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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라지》문학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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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시와 먼 곳의 전야(외1편) 댓글:  조회:257  추천:0  2021-06-23
시와 먼 곳의 전야 ▣ 수필 / 채복숙   이쁘장한 젊은 녀자가 그림을 보고 있다. 세련된 초록의 원피스를 입고 검은 핸드백을 든 채 머리를 20~30도의 각으로 살짝 들어올려 오른쪽 우, 화면에 나타나지 않은 그림을 보고 있다. 녀자는 대략 7:3 비례의 장방형 구도 안에 서 있다. 명도를 살짝 떨어뜨려 조금은 우울해 보이는 색감의 연두색 풀무늬 벽지 우에는, 역시 살짝 우울해 보이는 낮은 하늘과 머리를 풀어헤친 나무를 그린 풍경화가 있다. 녀자는 아마 갤러리 속에 몸을 담고 있는 것이리라. 백열등에 직접 조명을 받은 듯 얼굴 피부는 눈처럼 희고 깨끗하다. 그러나 두 볼은 오히려 발가우리하다. 눈은 속쌍거풀이고 입술은 작고 도톰하다. 미인이다. 미인은 가슴이 깊게 파인 원피스 안에 하트형 깃의 다홍색 스웨터를 입었다. 하트형 깃의 끝에는 작은 금속고리가 걸려있고 그 고리에는 하얀 진주 패물이 걸려있다. 그뿐이 아니다. 하트형의 스웨트 깃은 량옆을 돌아가며 같은 색상의 남홍(南红) 마노 구슬로 치장했다. 백조의 목같이 희고 예쁜 목에는 가는 금목걸이가 걸려 있는데, 그 목걸이는 또 무늬가 보이락말락하다. 이미지는 세밀함이 극치에 달한다. 사진일가? 사진이 아니라 ‘동경’이라는 제목의 그림이다. 그림이지만 사진이 울고 갈 지경으로 리얼리티하다. 나는 한때 신문의 ‘예술살롱’란을 담당한 적 있다. 그때 예술평론이라 하기에는 많이 부족하지만, 스스로는 느낌이 그럴 듯한 감상문들을 꽤나 썼었다. 우의 그림도 그때 만난 것이다. 나는 그림을 보며 세밀화의 극치가 이같은 경지에 도달할 수 있음에 혀를 내둘렀다. 중국에서는 회화의 전통 쟝르로 공필화라는 것이 있기는 했지만 그래도 정신과 기품, 경지를 중시하는 화파가 우선시되였고 사진과 똑같게, 혹은 사진보다 더 세밀한 그림은 근래에 많이 흥기하기 시작한 것 같다. 현재 중국 회화 시장에서는 세밀화가 상당한 자리를 차지하고, 가격이 천문수자인 그림을 그려내는 화가도 적지 않다고 한다. 그런가 하면 서방 미술계는 여러 화파들이 돌고 돌아 슈퍼리얼리즘이라는 경향이 생겨났다고 한다. 그런데 사진예술은 또 다른 추구가 있는 것 같다. 사진이란 이름을 한자로 풀이하면 베낄 사에 참 진이다. 참을 베낀다는 뜻이다. 말 그대로 피사체를 그대로 베낀다는 뜻으로 리해해야겠다. 초기의 사진은 결코 미술의 령역이 아니였을 것이다. 하지만 현재는 디지털 기술로 다양한 사진 이미지들이 만들어지고 있으며, 이런 기술들이 사진의 개념을 완전 바꿔 버렸다고 해도 결코 과언이 아니다. 지금 사진은 당당히 예술의 한 분야로 되여, 있는 그대로 담아내지 않고, 낯설거나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대상을 만들어 보여주기도 한다. 현재, 사진작가들은 상상력의 한계에 도전하면서 또 다른 극치의 작품들을 만들어낸다. 그러고 보면 미술작품은 사진화 되고, 사진작품은 미술화 되는 게 아닌가 싶다. 세상은 타자를 배척하기도 하지만, 이렇게 타자가 되고 싶어하는 경향도 있는 것 같다. 우리가 사는 일상은 거의 비슷한 나날들의 중복이다. 단조롭고 따분하다. 서로 다른 시간이라는 점을 제외하면 거의 완벽에 가깝게 똑같은 일상이다. 대개의 사람들은 그 매일매일의 비슷한 일상에서 도망칠 수 있기를 바란다. 그래서 홀로의 려행, 먼 곳에로의 동경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정작 홀로 떠돌아다니는 사람은 안정된 환경과 따뜻한 가족이 그립다고 하니 아이러니하지 않을 수 없다. ‘령혼을 위한 닭고기 스프’라는 것들이 많이 류행되던 시절이 있었다. 그 시절에는 ‘생활은 눈앞의 구차한 일상만이 아니야, 시와 먼 곳의 전야도 있어’라는 꽤 근사한 노래도 있었다. 대략 7~8년 전, ‘시와 먼 곳의 전야’를 위해 교사직을 그만뒀다는 녀교사의 일화가 전 중국을 들썩이게 한 적도 있다. 이 일화의 주인공 녀교사가 썼다는 사직서는 단 한줄로 된 “세상은 저렇게 크고 나는 그것을 보러 가고 싶다”이다. 그런데 심심한 네티즌들이 그것을 대련(对联)으로 만들었으니, 그중 가장 이름난 것이 “돈지갑은 요렇게 작고 어디에도 갈 수 없다”이다. 거기에 횡서(横批)로 “출근이나 잘해라”고 달았다고 한다. 사람은 항상 리상적이 되여 보이는 다른 누군가가 부럽고, 예술은 늘 상반되는 령역에로 꾸준히 파고 들어가는 것 같다. 자아에 대한 불만이 새로운 자아를 만들려는 노력으로 이어지는 게 아닐가. 요즘도 꽃은 피였건만 일상은 단조롭다. 그래서 나도 시와 먼 곳의 전야가 한결 더 그리운가 보다. 일상을 탈피할 수 없다면 그리운 시와 먼 곳의 전야를 내가 직접 만들어낼 수밖에 없겠지… 다시 한번 ‘동경’이라는 그림을 들여다본다. 그림 속의 그녀도 시와 먼 곳의 전야를 보고 있는 것이리라. 격조가 살짝 우울하지만 눈빛이 례사롭지 않아 동경이라는 것이 더 돋보인다. 채복숙 프로필 채복숙, 흑룡강신문사 기자 경력, 현재 흑룡강조선민족출판사 편집. '민족문학' 잡지 년도상 등 수상. ►채복숙의 다른 작품 감상 인생은 색갈의 강이야- ▣ 수필 / 채복숙   출처가 어디인지는 알 수 없지만 ‘휴일의 성소(圣所)는 침대’라는 말이 있다.(출처를 알 수 없으니 일단은 본인의 명언으로 치자.) 더구나 해빛 따뜻하고 나른한 봄날 주말이면 침대에서 이리 뒹굴, 저리 뒹굴 하는 산만함이 나처럼 게으르지만, 매일 아침 꼬박꼬박 제시간에 출근해야 할 출근족에게는 황금 같은 휴식일 것이다. 그런데 전번 휴일에는 아침부터 급히 나가 돌아야 할 일이 생겼다. 나는 속으로 ‘알파카’라는 동물의 한어 속칭을 몇번이나 외우기는 했지만 별 수 없는 일이였다. 바로 며칠 전, 사월 중순임에도 눈을 퍼부은 이 곳 북방 도시는 아직도 우중충했고, 나는 선잠에서 깬 아이처럼 기분이 나지 않았다. 하지만 온 오전 시간을 할애해 해야 할 일들을 다 하고 나니 숨통이 트이는 것 같았다. 거리에 나서니 아침에 올 때까지만 해도 그냥 텁텁한 다갈색으로만 인식되던 사위가 갑자기 연분홍 물결에 설레이고 있었다. “어? 언제 꽃이 폈지? 아침에는 못 봤는데?” 그렇다, 아침에는 꽃이 핀 걸 못 본 거다. 선잠에서 깨여 떼를 써야겠는데, 떼를 쓸 수 없는 어른은 눈앞의 풍경도 선택적으로 본 것이였다. 거리 전체가 연분홍의 물결이 되여 흐르고 있는 느낌이 들었다. 작은 바람에도 그 연분홍들은 솰솰 설레이였다. 긴 어둠의 겨울을 지나 드디여 봄이 온 것이였다. 봄은 연분홍이다. 젊은 시절 나는 연분홍을 되게 좋아했다. 옷장 전체가 연분홍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였다. 체격이 가녀린 나에게 연분홍 옷은 이래저래 잘 어울렸다. 친구들은 나와 같이 쇼핑을 나가면 분홍색만 봐도 “저기 네 스타일이 있다”고 소리칠 정도였다. 스스로도 연분홍이 잘 어울리는 것 같아, 친구들이 “참 예쁘구나”고 할 때면 저절로 입이 함박만 해졌다. 나는 그렇게 나이가 꽤 들 때까지 그게 인사적인 칭찬일 수도 있다는 걸 전혀 생각지 못했으니, 심성이 단순해 빠진 건 확실하다. 세월은 쏜살같이 흘렀고, 나는 리유 없이 마냥 빨간색이 좋은 시간을 보낸 적 있다. 온 여름 빨간 반팔티에 빨간 핸드백을 메고 사처로 쏘다니군 했으며 이래저래 사람을 웃기는 사고도 적잖게 쳤다. 그때의 나는 여러가지 일들에 참여했고, 또 그 모든 것들에 신나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상 우에 놓인 빨간 계혈석 팔찌가 싱겁게 바닥 우로 굴러떨어지며 산산조각이 났다. 비싼 것은 아니였지만, 그것은 내가 유난히 아끼는 것이였고, 여름 내내 나와 같이한 것이였다. 미신이라 하겠지만 나는 그것이 주인을 대신해 액을 막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미신대로라면 나는 그것을 종이봉투에 담아 어디엔가 고이 매장해야 했다. 하지만 나는 어쩐지 씁쓸한 기분이 되여 그냥 쓰레기통에 담아버렸다. 그 날 저녁, 나는 한창 빨갛게 피고 있는 월계화 가지를 쑥덕 잘라버렸다. “난 아직 자를 때가 안되였단 말이야!” 월계화는 이렇게 소리치며 내 손가락을 덥석 물었다. 뾰족하고 단단한 가시에 찔린 손에서는 찔끔―하고 새빨간 피방울이 배여 내왔다. 몇년 동안 잘도 꽃을 피우던 월계화는 이젠 내 기억에서 가물가물 사라져 간다. 가을이면 나는 락엽과 똑같은 색갈의 가벼운 재킷을 입기 좋아했다. 박봉을 받는 내가 백화점에서 일개 재킷 하나를 월급의 1/3을 주고 산다는 건 무리긴 무리였지만 나는 눈 한번 깜빡 안하고 그것을 사들이였다. 그것은 밝은 노란색 우에 흰색의 반투명 막을 친 것처럼 선명하면서도 뽐냄이 없고, 발랄하면서도 진중함이 있는 색상이였다. 재킷은 락엽처럼 가벼웠지만, 가을바람을 제법 잘 막아냈다. 그 시절 나는 자연에 들어가는 것이 좋았다. 오후의 밝은 해살을 받으며, 락엽이 덮인 소로길을 걷노라면 머리가 맑아지고 기분이 상쾌했다. 그것을 두고 나는 인생을 누리는 것이라 정의했다. 그때 나는 자연 속에서 많은 것들을 주어왔다. 다친 자국이나 흠집 하나 없이 깨끗한 락엽 한장은 좋아하는 시집 속에 끼워 넣었고, 탑처럼 정중한 모양을 가진 솔방울은 서가 우에 잘 세워 두었다. 그리고 맑은 하늘 아래의 산이며 들이며, 물이며 등 가을 풍경들은 사진으로 고화되여 내 기억 속과 클라우드 속에 동시 저장되였다. 북방의 겨울은 매섭기는 하지만 짜장 청정한 기운이 있다. 그 청정한 기운은 특히나 감청색의 하늘빛에서 선연하게 안겨온다. 감청색은 또 바다의 색갈이기도 하지만 내가 좋아하는 람보석의 색갈이기도 한다. 그것은 온갖 희열과 슬픔, 분노, 사랑과 미움이 인생이라는 용광로에서 단련되여 나온 것처럼 단단하고 순수하다. 그 단단하고 순수한 감청색을 옷으로 만들어 입으면 고상하고 신비스러운 멋이 있다. 하지만 그것은 결코 컨트롤하기 쉬운 색상은 아니다. 나는 겨울이면 감청색의 깃 높은 스웨터를 입는다. 그것을 입고 나면 쌀쌀맞고 랭정하면서도 순수한 느낌이 묻어난다. 그 쌀쌀맞고, 랭정하면서도 순수한 시간들에 나는 여러가지 생각들을 한다. 그리고 그 생각의 편린들을 손 가는 대로 잡히는 종이장에 아무렇게나 적어놓는다. 그 종이 조각 우의 글자들은 철학가의 고상한 언어들처럼 두서가 없지만 또한 내 삶의 단증이 되기도 하다. 그리고 봄이 왔다. 나는 연분홍과 감청색으로 짜깁기를 한 스카프를 둘렀다. 연분홍과 감청색은 천생연분인 것처럼 잘 어울린다. 발랄하면서도 랭정하고, 순수하면서도 고급스럽다. 나는 봄바람 속에서 스카프를 날리며 꽃이 핀 것을 본다. 연분홍꽃들은 여전히 아름답고, 봄날은 여전히 단순하다. 해빛이 내리쬔다. 투명한 해살은 온갖 색상들을 품고 있다. 애기풀의 화사한 연두색이며, 오래된 건물의 진중한 암회색이며, 지나가는 회사원의 깔끔한 하얀색이며… 세상은 색갈의 회합이고, 인생은 색갈의 강이다. 집으로 돌아왔다. 창문으로 밝은 해살이 가득 들어와 침실은 명정한 분위기가 난다. 금전운이 좋으라 친 베이지색 카텐이 유난히 럭셔리한 감을 준다. 편안한 침대에 몸을 뉘였지만 생각은 제멋대로 쏴쏴― 흐른다. 올 봄에는 아까 보았던 아방가르드한 아가씨처럼 머리카락을 보라색으로 염색하면 어떨가? 그러면 계절의 륜회처럼 마음에도 또 새로운 색상들이 흘러들겠지…   《도라지》2021년 3기
