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균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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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    《심리교정을 해드립니다!》 댓글:  조회:1162  추천:0  2015-10-01
                        《심리교정을 해드립니다!》      본심리교정쎈터에서 일류의 수준으로 심리교정을 해드립니다. 본쎈터는 목전 수많은 사람들의 비정상적인 심리전화가 각종 위법란기, 범죄의 내적요인이 되고있는 국내현황에 립각하고 인민들의 절박한 수요에 의해 새로 설립한 쎈터입니다.    본쎈터는 특히 경제발전과 빈부차이를 축소하는 길에 걸림돌이 되고 막무가내한 사회공해로 되고있는 부정부패에 절치부심하는 민심을 감안하여 개발한 시스템으로서 해당자들의 심리를 교정하여 인민의 공복다운 렴결봉공형관리로 새롭게 부상시키기 위해 심리청결을 하는것을  취지로 합니다.      심리자문실에서 예비교정을 해드림니다. 례컨대 당신은 권좌에 오르기 바쁘게 심통이 먹통이 되였다는것을 자각하고있는가? 관리로서 어디에서나 떳떳이 나설만큼 도덕표준이 도달했다고 느끼고있는가? 권력을 쥐였을 때 한몫 크게 챙기지 못해 종일 안절부절하지 않는가? 당신은 자기가 《인민공복》이라는것을 자각하고 백성을 위해 복을 창조한다고 자긍하는가?…만일 상술한 큰 문제상에서 명랑하게 대답할수 없다면 혼자 골머리를 앓지 말고 심리교정쎈테에 등록하기를 권고하는바입니다.    본쎈터는 인민대중의 직속자선단체이지만 세계에 둘도없는 심리교정쎈터로서 교정사들도 세계적으로 덕망있는 전문가들입니다. 사람을 구하는것이 최종 목표이므 로 교정내용이 지극히 현실적이고 실용적이며 교정방식도 독특합니다. 본쎈터는 전 사회에 낯을 돌려 복합형, 청렴형인재로 재생하도록 하기 위해 대상에 따라 각양하게 교정해드리며 다종다양한 국제교정술도 인입하였습니다.    본쎈터에서는 봉페식교정을 하는바 교정대상자들의 실제에 근거하여 반을 편성하는데 유치원에서 소반, 중반, 대반에《면양반》,《토끼반》,《비둘기반》등이 있듯이 본쎈터에서도《홍군반》,《로팔로반》,《허운봉반》,《초유록반》등 력사의의가 있는 명칭으로 반을 편성합니다.    본쎈터는 개발정신이 독특하고 심리교정내용이 다양다종합니다. 주요한 심리교정 대상자들은 탐관오리들입니다. 탐관이란 물욕에 눈이 어두워 미련해진 사람으로서 가질수록 더 가지려고 로심초사하는것이 가장 특징적입니다. 거개 머리가 단순하여 요행심리에 매달리다가 결국 석류치마밑에서 들통나서 일패도지하는 비정한 인간들의 악성리기심, 등치고 간빼먹는 투기심리 등 심리교정의 종류가 각양각색입니다.      성별, 년령, 직업, 급별 등을 불문합니다. 그러나 곧 권좌에서 물러나야 한다는 위기심리에서 충족한 후반생을 마련하려고 억지로 욕심을 채우는59세 현상, 기대치 는 높은데 장애에 부딪쳤을 때 그 한발작이 천고의 한이 될줄을 모르고 물이 흐린김 에 한몫 단단히 챙기려는39세현상과 같이 두개 난관을 넘을수 없다고 자각한 사람은 특별대상자로 취급합니다. 그러나 백성들이 알아주는 청관들은 일체 사절하는바 그 이상 좋은 심리상태란 존재하지 않기때문입니다.    허다한 탐관오리들이 《39세》,《59세》이 두개의 난관을 넘지 못하는데 인간의 체력, 지력, 기억력은 년령과 직접 관계되지만 탐욕심만은 년령과 무관하므로 이 두개 년령단계에서 심리교정이 초미의 문제로 나선다는것을 특히 주명해두는바 입니다.     당전 이런 년령단계의 비정한 당정관리들의 비뚠심리를 교정하고 지도하여 건강하고 청렴한 관리심리구조를 가지게 하는것은 민중들의 숙망일뿐만아니라 바로 당과 국가의 흥망성쇠와 관계되는 준엄한 과제이기에 심리교정에 들어간후 육체상, 정서상 상대적으로 부담이 과중하다는것을 미리 통보하는바입니다.    본쎈터에서는 탐욕척결교정, 렴결봉공교정, 영욕 8 종교정, 변태심리교정, 도덕 순결화교정, 징계형교정 등 20개의 전업교정부와 13개의 박사학위, 25개의 석사학위, 관리심리교정박사후 과정도 있으니 선택공간도 충분합니다.    탐욕척결교정에서는 교정방침이 특이한바 재실천속에서 자기가 가져야 할 바른 심리자세를 련마하게 합니다. 그만큼 인간의 본성이기도 한 사리사욕을 초월하여 극도의 탐욕성을 가진 인재들이 몰려들수 있기에 특별히 초빙한 선행탐욕자들을 반면 형상의 모델로 삼아 실천적으로 심리교정을 합니다. 음모술수, 아첨, 리간도발, 회유 책 등 온갖 악질적인 심리는 제일 좋은 교정실에서 집중교정을 받게 합니다.     렴결봉공교정은 인민의 공복으로서 반드시 갖추어야 할 기본심리자질부터 의식하는것인데 본쎈터의 운영취지가 철두철미 렴결봉공정신을 구비하도록 하는것이므로 본인은 물론 교정사가 관리로서의 심리자질이 형성되였다고 인정될까지 반복형교정도 해드립니다. 교정은 사욕심리교정합본의 내용에 따라 진행됩니다,    렴결봉공이 무엇인지 모르는 저지능자는 먼저 예과교정에서 기본심리을 갖추게 하고 다음 자원원칙하에 본격교정에 들어갑니다. 렴결과 봉공은 우리 말에 있는 말이지만 렴결봉공은 한어식단어조합으로서 렴결이란 청렴하고 결백하다고 해석할수 있고 봉공이란 나라와 사회를 위해 힘써 일함이라고 해석할수 있습니다. 이 면에서 교정받고 일심불란으로 도덕수양을 닦으면 우선 본인에게 좋고 가족에게 좋으며 일신 영달에도 안전계수를 높여주니 용의자가 많을것으로 예정하고있습니다.    영욕8종교정은 최근년간에 개발한 교정술로서 이 교정의 내용은 이미 전 국가적인 국민도덕교화로 보급 되여있기에 상대적으로 강압적일수 있습니다. 그러나 언녕 수치심이 무엇이고 진정한 영예심리가 무엇인지 가슴속에 새기고 있는 사람들은 별책에 등기합니다. 본쎈터는 돈벌이가 목적이 아니기에 모든것이 무상으로 운영됩니다.    본쎈터에 들어서면 다음 같은 글자를 정하게 쓴 액틀이 안겨올것입니다. 이 교정부가 본 쎈터의 핵심부이기때문입니다. 이 액틀에 쓰인 글을 10분간에 암송하지 못하 면 본인이 아무리 간곡하게 심리교정을 요구해도 완곡하게 사절합니다.    《8대영광과 8대수치》    1. 조국을 열렬히 사랑하는것은 영예이고 조국에 해를 끼치는것은 수치다.    2. 국민을 위해 봉사하는것은 영예이고 국민을 배신하는것은 수치다.    3. 과학을 숭상하는것은 영예이고 우매하고 무지한것은 수치다.    4. 근면성실하게 일하는것은 영예이고 편한것만 찾고 일하기 싫어하는것은 수치 다.    5. 단결해 서로 돕는것은 영예이고 남에게 해를 끼치며 자기리익만 좇는것은 수치다.    6. 성실하게 신의를 지키는것은 영예이고 리익을 좇아 의를 저버리는것은 수치 다.    7. 법과 규율을 지키는것은 영예이고 법을 어기고 규률을 혼란하게 하는것은 수치다.    8. 어려움을 참으며 분발하는것은 영예이고 교만하고 사치하며 방탕한것은 수치 다.     이 교훈은 전국적으로 보급되였다는것을 잘 알고 있을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이는 관리들을 포함한 국민전체의 정신재무장운동인것입니다. 본쎈터에서 심리교정을 마치면《영욕관》의 세기적의의를 명기하게 될것이고 새로운 리상형관리로 거듭날수 있다는것을 담보합니다. 본쎈터의 교정학자들은 《8영8치》를 눈에 넣고 귀에 넣고 머리에 넣고 가슴에 넣고있기에 외착없이 잘 교정해주고 그 기초상에서 실천에 옮겨 검증받는데 모를 박고있습니다.                 본쎈터주소: 현대시 인민로 사회구역1호빌딩                                               2008 년 1 월 20      
49    (교육칼럼)영원한 난제인가? 댓글:  조회:1345  추천:0  2015-04-26
                                 영원한 난제인가?                                                                           최 균 선      언필칭 자질교육이라 하면 자다가 봉창을 두드리는격이고 남들이 곱씹고 중복 해석하고 피루어온 해묵은 과제를 중계방송하는것이라고 할수도 있겠으나 느낌에는 원래 짝이 없는 법이니까 같은 문제라도 인식이 다르고 느낌이 다를수는 있겠다.    중국교육계에서 자질교육이 제창된것은 지난세기 80년대 중기였는데 이미 25년도 넘는다. 속담대로10년이면 강산이 두번 변하고 절반 변한셈이라 할가? 물론 자질 교육은 의연히 작금의 교육에 주류라고 긍정하고 있지만 달라진것은 별로없다. 학생 들로 공부기계, 지식의 저장고로 만들지 않고 “전지전능”하고 다재다능한 인재로 키우려는 자질교육의 취지는 두말할것 없는데 웨치는 소리는 줄곧 우렁찬 대신 더 억세게 틀어쥔것은 여전히 응시교육이였다.   자질교육의 내함이 무엇이고 실질은 무엇이며 중국교육발전에서의 필수성, 영향성 등에 대한 장편대론들은 아무리 심오하고 요란하여도 거기서 거기인 해석에 그치고 그나물에 그밥이다. 사전에서는 교육면에서의 자질을 타고난 해부생리학적인 특수성의 총체적발전의 전제라고 밝히고있다. 복잡하게 말할것없이 자질이란 학생들 개개의 기성지식 축적 및 나아가서는 능력이라 함축할수 있고 곧 배움에 대한 학생들의 소화능력이라고 한마디로로 귀납할수 있겠다.    상술한 해석들에 다 도리는 있으나 완전한것은 아니다. 자질은 일생동안 쭈ㅡ욱 이어져있고 부단히 준비해가는것, 다가올 학문을 배워낼수 있는 능력이라고 할 때 자질교육은 지식만능, 점수통수가 아니고 장차 각자가 삶의 마당에서 보다 빛나게 자아를 완성해갈수 있도록 충분한 준비를 시키는것이라고 하면 더욱 가슴에 와닿을수 있을것이다. 모두어 말하면 자질교육의 진정한 함의는 아이들의 건전한 인격을 배양하고 전면적으로 발전하도록 인도하는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의 관념속에는 자질제고란 그냥 학교공부이고 공부란 학교에서만 하는것으로 인식되고 있는만큼 자질의 척도는 의연히 점수이기에 교과서지식중심, 점수쟁탈전의 살벌한 분위속에서 훈육(训育)의 틀을 벗어나지 못하고있다. 사회는 발전하고 시대은 비약하는데 중국의 교육은 의연히 공리적응시교육의 속박에서 벗어날 길 없는것인가? 아무도 풀수없는 교육의 영원한 난제인가?      이런 철옹성같은 교육기제하에서 무한한 동경의 세계에서 환상의 금나래를 퍼덕이는 어린생명들을 해가 저물도록 교실안에 가두어놓고 피로전술을 견지하지 않을수 없다. 따라서 중소학생들은 몰이군이 모는대로 가야 하는 양떼로서 쫓기며 사는 세대라고 개괄할수 있다. 엎친데 덮치는격으로 학부형들마저 변수로 작용하면서 견고한 력학적관계를 이루어가지고 진정한 자질향상에 장벽으로 충당되고있다.    하여 욕심많은 부모들의 기대와 요구, 채촉과 강요하에 아이들은 자기네 특유의 삶의 권리를 잃고 빨리빨리 대학생이 되는 막연한 기대에 삶을 걸고있다. 전 사회적 교육체제에서 막무가내한 처경인데 부모들은 아이들이 자유롭고 창의적이며 개성적으로 자랄수 있는 교육환경을 마련해주어 아이들의 자발적인 특유의 삶의 문화를 꽃피워가도록 왼심을 써야 하는데 그와 반대이니 걱정이 아닌가?    우리의 학교들은 좀 더 인간적인 그리고 다양한 삶의 의미를 터득하고 익히는 즐거운 곳이 되여지고 보다 다양성이 보장되는 개성적인격발전의 온상이 되여져야만이 자질교육이 공리공담이 되지 않고 제자리 답보가 되지 않을수 있다. 하긴 “쾌락교육” 이 시도된지 오래고 일정한 성과도 쌓았지만 근본바탕이 해결되지 않고있다.    근원은 언필칭 그 밉고도 고운 점수만능에 있다. “관문을 빠져 나가기 어려운데 말을 타든 꽃가마에 앉든 다를게 무어냐?”하는 전고가 있는데 그 점수라는것도 절대적으로 신뢰할것이 못되기에 문제는 미묘해지는것이다. 결국 자질교육이라는것도 점수의 하녀가 된셈이고 아이들은 의연히 점수의 노예로 허덕이고있다. 그만큼 높은 점수에《저능아》는 계속 배출될것이다. 자질제고를 론할 때 어떻게 학생의 전인생 행로에 영향줄것인가 글을 가르침에서 곧 사람을 가르친다는 사명의 내함을 어떻게 외연에로 확장시킬것인가 하는 문제에 력점을 두어야 할것이다.    물론 량지가 있는 교원들이건만 “시집살이”를 하고있다. 자질교육은 미시적으로나 거시적으로나 교재지식의 완벽한 전수와 피동적접수로서는 완성될수 없다는것을, 교재지식권내에서만 체현되는 교원의 단면적교수활동만으로는 이 사회, 이 시대가 요구하는 인재를 육성할수 없다는것을 선생님들도 잘알고있다. 알고있은들 어쩐단말인가? 이는 교육의 이률배반현상이라고 체념해버려야 할가?    학생들의 인격력량을 측정하는 점수를 인간이 고안해냈건만 우리 자신의 세계에 주재자로 군림하여 죽였다살구니 비애가 아니며 자조(自嘲)가 아니겠는가? 펄펄 뛰여야 할 자유적생명들이 지식접수기로, 계산기로 되여야만 흡족해 하는 학부모들은  거개 인격발전에 유익한 활동도, 과외독서마저도 공부에 지장이 되는것으로 저어하기에 아이들은 교과서속에서, 허물어도 허물어도 끝없는 숙제산에서 헤매다보니 어린생명체의 “광합작용”의 시간마저 점유당하고 만다.    변화다단한 인생항로에서 종신토록 배워나가는 실효적이고 귀중한 그 모든것이 일일이 점수로 환산되지 않는다는것을 에디슨, 아인슈타인, 발자크같은 위인들의 인생업적이 증명하였건만 어이하여 점수의 노예적운명에서 해탈되지 못하는지, 교육이 현사회의 투영, 미래사회의 신념, 그것의 준비단계에서의 최고가치임을 우리는 다 함께 영영 깨우치지 못하고 말것인가?    우리의 민족교육이 추구하고 지향해야 할 정신적바탕이 더욱 훌륭해지고 나아가서 사회의 생성과 유지를 위해 공헌해야 한다면 우리는 교육을 통해 길러내야 할 높은 자질의 민족인재의 배양은 어떻게 개변되여야 할가? 우선 연박한 과학문화의 소유자가 되여야 할것은 두말하면 잔소리일것이다.    따라서 늘 생각하는 사람, 현실을 투시할줄 알고 느낄줄아는 명철한 사람, 느끼고 생각한것을 두세가지 어종으로 적절하게 표현하고 글로 옮길수 있는 사람, 류행이라고 맹종하지 않는 줏대있는 사람 등 종합적자질을 구비한 인격자로 배양해냈을 때 우리 교육자들은 자질교육의 임무를 집행해가고 있다고 말할수 있을것이다.    그리고 부대적으로 말한다면 자식을 위한 교육투자에 부모가 응당 해야 할 의무와 도리를 초월할정도로 헌신적인 우리 학부모들은 물고기를 잡아주어 평생 잘살수 있도록 로심초사하기보다 물고기를 잡는 방법을 장악하도록 가르치는 유태인들의 전통적교육리념을 거울로 삼고 실천에 옮기록 힘써야 명지한 부모라 할수 있을것이다.    자질교육에서 규명된 본질은 자연적속성으로서 시종 자연환경속에서의 생명운동에 관통시키는것이다. 이것을 “교육생태학”이라고 멋지게 표현하고 있는데 교육과정에 생명운동의 상태 및 규률에 좇아 자질교육의 본질적공능을 실현하는것으로서 이는 자질교육의 출발점이자 귀속이 된다. 이점을 알고 교육에 림해야 자질교육의 황금가을을 맞이할수 있을것은 자명하다. 한비자의“선두를 다투지 않으며 꼴찌를 부끄러 워하지 말아야 한다”말은 처음부터 죽어라 달리면 쉽게 지친다는 전제를 깔고있다. 선두를 다투지 않는다는 말은 경마를 두고 한 말이지만 처세에도 적용된다.                                  2012년   2월 7 일 ( 수개) (참조용 펌글)    이런 대학입시시험방법은 영원한 난제로 되고있는 우리네 대학시험제도에 대비하여 참고가치가 없을가? 나름대로 종합지식과 종합자질을 시험보는 이런 시험은 참 좋은 시험방법 내지는 시험형식이라 생각한다. 북한, 대입시험에 원격시험제 도입..내년 전국 확대      (서울=연합뉴스) 차지연 기자 = 북한(조선ㅡ이하 같음, 옮긴이)이 올해 대학입학시험을 원격시험 방식으로 실시했다고 북한의 대외용 주간지 통일신보가 27일 전했다. 김영수 북한 교육위원회 국장은 "새 세기 교육혁명을 적극 추진하려는 사업의 일환으로 대학입학시험에서 원격시험평가방법을 도입했다"고 밝혔다.    북한이 도입했다는 원격시험 방식은 수험생이 국가 정보통신망을 통해 교육위원회가 제출한 시험 문제에 대한 답을 컴퓨터에 입력하는 방식이다. 이전까지 북한의 대학입학 시험은 수험생이 대학 시험장에 가서 필기로 시험문제 답을 쓰거나 물음에 대답하는 방식으로 진행했다. 김영수 국장은 "이미 5∼6년 전부터 일부 대학에서 부분적으로 원격시험 방법을 적용했다"며 내년에는 전국 모든 도와 대학에서 원격시험평가 방법을 받아들이도록 할 계획"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올해는 량강도와 자강도, 함경남북도, 평안북도, 황해북도를 비롯한 7개 도와 김일성종합대학, 김책공업종합대학, 김형직사범대학, 평양건축종합대학, 한덕수평양경공업대학 등 10개 중앙대학으로 확대해 도입했다"고 소개했다.    통일신보는 예를 들어 "량강도의 학생이 김책공업종합대학 입학시험을 친다고 하면 평양에 있는 김책공대에 올라오지 않고 자기 도에 있는 전자도서관에 앉아 컴퓨터로 시험을 치고 그에 대한 평가도 컴퓨터로 받게 된다"고 설명했다.    김영수 국장은 "원격시험은 학생들의 실력평가에서 객관성과 공정성을 보장할 수 있다는 것이 장점"이라며 "시험성적도 실시간으로 동작하는 프로그램에 의해 자동으로 채점되고 즉시에 현시된다"고 강조했다.    charge@yna.co.kr (끝)  
48    (교육칼럼) 학원덕분에 오른 성적의 리페 댓글:  조회:1391  추천:0  2015-04-10
                   학원덕분에 오른 성적의 리페                                        진 언       아이를 키우는 현대부모들의 골치거리는 학습성적부진이고 그 해결책으로 학원에 다니게 하느냐 마느냐 하는 문제라고 말해도 과언은 아닐것이다. 그런데 사람마다 사유방식이 다르고 교육관념, 가치기준이 다르므로 학원다는것이 좋다는 사람들도 많다. 소학생들이 학원에 다니는 동기, 목적이 각양각색이겠지만 결국 학원에 다니지 않으면 다른애들보다 뒤처진다는 위기감때문이다.    물론 학원에 다니면 좋다는데는 나름의 리유가 있다. 예습을 하기에 학교수업이 지식공고단계로 될수도 있어 좋고, 학원에서 배운것을 더 심화공고하게 할수 있어 좋고 학습방식이 달라서 흥취가 생기게 해서 좋고 특히 맟춤형으로 각자의 수준에 알맞게 해석해주어서 좋고 학교시험에 대비하여 여러가지 모의시험도 쳐보고 예상 문제집을 풀수 있어서 좋고, 학급보다는 소규모여서 묻고 지도받아 좋고…    학원에 매달리는 심리바탕은 보다높은 점수를 받으려는것인데 결국은 다른 애들보다 뛰여나게 하려는것이다. 달리말하면 수업보충을 해서라도 점수를 높이고보자는 심리이다. 기실 학원교육의 비결은 선행수업이다. 과당수업진행을 헝클어놓는다거나 학습부담을 가중시키는것은 둘째치고 우선은 아이들에게 의존성을 심어주는것이다. 숙제까지 일컬어 숙제반에 가서야 완성할수 있다면 우리가 주장하고 늘 말하는 자습 능력배양, 독립사고능력배양을 스스로 포기하는 셈이다.    세상에 쓸모없는 지식이 없듯이 효률없는 학습지도를 하는 교원이 없다. 그러나 흥취배양, 다면수배양을 목적으로 하는 피아노학원, 미술학원, 무용학원 등은 학습 성적제고와 별개의 문제이므로 화제에서 소외시킨다. 화제는 학습성적을 직접적으로 제고시키는 지력발굴형의 그런 각종 학원에 다녀서 높아진 성적은 득도 있지만 페단 도 많기에 학원에 다녀서 높아진 성적을 미신해서는 안된다는 견해이다. 우선 먹기는 곶감이 달다는 속담이 있지만 학원에 다니는게 능사가 아니다.    학원에 다니면 바르지 않은 경쟁심이 더 무성해지고 학원에 같이 다녔는데도 성적이 차하다면 자존심이 더없이 구겨지고 자책감에 앞서 좌절감과 부모에 대한 죄책감까지 덮치여 자신에게마저 짜증을 내게 될수도 있기때문이다. 그러고나면 학교 수업도 시들해지고 학원공부도 지루해 한다. 그래도 정규교육을 신뢰해야 맞다.    집에서 새는 바가지는 밖에 나가도 샌다고 워낙 공부에 열중하지 않는 아이라면 학원도 “구세주”가 못된다. 학원에서도 자기가 집중하고 하려는 마음이있어야 공부가 잘되고 성적도 소기한대로 올라간다. 맨날 학원에 다니다가 학원을 그만두니 성적이 하강선을 긋는 아이들도 있고 별로 나아지지 않은 학생들을 적잖게 알고있다.      나도 시대풍조를 못이기여 손자를 2학년때 일년을 수학, 한어, 영어학원에 보냈는데 별로 단맛을 보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학원을 등지고 자습능력배양에 모를 밖았더니 말이 가는데 소도 간다는 속담처럼 처음엔 좀 불안해 하다가 혼자 숙제도 하고 자습능력이 상당히 제고되여 담임교원도 학습기틀이 완전히 잡혔다고 치하하였다.    혼자 수학문제를 풀어내거나 한어작문을 짓고나서 원시적인 성취감이라도 자신심이 돈독해지면서 더구나 공부에 열중하게 되였다. 그리고 학교에서 선생님의 강의만 명심해 듣고 그날 배운것을 소화하기만 한다면 학원에서 보충수업을 받을 필요가 없다고 인도하였더니 지금은 본인이 한사코 학원에 안다닌단다. 물론 이런 체험이 보편적이라 할수 없지만도 사교육일반에 대하여 심사숙고하게 한다.    소위 말하는 필요악에 사교육도 포함되는것인가? 요즘 중소학생들의 학습성적 부진에 능사가 학원에 턱걸이를 하는것이라고 해도 과언은 아닐것이다. 학원에 다니지 않고도 매학과목이 95점이상인 애가 평시시험에 1-2점 떨어졌다고 부랴부랴 학원으로 달려가는 형편이니 가히 알수 있지 않은가!남보다 빼여난 성적을 따내려는 심정은 가륵하지만 그렇게 나가면 공부를 끝까지 잘할수 있을가?    조금 까다로운 설명이 되겠지만 원점으로부터 설명해보자. 인간의 뇌는 크게 3층 구조로 되여있는데, 1층은 생명유지의 뇌, 2층은 감정과 본능의 뇌, 그리고 마지막 3층은 공부와 리성의 뇌라고 한다. 뇌는 20년 동안 서서히 발달하는데 시기별로 뇌의 발달부분과 각 부분이 기능하는 령역이 다르다.    언제부터인가 “조기교육”이 시대풍조로 되였는데 이도 아니나서 콩밥을 씹는다는 속담처럼 뇌발달과 걸맞지 않는 선행교육이 가장 나쁘다. 물론 신동들이 있다고 뉴스에 많이 나와있지만 결국 극소수가 아닌가? 이런 어경에서 말하면 잘 걷지도 못하는 아이들에게 백메터경주를 시키는것과 같이 무모한 작동이라 해야 할것이다.    공부에 인위성, 특히 강압은 통하지 않는다. 흥취가 가장 훌륭한 선생이다. 긍정적인 학습정서와 학업성취도의 관계에서 본다면 학업성취도와 학습흥취도가 반비례될수 있다. 극성스러운 엄마들의 열성이 아이로 하여금 어느 정도의 성적은 따내게 할수도 있지만 자습능력의 부재로 말미암아 궁극에는 한계에 이른다. 학원의 우수생들은 더구나 자신심결핍증에 걸린다. 성공함에서 자신심만한 동력이 더 있을가?    잘 알지도 못하는 내용도 반복해서 들으면 내용을 리해하게 되고 학교성적도 올라갈것이라고 생각해서 학원수업에 올인하는데 안다고 진도를 앞당겨 나가는식으로 리해되지 않는 부분에 또 다른 내용이 추가하면 수업시간에 사고력이 침체되고 창의력이 낮아지는 현상을 자초하는것이다. 스스로 공부할줄 안다는것은 자신을 위해서 공부한다는 학습관념이 형성되고있다는 표징이다. 아이가 혼자 숙제랑 완수함으로써 성취감을 느끼게 되며 그 와중에 차차 자신감도 커지는 법이다.     어린아이들에게 형성시키기 어려운 난제이지만 우선 공부를 해야 하는 리유를 알게 하는것이 급선무이다. 연후에 학습방법을 터득시키고 장악하도록 인도해야 한다. 세번째 여건으로 학습과 관련된 환경을 조성해주는것도 자못 중요하다. 이 세가지가 유기적으로 결합되여야 최적의 학습효과를 얻을수 있는데 그중에서도 기점은 공부를 해야 하는 리유를 알고 목적성있게 나가는것이다.    어떻게 하면 공부를 열심히 해야 하는 리유를 동심에 맞게, 년령단계에 따르는 인식발전에 맞게 납득시킬것인가? 단마디 명창으로 답할 문제가 아니다. 옛날엔 그저 공부못하면 “쇠궁디를 두드리고싶으냐? 공부를 잘하지 않으면 힘으로 벌어야 한다. 제발 공부를 좀해라.”는 식으로 충고하였다. 이런 잔소리가 당시에는 어떤 자극을 줄수 있지만 크게 깨우치고 수업시간에 정신을 집중하여 강의를 듣게 하지는 못한다.    현시대아이들은 인터넷게임을 하고 텔레비죤을 보는데 심취된다. 애들이 벌써부터 말초신경자극에 의한 즐거움을 만끽하려하는데 그러다보면 너무 깊숙이 빠져들어 헤여나올줄 모른다. 이것은 난제이다. 학습열정을 가지게 하는데는 꿈을 가지게 하는것이 상책이다. 자신만의 꿈을 가지고 자아이미지를 형성시켜 나간다면 공부에 열심하게 되고 차차 성취감을 도취되고 알면 알수록 신나하는게 동심이다.    지금 “등급+평어”의 평가방식을 운용하여“우수, 량호, 합격, 대기합격”등 등급으로 평가하고 백점제를 전면 취소함으로써 점수를 가지고 옴니암니 따질수도 없게 되였기에 아이들의 점수제일주의 관념에도 변화가 생길수밖에 없다. 높은 점수를 따내기 위해서 악을 쓰게 할것이 아니라 “알고 넘어가야 한다.”는 취지에서 아이들의 공부를 지도해야 바람직하다. 학원덕에서 높아진 성적에는 리페가 공존하고있기에 절대적이 아니며 그만큼 미신하지 말아야 한다는 주장이다.                                 2014년 12월 3일
47    (교육에세이)교원, 선생, 스승 댓글:  조회:1900  추천:1  2014-09-09
  교원은 직업적으로 학생을 지도하는 직책의 사람이다. 배움의 과정에서 학생을 이끌어주거나 도움을 주는 사람을 의미한다. 교원을 선생 또는 스승이라고도 하며 대학에서는 교수(敎授)라 부른다. 교원이란 교과서 내용을 해석하며 일정한 수준의 지식을 저장하도록 인도하는 직업인이다. 아이들에게 지식을 전달하는외에 다른 의미를 찾을수 없을 때 교원은 그저 교원일뿐이며 장악한 지식도 제대로 가르칠수 없을 때는 불적격의 직업인이다. 교원사업을 생계형 직종으로만 생각하는이들이 존재하기에 교원군체가 억울하게 매도되고 폄훼당한다. 교원이 학생들에게서 존경과 신뢰를 받음으로써 학생들이 자발적으로 따르게 하는 정신적힘을 교육적권위라고 부른다. 이런 권위가 구현될 때 교원은 학생의 자주적, 능동적인 자기활동을 조직하고 발전시키는 지도력을 발휘할수 있다. 교원의 자격은 자질과는 구별된다. 자격이란 법적인 “교원자격증”을 말하며 자질이란 교원이 될수 있는 인간적바탕을 뜻한다. 총체적으로 교원은 원만한 인격을 위해 근신,노력하는 자세, 학생을 사랑하고 그들의 미래의 인생준비를 위해 동고동락할수 있는 선도자적자세가 요구된다. 교원은 까막눈 어린이들을 자연인으로부터 사회인으로 바르게 성장하도록 이끌어주고 도와주는것이 천직이다. 교육은 사랑에서 시작된다.  진정한 교원은 학생과의 륜리를 지켜야 하며 동사자, 학부모와 일반사회에 대한 륜리도 지켜야 한다. 하여 옛날에는 스승의 그림자도 밟으면 안된다고 했으며 임금, 부모와 동격의 존재로 대우하였다. 선생님이라면 아이들에게 마음의 등불이여야 함은 물론 지식전수가 지혜를 키워주고 인성을 가꾸어주는 과정이라고 생각하고 심혈을 쏟아야 한다. 지식은 리치를 배워서 아는것이고 지혜는 살면서 쌓는것이다.  지식은 두뇌에 저장하는것이고 지혜는 경험으로 터득하는것이다. 지식은 리성적인 론리이고 지혜는 감성적, 실용적인 인생기술이다. 그것을 전수하는것이 바로 선생님의 몫이다. 교원이 교직을 그저 직종으로만 생각하면 기능직업자에 그치나 학생의 인생준비와 장차의 인격양상까지 책임지는 성스러운 사업으로 생각하면 선생님, 스승, 원예사로, 인류령혼의 공정사로 거듭나게 된다. 인간교육에는 그저 교원이 아니라 스승이 필요하다. 스승의 참된 이미지는 무엇일가?  바로 학생들의 마음이 절로 끌리게 하는 선생님이다. 스승은 대개 교원이나 선생님을 존경하는 뜻으로 사용되지만 깊은 인격적감화를 통해 삶의 큰 전환을 마련해주는 위대한 선생님이다. 스승은 인격과 학식의 탁월함을 바탕으로 제자들을 가르치며 스승으로서의 본보기로 학생들을 이끌어 인생의 진로를 개척하게 한다. 스승은 우선 인간을 만드는 학자가 되여 한 사람이 사람이 되여가는 과정에 지대한 영향을 끼칠수 있어야 한다. 지식보다는 지혜를, 지혜보다는 인성을 전해야 한다는 말이다. 스승은 박학을 전제로 따스함, 인내, 관용, 자비의 미덕을 갖추고 눈길만으로도 자석처럼 학생들을 흡인하는 사람이여야 한다. 현대교육은 의혹을 해석하는것이 아니라 할줄 모르는것을 할줄 알게 하는것이다. 가르친다는것은 동시에 많은것을 얻음을 의미하며 가르치는자나 배우는자나 인격은 동등하다. 청출어람을 접수못하는 사람은 참된 스승이라 할수 없다. 제자가 계속 제자로만 남는다면 스승에 대한 고약한 보답이라는 니체의 말은 의미롭다. 사도존엄에서 종래로 자애로움이 배제된적이 없었다. 교원의 사랑은 어머니의 사랑처럼 살갑지 않아도 사심이 없는 사랑이다. 가장 훌륭한 선생이란 아이들과 함께 웃는 선생이다. 가장 좋지 않은 선생이란 아이들을 우습게 보는 선생이다. 그만큼  학생을 믿어주는 스승이 훌륭한 스승이다. 자기학생에게 믿음을 실을줄 모르는 교원은 되돌아와 자기자신을 믿지 못하는것과 다를배 없다. 학생에 대한 믿음은 사랑에서 온다. 학생을 사랑하고싶지 않은 사람은 교단에 나설 자격이 없다. 무릇 모든 사람이 자기인격대로 존재하듯이 교원은 스승의 이미지로 교단에 나설 리유를 창조한다. 꿀벌은 꿀을 채집하기 위해 꽃을 찾는다. 교원이 보수만 따지며 교직에 선다면 파리가 꽃을 찾은것과 다름이 없다. 상술한바와 같이 교원, 선생님, 스승님은 거의 같은 말로 사용되지만 지식경제시대, 가치관념이 질변한 현상황에서는 다른 특성을 지니게 되였다. 생업을 위해 학생들에게 지식을 전수하는이들은 가르침이라는 무형의 상품교환을 하고있는셈이다. 교원이라면 직업도덕견지에서 자기직업에 대한 열애로 로심초사하는지 아니면 불가피한 의무감에서 교직에 몸 담고있는지 스스로 성찰할 필요가 있다. 교원은 우선 인성을 가르쳐야 하고 학생은 우선 사람으로서의 도리를 배워야 한다. "좋은 나무에 좋은 열매가 열리며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딸수 있겠느냐?"라는 말이 진부할지 모르겠지만 아직도 계률이 된다고 믿는다. 령혼의 타락보다 슬픈 일은 없지만 교육자들이 재부나 명예에만 매달리면 그보다 더 자괴하게 되는 일은 없다. 교원, 선생님, 스승의 층차에서 가슴에 손을 얹고 자신은 어느 층차에서 있는지 자리매김을 해보시라. 자기가 하는 일에 혼신을 몰부을 때, 그리고 학생들의 애대를 받을 때 이미 값어치를 했다고 생각하면 너무 랑만적일가?  아버지로부터는 생명을 받았으나 스승으로부터는 생명을 보람있게 가꾸는것을 배웠노라고 제자들이 평생 외울 때 그 교원은 거듭나는것이다. 연변일보 2014-09-09
