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영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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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7    탁구를 즐기는 사람들 댓글:  조회:307  추천:1  2020-01-06
탁구를 즐기는 사람들         사람마다 애호가 다양하다. 운동에 대한 애호도 저마다 다르다. 우리 주변에는 탁구를 선호하는 사람들이 많다. 여느 한 친구는 전원주택에서  생활하는데 집에다 탁구판까지 가져다 놓았다.         연길체육장 2 층에는 정부에서 지원하는 면비 탁구회관이 있다. 개장한지 일년정도 되는데 손님들이 끊을 사이가 없다. 탁구판이 20여개나 되지만 늦게 간 사람은 자리가 없다. 하여 기다리다가 남들이 쉬거나 돌아간 다음 에야 칠수 있다. 탁구 칠러오는 사람들은 대체적으로 중로년분들이 대부분인데  솜씨를 보면 옛날에는 다 내노라하는 분들였음이 틀림없다. 퇴직후 취미로  새로 배우는 분들도 일부 있다.         탁구회관은 아침 7시면 개장하는데 일찍 오는 사람들이 많다. 짝을 묶어 오는 사람들도 있고 혼자 오는 사람도 있다. 오래 다닌 사람들 지간에는 호상 익숙한것 같다. 허나 일단 시합을 치르면  사정을 두는 법이 없는데 친구건 파트너건 상관 없다.  탁구경기를 관람하노라면 관중들도  덩달아 즐겁다. 공을 올려 뜨리고 잽싸게 깍으면서 시작하는 사람이 있나하면 또 공을 손에 꼭쥐고 있다가  깜쪽같이 시작하는 사람도 있다. 선수들은 저마다 비밀 무기들이 있다. 수준이 비슷한 선수들이  공격하는 장면은 참  멋지다. 몸까지 써가면서 공격해 대지만 상대도 전혀 두려움이 없이 맞공격 한다. 똑딱 똑딱 탁구공은 이쪽에서 저쪽으로 저쪽에서 이쪽으로 총알같이 날아 다닌다.          탁구운동은 반응이 빨라야 한다. 탁구공은 운동괴적이 짧고 변화무쌍하다. 진공측에서는 모든 기교와 수단을 다하여 공의 락하점을 때로는 오른쪽 모서리에 때로는 왼쪽 모서리에 견주어 방어측으로 하여금 곤난에 빠뜨리게 한다. 방어측에서는 대방으로부터 날아 오는 여러 류형의 공을 잽싸게  받아 내고 방어에서 공격으로 돌진 한다.  기회만 포착되면 사정없이 공격을 들이 대는데  절때 사정 두지 는 법이 없다. 짧게 낮게 빠르게 연속공격을 들이 댄다. 이렇게 공격에서 방어로 방어에서 공격으로 넘나들며 경기를 펼쳐 간다. 한번 두번 세번 여지없이 공격하는데 대방측의 위기반전 능력도 만만치 않다.  그러다가 아차 실수하면 1 점을 잃는것이다.  이때에야 득점수는 수건으로 이마의 땀을 닦아 내는데 얼굴에는 승자의 미소가 어려있다. 이멋에 탁구할려 온 사람들이 시간도 잊고 피로도 잊고 경기에 몰두하는것이 아닐까.         나의 로처장님은 어려서 부터  탁구선수 였다고 한다.  수준급인데 웬만한 경기에 나가면  우승하는건 보통이다. 지금은 정년퇴직을 하고 취미로 탁구회관에 나가 학생들을 배워 준다.  연변탁구계에서 로처장의 이름을 대면 모르는 사람이 별반 없다.         우리 친구가운데도 날쌘 선수가 있다. 그 친구는 매주 토요일이면 경기가 아니면 훈련에 나간다. 혹여 금요일 저녁에 친구들 행사가 있으면 청가를 맡기가 일쑤다. 연변일보에서도 몇번이나 그 친구가 우승했다는 보도를 본적이 있다.  우리 단위에서 한다는 탁구선수와 그 친구를 아는가고 물어 보니 자기보다는 한수 위라고 했다.         광주에도 탁구애호가 친구가 있다. 탁구를 배운지 시간은 길지 않지만 진보가 빠르다. 경상적으로 광주회계사협회 탁구 시합에 나간다고 한다. 명년에 친구들이 청도에서 행사를 가지는데 탁구시합종목을 넣어야 할지  고려중이다.         운동은 신체단련에만 좋은것이 아니라 기분전환에도 만점이다. 하루의 일과를 끝내고 땀을 뚝뚝 흘리며 운동하고 나면 온몸이 거쁜하고 정신이 맑아진다. 하루동안 사업일정으로 하여 쌓여던 피로와 스트레스가 확 날려 보내는 순간이다. 그래서 총명한 사람들은 운동을 끊지 않는다.         일전에 한 사무실에서 근무하는 친구가 요지음 부터 연길역전 탁구회관에 나가 탁구를 배운다고 했다.  좋은 선택이다. 이제 배워 언제 선수가 되랴만은 열심히 운동하면 신체건강에 도움이되고 재미도 되고 일거량득이 아닐수 없다. 
116    가장 아름다운 고속철도 댓글:  조회:187  추천:0  2020-01-03
가장 아름다운 고속철도             연변은 아름다운 곳이다.  고속렬차를 타고 훈춘에 가면서 차창밖의 가을풍경을 바라 보노라면  경치가 마치 한폭한폭의 수채화같이 아름답다.  늦가을의 하늘은 공활하고 하얀 구름이 높이 떠 있는데 산비탈에는 소떼들이 무리지어 먹이를 찿고 있고 밭에는  옥수수를 거두어 들이는 농부들의 분망한 모습이 안겨 온다. 차창밖의 경치는 봄이면 꽃이 만발하고 여름이면 록음이 우거지고 가을이면 황금파도 설레이고 겨울이면 림해설원을 이룬다.  이 고속철로는 고객들로부터 가장 아름다운 고속철로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개혁개방의 봄바람을 타고 연변의 교통건설은 천지개벽의 변화를 가져 왔다.  고속공로가 통하고 고속철로가 뚤리는 대장거를 이루어 내였다. 2015년9월20일은 연변교통력사상 대서특서해야할 중요한 날이다. 이날 연변은 고속철로가 없던 력사에 종지부를 찍고  고속렬차가 개통하였다. 고속철로가 개통함으로 하여 연변은 명실공히 한시간 경제권을 이루었다. 지금 연길에서 고속렬차로 40분이면 훈춘 돈화에 도착할수 있다. 전에는 꿈에서도 생각못했던 일이다.         이제 가장 아릅다운 고속철도 연길-훈춘 구간을 달리며 자연경관을 구경하고 인문력사도 일아 보자.        연길-훈춘 고속철도의 가장큰 특점은 다리가 많고 텐널이 많은 것이다. 그만큼 철도가 강을 많이 건너고 산을  많이 통과한다는 말인데 텐널은  무려 20개나 된다. 지금은 진짜" 물을 만나면 다리를 놓고 산을 만나면 굴을 뚫는" 시대가 되였다. 고철은 비용이 많이드는 항목인데 1킬로메터당 투자가 1억원 이상이 수요된다.          고속철도의 개통과 더불어 연길서부는 비약적인 발전을 가져 오고 있다. 신축 고층 아빠트들이 즐비하게 들어서고 있는데 새로 분양하는 아빠트가격은 균가로 6000원이 넘는다. 지금 역전 맞은 편에 산산성(衫衫城)이라는 주택단지를 조성하고 있는데 연길에서 가장 큰 주택구역이라고 한다.         차가 연길역을 미끌어 나가자 브라하통하에 건설된 연천대교가 한눈에 안겨 온다. 미끈한 몸매를 자랑하는 연천다리는 금년 5월에 정식 개통되였는데 지금  고속철도역과 연길하남구역을 련결하는 교통중추역을 담당하고 있다. 그옆으로 보이는 하얀 건축군은 연길인민경기장 건축군이다. 자치주창립60주년 헌례건축군인데 그 모양새가 마치 별나라에서 날아온 비행접시같다.          고속렬차가 달리다가 잠간 다리를 지나게 된다.  마반산협곡을 지나가는 순간이다. 마반산은 연길주변에서 가장 높은 산이다. 해발이 592메터로서 해발이517메터인 모아산보다 높다. 마반산은 연변고대장성의 동북쪽끝이기도 하다.  지금도 마반산에 오르면 옛봉화터가 그대로 보인다. 브라하통하와 해란강은 성자산부근에서 합쳐서 동으로 흘러가는데 제법물살이 세다. 마반산역전 앞부근에서 부터 강폭이 좁아 지면서 강물은 높은 골짜기사이로 거품치며 흘러 간다. 마반산협곡을 통과하는것이다. 정부에서는 이곳에 마반산발전소를 세웠다.          마반산협곡을 통과한 고속렬차는 동으로 달린다. 렬차는 훤하다 어둡다를 반복하는데 텐널을 통과하는 것이다. 고철스피카에서는 도문북역에 도착한다고 안내방송 한다.          도문을 과거에는 회막동이라고 불렀다. 도문시는 조선남양과 마주하고 있다. 도문의 일광산은 근년에 아름답게 꾸며지고 있는데 조각공원도 조성되였고 화해(花海)도 만들어져 있다.  여름 한철이면 화해구경을 오는 류람객들의  차량들로 종종 도로가 막힌다. 일광산에 위치한 이름난 화엄사(华严寺)에는 많은 선남신녀들이 찿아 오고 있다.  일광산정에 올라 서면 두만강 건너 남양이 환히 보인다.  2002년도 나는 어린 아들을  업고 일광산정에 등산한적이 있다.         도문역을 지나 얼마 지나면 량수가 나타난다. 량수에는 그 유명한 단교(断桥)가 있다.  2차세계대전이 거의 끝날 무렴 쏘련홍군의 지면부대의 추격을 끊어버리기 위하여 일본군은 당시 소좌녀특무 三司를 파견하여 온성다리를 폭파하게 하였다. 1945년8월12日새벽 三司은 온성다리 제5번 기둥에 폭파약을 안장하고 다리를 폭파시키였다. 온성다리는 통차하여서 부터 폭파하기까지 8년시간 밖에 되지 않았다. 2006년 도문시인민정부에서는 이곳을 도문 애국주의 교육기지로 명명하였다.          근 40분을 달린 고속렬차는 종착역인 훈춘시구역에 들어 선다. 차창밖으로 3만개의 관중석을 가진  이쁜 조형의 훈춘인민경기장이 보인다.  훈춘시 절부에서는 시민들의 신체단련 요구를 만족시키기 위하여 경기장을 무료로 개방하였다. 개혁개방이래 훈춘의 도시건설은 비약적인 발전을 가져왔다.         훈춘시와 훈춘합작구를 이어주는 훈춘산림대교와 훈춘대교가 건설되여 도시 교통대동맥을 이루고 있다. 훈춘대교는 2017년10월9일에 정식 개통되였는데 교량길이가617메터이고 주탑의 높이는 85메터다. 매번 저녁이되면 네온등으로 장식된 훈춘대교가 사람들의 시선을 끈다. 홍기하 강반에는 고층아빠트들이 즐비하게 들어 섰고 거리에는 훈춘을 찿은 로씨야유람객과 국내손님들이 많다.        고속철로의 개통은 사람들의 생활과 생산에 매우 큰 변화를 가져 왔다. 지금은 아침에 장춘을 떠나 오전에 도착하여  훈춘구경하고 정심에 양고기뀀을 맛보고 오후에 집으로 돌아 갈수 있는 여건이 현실화 되였다. 또 그렇게 하는 친구들이 많다.         외지에서 온 손님들은 한번은 고속철도 량켠의 아름다운 풍경에 감탄하고 두번째는  연변특색의 미식에 또 한번 감탄한다.        가장 아름다운 고속철도의 이야기는  고속철도를 타고 인터넷을 타고 조국의 방방곡곡에 전파되고 있다.
115    황연농사 댓글:  조회:142  추천:0  2020-01-02
황 연 농 사         담배는 독초와 황연으로 나누는데 독초는 해빛에 말이고 황연은 건조실에서 말리 운다. 과거에 독초는 일반적으로  매개 가정을 단위로 생산 하나 황연농사는 집단적으로 하는것이 관례였다. 아마 그세월에 생산자료가 주로 생산대에 귀속되였기 때문에 그런 현상이 보편화된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황연농사는 집단농사하던 그시절에  생산대로 말하면 부업에 맞먹는 것이였다. 우리 마을에는 기본상 논농사를 주로하였는데 밭에는 담배를 많이 심었다.   돈이 될만한 황연을 심는것이 수지가 맞는 일이였던것이다.          황연농사는 손이 많이 가는 일이였다.  이른 봄이 되면 우선 생산대에서는 유리온상 수선부터 하여야 한다. 온상이라 해야 일년에 한번 담배모를 심는데  끝히다 보니 방치 되여온 온상을 수라하는것도 큰 역사였다.  깨여진 유리도 바꾸어 넣어야하고  떨어져나간  벽은 다시 흙으로  발라주어야 한다. 열 손실을 막기 위하여 서는  여느 틈새나 모두 잘 막아 놓아야  하는데 이것이 가장 기본적인 보수 사항이다.         여러가지 보수가 끝나고 나면 온상에 부식토를 깔고 바닥을 수평 잡고 담배씨를 골고루 뿌리여 준다.  마감으로 위에 엷게 보드러운 흙으로 덮어 주고 물을 뿌린다. 한편으로 온상밖에 설치된 아궁이에다 불을 지펴 온상내부의 온도를 높혀 준다. 해볓의 열로만은 담배씨 발아에 필요한 에네지를 만족시키지 못하기 때문이다. 따뜻한 온상에서 담배는 싹이 트고 흙을 뚫고 잎사귀가 나온다.         당시 담배 온상은 생산대 마다 갖추어져 있었다. 황연농사는 기본상에 농촌부녀들이 몫이다. 밖에는 찬바람이 쌩쌩부는 초봄이지만 유리온상안의 온도는 30도를 밑돈다. 부녀들은 온상모판위에 널판자를 올려 놓고 그우에 쭈크리고 앉아서 참대 펜센트로 잡풀을 뽑아 낸다.          잎이 4잎정도 나오면 다시 영양단지에 옮기는데  담배묘는 모살이를 거치게 된다. 어느 정도 뿌리가 잡혔다 싶으면 담배묘는 유리 온상을 떠나  비닐 온상에 날라가야 한다.  그때는 봄이면 바람이 세게 불어치였다. 촌에서는 바람을 막으려고 수수대를 엮어 울타리를 세웠는데 우리들의 놀이터가 되였다. 해볓도 맞고 바람도 맞으면 묘는 건실하게 자란다.           5월말쯤이면 황연묘가 대전에 나간다. 7월 하순쯔음 부터는 담배잎을 수확한다. 담배밭에 가면 담배냄새가 코를 찌른다. 해볓이 쨍쨍 내리 비추는 한여름 담배잎 뜯기 로동은 그야말로 고역이다. 담재잎을 수레에 싣고 탈곡장마당에 운반해 오면 녀성들이 새끼끈으로 담배잎을 달대에  꼬아 맨다. 다음 건장한 남성들이 건조실에 들어가서 위로부터 아래로 내려오면서 담배 달대를 걸쳐 놓는다.         담배대를 다 갈쳐 놓으면 건조실에 석탄불을 지펴 온도를 올린다.  건조실 화부는 기술업종에 든다.  불이 너무세면 담배를 태울수 있고 너무약하면 말리기 힘들다. 이래 저래 책임이 크다. 허나 일이 고되거나 힘든 것은 아니다. 휴식할수 있는 여유시간도 많다. 어떤사람들은 휴식시간을 리용하여 돌절구도 만들었다.        어릴때 우리는 강냉이며 감다를 훔쳐다 건조실에 와서 곧잘 구워 먹었다. 건조실은 한동네의 활동실 같은 장소였다. 저녁이면 마을 어른들이 건조실 마당에 모여 쑥불을 지펴 놓고 모기를 쫓으며 한담도 하고 동네 정보도 교환하였다. 지금 생각해보면  텔례비조차 없던 그 세월에 무슨 문화생활이 있었냐 싶다.         황연이 다 마르면 이른 아침 사원들을 동원하여 담배 달대을 내리 운다. 바싹 마른 담배잎이 부서지는것을 방지하기 위하여 달대를 내리우는 일은 반드시 해 뜨기전에 완성한다. 다음 말린 황연은 반지하로된 창고에 움직이여 습기를 준다. 다음 녀성들이 모여 앉아서 황연을 곱게 편 다음 왼손으로 꼭지쪽을 꽉 쥐고 오른손으로 동여 준다. 여러개 꼭지를 모아서 황연덩어리를 만든다. 어느정도 산품이 모이면 촌에서는 황연을 연초공사에 가져다 팔게 된다.          황연농사는 대단히 고된 로동이다. 이른봄 씨앗을 뿌려서 부터 묘가 대전에 나가기 까지 얼마나 많은 부녀들의 손길이 가는지 헤아릴바 없다. 황연 잎을 뜯고 달대에 걸고 말리고 조례하는 어느 한가지도 쉬운 것이 없다. 허나 그시절 황연 농사는 돈이 되는 일이였다.         어린 나이의 우리에게는 온상이며 건조실이며 반지하 창고 모두가 더 없이 좋은 놀이터자 전쟁터였다. 지금도 여느 촌마을을 지나다가 건조실을 만나면 더없는 친철감을 느낀다. 