4    정체성을 지키기 위한 처절한 몸부림과 삶의 진정성 추구 댓글:  조회:1362  추천:1  2014-03-24
격월비평 정체성을 지키기 위한 처절한 몸부림과 삶의 진정성 추구 -«도라지» 2012년 3호 격월평 오상순  언제나 새로움을 꾀하는 《도라지》답게 2012년 3호도 청신함과 아름다움과 향기로 독자들을 끈다. 2012년 3호에 소설 3편, 수필 12편, 칼럼 1편이 실렸다. 쟝르는 다르지만 조선족으로서, 작가로서, 교수로서, 인간으로서 정체성 찾기의 처절한 몸부림이란 공통점이 있다.   《도라지》3호에 홍만호선생의 수필시리즈 “기다림”, “외로움”, “참을성”이 실렸는데 그대로 년장자의 인생철학이라 할수 있다. 저자는 학자로서의 박학다식과 년장자로서의 풍부한 인생체험을 바탕으로 기다림, 외로움, 참을성의 변증적관계를 설득력있게 풀어나가면서 인생진리를 깨우쳐준다. 저자의 인생에 대한 달관과 초월의지는 젊은 작가들의 본보기가 되기에 손색이 없다.   ➤민족정체성을 지키기 위한 처절한 몸부림     박옥남은 2000년대에 들어서면서 창작활동을 가장 왕성하게 한 작가중의 한 사람으로 고향마을을 무대로 조선족농촌의 생활풍경을 그림같이 그리면서 조선족농촌의 황페화와 조선족공동체의 해체 등 민족의 운명에 대해 끊임없이 성찰해온 작가이다. 청년작가들이 현대적인 감각을 추구하였다면 박옥남은 꾸준히 자기의 소설적공간과 주인공들, 소박한 전통기법과 우리 민족 고유의 방언을 고집하면서 자기의 브랜드를 만들었다고 할수 있다. 《도라지》 2012년 3호에 실린 박옥남의 실화소설 《고향》과 수필 《고향사람》도 박옥남의 브랜드를 한층 부각시키는 작품이다.    박옥남의 실화소설 《고향》은 수필 같은 소설이다. 22년만에 고향에 내려와 변화된 모습들을 돌아보면서 과거를 회상하는것이 전부이다. 그런데 아무른 소설거리도 없는 소설이 큰 감동을 준다.   조선족에게 있어서 고향마을은 민족공동체의 상징이다. 그런데 우리의 선조들이 피땀으로 가꾸어 아담하고 정답고 화목하여 무릉도원과 같았던 조선족마을들이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있다. 이제는 아스라니 잊혀지는, 더는 찾아볼수 없는 옛고향의 아름다운 흔적들을 박옥남은 섬세한 필치로 그림 같이 그려내여 우리앞에 펼쳐주고 하나하나의 추억을 건져내여 독자들의 머리속에 심어준다. 박옥남의 《고향》을 펼쳐들면 고향에 대한 기억이 그렇게 아름답게 안겨올수가 없다.      집안이 빠개지도록 “모야!” “뒤돌이야!”하며 목에 피대를 세우고 떠들어대던 마을 아낙네들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생각대로 윷사위가 나오면 개선장군들처럼 구들복판에 나서서 어깨춤을 추군 하던 아낙들, 인도사람들처럼 배꼽춤을 춘다며 옷깃을 말아올리고 함지박같은 엉뎅이들을 흔들어대여 배꼽을 잡게 했던 사람들, 마을치고도 제일 뚱뚱한 아낙 몇은 기록영화에서 본대로 일본의 스모선수들을 모방한다며 윷을 치다말고 윷판우에서 씨름판까지 벌려 좌중에 폭소를 안겨주기도 했다. 흥을 몸으로 표현할줄 알았던 우리 마을 아낙들은 술이 거나해지면 물을 담은 양푼에다 박바가지를 엎어놓고 장단을 치면서 저마다 재간껏 자기들의 기량을 자랑하기도 했으니 뭐니뭐니 해도 가장 고단한 삶을 가장 재미있게 살다간 사람들이 아닌가싶다.     저자는 “봄이면 호드기를 불어대며 벌판을 주름잡고 여름이면 마을뒤 개울물에서 물장구를 치고 가을이면 잠자리떼를 쫓아 골목골목을 누비고 겨울이면 썰매놀이에 해 넘어가는줄도 몰랐던 동년이 살아서 돌아올것만 같”고 “하루일을 끝낸 어른들이 저녁노을에 물든 고샅길로 삼삼오오 떼를 지어 귀가하는 모습이 보이는것 같았고 집집의 굴뚝에서 밥짓는 연기가 모락모락 피여오르는 풍경이 보이는것 같았으며 마당둘레에 모닥불을 피워놓고 오순도순 모여앉아 이야기꽃을 피우던 이웃들이 보이는것 같았다.”고 애절히 표현한다. 소설 전반에 걸쳐 옛고향마을에 대한 아름다운 추억이 큰 공감대를 형성하며 눈물겹도록 감동을 준다.   소설의 다른 한 특징은 비교의 미학이다. 저자는 무릉도원과 같았던 옛 고향의 세태풍속과 오늘날 너무나도 피페해져 있는 고향마을의 모습을 대조적으로 그리여, 조선족농촌 황페화의 심각성을 더욱 부각시키고있다.    원래 110호가 운집해 살았던 마을에 조선족은 겨우 17가구에 24명, 대신 농사지으러 들어온 한족이 30호가 된단다. “중심거리에 한식경을 서있어도 아는 얼굴을 만날수가 없”고 옛집터를 찾아갔더니 “쉐이야?!”하며 꽥 소리치는 한족아낙과 웃통을 훌렁 벗어붙이고 길가에서 한담하는 한족 나그네들과 황둥개가 오늘날 이 마을의 풍경을 이루고있다.     내가 살던 집은 터만 남고 친구들과 소꿉장난하던 벽굽이쪽에는 범이 새끼칠 정도로 잡초가 무성했고 참외며 일년감을 심어먹던 터밭은 온통 콩밭으로 변해있었다. 산천은 의구한데 인적은 간 곳이 없는 현실앞에서 “주위는 너무나 한적해서 오솔한 느낌마저 들었다.”고 저자는 아픈 마음을 토로한다.    전 공사적으로 이름이 뜨르르했던 조선족학교의 벽돌교사는 돈사로 변했다가 방치된 상태, 돈사바닥엔 말라 부스러진 나무가지와 돼지똥 같이 보이는 흙무지와 밟혀죽은지 오래되여 바싹 말라버린 쥐 시체가 여기저기 널려있다. 저자는 페허속에 서서 “이곳에 우리 말로 글을 배워주던 학교가 있었댔다는 사실은 이제 력사의 뒤안길로 사라져 전설로나 남을것”이라며 눈물 흘린다.    끊임없이 조선족마을의 피페화와 동화(同化)현상을 부각시켜 민족의 위기를 강조하던 박옥남의 이전 작품과는 달리 이 소설에서는 무릉도원와 같았던 조선족마을의 옛풍경을 되살려냄으로써 과거지향속에 새로운 동경을 시도해본다.     전체적으로 이 소설은 과거지향적인 성격을 띠고있는데 앞날에 대한 희망을 버리지 않고있다. 호도거리때 분여받은 땅외에 20쌍을 개간하여 한족사람한테 도급주어 일년에 양도금만 20만원을 받으면서 승용차를 끌고다니는 촌장, 저자는 그를 “신흥지주”라 칭했다. “땅만큼 실속있게 자기를 부자로 만들어준것은 없다”고 하면서 명년엔 마을에 상하수도를 놓고 일들을 벌려볼 심산이라면서 남에게 내주었던 땅을 걷어들여 정책 좋고 시세 좋은 농사일을 다시 시작해보겠다는 촌장은 조선족농촌의 미래의 한 상징이라 할수 있다.   실화적인 제재, 려로형 구조, 대비적수법이 “고향”의 서사특징이라 할수 있는데 원근법에 의한 구성이 빈틈없이 탄탄하면서도 자연스럽다. 소설에서는 민족적정취가 물씬 풍기고 “풋풋한 흙냄새, 고향냄새가 짙게 피여오른다.”   박옥남의 수필 “고향사람”은 “고향”과 “고향사람”에 담겨진 재미있는 에피소드로 이주민으로서의 정체성의 갈등과 추구를 파헤친다.      수필은 예전에 고향어른들은 처음 만나는 사람과는 꼭 “고향이 어디요?”하고 상식처럼 묻군 했다는 에피소드로 시작된다. 두번째 일화는 학교에 입학할 때 선생님은 꼭 “고향이 어디예요?”라고 물었는데 또랑또랑 대답하면 똑똑하다고 칭찬받고 어물어물하거나 동문서답하면 멍텅구리라고 꾸지람 듣기가 십상이였던 일, 선보러 가서 장인될 사람의 “고향이 어딘고?”라는 물음에 대답못하면 “반푼”으로 취급되고 혼사가 깨여질수도 있었다는 이야기가 세번째 일화다. 이민1세들에게 있어서 고향은 자식들이 반드시 알아야할 필수지식이였다면 그 후대들은 “강다짐으로 기억해야 하는” “수학책의 공식만큼 난해하고 어려운 일로 생각”되였단다.   네번째 일화는 한국인과의 대화이다. “미스박 고향이 어디예요?”하는 물음에 “흑룡강입니다.” 대답하니 “원적 말이야. 부모님 고향이 어딘가고?” 재차 묻는다. 함경도란 대답에 더이상 말을 꺼내지 않는 한국인, 민족은 같아도 고향이 다르니 관심이 없다고 판단한다. 조선족들에게 “고향사람”은 “뿌리는 하나”라는 공동체의식과 민족의식이 강조되였다면 중국에 진출한 한국인에게 고향사람은 반도의 어느 지역이냐에 관심이 집중되는것이다.    산동성 교주시에서 근무할 때, 만날 때마다 “고향사람”이라 부르며 과일을 덤으로 주던 한족청년은 “한 고장에서 함께 살았던 사람”으로 보다 포섭적인 모습을 보였다.    결말에서 저자는 “우리 어머니 우리 아버지가 반색하던 고향사람이나 산동땅에서 만난 한족 야채장수나 나에겐 모두다 소중한 고향사람”이라고 단정한다.   짧은 수필속에 조선족, 한국인, 한족의 정체성의식, 그리고 조선족 이민1세와 그 후대들의 정체성의식의 차이를 생동하게 부각시키면서 고향을 멀리 떠난 사람들에게 있어서 고향사람은 서로 의지하고 서로 부축하면서 따뜻하게 살아갈수 있는 마음의 안식처와 같은 존재라는 주제의식을 이끌어낸다.    이 수필을 더욱 빛나게 한것은 팔도방언의 생생한 구현이다.    “동두까리로 대갈통을 쳐부숴슬라므네 피가 사방 퉸수다.”   평안도 아낙이 채소밭에 들어가 말썽을 부리는 씨암탉 때려잡던 소리를 하는데   “무신놈의 달구새끼를 몽디로 잡능교?”하고 경상도 아낙이 중을 뜨니   “달그 잡는데는 몽치보다 이 방치가 제격이 아니겠음둥?”하고 함경도 아낙이 동을 달고   “아 그래갖고 닥을 지대로 잡것어? 짜른 방매이보다 긴 꼬장가리가 백배 낫제.”하고 다른 아낙이 총결을 짓는다.   이 수필에서도 박옥남은 팔도방언을 재치있게 끌어들여 박옥남다운 개성을 살려내고있다. 주제도 좋고 구수한 방언이 민족적정취를 물씬 풍기면서 감흥을 주며 깔끔하고 빈틈없는 구성이 미감을 준다.    중학생 김광원의 수필 “그리운 향기”를 읽으면서 우리 문단의 미래가 보이는것 같아서  대견스러웠다. 수필을 구성하는 재치며 미끈한 언어구사며 주제를 심화시켜나가는 능력이며 빈틈이 없다. 어린 나이지만 민족에 대한 깊은 리해와 사랑에 감동했다.   “그리운 향기”- 평범하면서도 많은 상상을 불러일으키는 제목이다. 어머니가 정성껏 준비한 아침상에서 구수한 된장국에 뚝딱 밥그릇을 비우고 입안에 퍼진 된장냄새를 빼려고 박하사탕을 찾는데 어머니께서 숭늉을 건네주던 일화로 서서히 숭늉에 대한 자신의 리해와 사색을 펼친다.   기름진 음식에 속탈이 났을 때 어머니께서 건네준 숭늉을 투정부리며 낯을 찌프리며 처음 마실 때 숭늉의 볼품없는 겉모습과는 달리 목구멍으로 들어가는 순간 그 구수함과 시원함이 가슴속까지 스며들어 그 한모금의 진한 숭늉맛에서 옛조상들의 절약정신과 삶의 지혜를 엿볼수 있었다고 고백한다. 그때부터 숭늉이 고급스럽게만 느껴졌단다.   