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균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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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못생긴 나무에 걸어둔 잡념 댓글:  조회:7708  추천:0  2012-04-13
                                             못생긴 나무에 걸어둔 잡념                                                             최 균 선        산에 가면 늘 미끈한 나무보다 아픔을 먹고 어렵게 자란 못생긴 나무에 더 정이 끌린다. 보잘것없는 못생긴 나무가 저 큰산을 지키고 있다는 생각에 가슴이 아릿하다. 사람들이 기암괴석에 찬탄할 때 험한 바위짬에서 용케도 살아남은 나무가 내 심혼을 사로잡는다. 바람이 함부로 내던져 저 바위틈에 언제 움트고 뿌리를 박게 되였는가?    무성한 수림하고는 너무나 대조적으로 바위우에 위태롭게 자란 못생긴 나무한그루! 사나운 비바람속에 자라며 눈보라를 이겨온 나무이다. 바위에 짓눌리는 그 억압이 과연 무엇인지 알것같다. 홀로 산을 지키는 나무는 바위하고만 대화를 하면서 살아왔으리. 스스로 하늘을 찌르는 락락장송이 아님을 알면서도 홀로서기를 하여왔으리. 자신이 키워가고 있는 꿈을 먹으면서 살아왔으리.    다른 나무들이 겪지 못한 역경을 이겨왔기에 다른 나무들이 볼수  없었던 새의 잔등을 보면서 컸을게다. 못생긴 나무는 허위와 거짓으로 가득찬 저 세상보다도 청정한 무주공산의 아침이슬을 머금고 사는 삶이 행복하다고 생각했을가? 부러운것없이, 그러는 동안 이 산에서 하나를 배웠을게다. 하나의 목숨으로, 일편단심 마음속에 묻어둔 청산도 드팀없이 하나였을게다.    아픔을 이기고 고통도 삼켜온 나무이지만 자신을 이기지 못한것은 아닐가? 바위우에서 악착스레 자란 나무를 차거운 나무라고들 하더라만 차거운 나무의 못생긴 그 양자때문에 더 많은 눈길을 끄는지도 모른다. 차거운 나무는 베여지고 끌려내리는 수많은 형제들을 보며 눈물을 흘렸을것이다. 정에 못이겨, 차가운 나무에 참된 시가 있고 선경의 그림이 있다. 차가운 나무, 못생긴 나무의 뜨거운 사랑이여!    새벽녘 찬바람에 꿈을 깨면 참이슬 한모금 머금고 밝아오는 아침에 나름대로 기지개를 켰을게다...못생긴 그만큼 홀로서기의 본보기로 되여, 못생긴 그대로 홀로 푸른 산을 지키니 의롭지 않느냐! 나무에 기대여앉아 나무의 이야기를 끝까지 들어주고싶다. 산사나이는 사랑을 하지 말라고 하던 선인들의 얘기도 깡그리 잊은채 이 산에 뿌리내리게 된 이야기랑, 목숨과도 바꿀수 있는 그 존재의 리유와 의미랑…….    아침, 몽몽한 안개속에서 깨여나는 모습도 보고싶고 또 해살과 함께 밝아져오는 잎새의 흐느낌도 듣고싶다. 속깊이에서 뭔가 꿈틀거리고 있는것도 느끼고싶다. 가진것 하나 없고 보잘것없는 못난 나무, 다른 나무들처럼 어엿한 자태도 없고 무성한 잎사귀도 없음에 장래의 동량감될 자신이 아님을 슬퍼하지는 않았을가?    못생긴 나무가 산을 통채로 바친다는 진솔한 내용의 시집일지 어이알랴, 산만을 알고 산만을 지켜왔던 못생긴 나무, 산을 선택한 몸이고 산에 선택된 몸이기에 아마 가진것은 산의 넓은 품일게다. 못생긴 나무 산의 공기처럼 청신하고 그윽한 잎내음이 페부에 스며들어 좋다. 새소리도 더 귀맛좋고 산속의 개울물도 전보다 더 달콤하다. 그날 이후 나는 익숙한 발걸음으로 봉우리 하나 더 넘어 못생긴 나무가 선 그 바위를 누가 부르는듯, 누가 기다리는듯 허위단심 찾아가기 시작했다.    산을 지키는 나무들은 결코 잘난 나무들이 아니다. 잘난 나무는 일찍 베여지지만 못난 나무는 못난탓에 끝까지 남아 푸른 산을 지킨다. 가물과 비바람을 먹으면서 허리굽어진 못난 나무가 푸른 산을 지킨다는것은 얼마나 눈물겨운가. 나도 못난 나무가 되고싶다. 고향은 자고로 잘난 사람들에 의해 지켜지지 않았고 고향을 나무린 사람들에 의해 지켜지지 않는다. 고향의 풀한포기. 나무 한그루에 깊은 정을 가진 못나고《미련》한 자들에 의해 고향이 지켜졌다. 너무 못생긴탓에 저 큰산을 저렇게 드팀없이 지켜선 나무처럼,    산에 잡목들을 하찮게 여기는 우를 범해서는 안된다. 실재적으로 산을 지키고 산 사태를 막고 산홍수를 말리는 등 록색땜의 역할은 잡목들이 담당하고있다. 못난 나무가 없는 산은 골짜기가 없는 산을 찾는것과 같을것이다. 못난 나무가 산을 지킨다는 속담에는 오묘한 인생철리가, 처세의 묘리가 담겨져있다.    이 세상에는 약삭빠르게 사는 사람들이 참 많다. 그 사람들은 정직하게 땀을 흘리는 사람들을 바보로 여긴다. 자기들처럼 살지 못한다고 비웃는다. 편하게 사는 방법이 있는데 모른다고 비아냥거린다. 그들은 스스로 슬기롭다고 여긴다. 세상을 잘 사는 방법은 사람나름에 달렸다고, 멋지게 사는것은 아무나 하는일 아니라고 은근히 자부심을 내세운다.    그런데 그런 사람들일수록 일신에 해되거나 리득이 없을 때에는 나서지 않을뿐만 아니라 뒤걸음질친다. 그러나 리득을 볼 일이면 물불을 가리지 않고 달려든다. 이런 사람들은 스스로 총명한체 하지만 기실 세상을 웃기는 존재들이다. 자기 목숨이나 부지하고 있을것이지, 왜 참견하는데? 누가 알아주기나 하는가? 죽으면 끝장인데.... 농촌에 남아 부모를 모시는 자녀들을 그 집에서 못난 자식이라 한다. 도시에서 공장을 지키고 있는 이들도 어쩌면 못난 사람들에 속한다고 할것이다.    허지만 나라나 민족도 사실 못난 사람들이 지켜왔다. 잘난 사람들은 정작 민족과 나라가 어려울 때 제몸 살려고 요리조리 피해버리지만 못난이들은 우직하게 목숨걸고 구국항쟁에 생명을 불태웠다. 그런 열혈지사들이 없었던들 오늘의 우리가 있을수 있으랴!력래로 나라를 위해 목숨바친 수많은 사람들은《못생긴》민초들이였다.    세상에는 잘난 사람이 더 많은것일까? 아니면 바보가 더 많은것일까? 암투와 리기로 시끌벅적한 인간촌에는 잘난 사람이 더 많은지 모른다. 가령 가장한 바보들이 있다면 그냥 바보들로 보아서는 아니될 일이다. 박학다재하고 명지하던 정판교가 난득호도(难得糊涂)라는 절창을 내놓았을 때는 이만저만한 숙고가 없지 않았을것이다. 스스로 어리석은체 얼떨떨한체 하는 사람은 바보일지라도 거룩한《바보》들이다.    끼리 대화하면 편안하다. 그러나 한 사람과 간능한 사람과 일을 도모하면 파탄날수밖에 없다. 인간관계는 오묘하기 그지없다. 쾌적하게 살고싶으면 방법이 있다. 가 되면 된다. 적당히 속아주고, 적당히 넘어가주면 된다. 바보같은 수하가 되면 끝까지 자리를 지킬수 있다. 그러나 너무 똑똑하면 도무지 청운의 사다리를 끝까지 오를수가 없다.      자기 생각과는 다르게 지고가는 또 지고가야만 하는 그런 생활의 십자가가 우리 매개인에게 지워진 인간세상이다. 똑똑한 사람이 어떻게 십자가를 질수 있겠는가. 십자가를 지고 가지 못하는 사람을 보라. 한결같이 똑똑한 사람이다. 자기 할일도 많고 이룰것도 많은데 어떻게 홍익인간의 십자가를 질수 있겠는가.    험난한 인간세상을 헤치고 나가는 비결은 큰 능력을 나타내는데 있지 않다. 너무 드러나서 먼저 썪는 서까래가 되지 않으려면 매사에 근신해야 한다. 누구든지 자기를 따르면 흥하고 거역하면 패망하게 하는 칼자루를 쥐고 있고 그것을 능란하게 휘두를줄 안다. 요요한 권력자앞에서는 당연히 자로, 자로 되여야 한다. 그것이 살아남는 길이요 거듭나는 무대이다.      나는 오늘도 못생긴 나무처럼 살아간다. 못생긴 나무가 산을 지킨다는 사실을 되새기며 살아간다. 제힘으로 변화시킬수 없는것은 받아들이며 질그릇에 금은보배를 담듯이 나의 못생긴 운명의 그릇에 나름껏 캐여내는 정신적보물을 담으면서…                                                                                               2012년 2월  (연변일보)
19    담배,신분 및 기타 댓글:  조회:9435  추천:0  2012-03-28
                                                               담배, 신분 및 기타                                                                           최 균 선          특색있는 사회주의를 건설한다는 이 시대에 고급담배로 신분이나 지위를 과시하는 자아가치실현이 만연되고있다. 기실 담배피우는것으로 신분의 고귀함과 지위의 재세를 부린것은 일찍 청조때부터였다고 한다. 그 우량한 전통을 계승하여서인지 마드로스를 들고 있으면 쓰딸린의 기질을 볼수 있고 여송연을 입에 물고있으면 귀족기질이 보이고 고급담배를 피우면 신분과 지위를 보아낼수 있다는 말이 있다.      “만리길 가느니 ‘만보로‘를 피우라던가? 확실히 고급담배 아니면 안피우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최고급담배를 피우는양 너무 수선떨 필요는 없다. 기껏해 한갑에 몇십원짜리를 피우는것은 현재 중국흡연계에서는 새끼무당에 불과하니 말이다. 공보된 담배가격표를 보면 정말 혀가 내둘러질것이다.        초고급으로《(천리달목(千里达木)》39000원/ 보루《고희패세(高希霸世)》 22600원/보루, 제2등급으로《로미오 1호(罗密欧1号)》9968원/보루 등이 있고 소위 특급으로 최고870짜리, 최저 360원짜리도 있다. 그 아래 차원으로 266원짜리도 있고 고급담배로 명명되는것으로 192원, 186원,100원짜리가 있으며 그 버금으로 98원,96원, 50원/보루가 있다.        일컬어 대중담배로는《개은미등(盖银美登)》46원/보루,《개장정(盖长征)》40원/보루, 그 아래 차원으로《중남해》38원이다. 최하층 대중담배로 높은값이 18원/ 보루(연소웅묘(软小熊猫) , 제일 최하로《팔달령(八达岭 )비마(飞马) 》14元/ 보루이다. 이런 담배의 가격표에서 중국의 빈부격차와 부패일지를 읽는듯 할것이다.        최고 39000원짜리와 최하14원짜리를 비교해보라, 내가 수자에 둔감해서 계산기로 나누기를 해보니 2785.7142가 나왔다. 이게 공배수인지 모르겠다. 39000원 이면 담배한가치 값이 얼마일가? 아름차서 나누기를 략한다. 그것을 몇분안에 태워버린다는것은 참으로 기네스북에 오를만한 장거이다. 담배가격차가 그대로 신분의 차이가 될것인가? 최하층인간으로 최고급 담배를 피우지 못한다해서 인격력량마저 그렇게 몇천배 차이가 날수 있을것인가? 만약 날마다 몇만원, 몇천원짜리 담배를 피운다면 무엇을 의미하고 있는가? 수요의 소비인가, 자기과시의 소비인가?        어떤 고급담배를 피우든 어떤 방식으로 피우든 바탕맛은 담배맛이다. 담배맛은 그냥 담배맛이지 향료냄새일수는 없다. 수십백가지 배추김치맛이 있다해도 배추를 등질수 없는 도리와 같다. 담배의 가격차이에서 먼저 치부한 자와 권력자들의 사치한 추구는 뭇사람들의 위에 올라앉으려는 자세로서 실질적으로 “재부에서 향수하는 변태감”을 조장하고 있을뿐이다.        항간에는 억수로 취했는데도 술을 마시면 사람이 술을 마시는것이 아니라 술이 사람을 마신다는 말이 있다. 같은 도리로 사람이 담배를 피우는것이 아니라 담배가 사람을 피우는것이 아닐가? 결국 고귀하신 신분이나 직위가 담배연기로 사라진다는 추리가 나올법도 하다. 담배의 사용가치는 피우기 위한것이고 담배연기맛을 보는것이다. 물론 이것은 보통담배를 피우는 차원의 얘기이고 몇만원, 몇천원씩 태워버리는 장거는 이런 사용가치로 계산이 되지 않을것은 물론이다.        중국사회과학원 공업경제연구소의 한차례 조사통계에 의하면 초고급 담배를 소비하는 군체의 소비동기는 담배를 통하여 신분과 지위의 특수성을 체현하는것이나 이런 사람들은 제돈으로 천문수자의 높은 가격의 담배를 사서 피우는것이 아니라 뢰물로 들어온것을 피우는것이 절대다수라고 피로하였다.        요란하게 선전하는대로 담배가 그렇게 위해하다는데 최고급담배라해서 보건품이  될수는 없는 노릇이다. 흡연은 일종 비문명행위라고 규정짓고있다. 하다면 초고급담 배를 피우면 초고급문명행위가 되는건가? 그럼에도 피우는 담배가 신분과 지위의 상징으로 되고있다는것은 아이로니이다. 무슨 담배를 피우든 우선은 사람이 아니던가?        전하는데 의하며 발달국가의 상층계층에서는 흡연률의 70%로부터 15%로 하강되였다 하고 중국의 최고령도자들은 모두 담배를 피우지 않는다고 한다. 이로써 어떤 담배를 피우는가로 신분이나 지위를 나타내려던 시대는 옛말이 되여 다시는 돌아 오지 않는다는 설명이 되겠다. 그래도 그냥 담배로 자기신분을 확증시키고 지위를 나타내려 한다면 우스운 사유방식이 아닐수 없다.        중국의 많은 상품의 물가가 대관절 왜 이렇게 되는지 궁금하다. 무릇 어떠한 상품이든 사용가치와 교환가치 두개 인소로 구성되여있다. 사용가치란 사람들의 모종 수요를 만족시키는 물품의 효용성이다. 사용가치는 상품의 지연속성에 의해 결정된다. 최고의 담배와 최저의 담배의 질과 량이 그렇게도 몇천배 차이가 난단말인가?        상품의 사용가치를 벗겨버리면 남는것은 오직 하나의 속성ㅡ로동의 산품이라는것이다. 담배한가치를 만드는데 근 2천원의 로력이 든단말인가? 가치실체란 상품속에 응결된 인류의 추상로동이다. 그만큼 가치량은 상품속에 응결된 사회필요로동이 된다. 상품의 가치량은 가치실체를 형성한 로동량으로 계산되고 로동자체의 량은 로동지속시간으로 계산된다. 상품은 사용가치와 가치의 통일체이며 상품생산과정은 로동과정과 가치형성과정의 통일이다.        그러면 가격의 기준은 무엇인가? 가치규률은 객관적인것으로서 사람의 의지에 의해 전이되지 않는다는 등 서책적인 정의와 해석이 잡다하지만 복잡하게 말할것없이 상품의 가격과 가치의 일치는 우연적으로서 불일치가 비일비재이다. 물가를 결정하는데 이런저런 의거가 있지만 주요하게는 시장의 공급상황에 따라 가격이 변화무상하다.《락양귀지(洛阳纸贵)》라는 성구가 있듯이 물건이 희소하면 귀하게 된다는것은 상식이다. 말하자면 공급과 수요사이에서 올랐다, 내렸다 하는것이다. 그러나 천문수자의 엄청난 담배값은 공급과 수요문제도 아니고 심리수요에서 생긴 롱간이 아닐수 없다.        각설하고, 담배의 유해성은 이미 범세계적으로 공인하고있다. 그런데 아래의 사실을 누가 명쾌하게 해석할수 있을가? 전하는바에 연초계통에서 국민경제에 매일1 0여억 인민페를 공헌한다고 한다. 1982년 부터 2004년 중국연초 산업에서 바친 공상세 루계가 무려 15778억원으로서 국가재정 수입을 증가하였고 시장소비를 만족시키는데 국민경제의 중요한 기둥의 하나로 되여 적극 공헌하고 있다고 한다.         동시에 로동밀집형기업인 연초기업에서 대량적인 일자리를 제공하고 취업률을 높이여 사회의 안정으로 도모하는 중요한 력량이라고 한다. 국내 연초산업계통에 종사하는 사람이 근 1억명이나 되며 각지에서 실업인원과 여러 학교졸업생들의 생계 를 해결해 준단다. 거기에 연초산업과 련계된 몇백만의 담배농들의 생계까지 포함하면 마멸시킬수 없는 공헌을 하고있다는것은 숨길수 없는 사실이다.         2005년 수치로 계산된바에 의하면 연초공상세수입의 합계는 2000여억원이 된다고 하였다. 실제상 연초산업이 나라에 공헌하는 세수액은 4000억원에 달하였고 “연초와 에너지산업은 줄곧 우리 나라 세수액의 두개 큰 명맥과 기둥”으로 되였다고 공보하였다. 연초산업에서 보유한 자산은 이미 5천억원이 되고 6000만이 연초업에 종사하고있으며 매년 국가공헌의 십분의 일의 재정수입을 올린단다.        이 모든 소위 공헌은 누가 창출한것인가? 물을것도 없이 담배를 피우는 사람들의 덕분이 아니겠는가? 그런데도 금연을 제창한다면 국가재정수입의 주요한 통로를 막는것이 아니며 나아가서 국가재정 수입의 기둥을 흔들고 대동맥을 끊자는것과 같지 않은가? 불가능한 일이지만 전국 모든 흡연자들이 한결같이 금연한다면 재미있는 결과가 나올것이다. 담배는 위해성이 있다고 겉곽에 명백히 밝히면서도 부단히 담배 생산을 발전시키고 담배값을 높이는것은 병주고 약주기가 아닌가? 자가당착 인가? 모순률인가? 배중률인가? 자기 혀를 씹기는 아닌가?        이런 얘기가 있다. 만드는 사람은 제쓰자고 만드는것이 아니고 사는 사람도 제쓰자고 사는것이 아니고 쓰는 사람은 그것이 무엇인지 모르고 쓰는것이 있는데 그게 무어냐? 관이다. 한보루에 39000원씩 하는 담배를 만드는 로동자는 제피울 생각 은 꿈에도 못할것이고 그것을 사가는 사람은 제피우자고 사기보다 거개 뢰물로 바치기 위한것이요, 뢰물을 받은자도 금연한 상태라면 그것을 다시 현금으로 바꿔들이고 처리한 담배는 다른 손으로 또 뢰물로 돌려지고…        고급담배로 자기를 나타내려 꾸밀필요가 없다. 남경시 강녕구방산관국원국장 주구경은 습관적으로 손가까이에 놓고있던 한갑의 담배가 조사대상의 빌미가 되였고 마침내 고급담배를 피우는 등 사치한 소비행위로 해임을 당하고 전도를 망치고말았다. 재주를 쓰다가 메주를 쓴 격이랄가. 몇만원, 몇천원짜리 담배를 제돈으로 사피운다는것은 아이보다 배꼽이 큰데 이런 밑지는 장사를 할 자가 세상에 있기나 할가?        아무튼 세상사에 자가당착인 일이 한두가지 아님은 사실이라 하겠다.                                                                                           2012년 3월 25일      
18    표절과 인용 댓글:  조회:8464  추천:0  2012-03-05
                                                                                                인용과 표절의 차이                                                                                                         최 균 선           어느때부터 만연되였는지는 몰라도 중국만이 아니라 외국에서도 표절현상이 우심하여 의론이 분분하게 되였다. 표절이란 무엇인가? 위키백과에서는 표절(剽窃)이란 다른 사람이 쓴 문학작품이나 학술논문, 또는 기타 각종 글의 일부 또는 전부를 직접 베끼거나 아니면 관념을 모방하면서, 마치 자신의 독창적인 산물인것처럼 공표하는 행위를 가리킨다고 해석하고있다.          인용(引用)은 다른 사람들의 저작들에서 구절이나 단락을 발취하려 할때 원저자와 그것의 구체적출처를 밝히고 광명정대하게 리용하는것을 말한다. 인용은 여러가지 리유에서 사용된다. 의미를 명확하게 하거나 인용되는 글의 주장을 확실하게 뒷받침하려 할 때, 또는 자기 글에 색다른 정보를 제공하려는 경우에도 사용된다. 이는 단순히 론의를 위해서일수도 있고 원저자에 대한 경의를 표하기 위한것일수도 있으며 론거를 충실하게 하려는 목적도 있다. “베른협약”이라는것이 나온것처럼 인용법은 범세계적으로 공인된 수법이다.           그런데 출처를 밝히기만 하면 표절이 아니라고 할수 있을가? 자기 이름으로 내는 론문에서 핵심내용이나 대부분이 남의 글에서 옮겨온것이라면 출처를 분명하게 밝혔더라도 표절로 볼수 있는데 인용과 표절의 차이를 딱 부러지게 말하기 어려운 경우가 종종 있다. 우선 인용의 정도이다. 정당한 범위안에서의 인용이여야 하는데 항목 설명이 주된 구성부분이고 인용은 부수적이어야 한다. 주종관계가 인용이 원 문보다 길어서는 안된다는 등은 상식적인 규정에 불과하다.           인용하는 글이 저작의 일부여야 한다고 규정할수도 없다. 짧은 문구나 시, 가사 등은 그 전부를 인용할수도 있기때문이다. 한편, 잡지나 신문 등에서의 보도를 위한 인용의 범위에 대해서는 그 해석이 쉽지 않다고 생각된다. 특히 겨끔내기로 써내는 문법서들이나 사전들에서 어느것이 기성된것이고 어느것이 창조발명인지 아무도 금을 그을수 없다. 인용하면서 약간 수정하거나 변경시켜도 인용되는 저작물의 기본적 동일성에 변함이 없고 그 표현의 본질적특성을 그대로 감득할수 있다면 역시 인용이라고 보아야 한다.            전국의 다른 국립대학들에서는 어쩌는지 몰라도 내가 몇년 있었던 사립대학경우, 해마다 졸업론문를 쓸 때이면 학생마다 우선 착수하는것이 자료수집이고 이른바 연구  검토단계이다. 크든 작든 자기 집을 지으려면 네기둥과 간기둥, 그것들을 이어주는 가름목들과 대들보, 연목들이 두루 갖추어져야 착수할수 있다. 남에게서 얻어온 재목들로만 집모양이 얼추 나게 엮을수 없다. 학생들이 론문쓰기에서“집” 이라는 추상적 제목을 내놓고 막연하게 여기저기서 가능한대로 재목ㅡ자료들을 끌어들인다.           그다음 구조의 크기와 형식을 설정하고 그에 맞게 재료를 마르며 조합을 시도한다. 특히 한국어로 졸업론문을 써야 하니 아는것이 많지 않고 새 견해나 관점이란 있을수도 없는데다가 론증할수도 없고 사유방향도 서지 못하다보니 거의다 인터넷에 뜬 글에 매달린다. 여기 한단락, 저기서 한구절씩 뽑아내여 론제에 맞게 엮으려고 모지름을 쓰지만 룡두사미격의 글이 되기도 하고 말대가리에 당나귀주둥이를 갖다대는격의 글이 되며 종적인 련계, 유기적결합이 잘 되지 못하여 횡설수설이 되여진다.           이런 조합식론문은 학자,교수들속에서도 성행하고 있는데 학생더러 혼자 깨여있으라고 요구할수도 없다. 인용을 많이 하되 정당성을 기하여 각주같은것을 달것을 요구하지만 어느것이 인용이고 어느것이 작자의것인지 구별할수 없는판에 각주를 달아봐야 눈감고 야옹하는 격으로 자아기편이 아닐수 없다.           인용의 출처를 밝히지 않고 타인의 글 전부나 일부를 그대로 가져다가 자기가 쓴것처럼 내놓것은 대학생들이 할수 있는 저차원의 표절이고 여러가지 동종의 글에 구절구절을 발취하여 단순히 조합하거나 한 문장을 통채로 옮겨다가 가담가담 자신의 해석인것처럼 보태거나 개념들을 동의어로 바꿔놓는것은 조금 고차원적인 표절방식이다. 가장 교묘한 표절로는 착상, 주제발굴을 가로채는것인데 문제의 제기, 가설, 론증, 결론 등을 도용하는것이다. 대학보고서와 론문에서 심심찮게 볼수 있는 상당히 수준이 높은 표절이다. 이런 표절방식은 학술계에서도 만연된지 오래다.           문학, 사회학, 언어학 범위의 학사론문은 지도성과 경제효익을 기약하지 않기에 두루뭉실 얽어가지만 기술가치함량이 높은 론문같은것을 베껴내면 문자만이 아니라 남의 연구성과까지 훔치는것으로 된다. 이 시점에서 대학(국립대학도)에서 학생들이 꼭 졸업론문을 써야 하는가? 하고 곤혹에 빠지는 사람들이 많지만 함께 탄 배가 물결 따라 흐르는데 혼자 뛰여내린다면 시세에 어두운 사람이 될것이다.         물론 본과4년을 배운것을 리용하여 어떤 과제를 조사연구하거나 총화를 짓는것은 사회에 학술가치나 경제적실효를 제공하는것 아니라 그저 학습성과를 현시하며 학사자격을 가지는 형식이고 론문이 학생에 대한 고찰정도에 그친다고 여기면 심상한 일이라 크게 문장을 지을 일도 아니나《그래도 이건 아닌데…》하고 뇌까리게 된다.          전국적으로 서로 베껴내는 풍조가 활개치는 마당에 내것도 다른 사람이 표절할수 있다는 가능성을 생각하면 누구를 질타할 일도 못된다. 이 시점에서 정당한 방법으로 옮겨쓰면 인용인데 아이보다 배꼽이 더 큰것처럼 자기 말은 몇구절 없이 대부분 남의 사상이나 견해의 조합하지 말라고 뒤를 누르지만 고양이에게 부뚜막고기를 먹어서는 안된다는 으름장에 불과한것이였다.          뉴톤이 모든 창조는 재창조라고 말했듯이 글을 쓰는 사람은 누구나 다다소소히 타인들의 사유에 힘입으며 자기 사상, 견해를 서술하지 않을수 없다. 그만큼 인용이 없이는 자기의 정당성을 론증명하기엔 무기력하다는것을 자인하고 어쩔수 없이 타인의 사유를 빌려다가 쓰는것이 정당화되여 왔다.           그런데 본문보다도 인용문이 더 많은 론문이나 참고문헌목록이 길고 긴 리론서들을 보면 명칭이 다를뿐 역시 옮긴것은 옮긴것이요 한두마디 건너 인용하는것은《나의 독창적인 견해는 별로 없소》라는 발견의 부재를 드러내는것이다. 비록 광명 정대하게 각주를 달아도 표절과 똑같은 효과를 얻고있다. 새 사상을 가지고 독자적으로 피력할 자신이 있다면 남의 사상의 목장에서 방목하는격으로 그저 자료에만 매달릴 필요는 없으며 책을 인용투성이로 만들필요도 없으리라.         인용에는 대체상 소크라테스, 맑스, 프로이드, 니체, 칸트같은 대사상가들의 말로 자기 론증에 버팀목을 삼는게 관례이다. 그런데 선인들이 이미 기성화시킨 문법리론이 있는데도 새록새록 나오는 문법교과서들은 중복로동이 많기마련이고 읽기교과서나 문학작품선 같은것들은 편자의 가치기준, 선호도에 따라 기성작품을 옮기는것이니 컴퓨터시대에는 마음만 먹으면 해낼수 있는 쉬운《저술》작업이라 할것이다.          창작하거나 저술하거나 정확성을 담보할수 없더라도 한편의 글에 자기 모종 사상견해가 있어야 한다. 자기 발견이나 견해가 전무후무한데 책을 엮었다면 무모하며 결과적으로 무효로동이다. 사상,관념이란 지식과 지혜의 산물로서 명확한 목표를 전제로 한 사유활동의 결과물이요 저자의 령혼이며 그 글은 거기서 피여난 꽃이다.        사상표현이란 문필가들의 궁극적인 목표이다. 오직 사상만이 글에 생명을 부여하고 사회적가치를 제공한다. 사상가는 명확한 목표와 의지와 책임감으로 대중을 계몽하고 인도하는 선구자로서 모든 문필가들의 귀감이다. 그리하여 불세출의 대사상가 들은 고귀하고 위대하며 그 지식과 사상의 빛발을 모든 독자들이 터득하려 하고 접수하고 자기 실천행동에 지침으로 삼으려하기에 숭경의 대상이 되는것이다.          참다운 리론가의 길은 진리ㅡ사상과 리론을 창출해내고 진리로써 인간들을 더 높은 차원의 인식단계로 끌어올려주데 있는것이며 그 진리의 빛으로 새로운 진리들을 탐색해낼수 있도록 나아갈 길을 비춰주는데 있다. 인류문명사에서 별처럼 떠올랐던 수많은 사상가들이 있었기에 인류는 오늘의 현대문명시대에 이른것이 아니랴,           설사 위대한 사상은 아니라도 독창적인 견해도 없고 개성적인 론술능력이 없다면 진리를 탐구하는 길에 튼튼히 설수 없고 앞장서서 갈수도 없는 절름발이“문필가, 리론”가라고 해야 할것이다. 두뇌에 기성리론만 가득차있으나 자신의 사유력으로는 촌보난행이기에 표절하거나 인용하는 길밖에 없을것이다.           물론 현대에는 참고문헌을 등지고 저술할수 있는 천재들이 많지 않고 한구절도 인용하지 않고 론술할수 있는 학자나 평생 타인의 리론에 의지하지 않는다고 장담할 리론가들이 별로 없지만 적어도 타인의 사상노예로 충당되지 말아야 할것은 자명하다. 만약 그런 사유의 연골증“환자”들이 사상가, 리론가. 작가처럼 행세한다면 지극히 우려스러운 일이 아닐수 없다.           세상이 변하여 종말이 온다하더라도 자기 자신의 사상만은 영생하기를 바라는것은 모든 사상가들의 저술의 취지이다. 사상은 저자, 문장의 표지이다. 하여 사상이 있는 사람은 타인의 사상과 리론을 후무리려하지 않는다. 지금처럼 론술에서 표절 행위가 공공연하면 사상가들이 배출되기 어려우며 지식인사회의 불치의 암증으로 어느 민족의 문화발전이든지 만성자살에 이르게 될것이다.                                                                                            2012년2월  15 일
17    (교육칼럼) 자식은 피조물이 아니며 부모는 주물공이 아니다 댓글:  조회:10118  추천:5  2012-02-23
인간의 바람직한 성장, 발전이 전개되고 촉진되는 교육현장은 학교, 가정, 사회라는 불가분리적인 세마당으로 이루어졌다. 따라서 교차적이며 조화로운 협동속에서 종합자질이 구비된 “세계공민”을 육성하는데 취지가 있다. 그런데 많은 학부모들은 교육이 학교교육에서 전부 실현되는것처럼 생각하면서 그저 물질적뒤바라지나 해주면 부모의 의무와 도리를 다 한것으로 여기고있다. 가정은 인간교육이 사랑을 통해서 진행되는 최초의 교육마당으로서 조화로운 대인관계, 사회관계를 맺는데 필요한 례의범절, 량호한 습관, 풍속등을 익히고 시비 관념, 가치판단의 기준도 초보적으로 익히게 된다. 그래서 자기 자식에 대한 어머니 의 영향은 백명교원의 영향을 초과한다고 하는것이다. 이렇듯 학교교육은 가정교육의 터전우에서만이 충실한 열매를 맺을수 있다. 그런데 부모들의 교육관념에는 이런저런 문제점이 존재하고있다. 첫째로 자식에 대한 비현실적인 기대치이다. 자식을 저마다 “룡”이나 “봉황”으로 만들고싶은 욕망은 리해되나 이런 교육관념의 편차로 조건만 지어주고 본인이 노력만 하면 무엇이나 다 배워낼수 있다고 여기면서 아이의 정신적자질, 취미같은것은 외면하고 주관욕망에만 매달린다. 사실 어떤 자질은 시작부터 좌절당할수 있다. “항상 장군이 될수 없으나 항상 사람은 될수 있다.(괴테)”는 말을 명기할 필요가 있다. 사람은 자기가 하고싶은것을 할 때 가장 빛나게 능력을 발휘한다. 아이들도 마찬가지이다. 비현실적인 기대치가 사회 실제 수요와 아이의 심신발전의 내심수요와 엄청나게 어긋나면서 아이의 자연적인 발전에 인위적인 장애물을 조성하는것이다.  자기 아이를 잘 아는 부모가 명지한 부모이다. 아이를 자연적인 성장기회속에 놓아 두어야 하지 공연한 승벽심으로 아이를 경쟁의 소용돌이속에 몰아넣지 말아야 한다. 자식은 피조물이 아니며 부모는 주물공이 아니다.  둘째로 지적학습평가에 대한 편파적인 집념이다. 유일진학론의 지휘봉밑에서 아이들이 공부기계로 전락되고있는데 정서상수발전에도 신경을 써야 한다. 정서상수 (EQ)는 개체에 고유한 가장 중요한 생존능력이다. 아이들을 부호나 수자더미에 구겨박지 말라. 세계는 수자경쟁의 세계이기도 하지만 보다는 인정세계로서 심리경쟁이 치렬한 세계이다. 성공의 요소에서 지력요소는 20%밖에 차지하지 않는다. 작가 발자끄의 성공이나 발명대왕 에디슨의 성공사가 이를 잘 증명한다. 그리고 많은 가정들에서 아이들에게《넌 네공부나 해, 집일을 참견말고…》라고 하는것이 부모들의 부탁이고 공동한 심리상태이다. 이런 관심과 배려는 결국 영원히 크지 않는 “아이”를 길러내는것이며 의뢰심과 귀족심리의 토양이 되여 생존능력을 약화시키는것과 다를바 없다. 오직 행동으로 해냐갈수 있는 사람만이 치렬한 경쟁의 급류속에 떠밀려가지 않고 도태되지 않을수 있다. 명지한 학부모들이여!자기 자식을 무작정 “장군”으로만 키우려 하지 말고 적성에 맞는 “병사”를 키울 심리준비도 하시라. 훌륭한 “병사”가 될수 없다면 영원히 “장군” 으로도 될수 없다.   
