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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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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0    대약진시대에 벌어진 황당한 일들 댓글:  조회:5799  추천:0  2017-05-21
대약진시대에 벌어진 황당한 일들   중공중앙정치국은 1958년 8월에 북대하에서 확대회의를 열었다. 회의후에 중국은 “영국을 따라잡고 미국을 초과한다”는 구호를 내걸고 전민이 강철을 제련하는(全民炼钢)운동과 농촌인민공사화운동을 시작했다. 그 시기의 대약진운동에서 별의별 기이한 일들이 다 발생되였다. 《염황춘추》 2006년 제8기에 실린 리개원이 쓴 글을 보면 대약진기간중에 많은 간부들은 기층에 내려가서 선전하고 공산주의인민공사의 아름다운 미래를 묘사했다. 당시 국무원의 한 부총리는 하남성 수평현에서 아주 구체적으로 연설했다. 그는 인민공사의 좋은 점을 다음과 같이 얘기했다: “첫째, 좋은 먹을거리는 배만 채우는것이 아닙니다. 매끼에 돼지고기, 닭고기, 물고기, 닭알이 있을것이며 더욱 멋진 음식도 있을것입니다. 례를 들면 원숭이머리, 제비집(燕窝), 해산물 등도 필요한만큼 공급합니다. 둘째, 옷을 입는것도 모두 원하는대로 만족시켜 드립니다. 하나같이 검은색이나 푸른색이 아닌 각종 색갈과 모양의 옷이 있습니다. 멀리 않은 장래에는 보통옷은 그냥 업무복으로 사용하고 퇴근하면 사람들은 가죽옷, 나일론옷, 양털옷으로 갈아입을것입니다. 인민공사는 모두 여우를 키워서 여우가죽옷을 만들어입을것입니다. 셋째, 집은 현대도시의 기준에 맞춥니다. 현대화가 무엇입니까? 인민공사입니다. 집의 북쪽에는 난방설비를 하고 남쪽에는 랭방설비를 합니다 .사람들은 모두 높은 건물에 사는것은 더 말할것도 없고 안에는 전등, 전화, 상수도, 무선전화와 텔레비죤이 있을것입니다. 넷째, 달리기선수를 제외하고는 려행객이나 행인들이 모두 교통수단을 가지게 될것입니다. 항공로선도 각방향으로 다 다닐것이고 모든 성에는 비행장을 만들고 모든 지방에 비행기공장이 세워질 날도 멀지 않았습니다. 다섯재, 모든 사람은 고등교육을 받을것입니다. 교육은 이미 보급되였습니다.” 당시 중앙정치국 후보위원이던 강생은 “공산주의는 천당이고 인민공사는 교량”이라고 허튼소리를 치기도 했다. 먼저 인민공사라는 교량을 세운후 다리를 넘어가면 바로 공산주의라는것이였다. 하북성 서수현에서는 인민공사대식당을 건설하자는 기치를 높이 들고 먼저 “밥먹는것은 무상”이라는 구호를 내걸었다. 전현에 6.4만여호의 주민호와 32만명의 인구, 248개의 농업합작사가 있었다. 대약진기간중에 전현에 모두 1777개의 공공식당을 만들어 28.5만명이 식당에서 밥을 먹었다. 이렇게 전현의 식당화를 실현했다. 서로 다른 업무, 임무의 필요에 따르기 위하여 이외에 야외전투군인식당 1410개, 유아식당 119개, 로년식당 248개도 내왔다. 가가호호 모두 쌓아두었던 량식을 무상으로 식당에 헌납했다. 나중에 인민공사라는 이 교량은 900만평방킬로메터의 중국대지 곳곳에 세워졌다. 공공식당도 전국각지에 생겨났다. 그러나 좋은 시절은 오래 가지 못했다. 인민들이 다리를 건너가고 나서 보게 된것은 꿈에 그리던 천당과는 완전히 상반된 광경이였다. 원숭이머리, 제비집료리, 해산물은 고사하고 멀건 죽마저도 먹을수 없게 된것이다. 대약진은 전방위적으로 시작되였다. 교육도 례외가 아니였다. 새로운 공장은 학교를 둘수 있다. 중학생을 모집해서 여기서 공부한다. 한 공장이 바로 하나의 대학이다. 하루에 몇시간은 공부하고 몇시간은 일한다. 공장이 바로 학교이고 학교가 바로 공장이다. 나중에 졸업하면 대학을 졸업한 동시에 기술자가 되는것이다. 이것도 공산주의로 가는 하나의 조건이였다. 하남성 방성현 성관진에는 모두 1.1만명 인구가 있었는데 몇개월내에 종합홍전대학, 위생학교, 희극학원, 음악학원, 무도학원, 사범 등 9개의 전문학교가 설립되였다. 각종 공농대학, 홍전대학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났다. 1958년 7월부터 10월까지 대약진기간동안 강생은 중앙문교소조(中央文教小组) 부조장의 신분으로 북경과 하남성의 일부학교를 시찰하면서 “교육혁명”의 진행상황을 파악했다. 북경사범대학에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사범대학은 두가지 임무가 있습니다. 하나는 학교를 운영하는것이고 하나는 공장을 운영하는것입니다. 모든 반은 공장을 하나씩 운영해야 합니다. 학교는 소학교, 중학교에서 대학교까지 해야 합니다.” 1958년에는 이런 일하고 공부하는 학교를 적어도 100개를 만들려고 하였는데 설립할 상황이 되는지 안되는지에 대해서는 전혀 신경쓰지 않았다. 강생은 농업생산에서도 “사람이 얼마나 대담하게 하는지에 따라 땅은 그만큼 생산해준다”고 했었는데 설마 교육도 “사람이 얼마나 대담하게 하는지에 따라 학교도 얼마든지 설립할수 있다”는것인가? 교수를 평가하는데 있어서 강생은 “대약진”중에 아주 황당한 견해를 밝힌바 있다. 그는 북경농업대학을 시찰할 때 명확하게 지시했다: “학교는 최소한 학교, 공장, 농장, 연구소, 농업국 5개의 간판을 내걸어야 한다. 만일 10여개의 간판을 내걸수 있으면 더 좋다. 교수는 심는 작물의 생산량에 따라 급을 평가해야 한다. 무당 1000근을 생산하면 5급교수이다. 2000근이면 4급교수, 3000근이면 3급교수, 4000근이면 2급교수, 5000근이면 1급교수이다.” 1958년 8월 4일에 하북성 서수현 당위서기는 시찰을 내려온 중앙수장에게 이렇게 보고했다: “금년의 전현 평균무당생산량은 2000근에 달했습니다. 총생산량은 12억근입니다.” 이외에 그는 또 허풍을 떨어 “1개의 배추가 520근이고 보리는 무당 12만근이며 면화는 무당 5000근을 생산합니다”라고 보고했다. 중앙수장이 이렇게 물었다: “그렇게 많은 량식을 거두었습니까? 당신들의 전체 현이 31만명인데 어떻게 그렇게 많은 량식을 다 먹을수 있겠습니까? 당신들은 량식이 너무 많으면 어떻게 합니까?” “량식이 많으면 기계와 바꿉니다.” “기계와 바꿔도 다 안되면 어떻게 합니까? 당신들의 량식이 남아돌더라도 다른 사람들이 기계와 바꾸지 않으려고 하면 어떻게 합니까?” “그러면 우리는 산약(山药)으로 알콜을 만듭니다.” “모든 현마다 알콜을 만들면 그렇게 많은 알콜을 어디에 쓰려고?” “우리는 그저 어떻게 하면 더 많은 량식을 얻을지만 생각하고있습니다. 그리고 어떻게 먹어치울지는 생각하지 않고있습니다. 사실 량식이 많으면 좋지 않습니까? 많아서 국가가 필요없다고 하고 아무도 필요없다고 하면 인민공사사원들끼리 많이 먹으면 됩니다. 하루에 다섯끼도 먹을수 있습니다.” “전인민이 강철을 제련하라”는것은 대약진의 핵심이였다. 1958년 1월 하순에 북경에서 개최된 최고국무회의에서 이렇게 제안했다: “15년후에 4000만톤의 강철, 5억톤의 석탄, 4000만킬로와트의 전기를 만들어야 한다.” 이때로부터 보수사상을 비판하기 시작했다. 1958년 6월 21일에는 야금부가 대약진의 사상지도에 따라 중앙에 보고했다. 1959년의 강철생산량은 3000만톤을 초과할수 있고 1962년에는 8000~9000만톤에 이를수 있다고 보고했다. 이 보고서는 전국에 돌려지면서 선전되였다. 중공중앙은 그해 8월 17일부터 30일까지 북대하에서 거행된 정치국확대회의에서 “전당전민이 1070만톤강철생산을 위하여 분투할것을 호소함”이라는 문건을 채택했다. 전인민의 강철제련은 불꽃처럼 전국으로 번져갔다. 심지어 중남해의 안에도 작은 고로(小土炉)를 가설했다. 농촌이나 도시나 할것없이 모든 곳에서 작은 고로를 가설하고 강철생산을 시작했다. 국가기관의 마당, 공장, 학교, 거리에는 모두 강철제련의 열기가 뿜어져나왔다. 북경, 상해 등 11개도시의 18개 대학에서만 매년 69.2만톤의 강철을 제련할수 있었는데 이는 1949년 전국강철생산량의 4.38배였다. 제남시의 중학교에서는 1주일내에 77개의 소형고로를 만들었다. 할빈시의 19중학교에서는 10명의 대원이 5일만에 강철제련기술을 익혔고 하루만에 작은 공장을 지었다. 그리고 하루반나절만에 강철제련설비를 가설했으며 전교의 지원하에 3일만에 3000여근의 페철을 만들어냈다. 이리하여 “소년위성강철제련공장”이 생긴것이다. 1958년 7월중순에 첫번째 쇠물이 녹아져나왔다. 이 작은 공장의 년간생산품은 1800대의 뜨락또르부속품으로 사용되였다. 어린아이들이 10여일만에 야금기술자가 되다니 어찌 기적이 아니겠는가? 그 시기에는 누구나 강철을 제련할수 있었다. 어느 시의 중산로에는 10여명의 가정주부가 맨손으로 일어나서 기술도 모르고 재료도 없는데 그날로 소형고로를 만들었고 그날로 강철을 만들어냈다. 의과대학부속병원의 의사, 간호사들은 환자를 돌보지 않고 병원내에서 고로를 만들고 철강을 만들어냈다. 이런 가지가지 황당한 일들이 대약진시기에 일어났다. 리성적으로 보면 이런것들은 모두 말도 안되는 일이였지만 당시에는 이런 거짓말이 횡행했다. 아마도 거짓말도 백번을 중복하면 진리로 바뀌나보다.  
159    미녀라면 사족을 못쓴 조조 댓글:  조회:6142  추천:2  2017-03-19
미녀라면 사족을 못쓴 조조     조조(155~220년)는 미녀라면 사족을 못쓰는 위인이여서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손에 넣지 않고는 배기지 못했다. 출신성분도 가리지 않았다. 창기든 유부녀든 눈에 들기만 하면 방법을 대여 손에 넣고야 말았다. 후일 조비를 낳아 황후가 된 변부인은 창기출신이였지만 그녀의 미모에 반한 조조는 그녀의 신분이 천하다고 해서 꺼리지 않고 부인으로 맞아들였다. 두부인의 경우는 더욱 한심했다. 그녀는 남편이 멀쩡히 두눈을 펀히 뜨고 살아있는 유부녀였다. 류비가 조조와 함께 하비성에서 려포를 포위했을 때의 일이였다. 하루는 관우가 조조를 찾아왔다. 조조는 느닷없이 찾아온 관우를 의아한 눈길로 바라보았다. 그러자 관우는 조조를 보고 낮은 소리로 부탁했다. “려포의 부장중에 진의록이라는 자가 있는데 이제 우리가 이겨 성이 함락되면 그의 처를 나에게 주십시오.” “허허, 이제보니 운장도 어지간히 녀색을 밝히는구려. 그러지요.” 조조는 흔쾌히 허락했다. 그런데 성이 곧 함락되려고 하자 관우가 몇번 더 찾아와서 “진의록의 처를 꼭 나한테 줘야 합니다”라고 다짐을 받았다. 조조는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도대체 진의록의 처가 어떤 미인이기에 저 관우라는 사내를 이토록 애태우게 했을가? 려포가 항복하고 성이 함락되자 조조는 장난삼아 먼저 진의록의 처를 데려오게 했다. 보니 대단한 미인이였다. 그녀가 다른 사람의 처였고 관우가 달라고 부탁했지만 그녀의 뛰여난 미모에 반한 조조는 다른것을 고려할 겨를이 없었다. 진의록의 처라고 하지만 미인은 전리품이니까 승자가 가지는것은 당연하지. 비록 관우가 먼저 탐내서 달라고 했지만 내 마음을 설례이게 한 미인을 어찌 그에게 내줄수 있겠는가? 먼저 차지한게 임자지! 그래서 조조는 그녀를 자신의 첩으로 삼았다. 후일 조조의 비빈이 된 두부인이 바로 그녀였다. 조조는 두부인을 꽤나 사랑했었던것 같다. 두씨가 조조의 첩이 되였을 때 이미 진의록과의 사이에서 낳은 진랑이라는 아들이 하나 있었다. 조조는 진랑을 아들처럼 궁에서 키우며 심히 예뻐했다. 매번 손님들을 맞을 때마다 무릎에 앉히고는 이렇게 말하군 했다. “세상에 나처럼 의붓자식을 친아들처럼 사랑하는 사람이 또 있을가?” 한편 련모했던 녀인을 빼앗긴 관우는 깊은 원한을 품었다. 후일 관우가 조조의 후한 대우에도 불구하고 끝내 그에게 심복하지 않은 까닭이 여기에 있다. 세상에 사랑하는 녀인을 빼앗아간 사람의 밑에서 일하고싶은 사람이 어디에 있겠는가? 관우는 간적 조조를 도모해 중원을 되찾고 한나라 황실을 회복하겠다고 거창한 구호를 내걸었다. 하지만 그것은 꿈에 지나지 않았다. 조조는 미녀를 좋아한 덕분에 무려 25명이나 되는 아들과 6명의 딸을 얻을수 있었지만 그 과정에서 평생의 원한을 사기도 하고 목숨을 잃을번하기도 했다. 진의록의 처 두부인을 빼앗았다가 관우에게 한을 품게 했던 일도 조조에게 교훈이 되지 않았다. 장제가 죽자 과부된 추씨를 슬쩍 취했다가 거의 죽을번했던 적도 있었다. 표기장군 장제는 홍농에 주둔하고있을 때 사졸들이 굶주려서 남쪽의 성을 공격하던중 날아오는 화살에 맞아 죽고말았다. 장제의 부인 추씨는 장제의 조카인 장수에게 의지했다. 조조가 남정할 때에 군대가 육수에 이르자 장수가 무리를 이끌고 항복하였다. 그때 과부 추씨를 본 조조는 첫눈에 반하여 그날밤으로 그녀를 품었다. 조조가 자신의 숙모를 건드린것을 알게 된 장수는 치욕을 느끼고 조조에게 원한을 품었다. 조조는 그것을 알고 몰래 장수를 죽이려는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계책이 새여나가 장수가 조조를 엄습하였다. 장수는 조조가 추씨에게 빠져 음탕한 놀이를 하는 틈을 타서 기습공격을 감행했다. 그 싸움에서 전위가 조조를 지키다가 죽고 조조는 뒤문으로 달아났다. 도망칠 때 조조의 조카 조안민이 란도질 당해 죽었다. 조조의 맏아들 조앙도 조조를 구하자마자 장수의 군사들의 손에 죽고말았다. 조조의 맏아들 조앙은 유부인의 소생이였다. 그러나 유부인이 일찍 죽었기에 정실부인인 정부인이 조앙을 맡아 키웠다. 자식이 없었던 정부인은 조앙을 친자식처럼 정성껏 키웠다. 정부인은 조조가 장수의 숙모와 염문을 뿌렸다가 조앙을 죽게 하고 홀로 살아 돌아온것에 몹시 분개했다. 그녀는 조조를 볼 때마다 늘 이렇게 바가지를 긁군 했다. “내 아들을 데려가 죽이고는 혼자 살아 돌아오다니 어찌 그럴수가 있습니까!?” 조조는 이 말을 들을 때마다 마음이 몹시 괴로왔다. 그런 잔소리에 견딜수 없었던 조조는 정부인을 친정으로 돌려보냈다. 정부인이 기가 좀 꺾이면 다시 데려올 생각이였다. 정부인은 조조와의 화해를 거부하고 돌아오려고 하지 않았다. 조조가 직접 정부인의 친정집으로 찾아갔을 때 정부인은 베틀에 앉아 베를 짜고있었다. 조조는 정부인의 등을 부드럽게 어루만지면서 달랬다. “나를 좀 보아서 함께 집에 돌아갑시다!” 정부인은 고개를 돌리지도 않았다. 조조는 발길을 돌려 나가다가 문지방에 서서 다시 말을 걸었다. “정말로 헤여지자는것이요?” 아무 대답이 없자 조조는 하는수 없이 관계를 끊었다. 정부인은 남은 여생을 길쌈을 해서 자급했다. 조조는 정부인을 쫓은것이 끝내 마음에 걸렸었던 모양이였다. 나중에 병이 깊어져 스스로 다시 일어날수 없게 되였을 때 조조는 깊이 탄식했다. “내가 평생에 뜻대로 살았지만 크게 마음에 빚진 일이 없었다. 다만 내가 죽어서 저 세상에 가서 맏아들 조앙을 만났을 때 그 애가 ‘저의 어머니는 어디에 계십니까?’라고 묻는다면 내가 장차 뭐라 대답해야 할가?!” 조조는 처음부터 반역을 꿈꾸었던 적이 없었다. 그는 죽는날까지 한나라의 충신으로 남기를 원했던 사람이였다. 그의 꿈은 자신이 죽었을 때 묘비명에 “한나라 고 정서장군(征西将军) 조후지묘(曹侯之墓)”라고 쓰이기를 소망했다. 단지 시대가 그를 한나라를 빼앗은 역적으로 만들었을뿐이다. 조조가 적벽대전에서 패하고 돌아오자 한나라 조정에서는 새로운 여론이 일어났다. 조조는 이미 큰 공을 이뤘으니 이제 2선으로 후퇴해야 한다고…그동안 조조의 위력과 업적에 눌려 잠잠하던 한나라황실과 문벌이 높은 조정대신들의 합작품이였다. 헌제는 조조의 공적을 기린다는 명목으로 3개의 현을 식읍으로 내려주었고 문벌이 높은 조정대신들은 패전으로 한 날개가 꺾인 조조에게 이제 할만큼 했으니 군국의 대권을 내놓고 초야로 돌아가라고 은근히 압력을 가했다. 이에 대해 조조는 자신의 뜻을 분명하고 솔직하게 밝혔다. “만약 국가에 내가 없다면 얼마나 많은 자들이 황제를 칭할지, 또 얼마나 많은 자들이 왕을 칭할지 모른다. 제군들은 내가 곧 병권을 넘겨주고 국사를 맡아 다스리는 일에서 물러나 무평후국(武平侯國)으로 귀향하기를 바라고있다. 이는 실질적으로 불가능하다. 어째서인가? 진실로 내가 병권을 놓게 되면 다른 사람들에게 화를 당할것이 두렵기때문이다. 또 내 몸이 패망하는 즉시 국가가 위태로운 지경에 빠질것이므로 허명을 사모하여 실질적인 화를 부르는것을 옳다고 할수 없으니 그렇게 할수는 없다.” 여기서 “차라리 내가 세상을 저버릴지언정 세상이 나를 저버리지 못하게 하겠다”라는 조조의 립장이 잘 표현되여있다. 조조가 주공과 같은 성현처럼 후세사람들에게 추앙을 받기를 원했었더라면 이때 조정의 의론에 따라 군국의 대권을 반납했어야 했다. 그러나 조조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조조가 군국의 대권을 내놓고 고향으로 돌아갔다면 그 자신과 가족의 생명안전을 결코 보장받지 못했을것이다. 또 시대적상황으로 볼 때 조조가 아니더라도 다른 실력자가 결국은 한나라를 패망시키고 황제의 지위를 빼앗았을것이다. 한나라는 이미 스스로 멸망한 상태였기때문이였다. 한나라는 국가의 가장 기본적인 기능인 국가안정보장과 질서유지에 철저히 실패함으로써 백성들의 생존자체를 위협에 빠뜨렸다. 조조에게 국가의 모든 권력이 집중된것은 이러한 혼란상황을 극복하려고 동분서주한 결과였을뿐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조조가 어떻게 권력을 내놓고 초야로 돌아갈수 있단말인가? 이런 리유로 조조는 희대의 “악당”이요 “역적”이 되였다. 그러나 인민의 삶을 도탄에 빠뜨린 한나라의 황실을 부흥하겠다고 해야만 정의의 편이라고 할수 있을가? 《삼국연의》에서는 조조를 역적이라고 욕했지만 력사학자들은 조조를 영웅이라고 재평가했다.    
