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청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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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    책 출간식과 함께 거행한 뜻깊은 70돐 축수연 댓글:  조회:3713  추천:18  2020-11-03
아리랑 생방송 《좋은 세상》   프로그램명:  방송날자: 2020년 11월  2일 아침 8:00~8;40 방송내용: 책 출간식과 함께 거행한 뜻깊은 70돐 축수연 래     빈: 원 룡정시 직업중등전문학교 부교장 주청룡 책임편집: 강순선-13179080088 사 회 자: 조일광, 김설화 ---프로그램 节目头--- 남; 70돐 축수연에 책출간식을 함께 거행해 하객들의 존경과 축복속에서 뜻깊은 축수연을 맞이한 분이 계십니다. 녀; 바로 원 룡정시직업중등전문학교 부교장이며 현재 로인협회회장직을 맡고 계시는 주청룡선생님이신데요.   남; 오늘 “좋은 세상”프로에서는 주청룡선생님을 생방송실에 모시고 그간 사회와 민족에 대한 책임감, 사명감을 안고 보람찬 삶을 증명해온 두권의 책으로 더 빛나게 맞이한 70돐 축수연의 이야기를 들어보도록 하겠습니다.  여러분들의 많은 애청 기대합니다.  **********************************************************************************생방송실에 나오신 원 룡정시직업중등전문학교 부교장이며 로인협회회장이신 주청룡선생님과 인사 나눠 보도록 하겠 습니다. 반갑습니다. 주청룡부교장; 인사 나누기 (1); 우선 70돐 축수연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지난 10월 25일  책 출간식을 함께 거행하는 의미있는 70돐 축수연은 하객들의 존경과 축복속에서 맞이하게 되였다는데요. 어떻게 되여 이런 뜻깊은 축수연을 거행할 생각을 갖게 되였는지요? 답: 예, 금년은 제가 70돐생일을 맞는 해입니다. 적지 않는 사람들은 자식들에게 물질적 재산을 물려주고 있는데 저는 한평생 교원공작을 하다니 자식에게 물려줄 물질적 재산을 축적한 것이 없습니다.  물질적 재산이 없으면 무엇을 물려주겠는가고 생각하던 끝에 제가 퇴직한 다음 쓴 글들을 묶으면 책이 두권이 되겠는데 이것을 가문의 문화유산으로 하여 넘겨주면 의의가 있겠다는 생각을 갖고 이번에 저의 생일 70돐을 맞으면서 이미 신문, 잡지, 방송에 발표된 글 가운데서 일부부를 뽑아 《주청룡문집》1, 2권을 출판하게 되였습니다. 이렇게 책을 묶은 것이 1권은 사회상의 화제를 다룬 칼럽집 《나는 중국조선족》이고 2권은 생활수기집 《성 쌓고 남은 돌》입니다. 우리 조선족 전통풍속은 환갑, 고희연 등은 당사자가 큰 상을 받고 친척들이나 하객들이 나와서 절을 하는 형식으로 축수연을 치르고 있는데 이렇게 하면 행사가 더 많이 복잡하여지고 길어지지요. 저는 어쩐지 큰 상을 받으면서 절을 받고 싶지 않았습니다. 차라리 이렇게 하객들이 많이 모인 기회에 저의 문집출간의식을 하면서 하객들에게 저의 책을 증정한다면 더  의의가 있지않겠는가 하는 생각을 갖고 고희연 겸 저의 문집출간의식을 하게 되였습니다. (2): 출간의식에 선보인 두권의 책에는 어떤 내용을 담겨져 있는지요? 답: 예, 제1권 “칼럼집”은 총 505페지, 127편의  칼럼으로 되여 있는데 크게 두가지 부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하나는 중국에서 쓴 칼럼들인데 주로 우리 조선족의 “3농문제”를 다룬 칼럼과 기타 사회상에 존재하는 문제들을 다룬 칼럼이고 다른 하나는 친척의 요청으로 2007년부터 2010년, 3년간 한국에 가 있는 동안 한국사회를 료해하고 재한 중국로무일군들의 삶의 현장을 료해하고 한국정부의 중국동포들에 대한 관심과 배려, 중국동포들의 한국의 경제건설에 대한 기여, 한국과 재한 중국동포사회의 화합과 공존, 모순과 갈등, 이런 모순과 갈등을 어떻게 풀어나갈것인가? 하는 과제를 가지고 《우리는 자랑스러운 중국의 조선족》등 여러 편의 칼럼을 써서 한국사회에서 재한 중국조선족에 해한 인식을 바로 잡고 그들의 인권을 보장하여 줄 것을 호소한 칼럼들입니다. 제2권 “생활수기집”은 총 465페지 51편의 수기들로 되여 있는데 주로는 국내 여러개 대도시와 동남아 여러개 나라와 지구 그리고 서유럽의 여러개 나라를 유람하고 쓴 기행문이고 그외에 또 생활수기부분들이 있습니다. (3); 독특했던 70돐 축수연에 대한 하객들의 반응 또한 뜨거웠을 같습니다. 답: 예, 저의 70돐축수연은 좀 특색적이였습니다. 조선족의 전통적인 고희연은 당사자가 큰 상을 받고 친척과 하객들에게서 절을 받는 형식으로 되였지만 저는 그런 형식은 없었고 생일단설기에 초불을 켜놓고 제자대표 넷이 나와서 우리 부부의 건강장수를 빌면서 함께 초불을 불어 끄는 형식으로 되였고 그 다음 책 출간의식은 저의 문집을 편집한 작가선생님이 편집과정을 소개하고 제가 문집출판소감을 이야기 하고 저의 원 단위, 룡정작가협회, 룡정아동문학회, 제자대표의 축사 등 절목들이 있어 전체 하객들의 뜨거운 반응을 잃으켰습니다. (4); 대단하십니다. 두권의 책에는 그간 사회와 민족에 대한 책임감, 사명감을 안고 살아 오신 선생님의 기여가 고스란히 담겨져 있었기에 70돐 축수연이 더 빛났다는데요. 한점 부끄러움없이 살아온 70인생에 대해 자부심과 큰 보람을 느껴셨다면서요? 답: 예, 그날 하객들이 많았는데 가장 감동적인 것은 저의 제자 몇이 저의70돐축수연 및 책출간식을 기획하면서 위챗을 통하여 자기들의 동창들에게 서로 알리였는데 예상밖으로 많은 제자들이 와서 축하를 한 것입니다. 이때 저는 한편생 당의 교육사업에 충성한 보람이 오늘 이렇게 많은 제자들에게서 이런 축복을 받는구나 하는 심정에서 감격의 눈물이 솟구쳐 나왔습니다.   (5); 칼럼집이 보여주다싶이  선생님께서는 사회적으로 관심하는 문제에 대해 예리한 필봉으로 127편의 칼럼들을 써내셨는데요. 칼럼은 언제부터 어떻게 되여 쓰게 되였는지? 첫 칼럼이 사회에 어떤 반향을 일으켰는지에 대해 상세히 이야기 주시렵니까?   답: 예, 학교에서 지도자 직에 있다가 2006년 정년퇴직을 4년 앞두고 제2선에 물러나게 되였습니다. 제2선에 물러난다는 것은 기실 집에서 편히 쉬라는 것인데 서운한 말로 한다면 이젠는 성 쌓고 남은 돌이라고 생각되였습니다. 극진히 사업을 사랑하고 열심히 일해 오던 내가 사업을 그만둔다는 것은 인생의 종말로 느껴졌으며 무엇이든 하지 않고 매일 마작치기를 하거나 그렇지 않으면 쪽걸상을 가지고 나가서 령감들과 같이 매일 그늘밑에서 소일하며 보낸다는것은 너무나도 허무한 생활이라고 생각였고 일종 심리적 불안한 감까지 있었습니다. 그래서 많은 고민 끝에 아직 기력도 좋고 정신력도 좋은데 무엇이든 사회에 유익한 일을 해야겠다는 생각을 갖게 되였습니다. 이렇게 련 며칠 생각을 굴리다가 하루는 기발한 생각이 떠 올랐습니다. 그것이 바로 ‘나는 중국의 조선족이다. 그럼 내가 중국조선족사회를 위하여 무엇을 해야 하는가?’ 하는 것이였습니다. 이런 취지를 갖게 되니 우리 조선족사회에 대하여 많이 사색을 하게 되였습니다.  그래서 저는 제가 살던 고향마을과 주내 여러 농촌마을을 돌아 다니며 3농문제에 대해 고찰하였습니다. 2006년 여러 농촌마을을 돌아다니면서 고찰한 정황들을 종합하면 1.농촌인구가 현저히 감소되였고 2. 많은 농민들이 소농경제 울타리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제한된 경작지에서 저 소득의 수입으로 입고 먹는 문제를 겨우 해결하고 있었으며 3. 3,40살을 먹도록 장가를 가지 못한 로총각들이 수두룩 하여 혼인균형이 파괴였으며  4.  학생수가 많이 줄어들고 많은 학교가 페교되였으며 5.외국로무로 외지의 사람들에게 경작지를 임대 혹은 양도하여    조상들이 개척한 삶의 터전이 다른 민족에게 로 넘어가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조사자료을 가지고 “농촌조선족 인구의 이전을 어떻게 볼것인 가?”란 제목으로 2007년5월에 만여자에 달하는 글을 써서 흑룡강신문에 발표하고 중앙인민방송국 조선어방송에서 저의 육성으로 방송되였는에 처음으로 이런 내용의 글이 발표되니 조선족사회에서 큰나큰 반향을 잃으켰습니다.  (6); 여러매체와 손잡고 많은 칼럼을 쓰시면서 우리 사회의 발전에 한몫 하였다고 들었습니다.  답: 예, 2011년 6월, 중앙인민방송국 조선어방송의 《오늘의 화제》담당편집선생님으로부터 사회상에 존재하는 문제점을 다룬 칼럼 정기적으로 육성방송을 해 줄 것을 바라는 청탁을 받았습니다. 이래서 2011년 7월부터 매주 《오늘의 화제》프로에서 시리즈로 중국조선족의 현상태를 분석하고 앞으로 해야할 일, 한국과 중국조선족 사이에 어떤 모순과 갈등이 있는가? 이런 모순과 갈등을 어떻게 풀어나갈것인가? 하는 문제와 기타 사회상에 존재하는 문제들을 가지고 칼럼을 써서  1년반 매 주일마다 련속 저의 육성으로 방송하였는데 지금은 중앙인민방송뿐만 아니라 길림신문, 연변일보, 흑룡강 신문 등 조선족 보도 매체에 계속하여 사회적으로 존재하는 문제들을 가지고 칼럼을 발표하고 있습니다. (7); 지금까지 각 매체나 언론사에 발표한 칼럼들이 참 많은 줄로 알고 있습니다. 우리민족의 발전과 진보를 위한 선생님의 관심이 깃들어 있는 애증넘치는 필들이 있다면은요?     답: 예,  2010년 10월, 제가 살던 농촌 고향마을에 다녀오게 되였는데 그전에는 다른 민족이 한호도 없이 순 조선족이 60여 호 단란하게 모여 살던 곳이 2007년 한국 방문취업제 문이 열리자 출국로무요, 대도시요 하면서 떠나다니 조선족은 몇 호밖에 없고 대부분 다른 민족들이 밭을 부치고 있었습니다. 조상들이 개척한 삶의 터전이 다른 민족에게 누에 뽕입먹듯이 잠식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연변의 여러 농촌들을 돌아보면서 3농문제를 조사를 하여보니 거의 다 제 고향마을과 비슷한 상황이였습니다.      농촌조사 가운데서 우리의 토지가 타민족에게 넘어 가는것이 가슴아프게 느껴졌습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토지는 임대한 것이기에 기한이 되면 도로 찾을수 있다고 하면서 아주 락관 적이였습니다. 그러나 저의 생각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시간이 길고 세대가 바뀌게 되면 자연히 그 임대가 경영권으로 넘어갈수 있습니다. 이렇게 되면 후세 사람들이 대학교나 기타 여러가지 도경을 통하여 과학적인 영농법을 배워가지고 본 고장에 와서 규모화 농업을 하려고 하여도 발을 붙일 자리마저 없게 될것이고 우리의 삶의 터전을 영영 잃게 될것입니다. 그렇지만 모든 농촌 마을이 다 그런것은 아니였습니다. 저는 우리 조선족 농촌마을을 방문하면서 여러가지 선진적인 경영모식도 많이 찾아내였습니다. 이러는 가운데서 토지가 타민족에게로 넘어가지 않고 조상들이 개척한 삶의 터전을 우리가 가꾸고 지키자면 아래와 같은 여섯가지 방면으로 노력하여야 한다고 보았습니다.     첫째로는 외지에 나간 촌민들의 토지를 촌민위원회에서 통일적으로 관리하여 본 지방 촌민들에게 임대주어 외지에 갔다가도 아무때든 돌아와서 농사를 짓도록 하고 둘째로는 과학적인 규모화 농업을 하여 제한된 농경지에서 보다 높은 수확 거두어야 하고 셋째로는 생태농장을 꾸리여 한국의 사육농장에서 일하면서 배운 사육기술로 고향에 돌아와서 가축, 가금 생태농장을 꾸리는것입니다. 넷째로는 자연우세를 충분히 리용하여 당지의 농산품, 특산품 등을 여러가지 명브랜드로 가공하여 수출형 농업을 하여야 합니다. 다섯째로는 농민전업합작사 혹은 전문농장을 꾸리는 것이였습니다. 분산된 농업으로는 다수확을 따낼수 없습니다. 농민전업합작사 혹은 전문농장을 꾸려 로동력을 합리하게 배치하여 농사도 짓고 다종경영을 하면서 통일관리, 통일생산, 통일수확, 통일가공, 통일판매를 하여 규모화, 기계화, 현대화의 방향으로 나가야 하는 것이였습니다. 여섯째로는 공농업이 결합된 집중촌건설을 하는것입니다. 분산된 자연툰을 합병하여 유리한 환경조건을 갖춘 곳을 선택하여 집중촌을 건설하여 제한된 경작지를 감농군들에게 맡기고 촌기업을 많이 꾸리여 여유의 로동력을 모두 촌기업으로 전이 시키면 여유의 로동력을 합리하게 배치할수있습니다. 모두어 말하면 공농업이 결합된 집중촌을 건설하여 소도시화를 하는 것입니다. 소도시화를 하면 도시에 시집가는 처녀들이 적게 되며 따라서 조선족 총각들의 혼인 불균형도 해결할수 있으며 인구가 증가되면 자연히 학생수도 늘어나 우리민족 교육도 보장할수 있으며 조선족공동체를 더욱 건전히 구축하고 우리 민족의 정체성을 확보할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도시에 들어가 창업할 능력이 없는 사람들은 출국하여 번 돈으로 본 고장에서 집중촌건설에 투자하여 공업도 하고 과학적인 규모화농업을 한다면 우리의 삶의 터전도 가꾸고 지킬수 있으며 이 터전을 우리의 후세에 넘겨 줄수 있다고 봅니다. 이상으로 저는 농촌조사를 개괄하면서 “조상들이 개척한 삶의 터전을 우리가 가꾸고 지키자”란 제목으로 만여자 되는 글을 써서 2012년도에 흑룡강신문, 《농가》 잡지와 중앙인민방송국 조선어 방송에 발표하였습니다. 그리고 중한수교 20주년을 맞으면서 “중한수교와 중국조선족사회”란 글을 써서 중앙인민방송, 〈농가〉잡지, 길림신문, 흑룡강신문, 한국의 동북아신문에 발표하였습니다. 그 내용을 소제목형식으로 보면 1.자랑스러운 중국조선족 2. 중한수교전의 중국조선족사회  3. 중한수교후의 중국조선족사회  (1) 연해도시, 대도시에로의 인구이동  (2) ‘코리안드림’으로 인한 한국진출 (3) 외화수입은 자지방의 경제발전에도 커다란 도움을 주고 있다 (4) 인구이동이 조선족사회에 미친 영향 1) 조선족집거지 인구의 감소와 분산으로 하여 조선족공동체   해체의 위기를 겪고 있다 2) 조상들이 개척한 삶의 터전이 점차 타민족에게로 넘어가고 있다 3) 농촌총각들이 장가들기 어렵게 되였다 4) 리혼률이 높아가고 결손가정자녀가 많아지고 있다 4. 금후의 전망 등 이러한 내용들이였습니다. 그리고2014년도에 저와 농가잡지 주필 홍천룡선생님이 연변인민출판사의 위탁으로 20여일간 흑룡강성의 농촌조선족마을을 현지조사하면서 개혁개방후의 농촌조선족마을의 변화를 고찰 하고 3농문제를 다룬 계렬칼럼을 《길림신문》에 발표하였는데   《길림신문》 ‘오늘의 화제’ 평의에서 2등상을 수상하였습니다. (8); 칼럼집의 한부분에는 최근 몇년래 해내외에 다녀오면서 체험들을 필봉으로 펴내셨다는데요?  한국대통령에게 편지를 올림만큼 우리 민족에 대한 사랑의 마음과 조선족에 대한 대변이 깃들었습니다. (한국에서 주로 써온 칼럼에 대해 상세히)    답: 예; 2007년 7월에 친척의 요청으로 한국방문길에 오르게 되였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한국으로 간다면 아마 머리속에 돈벌이라는 사상이 앞설 것입니다. 하지만 저는 그런 생각보다도 우선 한국사회를 료해하고 재한 중국동포들의 삶의 현장을 료해하고 한국정부의 중국동포들에 대한 관심과 배려, 중국동포들이 한국의 경제건설에 대한 기여, 한국과 재한 중국동포사회의 화합과 공존, 모순과 갈등, 이런 모순과 갈등을 어떻게 풀어나갈 것인가? 하는 것을 료해를 하고 이런것을 글로 써서 언론매체에 발표하면 우리 동포사회에 도움이 되지 않겠는가 하는 것이였습니다. 한국에 도착하여 공항, 출입국 사무소, 취업교육장, 로동부 고용지원쎈터, 신문사, 방송사 등 국가기관, 사업단위를 다니면서 보면 한국의 국가공무원, 사업단위 일군들은 우리 동포들에 대하여 아주 뜨겁게 대하였고 동포다운 사랑을 주었으며 봉사업체의 종업원들도 아주 열정스럽게 대하였습니다. 이럴 때마다 이국 땅에서 한 겨레의 따사로운 정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중국에 있을 때 우리 중국의 조선족들이 한국에서 3D업종 일을 하면서 많은 멸시, 모욕 등 불공정한 대우를 받고 갖은 굴욕을 참으면서 일하여 왔다는 말을 많이 들었습니다. "산에 가야 꿩을 잡고 바다에 가야 고기를 잡는다."는 속담이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중국동포들이 3D업종 일을 하는 농장, 건설현장, 산업현장에 가서 그들이 고달프게 일하는 실생활을 체험하였습니다.   이렇게 한국에서 현지체험을 하면서 보면 중국에서 간 일부 젊은이들은 기술부문에서 일하면서 그 어떤 스트레스를 받지 않고 일하였는데 3D업종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중국에서 듣던 바와 같이 일부 하류계층의 고용주들이 중국동포들을 마구 욕하면서 부려 먹는 현상과 중국동포를 가정부로 둔 극 소수의 가정에서 가정부(나의 친척도 포함)를 종으로 여기며 최저 한도의 인권조차 보장해주지 않는 현상을 가슴 아프게 보아 왔습니다. 우리가 한국으로 돈벌러 왔고 한국의 많은 3D업종에서 인력을 많이 수요하는 것만큼 3D업종에서 일하는 것을 개의치 않습니다. 하지만 인격은 무시당하지 말아야 하고 인권은 보장되여야 한다고 봅니다. 그렇다면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내 힘으로 중국조선족을 대변해 한국의 언론매체를 통하여 재한 중국조선족의 지위를 확립하고 3D업종에서 그들이 인격적 무시를 당하지 말고 인권침해를 받지 않도록 호소하는 것이였습니다.   하여 저는 중국에서 조선족은 소수민족의 우대정책을 향수하면서 자랑스럽게 생활한다는 것을 12가지로 개괄하여 말하면서 "중국조선족은 문화수준이 전국에서 가장 앞자리를 차지하고 있고 조선족은 로인을 존경하고 어린이를 사랑하며 례의바르고 깨끗하고 문명한 민족으로 중국 전역에 널리 알려져 있다. 그리고 중한관계에서도 중국조선족은 가교작용을 하고 있다. 때문에 우리는 중국에서 소수 민족이라고 하여 소외당하거나 소외감을 느껴 본 적이 없이 소수민족의 우대정책을 향수하면서 당당하게 중국조선족으로 살아가고 있다. 그런데 오히려 한겨레의 나라 한국에 와서 일부 최하층의 사람들에게서 '조선족'이라는 리유로 업신여김을 당하고 있다" 저는 이런 내용을 골자로 우리는 "자랑스러운 중국의 조선족"이라는 칼럼을 써서 한국의 여러 신문에 발표하여 한국사회에서 우리 중국조선족에 대한 인식을 바로 잡고 3D업종에서 중국조선족들의 인격을 무시하지 말고 인권을 보장하여 줄 것을 호소하였습니다.   그리고 또 3D업종에서 내가 직접 목격하였거나 친척, 친구들이 멸시, 모욕, 학대를 받은 사례들을 정리하여 "한겨레의 사랑을 느꼈으면"이라는 제목으로 대통령님께 올리는 편지를 써서 동북아신문에 발표하여 재한 중국조선족들의 인권을 보장하여 줄 것을 요구하였습니다. 저의 이런 글들이 신문에 발표되면서 한국사회와 동포사회에서 일정한 반향을 일으켰습니다.   KBS-1 라디오방송에서는 제가 재한 중국조선족들의 의사를 충분히 대변할 수 있다고 하며 저를 "2008년 송년의 밤"프로에 초대하였습니다. 저는 그 프로에 출연하여 "한국정부의 '방문취업제'의 혜택으로 하여 중국조선족들이 한국에 와서 돈을 많이 벌고 있는데 이것은 한국정부가 우리 동포들에 준 사랑이다. 저는 우리를 보내준 중국정부와 우리를 받아 준 한국정부의 사랑에 감사하다"고 말하면서 "3D업종에서 재한중국조선족들의 인격을 존중하고 인권을 보장하여 줄 것"을 호소하였습니다. 그 방송이 전파를 타고 지구촌의 방방곡곡으로 퍼져나갔습니다.   그리고 2009년 1월에《KBS-1 TV》와 《중국동포타운신문사》가 공동 주최로 "한국기업인과 재한 중국동포 간담회"를 조직하였는데 저도 그 간담회에 초대되였습니다. 그 회의에서 저는 한국정부의 '방문취업제' 정책으로 하여 중국조선족들이 한국에 나와 돈을 벌고 있는 한편 한국의 경제건설에서도 일익(一翼)을 담당하고 있다. 이것은 아주 좋은 일이다. 반면에 제가 직접 목격한 농장, 건설현장, 산업현장의 일부 악덕 고용주들은 재한 중국동포들을 멸시, 모욕하면서 마구 부려먹는 사례들을 렬거하면서 한국기업인들에게 재한 중국로무일군들의 인권을 존중하여 줄 것을 호소하였습니다. 이 간담회의 현장록화가 2009년 음력설 이튿날 저녁 10시에 KBS-TV-1에서 방영되여 온 지구촌에 전파되였고 이로 하여 한국사회의 중시를 일으키게 되었으며  중국동포들의 많은 절찬을 받았습니다.   이렇게 한국에 체류하는 기간 재한 중국동포들의 삶의 현장을 찾아다니면서 그들의 실생활을 조사하고 한국과 재한 중국동포단체에서 공동 주최한 여러 가지 행사에 참석하면서 한국사회와 재한 중국조선족사회에 대해 많이 알게 되였습니다.   한국인들이 중국동포들에 대하여 눈높이를 아래로 하는데는 중국동포들 자신에게도 찾아 봐야 할 부족점이 없는 것은 아니였습니다. 극 소수의 개별적인 사람들이 한국의 법률과 제도를 어기고 술을 마시고 거리를 쓸고 다니면서 주정을 하거나 싸움질을 하고 불법 퇴페업소를 꾸리거나 거기에 드나들고 위생을 잘 지키지 않고 교통질서를 잘 지키지 않는 등등 문제들이 존재하여 미꾸라지 한마리가 개울물을 다 흐린다고 재한 중국조선족들의 이미지를 크게 손상시켰습니다. 하여 저는 "재한 중국조선족들 자각적으로 준법의식을 높이자!", "아름다운 동포사회의 이미지를 가꾸자" 등 칼럼을 써 재한 중국조선족들이 즐겨 보는 한국의 신문에 발표하여 재한 중국조선족들이 자각적으로 한국의 법률과 제도를 준수하고 열심히 일하면서 한국사회와 동포사회가 화합, 공존의 사회를 만들기에 노력할 것을 호소하였습니다. (9); 제2권은 총 465페지 51편의 수기들로 묶어진 생활수기집이라는데요. 퇴직후 부인과 함께 국내외 여러 나라와 지역들을 돌며 유람중 써낸 기행문들과 생활수기라면서요? 즐겁고 풍요로운 삶속에서 걷어낸 풍작이네요? 답: 예, 저는 퇴직후 안해와 함께 중국에서는 상해, 항주, 남경, 북경, 심양, 청도, 대만, 향항, 오문, 태산, 집안고구려유적지, 동녕요새 등 곳을 다니면서 유람하였고 국제 유람으로는 한국에 체류하면서 제주도, 정선, 월미도, 진해, 장봉도 전라남도 화순군에 있는 저의 옛조상의 사당 등 곳을 유람하고 조선의 평양, 금강산, 개성, 판문점을 유람하였으며 동남아의  타이, 싱가포르, 말레시아 그리고 서유럽의 이딸리아, 반띠까노, 오지리, 독일, 스위스, 불란서 등 나라를 유람하고 모두 려행수기를 써서 길림신문, 연변일보, 송화강잡지 등에 련재로 발표하였습니다 (10); 이외에 생활수기도 여러편 썼다고 하던데 거기에서 가장 인상깊은 생활수기가 있다면은요? 답: 예, 이외에 생활수기도 24편을 썻는데 그 가운데서 가장 인상깊게 쓴 생활수기는 《KBS와 함께하는 송년의 밤》이라고 생각됩니다. 저는 한국사회를 료해하고 재한 중국동포들의 삶의 현장을 료해하고 한국정부의 중국동포들에 대한 관심과 배려, 중국동포들이 한국의 경제건설에 대한 기여, 한국과 재한 중국동포사회의 화합과 공존, 모순과 갈등, 이런 모순과 갈등을 어떻게 풀어나갈 것인가? 하는것을 료해를 하고 이런것을 칼럼을 써서 한국의 언론매체에 발표하여 한국사회에서 중국동포들에 대한 인식을 바로 잡고 재한 중국근로자들의 인권을 보장하여 줄 것을 호소하였는데 이것이 한국 KBS방송사의 인정을 받아 《KBS-1 TV》와 《중국동포타운신문사》가 공동 주최로 조직한 "한국기업인과 재한 중국동포 간담회"와 《KBS 송년의 밤》프로에 초대되여 제가 중국동포들을 대변하여 말한 것이 전파를 타고 그 록화영상이  지구촌에 곳곳에 펴졌고 중국과 한국에 있는 중국조선족들에게서 많은 절찬을 받은 것을 소재로 쓴 것이여서 가장 인상 깊은 수기라고 할 수있습니다. (11); 우리민족사회에 대한 책임감과 사명감이 있기에 이런 보귀한 글들을 펴내지 않았을가 생각합니다. 지금도 여전히 조선족민족력사문화에 관심을 갖고 “중국조선족력사 동호회”회원으로써 항일전적지 답사에 참가하여 민족의 력사발굴에 한몫 기여하는건 물론 자신의 인맥과 실력으로 이 땅을 가꾸어온 우리 조선족 명인들을 소개하는데 동조해오셨다지요? 답: 예, 2015년 항일전쟁승리 70주년을 맞으면서 “중국조선족력사동 호회” 성원들이 대전자 항일전적지, 소사하항일전적지, 내두산 항일밀영유적지, 어랑촌 13용사전적지, 공도진렬사기념비, 장암동참사유적지를 답사하고 《중국조선족력사 동호회》성원들이 연변아동문학학회와 함께 흑룡강 동녕현에 있는 〈동녕요새〉를 탐방하였으며 이외 15만 탈출사건 력사유적지, 훈춘 대황구항일유격근거지답사  처창즈항일유격 근거지, 소왕청항일전적지, 진한장렬사 릉원 등 곳을 답사 하고 〈동녕요새〉 탐방 기행문은 이미 2016년도에 《송화강》잡지에 발표하였고 《중국조선족력사동호회》에서 답사기를 책으로  편찬하는데 다른 답사기도 다 써서 이미 협회에 교부하였습니다. 그리고 장춘텔레비죤방송국에서 비물질문화유산《중국조선족 명인기록편》 찍을때 주정협의 추천으로 촬영팀을 안내하여  전국로동모법이며 농민 벼재배전문가인 최죽송, 전국로동모범 김시룡, 전국로동모범 우편배달원 리호천, 전국3.8붉은기수 리옥금, 전국민병선진공작자 리종률, 연변사과배 품종을 백육해 낸 최창호, 조선족의 우수한 교육자 연변대학 초대 부교장 림민호, 중국조선족 음학사에서 정률성에 이어 공로가 큰 허세록 등 8명의 기록편을 찍었고 제가 쓴 전국로동모범 리호천사적이 《중국조선족백년실록》에 수록되였습니다. (12): 우리민족사회를 위해 앞으로 해야 할 일이 태산같아 일분일초가 아까울 정도로 분주히 보내신다면서요? 앞으로 타산에 대해 이야기 주시렵니까? 답: 예,  이미 써놓은 글들을 정리하면 또 책이 한권 거의 되고 앞으로도 제발로 걸어다니고 저의 사유로 글을 쓸수 있을 때까지 계속해 《력사동호회》를 따라 력사답사를 하고 중국조선족사회에 대해 많은 유리한 일을 하고 그것을 글로 정리하여 방송, 신문, 잡지에 발표하고 그것들을 묶어 책으로 출판하려 합니다. **********************************************************************************결속어;  략 …     ………… 멋진 필봉과 취미생활로 제2의 인생을 멋지게 장식해가고 있는 주청룡선생님의 만년에 건강하고 행복하시기를 기원드리면서 오늘 프로 여기에서 이만 접겠습니다.      이 시간 책임편집에 강순선이였습니다.  
