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균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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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52    (칼럼) 정유년 묵시록 댓글:  조회:2400  추천:0  2018-01-01
                                                                   정유년 묵시록                                                                              진 언     예나 다름없이 덧없이 흘러간 이 한해, 나로서는 물질생활에 별로 달라진것이 없는 대신 심심찮게 사고나는 몸도 그렇고, 리해득실로 따져보아도 무의미한 중복의 하루하루가 점철된 한해이다. 딴에는 뭔가 도모하려던 일도 있었던지…결과는 미담보임, 하지만 생에 대한 욕망만은 왕성해서 희망이라는 사치스러운 기대를 잉태해 주는 마력에 턱걸이하고 가끔 웃기도 했던 한해였는데…     누군가 정유년을 두고 가라사대 정(丁)은 십간 가운데서도 불의 기운을 상징하는 붉은색을, 유(酉)는 닭을 뜻한다고, 닭울음소리와 함께 어둠이 걷히고 새아침이 밝나니 그래서 닭은 어둠속에서 빛의 출연! 만물과 령혼을 깨우는 개벽의 해! 새 시대의 시작을 알리는 서곡! 귀신과 마귀를 물리치는 힘도 있단다. 그래서 혹했던가! 나로서는 별로 바라는것이 없으면서도 공연히 기대되였던 정유년!     일년 열두달 365일을 찍어넣어 두툼했던 달력이 이젠 달랑 한장만 남아서  2017년, "붉은닭의 해"를 마감하고있다. 세월의 류수는 저만치 흘러가고 또 새해라는 년륜이 곧바로 시공의 문턱에 새겨지는도다. 신년차에 구곡간장에 서리고 얽히는 감구지회야 어찌 없으랴만 말해보아야 시시콜콜할것이니 이만 접어두고, 오지랖넓게 눈을 들어 멀리 풍물을 내다보나니…     붉은수탉이 잘못 울어쌌는지 아이러니하게도 전 세계적으로 크고 작은 피빛 사건들로 소름돋던 지극히 지독한 정유년이였다. 물론 올해에만 지독함이 새겨진게 아니지만 가도록 황산이라고 지난날보다 더 볼썽사나워진 지구촌이 된 한해, 다재다난했던 이 해가 어렵사리 지나갔다. 비록 미미한 민초라도 아슬아슬한 살얼음 판같던 국제정세, 자칫 일어날번했던 불구름속에 민족공멸을 피해간것이 천만다행 이라 놀랐던 가슴을 어르쓸며 갖잖게 묵시록을 엮어본다.     백성은 국사를 론하지 말아야 한다고 했지만 정치가 개개인의 인간생활에 끼치 영향은 절대적이여서 아무도 초연하게 살아갈수 없다. 정치가 마치 다른 령역의 일이 기에 왈가왈부해야 아무 소용이 없다고 하지만 인류가 사회집단을 이루고  강력한 약속력에 얽매이지 않을수 없는게 정치이니 누군들 진공상태에서 살것인가?     시공의 장벽이 사라진 오늘 날, 세계의 질서를 누가 쥐락펴락 하는가? 물으나 마나한 우문이다. 국가지간, 민족지간에 대립,격화가 심각해지고있다. 과거처럼 직접 적이 아닌 교묘한 술책을 쓰지만 무자비하기는 이짝저짝이다. 피상적으로 중동지구의 아수라장이나 이판사판 조미대결의 아슬함은 미국이 제국주의적 독식야욕을 앞세우고 있기에 국제정치는 이상할것이 전혀없는 소용돌이였다.     강대하면 욕심껏 먹어치우고 약하면 막무가내로 먹히우는 력학구도는 지구촌 에서의 생존의 고리!! 그래서 약소국, 약소민족은 항상 초조해지고 불안해지는것이니, 그리하여 생존권 침해에서 벗어나려는 생사결판의 발버둥이질! 미제를 우두머리로 한 렬강들은 바로 이런 틈서리속에서 강성해졌고 지금도 그렇게 작동되고있다. 정글의 법칙에서 벗어난, 나만의 보호와 축복은 그 어디에도 없고 약자의 부질없고 허무맹랑 한 안깐힘을 강자들은 비웃으며 제멋대로 놀아댄다.     처칠이 영원한 친구가 없고 영원한 적이 없다고 했듯이 미국을 괴수로 한 서구 렬국들이 내키는대로 주무르며 리해득실에 따라 친구와 적이 번복되는 요상한 국제관계, 지구상에서 오로지 양키의 리익이 보장되여야 한다는 억지국(国), 생떼질 국(国) 에 무조건 순종하라는 횡포무도한 강도론리가 판을 치니 요상스럽다는것이다.    서구제국주의자들이 식민통치를 위해 내흔드는 위선적인 평화질서,인권타령은 철두철미 기편수단인데 그것에 취해버려 멸종된 인디안인들처럼 수많은 약소국들이 그것에 올인되여 자기도 모르게 어리광대질하고있다. 평화와 인권을 빙자한 극악무 도한 제국주의자들은 굴종을 강요하며 평화를 팔면서 최첨단무기의 세례를 안긴다.     양키는 욕심같아선 불복하는 적국들을 마구 두들겨패고 침탈하고 싶겠지만 평화 니 인권이니 세계질서니 하는 그럴듯한 미명하에 옴니암니 제리속만 챙기려들면서 우 선은 손쉽게 먹어치울수 있는 밥그릇 챙기기에 혈안이 되여 날치고있다. 말하자면 미국의 세계경찰행세는 어제나 오늘이나 그냥 그 꼴이라는것이다.     힘의 원리에 의해 주권이니 민족독립성이니 하는 념원은 갸륵해도 자강, 자립의 의지나 실력이 없으면 속고이마저 벗기우고 거세당하는 세상이다. 교활하고 음흉 한  양키들이 손을 대지 않고 코를 풀듯이 곰팡이낀 “이이제이(以夷制夷)”계략을 쓰 려고 하는판에 그런 얄팍한 수단을 간파하지 못하고 추종하는 세력들이 지구촌에 많으니 양키가 오만방자한것이다. 양키네들의 세계제패의 탐욕이 끝없는 한 최강의 군사력에 맞서는것은 절대 용허되지 않는데 누가 감히 맞선다면 대역부도한 일처럼 공인된다.     그리하여 날이 갈수록 국제사회는 편짜기에 올인하고있다. 서로 제편을 확충하 려고 리간계, 얼리고 닥치기 수법 등이 갈수록 간교해지고 치밀해지고있다. 동남 아시아 상당수 나라가 양키들의 제스츄어에 홀라당 넘어가고 있는 상황에서 민족자주, 자강을 지향하는 동방소국의 핵무장이 가지는 의미는 역시 리해득실로부터 합법여 하가 풀이된다. 본질은 핵보유 그 자체가 아닌, 그것으로써 무엇을 이루고자 하는 지 향성을 객관적으로 투시해야 사리에 맞다. 왜냐?     지금까지 "핵균형=패권주의=적대적 공생"이였다. 그러나 이것을 작금의 조미대결 의 방정식에 그대로 대입하려 든다면 틀린 답이 나올수밖에 없다. 동방소국의 핵무 장이 미국을 괴수로 한 해양세력의 침탈에 맞서는것이기에 무작정 타매할 일이 아니 라고 본다. 강도가 문앞까지 쳐들어와 칼춤을 추는데 집안에서 식칼이라도 가는것은 인지상정이 아니겠는가? 몽둥이를 들고 서있는 사람은 개에게 물리지 않는다"는 속담은 경세지언이기도 하지 않는가?     내가 하면 로맨스요 남이 하면 불륜이라는 말로 작금의 국제시비를 비유하기에는 창백무력하다. 독립자주라는 슬로건이 탈선하지 않는 한 그것은 어디까지나 정당할수 밖에 없다. 누구처럼 편들어주는 큰형니미 없다면 곤두박질 하면서라도 내가 나를 지킬수밖에 없기때문이다. 단군족의 생존권과 번영창성의 권리를 누가 곱지 않게 보는가? 전 인류의 공생공존과 충돌되지 않는데 왜 동네방네 콩팔칠팔인가?     속담에 매를 이기는 장수가 없다했거니와 그게 “모든개매”일 경우 아무리 깡다 구(악착같은 기질이나 힘)가 있다해도 난당이다. 그렇다고 자진하여 바지를 벗고 볼기짝을 들이댄다는것도 말이 아니되고…이래저래 설음과 속으로 삼키는 분노는 약자의 숙명인가? 그러나 시시비비가 생뚱같이 뒤탈리는 현시대에도 영구불변, 정해 진 틀이 따로 없다고 생각하면 문제는 달리 해석되고 달리 체현될수도 있다.     개체는 물론, 한 국가의 생존권의 주인은 바로 “나”이다. 역경도 타격도 나의 판단과 내가 맞서는 태도에 따라 타개될수도 있다. 강자에 굴종할것인가 항거할것 인가가 아니라 자강할것인가에 달린 일이다. 이 대천세계에는 다양한 동물들이 살아 가고있다. 존재리유도, 살아가는 방식도 제가끔이다.     인간은 자기중심적 사고를 한다. 결코 강자의 특허가 아니다. 내 리익이 있으면 타자에게도 나름의 리익이 있을법한데 제리익을 잣대로 가로긋고 세로 그으며 매사에 왈가왈부한다는것은 강도론리이다. 그러나 모든 약자에게 통한다고 생각한다면 유치 하다고 해야 하리라. 모든것이 변화한다. 이것만이 절대진리이다. 흥망성쇠의 섭리 에서 미제인들 자유로울고?     유엔제재를 빈대떡 빚듯 내키는대로 주물럭거리는 미국을 따라 웨치려 할진대 미국의 피비린 침략사를 한번 돌이켜보라. 미국은 적국이 없으면, 제1산업, 군수산 업이 돌아가지 못하는, 피를 먹고 사는 흡혈국이다. 미국의 태생지가 어디냐? 인종청 소를 당한 인디안인들의 피바다속에 시체산이다. 조선침략, 베트남침략, 리비아침략, 아프카니스탄침략, 이라크침략, 이란의 소요…끝없이 적을 만들고 침탈하여 비대해 졌다.          강도론리앞에서는 시비가 네미덜머리다. 이스라엘은 핵탄이 200여기인데 눈감아 주고 있는 미국이다. 리비아, 우크라이나가 미국에 속아서 당한 참화를 똑똑히 못보 았나? 침략자 양키가 평화가 보장해 준다는 환상은 유치하다. 승냥이는 결코 양으로 진화하지 못한다. 불문곡직 힘으로 대방의 항거능력 자체를 말살시키는게 양키네 목 적인데 구세주인듯 이 목을 매고 끌려다닌다면 그 모습이 아니 처연할가!     우리 민족의 얼속에서 번뜩이는 슬기와 지혜를 보라! 돈은 없어도 자존만은 지키 려는 지조! 그게 인간의 참된 가치를 지키려는 배달민족의 본성이고 그게 민족다운 자세이고 천세만세 물려줄 참모습이다. 빌어온 고양이는 사흘을 못넘긴다. 호가호위 도 일종 방편일뿐이다. 지정학적으로 복받은 땅이건만 루루천년을 내리내리 잡다 한 외세에 침탈당하였던 배달민족, 자고로 정글법칙이 운행된 민족지림에서 꿀리는데 한점없이 공생공존을 웨치려면 자강하는 길외에 다른 길이 없다. 정의에 나서란 약자도 용감해지나니!!!                                                             2017년 12월 31일   
851    진언수상록 (75) 천당이 어드메냐? 댓글:  조회:2462  추천:0  2017-12-23
                                                 천당이 어드메냐?                                                             진 언         오늘 또 이웃의 장례식에 참녜하였다. 낯익은 얼굴들이 하나둘 세월의 비바람에 지는 인생이 슬펐던가, 못하는 술몇잔을 걸치고 알딸딸한 걸음으로 강둑길을 굼닐다 가 혼탁해진 개천이라도 바다로 간다고 류수의 원리를 체현하는 연집강을 굽어보니 상념이 뚱딴지같이 흐른다. 미친놈 미치지 않았다고 가슴을 탕탕 치듯이, 억수로 취하고도 멀쩡하다고 하듯이 생각은 맑지만 비애는 비틀거린다.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떠나간 이들을 생각하면 자연좇아 사후세계에 엉뚱함을 달려보게 되는것은 이맘 때 로옹들의 공통한 심성이라 할것이로되 저저 죽음을 맞는 자세는 다를것이다. 공자의 제자가 사후세계에 대해 묻자 공자가 가라사대“현세도 잘 모르겠는데 사후세계는 개나 줘버려라.”라고 했다던가? (고증할길은 없음).     무슨 일이나 겪어보아야 실상을 알수 있다는 뜻으로 쓰이는 “죽어봐야 저승 알지”라는 말과는 별개로 정말 사후세계는 죽어봐야 알수 있는 일이다. 그런데 죽어봐서 알게 된것을 살아있는 사람들에게 전달한 사람은 인류사에 한번도 기록된적이 없다. 그런데 종교인들은 곧잘 사후세계를 론하고있다. 어째서 이 세상에 태여나게 되였는지도 모르는데, 어떻게 살아야 제대로 살지도 모르는데 허구헌날 사후세계를 설교하는것은 눈감고 “야옹ㅡ”하는식의 자기기만이 아닌가?     천당이요 지옥이요 하는 사후세계는 영원히 살고자하는 자아의 환상이다. 자아가 가장 좋아하는것이고 또 누구나 좋아하는것으로 인간이 가질수 있는 욕심중에 가장 큰 욕망이다. 그래서 이것을 종교에서 실현시켜준다고 유혹한다. 기독교의 천국은 말 할 필요도 없고 불교도 환생으로 영원한 삶을 설교하고있다.     하지만 자아는 환생하는 주체가 아니라 이 세상에 이 몸이 장기적인 기억이 가능해지면서부터 기억의 덩어리로부터 나타난“나”라는 일종의 기억의 집합체일뿐이다. 이것이 우리가“나”라고 느끼는것이지만 몸이 죽고나면 동시에 사라진다. 이것을 불가에서는 “무아”라고 한다. 자아가 나타날수 있는 근원이 되게 하는 의식, 그것은 순수한 자각을 느끼는 의식이다. 우리가 감각하며 사는 지금 이 순간에 존재하게 하는 그 의식은 죽음을 맞이한 최후시각에도 단말마적으로 반짝일것이다.     불가에서는“아뢰야식(阿賴耶識)” ,“제8아뢰야식(第八阿賴耶識)”이라는 현묘한 말로 설교하는데 모든 법의 종자를 갈무리하고 지각작용을 가능하게 하는 가장 근원적인 심층의식이라고 해석하고있다. 그리고 불가에서 일컬어 심의식(心意識)에는 안식(眼識) ? 이식(耳識) ? 비식(鼻識) ? 설식(舌識) ? 신식(身識) ? 의식(意識)이라는 6식설법도 있다. 하지만 그 의식이 곧 “나”일가?     그 의식은 “나”가 전혀 아니다. 자연계에서 죽음이 끝없어도 새로운 생명이 태여나는것을 환생이라 하는것은 들리지 않는, 상상속 천국의 소리로서 본래 불가에는 없던 (그리고 엄밀히 따지면 지금도 없는) “교리”로 사람들을 매료시키고있다. 우리는 자아를 너무 사랑하기때문에 그것을 놓치고 싶어하지 않는다. 죽어도 다시 새로 환생하고 싶어한다. 하지만 우주에 존재하는 모든 생명은 죽음을 피할수 없다. 하지만 새로운 생명이 부단히 태여난다. 그것이 생명의 대순환으로서 이 욕심을 버릴 때 각 종교에서 열심히 설교하는 영생설에 혹하지 않을것이다.     천국과 지옥은 과연 존재하는가, 있다면 류류상종이라 악한놈들은 악한 놈들이 있는데로 (지옥)로, 선한사람은 선한사람들만 모인 천국으로 간다는데“이승”에서 “저승”을 론한다는 자체가 그럴듯한 속임수라고, 현실세계의 악인들은 업보때문에 지옥에 떨어진다는것이 악에 대한 유일한 대책이라는 식으로 말하는 "설교"는 순전히 얄팍한 기만술이다. 내가 유물론자로 자처하는것은 아니지만,     몸은 생명을 다해도 의식은 남을가? 늙은 생명은 련속부절 사라지고 새 생명은 계속 태여나고 그 생명에 생겨나는 수많은 의식들이 끊임없이 생성되기때문에 가치가 없는 의식은 필요없다고 누가 선언할수 있는가? 그것을 무엇으로 판단하느냐? 누구도 정답을 못할것이 뻔하다. 그래서 종교야말로 정신을 마비시키는 독약이라 하는게 아 닌가? 자가당착이지만 사후에 무엇이 있다면 “무”자체밖에 더 있겠는가?     아직도 천당,지옥이 어디 있는지 몰라 궁금증을 달리는가? “천당지옥은 한생각, 마음의 일로서 제 한마음 바로 다스리며 살면 천당이요 제 한마음 그릇되게 가지면 그 자리가 곧 지옥이라 마음밖에서 천당지옥을 구하면 미신, 맹신, 광신의 첩경이라 마음은 모든 법의 근본이요(心爲法本), 마음은 모든 법의 가장 으뜸되는것이며 (心尊 心使 ), 그리고 마음에 의해서 모든것은 이루어지나니(中心念善) 만일 깨끗한 마음 으로 말하고 행동하면(卽言卽行) 그 사람에게는 반드시 행복과 즐거움이 뒤따른다 (福樂自追) 마치 그림자가 물체를 따르듯이(如影隨形)”라고 하니 순리로 살다 갈 일이 아니랴,        불법은 마음법이라 한다. 그래서 다른 종교보다 실제적이라 볼수도 있다. 불교는 제 한마음 바로 다스려 바로 쓰는 법을 가르치되 마음밖에서 구하지 말라 이른다. 한국의 법정스님의 시가 의미롭게 새겨진다.     “여보게 부처를 찾는가?…여보게 친구/산에 오르면 절이 있고/절에 가면 부처가 있다고 생각하는가/절에 가면 인간이 만든 불상만/자네를 내려다보고 있지 않던가 //부처는 절에 없다네…부처는 세상에 내려가야만 천지에 널려있다네/내 주위 가난한 이웃이 부처고/ 병들어 누워있는 자가 부처라네//그많은 부처를 보지도 못하고 어찌 사람이 만든 불상에만 허리 가 아프도록 절만하는가//     천당과 지옥은 죽어서 가는 곳이라고 생각하는가/ 천당은 살아있는 지금이/천당이고 지옥이라네/내 마음이 천당이고 지옥이라네/내가 살면서 즐겁고 행복하면/ 여기가 천당이고/살면서 힘들고 고통스럽다고 하면/ 거기가 지옥이라네//자네 마음이 부처고/자네가 관세음보살이라네// 여보시게 친구/ 죽어서 천당가려 하지말고/ 사는동안 천당에서 같이 살지 않으려나// 자네가 부처라는걸 잊지마시게/ 그리고 부처답게 살길 바라네/ 부처답게……”     각설하고, 사람은 살면서 누구나 죽는다고 생각하면서도 아등바등 살아간다. 누군가는 죽기 위해 살고있다고 말하기도 한다. 은근히 장생불로를 바라면서 말이다. 그러나 인명재천인것을 어찌하랴, 석가모니도 생로병사에 고뇌하다 결국은 사신을 물리치지 못하였다. 그런데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자는 죽어도 살겠고 살아서 나를 믿는자는 영원히 죽지 않는다.”하고 예수님은 교시하고있다. 아멘!     세상에 변하지 않는것은 아무것도 없다. 우주만물의 흥망성쇠, 인간의 생로병사를 현실로 받아들이고 마음 편하게 마지막 잔광을 한껏 선물하는 석양을 바라보아야 하련만 그게 안되기에 인생은 죽음을 향해 가면서 남는것은 오직 영원한 삶이이라는 밀주같이 달착지근한 소리를 듣고 그것을 믿으며 시려오는 가슴을 어루만진다.     우리가 오래동안 살기를 바라는것은 미쁜 욕망이라 할세 당면의 문제는 오늘을 어떻게 사느냐이다. 죽음은 가장 두렵지만 전전긍긍 하며 산다는것은 자학(自虐)이다. 설사 환생한들 뭣하리오. 귀공자로 태여난들 뭣하리오. 천사로 환생해서 악마와 싸우던들 뭣하리오. 보고싶지 않으나 자꾸 보이는것을 안볼수도 없듯이 궁극을 알면서도 가는데까지 가보쟈!                                                                     2015년 4월 1일
850    (진언수상록 73) 비극영웅을 기리다 댓글:  조회:2374  추천:0  2017-12-23
