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영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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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사진현상기(扩印器) 댓글:  조회:1109  추천:1  2019-01-16
사진현상기(扩印器)         지금은 많은 사진기가들은 자기로 사진을 씻지 않는다.    칼라로된 사진현상 하려면 기술도 기술이거니와 설비 또한 비싸다.    그리고 요지음 디지텔사진기가 많기에 사진을 별도로 뽑아야할 필요성을 느끼지 않는다.   아무리 많은 사진이더라도 켐퓨터에 입력하기만 하면 끝이다.     참으로 편리한 세상이 되였다.     과거에는 누구 집에 놀려 가면 종종 사진첩 구경을 하게 된다.     허나 지금는 그런 일이 없어 져버리였다.           시대의 발전과 더불어 취향에 변화가 생긴것도 있겠지만 구구히 사진첩이 아니라도 사진을 열람 할수 있는 도경이 너무 나도 많아 지였기 때문이다.     지능형 전화라든지 노트북이라든지 모두 영상입력이 가능하다.     지난해 내가 지능전화기로 찍은 사진만하여도 1700여장이 되였다.     그것도 년말에는 운(云)도편에 저장하는데 보관이 무료다.             80년대 초반에 우리 집에는 35미리짜리 일본제 자동사진기가 있었다.     일본에 계시는 고모님이 중국 방문오시며 우리에게 선물한 사진기였다.     그 시절에는 극히 적은 사람들이 유람이라던지 결혼식때나 사진기를 들고 다니였다.     어찌보면 자랑거리에 속하는 귀중한 물건이였다.     당시135필림을 쓰는 사진기는 기본상 일본산이였다.     국산이라면 갈매기표 사진기가 있었는데 필림은120미리를 넣었다.               사진기는 갖추어 지였겠다 나머지는 촬영하고 사진을 뽑는 일이다.     우리는 이 사진기로 많는 사진을 찍었다.     지금 사진기는 디지텔 사진기여서 찍은 직후 집적효과를 체크할수 있지만 당시에는 그것이 불 가능 했다.     오직 사진을 뽑아야만 코가 달렸는지 눈이 달렸는지 알수 있었다.     지금도 사진업계에 우스개소리가 있는데 누구를 망하게 할려면 사진기술을 배워주라는 말이다.    알면 알수록 사진기에 대한 요구가 높아가고 설비에 대한 욕심이 생긴다는 이야기다.     그러니 자연히 돈을 팔게 되여 있다.              당시 나의 둘째형님은 사진기에 대한 연구가 깊었다.     형님은 낡은 구식 사진기 한대를 얻어왔다.     형님은 나무 널판자에 금속 막대기를 고정해 놓았다.     사진현상기를 만드는 첫 보조였다.      그리고 깡통하나를 얻어다 금속막대기에 련결시키였다.     물론 조절 가능한 조리개를 안장하였다.     깡통안에는 전등불을 넣었고 밑에는 사진기에서 떼여낸 렌즈를 부착시키였다.     렌즈밑에는 유리를 고정시키였는데 그사이로 사진필림을 끼여넣었다.     이쯤 하면 간단한  사진현상기가 탄생한 것이다.             방의 모든 불을 끄고 천정에는 붉은색 등불을 켠다.     그리고 확인기의 불을 켜준다.     사진필림을 끼여 넣으면 검판에 담긴 영상이 사진현상기  불빛을 통과하여 널판자에 아주 똑똑히 비쳐진다.     깡통을 아래우로 조절하며 사진의 크기를 확정한후 불을 끈다.    집안 에는 붉은 빛만 남아있다.     이때 검은 종이에 싼 사진종이를 꺼내여  널판자 우에 고정시킨다.     강통안의 전등과 련결된 개페기가 형님의 손에 쥐여져 있다.     형님은 전등을 켰다 껐다를 반복한다.      그리고 显影分이 용해된 소래의 액체에 빛을 쪼인 사진 종이를 잠구고 영상이 나타나기를 기다린다.     기적같은 일이 서서히 눈앞에 나타난다.     점차점차 사진종이에 영상이 나타난다.     마치 마술사 된 기분이다.     딱좋은 영상이다 싶으면 참대로 제작된 펜센트로 사진을 짚어 내여 定影分이 용해된 액체 소래에 잠군다.     이로서 사진 씻는 일이 완료된 셈이다.     일정한 시간이 지나면 사진종이를 꺼내여 물에 씻은 후 유리에 부착시켜 말리 운다.             그때 우리는 많은 사진을 씻었다.     형님 몰래 나도 가만가만 사진을 현상해  보았다.     반급의 친구들도 청하여 견학시키였다.     사진영상이 나타날때 이런 장면을 처음보는 친구들은 눈이 휘둥 그래 진다.               지금도 우리 집에는 그때 뽑은 사진들이 많다.     모두 기념의미가 깊은 사진들이다.     더욱히 자기가 손수 촬영하고 또 집적 씻은 것이 기에  더욱 친절한 느낌을 주는 사진이다.  
30    사격장 댓글:  조회:1008  추천:0  2019-01-15
사 격 장      사격장이란 말그대로 총을 쏘는 장소라는 말이다. 지금은 우리 민간인들이 사격장을 접근하기가 어렵다. 한것은 성시의 확장과 더불어 사격장은 시내와 동떨어진 외진곳으로 전이 되였고 또한 안전문제로하여  접근을 금지하기 때문이다.    내가 어릴때에는 지금 소영소학교 동쪽에 큰 사격장이 설치되여 있었다. 부대에서는 자동차에 군인들을 싣고 와서 총탄실험도하고 사격훈련도 하였다. 사격하기 전에 몇명의 병사들이  사격장 주위의 산꼭대기에 뛰여올라가 기발을 꼽는다. 뜻인즉 사격훈련을 하겠으니 접근하지 말라는 신호다.   아침부터 콩복듯한 사격소리가 마을을 시끄럽게 한다. 어찌보면 소영에서만 볼수있는 풍경이다.         우리는 하학만하면 사격장으로 달려 간다. 어떤 친구들은 집으로 뛰여가서 호미를 들고 달려온다. 한것은 그곳에 가면 돈이 될만한 것들이 많기 때문이다. 시간이자 금전이다. 바로 사격장에서 체험할수 있는 진리였다. 사격이 끝나고 군대들이 철거하자 바람으로 총알이 가장 많이 박힌 흙더미를 향해 달려간다.  먼저 노다지를 차지하고 감자캐듯 땅을 파헤치면 탄두를 많이 주을 수 있다.     권총탄두는  껍데기는 동으로 되여 있고 그 속에는 연(铅)이들어 있다. 자전거방울에 탄두를 담아 풍로불에 올려 놓는다. 불이 이글거리면 탄두에서 연이 녹아 나온다. 이쯤에 집게로 탄두껍데기를 집어 내고 연을 식힌다. 연은 비중이 높은 금속이다. 녹여서 얻은 연과 동으로 된 탄두껍데기를 공소소에 팔면 돈이 된다. 권총탄두에 연이 많다. 반면에 보총탄두내면을 보면 연이 적고 쇠가 많다. 70년대 동 한근에 3원좌우 연 한근에 60전좌우 였는데 그때 운동화 한컬레가 3원좌우다. 운수가 좋으면 두어번 줏으면 새신이 생긴다는 말이다. 생각만 해도 흥분되는 일이다.   그때는 사격훈련이 많았다. 중쏘관계가 긴장하던 시절이 였다. 어린 나이여도 어른들이 전쟁에 대해 말하면 귀가 솔깃해 진다. 무슨 쏘련에서 비행기가 뜨면 담배 한대 피우는 시간이면 연길까지 온다는둥 중국과 쏘련이 전쟁하면 독일이 쏘련을 진공한다는둥 그 시절에는 진짜로 밭고랑 타고 세계를 내다보는 토배기 군사가들이 많았다.    군관들은 권총사격훈련하는데 팔목힘을 키우는 목적으로 권총자루에 벽돌장을 매달고 묘준훈련을 한다. 진종일 무거운 짐이 달린 권총을 꼬나들고 있는 것도 고역이다.  또 한편에서는 기관총 기능검사를 한다고 무수한 총을 쏘아 댄다. 표준동작으로 말하면 손가락으로 방아쇠를 당기여 사격하는 것이지만 군인들은 쇠막대기로 당겨준다. 기관총도 쇠로된 틀에 고정하고 말이다. 총신이 벌겉게 달아오으면 식히고 또 쏜다.    며칠전 한국방송에서 사격장에 관한 이야기를 했다. 60년대 미군이 군사연습을 단행하는데 포탄알이며 탄피를 줏겠다고 애들이 사격장에 뛰여 들어 갔다는 것이다. 지금 어른이 된 그들과 무섭지 않았냐고 물으니 배고푼것이 더 무섭더라고 대답한다. 그 사람들도 사격장에서 돈이 나오는 줄 알았던 것이다. 사격장이 근처에 있다보면 탄깍지라던지 탄두같은 것을 많이 줏게 되고 그것이 어린시절 우리들의 유일한 놀이감이 였다. 하다보니 불발탄을 갖고 놀다가 터져 손을 상한 사고도 있었다.     그때 사격장의 규모도 점점 커가고 시설도 많이 개선되였다. 고정된 사격표말은 사격훈련을 만족시킬수 없었던지 후에는 이동식으로 고치는 것이였다. 전호를 파고 레루장을 펴고 그우에 구루마(车)를 앉히고 사격표말을 고정시키였다. 다음 구루마에 바줄을 매고 전호량끝의 자새에 바줄을 감아 놓았다. 병사들이 자새를 돌리면 구루마가 이동하는데 이동속도는 임의로 조절이 가능했다. 움직이는 사격표말은 군인들에게는 사격난도가 커졌지만 우리에게는 절호의 놀이터가 되였다. 길이가 한백메터되는데 구루마에 앉아 놀다 보면 속도감도 좋다. 손에 막대기를 들고 휘두르노라면  마치 개선장군이 된 느낌이다. 당시 여느 공원에 간들 이보다 더 좋은 놀이가 있으랴.    시간이 흘러 80년대에 들어서며 사격훈련이 적어지였다. 아마 다른 곳으로 전이 되였는가 보다. 군인들이 안오는 사격장에는 잡초가 무성하여 졌다. 관리가 없으니 레루장도 하나둘씩 도적맞히였다. 결국에는 하나도 남지 않고 다 뜯어져버렸고 목침마저 사라져버렸다. 다시 몇해 후에는 새마을이 들어 섰고 지금은 사격장 흔적조차 찿아 볼수 없다.   지금도 새마을을 지나다닐 때에는 그시절 사격장 모습이 떠오른다. 우리들의 동년의 꿈이 묻혀있던 사격장이다. 아 나의 동년이여!  
29    사물놀이(四物乐) 댓글:  조회:1318  추천:1  2019-01-14
 사물놀이(四物乐)          사물놀이에   들어가는  악기로는 꽹가리 징 북 새장구등 네가지다. 비록 악기의 종류는 적지만 소리의 변화 풍부하며 박진감이 강하여 흔히 사람들로 하여금 흥분속에 빠져 들어가게 한다.  선조들은 우리민족의 고유한 민속악기로 귀맛좋고  변화무쌍한 많은 소리를  편곡해 내였다.      사물놀이를 관람하노라면 출현자들의 능란한 손놀림과 몸짓 익쌀스러운 표정에 매료되여 같이 흥분하고 같이호흡하고 같이 몸을 흔드는 일이 허다하다. 북소리는 마치 잔잔한 호수가에서 노니는 갈매기를 표현하듯 소리도 낮고 빈도도 늘지다가도 마치 우뢰가 울고 번개가 치듯 소리가 높고 빈도가 밀집해 진다.  표현자들은 징을 선두로 하여 소리의 변화를 이끌어 내는데 혹은 낮은 데로부터 높은 데로 혹은 높은 데서 낮은 데로의 변화를 통하여 사람의 마음을 사로 잡는다.        사물놀이는 옛날 농경시대의 농가락의 일종으로서 힘든일 할때  피로도 풀고 기분도 돋구고 마음도 단합시키는 작용을 하였다. 농부들이 휴식의 한때를 리용하여 공터나 밭머리에 모여서 고정된 식과 틀을 떠나 자유자재로 마음의 변화를 표현하던 놀이 방식이다. 지금 보아도 아주 지헤롭고 슬기로운 우리민족의 내심세계의 변화를 잘 보여 주었다고 생각한다.     지금은 촌에 가도 대부분 기계화농사라  분공이 세밀하고 시간이 급하여 밭 머리에서 농악을 즐길 겨를이 없다. 오히려 도시에서 무대에서 사물놀이가 더욱 류행되는 편이다. 내가 사물놀이를 처음으로 접하게 된 것은 연변대학 학생들의 표현을 보면서 부터였다. 학생들은 민족복장을 입고 연변대학길거리에서 표현하는데 북소리가 하늘을 진동하고 새장구의 멜로디가 관람자들의 심금을 울렸다.      춘절을 맞이하여 단위에서는 문예공연을 한다고 통지하였다. 각 부서 에서는 무슨형식을 취할가 고민이 많다. 형식은 재담 소품 합창 무용등 다양하다. 우리는 합창할가 무용할가 토론하다가 엉뚱하게 사물놀이를 하기로 합심하였다.  한것은 우리 부처의 한직원이 소개하기를 친구가 군중예술관선생님으로 사업하는데 청해올수 있다는것 때문이 였다. 사상을 통일하고 우리는 실천에 몰입하였다.       젊은 선생님은 요구가 엄격하였다. 매하나의 동작과 소리를 꼼꼼히 가르쳐 주는데 정말 책임심 또한 강한 분이였다. 허나 문제는 우리 한테서 생기였다.         두개 처실이 합하여 절목을 표현하게 되였기 때문에 사람을 고정시키는 일이 가장 큰 문제였다. 하긴 우리에게 전문연습시간이 주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사업은 사업대로 해야 했고 연습은 연습대로 밀고나가야 했다. 두마리 토끼를 다 잡아야 한다는 말이다. 오늘은 저사람이 청가다. 내일은 이사람 청가다. 가뜩이나 시간이 없는데 사람변화가 너무 많다.                기초라도 있는사람들이라면 괜찮은데 난생 처음으로 새장구를 치여보는 녀성분들 그리고 북이라는 개념조차없는 남성분들 모두가 골치덩이다. 이번 공연을 책임진 처장동무는 공연때문에 잠도 못잔다고 나보고 하소연했다. 나는 고무격려의 차원에서 너무 신경쓰지 말라고 말은 했어도 실은 나도 어떤 연출이 될지 모르겠다. 울며 겨자먹기다. 절목 형식도 보고했고 선생님도 청해왔고 악기도 빌려 왔으니 이제 다른 선택이란 없다. 하는데 까지 열심히 해야 한다.       선생님은 우리의 구체적 실정을 고려하여 작품을 4개 악장으로  비교적 간단하나 박진감이 강하고 재미있는 사물놀이로 편곡하였다. 일단 연습에 들어갔다. "북과 새장구를 가운데를 쳐야 합니다. ""크게 두번치고 낮게 네번 쳐야 합니다. ""소리의 높고 낮음이 선명해야 합니다" 선생님은 목소리 마저 쉬였다. 얼마나 애간장이 터졌으면 목소리 마저 쉬였겠는가.  잘하던 못하던 우리 탓이지 선생님의 교육과는 별개라고 나는 생각한다. 이튿날부터 우리는 마이크가 달린 확성기를 빌려왔다. 될수록 이면 선생님께서 큰소리로 이야기하지 않아도 들릴수 있게 말이다.      원래 기초가 없는 학생들이라 두개를 배우면 하나를 잊어 먹는다. 반복이 필수다. 하여 우리는 오전에는 자습하고 오후에는 교학받기로 하였다.      이쯤하면 평판이 나올 법하다. 우리는 될수록  이면 다른 사람들에게 영향을 주지 않기 위하여 연습장을 1층전람실에 안배하였다. 하지만 북소리 새장구소리 징소리가 요란하기 만하다. 잘치면 소리가 듣기 좋을 련만 초보들에게 기대하긴 무리다. "소리가 너무커요""무슨소린지 모르겠다""박자가 엉망이구먼 ㅎㅎ"벼라별 소리가 다있다. 허나 남이야 뭐라던 상관이 없다. 오직 우리가 열심히 하고 연출에서 성공을  거둘때 만이 이것이야 말로 관중들에 대한 가장 큰 보답이리라.      출연자들 열성 또한 대단하다. 어린이 두명을 둔 애엄마는 휴식일 집에서 연습한다며 새장구를 메고  집에 갔다. 징을 치는 친구는 악보는 문외한 이지만 자기만의 기법으로 선생님의 강의를 정리해냈다. 우리는 하나다. 우리는 집단의  한명의 성원이다.  집단의 명예를 위하여 우리는 노력한다.       사람살이도 사물놀이와 비슷하다. 모르는 것을 배와야 하고 연습해야 하고 무대에 나설 차비를 해야 한다. 남이야 뭐라던 결과를 얻어 내는것이 중요하다.      이제 연출할 날까지 얼마 남지 않았다. 우리 집단의 매개 성원이 합심하여 노력한다면 사물놀이가 매우 성공하리라 믿는다. 하기에 오늘도 열심히 노력하고 있다.