100    연변인민방송 <행복한 세상 정다운 목소리> 댓글:  조회:3610  추천:0  2020-06-15
                                      방송일시: 2020년 6월 3일                                          PD /기획 / 사회: 황설화                                          출연: 주청룡                                          제작: 손귀옥   --- 개 시 곡 ---   안녕하십니까? 여러분들의 생활에 행복과 활력, 재미나는 정보를 제공해드리는 프로담당 황설화입니다. 국내 코로나사태는 이미 상당히 좋아지고 있지만 국외 상황은 락관적이지 못합니다. 올해에 해외려행을 계획한 분들은 계획들이 모두 수포로 돌아갔는데요, 사실 장시간의 비행기를 타고 적지 않은 돈을 들여서 가야 하는 해외여행, 한번 떠나려면 쉽지 않습니다. 오랜 시간을 계획하고 준비한 해외려행인데 올해는 물론, 래년도 사태가 어떻게 될지 모르는 상황에서 려행을 즐기는 분들한테는 참 아쉬운 일이죠~ 코로나 사태로 려행을 못가서 마음이 근질근질한 여러분들을 위해 오늘의 , 코너에서는 유럽려행기를 준비했습니다. 근 두주간 유럽국가인 이딸리아, 오스트리아, 프랑스,독일,스위스 등 나라를 려행한 분을 모시고 문화와 력사가 어우러져있는 유럽려행의 재미나는 이야기들을 들어볼가요?   --- 캠페인 곡 --- 연변작가협회 회원이시고 길림신문사 특약기자이신 주청룡 선생님께서 방송실에 나와계십니다. 네, 주선생님, 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 1. 려행을 좋아하는 분들이라면 누구나 꿈꾸는 려행지가 유럽입니다. 특히 예술과 문화에 관심이 많은 분들은 꼭 한번쯤은 유럽에 가보고 싶어하는데요, 주선생님께서 유럽려행을 선택한 리유도 있나요? 유럽려행의 첫 나라가 이딸리아라고 들었는데요, 장시간의 비행시간은 괜찮았는지? 그리고 처음으로 유럽이라는 지역에 도착했을때의 느낌이 어땠는지 참 궁금하네요. 예, 저는 려행을 즐기는 편이라 정령퇴직을 하고 마누라와 같이 국내 여러곳을 려행하고 한국, 조선, 대만 향항, 오문 타이, 싱가포를 말레이시아 등 나라와 지구도 려행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2018년에 부부 동반으로 서유럽려행을 하게 되여습니다. 장거리려행에서 제일 바쁜 것이 비행기를 타는 것이지요. 12일 북경시간으로 새벽 2시반에 비행기가 북경수도공항에서 리륙하여 이딸리아 북부도시 밀라노를 향해 떠났는데 장장 10시간을 날아 로마시간으로 5시반에 밀라노에 도착하였는데 북경시간으로는 12시 반이였으므로 이미 중국은 오후에 들어섰는데 미란은 아직 먼동도 트지않은 새벽이였습니다. 비행기가 해뜨는 방향을 등지고 날다니 장장10시간 계속 밤으로 날았습니다. 장밤 10시간 비행기에 앉아 간다는 것이 쉽지 않지요, 몸도 자유로이 움직일 수 없기에 어떻게 말하면 10시간 걸상에 묶이여 가는 거나 다름 없지요.  날이 밝자 우리는 아침식사를 간단히 하고 뻐스를 타고 밀라노시내를 돌면서 여러 곳을 유람하였는데 이때의 감상이 그전에 국내의 여러 곳과 아세아의 여러개 나라와 지구를 유람하였는데 언제 기회있으면 유럽려행을 하였으면 하였는데 이번에 정말 직접 유럽땅을 디디고 서유럽의 여러개 나라을 돌게 되였구나 하는 생각에 마음상으로 정말 흐뭇하였습니다 2. 사실 패션에 관심이 많은 분들은 이딸리아 밀라노에 대한 관심이 뜨겁습니다. 밀라노는 이딸리아의 경제와 공업의 중심도시일뿐만 아니라 손꼽히는 세계적인 패션도시인데요, 매년마다 수많은 사치품 브랜드들의 모델상품쇼가 열리는 곳이기도 합니다. 이러한 멋의 도시인 이딸리아 밀라노에 대한 인상은 어땠나요? 예, 밀라노는 이딸리아 롬바르디아 주의 주도인데  중국을 말하면 한개 성소재지에 해당하는 도시이지요. 밀라노는 이딸리아 최대의 산업 도시이자 패션과 디자인의 중심지라고 합니다. 밀라노패션위크는 뉴욕 패션 위크, 런던 패션 위크, 파리 패션 위크와 함께 "4대 패션 위크" 중 하나라고 합니다. 우리말에 딱 여기에 해당한 말이 없어 그러는데 패션 위크란 디자이너(设计师)들이 작품을 발표하는 패션쇼(流行服装表演)가 집중적으로 열리는 주간을 말하는 것으로서 밀라노에서는 1년에 두 번 열리는데 가을/겨울 행사는 2월이나 3월 중에, 봄/여름 행사는 9월이나 10월 중에 열린다고 합니다. 그리고 밀라노에는 세계최고 디자이너들의 본점이 진을 치고 있었는데  이 거리에서는 마주오는 사람들은 모두 복장모델 같다고 할 정도로 패션의 거리답게 모두 옷 매무새에도 세련미가 가득하였습니다. 3. 제가 가장 좋아하는 영화중 하나가 일본의 미야자키 하야오 영화감독의 애니메이션 인데요, 용감과 사랑, 배려를 주제로 하는 이 영화의 천공의 성은 이딸리아의 치비타로부터 령감을 찾아 구상한 영화입니다. 치비타는 현재 애니메이션의 흥행으로 관광명소가 되였는데요, 실제로 보면 천공의 성처럼 몽환적인 느낌이 있는지 궁금하네요. 저도 꼭 가보고 싶은 곳이거든요. 예, 천공의 성 치비타(Civita)는 이딸리아 라치오주에 위치한 작은 진인 바뇨레조(白露里治奥)에서 동떨어져 있는 작은 산꼭대기에 자리잡은 고대의 작은 마을입니다. 이 천공의 성은 몇백년간 황페한 유령도시로 불리우다가 1986년 일본의 미야자키 하야오 영화감독이 그림영화 〈천공의 성 라퓨타〉를 찍을 때 이 천공의 성으로부터 령감을 찾았다고 하여 이 작은 마을이 다시 사람들의 주의를 불러 잃으키면서 지금은 관광명소로 되였다고 합니다. 이 마을은 사면이 깍아지르듯 한 산꼭대기에 집들이 촘촘히 들어 앉아 있었는데 지금 보존되여 있는 집들은 2~3층으로 되여 있었으며 대부분 중세기에 지은 집들이라고 합니다. 이 마을과 바뇨레조 진과의 련계는70m 높이에 약 300 m길이의 다리로 되였는데 다리가 좁고 중량감당제한으로 하여 큰 차는 다릴 수 없지만 승용차는 다니고 있었습니다. 우리가 이 공중도시를 건너가기 전에 구름이 이 도시 아래에서 흐르고 있어 이 도시가 마치 신기루마냥 구름우에 떠 있는것 같았습니다. 우리가 다리를 건너면서 사방을 구경하고 사진도 찍으면서 20~30분정도 걸어 이 공중도시에 올랐을 때에는 산아래에 약간한  구름이 흐르고 있었는데 마치 하늘나라에서 천하세상을 내려다 보는 듯 한 감이였습니다. 위챗에서나 텔레비죤에서 아츨한 절벽우에 집들을 지어놓은 것을 여러번 봤는데 이곳에 와서 직접 제눈으로 그러한 그림같은 것들을 보니 유람객들은 너나없이 “야! 경관이다.” “야! 멋있다.” “야! 정말 하늘공중에 떠있는 도시구나!”라는 감탄사가 터져나오면서 서로서로 기념촬영에 여념이 없었다. 4. 섹스피어의 명작 은 모르는 분들이 거의 없는데요, 그들의 절절한 사랑이야기는 전 세계인들을 감동시켰죠. 명작속 줄리엣의 옛집이 이딸리아 베로나에 있는데요, 거기도 가보셨나요? 예, 베로나에 가서 다른 유람을 마치고 줄리엣의 옛집으로 갔습니다. 줄리엣은 이딸리아 베로나의 한 부유가정에서 태여났으며 영국의 극작가이며 시인인 섹스피어의 명작 ㅡ 《로메오와 줄리엣》희곡 중의 녀 주인공 인물입니다. 섹스피어가 1594년에 쓴 희곡 ㅡ《로메오와 줄리엣》은 서로 적대적인 두 가문에 대한 이딸리아 전설을 기초로 하여 극본을 썼다고 합니다.  줄리엣의 옛집은 13세기에 지은 오랜 건축물이였습니다. 아치형의 굴처럼 생긴 통로(门洞)으로 들어 서면 2층으로 된 줄리엣의 옛집이 있습니다.  줄리엣의 옛집에서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은 로메오와 줄리엣이 만남을 약속한 베란다입니다. 당년에 줄리엣은 이 베란다에서 오래동안 서 있었고 로메오는 그 아래에서 줄리엣에게 사랑을 고백하였으며 베란다로 올라가서 절세미인과의 사랑이 시작되였다고 합니다. 우리가 갔을 때에 그 베란다 아래와 붉은 벽에 글을 써놓은 종이장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었습니다. 외국어를 모르른 나로서는 너무도 이상하여 가이드와 물어보니 젊은 유람객들이 로메오와 줄리엣의 사랑처럼 자기들의 애정과 충성의 마음을 사랑하는 련인 혹은 안해에게 전달하는 내용을 담아서 써 붙인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더욱 많은 것은 마음속에 가장 완미하고 사랑하는 사람 ㅡ 줄리엣에게 보내는 사랑의 편지라고 합니다. 당지 정부에서는 날로 늘어나는 편지가 전반 벽에 덧 붙는것을 피면하기 위해 “줄리엣구락부”란 조직을 내와 세계 각국에서  사랑의 편지를 써 보내 온 사람들에게 줄리엣의 회답편지를 받도록 지원자들이 전문 줄리엣을 대리하여 회답편지를 써 보낸다고 합니다. 해마다 련인절이면 “사랑하는 줄리엣"이란 가장 우수한 사랑의 편지 징집활동도 벌리는데 그 영향력이 매우 넓다고 합니다. 줄리엣 옛집 정원에는20세기에 제작된 줄리엣의 전신 동상이 있는데 관광객들이 조각상의 오른쪽 가슴을 어루만지면 사랑에 행운이 따른다는 관습 때문에 그녀의 오른쪽 가슴을 너무 어루만지여 반들반들 빛나고 있었습니다. 유람객들은 너나없이 모두 줄을 서서 기다리여 줄리엣의 동상옆에 서서 기념사진을 남기였는데 우리도 줄을 서서 한참 기라려서야 사진을 찍을 수 있었습니다.  5. 오스트리아는 인구가 천만명이 안되는 작은 유럽의 나라이지만 고도로 발달한 나라중 하나로 OECD 창시나라중의 하나입니다. 특히 수도 윈은 음악의 성지인데요, 이딸리아와 달리 오스트리아에 머문 시간은 길지 않았는데요, 오스트리아란 나라에 대한 인상은 어땠나요?  예, 나흘동안 이딸리아의 유람을 마치고 16일 아침 오스트리아로 떠나 뻐스가 알프스산맥을 따라 달렸으며 오스트리아경내 들어섰는데 국계를 지날 때에 세관도 없었거니와 차량과 사람에 대한 아무런 통관검사도 없이 차는 계속 달리였습니다. 가이드가 길옆의 패쪽을 가르키며 저것이 바로 국계를 표시하는 패쪽이라고 하였습니다. 마치 연길과 룡정사이의 연룡도로를 달릴 때에 연길계(延吉界), 룡정계(龙井界)표시한 것처럼 여기에서도 그저 영어로 이딸리아계, 오지리계라고 표시하였을 뿐 아무런 구속이 없이 차는 마음대로 달리였습니다. 가이드의 말에 의하면 유럽련합내에서는 국경지대에 세관도 없고 차나 사람이나 아무런 검사도 없이 마음대로 국경을 넘나든다고 하였습니다. 오스트리아는 중앙유럽 알프스산맥에 있는 내륙국이며 면적은 약 84,000㎢이고, 인구는 천만명도 안되는 약 875만명밖에 안된다고 합니다. 그렇지만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국가 중 하나로서 시민을 위해 수준 높은 복지를 하는 나라이며 수도  윈은 수년 련속 세계에서 가장 살기 좋은 도시로 선정되였다고 합니다. 오스트리아는 1955년 유엔회원국이 되였으며 1995년에는 유럽련합(EU)에 가입하였으며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의 창립국입니다. 우리는 오스트리아의 인스브루크로 갔는데 인스브루크는 오스트리아 서부 티롤주의 수부이며 오스트리아에서 다섯번 째로 큰 도시라고 합니다. 인구는 약 13만명 밖에 안되는 그리 크지 않은 도시이지만 알프스산의 풍경이 아름다운 곳으로 서유럽에서 가장 인기있는 겨울 스포츠 관광지라고 합니다. 1964, 1976년 동계 올림픽을 개최하였고 1984, 1988년 동계 국제 장애인 올림픽운동회가 2회 련속 개최되였으며 2012년에는 제 1회 동계 청소년 올림픽의 개최지로 선정되였습니다. 인스브루크는 바로 알프스산 밑에 있었습니다. 뻐스에서 내려서 알프스산을 바라보니 산에 구름이 꽉 껴 있었고 구름우로 신기루와 같이 산봉우리가 보였습니다. 인스브루크에서 우리는 황금지붕을 보러 갔습니다. 이 건물은1420년에 지은 건물인데 1500년, 당시 이곳에  거소를 두었던 오스트리아 황제 막시밀리안 1세는  바로 앞의 광장에서 진행되는 행사를 관람하기 위해 이 베란다가 만들어졌고 그 우에 황금지붕이 얹히게 되였다고 합니다. 이 지붕에는 황금으로 도금된2,738개의 동판기와가 엊혀있었습니다.  6. 독일이라고 하면 흔히 품질 좋은 자동차로 유명한 국가입니다. 벤츠, 보마, 폭스바겐, 아우디, 로스레스, 람보기니, 부가디 등 브랜드를 보유한 국가인데요, 독일에선 어떤 지역을 돌아보셨나요?     예, 이번 려행기간에 독일은 두곳으로 가게 되였는데 오스트리아에서 스위스로 갈 때에 독일의 퓌센에 들러 신 백조의 성과 구 백조의 성을 보았는데 신백조의 성은 바이에른 왕국의 국왕 루트비히 2세가 지은 성인데 루트비히 2세는 18세에 바이에른 왕국의 왕이 된지 2년 만에 프로이센 왕국과의 전쟁에서 패배하여 주권을 잃고 이름뿐인 왕으로 전락되였다고 합니다. 이러한 정세로 인한 압박감에 본래 심약한 성품이 더해져 몽상의 세계에 틀어박혀 신 백조의 성을 지어 유럽에서 가장 화려한 성으로 만들기로 했답니다. 산 우에 세워진  이 성은 가극 〈로엔그린〉에 나오는 백조의 전설을 토대로 했기 때문에 성 곳곳에 백조를 주제로 한 구조물이 있어 “백조의 성”이라고 합니다.  그는 해마다 여러 곳에 궁성 건축을 위해 약 150만 마르크를 사용했는데 빚이 눈덩이처럼 불어난 루트비히 2세는 국가 예산마저 랑비하게 되고 결국 반대자들에 의해 정신병자로 판정을 받고 강제적으로 퇴위당하고 말았습니다. 강제로 퇴위당한 후3일 만에 루트비히 2세는 호수에 빠져 익사했다고 합니다. 신 백조의 성은 1892년 완성되였고 결과적으로 그는 성의 완공을 보지 못하고 죽음을 맞이 했는데 죽을 때에 성이 관광지 따위로 전락하는 것을 원하지 않다고 자신이 죽으면 성을 허물어 버리라고 유언을 했다고 합니다. 당시에는 나라의 재정을 돌보지 않고 성을 짓는 데만 빠져서 ‘미친 왕’이라 불리우며 강제퇴위를 당하였고 그는 죽음으로 끝을 맺었지만 성은 허물어 지지 않고 그의 광기 덕분에 지금은 훌륭한 관광명소로 되였고 후에 사람들은 관광 수입만으로도 엄청난 혜택을 보고 있다고 합니다. 그다음으로는 구 백조의 성을 구경하였는데 이것은 루트비히 2세의 아버지인 막시밀리안 2세가 지은 것인데 루드비히 2세가 이곳에서 자랐는데 그는 이 성의 아름다움을 보면서 자신이 아버지보다 더 아름다운 성을 짓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성장하게 되였고 후날 왕이 된 후에 신 백조의 성을 지으면서 국고를 너무 랑비하여 결국은 강제퇴위를 당하고 자결까지 한 것이지요.  독일 퓌센에서는 이 두개의 성을 구경하고 다음 유럽려행을 마치고 귀국할 때에 독일에서 가장 큰 공항이 있는 독일 중서부도시 프랑크 푸르트로 갔습니다. 이 도시는 인구가 74만 7천명으로서 독일에서 5번째로 인구가 많은 도시라고 합니다. 독일의 행정 수도는 베를린이지만 경제 수도는 프랑크 푸르트라고 할 만큼 독일에서 경제적인 중심을 차지하고 유럽 련합에서 가장 부유한 도시 가운데 하나라고 합니다.    이 도시에서 해마다 여러가지 박람회가 많이 열리는데 특히 2년에 한번씩 열리는 자동차박람회가 유명하며 1485년에 시작된 력사가 깊은 세계 최대의 도서전인 프랑크 푸르트 국제도서전이 매년 10월 이 도시에서 열린다고 합니다.  그리고 문학을 하거나 문학에 관심이 있는 분들은 괴테라면 다 알고 있지요. 독일의 대문호 시인, 소설가, 극작인 괴테(1749~1832,)도 이 도시에서 태여나서 활동하였으며 괴테의 생가가 지금도 있었습니다. 우리는 이 도시에 와서 뢰머광장, 시청사 등 여러 곳을 참관하고 괴테생가도 참관했는데 4층에 20여 칸의 방으로 된 집으로서 2층 객실은 매우 넓었으며 화려하고 우아한 붉은 색의 비로도로 장식되였으며 궤테가 중국문화를 숭배하였기에 객실벽지에는 농후한 중국풍치가 가득차 있었습니다. 이래서 이 객식을 “북경”청이라고 부르고 있었습니다. 3층에는 궤테의 만년의 초상화가 걸려있었는데 그 전에 그저 책에서 괴테에 대한 이야기를 봤지 그의 인물형상이 어떻게 생겼는지 몰랄었는데 이 집에서 그의 초상화를 보니 아주 영준하게 생긴 미남이였습니다.      7. 우리 나라에 희말라야산맥이 있다면 스위스에는 알프스산맥이 있습니다. 설경 또한 황홀하게 이쁜데요, 알프스산맥의 필라투스산은 어땠나요?   17일 우리는 스위스에 가서 설경을 구경하려고 필라투스산으로 갔는데  차에서 내리니 산기슭까지 구름이 꽉 내리드리우고 보슬비까지 오면서 산이 올리다 보이지 않았습니다. 매우 을씨년스러운 날씨였다. 우리는 모두 “이렇게 구름이 꽉 끼고야 어떻게 설산을 구경할 수 있는가? 아세아의 동쪽, 중국의 가장 동쪽 끝에서 구라파의 서쪽 나라 스위스에 와서 그렇게 바라던 설산경관을 구경할수 없으니 정말 재수없다. 하필이면 왜 오늘 날씨가 이런가?’”라며 실망의 소리로 한탄하니 가이드는 “그래도 올라가 보자. 싼꼭대기에 올라가면 혹시 설산을 볼수도 있다.”고 우리를 위안하는 것이였다. 우리는 가이드의 안내로 삭도를 타고 산꼭대기로 올라가는데 올라갈수록 구름은 떠욱 짙어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산꼭대기에 거의 오를 무렵 아마 8/10쯤 올랐을가 할때 삭도가 구름층을 뚫고 오르면서 푸른 하늘에서 해님이 우리를 반겨 방긋 웃으면서 눈부신 해살를 내리 뿜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너무나도 기뻐 모두 일제히 “야!” 하고 웨치였다 마치 비행기가 구름층을 뚫고 오르는 것 같았다. 아래를 내려다보니 새하얀 구름바다가 우리의 발밑에 있었는데 비행기에서 구름바다를 내려다 보는 것 같았다. 