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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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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    무언가 이뤄내야 한다는 생각 버려라 댓글:  조회:1934  추천:0  2017-02-09
무언가 이뤄내야 한다는 생각 버려라   이의수     시원한 아침공기를 마시며 가까운 등산로로 산책을 한다. 시원하다 못해 차가운 봄바람이 몸속깊이 파고든다. 산을 오르는 사람들의 모습은 다양하다. 맨손체조를 하면서 가는 사람, 이어폰을 꽂고 음악을 즐기며 걷는 사람, 진지한 대화를 하며 대부분의 사람들을 앞서 보내는 사람, 혼자 열심히 달리는데만 집중하는 사람 등 각양각색의 사람들이 저마다의 느낌과 생각을 가지고 산으로 오르고 산에서 내려온다.   산행하는 사람들 가운데 가장 멋없게 산을 오르는 사람은 누구일가? 그것은 정상까지 올라가는 그 자체를 위해 산에 오르는 사람이다. 매일 아침 산꼭대기에 올라서서 소리쳐야 되는 성취주의자들이 있다. 성취주의자는 어떤 미래의 목적지에 도착하면 그때부터 영원히 행복해질것이라는 환상을 갖고있다. 성취주의자에게 려행은 중요하지 않고 목적지에 도착하는것만이 중요하다.   반면에 쾌락주의자들은 목적보다는 오로지 려행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성취주의자들과 쾌락주의자들 사이에 회의주의자들이 있다. 목적지와 려행 두가지를 다 별 볼일 없는것으로 여기고 포기한 허무주의자는 삶에 환멸을 느낀다. 성취주의자는 미래의 노예로 살고 쾌락주의자는 순간의 노예로 살며 허무주의자는 과거의 노예로 산다고 한다.   우리에게는 목적지에 도달하려고만 하는 목적의식도 중요하지만 목적지에 도달하는 과정도 중요하다. 목적지에 도달하는 과정속에서 즐거움이 있어야 한다. 인생은 그 과정속에서 행복을 발견하는것이 중요하다. 아빠트 하나를 장만하기 위해서 모든것을 절제하고 돈을 모으는 일에만 집중하고 살아온 중년들이 있다.   승진을 위해서 모든것들을 포기하고 직장에만 매달려온 사람들이 있다. 아빠트를 장만했지만 그 뒤 더 넓은 아빠트가 눈에 들어와 또다시 돈의 노예가 되여살아간다. 승진을 하였지만 더 높은 직위에 오르고싶어서 더 일에 매달려 산다. 내가 생각했던것들을 성취했다고 내 인생의 행복이 성취된것은 아니다. 지난 시간들을 되돌아보면 숨가쁜 인생을 살아왔다. 좀 더 나은 인생을 살아보겠다고 몸부림치며 앞만 보고 달려왔다. 그런데 비로소 이뤘다고 생각하는 순간 또다시 더 이뤄갈것이 생겨 달음질을 멈출수 없다.   아직도 달려야 한다는 생각이 머리속에 가득하지만 어디서 멈춰서는것이 내 인생의 완전한 성취인지 헷갈린다. 목표를 찾다가 정작 목표를 잃어버린것 같다. 중년이 되면 내가 무언가를 이뤄야겠다는 의지가 솟구친다. 그러한 열망은 정말 중요한것들을 놓치도록 만든다. 내 삶속에서 성취에 대한 리유와 목적이 분명해야 한다. 만일 노예처럼 살아야 이뤄낼수 있는것이라면 고민해 보아야 한다. 그러한 삶을 선택해야 할 만큼 그 일이 그렇게 절실한지 말이다. 그리고 이에 대해 가족들의 공감과 지지를 받을수 있어야 한다.   원하는 일을 이루는것도 중요하지만 일상의 행복을 지켜가면서 이뤄낼수 있는것이 진짜 행복이다. 고통의 대가로 채워진 성취를 통한 행복이 아니라 일상의 즐거움속에 이뤄가는 성취가 행복이 될수 있다. 내 인생의 작은 수수께끼 하나를 풀어내는 즐거움으로 매일을 채워 나가자. 너무 큰것을 이루려다가 길잃은 인생이 되기보다 작은것의 즐거움을 느끼며 큰것을 이뤄내는 인생을 만들어보자.    
32    후배기자들 올바른 한글사용 바라는 마음으로 이룬 100회 댓글:  조회:3433  추천:0  2016-03-13
후배기자들 올바른 한글사용 바라는 마음으로 이룬 100회   [인터뷰] 강상헌 우리글진흥원 원장   안혜나 기자 | hyena@mediatoday.co.kr       2012년부터 시작한 본지 ‘강상헌의 바른말 옳은글’ 칼럼이 100회를 맞이했다. ‘바른말 옳은글’ 칼럼의 저자 강상헌 우리글진흥원 원장은 1978년 동아일보에 입사 98년 퇴사때까지 꼬박 20년 기자 생활을 한 중진 언론인이다. 그는 항상 후배 기자들에게 올바른 한글 사용의 중요성을  강조해왔다. 강 원장이 현재 미디어오늘을 통해 언론에서 잘못 쓰여지고 있는 한글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있다. 이 역시 후배 언론인들에게 올바른 한글 사용법을 고민하게 하기 위한 선배 언론인의 마음이다.     ‘바른말 옳은글’ 칼럼을 쓰는 이유는 무엇인가   글을 쓴다는 것은 자신의 생각을 말과 글을 통해 사람들에게 보여주는 것이다. 기사도 이와 마찬가지이다. 선배 기자 입장으로서 후배 기자들이 글을 쓰거나 기사를 작성할 때 올바른 한글 표현을 통해 자신의 생각을 명확하게 밝히길 바라는 선배의 마음을 담아 ‘바른말 옳은글’ 칼럼을 시작하게 됐다.   요즘 기사를 보면 올바른 한글을 쓰지 않는 경우가 많다   후배 기자들이 작성한 기사를 보면 처음엔 화가 나기도 했다. 하지만 지금은 이들이 어떠한 교육과정을 밟고 한글을 배웠는가에 대해 이해한 후로는 후배기자들에게 나타나는 한글사용의 문제점이 사회 전반의 구조적인 요인에서 비롯됐다는 것을 알았다.   한글은 아쉽게도 한자를 배워야 그 본디를 정확히 이해할 수 있는 언어이다. 하지만 지금의 젊은 세대들은 한자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한 세대이다, 이러한 젊은 후배기자들이 한글과 한자에 대한 깊이있는 교육이 부족하다보니 한글로 문장을 구현할 때 오류가 생기고 애매모호한 문장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그래서 기사에서 독자들이 봐도 어색한 문장들이 보이기도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한자 교육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아직 대한민국에는 한자 교육에 대한 다양한 의견들이 있다. 나는 한자에 대한 중요성은 알고 있지만 섣불리 한자 교육에 대한 입장을 말하기는 곤란하다고 본다. 하지만 글을 좀 더 잘 쓰고 싶고 한글이라는 언어에 대해 깊이있는 공부가 필요하다고 느낀다면 한자를 배우길 권한다.   그런데 아직 젊은 사람들이 ‘한자’라고 하면 어렵고 복잡하다고 생각해 한자 공부를 꺼리는 경향이 많다. 하지만 한자를 배우고 한글 공부를 한다면 마치 디지털카메라의 해상도가 좋아지듯이 한글을 보는 깊이와 시선, 글을 다루는 솜씨도 훨씬 좋아질 수 있다. 한자 공부에 대한 팁을 주자면 한자를 단순히 복잡한 언어라고 보지 말고 하나의 그림 형태로 이해하면서 공부한다면 한자에 대해 공부하기가 훨씬 수월할 것이다. 한글에 대한 애정과 관심이 많은데 한글 사랑에 대한 계기가 있는가   난 지난 30년동안 매일같이 글을 써온 사람이다. 어릴 때부터 책 읽고 글 쓰는 것을 좋아했는데 이러한 글에 대한 관심이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그리고 내가 기자 생활을 시작하면서 대선배들로부터 글을 잘 쓰는 방법, 한글을 다루는 방법을 배웠다. 당시 선배들의 가르침과 한글에 대한 나의 애정이 지금의 나로 이어져 온 것 같다.   현재 ‘우리글 진흥원’을 대표로 활동하고 있는데 ‘우리글 진흥원’은 어떤 일을 하는 곳인가   우리글 진흥원은 지난 2011년에 시작해 올해로 만들어진지 만 3년이 됐다. 현재 우리글 진흥원이 주로 하는 일은 국가기구 및 지방자치단체 등이 보도자료 및 글을 작성할 때 올바르게 한글을 쓸 수 있도록 자문해주고, 한글 사용법에 대한 강의 활동 등을 펼치고 있다. 또한 대학생을 대상으로 글쓰기 교육 및 강의도 진행하고 있다.   ‘우리글 진흥원’을 만든 계기가 있는가   난 현재 헝클어지게 엉망으로 쓰여지고 있는 지금의 한글이 올바른 모습으로 돌아오길 바란다. 그래서 나는 한글의 본모습과 올바른 한글 쓰기를 사람들에게 알리기 위해 만들게 됐다.   글을 쓸 때 한글을 올바르게 쓰고자 한다면 어떻게 해야 하나   사람들은 자신이 어릴 적 한글을 습득하고 배웠던 개인적 취향을 유지하면서 평생 글을 쓴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글을 다 쓰고 난 후 자신이 글에 쓴 단어가 적절한 단어인지, 문장 작성에 완성도가 있는지 검토하지 않고 지나쳐버리기 일쑤다. 앞에서 언급했다시피 글을 자신의 생각을 담는 것이다. 글을 다 작성하고 난 후 국어사전을 찾아가면서 올바르지 않는 단어는 수정하고, 문장이 어색하다 싶으면 고치는 노력을 보이면서 글의 완성도를 놓이는 작업이 필요하다. 하지만 이러한 글의 완성도를 높이고자 한다면 한글에 대한 깊이있는 공부가 필요하다. 그러니 글을 쓰는 사람이라면 한글과 한자에 대한 꾸준한 공부가 필요하다.   ‘바른말 옳은글’ 칼럼을 보면 언론사의 올바르지 못한 한글 사용에 대한 지적이 많다   언론사가 작성하는 기사와 뉴스는 대한민국 국민들이 한글의 본보기로 삼아서 보는 한글의 기준, 표본과 같은 것이다. 그러니 언론사가 올바르지 못한 한글을 사용한다면 국민들도 올바르지 못한 한글을 사용하게 되는 것이다. 나는 언론이 올바른 한글을 사용하도록 돕기 위해 스스로 ‘글 선생’을 자처하면서 바른말 옳은글 칼럼을 작성해 후배 기자들에게 올바른 말과 글을 쓸 수 있도록 도와주고 있는 것이다.   칼럼 소재는 어디서 얻는가   일주일에 보통 7, 8개씩 제보가 들어온다. 그럼 내가 해당 기사나 글을 보고 ‘바른말 옳은글’ 칼럼을 작성할지 판단한다. 아니면 내가 TV나 신문을 보고 느낀 한글에 대한 올바르지 못한 표현을 칼럼으로 작성한다. 그리고 나도 아직 한글과 언어를 공부하고 있는 사람이라 칼럼 작성할 때 주위 사람들에게 많은 도움을 받는데 전남대 김태완 교수, 명지대 진태하 원로교수, 성균관대 전광진 교수에게 많은 도움을 받는다.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이 있는가   내가 이 칼럼을 쓰는 이유는 후배를 사랑하는 마음을 이 칼럼을 통해 드러낸다고 볼 수 있다. 후배 기자들이 내 칼럼을 통해 좀 더 명확하면서도 자신의 생각을 올바르게 전달하는 기사를 작성하고 한글에 대한 끊임없는 공부와 연구를 하길 바란다. 그리고 한글에 대한 애정을 가지고 한글을 올바르게 쓰도록 노력하는 모습을 보여주길 바란다.         
31    참 예쁜 꽃지바다 왜 하필 해수욕장이라고 해요? 댓글:  조회:3505  추천:0  2016-02-20
  참 예쁜 꽃지바다, 왜 하필 해수욕장이라고 해요? [강상헌의 바른말 옳은글] 바다가 소금물 샤워장인가       강상헌 언론인 · (사)우리글진흥원 원장     영국 시인 존 메이스필드(1878~1967)의 시집 ‘Salt-Water Ballads’(소금물의 노래). 영문학사(史)에도 오른 이름이지만, 우리 소월 시집처럼 대중적으로도 인기 있다. 그 소금물은 바다다. 멋없다고 씨익 웃고 그냥 지나칠 일 아니다. 그의 바다 향한 열병(熱病)의 시 ‘Sea Fever[씨 피버]'는 대박이었다. 첫머리만 외워도 ‘아!’하고 학창시절 그리울 분들 많으리.   I must go down to the seas again, to the lonely sea and the sky... (아무래도 나는 다시 바다로 가야겠네, 그 외로운 바다와 하늘로...)   우리에게 바다의 이름은 ‘바닷물 샤워장’의 이미지와 겹친다. 해수욕장이라는 이름 때문이다. 그 이름이 어떻게 생겨나, 지금껏 우리 아름다운 해변의 대표명칭으로 쓰이고 있는지 알아내지는 못했다. 그러나 바다 떠올릴 때마다 안타까웠다. 우리 말글 시리즈 2주년 100회 맞아 여러분께 예쁜 선물 드리고 싶은 마음으로 선택한 주제, ‘바다의 제 이름’이다. 10년은 묵힌 생각, 답을 찾진 못했다. 다행히 어진 이들의 비슷한 마음, 여러 생각을 얻을 수 있었다. 따로 아름다운 이름 붙인 지자체도 있어 마음 설레기도 했다. 이런 지혜, 잘 모으면 더 좋은 결실 가능할 수도 있다는 희망을 품고 있다. 의견 주시면 계속 연구할 터, 고견 사양하지 말고 가르쳐 주시기 바란다. 이 글은 이를테면 ‘중간발표’ 격이다.   해수욕장(海水浴場) 이름의 뜻은 ‘바닷물에 몸을 씻는 곳’이다. 목욕(沐浴)의 욕 자(字)다. 목욕을 사전은 ‘머리를 감으며 온몸을 씻는 일’이라 푼다. 좀 이상하지 않은가? 머리 감는 것을 왜 따로 설명했을까? 이유는 속뜻 때문이다. 목(沐)은 머리를 감는 것, 욕(浴)은 몸을 씻는 것이다. 둘 다 그 동작이나 비슷한 이미지의 그림에서 오래 전에 생겨났다.   시인이 열병을 앓았던 그 바다는 목욕탕이 아니다. 우리가 그리워하는 바다도 그렇다. 목욕탕 욕조에서처럼 물 텀벙거리며 노는 좋은 뜻 아니냐 할 수도 있다. 그러나 바다가 여름에만 물장구치며 노는 데인가? 하긴 오래 전에는 맥주를 여름에만 얼음 채워(히야신가 뭔가 해서) 마시는 것으로 알았다. 바다가 세상 변화에 걸맞는 제 이름을 얻지 못한 것이다.   그렇게 불러 왔기 때문에 ‘해수욕장’ 낱말에 그 아름다운, 즐거운, 신비로운, 생명력 넘치는, 외로운, 화려한, 때로 광포(狂暴)한 바다의 여러 압도적인 이미지가 담겨 있으리라고 지레 생각해 온 것이다. 그러나 뜻 따지니 허망하지 않은가? 바닷물목욕탕이라, 해수탕? 저 바다가? 이제 묻어두어도 될 이름 아닌가, 아쉬우면 괄호에 넣어 새 이름과 함께 쓰던지.   가장 마음에 두고 있는 새 이름은 그냥 ‘바다’다. 땅 이름 뒤에 붙이면 된다. 품도 덜 들고, 이미지도 간결하며, 날 것 그대로의 싱싱한 아름다움이 뚝뚝 묻어 떨어진다. 가마미바다 해운대바다 경포대바다 대천바다 몽돌바다 김녕성세기바다... 꽃지바닷가처럼 ‘바닷가’도 더할 나위 없이 좋지만, 앞에 지명(地名) 붙으면 오히려 거추장스런 느낌 든다.   한자(漢字)라야 권위서고 ‘있어 보인다’고 생각한다면, 해변(海邊) 해안(海岸)을 붙이면 된다. 해수욕장보다 부드럽다. 더 세련된 듯한 해빈(海濱)도 있다. 바닷가라는 비슷한 뜻이다. 청포대해변 남해해안 함덕해빈... 이호태우해변은 제주도 옛 이호해수욕장에 전통배 태우 뜻 합쳐 지자체가 붙인 멋진 이름, 박수 보내고 싶다. ‘이호태우바다’가 더 멋지지 않은가?   고유어로 즐거운 곳이라는 바다의 이미지를 덧붙이고 싶다면, ‘바다뜰’ 또는 ‘바다뜨락’은 어떨까? 하조대바다뜰 송정바다뜨락... 처음에야 좀 설은 듯 하겠지만 즐겨 부르면 좋은 이름 되는 법이다. 즐겁게 노는 모습은 ‘멱’ 또는 ‘미역’이란 낱말로 덧붙여도 좋을 것 같다.   육지가 바다 쪽으로 튀어나온 지형(地形)인 ‘곶(串)’의 곶지가 변해 ‘꽃지’로 탈바꿈했다고 한다. 충남 태안반도의 그 바다, 꽃 이름자처럼 아름다운 곳이다. 꽃지해수욕장보다는 꽃지해변 꽃지바다뜨락이 더 낫지 않을까. ‘꽃지바다’ 이름을 지도에서 볼 수 있게 된다면 얼마나 기쁠까. 이름(말)은 그 모습(본디)과 어울려야 좋다. 가치를 담아야 한다.   토/막/새/김 남북대화 초기, 평양에 간 방송사 카메라가 물었다. “해수욕 자주 가세요?” 기억 선명하진 않지만, 중년여성 그 겨레 “날마다 가디요.”라 했던가. 신문방송이 난리가 났다. 해수욕도 모르더라고. 또, 채소도 모르는지 채소를 ‘남새’라 하더라고 했다. 비웃는 것이었다. ‘바닷물 멱(미역)’이라 말하던 그 사람들, 요즘 연속극 보고 서울물 들어 다 ‘해수욕’ 안다. 남새는 고유어 표준말이다. 채소(菜蔬)라야 맞아? 기자들이 그랬다. 부끄러웠다. 아직 못 잊는다. 북한 다녀와 감옥살이도 했던 황석영은 1993년 책 ‘사람이 살고 있었네’를 썼다.    
