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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라지》문학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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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8    《도라지》2022년 1기 댓글:  조회:603  추천:0  2022-01-13
77    《도라지》2021년 6기 댓글:  조회:354  추천:0  2022-01-13
76    《도라지》2021년 5기 댓글:  조회:595  추천:0  2021-09-22
75    《도라지》2021년 4기 댓글:  조회:484  추천:0  2021-09-22
74    시와 먼 곳의 전야(외1편) 댓글:  조회:257  추천:0  2021-06-23
시와 먼 곳의 전야 ▣ 수필 / 채복숙   이쁘장한 젊은 녀자가 그림을 보고 있다. 세련된 초록의 원피스를 입고 검은 핸드백을 든 채 머리를 20~30도의 각으로 살짝 들어올려 오른쪽 우, 화면에 나타나지 않은 그림을 보고 있다. 녀자는 대략 7:3 비례의 장방형 구도 안에 서 있다. 명도를 살짝 떨어뜨려 조금은 우울해 보이는 색감의 연두색 풀무늬 벽지 우에는, 역시 살짝 우울해 보이는 낮은 하늘과 머리를 풀어헤친 나무를 그린 풍경화가 있다. 녀자는 아마 갤러리 속에 몸을 담고 있는 것이리라. 백열등에 직접 조명을 받은 듯 얼굴 피부는 눈처럼 희고 깨끗하다. 그러나 두 볼은 오히려 발가우리하다. 눈은 속쌍거풀이고 입술은 작고 도톰하다. 미인이다. 미인은 가슴이 깊게 파인 원피스 안에 하트형 깃의 다홍색 스웨터를 입었다. 하트형 깃의 끝에는 작은 금속고리가 걸려있고 그 고리에는 하얀 진주 패물이 걸려있다. 그뿐이 아니다. 하트형의 스웨트 깃은 량옆을 돌아가며 같은 색상의 남홍(南红) 마노 구슬로 치장했다. 백조의 목같이 희고 예쁜 목에는 가는 금목걸이가 걸려 있는데, 그 목걸이는 또 무늬가 보이락말락하다. 이미지는 세밀함이 극치에 달한다. 사진일가? 사진이 아니라 ‘동경’이라는 제목의 그림이다. 그림이지만 사진이 울고 갈 지경으로 리얼리티하다. 나는 한때 신문의 ‘예술살롱’란을 담당한 적 있다. 그때 예술평론이라 하기에는 많이 부족하지만, 스스로는 느낌이 그럴 듯한 감상문들을 꽤나 썼었다. 우의 그림도 그때 만난 것이다. 나는 그림을 보며 세밀화의 극치가 이같은 경지에 도달할 수 있음에 혀를 내둘렀다. 중국에서는 회화의 전통 쟝르로 공필화라는 것이 있기는 했지만 그래도 정신과 기품, 경지를 중시하는 화파가 우선시되였고 사진과 똑같게, 혹은 사진보다 더 세밀한 그림은 근래에 많이 흥기하기 시작한 것 같다. 현재 중국 회화 시장에서는 세밀화가 상당한 자리를 차지하고, 가격이 천문수자인 그림을 그려내는 화가도 적지 않다고 한다. 그런가 하면 서방 미술계는 여러 화파들이 돌고 돌아 슈퍼리얼리즘이라는 경향이 생겨났다고 한다. 그런데 사진예술은 또 다른 추구가 있는 것 같다. 사진이란 이름을 한자로 풀이하면 베낄 사에 참 진이다. 참을 베낀다는 뜻이다. 말 그대로 피사체를 그대로 베낀다는 뜻으로 리해해야겠다. 초기의 사진은 결코 미술의 령역이 아니였을 것이다. 하지만 현재는 디지털 기술로 다양한 사진 이미지들이 만들어지고 있으며, 이런 기술들이 사진의 개념을 완전 바꿔 버렸다고 해도 결코 과언이 아니다. 지금 사진은 당당히 예술의 한 분야로 되여, 있는 그대로 담아내지 않고, 낯설거나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대상을 만들어 보여주기도 한다. 현재, 사진작가들은 상상력의 한계에 도전하면서 또 다른 극치의 작품들을 만들어낸다. 그러고 보면 미술작품은 사진화 되고, 사진작품은 미술화 되는 게 아닌가 싶다. 세상은 타자를 배척하기도 하지만, 이렇게 타자가 되고 싶어하는 경향도 있는 것 같다. 우리가 사는 일상은 거의 비슷한 나날들의 중복이다. 단조롭고 따분하다. 서로 다른 시간이라는 점을 제외하면 거의 완벽에 가깝게 똑같은 일상이다. 대개의 사람들은 그 매일매일의 비슷한 일상에서 도망칠 수 있기를 바란다. 그래서 홀로의 려행, 먼 곳에로의 동경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정작 홀로 떠돌아다니는 사람은 안정된 환경과 따뜻한 가족이 그립다고 하니 아이러니하지 않을 수 없다. ‘령혼을 위한 닭고기 스프’라는 것들이 많이 류행되던 시절이 있었다. 