28    주민 신분증 댓글:  조회:1037  추천:0  2019-01-04
주민신분증             신분증은 한사람의 신분에 대한 증명이라 하겠다. 1984년에 우리 나라에서 처음 신분증이 나와서 부터 신분증은 이름도 여러번 변하고 내포된 정보도 많이 변하였다. 현재는 제2대신분증을 사용하는데 칩이 안장되여 더욱 많은 장보를 저장하고있다.         지금은 신분증을 휴대하지 않으면 진짜로 움직이기 힘든 세월이다. 기차도 뻐스도 비행기도 탈수 없다. 집을 구매해도 차를 뽑아도 모두 신분증을 제시하여야 한다. 이렇게 중요한 신분증을 소지하지 않았을 경우 따라오는 불편함이 이루 감당하기 어렵다.       오늘 나는 일보려 장춘으로 가게 되였다. 같이 떠난 친구들이 나의 차표까지 끊은 상태라 나는 자동매표기에 신분증을 제시하고 표를 뽑기만 하면 끝나는 일이였다. 가방에서 신분증을 꺼내여 자동매표기에 제시하던 찰라 이게뭐야. 신분증이 아니고 은행카드였다.       나는 다급히 가방이며 호주머니를 뒤졌다. 헌데  유독 신분증만 없다. 다시 한번 삿삿히 번져봐도 없다. 나는 다급히 안해한테 전화했다. 집에 신분증이 있는가 찿아보라고. 때는 기차출발을 20여분 앞둔 시각이였다. 전화가 왔는데 못찿았다고 했다. 긴박한 순간에 안해가 운전면허증을 갖고 갈테니 기다리라고 했다. 기차출발을 10분 앞두고 안해가 차를 운전하고 운전면허증을 가져다 주었다. 나는 기차표구매소로 달려갔다. 여차여차하게 매표원에게 설명하고 운전면허증을 제시 했더니 인츰 차표를 건여 주었다. 만세다 대뜸 검표구를 지나 차에 올랐다.          차에 앉아 신분증이 어느곳에 두었을가 곰곰히 생각해 보았다. 지난달 26일에도 기차를 탔으니 물론 신분증이 이었다. 그런데 31일날 세차하고 집에 돌아온후 가방을 열어보니 카드며 운전면허증이며 열쇠며 아무것도 없었다. 당금 새해를 맞이 하는데 왜 이런 일이 발생하는 걸까. 나는 당금 집에서 나와 차고로 뛰여갔다. 차앞좌석 문을 열고 보니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자세를 낮추고 보조석 밑을 살펴보니 다행이도 카드며 열쇠며 현금이 보였다. 행운이다 이것들을 못 찿았을 경우  나의 생활은 막대한 혼란을 받게 된다. 나는 회심의 미소를 짓으며 집에 올라 왔다. 보험의 각도에서 나는 가방에는 은행카드  신분증만 소지하기로 하고 나머지 일체는 집에 두고 다니기로 하였다. 그런데   원고로 신분증을 둬두고 은행카드만 갖고 나온 것이다. 신분증소동이 벌어진 것이다. 한장의 신분증이 이처럼 우리의 생활에 중대한 작용을 일으키고 있다.       장춘에서 일보는 와중에도 신분증 불소재로 인한 근심을 떨쳐 버릴수 없었다. 하여 동사자들과 좀 일찍 역에 도착해야 함을  재차 강조했다.  발차 45분을 앞두고 우리는 장춘역에 도착 할수 있었다. 기차표는 이미 인터넷으로 구매되였기에 다른 친구들은 자동판매기에서 표를 뽑고 대합실로 들어갔다. 하지만 나는 줄을 서 표를 받을 수 밖에 없다. 신분증을 소지하지 않은 대가를 치루는 판이다.       근데 오늘 따라 웬 손님이 이렇게나 많은지. 그리고 판매원의 속도는 왜 이렇게나 늦은지. 속이 부글거려도 참을 수 밖에 없다.  20분을 기다려 나의 차려가 되였다. 운전면허증을 들이 밀고 표를 달라고 했다. 헌데 인터넷구매기록을 보여 주어야 한다고 말한다. 연길역과는 또 다른 시스템이다. 친구들이 나한테 기록을 보내주지 않았다. 다급히 친구한테 전화를 했다.  통화가 안된다. 뒤에선 사람들은 빨리 사라고 야단이다. 일단 옆으로 자리를 내주며 또 통화를 시도했지만 엮시  안된다. 시간은 빨리도 흐른다. 이젠 시간이 10분 밖에 남지 않았다. 나는 집에 있는 동사자에게 전화하여 같이 온 친구들에게  련락하여 나의 정황을 알려주라고 통지하였다. 드디여 기록이 위챗을 통하여 전해왔다. 표를 찿을 수 있게 되였다. 만세다. 표를 찿은 나는 2층 대합실로 뛰여갔다.        나는 또다시 신분증의 중요함을 실감했다. 감사한건 신분증불소재자들에게 마련한 만회조치다. 운전면허증으로나마 구매가 가능하여 졌기 때문이다.       나는 출장이 비교적 많은 편이다.  신분증불소재로하여 부산 떨기는 처음이다.       나는 오늘 일이란 빈틈없는 준비가 되여야 하고 마음은 항상 차분하여야 되고 흥분상태에서는 실수가 많을 수 있다는 아주 간단하나 심오한 도리를 다시 한번 깨닫게 되었다.  
27    두도온면(头道温面) 댓글:  조회:1448  추천:0  2018-12-29
 두도온면(头道温面)          두도온면이라면 많은 사람들이 알아 준다. 대게는 술을 마신 이튿날 속이 번저질때 찿는 것으로 알고 있다. 따뜻하고 칼칼한 온면국물이 해정작용을 한다할가 어째든 한번 먹으면 다시 찿게되는 맛집이다. 헌데 연길에는 두도온면이란 간판을 단 식당이 여러군데 있다. 손님들이 두도온면을 하도 많이 찿으니 각자 두도온면이라고 내놓는지 모르지만 "두도온면" 상표를 획득한 집은 오직"맛선생"한집뿐이다. 온면집은 북대  동전서부대남쪽에 위치하고 있는데 항상 손님이 많다.            우리 반장와이프하고 온면집 사장은 친척 사이였다. 그렇게 알고 다니기 시작한지도 여러해가 지났다. 어느날 정심시간 나와 서기 반장이 만나서 무엇을 먹겠는가 연구하고 있었다. 반장이 말했다. " 북대에 온면집이 있어. 집적 누룬국수로 온면하는데 맛이 죽인다니까"하여 우리 세명은 민주에서 부터 차를 운전하여 북대로 이동하였다. 기대감을 품고말이다.         문을 떼고 들어가니 주인이 반긴다. "아즈바이 왔습니까. 빨리 들어오시오"신체가 든든하게 생긴 주인은 첫인상에 성격이 서글서글하고 후더워 보였다. 정심이라 우리는 온면세그릇만 시키였다. 벽에는 사장님이 연변방송국에서 취재받을 당시 찍은 사진이 걸려있었다. 그리고 국가공상관리국 국장이서명한  "두도온면"전문상표획득 증서도 가장 중요한 위치에 걸려있었다.  이 온면집의 정통(正统)성을 증명하고 있다.     온손님들은 대체적으로 단골인것 같다. 젊은축들이 있는가하면 로부부들도 있다. 온면의 가장 큰 특점은 사람이 사람을 다시 불러들이는 것이다. 이집 온면은 매운맛의 정도에 따라 특급 중급 초급으로 나뉘였다. 원래 매운것을 즐겨 먹는지라 나는 일단 중급부터 시작하기로 했다.     기다리던 온면이 올랐다. 국물은 연한 간장색을 띠였고 면발은 빛이 돌았다. 안춘(鹌鹑)알 소고기등 고명이 면발위에  곱게 얹혀있다. 온면과 랭면의 고명이 가장큰 차이점은 바로 냉면고명에는 고추가루가 들어가나 온면고명에는 고추가루가 없다. 온면 그릇을 가까히하고  코를 벌름거려 냄새맡으니 조금은 매운냄새와 짭짜름함과 고소한 향이 난다. 나는 일단 숟가락으로 국물을 떠마시였다. 온면먹기전 국물을 마시여 보아야 진짜 온면의 맛을 알수 있기 때문다.       카 . 톡톡쏘는 맛이다.  고추매운맛 후추매운맛  그리고 연한향까지난다. 국물이 배속으로 흘러드니 온몸이 따뜻해진다. 그리고 쨍해난다. 마치 포근한 담요를 몸에 두른것 같다. 면발은 어찌나 쫄깃쫄깃하고 매끄러운지 입에 넣자마자 목구멍을 넘어간다. 내가 국수를 좋아하는 원인중 하나가 바로 매끌매끌한 면발이 목구멍을 넘어갈때 그감각이다. 그리고 매운맛 짠맛 고소한맛 모두가 내입에는 딱맞다. 진짜로 짜지도 싱겁지도 않다. 정신마저 맑아지는 느낌이다. 나는 국물까지 다비웠다. 서기가 말한다. "두도온면 좋아하는구머. 먹을줄안다구"        우리 서기는 견식이 많은 사람이다. 국내는 메주밟듯 돌아 보았고 멀리로는 영국땅을 밟아본 친구다. 온면이 오르자 나와는 달리 국수몇오리 입에 넣고 음미하더니 왈 "동남아국가들 음식에 들어가는 향신료가 들어간거같다구. "내가 사장어른하고 진짜 그러냐고 물으니 시물시물웃으며"아즈바이 내가 그걸알려주면 안됩즈비"라고 슬쩍 넘겨버린다. 하긴 특허가나온 두도온면인데 철저히 비밀에 부쳐야 한다.      이것이 인연이 되여 나는  온면이라면  줄곳 "맛선생"집으로 다니였다. 무슨 끌어 당기는 힘이 있는 같다. 그리고 화룡고중835 많은  행사는 기본적으로 여기서 조직되였다. 우리 반급의 아지트 같은 곳이다. 일본 한국 국내 여러동창들 모임에도 "두도온면"이 빠질수 없다. 나의 추천으로 직장동료들  그리고 친구들도 잘 다닌다. 한번은 한처실에 친구를 데리고 온적이 있는데 너무 맛 있어서  이튿날 다시 찿았다고 한다. 근데 그날 따라 손님이 넘쳐나 기다리다 아쉬움만 남긴채 돌아 갔다고 했다. 얼마나 먹고 싶었으면 이튿날 다시 찿았을가.         두도온면이 점점 연변의 명물로 자리잡고 있다. 특유의 칼칼한 맛이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 잡고 있는것 같다. 얼마전 내가 고향음식에 대한 글을 쓰고나서 친구보고 뭐가 빠지였는가 보라고 했다. 위챗에 당금 소식이 들어왔다. "왜서 두도온면이 빠졌지. " 아주 리해 안간다는 립장이였다. 나는 온면집에서  동사자들이나 친구들을  자주만난다. "여기는 웬일이여"  " 우리 이집 단골이야"모두 반갑다 인사한다. 제일 좋은 광고는 입소문이다. 한입 두입 건너가면서" 맛선생"두도온면이 소문낸것이다.         나와 두도온면은 연분이있다. 맛도맛이려니와 사장부인이 성씨가 한씨라 한다. 어쩌면 맛있는 온면도 먹고 한집안도 만난 것이다. "맛선생"식당에서 요지음은 새상품 개발에도 힘을 쏫아 붓고있었다. 집에서도 손쉽게 먹을 수있도록 개발한 편이"두도온면"이다. 특히 타향에 있는 친구들이 고향이 그리울 때 가장 알맞는 음식이라 생각한다.   연변의 명물 두도온면이 더욱많은 사람들의 사랑속에서 번영하길 바란다. 그래야 우리도 아무때건 맛보려갈것이 아닌가. ㅋㅋㅋ
26    고추장 련정 댓글:  조회:1205  추천:0  2018-12-28
고추장 련정           지금은 고추장이라고 하면 누구나 별로 라고 생각할수 있다. 슈퍼에 가면 각양각색의 상표를 붙인 여러가지 맛의 고추장이 진렬되여 있다. 장마당에나 시장에 가면 빨간색의 큰소 래에 고추장을 가득 담고 파는 아줌마들의 모습도 볼수 있다. 허나 70년대 중반기만 해도 상품으로 된 고추장이라는 것이 없었다. 우리 살던 마을에서도 고추장담그는 집이 몇집 안 되였다.          나의 부친은 경상북도 월성군 산내면 출신이다.  비록 18살 나이에 중국에 들어 오시였으나 고향음식에 대한 애착이 대단하시였다. 경상도사람들 매운것을 즐기는지라 부친께서는 고추장을 좋아 하시였다. 우리 마을 사람들은 경산도 말씨를 구사하는 우리 아버지를 보고 붉은군대라고 하였다. 따뜻한 경상도에 살다가 찬바람 불어치는 만주땅에 들어오니 얼굴피부가 얼어든것 처럼 붉게 변하였다. 1947년도 학강에서 해방을 맞이하고 해방군에 입대하였고  조선전쟁에도 참가하였다. 산전수전다 겪어오신 아버지지만 음식습관만은 변하지 않았다. 하기에 우리 자식들도 어려서부터 고추장을 접하게 되였고 또 즐겨먹게 되였다. 우리 모친은 비록 함경북도 출신이였으나 고추장을 좋아하는 남편덕분에 맛있는 고추장을 담그는 기술을 터득하게 되였다.           나는 어려서부터 어머님이 고추장을 만드는것을 보아 왔다. 고추장을 담그려면 손이 많이가야 한다. 이름에서 알수있다 싶이 우선 좋은 고추가루가 준비하여야 한다. 가을에 고추장을 만드는 첫 순서로는 메주를 만들어 천정에 걸어 놓는 것이다. 우리 연변의 된장을 담글때 쓰는 메주모양은 대체상 반원체 모양이다. 그러나 고추장을 담글때쓰는 메주는  조개떡 모양으로서 엷고 작다. 이런 고추장메주를 대여섯개씩 짚오라기로  묶어서 천정에 걸어 놓는다. 한해동삼 걸어놓고 있노라면 집안의 온도와 습도가 메주를 잘뜨게 하는 작용을 한다. 봄이 면  어머님은  메주를 물에 씻는다. 솔로 여기저기 불순물을 깨끗이 씻어 버린다. 그리고 쪼개여 햇빛에 바싹 말리운다.            다음 순서는 방아간에가서 메주를 가루내는 작업이다.  나는 어려서 어머님과 같이 방아 찢으려 자주 다니였다. 우리 동네계시는 황선생님의 집은 팔간집으로서 뒤울안에 방아간이 설치되여 있었다. 방아간도 과거에는 잘사는 집에만 설치되였나보다.  평소에 방아간문에는 자물쇠가 걸려 있었다.  자물쇠는 영화에서나 볼법한 구식자물통이였는데 마치 할머님들의 비녀같이 생긴 쇠막대기가" ㄷ" 자형의 자물통에 꽂혀 있었다.       나는 다리에 힘을 넣어 발판을 딛는다. 쿵덕 쿵덕 방아소리가 난다. 어머님은 방아가 호박을 떠나는 순간에 잽싸게  손으로 메주덩어리를 이리저리 번져준다. 이러기를 반복하다가 바가지로 메주가루를 떠내여 채에 친다. 어둑시그레한 방아간에서 나와 어머니는 손을 맞추어 방아 찢는다.  이렇게 쿵덕쿵덕 방아찢고 가루를 내였다. 한줄기의 햇볕이 방아간에 비쳐와 힌 머리수건을 친 어머님의 얼굴을  환하게 비춘다. 메주가루에서는 특유의 발효냄새가 났다.       집에오면 우선 큰 나무함지에 메주가루를 쏫아 붓는다. 거기에 곱게 가루낸 고추가루와 소금가루를 두르고 잘 섞어 준다. 다음 물엿과 찹쌀죽도 넣는다. 그리고 또 번져주기를 반복하는데 아마 여러가지 원자재가 고루 섞겨야 발효가 잘되고 맛을 내기 때문일 것이다. 