30    恨 노래한 민족시인 김소월과 현대시의 아버지 정지용 댓글:  조회:3430  추천:0  2016-02-14
恨 노래한 민족시인 김소월과 현대시의 아버지 정지용 유종호가 말하는 동갑내기 시인의 작품세계…     "김소월은 그리움과 슬픔의 정서를 통해 인간 회복을 호소한 민족시인입니다. 반면 정지용은 우리말을 찾아서 닦고 조직하는데 시 인생을 바친 20세기 최초의 직업시인이죠. 1902년생 동갑내기인 이들이 다른 시대인처럼 느껴지는 것은 작품 세계의 차이가 빚어내는 착시 현상일 것입니다."   유종호 전 연세대 석좌교수는 13일 서울 종로구 W스테이지에서 열린 '네이버 열린 연단: 문화의 안과 밖' 강좌에서 이렇게 말했다. 그는 김소월의 '진달래꽃'과 정지용의 '정지용 시 전집'을 주제로 '2015 오늘을 성찰하는 고전 읽기' 마지막 강연을 펼쳤다.       유 전 석좌교수는 두 시인을 같은 해에 태어나고 사망한 마르크스와 투르게네프(1818~1883)와 비교하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는 "많은 사람이 김소월과 정지용이 동갑이라는 사실을 의외라고 느낄 것"이라며 "이들의 차이는 사회적 총화로서 인간의 개성 차이에서 오는 것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고 설명했다.   유 전 석좌교수는 김소월이 정지용에 비해 다작(多作)했지만 김소월의 작품 성취도는 높낮이가 고르지 못했던 반면 정지용은 상대적으로 고른 편이었다고 평가했다.   그는 한국의 대표적 시인이었던 두 사람이 모두 불행하게 세상을 떴다는 것을 공통점으로 들었다.   유 전 석좌교수는 "김소월은 자살설이 정설로 굳혀졌고 북으로 간 정지용은 정치와 전쟁의 와중에서 최후를 맞았다"며 "반면 미당 서정주는 86세로 천수를 다하고 900편에 이르는 걸출한 시편을 남겼다. 미당의 상대적인 행운은 김소월과 정지용의 불운을 부각시켜 준다"고 말했다.   그는 동시 '엄마야 누나야','말'에서 두 시인의 차이가 단박에 드러난다고 주장했다.   그는 "김소월의 '엄마야 누나야'는 옛 가락에 의탁해 동심을 드러내고, 정지용의 '말'은 개성적이고 독창적인 면에서 자연스럽게 인지의 충격을 준다"며 "이러한 면이 두 시인 사이에서 세대 차를 느끼게 하고, 이는 많은 작품에서 그대로 발견된다"고 강조했다.   유 전 석좌교수는 이후 두 시인의 본격적인 작품 해석에 들어갔다.   우선 그는 김소월의 '초혼', '예전엔 미처 몰랐어요', '차안서선생 삼수갑산', '옷과 밥과 자유' 등을 예로 들며 "김소월은 인간의 보편적인 슬픔을 표출하며 독자들에게 공감과 위로를 안겨줬다"고 해석했다.   이어 "그는 인간 삶의 본원적인 슬픔에 대해 깊은 통찰을 보여주진 못했다"면서도 "그의 시는 이념의 명시적 표출을 멀리했기 때문에 거부감을 주지 않고 호소력을 갖는다"고 덧붙였다.   그는 김소월의 대표작 '진달래꽃'에 대해서도 "조국의 산천에 지천으로 피어 있어 상징이 될 수 있는 진달래꽃으로 조선주의를 밝혔다"며 "이는 그가 천성의 시인이었음을 말해준다"고 평가했다.   유 전 석좌교수는 정지용에 대해서는 대표작 '향수'로 강연을 이어갔다.   그는 "일제 한자어를 마구잡이로 빌려 쓰던 1920년대에 정지용은 주류 사회에서 배제된 토박이말을 찾아내 그것을 시어로서 조직하는 일을 선도했다"며 "토박이말의 시적 유효성을 보여주며 부족 방언의 순화에 크게 기여했다"고 말했다.   이어 "시가 우리말로 빚어진다는 것을 직관적으로 통찰하고 방법적으로 자각한 그는 한국 현대시의 아버지"라고 주장했다.   유 전 석좌교수는 '향수'가 미국 시인 트럼블 스티크니(Trumbull Stickney)의 '추억'을 모방해서 짜깁기했다는 항간의 의혹을 강하게 비난했다.   그는 "모방설의 최대 약점은 스티크니의 원문을 놓고 정지용 작품과 비교·대조해야 한다는 제1원칙을 소홀히 했다는 것"이라며 "우리말 번역만 놓고 피상적으로 파악한 유사점으로 모작이라고 속단했다"고 지적했다.   '백록담', '종달새', '또 다른 태양' 등의 작품을 예로 들며 정지용에 대한 각박한 평가에 대해선 안타까움을 표했다.   유 전 석좌교수는 "그의 작품 중에는 경박한 감각과 말놀이라고 여겨지는 것들도 적지 않다"면서도 "그는 서정시 쓰기가 힘든 시대에 '언어 미술이 존속하는 이상 그 민족은 열렬하리라'는 신념과 '우리 시는 우리말로 빚어진다'는 방법적 자각을 시로 실천했다"고 설명했다.   이어 "그의 공로는 응분의 평가를 받아야 한다고 생각한다"며 "20세기 최초의 직업시인이라 할 수 있는 그의 시적 성취가 후속 시인들에게 가장 많은 영향력을 발휘했다는 사실도 간과해서는 안 된다"고 덧붙였다.   2016/02/14 10:36 연합뉴스 김보경 기자     
29    사내들을 죽음도 불사하게 만든 기녀 초요갱 댓글:  조회:4300  추천:0  2015-12-08
사내들을 죽음도 불사하게 만든 기녀 초요갱   이한우 (한국)     세조 9년(1463년) 윤7월 4일 세조가 조정 내 유신(儒臣)들을 위해 경회루에서 큰 잔치를 열었다. 이 자리에는 당시 '4기녀'로 유명했던 옥부향(玉膚香) 자동선(紫洞仙) 양대(陽臺) 초요갱(楚腰輕)이 모두 불려와 춤과 노래를 선보였다. 이날 실록이다.   "초요갱은 어려서 평원대군(平原大君) 이임(李琳)의 사랑을 받다가 평원대군이 죽자, 화의군(和義君) 이영(李瓔)과 사통하였는데, 임금이 이영(李瓔)을 폄출(貶黜)하고 초요갱도 쫓아냈다가 얼마 아니되어 초요갱이 재예(才藝)가 있다고 하여서 악적(樂籍)에 다시 소속시키니 계양군(桂陽君) 이증(李 曾)과 또 사통하였다. 임금이 이 사실을 알고 비밀리에 이증에게 묻기를 '어찌 다른 기생이 없어서 감히 초요갱을 두고 서로 간음하는가?' 하니 이증은 그것이 무고(誣告)임을 변명했으나 이날도 초요갱의 집에서 묵었다. 뒤에 판사(判事) 변대해(邊大海)가 몰래 초요갱의 집에 묵었다가 이증의 종에게 맞아 죽었다."   '허리가 개미처럼 가는 초나라 미인의 경쾌함.' 초요갱에 담긴 뜻이다. 잠깐 옆으로 샌다. 당시 기생들의 이름이다. 옥부향은 '옥같이 맑은 피부에서 아름다운 향기가 난다'는 뜻이고 자동선은 '신선들이 사는 곳의 선녀'라는 뜻이다. 그 밖에 '이슬을 머금은 꽃이라는 뜻'의 함로화(含露花)라는 기생도 있었다.   초요갱 초요갱은 도대체 얼마나 미인이었기에 그냥 고관대작도 아니고 세종의 아들들과 동시에 놀아날 수 있었을까? 평원대군 이임은 세종과 소헌왕비 사이의 일곱째 아들이고 화의군 이영과 계양군 이증은 세종과 신빈 김씨 사이에서 난 아들이다. 이임과 이영은 이복형제, 이영과 이증은 동복형제이고 따라서 세조와도 형제간이다. 초요갱은 그에 앞서 수양대군이 정변을 일으킨 직후인 단종 3년(1455년) 이영과의 관계가 문제가 돼 궁궐에서 쫓겨난 바 있다.   그런데 궁궐을 나간 초요갱은 세종 때 좌의정을 지낸 신개의 막내아들 신자형(申自衡)과 눈이 맞았다. 아예 안방을 꿰차고 들어앉았다. 세조 3년(1457년) 6월 26일 사헌부에서는 예장(禮葬)도감 판사 신자형이 본부인을 멀리하고 초요갱에게 빠져 초요갱의 말만 듣고 여종 두 명을 때려죽였다며 처벌을 요구하는 기록이 나온다.   그러나 신자형은 계유정난의 공신이었기 때문에 유배는 가지 않고 직첩(職牒)만 빼앗겼다.   그런데 석 달여 후인 10월 7일 사헌부에서는 훨씬 충격적인 보고를 올린다. 신자형의 7촌 조카뻘인 안계담이란 자가 초요갱을 '덮치기 위해' 다짜고짜 신자형의 안방으로 들이닥쳐 신자형의 아내 이씨는 놀라서 달아나다가 땅에 뒹굴고, 초요갱을 찾지 못한 안계담이 신자형의 노비들을 마구 구타하는 사건이 발생했다는 것이었다.   이처럼 아름다운 기녀를 둘러싼 사내들의 쟁탈전에는 왕실에서 미관말직까지 귀천(貴賤)이 따로 없었다.   앞서 이복형님이기도 한 세조에게 야단맞은 계양군 이증과 관련해 실록에는 "주색(酒色)으로 인해 세조 10년 8월 16일 졸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40도 안 돼 세상을 뜬 것이다.   초요갱은 남자들에게 횡액(橫厄)을 가져다 주는 '요부(妖婦)'와도 같은 존재였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초요갱의 입장에서 보자면 억울하기 그지없는 일이다. 자신이 누구를 죽인 적이 없다. 죽음도 불사한 사내들이 달려들다가 날개를 태워버리기도 하고 목숨을 잃기도 했을 뿐이다.       [출처] 조선일보      
28    이렇게 쓰면 노벨상 받는다 댓글:  조회:3368  추천:7  2015-11-01
이렇게 쓰면 노벨상 받는다     소설은 독자들의 호기심을 불러일으켜야 한다. 흡인력이 있어야 한다. 독자들의 구미에 맞아야 한다. 신선한 감정세계를 그려야 한다.       작자와 독자, 작중인물과 독자가 서로 통하고 호흡을 같이 해야 한다. 각계계층 독자들의 수요를 파악해야 한다. 예술매력으로 독자들을 정복해야 한다.       독자들로 하여금 내가 쓴 소설을 읽게 하고 계발을 받을수 있게 해야 한다. 그리고 철리적인 것, 나만의 독특한 것이 여야 한다. 작가는 세계를 창조한다. 작가는 예술적인 천부가 있어야 한다. 작가는 풍부한 상상력이 있어야 한다. 작가는 이야기를 꾸며내고 가공하는 능수여야 한다.     소설은 장엄한 거짓말이다. 생활에 있는 진실한 사실이라 하여 예술의 진실이 아니다. 꾸며낸 이야기도 예술의 진실이 될 수 있다.       보편적인 것에서 개별적인 것을 찾아내고 개별적인 것에서 보편적인 것을 체현해야 한다. 깊은 생활체험과 풍부한 지식이 있고 사상적 매력과 작가의 인격을 갖추어야 한다. 언어는 반드시 예술적이어야 한다.-언어관. 언어는 작가의 기본공이다.-언어의 형상성, 언어의 매력. 언어는 색채가 있고 동태적이어야 한다. 작가는 언어의 마술사가 되어야 한다. 언어예술의 대가로 되어야 한다.       세절은 반드시 독특해야 한다. 세절은 생활에서 받은 독특한 감수이다. 세절은 때론 정절을 대체할 수 있다. 노신의 《공을기》에서는 세 개의 세절로 공을기의 일생을 묘사하였다. 감정은 반드시 진실해야 한다. 생활의 독특한 발견이 있어야 하고 그 것을 심각하게 발굴하여 발전시켜 창작해야 한다.       소설은 사람을 쓰는 것이다. 복잡하고 변화가 많은 인간을 쓰는 것이다. 인간의 깊은 내심세계를 파헤쳐야 한다. 이야기는 신선하고 중복이 없게 비상적인 상태에서 인간의 진면모를 그려낼 수 있다.     소설은 사람 사는 잔 이야기이다. 몸과 마음으로 느껴야 한다. 통치자가 한 개인의 운명까지 관계해서는 안된다. 이 모든것을 바로 잡아주는 작용을 문학이 해야 한다. 읽고 나면 머리 속에 형상으로 남아 있는 작품이어야 성공적이다.     소설은 어느 짙은 인생의 단면을 그려주어야 한다. 아직 누구도 써내지 않았던 나만이 보아낸 독특한 그 것을 써내야 한다. 엄격한 자세가 있어야 한다. 부지런해야 한다.   어느 인상적인 한 장면이 머리 속에 박혀 그 것이 계기로 후에 한편의 엉뚱한 소설이 될 수 있다. 쓰고저 하는 것을 어떻게 가장 요령 있게 재미있게 지루하지 않게 선명하게 표현할 것인가 하는 것을 알아야 한다.     심후한 역사감과 선명한 당대성이 조화적으로 통일되어 있고 철리적 상징성과 역사적 신비성이 조화적으로 통일되어 있으며 줄거리 구성의 굴곡성과 세부묘사의 풍부성이 조화적으로 통일되어 있고 전통적 수법과 외래수법이 조화적으로 통일되어 있어야 한다.     문학의 길에 들어선다는 것은 고생문이 열리기 시작한 것이다. 문학은 물질적인 풍요와 만족한 생활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문학은 진지성을 가지고 파고들어야 한다.     문학은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를 가장 절실하게 꾸미지 않고 표현하는 것이다. 문학은 생활이고 인생자체이다.       문학의 5대 요소는 인간성, 사회성, 시대성, 민족성, 도덕성이다. 문학의 3대 특성은 영원성, 독창성, 보편성이다.       소설은 리상화를 반대하고 진실성을 추구해야 한다. 성격묘사에 있어서 그 인물이 무엇을 하는가를 보여줌과 동시에 더욱 중요하게는 어떻게 하는가를 보여주어야 한다. 소설은 작가의 의지나 정서경향을 직접적으로 설교하는것이 아니라 장면이나 환경, 사건, 인물을 통해서 자연스럽게 보여주어야 한다.   생활의 진정한 가치를 파악해야 한다. 이야기정절을 통해 인물형상을 두드러지게 해야 한다. 알아듣게 글을 써야 하고 기쁨 속에 비관적 정서를, 슬픔 속에 느슨함을, 속된 장면에 우아한 언어를 쓰는 재치가 있어야 한다.     지루한 것을 생동하게 묘사하고 끝까지 물고 늘어지고 깊게 파고들어야 한다. 어떤 사실이 작가를 통하여 얽히고 반죽되여 작가의 것이 된다면 그것이 원 사실과 다른 거짓이라하여도 그것이 더 진실하고 실물적인 것이다. 리론에 집착하기보다 쓰고저 하는 것에 깊이 파고들어야 한다. 작중 인물을 꿈속에서까지 생각하면서 살아있는 실체를 어떤 각도로 그려내야 한다. 뿜어내지 않으면 못견딜 강렬한 그런 할 이야기가 있어야 한다. 순수소설은 낮은 수준의 사람들에게 가르침을 주는 것이 아니라 자기와 맞먹는 수준이나 자기보다 높은 수준의 사람들에게 모든 힘을 다 내여 공을 들여 쓴 소설이다.       (1994년 연변작가협회 민족문학원 제1기 강습반 소설강의종합)      
27    한국방송 앵커의 굴찌칸 굴욕 댓글:  조회:3637  추천:0  2015-11-01