저자는 숭늉은 미국의 코카콜라처럼 입맛을 자극하지도 못하고 프랑스의 와인처럼 우아하고 깔끔하지도 못하고 다만 시원하고 구수하다는 맛때문에 한끼 식사후의 입가심밖에 되지 못하는 껌 같은 존재, 옛날 우리의 선조들이 밥을 다 짓고 밑에 붙은 누릉지가 아까와서 다시 물을 부어 우려낸 숭늉, 저자는 그런 숭늉속에 내포된 함의를 “가난하더라도 바르게 살자”는 우리 선조들의 삶의 원칙, 우리 조상들이 남겨준 소중한 정신적유산”으로 리해하면서 우리 후대들이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있음을 가슴 아파한다.   그대로 민족의 정취, 민족의 향이 짙게 풍기는 수필이다. 숭늉에 대한 리해도 참신하고 설득력이 있어 공명을 불러일으키며 민족의 얼, 민족의 문화, 민족의 미래에 대한 사색과 여운을 던져준다. 숭늉에서 이끌어낸 민족정신이 돋보인다.      ➤작가로서의 정체성 지키기   조광명의 중편수필 “시인보다 가난한 라면은 없다”를 즐겁게 읽었다. 아이러니, 언어유희, 자조와 유머로 점철된 이 수필을 읽으면서 작가의 뛰여난 유머감각, 위트, 구상력, 감각적인 언어표현에 감탄했다.   “시인보다 가난한 라면은 없다”- 론리성이 파괴된 시적인 제목이다. 가난한 시인과 라면의 등호관계- 작가의 뛰여난 구상력이 돋보인다. “세상에 시인보다 가난한 라면은 없다. 라면보다 가난한 시인은 있어도.”, “시를 쓰서 배고픈 시인들”이란 표현도 그대로 명언이다. 라면에 비유되는 작가들의 위치와 생활, 그것이 평생을 작품이란 밭을 가꾸어온 작가들의 현실이다.   저자는 메신저로 친구와 말장난하는것으로 시작하여 “문학의 꿈에 미쳐 밤새워 독서하고 습작에 열을 올리던 배훌쪽이 소년이 40대 중반의 배불뚝이 펑퍼짐한 아저씨”가 된 오늘, “글재간 익히느라 밥벌이재간 익히기에 게을렀던” 자신, “시가 밥을 주는건 아니”며 “밥그릇에 시귀 적고 낄낄댈수만은 없는걸” 늦게 깨우친 자신을 자조하기도 하고 그러면서도 일년에 시 몇편 못쓰는 자신을 두고 “네가 시인이냐?”, “시들이 나를 버린것이 아니라 내가 시들을 버린줄 나도 잘 안다. 그런 나는 이제는 시인이 아닌지도 모르겠다.”며 시인으로서의 정체성에 갈등을 느끼기도 하지만 “시 한수로라도 최고의 갑부로 된 기분으로” “아름다운 시 한수 구걸하기 위해 주린 배 더 줄이며 라면 한봉지 사먹기에도 린색하던, 그 배고프던 령혼의 10대소년”을 그리워하면서 “어쩌면 그때가 가장 배불렀던 시절이였는지 모른다.”는 대답을 얻는다.    결말에서 저자는 “아무래도 나는 장사체질은 아닌가부다.”고 시인으로서의 정체성을 확립한다. “시인은 아무리 가난해도 라면처럼 뽀골이파마는 하지 않는다.”, “꼬불이가 아닌 생머리라면, 그건 라면이 아니라 우동일것이다.”라는 말장난은 상징성을 띤다. 작가로서의 긍지감과 지조라고 할가…   라면보다 가난한 시인의 현실에 대한 자조속에는 역설적으로 그러한 현실이 조성된 사회에 대한 비판이 심층적으로 깔려있다. 시인으로서의 정체성 갈등과 확인이면서 문학을 외면하는 현실에 대한 비판이다.   수필에서 언어유희는 즐거움을 듬뿍 선사한다. 언어유희속에 깊은 주제를 담고있어 돋보인다.   김혁의 칼럼 “난 ‘상어’로소이다”는 자신의 체험을 바탕으로 작가의 성공과 학벌이 꼭 등호관계가 아님을 주장하면서 “학벌지상주의”의 현실을 비판한다. 시적인 제목에서 자조적이고 역설적인 냄새가 다분하다.    이 작품은 무엇보다 비유와 상징의 참신성에서 돋보인다. 졸업장이 없는 작가와 부레가 없는 상어, 그야말로 김혁다운 비유이고 상징이다.   저자는 상어에 대한 사전적해석을 빌어 부레가 없는 상어는 다른 동물과 달리 24시간 내내 끊임없이 몸을 움직여야 살수 있다는것, 상어가 다른 어종이 비하지 못할 힘찬 근육과 우람한 몸체를 갖게 된것도 그렇게 쉼 모르고 끊임없이 깊은 바다, 넓은 바다를 누빌수밖에 없는 “결손”때문이라고 하면서 부레가 없다는 결손때문에 하루종일 몸부림치는 상어처럼 무학력 작가들은 졸업장이 없다는 결핍때문에 끝까지 가보려는 시종여일의 정신, 작업에 림하면 온몸을 던지고 끝장을 보려는 가렬처절한 문학정신이 있기에 누구보다도 다산을 낳고 그 와중에 수작(秀作)을 낳기도 한다고 주장한다.   “학벌지상주의”에 대한 비판도 날카로운데 탄탄한 구조속에 주제를 설득력있게 풀어나간다. 칼럼은 3부분으로 구성되였는데, 1에서는 남들이 띠를 물으면 상어띠라고 대답하는 에피소드로 자연스럽게 독자들을 본론으로 이끈후 2에서는 작가 프로필을 적을 때면 대학졸업생이 아닌 자신의 난감함을 고백한다.   농부처럼 20여년 필밭을 경운하며 수많은 작품을 발표하고 수상하고 작품집을 내고 상당한 성과를 거두었지만 학력란은 “솎아낸 무밭마냥 한줄 비여 있어야 하고” 통신대학도 나오고 석사연구생공부도 했지만 “함수”와 “수료”라는 딱지는 어김없이 붙어있고 그 빈자리가 커보여 은근히 써놓고는 “백정이 가마타고 대학모퉁이”를 도는듯한 참괴감을 금할수 없는 마음을 고백한다.   3에서는 학력과 성공한 작가가 꼭 등호가 되는것은 아니라는 주장을 고금동서 수많은 위대한 작가들을 례들어 설명하고 오늘날 조선족문단에서 중견으로 활약하고있는 3, 40대 다수 작가들이 “부레가 없는 상어”신세임을 밝힌다.   “가방끈이 짧다”고 좋은 작품이 나오지 못하는것이 아니며 오히려 그들의 작품이 “이 사회 뒤골목에 내쳐진 밑바닥 삶을 사는 부류들처럼 거칠고 다부지며 치렬”하다는것, 생활을 자신의 피부로 접하고 느낀 그만의 “감성”으로 창작하는것이 무학력자들의 우세이며 때로는 최고 명문의 작품보다 더 명쾌한 경우도 있다고 주장한다.     저자는 언제부터인가 우리 사회는 “학벌지상주의” 세상으로 변하여 번듯한 대학을 나와야 사람대접을 받는 사회, 능력보다 학벌을 보고 무학력자는 무능력자로 락인찍는 사회이며 우리 문단도 승자독식을 부추기는 학력지상주의병페가 고스란히 드러나고있다고 비판한다.   물론 고학력이 작가의 화려한 포장이나 멋진 옷만은 아니며 우리 문단에 고학력작가가 적은 현상은 문학적재능이 없기때문일수도 문학에 관심이 없어서일수도 있다. 하지만 오늘날 우리 문단은 무학력 작가들이 중견이 되여 활약하고있는것이 사실이다. 그들도 각자 직장생활과 가정생활로 바쁜 나날들을 보내고 오히려 더 힘겹게 살아가지만 일편단심 문학에 대한 사랑으로 시종여일 창작을 견지하고있는것이다. “학벌지상주의” 페단도 없애야 하고 작가들을 지켜주고 키워줄수 있는 제도적인 조치가 따라가야 우리 문단이나 문학이 발전할수 있다.   ➤교수로서의 정체성 확립   김영옥의 “류월에 떠나보낸 짝사랑”은 잔잔한 감동을 주는 고백체의 경수필이다. 오랜 세월 교수사업에 몸담아온 저자는 자신의 교수생활을 소재로 4년간 정을 쌓으며 자식 같이 거두며 배워준 학생들을 졸업시키면서 느끼는 리별의 아픔과 그리움, 무엇보다 교수로서 학생들에 대한 다함없는 사랑을 섬세한 필치로 그리고있다.   짝사랑이란 한쪽만이 일방적으로 상대방을 사랑함을 말하는것으로 짝사랑이란 표현이 자칫 선생의 일방적인 사랑으로 리해할수 있어 처음에는 머리를 기우뚱했지만 수필을 읽으면서 “내리사랑”, “주는 사랑”, “짝사랑”에 빠질수밖에 없는 교수로서의 숙명과 교수직업의 신성함을 “짝사랑”이라는 표현으로 잘 살려내고있음을 알게 되였다.   대학교수답게 수필언어가 수려하고 정확하며 녀성수필가답게 섬세하고 생동하여 편안하게, 재미있게 읽으면서 감동을 받게 한다.   서두에 “해마다 류월이면 나는 어김없이 한번씩 짝사랑을 떠나보낸다.”로 시작되여 대학교 캠퍼스에서 날마다 청춘의 활력으로 넘치는 싱그럽고 앳된 얼굴들을 만나고 수업시간마다 “나”를 쳐다보는 총명하고 열망어린 눈동자들을 바라보노라면 저도 모르게 행복이 샘솟는듯하며 글 읽는 그들의 랑랑한 목소리를 들으면서 가끔 발음도 억양도 어색할 때가 있지만 대견스럽기만 한 학생들, 가르치고 배우며 그들과 어울리다보면 어느날 문득 이 아이들을 향한 깊은 사랑에 빠져있는 자신을 발견한단다.   저자는 어렸을 때부터 문학이라는 “문”자조차 싫어하던 학광요라는 학생이 선생님의 열정에 감동을 받아 그처럼 하기 싫은 문학공부도 열심히 하게 되였고 언제부턴가는 문학수업을 좋아하게 되였다고 고백하는 순간, “그 평범한 한마디가 문학을 가르치는 나에게 얼마나 큰 힘이 되였는지 그 아이는 지금도 모를것이다. 이런 아이들을 내가 어찌 사랑하지 않을수 있단 말인가”고 저자는 감동한다.   졸업을 앞두고 “김선생님, 우리가 선생님을 영원히 사랑해요! 청춘을 지키기 바랍니다. 예쁜하세요!” 라고 쓴 예쁜 카드를 펼치던 순간, 포복절도하면서 한국어문법도 제대로 익히지 못하고 떠나는 학생들에 대한 걱정과 부끄러움과 자책을 느끼면서 “이런 아이들을 어찌 사랑하지 않을수 있단 말인가?”고 고백한다. 저자는 학생들과 함께 했던 감동적인 나날들을 회상하면서 그들을 사랑하지 않을수 없음을 고백한후 어느해 류월, 첫기 졸업생들을 떠나보내면서 자신의 사랑이 결코 짝사랑만은 아니였음을 알게 되였다고 고백한다.   “가끔은 그 아이들이 어떻게 지내는지 궁금하기도 하고 그 애들과의 행복했던 추억들을 떠올리면서 그리움에 젖기도 하고 각별히 사랑했던 아이들이 졸업후 련락이 드물거나 끊기다싶이 할 때는 은은한 상실감을 느끼며 간혹 엽서나 메일로 몇마디 안부를 물을 때면 또다시 행복으로 설레이는, 역시 못말리는 짝사랑”이라고 고백한다.   “곧 류월이 닥쳐온다. 깊이 사랑했던 아이들을 떠나보내며 또다시 리별의 진통을 겪어야 한다. 그나마 다행스러운것은 해마다 리별의 아픔끝에는 또 새내기들과의 새로운 만남이 있다는것이다. 다시는 아픈 짝사랑을 하지 말자고 맘속으로 늘 맹세하지만 싱그럽고 사랑스런 낯선 얼굴들과 매일매일 만나서 어울리다보면 나의 새로운 짝사랑은 또다시 시작된다.”는 결말은 서두와 잘 조응된다.     구성이 빈틈없고 사례도 생동하고 재미있다. 오랜 세월 학생들과 함께 했던 교수의 생생한 체험과 진솔한 고백에서 교수로서의 진정성이 절실히 느껴진다.     ➤ 자아정체성 찾기와 삶의 진정성 추구     김혜련의 단편 “서울역”은 포스트모더니즘적 요소가 다순한 소설이다. 요지음 젊은 작가들이 그러듯이 이 소설도 일인칭 심리소설인데 사건들의 필연성이나 련관성이 배재되고 시공간이 타파되고 사건의 시말에 대한 교대가 생략되고 불확정적이고 임의적이다.     소설에서 “나”와 현의 갈등과 “나”와 어머니의 갈등이 교차되는데 그렇게 밑도끝도 없던 이야기가 엉뚱하게 결속된다. “나”는 아버지와 어머니가 저축해둔 몇천만윈을 그들 몰래 전세집을 얻는데 써버렸고 그 사실을 알았을 때 어머니는 “에미가 그거 안줄가봐 말 안하고 썼니. 너도 부모가 돼봐라.”하고 한마디 할뿐이다.   “가족이란게 원래 맨날 지지구 볶구 싸우구 화해하고 그렇게 사는거지.”라는 엄마의 한마디에 이 소설의 주제적의미가 담겨있다고 본다.   세상의 존재를 돈으로 살수 있는것과 돈으로 살수 없는것의 이분법의 자대로 재는 “나”와 다이아몬드가 밤하늘의 별 같아서 좋다는 말을 믿는 현, 로후준비는 각자 알아서 하자고 부모에게 선언하는 “나”와 2년여를 로숙자들과 어울리면서 아버지를 찾아헤매는 현, 별이 아름다운것은 멀리 떨어져 있기에 아름다워보이듯이 가족관계도 그렇다고 생각하는 “나”와 가족이기에 아버지를 찾아야 한다는 현이는 대조적이다.   별 주제가 없는것 같고 별 이야기가 아닌것 같은데 그 황당하고 임의적이고 편파적인 일화속에서 가족과 인정에 대한 의미를 되새겨보게 하는 작품이다.   