고추장은 발효음식이기 때문에 여러가지 조건이 잘 구비되여야 한다.     다음 고추장단지에 퍼담는다. 고추장단지는 보통자기로 된것인데 배는 불룩하고 아구리는 작다. 다 담은후 알소금을 뿌린다. 장맛이 달아나지 못하게 하는 방법이라 한다.  덮개를 닫고 단지를 집뒤쪽의 벽밑에 놓는다. 이렇게 서늘한 곳에서 고추장은 발효되고 맛을 낸다. 일정시간이 지나면 빨같던 고추장이 약간 검른색을 띤다. 다 익었다는 신호다.     여름 터밭의  채소가 한창 일때 밥상에서 고추장이 빠져서는 안된다.  쌈을 싸먹어도  오이 파 풋마늘을 먹어도 고추장이 있어야 한다. 맵고도 달콤하며 쨍한 우리집 고추장은 입맛을 당기게 하는 마력(魔力)이있었다.      고추장은 그무엇과도 배합이 잘된다. 겨울철 뚝배기에 된장을 풀고 감자를 넣고 끓인다. 말리운 푸른고추를 손으로 비벼 넣고 마지막으로 고추장을 떠넣는다. 지글지글 끓는 뚝배기는 추운 겨울을 이겨내는데 필수다. 세치네탕에도 고추장이 들어간다. 더덕구이에도 고추장이 들어간다. 고추장은 당년 우리 집의 유일한 조미료였다.        아버지는 내가 어릴때 늘 산에 가서 방목 한다거나 삼을 자래웠다. 덕분에 우리는 곰취며 더덕이며 고사리 같은 야채를 알게 되였고 그런 것들이 늘 우리집 밥상에 오르게 되였다. 곰취쌈을 싼다던지 고사리무침에 밥을 비빌때에도 고추장이 빠져서는 안된다. 더욱히 더덕은 고추장을 발라서 구워야 제맛이다. 어머님께서 손수담근 일년 먹을 고추장이 반년 정도면 굽이 난다.  그러면 어머니는 또 고추장을 담그는데 발효시간이 짧아 아직 제맛이 아니라만 그래도 나는 좋았다.  지금 우리집 아들은 고추장을 먹지 않는다. 세대차인가 보다. 매운것을 먹으면 속이 아리다 한다. 나는 자극성이 강한 맵고 얼얼한 것이 좋은 반면에 애들은 고소하고 정갈하고 담백한 것을 좋아 한다.         이전에 우리는 고추장을 먹으면 싸움 잘 한다고 들었다. 하여 나는 싸움에서 이기라고 우리집 수닭에게 고추장를 많이 먹이였다. 그래서인지 우리집 수닭은 뼛이 진붉고 키가 크고 발톱이 날카롭다. 웬만한 닭과의 전투에서는 지는법이라곤 없다.       우리집 고추장에 찹쌀죽이 들어가는 것이 특별하다. 어머님이 어디서 배운비법인지 모르나 방송에서 나오는 고추장담그기 절목에서도 그런것이 없었다. 하기에 우리집 고추장은 항상 하르르하고 달콤하다. 아마 "소영표"고추장의 비법이리라. 고추장은 익어 갈수록  매운맛이 줄어드는 반면에 달고 은은한 맛이 깊어진다. 마치 사람이 나이 들수록 모(角)는 줄어들고 지헤로와지는 것과 흡싸하다할가. ㅎㅎㅎ       어머님이 돌아가신지 30년이 넘는다. 하지만 지금도 어머님의 손맛이 배인 그 고추장맛을 잊을수 없다.
25    부모 보모 댓글:  조회:1214  추천:0  2018-12-26
부모 보모         요지음 어린이 한명 자래우려면 성본이 높다. 우선 경제적으로 돈이 필요하고 둘째로 로동이 필요하다. 하여 어떤 젊은 축들은 결혼 안 한다. 결혼해도 어린이는 요구 안 한다는등 주장이 나오지만 그것은 어디 까지나  편면적이다. 결혼도 해야하고 아이도 낳아야 하고 조건이 허락된다면 2명의 아이가 있으면 더욱 만점이다. 우리 사회발전 각도에서 봐도 좋고 가정결구를 봐도 어린이를 생육하는 것은 사회에 대한 공헌이다. 아이를 자래우며 부모도 커진다고 하는데 .          요지음 어린이 보육에 필요한 모든 상품이 구전하다. 슈퍼에 가면 부모들이 생각 못 했던 영아보육 필요한 상품이 넘쳐 난다. 헌데 탁아소가 적다. 다음 정부가 경영하는 유치원이 적다. 결과적으로 보육에 필요한 많은 부담은 고스란히 젊은 부모들의 부담으로 돌아간다. 그러니 자식들이 부모님들에게 손을 내민다.         “ 어머니 우리 애기 좀 봐줘요”          “ 양육비 좀 대줘요” 요지음 손자손녀를 돌보는 부모님들이 많다. 한도시에서 살면서 손군들 보는것 쯤은 다 행복이다. 북경 상해 청도 어디라도 다 간다. 일본 한국 나가서 카나다에도 달려간다. 쉽게 말하여 자식이 어느곳에 사업하고 가정 꾸리였으면 그곳이 바로 부모님들이 손군들을 봐주는 사업장이 된 것이다.        젊은 축들은 자기들 형편에 출근도하고 어린이도 부양 할려니 힘에 부치는 건 사실이다. 요지음 젊은이들의 로임으로 어린이 양육하려면  태반 부족하다. 하여 어떤 집에서는 보모비에 보태라고 2000~3000원씩 대주는 집이 있는가 하면 또 어떤 집에서는 자식집에 가서 집적 손군을 봐주는 집도 있다. 젊은 부모들도 부모님들이 자기집에 와서 아이를 봐주기를 바란다. 그들의 도리라면 부모같이 자란 아이들은 총명하고 어디에 내놓아도 당당하다는 것이다.       하긴 어린이는 부모가 키우는 것이 맞으나 자기들 끼리 감당하기 어려워 부모님을 청해오는 하는 마당에 요구 사항도 많다. 텔레비에서 나오는 유아 학대사건도 들먹이니 더구나 할 말이 없다. 불쌍한 부모들 결국 자식집에 얹혀 있으며 손군을 볼라니 집일을 도울라니 진짜 허리 아프다. 허나 별도리가 없다. 사회적으로 보육에 필요한 시설이 너무 적고 가격 또한 너무 엄청나기 때문이다. 천하부모가련정(天下父母可怜情)이라고 손군까지 자래워야 되는 고단한 인생이다.        부모님이자 보모로 된 것이다. 우리  이웃에는 딸을 일본에 보낸 퇴직한 내외분이 살고 있다. 매일이라도 만날법한 분들인데  한동안 전혀 볼수가 없다.  한 반년후에 만나 물어보니 일본에 서 손군을 봐 주었다고 했다. 일본은 유치원보육비는 높지 않은 대신에 출근할려니 데려다 주고 데려오고 할 시간적 여유가 없다고 한다. 그분들은  아주 정규적으로 일본에 다녀온다. 다 자식들 뒤바라지 해주려는 갸륵한 맘 때문이다.             부모님들은 돈 안드는 보모로 전략하고 있다. 세월이 변하여 지금은 오히려 젊은이들의  목소리가 높다. 어린이 보모할려니 부엌일 볼라니 진짜 머슴살이다. 허나 별수가 없는 현실이다. 부자집이라면 돈만 팡팡 내밀면 되련만 형편 안되니 말이다.   우리 아이는 기본상 안해가 키웠다. 금방 해산해서는 외삼촌댁이 우리 집에 와서 봐 주었고 다음에는 장모님이 도와 주었다. 그리고 탁아소에 다니기 시작하였다. 안해 단위에 탁아소가 있어서 매우 편리했다.  애도 탁아소에 가면  자기 또래가 많아 좋아한다.          지금 나라적으로도 출산을 격려하고 있다. 정부 차원의 지원이 제일 필요하다. 정책상 출산휴가 시간을 늘여주 고 재정상 영아양육비용 지원이 절실하다.  유럽나라들에서는 아빠도 해산휴가를 준다는데 우리도 배워야 할 바이다. 가정에서 아빠의 위치가 너무도 중요하다. 엄마와 아빠가 어린이에 대한 교육방식과 기대하는 효과는 차이가 있다. 각 단위들에서도 보육시설을 갖추는 것도 도리다. 그래야만 젊은 부모들이 시름 놓고 사업할수 있고 또 자기직장을 더욱 아까고 사랑 할 것이다.          부모님들을 보모에서 해방시키여야 한다. 한일 자식뒤바라지 할라니 사업터에서 성과낼라니 쉴새없이 달려온 부모님들이다. 퇴직을 앞두고  혹은 퇴직후 손군들 돌보노라 너무 다망하다.              부모님들에게 시간을 주라. 그분들 만의 시간을 주라. 그것도 효도하는  것이다.
24    고향음식 댓글:  조회:1588  추천:0  2018-12-24
   고 향 음 식       우리 고향 연변에는 자랑 거리가 많다.  가무의 고향 축구의 고향 등 전국적으로도 유명하다. 어떤 사람들은 연변이라면 잘 몰라도 장백산이라면 잘 아는 경우도 있다. 민족의 성산 장백산은 그 위용을 만천하에 자랑하고 있다.         사람이 고향을 떠나 객지에서 생활하다 보면 제일 생각나는 것이 바로 고향음식 이다. 특히 우리 조선족으로 말하면 된장국이라던지 순대  랭면 같은 민속음식이 생각날 때가 많다. 왜서 일가 알고보니 사람들의 음식맛은 어린이 시절에 고정된다고 한다. 어릴때 무엇을 먹었으면 그맛이 고정되였기에 후일에도 먹고 싶다는 말이다.      지금 아이들의 입맛은 우리와는 세대차이가 난다. 한족식 서구식에 더 잘 적응되는가 보다. 우리애를 보면 일년가보아야  한번도 장국 먹고 싶다는 말이 없다. 허나 누구야 어찌하던 나는 그중에서도 나는 우리 민속음식이 맛있고 좋다. 어찌보면 보수에 가깝다고할 정도로 우리 음식이 좋다.        사업상 관계로 나는 주내(州内)여러곳으로 일보러 다니는 차수가 많다. 그러다보니 각현시의 특색음식을 두루 맛보게 되는데 오늘  그 중에서도 내가총화한  8개현시의 대표음식에 대하여 이야기 하려 한다.        훈춘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것이 고기뀀이다. 그것도 양고기가 아니고 소고기 뀀이다. 크기가 타지방것 보다 크고 맛이 일품이다. 웬간하면 고속철도가 갓통행하던 그 몇칠 외지에서 온 손님들이 아침부터 뀀집 앞에 줄지어 기다리였겠는가. 그 가운데는 우리집식구 세명도 포함되였다. 작은 칼도마와 칼이 같이 오르는 것도 이색적이다. 로씨야큰뀀이라고 하는것이 있는데 고기점이 트별히 크다. 베여 먹지 않으면 한입에 들어갈수 없을 정도다.           도문하면 세원식관(世原食馆)이다. 주로 소꼬리탕이 유명하다. 장사가 어찌나 잘 되는지 택시기사들과 소꼬리탕집이 어디냐고 물어보면 틀림없이 모셔드린다. 소꼬리를 너무잘 고운 덕분에 국물마저 보얗고 고기 또한 입안에서 녹아난다. 전에는 한국손님들이 많이 찿았는데 지금은 당지 손님들이 더 즐거워 한다. 전날 저녁에 어느 식당에서 술을 마신것과는 상관없이 아침에는 세관식관에서 만나 해정하는 일이 너무 많다.             연길음식은 다양하다. 그러나 대표적인 것이 랭면이다. 연길사람들 랭면에 대한 사랑은 특별하다. 여름이면 순희랭면집에는 손님이 줄지어 자기 차레를 기다린다. 이전에는 손님 대부분이 조선족들 위주였지만 지금은 한족이 더 많다. 설명절때면 계절과 관계없이 랭면 찿는 손님도 많다. 유람객들은 아무식당에 들어서도 랭면을 찿는다. 우리 연변은 랭면집이 전문인줄 모른다.          왕청에는 배초구 조선족개고기집이 유명하다. 고속도로를 타고 연길에서 왕청방향으로 달리다가 배초구진에서 내리면 된다. 한10여년전 우리는 왕청에 갔다 올때는 반드시 이집을 찿았다. 당시에  지붕이 낮으막하고 낡은 집이 였는데 지금은 벽돌집으로 면적이 크게 확장되였다. 개고기와 간장에 졸인 두부가  일품이다. 자리가 없어서 밖에다 상차리는 일이  푸술하다.            룡정에는 화미순대집이 소문났다. 하루에 반날만 영업하는 집으로서 정심에도 일찍 가지 않으면 자리가 없다. 춘절때면 많은 사람들이 명절손님접대용으로 10~20근씩 사가기도 한다. 내가 룡정에서 공작할때 친구들이 오면 화미순대집에 안배하곤 했다. 굵은 순대는 늦게 가면 없단다. 듣는바에 의하면 북대에 연길분점을 두었다고 한다.          화룡에는 서성진의 진달래촌 토닭이 맛있다. 금년봄 란주에서 려행사를 하는 친구가 왔다. 화룡친구들의 추천으로 진달래촌 토닭곰을 시키였는데 육질이 쫄깃쫄깃한 것이 진짜 토닭고기 맛이다. 곁드려 올린 고사리며 취 달래등 햇나물이 입맛을 돋군다. 맛도 맛이려니와 식사후 진달래만속촌을  한바퀴 돌아보는 재미 또한 쏠쏠하다.           올라가면서 안도다. 지금은 고속도로 타고 안도로 가는일 많지만 과거에는 국도(国道)를 타야했다. 석문진에 가면 세치네탕이 유명하다. 한번은 겨울에 장백산유람갔다 오는길에 저녁을 먹으려고 석문에 내리였다. 식당주방에는 크고작은 물통이 가득한데  세치네가 가득 담겨있었다. 공기를 마시려고 모든 고기들이 머리를 우로 향하고 있다. 조리법 또한 이색적이다. 부글부글 끓는 가마에 깔대기 모양의 모자를 씌우고 구멍으로 산물고기를 쏫아 넣는다. 고기들은 뜨겁다고 아우성이다. 소리가 밤잠하면 모자를 벗기고 먹는데 별미다.           마지막으로 돈화다. 돈화의 료리는 맛부터 아래 동네와는 틀린다. 진짜배기 한족료리사들이 집적 채소를 복아낸다. 돈화에는 늪과 양어장이 많다. 하여 물고기 료리가 유명하다. 물고기를 올릴 때에는 큰쟁반을 쓰는데 두부며 넓은 국수가 같이 입맛을 돋군다. 짠지 생마늘 같은 것도 구미에 따라 요구 할수 있다. 거기에 전병(煎饼)까지 베여물면  둘이먹다 하나 죽어도 모른다.         많고 많은 고향음식가운데  대표적인 몇가지만 소개  하였다. 이국땅에서 혹은 타지방에서 생활하고 공작하는 분들  외로울 때나 피로할때 종종 고향소식과 고향음식이 생각날 때가 있을 것이다. 외지에서 동창들이나 손님이오면 나는 고향을 홍보하는 각도에서 민속식당으로 모신다. 그네들은 맛있다고 야단이다. 확실히 연변의 많은 음식들은 특색이 선명하다. 다른 지방에서는 보기도 먹기도 힘든것들이다. 그리고 음식점마다 환경이 아늑하고 봉사태도가 좋다.           고향음식이란 단지순한 음식이란 개념을 떠나서 고향에 대한 그리움 부모형제들에 대한 사랑 그리고 자신에 대한 새로운 인식등이 혼합되고 발효된 향련(乡恋)이라고 생각 된다.         아무때건 고향에 오면 금준미주(金樽美酒) 옥반가효(玉盘佳肴) 가 그대들을 맞이 할 것이다. 