그 시절에는 ‘생활은 눈앞의 구차한 일상만이 아니야, 시와 먼 곳의 전야도 있어’라는 꽤 근사한 노래도 있었다. 대략 7~8년 전, ‘시와 먼 곳의 전야’를 위해 교사직을 그만뒀다는 녀교사의 일화가 전 중국을 들썩이게 한 적도 있다. 이 일화의 주인공 녀교사가 썼다는 사직서는 단 한줄로 된 “세상은 저렇게 크고 나는 그것을 보러 가고 싶다”이다. 그런데 심심한 네티즌들이 그것을 대련(对联)으로 만들었으니, 그중 가장 이름난 것이 “돈지갑은 요렇게 작고 어디에도 갈 수 없다”이다. 거기에 횡서(横批)로 “출근이나 잘해라”고 달았다고 한다. 사람은 항상 리상적이 되여 보이는 다른 누군가가 부럽고, 예술은 늘 상반되는 령역에로 꾸준히 파고 들어가는 것 같다. 자아에 대한 불만이 새로운 자아를 만들려는 노력으로 이어지는 게 아닐가. 요즘도 꽃은 피였건만 일상은 단조롭다. 그래서 나도 시와 먼 곳의 전야가 한결 더 그리운가 보다. 일상을 탈피할 수 없다면 그리운 시와 먼 곳의 전야를 내가 직접 만들어낼 수밖에 없겠지… 다시 한번 ‘동경’이라는 그림을 들여다본다. 그림 속의 그녀도 시와 먼 곳의 전야를 보고 있는 것이리라. 격조가 살짝 우울하지만 눈빛이 례사롭지 않아 동경이라는 것이 더 돋보인다. 채복숙 프로필 채복숙, 흑룡강신문사 기자 경력, 현재 흑룡강조선민족출판사 편집. '민족문학' 잡지 년도상 등 수상. ►채복숙의 다른 작품 감상 인생은 색갈의 강이야- ▣ 수필 / 채복숙   출처가 어디인지는 알 수 없지만 ‘휴일의 성소(圣所)는 침대’라는 말이 있다.(출처를 알 수 없으니 일단은 본인의 명언으로 치자.) 더구나 해빛 따뜻하고 나른한 봄날 주말이면 침대에서 이리 뒹굴, 저리 뒹굴 하는 산만함이 나처럼 게으르지만, 매일 아침 꼬박꼬박 제시간에 출근해야 할 출근족에게는 황금 같은 휴식일 것이다. 그런데 전번 휴일에는 아침부터 급히 나가 돌아야 할 일이 생겼다. 나는 속으로 ‘알파카’라는 동물의 한어 속칭을 몇번이나 외우기는 했지만 별 수 없는 일이였다. 바로 며칠 전, 사월 중순임에도 눈을 퍼부은 이 곳 북방 도시는 아직도 우중충했고, 나는 선잠에서 깬 아이처럼 기분이 나지 않았다. 하지만 온 오전 시간을 할애해 해야 할 일들을 다 하고 나니 숨통이 트이는 것 같았다. 거리에 나서니 아침에 올 때까지만 해도 그냥 텁텁한 다갈색으로만 인식되던 사위가 갑자기 연분홍 물결에 설레이고 있었다. “어? 언제 꽃이 폈지? 아침에는 못 봤는데?” 그렇다, 아침에는 꽃이 핀 걸 못 본 거다. 선잠에서 깨여 떼를 써야겠는데, 떼를 쓸 수 없는 어른은 눈앞의 풍경도 선택적으로 본 것이였다. 거리 전체가 연분홍의 물결이 되여 흐르고 있는 느낌이 들었다. 작은 바람에도 그 연분홍들은 솰솰 설레이였다. 긴 어둠의 겨울을 지나 드디여 봄이 온 것이였다. 봄은 연분홍이다. 젊은 시절 나는 연분홍을 되게 좋아했다. 옷장 전체가 연분홍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였다. 체격이 가녀린 나에게 연분홍 옷은 이래저래 잘 어울렸다. 친구들은 나와 같이 쇼핑을 나가면 분홍색만 봐도 “저기 네 스타일이 있다”고 소리칠 정도였다. 스스로도 연분홍이 잘 어울리는 것 같아, 친구들이 “참 예쁘구나”고 할 때면 저절로 입이 함박만 해졌다. 나는 그렇게 나이가 꽤 들 때까지 그게 인사적인 칭찬일 수도 있다는 걸 전혀 생각지 못했으니, 심성이 단순해 빠진 건 확실하다. 세월은 쏜살같이 흘렀고, 나는 리유 없이 마냥 빨간색이 좋은 시간을 보낸 적 있다. 온 여름 빨간 반팔티에 빨간 핸드백을 메고 사처로 쏘다니군 했으며 이래저래 사람을 웃기는 사고도 적잖게 쳤다. 그때의 나는 여러가지 일들에 참여했고, 또 그 모든 것들에 신나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상 우에 놓인 빨간 계혈석 팔찌가 싱겁게 바닥 우로 굴러떨어지며 산산조각이 났다. 비싼 것은 아니였지만, 그것은 내가 유난히 아끼는 것이였고, 여름 내내 나와 같이한 것이였다. 미신이라 하겠지만 나는 그것이 주인을 대신해 액을 막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미신대로라면 나는 그것을 종이봉투에 담아 어디엔가 고이 매장해야 했다. 하지만 나는 어쩐지 씁쓸한 기분이 되여 그냥 쓰레기통에 담아버렸다. 그 날 저녁, 나는 한창 빨갛게 피고 있는 월계화 가지를 쑥덕 잘라버렸다. “난 아직 자를 때가 안되였단 말이야!” 월계화는 이렇게 소리치며 내 손가락을 덥석 물었다. 뾰족하고 단단한 가시에 찔린 손에서는 찔끔―하고 새빨간 피방울이 배여 내왔다. 몇년 동안 잘도 꽃을 피우던 월계화는 이젠 내 기억에서 가물가물 사라져 간다. 가을이면 나는 락엽과 똑같은 색갈의 가벼운 재킷을 입기 좋아했다. 