16    (교육칼럼)학위와 능력의 삼각지대 댓글:  조회:10248  추천:8  2012-02-17
    학위란 대관절 무엇인가? 이런 물음은 오래전부터 있은 질문이지만 나로 말하면 더구나 우문으로 될것이다. 우문은 우문이로되 학위는 표상적으로 한 사람이 어느 한 방면에서 “돌파”를 하여 일정한 성적을 따냈다는 표지이지 한 사람의 전면적인 능력을 표지하는것은 아니다. 이 말은 누가 했는지 현답이다. 속담에 처녀면 다 확실한가? 학위가 정말 능력을 증명할수 있는가?     학력주의란 보다 높은 학력이 우선시되고 특권계층으로 되게 조건을 지어주는 현상을 의미한다. 이때는 학력의 명목가치가 그 실질가치, 즉 학력에 미치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사회적보상은 그 명목가치에 따라 이루어진다. 근간에 각 대학, 학원들의 한국어교원 초빙조건에서 언필칭 석사, 박사이다. 물론 그 요구대로 인입할수는 없고 희망사항인것은 알겠지만 아무튼 학위만능이 얼마나 우심한가를 설명한다.     한국어를 배우는 학생들은 비록 대학생들이지만 기점이 걸음마를 타는것으로서 접수능력과 사유능력, 자습능력 등면에서 우세할뿐 식자관부터 넘어야 하는 소학교일학년생들이다. 조선족소학교에 일학생들은 학전교육의 계단에 식자관을 넘고 들어온 아이들이고 언어환경의 우세로 언어습득면에서 대학생들보다 오히려 기점이 높다.     랭정하게 투시하면 대학교 교수라해서 꼭 이런 “소학생” 들에 적임교수자라고 말하기 어렵다. 경험많고 유능한 소학교원들이나 착실한 중학교원들이 식자교수에서는 오히려 적임자일수 있다. 그런데도 한결같이 학위지상주의에 매달려있기에 그저 연구생 아니면 교수들만 선호한다. 물론 여러가지 리유도 있고 우세도 있겠지만도.     한족학생들은 한국어를 배우는것이지 연구생공부를 하는것이 아니므로 문법도 기초지식 위주이지 학술연구가 아니다. 숟가락이 크다해서 밥을 더 맛있게 많이 먹인다는 법은 없다. 곰방술이라도 폭폭 떠서 먹여주면 입이 작은 아이들에게는 오히려 적격이 아니겠는가? 한국어를 갓배우는 학생들에게도 같은 도리이다.     지금 고학력자들이 위망이 높다해도 한손으로 해를 가리울수 없다. 생물의 다양성으로 하여 세계는 다채롭게 꾸며진다. 무조건 학위만 보는것은 적재적소의 원칙에도 맞지 않는다. 물론 고학년에 올라와서 한국문학사라든가, 개황같은 전업선택과들은 대학물을 먹고 대학교단에 섰던 사람들이 더 적임자일수 있다.     각설하고, 봉건시대에 문벌이라는게 판을 쳤는데 그 자체가 민주사회의 대적으로서 불평등의 대명사이다. 학벌이라는것도 실력경쟁의 견지에서는 역시 불평등기제로서 학위만능주의의 선입견을 앞세운 편파적인 관념을 키우는 바람이 새여들 온상이 될수 있다. 우스운것은 교수에도 무능교수란게 있음을 알게 되였고 석사라해도 포장이 그럴듯한 엉터리 상품에서 받는 그런 실망감을 느끼게 한것이다.     석사증은 따냈지만 어감문제인지 기본교수용어도 제대로 번지지 못하여 한마디 건너 중어를 답새기는 수준이였다. 그래도 석사, 박사라는 학력의 후광이 있어 학교당국에서는 절대적으로 만족하는데 사이비현상이라고 아니할수 없다.     그러니 중국의 각대학들에 직함으로서의 교수는 많지만 학자형이나 학문이 깊은 대학교수는 많지 않다고 하는것이다. 바다에는 고래가 있고 상어도 있고 준치도 있는 반면에 물개도 있고 새우도 있고 불가사리도 있다. 석사, 박사, 교수가 생활하고 가르치고 연구하는 교육현장을 바다에 비유할수 있다면 중국의 무변광대한 학해(学海) 에서 서식하는 석사, 박사, 교수라는 자연인도 류류별별에 다종다양하고 천차만층일것은 당연지사이다.    그 어디에도 상중하가 있는법, 어마어마한 학해에도 고래나 상어나 준치만 있을수 없다. 이런 자연인은 또한 학벌로 나눠지고 인맥으로 나뉘어지고 본학교에서 일한지 오래면 대우를 높여 부교수요 교수요 하는데 명실상부한 교수들과 한물밥이 되여져 교수들의 위상을 깎고 나아가서 학해를 흐리우고있다.     지식경제사회에 학문의 권위라는 위계질서가 존재함은 당연하다. 진정 박학한 권위도 있거니와 어찌하여 보직을 차지한 사람도 있다. 학벌과 관계없이 가진 직위에 따라 어부지리로 교수, 연구생의 계관을 쓴 사람들이 중국에 득시글거리는 상황을 감안할 때 무조건 우러러 보이는것도 맹종이다. 잉어가 준치인양 행세하는 인간들이 있음은 학해를 위해서는 불행이고 비애이지만 요는 성스러운 학해가 오해를 받고있다는 사실이다.    중국에서의 학위제도의 회복은 지난세기70년대말에 발걸음을 떼여80년대에 박사학위수여가 시작되였다. 그런데 언제부터인지 중국박사교육은 목동이 양을 방목하는것과 필적한다고 말할수 있다. 박사도사 한사람이 몇십명, 지어 백여명의 박사연구생을 지도하는 기관은 이미 뉴스가 아니다. 정녕 천재적박도인가?아니면 박사배양도 현대화흐름선이 되였는가? 이를 두고 “박사대약진”이라고 칭하고있다.  지난세기 50년대말 대약진운동의 악과가 돌이킬수 없이 심각했던것처럼 석사, 박사의 수준이 미끄럼타고있으니 학위의 광환도 색바래였다. 이리하여 근년의 박사들을 “물박사”라고 풍자하고 있는 상황이다. 이런 물박사현상이 불러온것은 당연히 학술부패일수밖에 없다. 각학교들에서 박사점을 쟁취한후 교수들도 박도로 승급하게 되였는데 그 모든 교수들이 다 합격된 박도일가?      대량적인 연구생배출, 교수등급제로 중국의 연구생몸값, 교수들 계관의 값이 크게 내릴수밖에 없다. 기록에 따르면 중국의 대학들에 교수인수는 이미 범람상태로서 재난성적이라고 한다. 모대학에 교장의 운전수마저 부교수님신분으로 핸들을 돌린다 니 아이러니인가? 유머인가? 전국정협위원이자 화동리공대학 장감조(张鉴祖)교수는 중국대학들에 교수들이 범람하고 있다고 결론을 내렸다. 작금의 중국대학교수들의 학술수준이 세계각국과의 횡적비교에서든 중국 백여년 학술사에서의 종적비교에서든 사람들이 경악할 정도로 저수준이라고 한다.      중국의 여론계에서 유행되는 물박사(水博士)란 말에 일리가 없는것이 아니다. 통계에 의하면 현재 중국에 박사생만 하여도12만명으로서 미국, 독일다음 세계 제3위라고 한다. 교육부의 규획에 의하면 2010년부터 매년 5만명이 박사학위를 얻게 할것라 하는데 이는 세계 제1위를  차지하는 영광의 기적을 창조하는 셈이다.      그런 흐름식생산에서 나온 “거품박사”들보다 진정한 박사들이 더 많은것도 사실이나 문제는 학술계에 “진짜같은 가짜박사”,“가짜인 정말 박사”들이 있다는것이다, 소위 진짜같은 가짜박사란 “꿩(野鸡)대학”에서 얻은 박사칭호를 말하는데 실제상 인민페로 바꾼 학위증서이다. 물박사, 거품박사들은 독서에 품을 들이지 않았겠지만 돈은 분명 적잖게 들였을것이다. 외국에서 도금한 학위자들도 같고 같다.     이는 존경스러운 진짜 박사님들의 비애일뿐만아니라 이 시대의 비애이다. 박사라 하면 박학의 대명사로서 지난날 박사들이 쌀에 뉘만큼도 안되였을 때는 진정 어느 한가지 학문분야에서 조예가 깊은 전문가들이고 학자들로서 사람들이 진심으로 우러러 보았다. 그게 정상이다. 중학생들이 박사가 더 센가? 교수가 더 센가 하는 의론을 하던 그 시절에는 대학교수도 선택된 학자형의 인재들로서 학문에서 선택된 정영이 되기에 손색이 없었더랬다. 그런데 학위마저 상품화가 다 되여진 지금은 박사, 교수라 해도 반신반의하고있다.      물론 학위획득자가 장악한 지식과 기술자의 실천경험을 동등시할수는 없다. 능력자가 꼭 학위가 높은 사람은 아니기때문이다. 이 역시 정확한 평가이다. 학력과 능력사이에 등호를 칠수 없다는 설명이다. 한걸음 물러서서 학위자가 능력이 없다고 말할수 없는것처럼 높은 학위소유자가 꼭 능력자라고 말할수도 없다. 능력자라면 허명무실할수 없지만 고학력자는 허명무실한사람이 많을수 있다.     고로, 저학력=저자질이 아니듯이 학위가 없다해서 업무자질이 낮다고 기시해서는 안된다. 같은 도리로 고학력자와 높은 자질사이에 등호를 칠수 없듯이 고학력자들속에 업무능력저질자가 있다.  말하자면 학력과 능력문제는 변증법적으로 분석해야 한다는 생각이요 나름대로의 주장이다.     한번 따놓으면 그 광환으로 득세하는 자격증일뿐이라면 세상은 제로섬이 되여진다. 하긴 물이 다 말라버리고 언제만 남아도 그냥 모모 저수지라고 칭하는 인습이니까 리유라면 리유가 되겠다. 실력이 있어도 학위가 없다는 리유로 불공정한 평가를 받고 제자리를 찾지 못하게 되는 사회는 바람직하게 굴러가지 못할것이다. 세상에서 창조적인것은 이런 류의 제도권에서는 창출되지 못한다는것을 알면서도 그냥 편견에 맹목성을 달아맨다는것은 일종의 사회비극이 아닐수 없다.     역설적이게도 사회상에서는 갈수록 학위만능주의에 더 목을 맨다. 이는 공개적인경쟁과 평가기회를 박탈하고 능력에 기초한인재등용의기회를 차단하여 학위증을 준신분증화하는 셈이다. 하여 이런 저런 사정으로 학위를 포기한 본과대학생들을 설자리가 없게 만든다. 이것은 분명 불합리한 사회인소만 조장할뿐이다.                                                                                                                                2011년6월   20일
15    진언련시조 (1) 댓글:  조회:8185  추천:0  2012-02-09
                                진언련시조    (1)                           우주 별총총 신비한데 천국은 어드메냐 찾지마라 지구인이 득달하는 그날에는 필연코 아수라장이 되여질듯 싶으이   우주는 창망하고 세월은 억겁인데 현대문명 백년새에 인공위성 무수하니 언젠가 태공쓰레기 무더기로 쏟아지리   우주의 대폭발은 우연인고 필연인고 묻지마라, 지구촌이 하나 더 생겼더면 천궁의 옥황상제도 태평무사 하리요 태양 태양은 빛을주고 따스함을 쏟아주나 후예가 아홉개를 떨구지 않았던들 우리는 불덩이해를 좋아하지 않으리   해님도 엎어놓은 독안은 못비추듯 봄이라 모든 꽃이 만개하지 않거늘 두어라, 빈익빈부익부 불평등을 어이리   해빛이 비춰주매 시궁창도 번쩍이고 하찮은 먼지도 빛을받아 눈부시네 우리네 인생현장도 이와같은 풍경일세   진리는 태양이요 진실은 해빛이라 먹구름 저너머 태양은 웃노매라 진실을 숨기려하면 어리석기 짝없지   해님은 가난한 농가집도 찾아드네 일컬어 부모관들 해볕같이 한다면야 민심도 태양따르는 해바라기 아니되랴   아침해 청춘의 희망이요 랑만일제 서산에 락조는 로옹들의 묵념인가 석양이 무한히 좋아 불타는 여생요   해빛도 너무 쬐면 꽃비단도 색바랜다. 자식사랑 지나치면 응석둥이 길러내리 여보소 귀한자식은 매한개 더 쳐야제 달 휘영청 밝은달아 월색이 하도좋아 빌려온 빛이라도 칭송이야 아끼랴만 너처럼 호가호위식 인간들도 많더라   휘영청 밝은달은 앞뒤가 다 명경인지 등뒤에 숨긴 흑점 우리는 못보지만 앞면만 바라보면서 찬탄하니 우습다   차디찬 광한궁에 방아찧는 옥토끼야 상아님의 참회를 천년만년 찧으려나 두어라, 배반의 참회 찧는단들 가루뿐   휘영청 만월도 이지러지니 가석타만 기울고 차오름이 달의 탓이 아니여라 우리네 생로병사도 저같지를 않은가   물속에 달님을 건지려는 원숭이야 너를야 비웃을 리유 우리에게 없을진저 저저의 일확천금몽 수중로월 아니냐   교교한 달빛이요 차디찬 월색이라 보는 눈이 유정한가 느낌이 무정한가 아서라 인간의 마음 차일시에 피일시
14    (교육수필)꼭 이리 되여야만 할가 ? 댓글:  조회:10100  추천:3  2012-02-06
        지금 중소학교에의 정규교육못지 않게 필수적인것으로 되고있는 보충보도는 이미 풍조로 되여져 마치 두다리는 있어도 송엽장이 없으면 촌보난행인 사람들처럼 각종 학원에 매달리고 있는데 평범했던 교원이고 이미 성쌓고 남은 돌같은 사람이 되였지만 사회를 향하여 그냥 “꼭 이리 되여야만 합니까?”하고 다시 한번 묻고싶다.        매일 갓입학한 손자“님”을 “모시려” 교문앞에서 기다리며 귀동냥하면 로심초사하는 할아버지, 할머니들속에서 오가는 말이 시험얘기고 성적표이고 하학후 학원에 가는 일이였다. 아이가 “될성부르지”못할가 하면 담임선생들이 첫처방이 학원에 보내야지 않되겠다고 선포한단다. 진종일 갇혀있던 교실에서 아이들이 나오면 할아버지들은 저마끔 학원으로 끌고가는데 소학교에 입학한지 한달도 안되는 일학년생들도 례외가 아니였다. 조기인재교육에 감탄하기 앞서 곤혹과 갖잖은 사색이 내달린다.         그러다가 30여년만에 옛날 동성용 영성학교서 함께 있었던 옛친구를 만났는데 3학년에 다니는 손녀를 기디리고 있었다. 팔도중학에서 교도주임까지 한 그도 학원에 대한 일가견이 있을것같고 보충수업에 대한 체험이 있을듯 싶어서 손녀도 학원에 다니느냐고 물었더니 처음엔 남에게 뒤질세라 보내보았는데 재미가 쑬쑬해서 그만두고 지금은 자기가 “몸소 가르친다”고 하였다. 그의 많은 체험에서 얻은바가 컸다.        제발등에 불이 떨어져봐야 한다는 말이 있듯이 내집에 학교다닐 아이가 있기전까지는 크고 작은 아이들이 방학간, 주말휴식시간은 물론 하학하후 곧장 보충 수업까지 받으러다니는 모습들을 볼때는 강건너 불구경하듯이 그저 고개만 비탈아 보았는데 역시 사람은 제모(사투리)에 부닥쳐봐야 하는갚다.         퇴직하고 한동안 외지에서 교편을 잡았다가 손주놈도 제민족교육을 시키고 싶어 연길에 돌아왔는데 소학에 입학시키고나니 근심이 제먼저 알았는지 지레 찾아들기 시작하였다. 그동안 한족애가 다 된 놈을 마른나무 꺾듯이 달구쳐서 조선어철자관은 간신히 넘겼지만 언어환경이 달라지고 교과서도 달라서 제대로 받아물지 걱정하며 학원보충수업도 떠올려보군 했다.        모두가 취해있는데 현인도 아닌 내가 혼자 깨여있는척 할수는 없는 일이라 학원들의 초생광고를 받아읽으면서 도깨비궁리를 많이도 굴리였다. 그러면서도 마음과 생각은 각각이여서 전국적으로 보편화된 현상이지만 교육이 곁길로 빠졌다고 생각은 떨쳐버릴수 없었다. 왜그냥 곁길로 빠졌다고 고집하게 되는가?       주관적여건으로 말하면 유일승학주의가 이 시대 교육의 주제로 되여있기때문에 점수로서 학생자질의 우렬이 결정되고 교수사업의 성과가 흥량되는 상황에서 조류를 말려낼 사람이 없는것은 막무가내한 일이다. 따라서 부모들마다 자기 아이를 어릴때부터 높은 학점을 따내는 돌출한《특재》로 키우려 하고있기때문이다.        우리의 학교교육의 궁극적목표가 대학입학이고 학생들을 비롯하여 교사와 부모들이 통일전선을 형성하고 있어 유치원부터 교육은 대학입시를 위해 경영되는것이다. 이러한 승학위주의 교육은 교육정상화의 실패를 비롯한 많은 문제점들과 사회적인 병폐를 낳으면서도 현재까지 계속되고 있고 보다 바람직하게 개혁될 가망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 물론 그것을 철저히 해결할 적임자는 아직 테여나지 않았다.       감장송아지를 팔아서라도 자식공부는 시킨다는 우리 민족의 교육열은 세인이 다 아는 일이다. 천군만마가 외나무다리를 향해 진군한다는 흑색7월의 결전이 전국의 각 대학들에서 확대초생하면서부터 많이 느슨해졌지만 입시경쟁은 아직까지도 본인은 물론 부모와 교사의 피를 말리고있다. 교육이 산업화되면서 교육산업의 일종이라 할수 있는 각종 학원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났고 부모들은 아이들의 성적을 높이기 위한 조치로 이런저런 학원을 다니게 하면서부터 더구나 공부기계로 전락되고 말았다.        학교교육에 대한 기대만큼 학교가 부모들의 욕구를 제대로 채워주지 못한다고 생각하고 있다면 기실 이는 교원들의 비애만이 아니라 시대의 비애이기도 하다. 교육의 3대지표인 덕,지,체에서 오로지지(知)만 강구하면서부터 학교교육이라는 말과 승학교육이라는 말이 일맥상통하는 말로 쓰이게 되였다. 부모들은 보편적으로 학교에서는 별로 못배우고 제대로 배우려면 학원을 다녀야 한다는 인식을 선행시킨다.         학교수업이 미처 대응하기 어려운 특기적분야나 학습이 매우 뒤쳐진 학생을 위해서 사교육은 필요할수 있다. 그런데 사교육에는 자녀의 학습수요와 추구보다 부모들의 불안심리와 욕망과 “다른 애들이 다하니까”하는 식인 경쟁심리가 개입되여있다. 많은 부모들은 자녀가 집에서 공부하면 불안해하고 신경전을 한다.         또 자녀의 재능발굴보다는 점수와 등수를 먼저 생각한다. 부모들의 자녀교육에 대해 과잉된 관심은 아이들은 물론 부모들의 생활에 많은 행복의 공간을 빼앗고있다. 또 생계로 동분서주하는 부모들이 보육문제로 울며겨자먹기로 사교육에 의존하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우리의 사교육은 학생의 실력, 거주구역, 가정경제수준을 불문하고 총체적으로 가행되고 그만큼 많은 가정들에 엄청난 사교육비부담을 들씌우고 있어 골치거리가 아닌것이 아니다.         기실 각종 학원, 보도반에서 보충수업은 거개 학교보다 진도를 앞당기는것이 “묘방”으로서 “우세를” 발휘한다. 이런 선행학습위주로 이루어져 학생들은 어려운 문제를 많이 풀다보니 학습에 대한 자신감과 흥미를 상실하게 된다. 또 점수와 석차를 올리는데 치중하다보니 문제풀이를 반복하게 하여 학생이 스스로 끈기있게 해법을 생각해내서 창의적으로 문제를 푸는능력과태도를 만성적으로 상실하게 한다.        까놓고 말해서 학원이 후진생들을 춰세우기 위한 자선적인 교육장치라기보다는 우선은 상업실체로서 학교정상수업에 차질을 빚고있다. 그런데도 학부모들은 학원에 보내지 않으면 자기 아이가 뒤떨어지는것으로 인식하고 시대풍조에 뒤떨어진 부모로 되는듯 심려하다보니 사교육으로 영양보충하는것은 학부모간. 학생들간의 필수적인 경쟁항목으로 되여졌다.           그리하여 마침내 과외공부가 진짜공부이고 학교공부는 간식이라는 전도된 교육관념이 굳어졌고 학원공부라는“교육괴태”가 무소불위의 교육만능으로 부상되였다. 과외보도반은 지금 학생들이 학교, 집 다음 꼭가야 하는 곳이다. 학원에 가면 학교에서 배우지 못하는것도 배우고 배운것을 공고화하기 위해서라고 하고 학교에서도 잘 배울수 있지만 한반에서도 실력차가많이 나서 호상피해를 본다하고 자신의 수준에 맞는 학습내용을 집중적으로 공부할수 없기때문에 가야 한다고도 한다.        보충수업을 하여 후진생들을 향상시키는것은 원래 교원의 직책내의 일이다. 하지만 그것은 상품경제시대 이전, 명실상부한원예사님들에게만 바랄수 있었던 일이였고“위인사표”를 철칙처럼 지키던 교원들만이 할수있은 고상한 책임이였다. 지금도그런 헌신적이고 책임적인 선생님들이 있지만 그리 많지 않다.         현재 학교정상수업정황은 어떤가?기초부터 차근차근하자니 이미 배운 학생들은 다 아는 내용이라 딴짓을 하는 학생이 많다고 한다. 그렇다고 기초닦기를 배제하고 가르치자니 과외보도를 받지않는 학생들은 전혀 진도를 따라가지 못한다고 한다. 수업진도란 무엇을 전제로 하는가? 절대대부분 학생이 새 지식을 장악하는 지식전수의 일환이다. 진도란 지식전수의 량적전수를 말한다.         철학에서는 량적변화가 질적변화를 일으키지만 학교수업에는 량이 질로 변한다는 철학이 없다. 물론 학기내 교수임무로 말하면 진도란 교원에게 드틸수 없는 우선 과업인것은 사실이다. 비록 주류는 아니지만 교원들속에는 수업시간에는 복습하고 과외지도라고 명명한 시간에도 진도를 나가는 피동적인 위치에 처하게 된다. 이는 역지사지로 생각하면 선생님들의 말못할 고충인것은 사실이다. 한알의 모래알에서 대천세계를 본다고 이런 정황하에 많는 문제점들을 류추해볼수 있다.         원래 과외보도, 써클이라면 말그대로 후진생, 혹은 흥취생을 따로 조직하여 각방면에서 향상을 도모하는것이여야 하는데 학교정상수업을 무시하고 진도를 나감으로써 무슨 묘리나 장악하고 있는듯이 표방하고있지만 기실 상업행위이다. 이처럼 학생의 부담문제 등 여러가지 페단을 감안하여 교육행정부문에서 시종 단속하고 있고 액외수입을 도모하는것을 엄금한다. 그러나 교원대오속에는 그냥 독직자들이 존재하고있다. 수업이 끝나서 의문나는것을 물으면 시간이 없다고 매몰차게 거절해버리고 더 지꿎게 달라붙으면 보도반에 와서 배우라고 하는 교원도 적지 않다.          재직교원들의 과외돈벌이가 단속되니 방법이 바뀌었다. 담임교원이 교외의 인연있는 선생에게 학생을 제공하고 학생당50원좌우를 소개비로 받는것은 언녕 공개된 비밀이다. 만약 자기가 지정한 보도반에 가지 않고 딴데 다니면 부모에게 그냥 성적이 말이 아니라고 간접적으로 암시하는 교원들도 없지 않아 있는 실태이다.        물론 시대의 흐름으로 보아 과외보도반이나 학원의 존재를 무작정 부정할수 없고 긍정면을 시인하지 않을수 없다. 사교육의 가장 큰 장점은 첫째, 교육의 장을 공교육의 중추인 학교밖까지 확장시켜 학생들의 과외활동을 적절히 조률함으로서 열성껏 배움의 길로 이끌수 있다는것이고 둘째로 전문적, 실천적교육이 이루어진다고 말할수도 있다. 그러나 자타가 내심으로 시인하는것인즉 학생들이 정말 필요로하고 부족한 부분을 보충해주기 위해서 경영되는 사교육은 매우 드물다.        그만큼 현상적으로 볼 때 정규적학교교육의 담벽을 “위협”하는 존재인것은 사실이다. 학교측 (선생님)은 과반수이상이 학원이나 과외를 다니기때문에 심화과정, 혹은 자률학습이라는 형태로 수업을 진행하게 되였는데 기초지식을 짧은 시간에 간단히 설명하기때문에 학원을 다니지 않는 학생들이 힘들어할것은 자명하다. 이렇게 소학교부터 중학, 고중에 가면 그 과정은 더심해지고 학생들은 학교수업에 흥미와 신념을 잃게 된다. 그러다 보면 문제아가 생기고 땡땡이를 치는 학생들이 생기고 수업시간에 딴전을 보는 등등의 문제가 비일비재하는것이다.        학원, 과외보도반에 다니는 아이들의 솔직한 말도 많이 들어봤다. 학원에 가면 학교에서 알수 없었던 부분에 대해서 다시 공부할수 있고 친구들과 어울려놀수도 있어 좋다고 한다. 하지만 학교선생님에 대한 또는 학교에 대한 학생들의 불신이 커지고 수업시간에 공부를 하지 않고 다른 행동을 하는 현상이 점차 보편성을 띠게 된다. 학원에서 또 배우면 되기에 학교에서는놀아도 된다고 생각하는것이다.          학교는 다만 지식을 전수받는 곳이고 학생은 지식의 저축기인가? 학교에서는 학습뿐만아니라 군체속에서 인성, 례절,도덕교육,생활교육 등등이 진행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다수 학생들은 학원을 더 좋아하고 학교의 생활들을 소홀히 하는 추세이다. 