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영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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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1    꽃구경 댓글:  조회:1088  추천:0  2020-05-09
꽃구경     꽃구경도 부지런하여야 한다. 특히 우리 연길로 말하면 꽃피는 계절이 짧다. 제일 처음으로 피여 나는 복숭아와 살구꽃은 화기가 길지 않기에 시기를 놓히면 그 이름다움을 감상할수 없다. 지난주 토요일날 자전거를 타고 장백로를 달리며 보노라니 아직은 꽃구경하기에는 이르다는 느낌이였다. 헌데 오늘 보니 이미 한물 지나 갔다. 꽃잎들이 많이 떨어져 있었다. 기다려 주지 않은 꽃이 참으로 얄미웠다.   우리와 달리 남방에서는 꽃을 감상할 시간이 길다. 그리고 날씨 또한 따뜻하여 꽃을 감상하는 분위기도 좋다. 광주에는 춘절기간에도 꽃시장이라는것이 있다. 몇해전 광주꽃시장을 구경하게 되였는데 동북에 눈이 펑펑내릴때 광주에는 각가지 아름다운 꽃들이 이쁜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곤명의 꽃시장은 계절과 관계없이 전국에 다양한 품종의 꽃을 배송한다.       미(美)가운데는 순간미라는것이 있다. 사람들은 벗꽃의 아름다움은 순간미라고 하였다. 여느 순간에 활짝피였다가 또 여느순간에 우수수 꽃잎을 날리는 벗꽃은 열열함과 순결 고상 행복 생명 사랑을 상징한다고 한다. 무한대학 교정의 벗꽃은 전국적으로도 유명한데 인터넷에서  미리 예약하여야하고 문표를 구입하여야 구경할정도다.  하지만 화기를 놓히면 활짝핀 벗꽃의 화사함을 구경할수 없고  땅에 떨어진 눈같이 힌 꽃잎만 구경할수 있다.      순간미를 감상하려면 우선 개화기를 잘 맟우어  꽃구경에 나서야 한다. 친구가 말하기를 "먹고 살려면 부지런해야 한다"고 했다. "꽃"구경도 마찬가지다. 늘 꽃나무와 가까히 해야하고 부지런히 꽃망울을 관찰해야 한다. 그래야 가장 적절한 시기에 가장 아름다운 꽃을 감상할수 있다.  아름다운 꽃을 머리속에 담아두려면 세심하고 반복적인 관찰이 필수다.      요지음 연길로 말하면 진달래꽃이 가장 왕성하게 피는 계절이다.  연길동쪽에 자리잡은 성자산이라던지 하룡촌의 산기슭에는 진달래가 많이 서식되고 있다. 꽃구경을 하려는 사람들에게 요지음은 절호의 시기다. 자가용을 리용하여 드라이브도 하고 동하국 옛서울 유적지도 답사하고 꽃구경도 하면 진짜 일거량득이다. 활활 불타오르는 듯한 진달래 우리백의 민족의 얼이 숨쉬는 진달래는 만민의 사랑을 받고 있다.      꽃이 피는 봄이 오면은 산과 들에는 새들이 날아예고 연푸른 나무잎새가 뾰족뾰족 돋아 난다. 뭇산에 피여난 살구꽃은 온산을 흰색으로 뒤덮는다. 저멀리 산비탈의 옥수수밭에는 밭갈이하는 뜨락또르가 보이고 그밑에 자리 잡은 살구나무꽃핀  시골마을은 마치 에덴동산 같이 아름답다.      꽃구경도 한철이다. 시기를 놓히면 또 내년을 기다려야 한다. 그러노라면 또 한살먹는것이 아니겠는가. 꽃을 사랑하는 사람들이여 꽃구경 떠나세나. 연분홍 진달래 고개젓고 새하얀 살구꽃  피여난 성자산 꽃구경  가세나
130    거짓보도 댓글:  조회:1091  추천:0  2020-05-09
 거짓보도   거짓보도는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특히 외국언론사들에서는 가끔 가다가 사람들을 놀라게하는 특대소식을 보도하여 시선을 끄는데 시간이 지나고 보니 거짓보도 였다. 그들은 무슨 내선(内线)이니 이름을 밝히기 싫어 하는 소식 령통인사의 말이니 하며 검증도 되지 않은 소식을 보도 한다. 우리 나라에서는 거짓보도가 없다. 그것은 언제나 사실을 근거로한 보도원칙을 철저히 집행하고 있기 때문이다.      요지음 외국 언론사들에서는 여느 나라의 지도자 신체건강 이상설에 대한 소식보도를 엄청 쏟아 붓었다. 대부분 거짓보도가 다루는 내역은 많은 사람들의 관심사가 집중된 화제다. 그러니 보니  선량한 사람들은 보도의 진가를 잘 살펴 보지 않고 베일에 싸인 허위보도에 얼려 넘어가기 일쑤다.     거짓보도는  왕왕 사람들의 특대 관심사를 주요 내용으로 삼는다. 그래서는 안된다고 많은 사람들이 걱정하는 사건을   특필대서하는것이 그들의 특점이다. 그래야 보도의 효과를 극대화할수 있기 때문이다. 일부 판단능력이 바약한 사람들은 소식의 진가도 가르지 못하고 그대로 받아 들이는 경우가 있다.  선량한 사람들은 이처럼 중대한 사안을 그 누가 감히 거짓을 꾸며내겠는가고 생각한다. 뉴스를 끝까지 보지도  않고 그저 사실이라고 믿어 버리는 것이다.       그러면 왜 일부 언론들이 검증도 되지 않은 소식을 내보내는 걸까? 그것은 언론이 누구한테 장악되였느냐 누구를 위하여 복무하느냐와 집적적인 관계가 있다. 누가 언론을  장악하면 그것은 그가 곧 유리한 고지를 점령한것과 같다. 보통 사람들이 장악하고 있는 정보는 량이 적고 준확도가 낮다. 때문에 우리 언론이 어떻게 빠르게 준확한 소식을  대중한테 전달하느냐는  상당히 중요한 문제다. 거짓말도 만번하면 사실로 된다고 하지 않는가. 거짓보도를 하는 외신들도 이 도리를 잘 알고 있다. 하기에 그들은 자기들의 말못할 목적에 도달할려고 대중을 속이는 일을 서슴치 않는다. 하기에 우리 언론은 이런 현실을 적시하고  거짓을 발가 놓아야 하고 정면 으로 대중을 인도를 하는것이 그 무엇보다 중요하다.       과거 일부 사람들은 자본주의사회 여론자유에 대하여 다소 긍정적인 태도를 표시하였다. 허나  코로나19를 겪으면서 우리는 서구의 언론에 대하여 새로운 인식을 가져오게 되였다. 서구의 언론들은 철두철미 부자와 기득리익집단의  선전공구다.  리익을 위해서라면 원래 쓰고 있던 가면부도 서슴없이 찟어버리고 리익집단의 대변인 모습을 적라라하게 드러 낸다. 평소와는 완판 다른 백퍼센트 위선자들이였다.      혼란한 언론은 사람들로 하여금 방향을 잃게 한다. 때문에 우리는 대중들에게 당의 로선 정책방침을 명확하게 선전해야하고 우리 당이 무엇때문에 3가지를 대표하는가에  대하여 선전하여야 한다. 여기에는 한치의 에누리도 허용되지 않는다. 기치는  선명하고 일관하여야 한다. 그래야  전국잉민들을 이끌고 중국특색의 사회주의 대업을 완수할수있다.
129    봄비가 내린다. 댓글:  조회:1085  추천:0  2020-05-09
봄비가 내린다.      아침에 밖을 내다 보니 적은 비가 내리고 있었다. 오래만에 내리는 봄비가 대지를  적셔 주고 있었다. 출근길에 보니 흐린 날씨와는 너무도 대조적으로  길가에 활짝 핀 꽃들이 길손을 반긴다.  물기를 가득 먹음은 연분홍 복숭아꽃 새하얀 살구꽃  노오란 개나리꽃이 더 아름답고 청수하게 보인다.      어제는 곡우(谷雨)절기였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곡우에 비가 내리면 풍년이 든다고 한다. 하루가 늦어 서라도 비가 내리니 마음이 즐겁다. 하긴 곡우가 봄이 끝나는 절기라 하지만 우리 연변으로 말하면 이제야 봄이 제철기에 들어 선것이다.      봄이 되니 만물이 소생한다. 며칠전 자전거운동길에 하룡촌에 가보니 산 비탈에 진달래가 떨기떨기 피여 있었다. 우리 민족의 사랑을 한몸에 듬뿍담은 진달래다. 저멀리 산동교동반도의 석도에도 진달래가 있다고 한다. 들에는 이름모를 새파란  야초들이 뾰족뽀족  땅을 뚫고 올라 오고 있었다. 한 여름이면 그저 스쳐지나갈 풍경이건만 요지음 같은 봄에는 보이는  모든 푸른 생명이 그토록 반갑다.     지나온 몇달은 우리 모두에게 힘든 시간이였다. 불의에 들이 닥친 코로나19로 인하여 사람들은 출입을 금지하였고 긴 재택생활을 하여야만 하였다. 하지만 당과 정부의 강력한 대응책과 호소를 잘 따라 주는 국민들이 있었기에 우리는 점차적으로  일상을 찿아 가고 있다.  다른 나라들에서 코로나의 강타를 받고 있을때 우리 나라는  지금 생산을 회복하고  경제가 점차 회복세를 나타 내고 있다.  얼마나 행운스러운지 모른다.     물은 생명의 원천이다.  물떠나 생명은 존재 할수 없다. 이제 물먹음은 대지에는 만물이 소생할것이다.  자연은 우리가 겪은  코로나19역경과 관계없이 또 다시 파란 하늘 맑은 공기 싱싱한 록색을 우리에게 선물한다. 그것은 우리가 역경을 이기여내는 큰힘이 된다. 우리 모두서로서로 도우며 코로나를 그복하고 고난을 이겨내야 한다.      사회생활중에서 사람이 사람을 떠나지 못한다. 이탈리아에서 이번 코로나의 역경으로 곤혹을 치르고 있는데 와중의 한개 원인이 바로 과도한 밀접 접촉이라고 한다. 이번 역경을 통하여 사람들은 많은 도리를 총화하였다. 사람사이 거리를 너무 가깝게 두지 말아야 하고 또 너무 멀리 하여도 안된다. 너무 멀리하면  상업이 중지되고 인간관계가 멀어 지고 너무 가까이 하면 사생활이 없어 지고 부담스럽게 된다. 자연의 리치가 생명의 대가로 우리를 깨우쳐 주었다.       이제 우리는 점점 일상으로 되돌아 가고 있다. 봄은 만물이 소생하는 계절이요 희망이 꿈트는 계절이다. 봄비를 먹음은 대지는 이제 곳 록색단장하게 될것이고 왕성한 생명을 과시할것이다. 봄비는 차겁다. 하지만 생명을 잉태시키는 단비가 그토록 반갑다.       봄비는 우리 모두에게 희망을 준다. 희망이 가득한 봄철 우리 모두 올해 완수 하여야 할 제반 과제를 다시 한번  검토하고  보완해야 할것이다. 그리고 가배의 노력을 경주해야 생명이 하사한 새생활을 만끽할수 있는것이 아닌가.