한국방송 앵커의 굴찌칸 굴욕 [강상헌의 바른말 옳은글] 용언 어간 말음 ㄺ의 발음    강상헌 언론인 · (사)우리글진흥원 원장     “집값이 폭등하던 시기 시장을 옥죄었던 굵직한 규제들이 잇따라 풀리고 있습니다.” 1월 3일 한 뉴스를 글로 적은 홈페이지의 문장이다. 실제 소리는 [굴찌칸 규제들이...]였다.   향도(嚮導), 시민들 사이에서는 낯설지만 군대 울타리 안에서는 익숙한 단어다. 군 출신들도 잘 안다. 원래 ‘길을 인도함. 또는 길은 인도하는 사람’의 뜻, 이 의미를 바탕으로 행진할 때 대오(隊伍)의 맨 앞에서 방향과 속도를 조절하는 사람이라는 뜻의 군사용어로 쓴다.   스탠더드(standard) 즉 기준(基準), 군대에서는 ‘제식 훈련에서 대오(隊伍)를 정렬하는 데 기본이 되는 표준을 대원들에게 알리는 구령(口令)’이다. 이 ‘기준’ 구령을 외치는 임무를 맡은 사람을 중심으로 참가자들은 모이거나 흩어진다. 이 또한 ‘군사용어’다.   한국방송(KBS)의 간판 뉴스 ‘KBS뉴스9’는 스스로 자임 또는 자부하듯, 이견(異見) 없진 않겠지만, 현실적으로, 뉴스의 향도 또는 기준이다. 표현이 깨끔하지 않고 조건의 말들이 붙은 것은 KBS 탓만은 아니리라. 그러나 최소한 말에 있어서만은 시청자 또는 국민의 향도 또는 기준이어야 하지 않겠는가? 최영철 ‘앵커’의 언어실력은, 그렇게 중요하다. 뉴스를 전하는 이들의 연모인 ‘말’에 관한 이야기다. 앵커라는 이름의 진행자(MC)가 방송에서 틀린 말을 한다면, 시청자들은 그 오류를 본을 삼는다. 엉터리 향도나 기준은 반듯한 행렬(行列)을 도리어 망가뜨리는 것이다. 길로 가야지 논두렁으로 가면 어쩌나. 국민의 국어 교육에도 큰 폐해다.   [국찌칸 규제들이...]가 맞다. 중학교 때부터 나오기 시작하는 우리말 발음 문제의 손꼽히는 이슈 중 하나다. 고교생이면 모르면 안 되는, 시험에 잘 나오는 대목이다. 기억이 나지 않는 이도 있겠지만, 이렇게 배웠을 터다. ‘용언(用言)의 어간(語幹) 말음(末音) 겹받침 ㄺ의 발음’이라는 제목과 설명이다. 괄호의 한자는 필자가 첨가했다.   ㄺ은 어말 또는 자음 앞에서 [ㄱ]으로 발음한다. 표준발음규정, 국가의 기준인 것이다. 달걀을 낳는 닭은 [닥]이다. 날씨가 맑다[막따], 늙다[늑따] 들의 사례가 있다. 그런데 ‘다만, 용언의 어간 말음 ㄺ은 ㄱ 앞에서 [ㄹ]로 발음한다’는 조항이 있다. 예외인 것이다. 맑게[말께] 묽고[물꼬]등이 사례다.   ‘굵직하다’는 그래서 [굴찌카다]가 아닌 [국찌카다]다. ‘굵게’가 [굴께]인 것과 대비된다. 정확히 뜻을 이해하고 그 자리에서 서너 번 씩만 입에 올려 소리를 내봤더라면, 상당한 시간이 흐른 뒤에도 입에 붙은 그 말은 쉬 되새겨진다. 그래서 대부분 틀리지 않는다. 문제는 소리 내어 외어보지 않았던 사람들이다. 국어의 발음(발성) 교육의 문제인 것이다.   발음 뿐 아니라 뜻도 흐릿하다. 용언은 ‘동사 형용사 같은, 서술어 기능을 하는 문장성분’이다. 어간은 활용어가 활용할 때 변하지 않는 부분, ‘보다’ ‘보니’에서 ‘보’와 ‘먹다’ ‘먹니’에서 ‘먹’이다. 말음은 종성이다. 이해가 잘 되시는지? 사전 만든 이들은 당시 한자어를 활용해 표제어와 그 풀이를 적었다. 지금 사람들은, 선생님들까지도, 대부분 한자를 안 배웠다.   뜻을 또렷히 새겨보지도 않고, 소리 내어 외어보지도 않은 채 눈으로만 익힌 ‘용언의 어간 말음 ㄺ의 발음’ 이론은 시험 끝 종소리와 함께 망각의 늪으로 빠지기 십상이다. 그래서인지 우리 사회 꽤 중요한 인사들도 자주 그 앵커처럼 [굴찌칸 규제...]식 발음으로 굴욕을 겪는다. 지금이라도 [국찌칸 규제...]를 대여섯 번만 외우면 될 텐데.   언어와 (보편적) 지식이나 교양 등 방송인으로서의 소양보다는, 외모와 매끄러운 말솜씨 등 연예인 선발 기준으로 진행자들은 선발하고 있는 것 같다는 얘기를 늘 듣는다. 뉴스까지 방송사 간 농염(濃艶)과 달변(達辯)의 대결을 벌이는 것인가? 지적이고 언어도 정확하면서 아름답기까지 한 진행자는 진정 나무에서 고기를 구하는, 연목구어(緣木求魚)인가?   강호동, 박지선 씨가 곧 거기 나설라, 말도 잘 하는 이 분들이야 말로 눈길끌기에 최적 아닌가. ‘말’ 안 되는 이가 마이크 잡으면 고객(시청자)들이 비웃는다. 노래방에서도 그렇듯.   토/막/새/김 본말전도(本末顚倒), 중요한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이 구별되지 않거나 일의 순서가 잘못 바뀐 상태를 이르는 숙어다. 본디[本]와 끄트머리[末]가 뒤집혔단다. 내용으로 승부하기 버거우니 장식품으로나마 눈길 끌어보겠다는 계산도 본말전도다. 성형(미용)수술 ‘공장’의 난립이나 짝퉁이라도 하나 들어야 거리에 나설 수 있다는 ‘세련녀’들의 치열한 열등감 열패감(劣敗感)도 본말전도의 병적 전개일 수 있다. 바르고 고운 말, 언론인으로서의 자질이 아닌 다른 조건을 먼저 챙기면, 그들의 방송보도는 암울할 것이다. ‘본말전도 방송’ 아니겠는가.        
26    중국 미녀작가 댓글:  조회:5506  추천:1  2015-10-11
중국 미녀작가   步非烟   步非烟(原名辛晓娟),1981年出生于四川成都,毕业于北京大学中文系,2006年获得北京大学古代文学硕士学位,中国内地女作家。 2004年获得温瑞安神州奇侠奖,2005年、2006年获黄易武侠文学奖。著名学者孔庆东称步非烟为“大陆武侠作家中最具希望的新星”。她的作品大气磅礴、汪洋恣肆,想像力神秘奇特,笔风变化万端,她开创的女子武侠更被誉为新神话主义、大陆武侠奇幻界想像力的代表。"80后"青年作家 。[1] 她的作品有《华音流韶》系列、《武林客栈》系列、《昆仑传说》系列、《玫瑰帝国》系列、《修罗道》等。此外,她还曾受金山公司邀请,写过《剑侠情缘》小说。         米米七月   原名黄菲,1986年生于湘西,湖南张家界人,土家族姑娘,代表作品《他们叫我小妖精》、《小手河》、长篇小说《肆爱》。       吴韵汐   笔名桃花潭水、弱水雕栏,90后美女作家,13岁开始诗歌、小说创作。代表作品 《天空一无所有,为何给我安慰:海子诗传》     明晓溪 当代著名女作家,武汉大学硕士。 代表作品有《旋风少女》、《明若晓溪》、《泡沫之夏》、《会有天使替我爱你》[1]  等。2008年12月1日“2008第三届中国作家富豪榜”重磅发布,明晓溪以300万元的版税收入,荣登作家富豪榜第11位,引发广泛关注。而文笔细腻的明晓溪也有“现代小琼瑶”之称。     卫慧 1973年出生, 被称为 "晚生代"、 “新新人类”女作家, 1995年毕业于复旦大学中文系, 22岁的卫慧发表她的处女作《梦无痕》。做过记者、编辑、电台主持、咖啡店女侍,蹩脚的鼓手,不成功的广告文案,自编自导自演过话剧,生于浙江余姚,儿时在普陀山、桃花岛等地度过,1990年在南昌陆军学院参加为期一年的军训。参加99国际“超市艺术展”至今从事写作十年有余。作品有《像卫慧那样疯狂》、《水中的处女》、《欲望手枪》、《上海宝贝》、《我的禅》等。部分作品译成31种文字,并登上日、英、意、德、法、美及西班牙、阿根廷、爱尔兰、香港、新加坡的各类畅销榜前十。居纽约与上海,专职写作。       春树   1983年出生于北京,当代女作家、女诗人。 2000年, 春树从高中辍学, 开始自由写作。 至今已出版小说《北京娃娃》 、 《长达半天的欢乐》、 《抬头望见北斗星》等, 她有主编过《80后诗选》。 2004年,她获得第五届网络金手指的网络文化先锋奖。2004年,她成为美国《时代周刊》杂志封面人物,美国人称她为“新激进份子”。她也是80后著名代表人物之一。 她代表作有:《北京娃娃》《长达半天的欢乐》《2条命》《在地球上:春树旅行笔记》。《抬头望见北斗星》           安意如 原名张莉,1984年6月20日出生于安徽绩溪,现代作家。[1] 2002年毕业于安徽某中专院校。2005年9月,出版传记文学《看张爱玲画语》。[2]  2006年8月,出版文学随笔《人生若只如初见》和《当时只道是寻常》。[3]  2006年10月,出版文学随笔《思无邪——诗三百》。2009年8月出版新书《美人何处》。[4] 2012年12月出版《再见故宫》,多处抄袭或改编歌手河图所唱歌曲的歌词。[5]         沧月 1979年5月15日出生于浙江台州,中国当代奇幻文学作家、建筑师,毕业于浙江大学建筑设计及理论专业。 2001年开始发表作品,先以武侠成名,后转入奇幻领域。2002年,开始为杂志撰文。2007年,担任杭州市作家协会类型文学创作委员会主任。2014年,担任浙江省网络作家协会副主席。 她十年来出版作品二十余种,作品累积销量达10,000,000册[1]  ,代表作有《听雪楼》系列、《镜》系列、《羽》系列、《鼎剑阁》系列、《夜船吹笛雨潇潇》、《曼青》、《花镜》、《雪之蝶》、《雪满天山》等。                  郭妮 郭妮,别    名 妮殿、妮姬、妮j 80后青春偶像作家,广西柳州市1981年10月5日  有日产万字“华语小天后”的称号。曾联合聚星天华公司创建杂志《火星少女》,面向年轻女读者的刊物。其小说主要为少女向的青春恋爱小说,其中台湾版和香港版已发行(但主要支持者集中于内地)。号称“亿元女仔”,以高产闻名。代表作:《麻雀要革命》、《天使街23号》、《恶魔的法则》、《壁花小姐奇遇记》、《再见苏菲斯》          崔曼莉 毕业于南京大学,自由作家。 崔曼莉2002年开始创作,在文学刊物发表诗歌小说十余万字。著有长篇小说《最爱》,《浮沉》一、二部,《琉璃时代》,中短篇小说集《卡卡的信仰》等。其中《浮沉》销售过百万册,《琉璃时代》获中国作家出版集团长篇小说奖,短篇小说获诸多文学奖。2012年《浮沉》被改编成同名电视剧播出,被新闻出版总署推荐为最值得阅读五十本好书之一。《琉璃时代》获得中国作家出版集团长篇小说奖。四岁开始学习书法,2012年,书法作品在德国参加国际书法大展,并获收藏。         笛安 笛安,女,全名李笛安,中国作家。 2012年中国作家富豪榜上榜作家,著名作家李锐的女儿,1983年生于山西太原,2001年毕业于太原五中,同年考入山西大学历史系历史学专业。 2002年赴法留学,在巴黎索邦大学学习社会学,2010年获得硕士学位。现在是最世文化签约作家,《文艺风赏》杂志主编。获第八届“华语文学传媒大奖”最具潜力新人奖。2003年发表的第一篇小说《姐姐的丛林》在《收获》杂志成为头条;2007年9月出版中篇集《怀念小龙女》;2004年创作了长篇小说《告别天堂》;2005年创作的《芙蓉如面柳如眉》是笛安的第二部长篇;之后出版的《西决》、《东霓》、《南音》、《妩媚航班》  获得广大读者的喜爱;2013年12月5日,2013第八届中国作家富豪榜重磅发布,笛安再度上榜。           赵佳蓉 别名 落落,落大,落殿 出生日期 1982年4月30日 中国青春文学作家中国文艺网络奖·最佳作家 )一般指赵佳蓉 赵佳蓉(笔名落落),1982年4月30日生于上海,最世文化签约作家、《文艺风象》杂志主编、《最小说》别册《ZUI Silence》文字总监。2012年位列第14名,版税高达320万。[1] 曾因擅长描写校园青春小说,而被称为“校园女王”。2011年出版的《剩者为王》直指“剩女”话题,获得当年上半年虚构类畅销书第八名,成为排行榜中最畅销的女作家。 代表作主要有《年华是无效信》、《尘埃星球》、《须臾》、《不朽》、《剩者为王》、《千秋》、《万象》等             桐华  桐华,原名任海燕子,1980年10月18日桐华出生于陕西省, 中国言情小说作家、影视制作人、词作者。中国文坛言情小说“四小天后”之一,被封为“燃情天后”。毕业于北京大学。2005年从中国到达美国,创作第一部小说《步步惊心》在网站连载,2006年正式出版。2011年凭借《步步惊心》改编影视剧名声大噪。[1]  其小说《云中歌》《大漠谣》《最美的时光》等被陆续改编成影视,  2013年,桐华参与策划电视剧《金玉良缘》[3]  《抓住彩虹的男人》。             尹珊珊  80后代表作家之一。别    名 珊珊,乖乖女,尹小珊,嘟嘟妹 出生日期 1982年7月26日 第二届新概念作文大赛一等奖得主,代表作《纯快乐物语》,已出版《自由18岁》、《玫瑰在风中呼唤》。曾以文化成绩最高分考进中央戏剧学院戏剧文学系。           林静宜  林静宜,80后代表型青年作家、影视编剧。福建人,生长于东南海岸线。四川传媒学院编剧课程教师。四川作家协会会员,巴金文学院新苗工程重点作者。16岁起开始有文学、绘画作品见于报刊,至今在杂志开设有情感专栏。代表作有长篇小说《蝶葬》、《逆时钟》。黄健中导演曾不远千里选中林静宜为其创作电影剧本《栖镇故事》(唯一编剧)。2012年12月15日晚,新锐艺术盛典在上海落幕,80后福建作家林静宜摘下了新锐艺术人物文学类最具人气奖。           小妮子  小妮子,中国言情小说作家。2004年,小妮子处女作出版,《恶魔之吻》第一部以黑马之势席卷全国,奇迹般地创下百万册的销售神话,掀起一股铺天盖地的“小妮子热潮”,奠定了小妮子在青春文坛的地位。代表作有《恶魔之吻》、《龙日一,你死定了》《仲夏夜之恋》、《亲亲亲吻鱼》等。        
25    비명에 죽은 중한 녀자연예인들 댓글:  조회:9620  추천:7  2015-10-07
비명에 죽은 중한 녀자연예인들   제명을 다 살지 못하고 안타깝게 젊은 나이에 저 세상으로 간 홍안박명의 녀자 연예인들, 그녀들이 남긴 소중한 순간들, 기억들 그리고 그녀들의 맑은 미소는 우리들의 마음속에 영원히 빛날것이다.     비명에 죽은 중국 녀자연예인들   1. 옹미령(翁美玲):   향항배우 옹미령은 1959년 5월 7일에 향항에서 출생했다. 1980년대초에 대륙에서 가장 환영받는 녀배우로 최고의 인기를 누리던 옹미령은 1985년 5월 14일에 자택에서 가스자살로 혜성처럼 빛나던 꽃같은 삶을 마감했다. 향년 26세였다. 바람난 남자친구 탕진업(汤镇业)때문에 상심해서 자살한걸로 알려졌다.    2. 류단(刘丹):   류단은 1975년 11월 10일에 흑룡강성 할빈시에서 출생해 락양에서 자랐다. 1998년에 《환주공주(还珠格格)2》에서 향비(香妃)역을 맡으며 인기를 누렸다. 류단은 2000년 1월 30일 아침 6시에 광주에서 심수로 달리는 고속도로에서 뜻밖의 교통사고로 불행하게 사망되였다. 향년 26세였다.    3. 균자(筠子):   본명이 오아군(吴雅君)인 대륙가수 균자는 1977년 7월 18일에 신강에서 출생했다. 2000년 9월 10일에 균자는 자택에서 스스로 목을 매 봄꽃처럼 찬란하던 자신의 생명을 결속지었다. 향년 23세였다.    4. 진보련(陈宝莲):   향항배우 진보련은 1973년 5월 23일에 상해에서 출생했다. 2002년 7월 31일 5시 30분쯤에 여러번이나 자살, 자학 경력이 있는 진보련은 갓 1개월이 지난 아들을 남겨놓고 상해 정안구 남양로에 있는 24층 옥상에서 투신해 자살했다. 향년 29세였다.  5. 허위륜(许玮伦):   대만배우 허위륜은 1978년 11월 13일에 대만 대북시에서 출생했다. 2007년 1월 26일에 중산고속도로에서 남하하다가 교통사고로 중상을 입고 대중시등청병원에 실려가 구급을 받았지만 효과를 보지 못하고 1월 28일 19시 37분에 사망되였다. 향년 28세였다.     6. 려초녕(黎础宁):   대만 가수 려초녕은 1984년 10월 16일에 대만 남투현 포리진에서 출생했다. 2008년 11월 12일 야밤에 그녀는 자가용차안에서 숯을 피워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7. 반성의(潘星谊):   배우 반성의는 1980년 10월 11일에 안휘성 회북시에서 출생했다. 반성의는 2009년 2월 20일 오전 7시쯤에 자택에서 뜻밖의 사고로 사망되였다. 당시 그녀의 아버지는 주방에서 밥을 짓다가 갑자기 “쨍그랑”하는 소리를 듣고 달려가보니 어항이 깨여져 산산조각이 난 유리가 온 방바닥에 흩어져있었고 중상을 입은 딸이 유리조각가운데 넘어져있었다. 아버지는 딸의 시력이 좋지 못해(병독성결막염) 그날 병원에 가려고 준비하던 중이였다고 했다. 아버지는 어항옆에 전화가 있었는데 아마도 시력이 좋지 못해 어항에 부딪치면서 미끄러져 넘어진것 같다고 했다. 결국 반성의는 넘어지면서 유리쪼각에 대동맥이 파렬되였다. 그후 반성의는 북경대학제3병원으로 호송되였으나 구급효과를 보지 못하고 사망되였다. 향년 27세였다.    8. 진림(陈琳):   가수 진림은 1970년 1월 31일에 중경에서 출생했다. 1990년대에 전남편 심영혁(沈永革)과 함께 대륙가요계의 신화를 창조하며 최고인기가수로 활약했던 그녀는 심영혁의 혼외련으로 부부감정이 파렬되여 리혼한후 저조기에 들어가 아무런 작품도 내놓지 못했다. 2009년 7월 24일에 음악인 장초봉(张超峰)과 결혼했다. 