과연 학교의 좋은점에도 불구하고 학교에 입학해서부터 곧장 학원에 다녀야 하는가? 아니면 학교공부에 더 충실해야 하는가?          상기한 교육의 각이한 페단으로부터 우리의 교육이 곁길로 빠졌다고 하면 착각이고 독선일가? 조선족부모들은 한족들보다 과외보도나 특장 교육에 더 극성을 부리고있다. 인재교육에 대핸 인식이 이상하게 뒤틀리고있다.  그러나 동기는 좋아도 설계도가 바로 건축물인것은 아니며 동경이 곧 미만한 현실로 되는것은 아니다.        과외보도가 만능이고 만사대길인가? 필자가 사는 마을에 한 소학생이 있었는데 다른 아이들이 영어써클이요 수학보도요 끼리끼리 몰려다닐 때 늘 혼자서 뽈도 차며 자유자재로 휴식을 만끽하고 있었다. 하도 궁금해서 몇번 대화하며 알아보았더니학전반도 다니지 않았고 한번도 무슨 써클에 참가하지 않았단다.          그애의 할아버지가 애가 애초에 유치원을 죽어라고 싫어해서 초기부터 독립적학습능력을 키워왔는데 일학년때부터 반장을 하고 각과의 성적도 언제나 앞장이고 웅변, 글짓기경연, 지식경연 등 여러면에서 거의 도거리로 상받는단다. 물론 한애의 사실이 보편성문제에 대한 론거로는 불충분하겠지만 적어도 과외보도반이 만능이라는 잠규칙에 구멍을 펑 뚫고 있음은 사실이 아니겠는가?         따지고 보면 학원이나 과외보도반의 현대화교육시설보다 나을리 없다. 가령 퇴직한 로교원이니 잘 가를칠수 있다고 근거를 댄다면 지금 재직교원들은 자격미달이고 신뢰할수 없는 교원이란 설명이 된다. 정녕 제사에는 마음이  없고 제사밥에만 마음이 있다거나 스스로 학생의 성적제고에는 확신이 서지 않는다는 교원이 혹시 있다면 과시 길은 아는데 자동차는 몰줄 모른다거나 핸들은 잡았는데 아직 몰줄 모른다는 격이 된다. 과외교원들의 힘을 입어 성과를 나타내려 한다면 그 자신을 위해서는 참 슬픈 일이 아닐수 없다. 물론 절대 대부분 선생님들은 충성스러운 교원들이라 생각한다.        몇해전까지만 해도 연길시내에 유격전을 하는 과외보도교원들은 많았지만 그 사이 각종 학원들이 무수히 일떠서 교육계에 기관을 이루고 있음에 경탄이 나왔다. 지식경제시대의 필연적인 산물인가? 현대교육이 나아갈 바람직한 길인가?   어떤 경관을 이루고 있든 과외보도에만 매달리면 남에게 업혀서 달리기를 배우는것과 다를바 없는것으로서 자학능력을 운운할수 없거니와 창신형의 인재로 되기에는 첫단추부터 잘못 채웠다고 생각한다. 결국 돈의 유혹이 이끄는대로 교육이 곁길로 빠진것이다. 현재 중국의 교육이 실패하고 있다는 공중여론이 무성한데 이 점에서도 론거가 제공될수 있다.         학원의 보충수업과 과외보도가 성행하게 된 근원을 따지고 보면 자발적이라기보다 한국의 교육현장을 닮아버린 현상이라고 단정하고싶다. 그런데 한국에서도 근간에 이르러 사교육비와 입시과열 현상으로 시끌벅적하고있다. 사교육이 사회문제로까지 치달아오른 한국에서도 사교육은 긍정적인 영향보다 부정적인 영향이 많은것이 사실이라는 현실을 직시하기 시작했다. 결국 사교육이 성행되면서 정규적인 교육에 많는 페단들을 낳고 충격하고있다는 사실이 실천속에서 증명된것이고 교육관념상 조절이 요청된다는 설명이 되겠다.       하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한마디로 학교의 정상수업을 엄밀하게 짜나가면서 음으로 양으로 진행되는 회색수입을 단절시키고 담장밖에 뻗어나간 가지에서 익은 열매를 자기의 빛으로 익힌것이라고 내세우는 가치관을 가급적으로 개정해야 한다. 아니면 무작정 자기 본직업에 충성하고 몰두하는 길밖에 없다. 교원이 정당한 보수가 아닌 회색수입에 사덕마저  상실한다면 비록 교단에서 섰다해도 유령에 불과하며 애매한 자제들만 해칠뿐이다. 이른바 사교육의 리페를 잘 분별하고 정확한 교육기 제로 운영되였으면 하는 허황한 기대를 가져볼뿐이다.                                                                                                          2008년2 월10 일         
13    (교육칼럼)싱거운 걱정 한마당 타작해본다. 댓글:  조회:9215  추천:0  2012-01-21
    요즈음 한국의 중학교들에서 학교폭력에 배기지 못하고 자살하는 학생이 속출하자 교육계는 물론 전 사회적으로 부심하고있다. 보도기사들을 보면 참으로 중학생들마저 인간성이 이렇게 비틀려 있는가에 경악하게 된다. 가해자들은 장난삼아, 심심 풀이삼아, 기분잡쳐서… 등 리유로 가지가지 야만적폭행을 했다하고 폭력과는 인연이 없어야 할 계집애들조차 사내애들 찜쪄먹게 동성에게 폭력을 가행한다니 정말 젖먹이던 암소도 하늘 우러러 개탄할 일이 아니냐.     가해학생들을 조사할 때 한다는 소리가 참으로 걸작이다.  “센척 안하면 친구들이 우습게봐”   "'차이'를인정하는 법을 못배웠어요."(서울목운중3학년최모군)   센척하지 않으면 우습게봐요. 애들한테 우월해 보이고싶어요.(경기수하중3학년임모군)   3. 스트레스 풀곳이 없어요. 학교갔다 학원갔다 매일 공부공부…. 때리고나면 스트레스 풀리고 우쭐해져요.(서울휘문중2학년 이모군)   4. 같이 왕따시키지 않으면 내가 왕따 되니깐요.(서울영림중3학년이모양)         그야말로 똥누는놈 주저앉히고 이앓는 놈 뺨치고 상가집에서 노래할 너절한 생명들이라 아니할수 없다. 그런데도 가해학생도 껴안아주어야 하고 락인이 찍혀 고등학교 진학을 망치는것도 일이 아니라거니“가해자도 피해자이다. 무조건적인 처벌보다 보호와 관심이 필요하다. 아직 어리지 않은가? 처벌이 능사가 아니다. ”이런 사이비 인권가들은 역향사유를 한다는건가?     참으로 군자들이요 흙으로 빚은 미륵보살이라고나 할가? 포섭의 리론이 성립된다면 피해학생들의 인생에 찍힌 락인ㅡ한평생 아물지 않을 심신의 상처는 어떻게 보듬어야 하는가? 인간을 학대함으로써 쾌감을 느끼는 그런 인간악을 가진 애들은 인성교육의 미달이 아니라 악질적본성으로 보는것이 상식이다.  우리 농촌에는 웬간한 마당에 비질이라는 말이 있다. 참으로 한가한 소리로 약한 애들을 죽이고있다.  한국 대학생46.1%가 “왕따”를 겪어본 경험이 있다고 하고 학교폭력배로 된 경력자70% 이상이 사회에 나가서 범죄자로 전락한다는 통계를 보고 하는 소린지 모르겠다.     나쁜 나무에 좋은 열매가 맺히는 법이 없다. 나무는 그게 무슨 종류이든 한해에 다 자라지 않는다. 중국말에《빙동삼척비일지한((冰冻三尺非一日之寒)이라는 말이 있다. 그애들의 심령속에 너무나 일찍 뿌리내린 인간악이 그래 학교인성교육이 부족하 고 껴안아주지 않아서인가? 물론 사회영향이 객관조건이 되겠지만 그들 내심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할수 없단말인가?     "차이에 대한 교육부족" "외부에 대한 자기방어 및 자기과시욕" "스트레스해소" "추종심리" 등이라고 종합하고 있는데 사회상의 악랄한 조폭들을 초월하는 비인간적행위의 심리바탕은 인성교육의 부족이 아니라 피속에 잠재한 기질적인 인소의 필연적인 악과라고 하면 무식한 소린가?     공부에 대한 과도한 압박감과 공부에 집중된 생활에서 그 리유를 찾기도 했다.  "스트레스 풀곳이없어요",“공부압박감에스트레스는 쌓이는데 풀시간도 없고 풀곳도 없으니 약한 애들한테 푸는것"이라고,“제대로 놀것도없고 스트레스 풀데도 없으니깐 애들 왕따시키면서 재미를느낀다", "일종의 집단놀이문화"다. 이게 인간의 입에서 나오는 말인가. 시에미 역증에 개배때기를 걷어차는 그런 잠시 비틀어지 심리도 아니다. 이런 방자한 구실에서 교육과 인식문제가 아니라 인간된 품질문제라는 결론을 지으면 안되는가?     학교교육이 굉장히 경쟁적이기때문에 애들이 더 폭력적으로 변한다는 주장도 내놓고있다. 어불성설도 유만부동이다. 사회는 학교보다 덜 경쟁적인가? 경쟁이 인간학대증을 낳는다는 천재적인 발상이 귀엽다. 그러나 아무쓸데도 없는 입방아로 구제 불능아들을 감싸려는 저의인지는 몰라도 좀 핑계같은 핑계를 했으면 사람들의 이목을 잠시 흐리겠는데 그도 아니니 가상할뿐이다.     인간악중에서 남을 강압하고 학대하는 그런 악을 생명의 지탱점으로 한다는 그런 인간들은 인간쓰레기들이다. 기실 약자들앞에서 거센체하는 자들은 강자앞에서는 눈물나게 비겁하며 비루한 이중인격자들이다. 종로서 뺨맞고 한강서 발구른다는 속담은 약육강식의 사회에서 간접적반항심을 시사하는 의미도 있지만 별개의 문제이다.     "왜 학교폭력이 일어나는지 아이들에게 진솔하게 들어봐야 한다. 학교폭력을 막기위해서는 단순히 사후처리뿐아니라 평소의 인성교육에도 신경써야한다"고 말했다. 고명한 리론인듯하나 자다가 봉창을 두드리는 격이요 잠결에 남의 다리를 긁는격이다. 리론에서 리론으로 그치는 탁상공론으로서는 요란할지 몰라도 행차뒤 나발처럼 싱겁기는 매한가지이다.     그래 인성교육은 별개로 해야만 하는가? 학교라는 인간집단속에서. 인문교육에 유조하다는 문장들을 배울때 인성교육이 동시적으로 진행되는것이 아니던가? 춤 출때 반드시 고개짓 따로 하고 엉덩이를 따로 흔들어야 하는가? 물론 이는 이로 갚으라는식으로 보복하라고 피해학생들을 부추길수는 없지만 죄는 지은데로 가야 한다.     가해자들을 전학시키는것도 능사가 아니다. 집에서 새는 바가지 밖에선들 아니새랴, 다른 학교에 가면 몸에 배인 악습이 절로 떨어진단 말인가? 화살을 맞은 병사에게 겉에 나온 화살대를 잘라주고 살에 박힌 화살촉은 내과의사를 찾아가보라 하면 얼마나 고명한 의사인가? 생발가락을 앓느라 고생고생하다가 벽을 사이둔 이웃집에 아픈 발을 디밀었다. 그 집주인이 이게 웬발이냐고 호통치니 발이 너무 아파서 내보냈으니 인제 나와 상관없다고, 알아서 처리하라고 하는 우직한자의 옛이야기도 떠올라 허구픈 웃음이 새여나온다     교육에는 감화만 있는게 아니라 강제적교화도 있는것이다. 폭력자들을 가차없이 퇴학시키거나 죄값을 법률적징계로 갚게 하고 인간이 될때까지 가혹하게 다루어 폭력의 맛을 제피부로 체험시키는것은 중요다. 소금이 짠줄은 먹어봤기에 아는것이다. 공권력의 위압감속에서 인성교육이 진행되는것이다. 순자는《인지초성본선(人之初性本善)》이라고 했지만 사실 인간들속에는 기질적으로 반인도적이고 반인애적인 인격장애자가 있고 악랄한 공격성을 가진 괴짜들이 많고도 많다.     그런 자들이 잡힌후 참회하는듯 눈물을 잘 짜는데 악어의 눈물일뿐이다. 한두마디 말에 개과천선했다고 가슴이 찡해하는것은 어리석은 오감이다. 바늘도적이 소도적이 되고 못된 송아지 뿔부터 난다는 속담을 한번 되새겨보자. 될성부르지 못한 애들을 어루만지기전에 보복의 두려움속에서 사회정의와 인간성의 륜리에 대하여 회의하면서 인격적으로 비틀어질수도 있는 피해자들에게 먼저 신경써야 상식에 맞는다. 그런 불쌍한 애들을 먼저 껴안아주고 수모와 치욕의 락인이 찍힌 심령을 보듬어 주는게 순리인데 천사인양 가해자들의 인격배양이니 년령이니 하는것은 식은차를 놓고 해바라기를 까며 한담하는격이다.     오래 쓴 밀걸레는 아무리 빨아도 역시 걸레이다. 걸레를 부엌방에 생주와 함께 놓아두는 사람이 있는가? 승냥이는 양우리에 함께 넣어둘수록 양들만 피해를 본다는 도리가 너무 심오한가? 기해자들을 안고가야 한다는데는 교육학적도리도 없지는 않으나 서서 말하면 허리가 아프지 않은 법이며 탁상공론하면 목은 쉴지라도 엉덩이에 종기는 생기지 않는다.     이리하여 학교폭력을 두고 망국병이 들었다고 개탄한는 지성인들이 많다. 색시그루는 다홍치마때부터 앉히라는 속담은 반도사람이면 다 알것이다. 한인간의 인격형상은 어릴때부터 다듬어어야 할것은 자명한 도리이다. 각계에서 뒤늦게 대책들을 마련하느라 부심하고있는데 피해자의 인명에 관한 문제이고 장원한 관점에서 본다면 새 일대들의 인격문제로서 이번에도 열렬한 론의가 호들갑으로 끝날 위험을 경고하고 나선 지사도 있다. 소잃고도 외양간은 고쳐야 하거니와 단단히 잘 고쳐야 할것이다.     어릴 때 이렇게 반목하고 원한을 가슴에 새긴 사람이 생사를 같이할 전쟁마당에 가해자와 함께 있다고 하자. 뒤에서 총질하지 않으면 량지가 있는 셈이다. 지금 한국에 만연된지 오래나 대책미달로 여전히 횡행하는 폭력, 돈을 갈취하고 좋은 옷이나 금품을 강탈하는 악행들로 교육이 병들고있다.  비정한 힘의 론리를 어릴때부터, 동족사이에, 친구들 사이에서 조장한다면 그 미래는 긍정코 암담할것이며 악순환이 되여 한 나라를 망칠 재화를 불러올수도 있다고 생각하면 너무 앞질러 나가는지 모르겠다.     비록 한겨레라 해도 국경을 달리하는 이국의 일을 두고 콩이야 팥이야 할 계제가 아닌줄 알면서도 계발을 받게 된다. 하여 연길시내 몇몇 소학교5-6학년 학생들과 모중학교 학생들과 담화하며 소위 “왕따” 현상이 여기에는 없는가 료해하였더니 비슷한 사정이 더러 있지만 사회문제로까지는 번져질 조짐은 아니여서 다행이나 역시 우려되는기는 마찬가지이다.     하루는 모소학교 교문앞에서 한 젊은어머니가 일학년생으로 보이는 남자애를 닥달하고있었다. 귀동냥해보니 그애가 자기애의 돈을 몇번이나 빼앗다는것이다. 심상한 일이 아니였다. 이 학교의 일학년 다른 반에도 덩치큰 한 애가 약한 애들을 죽였다 살구고 학용품들을 망가놓는거나 좋은것이 있으면 뺏는 현상이 있다고 하였다. 아직 상습적인 “폭력”행위이라 할수는 없으나 직업병탓인지 심사숙고하게 되였다.     창문을 활짝 열어놓으면 꽃향기도 들어오거니와 쉬파리들도 날아들듯이 한류를 타고 좋은것도 많이 들어왔지만 나쁜것들도 많이 들어왔고 계속 들어오고있다. 못된 버러지 장판방을 긴다고 배우라는것은 아니배우고 못된 짓부터 잘 배우는게 아이들이기도 하니까, 이국 학교들에 만연된 그런 지랄만은 우리의 순진한 학생들이 따라 배우지 말기를 속으로 비는바이다.                                                                                                       2011년11월16 일
12    (교육칼럼)인격배양문제초고 댓글:  조회:9303  추천:2  2012-01-12
                                          1. 문제의 제기       개혁개방시대에 진입하여30여년, 상품경제모식에로의 급전환, 사회분배체계의 대분화, 외래문화의 침투, 사회상의 온갖 부패현상 등은 사람들의 사상관념, 가치취향, 도덕기준을 크게 헝클어놓았다. 하여 진짜와 가짜, 미와 추, 선과 악에 대한 도덕적판 단에 비리한 영향을 생성시켰다. 이런 사회대환경은 학교덕육소환경을 점차 오염시켰으며 정치사상교양과 륜리도덕교육에서 덕육의 목표, 내용, 방법, 방식에 대하여 탐구과제가 제기된지 오래나 그 해결이 묘연하다.       2.《합격된 중학생》덕육목표       덕육목표에는 전면적인격발전이 전제로 되고 있지만 지금까지 학교교육의 덕육현황을 본다면 의연히 정치리론의 주입과 암기, 시험점수, 각종 규장제도에 대한 약속력 등이 도덕륜리교육의 완성화 내지는 결과로 묵인되고 그로서 자족하고있다.  덕육을 단순히 정치화라고 생각하는것은 역시《극좌》사상의 관성, 후유증이라 해야 할것이다.       만약 리론설교에 력점을 두고 점수만 추구한다면 현대청년학생들의 자신발전의 심리수요를 도외시하게 되고 덕육과정에서의 개체의  도덕사회화와 사회도덕의 개체화, 량자간의 관계를 과학적으로 처리하지 못하게 된다. 그러므로 보다높은 차원에서《합격된 공민》양성을 새 목표로 내세워야 한다고 생각한다.      합격된(사회주의) 공민을 양성한다는것은 학생각도에서 문제를 사고하던데로부터 점차 공민의 각도에서 사회도덕문제를 사고하고 판단할줄 알게 하는 덕육의 최종목적을 실현하는것을 말한다.       학교덕육은 전반 국민도덕교육의 중요한 구성부분이자 그 기초로 되여있기때문에 국가의 운명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있다. 그런데 우리는 현시대 청년학생들의 도덕관념에 대해 어느 정도 알고있는가?       세계적범위에서 덕육의 추세는 언녕 사회화에로 나갔다. 그런데 우리가 의연히 리론에서 리론으로 그친다면 경쟁의식이 소용돌이치는 현대사회에 적응할수 있는 인재를 육성할수 없을것은 자명하다. 때문에 덕육의 목표를 시대적차원에로 끌어올려 인격배양에로 전환해야 한다고 생각해본다.       3. 덕육의 핵심문제      《사람은 오직 교육을 거쳐야만 사람이 된다.(칸트)》교육에서 사람을 육성한다는것이 바로 후자인 인격적인간이다.       오래전 전국을 들썽하게 한국기업주 김진선이 고용로동자들더러 무릎을 꿇게 한 사건에 대한 일부 대학생들의 도덕적가치판단은 실로 경악과 우려를 자아내지 않을수 없었다. 100명 중국로동자들이 한국기업주에게 무릎을 꿇은 사건에 대하여 광주 모대학의 96년급대학생들이 토론을 벌리였는데 그들의 언론은 참으로 우리를 심사숙고하게 하였다. 그때 그들의 언론을 회고해보자.     《무릎을 꿇었다는 그 행동으로 말하면 어느 누구에게 무릎을 꿇은것이 아니라 현실에 대하여, 금전에 향하여 머리를 숙였을뿐이다. 이는 슬픈 인생일망정 결코 수치스러운 일은 아니다.…》     《무릎을 꿇었다는것은 손천사(유일하게 무릎을 꿇지 않은 청년로동자ㅡ 필자주) 보다 더 용감하고 더 용기가 수요되는 일이다.》     《한사람의 잠시적굴욕은 한집안의 안녕과 포식을 안겨준다. 그래 속이 빈 몸으로 민족자존을 살릴수 있단말인가? …>등       이런 사이비한 가치판단에 실망한 선생은 옳바른 면에로 이끌려고 자기의 견해를 칠판에 써놓고 동의하는 학생은 손을 들라고 하였다. 그런데 놀라웁게도 80여명 학생들중에서 5-6명이 겨운 손을 들었고 나머지 학생들은《와》하고 웃었다. 물론 대학생들의 웃음에는 그들로서의 리유가 있었을것이고 또 이런 사건에 대한 도덕적가치판단이 전반 대학생들의 도덕가치를 대체한다고 단정할수는 없지만 아무튼 시대의 비극이 아닐수 없다.       일찍 미국의 정객 덜레스가 《평화적이행》이라는 악명높은《예언》을 내놓은후 자기들이 야망을 제3세대4세대에 기탁하면서 호시탐탐 노리고있다는 사실을 젊은 세대들은 알려고 하지 않는다.  높은 도덕적각오에는 고상한 인격이 안받침되여있다. 자고로 충의지사들은 지성인이였고 우국우민의 고귀한 덕성은 륜리도덕과 갈라놓을수 없었다. 그런데 평화적환경과 행복의 요람에서 고이 자란 청년학생들은 자아주체, 자아중심의 경향이 극단에로 나아가고있다.       하다면 덕육과정에서 어떠한 인간상을 부각시킬것인가?       첫째, 자타의 처지를 바꾸어 생각할줄 알며 남을 생각해주는 인정미가 있는 후더운 인간.       둘째, 밝은 사회가 수요하는 성실한 품성을 지녀 맡은바 소임을 책임껏, 열심히 하는 실질적인 사람.       셋째, 자존, 자주, 자애, 자강의 정신이 있고 굳센 의지를 지녀 역경을 헤쳐 나갈줄 아는 진실한 사람.       넷째, 공익과 헌신정신을 발휘할수 있으며 관용과 아량이 있으면서도 품위가있는 사람.       다섯째, 주견이 있으면서도 부드럽고 신의를 지키는 충성스러운 사람.       여섯째, 창조적의력으로 충만되여 자기 운명에 도전하며 협동정신이 있는 운치있고 슬기로운 사람.       일곱째, 애증이 분명하고 불의에 떨쳐나설줄 알면 정의를 위해 용감히 싸우는 고매한 성격의 사람.       여덟째, 렴결과 봉공을 인생척도로 나라와 민족의 진흥에 한몸을 바치려는 웅심이 깊은 사람.       상술한바와 같이 미덕은 인격형성의 주축이 되여지고있다. 미덕은 도덕의 집합이고 도덕의 기초는 인간의 자률정신이다. 미덕에 대한 자발적추구가 없다면 완정한 인간이 될수 없듯이 인간의 심미의식은 그 사람의 일정한 사회실천경험, 민족문화심리 등 제요소의 영향을 받게 되는바 옳바른 심미관수립은 인격형성의 죄표로 된다.       하지만 우리는 이때까지 도덕완성의 자률정신배양을 유의무의하게 홀시해왔다. 자률정신배양에서 다음 몇개 방면에 모를 박아야 할것이다. 우선 륜리규범이 학생들 에게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알려주는것이라면 리성적천명은 어째서 그리해야 하는가를 납득시키는것 즉 해결이다. 이는 도덕적판단능력배양의 전제로 된다.       지(知)와 능(能)은 불가분리적이긴 하지만 도덕규범을 알고있다는것과 도덕 문제해결능력이 있다는것은 별개의 문제이다. 그러므로 덕육은 주입이 위주가 아니라 부단히 자극하고 계발하면서 피교육자들로 하여금 적극 사고하게 하고 상응한  도덕 기준으로 자아인격을 형성하도록 이끌어주어야 한다.      다음 독립성, 창조정신의 배양이다. 도덕의 선택방식에는《습관형,량지형,리지 형》이 있다. 습관형도덕선택방식의 특점은 여러 사람의 시비표준이 되고 권위의 시비표준이 곧 자기의 시비표준이 되여져 독립자주적 판단능력이 결핖한것이다. 이는《전형적인 중국전통적도덕선택방식》이며 또 우리청년학생들이 흔히 취하는 선택방식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권위라하여 절대적으로 미신하지 말고 자기의 경험, 자아 리성, 자아반성으로 분별, 판단할수 있도록 잘 이끌어주는것이 자못 중요하다.         4. 인격배양으 경로문제       자고로 덕이 높은자는 고상한 인격자였다. 우리가 양성해야 할 인간은 현대적인 인격자이므로 마땅히 시대적특성으로부터 출발해야 한다. 아래에 필자의 천박한 체득을 피력하려 한다.       1) 덕육은 사회발전과 변화에 긴밀히 련계되여야 한다.즉 재래의 덕육내용, 방식, 방법에서 해탈하여 일련의 사상, 도덕문제에서의 곤혹을 잘 풀어주어야 한다는것이다. 이를테면 사회주의특색의 현대화와 부패현상을 어떻게 분석할것인가? 개인발전과 공익과의 관계, 상회경쟁과 협동 정신을 어떻게 정확히 처리해야 바른가?       2) 덕육의 목표와 학생들의 심리를 긴밀히 련계시켜야 한다. 청년학생들은 취업, 련애, 개인발전,치부 등에 대해 사회인과 마찬가지로 민감하다. 따라서 사회상의 도덕충돌은 이들의 심령속에서도 진행되고있다는것을 알아야 한다. 학생들은 일단 학교문을 나서면 망연자실하고 속수무책이기가 일쑤다. 한것은 졸업증, 학력, 취직을 위한 공부만 했기때문이다. 그로써 자신의 향상정신에 만족을 얻을지 몰라도 인간의 궁극적인 목적인 자기 발전이나 사회에 기여하는 창족적인재로 되기엔 손색이 있는것이다.       현대청년학생들의 심리속에는 무관심, 무감동, 무흥취 등 심리공백이 많다. 그러므로 학교가 자신의 범위내에서 공부를 잘하고 규률을 잘 지키는 이른바《합격된 학생》각도에서만 사고하고 리론전수로 목적에 도달하려 한다면 시행착오이다. 그저 봉페식관리에 만족하지 말고 대학생들로 하여금 생활속에 침투시키고 사회화에 접근시켜야 장래 각종 모순충돌속에서 능란하게 처사하고 해결핤수 있는것이다. 한마디로 정치리론은 참다운 인생관을 수립시키기엔 너무 창백하다는 말이다.        3) 교육주체의 자아실천의 통제학교도덕교육과 교육자아실천의 탈점을 시급히 통제해야 한다. 교육의 취지가 전 면발전이지만 당면 교육의 실태를 보면 의연히 점수통수이고 민주의 기치 및 의의를 날마다 말하지만 교원의 권위가 절대적이고 독단독행한다. 특히 번다한 수금현상은 학생들의 심령에 오도된 가치관념, 금전위력을 락인찍어주고있다.      4) 덕육사업과 학생심리발전수요를 유기적으로 결합시켜야 한다.덕육사업자들은 학생들이 무엇을 듣고싶어하는가, 무엇을 가장 많이 말하는가, 현재 어떤 구체적곤난에 처하여 있는가? 등 문제의 해결에는 아랑곳없이 그냥 한본새로 각종 정치리론주입에만 자족한다면 사실상 학생들이 거부감을 가질뿐 자각적인 인 격수양을 이끌어가는데 아무 도움이 안된다.       교육자와 피교육자는 높은 문화층차를 배경으로 한 인정세계에서 동등한 인격의 성원이 되여지고 학교는 곧바로 지식전수와 더불어 평등한 삶의 의미를 나누어가지며 보람있는 인생을 준비하는 의로운 장소로 되여야 덕육사업도 잘 될것은 자명하다. 그러므로 정치사상교육과 기본공덕양성을 병진시켜야 한다. 일반 사회공덕이 높다고 해서 정치각오가 높다고 말할수는 없지만 도더적으로 고상한 사회공민이 될수는 있다. 이는 되돌아와서 정치사상교육으로 인격발전을 대체할수 없다는 설명이 되 기도 한다.       자기본위, 자아실현만이 실혜적이라는 인생관  및 가치취향이 시대사상인듯이 착 각하고있는 현시대야말로 인성의 회귀, 인간성의 발굴, 인간성의 함양이 절실히 수요 된다는것을 리성으로써만이 아니라 정감적으로 터득시켜야 처세술, 처세의 도리, 사교술, 공공관계처리 등이 능하고 보다 완미한 인격자로 거듭날수 있다.       현대교육의 시대적추세는 어디까지나《진리의 광명으로 인간심령을 밝혀준다》 따라서 교육자는 지력적, 체력적, 도덕적, 정감적, 심미적 제방면에서 가능한것, 환성된것, 인격적인간을 양성해야만 덕육사업이 성공적이라고 말할수 있을것이다.                              2011년12월10일 수개