산꼭대기에 다 올라 삭도에서 내리니 이곳은 해발 2000메터 좀 넘는 산이라 눈이 없었는데 저 멀리 사방에 모두 이보다 더 높은 수백개의 설산봉우리 보이였는데 그야말로 가관이였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발밑은 새하얀 구름바다였는데 드문드문 이름모를 커다란 산새들이 구름바다우로 날아예고 있었는데 마치 바다에서 날아예는 갈매기를 방불케 하였습니다.  8. 스위스에서 기차려행도 하셨는데 기차려행도 응근이 재미있는 려행으로 려행애호자들의 로망입니다. 스위스에서의 기차려행은 어떠했는지요? 우리나라의 기차와 다른 점이 무엇인지 궁금하네요. 예, 18일 오전 우리는 스위스의 루체룬에서 다른 도시 인터라켄으로 가면서 기차려행을 하게 되였습니다. 대합실로 들어 가 걸상에 앉았 기차를 기다리고 있는데 희귀한 일도 있었습니다. 아니 글쎄 참새들이 옛날 농촌에서 집안에 둥지를 튼 제비들처럼 집안에서 날아 다니다가도 우리가 앉은 걸상밑으로도 아무런 경계심도 없이 퐁퐁 뛰여다니면서 왔가갔다 하지 않겠습니까? 모양새는 우리 지방의 참새와 조금도 다른 점이 없었지만 사람들과의 경계심은 우리 지방의 참새들과 완전히 달랐다. 우리 지방의 참새들은 사람들의 곁으로 오지 않지요. 사람들이 가까이 가면 포르롱 하며 날아나면서 사람과의 경계심은 대단하지요.  그러나 이곳의 참새들이 사람과 아무런 경계심도 없이 집비둘기처럼 사람의 주위를 뱅뱅 돈다는 것은 사람들의 동물보호의식에 따른 결과라고 밖에 볼수 없다고 생각되였습니다.  기차에 올보니 중국의 기차는 모두 가운데 인행도이고 한쪽에 3인석, 다른 한쪽에 2인석으로 된 한줄에 5인석 표준궤도의 차였는데 이번에 스위스에서 탄 기차는 인행도 량켠이 다 2인석인 한줄에 4인석 좁은 궤도의 차였습니다. 밖을 내다보니 기차길도 좁아 보이였습니다. 기차는 루체른호(卢塞恩湖)연안을 따라 달렸는데 거울같이 맑은 루체른호와 호수 량안의 아름다운 경치를 볼수 있었습니다. 호수에는 울긋불긋 단풍으로 물든 산과 산봉우리에 싸인 하얀눈이 거울같은 호수에 빗겨 아래우가 서로 대칭을 이루면서 유람객들의 눈과 마음을 호수로 끌어 들였습니다. 우리가 탄 붉은 색 기차도 호수에 빗겨 마치 기차가 호수 우로 달리는 듯 하였다. 거울같이 맑은 호수에 빗긴 흰눈에 덮인 산봉우리들, 호수에 빗긴 호수량안의 다름다운경치, 거기에 농촌마을과 풀밭에서 여유롭게 풀을 뜻고 있는 소떼들, 그야말로 아름다운 수채화였습니다. 9. 스위스 하면 또 시계를 뺴놓을수 없죠. 혹시 시계는 구매하셨나요? 예, 인터라켄에 도착하여 우리의 인솔자는 우리를 시계상점으로 안내하면서 시계를 사려면 여기서 사라면서 이곳은 다른 곳보다 시계종류가 많고 값도 싸다는 것이였습니다. 시계상점에 들어가 보니 확실히 시계종류가 다양하고 환률은 유러와 인민페가 1:8로서 값은 인민페로 몇백원, 몇천원, 몇만원, 지어 값이 제일 비싼것은 인민페로 250만원에 가는 것도 있었습니다. 우리 부부는 하나씩 사고 아들과 미래의  며느리 될 사람의 것까지 4개를 샀는데 값은 인민페로 1,500원에서 3,500원 사이였습니다. 어리때부터 스위스는 시계왕국이고 스위스의 시계가 세계에서 최고라는 말을 많이 들어왔던지라 시계를 사서 손목에 차고보니 아주 흐뭇한 마음이였습니다. 그러나 또 달리 생각해보면 중국의 100원짜리 시계가 10시를 가리킬 때 스위스의 몇 천원에 달하는 시계도 10시를 가리키지 그 이상 더 똑똑하게 시간을  알릴 수는 없었습니다. 그저 허영심이랄가? 긍지감이랄가? 가부간 스위스 시계를 찬것으로 하여 기분이 흐뭇한 것만은 확실하였습니다. 10. 빠리에는 유명한 향수박물관도 있는데요, 녀성들이 가장 좋아하는 관광지이죠. 향수박물관은 어땠는지 참 궁금하네요. 향수박물관은 5,000년에 이르는 향수의 력사를 보여주기 위해 프라고나르회사가 1983년 설립하였는데 박물관에 소장된 것이 5만여 건에 달한다고 합니다. 향수박물관은 주로 력사구와 수장품구 두 구역으로 나누는데 향수를 비롯해 향수병, 향수 저장 용기, 제조도구, 화장품세트 등이 다양하게 전시되여 있었으며 동서양의 각 시대별 향수와 화장품 종류들도  전시되여 있었습니다. 각 시대에 만들어진 향수병은 당시의 류행을 반영한 것이여서 설계와 류행의 변화도 알아 볼 수 있었으며 향수 추출을 하는 증류기 등이 과거부터 현재까지 각 시대별로 전시되여 있어 향수의 제조와 포장 방법이 발달해온 력사를 알볼 수 있었습니다. 현대식 향수 제조방법도 제조공정 전체를 실제 설비 그대로 전시해 놓아 쉽게 리해할 수 있었으며 관람객들에게 향기를 맡는 법 등 향수에 대한 지식을 설명해 주었으며 향수 종류별로 냄새를 맡아보는 항목도 있었는데 젊은이들, 특히는 젊은 녀성들은 냄새를 맡아보고 여러가지 향수에 대한 이런 저런 평가를 하였지만 나로서는 남들을 따라 냄새는 맡아보았지만 맡아 본다더라고 맡았지 좋다 나쁘다 평가는 할 수 없었습니다. 박물관 안에는 프라고나르 회사의 화장품상점이 있어 유람객들은 그 자리에서 공장가격으로 마음에 드는 그 회사의 그라스화장품공장에서 생산한 여러가지 화장품을 살 수 있었습니다. 우리 일행가운데는 세쌍의 젊은 부부외에 젊은 녀성이 여럿이 있었는데 그들은 모두 중국에서 사는 것보다 질도 많이 좋거니와 가격도 중국에서 사기보다 많이 싸다며 자기네도 쓰고 돌아가서 선물로 주겠다며 여러가지 화장품들을 쌌는데 저마다 한 가방씩은 되게 사는 것 같았습니다.    11. 주선생님께선 근 두주일동안 유럽 여러 나라들을 려행하였는데요, 사실 문화가 전혀 다른 지역을 돌면서 가장 힘든 점은 음식이 아닌가 싶습니다. 저는 려행을 떠날 때 꼭 고추장을 갖고 가거든요. 외지음식을 며칠만 먹으면 김치와 고추장이 생각나요. 혹시 유럽려행시 음식은 입에 맞으셨나요? 환률차이로 가격도 꽤 나갈것 같은데요. 이딸리아의 피렌체에 갔을 때 우리 일행은 이딸리아에 와서 이딸리아의 대표적인 음식은 먹어 봐야지 하며 1인분에 인민페로 350원씩 하는 이딸리아의 대표적인 음식 소고기 스테이크, 우리말로 하면 소고기구이를 먹어보기로 했습니다. 소고기구이는 소고기 등심을 프라이팬(煎锅)에 구운 것인데 가이드의 말에 의하면 이딸리아의 사람들은 소고기구이를 할때 익은 정도를 기수로 말하지 우수로 말하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이딸리아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5분숙(5分熟),7분숙(7分熟)으로 해서 먹지 전숙(全熟)으로는 먹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5분숙은 피물이 뚝뚝 떨어지고 7분숙은 겉은 다 익고 내부는 조금 덜 익어 조금 붉으스레 하다고 합니다. 전숙으로 먹으면 질겨서 맛이 못하고7분숙으로 구워 먹으면 만만하다고 하였습니다. 우리 동양사람들은 고기를 다 익혀 먹는 습관이 있기에 피가 떨어지는 5분숙은 먹을 수 없는 만큼 7분숙으로 먹기로 하였습니다. 소고기구이는 두사람이 한 프라이팬으로 해서 한상에 4명씩 앉아 먹었는데 우리 부부는 심양에서 온 젊은 부부와 같이 한상에 마주 앉아 먹었습니다. 소고기 스테이크가 이딸리아의 대표적인 음식이라고 하지만 속이 채 익지 않아 붉으스레 한 것이 우리 부부의 입에는 맞지 않아 겨우1인분만 먹었습니다. 그러나 우리와 마주한 젊은 부부는 맛있게 잘 먹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1인분을 그들에게 주었더니 그들은 감사하다면 그것도 맛있게 다 먹었습니다. 음식문화도 동양과 서양이 이렇게 차이가 있는데 우리 늙은이들은 동양음식문화에 습관되여 한 끼니에 인민페 700원을 팔고도 그저 이딸리아의 대표적인 음식 소고기스테이크라는 것을 맛을 보았다 뿐이지 먹기는 맛없이 먹었지만 젊은이들은 맛있게 먹는 것을 봐서 서양음식문화를 인차 받아들이는 것 같았습니다.  이번에 유럽에 와서 가장 우리의 습관과 맞지 않은 것이 바로 음식문화였다. 아침식사는 반드시 주숙한 호텔의 뷔페(自助餐)를 먹게 되였는데 뷔페란 전부 여러가지 종류의 빵과 우유, 과일였습니다. 저는 집에서부터 우유와 빵은 먹지 않는 습관이므로 아침에 식당으로 들어 가면서부터 우유냄새에 코를 찡그리였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서양음식이 입에 맞지 않는다고 하면서도 별 타발이 없이 자기의 배는 채웠지만 70년간 내몸에 토장국냄새가 슴배이고 쌀밥에 토장국으로 내몸을 가꾸어 온 저로서는 입에 너무 맞지 않아 그저 굶지 않는다는 정도로 코를 찡그리며 억찌로 먹었습니다. 이번에 유럽에 가 보니 유럽에 가서 식당을 꾸리는 중국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우리의 인솔자도 중국인인지라 점심, 저녁이면 중국사람들이 꾸리는 식당으로 우리를 안내를 하였습니다. 중국사람들이 꾸리는 식당이라 점심, 저녁은 이밥에 여섯가지 채, 한가지 국(六菜一汤)이였기에 우리의 음식습관에 맞게 배불리 먹을 수 있었습니다. 만약 중국사람들이 꾸리는 식당이 없었더러만 10여 일 간 유럽려행을 어떻게 하였겠는가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12. 려행이란 낯선 곳에 가서 그 지역의 문화와 력사 그리고 그 지역 사람들의 삶을 느끼는 재밌는 일입니다. 보통은 처음 가는 곳이다보니 려행을 끝낼때 꼭 아쉬운 면들이 있던데요, 혹시 이번 유럽려행은 어땠나요? 예, 저는 어느 곳을 가나 그곳의 농업고찰을 하기 좋아 하는데 우리가 서유럽을 갔을 때 드문드문 옥수수가을을 하지 않은 것이 보였지만 이미 대부분의 작물들은 가을을 한 뒤여서 농업고찰을 하지 못한 것이 유감이였습니다. 이딸리아의 북부 미란에서부터 중부 로마까지 또 다시 중부로부터 북부에 이르기까지 포도재배를 하는 곳이 여러 곳이 보이기는 하였지만 뻐스에서 내다보면 그래도 잔디풀 같은 것이 온 전야를 덮었는데 제 생각에는 온 전야를 잔디로 덮을 수는 없다고 생각되여 저것이 바로 동맥(冬麦)이 아닌가 싶었습니다. 그리하여 우리의 인솔자(가이드를 겸함)와 물어 보니 그도 중국인이라 그것은 몰랐습니다. 운전수와 물어보려 해도 영어를 한마디도 모르니 방법이 없어서 가이드더러 운전수와 물어봐 달라고 하니 운전수도 모를 것이라고 하였다. 참으로 운전수가 몰를 수 없겠는데 하고 생각하면서도 가이드가 그렇게 말하니 유감스러울 뿐 별다른 방법이 없었습니다. 가이드도 중국인이라 어째든 당지의 가이드보다 제한성이 있다는 감이 들었다.   --- 맺 는 말 --- 네, 오늘은 주청룡 선생님을 모시고 유럽려행기를 들었는데요, 앞으로 코로나 사태가 지난후 이 나라들에 려행가려는 분들한테 조금나마 도움이 되셨길 바랍니다. 본 프로기획에 황설화, 록음제작에 손귀옥이였습니다. 오늘도 여러분들한테 힐링이 된 시간이였길 바라면서 다음주 이 시간에 더욱 힐링되는 내용으로 만나뵙겠습니다. 지금까지 함께 해주신 여러분, 감사합니다.
99    서유럽려행기[32. 마지막회] 댓글:  조회:3215  추천:0  2020-04-04
서유럽 려행기 [32. 마지막회] 5) 바로크건축(巴罗克建筑) 회화(绘画)적이고 극적인 복잡한 굴곡과 곡선의 움직임이 풍부하고 건축물의 안팎은 금빛의 눈부신 조각이나 그림으로 장식한 문예부흥시기  이후 16세기부터 18세기에 걸쳐 유럽에서 류행된 바로크건축(巴罗克建筑)이다. 례하면 바띠깐노시국의 성 베드로 광장(圣彼得广场)이다. 바로크건축(巴罗克建筑) 바띠깐노시국 특히 로마의 콜로세움은 서기 70년에 착공해 10년 뒤인 서기 80년에 준공되였는데 지금으로부터 거의 2,000년 전에 지은 건물이지만 4층으로 되여 있으며 80여 개의 아치문을 통해 5~6만 명의 관중들이 입장하는데 30분, 퇴장하는데 불과 15분밖에 걸리지 않게 설계되였다. 콜로세움은 각 층마다 각기 다른 양식으로 꾸며진 건축물로도 유명하다. 1층은 도리아 양식(多立克柱式, 도리스인들이 창시한 고대 그리스의 건축 양식. 기둥이 굵고 주추돌이 없으며 기둥머리 장식이 역원추 모양으로 간소하나 장중미가 있다), 2층은 이오니아 양식(爱奥尼柱式, 고대 그리스에서 발달한 건축 양식. 아테네 전성기 때에 이오니아지방에서 발생하여 1세기가량 성행하였는데 우아하고 경쾌한 것이 특징이다), 3층은 코린트 양식(柯林特风格, 기원전 6세기부터 기원전 5세기경 그리스의 코린트에서 발달한 건축 양식. 화려하고 섬세하며, 기둥머리에 아칸서스 잎을 조각한 것이 특징이다)의 기둥과 원형에 가까운 아치로 장식되여 있다.  서유럽의 건축을 보면 대부분 4 ~ 5층으로 되여 있었으며 10여일 동안 유럽의 크고 작은 도시를 돌아보면서 6층이상의 건물은 몇채 보지 못하였으며 혹시 엘리베이터가 있는 고층건물을 봤다면 모두 교외에서 한 두채씩 보이였다. 그리고 이딸리아에서 도시의 거리바닥은 전부 돌을 깔았으며 유럽에서 도시의 대중교통으로는 뻐스이고 무괴도 전차와 유괴도전차도 있었으며 그들의 특정된 도로 점유공간이 없이 뻐스와 무괴도 전차들이 유괴도전차 레루장을 마구 깔며서 달리고 있었다. 이딸리아에서 도시의 어떤 거리들을 보면 매우 좁았는데 기동차가 없던 시대에 지은 집들이여서 그런지 4,5층으로 된 층집사이에서 뚱뚱한 사람이 둘이서 나란히 걷기 바쁠 정도로 좁은 길도 있었다. 유럽의 도시건축들을 보면 특히 궁전이나 대성당 같은 건물들은 몇 십 년, 지어 몇 백 년을 걸쳐 지었으며 대부분 지은 지 몇 백 년, 지어는 천년넘는 집들이였는데 그래도 아주 견고하게 서 있었다. 나는 유럽의 이런 건축물들을 보면서 이곳에서는 한번 집을 지으면 몇 백 년 지어 천년도 넘게 사용하는데 왜 우리 고장에서는 지은지 50년도 못가고 20 ~ 30년 되는 집들을 허물고 그 자리에 또 새로운 집을 짓는지 의문스러웠다. 질량보증이 그렇게도 안 되는지? 전형적인 실례를 본다면 연길시내에 있던 청년호텔을 들수 있다. 외관으로 14층으로 된 그 집은 지은지 20년이 좀 지나 허물고 다시 그자리에 그보다 좀 높은 새로운 층집을 지었다. 낡은 층집을 허물고 그 자리에 새로운 층집을 지으니 새로운 층집값에는 낡은 층집값까지 포함되였으니 새로 지은 층집값이 올라가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집값이 올라가는 것은 둘째로 치고 건축물자재에 대한 자원랑비가 얼마이며 낡은 집을 허물었다면 거기에서 나오는 건축쓰레기는 얼마겠는가? 몇천년 가도 분해가 되지 않는 이런 건축쓰레기 처리도 얼마나 골치거리로 되는가? 우리도 유럽의 건축처럼 한번 지으면 몇백년 갈수 있게끔 지을 수 없을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6. 귀국비행기에서의 체험   프랑크푸르트국제비행장 비행기가 베를린 시간으로 22일 오후 7시반(북경시간으로23일 오전2시 반)에 리륙하였는데 북경에 도착은 북경시간으로 23일 정오 12시였다. 갈 때에는 해뜨는 방향을 등지고 날다니 북경에서 새벽 2시반에 리륙하여 10시간 계속 밤으로 날았지만 귀국 할때에는 비행기가 해뜨는 방향을 마주하여 날았으므로 유럽과 아시아의 경계인 우랄산맥을 넘어 아시아의 경내에 들어 서면서부터 날이 희붐히 밝아오면서 9시간 반의 비행로정에서 대부분 시간은 낮이였으므로 산과 전야, 하천과 호수 등 자연 풍경들을 다 볼수 있었으며 씨비리상공을 지날때에는 산들에 흰 눈이 덮여 있었다.   아세아와 유럽의 경계 우랄산맥 비행기가 날때에 매 승객들의 앞에 노트북의 모니터같은 스크린이 있어 영상으로 비행기가 날아야 할 시간과 거리, 비행기가 떠 있는 상공위치와 해발고도, 바깥기온, 비행시속변화, 이제 날아야 할 시간과 거리 등  수자적 정보가 다 나타났다. 비행기가 리륙할 때 보니 프랑크푸르트로부터 북경까지의 비행거리가 8,300㎞로 나타났으며 항선을 보면 약간 북으로 활등모양으로 호선을 그으며 날았다. 아마 직선거리로 날면 우랄산맥과 씨비리상공으로 날게 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영상으로 수자적 정보가 나타남으므로 하여 많은 궁금증도 풀어 주었을 뿐만아니라 이미전에 상식적으로 알고 있었던 것을 이번의 려행으로 하여 직접적 체험으로 알게 되였다. 례하면 비행시속이 1,000㎞ 좌우, 비행고도가 만메터 좌우된다는 것과 해발고도가 매 100m 올라감에 따라 기온이 0.6도씩 내려간다는 것을 비행기에서 나타나는 수치로부터 알수 있었다. 비행기가 10,000m 상공에 떴을 때 외부 기온이 -60℃로 나타났는데 그때 아침이였음으로 지상기온이 0℃좌우로 추정되는데 이렇게 계산하여 보면 해발고도가 매 100m 올라감에 따라 기온이 0.6도씩 내려간다는 것을 체험적으로 립증할 수 있었다. 12시가 되여 비행기가 수도 비행장에 착륙하였음으로 9시간 반 비행한 것으로 되다. 북경으로부터의 거리를 보면 독일의 프랑크푸르트가 이딸리아의 미란보다 더 먼데 비행시간은 반시간 앞당겼으니 올때의 비행기가 비행시속이 더 빨랐지 않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통관검사를 마치고 세관을 나와서 우리는 각자 제 곳으로 가게 되여 서로 갈라지게 되였는데 이번의 려행길에 12일이란 시간이 그리 길다고는 말할수 없지만 우리는 그 동안 모두 정이 들어 이후 서로 련락을 하려고 전화번호를 교환하면서 아쉬운 심정으로 《안녕! 안녕!》하면서 갈라졌다.     이번 려행의 전체 팀원  [전문 끝] 서유럽려행기 전문 2019년 연변일보에 32기로 련재
98    서유럽려행기[31] 댓글:  조회:3367  추천:0  2020-03-31