결혼후 남편 장초봉은 진림이 전 남편 심영혁을 잊지 못한다는 리유로 안해에게 폭력을 행사했던것으로 알려졌다. 2009년 10월 31일에 진림은 북경의 친구집에서 투신자살했다.  9. 배우 백정(白静):   시버족(锡伯族)인 백정은 1983년 6월 4일에 료녕성 조병산시에서 출생했다. 백정은 2012년 2월 28일 오후에 북경시 조양구에 있는 거처에서 감정분규로 남편 주성해(周成海)의 칼에 찔려 사망했다. 향년 29세. 주성해도 뒤따라 자살했다.     10. 홍서양(洪瑞襄):   대만 배우이며 가수인 홍서양은 1968년 2월 23일에 대만 대북시에서 출생했다. 2012년 3월 23일 저녁 11시에 대만 신북시 림구구에 주차한 승용차안에서 홍서양의 시신이 발견되였는데 사망시간은 2일전, 사망원인은 숯을 피워 스스로 목숨을 끊은것으로 알려졌다. 향년 44세였다. 홍서양은 영화감독 왕도남(王道南)과 결혼했으나 자식이 없었다. 그녀는 왕도남과 리혼한후 배우 림홍상(林鸿翔)과 사귀였다.   11. 량정문(梁静雯):   향항 유선텔레비죤방송국 경제관련채널의 기자겸 아나운서인 량정문은 2015년 4월 8일에 자택에서 숨진채 발견되였다. 모친에 의해 발견된 량정문은 방안에서 숯을 피워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현지경찰은 량징원의 사망을 스트레스로 인한 자살로 추측했다. 유서는 발견되지 않았다. 향년 34세였다.    자살한 한국 녀자연예인들    1. 이은주:   배우 이은주는 1980년 12월 22일(음력 11월 16일)에 전라북도 군산시에서 이상열과 최순향의 1남 1녀중 둘째로 태어났다. 이은주는 2005년 2월 22일 오후 20분께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수내동 자신의 아파트 드레스롬에서 이동식 옷걸이에 넥타이 끈으로 목매 숨져 있는 것을 그녀의 오빠가 발견하고 경찰에 신고했다. 침대 옆에는 "엄마, 미안해, 사랑해. 영화가 너무 하고 싶었다. 사람으로 살아도 사는 게 아니다. 돈이 다가 아니지만 돈 때문에 참 힘든 세상이야. 나도 돈이 싫어. 누구도 원망하고 싶지 않다" 라는 내용의 유서를 발견했다.   이은주는 목을 매 자살하기 전에 먼저 커터칼로 왼쪽 손목 동맥을 자르려 시도했던 사실이 경찰 조사결과에 밝혀졌다. 그녀의 자해로 침대위에 피가 많이 흘려져 피자국이 많이 있었으며 자살 실패 후 목을 맨 것으로 경찰은 추정했다. 이은주는 영화 "주홍글씨" 촬영 후 알몸연기 등 노출연기에 의한 고민 때문에 우울증이 심했고 그로 인해 자살 직전까지 줄곧 불면증에 시달렸다.  은주는 영화를 찍으면서 살이 4킬로나 빠질 정도로 고생했다.  특히 한석규, 엄지원과 함께 찍었던 베드신 장면은 33번이나 찍었고 베드신을 찍는 일주일 내내 3~4시간 밖에 잠을 자지 못했다.    2. 유니:   배우 겸 가수 유니는 1981년 5월 3일에 출생했다.  1996년 드라마 《신세대 보고 어른들은 몰라요》를 통해 데뷔했고 드라마, 영화 등에 출연하며 연기 활동을 하였다. 2003년 1집 앨범을 발표하며 가수로 데뷔하였다. 2005년 2집을 발표하였으며, 2006년에는 일본에서 싱글 앨범을 발매하기도 했다. 2007년 3집 발매를 앞둔 2007년 1월 21일 낮에 자택에서 목을 매 자살하였다. 향년 27세. 사유는 오래전부터 앓아온 우울증으로 추정된다. 유서는 발견되지 않았다. 유니 어머니는 유니가 어려서 연예계에 데뷔해 내성적인 성격으로 마음고생이 심했으며 그로 인해 우울증이 있었는데 그게 원인인 것 같다고 밝혔다.    3. 정다빈:   배우 정다빈의 본명은 정혜선으로 1980년 3월 4일 경기도 성남시에서 1남 1녀 중 장녀로 태어났다. 2007년 2월 10일, 당시 본인 남자친구의 집 화장실에서 수건으로 목을 매 숨진 채 발견되었다. 향년 28세. 아래는 사망 전 날 올라온 정다빈의 글이다. 복잡해서죽을것같았다.이유없이화가나서미칠것같았다. 멀미가날듯이속이힘들었다.머리가너무아파서눈물이났다. 신경질의성낼노의노예가될뻔했다.울다웃다미치는줄알았다. 내가나를 잃었다고생각했었고나는뭔가.정체성을잃어갔었다.   순간. 전기에감전이되듯이. 번쩍.   갑자기평안해졌다.주님이오셨다.형편없는내게.사랑으로. 바보같은내게.나의소중함을알게하시고.용기를주신다. 주저앉으려했던나를.가만히.일으켜주신다. 나는.이제.괜찮다고.말씀하신다. 나는.괜.찮.다. -정다빈, 싸이월드 미니홈피 (2007년 2월 9일)-   4. 최진실:   정상의 자리에 올라 만인의 사랑을 받았던 저명한 배우 최진실은 1968년 12월 24일에 아버지 최국현과 어머니 정옥숙 사이에서 태어났고 남동생 최진영(배우이자 가수이며 2010년 3월 29일에 자택에서 자살)이 있다. 최진실은 2008년 10월 2일 오전 6시 15분, 서울특별시 서초구 잠원동의 자택 욕실에서 숨진 채로 발견되었다.   대중문화 평론가 차우진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한 시대가 갔다. 그를 스타로 만들고 바라보고 우상으로 세운 것도 우리들이었고 그를 고통 속에서 세상을 등지게 만든 것도 우리들이었다. 최진실의 죽음은 단지 누군가의 죽음으로 한 시대의 끝을 경험하는 것과는 다른 생각을 갖게 한다. 최진실의 죽음을 애도하는 것은 우리 자신에 대해 반성하는 것과 같다. 최진실의 부재가 충격적인 것은 시대적인 무의식이 투영되었다가 왜곡되는 과정이 적나라하게 드러났기 때문이다. 그의 부재가 환기하는 것은 역설적으로 그가 있어서 우리가 얼마나 행복했던가란 사실이다. 그의 죽음을 기억하고 그의 부재로부터 배운 것들을 잊지 않는 일이야말로 그를 애도하는 가장 옳은 방법이라고 믿는다.    5. 장채원:   연예인 장채원은 1982년 7월 18일에 출생했다. 원래는 장정한이란 이름을 가진 남자였지만 2004년말에 여자로 성전환 수술을 하고 “장채원”으로 개명하였다. 2008년 10월 3일 오후에 서울 한남동 자택에서 목을 매 숨진채 발견되었다. 경찰은 자살로 추정하였으며 남자 친구와 헤어진 뒤 충동적으로 자살한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장채원은 자살당일 오전 자신의 미니홈피에 “엄마 미안해 다음에는 잘할께...”라는 글을 남겼다. 스포츠서울은 친구의 말을 인용 자살 원인을 악성 댓글에 의한 상처와 남자 친구와의 이별 때문이라고 전했다. 일부 언론은 배우 최진실의 자살로 인한 베르테르 효과(모방자살)일 가능성을 언급하기도 하였다.     6. 장자연:   배우 장자연은 1980년 1월 25일에 전라북도 정읍에서 1남 2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어린 시절 교통사고로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도 역시 교통사고로 2006년에 돌아가셨다. 2006년 27세에 롯데제과 CF로 연예계에 데뷔하였으며 KBS《꽃보다 남자》에 출연하며 배우로서 활동하기 시작했다. 일명 “장자연 리스트”에 따르면 그녀는 데뷔 후 성상납 강요와 폭력 등에 시달려 왔다고 한다. 2009년 3월 7일에 경기도 분당의 자택에서 사망한 채로 언니에 의해 발견되었다. 당시 그녀의 나이는 30세였다. 사인은 구체적으로 알려지지 않았으나 우울증이 원인이라는 지인들의 증언이 있다.       7. 김수진:   간호사인 어머니가 서독으로 유학을 떠나1975년 6월 28일에 그곳에서 독일인과의 사이에서 김수진을 낳았다. 배우 김수진은 2013년 3월 29일 오후 9시쯤 강남구 논현동 자택에서 목을 매 숨진 채 발견됐다. 경찰은 우울증에 의한 자살로 추정했다. 김수진의 자살소식은 이틀이 지난 4월1일 인터넷을 통해 알려졌으며 수일간 검색어 상위에 올랐다.   한국의 가수 겸 배우인 유채영도 본명이 김수진이다. 1973년 9월 22일에 출생해 2013년 10월 말 위암 말기 판정을 받고 항암치료 중 2014년 7월 24일 향년 42세로 사망했다. 그외 1988년생인 가수 김수진, 1993년생인 가수 김수진, 1996년 2월 20일에 출생한 배우 김수진 등 동성동명의 건재한 연예인이 있다.    8. 설리 1994년 3월 29일에 출생했던 한국의 가수 겸 배우 설리(본명 최진리)가 2019년 10월 14일 오후 3시 20분쯤 경기 성남시에 위치한 심곡동의 자택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 설리는 그동안 각종 악성댓글에 시달려 온 것으로 알려졌다. 설리는 과거 "내게만 유독 색안경을 끼고 보는 분들이 많다", "오해하지 마라 난 나쁜 사람 아니야"라는 말을 하기도 했다. 8. 구하라 1991년 1월 3일에 출생했던 한국의 가수이자 배우인 구하라 씨가 절친 설리가 자살한지 42일만인 2019년 11월 24일 저녁 6시쯤 서울시 강남구 청담동에 있는 자택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 구하라씨는 절친 설리가 극단적 선택을 하고 숨졌을 때 영상편지를 보내며 설리 몫까지 열심히 살겠다고 말했지만 결국 자신도 자살을 선택했다. 구하라씨는 절친했던 가수 설리 씨의 죽음으로 힘든 시간을 보냈던 것으로 알려졌다. 구하라씨는 이미 지난 2019년 5월에 한차례 자살을 시도했다가 구조된 적이 있다. 
24    금도는 그런 쩨쩨한 말이 아니라 탁 트인 마음이다 댓글:  조회:3529  추천:0  2015-10-03
금도는 그런 쩨쩨한 말이 아니라 탁 트인 마음이다 [강상헌의 바른말 옳은글 98 ] 2014년 새해 금도사용설명서   강상헌 언론인 · (사)우리글진흥원 원장     사노라면 언젠가는 밝은 날도 오겠지 // 흐린 날도 날이 새면 해가 뜨지 않더냐 // 새파랗게 젊다는 게 한 밑천인데 // 쩨쩨하게 굴지 말고 가슴을 쫙 펴라 // 내일은 해가 뜬다 내일은 해가 뜬다. (김문응 작사 길옥윤 작곡, 1966년작 《사노라면》 가사 1절)   “내일은 내일의 해가 뜬다.” 왕년의 대작 미국영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여주인공 스칼렛 오하라(비비언 리 출연)가 막판에 주먹 불끈 쥐며 그렇게 부르짖었다. 원문(Tomorrow is another day.)보다 우리말 번역문이 더 아름다워 우리 젊은이들 가슴을 더 흔들었다. “사노라면”의 해 이미지와 흡사하지 않는가?   그 가슴에 품은 뜻, 흉금이다. 왜 있지 않는가? 흉금을 터놓고 얘기하자는 말, 가슴을 쫙 펴고 구긴 데 없이 당당하게 살자는 이 노래가 사람을 내내 달뜨게 하는 까닭일 터. 그 낱말의 사촌이 바로 금도(襟度)다.   마음의 큰 터전, 모두를 보듬어내고도 화수분일 것 같은 백범 김구 선생 웃음보처럼 낙낙한 가슴 속을 이른다. ‘다른 사람을 포용할만한 도량’이라고 사전은 새긴다. ‘금도’는 이렇듯 아름답고 귀한 말이다. 아웅다웅 투닥토닥 하는 상황에 쓰는 지저분한 말이 아니다.   70년대 통속 연애소설의 상투적 주제 ‘넘어서는 안 될 선’의 기억이 아직 남아서일까? 정치인들의 그 ‘금도’는 잘라 말해 어리석다. 금도의 뜻이 그게 아니다. 뚱딴지도 유분수지, 금도가 ‘마지노선’이란다. 최근의 보도를 보자.   최경환 새누리당 원내대표는 “...말이 정치적 금도를 넘나들고 있다."고 했다. 같은 당 황우여 대표는 “...인간적 아픔은 피해가는 것이 최소한의 금도 아니었는가”라고 했다. 그 당 대변인이 “SNS에서도 넘지 말아야할 선이 있다"고 언급한 그 ‘선’이 바로 그들의 금도다. 민주당 전병헌 원내대표도 “...최소한의 예의와 금도를 깬 처사"라고 ‘금도타령’으로 벋섰다.   정치를 평하고 논하는 대학교수도 예외는 아니다. ‘정론-막말의 금도’란 이름의 신문 칼럼에서 신율 명지대 교수는 “...모든 말에는 금도가 있다. 부부싸움에도 해도 될 말과 해선 안 될 말이 있고 부모 자식 간에도 마찬가지다.”라고 했다.   미디어오늘은 여러 차례 이 말의 오염(汚染)과 오용(誤用)을 지적해 왔다. 한겨레신문도 이런 밉상을 보다보다 지쳤는지 한 칼럼에서 이 말의 뜻을 되레 차분하게 설명해줬다. 경향신문 사장을 지낸 언론인 고영재 씨의 글 이 대목을 통해서다.   ... 금도, 의미심장한 말이다. 인간 세상의 난제를 해결하는 실마리가 숨어 있는 말이기도 하다. 금도에 담긴 도량, 배려, 분별, 약자에 대한 측은지심 등의 의미를 곱씹어 볼 일이다. 무릇 금도란...   ‘금도 타령’이 한동안 뜸했다. 그러다 또 한 무리 정치인들이 생각 없이 엉터리 말 ‘금도’를 질러대니 우리 언론들 따라 외우기 바쁘다. 우리 신문과 방송의 데스크들, 선배님들은 요즘 후배님들을 어떻게 지도하는지 궁금하다. 걱정스럽기도 하고. 그들은 모두 공인(公人)들이다. 선배 김재곤 기자의 핏대가 문득 그립다. 고 김용정 기자도.   금지가 뼈에 사무친, 하릴없는 패배의식의 결과일까? 금도(襟度)를 금도(禁度)라고 지레 무심코 짐작한 결과로 본다. 하긴, 그 나이 사람들의 의식은 측은할 정도로 쩨쩨할 수 있다. ‘날이 새면 해가 뜨지 않더냐’라고 절규했어야 할 정도로 핍박의 사고에 익숙했던 시절이었다. 독재의 프레임은 차츰 ‘대인(大人)의 금도’와 같은 표현들을 세상에서 지웠다.   세상이 그렇게 이끌었을 수도 있었다. 전적으로 그들의 (무식) 탓만은 아니라는 얘기다. 그런 선배들에게서 후배들은 따라 배웠다. 그러나 고쳐야 할 사항이다. 그 낱말뿐일까?   금도는, ‘넘어서는 안 될 선’ 따위의 야릇한, 엉큼한 말이 아니다. 너른 가슴이다. 관대함이고 아량이다. 남을 즐겁게 하는 배려다. 푸근한 미소다. 당당함이고 흔쾌함이다. 열린 마음이다. 이효리의 마음 같은 상큼한 청춘이다. 베풂이고 감사다. 금도는, 2014년 새해 모든 이들과 함께 나누고 싶은 기쁨이다.     토/막/새/김 저고리[의(衣)] 앞 여미는 부분이 옷깃[금(襟)]이다. 저고리가 흩날리지 않도록 단정하게 여미는 데 ‘하지 말라’는 뜻 금(禁)을 썼다. 두 이미지(그림글자 衣 禁)가 하나 됐다. 옷깃 안쪽은 사람의 가슴, 襟이 옷깃이면서 ‘가슴’의 뜻이 된 인연이다. 신령스런 힘이 숨 쉬는 숲 임(林)과 제단 또는 신(神)의 영역을 뜻하는 시(示)가 붙어 ‘금하다’[禁]라는 완강한 뜻이 됐다. 나무[목(木)] 모여 숲[林]되고, 거기에 제단[示] 놓여 금지[禁]가 되고, 거기에 저고리[衣] 붙어 가슴[襟]되는, 오랜 문자역사의 퍼즐은 사물의 이치를 보듬고 있다. 본디다.          