11    현대시의 곤혹 댓글:  조회:11010  추천:5  2011-11-08
         문학의 저조기라 일컫는 이 시대, 갈수록 현실과 동떨어진 문학, 독자를 외면하는 창작, 특히 현대시는 독자를 의식하기보다는 무시하고 멋대로 나가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것이다. 그 원인이 한두가지가 아니지만 요는 시인 스스로가 독자와의 사이에 단절의 담을 쌓고 소통과 공명에 신경쓰기보다는 자아도취의 상아탑속에서 스스로 자리매김을 하고 자족하고 있다는것이다.         현대파시를 표방하면서 정제되지 않은 과도한 이미지의 수사학이나 리해불가의 시들이 판을 치는 시단의 풍경에 독자들은 언녕 실망을 숨기지 않는다. 서정성을 생명으로 하던 시들을 낡은것이라고 부정하는 경향에 마주하여 문학은 반드시 어찌 되여야 한다고 론단할수는 없지만 시인들 스스로 비평적사고를 할 필요가 있을것 같다.        시의 소통부재, 공감부재를 우려하지 않을수 없는 이 시대에 진실한 삶의 의미를 읊고 철학적사고를 시창작의 취지로 내세우고 삶의탐구, 인생의 성찰을 보여주는 시, 진실한 시적경지와 예술적희열을 선물하는 시가 희소하기때문이다.       현대시라도 시인은 괴이함, 애매모호함에 심취하기보다는 시인 나름의 관찰과 사색을 시에서 형상화하려 애쓰면서 그 노력이 보다 많은 독자들의 흉벽을 두드려 공명의 대문을 활짝 여는게 바람직하지 않을가? 하고 무모한 곤혹을 굴리지만 해답이 명랑하지 않다. 물론 시가 도구로 전락되였던 시대로 돌아가지 말아야 하겠지만도 자연과 고향과 우리 주변의 인물들과의 정서합일은 진정 서정시가 독자를 불러들이는 길이고 그것이 시가 살아남는 길이라고 말하고싶다.         재래의 경물시가 다 심오한 사색으로 채워져있은것은 아니다. 그러나 시인의 오감에 와닿은 그것이 시인 개체의 아름다움이나 감동, 슬픔이나 혹은 고통만이 아니라 그 정서와 사색속에서 많은 사람들의 정서적촉동을 받게 하는것이 시의 생존리유가 아니며 공간이 아닐가싶다. 인간의 삶의 현장, 심리심처의 활동에 대한 투시는 시인이 선 위치와 가치취향에 따라 달라진다. 기실 정태적자연경물의 재복사가  아니라 현재의 삶을 배경으로 재조명하는것도 의미롭지 아니한것은 아니다.        시적동기와 창조된 시적경지는 시인의 새로운 시각과 창조의 열정은 어찌했든 현실생활, 인간의 공통된 심적상태와 불가분의 관계를 맺을수밖에 없다. 고요한 달밤 농가의 퇴마루에서 부는 젓대소리에는 연주자의 생명운동의 절주가 고스란히 담겨 있지만 그 정겨운 소리를 듣는 사람의 흉금에 감동이 일지 않을수 없다. 시의 예술적효응도 젓대소리와 같다면 결코 독자를 잃어버린 비애는 없었을지도 모른다.        시인의 시적상상이 자연과 현실, 대중을 배경으로 한 시라면 그것이 독자의 심금과 어우러짐은 시가 문자폭력이 아니고 삶의 골짜기에 잠복해있는 감동성, 다시말해 평화로운 일상을 동경하는 독자들의 가슴을 마술같은 힘으로 휘여잡을것은 틀림 없다.  요지경같은 현실과 인간의 조우와 인생의 의미와 진실을 재구성하고 현실에 대한 시적인식으로 변화시키는 효과를 가져오는것을 누군들 말리랴!        시의 현실반영은 시적대상의 외양과 속성의 반영이기도 하지만 결국은 시인의 시적세계와 대상에 대한 깊고 넓은 주관성이 전제이다. 시적자아가 외부세계와 다양하게 만나면서 유기적으로 조화를 이루어가는데 이것이 현실반영만이 아닌 투시력을 과시하는 시의 성공여부를 결정짓는다.        시인은 삶의 현장을 남다른 시각으로 직시하며 그것을 시로 읊는데 이는 시인의 일상에 용해되여 있던 환경과 대상을 전시하면서 동시에 의미롭고 순결한 순간들을 독자의 마음밭에 옮겨심음으로써 생명의 의의를 환기시켜 친구같은 시적대상으로 접수시킨다.  자신만의 사색의 공간, 감탄 혹은 흐느낌일지라도 자기가 몸담그고 있는 인생현장의 구석구석을 눈빛질하며 동시에 시적경계를 펼쳐 소통하고자하는 노력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시인의 벗어버릴수 없는 숙명이다.        우리들 삶은 평범하기도 하지만 시각을 달리하면 미처 발견하지 못햇던 저마다의 사연들로 심각하게 엮어질수 있다. 보통의 인간심리와 일상이 중복되는것이 삶이지만 시인은 이 복잡하고도 미묘한 삶의 순간과 사건과 감정들을 절묘하게 긍정으로 빚어낸다는데 남다른 재능이 현시되는것이므로 독자가 수수께끼를 풀도록 글재주를 피우는것은 시인으로서는 보람없는 잔재주에 불과한것이다.        인간의 삶에 중뿔난것이 있으며 정감에 특수라는게 있는가? 날마다 생계로 동분서주하고 리기심에서 얼굴을 붉히고 흰술에 된장찌개를 안주로 하며 취한김에 노래가 절로나오는 그것이 민초들의 삶이다. 싫어도 물러서지도 못하는 그 일상을 바라보며 느끼는 시인의 마음은 남다를수는 있어도 애매모호할수는 없다.        현대 시인들은 자아도취에 빠지면 안중에 독자가 없다. 그래서 정감이 넘치는 수식어를 동원하는것이 아니라 될수록이면 엄청 낯설게 만들기에 골머리를 짠다, 그런데 그런 문자조합을 미화시키는것만으로는 독자들의 시예술에 대한 관성비슷한 정서와 시적흥분을 불러일으키지 못한다. 현실이 이것을 증명하고있다.      시에서의 재치있는 비유와 심오한 상징과 형용사에는 세상에 대한 체험과 사색이 녹아있어야 한다. 그것이 봄바람에 부푼춘심이든, 남산에서 아물거리는 아지랑이든, 잃어버린 님에 대한 애상이든, 신비한 밀어이든, 시인이 세상을 두루 탐지하며 쌓은 기억장치가 어느 순간 활 풀리면 결국 세상에 대한 인식의 표출이며 생명활동의 단면도로 펼쳐진다. 그러나 시인의 관심사는 혼자만의것이 아니라 될수록이면 많은 독자의 공감을  전제로 해야 한다는 설명이 되겠다.        일상의 대상들을 관조하는 시인의 독특한 시각에 의해 시속에서 하늘, 별, 바다, 산, 나무, 풀잎 등 자연물이 새로운 생명체로 환기되고 또한 보통인물들이 등장함으로써 삶의 친숙함과 정서적인감각들이 고스란히 전달되여야 시답다는 말이다. 이러한 시적특징에는서정 혹은 철학적사색, 세계관 내지는 미적의식이 바탕이 되여 있음으로 하여 시가 존재리유를 확보한다. 시적대상물은 처음에는 시인 혼자의 감각대상이지만 그냥 전유물로 남는다면 그 시는 존재의 가치를 잃고만다.        전통적정서의 맥을 이어가고있는 시인의 예지를 진부하다고 보는것은 설득력이 없다. 자연을 시적소재로 한 서정시, 그보다 평범할수 없는 민초들의 일상과 정서, 혹은 향수의정, 모성애, 심층적정서까지 담은 시들이라 하여 자연을 옮긴 시, 진부한 시라는 관념은 성립될수 없다. 경물을 소재로 한 시가 갖는 한계점을 어떻게 극복하는냐 하는 문제는 시인의 재능문제이지 전통시의 원죄가 아니다.         작고 하찮은것까지 다루는 시인의 세계관은 자연성은 물론 서정의 범위를 넘어선 확고한 자기 신념을 설득력있게 펼쳐보일수 있다. 경물이 시적대상일 경우라도 강하고 아름다운 생명의 본질외에도 새롭게 형상화할수 있는 가능성도 소실된것은 아니다.        시인에게 있어 독특한 깨달음은 시적령감의 성취이자 시창작의 기본정신이다. 평범한 일상에서 감동되고 그 감동을 시적정서로 전환시키는 시인의 격렬한 정서파동, 사색의 모대김은 깨달음이자 동시에 성스러운  사명이라 할것이다.        세상을 대하는 방식과 태도, 그것을 바라보는 시인의 눈은 일반인과 다르지만 시인의 심미희열은 미처 보지못했거나 경험하지 못했거나 깨닫지 못한 독자들에게 시읽기의 즐거움을 전해주는데 귀결된다. 우리가 스쳐지나는 일상에서 시인이 생에 대한 또 다른 깨달음, 내지는 진리에 대한 깨달음을 얻는것은 그동안 쌓은 삶의 경험과 철학이 바탕이 되기때문이지 세상에 없는것에 대한 발견은 아니다.        모두의것, 공통된것을 시적소재로 잡기 위해서는 진실된 체험을 전제로 하는데 시인이 성스러운 눈길로 바라본 시세계에 사람들이 친근감을 느끼게 하고 사물에 불어넣은 생명현상을 제시해준데 감탄하고 고마움을 느끼게 한는것만큼 시인으로서 더 보람찬 일이 있을가?        낯설기만 한 언어조합,수수께끼로서가 아니라 진한 사람내음이 묻어나는 사색에 정감이 슴배여 있어야 음악같은 서정시이다. 그래서 시는 덕담이 되고 예술이 되고 미학이 되는것인지도 모른다. 하얀꽃'이든, 몽롱한 꿈이든, 인간냄새가 나는 정으로, 삶의 미학으로 전달하는 시인의 창조성은 그래서 일반인이 미칠수 없는 선각자같은 깨달음이며 예술경지이다.       우리의 삶은 어디까지나 실재적인것, 효용가치가 있는것에만 습관되여 왔다. 독자의 환영을 받는 시는 소박하고 독자의 심미능력을 시험하지않고 자연스럽게, 그렇듯 익숙하게 받아들여진다. 괴이한 억지사색과 표술로 하여 시의 미적균형상 파괴는시적대상을 따뜻하게, 섬세하게 들여다보면서 시적미와 존재의 신비한 현상을 흔상하는데 눈가리개가 된다. 존재의 보편성과공동지향성을 굳이 파괴해야 새로운 시창작이라고 맹신하는 시인은 생생한 인생현장을 깊이 투시하고 평범한 존재들의 아름다움을 발굴해 내고 그것을 섬세하게 보여주는데 흥미가 없는듯 하다.         시인과 시적대상이 하나가 되여야 할것은 물론, 분출되는 시적정서는 시인의 깨달음의 농축만이 아니라 그 아름다움의 현시를 통해서 독자는 미지와 기지의 경계를 넘나들며 또 다른 깨달음을 획득하게 할 기회에 기뻐한다. 독자를 마다하는 시창 작자가 있을가? 누구나 독자의 공감대를 울릴 걸작을 시도할것이며 시적정서로 어렵지 않은 시어의 최적의  조합, 친숙한 소재들로 심미구심점을 노려야 한다.        부단한 시개혁정신으로 나름의 독자세계를 개척하는 시인만이 각박해지는 문학소비생활에서 소외당하지 않고 곧 잊혀지는 시인이 되지 않을것이다, 그러나 자아감각에만 집착한다면 문제는 달라지며 독자를 실망시킬뿐이다. 자연의 소중함, 주변 사물과 혹은 정서적가치를 도외시하거나 그것들과 동떨어진 심경에서 시적성취를 추구한다면, 독자에게 기대려하지 않는다면 협조와 조화에서만 가능한 문학소비가 그저 희망사항으로 남을 일이다.        너무 많은 홀시된것들, 잊혀진것들에서도 예술적향수가 될것들을 찾아내는 그 시적안목은 고귀하고 성스럽다. 이로 인하여독자는 시인의 혜안이 투시하고 있는 숭고하고 성스러운 예술경지의 창조에 존경을 품게되는것이다. 현시대의 재빨리 소실되어 가는 따스한 인정과 선량, 그리고 삶의 기본정신을 시에서 편달하는 시들은 시인의 성실하고 진지한 시정신에서만 가능하다. 문학의 위기를 실감하고 있는 이 불확실한 문학의 화원에서 시대를 앞장서 이끌어가는 시적정신, 진정 문학의 새로운 길을 인도하는 시인의 구도자적사명이 필요한 때, 참된 시창작의 한길을 걸어가는 시인들에게는 독자들이 존경의 마음을 앞세우고 줄쳐오리라.                                                                                                              2011년5월23 일
10    잠타령 댓글:  조회:9745  추천:0  2011-08-25
                                                                               잠타령                                                                               최 균 선                                                          추야장 긴밤 월색도 처량한데                                                          창밖 단풍나무잎지는 소리에                                                          어즈버 잠 못이루는 로옹이라                                                          떠오르나니 잠타령뿐이로구나.         누군가 인생을 평균70년으로 치면 20여년을 잠자리에서 보낸다고했다. 인생의 1/3의 세월만큼 인생을 허송하는것이라고 생각하면 너무 가석한 일이 아닐수 없다. 그러나 고해속에서 자맥질하는 나약한 인간에게 주어진 안식으로서 지쳐버린 육체와 정신에 새 활력을 불어넣어주는 소중한 시간이기도 하다. 다사분주한 이 하루도 자고나면 세월의 락엽이 되고 고달픈 심신에 새 잎새가 활기차게 살아나게 된다. 그래서 잘자고 나서 달콤하게 잤다고 할게다.        인간의 수면자세는 다양하다. 자는 모양새를 어떤 대상물과 비교하여 말할 때 온몸을 오그리고 옆으로 누워자면 개잠이요 갓난아기가 두팔을 머리위로 벌리고 자는 잠은 나비잠이요 옷을 입은채로 자면 등걸잠이요. 꼿꼿이 앉은채로 자면 말뚝잠이요 새우처럼 몸을 꼬부리고 자면 새우잠이요 토끼처럼, 깊이 잠들지 못하고 아무데서나 잠깐 자는 잠은 토끼잠이라 일컫는다.        말뜻에 따라 이름하면 아침에 깨였다가 다시 든 잠은 두벌잠이라 하고 묶어가도 모르게 깊이 든 잠은 귀잠이요 한낮에 자면 낮잠이요 남의 발치에서 자면 발치잠이요 날샐녘에 겨우 잠들면 새벽잠이라 이른다. 초저녁부터 일찍 드는 잠은 초저녁잠이요 잠든지 얼마 안되여 옅은 잠은 풋잠이요 한데서 자면 한뎃잠이요 잔둥만둥하면 선잠이요 막 곤하게 금방 잠들면 첫잠이요 아주 달게 자고나면 꿀잠이라 한다.        몰래 잠들었다 깨는것은 도둑잠이요. 잠시잠깐 눈붙이고 난것은 쪽잠이요 비좁은 공간에서 여럿이 모로 누워 불편하게 자는 잠은 칼잠이요 너무 피곤하여 아무데서나 쓰러져 자면 멍석잠이요 기차칸이나 장도뻐스안에서 앉은 자리를 어른에게 양보하기 싫어서 잡지로 얼굴 가리고 자는체하는 잠은 야살궂은 꾀잠이다.        어떤 자세로 자든 잠의 또 다른 중요한 기능은 정보처리와 갈등해소 기능이다. 이것을 담당하는게 꿈이다. 사람은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삶의 상당 부분을 잠자고 꿈꾸며 살아야만 한다. 사람의 꿈은 과거의 기억을 정리, 분류, 삭제, 저장하는 일을 담당한다. 쓰레기와 같은 과거의 기록을 모두 떠안고 살아간다면 그러잖아도 복잡한 인생이 얼마나 고달파질까. 꿈을 통해 사람의 뇌는 필요하고 유용한 기억을 저장하고, “쓰레기기억”을 삭제하게 된다.        성인은 꿈을 안꾸는 날도 있으나 대개20~25%가 꿈이고 아기의 잠은 절반 정도가 꿈이라고 한다. 이 시점에서《잠을 자야 꿈을 꾸고 꿈을 꿔야 님을 보지》하며 가슴뜯던 옥중 성춘향이 잠시 잠간 잠들어 오매불망 그리던 리몽룡을 꿈속에서 해후한 잠은 노루잠이지만 그에겐 다시없는 가장 행복한 시각이였을것이다.        대관절 잠이란 놈은 어찌타 그토록 불가항력적인가? 아직까지 잠에 대한 명확한 기준은 없다. 대개 무의식상태에서 눈을 감고 쉬는것으로서 여러가지 운동, 감각 및 생리적기준들을 만족시켜주는 경험의 수렴(收敛)점일진대 잠의 가장 중요한 기능은 피로회복으로서 수면중엔 신체의 모든 기관이 휴식상태에 들어가고 낮시간에 축적된 각종 피로물질이 분해된다고 한다.        허구헌날, 매 하루는 잠에서 깨여나는것으로 시작되고 잠에서 종지부를 찍게 된다. 사랑이 인생의 주제라면 잠은 인생의 기본내용이 된다. 그러면 잠이란놈이 세상에서 제일 강한가? 보통 수면은 죽음만큼 강하지 못하다고 말한다. 죽음은 최고 의 두려움이다. 그렇더라도 말려낼길 없는 인간의 성욕, 식욕, 수면욕중에서 가장 견딜수 없는것이 그래도 수면이 아닐가싶다. 졸음이 실린 눈까풀이 천근같이 무겁다는것을 누구나 체험해보았을것이다.        흔히 사랑은 죽음보다 강하다고 한다.사랑의 힘은 그처럼 유혹적이고 강렬하지만 사람을 직접 죽이는 힘은 없다. 사람이 그것을 이겨내려 하지 않을뿐이다. 어떤 리유에서든 불면증의 괴로움은 성유희상대가 없는 정황과는 비길바가 아니다. 불면의 고통은 사람이 겪는 가장 혹독한 경험중 하나다. 강제로 잠을 못자게 하니 각종 호르몬체계가 교란되고 면역력이 극도로 떨어져 사망했다는 동물실험 결과도 있다.         물질문명이 고도로 발전한 이 시대 현대인들은 불면증과의 싸움에 지치고있다. 평소에 잠을 못자면 육신이 물먹은 솜처럼 된다는것은 누구나 경험해서 잘 아는 상식이다. 일반적으로 잠이 부족하면 피로, 집중력 저하, 짜증, 환각, 망상, 공격성 증가 등의 증상이 나타난다.        그런데도 본능적으로 잠의 깊은 늪에 빠지려하는 사람에게 몇백촉의 전등불빛을 비춰대며 강압적으로 련며칠 눈도 붙이지 못하게 하며 심문을 들이댄다면 그보다도 더 잔인한 인권유린은 없을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그것을 불철주야의 사업이라 말할것이다. 우리는 영화에서 그런 장면을 많이도 본다. 그게 어찌 영화에만 있는것이랴. 영화는 현실의 재현이 아니겠는가? 가해자 자신도 하품을 하면서도 인간의 본능이고 욕구인 수면의 자유와 권리를 강탈하는 행위를 그저 악착하다고 하기엔 너무 빈약한 표현이리라. 왜냐하면 그런 인간상을 표현할 말이 아직 만들어지지 않았기때문이다.         일언이페지하고, 나는 잘수 있는데도 잠못드니 행복한 괴로움을 자초한것이지만 그가 누구이든간에 강압으로 자게 못해서 죽을맛인 그런 피해자들의 최저의 인권보장을 위해 기도하면서 게으른 하품에 인생일사의 허무하고 황당함을 날려버리는게 마음 편할것이라 이만 아무결과도 없을 생각을 접어두련다.                                                                           이화(梨花)에 월백(月白)하고 은한(銀漢)이 삼경(三更)인제                                      일지춘심(一枝春心)을 자규(子規)야 알랴마는                                      다정(多情)도 병(病)인 양하여 잠못들어 하노라                이 시조는 고려시대 문신 이조년의 다정가(多情歌)로 객관적 상관물인 리화 (梨花)와 자규(子規)를 통해 봄밤의 애상적인 한과 정서를 시각적, 청각적으로 노래하고있다. 시조에서처럼 다정한이 아니더라도 이래저래 잠못이루고 뜬눈으로 밤을 지새는 고달픈 인생들이 얼마나 많을가, 싱거우리만큼 오지랖 넓지만 장가도 못들고 추거운 베가에 한숨을 태우는 조선족농촌로총각들을 떠올리게 된다.         안해의 잔소리에 범벅이 된 사랑일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인생도 헛산것이 된다. 그냥 하루의 일과같이 나누는 부부의 성애마저 누리지 못하는 웅성의 심신의 괴로움인들 오죽하랴! 정애에 주려 밤마다 잠못든다면 인생의 연장선이 아무리 길다한들 무슨 의미가 있으며 무슨 흔적이 남을것인가?         …추색이 각일각 짙어가는데 용케도 살아남은 부나비 몇마리가 하루밤 정사에도 사생결단하는듯 전등을 싸고돌며 란무하누나. 타향의 단간방에서 오늘도 불면증에 시달리며 이런저런 잡생각을 굴리고 몽글리다가 별볼일없는 글을 이렇게 몇줄을 끄적여 보았다. 적어봤대야 아무도 읽지 않을 잡담에 불과하지만도…….                                                                                                 2010. 10 월 5일 황도에서
9    인생수사학 댓글:  조회:8340  추천:2  2011-08-05