128    남도사람과 그 후손들 댓글:  조회:1146  추천:1  2020-05-07
남도사람과 그 후손들    一、이민1세    어릴때 우리가 살던 소영마을에는 남도(南道) 사람들이 별로 없었다. 하기에 마을에서 경상도 말씨를 쓰는 아버지를 모르는 사람이 별로 없었다. 우리들은 아버지의 경산도 사투리에 특별한것을 느끼지 못하였지만  동네에서는  아버지를  남도사람이라고  했다.      아버지는 1921년생인데 고향은 경상북도 월성군 산내면이다. 한일 합병으로 인한 일본놈들의 압박과 착취는 경산도 시골마을에도 례외가 아니였다.  경찰서에서 청년들을 강제 징병하려고 시골까지 쫓아 다니였다.  먹고 살기도 힘들던 그 시절 땅이 넓고 사람이 적은 만주가 살기 좋다는 말을 듣고 아버지는 18살되던 나이에 혼자서 두만강을 건너 만주로 왔다. 하지만 가진게 없는 사람에게서 만주 역시 똑같은 인간지옥이였다. 중국말 한마디도 모르는 경상도 청년은 만주허허발판에서 탄갱에서 벌목장에서 별의별 고역을 다 하다가 광복을 맞이 했다. 그뒤 지인의 소개로 엄마를 만나서 연길 근처 소영촌에서 새가정을 이루었다.       아버지는 3남1녀의  가장으로서  마른 일 궂은 일 가리지 않고  밭도 다루고 소방목도 하고 양봉도하면서 자식들을 키웠다. 한일 고생만하다가 락을 보지 못하고  1985년 파산균감염으로  64세를 일기로 세상을 하직하였다. 몇해만  더 살아 계시였으면 고국땅을 밟아 볼수 있었으련만  끝내 소원을 이루지 못하였다.      어릴때 우리집에는 친척이라고 해야 외삼촌 한집밖에 없었다. 내 또래 친구들은 쩍 하면 큰집에 간다거니 뭐니 했지만 우리에게는 큰집이 없었다. 어릴때 나는 그것이 이상하게 느껴지였다. 나이가 들면서 나는 아버지 고향이 남쪽이라는것 아버지는 홀몸으로 중국에 왔다는 것도 알게 되였다.      아버지는 늘 우리에게 고향 이야기를 들려 주었다. 고향은 조전리(枣田里)인데 대추가 많이 나고 맛이 좋다고 했다. 그리고 조선이 통일되면 우리를 데리고 고향을 간다는 말씀도 잊지 않았다. 하지만 아버지께서는 고국을 떠나 40여성상 되도록  한번도 고향땅을 밟아 보지 못하였다. 아버님께서 얼마나 고향을 가고 싶었고 부모형제들을 그리워했을가.      지난세기 70년대 말부터 중국과 한국사이에는 서신거래가 통하였다. 우리 마을에도 누구네 집에서는 한국의 친척편지를 받았다고 하였다. 당시 메아리방송에서는 정기적으로 리산가족찿기  방송을 하였다.  아버지는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늘 방송에 귀를 귀울리였다.      당시 둘째형님이 아버님의 분부대로 메아리 방송에 편지를 하게 되였다.   중국길림성 연길에 살고 있는 아무개가 고국에 살고 있는 부모님과 형제 여러분을 찿는다는 내용이였다.    그뒤로 아버지는 메아리방송에 대해 더욱 신경을 쓰게 되였다.  얼마후 한 마을에 사는 한 사람이 희소식을 전해왔다.  한국에 사는 큰아버지께서 우리가 보낸 소식을 전해들었다는 내용이 메아리방송에서 나왔다는것이다.      탈곡장에서 일하던중 아버님은 이 반가운 소식을 동네분들 한테서 전해 들었다.  그날 아버님은 그토록 기뻐 하였다.  만나는 사람마다 보고 남조선의 친인들을 찿았다고 그들이 살아 있다고 이야기 하였다.  아버지의 인생에서 이날 같이 즐거운 날이 더 없었을 것이다.      어찌 그렇지 않으랴! 혈열단신으로 만주땅에 들어와 산전수전 다겪고  연변땅에 자리 잡고 처자를 거느리던 아버님이 아니였는가.  친인이 살아 계신다는 소식에 아버지는  얼마나 즐거워 했는지 모른다.  저녁먹을 때에는 힌술도   몇잔 마시였다.  오매불망 애타게 기다리던 고향소식에 아버님은 어린애 마냥 즐거워 하였다.      얼마후 남조선의 큰아버지께서 혈육의 정을 담은 편지를 보내 왔다.  주소도 아버지가 기억한것과  거의 같았다.  다만 행정구역이 재획분으로 작은 변화가 있었을 뿐이였다.     "아우야.  죽은 줄로만 알았던 네가 살아 있다니 믿어지지 않는다.  그동안 만주땅에서  얼마나  고생 했느냐"    그날 아버지는 편지를 읽고 또 읽었다.  후일 내가 당년의 소중한 편지들을 따로 묶어 놓았다.  우리집의  력사기록물이였으니 말이다.   二、이민2세    중한수교가 이루어진 후로 한국방문길이 많이 열리였다. 어떤집들에서는 친척방문 요청으로 한국을 방문하기도 하였다. 허나 우리집의 사정은 좀 특별하였다. 글쎄 한국호적에 아버지가 언녕 돌아가신것으로 기재되여 있었다고 한다. 그러니 큰아버지도 우리를 요청할수도 없게 되였다.     이야기는 거슬러 만주국시절이 였다. 한번은 도문에서 막일을 하던 아버지가 의외로 고향친구를 만나게 되였다. 아버지는 너무도 반다워 무작정 친구를 식당으로 데리고 가서 술도 사주고 식사도 대접하였다. 고향의 부모님 안부도 묻고 자신의 근황도 소개하였다.  헤여질 때에는 권연도 한보루 사주면서 고향에 돌아가면 부모님께 자기의 소식을 전해줄것을 부탁했다. 헌데 무슨 원인이 였는지 그 친구가 고향에 가서 아버지가 사망했다고  한다. 하여 고향에서는 아버지가 사망한것으로 기록되여 있었다.      그때 아버지의 한국 호적이 제명되지 않았다면 후손들인 우리의 초기 한국방문이 가능했었다. 헌데 관공서에서는 사망으로 기록된  사람의 후손이라니  요청허락을 해주지 않았다. 문제를 해결하려면 법을 통하여 아버지가 중국에 살아 있었다는것을 증명해야 하는데 그것이 매우 힘들었다. 하여 남들보다 일찍이 혈육을 찿은 우리가 오히려 남들이 다 가는 한국을 가지 못하게 되였다.       2001년 큰형님은 한국기업의 요청으로 고국을 방문하였다. 그뒤 한국에서 일하고 생활하게 되였다. 그당시 형님은 우리집의 대표로 처음으로 아버지의 고향집을 찿았다. 그때 아버지의 형제분들은 이미 다 돌아가시고 산내면에는 사촌형님 부부만 살고 있었다. 형님은 고향에 찿아온 동생을 그토록 반겨 주었다. 그리고 하는 말이 집안 제사때면 아버지의 위패를 모시고 제를 지냈다고 했다. 진짜 가슴이 뭉클해지는 이야기였다. 한번 본적도 없는 삼촌의 제를 지내주다니 너무도 감동되는 일이였다.      당시 형님이 한국에 장기체류하려면 친척 요청이 있어야 했다. 사촌형님은 요청에 필요한 서류를 마련하려고 관공서에도 여러번 다녀 왔다. 머리칼을 잘라DNA검사를 마친 결과 혈육의 가능성이 99. 99% 로 나왔다. 그리하여 형님은 혈육감정에 통과되였고 또 한국영구체류권을 획득하게 되였다.       2019년설 우리집 세식구는 한국에서 설을 쇠게 되였다. 한국에 도착하자 형님이 이번 걸음에 고향방문을 다녀오자고 했다. 나는  아버지의 고향을 참배하는것이 응당한 일이라고 생각하였다. 초사흩날 형님 누나 나 조카까지 네명이 아버의 고향을 찾아 떠났다. 평택에서 떠난차는 경주방향을 바라보며 달리였다.  차창밖을 내다보니 온통 산이다.        차가 경주에 가까워질수록 공연히 심장이 두근 거리였다.  아버님의 동년의 발자취가 남아있을 그 땅을 밟게 된다는 격동 때문이다.  사전에 우리가 간다는 소식을 받은  형수님이  여러번 전화를 해왔다.  어떻게 오냐고 몇시에 도착하냐고 말이다.  그리고 포항에 사는 딸에게 전화를 하여 올라와 우리를 배동하도록 분부하였다.      차는 경주에 들어서기전에 오른쪽으로 돌려 산 내면 방향으로 달렸다.  나는 차창밖의 모든 것을 유심히 바라 보았다.  어떤곳일까 옛날에는 어떠했을가 지금은 어떨가.  나로 말하면 조상의 발자욱과 숨소리가 슴배여 있을 고향에 다가선다는 그 자체가 격동이였다.    "다왔어.  여기야"   차에서 내려보니 완전한 시골 풍경이다.  새로지은 아담한 집은 널판자로 울타리를 둘었고 뜰안에는 경인기한대와 네바퀴오토바이가 서있었다.  집뒤에는 참대나무가 빼곡히 자라있다.   출입문을 열고 들여다보는데 형수님이 나온다.   "아이고야.  너들이 왔꼬나"   "형수님 안녕하셨습니까?"    형님과 형수님이 정좌하시였다.  우리는 옛법대로 큰절을 올리였다.   "너들이 오니 참 반갑다.  오노라 욕보았다.  "   "많이 기다렸다.  고생했다.  "    처음으로 듣는 한씨집안의 이야기였다.      저녁때가 되니 밥상을 갖추어 올린다.  아마 큰집에서 맨날 제사상차리던 연고인지 형수님의 일솜씨가 재빠르다.  올해75세의 나이지만 목소리가 챙챙하고 기억력이 비상하다.        식사하는 내내 우리는 많은 것을 이야기 했다.  처음으로 중국에서 편지가 왔던이야기 그편지를 받고 그처럼 즐거워하던 큰아버지의 이야기 등이다.  전에 한국에 있는 할아버지와 삼촌들은 만주로간 우리 아버지가 돌아 간것으로 알고 있었다 한다.  하여 아버지의 제사까지 지내였던 것이다.       三,이민3세    큰형님의 아들은 2006 년에 아버지를 찿아 한국에 갔다. 우리 아버지가 당년에 살길을 찿아 만주에 왔는데 지금 조카애가 돈벌이를 떠난 아버지를 찿아 한국에 간것이다. 조카는 한국에가서 처음에 건설현장등에서 용역으로도 뛰였다. 지금은 꼬치집을 경영하였는데 장사가 잘 된다고 했다.     누님의 딸 그러니 나의 외조카도 한국서울에서 사업한다. 원래 공부를 잘하던 조카는 중국의 유명대학을 나와 일본에가서 석사연구생을 마치였다. 그뒤로 중앙텔레비전방송국 등 여러곳에 취업하다가 지금은 중국유명게임회사의 한국주재관리직을 맡아 보고있다. 한국은 게임산업이 엄청 발달하였다. 조카는 지금  중국과 한국 일본등 여러개 나라를 넘나들며 사업을 넓혀가고 있다.     다음 나의 아들의 이야기다. 아들은  2016년북경건축대학에 입학하였다.  아들의 대학교 전업교수님은 한국전균관대학의 박사졸업생이다. 아들이 대학1학년일때 교수님은 아이의 시야도 넓혀 주는겸 여름방학에 전균관대학에가서 견습할것을 건의하였다. 마침 본인도 가고 싶다고 하여 아들은 여름방학에 집적 서울에 갔다.      헌데 어릴때부터 한족유치원을 거쳐 줄곳 한족학교를 다닌 금진이는 그때만해도 한국말에 서툴었다. 공항에서 전철타고 학교가는데 의사소통이  안되여 많은 고생했다고 한다. 그뒤 아들은 어머니따라 한국글과 말공부를 시작하였다. 아들은  올해 대학 졸업이다.     맺는말    아버지는  전형적인 이민1세였다. 아버지는  홀몸으로 중국에 들어와 많은 고생하다가  어머니을 만나 결혼하고 우리3남1녀를 보았다. 우리가 살던 마을에는 갑산집이요 용포동집이요하는 고향마을 이름을 붙인 집들이 많았다.  그법대로라면 우리집은 조전리집이였을 것이다.      남도(南道) 생활의 특징는 우리집 여기저기에서 표현되였다. 과거에 동네에서고추장을 담그는 집은 우리집이 유일하였다. 아버지는 비빔밥도 좋아하고 냉국도 즐긴다. 학교에서 들놀이 갈때 내가 고추장에 묻혀 구운 더덜기반찬을 가져가니 모두 맛있다고 야단이였다.      세월은 흘러 아버지가 세상을 뜬지도35년이 된다. 중한수교이후 두 나라사이의 경제 문화교류가 활발하게 전개되고 있다. 조금만 더 오래 살아도 아버지는 고국으로 돌아 가려던 념원을 실현하였을 것이다. 지금 형님이 한국가서 일한지도 근 20년이 된다. 나도 한국에 여러번 다녀 왔다. 한강의 기적은 많은 사람들의 감탄을 자아내기에 충분하였다.      한 경산도 청년의 만주 이민사는 많고 많은 이민사중의 하나에 불과하지만 이별과 상봉 슬픔과 환락은 우리 가정의 진실한 력사였다. 그 후대로서 우리는 아버지가 못 이룬 념원을 하나하나 이루어 가고 있다. 이민1세에서 이민2세로 이민3세로 내려가면서 끊어지였던 가정 력사도 잇었고 또 고국땅에가서 젊음의 꿈도 이루고 있다.      피는 물보다 진하다. 우리는 혈육이 였기에 40여년의 이별속에서도 잊지 않고  끈끈한 정을 안고 살았으며 우리는 동포이기에 방문취업의 길이 열리여 시름 놓고 로동하고 돈을 벌수 있으며  우리 두 나라의 우호적 관계가 지속되기에  젊은 세대들간의 친선교류가 끊임 없이 이루어 지고 있다.     아버지세대의  만주 이민은 일본놈들의 핍박에 이루어진 우리 민족의 피눈물의 력사의 한부분이 였다. 우리 민족은 지나온 과거를 영원히 잊지 말고 분발노력하여 경제의 발전과 사회건설에 힘다해야 할것이다.   두나라가 사이 좋게 보내기를 기원한다.