158    모택동은 왜서 대약진착오를 승인했는가? 댓글:  조회:5537  추천:0  2017-02-19
모택동은 왜서 대약진착오를 승인했는가?     1960년 여름이 되여 모택동은 압력을 느꼈다. 그는 자신이 창도한 “대약진”과 인민공사운동중에서 일부 일처리방법과 구호에 대해 확신이 없었고 동요하기 시작했다. 지금의 젊은이들은 상상할수도 없지만 1959년 봄에 중남해의 중앙지도자들의 집에는 비서가 지도자들에게 식량분량을 자보받아 그 표준대로 공급하는 일이 벌어졌다. 당시 국가에서는 매개 도시인구에 규정된 배급식량을 최저한도로 감소하고 량식배급에 대해 저표준분량으로 정할것을 요구했으며 남새로 량식을 대체하게 했다. 당시에 몸이 웅장한 모택동이 자보한 정량은 매달 26근이였고 류소기가 18근, 주은래가 24근, 주덕이 26근이였다. 이 정황이 중앙의 각 당지부와 당소조에 알려진후 모두들 중앙고위급지도자들의 식량표준이 너무 낮다고 인정하면서 적어도 절대 대부분 남성간부들의 식량표준(28근)과 같아야 한다고 했다. 그러나 중앙지도자들은 모두 만족된다고 하면서 변동하지 말라고 견지했다. 그리하여 그들이 자보한 분량만큼 그들에게 량표(粮票)를 발급했다. 이런 국면은 하루 아침에 조성된것이 아니였다. 1958년부터 “대약진”을 시작하면서 1959년에 모택동은 또 착오적인 려산회의에서의 투쟁을 발동했다. 그번의 “반우경”운동은 극좌사조가 늘어나게 만들어 짧디짧은 3년내에 국민경제가 엄중하게 불균형을 이루었고 전국적으로 량식이 대폭 줄어들었으며 삼림이 엄중하게 파괴되였을뿐만아니라 농민들이 기아에 시달렸고 질병이 련이어 발생했다. 그 시기 굶어죽고 질병에 죽는 사람들이 부지기수였다. 모택동은 백성들이 기아에 시달리고 굶어죽는다는 소식을 들은후 근심걱정으로 애가 타서 안절부절못했다. 1960년 6월 14일부터 18일까지 중공중앙에서는 상해에서 정치국확대회의를 열고 경제문제와 국제문제에 대해 토론했다. 회의의 마지막날에 모택동은 두시간에 거쳐 《10년총결》을 써냈다. 말이 10년총결이 사실은 주요하게 3년동안의 대약진총결이였다. 그날 오후의 페막식에서 모택동은 3년보충계획지표와 《10년총결》에 대해 연설했다. 모택동은 《10년총결》에서 자아비판을 했다. “나 자신도 많은 착오가 있었습니다. 어떤것은 당사자와 함께 범한것입니다.” 모택동은 고지표는 결심하고 고쳐야 합니다. 고쳐야만 완전히 주동을 쟁취할수 있습니다. 주동권은 극히 중요한 일입니다.” 모택동은 또 사회주의시기의 혁명과 건설에 있어서 매우 큰 맹목성이 있었고 인식하지 못한것이 있었다고 승인했다. 그는 “우리는 아직도 그에 대해 심각하게 인식하지 못하고있는데 두번째 10년기간에 조사연구하여 그에 대한 고유의 규률를 찾아내야 하며 그 규률을 리용하여 사회주의혁명과 건설을 위해 복무해야 한다”고 말했다. 《10년총결》은 모택동이 처음이자 유일하게 계통적으로 3년동안의 대약진을 총결한 문장이였고 또 그 자신이 처음으로 “대약진”과 인민공사운동중에서 착오가 있었다는것을 승인한 중요문헌이였다. 하지만 당시의 정황에서 모택동은 지도사상상의 “좌”적인 착오를 인식하지 못했고 또 인식할수도 없었다. 설상가상으로 쏘련에서 재중전문가를 전부 철수시키는 엄중한 문제가 발생되였다. 당시 중국을 도와주려고 온 쏘련전문가는 모두 1300명이 있었는데 경제, 국방, 문교, 과학연구 등 200여개 기업과 부문에 분포되여있었다. 그들이 전부 철수하면 중국의 일부 중대한 설계항목과 과학연구항목이 중도에서 중단하게 되고 일부 시공중에 있는 건설항목도 중지하게 되며 일부 실험생산에 들어간 공장과 광산도 기한내에 생산에 들어가지 못하게 된다. 이는 곤경에 처한 중국경제에 설상가상이 아닐수 없었다. 1960년 7월 31일에 모택동의 주최하에 주은래는 회의에서 쏘련전문가들이 철수한 문제와 외교무역문제에 대해 보고했다. 후르쑈브가 고압정책을 쓰며 핍박하자 모두 허리띠를 졸라매고 빚을 물어야 한다고 했다. 모택동은 묵묵히 줄담배만 피우다가 마지막에 “명년내로 빚을 다 갚읍시다”라고 말했다. 회의의 마지막날에 모태동은 1시간동안의 강화를 했는데 국내문제에 대해 말하다가 갑자기 량식생산을 틀어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모택동은 전답관리를 잘하고 가을걷이, 가을곡식심기를 잘하며 량식을 많이 심고 량식을 많이 생산하라고 지시했다. 백성은 식량을 생존의 근본으로 여긴다고 먹는 문제가 첫째였다. 농촌인민공사가 급히 “공산주의”로 과도한다는 바람이 부는 정황에 대해 “생산자료는 각각 인민공사, 생산대대, 생산대 3급에 속하고 생산대로 기초로 한다”는 정책은 적어도 5년은 변하지 않습니다. 그러니 5년후에 다시 말합시다. 꼭 개인소유제부분이 있어야 하고 사원들에게 약간의 자류지를 주어야 합니다. ‘대집체, 소자유’는 1958년 무창회의결의때 제기한것인데 이 점을 꼭 명심해야 합니다. 오늘 내가 한 말은 나 개인의 의견이 아니고 우리가 과거에 공동을 결정한것입니다. 그리고 중앙에서 지시한것인데 오늘 내가 다시 한번 중복한것입니다.” 모택동이 이런 정책을 재차 천명한것은 당의 농촌정책이 앞으로 새로운 조정이 있게 된다는것을 예시했다. 세심한 사람들은 모택동이 회의에서 한마디말밖에 하지 않았다는것에 주의를 돌렸을것이다. 북대하에서 회의를 하는 한달남짓한 기간에 모택동이 바다에 들어가 수영을 한 차수는 5~6번밖에 되지 않았는데 이는 이왕에 매우 드문 일이였다. 과연 모택동의 심정은 매우 무거웠다. 그는 늘 혼자서 오래동안 쏘파에 앉아서 침묵을 지키군 했다. 잠도 잘 자지 못했다. 국제상에서 쏘련 등 방면에서 압력을 가하고 국내에서는 당초 예상하지 못했던 수습하기 어려운 경제국면이 나타났다. 1960년 10월에 들어선후 일부 농촌에서 사람이 굶어죽는 엄중한 사건이 갈수록 많아지고있다는 정황이 모택동한테까지 반영되였다. 그 정도로 문제가 엄중한것을 보고 몹시 놀란 모택동은 다시 국내문제에 정력을 집중했다. 1961년 1월 14일부터 18일까지 열린 중공중앙 8기 9중전회에서 리부춘은 “국민경제가 3년의 대약진을 거치면서 새로운 불균형과 새로운 문제가 나타났다”고 하면서 “1961년부터 2~3년내에 조정, 공고, 충실, 제고의 방침을 실행해야 한다”고 했다. 회의에서는 이 《의견》을 통과했고 회의공보중에 정식으로 전당화 전국인민에게 선포했다. 1961년부터 국민경제에 대해 “조정, 공고, 충실, 제고”의 8자방침을 실행한다. 그 주요내요은 농업을 대대적으로 회복하고 국민경제의 집중통일관리를 가강하며 종업원과 성진인구를 감소하며 시장공급을 안정, 조절하는것이다. 중앙에서 1960년 11월에 《농촌인민공사의 현정책문제에 관한 긴급지시》를 내보낸후 1961년 3월과 5월을 선후로 광주와 북경에서 사업회의를 열고 《농촌인민공사사업조례(초안)》에 대해 토론하고 수정했다. 전국 농촌에서 《긴급지시편지》와 《농촌인민공사사업조례(초안)》의 기본정신을 시행하는것은 생산대대를 기본핵산단위로 하는 3급소유제를 다시 천명한것이다. 이는 현계단 농촌인민공사의 기본제도이다. 동시에 배상정책을 견결히 실행하고 량식수매를 감소하며 농민부담을 경감할것을 요구했다. 또 농부산품수매가격을 제고하고 적당한 매매정책을 규정하며 각항각업에서 농업에 대한 지원을 가강하라고 했다. 그리고 중앙에서는 최근 2~3년내에 반드시 경제관리대권을 더욱 많이 중앙과 중앙국에 집중하고 1958년이래의 지방주의와 분산주의를 반대하기로 결정했다. 동시에 종업원인수와 비농업인구를 줄이고 1961년에 각각 960만과 1000만 두가지 지표를 완성할것을 요구했다. 그리고 사회집단구매력을 강력하게 줄이고 일상용공업제품과 수공업제품을 회복, 발전시키고 18가지 종류의 기본생활필수품가격을 안정시키는 동시에 부분적 소비품에 대해 고가를 실행하고 류통경로를 증가하기로 했다. 상술한 조정조치의 정식시행은 엄중한 경제곤난국면을 호전시키는데 적극적인 작용을 했다. 게다가 자연재해까지 감소되여 농업생산에서 호전의 조짐이 보였다. 1961년의 량식산량은 전해에 비해 2.6% 증가해 도시주민의 최저생활수요를 기본적으로 보장했다. 몇년간의 간고한 노력을 거쳐 당시 엄중하게 균형을 잃었던 국민경제가 기본상 회복되기 시작하였고 인민의 생활도 어느 정도 개선되였다. 특히 농민, 로동자, 도시인구지표를 조정하는 동시에 공산당은 지식분자와 여러 정치파벌과의 관계를 조정하였다. 비록 이런 노력은 좌경사상이 지도하는 당시의 정황에서 전면적으로 철처하게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지만 공화국의 령수와 인민군중이 동고동락하고 함께 환난을 겪으면서 견뎌온 시대였다.          
157    쏘련군에 참패해 흑할자도를 잃어버린 장학량 댓글:  조회:5625  추천:1  2017-02-12
쏘련군에 참패해 흑할자도를 잃어버린 장학량     1929년 7월에 중쏘간에 중동철로권익의 귀속문제때문에 무장충돌을 초래한 《중동로사건》이 폭발되였다. 전투는 주요하게 중국의 만주리와 자라이눠얼(扎赉诺尔)지역에서 벌어졌다. 그해 7월부터 11월까지 크고 작은 전투가 수십차 벌어졌다. 처음에 중국동북정부가 중동철로의 전보와 전화를 되찾고 쏘련인들을 본국에 돌려보내려고 하면서 쏘련군과 동북군의 무장충돌이 일어났고 잇달아 전쟁으로 번졌다. 처음에 전쟁에서 승리의 단맛을 보던 동북군은 11월에 들어서자 대패를 당했다. 쏘련군이 선후로 자라이눠얼, 만주리, 하이라얼(海拉尔)을 점령했다. 동북군은 2000여명이 사망되고 7000명이 포로되였다. 쏘련측의 통계에 따르면 쏘련군은 143명이 사망되고 4명이 실종되였으며 665명이 부상을 당했다. 1929년 5월 27일에 할빈특구 경무처장 미춘림은 쏘련이 할빈령사관에서 원동당원해회를 연다는 비밀정보를 접수했다. 장학량은 비밀전보를 보내 할빈특구 장관 장경혜에게 군대와 경찰을 파견해 할빈주재 쏘련령사관을 수색해 총령사를 붙잡으라고 명령했다. 동시에 중동철로쏘련종업원련합회를 봉인하고 중동로 쏘련측의 정, 부 국장의 직무를 중지시켰다. 5월 29일에 장경혜는 또 명령을 내려 할빈, 치치할, 하이라얼 등지의 쏘련령사관을 봉쇄해버렸다. 5월 31일에 쏘련정부는 중국 남경정부에 항의를 제출하면서 할빈령사관의 체로인원을 석방할것을 요구했다. 동시에 쏘련은 변경지구에 병력을 증강해 외교교섭이 실패하면 무력으로 해결할 준비를 했다. 《5. 27사건》의 폭발은 《중동로사건》의 도화선으로 되였다. 장학량이 28살에 발동한 《중동로사건》으로 하여 중국지도에서 닭의 볏인 흑룡강과 우쑤리강사이의 흑할자도(黑瞎子岛)를 쏘련군이 점령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로원수(老帅) 장작림이 1928년 6월에 일본군의 음모에 의해 렬차폭발로 사망된후 젊은 원수(少帅) 장학량이 동북3성 보안 총사령직을 맡았다. 얼마후 장학량은 국민정부에 의해 륙해공군 부사령으로 임명되였다. 그 시기에 그는 28살의 혈기왕성한 청년이였다. 장학량은 이 전쟁을 통해 쏘련군의 수중에 있는 철로권, 전화권, 전보권을 모두 찾아서 중국의것으로 만들려고 했다. 그때는 레닌이 10월혁명승리후에 전세계에 향해 “제정로씨야가 중국에서 빼앗은 땅을 전부 중국에 돌려주겠다”고 선포한지 10년이 지났을 때였다. 그러나 이미 쓰딸린시기가 된 쏘련은 1689년 9월 7일(강희 28년 7월 14일)에 《네르친스크조약(尼布楚条约)》을 체결할 때 중국에 속하는 령토라고 확인했던 이 땅에서 동청철로, 전화, 전보, 광산, 삼림 등의 권리를 행사했다. 1928년 6월에 국민정부가 통일된후 외교부장을 담임했던 왕정정은 남경에서 불평등조약수정을 중심으로 하는 “혁명외교”를 발동했다. 통일을 옹호했던 장학량은  이런 형세에 고무되여 쏘련측에 땅을 돌려달라고 요구했다. 1990년 봄에 장학량은 당덕강앞에서 구술할 때 “내가 로씨야사람과 싸운것은 자신을 과대평가한것이였습니다”라고 말했다. 당시 혈기왕성했던 장학량은 세인들에게 본때를 보여주고싶었던것이다. 장학량은 1929년 7월부터 시작해 중동철로의 쏘련인을 쫓아냈고 할빈시내의 쏘련기구를 차압했다. 그해 7월 18일에 쏘련은 중국과 외교관계를 단절한다고 선포했다. 그와 동시에 길림의 중쏘변경에 쏘련군이 집결하기 시작했다. 이 싸움에서 중국군은 처음에 승세를 보였다. 중국의 만주리와 자라이눠얼지역에서 1929년 7월부터 11월초까지 동북군은 충분한 준비가 있었기에 적지않은 승리를 거두었다. 쏘련도 이 전쟁은 져서는 안될 전쟁이라는것을 알고있었다. 그리하여 쏘련은 지휘관을 가륜(加伦)으로 바꾸었다. 가륜은 중국명이고 본명은 바실리 콘스탄티노비치 블류헤르(瓦西里·康斯坦丁诺维奇·布柳赫尔)였다. “원동군의 령혼”이라고 불리우는 가륜이 온후 동북군은 한개 려가 전멸되는 처참한 참패를 맛보았다. 가륜은 장개석이 령도하는 국민혁명군군사총고문을 맡은적이 있었고 중국대혁명과 북벌에도 참가했으며 중국공산당이 발동한 남창봉기도 지도했다. 쏘로국내전쟁시기에 장군으로 성장한 그는 한개 보병사로 대량의 땅크, 장갑차와 같은 장비를 갖춘 기계화부대 자위군을 보기좋게 쳐부신 기적을 창조하기도 했다. 그는 1935년에 쏘련에서 처음 군사계급을 수여한 5대원수중의 한 사람이다. 그는 1938년 11월 9일에 스탈린의 숙청명단에 들어 일본간첩이라는 루명을 쓰고 비밀리에 처형되였다가 1956년에 억울한 루명을 벗었다. 동북군의 장비가 중국에서 두번째에 가라면 서럽다고 할 정도였지만 쏘련군과 비할수는 없었다. 쏘련군함이 40발의 포탄을 발사할 때 상업선박을 개장한 동북해군은 한발의 포탄밖에 발사하지 못했다. 한광제려장이 지휘한 제17려는 전군이 전멸했고 량충갑려장이 지휘한 제15려는 만주리에서 전부 포로되였다. 하이라얼을 잃은후 할빈과 흑할자도도 쏘련군이 점령했다. 새 군벌을 대처하기에 바빴던 장개석은 장학량에게 도움을 줄수 없었다. 1929년 11월하순에 자라이눠얼, 만주리, 하이라얼은 이미 쏘련에게 함락되였다. 장학량은 부득불 패배를 승인하고 1929년 11월 26일에 정전을 요구했다. 장학량은 채운승을 파견하여 쏘련과 담판하게 했다. 1929년 12월 20일에 장학량은 미국측의 조정하에 쏘련과 《백력협정(하바롭스크협정)》을 체결했다. 이것이 《중동로사건》이다. 중국측에서는 중동철로를 중쏘에서 공동히 관리하던 원래상태를 회복하자는 쏘련측의 제의를 받아들였다. 쌍방에서는 포로를 석방하고 전쟁결속을 선고했다. 결과는 철로를 빼앗아오지 못했다. 게다가 쏘련군은 철군한다고 했지만 중국령토인 흑할자도에 간후 섬에 눌러앉아 가려고 하지 않았다. 흑할자도는 쏘련의 하바롭스크와 린접했고 흑룡강, 우쑤리강을 지키는 요충지였다. 때문에 제정로씨야때부터 로씨야는 줄곧 흑할자도의 전약의의에 대해 관심을 가졌다. 1929년 당시의 쏘련정부도 흑할자도의 전략의의를 중시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이 모든것은 정전후에 체결된 《백력협정(하바롭스크협정)》에 체현되였다. 이 협정에 대해 국민정부는 승인하지 않았다. 장학량을 위수로 하는 지방대표는 국가와 국가지간의 담판에 참여할수 없다. 이 담판은 동북군대표의 권한을 초월한 담판이였다. 장개석도 이 담판을 승인하지 않았다. 송미령의 큰 언니 송애령이 곁에서 장개석을 보고 “협정을 승인하세요. 그래야 쏘련에서 장경국을 중국에 돌려보낼수 있어요”라고 권고했지만 장개석은 동의하지 않았다. 하지만 정전을 위해 협정을 체결하지 않을수 없었다. 협정은 쏘련이 중동철도에서 소유했던 권익을 회복시켰다. 그 대가로 쏘련군이 동북에서 철군하게 되였다. 그러나 쏘련군은 협정에 따라 동북에서 철군하지 않았다. 쏘련군은 다시 철로의 권익을 얻은후 수상요충지 흑할자도를 강정했는데 그렇게 점령한것이 줄곧 79년동안이나 점령하고있었다. 장학량이 《중동로사건》을 일으켜 쏘련이 우리 나라의 령토 흑할자도를 점령하는 결과를 초래했는데 이는 그후 중로의 령토분쟁에서 가장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중의 하나로 되였다. 그러다가 2004년에 체결한 《중로국계동단보충에 관한 중화인민공화국과 로씨야련방의협정》에 따르면 중국은 174평방킬로메터에 달하는 흑할자도의 절반주권을 되찾았다. 2005년에 로씨야의 두마(의회명칭), 련방위원회와 중국의 전국인민대표대회에서는 선후로 이 협정을 비준했다. 그때로부터 흑할자도 더 나아가서 중로변계문제의 최정해결에 종지부를 찍게 되였다. 흑할자도는 중로변계 무원현경내의 흑룡강과 우쑤리강이 합류되는 주항도 서남측에 위치해있는데 중국에서 태양을 가장 일찍 볼수 있는 지방이고 흑룡강류역중 최대의 강섬이다. 면적은 350평방킬로메터로서 오문의 12배, 진보도의 500배에 달한다. 《정주일보》      
156    주은래가 병세가 위급할 때 털어놓은 비밀 댓글:  조회:5427  추천:0  2017-02-05
주은래가 병세가 위급할 때 털어놓은 비밀     그것은 1975년 12월 20일 오후의 일이였다. 주은래의 체온은 38.7로 올라갔다. 그는 갑자기 중앙조사부 부장 라청장을 만나겠다는 요구를 제기했다. 당시 중앙에서는 중앙정치국위원이여야 주은래를 만날수 있다는 규정이 있었다. 때문에 사업일군을 전화로 상부에 지시해줄것을 청하였다. “4인방”은 서로 이 사람 저 사람에게 밀면서 대답하지 않았다. 그래서 전화는 등소평한테까지 가게 되였다. 등소평은 “총리께서 중병에 계신데 그의 요구라면 뭐든지 다 들어주시오”하고 말했다. 사업일군은 다음날에 주은래의 분부대로 승요차를 파견해 라청장을 병원에 모셔왔다. 라청장이 갓 병실에 들어서자 주은래는 혼미상태에 빠졌다. 라청장은 병실옆 객실에서 기다리는수밖에 없었다. 정오까지 기다려서야 주은래가 깨여났다는 소식이 와서 라청장은 즉시 주은래의 병상앞까지 달려갔다. 주은래는 라청장에게 모택동이 당년에 중경에서 위험에서 벗어난 놀라운 비밀을 알려주었다. 주은래는 미약한 음성으로 라청장에게 대만동포를 잊지 말라고 말했다. “특히 혁명에 공헌한 대만벗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일생에 혁명에 유익한 일을 한번만 한 사람이라도 말입니다. 례하면 지금도 대만에 있는 장씨성을 가진 그 두사람…” 거기까지 말하고 주은래는 또 혼미상태에 빠졌다. 의사들이 구급에 바삐보내는 바람에 담화는 중지되였다. 라청장은 병실밖에서 기다렸다. 한나절을 기다렸지만 주은래는 깨여나지 못했다. 라청장은 주은래의 병세가 엄중하다는것을 알았다. 그는 자신과의 담화로 주은래를 피로하게 할수 없다는 생각에 살며시 병원에서 나왔다. 주은래가 말한 장씨성을 가진 두 사람은 도대체 누구일가>? 라청장은 지난일을 돌이켜보면서 말했다. “나는 주은래의 신변에서 40여년동안 사업하면서 그가 하는 이야기를 헤아릴수 없이 들었습니다. 이왕에 총리께서 하신 말씀에 근거하면 그가 말한 장씨성을 가진 두 사람은 서안사변을 일으킨 장학량과 중경헌병사령직을 맡았던 장진일것입니다.” 원래 당년에 중경담판에서 결과가 있게 되자 모택동은 연안으로 돌아올 준비를 했다. 1945년 10월 8일 저녁에 장치중은 모택동을 위해 환송만찬회를 열었다. 이 만찬회에서는 중경에 있는 국민당 요인, 각 당파, 문화계의 지명인사 도합 500여명이 참석하였다. 누가 알았겠는가? 그때 흉보가 전해졌다. 홍암촌에서 멀지 않은 가릉강변도로에서 총소리가 들려왔다. 주은래를 닮은 중경주재 팔로군판사처의 비서이며 국민당원로 료중개의 사위인 리소석이 불행하게 총에 맞아 병원에 실려갔다. 그 소식을 들은 주은래는 모택동을 놀라게 하지 않고 중경헌병사령 장진과 함께 차에 앉아 금탕가시민병원으로 달려갔다. 주은래가 당도했을 때 리소석은 피를 너무 많이 흘려 이미 사망되였다. 당시 중경의 도로는 복잡하고 사회가 혼란했다. 게다가 일부 국민당특무들이 자신을 목숨을 바쳐서라도 모택동을 죽이고야 말겠다고 맹세했다는 정보까지 주은래의 귀에 들어왔다. 어떻게 모택동을 안전하게 모시고 홍암촌까지 갈것인 하는것은 매우 긴박한 문제였다. 주은래는 장진에게 모택동의 안전을 절대적으로 보장해달라고 요구했다. 국민당 헌병사령 장진은 “주주임께서 마음을 놓으십시오. 만찬회가 끝나면 내가 모선생을 나의 차에 모시고가겠습니다. 어느 방면의 특무든지 헌병사령의 차에 총을 쏠 담량은 없을것입니다”하고 말했다. 장진은 말한대로 모택동을 거주지까지 모셔다주었다. 이틑날에 장진은 또 모택동에 대한 경호를 강화했다. 10월 10일 오후에 국공회담협정은 매원에서 체결되였다. 장진은 이틑날에 모택동이 연안으로 돌아간다는 소식을 듣고 경계를 강화하고 자신이 직접 모택동을 공항까지 호송했다. 주은래는 여러번이나 장진이 중경담판에서 큰 공을 세웠다고 언급했는데 사망되기전까지 그를 잊지 않았다. 주은래는 경상적으로 이 일을 이야기하며 대만에 관한 사업을 책임진 일군들에게 타일렀다. “장진의 직무는 헌병사령입니다. 우리의 정책에 따르면 총살해야 할 특무입니다. 하지만 직무만 보아서는 안됩니다. 우리에게 도움을 주고 우리를 위해 공헌을 한 옛 친구를 잊지 말아야 합리하게 대만에 관한 문제를 잘 처리할수 있고 옛 친구에게 미안하지 않습니다. 물 한방울의 은혜도 반드시 용솟음치는 샘물로 갚아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주은래였다. 진심으로 사람을 대하는 그는 당내당외를 막론하고 모두 가장 의로할수 있는 동지이고 벗이였다. 그는 생명의 최후순간에도 우리 당을 도와준 반대당의 옛친구를 잊지 않았다.    