                                                                                                 인생수사학                                                                                                          최 균 선          인생을 왜 수사학으로 풀어야 하는가? 인생을 수사학적으로 터득하면 첫째, 세상을 보는 눈이 더 밝아질것이며 둘째, 사색의 내용이 더 풍부해질것이며 셋째, 더욱 생동하고 형상적으로 자기 의사를 나타내여 듣는이와 소통이 더 잘 될수 있는바 어휘적수법이든 문장론적수법이든 인생의 참 의미가 더욱 투철해질수 있다.        세월은류수같고시간은살같고인생은 바람같고 세상은 구름이요 운명은 달빛, 인생은 일장춘몽같고 지리멸렬한 유희같고 인생현장은 경기장같고 희비극이 연출되는 극장같고 생활속은 장마당같고 각축장같고 바둑판같고 도박판같고…아름다운 화원 같기도 하고 해수욕장같고…락원같기도 하고 련옥같기도 하고…        인간의 양상은 어떠한가? 천층만층 구만층의 인간군속에는 부처같은 사람도 있고 아닌보살도 있고 면양같은 사람도 있고 승냥이 같은 자도 있고 여우같은 자도 있고 독사같은 자도 있고 소처럼 충직한 자도 있고 나귀같은 떼쟁이도 있고 돼지처럼 탐욕 스러운 자도 있고 개보다 못한 자도 있고…각양각색, 류류별별의 인간상을 이루다 말 할수 없지만 우연의 왕국에서 왔다가 필연의 왕국에로 돌아가야 하는 과객들이다.        민심은 천심이요 민중은 사회의 주추돌이요 로동인민은우리에게먹을것과우리 의 몸을 가리워줄옷을 만들어주고우리가안식할 거처와 침대를 만들어주는구세주 같은존재들이다. 그러나 농사짓는 농민들은 촌바우고 촌닭이고 시대락오자, 무지의 대명사로 되였있다.기실 조상3대이상을 거슬러 올라가 욕하는 셈인줄 모른다.         인생자세는 마땅히 어떠해야 하는가? 손바닥에는 운명이란 말을 쓰고 손등에는 의지라는 말을 쓰라. 그리고 주먹을 꼭 쥐고 앞으로 나가라. 이렇게 주먹을 쥐면 손등의 의지가 손바닥의 운명을 좌우할수 있다. 이 말은 간접인용법으로 남의 말을 빌려다 쓰는 수법이다. 손바닥에는 정감이라는 말을 쓰고 손등에는 리성이라는 말을 쓰고 주먹을 거머 쥐라. 그러면 손등의 리성이  손바닥의 정감을 조절할수 있다라고 한다면 앞에 말을 모방한것이다.          인생기술이란 불충분한 전제에서 충분한 결론을 찾아내려 아득바득하는것이다. 인생은 등산로,가장 높은 곳에 올라가려면가장 낮은 곳에서부터 시작해야 할것이다. 자기 그림자에 자기가 쫓기는 삶은고달픈 삶이건만 우리는 자기 그림자를 밟으려 내달리는 아이들같이 그냥 술래잡기를 한다.         인생마당은 도처에 진흙탕이다. 그러나 주변이 모두 흙탕물이여서 자신도 깨끗지 못하다는것은 자기 변명이다. 운명은 항거할수 없기도 하지만 만들어 지기도한다. 금수는 본능적으로 행동하고 만포식밖에 모르지만 사람은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모든것을 생각하며 보다 나은 생활을 영위하려고 애쓰는 존재이기에 고귀한것이다. 빅토르 프랑클은《인생이 당신을 위해 어떤 의미를 가졌는지를 묻지마라. 그대가 인생을 위해 어떤 의미를 창조해나갈것인가를 오히려 인생쪽에서 당신에게 묻고있다.》라고 쓰고있다.        즐거움은 잠깐이요 고통은 길다. 그것이 인생이다. 기쁨은 머물지 않고 날아가 버린다. 주체는 외부세계를 자신의 목적에 맞게 변화시킴으로써 그성과 위에 자아실현을 이룩해 나간다고 했다. 죽은 물고기는 떠내려가지만 산물고기는 강을 거슬러올라간다. 인생은 다만 내마음의 느낌에 따라 달라진다.        돈과 씨름하는 이 시대의 가장 큰아픔속에서 인생이 숨가빠진다. 땀흘리지 않는 자는 삶을포기한자요, 시련을 두려워하는자는 인생의 진미를 알수 없다. 나를 위하여 땀을 흘리고, 이웃을 위하여 눈물을 흘리고 나라를 위하여 피를 흘려야 한다는것은 대도리이지만 적어도 사회인의 자률을 시사한다. 작은 어려움은 오기로 버티고 큰 어려움은 반발심으로 버티고 더 큰 어려움은 희망으로 버텨야 한다. 돌밭에서 발굽이 굳어진 짐승은 어떠한 길도 질주할수 있다고 했거늘 역경을 이겨낸 사람만이 인생철학을 터득한 사람이다.        사랑의 청초가 없으면 인간세상은 사막이 될것이다. 이는 은유이다. 인생에 은유적으로 표현할 현상이 기지부수이다. 가재는 게편이라 끼리끼리 짜고들면 흰것도 검은것이 되고 검은것이 흰것으로도 되는 세상이다. 풍유적인 현상도 많다. 자식 뒤바라지를 한다고 한국에 나갔다가 산돼지 잡으로 갔다가 집돼지 잃는격의 현상도 가슴아프게 한다. 숭어가 뛰니 망둥이도 뛴다고 여건도 마련되지 못하고 도시진출을 하다보니 항구적인 가원을 잃고 한지에 방아를 거는 사람도 많고 많다.        인생현장에서 가장 류행되는것은 과장법이다. 원래 과장법이란 감정, 사상, 사물 등을 실제보다 과장해서 표현함으로써 좀더 선명한 인상과 감동을 주고자 하는 수사법이지만 인생현장에서는 허위조작. 정적부풀리기, 허장성세 등 비리한 기량으로 악용되고있다. 과장법이 가장 정채롭게 운용되기는 잡다한 광고를 첫손가락으로 꼽아야 할것이다. 이를 소만큼 부풀리고 여기 은전 삼십냥이 없다는식의 아이러니도 비일비재로 생성되여 세인을 서글프게 하고있다.        아이러니는 어휘운용의 각도에서 특별한 곳이 없지만 아이러니가 아이러니로 되는 관건은 해석에도 있다. 인간사회는 역설적이다. 역설은 아이러니의 하위범주이다. 눈을 감아라. 그러면 당신은 세상을 볼것이라는 말은 사색하는 인간이되여 세상을투시하라는 말일것이다. 명백히 모순되고 부조리한것을 곧이곧대로 말하기가 난처할 때 진실을 역설하라. 그것이 더 효과를 볼것이다.    사회는 자발적으로 대조법을 너무나 잘 설명하고있다. 다수는 일하고도 살수 없는데 소수는 놀고도 잘들 산다는 말은 우리가 책에서 배운 과거에만 있은 사실이 아님을 현실이 잘 보여주고있다. 극소수가 국민소득 절대대부분을 점유하고 있다는 것은 신문을 잘 보지 않는 사람들도 잘 알고있다.         죄는 지은데로 가고 공은 닦은데로 간다는 속담은 뜻이 깊지만 현실에서는 무색해지고있다.  정의의 상징은 량심이요,관용의 상징은 리해심이요 조화의 상징은 평등이라고 확실하게 열거할수 있지만 국인들은 무질서가 질서이고 부조리가 조리이며 불평등이 평등이라고 믿는것이 오히려 마음 편하다고 생각할것이다.        도저히 관용해서는 안되는 비리한 사회현상을 관용한다면 그것은 프로이드가 말한 이화이고 집체무의식이다. 그 선함을 강인하게 지킬수있는 힘이 없다면 세상은 악으로 가득찰것이다. 원님은 불을 질러도 일없고 백성은 초불을 켜도 안된다는 속담을 만들어낸 우리 선조할아버지네가 참으로 지혜롭다. 하지만 황당한 세상이라 황당무계함도 공공연히《진리》가 되는 현실인데 누가 외우고 다닌단말인가?         작고한 한국의 한 수필가는 ‘펜은칼보다강하”다고 선언하고 다음같이 쓰고있다."글을 쓰는 나의 유일한 목적은 진실을추구하는 오직 그것에서 시작하고 그것에서그친다. 우리에게는 현실의 가려진 허위를 벗기는 이성의 빛과 공기가 필요하다. 진실은 한사람의 소유물일수가 없고 이웃과 나누어야 하는 생명인까닭에, 그것을 알리기 위해서는 글을써야 했다. 쓴다는것은우상에 도전하는 이성의 행위이다. 그것은 언제나 어디서나 고통을 무릅써야 했다." 정의로운 그의 글짓기 자세이지만 비판의 무기는 무기의 비판보다 언제 무력하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인생을 수사학적으로 해석하면서도 마을에 걱정도감 이른아침부터 구시렁거리는거나 같아서 우습다.                                                                                                                                                                                                  2010년12 월15
8    편지를 쓰시라 (최균선) 댓글:  조회:9820  추천:1  2011-08-04
                                                                      편지를 쓰시라.                                                                  최 균 선       편지란 한때는 저저의 입에 오르고 귀에 익던 개념이다. 편지를 서신이라고도 하는데 멀리 떨어져있는 상대편에게 전하려는 사연이나 묻고 싶은 일, 요구되는 일이 있을 때 쓰는 글이다. 아무튼 편지란 쓰는 사람은 써서 즐겁고 읽는 사람은 받아서 반가운 글이다. 하지만 지금은 편지란 우리들의 기억속에 한낱 단어로 남아있게 되였다.     생활을 편리하게 하는 디지털시대에도 번거로움을 마다하고 손편지를 고집한다면 너무 시대에 뒤떨어진 아집이겠지만 인정이 갈수록 삭막해지는 이 시대에는 사람냄새 풋풋해서 좋지 않은가?그 많은 글들 가운데서 편지만큼 쓰는 사람이 진정을 토로하는 글이 어데 있으며 읽는 사람이 감동을 안고 읽는 값진 문자가 더 있으랴!     편지를 쓸 시간이 없다는것은 아무래도 구차한 변명이다. 물먹은 해면을 비틀어 짜면 물이 나오듯 시간은 특수 경우 아니면 짜낼수 있다. 정 안되면 잠자는 시간을 줄이면 된다. 특히 먼곳에 벗의 정성담긴 편지에 여러차례 회답을 하지 않으면 벗을 잃을수도 있다. 그리고 응당한 감사편지나 위문편지를 쓴다거나 하는것은 문필활동이 아니라 인정의 나눔이다. 편지는 진솔하고 소박한 감정을 담는게 위주이기에 철자가 틀리거나 띄여쓰기가 틀렸다해도 대수가 아니다.     편지는 개인서한이라도 값매길수 없을만큼 보귀할 때가 있다. 편지는 한 사람의 운명을 바꾸어놓기도 한다. 문학거장 체호브도 처음엔 지방신문에 풍자소품이나 발표하는 무명작가였다. 그런데 평론가였던 그리고리예위치가 그의 작가적재능을 발견하고 그에게 축하의 편지를 써보냈다. 그의 편지에 감동된 체호브는 답장을 썼다.   《당신은 당신의 편지가 나의 자존심에 얼마나 큰 작용을 일으켰는가를 능히 판단할수 있을것입니다. 당신의 편지는 그 어떤 장금보다 귀중하며 한 초학자로 말하면 현재는 물론 장래에 있어서도 일종의 보수로 될것입니다. 나는 다만 반복할수 밖 에 없습니다. 이런 장려는 정말 저를 진동시켰습니다.》이렇듯 체호브가 후일의 문호로 된데는 한차례 힘있게 등을 밀어준 그리고리위치이다. 바꾸어 말하면 체호브에 대한 그리고리예위치의 원견성있는 평가를 담은 한통의 편지가 세계적인 단편소설 가를 낳았다해도 과언이 아니다.     지금은 편지봉투에 우표를 붙여서 먼곳에 편지를 보내는 사람들이 많지 않지만 전자우편이 주지 못하는 매력인 인간의 따스한 정이 한가득 안겨오는 장점이 있다. 현대젊은이들에게는 불편하고 답답할수 있겠지만 가끔 한글자한글자 정성들여 편지 를 쓰는것은 문화인으로서의 또 다른 정취라는것을 모르기때문이다.       통신수단이 지금같이 발달되지 못했던 그 시절을 살아온 사람들은 거개 가슴을 설레이며 련애편지를 써본 경험이 있을것이다. 지금 젊은이들이라면 아무렇지도 않을 편지를 보지도 않는 곳에서 혼자 쓰건만 그냥 신비롭게만 생각하며 쓰던 그 아름답던 기억에 회심의 미소가 지어질것이다. 한마을에 살고 매일 일밭에서 얼굴을 맞대는 처지건만 감히 진정을 토로하지 못하고 끙끙거리다가 유일한 고백의 수단으로 편지를 택하였던 옛그날은 결코 락후하던 시대의 재고품만은 아니다.     마음을 다져먹고 쓴 사랑의 꽃편지를 써본 사람은 알수 있다. 저저히 순정을 지녔던 그 시절엔 부끄러움을 잘 타는 사람에게는 남몰래 편지를 쓰는게 상책이였다. 아니면 하고싶은 말이 이발에 걸려서 나오지 못하고 평생의 유감으로 될수 있다. 내심으로 아무리 격렬한 사랑에 휩싸인 사람이라도 편지지를 앞에 두면 말문이 막혔을것이다. 그러나 머뭇거림이 편지에 고유한 미덕이고 지우고 생각을 구겨버리고 파지를 내는 시간에 사랑의 감정을 솔직하게 만나게 되고 더 다지게 되였던것이다. 식구들도 몰래 밤새워 쓴 편지가 사랑하는 이의 손과 눈앞에 전달되기까지의 그 시간을 목마르게 헤아리며 가슴설레이던 그 기다림은 세상에 그 무엇보다 미쁜 기다림이였으리라. 강물이 흘러가는 그 기다림의 거리를 겪는 동안 사랑은 맑고 푸른 강 물처럼 소용돌이치며 더욱 수심이 깊어졌으리라.     편지는 력사성적인 기록이다. 그 어떤 최신기술도 세월령감이 돌리는 망각의 맷돌을 멈추지 못한다. 비록 허구한 세월이 흘러 편지지가 색이 바래고 보풀이 일었을지라도 그때, 그곳에서의 그 감정을 고스란히 새겨두고있는것이 바로 낡은 편지봉투안에 고이 접어둔 편지이다. 세상에는 간난신고를 거쳐 몇십년만에 마침내는 임자에게 전해진 사랑의 편지얘기가 한두가지가 아니다. 그런 편지는 생명의 연장선 그 자체이고 박동을 멈출줄 모르는 심령의 긴 메아리이다.     지금은 인터넷시대, 현대화통신망이 지구를 하나의 촌으로 만들어서 핸드폰으로 만리이역도 지척인듯이 육성을 들을수 있고 당면해서 말하기 딱할 때 쓰는 좋은 방법이지만 시간촉박을 받고 청각적인 전달이여서 일차성적인 교류에 그친다. 문안편지는 차분하게 앉아 가장 다정한 말을 고르며 쓰기에 가장 사람답고 인정스러운 교류이다.     편지는 시각적인것으로서 장기성을 고유할뿐만아니라 편지를 쓰는 사람의 그 정성과 진실한 마음을 마음으로 감지하면서 두고두고 교류할수 있기에 소중한것이다. 그래서 편지는 아직도 편지로서의 특색이 색바래지 않고있다, 편지는 친혈육들에게  사랑하는 사람에게 가장 좋은 례물이 된다는것을 잊지 마시라.     편지는 아름다운 인연의 무지개이며 마음과 마음의 골짜기에서 울리는 그윽한 정감의 부름이고 화답이며 시간과 공간을 날아넘어 길게 뻗어가는 뜨거운 포옹이다. 그것이 비보이든 희소식이든 심장의 울림을 실은 편지, 날아가고 날아오가는 편지 마다에 절절한 감정이 새겨지고 무릎을 맞대고 나누는 서로의 속삭임과 간절한 념원 이 담긴다. 편지지위에서의 만남은 비록 육성은 들을수 없으나 가장 진솔한 담화의 장이 되여 마음과 마음의 언덕에 지성의 금탑을 높이높이 쌓아준다.     지금 컴퓨터의 보급으로 영상을 마주하고 대화를 할수도 있는 고기술시대에 사는 현대청년들은 편지라는 이 전통적인 통신수단을 가볍게 보고 때지난 정감교류의 수단으로 보는것이 상례이다. 피아노를 치듯 키보드를 두드려 쓰는 이메일은 기계의 작동으로 되기에 풋풋한 사람냄새와 인정이 많이 희석된다.     편지를 받아보기를 싫어하는 사람은 없겠지만 편지쓰기는 게으름 부린다. 편지를 받아읽는 기쁨이 누구에게나 있다면 당연히 누군가는 편지를 써야하는데 모두들 쓰기는 싫어한다. 비록 몇장의 종이장이긴 하지만 외롭고 슬플때 포근히 감싸주는 미더운 사람의 심령의 전파이고 리해와 지성으로 쌓아올리는 정감의 철옹성이기도 한데도 말이다. 쓰는 편지는 온 마음을 다하고 읽는 편지는 그저 부호를 보는것이 아니라 마음의 눈으로 보듬으며 마음의 귀도 귀울인다.    편지는 손으로가 아니라 마음으로 쓰는 일이다. 편지를 쓰시라, 편리한 현대전파통신에 만족하지 말고 고향에 계신 부모들과 먼곳에 벗들에게 편지한통을 띄우시라. 편지는 마음과 마음을 이어주는 무지개 다리이며 진정에 호소하는 충정의 전파이다. 때때로 편지를 쓰시라. 편지는 지성을 지닌 문화인만이 향수할수 있는 특권이며 지성인들끼리 나눌수 있는 진솔한 대화이다.     편지를 쓰시라, 두보의《전란이 심한 때에 집에서 온 편지 만금보다 귀하여 라!》라는 시구를 누구나 감명깊게 읊었을것이다. 두보가 먼곳에서 어렵사리 받은 그 편지에 담겨지 그 의미는 그저 편지의 의미만은 아니다. 그리움을 앞세우고 한가득 정을 담은 편지를 쓰고 편지를 읽는 마음은 순수하며 그 모습 성스럽기 그지없거늘, 그대여, 종종 편지 한통 쓰시라!                                                                         2010. 10. 5
7    취중진담(최균선) 댓글:  조회:11846  추천:3  2011-07-31
취중진담   최 균 선                              1. 기우   점점 걸음이 촉박해진 9월의 해가 서산마루에서 얼굴을 붉히고있었다. 지각한 그 사랑에 얼굴을 붉히는가, 다하지 못한 그 무엇이 아쉬워 식어가는 미소를 던지는가? 피빛석양이 별스레 가슴을 클클하게 해준다. 낡은 자전거가 내는 듣그러운 소리를 체념해 버리려고 공연히 신경을 쓰며 슬슬 지친 다리를 옮기여 밀수집사대 부근에 이르렀을 때 부르하통하 개바닥에 듬성듬성 일구어놓은 뙉밭머리에서 웬사람이 청승맞게 불어대는 새납소리가 발목을 꽉 잡았다. 거의 음치에 가까운 나로서는 구슬픈 선률에 담긴 사연을 전혀 알길이 없었으나 그저 스치고 지날수 없을만큼 마음이 끌렸던것이다.  나는 오래 동안 씻지 않은 자전거도 씻을겸해서 강바닥으로 내려갔다. 밭둔덕에 두다리를 뻗고앉아서 무슨 독주회라도 하듯 열심히 새납을 부는 사람은 부리부리하게 하게 생긴 50대 중반이나 됨직한 전형적인 한족사내였다. 그는 사람이 오건말건 아랑곳없다는듯 그냥 자기 비애에 잠겨있었다.  자전거를 얼핏 씻고나서 그에게로 슬금슬금 다가간 나는 그의 애상을 깰가봐 아무소리도 내지 않고 애달픈 음조에 취해서 말없이 지켜만보았다. 나이에 걸맞지 않게 이마에 깊숙히 건너간 주름살이 눈길을 끌었다. 그것은 갖은 풍상고초를 겪은 사람들에게서만이 볼수 있는것으로서 그가 성숙하고 매우 로련한 사내라는것을 말해주고있었다. 새납의 음을 짚으며 오르내리는 손가락들은 길고도 힘있어보였는데 매개 관절이 그렇게 날렵할수 없었다. 갓 면도질한듯한 두볼은 구레나루터로 험상궂어보이기까지 했다. 이윽고  새납불기를 멈춘 사내는 난데없는 불청객이 점도록 지켜보는게 어색했던지 얼굴을 돌려 힐낏 건너다보았다. 비상한 의력이 간직되여있는듯한 크고 검은 눈에서 침착하고 기민한 빛이 번뜩이고있었다. 어느모로 보나 확신과 참을성이 있고 좀해서는 충동하지 않을 매우 고집스러운 개성을 보여주는 얼굴 전체에서는 불혹의 나이를 넘긴 장년들에게 고유한 자부심과 오만성도 보였고 사나이답게 정중하고 드놀지 않는 사람이라는것이 력연히 나타나고 있었다. 흔상자가 나이가 퍽 지숙한 늙은이여서인지 그가 먼저 푸접좋게 말을 걸어왔다.  《로인님, 여직 내 새납소리를…아니 혹시 저 모아산아래 마을서 살던 그 로추이가 아닙니까? 》  무척 귀에 익었던 목소리다. 다시 뜯어보니 오래동안 녹쓸어있던 기억의 대문이 찌쿠덩 열리는듯 싶었다. 맞다! 30여년전 내가 살던 룡산5대에 지식청년으로 내려왔던 그 괴퍅한 성미의 조화성이였다.  《아니?! 화성이가 아닌가?》어마지두에 큰소리치며 그의 손을 와락 부여잡는 순 간에 잔뜩 무디여진 내 기억이 흘러간 세월의 갈피를 후르륵 넘겼고 그 갈피마다에 꼭 박혀있던 한 애된 청년의 모습이 우렷이 떠올려졌다.  《참 여기서 최형을 만난다구야, 그후 최형이 영성에서 선생질을 시작했다는 소문을 들었고 명동인지 하는 산골중학에 조동해갔다는 풍문까지 듣고는 더 행방을 알수 없었는데…》  《응, 하긴 그럴거야, 거기서 떠나 도문에도 가있었고 나중에 여기 연길에 오게 되였어, 사범학교서 앞당겨 교단에서 물러났고 지금 사립학교에서 담배벌이나 하면서 나날을 보내네. 아무튼 하잘것없는 내 이야기를 하자면 장편소설도 되지, 이러지 말고 우리 어디가서 술잔이나 기울이면서 천천히 회포를 나누자구》  그리하여 우리는 5원짜리음식점 구석에 마주앉았다. 워낙 잘 먹지 못하는 술이였지만 슬슬 잘도 넘어갔다. 서로 잔을 부딪치노라니 정말 감구지회가 깊었다. 살다 보면 많은 일들이,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잊혀지기 마련이지만 이 화성이만은 내게 잊혀지지 않는 존재였다.                                    2. 이왕지사   그 시절 사회에서 완전히 소외당한 존재였던 나로 말하면 집체호청년들과 어울 릴수 없었다. 게다가 류향복이라는 조선족처녀애를 내놓고 말짱 한족학생들이여서 더 구나 차지도 덥지도 않게 보낸 처지였다. 그러나 다만 이 화성이만은 내게 있어서 몰래 정을 주고받은 유일한 청년이였다.  그는 조선말을 꽤나 하고있었다. 무슨 뜻이 있어 그랬던지 그렇게 격리시키느라 눈들을 밝히는 살벌한 나날에도 나의 《실락원》을 찾아와서는 조선말을 배우느라고 열성이였던 화성이다. 그렇게 서로 마음이 얽혀서인지 매번 나를 비판투쟁하는 마당에서 다른 애들처럼 각박하게 굴지 않았다.  나는 지금도 그날 전공사당원들을 핵심으로 한 천명군중이 모인 비판대회에서 은근슬쩍 나를 보호해주던 그 화성이를 잊지 않고있었다. 그날 지식청년들을 부식 시키려 시도했다는 그 엉터리죄를 승인하고싶지 않아 그들의 말대로 퍼그나 《로실》 하지 못했던 나에게 집체호청년들이 우르르 달려들어 주먹질 발질할 때에 화성이 끼여들어 누구보다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성토하면서 급선봉친구들을 얼렁뚱땅 한쪽으로 밀어내였었다.  그날 그 화성이의 엄정한 비판발언이 아니였더면 아마 내 갈비뼈가 두어대쯤은 금이 갔을것이다. 그후부터 나는 드러내놓고 그와 친하지는 못했지만 진심으로 그를 좋아하게 되였다. 죄는 지은데로 간다고 그 지랄의 년대에 내내 나를 잡아먹지 못해 처처에서 애먹이다고 마침내 전공사당원현장비판대회까지 소집했던 고향친구 장산호씨가 그 이튿날 치보주임에게 불려가고 얼마후 집체호에 유일한 조선족처녀애인 향 복이를 강간한 죄로 20년도형을 받게 되였다.  일이 이렇게 되자 집체호녀성청년을 어쩌구했다는 루명이 절로 벗겨지게 되였고 사람들이 보는 눈길이 저으기 부드러워졌다. 화성이가 내 사람 됨됨이와 인품을 은근히 자기 친구들에게 이야기해주었던지 한족애들도 그렇게 적대감을 가지고 기시하지 않게 되였다. 그런 화성이를 30여년만에 우연히 만나게 된것이다. 통쾌하게 몇잔 굽을 내더니 신세타령을 하기 시작했다.  《최형도 알다싶이 나 ㅊ광산에 추천받아 올라갔지 않우?》 《그래, 기억하고있지, 그때 화성이가 보위과장으로까지 승급했다는 소식을 들었는데 그후 어떻게 되였나? 그 광산도 완전히 파산되지 않았어? 》 《맞소, 하지만 그 썩 전에 그 빌어먹을 고장을 떠나게 되였소. 어떻게 되여서인가구? 이 화성이가 명이 나쁜탓이겠지, 그 광산우두머리가 노는 꼴이 어찌나 눈에 거슬리던지 어느 날 그만 술에 취해서 권총을 그의 가슴에 들이댔다가 분을 이지지 못해 공중에 한방 쏘아버렸소, 내가 그때 무슨 정신으로 그랬던지…결국 그 친구에게 톡톡히 빚을 물게 되였지, 갱으로 내려가라는 명령을 받았소. 그렇게 갱부생활을 하여서 몇달 안되여 갱이 무너지는 사고가 생기게 되였소. 지금 생각하면 내가 그때 죽지 않고 살아남은게 기적이라면 기적이지. 결국 목숨은 구했지만 다리뼈를 상해서 절름발이가 되였던거요. 