127    밭갈이 가세 댓글:  조회:940  추천:0  2020-05-06
밭갈이 가세      손바닥만한 뙈기  땅이라도 밭갈이가 필요하다. 밭을 갈아 번져야 땅이 폭신폭신해지고 수분을 먹을수 있는데 그래야 종자 발아에 유리하다. 맨땅에다 종자를 넣어서는 농사가 잘되지 않는다. 곡식이건 채소건 밭고랑을 따라 북을 돋구어줘야  뿌리가 튼튼해지고 대가 건실하게 자라날수 있다.      전에는 밭갈이라고 하면 사람들은 당연히 소가 한다고 생각했다. 보통  대전밭은 소두마리로 밭갈이 해야  한다. 한마리로서는  그많은 밭을 감당해낼수 없기 때문이다. 소나 말을 역축(役兽)이라고 하는것은 일하는 짐승이라는 말이다. 그당시 소나말은 선진생산력이였다.  몇사람이 해야 할일을 소 한마리가 할 수 있으니 말이다.        밭갈이 하려면 농부의  팔기운이 세야 한다. 보습이 너무 땅에 박히면 소가 힘들고 너무 옅으면  땅을 번지지 못한다. 이런것을 모두 농부의  팔뚝으로 조절해야 한다.      재미있는것은 농사군과 소의 대화다.     "들어서 들어서"     "이랴 가자 가자"     "올라서 올라서"     소가 무슨 사람의 말을 알아듣겠냐만 농부는 자기로 말하고 자기로 웃고 성내며 진종일 소와 같이 일한다. 그러면서 고된 로동에서 해탈되려고 노력한다.  농사일은 어느 한가지가 고역이 아닌것이 없다 .      시대의 발전과 더부러 지금은 부역소가 가본상 소실되였다. 왜냐하면 생산효률이 낮고 또 소사양 할려면 힘들기  때문이다. 우리가 어릴때 신문방송에서는  네가지현대화를 건설한다고 선전하였다. 그중에 농업현대화가 있는데 현대농업은 또 원전화 수리화 기계화가 있었다. 기계농사를 보급하자던 념원이 지금 많이 현실화 되였다 .  농사 짓는 집이라면 기본으로 경인기 한대 정도는 갖춰져 있다.      왕년에는 밭을 부치는 친구가 밭갈이를 도맡아 해주었다. 때가 되면 친구가 녕파에서 생산한 네바퀴 뜨락또르를 몰고 와서 밭갈이를 했다. 그런데 올해 그친구가 출장중이다. 밭갈이도 철기가 있다. 요지음 해야하는 상황이다.   우리 동네에는 미국에가서 한 20년 일하다온 친구 형님이 있다. 형님으로 말할진대 위로는 나의 누님과 동창이고 아래로는 나와 형님동생은 친구사이다. 내가 형님을 찿아 이야기 했다. "형님. 사간나면 내 밭갈이 해주오" "응 . 그래마" 형님은 흔쾌히 받아 주었다.      15마력짜리 경인기에 보습을 메웠는데 힘이 좋았다. 한참 일하는 모습 보았는데 원통 밭고랑이 보이지 않는다. 이런걸 가르켜 밀잡이라고 한다.  그래서 물어 보니 밭을 더 부드럽게 하려고 먼저 밀잡이를 하고 나중에 다시 밭갈이 하겠다고 했다. 너무도 감사한 일이였다. 그저 대충해줘도 뭐라고 할 사람 없는데 형님의  진심에 감동되였다.      나는 경인기 뒤따라 다니며 돌맹이를 줏어 내였다. 그러면 동서내외간이 그 돌맹이들을 차에 실어서 밖에 내다 버린다. 우리 밭에는 원래 돌맹이가 없었는데 몇해전 수도공사를 하면서 돌맹이가 많이 나왔다. 보일때마다 주어 내니 땅이 부드럽다. 검고 부들부들한 땅 이런 땅을 가르켜 땅 힘이 세다고 한다. 무엇을 심어도 잘 된다. 거기에  또 몇해 전에 친구가 유기농 비료 몇차를 실어다 내였다. 비옥한 땅이다. 김소월의 시 한구절이 떠올랐다. 바라건대는 우리에게 우리의 보습 대일 땅이 있었더면! 이처럼 떠돌으랴, 아침에 저물손에 새라 새로운 탄식을 얻으면서.      일본놈의 통치하에 땅 잃고 힘들게 살아가는 농민들의 심정을 잘 보여주었다. 나는 보습대일 뙈기밭이라도 있으니 얼마나 행복한가.      일이 거의 끝날 무렴 동서가 목탄 불을 짓피였다. 형님이 수고 하셨는데 맥주에 양고기뀀을 대접할려고 말이다. 형님은 맥주도 얼마 마시지 않았다.      소뿔은 단김에 빼라고 오늘 손을 대였던 김에 옥수수 파종까지 마무리 할 참이다. 무슨 일이나 집적 해봐야 한다.  전에는 친구가 파종해주니 그저 그렇다고 생각했는데 그것이 아니였다. 형님의 옥수수파종가를 가져다 한참 봐도 종자를 넣는 곳과 비료를 넣는 곳을 찿지 못하겠다. 물어 보니 이 파종가는 종자만 넣게 된것이라고 한다. 아참 원래 이런판이였구나.        나는 차를 운전하여 소영촌에가서 파종과 시비를 동시에 할 수 있는 파종기를 가져 왔다 . 기계농사라 얼마 안되여 파종도 마무리 했다. 기계가 하니 말이지 호미로 자리를 찍고 씨앗을 넣고 밟고 하자면 원간히 품이 가는 일이 아니다.         요 며칠은 누구를 찿아 밭갈이 할가고 걱정도 했는데 오늘 형님덕에 밭갈이 끝냈으니  한 시름을 놓았다.    전통적인 우애는 이렇게 이어  온다. 부모들끼리 사이 좋으면 자식들 사이도 좋고 형님네끼리 사이 좋으면 동생들 사이도좋다.      뭐나 내가 잘나서 대접받는다고 생각 말고 모두 우리 부모 형님 누님들이 잘 해주었기에 내가 덕을 본다고 생각하자. 그러니 자식을 위해서라도 내가 허투로 남을 대하지 말아야 한다.
126    꽃피는 봄이오면 댓글:  조회:926  추천:0  2020-05-06
꽃피는 봄이오면      올해 많은 사람들이 5. 1절을 기다리는것 같았다. 코로나19의 영향으로 오래 동안 집에 있던 사람들는 오래만에 밖에나와 자연을 가까히 할수 있는 시간을 가지게 되였다. 일기예보에 의하면   5. 1절날 연길은 기온 높고 바람도 약하다고 하니 야외 활동하기는 딱 좋은 날이다. 동서간부부가 한국에서 연길에 온지도 4달이 되여 온다. 코로나의 영향으로 발이 묶겨 출국 못하고 있는 동서간네와 같이 오래만에  마반산에 가기로 하였다.      아침에 차를 운전하여  마반산으로 가는데 광흥양어장에는 차량과 사람들로 가득하였다. 보매 아침 일찍이 온것 같은데 사람들은 촘촘이 앉아 낙시대를 드리워 놓고 있었다. 양어장은 마치 무슨 축제행사라도 여는 분위기다.      오래만에 이런 정경을 보는 동서는 놀라워하는 기색이다. 우리 단위에도 낙시애호가들이있는데 올해 들어서 가온이 차고 바람이 세여 몇번 낙시질 해보지 못하였다고 한다. 아마 낙씨애호가들에게 오늘은 더 없이 좋은 날씨다.      마을에 들어서니 시공차량들로 가득하다. 시공대가 촌에 입주하여 골안에서 흘러내리는 물곬의 언제를 시공하는 판이였다.  이골에 평소에는 물이 얼마 안되지만 큰비가 내리는 날에는  물곬이 사람을  깜짝 놀아게 한다. 몇해전에  나도 그런  장면을 집적 목격하게 되였는데 꽝꽝하는 바위가 서로 부디치는 소리가 골안을 진동하고 흙탕물이 사품치며 일사천리로  흘러 내리였다. 이 곬물을 업수히 보았다가 사고를 낸 사람도 있었다.         차가 도착하여 동네를 둘러보니 봄 기색이 완연하다. 집집의 뜰에 심어 놓은 살구나무에는 새하얀 살구꽃이 다닥다닥 피여나 있고 산등성이에는 연분홍 진달래가 마치 타오르는 우등불인냥 한아름 한아름씩 피여나 있었다.  꽃피는 봄이 온것이다.      부지런한 실농군들은 벌써 뜰안의 밭을 갈아 놓았다. 보통 밭갈이는 밭의 지세에 따라 형태에 따라 방향을 설정하게 되여 있다. 일매진 터밭은 기계호리의 힘을 입어 반듯한 여러가지 기하도형을 이루었다.      일이 몸에 배인 동서는 터밭의 돌줏기에  처형은 나물 캐기에 나섰다. 해마다 터밭의 돌을 주어 냈지만 지난해 수도물공사로 밭을 파혀친 후로 또 많은 자갈돌들이 보인다.      오늘 행사에 쓸 양고기꼬치와 닭은 언녕 준비된 상태다. 동서는 가장 좋은 양고기를 사다가 직접 썰고 꿰였다.  안해는 로두구 시골토닭 두마리를 사다 손질해 놓았다. 뭐니뭐니해도 시골행사에는 고기구이와 토닭이 제격이다. 시원한 바람이 통하는 정자에 올라 앉아 시골맛이 다분한 동네를 바라보며 맛나는 고기에 캔맥주를 마시는 기분 생각만해도 즐겁다.        오늘이 명절이라 둘째형부부 누님부부도 놀려 내려 왔다. 모두들 5. 1절은 로동절이라며 꽉지며  삽을 찿아 내여 옥수수 뿌리치기에 나섰다. 과거 농사경험이 있는 누님과 매부는 걸싸게 일한다. 누님의 북경에서 온 외손자는 밭에서 달아 다니며 좋다고 야단이다. 올해 소학교에 들어가야 하는데 역시 코로나 때문에 연길에 와서 발이 묶긴것이다. 아들 금진이도 연장을 찿아 들고 일손을 도왔다.      삽시에 불어난 손님들 덕분에 우리집 울안은 너무너도 흥성흥성하다. 정심준비도 차실 없이 진행되였다. 밖의 부뚜막의 가마에서는 닭고기 삶는 구수한 냄새가  풍겨 나온다. 아궁이에서는 시뻘건 불길이 활활 타오른다. 촌에서 행사할때는 집안부엌보다 바깥 부뚜막이 제격이다.      옥수수 뿌리털기 일이 거의 끝날 즈음 우리는 식사하기로 하였다. 화로에서 뿌직뿌직하며 익어가는 양고기 냄새가 뜨락을 진동한다. 꼬치전문집과 야외꼬치구는  맛이 틀리는대 주요하게 두가지 원인이다. 첫째는 야외에서 꼬치를 구울 때에는 고기에 그을름 냄새가 배기는데 꼬치집에서는  그렇게 할수가 없다.  가게에서는 공기 오염문제때문에  연기를 화로 밑으로  뽑아내기 때문이다. 둘째로는   꼬치를  야외에서는 양념을 뿌려가며 굽는다. 다 익은 꼬치에 양념을 묻혀 먹는거과 꼬치에 양념을 뿌려가며 구워 먹는거은 본질상 맛이 구별이 난다.      가장 중요한것은 뭐니뭐니 해도  현장 분위기다. 시골은 공가가 시원하고  물맛이 좋다.   큰컵으로 맥주를 마셔도 취하지 않는다. 닭고기도 다 익었다. 닭고기를 손으로 쭉쭉 찟어 간양념에 찍어 먹으니 그맛이 별미다.  묵은 토닭이다 보니 삶는데도 시간이 걸렸지만 그맛이 일품이다.   고기닭하고는 완전히 다른 판이다. 동서의 말에 의하면 양계닭은 닭뼈가 불는색이 나는 반면 토닭은 뼈가 희다고 한다.      식사후에는 아들과 같이 드론 띄우기를 하였다. 하늘로 날아 오른 드론은  일상에서는  볼수 없는 높이와 각도로 우리에게 생신한 화면을 보내 주었다. 근 4달간 집에 갇혀 있던 아이는 드론 띄우기에 신났다. 금년에 대학교 졸업인데 코로나때문에 필업론문 집필도 집에서 하고 있다.      집으로 돌아 올때 보니 성자산에는  상춘객들이 가득하였다. 산에서 진달래 꽃구경하는 사람들 비탈에서 봄 나물캐는 사람들 강기슭에 돗자리 펴고 음식먹는 사람들 각자 자기의 방식으로 봄을 느끼고 있었다.    꽃피는 봄이 오면은 사람들 마음도 덩달아 즐겁다.