155    옛말이 되였으나 잊을수 없는 윁남자위반격전 댓글:  조회:5346  추천:1  2017-01-14
옛말이 되였으나 잊을수 없는 윁남자위반격전         1978년 12월 25일에 윁남군은 10만이상의 병력과 여러개의 땅크부대를 동원해 캄보쟈를 침공했다. 윁남은 인도지나반도에서 패권을 차지하려는 야망을 가지고있었다. 그런데 언감생심 하찮게 보았던 캄보쟈가 그런 윁남을 저지하려고 했다. 윁남은 그런 캄보쟈를 눈에 든 가시처럼 여기고 “가르침”을 주려고 작심했다. 당시 캄보쟈수도 프놈펜에는 중국의 군사고문 6000명이 주둔해있으면서 캄보쟈의 좌파세력인 크메르 루주(红色高棉)를 지원했다. 윁남은 구쏘련과 우호조약을 맺었고 구쏘련군이 중국북쪽국경지역에 부대를 증강했기때문에 캄보쟈를 침공해도 중국이 개입하지 못할것이고 또 구쏘련이 중국의 개입을 저지할것이라고 판단했다. 그러나 윁남의 판단은 틀렸다. 1975년에 미군을 몰아내고 남북을 통일한 윁남은 120만명이나 되는 화교들의 재산을 빼앗았다. 그뿐만아니라 국경일대에서 1978년 하반기에만 해도 700차례에 거쳐 무장충돌을 일으켜 300여명의 사상자를 초래했다. 윁남측은 1978년에 중국의 윁남령토침입에 따른 충돌이 2175건에 달했다고 발표했다. 등소평은 일찌감치 “오만하고 감사할줄 모르는” 윁남에 대해 “징벌”을 하기로 마음먹었다. 1978년 9월에 열린 정치국회의에서 윁남을 공격할데 관한 문제가 직접 언급되였다. 정치국회의에 앞서 등소평이 윁남공격을 이미 결정했다는 설이 있다. 등소평은 1978년 11월초에 9일간 타이, 말레이시아, 싱가포르를 방문했다. 윁남을 공격할 때 이 나라들이 중국에 대해 가질 두려움을 없애기 위한 사전의 조치였다. 싱가포르 수상 리광요를 만난 자리에서 등소평은 윁남을 배은망덕한 놈이라고 욕하면서 윁남이 캄보쟈를 공격하면 중국은 윁남이 무거운 대가를 치르게 할것이라고 말했다. 등소평은 또 쏘련은 중국과 윁남의 싸움에 관여하지 않을것이라고 말했다. 중국은 쏘련쪽은 마음을 놓았지만 미국이 어떻게 나올지 알수 없었다. 1978년 12월 4일에 때마침 미국대통령 카터가 국교정상화를 제안했다. 등소평은 8일만에 전격적으로 그 제안을 받아들였다. 1979년 1월 1일에 중미는 국교를 정상화했다. 등소평은 1월말부터 2월초까지 서둘러 미국을 방문했다. 리유는 두가지였다. 윁남을 구쏘련으로부터 떼어놓기 위해 미국이 개입할 여지를 차단하고 미국을 활용해 윁남과 구쏘련의 군사협력을 막기 위해서였다. 등소평은 카터에게 “꼬마친구가 말을 안들으면 엉뎅이를 때려야 한다(小朋友不听话,该打打屁股了)”라고 말했다. 귀국길에 등소은 일본에도 들렀다. 일본 수상 오히라 마사요시(大平正芳)를 만나 미국에서와 마찬가지로 윁남징벌의 정당성을 천명했다. 공격준비는 이로써 끝났다. 1979년 2월 11일에 정치국확대회의가 열렸다. 공격날자를 17일로 결정했다. 4월에 시작되는 우기를 피하기 위한 선택일이였다. 기원 938년에 당나라가 멸망된 후 5대10국에 속한 남한(南汉)이 윁남에 패함으로써 1000년만에 윁남이 독립할수 있었다. 그 당시에 우기를 고려하지 않고 무리한 전쟁을 벌렸기때문에 남한국이 윁남에 실패했던것이다. 등소평은 그런 력사를 고려하지 않을수 없었다. 북쪽에서 만약 구쏘련이 결빙된 아무르강과 우수리강을 건너더라도 곧 해빙되여 더이상의 작전전개가 어려울것이라는것도 강이 풀리게 될 날자를 선택한 원인중의 하나였다. 중국인민해방군이 윁남국경을 넘던 1979년 2월 17일에 신화사는 선전포고문을 발표했다. “남이 나를 건드리지 않으면 나도 남을 건드리지 않는다. 만약 남이 나를 건드리면 나도 반드시 남을 건드린다(人不犯我, 我不犯人, 人若犯我, 我必犯人)”는 모택동의 말을 인용했다. 중국은 전운(战云)이 무르익을 때까지 기다렸다. 상대방이 먼저 손을 쓰기를 기다려서 다시 유리한 시기를 틀어쥐고 상대를 제압하는 “후발제인(后发制人)”의 전략이였다. 이는 미국이 9·11테로이래 “예방성전쟁(预防性战争)’이라는 명목으로 선제공격을 불사한것과 대조된다. 광주군구 사령원 허세우상장이 동선광서변방부대 총지휘를 맡았다. 허세우는 “무서워서 뒤걸음치는자는 죽인다! 싸움터에서 도망치는자는 죽인다! 전투기회를 지연시키는자는 죽인다! 적에게 투항하는자는 죽인다! 군사정보를 루설한자는 죽인다! 전쟁기률을 위반한자는 죽인다! 칼을 사용한자는 죽인다! 죽인다…”는 “십살령(十杀令)”을 내렸다. 무한군구 사령원 양득지상장이 곤명군구 사령원으로 임명되여 서선운남변방부대 총지휘를 맡았다. 양득지는 윁남이 프랑스에 항거해 싸우는 전쟁에서 중국군사고문으로 있으면서 윁남을 지원했었다. 허세우가 지휘하는 동선병퇀은 제41군, 제42군, 제43군, 제54군, 제55군, 제50군(149사는 서선에 배치됨)으로 구성되여 광서방향으로 출발했다. 양득지가 지휘하는 서선병퇀은 제11군, 제13군, 제14군, 제50군 149사로 구성되여 운남방향으로 출발했다. 1979년 2월 17일 자정에 중국인민해방군이 윁남국경 26개 지점을 통해 물밀듯이 공격해들어갔다. 9개군의 22만 5000명의 병력, 전투기 170여대, 땅크 200여대를 몰고 공격한 중국군에 맞서 윁남은 민병대와 지역수비대 10만병력으로 막아냈다. 당시 인도지나반도에서는 중국과 윁남이 격렬하게 충돌했다. 중국은 윁남공격에서 처음에 실패했다. 25년간의 전투를 통해 단련된 윁남지역수비대와 민병대의 로련함과 윁남의 특수지형때문이였다. 미군이 남기고간 50억딸라어치의 최신형 전쟁물자와 무기도 위협적이였다. 민병대는 윁남북부특유의 복잡한 땅굴과 엄페호, 산간지형을 십분 잘 활용했다. 문화대혁명으로 실전경험이 없고 장비가 낡은 중국군은 생각밖에도 윁남군한테서 악몽같은 타격을 받았다. 1954년에 사상 최초로 식민지군대가 제국주의군대를 격파했던 “디엔 비엔 푸전역(奠边府战役)을 지휘하고 미국과의 전쟁을 승리로 이끈 무원갑(武元甲)장군이 윁남군을 지휘했다. 정규군 대신에 예비군병역 10만을 동원한 그는 유리한 지형을 리용해 중국군을 방어하는 전략을 펼쳤다. 그리고 최정예병력 5만은 정규전이나 장기전으로 확전될 경우를 대비해 하노이에서 대기하는 배수진을 쳤다. 경험을 섭취한 중국군은 전면공격을 개시하여 윁남의 중심도시를 하나 하나 점령했고 윁남의 가장 중요한 전략요지 량손성을 점령하는데 성공하여 하노이를 핍박했다. 1979년 3월 5일에 동서량선의 아군은 앞사람이 쓰러지면 뒤사람이 전진하면서 윁남경내 40킬로메터까지 깊이 들어가 윁남수도 하노이가 직접 아군의 공격에 처하게 하므러써 윁남을 징벌하는 전략목적에 도달했다. 중국군은 1979년 3월 6일부터 1979년 3월 16일까지 모두 중국경내로 철군했다. 중국군은 로케트포와 장거리포의 엄호를 받으며 철퇴하면서 지뢰를 묻었다. 윁남군은 대규모의 추격행동을 하지 않았다. 1979년 3월 16일에 중국은 전쟁이 결속되였다고 선포했다. 하지만 그때로부터 1990년초까지 윁남은 줄곧 변경에서 끊임없이 도발행동을 감행했다. 1990년 2월 13일에 중윁 량국간에 마지막 한차례의 전투가 있은후 중윁변경은 조용해졌다. 당시 중윁전쟁에 대한 각국의 태도는 어떠했는가? 1979년 2월 22일에 신화사는 중국의 자위반격전에 대한 각국의 태도를 종합했다. 첫째, 중국을 비난하고 윁남을 지지하며 중국군의 철군을 요구한 나라들로는 구쏘련, 꾸바, 체스꼬슬로벤스꼬, 벌가리아, 민주독일, 웽그리아, 뽈스까, 몽골, 아프가니스탄, 에티오피아, 모잠비끄, 알바니아, 앙골라 및 캄보쟈의 친윁헹삼린(韩桑林)정권으로 기본상 구쏘련과 그 위성국가들이였다. 둘째, 중국에 유감을 표시하며 중국의 철군을 요구한 나라들로는 라오스와 인도였다. 셋째, 중국을 반대하고 캄보쟈에 대한 윁남의 군사행동을 반대한 나라들로는 카나다, 스웨리예, 뉴질랜드였다. 뉴질랜드는 중국군의 철군도 요구했다. 넷째, 중국군이 윁남에서 철군하고 윁남군이 캄보쟈에서 철군할것을 요구한 나라들로는 미국, 일본, 동남아국가련맹 5개국, 오스트랄리아, 로므니아, 유고슬라비아, 영국, 이딸리아, 화란, 노르웨이, 핀란드, 이라크였다. 다섯째, 중국과 윁남에 모두 유감을 표시하며 윁남과 캄보쟈에서 자기절로 자기 나라의 운명을 장악하기를 바란다고 한 나라들로는 유럽공동체국가와 기타 나라들이였다. 여섯째, 담판으로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고 호소한 나라들로는 애급, 말리, 리비아, 마다가스까르, 방글라데슈, 끼쁘로스와 북유럽의 기타 나라들이였다. 일곱째, 공개적으로 성명을 발표하여 태도를 표시하지 않은 나라는 뽀르뚜갈이였다. 여덟째, 중국을 지지한 나라는 민주캄보쟈였다. 중윁전쟁은 참담했다. 17일간의 전투에서 중국군 2만 6000명과 윁남군 3만명이 사망되였고 중국군 3만 7000명, 윁남군 3만 2000명이 부상당했다.      
154    모택동: 끌고 나가 총살하시오! 댓글:  조회:8044  추천:2  2017-01-01
모택동: 끌고 나가 총살하시오!     1950년 3월 4일에 북경을 떠난지 88일이 되는 모택동은 중국당정대표단을 거느리고 중남해로 돌아왔다. 이틑날에 리은교는 향산에 가서 안해 한계형을 데려왔다. 당시 20대초반인 리은교는 무당파(武当派)의 속가제자이며 모택동의 경호원이였다. 모택동은 특별히 료리사에게 몇가지 료리를 더 부탁해서 한계형을 대접했다.   식사후 모택동은 한계형에게 향산의 일부 정황에 대해 상세하게 물어보았다. 한계형은 무의식중에 한 중앙령도간부가 기관에서 향산의 산비탈에 건축공사를 하는 기회를 타서 자신의 2층집도 지었는데 입주하지 않았을뿐이라는 이야기를 했다. 그 말을 들은 모택동은 삽시간에 얼굴빛이 변했다. 한계형은 더 말하지 못했다.   이틑날 오후에 리은교는 국향서옥에서 향산에 자택을 지었다는 그 령도간부를 만났다. 리은교는 그를 데리고 모택동의 있는 곳으로 갔다. 모택동의 응접실에는 주은래와 섭영진이 있었다. 모택동은 두손으로 허리를 집고 서서 그 사람의 아래우를 훑어보며 마음속의 화를 억누를수 없어 큰소리로 고함쳤다.   “당신의 위엄이 여간 아니군. 내 보기엔 당신은 과거의 왕후장상과 비슷하군!” 그 령도간부는 놀라서 식은땀을 흘렸다. 그는 감히 머리를 머리를 들어 모택동을 보지도 못했다.   모택동은 뒤짐을 지고 큰 걸음으로 방안을 왔다갔다 하더니 갑자기 그 령도간부를 향해 손가락질 하며 물었다.   “당신이 이렇게 하는게 공산당간부다운 일이요? 백성들이 뒤에서 우리를 뭐라고 욕하겠소? 내가 일찍 승리한후 리자성을 닮지 말라고 말하지 않았소? 당신은 왜서 바보인척 하는거요?”   도탄에 빠진 백성들을 구하겠다고 일떠서 명나라황제를 뒤엎은 리자성은 북경을 점령하자 승리에 도취되여 부화방탕한 생활을 하면서 도리여 백성들의 고혈을 빨아먹었다. 모택동은 이를 경계하라고 여러번이나 말했었다. 당시는 국민당을 몰아내고  갓 중화인민공화국을 세운지 반년도 안되는 때였다.   겁에 질린 그 사람은 머리를 푹 숙이고 가슴이 한줌만 해서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주석님, 제…제가 잘…잘못했습니다…”   “당신이 잘못했다구? 집을 지을때는 그것이 잘못이란걸 몰랐소? 내 보기엔 당신은 알고도 범한것 같소. 수중에 권력이 있다구 마음대로 휘들러서야 되겠소?” 모택동은 담배를 입에 물고 불을 붙이느라고 잠시 말을 끊었다. 주은래와 섭영진은 서로 쳐다보며 누구도 말을 못했다. 갑자기 모택동이 두모금 빨고 힘껏 비벼끄더니 손을 흔들며 엄하게 소리쳤다. “끌고 나가 총살하시오!”   그 말에 리은교는 깜짝 놀랐고 주은래와 섭영진도 놀라서 쏘파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 령도간부는 바지에 오줌을 쏘며 주저앉았다. 모택동은 리은교를 보고 명령했다. “이 자를 끌고 나가시오! 끌고 나가 총살하시오!”   리은교는 주은래와 섭영진의 눈치를 살폈다. 주은래와 섭영진은 사태가 이 지경까지 되자 부득불 앞에 나서서 한마디씩 했다. “주석님, 먼저 화를 누르십시오!” “이 문제는 먼저 조사를 똑똑히 한후 엄하게 처리해야 합니다!” 모택동은 계속 화를 내며 말했다.   “우리 공산당원은 인민을 위해 복무해야지 향수를 누리려고 여기에 오지 않았습니다. 탐오부패는 더구나 허락할수 없습니다! 이렇게 향수부터 누리려고 하면 리자성이 될것입니다!”   주은래와 섭영진은 그 령도간부를 꼭 엄하게 처리하겠다고 말했다. 그제야 화가 좀 가라앉은 모택동은 섭영진에게 그 령도간부에 대한 처리를 맡겼다. 현재 습근평이 부패척결을 추진하고있는 이때에 이 이야기는 매우 좋은 교재로 되고있다.           