박봉을 받는 내가 백화점에서 일개 재킷 하나를 월급의 1/3을 주고 산다는 건 무리긴 무리였지만 나는 눈 한번 깜빡 안하고 그것을 사들이였다. 그것은 밝은 노란색 우에 흰색의 반투명 막을 친 것처럼 선명하면서도 뽐냄이 없고, 발랄하면서도 진중함이 있는 색상이였다. 재킷은 락엽처럼 가벼웠지만, 가을바람을 제법 잘 막아냈다. 그 시절 나는 자연에 들어가는 것이 좋았다. 오후의 밝은 해살을 받으며, 락엽이 덮인 소로길을 걷노라면 머리가 맑아지고 기분이 상쾌했다. 그것을 두고 나는 인생을 누리는 것이라 정의했다. 그때 나는 자연 속에서 많은 것들을 주어왔다. 다친 자국이나 흠집 하나 없이 깨끗한 락엽 한장은 좋아하는 시집 속에 끼워 넣었고, 탑처럼 정중한 모양을 가진 솔방울은 서가 우에 잘 세워 두었다. 그리고 맑은 하늘 아래의 산이며 들이며, 물이며 등 가을 풍경들은 사진으로 고화되여 내 기억 속과 클라우드 속에 동시 저장되였다. 북방의 겨울은 매섭기는 하지만 짜장 청정한 기운이 있다. 그 청정한 기운은 특히나 감청색의 하늘빛에서 선연하게 안겨온다. 감청색은 또 바다의 색갈이기도 하지만 내가 좋아하는 람보석의 색갈이기도 한다. 그것은 온갖 희열과 슬픔, 분노, 사랑과 미움이 인생이라는 용광로에서 단련되여 나온 것처럼 단단하고 순수하다. 그 단단하고 순수한 감청색을 옷으로 만들어 입으면 고상하고 신비스러운 멋이 있다. 하지만 그것은 결코 컨트롤하기 쉬운 색상은 아니다. 나는 겨울이면 감청색의 깃 높은 스웨터를 입는다. 그것을 입고 나면 쌀쌀맞고 랭정하면서도 순수한 느낌이 묻어난다. 그 쌀쌀맞고, 랭정하면서도 순수한 시간들에 나는 여러가지 생각들을 한다. 그리고 그 생각의 편린들을 손 가는 대로 잡히는 종이장에 아무렇게나 적어놓는다. 그 종이 조각 우의 글자들은 철학가의 고상한 언어들처럼 두서가 없지만 또한 내 삶의 단증이 되기도 하다. 그리고 봄이 왔다. 나는 연분홍과 감청색으로 짜깁기를 한 스카프를 둘렀다. 연분홍과 감청색은 천생연분인 것처럼 잘 어울린다. 발랄하면서도 랭정하고, 순수하면서도 고급스럽다. 나는 봄바람 속에서 스카프를 날리며 꽃이 핀 것을 본다. 연분홍꽃들은 여전히 아름답고, 봄날은 여전히 단순하다. 해빛이 내리쬔다. 투명한 해살은 온갖 색상들을 품고 있다. 애기풀의 화사한 연두색이며, 오래된 건물의 진중한 암회색이며, 지나가는 회사원의 깔끔한 하얀색이며… 세상은 색갈의 회합이고, 인생은 색갈의 강이다. 집으로 돌아왔다. 창문으로 밝은 해살이 가득 들어와 침실은 명정한 분위기가 난다. 금전운이 좋으라 친 베이지색 카텐이 유난히 럭셔리한 감을 준다. 편안한 침대에 몸을 뉘였지만 생각은 제멋대로 쏴쏴― 흐른다. 올 봄에는 아까 보았던 아방가르드한 아가씨처럼 머리카락을 보라색으로 염색하면 어떨가? 그러면 계절의 륜회처럼 마음에도 또 새로운 색상들이 흘러들겠지…   《도라지》2021년 3기
73    《도라지》2021년 3기 댓글:  조회:761  추천:0  2021-06-23
72    《도라지》2021년 2기 댓글:  조회:403  추천:0  2021-06-23
71    《도라지》2021년 1기 댓글:  조회:396  추천:0  2021-06-23
70    《도라지》2020년 4기 댓글:  조회:958  추천:0  2020-08-19
69    《도라지》2020년 3호 댓글:  조회:882  추천:0  2020-07-20
68    《도라지》2020년 2호 댓글:  조회:714  추천:0  2020-07-10
67    《도라지》2020년 1호 댓글:  조회:638  추천:0  2020-07-10
66    《도라지》2019년 6기 댓글:  조회:739  추천:0  2020-06-02
65    《도라지》2019년 5기 댓글:  조회:524  추천:0  2020-06-02
64    《도라지》2019년 4기 댓글:  조회:542  추천:0  2020-06-02
63    [시] 꽃의 숙명(외9수)-변창렬 댓글:  조회:594  추천:0  2019-09-17
변창렬 꽃의 숙명(외9수)     눈섭에 꼬리표 달고 살짝 웃을 때 지려는 기미가 보여진다   오무렸다 펼치는 것이 웃는 것도 아니다 이슬 한모금에 울컥하는 서러움도 섞여있었다   열매들이 오돌차게 앉아있을 때 흐드러진 꽃의 그림자가 뭉쳐진 설레임으로 탱탱 감기고 있었겠지   떨어진 잎에서 맺혀진 열매까지 애처로운 피줄이 말라 시들도록 흐느낄 것이다 말라서 날아가더라도 고개만은 자꾸 돌리며 곁눈질하는 꽃잎들 엄마가 흐느낄 때가 보여진다   대추   먼길 걸어오신 할아버지 얼굴이다 배속에 품은 통 큰 웅심 알알이 영글어 배짱이 굳다 작은 몸집이여도 옹골찬 겉모습 할아버지는 벌겋게 지쳐계셨다 차례상에 모셔놓고 절 올릴 때 