125    새봄이 온다 댓글:  조회:891  추천:0  2020-05-06
새봄이 온다       본격적으로 봄이 다가 오고 있음을 직감하고 있다. 한낮이 되면 기온이  상승하여 지붕위에 쌓였던 눈이 녹아 흘러 내린다. 금년에 들어서 연변에는 유달리 눈이 많이 내리였다. 내린다 하면 폭설이고 폭설이 왔다하면 길이 막혀버린다. 제설작업은 밤에 낮을 이어 간다. 방금 눈을 실어 내간지 얼마 안되였는데 또 큰 눈이 내린다. 3월에 들어서서도 폭설이 여러번 대지를 강타하였다.          저 멀리 보이는 룡정의 마안산은 흰눈에 덮히여 마치 고원지대의 산봉오리 같은데 윤곽이 더욱 선명하고 더욱 웅장하게 보인다.  사회과학원 력사연구소의 동창은 옛날 짜리로씨아군대가 저기를 지나 룡정에 진입했다고 나에게 알려 주었다.  계절은 계절인지라 적설은 오래가지 못하고 녹아버린다. 하지만 골목길이나 음달진곳의 눈은 인츰 녹지 않는다.        남방에서 사업하는 친구들은 위챗을 통하여 봄소식을 알리는 사진들을 많이 보여 준다. 얼마전 저멀리 광주에 꽃이 피였다더니 요지음은 가흥에 벗꽃이 만개하였다는 소식도 반갑게 전해 온다. 지리에 박식한 서기는 이제 얼마 안되면 벗꽃전선이 북상할거라며 우리에게 무한한 상상의 나래를 펼쳐주었다. 시시각각 봄 소식을 보내주는 친구들이 있음으로하여 마음속에는 언녕 새봄이 찿아 왔다. 나는 봄을 타는 스타일인가 보다. 북경에 사업하는 교수님은  목난꽃이 피였다며 이쁜 사진들을 올리고 산동 위해에서 사업하는 선배님은 살구꽃사진과 곁들어 봄소식을 전해 왔다.       내가  봄을 좋아하는것은 새생명의 시작을 알리는 계절이기 때문이다.  한겨울의 추위가 물러가고 얼었던 대지가 기지개를 켜고 씨앗들이 뿌리내리는 봄철은 사람들로하여금 희망과 기쁨을 안겨준다.      몇해전의  일이다. 남들은 바다 넘어 일본에 벗꽃구경을 간다고 야단 할때 우리부부는 청명휴가를 리용하여 호북성소재지 무한을 찿아 떠났다. 무한대학교정의 벗꽃은 아름답기로 소문난 곳이다. 무한대학에가서 벗꽃을 즐기고 오리라 .        무한도착 이튿날 아침 우리는 일찍이 기상하여 무한대학거리에 나섰다. 교정에는 아름드리 벗꽃나무가 숲을 이루고 있었다. 처음 보는 벗꽃이라 신기하기도 하였다. 화사한 벗꽃들이 가지에 가득 피여 있는데 좀체로 나무가지가 보이지 않는다. 나는 그때에야 연분홍색 벗꽃도 있다는것을 알았다. 시기로는 조금 늦게 왔다는 느낌도 들었지만 그것이 무슨 대수랴!       봄은 자연에만 있는것이 아니다. 사람들 마음속에도 봄이 간직되여 있다. 코로나19로 역경을 겪던 우리가 얼마나 봄이 오기를 고대했던가. 그봄이란 자연의 봄이라는 범주를 벗어나 새희망과 새생활을 동경하는 마음속의 봄이였다. 험난한 시간을 보내면서도 사람들은 시종 희망과 신심을 버리지 않았다. 집에 있는 기간 리용가능한 모든 도구를 리용하여 신체단련을 견지하였고 또 마음의 조절도 하였다.      이제 봄이 왔다. 코로나도 점점 물러가고 있다. 두팔을 벌려 새봄을 맞이하자.
124    독서인생 댓글:  조회:2533  추천:0  2020-04-29
독서인생    좋은 책을 읽는것은 사람에게 있어서 보약과도 같은 것이다. 왜냐하면 책속에 지혜가 있고 책속에 지식이 있고 책속에 꿈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책을 얼마나 읽었느냐고 하면 왕왕 시간이 없어 못 읽는다고 한다. 사실 지금 사람들은 시간에 쫓게 살고 있는것도 나름대로 사실이라 하겠다. 직장에서 맡은바 직책을 완수할라니 집에서 자식교육을 책임질라니 바삐 보내고 있는것  현실이다. 거기에다 취미생활이요 친구들 사이 술자리요 하노라면 당연히 시간이 부족할수 밖에 없다.       일본사람들의 생활절주는 우리 보다 많이 빠르다. 얼마전 친구가 일본류학시절의 이야기를 하는데  일본에서 불법체류를 대대적으로 단속하던 시기가 있었다고 한다.  경찰은 그 많은 행인중에서 중국인 불법체류자를 용케도 찿아 낸다고 했다. 일본사람들은 시간에 쫓기듯 종걸음이 거나 뛰여 다니는 반면 불법체류자들은 여유 있는 걸음을 걷는다고 했다. 일본사람들은 손에 메모지를 들고 하루의 스케줄을 점검하며 일하고 있었다.       하지만 일본사람들의 독서량은 우리 보다 엄청더 많다. 우리가 시간이 없어 책을 못읽는다고 할때 생활절주가 우리보다 빠른 일본사람들이 일년에 읽는 책권수가 우리 보다 10배이상 많다. 통계에 의하면 일본사람들은 년 평균8. 7권의 책을 읽는 반면 중국사람들은 년 평균 0. 7권의 책밖에 읽지 않는다고 한다. 책을 읽으려면 시간이 필요하다. 허지만 짬짬의 기간이라도 유용하게 리용하면 독서할 시간은 얼마든지 있다. 그러니 우리가 시간이 없어 책을 못 읽는다는것은  한낱 구실에 지나지 않는다.       언제부터인가 사람들은 편면적이고 불계통적인 소식 전파에 익숙해 지게 되였다. 하기에 소통과정에서 종종 누구에게서 들은바에 의하면 여느 온라인에서 본데 의하면 이라는 말을 곳잘한다. 온라인에 등재된 문장은 왕왕 편집자의 기호를 반영한 불확실한 경우가 많다. 하기에 온라인에 중독되면 결국 불확실하고 편면적인 소식 입수에 그치게 된다. 결국 독서를 통한 료해와 분석 사고를 통한 론단이 아니라  풍문에 얻어 듣은 말로써 자기의 관점을 대처하는 것이다. 혹여 자기의 관점을 감추기 위한 수법일지는 몰라도 결국에는 종합소질이 낮거나 주견이 없고 깊이가 옅은 사람으로 락점될수 있다. 우리가 많은 독서를 통하여야 시비가 바르고  품위가 높고   추구가 있는 사람으로 발전할수 있다.          요지음 나는 «어머니»라는 제목의 책을 읽게 되였다. 여느 호남성 상서(湘西)지방의 한 시골소년이 어엿한 대학생으로 중국작가협회 전직작가로 성장하는 과정에 어머니와 자기사이에 얽인 사랑과 분노 포용과 탈출 보수와 진보를  엮은 이야기 였다. 비록 자신은 문맹이여도 자식을 큰 재목으로 만들기 위하여 자기의 모든 것을 헌신하는 어머니의 희생정신에 나는 저도 몰래 많은 감동을 받았고 또한 자기의 지나온 길일 돌이켜 보게 되였다.       독서의 범위는 고정된 틀이 없다. 자기의 애호에 따라 사회의 조류에 따라 임의로 선택할수 있다. 나는 비교적 "잡식"형인데  닥치는 대로 책을 읽는다. 마음에 드는  소설이나 잡지 그림책이면 쟝르에 관계없이  구독한다. 지금와서 책을 읽는건 벼슬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다만 독서가 인생의 한부분으로 되였기 때문이다.
123    온라인 문학 댓글:  조회:2178  추천:0  2020-04-29
온라인 문학         나는 차를 운전한면서 방송을 듣는 습관이 있는데 특별이 시간을 할애하지 않고도 노래도 듣고 소식도 듣을수 있어 좋다. 특히 차에서 우리말 방송을 잘 듣는데 재미나는 프로도 듣고 또 조선족사회가 돌아가는 현황도 알수 있게 되여 실로 콩먹고 알먹기라 하겠다. 오늘 운전하고 시골로 가는데 우리말 방송에서 온라인 문학에 대하여 이야기하고 있었다.  글에 대하여 관심이 있는 지라 나는 자연히 방송에 귀가 솔깃해 지였다.       지금 우리말 문학은 지면문학과 온라인 문학으로 나뉘는데 상호작용하고 있다고 한다. 전통적인 지면문학은 여러 문학잡지사 신문사 등에서 다루고 있다.  창작된 작품들은 투고와 퇴고를 거듭하며 편집선생님들의 수정을 거쳐서 완성작으로  세상에 태여 나게 된다. 그러다 보니 작품의 질량이 상대적으로 높다. 온라인 문학작품은 자발적인 창작과 발표로 진행되고 있는데 여러가지 온라인 싸이트에 자기의 작품을 올리는 방식으로  발표된다. 아마추어들이 애용하는 교류방식이라 하겠다. 온라인 창작의 우점이라고 하면 시간과 지면의 제한없이 작가의 생각과 주장을 자유롭게 발표할수 있는 령활성이다. 지금 잡지사 신문사들에서도 문학싸이트를 운영하고 있지만 민간적인 작품교류에 비하면 그리 활발한 편이 아니다. 잡지사나 신문사에서도 온라인 문학교류와 작품에 관심을 보였으면 좋을것 같다.      지인들의 소개로 작년에 나는 여러개 문학췬에 가입하였다. 온라인에는 전문 시를 다루는 위챗동호회가 있는가 하면 시 소설 수필을 겸하여 다루는 위챗췬도 있었다. 대체적으로 보면 한500명이 되는 우리민족 문학애호가들이  여기저기 췬에 몸을 잠그고  문학담론도 하고 작품도 교류하는것 같다. 췬의 이름을  문학사라고 달지 않았지만 문학췬은 결국 문학애호가들의 활동장소요 출간지같은 것이였다. 지금은 시대 발전의 힘을 입어 문학애호가들 끼리도 쉽게 련락할수도 있고 또 자기들의 글에 대하여 자유롭게 담론할수 있게 되였다.  이런 외부적 조건이 문학발전에 큰 도움이 될수있다.       관방에서 꾸리는 잡지나 신문은 문턱이 좀 높은 편이다. 정규적인 출판물로서 작품의 정치적인 경향이나 필력에 대한  요구가 엄격하다. 이방면의 요구는 여느 매체들도 매 한가지다. 하기에 자발적으로 이루어진 매체들도 췬주를 포함한 운영진은 이러한 요구를 철저히 지켜 나가야 할것이다. 문학애호가들은 작품을 온라인에 발표하는데 끝히지 말고 잡지나 신문에 발표하기에 노력하면 좋을것이다.       우리말 문학의 발전이 겪고 있는 장애는 두가지로 볼수있다. 하나는 작가수가 적은 것이고 둘째로는 독자수가 적은것이다. 그러니 우리 문학이 활기를 띠려면 작가대오와 독자대오를 건설하는것이 급선무라 하겠다. 량변이 있어야 질변이 있다. 많은 좋은 작품으로 독자를 흡인하여야 함이 우선 해결해야할 과제라고 본다. 볼거리가 많아야 한다는 말이다. 좋은 작품은 독자들을의 마음을 흡인한다. 듣는말에 의하면 우리말 출판물에서« 노인세계»가 독자수가 제일 많다고 한다. 중장년층이 우리글로 된 문장을 많이 읽고 있다는 말이다. 가능하면 우리민족 기성작가분들이 자신들의 창작활동을 펼쳐나가는 동시에 후배들을 배양하는 각도에서 문학사이트에 특강같은 절목을 설치하였으면 하는 바람이다. 글쓰기 아마추어들도 배움의 장소가 있게 말이다.        자기들이 창작한 작품을 열독하는것을 통하여 독자들 사이는 더욱더 친근하여 지고 교류의 장은 더욱더 커질것이다. 그러니 당금은 질적으로 차이가 있더라도 대수가 아니라고 본다. 많이 사고하고 많이 쓰노라면 기필코 질적인 변화를 가져올것이다. 하루 강아지가 범을 무서워하지 않는다고 하지 않는가.      맨발을 한 사람은 신발을 신은 사람을 무서워하지 않는다. 누가 뭐라고 해도 상관할바가 아니다. 하고 싶어 하는 일인데 비평해도 좋고 비앙거려도 관계없다. 오직 목표를 향하여 부지런히 가노라면 그어느때인가 웃을 날이 올것이다.  
122    독서일 댓글:  조회:2137  추천:0  2020-04-29
독서일        오늘은 세계 독서일 이다. 독서는 행복하고  즐거운 일이다. 독서를 통하여 우리는 전문지식도 습득하고 또  사람이 살아가는 도리를 터득하고 새로운 관점 조류(潮流)를 접속하게되고 아름다운 새생활을 동경하게 된다. 하지만 요지음 우리 주위에는 책을 읽는 사람이 많지 않은게 현실이다. 책을 읽으라하면 그무슨 곤역을 격는것처럼 싫어하는 같다.      독서를 고무하려고 정부차원에서도 많은 노력을 기울인다. 신문이나 방송에서 독서에 관한 토론을 진행한다 던지 «독서가정»평의 활동을 조직하는 등 활발한 양상을 보이고 있다. 헌데 결과적으로 보면 효과가  리상적이지 못할때가 많다.  결국 정부나 관련부처에서는 열을 올리고 있는데 독서해야할 시민의 반응은 미지근 한 상황이다.  주요원인이 무엇일까?      첫째 원인은 가치관과 관계된다고 본다. 개혁개방이래 많은 사람들은 경제리익 추구를 가장큰 목표로 삼았다.  경제가 발전하여야 과거 하고 싶었지만 못하였던일을 할수있고 과거 해결하고 싶었지만 해결하지 못하였던 일들을 해결할수 있었다. 결과적으로 누가 돈을 더 많이 더 빨리 벌어들이는가가 성공인사의 기준이 되였다. 그러니 무릇 돈버는일에는 시간과 정력을 할애하지만 돈과 거리가 먼 독서에는 흥취가 없다.      두번째 원인은   품위가 낮은 것과 관계된다. 어떤 분들은 게임 드라마 유흥 등 분야에서는 활약적이지만 독서에는 냉담하다. 술이나 한잔 들어 갔다하면 고금중외 경제  외교 군사 등분야에 대하여 열띤 담론을 하기 좋아 하지만 대부분 얻어 듣은 진가를 가르기 힘든 풍문을 재탕하는데 끝힌다.  책을 보아도 고추장 맛보기식으로 몇줄 읽는데  불과하다. 이런식으로는 책속의 영양분을 흡수하지 못한다. 독서가 인생의 한부분으로 습관이 되여야만 자신을 부단히 제고할수 있고 시야를 넓힐수 있다.      독서는 습관이고 독서는 품격이고 독서는 인생이라 할수 있다. 독서라는것은 매개인의 개인행위 범주를 벗어난 민족과 나라에 장래와 관계되는 큰일이다. 독서하기 싫어하는 민족과 나라는 희망찬 내일이 없다.      우리는 독서를 통하여 살아가는데 필요한지식이나 상식을 터득하게 새로운  관점들을 수립하게 된다.  그런데 요지음 사람들은 더욱 쉽게 더욱 빠르게 더 많은 정보를 얻으려 한다. 그러니 어떤 사람들은  체계적이고 완정하게 서술된 서적을 멀리하고 文摘라던지 토막소식이라던지 八卦소식들에 열중하게 된다.        그리고 요지음 사람들은 텔레비드라마 오락프로 개임 핸드폰에 너무도 많은 시간을 할애하고 있다. 드라마는 아무리 많이 보아야 별로 도움이 없다. 다른데 열중하다 보면 책을 읽을 시간이 자연히 적어질수 밖에 없다. 나의 단임선생님의 명언을 빈다면 "사람에게 시간이 제한되여 있기에 놀음을 탐낸다면 공부할 시간이 없다"는 것이다.      지금 새집을 장식하면 다른건 다 갖추는데 책장이 없는 집이 많다. 그나마 애들이 어릴때는 집에 참고서적이라도 갖춰져 있었지만 대학을 보낸후로는 집에는 새로 구입한 책이 별반 없다. 그러고 서야 어찌 돌변하는 시대에 적응 할수 있겠는가.      이제부터라도 독서하는 습관을 양성하자. 좋은 책을 벗하고 살다보면 자기도 우수해질수 있다.