                                                            비극영웅을 기리다                                                                            진 언       사마천의《홍문연》을 읽으면 감수가 각이할것이다. 관념상 항우는 폄훼하고 류방을 치켜세웠다. 항우는 용맹하나 무모하여 아낙네들같은 인정을 가지고 있어 류방을 놓아주었기에 종당에 사면초가에 빠지여 패주하다가 오강에서 자결하는 비극을 빚었다는것이 정설로 되여졌다. 승자가 력사를 쓰니까 그렇게 돌아가는가?     패왕답지 않게 황제보좌에 오르지 못했거니와 목숨마저 잃었으니 대업을 이루지 못한건 둘째치고라도 천추의 비웃음거리로 된 “대머저리”라는것이다. 반면에 류방은 머리가 잘돌고 계략이 뛰여나며 인심을 얻었기에 시운이 틀어져도 동산재기할 웅심이 있고 기회를 잘 틀어쥐였기에 황제위에 오를수밖에 없었다는것이다.     시비는 하기 나름인가? 력발산 영웅이 머저리로 락인찍히고 항간에 류망소인배가 영웅으로 추대되였다. 사실이 과연 그러한가?《홍문연》을 다시 읽노라면 생각도 다르게 된다. 아름다운것과 추악한것이 뒤바뀌고 선악이 전도되고 진짜와 가짜를 가려내지 못했으니 력사의 아이러니라고 해야 하리랴,    진실된 력사는 아무나 치장해 내놓을수 있는 소녀가 아니다. 력사를 참고하면 현실을 인식하고 미래를 열어가는데 유조하다. “홍문연”을 수업각도에서 개괄한다면 학생들로 하여금 진,선, 미를 흔상하게 할수 있다. 환언하면 문장의 사상예술성을 음 미하고 인격의 진,선,미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게 하고 인성의 진,선,미도 새겨보게 하면서 비극의 진,선,미도 반추해보고 력사의 진,선,미도 터득하게 할수 있다.     1. 인격의 진, 선, 미     “인격은 금이요 인격의 광휘는 어떠한 사악, 어떠한 세력도 마멸할수 없다.”는 말이 있다. 항우가 비록 실패했지만 인격매력은 천추에 빛나고 있는바 과시 “살아서 는 영웅이요 죽어서도 영웅귀신”이 아니런가? 항우가 영웅이란것은 옛날부터 정평이 나있었다. 항우는 뭇영웅만이 아니라 영웅중에 호걸이다. 유명한 거록대전 (巨鹿 之战)에서도 그렇고 해하에서의 일당백의 싸움도 그렇고 오강가에서 웃으며 사신을 맞으며 자결한 장렬한 거동도 그렇고 홍문연에서 항우의 영웅다운 아량도 그렇고…     용맹무쌍하고 호방하고 종용하며 진솔하고 광명정대하며 도량이 넓고 인의가 있는 사나이, 이것이 바로 력사상의 항우의 본연이다. 항우야말로 위대한 인격을 한몸에 집대성한 인걸이라해도 손색이 없다. 위대한 인격은 일월과 같아 하늘을 가르 며 빛발 눈부시여 후세사람들이 기리게 한다. 간능한 류방에게 패하여 비극의 주인공 으로 남았지만 실은 영웅호걸의 인격을 갖추었을 뿐만아니라 제왕의 기질도 갖춘 영웅이다. 사마천이 제왕도 아닌 항우를 “본기(本纪)”에 써넣었을뿐만아니라《사기》 에서 가장 돌출한 인물로 부각시킨데는 다 생각이 있었기때문이 아닐가?     류방은 어떠한가? 한마디로 속다르고 겉다른 소인배이다. 범증의 예견처럼 그는 관중에 왕이 될 욕심은 굴뚝같았지만 입관후 재물을 취하지 않고 미색에 탐하지 않는 자태로 분장하였는데 군사력량이 잠시 항우의 상대가 아님을 알았기때문이다. 이역시 지모라하면 지모이겠지만 항우와는 인격차원에서 뒤틀린다. 하긴 꿩잡는게 매라고 승자는 왕이요 패자는 역적이라 실패한 영웅 항우를 위해서는 변명거리도 없으리라. 그 러나 제왕이 된 류방의 “교토사량구팽(狡兎死良狗烹)”과 얼마나 대조적인가?     2. 인성의 진,선,미      지난세기 한때 소위 자산계급인성론은 대역부도한것이였지만 인성의 존재는 부정 하지 못했는바 “다만 구체적인 인성은 있지만 추상적인성이 없다”고 했을뿐이다. 그런 구체적인성을 항우의 몸에서 읽을수 있다. 항우의 인성미는 인성의 본질 질박함이 다. 항우는 대인격자이면서도 의연히 범부속자로서 다른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인지 상정이 없을수 없다. 해하가에서 패하고 오강까지 밀리였을 때 사면초가로 갈길이 더 없었지만 “강동의 부로들을 볼 면목이 없다.”고 말하며 강을 건너 도피하기를 거절한것은 항우의 진정한 마음의 메아리였던것이 아니랴!     그의 말 한마디에서 우리는 그의 심리바탕에서 가장 진실한 일면을 엿볼수 있으 며 종리매를 배를 타게 한 환난지우지정에서 그의 남아의 풍모가 여실히 드러난다. 한목숨 건지여 강동으로 돌아가기를 거절한것은 기실 그의 지엄한 자존에서 나온것으 로서 그의 마음바탕이 선량하다는 반증이다. 사면초가에서 “패왕별희(霸王别姬)”의 장면은 얼마나 비장한가!그는 감히 사랑하고 감히 미워할줄 아는 심지가 명랑한 사 내대장부였다. 물론 여기서 그의 소인격의 치명적약점도 드러난다고 왈가왈부하지만 역시 인성미를 갖춘 영웅임에는 틀림없다.     반대로 사마천이 류방의 인성의 허위와 추악한 일면을 림리하게 기술하고있다.  그처럼 무뢰한의 무치함은 류방의 간판이요 잔인성과 추악성은 그의 본성이였다. 딸 의 혼인을 교역으로 삼거나 항백의 감정을 롱락한것 등 사실과 혈전만리를 헤쳐온 건국 영웅 한신을 의심하여 잡아죽인것이나 제애비마저 모른체 한 사실에서 그의 추악한 인성이 여실히 드러나지 않는가? 선량함도 정치투쟁의 도구로 될 때 인성중에 진,선, 미로 이화될수 있다는 사실은 인간의 원초적인 비애인지 모르겠다.      3. 비극속에 진,선,미      “비극은 인생에서 가치있는것의 훼멸을 사람들에게 보여준다. ” 인생에서 가치있는것이란 바로 인격의 진,선,미이며 인성의 진,선,미는 인간의 생명력이며 사회학각도에 말한다면 생산력이 되기도 한다. 항우로 말하면 원래 천지를 진감할 위업을 이룰 영웅으로서 력사의 한페지를 빛나게 장식할 인물이다. 그의 최후의 개탄처럼 하늘이 알아봐주지 못한 탓인가? 그의 우수한 품질은 그의 대업에 도움이 되지 못했다. 그래서 “당신은 용속한자가 왕이 된다는것을 믿지 않는가?”라고 한 서양격언을 떠올리면 항우의 실패가 더 애석해지는것이다.     원래 고상한자가 비루하고 간능한 소인배에게 당하지 말아야 하지만 운명의 신은 못된 장난질을 잘한다. 시인 북도의 말처럼 고상함은 고상한자의 묘지명이고 비루함 은 비루한자의 통행증이 되는 현실사회에서 영웅에게도 막무가내함이 있는것이다. 전통적으로 항우의 비극을 성격의 비극으로 단정지어왔다. 꿩잡는게 매요 쥐를 잘 잡 는게 좋은 고양이라는 실용주의 철학으로 말하면 항우는 유구무언이라 하겠다. 더구나 죽은 자는 말이 없다. 한편 이런 평판은 력발산, 개세의 영웅에 대한 전면적인 평가일수 없으며 그만큼 일종 모독이라 할것이다.     항우의 실패는 기실 그의 개인의 착오만이 아니다. 그의 성격에 인간적인 결함이 없을수 없으나 그 시대가 항우같은 영웅을 리해하지 못하고 용납하지 못했던것이라 말하면 어페일가? 혹시 그의 출생이 시대착오일지 모른다. 어쨋거나 성패로만 영웅을 론할수 없다. 승리한자는 왕이 되고 패자는 역적이 된다는 론제는 통치자들이 혹세무 민하는 랑설이며 용속한자들의 바람따라 돛을 달아야 한다는 편견일수도 있겠다.     항우는 비록 실패했지만 명실공히 천하영웅임에 손색이 없고 류방이 비록 득세하여 황위에 올랐지만 뛸데없는 소인배이다. 이 시점에서 볼진대 항우의 개인적비극을 확장한다면 당시 사회의 대비극이였다. 어찌보면 항우의 조우와 운명적비극에 대한 서술에서 사마천의 인생조우와 비극적운명의 관조가 엿보이기도 한다. 아무튼 사마천 의 명문장인 “홍문연”에서 력사의 진,선,미와 사상예술적인 진,선,미도 충분히 읽을수 있으나 일개 무명 훈장으로서 이만 말을 사리기로 한다.                                                                                    2015년 3월 15일
849    (교육칼럼) 숙제산 저 너머 댓글:  조회:2276  추천:0  2017-12-16
                                                        숙제산 저 너머                                                                  최 균 선       대관절 숙제란 무어냐? 공연한 우문이다. 학교에서 배운것에 대한 복습과 예습 및 과외학습을 목적으로 내주는 과제로서 학생이 응당해야 할 일과인데 새삼스럽게 왈가왈부 한다면 자다가 봉창을 두드리는 격이니 말이다. 하지만 과중한 학생숙제가 해결되지 않은채 남겨진 묵은 문제 또는 앞으로 좀더 두고 생각하거나 해결해야할 문제ㅡ전 사회적으로 제기되는 숙제로 되고있으니 화제거리가 되는것이다.     금방 초중에 올라온 손자가 거의 매일 빠르면 밤 열시를 넘기더니 기말이 닥쳐와서인지 요즘은 자정이 다 되도록 숙제산의 골골을 헤매두드리고 문제바다에서 허우적거리다 보니 입안이 헐고 이몸이 부어올라 밥도 먹기 힘들어하는데 어디 내 아이만 그럴가? 아침 여섯시 반에 등교하여 저녁 여섯시에야 하학하는데 저녁도 대충 먹고 대여섯 시간동안 숙제를 해야 한다면 그게 교육학 원리에 맞기나 한것인가?     귀동냥한데 의하면 연길시내 조선족중학교들은 대동소이하고 한족학교학생들은 더구나 밤을 새우는게 보통이란다.  과량의 숙제를 두고 거국적으로 찬반이 엇갈리는 의론이 분분하지만 한창 자라는 애들을 너무 혹사시키고 있다는 시점에서 아무래도 공중의 시비거리가 아니될수 없다. 건국해서 오늘에 이르기까지 교육이 부단히 개혁되면서 중소학생의 학습부담이 날로 가중해지는것은 정상적인 교육운행일수 없다.     “점수통수”가 맹위를 떨치고 “승학유일주의”지휘봉아래 죽기 아니면 까무치기인 중소학교 학생들을 두고 한번 사색해 보라. 학생들의 인생의 의의와 가치평가표준이 심각하게 뒤틀려있지 않은가? 욕심껏 숙제를 내는데 습관화된 교원들도 심사숙고 해보시라. 역지사지로 내가 거의 매일 밤새도록 숙제를 해야 한다면 어찌할가? 자기의 인생관과 가치관념에 문제가 생겨나서 일종 고질이 되지 않았는가 말이다. 학생들로 말하면 과중한 숙제문제는 멋진 말로 숙제콤플렉스 따위의 문제가 아니다.     건국해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교육개혁이 심화발전되면서 줄곧 수반되여 온 학습부담문제가 심각해져서 교육부문에서 수많은 유관정책을 공포했지만 아래에서는 “점수통수”, “유일승학론”의 지휘봉이 난당이다. 그러다보니 정책규정은 소나기만 요란했을뿐 비는 내리지 않는격이 되고말았다. 더 심하게 말한다면 “학생부담경감 정책”이 소기의 목적에 도달하지 못하였으니 한바탕의 “정치쇼”가 된 격이다.     이런 시책의 실천효과는 어떠한가? 유관부문의 조사연구에 의하면 과중한 숙제로 하여 중소학생들속에 학습을 혐오하는 정서가 엄중하다고 한다. 어린학생들이 학습콤플렉스로 생명렬차에서 중도하차한 사건이 한두번이 아니다. 중소학생의 과중한 부담의 표징은 교과서가 많고 과목이 많고 숙제가 많고 학습보도가 많은것이다. 아이들은 공부기계가 아니며 지식접수기가 아니다.     유관인사, 전문가들이 지지부진한 부담경감의 원인을 지적하고는 있다. 이를테면 가장 근본적 원인은 작금의 공리성교육의 조류가 고패치다보니 각학교들에서 서로 뒤질세라 승학률과 지명도를 위해 갖은 방법을 강구하여 가능한껏 학생들의 시간과 정력을 짜내고있다고, 학부형들도 성적제일주의를 맹신하다보니 액외로 각종, 각양의 학습부담을 가중시키고있다고,     특히는 중학교에서 중점고중에 더 많이 보내려는 경쟁심을 동력으로 하다나니 제작해 내는 숙제산, 문제바다는 점입가경이다. 깊이 따지고 볼것도 없이 직각상에서 학생들의 학습부담 경감은 교원들이 하기에 달린 일이다. 숙제는 교원들만이 낼수 있는 특권, 특허가 아닌가! 숙제를 검사하여 학생들의 습득정도를 료해하는 주요한 사업인것을 모르는 사람이 없다.     그러나 중학교에서도 소학생들에게 하던 작법대로 영어, 한어같은 과목에서는 단어를 몇벌씩 써오라는 숙제를 내고 심지어 한어, 어문복습을 억세게, 빈구석이 없이 틀어쥔다는 의도인지 문제의 해답까지 몇벌 베끼라는 숙제도 내는것은 아무리 전방위적으로 생각해도 이는 비과학적인 교육운행이다. 물론 굼벵이도 지붕우에서 떨어질 때 생각이 있다고 무슨 목적이 있을것은 물론이다. 하지만 묻거니와 피로전술도 전술인가? 초중일학년생이 밤새워 해야 하는 숙제라면 합목적인 압력기제가 아니라 아이들의 심신건강을 해치는 “잔인함”이라고 말하지 않을수 없다. 공허한 뇌가림일지라도 한소리 먹이고싶다. “아이들을 구하라!!!”     첫째도, 둘째도, 셋째도 주입이 잘 되였는가? 지식접수기(학생)들이 제때에 잘 받아들였는가에만 관심을 쏟지 않을수 없는 실정이다. 그러다보니 “너는 진군나팔을 불어라, 나는 나대로 북치고 장구치고 새납불고 피리불며 승학의 고봉에로 맹진할것이다.” 라는 식이니 학습부담 경감같은 소리는 공허한 울림이 되고 만것이다.      물론 예나 지금이나 “승학률”이라는 지휘봉아래 피동적으로 맹돌격하는 교원들의 고충을 헤아리지 못할바는 아니나 학생들의 학습부담을 경감하라는 교육부의 지시는 엄정한데 왜 실천에 옮겨지지 않는가? 우에 정책이 있으면 아래에는 대책이 있다는그런 유모어는 아니지만 확실히 어깨춤 따로 엉덩이춤 따로인가!     학습부담경감은 태산처럼 짓누르는 심리압력부터 덜어주는것이지 공부에 아무런 부담이 없게 한다는것이 아니다. 우선 학교에서 객관적인 분석을 거쳐 바람직한 개선이 수요되고 다음 학부모들의 심사숙고가 수요된다. 보다 과학적인 시각에서 착안한다면 공부함에서 아무런 부담이 없을수는 없는 노릇이다. 적당하고 합리적이며 과학적인 압력은 학생들의 학습에 원동력이 된다는데는 아무런 이의가 있을수 없다.     “높이 뛰여 복숭아를 따는식이야말로” 최적의 학습환경이다. 경험이 표명하다싶이 학생들의 당시 개성발전정도에서 능히 도달할수 있다면 학습내용이 비교적 많더라도 아이들은 아름다운 고생이라고 생각하며 배우기를 학생으로서의 락으로 받아들일것이다. 그만큼 개운하고 유쾌한 학습이란 학습단계에서의 모종의 감수인것이다.     그러므로 학생들을 그저 공부기계, 지식저장기계로 여기고 작동시킨다면 미래지향적이고 생산적인 배움일지라도 결과적으로 감당키 어려운 고역으로 될수밖에 없다. 특히 현재 아이들은 거개 독신자녀들이기에 온실안에 화초처럼 풍상고초를 겪을 기회도 없었고 또 그럴 필요도 없이 고이 자라다보니 고난을 이겨내려는 의지력도 약하다. 이런 학생들에게 대들보에 상투를 매달고 송곳으로 허벅지를 찌르며 공부시킬수는 없으니 실제로부터 착안하고 실용주의적으로 진행되여야 명지하지 않을가?     학교와 교원들, 학부모들은 아이들에게 너무도 과중한 심리부담을 경감시키려면 번쇄하고 중복적인 련습을 강요하지 말아야 하는 동시에 사회발전에 따른 실제수요와 아이들의 개성발전 여하에 따라 가능껏 접수할수 있는 계선을 잘 그어야 한다. 물론 일정한 학습부담을 안겨줌으로써 어릴때부터 견정불이한 진취정신과 고생을 이겨내려는 분발력을 키워주는 과정을 부인할 생각은 없다. 아이들이 인생준비로써의 공부가 실로 용이한 일이 아님을 알게 하여 하늘에서 호떡이 떨어지는 법이 없다는 도리를 몸에 박히게 하는것은 어디까지나 합목적이고 합리적이다.     문제는 과유불급이다. 과유불급은 절대 진리이다. 필자가 오지랖 넓게 이래야 한다. 저래야 한다고 훈계조로 언설하였지만 대책없는 탁상공론, 건넌산 꾸짖기임을 알고있다. 말해 보아야 소용없는 말은 아니하기만 못하다고 하지만 아무 생각도, 견해도 없다는것과는 차원이 다르다. 무슨 해결책도 내놓지 못하고 제혼자 구시렁거리지만 작금에 중소학생 학습부담문제는 전반 사회에서 풀어야 할 숙제임은 사실이다.                                  2017년 12월 12일                           연변일보   1월 15 일 발표됨 
848    성찰과 치유로써의 수필 댓글:  조회:2239  추천:0  2017-12-15
                                                    성찰과 치유로써의 수필                                                                   최균선       흔히 수필을 자기 고백의 글이라고 하는 데는 또 다른 의미가 있다. 말하자면 자기 성찰로써의 수필을 쓰노라면 알게 모르게 세속에 병든 마음을 치유할 수도 있는 의미로운 창조적 작업이라는 것이다. 자꾸자꾸 수필을 쓰노라면 무의식에 잠재해있던 내면의 갈등을 겪지 않을 수 없는데 그것이 바로 일종의 심리치료인 것이다.     프로이드는 환자를 치료할 때 환자가 속심을 솔직하게 털어놓는 과정 자체에서 환자의 심리갈등이 어느 정도 치유된다고 보았다. 말을 통한 치유가 가능하기에 하고 싶은 말을 문자로 적어놓는 글도 례외일 수 없다. 일기나 자전적인 글도 자신을 위한 치유로써의 글이라 할 수 있다. 자신의 삶의 양상을 폭로하면서 상처를 끄집어내며 투시하고 치유하려는 본능적 욕구가 발현된다. 수필만이 아니라 다른 쟝르의 글에도 자기 치유를 위한 무의식적 충동이 반영되기도 한다. 창작심리 속에 자신의 상처와 갈등을 드러내면서 성찰할 수 있기 때문이다.     어떤 수필을 아무날 아무때 쓰려고 작정해놓았다가 집필하는 사람들도 혹 있겠지만 우연히 보게 된 경물, 어떤 현상에서 문득 수필글 감대기가 다가서고 혹은 끊임없는 잠의식의 흐름 속에서 어떤 관념이 떠오를 때 그것을 표현하고 싶은 열망에 몸이 달아오른 경우가 있음을 체험해보았을 것이다. 이것은 령감의 발현과 다르다.     무심한 듯 무심하지 않기도 한 나날속에 겹쳐지는 세월을 보내며 어느날 문득 마주하게 된 산이 은혜로운 해볕 아래 화사한 봄날의 풍물을 빚어가고 있음을 느꼈을 때, 거한 바위 앞에서 침묵의 의미를 되새겨보면서 오히려 표현하고 싶은 욕망의 꿈틀거림을 말려낼 수 없을 때, 시나 혹은 수필로 표현해내고 싶어지는 것은 글을 쓰는 사람들의 공통된 직업병 혹은 심리관성이라 할 수 있겠다.     그리 되려면 반드시 남다른 감수와 정취를 갖추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감각이 활약하면 감수는 절로 쌓이게 된다. 이를테면 봄, 여름, 가을, 겨울의 이채로운 계절은 돌아가면서 아름다운 자연을 만들어간다. 꽃 피고, 무성한 숲 그리고 온갖 색갈로 물들었다가 마침내 떨어지는 락엽과 흰눈이 쌓여가는 련산련봉들을 보면서 이 땅의 서정적인 풍취는 물론이지만 생명의식을 가지고 즐겁고 복된 나날을 함께 할 수 있는 공동체적인 삶에 대해 다시 느끼고 새삼스레 생각해보게 된다.     겨울, 라목의 숲에서 끈덕지게 은근히 준비되고 있는 새봄의 싱싱한 새잎의 향연은 나무의 생명찬가이며 우리가 살아야 할 의미를 깨우쳐준다. 호듯호듯 뛰는 해살과 뜨거운 여름의 해볕 아래 오곡과 백과가 성숙하고 차차 익어간다. 봄여름을 지난 계절의 절정은 가을이다. 해볕의 은총을 입어 붉게 익어가고 시간과 바람 속에서 맛이 깊어가는 가을은 분명 사계절의 절정이다. 그리고 그러한 계절의 화려한 성숙의 끝에 락엽이 지고 땅 우에서 다시 썩어 흙이 되여진다. 풍요로움의 절정에 뒤이어 쇠락의 섭리를 읽으며 인생무상을 반추하게 된다.     단풍이 붉게 타고 있는 산자락길에 굼니노라면 자신도 한폭의 풍경이 되는 것이 요 바람이 건들 불어와 한잎, 두잎 쓸쓸히 떨어져 락엽이 락하의 철학을 실증하고 있을 때 처연한 조락 때문에 련민의 정이 가슴 가득 차오를 것이다. 산봉에 펼쳐진 하늘바다에 구름 몇송이가 고기처럼 유유히 헤염치고 있는 풍경에 심취되면 스스로 의미로운 시각을 맞는다고 생각될 것이다. 그것이 곧 아름다움이며 감동이다.    우리는 자기의 생애에 한페지를 멋지게 장식하는 멋과 재미에 자연을 찾아가면서 체험을 빚어간다. 인생이란 무엇인가를 알기 위하여 철학가의 인생론 열권을 볼 필요는 없다. 륜회하는 계절의 변화 속에서의 다양한 감수와 정취는 철학적 사색으로 려과되고 문학적인 언어로 엮어져 세상에 거듭난다. 그 와중에 자신의 삶과 사랑, 통찰과 아픔을 그대로 보여주노라면 마음의 주름살도 자연히 다림질하게 된다.     몽떼뉴는 수필은 마음의 보행 그대로의 모습이다라고 하여 지극히 자연스러운 인간적 심성을 표현하는 것이라고 말하였다. 이것이 수필창작의 첫걸음이며 독자의 기억의 심연에 있던 서정과 서사를 자극하여 감동을 불러일으키는 일이다. 세상과 삶에 대한 성찰을 통하여 비판정신의 낙낙함도 서슴없이 드러낼 때 자신의 마음의 골짜기를 어누룩한데 없이 내키는 대로 편답할 수 있다.     인생의 의미를 또 다르게 생각하고 음미하고 인생에 대한 달관이 수필에 담긴다면 작자의 개성적, 관조적 인간성이 구현된다. 수필은 정서적이고 관조적이며 내밀한 정신세계에 자진침투하려는 자세와 충동적인 행위본능의 산물로서 차분한 정취와 력동적인 정서가 조화를 이루는 량면성이 있다. 그래서 수필에서 어떠한 쟝르보다도 인간성의 문제와 폭넓은 인문학적 소양이 잘 드러난다고 하는 것이다.     마치 다정한 지인에게 귀속얘기를 들려주 듯하거나 아니면 많은 청중을 마주하여 자신의 견해와 주장을 역설하는 뜨거운 열기가 넘쳐나기도 한다. 이와 같은 리지적인 면과 열정적인 뜨거움이 씨와 날이 되여 수필의 경지를 펼치고 있다. 수필은 감성과 리성, 랭철함과 열정의 갈등과 소용돌이가 마침내 정관의 자세로 가라앉는 내 안의 진실한 인간상을 부각하는 작업인 것이다.     현실을 직시하며 작심하고 내뱉는 날카로운 비판, 온당하고도 합리적인 제언, 현대의 사회가 안고 있는 비정함, 죽음의 문제, 종교문제 등등 제현상에 대한 나름의 깨달음을 표백하면서도 인생론적인 얘기 속에 해박한 지식과 랭철한 지성적 지향을 호소하며 동조를 기약하게 된다. 독자들의 가슴에 공명을 일으키려면 우선 그들을 존중하고 리해하는 아량과 포용이 있어야 한다. 그러면서도 당당하면서도 여유롭게 자기가 바라본 세상과 삶의 현장을 투시한 결과를 공유해야 한다.     한편, 한편의 수필이 그 어느때보다 칠정륙욕에 집착하고 있는 현대인들에게 온갖 사람, 온갖 사건을 직접 체험한 사람만이 보여줄 수 있는 진실한 모습이고 해탈하려는 기특한 심성을 독자의 정서체험으로 전환시킬 수 있다면 그보다 바람직한 수필이 없을 것이다. 환희와 더불어 분노 없이도 살아갈 수 없는 세상에서 수필은 분노의 감정 그 자체를 넘는 정당한 분노도, 의로운 분노도 얼마든지 토로할 수 있다. 그것은 독자에게 하는 성토이기 전에 심리평형의 수단이 되기도 한다.     수필을 써서 세상에 내놓으려면 작자 자신이 스스로 심리치료를 거치게 된다. 자신의 흔적과 삶의 골짜기를 개방함으로써 치부도 드러나게 되므로 수필을 통하여 무엇을 어떻게 고백할 것인가 고민하게 된다. 어떻게 살아왔는가를 이야기하면서 자신의 인간상과 인격력량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고 앞으로 어떻게 살겠다는 의향도 비쳐야 하기 때문이다.    수필읽기를 통해서도 치유가 가능하다. 작가는 개체경험을 일반화하여 내면의 갈등과 치유를 독자도 경험할 수 있도록 해준다. 따라서 읽는 이는 글을 통해서 감동을 받고 상처를 어루만질 수 있으며 자기발전을 도모할 수 있는 것이다.     살며 느끼는 사람이면, 생명을 사랑하고 생활을 사랑하며 인생의 의미를 파헤치고 싶으면 표현하라! 표현욕은 소유욕 뒤에 그림자처럼 묻어나오는 욕망이다. 이 평범한 진리를 깨달았기에 작가의 길에 나선 사람들이 있게 된 것이 아니랴, 감성과 리성의 려과를 거친 감정을 씨실로 살아왔고 살아가는 이야기, 남에게 드러내고 싶은 자화상을, 아픔을 먹고 자라는 인생나무와 그것을 키워가면서 그 모두를 사랑한 사연들을 표백하고 또 표백하시라.                                                   2017년 1월 7일    (연변일보)