46    독자분들에게 알림니다. 댓글:  조회:2906  추천:0  2012-06-19
 독자 여러분에게 졸고  《문학원론》을 애독해주시는 여러분 갑사합니다. 근간에 출판에 교부하기 위해 최종수정을 거쳤습니다. 이에 리용하실 분들은 참조해주십시오.                           2012년 11월 18일                             졸고의 필자
45    《광야의 아리랑》의 문학적발굴과 제가치 댓글:  조회:3230  추천:3  2012-06-10
                            《광야의 아리랑》의 문학적발굴과 제가치                                      권두언   그때로부터 세월은 망각의 언덕을 씻어내리며 많이도 흘렀지만 단군의 후손치고 지성인이라면 누구나 다 지난날 반일독립투쟁사에 색바랠줄 모르는 관심을 쏟고있을것이다. 하기에 김운룡작 력사대하소설《광야의 아리랑》의 출판은 광범한 독자대중속에 지대한 흥미를 자아내리라 믿는다. 누군가 천명의 독자들속에 천명의 햄리트가 있다고 했듯이 이 소설에 대해 각자 자기 리해와 인식에 따라 분석, 판단할수 있다. 필자도 한 독자의 신분에서 나름대로의 견해를 기술할뿐이다. 우선 작가는 장기간의 조사연구를 거쳐 풍부한 재료를 모아 웅대한 포부를 품고 붓을 날려 광활한 중국대지에 찍힌 반일투사들의 피어린 발자국들을 재현해내고 그들의 희망과 리상, 나라를 빼앗기고 짓밟히게된 당시 조선인민들의 재난과 기막힌 고난, 그리고 비참한 운명을 줄기차게 써내려한다는것을 가슴으로 느낄수 있다. 비록 작가의 시공간의 제약성 및 기타 여건의 제약성으로 기술의 (记述)의 부족을 피면할수 없었지만 이미 먼 과거로 된 반일독립투쟁사를 잘 모르는 독자계층, 특히는 청년세대들은 이 소설을 통하여 우리 민족의 수난사와 투쟁에 대한 형상화된 지식을 얻을수 있고 그로부터 한층 심각하게 민족적문화감화를 받을수 있을것이다. 작가는 소설에서 중국조선족의 뿌리를 더듬어 만주대륙에서의 망향민이 어떻게 기구한 력사의 비탈길을 걸어 완정한 민족공동체를 이루게 되고 그 와중에 얼마나 참혹하고 아픈 생활고를 겪어야 했던가를 생생한 화폭으로 재현시키려고 간거한 작업을 벌렸다. 작자가   권두에서 피력하다싶이 이 땅에 피로써 씌여진 그 비장하고 뜨거운 력사를 기록하려 시도하고있다. 아직 전3부를 읽고 전반 작품의 전개력을 추단할수는 없지만 작자가 력사대하소설로 구상한만큼 작품의 주선률은 오래동안 세월의 락엽속에 묻혀있던 반일애국지사들의 처절한 민족독립투쟁과 그들이 이룩한 서사시적장거일것이다. 우리 민족은 가히 백의민족이면서도《아리랑민족》이라고 말할수 있다. 한것은 아리랑이 옹근 조선민족의 넋두리이면서도 생명의 찬가로서 단순히《리랑》을 떠나보내며 울면서 부른 전설속의 어느 가냘픈 녀인의 호곡이 아니라 보다 크고 소중한 내 나라ㅡ《님》을 잃은 그 깊은 시름과 한과 정회가 담겨있는 반도인들의 넋의 메아리이기때문이다. 작가가 바로 이런 력사적인 노래를 생과 투쟁에로의 궐기를 호소한 주제곡으로 삼고있어 더욱 흥미롭다. 이 시점에서  김룡운의 대하소설을 이라고 할수도 있다. 사실 우리 배달겨레는 수난민족이면서도 불멸의 민족으로서 피와 눈물로 자기 력사를 써내려 오면서 생존권을 위해 싸워왔다. 그 과정에 식민지노예의 치욕도 기록했고 마침내 그것이 빌미가 되여 오늘도 분단민족의 비극을 한으로 삼키고있다. 희극은 웃음과 더불어 육체와 정신을 느슨하게 하지만 비극은 눈물과 함께 인간에게 비애를 긴장한 맥박으로 승화시키고 반발적인 투쟁에로 이끄는 비상하고 끈덕진 힘을 가지고있다. 바로 이  비극성을 소설의 감정기조로 삼고있기에 소설로 하여금 더욱 력사성과 민족성을 띠게한다. 《광야의 아리랑》은 또 하나의 비극의 산물인 중국조선민족의 뿌리를 근저로부터 캐면서 반일독립투쟁을 리념의 시점에서 쓰지 않고 전체 민족정신의 발기로. 민족독립의 력사적투쟁으로 기록하고있다는 이 점에서 보다 다른 색채를 띠게 된것이다. 피로써 쓴 력사는 무엇으로도 지울수 없고 그 어떤 정치수요와 리념으로부터 외곡, 오도해서도 안될일이다. 그러나 부동한 리념과 체제하에서 누구를 어떻게 쓰는가는 거의《제재결정론》에 얽매여있었다. 이를테면 우리가 알고있는 반일투쟁사는 일매지게 중국공산당의 령도아래의 동북항일련군과 조선공산주의자들로 구성된 항일부대였고 민족주주의자들이나 당시 무정부주의분자들의 력사적장거는 목적의도적으로 백안시되였거나 부정적이였다. 리념의 반쪽시각으로 조선민족의 반일투쟁사를 정치수요로부터 구사하면서 항일혁명은 공산주의주자들만 한것으로 획일화했던 문화시각을 바로잡아 놓음으로써 력사는 승리자에 의해 씌여진다는 관념을 찢어놓으려고 시도한 여기에《광야의 아리랑》의 적극적의의가  있는것이다.  한편 한국에서도 리념의 지배아래 공산주의자들을 완전히 배제하고 여타의 독립투사들만을 기리면서 력사의 탈절을 목적의도적으로 묵인했거나 막무가내하게 간과해오고 있었는데 작가 김운룡씨가 력사유물주의적으로 문제를 투시하고 대댬하게 리념의 속박에서 벗어나 경향파가 아닌 부감자(俯瞰者)의 시점에서 조선민족이 수난사, 반일투쟁사를 보다 객관적이고 보다 전면적으로 조명하려고 혼신을 불태우고있다. 이점에서 소설의 자리매김이 명확해지고 가치분동을 누르고있다고 해야 하리라. 소설은 확실히 한가지 리념교육하에 굳어져버린 우리들의 진부한 력사관에 도전하여 범민족의 립장에서 일제침략자와 식민통치를 폭로, 성토하고 사람들의 생동한 이야기를 통해 조선인민들의 고통과  자유독립을 갈망하는 강렬한 숙망을 반영하려 하였다.   《광야의 아리랑》은 어떤 소설인가?   《광야의 아리랑》을 옳게 평론하자면 우선 어떤 성질의 책인가?하는것부터 찍어놓고 의론을 펼쳐나가야 할것이다. 이 소설이 완정한 력사소설인가? 단지 김석우일가의 가족사인가? 아니면 일제침략사와 조선민족의 반일구국투쟁사인가? 특정된 력사시대에 조선족의 개념은 복합개념인가?단독개념인가?      소설의 뒤면에 편집자가《소설로 엮어내는 중국대륙에서의 독립운동사》라고 주명하고있는데 작가는 중국조선족의 반일투쟁사이고 만주에 뿌리내린 력사의 추적이라 한다. 그리고 소설에서 어떤 때는  한민족, 어떤 때 조선민족으로 엇갈려 쓰고있다. 당시의 한민족과 조선민족, 조선사람은 부동한 개념인가? 동일한 개념의 부동한 표현인가? 등등 일련의 문제는 보다 엄격한 의미에서 심중하게 연구분석 해야 할것이다. 물론 소설이 채마무리되지 않은 정황에서 이렇다 저렇다 추단하는것은 무리이기 십상이나 6부로 구상되고있는 소설의 절반의 편폭을 차지하고있는 전3부에서 김석우가족의 새세대들이 반일투사로 성장하는 과정과 활동 및 수많은 민족주의자, 무정부주의자들의 독립운동과 류혈투쟁이 반영되고는 있지만 30년에 걸친 반일투사들의 귀속, 경력이 의연히 투철하게 구명될수 없고 또 그들의 매개인의 개성, 실질 등 진면모가 정면으로 또 집중적으로 묘사되지 않고있다는 점을 먼저 찍고넘어가야 하겠지만 사유의 일치성을 가지기 힘든것은 무엇때문일가? 오히려 김동춘, 김동철, 김동석과 그들을 반연으로 얽힌 리설경, 안삼순, 홍향숙, 추향, 애선, 장포 등 인물들의 애정과 갈등, 비환리 합의 불우한 운명, 이들의 세태적인 일상이 오히려 많은 분량의 편폭으로 이야기되고있다. 리설경, 안삼순, 홍향숙,추향, 등 인물들도 녀 성독립운동가로 볼수도 있겠으나 많이는 애정을 출발점으로 삼각관계 가 맺어지면서 세태적인 이야기가 길게 엮어지고있다. 거창한 력사대하소설일 때 반일혁명투쟁에서 일어난  력사적사건 들을 기본흐름으로 하면서 자유독립을 위한 투쟁의 합법칙적과정을 심오하게 전면적으로 반영되리라고 생각했는데 가지가 너무 무성해서 큰 줄기들이 가리워져있지 않나 생각해 보게 된다. 저명한 독립투사들의 투쟁활동을 소설의 주선으로 끌고가면서도 그에 복종하는 다양한 부선들을 통해 해당한 시대를 폭넓게 반영함으로써 반일투쟁의 주도적흐름과 함께 전반적인 시대적조류를 폭넓게 재현하여 대하력사 소설의 품격을 높이는것은 전적으로 가능한 일이였다.      대하력사소설로 구상한만큼 영웅서사시적인 양상의 특성에 맞게 보다 영웅적이고 숭엄하며 무거운 정서적색채를 잘 살려나간다면 예정한 묘사대상의 본색에 맞는 보다 더 진실한 구현이 되였을것이고  엄연한 대하력사소설로 되였겠다는 아쉬움을 남기게 된다. 아무튼 대하소설이라면 절정이 있을것이고 그 절정은 소여단계의 가장 큰 력사적사건으로 이야기선이 이루어져야 할것이며 그것을 사건선뿐만아니라 인물들간의 감정선, 갈등선의 최고점으로 설정함으로써 작품의 초점을 명백히 하고 력사적인물들의 형상의 론리성을 보장해야 더욱 돋구어질것은 자명하다. 그리고 력사적사건선우에 각계층의 수십명의 인물들을 등장시킨이상 그 사건을 가능한껏 력사적화폭의 유기적조성부분으로 밀집시켜야 구성에 걸맞는 대서사시적화폭이 빛나게 창조될것이다. 력사대하소설은 력사적사건을 중심으로 하기마련이다. 그렇게 될수밖에 없는것은 바로 력사사건자체의 거대한 의의를 살리는것이야말로 력사소설창작의 성스러운 임무이기때문이다. 하기에 력사소설창 작에서 구성을 짜나갈 때 종자나 주제, 갈등이나 인물성격뿐만아니라 양상까지도 력사인물들의 위대성을 형성하는데로 지향하여야 소기의 목적에 도달할수 있다. 가령 《광야의 아리랑》이 일반 소설일 때 허구와 상상은 허용되 는것이고 내용이 력사사실에 충실한가 하는것을 력사시각으로 너무 깊이 따질필요가 없을것이다. 만약 작가가 단지 김석우일가의 력사와 가족성원들의 비환리합, 눈물겨운 사랑이야기를 주선으로 구상했다면   특수성을 허용해야 하고 전체 민족독립투사들의 전형성과 보편적의의를 강요하지 말아야 할것이다.  소설에서는 홍범도, 김좌진, 김구, 리동휘 등 전설적인 반일장령 들이 등장하지만 3부의 소설행정에서는 과객으로 스쳐지나지 않았나하는 유감을 밀어버릴수 없다. 이 시점에서 이 책의 의의를 완정한 반일투사들의 투쟁사로 추켜올리고 작가가 펴낸 생활화폭을 전면적인 력사화폭으로 과대평가한다면 문본과는 리탈된 속단이라고 해야겠다.    소설의 구성은 내용의 조직이며 형상요소의 유기적배렬로서 주제의 수요에 맞게 그것을 조직해야 하는데 그것은 단순히 소설창작에서 기교문제만이 아니다. 특히 력사소설일 때 단순히 력사사실의 라렬이 아니며 반대로 허구적인 인물을 력사현장에 실재한 인물로 형상화한다면 력사소설로서는 손색이 갈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일반허구적인 일반소설과는 달리 력사소설은 력사에 충실한 전제하에서 소설문본이 이루어져야 하고 또 사회적, 학술적인 제문제들이 합목적 으로 기술되여야 명실공히 력사소설이 되기때문이다. 하기에 력사소설구성에서는 사건의 배렬과 인물형상창조 등 여러면에서 중력중심 문제가 제기되는것이다. 이런 인식과 견해는 물론 어디까지나 개인적인것으로서《광야의 아리랑》이 력사소설이냐 아니냐를 단칼에 가르자는것은 아니다.   2.《광야의 아리랑》의 문학적력사발굴문제   19세기말 두만강연안의 소수의 월강민이 이 땅에 화전의 첫괭이를 박은 그 날부터 중국조선민족의 발족사로 된다면 근150년의 력사를 기록하고있다. 그러나《광야의 아리랑》을 어느 평론에서처럼   20 세기 중국조선족의 생존과 운명을 그려낸 력사소설이라고 일괄하는것은 무리이다. 왜냐하면 중국조선족의 완전한 부상 및 그 개념의 창출은 썩 후의 일로서 당시로서는 그냥 조선인, 혹은 고려인으로 불리우고 또 그런 군체로 생활하고 투쟁하였기때문이다. 오늘의 민족개념으로 과거력사적존재를 명명하는것은 역시 리념의 수요에 호흡을 맞춘 론단으로서 자칫 젊은세대들을 오도할수 있다. 20세기초로부터 20년대이후 대량적인 망향민들이 만주에 밀려들 까지 100여년동안의 중국조선족의 형성사는 일제의 침략사와 더불어 전반 조선민족의 력사행정에서 중요한 한페지로 되여있다. 그만큼 한 문학작품의 범위를 벗어나 많은 사회적, 학술적인 중대한 문제들로 얽혀있는바 보다 깊은 연구와 실천을 거쳐 검증되여 할 과제이다. 일제의 조선강점과 수탈, 만주에서까지의 조선인에 대한 탄압과 살륙은 세계력사적흐름에 거슬리는 반인류적인 준동으로서 그것에 두손들고 이른바《한일합방》에 숙명적으로 추종하면서 악명높은《대동아공영권》동조하는가 아니면 목숨을 내걸고 민족의 자유독립을 쟁취하기 위해 싸우느냐 하는것은 전민족의 사활문제였다. 따라서 그것은   민족간의 갈등과 투쟁의 초점이 되였으며 자발적인 반일투쟁의 도화선으로 될수밖에 없었다. 광활한 만주대지에 밀려든 망향민들가운데는 살길을 찾아들어온 화전민. 개척민들만이 아니라 구국의 큰 뜻을 품고 래일을 벼리고 있 은 선진적지식인, 독립투사들도 있었는바 이들은 자연적으로 반일구국의 통일전선을 결성하게 되였다. 소설에서의 반일투사들은 모두 화산처럼  폭발한  민족의분을 동력으로 삼은 애국애족의 지사들로서  그들은 류혈도 희생도 아랑곳없이 정의의 총칼을 비껴들고 분연히 떨쳐나서 발톱까지 무장한 일제침략군과 생사판가름의 싸움을 벌렸다.     우리 민족의 식민지노역사가 치욕적이였다면 한점의 불꽃이 마침내 료원의 불길로 타올라 새세계의 아침을 열어온 항일구국의 투쟁사는 영광스러운 불멸의 사시가 아닐수 없다. 이를 력사대하소설로 재현하려 시도하고있는 작가는 뜨거운 민족애와 일제에 대한 불타는 증오심을 품고 거대한 소설적화폭을 펼치여 일제침략자의 죄악을 폭로함으로써 식민지제도를 뒤엎고 광복을 쟁취하기 위한 판가리싸움은 막을수 없는 민족대결이라는것을 시사하고있다.     36년간에 걸친 식민지인민의 설음과 원한. 방황과 고민, 얼의 모대김 등으로 관통되여있는《광야의 아리랑》의 시대배경은 어느 뿌리찾기소설보다  복잡하다. 그러므로 민족수난의 년대, 민족해방의 투쟁사를 전면적이고 완정하게 재현한다는것은 용이하지 않은 일로서 아무나 해낼수 있는 일이 아니다.     바로 이러한 사정이 작가가 대하력사소설을 구상함에서 난제를 피면할수 없게 한다. 그러나 작가 김룡운씨는 이를 해내려고 오래전부터 윽별러 왔고 지금 실제상 두팔을 걷어부치고 해나가고있다. 소설에서는 당시의 가장 기본적인 모순이였던 민족간의 모순을 옳게 파악하고 소설에 대력사환경을 펼쳐주면서 력사사건. 력사인물들을 등장시키고 그들의  무장투쟁활동도 묘사하고있다. 주지하다싶이 홍범도, 김좌진, 리동휘 등 력사적인물들에 대한 감동적이야기는 편단적으로나마 세상에 널리 전해지고있다. 그리고 소설에서 묘사되고있는 안중근의사가 이등박문을 사살한 장거, 죄악 적인《한일합방》, 력사적인 3.1운동, 상해림시정부, 유명한 봉오동 전투와 홍범도의 전기적이야기, 야만적인 훈춘대토벌, 청산리전투와 김좌진장군의 무공, 등 력사적인 사건들은 회상기나 문헌식으로 세상에 널리 알려져있어 생소한 인물이나 사건이 아니다. 그리하여  소설에서 력사인물들을 어떻게 진실하고 생동하게 형상화하는가 하는 간거한 작업이 주어지게 된다. 작가 김운룡씨는 이들 력사인물들과 력사사실들을 형상화하기에 모지름을 쓰고있다. 21세기 첫언덕에 메아리치는《광야의 아리랑》이 민족의 깊은 뿌리를 다시 더듬어내고 민족투쟁사를 사실적으로 구현하려는 작자의 소망대로 만중의 가슴에도 메아리칠지는 아직 작품의 완성으로 미루어 보아야 하겠지만 중요한것은 15여성상의 피타는 조사연구와 방대한 구상력과 그에 수반한 서술력이다. 이점은 충분히 긍정해야 할것이다.   3.《광야의 아리랑》에서의 형상창조문제          력사대하소설은 소설문학형태에서 가장 큰 양식으로서 시대를 폭넓게 반영한다. 온 시대를 광활한 령역에 걸쳐 재현하는데 력사대하 소설양식의 생활반영의 본질적특징이 있다. 이 본질적특성으로부터 력사대하소설창작에서는 전개된 묘사와 서사시적화폭의 창조, 주제의 다양성과 인간관계의 복잡성, 성격발전 과정의 폭넓은 묘사와 구성의 광활성, 갈등과 이야기줄거리의 다양성, 많은 형상수법의 리용과 묘사기법 등의 형상원리가 흘러나오게 된다. 그리고 수많은 인물들이 나오고 수많은 복잡한 사건들이 이야기되고 다양한 모순들이 얽히며 복잡한 생활이 끝없이 묘사되기때문에 작가는 다양한 령역과 무대가 주어진 우월한 조건만큼 자기의 전개력을 충분히 발휘하여야 한다.  장편소설의 전개력은 생활묘사뿐만아니라 그의 기본형상과제인 성격형상을 전개하여 그 전모를 보여주는데도 있다. 전개된 생활묘사는 전형적인 큰 환경으로 되며 그것의 생활바탕으로서 궁국적목적은 전형성격을 창조하는데 있다. 하여 인물을 정면과 측면에서 그리게 되며 외모뿐만아니라 내면세계도 탐구하며 그의 발전의 력사까지도 전면적으로 묘사하여야 한다. 대상을 세부화하여 구체적으로 묘사하면서도 생활을 여러각도에서 폭넓게 전개하는것은 장편소설에서 감동을 자아내게 하는 기법의 하나이다. 력사대하소설은 그 묘사의 전개력으로 하여 력사현장의 실제적모습에 가장 근사한 생활화폭을 재현함으로써 력사현실에 가장 가까운 문학양식이다.        《광야의 아리랑》은 20세기초부터 앙양되여 광복에 이르기까지  30여년간의 력사를 국내국제의 정치, 경제 문화, 독립운동, 인민들 의 최하층인생 등 력사현장의 모든 면에 걸쳐 그 복잡성과 심오성을 력사의 모양대로 재현하려고 시도하고있다. 김룡운의 대하소설의 성과는 대서사시적인 력사적화폭창조에서 발현된다고 보아야 할것이다. 이를테면 김석우일가의 많은 성원들의 개인적인 생활이 묘사되면서 홍범도 등 독립투사들의 활동도 묘술되고 상해림시정부의 활동도 다소 반영되고 있으며 서울총독부와 봉천의 관동군사령부, 그리고 상해일본령사관의 간첩활동도 나오고있다. 활동지역으로 볼때 서울과 상해, 통화지구와 길림지구, 북간도, 더 나아가서 로씨아연해주 등 광활한 무대가 펼쳐지고있다. 그럼에도 장편소설은《중국조선족의 지난 세기 상반엽의 반일투쟁을 실사구시적으로 묘술하는 작업은 오늘 중국조선족이라고 불리우는 민족공동체가 중화의 50여개 소수민족중의 하나로 뿌리내리는 과정과 그 필연성에 대한 문학적인 확인》이라거나《이처럼 제재가 안고있는 가장 큰 모순을 제대로 파악하였기에 김운룡은 중국조선족의 반일투쟁을 사시적으로 재현할수 있었다.》는 론단을 읽게 되는데 필자가 보건대는 틀려도 한참 틀린 론단이다. 이 역시 관능적으로 협소한 리념의 울타리속에 빠져들고 있는것이 아니겠는가? 묻거니와 소설의 인물들인 홍범도, 김좌진, 김구 등이 언제 중국 조선족의 일원으로 되였던가?이는 자가당착의 의론이다. 그는 자기 평론에서 홍범도의 인물형상을 분석하면서 이런 대화를 인용하고있다.《한국에 문명개화를 시키겠다고?그래 넌 한국의 문명이 무엇인지 아느냐?》《이제 똑똑히 보거라. 한국사람이 살아있다는것을》대  대화에서 보다싶이 그는 엄연히 자기 신분을 한국인으로 밝히고있다. 하긴 그 당시 그런 신분밖에 더 될수도 없었겠지만…평자는 그들의 그후의 행각을 과연 몰각해서인가?페언은 이쯤해두고, 소설의 종자가 박혀있는 계기는 주요하게 인물성격을 통하여 밝혀진다. 따라서 소설의 계기해명과정은 성격의 묘사과정으로서 사회 적적문제성이나 극성, 작품의 생명인 진실성도 성격묘사의 결과에 형상된다. 대하력사소설《광야의 아리랑》에서는 력사의 대환경과 대사건을 묘사하고있는데 홍범도 안중근의 형상의 구체성을 내놓고 기타 반일투사들의 형상은 그림자식으로 수반되였다고나할가, 하여 이 소설에서 가장 주목되여야 할 력사적대인물들의 형상이 계렬화되지 못하고있다. 장편소설에서는 생활묘사를 타당성과 내용이 있게 전개하기 위해서는 인간관계를 옳게 설정하고 심화시켜야 한다. 소설에서 전개된 묘사의 전개들이 그자체로서는 보잘것없는것처럼 보인다해도 소설의 전반 흐름속에서는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 그런 구성요소를 허용하면서 전개된 형태로 대서사시화폭으로 창조되는것은 사실이나 끝없이 펼쳐진 화폭들이 다 종자에서 피여난것으로 되고 그 모든 부분들이 주요인물들의 형상창조에 없어서는 안될 그런 구성요소로 되게하는데 장편소설의 전개된 묘사에 대한 근본요구가 있다는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김동춘과 김동철의 형상은 비교적립체성이 있고 인상적이다. 그 러나 그들은 청나라 고관의 자제들로서 보편적의의를 가지기에는 어떤 제약성이 있다고 해야겠다. 특히 김동춘 김동철의 성격발전과 그 와중에 현연되는 인물성격은 독립투사로 보다는 애정에서의 인격적이고 진실한 감정의 조선사나이라는 형상성이 더 두드러지게 안겨오고있다. 이것이 결코 작자가 그리려는 최종의 형상은 아닐것이다. 홍범도부대의 참모역할을 한 인물이라면 그 이름이 미상일지라도 실재한 력사인물임에는 틀림없다, 하다면 김동춘은 력사인물인가 허구한 인물인가? 알수 없다. 소설인물의 일반화와 개성화가 통일되여 전형성이 보장된 성격의 주도적특질을 투명하게 부각해야 성격형상의 전모를 련상할수 있는것이다.  반면에 이 소설에서 가장 개성이 있고 립체감이 나는 인물이 장포인데 그의 성격발전그라프를 본다면 하인으로부터 나중에 어찌하여 갑부가 되고 떵떵거리며 호화사치한 생활을 하는데 그야말로 평지돌출이요 운명적으로 행운아이다. 그는 이 소설에서 가장 성공적으로 그려진 인물이라 볼수 있다. 그런데 그가 홍범도의 훈계대로 자기 민족성은 잃지 않고 산다지만 아무튼 투쟁의 도피자로서 그를 인간적으로 용서하고 포섭해주는 홍범도의 흉금을 말해주는데 유조할지는 모르겠으나 이 소설에서 노는 각색과 형상의 적극성, 의의가 무엇인지 알수 없다. 녀성들의 형상부각에서도 후에 투사의 안해로 성장한 설경이나 녀성독립운동가로 된 안삼순이를 내놓고 기타  녀인들의 형상이 아직 뚜렷한 존재의 리유를 스스로 밝히지 못하고있다. 그러나 작가는 가렬처절한 전투장면이나 간고한 시련, 처참한 살 육현장 등을 묘사하면서 인물들의 영웅성과 희생정신, 강의한 의지와 불굴의 투쟁정신, 조국애와 인간애 등을 탐구함으로써 소설에 비장한 감정을 관통시키고있다.  한편 소설창기교면에서도 작가가 여러가지로 무던히도 고심하게 탐구하고 있음이 괄목된다.《신민회통지서》,《독립선언문》같은 력 사자료를 리용하여 력사에 근사하게 폭을 넓히고 깊이를 보장하면서  력사문헌성적성격을 살리고있다.         작가의 창작쓰찔이라고 할가 아니면 기호라할가, 소설에서 여러가지 시문, 노래들이 삽입되여있는데 작품에 정서적색채를 더해주고 인간학의 요구를 구현하려는 노력이 돋보이게 한다. 장편소설의 전개된 서사시적화폭에는 서사시적요소뿐아니라 서정적이며 극적인 요소도 조화시키고 묘사에 포함시킬수 있다. 그러나 력사소설일때 너무 잦은 노래, 시의 인용은 오히려 자체에 고유해야 할 비장성이나 장엄성을 상실하게 하기 쉽다.     소설에는 대화가 무척 많은데 장편소설에서 대화를 길게 하는것은 전개된 묘사를 요구하는 형태적특성의 반영이다. 적들의 대화를 통해서도 우리는 그 성격형상을 깊이 파악할수 있는데 세기말적인전 쟁광증에 걸려 발광하는 일제침략자들의 야심과 비인간성, 학대광의 본성을 느낄수 있다. 이와같이 소설은 드문히 긴 대화로써 력사반영의 폭과 성격묘사의 깊이를 보장하여 소설적전개의 위력을 과시하려 하였는데 좋은점도 있다. 그러나 대화의 긴축성이 수요되는 느낌도 다분히 주기도 한다. 부언한다면 불필요한 인물을 없애고 상식적이고 세태적인 생활묘사를 극복하며 무미건조한 사건을 버리고 형상을 보다 집중화할것이 요청된다.   4.《광야의 아리랑》은 끝나지 않았건만   《광야의 아리랑》에 관통시키려는 주제는《조선족은 누구이며 왜 만주에 살고있는지를 자문자답하면서 그 정체성을 밝혀보려》한 것이다. 그리하여 작가는 만주황야에서 조선족이 뿌리내리는 과정을 추적하고있다. 한 민족인에게 있어서 가장 귀중한것은 자기가 누구이 며 어데서 어째서 이땅에 왔으며 어떻게 피의 백년사를 기록하였는 가를 아는것이라고 말할수 있다. 그런데 아리랑은 작가가 말한것처럼 중국조선족들에게만 슬픈 노래이고 생명의 노래였을가?작가가 서문에서 쓰고있는《…조국의 운명을 무겁게 지고 피와 눈물을 흘리며 한편으로 투쟁하고 또 한편으로 개간하며 마침내 공동체를 이루어내였습니다.》에서 조국의 개념의 외연은 무엇이고 내연은 무엇인가?쉽게 말하면 여기서 말한 조국은 과거의 망향민의 조국인가?후에 하나의 소수민족으로 굳어진 중국조선족의 오늘의 조국인가? 당시의 그 열혈의 반일투사들 모두 여기에 뿌리내리고 특정된 력사산물인 중국조선민족의 일원으로 자기 후대들을 번식했던가? 아니였다. 소설의 결말에서도 제시되다싶이 홍범도는 후에 로씨아로 건너가서 거기서 살다가 파란많은 일생을 마쳤다는것은 세상이 다 아는 일이다. 김좌진의 최후도 리념의 수요에 의해 지금 서로 다르게 해명되고있어 하나의 력사수수께끼로 남아있다. 그의 후대는 남조선에서 주먹대장질을 하다가 후에 한국의 국회의원까지 지냈다고 한다.     김구는 후에 귀국하여 남북통일정부건설을 추진하다가 우익적반 동분자에게 암살당하였다. 결국 그때의 민족주의적인 반일투사들은 자기들의 최종목적인 조국광복을 위해 싸우다가 그렇게 귀속을 찾았던것인데 그런 력사사실을 오늘의 력사범주에 가져다가 붙이는것은  실사구시적이 못된다. 이 모든 의난점들이 투철하게 밝혀진 전제하에 소설이 펼쳐져야 진실성이 믿음직해질것이다. 그러나 력사대하소설《광야의 아리랑》은 상기한 결함들때문에 자체에 담겨진 사회적의의와 인식교육가치가 마멸되는것은 아니다. 반대로 력사의 진상을 어떻게 조명할것인가?하는 문제를 두고 대중들속에서 시비를 가리게 하는 역할도 일으킬수 있다. 중국조선민족의 이민사는 조선족작가들이 써낸 거의 모든 장편 소설들에서 공통한 제재로 되였다. 그러나 문학의 고질로 된 리념과 체제로 하여 회피의 두꺼운 화문보에 가리워진 력사를 새롭게 조명하고 중국조선족의 력사와 투쟁사를 진실한 모습그대로 회복해놓을것을 시대가 요구하고있으며 다른 민족인민들도 반일투쟁사에 대한 옳바른 지식을 얻기를 바랄것이다. 진리를 검증하는 유일한 기준은 실천이다. 한 작품의 진가를 검증하는 기준도 결국은 문본의 실천으로서 우선 작품의 완성고와 사회대중속에서 나타나는 효과를 보아야 할것이다. 독자가 이미 김운룡씨의 다른 장편소설《새벽의 메아리》에 대하여 결론을 내린것처럼 중국조선민족, 더 나아가서는 전 조선민족독자들이 알맞는 평가를 내릴것이다.        《광야의 아리랑》은 작가가  이룩한 여러가지 문학적성과 더불어 한번 읽어볼만한 가치를 보유하고있다.                                  2002년 9 월 1일
44    집필을 마무리하며 댓글:  조회:3264  추천:14  2007-09-19
                                                집필을 마무리하면서   졸고를 집필한지 꼭 12년째이다. 십년이면 강산이 변한다는데 강산은 아니변하고 사람만 로쇠하였다. 다만 끈질김만 헐떡거린다. 시대는 비약하고 생활은 쉬임없이 자기 양상을 바꾼다. 문학도 격변하는 시대와 생활을 바싹 뒤쫓아가며 다양한 양상을 보이고있다.   새록새록 새 개념들이 나오고 각종 문학리론서들이 쏟아져나왔다. 동서방비교문학, 비교문학개론…변화다단한 문학의 발걸음에 맞추어 문학을 개괄한다는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이미 떠난 길이여서 일심불란 경영하다보니 문학리론서의 몰골을 갖추었다.   현시대 문학소비의 열정이 날로 식어감에 따라 저곡에 들어선 문학이 되였지만 거품을 부풀리고있다. 이런 문학현상을 두고 들끓는 가상으로 내심의 공허와 두려움을 덮어감추고 고독과 위기라는 이 정신상태를 다른 행위로 전화시키려고 시도하고있다.   이런 문학거품은 구경 “력사”의 발효인가 아니면 “현실”의 팽창인가? 소비열광속에서 문학경전은 “청춘소설”, “큰 소리문학” “력사를 말하다” 앞에서 전면 붕괴되였다. 진정한 문학은 이제 뒤줄에 물러나 더는 문학의 진정한 심미의의를 바라볼수 없게 되였다. 문학은 마지막 효용 즉 서사적련속성을 붙안고있다. 문학은 마치 줄 끊어진 연처럼 오래동안 자유와 방황을 한몸에 감을것이다.   낡은 일원화가 결속되지 않았고 새로운 일원화도 아직 접종되지 않고있다. 사람들은 상품적, 교환적, 오락적인 일원화속에서 문학을 영위할것이다. 문학이 날로 변연화되고 갈수록 사회주류의 시야에서 벗어나고있지만 인류의 정감생활이 지속되는 한 죽지 않을것이다.   키보드를 다 두드리고 나서 창밖을 내다보니 도시의 밤하늘을 밝히는 불야성속에서 많은 별들이 숨어버리고 큰별들만 반짝인다. 나의 졸고가 독자들에게 한가닥 빛이라도 될수 있을가? 기대심은 뭇별처럼 깜박이기만 한다…                           2012년 5 월 10일                                                  주요참고서적   1. 《미학백과사전》호남인민출판사.1988년 7월 출판 (중문판) 2. 《어문지식사전》하북인민출판사. 1985년, 5월 출판 (중문판) 3. 《미학론집》    상해문예출판사. 1980년 7월 출판 (중문판) 4. 《미학과 예술평론》복단대학출판사. 1985년 2월 출판 (중문판) 5. 《조선문학사》연변교육출판사. 1957년8월 출판 (조문판. 상하) 6. 《예술론》(맑스, 엥겔스) 연변인민출판사 1958년 출판 (조문판) 7.《예술심리학》료녕인민출판사 1988년1월 출판 (중문판) 8.《중국문체지식사전》호남교육출판사 1988년11월 출판 (중문판) 9.《감각, 지혜와 시》곤륜출판사 1987년12월 출판(중문판) 10.《현대소설미학》장덕림.호남문예출판사. 1987년 12월 (중문) 11.《현대시구조》후고 프리드리히 한길사출판. 장희장 옮김 12.《현대시학》한국 윤석산 저 도서풀판사 1996년 출판 (한국어판) 13. 《시론》한국 1이승훈 저.1997년3월 출판 (재판본)  14.《문학과 예술론》맑스. 엥겔스. 조선로동당출판사.1966년7월판 15.《맑스, 엥겔스선집》(1.2권)조선로동당출판사) 1966년 출판 (조문판) 16.《소설창작기교》 김흥섭 . 조선문예출판사 1990년10월 출판 17.《서정과 시창작》장요남 저 조선문예출판사. 1990년 10월 출판 18.《벨린쓰끼선집 2. 4권》 조쏘출판사 19.《문학리론교정》고등교육출판사 2005년 수정제2판 (중문판) 20.《문예소사전》조쏘출판사 193년11월 출판  (조문판) 21.《조선문학통사 (상)》조선 과학원출판사 1959년 출판 (조문판) 22.《꿈의 해석》프로이드 저. 상무인서관 1986년 (중문판) 23.《문학비평의 방법과 실제》리선녕 삼지원출판사 1990년판 24.《현대문학이론》한국 문예출판사 1991년 출판 25.《접수미학과 접수리론》료녕인민출판사 1987년 출판 (조문판) 26.《문학이론입문》한국 창작과 비평사 1988년 출판 27.《현대문학이론》한 종로서적 1989년출판 28.《장편소설과 민중언어》한국 창작과 비평사 1988년 출판 29.《문예심리학》(중문) 길림교육출판사 1988년 8월 출판 30.《현대심리학과 문학》길림교육출판사 (중문)1994년12월 출판 31. 발자끄 《문학은 장엄한 거짓말이다.》(《《서방문론선》하권 상해역문 출판사 1979년 중문판    
