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영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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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1    중경샤브샤브 댓글:  조회:2551  추천:0  2019-12-30
중경샤브샤브         오전에  시내에 나왔는데  돌아 갈때는 이미 정심때가 되였다. 나는 안해보고 정심이나 먹고 집에 가자고 제의하였다.  안해도 그러자고 하여 우리는 미식거리를 찿았다. 뭘 먹을가 하고 여기저기를 둘러보는데 중경샤브샤브 라는 간판이 눈에 띄였다. 오래 동안 매운음식을 안 먹었더니 매운맛이 당기는 같았다.        문을 밀고 들어가 보니  아주 정갈하게 꾸며진 식당이였다. 이른 정심인데도 벌써 사람들이 북쩍거리고 있었다. 우리는 창문옆 테불을 자리하고 앉았다. 주인이 나와서 뭘 드시겠는가고 묻는다. 이집은 여러가지 식자재를 그릇에 담아 손님이 자기로 가져다 먹게 된 시스템이였다.         국은 전자렌지로 끓이고  있었다. 우리는 원앙가마를 요구하고 매운것과 안 매운 두가지를 자유롭게 선택 할 수있게 하였다. 일단 양고기는 매운 국가마에  야채는 안 매운국가마에 넣었다. 이윽고 매운 붉은 가마가 먼저 끓었다. 그것은 국에 기름이 많기 때문이다. 긴 참대 젓가락으로 양고기를 집어 내여 후후 불어 가며 머리를 뒤로 젖히고 입에 넣었다.         와___아. 맵다. 그리고는  후_후 하며 들이 숨을 연거퍼 쉰다. 그것은  후죠(胡椒)의 매운맛 때문이다. 고추의 매운맛과 후죠의 얼얼한 맛이 번갈아 힘을 발산하는것 같았다. 입만 매운것이 아니라 온몸이 열기를 발산하는것 같았다. 너무 매워서 나는 차물을 마시였다. 하지만 또 붉은 탕에 젓가락이 간다. 이것이 바로 중경샤브샤브의 매력일것이다. 후_후하며 고기며 야채며 건두부며를 먹었다. 이마에서는 저도 몰래 땀이 줄줄 흘러 내린다.         사천료리의 특점이라면 마라(麻辣)를 손 꼽을수 있다. 중국서남지방에는 "무섭지 않은 것이 매운것이도다. 매운것이 무섭지않도다. 맵지 않을가 무섭도다. "(不怕啦,辣不怕,怕不辣)라는 말이 있다. 뜻인즉 사천 귀주 호남사람들이 매운것을 무서워하지 않고 즐겨 먹는다는 말이다. 듣는 말에 의하면 하룡원수님께서 "사천사람들이 무서워하지 않은 것이 매운것이고 귀주 사람들은 매운것을 무서워하지 않고 호남사람들은 맵지 않을가 무서워 한다"고 했다 한다. 우리 조선사람들도 매운것을 즐기지만 우리의 매운맛과 사천의 마라맛은 틀린다. 우리는 고추의 매운맛과 고소한 맛을 선호한다면 그네들은 매운맛과 얼얼한 후죠의 혼합된 맛을 즐긴다.         서남쪽사람들이 마라를 즐기는데는 원인이 있다고 한다. 서남쪽에는 비가 많이 오고 흐리는 날씨가 많다. 특히 겨울이 되면 온난 설비가 갖추어 지지 않은 그 동네의 날씨는 사람들로 하여금 더욱 냉기를 느끼게 한다. 습기와 냉기를 머금은 몸뚱아리는 어서 빨리 몸속의 습기와 랭기를 몰아 낼 것을  제의 한다. 그  해결 방법중에 가장 경제적이고 간단한 방법이 바로 마라음식을 섭취하는것이다.          전하는데 의하면 마라탕은 명말청초 중경시 가릉강반 조천문(朝天门)등 부두 품팔이군들의 음식이였다고 한다. 그때 들어간 주요 식자재들로는 소채갑 소피 동물의 내장이고 가마는 큰 소래로 대처하였다고 한다. 그러다가 19세기 20~30년대에 대거 류행하였고 30년대에는 고급식당에서도 중경샤브샤브를 경영하였다고 한다.          연길에서 중경샤브샤브가 소문낸것은 어제 오늘의 일이아니다. 사천샤브샤브의 독특한 매운맛과 중독성이 강한 향신료맛은 사람들로 하여금 저도 몰래 다시 발길을 돌리게 하는 마력이 있다. 연길식객들도 례외가 아니다. 중경샤브샤브가 연길에 들어 오자 대뜸 사람들의 환영을 받았다. 처음으로 연길에 들어 올 때가 아마 1994년 좌우라고 생각된다. 그때 중경샤브샤브집 위치가 중앙소학교  근처라고 생각된다. 친구의 추천으로 몇번 먹어 보았는데  얼마나 맛있는지 한주일에 한두번 다닐 정도였다. 당시 공부연(孔府宴)이라는 술이 흥행할때였는데 우리는 컵에 술을 반쯤 붓고 그위에 생계란을 까서 부어 넣었다. 그리고는" 동방에서 태양이 솟네"하며 한모금에 넘겨 버리였다. 그리고 그 얼벌한 양고기라던지 건두부를 건져 안주로 하였다. 그때는 아마 흰술이라야 말로 중경샤브샤브에 맞는다고 생각 했던 같았다. 아마 찰떡궁합쯔음으로 여기였다.          중경샤브샤브를 먹기 가장 적합한 시기는 바로 겨울철이다. 헌데 술소리가 나온김에 하는 이야기지만 겨울에는 특별히 술을 조심하여야 한다. 매운 중경샤브샤브에 소주를 겯들어 마시노라면 웬만해서는 그 자리에서는 취하지 않는다. 마치 술량이 늘어난 같은 느낌이 든다. 허나 막상 술상이 끝나고 밖에 나와 찬 바람을 맞으면 당금 취 할 때가 있다. 나도 그런 경험을 몇번 해본 적이 있다. 그러니 요지음 같이 추운 날씨에는 소주도 적당히 마시고 일찍 귀가하는것도 상책이다.          오래전에  한번은 서울에 가서 며칠 있게 되였다. 이런 저런 음식도 먹어 보았지만 별로 거뿐한 느낌이 없었다. 말말중에 나는 친구보고 "여기 마라탕집이 없냐"고 물었다. 헌데 대답은 너무도 충격적이 였다. 있을 뿐만 아니라 주인장은 진짜 사천에서 온 사람이라고 했다. 하여 우리는 이국땅 대림동에서 중국 사천마라탕을 맛보게 되였다. 이국에서 맛보는 마라탕은 맛이 일품이 였다. 얼마전에 듣을 려니 지금 한국에서 마라탕이 인기가 있다고 한다. 전철부근의 마라탕 집들은 대박이 난다고 한다.      음식이란 이런것인가 보다. 맛있는 음식은 지방과 관계없이 국경과 관계없이 사람들이 즐겨 먹고 또 전파시키는가 보다.  
110    눈보라치는 아침 댓글:  조회:2414  추천:0  2019-11-18
눈보라치는 아침        며칠전부터 일기예보에는 눈이 온다고 하였다. 온다 온다하더니 지난밤 큰 눈이 내리였다. 이른 아침 일어나 큰길을 내려다 보니  눈이 내려  거리는 더없이 환하게 보인다. 가로등 불빛이 차겁게 거리를 비춘다. 이른 때라 차량도 적다. 저 멀리 고속철역이 평소보다 더 가깝게 보인다. 대지는 어디라 할것없이 일매지게 힌눈으로  덮히였다.  주민구역내 작은 광장을 내려다 보니 은은한 불빛을 뿜는 상점집 등불과 밤새 내린 눈과 조화되여 마치 무대의 한 배경같이 보인다.         우리 동네는 강가에 있다 보니 바람 또한 세차다.  집안은 따뜻하건만 기승치는 바람소리 그리고 눈보라를 보노라면 완연한 겨울이 왔음을 알려주고 있다. 이제 아침 출근이 문제다. 이처럼 눈이 많이 내린 날에는 교통사고가 빈번하다. 초보들이 운전하고 나왔다가 손해보는 경우도 허다하다. 밖에서 눈치는 삽이 바닥을 긁는 소리가 띄염띄염 들려오기도 한다. 나도 일찍나가 동네 눈치기 로동에 참가하여야 겠다.               눈을 치려고  밖에 나와 보니 지난밤에 내린 큰 눈으로 대지는 온통 백설세계로 변하였다. 마치 하느님이 요술을 피워 하루밤사이에 대지를 동화세계로 이끌어 간듯 하다. 산도 들도 도시도 농촌도 모두 올해 첫눈의 세레를 받았다.  주민구역내 운동기구에도 한뼘 정도의 눈이 덮히여 있었다. 모든것이 눈속에 파뭇혀 있었다.  자가용차들이 늦은 속도로 꿈지럭 거린다.         동네 경비원과 청결원 몇명이 부지런히 눈을 치고 있었다. 첫눈은 마치 햇솜마냥 부드럽고 깨끗했다. 차가 지나지 않은곳의 눈은 치기도 쉽다. 허나 차가 지난면서 굳어진 눈치기는 힘들다. 비록 물업비용을 내고 있지만 시간날때 내려 와서 눈을 치우는것도 의미 있는 일이라고 본다. 부지런히 일하다 보니 머리에서는 땀이 돋는다.       이런날에는 걸어서 출근하는것도 좋다. 공기는 엄청 차거우나고 깨끗해서 좋다. 가로수에 내린 눈은  너무 무거워 당금 나무가지가를 끊어버릴듯 하다. 거리에는 평소보다 보행으로 출근하는 사람들이 많다. 안전에도 도움 되고 또한 첫눈을 만끽한다는 점에서 일거 량득이 아닐수 없다.       올해는 눈이 늦게내린 셈이다. 11월 중순인데 첫눈이 내렸으니 이만하면 밭농군들에게도 채밭주인들에게도 충분한 시간적 여유를 준 셈이다. 농군들에게 있어서 절기는 철저히 지키야야라는 불문률이다. 씨앗을 넣을 때 넣어야 하고 거두어 드릴때 거두어야 한다. 몇년전에 폭설이 내린적이 있었는데 그때까지 촌에서는 옥수수를 거두어 들이지 못한 상황이였었다. 정부에서는 기관공무원들을 동원하여 농민들을 도와 폭설의 피해를 줄일것을 동원하였다. 사람들은 눈이 무릎을 넘는  밭에 들어가 옥수수를 뜯어 내였다. 절기를 맞추어 거두어 들이였더면 훨씬 쉽게 할수 있는 일이였다.        이제 한달 남짓하면 올해도 막간다. 올해 제반 사업들은 어떻게 하였는지 총화해야 할 때도 되였다. 완수한 사업들은 총화를 잘  하여야하고 못 완수한 사업들은 하나하나 렬거하여 시간배치를 잘해야 한다. 아직은 시간이 있다. 그렇다고 미루기를 한다 던가 대충대충 얼렁뚱땅해서는 안된다.       년말이되면 각 부서마다 일손이 바빠진다. 그렇지만 행사는 행사대로 이루어져야 할것이다. 우리화고 365반급에서는 년말이면 송구영신 모임을 가진다. 단임선생님을 모시고 지나온 한해를 총화하고 다가 오는 한해를 기획한다. 동창들은 그날을 기약한다.       눈보라치는 아침 이제야 겨울이 온것 같다. 겨울은 겨울같은 날씨가 있어야 사람들건강에도 좋고 자연에도 좋다. 
109    총각김치 댓글:  조회:2462  추천:1  2019-11-06
  총각김치            총각이란 결혼을 하지 않은 젊은 남자를 말한다.  언제부터인가 우리 연변에 총각이란 이름을 붙인 김치가 나왔다. 국어사전을 찿아 보니 굵기가 손가락만 한 또는 그보다 조금 큰 어린 무를 무청째로 여러 가지 양념을 하여 버무려 담근 김치를 총각김치라 한다.        배추김치는 처녀김치 무우김치는 총각김치라고 했다. 김치의 생김생김을 두고 하는 말하는것  같다.  총각(總角)이란과거 결혼을 하지 않은 젊은 남자를 가르키였다.  총각은 머리를 묶고 상투를 쓰지 않았다고 한다.  총각김치는 흰무의 무청을 따지 않고 무우와 같이 절구는데 밥상에 올릴때 무청을 돌돌 말아서 접시에 담는다. 그러니  머리를 묶은 총각처럼 생기였다고 얻은 이름이 아닐까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배추김치는 왜서 처녀김치라 할가?그 건 암만 생각해도 알바 없다.       가을 총각무는 9월초순에 심어도 먹을수 있다.  일반적으로   50일좌우면 수확할수 있다.   금년에는 오이와 도마도 넝쿨을 걷우어 내고 그 자리에 총각무를 심었다. 물도 주고 비료도 주었더니 총각무농사가  잘되였다.  야들야들한 파란 잎사귀 그밑에 숨어 있는 백옥같이 희고 고운 총각무 보기만 해도 자기농사에 대해 만점을 주지 않을수 없다. 웃음주머니가 흔들거리였다. 나도 이만하면 로농수준이다.     우리는 우선 무를 뽑아 지하수에 씻었다. 시들고 마른 잎은 뜯어 버리고 몸통이에 묻은 흙은 솔로 닦아 버리였다. 그뒤 여러면 휭구고 나니 총각무우가 한결 희고 푸르러 보인다. 한3분의 1가량밭의 무를 뽑았는데도 두식구가 먹기에는 충분한 량이였다. 나머지는 형님네 몫이다. 소금물을 비닐통에 부어 넣고 또 총각무우를 가득 채워넣었다. 이로써 초절이가 끝난 셈이다.       우리집에서는  매번 먹을 때마다 조금씩 꺼내여 양념장에 버무려 먹는다. 지뻘건 고추양념을 바른 총각김치는 쨍하기도 하고 사각사각하기도 하고 얼벌하기도 하여 밥 도둑이나 다름 없다. 자꾸 젓가락이 가게 된다. 총각김치는 외모상에서 무와 무청이 붙어 있는 상태라 보기도 좋고 먹기도 좋다. 한꺼번에 무맛과 무청맛을 다 볼수 있는 김치다. 몸뚱이는 희고 머리발은 푸르다. 좀큰 무우는 반이나 네등분으로 쪼개여 담구면 먹기가 쉽다. 하지만 그것도 양념을 버무릴때 하는 일이지 너무일찍 무우에 칼을 대면 무맛이 변하게 된다.     한국 총각김치 양념에는 여러가지 재료가 많이 들어 간다. 우리도 그것을 많이 배워 오고 있다. 고추가루 생강 소금은 물론이고 무슨 멸치젓 찹쌀풀 물엿 매실 쪽파등도 들어 간다고  한다. 그러니 맛이있을수 밖에 없다.             지금은 무가 철모르기나 다름없다. 봄부터 가을 까지 내내 싱싱하고 질 좋은 무를 수확할수 있다. 그러니 총각김치도 사철 먹을수 있는 김치로 되였다. 로인님들 말에 따르면 날씨가 따스한 경상북도에서는 김치움이라는것이 없었다고 한다. 그늘진쪽에 땅을 한삽정도로 파고 김치독을 앉히면 끝이라 한다. 땅의 기운을 받으니 자연히 시원할것이요 날이 따스하니 발효가 잘 된다고 봐야 할것이다. 어떤집에서는 서까래나 옥수수대로 움막 같은 것을 설치하고 그아래에 김치독을 앉히기도 한다고 했다.    총각김치는 배추김치와 달리 많이 하지 않는다. 배추김치는 복아 먹어도 되고 국을 해도 되고 밴새속을 해도 되지만 총각김치는 시굴면 맛이 간다. 하기에 총각김치는 적게 담구어 제때제때에 먹는 것이 좋다. 
