왈룡이는 이미 숨이 졌다.   시체도 꺼낼 방도가 없었다. 누군가 량보스네 끌삽굴착기를 빌지는 의견도 있었지만 아무리 힘이 있는 굴착기라도 바위를 움직이지 못한다는 결론이 났다. 마지막에 누군가가 시간이 들더라도 왕싼이와 왕쓰를 청해서 선바위를 쪼개야 한다고 했다.   왕싼이와 왕쓰가 정과 메를 들고 달려 왔다.   그날 밤으로 왕싼이 형제는 선바위를 네쪼각내고 왈룡이를 구덩이에서 건져올렸다. 왈룡는 거대한 시체가 되여 선바위 곁에 내쳐졌다.   사람인명을 빼앗은 현장이 너무도 처참해서 사람들은 모두 외면했다.   추월이는 남편의 시체를 멀거니 내려다보면서 눈물 한방울 흘리지 않았다. 생떼같던 첫남편을 잃고 재가 했는데 이번에는 두번째 남편도 잃는다.   사방산으로부터 득달같이 달려 내려온 언뜰먼뜰한 검은 구름에서 우두둑- 소낙비가 떨어졌다.   이튿날 아침나절에 또다시 소낙비가 내렸다. 왈룡이가 판 구덩이안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설설 기여다니던 숱한 뱀들이 구덩이안에 비물이 차자 조각이 난 바위를 타고 지경마을 전야로 달아 났다.   왕싼이만은 네쪼각이 난 바위를 보면서 가만히 웃었다.   왕싼이는 비석을 만들어 돈을 벌 타산을 했다.      [ 2008년 11호]   [연변소설가학회 창간호 등재] 본 작품은 제1회 '김학철문학상' 대상수상작품임.      
91    “맨자지와 밥밑깨” 댓글:  조회:1375  추천:0  2014-12-19
“맨자지와 밥밑깨”  □ 최국철              우리 동년배들에게 격세지감을 자아내게 하는 “맨자지와 밥밑깨”- 허름한 부엌에서 많이 오갔던 방언,  초라했던 우리들의 물리적인 부억풍 경이 사양되면서 따라서 사어(死语)가 되여버렸다. “맨자지”- 사뭇 자그막하게 속삭여보면 미각을 흥그럽게 열어가는 추억의 메뉴로 떠오른다. “쌀밥”을 뜻하는 강원도사투리로 잡곡을 섞지 않고 입쌀로만 짓는 밥이다. 우리들은 그 시절부터 “입팝”이라는 억센톤을 가미한 이밥에 익숙해져있다. 쌀밥은 몰랐다. 우리의 “맨자지”는 밥밑을 안두고 입쌀로만 지은 밥이다. 그러니 “맨자지와 밥미깨”는 류의적인 방언은 아니고 “맨자지” 로 하여 웃고 시시한 “밥미깨”로 하여 울었으니 반어적인 민속용어들이라고 해도 될것 같다. 밥밑이란 고유문화어로 밥을 짓을 때 주되는 쌀 이외의 그밑에 놓는 콩,보리 팥 따위들을 일컫는 말인데 밑에 콩을 놓는다면 밥밑콩, 보리를 놓는다면 밥밑보리라고 불렀다. “밥밑(깨)개”에서의 개란 불완전명수사로 약간의 수거나 약간의 정도라는 뜻을 붙은것이다. 밥밑깨외에도 “불개”라는 방언으로도 통했다.붇다에서 파생한 “불개”는 물에 젖어서 부피가 카진다거나 분량이 많아진다는 뜻인데 밑개를 하여 량을 불군다는 뜻으로 국어사전에도 존재를 과시하고 있다. 옛날 생산대시절 봄파종부터 가을탈곡까지 이래저래 절기를 늦추었다.사원들이 대충대충 지은 농사를 늦가을에 징구량이라는 이름으로 공사마을에 있는 량식창고에 바치고 나면 보통 걷곡으로 사원(촌민) 인당 400근 좌우가 배분되였다. 농부산품이 흔천한 지금도 걷곡 400근이라면 빠듯하겠는데 그때는 당초에 턱없이 모자랐다. 거기에다 큰 보탬이 안되는 잡곡도 끼여 있었다. 연변에서 먹을 고생으로 못살겠다고 안쪽이라는 흑룡 강성, 료녕, 길림지구로 많은 “연변내기”들이 이사갔는데 그쪽에 가서도“중국혁명을 혼자 다하는 연변식 열정”과 말간 청빈을 그대로 답습하다가 안쪽사람들의 조크를 받은 일례들은 지금도 민간에 화제로 살아있다. 당시 마을마다 대대(촌)에서 꾸리는 정미소가 있었는데 보통 “석매칸”이라고 불렀다. 며칠씩 다니면서 순서를 잡고 쌀을 찧어오는 날이면 보통 밤이다. 마대에 넣은 쌀을 등디목에 쌓고나면 아버지는 코물을 훔치고 대견스레 쌀마대를 어루쓸면서 “이보, 새끼덜에게 한 열흘동안 목구메가 꺽 메지게 입팝 맨자지만 해멕이우”하고 분부했다. 지금까지 정이 넘치는 이 후더운 목소리를 어떻게 표현해야 그때의 그 감동을 담아 낼수 있는지 모르겠다. 백일도 아닌 열흘동안 맨 기름기가 자르르 도는 하얀 이밥에 간장을 찍어 먹는다는 그 내밀한 행복감…닭이 우는 소리에 깨여나보면 어머니는 이남박을 달각가리면서 입쌀을 씻고 할머니는 부억에서 불을 지피면서 어머니와 두런 두런 새벽대화를 나눈다. “맨자지 이팝이다!” 진군나팔소리같은 그 한마디 소리에 형제들은 저마다 헌 이불을 차던지고 벌떡벌떡 일어났다. 그리고는 술에 착착 감기는 이밥을 “지렁”(간장)에 찍어서 포식했다. 하지만…하지만 그 기대감,행복감은 그 한끼가 고작이였다. 열흘동안 이밥만 해먹이라던 아버지의 그 분부가 쌀독 계산에 밝은 어머니한테서 제동이 걸린것이다. 저녁부터는 무우를 썰어서 밥밑개를 했는데 그것도“말이빨 옥수수”라고 일컫던 메옥수수거나 좁쌀을 함께 놓은 이상한 잡곡밥이였다. 제일 싫증이 나던 밑개가 바로 무우밑개였다. 물기가 많아서 쌀과 어울 리지 못하고 따로 굴러다녔는데 밥이 들크무레했다. 이런것을 시골에서는 보태먹는다 혹은 “뿔궈”먹는다고 했다. 부풀려 혹은  물에 콩을 불리듯 한껏 불린다는 뜻이다. 겨울방학이면 두끼만 먹었는데 이것을 한족말을 차용해서 “얼뚠빤 (二顿饭)”이라고 했다. 늦은 아침을 치르고 점심은 건넌후 이른 저녁을 먹는데 노루꼬리 만한 겨울해라 그대신 밤은 그렇게도 지루했다. 장난이 기세찬 쥐가 집뒤 벽 가작우에 얹어놓은 꽁공 언 시래기를 까드득까드득 갉아 먹는 소리가 들릴쯤에는 이른저녁에 먹은 저녁배가 풀썩 꺼지면서 배가 껄떡거린다. 그때면 김치움에서 배추김치를 꺼내다가 우적우적 먹어대거나 생무우를 먹군 했다. 드문드문 강변에 나가서 얼음덩이를 까서 우뚝우뚝 십어 먹군했다.  “흉년세월에 애들은 배터져 죽고 어른들은 배고파죽는다”고 했다. 배고픈 고생을 모르는 사람들은 이 말의 뜻을 모를 것이다. “지낙 늦게 바라들어오문 밥이 없다”-어머니의 “훈육”이기도 했다. “맨자지”밥도 배불리 먹지 못했고  잡곡이라고도 할수 없는 시시한 무우밑개를 둔 밥과 두병을 둔 밥을 먹는 배 고픈 소년,거기에다 어머니에게까지 늘 푸대접받았던 소년기의 그 추억은 우울한 황색추억뿐이다.    연변일보
90    “무끼 쪼슨것에 물새비 넣은 햄” 댓글:  조회:1870  추천:1  2014-12-16
‘무끼 쪼슨것에 물새비 넣은 햄’을 보면 목이 꾹 메면서 가슴이 시린다. 먹지 말라는 설음은 궁핍에서 오겠지만 지금까지 상쇄가 안되는 아픈 부끄러움이였다. “무끼 쪼슨것에 물새비 넣은 햄” —얼핏 보면 중세어 같지만 우리가 지금 흔히 사용하는 함경도방언이다. 더 적절하게 말하면 륙진방언이다. 해석하면 잘게 쪼은 무우에 짠 물새우를 버무린 밑반찬이다. 햄(ham)의 어원에 대해 필자는 광복시기 쏘련홍군들이 동북으로 진출하면서 남긴 로어라고 생각했고 우리가 차용한줄로만 알았는데 그것이 아니였다. “햄” 혹은 “해미”는 함경도 토착방언이다. “무끼 쪼슨것에 물새비 넣은 햄”—문화어로도 대접받지 못해 해석하기도 구구하다. 다행히도 한국식 밑반찬이란 포괄적인 음식용어를 차용하니 문화명칭으로 둔갑할수 있다. 밑반찬이라 하면 장아찌, 젓갈, 자반따위들로 다시 세분하는데 “무끼 쪼슨것에 물새비 넣은 햄”을 어느 종류에 편재시켜야 적절할지 서성거리다가 아무래도 자반쯤에 가까울것 같다. 필자의 소학교시절은 무섭게 가난했던 생산대시절로 거슬러 올라가게 된다. 무릎아래로 자식 오남매와 우로 조모를 모신 우리 집은 8명이라는 대가정이였다. 이 대가정의 생활력 중심에는 아버지라는 존재가 바위처럼 우뚝 서있었다. 하기에 우리 집 밥상질서도 존(尊)과 비(卑)가 엄격했다. 복(福)자를 새긴 아버지의 밥그릇의 내용물부터 놋숟가락은 우리들이 감히 범접할수 없는 식기(食器)였다. 뿐만아니라 그 시절 아버지만 유일하게 까는 요도 그런 연장선에서 부러운 침구였다. 아버지는 주(住)식(食)에서 모든 “기득권”을 누린것이다. 지금 보면 보잘것없지만… 소학교 3학년이였으니 필자가 11살이 되던 해다. “큰사람이 밭갈이에 지쳐서 얼굴이 누렇게 뜨는데 무끼 쪼슨것에 물새비라도 넣어서 따루 햄을 맨들어주오.” 