121    설맞이 댓글:  조회:2284  추천:0  2020-04-27
설 맞 이        설이 다가 오고 있다는 가장 집적적인 감수는 행사가 많아지고 있다는 것이다.  과실(科室) 처실(处室)의 총화모임 동사자들 사이 친구들 사이 동창들 사이 모임 그리고 객지에서 사업하던 친척 친우들의 고향방문 모임 등등 명색도 가지가지다.  그중에 어떤 모임은 사전에 참석할 준비가 되여 있었지만  또 어떤모 임은 미처 생각지도  못했던 것도 있다.  그러다 보니 세밑은  행사가 겹치고 스케줄이 비교적  빡빡한 상태다.       요지음은 미처 생각지도 못하였던 행사에 참석해달라는  요청도 여러번 받았다.  다른 사람들이 요청을 받는다는 것은 그만큼 내가 대방의 심중에 있다는것을 말한다. 그러니 웬간하면 참석하는것이 례의다. 행사장에 가면 다들  설맞이 모임이라고 운을 떼지만 솔찍히 말하면 설을 구실로 삼아 련계를 가지고 감정을 이어 가자는것이 목적이다.        지금 설맞이 분위기는  옛날에 비하면 차이가 많다. 물질생활이 결핍하던 그 시절에는 어른이나 아이들이나 설날이 오기를 손꼽아 기다리였다. 설이 되여야 새옷도 얻어 입고 고기도 베고 폭죽도 터칠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에 와서 설의 의미는 새로운 한해를 시작 한다는 외에는 별로 느껴지는 바가 없다. 하여 어떤 가정에서는 설이면 아예 려행을 떠나기도 한다. 설 련휴일기간 남성들은 술과 씨름하고 녀성들은 주방에서 료리를 만들다 보면 모두 피곤하기만 하다. 그리고 번거로운 손님접대와 가무는 가정불화를 불러오기도 한다. 하기에 명절끝에 이혼률이 상승한다고도 하지 않는가.        중국사람들은 설에 많은 의미를 부여하였다. 새해를 맞이하면서 건강과 행복을 념원하기도 하고 사업에서 성과를 올릴것을 바라기도 하고  부자되라고 축복하기도 한다. 한마디로 말하면 새로운 모습으로  새로운 시작을 할 것을 바라는 것이다. 이러한 념원과 축복은 모두 아름다운것이다. 사람들은 이렇게 한해 한해를 맞이하고 또 분발노력하며 새로운 삶을 영위해가고 있다.        " 지나온 나날을 돌아 보니 먼데 앞날을 내다보니 가깝구다. " 얼마전 소꿉친구들이 모인 행사에서 한 친구가 감탄하며 하던 이야기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상반전에는 성과를 비교하고 권력을 비교하였다면 하반전에는 건강을 비교하고 수명을 비교하여야 한다"고 했다. 친구들도 웬간이 나이가 드니 건강에 신경을 쓰는것이 확실하다.  실천이 증명하다 싶이 건강이 없는 삶이란 암울하기 그지없는 생명연장에 불과하다. 친구들 사이에는 말말간에도 간강이라는 단어가 툭툭 튀여 나온다. 20대 30대들 사이에서는 별로 쓰지 않던 단어다. 간강이 첫째라는 말이다.         새해에 대한 기대와 소원은 사람마다 다르다. 우리집으로 말하려면 아들애가 념원대로 학업을 잘 해나가고 안해가 건강하고 내가 하는 일이 순리로왔으면 하는 것이다. 그외 별로 바라는것이 없다. 과분한 욕망은 오히려 상반되는 결과를 가져올수도 있다.        저녁에 인평강뚝에서 천지다리쪽을 바라 보니 마치 시골에서 대도시를 바라보는 느낌이다. 시내쪽에는 여러가지 색갈의 장식네온등불이 도시를  아름답게 장식해 놓았다. 이제 설이되면 강뚝에서는 폭죽을 터치운다. 그소리가 어찌나 세고 밀집한지 마치 전쟁터를 방불케 한다. 대포소리같이 우둔한 소리를 내는 폭죽도 많으데  폭팔소리에 유리창이 다 울린다.        묵은 년을 보내고 새년을 맞이하는 이때 부모님의 은덕을 잊지 말아야하고 혈육의 정을 잇어나가야 한다. 또한 가정의 안녕을 지켜가야 하고 친구간의 정분을 더욱 보듬어 가야 할것이다.       나는 새해에  우리 모두에게 행운과 행복을 깃들기를  바란다.    친구들이여 보고 싶네.
120    고향 댓글:  조회:2248  추천:0  2020-04-27
고    향         설이 다가 옴에 따라 이국땅에서 타향에서 사업하고 출근하던 분들이 륙속 고향을 찿아 오고 있다. 오늘 손님 마중으로 공항에 나가 보니 고향을 찿아 오는 사람들로 무척 붐비였다. 인천-연길 항공편에는 귀국방문객으로 가득했다. 한사람이 귀국하는데 마중 나간 사람은 온가정인 같다. 상봉의 희열로 퐁퐁 뛰는 젊은 사람이 있냐하면 마중나온 아이를 안고 싱글벙글하는 아빠도 있다.         설이 되면 자식들은 사업이 아무리 바쁘더라도 길이 아무리 멀더라도  부모님이 계시는 고향에 찿아 온다. 이것은 력대로 이어온 관습이다.  잘 나가는 사람이나 못 나가는 사람이나 모두 고향의 부모님집으로 모인다. 부모님께 새해의 인사를 올리고 지난 한해의 평안을 보고 드린다. 그리고 가족이 모여서 맛있는 고향음식도 맛보며 오손도손  혈육의  정을 나눈다.  설음식을 장만하는데 종래로 돈을 아끼는 법이 없다. 동양사람들은 가족의 정을 중시한다.  그중에서도  중국사람들이  특별한데 설이면 가족의 상봉을 최우선으로 여긴다. 온집 식구가 상봉했다는 것은 모두가 안전하게 한해를 보냈다는 것을 설명한다. 자주 상봉해야 정이 오가고 정이 오가야 더 아낄것이 아닌가.           부모님이 계시기에 고향이 있고 고향이 있기에 아름다운 추억이 있다. 누구나 고향에 대하여 특별한 기억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우리의 동년시절에 고향이  유명해서도 아니고 고향이 부유해서도 아니다. 그것은 우리 부모님들이 신근하게 로동하고 생활하고 우리를 교양시켜준 곳이기 때문이다.         고향은 우리의 태줄을 묻은 곳이요 우리를 자리운 곳이고   짜개바지 친구들과 뛰 놀던 곳이요  철이들게 하였던  곳이고 잔뼈를 굳혀 주었던 곳이다.  더 나가서  우리의 뿌리가 내린 곳이다. 고향의 이야기 고향의 풍경 고향의 먹거리 이 모든것이  고향이라는 큰 가마속에 용해되여  끈끈한 정을 만들어 내였고 그것은 또 언제나 우리의 가슴을 따뜻하게 덥혀 준다. 그것은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더욱 짙은 향기를 만들어 내고 시간이 흐를수록 고향에 대한 사람들의 향수(乡愁)를 불러 이르킨다.           아무리 성공한 엘리트라도 매일과 같이 직장에서 바삐 돌아치는 평사원(社员)이 더라도 방송에서 혹은 신문에서 고향소식 한줄이라도 접할때면 저도 몰래 흥분하게 된다.  특히 고향을 떠나 이국땅이나 타향에서 생활하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고향은 한시도 잊지 못할 존재다. 현재 고향의 부모님들이 이미 하늘 나라에 가시였더라도 혹은  친척 친우들이 고향을 떠났더라도 머리속에 남아 있는 고향은 언제나 포근하고 정이 넘쳐나는 존재 그 자체다. 그것은 마치 아름드리 소나무의 가지리인냥 아무리 얼기설기 엇갈려 있어도 아무리 멀리 뻗쳐있어도 결국은  뿌리를 떠나지 못하는것과 흡사하다.         고향은 모든 사람에게 있어서 뿌리라고 할수 있다.  뿌리가 있기에 우리는 아무리큰 난관에 봉착해도 이겨나갈수 있고 위안을 받을수 있다. 그래서 오늘도 많은 사람들이 고향을 찿고 있는것이 아닐가.
119    리발 댓글:  조회:2204  추천:0  2020-04-27
 리 발          설날이 다가 오고 있다. 모두들 집무실에서  사무를 보고는 있지만 명절 기분에 일이 손에 닫지 않는 모양새다. 어떤 친구는 서성거리기도 하고 또 여느 친구는  주섬주섬 서류를 모아 놓기도 한다. 설이라고 해야 옛날같이 크게 기대되는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긴 휴가기일이라  많이 기다리게 되는 것이 사실이다.  슈퍼에 가면 사람들이 복새통을 이루고 거리에는 차량들이 분빈다. 특히 외지 번호판를 단 차량들이 눈에 많이 띄운다.         나는 설전에 가뜬히 리발하고 명절분위기를 잡으려고 리발관을 찿았다. 우리 동네는 번화가와 좀 떨어져 리발관도 많지 않다. 한집은 이미 문을 닫아버리였다. 일찍이 어디론가 떠난 같다.  다른 한 집을 찿아 갔더니 손님이 두명이 대기중이였다. 다른 곳을 갈려면 멀기도하여 기다리기로 하였다.          자리에 앉아  리발사를 바러보니 40세가 좀 넘을가하는 녀성분이였다. 그런데 웬지 리발수평이 그리 탐탁해 보이지 않았다. 리발이라는 것은 올리 깍는 것이 기본인데 이분은 자꾸 내리 추리기만 한다. 리발기에 익숙하지 않다는 표현이다.  손님은 고중생같이 보였는데 그저 담담한 표정이다. 언젠가  나도 저런 리발사한테 머리를 맡긴 적이 있었는데 좀처럼 시원치 않았다. 진종일 머리를 만지기만 하고 축도 내지 못한다. 이런 리발사들은 대부분 면도질도 서툴다.          나는 이집은 아니다 싶어  단연히 나왔다.  20여년째 머리를 깍는 단골집이 한집 있기는 하나 거리가 멀다.  90년대 말부터 그집에 다니기 시작했는데 리발사부부는 원래 복무공사 산하 국영리발관에 출근하다가 개체로 리발관을 꾸린분들 이다.  남자는 이전에 하남다리부근 리발소에 출근했는데  그때도 나는  그집 단골이였다. 후에 그들 부부가 개체리발관을 한다기에 줄곳 그 집만을 리용하게 되였다. 단골이기에 무슨 말을 하지 않아도 그들 부부가 척척  알아서 해주니 그뒤로 다른 집에 가본적이 별로 없다. 그 집에 가서 리발하면 우선 머리를 가뜬하게 깍아 주니 정신이 나서 좋고 면도까지 빡빡하게 밀어 주니 시원해서 좋다. 헌데 내가 집을 이사한후로는 거리가 멀고 주차하기도 힘들어 리발가는 차수가 적어 지였다.          이집 부부는 원래 하향지식청년으로 농촌재교육을 받은 분들로서 정책락실후 도시에 올아온 뒤로는 줄곳 리발업에 종사했다고 한다. 40여년을 리발하였으니 진짜 전문가수평이다. 키가 크고 여윈 남편은 매우 자상한분으로 한번 머리를 리발하는데 반시간정도 걸린다. 이리 다듬고 저리 다듬는데 여간만 소심하는 것이 아니다. 반대로 몸집이 큰 안해는 성격이 활달하고 목소리도 높고  시원시원한데 머리깍는 솜씨가 하도 잽싸서  리발을 하는데 20분도 채 안걸린다.          리발관에 들어서 보니 이미 손님 한분이 머리를 깍고 있었다. 주인은 나를 보고 반갑게 인사한다. 얼마나 많은 손님이 리용하였는지 리발의자의 가죽 겉면은 파손된 곳도 여러 곳이다. 고물과도 같은 존재로써 또한번 이집의 력사를 말해 주고 있다. 전문 리발집과 미장원의 구별은 리발용의자를 보면 알수있다. 이집은  남자리발 전문이다 보니 의자도 리발전용의자다.  미용원이란 간판을 단 집들은 의자부터 틀리는데 전통방식의 리발전용의자가 아니고 대체로 간이식 의자다. 그러니 누워서 면도를 받을수도 없다.         내 차려가 되여 의자에 앉으니 리발사가 말없이 익숙한 솜씨로 머리를 깍기 시작한다. 지금은 리발기도 충전식으로 가볍고도 잘 먹힌다. 원체 나는 두주일에 한번 정도 리발하기에 머리가  길지 않다. 리발사는   시원시원 올리 밀고 다음 순서로 가위로 찰칵찰칵 다듬기 시작한다. 가위솜씨가 어찌나 현란한지 마치 가위가 머리위에서 춤추는 같다. 어느 정도 잘 되였다 싶으면 면도칼로 머리 밑부분을 갖쭌하게 끊어 준다.  다음 목에 수건을 돌려주고 샴프를 바르고  두손으로 머리를 빡빡 감는데 그렇게 시원할수가 없다.         이집에서는 다른 리발관에는 없는 서비스도 제공하는데 두손을 합장하도 머리를 도닥여 준다. 토닥토닥 두드릴때면  자연적으로 머리가 까댁거리게 되는데  마리가 한결 시원하고 맑아지는 느낌이다. 마지막으로 량쪽 어깨를 두번씩 치고 등을 크게 한번 쳐주면 안마는 끝이다.  다음 눕혀 놓고 면도를 하는데 면도질 솜씨 또한 수준급이다.  매번 면도하기 전에는 습관적으로 면도칼을 가죽띠에 쓱쓱 문질어 준다. 면도는 이마부터 시작하여 볼과 턱까지 싹싹 밀어주는데 전기면도로는 전혀 느낄수 없는 빡빡하고 거뿐한 느낌이 든다. 머리를 다 씻은 뒤에는 건발기로 머리를 말리 우고 또 리발기와 가위로 요리조리 잘 다듬어 준다.  끝날무렵 리발사는 거울속의 나를 보며 어떠냐고 묻는다. 머리도 짧게 잘 깍았고 볼턱의 수염도 잘 밀어 낸지라 나는  기분 좋게" OK"이라고 했다.        거리를 나오니 사람들이 붐빈다. 찬 바람을 맞으니 머리는 한결  시원하고 날것 같은 기분이다. 이제야 내가 진짜 설을 맞이하는 기분이 들었다. 경자년 설을 맞이하며 머리깍은 기분 진짜 좋다.  