153    고강 림표가 항미원조를 반대했는가? 댓글:  조회:4306  추천:2  2017-01-01
고강 림표가 항미원조를 반대했는가?     1954년에 중국공산당 제7기4중전회에서 고강, 요수석사건에 대해 결정을 내린후 고강이 항미원조에 출병할것을 반대했다는 설법이 있었다. 1971년의 “9.13”사건후에도 또 림표가 항미원조출병을 반대했다는 설법이 있었다. 20세기 90년대말까지 항미원조전쟁에 대해 언급한 개별적인 저작에서 이런 설법이 있었다. 그럼 고강과 림표가 정말로 항미원조출병을 반대했는가?   고강과 림표가 항미원조출병을 반대했다는 설법은 근거가 부족하다. 1950년 6월 하순에 미국이 무장으로 조선내전을 간섭하고 대만해협을 침입하자 중공중앙에서는 항미원조에 출병하고 대만해방을 뒤로 미루기로 결정했다. 이 결정은 당시 각 중앙국의 주요지도자들중 고강이 제일 먼저 알고있는 사람중의 하나였다.   1950년 7월 7일에 중앙군위에서 동북변방군을 조직할데 대한 문제를 연구했고 그 이듵날에 변방군에 편입된 부대는 즉시 광주, 중원 등지로부터 동북으로 집중되였다. 이미 확정된 변방군 사령원 겸 정치위원 속유, 부사령원 소경광, 부정치위원 소화는 병으로 잠시 와서 직무를 맡을수 없었다. 1950년 7월 22일에 주은래와 섭영진은 련명으로 모택동에게 “변방군을 먼저 동북군구에 귀속시켜 고강사령원 겸 정치위원의 지휘를 받게 하는게 어떻겠습니까”하고 건의했다. 모택동은 그 건의를 비준했다.   동북변방군의 공급과 참전에 수요되는 물자준비, 장비의 보충과 수리, 운수, 전방동원 등 참전준비는 모두 동북군구 사령원 겸 정치위원인 고강의 직접적인 지도하에서 진행되였다.   1950년 8월중순후에 조선전쟁은 작아대치국면이 나타났다. 그해 8월 31일에 고강은 모택동에게 조선전쟁상황과 변방군준비사업에 대한 몇가지 구체적인 문제에 대해 보고했다.   “현재 아군의 어떤 간부들중에는 일본군이나 국민당군과 싸울 때의 안광으로 오늘의 적을 보는 경향이 있습니다. 적들의 전술, 공군, 대포 등 특점에 대해 잘 알지 못하면서 말입니다. 또 일부 간부들은 미국공군에 대해 속수무책인데 전문가들을 조직하여 적의 작전특점을 연구할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그래야만이 작전시 적을 소멸할 파악이 있게 됩니다.”   모택동은 1950년 9월 3일에 고강에게 “반드시 현대전쟁의 관점으로 부대를 교육해야 합니다. 절대 적을 경시해서는 안됩니다. 당신의 의견은 정확합니다. 그 문제에 대해 연구해봅시다”라는 내용의 답장을 보냈다. 이는 고강이 동북변방군의 작전준비사업에 대해 적극적이고 주동적으로 나섰다는것을 말해준다.   주은래와 팽덕회가 그후에 했던 보고에서도 볼수 있다싶이 중공중앙정치국에서 항미원조출병에 대해 토론할 때 확실히 부동한 의견이 있었다는것을 알수 있다. 양상곤신변에서 사업했던 일군의 말에 의하면 양상곤은 “당시 출병에 대해 찬성하는 사람은 소수였습니다. 출병을 하지 말자거나 잠시 출병을 하지 말자는 의견이 다수였습니다”라고 말한적이 있었다. 중앙정치국회의에서 결정을 내리기전에 고강이 출병하는데 찬성하지 않았다고 해도 그가 혼자 아니였을것이다. 찬성했건 반대했건 모두 당내의 민주체현으로 정상적인것이였다. 더구나 어떤 의견이든 모두 당과 국가의 리익을 책임지기 위해 고려한것이였다. 때문에 누가 찬성하지 않는다는 의견을 내놓았다고 해서 항미원조출병을 반대했다고 하는것은 공정하지 못한것이다. 중공중앙정치국에서 중국인민지원군을 조직하여 “항미원조, 보가위국”의 결정을 내린후 출병을 찬성하는 고강의 태도는 견결했고 매우 적극적이였다.   1950년 10월 8일에 모택동이 중국인민혁명군사위원회 주석의 명의로 서명한 중국인민지원군을 조직할데 관한 명령중의 규정에는 “중국인민지원군은 동북행정구를 총후방기지로 한다. 총후방기지는 모든 후방사업과 조선을 지원할데 대한 사무를 담당한다. 동북군구 사령원 겸 정치위원 고강동지가 총부방사업의 배치를 지휘하고 책임진다”는 내용이 있다. 그날 고강은 방금 지원군 사령원 겸 정치위원직을 맡은 팽덕회와 함께 심양으로 날아갔다. 1950년 10월 9일에 고강은 팽덕회와 함께 지원군 군이상간부회의를 열고 출국작전에 대해 상의했다.   1950년 10월 8일에 주은래는 모택동과 중공중앙의 위탁을 받고 림표더러 쏘련에 가서 쓰딸린 등 쏘련지도자들에게 중공중앙정치국회의에서 출병을 결정한 정황을 통보하고 쏘련측에서 무기장비와 공중엄호를 제공해줄것을 요구하라고 부탁했다. 쓰딸린은 쏘련공군이 준비가 되지 않았다면서 3개월내에는 중국지원군작전을 엄호할수 없다고 대답했다.   이 소식이 북경에 전해지자 모택동은 1950년 10월 13일에 다시 중공중앙정치국위원회의를 소집했다. 그번 회의에서 고강은 항미원조에 출병하는 대해 태도가 매우 견결했다. 고강과 팽덕회는 쏘련에서 공군이 출동하지 못한다고 해도 우리는 반드시 출병해야 한다고 표시했다. 모택동은 그날 주은래에게 보내는 전보에서 “고강, 팽덕회동지 그리고 기타 정치국동지들과 상의한 결과 우리 군은 반드시 항미원조에 출병해야 한다고 일치하게 인정했습니다”하고 썼다.   1950년 10월 14일 3시에 모택동은 다시 주은래에게 전보를 보내여 “팽덕회와 고강동지는 모두 괴뢰군과의 싸우면 승산이 있다고 인정했습니다. 그들과 나는 모두 참전이 꼭 유리하다고 인정했습니다.   첫째, 지원군이 출동한후 팽덕회는 동북총후방기지의 사업에 만족을 표시했다. 팽덕회는 항미원조전쟁기간에 “지원군이 전선에서 승리한데는 두 사람의 공로가 크기에 응당 그들에게 감사를 드려야 합니다. 그중 한사람은 고강이고 다른 한사람은 홍학지(지원군 부사령원 겸 지원군후방근무사령부 사령원직을 맡았음)입니다.   둘째, 중공중앙정치국에서 중국인민지원군을 조직하여 항미원조, 보가위국의 결책을 내온후 고강의 태도와 행동을 보면 고강이 항미원조에 대해 태도가 견결했고 적극적이였다는것을 알수 있다.   셋째, 1951년 11월에 고강과 림표는 동시에 중앙군위 부주석으로 임명되였다. 림표가 항미원조출병을 반대했다는 설법은 주요하게 그가 병을 핑계로 지원군통수직을 맡지 않겠다고 한것과 관계된다. 그리고 또 중공중앙정치국에서 항미원조출병을 결정한후에도 림표가 의연히 출병을 반대했다는것이다.   모택동은 확실히 림표에게 지원군통수직을 맡기려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 1950년 8월 31일에 고강은 변병군이 출동후 해당문제 대해 모택동에게 보낸 편지중에는 “부대를 지휘하는 통수와 전문인재가 빨리 동북에 올것을 건의합니다. 그래야 충분히 준비할수 있습니다”라는 내용이 있었다. 모택동은 1950년 9월 3일에 고강에게 회답편지를 보냈다.   “림표와 속유는 병이 있고 또 두 사람은 이 기간에 해야 할 사업이 있어서 잠시 나가지 못할것입니다. 아마 몇개월후에야 가능할것 같습니다.”   모택동의 이 편지에서 림표는 확실히 병이 있었다는것을 알수 있다. 때문에 한달후에 중국인민지원군을 조직하여 항미원조에 출병할 때 림표는 지원군 통수를 맡을수 없었던것이다. 중공중앙의 결정에 의해 림표는 쏘련에 가서 치료를 받았다.   당시 림표는 중공중앙정치국 위원이 아니였다. 양상곤의 일기와 그번 회의에 참가했던 박일파에 따르면 림표는 1950년 10월 4일 오후와 5일 오후에 중공중앙정치국확대회의에 참가했다.   림표가 회의에서 무슨 의견을 발표했던 항미원조출병을 반대했다고 말할수 없다. 중공중앙정치국에서 항미원조출병을 결정한후에도 림표가 항미원조출병을 반대했다는 설법은 증거가 없어 믿음성이 없다. 그러나 1951년 11월 5일에 중앙인민정부위원회 제13차회의에서 고강과 림표를 동시에 중앙인민정부 인민혁명군사위원회 부주석으로 보충선거했다.   1951년말과 1952년초에 림표가 3개월간 중앙군사위원회의 일상사업을 주최했다. 항미원조는 당시 중국공산당과 중국인민에게 첫째가는 대사였기에 만약 고강과 림표가 항미원조출병을 반대했다면 모택동과 중공중앙에서 그들을 그토록 신임하지 않았을것이고 항미원조가 시작되여 1년이 지난후 그들을 중앙군위 부주석으로 보충선거하지 않았을것이다.      
152    죽음도 갈라놓지 못한 한무제와 리부인의 사랑 댓글:  조회:4132  추천:2  2017-01-01
죽음도 갈라놓지 못한 한무제와 리부인의 사랑     서한때에는 황제와 항후의 릉을 나란히 배치를 하였는데 황제릉은 서쪽에 황후릉은 동쪽에 위치했다. 그런데 무릉(한무제의 무덤)만은 동쪽에 있어야 할 황후의 릉이 없다. 한무제에게 진황후와 위황후 두명의 황후가 있었다. 하지만 진황후는 페위되였고 위황후는 억울한 고소를 당해 자살하고말았다. 이런 까닭에 황후의 릉이 없고 대신에 한무제가 말년에 의지했던 리부인의 묘가 있다. 그런데 리부인은 황후의 서렬에 오르지 못했기에 그녀의 무덤은 동쪽에 위치하지 못하고 무릉의 서북쪽에 위치해있다. 리부인은 비천한 출신이였다. 그녀의 오빠인 리연년(李延年)은 노래와 춤에 뛰여난 배우였다. 작곡에 뛰여난 자질이 있어서 감미로운 선률로 변주곡을 만들어 불렀는데 한무제는 물론 신하들이 모두 좋아했다. 어느날에 리연년은 한무제앞에서 춤추며 노래를 부를 기회가 생겼다.   북방에 아름다운 미인이 있어(北方有佳人) // 세상 제일의 미모를 독차지 했구나(絶世而獨立) // 한번 웃음 지으면 온 성이 무너지고(一顧傾人城) // 두번 웃음 지으면 온 나라가 기울어지네(再顧傾人國) // 성과 나라가 기우는것을 어찌 모르랴마는(寧不知傾城與傾國) // 천하의 아름다운 미인은 다시 얻기 어려운 법(佳人難再得).   이 노래를 들은 한무제는 리연년의 누이동생이 노래의 주인공임을 알고 탄복하여 그날부터 리부인을 애첩으로 삼았다. 하지만 미인박명이라는 말처럼 리부인은 젊은 나이로 요절했다. 리부인은 입궁한지 몇년이 되지 않아 앓기 시작하더니 결국 병이 더이상 치료할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리부인이 병상에서 일어나지 못한다는 말을 들은 한무제는 리부인을 보러 찾아왔다. 경국지색에 대한 황제의 사랑은 식을줄 몰랐는데 사랑하는 녀인을 보내야 했으니 황제의 가슴은 얼마나 미여졌겠는가? 어여쁜 얼굴을 한번 보고싶어 찾아왔으나 리부인은 보여주지 않았다. 황제가 온것을 본 리부인은 급히 이불로 얼굴을 가리우고 말했다. “첩이 병으로 얼굴이 망가져 페하를 뵙지 못하겠나이다. 제가 죽은후 저의 식구들을 보살펴주십시오.” “부인이 병이 위중하지만 약으로 치료할수 있는데 어찌 짐을 다시 보지 못한단 말이요?” 한무제는 기어코 리부인의 얼굴을 보려고 이불을 들어올렸다. 리부인은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울었다. 영원한 리별을 앞두고 한무제는 얼굴을 보여달라고 거듭 사정했지만 리부인은 끝내 보여주지 않았다. 황제는 속상해하며 떠났다. 그 자리에 있던 리부인의 누이동생이 리부인을 탓했다. 그러자 리부인이 말했다. “페하께서 알고계신 얼굴은 예전의 내 모습이다. 그런데 이제 이렇게 추한 모습을 보이면 황제는 놀라서 우리 식구들을 절대로 보살펴주시지 않을것이다.” 며칠후 리부인은 세상을 떠났다. 일의 결과는 과연 리부인이 예상대로 되였다. 리부인이 한무제에게 얼굴을 보이지 않은것은 그녀에 대한 황제의 무한한 그리움을 자아냈다. 그리하여 황제는 명화가를 청하여 그녀의 화상을 그려 감천궁에 걸어놓았다. 그리고 리부인이 죽자 한무제는 리연년을 악부의 장관인 협률도위(協律都尉)에 임명했다. 그리고 또 한명의 오빠인 리광리(李廣利)를 이사장군(貳師將軍)으로 삼았다. 리부인에 대한 한무제의 애틋한 사랑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제나라의 방사 소옹(少翁)을 시켜 리부인의 혼령을 불러오게 하고 황제는 애절함에 겨워 노래까지 불렀다.   “부인이오, 아니오?(是邪非邪) // 내 멍하니 서서 그대만을 바라보노니(立而望之) // 어이 이다지 나폴나폴 더디게만 오시는가(偏何姗姗其來遲).   뛰여난 문인이였던 한무제였기에 리부인의 죽음은 그를 시인으로 만들기에 충분하였다. 총희(寵姬) 리부인에 대한 한무제의 애타는 마음이 한편의 부(賦)에서 절절하게 나타났다.   저토록 밝은 세상 두고(去彼昭昭) // 어둠의 세계로 떠나갔구려(就冥冥兮) // 신궁으로 내려가면(旣下新宮) // 다시는 옛터로 돌아오지 못하나니(不復故庭兮) // 아아, 애달프도다!(嗚呼哀哉) // 그리운 혼령이 이토록 아른 하거늘(想魂靈兮).   사랑은 권력보다 강하다. 권력은 처음 잡을 때에는 무한한 힘을 가지나 시간이 지날수록 가벼워진다. 사랑은 다르다. 처음엔 밋밋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애틋한 그리움이 수시로 요동쳐 보고픈 마음은 한시도 식을줄을 모른다. 권력은 사랑을 버릴수 있지만 사랑은 권력마저도 포기하게 만든다. 가장 아름다운것이 사랑이지만 가장 두려운것도 사랑이다. 천하의 제왕 한무제도 평생 많은 녀인을 거느렸다. 그러나 진정한 사랑이 그리웠다. 많은 녀인들속에서 한무제가 원하는 사랑은 리부인이였다. 하지만 정들 무렵에 리별이라면 그 사랑은 애가 끊어지는 처절함이 된다. 천하의 권력을 다 가졌다고 한들 무슨 소용이 있단 말인가? 크지 않은 리부인의 묘가 광활한 벌판에 홀로 다소곳하게 누워있다. 한무제는 그녀의 죽음을 슬퍼하여 황후에 준하는 장례를 치르고 그녀의 묘를 “영릉(英陵)”으로 불렀다. “꽃”처럼 어여쁘고 “옥”처럼 귀한 녀인이 잠든 곳이라는 의미이다. 한무제의 애끊는 사랑이 최고의 례우를 해준것이다. 그러나 리부인묘는 그러한 례우에 개의치 않고 일편단심 동남쪽의 무릉만 바라보고있다. 산같은 무릉도 고적한 동풍이 싫어 서북쪽의 영릉을 향해 앉았다. 525메터의 오작교가 없는 벌판엔 철책이 가로막고있다. 살아서도 죽어서도 손잡고 있을수 없어 애틋한 그리움으로 오늘도 영원히 마주보아야만 하는 사랑, 그 사이를 오가는 바람만이 흐느낌과 애절함으로 사랑의 언어를 전하고있다.      
151    루명 벗은 옹정황제 댓글:  조회:6823  추천:2  2016-04-03
  루명 벗은 옹정황제   청나라 4대 강희황제부터 아들 옹정황제, 손자 건륭황제에 이르는 134년은 중국력사의 전성기이다. 지금 중국의 엄청난 땅덩어리는 이때 정해졌다. 6000만명이던 인구도 이 기간에 2억명으로 늘었다. 강희황제와 건륭황제는 력사상 가장 뛰여난 군주”라는 명예도 함께 누렸다. 그러나 옹정황제에게는 유독 “잔인한 독재자”의 형상이 따라다녔다. 강희황제는 아들이 서른다섯이나 되였다. 강희황제가 일찌감치 둘째아들을 황태자로 지명하자 신하들이 아들에게 줄을 서는 일이 벌어졌다. 그는 황태자를 페위했다. 그러자 황자(皇子)들간에 후계자리를 놓고 다툼이 뜨거웠다. 서로 헐뜯고 고자질했다. 1722년에 강희황제가 죽게 되자 아들들이 모였다. 대신(大臣) 롱고도가 방에 들어가 황제의 뜻을 받아왔다. 계승자는 넷째 아들, 후날의 옹정황제였다. 옹정황제는 몸을 돌보지 않고 일했지만 후계지명을 둘러싼 음모설에 시달렸다. 음모설은 이랬다. “강희황제는 원래 열넷째아들에게 제위를 물려준다는 뜻으로 롱고도의 손바닥에 “十四(십사)”라고 썼다. 옹정황제에게 매수된 롱고도가 방을 나오면서 “十四”에서 “十”을 혀로 핥아 지우고 “四”만 남겼다.” 강희황제가 “열넷째 아들에게 넘겨준다(传位十四皇子)”고 종이에 써둔것을 옹정황제가 훔쳐서 위조했다는 소문도 있었다. “十四”의 “十”을 “~에게”를 뜻하는 어조사 于(우)로 바꿔 “넷째아들에게 물려준다(传位于四皇子)”가 되게 했다는 얘기이다. 옹정황제는 소문을 퍼뜨린 이복형제들을 “개”, “돼지”라고 부르고 감옥에 가둬 죽게 했다. 그는 죽을 때까지 황태자를 발표하지 않았다. 후계자이름을 적은 종이를 황궁안의 “정대광명(正大光明)”이라고 쓰인 액자뒤에 두고 “내가 죽으면 열어보라”고 했다. 그러고는 “한번 후계자로 마음에 뒀더라도 잘못하면 언제든 바꿀수 있다”고 했다. 그랬더니 황자들은 아버지 마음에 들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황제가 되기 위한 수련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옹정황제식의 황위세습제도는 청나라가 끝날 때까지 계속되였다. 최근에 료녕성에서 옹정황제의 “황위찬탈”루명을 벗겨줄 강희황제의 유서가 발견됐다고 한다. 유서에는 “넷째아들은 인품이 남다르고 생각이 깊어 대통(大統)을 이을 만하다”고 되여있다. 유서는 만주어와 몽골어로도 씌여있어 한자 몇글자로 고치는것으로는 내용을 바꾸기 어렵게 되여있다고 한다.         
150    강청의 전 남편 당납의 비밀신분 댓글:  조회:7725  추천:0  2016-03-27
강청의 전 남편 당납의 비밀신분   (번역)     1914년에 강소성 소주에서 출생한 당납(唐纳)은 1935년 봄에 녀배우 람평과의 사랑에 빠져 그녀와 동거했다. 그러다가 1936년 4월 26일에 항주의 륙화탑에서 람평과 결혼식을 올렸다. 그날 조단과 엽로천, 고이기와 두소견도 함께 결혼식을 올렸다. 세쌍의 명배우가 함께 올리는 결혼식은 많은 사람들의 눈길을 끌었다.   그 당시 당납은 공청단에 가입하였고 그후 중국공산당에 가입하였다. 당납이 중국공산당특별당원이고 국가안전부의 정보일군이란 사실은 줄곧 비밀로 되여있었다. 람평은 선후로 유계위(俞启威-일명 황경), 당납, 장민(章泯), 모택동 네 남자에게 시집을 갔는데 네 남자는 모두 중국공산당 당원이였다.   결혼후 당납과 람평의 생활은 행복하지 못했다. 그들은 늘 언성을 높이며 다투었다. 부부싸움을 하는 차수가 점점 늘어났는데 어느 한번은 그들 부부가 또 크게 싸웠는데 하기언과 사매의 앞에서 강청은 당납의 머리카락을 잡고 휘둘러서 당납의 머리를 벽에 부딪쳐 놓았다. 당납은 부부간의 불화로 두번이나 자살하려고 했으나 성사하지 못했다.   당납과 람평이 리혼한후 일본군은 상해를 공격했다. 람평은 제남, 서안을 거쳐 1937년 8월에 연안으로 들어가 이름을 강청이라고 고쳤다. 당납은 1937년말에 무한으로 갔다가 제2의 수도 중경으로 들어갔다. 당납이 혼자서 고독하게 사는것을 본 조단은 18세의 녀배우 진로를 그에게 소개해주었다. 1938년 3월의 어느날에 조단의 소개로 처음 만난 당납과 진로는 첫눈에 정이 들어 함께 말타기도 하고 수영도 하다가 번개식결혼을 했다.   1938년 10월에 당납과 진로는 윁남을 거쳐 향항으로 가서 한달 남짓한 동안 놀다가 상해로 돌아왔다. 당납과 진로는 프랑스조계지의 해격로(지금의 화산로)의 강소로구에 거주했다. 당납은 장기(蒋旗)라는 필명으로 《진원원》, 《생로》 등 장막극본을 썼다. 진로는 상해에서 배우로 활약했는데 당납은 그녀에게 “홍엽(红叶)”이란 예명을 달아주었다. “홍엽”의 함의는 “람평”과 상대되는것이다.   1940년 5월 1일에 진로는 아들을 낳았는데 당납은 몹시 기뻐서 아들의 이름을 마균실이라고 지었다. 그리고 아명을 엄마의 예명 홍엽에 따라 홍아라고 불렀다. 진로는 당시 당납의 정치신분을 모르고있었다. 다만 당납의 행적이 늘 비밀스럽다고 느꼈을뿐이다. 어느 한번 당납은 진로를 보고 “만약 내가 체포되여 당신에게 련루되면 당납과 리혼한지 오래된다고 말하오”라고 말해서 진로를 놀라게 했다. 몇년후에야 진로는 당납이 중국공산당의 지하활동에 참가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였다. 진로와 당납의 혼인은 8년밖에 지속되지 못했다. 당납은 중경에서 다른 한 녀배우 강건을 사랑하게 되여 그녀와 동거했지만 얼마 못가서 성격차이로 헤여졌다.   항일전쟁이 승리한후 중경에서 상해로 돌아간 당납은 《문회보》의 부총편집으로 사업하면서 마계량이란 필명으로 글을 썼다. 당납이 진로의 집으로 찾아갔을 때 진로는 이미 소금장사군과 결혼하여 잘 살고있었다. 그러나 당납은 늘 아들 홍아를 보러 다녔다.   1947년 8월에 미국대통령특사 웨더마이어(魏德迈)가 상해에서 연 기자초대회에 참석한 당납은 그곳에서 《자유론단보》의 녀기자 진윤경을 알게 되였다. 젊고 예쁘고 영어와 프랑스어에 능하고 재주가 출중한 진윤경에게 첫눈에 반한 당납은 거의 날마다 그녀에게 격정에 넘치는 련애편지를 써보냈다.   진윤경은 원 프랑스주재 중국(국민당정부)공사(公使)인 진록의 셋째딸이였다. 전칭이 특명전권공사인 공사는 외국에 파견되는 외교사절중 대사(大使) 다음의 직급에 속한다. 1949년 2월에 진윤경은 유엔교육과학문화기관의 미국사무소에 가서 사업하게 되였다. 이미 《문회보》의 총편집을 담당하고있던 당납은 진윤경과 함께 있기 위해 사직하고 뉴욕으로 날아갔다. 당납은 뉴욕일보에서 사업하다가 유엔의 한 중문인쇄공장에 옮겨가 사업했다.   당납이 미국으로 간것은 진윤경을 만나기 위한것도 있었지만 강청의 보복을 피하기 위한 목적도 있었다. 그 시기는 국민당이 몰락하고 중국공산당이 승리를 눈앞에 두고있는 때였다. 그가 계속 중국에 남아있을 경우 공산당이 나라를 세우면 보복심이 강한 강청이 그를 가만놔둘리 없다고 생각했기때문이다. 당년에 상해에 있을 때 사람들앞에서 당납의 머리를 잡아끌어 벽에 부딪쳐놓기까지 했던 강청이 제1부인의 신분으로 어떤 보복을 할지 알수 없었던것이다.   그후 진윤경이 유엔교육과학문화기관의 총부가 있는 프랑스의 빠리로 가자 당납도 그녀를 따라 빠리로 갔다. 빠리에서 진윤경과 결혼한 당납은 천교호텔을 개업했다. 그는 강청의 추적을 피하기 위해 이름을 마소장이라고 고쳤다. 진윤경도 안나라는 영문이름을 썼다. 빠리의 화교들은 마소장이 원 프랑스주재 중국공사 진록의 사위라는것만 알았지 그가 중국공산당 제1부인의 전 남편이였다는 사실은 모르고있었다.   문화대혁명기간에 당납은 해외에 있었기에 강청의 마수를 피면할수 있었다. 그후 “4인방”이 감옥에 갇혔다는 소식을 들은후에야 당납은 귀국했다. 그런데 그를 접대한것은 중공중앙조사부였다.   중공중앙조사부는 1955년 6월 20일에 정식으로 성립되였는데 제1임 부장은 리극농이 겸임했다. 1983년 7월 1일부터 중공중앙조사부를 주체로 하고 공안부의 반간첩부문 및 기타 해당부문이 합병하여 중화인민공화국 국가안전부를 세웠다. 당납은 중국대륙을 떠난후 1978년에 처음 빠리에서 귀국했다. 당납은 프랑스에서 마소장이란 이름으로 살았지만 중공중앙조사부는 그를 당납이라고 불렀다. 이로보아 프랑스에서의 당납의  비밀신분이 무엇인지 말하지 않아도 알수 있다.   문화대혁명시기에 강청은 장춘교한테 부탁하여 정군리를 찾아 담화하게 했다. 장춘교는 정군리를 불러놓고 “강청동지가 연안에 간후 당신에게 써보낸 몇통의 편지와 강청동지의 두장의 사진을 바치시요”라고 말했다. 1966년 10월 9일 아침에 상해 회해로에 위치한 강무청사 3층 정군리의 집에 홍위병차림을 한 공군 4군 교도대가 뛰여들어와 일기, 서한, 친필원고, 사진 등 자료들을 가져갔다. 얼마후 정군리는 체포되여 감옥에 들어갔다. 당납과 강청의 친구였던 정군리가 강청의 지난  력사를 너무 많이 알고있었기때문이다.   후에 이 소식을 들은 당납은 “만약 내가 국내에 있었다면 더 처참하게 당했을겁니다”라고 말했다. 중국대륙을 떠난후 처음 귀국한 당납은 1978년 12월에 북경에서 엽검영원수의 접견을 받았다. 엽검영은 무엇때문에 프랑스화교 당납을 회견하였는가?   당시 중공중앙 부주석이였던 엽검영은 중앙군사위원회의 사업도 주관하고있었는데 중공중앙조사부는 그의 직속령도를 받고있었다. 당납은 사실 중공특별당원이고 프랑스에서의 중공중앙조사부 중요간부였기에 귀국하자마자 엽검영의 접견을 받았던것이다. 엽검영은 당납의 부인은 부르지 않고 당납만 지명하여 접견했다. 엽검영이 당납을 접견했을 때 당납의 정치신분은 프랑스화교가 아니였다. 만약 프랑스화교신분이였다면 당납의 부인도 함께 엽검영의 접견을 받았을것이다. 이는 그번 접견이 중공중앙조사부의 내부회견이였다는것을 말해준다.   때문에 당시의 접견은 비밀리에 진행되였다. 그때로부터 옹근 30년이 지나서 엽검영의 일생을 소개할 때에야 엽검영이 당납을 접견했던 당시의 사진이 신문에 실렸다. 하지만 사진설명에는 당납을 프랑스화교라고 소개했다.   당납이 프랑스의 빠리에서 천교호텔을 경영할 때 그곳은 명류들이 모이는 장소였다. 당납은 장인의 국민당신분의 엄호를 받았고 호텔경영인이란 신분을 가지고있었기에 정보사업을 하기 가장 합당했다. 때문에 누구도 당납이 중공중앙조사부의 고급정보간부일것이라고 의심하지 않았다.   1985년 9월에 당납은 또 귀국했는데 그때는 국가안전부에서 그를 배치해주었다. 1983년 7월 1일부터 중공중앙조사부는 국가안전부로 개칭했다. 중공중앙조사부는 중국공상당정보기구이지만 국가안전부는 중화인민공화국정부의 정보기구이다. 그번에 당납은 부인과 딸을 데리고 귀국했는데 국가안전부에서 상해의 5성급호텔인 신금강호텔에 배치했다.   배우, 영화평론가, 기자, 중국공산당 특별당원, 중공중앙조사부의 중요간부, 제1부인 강청의 전 남편 등 여러가지 신분을 가졌던 당납은 1988년 8월 23일에 페암으로 빠리에서 사망되였다.  
