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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비의 귀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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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오늘 축구는 가장 용감한 팬을 잃었습니다' 댓글:  조회:1374  추천:0  2017-07-08
브래들리, 더는 아프지 않은 곳에서 편히 쉬기를   누군가에게 축구는 무엇일까요?   보통은 공을 차고 공격하며 수비하는, 이겨야 하는 싸움일 것입니다. 하지만 누군가에게 축구는 단순한 공놀이를 뛰어 넘어 자신의 전부일지 모릅니다. 축구는 생사의 문제가 아니라 생사보다 훨씬 더 중요하다던 리버풀의 전설적 명장인 빌 생클리의 말을 인용하지 않더라도 누군가에게 축구는 자신의 삶 모든 게 투영된 전부일 수 있습니다.   이 아이에게 축구가 그랬습니다.   브래들리 로어리. 로어리는 태어난 지 18개월 만에 소아암의 일종인 신경 모세포종 진단을 받았습니다. 교감 신경에 생기는 악성 종양이었습니다. 만 2살도 안 된 아이가 받아 안기엔 너무나 크고 가혹한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로어리는 씩씩하게 병마와 싸웠습니다. 그러다 호전되는가 싶었지만 지난해 7월 재발, 연말에는 말기 진단이라는 청천벽력과도 같은 현실과 마주해야만 했습니다. 너무나 슬프고 고통스런 일이었습니다.   이 아이가 삶 마지막에 붙잡은 게 축구였습니다.     아빠와 함께 경기장을 찾아 밝게 웃는 브래들리     삶과 죽음이란 경계를 알기에는 너무나도 어렸던 로어리는 자신이 가장 좋아했던 축구를 통해 잠시나마 병마와 현실을 잊을 수 있었습니다. 자신이 살고 있는 선덜랜드의 팬이자 공격수 저메인 데포를 좋아했던 로어리는 선덜랜드와 데포가 내민 손을 잡고는 잠깐이나마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로어리의 안타까운 사연을 접한 선덜랜드와 데포가 발 벗고 나서 그와 함께한 것이었습니다.   선덜랜드와 데포가 로어리와 처음으로 인연을 맺은 건 지난해 9월이었습니다. 에버튼과의 홈경기에 로어리를 초청한 것이었습니다. 경기 시작 전에 데포의 품에 안긴 로어리는 세상 다 가진듯한 미소를 지어 보였습니다. 자신의 최고의 팀과 선수를 만났으니 당연했습니다. 로어리의 해맑게 웃는 표정이 한편으론 세상에서 가장 슬픈 모습으로 비춰지기도 했습니다. 로어리의 사연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선덜랜드와 에버튼 팬들은 너나 할 것 없이 로어리의 나이인 5살에 맞춰 경기 시작 5분에 로어리의 쾌유를 비는 합동 서포팅을 하기도 했습니다.   축구는 그렇게 로어리와 함께 했습니다.   로어리의 가슴 아픈 사연에 편이 따로 있지 않았습니다. 선덜랜드 뿐만 아니라 많은 팀들과 사람들이 로어리의 아픔과 함께 했습니다. 지난해 12월엔 선덜랜드와 첼시의 경기를 앞두고 베고비치가 지킨 첼시 골문에 로어리가 승부차기를 하는 깜짝 이벤트를 가졌습니다. 로어리는 멋지게 킥을 성공시켰는데 BBC의 대표 축구 프로그램인 에서는 이날의 로어리 골을 이 달의 골로 선정하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축구는 로어리와 함께했고 모두에게 진심이었습니다.   잉글랜드 축구협회 차원에서도 움직였습니다. 저메인 데포가 올 3월 치러진 잉글랜드와 리투아니아의 월드컵 유럽 지역예선전에 로어리를 에스코트 키즈로 함께 하고 싶다는 뜻을 밝혔고 잉글랜드 축구협회가 적극 받아 안고 일을 추진하면서 로어리가 잉글랜드 축구의 성지인 엠블리에 서는 일이 가능했습니다. 긴장하고 부끄러워하기도 했지만 이내 밝은 표정으로 데포의 품에 안긴 모습이 지켜보는 축구 팬들에게 말하기 힘든 뜨거움을 던져주기도 했습니다. 이날 3년 4개월 만에 대표팀 경기에 복귀한 데포는 골까지 넣으면서 로어리에게 또 다른 선물을 하기도 했습니다.     데포의 품에 꼭 안겨 있는 브래들리     하지만 로어리에게 남은 시간은 많지 않았습니다.   선덜랜드의 시즌 마지막 홈경기인 5월13일 스완지전에 데포와 함께 경기장에 나선 로어리의 몸이 안 좋아 보였습니다. 6살이 된 로어리가 감당하기엔 병마의 고통이 너무 컸던 것입니다. 결국 로어리는 지난달 시한부 선고와 함께 연명 치료에 들어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틀 전인 7월6일 선덜랜드를 떠나 본머스로 이적한 데포는 입단 기자회견 도중 뜨거운 눈물을 쏟아냈습니다. 