114    집법기록의(记录仪) 댓글:  조회:138  추천:0  2020-01-02
집법기록의(记录仪)        요지음은 행정집법이 점점 규범화 되고 있다. 과거 향항 영화를 보면 경찰들이 집법기록의를 제복(制服)에 부착한 것을 볼수 있다. 법을 집행할때 경찰은 기록의를 피집행자한테 돌리고 무슨 연고에 의하여 어떤법을 집행하고 있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피집행인에게 당신의 권리와 의무는 무엇이라고 알려 준다. 영화에서나 볼법하던 이런 일을 지금은 우리 주변서도 자주 목격 할 수 있다.          몇해전 여름날 저녁 나는  차를 운전하여 고속도로를 빠져나오게 되였다. 차가 출구를 나오는데 경찰이 다가 오더니 집법기록의를 나한테 돌리고 거수경례를 붙이는 것이였다. 그리고는 가사증과 기동차증을 제시하라고 했다. 기동차를  훝어 보더니 하는 말이 나의 차량에 또 다른 기동차증이 있다고 한다.  그런 일이 없다고 나는 주장했다. 그러자 경찰이 어딘가 기동차증을 가지고 가는것이 였다.         이윽해서 돌아온 경찰이  나와 하는 말이 이것은 작페된 가사증이고 새것이 따로 있다고 한다. 그러면서 다음 부터는 새 기동차증을 소지하라고 주의를 주었다.        후에야 알게 되었는데 내가 소지했던 기동차증은 진짜로 작페된 것이 였다. 어느때인가 기동차 년검을 하게 되였는데 기동차증을 찿지 못하여 새것을 발급 받았던 것이다. 경찰이 나의 차를 세운 것은 내가 년검표식을 부착하지 않았기 때문이였다.        내가 이 사건을  말하는데는 원인이 있다. 법을 집행할때 집법자는 자기의 신분을 밝히여야 하고 현재 무슨 검사를 하고 있고 피집행자에게는 어떤 권리와 의무가 있다는것을 알려 주어야 한다.  될수록 표준화된 언어와 행동을 취하여 자기의 집법에 따른 책임을 최대한 감소하여야 한다. 집법기록의는 피집법자의 언행을 기록하지만 집법자의 언행도 고스란히 기록하니 말 그대로 쌍인검(双刃剑)인것이다.        요지음 고속렬차를 타면서 보니 렬차장들도 기록의를 부착하고 있었다. 허나 그들에게 있어서 기록의는 단순한 기록의에 불과할뿐 집법기록의가 아니다. 왜냐하면 렬차장은 공무원이 아니고 집법인원이 아니기 때문이다.        국무원의 요구에 근거하여 새해 각행정집법단위들에서 집법기록의를 사용하고 있다. 우리 세무계통에서도 새해부터는  규정된 몇가지 집법행위는 무조건 집법기록의를 사용하게 되여 있다. 이제 집법이 한층 더 규범화 될 것이다. 왜냐하면 과거의 일방적인 집법행위를  지금은 집법자와 피집법자의 모든 행위를 기록하고 있기때문이다. 법정에 나간다면 집법기록의가 기록한 내용이 그 어느쪽에 유리할지는 법관의 판단에 맡기여야 한다. 
113    춥다고 움츠러 들지 마라 댓글:  조회:167  추천:0  2020-01-02
춥다고 움츠러 들지 마라        진정 동장군이 왕림하였다. 오늘 낮 기온이 영하12이고  4~5급 바람이 불어 쳤다. 올해치고 제일 추운 날씨였다. 조금만 밖에 있어도 손발이 시리다.  전형적인 겨울 날씨임이 틀림없다. 며칠전에 병원에 갔댔는데 주사실에는 기침소리로 콜록거리는 환자가 가득하다. 날씨의 급격한 변화에 감기환자들이 급증한것같다.         허나 추운 날씨가 매냥 나쁜것만은 아니다. 추울때는 추워야 한다. 난동이라고 겨울날씨가 따뜻하면 그에 따른 피해가 속출하게 된다. 북빙양의 얼음이 녹아 내려 바다수면이 상승하면서 일부륙지가 바다에 잠긴다고 한다. 일본에서 온 친구가 말하는데 과거에는 찌바지역에는 태풍피해가 적었지만 지금은 늘어 난다고 한다. 지구 온난화가 불러온 변화라고 한다.        연길은 분지에 자리 잡은 도시다.  도시외각에는 농촌마을이 산재되여 있고 또 촌주민들은  난방용으로 대부분 석탄을 때고 있다. 그러니 겨울이 되면 매캐란 석탄연기로 도시가 시달리고 있다. 바람이 불지 않는 날 아침 출근대에 모아산에서 연길시내를 바라 보면 도시는 자오록한 연기속에 잠겨 있다. 이런 화면을 바라 보노라면 마음이 서글프다. 연길은 바람이 불것을 요구한다. 찬 바람이 불어야 오염된 공기를 밀어 내고 사람들은 맑은 공기를 마실수 있고 도시가 활력으로 차넘칠수 있다.         동지날부터 시작하여 우리는 겨울내 가장춥다는 39도에 들어 서게 된다. 혹독한 추위가 시작됨을 알리는것이다. 어제 장춘에서 고철을 타고 연길로 오는데 길림역에서 오르는 손님들 날씨가 춥다며 손을 마주 비빈다. 듣는 말에 의하면 혹한속에서 나무도 얼어 터진다고 한다. 하지만 우리 주위에는 추운 겨울을 즐기는 사람들도 얼마든지 있다.         등산운동이 그 가운데 한가지라 하겠다. 등산대원들은 아무리 추운 날씨라고 하여도 결근하지 않는다. 마치 휜눈이 뒤덮힌 산마루에 무슨 금은 보화나 있는 것처럼 등산을 멈추지 않는다. 오히려 추운 날씨를 향수하는것이다. 산봉우리에 오르면 산정을 정복했다는 쾌감으로 피로가 가시여진다.           스키운동도 겨울을 즐기는 전향적인 방식이다. 나의 한친구는 길림 흑룡강등 지방의 스키장을 다 누비였다. 돈있는 사람들은 알프스산맥으로 스키 할려 다닌다고 한다. 진짜 멋쟁이들이다. 친구의 소개에 의하면 스키를 타고 산정에서 날아 내려 오는 그 속도감은 안 해본 사람은 영원히 느낄수 없다고 한다. 일망무제한 천연림 그가운데 넓게 틔인 스키코스는 마치 산정상에서 흰 명주천을 드라운것 같고 그위를 날아 내려오는 스키맨들은 마치 날아 내리는 제비 같다.         등산운동이나 스키운동은 산을 떠날수 없지만 빙상운동은 빙판만 있으면 얼마든지할수 있는 운동이다. 연길시에서는 근년에 브라하통하 빙판을  리용하여 빙상운동을 활발히 펼치고 있다. 아주 총명한 거사라고 본다. 이전에는 영빈교와 무지개다리사이의 빙판을 리용하여 빙상운동을 전개 하던 것이 일약 브라하통하 얼음강판을 리용하는 바람에 빙판의 면적이 대면적으로 증가되였다. 그만큼 코스도 길어 지였고 놀이터도 많이 늘어 났다.         요지음 정부부문에서는 빙설경제라는 단어를 자주 사용한다. 우리 나라에서 동기올림픽주최권을 획득함에 따라 북방지구에서 빙상운동도 활발하게 추진되고 있다. 북방사람들이 겨울철 돈을 팔아 남방에 유람간다면 남방가람들은 기꺼히 돈지갑을 열어 북방에 와서 눈구경 얼음구경 빙설운동을 한다. 누이 좋고 매부 좋은 격이다. 그러니 정부에서 돈이 되는 빙설경제에 대하여 중시하지 않을수 없다.         춥다고 음츠러 뜨리면 점점 더 춥다. 춥더라도 집에서 뛰쳐 나와야 한다. 지금 방한복들은 엷고 따뜻하여 움직이는데 아무 불편이 없다. 밖에 나와야 신선한 공기를 마실수 있고 밖에 나와야 자연과 가까히 할수 있고 밖에 나와야 활기가 넘친다. 
112    북해찰기 댓글:  조회:208  추천:1  2019-12-31
북 해 찰 기         12월초 출장길에 나는 광서쫭족자치구 북해시에 다녀오는 기회를 가지게 되였다.  북해는 광서에서도 최남단에 자리 잡고 있다.  대륙땅끝이 뢰주반도인데  북해는 뢰주반도 왼쪽에 위치하고 있다.  많은 사람들은 북해라고 하면 자연히 다단계 판매를 떠올리게 된다.  그만큼 과거에 사람들의 머리속에 북해의 의미지가 밝지못했던것 같다.             북해는 광서자치구 14개 지구급도시중 한개 도시인데 인구는 200만명으로서 연변인구보다 좀 적은 편이고  면적은3337평방키로메터인데 연길과 도문시면적을 합한것과 비슷하다.  그러니 자연히 인구밀도가 연변에 비하여 높다.  관하에는 3개구 한개현이 있고  2018년 재정수입은225억원이라고라니 우리 연변의 4배가량된다.             북해는 1984년 국무원에서 발표한  14개개방도시 중의 하나다.  거리에 나가 보면 새아빠트들이 즐비하고 집을 파는 거간군들이 여기저기서 불쑥불쑥 튀여 나온다.  몇마디 물어 보았다 하면 사람을 잡고 놓지 않는다.  동북의 로인들의 선택가운데 첫번째로 꼽는 곳이 해남도라고 하면 버금으로 가는 곳이 북해다.  북해는 집값은 해남도애 비하여 싸나 기후와 자연경물은 해남과 비슷하다.  하여 북해에 와서 집을 사는 동북사람들이 많다고 한다.  추운 겨울 따뜻한 북해에 와서 보내는 것도 좋은 일이다.              북해에서 가장 큰 자랑거리가 바로 은탄(银滩)이다.   은탄의 가장 큰 특징이 바로 바다 모래가 은백색을 띠고 또 부드럽다는 것이다.    일찍 일어나는것이 습관된 나는  아침5시가 넘자 무작정 호텔을 나왔다.  북해는 아직도 컴컴한 밤이다.  일조가  우리 연변과 한시간 넘게 차이가 나는것 같다.  12월초 북해 낮 온도가 20도 좌우 밤 온도가 10좌우라고 하니 연변의 초여름 따스한 날씨를 련상시킨다.  나는 가로등 불빛을 따라 한시간 정도 보행운동을 하였다.  가로수로써  종려나무들을 많이 심은것 같았다.            아침 7시가되니 날이 희붐하게 밝아온다.  호텔부근으로 돌아 오는데 무슨 풍경구 같은 시공현장이 보였다.  관리하는 사람도 없길래 일단은 공사현장을 꿰뚫고 안으로 들어가 보았다.  그런데 불씨로 앞이 훤하게 트인다.  바다가로 나왔던것이다.  나는 잰걸음으로 나무숲을 지나 백사장에 들어섰다.           바다가는 너무도 황홀한 모습이였다.  아득히 뻗은 바다가에 은백색의 백사장이 펄쳐져 있었다.  멀리에는 철썩이는 바다가를 조용히 거니는 사람들의 모습이 보였다.  그리고 정박한 물고기잡이 어선들위의 빨간 등불도 보인다.  발밑에는 부드러운 촉감을 주는 흰색의 모래불이 끝없이 펼쳐져 있었다.  걸음을 멈추고 앉아서 한웅큼 잡아 보니 흰모래는 마치 곱게 가루낸 쌀가루같이 어여쁘다.  세상에 나는 흰 모래를 처음으로 접해 본다.             이윽고 동녘 바다가에서 해가 불끈 솟아오른다.  동쪽을 바라보니 하늘은 온통 붉은색이다.  하루의 시작을 알리는 일출은 너무도 황홀하였다.  돌아서서 서쪽을 바라보니 방금까지도 너울로 얼굴을 가린 신부같이 아리송하게 보이던 백사장이  언제 그랬냐 싶게 더욱 가깝게 더 환하게 안겨 온다.  해볓을 받은 은탄이 너무도 환상적이다.          은탄은 마치 처녀의 주릅잡힌 치마자락같이 부드럽고 눈부시다.  가히 범접못할 깨끗함과 아름다움을 겸비하였고 사람들로 하여금 무한한 추구와 련상에 사로잡히게 한다.  허나 정작 마주하면  너무도 부드럽고 너무도 대범하다.  천만년의 파도의 세례를 받은 은탄은 두팔을 벌려 세상 방방곡곡의 손님을 반긴다.  그이름도 만천하에 날리여 "천하제일탄"이란 미명을 가지고 있다.           북해의 또하나의 자랑거리는 금해만 홍수림(红树林)이라는 풍경구다.  총서기가 다녀간후로 홍수림을 찿는 유람객들이 더욱 많아지였다고 한다.  하루의 일과를 마친 어느날 늦은 오후나는 홍수림을 찿았다.  국가급산구(山口)홍수림생태자연보호구는1991년10월에 국무원으로부터 첫번째국가5대해양자연보호구가운데 하나로 평정 받았다고 한다.  홍수림풍경구는 은탄풍경구과 련결되여 있는데 시내와는 그리 멀리 떨어져 있지 않았다.          홍수림이라고 하면 사람들은 나무가 붉은가하고 생각할테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  잎도 푸르고 줄기도 푸르다.  홍수림은 열대 아열대해안조간대(潮间带)의 특유한 태생(胎生)목본식물군락으로서 "해상산림"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다.  밀물이 들어 오면 잠기고 썰물이 지면 모습을 나타내는데 해수를 정화하는 작용을 한다고 한다.           금해만 홍수림풍경구는 방파제를 따라 건설한 공로를 위주로하여 홍수림안쪽의 잔도를 따라 구경하는 시스템이였다.  잔도를 따라가며 뻘을 내려다보니 얼기설기뒤엉킨 나무들이 진흙속에 뿌리를 내리였다.  썰물이 진때라 바다물은 저 멀리로 빠져나가고 나무뿌리사이로 새끼게며 이름모를 해양동물들이 기여 다니는것을 볼수 있다.  혹간 내가 알아보는 조개 새끼낚지도 보인다.  이홍수림에만 해도 12종의 식물과 백여종의 조류 곤충 조개가 서식한다고 한다.  자연보호구를 설치하였기에 여러가지 식물과 해양동물들을 보호할수 있었다.           잔도를 따라 걸어가며 홍수림을 바라보노라니 저멀리 뻘에서 조개 줏는 어민녀인들 모습이 보인다.  그녀들은 모여서 작업하는데 참대로 결은 모자를 쓰고  꽃다지 천으로 지은 이쁜옷을 입고 있었다.  가까이에온 어민들을 살펴보니 모두 옆구리에 그물망태기를 차고 있었는데 수확한 어물들로 가득했다.  물어보니 작은 조개는 한근에 5원이고 큰것은 10원이라 한다.            한참 걸어가노라니 석양이 물든다.  서쪽하늘은 점점 붉게 물들고 진종일 대지를 밝혀주던 태양이 서서히 바다속으로 들어 간다.  그때  바다도 붉어지고 홍수림도 붉어진다.  하루의 일과가 끝날무렴 때아닌 회오라기 몇마리가 홍수림에서 날아 오른다.  바다와 홍수림과 일몰이 조화되여 아름다운 한폭의 풍경화를 연상시키였다.           북해는 아름다운곳이다.  은탄도 있고 홍수림도 있는 아름다운 유람도시다.  아직까지 어민들의 소박한 인품이 보이는 곳이기도 하지만 또한 도약을 꿈꾸는 도시다. 