43    제 3절 문학의 계승과 발전 댓글:  조회:3703  추천:15  2007-09-18
제3절 문학의 계승과 혁신 1. 전통문학과 현대문학의 대결 력사적으로 고찰한다면 중국문학이나 조선반도의 문학이나 그 흐름을 보면 우선 근대성(모디니티)의 지향성과 전통에의 지향성이 대결되여 걸어온 흔적을 력력히 찾아볼수 있다. 이것은 동양문학이 서양문화에 대비해 말단 주변문화권에 속하는 사실을 승인한것이다. 사실 어느 시대나 서방의 태양을 따르는 해바라기현상이 주변문화권에서늘 존재해 왔다. 그런데 외래사조가 범람함으로써 자기것을 지키려는 본능적인 전통론도 주기적으로 오게 되였다. 동방의 문화권내에서 중국, 일본, 조선반도문학사에서 모더니즘의 의미는 세가지 양상으로 접수되였다. 첫째, 모더니즘이 부정적으로 인식된것이다. 이 용어자체가 다분히 리얼리즘차원이며 엄밀한 개념규정이 단행된바 없다. 즉 이질적문화의 총칭으로 인식되여있다. 1920년대 조선반도에도 모던껄이란 말이 유행된바 있다. 그때까지는 다분히 멸시를 동반한 개념이였다. 그렇게 된 내면에는 동시대적으로 생활양식상 차이가 현저했지만 거부감부터 앞세웠기때문이다. 둘째, 모더니즘과 맑스주의와의 대립구도가 형성되였는데 중국이나 일본의 경우 더 현저하게 나타났다. 물론 량자가 다 이질적인것이다. 량자는 발생초기부터 동양에 인입되면서까지 상반된 가치관으로서 수용되였다. 모더니즘은 자본주의사회에서 분비된 예술로서 루카치는 반리얼리즘으로 규정하였다. 셋째, 국가적, 지구적인 보수주의 내지는 민족주의와의 대립양상으로서의 모더니즘이다. 근대주의 지향으로서의 당위성이 제국주의가 추구하는것이라면 그들의 희생품이 될수밖에 없는 모든 비서방권내에서 국가내지, 민족들에게 있어서는 서구의 분비물인 모더니즘에 대한 본능적인 거부가 필연적이였다. 2. 새 시기의 현대문학 문학전통 자체는 동태적이고 개방적이며 부단히 발전하는 계통이다. 그만큼 대변혁시대, 문학도 혁신의 길에서 진통을 격기마련이다. 중국문학은 1976년 눈물의 청명절날에 장려한 서막을 열어 “상처문학”, “반성문학”, “개혁문학”, “뿌리찾기문학”, “선봉파문학” 등 파란만장한 려정을 거쳐 문학발전행정에서 가장 풍부하고 새롭고 쟁론도 많고 사회효응도 거대했던 새 시대에 들어섰다. 10년간 지속되였던 대동란이 흐지부지하게 결속되고 미구에 쑥대밭이 되였던 중국문학의 화원이 복구되기 시작하여 점차 정상적인 궤도에 오르게 되였다. 그먼저 문학은 사회의 기타 령역과 마찬가지로 비틀어진것을 바로잡는 력사적사명을 완수해야 했다. 특히 “문예는 계급투쟁의 도구”라는 “사인무리”의 발명만이 아니라 유론의 유독을 가급적으로 철저히 청산하고 문예와 정치와의 합리한 관계를 규명해야 하였다. 하여 1979년 ≪상해문학≫에 발표된 론평원의 문장이 발단이 되여 마침내≪문예와 정치의 관계≫에 대한 대쟁명이 벌어졌다. 쟁론은 그 ≪강화≫이래의 유관된 관점을 어떻게 평가할것인가? 하는 첨예한 문제에 소급되였다. 1980년 7월 ≪인민일보≫에 “문예는 인민을 위해 복무하고 사회주의를 위해 복무해야 한다.”는 사론이 발표되자 그번 쟁론은 명확하게 매듭을 지었다. 그러나 이 사변(思辨)시대는 점차 각종 가치추구를 만족시키기 시작하였다. 행동의 시대에 일체 장애를 부시려고 하였는바 이런 행동은 찬반이 엇갈렸지만 창작사조들이 굴기하고 새로운 관점들이 분분하여 문학리론방면에서 몇차례 쟁 론이 벌어지였다. 1980년전후 4인무리시대 가짜, 큰 소리, 빈소리가 넘쳐나던 문학창작활동에 대립하여 누군가 “진실을 쓰자” “본질을 쓰자”는 구호를 내놓아 사실주의문제에 대한 쟁론에 불붙었다. 그러나 그번 쟁론이 치렬해질 때에 문제는 다시 새로운 력사조건하에서 사실주의를 어떻게 발전시킬것인가? 하는 두개의 관점이 대립되였는데 사실주의문학은 전방위적인 발굴과 심화를 도모할것인가? 하는 문제로 귀결되여 나중에 사회주의사실주의와 혁명적사실주의와 혁명적랑만주의를 결합하는 “량자결합”창작방법은 력사의 선택에 따를수밖에 없었다. 그후 문단에 상업주의사조가 싹트고 점차 장대해져 인문주의와 상업주의 분야가 출현되였다. 뒤따라 분분한 문학주장과 창작기법들이 나왔다. 이는 과학과 신화가 서로 얽힌 시대로서 오색찬란한 외계의 정보가 밀려들어 작가들의 남구열정을 불러일으켰다. 그리하여 20세기 80년대초까지 사실주의창작방법으로 창작하던 일부 작가들이 서방현대주의수법으로 의식의 흐름소설이라든가 “선봉파”라고 불리운 작품들을 써내기 시작하였다. 1981년 고행건의 ≪현대소설기교초탐≫이 나오자 미구하여 네작가가 련명으로 “중국은 현대파문학을 수요한다”는 구호를 제기하여 적막하던 문단상공에 네개의 “아름다운 작은 연”이라 명명된 사건이 터졌다. 그리하여 전국적범위내에서 사실주의와 현대파간의 쟁론이 끓어번지게 되였다. 그번 쟁론은 1980년중기까지 지속되다가 한패의 준현대파와 선봉파작가들의 작품이 문단에 류행되자서 슬그머니 갈앉아버리였다. 한편 상품경제의 격류에 따라 문학도 궤도를 바꾸기 시작하였는바 후현대주의의 영향이 바야흐로 심입되였다. 권위에 대한 반항, 주류문학에 대한 배반은 새 시기 문학의 단적인 표현형식이다. 순문학적쟁론은 전위와 수구, 반전통, 실험군체와 리익군체의 모순과 충돌이였다. 80년대 후기 문학쟁론의 초점은 거의 모두 리론성문제 즉 문학평론방법, 문학의 주체성문제, 소설창작에서의 예술창신문제, 문학의 뿌리찾기문제 등 몇개 방면에서의 쟁론이였다. 3. 문학의 현황 새 시기이래 문예창작은 이미 충분히 개방적이고 다원적으로 발전하였기에 어떻게 창신하고 다원화발전을 도모할것인가는 문제로 되지 않는다. 그러나 심사숙고 할 문제는 문예창작에 대한 인식과 문예와 현실의 관계를 처리함에서 엄중한 오구가 나타난 사실이다. 우선 현실도피의 창작관념을 가지고 있기에 사회책임과 작가적사명을 외면하였고 문학은 자아표현과 자아가치실현의 수단으로 전락되였다. 그리하여 현실생활에 존재하지도 않는 서방의 후현대주의사조와 전위문화사상, 관념과 리론자원을 빌어다가 기계적으로 해석하기에 열중하였다. 그리고 인위적인 황당과 변형을 시도하며 현실생활중의 어떤 표상과 신변잡사를 묘사하거나 개인의 욕망을 서사화하면서 자아감각에 도취되고 자족하거나 새 부자들의 심미정취에 빠져버렸다. 한마디로 작가들은 창작과 현실관계에서 “집체적도피”를 선택하였다. 그들은 현실생활에서 출발하여 창작하는것이 아니라 이미 기성된 사상관념과 추상적리론, 개념에 매달려 창작한다. 마침내 문학은 시대와 생활의 최하층, 고난과 진실, 보편적인 심령을 떠나버렸다. 문학창작의 선도자역할을 해야 할 평론계도 흔히 오도하고있다. 당대중국문학창작을 총체적으로 고찰한다면 잡다한 의론들이 많은데 이른바 “변연론”, “사망론” 외에도 근래에 나도는 “쓰레기설”, “고도설(高度说)”, “가치설” 등이다. 이 모든 문학현상은 문학의 랭각과 지위의 하락, 딱한 처경을 자초하였다. 물론 다매체, 인터넷의 영향도 문제지만 가장 곤혹스러운것은 문학자체와 현실생활이 엄중하게 탈절되였다는 문단현실이다. 벨린쓰끼는 일찍 “어느 한 시인도 자신과 자신에 의하여 위대해질수 없다. 그가 자기의 고통, 자기의 행복에 의거하지 않는다. 어떠한 위대한 시인이 위대해진것은 바로 그의 고통과 행복이 사회와 력사의 토양에 깊이 뿌리박았기때문이다.”고 단언하였지만 그의 명석한 론단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이 없다. 1980년 이래 “신계몽”주의의 추동하에 사실주의는 점차 소외당하고 망각되여버렸다. 리론계와 평론계는 최초의 문예인식론으로부터 반영론에 이르고 후에는 문학주체론, 심미의식형태론, 언어형식주체론에 이르고 다시 당대문학의 심미문화론, 감관소비론과 욕망만족론 등에 이르렀다. 이 모든 경향들 역시 문학의 저조기와 랭각시대을 불러온 원인중의 하나이다. 드디어 개인지상주의를 고양하는 “인간의 문학”과 언어유희식 기교의 산물인 “순문학”창작이 류행되였다. 1990년대 시장경제의 파도가 중국을 휘말아올리게 되자 자기를 읊는 “순문학”은 창작방향을 잃게 되였고 “인간문학”은 “신체욕망”과 “감관자극”의 상업성을 우선으로 하면서 소비성대중문학으로 변질 되였다. 일부 지성적작가들이 이런 문학현상들에 중시를 돌리면서 신사실주의, 신사실(新写实)소설을 쓰기도 했다. 하지만 창작규칙과 관념문제로 인하여 사실적묘사와 진실성과 비판력도를 약화시켰기에 역시 광대한 독자대중의 심목속에 자리잡지 못하고 결국 잠간 흔들어 보다가 간 “사실주의충격파”로 되였다. 신사실주의는 “가치중립”의 창작자세를 가졌기에 “진실한 생활”을 묘사하면서 더구나 자연주의에 기울어지게 되였다. 이른바 “원생태”의 창작은 다변하는 현실생활을 파악할수 없었으므로 자진하여 포기하고 현실의 변화와 더불어 신자유주의와 소비향락주의 론리를 맹종하게 하였다. 그리하여 전통문화가치 추구의 립장과 주류의식형태와 인민성의 창작원칙을 내던지게 되였다. 이는 현실의 본질문제를 파악할 작가들의 능력부재와 진실의 붓을 잡을 용기의 결핍에서 비롯된것이다. 민중의 생활속에는 문학의 원료가 무진장하게 매장되여 있지만 그것을 발굴하려는 창작의욕도 희석되고 말았다. 도스또옙쓰끼는 “중요한것은 예술이 시종 현실에 고도로 충실하는것이며 …예술이 근근이 현실에 영원히 충실해야 할뿐만아니라 당대현실에 충실하지 않을수도 없다.”라고 하였는데 문학의 사인화를 주장하는 작가들로 말하면 경세지언이다. 4. 문학의 전망 문학은 어떻게 발전하며 어디로 나갈것인가? 많은 리론가들이 문학발전의 미래에 대한 예측과 타산을 천명했다. 력대의 리론가들의 예측과 타산은 각이하다. 헤겔은 비관적태도를 가지고 문예의 사멸을 운운하면서 장차 철학으로 대체될것이라고 선언했다. 문학은 오랜 전통격식에서 벗어나려고 새로운 양식을 시도하고 실천한지 오래다. 하지만 디지털, 사이버문화의 등장으로 하여 문학예술효용의 약화는 더더욱 위기감을 고조시키고있다. 첫째, 문화가운데서의 지위와 담당하고있는 각색에서 볼 때 문학의 단일한 심미본질은 진작 더 다양하고 복잡한 문화특성에 자리를 내주었다. 80년대 지식계에서 대담하게 “정치와의 리혼”을 극력 주장하면서 심미본질을 추켜들고 문학이 초연이 자욱하던 정치투쟁의 전초로부터 떠나 시의가 넘치는 심미성전에 들어서게 되였다. 둘째, 이미 문화문제로 된 이상 문학은 이제 더는 고상하고 우아한 지고무상의 문화가 아니다. 존재방식상 문학은 단순한 문자와 종이로 된 책으로부터 문자, 소리, 영상 등 종합매체형태로 변하였다. 독자와의 관계를 보아도 문자가 더는 고급정신량식이 아니라 대중의 일상 소비물품의 일부분일뿐이다. 맑스는 “사람들은 스스로 자기의 력사를 창조하지만 그것을 자기의 뜻대로 창조하는것은 아니다. 그들은 자기의 력사를 자기 자신이 선택한 환경속에서 창조하는것이 아니라 자기앞에 놓여있는 이미 이루어진, 과거에서 물려받은 환경속에서 창조한다.”고 제시하고있다. 물론 사회가 변하는만큼 문학도 변하지 않을수 없다. 인간의 삶이, 그 현실속에 인간들의 모습도 바뀌는데 그 삶이 현장과 인간상을 조명하는 문학예술이 바뀌지 않을수 없다. 문학에서 맛이란 바로 사람냄새이고 멋이란 바로 진실한 삶의 양상과 양태이다. 인간관계가 소원해지고 전통뉴대가 파괴되여가는 마당에서 문학의 주제의식은 의연히 상실당한 인간성으 회복에 집착해야 한다면 현대인들을 상대로 한 인간적사랑을 주제로 한 문학만이 문학을 구할수 있을것이다. 하늘이 맑고 바람이 따스하고 강과 바다가 우리의 심령과 융합되게 할수 있으며 인간간의 화해, 자연과 인류의 조화를 이룰수 있다. “생명은 짧고 예술은 길다.” 전통문학에서 무엇을 계승하고 혁신해야 하는가? 1) 내용의 계승성과 혁신 문학은 오늘에 이르기까지 기나긴 발전행로를 걸어왔다. 지구는 인류를 위해 존재한것은 아니지만 문학은 문명한 인류를 위하여 출현되였다. 모든 예술이 일종의 심리활동이듯이 문학의 모체도 인류의 심령이다. 문학예술의 유산에 대한 비판적계승은 문학자체의 생리이다. 19세기 문학이 20세기에 들어서면서 내용, 형식 등 많은 방면에서 도전에 직면하였다. 특히 리얼리즘으로부터 반리성주의(다다이즘), 립체파(큐비즘), 표현주의, 초현실주의, 황당파 등 파격적이고 반역적인 각양각색의 예술운동의 도전을 받으면서 20세기의 새 언덕에 올라섰다. 정보시대, 다매체시대를 맞아 문학은 전성기를 넘어 소외당하는 의식형태로 되여간다. 인간의 정신가원(精神家园)인 문학의 발전공간을 확보하고 변화하는 21세기에 문화시장을 개척하려면 문학계가 획기적인 진로를 개척해야 할것이다. 소위 현대성이란 실질적으로 전시기의 현대성에 상대하여 하는 말이다. 무릇 현대성의 핵심은 인간의 주체성이며 인성을 신장하는것은 현대성리론의 공 통한 특징이다. 그러나 한 작가가 민족특색이 있는 훌륭한 작품을 창조해내려면 민족문화정신을 무시할수 없으며 오직 민족문화정신의 가치선택을 존중해야만 예술생명을 얻을수 있다. 민족적일수록 더욱 보편적인 세계적가치를 창조할수 있다는것은 실증할 필요가 없다. 2) 형식의 계승과 혁신 문학의 계승성은 예술형식에서 더욱 심각하게 표현되고있다. 문학형식도 진화하는것이다. 소중한 문학유산을 발전적으로 계승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형식의 모색도 필요하다. 이는 형식의 파괴가 아닌 급변하는 시대정서를 수용하기 위한 불가피하고 지혜로운 창조적인 모색인것이다. 문학이 극복해야 할 가 장 중요한 문제는 민족문학특성의 확보이고 그것을 고양하는것이다. 오늘날 전파정보매체와 첨단기술의 비약적인 발달로 인하여 전통적인 민족문학은 형식상에서부터 해체되는 도전을 받고있는 실정이다. 하지만 전통문학의 형식이 바뀐다고 해서 전통문학의 형식이 담고있던 내용과 민족정서까지 바뀌는것은 아니다. 민족문학의 현재적생명력은 어디까지나 보편성과 대중성을 전제로 하고있다. 그러므로 형식의 전환을 경계할 필요없으며 문학의 내용을 중점으로 전통적문학을 현재적으로 계승할 방법을 찾아야 할것이다. 어느 나라에서든지 문학은 민족정신을 불러일으키고 민족정신을 떨치게 하는 작용을 한다. 하기에 문학이 근근이 오락성과 취미성에 머물러서는 희망이 없다. 문학은 마땅히 진,선,미에로 인도해야 하며 인간의 력량을 제조하려는 취지를 가지고 정면적인 정신가치에 대한 긍정과 신장을 도모해야 함은 자명하다. 매 한차례 문학의 초월성은 문학발전사에서 획기적인 전환점이기도 하였다. 주체성을 신장하는 문예학사상은 그 시기 문학가들에 의하여 선명한 표술로 되였다. 그것은 문학의 생존전략이다. 새 시대의 문학은 언제나 시대의 양상과 색채와 소리와 더불어 생활의 주선률이 될 때에라야만이 생존공간을 개척하고 확보해 나갈수 있다. 문학의 사인화, 개인화, 은밀화의 창작은 공공성에로 통하는 대문을 닫고 막다른 골목에 들어서는 딱한 결과를 낳을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당전 문학리론은 현대성위기에 직면했다고 하면서 작가들은 더는 사회량심이라든가 인류령혼의 공정사로 자처할 필요가 없으며 자신을 보편적주체로 할 필요가 없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사회를 개조하려는 유토피아 식의 구상과 충동을 버려야 하며 대변인식의 창작태도를 벌리고 사회력사적객관수요와 전인류 및 전체 인민의 주관수요를 적게 표현하거나 아예 표현하지 말아야 한다고 력설하고있다. 20세기 90년대에는 혁명과 결별하고 계몽을 포기하며 주류를 담담하게 대 하고 본연에로 회귀해야 한다는것이 류행어로 되었다. 그러나 사인적창작태도가 공동한 인식과 공공성을 무시했으되 인간의 기본생활질서와 기본적가치표준 마저 등돌릴수 없었다. 실천이 증명하다싶이 현대성서사론술은 주어진 인문환 경에서는 자가당착에 빠지고말았던것이다. 어떻게 인식하고 주장하든간에 목욕물을 버릴 때 아이도 함께 내던지듯이 객관적인 자기존재의 환경마저 무시할수는 없는 노릇이다. 사인화창작의 합리 성을 량자대립의 기초우에 세우려해서는 바람직하지 않다. 문학은 사인령역과 공공령역의 사이에 중간지대에 놓여있으며 대표형공공령역이 시민공공령역에로 과도하는 중간환절속에 처할수밖에 없는 숙명을 벗어버릴수 없다. 말하자면 문학은 사인생활에 뿌리내려야 하거니와 공공령역에서 꽃피고 열매맺아야 한다는것이다. 소위 자아표현이란 일종 환각같은 동경으로서 진정 표현되는것은 하나의 의식형태화된 “공공인(公公人)”에 불과하다. 자아본신은 이미 의식형태화된 사회구성원으로서 문학창작에 진공상태란 없으며 그만큼 진실한 자아란 거울속에 꽃이나 물속에 달과 같아서 볼수는 있어도 눈썹사이에 잡아둘수 없는 환영에 지나지 않는다. 문학은 인간의 생존전략이지만 때가 지나면 한물가는 류행복이 아니다. 작가의 본질은 자아표현이 아니라 자아초월이다. 자아실현은 목적이 아니라 수단이고 자아초월의 수단이여야 한다. 동일성도 역시 현대성의 표징의 하나라고 할 때 적어도 동일성문제에서 현대성은 멋대로 초월할수 없기때문이다. 새 시대의 문학은 어디까지나 시대의 양상과 색채와 소리와 함께 생활의 주선률이 될 때에라야 생존공간이 확보되고 미래를 개척할수 있다.  
42    제2절 비교문학론 댓글:  조회:3794  추천:21  2007-09-18
                                             제2절 비교문학리론 1. 비교문학의 개념 비교문학은 19세기말, 20세기초에 흥기한 문학연구의 한갈래로서 두가지 종류 이상의 민족문학지간의 호상작용과 과정, 문학과 다른 예술형식, 나아가서 의식형태들 사이의 호상관계를 력사적으로 비교연구하는 학과이다. 비교문학은 국제간의 문학적교류사 즉 한 나라의 문학이 언어의 장벽을 넘어서 외국문학에 미쳤거나 받았을 영향의 상관관계를 밝혀 상호의 동질성과 이질성을 규명해내 는 학문으로서 문학사의 한 분야이다 프랑스의 비교문학연구가인 귀아르(Marius Francois Guyard)는《비교문학》서문에 자신의 비교문학관을 세가지 명제로 나누어 기술하고있다. “비교문학은 단순히 문학의 비교가 아니고 문학사의 한 분야이며 일반문학이 아니다.” 그의 이런 정의는 국제간에 이루어진 문학적영향관계를 전제로 한 사실존중과 인과론을 중시한것이다. 비교문학은 자체의 민족문학을 연구하지 않으며 전 세계의 각 민족문학에 공동하게 존재하는 가장 보편적이고 근본적인 규률도 탐구하지 않는다. 비교문학은 하나의 학과이지만 일반 문학연구상에서의 비교의 방법과는 다르다. 비교문학은 세계적시각과 흉금으로 부동한 국가, 부동한 문명권내에서 두가지 이상의 민족문학지간의 상호작용의 과정, 문학과 다른 예술형식, 나아가서 의식형태들사이의 상호관계를 력사적으로 비교연구하는 학과이다. 비교라는 개념은 의미의 폭이 넓지만 비교문학론에서 사용될 때에는 “영향관계”를 검토하는 문학연구의 한가지 방법론이다. 비교문학에서는 주요하게 세계문학현상에서 동원성(同源性), 류동성, 변이성, 이질성과 상호보충성을 연구하는 실증적영향연구, 문학의 변이성연구, 평행연구와 총체적문학연구를 기본방법론으로 삼는다. 2. 비교문학의 연혁 서구에서 비교문학연구의 계기는 랑만주의의 등장이였다. 랑만주의와 더불어 각국 문학의 독창성을 인정하고 빈번한 교류가 시작되였던것이다. 19세기 낭만주의시대 이후 유럽문학의 상호관련이 더욱 복잡화되고 긴밀화되면서 단일한 국민문학적연구체제로는 문학의 여러가지 현상을 전체적으로 밝힐수 없게 되자 문학의 상호련관성을 찾기 위해 프랑스를 중심으로 시작되였다. 그러나 비교문학에 대한 구체적목표와 방법론의 정립은 19세기중엽에 와서야 이루어졌다. 비교문학이라는 용어는 1827년 프랑스 소르보대학의 교수 월만이 자기의 강의제목을《비교문학연구≫라고 칭한데서 기인된것이다. 20세기에 들어서서 국제간 문화교류가 활발해지면서 리론적으로 발전하고 령역을 확장하여 현재 서구에서 주목받는 문학연구분야로서 부상되였다. 비교문학은 국제지간의 문학적관계의 력사로서 국가적인 측면과 세계적측면에서 해석되고있다. 국가적측면에서의 비교문학은 서로 다른 문학권의 단순한 비교가 아니라 한 나라의 문학이 다른 나라의 문학에 어떻게 영향주었는가? 그 변형의 구체적관계는 어떠한가를 탐구하고 어떤 제시를 하는것이다. 3. 비교문학의 연구령역 비교문학은 일반적으로 문학실체의 비교가 아니라 부동한 언어, 부동한 국가 문학령역에서 창작 및 작품에 대한 연구성과비교이다. 비교의 초점은 반드시 비교가능성의 문제에 맞추어져야 한다. 그래야만 연구에 실효성이 보장될수 있다. 비교문학은 부동한 시점에 따라 두가지 연구류형으로 나뉘여졌다. 첫째는 영향연구이고 둘째는 평행연구이다. 영향연구는 각국 문학의 연원과 전파와 그 매개성을 거슬러 올라가서 따져본다. 이 방법은 프랑스, 독일 등 모든 해당 나라에 직접적영향이 없거나 련대성이 없는 그러한 문학비교이다. 이 연구방법으로 작품의 문체와 구성, 언어, 정조(情调) 및 문학관계에 대한 분석을 거쳐 동일성을 찾으면서 부동한 일면에 대한 연구도 포괄한다. 비교문학의 연구방법은 각 나라의 작가, 작품의 상호영향관계를 비교분석하는것인데 구체적으로 문학에 있어 어떤 영향들이 받아들여졌거나 거부되였으며 그 영향들이 얼마만큼 성공을 거두었는지를 밝히는것이다. 이를 또 각 분야별로 나누어 고찰해 본다. 첫째로는 각 장르의 형식이 어떻게 발전하고 전파되였는지를 연구하는 문학형식연구이고 둘째로는 문학의 소재가 되는 인간형과 전통의 문제를 다루는 제재 연구이며 셋째로는 작가의 사상과 철학, 또는 한 시대, 한 지역의 사조 등이 어떻게 전파되고 영향주었는가를 살펴보는 사상 및 감정의 영향연구이고 넷째로는 한 나라 국민문학에 미치는 세계적인 작가의 영향관계를 비교,검토하는 작가연구 등이 있다. 이중에서 가장 중요한것은 작가연구이다. 한 작가로부터 비롯되는 여러 문제들속에 형식, 제재,사상의 연구가 집중적으로 포괄될수 있기때문이다. 1950년이후 단순히 국가간의 문학영향관계뿐만아니라 문학과 린접학문의 영향관계(예술,철학,력사,사회과학,자연과학,종교 등)에까지 관심령역을 확장했다. 문학이 단순히 자체내의 영향뿐만아니라 지식과 사고체계가 다른 여러 학문의 영향까지 받는것으로 보고 단일한 비교체계로부터 사고체계의 전반적영향관계에까지 연구분야를 넓힌것이다. 특히 문학과 기타 예술과의 관계는 1970년대, 1980년대 비교문학연구의 중심을 이루고있다. 비교문학연구에서는 직접적관계가 없는 부동한 민족문학의 주제, 제재, 문체류별, 인물형상, 풍격특점 등에 존재하는 같은 점과 차이에 대한 연구를 평행연구라고 한다. 평행연구에는 “제재력사”, “주제학”, “류형학”, “형태학”, “비교비평(비교시학)” 등 내용이 포괄된다. “주제학”에서는 동일한 주제사상ㅡ“사랑과 의무의 충돌”, “인생의 짧음과 자연의 영구함의 모순” 등의 부동한 민족문학에서의 표현 등을 대비연구한다. “류형학”은 각 민족문학의 동일한 류형의 작가와 작품, 인물형상과 이야기정절 등을 대비연구한다, “형태학”은 동일한 문체가 부동한 민족문학에서의 부동한 발전과정을 연구한다. “비교비평”에서는 부동한 민족문학의 부동한 비평개념과 비평원칙 및 기타 발전력사, 각 민족시가창작의 공성과 특색을 연구한다. 평행연구는 사람들로 하여금 더 넓은 시야로 문학의 보편적인 규률을 총화해내고 더 풍부한 문학현상을 개괄하는 동시에 자기 민족문학의 독창성을 인식하도록 도와준다 4. 각 민족문학의 호상영향 학실천이 보여주다싶이 한개 민족문학의 번영은 외래문화를 잘 흡수하는가 자기를 봉쇄하는가와 밀접한 련관이 있다. 당시 아랍문화, 인도문화, 서역 각국의 문화는 당조의 문화발전을 크게 추동하였는바 음악, 무용, 문학 등 방면에서 뚜렷한 성취를 거두었다. 19세기 로씨야의 비판적사실주의문학의 번영도 작가들이 외래의 영향을 접수한것과 밀접하게 관련되여있다. 각민족문학의 호상영향은 문학발전에서 객관적이고 규률성적인 문화현상이다. 이런 현상은 경제, 정치, 문화의 수요와 밀접한 관계에서 산생되였다. 각민족문학은 모두 인류의 공통한 감정 및 세계에 대한 공통한 감수와 욕망을 반영한다. 애정, 애국주의 등은 력대로 모든 민족문학의 기본주제였다. 각 민족문학은 모두 본민족문화사의 생활내용과 상응한 표현형식이 있지만 때로는 비슷한 점들이 있다. 각 민족문학은 일정한 시공간의 문학사조와 문학관념의 영향을 입어 호상적응되는 창작방법을 쓰고있다. 이를테면 진,선,미 등을 추구하는 문학관념 은 거의 공통하다. 애정, 애국주의 등은 모든 민족문학의 기본주제였다. 문학발전은 본민족문화유산을 계승하고 타민족문학의 우수한것을 섭취한 결과이다. 례하면 ≪삼국연의≫, ≪수호전≫등이 구라파각국의 언어로 번역된후 볼테르, 괴테, 쉴러, 헤겔 등 작가, 학자들의 주목을 끌었다고 한다. 반대로 20세기후 뿌쉬낀, 레르몬또브, 바이론, 쉘리, 뻬뙤피 등 반항정신, 애국주의정신으로 충만된 작품들이 로신에 의해 중국에 소개되였으며 “5. 4” 이후에는 발자끄, 졸라, 모파쌍, 프로벨 등 작가들의 비판적사실주의작품들이 중국에 전파되였다. 다음 예술형식, 표현기교상에서 호상 학습하는 본보기로 되였다는 점이다. 두보, 리백 등의 작품이 영문으로 번역되여 서방시단을 진동했다고 한다. 선진적창작방법의 교류에서 왕왕 한나라에서 선행된후 뒤미처 세계문학사조로 되였다. 례하면 1910넌대 이딸리아의 시인 마리넷티가 미래주의선언을 발표한후 프랑스, 로씨야 등 나라에서 “립체미래주의파”, “자아미래주의파”등 미래주의파들이 륙속 산생된 사실이다.  
41    제 4 장 발전론 제1절 문학의 기원 댓글:  조회:3419  추천:17  2007-09-18
                                             제1절 문학의 기원 문학예술은 언제 어떻게 발생하였을가? 인류는 어떤 환경과 심리기제하에서 문학예술을 수요하게 되였을가? 력대의 문예리론가들은 줄곧 문학의 기원문제를 명확하게 규명하려고 하였지만 그리 쉬운 일만은 아니였다. 조형예술의 출현과 책의 출현과의 사이에 수만년 력사가 흘렀다. 그림과 문자사이에도 오랜 진보과정이 수요되였다. 책에 의해 문학이 류포된것은 종이와 인쇄술이 발명된 썩후의 일이다. 1. 모방설 고대로부터 18세기에 이르기까지 유럽의 문학론에서 가장 주류를 이룬것은 문학을 일종의 모방으로 보는 견해였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모든 예술을 “모방”이라고 규정하고 이 모방은 인간의 원초적본능이며 본능의 만족은 즐거운것이라고 주장했다.“모방”이란 용어는 소크라테스의 제자였던 플라톤의《대화편》에 최초로 나타났는데 후에는 복합개념으로 사용되였다. 플라톤은 자기의 저서《공화국》제10권에서 스승의 견해를 빌어 회화, 시, 음악, 무용, 조각 등 모두 모방의 세계라고 단언했다 이 견해를 기준한다면 문학론은 진리나 정의, 덕성, 교화라는 이 론리기점을 떠나서는 론의할수 없다. 이런 모방설은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이래 서방의 예술사상을 오래동안 지배해오다가 19세기 자연주의리론에 이르러서는 형식적인면이 더욱 극단적으로 강조되였다. 데모크리스트는 “거미에게서 직포착상과 바느질을 배우고 제비에게서 집을 짓는 방법을 알았으며 백조와 황조 등 새들에게서 노래부르는것을 배웠다”고 하였다. 그후 아리스토텔레스는 한걸음 더 나아가서 문예는 인류의 모방기능과 모방해낸 작품에서 쾌감을 느끼는데서 산생되였다고 피력하면서《시의 기원에는 두가지 원인이 있는데 모두 인간의 천성에서 온것이다》라고 력설했다. 동양의 모방론은 서양의 경우처럼 자연의 모방이라는 론리를 내세우지 않고 신과 인간과 자연을 동일체로 파악했다. 예술상에서의 모방에는 두가지 함의가 있다. 첫째, 기타 예술작품을 본보기로 삼고 작품을 제작하는 대상에 대한 모방이다. 둘째, 현실적존재를 모델로 하여 같은것을 제작해내는것으로서 곧 대상에 대한 묘사이다. 첫번째 함의는 고전예술에 대한 모방에서 표현되고 두번째 함의는 예술은 현실 혹은 자연을 모방한것이라는것이다. 미학상에서 주요과제는 후자이다. 여기에 두가지 정황이 있는데 객관적대상물에 대한 표현으로서의“재현”혹은 “묘사”이다. 이렇듯 “모방론”은 가장 오랜 문예발생론이다. 2. 표현본능설 이 기원설은 허드슨이 주장한 학설이다. 문명개화기에 들어선 인간으로 말하면 자기의 사상과 감정을 다른 사람에게 이야기하고 싶어하는 강한 욕구를 가지고있기에 그 욕구가 언어에 의해 표현될 때 문학이 발생했다는것은 추측가능한 일이기도 하다. 표현기원설에서 예술의 본질은 표현, 특히는 감정표출에 있으며 예술활동은 “표현충동”에서 출발했다고 인식하고있다. 레브 똘쓰또이는 한사람이 자기가 체험했던 감정을 다른 사람에게 전달하기 위해 마음속에서 다시 그 감정을 불러일으키고 모종 외재적표지로써 표달해내는것이 곧 예술이라고 하였다. 그후 이딸리아 미학가 크로체와 영국문예리론가 꼬린우드도 “표현기원설” 리론을 더 심입,발전시켰다. 동양의 경우 표현론은 “성정론(性情论)”, “기상론(气象论)”으로 나눈다. 성정론에서는 시를 인간의 본편적성정의 표현로 보았고 ≪서경(书经)≫에서 “시란 자기 뜻을 말로 표현한것이요 노래는 가락에 맞춘 말(诗言志歌永言)”이라고 주장했고 ≪시경≫에서 “마음이 흘러가는바를 적은것이 시”라는 주장했다. 3. “로동”기원설 문예가 “로동”에 의해서 기원하였다는 리론의 가장 유력한 제창자는 로씨야의 쁠레하노브였다. 말하자면 원시인들이 로동과정에 협동적동작, 피로의 경감, 사상 감정교류를 위해 늘 일정한 박자에 따라 절주있게 소리를 냈는데 이것이 최초의 음악절주의 래원이라고 하였다. 이런 절주있는 로동가운데서 합창과 일정한 의의가 있는 언어가 결합되여 최초의 시가 산생되였다고 하였다. 우리는 맑스주의관점에서 상술한 제 인소들중에서 로동기원설이 특별히 중요한 의의가 있다고 인정하고있다. 4. 기타의 기원설 1) 유희충동설 예술을 일종의 유희로 보면서“유희충동”이 창작동기라는 학설이다. 문예의 유희기원설리론의 창시자는 칸트였으나 그것을 명확하게 계통적으로 천명한것은 쉴러와 스펜서였다. 쉴러에 이르러 예술이“유희”에서 기원되였다는 리론이 명확히 제출되였다. 그는 자기의 저작《심미교육서간》에서《사람들은 현실세계에서 생활하므로 자연력과 물질수요에 강박당하고 또 리성법칙의 온갖 약속을 받지 않을수 없기에 자유롭지 못하다. 하여 사람들은 늘 자기의 남은 정력으로 자유로운 천지를 창조하려 하는데 이것이 곧 유희다.》라고 천명였다. 2) 만물유령 기원설 인류문화의 발전에 따라 19세기말 20세기초 만물유령론 (아미니즘)이 점차 흥기하였다. 고대중국의 문학리론에서는 무술론 (巫术论)이라고 한다. 이 리론의 출현은 영국의 인류학자인 타일러의《원시문화》라는 저서에서였다. 후에 영국의 다른 인류학자 프라이저와 프랑스의 레이냐크 등 고고학자들에 의하여 발전되였는데 지금까지도 서방에서 일정한 시장을 차지하고있다.