108    배추김치 댓글:  조회:2381  추천:0  2019-11-05
      배추김치         촌에서는 이맘 때면 배추김치를 담구 었다. 너무 일찍이 담구면 쉽게 시굴어 질수 있고 너무 늦어 지면 가을 한철 먹거리가 적어 진다. 매개 가정마다 김치를 담구는 시간은 좀씩 다르지만 대체적으로 촌에서 탈곡철이라고 보면 된다.       지금은 따로 배추김치 탈곡철이 없다. 왜냐하면 수확기로 가을과 탈곡을 같이 하기 때문이다. 과거에는 인력으로 가을하고 묶고 하지고 운반하고 동네에서 탈곡마당을 공구고 탈곡하던것을 지금은 수확기가 한번에 끝내여 버린다.     그러니 탈곡철이란 말도 없어 질수 밖에 없다. 눈이 내리지 않고 큰 바람이 불어 치지 않는다면 수확이 조금 늦어도 별로다. 기계로 가을하면 바로 벼긁을 별수가 없기 때문에 벼집단을 얻을 수도 없다.      배추김치를 담구는 절차는 대체적으로 세개단계를 거쳐야 한다.      첫번째로 질 좋은 배추를 마련하여 해볓에 쪼여 시들게 한다. 그래야 배추가 상하지 않는다. 전에는 조선족마을에서 채소농사 하는 사람들이 적었다. 마을에서 심기도 하였으나 포전관리가 따라가지 못하는 등 페단으로 질좋은 배추를 얻기 힘 들었다. 한족채대에서 심은 통배추는 포기를 쪼개면 노란 속잎이 나오는데 사각사각 하고 맛이 달았다.   배추농사에서 관건은 시비와 물주기 작업이다. 제때에 물을 주지 않으면 배추 잎이 질기고 속이 탄탄하게 앉지 못한다. 식구가 많은 집에서는 보통 1000근 정도의 배추를 마련하게 되는데 겨울철 채소가 부족하던 그 세월에 배추김치는 주요 채소 래원이였다.     낮에는 배추를 해빛에 쪼여 어느 정도 수분을 빼여 버린다.  저녁이 되면 배추뿌리은 밖으로 잎은 안으로하고 둥그렇게 쌓아 올린다. 마지막으로 헌 이불 같은것으로 위를 덮어 주어야 하는데 주요하게 얼굼을 방지하기 위하여 서였다. 이런 작업을 열흘정도 거친다. 한해 겨울 먹을 김치를 할 배추이기 때문에 모든 사항을 허투로 대할수 없다.         두번째 순서로는 초절이다. 지난해에 사용했던 김치독들을 김치움에서  꺼내여 잘 씼는다. 김치란것은 발효음식이기 때문에 김치독을 잘 씼지 않으면 독에 붙어 있던 효소균이 번식되여 새김치에 곰탈이 나게 할수 있다.  맑은 물로 여러번 깨끗하게 휭구어야 한다.  마감으로 벼짚에 불을 붙여 독안에 여러번 돌려 준다. 불로 균을 잡는 절차인데 우리 선조들의 지혜를 보여 주는 대목이기도 하다. 그리고 소금물을 독에 붓고 배추를 한포기 한포기씩 곱게 독에 넣는다.  꽁꽁다져 넣은후 돌로 위를 눌러준다.  이때 배추는 반드시 소금물에 잠기여 있어야 한다. 왜냐하면 배추가 공기와 접촉하면 변하기 때문이다.       마감으로 덮개를  잘 덮어 주고 돌로 눌러 준다. 그것은 주요하게 바람에 덮개가 날려 다거나 짐승들이 법근하여 덮개를 번져 놓은 것을 방지하기 위하여서다.           때를 맞추어 농촌에서는 김치양념만들기 위한 작업에 들어 간다. 고추가루 마늘 생강은 필수다. 집체농사를 하던 시절에는 촌에 회의가 많았다. 낮에는 밭에 나가 일하고 저녁이면 모여서 회의를 하는데 대체적으로 상급회의정신 전달이거나 계급투쟁에 관한 학습과 토론이다.       이때면 녀성들은 마늘을 소버치에 답고 회의에 참가하기 일쑤다. 남성들은 웃방 쪽에 모여 앉고 녀성들은 정주칸 가마목쪽을 차지하게 된다. 대장는 회의를 소집하는데 집중하고 남자들은 초담배를 피우는데 집안에 연기가 자옥하다. 녀성들은 소버치에 담아온 마늘을 까기에 여념없다. 지금 시장에서 파는 마늘은 쪽이 크고 까기도 쉽지만 전에는 토종마늘이라 쪽이 작고 껍질이 엷어 까기가 힘들다. 총명한 사람들은 마늘을 부수고 물을 뿜어 수분을 주는데 그러면 상대적으로 마늘 까기가 쉬워진다. 허나  껍질이 연한 붉은 색을 띠는 토종마늘은 즙이 많고 맛이 월등하다. 회의가 끝날 역이면 마늘 까기 작업도 완성되여 간다.       다음은 순서는 깐 마늘과 정선한 생강 굵은 소금과 고추가루를 머리에 이고 방아간에 간다. 어려서 외할머니와 어머니같이 쌀가루 내려 방아간에 자주 갔었는데 김치양념 할 때도 예외가 아니였다. 먼저 마늘과 소금을 두르고 방아질하다가  거기에 고추가루를 넣는다. 그래야 마른 고추가 날리지 않는다. 쿵덕쿵덕 내가 방아를 딛으면 어머니는 밥주걱으로 뱁싸게 양념을 뒤번져 놓는다. 마늘 양념장을 곱게 찧으려면 골고루 자주 번져 주어야 한다. 아니면 통마늘이 나오거나 고추가루와 마늘이 잘 섞여 지지 않는다. 한해 배추 김치를 담구려면 양념장만해도  여러 소랭이를 준비하여야 한다.      세번째 단계가 바로 김치를 담구는 날인데 제일 중요한 작업이다. 우리집에서는 통상적으로 버치를 리용하였다. 먼저 초절이한 배추포기를 맑은 물에 휭구어 준다. 소금물이 다 빠지도록 여러번 씻어야 하는데 그렇지 않을 경우 김치가 너무 짭게 되여 맛이 없다.  다 씻은 통배추를 한포기씩 버치에 올려 놓고 물을 찌운다. 다음  배추속으로 부터 바깥으로 한잎한잎 번져 가며 손으로  양념장을 골고루 발라 준다.       배추김치를 담군다기도 하고 번진다고도 한다. 아마 한잎씩 번져가며 양념을 바른다는 의미에서 나온 말일지도 모른다. 배추김치는 손이 많이 가는 작업이다. 하여 동네에서 녀성들이 도우려 오기도 한다. 대게 손바꿈이라고 보면 된다.  남정들도 할일이 많다.  물을 날라 주어야 하고 완성된 김치를 움에 운반하고 독에 넣어야 한다. 어떤 집들에서는 무우를  손바닥 만큼씩 넓쩍넓쩍 썰어서 김치독맨 밑에 넣는데 그것도 별미다.       촌에서 배추김치를 담구는 날은 큰행사날과 다름 없다. 왜서 글 첫머리에 탈곡철에 김치를 담군다고 했냐하면  그때가 배추김치를 담구는 가장 적합한 기온을 갖추었기 때문이다. 갓완성된 배추김치를 소랭이에 듬뿍 담아 탈곡장에 내온다. 그러면 탈곡에 지친 녀성들이 둥그렇게 모여서서 빨간 양념이 가득 발린 배추김치를 손으로 쭉쭉 찟어 입에 넣는다. 마늘의 톡쏘는 맛과 생강의 당기는 향 달짝비근한 고추가루와  짭잘한 알소금의 맛이 조화되여 사람들의 입맛을 사로잡는다. 사람들은 후후하면서도 입가에 고추양념을 바르면서도 손은 저도 몰래 김치소랭이에 간다. 배추김치를 탈곡장에 내 오는데는 또한 자기의 배추김치솜씨를 자랑하려는 뜻도 은근슬쩍 비쳐져 있다.     우리 민족은 김치를 떠날수 없다. 장춘에서 대학공부할때 우리 학교 담장밖에 배추밭이 있었다. 저녁이면 몰래 담장을 넘어 우리는 배추를 훔쳐 오기도 하였다. 서툰솜씨로 세수소랭이에 담군 초절이도 아니한 막김치였건맛 별맛이였다. 우리 침실 한족친구들도 먹어 보고는 맛있다고 야단이다. 자기들이 배추를 구해올테니  해달라고 하기도 했다.       촌에서 먹거리가 귀하던 그시절 배추김치는 절반 량식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였다. 온동삼 김치가 밥상을 떠날 때가 없었다. 시래기국에 밥 한그릇  그리고 밑둥이를 썩둑 자른 배추김치 한포기 이것이 전부의 밥상이였다. 우리는 그것을 먹고 자랐고 힘을 키웠다.      한번은 서울의 어느해장국집에서 밥을 먹게 되였다. 뼈국한사발과 공기밥이 나오는데 김치는 자기절로 떠먹느라고 하였다. 부엌옆에 김장독이 있었는데 벽에는 "먹을 만큼 담고 랑비을 하지 맙시다. 김치는 우리의 자존심입니다"라는 글귀가 붙어 있었다.       글을 보면서 나는 뭔가 뭉클 해오는 감이 들었다. 김치는 우리의 자존심이다. 그렇다. 김치는 비록 산해진미가 아니지만 비록 값비싼 재료로 만든 음식이 아니지만  우리에게 특수한 감정이 있다. 우리민족은 김치에 밥을 먹고 일하고 자식을 키우고 공부시키였다. 비록 초졸한 밥상이였지만 우리는 그것을 먹고 자랐다. 김치는 단지 먹거리라는 범주를 떠나 고생 많던 과거에 대한 회억과 옹기종기 아이들이 모여 앉아 밥먹던 그시절을 환기시키는 매개물이 되였다. 우리는 우리 것을 아끼고 지키여야 한다. 우리가 김치를 가득 담아 내오고 먹지 않고 버린다면 남들도 우리 음식을 귀중하게 여기여 주지 않는다. 김치는 우리의 자존심이다.    김치움에서 방금 내온 시원한 배추김치 허연 밑둥이를 썩둑 자른 배추김치 생각만해도 슬슬 군침이 돈다. 
107    사랑이 뭐길래 댓글:  조회:2674  추천:1  2019-10-21
사랑이 뭐길래          요지음 퇴직하였거나 퇴직을 앞둔 부모들에게는 새로운 일거리가 생기였다. 바로 손자손녀 보는 일이다.결혼한 자식들이 바쁘다고 아우성치는데 모르는체 할수도 없다.        60 년대 출생한 부모들은 위로는 부모님한테 효성했지만 자식들 한테 소외당한 세대들이다.  부모님들 모시랴 자식키울랴 출근할랴 눈코뜰새 없이 보내다가 이제 좀 숨돌릴까 하니 또 일거리가 생긴것이다.  이전에는  아이를 자기가 낳고 자기로 양육하였다면 지금은 낳는것과 양육하는것이 점차 분리되는 시대를 맞이하는 같다. 그리고  지금 젊은이들은 자기애를 낳고도 무슨 누구를 위하여 큰  일을 해놓은것처럼 으시대기가 일쑤다.         과거에 마나님들이 애를 낳기만 하고 영아양육은 어멈들이나 아환들이 하더니만 지금 젊은축들은 자기 아이를 의레 부모님들이 돌봐 주려니 한다. 돈 있는 집은 괜찮으나 경제상황이 넉넉하지 못한 집들에서는 꼼짝 못하고 불려 간다.  이렇게 하는데는 자식이 대학생이건 연구생이건 박사생이건 별로 상관 없다.  하나같이 부모를 시켜먹으려 하고 있다.     부모가 아이를 볼경우 경제적으로 절약 되고 질적으로 담보 받게 되고 게다가 집안일까지 해줄수  있는 일거 삼득의 우점이 있으니 말이다. 자식들이 그러한 심리상태를 가지게 된데는  부모에게도  책임이 있다.      부모들도 자식들의 곤난을 알고 남음이 있다.  손자 손녀와 가까하 하고 싶은 것도 사실이다. 한도시에서 생활한다면  어느정도 보모노릇 해봐야 별로 관계 없다. 허나 대도시라든지 외국에 가서 생활하는 자식들의 뒤바라지 할 경우에는 상황이 전혀 다르다.        손자손녀가  영아일때는 어쩌랴 싶어 보아 주었더니 유치원 가도 봐 달라고 한다. 자기들이 출퇴근 할려니 시간이 없으니  애들을 유치원에 보내주고 데려 오라고 한다. 참고 참아서 학교가기전까지 돌봐주었더니 소학교 저급학년까지만  더 봐달라고 한다. 원래 대도시나 외국에는 집값이 하도 비싸다 보니 방면적이 보편적으로 작다. 연길집들은 웬만하면 백평방이 남는다. 작은 집에서 여러명이 생활하다 보면 불편하기로 말이 아니다. 하여 남편들은 다시 집에와 홀로 생활하는 편이 적지 않다. 직장에서 존중 받고 사회에서 나노라 하던 사람들이 새로운 시대 리산가족으로 전략되고만 것이다.       우리 주위에는 보모역을 하는 부모들의 이야기를 많이 들을수 있다. 어떤 분들은 북경 상해같은 대도시에 달려 가서 어떤 분들은 한국 일본 미국에 가서 까지도 자식들  보모노릇을 한다.        북경에 사는  친구가 말했다. "아빠트 소구역에 가보면 외지에서 온 부모님들이 가득혀. 말씨를 들어보면 전국 각지 다 있어요. 하나 같이 손자손녀 보모역 할려 왔지"   미국에간 친구가 말했다. "영어를 모르는 대륙에서 간 부모들끼리 모여서 한담하고 그래요. 시간 맞추어 유치원 뻐스를 마중하고. 말이 안통하니 답답하지"       누가 부모님한테 제일 효도하냐고 조사해보았는데 배운것이 많을 수록 효도하지 않았고 적게 배운 자식이 더 효도한것으로 나타 났다. 이런 현상이 절대적인것은 아니지만 그 배후에 현실적인 문제도 내포되여 있다. 공부를 잘하여 북경 상해등 대도시에서 대학공부를 하고 외국에가서 연구생 공부를 하고 타향에서 사업하고 생활하게 되였다면 언제 효도할수 있겠는가.      효도란것이 무슨 절대적으로 경제적으로 돕는다는것이 아니다. 경제적으로 보다도 더 나가서 생활상에 보살펴 드리고 정신적으로 기탁이 되여주고 심지어 아침저녁으로 인사드리고 말동무 하여 주는것도 효도다. 지금 세상에 효도란 물질적인것을 넘어 정신적인 안위와 보살핌이라 하겠다. 아플때 찿아 뵙고 병원에 모셔가고 답답 할때 안위해주고 이런것이 아니겠는가.        얼마전에 위챗에 오른 어떤 부모가 쓴 글을 보게 되였다. 부모가 결혼을 앞둔 자식 보고 물었단다.  너희가 결혼하는데 어떻게 치루었으면 좋겠느냐고 . 하니 아들이 하는 이야기가 기왕이면 잘 해주었으면 좋겠다고 하더라 한다. 그래서 일생의 적금을 다털어 결혼을 시켜주었다. 나이를 먹고 아프고 하니 자식한테 말했다 한다. 나도 아프고 하니  병원도 가야 하고 약도 먹어야 한다고. 그랬더니 자식하는 말이 왜서 젊어서 보험에도 들고 그러지 않았냐고 반문하더란다.         이글을 보고 나는 깊은 사색에 잠기였다. 교육의 실패를 실감하는 시각이였다. 나는 이 이야기를 안해에게도 아들에게도 하였다. 아들애가 우리를 보면서 시원하게 말했다.   "근심 말아요. 내가 모실게요" 말로라도 감사한 일이였다.       자식 자리우는것이 무슨 효도를 받기 위한것은 아니다. 헌데 요지음 젊은이들이 부모님한테도 너무나도 리기적이다. 어떤 젊은 부부는 자기애를 부모집에 보내고 자기들끼리는 전자유희놀려 간다고 했다. 한심한건지 아니면 철이 못 든건지모를 일이다. 모든것을 자기중심으로 하다보면 부모님한테도 잘 할수 없다.       그리고 해외에 나가 직장을 구한 친구들도 피차일반이다. 국내에서 하던것과 똑같이 한다.     어느대학에서  부모님들의 희망수명에 대하여 설문조사한바가 있다. 헌데 생각외로 부모님들의 사랑을 가장 많이 받고 교육경비도 엄청 많이 써가면서 공부시킨 자식들의 답이 너무도 빗 나갔다. 오래 앉기를 바라지 않은것이다. 참으로 한심한 일이였다.      사랑이 뭐길래. 내리 사랑이라고 하지만 할 말은 하여야 한다. 교육이 따라가지 못하면 아이들 하자고 하는 대로 방관하면 결국은 자식을 해치는것이다. 적당히 지적도 하고 거리도 두어야 한다. 