23    그때 그시절에 댓글:  조회:1207  추천:0  2018-12-21
  화룡고급중학교 75돐을 기념하여           오늘 나는 기쁜 마음으로 모교75돐기념 행사에 참석하게 되였다.사정으로하여 모교에 도착한 시간은 11시가 다되여가는 때였다.체육관에서 예술절 문예공연이 한창고조에 오르고 있었다.열띤 노래와 그에맞춘 교사들의 세련된 댄스가 관중들의 박수갈채를 받았다. 교단에서면 지식을 전수하는 훌륭한 교사요 무대에 오르니 멋진 댄스맨이다.학생들의 노래수준 또한 경탄을 자아낸다.진짜로 세월은 변했고 후배들의 멋진 춤사위는 선배들의 맘을 사로 잡았다.             때는 거슬러 1985년 나는 화룡고중으로 전학하게되였다.원래 다니던 학교에는 문과반이 없어 매부의 소개로 화룡에 가게된것이다.그때 화룡고중에서 많은것을 새로 감수하게 되였다.        그때는 모교에 뜨신물 끓이는 보일러가 따로 준비되여 있지 않았다.쌀을 씼은 뜨물이 유일한 뜨신물이였다.애초에는 저걸 어떻게 마시나하는 거부감도 있었지만  자주 마시다보니 오히려 맹물마시기보다 구수하고 좋았다.후일 대학을 나와 기관에 출근하다보니 술마시는 차수가 많았다. 한번은 백주를 많이 마이고나니 속이 뒤번저지고 맥이 다 빠져 초절이가 되여버렸다.끙끙 앓다가 번뜩생각나는것이 있었으니 바로 뜨물이였다.안해와 뜨물을 달라고하니 뭔 정신나간 소린가학고 이상한 눈으로 나를 보았다.나는  뜨신 뜨물을 마시면 해정이 될것 같다고 하며  사정했다. 설탕을 넣은 뜨신  뜨물을 마시니 정신이 번쩍들었다.                       그때는 한창 먹을 나이라 저녁 자습을 끝내고 숙소로 돌아오면 늘 배가 고팠다. 지금이야 배고프면 먹을 것도 많지만 그때만해도 먹을 것이 별로없던 시절이다.궁리하던중 어느친구가 학생식당에 들어가서 삶은 계란을 훔쳐먹자고 제안해왔다.우리는 당장에 의견을 통일하고 실천에 옮기기로하였다.            그때 모교의 학생식당은 단층구조로 되여 있었는데 북쪽벽에 창문이 나있었다.물론 남쪽에도 창문이 있었지만 안전상에 문제가 있다는 판단으로 우리는 북쪽 창문으로 들어가기로 합의를 보았다.유리를 고정한 못을 뽑고 유리를 들어내였다.그리고 창문을 열었다.살살기여 들어가보니 눈에는 풍년이다.소래에 삶은 계란이 수북히 담겨있었다.우리는 냉큼 호주머니에 가득넣었다.나올때에는 발견되지 않게끔 유리도 잘안장하여 놓았다. 성공의 희열에 벅찬우리는 닭알을 까서 입에 밀어넣었다.얼마나 맛있었던지 지금도 잊을수없다.이렇게 우리는 두번 계란을 훔쳐먹었다.그런데 끝내는 식당관리원이 줄어드는 계란을 발견했던 것이다.어느날 아침에 관리원이 고래고래 소리지르며 어떤놈들이 계란을 훔쳐먹어느냐며 욕설을 퍼붓고 있었다.우리는 아무것도 모르상을 짓고 식당으로 들어가 유유히 밥을 먹었다.ㅎㅎ                내가 화룡고중 전학하여 며칠지나 5.1절을 맞이하게되였다.같은 침실의 동무들은 휴식일이라 다 집으로가고 나만 홀로 숙소에 남았다.그때 매부가 송하평탄광병원에 의사로 근무하고있었다.연길에서 누님도 나를 볼려 화룡에 올라왔는데 실기떡이며 삶은 고기며 음식을 한구럭들고들어왔다.맨날 미역국에 밥을 먹다가 별다른 음식을보니 얼마나 좋던지.마구 입에넣었다.그날 저녁 혼자자고 있는데 찍찍거리는 소리에놀라 깨여나고 말았다.무슨소리지?달빛이 집안을 환하게 비추고 있는데 소리나는 쪽을바라보니 이게뭐야.커다란 쥐몇마리가 먹다남은 설기떡을 쟁탈하고 있었다. 때로는 실기떡을 물고 뛰고 때론 일층침대에 뛰여오르기도 한다. 온몸이 오싹해났다.무슨 잔치라도 벌리는거아닌가.먹지못한 쥐놈들 얼마나 좋아했을가        그해가을 우리는 이층으로된 숙소로 들 어가게 되였다.거주조건이나 위생조건이 모두 단층숙소와는 비할바없이 좋았다.헌데 여기서 또한 사건이 발생하고 말았다.하루 아침 일어나보니 아래층에서 자던 후배의 얼굴에 피가 말라붙어 있었다.간밥에 쥐한테 귀가 물렸던것이다.우리는 이렇게 쥐와 한집에서 살며 공부하고 대학고시를 보았다.허나 용케도 앓지않았고 건강하게 자랐다.지금 숙소조건은 얼마나 좋은가.큰 창문이 박힌 환한 침실 실내 위생실모두가 현대화다.                     그해 우리는 화룡시 남쪽에 자리한 한족학교에가서 대학시험을 보았다.지금이야 부모 친척들이 배동하여 시험장으로 간다만 그때만해도 우리는 그 먼길을 걸어다니며 시험을 보았다.시험 성적이 나왔다.입학통지서가나왔다는 소식을 받고 나는 모교로 떠났다. 86년도 한 여름 연변에는 큰 비가 몇일새 끈지않고 내렸다.나는 연길에서 기차타고 조양천에갔고 다시차를갈아타고 화룡으로갔다.철길이 여러군데 끊겨 방금 보수한터라 가차는 굼뱅이 속도로 느릿느릿화룡으로 달렸다.입학통지서를 받은 그날 얼마나좋아했는지 모른다.       학교를 졸업하고 30년이 되던2016년 우리는 모교를 찿았다.우리의 더팀목이 되여준 모교 성공의 길로 이끌어준 여러 선생님들 그은정 잊을수 없다.하여 오늘도 모교를 찿은것이다. 모교여 번영창성하라       
22    자전거 운동 댓글:  조회:1069  추천:0  2018-12-21
자전거 운동           요지음 큰 도시에서는 공용자전거가 류행이다 . 반시간에 1 원하는데 특히 외지에서 놀러간 친구들에게 인기만점이다.  금년설에 가족단위로 광주 심천에 유람다녀왔는데 자전거가 우리에게 많은 편리를 가져다 주었다. 아무곳에서나 아무 시간에나 다 가능한 자전거는 내가 가고 싶은 어느곳 이라도 갈수 있게 하였다.          내가 자전거운동을 하게된 것은 동서의 영향을 받았기때문이다. 하루는 동서가 말한다. 친구들같이 자전거타고 장백산유람을 갔다 왔다고. 이한마디에 나는 호기심이 부쩍 생기였다. 그 먼곳을 어떻게 자전거로 이동했을가.  나는 먼저 동서의 자전거를 빌려 타보기로 였다. 아마1993년도 뒤로는 자전거를 타본 적이 별로 없다. 1993년도에 집을 단위근처로 이사하였기에 출근족을서 자전거타야할 필요가 없어지였다.               20년만이다. 올라타기부터  괜히 서툴다. 하지만 몇번을 반복하여보니 괜찮은 감각이온다. 한주일 타본뒤로는 아예 자전거를 한대 구입하기로 결정하였다. 운동자전거는 가격대차이가 큰데 좋은 것은 몇만원짜리도 있었다. 나는 동서의 제안으로 5000원짜리를 사기로 하였다. 운동자전거 치고는 비교적 저렴한편이다. 주위의 어떤 친구들은 자기 자전거가 몇만원짜리라고 자랑하는데 그사람들 자전거 운동하는것을 몇번 못 보았다. 그때가2013년 여름이였다. 안해는 격려하는 차원에서 나에게 쫄뱅이바지 적삼 신발 안전모 장갑등을 사주었다.       신바람난 나는 본격적인 자전거운동에 뛰여들었다. 처음에는 개발구까지 다음에는 소하룡발전소까지  또 다음에는 마반산까지로 코스를 점차적으로 확장해나갔다. 이른 아침에 잠에서 깨여나 간단한 예비운동을 하고 음악을 틀어 놓고 자전거에 뛰여 오른다. 씨엉씨엉 페달을 밟으며 달리 노라면 마음마저 상쾌하다. 쌩쌩 달려라 나의 자전거야!            나는 해뜨기전에 집에서 나와 기본상 하루 아침에 30 공리를 달리였다. 조양천진까지도 좋은 코스였다. 새로선 고속도로 연길서입구까지도 멋진 코스다. 아침에는 차량이 적어 자전거 타기에는 좋은 시간이다. 자전거를 타면서 거리(距离)만 생각하면 따분하고 힘들다. 하여 나는 명상 공상을 할 때가 많았다. 혹여 나만의 노라우가 아닌지. 후일 이말을 서기와 했더니 왈 "마라톤도 한가지여. 마라톤 하며 인생을 사는겨"단위에 있었던일 친구들을 만났던일 좋은일 굿은일 그러다 보면 거리가 단축되고 속도가붙는다.             타다가 보니  룡정에 도전하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룡정은 내가5년동안 근무하던 도시다. 과거에는 자동차로 출근했었지만 그것을 내가 지금 자전거로 해결한다는 욕구가 생긴것이다. 왕복40킬로가 조금 넘는 거리다.             결단은 인츰 행동으로 련계되였다. 예술극장에서 출발하여 연길개발구를 거쳐 룡산올리막길에 붙었다. 점차점차 올리막이다. 그중에도 원수금소(原收费站)앞 올리막을 오르기가 가장 힘들다. 어싸어싸 그래도 나는 내리지 않고 끝까지 견지하였다. 얼굴에서는 땀방울이 뚝뚝 떨어져 내린다. 나의 경험에 의하면 힘들다고 자전거에서 내리면 다시 타기가 더 힘들어 진다. 바쁘더라도 늦더라도 속도 조절하면 계속 타는 것이다. 자전거 타기의 한가지 재미는 바로 올리막과 내리막이 있기때문이다. 모아산 굽이를 돌면서 부터는 모두 내리막이다. 시속이45킬로까지나는데 그재미는 안해본 사람은 느낄수가 없다.            그뒤로는 룡정까지가 보통코스로 되였다. 날씨가 좋을 때에는 거의 매일이다 싶이 자전거타고 룡정을 달렸다. 연길 룡정구간의 경치는 너무도 아름답다. 봄에는 벼모내기 화면이 여름이면 강가에서 낙시하는 강태공들의 화면이  가을이면 세전벌의 황금파도가 매우 유혹적이다. 연변의 명산 모아산 그리고 만무과원 얼마나 멋진곳인가            자전거 운동의 재미중 또하나는 내가 가고 싶은 곳을 마음대로 갈수 있다는 것이다. 이전에 근본 생각도 못해 본 동네를 구석구석 누비였다. 농촌길을 달리다보면 낡은 못 쇠줄따위가 바퀴에 박히는 경우가 있는데 그날에는 고생이다. 한번은 10리길을 자전거를 밀고 올때도 이었다. 전업선수들은 다이야 수리공구를지니고 다닌단다. 전신무장한 남자가 자전거를 밀고 가는 모습 생각만해도 우습다.           나는 투도온면을 좋아한다. 집적 투도에가서 맛 본적도 있다. 어느해 가을이 였다. 자전거타고 투도가 온면이나 먹고올가. 자전거운동과 맛집의 만남이였다. 다음날 나는 자전거에 뛰여 올랐다. 룡정까지는 무난하다. 룡정체육장 올리막길이 좀 힘들다. 허나 동성내리막 길을 날아 내려갈 생가하면 힘 솟는다. 동성 흥성 잘도 나간다. 비록 혼자지만 노래도 들으며 제좋은 명상에도 잠기며 달리다 보니 투도가 눈앞이다. 40키로 완성이다.             정심을 온면으로 해결하고나니 힘이 난다. 나는 자전거 타고 진정부며 학교며 한바퀴 고 기념사진을 남기였다. 나와 한반공실 친구들에게 위챗으로 사진을 보내였다. 반응이 뜨겁다.            자전거 운동의 좋은점이  바로 다리 근육을 튼튼히 하고  슬개골(膝盖)을 보호하고 인대(韧带)를 탄탄하게 하는 것이다. 내가 친구들 보고 웃으깨로 이야기했다. "내 다리는 발동기여"         자전거를 타면서 나는 많은 것을 얻었다.       신체도 단련하고 운동의 쾌락도 느끼고  고향의 멋진 풍경도 공짜로 구경하였다.  