40    제 3절 현대주의평론 댓글:  조회:3512  추천:19  2007-09-18
                                                    제3절 현대주의평론 1 력사주의비평과 사회문화비평 1) 력사주의비평이란 문학작품과 그것이 둘러싸고있는 사회적문화적맥락을 다루는 방법으로서 주로 작품의 근원을 밝히려 한다. 작품이 생산된 력사적맥락과 사회적소산으로서의 작품, 그 작품이 그 시대의 사회적, 문화적요소들에 준 충격, 그 작품에 대한 후세의 독자가 느끼는 의의 등의 상호관계를 밝힌다. 여기서 작가야말로 작품의 근원이고 출발이며 원인이기 때문에 작에 대한 전기적연구가 중요하게 대두한다. 력사주의비평에서 착수하는 첫작업은 원본(text)의 확정이다. 활자화되여있는 한 작품이 진본이냐 아니냐는 력사주의자의 특별한 관심사이다. 원본의 확정은 한 작가와 그의 작품의 특질과 의도에 대한 민감한 판단력이 필요한것이다. 그런 까닭에 원본확정작업을 특별히 원본비평이라 부르는 독자의 령역으로 인정하고있다. 고대시가의 경우 원본비평은 더없이 중대한 과제가 된다. 원본비평 이론의 권위자인 미국의 프레드슨 바우어즈는 원본비평의 목표를 “한 작가의 텍스트 본래의 순수성을 회복하는 한편, 판을 거듭함에 따라 늘 생기는 와전으로부터 그 순수성을 보존하는것”이라며 원본확정에 몰두한다. 다음 력사주의비평가는 작품의 “해석”보다는 “해설”에 일차적관심을 가진다. “해설”은 현재의 독자들을 위한 일종의 “번역”이다. 작품을 “번역” 하다보니 옛말의 문법자체가 하나의 독립된 학문으로 굳어진다. 가치가 있다고 인정되는 작품에 대한 주석, 해설, 번역은 확실히 비평적로작이다. 문학이라는 개념은 어디까지나 가치의식을 내포하고 있는것이다. 그들에게 있어서 모든 문학작품의 제일차적참고서는 사전과 문법서이였다. 력사주의비평은 자체에 한계를 가지고있는바 연구결과보다 연구과정에 더 관심을 기울이는것이였다. 문학작품의 원천에 대한 기본조사가 연구수단임과 동시에 연구목적이 되는 경향이 있고 기원과 가치평가를 혼동하는 발생학적오유(发生学的误谬)를 범한다. 그만큼 작품의 형식, 구조 등의 미적의미의 규정에 대해 간과해버리며 작품의 과거성에 집중하다보니 현재성에 대한 감상이 소홀해지기 쉽다. 력사주의비평은 1920년대에는 미국에서 본격적으로 문학연구를 주도했지만 30년대에는 형식주의의 공격으로 수세에 처했다가 40년대에 퇴조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다가 1950년대에 다시 부흥하여 현재에 이르렀다.력사주의비평이후 신역사주의도 출현되였다.신역사주의(New Historicism)라는 용어를 처음으로 사용한 리론가는 미국의 문화비평가 그린블랫(S. Gre enblatt)이다. 1982년에 문학잡지《쟝르》의 특집호에서 처음 사용한후 력사에 기초한 새로운 형태의 비평을 지칭하는 용어로 되였다. 푸코의 영향하에 출발한 신역사주의는 다음의 몇가지 점에서 전통적력사학자들과 구분된다. 전통적인 력사학자들은 과거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또 그 사건을 통해 우리가 역력사를 어떤것으로 생각하는가에 관심을 기울인데 반해 신력사주의자들은 그 사건이 어떻게 해석되여 왔는지를 문제삼고 그 해석을 통해 해석자들에 관하여 어떤것을 알수 있는가에 관심을 쏟는다. 또 전통적력사학자들은 력사가 일련의 인과관계에 의해 일어난 사건들의 련속이라고 생각하는데 반해, 신력사주의자들은 력사적사실에 대하여 명확하게 분석할 수는 없다고 믿었다. 이런 리유로 신력사주의자들은 사건을 련속적으로 서술하는 대신 오직 해석하는 일만이 존재할뿐이라고 말한다. 그 리유는 사실상 력사적사건을 객관적으로 분석하는 일이 불가능하다고 믿기때문이였다. 그들의 주장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위에서 언급한것처럼 력사는 사실의 문제가 아니라 해석의 문제이다. 그렇기때문에 모든 력사적설명은 일종의 이야기에 불과하며 이야기를 분석하는 문학비평의 방법으로만 분석이 가능하다. 둘째, 력사는 인과관계에 의해 직선적으로 발전하지도 않았을뿐더러 진보적이지도 않다. 그렇기때문에 원인과 결과를 분석하거나 인류력사의 발전을 론의할 필요가 없다. 셋째, 권력은 어느 한 사람이나 한 집단에 의해 규정되는것이 아니라 그 사회의 물질적조건이나 그 사회의 문화가 생산한 담론들을 통해 이루어지는 사상의 변화속에서 순환된다. 넷째, 어떤 시대의 보편적이고 통일적인 정신은 존재하지 않는다. 단지 담론들 사이에서 력동적이고 비고정적인 상호작용이 있을뿐이다. 다섯째, 개인의 정체성은 문화에 의해 형성되며 문화는 개인의 정체성에 의해 영향을 받는다. 그러므로 ‘정상/비정상’과 같은 범주는 개념정의의 문제에 불과하다. 여섯째, 모든 력사적분석은 불가피하게 주관적이다. 그래서 력사학자들은 력사를 해석하기 위하여 그들 자신이 취한 방법을 드러내야 한다. 이런주장을 근거로 신력사주의자들은 전통적력사주의자들처럼 문학작품의 흥미로운 력사적배경을 제시하는것으로 만족하지 않았다. 그들은 문학과 력사를 분리하여 문학을 그 자체가 완결적이고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어떤것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그들은 문학텍스트를 담론들의 상호작용의 일부분이자 사회적의미망(意味网)을 구성하는 하나의 끈이라고 생각했던것이다. 한편 문학텍스트만큼이나 그것이 등장하게 된 력사적상황도 똑같이 중요시하였다. 2) 사회문화비평: 력사주의비평이 문학을 바라보는 손쉬운 방법으로 널리 선호될무렵, 사회문화비평방법이 등장하였다. 사회,문화비평은 사회학적각도에서 문학비평을 진행하는것으로서 일명 사회학적방법(반영론, 모방론)이라고도 한다. 사회, 문화비평은 사회학자, 문예학이 결합된 산아로서 사회학과 미학, 문예학을 겸비한 비평방법이다. 이 비평방법을 가장 일찍 도입한 사람은 이딸리아의 철학가 비코였고 그후 프랑스의 녀류작가 스탈부인이 계속 연구하였다. 이렇듯 사회학적비평은 력사가 유구하지만 일종의 비평류파로 형성된것은 18세기 이후였다. 프랑스의 비평가 테느가 ≪영국문학≫, ≪예술철학≫ 등에서 문학예술의 3요소결정론을 내놓았다. 즉 문학예술은 종족(선천적생리유전인소), 환경, 시대, 이 세가지 요소로부터 결정된다는 관점은 사회력사평론방법에 리론기틀을 잡아주었다. 테느는 “주의로부터 출발하지 않고 남들더러 접수하라고 할 대신 다만 약간의 법칙들을 증명할뿐이다.”라고 썼다(≪예술철학≫ 한문판 제10페지) 이 비평방법은 문학을 사회적소산으로 보고 사회문화적요인의 복잡한 상호관계의 반영이나 결과로 보면서 문학과 사회제도, 작자의 사회적지위, 소재로서 사회의 모습, 문학의 전달과 공급의 문제를 취급한다. 문학은 그것이 생성된 환경, 문화와 분리되면 충분히 리해될수 없으므로 사회상이나 사상도 작품의 형태나 기법처럼 중요하다고 인정한다. 이 비평방법의 특징은 문학작품은 그것을 생산한 환경, 문화, 문명과 분리할수 없고 작품속에 구현된 사상은 형식과 기교못지 않게 중요하며 생명력있는 작품은 당시의 문화나 개개의 독자와의 관계에서 매우 도덕적이고 이데올로기의 표현이기에 비평은 작품에 대한 심미적관조 이상의것이 되여야 하며 비평가는 과거나 현재의 문학작품에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고 주장한것이다. 력사주의비평이 원천을 강조한다면 사회문화비평은 문학의 개별적인 전체성을 강조한다. 즉 텍스트, 언어조건, 전달방식, 전기, 쟝르, 관습, 전통 등에 관심을 가지지 않고 작품과 삶의 현실과의 상호관계에 주목한다. 력사비평이 실증적인데 반해 사회문화비평은 리념적이며 문학과 사회의 소통을 중시하였다. 이 비평방법에는 사회학적측면과 력사적측면이 있다. 작품에 대한 테느의 력사적고찰과 비평방법에는 심각한 일면이 있다. 그리하여 사회문화비평의 대표자로 되였다. 이 방법의 취지는 작가와 환경, 작품과 환경간의 호상관계를 밝혀내고 아울러 문학의 사회적지위를 확정하는데 있다. 첫째, 문학작품을 사회생활의 복잡하게 얽힌 관계중에서 총체적으로 고찰했다. 사회비평방법은 작품을 한갓 형식적표현으로만 간주하는것도 반대하거니와 문학창작을 작가의 자아표현의 결과로만 간주하는것도 반대하였다. 둘째, 실증적인 분석방법을 중시했다. 사회현상으로서의 문학자체의 내부결구를 분석하고 천명하며 문학현상의 내부결구와 전반사회결구의 관계를 밝였다. 사회문화비평의 의의는 현실과 력사를 합리적으로 리해하기 위한 방법으로 인간의 삶을 바르게 질서화하고 편견에 맞서싸우려는 인간다운 인식을 확인하는 작업이라는데 있으며 시대의 폭력과 사회의 타락에 저항하며 민중의 건전한 생활과 력사의 옳바른 진행을 위한 참다운 창작과 비평을 인도한데 있다. 반면에 사회력사배경을 고찰함에서 문학을 제약하는 경제적층차에까지 심입되지 못했으며 외재세계의 문학에서의 투영에만 중시를 돌리면서 사회에 대한 문학의 반작용을 홀시하였다. 작품의 배경, 소재나 주제를 사회와 문화를 통해서 고찰으로써 작품의 미학적질서나 창조솜씨를 충분히 설명하기 어려웠다. 문화비평리론은 많은 부분에서 신력사주의와 리론적전제를 공유한다. 다만 문화비평리론은 보다 정치적이고 마치 맑스주의자들처럼 억압받는 집단을 지원하며 대중문화에 관심을 가진다는 점에서 구별이가 있다. 2.형식주의비평과 신비평리론 1) 형식주의비평 1920년대, 사회,문화적비평방법이 동시에 범하고있는 약점을 극복하고 등장한것이 형식주의비평이다. 형식주의비평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이후 가장 오래된 정통적비평방법이다. “문학은 작가의 인격과 환경의 반영이다.”, “작가의 의도와 텍스트는 일치한다.”는 력사적방법에 대한 반명제(反命题)로서 문학성을 철저하게 그 언어조직과 일체화시켜 분석하고 기술한다. 형식주의란 용어는 로씨아의 내용주의자들이 문학의 주제대신 음성이나 단어의 형식상의 방식(패턴)을 중요시하는것을 비판한 뜻에서 유래되였는데 문학을 언어적형식, 언어적구조로 보며 작품에 내재한 문학의 존재성, 독자적자률성 등을 객관적으로 밝히려는 비평방법이다. 이 비평에서는 문학작품은 자체의 법칙과 질서체계를 가지며 그 자체가 완정하므로 비평가는 작품자체로 접근하여 작품의 독자성,우위성과 “작품자체”라는 명제를 강조하고 제시한다. 이를테면 작품을 구성하고있는 언어의 상호관계, 문장의 양상, 패턴, 류사한 낱말과 어구, 주어부와 술어부의 호응관계, 말투, 말들의 선택, 문맥의 련결관계 등 내적련관성을 주로 연구한다. 형식주의비평의 성과를 론한다면 작품 자체의 형식미를 밝혀내려하기에 서정시를 다루는데 성공적이고 문학의 외적조건에 의한 평가와 문학을 종속화하려는 경향에 반하여 문학의 독자적자률성을 주장한것에 적극성이 있다고 해야 할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체에 한계성을 가지고있는바 특별히 선별된 작가와 작품만을 다루었고 서사적쟝르의 분석과 비평에서는 실패하였다는것, 작품의 어느 언어, 이미지, 서술방법 등 국부성에 치중한것, 문학사를 무시한것, 객관적오유와 소비적오유, 본체론적오유를 범한것 등 제약성을 보였다. 2) 신비평리론 신비평리론은 20세기 30년대 주요하게 미국남부에서 형성되여 후에 서방 각국에 큰 영향을 끼친 문학비평경향이다. 신비평이란 명칭은 크로우드 램슨이 1941년에 출판한 자기의 평론집에 단 제목에서 유래된것이였다. 신비평은 “결코 통일된 단일한 리론이 아니라 상호련관되고있으면서도 전적으로 일관성을 형성하지 못한 여러 리론들의 복합체이다.” 영미신비평의 각 류파들의 리론체계가 각이하고 강조하는 중심이 다름에도 연구대상은 작품의 시대배경이나 작가의 생애나 심리 혹은 독자의 정감반응이 아니라 문학작품자체라고 보는데서는 관점이 일치했다. 시는 “주요하게 시이지 다른 어떤 물건으로 보지 않는다.”② 라고 한 엘리어트의 이 한마디 말에서 벌써 신비평의 리론주장이 분명하게 표명되고있다. 신평론의 특점은 주요하게 두가지다. 하나는 본체론을 견지하며 작품을 평론의 출발점과 종지로 삼은것이다. 신비평은 작가를 중심으로 외부적연구를 하는 사회력사비평을 버리고 작품을 중심으로 한 내부연구에로 전향했다. 신비평의 리론가 W.K.윔섯은 1940년대 후반기, 그의 동료 M.C.비어즐리와 공동명의로 《의도적오유(Intentional Fallacy)》와《영향적오유(Affective Fallacy)》라는 두편의 론문을 발표했는데 “의도적오유”와 “감각의 오유”라는 명제들이 제기되였다. 작가의 창작의도로부터 출발하여 작품의 의미를 해석하는것은 착오적이라고 하였는데 이것이 유명한 “의도적오유”이다. 그는 작품의 의미와 독자의 정감효과를 혼동하는것은 착오라고 하였다. 환언한다면 작가의 창작의도와 작품에서 실현된 예술세계가 일치하지 않으므로 반드시 구별해 보아야 한다고 주장하였던것이다. 그러면서 문학평론의 대상은 마땅히 작품자체여야 하며 작자의 창작의도 같은것은 고려할 필요가 없다고 역설하였다. 이것이 “감각의 오유”라는 명제이다. 그리고 만약 작품이 봉페형이 된다면 일체 력사적관점은 여기서 모두 소실된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작자의 의도가 그가 완성한 작품을 훨씬 초과할수 있다. 그런데 그의 실천이 목표보다 퍽 못하거나 또는 이 목표와 거리가 너무 멀수도 있다.”라고 역설하였다. 신비평가 부룩스는 “시에는 모종 초시대적인것이 있기에 보편적인 관심을 가지게 된다.”고 하였으며 “감각오유” 리론에서는 독자가 작품을 읽을 때 감수상에서 오유가 생길수 있는바 감수한것이 작품에서 표현된 의의와 똑 같을수 없으므로 독자의 감수가 어떠한가는 관계할것이 없다고 주장했다. 이렇게 신비평은 문학활동에서 작가ㅡ독자ㅡ작품 이 세개 환절에서 문본을 독립적이고 자재적인 실체로 간주하고 작품의 의의는 밖에 있는것이 아니라 작품속에 있다고 역설하였다. 다음 글자마다 따져가며 자세히 읽고 상세히 분석하고 해석할것을 주장했다. 신비평리론에는 진보적인것과 이처럼 합리적인것들도 많은 반면 맑스주의관점에서 고찰할 때 일정한 제약성도 보이고있다. 3.구조주의비평과 심리주의비평 1) 구조주의비평 구조란 개념의 어원은 라틴어로서 통일체내의 각 부분, 각 요소, 각 단원지간의 관계 혹은 본질적련계를 의미하고있다. 이 원리에 근거하여 문학작품을 하나의 총체적구조로 보고 그 구조를 이루고있는 요소들을 텍스트안에서 찾아 문학의 독자적 ,자족적인 존재성을 확실하게 규명하는 비평방법이다. 문학에 대한 구조주의적인 접근법은 일반독자들의 평소의 신념을 헝클어놓았다. 통념상 문학작품은 작가의 창작의 산물이며 작가의 근본적인 자아표현이다. 또한 텍스트는 독자가 그속에 들어가서 작가의 사상 혹은 감정과 정신적 또는 인간적으로 교류하는 대화장이다. 그러나 구조주의자들은 작가는 “죽었으며” 문학적언술에는 진실이라는 기능이 없다고까지 주장한다. 롤랑 바르트는 구조주의적립장을 천명하면서 작가들이란 이미 쓰인 문장들을 뒤섞어 재결합하거나 재배치하는 능력밖에 없는 사람들이라고까지 역설하였다. 구조주의는 근원적으로 스위스의 언어학자 드 소쉬르의 언어학적배경에서 출발한다. 구조주의는 모방론, 표현론, 효용론과 대립하며 작품의 외재성을 인정하지 않으며 반현상학적립장에 서있는것이 특징이다. 이 리론에서는 언어학연구의 주된 목적은 개인의 말이 아니라 인간의 특정된 표현행위의 근간을 이루는 체계를 연구하는것이라고 주장하고있다. 소쉬르는 언어가 그 자체로 어떤 의미를 가지는것이 아니라 다른것과의 구별을 통해 의미를 획득하는것으로 보았다. 즉 신호등의 빨간색은 “초록색이 아님”이고 “정지”라는 의미를 가진다. 모든 기호는 이렇듯 기의(정지)와 기표(빨간)의 관계로 이루어진다고 한다. 이렇듯 구조주의가 기존의 방법들과 근본적으로 다른것은 문학에 대한 독자들의 전통적신념을 철저히 거부하면서 시작한다는것이다. 신결구주의평론은 “서술학”이라 하며 프랑스의 “신비평”이라고도 한다. 그것은 영미의 신비평에 뒤이어 20세기 60년대에 흥기한 일종 더 새로운 본체론식평론으로서 광의적의미에서의 형식주의평론에 속한다. 결구주의평론의 정초자는 소쉬르이지만 집대성한 사람은 프랑스의 평론가 롤랑 바르트이다. ≪서사작품결구분석도론≫은 그의 대표작으로서 구조주의비평의 선언서로 되었다. 구조주의는 주요하게 두가지 특점을 구비하고있다. 첫째, 평론의 내재성과 평론의 내재성과 추상성을 견지하면서 구체작품으로부터 출발하여 력사사건, 사회사조, 작자의 생평 등 외재인소를 분석, 해석하는것은 반대한것이다. 둘째로 작품에 대해 “원문분석”을 하여 내부결구와 일반규률을 제시할것을 주장한것이다. 영미의 신비평에 비하여 구조주의의 진보적의의는 정체결구에 대한 강조가 계통론에 접근한것은 성과이기도 하다. 구조주의 비평은 문학의 령역에 엄밀성과 객관성을 도입한 장점이 있는 반면에 실제 텍스트의 특수성을 무시하여 개별적인 텍스트를 다루고 작가와 력사, 작가의 언어를 무시하여 문학의 탈신비화현상을 초래한다. 그러나 그 결과는 결코 명랑한것은 아니였다. 2) 심리주의비평 우리가 문학을 론의할 때 자주 사용하는 문학정신, 문학적감동, 사상, 령감, 정서, 성격, 동기 등은 모두 인간의 실리상태를 표현한다는데서는 공통성을 가진다. 이것을 세분한다면 문학정신, 사상, 령감 등은 문학작품을 창작할 때의 상태이고 정서, 감동 등은 그것을 받아들일 때의 상태이며 성격, 동기 등은 문학작품내부의 요소라 할수 있다. 문학연구에서 작가의 창작, 독자의 수용, 작품의 내용을 인간성의 면에서 고찰하는 일은 불가결의 중요한 과제가 되였다. 심리비평방법에는 광의적의미와 협의적의미가 있다. 광의적의미로는 문학비평과정에 심리학의 기본리론과 원칙에 따라 심리학연구수단과 방식을 문화비평대상의 특점과 결부시켜 문학창작활동중의 어떤 독특한 심리현상과 법칙성을 도출해 내려는것을 말한다. 협의적의미로는 곧 프로이드의 정신분석원리에 의거하여 창작과정과 감상과정에서 보아내기 어려운 심층적심리동기를 고찰하는것을 말한다. 이 방법은 인간의 변태심리와 잠재의식에 근거하여 문학현상을 해석하려는것이다. 프로이드는 “무의식 유일론자”이다. 그의 심리학에서 문학과 가장 긴밀히 련계되는것은 인격결구리론과 꿈에 대한 해석리론, “성본능설”이다. 이 방법은 프로이드의 정신분석원리에 근거하여 인간의 변태심리와 잠재의식을 빌어 문학현상을 해석할것을 주장한다. 그는 인간의 정신과정과 인격특징은 “본아”와 “자아”, “초자아”로 조성된 세개차원의 심리결구에 의해 결정된다고 인정하였다. 그후 여러 류파들에서 심리학을 문학연구에 응용하게 되였다. 4. 정신분석비평과 신화비평리론 신화비평이란 문학을 신화체계내의 한 존재로 보고 문학속에 내재해 있는 신화체계를 밝히려는 비평형태이다. 신화비평은 원형비평이라고도 하는데 이는 문학속에 내재해 있는 신화적요소가 신화적원형을 이루고있기때문이다. 또한 신화라는것은 일반적인 의미에서 보편적인것인데 이것은 상이한 신화속에 유사한 모티프나 테마가 발견되며 류사한 심리적반응이나 문화적기능을 하게 된다는것으로서 이러한 모티브나 이미지는 원형(보편적인 상징형식)이다. 원형비평을 일명 신화비평, 토템식비평이라고도 하는비 새로운 비평목적으로서 옹근 한세대의 평론가들에게 영향주었다. 원형비평의 정초자는 스위스의 칼 융이다. “원형”을 원시모형이라고도 하는데 최초의 “원시적”이라는것이다. “원형리론”의 창시자 칼. 융은 문학원형을 세개 큰 류형으로 나누어 론술했다. 1) 신화원형 융은 문학예술의 원천을 그의 집체무의식과 원형에서 찾으면서 모든 위대한 예술창조는 신화와 집체무의식에서 원천을 찾게 되여있다고 주장했다. 고대중국의 ≪대우의 치수≫, ≪녀와씨가 하늘을 깁다≫라든가 쉘리의 ≪해방된 프로메테우스≫에서 등 희랍신화는 후세의 동서방문학에 영향이 컸는바 창작의 원형으로 되여 문학발전에 풍부한 재료와 예술상상력을 제공해 주었다. 2) 이미지형원형 융은 “예술창작이란 우리들이 추구할수 있는 범위내에서 즉 무의식중에서 원형형상을 격발시켜 그것을 정밀하게 가공하여 완정한 작품으로 되게 하는것이다.”라고 쓰고있다. 중국의 고대시가에서도 이미지를 강조했다. 우선 식물이미지이다. 사람들의 견정한 품격을 상징하는 소나무, 순결을 상징하는 련꽃, 선구자를 상징하는 진달래꽃, 굳은 절개를 상징하는 참대의 이미지 등이다. 다음 동물이미지다. 례하면 사랑을 상징하는 원앙새, 길한 소식 전달자를 상징하는 기러기, 장수를 상징하는 거부기와 송학의 이미지, 근로하고 충성을 상징하는 황소 등등. 셋째로 사물이미지이다. 기독교인의 도를 상징하는 십자가, 경사를 상징하는 붉은색의 이미지, 상사심리를 상징하는 달이미지 등이다. 3) 의경원형 각 민족시가에서 의경원형은 각 민족의 특징으로서 전형환경을 표현하기도 한다. 중국고대시가와 산문에서의 봉래산선경, 광한궁선경, 동해룡궁선경, 염라지부정경, 우리 민족의 백두선경, 금강산선경 등은 모두 의경원형에 속한다. 원형은 인류가 력사행정에서의 집체경험으로서 매개 사람에게 같으므로 초개성적인 공통심리기초를 구성한다. 칼 융은 예술가들이 신화원형을 감지하고 발견하는것은 예술창조의 불가결의 기본공이며 작가의 재능이라고 인정하였다. 평범한 작가, 시인들은 아무렇게나 떠오르는 생각대로 창작하지만 위대한 작가, 시인들은 시종 력사를 관통시키면서 력사의 가장 깊은 곳에 들어가 창작을 시작한다고 하였다. 괴테가 그러하였고 니체가 그러하였는데 그들의 전부의 재능이란 력사의 가장 깊은 곳에 잠재한 무의식과 원형을 감수하고 예감하고 표현한다고 하였다. 그러나 원형반영은 작가의 생활환경과 심미리상, 심미추구에 따를 수밖에 없다. 말하자면 같은 진달래도, 밝은 달도 그 의경원형은 차일시피일시이고 각자의 심미정서에 따라 각이할수밖에 없다. 신화비평은 몇가지 문제점을 안고있는데 우선 문학을 신화의 신비로써 신비로움을 해석하기에 문제의 추향을 복잡하게 만들기도 한다. 따라서 문학자체 의 특성에 대한 연구공능, 미학적가치평가가 약화할수도 있으며 거시적고찰이 미시적고찰을 소외시키고 대신 원형발굴에 주관색채가 선행할수도 있다. 칼 융의 리론은 많은 의문점을 가지고있음에도 문학원형의 성격조합성 및 증대속성등은 묘사내용에 광활한 새 천지를 열어주었다고 충분히 긍정해야 할것이다.    