조모가 이런 분부를 내리면 어머니는 어김없이 무우를 잘게 탕치고 거기에 공소합작사에서 사온 짠 물새우를 넣은 반찬을 만드는데 그것을 파르스름한 유리그릇에 담아서 아버지 밥그릇과 가지런히 놓는다. 그때부터 밥상에만 앉으면 눈길은 그 유리그릇에서 맴돈다. 새우의 비비한 냄새가 그렇게도 자극적이였지만 우리들에게는 군침만 흘리게 하는 금식이였다. 그런데 어느날 아침인가 나도 모르게 무엄하게도 아버지의 그 반찬그릇에 불쑥 저가락을 넣었다. 하지만 “탁”하는 조야한 소리와 동시에 아무렇게나 휘여진 나의 초라한 참대저가락이 “절러덩” 밥상우에 나동그라졌다. 어느결에 큰아들의 철없는 “침략행위”를 발견한 어머니가 자신의 저가락으로 나의 저가락을 가격한것이다. 지금도 믿지 못할 일이다. 당시 우리 집은 아버지, 할머니를 위시하여 우리 남자형제들만 밥상에 둘러앉고 어머니가 누나와 녀동생을 데리고 구들바닥에서 식사했다. 그리고 그 사이에 일본화로를 놓고 된장국을 찐하게 끓이군 했다. 그 첩첩한 장애물을 넘어서 어떻게 나를 물리쳐버렸는지 모를 일이다. “어디서 배운 개버릇이야. 자란덜(어른들)의 음식에 탁탁 매달리면서…그게 니가 먹을 햄이니… ” 어머니가 사납게 눈을 흘겼다. “놔두오. 애들이 그렇지…” 아버지가 나의 역성이라도 들어주었으면 했지만 아버지 역시 눈을 흘기면서 “얼때 모르고 헴이 못 들었다”고 나무랐다. 그날의 그 일그러졌던 참담한 랑패상…생존이라는 현실에서 우리 집 구성원들의 생존과 삶의 연장을 위해서 아버지라는 존재를 부각하려면 어머니가 악역배우로 나서 “전밥들의” 희생을 강요해야 한다는 생존적인 진실이 숨어있을테지만 감성은 필경 감성 그 자체다. 하기에 필자에게 평생의 부끄러움만이 아닌 치부 같은 존재로 남았다. 필자는 지금도 집사람에게 그런 류의 자반을 만들지 못하게 한다. “무끼 쪼슨것에 물새비 넣은 햄”을 보면 목이 꾹 메면서 가슴이 시린다. 먹지 말라는 설음은 궁핍에서 오겠지만 지금까지 상쇄가 안되는 아픈 부끄러움이였다. “무끼 쪼슨것에 물새비 넣은 햄”, 그 시절 결국 나에게 속하는 반찬이 아니였다. 피를 물려준 어머니에게서 받은 그 참담한 부끄러움을 잊지 못하는 까닭은 그날의 그 작은 일상이였던 밥상사연이 필자의 성장에 결정적인 큰 영향을 미쳤기때문이였으리라… 자기에게 속하지 않을 물건은 욕심내지 마라.   연변일보 2014-12  
89    제2장 메카 - 연안 1 - 연안 댓글:  조회:899  추천:1  2014-06-24
 제2장 메카—연안 연안   여기가 연안입니다. 연안에 도착했습니다… 연안—욱복(郁馥)한 황하문명의 발상지지만 직관적인 조망은 그렇게 아름다운 곳은 아니다. 연안은 산림이 울창한 곳도 아니고 평원도, 초원도 아니다. 섬북땅에서 태연하게 서식하는 산양의 밸같이 답답하게 뻗은 골짜기들과 그 골짜기가 이색적으로 만들어낸 황색등고선아래에 자리잡고있었다. 어디에서 시작되고 어디에서 끝이 날지 대중할수 없는 수천갈래의 만(湾)들속에 자리잡은 자그마한 진이기도 했다. 하지만 이런 지리적인 여건은 수천년동안 황색먼지가 날리는 고원우에서 세거를 고집하면서 살아가는 사람들과 대를 이어 세세대대로 생활하면서 이룩해놓은 고원문명에서도 가장 우뚝한 존재인 황하문명을 창출하는데는 아무런 무리도 없었다. 주덕해일행이 서안에서 연안에 도착한 시기는 1939년 9월말이라고 보면 무난하다. 1939년 3월에 쏘련(로씨야) 모스크바 동방대학을 떠나 서역땅인 신강 우룸치에 도착한후 근 반년간 초대소에서 머물렀으니 시간적으로 이런 추이가 나온다. 주덕해에게 쏘련 왕복행은 격동과 고달픔 그 자체였다. 북만에서 떠날 때 극동의 울라지보스또크(해삼위)에서 바다갈매기 울음소리를 무심하게 들으며 반년동안 “모쁘르”에서 모스크바 향발소식을 애타게 기다렸고 이번 귀국차 역시 크게 곡선을 그렸는데 그것도 낯선 서역땅에서 애꿎은 모래바람을 맞으면서 6개월 동안 머물렀다. 쏘련 왕복행에 중국의 동북과 서북 량극에서 꼬박 일년을 멋없이 허비한 셈이다. 연안에 도착한 주덕해일행은 도합 10명이였는데 리천부(방호산), 장복, 전우(全宇)1), 주춘길, 진반수, 류경룡, 진욱, 리림, 리권무2) 등이다. 그날 저녁 8로군 총부 후근부에서 마련한 동굴집에 짐을 풀었다. 서안에서 오는 도중 이런 동굴집에 짐을 풀고 숙식을 했던이들에게는 이제 섬북의 동굴집이 낯설지가 않았다. 이들은 팔로군총부 초대소에서 “국제주의전사”, “조선인”으로 불리우면서 연안의 첫날밤을 맞았다. 동굴집과 동굴집 사이에 간벽을 파고 거기에 석유등잔을 놓았는데 그 등불이 두 동굴집안을 밝히고있었다. 이런 두칸짜리 동굴집은 가운데 갱도 같은 통로를 만들었는데 당시 모택동, 주덕을 비롯한 중앙령도들이 거처하는 동굴집 역시 이런 구조였다. 하루종일 걸었지만 로독이 나지 않았고 잠도 오지 않았다. 추운 겨울이 물러가는데도 땅바닥에 악착하게 달라붙은 3월의 잔설을 꿈속같이 일별하면서 모스크바—얄마따—이리—신강—란주—서안판사처— 거기에서 다시 연안으로 걸어서 들어온 일행은 목적지에 도착했다는 안도감보다 꿈과 같은 흥분에 빠졌다. 중국에서 모스크바 동방로동자대학으로 갈 때부터 학원들은 중국공산당의 지시에 따라 모든 인적사항들을 비밀에 붙이고 혁명사업에 페가 되는 행위를 근절했지만 3년간의 학원생활에서 이들은 두터운 인간적인 우정을 맺는데는 아무런 지장이 없었다. 주덕해는 방호산전우, 리권무를 비롯한 동기생들과 모두 가깝게 보냈다. 주덕해는 말솜씨가 느릿느릿한것만치 워낙 인품이 중후하고 포용성이 후더워서 동기생사이에서 절대적인 신임을 얻고있었다. 주덕해곁에는 방호산이 누웠다. 이들은 모두 말이 없지만 궁형으로 만들어진 요동천정에서 어룽거리는 석유등잔불빛을 보면서 섬북의 밤하늘과 그아래 연안의 초라한 주거지의 온갖 밤소리를 조용히 듣고있었다. “여기서 우리 만주까지 얼마나 멀가?” 방호산이 물었다. 함경북도 태생인 방호산은 주덕해처럼 전형적인 투박한 함북말투를 구사하고있었다. “왜 고향생각 나나?” 주덕해는 방호산보다 2살 년상이다. 주덕해는 방호산이 몰라서 묻는것이 아니라는것을 알고있었다. 모스크바 동방로동자대학에서 군사과목을 학습하고 성적이 우수했던 방호산은 서안팔로군판사처에서 만든 지도에서 연안과 북만땅과의 거리를 비례척으로 계산하고있었다. “저녁에 협리원이 소개하는걸 듣자니 조선의용대가 태항산에 있다고 하던데 태항산은 여기서 먼가?… 래일 총부에 가서 다시 지도를 찾아봐야겠군.” “연안에 오자부터 좋은 소식만 들어서 기분이 좋구만… 여기에 ‘연안송’과 ‘팔로군행진곡’을 만들어서(작곡) 온 연안과 팔로군을 들썩하게 만든 인물이 있는데 조선사람이라 하더구만.” “팔로군행진곡”의 작곡가는 정률성이였지만 이들은 아직 정률성(郑律成)3)의 존재를 파악하지 못하고있었다. “나도 들었소. 우리가 연안으로 먼저 들어왔는가 했더니 언녕 많은 조선인들이 들어왔더군… 참으로 대단해.” “아무렴, 대단하지. 여기까지 온걸 보면… 이제 시간을 타서 꼭 찾아보기요.” 주덕해는 서두르지 않고 응수했다. 이들은 서안판사처에 머물고있을 때 화북청년동맹과 조선의용군 소식을 들었고 그 당시 크게 흥분했다. 그런데 연안까지 조선인들이 진출했다니 그저 경이롭기만 했다. 밖에서 바람이 후르르 소리를 지르면서 지나갔다. 고향에 있을 때 문을 나서면 산이고 그 산과 산발에 무수히 늘어선 나무숲이 먼저 바람을 맞으면서 쏴— 저항이 거세찼지만 여기에서는 아무런 저항도 없이 그저 헐겁게 흘러가고있었다. “우리가 모스크바에서 연안으로 나왔다면 조선의용대(군)도 어느땐가는 연안으로 들어올수도 있지 않을가…” “그럴수도 있겠지.” 주덕해가 나지막하게 막연한 소리를 했다. 기실 섬북과 연안에는 홍군출신인 양림4)과 무정이 먼저 들어왔고 그후에 조선인으로 유일하게 서안사변에 참가했고 당시 “항일군정대학” 적공훈련반 주임인 서휘5), 항일군정대학 교원 최창익, 항일군정대학 의무실에서 사업을 협조하고있던 허정숙이 있었다. 당시 허정숙은 항일군정대학 학생이였으니 몸이 허약하여 잠시 의무실에 가서 사업을 협조하고있었다. 그리고 로신예술학원에는 음악교원으로 사업하던 정률성이 있었고 중앙당교에서 학습중인 진광화6)도 있었다. 