21    등산 댓글:  조회:907  추천:0  2018-12-20
등   산       내가 등산을 시작한데는 원인이 있다. 2000년도 년말즘이라고 생각 된다. 큰동서가 우리 집에 놀려 왔다가 나보고 말했다. 등산 다니지 않게냐고. 동서는 이미 등산 다닌지 몇해 된다고 했다.그해 여름 연변TV절목에 어느 등산대 활동을 소개한 적이 있었다. 한여름 등산대원들은 웃음꽃을 피우며 록음이 우거진 산림속을 걷는다. 길가에는 여러가지 꽃들이 만발해 있었다. 호기심이 부쩍동한 나는 생각할 여를도 없이 그럽시다라고 대답해 버렸다. 얼마나 재미있을가.          이튿날 등산협회에서 고용한 버스는 연길공원 맞은 편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내가 기껏 준비 했다는 것이 동삼구두와 멜가방 하나였다. 가방에는 록화기(摄像机)를 넣고 왔다. 처음하는 등산을 기록하기 위해서였다. 나를 본 동서가 장갑과 방한(防寒)모자는 준비해왔냐고 물었다. 없다고 하자 동서는 가차없이 자기 등산가방에서 털실로 된 머리수건과 장갑을 꺼내 주었다.아참 이런것이 필요했구만. 사실은 초보였으니까. 어떻게 보면 나는 등산을 유희로  재미로 간주했다.           뻐스는 정확하게 7시 출발하였다. 눈내린 길이라 3시간 달려서야 하마탕에 도착 할수 있었다. 차에서 내리니 회장어른이 이야기 한다. 저앞에 보이는 산이 사방산(四方山)이다. 길도 험하고 가파로우니 모두 안전에 주의하라. 그리고 출발하였다.        나는 처음으로 등산대오를 따라 출발하였다. 연변등산협회라는 붉은기가 선두에 서고 그뒤로 대원들이 줄지어 등산하기 시작하였다. 나는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록화에 정신없었다.처음 만나는 대원들이지만 잘도 호응 해주었다. 때로는 손도 흔들고 때로는 미소도 짓는다. 눈내린 산에 무슨 길이 있으랴. 밭을 꿰뚫고 산을 가로 지나 앞으로 오직 앞으로 진군이다.          헌데 처음으로 그것도 유명한 사방산이 나같은 초보 등산군에게 절대로 쉽게 길을 내주지 않았다.  산은 오를수록 가파로왔다.눈내린 사방삼은 미끄럽기도 하다. 헐떡헐떡 숨쉬기 조차 힘들다. 앞을  보니 아직도 너무도 멀다. 동서가 말한다. 대오에 떨어지지 말아야 한다. 중간 정도가 좋다.너무 떨어지면 쉬여갈 사이가 없다.          40여명의 대오가 한일자로 길게 늘어서 전진하고 있는데 멀이서 보니 가관이로다. 마치 꿈틀거리는 한마리 룡이라 할가.등산복은 선명한 색상 일수록 좋다. 그래야 사람을 쉽게 찿을수 있다.산과들이 모두 힌 눈속에 파뭇혀 있다. 붉은색 노랑색 파란색의 등산복은 마치 빙설속에 수놓이한 한폭의 그림 같다. 등산대장은 선로와 전진속도를 장악하는데 어느정도 힘들때면 " 휴식"하고 명령한다. 뒤에선 경우는 겨우 대오의 선두까지 쫓아 왔는데 얼마 휴식도 못하고 또 다시  등산길에 올라야 한다. 그래서 동서가 알려준거로구나.         대원들 사이는 매우 친절했다. 앞에선 대원들은 눈길을 내며 전진할려니 매우 힘들다. 무릅을 넘는 눈길 하지만 뒤에선 대원을 배려하여 올리막 길에 잡았던 나무 홰초리를 천천히 놓아준다.아닐 경우 뒤에선 대원의 뺨이 홰초리에 맞을수 있기 때문이다. 손도 당기여주고 등도 밀어주면서 시종 동지지간의 우애가 넘쳐난다.  등산대원들 지간에만 있는 특유의 배려심이다.          산은 오를수록 가파롭다. 사람이 다녀간 흔적도 없다. 사방산이라 함은 이산의 맨 꼭대기가 장방형모양을 가졌기 때문이란다. 희한하게 산 꼭대기는 평퍼짐한 지세를 가지였다. 그리고 수림으로 꽉 차있었다. 등산 대장은 지도를 보면서 대오를 용케도 거느리고 있었다. 그러니 길을 잃을 근심도 필요 없다.        산정에 오르니 승리의 희열로 감싼다. 모두가 모여서 큰 소리로"야호"하고 소리쳤다. 우리는 해냈다. 나도 해냈다. 왕청현 하마탕 사방산 도전에서 성공했다. 추운 겨울날이지만 마리에서는 김이 물물 난다.          여느 골짜기를 찿아 잠간의 휴식을 취하였다. 물도 마시고 갖고간 간이 음식도 나눈다. 빈손으로 참가한 나지만 엮시 대원들의 덕분에 삶은 닭알도 얻어 먹었다. 대장이 명령한다. "추운곳에 오래 있으면 안된다 하산(下山)이다."          그때에야 나는 등산보다 하산이 힘들다는 것을 몸으로 체험하였다. 등산 할 때에는 나무가지라도 잡을수 있지만 눈 내린 하산길에는 별로 잡을 것도 없다. 엉덩방아는 기본이고 자칫 하면 뒹굴 수도 있다.하다보니 발끝에 힘을 주게되고 온몸의 신경말초가 하산내내 초긴장상태에 처해있다.하지만 락오(落伍) 는 용납될수 없다.그때에야 나는 대오에서 떨어지지 말라는 말의 진정한 함의를 알게된것 같았다.         산골의 해는 짧다. 산자락에 내리니 날씨는 저물었다. 마을 까지는 아직도 한참 더가야 한다. 등산 시작때의 떠들썩한 분위기와는 사뭇달리 대원들 사이에서는 말이 없었다. 그저 신바닥이 눈을 눌러주는 빠드득 빠드득하는 소리만 들릴 뿐이다.          우리 대오는 마을 어느집에 들어섰다. 때는 저녁 6시가 넘었다. 문을 떼자  양고기 삶은 냄새가 코를 자극한다. 가뜩이나 배가출출한데 고기냄새를 맡으니 식욕이 버쩍 난다. 미리 예약한 사안이였다. 주인장은 매우 서글서글한 성격의 소유자인데 우리 보고 배가 고플터니 많이 잡수라 한다. 그날 저녁 양고기국밥 그렇게도 달고 맛있었다.          연길에 도착하니 저녁 10시가 넘었다. 동서가 묻는다. "다음에도 참가하겠소?"나는 생각할 여유도 없이 수락했다. 산의 매력이 나로하여금 또다시 등산하도록 부른것이다. 만약 누가 나한테 사방산 꼭대기에 돈을 올려 놓았으니 가져가세요 하면 절때 가지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다음해 2001년 나는 주일마다 등산에 참가하였다. 금요일에는 일체 술장소를 피한다.체력보전을 위해서다.1년52주일 당해에 나는  청가를 한번 밖에 맡지 않았다. 산의 웅장함이   산 자애로움이 나로하여금 등산을 견지하도록 고무격려 하였다.년말에는 우수대원으로 평정되여 이쁜 장갑 한컬레를 상으로 받았다.ㅋㅋㅋ        중국말에 지자락수 인자락산(智者乐水,仁者乐山) 이란 말이있다. 지금은 많고 많은 등산애호가들이 조국의 방방곡곡에서 등산을한다. 등산으로 몸을 튼튼하고 마음을 다스리고 또한 자연이 우리에게 하사한 아름다운 강산을 흠상한다. 어찌보면 모두 인자들에게 차려진 복이다.  
20    친구야 친구 댓글:  조회:1260  추천:0  2018-12-18
친구야 친구        사람이 살아 가면서 많은 사람과 어울리고 많은 사람을 알게 되는데 와중에 성질이 비슷하고 취향이 근사한 사람끼리 친하게 된다. 하긴 이것도 사회생활을 하면서부터 알고 가깝게 보내는 친구들을 말한다. 어디까지나 목적성이 있게 접근하고 또 배양한 감정을 말한다. 하지만 소꿉친구일 경우는 이와 반대다. 내가 태여난 고향을 내가 선택한 것이 아니다. 하늘이 점지한 것이다.             나는 고향에서 년령또래가 비슷한 아이들과 같이 놀고 공부하고 같이 자랐다. 개중에 더 가까운 동무가 있었다면 그것이 바로 소꿉친구다. 우리 사이에는 아무런 리해관게도 없다. 혹여 다른관게가 있다면 형님이나 누나친구들의 동생들과도 친하다는 것이다. 친척은 아닐지라도 우로부터 내려오는 정(情)의 계승이라 할것이다. 우리는 주변에서 이런 상황을 발견할수있다.        소꿉친구와는 매일 매월 혹은 매년에 소식이 통하지 않아도 좋다. 아무때건 아무장소에서건 할이야기가 있다면 전화하여도 좋다. 맑은 정신에도 좋지만 취하여서 허리꼬부랑 소리로 전화해도 좋다. 그렇게 할수있는것은 친구지간의 무한한 포옹과 믿음 관심때문이다. 이것은 결코 하루아침에 이루어지는것이 아니다. 어린이 시절 어른시절 산전수전 다 겪으면서 맺어지고 다져지고 가꾸어 왔기 때문아다.          누구와 사귀여야하고 어떻게 지내야하는가를 누구도 배워주지 않았다. 하지만 부모님들의 인생태도 형제들의 말없는 행동을 통하여 우리는 친구들과 사이좋게 사귀고 여지껏 지내왔다.       나에게도 절친이있다. 소학교시절부터 지금까지 쭉 지나온 소꿉친구 리군(君)다. 한족애들은 이런친구를 발소(发小)라고 하는데 그무엇과도 바꿀수 없는 친구라고 한다. 소학교때 리군의 집은 학교 아래동네에 나는 웃동네에 살었다. 거리로는 약5리길이 될것이다.           초중 1학년때 놀려갔는데 리군의 어머님께서 우리에게 밥상을 따로 차려주었다. 나는 불시로 어른대접 받는 기분이였다. 아마 이것이 나의 생애에서 손님생활로서의 첫장면이였다. 리군의 부모님들은 성격이 모두 시원시원한 분들이다. 부친은 조선항미원조에 참가한 분이였는데 우리에게 전쟁이야기를 곳잘 해주었다. 그당시에는 원래 공부압력도 없던 시절이라 우리는 맨날 같이 놀고 시간을 보냈다. 저녁이면 가방을 둘러메고 공부하러 간답시사 하고 리군집으로 간다. 여름이면 괜찮은데 겨울에는 바람불고 춥다. 특히 소학교근처를 지날때면 바람에 낡은 문이 삐꺽삐꺽하고 소리나는데13~14세 나이 소년에게는 무섭기도 했다. 동네집개들도 사람기척소리에 요란하게 짓어댄다. 그러면 같이 개짓는 소리도 내면서 집으로 향했다. 담을 자래운다는 말이다.           년령상의 특점이라 할가 우리는 여러명이 어울려 놀았다. 나는 초중을 79년도에 졸업하는데  그때 처음으로 집단적으로 술을 마시여보았다. 지금보면 개발구에서 하룡촌으로 내려가는 길어구 마을이다. 장소는 한반급에 다니던 학생의 집이였는데 초중졸업기념행사가 그곳에서 성황리에 개체된 것이다.       때는 7월초다. 한40명의 동반생들이  난생 처음으로 부모님의 감시를 벗어나 아주 방정하게 마음대로 술마신것이다. 그때 우리반급에는 한두살 이상의 친구들도 있었는데 형들이 우리를 교육하기를 록두가 백주마시는데 좋다고 하였다. 하여 술마시기전에 생록두 한줌씩을 와삭와삭 먹어버리였다.  다른 친구들은 효과를 보았다고했 는데 나는 모르겠다.  그때나 지금이나 나는 백주는 체질에 맞지 않는가보다.          그당시 우리는 부모님 몰래 가만가만 술을 마시였다. 무슨맛인지도 모르고 말이다. 리군의집 고방에서 술한잔만 하면 얼굴이 홍당무우가 되고 숨가쁘다. 다른 친구들은 좋다고 야단인네 나는 춥고 메스껍다. 세월의 세례를 거쳐 어느 한시기는 사업상관계로 백주도 많이 마시였지만 결과적으로 나의 체질에 맞지않았다. 하여 후에 바꾼것이 맥주다.         리군은 나 먼저 학교를 나왔다. 정식으로 사회에 진출한것이다. 방학때면 우리는 같이 모여 행사도 하고 술놀이도 많이했다. 한번은 우리 집에서 개추렴을 하는데 고기 삶는 냄새가 동네에 펴지였나보다. 한참 고기에 술에 흥이 나있는데 이웃집 할아버지가 찿아왔다. "여보게 송곳빌리려 왔다네. "내가 찿아보고 있는데 친구들이 할아버지보고  말하기를 "얼른 올라오세요. 개고기 잡수세요"라고 권했다. 할아버지는 인츰 신발 벗고 구들에 올라오시여 술과 고기를 드시였다. 아마 고기냄새에 썰썰이를 이르키였나보다.          후일 우리 익쌀꾸러기들은 할아버지의 외호(外号)를 "송곳할아버지"로 칭(称)하였다. 기억이 생생하다. ㅋㅋㅋ 그후 친구는 리비아에 로무송출갔다.  지금은 한국에서 일한지도 20년이 된다. 아마 외국나들이에 습관된 인생인생인가 보다. 지난해  말미를 맡고 연길에  왔는데 그때 내가 시간적인 여유가 없어 인츰 만나보지 못했다. 전화로 미안하다고 하니 "괜찮아. 먼저 일보라구 "한다. 후에 일은 말하지않아도 뻔하다. 미안한감에 내가 맥주 몇컵을  더 마시였다.      친구의 도리라할가 의무라할가 더 많은 것을 해주고 싶고 나누고 싶은것이 친구다.  