서유럽 려행기 (31)   3. 농업고찰을 못한 유감 나는 어느 곳을 가나 그곳의 농업고찰을 하기 좋아 하는데 우리가 서유럽을 갔을 때 드문드문 옥수수가을을 하지 않은 것이 보였지만 이미 대부분의 작물들은 이미 가을을 한 뒤여서 농업고찰을 하지 못한 것이 유감이였다. 이딸리아의 북동부 미란에서부터 중부 로마까지 또 다시 중부로부터 북부에 이르기까지 포도재배를 하는 곳이 여러곳이 보이기는 하였지만 뻐스에서 내다보면 그래도 잔디풀 같은 것이 온 전야를 덮었는데 나의 생각에는 저것이 바로 동맥(冬麦)이 아닌가 싶었다. 그리하여 우리의 인솔자(가이드를 겸함)와 물어 보니 그도 중국인이라 그것은 몰랐다. 운전수와 물어보려 해도 영어를 한마디도 모르니 방법이 없어서 가이드더러 운전수와 물어봐 달라고 하니 운전수도 모를 것이라고 하였다. 참으로 그럴 수 없겠는데. 그러나 가이드가 그렇게 말하니 유감스러울 뿐 별다른 방법이 없었다. 가이드도 중국인이라 어째든 당지의 가이드보다 제한성이 있다는 감이 들었다. 4. 서양음식문화 이딸리아의 피렌체에 갔을 때 우리 일행은 이딸리아에 와서 이딸리아의 대표적인 음식은 먹어 봐야지 하며 1인분에 인민페로 350원씩 하는 이딸리아의 대표적인 음식 소고기스테이크, 우리말로 하면 소고기구이를 먹어보기로 했다. 소고기구이는 소고기 등심을 프라이팬(煎锅)에 구운 것이라고 한다. 가이드의 말에 의하면 이딸리아의 사람들은 소고기구이를 할때 익은 정도를 기수로 말하지 우수로 말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이딸리아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5분숙(5分熟),7분숙(7分熟)으로 해서 먹지 전숙(全熟) 으로는 먹지 않는다고 하였다. 5분숙은 피물이 뚝뚝 떨어지고 7분숙은 겉은 다 익고 내부는 조금 덜 익어 조금 붉으스레 하다고 한다. 전숙으로 먹으면 질겨서 맛이 못하고7분숙으로 구워 먹으면 만만하다고 하였다. 우리 동양사람들은 고기를 다 익혀 먹는 습관이 있기에 피가 떨어지는 5분숙은 먹을 수 없는 만큼 7분숙으로 먹기로 하였다.   소고기구이   소고기구이는 두사람이 한 프라이팬으로 해서 한상에 4명씩 앉아 먹었는데 우리 부부는 심양에서 온 젊은 부부와 같이 한상에 마주 앉아 먹었다. 소고기스테이크가 이딸리아의 대표적인 음식이라고 하지만 속이 채 익지 않아 붉으스레 한 것이 우리 부부의 입에는 맞지 않아 겨우1인분만 먹었다. 그러나 우리와 마주한 젊은 부부는 맛있게 잘 먹었다. 하여 우리는1인분을 그들에게 주었더니 그들은 감사하다면 그것도 맛있게 다 먹었다. 음식문화도 동양과 서양이 이렇게 차이가 있는데 우리 늙은이들은 동양음식문화에 습관되여 한 끼니에 인민페 700원을 팔고도 그저 이딸리아의 대표적인 음식 소고기스테이크라는 것을 맛을 보았다 뿐이지 먹기는 맛없이 먹었지만 젊은이들은 맛있게 먹는 것을 봐서 서양음식문화를 인차 받아들이는 것 같았다.    이번에 유럽에 와서 가장 우리의 습관과 맞지 않은 것이 바로 음식문화였다. 아침식사는 반드시 주숙한 호텔의 뷔페(自助餐)를 먹게 되였는데 뷔페란 전부 여러가지 종류의 빵과 우유, 과일였다. 나는 집에서부터 우유와 빵은 먹지 않는 습관이므로 아침에 식당으로 들어 가면서부터 우유냄새에 코를 찡그리였다. 다른 사람들은 서양음식이 입에 맞지않는다고 하면서도 별 타발이 없이 자기의 배는 채웠지만 70년간 내몸에 토장국냄새가 슴배이고 쌀밥에 토장국으로 내몸을 가꾸어 온 나로서는 입에 너무 맞지않아 그저 굶지 않는다는 정도로 코를 찡그리며 억찌로 먹었다. 이번에 유럽에 가 보니 유럽에 가서 식당을 꾸리는 중국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우리의 인솔자도 중국인인지라 점심, 저녁이면 중국사람들이 꾸리는 식당으로 우리를 안내를 하였다. 중국사람들이 꾸리는 식당이라 점심, 저녁은 이밥에 여섯가지 채, 한가지 국(六菜一汤)이였기에 우리의 음식습관에 맞게 배불리 먹을 수 있었다. 만약 중국사람들이 꾸리는 식당이 없었더러만 10여 일 간 유럽려행을 어떻게 하였겠는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5. 유럽의 건축문화 밀라노에 도착하여 유럽의 땅을 밟으면서부터 유럽 건축이 우리 동방과 다르다는 감이 들었다. 특히 궁전, 대성당 같은 건축들을 보면 더욱 그러하였다. 1) 비잔틴 건축(拜占庭式建筑) 4세기경에 비잔티움(拜占庭, 기원전 7세기 메가라인麦加拉人 이 세운 식민 도시)을 중심으로 발달하여 내부는 모자이크나 대리석으로 화려하게 장식하고 큰 돔을 얹은 집중식 교회 건축이 특색인 비잔틴 건축(拜占庭式建筑)이다. 례하면 피사의 세례당이다.   비잔틴 건축(拜占庭式建筑) 피사의 세례당  2) 로마네스크건축 (罗马风建筑) 천정은 돔(圆屋顶)모양으로  하고 내부에 매우 둔중한 굵은 기둥들을 많이 세웠으며 벽체는 두껍게 하고 거기에 날개벽을 덧붙여 보강하였으며 창문은 좁고 길며 벽, 기둥, 아치 등에 벽화 또는 돋을새김으로 장식한 10~12세기의 로마네스크양식 건축 (罗马风建筑)이다. 례하면 피사의 대성당이다.   로마네스크양식(罗马风建筑)피사의 대성당   3) 고딕양식의 건축(哥特式建筑) 하늘 높이 치솟은 뾰족한 탑이거나 지붕, 돔모양의 반구형 천장이거나 지붕으로 된 중세 후기 서유럽에서 나타난 고딕양식의 건축(哥特式建筑)이다. 례하면 밀라노대성당이다.   고딕양식의 건축(哥特式建筑) 밀라노대성당 4) 베네치아건축 (威尼斯建筑) 정면에 요철((凹凸))이 없이 평탄하며 우미하고 경쾌한 양식으로 문예부흥시기에 지은 베네치아건축 (威尼斯建筑)이다. 례하면 베네치아의 산 마르코 대성당(圣马可大教堂)이다. 베네치아건축(威尼斯建筑) 베네치아의 산 마르코 대성당(圣马可大教堂) [다음 계속]  
97    서유럽려행기[30] 댓글:  조회:3346  추천:0  2020-03-27
서유럽 려행기 [30] 우리는 궤테생가를 다 참관하고 다시 뢰머광장으로 왔다. 뢰머광장에서 남쪽으로 조금만 걸으면 마인강(美因河)이므로 우리 일행은 마인강 구경을 나갔다. 마인강은 라인강(莱茵河)의 최대 지류로서 동쪽에서 서쪽으로  프랑크푸르트를 지나는 강이며 1천500톤 이상의 배가 항해하여 물자의 수송을 할수 있는 큰 강이다. 강변에 이르니 제일 먼저 보이는 것이 마인강에 가로 놓인 웅장한 아이젤너 다리(爱情桥)였는데 이 다리는 보행자 전용다리라고 한다. 특히 련인들이 즐겨 거니는 다리라고 하는데 아이젤너 다리를 한어로는 爱情桥라고 한다. 다리의 란간에는 빨간천으로 된 리본이 매여져 있는 사랑의 자물쇠가 조랑조랑 잠겨져 있었다. 가이드의 말에 의하면 이렇게 사랑의 자물쇠를 잠구어 놓으면 서로 갈라지지 않고 영원한 사랑이라고 한다. 다리우에는 노란 자물쇠를 파는 가게도 몇곳에 있었는데 사는 사람들의 요구에 따라 글자도 새겨 주었다. 우리 일행도 이 다리에 올라서 거닐면서 강 저쪽켠까지 갔다왔는데 젊은이들은  가게에서 노란 자물쇠를 사서 자기들의 이름을 새겨서 빨간 리본과 함께 애정다리에 잠궈 놓았다. 영원히 갈라지지 않고 백년해로 한다는 것이였다. 자물쇠를 잠궜다고 하여 모든 사람들이 다 꼭 그 념원대로 될 수가 있겠느냐마는 그들의 사랑의 념원만은 찬양할 바였다. 우리가 갔을 때에는 사랑의 자물쇠를 잠궈놓은 것이 그리 많지 않았지만 가이드의 말에 의하면 며칠 지나면 이 다리에 자물쇠가 가득 잠겨져 있다고 한다. 자물쇠가 너무 많이 달리면 해당부문에서도 이것을 제거 하는 것도 골치거리가 된다고 하는데 그 제거한 자물쇠를 페철로 팔아도 그것을 제거하는 일군들의 로동공가가 더 나올 것이라고 한다.   아이젤너 다리(爱心锁桥) 다음으로 눈에 크게 띄우는 것이 강 건너편에 높게 솟은 첨탑의 건물이였는데 가이드와 물어보니 드라이쾨니히교회라고 한다. 이번 려행에서 많은 성당을 참관 하였기에 일행 모두 그 교회를 가 볼 생각은 없었다.   마인강건너편 드라이쾨니히교회를 배경으로 강옆에는 산책로가 있었는데 조깅하는 사람들, 애완견을 데리고 나와 여유롭게 산책하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유원지 잔디밭의 벤치에 앉아 도란도란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도 있었으며 비둘기와 백조, 오리 등 여러가지 물새들도 강우를 날아예다가도 사람들의 곁에 와서 내리기도 하였으며 사람들이 먹이를 주면 쪼르르 달려와 쪼아 먹고 또 주기를 기다리는 새들도 있었다. 나는 어느 나라에 가나 그 나라의 상징적인 기념품을 사는 것을 잊지않고 있었기에 이곳에 와서도 상징적인 기념품을 사려고 돌아다니다가 둥근 도자기판에 프랑크푸르트의  징표로 되는  뢰머광장과 시청을 푸른하늘 흰구름을 배경으로 조각해 넣고 테두리를 노란색갈로 장식한 기념품이 마음에 들었다. 정말로  프랑크푸르트의 상징물로 될수 있다고 생각되여 그것을 샀다. 프랑크푸르트에서의 유람을 마치고 나니 오후 네시가 되였다. 이것으로 이번 서유럽의 려행은 끝이였다. 하여 우리는 귀국하려고 독일의 제1의 공항인 프랑크푸르트국제공항으로 갔다. 이번 려행에서 12일 아침 이딸리아의 미란공항에서부터 탄 이 뻐스를 22일 프랑크푸르트국제공항까지 10여 일동안 하루도 쉬지않고 혼자서 6 개 나라를 돌았었고 또 다시 이딸리아로 돌아가야 함으로 그 뻐스운전수도 우리를 위하여 많은 수고를 하였다고 생각되면서도 언어가 통하지 않으니 그저 손시늉으로 단 한마디 생큐(thank-you)하면서 손을 저어 감사의 뜻을 표할뿐이였다. 정말 영어를 모르는것이 안타까웠다. 그래도 우리의 인솔자가 우리를 대표하여 영어로 그 운전수에게 우리의 뜻을 전달하니 그 운전수는 우리에게 웃음을 지으면서 몇마디 말하였는데 인솔자가 안녕히 귀국하는 뜻이라고 하였다. 하여 우리는 그저 손을 저어서 석별의 정을 표하며 갈라지였다. 공항에 들어서서 우리의 인솔자는 이번 려행에서 유럽련합내의 모든 나라에서 우리들이 산 물건들을 면세수속을 하여 주었다.   프랑크푸르트국제공항청사   서유럽려행에서의 소감 이번 려행에서 여러 관광명소에 대한 소감은 이미 다 말하였기에 더 언급하지 않고 그외의 소감에 대해 몇가지 말하여 보려 한다. 1. 려행비용 2012년에 조선과 동남아의 몇개 나라와 지구(港澳新马泰), 2013년에 대만관광을 하였는데 관광비용이 경외관광(국제관광과 대만, 향항, 오문 포함)이 상대적으로 경내(중국대륙)관광보다 많이 눅었는데 이번의 서유럽려행도 연길로부터 서유럽까지 왕복 비행기로, 유럽에 가서 개인 쇼핑을 제외한 13일간의 모든 비용은 1인당 11,300원의 려행비용내에서 전부 해결되였으므로 상대적으로 국내려행보다 많이 싸다고 말할 수 있다. 그래서 나는 나의 친척, 친구들에게 같은 값이면 국내려행보다 국제려행을 할 것을 권장하였다. 2. 기후 우리 연변은 북위 42도로서 기후는 북반구의 중온대 습윤한 계절풍기후로서 봄에는 건조하고 바람이 많으며 여름에는 따뜻하고 덥고 비가 많으며 가을에는 시원하고 상쾌하며 비가 좀 내리며 겨울은 좀 길고 춥다. 나는 그전에 우리 연변보다 위도가 높은 곳은 다 연변보다 기온이 낮다고 생각했고 서유럽은 우리 연변보다 위도가 10도 좌우 높으므로 연변보다 기후가 많이 낮고 겨울이 연변보다 몹시 춥겠다고 생각하였는데 어느 책에서 영국 런던의 기온이 대서양 편서풍의 난류로 하여 서울보다 여름기온이 낮고 겨울 기온이 높으며 런던의 강수량은 서울보다 계절에 따른 변동이 작다는 글을 본 적이 있다. 그리하여 이번에 서유럽려행을 떠날 때 옷 준비를 위해  떠나기 며칠전부터 우리가 가려는 나라의 기후를 인터넷 검색을 하여 봤다. 검색을 하여 연변기후와 비교를 해보니 우리가 가려는 나라의 기후는 련속 며칠간 모두 연변보다 4~5도 높았다. 하여 떠날 때에 옷을 가을 옷으로 두텁게 입지 않았다. 정작 서유럽에 가보니 확실히 우리 연변보다 기후가 따뜻한 감을 느꼈다. 우리 연변은 10월 중순이 지나면 나무잎들이 다 떨어지고 앙상한 나무가지만 남아있는데 우리가 서유럽을 갔을 때 11월 중순인데도 한창의 단풍계절은 좀 지났지만 나무잎들이 많이 있었고 어떤 나무들은 단풍이 한창이였으며 이딸리아에서는 포도재배가 많았는데 포도밭을 새노랗게 물들였으며 동맥(冬麦)이라고 짐작되는 잔디같은 새파란 풀들이 온 전야를 뒤덮고 있어 그야말로 록색세계라는감이 들었다.   이딸리아의 포도재배       [다음 계속]
96    서유럽려행기[29] 댓글:  조회:3276  추천:0  2020-03-23
서유럽 려행기 [29] 시청사(市政厅) 광장 서쪽에 자리한 3동짜리 건물은 시청사로서 원래 귀족의 저택이였으며 15세기에 시의회가 사들인 것이다. 계단식으로 된 삼각 지붕이 특징이며 고상하고 우아한 멋이 있는 건물이며 가운데 건물을 뢰머라고 부른다. 이 건물은 1562년부터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즉위 축하연이 열린 장소로서 축하연이 열린 2층의 방을 ‘황제의 방’이라 부르고 이후 1792년까지 약 200여 년간 호화로운 축하연 장소로서 영광을 누렸다.       건물벽에는 독일 출신의 신성로마제국(독일의 오토 1세부터 프란츠 2세가 제위에서 물러날 때까지의 독일 제국의 정식 명칭)의 황제 52명의 초상화가 걸려 있어 당시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들을 차례로 알수 있었다.   프랑크푸르트 시청사 프랑크푸르트 대성당(法兰克福大教堂) 광장동쪽에는 또 프랑크푸르트 대성당이 있는데 이 성당은  프랑크푸르트에서 가장 큰 성당이다. 852년 완공되어 왕실 례배당 겸 주교구 (主教区)성당으로 사용되였으며 황제들의 대관식이 거행된 성당이기도 하다. 1562년부터 1792년까지 모두 열명의 황제들이 이곳에서 왕관을 머리에 썼다고 한다. 이곳에서 대관식을 마친 황제는 시청사 건물인 뢰머에서 축하연을 열었다고 한다. 성당 내부에는 보물관이 있어서 추기경과 사제들의 화려한 의상과 금으로 씌운 장식품들이 전시되여 있다. 웅장한 멋을 자랑하는 95m 높이의 첨탑 위에 올라가면 프랑크푸르트암마인 시내를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다. 괴테생가(居歌德故) 다음으로 우리는 프랑크푸르트 중심거리에 있는 괴테생가로 갔는데 뢰머광장에서 서북쪽으로 도보로 10분 거리였다. 고딕 양식으로 지어진 괴테생가는 4층으로서 20여 개의 방으로 되여 있었으며 괴테와 그의 가족의 삶의 흔적을 그대로 살리도록 전시 돼 있었으며 당시 중상류층의 생활상도 짐작하여 볼 수 있었다.    괴테생가 1층은 대청(大厅), 식당, 그리고 주방칸으로 되여 있었으며 대청에는 옷걸이, 프랑크푸르트식의 나무괴와 소형금고가 있었고 벽에는 괴테의 소년시기 초상화가 있었으며 창문밑에는 당년 괴테 어머니가 사용하던 재봉침이 있었다. 식당에는 당년에 사용되고 있던 바로크식의 원형의 식탁이 있었고 벽에는 거울이 걸려 있었으며 주방칸에는 주방용구들이 있었다. 2층은 객실과 음악실이였는데 객실은 매우 넓었으며 화려하고 우아한 붉은 색의 비로도로 장식되였으며 괴테가 중국문화를 숭배하였기에 객실벽지에는 농후한 중국풍치 가득차 있었다. 하여 이 객실을 “북경”청이라고 부르고 있었다. 당년에 괴테는 여기에서 독일과 유럽의 여러 나라에서 온 작가, 시인들과 흥미진진하게 이야기하였다고 한다. 음악청도 음악을 즐기는 괴테일가의 늘 모여 즐기는 곳으로서 여기에 오래된 피아노 한대가 놓여 있었고 벽은  괴테가족성원들의 초상화로 장식되여 있었다. 3층에는 괴테가 태여난 방이 있었는데1749년 8월 28일에 동쪽의 방에서 태여났다고 한다. 이 방에는 괴테의 만년의 초상이 걸려 있었다.   괴테의 만년의 초상 3층 복도에는 세계에서 가장 값 비싼 천문시계가 있고3층에는 아버지의 서재가 있고 3층에는 또 어머니의 단독 방도 있다. 3층에는 또 도서실과 화랑(画廊)이 있었는데 도서실에는 소장한 책이 2,000여 권이라고 한다. 화랑에서는 독일과 네덜란드 화가들의 수많은 우수한 작품들을 볼 수 있었다.    3층 도서실 ‘시인의 방’이라고 불리는 4층 왼쪽의 방은 괴테의 명작 과 가 탄생한 곳이라고 한다. 은 괴테가 26세 때 단 4주 만에 완성했으며 그는 이 방에서 다수의 작품을 집필했다고 한다. 방에는 생전의 괴테의 책상과 자필 원고가 놓여 있다. 4층에는 궤테의 사무실에는  예술품, 장식품, 친필원고들이 진렬되여 있었다. 이 집은 제2차 세계 대전 때 많이 파괴되였지만 전쟁이 끝난 후인 1951년 원래의 모습으로 재건해 놓았다고 한다. 다행히 내부 살림들은 전쟁전에 괴테를 사랑하는 독일인들이 안전한 곳으로 옮겨 보관하였다고 한다.  독일 문학의 거장이라고 불리는 괴테는 독일뿐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사랑받는 작가이다. 그는 황제의 고문관인 아버지와 프랑크푸르트 시장의 딸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나 부유한 환경에서 자랐다. 그가 문학의 길을 걷게 된 것도 독서를 좋아했던 아버지 한스의 영향이 컸다고 한다. 그는 8세부터 시를 짓기 시작하여 시와 희곡 등을 습작하면서 많은 작품을 탄생시켰는데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은 괴테 자신의 슬픈 사랑을 토대로 만들어진 것으로서 자신의 친구인 케슈트너의 약혼녀 샤르로테 부프를 짝사랑한 경험과 친구인 예루살렘이 유부녀에게 실연당해 자살한 사건을 소재로 하여 썼다고 한다.  그는 또 시인, 극작가, 문학가뿐만 아니라 바이마르궁전(魏玛行宫) 고문으로 활약한 정치가에 지질학, 광물학을 비롯한 자연과학 연구가로도 그 명성이 높았다. 당시 나폴레옹마저 괴테를 만난 후 그의 존재를 인정했다고 하니 얼마나 대단한 사람이였는가 하는것을 알수 있었다.