106    갑돌이와 갑순이 댓글:  조회:2784  추천:1  2019-10-18
갑돌이와 갑순이       «갑돌이와 갑순이» 이노래는 많은 청소년 남녀들이 불렀고 또 그들의 심금을 울리였다.  내가 처음 이노래를 접한 것은 70년대말 즈음으로 기억된다. «눈물젖은 두만강»,« 나그네 설음»,« 갑돌이와 갑순이» 등 노래가 불러지기 시작되던 시기였다.       갑돌이와 갑순이는     한마을에 살았더래요     그들 둘은 서로서로     사랑을 했더래요        내가 이 노래에 인상 깊은 것은 친구판(朋友版) «갑돌이와 갑순이»사연과 관련된다. 친구는(아래서 부터는 갑돌이라고 부르자) 웃동네 살았고 그가 사모하던 녀자애(아래서 부터는 갑순이라고 부르자)는 아래 동네에서 살았다.        사랑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그저 남자 녀자에 어섯눈이 뜰때 갑돌이는 갑순를 좋아 하기 시작하였다.  갑순이에게 무한한 호기심과 흥취를 가지였다. 그녀의 모든 것이  마음을 들었고 만나기만 해도 심장박동이 빨라지고 숨이 차지였다.       원래 갑돌이와 갑순이는  한학년이 아니였다. 갑순이는 초중2학년때 무슨 연고인지 웃학년에서 한학년 내려 앉았다. 그와 같이 여러명의 녀자애들이 내려 앉았는데 모두 웃기를 좋아 했다.       갑순이는 공부를 잘 하였다. 매번 기중시험 기말시험에서 일등을 하는데 많은 애들이 흠모하는 대상이였다. 지금 말로는 아마 粉丝라고 할가.  많은 애들이 갑순이를 따랐다. 교장선생님도 학기말이면 전교사생들 앞에서갑순이를 표창하였다.       갑돌이의 마음에는 갑순이 밖에 없었다. 갑순이만 보면 공연히 흥분해지고 또 뭔가 자기 재간을 보여 주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친구 갑돌이는 나와 한학년 한반급으로서 아주 친근한 사이였다. 하지만 우리 사이에 남자애 녀자애 화제만은 제외였다. 갑돌이는 늘 갑순이가 상학하고 하학하는 길에서 서성거리였다.     재네는 어떻게 살까     재는 뭘 좋아 할까     재내 집에는 뭐가 있을까 정작 갑돌이는 갑순이를 만나면 할말을 잊는다.     "학교가니?"     "집을 가?"    그리고 혜식한 웃음만 짓는다. 갑순이도 묻는 말에 얼굴이 홍당무우되여 겨우 한마디로 답한다.      "응"      "그래"     허나 갑돌이를 대할때와는 달리 성격이 활달한 갑순이는 늘 자기또래들 과는  웃고 떠들며 학교로 다니였다. 매번 갑순이의 깔깔거리는 웃음소리에 갑돌이는 혼이 빠지는것 같다.        갑순이의 모든것에 알고 싶은 갑돌이는 궁리끝에 실전에 들어 갔다 . 우선 어려서 부터 한마을에서 자란 뒤집에사는 영옥에 대한 공략을 펼치였다. 왜냐하면 영옥이와 갑순이가 친하기 때문이다. 갑순이와 친하려면 영옥이를 건너 갈수 없다. 그러자 매번 영옥이와 어깨동무하고 다니던 갑순이는 갑돌에게 살풋이 웃음도 짓도  대화도 하였다.       갑돌이는 미칠뜻이 기쁘다. 오라 갑순이가 나를 좋아하는 구나. 그뒤로 부터는 갑순이와 더욱 가까워 지려고 갖은 방법을 다 동원하였다.      하학시간이 되면 갑순이 앞에서  뽈도 차고 노래도 하였다. 사실 공부하나만 빼고는 갑돌이가 갑순에게 짝질게 하나도 없었다. 부리부리한눈 건장한 체구 발달한 사지 비록 아직 어린나이지만 자뭇 남자다운 멋이 보였다.       그러던 어느날 갑순이가 갑돌이를 찿았다. 시내 학교로 전학한다며 잘 있어라 공부 잘해라는 말을 하였다. 갑돌이는 정신이 나간 사람처럼 멍하니 갑순이만 바라보다다 이윽고 말했다. "응 너도  잘가 . 놀려와"        할말은 많았지만  어리벙벙하여 뭘 말해야 할지 생각이 나지 않았다. 그뒤로 갑돌이도 시내학교로 전학하였다. 비록 같은 학교는 아니지만 그래도 두사람의 차이를 줄이려면 이것도 방법이였다.       갑돌이도 갑순이도 소년에서 청년으로 성장하였다. 갑돌이는 학교를 나와 닥치는 대로 일하였다. 돈을 벌려고 건축판에도 심지어 우물 파는 일도 서슴치 않았다. 그의 마음속에는 오로지 갑순이 뿐이였다. 돈을 벌어 기타도 샀는데 내가 보기에는 갑순의 마음을 끌기 위하여서였다. 나는 그때 학교를 다니였는데 갑돌이는 이미 사회청년으로 탈바꿈하고 있었다. 그뒤 갑순이는 한시기 앓았다고 했다. 대학입시도 포기하고 사회로 진출하였다.       비록 어린 나이지만 갑돌이의 마음속 한구석에는 어깨가 쳐지는 느낌이 들었다고 했다. 갑순이는 도시호구고 나는 농촌호구라는 열등감을 밀어 내칠수 없었다고 한다. 지금보면 아무일도 아닌것을 그때 당시에는 넘기 바쁜 산이 였음이 틀림없다.       시간이 날때마다 갑돌이는 갑순이네 집에 가서 일손을 도왔다. 그때 갑순이네는 새집을 짓고 있었다.  갑돌이는 더러운 일 무거운 일 마다하지 않고 열심히 도와주었다. 갑순이 부모들도 갑돌이를 무척 반기였다. 때론 갑순이 아버지는 갑돌이와 술마시면서 자네같은 사위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웃으며 이야기 했다고도 한다.     갑돌이와 갑순이는   사로서로 사랑을 했더래요    그러나 겉으로는    안 그런척 했더래요       허나 갑돌이의 맘속에 자리잡은 렬등감이 그로하여금 용기를 내여 사랑을 고백하지 못하게 하였다. 두 청년남녀는 사이 좋은 친구사이로 보낼뿐 다른 동향이 전혀 없었다. 갑돌이의 사랑고백을 기다리다 지친 갑순이는 상대를 정하고 말았다.        뒤늦게 이사실을 알게된 갑돌이는 미칠것만 같았다. 비록 사랑한다는 말 한마디 못해 보았지만 손 한번 잡아보지 못했지만 얼마나 사모하고 얼마나 좋아 했는데 네가 나를 제치고 다른 사람한테 마음을  주냐.  이런 분노감  허탈감이 뒤엉키여 그날 얼마나 많은 술을 마시였는지 모른다고 했다.       그뒤 갑순이는 시내 총각한테 시집 가고 갑돌이는 한마을에 사는 처녀와 결혼하였다. 갑순이가 결혼하던날 갑돌이가 울었다. 세월은 흐르고 흘렀다. 갑돌이도 5살이된 손자를 둔 할아버지가 되였고 갑순이도 7살짜리 외손자를 둔 할머니가 되였다.       매번 행사가 있을 때면 우리는 만난다. 한국에가서 일하는 갑돌이는 신체가 건강하다. 일전에도 행사가 있어 만났는데 친구가 갑돌이와 갑순이보고 우스깨한다.      " 이제라도 손 한번 잡아보라구"     그러자 갑돌이가 허허 웃으며 하는 말이    "아니야 나는 순결한걸 좋아 한다구"   이때  갑순이가 갑돌이 보며 말한다.   "갑돌이는 원래 이래"한다.       사람들은 이룬것에는 대수러워 하지 않지만 못 이룬것에 대해서는 집착하는가 보다. 갑돌이와 갑순이의 옛사랑 이야기는 언녕 끝났지만 소꿉친구들의 행사때마다  화제에 올린다. 갑순이가 말한다.    "너희들은 내말 안하면 할이야기도 없어?"      그러건 말건 친구들은 좋다고 야단이다. 
105    누나 사랑해 댓글:  조회:2630  추천:1  2019-10-16
누 나  사 랑 해        누나는 나보다 10살 이상인데 우리 형제중에 유일한 녀자다. 70년대 중반 20세 나이에 당원에 가입하였으니 열성이 얼마나 대단하였겠는가를  짐작할수 있다.  누나는 젊은 나이에 선전대공작인원으로  민흥촌에 파견되여 일년 단련받기도 하였다. 50년대 출생한 누나의 가장 큰 특점이라면 헌신정신이다.  남의 일도 자기일처럼 하고 친구들사이가 형제자매처럼 친근하다는 것이다.        누나는 70년대말 마지막 공농병대학생으로 중앙민족학원에 추천받는 영광을 가지였다. 이런 영광을 누나가 받을수 있은것은 부모님들의 엄격한 교육과 본인의 노력과 갈라 놓을 수 없다. 당시 소식을 접한 마을은 마치 큰 잔치를 치루는 기분이였다. 여느 보통학교도 아니고 조국의 수도 북경에 가서 공부할수 있는 기회란 당시 촌에서 꿈에도 상상 못할 일이였다. 당시 나에게는 중앙이라는 두글자가 그렇듯 거룩하고 자애롭게 안겨왔다.        그때 학생모집을 나온 선생님이 우리집을 방문하고 하루밤 머물게 되였다. 어머니는 집에서 할수있는 제일 좋은 음식을 대접하였다. 찰떡 순대 토닭 두부는 지금이나 그제날에나 우리 민족의 최고 음식이였다.  어머니로 말하면 수도 북경에서 그것도 중앙민족학원에서 딸을 초생하려고  왔다는것이 일생에서 제일 큰 영광이 아닐수 없었다. 그때 소학교를 다니던 나는 북경에서 온 선생님의 일거일동을 유심히 살펴 보았다. 그토록 우아하고 멋져 보이였다.  선생님이 북경으로 돌아 갈때 많은 동네분들이 동구밖까지 나와서 바래주었다.        우리 집으로 말하면 누나가 제일 먼저 바깥세상과 접촉하였다. 누나는 매번 서신을 통하여 북경의 많은 재미나는 이야기를 나에게 전해주었다. 그리고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한다고 조언해주었다. 누나는 나에게 무선전 안테나와 같은 존재였다. 안테나가 설치되였기에 바깥세상 소식이 끝임없이 집으로 전달되였고 나는 또 미래에 대하여 무한한 동경을 가지게 되였다.        누나가 나에 대한 사랑은 특별한 것이였다. 내가 화룡에서 대학입시 공부할때 아버지어머님이 돌아가시였다. 어쩌면 같은 해에 시간차이도 얼마 두지 않고 하늘나라로 가시였다. 그때 막바지 노력을 경주하는 동생을 위로하려고 누나는 맛나는 음식꾸러미를 들고 자주 숙사를  찿아 주었다. 물론 입시준비를 잘 하라는 무격려도 잊지 않았다. 나의 입학통지서를 받은 누나는 그토록 즐거워하였다. 장춘에서 대학 공부할때도 누나는 학교를 찿아 주었다. 그때만 해도 형제들이 학교를 찿아 오는 일이 매우 적었다. 우리는 같이 장춘위만주국황궁을 참관하고 정심도 먹었다. 그때 연길과 장춘사이에 장도뻐스가 통하였다. 내가 한번 타 보고 싶다고 하자 누나가 그렇게 하라고 했다. 일본 고모집 방문 갈 때도 우리는 같이 다녀 왔다. 도꾜 혹가이도를 구경하였고 고모님과 잊지못할 만남을 이루었다.         누나는 항상 앞서 나가는 나의 본보기 였다. 공작에서나 생활에서나 누나는 항상 락관적이였다. 지금도 나는 어떤일에 부딪치면 누나라면 어떻게 처리했을까하고 생각해 본다. 누나는 단위에서는 중견인물로 뛰였고 집에서는 자애로운 어머니로 자식을 교육하였다. 딸애는 중국과학기술대학을 졸업하고 일본에서 연구생을 마치고 지금은 한국에서 사업한다. 누나는  퇴직후 서울과 북경을 오가며 딸애와 외손자를 봐주고 있다. 추석에 누나는 잠시 연길에 머물었다. 60대 중반이지만 허리도 꼿꼿하고 걸음도 가볍고 목소리 또한 또렷하다. 그래서 나는 기분이 좋다.        몇해전에 우리 아들애가 북경건대에 입학하였다. 당시 북경에 체류하던 누나와 매부는 자기 자식일처럼 기뻐하며 집적 학교를 발문하였다. 학교식당에가서 식사도 해보며 여기저기 상황을 우리에게 소개해 주었다. 그리고 누나가 북경에 있으니 애걱정 아무것도 하지말라고 한다. 한번은 우리 애가 배탈을 만났는데 참을수 없이 고통스럽다고 전화가 왔다. 하여 고모한테 빨리 전화하라고 했다. 누나는 소식을 듣고 당금 학교에 달려가  아이를 데리고 병원에가 보이였다. 고모가 근처에 있기에 우리애는 얼마나 편리한지 모른다.      누나네는 올해에야 새집에 들었다. 얼마나 바랐던 일인가!결혼하여 세집살이도 했고 비좁은 집에서 자식도 자리웠다. 생활에서 불편한 점이 많았지만 언제 한번 우리 앞에서 내색을 낸적이 없다. 오히려 내가 새집들이 할때마다 자기일처럼 기뻐해주고 축하해주었다.         자기를 희생하고 동생들을 먼저 생각해주는 누나 이런 누나 형님들이 있었기에 내가 순조롭게 학업을 마칠수 있었고 행복한 생활을 할 수 있었고 맡은바 과업을 완수할수 있게 되였다.   누나 사랑해.