19    미꾸리 댓글:  조회:1538  추천:0  2018-12-17
미꾸리        미꾸리라면 지금 모르는 애들이 많다.  누구를 탓할것도 없다. 보지도 듣지도 못한것이기 때문이다. 원래 사람이란 것은 자연의 일부분이고 자연과 더불어 살아가는것이 도리건만 요지음은 그렇지않다. 오늘 후배친구가 말하는데 인간의 눈에 보이는 물질은 우주공간의 0. 001프로밖에 안된다고 한다. 헌데 그 미소한 세계의 대부분과도  우리는 담을 쌓고 살고 있다.       상세기(上世纪)90년대초였다.  한단위에 출근하는 최씨성의 선배님이 나하고 말한다. 우리 아이들 학교에서 들놀이를 가는데 같이 가지않겠느냐고 말이다. 그집은 녀자아이였는데 이름있는 소학교 녀학생이고 독창(独唱)을 지망하고 있었다. 이튼날 우리는 학교에서 내준 뻐스를 타고 연변직공요양원를 향해 떠났다. 그때만 해도 그동네는 시내와 한참 떨어져 있었다.  지금은 나의집이 그맞은 동네에 살고 있으니 연길도 많이 확장되였다.         뻐스를 탄애들은 흥에게워 재잘거린다.  차가 콩밭을 지나갈때 선생님께서 저것은 무슨 작물이냐고 물었다. 옥수수다. 벼다. 여러가지 답이 나오는데 나는 그만 놀았다. 뭐야. 한여름의 콩과 녹두 팥을 두고 구분하기 힘들다면 어린애들이니 리해가 간다마는 이건 너무도 아니였다.        한가정 한애만 자리우자는 정책하에 어린이들은 황제황후로 변하고 말았다. 도시애들은 아무리 더운 여름날이라도 발목을 강물에 혹은 시내물에 담구어본적이 거의 없을 것이다. 농촌애들도 거주지가 촌이라할뿐이지 자연과의 접촉이 빈약한 상태였다. 결과적으로 행복하고 즐거워야할 동년은 여기 학원에서 저기 학원으로 공부에서 공부로 자유없는 나날을 보내고말았다. 놀거리도 전자유희나 실내활동밖에 없다. 허나 우리 년령의 친구들에게는 학교는 생활의 극적은 부분에 지나지않았다. 많은 시간은 밖에서 자연과 더불어 놀고 먹고 자랐다.       전에는 미꾸리가 촌에서 대접못받던 어종(鱼种)이다.  그때만하여도 여러가지 종류의 물고기가 많이 서식되고 있었다. 늪지도 여기저기 여러곳에 널려있었고 무슨 쌍도랑이니  큰도랑이니 부르던 곳에 물고기가 많았다. 큰 비가내린뒤에 큰도랑에다 채발을 놓으면 하루저녁 사이에 몇바게쯔 (水桶)분량의 물고기를 잡을수 있었다. 대개는 버들개 모새밑이 붕어 그리고 미꾸리다.       여름한철 잘잡는집들은 고기잡이수입만도  짭짤하였다. 하긴 다 수고값(辛苦钱)인셈이다. 온저녁 자지못하고 모기와의 전쟁을 해야하고 일정시간마다 설친 잠에서 일어나 채발에 걸린 잡풀도 거려내야한다. 그렇지 않으면 채발에 걸렸던 물고기들이 보를 넘고 달아나기 때문이다. 잡아온 고기는 인차 종류에 따라 분류하고 내장을 제거하고 소금을 뿌려 말린다. 소영에는 일본침략당시 비행기고(库)가 여러군데 남아있었는데 천연적인 건조마당으로 사용되였다. 아침에 물고기를 널어놓으면 종일  콩크리트로된 비행기고가 열을잔뜩받아 오후가되면 물고기를 바싹말리워준다. 다른 동네서는 부러워하기도 했다.          지난세기 70년대까지만 해도 나의 부친께서는 갈베려나갔다 물오리라든지 초어(草鱼)같은것을 잡아오시군 하였다. 그만치 물고기 서식지가 많았고 자연환경이 깨끗했다는것을 설명한다. 헌데 80년대에 들어서면서 대량의 화학비료 살초제등이 투입되면서부터 논도랑의 물고기가 점점 줄어들기 시작되였다. 지금은 촌에가도  개구리 울음소리조차  듣기 힘들다. 촌에는 모기도 적다. 참새도 적다. 모두 인류문명의 부작용이 가져다준  결과다.          하지만 미꾸리만은 그래도 잘잡힌다. 그만치 생명력이 강하다는것을 말한다. 미꾸리는 노란색과 검은색으로 분류된다. 맛도 일품이다. 한국에서 추어탕(鳅鱼汤)이라면 몸에 좋다고 란리다. 남자분들은 두어그릇도 뚝딱비운다고 했다. 부식품이 풍족하지않던 80년대초 거도(水渠)와 물도랑은 우리들에게 맛과 즐거움을 가져다주는 터전이였다. 누가 놀러오면 먼저 떠오르는것이 도랑에 나가 추어를잡아 안주하자는 생각이다. 연변일중을 다닐때 휴식일날 한반급의 은철친구가 놀려왔다. 우리는 두말없이 반두와 채발을 들고 큰도랑에 나섰다.         물고기 잡이는 분공이 세밀해야 한다. 한명은 물 아래쪽에서 반두를 대고 한명은 도랑주변의  풀밑이며 돌사이며를 발로 휘적질하여야 한다. 샅샅이 주밀히 고기를 쫓아내야 한다. 그뒤에선 친구는 보조작용을 하는데 나머지 물고기들이 달아나지 못하도록 다시금 휘적질해대야 한다. 관건은 반두를 대고있는 친구인데 발을들었다 놓았다하기를 반복해야 한다.  반두를 잡았는데 고기가 많이잡혔다면야 누구나 다 공로가 있는것이지만 만약 적거나 없다면 십중팔구는 반두를댄 사람의 탓으로 락찰되기가 쉽다. 하기에 반두들 책임진 사람은 고기잡이를 제일잘하는 사람으로 선정한다.         한사발 정도 잡고나서 우리는 돌아왔다. 당금 물고기탕을 끓어야하기 때문이다. 미꾸리는 보기는 싫어도 맛은 붕어나 모새밑보다 월등하다. 그릇에담은  미꾸리에 소금을 치고 잽싼 솜씨로 덮개를 덮는다. 소금을 접촉한 미꾸이는 불에덴 황소마냥 소리소리 날친다. 우리는 미꾸리가 정신을 다잃고 몸속에 들어갔던 먹이를 다 토하기를 기다리였다가 덮개를 열었다.         다음 호박잎을 넣고 두손으로 힘을 주어 미꾸리와 같이 주물러주기를 반복한다. 깨끗한 물에넣고 여러번 휭구어내노라면 미꾸리몸에 부착되였던 미끌미끌한 점액이 깨끗이 씻겨나간다.  그리고 배속의 먹이가 깨끗이 세척된다. 활활타오르는 화로불에 쇠가마를 올리고 콩기름을 달구다가 고추장을 넣는다. 다시 애호박 풋고추등을 넣고 같이 볶다가 물을 두른다. 관건은 내기풀을 넣는것이다. 그래야만 미꾸리의 고유의 비린내를 치고 구수한맛을 살군다. 다 익어간다할지음 계란서너개을 깨여넣는다. 그러면 소영표미꾸리탕이 완성된 셈이다.   백주에 미꾸리탕은 꿀조합이다. 맛이 얼마나 좋은지 탕이 얼마나 시원한지 않먹어본 사람은 생각지도 못한다. 백주 한잔을 비우고 매콤한 추어탕 한모금입에 떠넣느면 배속까지 찡하고 시원하다. 글을 쓰고있는 지금 나의 입안에는 군침이 돈다.   일전에 외지에서사는 친구가 놀려왔는데 추어탕이 먹고싶다고했다. 나는 연길에서 소문난 한 추어탕집으로 안내하였다. 두어숱가락 국을 떠마시던 친구가 옛날 맛이안난다고했다. 당연한 말이다. 당시 우리가 사용한것은 친환경채소 친환경미꾸리를 넣어끓인 소영표(小营牌)추어탕이 아닌가 ㅎㅎㅎ  
18    결혼 댓글:  조회:1448  추천:0  2018-12-12
  ❤ 결 ❤ 혼 ❤       사람이 살아가노라면 결혼을 하게되고 생육하게 되고 자식교육하게 되고 이렇게 반복하게 된다.과거에는 이것이 불문률이라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그률이 점점 변화되고 있다. 결혼을 안하겠다 . 결혼은 하나 생육은 포기다.생육은 하되 늦게 아이를 보겠다.엄연히 지난한 시기의 나라계획생육정책의 수호자로 나서는  친구들이다. 사회의 획기적인 변화는 당연히 사람들의 의식(意识)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한다.혹 나를 보수통이라고 할지도 모르지만 젊은 친구들이 부모님들의 의사에 따라 혼사도 생육도 다그치는 것이 맞다고 생각한다.부모님의 마음도 알아서 처사하란 말이다.       집에 혹시 나이 많은 처녀총각 있다면 부모로서 그이상 더 속이 탄일이 없다. 요지음 결혼식에 참가해보면 타민족과의 혼인이 적지않다.하긴 어려서부터 한족유치원 한족학교 그리고 대학은 저멀리로 다닌 아이들보고 조선족대상자를 얻어 오라고 강박해도 효과는 미미한 상태다.애들이 말한다.나보고 어디가서 조선족애를 친해오라는 건데요.         바빠난 부모님들은 여기저기 수소문낸다. 물에 빠진사람이 지프랭이라도 잡는 다더니 부모님들은 자기집아이조건이 여차여차하게 좋은데 어떠어떠한 사람을 요구한다고 맨날 광고한다.마치 기업에서 신사원모집할때 인력자원부장이 인재시장에 나와 역설하는것과 흡사하다.그것이 부모의 마음이다.      그럼에도 불과하고 결과적으로는 타민족과의 결합이 많다.이것은 받아들여야하는 현실이다.우리 아이라고 파악이 있는건 아니다.민족 대융합의 시대가 아닌가.      혼사는 매개인에게만 관계되는 일이 아니라 가정 사회 나라에 관계되는 큰일이다.전에 조선에서 생육을 많이한 어머니를 영웅의 어머니라고하니 납득이 잘되지않았다.애를 몇명 낳아 자리우는것과 나라가 무슨 관계가있지? 지금보면 너무도 확실하다.우리집 자식이자 나라의 자식이고 나라의 일군이다.일군이 딸리면 무슨공사(工事)를 하기도 힘들다.        과거 우리는 한세대를 25년으로 보았다.하지만 올세는 30세를 넘어 결혼하는 친구들이 허다하다.자료를 보니 일본의 인구감소세(势)가 엄청하다고 한다.해마다30__40만명의 인구가 줄어 든다고 한다.요지음 인구감소에 따른 사회적인 문제가 많은 나라에서 반영되고 있다.우리 나라의 퇴직년령도 뒤로미룬다고 말이 나온지 여러해가되였가.주요원인을 보면 젊은 친구들이 퇴직자들에 대한 부담이 커지였기 때문이다.요지음 애들이 결혼하여 4명의 노인을 돌봐야하는 현실이다.그러니 현실적인 부담이 적지 않다는 말이다.       다시 결혼이야기로 돌아가자.모든 애정사항이 구비되면  결혼잔치를 벌린다.이는 부모님들이 자식결혼에 대한축복이다.       헌데 지금 어떤 집들에서는그범주(范畴)를 벗어나 결혼잔치를 빌어 엉뚱한 재부(财富)자랑이나 권세(权势 )자랑을 한다. 사람들은 대체적으로는 곱지 않게 보는 눈치다. 아무리 결혼식을 요란하게 해도 부부끼리 맞지 않으면 요지음 젊은이들은 가차없이 리혼한다.그런 실례를 주위에서도 적지않게 보아왔다.     가정형편이 좋으면 어느정도의 지출은 무리가 아니다.요지음에는 집이며 자가용이며 장식이며 모든것을 부모들이 해주는일이 보통이다.좋은 세월 만난 친구들이다.      우리 결혼때는 그런건 생각조차조 못했다.나의 유일한 우세란 결혼전에 집이마련되여있었다.89년도에 73평방짜리 열공급 층집이라면 모두 부러워했을 것이다.직장 덕택이다.       요지음에는 시대의 발전과더불어 결혼식을 혼례식장에서 그것도 마치 무슨 연극이나 하는 것처럼  요란하게 하는 집들도 많다.등불쇼도하고 노래와 춤도 곁들인다.아마 열열한것을 즐기는 젊은측들의 요구에 따른것이리라.              몇해전 나는 조카애 결혼식에 참가하려 한국에 갔었다.우리 결혼식과는 사뭇 다른 참신한 의식이였다.혼례식과 피로연(宴会) 은 완전히 다른 장소 다른 시간에 진행되였다.혼례식장에는 친척 친우 하객들이 정연하게 앉아  조용히 새가정의 탄생을 축복했다.주최측에서 모신 신분 높은 분이 신랑신부에게 축하를 해주는 동시에  앞으로 여차여차하게 가정을 꾸리여나가야 한다고 설교하며 차근차근 그 도리를 설명했다.참석자 여러분들도 한차레의  인생교육을 받는셈이였다.       한편으로 식당에서는 부페식으로 잔치객들을 맞이한다.료리나 술이나 다좋은데 내가볼바에 분위기은 연변식이 더좋다.         한국은 연회석둥근밥상이 아니고 장방형긴 밥상이여서 술을 건배하기가 힘들다. 재미있는건 손등에 도장찍는것이다.회식장에 입장할 때에는 신혼부부측이 내준 밥표로 들어가야하고 혹시 회식장을 나왔다 다시 입장하려면 손등의 도장을 검사 맞아야 한다.       식사도 식사지만 신랑신부 두사돈집 그리고 가까운 친척들끼리는 또 다른방에서 식을 진행한다.상호인사나누며 례단을 내놓는다.집안잔치라고 할가.총적으로 보면 한국식 혼례는 장중하고 의미있게 회식은 자기요구에맞게 집안잔치는  은페적으로 하는것이 특점이라하겠다.        전에 로씨야울라지보스도크에서 결혼식을 하는 장면을 목격하였다.얼마 안되는 하객들의 배동하에 신랑신부가렬사기념비를 찿아 인사하고 생화를 헌화한다.그자리에서 들러리를은 신랑신부와 하객들에게 샴페인을 따서 부어준다.간단한 춤이나 익쌀꾸러기 표현도 있었다.한마디로 간단했다.         결혼은 어디까지나 형식일뿐이다.형식보다는 내용을 앞으로의 삶을 어떻게 영위해나가는가가 더욱 주요하지않을가.
17    조글로 그리고 나 댓글:  조회:1310  추천:0  2018-12-11
  조 글로 그리고 나          처음으로 조글로를 대하기는 몇해전 우리반 김서기의 시를 보면서 부터였다.서기는 시창작을 즐기는데 조글로를 곳잘 리용하는 것이였다.그리고 조글로 사장님하고는 아는사이인것 같았다.그정도로 알고있다가 금년 국경절전날 화룡고중창립75주년 행사에 참가하고 돌아와서 무언가 할이야기가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그래서 기념문장을 써서 조글로에 올리는 것도 좋겠다는 생각이  떠올랐다.             화룡고중졸업생으로써 기념행사에 참석했으면 뭔가 떠오르는 기억속의 이야기를 학우들과 그리고 친구들과 나누는것도 재미있겠다는 출발점에서였다.       일단 작업에 착수하기로 하였다.30년전의 이야기를 끄집어 내였고 또 나름대로의 수정도 거치였다.그리고 편집잘하는 동창에게 부탁하여 조글로에 올리였다.헌데 얼마안지나 김서기한테서 전화가왔다.조글로 사장에게서 련락이 왔는데 아무개가 당신 동창이냐고 문의하더라고.참 자상한 사장님이였다.조글로의 편폭이 얼마나 큰데 그속에서 나의 글을 발견하고 련락했을가       나는 네트웨크에 대해 아는것이 별로없다.사실상 단위에서 사무처리 정도로 컴퓨터를 사용하고 있을뿐이다.맨날 하는일이 기획을 내고 총화하고 일을 밀고나가고 이런것이다보니 생각지 않게 문장쓰는 일이 많다.아마 전형적인 기관스타일이다.헌데 조글로를 접하면서부터 나는 우리 조선족사회의 정보에 큰관심이 생기였다.과거에는 조선말연변일보를 잘 보았는데 그것도부수(份数)가 귀하여 나에게 차려질 때가 적었다.올세 지능핸드폰이 보편화된 시대에 인테넷에 올라 보고싶은 문장 관심하고 있는 사항을 열독하기가 얼마나 편한가      시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시로 수필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수필로 자기생각 자기주장을 력설하고 있다.장사하는 사람들은 정보교류로 운동하는 사람들은 활동안내로 많고많은 사람들이 조글로를 도구삼아 생활를 재미있게 꾸리여가고 있다.물론 자기 생각을 고취한다고하여 법을 어기는 사설은 금기하여야 할것이고 조글로 측에서도 관련규칙을 철저히 준수하리라 믿는다.         과거나 현재나 우리말 잡지나 신문은 발행부수가 적은것으로 알고있다.조선족의 인구제한으로 조선문구독자가 적은것이 가장큰 원인이다.게다가 많은 조선말책자들은 재정상의 곤난으로 부대끼고있어 좋은책을 출판하기도 힘든 상황이다.도서(图书) 출판은 많은 비용이 필요하고있지만 인터넷문장은 기본상에서 공짜다.도서는 시간제한 공간제한 구독제한등 많은 애로사항이 존재하지만 인테넷글들은 빠른 시간내에 정확하게 구독자와 대면할수있다.최대한 글의 가치를 발휘할수있는 요소를 구비하고있다.      이전에는 문학애호가들끼리 동호회를 뭇고 같이 토론회의도 가지고 작품을 감상하기도 하였다.1985년 나의 친구가 연변대학을 다니였는데 그친구가 화룡남평인가 하는곳의 문학도들과 쌀롱을 갖는다고 화룡을 찿아온일도 있었다.열성이 대단하였다.아마 그세월에는 많은 사람들이 작가를 숭배하고 시인을 흠모했을 것이다.어섯눈을 방금뗀 시기라 경제보다 랑만과 애정이 넘쳐나던 시기라함이 더 적절할것같다.헌데 당시 경제사황으로서는 문학팬들이 잡지를 낸다는것은 어림도없는 일이다.하여 어떤팬들은 자비로 종이를 사서 프린트하여 소위 자기들만의 잡지를 만들었다.나도 그런책자를 여러권 만나보았다.문학을 얼마나 하고싶었으면 그랬을가.       지금은 많이 변했다.경제중심의 사회 리기주의( 利己主义)범람 자사자리(自私自利 )침투 사람들의 의식이 다양화를 나타내고있다.하기에 글쓰기애호가들은 줄어들고 있는추세다.웬만하면 시를 쓰는 사람이 시를 읽는 사람보다 많다고하겠는가.실리(实利)주의가 범람하여 돈이 안되는 일은 하지 않으려하고있다.글쓰는 사람도 먹고 살아야하니 별수없이 필을 놓고 상전(商战) 에 뛰여드는 사례도 있다.조선문으로된 작품집이 대부분 사비(私费)로 출판되는것 또한 현실이다.이런 와중에 조글로가 문학애호가들에게 글쓰기 무대를 마련해준것이다. 글쓰기 욕구를 만족시킬수 있는 큰 마당을 제공하여 주었다.얼마나 고마운 처사인가.자유자재로 시간과 공간의 제한없이  글을 올릴수있다는 자체가 고마운것이다.여기서 많은 좋은 문장을 읽을수 있고 또 작가와독자사이 토론할수도있어  공간개념을 넓히고 상상의 나래를 맘껏 펼칠수있다.      나는 우리민족사이트 가운데 조글로와같은 종합적사아트가있는것이 자랑스럽다.    