111    중경샤브샤브 댓글:  조회:165  추천:0  2019-12-30
중경샤브샤브         오전에  시내에 나왔는데  돌아 갈때는 이미 정심때가 되였다. 나는 안해보고 정심이나 먹고 집에 가자고 제의하였다.  안해도 그러자고 하여 우리는 미식거리를 찿았다. 뭘 먹을가 하고 여기저기를 둘러보는데 중경샤브샤브 라는 간판이 눈에 띄였다. 오래 동안 매운음식을 안 먹었더니 매운맛이 당기는 같았다.        문을 밀고 들어가 보니  아주 정갈하게 꾸며진 식당이였다. 이른 정심인데도 벌써 사람들이 북쩍거리고 있었다. 우리는 창문옆 테불을 자리하고 앉았다. 주인이 나와서 뭘 드시겠는가고 묻는다. 이집은 여러가지 식자재를 그릇에 담아 손님이 자기로 가져다 먹게 된 시스템이였다.         국은 전자렌지로 끓이고  있었다. 우리는 원앙가마를 요구하고 매운것과 안 매운 두가지를 자유롭게 선택 할 수있게 하였다. 일단 양고기는 매운 국가마에  야채는 안 매운국가마에 넣었다. 이윽고 매운 붉은 가마가 먼저 끓었다. 그것은 국에 기름이 많기 때문이다. 긴 참대 젓가락으로 양고기를 집어 내여 후후 불어 가며 머리를 뒤로 젖히고 입에 넣었다.         와___아. 맵다. 그리고는  후_후 하며 들이 숨을 연거퍼 쉰다. 그것은  후죠(胡椒)의 매운맛 때문이다. 고추의 매운맛과 후죠의 얼얼한 맛이 번갈아 힘을 발산하는것 같았다. 입만 매운것이 아니라 온몸이 열기를 발산하는것 같았다. 너무 매워서 나는 차물을 마시였다. 하지만 또 붉은 탕에 젓가락이 간다. 이것이 바로 중경샤브샤브의 매력일것이다. 후_후하며 고기며 야채며 건두부며를 먹었다. 이마에서는 저도 몰래 땀이 줄줄 흘러 내린다.         사천료리의 특점이라면 마라(麻辣)를 손 꼽을수 있다. 중국서남지방에는 "무섭지 않은 것이 매운것이도다. 매운것이 무섭지않도다. 맵지 않을가 무섭도다. "(不怕啦,辣不怕,怕不辣)라는 말이 있다. 뜻인즉 사천 귀주 호남사람들이 매운것을 무서워하지 않고 즐겨 먹는다는 말이다. 듣는 말에 의하면 하룡원수님께서 "사천사람들이 무서워하지 않은 것이 매운것이고 귀주 사람들은 매운것을 무서워하지 않고 호남사람들은 맵지 않을가 무서워 한다"고 했다 한다. 우리 조선사람들도 매운것을 즐기지만 우리의 매운맛과 사천의 마라맛은 틀린다. 우리는 고추의 매운맛과 고소한 맛을 선호한다면 그네들은 매운맛과 얼얼한 후죠의 혼합된 맛을 즐긴다.         서남쪽사람들이 마라를 즐기는데는 원인이 있다고 한다. 서남쪽에는 비가 많이 오고 흐리는 날씨가 많다. 특히 겨울이 되면 온난 설비가 갖추어 지지 않은 그 동네의 날씨는 사람들로 하여금 더욱 냉기를 느끼게 한다. 습기와 냉기를 머금은 몸뚱아리는 어서 빨리 몸속의 습기와 랭기를 몰아 낼 것을  제의 한다. 그  해결 방법중에 가장 경제적이고 간단한 방법이 바로 마라음식을 섭취하는것이다.          전하는데 의하면 마라탕은 명말청초 중경시 가릉강반 조천문(朝天门)등 부두 품팔이군들의 음식이였다고 한다. 그때 들어간 주요 식자재들로는 소채갑 소피 동물의 내장이고 가마는 큰 소래로 대처하였다고 한다. 그러다가 19세기 20~30년대에 대거 류행하였고 30년대에는 고급식당에서도 중경샤브샤브를 경영하였다고 한다.          연길에서 중경샤브샤브가 소문낸것은 어제 오늘의 일이아니다. 사천샤브샤브의 독특한 매운맛과 중독성이 강한 향신료맛은 사람들로 하여금 저도 몰래 다시 발길을 돌리게 하는 마력이 있다. 연길식객들도 례외가 아니다. 중경샤브샤브가 연길에 들어 오자 대뜸 사람들의 환영을 받았다. 처음으로 연길에 들어 올 때가 아마 1994년 좌우라고 생각된다. 그때 중경샤브샤브집 위치가 중앙소학교  근처라고 생각된다. 친구의 추천으로 몇번 먹어 보았는데  얼마나 맛있는지 한주일에 한두번 다닐 정도였다. 당시 공부연(孔府宴)이라는 술이 흥행할때였는데 우리는 컵에 술을 반쯤 붓고 그위에 생계란을 까서 부어 넣었다. 그리고는" 동방에서 태양이 솟네"하며 한모금에 넘겨 버리였다. 그리고 그 얼벌한 양고기라던지 건두부를 건져 안주로 하였다. 그때는 아마 흰술이라야 말로 중경샤브샤브에 맞는다고 생각 했던 같았다. 아마 찰떡궁합쯔음으로 여기였다.          중경샤브샤브를 먹기 가장 적합한 시기는 바로 겨울철이다. 헌데 술소리가 나온김에 하는 이야기지만 겨울에는 특별히 술을 조심하여야 한다. 매운 중경샤브샤브에 소주를 겯들어 마시노라면 웬만해서는 그 자리에서는 취하지 않는다. 마치 술량이 늘어난 같은 느낌이 든다. 허나 막상 술상이 끝나고 밖에 나와 찬 바람을 맞으면 당금 취 할 때가 있다. 나도 그런 경험을 몇번 해본 적이 있다. 그러니 요지음 같이 추운 날씨에는 소주도 적당히 마시고 일찍 귀가하는것도 상책이다.          오래전에  한번은 서울에 가서 며칠 있게 되였다. 이런 저런 음식도 먹어 보았지만 별로 거뿐한 느낌이 없었다. 말말중에 나는 친구보고 "여기 마라탕집이 없냐"고 물었다. 헌데 대답은 너무도 충격적이 였다. 있을 뿐만 아니라 주인장은 진짜 사천에서 온 사람이라고 했다. 하여 우리는 이국땅 대림동에서 중국 사천마라탕을 맛보게 되였다. 이국에서 맛보는 마라탕은 맛이 일품이 였다. 얼마전에 듣을 려니 지금 한국에서 마라탕이 인기가 있다고 한다. 전철부근의 마라탕 집들은 대박이 난다고 한다.      음식이란 이런것인가 보다. 맛있는 음식은 지방과 관계없이 국경과 관계없이 사람들이 즐겨 먹고 또 전파시키는가 보다.  
110    눈보라치는 아침 댓글:  조회:498  추천:0  2019-11-18
눈보라치는 아침        며칠전부터 일기예보에는 눈이 온다고 하였다. 온다 온다하더니 지난밤 큰 눈이 내리였다. 이른 아침 일어나 큰길을 내려다 보니  눈이 내려  거리는 더없이 환하게 보인다. 가로등 불빛이 차겁게 거리를 비춘다. 이른 때라 차량도 적다. 저 멀리 고속철역이 평소보다 더 가깝게 보인다. 대지는 어디라 할것없이 일매지게 힌눈으로  덮히였다.  주민구역내 작은 광장을 내려다 보니 은은한 불빛을 뿜는 상점집 등불과 밤새 내린 눈과 조화되여 마치 무대의 한 배경같이 보인다.         우리 동네는 강가에 있다 보니 바람 또한 세차다.  집안은 따뜻하건만 기승치는 바람소리 그리고 눈보라를 보노라면 완연한 겨울이 왔음을 알려주고 있다. 이제 아침 출근이 문제다. 이처럼 눈이 많이 내린 날에는 교통사고가 빈번하다. 초보들이 운전하고 나왔다가 손해보는 경우도 허다하다. 밖에서 눈치는 삽이 바닥을 긁는 소리가 띄염띄염 들려오기도 한다. 나도 일찍나가 동네 눈치기 로동에 참가하여야 겠다.               눈을 치려고  밖에 나와 보니 지난밤에 내린 큰 눈으로 대지는 온통 백설세계로 변하였다. 마치 하느님이 요술을 피워 하루밤사이에 대지를 동화세계로 이끌어 간듯 하다. 산도 들도 도시도 농촌도 모두 올해 첫눈의 세레를 받았다.  주민구역내 운동기구에도 한뼘 정도의 눈이 덮히여 있었다. 모든것이 눈속에 파뭇혀 있었다.  자가용차들이 늦은 속도로 꿈지럭 거린다.         동네 경비원과 청결원 몇명이 부지런히 눈을 치고 있었다. 첫눈은 마치 햇솜마냥 부드럽고 깨끗했다. 차가 지나지 않은곳의 눈은 치기도 쉽다. 허나 차가 지난면서 굳어진 눈치기는 힘들다. 비록 물업비용을 내고 있지만 시간날때 내려 와서 눈을 치우는것도 의미 있는 일이라고 본다. 부지런히 일하다 보니 머리에서는 땀이 돋는다.       이런날에는 걸어서 출근하는것도 좋다. 공기는 엄청 차거우나고 깨끗해서 좋다. 가로수에 내린 눈은  너무 무거워 당금 나무가지가를 끊어버릴듯 하다. 거리에는 평소보다 보행으로 출근하는 사람들이 많다. 안전에도 도움 되고 또한 첫눈을 만끽한다는 점에서 일거 량득이 아닐수 없다.       올해는 눈이 늦게내린 셈이다. 11월 중순인데 첫눈이 내렸으니 이만하면 밭농군들에게도 채밭주인들에게도 충분한 시간적 여유를 준 셈이다. 농군들에게 있어서 절기는 철저히 지키야야라는 불문률이다. 씨앗을 넣을 때 넣어야 하고 거두어 드릴때 거두어야 한다. 몇년전에 폭설이 내린적이 있었는데 그때까지 촌에서는 옥수수를 거두어 들이지 못한 상황이였었다. 정부에서는 기관공무원들을 동원하여 농민들을 도와 폭설의 피해를 줄일것을 동원하였다. 사람들은 눈이 무릎을 넘는  밭에 들어가 옥수수를 뜯어 내였다. 절기를 맞추어 거두어 들이였더면 훨씬 쉽게 할수 있는 일이였다.        이제 한달 남짓하면 올해도 막간다. 올해 제반 사업들은 어떻게 하였는지 총화해야 할 때도 되였다. 완수한 사업들은 총화를 잘  하여야하고 못 완수한 사업들은 하나하나 렬거하여 시간배치를 잘해야 한다. 아직은 시간이 있다. 그렇다고 미루기를 한다 던가 대충대충 얼렁뚱땅해서는 안된다.       년말이되면 각 부서마다 일손이 바빠진다. 그렇지만 행사는 행사대로 이루어져야 할것이다. 우리화고 365반급에서는 년말이면 송구영신 모임을 가진다. 단임선생님을 모시고 지나온 한해를 총화하고 다가 오는 한해를 기획한다. 동창들은 그날을 기약한다.       눈보라치는 아침 이제야 겨울이 온것 같다. 겨울은 겨울같은 날씨가 있어야 사람들건강에도 좋고 자연에도 좋다. 