104    후회 댓글:  조회:1802  추천:0  2019-10-11
후 회        우리 말에는 "후회막급(后悔莫及)" "후회막심(后悔莫甚)"이란 말이 있다. 사람이 살아가다 보면 후회하는 일이 있기 마련이다. 어떤 일에서 실수를 저질렀거나 노력이 부족했거나 기회를 제대로 포착못했거나 할때 후회를 하게된다.         후회하였다 하여 다 나쁘지만은 안다. "한번 당하여 보아야 지혜가 생긴다(吃一堑长一智)"라는 말도 있다. 그만큼 부대끼여 보아야 경력도 쌓고 지혜도 생긴다는 말이다.  신(神)이 아니고 사람인이상 시행 착오를 범하지 않는 사람이 없다. 나라의 큰일을 보는 어른들도 착오를 범할라니 보통사람으로서 일시 착오를 범하는건 정상적인 일이다.      관건은 후회하는데 끝히지 말고 교훈을 섭취하는 것이다. 한가지 일에 착오를 범할수 있지만 같은 일에 같은 착오를 범하면 안된다. 매사 뒤끝에는 총화분석이 따라가야 한다. 일을 성사시키지 못한 원인은 무엇이고 앞으로는 어떻게 처사하여야 하는지 대안(替案)은 무었인지 꼼꼼하게 따져 보아야 한다. 그래야 실패하여도 가치가 있다.        미리대책을 세워야 한다(未雨绸缪,防患未然). 앞으로 맞이 하게 될 여러가지 사항을 주밀하게 분석하고 그에 맞는 대책을 세워야 한다. 자기의 모든 지혜와 재능을 동원하여 앞날을 설계하고 추친해야 한다. 그래야 일에 마주쳐도 당황하지 않고 차근차근 처리해 나갈수 있다.       중국말에 새옹실마연지비복(塞翁失马焉知非福)이란 말도 있다. 나쁜 일이 좋은 일로 전변할수 있다는 말이다. 변증법에 부합되는 아주 정확한 이야기다. 운수가 나쁘다고 하여 매냥 나쁠수 없고 운이 좋다하여 매냥 좋을수 없다. 돌아가는 세상이라 하지않는가.       여지껏 살아 오면서 후회를 한적이 있지만 많지는 않다. 어느 정도의 성과도 거두얻고 즐거운 일이 상심한 일 보다 많고   살아 가는 일이 피곤하지가 않다. 자기의 모든 노력을 경주하였기에  혹여 바라던 성적을 거두지 못하여도 후회는 없다. "작은 일은 사람이 결정하고 큰 일은 하늘이 결정한다고 한다(小事人定,大事天定)"고 했다.       순종(顺从)과 순응(顺应)은 다른 뜻이다. 세월이 가는대로 일이 벌어지는대로 남의 지휘하는대로 따라 가는것은 순종이지만 순응이란것은 환경이 변화하였을 때 사람들이 현유의 환경조건에 적응하는 과정을 말한다.    하자는 말인즉 매냥 후회하며 순종하지 말고 일에 부디치면 앞뒤좌우를 잘 판별하여 주동적으로 순응해가야 한다는 말이다. 
103    위챗시대 문학교류 댓글:  조회:1737  추천:0  2019-10-11
위 챗 시 대  문 학 교 류        지금은 위챗의 힘을 입어  교류가 많이 편리하여 지었다. 사람들은 아무런 지역적 제한도 받지 않고 자유롭게 글과 도편을 주고 받을수 있다. 본인이 원한다면 화상채팅도  얼마든지 가능하다. 문학도들은 이런 과학기술의 보급과 혜택을 누릴수 있는 시대에서 생활할수 있게 되여 행운스럽다.        지금은 손가락매체 시대라고도 한다. 전에는 노트북만들고 다녀도 대단히 앞서가는 사람으로  우러러 보였지만 지금은 별로다. 오히려 간단히 핸드폰 하나로도 많은 업무를 볼수 있는 시대가 되였다. 시대는 도약적으로 발전하고 있다. 전에는 상상에만 그치였던 일이 지금은 현실로 변하였고 또 내일에는 어떤 첨단적인 기술이 우리의 사업과 생활에 영향줄지 알기 힘들다.        지금은 누구나 작가역을 할 수 있고 누구나 방송사역을 할 수 있다. 번거롭게 무거운 사진기나 록화기를 들지 않더라도  핸드폰으로 얼마든지 촬영 록화가 가능하다. 자신의 의사을 온라인을 통하여 여러 사람들과 교류할수 있고  또 자신의 작품도 발표 할 수 있다. 전통적인 신문 방송 잡지사가 조급해하지 않을수 없다. 과거에는 가장 빠른 문자매체가 매일 신문이였고 또 더 빨아야 호외(号外)가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시시각각 실황에 가까운 신문기사가 무더기로 나가고 있다. 아침에 받아본 신문을 펼칠때 기사내용은 이미 구문(旧闻)으로 변하여 버리였다.  나라 안팎 관계없이 시간대에 관계 없이 많고 많은 정보가 교류 되고 있는 현실이다.       우리민족의 문학매체는 한족매체에 비하면 매우 빈약한상태다. 우선 인구수량면에서 렬세에 처하여 있다. 게다가 관영매체들의 문턱이 높고 심사표준이 높기에 웬간한 작품들은 빛을 보기가 힘들다. 이런상황에서 민간문화인들의 발촉과 노력으로 많은 문예애호가들이 교류와 협력할수 있는 문학췬를 탄생시키였다. 어찌보면 우리민족 문화교류의 새시대에 진입하였다. 시대의 맥박을 타고 태여난 이 신생아를 우리 문학도 모두가 아끼고 사랑하여야 한다.         요지음 우리글 문학췬들이 활발한 양상을 보이고 있다. 췬주들이 수고가 많다. 문학수양이 높은 췬주님들이 매일 문학도들을 이끌어주고 매 하나의 진보에 긍정해주고 고무하여 준다. 유명학자나 문학인들과의 교류도 활발이 진행된다. 췬에 보면 유명인사들도 적지 않다. 이처럼 근거리애서 집적 유명인사들과 교류할수 있다는건 과거에는 상상도 못할 일이다.  얼마나 행운스러운지 모른다.  췬에 참가한 문학애호가들을 보면 시며 수필이며 소설을 선호하는 아마추어들이 많다. 애호가들은 매일 새로운 작품을 올리고 토론을 벌린다. 열띤 토론과정도 췬에서 진행되는데 유익한 변론이라고 본다. 단정컨대 우리민족 문학췬의 애호가들이 멀지 않은 앞날 민족문단의 새로운 력량으로 등장할것이다.      지금 현황을 보면 췬애호가들의 년령대가 비교적 높다. 젊은 친구들의 도입이 급선무로 나서고 있다. 젊은 친구들은 무엇을 생각하고 무엇을 바라는지 그것을 알아야 한다. 중장년층들 만으로는 힘이 부족하다. 선배들은 대학가를 중심으로하여 우리 민족 젊은이들이 우리의 문학에 관심을 가지고 적극적으로 참여하게끔 이끌어 주어야 한다. 교류를 통하여 민족문단의 발전 방향을  제시하고 이끌어 주어야 한다. 그들과의 심도 있는 교류는 민족문단발전의 상당한 추동력이 될것이다.       매하나의 문학췬은 가히  문학추진 원동력이라 할수 있다. 여러개 문학췬의 단합은 또 영향력이 훨씬 더큰 원동력을 만들어낼것이다. 교류와 협력은 문학췬이 존재하고 발전할수있는 근원이다. 췬주지간의 교류와협력은 첫번째로가는 우선무다. 기쁘게 볼수 있는 것은 당전 췬지간의 호상 교류다. 나한테 네가 있고 너한테 내가 있는것이 당전 문학교류췬의 현주소다.    산이 높다하되   하늘아래 뫼로다   오르고 오르면   못오를리 없건만   사람이 제아니 오르고   뫼만 높다하더라        우리민족 문학도들이 갈길은 아직 멀고 험난하다. 민족문학보급과 창작수준의 제고가 당면의 주요 과업이라 생각한다.
102    일판술판 댓글:  조회:1678  추천:0  2019-10-11
일 판 술 판        국경절휴가도 벌써 끝나가고 있다. 천기예보에 의하면 오늘은 어제와 달리 따뜻한 날씨라고 한다. 나는 차를 운전하여 마반산으로 향했다. 가을 하늘 광활하고 하얀 구름이 높이 떠있다. 시내 에는 아직 생화가 피여 있는데 산에 들어서니 어언 울긋불긋 단풍이  물 들었다.   날씨도 좋겠다 단풍도 들었겠다 마음도 즐거워 진다.      절기도 바뀌고 또 휴일이라  오늘은 마반산에가서 올해 농사마무리도 하고 터밭도  정리할예정이다. 농촌일이란 일을 할려면 손이 쉴사이가 없다. 또 그래야만 정갈한 뜨락에서 살수 있다.      터밭의 찰옥수수는 대부분 풋것으로 따먹고 마른 옥수수는 얼마 남지 않았다. 내가 휴가기간 뜯으려고 했는데 어제 형님 내외분이 내려와 다 뜯어서 정자에 널어 주었다. 량은 많지 않아도  뜯거니 나르거니 품이 많이 드는 일거리였다. 덕분에 나의 일이 적어지였다만은 형님내외분은 많이 고생하였다.      이제 남은 일이란 옥수수이삭 겁질을 벗기고 고추대와 가지대를 뽑아 내고 옥수수대를 베고 묶고 하지는 일이다.      . 울안에 들어서니 제일 먼저 눈에 들어 오는 것이 새파란 총각무우잎과 배추잎였다. 오이넝쿨과 도마도넌출을 걷어낸 자리에 총각무우를 심었는데 잎이 어찌나 푸르고 싱싱한지 지나가던 사람들도 담넘어 드려다 본다. 푸른색은 생명의 색이라 주위의 마른 옥수수잎과 선명한 대조를 이룬다. 농사절기란 참 빠르기도 하다.  5. 1절에 옥수수 심고  5월중순에 도마도 가지 오이를 옮기였는데 벌써 수확을 다 끝낸지 오래다.       산림구역은 국경절부터 방화계절에 들어 선다. 야외불사용은  일체 금지다. 이 근년에 옥수수농사하는 사람들로 말하면 옥수수대 처리가 골치 거리다. 태우려니 야외불사용 금지고 방치하려니 밭을 차지 한다. 나처럼 터밭에 심은 옥수수대는 그나마 량이 적지만 그것도 처리할 방법이 별로 마땅치 않다.   .  나는 우선 정자에 올라 앉아 옥수수껍질을 벗기는 작업부터 시작하였다. 해볓이 나의 등을 골고루 따뜻하게 비추어 준다. 벌써 따뜻한 해살이 수요되는 계절이 되였다. 터밭 옥수수농사는 가공이 난제로 나타 난다. 우리집 터밭에서는 풋것으로 먹고 나머지  옥수수가 대략40근정도 나오는데 가공할려면 량이 적다고 정미소에서 잘 받아주지 않는다. 허나 내밭에서 난 무공해 옥수수라는 생각에  걸음을 더 걷더라도 가공해 오고야 만다.       혼자서 작업할려니 처음에는 괜찮지만 시간이 슬슬 지나가니 심심하기도 하다. 하여 친구한테 전화를 했다. 우선 문안인사부터 시작하였다.    "어제 정심에 마신술이 힘들지 않소?"     어제 정심에는 친구들이 모여서 행사를 가지였다. 집적 일소리부터 거론하면 인사가 아니다. 그리고  친구에대한 관심도를 보여야 한다.    "오늘 일정은 어떻게 잡았소?"    친구는 친구다. 인츰 내 속내를  알아 준다.    "괜찮네 . 오늘은 뭘하는가?"    이때다. 소뿔은 단김에 뽑으라 했다.    "마반산에 내려왔는데 오지않으려우?"   "내려가지. 무슨 일하는 거요?"   "혼자 일하자니 적적해서 "    전화를 놓자 바람으로 나는 친구대접용으로 동네에 나가 암닭 한마리를 사왔다. 그리고 바깥부엌에 불을 지펴 물을 끓이였다. 닭을 튀할려면 뜨거운 물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두사람의 넉넉한 정심거리다.      이윽고 친구가 차를 운전하여 왔다. 올려면 올거지 무슨 맥주며 양고기며 한짐 들고 들어 선다. 더 반가운건 우리 친구 한명 더 모셔 온 것이다. 옳거니 . 일군이 불어 났다. 좀 지나니 또 차 한대가 울안에 들어 서는것이 였다. 방조군 한명이 또 늘어 났다. 이정도면 일을 빨리 끝낼 수도 있겠다. 친구가 좋긴 좋아.       일군이 왔으니 정심을 먹여 보내는것이 도리다. 닭부터 손을 보아야 한다. 여차여차하게 손을 놀리였더니 먹음직한 토닭한마리가 금시 노란살결을 들어내였다. 일군이 많으니 양고기도 구워야 한다. 이런 저런 일군들 식사주비를 하노라니 어언 정심때가 되여온다.     "어떡하지?"    "정심이나 먹고 오후에 일하자. " 이렇게 자문자답하고 나니 먹을 일이 급하다. 목탄을 내오고 화로도 내왔다. 양고기도 손바닥만큼 큼직큼직 썰고 양념장도 만들었다. 쇠가마에 들어간 통닭은 맛나는 냄새를 풍긴다. 탉탕에는 무우와 감자를 썰어 넣었다.       " 기왕 모인바 하고 친구들 더 부릅시다. "      의견을 통일하고 난뒤 친구가 또 전화를 넣었다. 전화 받은 친구들도 일손을 돕겠다며 인츰 내려오겠다고 한다. 친구들은 맥주며 과일이며 한구럭들고 들어섰다.      원래 간단하게 식사만하고 일하려 했는데 "오래간만이요","반갑소","자주 련락하기오"등 말이 등장함에 따라 빈맥주병이 줄줄이 나온다. 일판이 술판으로 번져지는 시작이였다.       술상은 점점 익어가니 일손은 점점 줄어들수밖에 없다. 모두들 가을을 타는가 보다. 아니 정확히 말해서 모두들 사람을 좋아한다. 일이야 내일해도 되지만 이 소중한 만남이야 언제 또 만들랴. 기왕이면 우정도 나누고  휴식도 취하고 가는데까지 가볼판이다.      사람이 살아 가면서 불을 사람있다는것과 불러준다고 달여오는것 이런 모두가 지덕(积德)이라 생각한다. 한마을에서 나서자란 우리들사이는 아무런 부담도 알륵도 없는 친구사이다.    집에 돌아오니 안해가 오늘일 다했냐 물어 본다. 답이 궁하게 되였다. 