847    행복한 싸움 댓글:  조회:2327  추천:0  2017-12-12
                                                   “행복한”싸움                                                            최 균 선     빅또르 유고는《인간에게 세가지 싸움이 있다. 즉 인간의 삶과 자연과의 끊임없는 싸움(더위, 추위, 질병, 기아, 기술, 지식, 기계 등),인간과 인간과의 싸움(개인의 존재, 경쟁, 인종, 종교, 국가, 민족), 자기와 자기와의 싸움 (야누스(로마신화의 兩面神), 앞과 미래, 뒤와 과거, 게으름과 부지런함, 나약과 용감, 거짓과 참됨, 비렬함과 위대함과의 싸움)》이 있다고 했다.     이 세가지 싸움은 루루천년, 인간의 비애와 비극의 근원이라고 말할수 있다. 첫번째 자연과의 싸움에서 더위와 질병은 부귀한 자에게나 빈궁한 자에게나 불가피면의 고험이였으나 추위와 기아는 헐벗고 굶주린자에게만 차례진 혹독한 시련이였다. 그러나 인간은 마침내 수없이 많은 피와 땀의 대가를 지불하여 대자연의 정복자로 군림하고 고도의 문명을 창조해냈다. 그것의 결과물인 기술과 지식, 기계와의 싸움은 문명인이 기꺼이 자초한 싸움으로서 사치한 향수라고 말할수 있으리라.     두번째의 인간과 인간의 싸움은 무지경의 인간악을 창출하면서 인성을 마멸시키는 처절한 전쟁이였다. 대자연속에서 박투하였던 생존경쟁과는 성질이 다른 싸움으 로서 인종과 종교간의 싸움은 피비린 살륙을 불러왔고 국가와 국가, 민족과 민족의 혈투는 파괴와 건설의 사이비론리를 펼치며 문명인의 온갖 비리와 사악함을 철저히 드러냈고 자기들의 가원인 지구를 서서히 훼멸하는 장거를 서슴치않게 되였다.     세번째 자기와의 싸움은 부단한 자기개발의 연장으로서, 지와 인성의, 악과 선, 감정과 리지, 량심과 흑사심, 미와 추, 방종과 자률, 탐욕 등등 자기내부의 투쟁으 로서 개체생명의 종식과 더불어 끝날 허무한 싸움이다. 결국 인간은 자기를 철저히 알지 못하고 자신을 용납못하는 령장동물 그 이상으로 진화하지 못하다는 반증이다.       인간은 드디어 자기와의 싸움에서 제2전장에 이르게 되였다. 즉 현대물질문명, 넘치는 식복이 가져다준 비만과의 싸움이 그것이다. 옛날엔 일하는 사람치고 병적이 아니고는 배가 나온 사람이 거의 없었다. 그래서 배가 불룩하게 나오면 장군배라고 불러렀는데 부하고 귀함의 첫째로 되는 표징이기도 하였다.     하지만 지금은 부푼 배를 부러워할 대신 오히려 보는 사람이 부담스러하는 시대로 되였고 잘먹어서 나온 배를 가지고 장비야 내 배 다칠라하며 거드름을 피우는 사람이 별로 없다. 거리에서 끌고다니는 애완견들을 왼눈질해보면 뚱뚱한 개들이 늘고있다는 느낌이 들군한다. 비만증이 지구촌의 대난제로 된 마당에 견공들에게도 비만증이 생겼으니 살맛이 극에 이른 좋은 세상이라 해야 하는가?      인류가 먹거리때문에 생사박투할 때는 비만의 의미를 알지 못했겠지만 진화과정 에서 기아에 대비하여 풍족한 시기에 체내에 에너지원을 축적하려는 유전적경향이 지속되였던 탓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기록에 따르면 2000년전 고대로마, 희랍인들도 건강을 위해 다이어트를 했다. '다이어트'(Diet)의 어원이 희랍어 '디아이타' (Diaita) 에서 유래한것도 이런 리유라고 한다.     지금처럼 날씬해지기 위한 다이어트가 시작된것은 19세기부터이다. 산업혁명이 선물한 풍요는 인간의 아름다움에 대한 욕구를 자극했고 다이어트를 하나의 산업으로 탈바꿈시키는 계기가 됐다. 1930년대 미국에서는 일명 “기생충다이어트” 즉 소고기에 기생하는 “촌충”을 먹어 살을 빼는 방법이다. 촌충이 장기속에서 최대 9m까지 자라는 탓에 두통이나 시력감퇴와 척수염, 간질, 치매같은 심각한 질병을 유발했지만 이 방법의 붐이 일면서 광고까지 신문에 나올정도로 기생충약은 불티나게 팔렸다.     아무튼 총명한 인류가 고안해 낸 살까기방법이 가지가지였다. 산업혁명에 따른 대량생산으로 고무속옷까지 만들어졌는데  남녀를 불문하고 류행됐지만 과하게 몸을 조이다가 뼈가 으스러지거나 장시간 착용해 피부가 괴사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야말로 잘먹어서 오른 살, 살과의 전쟁은 잔혹하다고 해야 하리라.     최근 비만의 발병률이 전 세계적으로 빠르게 증가하고 있고 비만은 대사성질환 뿐만아니라 신체 각 장기에 미치는 영향이 광범위하여 인류의 건강에 심각한 장애를 초래하며 고지혈증, 고혈압, 동맥경화, 당뇨병, 지방간 등의 발생비률을 현저하게 증가시킨다고 한다. 비만은 사람들이 가장 싫어하나 막무가내하고 곤혹스러운 현상으로 되였다. 몸이 나면 복된 상징이라고 여기던 전통관념이 조롱당하고있다. 이 역시 물극상반의 원리로 해석하는지 모르겠으되 세계는 이미 “비만시대”라 지칭되고있다.    중국 인민망은 한 보고서를 인용해 중국의 비만인구가 현재 3억 2천 500만명 이라고 전했다. 이 보고서는 앞으로 15년간 비만인구가 매년 1.2%씩 증가할것으로 예상하면서 20년후에는 비만인구가 지금의 두배가 될 가능성도 있다고 예측했다. 비만인구가 급증한데 는 중국인들의 음식습관 변화에다 운동과 육체로동 기회가 줄어든것이 주요원인이란다. 중국의학과학원의 우양펑(武陽豊) 교수는 "중국은 세계에서 가장 날씬한 국가중의 하나였지만 이제 서방을 빠르게 따라잡고있다"면서 "걱정스러운것은 이런 현상이 매우 짧은 시간에 이뤄졌다는것"이라고 우려했다.     탐식과 영양과잉섭취가 비대증의 원흉인지 딱히 알수 없으되 비만치료로 보통 자기 절제를 제창하고있다. 아무튼 배와 엉덩이와 허벅지에 넘치는 살을 빼기 위해서 다종다양한 방법이 나오고 엄청난 돈을 퍼붓고있지만 그 누구도 전쟁에서 승리를 예측하지 못하고있다. 그래서 더구나 살까기가 저저의 목표로 되여 극성을 부리는 현시대이다.     그런데 아이러니한것은 전세계적인 불평등으로 하여 어떤 사람은 영양과잉으로 비만이라는 행복병에 걸려 살까기에 골치를 앓고 어떤 사람들은 먹고 살기 위해 불철주야 악착같이 일하지만 배가 등에 가붙도록 배고픔에 허덕이고있다는 사실이다. 한국에는 국민들중 영양섭취가 부족한 사람은 10%에 불과하지만 성인 30%가 비만에 해당된다는 등 영양불균형 및 식생활문제가 심각한 수준인것으로 나타났다고 한국매체에서 보도한바 있다. 과잉행복의 불행인가? 물극상반의 재확은 아닌가?     국제적십자사련맹은 년례 세계재난보고서를 통해 빈부격차가 점점 심화되고 있는 데다 국제곡물가격이 급등하면서 식량구입능력에 현저한 차이가 나타나고 있다고 공표했다. 베켈레 겔레타 사무총장은 성명에서 “자유로운 시장의 힘이 상호작용한 결과로 지구촌 인구의 15%(9억2500만)가 굶주리는 한편 다른 20% (15억)는 비만과 과체중에 시달리고 있다면 뭔가 일이 잘못돼 가고있는것”이라고 일침을 가했다.     극빈인구도 9000만이나 되는데 세계인구의 70명중 한사람이 빈궁속에서 허덕이고 있고 일곱명에 한사람이 기아선상에서 최대의 인간고인 기아에 시달리는 셈이다. 인류의 세가지 싸움이 끝나지 않았지만 빈곤과의 싸움이 인류사회의 지극히 불합리한 부익부빈익빈의 극한에로 치달아올랐다는 반증이다. 그러나 이 세상에 박애 주의는 살아있어도 대자대비하고 전지전능한 구세주는 없다. 인류자신의 첫번째 전쟁 이 지금도 진행형인데 제2전장에서 행복한 싸움을 하느라 고생하는 사람들은 잘 먹어보려고 아등바등하지만 그냥 배가죽이 등에가 붙어있는 사람들을 부러워하는가?     인류는 이러한 불평등내지 부정의를 어떻게 해결할것인가 하는 문제에 직면하고있다. 세계경제는 심각한 위기를 거듭하고 있는 상황에서 많은 지자들이 “맑스가 옳았다” 하고 말한다. 맑스의 통찰과 분석에서 어떤 측면이 옳았는지 알수 없지만 분명한것은 이 지구촌에서 매6초에 어린애 하나씩 기아로 죽어간다는 사실이다. 참혹한 현실이 평등을 설교하는 “하느님”을 조롱하고 있지 않는가?!                                                                2011년 11월 20일 
846    도적이 매를 들고있나니 볼지어라 댓글:  조회:2202  추천:0  2017-12-07
                                       도적이 매를 들고있나니 볼지어라                                                          (두루 엮음)        조선 인조때 洪萬宗(홍만종)이 보름만 (旬五)에 완성했다는《순오지(旬五志)》에 있는 속담성구이다. “적반하장 입리굴자 반자릉력(賊反荷杖,以比理屈者,反自陵轢) 도둑이 도리어 몽둥이를 든다는것은 잘못한 자가 오히려 상대를 업신여기고 성내는것을 빗댄것이다)”도적질하러 들어온 도둑이 주인에게 들키자 도리어(賊反) 몽둥이를 휘두른다(荷杖)면 언어도단이라고 할것이다.     예로부터 주객이 뒤바뀐 일이 많았는지 관련속담이 많다. ‘도둑놈이 몽둥이 들고 길에 오른다’, ‘방귀 뀐놈이 성낸다’, ‘소경 개천 나무 란다’, ‘물에 빠진 놈 건져놓으니까 망건값 달라한다’ 등, 자신이 잘못했는데 오히려 큰소리를 탕탕 치는 이런 자들을 향하여 적반하장도 유분수라고 질타한다. 렴치가 먼데 있지 않고 바로 옆구리에 있으니 인간으로서 좀 분촌이 있어야 곁에서 분노를 터뜨리지 않을수 있기때문이다.     민초들 생활권에 적반하장현상은 잠시 제쳐놓고 국제무대에서의 적반하장현상을 보자. 내가 하면 로맨스고 남이 하면 불륜이라는 강도론리를 내들고 세계를 마구 짓 밟고 다니는 미국이야말로 도적이 매를 든 전형이라 할것이다. 아닌가 보라,     세계에서 가장 잔인한 나라는  미국으로서 최소 6천만 명에서 최고 1억명으로 추산되는 인디안 원주민 학살에 대해 사죄한적이 없다. 오늘의 미국은 침략과 학살의 현장이다.〝조선전쟁에서 500만의 민간인을 학살한 미국이고, 베트남 전쟁에서 량민 300만을 학살한 미국이다. 캄보쟈, 라오스, 비르마에서 100만의 량민을 학살한 미국이며, 아프가니스탄, 이라크, 리비아,시리아 세계 각지에서 70만의 량민을 학살한 나라가 바로 미국이다.     미제는 “힘이 주인으로 있으면 정의는 하인이다 (영국속담),“힘이 정의다(영국 속담”라는 속담을 만들어냈듯은 사리도 분별하지 않고 제멋대로 횡포무도하게 짓밟으며 세계경찰질을 해왔다. 미국은 건국후 2014년까지 전쟁이 없은 해가 불과7% 밖에 안되는 전쟁의 력사이며 죽임을 당한 5천만명의 90%가 량민들이였다. 미국을 움직이는 파워엘리트들은 인류력사에서 가장 악랄한 살인강도들로서 자기들의 리익을 위해서는 타민족들을 싹쓸이로 없애버리는것도 서슴치 않은 않는 살인마들이다. 좀 더 멋지게 말한다면 현대판 싸탄들인것이다.     그래 아니란 말인가?인류역사에서 핵무기를 최초로 사용한 나라로서 최첨단 핵 무기로 다른 나라들을 공갈,협박해 왔다. 세계에서 가장 음흉하고 잔인한 나라가 미국이다. 력사가 증명하고있다. 불과 240여년의 짧은 력사를 가진 미국지배세력이 그 동안 다른 나라들을 침략한 회수는 무려 2백여차례도 더 된다. 이런 미국이 세계적인 으뜸의 불량국가가 아닌가? 그러나 자기네와 죽기살기로 맞짱뜨는 조선, 이란, 시리아 등을 불량 국가니 테러지원국가이니 뭐니 하며 흑백을 전도하고있다. 그러함에도 백악관의 관료는 외신기자들에게 "과거부터 북한(조선)은 조작의 달인이었다. 그 나라는 살인적인 정권"이라며 침을 튕기였다.     미국정부는 력래로 자신의 력사를 되돌아볼줄 아는 건전한 의식을 가지고있지 않다는 반증이다. 일찍 통킹만사건을 조작하여 월남을 침공한 사실, 대량살상무기가 있다고 황통을 불며 자기 똘마니들을 이끌고 이라크를 침공하여 인간지옥으로 만들었던 미국, 그래 누가 조작의 달인이고 누가 살인적 정권인가? 흑백을 전도해도 앞뒤를 가려보고 가능한껏 해야 한다. 하여도 음모술수는 오래 행할수 없다. 거짓 을 습관처럼 행하는 정권, 음모술수가 교묘함때문이 아니라 힘이 있었기에 통했지만 힘이 진하면 졸렬해진다. 억지와 생떼질은 잠간 은 이기지만 바닥이 나면 진면모가 드러난다.  자신을 전혀 반성할줄 모르는 자는 참으로 강도가 아니면 바보일뿐이다.     나를 따르면 흥하고 나를 거슬리면 망하게 한다(顺我者昌逆我者亡) 는 강도론 리가 국제법인가? 미국이 일으킨 그 모든 살륙유희는 평화질서인가? 이른바 대화를 위한 경제제재와 군사적 압박이라는 국제적수사법이 가당키나 한가? 상대의 목을 죄 이면서 “내 말을 들을래, 아니면 아예 죽을래, 내 말 듣고 식민지 주구가 되면 살려 주고 내 말 안듣겠으면 죽여버릴테니까 어디 죽어봐라!” 하는것이 아닌가?! 언감 묻거니와 주먹을 부르쥔 손으로 악수할수 있는가? 숨이 막 넘어가도록 목을 옥죄이면서 심호흡을 하라니? 맨날 총포를 휘두르며 인권타령을 하다니??     력사학자 토드 피어스(Todd Pierce)는 “칠콧 보고서가 미국과 영국은 그들이 원하는 어느 나라라도 처들어가서 그 나라를 마음대로 바꿀수 있는 ‘권리’와 ‘자유’가 있다고 믿고있는 것을 보여 주는 것”이라고 말했다. 지구상에서 가장 악랄한 살인강도가 바로 미국과 유럽국가들이다. 세르비안 정치분석가 알렉산더는 “부시와 블레어 가 2003년 거짓명분을 가지고 이라크를 침략한것과, 1999년 나토가 유고슬라비아를 침략한 것은 평화에 반하는 명백한 범죄행위”라고 말한다.     알렉산더는 “1999년 미국방성 회의에서 강경파들이 1991년 걸프전후 5년~10 년안에 러시와와 관계하는 나라들 – 시리아, 이라크, 이란을 쓸어버리겠다고 말했 다“고 한다. 또 9.11 이후에 고참 미군장교가 클락에게 “7개 나라들을 쓸어버리겠 다. 이라크를 시작으로 시리아 레바논 리비아 소말리아 수단 이란 등”이라고 말했다 고 알렉산더는 언급했다. 그는 이어 “서구는 이렇게 해서 석유가 많이 나는 중동과 북부아프리카을 장악하게 된다는것” 이라 했다. 1999년 이전에 이미 미국의 뜻대로 움직여 주지 않는 나라들을 뒤엎겠다고 결정했다는 말이다.     이 세계를 피로 물들인 미제국의 력사는 음모, 전쟁, 위선, 세뇌의 력사임은 두말할것 없다. 미국이 지금까지 해왔던 짓거리를 멀리갈것도 없이 지금 중동에서 하는 짓거리를 보면 명약관화하다. “북핵해결”의 유일한 평화적 해결책이 조선을 질식시켜 붕괴시키는 길뿐이라고 동네방네 고아대며 강요한것이 미국이다. 핵항모와 핵잠수함으로 포위하고 근육자랑을 하고 있는것이 미국이다.     이러한 미국의 조폭같은 대외정책에 대해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고 당당하게 도전하여 대결한 나라들은 조선을 비롯해 극소수에 불과하다. 형편없이 깔보던 동방의 약소국이 로케트 강국이 되자 절대적인 패권을 휘두르던 미국의 신화가 풍지박산나는것을 직감한 미국정치인들의 단말마적인 비명소리가 요란스럽다,     력사의 롱담인가? 약소민족이 일어났다, 이제는 어떠한 대국들도 제멋대로 유린 할수 없도록 최첨단 핵무기를 보유한 단군족이 거듭나고있다, 하여 미국이 환장하여 미쳐버린 것이며 미친놈 지랄부리듯 항공모함이나 핵폭격기, 핵잠수함으로 핵참화를 조성하 려는 불장난은 입에 달고 있는 도발이 아니고 평화의 메세지인가?     미국이 1945년에 UN, 나토 수많은 국제조약으로 구축한 다자적 세계질서는 미국의 공화당의 네오콘에 의하여 계속 파괴되였다. 미국은 핵실험금지조약을 비롯한 지뢰금지조약을 거부하고 자국의 주권을 제약하는 국제사법 재판소의 모든 결정을 거부했고 UN 안전보장이사회의 결정도 구속되지 않으려 했다.     보다싶이 미국의 대외전략은 자국의 리익만 내세우는 독식주의이다. 미국은 자국 위주의 일방적인 의사결정으로 다른 약소국가에게 이를 강요하는 가장 악랄한 불량국가, 세계에서 가장 무도하고 잔폭한, 그냥 도적이 아닌 깡패국인데 오히려 매를 드니 국제시비가 웃기지 않는가?! 이런 경우를 두고 어처구니 없다고 할가, 어의상실이라고 할가? 언어도단이라고 할가? 오직 분명하는것은 세계의 화근, 악의 소굴이 미국이라는 사실이다.     그네들이 이런 정도에 이르게 된것은 결국 자기들의 힘만 내세우며 당장의 리익을 위해 말도 안되는 기준과 규칙을 만들어내고 타국을 압박해 처먹고 사는 걸 당연시해 온 결과이다. 트럼프가 중국과 러시아에 대해 “미국의 힘과 영향력, 이해관계에 도전하고 있다고” 고 엉터리를 쓰는데 나보다 센 놈은 용납하지 않는다는 강도론리를 내세우는 얼뜨기라 해야 할것이다.     자기네ㅡ미국 이외의 다른 나라를 같잖게 보는데 습관화된 극도의 오만과 편견으로 하여 무소불위의 유일강대국이 영원하리리 믿은 까닭이다.     력사는 말한다. 강대한 로마제국이 멸망은 결코 력사의 롱담이 아니다, 바야흐로 서산락일의 미국의 멸망도 결코 력사의 유머가 아니다. 미국이 인성을 갖춘 인종들이 사는 나라라면 패권주의 야망을 버려야 희망이 있다. 그에 앞서 국제사회는 많은 나라들을 침략하고 수많은 무고한 백성들을 잔인하게 도살한 피비린 죄행을 석고대죄 하게 하고 그 대가를 천백배로 갚도록 모든개 매를 들씌워야 시비가 바로 선다.                                                                             2017년 7월 25일                  
845    진언수상록 (72)세계비극은 누가 연출하고 있는가? 댓글:  조회:2549  추천:0  2017-11-21