95    서유럽려행기[28] 댓글:  조회:3325  추천:0  2020-03-18
 서유럽 려행기 [28] 상공업중심지 메스로 가다 우리는 베르사유궁전 부근에서 점심을 먹고 오후 1시 반에 프랑스의 동북부에 있는 도시 메스로 향해 떠났는데 뻐스는 장장 5시간 반 330㎞를 달려 저녁 7시에 메스에 도착해서 주숙을 정했다. 메스(梅斯)는 프랑스 동북부 모젤주(摩泽尔州)에 있는 모젤 강(摩泽尔河)과 세유 강(塞耶河) 의 합류점에 위치한 도시로서 로렌(洛林)지방의 중심도시이며 독일, 룩셈부르크 국경과 가깝고 예로부터 여러 지방으로 통하는 교통로의 요지로 발전하였다. 인구는 124,500명(2005년 기준)이다.   메스(梅斯) 철, 석탄이 풍부한 이 지역은 독일과의 분쟁 대상이 되여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으로 1871년 독일에 넘어갔다. 제1차 세계대전 후1918년에 다시 프랑스로 양도되였고 제2차 세계대전 때 잠시 독일에 다시 점령당하기도 했다. 오래동안 유럽 최대의 군사기지로 있다가 근대에 와서 상공업중심지로 발전하였다. 그후 20세기 후반, 새로 형성된 로렌 지방의  중심도시는 낭시(南希, 프랑스 동북부에 있는 상공업 도시) 대신 메스가 되였다. 메스는 로렌지방의 중심지로서 제철 공업을 비롯한 다양한 공업이 발달하였고 빠리와 스트라스부르(斯特拉斯堡, 프랑스 동북부 알자스阿尔萨斯 지방에 있는 항구 도시)를 동서로 잇는 고속도로, 철도가 통하며 이는 독일로 련결된다. 북쪽의 룩셈부르그(卢森堡, 유럽 중부에 있는 립헌 군주국)로 련결되는 도로와 철도도 통하며 모젤 강과 통하는 운하로 련결되는 내륙 항구이기도 하다. 시내의 볼거리로는 고딕 양식의 메스 대성당(13∼16세기), 중세 시대에 구축된 성벽, ‘독일인의 문’이라고 일컬어지는 성문(13~15세기), 로마 제국 시절의 유물 등이 있다. 메스는 또 시인 베를렌(1844~1896)의 출생지이기도 하다.   메스 대성당 독일의 경제중심 괴테의 고향 프랑크푸르트 로 가다 이튿날(22일) 8시 반 우리는 독일의 프랑크푸르트(法兰克福)로 향해 떠났다. 뻐스에서 가이드는 프랑크푸르트에 대해 소개를 하였는데 프랑크푸르트는 프랑크푸르트암마인(美因河畔法兰克福)의 략칭이라고 하며 독일 중서부 헤센주(黑森州)에 있는 도시로서 라인강(莱茵河) 지류인 마인강(美因河) 연안에 위치해 있으며 면적은248.31 km2, 인구는 746,878 명(2017년)으로서 헤센주에서 가장 큰 도시이며 독일에서 5번째로 인구가 많은 도시다. 독일의 행정 수도는 베를린이지만 경제 수도는 프랑크푸르트라고 할 만큼 독일에서 경제적인 중심을 차지한다고 한다. 이 도시에 유럽 중앙은행이 있으며 프랑크푸르트 증권거래소도 있어서 영국의 런던과 함께 유럽의 금융 중심지 역할을 하고 있으며 유럽 련합에서 가장 부유한 도시 가운데 하나라고 한다.  이 도시는 유럽 중앙부에 위치한 지리적 조건으로 하여 중요한 교통의 중심지가 되고 있으며 도시 남서부에  독일에서 리용객이 가장 많은 독일 제1의 공항인 프랑크푸르트암마인 국제공항이  자리잡고 있어 독일을 중심으로 려행하는 려행객들에게 프랑크푸르트는 려행을 시작하는 관문이나 혹은 려행을 마무리하는 관문이 되고 있다고 한다. 우리도 유렵려행의 제일 마지막으로 이 공항을 리용하여 귀국하게 되였다. 공업으로는 염료, 약품, 광학, 전기기기, 기계 등이 발달하였으며 오늘날에 와서는 항공, 철도, 자동차 교통의 요지가 되여 독일의 경제, 금융의 중심지로서 주식, 상품거래소가 있고 매년 국제박람회가 열리는데 기계공구, 생활용품, 모피, 액세서리 및 서적 등의 국제박람회로 알려졌다. 특히 2년마다 열리는 자동차박람회가 유명하며 1485년에 시작된 력사가 깊은 세계 최대의 도서전인 프랑크푸르트 국제도서전이 매년 10월 이 도시에서 열린다.  그리고 독일의 대문호 괴테 (歌德, 1749~1832, 시인, 소설가, 극작가)도 이 도시에서 태어나서 활동하였으며 괴테의 생가는 지금 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어 이 도시는 괴테의 도시로도 유명하며 괴테대학교, 국립예술대학, 자연박물관, 공예박물관, 력사박물관, 기타 문화, 교육시설도 정비되어 있다. 한편, 이 도시는 2006년 국제축구연맹 월드컵 축구 대회의 개최지 중 한 곳이기도 했다. 반면에 2007년에는 독일의 DPA통신사가 조사한 결과 독일의 도시 중에서 범죄 발생률 1위라는 불명예를 안았다고 한다. 프랑크푸르트의 야경   뻐스는 1시간 반 달려 10시에 독일 경내에 들어 섰는데 이곳에도 세관도 없고 아무런 검사도 없이 차는 계속 달렸는데 세시간 반 250㎞를 달려  프랑크푸르트에 도착하였다. 우리는 여기에서 간단하게 점심식사를 하고 뢰머광장으로 갔다. 뢰머광장(罗马广场) 뢰머광장은 프랑크푸르트의 구시가지 중앙에 위치한 광장인데 '뢰머(로마인)'라는 이름을 가지게 된 것은 고대 로마인들이 이곳에 정착하면서부터인데 15~18세기의 건물들이 몰려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9세기부터 이 광장에서 박람회가 열렸으며 지금도 각종 국제전시장이 열리는 대형 광장으로 관광객들에게 인기 있는 프랑크푸르트의 지표(地标)라고 한다. 15세기 초에 이 광장에 있던 저택 3채를 시에서 사들여 시청사로 개조하면서 중심 광장으로 자리매김하기 시작했으며 오랜 략사를 지닌 광장이지만 2차대전의 포화를 피하지는 못해 상당 부분이 파괴되기도 했지만  현재의 모습은 복원 공사를 거친 것으로서 중세의 분위기를 잘 간직하고 있다. 광장 중앙에는 정의의 녀신 유스티티아(正义女神, 로마 신화에 등장하는 녀신)의 동상이 있는 분수대가 있다. 이 분수대는 1543년에 세워진 것으로 녀신상 오른손에는 검이, 왼손에는 천평이 들려 있는데 검과 천평은 정의와 법을 상징한다고 한다. 광장 주변에는 프랑크푸르트 대성당과 시청사 등 력사적인 건축물이 있다. [다음계속] 
94    서유럽려행기[27] 댓글:  조회:3425  추천:0  2020-03-15
서유럽 려행기 [27] 베르사유 궁전(凡尔赛宫)으로 가다 21일 아침 8시에 우리는 베르사유궁전으로 떠났다. 베르사유궁전은 빠리에서 남서방향으로 20km 떨어진  베르사유에 있는 왕궁이다. 베르사유는 원래 빠리의 시골 마을 중 하나였으나 이 궁전이 세워진 이후부터는 자치권을 가지는 파리 외곽의 도시가 되였다. 베르사유 궁전은 원래 왕이 사냥할 때 머무는 여름 별장이였으나 루이 14(路易14世)세가 12살 때 처음으로 그곳에 사냥하러 갔다가 소박하고 아름다운 성이 마음에 들어 왕위에 오른 다음 부왕이 지어놓은 별장 주변에 필요에 따라 건물을 증축하였는데 자기의 신하인 재무장관 푸케의 보 르 비콩트성을 둘러보고 온 후 그 어마어마하고 화려함에 자존심이 상했다고 한다. 그래서 보 르 비콩트의 건축에 참여했던 예술가들을 불러 유사 이래 가장 화려한 궁전을 지으라고 명령을 하였다고 한다. 이에 건축가 망사르, 실내 장식가 르 브룅, 조경가 르 노트르 등이 참여해 50년 동안 막대한 비용을 들여 궁전을 지었는데 원래 습지였던 이 땅의 자연 조건을 완전히 바꾸어서 숲을 만들고 분수를 만들기 위해 몇 개의 강줄기를 바꾸었다고 한다. 1682년 루이 14세가 빠리에서 이 궁전으로 거처를 옮겨 베르사유 궁전이 실제로 궁전으로서 사용된 기간은 매우 짧고 1715년 루이 14세 사후 뒤를 이은 루이 15세는 곧바로 빠리로 다시 궁전을 옮겼다.     베르사유궁전 이 궁전은 바로크 건축의 대표작품으로 호화로운 건물과 오페라, 거울의 방, 넓고 아름다운 정원, 1,400개의 분수로 유명하다. 베르사유 궁전은 한번에 2만 명이나 수용할 수 있는 커다란 정원이 있는데 정원에는 루이 14세가 지은 대(大) 트리아농과 루이 15세가 지은 소(小) 트리아농을 포함하여 작은 궁전들이 있다. 궁전내부를 돌면서 다음과 같은 것들을 볼수 있다. 1. 헤라클레스(赫拉克勒斯)의 방: 북쪽 날개에서 중앙까지 련결해 주는 곳에 있는 이 방은 궁전의 방 중에서 가장 크다. 벽난로 우에는 성경을 주제로 한 대형 회화가 있고 천장에는  헤라클레스(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최대의 영웅)를 례찬한 천장화가 장식되여 있다. 2. 풍요의 방: 천장은 풍요로움과 넉넉함을 표현하는 천장화로 장식되여 있는데 르브룅(프랑스의 화가, 실내 장식가)의 제자인 르네 앙투안 오아스의 작품이다. 그리고 루이 14세의 아들과 손자의 초상화가 있다. 이 방은 연회와 뷔페 파티를 위해 사용되였다고 한다. 3. 비너스(维纳斯)의 방: 천장에는 미의 세 녀신에 둘러싸인 비너스(로마 신화에 나오는 미美와 사랑의 녀신)의 모습이 있으며 정면에는 로마식 복장을 한 루이 14세가 있다. 4. 디아나(狄安娜)의 방: 천장에는 디아나(로마 신화에 나오는 달과 사냥의 녀신)가 장식되여 있다. 루이 14세의 흉상이 있는 이 방은 주로 당구와 게임을 즐기던 방이라고 한다. 5. 마르스(马耳斯)의 방: 루이 14세의 경비로 되여 있던 이 방은 전쟁의 신 마르스(马耳斯, 로마 신화에 나오는 군신軍神)에 관한 장식으로 되여있다. 6. 머큐리(墨丘利)의 방: 도로의 신인 머큐리(로마 신화에 나오는 목축, 상업, 웅변 및 사자의 신)의 방의 천장화는 새벽 별과 함께 수레에 오른 머큐리의 모습을 표현해 놓았다. 7. 아폴론(阿波罗)의 방: 아폴론은 그리스신화에서 음악, 의술, 궁술, 예언의 신이라고 하며 광명의 신이기도 하여 후에는 태양신이라고도 하였다. 그래서 이 방은 특히나 화려한데 루이 14세가 은제(银制) 왕좌에 앉아 신하들을 접견을 했다 해서 ‘옥좌의 방’이라고도 불린다. 8. 전쟁의 방 : 거울의 화랑(画廊)의 북쪽에 있는 방으로 말을 타고 적을 물리치는 루이 14세의 용맹스러운 모습이 새겨져 있는 부조(浮雕, 돋을새김) 등, 승리를 거둔 프랑스를 상징하고 있는 방이다. 9. 거울의 방: 베르사유 궁전에서 가장 유명한 곳으로 총 길이 73m, 너비 10.5m, 높이 13m인 회랑(回廊)으로서 17개의 창문과 578개의 거울이 있는 방이다. 1678년~1684년에 건축가망사르에 의해 만들어졌는데 서쪽 회랑 전체를 차지한 이 홀에서는 정원이 한눈에 내려다 보인다. 천장에는 르 브룅이 루이 14세의 생애를 그린 대벽화가 있다. 수정샹들리에(水晶吊灯), 황금 초대, 화병 등의 장식품도 당시의 최고급품으로 놓여 있다.   이 거울의 방에서1783년 미국독립혁명 후의 조약, 1871년 독일제국의 선언, 1919년 제1차 세계대전 후의 베르사유 평화조약이 체결되여 공식적으로 제2차 세계 대전을 종결짓는 등 국제적 행사 무대가 되였다. 거울의 방에서   10. 둥근 천장 창이 있는 대기실: 이 방은 왕의 침실과 입구 사이에 있는 방으로 왕을 알현하려는 왕족들의 대기실로 쓰던 방이다. 그래서 이 방에서는 갖가지 음모가 꾸며졌다고 한다. 11. 왕의 침실: 1701년 루이 14세는 자신의 방을 거울의  화랑 뒤쪽에 있으면서 궁전의 정면에 해당하는 장소인 이 방으로 옮겼다고 한다. 그리고 1715년 루이 14세는 이 방에서 숨을 거두었고 또한 프랑스 혁명때 1789년에는 루이 16세와 왕비가 이 방의 정면 베란다에 나와 군중들에게 고개를 숙이기도 했다고 한다. 12. 국무회의실: 왕의 침실과 거울의 방 화랑(画廊) 련결해 주는 방이다. 13. 평화의 방: 전쟁의 방과 거울의 화랑의 반대편인 남쪽의 모퉁이에 있는 방으로 벽화에는 유럽 평화를 확립한 루이 14세의 모습이 상징적으로 그려져 있는 등 루이 14세의 절대 권력을 과시하는 각종 장식품으로 꾸며져 있다. 14. 왕비의 침실: 침대 량옆으로는 베르사유를 통과하는 문이 있는데 왕비가 아이들에게 직접 갈 수 있도록 만들어 놓은 것이다. 이 방은 마리 앙투아네트(루이 16세의 왕비)가 황태자를 출산한 곳으로서 마지막으로 사용했던 마리 앙투아네트의 침실을 재현해 놓았다. 거울 우로는 루이 16세와 마리 앙투아네트의 어머니인 마리 테레즈와 오빠인 요셉 2세의 초상화가 걸려 있다. 15. 귀족의 방: 왕비가 귀족 부인들과 모임을 갖던 방이다. 마리 테레즈(프랑스의 수녀, 1873~1897)를 위한 천장화로 장식되어 있다. 16. 대기실: 왕과 왕비가 가족들과 함께 대중 앞에서 식사를 하던 곳으로 루이 16세와 마리 앙투아네트, 자녀들의 초상화가 걸려 있다. 1764년에는 모차르트(오스트리아의 작곡가, 1756~1791)가 이곳에서 왕에게 소개되기도 했다. 17. 경호원들의 방: 1789년 10월 6일 프랑스 혁명 당시 경호원들과 혁명군 사이에 격투가 벌어진 장소이다. 18. 대관식(加冕仪式) 방: 이 방에는 다비드(나폴레옹의 궁정화가)의 작품들로 장식되어 있는데 그중에 유명한 나폴레옹 황제의 대관식 그림이 걸려 있다. 대관식의 방   19. 왕실 소성당(小圣堂): 망사르가 설계한 성당으로 높은 천장에는 삼위일체(성부圣父, 성자圣子, 성령圣灵의 세 위격이 하나의 실체인 하나님 안에 존재한다는 교의) 이야기 외에 예수의 부활과 재림을 알리는 등 성서를 기본색조로 한 벽화들이 그려져 있다. 그리고 루이 15, 16, 18세와 샤를 10세의 결혼식이 있었던 곳이다. 이로서 베르사유 궁전 참관은 끝나고 베르사유 궁전 앞에서 집체사진을 찍었다. 베르사유 궁전 앞에서     [다음 계속]
93    서유럽려행기[26] 댓글:  조회:3542  추천:0  2020-03-11
서유럽 려행기 [26] 유람선은 알마교에서 떠나 동쪽으로 앵발리드교가 있는 쪽으로 출발 하였는데 앵발리드교를 지나면 쎈강에서 가장 화려한 다리가 보이는데 그 다리가 바로 알렉상드르 3세교(亚历山大三世桥)이다. 이 다리는 파리 전체에서도 가장 아름답고 정교한 다리로 손꼽힌다고 한다. 이 다리는1900년 프랑스만국 박람회를 위해 지어졌으며1896년 ~ 1900년에 지어진 것으로서 다리의 명칭은1892년에 프랑스-로시아의 공조(共助)를 성사시킨 로시아의 알렉상드르 3세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였다고 한다.  이 다리는 로시아와 프랑스간의 친교를 표현한다는 의미였으며1900년 프랑스만국박람회 시기에 맞추어 개통되였다고 한다. 이 다리는 길이가 107m이지만  다리의 높이는 고작 6m에 지나지 않는다. 그럼에도 량쪽 교두에 있는 17m 높이의 네 개의 화강암 기둥 덕분에 먼 곳에서도 눈에 들어오는데 이 기둥들 꼭대기에는 각각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날개가 달린 천마(飞马)와, 과학, 예술, 산업, 상업을 우의적으로 나타낸 금박을 입힌 조각상이 얹혀 있다. 다리의 량쪽 면을 장식하고 있는 표시등, 아기 천사,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녀신들도 역시 발전과 성취를 표상하는데 이들은 르네상스, 루이 14세, 그리고 현대의 프랑스를 상징한다고 한다.   알렉상드르 3세교   알렉상드르 3세교를 바라보며 왼쪽에는 그랑팔레(대형 전시장이자 박물관)와 프티팔레(파리 시립미술관), 오른쪽으로는 나뽈레옹의 유해가 묻힌 앵발리드가 보인다. 앵발리드는 군사박물관, 군사립체모형박물관, 해방훈장박물관, 현대사박물관, 생 루이 데 앵발리드 교회 등 여러 기념물이 한데 집합되여 있는 파리 최대의 종합전시장이다. 알렉상드르 3세교, 그랑 팔레, 프티 팔레는 1900년 파리 만국 박람회를 기념해 만들어진 건물이라고 한다.   알렉상드르 3세교를 지나면 다음 다리인 콩코르드 다리가 보인다. 콩코르드 다리의 왼쪽 편을 보면 오전에 보았던 콩코르드 광장(协和广场)이 있다.   콩코르드 다리를 지나면서 왼편으로 펼쳐진 넓은 공원은 튈르리 공원이며 튈르리를 지나면서 오른쪽으로 오르세 미술관이 보인다. 오르세 미술관은 폐쇄된 전기 기관차 역을 개조한 것으로 1986년 12월 미술관으로 개관하였는데 현재 오르세 미술관에는 1848년에서 1914년에 이르는 시기의 미술 작품들이 전시되여 있다고 한다. 이것은 우리가 보지 못한것이기에 더 말할 수 없는것이다. 오르세 미술관을 지나 고루아얄 다리를 지나면서 시테 섬으로 가기 바로 전에 있는 다리가 있는데 이 다리를 예술의 다리라고 한다. 파리에 있는 4개의 보행자 전용 다리 중에서 가장 유명한 다리로서 날씨가 좋은 여름 날 저녁에는 이곳에서 술을 마시는 사람들을 많이 볼 수 있다고 한다. 그리고 이 다리를 남녀가 함께 건너면 사랑이 이루어진다고 해서 ‘사랑의 다리’라고도 불린다고 한다. 예술의 다리를 지나면 시테 섬을 지나가게 되는데 시테 섬에서 우리를 가장 먼저 맞아주는 것은 퐁네프 다리이다. 퐁네프는 ‘새로 지어진 다리’라는 뜻이지만 실제로 퐁네프는 1607년에 지어진, 쎈강에서 가장 오래된 다리라고 한다. 퐁네프다리를 지나면서 본격적으로 시테 섬을 둘러보게 되는데 왼편으로 오전에 본 노트르담 대성당이 가까이에서 보인다. 시테 섬이 끝나고 이어지는 섬이 생루이 섬인데 시테 섬보다 조금 작지만 매력이 있는 섬이다. 아름다운 건물들이 많고 유명한 사람들이 거주했던 섬으로 17세기 호화로운 대저택과 류행복상점, 그리고 장식품상점들이 많이 있다고 한다. 유람선에서 본 에펠탑 유람선은  생루이 섬을 돌아 방향을 바꾸어 올때의 반대방향으로 원래의 출발지점인 나루터로 돌아 간다. 왼편으로 보면 생루이 섬 가운데 위치해 있는 마리교는 빠리에서 가장 랑만적인 다리로 알려져 있는데 련인들이 이 다리에서 키스를 하면 행운이 온다고 하여 련인들은 저마다 이 다리에 와서 키스를 하면서 미래의 행복한 혼인생활을 동경한다고 한다. 생루이 섬을 지나면서 오른편으로 펼쳐진 곳이 동성 련애자들과 예술가들이 즐겨 찾는다고 하는 마레지구라고 한다. 생루이 섬을 지나 시테섬을 거의 지나게 될 때 강 오른쪽으로 멋있게 보이는 건물이 파리 시청사라고 한다. 파리 시청사는 1871년에 일어난 화재로하여 원래의 시청사가 무너지고 그후 그 장소에 지금의 새로운 시청사가 세워졌다고 한다. 시청사 앞의 광장은 늘 여러 가지 행사로 다양하게 사용되고 여름이면 해변가를 모방해서 만든 백사장, 겨울이면 스케이트장으로 모습을 바꾸면서 체육운동을 즐기는 사람들의 활동장소로 되고 있다고 한다.  시청사가 있는 부분이 파리의 중심이라고 한다. 시청사를 지나면 왼편으로 콩시에르쥬리가 나온다. 콩시에르쥬리는 프랑스 대혁명 기간 파리 재판소의 부속 감옥으로 사용되였으며 단두대에서 처형될 죄수들이 주로 여기에 수감되어 있었으며 혁명 기간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진 마리 앙투아네트(루이 16세의 왕비)도 이곳에 수감된 죄수 중 하나라고 한다. 콩시에르쥬리를 지나면 시테 섬의 마지막 다리인 퐁네프의 오른편으로 사마리텐 백화점을 볼 수 있다. 오른쪽으로 다시 루브르 박물관이 보이고, 아까 온 길을 다시 돌아가 선착장이 있는 알마교까지 간다. 알마교 중간에는 파리의 안전을 위해 쎈 강의 수위를 재는 동상이 있는데 이 동상의 코 높이가 홍수가 났을 때 파리 시내가 물에 잠기는 수위라고 한다. 알마교를 지나 유람선은 에펠탑이 있는 예나교까지 간다. 예나교의 오른쪽으로는 샤이요 궁, 왼쪽으로는 에펠탑이 있다. 예나교를 지나면 비르 아켐 교가 나오는데 비르아켐 교는 아래는 자동차와 사람이 건널 수 있는 다리가 있고 그 우로는 지하철 6호선이 지나가는 다리가 있는 2층 구조이다. 비르아켐 다리를 지나면서 왼쪽으로 길게 펼쳐진 공원같은 곳이 보이는데 이것이 바로 인공섬인 “백조의 섬”이란 뜻의 시뉴섬이다. 섬은 좁고 긴 모양을 띠고 있으며 길이는 850m이다. 백조의 섬의 오른편에 있는 화려한 건물은 프랑스 라지오텔레비죤방송국이다. 라지오텔레비죤방송국 지나고 백조의 섬이 끝나는 그르넬교를 지나면서 보이는 동상은 자유의 녀신상이다. 자유의 녀신상은 프랑스 대혁명 10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서 미국에서 기증한 것으로 프랑스가 미국에 선물한 자유의 녀신상의 4분의 1 정도로 작다고 한다. 자유의 녀신상을 끝으로 유람선은 다시 출발점이였던 나루터로 돌아간다. 다시 에펠탑을 지나고 처음 승선했던 나루터에 도착하면서 쎈강 유람이 모두 끝났다.   단풍계절의 빠리시     [다음계속]
92    서유러려행기[25] 댓글:  조회:3562  추천:0  2020-03-08