109    총각김치 댓글:  조회:459  추천:1  2019-11-06
  총각김치            총각이란 결혼을 하지 않은 젊은 남자를 말한다.  언제부터인가 우리 연변에 총각이란 이름을 붙인 김치가 나왔다. 국어사전을 찿아 보니 굵기가 손가락만 한 또는 그보다 조금 큰 어린 무를 무청째로 여러 가지 양념을 하여 버무려 담근 김치를 총각김치라 한다.        배추김치는 처녀김치 무우김치는 총각김치라고 했다. 김치의 생김생김을 두고 하는 말하는것  같다.  총각(總角)이란과거 결혼을 하지 않은 젊은 남자를 가르키였다.  총각은 머리를 묶고 상투를 쓰지 않았다고 한다.  총각김치는 흰무의 무청을 따지 않고 무우와 같이 절구는데 밥상에 올릴때 무청을 돌돌 말아서 접시에 담는다. 그러니  머리를 묶은 총각처럼 생기였다고 얻은 이름이 아닐까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배추김치는 왜서 처녀김치라 할가?그 건 암만 생각해도 알바 없다.       가을 총각무는 9월초순에 심어도 먹을수 있다.  일반적으로   50일좌우면 수확할수 있다.   금년에는 오이와 도마도 넝쿨을 걷우어 내고 그 자리에 총각무를 심었다. 물도 주고 비료도 주었더니 총각무농사가  잘되였다.  야들야들한 파란 잎사귀 그밑에 숨어 있는 백옥같이 희고 고운 총각무 보기만 해도 자기농사에 대해 만점을 주지 않을수 없다. 웃음주머니가 흔들거리였다. 나도 이만하면 로농수준이다.     우리는 우선 무를 뽑아 지하수에 씻었다. 시들고 마른 잎은 뜯어 버리고 몸통이에 묻은 흙은 솔로 닦아 버리였다. 그뒤 여러면 휭구고 나니 총각무우가 한결 희고 푸르러 보인다. 한3분의 1가량밭의 무를 뽑았는데도 두식구가 먹기에는 충분한 량이였다. 나머지는 형님네 몫이다. 소금물을 비닐통에 부어 넣고 또 총각무우를 가득 채워넣었다. 이로써 초절이가 끝난 셈이다.       우리집에서는  매번 먹을 때마다 조금씩 꺼내여 양념장에 버무려 먹는다. 지뻘건 고추양념을 바른 총각김치는 쨍하기도 하고 사각사각하기도 하고 얼벌하기도 하여 밥 도둑이나 다름 없다. 자꾸 젓가락이 가게 된다. 총각김치는 외모상에서 무와 무청이 붙어 있는 상태라 보기도 좋고 먹기도 좋다. 한꺼번에 무맛과 무청맛을 다 볼수 있는 김치다. 몸뚱이는 희고 머리발은 푸르다. 좀큰 무우는 반이나 네등분으로 쪼개여 담구면 먹기가 쉽다. 하지만 그것도 양념을 버무릴때 하는 일이지 너무일찍 무우에 칼을 대면 무맛이 변하게 된다.     한국 총각김치 양념에는 여러가지 재료가 많이 들어 간다. 우리도 그것을 많이 배워 오고 있다. 고추가루 생강 소금은 물론이고 무슨 멸치젓 찹쌀풀 물엿 매실 쪽파등도 들어 간다고  한다. 그러니 맛이있을수 밖에 없다.             지금은 무가 철모르기나 다름없다. 봄부터 가을 까지 내내 싱싱하고 질 좋은 무를 수확할수 있다. 그러니 총각김치도 사철 먹을수 있는 김치로 되였다. 로인님들 말에 따르면 날씨가 따스한 경상북도에서는 김치움이라는것이 없었다고 한다. 그늘진쪽에 땅을 한삽정도로 파고 김치독을 앉히면 끝이라 한다. 땅의 기운을 받으니 자연히 시원할것이요 날이 따스하니 발효가 잘 된다고 봐야 할것이다. 어떤집에서는 서까래나 옥수수대로 움막 같은 것을 설치하고 그아래에 김치독을 앉히기도 한다고 했다.    총각김치는 배추김치와 달리 많이 하지 않는다. 배추김치는 복아 먹어도 되고 국을 해도 되고 밴새속을 해도 되지만 총각김치는 시굴면 맛이 간다. 하기에 총각김치는 적게 담구어 제때제때에 먹는 것이 좋다. 
108    배추김치 댓글:  조회:459  추천:0  2019-11-05
      배추김치         촌에서는 이맘 때면 배추김치를 담구 었다. 너무 일찍이 담구면 쉽게 시굴어 질수 있고 너무 늦어 지면 가을 한철 먹거리가 적어 진다. 매개 가정마다 김치를 담구는 시간은 좀씩 다르지만 대체적으로 촌에서 탈곡철이라고 보면 된다.       지금은 따로 배추김치 탈곡철이 없다. 왜냐하면 수확기로 가을과 탈곡을 같이 하기 때문이다. 과거에는 인력으로 가을하고 묶고 하지고 운반하고 동네에서 탈곡마당을 공구고 탈곡하던것을 지금은 수확기가 한번에 끝내여 버린다.     그러니 탈곡철이란 말도 없어 질수 밖에 없다. 눈이 내리지 않고 큰 바람이 불어 치지 않는다면 수확이 조금 늦어도 별로다. 기계로 가을하면 바로 벼긁을 별수가 없기 때문에 벼집단을 얻을 수도 없다.      배추김치를 담구는 절차는 대체적으로 세개단계를 거쳐야 한다.      첫번째로 질 좋은 배추를 마련하여 해볓에 쪼여 시들게 한다. 그래야 배추가 상하지 않는다. 전에는 조선족마을에서 채소농사 하는 사람들이 적었다. 마을에서 심기도 하였으나 포전관리가 따라가지 못하는 등 페단으로 질좋은 배추를 얻기 힘 들었다. 한족채대에서 심은 통배추는 포기를 쪼개면 노란 속잎이 나오는데 사각사각 하고 맛이 달았다.   배추농사에서 관건은 시비와 물주기 작업이다. 제때에 물을 주지 않으면 배추 잎이 질기고 속이 탄탄하게 앉지 못한다. 식구가 많은 집에서는 보통 1000근 정도의 배추를 마련하게 되는데 겨울철 채소가 부족하던 그 세월에 배추김치는 주요 채소 래원이였다.     낮에는 배추를 해빛에 쪼여 어느 정도 수분을 빼여 버린다.  저녁이 되면 배추뿌리은 밖으로 잎은 안으로하고 둥그렇게 쌓아 올린다. 마지막으로 헌 이불 같은것으로 위를 덮어 주어야 하는데 주요하게 얼굼을 방지하기 위하여 서였다. 이런 작업을 열흘정도 거친다. 한해 겨울 먹을 김치를 할 배추이기 때문에 모든 사항을 허투로 대할수 없다.         두번째 순서로는 초절이다. 지난해에 사용했던 김치독들을 김치움에서  꺼내여 잘 씼는다. 김치란것은 발효음식이기 때문에 김치독을 잘 씼지 않으면 독에 붙어 있던 효소균이 번식되여 새김치에 곰탈이 나게 할수 있다.  맑은 물로 여러번 깨끗하게 휭구어야 한다.  마감으로 벼짚에 불을 붙여 독안에 여러번 돌려 준다. 불로 균을 잡는 절차인데 우리 선조들의 지혜를 보여 주는 대목이기도 하다. 그리고 소금물을 독에 붓고 배추를 한포기 한포기씩 곱게 독에 넣는다.  꽁꽁다져 넣은후 돌로 위를 눌러준다.  이때 배추는 반드시 소금물에 잠기여 있어야 한다. 왜냐하면 배추가 공기와 접촉하면 변하기 때문이다.       마감으로 덮개를  잘 덮어 주고 돌로 눌러 준다. 그것은 주요하게 바람에 덮개가 날려 다거나 짐승들이 법근하여 덮개를 번져 놓은 것을 방지하기 위하여서다.           때를 맞추어 농촌에서는 김치양념만들기 위한 작업에 들어 간다. 고추가루 마늘 생강은 필수다. 집체농사를 하던 시절에는 촌에 회의가 많았다. 낮에는 밭에 나가 일하고 저녁이면 모여서 회의를 하는데 대체적으로 상급회의정신 전달이거나 계급투쟁에 관한 학습과 토론이다.       이때면 녀성들은 마늘을 소버치에 답고 회의에 참가하기 일쑤다. 남성들은 웃방 쪽에 모여 앉고 녀성들은 정주칸 가마목쪽을 차지하게 된다. 대장는 회의를 소집하는데 집중하고 남자들은 초담배를 피우는데 집안에 연기가 자옥하다. 녀성들은 소버치에 담아온 마늘을 까기에 여념없다. 지금 시장에서 파는 마늘은 쪽이 크고 까기도 쉽지만 전에는 토종마늘이라 쪽이 작고 껍질이 엷어 까기가 힘들다. 총명한 사람들은 마늘을 부수고 물을 뿜어 수분을 주는데 그러면 상대적으로 마늘 까기가 쉬워진다. 허나  껍질이 연한 붉은 색을 띠는 토종마늘은 즙이 많고 맛이 월등하다. 회의가 끝날 역이면 마늘 까기 작업도 완성되여 간다.       다음은 순서는 깐 마늘과 정선한 생강 굵은 소금과 고추가루를 머리에 이고 방아간에 간다. 어려서 외할머니와 어머니같이 쌀가루 내려 방아간에 자주 갔었는데 김치양념 할 때도 예외가 아니였다. 먼저 마늘과 소금을 두르고 방아질하다가  거기에 고추가루를 넣는다. 그래야 마른 고추가 날리지 않는다. 쿵덕쿵덕 내가 방아를 딛으면 어머니는 밥주걱으로 뱁싸게 양념을 뒤번져 놓는다. 마늘 양념장을 곱게 찧으려면 골고루 자주 번져 주어야 한다. 아니면 통마늘이 나오거나 고추가루와 마늘이 잘 섞여 지지 않는다. 한해 배추 김치를 담구려면 양념장만해도  여러 소랭이를 준비하여야 한다.      세번째 단계가 바로 김치를 담구는 날인데 제일 중요한 작업이다. 우리집에서는 통상적으로 버치를 리용하였다. 먼저 초절이한 배추포기를 맑은 물에 휭구어 준다. 소금물이 다 빠지도록 여러번 씻어야 하는데 그렇지 않을 경우 김치가 너무 짭게 되여 맛이 없다.  다 씻은 통배추를 한포기씩 버치에 올려 놓고 물을 찌운다. 다음  배추속으로 부터 바깥으로 한잎한잎 번져 가며 손으로  양념장을 골고루 발라 준다.       배추김치를 담군다기도 하고 번진다고도 한다. 아마 한잎씩 번져가며 양념을 바른다는 의미에서 나온 말일지도 모른다. 배추김치는 손이 많이 가는 작업이다. 하여 동네에서 녀성들이 도우려 오기도 한다. 대게 손바꿈이라고 보면 된다.  남정들도 할일이 많다.  물을 날라 주어야 하고 완성된 김치를 움에 운반하고 독에 넣어야 한다. 어떤 집들에서는 무우를  손바닥 만큼씩 넓쩍넓쩍 썰어서 김치독맨 밑에 넣는데 그것도 별미다.       촌에서 배추김치를 담구는 날은 큰행사날과 다름 없다. 왜서 글 첫머리에 탈곡철에 김치를 담군다고 했냐하면  그때가 배추김치를 담구는 가장 적합한 기온을 갖추었기 때문이다. 갓완성된 배추김치를 소랭이에 듬뿍 담아 탈곡장에 내온다. 그러면 탈곡에 지친 녀성들이 둥그렇게 모여서서 빨간 양념이 가득 발린 배추김치를 손으로 쭉쭉 찟어 입에 넣는다. 마늘의 톡쏘는 맛과 생강의 당기는 향 달짝비근한 고추가루와  짭잘한 알소금의 맛이 조화되여 사람들의 입맛을 사로잡는다. 사람들은 후후하면서도 입가에 고추양념을 바르면서도 손은 저도 몰래 김치소랭이에 간다. 배추김치를 탈곡장에 내 오는데는 또한 자기의 배추김치솜씨를 자랑하려는 뜻도 은근슬쩍 비쳐져 있다.     우리 민족은 김치를 떠날수 없다. 장춘에서 대학공부할때 우리 학교 담장밖에 배추밭이 있었다. 저녁이면 몰래 담장을 넘어 우리는 배추를 훔쳐 오기도 하였다. 서툰솜씨로 세수소랭이에 담군 초절이도 아니한 막김치였건맛 별맛이였다. 우리 침실 한족친구들도 먹어 보고는 맛있다고 야단이다. 자기들이 배추를 구해올테니  해달라고 하기도 했다.       촌에서 먹거리가 귀하던 그시절 배추김치는 절반 량식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였다. 온동삼 김치가 밥상을 떠날 때가 없었다. 시래기국에 밥 한그릇  그리고 밑둥이를 썩둑 자른 배추김치 한포기 이것이 전부의 밥상이였다. 우리는 그것을 먹고 자랐고 힘을 키웠다.      한번은 서울의 어느해장국집에서 밥을 먹게 되였다. 뼈국한사발과 공기밥이 나오는데 김치는 자기절로 떠먹느라고 하였다. 부엌옆에 김장독이 있었는데 벽에는 "먹을 만큼 담고 랑비을 하지 맙시다. 김치는 우리의 자존심입니다"라는 글귀가 붙어 있었다.       글을 보면서 나는 뭔가 뭉클 해오는 감이 들었다. 김치는 우리의 자존심이다. 그렇다. 김치는 비록 산해진미가 아니지만 비록 값비싼 재료로 만든 음식이 아니지만  우리에게 특수한 감정이 있다. 우리민족은 김치에 밥을 먹고 일하고 자식을 키우고 공부시키였다. 비록 초졸한 밥상이였지만 우리는 그것을 먹고 자랐다. 김치는 단지 먹거리라는 범주를 떠나 고생 많던 과거에 대한 회억과 옹기종기 아이들이 모여 앉아 밥먹던 그시절을 환기시키는 매개물이 되였다. 우리는 우리 것을 아끼고 지키여야 한다. 우리가 김치를 가득 담아 내오고 먹지 않고 버린다면 남들도 우리 음식을 귀중하게 여기여 주지 않는다. 김치는 우리의 자존심이다.    김치움에서 방금 내온 시원한 배추김치 허연 밑둥이를 썩둑 자른 배추김치 생각만해도 슬슬 군침이 돈다. 