주름진 얼굴은 여전히 달다   벼꽃   손가락 하나씩 꼼지락거리는 몸짓 바람결에 흔들리며 속살 숨기는 애교   싸래기로 설익어도 꽉 움켜잡고 싶은 애처로운 미소   석류    배속에 숱한 아이를 품고 모대기는 산모   애들마다 단물만 챙기시는 엄마 참지 못해 배를 가르시는 모험   세상을 잡으려고 내민 한쪽팔이 보인다 전세에 나의 팔 같은 것   시    떨어질 때 썩을 줄 알가 새겨진 무늬로 흐느끼는 그때가 나무잎이 아닐 수 있다   내릴 때 녹을 줄 안다 허나 물이 아니라고 몸부림치는 그 순간이 따가운 입술에 떨어지는 순간이 애처로울 것이다   꽃향기가 소 코끝에서 사라지듯이 갈길 잘못 간 어린애처럼 엉뚱한 느낌으로 코 흘리는 코물로 순식간에 커질 수 있는 그때가 우렁찬 숨소리가 될 것이리라   시는 없는 것이다 있어야 하는 숨결일가   노을   환한 인연이 펼쳐진다 속 따로 숨기는 그림자는 색다른 얼굴로 다가오네   나도 저렇게 미치고 싶다 엉뚱한 환상일지라도 펼치는 순간이 즐겁다   순간에 순간도   원시림은 사라지고 말았다 고목들이 죽을 때 뿌리도 고갈든다 변두리 잡풀들도 기다리기 지겨운지 죽었다 살았다 순환의 치매를 보여준다만 고목은 흔적도 없이 흙이 되였는지 물이 되였는지 깊은 잠들고 말았다   할배 할매도 엄마 아버지도 흙이 되였는지 물이 되였는지 원시림으로 사라지고 말았다   감자눈   멀다고 지쳤다고 생긴 게 뿔만 아니다   살다 보면 스스로 뜨고 싶은 눈   달팽이는 뿔이 없어도 먼길 가고 있다   잠자리   여섯 발가락으로 손가락 세여보며 수수께끼를 풀고 있다   바로서는 자세로 평형을 찾는 그 꾀 손가락끝에서 몸가짐 다잡아본다   손가락 손금을 물고 뜯고 간지럽히며 그 속을 헤여보는 속셈 평형론을 풀고 있구나   히말라야의 꼭대기로 착각할 줄 몰라도 멀리 날고 싶은 그 힘을 키우는 것 같기도 하다   손가락이 여섯개였다면 잠자리 발가락 하나 잡고 매달려 애걸복걸할텐데 누가 누구를 풀이하는지 애매한 꼭두각시   가을    시계바늘이 산언덕에서 바람소리 엿듣는다 슬쩍 스치는 바람에 꽃 하나 휘청이는 몸짓을 빛 한뽐의 그림자로 착각할 순간일 것이다   들국화 핀 저 길가에 해 저무는 그림자가 넌지시 늑장 부릴 때 휘청한 꽃향기가 어슴푸레 노을빛으로 숨는 꼬리였다   저 멀리 밤톨 터지는 소리가 고개 숙인 벼이삭과 들국화가 속삭이는 소리로 시계는 알고 있을 거다   출처: 2017년 제4기 목록
62    [시] 고독 (심명주) 댓글:  조회:827  추천:0  2019-07-18
고독 심명주   사랑하고프면 글을 읽으라 그리울 때면 독서하라 보고 싶을 때에는 책을 펼치고 운명을 탓하면서 책자한테만 기대여라   사랑을 전하고 싶을 때면 책을 읽고 있다 그러고 그리움이 수면우 해초인양 물결칠 때에도 글을 읽고 있다고 고백하라 보고 싶어 밤하늘을 눈에 담을 때도 인생을 탓하면서 글밭을 묻히거라   그리고 떠나라 멀리 한번 아주 멀리 저 먼곳까지 사막끝 오지까지   그래도 그립고  보고 싶고 사랑한다면   아서라 나 건반우 손끝에서 튕겨오르는 당신의 노고지리 천마리로 환생하리니 출처:2017년 제4기 목록  
61    <<도라지>>2017년 제6기 목록 댓글:  조회:1197  추천:0  2019-07-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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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    [수필] 가을을 만나다-리화 댓글:  조회:772  추천:0  2019-07-18
리화  가을을 만나다   가을이면 의례 맑아지는 것이 있고 물드는 것이 있다. 하늘이 그렇고 땅이 그렇고 그사이에 나마저도 어디 숨을 곳이 없다. 아직 촐랑거리는 정도의 내 감성과 엷은 내공으로는 이 계절을 읊고 노래하기가 부끄럽다. 다만 그 속에서 한껏 맑아지고 깊게 물들기만 해야 한다. 야트막한 산에 올라 누렇게 물든 풀밭에 앉아서 멍을 때리던 어느 가을날이 있었다. 굳이 가을정취를 느끼려 산에 오른 것은 아니였지만 하늘은 그렇게 높게, 그렇게 푸르게 걸려있었다. 마치도 대지의 아픔을 거둬가기라도 하듯이. 그 맑고 푸른 빛은 구천에서 주렴처럼 드리워 산과 나무와 풀밭과 그 우에 앉아있는 나를 관통해 땅속 깊이 스며들었다. 눈 맞추는 잎새마다 얼굴 살짝 붉히고 풀잎들은 바스락거린다. 나무와 풀들은 저마다 예쁘게 물들면서 한여름의 탁하고 무겁고 치열했던 삶을 내려놓기 시작한다. 어떤 것은 그 삶의 정화만 동그랗게 남겨두고 또 어떤 것은 굳이 열매 맺을 필요가 없다는듯 소탈하게 겨울차비를 서두르며. 