주향숙의 “소나기를 즐기며”는 아이디어가 참신하며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이 개성적이다. 소나기를 맞받아나가면서 환상적인 분위기에 젖어보는 저자의 랑만이 독자들을 흥분시키는데 저자는 소나기를 흠뻑 맞으며 나만의 자유, 나만의 즐거움, 나만의 느낌, 자신의 존재감을 만끽하면서 틀에 짜인 일상, 혼탁한 환경, 기존의 틀에서 벗어나 자기다운 인생을 살아갈것을 주장한다. 한번쯤은 일탈의 쾌감을 맛보는것도 멋있는 삶이라는 생각이 든다.     인간은 원래 고독한 혼자이며, 인간은 그렇게 시간의 흐름에 맡겨진채 하루하루를 죽여왔을뿐이며, 어려운 철학 같은것이 살아가는데 얼마나 도움이 되여왔는가 하는, 어딘가 허무주의적이고 비관적이고 회의적인 느낌을 주기도 한다.    김창영의 수필 “죽음과 그 시작”은 묘족들이 조상들의 시체를 관속에 넣어 올려놓은 현관동(悬棺洞)을 돌아보면서 삶과 죽에 대하여 시인다운 사색을 펼친 수필이다. 언어가 수려하고 구성도 빈틈없다. 수필에서 시적인 표현으로 하여 음미의 공간과 몽롱미, 여운과  함께 리해에 어려움을 주기도 한다.   김경희의 수필 “소음, 너마저 그리웠었다” 역시 인생과 삶의 의미와 방식에 대한 사색을 펼친 서정수필이다. 얼마나 외롭고 고독하면 소음마저 그리웠을가 하는 호기심을 주는 제목이다. 소음마저 그리워하던 저자는 산책과 등산에서 행복을 만끽하면서 자신의 소극적인 사고방식과 삶의 방식을 반성하게 된다. 외롭다고 하소연할것이 아니라 의미있는 일을 찾아하며 화려하지 못해도 수수한 들꽃 같은 삶을 살고싶다고 고백한다.   외로움을 절감하다가 의미있는 삶을 살겠다는 전변과정이 어떤 계기가 주어지지 않아 아쉽다. 외로움을 느끼는 자신의 절실한 체험을 완곡법보다는 소박하게 직접 표현했다면 더욱 가슴에 와닿겠다는 생각이 든다. 외로웠다고 사유가 정지된것은 아니다.   허옥진의 수필 “코구멍으로 보는 세상”은 제목 그대로 코구멍이라는 독특한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보면서 삶의 존재적 의미와 당위성, 그리고 희생정신과 헌신정신을 고양한다고 할수 있다.   그런데 시각이 혼란스럽고 비유가 어색하며 내용이 뚜렷이 안겨오지 않는다. “때론 우리는 잃어버린 한쪽 신발을 찾는 다른 한쪽 신발이 되여 종신보험을 위탁하지만 그 찾아헤매는 정체성은 바로 우리의 둥글지 못한 인생의 귀결점이 아닐가.”등 많은 표현이 모호하기만 하다. “혼탁되다”는 말도 오류다. 정체성이 귀결점이라는 표현도 어색하다. 오히려 저자의 시각에서 인생의 존재적 의미 내지 소망을 소박하게 표현했으면 더 좋았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허경수의 단편소설 “양의 울음소리”는 전통적인 이야기소설이라 할수 있다. 음식점을 경영하는 석만길이 한마을의 강성국과 임구석을 “운반 림시공”으로 데리고 내몽골에 당나귀를 사러 가서 겪었던 우여곡절을 엮고있다. 소설적 공간을 내몽골로, 내몽골초원과 몽골족들의 성격과 생활풍속이 색다른 신선한 느낌을 준다.   그런데 소설이 너무 우연성으로 엮어져 진실감이 떨어진다. 쩍하면 찌프차가 고장나는데 그때마다 공교롭게도 승냥이떼를 만나고 들불을 만나고 총든 강도를 만나고 폭풍우를 만나 차가 웅뗑이에 빠지면서 우여곡절을 겪는다.   들불에 당나귀 2천마리, 소 3천마리, 양 2천마리가 불타죽었다는것도, 차가 고장났을 때 배고프다고 불속에서 요행 살아난 어린 양을 잡아먹겠다고 칼을 빼든다는 이야기도 너무 억지스럽고 길에서 총든 강도들을 만났다는것도 현실에 부합되지 않으며 음식점을 경영하는 석만길이 두 친구에게 수고비를 주기 싫어 갑자기 음식점과 당나귀를 팔고 사라졌다는 사건설정도 진실성이 부족하다. 오늘날의 삭막한 인간관계를 비판하자는 작자의 의도는 알수 있으나 너무 억지스럽다.     《도라지》3호에는 개성과 독창성이 돋보이는 작품도 있고 수준이 떨어지는 작품도 있다.  어떤 수필은 너무 기교에 빠져있고 언어오류도 심심찮게 보인다. 소박하고 담백하고 청신하여 미감을 느낄수 있는 수필이 좋다.   조룡남의 시작노트는 련재중이여서 취급하지 않았음을 밝혀둔다.
3    소나기를 즐기며 댓글:  조회:1126  추천:0  2014-03-24
▣ 수필/ 주향숙 소나기를 즐기며 소나기가 내렸다. 나는 길우에 있었다. 그냥 평범한 하루였고 평온한 심정이였다. 그런 나에게 갑자기 소나기가 쏟아진것이다. 그리고 나는 이상하게도 그 소나기속으로 빨려들고있었다. 나는 왜 소나기를 피하려는 마음이 조금도 없는걸가? 내 가슴속으로부터 일렁이기 시작하는 이 알수 없는 쾌감은 어디로부터 오는것일가? 나는 아무것도 생각지 않기로 했다. 꼭 대답이 있으라는 법도 없는것이고 그리고 내가 생각한다고 그 대답이 주어지는것도 아니며 겨우 대답을 얻어보았자 그것에 대해 판단할 능력이 내겐 없다. 더우기 지금 내게 그 대답이 꼭 필요한것도 아니니까 말이다. 커다란 비방울은 땅이며 지붕이며 차를 요란스레 두들겨댄다. 그것이 지금 그토록 신명나는 리듬으로 경쾌하게 들려온다. 길은 어느새 강물이 되여 흐른다. 나는 그 물속을 철벙거리며 걷는다. 더는 바지가랭이에 물이 튕길가봐 걱정할것도 없으니까 너무 자유롭다. 인간들의 온갖 냄새와 여기저기 넘치는 쓰레기들의 혼탁한 냄새가 사라진다. 오로지 청신한 비줄기의 비릿한 냄새만이 차오른다. 땅이며 하늘이며 세상 모든것들이 소나기속에서 비줄기의 흰빛으로 한결 그윽하다. 그토록 현란해서 현기증이 일것 같던 세상이 푸근하게 안겨온다.   나는 그냥 소나기에 자신을 맡겨버리기로 했다. 이렇게 좋을수가 없다. 내가 좋으면 다 되는것이다. 허락받고서 태여난 생이 아니고 허락받고서 가는 생이 아닌데 이 시간만큼 내멋대로 한들 어떠리. 그냥 생겨먹은대로 그렇게 사는거지뭐. 소나기를 피해 황망히 뛰여가지 않았다. 그럴 필요가 없었기때문이다. 그사이에도 옷은 얼마든지 젖을것이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맞닥뜨리는 일 역시나 마찬가지다. 내가 피한다고 피해지는것이 몇개나 있는가? 항상 올것은 왔고 우리는 고스란히 감내할수밖에 없었다. 차라리 도망가지 말고 의연한 마음으로 맞고보면 더 편해지는 기분이 들 때도 있다. 그래서 피할수 없으면 즐기라고 했던가? 소나기속으로 걸어간다. 소나기가 마음대로 내 살갗을 때려온다. 비방울들은 내 세포마다를 상쾌하게 쿡쿡 터쳐온다. 비줄기는 내 얼굴이며 목덜미며를 적시다가 이내 온몸을 흠뻑 적셔왔다. 한결 시원함이 온몸을 훑고 지나간다. 늘 아무것도 아니면서 또 아무것도 이루어내지 못할줄 번연히 알면서도 무언가를 이루기 위해 뛰였다. 그렇게 갈증으로 타들고 땀나는 인생에 소나기만큼 큰 위안이 또 있을가? 소나기속에서는 혼자라서 좋다. 바글거리던 사람들이 어느새 그렇게도 재빨리 자취를 감추어버렸는지 사방을 둘러보아도 텅하니 비였다. 사람이면서 굳이 사람들을 싫어하는 나는 또 어느만큼 고약한것일가? 심각한척 따지지 말자. 이 세상에 원래 우리는 고독한 혼자가 아니였던가? 가끔 만나 웃고 떠들고 껴안는 행위너머에 구경 무엇이 더 있었던가? 결코 아무것도 없었다. 항상 내가 누군가를 가장 필요로 할 때 누군가는 곁에 없는 법이다. 새삼스레 찾을 필요가 없다. 그렇게 자신의 그림자를 거느리고 휘영휘영 가는것이다.    소나기속은 자유롭다. 내가 어느만큼 구차하게 질질 눈물을 흘려도 아무도 보는 사람이 없다. 소나기가 어느새 내 눈물을 다 가리우니까. 소나기는 아마도 울고싶을 때 울라고 오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소나기속에서는 아무나 소리쳐 욕해도 괜찮다. 비소리는 언녕 나의 목소리를 거두어버렸으니까. 그렇게 소나기는 아무나 소리쳐 욕하고싶을 때 욕하라고 오는지도 모른다. 어쩌면 원래부터 내가 웃고 울고 소리를 지르고 했어도 세상은 나를 향해 무관심했을지도 모를 일이지만 말이다. 소나기속에서는 어디로 갈지 생각을 말자. 그냥 내앞에도 소나기가 있으면 되니까. 이 세상 누가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를 안단 말인가? 모두가 다 그냥 그렇게 시간의 흐름에 맡겨진채 하루하루를 죽여왔을뿐일텐데. 게다가 몰라도 여태까지 쭉 잘 살아왔는데 오늘이라고 굳이 알아야할 필요가 더 있는가? 그냥 흔쾌히 소나기를 따라가는것이다. 가는 길이 진창이라고 불평부리지 말라. 여태 우리는 그런 진창속에서 바둥거리고 딩굴어왔을것이다. 화려한 날개를 펼치고 아스라히 비상하려는것은 꿈일뿐이다. 꿈은 언제나 깨기 마련이다. 원래 우리의 목숨은 흙에서 왔으며 다시 흙으로 돌아갈것이다. 진창이라고 억울해할 필요가 없다.     소나기속에서는 한결 홀가분해진다. 덕지덕지 붙어있던 욕심이 깨끗이 씻겨가버리는 까닭일것이다. 이 세상 모든 괴로움도 기실은 마음의 욕심으로부터 생겨난다. 그 욕심때문에 우리는 매일 불안하고 매일 아프고 매일 실망한다. 그리고 그런 자신을 다시 달래고 달래서는 또 하루를 살아가려고 이악스럽게 싸운다. 또다시 후줄근히 지쳐 쓰러지기는 마찬가지지만 말이다.    소나기속으로 떠오르는 사람도 있겠지. 피할수 없는 운명으로 만나 사랑이라는걸 알게 되였지. 그렇다면 그냥 그 사람때문에 소나기처럼 그리움에 젖으면 되는거다. 그렇게 이름을 껴안고 사무치게 그리워하며 살아가는거다. 더이상 그 무엇을 바라랴. 그리움이면 이미 충분하지 않은가. 더우기 처절한 그리움이라면 차라리 완벽하기조차 하지 않은가. 소나기속에서 무거운 사색은 절대로 하지 말아야 한다. 또 한톨의 먼지 같은 내가 어떤 사고를 할수 있단 말인가? 그렇게 어려운 철학 같은것들도 기실은 살아가는데 얼마나 도움이 되여왔는가? 다 부질없는 일인지도 모른다. 그냥 아무런 생각도 없이 소나기가 내 가슴을 두드리는 소리에만 귀를 기울이면 된다. 그리고 그 순수한 자연의 소리가 내 령혼을 적시는 황홀경에 빠지면 그만이다. 누군가 보기에는 미친짓일지도 모른다. 감기도 들것이고 고열로 앓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약 몇알이면 고열은 내릴것이다. 결국 그렇게 약으로 달래서 되는 지금까지는 아직은 건강한 몸인줄 알게 될것이다. 그때문에 기뻐해도 좋으리라. 그리고 내 발에 걸친 구두도 망가질것이다. 하지만 나는 아직 내 힘으로 다시 하나의 새 구두를 살것이다. 그때문에 나는 또 며칠은 기분이 더 행복할지도 모르리라. 어쩌면 소나기속에서 나랑 닮은 모습을 만나게 될지도 모른다. 그것이 결국 부질없는 기다림이 될지라도 나는 마침내 사람에 대한 은밀한 애정을 느낄것이다. 그때문에 저도모르게 가슴이 따스해지리라. 참 좋다. 소나기속은 너무나 좋다. 마음이 한껏 여유를 갖고 촉촉하고 생생하게 살아오른다. 소나기가 내 가슴에 일으키는 신비의 파문에 따라 설레인다는것은 그럴듯한 감동이다. 날마다 똑같은 먼지가 쌓이는 일상에서 소나기를 괜히 승화시키며 환상적인 분위기에 젖는것 또한 얼마나 찬란한 아름다움인가? 아직도 내릴 소나기는 얼마든지 있고 소나기를 누릴 시간도 얼마든지 있다는게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인가! 즐기지 않으려는가? 소나기속에.
