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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동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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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아가페, 천사의 날개가 결백한 이유 댓글:  조회:1322  추천:0  2013-10-28
 아가페, 천사의 날개가 결백한 이유     “나눔의 철학”으로 인생을 영위하는 이상규 지인의 감동스토리        “십시일반(十匙一饭)”이란 말이 있다. 즉 “여러 사람이 한 술씩 덜어내면 한 사람이 먹을 양식이 된다.”는 뜻이다. 그러나 한 사람의 주발에서 반을 갈라 나누게 되면 그는 그만큼 배를 곯아야만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룩하지도 않은 자기 주발에서 무작정 갈라내어 더 배고픈 사람을 염려하는 천사같은 지성인이 “나눔의 철학”으로 휘황하게 자기 스폰서의 인생을 영위하고 있은 즉, 그가 바로 이상규 선생이시다.     “밥통에서 한 술 밥을 떠내 주는 것은 선심을 갖고 동냥주는 것으로 볼 수 있지만, 한 공기에서 절반을 갈라주는 것은 진심을 나누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저는 선심을 베푸는 따위는 안 할겁니다. 서로 조건없이 진정한 마음을 나누고 싶고, 그것으로 만족합니다.”     이것을 신념으로 확고히 하고 황해를 넘나들면서 이상규 선생은 중국 신주의 방방곡곡에서 사랑의 멜로디를 연주하고 있다.     중국 연변의 조선족 뿐만 아니라 한족들에게까지 깊이 낙인이 된 이상규 선생님의 이미지는 바로 이런 선생님의 “나눔의 철학” 때문이다. 그런 철학을 소유하고 있기 때문에 선생은 자그마한 기업 하나를 운영하고 있지만 20년 간 수 십 차례 중국을 넘나들며 출판계, 언론계, 교육계에 한화 수억 원을 선뜻 지원하여 도서출판, 백일장, 장학금, 문학상 등등 후원행사를 이끌어 나갈 수 있었을 것이다.     이상규 선생의 중국동포를 위한 무한한 사랑은 감동 그 자체이다.     억장이 무너지는 그 기막힌 사연으로 몸부림치는 중국동포가 이상규 선생의 “설중송탄(雪中送炭)” 그 고마운 진정에, 천사의 그 결백한 날개로 포근히 보듬어 주는 그 감동에 목이 메여 쏟아지는 눈물을 걷잡지 못하는 그 장면에서 선생도 눈시울을 적시며 도리어 “돈 몇 푼으로 선량한 사람들의 눈물을 흘리게 한것 같아서 참으로 부끄럽다.”면서 “다른 어떤 활동을 잠시 접을 수는 있어도 이 장학금 후원 활동만은 계속하여 견지해 나갈 것이다.” 라고 말씀하시였다.     선생의 중국동포들에 사랑을 베풀어 온 그 엄청난 대가는 대학 진학을 위해 모지름을 쓰는 아들을 비롯한 한 가정의 운명을 걸고 자초한 진통이었다.     선생의 아드님이 대학 진학을 위해 열심히 공부를 하고 있는 어느 날 아침 이야기다.     그 아침 식탁에서 있었던 자식과의 뜻하지 않은 대화가 선생의 가정에 커다란 변화를 몰아 왔다.     “대학 졸업장이 없더라도 네가 죽는 날까지 후회없이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다면 졸업장이란 아무런 가치도 없다고 나는 생각하는데, 너는 어떻게 생각하나? 그리고 교육이란 인간으로 태어나 인간답게 살아가는 길을 가르치는 것이지 교육 그 자체를 목적으로 가르치는 것이 아니란다.”     선생이 이렇게 자식 앞에서 서슴없이 말의 서두를 꺼냈다. 그 순간 식탁 둘레의 분위기가 싸늘하게 식어갔다. 한참 후 냉랭한 분위기속에서 식사를 하던 선생의 부인이 차분한 어조로 반기를 들고 나서며 의견을 제시했다.     “남들은 수억 원씩 들여가며 대학을 보내는데 지금 학교 잘 다니고 있는 애한테 쓸데없는 말로 애 마음을 혼란스럽게 하지 말아요.” 라면서 일침을 놓는다.     자기도 대학을 중퇴하여 졸업을 못한게 철천지한이 될 터인데 어쩌면 자식한테까지 그런 명예롭지 못한 내력을 대물림하려는 생각을 할 수 있을까? 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을 것이었다.     참으로 옳은 말이며 옳은 생각이다.     남들은 빚을 내서라도 과외를 시키고 떨어지면 재수를 하고 3수, 4수를 한다는데도 말이다. 대학 진학을 위해 한 가정의 운명을 걸다시피 하는 이 사회의 분위기에 과연 어떤 부모가 이 같은 ‘몰상식’한 의견을 자식에게 제시할 수 있단 말인가?     유명하다는 학원의 밀집한 거리, 명문대 입학률이 높다는 명문고, 족집게 과외선생을 채용하는 고액 과외, 미국으로의 원정 출산, 이런게 다 우리 사회의 이야기다. ‘맹모삼천지교’를 뺨 치는 우리 민족 교육열이, 특히 계층간에 위화감을 조성해 놓았다. 명문대도 마음에 안 차 유학을 보낸다. 유학은 가정의 경제적 능력과 부모의 사회적 지위에 따라 구분되어 미국이냐, 유럽이냐, 아니면 동남아냐 이다. 이 축에도 못 끼면 심지어 국제적 시야를 넓혀 준다고 어학연수라도 보내는 게 상식화된 사회…      “오죽이나 못 났으면 어학연수 한 번 못 보냈을까?” 하고 손가락질 받지 않는 것만도 별 볼일 없는 부모로서는 행운으로 하는 세상이다.      이상규 선생의 집도 그리 넉넉한 편은 못 되지만 그렇다고 자식 등록금 마련엔 그리 문제될 것 없는 처지였다. 그런데 그 등록금이 키포인트 된 것이 아니라 8년 전부터 사업을 등한시하며 중국동포들에 깊은 관심을 갖고 후원사업을 벌였던 것이 그 아드님의 마음에 몹시 걸렸던 것이다.     그로 인하여 이선생님의 아드님은 학교 수강시간을 몰아서 짜고 비워둔 시간과 나날을 이용해 회사일을 거들기 시작했다.     이상규 선생은 자식이 열성으로 일하는 모습을 바라볼 때마다 저럴 바엔 아예 학업을 중단하고 사업에 몰두하게 하는게 오히려 바람직하리라는 생각을 외곬으로 몰게 되었다.     그 결과 사업적으로는 성공을 하였으나 그 뒤에 보이지 않은 둘레의 따가운 눈초리는 피할 길이 없었다. 외눈박이만이 사는 마을에 두 눈을 가진 사람이 산다는 건 분명 그 마을에서는 대단한 불구자일 수 밖에 없는 이 세상 물정임에야.     “저 집은 도대체 뭐 하는 집이야? 등록금이 없는 것도 아니고, 거처할 집이 없는 것도 아니고, 그래도 명색이 회사를 운영한다는 집에서 이해할 수 없는 짓거리를 하고 있으니…”     이런 야유를 퍼붓는다 해도 이상규 선생은 아무런 변명도 할 수 없는 회심의 미소만 머금고 있을 뿐이었다.     이 에피소드가 바로 이상규 선생의 ”부끄러운 대물림” 이 되었다는 일가견이다.     이상규 선생은 심지어 퇴직금까지 다 털어가면서 해마다 중국에 와서 장학금을 주기도 했다. 중국 동포들을 위하여 그렇게 즐기고 애착하는 수상스키도 다 팔아서 후원금으로 쓰기도 하면서 한 푼이라도 더 돈을 만들기 위해 열심히 뛰기도 했다.     친구 집 혼례식에 입고 갈 예복이 없어 부인과 의논하며 바장이기도 했었다. 중국에 오시느라 새로 맞춰 입은 양복을 어느 어려운 문인에게 벗어 주기도 한다. 한 때 지각 없는 코리안들의 사기행각으로 하여 피해를 입은 중생들을 대신하여 사죄하면서 주머니 돈까지 다 털어서 위로금을 내놓고 돌아갈 비행기표도 살 수 없어 기차를 이용하여 심양으로 가기도 했다.     이상규 선생의 중국동포들에 몰부은 사랑은 조선족에 한해서만이 아니다. 조선족들은 중국의 방대한 군체인 한족과의 완벽한 어울림을 형성하여야만 조선족들의 번영을 성취할 수 있다고 호소하는 이상규 선생은 장학금이나 백일장 등의 일체 조선족교육사업에서의 일체 행보에 한족 학생들도 동일시하며 지대한 관심을 베풀고 있다.     