118    갈색추억 댓글:  조회:2272  추천:0  2020-04-27
갈색추억        어느날  책을 보는데 서글픈  노래 한수가  TV에서 흘러 나왔다. 고개를 돌려 화면을 보니 이목구비가 청수한  한 남성 가수가 얼굴에 수심이 가득한채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희미한 갈색등불 아래   싸늘이 식어가는 커피잔   사람들은 모두가 떠나고   나만 홀로 남은 찻집        나는 보던 책을 접고 TV에 집중하였다. 그 남자의 눈에는 애틋한 감정이 가득 담겨져  있었다.  가사 또한 쓸쓸한 사연을 호소하고 있었다. 검은색 외투에 흰 목수건을 두룬 그 남자의 마음속에는 분명 그 어떤 떨쳐버리지 못할 옛 련인에 대한 미련이 자리 잡고 있었다. 나는 저도 몰래  노래에 끌리여   갈색추억이 담긴 찻집을 그려 보게 되였다.        밖에는 추적추적 가을 비가 내린다. 손에 검은 우산을 든 청년남녀들은 비를 피하려고 빠른 걸음으로 찻집 창문 앞을 지나쳐 간다. 손님들이  다 빠져나간 찻집에서 어떤 남자만 홀로 남아 있다. 어지간히 취하여 있는 듯도 하다. 원래 그처럼 달콤하게 느껴지던 커피도 오늘은 웬지 쓰기 만 하고 넘기기 힘들다. 접시위에 댕그랗게 놓여진 커피잔은  오늘 따라 그 남자의 고독한 모습과도 흡싸하다.         아무런 약속도 없는데     그사람 올일도 없는데     나도 몰래 또다시 찿아온     지난날 추억속의 그 찻집         그렇다. 그들은 이미 헤여지었고 남남이 되였다. 현실은 현실이 아니더냐. 헌데 가끔 악착스레 밀려오는 옛추억으로 하여 남자는 가끔 고민에 모대긴다. 만나자고 약속한 일도 없다. 그리고 그녀가 올 일도 없다.  왜냐하면 그녀는 이 도시를 떠나 어디론가 가버린지도 오래 되였다. 남자는 오늘도 저도 몰래 또 다시 그 찻집 문고리를 잡는다.         TV에서는 수심이 어린 얼굴의 녀자가 나오며 노래한다. 어찌 보면 아직도 대학생티가 다분한 그녀도 가끔 추억속에 묻혀 사는가 보다.  옛사랑에 미련을 가지고 있은들 무슨 방법이 있겠는가.      우리는 나란히 커피를 마시며    뜨더운 가슴 나누었는데    음악에 취해서 사랑에 취해서    끝없이 행복했는데        노래의 곡조에 매료 되여 나는 또 다시 상상의 나래를 펼치였다.  열련에 빠진 모든 청년남녀들이 그러했듯이  그들은  대학가 근처  찻집의 단골이였다. 책을 보다 가도 노래를 듣다 가도 대방에 대한 그리움 때문에 뛰여 나와 상봉하던 곳이 바로 이 찻집이였다. 그들은 달콤한 커피를 마시며 바라 보는것 만으로도 행복했고 만족했다. 레코트 판에서 모기 소리처럼 앵앵거리며 흘러나오는 흘러간 옛노래마저 자기들을 축복하여 주는것 같다. 그때는 세상이 다 자기들의것만 같았다.       어느날 갑자기 그대는 떠나고     갈색등 불빛만 남아     외로운 찻잔에 싸늘한 찻잔에     희미한 갈색추억        그러던 어느날 그녀는 그남과 다투었다. 별일도 아닌것을 가지고 작으마한 모순으로 크게 화내였다. 그리고는 앵하니 돌아지였다. 전화소리가 끊지 않았지만  받지 않았다. 사람의 마음이란 이렇게 변할수도 있는가 보다.  매냥 찻집에서 만나던 그친구가 그처럼 좋았지만 자그마한 일 때문에 대방에게 화풀이를 한것이다. 그후 그녀의 마음의 평온도 찿았건만 끝내 량해를 구하지는 않았다.       하건만 남자는 매일같이 찻집을 찿는다. 갈색등불밑에 고독하게 앉아있는 남자는 꿈에라도 그녀가 나타나길 고대한다.       노래는 다시 울려 퍼진다.         오래동안 어떤 노래에 빠져본 적이 없었다. 오늘은 나름대로 TV노래를 감상하며  상상의 나래를 펼치였다. 노래속 사람들의 이야기에  감동받아 언감생심 자기의 감상을 피로하였음을 밝힌다. 살아가면서 몇번쯤은 노래에  빠져 드는 것도 마음이 따뜻해 지는 일이다.
117    탁구를 즐기는 사람들 댓글:  조회:3239  추천:1  2020-01-06
탁구를 즐기는 사람들         사람마다 애호가 다양하다. 운동에 대한 애호도 저마다 다르다. 우리 주변에는 탁구를 선호하는 사람들이 많다. 여느 한 친구는 전원주택에서  생활하는데 집에다 탁구판까지 가져다 놓았다.         연길체육장 2 층에는 정부에서 지원하는 면비 탁구회관이 있다. 개장한지 일년정도 되는데 손님들이 끊을 사이가 없다. 탁구판이 20여개나 되지만 늦게 간 사람은 자리가 없다. 하여 기다리다가 남들이 쉬거나 돌아간 다음 에야 칠수 있다. 탁구 칠러오는 사람들은 대체적으로 중로년분들이 대부분인데  솜씨를 보면 옛날에는 다 내노라하는 분들였음이 틀림없다. 퇴직후 취미로  새로 배우는 분들도 일부 있다.         탁구회관은 아침 7시면 개장하는데 일찍 오는 사람들이 많다. 짝을 묶어 오는 사람들도 있고 혼자 오는 사람도 있다. 오래 다닌 사람들 지간에는 호상 익숙한것 같다. 허나 일단 시합을 치르면  사정을 두는 법이 없는데 친구건 파트너건 상관 없다.  탁구경기를 관람하노라면 관중들도  덩달아 즐겁다. 공을 올려 뜨리고 잽싸게 깍으면서 시작하는 사람이 있나하면 또 공을 손에 꼭쥐고 있다가  깜쪽같이 시작하는 사람도 있다. 선수들은 저마다 비밀 무기들이 있다. 수준이 비슷한 선수들이  공격하는 장면은 참  멋지다. 몸까지 써가면서 공격해 대지만 상대도 전혀 두려움이 없이 맞공격 한다. 똑딱 똑딱 탁구공은 이쪽에서 저쪽으로 저쪽에서 이쪽으로 총알같이 날아 다닌다.          탁구운동은 반응이 빨라야 한다. 탁구공은 운동괴적이 짧고 변화무쌍하다. 진공측에서는 모든 기교와 수단을 다하여 공의 락하점을 때로는 오른쪽 모서리에 때로는 왼쪽 모서리에 견주어 방어측으로 하여금 곤난에 빠뜨리게 한다. 방어측에서는 대방으로부터 날아 오는 여러 류형의 공을 잽싸게  받아 내고 방어에서 공격으로 돌진 한다.  기회만 포착되면 사정없이 공격을 들이 대는데  절때 사정 두지 는 법이 없다. 짧게 낮게 빠르게 연속공격을 들이 댄다. 이렇게 공격에서 방어로 방어에서 공격으로 넘나들며 경기를 펼쳐 간다. 한번 두번 세번 여지없이 공격하는데 대방측의 위기반전 능력도 만만치 않다.  그러다가 아차 실수하면 1 점을 잃는것이다.  이때에야 득점수는 수건으로 이마의 땀을 닦아 내는데 얼굴에는 승자의 미소가 어려있다. 이멋에 탁구할려 온 사람들이 시간도 잊고 피로도 잊고 경기에 몰두하는것이 아닐까.         나의 로처장님은 어려서 부터  탁구선수 였다고 한다.  수준급인데 웬만한 경기에 나가면  우승하는건 보통이다. 지금은 정년퇴직을 하고 취미로 탁구회관에 나가 학생들을 배워 준다.  연변탁구계에서 로처장의 이름을 대면 모르는 사람이 별반 없다.         우리 친구가운데도 날쌘 선수가 있다. 그 친구는 매주 토요일이면 경기가 아니면 훈련에 나간다. 혹여 금요일 저녁에 친구들 행사가 있으면 청가를 맡기가 일쑤다. 연변일보에서도 몇번이나 그 친구가 우승했다는 보도를 본적이 있다.  우리 단위에서 한다는 탁구선수와 그 친구를 아는가고 물어 보니 자기보다는 한수 위라고 했다.         광주에도 탁구애호가 친구가 있다. 탁구를 배운지 시간은 길지 않지만 진보가 빠르다. 경상적으로 광주회계사협회 탁구 시합에 나간다고 한다. 명년에 친구들이 청도에서 행사를 가지는데 탁구시합종목을 넣어야 할지  고려중이다.         운동은 신체단련에만 좋은것이 아니라 기분전환에도 만점이다. 하루의 일과를 끝내고 땀을 뚝뚝 흘리며 운동하고 나면 온몸이 거쁜하고 정신이 맑아진다. 하루동안 사업일정으로 하여 쌓여던 피로와 스트레스가 확 날려 보내는 순간이다. 그래서 총명한 사람들은 운동을 끊지 않는다.         일전에 한 사무실에서 근무하는 친구가 요지음 부터 연길역전 탁구회관에 나가 탁구를 배운다고 했다.  좋은 선택이다. 이제 배워 언제 선수가 되랴만은 열심히 운동하면 신체건강에 도움이되고 재미도 되고 일거량득이 아닐수 없다. 