23    성인 호랑이? 미디어 언어파괴 현상들 댓글:  조회:3501  추천:1  2015-06-09
성인 호랑이? 미디어 언어파괴 현상들   강상헌의 바른말 옳은글   강상헌 언론인 · (사)우리글진흥원 원장       전 세계적으로 5백여 마리, 중국에 20여 마리밖에 남지 않았다는 백두산 호랑이의 자태가 카메라에 뚜렷이 잡혔다면 반갑고 재미난 뉴스다. 우리나라 대표적 방송사가 지난 19, 20일 이틀간 네 차례에 걸쳐 동영상 화면과 함께 뉴스로 내보냈다. 당당한 외관, 과연 백두산 호랑이구나! 중국 발 특파원 뉴스였다. 눈이 시원했다.   그런데, 설마, 내 귀를 잠깐 의심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기자의 그 말은 ‘성인’이었다. 제목의 이 기사에서 기자는 이렇게 말했다.   “야생 백두산 호랑이입니다. 갈색 털에 온 몸에는 검은 줄무늬가 선명합니다. 성인 수컷으로 추정되는 이 호랑이는 자기 영역을 돌아보는 듯 천천히 걸음을 옮깁니다...”   성인은 “사물이 이루어지는 원인”이라는 成因, “인(仁) 즉 덕을 갖췄다”는 成仁, “지혜와 덕이 매우 뛰어나 길이 우러러 본받을 만한 사람”을 가리키는 聖人이 있다. 그리고 또 성년(成年) 어른(大人)”을 이르는 成人 등 몇개의 성인이 있다.   발음은 같고 뜻이 다른 동음이의어(同音異議語)들이다. 그 호랑이 기사에서는 어떤 ‘성인’을 말한 것일까? 혹 ‘곰과 호랑이가 사람이 되고자 동굴에 들어가 마늘과 쑥으로 연명하다가…’하는 단군신화를 빗댄 비유적 표현이었을까? 그런데 곰은 웅녀가 됐지만, 호랑이는 정해진 시간을 참지 못하고 뛰쳐나와 실패하지 않았던가. “다 큰 수컷 호랑이”라는 말을 ‘성인(成人) 수컷 호랑이’라고 표현한 것으로 이해하자. ‘이룰’ 성(成)과 ‘사람’ 인(人)의 두 글자의 합체다. 우선 이 점을 지적한다. 왜 ‘다 큰 수컷 호랑이’라고 쓰지 않았을까? 한자어 대신 우리말로 좀 풀어썼다고 무슨 흠이 되랴. 지적 사항 또 하나, 성인이 사람(만)을 지칭하는 단어인지 몰랐을까? 생물 책은 ‘다 큰 동물’을 이르는 말로 성체(成體)라는 단어를 쓴다. ‘다 큰 사람’을 成人이라 함과 같다. 그 기사의 ‘성인 수컷 호랑이’는 ‘성체 수컷 호랑이’로 고쳐야 제 뜻이 된다.   성인을 ‘어른’이라 하는 것과 같은, 다 큰 동물을 가리키는 일반적인 토박이말이 없다는 점은 먼저 언급해야 한다. 또 영어단어 adult[애덜트]는 사람[성인] 짐승[성체] 곤충[성충(成蟲)]등을 다 가리킨다. 비교언어학적인 접근은 또 다른 통찰력을 줄 수 있으리라.   초등학생 같은 아이들은 ‘성체’ 대신 ‘성인’이라고 흔히 쓴다. 말의 선택에 어려움을 겪는 것이다. (성인들의) 인터넷 글쓰기에서도 어렵지 않게 그런 고충을 볼 수 있다. 또 신문과 방송의 글에서도 상당한 수의 ‘성인 호랑이’ 표기를 더 발견할 수 있었다. 그런데, 그래서 ‘성인 호랑이’ 방송기사가 양해가 될까? 그 많은 시청자들에게?   비행기로 물건을 옮긴다는 공수(空輸)를 ‘산지(재배지)에서 바로 식당과 같은 소비처(消費處)로 실어온다’는 직송(直送)과 혼동해 쓰는 경우도 흡사하다. “건너 텃밭에서 수확한 배추를 부엌으로 바로 공수해오니 싱싱하다.”는 식이다. 이 방송사 뉴스도 예외가 아니다.   최근 유행인 ‘자처하다’도 그렇다. 일부 기자들, 이 덜 떨어진 말을 자주 쓴다. 이 방송사 도 ‘역시나’다. 독자 시청자 등 ‘고객’들은 그 말을 그렇게 쓰는 것이 옳다고 생각하고, 기억할 것이다. 잘못된 말의 전파, 즉 언어 와전(訛傳)의 채널 중 하나겠다.   “생계고민으로 교도소 행을 자처한 범행이 있었다.” “영국 윌리엄 왕자가 자선기금 홍보를 위해 하룻밤 노숙을 자처했다.” “지친 사람들에게 웃음을 주겠다고 개그 프로 출연을 자처한 목사님이 있다.”의 ‘자처’를 말함이다. 이 자처는 다 ‘자청’으로 고쳐야 맞다.   자청은 스스로(自) 어떤 일을 하겠다고 바라는(請) 것, 자처는 (어떤 목적을 위해) 스스로 어떠한(다른) 사람인 체 한다(處)는 뜻이다. (원래 그 신분이 아니지만) 범죄자 노숙자 개그맨을 자처할 수는 있으되, 자청할 수는 없다. 또 ‘자처’에는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는 자결(自決)의 뜻도 있으니 주의할 것. 말에는 각각의 쓰임새가 있다. 사전의 ‘용례’가 그것이다.   방송이 이렇듯 잘못된 말을 퍼뜨리고 있는 사실, 시민들은 엄중하게 지켜본다.      
22    모국어보다 영어 더 잘하는게 좋은 일인가요? 댓글:  조회:3747  추천:1  2015-05-03
모국어보다 영어 더 잘하는게 좋은 일인가요? 강상헌 외국어 ‘오픈’이 삼킨 우리말   ‘계란으로 바위치기’라는 말이 있다. 젠체하는 이들은 이란격석(以卵擊石)이라는, 흔치도 않은 숙어도 들먹인다. 한강에 돌 던지기, 벌겋게 단 화로에 눈[雪] 한 송이[홍로점설(紅爐點雪)], 한잔 물로 수레 가득 땔나무의 불끄기[배수거신(盃水車薪)] 등도 비슷한 뜻이다.   ‘도저히 감당 못할 일’이다. 계란으로 바위를 친들, 요즘 말 ‘진격(進擊)’의 용사라도,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그러나 그 말 속에는 ‘그렇다한들 그대로 두고 볼 수만은 없다’는 의지가 담긴 경우 드물지 않다. 굽힐 수 없는 명분, 불굴의 그 투지는, 그 자체로 보람일 수 있다.   ‘문자’ 늘어놓고 잘난 체 하는 모양새, 그다지 곱지 않다. 보는 이들도 같은 느낌일 터다. 그럼 이 영어 ‘문자’의 느낌은 어떠한가? ‘오픈’을 도마에 올린다.   이 낱말 볼 때마다 ‘계란으로 바위치기’를 생각한다. 불붙은 땔나무 수레의 절망감과 눈 한 송이의 희망, 그래도 한강에 돌은 던져야 한다. 하늘 향한 삿대질은 비겁하다. 우리말보다 훨씬 더 많이 쓰이는 ‘가장 강력한 외국어’다. 이런 말씀하실 줄 안다. 이렇게 대답하리라.   “이 보오. 무슨 뜻인지 모르는 바는 아니외다. 허나 글로벌 시대에 이미 우리 말 다 된 그 말 가지고 시비해서 무슨 효용이 있으리오? 너그러운 금도(襟度)를 보여 옹졸한 글쟁이라는 욕 듣지 않도록 자중자애(自重自愛)하시지요.”   -사려 깊은 고언(苦言), 감사합니다. 그러나 저는 이 단어가 피아노나 컴퓨터 같은 외래어(外來語)와는 다르다는 점을 지적합니다. 오픈은 한갓 외국어(外國語)일 뿐이지요. 바꿔 쓸 적확(的確)한 우리말이 있느냐 없느냐를 기준으로 생각합니다.   홈페이지를 ‘누리집’으로 바꿔 부르자고 하는 국립국어원의 ‘홈페이지’. 세금으로 움직이는 이 국가기구도 ‘오픈’의 괴력(怪力)에는 하릴없다. 우리말은 우리의 혼을 담는 그릇이다.   “현실적으로, 외국어나 외래어를 선호하는 것은 어느 정도 이해해야 하는 것 아니오? 애써 배운 외국말 섞어 쓰고 싶은 현학(衒學)의 취향은 누구에게나 있는 것일 테고, 선생도 예외일 수는 없지 않나요?”   -‘진단’이 틀렸다고 봅니다. 그래서 핵심을 놓치고 있는 것이지요. ‘오픈’이 말아먹는 이 상황은 외국어 선호나 유식한 체 하려는 속성 때문만은 아닙니다. 그보다 시민 중 상당수가 우리말보다 영어를 더 잘 알기 때문이라고 저는 짐작합니다. 즉, 영어는 잘 아는데 비해 정작 어머니말(마더텅 mother tongue)은 (그만큼) 잘 알지 못 하기 때문이라는 것이지요.   오픈(open). 열린 펼쳐진 개방된 노천(露天)의 영업중인 공개된 솔직한 미정(未定)인 따위의 형용사로, 열다 눈뜨다 입벌리다 펴다 개방(開放)하다 개통(開通)하다 개업하다 개막하다 개관(開館)하다 시작하다 따위의 동사로, 옥외(屋外) 야외(野外) 노출(露出) 따위의 명사로 참 다양하게 쓰인다. 맥가이버 칼 같은 쓸모 많은 말이다.   비슷하되, 용도와 상황에 따라 다소간의 차이를 품는 ‘오픈’의 이런 여러 쓸모들을 섬세하게 구분하는 우리말을 골라 쓰는 것이 어려워진 까닭이다. 그래서일 것이다. 두루뭉술, 전문가들까지도 대충 ‘오픈’으로 통일, 이젠 그 맞잡이 우리말을 떠올리기도 어려워졌다. ‘오픈’의 바다에 침몰한 것이다. 용불용설(用不用說), 안 쓰면 더 쪼그라든다. 뭐든지, 말도.   우리의 말무더기가 초라해진다. 오래 지녀온 걱정이다. 다양한 어감(語感)의 묘미를 요즘 말글의 어휘에서 보기 어렵다. 가령 박경리 ‘토지’나 최명희 ‘혼불’의 웅혼(雄渾)한 이야기 떠받치는 어휘의 씨줄날줄 기기묘묘 얽히고설킴은 이미 딴 세상이다. 패스트푸드나 라면으로 배고픔은 덜 수 있다. 그러나, 생각은 언어로 한다. 햄버거 말글로 ‘창조’는 못 짠다.                   고래심줄 세금으로 나라말 지키는 국립국어원 홈피마저 ‘오픈’ 타령이다. ‘내용은 한국어 교육 사이트(10월 오픈 예정)에서 제공…’ 등 많은 오픈들이 거기에 또아리를 틀고 있다. 오픈은 더 힘세다. 우리말 모르는 것 부끄럽다 여기지 않아 생긴 서글픈 부등식(不等式)이다. 하릴없이 계란이라도 던져야 하는 이유다. 그 계란던지기모임은 언제 오픈하느냐고요?   ‘시작’ ‘개막’ ‘열린’ 등 많은 뜻의 말 다 잠재워버린 오픈과 같은 경우를 찾아보자. ‘레버리지 효과를 기대하는 중국펀드가 많다’는 증권사 직원의 말에 ‘레버리지 효과’가 뭐냐 라디오 진행자가 물었다. “아, 그러니까, 그게, 레버리지처럼 작은 투자로 큰 이득을 획득하기 위한 ...” 레버리지가 leverage인줄은 알지만 ‘지렛대’임을 (잘) 알지 못하는, 우리말보다 영어를 더 잘 하는 일부 인구(人口)의 특성으로 본다. 영어 낱말 액센트 위치에 따라 달라지는 발음과 의미의 차이까지 빠삭한 그들에게 우리말글의 무게는 얼마나 될까?  
21    “잊혀진 계절”은 맞지 않는 말일까? 댓글:  조회:4189  추천:0  2015-04-02
  “잊혀진 계절”은 맞지 않는 말일까?         “길 가던 버스가 갑자기 폭발하다니, 믿겨지지가 않아.” “그러게 말이야. 이 사건은 오랫동안 잊혀지지 않을거야.” 최근 서울 행당동에서 일어난 버스폭발 사건에 대해서 두 여성이 나누는 대화가 이랬다. 두 사람 모두 잘못된 말을 쓰고 있었다. 그런데 너무 아무렇지도 않게 많은 사람들이 쓰고 있어서 어디가 잘못됐는지 단번에 알아채기도 쉽지 않다. 두 여성은 모두 ‘이중피동’을 쓰고 있다. 이중 피동은 피동형 동사에 ‘-어지다’ 형태의 피동표현을 한 번 더 쓰면서 중복된 피동표현을 하는 것을 말한다. 잘못된 우리말 쓰기의 전형 가운데 하나다. 피동은 주어가 직접 움직이는 능동에 대립되는 것이다. 주어가 남의 움직임에 의해 동작을 하게 되는 문법현상이다. ‘믿겨지지 않다’는 ‘믿다’의 피동사인 ‘믿기다’와 피동을 나타내는 ‘-어지다’가 결합된 이중피동 형태가 부정형과 결합했다. ‘잊혀지지 않는다’는 ‘잊히다’에 ‘-어지다’가 합쳐진 꼴에 역시 부정형과 결합했다. 두 문장을 바르게 표현하면 “믿기지 않아”, “잊히지 않을 거야”라고 해야 한다. 특히 ‘잊혀지다’는 바른 표현인 ‘잊히다’ 보다 훨씬 자주 쓰였던 표현이다. 가수 이용을 비롯해 여러 사람이 ‘잊혀진 계절’이라는 노래제목으로 노래했다. 바른 노래제목을 달자면? ‘잊힌 계절’이라 해야 할 것이다. 국립국어원 김형배 학예연구관은 “한글창제 이후 중세시대에는 국어에서 피동표현이 거의 사용되지 않았는데 영어의 영향을 받으면서 현대에는 피동표현이 자리를 잡아가고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아직까지는 능동으로 표현하는 것이 익숙하고 자연스럽다는 설명이다. 예를들어 ‘화살이 살에 박히고’라는 피동 표현이 옛 문헌에는 ‘화살이 살에 박고’라고 기록돼 있을 정도다. 흔히 “미용실에서 머리 깎고 왔다”라는 표현을 많이 쓰는데 원칙적으로는 피동표현을 쓰는 것이 맞다. 자기 머리는 스스로 깎는 것이 아니라 깎이는 것이기 때문. 능동표현이 익숙해졌기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으로 지금 우리말은 이대로 굳어졌다. 이중피동은 말이 쓸데없이 길어지고 깔끔하지 못하다. 김형배 연구관은 “피동표현은 국어가 발달하면서 점점 익숙해져가고 있으나 이중피동은 분명히 잘못된 우리 말 글 쓰기”라고 지적했다. 박양명 기자            또 다른 견해     국어 선생님들이 시험 문제를 낼 때의 특징 중 하나는 어법에는 맞지만 일상적으로 잘 쓰지 않는 표현을 내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한 예로 이용 씨의 노래 ‘잊혀진 계절’이나 그룹 동물원의 팬들이 가장 좋아하는 노래 ‘잊혀지는 것’을 들 수 있다. 이 노래 제목에 무슨 바르지 않거나 곱지 않은 말이 있을 것이냐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일 것이다. 그런데 그분들에 의하면 ‘잊혀지다’라는 말은 어법에 맞지 않는 말이라고 한다. 그 이유는 이 말에는 ‘잊다’에 피동의 의미를 만드는 ‘-히-’와 ‘-어지다’가 동시에 사용된 것이기 때문에 이중 피동이 된다는 것이다. 이중 피동은 사람들이 무의식적으로 쓰지만, 어법을 따지지 않더라도 고쳐서 쓰는 것이 훨씬 자연스럽다. 예를 들면 ‘범인으로 생각되어지는 인물’과 같은 표현은 ‘범인으로 생각되는 인물’로 바꾸는 것이 더 자연스럽다. 그렇지만 이 경우에서 어법에 맞게 ‘잊힌 계절’ ‘잊어진 계절’이라고 하면 매우 어색해진다. 대부분의 문학 전공자들은 이런 어색한 표현이 옳다고 이야기하는 것이 국어 교사가 할 일은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이런 말들은 출제에서 제외를 한다. 그리고 사람들이 ‘잊혀지다’에서 사용되는 ‘-어지다’를 피동을 나타내는 것으로 인식하기보다는 ‘이루어지다’ ‘없어지다’ ‘깨끗해지다’에서 보이는 것과 같이 ‘어떤 결과에 이름’의 의미로 인식을 하는데, 이럴 경우 어법에 맞지 않다고 하기도 어렵다. 현재의 어법에 맞지 않고, 사전에 등재되어 있지 않다고 해서 완전히 틀렸다고 보기는 어렵다.   이런 말들 중에 시험에 가장 많이 나오고, 신문의 칼럼들에서 지적하는 말 중 하나가 바로 ‘바라다’를 잘못 활용한 사례인 ‘바래’와 ‘바램’이다. 이 예들은 ‘바라+아’가 결합된 것을 잘못 말한 것이라는 지적을 워낙 많이 받다 보니 텔레비전을 보면 사람들끼리는 자연스럽게 “잘하길 바래”라고 말하는데, 자막은 매우 어색하게 ‘잘하길 바라’로 나온다. 그렇지만 이 경우도 사람들이 ‘바래’를 쓰는 것이 아주 근거 없는 것은 아니다. 만약 어법이 만고불변의 진리라면 ‘사랑하다’의 경우 ‘사랑하+아’가 되어 ‘널 사랑하’라고 고백을 해야 한다. 그렇지만 ‘하다’가 붙는 모든 말들은 ‘여 불규칙 활용’이라고 하여 어미 ‘아/어’가 ‘여’로 바뀌고 ‘하여’가 줄어서 ‘해’가 된다. 이것은 어떻게 보면 어간의 형태 그대로 두었을 때 발생하는 어색함을 방지하기 위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만나다’의 경우는 어간이 문장의 종결어미로도 사용되는 ‘나’로 끝나기 때문에 ‘내일 만나’와 같은 표현이 어색하지 않지만, ‘바라다’ ‘삼가다’와 같은 경우는 ‘바라’ ‘삼가’라고 하면 어색하다. 그래서 사람들은 ‘여 불규칙 활용’과 같은 원리를 적용해 ‘바래’ ‘삼가해’와 같은 표현을 쓰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리고 “3시까지 오기 바람”과 같은 예에서 ‘바라다’의 명사형을 ‘바램’으로 쓰는 사람들은 거의 없다. 그렇지만 희망을 뜻하는 명사 ‘바람’이 될 때는 ‘바램’을 더 많이 쓰는 것을 볼 수 있다. 그 이유는 이미 강력하게 자리를 잡고 있는 ‘바람’(風)이라는 말과의 충돌을 피하기 위해서라고 할 수 있다. ‘주검’이라는 말이 동사 ‘죽다’에서 온 말은 맞지만 명사가 되면서 ‘죽음’이라는 말과의 의미 충돌을 피하기 위해서 다른 형태로 사용하는 것과 원리가 상통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사람들이 그 나름의 타당한 근거를 가지고 자연스럽게 사용하는 말은 억지로 고치라고 하기보다는 빠른 심의를 통해 인정을 해 주는 것이 중요하다. 민송기                 부록 잊혀진 계절   지금도 기억하고 있어요. 시월의 마지막 밤을. 뜻모를 이야기만 남긴 채 우리는 헤어졌지요. 그날의 쓸쓸했던 표정이 그대의 진실인가요. 한마디 변명도 못하고 잊혀져야 하는 건가요. 언제나 돌아오는 계절은 나에게 꿈을 주지만. 이룰 수 없는 꿈은 슬퍼요. 나를 울려요...   그날의 쓸쓸했던 표정이 그대의 진실인가요. 한마디 변명도 못하고 잊혀져야 하는 건가요. 언제나 돌아오는 계절은 나에게 꿈을 주지만. 이룰 수 없는 꿈은 슬퍼요. 나를 울려요...      