매년 립추가 시작되면 나는 늘 가을을 찾아 서성거렸고 그러는 나에게 가을은 늘 새로운 세상을 열어주었으며 고스란히 내 안에 와주기만 했다.   익어라 가을   가을이 왔다. 위챗에도 가을이 왔다. 곱게 물든 단풍사진이 똘깍 소리와 함께 핸드폰을 물들이고 있다. 가을날의 안부는 이처럼 단풍사진 한장 만으로도 충분하다. 촬영관련 위챗계정들은 가을 려행지와 가을촬영에 대한 글들을 도배하고 있다. 한편한편 열어보면 어느새 그곳의 가을 속에 빠져버린다. 가까운 곳에 있는, 그 전해에 다녀왔던 은행나무숲으로 향한다. 가슴 설레이며 도착한 은행나무숲, 그만 경악하고 말았다. 숲은 전혀 다른 모습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벌거벗고 신음하고 있었다. 여기저기에는 나무가지들이 떨어져있었고 숲 전체가 강탈을 당한 느낌이다. 땅에는 계절을 앞당겨 떨어진 푸른 잎새들이 죽어가고 가지에는 몇몇 남지 않은 아픈 잎새들만 겨우 물들고 있었다. 그 전해의 황금빛 가을숲은 어디로 간 걸가. 그때 이 숲으로 왔을 때는 오후 늦은 시간이였고 저녁해살에 숲 전체가 노란 물결로 반짝이고 있었다. 황금을 모아놓으면 이처럼 노랗게 반짝일가. 엄마는 그속에서 아이처럼 신나하시고 은행나무 잎들을 두 손으로 받쳐 우로 날리신다. 한잎한잎 내리는 노오란 잎새들 사이로 엄마의 웃음이 더 환하시다. 수북한 락엽 우에 앉아서 잎새들을 다리 우에 올려놓으며 ‘소꿉놀이’도 하신다. 엄마, 엄마의 가을이 너무 이쁘닷… 우리 딸 가을도 이처럼 아름답게 물들 거야… 그럴가? 노랗게 물들고 싶어… 이 잎새들처럼… 그럴 거야. 너 노란 조각달 좋아하잖아. 너의 가을은 분명 노랗게 물들 거야. 그해 가을 속에는 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노란 잎새를 단 은행나무가 가지를 뻗어있었고 숲의 노란 물결사이로 보라색 외투를 걸친 엄마가 천진란만하게 웃고 계셨다. 그러나! 지금은?! 살펴보니 은행 열매를 털어간 흔적이 력력했다. 은행 열매를 얼마나 털었으면 온 은행나무숲이 다 멍들고 벌거벗었을가… 익으면 저절로 떨어지는 열매를 미리 떨어뜨린 사람들, 사람들의 사심으로 생긴 악과였다. 분노가 일었다. 언젠가 집앞 거리에 심어진 은행나무 가로수가 노랗게 익자 긴 막대기를 들고 가지를 툭툭 치던 사람모습이 번개처럼 지나갔다. 그럼 이 은행나무숲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막대기를 휘두르며 혹은 사다리로 올라가 은행 열매를 털었던 것일가. 짐작할 수가 없다. 다만 조금이라도 더 털어서 팔면 수입이 많아질 것이니 모조리 깡그리 털어간 것 같았다. 돈이라면 환장을 하는 사람들이지. 모든 것은 돈과 초점을 맞춰 살아가고 있는 이 시대가 아닌가 하는 생각을 다시 해보며 씁쓸해졌다. 손으로 이 숲들의 나무를 다 만져주면 이 숲의 아픔은 조금이라도 사라지는 것일가. 이 숲을 바라보며 아파했을 모든 사람들의 마음을 모아서 미안하다고 얘기해주면 조금이나마 위안이라도 될가. 숲은 여전히 말이 없다. 잎새도 다 요절되여 서걱이며 대답해줄 수가 없다. 모처럼 아픈 가을을 만났고 숲은 나보다도 더 아프면서 침묵을 하고 있었다. 인간의 탐욕은 락엽의 계절도 앞당겨 온다. 내 것으로 만들어야겠다는 사심으로 잎새는 고운 바람 한번 제대로 들지 못하고 요절하고 만다. 온 세상이 물들어 황홀해야 할 이 가을을, 이곳을 찾는 사람들의 마음속에서 익어가야 할 이 가을을, 부디 다치지 말자. 가을바람이 불어도 물들 잎새가 없는 가을은 삭막하다. 잎새야, 바람 들어라.   빛나라 가을   익어서 다가오는 가을은 풍요로움을 가져다주기도 하지만 자칫하면 헛헛하고 아픈 마음을 얹어주기도 한다. 십자거리에 서서 신호등을 기다리는데 문득 싸늘한 이 공기와 십자로 놓여진 길이 겹치면서 추억의 정경 같은 막연한 그리움이 몰려든다. 담배진처럼 지독한 이 그리움의 정체는 무엇일가… 이 정체 모를 무엇인가를 찾아서 길에 오르고 싶어진다. 새벽부터 길에 올라 떠돌이를 하고 싶어진다. 길에 오르면 내가 원하는 뭔가를 만나거나 느낄지도 몰라. 새벽 장거리 뻐스에 오르자 세상은 그제서야 고요히 열리기 시작했다. 재빛, 푸름푸름, 연홍빛, 엷은 젖빛 물안개… 이런 것들이 내가 찾는 막연한 정체인 걸가. 세상이 고즈넉하고 평화롭게 밝아온다. 새벽길에 오르면 새들의 지저귐도, 이른아침 어느 산사의 고요한 정적도, 아침해살에 하얗게 빛나는 자작나무숲도, 레루 우에서 빛나는 가을 해살도 만날 수 있다. 운이 좋으면 솔잎, 그 파아란 바늘 끝 마다에 령롱한 이슬이 맺힌 천년로송도 만날 수 있다. 발뒤축을 들고 입술을 가져다댈 수 있는 행운이 이어지고 솔향이 스며든 이슬이 입술을 달게 적셔준다. 