로어리와 관련한 질문을 받고서였습니다.   “브래들리를 처음 만났을 때를 잊을 수 없다. 나에게 달려오는 걸 보고는 큰 병마와 맞서 싸우는 아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었다. 그토록 사랑스런 아이가 고통스런 시간을 보내는 걸 지켜보는 건 너무나도 힘든 일이다. 브래들리는 내 인생 내내 내 마음 속에서 영원할 것이다. 난 매일 아침 그를 만날 것이다.”   어찌 보면 그 때까지 버텨준 것인지 안타깝게도 로어리는 데포가 눈물의 기자회견을 한 다음 날인 어제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먼 곳으로 떠났습니다. 로어리의 부모는 소셜 미디어를 통해 소중한 아들과의 마지막을 이야기했습니다.   “오늘 용감한 아들이 천사들과 여행을 떠났습니다. 우리의 작은 영웅은 큰 싸움에 도전했지만 다른 곳에서 필요로 했습니다. 우리의 마음이 얼마나 아픈지 말로 표현할 수가 없습니다.”     그곳에선 아프지 말고 좋아하는 축구 맘껏 즐기길     일제히 프리미어리그 구단들과 수많은 축구 인사들이 로어리의 너무나 이른 작별을 안타까워하고 추모하는 메시지를 남겼습니다. 각 구단들은 물론 게리 리네커, 앨런 시어러, 존 테리, 조던 픽포드, 베고비치 등이 잇따라 가슴 아픈 추모의 글을 남겼습니다.   영국 내 뿐만이 아니었습니다. FIFA도 소셜 미디어를 통해 애도의 뜻을 남겼습니다.   “오늘 축구는 가장 용감한 팬 1명을 잃었습니다. 브래들리여, 편히 쉬기를”   가끔씩 축구는 사람들에게 어떤 의미인가를 생각해 봅니다. 상황과 처지에 따라 저마다 다르겠지만 분명한 하나는 이기고 지는 승패의 구분만 존재한다면 축구가 이토록 전 세계 수많은 나라와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기는 힘들었을 것이란 사실입니다. 승부의 세계를 뛰어 넘는 그 안의 이야기, 우리들 삶의 그것과 다르지 않은 이야기가 있기에 그토록 많은 사람들이 축구를 향해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축구가 이기고 지는 것에만 매몰되지 않고 그 안의 이야기와 삶에 주목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축구에서 승패는 중요하지만 전부일 수 없는 까닭입니다.   사람들의 삶과 마음과 함께 할 수 있어야 합니다.   RIP 브래들리.   더는 아프지 않은 곳에서 축구를 맘껏 즐기길. 기사제공 박문성 칼럼
13    사랑의 향기‍/ 림순자 댓글:  조회:1981  추천:0  2017-05-16
지금은   하늘나라에   계시고   나의   곁을   떠난지  오래된   시부모님이지만   나는   아직도   시부모님의   사랑을   지척에서    느낄수   있다.  그것은   시부모님이   남기고   간   사랑의   향기가   아직도   따뜻한   차   한잔처럼   나의   마음을  데우고도   남음이   있으니   말이다.                 리씨   가문에   시집와서   시부모님의    사랑을   독차지하다싶이   한   나는   둘째   며느리기는   하지만  내가  시부모님의   제사상을   책임지고  차려드린다.          시어머님이  돌아가신지   7년,    시아버님의   3년제사까지   그리고  해마다    돌아오는   청명,    추석에   한번도  빼놓지않고   정성드려   차례를   지내게   되는데는   며느리로서의   의무도   있지만   그보다   시부모님이   나에게    주고간   사랑에   조금이나마   보답하기  위하여서이다. ‍          시부모님은   당신  아들이   복이  있어   나같은   안해를   맞았다고   생각하지만   나는   내가   복이있어   좋은   남편과  시부모님을   만났다고   생각한다.            어려서부터  아버지없이   자랐던  나는   시집가면서부터   시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를수   있는것만으로도  얼마나   황홀했는지   모른다.  내가  처음   남편과   함께   시집어른들을   만나러  갔을때   시아버님의   면상에는   웃음이  떠나지를   않았다.   하도   궁금하여   어른들이    주의하지않는   틈을  타   남편한테   물으려고   하던차   시어머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당신은   왜   벙글써해서   입을   다물줄   모르는가?"고   하니깐   시아버님이   하는   말씀이 "우리  둘째   복이  많은것   같아!   어디에서   저렇게   함박꽃같은   아가씨를   데려왔는지   모르겠어!   그래서   그냥  좋아!"라고   하는   것이였다.  