101    지혜 댓글:  조회:1927  추천:0  2019-10-11
지   혜         사람이 살아 가면서 많은 일에 부딪치게 된다. 그중에는 혼자힘으로 해결해야 하는 일도 종종 있다. 헌데 일상중에서 사람들은 일에 부딪치면 보통 다른 사람의 도움을 청하는 경우가 많다.        나의 경우에는 사람을 청하는 일이 더 많다. 뭘 할려고 일을 벌려 놓으면 먼저 생각하는 것이 누구를 찿으면 나 보다 더 잘 할수 있겠는가 생각을 한다. 그 사람이 하면 더 효률적이기 때문이다. 누구를 찿아야 하는 일도 마찬가지다. 내가 A를 통하여 B를 알게 되였다면 웬간해서는 나는 B를 집적 찿지 않는다. 왜냐하면 A를 찿으면 훨씬 빨리B를 찿을 수 있고 원하는 일을 더 원만하게 처리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나의 론리대로 라면 이것는 피라미트식 관리법이라 하겠다.      헌데 매냥 이 방법이 통하는건 아니다. 누구도 도와줄 사람을 찿을 수 없을 경우에는 울며겨자먹기로  좋던 굿던 자기절로 해결해야 할때도 있다.       촌에 살다 보면 여러가지 물건들이 필요하다. 농기구만 놓고 보더라도 삽 곡갱이 호미 곽지등 여러가지고 그외도 양수기 전기톱 전기진들  등 여러가지를 준비해 놓아야 한다.   여자들이 정기적으로 옷장을 정리한다면 남자들은 드문드문 창고정리를  한다. 어떤때는 필요한 공구를  찿으려면 잡동사니가 많아서 찿기가 힘들다. 하여 오늘은 일단 창고 정비할 차비를 하였다.       나는 일단 가벼운 물건부터 정리하였다. 오래된 창고라 별라별 잡동사니들이 다 쌓여 있었다. 우리 아이 어릴때 타던 얼음 썰매며 여러집에서 가져다 놓은 가스통이며 자동차 바퀴며 보지 못했던 물건들이 많았다. 이런것들을 분류별대로 갈라 놓고 필요 없는 것들은 버릴것이다.      문제는 벽면에 세워 놓은 철판으로 만든 괴짝이다. 동서간이 되는 분이 촌에서는 필요할것이라며 가져다 놓았는데 대단히 무겁다. 비록 아래위로 분리 할 수 있는 조합식이지만 원체 두터운 철판을 사용하였기에 혼자힘으로 운반하기에는 힘들다. 허나  끌어내지 않으면 괴뒤를 청리 할수가 없다.      무거운짐이라도 위에서 아래로 내리여 놓는건 그리 힘든일이 아니다. 우선 밑에다 안반을 받치고 조금씩 움직여 내리우면 된다.  다음 젖은 장대걸레 괴짝밑에 넣고 밀면 마찰력이 감소하여 잘 움직여 진다. 나는 무거운 괴짝들까지 모조리 움직여 내고 청결하였다.        그런데 원상복귀 할려니 힘겹다. 그 무거운 괴을 한메터 이상 들어 올려야하니 말이다. 어떻게 하면 들어 올릴까 머리를 굴려 보았다. 처음에는 도저히 궁리가 나지 않았다. 한참 생각하다가 한가지 방도가 나왔다. 우선 걸상두개를 놓고 그위에 괴를 올려놓았다. 다음  걸상을 움직이지 못하게 고정해 놓았다. 그리고 한손으로 괴짝을 잡고 다른 한손으로 괴를 들어 안반우에  걸쳐 놓았다. 그러니 밑의 괴와의 상대 높이 차이가 작아 지였다. 나는 웃 몸을 괴에 바싹 붙이고 있는 힘껏 괴을 들어  밑의괴 웃면에 올려 놓았다. 이로써 괴가 제자리를 찿았다. 내가 사용한것은 힘을 적게 들이고 무거운 것을 들수 있는 사면원리(斜坡原理)였다. 처음에는 도무지 못해 낼것 같은 일을 혼자힘으로 해내고 나니 흐뭇했다. 일을 부딛치면 당황해하지 말고 머리를 써야 함을 터득하는 사레였다.      무슨 일에나 부딛치면 어떻게 해결할가 여러모로 연구하여 보아야 한다. 사람을 청할수 있을 때면 괜찮으나 혼자힘으로 해결해야만 할때에는 온갓 방법을 다 생각해 보아야 한다.  무거운 짐을 들어 올릴 때에는 지레대원리 사면원리(斜坡原理)같은 같은 간단하지만 효능적인 방법을 고려해 볼수 있다.        2005년 형님이 한국에서 돌아와 일시 마반산에 거처하게 되였다. 그때 내가 차 세울자리가 마땅치 않아하자 형님은 손수 혼자힘으로 정자를 만들어 세웠다. 한낮에는 해볓을 막을 수 있는 주차장이 되고   평소에는 땀을 식힐 수 있는 휴식터가 되고 또한 포도달대로도 되는 다용도 정자였다. 그때 형님은 혼자서 정자를 세웠던것이다. 물건너 마을의 김동무가 말했다. "  내가 어떻게 세우나 찬찬이 보았다구. 참 재간이 있어!"       일에 부딛치면  다른 사람에게 도움을 청 할수 있다. 그러나 모든 것을 타인에게 의뢰하려는 생각은 버려야 한다. 자기절로 할수있는데 까지 해보아야 한다. 맨날 다른 사람에게만 의뢰하다가는  언젠가 큰 손해를 볼수도 있다. 
100    교사절 댓글:  조회:2579  추천:0  2019-09-09
 교 사 절        사람마다 다 자기의 은사가 있다. 아무것도 모르던 철부지로부터 대학문을 나서기까지 우리는 많은 선생님들의 가르침을 받았다. 하여 점차적으로 사람이 살아 가는 방식과 도리를 알게 되였고 많은 문화지식을 쌓게 되였다. 그것이 살아 가는 밑거름이 되였고 지금까지 나를 이끌어 주었다고 생각 한다.        내일이면 교사절이다.  선생님들께 명절의 인사를 드린다. 선생님들의 가르침에 감사 드리고 옥체 건강하시기를 기원 한다.           소학교에 붙을 때 나는 둘째형님의 뒤꽁무니를 따라 학교에 갔다. 1972년도 입학은 3월1일에 하였다. 그때 나의 단임선생님은 박정희선생님이 였는데 문화대혁명기간 농촌에 하방 되여 내려온 분이였다. 후에 중앙소학교로 전근하였고 교도주임사업을 맡아하였다. 선생님께서는 매우 인자하였다. 갓 입학한 우리들에게 휴식시간 화장실 다녀 오는 방법으로부터 교학시간 규률준수에 이르기까지 모든 사항을  일일히 가르켜 주었다.      초중을 올라 와서 단임교원을 여러 선생님들이 번갈아 보았다. 처음에는 김영기선생님이 맡아 보았는데 단편소설«붉은 수첩»의 저자다. 눈섭이 검고 길다. 목소리도 우렁우렁한데 글씨 또한 명필이다. 그때는 학기말이 되면 선생님의 감정서(鉴定书)란것이  있었는데 철필로 쓴 글씨는 진짜 아름다웠다.        초중2학년 때에는 황봉준선생님이 단임을 맏고 물리를 가르키였다. 황선생님의 집과 우리 집은 어르신들부터 아주 가까운 사이였는데 우리 누님의 결혼식 남자대반을 설 정도였다. 초중3학년에는 최동욱선생님이 단임을 맡았고 화학을 가르키였다. 선생님의 고향은 서란이였다. 선생님은 후에 시초생반에 전근하였다. 퇴직후 선생님은 룡정 동성용진에 집을 잡았다. 그때 몇번 인사할려 다녀 간적이 있었다.        후에 우리 조선어문을 기르치던 최응률 선생님은 원래 음악교원이였다. 우리 연변에 널이 불리우던 «나는야 기타를 타네»는 최선생님이 작곡한 노래다. 퇴직한후 선생님이 작곡하신 노래를 음반으로 내였는데 나도 선물 받았다.          화룡고중 다닐때는 최수남 선생님이 단임을 맡고 있느며  대수를 가르치였다. 지금도 우리는 련락을 하고 있고 선생님은 종종 제자들의 모임에도  참석한다. 형님 같고 오빠 같은 선생님이다.        우리 동창들 가운데도 교육사업에 종사하는 친구들이 적지 않다. 대학에서 고중에서 초중에서 교편을 잡고 있다. 인류문명의 공정사들이 맡은바 각자의 일터에서 열심히 일하고 있다. 우리 반장은 매년 교사절이면 교육사업에 종사하는 동창들과 함께 식사를 안배하였다. 금년에는 단임선생님이 미국으로 출국으로하여 행사를 미루기로 하였다.        교사는 아주 신성한 직업이고 또한 특수한 직업이다. 지식이 있다고 하여 누구나 종사 할수 있는 직업이 아니다.        우선 선생님들은 학생들에게 사람됨의 도리를 일깨워 주고 있다. 유치원생으로 부터 대학문을 나오기까지 우리의 생활은 기본적으로 학교를 중심으로하여 이루어진다. "ㄱ ㄴ ㄷ ㄹ "를 배우면서 우리 글을 익히 였고 선생님을 존중하고 친구지간의 우애를 도모하고 로동을 사랑해야 한다는등 아주 간단하나 깊은 도리가 있는 교육을 받게 된다.        과거에는 형제들이 여러명이 되다 보니 형님 누나들 따라 학교에 가고 놀고하는 일이 보통현상이였다. 지금 애들은 형제가 없다보니 고독하고 친구사귀기 힘들어 한다. 그리고 자기중심 사상이 심각하고 배려 정신이 빈약하다.            언젠가 어떤 사람이"독신자녀들이 군대에 가서 나라을 지킬수있겠는가?"고 의문을 제기한적이 있었다. 결과적으로 보면 긍정적이다. 그러나 그것은 결코 저절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고 여러 단계의 철저한 교육과 실천을 통하여 이루어진 결과다.       두번째로 선생님들은 학생들에게 량호한 생활습관 학습습관 행위습관을 가으친다. 습관이란 매우 중요한것이다. 량호한 습관은 우리들의 일생에 중요한 작용을 한다.       유치원때 선생님은 식사하기 전에 손을 씻고 식사후에는 치솔질하여야 한다고 배워준다. 식사후 치솔질해야 하는 이 행위는 아주 작은 일이지만 일생동안 사용해야하는 이빨건강과 직접적으로 련관이 된 중요한 생활습관이다.        학습습관에 대한  중요성 인식은 자식을 자리우면서 부터 더욱 깊게 되였다.  아이 보고 책을 보라고 하면 애들하는 첫 마디가 "아빠엄마는 왜 안보냐"다. 부모가 맨날 텔레비를 보면서 애보고 책보라해서는 절때 먹히지 않는다. 학교 다니면서 느낀것이 부모님들이 교원이거나  책과 가까히 하는집 아이들이 학습성적이 상대적으로 높다는것이다.  촌에서 회계라도 하는집 아이들이 낫다는 말이다. 아이들에게는 양호한 학습습관을 가진 본보기가 필요하다.          행위습관은 더 말할것없이 중요하다. 처음 만나는 사람하고 어떻게 인사라고 통성명하는지도 교육받은 사람들은 보면 인츰 알아 볼수 있다. 치마로 앉을 자리 설 자리를 아는 사람이다. 지금 단위들에서는 례의례절교육에 중시를 돌이고 있다. 어떤 장소에서 어떤 말을 하고 어떤 장소에서 무엇을 주의하요야 하는가를 모르면 사회생활 가운데서 렬세에 처할수 있다.       세번째로 선생님들은 학생들의 학습흥취를 배양해주고 있다. 선생님들은 우리에게 지식을 전수하여 줄뿐만이 아니라 학습에 대한 흥취를 배양하여 준다. 흥취를 가져야 공부가 재미있고 부단히 파고들수 있다. 어떤애들은 수학에 흥취가 있고 어떤애들은 력사에 흥취가 있다. 선생님의 매 한가지 언행이 아이들의 주의와 흥취를 불러일으킬수 있다. 배우는 즐거움과 제고되고있다는 흐뭇함 이런것이 상호작용하여 학습에 더욱 흥취를 가지게 한다.       흥취가 있는 일을 하면 피로를 모른다. 원래 문학에 흥취가 있다면 국내외작품집을 보는데 그이상 더 좋을 수가 없다. 지금은 다양한 통로를 통하여 문학작품과 접촉할수 있고 동호인들과 자유롭게 교류할수도 있다. 문학계정에 오르면 많은 사람들이 문학작품에 대하여 토론도하고 작품교류도 하는것을 볼수 있다.        선생님들의 공로는 이루 말할수 없이 많고도 많다. 교육이 발달하면 나라가 강대하여 진다. 지식은 힘이다. 대학문을 나왔다고 학습이 끝난것이 아니다.     교사절을 열열히 축하한다. 그대들의 신근한 로동이 있음으로 하여 나라의 앞날은 더욱 밝아질것이다.    
99    가을이 온다 댓글:  조회:2195  추천:0  2019-09-02
가을이 온다        우리 고향은 가을이 일찍 들어 선다. 벌써 하늘이 높아 지고 아침 저녁으로 서늘한 바람이 분다. 아침에 반팔적삼을 입고 강변에 나가면 춥다. 완연한 가을 날씨를 느끼게 한다. 남방에는 아직도 30도 이상이 라는데 연길은 낮에 20도를 좀넘고 아침에는  10도를 웃돈다. 남들은 아직도 덥다고 야단할때 우리는 긴팔을 입어야 한다.         가을은  황금의 계절 수확의 계절이다. 가을이 되면 오곡백과 무르익고 농부들 얼굴마다에 웃음꽃이 피여 난다. 길거리의 코스모스가 활짝 피여 있고 국화가 웃는 얼굴로 길손을 반긴다.  아직 농작물을 거두어 드릴때는 아니지만 그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 일전에 룡정을 나가며 보니 논밭은 옅은 누른색을 띠였다            얼마 지나지 않으면 황금파도 설레일것이다. 지금 농촌은 한창 고추수확계절이다. 어디 가나 녀성들이 둘러 앉아 빨간고추를 썰고 말리는 장면을 볼수 있다. 포도는 진한자주색으로  익어가고 오미자와 구기자는  빨갖게 익어 간다.      인류는  봄이면 씨앗 뿌리고 여름이면 기음 매고 가을이면 수확하고 겨울이면 저장하는 생산방식을  해해년년 반복하여 왔다. 지금은 시대가 발전하여 대부분 힘든 로동은 기계로 대체하고 있지만 그래도 농사는 철저히 절기를 맞춰야 한다. 무엇이나 익어가는 가을철에는 해야할 일들이 수두룩하다. 농부의 일손도 빨라 진다.       우리 연변은 복받은 땅이다. 근로용감한 우리 연변의 아들딸들은 고향의 산과들을 일하기도 좋고 살기도 좋은 고장으로 일구어 놓았다.  황금의 벼파도 설에이는 세전의벌 만무과원 어디가나 깨끗한 공기는 선인들이 우리에게 물려준 값진 재산이다.       연변은 자연재해가 적은 곳이다. 저온 냉해가 있기도 하나  홍수 우박 산사태 폭설등 자연재해가 다른 지방에 비하면 썩 적은 편이다. 우리는 진짜로 이땅을 개척한 조상들에게 감사를 드리여야 한다. 이러한 땅이 있기에 우리는 행복하다.        9월에 들어서 우리는" 9. 3"명절을 맞이한다. 매년 9월3일은 중국항일전쟁승리 기념일이자  세계반파쑈전쟁승리 기념일이다. 우리 연변으로 말하면 올해"9. 3" 명절은 연변족선족자치주창립67돐 기념일이다. 민족자치정책이 우리연변땅에 꽃을 피운 날이다. 이날은  «연변조선족자치주 지방지치조례» 의 규정에 따라 전주적으로 하루 휴식하게 된다. 외지에서 온 손님들은 9월3일날 휴식일이라면 어리둥절해 한다.      가을하늘 높고 푸른데  방송에서는 자치주창립의 노래가 흥겹게 흘러 나온다.     에루아 어절씨구 좋구나  좋네   해란강도 노래하고  장백산도 환호하네   에루아 두둥실 장고를 울리세   연변조선족자치주 세웠네   에루아 두둥실 모두가 뭉치여   여러민족 우애합작 대가정 건설하세       우리 연변인민들이 자치주창립의  희열을 반영한 노래다.   소수민족자치주는 전국적으로 30인데 그중 연변은 유일한 조선족자치주다. 자치주창립30주년일때 우리 학교에서는  연길경기장에서 펼쳐진 "9. 3"경축활동에 참가했었다. 그해 경축행사에 참석할려 전국 각지역의 조선족들이 연변을 많이 찿아 왔다.       전에는 "9. 3"을 게기로 각촌마다 운동대회를 가지였다. 여름의 농망기를 다 보내고 가을을 맞이하는 마당에 보통3~4일간 운동회를 연다.  경기종목으로는 보통 달리기 씨름 그네 뛰기 축구 배구 농구등이다. 우리 친구는 비암촌에서 씨름일등을 한적이 있다. 그때는 촌에도 사람이 많았다.          동네에서는 소를 잡아 운동원들을 대접하였는데 어른 아이 할것없이 식사할수 있었다. 낮에는 운동하고 저녁에는 모여서 술 마시고  춤판을 벌리였다. 진짜로 잔치판이였다. 그때 씨름일등과 그네 일등은 벽시계를 장품으로 주었다.      가을이 점점 우리에게 다가 온다. 매미소리가 찌르륵 찌르륵 정답게 들려 온다.       가을이 다가옴에 따라 농부들의 마음도 다급해 진다. 올해 농사수입은 과연 어떻게 될까. 기대치 만큼 나올가.  준확한건 모르지만 그래도 심중에는 수자가 있다.  가을이 깊어 감에 따라 일손도 바빠진다. 가을의 정취에 빠지여 가을에 취하여 시기를 놓히면 마무리에서 문제가 생길수  있다.                 가을은 자연의 절기만은 아니다. 농사를 짓지 않는 사람들도 이맘때면 지나간 시간들을 돌이켜보게 된다. 한해의 3분의 2의 시간이 지나 갔다. 여러분야에서 열심히 일하는 친구들도 올해 일은 년초계획대로  추진하였는지. 어떤 성적을 거두 었고 어떤 애로사항에 부딛치였는지. 남은 시간에는 무엇을 중점으로 돌파할것인지 지금부터 미리미리 훝어 보고 대안을 찿아야 할것이다.      가을 하늘이 높아 지고 서늘한  바람이 불어 오니  진짜 기분 좋다. 