116    가장 아름다운 고속철도 댓글:  조회:2585  추천:0  2020-01-03
가장 아름다운 고속철도             연변은 아름다운 곳이다.  고속렬차를 타고 훈춘에 가면서 차창밖의 가을풍경을 바라 보노라면  경치가 마치 한폭한폭의 수채화같이 아름답다.  늦가을의 하늘은 공활하고 하얀 구름이 높이 떠 있는데 산비탈에는 소떼들이 무리지어 먹이를 찿고 있고 밭에는  옥수수를 거두어 들이는 농부들의 분망한 모습이 안겨 온다. 차창밖의 경치는 봄이면 꽃이 만발하고 여름이면 록음이 우거지고 가을이면 황금파도 설레이고 겨울이면 림해설원을 이룬다.  이 고속철로는 고객들로부터 가장 아름다운 고속철로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개혁개방의 봄바람을 타고 연변의 교통건설은 천지개벽의 변화를 가져 왔다.  고속공로가 통하고 고속철로가 뚤리는 대장거를 이루어 내였다. 2015년9월20일은 연변교통력사상 대서특서해야할 중요한 날이다. 이날 연변은 고속철로가 없던 력사에 종지부를 찍고  고속렬차가 개통하였다. 고속철로가 개통함으로 하여 연변은 명실공히 한시간 경제권을 이루었다. 지금 연길에서 고속렬차로 40분이면 훈춘 돈화에 도착할수 있다. 전에는 꿈에서도 생각못했던 일이다.         이제 가장 아릅다운 고속철도 연길-훈춘 구간을 달리며 자연경관을 구경하고 인문력사도 일아 보자.        연길-훈춘 고속철도의 가장큰 특점은 다리가 많고 텐널이 많은 것이다. 그만큼 철도가 강을 많이 건너고 산을  많이 통과한다는 말인데 텐널은  무려 20개나 된다. 지금은 진짜" 물을 만나면 다리를 놓고 산을 만나면 굴을 뚫는" 시대가 되였다. 고철은 비용이 많이드는 항목인데 1킬로메터당 투자가 1억원 이상이 수요된다.          고속철도의 개통과 더불어 연길서부는 비약적인 발전을 가져 오고 있다. 신축 고층 아빠트들이 즐비하게 들어서고 있는데 새로 분양하는 아빠트가격은 균가로 6000원이 넘는다. 지금 역전 맞은 편에 산산성(衫衫城)이라는 주택단지를 조성하고 있는데 연길에서 가장 큰 주택구역이라고 한다.         차가 연길역을 미끌어 나가자 브라하통하에 건설된 연천대교가 한눈에 안겨 온다. 미끈한 몸매를 자랑하는 연천다리는 금년 5월에 정식 개통되였는데 지금  고속철도역과 연길하남구역을 련결하는 교통중추역을 담당하고 있다. 그옆으로 보이는 하얀 건축군은 연길인민경기장 건축군이다. 자치주창립60주년 헌례건축군인데 그 모양새가 마치 별나라에서 날아온 비행접시같다.          고속렬차가 달리다가 잠간 다리를 지나게 된다.  마반산협곡을 지나가는 순간이다. 마반산은 연길주변에서 가장 높은 산이다. 해발이 592메터로서 해발이517메터인 모아산보다 높다. 마반산은 연변고대장성의 동북쪽끝이기도 하다.  지금도 마반산에 오르면 옛봉화터가 그대로 보인다. 브라하통하와 해란강은 성자산부근에서 합쳐서 동으로 흘러가는데 제법물살이 세다. 마반산역전 앞부근에서 부터 강폭이 좁아 지면서 강물은 높은 골짜기사이로 거품치며 흘러 간다. 마반산협곡을 통과하는것이다. 정부에서는 이곳에 마반산발전소를 세웠다.          마반산협곡을 통과한 고속렬차는 동으로 달린다. 렬차는 훤하다 어둡다를 반복하는데 텐널을 통과하는 것이다. 고철스피카에서는 도문북역에 도착한다고 안내방송 한다.          도문을 과거에는 회막동이라고 불렀다. 도문시는 조선남양과 마주하고 있다. 도문의 일광산은 근년에 아름답게 꾸며지고 있는데 조각공원도 조성되였고 화해(花海)도 만들어져 있다.  여름 한철이면 화해구경을 오는 류람객들의  차량들로 종종 도로가 막힌다. 일광산에 위치한 이름난 화엄사(华严寺)에는 많은 선남신녀들이 찿아 오고 있다.  일광산정에 올라 서면 두만강 건너 남양이 환히 보인다.  2002년도 나는 어린 아들을  업고 일광산정에 등산한적이 있다.         도문역을 지나 얼마 지나면 량수가 나타난다. 량수에는 그 유명한 단교(断桥)가 있다.  2차세계대전이 거의 끝날 무렴 쏘련홍군의 지면부대의 추격을 끊어버리기 위하여 일본군은 당시 소좌녀특무 三司를 파견하여 온성다리를 폭파하게 하였다. 1945년8월12日새벽 三司은 온성다리 제5번 기둥에 폭파약을 안장하고 다리를 폭파시키였다. 온성다리는 통차하여서 부터 폭파하기까지 8년시간 밖에 되지 않았다. 2006년 도문시인민정부에서는 이곳을 도문 애국주의 교육기지로 명명하였다.          근 40분을 달린 고속렬차는 종착역인 훈춘시구역에 들어 선다. 차창밖으로 3만개의 관중석을 가진  이쁜 조형의 훈춘인민경기장이 보인다.  훈춘시 절부에서는 시민들의 신체단련 요구를 만족시키기 위하여 경기장을 무료로 개방하였다. 개혁개방이래 훈춘의 도시건설은 비약적인 발전을 가져왔다.         훈춘시와 훈춘합작구를 이어주는 훈춘산림대교와 훈춘대교가 건설되여 도시 교통대동맥을 이루고 있다. 훈춘대교는 2017년10월9일에 정식 개통되였는데 교량길이가617메터이고 주탑의 높이는 85메터다. 매번 저녁이되면 네온등으로 장식된 훈춘대교가 사람들의 시선을 끈다. 홍기하 강반에는 고층아빠트들이 즐비하게 들어 섰고 거리에는 훈춘을 찿은 로씨야유람객과 국내손님들이 많다.        고속철로의 개통은 사람들의 생활과 생산에 매우 큰 변화를 가져 왔다. 지금은 아침에 장춘을 떠나 오전에 도착하여  훈춘구경하고 정심에 양고기뀀을 맛보고 오후에 집으로 돌아 갈수 있는 여건이 현실화 되였다. 또 그렇게 하는 친구들이 많다.         외지에서 온 손님들은 한번은 고속철도 량켠의 아름다운 풍경에 감탄하고 두번째는  연변특색의 미식에 또 한번 감탄한다.        가장 아름다운 고속철도의 이야기는  고속철도를 타고 인터넷을 타고 조국의 방방곡곡에 전파되고 있다.
115    황연농사 댓글:  조회:2461  추천:0  2020-01-02
황 연 농 사         담배는 독초와 황연으로 나누는데 독초는 해빛에 말이고 황연은 건조실에서 말리 운다. 과거에 독초는 일반적으로  매개 가정을 단위로 생산 하나 황연농사는 집단적으로 하는것이 관례였다. 아마 그세월에 생산자료가 주로 생산대에 귀속되였기 때문에 그런 현상이 보편화된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황연농사는 집단농사하던 그시절에  생산대로 말하면 부업에 맞먹는 것이였다. 우리 마을에는 기본상 논농사를 주로하였는데 밭에는 담배를 많이 심었다.   돈이 될만한 황연을 심는것이 수지가 맞는 일이였던것이다.          황연농사는 손이 많이 가는 일이였다.  이른 봄이 되면 우선 생산대에서는 유리온상 수선부터 하여야 한다. 온상이라 해야 일년에 한번 담배모를 심는데  끝히다 보니 방치 되여온 온상을 수라하는것도 큰 역사였다.  깨여진 유리도 바꾸어 넣어야하고  떨어져나간  벽은 다시 흙으로  발라주어야 한다. 열 손실을 막기 위하여 서는  여느 틈새나 모두 잘 막아 놓아야  하는데 이것이 가장 기본적인 보수 사항이다.         여러가지 보수가 끝나고 나면 온상에 부식토를 깔고 바닥을 수평 잡고 담배씨를 골고루 뿌리여 준다.  마감으로 위에 엷게 보드러운 흙으로 덮어 주고 물을 뿌린다. 한편으로 온상밖에 설치된 아궁이에다 불을 지펴 온상내부의 온도를 높혀 준다. 해볓의 열로만은 담배씨 발아에 필요한 에네지를 만족시키지 못하기 때문이다. 따뜻한 온상에서 담배는 싹이 트고 흙을 뚫고 잎사귀가 나온다.         당시 담배 온상은 생산대 마다 갖추어져 있었다. 황연농사는 기본상에 농촌부녀들이 몫이다. 밖에는 찬바람이 쌩쌩부는 초봄이지만 유리온상안의 온도는 30도를 밑돈다. 부녀들은 온상모판위에 널판자를 올려 놓고 그우에 쭈크리고 앉아서 참대 펜센트로 잡풀을 뽑아 낸다.          잎이 4잎정도 나오면 다시 영양단지에 옮기는데  담배묘는 모살이를 거치게 된다. 어느 정도 뿌리가 잡혔다 싶으면 담배묘는 유리 온상을 떠나  비닐 온상에 날라가야 한다.  그때는 봄이면 바람이 세게 불어치였다. 촌에서는 바람을 막으려고 수수대를 엮어 울타리를 세웠는데 우리들의 놀이터가 되였다. 해볓도 맞고 바람도 맞으면 묘는 건실하게 자란다.           5월말쯤이면 황연묘가 대전에 나간다. 7월 하순쯔음 부터는 담배잎을 수확한다. 담배밭에 가면 담배냄새가 코를 찌른다. 해볓이 쨍쨍 내리 비추는 한여름 담배잎 뜯기 로동은 그야말로 고역이다. 담재잎을 수레에 싣고 탈곡장마당에 운반해 오면 녀성들이 새끼끈으로 담배잎을 달대에  꼬아 맨다. 다음 건장한 남성들이 건조실에 들어가서 위로부터 아래로 내려오면서 담배 달대를 걸쳐 놓는다.         담배대를 다 갈쳐 놓으면 건조실에 석탄불을 지펴 온도를 올린다.  건조실 화부는 기술업종에 든다.  불이 너무세면 담배를 태울수 있고 너무약하면 말리기 힘들다. 이래 저래 책임이 크다. 허나 일이 고되거나 힘든 것은 아니다. 휴식할수 있는 여유시간도 많다. 어떤사람들은 휴식시간을 리용하여 돌절구도 만들었다.        어릴때 우리는 강냉이며 감다를 훔쳐다 건조실에 와서 곧잘 구워 먹었다. 건조실은 한동네의 활동실 같은 장소였다. 저녁이면 마을 어른들이 건조실 마당에 모여 쑥불을 지펴 놓고 모기를 쫓으며 한담도 하고 동네 정보도 교환하였다. 지금 생각해보면  텔례비조차 없던 그 세월에 무슨 문화생활이 있었냐 싶다.         황연이 다 마르면 이른 아침 사원들을 동원하여 담배 달대을 내리 운다. 바싹 마른 담배잎이 부서지는것을 방지하기 위하여 달대를 내리우는 일은 반드시 해 뜨기전에 완성한다. 다음 말린 황연은 반지하로된 창고에 움직이여 습기를 준다. 다음 녀성들이 모여 앉아서 황연을 곱게 편 다음 왼손으로 꼭지쪽을 꽉 쥐고 오른손으로 동여 준다. 여러개 꼭지를 모아서 황연덩어리를 만든다. 어느정도 산품이 모이면 촌에서는 황연을 연초공사에 가져다 팔게 된다.          황연농사는 대단히 고된 로동이다. 이른봄 씨앗을 뿌려서 부터 묘가 대전에 나가기 까지 얼마나 많은 부녀들의 손길이 가는지 헤아릴바 없다. 황연 잎을 뜯고 달대에 걸고 말리고 조례하는 어느 한가지도 쉬운 것이 없다. 허나 그시절 황연 농사는 돈이 되는 일이였다.         어린 나이의 우리에게는 온상이며 건조실이며 반지하 창고 모두가 더 없이 좋은 놀이터자 전쟁터였다. 지금도 여느 촌마을을 지나다가 건조실을 만나면 더없는 친철감을 느낀다. 
114    집법기록의(记录仪) 댓글:  조회:2402  추천:0  2020-01-02
집법기록의(记录仪)        요지음은 행정집법이 점점 규범화 되고 있다. 과거 향항 영화를 보면 경찰들이 집법기록의를 제복(制服)에 부착한 것을 볼수 있다. 법을 집행할때 경찰은 기록의를 피집행자한테 돌리고 무슨 연고에 의하여 어떤법을 집행하고 있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피집행인에게 당신의 권리와 의무는 무엇이라고 알려 준다. 영화에서나 볼법하던 이런 일을 지금은 우리 주변서도 자주 목격 할 수 있다.          몇해전 여름날 저녁 나는  차를 운전하여 고속도로를 빠져나오게 되였다. 차가 출구를 나오는데 경찰이 다가 오더니 집법기록의를 나한테 돌리고 거수경례를 붙이는 것이였다. 그리고는 가사증과 기동차증을 제시하라고 했다. 기동차를  훝어 보더니 하는 말이 나의 차량에 또 다른 기동차증이 있다고 한다.  그런 일이 없다고 나는 주장했다. 그러자 경찰이 어딘가 기동차증을 가지고 가는것이 였다.         이윽해서 돌아온 경찰이  나와 하는 말이 이것은 작페된 가사증이고 새것이 따로 있다고 한다. 그러면서 다음 부터는 새 기동차증을 소지하라고 주의를 주었다.        후에야 알게 되었는데 내가 소지했던 기동차증은 진짜로 작페된 것이 였다. 어느때인가 기동차 년검을 하게 되였는데 기동차증을 찿지 못하여 새것을 발급 받았던 것이다. 경찰이 나의 차를 세운 것은 내가 년검표식을 부착하지 않았기 때문이였다.        내가 이 사건을  말하는데는 원인이 있다. 법을 집행할때 집법자는 자기의 신분을 밝히여야 하고 현재 무슨 검사를 하고 있고 피집행자에게는 어떤 권리와 의무가 있다는것을 알려 주어야 한다.  될수록 표준화된 언어와 행동을 취하여 자기의 집법에 따른 책임을 최대한 감소하여야 한다. 집법기록의는 피집법자의 언행을 기록하지만 집법자의 언행도 고스란히 기록하니 말 그대로 쌍인검(双刃剑)인것이다.        요지음 고속렬차를 타면서 보니 렬차장들도 기록의를 부착하고 있었다. 허나 그들에게 있어서 기록의는 단순한 기록의에 불과할뿐 집법기록의가 아니다. 왜냐하면 렬차장은 공무원이 아니고 집법인원이 아니기 때문이다.        국무원의 요구에 근거하여 새해 각행정집법단위들에서 집법기록의를 사용하고 있다. 우리 세무계통에서도 새해부터는  규정된 몇가지 집법행위는 무조건 집법기록의를 사용하게 되여 있다. 이제 집법이 한층 더 규범화 될 것이다. 왜냐하면 과거의 일방적인 집법행위를  지금은 집법자와 피집법자의 모든 행위를 기록하고 있기때문이다. 법정에 나간다면 집법기록의가 기록한 내용이 그 어느쪽에 유리할지는 법관의 판단에 맡기여야 한다. 