서유럽 려행기 [25] 에펠탑(艾菲尔铁塔) 다음으로 우리는 에펠탑 구경을 하려고 마르스 광장(战神广场)으로 떠났다. 빠리에 와서 마르스 광장에서 하늘을 찌르듯300m넘게 올리 솟은 웅장한 에펠탑을 올리다 보는 것이 기분이 제일 좋았다. 그것은 어릴때부터 에펠탑하면 빠리의 대명사가 될 정도로 빠리의 상징물이고 세계적으로도 유명한 거대한 건축물이기에 언제 저 탑을 직접 가 볼수 있을가 하는 생각을 해 왔었는데 오늘 직접 빠리에 와서 이 탑을 올리다 보고 또 이 탑을 배경으로 사진까지 찍으니 어찌 그렇지 않으랴.   에펠탑 에펠탑은 빠리시의 중심지역의 쎈강(塞纳河) 동남쪽 강변에 드넓게 펼쳐진 마르스 광장에 위치해 있는데 1889년 프랑스 정부는 프랑스 혁명 100주년 기념 만국박람회를 계획하면서 이에 적합한 기념물의 설계안을 공모했다. 100여 점의 설계안이 제출되였으나 100주년기념위원회는 유명한 교량기술자 귀스타브 에펠의 설계안을 채택했다. 하여 에펠탑은 프랑스 혁명 100주년을 기념물로  구스타브 에펠(居斯塔夫•埃菲尔)의 설계로 1887년에 시작하여 1889년에 준공되였으며 이를 설계한 프랑스 공학자 및 건축가 구스타브 에펠의 이름을 따서 에펠탑이라고 명칭하고 1889년 프랑스만국박람회의 입구로 되였다고 한다. 1) 외부구조 프랑스의 대표 건축물인 이 탑은 격자 구조(格子结构)로 이루어져 금속 구조 전체의 무게는 총 7,300 톤이고 비금속 자재를 포함하면 대략 10,000 톤이 된다고 한다. 보통 기차바곤의 적재량이 50~60톤인데 10,000 톤이면 50톤짜리 기차바곤으로 200개의 바곤에 실을수 있다는 말인데 상상만 하여도 대단히 웅장한 건축물이라고 할 수있다. 철기둥을 잇는데 강철부재(钢铁构件) 18,038 조각을 250만개의 못(铆钉)을 사용해 조립하였다고 하며 이 탑은 빠리에서 가장 높은 건축물이며 높이가 300m는 그 당시로서는 세계 최고의 건물이였다. 이는 81층 높이의 건물과 맞먹는 높이이며 1930년  미국 뉴욕의 크라이슬러 빌딩(克莱斯勒大厦77层, 高度300m)이 완공되기 전까지는 세계에서 가장 높은 건축물이였으며 1957년에는 텔레비전 안테나가 설치되어 높이도 324m로 되였다.  1975년에는 회전식 표지등이 설치되어 오늘날에는 파리의 야경을 아름답게 채색하는 '빛의 탑'으로도 사람들을 매료시키고 있다.     에펠탑구조도 2) 내부구조 1층에서 2층까지의 높이는 57.6m, 3층까지는  115.7m, 4층까지는 276.1m이며 1,2층은 식당이고  3층은 레스토랑이며 4층은 전망대이며2층과 3층 까지는 계단과 엘리베이터를 통해 올라갈 수 있고 4층 전망대까지는 엘리베이터로만 올라갈 수 있다 에펠탑 건축 당시에는 우아한 파리의 거리와 어울리지 않는 '철골 덩어리'라며 지식인들의 비난을 받았다. 소설가 모파상은 에펠탑의 모습을 보기 싫어 파리 시내에서 유일하게 에펠탑이 보이지 않는 에펠탑 내의 레스토랑에서 밥을 먹었다는 일화가 전해지기도 한다. 그러나 완공된 후에는 새로운 예술을 추구하는 사람들에게서 많은 지지를 받았고 오늘날에는 파리의 지표(地标)로 자리 잡고 있다. 처음에 탑을 세울 때에는 박람회가 끝나면 철거될 계획이였고 20년 간 세울 수 있는 허가를 받았기에 20년 기한이 끝나는 1909년에 해체될 예정이였데 그 무렵 발명된 무선 전신 전화의 안테나로 탑을 리용할 수 있다는 사실이 알려져 탑의 해체는 중단되였다. 1916년에 세계 최초의 태평양 횡단 무선통화에 성공하고 1921년에 라디오 방송을 시작하여서부터는 없어서는 안 되는 존재로서 세계적으로 인정받게 되였다. 건물 전체가 철골 구조로 되어 있고 그래서 강한 바람에도 13cm 이상 흔들리지 않고 철골이기 때문에 더운 여름에는 15cm가 더 길어진다고 한다. 이 탑은 자칫하면 비참한 운명을 겪을 번한 일도 있었다고 한다. 제2차세계대전 때인 1944년 8월, 련합군이 파리에 접근하자 히틀러는 파리의 군정장관 디트리히 폰 콜티츠 장군에게 에펠탑과 도시 전체를 파괴하라고 명령했지만 폰 콜티츠가 이 명령을 어겨 에펠 탑이 살아남을 수 있었고 오늘 빠리를 상징하는 최대의 관광명소로 되였다. 만약 디트리히 폰 콜티츠 장군이 히틀러의 명령을 집행하여 에펠 탑과 도시 전체를 파괴하였더라면 그는 천추에 용서못할 죄를 짓고 그것만으로도 력사의 죄인으로 되였을것이다.   유람선 나루터에서 에펠탑을 배경으로 쎈강유람 다음으로 우리는 쎈강유람을 하려고 에펠철탑의 동북쪽에 있는 강건너 쎈강유람선 나루터로 갔다. 쎈강(塞纳河)은 프랑스에서  3번째로 긴 강이며 빠리시의 중심을 동남방향에서 서남방향으로 활모양으로 구불어 지나는 강으로서 넓은 데는 2㎞되며 빠리시내에서는 시테섬(西岱岛)과 생루이섬(圣路易岛) 두개의 자연섬과 하나의 인공섬인 시뉴섬(天鹅岛, 백조의 섬)으로 이루어진다, 우리는 쎈강 북쪽연안 알마교에서 가까운 거리에 있는 식당용으로 쎈강물우에 띄워 놓은 커다란 배에서 점심식사를 하였는데 서남방향으로 강건너편에 빠리의 징표로 되는 웅장한 에펠탑이 건너다 보이였는데 에펠탑과 쎈강량안의 풍경을 구경하는 멋도 있었거니와 쎈강으로 오르내리는 유람선과 화물선을 구경하는 멋도 참 좋았다. 점심식사 후 우리는 유람선을 타고 쎈강유람을 시작하였다. 나루터는 바로 우리가 점심식사를 하던 알마교 부근이였는데 유람선은 1000여명이 탈수 있는 2층으로 된 배였다. 유람선이 떠나자 나는 쎈강량안의 건물과 경치에 대해 상세한 료해를 하려고 가이드의 팔을 끼고 갑판에 나가 가이드의 해설을 들었다. 마치 나 하나를 대상한 가이드와 같았다. [다음 계속]
91    서유럽려행기[24] 댓글:  조회:3641  추천:0  2020-03-04
서유럽 려행기 [24] 빠리개선문 노트르담 대성당 마치고 우리는 빠리개선문을 향해 떠났다. 빠리개선문은 샤를 드골 광장 복판에 위치해 있는데 1805년 《아우스터리츠전투[奥斯特里茨战役, 1805년 12월 2일 나폴레옹 1세가 지휘하는 프랑스 군이 러시아 황제 알렉산드르 1세(亚历山大一世)와 오스트리아 황제 프란츠 2세(弗朗茨二世)의 련합군을 아우스터리츠에서 격파한 전투]》에서 승리한 기념으로 1806년에 나폴레옹의 명령에 의해 건축가 장 프랑수아 살그랑 의 설계로 건설이 시작되여 1836년 완공되였다. 이 개선문은 고대 로마의 개선문을 본따온 것으로 신고전주의의 대표작 중 하나이다. 나폴레옹은 개선문이 완공되기 전에 이미 사망하고1840년 그의 유해를 파리로 이장할 때 그가 이 문을 지나 앵발리드 돔 교회 아래에 매장되였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는 나치 독일이 파리를 점령할 때 나치 독일 국기가 걸렸고 히틀러가 전차로 이곳을 지나기도 하였다. 그렇지만 드골 장군이 독일을 전승하고   파리를 해방시킨 다음 이 개선문을 통해서 행진대렬을 검열하기도 했다. 이딸리아 로마의 콘스탄티누스 개선문은315년에 세워졌으며 높이 21m, 너비 25.7m, 폭은 7.4 m에 달하였으나 빠리의 개선문은 프랑스 력사에서 영광의 상징으로 높이가 50m, 폭이 45m로 건설당시 세계에서 제일 높았는데 조선에서1982년 김일성의 70번째 생일에 맞이 하여 평양에 개선문을 세웠는데 높이는 60m, 너비는 50m로, 파리에 있는 개선문보다 더 크게 지어 빠리개선문은 지금은 세계에서 두번째로 높은 개선문이 되였다. 가이드의 해설에 의하면 개선문의 높이가 50 m이므로 이 도시에서 건물을 지을 때 이 개선문의 높이를 초과를 하지 못한다는 정부의 규정이 있다고 한다. 그래서 그런지 빠리시의 건물들은 전부 4 ~ 5층으로 되여 있지 엘리베이터층집은 하나도 못 봤다. 또 빠리뿐만아니라 이번에 돌아본 유럽의 도시들에서 엘리베이터층집을 본것이 몇채 안된다. 엘리베이터층집을 보았다면 도시 밖에 나가서 혹간 몇채씩 보았다. 개선문의 벽에는 장군들의 이름이 새겨졌고 아부키 전쟁, 터키에서의 승리, 오스텔리츠 전쟁 등 나폴레옹의 전쟁에서 영광스러운 장면들이 여러 개의 조각들로 장식되여 있다. 또한 개선문의 안쪽 벽에는 나폴레옹이 이끄는 부대를 지휘했던600여 명의 장군들의 이름이 새겨져 있고 전쟁 중에 전사한 사람의 이름에는 줄이 그어져 있다. 그 안의 자그마한 미술실에는 개선문의 력사를 말해주는 그림, 사진, 모형들이 진열되여 있다.     에투알개선문 사진에서 ➀ 개선문의 전망대 바로 아래에 나폴레옹이 승리로 이끈 전투들의 30개의 방패에 새겨져 있고 ② 그 바로 아래 샹젤리제 거리(香榭丽舍大街)에서 바라보는 쪽에는 프랑스 군대가 출정하는 모습을, 뒤면에는 귀향을 조각해 놓았다. ③ 그 아래쪽 왼편 네모난 곳에는 나폴레옹이1790년 터키 군대와의 전투에서 승리한 것을 묘사해 두었고 ④ 그 바로 아래에는 1810년 빈 조약을 기념하기 위한 조각으로서 나폴레옹이 승리의 녀신에게서 월계관을 받는 모습이다. ⑤ 오른쪽 네모난 곳에는 마르소 장군의 장례식을 묘사해 놓았고 ⑥ 그 아래에는 1792년 조국을 지키기 위해 일어나는 시민들의 모습을 조각해 두었다. 개선문 아래에는 제1차세계 대전에서 이름 없이 죽어간 참전 용사들을 위한 《무명용사의 무덤》이 있는데 이는 전쟁에서 사망한 신원 불명의 전사자들을 추모하는 무덤으로 매일 저녁 6시 30분이 되면 홰불이 켜지며 매년 7월 14일 이곳에서 군사 행렬을 하며 11월 11일에는 무명용사의 묘비 앞에서 군사들을 기억하는 행사가 있다.   개선문앞에서 샤를 드골 광장 이 개선문을 중심으로 12개의 거리가 부채꼴 모양으로 뻗어 있어 그 모양이 지도에서 빛나는 별처럼 보인다고 하여 별이란 뜻으로 원래는 이 광장을 "별의 광장”  이라고 부르다가 제2차 세계대전에서 나치 독일에 점령되여 있던 파리를 해방한 샤를 드골 장군의 영예를 기리여 1970년에 ‘샤를 드골 광장’으로 개칭되였다. 그러나 현재에도 ‘별의 광장’라는 부르는 파리 시민들도 있다고 한다.      드골광장 빠리시가지는 이 샤를 드골 광장을 중심으로 하여 부채모양으로 크게 12개의 거리로 되여 있기에 어디로 가나 거리 교차점이 열十자로 된것이 아니라 모두 X모양으로 교차되여 있었으며 따라서 집들도 대부분 직각사각형으로 되여 있는 것이 아니라 제형으로 되여 있었다.   빠리시의 거리와 건물 [다음 계속]
90    서유럽여행기[23] 댓글:  조회:3797  추천:0  2020-03-01
서유럽 려행기 [23] 20일 7시 반에 우리는 노트르담 대성당으로 향했다. 이번에 유럽에 와서 몇개 나라를 돌아보면서 교통체증을 보지 못하였는데 프랑스 빠리에 와서는 어디로 가나 교통체증이 심하였다. 지도를 보면 우리가 주숙하였던 호텔에서 노트르담 대성당까지 너무 먼 곳이 아니였는데 교통체증이 심하여 두시간이나 걸리여 9시 반에야 노트르담 대성당에 도착하였다. 노트르담 대성당(巴黎圣母院) 노트르담 대성당은 파리의 중심인 센강(塞纳河)의 시테섬(西岱岛) 동쪽끝에 있었는데 '노트르담(Notre Dame)은 프랑스어로 '우리들의 귀부인'라는 뜻으로서 '성모 마리아'를 의미하는 고딕 건축의 걸작으로 1163년 빠리 주교 모리스 드 쉴리의 주도하에 착공해서 많은 건축가들의 손에 의해 무려 180년이나 걸쳐  1345년에 완공돼 축성식을 개최했고 그후에도 부대공사가 이루어져 18세기 초 오늘날의 형태가 되였는데 12세기 고딕 건축의 걸작으로 꼽히는 노트르담 대성당의 장엄하고 웅장한 모습은 어느 쪽에서 보아도 감탄을 자아낸다.     노트르담 대성당 앞에서   수세기를 지나면서 흠집이 생기고 약해졌으며 18세기 프랑스 혁명 때 크게 파손되어 포도주 창고로 사용되는 수난을 겪기도 했으나 그 후 나뽈레옹1세가 다시 성당으로 회복하고 자신의 대관식(1804년)을 이곳에서 거행했으며 그 외에도 수많은 왕과 황제의 대관식이 거행되였고 왕족들이 이곳에서 세례를 받았으며1455년에는 프랑스의 애국 소녀 잔 다르크(圣女贞德, 1412~1431)의 명예 회복 재판이 열려 마녀(魔女)에서 성녀(圣女)로 다시  명예가 회복되였다.  1572년에는 앙리 4세와 마르그리트(玛格丽特)왕녀의 정략결혼(政治婚姻, 가장이나 친권자가 자신의 이익이나 목적을 위하여 당사자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시키는 결혼)장소로도 되였으며 드골 장군, 미테랑 대통령의 장례식도 이곳에서 거행한 등 여러 가지 력사적 사건의 무대였으며 프랑스의 소설가인 빅토르 위고(维克多•雨果)는 이 대성당의 찬미자로 대성당의 전통을 선양하기 위해 〈노트르담의 꼽추〉를 써서 무대에 올려 유명하였으며1991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였으며 매년 1200만 ~ 1400만 명가량의 방문객이 찾을 정도로 프랑스 내에서도 가장 인기 있는 관광 명소로 꼽히는 곳이다.   1) 성당외부 노트르담 대성당은 평면도로 보면 남북날개가 짧고 동서방향으로 길며 서쪽이 정면인 十자형으로 3층으로된 건축물이다. 노트르담 대성당은 전체 길이 130m, 너비 48m, 천장 높이 35m, 성당 정면(서쪽)에 위치한 고딕 양식의 한 쌍의4각형 쌍둥이 탑의 높이가 69m인 웅대한 건축물이다. 건물의 十자형 중심부에는 96m 높이 첨탑(尖塔)이 위치하고 있으며 이는 19세기에 와서 추가로 건설된 것이다.   노트르담 대성당 외부 구조도    노트르담 대성당 정문(서쪽) 정면 1층 은 세개의 출입문이 있는데 사진에서 ➀은 성모 마리아의 문(1210~20경)이고 성모 마리아의 승천과 천상 모후(天上母后)의 관을 받은 성모 마리아의 모습을 조각했으며 사진에서 ➁는 최후의 심판 문(1220~30경)이며 최후의 날에 심판하는 예수의 모습과 심판을 기다리는 사람들의 모습을 조각하였으며 사진에서 ➂은 성녀 안나의 문(1165~70경)인데 성모 마리아의 어머니인 성녀 안나의 문이다. 사진에서 ④는 세 개의 문 우에 28개의 립상이 있는데 구약성서에 나오는 28명의 유대의 왕을 상징하는 조각상이다. 사진에서 ⑤는 둥근 장미 창(13~14세기 유럽의 고딕 건축 양식에서 볼 수 있는 꽃 모양의 둥근 창문, 직경이 10m)이고 아래에 성 모자상과 두 명의 천사상이 있다. 양쪽으로는 아담과 이브의 조각상이 있다. 사진에서 ⑥은 왼쪽(북쪽) 탑, ⑦은 오른쪽(남쪽) 탑이고 높이는 각각 69m이며 왼쪽탑 안에서 387개의 계단을 올라가면 전망대가 있으며 전망대는 왼쪽 탑에서 오른쪽 탑으로 이어지며 전망대에서 파리 시의 전망을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다.  1200년대 공사를 시작해 두 탑은 1245년경에 완성되였으며 대성당은 1345년 경에 완성되였다.  노트르담에는 5개의 종이 있다. 가장 큰 종인 엠마뉘엘(Emmanuel)은 오른쪽 탑에 있는데 무게가 13톤이 넘으며 하루의 시각을 알리기 위해서나 여러 행사나 전례를 알리기 위해 울린다. 왼쪽 탑에는 부가적으로 4개의 종이 붙어 있는데 전례나 축제 때에 울린다. 2) 성당내부 성당내부는 동서방향으로 두줄의 콩크리트기둥으로 줄지어 서 있었는데 기둥과 기둥사이의 거리는 16 m, 높이는 3층까지 24 m이고 성당에는 서쪽, 남쪽, 북쪽 3면에 장미창(13~14세기 유럽의 고딕 건축 양식에서 볼 수 있는 꽃 모양의 둥근 창)이 있으며 서쪽 장미창이 가장 작지만 1225년에 제일 먼저 만들어졌고 남쪽과 북쪽 장미창은 직경이 13.1m 크기로 유럽에서 가장 큰 장미창이며 창은 각각 성서에 나오는 인물로 구성되어 있다. 남쪽 장미창은 이전에 화재로 파손됐으나 이후 복원되였는데 성모 마리아와 12사도(예수를 따르던 12명의 제자)들을 비롯한 성자들이 그리스도를 둘러싸고 있다. 장미창 아래에는 프랑스 제1의 성녀인 잔 다르크(圣女贞德)의 조각상과 제2의 성녀인 소화 데레사의 조각상이 있다.   성당내부에는 또 4세기에 만들어진 성모 마리아와 아기 예수상이 있고 성가대석(성가를 부를 수 있도록 마련한 자리) 벽의 돋을새김(浮彫)은  14세기의 작품으로서 예수의 일생을 묘사하고 있는데 성당이 지어질 당시 성직자와 일부 귀족들을 제외하고는 라틴어를 읽을 수 없어서 성경 내용을 알기 쉽게 조각으로 만들어 놓은 것이라고 한다. 각각 예수의 탄생부터 이어지는 신약성서의 이야기가 조각되여 있다.   19세기에 성당을 복원할 때 만들어진 성물 박물관(圣物博物馆)에는 예수님의 십자가 조각과 가시면류관 (荆棘冕旒冠,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힐 때 로마 병정이 예수를 조롱하기 위하여 머리에 씌웠던 가시나무로 만든 관)이 보관되여 있다. 성가대 뒤쪽으로는 니콜라 쿠스투(프랑스 조각가)의 피에타(기독교 미술에서 십자가에서 내린 그리스도의 시체를 무릎 위에 놓고 애도하는 마리아를 표현한 주제)가 있고 피에타 옆에는 루이 13세(프랑스 부르봉왕조의 왕, 재위 1610~1643)의 동상이 있다. 북쪽 장미창은 성모 마리아를 중심으로 구약성서에 나오는 인물들로 묘사여 있고 장미창 아래에는 빠리 최초의 주교인 생드니 성인과 성모 마리아상이 있다. 성당내부에는 또 도관풍금(管风琴)이 있는데 프랑스 성당에 있는 풍금 중 가장 큰 규모로 무려 8,000개의 도관으로 제작되였다고 한다. 성당 내부는 172개의 채색유리 창문으로 장식되여 있는데 중세 채색유리  중 가장 중요한 작품이라고 한다. 또한 내외 벽면에는 성경 내용을 담은 4,000개의 조각으로 장식되여 있다. 이 기행문에서 바로 이 부분을 쓰는 날 인터넷에서 노트르담 대성당이 어제(2019년 4월 15일) 저녁 화재가 발생했다는 뉴스를 보았으며 저녁에 중앙테레비죤뉴스에서 화재가 발생하여 성당우의 첨탑(尖塔)이 무너지는 장면을 보았다. 빠리에 가서 이 성당을 직접 보지 않았다면 이 성당이 화재에 휩싸인 장면을 보고 어떤 생각이 있었겠는지는 모르겠지만 직접 이 대성당을 참관하고 돌아와서 다섯달만에 이렇게 대형화재가 발생하여 첨탑이 무너지는 장면을 보는 순간에 정말 비감한 심정이였다.     화재에 휩싸여 있는 노트르담 대성당 이 성당이 완공되여 몇 세기를 내려 오면서 몇차례의 화재가 발생하여 복구를 하고 어떤 때에는 파손되여 보수를 하면서 오늘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이런 장엄하고 웅장한 건물이 석조로 된 골조를 제외한 목재로 구성된 부분들은 이렇게 거의 폐허로 되는 장면을 볼대 참으로 가슴 아픈 아프게 생각되였다.           [다음 계속]
89    서유럽려행기[22] 댓글:  조회:3849  추천:0  2020-02-24
서유럽 려행기 [22] 콩코르드 광장(协和广场) 다음으로 우리는 콩코르드 광장으로 갔다. 콩코르드 광장은 빠리시 한복판의 센강 북쪽 기슭에  위치해 있으며 동서길이 360m, 남북길이 210m, 면적은 8.64ha로 파리에서는 가장 넓은 광장이다. 파리에서 가장 큰 광장이라지만 북경의 천안문(44ha)에 비하면 1/5밖에 안된다.    팔각형으로 이루어진 이 광장은 원래 프랑스 부르봉왕조(波旁王朝)의 왕 루이 15세(재위 1715∼1774)의 기마상을 세우기 위해  1775년에 조성되였으며 이름도 당시에는 ‘루이 15세 광장’이라 불렸으며 1770년에는 왕세자(루이 16세)와 마리 앙투아네트(玛丽•安托瓦内特, 1755~1793)의 결혼식이 거행되였다. 그러나 프랑스 혁명이 발발하면서 광장의 력사는 피로 얼룩지게 되였다. 1792년에 루이 15세의 기마상이 파괴되고 이듬해에는 기마상자리에 단두대가 놓여 왕족과 귀족, 성직자 등 1,343명이 처형당했다. 1793년 1월 21일 프랑스 혁명중에서 루이 16세가 이곳에서 처형되였고 10월 16일 왕비인 마리 앙투아네트가 목을 잘리운 형장이기도 했다. 그리고  혁명가인 로베스피에르(罗伯斯庇尔1758~1794, 프랑스 혁명시기의 정치가)와 조르주 자크 당통 (乔治·雅克·丹东1759~1794, 프랑스혁명시기의 정치가)마저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졌다. 단두대가 있던 자리에는 지금 분수대가 있다.   콩코르드  광장 1795년에 비로소 공포 정치가 끝나고 이 광장의 이름은 이러한 어두운 력사를 넘어 평화화 화합으로 나가자는 미래에 대한 희망을 담아 화합, 일치라는 뜻으로 콩코르드  광장(协和广场)이라고 불리게 되였다고 하는데 우리 말로 하면 ‘협화광장’ 혹은 ‘화합광장’이라고 할수 있다. 현재 광장 중앙에는 1833년 이집트의 총독이였던 무하마드 알리 파샤(穆罕默德•阿里)가 프랑스의 루이 필리프왕(路易-菲利普, 1773~1850)에게 선물한  방첨탑 (方尖塔)이 우뚝 서 있다. 이 탑은 이집트의 람세스 2세(拉美西斯二世) 때 제작된 것으로 룩소르( 卢克索, 이집트 키나주에 있는 상업 도시) 신전(神殿)에서 옮겨왔는데 운송 기간만 약 2년반이 걸려1836년 10월에 빠리까지 왔다고 한다.  방첨탑의 높이는 23m에 230톤의 무게에 달하며 네 면에는 파라오(法老, 고대 이집트의 왕을 이르던 말)를 찬양하는 노래가 상형 문자로 새겨져 있다.  방첨탑의 좌우에는 로마의 산 피에트로 광장(圣彼得大广场)을 본딴 분수가 있으며 8개의 모퉁이에 코르투아 플라디에가 만든 녀신상이 놓여 광장의 아름다움을 더한다. 이 녀신상들은 각각 마르세유(马赛), 낭트(南特), 리옹(里昂), 보르도(波尔多) 등 프랑스의 8대 도시를 상징한다. 탑, 조각물이 분수로 이루어진 광장의 야경은 격동의 력사를 씻어 내듯 평화롭고 랑만적이다. 그때의 기술로23m높이에 230톤의 무게에 달하는 이 거대한 물체를 지중해 동남쪽 이집트에서 지중해 서북쪽 불란서까지 어떻게 운반해 왔는가 하는 것은 참으로 의문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콩코르드  광장에서 향수박물관  콩코르트광장을 다 구경하고 우리는 빠리의 향수박물관으로 갔다. 향수박물관은 프랑스 빠리 스크리브 거리에 있는 향수 전문 박물관이며 1860년에 세워진 나폴레옹 3세(1808~1873)의 저택을 박물관 건물로 사용하고 있다. 1926년에 세워진 향수 회사인 프라고나르회사가 5000년에 이르는 향수의 력사를 보여주기 위해 1983년 설립하였는데 회사 이름을 따서 '프라고나르 향수 박물관 이라고도 부른다. 이 향수박물관은 2004년 9월 30일에 페관하여 4년간의 대규모의 보수를 거쳐 2008년에 다시 개방하였는데 총 비용이 1,400만유러(약 1,881만딸라)가 들었다고 한다. 박물관은 보수를 거쳐 면적이 원래의 두배로 확대되여 1,500㎡로부터 3,000㎡로 확대되였다고 한다. 수건후의 박물관은 장식풍격에서 새로운 돌파를 가져왔을 뿐만아니라 허다한 보기드문 수장품들을 전시하였는데 박물관에 소장된것이 5만여 건에 달한다고 한다. 향수박물관은 주로 력사구와 수장품구 두 구역으로 나누는데 각 시대별 가구들을 배경으로 향수를 비롯해 향수병, 향수 저장 용기, 제조도구, 화장품 세트 등이 다양하게 전시되여 있으며 동서양의 각 시대별 향수와 화장품 종류들도  전시되여 있었다.     향수제조기기들 각 시대에 만들어진 향수병은 당시의 류행을 반영한 것이여서 설계와 류행의 변화도 알아 볼 수 있었으며 향수 추출을 하는 증류기 등이 과거부터 현재까지 각 시대별로 전시되여 있어 향수의 제조와 포장 방법이 발달해온 력사를 알아볼 수 있었다. 현대식 향수 제조 방법도 제조 공정 전체를 실제 설비 그대로 전시해 놓아 쉽게 리해할 수 있었으며 관람객들에게 향기를 맡는 법 등 향수에 대한 지식을 설명해 주었으며 향수 종류별로 냄새를 맡아보는 항목도 있었는데 젊은이들 특히는 젊은 녀성들은 냄새를 맡아보고 여러가지 향수에 대한 이런 저런 평가를 하였지만 나로서는 남들을 따라 냄새는 맡아보았지만 맡아 본다더라고 맡았지 좋다 나쁘다 감정 할 수 없었다. 박물관에는 사람들의 눈길을 끄는 전시품이 하나 있는데 그것이 바로 프랑스 국왕 루이16세의 부인 마리 앙투아 네트 왕후의 려행트렁크이다. 전해지는 말에 의하면 1791년 불란서대혁명 때에 마리 앙투아 네트 왕후는 이 트렁크를 가지고 프랑스에서 피란을 떠났다고 하는데 트렁크의 무게가 80킬로그람에 달했고 한다. 그 안의 물품들을 보면 마리 앙투아 네트왕후가 쓰던 보온병, 화장품상자, 그리고 야외식사도구 등이라고 한다. 박물관 안에는 프라고나르 회사의 화장품상점이 있어 유람객들은 그 자리에서 공장가격으로 마음에 드는 그라스화장품공장에서 생산한 여러가지 화장품을살수 있었다.   향수판매진렬대에서 일을 보고 있는 한국녀성 우리 일행가운데는 세쌍의 젊은 부부외에 젊은 녀성이 여럿이 있었는데 그들은 모두 중국에서 사는 것보다 질도 많이 좋거니와 가격도 중국에서 사기보다 많이 싸다며 자기네도 쓰고 돌아가서 선물로 주겠다며 여러가지 화장품들을 쌌는데 저마다 한 가방씩은 되게 사는 것 같았다.     [다음 계속]