39    제 2 절 문학평론의 양식과 방법 댓글:  조회:3767  추천:16  2007-09-18
                                        제2절 문학평론의 양식과 방법 1. 문학평론의 양식 1) 리론성평론 리론성평론은 일반원리에 의하여 문학평론체계와 방법, 그것들을 설명할 일정한 용어와 범주를 수립하여 문학작품을 평가할 판단기준을 마련하는 작업이다. 리론형평론의 핵심은 문학의 개념, 기능해명이며 작품의 우렬에 대한 평가이다. 따라서 문학의 본질, 기능, 가치평가의 기준이 평론의 척도로 된다. 가히 전면적분석평가를 할수도 있고 치중해 모종 문제를 평론할수도 있다. 분석식, 판단식 혹은 종합적으로 평론할수도 있고 혹은 비교식으로 할수도 있으며 혹은 거시적으로 혹은 미시적으로 평론할수도 있다. 이런 평론은 대체로 서론, 본론, 결론의 결구를 가진다. 2) 감상분석형평론 감상분석형비평은 실제로 구체적인 작가나 작품에 대한 론의를 말한다. 그러나 분석과 평가를 뒤받침하는 원칙과 리론은 대개 표면에 드러나지 않고 필요한 경우에만 인용한다. 실제비평의 착안점은 평론가가 실제작품 또는 작가에 대하여 어떤 리해와 평가를 내리는가 하는것이다. 이 평론은 독자들에게 낯을 돌리는 평론으로서 작품소개에 치중하는데 세가지 공통점이 있다. 우선 작품에 대한 소개가 꼭 완정한것은 아니여서 인물을 핵심으로 룡에게 눈을 그려넣는식으로 분석해도 되며 한개 편단을 평론하거나 작품의 특색을 제시할수도 있다. 그리고 작품의 내용외에도 작자의 정황(생활, 창작경력)에 대해 소개하여도 된다. 마감으로 자기의 인식과 결합하여 작가, 작품에 대한 인상, 태도를 담론한다. 감상형평론을 인상식평론이라고도 하는데 작품을 론할 때 철학적으로 정리하지 않고 자기의 인상을 충실하게 표현하려는 의도에서 주관적반응을 강조하는 평론이다. 신문에 “월평”이나 잡지들에서의 “이달의 화제”라거나 하는 서평들이 이에 속한다. 주로 평론대상에서 얻은 정서체험과 느껴지는 자기의 견해, 평가를 간결한 언어 혹은 시적언어로 전달한다. 독후감과 비슷하지만 구별이 있다. 감상, 체득형식을 취하면서 분석, 론증하지 않는다. 평론가는 발휘에 중점을 두는바 작품을 두고 여기로부터 저기에 이르는 련상으로 이것저것 말하기도 하고 옛것을 빌어 오늘을 말하면서 문예문제를 연구, 토론한다. 이런 평론은 흔히 문예수필, 잡기, 서신, 대화 등 형식으로 쓰기도 한다. 이런 평론은 언어가 간결하고 우아하며 직관적특색이 있으나 리성분석이 결핍하기에 정확하게 파악하기 어려울뿐만아니라 설득력이 결핍하다. 감상식평론은 작품을 감상할 때 직감과 감수로부터 출발하지만 반드시 문학리론으로 작품에 과학적분석과 판단을 진행하는데로 승화시켜야 한다. 3) 창조성평론 창조성평론이란 평론이 단순한 작품에 머물지 않고 평론가 자신의 문학에 대한 새롭고 독창적인 견해를 전개하여 그 평론자체에 예술적인 창조성을 부여하는 평론방법이다. 그러나 청탁받고 평론하거나 개인적감정에 얽매여 평론하면 편파적인 평론이 되기 십상이다. 창조성평론의 실질은 “자기를 예술작품속에 명시되여있는 재능과 일치시키는것”을 의미하며 작품과 창작과정의 흔상과 연구를 거쳐 작품을 재생, 재현하는것을 의미하며 예술작품이 창조적이고 자유로운 작업인것처럼 평론 또한 창조하여야 함을 의미한다. 한마디로 평론가가 평론대상의 가치를 공정하게 평가하는 형식을 통해서 자기의 세계를 창조하는 작업이 바로 창조성평론이다. 4) 재단성평론 재단성평론을 립법평론, 제작성평론이라고도 한다. 즉 실제작품의 창작기법에 대해 론평한다. 이를테면 소설창작방법, 서술기법이든지 시창작의 원리같은것이 평론내용이 된다. 창작방법이나 기법을 론한다는 시점에서는 리론평론에 가깝다. 이 류의 평론은 자체의 특점을 고유하고있다. 즉 시야가 비교적 넓은바 평론하는 작품이 한부나 두부에 제기되지 않고 어느 한 시기의 동일한 제재나 동일부류의 작품에 대해 종합평론을 하면서 종횡으로 진술하여 그 시기의 창작경향 특색 및 성과와 부족점을 총화한다. 하여 독자들이 해당 시기의 문학창작과 시대맥박간의 관계에 대하여 대체적인 료해를 가지게 한다. 례하면 ≪××년 단편소설 만평≫≪××년 중편소설순례≫등. 5 )해석식평론 해석식평론에서는 주관적감수도 그 어떤 발양도 하지 않고 객관성을 강조하면서 작품에서 무엇을 보여주고있는가를 적중하게 틀어쥐고 인물형상부각이 어떠하며 그 사상내용의 인식적, 교육적, 사회적, 미학적가치가 어떠한가를 분석, 판단,평가한다. 이런 평론방법은 중국의 한유의 주경, 석경(释经)에서 기원하여 점차 전통으로 형성되였다. 하여 거의 모든 명가,명작에 해석본들이 나왔다.《시경》훌륭한 례로 될수 있다. 이 평론방법은 작품의 본의에 대한 탐구를 중시하였기에 취할점이 있으나 평론의 창조성을 부정하거나 말살하기도 한다. 그러므로 주관적이고 막연한 인상식평론과는 달리 객관적이며 극력 상세한 해석, 설명을 강구해야 한다. 6) 고증식평론방법 고증식평론은 해석식평론과 련관되는바 특점이라면 대량의 방증재료로 해석을 증명한것이다. 서방에서는 실증평론이라 한다. “5. 4”시기 호적이 서방의 실험주의를 인입하여 이 평론방법을 새롭게 발전시켰다. 문학평론방법으로서는 국한성을 가지고있는바 기계적사유를 운용함으로써 근근히 고증차원에 머문다. 7) 발양식평론 작품의 어느 한점 혹은 몇개점을 틀어쥐고 평론가 자신이 철학, 정치, 론리 및 사회관점 등을 동원하여 발양하는것이다. 감상식평론은 작품의 내용을 바싹 에워싸고 자기 감수를 펴나가지만 발양식평론은 가끔씩 작품을 떠나 의론을 펴나가는 그 발양성에서 자기의 평론개성과 특점이 체현된다. 문본하나만 붙들고 고립적으로 연구분석하려는 페단이 있다. 그만큼 문학현상과 그것의 정신적가치에 대해 바람직한 평가를 줄수 없다. 그러나 문학작품을 성음, 의의, 이미지와 은유, 상징과 상징관계 형식과 기교문제를 구체적으로 다룰수 있다. 8) 쟁명형 쟁명형의 평론은 예술의 진리를 탐색하기 위해 진행하는 리론상의 쟁론과 변론이다. 부동한 의견을 발표하는것이 주요특색으로서 비평과 반비평을 포괄한다. 문예쟁론은 주로 작가와 작품에 대한 평론을 둘러싸고 전개된다. 로신은 “문예는 반드시 평론이 있어야 한다. 만약 평론이 틀렸다면 평론으로 반박해야 한다. 그래야 문예와 평론이 함께 전진할수 있다.”고 가르치고있다. 로씨야문학사에서 뚜르게네브의 ≪전야≫가 발표되자 평론가 도브롤류보브는 아주 높이 평가하였다. 그러나 뚜르게네브는 도브롤류보브의 작품의 가치에 대한 평가를 반대해 나섰다. 당시 주편이였던 네크라쏘브는 “도브롤류보브의 진리는 뚜르게네브에 대한 우의보다 더 진귀하다.”고 하면서 ≪진정한 대낮은 언제 오는가?≫라는 도브롤류보브의 평론을 그냥 발표하였다. 뚜르게네브의 진정한 평론가의 자세가 돋보이는 전형적인 례증이다. 과학적평론은 인상식평론의 주관주의, 판단식평론의 절대주의경향에 대립하여 나온것이다. 과학적평론은 객관주의, 상대주의로부터 출발하여 대량적인 과학법칙 혹은 리론, 특히는 사회과학, 심리학 및 생리학, 진화론 등 리론과 지식을 인입하면서 다양한 예술작품을 거시적으로 해석하고 평가한다. 2. 전통적평론의 방법 “방법”이란 이 말은 희랍어에서 왔는데 최초의 어원학적의미는 모종 길을 따라 전진한다는것이였다. 여기서 우리가 말하는 방법이란 문학연구에서의 인식도경, 리론, 학설 및 구체적으로 착수하는 각도, 연구, 수단, 순서를 말한다. 중외문학평론사상에서 영향력이 큰 평론방법으로 다음과 같은 몇가지가 있다. 1) 사회, 륜리적방법 문학작품의 해석, 평가에 있어서 사회륜리적방법이란 작품을 사회적, 경제적, 륜리적, 문학적환경과 관련시켜 리해하는 방법으로서 작품의 원천을 중요시하는 력사주의적방법과 일맥상통하는 점이 있다. 사실 문학작품의 분석비평에 있어서 작품의 사회적사실은 력사적성격이 전제되여야 제대로 해명될수 있는것이기때문에 이 두가지 측면은 서로 분리할수없이 밀접히 련계되여있다. 사회, 륜리적방법은 단순한 사실의 확정보다는 작가의 전기적사실이나 그의 사회적위치, 그리고 작가의 륜리의식과 문학작품의 사회적기능 등을 총체적으로 파악하고 이를 다시 력사적으로 고찰해서 궁극적으로 작품과 사회와의 상관관계와 그 내재적의미를 해석하려고 한다. 이런 륜리도덕평론은 몇가지 특점을 가지고있다. 첫째로 각계급, 각민족, 각사회형태가 모두 도덕으로 사람들의 의지행위와 인간과 인간, 인간과 사회, 인간과 국가 혹은 군체의 륜리관계를 규범화하고 생존과 발전을 수호하려 하기에 륜리도덕평론은 력사적인 원견성을 가지게 된다. 둘째로 륜리도덕평론의 내함과 도덕표준은 사회발전과 사회관계의 변화에 따라 변화발전하며 계급, 민족의 부동함에 따라 차이가 있고 륜리도덕평론모식은 형식상 영구성적인듯 하지만 내용상에서는 변화하는바 이는 륜리도덕평론으로 하여금 일종 모식으로 되여지게 하고 또한 다양성을 가지게 한다. 셋째로 륜리도덕평론의 력사성과 다양성으로 하여 작품이 도덕적인가 비도덕적인가를 평가할 때 선명한 차이성 심지어 적대성까지 가지게 한다. 중국은 오래동안 유가의 영향으로 말미암아 ≪시경≫에 대한 평론이 륜리평론이였다고 단정할수 있다. 2) 사회, 력사주의비평방법 작가와 작품을 력사배경, 사회환경, 작가의 전기 등 문학작품을 결정하는 여러가지 체계와 관련시켜 다루는 방법이 력사주의비평방법이다. 한 작품을 력사적사건으로 취급하는데에서 문학연구의 력사적방법이 시작된다. 이 비평방법은 일찍 산생되였고 영향면도 큰 비평모식이다. 기본원칙은 작품을 분석하고 리해하고 평가할 때 반드시 그 작품의 시대배경, 력사조건 및 작가의 생활경력 등을 작품과 련계시켜 고찰하는것이다. 문학의 기원, 특히 한 쟝르의 발생, 변천사는 력사주의비평가의 최대 관심사이다. 이런 의미에서 개체발생사평론이라고도 한다. 만약 해방전 조선문학작품속에서 가능껏 일제에 대한 저항의 낌새를 들추려한다면 력사비평의 한가지 방법이지만 발생론적오유에 빠지고 원인과 환경이 같으면 결과(작품)도 같은가? 하는 모순을 극복하지 못한다. 문학작품보다 외적요소에 치우침으로써 결국 비평의 힘을 상실하는 결과를 초래할수 있다. 3) 심미비평 심미비평은 문학작품의 미적구성 및 심미가치에 착안하고 작품의 정감이입 등 효과성과 오락성, 유쾌성 작용을 강조하며 문학작품을 진실, 선량함의 기초상에서 그것을 초월한 초공리적인 심미대상으로 본다. 그리고 작품이 독자에게 산생시킨 미감정도의 강약과 장구성, 잠시성과 련계시켜 우렬, 득실을 평가한다. 서방에서 심미비평의 립법자는 칸트였다. 왈드를 비롯한 유미주의자들은 당시 세인들이 경악할 예술주장을 내놓았다. 이를테면 다음같은것들이다. ㄱ) 예술과 자연: 예술이 자연을 모방한것이 아니라 자연이 예술을 모방한것이라고 하였다. 그들은 인상파화가들이 사람들로 하여금 런던의 안개를 알게 하였다고 생각했다. ㄴ) 예술과 인생: 예술이 인생을 모방할것이 아니라 인생이 예술을 모방해야 한다. 그는 인생이란 불완전하고 추악하지만 예술은 아름답다고 주장했다. ㄷ) 예술과 도덕: 예술과 도덕은 관계없다. 예술가는 오직 미를 추구한다. 죄악과 미덕은 예술의 원료라고 하면서 “일체 예술은 모두 도덕적이다.”라고 역설했다. ㄹ) 예술과 시대: 예술과 시대는 대항적이다. 예술은 오직 자신의 미를 표현할따름으로서 시대를 표현하는것이 아니라고 주장하였다. ㅁ) 예술과 비평: 비평가는 예술가와 같다. 칸트는 “가장 완미한 비평가는 본질상에서 순수주관적이여야 한다. 그것이 필요한것은 그 자신의 비밀이지 몸밖에 비밀이 아니다.”라고 하였는데 이런 주장은 평론가들로 하여금 공리주의와 도덕주의의 공제에서 벗어나게 하였다. 3. 평론과 문학의 교류 평론과정에서 평론가는 다음과 같은 문제에 부닥치게 된다. 즉 종적으로 전통적인 발상법과 횡적으로 외래적인 발상법의 교차관계, 모순관계 또는 종적으로 각 시대의 시와 소설에서의 발상법과 종횡적인 관계를 고찰할 때 새로운 내재적체험과 체험의 력사적기반으로서의 전통의 존재와 긍정부정의 문제를 회피할수 없다는것이다. 평론작업에서 동시적으로 부닥치는 종적인 고민과 횡적인 고민과 선택이야말로 평론의 기초가 되는것이다. 우리가 오래동안 지니고 내려온 경화된 고유의 사고방식과 외래문화와의 충돌, 사회현실과 개체의 리해관계 등 여러가지 문제가 평론가앞에 제기된 과제이다. 지금 중요한것은 감성을 회복하는것이다. 더 잘 보고 더 잘 느끼게 하는 평론이 요청된다. 평론의 임무는 작품의 내용을 최대한 찾아내는것이 아니며 작품속에 있는것 이상의 내용을 짜내것이 아니다. 환언한다면 평론은 작품으로 하여금 독자들에게 훨씬 더 실감이 나도록 인도하는것을 목적으로 삼아야 하지 아카데미즘식의 리론강의가 되여서는 안된다. 한부의 문학작품에 대한 접근방식과 리해의 폭이 중간에 끼여든 평론문으로 하여 외곡되고 변형될수도 있는데 그런 평론은 아니하기만 못하다. 무릇 평론은 용속사회학경향을 극복하도록 인도해야 한다. 이런 평론은 문학작품을 성음요소, 의의, 이미지와 은유, 상징성, 형식미와 기교 등을 구체적으로 분석, 평가하여 독자의 리해를 도와주어야 바람직하다. 례를 들어 말해보자. 시인 김소월은 꽃과 풀과 산이나 사랑을 많이 노래하였는데 얼핏 생각하면 화조월석에 음풍영월로 소일한 한적한 시인으로 여길수 있다. 그러나 기실 시인의 창작은 당대의 조선인민의 암담한 비극적운명이 빚어내는 사상과 정서를 다면적으로 표현하고있다는 점에서 특징적이다. 김소월과 조국의 자연이 상봉함으로써 자기의 가장 아름다운 자태를 드러내게 되였는데 시인이 조국의 자연을 자연그대로 노래하였기때문이 아니라 당대 조선인민의 사상ㅡ정서적감정의 운동을 자연을 통하여 진실하게 노래하였기때문이다. 피상적으로 감지한다면 그의 시에서 시적형상은 주요하게 집과 고향, 님과 조국을 잃고 방황하는 막무가내한 형상이다. 례하여 ≪님에게≫, ≪초혼≫, ≪님의 노래≫, ≪그리워≫ 등 사랑을 노래한 시들에서 “님”을 자칫 단순한 님으로 파악할수 있다. 그러나 상징이미지에서 보면 사랑을 노래하면서 “님”에 대한 사랑이 조국에 대한 사랑으로 치달아올라 서정세계에서 몸부림치며 피맺힌 ≪초혼≫에까지 치달아오른것으로 인지하여야 시적이미지를 깊이 새길수 있다. 련계성으로 말하면 문학평론과 문학감상은 모두 문학작품에 대한 창조성적인 열독이고 리해이며 평가이다. 그러나 량자는 대상범위, 접수특징과 지식배경 등 방면에서 다르다. 문학접수의 대상은 문학작품에 국한되고 문학평론은 작품을 주요 대상과 기본출발점으로 한다. 문학접수에는 개체성이 두드러지지만 문학평론은 일정한 정도에서 사회성접수이다. 문학감상은 문학평론의 기초이며 전제이다. 로신은 “시는 철학과 지력으로 깨칠수 없다. 감정이 이미 얼어붙은 시인에 대해 왕왕 오유적인 판단을 내리고 간막이밖에서 야유한다.”고 무책임한 평론가에 대해 힐난한바 있다. 평론가에게 있어서 작품은 실질상 순전히 객관의의상에서의 작품이 아니라 자신의 생활체험, 가치관념 등 주객체의 공동체이다. 4. 문학리론연구의 방향 모든 문학리론은 각각 저마다의 립각점에서 저마다의 방식으로 제시된것이기때문에 서로 다른 특징을 지니고있다. 그러므로 동일한 작품이라 하더라도 상이한 해석이 나오게 마련이다. 이를테면 김소월의 시 ≪산월화≫는 력사주의적관점에서 볼 때 조국의 주권을 박탈당한 식민지시대 지식인의 소극적저항의식을 노래한것으로 풀이될수도 있고 형식주의적관점에서 볼때에는 시인이 일상생활에서 느낀 사사로운 감정을 아름답게 승화시킨 한편의 소박한 서정소곡과 같은것으로 풀이될수도 있다. 그렇지만 우리의 시각을 복잡하게 이끄는 이러한 문학리론들이 어쩌면 비평의 다양성을 부여하게 된것인지도 모른다. 하나씩 떼어놓고 보면 각 문학리론들은 저마다 불완전하고 편협한것이라 하더라도 문학의 본질과 기능 및 구조에 관한 개념들을 제공한것들로서 문학리해와 감상에 나름대로 이바지하였다. 중요한것은 이렇듯 다양한 문학리론들을 단일한 한개의 론의의 평면우에 옮겨놓고 종합적으로 체계화할수 있는 좌표계를 마련하는 일이다. 그리고 각 리론들의 공통점과 차이점을 명확히 식별하고 계통별로 분류함으로써 문학연구에 온갖 리론이 고루 적용될수 있는 공통적인 기반을 구축하는 일이다. 에이브럼즈는 예술가, 작품, 우주, 청중이라는 네개의 좌표를 설정한 다음 이것들의 상호관련을 통해 네개의 리론체계가 형성되였다고 보았다. 그의 주장을 빌면 문학작품을 그 제재가 되는 우주와의 관계속에서 해명하려는것이 모방론이고 그 향수자가 되는 독자와의 관계속에서 해명하려는것이 효용론이며 그 제작자가 되는 예술가와의 관계속에서 해명하려는것이 표현론이다. 현대의 비평정신은 전통적비평정신과 현저한 차이를 보이고있다. 이를테면 시의 언어는 아름답고 풍부해야 한다고 인정하였으나 현대예술은 종래의 미라고 하는 사고방식을 파괴한다. 미라고 할수 없는것이 예술에서 추구된다고조차 할수 있을 정도이다. 미란 그저 단순히 언어를 교묘하게 조합하기만 하면 된다고 하는것으로 끝날수 없을 만큼 현대는 복잡화되여있다. 평론가는 작품 스스로 빛을 내는 반짝임 그 자체를 리해하는 일, 그것이 작품을 경험하는 일이다. 평론가의 평론의 투명성은 독자들의 생생한 심미경험을 해석해주면서 그에 부합되여야 한다. 결국 독자들과의 제2차 담화를 어떻게 준비할것인가 하는 문제이다. 평론은 평론가의 선택이지만 다음과 같은 방면에서 문학흔상을 초월한다. 첫째, 대상성에서 초월성이 표현된다. 둘째, 접수미학층차에서 표현된다. “내가 좋아한다 싫어한다는 말은 다만 식단, 가육, 준마, 사냥개…등에 소급될 때에라야만이 가능하게 위신이 설것이다.” 이 말은 평론의 객관성과 공정성을 념두에 두고 한 말이다. 셋째, 문학접수연구는 심미경험 혹은 예술심리라는 독특한 시각으로 진행된다. 평론에서 중요한것은 감성을 회복하는것이다. 더 잘 보고 더 잘 느끼는 방법을 익혀야 한다. 평론의 가치는 작품에서 내용을 최대한 찾아내는것이 아니라 작품속에 있는것 이상의 내용을 짜내고 가미하지 않는데서 진실하게 실현된다. 평론의 기능은 작품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보여주는것이 아니라 작품이 어떻게 예술작품이 됐는지 더 나아가서 예술작품은 예술작품이라는 사실을 보여주는것이다.
38    제3장 문학평론 제1절 문학평론의 기능 댓글:  조회:3684  추천:16  2007-09-16
                                      제1절 문학평론의 본질 1. 평론의 함의 평론(비평)이라는 말은 희랍어와 라틴어에 기원을 두고있다. 희랍어 “식별, 구분, 분할하다”의 뜻을 지니고있고 라틴어 “재판관, 심판, 감정가”의 뜻을 지니고있다. 문학평론을 정의한다면 문학의 본질적기능, 종류, 작가와 작품의 가치를 해설하고 평가하는 일체 문학행위라고 말할수 있다. 문학평론은 대체로 작품에 대한 해설과 평가를 가리키지만 동일한 성질의것은 아니다. 해설이 작품의 내용의 심층적의미를 규명하는 작업이라면 평가는 그 작품이 어떤 가치를 지니고 얼마만큼 가지고있는가를 검토하고 평가하는 작업이다. 전자는 알게 하는 일에 속하며 후자는 가치판단에 속하는 개념이다. 해설은 작품과 인과관계에 있지만 평론은 작품해설에 머물지 않고 도리여 거기서 출발하여 명확한 가치판단으로 끝난다. 평론가의 선험적인 문학적체험을 전반적인생경험과 련계시키면서 적극적인 인생태도를 세우는 그 자체가 평론의 가치를 포함한다. 평론은 후천적으로 문학창작에 봉사하지만 종속관계가 아닌 독립형태로서 그 존재리유는 평론대상에서 기인된다. 한 작품이 명성을 떨치는가 못하는가는 많은 경우 평론가에게 달린다. 이처럼 동시대의 가장 우수한 문학작품과 평론가사이에는 숙명적인 인연이 있다. 평론형식은 우연한 착상에서 결정되는것이 아니라 평론대상의 형식에 의해 결정된다. 평론은 평론관점에 의해 주관주의평론, 객관주의평론으로 나누게 된다. 주관적평론은 순수 평론가 자신의 취미와 기질, 문학소양에 의하여 작품에서 받은 감응을 중요시하는 평론이고 문단평론, 취미평론, 인상평론 등은 주관주의평론이라고 하는데 문학 감상차원의 작업이라 할수 있다. 객관적평론은 미적흔상대상을 설명함으로써 독자의 리해를 돕는데 있는바 작품을 리해하고 설명할 때 어떤 일정한 관점을 미리 설정해놓고 그 관점을 자대로 작품의 가치를 판단하는 작업으로서 그만큼 비개성적이다. 문학평론은 기타 학설처럼 자재적대상이 아닌 정신산품이며 언어를 존재형식으로 한다. 2. 평론의 기능 평론은 새로운 문학리론을 정립하고 작가의 창작활동을 고무하고 새로운 방향을 제시한다는데 중요한 의의가 있다. 체르늬쉡쓰끼는 “평론의 사명은 우수한 독자의 의견을 표달하는것”이라고 했고 뿌쉬낀은 “문학평론은 문학작품의 미와 결점을 비평하는 과학”이라 하였다. 로신도 문학평론의 기능을 두고 “비평은 반드시 잘 된점은 잘되였다 하고 나쁜것은 나쁘다고 해야 비로소 작자에게 유익하다.”고 기치선명하게 진술하였다. 평론의 기능은 예술작품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보여주는것이 아니라 예술작품이 어떻게 예술작품이 됐는지 밝힌다. 평론가는 문학에 대한 지식을 넓혀주고 작품을 옳바로 평가함으로써 작가와 독자에게 충분히 전달할수 있게 하는 구실을 하며 나아가서 작가가 미처 의식하지 못했던 의미까지도 추출해낸다. 문학평론을 “제2창작”이라고 하는 리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문학평론은 추상성을 가진 계통성적인 과학인식활동이다. 평론가는 론술의 정확성을 증명하기 위하여 철학, 정치, 도덕, 문학, 미학 등 관점을 일정하게 운용하여 작품의 언어기교, 내용선택, 결구 등을 분석하고 대조하고 귀잡총화하며 작자의 생활경험 및 그가 처한 시대의 사회문화에서 증거를 찾기도 한다. 문학평론은 사회비평적인소를 포함하지 않을수 없다. 평론가는 문학작품이 어느 정도로 사회생활의 본질과 시대정신을 반영했는가를 고찰할뿐만아니라 왕왕 작품자체를 벗어나 사회생활도 평론한다. 례하면 벨린쓰기는 뿌쉬낀, 고골리 등 작가들의 창작득실에 대해 평가할 때 로씨야 농노제도에 대해서도 심각한 해부를 들이댔다 문학평론은 동시에 또 문학활동의 의의와 가치를 규명함으로 사회비평과 융합된 미학비평이 되기도 한다. 문학평론의 방식을 심미체험, 리성분석, 가치판단 세마디 말로 개괄할수 있다. 평론은 새로운 문학리론을 정립하고 작가의 창작활동을 고무하여 자각시키여 새로운 방향을 제시하는 기능도 가지고있다. 한 작품에 대한 평론가의 가치판단은 그 작가의 운명을 결정하기도 한다. 체호브도 처음엔 지방신문에 풍자소품이나 발표하는 무명작가였다. 그런데 평론가였던 그리고리예위치가 체호브의 작가적재능을 발견하고 그에게 축하의 편지를 써보냈다. 그의 축하편지에 감동된 체호브는 이렇게 답장을 썼다. “당신은 당신의 편지가 나의 자존심에 얼마나 큰 작용을 일으켰는가를 능히 판단할수 있을것입니다. 당신의 편지는 그 어떤 장금보다 귀중하며 한 초학자로 말하면 현재는 물론 장래에 있어서도 일종의 보수로 될것입니다. 나는 다만 반복할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장려는 정말 저를 진동시켰습니다.” 체호브에 대한 그리고리예위치의 원견성있는 평가와 고무격려가 세계적인 단편소설가를 낳았다해도 과언이 아닐것이다. 체호브는 “평론가들이 결핍했던탓으로 많은 생명들과 예술작품들이 우리의 눈앞에서 소실되여버렸다. 우리들의 시대에 훌륭한 평론가가 없으므로 수많은 문명적인것, 수많은 예술품들이 매몰되였다.”고 개탄한바 있다. 사실 일부 훌륭한 문학작품들이 해빛을 금방 보았을 때 무참히 압살당할번했던 일이 한두번이 아니였다. 례하면 고골리의 중편소설집 ≪미르고로드≫와 ≪소품집≫이 방금 출판되였을 때 작품에서 로씨야 농노제의 반동본질을 첨예하게 폭로비판하였기에 한무리 반동문인들의 맹렬한 공격을 받았고 심지어 “자연주의문학”이라고 조소를 받기까지 하였다. 고골리가 어쩔줄 몰라서 불안해 할 때 탁월한 평론가 벨린끼가 용약 맞받아 나서서 세계적인 문학평론의 로작으로 자리매김한 ≪로씨야의 중편소설과 고골리씨의 중편소설에 대하여≫를 발표하였다. 벨린쓰끼는 고골리 창작의 사상예술적성취를 높이 평가하고 그의 사실주의방향을 충분히 긍정하였으며 뿌쉬낀과 나란히 놓았다. 그가 고골리의 창작열정과 작품을 유력하게 보호하여 나섰기에 작가로 하여금 그후 ≪죽은 넋≫, ≪검찰관≫같은 불후의 명작을 내놓을수 있게 했던것이다. 3. 문학평론의 임무 문학평론은 문학작품 자체가 우리에게 주는 느낌들 즉 아름다운것과 추악한것이나 그것에 관한 판단, 해석은 작품과 인과관계에 있지만 작품해석에 머물지 않고 거기서 출발하여 명확한 가치판단에 이른다. 문학평론의 성질이 자체의 네가지 임무를 결정한다. 1) 작품평론을 한다. 평론의 가장 기본적인 임무는 문학작품을 과학적으로 분석하고 평론하는것이다. 이에 뿌쉬낀은 “문학평론은 문학작품의 미와 결점을 제시하는 과학”이라 하였다. 문학의 백화원에는 아름다운 꽃송이도 있고 잡초도 있을수 있다. 만약 평론가가 제때에 잡초를 매버리지 않는다면 향초가 잘 자랄수 없다. 어떤 때는 한 작가에게서 향초가 꽃핀후 또 이런저런 잡초도 자랄수도 있다. 례하면 고골리는 일계렬의 훌륭한 반농노제도의 작품을 써내여 벨린쓰끼의 긍정을 받았지만 후에 ≪벗에게 보낸 서신집≫에서는 농노제를 옹호하는 착오적경향이 표현되였다. 벨린쓰끼는 이에 추호의 사정도 두지 않고 견책의 채찍을 들었다. 문학평론은 향초를 가꾸고 잡초를 매버리는 동시에 창작과 감상도 지도해야 한다. 작가도 자기의 창작품을 정확하게 대해고 평론가의 평론과 조언에 허심하게 귀를 기울여야 한다. 미학가 디드로는 “한 극작가가 아무리 천재라 해도 그는 어디까지나 평론가가 수요된다. 만약 그보다 더 천재적인 명실에 부합되는 평론가를 만난다면 그는 얼마나 행복할것이랴!”라고 말한바가 있다. 벨린쓰끼는 “비평가와 독자는 담화하는 두사람이다. 즉 그들은 담화를 위해 선정된 그 대상의 의의를 사전에 약속하고 동의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들은 서로 리해하기 곤난할것이다. 당신들은 한 작품을 분석하고 창작방법들에 대하여 엄숙하게 론의하며 이 법칙들을 분석대상인 작품에 적용하고 그 작품이 훌륭하다고 립증할것이다. 그러면 독자들은 당신들의 비평을 읽고 황홀해져서 당신들의 의견에 완전히 동의하고 정말 미학적법칙의 조항들이 정확히 적용되였으며 작품은 잘 되여있다고 보는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좋지 앓은 결과를 초래할것이다. 즉 당신들의 비평을 잊어버리기도전에 당신들이 찬양한 그 작품을 잊어버리는 경우가 흔하기때문이다. 그것은 당신들의 분석대상인 작품이 미문학(美文学)작품이 아니라 속임수의 잡화와 같은 작품이기때문이며 미학적형식은 있는듯하나 미학적생활정신이 없었기때문이다.”라고 쓰고있다. 고대희랍의 미학가 하라스는 “창작을 ‘칼’이라면 평론은 ‘숫돌’이다. ‘숫돌’은 비록 자기절로 움직일수 없지만 능히 강철칼을 날카롭게 날을 세워줄수 있다.” 라고 정채로운 비유를 하였다. 문학평론은 독자의 감상지도에서도 십분 중요하다. 문학평론이 문학흔상지도에서 노는 구실은 주요하게 세개면에서 표현된다. 우선 작품선택에 도움을 주며 가치관념상에서 독자를 이끌어주면서 위해로운 작품에 붉은등을 달아주어 독자들에게 주의를 상기시킬수 있다. 2) 문학평론은 시각차이을 조절해준다. 작자와 독자의 시각차이는 문학감상에서 필수불가결의 조건이다. 한것은 작품의 시각감만이 독자들의 열독흥취를 격발시킬수 있기때문이다. 그러므로 작가들은 창작과정에 세계에 대한 리해방식이 독특할것을 극력 추구하게 된다. 서방의 현대주의문학에서 소위 “낯설게 하기”수법이 바로 이런 심리수요로부터 창상된 표현수법의 일대 혁명이다. 다른 한방면으로 독자의 기대시야가 작자의 시야와 융합되여야 감상활동이 효과적이지만 반대로 량자의 시각차이가 너무 현격하면 접수심리상 충돌이 생기여 문학재창조활동에 참여할수 있는 조건인 리해성과 가독성이 거부당하고만다. 이런 시각차이의 이률배반현상을 해결하는것이 평론가의 두번째로 되는 공정성을 요구하는 임무이다. 평론가는 작가와 일반독자, 창작과 감상자사이의 복잡한 관계를 조해하여야 한다. 평론가 자신이 독자이기도 하므로 그의 사명은 “우수한 독자의 의견을 표달하는것이다.” 평론가는 독자들에게 예술상에서 성숙되고 재창조열정을 지니도록 요구하는 가장 리상적인 표달자로 충당되여야 한다. 3) 문학평론은 문학발전의 개척, 혁신을 추동한다. 문학평론가는 구체적작품을 분석, 평가해야 할뿐만아니라 창작경험을 총화한 기초상에서 한개 시기의 문학발전과 연변과정에서의 일부 중대한 문제를 거시적으로 고찰해야 한다. 이를테면 한개 시기의 문학사조의 특점, 스찔과 류파의 형성 및 연변, 창작방법과 제재선택, 민족전통의 계승과 외래영향 등이다. 례하여 디드로의 희곡평론은 자산계급희곡에서 “엄숙극종”의 건립에 직접적인 기초작용을 놀았다. 벨린쓰끼, 체르늬쉡쓰끼의 평론중에서 사실주의, 전형, 문학의 인민성과 민족성 등 문제에 대한 론술은 로씨야 19세기 비판적사실주의의 발전과 번영을 안아왔다. 벨린쓰끼는 고골리의 중편소설을 평론하면서 이렇게 주장하고있다. “우리에게는 미에 대한 개념들이 불완전하고 취미가 아직 설익었기때문에 우리의 비평은 그 수법들에 있어서 필연적으로 구라파적인 비평을 피해야 할것이다. 우리 나라의 한가한 몇몇 미학가들은 미의 법칙들이 우리에게 있어서는 마치 수학처럼 정확히 규정되여있는듯이 말하기까지 하지만 나는 이와는 다르게 생각한다.” 이 말에서 평론가들은 자기의 진정한 임무가 무엇인지 알수 있을것이다. 4) 문학현상에 대한 론쟁을 전개한다. 문학이 발전하려면 낡은 문학관념과의 쟁론은 불가피하다. 다른 한면으로 동시대의 각종 문학사조, 류파지간에도 각자의 문학관념, 미학리상을 선양하는 쟁론들이 전개된다. 문학평론이야말로 이런 쟁론의 유력한 무기인것이다. 하지만 그 경우 평론이 인맥을 따라 비실제적으로 올리추는 수단으로 되지 말아야 비판성이 공정하게 되고 효력을 볼수 있다. 중국의 경우 한시기 “좌적”영향으로 말미암아 문학평론은 “계급투쟁의 도구”로, 문화사업일군들을 정치적박해하는 수단으로 전락되였다. 문학평론은 자기 본연을 잃고 학술문제와 정치문제를 뒤섞어가지고 작가들을 한몽둥이에 때려잡는 참담한 문화비극을 산생시켰다. 문학은 자유정신의 표현이요 탐구적정신의 소산이므로 구속을 싫어한다. 그리하여 정치나 시대를 초월하여 그것을 자기의 법칙밑에 굴복시키지 않으면 안된다. 즉 선전이나 교화의 역할을 버리고 사람을 감동시키고 기쁘게 하기 위해 정치나 사상의 하녀가 되지 말아야 하며 사상선전과 계몽의 목적이 작가의 상상력속에 용해되였다가 감정(정서)의 옷을 입고 나오지 않으면 안된다. 작품에 고유한 법칙에 따라 한 작품이 얼마만한 선전성과 계몽가치를 가졌다거나 어떤 사상과 의도를 가졌다거나를 측정하고 지적할것이 아니라 작품에 나타난 사상과 현실이 작가의 상상력과 감정속에 얼마만큼 용해되였으며 그것이 독자를 어떤 방향으로 인도하면서 작가의 의도가 얼마나 실현되였는가? 그 결과 작품이 얼마나 독자를 유익하게 하였는가를 말해야 할것이다. 진정 훌륭한 평론은 창작방법을 가르치고 창작과정을 감시하는 대신에 작가의 창작력의 성장과 발전을 위하여 그에 필요한 분위기와 신념의 계렬을 준비해야 할것이다. 그로 말미암아 작가의 창작능력의 건전한 성장과 발현을 볼 때 비로소 평론의 지도성이 발생한다. 4. 문학평론의 기준 문학평론의 기준은 력사적이고 상대적인 평가척도일뿐 절대적선험이 아니며 불변의 리론모식도 아니다. 로신은 “우리가 일찍 문학비평사에 일정한 테두리가 없는 평론가를 본적이 있는가? 없다. 테두리가 아니면 진실의 테두리거나 전진의 테두리였다.…우리는 그에게 테두리가 있다고 비난할수 없다. 우리는 다만 그의 테두리가 옳은가 그른가 하는것만 평론할수 있을뿐이다.”라고 했다. 공통적인 문학평론표준을 다음 몇가지로 설정하고있다. 1) 진실성기준 문학예술에서 심미가치가 제1요소이지만 반드시 진, 선, 미의 기초이며 진실이 곧 미이다. 여기서 진실은 일상생활에서의 론리로 평가하는 진실이 아니다. 진실성표준에는 세가지 내용이 포괄된다. 우선 사회생활에 대한 인식이 심각하고 감상자가 사회생활의 본질에 대해 깊이 사색하고 탐구하도록 독특하게 격발했는가? 사회생활의 절실한 체험을 표현했는가? 감상자들이 열정적으로 대상을 포옹하고 동감하고 체험하고 재창조하고 자연스럽고 진지한 감정으로 이끌어주는가? 하는 등 일련의 문제들이다. 문학평론은 하나의 작품이 좋다, 나쁘다로 금을 그으면 작업이 끝나는것이 아니라 왜 좋은가? 왜 나쁜가를 판단적근거로 세시하는 작업으로서 평론가가 초점을 사회현실에 둘것인가? 독자에게 둘것인가? 작가에게 둘것인가 아니면 하나의 실체로서의 작품자체에 둘것인가에 따라 그 평가는 다르게 나온다. 한부의 문학작품을 사회현실(세계)과 인간의 삶의 현장에 대한 조명, 재현으로 보며 그것의 진실성 여하를 론해야 할것이다. 가령 한국작가 조정래의 대표작《태백산맥》을 평가한다고 할 때, 소설이 당시 조선반도의 사회상과 전쟁의 재난속에서 특이하게 영위된 인간의 삶의 양상을 얼마나 핍진하고 실감나 게 재현했는가에 가치척도를 둘 때 곧 진실성이 기준이 되는것이다. 작가 조정래는 리념투쟁의 필연적결과물인 비인간적인 전쟁극을 다루면서도 자기 처하고 있는 국가, 리념의 속박을 념두에 두지 않고 장가적인 안목으로 현실을 투시하고 인문주의적인 자세로 사건과 인물들을 다룸으로써 진실성을 확보하게 되었으며 그리함으로써 독자세계에서 각광을 받게 되었다. 2) 경향성기준 경향성을 문학평론의 한개 기준으로 삼는것은 우리들의 문학평론활동이 현실적사회공리성의 목적으로부터 문학작품의 가치, 의의를 유익한 면에서 판단할것을 요구하기때문이다. 이 공리성을 우리는 “착한것”이라고 개괄하고있다. 진실이 곧 미일진대 착함도 곧 미의 전제이자 미자체가 되여진다. 여기서 착한것인즉 인류와 인류진보에 유리하고 유용하며 유익한것을 가리킨다. 웰렉은 자기의 “문학의 리론”에서 진실성기준, 효용성기준, 독창성기준은 외재적평론의 기준에 속하고 복잡성과 일관성 기준은 내재적기준에 속한다고 규명하고있다. 3) 예술규준 문학평론에서 대상의 예술미에 대한 분석평가는 곧 예술가치에 대한 발굴이다. 문학평론 예술성규준을 다음의 두개방면에서 체현할수 있다. 우선 문학작품의 독창성에 대한 긍정 혹은 부정이다. 독창에는 제재선택, 예술구상, 표현 수법, 언어풍격 등 면에서의 독특성이 포괄될뿐만아니라 생활에 대한 리해와 생활을 발굴한 예술시각의 독특성도 포함된다. 다음 예술매력은 감상자들을 매료하고 감동시킨 거기에서 실증된다. 때문에 문학작품의 심미가치판단에서 작품의 감화력을 우선 보아야 한다. 이것은 문학작품의 가치실현에 관한 문제이며 나아가서 문학의 공리성문제이다. 공통적인 평론원칙은 다음과 같다. (1) 정체성원칙: 평가의 정체성이란 우리들이 문학작품과 문학현상에 대한 평론에서 반드시 정체적으로 착안하고 대상의 각개 구성요소 및 내재련계를 계통적으로 고찰, 파악하면서 대상의 가치와 의의를 전면적으로 평가할것을 요구하는 원칙이다. “어떠한 개인이든 문학상의 가치는 자기가 결정하는것이 아니라 오직 정체적비교속에서만 결정된다.” 이 말에는 두개층차의 의미가 있다. 하나는 지엽적문제를 캘것이 아니라 그의 정체적창작을 보아야 한다는것이다. (2) 동태성원칙: 문학현상자체가 부단히 발전변화하는 개방식계통이다. 분석의 동태성원칙은 구체대상에 대한 평가에서 그 가치, 의의를 발전적안광으로 볼것을 요구하고있다. 문학에 대한 어떠한 해석, 결론이든지 계단성의의를 가질수밖에 없다. 례하면 중국에서《홍루몽》에 대한 연구는 하나의 학문으로서 “홍학”으로까지 부상되였는데 사회문화적가치, 문학사적의의 등등에 론술들은 부단히 파생된 현상 그에 반하여 한시기 중국의 억천만 독자들의 가슴을 진동시켰던 “상처문학” 은 지나가버린 지진처럼 잠잠해지고 시대적리정비로 자리매김했던 그 문학의 거대한 영향은 계승이 단절된 현상들이 이를 증명한다. (3) 창조성원칙: 평론가가 자기의 독특한 심미시각과 심미경험으로써 객체를 창조성적으로 접수하고 재창조하고 대상속에서 독특한 발견을 하는것이다. 기계적으로 모종 평론표준에 깎아맞추지 않으며 열정적인 참여와 독립자주적의식으로 대상자체의 궤적을 탈리하지 않는것을 전제로 리론과 주장 및 심미취미를 침투시킬것을 요구한다. 엘리어트는 “내가 말하는 평론의 의미는 물론 예술작품에 대한 문자로 표달된 평론과 해석을 가리킨다. …평론은 반드시 목적이 명확해야 하는바 솔직히 말해서 작자에게서 해탈되여 독자의 감상능력을 규정해 주어야 한다.”라는 정채로운 론단으로 평론가들에게 좌표를 세우주고있다.  