107    사랑이 뭐길래 댓글:  조회:629  추천:1  2019-10-21
사랑이 뭐길래          요지음 퇴직하였거나 퇴직을 앞둔 부모들에게는 새로운 일거리가 생기였다. 바로 손자손녀 보는 일이다.결혼한 자식들이 바쁘다고 아우성치는데 모르는체 할수도 없다.        60 년대 출생한 부모들은 위로는 부모님한테 효성했지만 자식들 한테 소외당한 세대들이다.  부모님들 모시랴 자식키울랴 출근할랴 눈코뜰새 없이 보내다가 이제 좀 숨돌릴까 하니 또 일거리가 생긴것이다.  이전에는  아이를 자기가 낳고 자기로 양육하였다면 지금은 낳는것과 양육하는것이 점차 분리되는 시대를 맞이하는 같다. 그리고  지금 젊은이들은 자기애를 낳고도 무슨 누구를 위하여 큰  일을 해놓은것처럼 으시대기가 일쑤다.         과거에 마나님들이 애를 낳기만 하고 영아양육은 어멈들이나 아환들이 하더니만 지금 젊은축들은 자기 아이를 의레 부모님들이 돌봐 주려니 한다. 돈 있는 집은 괜찮으나 경제상황이 넉넉하지 못한 집들에서는 꼼짝 못하고 불려 간다.  이렇게 하는데는 자식이 대학생이건 연구생이건 박사생이건 별로 상관 없다.  하나같이 부모를 시켜먹으려 하고 있다.     부모가 아이를 볼경우 경제적으로 절약 되고 질적으로 담보 받게 되고 게다가 집안일까지 해줄수  있는 일거 삼득의 우점이 있으니 말이다. 자식들이 그러한 심리상태를 가지게 된데는  부모에게도  책임이 있다.      부모들도 자식들의 곤난을 알고 남음이 있다.  손자 손녀와 가까하 하고 싶은 것도 사실이다. 한도시에서 생활한다면  어느정도 보모노릇 해봐야 별로 관계 없다. 허나 대도시라든지 외국에 가서 생활하는 자식들의 뒤바라지 할 경우에는 상황이 전혀 다르다.        손자손녀가  영아일때는 어쩌랴 싶어 보아 주었더니 유치원 가도 봐 달라고 한다. 자기들이 출퇴근 할려니 시간이 없으니  애들을 유치원에 보내주고 데려 오라고 한다. 참고 참아서 학교가기전까지 돌봐주었더니 소학교 저급학년까지만  더 봐달라고 한다. 원래 대도시나 외국에는 집값이 하도 비싸다 보니 방면적이 보편적으로 작다. 연길집들은 웬만하면 백평방이 남는다. 작은 집에서 여러명이 생활하다 보면 불편하기로 말이 아니다. 하여 남편들은 다시 집에와 홀로 생활하는 편이 적지 않다. 직장에서 존중 받고 사회에서 나노라 하던 사람들이 새로운 시대 리산가족으로 전략되고만 것이다.       우리 주위에는 보모역을 하는 부모들의 이야기를 많이 들을수 있다. 어떤 분들은 북경 상해같은 대도시에 달려 가서 어떤 분들은 한국 일본 미국에 가서 까지도 자식들  보모노릇을 한다.        북경에 사는  친구가 말했다. "아빠트 소구역에 가보면 외지에서 온 부모님들이 가득혀. 말씨를 들어보면 전국 각지 다 있어요. 하나 같이 손자손녀 보모역 할려 왔지"   미국에간 친구가 말했다. "영어를 모르는 대륙에서 간 부모들끼리 모여서 한담하고 그래요. 시간 맞추어 유치원 뻐스를 마중하고. 말이 안통하니 답답하지"       누가 부모님한테 제일 효도하냐고 조사해보았는데 배운것이 많을 수록 효도하지 않았고 적게 배운 자식이 더 효도한것으로 나타 났다. 이런 현상이 절대적인것은 아니지만 그 배후에 현실적인 문제도 내포되여 있다. 공부를 잘하여 북경 상해등 대도시에서 대학공부를 하고 외국에가서 연구생 공부를 하고 타향에서 사업하고 생활하게 되였다면 언제 효도할수 있겠는가.      효도란것이 무슨 절대적으로 경제적으로 돕는다는것이 아니다. 경제적으로 보다도 더 나가서 생활상에 보살펴 드리고 정신적으로 기탁이 되여주고 심지어 아침저녁으로 인사드리고 말동무 하여 주는것도 효도다. 지금 세상에 효도란 물질적인것을 넘어 정신적인 안위와 보살핌이라 하겠다. 아플때 찿아 뵙고 병원에 모셔가고 답답 할때 안위해주고 이런것이 아니겠는가.        얼마전에 위챗에 오른 어떤 부모가 쓴 글을 보게 되였다. 부모가 결혼을 앞둔 자식 보고 물었단다.  너희가 결혼하는데 어떻게 치루었으면 좋겠느냐고 . 하니 아들이 하는 이야기가 기왕이면 잘 해주었으면 좋겠다고 하더라 한다. 그래서 일생의 적금을 다털어 결혼을 시켜주었다. 나이를 먹고 아프고 하니 자식한테 말했다 한다. 나도 아프고 하니  병원도 가야 하고 약도 먹어야 한다고. 그랬더니 자식하는 말이 왜서 젊어서 보험에도 들고 그러지 않았냐고 반문하더란다.         이글을 보고 나는 깊은 사색에 잠기였다. 교육의 실패를 실감하는 시각이였다. 나는 이 이야기를 안해에게도 아들에게도 하였다. 아들애가 우리를 보면서 시원하게 말했다.   "근심 말아요. 내가 모실게요" 말로라도 감사한 일이였다.       자식 자리우는것이 무슨 효도를 받기 위한것은 아니다. 헌데 요지음 젊은이들이 부모님한테도 너무나도 리기적이다. 어떤 젊은 부부는 자기애를 부모집에 보내고 자기들끼리는 전자유희놀려 간다고 했다. 한심한건지 아니면 철이 못 든건지모를 일이다. 모든것을 자기중심으로 하다보면 부모님한테도 잘 할수 없다.       그리고 해외에 나가 직장을 구한 친구들도 피차일반이다. 국내에서 하던것과 똑같이 한다.     어느대학에서  부모님들의 희망수명에 대하여 설문조사한바가 있다. 헌데 생각외로 부모님들의 사랑을 가장 많이 받고 교육경비도 엄청 많이 써가면서 공부시킨 자식들의 답이 너무도 빗 나갔다. 오래 앉기를 바라지 않은것이다. 참으로 한심한 일이였다.      사랑이 뭐길래. 내리 사랑이라고 하지만 할 말은 하여야 한다. 교육이 따라가지 못하면 아이들 하자고 하는 대로 방관하면 결국은 자식을 해치는것이다. 적당히 지적도 하고 거리도 두어야 한다. 
106    갑돌이와 갑순이 댓글:  조회:555  추천:1  2019-10-18
갑돌이와 갑순이       «갑돌이와 갑순이» 이노래는 많은 청소년 남녀들이 불렀고 또 그들의 심금을 울리였다.  내가 처음 이노래를 접한 것은 70년대말 즈음으로 기억된다. «눈물젖은 두만강»,« 나그네 설음»,« 갑돌이와 갑순이» 등 노래가 불러지기 시작되던 시기였다.       갑돌이와 갑순이는     한마을에 살았더래요     그들 둘은 서로서로     사랑을 했더래요        내가 이 노래에 인상 깊은 것은 친구판(朋友版) «갑돌이와 갑순이»사연과 관련된다. 친구는(아래서 부터는 갑돌이라고 부르자) 웃동네 살았고 그가 사모하던 녀자애(아래서 부터는 갑순이라고 부르자)는 아래 동네에서 살았다.        사랑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그저 남자 녀자에 어섯눈이 뜰때 갑돌이는 갑순를 좋아 하기 시작하였다.  갑순이에게 무한한 호기심과 흥취를 가지였다. 그녀의 모든 것이  마음을 들었고 만나기만 해도 심장박동이 빨라지고 숨이 차지였다.       원래 갑돌이와 갑순이는  한학년이 아니였다. 갑순이는 초중2학년때 무슨 연고인지 웃학년에서 한학년 내려 앉았다. 그와 같이 여러명의 녀자애들이 내려 앉았는데 모두 웃기를 좋아 했다.       갑순이는 공부를 잘 하였다. 매번 기중시험 기말시험에서 일등을 하는데 많은 애들이 흠모하는 대상이였다. 지금 말로는 아마 粉丝라고 할가.  많은 애들이 갑순이를 따랐다. 교장선생님도 학기말이면 전교사생들 앞에서갑순이를 표창하였다.       갑돌이의 마음에는 갑순이 밖에 없었다. 갑순이만 보면 공연히 흥분해지고 또 뭔가 자기 재간을 보여 주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친구 갑돌이는 나와 한학년 한반급으로서 아주 친근한 사이였다. 하지만 우리 사이에 남자애 녀자애 화제만은 제외였다. 갑돌이는 늘 갑순이가 상학하고 하학하는 길에서 서성거리였다.     재네는 어떻게 살까     재는 뭘 좋아 할까     재내 집에는 뭐가 있을까 정작 갑돌이는 갑순이를 만나면 할말을 잊는다.     "학교가니?"     "집을 가?"    그리고 혜식한 웃음만 짓는다. 갑순이도 묻는 말에 얼굴이 홍당무우되여 겨우 한마디로 답한다.      "응"      "그래"     허나 갑돌이를 대할때와는 달리 성격이 활달한 갑순이는 늘 자기또래들 과는  웃고 떠들며 학교로 다니였다. 매번 갑순이의 깔깔거리는 웃음소리에 갑돌이는 혼이 빠지는것 같다.        갑순이의 모든것에 알고 싶은 갑돌이는 궁리끝에 실전에 들어 갔다 . 우선 어려서 부터 한마을에서 자란 뒤집에사는 영옥에 대한 공략을 펼치였다. 왜냐하면 영옥이와 갑순이가 친하기 때문이다. 갑순이와 친하려면 영옥이를 건너 갈수 없다. 그러자 매번 영옥이와 어깨동무하고 다니던 갑순이는 갑돌에게 살풋이 웃음도 짓도  대화도 하였다.       갑돌이는 미칠뜻이 기쁘다. 오라 갑순이가 나를 좋아하는 구나. 그뒤로 부터는 갑순이와 더욱 가까워 지려고 갖은 방법을 다 동원하였다.      하학시간이 되면 갑순이 앞에서  뽈도 차고 노래도 하였다. 사실 공부하나만 빼고는 갑돌이가 갑순에게 짝질게 하나도 없었다. 부리부리한눈 건장한 체구 발달한 사지 비록 아직 어린나이지만 자뭇 남자다운 멋이 보였다.       그러던 어느날 갑순이가 갑돌이를 찿았다. 시내 학교로 전학한다며 잘 있어라 공부 잘해라는 말을 하였다. 갑돌이는 정신이 나간 사람처럼 멍하니 갑순이만 바라보다다 이윽고 말했다. "응 너도  잘가 . 놀려와"        할말은 많았지만  어리벙벙하여 뭘 말해야 할지 생각이 나지 않았다. 그뒤로 갑돌이도 시내학교로 전학하였다. 비록 같은 학교는 아니지만 그래도 두사람의 차이를 줄이려면 이것도 방법이였다.       갑돌이도 갑순이도 소년에서 청년으로 성장하였다. 갑돌이는 학교를 나와 닥치는 대로 일하였다. 돈을 벌려고 건축판에도 심지어 우물 파는 일도 서슴치 않았다. 그의 마음속에는 오로지 갑순이 뿐이였다. 돈을 벌어 기타도 샀는데 내가 보기에는 갑순의 마음을 끌기 위하여서였다. 나는 그때 학교를 다니였는데 갑돌이는 이미 사회청년으로 탈바꿈하고 있었다. 그뒤 갑순이는 한시기 앓았다고 했다. 대학입시도 포기하고 사회로 진출하였다.       비록 어린 나이지만 갑돌이의 마음속 한구석에는 어깨가 쳐지는 느낌이 들었다고 했다. 갑순이는 도시호구고 나는 농촌호구라는 열등감을 밀어 내칠수 없었다고 한다. 지금보면 아무일도 아닌것을 그때 당시에는 넘기 바쁜 산이 였음이 틀림없다.       시간이 날때마다 갑돌이는 갑순이네 집에 가서 일손을 도왔다. 그때 갑순이네는 새집을 짓고 있었다.  갑돌이는 더러운 일 무거운 일 마다하지 않고 열심히 도와주었다. 갑순이 부모들도 갑돌이를 무척 반기였다. 때론 갑순이 아버지는 갑돌이와 술마시면서 자네같은 사위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웃으며 이야기 했다고도 한다.     갑돌이와 갑순이는   사로서로 사랑을 했더래요    그러나 겉으로는    안 그런척 했더래요       허나 갑돌이의 맘속에 자리잡은 렬등감이 그로하여금 용기를 내여 사랑을 고백하지 못하게 하였다. 두 청년남녀는 사이 좋은 친구사이로 보낼뿐 다른 동향이 전혀 없었다. 갑돌이의 사랑고백을 기다리다 지친 갑순이는 상대를 정하고 말았다.        뒤늦게 이사실을 알게된 갑돌이는 미칠것만 같았다. 비록 사랑한다는 말 한마디 못해 보았지만 손 한번 잡아보지 못했지만 얼마나 사모하고 얼마나 좋아 했는데 네가 나를 제치고 다른 사람한테 마음을  주냐.  이런 분노감  허탈감이 뒤엉키여 그날 얼마나 많은 술을 마시였는지 모른다고 했다.       그뒤 갑순이는 시내 총각한테 시집 가고 갑돌이는 한마을에 사는 처녀와 결혼하였다. 갑순이가 결혼하던날 갑돌이가 울었다. 세월은 흐르고 흘렀다. 갑돌이도 5살이된 손자를 둔 할아버지가 되였고 갑순이도 7살짜리 외손자를 둔 할머니가 되였다.       매번 행사가 있을 때면 우리는 만난다. 한국에가서 일하는 갑돌이는 신체가 건강하다. 일전에도 행사가 있어 만났는데 친구가 갑돌이와 갑순이보고 우스깨한다.      " 이제라도 손 한번 잡아보라구"     그러자 갑돌이가 허허 웃으며 하는 말이    "아니야 나는 순결한걸 좋아 한다구"   이때  갑순이가 갑돌이 보며 말한다.   "갑돌이는 원래 이래"한다.       사람들은 이룬것에는 대수러워 하지 않지만 못 이룬것에 대해서는 집착하는가 보다. 갑돌이와 갑순이의 옛사랑 이야기는 언녕 끝났지만 소꿉친구들의 행사때마다  화제에 올린다. 갑순이가 말한다.    "너희들은 내말 안하면 할이야기도 없어?"      그러건 말건 친구들은 좋다고 야단이다. 