88    서유럽려행기[21] 댓글:  조회:3947  추천:0  2020-02-19
서유럽 려행기 [21] 루브르 박물관(卢浮宫博物馆)  12시 반 장장 5시간에 315㎞를 달려 빠리시에 도착하였다. 오늘 역시 운수가 좋았다. 우리가 그렇게도 근심하던 시위행진이 없었다. 점심을 먹고 우리는 루브르박물관을 향해 떠났다. 루브르박물관은 프랑스 수도 파리의 대표적인 지표(地标)성 건축물로서 센강 우측, 파리 중심가 1구역에 위치하고 있으며 메트로폴리탄 미술관(미국 뉴욕시 센트럴 파크에 있는 미술관), 대영박물관(영국 런던에 있는 국립 박물관)과 함께 세계 3대 박물관 중 하나이며 세계에서 가장 많은 사람들이 방문하는 미술관이다.(2010년 년간 관람 인원이 약 8백 5십만 명으로 집계됨)  루브르 박물관은 원래 프랑스 왕가의 궁전이었던 루브르 궁전을 미술관으로 사용하고 있는데 기원전4000년부터 기원 19세기에 걸친 각국의 미술 작품들이 약 38만 점의 예술품을 소장하고 있으며 이 가운데 약 3만5천 점이 전시되고 있는 국립박물관이며 박물관의 부지면적이 198헥타르이다. 루브르박물관 루브르박물관의 주 전시관인 리슐리외관(리슐리외黎塞留. 1585 ~ 1642. 프랑스의 정치가루이 십삼세 때의 재상으로 대외적으로 삼십 년 전쟁에 간섭하고 식민 정책을 진행시켜 프랑스 절대주의의 기초를 쌓았다), 쉴리관(쉴리,1560~1641. 프랑스의 정치가 앙리 사세의 신임을 받아 사실상의 재상으로서 재정 재건,농업 부흥, 국내 교통망의 정비 따위에 힘써 부르봉 왕조의 기초를 굳혔다. 저서에 《왕실 재정 회상록》이 있다.), 드농(Denon) 관은 ‘ㄷ’자 모양으로 련결되여 있는데 반지층, 1, 2, 3층으로 되여 있으며 조각 부문은 1,2층에 , 회화, 공예 부문은 2,3층에 진렬되여 있다 . 회화는 드농 관 1층과 쉴리 관과 리슐리외 관 2층에 주로 전시되여 있고 고대 유물들은 드농관 1층, 쉴리관 1층, 리슐리외관 반지층 일부, 쉴리 관 남쪽 전시실 1층에서 관람할 수 있다. 조각 작품은 드농관과 리슐리외관에 많이 전시되어 있는데 드농 관에는 이딸리아 조각작품이, 리슐리외 관에는 프랑스 작품들이 있다. 1, 이집트 유물 부문에는 5만 점이 넘는 작품들이 속해있는데 기원전 4천년부터 기원후 4세기에 이르는 나일강 류역의 이집트문명 유물들을 소장하고 있다. 미술품, 미이라, 의복, 보석, 게임, 악기, 무기에 이르는 방대한 수집품들을 통해 이집트인들의 생활상과 각 시대의 시대상, 예술적 특징 등을 감상할 수 있었다.   스핑크스 (狮身人面像)   2, 근동 유물 부분은 1881년부터 현재에 이르는 예술품들을 전시하고 있으며 이슬람의 공격을 받기 전, 근동 지역의 초기 문명과 정착 모습을 작품들을 통해 감상할 수 있었다. 지리학적 근거로 레반트 지역(중동지역, 수리아와 레바논을 일컫기도 함), 메소포타미아 지역(美索不达迷亚, 서남아시아의 티그리스강底格里斯河과 유프라테스강幼发拉底河 사이에 있는 지역. 이라크를 중심으로 시리아 동북부와 이란 서남부를 포함한다. 고대 문명 발상지의 하나이다.), 페르시아(현재의 이란) 지역으로 구분하여 수장품을 보여주고 있다. 3, 그리스, 에트루리아(伊特鲁里亚, 이탈리아 중부에 있는, 고대 에트루리아인이 살던 지역. 지금의 토스카나 지방이다.), 로마 유물 부문에서는 신석기 시대부터 6세기까지의 지중해 연안 지역의 작품들을 전시하고 있다. 4, 이슬람 미술 부문은 1,300년 간에 걸친 이슬람 문화의 유물들로 이루어지며 도자기, 유리, 철, 나무, 상아, 양탄자(地毯), 섬유 등을 포함한 5천 점 이상의 작품과 천 개 정도의 사금파리(사기그릇의 깨어진 작은 조각) 조각들을 소장하고 있다. 5, 조각 부문은 그리스, 에트루리아, 로마 부문에 속하지 않은 조각품들 중 1,850년 이전에 제작된 작품들로 구성되여 있다.  오직 이 부문에서 전시한 것들은 고대 건축 관련 작품들 뿐이다. 수장품도 100점 정도에 불과했으며, 나머지 조각 작품들은 베르사유(凡尔赛)의 왕실 조각 수장품에 귀속되여 있었다.  조각 부문은 그리스, 에트루리아(伊特鲁里亚), 로마 부문에 속하지 않은 조각품들 중 1,850년 이전에 제작된 작품들로 구성되여 있다.   6, 장식미술 부문은 중세부터 19세기 중반까지의 작품들을 보여주고 있으며 처음 이 부문은 조각 부문에 소속되여 있었다. 프랑스 왕들의 대관식 검을 보관하고 있는 프랑스 왕실 묘역인 생드니성당(圣德尼圣殿) 으로부터 가져온 왕실 소유품들과 예술품들을 주로 관장(馆藏), 전시하였다. 7, 회화 부문은 약 6천 점의 작품을 보유하고 있으며 1,848년부터 13세기까지의 작품들을 포함하고 있는데, 2/3 정도가 프랑스 화가들의 작품이며 북유럽 작품들이 천 2백 점 이상이다. 이딸리아의 회화 작품들은 프랑스의 국왕 프랑수아 1세(1494년 ~ 1547년)와 프랑스 국왕 루이 14세(1638년 ~ 1715년)의 유품들이 주를 이루며 나폴레옹 시대에 략탈한 후 반납하지 않은 전리품들과 박물관이 구입한 작품들도 있다. 회화 작품들 중 프랑스와 북유럽 작품들은 리슐리외관과 카레 궁정에 전시되여 있으며, 스페인과 이탈리아 회화들은 데농관 1층에서 찾아볼 수 있다.   성모마리아 화상   8, 판화와 소묘 부문은 종이에 표현된 작품들로 구성된 수장품이다. 수장품의 원형은 8천 6백 점의 왕실  수장품, 1797년 아폴로(로마 신화에 나오는 신)화랑(画廊) 415점을 전시하였다.                   [다음 계속]
87    서유럽 려행기 [20] 댓글:  조회:4183  추천:0  2020-02-16
서유럽 려행기 [20] 유구한 력사를 갖고 있는 프랑스로 가다 프랑스경내에 들어서면서 가이드는 프랑스의 개황에 대해 소개를 하였다. 프랑스는 유럽 대륙의 서부, 지중해와 대서양 사이에 위치하며 유럽에서 3번째로 큰 나라이며 정식명칭은 프랑스공화국이다.  프랑스는 서유럽의 본토와 남아메리카의 프랑스령 기아나 (法属圭亚那. 남아메리카에 있는 프랑스령의 해외 레지옹이다.)를 비롯해 여러 대륙에 걸쳐 있는 해외 레지옹(관할 구역 안에 우리 나라의 성에 해당되는 프랑스의 광역 자치 단체)과 해외 령토로 이루어진 국가로서 유럽련합 소속 국가 중 령토가 가장 넓다. 프랑스 본토는 남북으로는 지중해에서 영국 해협과 북해까지, 동서로는 라인강에서 대서양에 이른다. 그 지형적 모양으로 인해 프랑스인들은 종종 이 곳을 륙각형이라고 부른다.  프랑스의 수도는 빠리이며 국가 수반은 대통령이고, 정부의 수반은 수상이며 의회는 량원제로 구성된다. 면적은674,843㎢ , 인구는  65,630,692명(2012년)이다.     프랑스와 그 주변국가들 종족구성으로는  켈트족, 라틴족, 슬라브족, 북아프리카인, 인도차이나인 등이며 공용어로는  프랑스어이다. 종교는 로마가톨릭교 83%-88%, 이슬람교 5%-10%, 개신교 2%, 유대교 1%, 무교4%이다. 프랑스는 유럽련합(EU)의 창립 회원국으로서 설립 시부터 독일과 함께 중추적인 역할을 해왔으며 북대서양 조약 기구(北约)의 회원국으로 1966년에 탈퇴 했다가 1992년에 재가입하였다. 프랑스는 세계의 주요 경제 대국이지만 소규모 기업들이 큰 비중을 차지하는 발전된 혼합 경제이다. 공업(건축, 토목 사업 포함)에 종사하는 로동자가 전체 로동력의 1/3에 약간 못 미치고 GDP의 약 30%만을 차지하는 수준에 이른다. 농업에 종사하는 인구는 전체 로동력의 약 7%로 비교적 적으며, 국내총생산(GDP)에서 차지하는 비중도 4% 미만이다. 경제구조는 농공업 대신 3차산업이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데 총 로동력의  약 2/3와 GDP의 60% 이상을 차지한다. 관광업은 직접, 간접으로 전체 로동력의 약 7%를 차지하고 GDP에서 약 8%를 차지한다. 프랑스에는 공교육과 사교육이 공존한다. 공교육은 일체 무료이며 교육부가 관리한다. 16세까지 중등교육을 무상의무제로 실시하고 빈민층에 대해 재정 지원을 강화한 결과 저소득 집단들의 지적, 사회적 성장에 상당한 기여를 한다.   5년제 초등교육을 마치고 11세가 된 학생들은 중등교육의 제1단계에 들어간다. 15세에 이 과정을 마치면 제2단계인 직업교육 면허증을 딸 수 있는 2년 과정과 대학입학자격시험을 볼 수 있는 고등교육인 3년 과정 중에서 선택하여 진학한다. 사교육은 주로 로마 가톨릭 계통이다. 프랑스 헌법이 국가와 종교의 분리를 선언하고 있지만, 1959년에 제정된 법률에 의거하여 사립학교는 정부의 일정한 간섭을 받는 대가로 재정 지원을 받는다고 한다. 차가 프랑스경내에 들어서서 한창 달리고 있는데 먼저 빠리에 가 있는 중국의 다른 려행사의 인솔자가 우리의 인솔자에게 “지금 빠리시에서  유가상승으로 하여 마크롱정부에 향해 대형시위를 하고 있다.”는 전화가 왔다. 아니나 다를가 5시 반이 되여 어둠이 깃들었을 때 길에서 연한 황록색의 조끼를 입은 경찰들이 교통지휘를 하였는데 다행히 우리가 가는 방향의 차들은 막지 않고 통과시켰지만 마주 오는 차량들은 모두 통행금지를 하여 몇 십리 길에 차량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늘어섰는데 마주 보면 전조등빛이 비추는 것이 마치 노란색의 구술을 꿰여 놓은 것처럼 보였고 돌아서 보면 마치 붉은색 구술을 꿰여놓은 것처럼 보였다.       유가상승으로 하여 마크롱정부에 향해 대형시위를 하다   그래도 우리는 운수가 좋았다. 6시 반까지 아무런 교통차단이 없이 무사히 프랑스의 어느 한 작은 진에 도착하여 주숙을 정하였다. 오늘은 운수가 좋아 무사히 여기까지 왔는데 래일이면 빠리시에 들어가야겠는데 계속 시위를 하면 어쩌는가하는 근심이 태산 같았다 빠리 19일 아침 7시 반에 우리는 빠리로 향해 떠났는데 가이드는 빠리시의 개황에 대해 소개를 하였다. 빠리는 프랑스의 수도로서 프랑스북부 일드프랑스(法兰西岛) 지방의 중앙에 위치해 있고  센강(塞纳河) 중류에 있으며 면적은 105km2, 인구는 현재 224만 명이다. 파리의 행정 구역은 1~20구로 나뉘여 있다. 빠리는 프랑스의 정치, 경제, 교통, 학술, 문화의 중심지일 뿐만 아니라 세계의 문화 중심지로 ‘꽃의 도시’라고 불리며 프랑스 사람들은 스스로 ‘빛의 도시’라고 부른다. 빠리는 프랑스의 경제 중심지이며 세계 최고의 경제 도시이기도 하다. 빠리는 프랑스의 정치적, 문화적 중심지일 뿐만 아니라 중요한 재정적, 상업적 요지이기도 하다.   저녁노을에 비낀 빠리시   1980년대에는 지하철로 매일 500만 명의 주민이 빠리로 통근했다. 정부가 지하철 운영비를 보조해주기 때문에 승객은 실제 비용의 절반만을 지불한다. 파리시의 뻐스 운행체계도 현대화되여 있다. 이같은 개선은 통근할 때 자동차를 리용하지 못하게 하여 교통문제를 완화시키려는 정부정책의 일부였으나 그 효과는 의문이다. 교통량은 크게 늘어나고 있으며 교통체증을 감소시키기 위해 많은 지하도로와 강변 고속도로를 만들었고 광범위한 일방 통행망을 발전시켰다. 센강(塞纳河)이 남동쪽에서 시가지로 들어와 생루이섬(圣路易岛)과 시테섬(西岱岛)을 감싸면서 북쪽으로 크게 만곡을 이룬 다음 남서쪽을 거쳐 시외로 흘러나간다. 따라서 동쪽으로는 뱅센 숲, 서쪽으로는 불로뉴 삼림공원이 이어진다. 센강의 남쪽을 ‘좌안(左岸)’, 북쪽의 보다 넓은 지역을 ‘우안(右岸)’이라고 부른다.  센강류역의 주요 유람지점 우안은 전통적으로 정치, 경제 기능이 집중된 곳으로 정부 기관, 사무실, 백화점, 주요 기차역 등이 집중해 있다. 반면 좌안은 교육 기능을 중심으로 발전해왔다. 좌안의 라틴 지구(행정구역 상으로는 빠리 중앙지역인 5구에서 6구)에는 소르본대학을 비롯한 대학 및 고등교육기관, 연구소 등이 집중해 있다.     [다음 계속]
86    서유럽려행기[19] 댓글:  조회:4178  추천:0  2020-02-12
 서유럽 려행기 [19] 9시가 되여 기차가 도착하여 기차에 올랐는데 이때까지 내가 타본 중국을 비롯한 아세아의 몇개 나라의 기차는 모두 한쪽에 3인석, 다른 한쪽에 2인석이고 가운데 인행도로 되여있는 가로줄로 5인석 표준궤도의 차였는데 이번에 스위스에서 탄 기차는 인행도 량켠이 다 2인석인 가로줄로 4인석 좁은 궤도의 차였다. 밖을 내다보니 기차길도 좁아 보이였다. 루체른 기차역   기차는 루체른호(卢塞恩湖)연안을 따라 달렸는데 거울같이 맑은 루체른호와 호수 량안의 아름다운 경치를 볼수 있었다. 루체른호는 스위스 중부에 있는 호수로서 호수이름은 서쪽 끝에 있는 루체른 시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였고 한다.  호수면적은 114 km², 최대길이 39km, 최대너비 3km, 평균수심이 104 m, 최대 수심은 214 m의 복잡한 형태의 호수이다.     기차에서 내다 본 루체른호와 알프스산의 설산   그리고 기차를 타고 가면서 계속 흰눈이 덮인 알프스산의 산봉우리들을 볼수 있었으며 드문드문 가다 농촌마을들이 보이였는데 마을 주변은 모두 푸른 잔디밭이였으며 잔디밭에는 드문드문 여유롭게 풀을 뜯고 있는 소떼들이 보이였다. 거울같이 맑은 호수에 빗긴 흰눈에 덮인 산봉우리들, 호수에 빗긴 호수량안의 다름다운경치, 거기에 농촌마을과 풀밭에서 여유롭게 풀을 뜻고 있는 소떼들, 그야말로 아름다운 수채화였다.     렬차에서 내다 본 마주오는 렬차와 알프스산의 설산 기차는 10시 50분에 인터라켄역에 도착하였는데 기차에서 내리니 우리의 뻐스가 기차먼저 달려와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인터라켄(因特拉肯)은 독일어로 "호수사이 "라는 뚯으로 스위스 베른주(伯尔尼州)에 위치한 도시로서 동쪽에 있는 브리엔츠호(布里恩茨湖)와 서쪽에 있는 툰호(图恩湖) 사이에 위치해 있으며 시내에는 아레강(阿勒河)이 흐른다. 인터라켄은 알프스산맥이 죽 이어져 있는 산봉우리를 바라보는 경승지로  세계적인 관광, 피서도시이자 등산기지를 이루는 도시다.  면적은 4.3km2,  인구는2010년 통계로 5,429명이며 시계, 섬유, 고무, 단술(甜酒)  공업이 활발하다. 우리의 인솔자는 우리를 시계상점으로 안내하면서 시계를 사려면 여기서 사라는 것이였다. 이곳은 다른 곳보다 시계종류가 많고 값도 싸다는 것이였다. 시계상점에 들어가 보니 확실히 시계종류가 다양하고 값(1유러에 인민페 8원)은 인민페로 환산하면 몇백원, 몇천원, 몇만원, 지어 값이 제일 비싼것은 인민페로 250만원에 가는 것도 있었다. 이렇게 비싼 시계는 어떤 사람들이 사는지? 의문이 가지 않을 수 없었다. 우리의 일행이 여기에서 시계를 사는 사람이 많았는데 우리 부부도 시계왕국에 와서 스위스의 시계를 사서 차는 것도 일생의 기념이라고 시계를 사려고 상점을 한바퀴 돌아보았다. 그런데 시계를 사려면 이것저것 물어볼 것이 많은데 영어를 한마디도 모르는 우리로서는 정말 안타까웠다. 하여 우리 부부끼리 너무나도 안타까운 소리를 하는데 한 영업원이 우리가 하는 조선말을 듣고 어디에서 왔는가 하며 한국말로 물어보는 것이였다. 우리가 중국 연변에서 왔다고 대답하자 자기는 한국인인데 여기에 와서 영업을 한다는 것이였다. 너무나도 반가웠다. 은인을 만난 것이였다. 그리하여 그 한국인과 이것저것 물어보며 어떤 것을 사면 좋은가고 하니 값이 비싸다고 하여 성능이 어떻게  좋다고 말하기 바쁘니 우선 모양이 마음에 드는 것을 고르라는 것이였다. 그래서 우리는 우선 모양이 마음에 드는 것을 골랐다. 그다음 그 분이 시계의 성능과 가격할인, 면세 등에 대해 상세히 잘 설명하여 주었다. 정말 그 한국인이 고마웠다. 그렇지 안으면 영어를 한마디도 모르는 우리로서는 어쩔수 없었다. 그 분의 상세한 설명으로 하여 우리 부부가 하나씩 사고 아들 며느리 것까지 4개를 샀는데 값은 인민페로 1,500원에서 3,500원 사이였다.   우리가 산 시계 어리때부터 스위스는 시계왕국이고 스위스의 시계가 세계에서 최고라는 말을 많이 들어왔던지라 시계를 사서 손목에 차고보니 자못 흐뭇한 마음이였다. 그러나 또 달리 생각해보면 중국의 100원짜리 시계가 10시를 가리킬 때 스위스의 몇 천원에 달하는 시계도 10시를 가리키지 그 이상 더 똑똑하게 시간을  알릴 수는 없었다. 그저 허영심이랄가? 긍지감이랄가? 가부간 스위스 시계를 찬것으로 하여 기분이 흐뭇한 것만은 확실하였다. 스위스에서의 려행은 이것으로 끝나고 오후 2시에  프랑스로 향해 떠났다. 4시에 스위스와 프랑스 접경지대의 세관에 이르러 입경할 때와 마찬가지로 다른 차들은 거침없이 나가고 들어왔는데 우리는 인솔자가 차에서 내려서 출경수속을 밟았다. 입경할 때와 마찬가지로 아무런 통관검사도 없었다. 다만 유럽련합에 속하는 나라에서 산 물건은 유럽련합에서 마지막에 출국하는 나라 세관에서 면세수속을 밟게 되였지만 스위스는 유럽련합에 속하지 않기에 스위스에서 산 물건만은 이곳 세관에서 면세수속을 하여야 했다. 그것도 우리의 인솔자가 혼자 내려서 우리 일행의 면세수속을 대행하였다.              [다음 계속]    
85    서유럽 려행기 (18) 댓글:  조회:4141  추천:0  2020-02-08