우리 중국에 살고 있는 조선족들과 한족들은 이상규 지인한테서 너무나 많은 것을 받았지만 그에 대한 보답은 아무 것도 없다. 이에 마음으로나마 그 은정에 얼마간이라도 보답하고저 중국정부에서는 이상규 지인에게 “고마운 한국지성인”이라는 명예 칭호상을 수여하였다.     이상규 선생의 “아가페”에 관한 이야기는 너무도 거창하여 실로 한 입으로 다 말하기는 어렵다.     옛글에 이르기를 “문 인즉 도요, 도 인즉 문”이라고 했다. 글이 곧 그 사람이고 그 사람이 곧 글이다. 이상규 선생의 문학전집을 펼쳐보면 페이지마다 행마다 자기를 희생함으로써 실현되는 인간의 이웃에 대한 사랑으로 구구절절 읽는 이의 눈물을 자아내고 있다.     아가페! 천사의 날개가 결백한 이유는 바로 ‘아가페’라는 그 신성한 이념 때문이다. 2012년 10월. 서울에서. 
1    감자꽃이 열매를 맺었습니다 댓글:  조회:1768  추천:1  2013-10-27
감자꽃이 열매를 맺었습니다                       -한국시인과 연변 한 여인이 중한문화교류의 오작교를 놓은 이야기-        감자는 감자의 열매가 아닙니다. 감자도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습니다.      그러나 그 열매는 망각의 열매입니다. 감자는 열매로 번성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의 두 주인공 즉, 한국의 시인과 중국의 한 여인의 드라마틱한 피눈물의 사연으로 감자꽃을 피우고 보석같은 진중한 열매를 맺었습니다.     그 열매가 오늘 중한문화교류의 번영과 찬란한 미래의 서막을 열었습니다.       1996년12월, 중국 연길시의 한 식당에서는 조촐한 모임이 열리고 있었다.     한국시인 이상규선생의 연변조선족 문학계간지인 “아리랑” 발간 후원금 전달식이었다. 그 한 옆에서는 한 달 전에 사망한 조선족 여인의 추모회가 열리고 있었다. 이씨와의 짧은 인연을 연변 문인들과의 긴 인연으로 이어주고 44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 정신자 씨를 추모하는 자리였다.     작은 사업을 꾸리며 개인적인 관심사에만 머물러 있었던 이씨에게 보석같은 마음을 열어 커다란 가치에 눈뜨게 해준 정씨는 그에게 평생 잊을 수 없는 안타깝고 소중한 인연이었다.     이씨의 고향은 경기도 평택, 갑작스레 기운 가세 때문에 고려대 생물학과 3년 수료가 최종 학력이 됐다. 졸업장이 없어 취직도 포기하고 귀향하여 특수작물을 재배하다가 6년간 손해만 보던 농사꾼 생활을 접었다.     몇몇 회사를 전전한 끝에 차린 것이 유업회사 대리점, 그러나 그마저 십년지기의 배신으로 위기에 몰리게 된다. 연일 술로 세상에 대한 원망을 키우다 어느 순간부터 술병 대신 시집을 집어 들었다. 마흔을 넘길 때까지 문학 언저리에도 안 가본 그였지만 이제부터 김소월, 한하운, 한용운, 정지용… 등의 시들을 탐독했다. 한 편의 시를 수백 번도 더 읽었다. 희한하게도 구절구절이 실연 후에 듣는 유행가 가사처럼 절절하게 와 닿았다.     그렇게 수백 번씩 읽는 동안 문학의 토대를 쌓은 이씨의 심령에서 서정시의 운율을 타고 내면의 앙금처럼 쌓인 감성이 시로 토해졌다. 세월의 무게에 눌려 기억속에 가라앉아 있던 어린 시절의 향수가 실타래처럼 풀려 나왔다. 드디어 89년 “동양문학”지에 ‘석류’라는 시로 데뷔하고 90년 말에 첫 시집 “사랑의 비문”을 묶어냈다. 애초 비매품으로 내놨던 그 시집이 의외로 찾는 사람이 많아 4만 부나 팔리는 이변을 낳기도 했다.    이후, 4권의 시집을 가진 중견시인이 되었지만 먹고 사는 직업은 따로 가져야만 했다. 