98    기분 좋은 하루 댓글:  조회:2291  추천:0  2019-08-30
기분 좋은 하루       아침은 하루의 시작이다. 동녘 하늘에서 붉은해가 불끈 솟아 오르면서 기분 좋은 하루가 시작된다. 사람들은 너나없이 하루의 일과를 시작한다. 어떤 사람은 아침운동으로 어떤 사람은 아침 장보기로 어떤 사람은 소 먹일 풀베기로 하루의 서막을 연다.       아침에  사람마다 중요한 일과가 있으니 바로 아침 식사다. 영양점문가들의 견해에 따르면 아침식사를 잘 해야 오전 활동에 필요한 에너지를 보장할수 있다고 주장 한다. 아침식사를 거르면 신체에 필요한 에너지가 부족하여 몸을 해친다.  하기에"아침은 부자 같이 먹고 저녁은 거지 처럼 먹으라"고 하지 않는가. 헌데 젊은축들은 바쁘다는 핑게로 아침을 잘 먹지 않을 때가 많다.      자기의 신체가 어떻게 만들어지고 생각이 어떻게 형성되고 인생이 어떻게 만들어 지는가를 먹고 보고 만나는 세가지를 통하여  이야기 해보자.      하나. 먹는것을 통해 피와 살을 만들어 진다.    어린애기가 출생하면 모유를 찿는다. 배워준것도 아니지만 천성적으로 모유를 빨아 흡수한다. 어린아이는 인체에 수요되는 모든 영양분을 모유로 해결 받는다. 지금은 슈퍼에 가면 모유수 대신 영양우유제품들이 많지만 학자들의 견해에 따르면 모유수가 그 무엇보다 어린에게 좋다고 한다.  어린이는 모유로 자기의 피와 살을 만드는것이다.      어른도 마찬가지다. 다른 점이라면 어른은 신체에 필요한것을  주동적으로 찿아서 먹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전에 룡정에 이름난 보신탕집이 있었다. 매일 손님으로 북쩍거리는데 비오는 날에는 보신탕이 진짜 제격이다. 사람들은 더운 삼복철에 먹는 보신탕이 몸에 좋다고 여긴다. 우리는 여러가지 야채 고기 곡류 과일 등을 먹음으로써 사람몸에 필요한 영향을 흡수하고 운동을 거쳐  튼튼한 신체를 만든다. 우리가 먹는 것이 피와 살을 만든다 할때 음식물을 절때로 허투로 대할수 없다. 깨끗하고 영양이 있고 신선한것을 선택하여야 한다.       둘. 보고 듣는것을 통해 내 생각이 만들어 진다.    "나다니는 머저리가 집안에 앉아 있는 똑똑이 보다 낫다"라는 속담이 있다. "백문불요 일견"이라는 말도 있는데 보는것의 중요성을 말하였다. 청나라 말기 청정부에서는 공비로 미국에 어린이 유학생을 보내였다. 목적은 이아이들이 미국에서 공부하고 견식을 넓혀 청정부에 보답하기를 바란것이다. 견식이 넓어야 한다. 우물안의 개구리는 하늘이 우물 아구리만 하다고 생각한다.      작가나 시인들은 봄이나 가을이면 농촌에가서 생활체험을 한다. 이른바 땅의 기운을 받는 것이다. 그래야 글이 생동하고 생할미가 나는 것이다. 본다는것은  다만 눈으로 보다는 뜻 외에도 배운다는 뜻이 포함되여 있다. 보고 듣고 하는것을 통해 자연을 배우고 사회를 바라보는 예리한 시각을 가지게 되고 정확한 인생관을 갖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생활속에서 배우고 학교에서 배우고 일터에서 배운다. 부단히 새로운 지식을 습득하여야 지식이 폭발하는 이시대에서 두발을 단단히 붙힐수 있고 살아 남을수 있다. 과거의 밑천만으로는 살기가 힘들다. 다른건 그만두고 지금 위챗결산 방식의 도입으로 현금을 노리던 도적이 적어지였다고 하지 않는가. 사람들이 그만큼 현금휴대가 적어지였다는 말이다. 지금 핸드폰은 과거의 단순한 전화기 개념을 떠나서 사진기 록화기 라지오 록음기 유희기 전자결재 은행업무등 다방면의 공능을 지나고 있다. 핸드폰 하나만 들고 있어도 세상을 내다 볼수 있고 많은 일을 할수 있다.      셋.  만나는 사람을 통해 내 인생이 만들어 진다 .    우리는 살면서 많은 사람을 만나게 된다. 아버지 어머니 선생님 동창 친구 동사자 파트너 령도 등 허다한 사람을 만나고 또 교류하며 공존한다. 인간은 군체동물로서 혼자 살기 힘들다. 만나는 사람은 대체상에 두가지 부류로 나눌수 있다.  하나는 피동적으로 만나게 된 사람들이다. 즉 하늘이 맺어준 인연을 가지고 있는 아버지 어머니 선생님 동창 동사자 령도등 이다. 다른 한가지 부류는 주동적으로 만나 인연을 맺는 사람들인데 친구 파트너 등이다. 이부류에 속하는 사람들과는 애호 흥취 가치관 등 여러면에서 허다한 공동점을 가지고 있다.      사람을 만나다. 이것은 길가에서 누구를 만났다는 말이 아니다. 이것은 장시기 교류하고 합작할수 있는 비교적 고정된 관계를 가진 사람들과의 만남를 말한다. 나의 생각 관점 행동이 다른사람한테 영향을 줄수 있듯이 다른 사람도 나한테 영향을 줄수 있다. 좋은 사람과의 만남은 일생 동안 수혜를 볼수 있다.      성인이 되면 사람들은  좋고 그름에 대한 자기의 판단표준이 있게 되는데 이것은 교육수평 도덕수평 개인경력 등과 밀접한 관계가 된다. 중국말 속담에" 금을 가까히 하면 붉어지고 먹을 가까히 하면 검어진다"는 말이 있다. 좋은 사람과의 만남은 행복하고 즐거운것이다.      힘들때 부를수 있는친구가 있고 기쁠때 같이 동참할수 있는 친구가 있다면  이 일생 헛되히 살지않았다.  부족한것은 부단히 보충하고 남는것은 적극적으로 사회에 반납하여야 한다. 무엇이든 많이 짊어 지고 있으면 힘드니 항상유(有)에서 무(无)를 만들기에 노력해야 한다.       오늘도 기분좋은 하루를 만들기 위하여 우리 다같이 노력하자.       좋은 것을 먹고      좋은 것을 보고     좋은 사람을 만나는      기분 좋은 하루  
97    말한대로 이루어 진다 댓글:  조회:1963  추천:0  2019-08-29
말한대로 이루어 진다       얼마전에 위챗게정에서 어느분이 올린 글을 보았는데 참 마음에 들었다. "말한대로 이루어 집니다. " 비록 글은 간단하지만 함의가 깊은 말이다. 우리는 매일 많은 말을 하게 된다. 이사 소통하려면 우선 말 해야 하고 자기의 견해를 전달하여야 한다. "벙어리 속은 난 에미도 모른다"고 하지 않는가. 말을  함부로 해서는 안되고 바른말 긍정적인 말을 하여야 한다.      말은 자기 생각과 의념을 표달한다. 무엇을 생각하면 무엇을 말하게 되는데 그것을 이루어 내려면 상응한 실천행동을  진행해야 한다. 언어를 통하여 공중에게 자기의 주장을 적극적으로 홍보함으로써 여러 사람들의 리해와 지지를 얻어 내고 자기의 활무대를 넓혀 간다.       사람들은 교류를 통하여 여러 사람들과 단합하고 지혜를 모아서  일을 성사시킨다.   주장을 내 세울때에는 기치 (旗帜)문제뿐만 아니라 대중의 감독을 받자는 의도도 내포되여 있다. 왜서 담배 끊는 사람들이 속으로만 결심하지 않고 대중에게 자기의 용단을 선포하는걸가. 주요하게 감독하여 달라는 부탁과도 같다.       같은 일을 오래동안 반복하노라면 그것이 습관이 된다. 골프운동하는 사람들은 시합에 나가지 않아도 채를 치는 연습을 한다. 연습을 며칠만 중단해도 근육이 원래의 동작을 잊어버려 표준화된 동작을 만들어 내지 못하기 때문이다.  습관이라는것은 엄청난 정부에너지(正负能量)를 가지고 있다. 정에너지는 사람들로 하여금 사업에 신심을 주고 동력을 제공한다. 허나 부에너지는 사람을 점점 나락에 떨어뜨리게 한다. 나쁜습관 이를테면 밤을 새고 술을 과도하게 마시고 담배를 피우는 등이다.      습관을 견지라는데는 의력이 필요하다. 좋은 습관을 만들고 견지하기는 힘들지만 망가 뜨리는데는 잠시 잠깐 이다. 매일 같이 운동을 견지하던 사람도 하루를 안하면 그 상태를 자기가 알고 이틀 안하면 교련이알고 사흩을 안하면 관중이 안다고 한다. 자기에 대한 요구를 떨어뜨리면 아무리 우수한 사람도 쉽게 타락할수 있다.       여러가지 습관이 종합체를 이루어 사람들의 성격이 형성된다. 성격의 형성에는 시간이 필요한데  내인과 외인의 영향을 받는다. 성격은 보통 선천적인 인소가 많으나 후천적인 인소에 의하여 변할수도 있다.   군대에 갔다온 사람들은 보편적으로 성격이 시원시원하고 원칙을 지키며 부지런하다. 다 군대라는 이 특수한환경이 만들어낸 성격이다. 그리하여 군대 성격이라는 말이 나왔다. 일단 강인한 성격이 형성되면 어떤 역경속에서도 곤난을 전승할수 있고 정확한 견해가 나오고 그에 따른 처사방법이 나온다.      성격이 급하다.  성격이 느지다. 성격이 불같다. 이런것은 매개인의 성격을 묘사하는 말인데 사람의 성격은 일단 형성되면 쉽게 변하지 않는다. 성격이 좋은 사람은 아무리 큰 곤난에 부딛쳐도 흔들리지 않고 침착하며 조리가 있다. 성격도 일종 재부다.      성격이 좋다는 말은  인간세상을 대하는 태도가 적극적이고 락관적이며 많은 사람들과 어울릴수 있고 앞날에 대한 신심이 가득하다는 말로도 풀이 할수 있다.  또 일에 부디치면 회피하거나 소극적이며 책임을 다른 사람한테 전가하려는 사람들도 있는데 총체적으로 보면 에네지가 부족하며 그네들의 인생은 항상 음울하며 밝지 못하다.      삶이란 긴것도 아니다. 제한된 시간내에  여러가지 적극적인 요소들을 재 종합하고 제고하여야 힘이 있고 밝고  찬란한 미래가 도출될수 있다.  바른성격의 소지자들은 대부분 대인관계가 원할하고  내밀성이 있고 앞날에 대해 신심으로 충만되여 있다.     뭐나 적극적으로 생각해야 힘이 생기고 용기가 생긴다. 좋은 말을 많이 하고 나쁜 말은 하지 말고 상심한말 힘빠진 말을 적게해야 한다. 좋은 착상이 있으면 바로 행동에 옮기여야 한다. 행동력이 강해야 얻을 것이 있고 보장이 생긴다.   남의 시를 퍼온것이다.   생각이 말이 되고, 말이 행동이 되고, 행동이 습관이 되고, 습관이 성격이 되고, 성격이 운명이 되어, 당신의 삶을 결정짓습니다. 