149    당나라 저명한 불교승려 현장 댓글:  조회:4975  추천:0  2016-03-23
당나라 저명한 불교승려 현장     중국의 4대명작중의 하나인 신화소설 《서유기》는 불가제자 넷이서 천신만고를 겪으면서 무수한 요귀들을 물리치고 마침내 서천에 가서 불경을 가져오는 이야기를 담았다. 이 소설의 주인공중의 한사람인 당승(唐僧)의 원형이 바로 중국 당나라의 저명한 불교승려인 현장(玄奘)이다. 현장은 당나라의 승려로서 기원 600년에 하남성에서 출생하였다. 현장은 어릴 때부터 아주 총명하였고 당시 풍미하였던 불교학설에 대해 특별한 흥취를 가졌다. 11살이 나던해에 현장은 벌써 불경을 읽을수 있었고 13살에 출가하여 중국의 문화중심지인 락양의 정토사에서 경론을 공부하였다. 그후로는 전국각지를 돌아다니면서 스승을 구하여 불교리론을 통달하였다. 18살에 현장은 불교계에서 그 명성을 떨쳤다. 그가 인도불교학중의 “경장”, “률장”, “론장”을 통달하였으므로 사람들은 그를 “삼장법사(三藏法师)”라고 불렀다. 청년시기에 불교철학에 대해 집요하게 추구하기 시작한 현장은 당시의 불경번역문이 불완전하고 의문이 나는 부분이 많아 원저를 접하려고 불교의 근원지 인도로 가기로 다짐하였다. 기원 627년에 현장은 당시 당나라 수도였던 장안(지금 서안)을 떠나 인도의 나란다사로 향하는 머나먼 려정에 올랐다. 나란다사는 불교의 최고학부로서 그때 벌써 700여년의 력사를 갖고있어 인도불학의 권위이자 세계 기타지구의 불교신도들이 가고싶어하는 곳이였다. 1300여년전에 인류자체가 지리에 대한 지식이 결핍하고 교통조건 또한 지극히 락후했던 상황에서 도보로 중국중부에서 머나먼 인도에 간다는것은 엄청 힘든 일이였다. 도중에 인적이 없는 사막과 원시림을 경과해야 했고 중국서북의 대설산도 넘어야 했다. 독실한 불교신도인 현장은 모든 난관을 물리치고 기원 629년 여름에 마침내 불교고적이 많은 불교의 발원지 인도의 북부에 도착했고 나중엔 인도의 중부에 가서 불교의 6대 성지를 참배하였다. 현장은 인도에서 여러곳을 유람하면서 고승들에게서 불경을 배웠다. 어느날에 그는 배를 타고 간지스강을 건너다가 한무리 강도들의 손에 걸렸다. 강도들은 귀신을 믿는 자들이였는데 매년 가을마다 사람을 죽여 귀신에게 제를 지냈다. 배에 있던 강도들은 현장을 알맞는 포획물로 보고 그를 죽이려고 했다. 현장이 자기의 사정을 재삼 해석했지만 강도들은 들으려고 하지 않았다. 현장은 어쩔수 없어 눈을 감고 경을 외웠다. 그런데 때마침 일진광풍이 불어치면서 무시무시한 파도를 일으켰다. 이에 강도들은 겁을 집어먹고 부랴부랴 땅바닥에 엎드려 잘못을 빌었다. 이 소문이 삽시에 당지에 쫙 펴졌다. 당지 사람들은 불교의 힘이 현장을 보호하고있다고 여겼다. 기원 631년 현장은 인도의 나란타사에 5년간 머무르며 계현론사를 모시고 “유가사지론”을 연구하였다. 그후 현장은 다시 6년간 인도각지에서 불교성지순례려행을 계속하면서 10여명의 불교대사들의 가르침을 받아 일류의 불교학자로 되였다. 기원 643년에 현장은 그가 수년간 수집한 600여부의 경전과 불상을 지니고 귀국길에 올랐다. 당시 당나라 황제였던 당태종은 사람을 보내 그를 영접하게 하였다. 현장은 환속하여 관직에 오르라는 황제의 요구를 마다하고 장안의 홍복사에 들어갔다. 당태종의 후원으로 그는 각지의 고승, 학자들을 모아 그들과 함께 불경번역작업을 시작하였는데 그 사업은 장장 19년간 진행되였다. 현장은 경전번역에 혼신을 바쳤다. 19년동안 번역한 75부 1335권에 달하는 경론에서는 5세기 인도불교의 전면모를 반영한 기본저작을 체계적으로 번역, 소개하였다. 로년에 현장은 최대의 불교경전 《대반약경》 600권을 번역하였다. 여러 문화에 대해 깊은 리해를 갖고있은데다가 또한 범문에 정통했던 탓으로 현장이 번역한 글은 원문의 뜻을 살리면서도 류창했다. 현장은 경전을 번역하는 한편 불교의 다른 한 류파를 형성했다. 그것이 바로 중국불교사상 현장이 형성시킨 법상종이다. 불교저작외에도 현장은 려행기 《대당서역기》를 통해 10년남짓한 동안에 다녀온 110개 나라의 력사, 지리분포, 민족기원, 물산과 기후, 문화와 정치 등을 일일이 소개하였는데 그 내용이 풍부하여 오늘날까지도 아프가니스탄, 파키스탄, 인도 및 전반 중아시아의 고대력사와 지리를 연구하는 진귀한 자료로 되고있다. 19세기 이후 《대당서역기》는 선후로 프랑스어, 영어, 일어, 독일어 등으로 번역되여 현대고고학자들이 고대인도와 중아시아의 력사문화유적을 발굴하고 성과적으로 연구를 진행할수 있도록 근거를 제공해주었다. 현장의 영향은 주관적목적과 직접적효과를 초월하여 중국 및 동방문화사상 중요한 지위를 차지하고있다. 그는 국제적으로 인정받는 번역가, 불교학리론가일뿐만아니라 중고시대의 위대한 려행가로서 17년동안에 5만리를 걸어서 101개의 나라를 다녀왔는데 이는 세계력사상 드문 일이다. 그의 려행기는 오래전부터 불후의 세계명작으로 인정받고있다. 현장의 이야기는 력대문인들의 령감을 자극하였다. 당나라시기부터 많은 문인들이 예술수법을 리용하여 그의 이야기를 신격화하였는데 송나라에 와서는 《대당삼장취경시화》가 나왔고 명나라에 와서는 신화소설 《서유기》가 나왔다. 천여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사람들은 그에 대한 이야기를 즐겨 듣고있다. 《당조사화》    
148    중국농업의 신 신농씨 댓글:  조회:5103  추천:0  2016-03-20
중국농업의 신 신농씨     5000여년전에 신농씨(神农氏)는 강(姜)씨 성을 가진 부락의 한 수령이였다. 신농씨가 생활하던 년대에는 두령도 보통 씨족성원들과 함께 농사를 지어야 했다. 신농씨는 중국 최초의 농기구인 뢰사를 발명해 농업의 발전을 크게 추진했다. 그가 농업에 대해 큰 기여를 하였기에 사람들은 신농씨라고 존칭해 불렀다. 신농씨가 처한 시대는 부계씨족공사(父系氏族公社)초기여서 착취와 압박이 없고 사람들이 평등하게 우애를 나누며 살았다. 사기의 기재에 의하면 신농씨가 즉위한 시기에 남자들은 밭일을 하고 녀자들은 집에서 천을 짰으며 나라를 다스림에 있어서 감옥과 형벌이 필요되지 않았고 천하를 호령하는 왕도 군대도 경찰도 필요없었다. 신농씨는 중국 최조의 의학전문가이다. 전한데 의하면 신농씨는 백성들이 병마에 시달리는것을 보고 불안을 금치 못했다. 그는 오곡이 건강에 리롭다는것을 안후 100가지 풀의 열매가 사람들의 병을 치료할수 없겠는가고 생각했다. 신농씨는 산속을 헤매면서 여러가지 초약을 채집했는데 초약의 특성을 알기 위해 신농씨는 직접 초약을 먹어보았다. 신농씨는 경상적으로 중독되였는데 지어 하루에 70여번이나 중독된 적도 있었다. 전한데 의하면 신농씨는 《신농본초경(神农本草经)》을 편찬했는데 여기엔 여러가지 질병을 치료하는 처방전이 기재되여있다. 신농씨는 또한 천문력산(天文历算)분야에서의 학자이기도 하다. 그는 복희씨(伏羲氏)가 발명한 팔괘(八卦)에 기초해 64괘를 내놓았는데 이름을 《귀장(归藏)》이라고 달았다. 64괘로 사건을 기록할수 있을뿐만아니라 점을 칠수도 있었다. 이밖에도 신농씨는 적지 않은 사람들이 자신에게 필요되는 물건을 만들줄 모르는 반면에 필요되지 않은 물건들이 많이 생산되요 생활에 불편을 가져다주는것을 보고 사람들더러 한곳에 모여 물건을 팔고 사게 했다. 하여 중국에서 최초의 장마당이 생겨났다. 사람들에게 로동후의 오락을 제공하기 위해 신농씨는 5현금(五弦琴)을 만들었다. 오현금은 새소리와 같은 미묘한 음을 낼수 있었다. 후에 그는 아들에게 《종(钟)》이라 이름을 지은 악기를 만들어주었고 많은 가곡을 창작했다. 신농씨가 만들어낸 악기는 후세에 전해져 내려왔다. 신농씨는 강수(지금의 보계경내)에서 태여나서 죽은후 “다향지미(茶乡之尾)에 묻혔다. 다향지미는 지금의 호남성 주주시 염릉현 록원진(湖南省株洲市炎陵县鹿原镇)이다. 그는 염제(炎帝)라고 불리웠는데 존호는 신농이다. 후세사람들이 그를 중국농업의 신이라고 칭했다. 《고사》    
147    진독수 당적을 제명당한 후 감옥에서 지내던 나날들 댓글:  조회:5376  추천:1  2016-03-13
진독수 당적을 제명당한후 감옥에서 지내던 나날들   (번역)     1927년에 대혁명이 실패한후 진독수의 아들 진연년과 진교년이 련이어 국민당에 의해 살해되였다. 진연년과 진교년은 1922년 6월부터 1923년까지 선후로 프랑스와 구쏘련의 모스크바동방대학에 가서 공부했다. 진연년은 선후로 중공광동구당위 조직부장, 구당위 서기, 중공절강구당위 서기, 강소성당위 서기직을 력임했다. 1927년 6월 29일에 살해될 때 29살밖에 되지 않았다. 진교년은 선후로 중공북경지당위 조직부장, 북방구당위 조직부장, 중공호북성당위 서기, 중공중앙조직부 부장, 중공강소성당위 조직부장 등직을 력임했다. 1928년 1월 19일에 살해될 때 26살밖에 되지 않았다. 반년사이에 두 아들을 잃은 진독수(陈独秀)는 고통으로 온몸이 초췌해졌다. 진독수는 복청천에게 “제5차대표대회에서 나는 공격의 대상으로 되였습니다. 모두들 나를 우경기회주의, 투항주의라고 했는데 내가 누구에게 투항했다는 말입니까? 장개석이 연년과 교년을 모두 살해했는데 내가 내아들을 살해한 그에게 투항했다는 말입니까? 왕정위가 ‘혁명을 하려는 사람은 왼쪽으로 오고 혁명을 하지 않으려는 사람은 물러가시오’라고 높이 웨쳤는데 내가 그를 좌파라고 여겼을뿐만아니라 쓰딸린마저 그를 좌파라고 인정했습니다."라고 말했다. 1929년 11월 5일에 진독수는 당적을 제명당했다. 이 기간에 진독수는 점차 구쏘련의 트로쯔끼의 관점을 접수하기 시작했다. 공산국제의 독재전재에 대해 불만을 느낀 그는 간행물을 꾸리고 글을 써서 중국의 문제는 응당 중국인 자신이 연구하고 해결해야 한다고 말했다. 진독수는 당적을 제명당했지만 신앙과 추구를 포기하지 않았으며 남경국민당정부의 암흑통치를 견결히 반대했다. 1932년 10월에 상해의 저택에서 국민당은 “민국위해죄”로 진독수를 붙잡아 감옥에 처넣었다. 장개석은 진독수를 “민국위해죄”로 법정에서 재판해야 한다고 지시했다. 진독수는 남경군사법정으로 압송되였다. 1933년 4월 14일에 강소성고등법원에서 진독수의 사건을 공개심리하기 시작했다. 법정에서는 진독수를 “민국위해죄”로 기소했다. 진독수는 높은 소리로 항변했다. “나는 국민당과 국민정부를 반대했다는것만 승인합니다. 국민을 해쳤다는것은 승인하지 않습니다. 정부는 국가가 아니기때문입니다. 손중산, 황흥 등은 만청정부를 뒤엎고 북양군벌을 타도했습니다. 정부를 타도하는것이 곧 반역죄라고 한다면 국민당은 두번이 반역죄를 지은것이 아니겠습니까?” 방청석에서는 한바탕 웃음소리가 터졌다. 진독수의 변호사는 그의 친구 장사소였다. 장사소는 경전중의 고사를 리용하여 장편대론을 하였고 진독수가 중국공산당에서 제명당한것은 국민당을 협조했기때문에 숙청을 당한것이라고 변호했다. 그 말을 들은 진독수는 즉시 성명을 발표했다. “장변호사의 발언은 완전히 그 개인의 뜻입니다. 그는 나에게 동의를 얻은적이 없습니다. 나의 정치주장은 장변호사가 말하는 변호의 근거로 될수 없습니다. 응당 나의 변명문의 견해를 근거로 해야 합니다.” 이번 신판에 대처하기 위해 진독수는 2월 2일에 변명문을 써놓았다. 이 변명문에는 “법과 리치로 따지면 국민당정부와 국가를 구별해야 한다, 국민당이야말로 국민에게 해를 끼치는 당이며 국민정부는 나라를 망치는 정부이다. 이런 정부가 빨리 무너지지 않으면 나라의 전도가 없을것이다”라는 내용이 적혀있었다. 그는 자신이 이미 공산당을 떠났고 자신이 신앙하던 주의를 저버렸다는것을 승인하지 않았다. 진독수와 장사소의 변호는 도리가 있고 근거가 있었지만 법원에서는 당국의 뜻대로 진독수를 유기형 13년에 처하고 공민의 권리를 15년동안 박탈한다고 판결했다. 판결문랑독이 끝나자 진독수는 당장에서 큰소리로 항의했다. “나는 국민당을 반대했지 나라를 반대하지 않았소! 판결이 공정하지 못하니 나는 상소하겠소!” 그후 옛친구 백문위는 진독수의 아들 진송년을 보고 “너의 아버지는 나이 들어도 그 기개가 변하지 않아 영웅호걸이 되려고 하는구나. 많은 친구들이 도와주려고 해도 도와줄수가 없구나”하고 말했다. 당시 진독수는 이미 53세였다. 이것은 그의 일생에서 다섯번째의 감옥행이였다. 당사학자들은 진독수가 일생에서 감옥생활을 한 차수는 네번이란 설과 다섯반이란 설이 있다고 했다. 그런데 진장박이 믿는것은 다섯번이란 설이였다. 두가지 설의 쟁점은 1913년 7월에 구류된것을 체포로 셈에 넣을수 있는가 하는것이였다. 진독수는 안휘도독부 비서장직을 맡고있을 때 도독 백문위를 협조하여 원세개를 토벌하는 “2차혁명”에 참가했으나 백문위의 부하 호만태의 배반으로 실패했다. 진독수는 안휘성 무호를 지날 때 그곳에 주둔하고있던 공진붕에게 “랍치”당했다. 《진독수대전》의 저자 임건수는 “체포는 사법술어입니다. 이번에 진독수가 공진붕에게 묶이여 상객으로 끌려간것은 정권기관에서 체로한것과 성질이 다름니다. 때문에 나는 네번이란 설을 믿습니다”라고 말했다. 1934년에 진독수는 옥중에서 시 《금분루(金粉泪)》 56수를 썼다. 시중에는 비슷한 력사사실을 빌어 현실을 풍자하며 장개석을 위수로 한 4대가족의 암흑과 부패한 정치를 규탄했다. 1932년 10월 25일에 군정부장 하응흠이 와서 심문했다. 진독수에게서 시국에 대한 견해와 중국공산당에 대한 태도를 알아본후 하응흠은 정부와 합작하자고 권고했다. 그후 북경대학 교장 장몽린, 교육부 부부장 단석붕, 철도부장 고맹여 그리고 진공박, 서은증 등이 선후로 감옥에 찾아와 회개서만 쓰면 자유를 얻을수 있다고 설득했다. 그러나 모두 퇴박을 맞고 화를 내면서 돌아갔다. 1937년에 항일전쟁에 폭발했기에 국민당은 정치범을 석방했다. 5년동안 감옥살이를 한 진독수는 남경고등법원에 석방을 제기했다. 1937년 8월 21일에 사법원에서 진독수를 감형한다는 공문이 내려왔다. “범인은 이미 감옥에서 5년을 넘겨 징역을 받았는데 애국감정이 깊고 뉘우치는 태도가 좋았다… 범인 진독수의 원 징역기간을 감형하여 유기형 5년으로 집행하는것으로 관대하게 처리한다.” 진독수는 이 설법에 대해 몹시 화를 냈다. 출옥후 즉시 《신보》편집부에 편지를 써보냈다. “그들이 나를 ‘애국감정이 깊고 뉘우치는 태도가 좋았다’고 했는데 애국한다고 감히 뽐내지 못하겠고 뉘우친다는것은 뭘 가리키는지 모르겠습니다. 나는 원래 무죄이기에 뉘우칠 대상이 없으며 억울하게 재판을 받았기에 뉘우침은 다른 사람에게 속해야 합니다.” 진독수가 출옥한후 옛친구 호적이 그에게 미국에 가서 “우공(寓公)”이 되라고 했고 장개석은 그에게 국민당 로동부장직을 맡아달라고 청했지만 그는 모두 거절했다. 국민당정부는 또 10만원을 투자하여 그에게 따로 “공산당”을 창건하고 국민정부에 참가하라고 청했지만 진독수는 유혹에 넘어가지 않았다. 장개석은 국민당 중앙조직부장 진과부를 시켜 진독수에게 로동부장직을 주고 해마다 10만원의 경비와 국민참정회 다섯명의 명액을 주는것으로 유혹하라고 했다. 또 국민당중앙 비서장 주가화를 시켜 진독수에게 새로운 공산당을 조직해줄것을 요구했다. 그들의 요구를 들은 진독수는 화가 나서 말했다. “장개석은 나의 동지들을 죽였고 나의 두 아들도 죽였으며 나를 5년동안이나 감옥살이를 하게 하였습니다. 이렇게 나는 그와 철천지원쑤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국공이 합작하여 공동의 원쑤 일본을 대적해야 하니깐 그와 합작하여 항일하는것을 나는 반대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나더러 새로운 공산당을 조직하고 정부에 참가하라면 그것은 헛된 생각입니다!” 1937년의 7.7사변후에 국제국내형세는 근본적인 변화가 일어났다. 진독수는 출옥후에 정세를 잘 살펴보고 트로쯔끼파의 극좌주장을 비판하고 트로쯔끼파와의 결렬을 선포함과 동시에 국공합작을 옹호하고 중국공산당의 항일강령을 옹호하며 적극적으로 전민족의 항전대오에 뛰여들었다. 진독수는 출옥할 때 일본군이 상해를 공격하고있었다. 상해의 트로쯔끼파가 진독수더러 상해에 가서 다시 “당조직”을 세우라고 했을 때 진독수는 이렇게 대답했다. “나의 의견은 진독수외에 어떤 사람도 대표하지 않습니다. 나는 중국의 대다수 사람들을 위해 말할뿐이지 어떤 당파에게나 구속되지 않을것입니다.” 1937년 9월 9일에 진독수는 배를 타고 남경을 떠나 무한에 도착했다. 중국공산주의운동의 선구자이고 중국공산당창시인이며 중국공산당의 조기 최고령도자인 진독수는 1942년 5월 27일에 사천성 강진에서 사망되였다. 