종업원 10여 명을 둔 식품판매회사를 차려 냉혹한 생존현장을 뛰면서 삶의 허망함과 상실의 그리움을 시로 옮겼다.    92년 6월, 그 날도 이씨는 팔당 인근의 금남리를 찾아 시작(诗作)만큼이나 공을 들이는 취미가 수상스키, 사업시작 이후 쌓이는 스트레스를 주말이면 북한강의 세찬 물결로 씻어내군 했다.    수상스키를 끝내면 이씨는 10년째 애용해 온 “숲속의 집”이란 단골식당이 있었다.    그런데 그 날은 낯 설은 아줌마가 서툰 솜씨로 일을 하고 있었다. 식당일이 처음인듯 했다. 이씨는 새로 온 아줌마에게 말을 걸었다. 짤막한 대화속에서 이씨는 이북 출신 시골아줌마로만 생각했던 그 녀가 중국 연길시 연남소학교의 국어교사 정신자라는 여인일 줄은 꿈에도 생각 못 했었다. 남편은 검찰원이라 상류계급에 속했지만 두 아들을 대학에 보내기엔 봉급만으로는 역부족이었다. 생각다 못해 그 녀도 한국행을 결심하고 석 달 비자로 입국하여 ‘불법취업’을 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그렇게해서 시작한 일이 이 식당의 일이었다.    이씨는 정씨가 국어교사라는 것을 알자 시집 두 권을 그녀에게 선물했다. 자신과 딸의 작품을 함께 묶은 시집과 자신의 데뷔 시집이었다. 사업가인 줄만 알았던 그가 시를 쓴다는 사실에 정씨는 몹시 호감을 느꼈다. 그 후부터 그는 늘 정씨에게 작은 선물을 건네며 많은 배려를 베풀었고 정씨도 유일하게 터놓고 의지하는 한국인으로 가깝게 지내게 되었다.    그러는 동안 정씨의 석달 비자 기간도 끝나고 귀국하였다. 그렇게 정씨를 보내고 그는 다시 예전의 바쁜 일상으로 돌아갔고 정씨와의 만남도 기억속에서 희미해져 갔다.    그런데95년 4월 말, 신문 한 부와 함께 한 통의 편지가 날아왔다. 겉봉에 씌인 ‘정신자’ 라는 이름을 보는 순간 3년 전의 일이 되살아 났다.     그 사이 정씨는 길림신문사를 통해 한국 시인 이상규선생과 그의 딸 이지은 양의 시 몇 편을 ‘길림신문’에 실었던 것이었다. 바로 그 신문과 함께 보내온 편지였다.    그 후, 편지에 적힌 전화번호로 통화가 이어졌고 좀 지나 연변인민출판사에서도 정씨의 소개로 그의 시집을 중국에서 출판하고 싶다는 전화가 왔다.     한국에서 꽤 문필을 날리는 사람이 중국신문사에 돈까지 투자하고도 신문에 글 한 편 못 올리는 경우도 더러 있었다. 일개 초등학교 교사의 힘으로는 엄두도 못 낼 일이었지만 정씨에게는 그것이 가능했던 빽이 있었다. 북경의 정씨 이모는 주은래의 비서였던 황옥금씨. 그러니까 금남리의 식당에서 일을 하던 가난한 중국 아줌마 정씨의 본연은 중국 최 상류층의 인물이었던 것이었다.    그리하여 이씨는 시집출판에 관련된 자료를 중국에 보냈고 이어 그의 중국행이 이어졌다.    연길에 도착해 보니 정씨는 며칠 전에 수술을 받고 병석에 누워있었다. 그 때만 해도 그는 정씨가 무슨 병인지 몰랐다. 숱한 사람들이 문병을 다니는 게 좀 이상하긴 했지만 부인병이려니 싶어 민망해서 물어볼 수가 없었다. 그럼에도 정씨는 그에게 백두산 관광을 안내하겠다면서 길 떠날 채비를 하기에 이씨는 펄쩍 뛰었다. 정신 있느냐고, 몸조리나 잘 하라고. 하지만 정씨는 막무가내였다. 결국 정씨 부부와 함께 백두산 관광길에 올랐다.     백두산 가는 길 도로변에는 감자꽃이 지천으로 새하얗게 피어 있었다. 정씨는 감자꽃을 가장 좋아한다면서 감자꽃을 주제로 시를 써달라고 부탁하기도 했다. 그는 한국에 돌아가면 꼭 써서 보내겠다고 약속했다.    그렇게 백두산 관광이 끝나고 북한과 러시아, 중국, 3국 접경지의 관광까지 안내한 뒤 북경으로 떠나게 되었다. 뜨거운 북경의 여름 땡볕속을 마다 않고 만리장성을 돌아보고 자금성까지 열심히 안내하던 정씨는 어느 날 갑자기 북경병원에 드러눕게 되었다. 서울에 돌아온 이씨는 2, 3일에 한 번씩 북경으로 연락했다.    그가 정씨의 병을 알게 된 것은 귀국 후 이십여 일이 지나서였다. 병동을 옮겨가며 검사를 받던 정씨는 의식불명 상태에서 방사선 치료를 받았다. 