16    년말년시(年末年始) 댓글:  조회:1074  추천:0  2018-12-10
년 말 년 시 (年 末 年 始)       년말이 되면 각 단위마다 일손이 바빠진다.일년동안 진행되여온 여러가지 사업들을 총화해야하고 또 다음해 공작타산도 내놓아야한다.        혹자는 마무리 못한 일들로하여 퇴근시간이 늦어지기도 하다.년(年)이란것은 인간이 만들어낸 여느시간의 종점과 시작을 알리는것뿐인데 이젠 사람들이 그 규정이 몸에 배기고 또 제도화 되여서 잘 준수해나가고 있다.미국의 재정년도(财政年度)는  자연년도와 달리  6월 말을 기준하고 있다.구라파컵족구경기의 년도도 자연년도와는 달리하고 있다.                 년말이 되면 평소와는 다른 공작 절주를 따라야 한다.하루에도 여러가지 일을 봐야하고 멀리에서 오는 친구들도 만나야하고 술자리도 많게 된다.자연히 사람은 피곤할수밖에 없다.그러니 기다려지는 것은 주말이다. 어제는 리발하고 만달쇼핑몰에 다녀왔다.요지음 처럼  강추위가 휘몰아치는 한동삼에  최적의 휴식 공간이였다.지하 주차장에 들어섰더니 빈자리가 별로 없다.그만큼 고객들이 많이 찿아 왔다는 말이다.        상가로 말하면 우선 고객이 많이 찿아줘야 뭐가 팔이든 아니면 인기(人气)라도 있을것이 아닌가.홀에 들어서니 생각대로 평소와는 달리 손님이 많다.특정상 어린이와 젊은 애들 엄마가 많았다.집에 있자니 답답하고 밖에 나가려니 추운데 쇼핑몰이 최적의 선택이 된것이다.따뜻하고 공간이 넓고 먹을것 놀것 구경거리 살거리 모든것이 구비되였으니 휴식의 한때를 보내기가 안성맞춤이다.상가(商家)측에서도 반기는 기색이다.          어제는 한반급에 김서기가 위챗에 한장의 사진을 올리였다.6반 친구들의 집단사진인데 배경을 보니 로리커후였다.새하얀 백설세계를 배경으로 씩씩한 모습들이였다.설명을 보니 송구영신 활동이란다.참 좋은 기념행사라고 생각한다.동창들사이라도 각자 의 직책과 할일들이 있으니 만날시간도 많지못한것 또한 사실이다.             년말년시 집단활동을 통해 한해를 총화하고 다음해를 기획하고 서로서로의 문안과 축하를 주고받는것 이 얼마나 멋진 행사인가.의식감(仪式感)이라는것이 너무도 중요하다.어떤이는 이것이 형식아라고 말할지 모르지만 내용은 형식을 떠날수 없다.장중감 정식감 이런것이 구비되여야 내용을 보다 잘 전달하고 의미가 깊어 질수있다.           얼마전 나의 누님께서 위챗을 통하여  나에게 일본에 게시는 고모님 편지주소를 물었다. 년말이 되여오는데 고모님께 문안인사를 올리겠다는  말씀이였다.년말이면 부모님께 형제자매들에게 친구들에게 직장동사자들에게 상호 문안을 하는것이 상리(常理)라고 본다.        공가돈을 쓸대에는 각단위지간 상하급지간에 년하장이 범람하였다.누가 더 고급스럽고 누가 더 많은 년하장을 받았는가 하는것이  그당시에는 경쟁이 되다싶이되였다. 자기손으로 글한자 안쓰고 컴퓨터로 글을 짓어  프린트하는것이다.공금을 퍼부느며 하던 이런식의 년하장이 과연 어느정도의 효과를 거두엇을지 의심스럽다.그러나 자신의 맘을담은 소박한 년하장 한장 따뜻한 맘을 전하는  전화 한통 메시지 한통이 오히려 우의를 증진하고 상호료해하고  고무격려하는 더효과적이다.우의를 마음속에만 간직해서는 안된다.        묵묵히 바란다던지 소리없이 지키여 보고있다던지 하는것은 바람직 하지 않다.행동으로 언어로 표달해야 함이 옳다고 본다.나는 매년 원단 날이면 산에가 들에가 해돋이를 본다.장엄하면서도 아름다운 새해의 해돋이  .불끈 솟아오르는 태양을 보면서 나는 새로운  한해를 기원한다.그리고 여러분들한테 문안한다.요지음은 위챗이 발달하여 이쁜도안 멋진문구를 이용해 문안하는 사례가 많다.오지랍이 넓은 일인줄 알지만 나는 그런 행위를 제창하지 않는다.자기 로동이란 꼬물치도 반영안된 복사(复写)식이 반갑지가 않다는말이다.글 한줄이라도 말한마디라도  자기심중의 이야기야 말로 받는 사람의 심금을 울리기때문이다.
15    사상 공작대 댓글:  조회:1345  추천:0  2018-12-02
사상 공작대       89년도 여름 대학을 나와서 한창 출근의 희열에 들떠있던 어느날이였다.과장어른이 나를찿아이야기 한다.       금년도 학교졸업생들은 농촌교육을 받으라는 문건이 있어.화룡팔가자라는 동네에가서 몇달교육받고 오라구.뭐야.왜 나만가야는데.다른 친구들은 아무 별고없이 출근하는데 말이다.조직의 결정이라 나는 별소리없이 공작대에 참가하였다.한과실에 있던 박씨성을가진 40대후반의 남자분이 나를 데리고 촌공작대조장을 맡았다.첫날 단위에서는 우리를 차로 팔가자진 하남촌까지 실어다주었다.촌부에서는 하숙할 집이라며 천씨성을가진 할아버지 할머니량주가 사는집을 안내하였다.집에 들어서니 로인량주가 우리를 반겨준다.우리는 이불이며 생활에 필요한 물건들을 방에다 내려놓았다. 여느 농촌마을이 다 그렇다싶이 천로인네집도 세칸짜리 집이였는데 정주에는 노인량주가 방에는 우리주사람이 들고 아래칸은 창고로 사용하고 있었다.우리가 팔가자로 내려갈 때가 11월말이였다.날씨가 추웠다.         주숙은 해결된셈이다.사회주의 사상공작대 규정에 의하면 밥은 촌민들의 집을 돌아가면서 먹어야 된다고 했다.첫날은 천로인네 집에서 먹었는데 명태국이 너무맛있었다.할머니께서 집적담근 염채김치 갗김치 파김치가 밥맛을돋구었다.결정이 결정인지라 돌림밥(派饭)이라니 규정대로 이튿날부터는 한집에서 하루씩 얻어 먹어야할 판이였다.물론 식사비용은 본인이 감당하여야했다.이튼날에는 생산대장네 집에서 밥을 하였는데 별다른 음식은 아니라도 따뜻한 입밥에 시원한 된장국이 우리입맛에 맞있다.촌민들은 우리를 집에온 손님처럼 극진히 대접하였다. 내가 어릴때 우리 마을에도 선전공작대가 왔는데 우리 어머님은 집에있는 제일좋은 식재료로 공작대분들의 음식을 만들어 대접하였다.나의 누님도1976년도에 연길시 민흥촌에 공작대로 일년 넘게가있었다.물론 돌림밥을 먹었는데 그때만 해도 촌의 사정이 여의치않아 많은 고생을 하였다.한번 집에와서 이야기하는데 촌에서 명절이라 소를잡았는데 쌀이 부족하여 강냉이죽에 소탕을 드시였다고 했다.나는 누님보다 13년을 늦게 공작대에 나왔으니 촌이라고 하더라도 많은 변화가 이었다.조건이 좋아졌다는 말이다.        다시 우리 이야기로 돌아가자.며칠뒤 우리는 한 한족로인네집에 분배되여 밥을 먹게되였다.그집은 마을과 한참 떨어진 곳에 단독으로 거주하고있었다.집은 낮고 지붕은 조이짚을  올리였고 구새는 통나무로 되여있었다.집에 들어서는 순간 나는 멍해지고 말았다.뜬김이 뽀얗게낀 부억에서는 돼지새끼들이 달아다니고 있었다.땔것으로는 옥수수대였는데 원래 크지않은 부엌에 돼지새끼며 옥수수대며 갖가지 잡동사니며 참으로 사람이 들어설 자리가 없었다.나는 박조장의 뒤를따라 부억에서 방으로 들어갔다.집구조는 전형적인 세칸짜리 집으로서 방은 한족식 온돌이였다.밥은 이미 상에 차려놓았는데 어두운 전등빛 때문에 뭐가무엇인지 잘보이지 않았다. 바깥로인은 전형적인산동사람이였는데 성격이 시원시원하고 허우대가 큰 분이였다.우리를 보고 많이먹으라며 연신 권한다.산동말씨라서 대부분 이야기는 알아듯기 힘들었다.          숙소로 돌아온후 나는 본 이야기를 천로인양주에게 들려주었다.담배를 힘있게 빨아들이던 할아버지는 후하고 연기를 뿜어내시더니 박조장과 나를 번갈아보며 토론하시는 어조로 말했다."두분이 우리집음식을 탓하지 않는다면 여기저기 이집저집 떠돌이 식사하지말고 우리와같이 먹기오.별것없어도 따뜻한 밥을 같이먹는것이 어떻소?"참으로 고마운 분이였다.남들은 하루하는밥도 애난다고 하는데 로인양주가 우리를 도맡아 식사를 공급하겠다니 얼마나 고마운 분들인가.         낮이면 우리는 생산대분들과 같이 회의도하고 밭일도 하였다. 동삼이라 큰일은 없었지만 시간나는대로 촌의 일손을 도왔다.박조장은 팔가자진으로 회의하려 자주 다니였다.그럴때면 나는 종일 혼자있었는데 시간이 아까워 글씨연습을 하곤 하였다.그때 전국적으로 방중화(庞中华)의 만년필글씨를 배울때였다.하지만 나는 별도로"黄若舟怎样快写钢笔字"라는 책자로 글씨연습을 하였다.지금 어느정도 글씨를 쓰는것도 그때 연습한덕분이다.        우리 공작대가 내려가있는 팔가자진 하남촌은 과거에 교통이불편했다.하남촌은 팔가자진 동쪽방향으로5_6리 떨어져있는데 팔가자로 가려면 걸어가야한다.당시에는 뻐스도 통하지않았다.자전거를 빌려야는데 별로 빌릴만한 곳도 없다.한주일 한번정도 연길에 있는 집에 다녀오는데 뻐스를 타려면 팔가자로 가야한다.다시 서성까지는 도보로가던 뻐스로가던 이동해야하고 서성에서 연길가는 차를 바꾸어 타야한다.연길에서 하남촌으로 올때는 뻐스를타고 오다가 아예 서성에들어서기전 마을에서 내려 논밭을 꿰뚫고 얼어붙은강을 두개 건너서 10리길을 걸어다니였다.기차를 타려면 그것도 쉽지않다.하남촌에서 동남방햐으로 한참가면 홍기승강소(乘降所)라는데가 있다.기차역전은 아니나 오르고 내리고하는 곳이다.헌데 문제는 멀지않은곳을  연길__조양천___홍기승강소로 이어져 기차를 타야한다는것이다.나는 공작대로 내려간 4달동안 이런저런 교통수단을 다리용해보았다.벼라별계산도 다해보았는데 어떻게하면 시간도 절약하고 걸음도 줄이겠는가하는것이였다.그때 너무힘들게 다녀서인지 후일 꿈에서도 하남촌을 자주보았다.          이듬해 3월말 사회주의사상공작대는 제반 사업임무를 완수하고 본단위로 돌아왔다.전주총화모임을 연길예술극장에서 가지였는데 박조장은 모범상을 받았다.한집에서 한가마밥을 넉달간먹던 우리는 천로인과 작별해야했다.천로인량주는 우리의손을잡고 놓을줄몰랐다."시간 나면 놀려오라"고.우리도 섭섭한 마음을 금치못하며 하남촌을   떠났다.        하남촌을 떠나 10여년만에 나는  천로인을 만나뵈우려  마을을 찿았다.헌데 로인네는 이사가고 없었다.촌서기 일보던 렴서기는 돌아가시였다고 한다.마을은 큰변화를 가져왔는데 지금은 양파농사를 주로한다고 한다.큰 공장건물도 보였다.갖대학을나와 4달간을 보낸 하룡마을에서 나는 아는사람한분 못만났다.소박하면서도 친절하고 가식을 모르고 진심으로 공작대를 대해주던 하남촌 촌민들을 회억하면서 나는 한참동안 멍하니 하늘만 바라보았다.          하남촌을 떠나 20여년만에 나는 다시 마을을 찿았다.마을의 이곳 저곳을 거니노라니 머리에 떠오르는것은 오직 천로인양주와 마을 여러분들이였다.마을큰길에서는 어린아이들이 뛰놀고있었고 면목모를 농부들이 뜨거운 해볓을 피하여 그늘밑에서 땀을들이고 있었다.아세월은 많이 변했다. 이때 나는 당(唐)나라 하지장 ( 贺知章)의 시구가 떠올랐다.어려서 집떠나 나이들어 돌아올제 고향말씨변하지않았는데 귀밑이 희석하구나.어린아이 나를보고손님은 어디서오냐고 묻는다네.    