그외에도 항일군정대학 제5기 2대대 제8련 학원들인 리유민, 리홍염, 김웅(왕자인), 허금산, 한모, 홍임, 송운산, 리철중, 김란영, 장경련, 항일군정대학 제1대대 7련 학원 신억(한청) 등 도합 17명이 연안에 있었다.7) 하지만 이 시각 연안에 금방 도착한 주덕해일행은 아직 이 사실을 모르고있었다. 두 사내는 잠시 말을 하지 않고 저마다 궁싯거리기만 했다. 건조한 섬북고원의 가을밤은 수분기 한점 없이 청징했고 그속에서 서식하는 풀벌레들이 악착같이 울어댔다. 연안에서의 첫날밤은 철없이 깊어만 갔다. “뭘 생각하나? 만주 고향생각 하나?” 방호산이 다시 나직하게 말했다. “고향이야 어찌 잊겠나?… 쏘련에서부터 연안으로 오던 그 걸음을 다시 회고해보는거지.” 주덕해가 돌아누우면서 대꾸했다. “고생이 많아도 다시 생각해보면 꿈만 같지?” “그래, 꿈이라두 좋은 꿈이였지…” “래일 보탑산에두 가보구 당중앙이 주재해있다는 왕가평쪽으로 가볼가?” 방호산은 잠이 오지 않았다. “그러지.” 주덕해도 잠기가 말끔하게 달아났다. 원동의 울라지보스또크의 “모쁘르”에서 반년, 모스크바 동방로동자대학에서 다시 2년, 그후 서역에 귀국하여 신강에서 또다시 반년… 다음 란주, 서안을 거쳐 연안으로의 회정을 돌이켜보면 한마디로 지구를 반바퀴 도는 위대한 원정이기도 했다. 이 원정의 귀착지는 연안이였고 조선혁명가들의 정치적인 귀착지이기도 했다. 1939년 3월에 주덕해일행은 귀국하기 시작했다. 이들의 대학과정은 원래 4년제였지만 1938년에 동방대학이 페교되는 바람에 겨우 2년 동안만 배운 이들은 드디여 귀로에 오르게 되였다. 주덕해일행은 함께 모스크바역에서 기차를 타고 까자흐스딴공화국 수도 아스따나에 도착한후 그곳에서 다시 자동차를 바꿔타고 중쏘변경을 넘어 신강경내에 들어섰다. 1937년부터 1941년까지 신강지역에는 국제교통선이 두갈래로 있었는데 남부교통선은 카스에서 툴판, 하미지역을 거쳐 다시 란주로 내려오는것이다. 북부교통선은 두갈래가 있었는데 한갈래는 과얼과스를 통과하는것이고 다른 한갈래는 파극도로 통했는데 두갈래 모두 까자흐스딴으로 통했고 신강의 우수지역에서 합치면서 적화(우룸치)를 경유, 툴판, 하미지역으로 통하는 길이였다. 남북교통선은 모두 툴판에서 합쳐서 하미로 통했다. 모래바람이 세찬 서역이였지만 그래도 중국땅에 들어섰다는 사실에 일행은 모두 감동했다. 여기서는 일본군대를 볼수 없었고 천편일률적으로 중국군대들뿐이였다. 하지만 그 격동은 잠간이였다. 주덕해일행이 우룸치에 도착해보니 내지로 통하는 길이 막혀있었다. 주덕해일행에게는 비밀리에 행동하라는 지시가 떨어졌다. 때는 비록 2차 국공합작시기였지만 이곳의 국민당군대들도 쏘련으로부터 귀국하는 중국공산당사업인원들을 감시하고있었다. 일행은 신강변방독반 성세재의 관할하에 있는 특별초대소에 후송되여 그곳에 머물러있으면서 란주로 가는 로씨야비행기를 기다렸는데 무려 반년동안이나 이 초대소에 죽치고 앉아 무료한 나날을 보낼줄을 누구도 상상 못했다. 신강에서의 생활은 말 그대로 초조한 세월속의 초조한 기다림뿐이였다. 이들은 초대소에서 무려 봄, 여름을 지내고 9월에 드디여 란주로 가는 비행기에 앉아 서안으로 향발했다. 1939년, 이해 중국으로 놓고 말하면 불확실한 해였다. 동아시아에서는 이미 조선과 대만을 식민지로 삼은 일본은 중국 동북을 침공하여 언녕 괴뢰정부인 만주국을 세웠다. 하여 국제련맹은 일본에 대하여 제재조치를 취하려 했으나 일본은 국제련맹을 탈퇴했다. 국제련맹을 탈퇴하면서 영국, 프랑스 등 기존 렬강들과의 본격적인 갈등이 시작되자 일본은 중일전쟁을 일으켰으며 독일, 이딸리아와 방공협정을 맺음으로써 추축국에 가입하게 되였다. 일본은 륙군성의 팽창으로 북진을 주도하려고 선후로 훈춘일대의 장고봉에서, 5월에는 몽고변계 노몬한에서 쏘련군과 시탐적인 무력충돌을 했다. 하지만 두개의 전장에서 패퇴했다. 주덕해일행이 서안에서 연안으로 떠날쯤인 9월에 량국은 정전협정에 조인하였다.  
88    제1장 인간의 려정 9 - 주덕해의 실각—“문화대혁명” 댓글:  조회:1274  추천:11  2014-06-01
주덕해의 실각—“문화대혁명” 주덕해는 민족지역사회에서 정치, 경제, 문화 제반 분야를 거치면서 민족사회발전을 획책하고 가장 충실한 삶을 살았다. 연변의 광활한 하늘과 산과 강하는 한결같이 주덕해를 향해 활짝 열려져있었다. 하지만 특정년대에 진입하면서 주덕해는 비운을 면치 못했다. “문화대혁명”은 인간의 선으로 향한 진화를 가로막고 악으로 향한 퇴보를 종용한 대형인재이다. 이 시기 중국은 무뢰한들이 저돌적으로 사회를 찬탈하고 공략함으로써 중국을 비운으로 몰고 갔다. “문화대혁명”은 연변이란 하늘과 땅에서 주덕해란 존재가치를 훼멸하였다. “문화대혁명”기간에 주덕해에게는 “한사코 자본주의길로 나아가는 집권파”, “지방민족주의분자”, “특무”, “매국적”, “반역자” 등 듣기에도 해괴한 갖은 죄명이 다 들씌워졌다. 지금도 연변의 수많은 사람들은 주덕해가 연변2중 체육장에서 세상을 모르는 홍위병들에게 끌려다니면서 인간이하의 시달림을 받던 비참한 정경을 잊지 못하고있다. “문화대혁명”은 주덕해에게 있어서 가슴이 시리고 추웠고 애처로움을 주는 “혁명”이였다. 주덕해는 공덕을 바쳐 성립한 자치주에서 인간세상에 실질적으로 편재하지 못하고 연변 외곽에서 헛도는 초상으로 전락되면서 정치생애를 마쳤다. 중국조선족은 두만강을 건널 때부터 그 생활 자체가 새로운 환경에 끊임없이 적응되여왔다. 공화국 성립이후에 중국의 선진적인 소수민족정책과 소수민족의 특수위치로 인해 매 성원들에게 정치적으로 보장되는 사회무대로 진출할수 있는 기회가 부여되였다. 말하자면 조선족구성원끼리의 경쟁에 의한 사업성공의 기회가 주어진것이다. 하기에 개인적인 리해관계의 갈등은 주로 민족내부사이에서 발생했으며 조선족사이에 파벌과 불신을 가져오는 요인으로 작동하기도 했다. 이것이 바로 지위의식과 민족적한계성이기도 하다. 주덕해 역시 지위의식의 충돌의 피해자로서 반우파투쟁시기 “지방민족주의자”로 전락될번하기도 했다. 그 시기부터 사실상 주덕해의 머리우에 비운의 징조가 나타난 셈이다. 지금까지 주덕해의 실각과 불운한 운명을 “사인무리” 모원신, “문화대혁명”에 밀어버리고있지만 주덕해의 불운을 문화적으로 접근해보면 부분적으로 우리 민족 자신이 공유하고있는 한계성에서도 문제를 찾을수 있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중국의 민족간부에게 가장 경계해야 하는 “지방민족주의자”란 모자는 우리 민족 자신들도 앞장서서 씌우려 했다는 사실, 타의적으로라도 “주덕해 타도”를 웨쳤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된다. 하기에 주덕해의 실각과 비운에서 우리 민족들은 통회(痛悔)를 공감해야 한다. 민족의 발전은 이런 자아성찰의 과정을 통하여 발전하는것이다. 주덕해는 생전에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 제8기 후보위원, 전국인민대표대회 대표, 중공길림성위 상무위원, 길림성정부 부성장, 중공연변조선족자치주위원회 제1서기 겸 자치주 주장, 연변군분구 제1정위로 사업하면서 “연변조선(민)족자치구(주)”를 성립하고 제반 사업을 궤도에 올려놓는데 기반을 다진 가장 주요한 공로자의 한 사람으로서 연변의 모든 수리시설, 연변의 논밭, 연변의 사과와 사과배, 연변소, 연변대학, 연변병원, 연변체육, 연변교육, 연변가무단, 모아산숲, 연길공원, 신문출판방송 등 오늘날의 조선족의 정치, 경제, 문화, 교육, 스포츠를 비롯한 제반 사업의 기석을 다진 공로를 인정받고있다. 상술한 몇가지 단계를 거치면서 우리들은 주덕해라는 인간의 정치사상과 신념의 확립과정을 지켜보았다. 동시에 진정한 공산주의자의 성격형성을 수립하는 계기를 의식하고 주덕해의 인간적인 덕성을 접하면서 연변조선족자치주라는 지역사회에서 인간구성원들의 화합의 장을 마련하고 그것을 사업화, 생활화로 만드는 간략적인 과정과 륜곽을 접했을것이다. 그러면서 완성된 민족간부—주덕해의 모델을 수긍할수 있는 실천적인 계기를 큰 그림으로 읽었다. 주덕해—그는 격정년대에 가장 충실한 삶을 산 민족지도자로 인생이란 대단원에서 단계를 거듭할수록 격조를 승화하면서 명실상부한 정치가, 혁명가, 교육행정가 그리고 인간으로 자신을 완성했다.