서유럽 려행기 (18)   빈사의 사자상(濒死狮子像)  4시 40분에 루체른시에 내려와서 루체른의 호프교회 북쪽의 작은 공원 안에 가서 빈사의 조각상을 구경하였다. 빈사의 사자상은  덴마크의 조각가인 베르텔 토르발센(1770~1844)이 설계하고1821년 독일 출신인 카스아호른이 조각했다. 이 조각상은 세계에서 이름난 기념비조각상가운데의 하나이라고 한다.   스위스는 중립국으로서 전쟁에 대해 중립적인 립장을 지켜 왔지만 과거 생활고에 시달리던 시절에는 높은 임금 때문에 용병으로 지원하는 국민이 많았다. 이 사자상은 프랑스 대혁명 당시 1792년 8월 10일 프랑스왕 루이 16세와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玛丽•安托瓦内特)가 머물고 있던 궁전을 지키다가  전사한 786명의 스위스 용병의 충성을 기리기 위해 세웠다.  스위스 용병들을 상징하는 사자가 고통스럽게 최후를 맞이하는 모습이 묘사되였다. 사자의 발 아래에는 부르봉 왕가의 문장인 흰 백합의 방패와 스위스를 상징하는 방패가 조각되여 있다. 미국의 작가인 마크 트웨인은 이 사자기념비를 "세계에서 가장 슬프고도 감동적인 바위"라고 묘사하였다. 자연석인 거대한 바위 중간을 쪼아서 사자를 조각한 모습에 관광객들은 놀라움을 감추지 못하며 다른 관광지와는 달리 숙연한 분위기가 흐른다.   빈사의 사자상 빈사의 사자상에서의 유람을 끝내고 우리는 카펠교 부근에 있는 시계상점에 들어가 들어갔다. 래일 이보다 큰 시계상점으로 간다기에 나는 상점을 한번 둘러 본다음 상점부근에 있는 카펠교 구경을 나갔다.   루체룬시가지 건물   카펠교와 수탑(廊桥水塔) 루체른시는 루체른 호수에서 로이스강(罗伊斯河)이 흘러나오는 량쪽 변에 자리 잡고 있으며  여러 개의 다리가 놓여 있다. 그중 카펠교는1333년에 로이스강에 놓인 다리로서 유럽에서 가장 오래되고 가장 긴 나무다리로서 길이가 204m에 달하며 원래는 호수로 잠입하는 적들을 감시하기 위한 시설의 일부로 14세기에 지어졌으며 13세기에 건설된 요새화된 팔각형 수상 탑 앞을 지나가는데 눈에 잘 들어오는 우아한 형태로 루체른의 상징으로 되는 명물이다. 카펠교는 오지기와로 경사진 지붕이 기둥에 지지되여 다리를 완전히 덮고 있는 복도모양으로 되였다하여 한어로는 廊桥라고 한다. 다리는 부유한 시민들의 후원을 받아 제작되였으며 다리의 처음부터 끝까지 지붕의 들보에는 루체른의 력사를 나타내는 스위스 력사상 중요한 사건이나 루체른 수호성인의 생애를 표현한 112점의 삼각형 판화 그림이 걸려 있는데 이 중에는 17세기 하인리히 베그만의 작품도 10여 점 있다. 카펠교와 수탑(廊桥水塔) 그림은 루체른 시민들이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돈이 많이 들어 1726년에는 도시의 젊은이들이 작품을 파괴하는 일을 막기 위해 경비원을 세워야 했고 1741년 홍수가 난 이후에는 다리가 부분적으로 무너져 소실된 그림들을 다시 채워넣어야 했기 때문이였다.  1993년 8월 화재가 발생하여 다리는 거의 모두 파괴되였다. 재건축은 몇 달이라는 짧은 시간 안에 이루어졌으며 오늘날의 다리는 예전과 완벽히 똑같은 복제품이다. 그림 또한 3분의 2가 파괴되여 화가들이 사진을 참조로 다시 그려야 했기 때문에 그림 교체 작업은 훨씬 더 오래 걸렸다고 한다. 다리옆의 수중에 있는 높이 34m의 팔각형 석조의 ‘물의 탑’은 등대를 겸한 루체른 방위 탑으로 위급할 때에는 시민에게 경종을 울려 알리는 종각으로18세기에는 감시탑, 감옥, 고문실, 금고실 등 다양한 용도로 사용되였는데 지금은 기념품을 파는 상점이 있다. 밤이 되면 다리 주변에 조명이 들어와 경관이 아름답다. 기차려행 18일 오전 7시반 우리는 루체룬에서 인터라켄(因特拉肯)을 향해 떠났는데 뻐스를 타고 8시반에 루체룬기차역에 도착하였다. 우리는 9시에 이 역으로부터 기차를 타고 기차려행을 하면서 인터라켄이란 작은 도시로 가게 되였다.                                                           루체룬 기차역 기차를 타려고 대합실로 들어 가 걸상에 앉았 기차를 기다리고 있는데 희귀한 일도 있었다. 아니 글쎄 참새들이 집안에서 날아 다니다가도 우리가 앉은 걸상밑으로도 아무런 경계심도 없이 왔가갔다 하며 뛰여다니지 않겠는가? 모양새는 우리 지방의 참새와 하나도 다른점이 없었지만 사람들과의 경계심은 우리 지방의 참새들과 완전히 달랐다. 우리 지방의 참새들이 지금은 어디에 둥지를 틀고 사는지는 몰라도 예전에 농촌에 모두 초가집일 때에는 처마밑에 둥지를 틀고 살았지만 그래도 사람과의 경계심은 대단했다. 1957년도에 우리 나라에서는 참새전멸운동까지 벌렸으니 말이까. 그러나 이곳의 참새들이 사람과 아무런 경계심도 없이 집비둘기처럼 사람의 주위를 뱅뱅 돈다는 것은 사람들의 동물보호의식에 따른 결과라고 밖에 볼수 없다고 생각되였다.              [다음 계속]  
84    서유럽 려행기 [17] 댓글:  조회:4609  추천:0  2020-02-03
서유럽 려행기 [17]   알프스산맥(阿尔卑斯山脉) 스위스 세관에서 입경수속을 받은 우리는 설산구경을 하려고 알프스산맥에 위치해 있는 필라투스산으로 행했다. 이번에 우리 려행을 하는 나라들은 전부 아프스산맥에 위치해 있는 나라들이다. 하여 가이드는 알프스산맥과 우리가 가려는 필라투스에 대해 소개를 하였다. 알프스산맥은 유럽의 중부에 있는 남서쪽 지중해의 제노바 만에서 북동쪽의 빈까지1,200㎞의 활 모양으로 뻗어 있는 산맥으로서 동쪽으로 방향을 바꾸는데 서부(프랑스 남동부와 이딸리아 북서부), 중부(이딸리아 중북부와 스위스 남부), 동부(독일, 슬로베니아, 오스트리아의 일부) 알프스로 나누어지며 각각 여러 개의 산맥들로 이루어져 있다. 산맥에서 가장 높은 산은 프랑스와 이딸리아의 국경에 있는 몽블랑산(勃朗峰, 해발 4,807m)이며 평균 해발고도는 2,500m이다. 3,000m 이상의 높은 고산지대에는 식물이 자라지 않으며 암석과 만년설이 덮여 있다. 필라투스산(皮拉图斯山) 필라투스산은 스위스 루체른의 남쪽으로 15㎞떨어지 곳에 있는 스위스 중부의 루체룬을 내려다 볼수 있는 알프스산의 봉우리이다. 필라투스산은 여러개의 산봉우리로 되여 있으며 주봉인 톰리스호른봉은 해발 2,132m이다. 필라투스산 이름의 유래에는 다음과 같은 전설이 있다. 기원 36년간에 명성이 높은 이스라엘 지역의 로마 총독 폰티우스 필라투스가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명령하였다고 한다. 당년에 로마 제국의 제2대 황제 티베리우스(提庇留)가 병이 걸리자 예수를 불러다 자기의 병을 치료하여 줄것을 요구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티베리우스는 예수가 필라투스에 의해 十자가에 못박혀 죽었다는것을 알고 폰티우스 필라투스를 체포하여 감옥에 가두게 하였다고 한다 감옥에 갇히운 폰티우스 필라투스는 자살을 하였다. 그리하여 그의 시체를 이딸리아의 테베레강에 버리자 인차 무서운 폭풍이 일어나면서 물이 범람하였다고 한다. 할 수 없이 그의 시체를 건져내 라인강에 던졌는데 라인강에서도 여전히 그런 현상이 나타났다고 한다. 그리여 사람들은 그의 시체를 먼산(지금의 필라투스산)의 작은 호수에 버렸다고 한다. 이렇게 하였지만 여전히 그의 유령이 란을 잃으켜 광풍이 휘몰아치며 호수의 배를 뒤집어놓았다. 이때부터 이 산을 그의 이름을 빌어 필라투스산이라고 하였으며 중세기까지 당지 사람들은 그의 유령을 건드릴가봐 그 산으로 올라가지 못한다는 금지령이 내리였다고 한다. 그러다가 1585년에 루체른에 교회에서 일찍 축출당한 한 목사가 한패의 용기있는 촌민들을 이끌고 산에 올라가 그 유령과 싸움을 벌리면서 호수에 돌을 가득 뿌렸다고 한다. 그러자 그 호수가 메워지고 그 유령이 다시 나타나지 않았고 이때로부터 필라투스산으로 올라가지 못한다는 금지령이 취소되였다고 한다. 그 호수도 지금은 말아버린 호수로 있다.   필라투스산   뻐스는 5시간 반 286㎞를 달려 오후 1시 20분에 필라투스산기슭에 도착하였다. 차에서 내리니 산기슭으로부터 구름이 꽉 내리드리우고 보슬비까지 오면서 산이 올리다 보이지 않았다. 매우 을씨년스러운 날씨였다. 우리는 모두 ‘이렇게 구름이 꽉 끼고야 어떻게 설산을 구경할 수 있는가? 아세아의 동쪽 중국의 가장 동쪽 끝에서 유럽의 서쪽 나라 스위스에 와서 그렇게 바라던 설산경관을 구경할수 없으니 정말 재수없다. 하필이면 왜 오늘 날씨가 이런가?’ 라며 실망의 소리로 한탄하니 가이드는 ‘그래도 올라가 보자 산꼭대기에 올라가면 혹시 설산을 볼수도 있다.’고 우리를 위안하는 것이였다. 우리는 가이드의 안내로 삭도를 타고 산꼭대기로 올라가는데 올라갈수록 구름은 떠욱 짙어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산꼭대기에 거의 오를 무렵 아마 8/10쯤 올랐을가 할때 삭도가 구름층을 뚫고 오르면서 푸른 하늘에서 해님이 우리를 반겨 방긋 웃으면서 눈부신 해살를 내리 뿜고 있었다. 우리는 너무나도 기뻐 모두 일제히 “야!” 하고 웨치였다 마치 비행기가 구름층을 뚫고 오르는것 같았다. 아래를 내려다보니 새하얀 구름층이 우리의 발밑에 있었는데 비행기에서 구름바다를 내려다 보는 것 같았다. 구름층을 뚫고 올라오니 발밑이 구름바다였다 산꼭대기에 다 올라 삭도에서 내리니 이곳은 해발 2000메터 좀 넘는 산이라 눈이 없었는데 저 멀리 사방에 모두 이보다 더 높은 수십개의 설산봉우리 보이였는데 그야말로 경관이였다. 산꼭대기에는 유람객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는데 모두 삼삼오오 핸드폰이며 카메라를 들고 저 멀리 설산봉우리와 운해를 배경으로 여러가지 포즈를 취하며 사진을 찍느라 야단법석이였다. 필라투스산에서 바라 본 알프스산의 설산봉우리들 우리는 산봉우리의 산책로를 따라 한 고패 빙돌면서 설산봉우리와 운해를 구경하였는데 산세가 너무 험한데는 어떤 곳은 안전란간을 둘렀고 어떤곳은 절벽이여서 산책로를 닦을 수 없는 곳은 짧은 산굴을 뚫어 산책로를 닦아놓아 그것도 유람에서의 하나의 경관이였다. 태산이나 말레시아의 운정고원(云顶高原)에서 본 운해서는 설산봉우리들이 없었지만 이 곳에서는 사지장철 녹지않은 무수한 설산봉우리들을 볼 수 있어 더욱경관이였다. 드문드문 이름모를 커다란 산새들이 구름바다우로 날아예고 있었는데 마치 바다에서 날아예는 갈매기를 방불케 하였다. 한국에서 온 한 유람객은 한국의 많은 높다한 설악산, 지리산, 한라산을 등산하여 보았지만 이렇게 많은 산봉우리들과 운해는 본적이 없다고 하였고 광동성에서 온 한 유람객은 텔레비죤에서나 눈과 설산을 보았을 뿐 이렇게 직적 제눈으로 흰 눈과 설산을 보기는 처음이라고 이번의 유럽유람에 대해 아주 흡족해 하였다. 그렇다 아열대 지방에서 사는 그들이 북방을 오지 않고서는 한평생 눈과 얼음을 볼 수 없는 사람들이라 희눈과 설산보우리들을 보고 우리보다 더 신기하게 느끼다는 것은 아주 필연적인 것으로 이상할 것이 없었다. 우리는 한시간 반 가량 여기에서 놀고 산아래로 내려와 4시에 루체른시로 떠났다. 삭도를 타고 내려오면서 본 필라투스산의 운해         [다음 계속]  
83    서유럽 려행기 [16] 댓글:  조회:4299  추천:0  2020-01-29
서유럽 려행기 [16]    중립국 스위스(瑞士)로 가다 17일 아침 7시 50분에 우리는 스위스의 루체른(卢塞恩)으로 향했다. 루체른으로 가는 도중 가이드는 스위스와 루체른의 개황을 소개하였다. 스위스는 중앙유럽에 있는 련방 공화국이고 내륙국이며 정식 명칭은 헬베티아 련방이지만 스위스 련방이라 부르기도 한다.  1848년에 스위스련방정부가 수립되였으며 면적은41,284km2이고 인구는 2018년도 통계로 850.89만 명이며 수도는 법률상으로 없으나 베른(伯尔尼)이 사실상 수도 기능을 하고 있으며 베른은 스위스에서 네 번째로 큰 도시이며 최대 도시는 취리히(苏黎世)이다. 스위스는  1815년 빈 회의(维也纳会议)를 통해 영구 중립국으로 인정받았고 이에 따라 유럽 연합(EU)에도 가입하지 않고 있으며 스위스의 중립 정책에 따라서 많은 국제 기구가 본부를 스위스에 두고 있다. 종족구성으로는 게르만족(65%), 프랑스인(18%), 이탈리아인(10%) 등이며 공용어 독일어, 프랑스어, 이딸리아어, 로만슈어(罗曼什语)이다. 국토의 대부분이 알프스산맥의 릉선에 걸쳐있어 높은 산과 얼음으로 덮여 있으며 고원과 깊은 계곡, 호수도 많다. 이때문에 세계적인 풍광을 자랑하는 관광지가 발달되였으며 세계 최고의 관광산업국가로 평가받는다. 전통적으로 시계, 공구 등 정밀기계 산업이 발달되였으며 락농업(乳品农业)도 세계적인 수준이다.     스위스의 락농업   스위스 시계 력사의 시초   스위스 시계 력사의 시초 시발점으로는 바로 종교개혁을 이끈 칼뱅 (加尔文, 1509~1564프랑스 태생의 스위스의 종교 개혁가)이다. 1509년 프랑스에서 태어난 칼뱅은 종교 박해를 피해 망명 중1536년 제네바에에 입성하여 불과 2년 후인 1538년 기존 교회와의 마찰로 제네바에서 추방당하게 되였다. 하지만 다시 제네바 시 의회의 합의로 1542년돌아와 1564사망까지 제네바의 목사로 살아갔다. 칼뱅교리는 목사로 있으면서 금욕(禁欲主义)를 주장하여 “사치품 금지법”을 내놓아 칼뱅의 금욕주의 여파로 제네바 성 피에르 대성당의 화려했던 벽화와 치장품 모두 없어지고 현재 수수한 모습으로 남게 되였다고 한다.   그러나 규칙적인 생활과 례배시간 엄수를 위해 "시계"는 사치품에서 제외되였다. 이 소식이 종교박해를 받던 이탈리아와 프랑스의   신교도 시계제작공들에게 알려지면서 일자리를 잃어가던 제네바의 보석상들과 결합하여 대량으로 시계생산에 들어가게 되였다.   모든 산업 발전에 전쟁을 빼놓을 수가 없듯이 1,2 차 세계 대전으로 그나마 정밀시계를 생산하던 프랑스, 독일, 영국, 이탈리아의 시계 산업은 항공 등 정밀도를 요구하는 군수산업 체계로 흡수되면서 그 력사가 끊어지고 중립국으로서의 스위스만 (소수의 독일과 이탈리아를 제외) 번창하게 되였으며 그후 스위스 시계는 혁신에 혁신을 거듭, 현재 스위스 시계의 명성을 이어 가고 있다. 1970년대까지 전 세계의 시계 과반수를 스위스에서 생산했다는 통계도 있다고 한다. 루체른(卢塞恩)   루체른은 스위스중부 루체른주에 있는 도시이며 루체른 주의 주도(州都)이다. 면적은24.2 km2이고 인구는 2017년의 통계로7.8만 명 이다. 루체른 호의 서안에 면하며 로이스강(罗伊斯河)이 시내를 흐른다. 알프스 산맥을 넘는 교통로의 요지로 발달하였다. 알프스 산맥(阿尔卑斯山脉)의 유명한 필라투스 산(皮拉图斯山) 기슭에 위치하여, 알프스 산맥과 루체른 호(卢塞恩湖)의 경치를 감상할 수 있는 유명한 관광지이다. 성당과 박물관을 비롯한 옛 건물도 많이 남아 있다.   루체른   독일과 스위스는 린접된 나라지만 독일의 퓌센(福森)에서 스위스로 가려면 오스트리아의 서북부경내를 경과하여 가는 것이 많이 가까운 거리로 된다. 하여 우리는 다시 오스트리아의 경내에 들어섰는데 가는 길에 지형을 보면 전부 구릉지대였으며 전부 잔디밭으로 되여 있었으며 드문드문 10여마리, 20여마리씩 되는 소무리들이 보일 뿐 사람은 한명도 못 봤다. 차가 2시간 20분 달려 10시 10분에 스위스경내에 들어서게 되였는데 스위스는 중립국이므로 유럽련합에 속하지 않기에 다른 나라와 달리 세관이 앉아 있었다. 세관이라 하여도 자그만한 2층짜리 농촌집 같은 것이 한채 달랑 있었는데 고속도로 수금소 보다도 통행이 엄하지 않았다.  고속도로 수금소에는 모두 통행차단대가 있어 금액이 지불되여야 통행차단대가 올라가면서 통차가 허락 될 수 있었지만 이곳은 세관이라 하여도  통행차단대도 없이 모든 차량들이 아무런 거침도 없이 나가고 들어 오고 있었다. 아마 이런 차들은 이미전에 다 출입경수속을 밟은 것 같았다.    스위스의 세관   우리 뻐스는 처음으로 스위스로 들어 오는 것만큼 입경수속을 밟아야 했다. 하여 우리의 인솔자가 입경수속을 하려고 차에서 내리니 세관공작인원이 한사람도 없었다. 마침 우리가 간 날이 토요일이여서 휴식이라는 것이였다. 그러자 내가 “그러면 입경수속이 없이 들어가면 안되는가?”고 하니 인솔자가 말하는 것이 “그래도 되는데 그러다가 만약의 경우에 스위스경찰의 검사에 걸리면 엄청난 벌금”이라는 것이였다. 하여 우리는 스위스 국경의 변두리를 따라 이보다 좀 큰 세관에 가서 입경수속을 하였다. 스위스는 비록 세관이 있다지만 통관검사는 없었다. 매개 사람에 대한 려권검사도 안전검사도 없었고 물건검사도 없었으며 우리는 뻐스에서 내리지도 않았고 공작인원이 뻐스에 올라와서 사람인수도 확인하지 않았다. 다만 우리의 인솔자가 매개 사람의 려권복사본을 가지고 세관에 들어가 입경수속을 하면 되는것이였다. 인솔자가 입경허가증을 받아가지고 나오자 우리는 시름놓고 스위스 경내로 달리였다.       [다음계속]
82    서유럽 려행기 [15] 댓글:  조회:4275  추천:0  2020-01-24
 서유럽 려행기 [15]  서재에는 탄호이저(바그너가 작곡한 오페라. 독일의 중세 때에 기사이자 음유시인인 탄호이저가 마녀의 유혹에 빠져 관능의 포로가 되였으나 애인 엘리자베트의 순수한 사랑과 그녀의 죽음에 의하여 령혼의 구원을 얻는다는 내용이다.)의 모험담을 그려놓았으며 큰 응접실에는 백조의 기사(중세 유럽에서, 봉건 영주에 딸린 무사) 로엔그린(바그너의 랑만적 오페라)과 그의 아버지를 주제로 한 그림으로 꾸며 놓았다. 4층 음악실 벽에는 성배의 왕인 파르시팔(중세의 아서 왕 전설에서 성배를 찾으러 나선 기사)의 생애를 묘사 한 벽화로 채워졌는데 모두 바그너의 음악에 나오는 인물들이였다. 이런 벽화들을 보노라면 루트비히 2세가 다분히 바그너에게 정신을 빼앗기고 있었음을 느낄 수 있었다. 벽과 바닥에는 그림이나 장식이 없는 곳이 없고 푸른색의 둥근 천장은 별들로 장식했으며 붉은 반암으로 만든 둥근 기둥이 그 천장을 떠받치고 있다. 루트비히 2세의 침실은 특히 호화롭다. 루트비히 2세는 노이슈바인슈타인성을 유럽에서 가장 화려한 성으로 만들기 위해 최고의 가구와 장식을 구입했다. 여기에 당대의 최신 과학기술을 리용한 시설들도 있었는데 수세식 화장실, 중앙난방시설, 음식을 나르는 선반, 엘리베이터 등 전기를 리용한 각종 시설은 물론 전화까지 설치했다. 그리고 뾰족탑, 망루, 인공동굴을 갖추고 있다. 높은 산 우에 세워진  이 성은 오페라 〈로엔그린〉에 나오는 백조의 전설을 토대로 했기 때문에 성 곳곳에 백조를 주제로 한 구조물이 있어 “백조의 성”이라고도 한다.  루트비히 2세가 바그너를 워낙 총애한 나머지 국고를 랑비하고 바그너가 정치에 개입할 수 있을 정도가 되자 국민들과 궁정 관리들은 바그너를 단호히 거부했다. 결국 루트비히 2세는 1885년 바그너에게 바이에른을 떠나달라고 요청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해마다 여러 곳에 궁성 건축을 위해 약 150만 마르크를 사용했는데 그 정도로는 그의 계획을 이룰 수 없었다. 빚이 눈덩이처럼 불어난 루트비히 2세는 국가 예산마저 랑비하게 되고 결국 반대자들에 의해 1886년 6월 9일 금치산자(자기 행위의 결과를 판단할 능력이 없어서 일정한 자의 청구에 의해 가정 법원으로부터 자기 재산을 관리하고 처분할 수 없도록 법률적으로 선고를 받은 자)로 선고를 받았다. 네 명의 정신과 의사는 루트비히 2세를 검사하지 않은 채 정신병자라고 결론지었다. 그들은 노이슈반슈타인성을 건설하려는 것 자체가 정신병의 결정적인 증거라고 했다. 하여 그는 강제적으로 퇴위당하였다. 정신병자 판정을 받고서 강제로 퇴위당한 후3일 만에 루트비히 2세는 슈타른베르거 호수에 빠져 익사했다. 죽음은 자살로 공식 발표되였으나 실제로는 많은 의문점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노이슈반슈타인 성은 1892년 완성되였고 결과적으로 그는 성의 완공을 보지 못하고 죽음을 맞이 했다. 루트비히 2세는 성이 관광지 따위로 전락하는 것을 원하지 않다고 자신이 죽으면 성을 허물어 버리라고 유언을 했고 한다. 당시에는 나라의 재정을 돌보지 않고 성을 짓는 데만 빠져서 ‘미친 왕’이라 불리우며 강제퇴위를 당하였고 그는 죽음으로 끝을 맺었지만 성은 허물어 지지 않고 그의 광기 덕분에 지금은 훌륭한 관광명소로 되였고 후손들은 관광 수입만으로도 엄청난 혜택을 보고 있다.   호엔슈방가우 성(旧天鹅堡) 노이슈반슈타인 성에서 얼마 멀지 않은 곳에 서로 마주 볼수 있는 또 하나의 성이 있는데 이것이 바로 호엔슈방가우 성(旧天鹅堡)이다. 호엔슈방가우 성 이 성은  원래 중세 때 지어진 기사(중세 유럽에서 봉건 령주에 딸린 무사)의 성이였는데 몇 차례나 주인이 바뀌다가16세기에 이르러 당시의 기사들이 전부 사망되고 호엔슈방가우 성은 붕괴되기 시작하였으며 게다가 1800년 ~ 1809년 나쁠레온전쟁에서 엄중하게 파괴된것을 왕이자 노이슈반슈타인 성을 건립한 루트비히 2세의 아버지인 막시밀리안 2세가 이곳이 지세가 좋다고 하여 1832  ~ 1836년에 걸쳐 신고딕 양식으로 재건축하여 지금의 모습으로 되였다고 한다. 이 성은 실제로 왕 내외의 거처로 사용되였고 루드비히 2세가 이곳에서 자랐는데 그는 이 성의 아름다움을 보면서 자신이 아버지보다 더 아름다운 성을 짓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성장하게 되였고 후날 왕이 된 후에도 이곳에 머물며 노이슈반슈타인 성의 건설과정을 지켜보았다고 한다. 밤에 본 호엔슈방가우 성   내부의 구조를 보면 지금은 기도대청, 당구유희청, 왕후의 화장실, 왕후 서재, 왕후의 일상생활을 하는 방, 국왕의 탈의실, 침실, 기사방, 응접실, 음악실, 도서실 등이 있다.   기도대청은 원래 무기실과 물마이는 곳이였으나 막시밀리안 2세에 의해 신고딕 양식으로 기도실로 재건되였으며 지금도 여기에서 일요일과 명절이면 성제(聖祭)를 거행한다. 당구유희청은 원래 왕의 접견을 받을 때의 대기실이였으며 이 실내 벽화는 당시의 기사 로엔그린의 전설중의 정경을 그린것이였는데 형식상에서는 랑만주의가 선명하게 나타나고 있다. 독일 퓌센에서의 노이슈반슈타인 성과 호엔슈방가우 성의 관광은 이로서 끝이 나고 호텔로 향하였다.    퓌센호텔            [다음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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