20    소월의 진달래꽃은 지금도 피고 있을까 댓글:  조회:3988  추천:1  2015-04-02
소월의 진달래꽃은 지금도 피고 있을까   김병훈   김소월(1902~1934)의 시는 현대 서정시의 처음과 끝이다. 그의  서정시를 능가하는 시를 본적이 없고 그의 시어와 운율은 근 1세기가 지난 지금도 깊은 울림을 준다. 애잔하면서도 전통적인 정조와 입에 감기는 운율까지, 실로 그는 천재였다.   소월의 시를 읊조리면 어느새 눈물이 나고 가슴이 박차오르며 때로는 신이 난다. 시에 문외한인 사람이 보아도, 전문 평론가가 보아도 소월의 시는 명쾌하고 마치 마음속에 흐르는 노래처럼 리듬을 타고 일렁인다. 보는 관점마다 다 다르겠지만 소월의 시만큼 우리말을 아름답고 우아하게 구사한 문학작품은 또 없을 것이다. 그의 시는 한마디로 한 개인의 상상력과 지식으로 만들어낸 것이 아니라 수천 년간 수많은 사람들의 머리와 입으로 전승되며 다듬어진 민요같다. 그런 시를 혼자 썼다고는 도저히 믿을 수가 없다.   고작 32년을 살다 간 요절 시인은 백여 수의 시를 남겼는데 하나같이 가슴과 머리와 입에 와 닿는 명시다. 《진달래꽃》은 소월의 대표작으로 한국적 미학과 서정성의 극치를 단순명쾌한 시어로 표현하고 있어서 굳이 외우려 하지 않아도 몇번 읽다 보면 마음의 앙금으로 남아 자연스럽게 발성이 되어 나온다. 그 《진달래꽃》의 무대가 영변의 약산이다. 시 속에도 “영변에 약산 진달래꽃 아름 따다 가실 길에 뿌리 오리다”로 등장한다.   영변은 평안북도 내륙지방으로 묘항산에서 그리 멀지 않다. 원래 소월의 고향은 영변 옆의 구성인데 예로부터 이 지역에서는 약산의 진달래가 유명했나 보다. 약산은 영변읍 바로 옆에 솟아 있으며 산 아래로는 청천강의 지류인 구룡강이 안동 하회마을처럼 거대한 물돌이 지형을 만들며 감아 돌고 있다. 산의 동북쪽 분지에 영변읍이 자리한다. 겨우 488메터의 높이지만 강변 저지대에서 곧추 솟아서 상당한 고도감을 준다.   문제는 약산의 서쪽과 남쪽에 그 유명한 영변 핵시설이 있다는 것이다. 국내는 물론 세계적으로 파문을 일으킨 “북핵문제”의 진원지가 바로 여기다. 이제 약산에는 더 이상 진달래가 피지 않을 것이고 산 곳곳에는 핵시설을 보호하는 군사시설만이 가득할 것이다.   그래도 언젠가는 약산을 오르는 산길과 구룡강 강변에는 다시 진달래가 피여나고 그 사이로 난 꽃길은 최고의 자전거 코스가 될 것이라 믿어본다.                 부록   진달래꽃                              김소월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말없이 고이 보내 드리오리다.            영변에 약산          진달래꽃          아름 따다 가실 길에 뿌리오리다.            가시는 걸음 걸음          놓인 그 꽃을          사뿐히 즈려 밟고 가시옵소서.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죽어도 아니 눈물 흘리오리다.     김소월(金素月)의 본명은 정식(廷湜)입니다. 그는 1902년 8월 6일에 평북 구성군에 출생하고, 그의 아버지 김성도는 1904년 처가에 가던 중 철도 공사를 하던 일본 목도들에게 폭행을 당하여 정신이상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김소월은 광산 사업을 하는 조부에 의하여 자라났습니다. 남산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오산학교(1915년-1919년)에서 민족의 스승인 조만식 선생을 만나고, 평생 문학 스승인 김억 선생을 만났습니다. 1916년 오산학교 시절에 고향인 구성군 평지면의 홍단실과 결혼하였습니다. 3.1운동 후 오산학교가 문을 닫자 배재고등보통학교 5학년에 편입하여 졸업했습니다. 1923년에 도쿄상업대학에 입학했으나 동년 9월 관동대지진 후 중퇴하고 귀국했습니다. 김소월은 고향에서 조부님의 광산 사업을 도우며 일했으나 실패하고, 구성군 남시에서 동아일보 지국을 개설했으나 역시 실패하여 극도로 빈곤하게 되어, 정신적으로 충격을 받아 술로 세월을 보내고 친지들로 부터 멸시와 천대를 받았습니다. 1922년에 우리나라의 서정시의 기념비적 작품인 "진달래꽃"을 지에 발표하고, 그리고 "예전엔 미쳐 몰랐어요" "산유화"를 발표했습니다. 김소월의 유일한 시집 을 1925년에 출판했습니다. 김소월은 향토적 소재와 설화적 내용을 민요적 기법으로 노래했습니다. 그의 유일한 단편소설은 입니다. 김소월은 초기에는 여성적인 서정시를 썼으나, 말년에는 남성적인 참여적인 글을 썼다고 합니다. "진달래꽃" "산유화" "금잔디" "엄마야 누나야" "예전엔 미쳐 몰랐어요" 등은 한국 사람들이 가장 애송하는 시들입니다. 불행하게도 1934년 12월 24일에 곽산에서 아편을 먹고 음독자살했다고 합니다. 1981년에 금관 문화훈장을 추서하고, 남산에 그의 시비가 서 있습니다. 5~6년의 짧은 문단생활이지만 154편의 시와 시론을 남기었습니다.      
19    내 아내만은 깨끗하여라 댓글:  조회:4493  추천:0  2015-03-14
내 아내만은 깨끗하여라     요즘와서 남자들이 바람피우고 외도하는 일은 흔히 볼 수 있는 보통일로 됐다. 도시 남자들중 열에 아홉이 바람을 피운적이 있다고 하는데 이는 물론 과장된 통계인지는 모르겠지만 요즘 남자들의 바람이 얼마나 극성스러운가를 알수 있다. 그런데 남자들이 바람을 피우자면 상대가 있어야 할것이 아닌가? 그래서 그런지 바람피우는 여자, 외도하는 여자…아무나 함부로 할 수 있는 놀음이 아닌데 요즘 이런 사례들을 심심찮게 본다. 주위에서 바람난 여자들에 대한 소문도 귀에 많이 들리지만 내 눈으로 직접 본 사례도 적지 않다. 내 친척들의 아내, 내 동료들의 아내, 내 친구들의 아내…이런 아내들 중에는 남편들이 모르게 슬그머니 외도하는 유부녀들도 있고 놀랍게도 남편이 알고 있는데도 공공연히 외도하는 유부녀들도 있다. 이런 바람난 여자들중에는 남편이 외지에서 출근하거나 남편이 출국하고 혼자 사는 (아이가 있거나 없거나) 여자들이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남편과 함께 가정생활을 하는 여자들도 적지 않은 비중을 차지한다. 남자들이 바람피우는 이유는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결혼한지 오래된 남자들이 바람피우는데는 한가지 공동한 이유가 있다. 결혼하여 여러해가 지나면 아내에게 익숙하기때문에 성적인 감흥을 느끼지 못하게 된다. 이런 상황에서 자신을 남자로 인정해주는 여자를 찾게 된다. 그러면 여자들이 바람피우는 이유는 무엇일가? 그것은 놀랍게도 여자는 한 남자로는 부족하다고 한다. 이것이 여자가 외도하는 이유와 정당성이란다. 그리고 진정한 자기 자신을 찾아가는 모습이란다. 여자들은 주어진 환경이나 위치 또는 사고의 틀에 따라서 이유는 다들 다를수 있지만 공통된 주제를 가지고 론했을 때 털어놓는 사연은 거의 비슷하다고 한다. 즉 일상의 탈출을 꿈꾸는건 부족한것을 채우기 위해서가 아닌 만족을 느끼려는 욕망이 지배적이란다. 안에서 받는 고통이나 우울감에서 탈피하려는 방법으로 외도를 택하는데 배우자가 아닌 다른 이성에게서 또 다른 대리만족을 얻고자 한다고 한다. 우리 속담에도 《몰래 훔쳐먹는 떡이 더 맛있다》고 했는데  그래서 맥이 통한걸까? 바람난 여자들에 대한 정확한 통계는 알수 없지만 내 아내만은 이 부류에 속하지 않는것이 다행이다. 내 아내는 오직 가정만을 지키는 정숙한 여자이다. 나는 아내에게 물어본적이 있다. 당신은 외도를 꿈꾸어 본적이 없어? 아내의 대답은 이랬다. 가끔씩 나도 외도를 꿈꾸어 본적이 있어요. 현실 탈피의 핑게가 아닌 막연한 동경일지는 몰라도 한번쯤 어떨까…그러나 목에 걸리는게 있고 발목을 잡는게 많아요. 도덕이 시퍼렇게 살아 있고 윤리가 아직 땅속에 매장되지 않았어요. 더 중요한건 이것을 무장해제 시킬 용기가 없어요. 하지만 남자들은 내 아내와 같은 여자가 적기를 바란다. 내 친구녀석은 “내 아내를 내 놓고는 이 세상 여자들이 모두 바람이 났으면 좋겠어.”하는 말을 늘 입에 달고있었다. 그런데 그의 아내도 끝내 바람이 났다. 그는 나를 보고 “네 아내도 마찬가지야. 믿는 도끼에 발등 찍힌다고 어디 두고봐라.”했고 얼마후에는 내 아내가 어떤 남자와 단둘이 함께 다방에서 맥주마시는 현장을 발견하고 나를 불러냈다. 나는 놀랐지만 아내를 믿고싶었다. 천하의 여자들이 모두 바람이 났다하더라도 내 아내만은 깨끗하기를 바라는것이 이 세상 모든 남편들의 공동한 념원이 아닌가.    
18    김장이 김치인가 댓글:  조회:3363  추천:0  2015-03-01
김장이 김치인가 -김장과 김치의 어원   강상헌 언론인 · (사) 우리글진흥원 원장       김장, 대한민국의 김치 만들기와 나누기’(Kimjang, Making and Sharing Kimchi in the Republic of Korea)가 최근 유네스코의 인류무형문화유산으로 등재됐다. 이미 보도된 내용을 새삼스럽게 영어 제목까지 표시하며 언급하는 데는 이유가 있다.   우리 당국이 규정에 따라 유네스코에 신청하고, 유네스코는 이를 검토하여 결정했을 사안이다. 허랑하게 했을 리가 없다. 그런데 제목을 보면 ‘김장=김치’가 아니다. 관련 있는 말이기는 하지만, 엄연히 김장과 김치는 다른 단어다. ‘김치’를 담구고 이를 나누는 공동체적 미덕의 전 과정이 ‘김장’이다. 맞다, 우리가 먹는 것은 김치다, 김장을 먹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 언론을 포함한 여러 형태의 글쓰기나 말하기에서 김장과 김치를 같은 것으로 쓰는 경우를 본다. 심지어는 국립국어원의 국어사전도 그렇다. 그 사전은 김장과 김치가 같은 것이라고, 이렇게 풀었다. 다른 사전들도 베낀 듯 거의 같다.     그렇다면 김장은 김치를 만드는 것이면서 동시에 김치다. 그런데 그렇게 아퀴 짓기에는 석연치 않은 구석이 있다. 한국인은 매일 김장을 먹는다고? 어색하다. 또 ‘아닐 것’이라는 얘기를 자주 듣는다. 형식의 측면으로도, 내용적으로도 논리적이지 않은 점이 또한 지적돼야 한다. 김치를 담그는 것이 김장인데, 김장을 담그는 것도 김장이 되는 셈이다.   물론 시민들 중 일부가 그렇게 알았을 수 있고, 또 쓸수도 있다. 그런데 ‘김장=김치’의 등식(等式)을 확정하는 과정에서 어색하거나, 비논리적이거나, 그렇지 않을 것이라는 그런 (가능한) 지적들에 관해 한번이라도 논의가 있었을까?   그 사전 귀퉁이를 살피니 ‘김치’의 어원이 침채(沈菜)라 했다. 즉 (물에) 담근 푸성귀(채소)란다. 또 각 지역의 김치를 이르는 향토(鄕土) 말 중에는 가장 일반적인 것으로 ‘짐치’가 있다. 침채의 변형 또는 토속적 변용(變容)이라고 푼다. 또 그 침(沈) 글자에다 ‘이러 저러한 성질을 가진 것’이란 뜻의 우리말 ‘치’를 붙인 ‘침치’의 변형일 거라는 견해도 있다.   그 사전, ‘김장’의 비슷한 말로 진장(陳藏) 침장(沈藏)을 들었다. 또한 어원(語源)으로 침장을 제시했다. 뜻으로 읽으면 진장은 ‘편 것을 저장함’이고, 침장은 ‘담궈 저장함’이란 뜻이다. 고개 끄덕여진다. 다른 자료들에는 ‘팀장’ ‘딤장’을 거쳐 김장이 됐다는 풀이도 있다.   김장과 김치는 한국말이다. 낱말 곁에 한자 표기가 따로 없으니 한자어가 아니라는 얘기다. 그러나 어원까지 살핀 마당에 두 말이 같다고 할 사람이 어디 있을까 싶다. 김장의 ‘장’은 냉장고(冷藏庫)의 장과 같은 말이거나 최소한 관련이 있는 말은 아닐까?   대부분은 그렇게 생각한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김장과 김치는 같은 것이라고 여긴다. 사전에도 그리 돼 있지 않은가? 이해관계(利害關係) 따위로 다툼이 생길 소지가 적은 단어이기 때문에 대부분 무신경하게 지나친다. 이번 인류무형문화유산 등재가 이 단어들의 뜻(의 차이)에 관해 다시 생각하는 계기가 된 것이다.   일부 언론은 ‘왜 김치가 아니고 김장이 등재됐지?’하는 궁금증을 표시하는 글을 싣기도 했다. 그 답은 ‘유네스코가 상업화(商業化)를 우려해 개별 음식을 그 대상으로 삼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이었지만, 시민들의 상당수는 ‘김장과 김치가 다르구나’하는 사실을 (무의식중에 라도) 한 번 더 느낀 기회가 됐겠다.   ‘짜장면과 자장면’ 논란을 명쾌하게 풀어낸 일로 너무 유명한 국립국어원, 이번에 불거진 ‘김장=김치?’ 상황은 어떻게 풀어낼까? 그 국가기관은, 시민들에게는, 말글의 재판소다. 거기서 만드는 사전은 국가대표 국어사전이다.   토/막/새/김     김치의 다른 어원들을 보자. 한 사전(네이버의 두산백과)은 침채 말고도 김치의 어원을 ‘함채(鹹菜)’가 ‘감채’ ‘김채’ ‘김치’로 변화한 것이라는 설(說)도 제시했다. 함(鹹)은 소금기를 말한다. 또 침채는 ‘팀채’ ‘딤채’ ‘짐채’ ‘김채’로 변화되어 김치가 되었다는 것이다. 한 회사의 김치 전용냉장고 이름이 떠오른다. 순수한 우리말인 ‘디히’가 ‘지히’를 거쳐 ‘지’로 변한 채소 발효식품 이름을 주목하기도 한다. 이 이름은 오이지 짠지 섞박지와 같은 이름으로 오늘날의 요리에 전해진다. 말(언어)는 마치 살아서 움직이는 듯하다.      