105    누나 사랑해 댓글:  조회:526  추천:1  2019-10-16
누 나  사 랑 해        누나는 나보다 10살 이상인데 우리 형제중에 유일한 녀자다. 70년대 중반 20세 나이에 당원에 가입하였으니 열성이 얼마나 대단하였겠는가를  짐작할수 있다.  누나는 젊은 나이에 선전대공작인원으로  민흥촌에 파견되여 일년 단련받기도 하였다. 50년대 출생한 누나의 가장 큰 특점이라면 헌신정신이다.  남의 일도 자기일처럼 하고 친구들사이가 형제자매처럼 친근하다는 것이다.        누나는 70년대말 마지막 공농병대학생으로 중앙민족학원에 추천받는 영광을 가지였다. 이런 영광을 누나가 받을수 있은것은 부모님들의 엄격한 교육과 본인의 노력과 갈라 놓을 수 없다. 당시 소식을 접한 마을은 마치 큰 잔치를 치루는 기분이였다. 여느 보통학교도 아니고 조국의 수도 북경에 가서 공부할수 있는 기회란 당시 촌에서 꿈에도 상상 못할 일이였다. 당시 나에게는 중앙이라는 두글자가 그렇듯 거룩하고 자애롭게 안겨왔다.        그때 학생모집을 나온 선생님이 우리집을 방문하고 하루밤 머물게 되였다. 어머니는 집에서 할수있는 제일 좋은 음식을 대접하였다. 찰떡 순대 토닭 두부는 지금이나 그제날에나 우리 민족의 최고 음식이였다.  어머니로 말하면 수도 북경에서 그것도 중앙민족학원에서 딸을 초생하려고  왔다는것이 일생에서 제일 큰 영광이 아닐수 없었다. 그때 소학교를 다니던 나는 북경에서 온 선생님의 일거일동을 유심히 살펴 보았다. 그토록 우아하고 멋져 보이였다.  선생님이 북경으로 돌아 갈때 많은 동네분들이 동구밖까지 나와서 바래주었다.        우리 집으로 말하면 누나가 제일 먼저 바깥세상과 접촉하였다. 누나는 매번 서신을 통하여 북경의 많은 재미나는 이야기를 나에게 전해주었다. 그리고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한다고 조언해주었다. 누나는 나에게 무선전 안테나와 같은 존재였다. 안테나가 설치되였기에 바깥세상 소식이 끝임없이 집으로 전달되였고 나는 또 미래에 대하여 무한한 동경을 가지게 되였다.        누나가 나에 대한 사랑은 특별한 것이였다. 내가 화룡에서 대학입시 공부할때 아버지어머님이 돌아가시였다. 어쩌면 같은 해에 시간차이도 얼마 두지 않고 하늘나라로 가시였다. 그때 막바지 노력을 경주하는 동생을 위로하려고 누나는 맛나는 음식꾸러미를 들고 자주 숙사를  찿아 주었다. 물론 입시준비를 잘 하라는 무격려도 잊지 않았다. 나의 입학통지서를 받은 누나는 그토록 즐거워하였다. 장춘에서 대학 공부할때도 누나는 학교를 찿아 주었다. 그때만 해도 형제들이 학교를 찿아 오는 일이 매우 적었다. 우리는 같이 장춘위만주국황궁을 참관하고 정심도 먹었다. 그때 연길과 장춘사이에 장도뻐스가 통하였다. 내가 한번 타 보고 싶다고 하자 누나가 그렇게 하라고 했다. 일본 고모집 방문 갈 때도 우리는 같이 다녀 왔다. 도꾜 혹가이도를 구경하였고 고모님과 잊지못할 만남을 이루었다.         누나는 항상 앞서 나가는 나의 본보기 였다. 공작에서나 생활에서나 누나는 항상 락관적이였다. 지금도 나는 어떤일에 부딪치면 누나라면 어떻게 처리했을까하고 생각해 본다. 누나는 단위에서는 중견인물로 뛰였고 집에서는 자애로운 어머니로 자식을 교육하였다. 딸애는 중국과학기술대학을 졸업하고 일본에서 연구생을 마치고 지금은 한국에서 사업한다. 누나는  퇴직후 서울과 북경을 오가며 딸애와 외손자를 봐주고 있다. 추석에 누나는 잠시 연길에 머물었다. 60대 중반이지만 허리도 꼿꼿하고 걸음도 가볍고 목소리 또한 또렷하다. 그래서 나는 기분이 좋다.        몇해전에 우리 아들애가 북경건대에 입학하였다. 당시 북경에 체류하던 누나와 매부는 자기 자식일처럼 기뻐하며 집적 학교를 발문하였다. 학교식당에가서 식사도 해보며 여기저기 상황을 우리에게 소개해 주었다. 그리고 누나가 북경에 있으니 애걱정 아무것도 하지말라고 한다. 한번은 우리 애가 배탈을 만났는데 참을수 없이 고통스럽다고 전화가 왔다. 하여 고모한테 빨리 전화하라고 했다. 누나는 소식을 듣고 당금 학교에 달려가  아이를 데리고 병원에가 보이였다. 고모가 근처에 있기에 우리애는 얼마나 편리한지 모른다.      누나네는 올해에야 새집에 들었다. 얼마나 바랐던 일인가!결혼하여 세집살이도 했고 비좁은 집에서 자식도 자리웠다. 생활에서 불편한 점이 많았지만 언제 한번 우리 앞에서 내색을 낸적이 없다. 오히려 내가 새집들이 할때마다 자기일처럼 기뻐해주고 축하해주었다.         자기를 희생하고 동생들을 먼저 생각해주는 누나 이런 누나 형님들이 있었기에 내가 순조롭게 학업을 마칠수 있었고 행복한 생활을 할 수 있었고 맡은바 과업을 완수할수 있게 되였다.   누나 사랑해.
104    후회 댓글:  조회:515  추천:0  2019-10-11
후 회        우리 말에는 "후회막급(后悔莫及)" "후회막심(后悔莫甚)"이란 말이 있다. 사람이 살아가다 보면 후회하는 일이 있기 마련이다. 어떤 일에서 실수를 저질렀거나 노력이 부족했거나 기회를 제대로 포착못했거나 할때 후회를 하게된다.         후회하였다 하여 다 나쁘지만은 안다. "한번 당하여 보아야 지혜가 생긴다(吃一堑长一智)"라는 말도 있다. 그만큼 부대끼여 보아야 경력도 쌓고 지혜도 생긴다는 말이다.  신(神)이 아니고 사람인이상 시행 착오를 범하지 않는 사람이 없다. 나라의 큰일을 보는 어른들도 착오를 범할라니 보통사람으로서 일시 착오를 범하는건 정상적인 일이다.      관건은 후회하는데 끝히지 말고 교훈을 섭취하는 것이다. 한가지 일에 착오를 범할수 있지만 같은 일에 같은 착오를 범하면 안된다. 매사 뒤끝에는 총화분석이 따라가야 한다. 일을 성사시키지 못한 원인은 무엇이고 앞으로는 어떻게 처사하여야 하는지 대안(替案)은 무었인지 꼼꼼하게 따져 보아야 한다. 그래야 실패하여도 가치가 있다.        미리대책을 세워야 한다(未雨绸缪,防患未然). 앞으로 맞이 하게 될 여러가지 사항을 주밀하게 분석하고 그에 맞는 대책을 세워야 한다. 자기의 모든 지혜와 재능을 동원하여 앞날을 설계하고 추친해야 한다. 그래야 일에 마주쳐도 당황하지 않고 차근차근 처리해 나갈수 있다.       중국말에 새옹실마연지비복(塞翁失马焉知非福)이란 말도 있다. 나쁜 일이 좋은 일로 전변할수 있다는 말이다. 변증법에 부합되는 아주 정확한 이야기다. 운수가 나쁘다고 하여 매냥 나쁠수 없고 운이 좋다하여 매냥 좋을수 없다. 돌아가는 세상이라 하지않는가.       여지껏 살아 오면서 후회를 한적이 있지만 많지는 않다. 어느 정도의 성과도 거두얻고 즐거운 일이 상심한 일 보다 많고   살아 가는 일이 피곤하지가 않다. 자기의 모든 노력을 경주하였기에  혹여 바라던 성적을 거두지 못하여도 후회는 없다. "작은 일은 사람이 결정하고 큰 일은 하늘이 결정한다고 한다(小事人定,大事天定)"고 했다.       순종(顺从)과 순응(顺应)은 다른 뜻이다. 세월이 가는대로 일이 벌어지는대로 남의 지휘하는대로 따라 가는것은 순종이지만 순응이란것은 환경이 변화하였을 때 사람들이 현유의 환경조건에 적응하는 과정을 말한다.    하자는 말인즉 매냥 후회하며 순종하지 말고 일에 부디치면 앞뒤좌우를 잘 판별하여 주동적으로 순응해가야 한다는 말이다. 
103    위챗시대 문학교류 댓글:  조회:379  추천:0  2019-10-11
위 챗 시 대  문 학 교 류        지금은 위챗의 힘을 입어  교류가 많이 편리하여 지었다. 사람들은 아무런 지역적 제한도 받지 않고 자유롭게 글과 도편을 주고 받을수 있다. 본인이 원한다면 화상채팅도  얼마든지 가능하다. 문학도들은 이런 과학기술의 보급과 혜택을 누릴수 있는 시대에서 생활할수 있게 되여 행운스럽다.        지금은 손가락매체 시대라고도 한다. 전에는 노트북만들고 다녀도 대단히 앞서가는 사람으로  우러러 보였지만 지금은 별로다. 오히려 간단히 핸드폰 하나로도 많은 업무를 볼수 있는 시대가 되였다. 시대는 도약적으로 발전하고 있다. 전에는 상상에만 그치였던 일이 지금은 현실로 변하였고 또 내일에는 어떤 첨단적인 기술이 우리의 사업과 생활에 영향줄지 알기 힘들다.        지금은 누구나 작가역을 할 수 있고 누구나 방송사역을 할 수 있다. 번거롭게 무거운 사진기나 록화기를 들지 않더라도  핸드폰으로 얼마든지 촬영 록화가 가능하다. 자신의 의사을 온라인을 통하여 여러 사람들과 교류할수 있고  또 자신의 작품도 발표 할 수 있다. 전통적인 신문 방송 잡지사가 조급해하지 않을수 없다. 과거에는 가장 빠른 문자매체가 매일 신문이였고 또 더 빨아야 호외(号外)가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시시각각 실황에 가까운 신문기사가 무더기로 나가고 있다. 아침에 받아본 신문을 펼칠때 기사내용은 이미 구문(旧闻)으로 변하여 버리였다.  나라 안팎 관계없이 시간대에 관계 없이 많고 많은 정보가 교류 되고 있는 현실이다.       우리민족의 문학매체는 한족매체에 비하면 매우 빈약한상태다. 우선 인구수량면에서 렬세에 처하여 있다. 게다가 관영매체들의 문턱이 높고 심사표준이 높기에 웬간한 작품들은 빛을 보기가 힘들다. 이런상황에서 민간문화인들의 발촉과 노력으로 많은 문예애호가들이 교류와 협력할수 있는 문학췬를 탄생시키였다. 어찌보면 우리민족 문화교류의 새시대에 진입하였다. 시대의 맥박을 타고 태여난 이 신생아를 우리 문학도 모두가 아끼고 사랑하여야 한다.         요지음 우리글 문학췬들이 활발한 양상을 보이고 있다. 췬주들이 수고가 많다. 문학수양이 높은 췬주님들이 매일 문학도들을 이끌어주고 매 하나의 진보에 긍정해주고 고무하여 준다. 유명학자나 문학인들과의 교류도 활발이 진행된다. 췬에 보면 유명인사들도 적지 않다. 이처럼 근거리애서 집적 유명인사들과 교류할수 있다는건 과거에는 상상도 못할 일이다.  얼마나 행운스러운지 모른다.  췬에 참가한 문학애호가들을 보면 시며 수필이며 소설을 선호하는 아마추어들이 많다. 애호가들은 매일 새로운 작품을 올리고 토론을 벌린다. 열띤 토론과정도 췬에서 진행되는데 유익한 변론이라고 본다. 단정컨대 우리민족 문학췬의 애호가들이 멀지 않은 앞날 민족문단의 새로운 력량으로 등장할것이다.      지금 현황을 보면 췬애호가들의 년령대가 비교적 높다. 젊은 친구들의 도입이 급선무로 나서고 있다. 젊은 친구들은 무엇을 생각하고 무엇을 바라는지 그것을 알아야 한다. 중장년층들 만으로는 힘이 부족하다. 선배들은 대학가를 중심으로하여 우리 민족 젊은이들이 우리의 문학에 관심을 가지고 적극적으로 참여하게끔 이끌어 주어야 한다. 교류를 통하여 민족문단의 발전 방향을  제시하고 이끌어 주어야 한다. 그들과의 심도 있는 교류는 민족문단발전의 상당한 추동력이 될것이다.       매하나의 문학췬은 가히  문학추진 원동력이라 할수 있다. 여러개 문학췬의 단합은 또 영향력이 훨씬 더큰 원동력을 만들어낼것이다. 교류와 협력은 문학췬이 존재하고 발전할수있는 근원이다. 췬주지간의 교류와협력은 첫번째로가는 우선무다. 기쁘게 볼수 있는 것은 당전 췬지간의 호상 교류다. 나한테 네가 있고 너한테 내가 있는것이 당전 문학교류췬의 현주소다.    산이 높다하되   하늘아래 뫼로다   오르고 오르면   못오를리 없건만   사람이 제아니 오르고   뫼만 높다하더라        우리민족 문학도들이 갈길은 아직 멀고 험난하다. 민족문학보급과 창작수준의 제고가 당면의 주요 과업이라 생각한다.