아까 내가 살룩거리는걸 형도 보았겠지만, 형이 화가 복이 되는 경우도 있다는 말을 배워준적이 있지? 나 그 지겨운 갱에서 영영 벗어날 기회가  생겼지뭐요, 죽은 사람도 몇이 되지만 상한 사람도 적지 않소. 그래서 사고처리를 하고 보상을 한다더군, 그래서 요구가 뭔가고 물을 때 아예 연길 어느 공장에 보내달라구 떼질썼소, 그래 온곳이 연길 농구창이였소, 그런데 제길할 내 운명이라구야, 이야기가 지루한데 한잔 비우구 더 하던지 합시다. 결국 거기서 쌰강공인이 되였다오. 그날은 비가 구질구질 내렸는데 늘 걷는 출근길이였지만 어쩐지 기분이 찜찜하더라구요. 갱의실에 들어가니 언제나 웃고 떠들어치던 친구들이 머리를 푹 떨구고 들숨만 쉬고있지 않겠소? 나는 어떤 불길한 예감에 가슴에서 널장이 뚝 떨어지는것 같더군요. 아닌게아니라 직공대회에서 이렇다하는 해석도 없이 온 공장이 파산되였으니 집에 돌아가라는것이였소. 《짠먼 꿍렌 유리량》이라지만 쌰강하라면 쌰강이지 어데가 해볼데가 있겠소? 별수없이 입던 작업복과 비품들을 주섬주섬 거두어가지고 내 후반생이 꽃피여날가 기대하였던 공장과 결별하였지. 비는 여전히 내리는데 내 얼굴을 때리는 그 비방울이 어찌나 아프던지…아마 마음이 아파서 더 아프게 느껴졌겠지. 집에 돌아오니 안해와 두아이는 아직 돌아오지 않았더군요. 나는 새삼스레 내 행복이 가꾸어지던 집안을 둘러보았소. 두칸방에 눈에 띄이는것이란 아무것도 없었소. 17촌짜리 흑백텔레비와 구식랭장고나 값이 가겠는지, 그것들도 탄광이 한창 경기가 좋을 때 사놓은것이였소. 정말 앞길이 막막했소. 산입에 거미줄이야 치겠소만 초중을 담방 졸업할 딸애와 소학을 졸업하게 될 아들애의 학비를 댈 걱정이 태산같았소. 내게는 이 자그마한 집을 내놓고 의지할 곳이 없다고 생각하니 나를 믿고 사는 세 목숨이 안스러워서 그만 땅에 주저앉아 꺼이꺼이 울고말았소. 울고있는 나를 실넋한듯 보고섰던 안해는 문가에 아무렇게나 팽겨친 내 작업복과 다른 비품들을 번갈아보더니 그만 얼굴이 하얗게 질리더군요. 그날 점심은 네식구가 아무도 밥을 먹지 않았소. 안해는 언녕 흐물흐물해진 자그마한 가두공장에 출근하였는데 월로임이 2백원 남짓했지요. 내가 공장에서 죽기내기로 일했대야 한달에 겨우 6백원 남짓했소. 네식구가 8백원을 가지고 살려면 늘 빠듯했지만 아껴먹고 아껴입으면서 그래도 단란하게 살아갔지요. 기실 우리보다 못하게 겨우겨우 살아가는 사람들이 얼마라구요. 그래도 우리에겐 웃음이 있었소. 그런데…하루 아침에 실업자가 되였으니 마치 하늘을 받치고있던 기둥이 무너져내린것 같았소. 생활이 쪼들리기 시작했소. 손을 털고나앉아 공기만 마실수는 없었소. 사처에 연줄을 달아 일자리를 구했지만 문화정도가 초중인데다가 아무 특장도 없이 그저 힘밖에 없는 나로서 그 힘마저 쓸 자리가 없었소. 그렇게 속썩은 한숨으로 나날을 보내던 어느 하루 저녁은 거리에 나가 정처없이 걷고걷다가 어느새 철남의 야시장에 들어섰소. 불빛이 휘황한데 길량켠에 벼라별 장사군들이 도시의 밤생활을 즐기는 유한계층들을 소리쳐부르고있더군. 술을 마시는 사람들, 손에 손잡고 야경을 구경하는 사람들. 비디오앞에서 돼지멱따는듯한 소리를 뽑는 사람, 아무튼 들끓었소. 나는 어떤 계발을 받고 집으로 달려와 안해에게 나의 계획을 말했더니 물에 빠진놈 짚오래기라도 잡듯이 대뜸 대찬성이였소. 나는 취사도구들을 사들이고 밥상과 걸상들을 얻어가지고 야시장에 나가서 이것저것 해서 팔았습니다. 처음엔 체면이 깎이는것 같아서 큰 소리로 사구려를 부르지 못하였고 작식솜씨도 서툴러서 손님을 끌지 못했지. 그러나 날이 차츰 가면서 음식이 손님들의 구미에 맞게 되고 담도 커져서 요란하게 손님을  불러들이게도 되였습니다. 장사가 잘 되기 시작했소. 어떤 달엔 천오백원씩 벌때도 있었소. 우리 집은 다시 화기애애해졌소. 그러나 좋은 꿈은 빨리 깨여지는법이라든가. 한창 장사가 잘되여가던 어느 날 새벽 네시쯤해서 막 걷어가지고 집으로 돌아가려는때였소. 정거장쪽에서 무리지어 오던 뒤골목삽살개들이 나의 난전에 들어앉더니 이것저것 청해서 먹고 마시고 질탕거렸소. 그러나 나는 그들의 요구를 다 들어주면서 성의껏 모셨소. 장사군에게는 인간쓰레기들도 왕으로 여겨지는판이죠. 그런데 놈팽이들이 고기 한사발 다 쳐먹고 제에미를 욕한다더니 싱겁소. 짭소. 맵소, 하면서 음식이 어른들의 건강을 해쳤다고 걸구드는게 아니겠소? 결국 돈을 안내려는 수작이였소. 칠규에서 피가 쏟아져나올것 같더군. 몇마디 좋게 말하고 결산받으려고 했더니 무지막지하게 주먹과 발길이 막 날아드는게 아니겠소? 그렇게 맞다가 나도 그 동안 어데다 풀길없어 끙끙 쌓아두었던 울분과 미움과 분노가 솟구쳐 자기를 도저히 억제할수 없었소. 나도 주먹을 날리고 발길질했지요만 중과부적이였소. 막다른 골목에서 나는 칼도마우에 칼을 쥐여들고 대적하는수밖에 없었소. 그자들의 손에 언녕 비수가 들려있어서 자칫하면 목마른 죽음을 당할것이 뻔했지요. 그제야 그자들은 슬슬 꽁무니를 빼려 했소. 그러나 난전이 엉망진창이 되였지 얼굴에서 피가 질벅하게 흐르고 있지 해서 나는 발광하기 시작했소. 제일 우줄거리던 놈팽이에게 달려들었소. 그런데 겪고보니 겉으로는 거센체하는 그런 놈들은 기실 굴종하는 약자들과는 제멋대로 굴지만 악지세게 나오는 사람들은 십분 무서워하는 비겁하기 짝이 없는 그런 개망나니들이더구만. 나는 들고 뛰는 그놈의 살진 엉덩이에 칼을 박았소. 리성을 완전히 상실한 나는 끝장을 보려고 아저씨, 아저씨하며 살려달라고 애걸복걸하는 그자의 가슴에 칼을 박으려고 눈에 쌍불을 켰소. 그때까지 놈들의 발길에 채여서 사색이 다되여있던 안해가 달려와 내팔에 매달렸소. 그러는 사이에 놈팽이들은 다 도망갔소. 결국 그자들이 경찰들의 손에 잡혔지만 나도 병원에 스무날이나 누워있게 되였고 나오는 길로 다시 구류소신세를 지게 되였소. 정당방위의 계선을 넘어섰다는가? 쳇 개부랄같이… 에익, 세상에 그런 인간쓰레기들에게도 인도주의를 베풀어야 한다니 사회주의가 좋긴 좋지. 허허허…참 최형이 뭐 글을 쓴다니까 시시껄렁한 신변잡담을 하는건데 지루하지 않소?》 《아니, 내가 듣고싶었던 얘기구먼. 자, 이잔 내구  계속 말하라구, 잘 들을께》   3. 취중진담   뱀에게 물린놈 쌔끼오래기를 보아도 놀란다고 나는 다시 야시장에 나갈 엄두를 내지 못했소. 놈팽이들의 단짝들이 복수한다고 야시장을 휩쓸고 다녔다는 소리에 지레 겁이 나더군. 그렇게 내 운명에 막다른 장벽이 생겼소…》 나는 그에게 담배를 건네면서 한숨을 내쉬였다. 아주 감명깊게 들었다는 말없는 응대이기도 했고 계속 듣고싶다는 암시이기도 했다. 《그후 다시 살길을 찾아야 했소. 가만히 살펴보니 거리에서 양고기뀀을 구워파는것이 성본도 그리 들지 않고 밥벌이가 될듯 싶어서 그것을 시작했소. 며칠 집에서 굽는 련습을 한다음 번화가의 E학교부근에서 장사를 벌렸소. 로임을 착착 탈때는 몰랐는데 돈벌이가 정말 쉽지 않았소. 바람이 부는 날엔 연기에 눈물코물이 범벅이 되였으니 내꼴이 뭐이겠소? 하긴 갱에서 쇠돌을 캘때도 그꼴이였지만, 어떤 날은 한꼬챙이도 못팔고 내내 보초를 섰소. 소리치느라 목이 마르고 다리가 해나른했지만 눈길은 한시도 게으름부릴수 없었소. 성시관리일군이나 세무소사람들이 들이닥치면 눈치 빠르게 제꺽 철퇴해야 하니까. 하지만 내 옆에서 하는 신강사람의 난전에는 사람들이 경쟁이라도 하듯이 다투어 사먹는데 정말 복장이 터질 지경이였소. 진패사가 신강사람으로 화장하고 양고기뀀을 팔던 소품이 얼핏 생각나더군. 그래서 문공단에서 일하는 사촌동생에게서 위글족 모자를 빌어오고 머리를 지지고 수염을 길렀소. 신강사람으로 둔갑하여 다시 나섰지. 정말 웃기는 판이지? 하하하… 성이 나도 절대 《어허!》소리 한마디도 내뱉지 않았소. 모든 의사는 손짓과 턱짓, 고개짓으로 통했소. 벙어리신강인이 된셈이지요. 양고기뀀을 사먹는 사람들이 대부분 소년소녀들이였기에 절대 값을 가지고 흥정하지 않았기망정이지. 사람들이 진짜 신강사람인줄로 알구 있었지요. 장사가 괜찮게 되여서 어떤 달엔 한 5백원을 벌기도 했소. 그러다가 작년에 누이벌 되는 친적이 자기가 해남도에서 바다고기를 운반하는 일을 해서 돈을 벌었다면서 구슬리는 바람에 무작정 따라갔더니 계단식판매에 끌어넣으려 하였던것이지요. 지금은 정말 누구를 믿기도 어렵습니다. 소품에 신문에 날자를 내놓고 죄다 가짜라더니… 어디 그뿐인줄 아우? 광주역에 나서니 악마구리끓듯 하였는데 정신이 다 어질어질하더군. 누이의 목에서 목걸이를 잡아채여 가지고 여유작작하게 걸어가는 놈팽이를 눈을 펀히 뜨고 바라볼수밖에 없었소. 개판이지요. 기실 해남도에 간다는건 얼리기 위해 한 말이고 광주가 목적지였소, 아이구, 광주의 변두리에 싸구려려관이야 말로 도깨비굴이였소. 동서남북의 오가잡탕들이 다 모여들었는데…참 말두 마오. 처음엔 내친 걸음에 어떻게 해볼가 하다가 누이가 하는 꼴이 미워서 한달 있다가 돈만 팔고 돌아오고 말았소. 제길헐놈의 세상이야, 지금은 정말 편안한 백성이 되였소. 채소값도 좀 남기구 살림에 보탬이 될가 하구 아까 본 뙉밭을 일구어 마음이나 안정시키고 있는 판이요,》 술 한병이 어느새 굽이 났다. 그도 취기가 도고했다. 말도 막나오기 시작했다. 《형님, 작가라고 했지? 우리 같은 정리실업자들의 고충과 재취업의 실생활을 소재로 소설을 쓰려고 생각한다구? 허, 그게 잘 되겠소? 형님이 무슨 심리체험과 감수를 가지고 쓴단 말이요? 문화대혁명때 농촌에서 뒤몰리던 묵은 얘기나 쓰면 잘 될런지 몰라두, 우선 형님은 실업당하지 않았고 집에 형수님도 실업당하지 않았는데 어떻게 그 아픔을 가슴으로 느낄수 있겠는가 말이요? 배부른 사람은 배고픈 사람의 그 쓰라린 마음을 알수 없소. 영원히! 허구와 상상으로 쓴다구? 나는 무식해서 문학적으로는 말할수 없지만 이렇게 비유해서 말해봅시다. 만약 내가 얼음구멍에 빠졌다고 할 때 형님이 물불을 가리지 않고 얼음을 깨고 뛰여들어 구하지 않으면서 그저 언덕에 서서 “사람 살리시오, 사람 살리시오,” 하고 소리만 친다면 내가 형님에게 감지덕지할것 같소? 우리 공장의 대문앞의 선전란에 《오늘 노력하지 않으면 래일 일터를 찾느라 애쓸것이다.》라는 표어가 있었는데 당시엔 말하지 못했지만 순전히 개방귀같은 헛소리였소. 형님은 그래 우리 쌰강당한 사람들이 모두 일을 착실히 하지 않아서 그렇게 되였다고 생각하오? 물론 그중에는 아무짝에도 못쓸 게으름뱅이들이 끼여있는건 사실이지만 뭐 우리 로동자들속에만 그런 껄렁한 놈들이 있다는거요? 우리 공장은 싹 마사져서 그렇지만 내 친구들이 있던 다른 공장들에서 아무리  소처럼 일해도 웃어른께 한번 잘못 보이면 의연히 정리실업당하더라구요. 물론 일을 잘 하지 않는다는 죄명을 달아서 내쫓지. 기실 흥성하는 기업이 있다면 그게 훌륭한 령도들의 아래에 제구실을 착실히 하는 로동자들이 있다는 설명이 아니겠소? 큰일 작은 일 다 저희들끼리 결정해버리고는 왜 죄없는 로동자들이 일을 잘 하지 않은 탓인것처럼 자기네와는 아무 상관도 없다고 뻔뻔스럽게 말하는가 말이요. 가령 내가 반년간 출근하지 않아서 공장에 경제손실을 주었다해도 그들이 쩍하면 고찰이요 하고 외국려행을 하고 명산대천을 구경하느라 써버린 돈에 비하면 새발에 피일거요. 아니, 온 공장이 생산을 중지한다 하여도 그들이 머리가 뜨거워져서 망탕지휘 하는 바람에 밑진 거금에 비하지 못할것이요. 나 원래 광산에 있을때부터 밸이 꼬이는 일이 있으면 참지 못하는 성미여서 불평불만이 제일 많은 사람이였지, 헝!  공장이 문을 닫게 되였을 때 로동자들을 탓한다면 그게 무슨 개량심들이요? 참 형님이 오늘 내가 취해서 마구 내쏟는 말들을 다 소설에 옮길 담량이 있소? 그럼 더 험한 말을 막 하지. 흥, 뭐 로동자는 공장의 주인공이라고 입이 반지르르하게 말들 하지만 우에서 임명해 내려보낸 공복이 무능력자이든 속이 먹통같은 놈팽이든 무조건 접수하고 령도받아야 하는 로동자들이 주인이라구?  나는 책은 많이 읽지 못했소. 하지만 노복이 만족스럽지 않으면 주인이 마음 대로 내쫓는다는 말은 들었지만 소위 공복이 수많은《주인》들을 내쫓는다니 말이 되오? 참 우습지. 제밥통이 날아날가봐 전전긍긍하는판에 공복을 선택할 권리가 있겠는가 말이요. 흑백이 전도된 일을 어찌 한입으로 다 말할수 있겠소? 그리구 말해봤대야 제입이나 아프지.  공장을 제집처럼 사랑하고 전심전의로 맡은 일을 잘하라는 표어도 그렇지. 젠장 그래, 우리가 그렇게 해오지 않았단 말이요? 공장이 흥성하면 영광이고 공장이 망하면 수치라고 말은 간지럽게 해내싸지만 틀려도 한참 틀린 말이라구. 그래 집에서 당신을 사랑하지 않고 한발로 차내던지면 어쩐단 말이요? 로형이 밖에 나가 바람도 피우지 않았고 도박도 놀지 않았는데, 그리구 더구나 집벽도 파괴하지 않았는데도 집에서 요구하지 않는다면 어쩌겠소?  십몇년, 지어 몇십년을 땀흘려 일하면서 먹고 자는걸 내놓고 모든 잉여가치를 집에 바쳤는데도 밥마저 먹을 권리도 없게 되였지요. 공장이 쇠망하면 확실히 우리들 의 수치요. 그 말은 맞소. 그런데 왜 우리 로동자들만 수치스럽고 그들에게는 아무 일도 없는가 말이요? 나라가 어려움이 있고 공장이 잘 되지 않으니 실업해야겠지. 그러나 흑백은 전도 하지 말아야 할게 아니요? 뭐, 재취업의 길은 광활하고 치부할수도 있다고요? 웃기지 말라구 하시오. 》 …취중진담이라도 너무 직설이여서 마음이 조금 불안해지 시작했다. 역어빠진 화성이가 내 마음을 읽은 모양으로 정통을 푹 찔렀다. 《쳇, 그것 보라우, 형님 소설인지 문학인지 싹 걷어치우오. 그냥 간지러운 소릴 할게면 낯뜨겁게 나 작가요, 하구 무슨 빌어먹을 소재발굴이니 할게 없이 잠자쿠 책이나 읽으면서 마음이나 달래보던지. 불행이 소설을 낳는다는 말을 나도 읽어서 알지, 그래서 나도 주제넘게 소설이나 써서 울분이나 토해볼가구 생각한적이 있소, 허지만 그게 뭐요? 조선글로 나오는 소설은 어떤지 몰라도 요즘 젊은애들이 쓰는 무슨 현대소설인지 하는걸 두어편 읽어보면 배부르고 편안해서 잠꼬대나 하는것 같아서 밸이 뒤틀린단 말이요. 나도 소설이라고 한편 써놓은게 있소. 제목은 《6호병실》이요, 체호브의 소설제목을 본딴것인데 나딴엔 황당수법으로 된 풍자소설을 쓰려구 했던거요. 흥미있다면 언제 한번 형님이 보오, 그러나 발표할 생각은 없소. 할말을 다할수 없는 인생마당이 아니지 않소. 자, 마지막 한잔으로 우리의 기우를 기념합시다…. 그날 나는 몹시도 취해서 자전거도 못타고 비칠거리며 힘겹게 걸었다. 흐릿한 가로등에 비친 내 그림자는 나 자신보다 더 취한듯 이리비칠 저리비칠하였다. 술마시고 취하는 멋이란 이런것인가? 그러나 인생은 취생몽사가 아니다. 취생몽사가 아니면 어쩔텐가? 모두가 취했는데 홀로 깨여있는 사람은 더구나 고달픈 법이거늘……  
6    [수필] 인생의 철길따라 댓글:  조회:9105  추천:3  2011-07-26
                              인생의 철길따라                                                        최균선       아이때는 화룡선 철길을 넘어 “3.1”학교로 오가며 기차에 앉으면 어떻게 좋을가 빈궁리도 수없이 하였고 멀리서 기차가 달려오는가 맟춰보느라고 차고 뜨거운 레루에 귀를 바싹대고 듣는 멋도 좋았고 어쩌다 생긴 옛동전을 레루우에 놓고 기차가 지나가기를 기다리다가 더없이 납작해진것을 보며 환성을 지르기도 하였다. 그렇듯 내 동년의 무의식속에는 기차를 두고 자주 랑만적인 환상이 나래쳤다.     내 꿈은 기차를 타고 멀리 가는것이였다. 칙칙, 푹푹 연기를 내뿜으며 비암산굽이를 돌아 사라지는 기차이든, 삼봉동고개를 벌레처럼 기여가는 기차이든, 그리고 내가 내릴역이 어디일지 모르면서 그냥 가고싶었다. 기차를 타고 가다보면 기나 긴 산굴도 지나고 산설고 물설은 만리이역에 이른다 하더라도 그냥 가고싶었다.     철길이 언제, 어떻게 놓였든간에 기차는 나에게는 신비, 경이, 선망 그 자체였다. 철길이 두갈래인것은 기차바퀴가 량쪽에 달렸기때문이라고만 생각했다. 철길이 나란히 뻗어나갔지만 영원히 한점에서 만날수 없음을 알리없었고 기차길도 끝나는 곳이 있는지 없는지도 몰랐다. 아무튼 내 동년의 언덕엔 상상의 철길이 길게길게 뻗기시작했고 그래서 꿈에 온밤을 기차를 타고가는 때도 많아졌다.     그렇게도 육중한 기관차와 길다란 렬차들의 무게에도 무너져내리지 않고 철길이 철길로 버텨가는것은 그위를 질주하는 렬차들에 상봉의 희망과 리별의 아픔이 실려오고 실려가기에 그만큼 어깨를 짓누르는 책임감에 뻗디고 있는것인가? 철길은 사람들이 어디론가 빨리가고 빨리 돌아오기 위해 시작한것인가…물론 이런 고급스러운 생각을 해본것은 세월이 많이 흘러간뒤의 일이였다.     하나하나의 침목들은 량쪽에 놓인 레루를 잡아당기여 저마끔 외길이 되지 않도록 하는 친선목이기도 하다. 만남의 정거장, 리별의 정거장 플래트홈에 철길은 말이 없고 끈질기고 묘망하지만 사람들은 그 어디쯤에서 반가운 사람을 다시 만날수 있으리라는 희망으로 달구고있다.     몇해전 처음으로 산동반도남단 해변가까지 먼먼 려정을 오면서 다시 동년의 그 환상을 꿈꾸듯 이어보았다. 산을 넘고 평야를 주름잡고 대교를 건너 가로세로 뻗은 철길, 이 땅에 얼기설기 얽힌 두줄기 철길을 따라 가고 가노라면 머나먼 곳 어드메 쯤에서 누구인가와 눈물로 포옹할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인간이 길게 늘여놓았다는 고마움이 앞섰다. 몇천만리 먼 곳에서 떠난이들이 먼곳에서 빨리 만나려는 그 마음을 렬차가 싣고가니 누군인들 철길이 고맙지 않으랴!     환영처럼 스쳐지나는 산발들, 차창밖의 신작로에 먼지구름을 일구며 달리는 자동차들, 철길가에서 손을 흔드는 촌아이들, 저 멀리 산허리에서 풀을 뜯는 소떼, 공장굴뚝이 토하는 검은 연기, 드넓게 펼쳐진 옥수수밭과 밀밭, 깊게 패인 계곡, 굽이치는 산등성이, 도시의 고층건물, 아담한 농가, 스산한 농가의 지붕들을 얼없이 내다보느라면 일종 인생의 향수가 아닐수 없다.     누구든 돈만 더 팔면 침대표를 사서 편안히 누워갈수 있다. 그러나 인격의 척도가 호화렬차의 침대칸에서 현연되지는 않는다. 누우나 앉으나 차창밖으로 보이는 풍경들은 다를것 없고 종착역에 이르면 다 두발로 내려야 한다. 그러니 마른명태에 맥주를 마시며 려로의 피로를 달래는 정취를 느껴보는것도 그리 나쁜 일은 아니다.     고달픈 려행이지만 그 모든것들이 나를 깊이 빠져들게 하여 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종착지를 생각한다. 모일 모시에 기차가 역에 들어서고 길게 기적이 울리고 려객들이 꾸역꾸역 쏟아져내릴것이다. 일단 도착지에 내리면 생활의 한페지가 또 새롭게 펼쳐진다. 직업병같이 분필가루를 축복의 꽃보라처럼 생각하고 학생이면 다 사랑하고픈 나로서는 충실한 삶의 연장선을 긋는다고 할수 있겠다.     그러나 타향에 떠도는 몸이면 언제 어디서나 철길에 감심하게 되는것은 떠남이 막부득이한 사정이였더라도 고향에 돌아가려는 마음이 그 무엇보다 더 절실하기 때문이리라.  그렇듯 만남의 길은 리별의 길보다 언제나 먼저 마련되여있다. 그래서 렬차가 출발하기전에 가슴속에 돌아올 길이 그려지는것은 리별의 아픔때문일것이다.     아무리 먼곳이라도 갈곳이 있는 사람은 얼마나 행복한가? 돌아올 곳이 있는 사람은 또 얼마나 행복한가? 가지 않으면 안될 절박한 사정에서 떠나는 사람의 모습은 처절하지만 언제 돌아올지 분명히 알리고 떠나가는 사람의 뒤모습은 기다림으로 거룩한것이다. 돌아보고 또 돌아보며 떠났다가 뚜벅뚜벅 돌아오면 어떤 형용사도 무색해지는 그때, 송이송이 고향의 민들레와 더불어 반가움, 회포, 감개무량뿐이리라.     인생길은 참으로 두갈래 철길과 흡사하다. 하지만 누구에게나 자기 인생렬차가 있고 자기만의 생활의 궤도가 있다. 다만 출발역도 도착지도 씌여있지 않은 공백차표를 쥐고 인생렬차에 올라 세월의 궤도를 따라 가기는 다 같다. 철길이 어떤 곳에서 갈라지듯 인생의 궤적은 바뀔수 있으나 궤도는 벗어날수 없다.     학생일때는 이른아침 눈을 비비며 학교길로 종종걸음치고 하학하면 곯은배를 달래며 터벅터벅 돌아와 숙제책에 머리를 틀어박아야 하였다. 해해년년 밭갈고 모를 내던 그때는 날마다 뜨는 해와 더불어 일밭으로 나가고 땅거미를 밟으며 돌아오고 그리고 자고… 밝는 날 다시 밭으로, 논으로 나가 허리휘도록 일하고 또 일하였고…     후반생에 어쩌다 교단에 오른후 눈이 오나 비가 오나 학교로 달려가고 교단에 분필가루 날리고 숙제검사를 하고 시험지를 매기고…그렇게 30년을 로보트처럼 오고가다가 홀가분 절반, 허무 절반을 안고 사무한신이 되였다가 다시 사립학교들에서 똑같은 일을 반복해왔다. 여생을 석양처럼 불태우고 있다고 말하기엔 머석한 일이니 궤도를 벗어날수 없는 낡은 기관차가 역구내를 왔다갔다하는것과 같다고나 할가,     철길가에 수많은 간이역은 어떤 사람에게는 종착역이고 어떤 사람에게는 출발역이 될수도 있다. 그런데 인생의 철길에서 어디가 나의 출발역이고 어디쯤이 나의 특정된 종착역인가? 인생의 철길에는 간이역이 없다. 때론 어데선가 내려서 쉬고 싶은데 그럴수 없다. 유감도, 고달픔도, 오늘의 무거운 짐도 아무데나 나름대로 부리울수 없다. 그렇게 나는 간이역이 어디인지 모르고 지금도 덜커덩거리며 굴러간다.     인생의 철길은 자신이 놓고 싶은대로 놓는것이 아니지만 철길에 턴넬이 있기마련이듯이 인생철길에도 나름대로의 턴넬이 있다. 그것은 반드시 넘어가야 할 인생의 아리랑고개를 뚫는 길이다. 턴넬같은 인생길은 우리로 하여금 많은것을 느끼게 한다. 어떤 때는 자신의 의지와는 전혀 상관없이 턴넬같은 어둠속에서 오래오래 몸부림쳐야 한다. 아무리 긴 턴넬이라도 밝은 천지가 뚫려있기에 우리는 능히 인내하는것이다.     가고가도 끝없을것처럼 굽이쳐간 철길도 종착역에 도달하면 철길도 끝나는 곳이 있다. 철길 끝나는 곳에 서면 마침내 기차도 더이상 달리지 못하고 멈춰버리고 그로 인해 더 뻗을수 있을것 같다는 가능성과 그럴수 없을거라는 현실이 공존하는 공간... 그것은 가능성이자 한계의 공간이기도 한것이다.     철길이 끝나는 곳에 서면 어떤 느낌일가? 돌아갈 곳이 없는 사람에게는 그곳이 그야말로 절망의 벼랑이 될수도 있을것이고 성공한 자에게는 목표달성을 의미할수도 있을것이다. 인생의 철길도 마찬가지다. 결국 철길이 끝난 그 곳에 무성한 잡초처럼 허무할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인생의 종착역이란 어떤 곳인지 감이 잡힐것이다.  