                                           세계비극은 누가 연출하고 있는가?                                                                  진 언      힘의 론리라는 말은 외교용어이지만 힘의 론리는 곧 강도론리인가? 많은 사람들이 아이때 벌써 덩치 크고 힘이 센 아이에게 무작정 당하고는 쀼죽해진 입에 불만을 걸고 주먹으로 눈물을 닦아야 했던 일을 뼈저리게 체험했을것이다. 경우야 여하튼 약육강식의 섭리를 억울해도 짓씹어삼키지 않을수 없지만 굴욕은 증오로 새겨진다.      인류는 가지는것의 의미를 알고 내것이라는 자족감에 웃을줄 알면서부터 온갖 인간비극을 출연하기 시작하였고 갈수록 가심해졌다. 그렇게 시작된 비극은 현대문명 사회에서 더 치렬한 극정에로 치닫고있다. 가지지 못한 자들은 인간답게 살아보자고, 기득권을 가진 자들은 자신의 기득권을 위해 인성마저 버리다보니 비극은 세계 도처에서 매일같이 발생되고있다.     개체에게는 밥그릇을 위한 비극이지만 기득권자들에게는 본능적인것만은 아니다. 인류의 지구촌은 시끌벅적하다. 일본은 묵은 야심을 되살리기 위해 이미 준비를 끝내고  호시탐탐하고 있고 미국은 자유와 평화의 외투를 걸치고 태양아래 공공연하게 파괴와 략탈전쟁에 광란하고있다.     아랍땅은 미.영의 주도하에 힘의 론리에 의해 씌여진 비극이 연출되는 무대로 되여졌다. 근원은 아프리카땅에 대한 제국주의 야욕에 있다. 괴뢰를 앞세우고 자원략탈을 위한 끝없는 분쟁을 일으키고 있는것이다. 그렇다. 력래로 백성을 리용하는 전쟁광들은 있어도 타국의 평화를 마련하려 침략을 밥먹듯 한 강대국은 없었다.     미국과 영국이 주도한 이라크침략은 결코 이라크민중의 평화를 위한것이 아니였다. 아랍의 사막에 엄청난 피의 대가를 지불해야만 하는 전쟁의 포연속에서 평화의 덕목과 가치가 존재하는가?     밀모된 제국주의 략탈전쟁, 그러나 세상엔 공짜 오찬이란 없다. 불청객들은 격렬한 항쟁에 맞다들렸고 재정적부메랑이 되여 목을 졸리웠다. 승리자도 마침내 죽을맛이 되였다. 그러나 세계는 감히 흘겨보지도 못하고 구경하였다. 힘의 론리가 그처럼 두려웠던것이다. 많은 아프리카국가들에서 그들에 의한 끊임없는 내전이 진행중이다. 아프리카도 “저주의 땅”이 되고말았다.     남잡이가 제잡이가 된다는것을 현실이 증명하고있다. 해방자로서의 바그다드 입성은 꾸며진 비극의 한장면일뿐 결국 이라크라에서 자업자득으로 전전긍긍하다가 두손을 들고말았다. 첫줄부터 잘못 쓰인 씨나리오는 인권의 미명하에 첨단무기로 저지른 만행은 악마가 누구인지 너무나 선명하게 보여주었다.     소위 재건부터 내세운 파괴란 황당하거니와 상상이외의 현대판 인간지옥은 무엇으로 해석할것인가. 현시대, 파괴를 선행한 재생산이라는 조건을 담보하는 까닭에 약자의 희생을 통한 파괴가 있을수밖에 없다는것은 황당철학이다. 그자들의 국익은 인성도 인권도 네미덜머리로 내치고만다.     아프카니스탄과 이라크라에서 미,영주도의 강도적론리는 중태에 빠져버렸고 그 후유증은 지금도 심각하다.“해방군”으로써의 금의환향은 접어두더라도 “계륵”으로 되여버린 아프카니스탄, 이라크상황에 때늦게 당황망조하다가 드디어 꼬리를 사리고 말았다. 21세기 침략전쟁은 과거의 식민지전쟁처럼 일시적인 승리자의 희열로 장식되지 않는다는것을 력사규률이 제시하였다.     위정자들은 자신의 리익에만 정신이 뒤집혀 자기 국민을 대포밥으로 들이밀기를 서슴치 않는다. 부시가 인류가 낳은 그런 악종이 아니던가? 범을 등에 없고 으시댄 여우같은 이스라엘을 보라! 지금 미국을 지배하는 손은 유태인이라고 소문나있다. 자기들의 예수를 못박은 유태인, 돈벌레로 전락된 유태인들…아인슈타인, 챠플린 등 유태계인재들이 수많이 배출되였지만 오히려 유태민족의 자아풍자로 되고있다.     세상에서 제일 총명하고 돈 잘버는 특수민족이라는 찬양속에서 그들이 팔레스티나인들에게 저지르고있는 만행은 너무나 아이러니하다. 유태족이 과연 질적으로 훌륭한 민족인가? 의심되지 않을수 없다. 2천년을 나라없이 온갖 기시와 박해를 받아왔다는 자기들의 굴욕의 력사에 대한 자멸을 재촉하는 보복극인가?     스스로 선택받은 민족이라 자긍하지만 그게 걸맞는가? 깨지 않는 악몽이란 없다. 모든 허위는 벗겨지기 마련이며 모든 악행은 반드시 결산되여진다. 그들은 지금 힘의 론리로 자신을 정당화하지만 계속하여 만행을 자행한다면 반유태인 감정은 전 지구적으로 더 짙어갈것이 분명하다. 개인사이에는 용서가 있을지 몰라도 민족과 민족사이에는 리해와 용서가 없다.     정의를 분장시키는 미국과 이스라엘을 비롯한 강대국들의 행각은 참으로 세상을 놀래우고있다. 미국과 들러리인 영국의 이라크침략전쟁은 초강대국으로서 미국을 힘의 론리로 과시한 야만적전쟁에 불과하다는것을 누가 모르는가? 엄청난 피로 물들 이며 평화를 표방한것은 얼마나 처절한 유모아인가? 미국에 의한 야만적 전쟁은 인류의 상식과 량심을 짓밟은 살륙의 광기,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세계는 막강한 힘의 논리에 의해 지배되고 있으며, 평화의 덕목과 가치는 그 막강한 힘을 소유한 자의 자의적판단에 따라 얼마든지 제멋대로 해석될수 있음을 보여준다. 우리는 지구촌 각 나라에서 실시간으로 방영된 이라크전쟁을 지켜보면서 이제 새삼스러울것도 없는 이러한 사실을 다시 한번 씁쓸히 확인하였다. 그러나 확인은 심리정서에 머물뿐 아무것도 해결하지 못한다.     모든 배려는 대가를 지불해야 하고 모든 미덕은 결산되기마련이다. 국익. 그게 전부이고 힘이 론리가 모든것을 가르게 된다. 바로 약육강식 그 자체이며 그 사실에 슬퍼하며 분노하는것은 감상주의에 불과하다. 강도의 손에 들린 칼과 료리사의 손에 들린 칼은 다같은 칼일지라도 위험도를 결정한 자는 깡패들뿐이 아니던가?     집단적인 히스테리는 정신적인 빈곤과 허탈감으로 발전하고 점점 더 체념과 굴종의 비애에로 나아가고있다. 자유와 평등을 근본리념으로 한 정의의 미국은 없다. 파괴와 략탈의 선봉에서 그들속에 소수의 가진 자들을 위한 전쟁에 미쳐있다고 보는것이 량심이 있는 세계인들의 공통한 시각이다. 그런데 평등개념 즉 대자연속에서 생존의 자유는 공평하다는것을 누가 실천적으로 해석할수 있는가?     세계의 모든 인민들의 자연적인 인간성은 불평등하더라도 민족과 민족들 사이의 관계는 평등해야 한다는것은 잠규칙이다. 사회,국가가 어떤 상황이더라도 자연적인 인간성만은 수호하려는 인간본성을 누가 짓밟고있는가? 다양한 생존수단은 사회,국가 권력의 기반이다. 그런데 오히려 인간성의 침해요인이 되는 현실, 민주, 인권이라는 미명하에 강권을 휘두르며 인간비극을 연출하는 자들은 과연 누구누구들인가? 잡담제하고 단언하면 국제적 테로국가 왕초는 바로 미국이다. 그래 아니란 말인가?     힘의 론리에 의해 지배되는 이 세계, 평화의 덕목과 가치는 강한자의 자의대로 해석되고있다. 그러나 말의 꼬리를 다리라고 부른다 해서 꼬리가 다리가 될 수는 없다. 도덕경에서 로자는 "승리를 기뻐하는것은 살인을 기뻐하는것과 같다. 승리해서 돌아오는 군을 장례식을 치르듯이 맞이하라"고 했다. 이 말은 지금 우리에게 깨달음을 주는 비유적인 표현일가, 아니면 실제 전쟁은 결국 장례식이나 다를게 없다는것일가? 약육강식의 법칙을 초월한 국제적악행에 개탄한다면 시골의 일개촌부로서 너무 오지랖 넓다하겠지만 저주를 퍼붓는 사람은 결코 한둘이 아니리라.                                                                               2011 년 5월 8일  
844    (잡문) 위대할손! 분석님네들 댓글:  조회:2802  추천:0  2017-11-08
                                 위대할손! 분석님네들                                            진 언        분석이란 복잡한 현상을 다양한 각도로 풀어서 론리적으로 해명함이다. 분석도 다층차적이여서 철학분야에서 분석은 개념이나 대상, 그것을 구성하는 단순한 요소로 분해하는 일이다. 칸트에 의하면 선험적분석과 경험적분석이 엄격하게 구분되여있다. 화학분야에서는 물질의 조성이나 거기에 포함되여 있는 성분 등을 물리적 또는 화학적 방법으로 알아내는 일이고 론리학에서는 개념과 문장을 보다 단순한 개념이나 문장으로 나누어 그 의미를 명료하게 하는 일이다.     무릇 분석은 판단의 전제로서 인간의 지적인 사유활동에서 불가결의 요소로 된다. 그러나 모든 분석은 추상성이 고유한만큼 실패할 위험을 안고 하는것이다. 그래서 무엇을 분석하려면 가장 확실한 사실만 가지고 그 사실들이 시사하는 안전선 안쪽에서 기본적인 방향과 대략적인 륜곽만 그리는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한다.     그야말로 "분석" 그 자체로 만족하는것인데 사실상 확인된 기존사실만을 설명하는 수준에 머물기 십상이다. 분석의 동기, 목적이 아무리 옳바르더라도 심층적이고 치밀한 예측은 거의 불가능할수밖에 없다는 설명이 된다. 인간세상에 절대적인 진실은 없다. 누군가 진실을 밝힌다고 선언할 때에도 주관적인 판단이 따르기 마련이다. 단 진실과 거짓의 함량은 어느 정도 객관적 판단이 가능하며 따라서 어떤 주장에 거짓성분이 많으면 진실이 아니라는 결론을 내릴수 있다.     그러나 상황에 따라 가변적인 어떤 현상에 대한 분석은 무효로동이 되기십상이고 그만큼 무의미할 때가 많다. 근거도 증거도 없이 마냥 어찌어찌 된(한) 것으로 추정된다는, 이것도 저것도 아닌 추정성기사가 난당이지만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울수 없거니와 일괄 “부정”이 존재의 리유를 훼멸시킬수는 없다. 아무리 불구대천의 원쑤라도 편견의 늪에 빠져 무작정 부정하려고 억측까지 하지 않으면 안되는  그 작태는 소위 전문가, 교수의 이미지로 볼진대 꼴불견이 아닐수 없다.     사실부정, 현실부정을 하다못해 결과적으로 자기부정, 자기최면에 이르고 더나아가서 폄훼하고 외곡하며 악담같은 일종의 정신적 자위행위에 정신없다. 어떤 목적을 달성하려는 "정밀분석"은 핵심내용에 관련된 "디테일"까지 고려하여 근신하게 다루는것이 일컬어 분석가님들이 갖추어야 할 기본자세이다. 언론매체도 그렇다. 민감한 정보를 전하면서 자신의 주장을 펼치고 싶을 때는 "해당분야 전문가" 혹은 "해외 소식통"을 등장시켜 분석의 정당성을 기하지만 그 나물에 그 밥이 된다.     적대방이 무엇인가 하면 반드시 실패여야 하는 편견이 개탄스럽다. 현실과 추정, 억측을 가리지 못하고 오로지 부정, 폄하해야만 하는 전문가, 분석가, 언론인들은 대관절 전방위적인 사고를 할줄 아는 존재들인가? 의심스럽다. 그야말로 부정, 폄훼, 비아냥만 주입한 로보트들이라 말해도 비아냥은 아니렸다.     무릇 모든 과학기술연구개발은 실패를 전제로 한다. 오죽하면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라고 하겠는가? 또 성공과 실패의 기준은 하나가 아니다. 미국의 아폴로-13은 성공한 실패라고 불리운다. 달착륙목적에서는 실패이지만 우주선개발에서는 거대한 진보를 이룩하게 했으므로 성공이라는것이다. 반대로 실패한 성공이라고 불리운 사례도 얼마나 많은가? 성공과 실패의 구분은 리해하기 탓이라는 소리다.    지식이 없는것은 그런대로 량해할수 있다. 그러나 상식이 부족한건 정말 대책이 없다. 확실하게 장악한 정보는 없고 상식도 부족한 분석가라면 분석가라는 계관을 쓰기전에 인간으로서도 참으로 절치부심해야 할 비애, 불행이 아닐수 없다.     지금 세상은 자본주의세상이 주야장천 생산하는 가짜뉴스를 진짜뉴스로 알아준다.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조선과 관련된 거의 모든 ‘뉴스’를 가짜뉴스라 단언해도 지나치지 않을 정도다. 거짓의 정도 차이뿐 대부분 조선관련 뉴스는 통용어로 사실무근이다. 곤혹스러운것은 전문가들이 분석해낸 그 모든것들이 시간의 고험을 이겨내지 못하고 곧 백일하에 허위성이 발가지는 일이다. 그래도 그냥 무효로동에 열중한다.     몇십년을 두고 한발로 짓밟아버리고싶고 한입에 삼켜버리고 싶지만 고슴도치같고 전갈같은 적성국에 대해 ‘미국제조’(Made in US) 가짜뉴스가 범람하는것은 전혀 이상할것 없다. 거의 모든 조선관련 가짜뉴스들은 워싱턴, 동경, 서울을 거치며 진실로 둔갑한다. 그것을 베끼는것이 진실성이 생명인 언론이 할 일이 된다. 그래서 잡다한 뉴스들을 눈동냥하다 보면 분석가들의 걸작을 전달함에서 재미있는 통용어를 발견하게 되고 말자해도 그냥 반신반의를 앞세우게 된다. 례를 들어보자.      ◎ …가능성이 제기된다. ◎…보여주려 한 것으로 분석된다. ◎ …ㄹ것(ㄴ것)으로 예상 됐다. ◎ …으로 알려졌다. ◎ …ㄹ 거라는 관측이 제기된다. ◎ …ㄴ 것(ㄹ것) 으로 보인다. ◎ …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어 보인다 ◎ …할 것으로 예상된다. ◎ …할 수 있을 것으로 분석했다. ◎ …의도로 보입니다. ◎ …ㄹ것이라는 관측을 낳고 있다. ◎ …라는데 힘이 실리고 있다. ◎ …ㄹ 것이라고 밝혔다. ◎ …는 것"이라고 진단했다. ◎ …는 게 아니냐는 관측도 제기되고 있다. ◎ …것으로 풀이됩니다. ◎ …할 것이라는 관측도 나온다 ◎ …발휘할 것으로 예상된다”고 말했다. 등등,등등.     “말이 곧 그 사람”이라는 공자의 말이 있다. 각자의 판단결과, 문제의식, 성찰 등은 다름 아닌 말로써 체현된다. 사람이 어찌 시종일관 바른말, 옳은말을 하며 살수 있으랴만 적어도 허튼소리를 하지 않으려면 우선 남의 말을 경청할줄 알아야 한다. 맹자가 말한 지언(知言)이란  “비틀린 말로 그 가려진바를 알고 어지러운 말에서 그 빠져있는바를 알고 어긋나게 말하는데서 그 리탈된 바를 알며 회피하는 말로써 그 다함(모자람)을 아는것”이다     만일 ‘말’이 바르고 참되지 못하고 설득력이 없다면 소통이 잘 안되고 사회인으로서 반드시 갖추어야 할 기본자질인 인격력량, 능력, 비전’이 결여한 것이니 처세에 능할수 없을것은 자명하다. 공자가 “어진 사람은 그 말하는것을 참느니라 (론어” 라고 하였듯이 “말이 많으면 실패가 많다” ,“그 말하기를 부끄러워하지 않으면 실천하는것이 어렵다.”“성실하게 수양하고자 하면 빈말(虛言ㅡ허언)을 하지 않는 것에서부터 시작한다” (自不妄語始 자불망어시. 소학외편). “발걸음을 잘못 내딛는것은 고칠수 있지만 혀를 잘못 놀린 실수는 결코 돌이킬 수 없다(벤저민 프랭클린)”. 그러므로 “말하기 전에 세번은 생각하여야 한다” (삼사일언三思一言 ㅡ공자)     “착한 사람들은 첫째, 최상의 말을 하고, 둘째, 법(法, 도리)을 말하고 비법 (非法) 은 말하지 않으며, 셋째, 좋은 말은 하고 좋지 않은 말은 하지 않으며 넷째, 진실을 말하고 거짓은 말하지 않는다” (수타니 파타). 따라서 “참으로 아는 사람은 말이 많지 않다” (지자불언 知者不言ㅡ로자)     사람은 누구나 정도부동하게, 다다소소 거짓말을 하며 살고 남을 속이며 살게된 세상이지만 적어도 자기 자신, 량심만은 기만하지 말아야 한다. 이는 무슨 전문가 아닌 보통사람들도 가슴에 간직하고 있는 금언이다. 그런데 소위 전문가, 교수의 신분으로 “분석가”의 월계관을 쓰고 세상만사 무불통지인듯 고담준론을 펼치며 밥을 벌어먹고 사는 고귀한 위치에서 대중을 오도하며 주구장창 분석타령을 한다면 스스로도 얼마나 면괴한 일일가? 위대할손! 분석가님네들, 자중하소서, 아멘!                                            2017년 10월 8일
843    (진언수상록 71) “민족주의”의 안팎 댓글:  조회:2494  추천:1  2017-10-23
                                       “민족주의”의 안팎                                                       진 언       “민족주의”란 관념상 부정적으로 각인되여왔는데 기실 어떤 일률적인 론리로 설명될수 없는 특징을 고유하고있다. 민족주의에 “주의”라는 말이 붙었다해서 반드시 이데올로기로 락인찍을 필요는 없다. 민족주의가 완전히 비정치적이지는 않더라도 많은 경우 일상적삶과 일상적감정을 규정하는 요소로 작용하기도 하기때문이다. 그리고 정체성으로서의 “민족주의”는 또 다른 화제로 될수 있다.     민족주의를 심리상, 정치상 두개 측면에서 정의한다. 심리상의 민족주의는 일종 심리상태이다. 이런 심리상태는 한 민족의 민족성 혹은 민족리익, 민족독립, 혹은 일종 애국심과 민족자호감을 내포한다. 정치상의 민국주의는 일찍 피압박민족의 자유독립의식을 불러일으켰으며 또한 군국주의, 제국주의, 종족우월주의 및 전쟁 등 죄악을 야기하기도 하였다.     본래 민족이나 민족주의의 개념자체가 정치학적이든, 사회학적이든, 문화인류학적이든, 어떤 시각에서 접근하느냐에 따라 수많은 시각을 내포할수 있는 개념이다. 저명한 사회학자 칼훈은《민족주의(1997) 》에서 민족주의의 다양성을 말하면서 민족주의가 단순한 정치교의를 넘어 “말하고 생각하며 행동하는 근본적인 방식”이라고 주장함으로써 민족주의를 넓은 의미의 정체성으로 보는 관점에 힘을 실어준다.     동양적관념에서 민족을“혈연공동체”로 간주하면 민족이 있기에 민족주의가 있다고 단언하게 되고 반대로 민족을 “상상공동체”로 생각하는 서구사람들은 민족주의가 있어 민족이 있다고 단정한다. 력사적인 특이성으로 해서인지 서구사람들은 민족개념이 동양인들보다 희박하다고 한다. 동양은 중국의 한족, 조선족과 같이 혈통과 언어를 중심으로 개념이 뚜렷하다.     복합상징론자 D. 스미스는“모든 사회는 력사적으로 공유된 상징의식 문화와 같은 민족적인 전통을 가지고있고 그로 인해 정체성이 확보된다. 이를 민족의 종족적 요소라고 볼수 있다. 종족과 민족은 자연적인 집단이다.…민족주의의 힘은 종족적요소에 있으며 현재 지구화의 흐름속에서 민족주의가 다시 고개를 드는 핵심요인이다.”라고 주장하고있다. (《민족의 문화적기초-위계, 성약, 공화국》중에서》    우리 조선민족의 경우, 민족이 있었기에“민족주의”가 형성된것이다. 일제에 나라를 빼앗기나서 민족해방리념에서만 생긴것이 아니라 그전에 벌써 보편적가치의 구현으로서의 민족자존을 고양시키는 심리가 지극히 강렬했던것이다. 민족구성원이 민족국가를 지키기 위해 투쟁하는 과정에서의 의식과 운동속에 동시에 형성된것이다. 례하면 고려의 항몽투쟁과 일제에 반기를 들었던 민족주의가 그래서 원동력이 되였고 그 사상은 훼멸시킬수 없는 민족정신을 발산했던것이다.     이런 력사적사실을 배제하고 세계화의 마당에서 민족은 미구에 사라질것이라는 예측과 주장은 시기상조이고 비현실적이다. 세계화시대라지만 스스로 지구인이라고 느끼고 자칭하는 사람은 없을것이다. 외계인이 지구인을 공격하기전까지는 그렇게 되지 않을것이다. 그런데 민족이 쉽게 사라질수 있겠는가?     지금 세계화시대라는 매혹적인 화제가 통용되고있는데 그야말로 모든 세계사람들 평화공존하고 평등하게 대접받는 세계주의자(코즈모폴리탄니즘)의 시대인가? 약소국 가에 대한 서방강대국들의 억압착취가 더 가심화되고 있는 시대가 아닌가? 그러니 이런 차별과 억압의 시대에 “민족주의”가 더 필수적이 되고 지속적으로 요청된다.     사대주의적인 지식인들이 언제부터인가 민족주의를 배격하는 목소리를 높여왔다. 민족주의는 세계화시대에는 이미 낡은 이데올로기라는것이다. 배타적이며 폐쇄적이라 고 하면서 이제 민족주의를 해체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런 이런 발상들은 기실 자생적이라기보다 서방학자들의 관념에 동조하여 맞장구치는것이다.     강력한 정치력, 경제력, 군사력으로 세계를 지배하고있는 강대국들에게는 특별히 민족주의를 주장할 필요없다. 게다가 후진국의 민족주의는 자기들의 세계지배야욕에 방해된다. 결집된 항쟁세력을 해체하는것이 자신들의 횡포무도에 유리하기때문이다. 그네들이 민족주의를 억압적이고 비도덕적인 이데올로기로 내모것이다     초대강대국들의 파괴적민족주의와 식민지에서 벗어나 독립과 자주를 지키려는 제 3세계국가들의 “민족주의”는 수화상극이다. 그런데 그런자들의 리론을 신봉하여 무작정 추종하는것이 얼마나 황당무계하고 위험한 관념인가. 그것은 진리도 아니고 보편타당한 원리도 아니다. 그것은 후진국들과 약소국의 리익을 침해하는 사상리론적인 무기인데 그것을 얼씨구 부등키려 하니 궁극적으로는 자멸할 일만 남는다.     우리 민족의 경우, 분단민족으로 세계강국들에 둘러싸여 자주적으로 할수 있는 일이 별로없이 마치 주인이 베기에 달린 칼도마위에 고기덩이나 다름없게 된것이다. 이는 반만년의 력사를 기록한 우리 민족의 현주소이다. 이런 상황에서 민족을 통합 하고 외세에 쥐여놀지 않기 위해 “민족주의”는 신장시켜야 할 리념이다. “민족주의 라해서 배타적이거나 폐쇄적이라 말할수 없다. 국제사회와의 협력이나 개방경제와 배치되는것도 아니다. 세계민족지림에서 당당한 민족이 되는게 무슨 잘못인가?     강대국들이 약소국보다 더 민족주의적으로 생각하고 행동한다는 사실을 결코 간과해서는 안된다. 미국인들이 즐겨 말하는 애국주의는 민족주의의 미국식이름일뿐이 다. 인류 모두가 평화공존하고 평등하게 사는 코스모폴리타니즘은 리상일뿐이지 현실이 아니다. 우리가 그런 리상에 어덩덩하게 현혹되여 현실을 보지 못한다면 결코 외세의 시달림에서 벗어날수 없다는것은 불을 보듯 뻔하다. “민족주의”는 썩어버린 정신기둥도 아니고 결코 시대에 뒤떨어진 리념도 아니다.     물론 민족은 피줄로만 결성되는 존재가 아니라는것을 전제로 삼을 필요가 있다. 여러 정치적, 력사적, 문화적요소가 긴 력사속에서 그것을 만들어낸것이다. 그러므로 고대에 여러종족의 피가 섞였다해도 그것때문에 배달족은 단일민족이 아니라는것은 설득력이 부재한 망언으로서 결국은 민족허무주의에서 나온것이라 말할수 있다.     민족의 가치는 우주적이다. 민족이라는 경계는 함수관계에서 변수라고 말할수도 있는 국가의 경계보다 넓은 개념이다. 20세기초 일제가 조선반도를 자기 판도안에 그려놓고 36년간 식민통치를 감행했으나 끝끝내 조선민족을 정복하지 못했는데 과연 무었때문이였겠는가? 바로 유구한 력사의 장하에서 피의 세례를 받으며 키워오고 형성된 그 민족정신, 민족감정(민족주의?)을 말살할수 없었기때문이 아니였는가?     한포기 풀싹도 봄마다 양광을 받고싶어 땅속에서 돋아나온다. 수천년을 내리 여러 강족들에 침탈당한 굴욕적력사를 기록하다가 마침내 분단민족으로 된 오늘날 더구가 세기적인 숙망인 “민족융합주의”가 절실하게 요청되지 않는가? 이 지구촌에서 민족정신만큼 영구불멸할 정신이란 없다. 민족정신을 상실당한 민족은 민족이 아니라 단순히 혈연관계로 얽혀진 인간무리일뿐이다.     민족주의는 정치문제가 아니다. 정치적으로로 해석못하는 문제를  민족주의정신 의 빛과 힘으로 해석할수 있다. 다민족, 다문화의 지구촌에서 수많은 민족들이 얽히고 붐비며 찡내고 화해하며 사는 이 지구촌에서 공존하면서 살륙전쟁이 없는 평화의 대동세계를 이룩하려는 념원과 민족정신의 신장은 결코 상충되지 않는다. 이는 절대적인 진실이요 미래지향적인 진리이기도 하다.                                             2015년 3월 10일
842    (진언수상록 70) 문화 그리 문화인 댓글:  조회:2080  추천:0  2017-10-22