96    술자리 댓글:  조회:1950  추천:0  2019-08-27
    술 자리        술 마시는 사람이라면 한해에 한번 쯤은 술 마시고 취해본 경험이 있을 것이다.  취할려고 마신술은 아니지만 환경의 영향으로 주동적이든 피동적이든 많이 마실때가 있다. 술을 많이 마시면 취하고 취하면 제정신이 아니다. 가장 큰 특점이 큰 소리를 치고 사춘을 기와집 지어 주고 호랑이 잡던 이야기를 한다.       친구들끼리 라면 호상 리해하고 지나 가고 말지만 같은 기관에 출근하는 사람들이라면 어떤 사람들은 그것을 흠잡아 두고 두고 말하는데 영향이 좋지 않다. 좋을려고 마신술이 역 작용할수도 있다. 남을 해꾸려는 마음은 없어야지만 방비하는 마음은 없을 수가 없다.       어떤 사람은 천성적으로 술량이 크다.  반근은 기본이고 기분이 좋다 하면 7~8냥도 어렵지 않다. 한근도 별것이 아니다. 그런 친구들과 술을 마시려면 의레 주저심이 들 때가 있다. 비록 지금은 과거와 달라서 술을 강권하는 현상이 적다. 누가 마시지 않아도 별말이 없다. 그런데 어떤 장소는 안 마실 수가 없다. 문제는 술상에 참석자가 많을 경우다. "저친구 따른 술은 마시고 내가 따른 술은 왜 않하냐 ?무슨 의견이 있냐 ?"는 말에는 변명거리도 없다. 그러니 주는 술 다 마시고 나면 이튿날에는  끙끙 앓기도 한다.        그러니 술상에 앉는다 하면 기본적으로 반근 주량은 되여야 무난하게 참석할수  있다. 그정도 않되는 사람은 남보기도 밉깡스럽고 자기도 힘드니 멋 적다. 그나마 우리 연길사람들은 맥주를 즐겨 마시니 그 독한 백주는  안해도 좋다. 특별한 행사를 제외 하고는 보통 맥주로 통할수 있다. 허나 외지에 나가면 그동네 법에 따라야 한다. 친구 사이라면 별일 없지만 첫면목에 주인이 백주마시는데 기어이 맥주를 할수도 없다. 울며 겨자먹기다.      친구가 말했다. "엄숙한 장소에서는 백주를 마신다"고 말이다. 지당한 말이다. 그것도 도수 높은 술을 마신다. 중국사람들은 술상에서 혁명할때가 많다. 중요한 의제는 술상에서 상논하고  해결 본다.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일은 정식으로 회의를 열고 진지하게 토론하는데 형식에 끝힐뿐이다. 누구와 같이 술을 마시는가를 보면 그사람의 사교권을 알수 있고 능력을 가늠할수 있다.      지금 공금으로 손님접대를 할려면 요구사항이 엄격하다. 우선 술과 담배는 근본 올릴수 없다. 손님은 공무접대서류를 가져와야하고 참석자명단이며  료리는 무엇을 올리였고 지출은 어떤 표준으로 얼마하였다는 모든 수속이 구전하여야 결산 받을수 있다. 그것도 한개 공작조에 한하여 한번 뿐이다. 그러니 접대부문에서도 번거로움을 피하려고 식사를 따로 안배하지 않고 직공식당에서 부페식으로 식사를 안배한다.  물론 표준에 따라 밥값을 치러야 한다.      이상은 어지까지나 공식적인 장소에서 하는 방식이다. 회사나 기관에서 근무하는 사람들은 술 자리에가면 누가 말하지 않아도 자기 앉을 자리를 안다. 다 배워서 아는 것이다. 그리고 술을 자제하려고한다.      민간적인 차원의 술자리는 말도 많고 일도 많다. 무슨 사람들의 차원이 틀린다하기 앞서 어느 정도의 규제가 없기 때문이다. 특히 우리 민족은 이전에 행사가 있다하면 술을 마시고 술을 마신다하면 취할때까지 마시고 뒤끝에는 싸움판이 벌어질 때가 많았다. 술뒤끝이 조용하다 싶으면 오히려 뭔가 부족할 지경이였다.      절친의 조직으로 몇십년을 못보았던 동창 몇명을 만나게 되였다. 처음에는 알아보기도 힘들었다. 술을 마시면서 이야기를 하니 하나 둘 뭔가 생각나기도 하였다.      그렇다고 하고 한잔두잔 마시기 시작하였다. 친구들의 량해를 구하고 나는 맥주를 다른 친구들은 백주를 마시였다. 오늘은 오래만에 친구들과 만났으니 어울려 끝날때까지 마시여야 한다고 각오 했다. 대방이 나를 잘 안다는데 나만 모르겠다 하는 것도 실례인지라 고개를 끄덕이며 훌쩍훌쩍 맥주를 마시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세명이 백주 한병이 밑굽 났다. 이전에 나도 53도 술을 마셔 보았는데 백주가 배에 들어 갈 때는  명지끝까지 쨍해 난다. 원래 선천적으로 술량이 적은지라 나는 한번만 술이 과하여도 며칠씩 미열이 간다. 하여 웬만해서는 백주를 마시지 않는다. 두번째 병도 얼마가지 못했다. 어느정도 알딸딸하면 건배를 제의하는데 그럴 때마다 술잔을 비운다. 그러니 속도가 빠를 수 밖에 없다. 차츰 목소리가 높아지였다. 우리 사이는 허물 없이 없다. 관계가 좋다. 이런 차원에서 이야기하는데 소리가 높다. 내가 보건대 술취하는 두번째 단계에 들어 섰다.       술을 마시는 첫번째 단계로는 소근소근이야기 하고 미소를 짓으며 조금씩 마신다. 두번째 단계로는 큰 소리로 말하며 큰 모금으로 마신다. 세번째 단계로는 호언장담하며 컵채로 마시는데 여기가 고조이다. 네번째 단계로는 말에 조리가 없고 혼자 중얼거리는데  술은 얼마 못 마신다.        사람마다 주량은 다를 지라도 취하는 계단으로 들어가는 순서는 기본상 같다. 두번째 단계가 지나 가니 아니가 다를가 젊어서 호랑이 잡던 옛말이 나온다. 힘 자랑도 한다. 내가 얼마나 세다고 말한다. 사람이 열정적이고 인품이 좋아서 그럴수도 있으랴만 어디까지나 흐트러져가는 표현이다.      세상에 가장 힘든 것이 취한 사람과의 대화다. 안들어 줄려니 자꾸 손을 잡으며 흔들어 준다. 이미 한 말을  또 곱씹는다. 그러면서 강조하는것이 우리 사이가 좋다는 이야기다. 좀 소통이 될가하면 또 취한소리가 나온다. 옛날에 나는 어느 동네서 어떻게 소문난 대장이다. 내라면 모르는 사람 없다. 하여튼 허공에 붕 떠있는 현재와는 상관없는 이야기다.      눌러있으려니 취한소리 듣기가 질겁고  떠나려고 하니 친구보기가 미안하다. 한참 주정뱅이 소리 듣다가 보니  이제는 이미 네번째 단계에 진입하였다 . 혼자 말도 하고 방금한 말을 또 곱씹기도 한다.  끝이 보이지 않는다. 이때 나는 그들을 동원하여 자리를 끝내였다.       바깥의 공가는 시원하고 사람들의 표정은 밝다. 술도 보약이라는데 적당하게 마시면 친구간의 우정에도 도움이 되고 몸에도 좋다. 나도 취할때가 있지만 원래 주량이 적다 보니 당해내기가 힘들다. 하여 기분 좋은 두번째 단계에서 끝내려고  시도한다. 조금 부족하다 할때가 헤여지기 가장 적합한 시간이다.       세월도 흐르고 사람도 변했다. 맨 주먹으로 호랑이 잡던 이야기하여 보아야 누가 별로 먹혀 들지도 않는다. 혼자 마시는 술이 아닌바 하고는 술자리도 학문이다. 자기만 말하고 다른 사람의 화제를 막는 것도 큰 실례다. 누구나 말할 기회를 주어야 하고 화제는 동동으로 관심하는 사항이여야 한다.  엉뚱한 소재를 끌어 들인다거나 좌중에 참석한 사람한테 민감한 말은 하지 말아야 한다. 그것도 배려다.         술은 대단히 중요한 사교 매제물이다. 좋게 마시면 우의를 깊이하고 나쁘게 마시면 원쑤를 만든다. 몸에 해를 주면서 까지 술을 가지고 씨름하면 남들이 웃는다. 친구간 호흡이 통하면 땅콩 한접시에 명태한마리 놓고도 얼마든지 재미나게 맥주를 마실 수 있다.      술품이 인품이라고 술마시는 스타일을 보면 어느정도 감이 온다. 자중하는것이 술자리의 기본 스타일로 되여야 한다. 
95    이도백하 댓글:  조회:1910  추천:0  2019-08-27
이도백하       이도백하진은 나젊은 도시 세인의 관심을 가지는 도시다. 도시전체가 4A급 유람구다. 이로하여 유람객들은 장백산뿐만 아니라 이도백하에 대하여서도 많은 관심을 가지고 찿아 오고 있다.          이도백하진는 행정구역상 안도현에 귀속된다. 그럼 장백산보호관리위원회는 뭐지? 쉽게 말하면 우리 안도현이도백하진관할구역에 세워진 길림성정부의 파출기구다. 그 관할범위는 이도백하진 ,무송현,장백현의 일부분 포함하는데 면적은 6718평방킬로메터 인구는 15만명에 이른다. 그러니  간단하게 말하면 땅은 연변 땅이되 관리는 성에서 한다는 말이다. 사람을 놓고 말할진대 호적는 여전히 안도현 호적이나 그가 하는 사업은 성에서 관리한다.       특히는 10여년간의 건설을 거쳐 이도백하는 천지개벽의 변화를 가져 왔다. 몇년전에 나는 이도백화를 다녀 왔는데 원래 진의 모습은 아무것도 찿아 볼수 없었다. 도시입구로부터 시작하여 완전히 새도로 새건물 새형상이다.  구라파 작은 도시의 표준으로 설계하였다고 한다. 그때 친구의 제안으로 자전거를 대여하고 진을 둘러 보았다. 자전거 전용도로 역시 표준이 높고 건설이 잘 되였다는 강한 느낌을 받았다.       이도백하의 대표적 기념물은 미인송이다. 미인송은 밋밋하게 곧게 자라는데  키는 보통20메터30메터 사이고 나무꼭대기에 멋진 가지들이 자란다. 나이가 많은 것은 300살도 더되였다. 미인송은 국가보호식물이다. 원래 도시를 원시산림에 안에 건설하다 보니 이도백하진에서는 미인송을 쉽게 찿아 볼수 있다.         내가 처음 이도백하를 갔을 때는 1980년도 였다. 그때 전주 중학생«3호학생»하령영활동을 이도백하진에서 가지였다. 전주각지에서 온 친구들은 연길에서 뻐스를 타고 이도백하에 도착하였는데 주숙은 어느 림업소학교 교실에서 해결하였다. 침대가 없어서 학생책상을 붙혀 놓고 그 위에 누워서 잣다.  진짜 하령영답다.       낮에는 학생들을 해방패트럭에싣고 폭포수 근처까지 가서 내려 준다. 온하루  활동하다가 저녁이면 데려 온다. 아마 이런식으로 7일간 있었던것 같다. 덕분에 우리는 운동선수 숙소에서 시작하여 걸어서 기상대까지 가서 천지를 내려다 볼수도 있었다. 어린 나이라 힘들고 지쳤지만 그때 발밑에서 부석돌이 쿵쿵 소리 나던 일이 재미있었다. 벼랑길을 톱아 천지가에 가서  시원한 천지물에 손을 담구어도 보았다. 그때만 해도 유람객이 많지 않았다.       정심밥이라고 해야  한사람당 빵하나 계란한개 사이다 한병 사과 한알씩 이다. 처음에는 좋았는데 며칠 먹고 나니 먹기가 힘들었다. 그때는 모욕통 이래야 담장으로 둘레를 막아 놓은 노천 온탕이였다. 련며칠 같이 놀다 보니 친구를 사귀기도 하였다. 후일 연변일중에 붙어 가보니 그때 친구 두명을 만날수 있었다.       학교를 나와 나는 기관에 출근하였다. 그때  과장님이 나를 데리고 이도백하림업국집체기업재무처로 검사하려 갔었다. 집체기업소득세 검사였는데 주요하게 불합리한 비용을 찿아 내여 세금을 계산하는 방식이였다. 일을 끝내고 나니 재무처장님이 우리를 자연보호구 전람관을 구경시켜 주었다. 거기서 처음으로 호랑이 표본 매화사슴표본등을 보았다.       검사부문에 조동된후로는 이도백하를 자주 다녀 왔다. 그때 이도백하에는 세무분국이 설치되여 있었다. 해부식검사라는 것이 있었는데 한번 가면 10여일씩 주숙하며 검사를 다니였다. 쌩쌩 눈보라치는 겨울에 솜외투를 걸치고 이집 저집 상가(商家)를다니며 경영상황도 조사하고 장부검사도 하였다. 인상 깊은 것은 그때 검사과정에 지부회의를 소집한것이다. 지금 말라면 정상이지만 당시로 말하면 아주 급진적 행동이라 할수 있다.       1999년도 겨울 친구들끼리 이도백하를 방문한적이 있다. 승용차두대를 끌고 갔는데 돌아 올때 호상 대방차를 탓겠거니 하는 통에 2명을 두고 오고 말았다. 반시간 후에야 발견하여 다시 돌아가 싣고 오는 연극을 벌리기도 하였다. 그때 눈이 많이 내리였다. 하도 길의 눈을 치였으니 말이지 이니면 매우 위험한 로정이였다.       오늘은 일보려 이도백하로 출발하였다. 뻐스가 로예령에 톱는데 비가 내린다. 삼도를 지나니 날이 맑아 지고 이도백하에 도착하니 언제 그랬냐 싶게 날이 활짝 개이였다.      저녁 먹고 거리구경에 나섰다. 구라파식의 특색 있는 건물들은 조형등의 은은한 빛을 받아 더욱 아름다운 자태를 뽐낸다.  유람객들은 시원한 가을 바람을 맞으며 삼삼오오 동무하여 거리구경을 다닌다. 거리량안의 가게들에는 손님으로 북적거린다. 이도백하강 량안은 멋지게 꾸며 놓았다. 엷은 물안개가 낀 강면에서 야생중화추사야(中华秋沙鸭)푸드득 푸드득 날개를 치며 무리지어 날아다닌다. 진짜 인류와 자연이 공생하는 멋진 도시다.       이제 명년이면 고속도로가 통하고 또 좀 더지나면 고속렬차가 통한다고 한다. 그때면 이도백하는 진짜로 세계로 통하는 문이 열린셈이다. 그때가 되면 세계방방곡곡의 유럼객들이 구름처럼 이도백하에 모여들것이다. 
94    꽃동네 울동네 댓글:  조회:1868  추천:1  2019-08-22
  꽃동네 울동네         꽃동네하면 자연히 꽃들이 만발한 아름다움을 상상한다. 예전에는 공원같은 특정된 장소에서 꽃들이 아름다움을 느낄수 있었는데 지금은 도시 곳곳에서 꽃들을 볼수 있다. 도시건설중 꽃들은 아름다움을 담당한다      우리 연변도 도시건설 차원이 확실히 높아지였다. 예전에 땅위에 집 짓는것이 위주였다면 지금은 나무도 꽃도 함께 심는다.  덕분에 시민들은 꽃도  맘껏 감상할수 있는  꽃동네에서 생활할수 있게 되였다.          우리동네에 얼마전 넓다란 공공뻐스 주차장이 신축되였다. 콩크리트 주차장이 만들어지자 바람으로 원림부문에서 찿아 와서 주변에 꽃을  옮게 심는것이였다. 지금은 완전히 멋진 화단을 이루었다. 이름 모를 여러가지 꽃들이 만발하였는데 울동네가 명실공이 꽃동네로 변하였다. 그래서 기분이 좋다.       도시에서는 전문으로 꽃을 관리하는 원림부문이 있다. 지금은  보통 원림회사들이 일을 맡아 관리하는 방식을 취하고 있는데 그들의 수입도 이만저만이 아니다. 그들은 아침일찍 나와 물도 주고 풀도 뽑는다.        정부에서는 도시의 곳곳에 다양한 품종의 꽃과 나무를 심어 놓음으로서 환경도 미화하고 시민들의 마음도 즐겁게 하였다. 덕분에 도시는 점점 정갈해지고 아름답게 변모해 간다. 아름다운 도시환경은 유람객 유치에서도 한몫을  톡톡히 한다. 누이 좋고 매부 좋은격이다. 세금을 이런 곳에 쓰는 것이 바로 혜민정책의 구체적인 표현이다. 잘하는 일이다.        사람들 눈에는 어여쁜 꽃의 자태만 보이지만 실은 꽃 가꾸기는  힘도 들고 돈도 드는 일이다.  사람들의 손길이 가지 않으면 화단은 금방 풀밭으로 변해버린다. 아침장에 나가보나 꽃 한포기에 1원이다. 그러니 사람마다 꽃을 흠상할뿐만아니라 꽃을사랑하고 아끼여야 한다. 시민들의 소질이 보여지는 행위다.      근년에 여러 도시에서는 화해(花海)만들기에 열중하고 있다. 도문의 화해는 엄청 크고 룡정의 화해는 시설이 잘되여 있다. 일전에 화룡에 가게 되였는데 시가지에 들어서자 오른편에 아기자기한  꽃밭이 조성되여 있었다.         꽃밭에는 정자도 설치 되여 있고 련꽃늪도 있었는데 흰 너울을 쓴 신부와 양복차림의 신랑이 결혼기념사진을 찍고 있었다. 결혼차량이 줄지어 서 있는것으로 보아 아마 결혼식날 반드시 들려 가는 코스로  선정된것 같았다. 꽃밭은 하나의 풍경선으로 되였고  결혼하는 신랑신부의들의 환영을 받고 있다.      꽃을 사랑하는건 도시사람들 뿐이 아니다. 사회주의 새농촌건설의 템포에 맞추어 촌에서도 마을마다 꽃을 심고 있다. 얼마전 화룡시 남평진 고령촌에 가보았는데 골목마다 꽃을 심었다.   몇해전 우리는 룡정선구촌에가 코스모스씨를 뿌린적이 있었다. 가을이 되면 코스모스가 만발하는데 진짜로 멋지고 랑만에 차 넘친다.         코스모스 한들한들 피어 있는 길       향기로운 가을 길을 걸어 갑니다       기다리는 마음같이 초조하여라       단풍 같은 마음으로 노래합니다       한번은 친구가우리마반촌으로놀러오게되였다.마을입구에 들어 서자 친구가 하는 말이 "마을이 깨끗하다"는 것이였다. 우리 마을에서는 촌민들을 조직하여 정기적으로 길 청소를 한다.                마을에서는 길옆에 코스모스며 백일홍이며 봉선화며 국화등을 심어 놓았다. 여름부터 가을까지 여러가지 꽃들이 피여 난다. 하루 일과를 마치고 저녁식사후 동네마실을 다니기엔 이보다 더없이 좋은 꽃길이 없다.       기실 우리 마을은 부유한 마을은 아니다. 촌민중에  노약자나 환자들이 적지 않다. 그러나 촌민들이 아름다운 생활에 대한 동경과 미를 추구하는 마음 넉넉한 인품은 경제사정과 별관계가 없다. 잘 사는 사람들만 꽃을 좋아 한다는 법이 없다. 적게 가진 사람도 년로한 사람도 얼마든지 꽃을 좋아 할수 있고 또 좋아 하고 있다.           꽃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생활을 사랑하는 사람들이다. 우리마을 사람들은  항상 거리를 깨끗히 청소하고  길거리의 꽃을 보듬는다. 우리 민족마을의 특점이라 할수 있다.       마을 사람들은  백일홍같이 일편단심이고 코스모스같이 소박하다. 우리마을 사람들은 곤난을 두려워 하지 않고 항상 아름다운 생활을 추구한다.  마음속에는 새 생활에 대한 동경으로 가득차 있다.       이런동네가 꽃동네 우리동네다. 일전에 나는 지인의 소개로 «꽃동네 울동네»라는 이쁜이름을 가진 위챗계정에 가입하게 되였다. 팀원들중에는 꽃을 좋아하는 분들이 많았다. 여러가지 아름다운 꽃을 촬영하여 작품을 올리는데 실로 «꽃동네 울동네»다.       계정에서는 방주교수님과 여러업종에 종사하시는 팀원들이 관심화제를  토론도하고 교류도 한다. 어찌보면 인생교류의 한마당이고 배움의 연장선이다.       꽃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생활을 사랑하는 사람들이다. 우리에게는 자연의 꽃도 필요하지만 마음속의 꽃이 더욱 필요하다. 자연의 꽃은 누구에게 보여주기 위함이라면 마음속의 꽃은  참다운 인생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마음가짐이다.  아름다운 마음 아름다운 행실 이런  것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우리 사회를 더욱 아릅답게 부각할것이다.       자연의 꽃은 한계절 이지만 마음속의 꽃은 계절과 상관없이 영원하다.    