14    룡암찰기 댓글:  조회:1134  추천:0  2018-11-29
룡암찰기          룡암(龙岩)은 복건성의 서쪽에자리잡은 지구급도시로서 2개구 4개현을두고 인구는 318만명 면적은1.5만평방메터이다.이정도 이야기 해서는 도무지 짐작이 안가지만 고전(古田)회의라고하면  어느정도 당사(党史)를 배운 사람이라면 기억하고 있을것이다.고전진이 룡암시 소속 상항(上杭)현에 자리잡고 있다.         고전회의는1929년12월28일부터 29일까지 진행된 홍군방면군제9차다대표대회를 가르킨다.사상으로 당을 건설하고 정치로 군대를 건설한다는 우리군의 정치사상공작방침이 고고성을 올린곳이다.2014년 전군사상정치 공작회의가 여기서 열림으로서 고전회의 유적지가 더욱 유명세를타게되였다.지금은 홍고전(红古田)유람지가 AAAAA급으로서 많은 사람들이 찿는곳으로 되였다.          연변훈춘에 있는 자금광업(紫金矿业 )이 상항에서 창업하였다면 어느정도 우리와의 거리가 가까워질것이다.하여튼 못와본 사람이라면 지리적으로 알기쉽지않은 도시다. 며칠있으면서 관찰하여보노라니  룡암시는 경제적으로 너무 처진 동네도아니고 너무 뾰족한동네도 아니다.허나 경제활성화가 우리고향보다는 좋은 느낌이다.모든 층집들의 이래층은 일매지게 상포(商铺)들이다.규모는 작으나 마 문을열고 손님들을 맞이하고 있었다.사람밀도도 우리보다높다.       우리 연길은 사람이 적다.큰회사나 공업단지가 없는바하고는 나의판단에는 인구라도 많아야한다.머리수가 많아야 집도 팔리고 옷 먹을것 차량도 잘나갈것이다.어디에서 돈이나오냐고 할것인데 본토경제가 약하면 로무송출이 힘을 얻게된다.우리 연변도 마찬가지가 아닌가.본토 경제 활성화가안되니 타지방    더나가 한국 일본 미국에가서 돈버는 로무송출형경제가 톡특한 역활을하고있다.하기에 처음 연길에오는 손님들은 연변의 물가에 화들짝놀란다..룡암시도 대체로 로무송출형도시인것같다.         남쪽나라 전형적인 남방기후를가지고있는 복건성이다 .요지음 이도백하에는 함박눈이 펑펑쏫아진다는데 여기는 우리초여름날씨다.낮기온이22를 넘는데 기저기에 꽃이 피여있다.우리 연변인문력사는 비교적 짧다.한백년전 인물을 뽑으려면 얼마안된다.허나 남방의 작은 마을도 몇백년력사 심지어 천년의력사를 자랑하는 동네가 많다.인간이 그만큼 오래살았으니 이야기도 많고 인물들도 많다.결국 인문력사에 들어서서 자랑거리가 많다는 이야기다.못살던 그사절에는 별로 조상을 들먹여봐야 누가 대단하게 여기지 않지만 여지음 여유있는 살림을하게 되노라니 조상자랑을 할만치도하다.또 그것이 이야기로 전설로되여 유람업에 힘을실어주고 지방경제에도움된다.          우리 마반산에도 한1000년전에 사람이 살았고 또 동하국(东夏国)서울로 력사에 기재되여있다.력사족 유물도 좀씩나오고 있으나 문헌에 기재되여있는것이 얼마안된다.전설도 적고 자랑할것도 별로없다.이점에서 나는 남방의 인문문화가 부러울뿐이다.누구누구는 이마을 출생이다.누구는 아무개의 몇십대 후손이다.이것이 요지음에는 돈벌이 믿거름이되고 있다.유람업이 발달하려면 먹을거리 놀거리 듣을거리 살거리등이 서로 잘융합되여야는데 우리는 그것이 잘안되니 유람객유치의 한개고리가 끊어져 있는셈이다.참으로 안타까운 현실이다.       룡암시는 하문에서 뻐스를 타고 약3시간을 달려야  도착할수있다.갈때는 밤중이라 주변을 볼수도 없었다.그저 고속도로인게 달리는 차가 늦다는 느낌을 받았을 뿐이다.헌데 돌아올때보노라니 도로주변이 몽땅 산이다.산도 험악한 산이고 평퍼짐한 땅이라곤 별로 보이지않는다.이동네 농사는 어떻게하는건지 도무지 짐작할수없다.도로는 기본상  산골짜기를 타고 길을빼였는데 다리와 산굴이 많다.다리도 매우높다.과거 고속도로가 아니 뚫린세월에는 길이 얼마나 험악했겠는지 상상도 안된다.또 더앞서 홍군이 민서(闽西)지역에서 국민당군과 싸울당시 교통이란 수레길이나 별반 차이가 없었을것이다.지금은 천지개벽의 변화가 일어났다.고속도로 고속철로까지 통하니 외계와의 교통문제는 완전히해결된셈이다.경제가 발전하려면 길을 닦아야한다는 명언이 여기서 그역활을  남김없이 발휘하고았다 .          차이를 찿고 근원을 알아야 문제를 해결할수있다.전주상하가 합심하여 유람업으로 자치주를발전시키자는 분투목표가 세워졌다.문제는 어떻게 자기현 자기촌의 실제에 맞는 유람발전의 밑그림을 그리는가하는갓이다.민속촌을 한다고 너나없이 뛰여들지말고 히나를 해도 명품을 만든다는 장인의식이 필요하다.         지난해에 화룡광동촌에 가보았는데 오는 손님들은 총서기가 다녀간집을 배경으로 사진을 남기고 인츰인츰 떠나는것이였다.시간적인 촉박함도 있겠지만 나처럼 시간의 속박을 받지않는 유람객에게도 볼거리 먹을거리 놀거리가 적다는 느낌이 닿았다.손님을 끌어와야하고 오래있게 해야하고 재미를 느끼게해야하고 돈지갑을 열게 시스템을 만들어야 한다.요지음 주말이되면 시교근방으로 놀려가는 가정모임  각종협회모임  친구모임등이 많다.유람업이 사람들의 각광을 받고있다는 표현이다. 연변의 유람업이 번영하여 대외로는 연변을 알리고 대내오는 경제활성화에 큰도움을 바란다.
13    군사야영 댓글:  조회:1020  추천:0  2018-11-23
 군  사  야  영        내가 어릴때 연길시에는 문예경연대회라는것이 있었다 。각학교마다 자기들 절목을 공연하고 평심위원들의 심사를 거쳐 우수절목이 선정되는것이다 。지금이야 웬만한 공연이면 다 무대복장이 마련되고 또한 가정에서도 부담할수있는 능력이라만은 40여년전에는 그렇지가 못했다 。우리는 없는 사정에도 불구하고 소선대복과 치마를 만들어 입고 한판의 승부에 나섰다 。        그시절 촌에도 인재가 많았다 。 촌에도 크라네트 바이올린 손풍금등 악기를 다룰줄 아는 분들이 꽤나되였다 。대바른 선생님들께서는  갖은 곤난을 이겨내고 시소학생문예경연에 나서기로 합의했다 。      그때 우리 단임선생님은 박정희라고 부르는 녀교사였다 。원래 시내학교 교사로있다가 남편이 하방(下放)으로 인해 소영에 오게되였다 。남편은 성씨가 정씨였는데 원래 도시병원 의사선생님이였다 。선생님은 우리에게 인생첫교사로서의 모든것을 가르쳐주었다 。음악교원은 최응률선생님이였는데 참으로 대단한분이였다 。모두 잘 알고있는 80년대 류행곡«나는야 기타를 타네»의 자곡가이시다 。몇해전 80 세 생일을 쇠였는데 참석한 우리 제자들에게 기념품으로 선생님께서 손수 작사 자곡한 노래앨범을 나누어주었다 。        우리 학교에서는 단막극 «군사야영»을 공연하기로 하였다 。내용인즉 내가 맡고있는  역 영남학생이 군사야영 가던날 땡땡이치고 낚시하려간다 。소선대소대장이 이를 발견하고 교육한다 。보도원 선생님과동학들의 도움으로 영남이는 잘못을 늬우치고 동무들과같이 군사야영에 참가한다 。짧으나 아주 기복을 이루고 동학들의 마음을 사로잡은 단막극이였다 。형세로 봐도 그시대 현실을 잘 반영했다고 본다 。       우리는 본격적으로 연습에 들어갔다 。대본도 암기해야하고 표정관리도 교육받아야 한다 。정식문예공연을 앞두고 학교에서는 연습효과를 검열하는 차원에서 시험공연을 하기로하였다 。그때 마침 연변가무단에서 우리  마을에와 연출을 하게되였다 。대대에서는 무대를 설치한다 자리를 정돈한다하며 법석이였다 。우리공연은 가무단 공연절목 가운데 끼워넣었다 。 한여름의 어느날밤 소영촌에는 명절의 분위기가 물씬한가운데 우리의 공연이 시작되였다 。막이 열리면 영남이가 낚시대를 메고 나오며 노래한다 。"오늘은야 우리소대 군사야영 간다지만 하루쯤 빠져서야 큰일날가 나는야 오늘 아침 고기잡이떠났죠" 열띤 영남이의 기분은 한양없이 즐겁다 。땡땡이치고 낚시하는 마음 얼마나 좋을가 。       이때 영남이가 없는것을 발견한 소대장복자가 영남이를 찿아 내가로 뛰여온다 。복자가 노래한다 。"영남아 영남아 어디로갔니 동무들은 군사야영다모였는데 나는야 너를 애가나게 찿았다"。영남이가 복자를 보고 우쭐렁거린다 。녀자 소대장이라고 안중에 안넣는 모양새다 。영남이가 노래한다 。"이걸 보면 모르겠니 고기잡이지 " 그러는 영남이를 복자가 교육한다 。보도원선생님도 동무들도 영남이의 잘못을 지적한다 。울먹울먹하던 영남이는 마침내 잘못을 늬우치고 낚시대를 내동댕이치고 대원들과 함께 군사야영에 참가한다 。연출은 대성공을 이루었다 。박수소리가 여름의 밤하늘에 울려퍼지였다 。       지금도 50 세 이상의 소영사람들은 그날밤 무대를 기억하고있다 。우리는 연습에 박차를가하여 더좋은 성적을 내려고 윽별렀다 。드디여 문예공연의 그날이 다가왔다 。우리 남자애들은 눈같이 새하얀 소선대복에 곤색바지 흰운동화를 신었고 여자애들은 흰대복에 파란치마를 신발은 일제히 산다루로 하였다 。비록 촌소학교에서 온 아이들이라지만 우리는 조금도 녹녹치가 않았다 。마치 소련영화«산촌의 녀교사»중에서 나오듯이 “맨발바람에 모래불을 걷는다만은 씩씩하게 앞으로"하는 식이다 。속으로야 어찌 주눅이 안들었으랴 。시내 아이들은 분장도 곱게하고 사기또한 등등하다 。허나 우리는 선생님께서 하라는대로 머리쳐들고 대사도 또렷이 노래도 창창하게 해나갔다 。노력은 헛되지 않았다 。 관중석에서 우뢰와 같은 박수소리가 터져나왔다 。성공이였다 。           그뒤로 우리의 공연은 계속되였다 。당시는 바로 비림비공( 批林批孔)시절이였다 。우리 홍소병들도 시대의 흐름에 맟우어 선생님이 내준 각본대로 연습하고 온돌 공연에 나섰다 。삼로인 형식 재담형식 그리고 노래형식으로 사회에 존재하는 나쁜현상들을 실랄하게 비평하고 새 풍상수립에 어린몸을 담구었다 。   세월은 많이 흘렀다 。또 많이 변하였다 。하지만 변하지 않은것이 있으니 바로 동심(童心)이다 。세월이야 어떻게 변하였던지 마음속에는 항상 엉뚱한 생각  천진랑만란한 꿈을 간직하고 있다 。어려서 그토록 하고싶던 미술이였건만 여건이 여의치 못하여 그만두었다 。지금도 누가 스케치를 하면 그등뒤에서서 오래도록 지켜본다 。언젠가는 다시 그림을 배우고 싶다 。          이젠 하는일도 웬간히 자리잡아 가고있다 。아들애는 대학에갔고 부모님의 말을 잘 듣는 편이다 。안해는  직장에서나 집에서나 모든일에 열성적이다 。바라건대 남은 시간은 자기로 살고십다 。흥취와 정렬이 조합된 동심을 아로새기고 말이다 。ㅋㅋㅋ
12    송구영신(送旧迎新) 댓글:  조회:1138  추천:0  2018-11-22
송구영신(送旧迎新)          년말이되면 송구영신 행사가 빈번하다。  전에는 각 단위에서도 류사한 행사를 가졌다만 지금은 기업쪽에서는 계속진행되고 있으나 정부소속에서는 뜸한 상태다。 오히려 각종 민간단체 이를테면 배구협회 등산협회등 조직에서는 송구영신 활동이 활발하게 진행되고있다。          동창들사이에도 년말행사로 송구영신이 보편화되고 있다。 우리 반급에서는 지난해 년말 단임선생님을 모시고 총화모임을 가지였다。 비록 년중(年中)에도 외국에서 혹은 타향에서 동창이 오면 모임을 가진다만은 송구영신은 별도로 조직한 모임이였다。 그만큼 송구영신에 대한 여러분들의 기대치도 크고 부여한 의미도 깊다고 생각한다。          우리 동창들은 다양한 분야에서 맏은바 지책을 열심히 완수하고 있다。 대학교단에서 은행분야에서 정부각부처에서 자기회사에서 외국에서 국내에서 참으로 열심히 일하고 또 많은 성과를 올리고있다。 하여 행사때 모이면 할 이야기도 많고 교류할정보도 많다。 고로 송구영신을 단지 술장소라던가 먹는장소라고 보지 말아야한다。 민간단체지만 짜임새가 탄탄하고 사람들지간의 우애가 깊고 대화내용도 차원이 높다。         어려서 초중다닐때도 송구영신모임이 있었다。선 생님이 우리를 모여앉이고 평소와는 다른 자애로운 모습을 보이며 지나가는 한해에 어떠어떠한 변화와 진보가 있었고 다가오는 한해는 어떻게해야 한다는 총화와 기대를 이야기하시였다。그 뒤로 모두 돌려가면서 자기소감을 발언하였다。 그때 나는 반장이였는데 이런행사가 처음이라 뭘 어떤식으로 이야기해야는지 어리둥절해하였다。 시간은 흘러흘러 대학다닐때에는 오히려 송구영신이 기다려지였다。 학교에서는 교자(饺子)도 빚고 맥주도 내주었다。 어른 대접을 받는셈이였다。 조선족들이 개고기를 좋아 한다고 한접시 올려주었고 배추김치도 추가로 올렸다。 그때는 학급간부들 위주로 행사를 진행하였는데 장끼 보여주기같은 절목도 간혹 끼워넣어 웃음이 끝힐줄 몰랐다。 허나 동기는 오직하나 묵은해를 청산하고 새로운 한해를 기약하는것이다。그때 처음 어른이되여 맥주도 마시고 노래도 부르고 춤도추었다。젊음은 언재나 아름답고 언제나 활기차고 언제나 행복하다。          지난해 이맘때쯤이였다。주말을 맞아 나는 서기(고중때 우리반 단서기)와 함께 등산하게되였다。그날 우리는 고려대학에서 출발하여 허씨골안 (许家沟)광흥소학교옛터 광흥5대를 잇어 다시 고려대학을 돌아오는 코스를 만들었다。전에는 반장을 지내던 좋은 친구도 있었는데 다른일 때문에 못나오고 단출한 둘만의 등산으로 끝히고 말았다。하산하고 우리는 투도온면집으로 갔다。그곳에서 우리는 송구영신모임을 갖자고 의견을 모았다。단임선생님을 모시고 동창들도 만나고 한해를 총화하고 처진어깨도 다독여주고 아름다운 새해를 기약하자는 차원에서 우리는 행사의 필요성을 다시한번 느끼게되였다。우리반급은 뭘하면 모가나게하는 습관이 있다。서기는 집적 미술사에가서 현수막을 만들었다。설계도 어쩌나 이쁜지 다른반급에서 행사때 쓰겠다고 베끼여갈 정도였다。          송구영신은 예정대로 진행되였다。한국에서온 동창 화룡 룡정에서도 동창들이 연길에 모였다。모두다 활발한 모습이다。보고싶던 이야기 각자 맡은바 분야에서의 이야기 새해의 건투를 축원하는 이야기 우리는 즐거운 송구영신의 밤을보냈다。또 새로운 에너지를 얻었다。        친구들 동창들 얼마지나지 않으면 2018년은 물러가고 희망과 신심으로 벅찬2019년의 서광이 비끼여 온다。맘을 정리하자。옷깃을 여미자。다같이 새해를 맞이하자。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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