                             문화 그리 문화인                                        진 언         문화인을 한국 어학사전에서는 높은 문화생활을 누리는 사람이라고 해석하였는데 대략 맞되 애매모호하기도하다. “문화”와 “문명”이라는 두개의 영어단어의 어근으로 부터 해석한데 의하면 문화는 원시적의의에서의“ 경작(耕作)”을 의미하는바 농경과 련계되는 원시부락시대의 범주이다. 일반적 의의에서 문명이 곧 문화이다. 문명이란 개념의 원시적인 의의는 “시민(市民)” 이라고 한다. 즉 문화중에서 도시적인 요소, 고도의 기술, 직업분화, 사회계층문화를 가지는 문화의 복합체를 큰 단위로서 파악한 총체로서 문화가 빛의 작용이라면 그 빛이 구현된 실체가 결국 문화인것이다.     문화는 한개 종족진화의 근본으로서 만물지중에 최귀한 인간으로 진화하도록 만든것이요 생존하고 번영창성 하게 하는 정신적, 물질적 결정체이다. 그만큼 인성의 기본속성은 문화성이 되고 이 시점에서 누구나 다 “문화인”이 되는것이다. 인간이 인간인것은 바로 인간이 고도로 발달한 사유능력을 가지고있기때문이다. 사람은 문화가 있기에 부단히 자기를 완선화(教化)하기에 노력한다.     대자연속에는 문명이란 존재하지 않는다.자연계자체에는 사악과 음모술수가 없으며 암투와 혈투, 승진과 몰락이란게 없다. 자연은 그저 자연으로서 문명, 비문명이 없는바 문명이란 인류자신의 발전정도에 대한 자아판단이고 문명은 문화의 결과이자 가치판단이다. 하여 인간은 “文”이 없으면“ 化”도 없으며 “문화”가 없으면 “문명”이란 없다고 한다. 문화와 문명은 기실 동일한 문제에 대한 부동한 제기법이라 할수 있겠다.    사람의 본질적속성이 문화일진대 인간군을 크게 문화적인사람 혹은 문화인으로 나누는데 전통적관념에서 문화인이란 보통 지식인의 총칭으로 통하고있다. 구체 적의미에서는 학식이 있고 예술창작이나 연구에 종사하는 사람들을 “문화인”이  라 하여 지식분자와도 비슷한 의미를 가진다. 그래서 사람은 누구나 문화인으로 살기를 바라기에 될수록 가방끈이 길고 더많은 먹물을 먹으려고 한다.     그런데 교육받은 정도가 비교적 높다해서 꼭 문화인인것은 아니다. 어찌하는 말인가? 단순히 무슨 학력인가를 론할 때 어떻게 얻어쓴것인가를 론해야 할 현시점이다. 왜냐하면 돈이나 위치의 편리를 람용하여 샀거나 차지한 학력“계관”이 너무너무 많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명실상부하는가 하는 문제이다. 절대적은 아닐지 모르나 공자의 말처럼 그 말을 들어야 할뿐아니라 그 행동을 보아야 하는데 주요하게 그행동을 보고 문화인, 비문화인을 가늠할수 있다. 고대문화인들을 “문인무행(文人无行)”이라 평판하였는데 그 좌표는 지금도 적용되고있다.     실속이 없이 허명만 요란한 학벌은 “문화토비”가 아니면 “정신적거렁뱅”이에 다름이 없다. 진정 명불허전의 문화인으로 말하면 종신교육의 리념을 가지고 부단학습의 구지욕이 어떠한가? 진리을 탐색하려 들고 세상을 보는 자기만의 눈이 있는가? 하는것이 전제인데 이는 진리를 지향하는 정신경계에서 확인된다. 다음 심미취향과 심미판단력, 정감세계가 어떠한가에서 금이 그어지기도 한다. 그리고 도덕가치관과 실현의 정당성 즉 품덕의 여하에서 가늠되여야 할것이다.     서방은 물론 동양에서도 지식이 있는 문화인들을 존중하는 전통관념이 수립되여 있다. 그러나“두귀는 창밖에 일을 듣지 않고 일심불란 성현들의 책을 읽던 (两耳不闻 窗外事,一心只读圣贤书”고대문화인들은 현대시점에서는 달리 평가되여야 할것이다. 중국의 문화를 소금문화(盐文化)라 한다. 모든것을 절어 변질하게 한다는 의미도 있을것이다. 멀리를 론할것도 없고 요란하게 론할것도 없이 보통으로 말해보자     문화인의 덕은 다른 사람을 어떻게 대하고 자신을 어떻게 대하는가에서 나타난다. “존중”을 전제로 한 자존자중으로서 유아독존, 안하무인의 자세는 문화인과 인연이 없다. 만약 “문화인” 이라 해서 위선군체가 되거나 초민들의 머리위에 군림한 구세주인체 하거나 사회저층에서의 민생고 따위는 나몰라라 하거나 자기를 평민화할 리성사유를 할줄 모른다면 문화인으로서는 절름발이라 할것이다.     문화인의 정체적자질은 자기가 처한 자연환경을 어떻게 대하는가에서도 나타난다. 길을 걷다가 휘늘어진 가로수가 거추장스러워 뚝 꺾어서 내버리는가? 아니면 약간 허리를 굽히고 지나가는가? 뻐스안에서 년장자, 행동이 불편한 사람에게 자리를 양보할 마음이 있는가? 엘레베이터의 문이 열리였을 때 타인에게 겸양할줄 아는가?  건늠길을 건늘때 우연히 맹인을 보고 부축해줄 아량이 있는가? 등 마음가짐에서 그의 평시에 드러나지 않던 문화소양이 시사되는것이다.     결국 문화인의 자질이란 바로 언론과 행동에서 나타나는 그 자신의 도덕과 자질이다. 가령 호화아빠트에서 살고 고급자가용을 굴리며 컴퓨터로 유희랑 놀거나 노래방에서 아가씨와 이중창을 할수 있는 사람이면 문화인의 차원이라 할것이다. 하지만 이런 일반인식차원을 넘어서 문화란 물질적인소와 그것의 풍요로움에만 있는것이 아니라 우선은 인간의 덕목인 량호한 품성에서 체현된다는 말이다. 더불어 사는 인간세상에서 렴치와 례의를 지키지 않는 문화인이란 있을수 없다. 렴치를 지킨다는것은 인간본성의 동물성을 극복하고 감정적으로 행동하거나 말하지 않고 자기를 절제하는 자기의 인격적약속력이다. 아무리 고급양복에 넥타이를 매고 핸들을 돌린다해도 건늠길에서 어정거리는 로인이 거치장스럽다고 쌍트럽게 욕하면 그 순간 그는 문화인인것이 아니라 곧 야만인이 되여버린다.    세상만사가 문화라는 명칭이 붙어다니는 현시대, 정신병자도 정신병문화인이고 불륜풍류객도 불륜문화인이고 본성적으로 욕질하기 좋아하면 쌍욕문화인이고 폭력적 이거나 인신공격이면 폭력문화인이라고 말하면 극단적인 표현이라 할것이다. 그런즉 문화인이란 얼굴에 붙이고 다니는것이 아니라 정신과 심신에 배인 한 사람의 기본적 품성인것이다. 무릇 살아가는 과정이 곧 그의 삶이요, 평가기준이다. 어쩌면 과정이 곧 전부일수 있다는 말은 거의 진리같은 말일듯싶다     사람은 누구나 공중앞에서는 자기속에 내재한 야성을 숨기면서 교양이 있는 문화인이려 한다. 진정 문화인이 되려면 온유하고 겸손하며 인자하고 봉사하는 덕목을 갖춰야 하는데 자기안에 본능을 억제하고 극복하기란 어렵다. 그래서 덕행은 문화지식의 부족점을 미봉할수 있으나 지식은 덕행의 빈자리를 메울수 없다고 하는것이요. “문화”란 명백한것이지만 “문화인”이 된다는것이 용이하지 않다는것이다.    전통적관념에서 문화인의 기본특징은 종합지상수가 높은 사람을 말한다. 그러나 조금이라도 문화가 있는 사람이면 다 문화인으로서 고급문화인과 보통사람의 구별이 있을뿐이다. 현시대 지천으로 널린 문화속에서 문화생활을 하지 않는 사람이 별로 없으므로 문화층차로 귀천을 따지는것은 고루한 관념이다. 상대적으로 서방문화는 리성에 편중하고 동방문화는 감성에 편중하고 있다는 론제는 깊이 성찰할바라 사료된다.     고차원적인 문화인을 사회의 량심이라고 추대한다. 량지란 내심의 심판자를 의미한다. 루쏘, 볼테르, 졸라,로신 등 선각자들이야말로 진정한 지식분자, 사회정영들로서 확실히 력사시대의 정신기둥, 사회량심의 문화인들이라 칭송하기에 손색이 없다. 수십억의 인간형상이 어우러진 이 세상, 다변하는 이 시대에 획일적인 문화인의 표준이란 있을수 없다. 문화인의 기준은 각자의 심령에 새겨져있기때문이다.                                                                2012년 10월 15일   
841    (진언수상록 69) 지식분자를 재론함 댓글:  조회:1983  추천:0  2017-10-12
                                  지식분자를 재론함                                         진 언       지식분자란 다양한 해석이 가능한 복합개념이다. 지식을 가지고 있다해서 지식 분자인가? 학벌이 높다해서 지식분자인가? 전문인소는 지식분자로 되는 필요조건일 뿐 충분조건은 아니다. 기실 좀 공부하면 일정한 지식이 있고 학력을 가진다. 소학교 학력도 학력이라 지식의 다소, 깊고 옅음, 고저가 있을뿐이다. 지식분자도 사람이므로 인격 력량과 정신경계, 이미지로부터 착안하여 가늠해야 할것이다.     실러는“지식분자는 사상을 위하여 생활하는 사람”이고 “반드시 그 시대의 사회비판자, 현유가치의 반대론자여야 한다”고 단언했다. 례컨대 소크라테스식의 사명을 리행해야 지식분자의 계관을 쓸수 있다. 지식분자의 인격의 핵심은 독립정신과 창조능력이다. 이 시점에서 중국에는 재래로 걸어다니는 책뒤주는 많았지만 명실공히 우러를만한 지식분자는 상대적으로 많지 않다고 말하는것이다.     지식분자의 본질적특징은 무엇인가? 진정한 지식분자는 일체를 시비에 의거하기에 일단 옳다고 판정되면 끝까지 해내고 아니라고 생각되는것은 하지 않으며 그 어떤 정황에서든지 이 원칙을 고수한다. 진정한 지식분자는 누가 정보를 제공해주어도 무작정 채납하지 않으며 비방하고 모욕중상해도 고매한 지조가 흔들리지 않는다.     훌륭한 지식분자는《오직 시비를 따질뿐 일체를 아랑곳하지 않는다》는 사람들로서 자기의 사상과 견해에 충실할뿐 류행되는 사상을 따르지 않으며 다른 사람의 사상, 언론을 호불호의 정서로 대하지 않는다. 서방에는 독립적인격을 상실하고 사회풍조에 따르거나 권세에 붙좇아 대변자가 되고 부정축재에 왼심을 기울인 지식분자가 거의 없었다. 그러나 중국의 인문환경에서는 그런 지식분자가 많이 배출될수 없었다.      세상이 그를 매몰시키려하고 박해해도 이미 각오하고 있었기에 불가피한 최악의 경우도 과감히 맞서서 정시한다. 부귀영화도 진리를 추구하는 그들의 열정을 앗아가지 못한다. 지식분자의 생명은 학문연구에 있고 이를 비판하는것은 운명적으로 부여된 사명이다. 중국의 저명한 인구리론가 마인초(马寅初) 선생이 그 귀감이 되기에 손색없다. 그는 일찍 20세기50년대초에 인구에 대한 선견지명을 내놓았으나 최고권위의 일언지하에 이단자로 전락되였다.     주은래가 견해를 바꾸고 잘못을 승인하라고 권고하였지만 태산이 짓눌러도 허리를 굽히지 않는다는 자기의 지조를 지켜냈다. 하여 북경대학교장의 직위에서 쫓겨났고 나중에는 령어의 몸이 되였으나 시종 권위에 무릎을 꿇지 않았다. 가장 현명한 재판관인 시간이 그가 옳았다는것을 증명하고 루명을 벗었으나 오늘날 보다싶이 중국은 너무나 커다란 대가를 지불하고 있을뿐만아니라 어떻게도 만구할수 없게 되였다.     이렇듯 지식분자는 마인초선생처럼 확고한 신념을 가지고 있어야 하고 그것을 목숨으로 지켜야 한다. 중국에 저명한 지성인인 진연각(陈寅恪)선생도 지식분자에게서 중요한것은《독립정신과 자유적사상》이라고 하였는데 그것이야말로 지식분자의 생명이다. 지식분자는 진리를 추구하는 사명을 지닌사람으로서 진리을 지키기 위하여 옹근 시대에 반기를 든 일들이 희귀한 일이 아니였으나 거개 생명대가를 치렀다.     그러므로 열혈지사는 동양지식분자의 기본선택이 아니였거니와 또 선택일수도 없었다. 안전감이 결여한 처지에서 그들은 자유적리념에서 도망쳐나와 독립자주성을 버려야 했다. 생존위기는 절대다수가 자기의 정신가원과 사상진지를 포기할수밖에 없게 하였다. 자아보존의식만큼 더 중요한것이 있으랴, 환경의 압력하에 생존력량은 지식인의 인생에 결정적인소가 되여질수밖에 없는것이다.     지식이 곧 죄이고 지식을 가진자는“고린내 나는 아홉째(臭老九)”로 불구대천의 죄인이던 시대, “지식이 많을수록 반동(知识越多越反动)”이라는 기특한 관념이 당시의 구호로까지 되고 공부를 적게 할수록 더좋다는 “명언”이 되여 “독서무용론”까지 만연되던 시대에 비교하면 이런 개념들이 엄청 곤혹스럽지 않으랴. “아는것이 힘”이 라는 베이컨의 말도 있는데 사회문화발전을 추동할 “힘”을 가진 사람들이 왜 그때는 그리도 미움을 받아야 했는지 알고도 모를일이다.     일찍 “초계급인성이란 없다.” 지식분자들이 고취하는 인성이란 “실제상에서 자산계급개인주의다.”라고 하였는데 인간의 량심마저 부인하는 극치에 이른 시대였다. 하여 수많은 비겁한 지식분자들속에서 밀고풍이 성행되였고 령혼을 팔고 사람을 물고 늘어지고 사람을 잡는자가 관운형통(官运亨通)으로 되는 사이비인문풍경이 그려졌다.     그리하여 독립과 비평은 일반적으로 중국지식분자의 가치관과 전통이 아니였으며 더구나 추구일수 없었다. 고대중국의 지식인들에게는 자기의 견해나 계책을 위정자가 채납하면 더없는 영광이였다. 이러한 가치취향이 존속되여왔기에《대동란》시기 진시황의《분서갱유》도 긍정하는 글을 쓴 야비한 어용문인도 나왔다.       그런 피바람에 지식인들의 독립인격, 독립사고능력을 운운할 나위가 있었으랴, 지식분자의 량지는 비틀어지고 문인의 기본품격인 골기는 마침내 뼈도 추리지 못하게 되였다. 그로써 치유불가의 후유증을 낳았고 문인의 량지와 골기는 오늘날도 자못 삼가할바로 되였다. 시대는 변했다. 오늘의 중국은 30년전의 중국이 아니며 지식인들도 30년전의 지식인들이 아니다. 현대중국지식인은 리욕적인 자아로, 명리추구의 자아로 모습을 바꿨다. 지식정보사회, 지식경영시대의 지식인들은 더는 배고픈 소크 라테스가 되려하지 않는다. 부귀영화의 벼슬을 갈구하는 지식인들이 갈수록 많다. 기실 그리된 후에는 더는 지식분자라 칭하기 어렵다. 왜냐하면 실제상 독립사상의 조건을 포기고 권력체계속에서 독립적사고 혹은 창신성이 발휘될수 없기때문이다.     지금 신주대지에 넘치는것이 문인들이지만 진정한 문인은 상대적으로 많지 않다. 문인은 문인으로서의 지조가 있고 골기(文骨)있어야 한다. 문인들이 고유의 품격을 상실했다는것은 진정한 문화인의 타락과 상실을 의미한다. 전통적문인은 우아했고 현시기 문인들은 속되며 구시대의 문인은 문장을 근본으로 하였지만 현시기 문인들은 글을 사다리로 삼는다. 지식과 학위로 득세하려는 자아로써 자신의 력량을 그 어느 시대의 지식인들보다 더 풍요롭고 안전한 삶을 영위한다고 자긍한다.     지식인의 이런 확신은 천재의 시기로 명명되였던 서방근대사에 비교하면 허황하기 짝이없는 자족심리요 자기 기편이다. 실력보다 명분이 앞서고 소신껏 일하기보다 얼렁뚱땅 적당히 둘러맞추고 침소봉대하는 기량만 있으면 웅장과 고기를 다 제염낭에 넣을수 있다. 다른 업종처럼 산품을 생산할뿐 정신량식을 생산하지 않는다. 그러니 학자사회에서 비판정신이 사라진다면 일반 시정사회와 전혀 다를바없다.    서방세계에서 지식분자의 다른 표현은《비판》이다. 졸라는 《지식분자선언ㅡ나 의 공소》에서 “진리와 거짓을 폭로해야 하고 대립면에서 부정적인 전파자가 되여야 하며 정치와 전제 등에 대해 질의할수 있어야 하고 모종 정도에서 준정치적대항의 립장에 서야 하며 변연화의 비판자가 되여야 하고 비판성은 선구자의 사명을 지녀야 한다”고 선언했지만 어디까지나 독립적인 언론권이 부여될 때만이 가능한 일이다.     서방에서는 지금도 지식분자를 “사회의 량심”으로 칭하면서 그들을 인류의 기본가치( 리성, 자유, 공평)의 수호자의 대명사이다. 명실상부한 지식분자들은 상술한 기본가치에 근거하여 사회상의 일체 비정한것들을 비판하며 이런 가치의 실현을 위해 혼신을 다바쳐 분투하는 사람들이다. 이러한 지식분자를 우러르고싶다.                                                                  2011년 2월 8일
840    (수필) 양띠를 말하다 댓글:  조회:2244  추천:0  2017-10-03
                                                   양띠를 말하다                                                                                             최 균 선     나는 평생 무슨 띠가 좋소, 나쁘오 하는 설왕설래에 별로 신경을 쓰지 않았는데  어느덧 일곱번째 양띠해 전야, 청도의 한 녀제자가 핸드폰으로 “양해는 한수의 노래, 노래속에는 온통 환락이여라, 양해는 한폭의 그림, 그림속은 금수(锦绣)여라. 양해는 한마당 꿈, 꿈속에 모든것 행복하여라. 양해는 한척의 돛배, 배에는 양광이 넘치여라. 양해를 맞으며 즐거움이 끝없기를 축원해요.”라는 메시지를 보내여와서 새삼스레 양띠에 대해 알아보고싶은 흥심이 생겼다.     중국 민간에는 양띠생이 운수가 사납다고 와전되고있다. 양띠생이면 조실부모하거나 중도에서 상처(상부)하거나 혹은 만년에 아들딸을 잃는다는 등등. 그래서 사람들은 양띠를 꺼리면서 양해에 생육을 피하려하는 풍습까지 전해졌으니 이만저만 미운 양이 아니다. 한편 양띠라도 6,7,8월에 났다면 풀이 무성한때여서 좋다하고 겨울에 난 사람은 먹을 풀이없는 때여서 매우 처량하다고 한다.     “십양구불전(十羊九不全)”이라지만 문헌에는“십양구복전 (十羊九福全)” 이라 양은 행복이 미만함을 상징한다고 한다. 어떤 사람이 “십양구불전 (十羊九佛 全)”이라고 잘못 쓴것이 그냥 와전되여 (十羊九不全)으로 굳어진것이라고 해명하고있다. 잘못 전해진만큼 사실 양은 금기시할 동물이 아니다.     양은 인류가 가장 일찌기 사냥하거나 사육한 동물중의 하나로서 원고시기에는 극히 높은 지위를 차지하였다. 그리하여 중화문명의 발전사상 “양”이 일으킨 작용은 심지어 “룡”을 초과한다고 한다. 중화의 인문시조로 추대하는 복희와 염제는 모두 “양” 과 “혈연관계”과 있다고 말하고있다. 하여 5천년 긴긴 력사의 장하를 이룬 중화전통 문화속에는 거의 모든 곳에서 “양의 유전자인소를 찾아볼수 있다” 고 쓰고있다.     중국의 력서에는 양은 가장 따스한 정을 가진 띠로 되여있다. 그래서 양년에 난 사람들은 남에게 베풀기를 좋아하고 양띠생의 사람들은 왕왕 정직하고 친절하다고 정의되고있다. 그외 옛사람들의 안목속에는 양과 수많은 아름다운 일들이 련계되여 있다고 각인되여 있었다. 그리고 “羔食于其母,必跪而受之)”라는 말이 있듯이 양은 “효도, 례의를 알다”의 전범 (典范)으로 보았다고 한다.     양은 순하디 순하여 순종의 대명사로 되고있다. 사실 양도 소나 돼지처럼 인간에 헌신적이다. 양가죽, 양털은 사람을 따스하게 해주고 고기는 가육이고 양똥은 좋은 밑거름이 되기도 하고…양이 먹는것은 풀이지만 사람들에게 공급하는것은 가육인데 재수없는 양이라니 양으로서는 얼마나 억울하고 원통스러운 일인가!“十羊九不全” 설법의 래력은 모종 의미에서 양족속들의 비참한 조우에 대한 총결이라고나 할가,     불쌍하고 불쌍한 양이다. 양은 자기를 방어할 무기가 없는 동물로 맹수의 먹이가 되는데 어떤 리유에서인지 중국의 고경(古經)에는 일반백성을 양으로 표현하는 경우가 많았고 정약용도 백성을 양이라고 지칭하며, 관리들과 결탁한 깡패같은 토호들의 일반백성을 향한 폭력과 횡포로부터 안전하게 지켜주는것이 목민관이다.”고 했다.     양의 성질이 온순하고 순박하며 착해서일가? 양은 유사이전 복희씨(伏羲氏) 때부터 희생(犧牲)으로 길러져 하늘과 산천, 조상에 제사지낼 때 제물로 바쳐져왔다. 그래서 양하면 의례 희생되는 희생양(犧牲羊)이란 말이 생겨났는지 모른다. 숫양에 이르러서는 이야기가 좀 달라진다. 순한 양이 아니라 메돼지처럼 저돌적이기까지 하다. “저양촉번羝羊觸藩)”이라는 고사성어가 있듯이 숫양은 무엇이든지 뿔로 받기를 좋아하여 울타리를 받다가 뿔이 걸려 꼼짝달싹도 못한다는 뜻으로 진퇴량난을 의미하는 말이다. 저돌적이고 융통성없는 사람을 일컫는 말이기도 하다.      어쨋거나 양은 분명 길상물이로되 양띠해는 모두 꺼리고있으니 곤혹스럽지 아니한가? “羊”자에 대한 해석은 결코 나쁘지 않다. “羊”자는 상형문자로서 많은 자와 조합되여 새 한자가 만들어졌다. 례하여 “祥、样、羹、美、姜、善 ” 등이고 번체자로 “義”자도 그렇다. 그러니 글자를 보면 불길한 의미가 없다.     더 풀어서 말한다면 양(羊)을 나타내는 한자는 모두 좋은 의미를 띠고있다. 아름다울 미(美)에서 (大)는 크다는 의미에 앞서 사람을 뜻한다. 세상에서 제일 “큰것” 이 사람이다. 그러니 양같은 사람이 가장 아름답다는 뜻이다. 상서로울 상(祥)은 볼 시(示)와 합쳐진 글자로서 양을 본다는 뜻으로서 양을 보면 좋다는 뜻이다. 무리 군(群)는 양들이 무리지어 사는데 전혀 문제가 없이 잘 산다는것에서 유래되였다. 착할 선(善)도 양처럼 순하게 말하라는 뜻이다. 그러고보면 양(羊)가 들어가는 한자는 다 좋은 의미만 띠고있다.     력사상 수많은 양띠생 명인들이 있다. 례하면 위무제 조조, 당태종 리세민, 청태조 누르하치 등 양띠생의 제왕들이 있고 구양수, 사마광, 심괄, 증국번 등 고대의 정치가, 군사가, 문학가 등이 모두 양띠생이고 청조초기의 사상가 왕부지(王夫之)도 양띠이다. 명성이 만천하에 뜨르르한 명배우 주윤발, 장자치 등도 다 양띠생이란다.     그래서 양띠해는 길상스러운 해라고 한다. 가라사대 원만한 해, 긴장이 완화되고 타인과는 물론 자기 자신과도 평화로워지는 때이다. ㅡ예술의 후원자인 양은 우리의 본성안에 있는 모든 창조성을 일깨운다. 우리의 예술적, 미적시도는 생산적인 결과를 낳게 되며 우리들의 상상력도 풍부해진다. 양은 또한 염세적인 성향도 지니고있어 사소한 문제에도 지나치게 민감해지고 조바심도 친다. 결과적으로 양해는 소용돌이치는 행동의 해가 아니라 성찰의 해라는것이다.   《조상의 띠풀이》책에 양띠를 이렇게 쓰고있다. “나는 자연의 총아, 나는 신뢰하고 신뢰로써 보답받는다. 운명은 나의 용모에 미소짓고 나의 온화한 사랑속에서 만 물은 피여난다. 나는 내가 보는 모든것 속에서 아름다움을 애써 찾는다. 나의 얼굴은 아름답고 은총으로 가득차있다.ㅡ나는 양띠이다.” 이런 풀이는 또 어찌된것이냐?     운세를 풀어 가로사대, 양띠생은 착한 자선가이고 순수한 본성과 친절한 마음씨 덕에 대체로 행운이 따른단다. 양띠라도 오행에 따라 다소 각이한 특색을 띠고있단다. 금(金)의 양띠는 그 자신을 굳게 신뢰하고 자신의 재능의 가치를 안다.“금”의 성분은 넘치는 예술적 기질을 강화시키므로 끊임없이 모든 형태의 아름다움을 추구하도록 고취한다. 바람직한 금의 양띠이다.     목(木)의 양띠생은 사려깊고 성격이 좋고 여유있으며 타인의 바램도 념두에 둔다. 감수성이 예민하고 남을 기쁘게 하지만 나무의 성분이 결합되여있어 경박하지 않다. 그의 본성은 변함없고 인자하며 견고한 도덕적원칙을 지니고있다. 이 사랑스러운 양띠생은 자신이 믿는 사람을 철저히 신뢰하며 자신의 진정한 가치를 알면서도 다른 사 람들이 자신을 리용하도록 허용한다고 한다.     각설하고, 고인들이 양을 12지지에 넣은것만으로도 양이란 즘생이 선인들의 심목속에 중요한 지위를 가지고있었다는것을 충분히 설명해준다. 선조들이 양이 가지고 있는 길상스럽고 아름다움, 선량, 효성, 정결한 품질을 인정해 준것이다. 그러하되 기실12지지는 일종 문화부호로서 특수하고 신비한 력량이 없다. 문화전통을 객관적으로 투시하면서 길상스러운 양띠를 지어준것은 선인들의 아름다운 축원이라고 생각하면 느긋한 미소를 지을수도 있을듯싶다. 양띠생들이여, 상심하지 마시라.                                                                                           2015년 1월 5일