2    무슨 말이 더 필요한가… 댓글:  조회:1338  추천:0  2014-03-24
▣ 수필/ 김순희 무슨 말이 더 필요한가… 그를 봤다. 14년만에 보는 그가 반가웠다. 달려가 손이라도 잡고싶은데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얼결에 피해버렸다.   그렇게 며칠이 흘렀다. 마음이 영 편치가 않다.   뭐라고 말할가? 뭐라고 말해야 그가 알가? 지금의 내 이 상황을 어떻게 설명해야 그가 리해를 할가? 그렇게 하루 또 하루가 흘렀다. 그를 만날가봐 조마조마하다.   30대초반에 부푼 꿈과 미래에 대한 설레임, 자못 “웅대한 포부”를 품고 방송국을 떠났는데 다 잃고 다 던지고 찬바람이 휭휭 부는 가슴을 안고 다시 방송국으로 돌아왔다.   귀가 있고 입이 있는 사람들한테는 뭐라 말할 필요를 느끼지 않았다. 이미 많은걸 포기하고 체념한 뒤라 맘대로 생각하고 맘대로 씹으라는 배짱이였다. 이제 나는 남들의 말 같은것엔 신경을 쓰지 않기로 했다. 하지만 그는 들을수도 말할수도 없는 사람이다. 그는 내가 왜 방송국을 떠났는지, 왜 다시 돌아왔는지, 그동안 어디서 뭘 하다가 왔는지 다 모른다. 그런 그에게 이 14년의 내 인생행로를 차근차근 설명할수도 또 요약해 설명할수도 없었다.   내 고민은 나날이 깊어갔고 아무리 고민을 해도 마땅한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날 그와 정면으로 딱 부딪쳤다. 그는 나오고 나는 들어가는 찰나였다. 어디로 숨어버릴수도 없었다.   그런데 그가 십여년이나 못본 나를 마치 어제 본듯이, 아니 매일 본듯이 내 옆구리를 쿡 찌르는것이였다. 나도 얼결에 그의 어깨를 툭 쳤다.   수천수만마디의 말보다 그 하나의 행동이 나를 목이 메이게 하고 가슴 따뜻하게 할줄 몰랐다. 내가 속으로 끙끙 앓던 일이 이렇게 한방에 쉽게 해결될줄 몰랐다. 그가 뭐라 손시늉을 하길래 잘 몰라서 그를 쳐다봤다. 아참, 이래서 눈을 마음의 창문이라고 하는구나. 그의 눈이 나에게 말해주었다. 오랜만이다, 반갑다, 어디 갔다 인제 왔니…   이 큰 방송국 울안에서, 수백명 직원들중에서 나한테 확실하게 환영의 표시를 한건 그 사람- 벙어리뿐이다. 비록 입으로는 말을 안했지만 나는 그의 눈에서 그 뜻을 충분히 읽었다.   그래, 이런 간단한 방법도 있었구나. 그런데 난 뭘 그리 복잡하게 생각했을가? 나는 구경 그한테 무슨 말을 하고싶었던걸가?   겉으로는 말 많은 세상에서 말하지 않는 즐거움을 즐긴다고 했지만 사실 난 아직도 말하고싶은 충동을 못참고있다. 아직도 사람들이 몰라줄가봐 오해할가봐 전전긍긍하면서 급급히 해석하려 하고 설명하려고 한다. 끊임없이 지껄이고 표현하는데 길들여져서 아무 말도 하지 않으면 불안하고 답답한것이다. 말을 안해서 후회되는 일보다도 말을 해버렸기때문에 후회되는 일이 얼마나 많은가. 그렇게 큰 대가를 치르고도 나는 아직도 정신을 못차린거다.   우리는 살면서 참 많은 말을 하게 된다. 마음에서 우러나온 말도 하지만 마음에 없는 말도 한다. 마음에 없는 말은 그렇다치고 마음에서 우러나온 말일지라도 상대에게 진실되게 전달되는 말들이 얼마나 될가? 많은 말들이 얼마후면 불필요한 말, 부질없는 말, 금방 후회할 말이 된다. 사람들은 진심을 터놓으면 리해하고 마음이 통할거라고 생각하지만 그게 아니다. 사람을 믿었고 진실하면 벽을 허물수 있다고 천진하게 생각했던 나는 바닥까지 다 보여주고 모든 진실을 아낌없이 다 털어놓았다가 스스로 자기 무덤을 팠고 그로 인해 많은 아픔과 후회를 남겼다.   진심으로 터놓고 한 말이 자기 좋게 해석이 되고 별별 거짓말이 다 보태져 순간에 사람이 우스워지고 그것이 화살이 되여 나한테 날아왔을 때 나는 아무 말도 하고싶지 않았고 아무 말도 듣고싶지 않았다. 말을 해도 상처가 되고 말을 들어도 상처가 됐기에 아예 입을 다물었고 아예 귀를 막아버렸다. 이 세상엔 말로 할수 있는게 아주 많지만 또 말로 설명할수 없는게 얼마나 많은가를 그때 알았다. 뭐라고 설명하고 대꾸를 하기보단 시간이 흘러가고 말들이 묻히고 사람들이 나를 잊어주기를 바랐다.    그날 그와 인사를 하고나서 나는 새삼 말의 가벼움을 절실하게 느꼈고 입으로 말을 안하는 그한테 더더욱 믿음이 갔다.   방송국 울안에 들어서면 나는 그가 있는가부터 살핀다. 방송국 울안은 아침마다 주차전쟁이다. 조금 늦게 출근하면 주차할 자리가 없어서 되돌아나가야 한다. 대문을 통과하면서부터 어디 빈자리가 없나 차창밖으로 머리를 내밀고 두리번거린다.  저쪽에서 그가 나를 보고 손짓한다. 수백대의 차가 꽉 박아선 곳에 유일하게 날 위해 남아있는 빈자리를 보면 참으로 반갑다. 주차를 하고 내리면서 그와 하이파이브를 한다. 성공적으로 주차한 나보다 그가 더 좋아한다.   지나가던 한 후배가 말을 건넨다. “선생님, 벙어리와 친한 사이인가요?” “어 그래, 친한 사이야…” 그 말을 하고보니 그렇게 마음이 따뜻할수가 없었다. 그는 내 친구이고 또 나의 가장 든든한 빽이다. 26년전 대학교를 졸업하고 방송국기숙사에 짐을 풀었다. 그 기숙사에 불을 때주고 더운물을 끓여주는 사람이 그였다. 언어장애가 있는 그를 사람들은 벙어리라 불렀다.   처음엔 그와 어떻게 대화를 해야 할지 막막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 익숙해지면서 그와 눈을 맞추려고만 하면 얼마든지 그와 소통할수 있다는걸 알았다. 그에게 있는건 표정뿐이고 그의 눈빛이 말을 대신하고있었다. 기쁘면 활짝 웃고 화나면 찡그리고… 그의 얼굴표정과 눈빛을 보면 그의 마음까지 읽을수 있었다.   요즈음도 나는 늘 그의 도움을 받는다. 주차장에 정 자리가 없을 때면 그가 창고앞 비상용 자리를 내준다. 평소엔 차를 세울가봐 그 자리에 늘 커다란 돌이 놓여있다. 그는 끙끙거리며 그 돌을 옮기고 나보구 그 자리에 차를 세우라고 한다.  내가 그한테 뭘 해준게 있다고 그가 나한테 이렇게 일편단심인지 그한테 미안한 생각이 들 때가 많다. 내가 아는 많은 사람들은 자꾸 무언가 확인하고싶어하고 자기가 준만큼 받고싶어한다. 나는 그한테 아무것도 준게 없다. 그저 웃어주고 쩍하면 엄지손가락을 펴보인다. 그게 다다. 하지만 그가 나한테 굉장히 고마워함을 나는 안다. 그의 눈이 그걸 말해주고 그 마음을 나는 다 읽을수가 있다.   어느날 친구와 함께 등산을 하다가 등산로에서 그를 만났다. 여직껏 나는 방송국 울안을 벗어나서는 그를 만난적이 없다. 밖에서 그를 만난게 하도 신기해서 저 멀리서부터 환성을 질렀다. 가까이 가보니 그는 혼자가 아니라 가족들과 함께 왔다. 그는 가족들에게 열심히 나를 소개했다. 뭐라고 했는지 그 집 식구들이 나한테 허리를 굽히며 고맙다고 인사를 했다. 나보다 년세가 많은분들이 나한테 꾸벅꾸벅 절하자 나도 얼떨결에 꾸벅꾸벅 머리를 숙였다. 다들 굉장히 고마워하는 눈치와 표정들이다. 날 뭐라고 소개했을가? 참 궁금하다. 하지만 부끄러워서 그의 눈을 쳐다보지 못했다. 번마다 나는 나름대로 그의 뜻을 짐작하고 아마 그도 나와 같을것이다. 정확하지는 않지만 나는 그의 진심을 안다. 구태여 말하지 않아도 우리는 서로의 감정을 읽는다. 그의 진심은 말을 통하지 않고도 나한테 전해져 감동으로 내 마음을 적신다.   대화는 말로만 하는것이 아니라 눈으로 마음으로 할수 있다는것을 그에게서 배웠다.    뜻이 통했는데, 그의 생각 그의 마음을 아는데 새삼 무슨 말이 더 필요하겠는가.
1    연어들의 걸음걸이 댓글:  조회:1205  추천:0  2014-03-24
▣ 단편소설/ 구호준 연어들의 걸음걸이 녀인은 역시 풍경이다. 전철에 몸을 담고도 쉬지 않는 녀인의 입은 하나의 예술이요, 그 예술이 있어 그녀만의 풍경이 연주되고있다. 조물주가 인간을 만들었다면 녀인의 입을 만든 리유를 알것 같다. “오빠, 정말 오늘 나 데리고 도봉산 정상까지 오르는거지?” “그래. 약속은 지켜야지. 대신 중도에 포기하기는 없기.” “네. 힘들다고 버리고 가면 안되요.” “알았어.” “근데 오빠, 이렇게 입고 정말 정상까지 가능할가?” 녀인은 완벽하게 갖춰진 내 모습에 조금은 질려버린 표정을 만들려고 한다. 허나 그 질려버린 표정뒤에서 숨쉬는 즐거움을 보며 나는 픽 웃어준다. 배낭 하나 바로 갖추지 못하고 출근할 때 메고 다니는 가방을 어깨에 걸친 모습부터가 등산이 아닌 시가지 쇼핑이다. 가방만이 아니다. 등산에서 가장 필수적으로 갖춰야할 신발 하나 갖추지 못한채 운동화로 감싸버린 연약한 발이 내 가슴에 비끼려고 한다. 하지만 한번 하는 등산 약속때문에 그녀에게 수십만원을 팔아서 등산준비를 하라고 할수는 없었다. “등산은 결코 장비가 문제가 아니야.” “오빠, 그래도 등산하는 사람들 말하는것이 등산에는 장비가 첫째라고 하던데요.” 녀인은 그간 들은 풍월을 읊으려고 한다. 풍월만으로도 뭔가를 알고있음을 표현하는것 역시 녀인의 풍경으로 만들어주고싶다. 허나 그건 마음뿐이다. 아름다운 풍경을 감상하려면 풍경을 만들줄도 알아야 한다는것을 살아오는 동안에 나는 체험하고있었다. “그건 등산을 모르는 사람들의 풍월이야. 등산은 가장 중요한것이 정신력이지.” “오빠, 등산과 정신이 무슨 상관이예요?” “산을 마주했을 때 내가 저 산을 넘을수 있을가 하고 생각하는 순간부터 산은 이미 나로부터 멀어지고있어. 그리고 정신적으로 산의 기에 질려버린것이지. 그럴 때에는 아무리 훌륭한 장비를 갖췄다고 해도 그냥 무거운 짐으로 되는거야. 허나 저쯤이야 하는 생각을 하는 순간 나는 이미 산을 정복한것이 되거든.” “정말?” “그럼. 등산에는 그래서 첫째 정신력, 둘째 경험, 세째 체력, 네째가 장비야.” “그래?” 녀인의 변하는 목소리를 듣고 아차 했지만 이미 늦었다. 녀인의 얼굴로 그늘이 비껴가려고 한다. 녀인의 입이 풍경을 연주한다면 남자의 입은 역시 오염뿐인것 같다. “정신력은 문제가 없지만…” “걱정마. 등산은 내가 도사니깐. 항상 초보들은 등산귀신들과 같이 다녀야 하는거야. 그러면 힘도 별로 들이지 않고 등산을 즐길수 있거든. 중도에 힘들다면 내가 업고라도 다녀올게.” “큭…” 다시 밝아지는 녀인의 얼굴과 함께 웃음 한쪼각이 그녀의 손가락틈으로 흘러나온다. 녀인은 밥먹을 때 이를 보이지 않듯이 웃음을 웃어도 손으로 막고있었다. 대림동에서 신도림까지는 3분 거리. 녀인의 재잘거림에 대답해주는 사이에 지겨운 전철에서 내려 1호선으로 갈아타야 한다. 숨쉬기도 바쁜 2호선에서 내리니 가슴이 트이는 소리가 들려온다. 2호선은 내선순환이여서 늘 그렇게 붐비는지 아니면 발에 밟힐가봐 조심해야 할만큼 교포들이 넘치는 대림동에서 앉아서 그런지 알수 없지만 단 한번도 숨을 바로 쉬여본 기억이 없다. 전철을 갈아타려니 역시 사람들로 울바자를 만들고있다. 힘들게 다리에 신경을 쓸 필요가 없다. 