87    [수상소감] 삶의 진실이 문학을 만났을 때 댓글:  조회:610  추천:0  2014-05-31
  고민끝에 량산된 글을 다시 훑어보면서 통상적으로 막연한 불안감을 느꼈는데 이번에는 전혀 새로운 회의와 고민을 하게 되였다. 소설가가 생뚱맞게 수필상을 받아도 되느냐고?...관습적으로 내려오는 문학령역의 획분을 감별하지 못한 행위가 아니냐고...   하지만 삶의 진실을 문학에 담고싶어하는 작가의 문학실천은 소설이든 수필이든 그 쟝르에 《칼치기》를 할수도 없다고 자아위안하면서 이번의 《두만강》문학상을 독자들과의 합동호흡을 노리고 선인들의 위대한 삶의 진실을 공유하려 한 그 자세를 가상하게 여겨서 주는 격려로 알겠다. 현재 우리들의 문학시장은 작가들과 독자군의 대량 류실과 잠적으로 한산한 풍경을 연출한지도 이슥하다. 말하자면 작가와 독자군의 유기적인 련대와 조합이 파괴된것이다. 분명 작가, 독자 계층에서만 문제를 찾을수 없는 민족사회의 제 현상이 가져다주는 악재다. 하지만 악재를 만났다고 해서 그저 손을 놓을수는 없다. 우리 작가들은 새로운 변화를 시도해야 한다. 독자들의 문학작품에 대한 외면과 리탈에는 문학작품속에 실은 난해성, (예술성), 정체성(무게) 같은, 독자들을 피곤하게 할수 있는 글들의 존재가 일정 부분 작용하고있는것을 주관적으로 고민하는것도 순서다. 이것이 순서라고 할 때 우리들의 창작은 이제 침체기를 맞이했다고 보아야 한다. 변화되는 현실속의 인간들과 그 인간들의 삶의 좌표가 색채 없이 흐지부지하고 따라서 작가들의 필끝에서 량산되는 인물들의 사회적인 공리성도 포기되고있다. 이런 인물들이기에 위대한 삶의 근간이 사양되고 글마다 고민 없는, 독자들의 시선을 맹랑하게 흐리게 하는 신변 잡가나 아픔과 감동 한점 없는 서사적인 장난으로 일관한다. 급변하는 우리들의 현실은 다층차적이고 거기에는 급진적, 가변적 그리고 불확실성이 가져다주는 자의성도 내포하고있다. 그리고 거기에는 진실한 삶이 있고 그 진실을 문학에 담아내는 노력을 해야 한다고 본다. 민족사회의 총체적인 륜곽은 민족구성원들이 집합체이고 이 군체속에는 위대한 삶과 그 삶이 창조한 위대한 진실이 있다. 문학은 우선 먼저 그 삶과 진실을 만나야 한다.   * 본문은 2014년 5월 29일 장춘에서 열린 “길림신문” 제1회“두만강”문학상시상식에서 발표되였다.-문학닷컴 편자주
86    제1장 인간의 려정 8 - 연변의 문화 댓글:  조회:852  추천:1  2014-05-25
제1장 인간의 려정 연변의 문화 연변의 문화는 이민들이 월강하면서 지니고 왔던 무형의 민족관습, 민족 동질성과 전통성이 민족집단생활운행기제를 고착시켰는데 그것은 문화성으로 표현되기도 했다. 하기에 이런 문화에는 타관땅을 개척했던 이주민들의 동질성확보와 정체성이 고집스레 고스란히 녹아있었다. 초기 조선족농촌문화전통은 이런 측면에서 고찰할수 있다. 당시 동북지역에 거주한 조선인(족)들의 생활현실을 너무도 잘 료해했던 주덕해는 관성적인 민족문화에 기초하여 문화선전사업에도 커다란 중시를 돌렸다. 그것은 연안시기부터 정률성과 친구로 지내면서 문예창작을 지켜보았고 할빈에 진주하면서부터《전투보》를 꾸렸고 1948년 동북행정위원회 민정부 민족사무처의 기관지로《민주일보》를 창간하면서 실천적으로 표현되였다. 그후 연변에 진출하면서 특정지역 민족특색에 맞는 신문, 방송, 출판 등 기구를 규범적으로 만들면서 연변문화특색을 최대한으로 살렸다. 무릇 규범은 과학적인것이다. 제3지대출신인 연변대학 예술학원 전임 원장 김삼진은 “제3지대가 금방 성립되였을 때 주덕해정위에게는 처리해야 할 사무가 많았지만 그런 힘든 정황에서도 부대선전대를 내왔는데 이는 주정위의 가슴속에 자리잡은 문화사업체계이기도 했습니다. 그후 민족사무처에서 사업할 때 우리 부대가 전선에 나갔고 주덕해정위는 할빈에 남아있었는데 그때도 문예인재를 요구해서 문공단을 꾸렸습니다. 주정위처럼 정치를 하면서도 문화사업을 중시한분은 드물겁니다.”라고 밝혔다. 장만련은 “제3지대는 주덕해정위의 지시로 1946년에 선전대를 조직하였고 하반년부터 제3지대 선전대는 북만 여러 지역을 다니면서 문예 공연과 선전을 동시에 진행하여 농촌지역 군중들의 절찬을 받았다.”고 회억했다. 이 문화선전대가 현재의 문화예술의 모태라도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연변에 부임되여온후에 주덕해는 또 인차 연변가무단을 창립하였다. 연변가무단은 공화국초창기 북경, 상해, 광주를 비롯한 중국의 대도시와 민족지구를 순회하면서 민족문화예술의 진수를 활기차게 자랑했다. 조선족의 중국관내진출은 사실 문화예술단이 선두에 섰고 이렇게 조선족의 존재가 알려지기 시작했다. 주덕해는 특히 문화인재에 대한 관심과 배양에 큰 중시를 돌렸다. 조득현은 저명한 무용가로서 주덕해가 제3지대에 있을 때 선전대에 있었고 그후에 민족사무처 문공단에서 사업하였으며 주덕해가 연변에 올 때 함께 왔다. 그후 병치료차로 조선에 나간후 조선전쟁으로 소식이 끊어지자 주덕해는 “조득현무용가는 100개의 교향악단과도 바꿀수 없는 존재다.”라고 하면서 조득현을 찾기 위해 조선으로 사람을 파견하면서 문화인재에 대한 지지와 성원을 아낌없이 보냈다. 조득현은 연변에 온후 연변가무단 부단장직을 맡아하면서 연변의 문예사업발전에 큰 공헌을 하였다. 1957년 “연변예술학교”가 창립되였는데 주덕해의 공로와 갈라놓을수 없다. 그때 전국적으로 지구급이 꾸리는 예술학교는 “연변예술학교”가 유일했다. “연변예술학교”는 연변가무단과 주내 각 현, 시 그리고 동북3성 예술단체들에 해마다 많은 인재들을 양성해주었다. “연변이 노래와 춤의 고향으로 된 바탕과 기틀은 주덕해가 마련해놓았다고 평가할수 있습니다.” 박문일 전 연변대학 교장의 평가이다. 연변문화예술사업은 민족특색이 선명하고 변방지구의 문화예술발전가능성을 무한하게 시사하고있다. 뿐만아니라 문화대외교류의 현장도 마련되여 날이 갈수록 자신의 민족적, 지역적 특색을 더욱 선명하게 부각해나가고있다. 이 모든것은 주덕해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다. 17년 동안의 연변사업시기 주덕해는 정치적인 소속을 완성하면서 민족지역의 정치, 경제, 문화 제반 건설을 정상적인 궤도에로 진입시키던 시기이기도 하다. 하기에 사실상 연변이란 특정지역에서 가장 큰 성과를 따내던 시기였고 따라서 공산주의자의 격조 높은 품덕을 구가하던 시기이고 주덕해라는 인간전설을 구가하던 시기이기도 하다. 완성된 주덕해는 이렇게 인간적으로 연변사람들의 기억속에 영존하기 시작했다.
85    제1장 인간의 려정 7 - 민족공업 댓글:  조회:679  추천:0  2014-05-24
제1장 인간의 려정 민족공업 연변의 공업은 너무도 락후하고 조악했다. 해방초기 연변에는 석현과 개산툰의 제지공장, 천보산광산과 로투구탄광밖에 없었다. 1951년에 열린 전국 제1차 수공업생산합작회의이후에 연변 각 소도시들에서는 수공업합작사를 세웠다. 1953년에 33개였던 수공업합작사는 1956년에 와서 143개로 발전하였고 합작사에 참가한 인원은 수공업자 총수의 93.6%를 차지하였으며 따라서 규모가 비교적 큰 21개의 합작사가 지방 국영기업소에 들어감으로써 수공업에 대한 사회주의적개조가 기본적으로 실현되였다. 뒤이어 사인공상업에 대한 사회주의개조도 원만히 마쳐 연변공업에서의 유연한 과도기를 거쳤다. 그후 경제복구시기, 제1차 5개년계획시기와 제2차 5개년계획시기, 제3차 5개년계획시기까지 이어진 연변경제건설에서 공업은 에네르기, 야금, 기계, 화학, 삼림, 건축재료, 방직, 식품공업이 전면적으로 복구되였거나 새롭게 선을 보이면서 변두리지구의 공업발전가능성을 시사했고 민족지구공업발전의 가능성과 길을 모색했다. 주덕해는 “우리 나라 공업분야에는 부문이 많다. 일반적인 공업제품은 내지로부터 들여올수 있으나 민족제품은 자체의 힘으로 해결하여야만 한다.”라고 하면서 복구시기부터 제1차, 제2차, 제3차 국가경제발전 5개년계획시기에 연변의 당정지도자로 공업과 함께 숨을 쉬고 공업건설의 정초식을 치렀다. 주덕해는 발빠르게 움직여 심양에 있는 “동농고무공장”을 연변의 로투구에 옮겨오게 했고 전문적으로 조선족들이 신는 고무신을 만들어 공급하였고 후에는 연변고무공장으로 공장규모를 확장했다. 연변의 민족특수용품생산기지화는 주덕해의 공로와 갈라놓을수 없다. 1962년에 주은래총리가 연변에 왔을 때 주덕해는 총리에게 “조선족녀성들은 비단옷을 입기 좋아하며 뉴똥으로 지은 옷과 모본단이불은 조선족처녀들이 시집갈 때 가지고 가야 할 지참품이고 어린애들이 첫돌생일을 쇨 때면 습관적으로 칠색단꽃저고리를 입는데 주내에서 해결할수 없다.”고 회보하면서 해결해줄것을 청시했다. 그후 주총리의 비준을 거쳐 “연변민족비단공장”이 서게 되였다. 그밖에도 “민족침직공장”, “민족알루미니움공장”, “민족도자기공장”, “민족고무공장”, “민족악기공장” 등 민족계렬공장들이 선후로 건설, 가동되여 연변은 초보적인 규모를 갖춘 민족공업체계를 이루었다. 주덕해는 연변의 “민족특점, 변방특점, 산구특점, 자원이 많고 인구가 적은 특점, 면적이 넓고 경작지가 적은 특점”에 맞추어 실사구시적으로 일관된 사업작풍으로 농업에서는 기계화, 수리화, 림업, 축산업, 과학적영농수준을 크게 제고시켰고 공업에서는 민족공업을 중심으로 팔프, 제지 공업을 발전시켰다. 하기에 바람이 세차게 불어치던 연변의 산과 강하에는 주덕해의 족적이 고스란히 남아있었고 망치소리가 뚱땅거렸던 공장구역내에도 주덕해의 초상이 푸르게 남아있다.  