17    개불알꽃을 아시나요? 댓글:  조회:6149  추천:2  2015-03-01
개불알꽃을 아시나요?     개불알꽃은 요강꽃, 작란화, 복주머니란이라고도 하는데요, 학명은 Cypripedium macranthum이고 중국어로 大花杓兰(속명은 大口袋花)이라고 하지요.   개불알꽃은 중국의 흑룡강성, 길림성, 료녕성, 내몽골자치구, 하북성, 산동성, 대만 그리고 일본, 한국, 조선, 로씨야의 사할린섬, 시베리아 등지에 분포되여있답니다.   개불알꽃은 외떡잎식물 란초목 란초과의 여러해살이풀이고 산기슭의 풀밭에서 자라며 높이 25~40센치메터입니다. 짧은 뿌리줄기를 옆으로 뻗고 마디에서 뿌리를 내리며 털이 납니다. 줄기는 곧게 서고 잎은 3~5개가 어긋나고 타원형이며 길이 8~20센치메터, 나비 5~8센치메터입니다.     5~7월에 길이 4~6센치메터의 자홍색 꽃이 줄기끝에 1개씩 핍니다. 포는 잎모양이며 길이 7∼10센치메터입니다. 꽃잎가운데 2개는 달걀모양의 바소꼴이고 끝이 뾰족하며 밑쪽에 약간의 털이 납니다. 입술꽃잎은 길이 3.5~5센치메터로 큰주머니 모양입니다. 열매는 삭과이며 7~8월에 익습니다.   개불알꽃은 해발 500~600메터의 깊은 산속에 자라는 여러해살이식물로서 늦봄에서 초여름으로 접어드는 5월에 커다란 진한 분홍색의 꽃이 핍니다. 분홍색이외에 흰색 또는 노란색도 있으나 극히 드뭅니다.     커다란 둥근 꽃이 아래로 늘어진 모양새가 개의 불알을 닮았다 하여 “개불알꽃”이라는 이름을 얻었는데  한편 요강을 닮았다고 “요강꽃”이라고도 부른답니다. 일부 식물학자들은 이름이 너무 야하고 교육적이지 못하다고 하여 “복주머니란”이라는 예쁜 이름을 새로 지어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우로 40~50센치메터정도 뻗은 줄기에 3~5개의 커다란 주름진 잎이 줄기를 감싸고있고 줄기끝에 달걀만한 커다란 자홍색꽃송이가 달립니다. 일반적으로 야생화는 크기가 작지만 개불알꽃은 극히 드물게 큰 꽃을 피웁니다. 꽃은 3개의 꽃받침과 3개의 꽃잎으로 이루어지는데 꽃받침과 꽃잎의 색갈이 같기도 하고 다르기도 합니다. 그래서 꽃받침과 꽃잎 모두가 꽃으로 인식됩니다. 둥근 공모양으로 아래쪽으로 늘어져 달려있는것을 입술꽃잎이라고 부릅답니다. 다른 2개의 꽃잎은 좌우로 기다랗게 타원형으로 뻗어 균형을 이루고있습니다.     열매에는 수만개의 씨가 들어있고 익으면 스스로 터져서 씨가 퍼져나가는 삭과(蒴果)입니다. 자연상태로 뿌려진 씨는 거의 발아하지 못하고 뿌리가 번져서 번식하지만 자생지에서 캐다가 다른 지역에 옮겨 심으면 2~3년안에 모두 죽어버립니다. 이러한 사실을 알지 못하는 일부 사람들은 푼돈을 벌기 위해 무단채취를 계속하는데 이때문에 식물자체의 멸종위기를 맞게 된것입니다.   개불알꽃은 또 약재로도 쓰인답니다. 개불알꽃의 뿌리와 뿌리줄기를 오공칠(蜈蚣七)이라고 하는데 쓰고 맵고 따뜻한 성질을 가지고있답니다. 오공칠은 리뇨(利尿)작용을 하고 부종(浮肿)을 없애며 혈액을 잘 순환하게 하고 어혈을 제거하고 풍사를 몰아내고 습사를 없애며 통증을 멎게 하는 효능을 가진 약재로 전신부종, 소변이 잘 안나오는 증세, 대하병(带下病), 풍습으로 허리와 다리가 아픈 증세, 타박상, 리질 등을 치료하는 작용을 한답니다. 꽃 즉 오공칠꽃(蜈蚣七花)은 외상으로 출혈했을 때 사용한답니다.       그럼 이번에는 한국시인 오탁번이 지은 시 《개불알꽃》을 감상해볼까요?     개불알꽃     연못가 누운 소나무 아래   올봄에도 개불알꽃이   두 송이나 피었다   눈썹만한 햇볕에서도 고개 돌리고   솔개그늘 좋아하는   개불알꽃       누운 소나무를   차일로 삼아   들깻빛 반점도 선명하니   발그레한 불알 두 쪽이   암내라도 맡았는가   갸웃갸웃 흔들린다      
16    중국의 노벨문학상 애증사 댓글:  조회:3597  추천:1  2015-02-01
중국의 노벨문학상 애증사   암살된 문일다, 가장 위대한 중국 시인 “88년 노벨 문학상은 사실 선충원의 것                                                     김명호 한국 성공회대 교수     월명성희(月明星稀), 달이 밝으면 주변에 있는 별들은 빛을 잃을 수밖에 없다. 소동파(蘇東坡)의 적벽부(赤壁賦)에 나오는 구절이다.   중국에서 사각지대에 묻혀버린 사건이 많다. 중국의 노벨 문학상에 얽힌 아주 중국적인 사건도 그중 하나다.   남 얘기하기 좋아하기로는 중국인 따라갈 사람들이 없다. 누가 얼마 해먹었고, 누구 부인이 누구와 각별한 사이고 그 남편은 누구와 가깝다는 등 공원이나 찻집, 공중변소에 쭈그리고 앉아 시간 가는 줄 모르기 일쑤다. 앞에서 배 움켜쥐고 서 있는 사람 따위는 아랑곳하지도 않는다. 사실 같은 유언비어, 거짓말 같은 진실이 난무할 수밖에 없다. 골목마다 소재가 다르지만 전국적인 것이 태반이다.   모옌(莫言)이 올해 노벨 문학상 수상자로 결정된 후에도 예외가 아니었다. 새로운 얘깃거리와 함께 예전부터 나돌다 잠복했던 얘기들이 다시 수면 위로 떠올랐다.   2000년 10월, 프랑스 국적의 가오싱젠(高行健)이 노벨 문학상을 받는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대륙 작가들은 입을 삐죽거렸다. “노벨이 중국 작가와 무슨 원수 질 일이 있었길래 중국 본토 작가들이 아직도 노벨 문학상을 못 받는단 말인가.” 가오싱젠은 3년 전까지만 해도 엄연한 중국 국적이었다.   가오싱젠 상 받자 “中 본토와 원수졌나” 1985년, 고란 말름크비스트(Goran Malmqvist)가 노벨 문학상 종신 심사위원에 선정되자 중국 작가들은 “이제야 노벨 문학상으로 통하는 길이 열렸다”며 기대에 부풀었다. 인간관계를 중요시하는 민족이다 보니 그와 편지라도 몇 번 주고받은 작가들은 “5·4 신문학운동 이후 최대의 사건”이라며 흥분했다. 18명의 심사위원 중 중국문화를 이해하고 중국 고전과 현대문학, 쓰촨(四川) 방언에 정통한 사람은 말름크비스트가 유일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스웨덴이 배출한 세계적인 중국학자 요하네스 칼그렌(Johannes Karlgren)의 수제자였고, 부인도 남편 장악력이 뛰어난 쓰촨 여인이었다. 마웨란(馬悅然)이라는 중국 이름도 있었다. 며칠 밤을 뜬눈으로 새워도 피곤한 줄 모를 만한 경사였다.   말름크비스트는 번역가로도 명성을 떨쳤다. 92년 68세가 될 때까지 수호전, 서유기 같은 고전과 모택동 시집[毛澤東詩詞全集]과 원이둬(聞一多)·선충원(沈從文)의 소설 등 700여 종의 중국 책을 직접 번역했다. 스웨덴에 있는 그의 책상에 중국 작가들이 보내온 저술들이 산처럼 쌓이기 시작했다.   90년 가을, 홍콩을 방문한 말름크비스트와 중국 출판인의 대화를 엿들은 적이 있다. 중국인들이 노벨상을 얼마나 중요시하는지 실감이 났다. 처음부터 끝까지 노벨 문학상에 관한 얘기였다. 루쉰(魯迅), 선충원, 라오서(老舍), 원이둬, 바진(巴金) 등 중국 문학을 대표하는 작가들의 이름이 난무했다. “중국인들은 1936년에 세상을 떠난 루쉰이 노벨 문학상을 거절했다며 자부심을 느낀다. 당시 서구인들은 루쉰이 뭐하는 사람인지 몰랐다. 양셴이(楊憲益)의 주옥 같은 번역은 루쉰 사후에 나왔다.” 양셴이는 홍루몽(紅樓夢)을 영어로 번역한 베이징의 일류 술꾼이었다.   말름크비스트는 신문학운동이 배출한 최고의 작가로 선충원을 꼽았다. “심사위원들은 매주 네 번씩 회의를 연다. 6월부터 8월까지는 회의가 없다. 88년 5월 10일 밤, 대만 여류작가로부터 선충원이 베이징의 허름한 아파트에서 세상을 떠난 걸 아느냐는 전화를 받았다. 스웨덴 주재 중국대사관 문화참사에게 사실 여부를 확인했다. 선충원이 도대체 뭐하는 사람이냐고 내게 되물었다. 조금만 더 살았더라면 그해 가을의 노벨 문학상은 선충원 차례가 됐을지도 모른다.” 88년은 말름크비스트가 선충원 소설 3권의 완역본을 출간한 해였다. 그런 탓인지 몰라도 말조심하는 표정이 역력했다. “너무 토속적인 게 흠이다. 외국인들이 이해하기 힘들다.”   우리 신문에 자주 거론되던 바진의 작품에 관한 얘기도 빼놓지 않았다. “아주 좋은 소설들이다. 미래의 중국 연구자들이 지난 세기 쓰촨인들의 생활상을 알려면 꼭 읽어야 한다. 문학적 가치는 선충원의 것들만 못하다. 비교 대상이 못 된다.”   시인으로는 46년 국민당 특무에게 피살당한 원이둬에게 가장 후한 점수를 줬다. “중국 문학 사상 가장 아름다운 시를 쓴 정말 위대한 시인이었다. 걸출한 학자이기도 했다. 붉은 촛불(시집 紅燭)의 비애는 읽는 사람을 황홀하게 만든다. 노벨 문학상을 받고도 남을 만했다. 비장미 넘치는 시인이었다.” 2007년 10월, 중국을 방문한 말름크비스트는 다시 선충원 얘기를 꺼냈다. “시간이 흘렀으니 얘기하겠다. 88년 10월의 노벨 문학상은 선충원 것이었다. 발표 5개월 전에 세상을 떠난 것이 아직도 애석하다. 작가는 이것저것 따질 필요가 없다. 그냥 쓰고 싶은 걸 쓰면 된다. 체제나 반체제, 이런 건 우리의 관심사항이 아니다. 노벨 문학상은 세계 최고의 문학상이 아니다. 좋다고 생각되는 작가에게 주는 상이다. 중국에는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사람들보다 더 좋은 작가가 많다.”   첸중수 “노벨상, 화약보다 더 큰 해악” 중국인들이 노벨상에 너무 집착한다며 폭발력 강한 발언도 했다. “상금은 내게 줄 테니 명예만 우리에게 달라는 산둥(山東)성의 문화담당 간부도 있었다. 어떤 작가는 자신의 작품을 보낼 때마다 서화(書畵)를 몇 점씩 보내곤 했다. 다 돌려줬다.” 문화담당 간부가 누군지 밝히라는 추궁이 잇따랐지만 이름은 밝히지 않았다. 온갖 소문이 꼬리를 이었다.   모옌이 수상자로 발표되자 문화계가 발칵 뒤집혔다. 모옌은 산둥 사람이었다. 5년 전에 재혼한 말름크비스트의 부인까지 구설수를 탔다. “이번 노벨 문학상 수상자는 이 여자가 결정했다.” 43세 연하인 말름크비스트의 두 번째 부인도 쓰촨 출신의 중국 여인이었다.   온갖 소문에 시달린 말름크비스트는 “다시는 중국인과 상종하지 않겠다”며 돈에 얽힌 얘기도 폭로했다. “미화 60만 달러를 들고 와 자신의 소설을 번역해 달라는 젊은 중국 작가가 있었다. 거절하자 다른 심사위원에게 달려갔다.” 장이이(張一一)라는 작가의 이름까지 공개했다.   노벨상 얘기가 나오면 ‘문화곤륜(文化崑崙)’으로 추앙받던 첸중수(錢鍾書)를 떠올리는 중국인이 많다. 첸중수는 노벨 문학상 후보로 거론되자 “버나드 쇼의 말이 맞다. 노벨이라는 사람은 화약보다도 노벨상을 만들어 인류에 더 큰 해를 끼쳤다”며 불쾌해했다.       