녀인과 어깨를 부비면서 그대로 떠밀리면 걸음은 저절로 된다. 그런 시루속을 누비며 뛰여가는 사람들이 또 다른 물결을 일으키고있다. 오늘도 늦은 출근시간을 념두에 두고 저렇게 뛰여가고있으리라. “5분만 일찍 출근해도 되는데 왜 저렇게 뛰는지 리해가 안돼.” “오빠, 저 사람들이 출근시간이 늦어서 뛴다고 생각해?” 넘치는 인파속에서 나를 잃어버릴가봐 꼭 곁에 붙어서 걷던 녀인이 잠간 걸음을 멈춘다. “그럼?” 나도 걸음을 멈추고 녀인과 눈길을 부딪치려고 하지만 금방 사람들에게 다시 떠밀려 앞으로 간다. “마음의 조급함이 결국 저 사람들을 뛰게 하는것 아니겠어요? 걸어갈수 있는 여유마저도 갖지 못하고 살아야 하는 한국인들이라는 생각은 왜 못해요? 하루하루가 생존을 위한 싸움인데 언제 여유작작 걸어서 다닐 마음을 갖췄겠어요?” 마음의 불안함에 결국 걸어가는 여유마저도 빼앗겨버린 한국인들?! 그렇다면 나는 어떤 사람으로 남아야 할가? 갑자기 썰렁함이 가슴을 뚫으려고 한다. 나는 한국인이라고 해야 하나 아니면 중국인이라고 해야 하나? 한국에 발을 들여놓은지 7년 넘는 세월동안 단 하루도 불안함을 떨쳐버린적이 없다. 그 불안함이 이젠 공포로 변해가고있지만 한국인들처럼 전철을 향해 뛰는것으로 감추려고 하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중국인들처럼 스스로의 여유로움을 만들어본적도 없다. 한국에서는 교포, 중국에서는 조선족으로 통하는 나는 대체 어디에 속해야 하는것일가? 한국에서는 처음에는 중국조선족을 동포라고 불렀지만 그 동포란 결국 학술적인 용어로나 통할만큼 보편화되지 못하고있다. 차라리 서민들이 나 같은 인간들을 비하하여 만들어낸 교포가 일상화되면서 나 스스로도 “교포”라는 말을 스스럼없이 하면서 “동포”란 단어를 지워가고있다. 뛸수도 걸을수도, 그렇다고 멈출수도 없으면서 누군가의 불안함을 즐기려고 하는 나는 대체 어떤 인간으로 세상과 소통하고있을가? 년이 떠오른다. 잡으면 갈갈이 찢어버리겠다고 몇달을 찾아 헤매던 년의 얼굴이 떠오른다. 년은 한가하게 마음의 평온을 갖고 뛰여가는 사람들을 웃으면서 살아가고있을가? 잃은 사람은 다리를 펴고 살고 훔친 사람은 다리를 굽히고 잔다는 말 참말로 받아도 되는것일가? 년도 잠잘 때 굽힌 다리로 마음의 불안함을 느낄가? 년을 떠올리니 다시 화가 치밀려고 한다. 지금 또 어딘가에서 나만큼 어리숙한 놈을 향해 추파를 흘리고 아양을 떨고있을 년이 떠오른다. 년을 잡으면, 우연이건 필연이건 어딘가에서 년을 잡게 된다면 나는 어떻게 해야 할가? 정말 마음처럼 년을 갈갈이 찢어버릴수 있을가? 년은 아비를 죽인 원쑤도 아니요 내게 갈갈이 찢겨야 할만큼의 죄를 지은것도 아니다. 한때는 이불을 함께 덮고 살아왔던 녀자를 갈갈이 찢어야 한다면 세상에 살아남을 년들도 있을가? 년을 만나면 내 돈을 돌려달라고 할가? 그건 내가 준것도 아니요 훔쳐간 돈이니 당연히 받아야 할것이다. 내 돈을 내가 돌려받는다면 아무도 토를 달지 않을것이다. 하지만 년에게 돈이 없다면 내 표정은 어떻게 변해갈가? 그리고, 정말 그리고 년을 잡는다면 내 마음은 평온해서 뛰지 않는 여유로움을 찾을수 있을가? 년이 내 돈을 훔치기전에도 내게는 마음의 여유로움은 없었다. 어쩌면 년에게 돈을 잃어버리고 차라리 마음의 여유를 찾았는지 모른다. 사십평생이 넘도록 누군가를 갈갈이 찢어버리고싶을만큼 미워한적은 없었지만 년을 증오하면서부터 세상 사는 힘겨움을 잊고 보냈다. 뚫린 가슴우로 한겨울의 한기가 스밀스밀 기여들어온다. 타인에 대한 원망으로 마음의 위안을 느끼려고 한 나는 어떤 의미로 남아야 하는것일가? 년에 대한 원망과 증오가 자신의 무력함으로 다가오려고 한다. 내가 싫어지려고 한다. 나는 왜 꼭 이렇게만 살아야 하는것일가? “사장님이 주간실장을 맡아달라고 청들 때 왜 거절했어요? 주간보다는 야간실장을 맡아야 할 무슨 리유라도 있었나요?” 녀인의 목소리에 정신을 차리니 지하철이 노량진에서 걸음을 떼고있다. 노량진을 떠나면 조금씩 걸음이 빨라지다가 차츰 뛰여갈거고 용산역에 들어설 때쯤에야 다시 조금씩 여유로움을 보일것이다. “그냥 야간에 습관되여서 그랬어. 난 몸안에서 기가 반전을 하니깐 주간보다는 야간이 편하거든.” 중의가 그랬었다. -넌 기가 거꾸로 흐르고있어. 그래서 낮일보다는 밤일을 하면 더 정신이 나는것이지. 하지만 그것이 내가 굳이 주간실장을 거절하고 야간실장을 맡은 전부의 리유는 아니였다. 년을 잡아야 한다는, 내 뼈돈을 훔쳐간 년을 잡아 갈갈이 찢어놓아야 한다는 생각이 내가 주간을 거절하고 야간실장을 맡은 전부의 리유이자 유일한 핑게가 될것이다. 가리봉이 쪼각나고 이젠 대림동이 교포들의 새로운 집거구로 형성되였다. 8번 출구와 12번 출구에서는 한국어를 모르고 중국어만 해도 살아남을만큼 교포들이 진을 치고있다. 그러니 년이 다시 돈냄새가 그리우면 교포들이 집거한 곳으로 발길을 돌릴것이고 그런 년을 잡으려면 타인들과 꼭같이 출퇴근을 하면 불가능하다고 생각했었다. 기의 반전, 그 반전을 리용해야만 년을 잡을수 있는것이였다. 그래서 주간실장을 맡으면 월급도 더 받을수 있는것을 거절하고 야간실장을 맡았었다. 저녁 5시부터 아침 5시까지 출근이니 낮에 출퇴근하는 사람들을 핥기에는 시간이 넉넉했다. 그런데 몇달을 죽치고 앉아 지키고있었지만 여직 년의 꼬리도 보지 못했다. 그래도 그렇게 쉽게 포기할수는 없었다. 년을 잡으면 어떻게 해야 할지는 일단 년을 잡고나서 다시 생각해도 되는 일이다. “그렇게 일하다가 나중에 몸이 상해요. 사람은 저녁 10시에서 새벽 2시까지의 잠이 제일 건강에 좋거든요.” 녀인은 내 몸을 걱정하려고 한다. 피씩 하고 웃음이 흘러나오려 했지만 색조를 만들지 못하고 그대로 가슴 어딘가 잠간 머물다가 그냥 사라진다. 녀인의 관심이란건 언제나 독소가 있다. 진한 향이 넘치지만 그뒤에 숨겨진 독소를 보았을 때 마음 전체가 망가지는 소리를 들어야 한다. 년도 그랬다. “아침을 그렇게 거르면 어떻게 함까? 그러문 몸 버린단 말임다.” 하루에 두끼로 살아가는 나에게 기어이 세번은 수저를 들게 만들고있었다. 그런 작은 관심과 배려가 어쩌면 년에 대한 경계를 늦추게 한것이나 아니였을가? “술 마시구는 그래두 장국이 시원하단 말임다.” 년이 오면서부터 집에는 먼지 한점 없었다. 그래서였을가, 년과 함께 하는 그 짧은 동안은 잠간이지만 마음의 평온을 찾을수 있었다. “돈 모아서 오빠는 뭘 할거예요?” 녀인의 물음과 함께 차창밖의 어둠이 찾아들어 가슴에 막을 쳐놓는다. 이젠 뭘 해야 하지? 나는 뭘 해야 하지? 답이 없다. 스스로 뭘 해야 하는지를 모른다고 생각하니 자신이 싫어지려고 한다. 쇼펜하우어의 염세철학대로라면 자신이 싫어지는것을 염세주의라고 할것이다. 세상이 싫어지고 그러다가 자신까지 싫어지면 자살을 시도해야 할것이다. 허나 그건 쇼펜하우어의 전매권이니 자살을 시도하지는 않을것이다. 최소한 자신이 뭘 해야 하는지를 몰라서 자살한다면 자살해야 한다는것쯤은 알고있다는 의미가 될것이다. 알면서도 모르는척을 한다면 그것도 역시 자신에게 죄를 짓는 일이 아닐가? “오빠는 돈벌면 중국에 돌아가나요?” “글쎄.” 막막하기로는 뭘 하냐는 질문을 들었을 때와 별로 차이가 없다. “오빠는 다른 동포들처럼 여기서 하루 벌고 이틀을 써버리는 그런 사람이 아니던데요. 그러니 차곡차곡 모아서 중국에 가서라도 뭘 하세요.” 나보다는 십년 가까이 년하이면서도 내 삶을 걱정해준다. 나이와는 무관하게 세상을 살아가는 녀인의 모습을 보면서 나는 년을 잊으려고 했다. 아니, 어쩌면 그건 보기 좋은 핑게고 년을 잡을수 없다는 무기력으로 하여 포기를 했다고 할수도 있다. 하지만 녀인을 만나고나서 년에 대한 원한이 조금씩 희미해지기 시작하고있음은 분명하다. “나도 교포야. 남들과 꼭 같은 교포.” 녀인은 동포라고 불러주지만 나는 굳이 교포에 악센트를 뽑는다. 그렇게라도 더 이상 녀자들에게 무너지지 말아야 한다는 내 마음의 신조를 지켜야 할것 같다. “동포건 한국인이건 그 국적이 중요한게 아니잖아요? 사람이 살아가는 자세가 중요하거든요. 한국에서 도둑질하나 중국에서 도둑질하나 도둑질은 꼭같이 남의 물건을 훔치는것 아닌가요?” 녀인은 학자는 아니지만 한때 잘 나가던 기자였고 언젠가 차사고로 다리를 상하고 직장을 그만두고있었다. 그래서 교포라는 말보다는 동포라는 말을 즐기는것 같다. 그러나 내게는 동포도 교포처럼 들린다. 녀인도 한국인이니깐. “미국의 인종차별보다 심한것이 한국인들의 국적이 아냐? 그러니 이젠 교포들과 한국인은 같은 언어와 문화를 소유하고 사용하는 사람들일뿐 더 이상 같은 민족이라는 듣기 좋은 노래는 부르지 않는게 좋을걸.” 녀인의 얼굴에 웃음기가 흐르려고 한다. 그렇게 꼬집히면 화난 얼굴은 만들지 못해도 굳어라도 진다면 보기가 좋으련만 기름기 같은 웃음이 흐르니 되려 내가 화나려고 한다. “오빠도 역시 진한 피해의식을 갖고있네요.” 피해의식? 단순한 피해의식이 아니라 나도 어쩌면 한국에서 피해자였을것이다. 처음 한국에 나와서 용역을 뛸 때 악덕 같은 오왜지는 1시간 30분씩 연장작업을 시켰다. 2시간 연장작업을 하면 반날 월급을 지불해야 하니 꼭 1시간 30분만 일을 더 시켰다. 용역을 때려치우고 공장에 출근할 때에도 돈 몇푼 더 벌려고 하니 하루에 15시간을 넘게 일을 해야 했다. 그런 나더러 한국인들에게 좋은 감정 만들라니. “한국에서 일한다는것이 문화적인 차이와 환경의 차이로 힘들수는 있지만 그래도 그 모든것이 오빠 스스로가 선택한것이 아닌가요?” 오장에서 반란이 일어나려고 한다. 트럼이라도 시원히 하고싶지만 그것도 내 뜻대로 되지 않는다. 녀인은 답없는 질문만을 던지면서 나를 수렁으로 떨어뜨리려고 한다. “타인에 대한 원망이나 세상에 대한 불만보다는 차라리 자신이 선택한 일들을 열심히 하면서 즐기는것이 현명한 선택이 아닐가요? 과거에 대한 집착도 죄가 될것이요, 미래에 대한 무한정한 동경도 역시 현명한 사람들이 할 일은 아닐걸요. 한치 앞도 내다보지 못할거면 차라리 현재만 정시하면서 사는것이 즐거운 일이 아닌가요?” 녀인의 말을 뭐라고 부정하고싶지만 신경마저 올올이 매여버렸다. 나는 차라리 조용히 눈을 감는다. 녀인도 더 이상 입을 열지 않는다. “다음역은 용산역입니다. 내리실 문은 오른쪽입니다.” 안내방송이 열린 귀구멍을 쑤셔준다. 용산?! 내게는 너무나 익숙한 역이다. 가만히 눈을 뜨니 녀인도 귀에 이어폰을 걸고 눈을 감고있다. 지하철은 뜀박질을 서서히 멈추려고 한다. 용산. 안해와 헤여지고 더 이상 녀인을 믿지 않으려고 했었다. 그래서 몇년을 홀로 살아가면서도 남들처럼 애인 한번 구하지 않았었다. 하지만 가끔씩 술 한잔 마시고 녀자 몸뚱이가 그리운 날이면 차라리 용산에서 어슬렁거리군 했다. 24시간 19세이하 출입금지 구역이 용산에 있었다. 19세이하 출입금지지만 나이가 지긋해지는 나에게는 24시간 출입가능한 곳이다. 