102    일판술판 댓글:  조회:386  추천:0  2019-10-11
일 판 술 판        국경절휴가도 벌써 끝나가고 있다. 천기예보에 의하면 오늘은 어제와 달리 따뜻한 날씨라고 한다. 나는 차를 운전하여 마반산으로 향했다. 가을 하늘 광활하고 하얀 구름이 높이 떠있다. 시내 에는 아직 생화가 피여 있는데 산에 들어서니 어언 울긋불긋 단풍이  물 들었다.   날씨도 좋겠다 단풍도 들었겠다 마음도 즐거워 진다.      절기도 바뀌고 또 휴일이라  오늘은 마반산에가서 올해 농사마무리도 하고 터밭도  정리할예정이다. 농촌일이란 일을 할려면 손이 쉴사이가 없다. 또 그래야만 정갈한 뜨락에서 살수 있다.      터밭의 찰옥수수는 대부분 풋것으로 따먹고 마른 옥수수는 얼마 남지 않았다. 내가 휴가기간 뜯으려고 했는데 어제 형님 내외분이 내려와 다 뜯어서 정자에 널어 주었다. 량은 많지 않아도  뜯거니 나르거니 품이 많이 드는 일거리였다. 덕분에 나의 일이 적어지였다만은 형님내외분은 많이 고생하였다.      이제 남은 일이란 옥수수이삭 겁질을 벗기고 고추대와 가지대를 뽑아 내고 옥수수대를 베고 묶고 하지는 일이다.      . 울안에 들어서니 제일 먼저 눈에 들어 오는 것이 새파란 총각무우잎과 배추잎였다. 오이넝쿨과 도마도넌출을 걷어낸 자리에 총각무우를 심었는데 잎이 어찌나 푸르고 싱싱한지 지나가던 사람들도 담넘어 드려다 본다. 푸른색은 생명의 색이라 주위의 마른 옥수수잎과 선명한 대조를 이룬다. 농사절기란 참 빠르기도 하다.  5. 1절에 옥수수 심고  5월중순에 도마도 가지 오이를 옮기였는데 벌써 수확을 다 끝낸지 오래다.       산림구역은 국경절부터 방화계절에 들어 선다. 야외불사용은  일체 금지다. 이 근년에 옥수수농사하는 사람들로 말하면 옥수수대 처리가 골치 거리다. 태우려니 야외불사용 금지고 방치하려니 밭을 차지 한다. 나처럼 터밭에 심은 옥수수대는 그나마 량이 적지만 그것도 처리할 방법이 별로 마땅치 않다.   .  나는 우선 정자에 올라 앉아 옥수수껍질을 벗기는 작업부터 시작하였다. 해볓이 나의 등을 골고루 따뜻하게 비추어 준다. 벌써 따뜻한 해살이 수요되는 계절이 되였다. 터밭 옥수수농사는 가공이 난제로 나타 난다. 우리집 터밭에서는 풋것으로 먹고 나머지  옥수수가 대략40근정도 나오는데 가공할려면 량이 적다고 정미소에서 잘 받아주지 않는다. 허나 내밭에서 난 무공해 옥수수라는 생각에  걸음을 더 걷더라도 가공해 오고야 만다.       혼자서 작업할려니 처음에는 괜찮지만 시간이 슬슬 지나가니 심심하기도 하다. 하여 친구한테 전화를 했다. 우선 문안인사부터 시작하였다.    "어제 정심에 마신술이 힘들지 않소?"     어제 정심에는 친구들이 모여서 행사를 가지였다. 집적 일소리부터 거론하면 인사가 아니다. 그리고  친구에대한 관심도를 보여야 한다.    "오늘 일정은 어떻게 잡았소?"    친구는 친구다. 인츰 내 속내를  알아 준다.    "괜찮네 . 오늘은 뭘하는가?"    이때다. 소뿔은 단김에 뽑으라 했다.    "마반산에 내려왔는데 오지않으려우?"   "내려가지. 무슨 일하는 거요?"   "혼자 일하자니 적적해서 "    전화를 놓자 바람으로 나는 친구대접용으로 동네에 나가 암닭 한마리를 사왔다. 그리고 바깥부엌에 불을 지펴 물을 끓이였다. 닭을 튀할려면 뜨거운 물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두사람의 넉넉한 정심거리다.      이윽고 친구가 차를 운전하여 왔다. 올려면 올거지 무슨 맥주며 양고기며 한짐 들고 들어 선다. 더 반가운건 우리 친구 한명 더 모셔 온 것이다. 옳거니 . 일군이 불어 났다. 좀 지나니 또 차 한대가 울안에 들어 서는것이 였다. 방조군 한명이 또 늘어 났다. 이정도면 일을 빨리 끝낼 수도 있겠다. 친구가 좋긴 좋아.       일군이 왔으니 정심을 먹여 보내는것이 도리다. 닭부터 손을 보아야 한다. 여차여차하게 손을 놀리였더니 먹음직한 토닭한마리가 금시 노란살결을 들어내였다. 일군이 많으니 양고기도 구워야 한다. 이런 저런 일군들 식사주비를 하노라니 어언 정심때가 되여온다.     "어떡하지?"    "정심이나 먹고 오후에 일하자. " 이렇게 자문자답하고 나니 먹을 일이 급하다. 목탄을 내오고 화로도 내왔다. 양고기도 손바닥만큼 큼직큼직 썰고 양념장도 만들었다. 쇠가마에 들어간 통닭은 맛나는 냄새를 풍긴다. 탉탕에는 무우와 감자를 썰어 넣었다.       " 기왕 모인바 하고 친구들 더 부릅시다. "      의견을 통일하고 난뒤 친구가 또 전화를 넣었다. 전화 받은 친구들도 일손을 돕겠다며 인츰 내려오겠다고 한다. 친구들은 맥주며 과일이며 한구럭들고 들어섰다.      원래 간단하게 식사만하고 일하려 했는데 "오래간만이요","반갑소","자주 련락하기오"등 말이 등장함에 따라 빈맥주병이 줄줄이 나온다. 일판이 술판으로 번져지는 시작이였다.       술상은 점점 익어가니 일손은 점점 줄어들수밖에 없다. 모두들 가을을 타는가 보다. 아니 정확히 말해서 모두들 사람을 좋아한다. 일이야 내일해도 되지만 이 소중한 만남이야 언제 또 만들랴. 기왕이면 우정도 나누고  휴식도 취하고 가는데까지 가볼판이다.      사람이 살아 가면서 불을 사람있다는것과 불러준다고 달여오는것 이런 모두가 지덕(积德)이라 생각한다. 한마을에서 나서자란 우리들사이는 아무런 부담도 알륵도 없는 친구사이다.    집에 돌아오니 안해가 오늘일 다했냐 물어 본다. 답이 궁하게 되였다. 
101    지혜 댓글:  조회:384  추천:0  2019-10-11
지   혜         사람이 살아 가면서 많은 일에 부딪치게 된다. 그중에는 혼자힘으로 해결해야 하는 일도 종종 있다. 헌데 일상중에서 사람들은 일에 부딪치면 보통 다른 사람의 도움을 청하는 경우가 많다.        나의 경우에는 사람을 청하는 일이 더 많다. 뭘 할려고 일을 벌려 놓으면 먼저 생각하는 것이 누구를 찿으면 나 보다 더 잘 할수 있겠는가 생각을 한다. 그 사람이 하면 더 효률적이기 때문이다. 누구를 찿아야 하는 일도 마찬가지다. 내가 A를 통하여 B를 알게 되였다면 웬간해서는 나는 B를 집적 찿지 않는다. 왜냐하면 A를 찿으면 훨씬 빨리B를 찿을 수 있고 원하는 일을 더 원만하게 처리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나의 론리대로 라면 이것는 피라미트식 관리법이라 하겠다.      헌데 매냥 이 방법이 통하는건 아니다. 누구도 도와줄 사람을 찿을 수 없을 경우에는 울며겨자먹기로  좋던 굿던 자기절로 해결해야 할때도 있다.       촌에 살다 보면 여러가지 물건들이 필요하다. 농기구만 놓고 보더라도 삽 곡갱이 호미 곽지등 여러가지고 그외도 양수기 전기톱 전기진들  등 여러가지를 준비해 놓아야 한다.   여자들이 정기적으로 옷장을 정리한다면 남자들은 드문드문 창고정리를  한다. 어떤때는 필요한 공구를  찿으려면 잡동사니가 많아서 찿기가 힘들다. 하여 오늘은 일단 창고 정비할 차비를 하였다.       나는 일단 가벼운 물건부터 정리하였다. 오래된 창고라 별라별 잡동사니들이 다 쌓여 있었다. 우리 아이 어릴때 타던 얼음 썰매며 여러집에서 가져다 놓은 가스통이며 자동차 바퀴며 보지 못했던 물건들이 많았다. 이런것들을 분류별대로 갈라 놓고 필요 없는 것들은 버릴것이다.      문제는 벽면에 세워 놓은 철판으로 만든 괴짝이다. 동서간이 되는 분이 촌에서는 필요할것이라며 가져다 놓았는데 대단히 무겁다. 비록 아래위로 분리 할 수 있는 조합식이지만 원체 두터운 철판을 사용하였기에 혼자힘으로 운반하기에는 힘들다. 허나  끌어내지 않으면 괴뒤를 청리 할수가 없다.      무거운짐이라도 위에서 아래로 내리여 놓는건 그리 힘든일이 아니다. 우선 밑에다 안반을 받치고 조금씩 움직여 내리우면 된다.  다음 젖은 장대걸레 괴짝밑에 넣고 밀면 마찰력이 감소하여 잘 움직여 진다. 나는 무거운 괴짝들까지 모조리 움직여 내고 청결하였다.        그런데 원상복귀 할려니 힘겹다. 그 무거운 괴을 한메터 이상 들어 올려야하니 말이다. 어떻게 하면 들어 올릴까 머리를 굴려 보았다. 처음에는 도저히 궁리가 나지 않았다. 한참 생각하다가 한가지 방도가 나왔다. 우선 걸상두개를 놓고 그위에 괴를 올려놓았다. 다음  걸상을 움직이지 못하게 고정해 놓았다. 그리고 한손으로 괴짝을 잡고 다른 한손으로 괴를 들어 안반우에  걸쳐 놓았다. 그러니 밑의 괴와의 상대 높이 차이가 작아 지였다. 나는 웃 몸을 괴에 바싹 붙이고 있는 힘껏 괴을 들어  밑의괴 웃면에 올려 놓았다. 이로써 괴가 제자리를 찿았다. 내가 사용한것은 힘을 적게 들이고 무거운 것을 들수 있는 사면원리(斜坡原理)였다. 처음에는 도무지 못해 낼것 같은 일을 혼자힘으로 해내고 나니 흐뭇했다. 일을 부딛치면 당황해하지 말고 머리를 써야 함을 터득하는 사레였다.      무슨 일에나 부딛치면 어떻게 해결할가 여러모로 연구하여 보아야 한다. 사람을 청할수 있을 때면 괜찮으나 혼자힘으로 해결해야만 할때에는 온갓 방법을 다 생각해 보아야 한다.  무거운 짐을 들어 올릴 때에는 지레대원리 사면원리(斜坡原理)같은 같은 간단하지만 효능적인 방법을 고려해 볼수 있다.        2005년 형님이 한국에서 돌아와 일시 마반산에 거처하게 되였다. 그때 내가 차 세울자리가 마땅치 않아하자 형님은 손수 혼자힘으로 정자를 만들어 세웠다. 한낮에는 해볓을 막을 수 있는 주차장이 되고   평소에는 땀을 식힐 수 있는 휴식터가 되고 또한 포도달대로도 되는 다용도 정자였다. 그때 형님은 혼자서 정자를 세웠던것이다. 물건너 마을의 김동무가 말했다. "  내가 어떻게 세우나 찬찬이 보았다구. 참 재간이 있어!"       일에 부딛치면  다른 사람에게 도움을 청 할수 있다. 그러나 모든 것을 타인에게 의뢰하려는 생각은 버려야 한다. 자기절로 할수있는데 까지 해보아야 한다. 맨날 다른 사람에게만 의뢰하다가는  언젠가 큰 손해를 볼수도 있다. 
100    교사절 댓글:  조회:1104  추천:0  2019-09-09
 교 사 절        사람마다 다 자기의 은사가 있다. 아무것도 모르던 철부지로부터 대학문을 나서기까지 우리는 많은 선생님들의 가르침을 받았다. 하여 점차적으로 사람이 살아 가는 방식과 도리를 알게 되였고 많은 문화지식을 쌓게 되였다. 그것이 살아 가는 밑거름이 되였고 지금까지 나를 이끌어 주었다고 생각 한다.        내일이면 교사절이다.  선생님들께 명절의 인사를 드린다. 선생님들의 가르침에 감사 드리고 옥체 건강하시기를 기원 한다.           소학교에 붙을 때 나는 둘째형님의 뒤꽁무니를 따라 학교에 갔다. 1972년도 입학은 3월1일에 하였다. 그때 나의 단임선생님은 박정희선생님이 였는데 문화대혁명기간 농촌에 하방 되여 내려온 분이였다. 후에 중앙소학교로 전근하였고 교도주임사업을 맡아하였다. 선생님께서는 매우 인자하였다. 갓 입학한 우리들에게 휴식시간 화장실 다녀 오는 방법으로부터 교학시간 규률준수에 이르기까지 모든 사항을  일일히 가르켜 주었다.      초중을 올라 와서 단임교원을 여러 선생님들이 번갈아 보았다. 처음에는 김영기선생님이 맡아 보았는데 단편소설«붉은 수첩»의 저자다. 눈섭이 검고 길다. 목소리도 우렁우렁한데 글씨 또한 명필이다. 그때는 학기말이 되면 선생님의 감정서(鉴定书)란것이  있었는데 철필로 쓴 글씨는 진짜 아름다웠다.        초중2학년 때에는 황봉준선생님이 단임을 맏고 물리를 가르키였다. 황선생님의 집과 우리 집은 어르신들부터 아주 가까운 사이였는데 우리 누님의 결혼식 남자대반을 설 정도였다. 초중3학년에는 최동욱선생님이 단임을 맡았고 화학을 가르키였다. 선생님의 고향은 서란이였다. 선생님은 후에 시초생반에 전근하였다. 퇴직후 선생님은 룡정 동성용진에 집을 잡았다. 그때 몇번 인사할려 다녀 간적이 있었다.        후에 우리 조선어문을 기르치던 최응률 선생님은 원래 음악교원이였다. 우리 연변에 널이 불리우던 «나는야 기타를 타네»는 최선생님이 작곡한 노래다. 퇴직한후 선생님이 작곡하신 노래를 음반으로 내였는데 나도 선물 받았다.          화룡고중 다닐때는 최수남 선생님이 단임을 맡고 있느며  대수를 가르치였다. 지금도 우리는 련락을 하고 있고 선생님은 종종 제자들의 모임에도  참석한다. 형님 같고 오빠 같은 선생님이다.        우리 동창들 가운데도 교육사업에 종사하는 친구들이 적지 않다. 대학에서 고중에서 초중에서 교편을 잡고 있다. 인류문명의 공정사들이 맡은바 각자의 일터에서 열심히 일하고 있다. 우리 반장은 매년 교사절이면 교육사업에 종사하는 동창들과 함께 식사를 안배하였다. 금년에는 단임선생님이 미국으로 출국으로하여 행사를 미루기로 하였다.        교사는 아주 신성한 직업이고 또한 특수한 직업이다. 지식이 있다고 하여 누구나 종사 할수 있는 직업이 아니다.        우선 선생님들은 학생들에게 사람됨의 도리를 일깨워 주고 있다. 유치원생으로 부터 대학문을 나오기까지 우리의 생활은 기본적으로 학교를 중심으로하여 이루어진다. "ㄱ ㄴ ㄷ ㄹ "를 배우면서 우리 글을 익히 였고 선생님을 존중하고 친구지간의 우애를 도모하고 로동을 사랑해야 한다는등 아주 간단하나 깊은 도리가 있는 교육을 받게 된다.        과거에는 형제들이 여러명이 되다 보니 형님 누나들 따라 학교에 가고 놀고하는 일이 보통현상이였다. 지금 애들은 형제가 없다보니 고독하고 친구사귀기 힘들어 한다. 그리고 자기중심 사상이 심각하고 배려 정신이 빈약하다.            언젠가 어떤 사람이"독신자녀들이 군대에 가서 나라을 지킬수있겠는가?"고 의문을 제기한적이 있었다. 결과적으로 보면 긍정적이다. 그러나 그것은 결코 저절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고 여러 단계의 철저한 교육과 실천을 통하여 이루어진 결과다.       두번째로 선생님들은 학생들에게 량호한 생활습관 학습습관 행위습관을 가으친다. 습관이란 매우 중요한것이다. 량호한 습관은 우리들의 일생에 중요한 작용을 한다.       유치원때 선생님은 식사하기 전에 손을 씻고 식사후에는 치솔질하여야 한다고 배워준다. 식사후 치솔질해야 하는 이 행위는 아주 작은 일이지만 일생동안 사용해야하는 이빨건강과 직접적으로 련관이 된 중요한 생활습관이다.        학습습관에 대한  중요성 인식은 자식을 자리우면서 부터 더욱 깊게 되였다.  아이 보고 책을 보라고 하면 애들하는 첫 마디가 "아빠엄마는 왜 안보냐"다. 부모가 맨날 텔레비를 보면서 애보고 책보라해서는 절때 먹히지 않는다. 학교 다니면서 느낀것이 부모님들이 교원이거나  책과 가까히 하는집 아이들이 학습성적이 상대적으로 높다는것이다.  촌에서 회계라도 하는집 아이들이 낫다는 말이다. 아이들에게는 양호한 학습습관을 가진 본보기가 필요하다.          행위습관은 더 말할것없이 중요하다. 처음 만나는 사람하고 어떻게 인사라고 통성명하는지도 교육받은 사람들은 보면 인츰 알아 볼수 있다. 치마로 앉을 자리 설 자리를 아는 사람이다. 지금 단위들에서는 례의례절교육에 중시를 돌이고 있다. 어떤 장소에서 어떤 말을 하고 어떤 장소에서 무엇을 주의하요야 하는가를 모르면 사회생활 가운데서 렬세에 처할수 있다.       세번째로 선생님들은 학생들의 학습흥취를 배양해주고 있다. 선생님들은 우리에게 지식을 전수하여 줄뿐만이 아니라 학습에 대한 흥취를 배양하여 준다. 흥취를 가져야 공부가 재미있고 부단히 파고들수 있다. 어떤애들은 수학에 흥취가 있고 어떤애들은 력사에 흥취가 있다. 선생님의 매 한가지 언행이 아이들의 주의와 흥취를 불러일으킬수 있다. 배우는 즐거움과 제고되고있다는 흐뭇함 이런것이 상호작용하여 학습에 더욱 흥취를 가지게 한다.       흥취가 있는 일을 하면 피로를 모른다. 원래 문학에 흥취가 있다면 국내외작품집을 보는데 그이상 더 좋을 수가 없다. 지금은 다양한 통로를 통하여 문학작품과 접촉할수 있고 동호인들과 자유롭게 교류할수도 있다. 문학계정에 오르면 많은 사람들이 문학작품에 대하여 토론도하고 작품교류도 하는것을 볼수 있다.        선생님들의 공로는 이루 말할수 없이 많고도 많다. 교육이 발달하면 나라가 강대하여 진다. 지식은 힘이다. 대학문을 나왔다고 학습이 끝난것이 아니다.     교사절을 열열히 축하한다. 그대들의 신근한 로동이 있음으로 하여 나라의 앞날은 더욱 밝아질것이다.    