행인에게 내려주는 하늘의 은혜 같은 것일가. 이 감로수를 받아서 차 한잔 달여내면 또 얼마나 향기로울가. 가을의 투명한 빛 아래 세상도 빛나고 있었다. 헛헛하고 아픈 것들이 조금 눅잦혀질 것만 같다. 이런 헛헛함과 아픈 것들은 한번 지나가면 다시 오지 않는 것이 아니여서, 마치도 매년마다 가을이 오듯이 주기적으로 다가오는 것이기에, 이 투명한 가을 해빛 아래 자주 바래주어야 한다. 물든 가을잎새마냥 스스로 그 투명한 해빛 아래서 더 짙게 물들고 더 순하게 반짝일 수 있어야 한다. 그해도 나는 가을 속의 물든 잎새 한장인듯 그렇게 가을 속으로 빠져들어갔다. 제법 잘 익은 어느 가을 잎새를 닮은 그런 색 코트 목깃을 세우고, 짙은 회색 스키니 바지를 입고, 두 어깨에는 해골도안이 찍힌 큼직한 배낭을 멨다. 목에는 회색 목수건을 두르고. 하늘은 파랗게 빛나고 다리 밑으로는 가을 해볕만 흐르고 있었다. 다리 량켠으로는 나무들이 빨갛게 노랗게 물들어있었다. 나는 그 속에 있었다. 그 속에서 누군가의 발자국을 따라 숨차게 걷고 있었다. 사람들의 물결 속을 비집고 씨엉씨엉 걸어가는 그대의 걸음이 버겁게 빠르다. 부지런히 뒤따르지만 그대의 발꿈치를 따르지 못한다. 올리막길을 한참 걸어서 도착한 곳은 가을 단풍산의 산자락이였다. 울긋불긋 커다란 가을산이 빛나고 있었다. 잠간 현기증이 들었다. 노랗게 빛나는 잎새가 춤추듯이 떨어진다. 그 나무 아래로 다가서니 노란 잎새들이 머리에도 어깨에도 살풋이 내려 내 머리며 내 어깨에 빛을 더해준다. 한켠에서는 단풍나무가 빨갛게 빛나고 있다. 그대는 그 빨간 빛 속에 흠뻑 빠져있는 것 같다. 산이 빛나고 사람이 빛나고 세상이 빛나고 있었다. 삶에는 늘 빛이 고여있는듯 싶었다. 가을산에 오르면 이런 가을에 빠져서 돌아오고 싶지가 않다. 조금만 머물러있어도 잘 익은 저 나무잎들마냥 열매들마냥 성숙한 녀인으로 무르익고 빛날듯 싶다. 무성하고 치열하게 살았던 그 삶의 방증과 훌훌 털어버리고 소탈하게 내려놓는 모습을 보고 느끼면서 저도 몰래 가을의 성품도 닮아가고 싶어진다. 절정에 오른 가을 단풍산. 그 속에는 나도 있고 그대도 있었다. 잠간이였지만 우리는 벌써 물들어있었다. 우리는 벌써 빛나고 있었다. 그대는 빨갛게 나는 노랗게. 서산 우로 노을이 타오르고 우리는 지하철역으로 발걸음을 다그쳤다. 그것은 수년전 어느 늦가을이였다. 출처:2017년 제 6기 목록  
59    [수필]‘사이’의 온도-김단 댓글:  조회:759  추천:0  2019-07-18
김단  ‘사이’의 온도   1. 말주머니 여는 온도   창 밖은 노랗게 달아오른 해살에 아스팔트가 끈적해지고 내 마음에서는 심열이 솟구쳐 안팎으로 열기가 후끈후끈 해난다. 무더위 속 도심에는 행인의 그림자를 보기 드물다. 모두들 에어컨 바람이 제대로 나오는 상가를 찾아 맛있는 점심을 즐기고 있지 않으면 도시를 벗어나 어느 시원한 계곡에 맥주와 수박을 담궈놓고 이야기꽃을 피우고 있을 것이다. 이참에 도시도 내면의 무게를 비우고 나른한 휴식을 즐길 모양이다. 날씨도 덥고 입맛도 없으니 외출하지도 말고 오늘은 집에서 시원한 오이랭국이나 해먹을려고 오랜만에 랭장고 문을 열었다. 시원한 바람과 함께 랭장고 신선실에 챙겨놓은 야채가 보였다. 게다가 크고 작은 반찬통들이 살을 맞대고 빼곡이 들어앉아있다. ‘오이랭국이고 뭐고 랭장고 청소부터 해야겠구나…’ 손이 가는 대로 제일 앞에 있는 반찬통을 열어보았다. 시큼한 냄새와 함께 소고기고추졸임 사이사이에 파랗고 하얀 솜 같은 곰팡이들이 듬성듬성 들어앉았다. “랭장고에 보관했다가 며칠 지나서도 다 못 먹으면 한번 데웠다가 식혀서 다시 랭장고에 넣어둬라.” 엄마가 당부했던 것처럼 소고기고추졸임의 온도를 조금만 조절해주었더라면 ‘수명’을 조금이나마 더 늘일 수 있었던건데… 그 외에도 ‘장렬한 최후’를 맞이한 음식들이 가득했다. 언제 료리 의욕이 충만했던 날에 사두었던 기본재료들인지 아니면 지나가던 길에 그냥 행사가격이여서 통 크게 샀던 음식들인지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다이어트를 결심했던 날에 샀던 바나나 한뭉치도 그 고운 살결에 주근깨가 다닥다닥 돋아나있었고 더위에 물컹물컹해져 냄새가 나기 전에 쓰레기통으로 들어가야 될듯 싶다.   쓰레기통으로 버려지는건 류통기한이 지난 음식뿐만 아니였다. 자연과 인간 사이, 사람과 사람 사이, 사람과 동물 사이, 사람과 물건 사이 등 세상 모든 것이 온도에 의해 가늠이 되였다.   온도조절이 제대로 되지 않아 변질돼가는 사이사이가 점점 위태롭다. 사람사이에 류통기한이 박혀있는 것도 아니고 킁킁 냄새를 맡아본 뒤 변했다고 쓰레기통으로 버릴 수가 있는 것도 아니고.   