들어갈 때에는 활개치면서 들어갔다가도 나올 때면 늘 찝찔한 기분을 털어버리지 못했다.  한번씩 아가씨들과 딩굴고나면 술은 금방 깨여버렸지만 대신 옷을 주어입기전부터 몸뚱이 어디선가 스물스물해난다. 그런 스물거림은 오색이 령롱한 그 거리를 다 벗어날 때까지도 털어버릴수 없었고 몇번이고 몸뚱이를 씻고 또 씻어도 지워지지 않았다. 며칠을 두고 스물거리는 몸뚱이를 보고 내가 왜 이래야지 하면서 이젠 그런데는 발길을 돌리지 않는다고 하다가도 마음이 지치면 또 그곳으로 발길을 돌리고 그러고나서 또 며칠을 후회하기를 반복한다. 어쩌면 그런 스물거림은 아가씨들과 딩굴지 않아도 몸뚱이에서 살아 숨쉬고있었을것이다. 안해와 관계를 맺고 성병이란것이 무엇인지를 알게 되였다. 안해가 한국에 나오기전까지는 애인을 사귀면서 함께 살아도 보고 가끔 친구들과 함께 금방 한국에 들어온 녀인들과 잠간씩 모텔에서 밤을 새보기도 했지만 안해가 한국으로 오자 더 이상 낯선 녀인들과의 어울림은 없었다. 함께 벌어서 살아보자는 안해의 마음씀씀이가 고마웠고 그래서 결국 오빠라고 따라다니는 녀인들과의 관계를 깨끗이 청산했던것이다. 그런데 늘 청순하게만 생각했던 안해에게서 성병을 얻었다. 한국에 나온지 일년도 안된 안해에게서 받은것은 참기 힘든 스물거림이였다. 안해와 헤여졌지만 그 스물거림은 지워지지 않았다. 스물거림이 지워지기는커녕 아가씨들을 품으면 그 스물거림이 다시 재현되면서 남자가 말을 듣지 않았다. 어쩌면 그래서 스스로를 찾으려고 술 한잔 하면 술을 빙자하여 아가씨들을 찾았던것은 아닐가? 녀인이 조용해지려고 한다. 눈을 살풋이 감고있더니 한참 지나 내 어깨에 머리를 기대여온다. 잠이 든것일가? 아니면 잠든척을 하는것일가? 녀인의 숨소리가 가슴을 뚫는다. 순간이였지만 그냥 꼭 안아주고싶어진다. 녀인은 가냘프다. 하지만 녀인의 인생만은 그렇게 허전하지 않을것이다. 녀인을 만나면서부터 나는 조금씩 자신을 찾는 기분이다. 나와는 전혀 무관한 그런 녀인이 내게 또 다른 삶의 자세를 가르치고있었다. 녀인을 만난것은 보름전이다. 그날도 년을 잡으려고 대림역 8번출구에 있는 휴게소에 앉아서 하루를 때려치웠다. 때론 잠간씩 졸기도 하고 때론 뒤모습이 비슷해보여 뛰여가 얼굴을 확인하면서. 8번출구에 있는 휴게소는 로숙자들이 밤을 보내는 곳이다. 나는 그런 곳에서 낮이면 년을 잡으려는 일념으로 자고 깨고 뛰고를 반복하고있었다. 녀인도 그날 내가 잠간 조는 사이에 나를 스쳤다. 잠결에 얼핏 눈을 떴을 때 녀인 하나가 내 눈앞에서 사라지려 하고있었다. 아직 덜 깬 잠속에서도 뒤모습이 년과 같다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어쩌면 총총한 걸음걸이가 나를 의식하고 도망하는것이라는 생각이 들게 하여 뒤모습이 년과는 틀려도 엄청 틀린 녀인을 년으로 착각하게 한것일게다. 자리에서 일어나 년을 쫓아 인파를 헤치면서 뛰여야 했다. 7호선을 타는 에스컬레이터에서 녀인을 잡을수 있었다. 하지만 여느때처럼 앞으로 뛰여가서 얼굴을 확인할 여유가 없었다. 여유가 있다고 해도 좁은 에스컬레이터에서 내릴 때까지 기다릴수도 없었다. 그대로 어깨를 때렸을 때 녀인은 얼굴을 돌렸고 나는 실수를 느끼면서 “죄송해요”도 만들지 못했다. 그때까지도 깨지 못한 잠과 함께 또 한번의 허무함이 엄습했던것이다. “사람 잘못 보셨나보네요.” 실수를 하고도 아직 정신을 수습하지 못한 나를 향해 녀인은 밝게 웃어주었다. 말투나 옷차림, 표정으로 보아 교포가 아닌 한국인들이 말하는 국산이였지만 웃는 녀인을 향해 만들어낸것은 죄송합니다 표정이 아닌 어정쩡한 교포아저씨의 찡그린 얼굴이였다. “미안합니다.” 허리를 굽석할 때쯤에는 에스컬레이터에서 내린 뒤였고 한참을 그냥 그렇게 서있다가 녀인이 사라지고나서야 나는 출근시간이 된것을 알았다. 지쳐버린 몸뚱이를 끌고 힘들게나마 내 직장인 낙지집에 들어섰을 때 녀인을 다시 한번 만나게 되였다. 사장님과는 관심도 없는 인사를 건네고 주방으로 들어가려는데 사모님이 녀인을 인사시켰다. “오늘 새로 오신분이예요. 야간홀이거든요. 이분은 주방실장이고요.” “잘 부탁드려요.” 허리를 깊숙이 숙였다가 펴는 녀인을 보는 순간 참 더러운 인연이라는 생각이 스쳤다. 지하철역에서 년으로 착각하고 어깨까지 두드렸던 녀인이였다. “일에 서투니깐 많이 도와주세요.” 녀인도 분명히 나를 알아보았으련만 아는척을 하지 않았다. 녀인만의 마음 씀씀이가 엿보였지만 나는 따로 고마워하지 않았다. 내게는 녀자란 모두가 꼭 같은 거기에서 거기로 통하고있었다. 하지만 녀인을 다시 쳐다보아야 했던것은 녀인의 웃음때문이였다. 지하철에서 한번 보았던 웃음, 그 웃음을 여전히 얼굴에 담고있었다. 아무런 가식도 거짓도 없는 맑고 순수한, 그래서 마음의 어딘가를 울려줄것 같은 그런 웃음을 녀인은 담고있었다. “오빠, 아직도 멀었어?” 녀인은 잠도 깨지 않고 입을 놀린다. “응. 이제 청량리니깐 아직 11정거장이 남았어. 좀 더 자.” “고마워.” 녀인은 다시 숨소리가 고요해지려고 한다. 내 어깨에 기대인 녀인의 머리로부터 상큼한 향이 전해온다. 녀인은 잠들었어도 그 웃음을 얼굴에 담고있을가? 고개를 돌려 녀인을 훔치고싶지만 잠든 녀인이 깰가봐 움직일수 없다. 이 녀인은 내게 어떤 의미로 남아야 할가? 내 품이 아닌 어깨에 기대여 있는 녀인을 의식하면서 어떤 의미를 만들고싶어진다. 하지만 아무런 답도 없다. 내게는 역시 질문 자체가 답이 없는것일가? 타인이 내게 묻는 질문이건 내 스스로 만들어보는 물음이건 답을 갖지 못하는것일가? 녀인에 대한 답이 없다면 년은 내게 어떤 답을 줄수 있을가? 주간실장까지 거절하면서 년을 찾는것은 꼭 잃어버린 돈을 찾기 위해서일가? 년을 처음부터 사랑하지는 않았다. 홀로 살아남기도 힘든 한국이란 곳에서 사랑이란 내게는 의미가 없었다. 아니, 어쩌면 안해만큼은 사랑한다고 했을수도 있지만 그 안해와의 헤여짐과 함께 사랑이란 두글자는 차라리 가슴에서 지워버렸다고 해야 할것이다. 년에게 호감이 있었던것은 년의 짙은 사투리때문이였다. 말끝마다 “말임다”와 “있잼다”하는 말투는 한국인들에게서는 무식하게 보일지 몰라도 내게는 친근하게 느껴졌었다. 물론 고향에서도 시골 로인들에게서나 들을수 있을만큼 박제되여버린 사투리겠지만 나는 그것을 구수하다고 하고싶었다. 어쩜 단순한 친근감만이 아닌 내 나름대로의 계산이 앞서서였을수도 있었다. 한국생활에 익숙한 녀자들과 잘못 사귀면 뼈도 추리기가 힘들다는것을 이젠 경험이 알려주고있었다. 안해가 한국에 오기전에 사귀던 녀자도 임신을 빙자하여 돈을 뜯어갔으니. 한국에 금방 왔다는 설명보다는 짙은 사투리가 그녀의 입국시간을 말해주는 셈이였다. 친구들과의 술자리에서 처음 인사하고 함께 어울리고는 술이 얼근해지자 년과 모텔로 직진했다. 그리고 아직 잠자리를 잡지 못했다는 말에 다음날에는 바로 내 세집으로 자리를 옮기고. 실수라면 년의 시골사투리를 하는 그 기막힌 연기에 속은것이다. 나와 함께 보내는 동안에도 년은 사투리를 능숙하게 구사했다. 년의 모든것이 연기라는것은 년이 연기가 되여버린 뒤에야 알았다. 그날 년의 생일이라고 했고 그래서 친구들까지 불러서 함께 어울렸다. 회집부터 시작하여 노래방, 다시 양꼬치집까지 거쳐서 나올 때쯤엔 이미 술이 나를 삼켜버린 뒤였다. “있잼다, 오늘에는 우리 처음에 만났던것처럼 밖에서 자기쇼. 호텔엔 못가두 모텔에서라두 더 재밋게 보내자는 말임다.” 호텔에 못간다는 말에 나는 화가 났었고 그래서 기어이 년을 보고 호텔로 간다고 소리치고야말았다. 호텔은 비용이 만만치 않으니 그렇다면 현금을 갖고 가서 조금이라도 싸게 하자는 말에 알콜에 절었던 머리에서도 그럴듯하다는 답을 만들어 고개를 끄덕였다. 맑은 정신에는 누가 옆에 있으면 비밀번호를 누른적이 없지만 그날만큼은 년의 부축을 받으며 카드에서 현금 20만원을 뽑았었다. 호텔에서 술을 부어버리고 나를 다시 찾았을 때에는 년이 보이지 않았다. 지갑속에 넣었던 카드도 년과 함께 연기로 되여있었다. 적어도 500만원은 넘을 돈을 하루밤사이에 날려버린것이다. 그간 번 돈들은 언젠가 음식점 하나 차리려고 적금을 하고 남은 돈들을 전부 날려버린것이였다. 눈에 불들이 뛰여다녔다. 년을 잡으면 갈갈이 찢어버리겠다고 음식점을 차리려던 생각까지 접어버렸다. 그리고는 야간실장으로 다시 취직해서 년을 찾아 헤매였다. “오빠, 힘들지? 미안해요.” 녀인은 어깨에서 머리를 떼면서 중얼거린다. “괜찮아.” 나는 녀인의 머리를 향해 어깨를 비워준다. “고마워.” 녀인은 다시 내 어깨에 머리를 묻는다. 깨지 못한 잠속에서도 고마움을 간직하고 살아가는 녀인, 이 녀인과의 만남으로 나는 또 다른 나를 만나고있는것이나 아니였을가? 한 음식점에서 일한다고 하지만 녀인은 홀에서 뛰고 나는 주방에서 땀흘리니 서로가 다른 세상에서 살아야 한다는 리유로 나는 관심도 주지 않았다. 년에 대한 증오로 몸을 태우고있는 내게는 국산이건 중국산이건 녀인이란 꼭 같은 염오의 대상이였다. 그런데 녀인은 거짓없는 미소로 내게 다가오고있었다. 야간실장이니 사장님과 직원들의 밤참을 끓여야 했다. 녀인과 만난 첫날에도 별로 관심도 없는 간참을 끓였다. 입맛도 없으니 대충 김치찌개를 끓였었는데 녀인은 맛있다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고 그런 녀인의 앞에서 사장님도 엄지를 흔들어주었다. 여느때와 꼭같이 끓였는데 맛있다는 타인의 칭찬에 사장님도 정말 맛있게 느껴진것이라고 피씩 쓴 웃음을 웃어버렸다. 밤참을 먹으니 새벽이 다가오고있었고 손님들이 뜸해지자 낮에 설쳐버린 잠이 쏟아지려 했다. 나는 커피를 뜨물처럼 들이키기 시작했다. 그런 내가 안쓰럽게 보였던지 녀인은 기어이 음료를 마시라고 따라다녔다. 커피가 아니면 안마신다고 퉁을 주었지만 실장님이 맛있는 간참을 해준 보답이라면서 따라다니는 녀인에게 결국 손을 들고말았다. 녀인과 하루밤을 그렇게 보내고 새벽을 밟으면서 퇴근할 때 또 한번의 동행을 하게 되였다. 녀인도 대림동에서 살고있으니 함께 지하철을 타게 되였던것이다. 70%가까이 교포들로 넘치는 대림동, 그 대림동의 30%정도가 되는 가난한 한국인중에 녀인도 한사람이였다. “야간은 장난이 아닐건데요. 낮에는 무슨 다른 일이라도 하나요?” 퇴근시간이 새벽 5시, 첫 9호선은 5시 37분이라야 신논현역에서 떠나니 녀인과 둘이 지하철에 그냥 앉아있기도 막막하게 느껴졌다. 그래서 던진 질문이 나를 굳어지게 하고있었다. “네. 낮에는 병원에 다니면서 치료를 해야 해서 야간일자리를 찾았거든요.” 겉으로 보아서는 멀쩡한 녀인이 병원에 다닌다니 순간적으로 믿어지지 않았다. “몇년전에 차사고를 당하고 치료를 제때에 못해서 다리가 마비가 되고있거든요. 그래서 낮이면 병원에서 물리치료를 받고있어요.” “차사고라면 보험처리가 되는것 아닌가요?” “쌍방이 모두 과속운전이니 보험처리가 되지 않아요.” 