84    제1장 인간의 려정 6 - 농업 댓글:  조회:827  추천:0  2014-05-23
제1장 인간의 려정 농업   중국의 농업력사는 토지개혁을 거치면서 해방후 초급사, 고급사, 합작화, 인민공사, 대약진 등 생산발전을 가로막았던 정치운동식세례를 거치면서 농업 제반 분야가 제자리답보를 종용했다. 이런 인위적인 악조건에서 연변의 농업실정 역시 “극좌”편향의 “쓰나미”에 밀려 좌초했다. 농업발전은 빈 구호로 도모하는것도 아니다. 농업 자체의 과학적인 발전모식이 따로 있는데 우선적으로 가장 필요한 조건은 기본적인 토대로 작용하는 경성적인 농업기반시설이였다. 연변의 농업 제반 시설은 령적이였고 정적이기도 했다. 도시와 농촌의 격차가 심했고 농업인구와 토지가 실조되여있었다. 수확고가 헥타르당 100킬로그람도 되지 못한 연변농업현실에서 대체 어디에서부터 착수할것인가? 상상도 할수 없는 이 간고한 시기에 주덕해는 실사구시의 원칙에 립각하여 농촌에 내려가 조사연구에 몰두했고 농업생산을 진두에서 지휘했다. 주덕해는 간부들에게 사무실에 앉아서 큰소리만 치지 말고 농촌에 내려가 조사연구를 하고 대중과 기층간부들의 의견을 귀담아들으며 그 지역에 부합되는 구체적인 대책을 세우라고 지시했다. 주덕해는 연변농업현실에서 농업을 발전시키려면 우선 농업경성기반시설들을 먼저 건설하고 수리분야부터 착수하는것이 관건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농촌동력문제를 해결해야 했다. 주덕해의 비서출신인 손중사는 “다 알다싶이 주덕해서기는 농업을 중점적으로 틀어쥐였습니다. 그는 중앙과 성에 가서 회의하고 돌아오면 당사업은 요흔부서기를 비롯한 부서기들에게 일임하고 정부사업은 전인영부주장과 기타 부주장들에게 일임한후 대부분 시간은 농촌에 내려가 조사를 하고 현지에서 사업을 지도하군 하였습니다. 일년에 근 절반 시간은 농촌에서 보냈습니다.”라고 회억했다. 주덕해의 장녀 오영채는 “어렸을 때부터 우리 형제들은 아버지와 함께 오손도손 이야기할 때가 별로 없었습니다. 아버지처럼 농촌에 붙어있은 간부도 드물겁니다… 평소에 아버지를 볼수 없었는데 몇달씩 보지 못할 때도 있었습니다. 그것이 습관이 되여 아버지가 집에 있는 날이 되려 신기했습니다… 당시 어렸던 저와 동생들은 연변에서의 아버지에 대한 기억보다 무한53농장시절 일반농장원으로 계셨던 아버지를 잘 기억하고있습니다. 53농장에서 아버지는 버림을 받은 평민이였으니 연변시절과는 달랐습니다. 그때만은 아버지가 세대주라는 의식이 들었지요.” 하고 소회를 밝히기도 했다. 천하지대본으로 일컫는 농업은 그 중심에 소와 가대기만 잔존해있었다. 연변은 평원이 적고 산지가 많기때문에 수리시설을 건설하고 농업기계화를 실현하자면 시간이 걸려야 했다. 주덕해는 원시적인 영농법에 의거하여 농업생산을 발전시킴에 있어서 소가 주요한 동력으로 된다고 인정하였다. 1961년에 당중앙에서 “농촌인민공사의 목전 정책문제에 관한 중공중앙의 긴급지시”를 발포하였다. 그가운데는 가축사양관리에 관한 전문적인 규정도 한조목이 들어있었다. 대약진시기와 3년재해를 거치면서 연변소는 공화국 창건초기 8만 5천여마리에서 1만 5천여마리나 줄어들었다. 이런 악재를 돌려세우기 위하여 1961년부터 선후로 주덕해는 사업일군들을 조직하여 연길시 의란공사(진) 류채대대(촌)에 가서 두달 동안 묵으면서 소사양관리에 대한 조사사업을 하였고 그후 훈춘현 마천자공사(진) 5.2대대(촌)에 가서도 연변소발전설계도를 완성했다. 연변의 농업발전에서 주덕해는 룡정만무과원, 대소과수농장, 고동하인수공정을 비롯한 대형 농장과 수리시설수축에서, 훈춘벼농사, 연변소를 비롯하여 연변의 농업발전에서 대단원을 완성했다. 연변의 사과배와 사과도 주덕해와 떨어질수 없는 과일이다. 연변의 벼생산지구는 주로 해란강과 부르하통하, 가야하, 훈춘강, 두만강 류역에 분포되여있는데 강의 류량이 적어 늘 가물의 위협을 받게 되였다. 주덕해는 화룡현 원봉평원을 답사하고나서 주, 현의 련합측량조를 보내여 측량하게 하고 1956년 10월부터 원봉언제공사를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1958년 9월까지 2년 동안에 공사를 끝마쳤다. 원봉수리공사의 뒤를 이어 고동하수리공사도 시작되였다. 화룡현 오도양차 화집령에 산굴을 뚫어 고동하의 물을 해란강에 끌어들이는 대형수리공정이였다. 이 공정은 1959년 9월 18일에 준공되여 수원을 충족시켰다. 그후 안도저수지공사, 화룡현 아동저수지, 석국저수지가 련이어 시공의 발파소리를 울렸다. 주덕해는 농업인재유치, 농업인재양성에도 진력했다. 연변의 “미츄린” 최창호, 사과전문가 관치승, 농업간부 김시룡, 벼육종가 최죽송, 육종가 류창은, 려근택 등은 모두 “주덕해호”에 편승하여 연변의 농업바다에서 힘차게 노를 저은 저명한 농업기수들이다. 농민들에게 기울인 주덕해의 관심은 지극히 인간적이여서 조화사회를 열창하는 오늘의 현실에서도 귀감이 된다.  
83    제1장 인간의 려정 5 - 민족교육의 청사진 댓글:  조회:656  추천:0  2014-05-18
제1장 인간의 려정 민족교육의 청사진   《중국조선민족사료집》(제2권) 354페지에는《주덕해를 회억하여》란 책을 사료로 제출하면서 주덕해가 꾸린 야학교를 다음과 같이 소개했다. “1935년 봄, 주덕해는 동북인민혁명군 제1퇀에서 류수처(留守处)사업을 하였다. 5월에 부대는 벌리현으로 전이하였는데 주덕해는 병(페염)으로 부대를 따라 떠나지 못하고 벌리현 관할밑에 있는 소석향 수전촌에 머물러 병치료를 하게 되였다. 그해 7월에 그는 수전촌 태창수농민네 집에 있으면서 비밀리에 유격대의 조직사업을 하는 한편 태창수의 집을 교실로 항일야학을 꾸렸다.” 주덕해가 북만땅에 꾸린 야학교는 당시 최용건이 보청현에 꾸린 “군정강습소”, 조상지가 바랑허골짜기에 꾸린 “제3군 사령부 전신학교”, 허형식이 방정현에 꾸린 “단기훈련반” 등 위인들이 꾸린 초기교육시설과 나란히 일제강점시기 중국공산당이 령도한 항일교육기초시설에 편재하여 사책에 기입되였다. 일찍 주덕해는 할빈제3지대시절부터 북만땅에서 이름난 “상지중학교”를 창설했고 연변진출후에는 연변대학 창건자의 한 사람으로 선후로 연변농학원, 연변의학원, 연변제1고급중학교, 연변제2고급중학교, 연변한어사범학교, 연변위생학교, 연변재정무역학교, 연변예술학교 등 고등학교와 중등전문학교를 창설하여 여러 분야의 민족 간부와 전문인재를 양성하는데 정책적인 지지를 했다. 연변대학은 우리 나라 소수민족지역에서 가장 일찍 설립한 민족대학이다. 일찍 1948년 연변전원공서 림춘추와 주덕해의 제의로 설립되기 시작하고 주덕해가 제2임 교장(1임 교장과 2임 교장에 관한 자세한 기록은 뒤장에서 따로 언급하기로 함)이 되였다.《중국조선민족교육사료집》 제2권에는 연변대학 창립경과에 대한 원시적인 사료가 있는데 거기에는 연변대학 창립경과보고, 창립선언, 준비위원회 등 일체 사료가 구전하게 등재되였다. 그중 창립경과에는 아래와 같은 대목이 있는데 그 당시를 가장 여실하게 반영하는 원시기록이기도 하다. “…그리하여 今番社會의 需要와 中國共産黨議 正確한 民族政策과 林專員(림춘추), 朱政委(주덕해) 두 首長의 熱誠的인 努力과 全東北人民의 원성으로 因하여 東北朝鮮人民의 熱狂的인 歡呼속에서 創設되게 되였다.” 연변대학의 창립경과보고서와 창립선언은 전반 연변민족교육의 창립선언이기도 했다. 하기에 연변대학은 연변의 문화교육사업발전의 축소판이기도 했다. “민족문화발전에서 첫째도 둘째도 교육이 선행되여야 한다.” 이는 주덕해의 일관적인 교육사상이다. 주덕해는 일찍 조선의용군 제3지대 정치위원으로 사업하던 1946년부터 시작하여 북만조선인집거지역에는 촌마다 소학교가 있게 되였고 목단강, 할빈 등 큰 지역에는 민영중학교까지 세워지게 되였다. 하지만 이 시기 국공내전시기라 민영학교의 운영은 정상적이 되지 못했다. 이러한 정황에 비추어 주덕해는 과감하게 분산된 민영중학교를 집중하여 공립학교를 세우는 조치를 취했다. 하여 1946년말에 할빈조선중학교 등 5개 중학교를 합쳐 조선족이 비교적 집중된 상지현 하동촌에 “송강성립제1조선인중학교”를 설립하였다. 흑룡강성 상지시조선족중학교 원 부교장 김진봉은 이렇게 말했다. “주덕해동지가 우리 3지대를 책임지고 제일 첫번째로 하신 사업가운데 큰 사업이라고 보면 우선 교육을 먼저 틀어쥐였고 우리 민족이 중국의 큰 땅에서 공산당의 령도아래서 일어설 때 교육으로부터 시작했다는 점을 먼저 부각시켜야 한다고 봅니다. 그 간고한 정황하에서 동북에서 공산당이 령도하는 첫번째 공립조선인중학교를 처음 세웠다는것이 쉽지 않고 제일 감수가 깊습니다.” 연변대학 박문일 전 교장은 “연변대학 교장을 겸했던 주덕해서기는 중공길림성위를 대표하여 종합대학인 연변대학을 4개 대학으로 독립분원제를 실시한다는것을 선포하였습니다. 그리고 전달이 끝난후 미리 준비해두었던 간판들을 주덕해교장이 직접 각 학원에 달아주었습니다. 그후의 력사가 증명하고있는바 당시 특정된 력사단계에서 연변대학이 4개 대학으로 분립된것이 이 지구의 대학교육발전에 큰 의의를 가지는 일이였다고 생각됩니다.”고 밝혔다. 연변에 부임되여온후 주덕해는 기초교육도 틀어쥐였는데 연변은 유치원교육으로부터 시작하여 대학교육에 이르기까지의 완전한 교육체계를 확립하고 건전히 함으로써 지적능력을 개발하며 인재를 양성하기 위하여 좋은 토대를 닦아놓았다. 해방초기 연변의 교육은 일정한 토대를 가지고있었지만 통일적인 포치가 없고 구성이 합리하지 않으며 교원이 모자라고 고급중학교가 한개소도 없었다. 게다가 자금난도 극심했다. 하지만 물러설수 없었다. 주덕해는 주당위 전문회의를 열고 고급중학교를 건립할것을 지시하였다. 긴장한 준비사업을 거쳐 마침내 연변고중이 창립되였다. 이 학교가 바로 오늘의 연변제1고급중학교이다. 1952년에 연변제2고급중학교가 마침내 창립되였다. 이렇게 되여 연변의 조선족과 한족의 교육구성이 비례를 맞추었고 평행으로 발전할수 있었다. 1952년 2월에 연변지구 조선족소학교 교육이 보급되였고 1958년에 연변지구 조선족초급중학교 교육이 보급되여 전국적으로 교육이 가장 발전한 지구의 하나로 되였다. 1965년에 이르러 소학교와 초급중학교가 각기 1274개소와 276개소로 늘어 연변은 전국에서 제일 처음으로 문맹이 없는 지구로 되였다. 공화국 창건과 동시에 설립된 민족교육현장인 연변대학과 연변의 중소학교들은 반세기를 넘는 세월을 지나오면서 거족적인 발전을 했고 “교육태평세대”를 구가하고있다. 주덕해가 마련한 민족교육터전은 세류속에서 부단한 개혁과 발전을 거쳤다. 유치원, 소학교, 중학교, 대학에 이르는 교육현장의 사슬고리가 단단해졌고 련동적인 효과로 교육대계가 형성하였다.  