15    8월 15일 서울은 쥐 죽은 듯 조용했다 댓글:  조회:4461  추천:1  2015-01-01
日王의 항복선언 안믿어… 8월 15일 당일 서울은 쥐 죽은 듯 조용했다 전봉관 KAIST 인문사회학과 교수     [1] 1945년 8월 15일 그날 만세 부르며 뛰쳐나와?… 우리가 아는 광복의 기억은 왜곡됐다 항복·패전이란 단어 안나와 첫날은 광복인지 어리둥절… 16일 되어서야 '태극기 만세' 행복의 물결 온나라 뒤덮어   日 전쟁중 철저히 언론통제… 국민, 포츠담선언 뭔지몰라 조선총독은 9월 9일까지 여전히 조선총독으로 행동                                                                                             전봉관 KAIST 인문사회학과 교수   1945년 광복 이후 70년, 대한민국은 격동의 역사를 숨 가쁘게 달려왔다. 좌우 대립과 전쟁, 산업화와 민주화에 이르는 길에서 때로는 고통에 힘겨워하고 스스로 이룬 놀라운 성취에 감격하기도 했다. 지난 역사를 되돌아보는 일은 미래로 가는 길을 모색하기 위한 것이다.   "포항에서 병원을 운영하던 남편은 병원 문을 모두 걸어 잠그고는 조그마한 트랜지스터 라디오를 켜고 방송을 들으라고 했어요. 일왕이 벌벌 떨면서 항복 선언을 하는데, 그 방송을 처음부터 끝까지 들었던 겁니다. 일왕의 방송이 끝나자 이어서 한국말 방송이 나왔어요. '우리는 해방이 되었습니다. 대한민국 만세!' 라디오에서 우렁찬 목소리로 전 국민을 향해 소리쳤어요."   현재 한국인들이 간직한 해방 당일의 이미지는 수필가 전숙희(1919~2010)의 증언과 비슷할 것이다. 하지만 이 증언의 몇몇 대목은 역사적 사실에 어긋난다. 전날 밤부터 당일 아침까지 수차에 걸쳐 일왕 방송 예고가 있었으므로 굳이 문을 걸어 잠그고 방송을 들을 이유가 없었다. 트랜지스터가 발명된 것은 그로부터 2년 후인 1947년이었다. 결정적으로 그날 라디오에서 '해방' '대한민국 만세' 같은 말은 방송되지 않았다.   이처럼 기억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흐릿해지거나 왜곡되고 엇갈리게 마련이다. 독립운동가 박진목은 8·15 당일 "대구 시내가 태극기를 들고 나와서 만세를 부르고 울고불고하는 사람들로 야단"이었다고 회고했다. 하지만 같은 대구 출신 노동운동가 이일재는 "1945년 8월 16일 예정대로 일본 군대에 입대"해서 "이틀 뒤 일본군이 모두 퇴각해 18일에야 집으로 돌아왔다"고 증언했다. 만일 8·15 당일 태극기가 휘날리고 만세 소리가 높았다면, 다음 날 선량한 대구 청년이 일본 군대에 입대하는 역설적인 상황은 벌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역사학자들은 대체로 8·15 당일은 어리둥절한 채로 특별한 사건 없이 지나갔고, 만세 인파가 해방의 환희에 젖어 거리로 본격적으로 쏟아져 나온 것은 이튿날인 16일부터라고 의견을 모은다. 서울 주재 소련 총영사관 부영사의 아내로 8·15 전후 서울에 있었던 파냐 샤브쉬나의 기록도 이를 뒷받침한다.        (왼쪽)8월 15일 도쿄 - 1945년 8월 15일 폐허가 된 일본 도쿄 시내에서 히로히토 일왕의 라디오 방송을 듣는 시민들. (오른쪽)8월 16일 서울 - 1945년 일제의 항복 소식을 듣고 거리로 나와 환호하는 서울 시민들. 8월 16일 서대문형무소 앞에서 촬영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조선일보 DB     "8월 15일의 서울은 마치 쥐 죽은 듯했다. 물론 주민들은 일본의 항복을 알고 있었으나 많은 사람이 믿지 않았다. 그냥 기다렸다. 조심스러운 기쁨과 희망을 가지고. 그런데 그 바로 다음 날 모든 것이 바뀌었다. 거세고 억제할 수 없는 행복의 물결. 그 물결은 말 그대로 시내와 온 나라를 뒤덮었다."   일본의 패전은 15일 정오 조선·일본·대만 등에 방송된 일왕의 육성 방송인 이른바 '옥음방송(玉音放送)'을 통해 알려졌다. 1940년 조선의 라디오 유료 청취자 수는 22만7573명이었다. 여러 사람이 라디오 하나에 모여서 '옥음방송'을 들었다는 점을 고려하면, 단지 청취자가 적어서 해방되었다는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했을 것 같지는 않다.   하지만 전쟁 기간 내내 일제 군부는 철저히 언론을 통제했다. 조선 독립을 명시한 1943년 11월 카이로회담이나 일본에 무조건 항복을 요구한 1945년 7월 포츠담선언은 당연히 보도되지 않았다. 8월 6일 히로시마, 9일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이 투하돼 수십만명이 희생되었을 때조차 미군의 '신형폭탄' 투하로 무구한 양민이 희생되었다는 정도로만 보도됐다.   이러한 언론 통제 탓에 대부분의 일본인과 조선인은 패전 임박을 예상할 수 없었다. 15일 일왕의 '옥음방송'이 항복 선언일 것으로 예상했던 사람도 얼마 되지 않았다. 경성방송국 일본인 직원들조차 천황의 중대 발표가 소련에 대한 선전포고일 것으로 짐작했을 정도였다.   히로히토 일왕의 '옥음 방송' 중 무조건 항복 내용. 4분 37초 동안의 '옥음방송'은 잡음이 심해서 알아듣기 어려웠다. 난해한 한문 투의 문장은 일본인도 한 번 들어서는 이해하기 어려웠다. 천황의 육성 방송 직후 일본인 아나운서가 종전 조서를 다시 한 번 낭독했고, 이덕근 아나운서가 한국어로 번역한 원고를 낭독해 대강의 '개요'는 청취자들이 이해할 수 있었다.   "짐은 제국 정부로 하여금 미·영·중·소 4개국에 그 공동선언을 수락한다는 뜻을 통고토록 하였다."   소위 '무조건 항복 선언'이었다. 하지만 '종전 조서' 어느 곳에도 패전·항복·해방·독립 같은 단어는 없었다. 이 구절이 '무조건 항복 선언'으로 해석되는 것은 천황이 수락하기로 한 포츠담선언이 일본의 무조건 항복을 요구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포츠담선언의 내용은 이튿날인 16일자 신문에야 최초로 게재되었다. 포츠담선언의 내용을 알지 못한 채 종전 조서를 읽고 해석해봐야 전쟁이 끝났다는 것을 짐작하기란 쉽지 않았다.             '옥음방송' 직후 배포된 매일신보에는 천황의 종전 조서와 함께 당시 조선총독 아베 노부유키의 유고(諭告)가 게재됐다. 아베 총독은 소위 '일본과 조선은 한 몸'이라는 '내선일체(內鮮一體)'를 강조하면서 유언비어 유포와 동포 상잔(相殘)을 경계하라고 당부했다. 9월 9일 미군 사령관 하지 중장에게 정식으로 항복할 때까지 아베는 여전히 조선총독이었고, 총독으로 행동했다.   전쟁은 끝났지만 일본이 패망한 것도 같기도 하고 아닌 것도 같고, 조선이 해방된 것도 같고 아닌 것도 같아 어리둥절하기만 했던 날. 그날이 1945년 8월 15일이었다.    
14    중국문학의 변신과 도전 댓글:  조회:4862  추천:0  2014-12-14
중국문학의 변신과 도전 백지운 서울대 통일평화연구원 HK연구교수     중국 정통 문학사에서는 1976년, 즉 문혁 이후의 문학을 ‘신(新)시기 문학’이라부른다. 그런데 최근 1949년부터 70년대까지를 ‘전(前)삼십년 문학’, 개혁·개방 이후 현재까지를 ‘후(後)삼십년 문학’이라 구분하는 경향이 있다. 지난 30여 년간 중국이 겪은 엄청난 변화를 생각하면 이런 구분은 타당하고도 남음이 있다. 79년 덩샤오핑(鄧小平)이 처음 제기한 ‘소강(小康)사회 건설’의 방향이 새 지도자 시진핑에 의해서도 거듭 확인됐다. 중국은 2020년 ‘전면적 소강사회 건설’을 향해 전진 중이다. 그러나 화려한 외양 안에는 오랜 상처와 세파에 단단하게 굳어진맨살이 있다. 지금부터 살펴볼 ‘후삼십년’ 문학은 바로 그 맨살이다.   질풍노도 시대 한마디로 1980년대는 질풍노도의 시대다. 사회주의 시기에 ‘지식인’은 애매한 존재였다. 시대의 주역은 ‘노농병’이었고 그 ‘동반자’였던 지식인은 좀처럼 체제의 신뢰를 받지 못했다. 50년대 반우파 투쟁을 거쳐 문화혁명기에 이르러 지식인의 존재 기반은 극도로 위태로웠다.   마침내 문혁이 종결되고 개혁·개방 직후 반동으로 몰렸던 지식인들이 하나 둘 복권됐다. 농촌과 변방으로 하방당한 ‘지청(知靑:지식청년)’들도 대거 도시로 돌아왔다. 오랜만에 사회의 중심에 선 지식인들은 잃어버린 실존적 근거를 찾아 길을 나선다.   80년대 문학은 ‘상흔문학(傷痕文學)’과 ‘반사문학(反思文學)’에서 시작된다. 78년 루신화(盧新華)는 문혁 시기에 반동으로 몰린 어머니와 절연한 주인공이 어머니의 죽음 후 돌이킬 수 없는 상처로 괴로워한다는 자전적 소설 『상흔』을 발표했다. 문혁 직후 홍위병 세대의 심경을 잘 보여 주지만 시간적으로 문혁을 충분히 사유하지 못한 치기를 어쩌진 못했다.   뒤이어 나온 반사문학은 보다 성숙했다. 왕멍(王蒙)·장셴량(張賢亮)·다이허우잉(戴厚英)은 극좌노선과 관료주의가 낳은 비극적인 시대상을 깊이 있게 묘사했다.   그중 한국에서도 출간된 다이허우잉의 『사람아, 아, 사람아』는 참회의 시각으로 망각된 휴머니즘의 가치를 불러냈다.   80년대 중반에 ‘심근문학(尋根文學)’이 등장했다. 당시 중국 정부의 공식 입장이 ‘문혁의 전면 부정’임을 감안하면 상흔문학이나 반사문학 식의 문혁 비판은 오히려 체제순응적인 면이 있다. 심근문학 작가 한사오궁은 문혁을 악마화하는 것이야말로 문혁에 대한 진정한 반성을 차단한다고 생각했다. 청년 시절의 하방 경험에 기반한 그의 소설은 홍위병과 지청이 같은 세대라는 당연한 사실을 일깨운다. 그의 세대는 아버지·스승을 반동으로 내몬 가해자이자 황폐한 변경에서 하릴없이 청춘을 허비한 피해자였다. 『귀거래』 『여자, 여자, 여자』의 인물들이 겪는 착란과 환상은 이런 분열적 시대 경험에 기인한다.   ‘심근문학’은 분열과 혼돈으로 충만하다. ‘심근(뿌리 찾기)’이라는 모토 자체가 역설적으로 ‘뿌리’를 상실한 세대의 정신적 공황을 반영하는 것이다. 한때 열렬히 신봉했던 이념과 가치가 하루아침에 ‘전면 부정’되고, 모처럼 활짝 열린 문으로 서구의 새 사상과 사조가 물밀 듯 밀려왔다. 믿었던 현대는 ‘봉건’으로 매도되고 새로운 현대가 시작됐지만 앞이 보이지 않았다. 이런 공황 상태에서 이들은 자신이 청춘을 보낸 농촌과 변방으로 돌아가는 수밖에 없었다. 아청의 『장기왕』 『아이들의 왕』, 장청즈의 『북방의 강』 『심령사』는 이런 혼돈의 시대가 낳은 보석이다.   ‘심근문학’은 형식 면에서도 가히 전위적이었다. 사회주의 리얼리즘이라는 획일적 굴레에서 벗어나 시대가 선사한 자유를 맘껏 들이켰다. 초현실주의, 마술적 리얼리즘, 의식의 흐름, 노장사상…. 이들은 할 수 있는 것들을 모두 실험했다. 80년대 끝 무렵의 ‘선봉문학(先鋒文學)’은 이런 실험문학의 마지막 단계이자 90년대 문학으로 가는 과도기이다. 또한 모옌과 위화, 쑤퉁을 낳은 토양이 됐다.   탈정치화 시대 1990년대 문학의 가장 큰 특징은 지식인의 영락과 문학의 범속화다. 80년대 작가들은 혼돈의 시대에 방향을 제시할 의무가 자기에게 있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지식인으로서의 실존을 포기하지 않았다. 그리고 대중도 그들을 따랐다. 그런 면에서 80년대는 문학의 전성기였다. 작가들에겐 대중의 존경과 최소한의 안락한 생활이 보장됐다. 90년대처럼 시장에 아첨할 필요가 없었다.   90년대 자본주의 시장경제는 중국 문학의 생리를 뒤바꿔 놓았다. 위대한 작품을 결정하는 것은 이제 시장이다. 작가들은 실험을 중단했다. 대중이 이해하지 못하는 작품은 존재가치가 없었다. 80년대 말 ‘선봉문학’으로 출발한 작가들은 ‘신사실주의’와 ‘신역사주의’라는 새 장르에 둥지를 틀었다. 둘은 같은 계열이다. 쉽게 말해 ‘사실’을 새로 쓰고 ‘역사’를 새로 쓴다는 뜻이다. 여기서 사실과 역사는 ‘팩트(facts)’의 다른 말이다. 세상을 움직이는 숭고한 이념을 추구했던 지난 시대와 달리 90년대 작가들은 팩트에 집착했다. 세상에서 진실한 것은 오직 하나, 순간순간 눈에 보이고 만져지는 팩트뿐이다. 중국에서 이때처럼 문학이 왜소해진 때도 없을 것이다. 문학은 더 이상 숭고한 게 아니라 범속한 개인들의 범속한 일상일 뿐이다. ‘문학의 탈정치화’라는 말이 회자된 것도 이때였다. 이들은 체제를 비판하지도 지지하지도 않았다. 가능한 한 멀리 떨어져 걸었다.   중산층의 자잘한 일상을 집요하게 파고든 류전윈의 『닭털 같은 나날』은 신사실주의의 대표작이다. 팡팡의 『풍경』은 무의미한 삶에 유독 번득이는 생존본능을 섬세하게 그렸다. 위화도 초기의 실험을 접고 『산다는 것』 『허삼관 매혈기』 같은 범속한 문체로 돌아왔다. 문혁을 그렸지만 그는 어떤 정치적 발언도 하지 않는다. 평범한 인물의 파란만장한 인생역정 뒤에 문혁은 배경으로 깔려 있을 뿐이다. 쑤퉁은 30년대 ‘민국’ 시기를 주로 다뤘다. 그 역시 시대와 역사에 함구했다. 『쌀』은 한 용속한 인물의 동물적 본능과, 그럼에도 결국 처절하게 실패하는 운명의 냉혹함을 담았다. 왕안이의 『장한가』는 상하이 40년의 현대사를 고요히 흐르는 한 여인의 육체 속에 응축시켰다.   90년대의 또 다른 특징은 ‘순문학’과 통속문학의 경계가 흐려졌다는 것이다. 중국에서 순문학은 소비주의 문학과 구분되는 본격 문학을 뜻한다. 엘리트와 대중의 차이가 현격했던 과거와 달리 90년대는 사회 중간층이 형성되면서 독서가 교양이 아닌 ‘소비’ 대상이 된 시기다. 왕숴의 애정물과 범죄물은 중간층을 대상으로 ‘건달문학’이란 새 장르를 개척했다. 그가 시나리오를 쓴 TV 드라마 ‘갈망’은 90년대 ‘왕숴 붐’을 일으켰다. 한편 주원의 『나는 달러가 좋아』는 좀 다른 건달문학이다. 거침없는 욕설과 외설은 껍데기만 남은 기성세대의 엄숙주의에 보내는 조롱이다.   보면 볼수록 90년대는 반어적이다. 작가가 계몽자가 아닌 대중과 똑같은 범속한 ‘개인’으로 내려옴으로써 중국 문학이 대중적 저변을 넓혔기 때문이다.   춘추전국시대 2000년대는 문학의 전국시대(戰國時代)다. 사방에서 실력자들이 득세했다. 1990년대까지 근근이 명맥을 유지하던 ‘순문학’은 곳곳에서 치고 올라오는 신세대 문학에 속수무책이다. 무엇보다 지난 10년 세상이 너무 빨리 변했다. 기성세대와 근본적으로 다른 ‘바링허우(80後)’ ‘주링허우(90後)’ 세대의 독서 취향을 ‘순문학’이 종잡지 못하는 사이에 새로운 문학들이 세상을 뒤바꾸고 있다.   가장 막강한 도전자는 단연 ‘인터넷문학’이다. 중국의 인터넷소설은 기성 문학판을 뒤흔드는 정도다. 90년대부터 시장경제가 문학의 체질을 바꿨지만 2000년대 문학에 개입하는 대자본의 경영방식은 차원이 다르다. 상하이에 본사를 세운 ‘성다원쉐(盛大文學)’는 우리 식으로 말하면 거대 연예기획사다. 수많은 작가를 ‘전속’으로 거느린 이 주식회사는 철저한 영리성 원칙에 따라 작품을 생산·관리한다. 작가를 아이돌로 띄우고 파생·부가상품으로 이윤을 극대화한다. 여기엔 이중성이 있다. 자본 증식의 욕망에 몸을 맡겨 ‘놀이’로 전락한 문학이 겉모습이라면 양극화, 권귀(權貴) 자본주의, 관료 부패, 대량 실업으로 얼룩진 중국 현실에 대한 비판과 냉소가 내면 깊숙이 산재한다. 이 상반된 양면을 ‘바링허우’의 두 원조 궈징밍과 한한이 대표한다. 23세에 잡지 ‘최소설’을 창간한 궈징밍은 2010년 ‘최만화(最漫畵)’ ‘방과후’ 등 계열사 잡지를 통합하고 수십 명의 아이돌 전속작가를 영입해 문화출판기획사를 차렸다. 반면 한한이 낸 잡지 ‘독창단’은 발간 2호만에 발매 금지됐다. 지금 그는 블로거로 활동 중이다. 중국 사회의 아픈 곳을 찌르는 그의 신랄한 문장은 2010년 타임지가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 100인’으로 지목할 정도다.   신흥문학에 압도당하고 있지만 ‘순문학’에도 약진하는 작가들이 있다. 그중 비페이위와 츠쯔젠은 기성문학과 다른 서사풍격으로 장편소설의 최고 권위 마오둔문학상을 받으며 문단의 총아로 떠올랐다. 90년대 문학이 사회에서 고립된 ‘개인’들의 독백이었다면, 이들은 개인과 사회의 새로운 관계방식을 찾고 있다. 비페이위의 『위미』는 문혁에서 개혁·개방으로 이어지는 중국 사회의 상처 난 내면을 시골 소녀의 눈으로 예리하게 훑는다. 근작 『추나』에선 맹인 안마사들의 세계로 들어가 삶과 영혼의 깊이를 탐색했다. 한편 츠쯔젠은 네이멍구자치구와 러시아 국경지대를 잇는 헤이룽장성 일대를 배경으로 에벤키(Ewenki)족 100년의 부족사를 그렸다. 여성·맹인·소수민족 등 기성 서사의 변방에 있던 소수자의 시선으로 중국의 역사와 현실을 섬세하게 복원하는 이들은 ‘순문학’이 아직 건재함을 보여 준다.   마지막으로 작지만 주목할 흐름이 있다. 2004년 출현한 ‘저층(底層)문학’이다. 류지밍을 비롯한 작가들은 개혁·개방과 초고속 성장이 초래한 양극화·부정부패 등에 주목한다. 농민공·해고노동자·촌부·광부 등 중국 사회의 광범위한 저변을 지탱하는 저층의 삶을 서사화하려는 새로운 시도가 위기에 몰린 ‘순문학’의 지원군이 될 것인지 귀추가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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