839    (진언수상록 68) 인성악의 극치 댓글:  조회:3536  추천:0  2017-09-28
                    인성악의 극치                                       진 언       인간은 동물적 야성과 리성적 본성을 지니고 있어 동물과 류사하면서도 또 다른 물종이다. 인류는 현대문명인으로 되였지만 인성과 야성 두가지를 다 보존한 모순의 복합 동물로 진화하였다. ‘인간’은 호모 사피엔스(생각하는 존재, 리성적존재)라는 종족의 구성원과 대등한 의미로 사용되지만 단순한 생물학적 종이 아니라 도덕적 능력과 자의식을 지닌 존재라는 의미로 ‘인격’이란 말로 표현되기도 한다.     생물로서의 본성을 지니고 있는 인간이지만 생명의 리유와 가치는 론리적으로 설명할수 없는 초론리의 범주에 속한다. 인간에게는 리성적 본성이 고유하기에 생물 학적인 기본적 욕구외에 명예욕, 소유욕, 권력욕 등 욕구를 가지고 있는데 리성의 작용때문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은 리성적동물”이라고 정의하였다.     리성은 인간의 직관능력이며 론리적, 론증적 사고능력에 의거하여 좋고나쁨, 옳고그름을 구별하는 능력이다. 사람의 사람됨은 리성을 가지고 생각하며 행동하며 그 사회를 이루며 그 안에서 살아갈줄 아는데 있다. 인간행위의 도덕적 판단기준은 크게 칸트로 대변되는 의무론, 아리스토텔레스로 대변되는 목적론, 벤덤으로 대변되는 공리주의가 있다. 동물은 약육강식의 론리로 약자를 잡아먹으며 번성해왔다. 동물들만 그런것이 아니라 인간들이 서식하는 지구촌 곳곳에, 이 마음 저 마음, 내마음속에 숨겨진 인간악, 모든 사람들의 마음속에 둥지를 틀고있다가 무시로 튀여나오고있다. 사람들이 모여 이루어진 사회에서 일어나는 악이기에 인간악이라고 명명한다.     인간악을 대학처럼 계(系)로 나눈다면 횡포계, 싸움계, 전쟁계, 거짓계 등일것이다. 짐승보다 고귀하다는 인성이 스스로 조롱당하고 있지 않은가?! 무지경으로 넓어지고 깊어지고 높아지는 횡포계의 경관은 사람들을 경악하게 한다. 세계경제위기에 못지 않은 인간성 상실의 위기시대가 도래한것이다. 선행의 기도는 거짓발림이고 악행 만이 본성인 악인들, 착한사람으로 사람을 살리고 또 살리는 착한 일에는 인제 넌덜머리가 난듯 포악성과 잔인성이 인간비극을 빚어가고있다.     인간증오와 배척은 폭력의 근원이고 목표는 독식이다. 유사이래 하루도 멈춘적이 없었던 타민족들간에 벌어지는 인간비극은 얼마나 처절했던가? 국제적인 살인악마라 하면 구라파에서 히틀러를 첫손에 꼽는다. 동양에서는 2차세 계대전시기 중국을 비롯한 아세아각국을 강점한 일본황군의 이중적 인간성은 인간의 잔인성이 어디까지인가? 하는 치떨리는 의문을 가지게 한다.     서양에서는 뇌구조가 일반인들과 다른 자들로, 타인과의 공감을 전혀 이뤄내지 못하는 “무공감자”들을사이코패스(Psychopath)고 한다. 이들보다 더 무서운 악한들을 소시오패스(sociopath) 라고 한다. 량심없고 얼음같이 차디찬 심장을 가진 인간들을 가리킨다. 이런 인두껍들은 잔혹하기 그지없고 주변인들에 대해 기만적이고 비인간적 이며 무책임하고 타인의 생명안전을 중요히 여기지 않는 데다가 다른 사람을 해코지 해도 전혀 가책을 느끼지 않는 인성과 량지가 살실된 자들이다.     역시 지난 이야기지만 섬나라 황군들속에 사이코패스 혹은 소시오패스들이 많았 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중국 중앙당안국은 일제전범 자백서 45편을 련속 공개하였는데 일본군 간부출신의 기이치 스미오카(住剛義一)라는 자의 서면자백서를 홈페 이지에 공개했다. 기이치는 자백서에서 "1942년 7월 태원시에 주둔할 때 포로 220여 명을 산채로 과녁으로 만들어 일본군 각 1명당 포로 1명씩을 살해하도록 했다"고 적었다. 1942년 8월에는 기관총 부대 신병 70명에게 포로 70명 을 죽이 라고 명령했고 각 교관과 조교 및 신병 340여명이 모두 340명의 포로를 죽이기게 명령했다고 고백했다.     그는 1942년 2월에는 요충지 점령을 위해 중국인 마을을 습격할 당시 장티푸스 및 검색하기">콜레라균을 민가의 식기와 탁자 등에 묻히는 방식으로 세균전도 펼쳤다고 밝혔다. 그는 자신과 부하들이 수차례 중국인 녀성에 대해 강간을 일삼았다고도 고백했다. 1942년 6월에는 20살 남짓의 젊은녀성을 자신이 강간한뒤 부하들에게 이 녀성의 어머니를 강간하라고 시켰다고 털어놓았다. 그와 자신의 부하들이 중국인 녀성을 범한뒤 부대장에게 들키지 않으려고 이들을 살해한적도 있다고 했다.     중국사람 645명을 살해하고 724명을 고문했다는 일본경찰출신 전범의 자백서도 공개됐다. 1934년 10월 만주국 경무지도관으로 중국에 오게 된 그는 195 4년 작성한 이 문서에서 "1935년 8월 폭행, 물붓기, 매달기 등의 방법으로 체포된 중국인 20여 명을 고문했다"고 진술했다. 또 동료인 '이시다'가 구금된 중국인 두명을 "반일사상이 농후하다"는 이유로 참살한뒤 희생자들 뇌를 '약'으로 만들었다며 "나도 하나를 먹었다"고 진술했다.     특히 그는 1945년 일본이 패망할 때까지 자신이 10여 년간 중국인 645명을 살해하고 724명을 고문했으며 민가 47채를 불태우고 부녀자 14명을 강간했다고 진술했다. 일컬어 황군이 천하에 가장 추악하고 잔악하여 악마짓을 서슴치 않았다는것은 세상사람들이 다 알고있다. 사람을 학살하고 학대하며 쾌감을 느끼는 위대한 인성, 그리고 그것을 기록하고 무훈담을 얘기하듯 지껄여대는 “인성”을 지닌 섬나라의 문명개화한 “인간”들이 있었다는것은 인류의 수치, 비애가 아닐수 없다.     이런 인간악들에 몸서리치노라면 오늘날 국제적 전범이라고 자칭하는 인권국인 미국인들의 인간성을 련상하게 된다. 세계질서를 수호한다는 세계헌병인 아메리카 합중국에서 백인경찰이 적수공권의 흑인을 개패듯 패고 사살하는 참상이 전파를 타고 전세계에 알려졌다. 참으로 번지르르한 말씀과는 너무도 다른 “인권주의”극치가 아니란 말인가? 약자에 대한 무차별적인 폭행을 그 백인경찰은 가공할만한 강자라 하겠다. 그런 행위를 도덕적결함, 개인의 일탈이라고 보아야 할가? 폭력을 좋아하는 자들에겐 인권을 론할 건덕지도 없다.    서양인들이나 과거 일제황군들은 “우리”라는 말을 썼을것이고 서양어에도 “우리” 라는 개념이 있을것이다. 인류 전체를 놓고 말할  때 우리라는 말에는 내가 들어있고 네가 들어있다. 그래서 우리가 우리를 우리라고 부를 때 끈끈한 정으로 여럿을 묶는다. 그래서 관습상 보통 “우리”면 모두를 말하는것으로 인지되여 있지만 창망한 우주에 성계가 있고 성좌가 있듯이 인간세상에도 “우리 인류”라는 경우를 내놓고는 기실 끼리끼리의 “우리”만 있는 상황이다.     인연과 리익관계상 자기와 함께 자기와 관련되는 여러사람을 다같이 가리킬 때의 우리, 또는 자기나 자기편을 가리킬 때 진짜 “우리”가 있다. 이를테면 국제상에서의 리익집단으로서의 우리, 사회상에서 가진 저들의 우리, 못가진 그들의 우리, 권력계 층에서 급별로서의 우리, 분명 불공평하고 비리한 상황임에도 침묵을 선택해야 하는 약자들로서의 우리, 자기 목소리를 낼수 없는 존재들로서의 우리… 등이다.     서로서로 우리라고 말하는 인간군들인데 륜리성은 제쳐놓고 인간적으로 도저히 용납못할 악행들이 련속부절히 발생하는 인간사회의 참상들을 두고 무슨 말을 하며 어떻게 형용할수 있단말인가? 뒤틀려도 더럽게 비틀어진 인성악이 극치에 이르러  폭력, 학대, 살륙 등 가지가지 비극들로 점입가경을 이루었다. 이것도 인류사회에 보편적인 상식문제인가? 나로서는 알수 없다. 오로지 인간악을 저주할뿐이다.                                          2017년 4월 8일 (부록)                                          500余种酷刑揭开日本侵略者“魔鬼”面目           2017年07月14日 09:53:11  来源: 新华每日电讯10版         新华每日电讯记者周长庆、刘硕    侵华日军酷刑多达34类、500余种,可谓集古今中外残忍与残暴手段之大成,空前绝后,罄竹难书   侵华日军酷刑之酷、之虐、之恶、之毒、之暴、之耻,更是达到了极点,非语言能形容,真是正常人不能为,善良人不愿想,心软人不忍睹,胆小人不敢看,其暴虐残酷无耻的程度是人类酷刑史上罕见的   吉林省两位专家经过十年专题研究发现,日本侵华时期特别是在中国东北进行殖民统治期间,利用和“发明”各种惨无人道的酷刑,残忍折磨和虐杀抗日军民、普通群众以及盟军战俘等外国人。这些酷刑多达34类、500余种,可谓集古今中外残忍与残暴手段之大成,空前绝后,罄竹难书。   有关专家认为,日本侵略者的酷刑虽然不能摧毁中华民族的“血肉长城”,但应该引起爱好和平的人们的关注与警惕。二战后远东国际军事法庭已把酷刑拷问列为日本战犯的战争罪行之一,而酷刑作为侵华日军的集体犯罪行为,至今仍未得到充分的揭露与清算。 “十年磨一剑”揭露日本侵略者酷刑   在二战后中外有关日本侵华暴行的研究中,往往集中在大屠杀、“慰安妇”和人体实验、细菌战与化学战方面,而对日寇及其帮凶在中国各地对抗日军民和普通群众普遍施行的多种多样的酷刑、虐待,因重视不足而没有开展深入研究。有鉴于此,中共吉林省委党史研究室征研一处处长、研究员王宜田和吉林大学马克思主义学院副教授巩艳,历时十年,对侵华日军主要在东北实施的酷刑进行了专题研究,填补了这一空白。他们在散见于各类战争史实的中外档案资料或著作中寻找相关记述并进行归类总结,2016年末,他们的专著《罪恶——东北沦陷时期日军酷刑犯罪实证》(以下简称《罪恶》)由吉林文史出版社出版发行。这也是中外第一部专门从酷刑角度揭露二战日军暴行的研究专著。   “要把侵华日军酷刑的种类写全、把同胞受难的经历写全、写准是一件非常不容易的事情。因为其酷刑种类繁多,五花八门,我们只能以刑具的物理性质和受刑人的部位加以分类和命名。”王宜田说。   记者强忍着精神痛苦,多次翻过《罪恶》这本书,一个真切的感受就是:无论是中世纪西班牙宗教裁判所的水刑,还是美国中情局在关塔那摩监狱的水刑,乃至一些国家警察对示威者使用的辣椒水喷雾剂,比起侵华日军在中国东北实施的“水刑”相比,只能是“小巫见大巫”了。据《罪恶》披露,1906年日本在中国东北设立铁路和领事馆警察署的同时,就把“灌凉水”酷刑引进来对中国人使用。据统计,在伪满洲国,日本军警宪特使用的灌凉水方法就有33种之多,如灌辣椒水、灌煤油、灌凉水掺小米、灌凉水掺头发、灌臭水、灌马尿、灌粪便、浇开水……在华北,侵华日军和汉奸打手竟给灌辣椒水起个“好听”的名字——“放焰火”,因为人被倒着灌辣椒水时,会呛得从鼻子嘴里喷出血水来,喷得老高。实际上,二战期间,所有被日本军队侵占的国家和地区,日本宪兵都使用过灌凉水、辣椒水的酷刑,新加坡华侨把这种酷刑叫“东京酒攻”,闻之色变。 酷刑揭露“恶魔”真面目:日本侵略者集体犯罪   “酷刑是人类社会发展史上极其野蛮残暴的行为,而侵华日军酷刑之酷、之虐、之恶、之毒、之暴、之耻,更是达到了极点,非语言能形容,真是正常人不能为,善良人不愿想,心软人不忍睹,胆小人不敢看,其暴虐残酷无耻的程度是人类酷刑史上罕见的。”王宜田说。   研究表明,日本的酷刑犯罪是以日本国家法律、法令和军队命令为依据,由日本宪兵、军队、警察、特务、看守、监工、开拓民、教师等共同实施,并唆使、强迫伪满洲国军、警、宪、特、汉奸等参与其中,共同加害于中国抗日军民和普通群众,其残忍程度超出当代人的想象,是日本的地地道道的国家战争犯罪。   王宜田认为,日本侵略者对东北各族人民实施的酷刑不但是日本法律明文规定的,而且是按照日本关东军司令部所颁布条例、命令执行的,更是在日本关东军、关东宪兵队各级军官命令下实施的。从其性质上来看,这是国家与个体共同实施的“依法行为”,体现出酷刑罪恶的国家属性,是日本侵略者的集体犯罪。   在日本宪兵训练大纲中就列入了刑讯方法,包括鞭打、灌水、火烧、水烫、电休克、膝关节脱臼、悬梁、跪利刃、切除手指甲和脚趾甲,以及折断手指和脚趾。许多宪兵军官还“发明”自己一套刑讯花样,在其侵占地区肆无忌惮地使用。   二战时期,盟军缴获的《日军审讯守则》第二节称:“通常应使用的手段有……一般的拷问、毒打、撞击和一切能使肉体痛苦的方法……”日本关东军参谋本部制定的《俘虏审讯要领》,规定了使用酷刑原则和具体酷刑,并规定“拷问要持续给肉体以痛苦……拷问实施的手段要考虑方法简便,没有残忍感,痛苦的持续性强,不留伤害的痕迹”。有了这样的官方法律依据,日伪军警宪特拷打中国的抗日人士和无辜民众时更加有恃无恐、毫无人性。 “恶魔”制造“人间地狱”令人发指   据《罪恶》一书披露,在伪满洲国,日本侵略者和其帮凶不仅将古今中外各种酷刑“发扬光大”,还“发明”了很多更为残忍的酷刑。   比如,在零下三四十摄氏度的严冬有各种“冻刑”方法:最普通的是浇凉水,还有先打后冻,光脚在雪地上冻,趴冰上冻,塞水缸里冻,裸体在室外站立,裸体坐雪地上浇凉水,绑电线杆或旗杆上冻,还有什么“打坐”(把人赤身裸体埋雪堆里、外面只留个脑袋),“蘸糖葫芦”(叫人跳冰窟窿里“洗澡”、出来被风一吹冻成冰人),“冻冰棍儿”(把人衣服扒光、绑上,站在冰天雪地里浇凉水)……   卑鄙无耻、心理变态的日本侵略者还“发明”了各种“阴刑”,即对男女性器官实施火烧、针刺、刀捅、脚踢,甚至用猪鬃刺尿道,用狼狗咬男性生殖器,割下妇女乳房,剖开孕妇肚子,往阴道里塞瓶子……其龌龊下流之酷刑,绝非当今的人们所能想象。   日本侵略者魔鬼般的酷刑折磨和其他暴行,对于沦陷区特别是东北人民来说无异于“人间地狱”一般。酷刑甚至激起了一些尚有良知的伪满洲国警察的严重不满甚至武装暴动。   1945年4月5日,伪满黑龙江通河县“警尉补”王金财率领部分警察发动暴动。他们打开县“矫正局”监狱大门,释放了被关押的爱国民众180多人;占领伪警备队,解救了关押在此的东北抗联三路军迫击炮营营长谢洪升;最后占领伪县公署,武装起300人的起义队伍,向城内的日伪军警官吏进攻,打死日本军警34人、伪满特务2人,放火烧毁县公署大楼、警察署、汽油库和大批物资。这就是震惊伪满洲国的“通河事件”,又称“四六”反日暴动事件。4月6日,日伪当局紧急调动邻近地区大批军警将暴动扑灭。8月12日,王金财等被捕的37人在佳木斯被日寇枪杀。   据调查,王金财领导暴动的原因很简单,就是难以容忍日伪特务和警察对中国同胞施以各种惨无人道的酷刑。暴动发生前,他负责守卫县“矫正局”监狱。当时日伪当局大肆逮捕当地抗日民众并严刑拷打,使关押在此监狱的267人中被折磨致死达188人。受刑同胞的惨叫声不绝于耳,死亡者的尸体被扔到附近田地里。基于同情、怜悯和义愤,王金财遂带领亲信毅然发动了反日暴动。“通河事件”给日伪当局以强烈的震撼,迫使他们暂时停止了在通河县的“矫正”政策。 酷刑难撼共产党人革命意志   王宜田说,研究发现,在伪满洲国所有遭受日本酷刑拷打的人群中,中国共产党人是最坚强的。因此,他们在《罪恶》一书专写了“日本酷刑下的共产党员”一节,讲述了杨靖宇、张浩(林育英)、赵一曼、金剑啸、于天放等人意志如钢、气贯长虹的英勇事迹。此外,还在“日军酷刑下的爱国志士”一节中,介绍了一些宁死不屈、视死如归的东北义勇军、国民党爱国人士和普通百姓的可歌可泣的事迹。   在硝烟弥漫的冰天雪地战场上,抗日民族英雄杨靖宇(原名马尚德)威震敌胆的英雄气概已闻名遐迩,他在日寇酷刑面前的坚贞不屈却少有人知。那是1929年7月,党中央派遣正在上海学习、化名张贯一的杨靖宇到东北工作,中共满洲省委任命他为中共抚顺特支书记。8月30日,由于叛徒出卖,他在抚顺被日本警察逮捕。敌人根据情报断定张贯一是新来的共产党人,当晚就开始审讯。马尚德在老家河南从事革命斗争时曾3次被捕,有着刚强的革命意志和丰富的斗争经验。敌人不论怎么审讯,他一直坚称自己是开杂货铺的,不知道什么是共产党。连续几天,敌人使用了坐老虎凳、皮鞭抽、灌凉水、灌马尿、上大挂、烙铁烙、蚊虫叮咬、水牢浸泡等酷刑,他被折磨得伤口感染、腐烂,高烧不退、气息奄奄,但始终不承认自己是共产党。后来他被以“反革命嫌疑罪”判处有期徒刑1年6个月,1931年4月刑满出狱后又不幸被捕。直到“九一八”事变后,杨靖宇才在党组织营救下出狱,投入到组建东北抗日联军、同侵略者血战到底的伟大斗争中。   抗联女英雄赵一曼因伤被俘后,日本警察特务为逼她供出情报,无所不用其极,对她先是施用钢丝鞭抽、老虎凳、竹筷夹手指和脚趾、拔牙齿、灌凉水、压杠子、搓肋骨等“轻刑”,后来又使用盐刑(向伤口撒盐)、钢针、铁钎、竹扦刺指甲缝、烙铁烙胸背大腿以及坐电椅子等“重刑”,还有难以描述的专门刺伤女人柔软之处的酷刑,但都未能使她屈服。在赵一曼就医监护治疗期间,敌人还“抓住她的头发往墙上乱撞,用烟头烫伤她的脸,成绺地揪下她的头发”,把她折磨得死去活来。尽管如此,她始终守口如瓶,表现了大无畏的英雄气概,直到最后英勇就义。   于天放,又名王文礼,是黑龙江呼兰人,曾任东北抗联第三路军第六支队政治委员、总部军政特派员兼宣传科长。他被捕后奇迹般地从伪满北安监狱逃脱,新中国成立后曾任黑龙江省副省长、黑龙江大学校长等职。1944年12月19日,因叛徒出卖,于天放被伪庆安县警察署逮捕。入狱第一个月,日本特务为了收买他,用尽各种办法软化他,但他毫不为其所动。敌人开始对他使用酷刑,先打手板、用皮鞭抽后背,然后是灌凉水、吃“红枣”(用烧红的烙铁烙皮肤),最后用电刑,几乎尝遍了所有的酷刑。他在新中国成立后回忆道:   “其中最好挺的是打手板和鞭背,打了几下就麻木不觉疼了;电刑过急,一碰就不省人事了,咬咬牙就挺过去了;最难挺的是灌凉水,使人七窍流血,头发变红(由发孔冒血),几次昏死……有一种电刑,碰上不能马上昏死过去,专使心脏震动,非常难忍。这些酷刑,我受过五六次。”   无论多么惨绝人寰的酷刑,铮铮铁骨的于天放都咬牙挺过来了。他不甘心坐以待毙,一直考虑如何越狱,利用放风的机会摸清了看守的位置和看守放钥匙的地方。终于在1945年7月12日与另外一名抗联战士赵忠良一起,打死日本看守成功越狱,并在人民群众掩护下脱险。当时伪满洲国报纸惊呼:“于天放逃跑,满洲国失去了一大半。”日寇以物资和钱币总计百万元的价格悬赏捉拿于天放,并威胁“谁要隐藏,全村诛灭”,还组织了疯狂的大追捕,逼迫数十万当地百姓“拉大网”搜寻。这是日寇在“8·15”投降前夕对东北抗联最大规模的一次军政行动。在1954年国庆节上,毛泽东主席在天安门城楼上与于天放握手时,诙谐幽默地对他说:“天放,抓不到;今天,见到了。大智大勇,人民英雄!” 正视历史呼唤良知   为什么“二战”中日本侵略者对被占领区人民会施行这样多的酷刑,而且其规模大得超出想象?有关专家分析说,法西斯主义的邪恶残暴本质,加上当年日本民族文化传统中的劣根性,导致日本侵略者的极度残忍和心理变态。这是必须深刻反思反省的日本战争罪行。   中国第二档案馆馆长、研究馆员马振犊认为,酷刑虐待是日本军队二战暴行的一个重要方面,它往往是直接导致受害者被屠戮死亡的原因,曾有无数中国同胞与朝鲜、苏联、英美及南洋各国人士死在日军的酷刑之下,其危害程度绝不亚于日军大屠杀等暴行。日本法西斯企图用这种严厉的惩罚手段来震慑各地的反日活动,在民众中造成高压与恐慌,来达到其维护法西斯统治的目的。   马振犊说,侵华日军在施行多种酷刑手段与方式方法方面的残忍性、多样性与普遍性,不仅达到了空前绝后令人发指的地步,而且可以说是,集古今中外残忍与残暴手段之大成,其内容方式已达无以复加的地步。他们所作所为的残忍度及其下流性,甚至在几十年后的今天,人们也无法直面,不忍或不敢叙述。   事实上,面对当时的日军酷刑照片和文字记录,即使是现在,很多人也不忍看读,甚至产生心理上的疾患。例如当年的南京大屠杀亲历者、美国人魏特琳,以及几十年后的南京大屠杀的研究者张纯如,最后都是因饱受日军酷刑暴行的强烈刺激、不能摆脱心理阴影而最终自杀。王宜田曾多次自问:中华民族为什么会遭到如此巨大的磨难?无辜的同胞为什么会沦为魔鬼施虐的羔羊?如何才能避免历史悲剧的重演?他说:“捍卫尊严需要实力,更需要勇气、胆量和血性。当一个民族真正从精神上站立起来的时候,悲剧才不会重演。我们研究酷刑、记录痛苦不是为了延续仇恨、增加仇恨,而是为了正视历史,呼唤良知和理性!”