82    제1장 인간의 려정 4 - 연변에서(1949—1967년) 댓글:  조회:791  추천:5  2014-05-17
제1장 인간의 려정   연변에서(1949—1967년) 중공길림성위원회에서는 공화국이 창건되던 해인 1949년 3월 20일에 주덕해를 연변에 파견하였고 그해 5월 22일 주덕해, 왕록, 문정일, 최채, 림민호 등 9명으로 중공연변지방위원회를 구성하고 주덕해를 중공길림성위원회 위원, 중공연변지방위원회 서기로 임명하였다. 그리고 두달이 지난 7월 13일에 동북국 농림부 비서장으로 전근한 문정일 뒤를 이어 주덕해를 연변행정독찰전원공서전원(주정부 전신)으로 임명하였다. 중국인민정치협상회의 연변위원회는 1956년 8월에 설립되였는데 도합 4기의 위원회를 구성하였으며 주덕해가 주석을 련임했다. 이렇게 되여 주덕해는 연변에 파견되면서부터 연변의 당정사업을 총괄하는, 명실상부한 당정지도자 제1인자 반렬에 올랐다. 이것으로 주덕해는 민족관을 실행하고 완성할수 있는 정치적인 지위를 확립했다. 공화국이 창건되기 직전인 1949년, 전국을 향해 진군할데 대한 주덕의 “중국인민해방군총부명령”이 하달되면서 전 중국의 해방은 초읽기에 진입했다. 1949년 6월 15일부터 19일까지 정치협상준비위원회가 북평(북경)에서 제1차 전체회의를 소집했다. 이 회의에는 전국적으로 중국공산당, 각 민주당파, 각 인민단체, 각 지구, 인민해방군, 각 소수민족지구 23곳(지구)에서 134명의 대표가 참가하였는데 이 회의에서 제1기 전국정치협상회의에 참가할 각 성, 시, 지구와 참가인원을 제정해 정치협상회의 조례와 공동강령, 정부방안과 선언을 기초하였다. 그리고 새 중국의 국기, 국가, 국장 도안을 제정했다. 주덕해는 134명속의 일원으로 북경에 가서 전국정치협상회의 준비회의에 참석했다. 이건 주덕해 본인에 대한 북경의 정치적인 “결재”이자 주덕해를 대표로 하는, 조선민족에 대한 중공중앙의 인정이기도 했다. 주덕해는 그해 9월 21일부터 30일까지 열린 전국정치협상회의 제1기 전국위원회의에도 참가하였다. 이 회의에서 180명의 전국위원회 위원이 탄생하였는데 주덕해도 위원으로 선거되였다. 중국은 다민족국가로서 합리하고 선진적인 민족정책시스템을 잘 제정하고 국책에 반영해야 장구적인 국가운영이 가능하다. 중공중앙은 새 중국이 건립하기전부터 민족문제를 정확히 처리할 결책을 제정하였다. “중국인민협상회공동강령”을 제정할 당시 모택동을 비롯한 당중앙은 다방면으로 론증하고 반복적으로 고려한후 민족자치를 실시할것을 결정하였다. 1951년 주덕해는 북경으로 가서 건국 2돐 경축활동에 참가하게 되였다. 그때 주덕해는 전국정치협상회의에서 “연변은 조선족자치구를 건립할수 있는 주관조건과 객관조건이 다 구비되였다. 때문에 중앙정부에서는 우리의 요구를 비준하여줄것을 바란다.”고 중앙에 반영하였다. 그리고 돌아오자 바람으로 연변조선(민)족자치구(주)주비위원회를 설립하고 사업을 다그치기 시작했다. 우리 나라의 고전민족리론에 근거하면 민족이란 같은 언어, 공동령역, 공동경제생활 그리고 공동문화생활을 통해 력사적으로 형성된 공동심리소질이 안정된 사람들의 공동체이다. 중국의 민족식별(확정)사업은 전후로 30년이란 시간을 거쳤으며 대체로 3개 단계로 구분할수 있겠다. 제1단계는 새 중국 성립부터 1954년까지인데 이 시기 주요하게 조사를 진행하는 동시에 1차적으로 민족성분을 확정지었다. 이중에는 이미 확정된 몽골족, 회족, 장족, 위글족 등 소수민족을 제외하고도 조선민(족)족, 장족, 바이족, 따이족, 리수족, 오르쳔족 등 38개 민족을 이 단계에서 확정지었다. 주덕해의 노력으로 조선민족은 제1단계에서 조선민족(1955년후부터 조선족)이란 민족적칭호를 확정지었다. 1952년 8월 9일 “중화인민공화국 구역자치실시요강”이 공포된후 8월 29일에 길림성 연변조선족자치구 제1차 각족 각계 인민대표회의가 소집되였다. 이 회의에서 연변조선족자치구를 성립하고 항일전쟁승리기념일인 9월 3일을 자치구 성립일로 선포하였다. 주덕해는 회의에서 중공연변지위를 대표하여 “길림성 연변조선족자치구인민정부 시정방침에 관한 건의”를 제출하였다. 주덕해는 “연변조선민족자치구는 중화인민공화국의 구성부분이며 연변조선민족자치구인민정부는 1급지방정권기관으로서 공동강령과 상급 인민정부의 결의, 지시, 법령에 근거하고 민족구역자치실시요강의 규정에 따라 자치구내에서 자치권리를 행사하며 사업을 진행한다. 연변조선민족자치구인민대표회의와 곧 성립될 연변조선민족자치구인민정부의 임무는 민족특징을 돌보며 민족형식을 통하여 민족평등정책을 관철하며 여러 민족 인민을 단합시켜 체계적으로 절차를 밟아 정치, 경제, 문화 건설을 진행하는것이다.”고 밝혔다. 이 대회에서 주덕해는 연변조선족자치구 제1임 주석으로 선거되였다. 연변조선민족자치구의 성립은 우리 당의 민족구역자치정책구현의 축소판으로 동북지역에 거주하는 광범한 조선민족들의 지지를 받았다. 자치구의 설립이 “나무를 심은것”이라면 자치주의 간부양성문제는 “나무를 가꾸”는것으로 된다. 주덕해는 민족간부의 문화자질문제가 민족정책을 집행하는 주요한 고리라는것을 간파하고 간부들과 간부양성사업에서 솔선수범했다. 주덕해는 민족구역자치정책을 집행하는 관건이 자치구 여러 민족이 정치, 경제, 문화 등 제반 분야에서 정치, 경제의 평등을 쟁취하고 연변을 조화로운 민족단결자치구로 건설하는것이라고 보고 거시적으로 민족간부등용, 민족간부비례 등 정책적인 정면과 세부적인 측면에서도 한치의 루락도 없이 철저히 집행할것을 요구했고 또 그 자신이 앞장섰다. 그는 한족간부와 한족지식인을 연변에 모셔오고 여러 면으로 보살펴주었는데 특히 과수기술원, 양잠기술원 같은 농업인재류치에 적극적이였다. 주덕해의 발의하에 1954년부터 연변에서는 해마다 9월을 민족단결선전월로 정하고 민족정책을 관철한 상황을 검열하고 민족단결모범을 표창하였는데 현재까지 정부행정에서는 그 전통을 이어가고있다. 주덕해는 여러 민족이 잘 단합되도록 하자면 주당위의 지도성원부터 잘 단합되여야 하고 본보기를 보여주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주덕해와 전인영, 요흔 등 한족간부들과의 사이에 맺어진 동지적우의는 현재를 살아가는 민족간부들의 귀감으로 되고있다. 민족간의 단합을 추진하기 위해서 주덕해는 중앙의 지시를 령활하게 집행하였다. 3년 곤난시기에 국무원에서는 주덕해의 요구에 근거하여 조선민족의 생활습관을 돌보아 조선족들에게는 사람당 입쌀 3근씩 더 공급하라고 지시하였다. 주덕해는 국무원의 이 배려를 한족을 비롯한 주내의 여러 민족에게 고루 돌렸다. 민족을 불문하고 주내의 60세 이상의 로인과 3살 이하의 어린이에게는 몽땅 입쌀을 공급하였다. 그리고 특정시기 조선족에게 더 주는 3자의 천표도 그 절반을 기타 민족에게 돌렸다.  
81    제1장 인간의 려정 3 - 갈림길에서 댓글:  조회:787  추천:1  2014-05-10
제1장 인간의 려정 갈림길에서 이 고민은(1945년 하반년부터 1949년 2월까지) 할빈에서 제3지대 정치위원으로 사업하면서 실천속에서 하나하나 행동으로 풀어가기 시작했고 동북행정위원회 민정처소속 민족사무처 처장으로 사업하면서 민족성격이 성숙되기 시작했다. 그 첫째 발단은 무산된 조선진출이라 할수 있다. 연안에서 주덕의 6호명령을 받고 조선진출을 목표로 심양까지 나왔다가 “포츠담선언”에 부딪치면서 무산되였는데 이는 사실상 “조선민족해방의 선봉대, 중국항일전쟁가운데서의 국제종대 선봉대”의 정치성격을 “격하”시키는 사건의 발단으로 되기도 한다. 주덕해에게도 민족공동체 활로와 소속에 대한 고민을 한층 성숙시키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무산된 조선진출은 주덕해에게는 일종의 선언이였다. 이 시기부터 주덕해는 중국항일출신의 민족간부가 자기가 소속한 민족(조선인)군체들이 조선으로의 이주만이 생존수단이 아니라는 구체성과 중국공산당의 령도아래 중국에서의 영원한 정착과 중국공민으로의 전환을 설파했던 시기이기도 하다. 이것은 사실상 민족군체가 중국에서의 소속감을 인정받고 나아가 정치, 경제, 문화 등 제반적인 사회지위를 확보해야 한다는 선언이였다. 주덕해의 이런 선언은 제3지대 정위로 사업하면서 민운사업에 뛰여들고 국민당과의 싸움에서, 민족군체들의 삶의 현장을 직접 눈으로 확인하면서 더 확고해졌다. 김정순의 회고에 의하면 할빈 제3지대 사업기간에 김정순을 비롯한 많은 교도대대 대원들이 할빈시구역과 그 주변의 방정현, 연수현, 주하(상지)현 등지에 거주하는 조선인들의 생활실태조사를 했다고 한다. 사실 광복전 동북에 거주하던 조선인들이 조선으로의 이주를 50만명으로 추정하는데 광복전이 1차 이주라면 광복후가 2차 이주로 고봉기에 달했다. 광복전후 이주민은 대략 백만으로 헤아린다. 이 민족대이동을 주덕해가 눈으로 확인한것이다. 특히 북만은 상대적으로 안정한 동만(연변지구)과 달리 이 시기 이주가 급물살을 탔다. 