37    제3절 독자와 문학 댓글:  조회:3490  추천:24  2007-09-16
                                      제3절 독자와 문학 1. 독자와 문학 독자란 작가사상의 수신자이다. 독일의 교육연구가 미하엘 바인리히는 문학작품을 작가의 관점에서가 아니라 독자의 관점에서 관찰할것을 강조하면서 “독자들의 기대가 문학작품의 구성요소이기때문에, 그리고 문학은 독자와의 대화에서 존재하기때문에 문학사는 바로 이 대화의 력사”가 되여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문학사회학에서 문학과 사회관계를 세가지로 구별하고 관찰하였다.    첫번째는 작가와 그가 속하는 사회관계이다. 작가가 사회의 어느 층에 속하느냐 하는 문제는 작가의 리념과 더불어 작품속에 반영된다. 두번째로 문학작품과 독자도 포함한다는것이다.  그런데 독자와의 관계도 단순하지 않다. 례컨대 작가가 작품을 쓸 때 마음속으로 예측하였던 독자 즉 대화의 파트너와 실제 독자는 일치하지 않을수 있는것이다. 독일의 프란츠 카프카는 ≪성≫, ≪아메리카≫ 등 대작을 썼을 때 어떠한 가상의 독자도 없었다. 자기가 죽은 다음 원고들을 불살라버리라는 유언까지 했다. 그런데 그의 친구 막스 브로트가 그가 죽은후 그의 유언을 어기고 출판을 하는데 뜻하지 않았던 전세계의 독자를 확보하게 되였다. 또한 로신의 경우에는 1918년에서 1936년 걸쳐 일부 지식인들과 정치인, 혁명동지들만을 대상으로 하는 아주 소수의 써클을 위한 잡지와 소설집에 중편소설을 발표하였던것인데 결과적으로 수천만의 중국인을 위한 저술이 되였다. 중국혁명이 로신의 의도에 호응할만한 능력있는 출판자를 로신의 작품에 제공할수 있었기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작품속에 반영된 사회현실의 제관계인것이다. 문학은 즐거움을 주는것이냐, 가르침을 주는것이냐? 시드니와 같은 대다수의 르네쌍스 비평가들에게는 도덕적효과가 최종목적이었고 쾌감과 감정은 부수적인것이였다. 그는 “시는 말하는 그림이며 가르침과 즐거움을 주는 두가지 목적을 가지고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므로 좋은 시인은 독자의 요청에 부응하는 시인이다. 독자의 요청을 어느만큼 만족시켜 주느냐하는것이 그 시인에 대한 평가기준이 된다. 시드니의 문학관은 이런 점에서 볼 때 철저히 효용론의 립장을 취하고있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시인은 자기의 교훈을 이야기속에 숨김으로써 “잔인한 악인”까지도 “앵두알을 먹듯이” 저도 모르게 선을 사랑하도록 유도한다고 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서사시는 “가치있는 인간이 되고자 하는 욕망으로 정신을 가장 불타게 하기”때문에 시의 왕림을 스스로 증명한다. 공자는 ≪론어≫에서 “시 3백편을 읽으면 사특한 마음이 없어진다.”고 했는데 이것은 분명 독자를 의식한 말임을 알수 있다. 문학작품의 감동의 효과는 마치 설사약이 위장을 깨끗이 씻어내듯이 마음의 찌꺼기를 씻어내어 정화시켜주는것에 비유할수 있다. 그러나 독자들의 취향도 가지가지, 불만도 가지가지이고 바라는것도 가지가지이다. 열독흥취의 다양성이라는 측면에서는 바람직한 일이라 할수 있지만 독서계의 통일성에는 불안한 인소로서  “기대지평”의 불온정성을 의미한다. 특히 시대의 발전과 문학환경의 변화에 따라 문학작품은 새로운 모습으로 등장하며 그때마다 독자들은 텍스트ㅡ문학문본의 새로운 지평에 부딪치게 된다. 독자들의 “친숙한 지평” 과 텍스트의 “새로운 지평”사이의 이런저런 충돌 로 인하여 이른바 “지평의 전환”이 생겨난다. 이러한 지평의 전환은 곧 독자들에게 수용되여 새로운 “기대지평”으로 작가들을 충격하고 무형의 압력을 준다. 그래서 문학관념의 소통문제가 새롭게 제기되기도 한다. 주제의 적극성이라든가, 사회적가치라든가, 작품의 지적수준이라든가, 질적함량이라든가를 불문하고 결국 재미있느냐? 없는냐? 하는 이률배반적이고 이중성적인 열독취향은 상품화된 문학작품의 가치취향을 엉뚱한 방향으로 이끌었으며 가치기준도 불가예측이 되게 하였다. 문학작품이 재미있다고 할 때 그 재미란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분명 지식적유희를 말할것이다. 간접적경험, 감동으로 말할 때 만화를 보는듯 홀가분한 유모아감일것이다. 책을 덮은뒤 무겁고 비장한 정서를 가지게 된다면 그게 오히려 이상하게 느껴지는 현시대의 열독심리상태이기도 하다. 문학은 작가의 상상, 감정을 독자의 상상력, 감정에 호소하고 감동시키는것이다. 2. 독자의 위치 현대비평이 거둔 가장 괄목할만한 업적은 어쩌면 독자의 재능을 발견하고 부당한 대우를 받던 독자의 위치를 새롭게 자리매김해준데 있다. 독자는 자유로운 신분이다. 문학은 별다른 선택이 없다. 오직 자기에게 속하고 자기를 열애하는 독자를 쟁취하는 길뿐이다. 문학예술은 발송인에서 접수인으로 일방통행으로 보내지는 소포같은것은 아니라 감정의 소통수단이다. 감정의 통과작용이기때문에 일방통행일수 없듯이 심혼의 울림이 없는 작품이 살아남을수 없다. 흔히 독자는 무서운 군체라고 하는데 작가가 심혈을 쏟아부어 생산한 정신산품ㅡ책을 구매해주는 큰 손이고 열독주체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문학령역에는 작가ㅡ문학이라는 두점과 선이외에 이 량자와 등거리관계에 있는 세번째 점인 독자의 존재를 중시해야 한다. 문학령역에 이 세개의 각색이 곧 “문학의 기묘한 3각지대”를 이루고있다. 물론 작자의 창작과 독자의 열독수요가 이 3각지대에서 주요한 모순으로서 기타 모순과 서로 련관되여있거나 굴절반사가 되여진다. 문학작품은 독자에 의해 진정 강한 생명력을 가지게 되고 작품이 재창조된다. 독서는 텍스트에 의존하며 그 텍스트는 읽고있는 독자에 의해 좌우된다. 그러나 어떤 텍스트의 독서내용은 독자에 따라 무수히 다양한 편차를 가지며  동일한 독자라도 상황이 달라지면 동일한 텍스트를 다르게 읽을수도  있다. 작가의 립장에서 본다면 자기의 “정신수출”이 독자의 심령세계에 “침략”이 될것인지 아니면 “문화건설자”가 될것인지는 작가가 수출한 정신의 우렬과 흡인력유무, 유익점, 그에 반해서 독자가 원래 가지고있는 정신상태와 조건, 당시의 정신적수요에 의해 결정된다. “작품은 독자의 독서행위를 통해서 완성된다.”는 샤르트르의 독자론은 그만큼 소홀히 취급하였던 독자에 대한 중요성을 새롭게 인식시켜준것이다. 문학활동은 작가와 독자의 상호합작관계속에서 진행된다. 독자의 감상에서 정보귀환은 작가의 예술추구에 중요한 참조계로 되며 심지어 일종 고삐가 되여 창작을 제약하기도 한다. 어느 작가는 이렇게 쓰고있다. “작가가 원고지를 펼쳐놓고 창작할 때 미지의 독자의 그림자가 작가의 뒤에 서있으며 작가가 그림자의 존재를 의식하기를 원치않을 때에도 그냥 그의 등뒤에 서있는다. 이 독자는 원고지우에 작가가 볼수 없는, 그러나 마멸해 버릴수 없는 표기를 찍어놓는다.” 아. 똘쓰또이도 “개인의 창작경험에 근거하여 나는 내가 쓰려는 작품의 응당 있어야 할 력량과 질량은 나의 심목중에 제일 먼저 제기되는 독자와 관련된 개념에서 얻어진다는것을 알았다.”고 쓰고있다. 이렇듯 여기에는 상품을 련결점으로 한 량자의 긴밀한 합작이 수요되거니와 전제조건이 있다. 작가는 자기의 정신수출행정에서 무엇보다 먼저 독자는 단순히 수동적기능만 갖는것이 아니라 력사형성의 에네르기가 되고있는 점을 전제로 삼아야 하며 문학작품의 력사적생명은 그 수용자 즉 독자의 능동적참여에 의해서 련속성과 재생산성으로 발전할수 있다는 점을 명기해야 할것이다, 따라서 문학의 력사는 작품의 전달기능과 마찬가지로 독자와의 대화적이며 과정적관계를 전제로 한다는 점을 도리로서가 아니라 정감적으로 알아두어야 한다. 3. 독자의 류형 광의적의미에서의 독자는 책을 읽는 모든 사람들을 포섭하고있다. 여기서 말하는 독자란 문학작품을 읽는 독자를 말한다. 열독심리에서 착안한다면 능동형, 피동형, 참여형, 구지형, 소일형이 있고 열독효과에서 본다면 일반독자, 초일급독자, 작품의 원뜻을 등진 창조형독자가 있다. 감상수준을 평가하여 경험있는 독자, 리상적인 독자, 유능한 독자, 진부한 독자, 둔감한 독자…등으로 나눌수도 있고 감상기호로부터 우아한것과 통속적인것으로 나눌수도 있다. 여기서 흥미, 환원과 이변, 오해와 공명 등에 층차성이 생긴다. 독자의 층차를 또 제1독자(작자 및 가족, 친우 등)와 제2독자(편집. 출판인)과 제3독자(문학계, 평론계)로 나누기도 한다. 이런 부동한 독자층이 문학활동에서의 참여정도를 결정한다. 여기서는 제4독자층에 대해 연구한다. 이 층차의 독자층은 가장 방대한 구매대오로서 문학에 “명성”을 가져다주기 때문이다. 이 독자층에 문학형독자층이 따로 있는데 구지형독자를 비롯해서 문학에 매료되였거나 학습하여 장차 문학창작권에 들어서려 시도하는 독자가 들어있다. 다음 비문학형독자군에는 우연하게 혹은 경우에 따라 문학작품을 읽는 독자, “핍박”에 의해 열독하는 독자(광범한 학생층), 소일형, 오락형독자 등이 포괄된다. 이런 분류는 이딸리아 “접수미학” 학자인 모르가리의 분류법에 근거한것이다. 문학형독자군속에도 통속문학독자가 절대 다수를 차지한다. 이 부류의 독자들은 생활경력, 경제상황, 정치, 사회지위, 문화정도, 지식결구, 도덕관념, 심리상태, 감상수준 등 제원인으로 하여 문학에 부동한 리해와 평가를 가지게 된다. 그러나 문학을 실제로 가능케하는 주체가 누구인가에 초점을 맞추게 되면 작가와 독자는 동등한 립장이 된다. 소설가가 없으면 소설독자가 존재할수 없듯이 소설독자가 없으면 소설가도 존재할수 없다. 독자가 문학의 운명을 결정하기에 이른 현시대가 된것이다. 목전, 인터넷문학이 흥성하면서 인터넷문학이 대성황을 이루었는데 네티즌들의 열독의식, 열독심리는 “변수”로서 전면적이고 객관적일수도 있고 편파적이고 주관적 일수도 있기에 작가의 주관관념이 독자들의 열독심리, 심미취미와 등호로 성립될수는 없다. 이것은 문화소비에서의 절대현상이다. 4. 작가와 독자 작가와 독자는 비유하건대 기하학상에서 직선으로 련계되는 두개 점이고 사회학이라는 이 망망한 대해속에서 서로 흡인하고 의뢰하는 두개의 마음이다. 싸르트는 ≪문학이란 무엇인가?≫에서 “모든 작품은 일종의 부름이다. 쓴다는것은 언어를 수단으로 자신의 기획을 객관적존재로 구체화시켜달라고 독자를 향해 웨치는 행위”라고 하였다. 자기 자신은 누리지 못하는 삶의 기쁨과 의의, 인격의 존엄성을 우리에게 일깨우기 위하여 한평생 혹사한 그런 숭고한 작가들이 많고 많다. 그러한 작가들의 대작들을 읽으면서 각자의 삶도 시나브로 심화되고 확충되여 간다. 그들 의 격려에 힘을 입어 우리는 인생의 허무와의 싸움에서 이겨나갈수 있고 삶의 가치에, 세계의 아름다움과 신비함에 눈을 더 크게 뜰수 있는것이다. 위대한 소설들은 인간들의 진정한 적은 자신의 독선과 리기심이라는것을 일깨워주었고 이웃에 대한 관심과 사랑이야말로 삶을 존엄스럽게 해준다는 교훈도 주고있다. 실로 작가들은 슬픔과 절망조차도 소중하고 가치있는 부분임을 우리들로 하여금 체험하게 한다. 스티븐슨과 동행하면 보물섬에도 갈수 있고 쎄르반떼스를 따라서 돈 끼호떼의 기사수업을 추적하노라면 시대락오자의 참패가 어데서 오고 그 뼈저린 맛을 알게 된다. 발자끄의 ≪인간희극≫속에서 우리는 각양각색의 문명인의 탐욕과 우매와 비틀어진 인격상에 통탄하게 되고 모파쌍의 ≪미모의 벗≫에서 웅성의 잔인함과 리기심을 보면서 몸서리치게 된다. 몰리에르의 ≪따르뜌프≫에서 우리는 위선과 사악의 근원을 보며 인간의 원죄와 추태에 얼굴을 붉히게 된다. 일반독자이든 전업적안광을 가진 비일반독자이든 한부의 책을 읽을 때 그 작품을 쓴 작가와의 한차례 지력겨룸, 사상, 정감의 겨룸, 관찰과 인식의 겨룸, 표달방식과 능력의 겨룸이라 할수 있다. 작가가 각 방면에서 독자의 우위에 있으면 독자는 탄복한다. 이처럼 독자의 기대심리는 중대한것이다. 공명은 문학접수의 고조계단의 특유한 상황으로서 작품에 대한 독자의 강렬한 심령의 반응이며 혹은 동일한 작품에서 산생된 부동한 독자들사이의 심령감응현상이다. 따라서 자연히 작가군과 독자군의 문화반응문제가 뒤따라 선다. 그것의 첫째로 공명대이다. 공명은 문학접수의 고조계단의 특유한 상황으로서 작품에 대한 독자의 강렬한 심령의 반응이며 혹은 동일한 작품에서 산생된 부동한 독자들사이의 심령감응현상이다. 여기서 두가지 의미에서의 공명이 산생된다. 례를 들어 쉘리의 경우, 당시 영국사람들이 금빛면사포를 쓴 이른바 “도덕”앞에 전전긍긍해 있을 때 쉘리가 일떠나서 그런 도덕의 허위와 잔혹성을 발가놓았다. 그러나 영국사람들이 쉘리에게 안겨준것은 인신공격이였다. 여기서 우리는 예술가치의 실현은 하나의 협조적감상과정이 아니라 충돌의 력사이기도 한것임을 충분하게 알수 있다. 단떼의 ≪신곡≫을 두고 맑스는 중세기의 제일 마지막 시인이자 새 세기의 첫시인이라는 영예의 계관을 내려주었지만 너무나 일찌기 발표한 시인의 시대리상, 시인의 정신과 관념은 프로렌스 공민들에게서 얼마 리해받지 못하였다. 1800년이란 세월이 흐른후 랑만주의가 흥기해서야 단떼의 정신이 이딸리아사람들의 심령속에서 부활되였고 그제야 괴테식정신으로 환기되였다. ≪데카메론≫의 작자 보카치오도 오랜 세월이 지난후에 세계고전작가의 보좌에 모셔졌다. 상술한바와 같이 작가군과 독자군사이에 문화반응은 심각해질수 있다. 현대주의국가들에서도 작가군과 독자군사이의 관계가 팽팽해졌다. 현대파가 직면한것은 한개 문명의 극적변화, 문화렬변의 시대였다. 례하면 카프카, 유네쓰꾸 등의 작품들은 온작 시련을 거쳐서야 독자들에게 접수되였던것이다. 그러나 시대의 렬차는 달리고 승객들은 부단히 바뀌기 마련이다. 그것은 시대가 작가들에게 내주는 다할길 없는 숙제로 되고있다. 책은 누군가와 만나야만 살아날수 있다. 그 마법의 주인공이 독자들이다. 문학작품이 잠들어있는 공주라면 독자가 바로 그 행운의 왕자이다. 하지만 아무나 잠자는 “공주를 깨울수” 없다. 별처럼 반짝이는 눈을 뜨게 할수 있는것은 그처럼 아름다운 공주를 차지할수 있는 자격이 있는 “왕자”의 입맞춤뿐이다. 그만큼 독자와의 문학적대화는 진솔하고 진지해야 한다. 이 점은 작자의 사명감과 더불어 사회적책임성을 규정하게 된다. 검투사가 검으로 말하듯이 작가 는 글로 대화한다. 글의 주재자는 곧 독자들이다. 문학작품이란 작자가 자신의 전부의 능력을 동원한 정신산품이다. 문학예술은 독자의 령혼심처를 울림으로써 더욱 소중하게 되지만 문학의 진동시대는 이미 지나갔다. 이는 시대변화의 현상으로서 독자들의 탓이 아니다. 과거는 물론 현대에는 더구나 작가의 열정적인 감정의 전달, 확산이 어떻 게 독자에게 영향을 주는가 하는 독자의 반응이 그 작품의 사활을 결정하게 되 였다. 헤겔은 “무릇 현실은 모두 합리하며 무릇 합리한것은 모두 현실”이라는 쟁의 있는 명제를 내놓았는데 정말로 문학예술을 그저 소일거리로 삼는다면 문학에 그보다 더 곤혹스러운 조우는 없을것이다. 비유하건대 작가와 독자는 물과 고기의 관계이다. 누가 물이고 누가 고기일가? 량자는 변수관계이다. 작가는 자신이 독자라는 대해속에 하나의 작은 고기라고 생각하면 창작에 근신할수 있고 독자는 자신이 일종 지혜의 집합속에서 정신서식한다고 생각하면 작자가 리해될것이다. 아무튼 작자와 독자는 영원한 파트너이다. 물떠나 고기가 살수 없고 고기가 없는 물은 “사해”이다. 이 점이 오늘날 문학의 삼각지대에 세워진 풍경이다.
36    제 2절 작가의 자아실현 댓글:  조회:3338  추천:21  2007-09-16
                                      제2절 작가의 자아실현 1. 자아실현의 함의 “자아”란 사회심리학상에서는 자아관념, 자아의식이라고 하는데 자기 혹은 타인 및 단체와의 교제중에서 감지나 공제, 나아가서 개체가 자기의 심신활동상태에 대한 감지와 공제를 가리킨다. 근래의 문학리론서들에서 흔히 사용하는 자아개념은 심리학상에서의 개념과 상통한것으로서 작가의 자아는 사회생활에서 작가의 행위방식을 결정한다. 한방면으로는 작가의 일언일행이나 일거일동을 제약하고 공제하며 모종 약속력밑에 잡아둔다. 다른 한방면으로는 다른 사람들이 작가가 표현한 행위방식으로부터 작가적자아에 대해 인식을 가지게 된다. 그러므로 작가의 자아는 자아평가와 다른 사람들의 평가속에서 건립되는것으로서 작가의 사람됨을 판정하는 중요한 표지로 된다. 작가가 일반사람들과 다르다고 하는것은 작가의 자아가 사회생활에서 그의 행위방식을 규정지을뿐만아니라 작가의 인식활동도 결정하므로 작가의 위인과 창작은 불가분리이기때문이다. 작가의 자아본질은 일정한 사회관념이 작가의 몸에서의 내화로서 작가의 성격, 정감 및 문화자질상의 특징을 띠게 된다. 인간의 수요심리에서 가장 높은 층차는 자아실현이다. 예술수요가 바로 자아실현의 표현으로서 인간의 본연이며 실현하고자 하는 잠재력이다. 지난시기문학창작에서 “자아표현”문제는 이단사설로 되였는데 극좌사상으로 작가의 자아표현의 합리성을 부정해온데서 인기된 사상상의 관성이라 할것이다. 자아실현은 문명의 주체의 척도로서 선명한 시대특징을 가진다. 자아실현은 한개 력사적범주이며 또한 한 개체생명의 표준이다. 이에는 두개층차가 있다. 하나는 어느 방면에서 인간의 능력이 미칠수 있는 수준이고 다른 한방면은 본질적력량의 종합적실현이다. 자아실현의 조건은 자아와 환경관계이다. 작가는 자아실현을 수요하고 예술공능도 작가로 하여금 자아를 실현하게 한다. 2. 자아실현의 자세 매 한가지 심미규범에는 모두 주관과 객관 두개 방면이 있는데 미적감수는 창작주체와 심미객체의 관계속에서 산생된다. 때문에 예술미감의 성질은 순수하게 객체의 성질에 속하는게 아니라 량자의 융합에 속하게 된다. 그중에서 주관인소가 주요하고 결정적이다. 레브 똘쓰또이가 “사람들은 언어로 서로 자기의 사상을 전달하고 예술로 감정을 교류한다.”고 했듯이 인간의 정감은 토로를 수요한다. 자아실현의 부동한 수요에서 예술수요가 정감특성을 가지고 있는것은 독특한 풍경이라고 할수 있다. 그런데 새 시기 문학예술활동에서 주관작용이 극대화되면서 문학창작을 순 자아표현이라는 다른 한 극단에로 나아갔다. 문학창작에서 자아표현의 존재의 보편성 및 그 본질, 자아표현의 객관적필연성과 의의와 역할을 옳바르게 리해하는것은 창작에 선행되여야 할 관념과 태도이다. 고왕금래의 문학창작실제가 시사하다싶이 “표현형식상 부동한 특점이 있을뿐 예술작품이라고 할수 있는 모든 작품속에 작자의 자아표현의 인소가 포함되지 않은것이 없다. 시는 곧  “언지(言志)”라거나 “연정(缘情)” 이라고 한 선인들의 말은 실질상에서 자아표현에 대해 론한것이다. 벨린쓰끼는 “서정류의 시는 주관적, 내재적시이다.”라고 말하고있다. 고대중국에서 가장 긴 서정시인 ≪리소≫가 바로 굴원의 “자아표현”의 걸작이다. 그는 여러방면에서 시인의 자아ㅡ조국을 아끼고 인민을 걱정하고 세속의 질투와 암해를 분노의 목소리로 질타하면서 아름다운 리상을 추구하였다. 두어라!나라엔 알아줄이 없나니/옛서울 그릴것 무엇이뇨? 손잡고 덕정을 베풀자 없거늘/팽함의 거처로나 찾아가리라! (已矣哉!国人莫我知兮,又何怀乎故都? 既莫足与为美政兮,吾将从彭咸之所居!) 시에서 보여주다싶이 간신들의 모함을 받아 버려진 몸이 되였어도 시인은 자기의 새명과 일체를 조국과 백성의 운명에 긴밀히 련계시키며 개탄하고있다. 진자앙의 ≪유주대에 올라≫서도 시기를 만나지 못하고 지기도 없이 고립무원한 처지와 인생이 덧없이 늙어가는 비분강개함을 눈물을 머금고 절절하게 토로하고있다. 그러나 고독한 시인의 자아의 뒤에서 빛나는 보다 숭고하고 포용적인 시인의 자태를 볼수 있으므로 시인과 함께 흐느끼고 동정하게 되는것이다. 앞에간 옛사람들 까마득이 사라지고 뒤따르는 사람들도 보이지 아니하니 천지를 생각하며 나홀로 외로이 슬픈 눈물 휘뿌리노라. (前不见古人,后不见来者, 念天之悠莜,独伧然而涕下. ) 이렇듯 예로부터 시작품들에서는 시인의 자아를 표현하고있다. 서정시에서는 시인이 “자아”를 대상으로 하고 주관정서를 특징으로 하기에 작품속에 자아의 표현이 직접적으로 뚜렷이 드러나지만 서사적문학에서는 “자아”는 표현이 더 함축적이고 심각하다. 레닌이 레브 똘쓰또이를 “로씨야의 거울”이라 하였는데 이 “거울”속에는 당시 현실생활의 축영이 비껴있는 외에도 작가의 주관적 인소들도 비쳐있다. 말하자면 “로씨야사회에 대한 비할바 없는 화폭뿐만아니라” “분명”하면서도 또한 “종교에 미친 지주”의 모습이 비쳐있고 다른 한 일면에서는 “사회적거짓과 허위를 반대하는 극히 강력하고 직접적인”작가의 숭고 한 령혼이 비껴있다. 결 과적으로 말하면 작가는 소설로서 자아를 빛나게 실현한것이다. 창작활동에서 주관과 객관, 창작과 생활에 대한 관점과 태도의 부동함에 따라 작품에서 체현되는 “자아표현”도 달라진다. 랑만주의자들은 작작의 주관과 리상이 강조되고 자기가 희망하고 보고싶은것을 표현하며 내심세계의 표현과 상상이 창작에서 노는 구실을 중시하기에 필연적으로 그 표현이 선명하고 강렬할수밖에 없다. 작품속의 인물들은 실제상 작자의 리상의 화신이며 예술형상들은 작가의 주관인소의 직접적인 현연이다. 서방현대파는 객관현실의 실재성을 부정하면서 눈길을 자아세계에로 돌리며 주관적이고 내재적인소를 발굴할것을 강조한다. 그들의 창작은 주관인소의 작용을 극도로 과장하기에 생활실제를 완전히 탈리한 순수의 “자아표현”이 되여 문학예술창작에서 자아표현의 합리한 인소가 반면에로 나아가게 하였다. 사실주의문학에서의 자아표현은 사물에 대한 객관적묘사와 결합되여있다. 문학작품에서의 자아표현은 작가의 자아정신세계의 풍부성과 독특성이 작품속에서의 표현이며 예술창작규률과 련계된 있을법한 현상으로서 주관념원에 의해 전이되는것이 아니다. 괴테는 “예술가는 정체로써 세상과 대화한다. 그러나 이 정체는 그가 자연계에서 능히 찾을수 있는것으로서 그의 마음과 지혜의 결실이다.”라고 쓰고있다. 이른바 “마음의 결실”은 비록 사회생활속에 뿌리내리지만 작가의 정신적창조이다. 예술창작과정에 이런 인소들은 부동한 작용을 하며 창작의 전과정을 제약하며 작품의 풍모, 품격, 가치와 효과를 결정한다. 작가의 자아는 일종 복잡한 정신인소의 총화이다. 그속에는 작가의 세계관, 예술관, 심리, 성격, 정취와 애호, 예술경험과 재능 등외에도 작가의 신세, 경력 심지어 모종 유전과 생리인소까지 포괄되며 예술창작과정에 풍모, 품격, 가치와 효과를 결정한다. 진자앙의 유주대에 올라 눈물을 흘린것이나 림대옥이 지는 꽃을 보고 마음이 찢기는것이나 다 그의 자아와 련계된다. 레브 똘쓰또이는 “작가가 묘사한 사람이 성인이든, 강도이든, 황제이든, 노복이든 우리가 찾아보려는것은 작가 자신의 령혼이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작품속에서의 자아표현은 결코 특수한 형태를 가지고 있는것은 아니다. 프로벨은 “예술가는 그의 작품속에 마땅히 하느님처럼 자취를 감추고있으면서도 만능이여서 도처에서 그가 볼수 없는 그를 감수하게 한다.”고 했다. 작가는 자기 작품속의 인물에 생명을 부여함으로써 자아를 표현한다. 발자끄의 자아가 있었기에 천고절창의 ≪인간희극≫이 있게 되였고 조설근의 자아표현욕이 있었기에 ≪홍루몽≫이 있게 되였다. 작가의 정신세계의 본질로 말하면 작가의 자아를 둘러싸고 건립된 방대하고 다변하는 의식결구로 사회의식결구의 축도로 된다. 괴테는 파우스트에게 세기적인 새 생명을 부여하였고 로신의 자아표현이 있었기에 아Q라는 불행하고 세상과 다툴줄 모르는 인물이 창조되였다. 더 례를 든다면 죠이스가 없었다면 ≪율리시즈≫가 없을것이며 마르쿠스가 없었다면 그의 ≪백년의 고독≫이 존재하지 않을것이다. 3. 자아실현의 가치척도 사람들은 자아표현이 문학예술창작의 보편적규률이라는것을 갈수록 더 공인하고있다. 특히 서정시에서 작가의 자아는 자아표현의 형식을 취하여 개인정감을 토로하는것으로 사회생활을 반영할수밖에 없는데 이에는 작가의 자아의 락인이 찍히게 된다. 작품의 심미가치의 고저는 오직 작가의 자아표현에 독특한 가치척도와 개성척도가 있는가에 의해 결정되지만 반드시 자아로 관찰하고 체험하고 다른 사람의 자아를 그려냄으로써 다른 사람의 령혼의 전률을 통찰해야 한다. 작가에 의해 나온 타인의 자아는 결국 작가의 자아의 일종 이화이며 작가의 자아에서 파생되여 나온것으로서 공제와 제약을 받는 가상적자아인것이다. 그러면서도 작가의 자아는 작가의 진실한 자아를 핵심으로 하고있다. 작가의 진실한 자아는 정신세계속의 창작의식을 공제하기마련이다. “자아표현”은 예술내용의 주관적정신인소이고 작품속에 반영된 객관사물은 곧 내용의 객관인소이다. 문학내용은 바로 이 두개인소의 통일이다. 그 통일은 절반대 절반의 가하기가 아니라 주관인소의 지배속에 상호침투되여 융합된것이다. 만약 예술작품의 객관적인소를 육체라고 한다면 예술의 주관인소(사상, 경향, 심미관점) 즉 작자의 “자아”는 예술작품의 령혼이다. 만약 자아를 실현하기 위해 문학작품을 창작한다면, 만약 강렬한 주관격정에 시대적냄새가 없다면 작품은 곧 태여나자마자 요절하고 말것이다. 4. 자아실현의 개성과 공성 작가의 자아실현에는 개성과 공성문제가 제기된다. 자아는 주관적특점을 가지고있고 개성특점도 가지고있다. 매 하나의 자아는 모두 하나의 개성으로서 창작개성과 독특한 풍격을 형성하는 내재적근거이다. 이 두가지는 예술창작에서의 “자아표현” 일종 형식이다. 여기서 “강렬한 주관격정”은 예술에 령혼과 생기를 부여하는 자아적이고 주관적인 표현이다. 그 경우 작가가의 자아는 아름답고 고상하며 미래지향적이고 풍부하고 타채롭고 확실하고 투철한것이여야 한다. “자아표현”은 작가의 자유이고 본능이지만 자기의 신변잡사에 불과한 쇄말주의적(트리비얼리즘)적인 비속하고 소극적인 “자아”는 태생적으로 무가치하고 생명력이 박약하게 된다. “물론 문필활동에 있어서는 기계적인 평균화라든가 소수에 대한 다수의 지배라든가 하는 일은 가장 있을수 없는 일이다. 물론 이 활동에 있어서는 개인의 창의성이나 개인적기호의 자유, 사색과 환상, 형식과 내용의 자유가 보다 많이 보장되도록 하는것이 절대로 필요 하다. 이러한 모든것은 다툴수 없는 일이다.” 쁠레하노브는 “사상이란 그 무슨 세계를 탈리한 독립적인 존재가 아니다. 어떤 개인의 사상이든 모두 이 세계에 대한 그의 관계로부터 결정되며 풍부해진다. 한 개인과 이 세계와의 관계가 자기의 ‘자아’를 유일한 현실로 간주하는 지경에 이른다면 그는 영락없이 사상빈곤자로 전락하고말것이다.”라고 하였다. (예술과 사회생활) “하나의 예술작품에서 기본적인것은 응당 개인의 생활범위를 멀리 초월한것이 되여야 한다. 시인은 응당 인간의 신분으로 개인 내지 전 인류의 정신과 심령을 표현해야 한다. 예술령역에서 개인 요소가 끼여드는것은 하나의 결함으로써 있어서는 안된다. 만약 하나의 예술형식이 주요하게 개인적인것이라면 그것을 다만 정신면으로 대해야 한다.” 칼 융의 이 주장은 예술은 자아를 표현하거나 개성을 표현할것이 아니라 인간 및 인간의 정신심령ㅡ력사적으로 침전된 집체무의식의 표현이라는것이다. 그러나 벨린쓰끼는 정채롭게 쓰고있다. “문학의 다른 측면, 사실적문학, 생활의 문학, 현실의 문학, 진정하고 참다운 현대문학이 나왔다. 이 문학의 특수성은 현실에 대한 진실한 묘사에 있다. 이 문학은 생활을 개조하는것이 아니라 재현하고 부흥시키며 생활의 다양한 현상들중에서 완전하고 활기있고 유일한 화폭에 필요한것들을 선택하여 하나의 렌즈처럼 반영한다. 이 내용이 가지는 내용의 분량과 한계는 문학작품의 위대성과 재능으로 규정되여야 한다.”