113    춥다고 움츠러 들지 마라 댓글:  조회:2459  추천:0  2020-01-02
춥다고 움츠러 들지 마라        진정 동장군이 왕림하였다. 오늘 낮 기온이 영하12이고  4~5급 바람이 불어 쳤다. 올해치고 제일 추운 날씨였다. 조금만 밖에 있어도 손발이 시리다.  전형적인 겨울 날씨임이 틀림없다. 며칠전에 병원에 갔댔는데 주사실에는 기침소리로 콜록거리는 환자가 가득하다. 날씨의 급격한 변화에 감기환자들이 급증한것같다.         허나 추운 날씨가 매냥 나쁜것만은 아니다. 추울때는 추워야 한다. 난동이라고 겨울날씨가 따뜻하면 그에 따른 피해가 속출하게 된다. 북빙양의 얼음이 녹아 내려 바다수면이 상승하면서 일부륙지가 바다에 잠긴다고 한다. 일본에서 온 친구가 말하는데 과거에는 찌바지역에는 태풍피해가 적었지만 지금은 늘어 난다고 한다. 지구 온난화가 불러온 변화라고 한다.        연길은 분지에 자리 잡은 도시다.  도시외각에는 농촌마을이 산재되여 있고 또 촌주민들은  난방용으로 대부분 석탄을 때고 있다. 그러니 겨울이 되면 매캐란 석탄연기로 도시가 시달리고 있다. 바람이 불지 않는 날 아침 출근대에 모아산에서 연길시내를 바라 보면 도시는 자오록한 연기속에 잠겨 있다. 이런 화면을 바라 보노라면 마음이 서글프다. 연길은 바람이 불것을 요구한다. 찬 바람이 불어야 오염된 공기를 밀어 내고 사람들은 맑은 공기를 마실수 있고 도시가 활력으로 차넘칠수 있다.         동지날부터 시작하여 우리는 겨울내 가장춥다는 39도에 들어 서게 된다. 혹독한 추위가 시작됨을 알리는것이다. 어제 장춘에서 고철을 타고 연길로 오는데 길림역에서 오르는 손님들 날씨가 춥다며 손을 마주 비빈다. 듣는 말에 의하면 혹한속에서 나무도 얼어 터진다고 한다. 하지만 우리 주위에는 추운 겨울을 즐기는 사람들도 얼마든지 있다.         등산운동이 그 가운데 한가지라 하겠다. 등산대원들은 아무리 추운 날씨라고 하여도 결근하지 않는다. 마치 휜눈이 뒤덮힌 산마루에 무슨 금은 보화나 있는 것처럼 등산을 멈추지 않는다. 오히려 추운 날씨를 향수하는것이다. 산봉우리에 오르면 산정을 정복했다는 쾌감으로 피로가 가시여진다.           스키운동도 겨울을 즐기는 전향적인 방식이다. 나의 한친구는 길림 흑룡강등 지방의 스키장을 다 누비였다. 돈있는 사람들은 알프스산맥으로 스키 할려 다닌다고 한다. 진짜 멋쟁이들이다. 친구의 소개에 의하면 스키를 타고 산정에서 날아 내려 오는 그 속도감은 안 해본 사람은 영원히 느낄수 없다고 한다. 일망무제한 천연림 그가운데 넓게 틔인 스키코스는 마치 산정상에서 흰 명주천을 드라운것 같고 그위를 날아 내려오는 스키맨들은 마치 날아 내리는 제비 같다.         등산운동이나 스키운동은 산을 떠날수 없지만 빙상운동은 빙판만 있으면 얼마든지할수 있는 운동이다. 연길시에서는 근년에 브라하통하 빙판을  리용하여 빙상운동을 활발히 펼치고 있다. 아주 총명한 거사라고 본다. 이전에는 영빈교와 무지개다리사이의 빙판을 리용하여 빙상운동을 전개 하던 것이 일약 브라하통하 얼음강판을 리용하는 바람에 빙판의 면적이 대면적으로 증가되였다. 그만큼 코스도 길어 지였고 놀이터도 많이 늘어 났다.         요지음 정부부문에서는 빙설경제라는 단어를 자주 사용한다. 우리 나라에서 동기올림픽주최권을 획득함에 따라 북방지구에서 빙상운동도 활발하게 추진되고 있다. 북방사람들이 겨울철 돈을 팔아 남방에 유람간다면 남방가람들은 기꺼히 돈지갑을 열어 북방에 와서 눈구경 얼음구경 빙설운동을 한다. 누이 좋고 매부 좋은 격이다. 그러니 정부에서 돈이 되는 빙설경제에 대하여 중시하지 않을수 없다.         춥다고 음츠러 뜨리면 점점 더 춥다. 춥더라도 집에서 뛰쳐 나와야 한다. 지금 방한복들은 엷고 따뜻하여 움직이는데 아무 불편이 없다. 밖에 나와야 신선한 공기를 마실수 있고 밖에 나와야 자연과 가까히 할수 있고 밖에 나와야 활기가 넘친다. 
112    북해찰기 댓글:  조회:2786  추천:1  2019-12-31
북 해 찰 기         12월초 출장길에 나는 광서쫭족자치구 북해시에 다녀오는 기회를 가지게 되였다.  북해는 광서에서도 최남단에 자리 잡고 있다.  대륙땅끝이 뢰주반도인데  북해는 뢰주반도 왼쪽에 위치하고 있다.  많은 사람들은 북해라고 하면 자연히 다단계 판매를 떠올리게 된다.  그만큼 과거에 사람들의 머리속에 북해의 의미지가 밝지못했던것 같다.             북해는 광서자치구 14개 지구급도시중 한개 도시인데 인구는 200만명으로서 연변인구보다 좀 적은 편이고  면적은3337평방키로메터인데 연길과 도문시면적을 합한것과 비슷하다.  그러니 자연히 인구밀도가 연변에 비하여 높다.  관하에는 3개구 한개현이 있고  2018년 재정수입은225억원이라고라니 우리 연변의 4배가량된다.             북해는 1984년 국무원에서 발표한  14개개방도시 중의 하나다.  거리에 나가 보면 새아빠트들이 즐비하고 집을 파는 거간군들이 여기저기서 불쑥불쑥 튀여 나온다.  몇마디 물어 보았다 하면 사람을 잡고 놓지 않는다.  동북의 로인들의 선택가운데 첫번째로 꼽는 곳이 해남도라고 하면 버금으로 가는 곳이 북해다.  북해는 집값은 해남도애 비하여 싸나 기후와 자연경물은 해남과 비슷하다.  하여 북해에 와서 집을 사는 동북사람들이 많다고 한다.  추운 겨울 따뜻한 북해에 와서 보내는 것도 좋은 일이다.              북해에서 가장 큰 자랑거리가 바로 은탄(银滩)이다.   은탄의 가장 큰 특징이 바로 바다 모래가 은백색을 띠고 또 부드럽다는 것이다.    일찍 일어나는것이 습관된 나는  아침5시가 넘자 무작정 호텔을 나왔다.  북해는 아직도 컴컴한 밤이다.  일조가  우리 연변과 한시간 넘게 차이가 나는것 같다.  12월초 북해 낮 온도가 20도 좌우 밤 온도가 10좌우라고 하니 연변의 초여름 따스한 날씨를 련상시킨다.  나는 가로등 불빛을 따라 한시간 정도 보행운동을 하였다.  가로수로써  종려나무들을 많이 심은것 같았다.            아침 7시가되니 날이 희붐하게 밝아온다.  호텔부근으로 돌아 오는데 무슨 풍경구 같은 시공현장이 보였다.  관리하는 사람도 없길래 일단은 공사현장을 꿰뚫고 안으로 들어가 보았다.  그런데 불씨로 앞이 훤하게 트인다.  바다가로 나왔던것이다.  나는 잰걸음으로 나무숲을 지나 백사장에 들어섰다.           바다가는 너무도 황홀한 모습이였다.  아득히 뻗은 바다가에 은백색의 백사장이 펄쳐져 있었다.  멀리에는 철썩이는 바다가를 조용히 거니는 사람들의 모습이 보였다.  그리고 정박한 물고기잡이 어선들위의 빨간 등불도 보인다.  발밑에는 부드러운 촉감을 주는 흰색의 모래불이 끝없이 펼쳐져 있었다.  걸음을 멈추고 앉아서 한웅큼 잡아 보니 흰모래는 마치 곱게 가루낸 쌀가루같이 어여쁘다.  세상에 나는 흰 모래를 처음으로 접해 본다.             이윽고 동녘 바다가에서 해가 불끈 솟아오른다.  동쪽을 바라보니 하늘은 온통 붉은색이다.  하루의 시작을 알리는 일출은 너무도 황홀하였다.  돌아서서 서쪽을 바라보니 방금까지도 너울로 얼굴을 가린 신부같이 아리송하게 보이던 백사장이  언제 그랬냐 싶게 더욱 가깝게 더 환하게 안겨 온다.  해볓을 받은 은탄이 너무도 환상적이다.          은탄은 마치 처녀의 주릅잡힌 치마자락같이 부드럽고 눈부시다.  가히 범접못할 깨끗함과 아름다움을 겸비하였고 사람들로 하여금 무한한 추구와 련상에 사로잡히게 한다.  허나 정작 마주하면  너무도 부드럽고 너무도 대범하다.  천만년의 파도의 세례를 받은 은탄은 두팔을 벌려 세상 방방곡곡의 손님을 반긴다.  그이름도 만천하에 날리여 "천하제일탄"이란 미명을 가지고 있다.           북해의 또하나의 자랑거리는 금해만 홍수림(红树林)이라는 풍경구다.  총서기가 다녀간후로 홍수림을 찿는 유람객들이 더욱 많아지였다고 한다.  하루의 일과를 마친 어느날 늦은 오후나는 홍수림을 찿았다.  국가급산구(山口)홍수림생태자연보호구는1991년10월에 국무원으로부터 첫번째국가5대해양자연보호구가운데 하나로 평정 받았다고 한다.  홍수림풍경구는 은탄풍경구과 련결되여 있는데 시내와는 그리 멀리 떨어져 있지 않았다.          홍수림이라고 하면 사람들은 나무가 붉은가하고 생각할테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  잎도 푸르고 줄기도 푸르다.  홍수림은 열대 아열대해안조간대(潮间带)의 특유한 태생(胎生)목본식물군락으로서 "해상산림"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다.  밀물이 들어 오면 잠기고 썰물이 지면 모습을 나타내는데 해수를 정화하는 작용을 한다고 한다.           금해만 홍수림풍경구는 방파제를 따라 건설한 공로를 위주로하여 홍수림안쪽의 잔도를 따라 구경하는 시스템이였다.  잔도를 따라가며 뻘을 내려다보니 얼기설기뒤엉킨 나무들이 진흙속에 뿌리를 내리였다.  썰물이 진때라 바다물은 저 멀리로 빠져나가고 나무뿌리사이로 새끼게며 이름모를 해양동물들이 기여 다니는것을 볼수 있다.  혹간 내가 알아보는 조개 새끼낚지도 보인다.  이홍수림에만 해도 12종의 식물과 백여종의 조류 곤충 조개가 서식한다고 한다.  자연보호구를 설치하였기에 여러가지 식물과 해양동물들을 보호할수 있었다.           잔도를 따라 걸어가며 홍수림을 바라보노라니 저멀리 뻘에서 조개 줏는 어민녀인들 모습이 보인다.  그녀들은 모여서 작업하는데 참대로 결은 모자를 쓰고  꽃다지 천으로 지은 이쁜옷을 입고 있었다.  가까이에온 어민들을 살펴보니 모두 옆구리에 그물망태기를 차고 있었는데 수확한 어물들로 가득했다.  물어보니 작은 조개는 한근에 5원이고 큰것은 10원이라 한다.            한참 걸어가노라니 석양이 물든다.  서쪽하늘은 점점 붉게 물들고 진종일 대지를 밝혀주던 태양이 서서히 바다속으로 들어 간다.  그때  바다도 붉어지고 홍수림도 붉어진다.  하루의 일과가 끝날무렴 때아닌 회오라기 몇마리가 홍수림에서 날아 오른다.  바다와 홍수림과 일몰이 조화되여 아름다운 한폭의 풍경화를 연상시키였다.           북해는 아름다운곳이다.  은탄도 있고 홍수림도 있는 아름다운 유람도시다.  아직까지 어민들의 소박한 인품이 보이는 곳이기도 하지만 또한 도약을 꿈꾸는 도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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