838    (진언수상록 67) 림상성암과 심부암 댓글:  조회:2320  추천:0  2017-09-16
                                                  림상성암과 심부암                                                                  진 언       인간의 목숨을 노리는 천백가지 병마에서 불치의 절증(绝症)은 암이다. 병리학에 감감이지만 암소리를 너무 많이 들어서 암종류를 꽤나 기억하게 되였다. 위암, 대장암 (우결장암, 좌결장암), 간암, 페암, 전립선암, 갑상선암, 신장암, 췌장암, 담낭암, 담도암, 자궁암, 유방암, 설암, 뇌종양, 후두암, 비인암, 혈액암(백혈병),고환암, 음경암, 음낭암, 방광암, 피부암…듣기만해도 어느게나 실색하게 되는 몹쓸놈의 병마이다.     먼저 인체암을 보자, 귀동냥에 의하면 사람마다 체내에 암세포를 가지고있는데 인체내에 정상적인 한개 분자라로서 일생에 수반된다고 한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그 것과 평생 공존하지만 평안무사하고 어떤 사람에게는 있는지 없는지 모르다가 량자가 사활적인 싸움을 벌려서 암세포가 우세하면 확산되여 종당엔 목숨을 앗아간다.     이런 암증은 기실 인간의 내심에도 있는데 나름대로 심부암이라 명명한다. 심부 (心府)란 마음이 있는 곳이다. 이 심부암은 일명 전반 상층사회에 만연된 악성종류로 서 탐욕부패암이다. 림상적인 암증은 사람을 락담실망케 하고 사회상의 탐욕부패암은 량심을 가진 국인들을 절치부심하게 한다.     심부암은 모든 사람들이 대뇌속에 있는 욕심에서 발병하는데 인간의 정상적인 생 리현상으로서 보편적으로 존재하는 규률이기도 하다. 욕심인즉 인간향상의 동력이기 도 하기때문이다. 문제는 어떤 사람은 욕심을 가지고 살지만 자아공제로 도를 넘지 않기에 병으로 자연사하는 대신 욕망의 방종을 넘어 탐관이 되면 정치생명은 물론 목숨도 비참하게 끊긴다. 공방형앞에서는 군자도 위인도 따로 없다는 실증이다.     이 두종류의 고질병은 비록 부동한 캐리어와 부위에서 발생하기에 생리적으로 아무런 연원이 없지만 상사한 발병과정과 긴 연변경력이 있고 심지어 기인(起因), 진 전, 연화(演化), 돌변, 증상들이 거의나 비슷하다고 할수 있다. 해부학적 비교를 해볼 필요가 있다. 인체암은 난치병이면서도 거이 불치이지만 치유욕망은 상대적으로 강렬 하다. 그만큼 생에 대한 욕망은 누구나 강렬한것인데 이는 인간의 속성이다.     들을라니 인체암은 생활습관병인데 루추한 인생관에서 기인된 불량한 생활기호로 탐식하고 움직이기 싫어서 서면 앉고싶어지고 앉으면 눕고 싶어지고 누우면 머리가 뗑- 하도록 자고싶은 등 인체의 음양의 평형의 파괴에서 온다고 한다. 게다가 영양제, 보신약을 볶은 콩알주어먹듯이 해서 암세포의 성장을 촉진한다. 생명은 운동에 있다 고 라태에 의한 비대증은 반갑지 않은것만은 사실이다.     심부암은 일종 심리습관병으로서 불량한 악습이 있기에 선악표준이 전도되여 리기적인 시비관념으로 다다익선, 얻기만 바라고 내주기는 싫어한다. 한마디로 인생관 과 가치관념마저 완전 썩은것이다. 새는 먹이로 죽고 사람은 재물로 죽는것은 하늘이 정해주고 땅이 지시하는 섭리라해도 이건 아니다. 인간은 새가 아니지 않은가?     암증은 체내의 오물들이 퇴적되여 기인된다고 한다. 불량하고 리롭지 아니한 온갖 유해물질을 제때에 배설하지 않고 내장이 깨끗할 때가 없으면 암증이 싹트기 시작하는 때라고 한다. 림상학적으로 병변(病变)이 발발하는것이다. 옛날 못먹고 못살때 에도 몰라서 그렇지 암으로 죽기도 하였으나 지금처럼 재별(자별)나지는 않았다.     심부암도 기실 심리쓰레기의 퇴적에서 발병한다. 먹지말라는 것일수록 더더구나 먹고싶어지듯 탐심은 굴뚝같은데 이러저러하게 방애를 받거나 억제당하면 반상적으 로 탐심이 기광부리고 운좋아서 넘치도록 후무린 흡족감에 만복의 배를 어루쓸지만 심리적으로는 공연히 불안해져 좌불안석, 심장은 노상 두근닥근, 일곱근이 될게다.     인체암은 량적변화가 질적변화를 일으키는데 이는 암세포활동의 일반적규률이다. 인생길에서 또 다른 일종 형식의 돌변, 례하면 천재, 인화의 타격을 입었거나 가정이 파탄나는 충격을 이기지 못하였거나 생로병사의 섭리를 접수하지 못하고 그냥 병사 할가봐 전전긍하면 오히려 암세포가 우후죽순마냥 될 가능성이 높다고 한다.     심부암도 마찬가지로 량적변화로부터 질적변화에로 비약한다. 사람의 일은 한치 앞도 모른다는 속담이 있듯이 풍운이 돌변하여 일세영달의 운세가 뒤틀어져서 일패도 지한후 계하수란 어떤것인지 뒤늦게 절감하며 절통해 하는데 그럴수록 없는 후회약을 찾는다. 좋다가 그렇게 허무하게 말줄을 알았더면…아아ㅡ눈물코물이여, 멈추소서.     인체암은 몸을 돌보는 문제이고 심부암은 마음을 다스리는 문제이다. 욕심이 코를 꿰고 가는곳은 구지레한 탐욕의 늪이다. 버둑거릴수록 더 깊이 빠져들아가는 수렁 늪이다. 한번 빠져들면 사치한 마음을 제어할길 없어 마음이 늘 황황해지고 심란해지고 바구니로 밑빠진 독에 물을 길어 채우려하듯 그냥 채워지지 않아서 안달복달하다가 “동창사발*东窗事发)로 아차차!하는 순간에 풍비박산난다.     예전엔 심부암에 걸린자들이 극히 소수이고 개별적인 림상표현이라고 하였지만 작금에 와서는 보편적병증으로 되였다. 암세포처럼 못말리게 된것이다. 그래서 절대다수가 건강하고 심부암에 걸린자들은 극히 개별적이라던 틀에 박힌 진단이 도전을 받고있다. 예전에 그런 말을 했다면 건강한 사람을 무함하는 “오진”이라고 커다란 감투를 쓰고 곤욕을 치렀을게다. 지금와서 하나를 발견하면 즉시 “격리치료”를 하여 “특별병원”이 넘쳐날정도이니 심부암이란 얼마나 어마어마한 병인가,     이런 조치는 회피하거나 부인할수 없는 “림상처리”의 실상이 핍박하여 류추해 낸 리성진단과 처방이다.“권전계(权钱系)”에 이미 심부암환자가 주류를 이루었다는 실증이기도 하다. 물론 부패라는 사회암증은 결코 우연의 왕국의 사회증상이 아니다. 전 세계의 모든 국가들에 존재하는바 객관규률이고 필연적이기때 문일게다.     인체암증은 시대를 모르고 사회제도를 모르는 병리현상으로서 봉건사회든, 자본주의사회이든 사회주의사회이든 필연적존재이나 심부암은 개체의 욕망과다증에서 유발되면서도 병근은 사회제도와 무관하지 않다. 쉬파리가 알을 쓿는 본능이 악착해도 생달걀에 쉬를 쓿지 못한다. 미꾸라지도 맑은 물에서는 생겨나지 않듯이 말이다.     현대문명사회에서 심부암은 불치병이다. 심부암에 걸려서 량심과 도덕이 썩었는지 량심과 도덕이 썩으면서 암세포가 확장되는지 딱히 금을 그어서 말할수 없지만 병근은 욕망과다증에 있는것은 사실이다. 심부암에 걸린자들은 두뇌가 썩어 문드러질 정도이지만 가질손은 멀쩡하여 얼마나 길게 뻗칠지를 조기진단하기 어렵다. 아이러니한것은 요즘 에볼라처럼 주치의사도 감염되여 죽는 사례가 있듯이 심부암을 치료한다는 “특수의사”들마저 심부암에 걸렸으니 누가 누구를 치유할수 있겠는가?     물가에서 놀면 신발이 젖기마련이라고 “권전계”의 당사자들이 보편적으로 심부암에 걸릴 확률이 높다. 이래서 심부암은 사회근간을 흔드는 악성종양이 되는것이다. 개체차원을 넘어 전반 사회병으로 급상승하고 있기때문이다. 민초들에게도 심부암균이  잠재해있지만 피땀으로 치유된다. 이는 심부암은 지력상수가 높고 소위 능력자들속에서 발병률이 높다는 반증이다. 그러나 기실 방아간을 스쳐지난 참새들에 불과하다.     심부암은 근절할수 없지만 직업도덕, 사회도덕, 륜리도덕건설이 잘되고 관념, 의식상에서 욕망을 가약속범주(可约束的范畴)에 넣고 에누리없이 철저히 내화시킨다면 심부암환자들을 씨를 말리지는 못할지라도 대대적으로 감소시킬수 있다. 심부암병자들을 치유하지 못한다면 그 모든 요란한 슬로건이나 화려한 주어들이 황제의 새옷이 된다. 그런데 황제가 발가벗었다고 곧이곧대로 소리친 어린아이가 뛰쳐나올가?                                                                               2014년 10월 15일
837    한방울의 맑은 물처럼 댓글:  조회:2273  추천:0  2017-09-11
수필                     한방울의 맑은 물처럼                                      최균선     한방울의 물, 그 것은 지극히 보잘 것 없다. 하지만 그런 하잘 것 없는 물방울이 모이고 모여 시내물을 이루고 대하를 이루고 마침내 망망한 큰바다를 이룬다고 할 때 한방울, 한방울의 물은 의미가 달라진다. 나무가지 이파리에서 떨어지는 이슬방울이나 내둑에 이름없는 풀잎에 맺힌 이슬도, 주루륵 흘러내리는 눈물이나 다 한방울이다.     억수로 쏟아붓는 창대 같은 비줄기도, 바위를 뚫는다는 락수물도, 태산준령을 휘감아버리는 안개도 따지고 보면 작디 작은 물방울이다. 늘 보아서 일상으로 된 물이지만 그 조화를 생각하면 찬탄이 아니 나올 수 없다. 흉용팽배하는 홍수를 이루어 새로 물길을 낼 때는 맹수같이 포효하지만 어느 한 위치에서는 스스로를 가다듬고 넓게 펼치여 잔잔히 흐르며 거추장스러운 진흙이며 모래며 오가잡탕들을 가라앉히거나 뒤에 떨궈버리고 다시 맑음을 찾아 고요히 흐르면 곧 명경지수가 되여지는 물! 물 속에 구름이 떠가고 청산이 거꾸로 비끼 듯 삼라만상을 포용하니 과시 해인삼매라 하리라.    사람들은 자고로 물을 찬미해왔는데 무엇보다 무변광대한 흉금이다. 구정물도 받아주는 포용력, 어떤 모양의 그릇에나 담기는 융통성, 낮은 곳을 찾아서 흐르는 겸손, 막히면 돌아갈 줄을 아는 지혜, 큰바위도 뚫는 끈기와 인내, 장엄한 폭포처럼 투신하는 용기, 유유히 흘러가서 바다를 이루는 대의 등이 바로 그러하다.     청산리 벽계수나 호한한 대하의 흐름소리는 대자연의 주선률이다. 물은 만물에 생명을 불어넣어주며 순리를 따른다. 물은 흘러온만큼 흘려보내고 흘러간만큼 받아들인다. 물은 빨리 간다 우쭐대지 않고 늦게 간다 조바심치지 않는다. 물은 네 자리, 내 자리를 금 그어놓지 않고 앞서거니 뒤서거니 청류와 탁류라도 더불어 함께 흐른다.    그 낱낱이 각색 혼돈이 되고 어느 자리에서는 한덩어리 동색이기도 되기도 한다. 인간들처럼 잘나고 못남, 높고 낮음, 크고 작음, 도고함과 비굴함, 착하고 순하고 악하고 못됨 따위의 구별도 놓지 않고 네 먼저 내 먼저 너무 잘 어우러져서 맑아지려는 물, 흐르는 물이나 가두어놓은 물이나 그릇에 담아놓은 물이나 물은 시종 맑아지려는 지향이 얼마나 올곧고 대바르고 초심을 지키니 거룩할사 물이로다!    온갖 것에 스며있어서 눈에 보이지도 않는 물은 또 어떠하다고 말해야 하는지? 큰비가 온 뒤 온통 탁류가 된 강물을 두 손으로 퍼서 방울방울 흘려보면 전체로 볼 때보다는 그리 혼탁하지 않다. 어지러운 빨래물이나 땅바닥을 닦아낸 걸레를 쥐여짤 때 방울방울은 상대적으로 맑다. 광선이 투사하여서인가? 타자를 깨끗이 씻어주고 자신은 더없이 더러워졌지만 방울방울은 맑음을 잃지 않고 있으니 이 무슨 조화인가!     사람들은 우물이 맑아야 아래물도 맑다는 속담을 만들어 자녀교육에서 본보기가 중요하다는 철리를 시사하려 하였는데 백번도 더 지당하다. 그러나 자연계, 생태환경의 경우 우물이 맑다해서 아래물도 꼭 맑으라는 법은 없다. 연길에서 탁류로, 오수로 이름있는 연집강(옛날에는 강의 모양새를 갖추었을테지만)을 거슬러 한 십리쯤 가 연하촌 2대 부근에 이르면 가히 미역이라도 감을만하게 맑은 흐름을 보게 된다. 하지만 내려오면서 인간들의 이런저런 역사질에 그 맑음은 대번에 흐려짐을 볼 수도 있다.     대지의 혈맥이요, 젖줄기인 물은 항상 자기가 있어야 할 곳에 존재하면서 만물을 리롭게 하고 다른 것을 깨끗하게 씻어 자신이 더러워지나 전혀 자랑하지 않는다. 그냥 낮은데를 따라 아래로, 더 아래로 향할 뿐 다투지 않고 교만하지 않으며 소유하지 않는다. 그 유연함으로 자기를 규정하지 않기에 그 무엇이든 불평없이 다 받아들이며 그래서 물은 낮은 곳이면 도달하지 못하는 곳이 없다.     물은 완전함을 체현한다. 물이 아래로 흐르며 작은 웅뎅이라도 그 것을 완전하게 채우고나서야 흘러가는 것은 결코 만족이 끝없어서가 아니다. 물은 변화다단한 상황에 따라 천태만상으로 변모하는 것은 절개가 없어서가 아니다. 형체가 어찌 변하든 자신의 근본을 잃지 않음을 말해준다. 물처럼 연약한 것은 더 없지만 특이한 힘을 구비한 물을 이기는 것이란 세상에 없다. 물이 더없이 부드러운 것은 결코 연약해서가 아니다. 물이야말로 이 세상에서 강한 것을 가장 확실하게 이기는 정신의 체현자이다. 물은 바위를 뚫을 수 있는 저력을 가졌지만 어이하여 유유히 에돌아 가는 걸가?     물은 흐를줄 아는 것만큼 인내성도 가지고 있다. 크고 작은 웅덩이가 넘칠 때까지 기다려주고 다시 흘러 백길계곡에 다달아도 의심치 않고 폭포되여 떨어지니 참용기를 예서 시사한다. 얕은 것은 흘러가도 깊은 것은 그 깊이를 헤아릴 수 없으니 이는 바로 지혜의 모습이다. 가늘게 흘러 눈에 보이지 않아도 마침내 강물에 다달으니 목표를 정해놓고 늘 성찰하는 군자의 자태가 여기있다.    사람도 물처럼 에돌줄 알고 갇히면 나누어주며 가고 앞섰다고 으시대지 말고 받은만큼 나눠주며 나눈만큼 받을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는 것이 물처럼 사는 인생이라 할 것이다. 사람이 물처럼 유연함으로 강한 것을 이기는 품성을 지닌다면 인생길에서 일종의 지혜를 터득한 것과 같다. 어떤 난관에 부딪쳤을 때 가장 간단한 방법으로 해결하고 약소함으로 강대한 것을 물리침에서 당면에 강세를 피하여 허점을 찌르며 기지롭게 타승하는 사유는 명철한 자의 특허이다.     물은 스스로 고이면 섞는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기에 일단 흐름의 길에 오르면 되돌아설줄 모르고 오로지 대해을 향하여 줄기차게 흐를줄 밖에 모른다. 물은 망망 대해에 들어서야 비로소 줄기찬 그 흐름을 멈추고 나름대로 보탬을 준 것에 자족한다. 황진이가 ‘주야로 흐르나니 옛물이 있을소냐’고 읊었 듯이 살아있는 물은 주야장천 흐르기에 언제나 새롭고 새로운만큼 그 깨끗한 지조를 잃지 않는다.     가장 낮게 가장 낮은 곳으로 흐르는 류수처럼 남과 경쟁하지 않는다는 ‘불쟁’의 원칙은 얼핏 생각하면 약자로 되는 소극적인 삶의 태도를 의미하는 것 같지만 그속에 특별한 의미가 있다. 흐르고 모여서 창해를 이루는 물, 미움도 아픔도 물처럼 그냥 흘려보낸다면 세상을 달관할 것이다.     격랑을 일구며 흐르는 대하가 모여 창파만리를 이룬 바다에 마주하면 인간이야말로 창해일속이라는 말을 새삼스럽게 절감하면서 실마리를 찾지 못하는 곤혹과 질의도 답안을 찾게 된다. 참으로 물처럼 살아갈 수 있다면 세상은 덜 번거롭게 느껴질 것이고 인생고뇌도 훨씬 줄어들 것이다.     로자의 《도덕경》에 상선약수(上善若水)라 써놓았다. ‘가장 좋은 것은 물과 같다. 물은 만물을 리롭게 하면서도 다투지 않고 모든 사람이 싫어하는 낮은 곳에 머문다. 물은 만물에 혜택을 주지만 만물과 다투지 않으며 모두가 싫어하는 낮은 곳으로만 흐른다. 고로 도(道)에 가깝다 할 수 있다.…물처럼 겸허해서 다투지 않을 때 비로소 허물이 없을 수 있다.’     매번 물가에 앉으면 무디여진 나의 시선이 강이 되고 바다를 이루는 줄기찬 흐름 우에 사로잡히면서 물의 미학을 겸허한 마음으로 배우게 되여 늘 고맙다.     물이여 물! 나는 너를 목청껏 찬미하노라. 바라건대 맑은 하나의 물방울처럼 살고 싶노라. 만리창공에 쪼각구름이 흘러가 듯, 강촌에 물 흐르 듯 그렇게 순리대로 살다가 생이 다하는 날, 방울방울 수증기로 승천하여 다시 구름이 되고 단비가 되여 가뭄 든 논께에 조금이나 보탬이 될 수 있다면 자족할만한 인생이라 하리라.                                                         2017년 9월  15일 (연변일보)
836    (진언수상록 65)문화의 현대화문제 댓글:  조회:2517  추천:0  2017-08-27
                                              문화의 현대화문제                                                          진 언       세계화의 시대이다. 인간적세계화를 모색하는것을 의미하는 세계화가 진정한 진 보라면 인간화시키는 방향이여야 한다는 론리를 가지고 있고 또한 력사적필연성이므로 부정할수는 없다. 문화령역에서 감별할 때 세계화의 종지는 세계통일문화를 건립하는것으로서 전 지구촌에 대해 말하면 웅대한 구상이다. 이 구상은 1961년 마샬. 맥크가 처음 제기한것이라 한다. 전자산품 특히는 텔레비죤의 쾌속적발전에 따라 사 람들은 통일된 사상과 문화의 방향에로 나가리라고 인식하였던것이다.     현대화는 인류의 숙명이다. 맑스는 전통으로터 현대화에로 나가는것은 “세계력사” 의 진정한 시작이며 그것은 고립적민족의 력사적 종결을 의미한다고 하였다. 만약 누가 주동적으로 순응하지 않으면 현대화조류속에 매몰될것이며 다른 사람의 현 대화가 그 민족을 해산시키는 방식으로 현대화를 실현할것인바 락후한 민족은 현대 문명의 변연민족으로 되고 궁극에 가서는 훼멸을 자초할것이다. 이렇듯 시대정신은 반드시 문화의 전통에서 벗어나 현대화에로 나갈것을 요구한다.     문화의 현대화에로의 근본적전화하는 현대화문제로서 시대정신을 체현하며 민족부흥문제로서 민족의 운명과 관계된다. 이는 또한 력사사명으로서 그 시대적내용으로 하여 사람들의 주의를 일으키고있다. 총체적으로 볼 때 전통문화는 시대가 지나고 락후하며 봉건적이고 우매한것이라 말할수 있지만 전통문화가 민족문화의 주체라는것을 부인할수 없듯이 민족정신은 때지난것이 될수 없다. 결단코!!!     현대문화의 시대정신의 형식과 내용은 통일된것이며 모종 민족성을 초월한것이기도 하다. 한편으로 문화의 주요한 공능은 곧 문화동일시(同一視)로서 문화에 대한 일시동인은 군체내부에서의 리지로 공동한 인식을 형성하는것이고 감정상에서 공명을 산생시키는것이며 의지상에서 공동한 추구를 달성하는것이다.     문화동일시에는 여러 층차가 있는데 주요하게 시대적동일시, 민족동일시, 계급동일시, 종교동일시 등이 있다. 문화세계화에서 통치지위를 차지하는것은 관념, 산품 및 서방의 혁신의 본질로서 모두 서방문화공업에서 과시되고있다. 많은 연구인들은 자본주의제도의 본질인즉 확장주의로서 의식형태 혹은 소비문화의 힘을 빌어서 사회 와 개인들을 자본주의적소비자로 환골탈태시키려고 기도하고 있다고 지적하고있다. 이렇듯 현대화의 세계적보편성은 강대한 물질적력량을 끼고 있는바 민족의 경계선을 타파하고 지구촌의 모든 민족을 현대화의 급류속에 몰아넣는다.     많은 사람들은 현대화개념과 서양화개념을 혼동하고있는데 세계화문제는 생각처럼 그리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세계와의 일치는 우리에게 무엇을 예시하며 실행과정에서 우리가 얻을것은 무엇이며 잃는것은 무엇일가? 불가항력의 충격파앞에서 맹동에 가까운 자세를 취하고있는바 심사숙고할 문제가 아닐수 없다. 정치,경제, 과학 기술문화는 물론 일상생활에까지 치렬하게 그리고 막무가내하게 주고있는 부정적인 영향력과 그 수용에서 자중과 성찰을 앞세워야 하지 않을가싶다.     미국을 선두주자로 하는 이른바 세계화라는게 무엇인가? 례를 들어 보자. 동물원에서는 육식동물, 초식동물을 격리시키고있다. 그런데 세계화란 바로 격리장벽을 다 없애자는것이다. 각자 자유의 서식공간을 없애고 공유하게 되면  맹수들이 약한 육식동물을 잡아먹게 된다는것은 상식이다. 바로 미국이 아메리카 사자로서 지구촌에 맛나는 모든것이 자기가 응당 독식해야 할 밥이라고 여기고 그렇게 행해 왔다. 문호를 개방하고 다 잡아먹겠다는것, 세계화는 신제국주의의 다른 말이고 정글법칙의 극단적인 체현이라고 해도 관언이 아닐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땅에서 현대의 삶을 살지만 서양문화를 숭배하면서부터 우리것을 지키고자 하지 않는다. 문화란 당연하다고 생각하는것들을 공유하는 사고체계라고 할수 있는바 이질적인것을 당연하다고 받아들이는 그런 맹종에서 자아상실이 가속화되 고있다. 우리는 지금 옛것을 빌어 오늘에 리용하고 서양의것을 중국에 리용한다는 합목적구호밑에 발달국가의 문화기술, 생활모식 등을 거의다 받아들이고 있는데 역시 환득환실의 잠규칙을 벗어날수 없다.     가져오더라도 진보적인것, 유익한것을 가져와야 한다. 남이 쓰다 남은것, 어떤 알리지 못할 목적밑에서 선심을 쓰듯이 내주는것이면 유해한것이라도 감지덕지해서 마구가져오는것은 기실 “가져오기주의”가 아니라 “받아오기주의”이다. 