35    제 2 장 문학의 삼각지대 , 제1절 작가와 문학 댓글:  조회:3212  추천:24  2007-09-16
                                               제2장 문학의 삼각지대                                              제1절 작가와 문학 1. 작가와 문학 문학이 개체의 사상감정이나 정서의 표혀이라는 정의외에도 자주 우리의 입에 오르는것은 문학은 현실의 반영, 표현이라는 말이다. 문학작품은 개인적창작물인 동시에 사회적산물이며 개성적문제로 표현되는 동시에 의사소통이라는 사회적보편성을 지녀야 하고 또한 작가, 작품, 독자라는 사회적3각관계를 떠나서는 성립될수 없다. 문학, 사회학자, 수용미학자들은 작가, 작품, 독자를 동일선상에 놓고 본다, 한네로레 링크는 작가를 세가지 형태로 나누었다. 1) 사실로서의 작가: 일정한 체험과 생활의 내용을 가진 즉 개인적인 삶이 강조된 경우의 작가를 말한다. 그의 작품은 그 나름대로 개성적인 삶의 세계를 가지는 전기적자료에 그 자체이기도 하다. 2) 추상으로서의 작가: 함축적인 작가라고도 하는데 일정한 작품의 생산, 창조하는 예술가 혹은 의식의 탐구자로서 주제의식의 작가 혹은 사상가로서의 작가를 가리킨다. 3) 허구로서의 작가: 해설을 중시하는 작가로서 작품속에 직접 등장하여 일정한 허구적현장에 대해 진술하는 작가를 의미한다. 문학작품은 외부세계의 사물이 작가의 내적정신상태에 의해 문학으로 전환된것이다. 서정주의 ≪국화 옆에서≫를 례를 들어보자. 한송이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봄부터 소쩍새는 그렇게 울었나 보다. 한송이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천둥은 먹구름속에서 또, 그렇게 울었나 보다. 이 시행은 시인의 내부세계에서 우러나온것으로서 시인의 일부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의 내부에 꿈틀거리는 일련의 충동들이 자연발생적인 힘에 의해 스스로 흘러나온것이다. 이 시에 사용된 이미지들은 시인의 내적정신 상태가 투영되여 하나의 상징체계를 이루고있다. 국화꽃, 천둥, 먹구름이 상징하는 그 세계에 시가 살아있다. 2. 작가의 창작정신 작가는 왜 신들린듯이 창작욕에 불타는것일가? 마슬로의 수요층차설에 따르면 “수요는 생명활동의 필연이고 가장 높은 차원은 자아실현”이다. 인간의 그 많은 수요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예술수요는 일종 필연의 수요이고 다시 자아실현의 수요가 된다. 로단은 “예술은 곧 감정이다.”라고 하였다. 레브 똘쓰또이는 “사람들은 언어로 상호자기의 사상감정을 전달하며 예술로 자기의 감정을 전달한다.”고 하였다. 작가의 정신은 기타 정신현상과 달리 초월성, 실상성, 변이성으로 특징지어진다. 례하면 작가적심리고통은 창작활동과 동반된다. 이는 일종 심각한 고통으로서 작가는 이 고통을 표현하기 위해 창작한다. 작가의 고통은 지혜의 고통으로서 위해한 작가일수록 그 고통은 거대하고 침중하게 표현된다. 그러나 헤겔은 “하나의 심각한 령혼속에서는 고통이 어디까지나 그 미를 잃지 않는다.”라고 쓰고있다. 이와 관련된 작가의 정신현상은 작가정신의 일종 비애라 할수 있다. 이런 시점에서 작가는 미쳐야 미칠수 있다고 하는것이다. 한세대 한세대를 내려오면서 위대한 작가들은 정도부동하게 이런 고통과 비애를 가지고 자기 작품에 그런 인생정서를 반영하였다. 적막감도 작가들의 한가지 정신현상이다. 이것은 작가의 사회적각색과 예술생애와 유관되는바 초월의식을 가지고있으므로 해서 동시대인들이 몰리해하거나 랭대하기도 하였다. 작가의 적막감은 자아성찰에 유조하며 내재적생명의 심도를 추구하게도 한다. 작가의 창작욕망은 내심의 수요, 외재적충격이 아닌 내구력(耐久力)에서 산생된다. 이를테면 도덕적력량의 촉동, 사명감 등등에 의해 인간과 인간, 개인과 사회, 주체와 객체자유와 필연간 모순속에서 정신적배신감, 정감의 표출, 념원의 기탁물을 얻으려한다. 작가의 고통은 지혜의 고통으로서 위해한 작가일수록 그 고통은 거대하고 침중하게 표현된다. 작가의 정신현상은 심미방식으로 표현되는 천지만물과 인간에 대한 감정, 태도이기도 하다. 3. 작가의 필요조건 1) 작가의 사유자질 작가의 사유자질구성은 일반사람들과 다른바 형상사유력이 특별히 강하다. 보통사람들에게는 한낱 사유대상에 불과한것도 작가에게는 벌써 감각대상으로 되여 신묘한 도리로 인상지어진다. 인간의 대뇌좌반구는 “과학형”이고 우반구는 “예술형”이라 하는데 작가는 보통 우반구공능이 발달되여있다. 그리하여 작가는 허구라는 이 지레대를 잘 운용할수 있는것이다. 문학창작에서 허구는 그 자체가 생활에 대한 관찰이 축적된 결과일 때에만이 비로소 바람직한 전형형상을 창조할수 있다. 그러나 고리끼는 “관찰하고 연구하고 아는것만으로는 부족하다. 더 나아가 ‘허구하며’ 창조하는것이 필요하다. 창작이란 수많은 쇄말사들을 완성된 형식을 갖춘 하나의 일정한 전일체속에 결합시키는것이다.”라고 투철하게 천명하고있다. 작가의 관찰은 기계적광학화의 과정이 아니라 이미전에 축적된 체적영상, 원형에 바탕을 둔것으로서 그런 감각, 지각에서 얻은 직관영상은 잠재사유의 려과를 거친 저급적이미지이다. 다시 심미의식과 려과를 거치고 제련을 거쳤을 때는 그 형상이 더욱 선명하게 심미가치가 있는것으로 부상된다. 이런 사유재료의 특징을 형상성, 독창성, 운동성, 제시성이라고 지칭한다. 작가의 기본사유형식은 형상사유이고 특수사유형상은 령감사유이다. 지각이 일반적형상직관, 직감을 초월하여 갑자기 얻어지는 모종 깨달음이 령감사유인데 기실 그것은 직각의 특수형식이다. 령감의 특점은 비자각성과 돌발성, 비일반성, 독창성이다, 령감사유는 잠재의식 현의식적통감에서 얻어지기도 한다. 작가의 사유자질에는 정감의 경향성도 들어있다. 작가의 정감은 창작사유에 발동을 걸어주는 작용을 하며 창작과정을 추진한다. 즉 예술직각, 직감은 정감이라는 이 “만유인력”에 의해 맹렬한 창작활동이 전개된다. 2) 작가의 심리자질 작가가 구비해야 할 심리자질을 다음과 같은 몇가지로 고찰할수 있다. (1) 작가의 인격심리: 인격이란 일정한 경향성을 띤 각종 심리자질의 총화로서 곧 진실된 그 사람이다. 작가는 늘 이 세계에 대한 심미관계속에 얽매여있는 심미류형의 인간이다. 작가의 첫째로 되는 인격특질은 심미성이다. 작가는 늘 심미적안광으로 사물을 관찰하고 평가하고 판단하며 심령의 민감성과 비론리성을 드러낸다. (2) 정서심리: 작가는 곧 인류정서의 대변자이고 자아정서의 표현자이기도하다. 작가의 정서에는 량극이 뚜렷한바 걱정이 많고 선심도 잘 쓰는게 작가의 보편적정서특징이다. 작가는 창작의 격정상태에서는 완전히 무아상태에 빠진다. 발자끄는 일단 붓을 날려 창작에 몰두하면 마치 마귀가 접한듯 자기가 쓰고있는 작품세계에서 환각세계까지 만들어내군 하였다. 창작과정에 있었던 일련의 일화들은 지금까지도 작가의 창작미담으로 전해지고있다. 3) 창작주체의 필요조건 (1) 생활루적: 작가지망생은 생활의 대학이 가장 훌륭한 대학이지만 풍부한 경력이 작가수련의 충분조건은 아니다. 체호브는 “만약 인간과 생활을 묘사하려 한다면 늘 생활을 체험하고 생활에 익숙해야 하지 서책연구를 해서는 아니된다.”고 가르치고있다. (2) 작가적안목: 작가는 찬 눈길로 세상을 보고 따스한 가슴으로 인류 일반을 포용하며 생활의 바다에 량지와 사색의 갈구리를 던져 인생의 의미를 낚는 지성인이 되여야 한다. 보고싶은것만 보는것은 유흥객의 시각이고 보이지 않는것을 보아내는것은 관찰자의 시각이며 보이지 않는것의 뒤를 투시하는것이 작가적안목이다. (3) 예술능력: 소위 예술능력이란 곧 창작주체의 예술감수능력, 예술발견능력, 예술표현능력을 가리킨다. 도브롤류보브는 쓰고있다. “감수력이 비교적 민감한 사람은 예술가의 기질을 가진 사람이다. 그는 주위의 현실세계에서 한 사물의 가장 밑바닥에 깔려있는 첫사실을 발견했을 때 강렬한 감동을 받는다. 예술능력이 없는 사람은 강산을 두루 밟았어도 남는것은 한때 감탄뿐이다.” (4) 사상준비: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것은 고통스러운 사색에서 생성된 사상이다. 그 사상은 정치와 련관되는것만은 아니다. (5) 문화지식: 예술수양은 다만 창작활동에서 필요조건이지 충분조건이 아니다. 창작주체의 다방면의 수양에는 연박한 지식이 선행한다. 만권책을 독파하고 만리길을 걸으면 붓놀림이 귀신같이 된다는 고훈이 있다. 이것은 리론지식과 실천의 결합을 제시하고있다. (6) 상상력과 련상능력: 상상력은 작가의 자질에서 기본적인 자질이다. 그만큼 창작능력의 동력인 상상력의 래원에 있다. 프랭클랜은 “아무것도 배운것이 없고 재주도 없는 사람의 상상력은 비록 날개는 있지만 발이 없는것과 같다.”라고 정채로운 비유를 하고있다. 이를 더 전개한다면 상상력이 없는 작가는 기름이 없는 등잔과 같고 운전할줄 모르는 자동차임자와 같다고 할수 있다. (7) 작가의 인격력량: 작가는 일반적으로 강한 심미감수능력이 있기에 직각인상이 곧잘 산생되고 정감, 사유, 의지와 정서가 수시로 표상으로 전화한다. 이점을 문학자질이라 한다. 작가의 지식결구의 특점은 형상화, 생활화, 미학화이다. 작가의 지식은 형상지식으로서 감성직관의 형태를 보류한 리성지식이기도 하다. 구체적지식결구에는 생활지식, 전업지식 및 보조지식, 세개 기본요소가 있는데 학자형 작가라야 유능한 작가자질을 갖추었다고 말할수 있다. 작가의 창조정신은 창조력의 격소로서 창조성활동에 구비되여야 할 자각성, 능동성, 방향성을 가리킨다. 창조정신의 특수성에는 작가의 폭발성, 변통성, 독특성이 포괄된다. 작가의 인재적인 요소에는 내적인소와 외재인소가 있다. 내재적인소에는 지력상수와 창작시의 심리와 지혜활동수준이 포괄되는바 곧 관찰력, 감수력, 상상력이다. 작가의 첫째로 되는 인격특질은 사명감이다. 즉 다른 사람의 마음을 리해할줄 아는 포옹력, 따뜻한 인간애와 관용적태도, 미적발견과 창조로써 사막화되여가는 인정세계에 한뙈기 록지를 개척하려는 사회적사명감 등이다. 작가의 직업도덕의 핵은 곧 예술적량지로서 바로 작가적인 진솔함이다. 작가의 둘째로 되는 인격특질은 자률성이다. 작가는 언제나 자아가치와 정감으로 자기의 생활을 지배하며 다분히 자기의 내심세계에 의거하여 자아를 실현한다. 작가는 객관적제약에 달가와 하지 않으며 기이한 환상에 잘 빠지고 보통사람과 모종 심리거리를 가지고있다. 작가에게는 고도의 자률정신이 있어야 한다. 문학작품이라는 정신산품을 만들어 내는 “자유직업자”인 작가의 륜리적력량은 주요하게 자아의지, 주동적인 선택능력을 배양하는데 있다. 내재적인 자신의 자각명령ㅡ그것의 준수를 작가의 도덕자률이라고 한다. 작가의 셋째로 되는 인격특질은 자아실현성이다. 작가는 최고의 감정세계의 미를 인생의 본체가치로 간주하기에 자아인격가치실현이 인생의 기본목적이 된다. 따라서 생활추구는 자기창조과정에 있다. 작가의 인격결구는 작위성을 고유하고있다. 그 한가지는 교체인격성으로서 부동한 시간에 두가지 부동한 개성특징을 표현한다. 례하면 창작할 때와 실제생활속에 있는 그가 다를수 있다. 작가들에게는 자체의 고유한 륜리가 있어야 한다. 작가의 륜리에는 지적도덕과 지적능력이 포괄된다. 지적도덕이란 작가의 몸에서 현시되는 예술진리에 대한 지혜적도덕가치 및 일정한 사회도덕원칙과 규범에 따라 운용하는 지적도덕품질이다. “문여기인”이라 하지만 작가의 인격과 정조와 품행 등은 각종 도경을 거쳐서 작품과 하나로 융합될 때 명실상부한다. 작가의 인품은 흔히 작품의 격조와 정조, 질과 품위에 영향주지만 작가의 인품과 글의 품격이 절대적으로 일치한것은 아니다. 다음 생활관과 예술관념에 차이가 있기마련이므로 작위현상은 피면하기 어렵다. 그리고 인격결구의 이중성, 다중성이다. 일부 객관원인으로 하여 작가가 모종 관념 혹은 심미요구에 영합하거나 막부득이 복종하여 개성품질이 희생당하거나 억압당할수 있기때문이다. 4. 작가의 사회의식 문학작품에 나타나는 작가의식은 현실반영의 렌즈이며 그 렌즈의 각도에 따라 작품에 드러난 현실반영의 명암이 갈라지고 세계관을 엿볼수 있다. 문학은 사회적반영이라기보다는 사회적굴절이다. 여기서 굴절이란 말은 사회현실을 조명할 때의 작가의식을 가리킨다. 사회의식이란 사회생활의 정신적방면을 가리킨다. 이에는 철학적, 정치적, 종교적 제견해가 포괄된다. 문학은 언제나 시대의 앞장에서 해당 사회의식을 충실하게 담는 큰 그릇이 된다. 문학창작에서 표현되는 작가의 사회의식을 대체로 다음과 같이 개괄할수 있다. 1) 주체의식 세계는 문학활동의 기본요소의 하나이다. 주관세계이든 객관세계이든 인간은 문학이 반영하는 “세계”의 중심이다. 따라서 문학창작에서 주체는 작가이며 특별히는 작가의 주관인소로서 인식능력과 창조능력외에도 심미의식이 핵심인소이다. 주체의식은 작가에게 있어서 창작생명이다. 작가의 주체정신은 부동한 층차를 이루고있다. 주체의식의 최고층차는 작가의 자아실현으로서 정신세계의 자유적개척이며 내우주의 대문을 활짝 열고 외우주의 맥박에 감응되여 참신한 내우주를 창조하는것이다. 주체의식에는 세가지 특징이 있다. 첫째, 세속관념, 상규적생활, 전통적습관에서 오는 편견의 속박에서 해탈하려는것, 둘째, 거대한 력사적투시력과 예견성으로 세속세계의 시공간계선을 초월하려는것, 셋째, 자아의 감정을 인류사회에 개방하면서 다른 사람을 사랑하고 인류를 사랑하는 가운데서 개체의 주체가치를 실현하려 하는것이다. 2) 심미의식 심리학에서의 심미의식은 미적태도의 의식과정을 가리키며 철학관점에서 말하면 미적가치에 대한 직접적체험을 의미한다. 심미의식은 작가의 창작에서 유익한 창작원천의 발굴자이며 간거한 창작활동에서 유력한 지레대이다. 근년래 작가들의 문학관념은 풍부해지고 가능한 확장되였다. 3) 력사의식 력사의식이란 작가가 목적의식적으로 전반 력사진전가운데서 생활의 흐름과 변화를 파악하는 정신자세를 말한다. 물론 력사대사변을 묘사할것만 요구하는것은 아니며 작가로 하여금 태고시기에로 돌아가서 민족생활과 민족정신 속에 원시적이고 몽매한 본능적인 습관, 풍속과 의식을 쓰라는것이 아니다. 4) 미래의식 미래의식이란 작가가 자각의식을 가지고 전면발전의 안광으로 가능하게 예견할수 있는 객관세계와 문학예술의 발전추세를 파악하고 자신의 창작방향과 자세를 부단히 조절, 갱신해나가는 창신의식이다. 5) 우환의식 작가의 주체성실현에는 자유의식외에 반드시 고도의 사명감이 있어야 한다. 이는 작가의 심령과 력사시대의 맥박과 통하는것을 가리키는바 인간세상의 일체 고뇌를 짊어지고 력사가 남겨놓은 온갖 부담을 짊어져야 한다. 작가의 사명의식은 필연적으로 깊고 넓은 우환의식으로 표현된다. 6) 참회의식 참회란 반성과 새 인식이라 할수 있다. 참회자가 림하는것은 만구할수 없는 력사성적인것이므로 그 참회는 필연적으로 감정상의 고통과 령혼의 내재적시달림에 모대기게 된다. 7) 관용의식 작가들은 보다 성숙한 력사적안광과 인생의 지혜로 착잡한 생활현상과 형형색색의 세속인생에 대해 될수록 많이 리해하고 민중과 함께 호흡하면서 인생현장의 본질을 투시할 때 자신감을 가지고 초월하여야 예술표현작업을 진지하게 진행할수 있다. 8) 민족문화의식 문학의 “뿌리”는 마땅히 자기 민족문화전통의 토양속에 깊이 뿌리내려야 한다는것은 두말할것 없다. 소설창작에서 민족의식의 침투는 옛것에 대한 미련이 아니며 복고사상이나 전통에 대한 특수한 회포가 아니라 민족성으로 충만된 현실생활에 대한 깊은 발굴이며 분석이고 표현이다. 9) 위치의식 작가는 때론 일종 역향적정감활동을 표현할 때가 있다. 작가는 투철한 력사의식으로 세계에 대한 묘사를 진행하는데서 일종 미학사상의 위치가 뒤바뀌는 현상이 출현할수도 있는데 이런 위치바뀜(错位)현상을 반영한 소설내용은 단순한 심미충돌이 아니라 복잡다단한 미학적사색의 결과이다. 10) 철학의식 작가는 작가이기에 학자가 되여야 하고 철학가가 되여야 한다. 예술사고는 언제나 철학적사고가 선행되여야 인간이 력사와 현실속에서 차지하는 지위와 가치, 의의를 바르게 분석판단 할수 있다. 11) 작가의 문제의식 영국의 시인 테드휴즈의 ≪시작법≫에 문제의식을 가져야 한다는 구절이 있다. 어떤 사물을 대할 때나 어떤 생각을 할 때, 그리고 정치, 경제, 사회와 문화적현상을 대할 때 문제의식을 가지는것, 이것이 문학정신이며 핵심적인 작가정신이다. 작가의 문제의식은 소재의 터밭이며 창작충동과 핵심주제를 키워내는 온상이며 문제의식은 열독심리에 유력한 흥분제로 된다. 12) 작가의 성의식 작가는 끈질기게 현실과 력사일반에 대해 고발하고 력사를 초월하면서 성문화에 대해 인간적으로, 철학적으로 사고할수 있어야 한다. 작가의 심미의식속에서 인간의 성심리와 성관념, 성활동은 단순히 인간의 생리기제로 파악되는것이 아니다. 작가는 가치관념의 각도에서 성의식을 탐구해야 한다.
34    제 3절 문학예술의 몽롱미 댓글:  조회:3566  추천:12  2007-09-16
                                          제3절 문학예술의 몽롱미 1. 몽롱미리론의 기원 소위 몽롱이란 사물이 모호하여 똑똑하지 않고 밝기도 하고 어둡기도 하여 사이비하고 이렇기도 한것같고 저렇기도 한것같은 현상 즉 명료성과 상반되는 개념이다. 그러나 몽롱성은 미감을 순수화하고 풍부하게 하며 인차 사라지지 않게 하는 특성이 있다. 몽롱미란 곧 형상의 모호, 개념의 불확정성, 터득할수는 있으나 말로 전달하기는 어려운 몽롱하고 함축된 미를 지칭한다. 몽롱미는 보일듯 말듯하고 그 뜻을 밝히기 어려운 미로서 모호미라 지칭하는 미감의 일종이다. 옛글에 “말우에서 용사를 가려내고 달아래에서 미인을 본다.”고 하였다. 미는 일정한 거리감에서도 오지만 몽롱성에서도 온다. 장강 3협의 선녀봉은 일년내내 구름에 덮혀 험준한 절경이 태반이나 가리워진다. 그리하여 “선경절반, 인간세상 절반” 이라는 경구가 나왔다. 일정한 조건하에서 몽롱미는 완전히 로출된것보다 더욱 매력이 있을수 있다. 만약 구름이 걷힌 날 가까이서 본다면 “신선세계”의 절반은 사라지고 들쑹날쑹한 면면한 산봉에 기암괴석만이 보일것이다. 구름속에 달, 교교한 월색, 운무속에 황산, 자오록한 비발속에 잠긴 계림의 산수, 동정호의 묘망한 돛배그림자…등등은 다 몽롱미의 극치라 해야 할것이다. 이처럼 몽롱성은 일부 모종 사물의 허물을 덮어감추고 일종의 특이한 아름다움을 선물한다. 어떤 사물을 있는 그대로 활짝 드러낸 상태에서 자세히 살펴보면 지구적인 미적향수를 느낄수 없을것이다. 마치 확대경속에는 비단결처럼 보드랍고 아름다운 피부가 없는것과 같은 도리이다. 이와같이 몽롱성은 모종 사물의 진면모를 투철하게 꿰뚫어볼수 없게 함으로써 심미심리에 미지의 공간을 남겨 그냥 흥미를 보유하게 한다. 몽롱은 선명함에 상대되는 개념이지만 대천세계에 허다한 객관사물 지간의 계선은 몽롱하고 모호하다. 달빛도 몽롱하고 안개도 몽롱하고 산도 몽롱하고 물도 몽롱하고…안개속에 다소곳한 꽃을 흔상할 때, 물속에서 비낀 달에 홀릴 때, 눈앞아물아물하는 아지랑이 등은 몽롱한 느낌을 준다. 몽롱미는 자연경물중에 고유한 일종의 풍경선이 아닐수 없다 사람들의 전통관념과 관습속에는 몽롱성이 나쁜 의미로 락인찍혀있는데 이는 심미표준의 시대적변천과정에서 생긴 심미심리장애라고 할수 있다. 기실 문학작품에서의 모호이미지, 회화에서 몰롱성 등은 다 미적표상이다. 몽롱미는 일종 미일뿐만아니라 일종 예술풍격미이기도 하다. 몽롱미의 특징은 몽롱하고 모호하며 함축된 형식으로 다의성내용을 표현하여 흔상자로 하여금 알아맞추고 상상해 보고 곰곰이 음미해야 비로소 심미향수를 만끽하게 하는것이다. 자기의 시로써 세상과 대화는 하려하면서도 열독을 방애하는 회삽(晦涩)이야말로 병태이며 내용상의 빈혈이다. 미국계통론학자 쟈드는 20세기 60년대 사물의 모호성문제를 제기하여 과학리론으로 연구되였다. 1975년 모호학은 하나의 학과로 세계적범위에서 중시받았다. 20세기 80년대 중국의 첫전문서인《모호학인론》나왔고 70년대 몽롱시에 대한 대론쟁을 거친후 문예계에서 모호리론에 대해 새로운 인식을 가져왔기에 모호이미지와 몽롱한 미적표상은 더는 생소하지 않게 되었다. 칸트는 “모호개념은 선명한 개념보다 더 표현력이 있다. 미란 응당 말로 전달할수 없는것이 되여야 한다. 우리는 언제까지나 우리들이 생각하는것을 언어로 충분히 표현할수 없다.”고 쓰고있다. 현대 중외의 작가들이 창작에서 모호성, 추상성을 추구하는것은 몽롱미의 효과에 이르려는 시도이다. 예술작품속에 몽롱미는 내용속에 숨겨둔 모호성, 다의성, 추상성, 적라라하지 않은 함축된 내함으로 표현되며 비흥(比兴), 상징,은유, 말속에 말 등으로 체현된다. 사물의 모양과 색채와 소리가 융화되여 불확정적이고 일상을 초월하도록 변형시켜 직관과 상식적인 도리로는 리해하기 어려워 풍부한 상상력으로 예측하고 추단해야 그것의 진실한 함의와 내재미를 파악할수 있다. 2. 몽롱성의 미학공능 사람은 금방 접촉한 사물에서 미적향수의 수요가 왕성하지만 일차성적으로 완전히 만족시키지 못하는 바로 그 순간에 “접근성 미감”이 산생된다. 이때가 바로 미감수요가 가장 강렬할 때이다. “행위과학”의 시점에서 볼 때 인간행위의 발동기라고 할수 있는 욕망(심리수요)이 일단 만족되면 곧 소실되고 새 욕망이 새 행위를 발동한다. 몽롱성의 미학공능은 사람들로 하여금 미적대상에 흥미도도하여 련련한 정을 보류하는 그 미감의 지속성, 접근성 미감에 있다. 몽롱미는 특정한 의경(意境)을 창조하여 호기심을 유발하며 탐구욕에 불을 지펴 알듯하면서도 묘망한 느낌속에 특수한 심미감수를 얻게 한다. 심미적대상에 대한 이런 고유한 심미심리 혹은 그런 기대심리를 예술적으로 만족시키기 위해 다양한 수법을 운용한다. 이를테면 “뜻은 명철하나 말은 에두른다.”는 수법으로 글에 함축미가 있게 여지를 남겨두거나 서정토로도 곧이 곧대로가 아니라 몽롱성속에 숨김으로써 예술미를 창조한다. 몽롱미에서 펼쳐지는 경지는 깊은 사색을 불러일으키며 미적향수를 느끼게 한다. 이렇듯 문학예술창조활동에서도 창조적사유의 일종인 련상의 공간을 제공하는 몽롱성은 중요하다. 객관적사물의 몽롱성은 결코 희미한것이 아니고 알쏭달쏭함도 아니다. 그러므로 현대시창작에서 몽롱성원리를 리용하여 몽롱미를 창조하더라도 흔상자들에게 파악불능이 되게 한다면 바람직하지 않다. 새 시기 현대시의 영향을 받아 젊은 일대들이 몽롱성이 짙은 시들을 많이 창작하였다. 례하면 “어두운 밤은 나에게 검은 눈을 주었다. /하지만 나는 그 눈으로 광명을 찾았다.”, “광풍은 꿈속에 재부를 빼앗아갔지만/도리어 나에게 사고의 유산을 남겨주었다.” 등에서처럼 몽롱성을 리용하고 몽롱미를 창조한것은 흔상자들에게 끝까지 파악불능의 수수께끼를 내는것이 아니다. 물론 충만된 격정을 직접적으로 토로하는것이 아니라 한폭한폭의 구체적도화(图画)로써 시인의 사상감정을 은근히 암시하고 상징하며 두드러지게 하는 새로운 시형식이 독자들앞에 돌연 나타났을 때 일반사람들의 흔상심리지각상 필연코 습관되지 않아 입에 잘 오르지 않는다거나 개운하지 않다거나 알수 없다거나 하면서 심지어 노해서 외면하기도 한다. 례하여 이런 시가 있다. 비둘기마저 성숙한 울음을 운다. 지나간 비바람 모질던 그 여름을. 이 시는 얼핏 보면 대자연속에 가을을 쓴것 같다. 그러나 다시금 음미해보면 “10년동란시기”의 그 “비바람 모질던 여름”을 읊고있고 오늘의 조국을 그려내고있다. 시는 리해하기 그리 어렵지 않다. 그러나 작자는 직설적으로 자기 감정파동을 토로하지 않고 시속에 한층의 상징적의미를 깔아놓고있는데 이 역시 미적창조의 새로운 풍경이 아닐수 없다. 3. 몽롱미의 필수성 문예는 몽롱성을 수요하며 문예는 몽롱성을 떠날수 없다. 문예의 몽롱은 일종의 미를 현시한다. 그러나 무작정 새것을 추구하고 색다른것을 표방하기 위한것이 아니다. 문예작품은 인류생활정보의 일종 귀환으로서 작가들이 모호세계에서 취한 정보와 소재가 또 인간의 관측할길 없는 “흑상(黑箱)”속에서 가공되므로 충분히 몽롱성을 띠게 된다. 작가가 가공해낸 작품은 몽롱세계에 대한 투시 혹은 굴절반사의 형상일뿐이다. 례하면 화면에 나타나는 장백산이나 계림산수는 비록 부분적모습만이라도 장백산은 장백산이고 계림산수는 계림산수이다. 한것은 량자는 부동한 개념으로서 장백산, 계림의 완정한 형식과 내용을 포괄하기때문이다. 허적인 각도에서 보아도 선명하다. 화면에 나타난것이 각자의 특징을 구별해주기때문이다. 다음 문학형상은 모두 모호개념 집합으로 구성되였다고 할수 있을진대 작가는 상상, 허구로 형상을 창조한다. 즉 실체적대상을 떠난 정황하에서 원래 저축하였던 흩어지고 모호한 인상으로 개조하여 다시 결구를 짜는바 모호수거의 결합체일수밖에 없는것이다. 자연물에 대한 형상묘사는 더구나 모호언어를 위주로 한다. 미국의 현대 시인 로닐의 시 ≪조우≫를 보자. 단풍잎에 이슬은 붉게붉게 빛나는데 련꽃잎에 이슬은 눈물처럼 투명하네. 이 시에서 단풍잎, 이슬, 련꽃잎, 눈물방울은 모두 무엇을 가리키는지를 딱히 알수 없다. 황차 세상에 똑같은 사물이란 없음에랴, 사물의 상대론각도에서 볼 때 모인물, 모사물도 순간마다 그것일수도 있고 또 그것이 아닐수도 있다. 모두어 말해서 사물의 무궁한 변화, 형상의 천차만별로 하여 종잡을수 없기에 사물의 특수성과 몽롱성이 충만되여있게 된다. 문예는 오직 사물의 이런 특수성과 몽롱성을 형상적으로 드러낼 때에야만이 풍부하고 다채롭고 정취가 그윽한 매력과 미감을 선물할수 있다. 무형속에 형상이 현연되여야 볼 때는 없는듯하지만 사색속에서는 실재를 느낀다. 이것은 전통적예술추구로서 일종 몽롱미에 대한 야릇하고 불가항력적인 추구이다. 표현방면에서 본다면 시가, 소설, 산문에서의 생략 혹은 비약이며 회화에서의 공백이고 영사막, 무대에서의 공간 모두가 기실 일종의 몽롱미이다. 례하면 영화 ≪붉은수수≫에서 “나의 할아버지”와 “나의 할머니”가 만나는 장면에서 우리앞에 펼쳐진것은 설레이는 일망무제한 붉은수수밭이다. 그들은 인적기가 없고 장려한 대자연속에서 하늘을 이불로 삼고 대지를 침상으로 삼고 그렇게 미칠듯이 야하게 그러면서도 순결하고 자연스럽게 정욕을 불태운다. 그 광활한 대자연은 “실재적”인 붉은수수밭이 아니라 “허적인 예술공간”이다. 그것은 인간이 자유로이 나래칠수 있는 황야이고 정감의 심연이며 사랑의 바다의 상징이다. 거기서 자유의 불길, 사랑의 불길, 생명의 불길이 활활 타번진것이다. 정직하고 강인하며 랑만적이고 호현한가하면 온순하고 순박한 다종기질의 사나이가 거기서 원시적인간성이 빛을 발산한다. 바로 그 붉은수수가 우매무지하던 시대의 인간성복귀의 상징이다. “한뙈기 붉은수수는 한사발의 붉은수수술을 고아낼수 있고 또 붉은 선혈로 변하여 나중엔 붉게 타오르는 민족정신으로 승화하였다.”고 상상해보라. 넓고 거칠고 야한 록색의 공간이 사람들에게 주는 이미지는 얼마나 모호하고 몽롱한가? 립체감도 있고 류동감도 있어 실로 끝이 보이지 않고 사색이 끝없는 공령(空灵)의 경지에 이르게 할수 있다. “사람은 아름답기에 사랑스러운것이 아니라 사랑스럽기에 아름다운것이다.”(레브 똘쓰또이) 이 명제에 근거하여 우리는 문예의 몽롱미를 련인의 눈속의 “서시”에 비유할수 있다. 서시가 그토록 아름다운것은 “서시”를 심미적눈길로 바라보고 “서시”를 죽도록 사랑하고 추구하는 련인의 모호하고 몽롱한 심령즉 아름다운 기대심리에 도취되여있끼때문이다. 바로 그래서 얼마의 련인이 있으면 얼마의 “서시”가 있게 된다. 문예의 몽롱미는 이처럼 현묘하고 알쏭달쏭하며 풍부하고 다채롭다. 사람이 몽롱하면 사실도 몽롱해지고 몽롱한 붓끝아래 대중도 따르기 어렵게 된다. 시 ≪가자!≫(북도)를 음미해 보자. 가자!락엽은 골짜기에 날려들고 노래는 오히려 갈곳이 없다. 가자!얼음위에 달빛이 강바닥에 넘쳐흐른다. 가자!눈은 한곳 하늘을 보라. 눈은 한곳 하늘을 보라. 마음은 황혼빛 북을 친다. 가자! 우리는 기억을 잃지 않았다. 우리는 가서 생명의 호수를 찾자. 가자!길이여, 길이여, 붉은 양귀비 흩날린다. ≪가자≫는 인생도로의 험난함이 주제로 된 서정시이다. 시에는 감상적인 기분이 짙게 흐른다. 그러나 “생명의 호수”를 찾는것은 잊지 않고있다. 인생의 가을에 “갈곳이 없고” 황혼빛 창망한데 일체 희망은 모두 물거품이 되여버려 마음속에서 북소리 울린다. 현실속에 인생의 길, 갈래갈래에 붉은 마취제인 아편꽃 흩날린다. 어디가서 생명의 호수를 찾는단말인가? 그러나 가지 않으면 안된다. 가자! 가자! 가자! 한걸음 한걸음 가는데까지다. 이것이 북도의 마음의 절규이다. ≪가자≫는 얼핏 보고는 알둥말둥하다. 마치 지옥에 오래 갇혀있다가 도망쳐나온 도주범의 번뇌와 갈망이 숨겨져있는것 같다. 어찌 생각하면 한창 청춘시절을 잃어버린 처녀가 아무리해도 되찾을길 없는 그 아픈 마음과 쓰라림을 호소하고있는듯도 하고 방불히 실총당하여 버림받은 적자가 다시 총애의 품으로 돌아오고 싶어하지만 이미 아득히 흘러가버린 세월을 한탄하며 돌아와도 들어갈 문이없어 처절한 신음을 토해내는것같기도 하다. 시인은 그것을 쏟아지는 울분대로 직설하지 않고 시적대상물에 정감을 이입시키는 수법으로 보일듯 말듯 정감의 베일속에 감추고 은근히 토로한다. 독자는 바로 그 숨겨진 심령심처의 구석구석에 더 호기심이 끌리고 보이지 않는 그 말을 더 풍부한 상상의 나래를 펼쳐 그곳을 엿보고 싶어하고 밟아보고 싶어진다. 시인은 이렇듯 수수께끼로가 아니라 몽롱미로 자기의 절절한 감수를 장식함으로써 시에 더 없는 매력을 싣고있다. 4. 몽롱의식의 영구성 인류가 생활하고있는 환경으로 말하면 어느 사람에게나 하나의 모호 세계라고 말할수 있다. 인간의 정신령역과 정감세계는 오색잡다하고 변화무상하여 조종할 방법이 없는 미형컴퓨터나 열수 없고 또 내부상태를 직접관찰할수 없는 “흑상(黑箱)”같다고 할수 있다. 객관세계와 주관세계 자체의 정지상태에서나 변화각도에서 보아도 완전히 다 알수 없고 다 꿰뚫어볼수 없는 몽롱성이 존재하므로 인식하는 과정에 필연적으로 몽롱의식이 산생된다. 인간의 현실에 대한 개조, 사람지간의 투쟁 및 사물자체의 발전변화는 사물을 시종 운동상태에 처하게 한다. 만약 인간이 정지적인 안광으로 변동속의 사물을 투시한다면 필연적으로 의혹과 모호의식이 산생된다. 만약 인간이 정지적안광으로 변동속의 사물을 투시한다면 필연적으로 의혹과 모호의식이 산생된다. 이런 주관의식의 몽롱성은 부단히 소실되고 부단히 산생된다. 그런데 이런 소실은 국부적이고 잠시적이다. 인간의 인식과 운동하는 세계사이에는 시공간적차이가 있기에 주관의식의 몽롱성은 불가피면적이다. 세계상의 어떠한 언어이든지 물질세계와 복잡다단한 심령세계의 기술하고 묘사함에서 의도적인 다의성보류, 추상성, 편파성, 파생성 등 불확실성을 가지게 되므로 핍진하지 못한 표현의 곤혹을 철저히 극복할수는 없다. 예술언어도 주관의식을 표현할 때 스스로 막무가내한 모호성과 몽롱성을 의식하게 된다. 이는 인류언어의 빈곤증을 의미하지만 어쩔수 없는 일이다.