주덕해는 북만땅에 익숙한 사람이였고 민족의 생존환경개선이 민족공동체의 운명을 결정하는 요인으로 작용한다는것을 잘 알고있었다. 북만에서의 우리 당의 소수민족“정강”과 민족구성원들의 삶의 현장에서 주덕해는 조선인들의 생활상을 잘 파악했고 그런 현장을 통하여 중국 동북땅에 거주하는 민족공동체가 중국에서의 정착이 가능하고 중국공민으로 자리를 잡을수 있다고 인정하면서 실천적인 노력을 기울였다. 중국에서 사는 조선인들은 이주하면서도 습관적으로 자기를 이국에 와서 사는 교민으로 간주하는 경향성을 내재하고있었다. 하지만 토지개혁시기, 토지분여 여부를 두고 조선민족은 조선의 교민인가, 아니면 중국의 공민인가 하는 정치적인 지위와 실존적인 문제에 봉착하게 되였다. 이 문제에 대하여 주덕해는 아주 실제적으로 똑똑히 해명하였다. 연변텔레비죤방송국 전임 국장 김희관은 “…선친(김문보)은 생전에 주덕해서기에 대해 제일 탄복해했고 주덕해서기의 청백을 죽음으로 항거하리만치 주덕해서기에 대한 변호가 강경했는데 민족문제에 대한 주덕해의 공로에서 민족의 정치적인 지위확보에 기울인 노력이 첫째 공로라고 말씀하시군 했습니다… 주덕해서기의 이 노력이 결국 조선(민)족자치구 (주)창립이라는 결실을 맺었는데 따지고보면 조선족의 정치지위의 확보는 여기에서 완성된것입니다… 어느땐가 제가 어머니를 회억하는 수필을 쓴적도 있지만 어머니가 생전에 제일 처음으로 들은 연설이 1946년 상지하동으로 내려온 주덕해서기의 연설이였습니다. 이 시기 주덕해서기는 무턱대고 조선으로 나가는 길만이 생존의 길이 아니고 땅을 무상으로 나누어주는 중국에서의 생존이 오히려 더 실존적인 민족생존의 길이라고 력설했는데… 그 당시 조선으로 나가기 싫은 어머니에게는 주덕해서기의 그 연설이 그렇게도 귀에 쏙쏙 들어왔다고 늘 회상했습니다. 어머니의 이런 회억은 어머니 개인에게만 있었던 기억이 아니라 당시 동북땅에 거주했거나 중국에 남았던 모든 조선민족들의 공동한 감수가 될것입니다.”라고 말했다. 주덕해는 할빈으로 진출한후 자신의 민족관을 민중들에게 끊임없이 설파했다. “…우리들은 특정시기 이주민입니다. 하지만 이주민이라서 다시 조선으로 나가야 한다는 주장은 편면적입니다. 동북에 있는 대다수 조선인들은 농사지으러 이 땅으로 왔습니다. 하기에 이 땅은 우리들(민족)의 삶의 근간으로 됩니다. 이런 근본을 잊고 자기가 이 나라의 주인이란것을 부정한다면 무슨 자격으로 토지를 분여받을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승리의 과실은 우리 자신이 총을 들고 지키고 나아가서 이 나라의 공민으로 자기의 정치권리를 떳떳이 행사해야 합니다. 나라가 주인들에게 부여한 의무이기도 합니다.” “조선인(민족)들은 중국에 거주한지 이미 반세기도 훨씬 넘고 한족과 기타 다른 민족들과 더불어 이 땅에서 신개지를 터뜨려 밭을 개간하고 어렵게 생활터전을 닦아나갔습니다. ‘내가 이 땅의 주인공이다’라는 의식과 자세가 가장 중요합니다. 자기가 자기를 믿어야 비로소 남들이 믿어주는것입니다. 조선민족의 번영과 발전은 이런 자세가 기초로 되여야 합니다.” 그 당시 주덕해가 가장 심혈을 기울인 사업은 조선(족)인들의 국적문제였다. 당시 조선민족의 국적에 대한 관점은 여러가지로 엇갈렸다. 신중국이 성립된후에도 어떤 사람들은 “무산계급의 조국은 쏘련이고 민족의 조국은 조선이며 현실의 조국은 중국이다.”라는 다조국론을 제기하였다. 얼핏 듣기에는 현실에 안주한 “조국론” 같지만 제기법 자체가 특정군체(조선민족)들의 소속감을 상실시키는 위험한 발상이기도 했다. 주덕해는 미래지향적인 관점으로 “다조국론”을 반박했다. “…조선사람(조선민족)들은 다른 형제민족과 함께 광활한 북만, 동만, 남만 지구를 개척하였고 여러 민족 인민들과 함께 반제, 반봉건 투쟁을 벌려왔으며 중화인민공화국의 창건을 위하여 공동체의 힘을 기여하였습니다. 우리 민족의 이런 영광스러운 력사를 그 누구도 부인할수 없습니다. 조선사람들(민족)은 중화민족의 떳떳한 가족입니다.” 조선(족)인들은 백년을 넘는 세월을 거치면서 중국 동북지역에서 공동생활을 함으로써 정치, 경제는 물론 언어, 풍속 등 각종 문화내용을 집단적으로 공유했고 중국내에서 집단귀속감정을 공유한 문화공동체로 자리잡았다. 주덕해는 중국에 거주하는 조선인을 조선민족(족)이라고 호칭해야 하며 중화인민공화국의 기타 소수민족과 동등한 권리를 향수하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는 당시 중국에 거주한 200만 조선민족의 공동의 념원이기도 했다. 1948년 조선의용군 제3지대 정치위원으로 있던 주덕해는 정세발전의 수요에 따라 그해 4월에 동북행정위원회 민족사무처 처장으로 임명되였다. 이때로부터 주덕해는 중국에서의 민족문제와 민족사업의 중요성과 특수원리를 깊이 연구하였으며 중국에 사는 조선인들의 력사와 현실을 정시하고 민족문제에서의 정답을 찾기에 진력했다. 이 시기 주덕해는 민족문제에서의 과도기적인 사상을 완성하는 시기로서 1948년 12월 민족사업좌담회에서 민족구역자치안을 제출하면서 정부의 인정을 받게 되였다. 1948년 12월 주덕해는 길림성 성장 주보중이 주최한 민족사업좌담회의에 참석하였다. 동북행정위원회에서 길림성위에 위탁하여 주로 연변 및 동북 기타 지구의 조선인들의 문제를 토의하기 위해 마련된 회의였고 주최자인 주보중은 2년전(1946년) 길림성민족사업회의에서 “조선민족은 중화민족의 어엿한 일원”이라는 연설을 할만치 민족문제에 큰 중시를 돌린 사람이였다. 공화국 창립전야인 1949년 8월, 운남성으로 전근되여가기전에 중공중앙 모택동주석에게 편지를 보내여 “먼저 연길지구에서 민족자치를 실현”할것을 건의하기도 했다. 이 자리에는 주덕해외에 연변에서 림춘추와 림민호 등 민족지도자들이 자리를 함께 했다. 주덕해는 이 회의에서 당시 연변의 민족지도자인 림민호를 비롯한 연변, 길림, 심양 지구에서 온 민족지도자들과 처음 만났다. 림민호는 주덕해보다 8년 먼저 모스크바 동방로동자대학을 다닌 선배로서 일찍 룡정지구에서 반일에 투신했던분이기도 했다. 이 회의에서 조선민족의 귀속문제를 두고 세가지의 각기 다른 의견이 제기되였다. 림춘추를 대표로 하는쪽은 연변을 조선에 귀속시켜야 민족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할수 있다고 주장하였고 림민호측은 쏘련의 련방방식에 좇아 연변을 장차 자치공화국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의견이였다. 주덕해는 이 두가지 의견에 다 동의하지 않았다. 량측의 의견 모두 연변경내에 사는 조선민족의 력사와 현실에 립각하지 못한 주관적인 시각으로 중국의 실정에서 실현될수 없는 공론에 불과하였기때문이였다. 조선귀속여부는 국가간의 문제로서 이 회의에서 토의될수 있는 성질의것이 아니였고 자치공화국을 세우자는 생각은 중국국정에 맞지 않을뿐더러 민족 자체 발전을 위해서도 불리하였다. 주덕해는 중국이라는 이 땅에서 중국공산당의 령도를 받고 중국의 한 민족으로 살아가는 대전제에서 구역자치안만이 최선책이라고 력설했다. 구역자치안은 주보중성장의 대폭적인 지지를 받았다. 주덕해는 “문화적으로 조선인(민족)들은 이 땅을 개척하는 그 시기부터 중국이라는 특정구역안에서 생활근거를 계속 공유해온 민족으로 이러한 특성이 조선인들로 하여금 강한 민족적정체의식을 유지할수 있게 하였던 배경의 요인이 되였고 초기이민들이 지켰던 민족집단적인 관습이 소속군체들의 문화거주지를 고착시켰다. 그것은 배타성과 족장적인 관습이 아니라 타관땅을 개척했던 소집단체의 동질성확보와 정체성에 대한 부단한 확인으로 보아야 한다. 다시말하면 조선인들의 소속근거는 중국에서 땅을 개척하는 그 시각부터 시작되였기에 구역자치만이 중국현실체제에 적응되고 생존에 부합되며 우리 민족의 정치적인 지위를 확보할수 있다.”고 명토를 박았다. 따지고보면 조선민족의 정체성은 중국의 특정환경에 대한 지속적인 적응으로 발전되여왔다. 새로운 정치체제와 국가의 탄생은 새로운 규범과 생활환경의 개변 그리고 정치적인 권리욕구를 배출했다. 중국의 너그러운 풍토에서만이 가능한 소수민족집단체의 본능적인 집단행위이기도 하다. 중국의 조선민족은 대부분이 소집단, 대집단으로 마을을 이루거나 특정지역에 모여 산다. 특히 동북의 광대한 농촌지역에서는 거의 대부분의 조선민족은 공동체를 구성하여 생활했다. 연변은 조선민족이 집거한 구역으로 구역자치가 필요한것이다. 이는 당시의 정치와 사회풍토에서 조선민족으로 하여금 동질성을 유지시키고 민족의식을 고양시키는 기본요소인 동시에 전제조건이기도 하다. 이 민족회의가 주덕해를 연변으로 나오게 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였다. 그로부터 석달이 지난 1949년 3월 20일 동북행정위원회에서는 연변지구에 대한 지도력량을 강화하고 동북조선민족에 대한 통일적지도를 강화하기 위하여 길림성위의 요구에 따라 주덕해를 연변에 보내기로 결정하였다.  