93    우리말 우리글 댓글:  조회:1796  추천:1  2019-08-20
우리말 우리글        이제 한달이 지나면 수필을 쓰기 시작한지 일년이 된다. 누가 나보고 수필을 쓰라고 요구한 적도 없고  강요한 적은 더더욱 없다.  그런데 내가 왜서 이런일에 몰두하는 걸가.       지난해 국경절 전야에 나는 서기의 제안으로 화룡고중설립75주년 행사에 참가하게 되였다.  학생들의 축하공연도 보고 교정도 둘러 보았다. 내가 다닐때 학교흔적은 아무것도 찿아 볼수 없었는데 학교는 여전히 화룡고중이다. 하지장(贺知章)의 시 한구절이 떠올랐다.       어려서 집을 떠나 나이 들어 돌아 왔네     고향말씨 여전한데 귀밑머리 희였네     어린아이 만났는데 안면이 없다네     웃으며  손님은 어디서 오는가 묻네       행사에 참가한분들은 년세가 많건 적건 다 학우라는 동일한 신분을 가지고 있다. 평소에 모교를 방문하였다면 시(诗)에서 나오는 장면이 재현될법 하다. 후배들이 나보고 어디에서 왔냐고 묻지 않을가.        고중문을 나온지 얼마되지 않는 같은데 저 숙사 창문에 기대여 연길가는 뻐스를 보며 집 생각을 했던 때가 어제 같은데 다 옛말이 되였다. 앞을 보며 사는 인생이지만 뒤를 안돌아 볼수도 없다.       행사를 마치고 집에 돌아온 나는 무엇인가 적어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떠오르는 기억속의 이야기를 학우들과 나누는것도 좋겠다는 생각에서였다.글은 이렇게 시작을 떼였다. 지난해 국경절로부터 시작하여 나름대로의 주제를 선택하여 수필이라는 쟝르로 자기의 주장과 견해를 력설하였다.        서기는 조글로를 곳잘 리용하였다. 글을 써서 친구한테 부탁하였더니 인차 편집하여 조글로에 올려 놓았다. 고중문을 나와서 조선글로 문장을 써보기는 처음이였다. 반응은 꽤나 좋았다.        얼마전에 지인 몇분과 같이 우리글에 대한 이야기를 나눈적이 있었다.  우리글에 자부심을 가지고 있고 또한 많은 글을  발표 해온 분들이였다.  나는  말했다.    "우선 조선문자로 된글이 많았으면 좋겠다. 그리고 조선글로 된 문장을 읽는 사람이 많았으면 좋겠다. "        글로벌시대 때문인지 아니면 경제시대때문인지 사람들은 점점 리익과 관계되는것에 집착하는 같다. 돈이 되는 것이라면 리익이 되는 것이라면 무엇도 서슴치 않는다. 언어와 문자에 대한 태도 역시 그렇다. 중국에서 살려면 중국말과 글을 잘 알아야 하는 것은 필수며 또한 당연하다. 그러나 자기민족의 언어와 글을 버리면 안된다. 민족특성중 가장 중요한것이 언어와 문자다. 이것을 잃으면 다 잃은것과 다름없다.       먼데 까지는 몰라도 우리 세대까지는 그래도 전통교육을 받는 사람들이다. 자기것을 자기가 아끼지 않으면 남들이 아끼지 않는다. 자기 본신도 소중히 여기지 않는데 뉘가 소중히 여기여 주겠는가. 우리말과 우리글을 우리가 아끼고 소중히 여기여야  남들도 귀한것임을 알아 준다.       거창한 발언인것 같지만 기실은 여러분들의 생각이다. 적은 부류의 사람이나마 자주 조선글로 마음을 표달하고 교류하노라면 우리의 민족성이 유지되고 발전되는데 실질적인 도움이 될것이다. 매개인의 작은 노력이 결국에는 큰 결실을 맺을 것이다.       기쁘게도 우리 주변에 이런 노력을 하는 분들이 적지 않다. 여러개 문학성췬에 들어가 보았는데 열성자들이 적지 않다.  경상적으로 작품을 올리는 분들도 있고 열정적으로 댓글을 남기는 분들도 있다.  어떤분들은 발언하지 않지만 췬에서 탈출하지 않는다는것 만으로도 관심이 있다는 표현이다.      민간적인 노력 역이 대단하다. 정식 신문이나 잡지는 문턱이 높아 못 오른다면 자기들끼리라도 교류하고 즐기자. 시도 좋고 소설도 좋다. 주류사상에 어긋나지 않고 문명사회건설에 도움이되는 우리글은 다 제창할바이다. 하물며 문학성췬에는 유명한 학자 교수 작가 시인들이 적지 않다. 그분들의 우세를 발휘하여 우리 췬의 품격을 올리는것도 좋은 일이다.       민족의 명맥을 잇어 나가는데는 글만한것이 없다. 현재 우리글로된 신문이나 잡지가 발행부수가 적다.  한족글로된 잡지는 웬만하면 발행부수가 몇만부을 넘는다. 헌데 우리 잡지는 고작 만부에도 못 미친다.  우리민족의 인구와 관계되는 일이지만 사고 하여야할 문제다. 당년의 «연변문예»잡지는 빌려 가면서 보았다.       자기의 부족한 필력이나마 부지런히 발휘하여 독자들이 관심하고 흥미가지는는 주제를 다루어 오늘도 우리글로 된 문장 한편을 제공하였다면 이로써 나는 만족이다. 누구의 시비에도 걸려 들고 싶지 않다. 문학은 쟁론이 많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전문업에 종사하는 분들의 이야기다. 구쏘련영화«향촌의 교사»에서 나오는 한마디가 있다. "가슴을 들어 내고 맨발바람에 헌 솜옷을 걸치였다만  부끄러워 말고 앞을 보아라. 앞에는 광명대로가 있다. "       수필이라는 쟝르가 구애없이 자기의 주장과 견해를 다룰수 있다는데서 나의 수선(首选)으로 되였다. 스마트폰이 있음으로하여 언제 어디서나 짬짬의 시간도 리용하여 글을 쓸수 있었다.   나의 모든 수필은 스마트폰의 덕분이다.      매번 첫사람으로 읽어 주고 수개하고 인터넷에  올려준 친구에게 감사드린다. 조글로에 감사드린다. 조글로가 있었기에 작품이 독자들을 만날수 있었다.      미흡한 글이나마 고무하여 주고 댓글을 달아준 독자 여러분에게 감사드린다.        
92    비암산 풍경구 댓글:  조회:2130  추천:0  2019-08-19
 비암산 풍경구         오늘 룡정에 갔는데 친구가 나보고 요지음 비암산에 가 보았냐고 묻는다. 하여 나는 금년 단오에 다녀 온적이 있다고 답했다. 그랬더니 지금은 또 다른 모습이라며  가보자고 제안해왔다. 요지음 룡정 비암산풍경구가 인기몰이를 한단다. 구질구질 내리던 비도 끊었겠다 구경도 할겸 등산도 할겸 그렇게 하자고 하였다.        차는 시내를 빠져나와 비암산방향으로 달리였다. 길옆의 강냉이 밭은 푸르디 푸른 장사진을 이루었다. 밭도 푸르고 산도 푸르다. 공로 옆 멀지 않은 곳에서는 유람비행기가  빠른 속도로 달리며 리륙준비를 하고 있었다. 이윽고 고객 한명을 실은 유람비행기가 하늘로 날아 올랐다.         평일인데도 룡정경기장 주차당에 차량이 적지 않았다.  유람객들을 모시고 온 큰 뻐스들도 즐비하게 서있었다. 오늘은 평일이라 유람객들중 나이 지긋한 분들이 많고 젊은 축들은 적다. 한국에서 온 단체유람객들도 꽤나 보인다. 룡정이라하면 한국에서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다. 항일시인 윤동주의 고향이 바로 룡정이다. 소설«인간문제»의 작가 강경애가 생활했던 곳이기도 하다.          우리는 널판을 깐 잔도(栈道)를 따라 걸었다. 길 량켠에는 여러가지 꽃들이 만발하였다. 이른바 화해(花海)다. 꽃 밭머리에는 꽃의 이름을 중국글과 조선글로 적어 관광객들에게 알여 주었다. 전에는 보지 못했던 품종이 아주 많았다. 멀리  바라 보아도 꽃이고 또 꽃이다. 꽃밭가운데는 정자도 있고 풍차도 있다.         화해라는 말을  나는 2016년 도문 친구한테서 처음 들어 보았다. 친구가하는 말이 일광산오르는 길옆에 화해를 조성한다고 했다. 그때 화해라는 단어에 대하여 감탄이 나왔다. 꽃의 바다!         룡정비암산 풍경구 화해는 2017년에 만들어 지였다. 그해 여름에  꽃구경을 왔는데 비암산으로 통하는 길이며 주차장이 과거에 비하여 혁신적인  변화를 가져 왔었다. 내가 룡정에서 사업할때  비암산에서 직원등산시합을 조직한적이 있었다. 그때 체육장에서 기상대방향으로 가는 길은 비포장도로였고 길량측에는 억새와 쑥대가 무성했다.        정부의 비암산유람구 개발결정에 따라 유람구는 이 몇년래 천지개벽의 변화를 가져 왔다. 우선 차길을  닦고 많은 나무와 꽃을 심었다. 꽃구경하는 잔도는 모두 널판자를 깔고 구역마다 표시판을 설치하였다. 놀이 사설도 많이 증설되였다. 마천륜(摩天轮) 들어섰고 유리다리도 만들고 삭도도 설치하였다. 지금도 건설중인 대형 오락시설이 여러 군데다.         룡정비암산의 대표적인 기념물이라고 하면 일송정이다. 30년대 실제로 비암산에 일송정이라고 있었고 항일지사들이 그곳에 모여서 항일구국밀회를 하였다고 한다. 한국노래"선구자"에서 일송정이 나온다.       일송정 푸른 솔은 늙어 늙어 갔어도     한줄기 해란강은 천년 두고 흐른다     지난날 강가에서 말 달리던 선구자     지금은 어느 곳에 거친 꿈이 깊었나       2017년 3월초 반장 서기 나 3명이 룡정력사 탐방길에 올랐다. 먼저 명동에 있는 유동주생가를 배알하고 다시 차를 돌려 비암산을 등산하기로  하였다. 란주에     있는 동창 허시인은 윤동주의 시를 몽땅 중국말로 번역한 괴짜다. 듣는바에 의하면 조선말시를 중국말로 번역할수 있는 사람이 몇명 안된단다.      그때 길에는 눈이 질적거리였다. 일단 차를  비암산밑의 주차장에 세우고 길을 따라 올라갔다. 올라가는 등산객 내려 가는 하산객 적지 않았다.  이 몇년간의 개발을 거쳐 비암산이 룡정의 대표적 등산코스가 되였다. 연길사람들이 모아산 등산하듯 룡정사람들은 비암산을 즐겨 오른다.      일송정에 이르니 여느 등산조직에서 기념촬영하고 있었다 . 그분들의 요청으로 사진 몇장 찍어 주었더니 우리 보고 기념사진 찍어 주겠다고 한다. 하여 잊을수 없는 기념사진을 남기였다.     그해 봄 비암산 서쪽산자락에 자리 잡은 동성이 고향인 청도 김사장이 왔었다. 아버지의 골회을 고향에 모시기 위하여 서였다.  그해 추석 김사장은 부인과 같이 제사지내려 왔었다. 일정을 다본 어느날 우리는 같이 전문 비암산풍경구를 돌아 보았다. 때는 늦가을이라 어떤 꽃들은 말라 가고 있었지만  그래도 화해의 기본틀은 선명하게 볼수 있었다. 뒤끝에 무론 맥주 몇병하였다.      친구와 같이 이야기 나누며 한참 올라 오니 큰길  굽이돌이다. 친구가 큰길로 걷지 말고 잔도 따라 걷자고 한다. 록음이 우거진 잔도는 산굽이를 따라 길을 내였는데 매우 시원하였다. 진짜 신체에 좋은 음이온이 많이 집중된 곳이였다. 벼랑타고  흘러내리는 물이 이따금 사람 몸에 튕긴다. 마치 깊은 산림속에 들어간 느낌이다.   잔도는 올리막도 이고 내리막도 있다. 불현듯 나무가지 사이로 유리 다리가 보였다. 그위를 걷는 사람들도 보인다. 친구가 이 잔도를 리용한것은 원래 유리다리를 구경시키기 위해서였다. 잔도 따라 산정에 오르니 평강벌이 한눈에 시원히 안겨 온다.       비암산은 전체적으로 볼때 8자형을 하고 있다. 유리다리는 두개의 봉우리사이를 잇고 있다도 보면 된다. 다리 시작점에서는 매개인에게 천으로 된 덫신을 준다. 아마 유리가 긁히는것을 방지하려는 조치인가 보다. 유리다리에 올라서 아래를 내려다 보니 현기증이 날지경이다.  골짜기 밑이 아칠하게 보인다. 돌아오는 손님중에는 다른 사람에게 들려오다 싶이 하는  사람도 보인다. "이미 올라도 섯을러니 대장부답게 앞으로 "이렇게 자아 고무 해놓고 앞만 보며 걸으니 별로 무서운것도 없었다.         때로는 여유가 생기여 좌우를 둘러보기도 하였다. 헌데 이때 "짜르릉"하는 유리 깨여지는 소리가 나고 발밑의 유리에는 금이 간다. 화들짝 놀랐다. 유람객들의 호기심을 끌기 위하여 설치된5D영상인것이다. 절반쯤 갔는데 보슬비가 내린다. 나는 속도를 내여 마지막 로선을 완성하였다.  돌아 올때는 제법 비가 내린다.  나는 빠른 걸음으로 원점을 돌아 왔다.        원점 바로 근처에 기상건물이 있었다. 여기로 부터는 포장길이 있었는데  산중턱의 일송정 주차장과 련결되였다. 일송정 볼려 온 손님들이 북적거린다. 오르고 내리고 많이 걸었는지라 하산은 유람차를 리용하였다. 한사람당 10원인데 리용하는 사람이 많았다.           다른 동네 유람지를 가보아야 별것 아니다. 이정도면 우리의 기초시설은 아주 잘된것이다. 유람지의 볼거리 듣을 거리 놀거리 먹거리가 다 갖추어진 셈이다. 관건은 시간벌기다. 오전에 왔다 오후에 돌아 가게 스케줄을 짜야 한다. 내용이 풍부하여야 하는데 민족적인것을 높이 추켜들어야 한다.  우리의 우세가 바로 남이 없는 우리민족 언어 복장 음식 무용 노래등이다. 이런 요소들을 유람전반과정에 용화시킴으로서 오기를 잘 했다는 느낌을 가지게 해야 한다.  우리 연변은 물론 타지방 유람객을 끌어드려야 한다. 그것이 진정 우리 유람발전에 도움이 되는 길이다.      우리도 유람객이 너무 밀려 들어 즐거운 비명소리 칠 때가 오면 얼마나 좋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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