33    제 2절 문학예술흔상심리 댓글:  조회:3320  추천:23  2007-09-16
                                                 제2절 문학예술흔상심리 1. 문학예술감수의 특수성 감수성을 감성이라고도 하는데 인간의식의 정서적성향을 가리킨다. 18세기초 영국에서 처음에는 사랑, 동정심, 련민의 정 등 부드러운 감정을 잘 느끼는 성격을 뜻하다가 그후 아름다움에 대해 민감한 반응을 보이는 성격을 뜻하게 되였다. 근대비평가들은 감수성을 감각, 사고 및 감정에 있어서 경험에 반응하는 작가의 특징적인 능력을 가리키였다. 감수성은 자연이나 예술미의 숭고에 대한 강렬한 정서적반응이라는 뜻이 며 인식으로서의 문학, 경험으로서의 문학의 전제조건이다. 문학감수는 그저 한부의 두터운 소설책, 지어낸 이야기를 적은 문학서적…등에 그치는것이 아니라 작품속에 파묻혀 개체자신의 정감반응정보에 목적을 두고있다.  산은 옛산이로되 물은 옛물이 아니로다. 주야로 흐르나니 옛물이 있을소냐  인걸도 물과 같도다. 가고 아니 오더라.   얼핏 읽어보면 그뜻이 잘 알리는듯싶다. 그러나 시인은 자연상태의 변화를 설명한것이 아니라 그 자연의 섭리에 일종 철학적사상을 담고있는것이다. 막무가내하고 속절없이 가버린 영웅인물에 대한 숭경의 마음과 그리움 등 정감속에 담긴 철리적사색의 정화를 느꼈을 때에만이 시조에 감동될수 있는것이다. 2. 문학감수에서의 주관능동성 문학흔상에서 “기계적반응”도 있게 된다. 말하자면 판에 박힌 반응, 무비판적반응 등을 이르는 말이다. 열독과정에서 독자의 기대시야와 텍스트사이에 흔히 순향적상응과 역향적좌절 이 두가지 정황이 나나타고 문학접수의 고조도 있게 된다. 문학접수에서 공명감은 고조단계에 들어갔다는 주요한 표지이다. 문학의 사회적기능은 독자의 문학경험이 그 삶의 실천속에서 우러나온 기대지평속으로 파고들어 그의 세계 리해를 미리 형성하고 그렇게 함으로써 되돌 아와 그의 사회적태도에 작용할 때 그 진정한 가능성이 발현된다. 독자의 주관능동성에는 다음 몇가지가 있다. 첫째로 온정성주의력이다. 우선 감상자를 매료시키는 선결조건은 작품에 주어져야 하지만 감상자의 열독의지력, 온정성 주의력 등 능동작용도 베제해서는 안된다. 무심한자에게는 어떤 절경도 매혹적이 못되듯 독서열정이 없으면 어떤 명작에도 매료될수 없다. 둘째로 분석비교이다. 동일작가의 여러 작품을 비교할수도 있고 다른 작가들의 작품과 횡적비교를 할수도 있으며 중외작품비교, 고금작품비교, 전통수법과 현대수법의 비교 등 종횡비교를 진행하면 그 감수가 더 심각해질수 있다. 례하면 고골리의 ≪죽은 넋≫의 쁠류쉬낀과 발자끄의 ≪우제니 그랑데≫에서 그랑데의 인물성격, 형상창조수법상에서 공통점과 차이점을 찾아볼수도 있다. 두인물의 성격상의 공통점이라면 재물과 금전에 대한 탐욕성, 린색성, 그로인한 비인간성이다. 그러나 다른 점도 있다. 그랑데는 교활하고 허위적이고 잔인한 신흥자산계급전형이고 쁠류쉬낀은 우매하고 부패몰락한 지주계급전형이다. 이처럼 같으면서도 인물형상은 비교속에서 더욱 선명하게 안겨온다. 예술에 대한 인류의 감수는 리해와 결합되여있다. 이런 지각ㅡ감수의 심입은 사상적심각성과 사물에 대한 리해의 심도와 갈라놓을수 없다. 김소월의 ≪산≫, ≪가는 길≫, ≪진달래꽃≫, ≪금잔디≫ 등 일련의 아름다운 시편들을 읊어보노라면 꽃잎지고 달이 뜨는 평화로운 밤, 귀뚜라미소리를 듣는듯 정답기도 하고 쓸쓸한 기분에 잠기게도 된다. 그러나 그 애수에 사무친 정서에도 불구하고 우리로 하여금 애수의 저 너머에서 무엇인가 구하여마지 않는 강렬한 동경과 풀수 없는 인도주의적지향과 생에 대한 긍정심을 토로하고있음을 가슴으로 느끼게 한다. 김소월의 시에는 격정을 불지르는 치렬한 시어들이 없어 외재형식상에서는 마치도 잔잔한 호수의 잔물결같은 감각을 준다, 그러나 저 호수 깊이에 생명들이 활약하듯 시속에서 생명이 약동한다. 문학예술흔상에는 흔상자의 련상과 상상력이 수요된다. 발자끄는 “진정한 시를 아는 사람은 시구에 토로된 미세한것을 가지고도 자기의 심목속에서 발전시켜나간다.”고 썼다. 련상과 상상은 예술이 현실로 돌아오게 하는 교량이다. 3. 문학작품의 자률성 주지하다싶이 창작은 모종 특정된 예술수단으로 현실생활에 대해 예술적처리를 거쳐 예술형상을 창조하는데 이런 생활로부터 예술세계로의 전화는 련상과 상상을 거쳐 실현되므로 감상속에서 예술이 다시 현실로 돌아오게 하자면 역시 련상과 상상으로 실현할수밖에 없다. 그러나 작가에 의해 완성된 작품은 그 자체로서 자립하고 자족 할수 있는 조건들을 갖추고있어야 한다. 작품을 리해하는데 작가의 다른 작품을 반드시 참조해야 한다든가 전문가의 설명을 들어야 리해할수 있다면 그 작품은 진정한 의미에서 완성된 작품이라고 하기는 어렵다. 작품은 상상력에 의해 창조된 하나의 새로운 세계로서 작가는 물론 독자로부터도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자률성을 지닌 존재인것이다. 창조된 예술형상은 질적규정성을 고유하기때문이다. 4. 문학흔상에서의 정감성 독자에게 정감이라는 심리품질이 없다면 아무리 뛰여난 필력도 흉금을 사로잡을수 없다. 누군가 작자는 반드시 먼저 나를 놀래우고 마음을 찢어놓고 두렵게 하며 전률시키고 감동시키고 눈물을 흘리게 하며 분노하게 하고 그 다음 만약 남은 힘이 있다면 나의 두눈을 즐겁게 하라고 말했다. 이렇듯 문학흔상에서 흔상자는 작품에 대한 인식에 따라 자발적으로 정감활동이 산생된다. 작가가 묘사하는것이 비록 개인생활의 범위이지만 개인생활의 범위와 시대, 사회생활범위는 공통성을 가진다. 1822년 프랑스의 한 극장에서 ≪오쎌로≫를 공연하였는데 제5막에서 오쎌로가 데스데모나의 목을 죄여죽이는 장면을 보던 극장보위를 맡은 한 병사가 그만 격분해서 “나는 저 죽여치울 흑인놈이 내 앞에서 공공연히 백인녀자를 죽이는것을 용인할수 없다!”고 소리치면서 총을 쏘아 오쎌로 배역의 어깨에 부상을 입혔다. 이는 치렬한 정감활동에서 조절력을 상실함으로써 빚어진 아름다운 충동성실수이지만 예술의 매력이다.
                                            제1장 문학예술흔상미학                                             제1절 문학예술흔상의 특성 1, 문학수용리론의 연혁 대략 1960년대 이후 문예학에서 문학의 수용과 영향의 문제와 관련된 연구가 활발히 진행되였다. 이런 리론적사고의 중심은 문학작품의 내용에 대한 물음으로부터 작품의 수용문제와 수용조건에 대한 문제로 이동하였다. 력사적인 문학관찰방법의 측면에서 볼 때 독자에 대한 관심은 문예학의 사회적기능 자체를 비판적으로 점검해 보는 동기가 된것이다. 작가, 작품 그리고 독자들간의 관계를 대화관계 그 자체로 파악하려는 문학수용리론은 문학은 독자를 위하여 존재하며 독자를 통해서 생명력을 얻고 영향력을 발휘한다는 점을 긍정한것이다. 만델라코프는 문학을 통한 삶의 변형가능성에 대한 믿음속에서 “행동하는 사상가를, 혁명적비평가를 기대할수 있으며 리론에서 실제로 나아가는 랑만주의자들의 행진을 확인할수 있다.”고 하였다. 문학적대화가 제대로 이루어지자면 작가, 작품, 독자 이 세가지 계기가 갖추어져야 한다. 문학접수란 전적으로 심미범위내의 열독, 흔상활동을 가리킨다. 문학접수는 문학소비의 현실의 련속이자 고급상태로서 문학소비의 최종적완성이고 가치실현의 확증이다. 문학흔상이란 바로 흔상주체가 문학작품을 읽으면서 체험하고 재창조하는 정신활동이다. 심미교류활동은 독자와 작자의 교류, 독자와 작중인물의 교류, 독자와 다른 기타 독자들사이에서의 교류, 독자와 작품속에 펼쳐진 자연이나 사회, 전인류적교류 등이다. 2. 문학흔상의 기대시야 문학적대화가 시작되기전 독자는 자각적이거나 비자각적인 어떤 심리상태에 처하게 되는데 접수심경이라 한다. 이런 접수심경속에 기대시야라 부르는 열독심리지향이 산생된다. 기대시야는 접수자가 접수과정에 들어가기전에 이미 가지고있던 접수객체에 대한 기대, 혹은 리해전의 심리상태라고 할수 있다. 독자들의 선험, 경험의식, 습관, 취향, 기호, 상식, 교육, 심미규범 등은 모두 기대지평을 구성하는 요소들이다. 문학접수는 기계적반응이 아니다. 흔상과정에 독자의 기대시야와 텍스트사이에 흔히 순향적상응과 역향적좌절 이 두가지 정황이 수시로 나타난다. 시대의 발전과 문학환경의 변화에 따라 텍스트는 각양각색으로 등장하며 그때마다 독자들은 “새로운 지평”에 부딪치게 된다. 기대시야에는 작품의 예술형식과 심미특질 등에 기대를 가지는 문학적기대와 작품의 생활내함과 사상의의 등에 기대를 가지는 생활기대가 있다. 그리고 자기에게 어떤 유익점을 줄수 있겠는가 하고 미리 예산하고 흔상에 림하는 가치기대도 있다. 독자가 작품의 보다 심층적인 의미, 정감의 경계, 인생태도, 사상경향 등에 대해 기대하는 의미기대가 있고 열독경험 기대시야도 있다. 열독경험 기대시야는 개체성기대시야와 집체성기대시야로 나누어 본다. 전자는 일반독자의 기대시야이고 후자는 전문비평에 종사는 특수독자들의 기대시야이다. 문학흔상의 고조에는 공명감, 관념의 일치성, 정감경험의 동조, 의지와 념원의 접근과 친밀성 등이 있다. 이 친밀성은 작가의 텍스트의 요람을 마련해 준다. 3. 문학흔상의 규정성 작품구성원소를 분석할 때 흔히 세가지 규정성에 부닥치게 된다. 첫째, 작품의 허구성이고 둘째, 작품의 심미적정감선이며 셋째 독자의 접수실현성이다. 이상의 세가지 규정성으로부터 작품구성의 기본흐름선이 풀려나온다. 이 흐름선상에 여섯개 원소가 있는데 현실생활→심미대상→창작과정→문학문본→독자접수→사회실천이다. 전반 문학접수의 특징은 간단히 말해서 개체성, 감성특질, 자유성, 언어의 매개성이다. 아래에 흔상활동의 특점을 알아보자. 1) 문학흔상에서의 심미희열 예술향수는 반드시 객체예술작품에 대한 관조로써 이루어진다. 그러나 예술향수를 느낄 때 흔히 객체 자신에 대한 향수가 아니라 객체의 자극에서 산생된 감정, 정서로써 향수를 느끼게 된다. 이것을 “내부집중”이라고 한다. 문학적대화후에 재음미하는 정서적반성과 사고이다. 심미재창조과정에 감상주체는 한방면으로는 자기의 본질적력량(리상, 의지, 정감, 능력)을 실현하고 자아존재의 가치확인에 만족을 느끼며 다른 방면으로감상주체 자신이 새로운 예술경지에 빨려들어가서 인물형상과 운명을 같이하면서 도취되여버린다. 얻은것은 돈으로 살수 없는 예술희열이다. 2) 문학감상주체의 차이성 문학감상ㅡ예술접수활동은 어디까지나 시대에 따라, 지방에 따라, 독자의 차이에 따라 차이가 있게 되고 사람의 선천자질, 생활경력, 사회분공, 주관노력 등 개체의 심미수양으로 하여 차별이 있게 한다. 한부의 작품을 감상할 때 평론가가 얻는 미감체험은 보통독자와 현저히 다르다. 심미취미는 다음과 같은 특점이 있다. 첫째, 심미취미는 주관애호의 형식으로 표현되므로 애호, 정취의 풍부함과 결핍함 등 차이성을 가지게 된다. 따라서 주관선택과 편애를 배제하지 않는다. 둘째, 취미판단은 추상적리론인식이 아니며 또한 적라라한 도덕개념도 아니다. 심미취미는 심미실천속에서 형성되는바 력사발전의 산물로서 시대와 민족, 사회제도와 계급 등의 제약을 받는다. 또한 심미주체인 그의 개인생활능력, 문화소양, 흥취, 애호, 심리 특점 및 사유방식의 영향을 받는다. 체르늬쉡쓰끼의 정채로운 론단이 있다. “상류사회의 귀부인들은 편두통을 즐겨하지만 농민들은 건강미를 좋아한다.” 심미취미의 계급경향성을 말하고있다. 심미취미는 심미감수와 심미리상과 융합된 일종 심미심리의 표현형식이다. 류협은 ≪문심조룡. 지음≫에서 “강개한자는 거슬리는 소리에 찬탄하고 속에 감추는자는 세밀한것에 펄쩍뛰고 지혜가 옅은자는 아름다운것을 보면 마음이 비약하며 기이한것을 사랑하는 자는 기괴한것을 놀랍게 듣는다.”라고 쓰고있다. 주체는 성격, 기질에 따라 각자 심미취미와 애호가 표현된다는것을 알수 있다. 문학흔상은 흔상주체를 창조한다. 작품의 기대시야와 작품의 력사시야가 일치하지 않을 때 독자는 자기를 반성하게 되고 독자의 사상관념, 정감태도 및 심미취미 등에 조정, 개변을 가져오게 되여 새로운 기대시야를 가지게 된다. 피아제의 “동화설”이 성립되는 동시에 그에 순응 혹은 거부감이 생성됨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특히 현대독자들의 흔상취미는 각양각색이여서 더 곤혹스럽다. 4. 문학흔상의 의의 일체 우수한 작가들은 모두 독자들의 감상요구와 취미를 존중하였다. 고골리도 자기의 작품을 발표하기전에 명시인 루꼬브쓰끼를 청하여다 새로 쓴 극본을 들려주었다. 그런데 루꼬브쓰끼에게는 원래 오침하는 습관이 있었는데 듣고듣다가 그만 코를 골며 굳잠에 빠져버렸다. 그가 잠에서 깨여났을 때 그를 책망할대신 “당신의 깊은 잠이 곧 이것에 대한 가장 훌륭한 비평이였습니다.”라고 말하고는 극본을 뻬치까속에 처넣었다고 전해지고있다. 문학작품의 모종 류형 혹은 형식특징에서 인기되는 기대지향인 문체기대도 있는데 이런 지향은 특정된 문체가 자신이 바라는 모종의 예술운치와 매력을 가지고있으리라는 희망을 의미한다. 작품속에 특정된 형상에서 인기되는 기대지향도 있다. 이 기대는 독자가 처음 접촉하는 형상과 정경을 희망하는것을 의미한다. 독자의 흔상과정은 열독주체의 능동적해석과 재창조과정이다. 대사막에 외로운 연기 곧추 피여오르고 강하에 지는 해 쟁반같고나.  왕유의 이 시구에서 새외풍경의 웅대함과 장려함을 읽게 된다. 독자의 각이한 해석은 심미적창조의 작용에서 온것이다. 동화(同化), 감정이입은 문학흔상 과정에서도 진행된다. 이런 경지에 들어서면 작가나 독자는 구별이 안되고 서로 공감하는 가운데 작가보다 독자가 더 상위에서 작품을 제것으로 만들어버리기도 한다. 이렇듯 흔상판단은 론리적판단이 아니라 심미적이므로 이런 심미감각은 정신으로 들어가서 새로운 정신세계로 나오는 고상한 생명활동이 된다.
31    제 3절 현대주의서사극 댓글:  조회:3828  추천:21  2007-09-15
제3절 현대주의서사극 1. 현대주의서사극의 개념 현대서사극이란 이 곁가지는 1920년대 독일의 시인이고 극작가이며 연극개혁가인 브레히트(Brecht) 로부터 세상에 나왔고 리론적연극적개화도 그에 의하여 이루어졌다. 서사극은 관객이 극중사건이나 인물속에 몰입되는것을 반대하면서 극과의 거리, 불연소상태를 주장하였다. 서사극은 관객이 극중사건이나 인물속에 적극적으로 몰입되는것을 반대하면서 극과의 거리, 불연상태를 주장하였다. 관객은 무대에서의 사건이나 등장인물과는 밀착해서는 안되며 랭정하게 객관적으로 무대를 대하여 앞으로 일어날지도 모를 일에 대처할수 있는 판단력을 길러내는것이라 하였다. 관객은 그가 무대우에 보고있는것은 단지 과거에 일어난 사건의 이야기에 지나지 않는것임을 깨닫고 비판적으로 거리를 두고 구경하게 될것이라고 주장했다. 이렇게 서사적,비연극적 연극은 관객이 지금 보고있는것이 현실의 환상이 아니라 인간행동을 과학적정신으로 제시해주는것이고 연극은 연극일뿐 실제현실이 아님을 관객들에게 상기시키는 여러가지 고안장치를 통하여 얻어지는 거리감과 소외효과에 바탕을 둔다. 서사극은 전통극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간주하던 감정교류, 감화작용, 카타르시스와 사건의 시작과 그 해결보다 리성적으로 관람하고 객관적으로 판단하기를 주장하였다. 2. 서사극의 발생 독일의 표현주의연극은 그 주제의식이나 형식이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었지만 단명했다. 표현주의희곡에 대한 공통한 인식은 그것이 매우 엄격한 반리얼리즘 연극이라는것이다. 사회정치문제에 초점을 두었던 이 표현주의연극이 쇠퇴하자 대신 등장한것이 서사극이였다. 연극적환상을 일으키는 전통에서 벗어난 브레히트의 서사극은 드라마를 좌익운동을 위한 사회적,이데올로기적인 토론장으로 발전시켰다. 그의 가장 중요한 리론서는 ≪연극을 위한 작은 지침서≫였다. 그의 극리론의 본질은 아리스토텔레스의 극리론이 관객들이 보고있는것을 그 시간, 그 장소에서 벌어지는 일로 믿게해야 한다는것을 전제로 하는 반면 진정한 맑스주의드라마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전제를 피해야만 한다는것이다. 서사극은 표현주의연극에 대한 비판에서부터 시작되였고 각별히 브레히트의 경우는 자신의 서사극과 표현주의연극과의 차별성을 리얼리즘의 성취정도에 두었다고 할수 있다. 결국 브레히트에게 있어서 문제는 리얼리즘이였던것이다. 서사극이란 용어는 그것을 쓰는 연출가에 따라 뜻을 달리해왔는데 시간과 장소의 일치를 지키지 않고 이야기되는 설화로 생각하고 있었다. 서사극은 감정이입적이라기보다는 리성적이며 사회적, 정치적주제에 대한 보고서여야 하며 리얼리즘으로부터 자유롭고 그 내용은 완전히 공개되여 관객의 검토를 가능케하는것이였다. 이렇게 서사극의 양식과 개념을 구축해가면서 새 양식에 걸맞는 새로운 기법들을 실험하였다. 그 기법들은 후에 서사극을 완성시킨 브레히트에게 거의 수용된것들이였다. 그 기법들은 다음과 같다. …독립된 설명적장치로서 영화가 리용되였으며…여러가지 영상 이미지…환등기와 프랑카드 그리고 게시판 등이 극의 분위기를 위해 혹은 배경으로 사용도고… 회전무대, 트레드밀, 엘리베이터, 전동화된 다리, 상하이동식무대 등을…증폭된 음향과 음악…확성기와 탐조등을 설치하기도 하였다. 3. 서사극의 목적 브레히트의 서사극을 중심으로 하여 서사극은 사회비판과 사회개혁을 목표로 한다. 그리고 이런 사회비판과 개혁을 이룰수 있는 하나의 예술적인 대안으로서 서사극이 존재하는것이다. 즉 비판적인 태도가 예술적인 태도일수 있다는것이 서사극 리론의 요점이며 비판적인 태도는 궁극적으로는 사회개혁을 가능하게 하는 집행성을 띤 비판을 의미한다. 서사극은 복잡한 내용과 사회적인 목표를 가진 지극히 예술적인 연극인것이다. “인간은 돌을 내던질 때 왜 그것이 달리 안떨어지고 그렇게 떨어지는가를 알고있지만 그 돌을 던지는 인간이 달리 안던지고 왜 그렇게 행동하는가에 대해서는 알지 못하네.” 브레히트는 인간의 사회적행동의 동기에 대한 인식을 관객들에게 보여줘야 할 필요가 있었고 또한 일어난 사회적사건에 대한것만을 보여주는것이 목적이 아니었기때문에 “우리가 예감한것도 보여주어야지요.”라고 형상적으로 천명하였다. 또한 우리에게 필요한 연극은 줄거리에서 보여주고있는 인간관계의 력사적현장이 허용하고있는 감정이나 통찰, 충동을 가능케 하는 연극이 아니라 사고와 감정을 불러일으키고 력사의 현장을 변경시키는데 기여하고있는 연극이다. 이것이 브레히트가 만들어낸 서사극의 목적이였다. 이것을 떼놓은 서사극은 이미 서사극이 아니다. 이런 측면에서 사회비판의식을 상실한채 형식과 기법만이 남은 서사극, 그리고 정치의식만이 란무하여 예술성을 상실한 내용만이 껍데기로 남은 서사극은 이미 서사극이 아닌것이다. 결론적으로 서사극은 브레히트가 추구하는바 사회비판과 실천에 대한 지향과 예술에 대한 지향이 통일된 결과물로서 남는다. 따라서 서사극은 당연히 자체의 예술적인 완결을 위해 그리고 예술적실천을 위해서 끊임없이 변화해야 하는것이었다. “이제 우리는 세계의 변화 가능성을 부각시키고 우리에게 즐거움을 제공하기 위해 우리가 드러내 보여주려고 하는 인간들사이에 일어나는 사건들을 비춰 줄 불빛을 향하여 계속 전진하고있다.” 고 브레히트는 단호하게 선언하였다. 4. 서사극의 주요임무 브레히트의 서사극은 상술한바와 같이 관객에게 연극에서 묘사되는 세계를 변화가능한것으로 보여주는것이였다. 이것을 서사극에서 나타내기 위하여 그는 서사극에만 고유한 범주를 만들어내였다. 여기서는 비극의 목적으로 설정한 카타르시스가 비극이 공포와 련민을 불러일으키는 사건을 모방함으로써 관객을 그것으로부터 정화시킨다는 점이 사회적으로 커다란 관심거리가 된다. 이 카타르시스는 특수한 심리적작용을 통하여, 즉 관객이 배우가 모방하고 있는 인물들속으로 감정이입되여 그들처럼 느낌으로써 이루어진다. 따라서 브레히트의 희곡은 감정이입을 통한 극적환상을 관객에게 줌으로써 결과적으로 사회에 대한 관객의 작용을 무관계화시키는 연극에 대한 비판에서 시작된다. 그리하여 일반 희곡적연극과 서사적연극이 자체의 특징으로 구분되고있다. 1) 희곡적연극, 서사적연극 무대는 하나의 사건을 구현하며 하나의 사건을 이야기한다. 관객을 사건속에 몰아넣고 관찰자로 만든다. 관객의 능동성을 소모시킨다. 관객의 능동성을 일깨우고 감정을 일으키며 관객에게 결단을 강요한다. 관객에게 체험을 전달한다. 관객에게 지식을 전달한다. 관객은 줄거리속에 감정이입된다. 극적환상이 주요도구로 되고, 론증이 주요도구로 되며 감정을 축적시키면서 인식의 단계까지 몰고간다. 이 연극속에서는 관객이 단지 자기 자신을 연극속에 내여맡긴채 같이 경험하고 자연의 일부분이 되여버리는것이다. 이런 희곡적연극은 연극의 상연에 있어서 “제4의 벽”이라는 개념을 상정한다. 이 “벽”안에서 연극은 극적환상을 만들어내는것이다. “보통 사람들은 연극을 할 때 무대에 벽이 세개만 있는것이 아니라 4개있는것처럼 즉 관객이 앉아있는 곳에 제4의 벽이 있는것처럼 연기를 한다. 어떤 사건이 무대위에서 일어나고 우리 인생에서 정말 일어나는 일이며, 저쪽에 관중이 앉아있는것이 아니라는 느낌이 들게 하고 또 그 느낌을 고수해 나아간다. 제4의 벽을 두고 연기를 한다함은 관객이 없는양 연기하는것을 말한다.” 이렇게 연기를 하는 경우, 관객은 극적환상을 갖게 된다. 즉 능동적으로 연극에 참여하는 존재가 아니라 “관객은 아무도 자기를 알아본체 안하니까 무언중에 자신이 극장에 와앉아있는것이 아니라고 가정한다.” 즉 “관객은 열쇠구멍앞에 앉아있다는 환상을 갖게 된다.” 이렇게 하여 관객은 극적환상을 지닌 연극에 피동적존재가 된다. 그러나 “배우가 직접 관객과 접하게 되면 그는 이미 살아있는 인물로 존재하는것이 아니라 단순한 보고자로 변하게 된다는것이다. 즉 서사적연기의 목적은 배우의 연기가(사회적상황에 대해) 자기가 이야기를 던지고있는 관객들과 더불어 토론을 벌리는 토론장을 열게 하는것이다. 그것은 결국관객이 극적환상에서 벗어나 변화하는 사회에 대한 의식을 일깨워주는것이다. 2) 배우의 자세 서사적연기의 목적은 배우의 연기(사회적상황에 대해)가 자신의 이야기를 체험하고있는 관중들과 더불어 토론을 벌리는 토론장소로 되게 하는것이다. 그것으로 관중들이 극적환상에서 벗어나 변화하는 사회에 대해 의식하도록 일깨워주는것이다. 배우는 자신의 자세 즉 자신의 사회적태도 혹은 기본적인 성향을 관중들에게 분명하게 제시해야 한다. 이 “자세”라는 말은 브레히트의 중요한 미학개념중의 하나이다. 브레히트는 “자세란 몸짓, 손짓으로 리해되여서는 안된다. 이것은 강조하거나 설명하기 위해 취하는 동작이 아니라 총체적태도와 관계된다. ”고 해석하 였는데 그 자신의 자세는 또 인간상호간에 이루어지는 사회적인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배우는 자세를 제시함으로써 그 사회의 특성을 표현할수 있다고 해석 하였다. 이러한 의미에서 “자세적언어”는 언어의 자기표현이 아니라 사회적인 행위를 강조하는 현실의 실제상황을 적절하게 표현한다는것이다. 서사극에서는 서사극의 목적과 범주의 연극적실현을 위해 몇가지의 기법을 사용한다. 1) 낯설게 하기 서사극은 낯설게 하기 수법으로 엮어지는데 낯설게 한다는것은 브레히트의 문학리론의 중추적범주로서 서사극의 기본구조를 이루는 개념이다. 서사극에서 낯설게 한다는것은 우선 당연하고 잘 알려져있는 자명한 사실에 대해 놀라움과 호기심을 불러일으키게 하는것을 의미한다. 즉 생소화효과는 묘사하려는 인간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일을 눈에 띄게 하고 설명이 필요한 것으로, 당연하지 않으며 자연스럽지 않은 것으로 보이게 하려는 기법이다. 생소화효과는 모든 일에 수긍하는 관중의 몰입하는 대토를 비판적인 대토로 바꾸어놓는다. 생소화효과상요의 전제조건은 무대와 관객석에서 모든 “마슬작”요소를 말끔히 거두어내고 “최면술”에 걸릴수 있는 여건을 없애는것이다. 이런 생소화효과로써 브레히트가 이루려는 목적은 일컬어 “력사화”이다. 그는 낯설게 하기를 력사화라는 개념과 련계시켜 설명한다. 브레히트의 연극리론에서의 력사화란 현재 사회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을 과거의 력사로 옮겨놓는것이 아니라 바로 특수하기 때문에 무상한 어떤 사건의 성격을 의식화하는것을 의미한다. 생소화와 력사화는 상관되는 개념으로 된다. 2) 해설자, 설화자 해설자, 설화자는 원래 서사시나 소설에 등장하여 서사적작품을 독자에게 중계해주는 허구적인물로서 해석적서술의 구성요소로 된다. 브레히트의 극에서 해설자가 서사극적인 기법으로 사용되는것은 “코카시아의 백묵원”이다. 이 극에서는 해설자가 독립성을 갖고 나타난다. 다른 연극작품에서도 해설자가 있지만 이 극의 경우처럼 그렇게 독립적으로 나타나지 않는다. 해설자는 관객에 비해 우월한 위치에 서서 사건전반에 대한 개관을 하고 이에 대해서 침착하게 거리를 유지하며 이야기를 엮어나가는 음유시인과 같다. 여러가지 명칭으로 불리워지는 해설자는 무대와 관객석사이의 중개자이며 무대의 사건진행을 “우에서” 관찰하고 해설한다. 그는 그의 성찰을 직접 관객에에 호소하며 관객을 그의 관찰에 끌어들인다. 즉 해설자는 생소화효과를 유발한다. 3) 노래 희곡에 있어서 독특한 요소는 노래이다. 그는 노래에 대하여 설명하는 곳에서 대화로 이루어지는 희곡의 내면적인 차원과 해설하는 노래의 차원이 분리되여야 한다는것을 역설하고 무대상의 배렬, 조명의 교체, 제목 등을 통하여 노래를 부른다는 사실이 기타의 다른 희곡진행과 시각적으로 구별되도록 류념해야 한다면서 노래가 “제시의 자세”로 불려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의 희곡에 불리우는 노래는 극에서 행하는 역할에 따라서 몇가지로 분류된다. 례하여《사천의 선언》에서 관중들을 향한 노래들은 해설적기능과 비유적인 성격의 형태로 나타난다.《억척어멈과 그 자식들》에서는 노래자체가 희곡과 내재적으로 련관되고 일반화되여 해설역할을 한다. 브레히트희곡에 노래는 그 기원을 고대희랍극의 함창, 함창곡(코러스)에서 찾을수 있다고 하였다. 브레히트의 희곡에 쓰이는 노래는 관중들을 일깨워 관중들로 하여금 연극적사건에 몰입하는것을 방지하면서 거리를 두고 비판적으로 볼것을 요구한다. 4) 서언과 발문 서언은 고대희랍극에서 시작하여 오늘날까지 수많은 희곡에 여러 가지 변형으로 적용되고있는 기법중의 하나로서 브레히트의 서사극에 쓰이는 서언도 이런 전통을 계승한것이다. 그 이런 발문은 서언과 연관되는 형식적인 부분이외에도, 관객에게 무대상의 예술세계에서 찾을수 없는 해결책을 현실에서 찾을것을 요구한다. 5) 관중을 향한 대사 연극에서 제4의 벽의 제거는 배우가 관객의 존재를 인정하고 관객에게 말을 걸수 있다는 전제조건이 된다. 관객을 향한 대사는 희곡에서 여러가지 방식으로 나타나는데 앞에서 말한 노래가 그 하나이다. 관중을 향한 대사는 방백이나 독백과 비슷하나 브레히트는 “관객을 향한 대사”가 방백이나 독백처럼 애매하지 않고 뚜렷하도록 요구했다. 6) 극중에 극과 재판장면: 극중극이라는 희곡형식은 브레히트의 전 희곡작품에서 쓰이는 기법중의 하나이다. 극중극은 사건진행을 중첩시켜주기때문에 관객은 연극적사건을 이중으로 체험하게 된다. 이렇게 극중극은 생소화효과를 내는 중요한 서사적기법으로 하나이다. 대표적으로 쓰인것은《코카시아의 백묵원》과《사천의 선언》이다. 7) 장면과 내용의 설명 대부분의 브레히트의 희곡은 각 장면마다 간단한 제목에서부터 시작하여 자세한 내용설명이 붙어있다. 이러한 제목이나 내용설명은 막에 투사되거나 현수막을 이용하여 연극적으로 실현된다. 하여 이끌어내고 내용을 요약하며 바깥세계의 사건을 사적인 령역으로 이끌어들인다. 연극적으로 제시될 내용을 미리 이야기해주는 설명이라는 서사적기법은 사건에 대한 긴장을 해소시킨다. 관객은 “무엇?”보다는 “어떻게?”라는 진행에 관심이 쏠리게 된다. 8) 관객에게 공개적으로 보여주기 서사극에서는 공개적으로 보여주기가 있다. “비유극의 서술자는 자기의 비유극에 필요한 모든것, 사건경위를 합법적으로 진행시키는데 도움이 되는 모든것을 공개적으로 관객에게 보여주는것이 좋다. 즉 비유극의 무대장치자는 비유극을 만드는 도구가 되는 조명등, 악기, 가면, 벽, 문, 계단, 의자, 식탁 등을 공개적으로 보여준다. 브레히트의 창작과정에서 작용한 근원적인 요인으로서의 현실을 파악하는 방법과 현실묘사의 방법이 주목받았다. 보다싶이 아리스토텔레스는 극에 대한 몰입, 즉 감정이입을 정신적 정화와 동등한것으로 보고 극적긴장이 관중들로 하여금 극에 몰입하게 하였지만 브레히트의 서사극에서는 아리스토텔레스가 극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했던 감정의 교류, 동화작용, 카타르시스, 사건의 시작과 그 결말과는 달리 극에서의 리성, 판단, 객관성을 주장했다. 브레히트는 자신의 극작품과 공연물에 다른 서사적 기법들도 많이 사용했다. 관객들이 극행위에 지나치게 몰입하는 것을 막기위한 또 다른 방편으로 이따금 극중 장면들이 막이 오를때 앞으로 전개될 사건을 나타내는 제목을 제시하기도 했다. 노래는 대개 플롯이나 등장인물에 대한 내용을 전달하기보다는 정치적인 메시지를 강조하기 위한것이었다.   그가 살던 시기의 정치적 불안으로부터 그의 서사극은 출발하고있다. 그는 그의 극작품을 보는 관객들이 연극을 통해 어떤 정치적메시지를 수혈받고 이후 행동하기를 바랬다. 그러나 후기의 비평가들은 사실 브레히트의 서사리론에 대해 비판적견해를 보이기도 한다. 왜냐하면 연극을 보면서 관객의 감정이입을 어떻게 연극 자체가 통제할수 있겠는지에 의문을 갖게 되였고 브레히트 자신도 그러한 감정이입을 완벽하게 통제했다고 정확하게 밝힐수는 없었기때문이다. 어쨌든 연극의 주체자는 연출가도 배우도 대본도 아닌 바로 관람객들이다. 브레히트는 자기의 리론에서 이렇게 서술하고있다.“리얼리즘적인것은 사회적인 인과관계의 체계를 밝히면서 지배자들의 관점이 지배자들의 관점이라는 점을 폭로하며 인류사회가 처해 있는 가장 시급한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한 가장 포괄적인 방안들을 마련하는 계급의 관점에서 글을 쓰며 발전의 계기를 강조하며 구체적이면서도 보편화를 가능하게 하는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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