우리 둘의 온도   “나는 아이가 생기면 이렇게 피곤하게 살지 않을 거예요.” “직접 나서 키워보면 알게 될게요.” 결혼생활 1년차, 동료들의 얘기가 새삼 실감이 나기 시작한다. 아이까지 생기면 나에게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은 더더욱 줄어들 것이다.       리허설 없이 생방송으로 진행되는 인생무대에서 난생처음 엄마라는 역할을 맡게 되는 우리는 때로는 서툴게, 때로는 설레이게 아이와의 온도를 맞춰간다. “어제 밤에 아이가 여러번 잠에서 깨는 바람에 난 선잠을 잤어. 아휴 피곤해.” 아이는 엄마에게 쾌적한 거리감각 따위는 요구하지 않는다. 숨막히고 뜨겁도록 가까운 사이를 원한다. 엄마는 그 뜨거운 사이에서 자신을 소진시키기도 한다. “아이를 재우고 나서 어쩌다 니가 올린 글을 읽어볼 여유가 생겼어. 나이가 들면서 자꾸 늘어가는 배역에 가끔 힘이 부친다. 엄마배역만 하다 나 자신으로 돌아가는 시간은 하루에 고작 10분, 이런 마음이 뻥 뚫리게 좋은 글 더 부탁해.” 대학동창생이 밤 11시에 위챗 모멘트에 올린 나의 글을 읽고 나서 올린 대글이였다. 요즘 위챗 모멘트에 아이 엄마들은 자신의 일상보다는 아이와 함께 보낸 일상을 올리기에 여념이 없다. 아이가 있는 동료 언니들은 출근하여도 얼굴에는 항상 피곤한 기색이 력력하다. 낮에는 열심히 근무하고 퇴근후면 집으로 돌아가 아이와 놀아주어야 했기 때문이다. 아이가 없는 나는 가끔 리해되지 않을 때도 있었고 나는 절대 피곤하게 아이를 키우지 않을 거라는 다짐도 미리 해본 적이 있다. 하지만 세상의 모든 엄마는 위대하고 엄마가 되기 위한 온도는 원초적 본능이였다. “집에 먹을 반찬은 있니? 된장하고 고추가루 더 가져다줄까? 새로 해둔 게 있는데…” “집 아래에 왔다, 내려오라.” “올라오세요, 쉬다가요.” “할 일이 많아서 먹을거리만 주고 가야 한다. 얼른 내려오라.” 어릴 적 엄마와 함께 생활했던 기억은 거의 없었다. 소학교에 들어가서부터 어른이 되기까지 엄마는 늘 외국에서 일을 하고 계셨기 때문이다. 엄마가 보고 싶으면 엄마 냄새가 배인 옷을 꺼내 눈을 감고 킁킁 맡았다. 향긋한 냄새가 후각을 자극하면 엄마가 바로 내 곁으로 소환될 것 같았기 때문이다. 내가 결혼을 한 뒤 엄마는 며칠에 한번씩 여러가지 반찬거리를 날라주셨다. 다리가 아프니 무거운 걸 들고 오지 말고 내가 가지러 가겠다고 해도 고집스럽게 꼭 들고 오셨다. “끼니를 해먹을 시간이 없으면 반찬 꺼내먹으면 편하다.” 일주일에 며칠씩 꼬박꼬박 날라다 주는 그 보자기 속 반찬들은 내가 지치지 않고 ‘밥벌이’를 할 수 있도록 힘이 되여주었다. 나는 이제 더이상 옷장 습기가 큼큼하게 배여있는 엄마 옷에 코를 갖다대면서 증발된 엄마의 흔적을 애타게 더듬어낼 필요가 없었고 휴일날 외국에서 걸려올 엄마의 전화를 손꼽아 기다릴 필요도 없었다.   생각해보면 외국으로 돈 벌러 갔을 때 엄마 나이는 기껏해야 서른다섯, 지금의 나보다 고작 세살 더 많은 녀자였다. 서로 떨어져있어도 아이인 나는 엄마의 온도가 항상 부드럽고 따뜻했다. 꼭마치 내가 엄마의 자궁 속에서 하나의 우주로 자라날 때의 그 부드러웠던 물마냥… 그리고 나도 서서히 그 온도를 지니게 된다. 내 몸속의 새로운 우주의 기원을 위하여.   너와 나의 온도   “오늘 저녁엔 뭘 먹으러 갈까?” “아무거나 니들 먹고 싶은 거로.” “양고기뀀 먹으러 갈래?” “어제 뀀 먹었어.” “그럼 어디 갈건데?” “아무래나, 니들 가고 싶은 대로.” “아, 몰라 너희 둘이 결정해라, 밥한끼 먹기 힘들구나.” “그래 먹지 마, 먹지 마.” 머리를 맞대고 뭘 먹을가 서로 열을 올리다가도 합의점을 찾지 못하고 셋 다 동시에 핸드폰을 만지작거린다. 그러다 그중 한 친구가 갑자기 음악을 틀고 살풀이 무용을 추기 시작한다. 하나 둘 입으로 구호를 중얼거리며 추는 걸 보아서는 공연안무를 익숙히 하고 있는 모양이였다. 또 한명은 아예 커피숍 쏘파에 드러누워서 식지로 핸드폰 화면을 부단히 밀어올린다. 저 추임새는 인터넷 쇼핑을 하기 위해 마음에 드는 물건을 찾는 것임이 틀림없다. 나는 한쪽으로 이들을 보면서 다른 한쪽으로는 갓 구워 올린 피자를 입으로 밀어넣으면서 허기진 배를 달래기에 바쁘다. 얼굴은 편안하고 표정은 소박하며 몸은 자유로워지는 그들 사이에서 나는 제일 행복한 온도를 느끼고 있다. 목에 피대를 세우고 얼굴이 벌개지도록 열 띤 토론을 하다가 갑자기 대화가 뚝 끊겨도 전혀 불편하지 않다. 간간히 일 얘기가 나오기도 하지만 그 어떤 획기적인 결론이거나 큰 성과를 내야 하는 회의와는 다르다. 가끔 인과관계가 없는 이야기들이 질서 없이 마구 툭툭 튀여나와도 우리는 매끈하게 얘기를 이어나갈 수 있다. 