99    가을이 온다 댓글:  조회:673  추천:0  2019-09-02
가을이 온다        우리 고향은 가을이 일찍 들어 선다. 벌써 하늘이 높아 지고 아침 저녁으로 서늘한 바람이 분다. 아침에 반팔적삼을 입고 강변에 나가면 춥다. 완연한 가을 날씨를 느끼게 한다. 남방에는 아직도 30도 이상이 라는데 연길은 낮에 20도를 좀넘고 아침에는  10도를 웃돈다. 남들은 아직도 덥다고 야단할때 우리는 긴팔을 입어야 한다.         가을은  황금의 계절 수확의 계절이다. 가을이 되면 오곡백과 무르익고 농부들 얼굴마다에 웃음꽃이 피여 난다. 길거리의 코스모스가 활짝 피여 있고 국화가 웃는 얼굴로 길손을 반긴다.  아직 농작물을 거두어 드릴때는 아니지만 그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 일전에 룡정을 나가며 보니 논밭은 옅은 누른색을 띠였다            얼마 지나지 않으면 황금파도 설레일것이다. 지금 농촌은 한창 고추수확계절이다. 어디 가나 녀성들이 둘러 앉아 빨간고추를 썰고 말리는 장면을 볼수 있다. 포도는 진한자주색으로  익어가고 오미자와 구기자는  빨갖게 익어 간다.      인류는  봄이면 씨앗 뿌리고 여름이면 기음 매고 가을이면 수확하고 겨울이면 저장하는 생산방식을  해해년년 반복하여 왔다. 지금은 시대가 발전하여 대부분 힘든 로동은 기계로 대체하고 있지만 그래도 농사는 철저히 절기를 맞춰야 한다. 무엇이나 익어가는 가을철에는 해야할 일들이 수두룩하다. 농부의 일손도 빨라 진다.       우리 연변은 복받은 땅이다. 근로용감한 우리 연변의 아들딸들은 고향의 산과들을 일하기도 좋고 살기도 좋은 고장으로 일구어 놓았다.  황금의 벼파도 설에이는 세전의벌 만무과원 어디가나 깨끗한 공기는 선인들이 우리에게 물려준 값진 재산이다.       연변은 자연재해가 적은 곳이다. 저온 냉해가 있기도 하나  홍수 우박 산사태 폭설등 자연재해가 다른 지방에 비하면 썩 적은 편이다. 우리는 진짜로 이땅을 개척한 조상들에게 감사를 드리여야 한다. 이러한 땅이 있기에 우리는 행복하다.        9월에 들어서 우리는" 9. 3"명절을 맞이한다. 매년 9월3일은 중국항일전쟁승리 기념일이자  세계반파쑈전쟁승리 기념일이다. 우리 연변으로 말하면 올해"9. 3" 명절은 연변족선족자치주창립67돐 기념일이다. 민족자치정책이 우리연변땅에 꽃을 피운 날이다. 이날은  «연변조선족자치주 지방지치조례» 의 규정에 따라 전주적으로 하루 휴식하게 된다. 외지에서 온 손님들은 9월3일날 휴식일이라면 어리둥절해 한다.      가을하늘 높고 푸른데  방송에서는 자치주창립의 노래가 흥겹게 흘러 나온다.     에루아 어절씨구 좋구나  좋네   해란강도 노래하고  장백산도 환호하네   에루아 두둥실 장고를 울리세   연변조선족자치주 세웠네   에루아 두둥실 모두가 뭉치여   여러민족 우애합작 대가정 건설하세       우리 연변인민들이 자치주창립의  희열을 반영한 노래다.   소수민족자치주는 전국적으로 30인데 그중 연변은 유일한 조선족자치주다. 자치주창립30주년일때 우리 학교에서는  연길경기장에서 펼쳐진 "9. 3"경축활동에 참가했었다. 그해 경축행사에 참석할려 전국 각지역의 조선족들이 연변을 많이 찿아 왔다.       전에는 "9. 3"을 게기로 각촌마다 운동대회를 가지였다. 여름의 농망기를 다 보내고 가을을 맞이하는 마당에 보통3~4일간 운동회를 연다.  경기종목으로는 보통 달리기 씨름 그네 뛰기 축구 배구 농구등이다. 우리 친구는 비암촌에서 씨름일등을 한적이 있다. 그때는 촌에도 사람이 많았다.          동네에서는 소를 잡아 운동원들을 대접하였는데 어른 아이 할것없이 식사할수 있었다. 낮에는 운동하고 저녁에는 모여서 술 마시고  춤판을 벌리였다. 진짜로 잔치판이였다. 그때 씨름일등과 그네 일등은 벽시계를 장품으로 주었다.      가을이 점점 우리에게 다가 온다. 매미소리가 찌르륵 찌르륵 정답게 들려 온다.       가을이 다가옴에 따라 농부들의 마음도 다급해 진다. 올해 농사수입은 과연 어떻게 될까. 기대치 만큼 나올가.  준확한건 모르지만 그래도 심중에는 수자가 있다.  가을이 깊어 감에 따라 일손도 바빠진다. 가을의 정취에 빠지여 가을에 취하여 시기를 놓히면 마무리에서 문제가 생길수  있다.                 가을은 자연의 절기만은 아니다. 농사를 짓지 않는 사람들도 이맘때면 지나간 시간들을 돌이켜보게 된다. 한해의 3분의 2의 시간이 지나 갔다. 여러분야에서 열심히 일하는 친구들도 올해 일은 년초계획대로  추진하였는지. 어떤 성적을 거두 었고 어떤 애로사항에 부딛치였는지. 남은 시간에는 무엇을 중점으로 돌파할것인지 지금부터 미리미리 훝어 보고 대안을 찿아야 할것이다.      가을 하늘이 높아 지고 서늘한  바람이 불어 오니  진짜 기분 좋다. 
98    기분 좋은 하루 댓글:  조회:653  추천:0  2019-08-30
기분 좋은 하루       아침은 하루의 시작이다. 동녘 하늘에서 붉은해가 불끈 솟아 오르면서 기분 좋은 하루가 시작된다. 사람들은 너나없이 하루의 일과를 시작한다. 어떤 사람은 아침운동으로 어떤 사람은 아침 장보기로 어떤 사람은 소 먹일 풀베기로 하루의 서막을 연다.       아침에  사람마다 중요한 일과가 있으니 바로 아침 식사다. 영양점문가들의 견해에 따르면 아침식사를 잘 해야 오전 활동에 필요한 에너지를 보장할수 있다고 주장 한다. 아침식사를 거르면 신체에 필요한 에너지가 부족하여 몸을 해친다.  하기에"아침은 부자 같이 먹고 저녁은 거지 처럼 먹으라"고 하지 않는가. 헌데 젊은축들은 바쁘다는 핑게로 아침을 잘 먹지 않을 때가 많다.      자기의 신체가 어떻게 만들어지고 생각이 어떻게 형성되고 인생이 어떻게 만들어 지는가를 먹고 보고 만나는 세가지를 통하여  이야기 해보자.      하나. 먹는것을 통해 피와 살을 만들어 진다.    어린애기가 출생하면 모유를 찿는다. 배워준것도 아니지만 천성적으로 모유를 빨아 흡수한다. 어린아이는 인체에 수요되는 모든 영양분을 모유로 해결 받는다. 지금은 슈퍼에 가면 모유수 대신 영양우유제품들이 많지만 학자들의 견해에 따르면 모유수가 그 무엇보다 어린에게 좋다고 한다.  어린이는 모유로 자기의 피와 살을 만드는것이다.      어른도 마찬가지다. 다른 점이라면 어른은 신체에 필요한것을  주동적으로 찿아서 먹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전에 룡정에 이름난 보신탕집이 있었다. 매일 손님으로 북쩍거리는데 비오는 날에는 보신탕이 진짜 제격이다. 사람들은 더운 삼복철에 먹는 보신탕이 몸에 좋다고 여긴다. 우리는 여러가지 야채 고기 곡류 과일 등을 먹음으로써 사람몸에 필요한 영향을 흡수하고 운동을 거쳐  튼튼한 신체를 만든다. 우리가 먹는 것이 피와 살을 만든다 할때 음식물을 절때로 허투로 대할수 없다. 깨끗하고 영양이 있고 신선한것을 선택하여야 한다.       둘. 보고 듣는것을 통해 내 생각이 만들어 진다.    "나다니는 머저리가 집안에 앉아 있는 똑똑이 보다 낫다"라는 속담이 있다. "백문불요 일견"이라는 말도 있는데 보는것의 중요성을 말하였다. 청나라 말기 청정부에서는 공비로 미국에 어린이 유학생을 보내였다. 목적은 이아이들이 미국에서 공부하고 견식을 넓혀 청정부에 보답하기를 바란것이다. 견식이 넓어야 한다. 우물안의 개구리는 하늘이 우물 아구리만 하다고 생각한다.      작가나 시인들은 봄이나 가을이면 농촌에가서 생활체험을 한다. 이른바 땅의 기운을 받는 것이다. 그래야 글이 생동하고 생할미가 나는 것이다. 본다는것은  다만 눈으로 보다는 뜻 외에도 배운다는 뜻이 포함되여 있다. 보고 듣고 하는것을 통해 자연을 배우고 사회를 바라보는 예리한 시각을 가지게 되고 정확한 인생관을 갖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생활속에서 배우고 학교에서 배우고 일터에서 배운다. 부단히 새로운 지식을 습득하여야 지식이 폭발하는 이시대에서 두발을 단단히 붙힐수 있고 살아 남을수 있다. 과거의 밑천만으로는 살기가 힘들다. 다른건 그만두고 지금 위챗결산 방식의 도입으로 현금을 노리던 도적이 적어지였다고 하지 않는가. 사람들이 그만큼 현금휴대가 적어지였다는 말이다. 지금 핸드폰은 과거의 단순한 전화기 개념을 떠나서 사진기 록화기 라지오 록음기 유희기 전자결재 은행업무등 다방면의 공능을 지나고 있다. 핸드폰 하나만 들고 있어도 세상을 내다 볼수 있고 많은 일을 할수 있다.      셋.  만나는 사람을 통해 내 인생이 만들어 진다 .    우리는 살면서 많은 사람을 만나게 된다. 아버지 어머니 선생님 동창 친구 동사자 파트너 령도 등 허다한 사람을 만나고 또 교류하며 공존한다. 인간은 군체동물로서 혼자 살기 힘들다. 만나는 사람은 대체상에 두가지 부류로 나눌수 있다.  하나는 피동적으로 만나게 된 사람들이다. 즉 하늘이 맺어준 인연을 가지고 있는 아버지 어머니 선생님 동창 동사자 령도등 이다. 다른 한가지 부류는 주동적으로 만나 인연을 맺는 사람들인데 친구 파트너 등이다. 이부류에 속하는 사람들과는 애호 흥취 가치관 등 여러면에서 허다한 공동점을 가지고 있다.      사람을 만나다. 이것은 길가에서 누구를 만났다는 말이 아니다. 이것은 장시기 교류하고 합작할수 있는 비교적 고정된 관계를 가진 사람들과의 만남를 말한다. 나의 생각 관점 행동이 다른사람한테 영향을 줄수 있듯이 다른 사람도 나한테 영향을 줄수 있다. 좋은 사람과의 만남은 일생 동안 수혜를 볼수 있다.      성인이 되면 사람들은  좋고 그름에 대한 자기의 판단표준이 있게 되는데 이것은 교육수평 도덕수평 개인경력 등과 밀접한 관계가 된다. 중국말 속담에" 금을 가까히 하면 붉어지고 먹을 가까히 하면 검어진다"는 말이 있다. 좋은 사람과의 만남은 행복하고 즐거운것이다.      힘들때 부를수 있는친구가 있고 기쁠때 같이 동참할수 있는 친구가 있다면  이 일생 헛되히 살지않았다.  부족한것은 부단히 보충하고 남는것은 적극적으로 사회에 반납하여야 한다. 무엇이든 많이 짊어 지고 있으면 힘드니 항상유(有)에서 무(无)를 만들기에 노력해야 한다.       오늘도 기분좋은 하루를 만들기 위하여 우리 다같이 노력하자.       좋은 것을 먹고      좋은 것을 보고     좋은 사람을 만나는      기분 좋은 하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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