5    댓글:  조회:7279  추천:42  2008-02-09
                    시                                      내 인생길                        인생의 기구한 오솔길에                          나는 걸음마다에 짓채인 조약돌이였지,                      사나이 칠석간장이 부서져                          피맺힌 아픔이 굳어진 한의 덩이였나?                        매말라 헐벗은 가지에                          쓰디쓴 열매 하나 외로웠지,                      저것에도 있을법한 꽃시절                          지금은 하늬바람에 떨고있구나.                        쑥대 우거진 마음의 무덤가에                           찢어진 추억의 돛폭,                      구배많은 마음의 오솔길에                           락엽에 묻힌 파아란 잎새,                        인습에 절은 지친 가슴이                          버리운 네거리에 헤매였어도                      참고 이겨낸 고달픔은                          인제 여기 오솔길에서 굳어지는가,                        가시넝쿨 덮인 내 오솔길                          내 인생의 오솔길에                      사나이 칠석간장이 부서져                          피맺힌 아픔이 조약돌로 딩구누나.                                   1988 년 6 월 16일 (연변일보)                                       바람이고 싶었다.                         나 바람이고 싶었다.                              무형의 속박에 숨막히던 그 때는                                   거칠것 하나없이 항시       갈길 드바쁜  나그네처럼,                         산허리에 묵은 덤불을                             진달래꽃불로                                   활활 싸지르는                                        바람, 바람이고싶었다.                         지겨운 저 비구름의                             살찌고 축축한 등을                                    써ㅡ억 밀어내고                                          하늘을 파랗게 날리는,                               사래긴 콩밭김에                                   땀으로 절어든 호미자루도                                         건뜻이 말려주고                                               이삭도 알차게 채워주고                               풀벌레도 헐떡이는                                   숲에 갈앉은 침묵을                                        한바탕 휘저어 냋쫓으며                                              소란도 피우고싶었다.                               잠자던 심술통도 터져서                                   찬서리 하얗게 몰아다가                                          산에 들에 불을 질러놓고                                               익어가는 성숙을 알리고싶었다.                               가도 가진것 하나없이                                  빈몸으로 날려가는ㅡ                                        와도 가질 마음 하나없이                                               빈가슴으로 날아드는ㅡ                                마냥 굳어져버려                                   늑장부리는 계절이여,                                         한을 터쳐 열매를 맺는                                              바람, 바람이고싶었다.                                     1994 년 5 월 14 일 (연변일보)                                                                               꽃과 바람                               불고가는 바람을                                 탓해서 무엇하랴!                                     꽃은 그래서                                         한자리에 다소곳이 피고                        꽃피고 잎지는 사연                          알아서는 무엇하랴!                              바람은 그래서 오고감이  스스럽다.                               하건만 멋모르는 새들은                                 스러지는 꽃이 서러워                                     락화의 한을                                         바람에 묻는다.                               꽃과 바람은                                 마음 맞지 않는                                     불행한 련인이라고                                         누가 말하는가?!                                    1994 년 5 월 14 일  (연변일보)     졸업생들에게                              자, 서로의 축복을                            희망봉에까지 지니고 가라.                            서로의 충성된 축복으로                            잡다한 애수를 쫓으라.                              하나, 또 하나의 기념책에                            다섯개의 춘추를 어이 다 쓰랴,                            성패와 득실로 발목잡히지 말고                            머리도 돌리지 말라.                              머나먼 풍경선                            너희들의 발길을 기다리거니                            신들메 단단히 동이고                            인생의 초행길 떠나라.                              길을 가면서 꽃도 함께 꺾을수 있으랴,                            오색유혹이 저 굽이에서 웃으리                            때에 멋지게 사절하는 몸가짐도                            첫걸음부터 바로잡으며 떠나라.                                         1999 년 6 월 6 일                                                                                    내 마음의 천평                       시대의 발걸음 뒤우뚱 ㅡ                     하다가도 바로잡아질수 있더라.                     력사의 무대는 떠들썩 ㅡ                     하다가도 잠잠해질수도 있더라.                       그러나 오, 벗들이여!                     미래와 사랑을 실은                     내 마음의 천평은                     예이제 기울수 없노라.                       황금의 마술봉 귀신을 울려도                     사심이 흑심을 꼬드겨도                     참된 생활이 비틀어질 때                     살줄 아는이여, 갈라면 가시라.                       영예의 계관 거꾸로 걸리고                     아름다운 계몽의 꿈은 저기 ㅡ                     흩날리는 지페의 조소에 얼룩진다만                     내 마음의 눈은 언제나 밝아라                       우리는 알고 있노라                     초불은 해처럼 눈부시지 않음을                     그러나 그대는 아는가?                     모든《백락》은 천리행의 준마였음을.                                         회한도 깊거늘                     교훈인들 어이 없으랴!                     동경은 언제나 아름답거니                     내 마음의 천평 녹쓸줄 몰라라                        공덕이여, 봄싹처럼 싱싱하라                     비끝엔 칠색무지개 비끼리니                     인생의 첫 봉화 ㅡ 밝음은                     영원히 여기 ㅡ 교단에서 시작되리라.                                 1990 년 7 월 10 일 (중국조선어문)
4    못생긴 아모르 댓글:  조회:7785  추천:32  2008-01-29
못생긴 아모르                                                                                                 ㅡ사랑은 아름다운 착오인가…      운운                                                                             1        봄은 흥겨워…        정성껏 대자연의 첫잔치를 베풀더니 어느새 싫증이 났는지 꽃과 나비와 꿈을 슬며시 걷어가지고 가버린다. 뒤따라 산야에 풍기는 야릇한 애수를 덮어주려는듯 첫여름이 푸른 옷자락을 너울거리며 들어선다.        하늘도, 숲도, 공기도 파랗게 물들었다. 푸르러지는 생각, 그리고 어데론가 자꾸 자꾸 가고만싶어지는 그러한 날이다.        철민이는 실버들이 늘어진 내뚝에 점도록 앉아서 해볕에 포근히 싸인 산간마을을 망연히 바라보며 오만가지 잡념을 다듬고있다. 감개무량하기엔 너무도 가슴아픈 추억의 마을이요, 한맘 크게 먹고 선뜻 들어서자니 무섭게 태치는 량심의 채찍이 쨩 울리며 걸음을 탁 막아나선다.        그랬다. 만약 갑자기 학교에 나오지 않는 학생만 아니였다면 결코 살아생전에 이 마을을 찾지를 않았을것이다.        《후유ㅡ꼭 16년만이로구나…》        철민은 밀물처럼 밀려드는 회한을 겨우 한숨으로 막아놓고 탕개가 풀려버린 두다리에 힘을 고이며 시들히 일어섰다. 그가 무거운 발길로 마을에 들어서는데 때마침 마주오는 늙수그레한 촌아낙네가 있었다.        《저ㅡ여게 한성이네 집을 찾는데요.》        《예에ㅡ저기 바루 저 초가집인데요.》        《네?!…아, 감사합니다.》        녀인의 손길을 따라 눈길을 주던 철민의 얼굴은 대뜸 하얗게 질렸다. (하느님 맙소사.)        철민의 짜내는듯한 신음소리에 녀인은 이상하다는듯 곱지 않게 흘끔거린다. 제풀에 머쓱해진 철민은 얼핏 얼굴을 돌리였다. 갑자기 술취한 사람처럼 걸음이 비탈렸다.        여기저기 보란듯 일떠선 벽돌집들에 소외된듯 언덕쪽에 외롭게 쭈크리고 앉은 초가집, 너무도 눈에 익은 그제날의《실락원》이다. 온갖 불행과 고통과 저주를 고즈넉히 삼키고있는듯 고색이 창연하다. 줄줄이 홈타기진 지붕이며 찌그러진채 매달려있는 헛간문, 얼추 엮어두른 울바자…그 어데나 힘겨운 고달픔이 철철 흐르니 오늘도《실락원》인가…철민은 주인을 부를념도 못내고 우두커니 섰다. 이때 귀익은 남자애의 목소리가 반갑게 들려왔다.        《선생님, 선생님이 어떻게…》        《오,  한성이구만, 그래 어데 갔다 오는길이지?》        철민은 언제나 수집은 계집애처럼 얼굴 잘 붉히는 사내애를 덥썩 부여잡았다. 언제 보나 류달리 정끌리는 개성적인 얼굴, 총기 있고 지혜있는 눈, 그 누가 보나 《훌륭한 애로구나.》하는 인상을 주는 열여섯살, 한창 망울짓는 미소년이다.        《저…논밭에요. 어머니가 목이 마르다기에 물을 가지러…》        《응, 그래?무척 힘들지?저 땀을…쯧쯧…》        《괜찮습니다. 참, 이게 우리 집인데요. 들어갑시다. 제가 어머 닐 모셔올게요.》        《오, 그렇지, 물론 동무의 어머니를 만나봐야지, 헌데 한성인 왜 학교에 안나 오지?》        추구하는듯 따끔하게 쏘는 선생님의 눈길에 사내애는 흙발을 비비며 떠듬거렸다.        《편지 받았습니다. 하지만 어머니 혼자서 도거리농사를 어떻게…어머닌 병도 많으시지…전 아무래두…》        《음, 사정 짐작하구있었소. 하지만 중점고중에도 가고 대학에도 갈수 있는 한성이가 참 애석하구만, 그래 동무어머닌?》        《어머닌 야단이십니다. 뼈를 갈아서라두 꼭 대학공부는 시킨다며 말입니다.》        《오, 참으로 훌륭하신 어머니시구만, 한성이두 효성이 지극하구…그럼 우리 한성이가 어떻게 살고있나 좀 구경할가?》        철민은 한성이를 따라 정지간에 들어섰다. 궁색이 쭉 깔린 살림이다. 몇해전에 갖추었을 색이 바랜 찬장과 그옆에 윤기도는 오지독 몇개, 할머니가 물려주었음직한 옛날 장농 한쌍, 그우에 댕그랗게 얹혀있는 이불 두어채…구석구석을 눈빗질하던 철민의 눈길이 벽에 걸린 사진틀에 굳어졌다. 동공이 점점 커지고 입귀가 자꾸 실룩거린다. 환각도 환영도 아닌 현실의 무서운 비극이 곧 막을 올리려고 한것이다.        철민은 갑자기 몽유병에나 걸린듯 자기자신을 가늠할수 없었다.        《음ㅡ그러니 한성인 여기 태생이겠지?》        《전 잘 몰라요. 어머니의 할아버지랑 저의 외할아버지, 외할 머니랑은 다 이 집에서 살았대요. 외할머닌 재작년에…》        《오, 그럼 동무의 아버지는…》        그렇게 묻는 철민이의 입술이 저도 모르게 파르르 떨렸다.        《전 유복자라나요. 어머닌 늘…》        《오, 그렇구만, 오…》        철민은 그저 《오오》하면서 체증만난 사람처럼 갑자르기만 했다.        한성이가 나가고 빈집에 남은 철민은 안경을 닦아쓰고 사진틀에 바싹 다가섰다. 돌이나 지났을 남자아이를 안은 젊은녀인이 시름겨운 눈길로 철민이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처녀시절의 생기와 활력은 스러졌으나 보다 성숙한 매력으로 아름다움을 과시하고있었다. 우수를 머금은 호수같이 서느러운 눈, 지친듯한 얼굴, 애련한 그 모습전체에 비껴있는 암담함과 우울속에서도 뚜렷이 내비치는 성스러운 모성애의 후광…        (아, 분명 그녀다!그녀가 살았단말인가? 어쩌면 그냥 이 집에서…운명은 잔혹도 하구나…헉…)철민은 모진 오열을 토하며 부르르 몸을 떨었다. 16년, 기나긴 세월을 두고 겨우 아물구었던 옛상처가 오늘 참회와 자책의 칼끝에 찔리워 다시 피고름을 랑자하게 짜낸다. 철민은 황황해진 마음으로 쫓기는듯 집을 뛰쳐나왔다. 발길이 닿는대로 걸어서 무너지듯 쓰러지고보니 역시 그 샘물터, 사연도 많은 첫사랑의 요람이였다. 샘물은 예이제없이 찰찰 넘치여서는 이끼 푸른 돌담새로 돌돌돌 흘러버리고있었지만 이 시각, 철민에게 뼈아픈 추억을 불러일으키는것이였다.        《정녀!그대가 묻었다는 그 순정을 이 철민은 찾을 낯이 없구나. 용서해다오. 아ㅡ아ㅡ》        오장을 후벼내듯 괴롭게 부르짖는 철민의 눈에서 뜨겁고 찝찔 한것이 주르르 흘러내리였다. 2       우연이 아니였다면 운명의 작간이였으리라. 대학4년을 알뜰히 다니다가 그만 시큰둥해진 그해 봄이였다. 시골에 계시는 고모네집에서 정양을 하다가 집으로 돌아오던 그날이다. 철민은 다리쉼을 할겸해서 고개턱 로송아래에 잠시 앉았다. 사원들이 하얗게 붙어앉아 김을 매고있는 비탈밭아래 토성마을이 신록속에 잠겨있 었다.     늦은 봄날의 양광이 호듯호듯 가슴을 희롱질하고 싱싱한 계절의 정화는 일만가지 욕망을 꼬드긴다.《혁명》이냐?학문이냐? 선택의 갈림길에 곤혹이 노그라져 하품했다. 그러나 철민이는 아무것도 될수 없었다. 사람마다 성스러운 마음에 숭고한 사명을 품고 열에 떠있었건만 그것은 짓부시고 족치고 잡아내는 지랄병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농토에 태줄을 묻고 자란 그는 그러기에는 너무 선량했고 기질적이 못되였다. 철민의 대학교의 그 뮤즈도 하루새에 녀류혁명가가 되더니 그를 싹수없는 시골뜨기, 백면서생이라고 비웃어버리고 높이 날고있었다. 그 자신만이 하찮은 존재 였다. (에이, 차라리 정염에나 콱 빠져볼가부다.) 그는 갑자기 갈증이 느껴지며 올 때 보아두었던 옹달샘이 생각났다. 건정건정 고개를 내려 산기슭 샘물가에 거의 닿았을 때 성긴 관목숲새로 새여나오는 일남일녀의 싱갱이질소리가 발목을 잡았다. 《제발 이러지 말아요. 싫어요.싫어요.》     《챠, 이거 개똥녀 매화타령인데, 친해보자는데두 왜 이래?이 태씨의 부인이 척 돼보지. 제밀,》     《개똥녀이기에 대상자 못된다는거 아냐요!》     챙챙한 목소리에 울음이 푹 실려있다.     《하, 요것, 정 이러기야? 잔말 말고 요렇게 착ㅡ헤헤…》     《놔요, 사람을 너무 업신여기지 말아요!제게도 인격은 있어요.》     《흥, 네깐 부농딸에게 무슨 개나발같은 인격이야, 자, 곱게 놀면 너네도 살도리가 나진단말이야.》     그저 웃고 지나쳐버릴《밀회》아니였다. 뒤미쳐 씩씩거리는 소리, 옷이 쫙 째지는소리…사태는 아무튼 급했다. 틀림없는 만행이였다. (저런 강도같은놈같으니라구.)철민의 눈앞에는 독수리에게 채인 풋병아리신세가 되였건만 구원의 소리 한마디 못하고 신음하는 처녀의 모습이 보이는듯싶었다. 철민은 관목숲에 훌쩍 뛰여들었다. 충동의 조약이였다.     《손을 놓아라, 짐승같은놈!》     느닷없이 천둥치는 호통에 한창 처녀의 바지띠를 끌러내리느라고 헐씨근거리던 망나니가 기겁해서 일어섰다. 그서슬에 바지가 훌렁 벗겨지며 흉물이 활 드러났다. 뭉툭하고 딱 바라진 몸뚱이에 마른 강낭떡같은 얼굴, 누렁개털같은 머리칼, 음기가 잔뜩 올라 일그러진 눈,     《너…넌 웬 잡놈이냐?물러갓!》     《썩 사라지지 못하겠니?망종같은놈…》     《야, 이새끼 흥을 깨는데, 씨팔것,》     말이 끝나기전에 주먹이 씽 날아들었다. 철민의 눈에서 불이 번쩍 일었다.    《에익, 개차반같은…받아라.》     철민의 두주먹이 허공을 그리는가싶더니 세괃은 구두발이 방비없는 그자의 사타구니에 날아들어갔다.《어이쿠》하고 허리를 푹 꺾는 그자에게 철민은 날선 무릎팍으로 면상을 콱 짓찧어놓았다. 피투성이된 그자에게 다시 주먹을 안기려는 순간,《그만 때려요. 그만…》하는 처녀의 목소리가 귀전에 울렸다.    《흥, 좋다. 좀 있다 보자구.》     요행 몸을 뺀 그자는 깨여진 입으로 피를 내뱉으며 마을로 줄행랑을 놓았다.     무서운 황소싸움에 오돌오돌 떨고섰던 처녀는 그제야 《와》하고 설음을 터뜨리며 땅에 푹 주저앉았다. 그렇듯 상심해서 우는 처녀의 울음소리가 무두질하듯 가슴을 마구 긁어내렸다. 허지만 철민은 처녀를 달랠 방책이 나지 않았다. 그저 말없 이 샘물가에 주정앉았다.     산곡간에 퐁퐁 솟아서 차분히 대지를 적셔주는 이 땅의 착한 젖줄기, 솟아서 고여서 사랑의 감로수이건만 이 정가로운 샘물처럼 맑아야 할 시골의 인정속에 어쩌면 저따위 잡놈도 끼여있나싶어지며 세상일이 또 한번 묘연해지기만 하였다.     《정…말 고마와요. 전…》     울음을 그친 처녀의 애련한 목소리에 철민은 고개를 들었다. 비록 해볕에 그을고 바람에 거칠어진 얼굴이였지만 무척도 애된감을 주는 처녀였다. 말못하는 내심의 고통과 감격의 정이 물결침에 오르내리는 젖가슴을 정성껏 감추며 어쩔줄 몰라하는 자태…그 모습은 금방 몹쓸 비바람에 시달린 애잔한 산꽃을 련상시켰다.     《아니, 악행에 좀 용기를 내였을뿐이요. 누구나 다 이렇게 했을거요.》     겸양속에 인정미가 흐르는 청년의 말에 처녀는 용기를 얻은듯 한걸음 다가섰다.     《저ㅡ어 혹시…룡강이라는 마을에서 살지 않았어요. 애명…은 야조》     처녀의 당돌한 눈길에 끌리듯 마주 응시하던 철민의 두눈이 번쩍 빛났다. 기억의 쪽문이 활짝 열린것이다.     《아니,귀동녀 아니요?나 야조요. 애명이, 아참 여기서 살았댔구만, 생각밖이요.》     《아이, 옳구만요!오빠, 지금은 한정녀라 불러요.》     그들은 얼싸 두손을 움켜잡으며 반가움에 끓었다. 어찌 그렇지 않으랴, 철민이와 정녀는 죽마고우였던것이다. 정녀네는 토지개혁때 오막살이에 이사와서 살았다. 그늘을 모르는 동심은 대번에 어울려졌다. 봄이면 메도 함께 캐였고 일성산 진달래며 나리꽃을 꺾어서는 귀동녀의 머리에 꽂아놓고《각시, 내 각시》하면서 짝짜꿍을 치던 철민이였다.《너는 아부지, 나는 엄마,》하면서 불때고 밥한다, 애기 업는다, 설레발치며 해지는줄 모르던 소꿉각시 정녀였다. 언젠가 한번은 정녀가 무엇에 토라졌는지 각시질 안한다고 쫑알거렸다.     《너 정말 안할래?간나!》     《안해, 안해,뿅!심술쟁이,》     정녀가 어찌나 얄밉게 입을 쫑긋거리는지 철민이는 손에 쥐고 있던 유리쪼각으로 정녀의 이마를 찔러놓았다. 삽시에 이마에서 빨간 피가 줄줄 흘러내렸다. 그만 겁이 더럭 난 철민이는 우는 정녀의 이마를 부등켜안고 와ㅡ하고 울음보를 터뜨렸다. 그때 그 상처가 지금도 그녀의 반듯한 이마우에 남아있을줄이야!     철민이가 열네살, 정녀가 열한살 때 성분이 나쁜 정녀네는 어느 산골로 쫓겨갔다. 그후 철민이네도 모아산아래 벌마을에 이사 와서 살게 되였다. 그때 그렇게 헤여지고 오늘이 처음이지만 두 동심에 꼭 박혔던 서로의 모습을 용케도 알아본것이다. 그들은 흉허물없이 정녀가 싸온 점심밥을 나누었다.     아쉬운 작별이였다. 집에 돌아온 철민의 마음은 가라앉을줄 몰랐다. 정녀가 시골의 함박꽃으로 피여서일가?아니면 소꿉시절의《각시》여서일가?불행한 그녀, 억눌린 그 넋에서 발산하는 그 빛은 무엇이였던가?아무튼 유혹은 너무도 컸다. 그녀의 몸에서 철민은 사랑의 오아시스를 분명 보았다.     랑만과 환상속에서 자기를 분장하기를 좋아했던 그는 목가적인 시골의 사랑을 그려보며 그 어떤 비장한 희열을 맛보았다. (기사식의 로맨틱한 사랑, 불행에 허덕이는 처녀를 구원해주는 의로운 기사!얼마나 렵기적인가…) 철민은 마음이 내키는 대로 감정의 준마를 타고 그 막연하면서도 신비로운 록지의 세계를 향해 달려보았다. 그러나 그는 결코 향락주의자는 아니였다. 향락주의가 되여질수 있는 그런 기질은 그에게 없었다. 