146    송경령과 송미령은 왜서 모두 아이를 낳지 못했는가 댓글:  조회:7667  추천:0  2016-03-06
송경령과 송미령은 왜서 모두 아이를 낳지 못했는가   (번역)     송경령편   송경령이 아이를 낳지 못하게 된 원인을 말하려면 먼저 그녀가 손중산과 함께 험난한 혁명의 길을 걸어온 이야기부터 해야 한다. 1916년 3월에 송경령과 손중산이 함께 일본에서 귀국하여 상해로 돌아온후부터 근 10년동안 손중산은 계속 중국혁명을 령도했다. 그 기간에 상해에 있으면서 책을 집필하기도 하고 상해에 가서 정무를 돌보기도 했는데 그들 부부는 늘 함께 사업했다. 송경령의 탁월한 머리는 손중산의 두뇌를 더욱 풍부하게 하여 그의 인격을 더욱 위대하게 완성시켰다. 그들이 귀국한후 손중산은 광주로 가서 대원수로 되여 제1차호법운동을 령도했다. 군벌과 정객들의 배척을 받은 손중산은 화가 나서 대원수직을 사직했다. 그 시기에 손중산은 상해에 거주하면서 어찌할 방도가 하나도 없어 의기소침해지고 절망에 빠져있었다. 송경령은 생활상에서 손중산을 전심전력으로 보살피고 정신상에서 고무격려하며 손중산을 분발하게 했다. 손중산이 독서를 즐기는것을 잘 알고있는 송경령은 가치가 있는 서적과 신문잡지를 수집했으며 손중산을 도와 자료를 열람하고 저서를 편찬했다. 1918부터 1919년사이에 손중산은 문을 닫고 래방객을 사절하고 문장을 지으면서 현상태를 개변하려고 결심했다. 그 시기의 저작에는 모두 송경령의 심혈이 깃들어있었다. 그녀는 손중산을 도와 많은 초안을 작성했으며 영문번역도 했다. 1920년 11월 25일에 송경령은 군정직무를 회복한 손중산을 따라 상해를 떠나 광주로 다시 돌아갔다. 1921년 4월에 손중산은 광주에서 비상회의를 열고 중화민국정식정부를 성립하기로 결정하고 대통령부를 월수산 남록에 설치했다. 1921년 5월 5일에 손중산은 림시대통령에 취임했다. 그해 10월 24일에 손중산은 계림에 가서 북벌계획을 세웠다. 송경령은 뒤에서 적극적으로 손중산의 군사행동에 배합했으며 녀성들을 동원하여 출정군인위로회를 조직했다. 동시에 송경령은 각계인사들을 동원하여 거액의 위문경비를 모금했으며 위로대를 조직하여 전선에 가서 전투에 나설 전사들을 위문했다. 북벌군이 순리롭게 진군할 때 손중산이 친히 배양한 부하 진형명이 혁명을 배반하고 반란을 일으켰다. 1922년 6월 16일 새벽 2시에 손중산은 진형명의 부대가 월수산을 공격하는데 정세가 위급하다는 보고를 받았다. 손중산은 깊은 잠이 든 송경령을 흔들어 깨우며 이 곳이 위험하니 함께 떠나자고 했다. 하지만 송경령은 위험에 직면했지만 두려워하지 않고 전반 국면을 돌보기 위해 떠나지 않으려고 결심했다. 그녀까지 떠나면 반란군에게 철군의도가 쉽게 발견될수 있기때문에 그녀는 남아서 손중산이 비밀리에 철수하는것을 엄호하려고 했다. 그리하여 송경령은 손중산을 보고 “중국에 내가 없어서는 되지만 당신이 없어서는 안돼요!”하고 말했다. 경호원들도 함께 떠나자고 권고했지만 송경령의 결심을 꺾지 못했다. 손중산은 하는수없이 50명의 위병들을 남아서 송경령과 대통령부를 지키라고 하고는 혼자서 떠났다. 손중산은 두번이나 반란군의 눈을 피해 황포의 영풍함에 올랐다. 그는 사전에 약속했던대로 례포 세방을 쏘아 안전하게 영풍함에 도착했다는 신호를 보냈다. 밤공기를 째며 울려퍼진 세방의 포소리는 월수청사에까지 들려왔다. 그 세방의 포소리를 들은 송경령과 위병들은 안도의 숨을 내쉬였다. 손중산이 떠난지 반시간이 되여 갑자기 포성이 울리더니 반란군들이 월수청사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반란군들이 산지를 점령하고 높은곳에서 좌우협공하면서 “손문을 죽여라, 손문을 죽여라”하며 미친듯이 웨쳐댔다. 사방이 어두워 적들을 볼수 없었기때문에 위병들은 잠시 반격을 하지 않았다. 날이 밝자 위병들은 보총과 기관총으로 반격하여 반란군의 공격을 30여차나 물리쳤다. 반란군들은 월수아빠트에 맹렬한 포격을 가했다. 목욕실이 포탄에 맞아 무너졌지만 위병들은 두려워하지 않고 용감히 싸웠다. 아침 8시가 되자 탄알이 모두 떨어졌다. 손중산이 이미 영풍함에 도착해 이 곳에 계속 남아있을 필요가 없었기때문에 송경령은 산아래로 내려가기로 결정했다. 두명의 위병과 요대장은 손경령을 호위하면서 천교를 따라 천천히 앞으로 걸어나갔다. 탄알이 두번이나 송경령의 귀밑으로 스쳐지났다. 그들이 방금 천교를 지났을 때 천교가 반란군의 포격에 붕괴되고 요대장도 탄알에 맞아 넘어졌다. 두 위병은 요대장을 대통령부의 후원으로 업고가서 상처를 감싸주었다. 그들이 대통령부에 도착했을 때 주위는 포화로 뒤덮여있었다. 송경령이 방금 대통령부에서 나왔을 때 건물의 지붕이 무너져버렸다. 아침 8시부터 오후 4시까지 송경령 등은 포화가 계속되는 지옥속에 로출되여있었다. 오후 4시에 광주위수구 사령 위방평은 부관을 대통령부에 파견하여 손중산의 위병들과 담판했다. 위병들은 첫째로 송경령의 안전을 보장해야 한다는 조건을 내걸었다. 그러나 부관은 송경령의 안전을 보장할수 없다고 대답했다. 그때 두층의 철문이 모두 열리면서 반란군들이 와아 소리를 지르며 밀려들었다. 혼란중에 송경령은 대문으로 달려나갔다. 급한중에 꾀가 생긴다고 손경령은 손에 들고있던 가방속의 물건을 땅바닥에 흩어지게 던져버렸다. 그녀는 반란군들이 서로 패물과 돈을 빼앗는 기회를 리용하여 도망쳤다. 송경령은 그 시기에 임신한 몸이였기때문에 행동이 불편했다. 대문을 빠져나온 송경령은 기지와 용감성으로 위기를 넘기면서 여러번이나 반란군을 피해 아는 사람의 집에 가서 휴식하다가 배를 타고 령남대학 교장 종영광의 저택으로 갔다. 그런데 과도한 피로때문에 송경령은 종영광의 저택에서 그만 류산을 하고말았다. 이것이 송경령의 일생에서 유일한 한번의 임신이였다. 그 한번의 류산때문에 송경령은 평생 아이를 낳을수 없었다. 이는 녀성에게 있어서 건강방면에서나 정신상에서 지대한 고통이 아닐수 없었다. 그러나 송경령은 필경 일세의 위인이였다. 그녀는 크나큰 도량과 진심어린 깊은 사랑을 가지고있었기에 그후의 혁명생애에서 수천수만의 어린이들을 위해 장기적으로 녀성아동복리사업에 종사했다. 아이들을 아끼고 사랑하는 송경령은 전 중국아동을 위해 모성애를 바쳤다.     송미령편   대만 《련합보》의 보도에 따르면 장위국은 대계도의 아들인데 장개석이 부양하여 친아들로 간주했다. 장위국은 형님의 압제를 받으며 마음속으로 늘 불괘하게 여기고있었다. 장위국을 키워준 요치성은 장위국에게 “너의 ‘아버지’는 어렸을 때 조심하지 않아 음낭이 난로에 데였는데 왕대부인이 아들의 화상을 치료하기 위해 돼지기름을 발라주었단다. 그런데 그 때문에 개에게 물려서 생육능력을 잃게 되였단다”라고 알려주었다. 그러니 장위국은 장개석의 친아들이 아니라는것이다. 그러나 장개석의 일기에 따르면 1927년 12월에 그와 송미령이 결혼한후 1928년에 송미령이 임신을 해서 그는 몹시 기뻐했다. 그런데 뜻밖에도 자객이 뛰여드는 바람에 송미령이 놀라서 류산을 했다. 미국 스탠퍼드대학의 연구원 곽대군은 장개석의 일기에 따르면 그해 8월에 어떤 자객이 한주일내에 두번이나 장개석이 거처하는 아래층의 위병을 돈으로 매수하여 웃층으로 올라와 암살하려고 했다. 첫번째는 24일 야밤인데 자객이 위병을 돈으로 매수한후 웃층으로 올라가려다가 송미령을 놀라서 깨여나게 했다. 장개석은 25일의 일기에 “안해가 병으로 인공류산을 했다”고 썼다. 27일의 깊은 밤에 두명에게 돈으로 매수당한 위병이 침실에 침입하여 총을 쏘려다가 장개석이 돌아눕는 바람에 놀라서 달아났다. 그후 장개석은 주모자가 누구인지 조사했고 그일이 있은 후 송미령은 더는 생육을 하지 못했다. 송미령이 류산을 했다는 장개석일기의 기재는 요치성이 장위국에게 했던 말이 정확하지 않다는것을 말해주었을뿐만아니라 영문으로 저술된 《진결여회억록》에서 언급했던 “장개석이 생육을 할수 없는 원인이 젊었을 때 매독에 걸렸기때문이다”라는 설을 뒤엎어놓았다. 장개석의 일기에 따르면 장개석은 젊었을 때 욕정에 몸부림친 적이 있었다. 하지만 장씨가문을 대표해 미리 장개석의 일기를 읽은 미국 스탠퍼드대학 후버연구소(斯坦福大学胡佛研究院)의 객원연구원 반방정은 “장개석은 송미령과 결혼한후 딴 사람으로 되였고 경건한 기독교신자로 되였다”고 말했다. 반방정은 또 “장위국은 젊었을 때 쏘련에 가서 류학하면서 12년동안 묵어있었는데 그 기간에 장개석이 쓴 일기를 보면 장개석이 장위국을 매우 좋아했다는것을 알수 있다. 그러나 송미령이 장개석에게 장위국의 출생에 대해 솔직히 말해달라고 요구했을 때 장개석은 도리여 대계도와의 의리를 지켜 대답하지 않았고 그 일로 송미령은 화가 나서 향항에 체류하면서 돌아오지 않았다”고 말했다.  
145    송미령이 사귀였던 남자들 댓글:  조회:6239  추천:2  2016-02-28
송미령이 사귀였던 남자들   (번역)     미국 웰즐리대학의 기록보관소에는 송미령의 처녀시절 서한들이 소중히 간직되여있다. 그 서한에 따르면 송미령이 장개석과 결혼하기전에 적지 않은 청혼자들이 있었으며 송미령자신도 좋아하던 남자들이 있었다.   이 서한들은 송미령이 미국의 대학에 다닐 때의 동창생이였던 밀스(米尔斯)에게 써보낸것이였다. 송미령보다 4살 년상인 밀스는 그녀의 일생에서 단짝 친구였다. 송미령의 처녀시절의 편지중에 그녀의 마음을 흔들어놓았다고 언급했던 남자들이 지금에 와서 누구인지 중요한 일이 아니다. 그러나 그들의 출현으로 하여 송미령은 사랑과 혼인에 대해 많은 사고를 할수 있었는데 그것은 그녀가 인생가치를 추구한 마음의 려정을 보여주었다.   1917년 6월에 송미령은 웰즐리대학을 졸업한후 오빠 송자문과 함께 귀국했다. 귀국하는 배우에서 송미령은 “Mr.Van Eivigh”이라는 “운명의 남자”를 만났는데 첫눈에 반해버렸다. 그 남자는 건축사였는데 아버지가 화란사람이고 어머니는 프랑스사람이였다. 배우에서 10여일동안 얘기를 나누면서 두 사람은 서로에게 호감을 가지게 되였다. 그가 송미령에게 청혼했을 때 19세의 송미령은 마음이 움직였다.   상해에 돌아온후 그녀의 혼인문제는 부모의 간섭을 받았다. 송미령의 아버지 송요여는 비록 미국류학을 다녀온 선교사였지만 어머니 예계진은 중국에서 나서 자란 녀성으로서 매우 전통적이고 보수적인 기독교신자였다. 그들은 19살밖에 안되는 딸을 그렇게 어린 나이에 시집보내고싶지 않았고 더구나 외국인에게 시집을 보내고싶지 않았다. 부모의 반대때문에 송미령은 정서가 저락되여있었고 혼인문제에서 매우 비관적이였다.   1917년 8월 16일에 밀스에게 보낸 편지에서 송미령은 이렇게 썼다. “나는 집에만 있고싶었고 결혼하고도 싶지 않았어요. 특히 제가 전번 편지에 언급했던 배우에서 만난 그 운명의 남자하고 결혼하고 싶지 않았어요. 내가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이랑 결혼할수 없게 되였지만 그렇다고 다른 남자들과도 결혼하고싶지 않아요. 명성과 금전을 위해서라면 몰라도…”   부모의 반대때문에 반년도 지나지 않아서 그 남자와의 련애가 끝나버렸다. 그때문에 부모와 크게 싸운 송미령은 한동안 힘든 나날을 보냈다. 갓 귀국한 송미령은 자신에 대한 부모의 “관심”에 적응되지 못했다. 그녀는 토라지는 방식으로 자신의 불만을 표시했다. 사실 미국에서 공부할 때 송미령은 한 남학생에게 호감을 가진 적이 있었지만 대학 2학년에 올라간후에는 더는 그 남학생을 좋아하지 않았다. 10년간의 류학생활을 하면서 송미령은 독립하는 습관을 가지게 되였다.    귀국후 며칠이 안되여 오래전부터 알고있던 이성친구 HK와 양선생이 북경에서 송미령을 찾아왔다. HK군은 2년동안 송미령을 추구했다. 두 사람은 미국에서 공부할 때 언약을 한적이 있었고 송미령도 상대방을 좋아한적이 있었다. 그러나 귀국후 송미령은 그와 헤여졌다.   1918년 1월말에 HK는 또 북경에서 송미령을 보러 상해로 왔다. 송미령의 어머니는 딸이 그에게  시집가는것을 바라지 않았다. 몇번 대면한후 송미령은 다시 그와 만나는것을 거절했으며 HK가 있을 가능성이 있는 모든 야회에 출석하는것을 피했다. 송미령이 랭대했지만 HK는 포기하지 않았다.   송미령을 접근하기 위해 그는 송씨가문에서 례배를 드리는 교회당으로 다니기 시작했다. 그가 검질기게 달라붙자 송미령은 화가 나서 교회당으로 다니지 않았다. 후에 두 사람은 만나도 서로 말도 걸지 않았다. 이렇게 친구가 낯선 사람으로 변해버렸다. HK의 끈질긴 애정공세는 효과를 보지 못했을뿐만아니라 오히려 송미령의 반감을 야기시켰다. 그때로부터 송미령의 편지에는 그녀를 골치아프게 한 HK가 다시는 언급되지 않았다.   HK를 거절한 시기인 1918년에 두 남자가 선후로 송미령의 마음을 흔들어놓았다. 그중 한 사람은 미국류학을 다녀왔지만 이미 결혼한 남자였다. 송미령은 자신이 유부남을 사랑하게 될줄은 생각도 못했다. 1918년 4월에 송미령은 중병에 걸린 아버지를 돌보는 한편 유부남을 사랑하면서 그와 결혼할수 없는 현실이 고통스러웠다.   1918년 5월초에 송미령의 아버지 송요여가 신장병으로 사망되여 온집식구는 한없는 슬픔에 잠겨있었다. 그 기간에 송미령은 혼인에 대해 리성적인 사고를 가지고있었다. 그녀는 녀자는 꼭 결혼해야 한다고 여겼지만 의연히 리성과 정감, 리상가 현실사이에서 방황하고있었다. 어떤 때 그녀는 모든것을 포기하고 그 기혼남자한테 시집을 가려고 시도했으며 심지어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편벽한 곳으로 가서 원시생활을 하려고도 생각했다.   또 어떤 때는 그 나이 많고 부유한 남자한테 시집을 가서 자신의 리상을 실현하려고도 했다. 물질생활의 풍족과 혼인문제에서의 끊임없는 흔들림이 송미령으로 하여금 무료한 느낌을 받게 했다. 자신의 존재가치와 의의를 증명하기 위해 1918년부터 송미령은 더욱 실제적 의의가 있는 사회사업을 하려고 노력했다.   명문가문에서 태여나 조건이 우월하고 지식과 미모를 겸비한 그녀를 따르는 남자들이 많은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일이였다. 송미령이 우수한 남자들을 하나하나 거절하는것을 본 사람들은 그녀가 임자 있는 꽃이 아닐가고 의심했다. 요언은 그렇게 생겨났다. 1919년 7월 14일에 송미령이 밀스에게 보낸 편지에는 이런 내용이 적혀있었다.   “상해라는 이 도시에서는 가는 곳마다 내가 이미 약혼했다는 소문이 돌았습니다. 게다가 소문마다 내가 약혼했다는 상대는 다른 남자였습니다. 친구들도 모두 내가 약혼한 남자가 도대체 어느 남자인지 몰랐습니다. 더욱 우스운것은 나와 약혼했다고 소문난 그 남자들은 누구도 소문을 부정하거나 승인하지 않았습니다.”   송미령의 어머니 예계진은 딸에게 좋지 않은 소문이 돌자 그해 6월부터 딸이 어떤 남자친구도 만나지 못하게 했다. 2개월이 지나자 요언은 잠잠해지기 시작했다. 그런데 미국에서 온 몇몇 옛친구들이 송미령이 약혼하지 않았다는것을 알고 그녀에게 애정공세를 들이대며 귀찮게 굴었다. 그때문에 그녀는 매우 괴로왔다. 그녀는 그 남자들이 매우 좋은 친구라고 여겨 단지 친구로 지내기 싶었을뿐이지 그들과 우정을 초월한 사이로 엮이고싶지 않았다.   이때부터 1921까지 송미령이 밀스에게 써보낸 편지는 처음 2년동안보다 적었으며 련애문제에 대해서도 매우 적게 언급했다. 다만 1921년 5월 25일에 써보낸 편지만은 례외였다. 그번 편지에서 송미령은 친구에게 버니라고 부르는 남성에 대해 언급했다.   송미령이 버니와 련애한다는 말을 들은 부모는 화를 내면서 견결히 반대했다. 버니가 외국인이였기때문이다. 송미령은 버니를 특별히 좋아했다. 전에 만났던 모든 남자들보다 더 좋아했다. 심지어 최근에 약혼까지 한 그 사람보다도 더 좋아했다. 하지만 송미령은 알고있었다. 버니와의 관계는 우정을 초월한 사랑으로 발전할수 없다는것을…   송미령은 편지에 이렇게 썼다. “우리 가정은 보수적이여서 가족의 순결한 혈통을 유지해야 된다고 엄격히 규정했기때문에 죽어도 내가 외국인에게 시집가는것을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나도 버니와는 불가능하다는것을 알고 단념했습니다.”   송미령은 버니와의 련애사실을 말하면서 밀스에게 현재 다른 한 남자의 사랑을 받아들여야 할지 말아야 할지 진지하게 생각해보는중이라고 했다. 바로 그녀가 최근에 약혼한 그 남자였다.   이 편지는 송미령이 처녀시절에 보낸 편지중 애정문제에 대해 언급한 마지막 한통의 편지였다. 자신이 특별히 좋아한다고 했던 버지는 부모의 강련한 반대때문에 포기했던것이다. 그 진지하게 고려중이라는 우수한 남자의 사랑을 송미령이 받아들였는지는 지금까지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다.   대학을 졸업하고 귀국한후 송미령은 오래동안 사랑에 대한 동경과 갈망을 가지고있었고 혼인에 대해 리성적으로 깊이 생각하기도 했다. 그러나 돈이 있고 능력이 있고 신분이 있고 교양이 있는 많은 남자들의 청혼을 받아들이기로 결정할 용기가 없었다. 처첩이 있는 군인출신의 정치명인 장개석이 나타날 때까지…   1927년은 바로 송미령과 장개석이 사랑하고 결혼을 한 중요한 한해였다. 송미령은 밀스에게 한통의 편지도 써보내지 않았다. 장개석과 결혼한후인 1928년 1월에 송미령은 남경에서 “장개석의 부인”의 명의로 밀스에게 한통의 편지를 써보냈다. 편지에서 그녀는 결혼정황과 혼인에 대한 그들부부의 부동한 견해에 대해 언급했다. 비록 신혼시절에 의견차이가 있었고 결혼생활에서 갈등이 있었지만 그런 의견차이와 갈등은 그녀와 장개석의 근 50년에 달하는 혼인생활에 조금마한 영향도 끼치지 못했다.    