80    제1장 인간의 려정 2 - 동방로동대학과 연안 댓글:  조회:863  추천:1  2014-05-03
제1장 인간의 려정 동방로동대학과 연안 다음은 쏘련(로씨야) 모스크바 “동방로동자공산대학”시절이다. 1936년 6월 중공벌리현위는 중공만주성위의 지시를 받고 주덕해를 쏘련에 파견했다. 중공중앙과 제3국제당주재 중공대표단은 우수한 항일간부들을 모스크바주재 “동방로동자공산대학”에 파견하여 중국혁명의 지도자와 간부들을 대량 양성했다. 동북에서도 많은 우수한 청년혁명가들을 추천하여 동북의 항일투쟁을 령도할 유격간부를 양성, 훈련시켰는데 주덕해도 여기에 선발되였다. 모스크바 “동방로동자공산대학”은 극동거주 쏘련인과 아시아인을 대상하여 공산주의운동의 지도자를 양성하기 위하여 1921년 10월 21일 제3국제공산당에 의해 설립됐다. 이 대학교는 “모스크바공산대학”, “극동공산대학”, “동방로동대학”으로도 불리웠다. 이 대학교는 중국, 조선을 비롯한 아시아나라들과 중동, 유럽 국가의 공산주의운동의 성장에 많은 영향을 끼쳤고 따라서 정치적인 거목들을 많이 양성하기도 했다. 명목상으로는 로씨야국립으로 되였지만 실제로는 경비 및 입학생 선별, 대학운영 등 모든 면에서 제3공산국제의 지시를 받는 산하기관이였다. 설립되여 몇년후 로씨야 국내학생 동방부와 국제부로 나눴는데 국제반은 조선어, 중국어, 일어, 토이기어, 프랑스어 등 7개 언어반이 있었다. 조선어는 1928년부터 개설했는데 연변대학의 전임 부교장 림민호와 박헌영의 안해 주세죽이 있었다. 모스크바 동방로동대학에 입학하려면 원칙적으로 해당 국가의 공산당 추천을 받아야만 하는데 주덕해를 비롯한 동북출신들은 중공만주성위의 추천을 받았다. 주덕해일행은 1936년 6월에 먼저 로씨야의 원동항구도시 울라지보스또크(해삼위)에 있는 “국제혁명가구원회”에 머무르면서 모스크바로 향발하라는 다음 지시를 기다렸다. 로씨야어로 “모쁘르”라고 부르는 이 기구는 세계의 혁명가들을 원조하는 단체였다. 울라지보스또크에 도착해서 향발소식을 기다렸지만 소식이 바이없었다. 조직의 지시대로 밖으로 시름놓고 나가지 못하고 비밀을 지키려고 사람들과의 접촉도 피하면서 중국 동북에서 오는 다른 팀들이 오기를 기다렸다. 울라지보스또크란 “동방을 지배하라”라는 뜻으로 로씨야 동해연안의 최대항구도시 겸 군항이다. 북극해와 태평양을 잇는 북빙양항로의 종점이며 씨비리철도의 종점이기도 하다. 1903년 씨비리철도가 완전히 개통됨으로써 모스크바와도 이어지게 되였다. 주덕해의 고향도 로씨야의 극동지구로서 여기에서 멀지 않은 도베야란 촌이였다. 하기에 주덕해에게는 낯선 이국땅은 아니였다. 철썩— 처절썩— 기슭을 때리는 바다의 파도소리를 들으면서 주덕해는 어머니 손에 끌려 조선으로 나가던 그 맨발의 시절을 아프게 회억했다. 슬프게 울리던 배고동소리속에서 마구 덤벼치면서 따라오던 바다갈매기와 파도소리는 아버지를 여의고 조선으로 다시 나가던 주덕해에게는 가장 아픈 기억으로 남아있었다. 아름다운 해변도시에서 주덕해와 리춘근은 동행들과 함께 반년동안의 지루한 기다림과 근 한달동안의 려정을 허비하다보니 그 이듬해인 1937년 1월에 끝내 “모쁘르”의 안내로 광막한 씨비리를 횡단하여 모스크바에 도착, 그 걸음으로 “동방로동자대학”에 입학했다. 한마디로 격동 그 자체였다. 10월혁명이 성공하고 사회주의가 정착된 쏘련, 그 사회주의를 이끄는 유서깊은 궁전과 붉은 광장, 아름다운 도시와 그속에서 여유를 즐기면서 살아가는 쏘련공민들… 쏘련땅은 열렬한 공산주의자들이 오매불망 그리는 메카였고 그만큼 성공한 사회주의의 성지로 성큼 솟았다. 수많은 서구의 진보적지식인들과 동방의 공산주의자들이 모스크바를 방문하고있었다. 그들은 자국에서 전혀 볼수 없던 사회리념과 가치들을 발견할수 있었다. 그리고 지주를 축출한 꼴호즈(집체)농장에서 농민들이 당당하게 국가의 주인으로 등장하는데 깊은 감명을 받았다. 더구나 비바람이 휘몰아치는 북만땅에서 일제에 저항했던 주덕해와 같은 열혈항일청년들에게는 격동의 나라였고 자유로운 “해방구 하늘”이였다. 주덕해와 같은 조선청년들뿐만이 아니였다. 혁명가라면 모두가 꿈꾸는 사회주의락원이였다. 실제로 모스크바는 세계혁명요람의 요람이였다. 윁남, 조선, 인도 같은 식민지의 반제운동가는 물론이요 중국, 일본, 중동… 등지의 공산주의자들까지 받아들여 특별례우를 해주고있었다. 동방로동대학은 우수한 공산당원들을 확보하고저 자질이 뛰여난 신진인물들을 흡수했다. 이 시기에 조선인들도 중국공산당 및 고려공산청년회의 추천을 받아 동방로동대학에 대거 입학하여 직업적혁명가의 길로 입문했다. 동방로동대학은 선후로 조선인학생 150여명을 배출했고 이들은 졸업한 뒤 국내 또는 조선에서 공산당활동에 주력하였다. 그외에도 이 학교는 선후로 류소기, 임필시, 소경광, 우란부, 채창, 하자진, 엽정과 같은 중국혁명의 거물급인물들을 배출했다. 1928년 조선반이 따로 개설되면서 림민호가 조선인들중에서 제일 먼저 입학한것으로 알려지고있다. 동방로동대학에 입학한 조선인들로는 선후로 림민호, 조봉암, 주세죽, 허정숙, 주덕해, 방호산, 리림, 리한무, 주춘길, 김일, 전우, 진반수, 진옥, 김삼 등이 있다. 동방로동대학은 쏘—독전쟁 발발직전인 1938년에 페교되였는데 주덕해는 제일 마지막 졸업생이다. 이 학교 졸업생들은 후에 대부분 연안조선혁명군정학교에서 다시 만났다. 주덕해가 동방로동대학에 입학할즈음에 페병이 도졌다. 하여 모스크바의 한 병원에서 한동안 치료하고 호전되여 다시 학교에 들어갔다. 주덕해의 이 병은 2년전(1935년 3월) 동북인민혁명군 제4군 제1사에 입대할 때 걸렸는데 밀산에서 료양하고 한동안 재발하지 않았지만 이때에 다시 도진것이다. 주덕해는 이 병이 자신의 생명을 해치는 지병이 될줄은 꿈에도 생각 못하고 다시 학교에 입학했다. 주덕해는 처음엔 중국반에 편입되였다. 하지만 동방로동대학교측에서는 주덕해를 비롯한 중국출신 조선인학원들이 중국어강의를 듣기 어려운 상황을 고려하여 8호청사로부터 12호대청에 있는 조선반으로 전학시켜주었다. 이 시기 주덕해의 한어구사능력은 차했다. 조선반에는 조선과 중국, 만주 등지에서 온 학생 20여명이 있었는데 그가운데는 방호산(李天富), 장복(림해), 리림, 전우, 주춘길, 리권무, 진반수, 유경룡, 진옥, 김일, 김상 등이 있었다. 대부분의 학생들은 성분이 복잡했는데 조선에서 직접 온 학생들도 있고 국내에서 추천된 학원들도 있었지만 신분과 소속, 배경 같은 인적사항들은 체크되지 않았고 모두 비밀이였다. 학생들도 당의 지시대로 엄격하게 규률을 준수하고있었다. 주덕해일행이 이 학교에 올 때에는 학교이름이 “모스크바 동방식민지반식민지리익연구학원”으로 고쳐졌는데 복잡한 학교명칭인것만큼 학원들의 신분과 소속국가도 복잡했다. “…산하에는 8개의 분원이 설치되여있고 중국반, 조선반, 윁남반, 필리핀반, 일본반 그밖에 일부 중동국가의 반들도 있었다. 학생들이 서로 다른 국가에서 오다보니 언어, 피부색갈, 생활 등이 차이가 심했고 정치, 사회, 문화 등 사회 제 분야에 대한 리해도 다각도였고 다층차였다…” 조선반과 중국반은 제8분원에 귀속되고 고급반과 초급반으로 나뉘여졌는데 주덕해는 고급반 즉 제1반에서 학습하였다. 혁명가양성을 목적으로 꾸려진 대학교는 기초적인 지식전수가 목적이 아니였다. 하기에 초급반은 말 그대로 문화정도가 매우 차한 학생들로 꾸려졌다. 하지만 코민테른에서는 국제학생들에 대한 대우를 중시했고 혁명후보들의 모든 편리를 제공해주었다. “…이들은 쏘련공산당사, 세계혁명운동사, 정치경제학, 사회발전사 등을 배웠고 군사학 과목으로는 주로 게릴라(유격)전술과목을 배웠다. 당시 중국반과 조선반은 코민테른 중국대표단(중국지부라고도 함)의 지도를 받았다. 중국대표단의 성원들은 왕명, 강생, 락보(洛浦), 왕가상, 진운 등이였다. 중국대표단의 책임자였던 강생도 한동안 이 학교에서 생활하였다.” 1923년 손중산은 더 이상 비밀결사나 군벌에 의존해서는 중국혁명이 성공할수 없다고 판단하고 국민당의 혁명의식을 고취하기 위해 공산당과 쏘련에 정치적제휴를 제안하였다. 쏘련과 중국공산당은 이에 적극 호응하여 1925년 10월 모스크바에 손중산의 이름을 딴 “손중산대학”을 설립하였는데 이는 선차적으로 쓰딸린이 제의했고 국공합작의 산물이기도 했다. “손중산대학”이 창립되자 동방로동대학의 부분적인 교원들과 학생들이 “중산대학”으로 전학했다. 당시 쏘련도 경제적인 여건이 시원치 않았지만 “동방로동자공산대학”과 “중산대학”에 대량적인 물력과 인력을 쏟아부었다. 로씨야측의 자료기재에 의하면 당시 두 대학교에 퍼부은 돈이 천만루블이였고 그외에도 당시 시세가 높았던 외화를 풀어 학원들에게 방학시에 집으로 오가는 경비로 충당해주었다고 했다. 중산대학에는 중국공산당의 거물급인물들인 등소평, 왕평, 박고, 장문천, 엽정, 왕약비, 채창, 하자진, 양상곤 등이 있었다. 1930년 “중산대학”이 페교되자 동방대학에서는 다시 중국반을 설치했다. 1937년 동방로동자대학은 다시 쏘련 국내학생만 입학시키는 동방대학과 외국학생만 수용하는 “민족식민지문제연구소”로 나누었는데 1938년에 이르러 모두 페교되였다. 4년제 동방로동자대학에서 주덕해는 2년 동안 학습했다. “동방로동자공산대학”시기 주덕해는 성공한 쏘련사회주의모델을 가슴으로 익히면서 공산주의신념을 더한층 굳혀주는 계기를 마련했고 따라서 중국혁명과 조선혁명을 국제적인 시야에서 폭넓게 바라볼수 있는 시야를 가졌다. 하기에 동방로동자대학은 주덕해가 혁명가, 정치가로 성장하는 중요한 “병참기지”였고 제1정거장이였다. 다음은 1939년부터 1945년까지의 연안시절이다. 당시 연안은 중국혁명가들에게는 성지였다. 연안출신이라면 누구나 우러러보던 이 시기 주덕해는 보탑산아래 연하기슭에서 “…중국의 광활한 땅에서 조선의 젊은이들 행진하네…”를 힘차게 부르면서 연안에서 중국혁명의 특수성과 승리에 대한 필승의 신념을 가슴에 담았고 국제공산주의혁명속에서 중국혁명의 필연성과 승리를 확신하면서 충실한 혁명가로 성숙했다. 주덕해는 팔로군 359려 718퇀의 한 특무련에서 지도원으로 군복무를 했고 8퇀에서 공급처 지도원으로, 다시 조선혁명군정대학에서 관리처장으로 일하면서 특정시기 민족의 지도자로 자라나는 과정을 밟아나갔다. 주덕해는 중국공산당원으로 항일련군출신이였기에 중국혁명에 대한 섭렵과 접수력이 빨랐고 자신을 인차 용해시켰으며 자신이 처한 민족과 중국의 운명적인 련대점을 알아가기 시작하였다. 그러면서 조선혁명군정대학에서 항일투사들과 의용대출신들이 연안에서 합류하고 다시 연안의 혁명기류에 편승하는 과정을 지켜보면서 중국혁명과 조선혁명의 련대적인 관계와 특수모식에 고민했다. 주덕해의 이런 자각은 필연적으로 민족의 정치 소재와 지위 그리고 번지수(국가소속)를 고민하는 결과를 낳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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