현실과 장래, 관념과 인습 앞에서 그도 사랑의 저울추를 이리저리 옮겨놓지 않을수 없었던것이다. 그것이 또하 불만이였지만,     그러던 어느 날, 철민이한테 정녀와 자기의 운명을 과거와 미래로부터 다시 가늠해 보고 이른바 선량한 사나이의 의로운 책임과 고결한 사랑으로 그녀를 구원해 보려는 용단을 내리게 한 일이 생 겼다. 그때 마을에 하중렬이라는 친구가 반란의 기치를 들고 토황제질을 하고있었는데 못하는짓이 없었다. 어느 하루 마을에 로총각 병구와 지껄이는 소리가 우연히 철민의 귀에 걸렸다.     《야, 로병구, 너 생고기 맛을 볼래?》     《어데 있니?곱니?》     《응, 산골미인이야, 상표 잘 붙지 못해 그렇지 일 잘하구 순박하구…에 또…》     《헌데 성분이 뭐니?괜히…》     《야, 그게 썩어떨어질 주제에…녀잔 고우면 단거야.》     《그렇게 곱니? 어쩐다? 그럼,》     《넌 시키는 서방질이나 하면 돼, 내가 다 방법이 있으니까, 헌데 너 될가? 히히…》     《쳇, 바가지들 맥이면 다된다면서?》     《음, 좋아, 헌데 너 누이동생 우리 처남과 약혼시켜야 해.》     《엉?너네 처남 나그네 아니니?》     《야, 싫으면 그만둬, 리혼자린데 뭘 그래,》     《가만 좀 생각해 보자.》     페병쟁이 색귀라더니 숨쉴 때마다 할딱거리면서도 생각은 굴뚝같은 모양이다. 실로 악착한 하씨의 심보요, 어처구니없는 교역이였다. 그리하여 철민이는 마침내《거룩》한 기사로 등장하기로 맘먹었다. 우선 편지를 썼다.     《…정녀, 이로써 대강 사연을 알렸소. 악덕의 라체가 란무하고 수난의 흉수가 모든것을 삼키려 할 때 정녀는 부디 동류의 처녀들처럼 자기를 학대하지 말고 흥정없는 진실한 감정으로 인생의 상록수를 가꿔가기를 바라오. 중언부언했소. 오해하지 말아주오.》                                 걱정많은 소꿉동무로부터     따찌야나에게 한 오네긴식의 긴 설교를 늘여놓은 편지를 보낸후 며칠은 그 어떤 성스러움과 거룩한 감정을 짜릿하게 맛보았다. 그러나 또 인차 후회하기도 하였다. 결국은 그녀의 불우한 처지에서 자기의 우월감을 가진것 같기도 하고 그녀의 감정세계에 너무 일찍 뛰여든감도 느꼈던것이다. …     철민은 부끄러운 자기 추억에서 간신히 헤여나왔다. 락조속에 마을이 유정하게, 그리고 쓸쓸하게 안겨왔다. 목에서 겨불내가 났다. 두손으로 샘물을 마구 움켜 마셨다. 그러나 어제날의 물맛이 아니였다. 그의 마음은 그녀의 집 문턱을 언녕 넘어섰고 그녀의 찢어진 마음을 어루쓸고있었다. 거의 같은 시각에 강짜많고 성미가 급한 안해의 충충한 얼굴이 차디차게 마주쳐왔다. (아, 아니다. 역시 오늘도 내가 못갈 집이 되였구나…)     집으로 발길을 돌리는 그의 눈앞에 한성이의 모습이 우렷이 안겨왔다. (그 애가…설마…?)악몽같은 상념에 가슴은 납덩이같이 무거워졌다. 3       철민이가 샘물가에 쓰러질 때 한성이네 모자가 집에 들어섰다.     《예, 오셨다는 선생님은 ?》     《글쎄요, 기다리신다구 하셨는데…》     《한성아, 내 얼른 밥할게, 너 밖에 나가 찾아보렴. 오신분이 설마 그렇게 훌쩍 가버렸겠니?》     《엄마, 그럼 닭이랑 잡고 점심 잘해요. 네? 얼마나 좋은 선생님이라구요.》     《오냐, 자식두, 어련히 하지 않을라구,》     가마에 물을 퍼넣던 그녀는 문득 아들을 불러세웠다.     《예, 한성아, 게섰거라. 그 선생 성씨가 뭐라했던가? 알구나 인사해야지…》     《성철민이예요.》     한성이는 이렇게 외마디를 내뱉고 삽짝문밖으로 바람처럼 사라졌다.     《이 얘, 너, 너 뭐라느냐? 성철민?…》     그녀의 손에서 물바가지가 미끌어떨어졌다. 한가득 담겼던 물이 좌르르 소리내며 널장판새로 흘러들었다. 못생긴 과거때문에 슬픔에 절고 전 마음, 악몽같던 전반생을 영영 묻어버리고 살아가려던 그녀의 운명은 또다시 그녀의 여린 가슴을 찢어놓는다. (아이고, 그래 그이란말인가? 어쩌면…) 그녀는 치마폭에 얼굴을 싸안고 흑흑 흐느꼈다. 이윽해서 한성이가 풀이 죽어 들어왔다. 《어머니, 또 우시잖아요? 또 아프세요?》 《응, 오냐, 아무것도 아니다. 그래 선생님은?…》 그녀는 아들의 대답을 바란것이 아니다. 마음은 벌써 흘러간 그 봄날의 샘물가에서 철민이를 부등켜안고 태질하고있었다. 그녀는 자기가 알뜰히도 사랑했던 그 남자가 안겨준 꿈같던 그 행복이 남긴 굴욕과 가지가지 경난을 떠올리기 앞서 자기에게 열어준 첫사랑의 세계ㅡ그 신비롭고 소중하던 아름다운 화폭들을 먼저 새겨보았다. 사랑에 불행했던 녀인들은 자기의 슬픈 사랑을 눈물로 절이는 순간에도 추억의 꽃다발만 애써 엮어보는 약점이 있는것이다. …그날, 그들은 아름다운 동화를 엮듯 동년시절의 꿈을 되살려보았으며 운명에 짓밟힌 처녀의 불행과 현실을 두고 다정한 오누이처럼 속삭였다. 흉허물이 없던 그 시절의 이름을 버릇처럼 부를때마다 정깊은 미소를 짓는 철민이를 몰래 훔쳐보며 (아이, 내게도 저런 힘센 오빠가 있었으면…)하는 절절한 마음이 솟구치기도 했다. 하여 방금 있었던 그 부끄러운 일마저 가뭇없이 잊고 가슴속에서 이름할수 없는 그 무엇이 싹트는 야릇한 움직임에 귀를 기울이며 은실금실을 늘여보았다. 그러나 거의 동시에 자기 인새의 지평선에 놓인 아찔한 낭떠러지와 넘을수 없는 절대경의 험준한 산의 무서운 환영을 확인했다. 동경과 기대, 신뢰에 찾던 얼굴을 머리수건으로 푹 검춰 버렸다… 《정녀, 오늘 정말 기뻤소. 이젠 그만 작별할가? 이제 또 만나게 될거요…》 철민이가 일에 갈라터진 그녀의 손을 꼭 잡아줄 때 정녀는 크고 미더운 그 품에 얼마나 기대고싶었던지 모른다. 정녀는 멀어져가는 철민의 뒤모습을 오래오래 지켜보았다. (미련없이 훌쩍 가버는 사람, 이렇게 헤여지고 다시 아니보면 잊혀질가? 잊으면 내 마음 편할가?) 정녀의 좁은 가슴에서 이름못할 아쉬움이 지꿎게, 얄궂게 수수께끼를 엮고있었다. 이리하여 정녀의 단조롭고 적막하던 마음의 동토대우에서 생의 첫봄이 찾아들었다. 해볕이 마음속에 더 깊기 스며들었고 꽃들이 그녀와 소곤거렸다. 남모를 안타 까움속에 살랑이는 미묘한 정감은 꿈길로 번져갔고 그 꿈이랑은 철민이로부터 펼쳐지고 또 모여왔다. 깨끗하고 말쑥한 얼굴, 정열적이고 선량한 눈길, 날렵해보이는 몸매, 그처럼 특이하게 흡인하던 착한 빛과 그 착함속에서도 은연히 내비치던 일종의 위압감…박우물을 마시고 자란 시골의 처녀에게 있어서는 그야말로 하나의 우상이였다. 바로 그러한 때에 철민에게서 편지가 날아왔다. 가슴이 활랑거렸다. 그녀는 바삐 겉봉을 뜯고 속지를 뽑아들었다. 비록 몇장의 종이이긴 하지만 외롭고 위태로운 자기를 포근히 감싸주는 미더운 품이였고 리해와 지성으로 쌓아올릴 철옹성이기도 한 편지였다. 그녀는 온 마음을 다해 회답을 썼다. 시간과 공간을 날아넘어 길게 뻗어가는 뜨거운 악수와 쩡 메아리치는 심장의 울림을 실은 편지였다. 두번, 세번 날아가는 편지마다 절절한 호소였고 아픈 마음의 속삭임이였으며 눈물에 전 념원이기도 했다. 고난속에서 허덕이며 의욕과 갈망에 타는 이 불쌍한 처녀를 사랑의 신ㅡ아모르는 그렇듯 기이한 힘으로 서서히 철민에게로 떠밀어주었던것이다. 마침내 철민에게서도 뜨거운 마음들이 전해오기 시작하더니 드디여는 열풍으로 정녀를 휩싸버렸다. 어느 날 땅거미질무렵, 정녀가 개울가에서 진빨래를 하다말고 하염없는 우수에 잠겨 속절없는 한숨만 헹구고 앉았는데 소학교에 다니는 동생이 오더니 귀에 대고 소곤거렸다. 정녀의 두눈에 별이 떴다. 《응, 그래, 얘, 집에가 암말두 하지마, 알지 응?》 정녀는 바람처럼 날아갔다. 아무것도 두렵지 않았다. 철민이가 내뚝에서 기다리고있는것이다. 마침내 다시 만난 그들, 두 넋은 굳게굳게 껴안았다. 《오셨군요, 흑ㅡ보고싶었어요, 전…》 《그래 이렇게 오지 않았소? 나도 정녀때문에 걱정이 많았소. 자, 내 눈물을 닦아주지.》 《절 이렇게 영원히 지켜주세요. 네?》 《정녀, 날 믿어도 좋소. 리해와 성실의 기반우에 세워진 우리의 에덴동산은 무너지지 않을거요.》 멀고 먼 신비의 나라에서 온 성자마냥 거룩해보이던 철민이, 따사로운 손길로 눈물을 씻어주며 그렇듯 경건하게 미래를 축복하는 님의 품속에서 정녀는 사랑보다 높고 귀중한 리해를 받아안았다. 고마움에 목이 메였고 감격에 전률했다. 온몸이 후끈 달아오르는 숨막히는 시각, 정녀는 처음으로 달콤하고 진지한 입맞춤을 받았다. (아이, 숨차…)하면서도 참지 못하는 격정에 그녀도 그런 입맞춤을 주었다. 그리고는 부끄러움에 못이겨 철민이의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처녀의 순진한 마음으로 무지개같은 고운 행복을 손짓해보는 애정생활의 첫시작에 흔히 있는 첫키스였지만 정녀에게 있어서는 하나의 성결한 령혼이 입술우에 올리는 혼례였고 사랑의 제단에 바치는 기도였다. 피치못할 그 숙명의 밤이였다. 그렇듯 마음을 감동시키는 흥분의 절정에서 달아오른 두몸은 포개지고 밀착되여버렸다. 영원과 순간, 질풍노도같은 격정을 휘몰아치며 작열하던 철민의 숨결은 신비롭고 몽롱한 애무의 미궁에로 그녀를 실어갔다. 육신에 굽이굽이 감돌아치던 형언할길 없던 감각들… 그 밤을 정녀는 후회하지 않았다. 녀인의 단순한 심리에서 나온 생각이 아니였다. 자기는 이미 철민의 사람, 살아도 죽어도 그 한사람의 안해가 되여진다고 믿어의 심치않았던것이다. 그만큼 정녀는 청춘의 온 생명을 다해 철민이를 사랑했다.  그러나 운명은 늘 하나의 목표를 향해 일심하는 그런 사람을 우롱하기 좋아했다. 무지개 비꼈던 그 사랑의 호수에 폭푸우가 들이닥쳤다. 파도에 실린 사랑의 쪽배가 사공을 잃었다. 잔인한 심리변태에서 장난질삼아 휘두르는 태씨의 보복의 채찍은 그녀의 집을 무덤으로 만들어놓았다. 할아버지, 할머니가 비명횡사했고 그 죄명도 어마어마했다. 그다음 아버지가 강물에 던져진 원혼이 되였다. 원래 빈농의 딸이였던 어머니가 요행 남았다. 그러나 들이닥치는 끔찍한 사변들앞에서 미쳐버렸다. 절망, 비통, 망연자실, 허탈속에서 하나의 믿음은 철민이뿐이였다. 그러나 철민이도 발길을  끊었다. 그런 때 누가 감히 올수 있었으랴, 태씨는 더욱 기승을 부렸고 불난 틈에 도적질하듯 태씨의 누이가 또 페병쟁이와의 혼담을 들이댄다. 그러면서 알아들으라는듯 철민이가 배치를 받고 흑룡강 어데론가 가버렸다고 넌지시 찌른다. 정녀는 앞이 아득했다. 일체가 끝났다. 번개치고 우뢰우는 깊은 밤, 정녀는 샘물가 소나무가지에 환멸의 올가미를 걸었다. (철민씨, 당신도 구원할수 없다면 저는 가렵니다. 나는 당신의 첫안해된 그 마음과 몸을 그대로 안고 갑니다. 부디부디 행복하세요…) 발돋움하며 모지름쓰며 염라국의 문전을 넘으려는 찰나이다. 배속에 뿌리내린 새 생명인 철민의 씨가 별안간 부르르 떨더니 가느다랗게 몸부림을 쳤다. 순간, 옹키고 맺혔던 그 생각, 목숨을 끊어서라도 보복하려던 막생각이 사라지고 강렬한 생의 추구를 주는 신비한 힘이 생겼다. 젊은 녀자의 마음속에 그 무엇보다 강한 모성애가 성큼 올라섰다. 이튿날부터 마을에서 정녀를 볼수 없었다. 마을에서는 의론이 분분했다. 두만강 물에 몸을 던졌다는 설도, 그 건너 제 삼촌을 찾아 도망갔다는 설도…사람을 잡기 일쑤인 패풍이 흙탕물도 오래지 않아 가라앉아버렸다. 해는 여전히 동산에서 솟았고 하늘에서는 비가 내리고 눈이 왔다. 정녀는 죽지 않았다. 갖은 수모와 굴욕을 길량식으로 삼고 철민이를 찾아 북대황에서 헤매이다가 장백현 두메산골 일가집에서 새 생명의 빛을 뿜어올렸다. 달이 가고 해가 지고…묵은 덤불속에 새싹이 움트는 계절, 걸음마타는 아들을 안고 마을에 들어섰다. 시골에 또 한번 풍운이 일었다. 비난의 돌팔매질, 동정의 눈길, 류언비어…그러나 정녀는 끄떡없이 그 모든것을 견디여냈다. 그녀에게 얼룩진 청춘을 보상해주고 미래를 약속해주는 삶의 기둥인 아들이 있었거늘 슬픔도 괴로움도 다 잊을수 있었다. 아들은 무럭무럭 잘도  자랐고 헴도 빨리 들었다. 마침내 이 땅에 추월춘풍이 불어 정녀의 가슴의 고드름도 녹았다. 진리의 해빛은 암흑을 내쫓고 재난의 광대들을 갈곳으로 보냈다. 따사로운 해빛아래서 정녀도 허리를 폈다. 인민의 진정한 봄이 왔건만 정녀의 사랑의 봄은 한번 가더니 올줄 몰랐다.     4   철민은 실면했다. 방황하는 그의 병든 넋은 밤마다 두만강의 탁류와 함께 흐느꼈다. 다른 일이라면 뉘우침의 고배를 마시고 불안의 꿈이라도 꾸는것이 고작이였으련만 정녀와의 해후는 다시금 뼈저린 참회를 낳았고 그 아픈 심회는 그의 온 생명을 단두대우에 내세웠다. 기억의 창고에서 곰팡이 끼였던 정녀의 마지막 편지(어머니앞으로 보냈던것이다.)가 다시금 피를 뚝뚝 돋히며 펼처진다. 《철민씨, 전 당신을 사랑했고 모든것을 바쳤어요. 그러나 믿으라던 그 품은 지금 어데 있나요? 서러워요. 그러나 안심하세요. 당신 한몸에 리롭다면 슬픔도 고통도 이 찢어진 가슴에 조용히 싸안겠어요. 철민씨에게 바쳤던 그 순정을 여기 샘물가에 묻어요. 언젠가 추억의 발길 닿거든 저를 위해 눈물 두방울만 뿌려주세요. 아, 구천에 가면 당신의 품은 변함이 없을가요? 저는 먼저 갑니다. 거기서 기다리겠어요. 부디 행복하기를…빌어요. 안녕히 계세요.》 그 편지를 받은 이튿 날 철민은 마을을 영영 떠나버렸다. 북만의 마을과 마을에서, 도시와 도시에서 전전하며 교편을 잡다가 마침내는 눈물겨운 이 변강도시에 들어와 다시금 사랑의 죄인으로 정녀앞에 나서게 되였던것이다. 철민이가 번민의 나락속에 깊이 빠져 헤매고있을 때 한성이가 학교로 나왔다. 《한성이, 잘 왔소. 정말 반갑소!》 철민은 밤낮으로 돌아치며 한성에게 정성을 쏟았다. 인습과 관념의 위력앞에서 무릎을 꾼 비겁한 사나이, 너무도 리기적이였던 철민이, 그 자신은 까츄샤에게 속죄하기 위해 경건히 기도하던 네흘류도브가 생각되면서 자신이 가증했지만 그렇게라도 마음의 평형을  찾아야만 했다. 한성이가 드디어 지구 중점고중에로 떠나던 날이다, 철민은 한성이에게 돈 백원을 슬며시 넣어주고 역으로 나가지 않았다. 이렇게밖에 할수 없었다. 역에서는 아직도 젊고 아름답고 가슴속에 념원과 격정이 차넘칠 정녀가 한성이를 바래리라는것을 알았던것이다.  붐비는 플래트홈에서 정녀가 한성이를 바래고있었다. 그러나 철민이가 그려보는 그런 모습이 아니였다. 병색이 푹 배인 가냘픈 시골의 녀인, 눈에서는 류다른 광채를 뿜고있었다. 한성이가 눈물이 글썽해서 말했다. 《어머니, 부디 오래 살아야 해요. 전 꼭 성공하겠어요.》 렬차는 떠나갔다. 인생의 플래트홈, 떠나는 아들을 말없이 바래는 정녀의 가슴속엔 가슴을 저미는 긴 고동소리만 남았다. 다 낡아빠진 기관차가 빈 바곤들을 한데 모으고있었다. 정녀는 자신이 빈 바곤같이 생각되였다. 파란많던 인생의 궤도에서 밀리우고 당기우며 오늘에 이르렀어도 역시 텅빈 가슴이 아닌가…역에서 나온 정녀는 우체통에 편지를 넣고는 곧추 집으로 걸어갔다. 10리 산길이건만 뻐스를 타고싶지 않았다. 들꽃이 피여있는 잔디밭도 있었건만 그녀는 그 모든것이 자기에게 속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자신의 불행과 고통과 비애를 묵묵히 짊어지고 내처 걸으며 힘겹게 찍어가는 그 하나하나의 발자국만이 그녀의 세계였다. 그래 정녀에게 또 무엇이 있을수 있단말인가? 그 이튿 날, 철민이는 두툼한 편지를 받았다. 그는 두만강기슭에 앉아 떨리는 손으로 봉투를 뜯었다. 《…철민씨, 원래는 이런 편지를 쓰리라고는 생각못했어요. 인제는 아득히 흘러간 옛이야기, 세월이 흘러가도 더더욱 가슴만 허벼주는 하나의 사연이 있어요. 불행했던 그 사랑의 열매가 오늘 익어서 생명의 찬란한 빛을 뿜어올리게 되였어요. 그가 누구인지 당신은 알겠지요? 애석하게도 그 애에게 축복해주어야 할 유일한 사람, 당신은 그런 용기마저 없었지요? 한성이, 그 애는 나에게 남은 유일한 진실이고 전부입니다. 당신이 찾아오리라는 기대속에 꿈꿀 때 배속에서 꼼질대는 생명, 첫사랑의 선물에 일종의 신비와 감격을 안고 축복했어요. 당신이 저를 버리고 멀리 가신후에도 몸안에서 부드럽게, 때론 급작스레 태동하는 진실한 새 생명은 빼앗긴 그것에 대한 막연한 보상으로, 미래에로 향한 강렬한 힘으로 되여 내 생명의 뿌리를 지켜주었어요. 바로 이것이 그 모진 세월에 죽지 못하고 살아온 원인이랄가요? 세상에서 제일 훌륭하고 착하고 사랑스럽던 당신, 아, 그러나 당신이 그리도 못생긴 아모르일줄을! 그러기에 불행한 녀인의 첫사랑에 대한 애착과 모성애의 성스러움을 영원히 리해할수 없지요? 인류가 생겨서 인간성은 줄곧 피와 눈물속에서 흐느껴왔고 참된 사랑을 위해서 진실로 비장한 대가를 치른 사람도 많지 않다고 당신은 말했지요. 그것이 당신의 말이였던지 어느 책에서 외운 말인지를 전 몰라요. 다만 당신이 아무말없이 떠날 때 눈물을 흘려보았던가 묻고싶어요. 나는 당신을 미워하지도 추억하지도 않겠어요. 다만 당신이 늘 말하던 그런 사랑과 인간성, 박애를 당신의 아들, 아니 나의 아들에게 베풀어주실것을 바래요. 내 생명의 나무는 너무도 빨리 말라들어서 그 불쌍한 애에게 그늘을 지어줄수 없군요. 별수 있나요? 폭풍속에 떠돌던 일엽편주, 운명의 작간으로 배주인이 그냥 소용돌이속에 처박아두면 그 배는 갈앉기마련이지요. 너무 긴 말씀을 드렸어요. 그럼 부탁합시다. 정녀》     눈물에 얼룩진 편지지들이 락엽처럼 날려 두만강 물결우에 떠내려갔다.     《아아, 못생긴 아모르! 그래 내가 아모르였던가?!…》     산너머 먼 저쪽 고개에 비를 머금은 구름덩이들이 엉켜돌고있었다. 철민은 자기 가슴을 쾅쾅 짓찧었다. 그것은 이른바 눈물의 참회, 통탄으로 이루어진, 홍소를 터뜨리지 못하는 몸부림이였으리라…  
3    시조묶음 (2) 댓글:  조회:7582  추천:39  2007-10-08
시조묶음                최 균 선   ※       일월이 밝다한들 음달이야 어이릿고   명암이 이같으매 대명천지 어디런고     조화론 대동세계는 우리가 이뤄보세   ※       해와 달 명랑한데 구름끼여 훼방하고   청풍이 불자는데 흙먼지가 원쑤로다     인간의 심령심처에 좀이낀건 뉘탓인고   ※       달걀이 생생한데 쉬파리가 알을 쓸며   맑은 샘에 미꾸리 솟을줄이 있으랴     기강이 해이해지니 큰쥐들이 난당일세   ※       정의가 좌천하니 사악이 신관사또요   공방형이 득세하니 진리가 퇴직하네     량지는 죽어가는데 리욕만 좋아라꿍   ※       다욕을 버리니 마음이 편해좋고   명리에 어두우니 갈길이 한곬이라     아희야 사무한신이 좋은줄을 네아느냐   ※       늙도록 살고지면 교훈인들 없으랴만   경험선생 명지함도 장파한뒤 갓쓰기라     백발이 지낭이라고 고집쓰지 마옵소서   ※       정이란 향화여서 그를 좋아 껴안노라   정에 약해 정없이 못산다는 백의족속     보시소 약육강식에 인정사정 네뚜리지   ※       욕망의 바다에 익사한이 얼마련고   탐욕이 인간의 대명사로 남는다면     가석타 즘생무리와 다를것이 무에랴,   ※       낮음을 꺼리여 높은 곳에 깃든새도   먹이는 내려와 찾으니 우습거다     사람도 이와 같도다, 명리에 웃고 돈에 죽고   ※       시비를 캐지 마라. 리욕이 기준이라   조고의 위록지마 옛말뿐 아니여라     지성아 시시비비가 누워서 침뱉기지                     2007 년 4 월 8 일              
2    시조묶음(1) 댓글:  조회:5847  추천:40  2007-10-08
시조묶음   최 균 선   ※       고우면 고운대로 미우면 미운대로   골고루 비춰주는 거울이 무슨 죄랴,     제한몸 올곧은데야 그림자가 삐뚤소냐   ※        녹이 쓴 동경은 닦으면 명경인데    량심의 거울이 흐리면 어이할고      적덕이 돈독해지면 행여나 맑아질가   ※       태종이 가로사대 거울이 세가진데   동경과 옛것과 사람이라 하더라만     아니지, 제왕의 명경 민심인줄 아느니   ※       잠그면 자물쇠요 열자면 열쇠인데   열쇠를 잃고보면 무용지물 자물쇠라     사랑의 꽃대문에는 성실이 금열쇠   ※  아무리 크다한들 제일로 뜬뜬한들   도둑놈 말려내는 자물쇠 있을거냐     량심의 만능열쇠가 으뜸인가 하노라   ※       지기가 하나이면 일생에 족하련만   지금은 네친구 내친구 많기도하이     그 많은 벗들중에서 어느 벗이 참벗인고?   ※       물이 너무 맑으면 고기가 없다는데   혼탁한 정계천엔 웬 잡고기 득시글?     두어라, 렴결봉공이 공담인줄 모르는가   ※       탐욕의 바다가 신주를 잠궜는데   이 땅에 정토가 어디 바로 있으련고?     아마도 안빈락도는 꿈에서나 지켜질듯   ※       세상이 혼탁하매 석수들이 난당이다   모조리 잡아들여 엄벌에 처하고픈데     뒤심이 저몬져알고 앞문으로 들어오더라   ※  한손에 법치들고 또 한손에 정의쥐고   부정부패 탐관오리 정의로 치려는데        법정에 어루신님은 호로묘에 옛중같네      ※       신선을 좋아하매 사신이 득달일세   부정축재 갑부들이 비린웃음 요란타만     재물신 무서운줄을 언제알려 하느니   ※       만사통 공방형을 어느 뉜들 홀대하랴   내것도 내것이요 네것도 내것될제     아뿔싸, 다다익선이 무덤인줄 모르난듸.   ※  닫자고 문이던가 열자고 문이던가    세상에 크고 작은 문들이 많더라만      무상한 마음의 문은 대대소소 예측불가.   ※       닫으면 홀로 코스 열고보면 조화세계   갈수록 꽁꽁 잠근 마음의 문 좀 여이소     세상과 담쌓고 사는 달팽이네 족속님들      ※  우리란 무엇이고 나라는게 누구더냐   뭉치면 철옹성이 물먹으면 모래성이     흰옷의 단군자손들 백년가지 하여이다        2007 년 3 월 25 일  
1    문학리론 (출판본) 댓글:  조회:8379  추천:22  2007-09-19
                      문학리론 (출판본)                                                     차 례 머리글을 대신하여1 제1편 문학일반론 제1장 문학의 내함2 제1절 문학의 본질2 제2절 문학의 제 특성8 제3절 문학의 속성24 제2장 문학과 제령역의 관계35 제1절 문학과 제 사회관계35 제2절 문학의 지향성41 제3절 문학의 기능45 제3장 문학의 내용과 형식52 제1절 문학의 내용52 제2절 문학의 형식57 제3절 문학언어 63 제2편 문학의 분류 제1장 독립형태의 문학양식76 제1절 형태로서의 분류76 제2절 시문학80 제3절 소설문학123 제2장 소설창작의 원리153 제1절 소설창작의 기법153 제2절 단편소설창작기법177 제3절 중, 장편소설 창작기법199 제3장 산문류형태215 제1절 산문론215 제2절 수필문학222 제3절 잡문론252 제4장 의뢰형문체263 제1절 희곡론263 제2절 씨나리오273 제3절 텔레비죤드라마283 제3편 창작방법론 제1장 문학창작실제296 제1절 전형화리론296 제2절 문예사조와 창작방법313 제3절 문학의 스찔332 제2장 현대주의문학344 제1절 현대주의문학의 개황344 제2절 현대주의문학의 류파349 제3절 현대주의문학에 대한 종합적고찰365 제3장 현대주의문학의 실제369 제1절 현대시론369 제2절 현대주의소설론386 제3절 현대주의서사극400 제4편 흔상, 평론, 발전론 제1장 문학예술흔상미학408 제1절 문학예술흔상의 특성408 제2절 문학예술흔상심리412 제3절 문학예술의 몽롱미415 제2장 문학의 삼각지대422 제1절 작가와 문학422 제2절 작가의 자아실현431 제3절 독자와 문학437 제3장 문학평론444 제1절 문학평론의 본질444 제2절 문학평론의 양식과 방법 453 제3절 현대주의평론462 제 4장 발전론472 제1절 문학의 기원472 제2절 비교문학리론475 제3절 문학의 계승과 혁신479 집필을 마무리하면서486 주요참고서적4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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