144    등소평과 화국봉의 아슬아슬한 쟁론 댓글:  조회:6906  추천:1  2016-02-20
등소평과 화국봉의 아슬아슬한 쟁론   (번역)     등소평이 갓 복직했을 때는 의연히 화국봉이 중국의 방향을 장악하고있었다. 국정방침은 어떠한 실질적인 변화도 없었다. 계급투쟁은 의연히 “기본고리”였고 “두가지 무릇”은 의연히 주류사조였다. 또 “세세대대로 모택동사상의 위대한 기치를 높이 추켜들자”는 화국봉의 가르침이 전국에 전해지고있던 시기였다. 등소평은 앞으로 나가려고 했지만 과거에 대해 설명하지 않을수 없었다. 그는 중국을 이끌고 미래를 향해 달릴 때 무거운 과거의 짐을 지고갈수 없었다. 과거에 대해 똑똑히 말하지 않으면 앞으로 나갈수 없었다. 이는 의식형태의 문제이면서도 권력이 누구에게 속하는가 하는 문제이기도 했다. 전자의 문제: 모택동이 아직도 중국인의 도사로 될수 있는가? 만약 될수 있다고 하면 모택동에게 여러번이나 비판을 받고 두번이나 타도되였던 등소평이 무슨 리유로 다시 정치에 나설수 있겠는가? 만약 될수 없다면 정신지주가 없는 중국이 미래로 향해 나갈 힘이 있겠는가? 후자의 문제: 문화대혁명이 남긴 지금의 권력체계이다. 이것을 절대로 계속 이후 중국의 원칙근거로 할수 없었다. 그러나 이 문제는 화국봉과 관련되여있었다. “두가지 무릇”에 대한 비판은 화국봉과 련계되지 않게 할수 없겠는가? 만약 화국봉과 련계된다면 또 허락을 얻을수 있겠는가? 중국에 대해 잘 알지 못하는 사람은 리해할수 없을것이다. 지금의 중국사회 가치관념으로 가늠해보아도 어리둥절해할것이다. 그러나 당시는 1978년 가을이였고 이 문제는 확실히 중국의 전반적인 대세중의 결정적인 부분이였다. “두자지 무릇”은 모택동의 후계자와 정치유산계승자인 화국봉이 형세를 안정시키고 자신의 정치지위를 든든히 하기 위해 제출한 주요한 정치방침이였다. “두가지 무릇”은 “무릇 모주석께서 결정한 결책에 대해 우리는 반드시 모두 옹호해야 하며 무릇 모주석께서 내린 지시에 대해 우리는 처음부터 끝까지 변함없이 따라야 한다”는것이다. 북경에서 나타난 이 쟁론은 1977년 봄부터 시작되였지만 멈추지 않았다. “두가지 무릇”을 견지하는 진영의 사람들은 패배중에 있었고 반대진영의 사람들은 점차 강대해지고있었다. 마치 한가닥의 “화근”이 1978년 여름에 닥쳐와 중남해의 높은 담장을 뚫고 나가 전국을 휩쓸은것 같았다. 그런데 가장 먼저 진동을 받은것은 머나먼 지방인 대서남이였다. 6월 25일에 감숙성당위 제1서기 송평은 리론학자들을 모아놓고 “용기를 내여 진리를 추구하라”고 했고 또 “이것은 금지구역이고 저것도 금지구역이라고 하지 말아야 한다”고 말했다. 두 주일이 지나서 이 “역류”는 다른 한 머나먼 지방인 동북으로 휩쓸어갔다. 흑룡강성당위 제1서기 양역신은 부하들에게 “사상을 해방”하라고 하면서 무슨 말이나 다 할수 있고 약점을 잡지 말고 모자를 씌우지 말며 몽둥이로 때리지 말라고 당부했다. 또 두 주일이 지났을 때 료녕성당위제1서기 임중이는 더욱 단호하게 말했다. “실천은 진리를 검증하는 유일한 표준이라고 했는데 이것은 현재 어지러운 세상을 바로잡아 바른 상태로 되돌릴수 있는 최선의 선택입니다.” 그후 서북방향에서 또 호응했다. 신강위글족자치구당위제1서기 왕봉은 이렇게 말했다. “진리의 표준은 오직 사회실천뿐입니다.” 그는 또 “이 문제를 승인하는가 안하는가 하는 문제는 하나의 리론문제일뿐만아니라 우리 당과 국가의 사상로선, 정치로선과 관계되는 문제입니다”라고 말했다. 이어 이 “역류”는 남쪽으로 흘러내려갔다. 그해 9월 상순에 복건성당위서기 료지고는 “과학리론은 객관적법칙을 증명하는 론거이지 진리를 검험하는 표준이 될수없습니다”라고 말했다. 그는 또 “이는 당과 국가의 전도, 운명과 관계되는 큰 문제입니다”라고 말했다. 이 말은 확실히 고의로 과장하여 듣는 사람을 놀라게 하려고 한 말이 아니였다. 적어도 등소평이 보기에는 그랬다. 그러나 등소평은 이 몇몇 성당위서기들이 나서서 말했다고 해서 일이 다 된것이라고 여기지 않았다. 그는 이 쟁론을 전국에 확대하여 “무릇파”가 부끄러워 얼굴을 들수 없게 해야 한다고 여겼다. 그래야만이 자신의 리론도 새 시대의 주류로 될것이고 진일보 행동하면서 가는곳마다 “불을 지필수” 있다고 여겼다. 등소평은 17개월전부터 개혁의 불을 지피기 시작했다. 1977년 4월 10일에 그는 “완전히 정확하게 모택동사상을 리해해야 한다”고 말했다. 1977년 5월 24일에는 또 “두가지 무릇”은 안된다고 말했고 1978년 5월 30일에는 또 “지금 실천은 진리를 검증하는 표준이란것마저 문제가 되고있습니다. 그야말로 해괴한 일입니다”라고 말했으며 1978년 6월 2일에는 “어떤 사람들은 누가 실사구시를 견지하고 실제로부터 출발하여 리론과 실천을 결합하면 천추에 용납못할 큰 죄악이라도 지은줄로 생각합니다.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의 관점은 사실상 맑스, 레닌, 모택동의 본래 말대로 따라하고 그대로 전하고 그대로 적용하면 된다고 주장하는것입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맑스레닌주의, 모택동사상을 위반하고 중앙정신을 위반한것이라고 여깁니다. 그들이 제기한 문제는 작은 문제가 아니라 맑스주의, 모택동사상을 어떻게 보는가에 관계되는 문제입니다. 어지러운 세상을 바로잡아 정상으로 되돌리고 정신적 속박에서 벗어나려면 우리의 사상을 크게 해방해야 합니다.” 1978년 7월 22일에 등소평은 “론쟁은 피면할수 없습니다. 어떤 사람들이 나서서 론쟁하는 근본원인은 ‘두가지 무릇’입니다”하고 말했다. 등소평의 말은 모두 북경의 높은 담벽안에 한 말이였다. 지금 그에게 수요되는것은 중남해에서 나와서 이 옛도시밖으로 나가는것이였다. 그는 황금의 가을에 전문렬차에 올라 북방으로 달려갔다. 1978년 9월 14일 새벽에 등소평일행은 길림성 도뢰소역에 도착했다. 흑룡강성당위서기 리력안이 플래트홈에서 기다리고있었다. 기차가 잠간 멎은후 등소평은 흑룡강성 대경유전으로 곧추 달리라고 요구했다. 이어 또 멈추지 않고 할빈까지 달려갔다. 그는 마음속에 할말이 많았다. 그는 리력안과 물질장려에 대해 담론했고 대경시당위서기 진렬민과 외국설비를 도입할 문제에 대해 담론했다. 9월 16일에 등소평은 길림성 장춘시에 도착했다. 남호호텔에 들어간후 길림성당위서기 왕은무가 강화를 요청했을 때 그는 다시는 말을 에두르지 않고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지금 우리앞에 놓여있는 문제는 두가지입니다. 첫째문제는 리론과 실천의 련계인데 모든것은 실천으로부터 출발해야 합니다. 지금 사람의 사상이 경직되여 무엇이나 모두 우에서 말한것이면 그대로 합니다. 화주석이나 그 부주석이 말한것이면 그대로 하지요. 자기절로 사고하려고도 하지 않고 진정으로 소화하려고도 하지 않지요.” 이 말은 직방적일뿐만아니라 신랄하고 예리해서 현장에 있는 사람들의 심금을 울리고 흥분하게 했다. 그런데 생각밖에도 등소평이 더욱 예리하게 말했다. “두번째문에는 어떻게 모택동의 위대한 기치를 높이 받들겠는가 하는것입니다. 이는 큰 문제입니다. 여러분들도 과거에 ‘두가지 무릇’에 대해 의론했지요? 무릇 모주석께서 서명하고 말씀한것은 움직이지 못하고 무릇 모주석께서 해놓은것은 무두 움직이지 못한다고 했는데 이것이 모주석의 위대한 기치를 높이 든것이란 말입니까? 아닙니다. 잘못하면 모주석의 명성을 손상시키게 됩니다. 모주석의 가장 위대한 점은 실사구시입니다. 맑스와 레닌은 종래로 농촌으로부터 도시를 포위해야 한다고 말한적이 없습니다. 당시 세계상에도 그런 선례는 없었습니다. 모주석의 위대한 점은 무엇입니까? 바로 중국의 구체적인 조건에 근거하여 혁명의 구체적인 도로를 밝혀준것입니다. 만약 실사구시의 기본사상이 없었다면 중국의 실정에 맞는 이런 길을 가르켜줄수 있었겠습니까? 중국혁명을 승리에로 이끌수 있었겠습니까?” 이 말을 마친후 등소평은 장춘을 떠나 심양으로 갔다. 이번에 등소평은 “두가지 무릇”이 진정한 모택동사상이 아니라는것을 말했을뿐만아니라 “두가지 무릇”이 이미 중국의 백성을 편안히 생활수 없게 했다는것을 암시했다. 등소평은 이렇게 말했다. “모주석께서 우리에게 수립해준 실사구시의 우량한 전통과 작풍을 회복하지 않으면 우리의 네가지 현대화는 희망이 없습니다. 우리는 너무 가난하고 너무 뒤떨어졌는데 솔직하게 말해서 인민들에게 미안합니다. 우리의 인민은 너무 좋습니다. 참을성도 이제는 한계에 달했습니다. 우리는 지금 반드시 생산력을 발전시켜야 하며 인민의 생활조건을 개선해야 합니다.” 그의 이런 말은 앞에 있는 고급관원들을 들으라고 한 말이였다. 그러나 분명히 백성들에게는 더욱 듣기 좋은 말이였다. 사실 등소평은 전국에서 모두 일떠나 그에게 호응할것을 바라고있었다.     
143    항전시기에 황금을 연안에 운송한 무명영웅들 댓글:  조회:4957  추천:0  2016-02-14
항전시기에 황금을 연안에 운송한 무명영웅들   (번역)     20세기 30년대에 항일전쟁이 폭발하였는데 그 비장한 력사를 돌이켜보면 다음과 같은 하나의 수수께끼가 남아있는것을 발견할수 있다. 국민당통치하의 구중국에서 연안홍색정권의 항전경비는 구경 어디에서 왔을가?   초원현은 황금이 많이 나는 고장이다. 중국에서 처음으로 년생산량이 만량이 되는 현인데 당년에 불행하게도 일본군의 수중에 들어갔다. 초원시의 《황금지》 기재에 따르면 “7.7사변”이 발생된 후에 일본군의 오가와지대가 1939년 2월 27일에 초원을 공격하여 점령했다. 그들은 이튿날에 또 령롱금광을 점령한 후에 북지나개발회사를 세우고 황금자원을 미친듯이 략탈하기 시작했다.   령롱금광의 봉쇄를 강화하기 위해 일본군은 사방 5리도 안되는 금광구범위내에 한개 중대의 병력을 주둔시켰다. 주변의 산우에 일곱 곳의 포루를 건축하고 중심금광구역에 세겹의 전기철조망을 늘여놓았으며 금광의 유일한 통로에 3개의 보초소를 세웠다. 금광에 거주하던 수많은 백성들이 쫓겨나고 한개련의 괴뢰군과 한개련의 기관총부대가 주둔했다. 주변의 대원, 구곡, 대상, 구가천 등 촌들에도 일본군과 괴뢰군이 주둔했다. 령롱금광은 물샐틈없을 정도로 일본군의 경계가 삼엄했다. 1941년 7월에 일본군은 령롱금광에 하루 황금생산량이 150톤이 되는 목조구조공장을 세우고 1200여명의 일군을 고용하면서 황금자원략탈을 다그쳤다. 팔로군의 침투를 방지하기 위해 일본군은 완제품황금에 대해 전면적으로 통제했고 황금조사대대를 내와서 황금밀매를 발견하면 일률로 몰수했으며 팔로군과 접근하는 자는 모두 총살했다. 범위굴에 들어가 황금을 빼앗기 위해 중공교동특위에서는 다른 곳에는 없는 상설기구인 교동황금사업위원회를 설립했다. 이 조직의 지도하에 광산로동자들은 일본군, 괴뢰군과 지혜로운 싸움을 벌렸다. 어떤 때는 돌로 고품질의 금광석을 바꾸어놓았고 어떤 때는 탄갱에서 금광석조각을 가지고 나왔다. 또 일본놈들이 남쪽에서 작업하면 팔로군은 몰래 북쪽에서 구멍을 파군 했다. 8년항일전쟁중에 중공교동특위에서는 황금자원을 모으기 위해 일제와 한간들과 특수한 생사박투를 벌렸는데 대량의 교동아들딸들이 수만량의 황금을 연안에 운송하기 위해 선혈과 생명을 바쳤다. 중공교동특위에서는 지방무장을 조직해 일본군의 황금운송차량, 광산구역의 포루를 습격하여 한간과 매국역적을 징벌했고 금광로동자들을 조직하여 파공하는 방식으로 일본놈들의 정상적인 생산을 파괴했다. 동시에 광석을 비밀리에 중국공산당이 관할하는 금광제련공장으로 운송했다가 다시 완제품황금을 지하교통소를 통해 연안으로 운송했다. 불완전한 통계에 의하면 항전시기에 초원현의 민중들이 팔로군을 위해 공헌한 황금은 수십만량에 달했다. 1940년만 해도 공회서기 소계광과 진문기 등이 비밀리에 연안에 운송한 황금은 2만량이 넘었다. 이 력사적 장거에 대해 당년에 주은래부주석과 주덕총사령은 찬탄해 마지않으면서 초원현인민이 세운 특수한 공헌에 감사를 드린다고 했다. 특히 소계광 등 사람들을 연안에 청해 접대해주었다. 사람의 심금을 울려주는 황금탈취전에서 소계광은 관건적인 인물의 한 사람이였다. 1939년 겨울의 어느날에 중공교동구의 공회서기직을 맡고있던 소계광은 초원현에 가서 황금을 마련하라는 임무를 맡았다. 당시 금광에서 비교적 가까운 류행촌에는 손무본이 거느리는 국민당의 비정규군이 주둔해있었다. 손무본은 황금을 통제하기 위해 한개 련의 병력을 금광에 주둔시켜 로동자들을 감시하게 했다.  소계광은 국민당관리로 변장하여 당지에서 가장 큰 금광주인 “허실눈”의 신임을 얻었다. 그는 “허실눈”을 리용하여 몰래 몇십자루의 총을 숨겨가지고 들어가서 로동자금광보호대를 조직했다. 그리하여 나중에 손무본의 비정규군을 금광에서 쫓아냈다. 그때로부터 잠장금광은 항일인민정부에 속하게 되였다. 이렇게 마련된 황금을 어떻게 적점령구역의 층층이 되는 봉쇄선을 통과하여 연안까지 운송하였을가? 력사자료에는 당시 교동에서 항일전선에 지원한 황금 등 물자는 “발해통로”와 “빈해통로”를 통과해 비밀리에 중공산동분국, 산동군구와 산동성전시사업추진위원회 및 로남구위에 운송된후 다시 연안으로 보내졌다. 수많은 교동의 아들딸들이 정의를 위해 뜨거운 피를 흘리고 생명을 바쳤는데 그중에는 60여년동안 사람들이 모르던 비밀도 숨겨져있다. 오늘의 래주시 후파진 북려촌에는 오래된 옛주택이 한채 있는데 당지의 백성들은 모두 그 집에 항일렬사 려품삼의 주택이라는것을 알고있다. 그러나 그들은 려품삼이 어느 부대에 있었는지 모르고있었다. 유가족들도 그가 팔로군에 있을 때 무엇을 했는지 잘 모르고있었다. 1950년 6월 9일에 려품삼이 액현인민정부에 의해 혁명렬사칭호를 수여받았지만 그의 구체적 사적에 대해서 정부에서도 잘 모르고있었다. 2004년 3월 25일에 려품산의 유가족들이 옛집을 수리할 때 무의식중에 높은 곳의 벽틈에서 한장의 손상된 누런 종이를 발견했다. 그것은 1943년에 교동행정주임공서에서 항일대원의 가족한테 발급한 우대량식증명서로서 제52호, 량식 600근, 식구 5명” 등 글자가 적혀있었다. 후날에 려품삼의 어머니는 당시의 일을 회상하면서 “액현이 해방되기전에 얼마간의 시간이 지나면 누군가 깊은밤을 타서 10~20근씩 담은 량식주머니를 우리집문앞에 놓아두군 했습니다. 나는 아들이 무엇을 하는지는 딱히 몰라도 일본놈들이 줄곧 아들을 잡으려고 한다는것은 알고있었습니다”라고 말했다. 그 기간에 려품삼은 어떤 때에는 비밀리에 집에 돌아와 자택의 남쪽마당에서 낯선 사람과 접속해 비밀담화를 나누기도 했고 어떤 때에는 적들과 마주쳤지만 번마다 슬기롭게 벗어나군 했다. 그는 어머니를 깊이 믿었기에 중요한 서류를 어머니에게 맡겨 보관시키면서 “만약 나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꼭 이 서류를 전부 태워버리세요”하고 당부했다. 1943년에 일본군은 우리측의 간첩이 제공한 비밀보고를 받고 려품삼의 거처를 알게 되였다. 그들은 3명의 특무를 파견하여 친척방문을 한다는 구실을 대고 장기적으로 촌마을에 숨어있으면서 려품삼을 붙잡을 기회를 기다렸다. 6월의 어느날 깊은 밤에 려품삼은 자전거를 타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가 어머니와 낮은 소리로 이야기를 할 때 갑자기 밖에서 “주교에 일본놈이 왔다”하는 고함소리와 함께 누군가 뒤창문을 두드리는 소리를 들었다. 그것은 부근에 숨어있던 일본특무가 고의로 소리를 지른것이였다. 려품삼이 이번에 집에 돌아온것은 련락원과 접속하기 위해서였다. 일이 탄로난것을 본 그는 자전거를 타고 북쪽으로 달아나다가 적들의 포위에 들었다. 해방후 우리군에 포로된 특무의 자백에 따르면 당시 그들은 산을 울려 호랑이를 놀라게 하는 수법으로 일부러 일본놈이 왔다는 거짓 정보를 흘린후 주교와 반대쪽인 북쪽에 매복해 있었던것이다. 일본놈들은 려품삼을 중요한 인물이라고 여겨 일본군 사령부로 압송했다. 일본놈들이 혹독한 고문을 들이대며 “팔로군이 무슨 임무를 수행하느냐, 상급은 누구냐”고 물었지만 그는 자신이 팔로군인것만 말하고 다른 말은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의 입에서 아무것도 알아내지 못한 적들은 그를 마대에 넣고 잔인하게도 칼로 마구 찔러댔다… 당지에서 전투에 참가했던 로동지의 회상에 따르면 1939년부터 1943년까지 려품삼과 전우들이 비밀리에 사들이고 무장으로 공격하는 방식으로 일본놈들의 손에서 대량의 황금을 거두어들였다. 이렇게 마련한 황금은 이름난 “발해통로”를 따라 중공산동분국으로 운송되였다가 다시 연안으로 보내졌다. 도중에 적들의 봉쇄선을 넘어야 했기에 정예의 팔로군전사들만 골라서 황금을 특제한 옷의 호주머니에 넣어가지고 운송했다. 한 사람이 열냥정도씩 넣어갖고 다녔기에 행군하기도 편리했고 적들을 만나면 림기응변하고 재빠르게 대응할수 있었다. 려품삼이 희생된후 그의 어머니는 과단하게 아들이 부탁한 중요한 자료를 태워버려 적들에게 아무런 흔적도 남겨주지 않음으로써 남은 동지와 당중앙의 전쟁경비안전을 담보했다. 그러나 이 영웅장거도 매몰되여 한단락의 아무도 알지 못하는 력사비밀로 되였다.    