누구의 말을 자르고 앞다투어 대답을 하든 누구의 말에 집중을 하지 않고 또다른 엉뚱한 말을 내뱉든 이런 것들은 우리 사이에 전혀 장애가 되지 않는다. 질풍노도의 감정 얘기도 빠질 수가 없다. 말하는 사람이 온도를 높여가면 듣는 사람은 비난과 질책이 아닌 그 사람의 이야기에 공감을 가지면서 상대방의 온도를 조절해준다. 말하는 사람도 자신이 어떻게 해야 할지 그 방법에 대해서는 뻔히 알고 있는데 생각처럼 되지 않으니 듣는 사람이 공감해주기를 원했던 것이다.   “사회에 나가면 친구를 사귀기 힘들다”라는 말에 반박이라도 하는듯 나는 현재 제일 친한 친구들을 학교에서가 아닌 사회에서 만나 지금까지 ‘신선도’를 유지하면서 우정을 이어가고 있다. 그 우정의 기원에 대해 우리 서로 이야기를 해본 적이 있는데 그 누구도 서로가 언제 어디서 어떻게 만났는지 기억이 가물가물 했다. “얘들아, 한시간째 못 결정하고 있다. 저녁을 어디 가 먹니?” “그냥 전번에 갔던 데로 가자.” “그래, 그러자.” 매번 치열한 토론을 해도 결국은 문턱이 닳토록 다니던 단골 맛집을 가군 했다. 우리 사이 마음 온도는 늘 36.5도로 순환되면서 처음이나 지금이나 우리 사이를 맴도는 공기는 부드럽고, 기쁨과 슬픔, 한숨과 침묵이 과장되는 법이 없이 단순하게 넘나든다.   마무리 온도   “만나면 같이 밥 먹자.” “응, 알았어.” 사이의 온도를 알기 위해 우리는 서로의 언어를 해석하기 시작한다. 반가우면 다음에로 미루지 말고 마주친 순간에 마음의 주파수를 맞춰 바로 식사를 하면서 술이라도 한잔 기울였으련만… 더욱 아이러니한 것은 이런 인사에 “응, 알았어.”라고 미리 정해둔 건설적인 답도 있다는 점이다. 짧은 인사뒤 이내 어색한 기운이 두 사람 사이를 오간다. 만약 엘레베터와 같이 사방이 막힌 좁은 공간에서라면 온몸이 간지러워나 견디기 힘든 증상은 더 빨리 나타난다. 마침 그날 입은 옷에 호주머니도 없다면 갈 곳을 잃은 두 손은 본능적으로 핸드폰을 찾아갔을 것이다. “전화번호나 위챗 알려줘 후에 전화할께.” 위챗을 추가하고 전화번호를 저장했지만 우리 서로는 일년이 지나도 이년이 지나도 말 그대로 전화번호와 위챗아이디만 저장된 ‘아는 사이’로 존재한다. 사회생활을 하다 보면 사람들과의 접촉이 더 빈번해진다. 정이 많아 따뜻한 사람, 마음이 닫혀있어서 미지근한 사람, 때론 상대방의 온도가 높아서 당황할 때도 있고 너무 차가워서 오싹해날 때도 있다. 시시각각 변화되는 사람들 사이의 온도 때문에 나는 명치끝에 바위가 걸린 듯한 체증에 시달리기도 하고 차가웠다 더웠다를 반복하는 세상의 중심에서 현기증을 느끼기도 한다. “넌 정말 최고야”로 나의 열정에 불쏘시개를 넣어주다가도 “이것밖에 안되니”로 찬물을 확 끼얹는다. 두뇌를 가동하고 몰두하여 일을 하고 있는데 “쟤네들은 정말 쉽게 일한다.”는 공기의 궤도에 따라 우리의 고막을 간지럽힌다. 이렇듯 사이의 온도는 언어에서 그 모습을 드러내기도 한다. 나는 관계에서 생겨나는 상처를 아물게 할 수 있는 능력이 없다. 친절한 인사에도 사이 좋은 대화에도 진심어린 부탁에도 나는 스스로 온도를 부단히 내려 조절한다. 표정은 무뚝뚝하게 언어는 차갑게 행동은 무관심하게 늘 그런 온도를 유지하면서 말이다. 그러나 그 또한 오래 버티지 못했다. 내가 변함없이 0도를 유지해도 상대방은 더웠다 차가웠다를 반복하면서 나를 녹였다 끓였다 한다. 롱락당한 느낌만 들 뿐이다. 무기력한 관계 속에서 때로는 쓰레기가 아닌 진심도 관성에 의해 자연스럽게 쓰레기통으로 버려진다. 마음속으로 얼려둔 ‘감정 쓰레기’들은 하나둘 늘어난다. 자신의 온도를 무조건 낮춘다 해서 혼탁하던 ‘사이’의 공기가 순식간에 맑아질 수는 없을 터이니 다른 사람들과도 36.5도의 쾌적한 마음의 온도를 가져보는 건 어떨가?  공동체적 삶을 살았던 예전 사람들은 무리를 떠난다는 것은 곧 죽음을 의미한다고 했다. 관계에 금이 가면 직접적으로 생존에 협박이 가기 때문이다. 째지게 가난했던 시절도 그들 사이는 쾌적한 36.5도를 유지하면서 살아갔다. 음식에 대한 불안이 크지 않은 현대인들 ‘사이’는 오히려 조화롭지 못하다. 환경과 사람 사이의 온도 때문에 지구는 매일 민감해지고 있다. 몇도의 차이로 우리는 삶의 변화를 잘 느끼지 못한 채 살고 있지만 정작 북극곰은 삶의 터전을 잃게 될 위험에 빠진다. 지구의 온난화로 북극곰은 ‘온도의 피해자’로 되고 사람들은 온도의 과잉 혹은 온도의 부족으로 점차 ‘감정의 난민’으로 된다. 탈출이 불가한 우리들 ‘사이’에는 파괴성적인 재앙을 막아낼 수 있는 적절한 ‘온도’가 필요하다. 출처: 2017년 제6기 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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