그 소식을 전하며 정씨의 남편은 아내가 위암 수술을 받았고 지금은 암세포가 전신에 확산되었다고 알렸다. 금남리 식당에서 일할 때 그 녀가 위가 아프다고 호소한 적이 생각났다. 그러니까 그 때부터 정씨의 체내에서 암이라는 병마가 자라고 있었던것이었다.     이씨의 내외 두 분은 정씨에게 감사와 사죄를 전할 방법으로 정씨가 완쾌하여 집으로 돌아가기를 기원하면서 생필품과 주방용기, 정씨의 옷가지 등 60kg가 넘는 선물을 마련해 정씨의 연길 집으로 보냈다.    서울에서 선물이 도착했다는 아들의 전화를 받고 정씨는 이렇게 말했다.    “그 보따리 절대 손대지 말고 그대로 놔 둬라. 내가 살아서 집에 돌아가 직접 풀어야 하는 물건이니까”     그러나 정씨는 끝내 그 보따리를 풀지 못했다.    선물 고마웠다는 정씨의 목소리를 들은지 열흘만에 그 녀 남편의 전화가 왔었다.    정씨의 사망소식을 전해 들은 그 날 이씨는 눈물을 흘리며 밤새 한 편의 시를 썼다.    백두산 가는 길에 정씨가 부탁했던 감자꽃을 읊은 시, 제목은 "감자꽃"이였다.                         불귀(不归),불귀(不归)                            내 설움                            연변의 산자락 돌밭 틈에                            흰 꽃으로 피었네                            감자꽃 피는 유월                            종일토록 쏟아 붓는                            불볕 더위, 긴긴 장마는                            시련의 채찍인가                            한 맺힌 눈물인가                            가난을 떨치려, 가난을 떨치려                            비바람 매몰찬                            산 설고 물 설은 금남리 강가에서                            모진 고난 감내하며 지새운 긴 밤                            병든 몸 내색 없이                            고웁게 미소 짓더니…                            불귀, 불귀                            불여귀(不如归) 슬피 우는 밤                            섧운 눈물 보일까                            섧운 얼굴 보일까                            산자락 돌밭 틈에                            가만히 피었다가                            가만히 떨어져 간                            아련한 감자 꽃       가만히 피었다가 소리없이 떨어진 감자꽃처럼 정씨의 뼛가루는 바람속으로 흩어졌다.     정씨가 이 세상을 하직하기 한 달 전에 이씨의 시집이 중국에서 출판되었다. “순정의 고백”, 북경의 병상에서 정씨가 직접 지은 이름이었다. 그 시집으로 이씨는 한국인으로서는 처음으로 중국 출판 시집을 가진 시인이 되었다…     그 해 12월, 정씨의 추도회에서 이씨는 준비해 간 3천 달러의 절반인 천 오백 달러를 정씨의 두 아들의 4년치 대학 학비로 내놓았고 나머지 절반은 휴간 상태에 놓여 있던 연변인민출판사의 “아리랑”을 위해 내놓았다. 2년간 걱정없이 잡지를 만들 수 있는 돈이었다.     행사를 끝내고 서울로 돌아온 이씨는 한국에서 연변 지식인 문화출판사업 후원금 모집에 두 발 벗고 나섰다…    이로부터 중한문화교류의 새 장이 서서히 서막을 열게 되였었다. 2012년 10월. 서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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