녀인은 마치도 남의 일을 말하는듯 얼굴에 잔잔한 미소까지 흘리면서 담담하게 말하고있었다. “그럼 부모님들은 뭘 하나요?” “참, 이 나이에 무슨 부모님은. 조금 힘들어도 내 힘으로 할수 있으면 해야지요. 아주 몸을 움직이지 못하는것도 아닌데요. 이만해도 얼마나 고마운지 모르겠어요. 야간이라도 나는 아직도 일할수 있다는것만으로 행복해요.” 녀인은 그날 고속터미널역에서 내려 7호선을 갈아탈 때 잠간 깨고는 내내 내 어깨에 기대여 잠들어 있었다. 얼굴에 밝은 표정을 만들면서 행복하게 산다고 해도 몸은 그만큼 지쳤으니깐. 대림에서 내려 녀인과 헤여져 내 전용감시소인 8번출구로 향하다가 잠간 고개를 돌렸을 때 내옆에서 그렇듯 당당하게 걷던 녀인이 아픈 다리를 겨우 끌고 가는 모습이 보였다. 풍경, 그것도 풍경이였다. 잔혹한 풍경이 아닌 자신과 타협하지 않고 살아가려는 그녀만의 풍경을 연주하고있었다. 그날 처음으로 나는 년과 비슷한 녀자들을 쫓아가지 않았다. 어쩌면 년을 잡으려는 생각보다는 혹시 녀인을 만나면 함께 어디 가서 밥이라도 한끼 먹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오빠, 아직 멀었어요?” 녀인의 목소리에 정신을 수습해보니 지하철은 어둠을 털어버리고 불빛 휘황한 도봉산역으로 들어서고있었다. “다 왔어. 얼른 내릴 준비해.” 도봉산입구는 역시 등산객들로 넘친다. 언제 찾아오건 한산할 때가 없다. “와 신난다.” 녀인은 팔을 길게 늘여뜨렸다가 천천히 하늘을 향하면서 깊은 심호흡을 한다. 녀인의 발랄한 모습을 보면서 몸뚱이가 성해도 구멍난 가슴을 갖고 사는 사람과 몸뚱이가 찌글어도 맑은 가슴으로 사는 사람중에서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면 무엇을 가져야 할가를 잠간 생각해본다. “오빠, 등산을 자주 다녀?” 입구를 벗어나 산에 몸을 맡기자 사람들이 조금씩 뜸해지기 시작한다. “예전에는 시간만 있으면 등산 잘 다녔어.” 예전은 이미 오래전의 이야기다. 한가하게 책상만 지켜도 밥을 먹을수 있던 세월의 이야기고 그 편함에 몸살을 앓다가 한국에 나온 뒤에는 일년에 한두번꼴로 산에 갈수 있었다. “오빠, 이젠 가끔 나 데리고 등산다니면 안되요? 오빠가 힘들기는 하겠지만.” 녀인은 그녀만의 특유의 웃음을 날린다. “그래. 시간이 나는대로.” 녀인과 함께 좁은 길을 걸으면서 이젠 년을 묻어야 할 때가 된것이 아닌가고 생각한다. 년을 잡아도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막막한 세월에 허구헌날 한낮의 로숙자로만 살수는 없으니까. “오빠, 이젠 글은 쓰지 않아?” “내가 언제 글을 쓴다고 했어?” “이, 벌써 잊었어? 그저께 아침에 술 마시면서 말하고서는.” 역시 며칠전 마신 술도 이제야 깨는것일가? 그저께 아침에 함께 퇴근하면서 녀인을 끌고 12번출구앞에 있는 샤브샤브로 향했었다. 그냥 아침만 간단히 먹자고 했었지만 정작 들어가니 소주 두어병을 까버리고. 소주를 마시면서 나는 녀인이 차사고를 당하기전에는 꽤 잘 나가는 기자였고 차사고로 다리가 불편해지자 직장을 그만두었다는것과 그날 운전하다가 차사고를 낸 남친도 결국 곁을 떠나버렸다는 정보를 얻을수 있었다. 그리고 중국에서는 나도 꽤 잘 나가던 놈이였고 글도 긁적거렸다는 정보를 흘려버리고. 에스컬레이터에서 어깨를 때린 리유를 묻는 말에 나는 새삼스럽게 년에 대한 증오를 술로 태워주었었다. “묻으세요. 쉽게 잊혀지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묻으려고 노력해봐요. 그 녀인도 그만의 사정이 있었을수도 있잖아요? 몇달 월급으로 생명을 구했다고 생각하면 마음이 편할거예요. 함께하는 동안은 그래도 고맙고 감사했을거잖아요? 그녀가 오빠의 손에서 죽어야 할만큼의 죄를 지은것도 아닌데 묻어주세요.” 녀인은 술 대신 생수를 홀짝거리면서도 내 가슴에 맺힌 응어리를 풀어주려고 했고 자리에서 일어날 때쯤에 등산 한번 하는것이 소원이란 녀인의 말에 휴식일에 함께 가준다고 약속을 했었다. “글을 쓸 때 어떤 주제들을 많이 다뤘어요?” “짬뽕들을 주제로 다뤘지. 시골에서 도시로 진출하여 어울리지 못하는 짬뽕들을.” 석굴암과 천축사로 가는 갈림길에서 암으로 가야 하는지 사로 향해야 하는지 잠간 망설이고있었다. “그럼 오빠도 짬뽕이네요.” 녀인의 키득거림이 귀구멍을 파고든다. “그래. 나도 짬뽕이지. 시골에서 발발 기여 겨우 도시로 진출해서 책상 하나 얻었댔으니깐.” “치, 누가 그런 뜻으로 말하나요? 한국에서의 오빠가 짬뽕이란 말이지.” “내가 왜 한국에서 짬뽕이야? 나야 중국산이고 연이는 국산으로 확연한데.” 처음 한국에 와서 직장을 찾아 헤맬 때 수입제, 중국산 하면서 인간차별을 놓던 한국인들의 모습을 나는 잊지 않고있었다. “오빠, 돈을 벌었다고 해도 다시 중국에 돌아가서 뭘 하면서 살 자신이 있어요?” 녀인은 정곡을 찔러버린다. 솔직히 중국으로 다시 들어간다면 막막하기만 할것이다. 지난해 잠간 중국에 다녀올 때 전과는 완연히 달라진 풍경을 보면서 그것을 느끼고있었다. 고속적인 발전과 함께 뛰여버린 물가, 한국에서 이렇게 벌어서는 중국으로 돌아가도 밥도 얻어먹기 힘들다는것을 피부로 느끼면서 다시 한국으로 향하지 않았던가? 중국에서 30년 넘게 살아온것에 비해 이제 겨우 7년을 한국물 먹은 나지만 지금 한국에 더 익숙해지고있었다. 그럼에도 단 한번도 한국에 정착하여 짬뽕으로 되겠다는 생각은 해본적이 없다. “오빠도 결국 다른 동포들처럼 또 다른 이민족이 될거예요.” 발걸음을 천축사로 향하는 내게 녀인은 돌처럼 답을 안겨준다. 또 다른 이민?! 그건 꿈에도 상상못하던 답이다. 중국조선족의 이민사를 한번쯤 글에 담겠다고 등산팀을 조직하여 한겨울의 눈발을 헤치면서 9시간을 넘게 오랑캐령을 넘었던적은 있지만 돈을 벌려고 찾아온 곳에 마음까지 부려놓겠다는 생각은 해본적이 없다. “178만 중국동포들중에 현재 한국에 거주하는 동포가 78만명을 웃돌고있어요. 가족이 전부 한국에 온 사람들도 있고 이젠 십년을 넘게 살아가는 사람들도 있어요. 그들이 모두 돌아갈것 같아요? 물론 소수의 사람들은 다시 고향으로 가겠지만.” 녀인은 기자로 지내던 시절의 예리함을 잃지 않고있는것일가? “하지만 이민은 마음 같이 안될걸. 결국 교포들은 어디에도 마음을 담지 못하고 살아야 할거야. 중국에 돌아간다는것도 불안하고 한국에서 평생을 이렇게 3D일을 하면서 살기도 힘들고. 교포들을 보는 한국인들의 눈길도 만만하지 않아.” 나는 배낭에 매달았던 지팽이를 꺼내 녀인에게 건네준다. 서툰 등산길에는 두 다리보다는 세다리가 그래도 많이 도움이 될것이다. “한국인들만 원망하지 말아요. 한국에도 상류층의 생활을 하는 사람들보다는 하층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더 많고 그들은 동포들때문에 어쩌면 더 살기가 힘들어졌거든요. 그리고 3D일을 하여 몸이 망가지는것이 두려운것이 아니라 정신이 무너지는것을 더 두려워해야 해요.” “깨진 그릇에 맑은 물을 담을수 없듯이 망가지는 육체에 온전한 령혼을 담는다면 그건 거짓말이야. 정신과 육체는 항상 공존해야 하니깐. 한국도 한때는 동포요 한민족이라고 떠들었지만 그것 역시 듣기 좋은 노래에 지나지 않고.” 녀인의 얼굴에 흐르는 땀을 보고 잠간 다리쉼을 할 곳을 찾아 두리번거린다. 하지만 평평한 자리는 먼저 온 사람들이 이미 차지했다. 녀인은 나무에 등을 기대면서 앞에 앉아 여유작작 떠들고있는 사람들을 가리킨다. “오빠가 만약 먼저 와서 저 자리를 차지하고있는데 저 사람들이 와서 끼여들어 떠든다면 기분이 좋겠어요?” “당연히 기분이 잡치지.” 나는 등산용 수건을 꺼내 녀인에게 건네준다. 한번 물에 적시면 몇시간이고 물기를 잃지 않는 수건이다. “왜 자신도 못하는 일들을 남을 보고 하라고 하나요? 우리가 저기에 끼여들면 저 사람들도 당연히 불쾌해할것인데.” 녀인은 결국 교포들과 한국인들 사이의 벽을 찾아주고있다. “그럼 교포들이 정신이 무너지는 원인은 뭐라고 생각해?” 다시 천축사로 가는 길을 향해 걸음을 떼면서 이번에는 내가 질문을 만들어본다. “우선은 자신들의 문제겠지요. 조금 더 긍정적인 사유로 산다면 정신은 쉽게 무너지지 않지만 스스로 피해의식을 갖고 살아가면 어떤 환경에서건 정신이 무너지게 되여있으니깐요. 그리고 한국정부도 동포들이 이민해오는것을 받아들이지 못하니 책임이 있고 중국정부에서도 따로 한국으로 진출하는 동포들에게 어떤 배려도 해주지 않으니깐 결국 이중으로 버림받은 셈이지요.” 나도 결국 그래서 술을 빙자하면서 살아왔던가? “한국에서 성공한 동포들도 적지 않아요. 그 사람들도 꼭같이 정신이 무너졌다고 생각하나요? 생각의 차이가 서로 다른 인생들을 만들게 하거든요. 오빠도 그럴거고.” 정상이 아득하게 보여진다. 녀인도 이젠 돌층계를 톺고있다. “오빠, 이렇게 걷고도 정상에 오를수 있을가요?” 단 한번도 생각못했던 또 다른 내 이민에 다시 우울해지려는 나를 향해 녀인은 말머리를 돌려준다. 나보다는 어려도 역시 배려하는 녀인의 씀씀이에 참 오랜만에 신경들이 올올이 즐거워지려 한다. “등산은 정신력이야. 내가 오를수 있을가고 생각하는 순간에 산의 기에 눌려버려. 그러니 그런 생각은 아예 버려.” 녀인에 대한 위안의 말이 아니다. 녀인은 불편한 다리라도 결코 정상을 포기하지 않을것이다. 녀인의 삶 자체가 그것을 보여주고있으니깐. 차라리 중도에 포기한다면 녀인이 아닌 나일거고 그래서 그건 나 자신에게 찾아주는 답일것이다. “오빠, 여기서 잠간 쉬였다가 가도 될가?” “그래. 너무 무리하지 말고.” 나는 자리에 앉아 녀인에게 어깨를 빌려준다. “어깨에 기대여 눈을 감고 숨을 고르롭게 해.” 등산하면서 중도에 앉아 쉬는것은 금물이지만 아픈 다리로 등산하는 녀인을 마냥 서있으라고 하는것은 죄악이라고 생각했다. “오빠, 오늘 정말 정상에 오르는것이지?” “그럼, 못오르면 이 오빠가 업고라도 오를게.” “이, 중도에 그냥 버리지만 마.” 녀인의 입가에서 엷은 무지개가 비껴가려고 한다. 산중턱에 있는 천축사의 풍경소리가 은은히 바람을 타고 다가온다. 녀인의 짙은 향을 맡으면서 정상을 향해 눈길을 주었을 때 수맣은 연어들이 비좁은 강을 거슬러 오르고있다. 아니, 어쩌면 강이 연어를 거스르고있을지 모른다. 연어들이 가는 길목길목마다 수렁들이 놓여있어 그 수렁에서 목숨을 잃는 연어들로 넘칠수도 있지만 살아있는 놈들의 몸부림은 결코 멈추지 않을것이다. 눈을 감고있지만 잠들지 않는 녀인을 꼭 안으면서 나는 또 다른 연어가 되여가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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