142    장개석의 틀이를 시리게 한 민국제일자객 왕아초 댓글:  조회:6482  추천:2  2016-01-31
장개석의 틀이를 시리게 한 민국제일자객 왕아초   (번역)     왕아초(王亚樵), 장개석은 이 이름을 듣기만 하면 틀이가 시큰거렸고 대립은 이 이름을 듣기만 하면 “문을 든든히 잠궜는가 검사했어?”하고 소리쳤다. 구상해탄의 3거두인 황금영, 두월생, 장소림도 길에서 왕아초를 만나기만 하면 급히 길을 되돌아 다른 길로 가군했고 늘 부하들에게 절대 왕아초의 기분을 건드리지 말라고 부탁했다. 원 국민당군통의 핵심인물인 심취는 “세상사람들은 모두 마귀를 두려워하지만 마귀는 왕아초를 두려워한다”고 말한적이 있다. 별 기이한 일이 다 벌어지고있던 민국의 란세에 위세가 등등한 신비한 인물 왕아초가 나타났는데 그는 무예가 뛰여나고 경공(轻功)이 탁월하며 신출귀몰하고 행방이 묘연하며 올 때는 소리없이 왔다가 갈 때는 흔적없이 사라지군 했다. 그는 전문 상층사회의 고관요인들과 일본군고급관리들을 암살했다. 그는 늘 상해,  남경, 무한, 복주, 향항, 남녕 등지를 귀신같이 달려다니며 어디에 탐관, 한간, 일본군이 있으면 그 곳에 가서 제거해버리군 했다. 그의 손에서 도끼가 번쩍하면 악인들의 머리가 날아갔고 그의 손에서 총이 “땅”하고 울리면 악인들의 심장이 멎어버리군 했다. 그는 몸매가 왜소했는데 검은테안경을 끼고 다녀서 매우 점잖아보였다. 그러나 그의 신분은 살기등등한 도끼방(斧头帮) 방주, 항일철혈한간제거퇀 퇀장이였다. 그는 “강회대협(江淮大侠)”, “암살대왕”, “민국제일자객”, “원동제일자객” 등으로 불리면서 강호에서 위세를 떨쳤고 그의 명성은 세상에 널리 알려졌다. 어느 한번 왕아초와 상해경비사령 양호는 무슨 문제때문에 상의했는데 의견이 맞지 않아 다투게 되였다. 화가 난 왕아초는 키가 작기에 걸상에 올라가서 양호의 량쪽 귀쌈을 후려쳤다. 많은 병사들을 거느리고있는 양호였지만 왕아초의 무예가 뛰여나다는것을 알고있기에 찍소리 못하고 바보처럼 웃기만 했다. 여기서 왕아초가 얼마나 대단한 인물인가를 보아낼수 있다. 1889년에 합비에서 출생한 왕아초는 일찍 신해혁명에 참가했고 후에 사회당에 가입하여 사회당안휘지부 부장을 담임했다. 1913년 겨울에 환계군벌 예사충(倪嗣冲)이 안휘의 정권을 빼았고 사회당을 “란당(乱党)”이라고 하면서 진압했기에 왕아초는 상해로 도망쳤다. 왕아초는 “안휘로동자동향회”를 조직하고 암살테로조직인 도끼방을 묶어세웠다. 도끼방의 명성은 하루아침에 높아졌고 왕아초의 이름은 상해를 진동했다. 그가 통제하고있는 “상해로동자총회”의 회원은 가장 많을 때 10만명에 달했다. 왕아초와 그의 암살조직은 시종일관하게 “장개석을 반대하고 항일하자”는 기치를 높이 들고 암살을 통해 사회변혁을 일으킬수 있기를 바랐다. 왕아초는 상해 포동에 들어선 일본해군 제3함대의 “출운호”를 폭발해버렸고 매국협정을 맺은 왕정위괴뢰정부 외교부 부부장 당유임, 온갖 나쁜 짓을 다 저리른 송호경찰청 청장 서국량 등을 암살했다. 장개석, 왕정위, 송자문 등도 하마트면 왕아초의 손에 죽을번 했다. 왕아초는 려산에서 장개석을 암살하려고 했고 남경에서 왕정위를 암살하려고 했으며 북경역에서 송자문을 암살하려고 했다. 장학량이 스스로 책임을 지겠다고 사직하고 상해로 갔을 때 그를 맞아준것은 기폭장치를 빼버린 작탄이였다. 이것은 왕아초가 동북의 3000만동포를 망국노로 만든 민족죄인 장학량에게 보낸 경고였다. 왕아초는 장학량이 정신을 차려 다시 항일하기를 바랐던것이다. 일본군, 왕정위괴뢰특무, 군통특무, 검은 패거리 등 여러 세력들이 여러번이나 왕아초를 죽이려고 쫓아다녔다. 장개석은 왕아초의 머리에 현상금 100만원을 내걸었고 왕정위괴뢰특무들은 층층이 병력을 배치하고 왕아초를 죽음으로 내몰려고 했으며 일본첩보기관은 덫을 놓고 왕아초를 유혹하여 붙잡으려고 온갖 수단을 다했다. 하지만 기민하고 용감한 왕아초는 번마다 위험한 상태에서 안전하게 벗어나 계속 악세력과 완강하게 싸웠다. 1933년 가을에 장개석은 현상금 100만원을 내걸고 왕아초의 목숨을 끊어오라고 명령했다. 당시 장개석은 왕아초의 도끼에 목숨을 잃을가봐 몹시 두려워했다. 장개석이 현상금을 내건 명단중에 림표, 서해동 등이 있었는데 현상금은 10만원을 초과하지 않았다. 군통특무들과 경찰들이 전면 수색에 나서자 왕아초는 교묘하게 부두로동자로 변장하여 상해를 떠나 향항으로 도망쳤다. 1935년에 리제심, 진명추, 왕아초 등은 향항에서 비밀회의를 가지고 국민당제4기6중전회에서 장개석과 왕정위를 암살할 계획을 세웠다. 왕아초는 화극지를 남경에 파견하여 암살을 책임지게 하고 하파광과 장옥화가 옆에서 협조하며 기자신분을 얻은 손봉명이 구체적암살행동을 맡기로 했다. 그해 11월 1일에 손봉명은 권총을 사진기안에 감추고 중앙대례당으로 들어갔다. 회의가 개막된후 대표들이 사진을 찍었는데 왕정위가 앞자리에 앉았다. 그러나 장개석은 보이지 않았다. 손봉명은 권총을 꺼내들고 왕정위를 향해 사격했다. 왕정위는 몸에 총알 세발을 맞았는데 한발은 몸속에 숨어있다가 9년후에 왕정위를 일본도꾜 제국대학병원의 수술대에서 죽게 만들었다. 왕정위암살을 왕아초가 지휘했다는것을 알게 된 장개석은 두려워서 대립을 불러놓고 명령했다. “빠른 시일내에 왕아초를 잡아와! 산채로 잡지 못하면 죽여도 좋아. 왕아초를 잡아오기전에는 내 앞에 나타나지 마!” 대립과 정개민은 왕아초를 잡으려고 수백명의 군통특무를 향항에 파견했지만 헛물만 켜고말았다. 1936년 2월에 왕아초는 군통특무들의 추격을 피하여 몇몇 부하들과 함께 광서의 오주로 도망쳤다. 왕아초는 리종인과 백숭희를 세번이나 찾아가 군사를 동원해 장개석을 토벌하라고 건의했지만 리종인과 백숭희는 거절했다. 오주에 거주하면서 왕아초는 궁지에 빠졌다. 향항에서 왕아초를 붙잡지 못한 대립은 왕아초가 의협심이 강해 부하들에 대한 보살핌이 매우 지극하다는것을 알고 왕아초의 부하 여립규를 붙잡아 남경의 감옥에 처넣었다. 여립규가 죽어도 왕아초를 배신하지 않겠다고 하자 대립은 여립규의 처 여완군을 찾아가서 “우리가 너의 남편 여립규를 놓아주고 상금을 톡톡히 주겠으니 왕아초한테 련계하여 경제형편이 어려우니 도와달라고 해.” 1936년 10월초에 여완군은 갑자기 향항에서 오주로 와서 왕아초의 부하들과 련계를 가진후 왕아초에게 전화를 하여 “향항에서 경제형편이 힘들어 오주로 왔다”고 말했다. 그때 여완군은 이미 대립에게 회유당했던것이다. 그녀는 오주에 온후 즉시 군통 주요책임자의 한 사람인 정개민과 련계를 가졌다. 10월 20일에 그녀는 일이 있어 상의하자고 하면서 왕아초를 자기의 거처로 청했다. 의리를 중히 여기고 의협심이 강한 왕아초는 여완군을 도와주기 위해 그녀의 집으로 찾아갔다. 여완군의 거처에 도착한 왕아초는 수십명의 특무들이 매복해있는줄도 모르고 문을 열고 들어갔다. 왕아초가 들어서자 방안에 매복해있던 특무들이 석회가루를 그의 얼굴에 뿌렸다. 왕아초는 석회가루가 눈에 들어가 눈을 뜰수 없었지만 원래 무예가 뛰여났기때문에 몇몇 특무들을 쓸어눕혔다. 하지만 특무들의 쏜 총이 다섯발이나 그의 가슴에 명중되였고 세 곳에 칼에 찔려 목숨을 잃었다. 특무들은 잔인하게 왕아초의 얼굴가죽을 벗겨버렸고 살인멸구하기 위해 여완군까지 죽여버렸다. 대립은 1923년에 호종남, 호포일과 함께 왕아초와 결의형제를 맺었지만 의리를 저버리고 왕아초를 살해했다. 그는 의협심이 강한 왕아초의 약점을 리용하여 신출귀몰하고 소리없이 왔다가 바람처럼 사라지는 “암살대왕” 왕아초를 살해했다. 일본놈들의 손에도 넘어지지 않던 일대의 민족영웅은 처첨하게 장개석의 독수에 목숨을 잃었으니 안타까운 일이 아닐수 없다. 왕아초는 길에서 억울함을 당하는 사람을 보면 서슴없이 칼을 뽑아 도와주는 호한이였고 탐관오리, 악당, 일본군을 보면 처단해버리는 영웅호걸이였다.  
141    호문에서 아편을 소각해버린 림측서 댓글:  조회:5932  추천:2  2016-01-24
호문에서 아편을 소각해버린 림측서   (번역)   사방을 메운 구경군들이 지켜보는 앞에서 흠차대신 림측서(林则徐)는 영국을 비롯한 서양상인들에게서 압수한 2만 1000상자가 넘는 아편을 20일에 거쳐 소각해버렸다.   1839년에 생긴 중국의 아편문제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였다. 당시 중국에 수입되는 아편의 량은 년간 4만상자에 달했다. 한 상자의 아편을 대략 100명의 아편중독자가 소비한다고 볼 때 중국의 아편중독자는 400만명으로 추산되였는데 그것은 당시 중국인구의 1%에 해당되였다. 그리고 그 수자는 매년 급속히 늘어갔다. 1만상자에서 4만상자로 되기까지 10년도 걸리지 않았던것이다. 경제적문제도 심각했다. 18세기후반에 중국은 영국에 차(茶)를 팔아서 대량의 은을 얻고있었으나 그후 영국이 은대신 인도에서 생산된 아편으로 차의 대금을 치르는 정책으로 바꾸었다. 그러자 1807년을 기점으로 중국이 아편때문에 은을 영국에 지불하는 형태로 역전되였다. 1827년에는 1800년을 기준으로 전국류통량의 20%에 달할 정도로 은류출량이 심각해졌는데 당시 중국의 세금은 은납제였으므로 국가재정과 국민의 살림살이가 동시에 급격히 나빠져갔다. 실로 이대로라면 아편은 “수십년후에는 세금을 낼 사람도 없어지고 무기를 들 사람도 모조리 없어질것”이라는 우려가 과장이 아닐 정도의 위협을 가져오고있었다. 림측서는 1785년 8월 30일에 복건성 후관현에서 태여났다. 시골의 훈장인 아버지의 수입으로는 생계가 어려워서 어머니와 누이들이 베를 짜서 살림에 보태야 했다. 아들이 태여나자 그의 아버지는 당시 복건성의 순무였던 서사증이 명성이 높았기때문에 “서순무와 같은 사람이 되여라”는 뜻에서 아이의 이름을 “측서”라고 지었다. 때문에 림측서는 일찍부터 관계진출을 목표로 학문에 열중했으며 유능하고 깨끗한 관리가 되여 고통받는 백성을 구제하겠다는 포부를 가졌다. 스물일곱이 되던 1811년에 과거에 급제해 진사가 되였고 8년 뒤에 운남성의 향시 감독관이 되는것을 시작으로 절강성, 강소성, 섬서성 등을 다니며 지방행정직을 두루 력임했다. 그는 청렴하면서 공정하게 직무를 수행하여 송대의 전설적인 명관 포청천에 빗대여 “림청천”이라고 불리웠다. 1830년초에는 북경에서 근무했는데 이때 공자진, 위원 등과 교류하며 개혁파의 지식인과 관료들의 모임인 “선남시사”에 가입하기도 했다. 비록 반년만에 다시 지방으로 내려가게 되여 시사활동을 오래 하지는 못했으나 공자진 등의 개혁사상에는 크게 공감하여 그후 림칙서의 활동은 모두 그런 사상에 따라 이루어졌다. 1832년부터 1838년까지는 강소성 순무와 호광성 총독을 잇달아 맡았는데 낡은 수리시설을 개축하고 재해를 입은 지방을 구호하는 일에 관가의 힘만이 아니라 상인들의 조직을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그는 부패하고 무기력한 관료집단보다 상인의 조직이 훨씬 현지의 사정에 밝고 행동도 효률적으로 한다는 사실을 알고있었다. 그는 상인들을 활용할뿐만아니라 그들의 상업활동을 장려하고 후원했으며 소금판매문제에서 상인들에게 최대한 자률성을 부여하는 시책을 썼다. 다만 부도덕하고 반사회적인 상업활동은 엄격하게 규제하고 처벌했는데 대표적인것이 아편판매였다. 그는 어느 지방의 총독보다 효과적으로 아편판매를 근절하는데 성공했다. 이로써 마침 아편문제로 골머리를 앓고있던 도광황제의 눈에 들게 되였다. 당시 청나라조정은 아편문제해결책을 두고 철저히 금지해야 한다는 엄금론(严禁论)과 은페된 아편판매를 차단하기란 현실적으로 어려우니 차라리 판매를 합법화하고 대신 세금을 거두자는 이금론(弛禁论)으로 갈라져있었다. 이금론도 나름대로 설득력이 있었으나 널리 도덕적모범을 보여야 할 조정이 취할 태도는 아니라는 의견이 지배적이였다. 림측서도 상소를 올려 엄금론에 찬성했으며 그에 필요한 여섯가지 방안을 구체적으로 제시하여 황제의 관심을 끌었다. 그리하여 1838년말에 림측서는 도광황제의 아편근절특명을 받고 흠차대신으로서 광동성에 파견되였다. 광동성의 광주는 오래전부터 해외무역의 창구였기에 서양에서 아편이 들어와 전국으로 퍼지는 출발점이기도 했다. 림측서는 먼저 아편이 거래되는 광동 지하조직부터 일망타진하기 시작했다. 그러려면 무엇보다 현지정보에 밝아야 한다고 여긴 그는 온갖 수단을 써서 정보를 수집했는데 과거시험을 치르면서 과제를 “아편판매망을 뿌리뽑는 법”으로 내걸어 과거에 응시한 현지인들의 현실성있는 의견을 널리 취합하기도 했다. 1839년 1월에 광주에 도착한 그는 먼저 아편과 관계된 4000명 가까운 중국인을 붙잡아들이고 류통되고있던 아편 3만근을 몰수했다. 그리고 1839년 3월부터는 외국인들에게로 눈길을 돌렸다. 서양인의 힘과 탐욕스러움을 잘 알고있던 그는 마구잡이로 그들을 압박하기보다 좋은 말로 타이르는 일부터 시작했다. 그러면서 아편과 무관한 외국상인들의 립장을 키워주는 한편 영국과 미국상인들 사이를 리간질하는 술책도 썼다. 림측서는 마지막에 강제적 수단을 써서 아편을 몰수했다. 그는 외국상인들에게 “다시는 아편을 거래하지 않겠다”는 서약서를 쓰도록 했다. 미국, 뽀르뚜갈 등의 상인은 서약서를 제출했으나 영국상인만은 제출하지 않고 광주를 떠나 오문의 본거지를 옮겼다. 그러다가 1839년 7월 7일에 술에 취한 영국군인이 림유희라고 하는 중국인을 살해하는 사건이 터졌다. 림측서는 즉각 범인을 인도할것을 요구했으나 영국측은 거절했다. 그러자 림측서는 오문에 거주하는 영국인들에게 식량과 물의 공급을 차단해버렸다. 그러자 영국인들은 오문에서도 물러나지 않을수 없었다. 결국 영국에 대해서는 정상적인 무역조차 금지한다는 조치가 취해졌다. 이제 전쟁을 피하기 힘들다고 여긴 림측서는 전력을 다해 전쟁준비를 했다. 그는 “적을 알고 나를 알면 백전백승이다”는 손자병법에 따르려고 이미 광동에 오기전부터 백방으로 서양관련정보를 수집했다. 구할수 있는 모든 서양의 서적과 잡지를 번역시켜 주로 서양인들의 성격과 무기, 전술을 중심으로 해서 《사주지(四洲志)》를 비롯한 몇권의 책으로 엮어냈다. 또한 림측서는 서양의 대포를 사들이고 서양상선을 사들여 전투함으로 개조하였다. 또 자체적으로 증기선과 자주포까지 만들어냈다. 그는 무기확보에만 전념한것이 아니였다. “우리가 저들에 비해 유리한 점은 이곳 지리에 밝다는것이다. 백성의 힘을 모으면 관병의 힘보다 훨씬 강력해진다.” 그는 이렇게 말하며 해안거주민중에서 장병을 모집하여 수병을 만들었다. 그리고 영국인의 목에 현상금을 걸었는데 이는 적에게 해를 입히기보다는 중국내부에서 영국에 협력하는 자들을 색출하기 위함이였다. 하지만 당시 청나라에서 누구보다 서양사정에 밝았던 림측서는 영국이 전력으로 공격해올 경우 결국 승리하기 어렵다는 점을 알고있었다. 그래서 정면대결보다는 유격전으로 대응해야 하며 북경에 이르는 요해처를 집중적으로 방비해야 한다는 상주문을 황제에게 올렸다. 그러나 조정에서는 그의 조언을 무시해버렸다. 결국 1840년 6월에 영국은 전투함 16척과 4000명의 병력으로 광동을 습격했다. “아편전쟁”이 시작된것이다. 림측서의 지휘로 백성과 군대가 단결해서 방어한 결과 영국군은 끝내 광동을 함락시키지 못했다. 그러나 그 사이에 영국군의 주력은 림측서가 예측했던 그대로 북경을 진격했다. 청나라군대는 수적으로 훨씬 우세했으나 화력과 전술에 앞선 영국군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결국 북경함락이 눈앞에 보이자 청나라조정은 림측서에게 전쟁의 책임을 물어 파면하고는 영국과의 교섭에 나섰다. 그래서 일단 영국군의 진격을 멈추게 했으나 얼마후 다시 강경론자들이 득세하며 맞서자 광동에 물러가 있던 영국군은 더욱 강한 병력을 출동시켜 상해를 점령하고 남경까지 진격했다. 결국 청왕조는 굴복해 1842년 8월에 “남경조약”을 맺았다. 향항을 할양하고 추가개항을 하며 거액의 배상금지불, 영국인활동의 자유보장 등에 합의한 청왕조의 위신은 땅에 떨어졌다. 이는 사실상 20세기초에 이르기까지 계속된 “동양의 굴욕사”의 시작이였다. 림측서는 결코 무턱대고 전쟁을 일으킨 사람이 아니였으나 아편전쟁이 끝나자 조정은 일제히 그에게 책임을 돌렸다. 그는 처형만은 간신히 면했지만 멀리 신강으로 좌천되였다. 그런 벽지에서도 그는 현지의 위글족들의 문화를 배우려고 힘썼으며 청나라관리로서는 처음으로 이슬람교도와 상대할 때 필요한 요점을 기록으로 남겼다. 그리고 1850년에 “태평천국”을 진압하는 일에 동참하라는 조정의 명을 받고 광서성으로 가던 도중 1850년 11월 22일에 사망되였다. 지식, 지혜, 인격 등 모든 점에서 림측서는 서양의 침략에 맞서 동양이 내놓을수 있던 가장 우수한 관료였을것이다. 그는 근대적사상의 실마리라고도 할수 있는 개혁사상을 가졌다. 모택동은 “림측서는 중국에서 자산계급민주주의혁명을 시작한 사람이다”고 그 점을 높이 평가했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동양의 체제를 유지한채 서양의 기술을 가미한다는 동도서기적인 개혁사상이였지 체제자체를 변혁하려는것은 아니였다. 물론 그런 개혁사상을 계속 발전시킬 기회가 주어졌다면 동양이 자체적으로 근대화에 성공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서양은 기다려주지 않았다. 림측서는 반봉건의 뜻을 채 펴보기도전에 반제국주의의 투쟁에 나서야 했다. 서양을 가장 잘 리해한 사람이였으면서도 서양이 동양을 짓밟는 서막을 연 사람으로 남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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