세계화의 급선 봉들은 전 지구화를 “동일화”, “일체화”로 착각할수도 있다. 그저 외제란 그 우월성 에 매료되여《받아오기주의》열광속에서 자신마저 상실한다면 심층적의미에서의 문화 지배와 피지배, 공제와 피공제의 비동질성관계의 확립을 감각하지 못한 의식이다.     우리는 예술분야에서도 빌려온 감정을 자기 감정인것처럼 표현하는 실태를 곤혹스럽게 보고있다. 례컨대 우리 조선민족에게 있을 법한 전통적감정표달은 다파먹은 김치독이 되고 맹종의 결과물인 무병신음같은《노래》들이 판을 치는바람에 전통가요 는 마치 새노래를 배우지 못한 늙은이들이나 부르는 옛가락으로 치부되고있다.     서양문화는 동양보다 진보적이다. (서양은 합리적이다, 서양이 표준이다)라는 전제로부터 시작한 모든 인식은 결국 “미국이 제일이다, 왜? 미국이니까” 라는식의 동어반복적 맹신만을 생산할뿐이요 자꾸 문화노예를 만들어낼뿐이다. 결국 편견 즉 서양은 합리적이다=서양적이 아니기에 불합리하다는 문화맹종에 자신의 신념을 넝마 처럼 버리게 된다. 서양사람들이 개방적이고 합리적이라는 그런 인식이 진리라고 말할수 있을가? 다만 서양적이 아니라는것 외에 어떤 신념의 체계이든 어떤 형태의 사회이든 인간자체가 지닌 사고와 행동방식은 비슷하게 나타난다.     서양사람들이 동양질서나 성향에 대해 개방적이라고 말할수 없다. 그들에게 있어서 합리성과 개방성이라는것은 서양적삶의 태도를 지칭하는 말일뿐이다. 소위 세계화하는 과정에 인간의 가치가 와해되고 행위가 규범을 상실하고 있으며 신앙이 붕괴되고 동정심과 도덕적량지마저 상실됨으로써 인성의 마비와 잔인성까지 횡행하고있다.       우리 문화가 설자리를 잃어가고있는 형편이라면 그게 바람직한 세계화일가? 우리가 이런 추세로 남의것만 맹종한다면 동방하늘에 솟는 달도 밝지 않다고 할지 모를 일이다. 민족문화사에 허무주의를 내세우며 구라파중심주의 사로를 맹종할수 없다. 한 민족이 세계에로 나아가려면 근근히 경제상에서 천지개벽을 해서는 안되며 문화상에서도 립신해야 한다는것은 상식이지만 문화현대화는 전통적인 모든것을 포기하고 오로지 서양의것으로 대체한다는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선지자는 고향에서 령험하지 않다”는 서방격언이 있다. 우리 속담중 “먼데 무당이 용하다”와 표현은 다르지만 본질은 같다. 중국에는 “外来的和尚会念经)”이라는 말이 있는데 “타향에서 온 중이 경을 잘 읽는다”의미쯤 되겠다. 그렇더라도 력사를 긍정하고 자기를 긍정할줄 알아야 한다.     어떤 리익이나 주장을 절대시하게 되면 그 반대편에 대한 극단적증오와 이에 따른 파괴가 자행된다는 사실은 력사에 너무나 흔한 일이다. 민족적일수록 세계화가 되는것임을 명기하자. 모든 일의 시작에 끝이 있고 그 끝나는 곳에 새 시작이 있다. 가장 어두운 곳에 가능하게 진짜 보배가 묻혀있을수 있으며 가장 정확한것이 맹점 속에 숨어있을수 있다는 진리는 세월에 의해 색바래지 않는다.                                                                                   2007. 3. 28  
835    굶기의 즐거움이라? 댓글:  조회:2105  추천:0  2017-08-26
                                               굶기의 즐거움이라?                                                              최균선       고대로부터 중국에 “민이식위천(民以食为天)”이라는 말이 전해져 내려왔고 우리 민족에게는 “목구멍이 포도청”이라거나 “금강산도 식후경”이라는 속담이 전해지고 있다. 인간의 생존의 전제이자 본성이기도 한 식(食)은 보편적이면서도 특수한 일종의 사회현상으로서 인류의 진화와 동보하였다. 유사이래 민초들은 먹기 위해 사는듯, 배를 불리기 위해 피터지는 인간고를 치러야 했다.     그런데 고도의 물질문명시대 영양가가 높다는 것만 골라서 먹고 또 많이 먹으면서도 운동에는 린색한 현대인들은 먹은 것을 다 소화시키지 못하여 이른바 부자병이란 것이 만연되면서 굶기가 병치료의 수단으로 되였다. 굶기는 너무 잘 먹는 것이 몸에 해로워 끼니를 굶는 것이 몸과 마음을 청소하는 청소부이자 인체 내부의 각 기관들을 부활시키는 가장 좋은 치유법이란다. 그에서 느끼는 감각을 “굶기의 즐거움” 이라고 명명하고 있다. 생명을 살리는 우주 대자연의 근본원리는 단식에 있다는 주장에 근거를 두고 있다.      어느 시대에나 어떤 계층의 사람이나 다 먹거리와 먹는 방법에 관심을 가져왔지만 현시대에 이르러서 특히 건강과 관련된 먹거리, 건강식이 많은 사람들의 제일 가는 관심거리가 되였다. 옛날엔 꿈도 꾸지 못하던 좋은 세월이 와서 지금은 먹는 문제가 단지 배를 불리는 문제가 아니라 영양공급과 살까기에 직결된 문제로 부상된 것이다.     대저 “식(食)은 명(命)”이란다. 밥을 어떻게 잘 먹느냐에 따라 운명이 달라진다는 말이다. 아무리 건강하더라도 무절제한 식생활은 단명하거나 질병의 고통에서 모대기게 한다. 원래 사람의 위는 주먹 만하고 음식도 주먹 만큼 먹도록 정해졌다. 하건만 요즘 적지 않은 사람들이 너무 많이 먹어서 위하수에 걸리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그런데 야단 아닌가? 날마다 때마다 가능한 잘 먹어야 한다는 식도락풍조로 자연의 리치에 어긋나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있으니 말이다.     동서고금을 물론하고 과식을 경계하여왔다. 일례로 쉐익스피어의 ‘헨리4세’에는 “과식하도록 내버려두어라. 무덤이 그를 향해 3배나 큰 입을 벌릴 것이다.”라는 구절이 있고 또 우리 선인들은 굵고 길게 살려면 음식을 적게 먹는 습관을 키우라고 했다. 너무 잘 먹게 된 일도 우환이 된 현대인들에게는 필경 경세지언이 아닐 수 없으렷다. 하지만 잘 먹어야 한다는 관념이 너무 깊이 뿌리 박고 있어서 대충 먹으며 산다는 게 삶의 질과 직결되는 문제인데 그게 말이 되냐며 소화공정에 더구나 열을 내고 있다.     필자는 굶기의 즐거움이 어떤지 알 수도 없거니와 그런 즐거움을 가져볼 생각은 꼬물만치도 없다. 세월이 반세기도 넘어 지났어도 굶주림의 고통이 기억에 생생한데 언제 배고픈 즐거움 따위를 떠올리겠는가? 인간세상에서 고생 고생 해도 배고픈 고생 만한 고생이 더 있겠는가? 건강장수를 위해서 굶기의 즐거움이 필요하기도 하겠지만 나로서는 배부른 흥타령으로 밖에 들리지 않는다.     지난 세기 70년대 이전에 태여난 세대들은 거개 몸소 겪어서 체험이 절실할 것이다. 먹는 문제로 지지리 고생하던 유년시절 주린 배를 달래려고 야생식물을 많이도 먹었을 것이다. 나도 이른봄에는 메뿌리를 캐먹었고 일송정에 진달래가 피면 꽃잎을 뜯어먹어 입술을 빨갛게 물들이였으며 어쩌다 만나면 뽀디(뽕)도 따먹고 개나리꽃도 입에 넣었으며 산의 개살구도 볶은 콩 주어먹듯 먹었고 민들레, 달래를 캐여 날 것 채로 우겨댔으며 하얗게 핀 비술나무씨도 훑어서 먹고 살구철엔 살구씨도 깨먹었다…     한여름에는 수수밭의 감부지인지 하는 것도 입이 거멓게 되도록 따먹었고 달달한 것이 속으로 댕겨서 옥수수대를 짓씹어 단물을 빨아먹었고 가을철이면 뉘 집 바자굽이나 두엄무지에 난 감태랑 뜯어먹었고 개암이 익기도전에 뜯어다 깨먹었다. 이제 생각해 보니 입에 넣어 먹을 만한 것이면 다 먹었던 것들이 대자연이 하사한 “천연보약”이 아니였는지 모른다. 칠십을 넘기도록 오장륙부에 고장난 곳 하나 없으니…     보리알천지인 조밥을 시래기국에 말아먹으면 제일 속이 든든하던 그 “행복”을 그 시절을 지내보지 못한 사람들은 신화처럼 여길 것이다. 지금도 여름이면 랭수에 밥을 말아 고추장에 파, 풋고추, 마늘 같은 것을 뚝뚝 찍어 먹으면 속이 개운하고 후련하다고 하면 아마 애들은 원시인 보듯 눈이 휘둥그래질 것이다. 배를 곯을가 봐 걱정되는 것이 아니라 먹을 게 너무 많아서, 너무 잘 먹어서 걱정인 시대이니 말이다. “몸이 났구만!” 하는 말이 덕담이였었는데 지금은 듣그러운 비아냥이 되니 가히 알 수 있지 않은가?      “신토불이(身土不二)”란 사람이 주어진 풍토와 일체가 되는 것을 의미한다. 자연과 인간이 한몸이 되는 것은 지혜로운 생활방식이 아닐 수 없다. 우리 민족은 육식민족이 아닌데 서양의 육식민족 흉내를 내다 보니 비만과 성인병이 만연하게 되였다. 이런 식생활은 바람직하지 못한 것이라 생각한다.     자연은 인류의 모체이다. 모든 생명체가 자연으로부터 왔기 때문에 건강을 유지하고 삶을 풍요롭게 가꾸기 위해서는 자연의 품으로 돌아가야 한다. 누가 받아들이든 받아들이지 않든 이 시대의 슬로건으로 된 것만은 사실이다. 로자, 루쏘 등 많은 선각자들은 일찍 “자연으로 돌아가라!”는 호소로 인류가 정신적, 육체적인 모든 질병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길을 제시해주었었다. 하지만 인류는 이를 마이동풍으로 여기고 비만증을 초래할 때까지 잘 먹어댔으니 자업자득이 아니겠는가.     살찌는 것을 막기 위해 굶어보는 행복한 사람들, 그들이 진짜 처절한 굶주림을 겪는다면 어떻게들 나올가? 사흘을 굶어보지 못한 사람과는 인생을 론하지 말라 했다. 핍박에 의한 굶주림이 아니라 의도적인 굶어보기가 왜 “굶기의 즐거움”이 되는지 나는 리해불가이다. 요란한 설교가 필요 없다. “작작 먹고 가는 똥 누라”는 속담의 원 뜻은 천천히 여유있게 나아가야 잘 받아들일 수 있다는 의미이고 너무 욕심을 부리지 말고 자신의 분수에 맞게 살아가는 것이 편안하다는 뜻이지만 또한 식복이 넘쳐나는 사람들의 건강장수에 경종이 아닐 수 없다.     만포식하거나 미식을 추구하면 결과적으로 뇌의 활성화가 잘 진행되지 않는다고 한다. 육체적 비만이 정신적인 포만상태를 보장하지는 않는다는 뜻으로도 되겠다.     굶주림이 일상이던 때 내린 식욕의 뿌리가 지금껏 억세게 굳어져서인가. 이처럼 막부득이한 굶주림은 력사적인 명제이고 병을 치유하고 건강에 유조하게 하려고 굶어보는 것은 사치한 삶의 양상이다. 달리 말하면 굶주림과 굶어보기는 차원이 다른 것이다.      먹을 게 남아돌고 너무 먹어서 먹는 게 지겨워진 복 받은 자들에게는 굶기가 고행이지만 무너진 심신을 단정히 하고 새로운 마음으로 자신을 혁신하고자 할 때는 굶기가 필요하다는 것을 부정할 수는 없다. 그러나 “먹지 않는(굶는) 즐거움”이란 하루이틀도 아닌 아사지경에서 모대기는 사람들에게는 분명 미친 소리로 들릴 것이다.     아니 그럴 것인가? 유엔산하기구인 세계식량계획(WFP)의 통계에 따르면 지난해 전세계 인구 9명중 1명에 해당하는 7억 9500만여명이 굶주리고 있으며 그중 33% 가량은 영양실조 상태라고 하였다. 또 전세계 5세미만 영유아 사망의 절반 이상이 영양결핍 탓인 것으로 나타났다. 여섯개의 개발도상국 인구 4명중 1명 이상이 영양결핍이라고 한다. 소말리아와 케냐, 예멘, 남수단 등 아프리카 4개 국에서만도 2000만명 이상이 극심한 기아에 시달리고 있다니 이 얼마나 슬픈 일인가! 굶주린 아우성과 배부른 흥타령이 인간세상의 협화음으로 되고 있으니…                                                              2017년 3월 10일            (단풍잎 16기)    
834    (진언수상록 63) 득민심자 득천하 댓글:  조회:2217  추천:0  2017-08-17
                                              득민심자 득천하                                                           진 언       “치국지도”를 맹자의 말을 한마디로 개괄하면 “민심을 얻는자가 천하를 얻는다 (得民心者得天下)로서 만세유전의 절창이다. 이를 부정명제로 비틀어놓으면 “실민심 자실천하(失民心者失天下)로 되고 역명제로 설정하면 “득천하자득민심(得天下者得民 心)으로 되며 역부정명제로 만들면 “실천하자실민심(失天下者失民心)으로 된다.     “민중의 지지를 얻으면 민심을 얻게 된다. 민심을 얻으려면 민중이 수요하는것을 주고 반대하는것을 주지말아야 한다.”이는 맹자의 치국지도이다. “백성이 귀하고 사직은 그 다음이며 임금은 가볍다” 는 맹자의 위대한 “민본위(民本为” 사상이다. 여기서 민심인즉 백성들의 감정으로서 초민들의 마음을 가볍게 볼일이 아니다.     맹자시대는 유세가(遊說家)가 활약했던 시대였다. 그는 인의를 주장했다. 힘으로 부국강병을 도모하는 패도로는 인심을 장악할수 없으며 인애(仁愛)에 의한 왕도로써만 민심을 얻고 천하를 다스릴수 있다고 하였다. 그러나 맹자의 치국지도는 잘 받아 들여지지 않았다. 봉건제왕들은 왕왕 자기를 받들어줄 수많은 손은 요구하지 생각할 줄아는 머리는 요구하지 않았다. 자기혼자 결단해야 될 일을 여러사람이 생각하면 일을 다스리기 어렵다고 생각해서였을것이다. 그러면서 민생은 뒤전이였다.    《장자. 내편, 대종사(庄子,内篇,大宗师)》에“圣人之用兵也,亡国而不失人心”이라 는 구절이 있는데 대략적으로 성인이 군대를 이끌고 다른 나라를 멸망시켰다고 하여 도 그 나라의 민심을 잃어서는 안된다는것이다. 례컨대 개세의 영웅이라고 추앙되는 항우가 어찌하여 시종 자기보다 뒤지는 류방에게 패하였는가? 그의 고집불통의 성격 외에도 가장 중요한것은 바로 인심을 얻어야 한다는 중요성을 몰각했던 탓이다.     이를테면 함양을 점령한후 투항한 진나라의 장수 왕자영을 죽이고 진나라궁전을 불살랐으며 초회왕을 암살하는 밀모에 가담하였다고 전해지고있다. 이런 몇가지 일에서만도 항우는 민심을 잃어버리기에 충분하였다. 항우와는 아시당초 상대가 아닌 류방은 장량의 건의를 받아들여 “약법삼3장(约法三章” 을 세우고 이르는 곳마다에서 민심잡기를 함으로써 그 위망과 영향력이 마침내 항우를 초월하였던것이다.     민심을 얻는자가 천하를 얻는다는 명제는 심각하나 그 도리는 상식적이다. 한것은 백성이 있어야 나라가 있기때문이다. 나라란 백성들로 조성된것이다. 이는 설명도 필요없는 기초상식이다. 그만큼 상식적이면서도 무게가 있는 치세의 도리이다. 하여 조금 지각이 든 봉건제왕들은 도리는 알고있었으나 민심속에 들어가지 못하였다. 민심을 얻어 천하를 얻은후에라도 통치지위를 만세유전시키기는 더욱 어려운 일이다. 백성을 애호하고 복을 마련해주는것은 봉건통치자들의 일종 책임이고 일종 봉사와 공 헌인데 진정 백성을 위한 봉건제왕이 누구누구이던가?     장자는 당시의 부패한 악덕통치자에게 다음과 같은 쓴소리를 했다. “네가 사람의 소리는 들어도 땅의 소리는 듣지 못하고 비록 땅의 소리를 듣는다해도 하늘의 소리는 듣지 못한다.”는 질타에는 그래도 당시 부패하고 악한 통치자가 땅의 소리를 듣지 못한다해도 다행히 사람의 소리는 듣는다고 했고 또 비록 하늘의 소리를 들지 못한 다해도 땅의 소리는 듣는다고 밝혀놓은것이다.      민심을 얻는다는것은 민생을 잘 보살폈다는 말과 같다. “민생”이란 단어가 가장 일찍 나온것은《좌전.선공20년(左传·宣公十二年)》에서다. “所谓“民生在勤,勤则不匮” 라했고《순자,부국(荀子,富国)》에도“如是则上下俱富,交无所藏之,是国计之极也”라는 구절이 있다.  20세기 20년대에 손중산선생이 “민생”에 새로운 내용을 주입하면서 “주의(主义)”로 승화시켰는데 민생에 대한 가장 경전적인 해석이다. “민생은 바로 인민생활ㅡ사회생존, 국민생계, 군중의 생명이 다.”(《孙中山选集》,人民出版社1981年版,第802页). “민생은 사회의 일체활동의 원동력이다.” (同上,第825页) 。     민생문제는 경제문제, 사회문제이면서도 정치문제이기도한바 정치각도에서 민생 문제를 사고하는것이다. 이런 의의에서 정치는 권리정치와 리익정치가 아니며 더우 기는 투쟁의 정치가 아니라 민생을 본위로 하는 민생정치이다. 이 도리를 조금 비틀 어 보면 무슨 딱지가 붙든 정치의 본질인즉 민심을 얻는 문제인것이다. 신라때 충담이라는 한 스님의《안민가 (安民歌)》가 있다.                                                        임금은 아비여                                                        신하는 사랑하시는 어미여                                                        백성은 어린아이라 할 때                                                        백성이 사랑을 알리라                                                        탄식하는 뭇창생                                                        이를 먹여 다스릴러라                                                        ………………………(략)     사필귀정이라는 옛성현들의 말이 있거니와 또 민심이 천심이라는 말그대로 력대의 혼군, 폭군들이 민심이반으로 몰락한 사실을 력사는 기록하고있다. 민중들은 누구인가? 민중을 민초라고도 하는데 풀과같은 존재이다. 풀은 하늘의 별보다도 많고 바다의 모래보다도 많으면서 한알의 씨앗이 되여 기꺼이 죽는다. 하지만 한알의 씨앗 은 죽어서 수많은 열매로 거듭 살아난다. 풀씨는 다시 살기 위하여 죽는것이다.     새 봄이면 땅속에 묻혔던 씨앗이 움튼다. 그 움틈은 바로 영원토록 죽지 않는 민중의 생명력이요 무성의 생명찬가이다. 민중은 제소리를 웨칠뿐만아니라 사회를 투시하는 두개의 혜안을 가지고있다. 말하자면 민중은 력사와 정의에 대하여 관찰하는 정확하고 명백한 눈으로 현재와 미래를 모두 꿰뚫어 보고있다는 말이 되겠다. 민중은 천심의 망원경으로 유구한 력사를 고찰하고 미래를 내다본다. 봉건제왕들이 천년만년이나 해먹을것처럼 욕심부렸지만 민초들은 마음만 먹으면 곧 뒤집어버릴수 있었다.     장편대론이 필요도 없다. 현대백성들의 절실한 관심사는 다섯가지다. 민생의 근본인 취업문제, 민생의 밑바탕인 교육문제, 민생의 원천인 분배문제, 민생의 의거인 사회보장문제, 민생의 방패격인 사회안정문제이다. 민생문제는 입으로 하는것이 더구나 아니다. 잘 살려는 백성들의 소원을 이루게 하려면 실제국책이 따라야 한다.     비유한다면 야자를 먹으려는데 찍어낼 칼을 쥐여주고 물을 끓여야 하는데 그릇을 마련해주는것과 같은 실제적인 문제를 해결해주는 경우와 같다고나 할가, 선(善) 의 미명하에 행하는 가상은 황당하며 자기를 속이는 우둔하고 무지한 작동이다. 따뜻해 지려면 화토불 가까이로 다가앉아야 한다는것은 삼척동자도 다 안다. 민심을 알려면 민중속에 들어가야 한다. 도덕과 량심과 박애와 후덕함을 얻으려면 그것을 가진 민중들과 가까이 하고 더 나아가 그 속으로 들어가야 좋지만 그게 잘 실천되지 못한다.     민생이란 중국의 전통적사회관념에서 백성들의 기본생계문제로서 국계민생이라면 곧 국가대사와 백성의 생활을 이르는 말이다. “일이 없이 삼보전에 오르지 않는다 (无事不登,三宝殿”는 말이 있듯이 한국에서처럼 선거철만 되면 장마당같은데를 돌며 민심을 살피는것은 얄팎한 수사학일뿐이다. 간디가 말한 일곱가지 악덕은 “철학이 없는 정치, 도덕이 없는 경제, 로동이 없는 부, 인격이 없는 교육, 인간성이 없는 과학, 륜리가 없는 쾌락, 헌신성이 없는 종교”이다. 이 말은 천하 금과옥조이다.                                                          2014년 1월 21일
833    산상에서 댓글:  조회:2124  추천:0  2017-08-17
   산상에서                              산                 정상                구름도               쉬여넘는              산상봉에서             욕망 접어놓고            거한웅좌에 깊이           허리굽혀 절할대신          지자요산의 지향인듯         장부의 호연지기 토하네        흰바위와 스치는 바람안고       산위에 산을 바라는 욕망으로      하늘낮다 개탄하니 우습지 않냐     마소, 웅숭깊은 산의 마음을 읽으소   올라온만큼 다시 내려야 하는 하산행에  버려라 모든것 버리고 허허하게 내려가거라 인생도 등산같거늘 내리지 않는 산행이 있으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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