시부모님은   나를   마음에   쏙   들어하는   눈치였다.‍         그때만해도   군인은    일등   남편감이였는데   현혁군인인  남편의   집에서   나한테   엄청   호감을   갖는데야  나로  말하면   호박이   넝굴채로   굴러  들어온   셈이였다.  비에  씻긴듯이   가난했던   우리집   형편을   손금보듯이  잘   알고   있었던   남편은   가정조건을   보고   색시를   데려올   생각은   꼬물만치도   없다면서   우리  두   사람은   선   후배  사이로   소학교   중학교.  고중까지   같이   다녀서   서로를   잘   아는데다가   두   사람이  마음이   맞고   이제   량가집   부모님의   허락만   받으면   얼마든지   결혼할수   있다고   하였다.           그렇게   나는   두집  부모님의   축복속에   달랑  50원   팔아   장농  하나를  마련하고  그  안에   이불  두채를   얹어  가지고   리씨가문에   시집왔다.  여기에서  잠간   에피소드   하나  짚고   넘어가자.  아무리   30 년전이라고   하지만   장농을   50원에  살수는  없었다.   남편이   보내준   목재로   목수  솜씨좋은  친구가  장농을   짜  주었는데   억지로   50원   수공전을  준것이   그나마   돈을  좀  썼다.  장농문   유리의  그림은   그림  잘   그리는  동창이   그려   주었고  도색은   나절로   하였다.  그러니  례단은  모두  생략이란  단어로  대체  하였다.  작은   소매점이라도   챙길만큼   없는것이  없이  한  트럭   꽉  박아   싣고온   맏  동서하고는  하늘과   땅   차이  대조가   되였다.  그럼에도   내가   시부모님의   사랑을    더   차지할수   있었던것은   가난이란   생활환경이   나에게  너무  많은것을   가르쳐준덕에    얼굴은   탱탱한  새  색시였지만   마음은   초로의   늙은이가   다   되여  척하면   삼천리라고   시부모님의   억양이나   말투를  들어도  시부모님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짐작할수  있었고   그러다   보니   시부모님의   생각과   나의  보조가  잘   맞았던것  같다.    ‍        성정이 쾌활  한데다가 워낙 자랑을 잘 하는 편이였던 시어머니는 동네분들에게 "자랑애"로 통했다. 시어머니는   밖에만  나가면  둘째   며느리   자랑을  하였는데   결과적으로는 "우리  둘째며느리   모든면이  나를   닮았다니깐"하면서  둘째   며느리를   빌어   당신  자랑을   하고   싶었던것  같다.  물론   우리   시어머니의   빛나는   력사는  자랑할   정도가   아니다.  13살에   참군하여   사선을   넘나들며   전방에서   부상병들을  구하는  간호사로  뛰였고   젊어서는   도문  의약공사   경리로  맹   활약   하기도   하였으며   나중에는   남편따라   연길에   오게되니   조동하는 곳  마다에서   당위서기   공장장등   령도직위에서   솔선수범하였다.  내가  그런   시어머니   마음에  들었으니  나의   시집살이는  순풍에   돛  단듯   불보듯  뻔한  일이   아니였겠는가?!     ‍          첫애를  임신하고  입덧이  너무   심했던   나는   음식냄새만  맡아도   구역질하며   토하군  하였다.  그러다보니  아침  일찍  일어나   시어머니와   함께하는   부엌일을   도저히   할수가   없었다.  원래   군인성격이였던 시  어머니는  아침에   일어났다하면   우당탕하고   내는   솥  뚜껑소리,   그릇소리에   집식구들이   늦잠을   잘래야  잘수가없어   시어머니가   기상나팔이였다.  그런데   내가  임신하고는  얼마나   소신성있게  그릇을   다루었는지   어떤때는  내가  밥상을   다   차릴때까지도  꿈나라에서   헤매다가   남편이   깨워서야   일어난적이   한두번이   아니다.   깨여나서  너무   민망한   나머지   몸  둘바를   모르면   시어머니는  "밥도  잘  먹지   못하는데   잠이라도   실컷   자라고   내가   일부러   깰가봐  조심  조심   일하다   보니   나만   빼고  온집  식구가   모두   늦잠자고   금방  일어   났으니   민망해   할것   없다"면서   위안해  주었다.    시아버님께서도"  홀몸도  아닌데   내가   조금씩  도우면  되니깐  며느리는  걱정말고   아침  잠이라도   푹  자  두오!"라고   하고는   " 당신  혼자   아침밥   지었소?   불은   내가   때지않고   귀신이   와서   땐는가?!"고   하면서   어색해하며   궁지에   몰려있는  나를  적시적으로   구해    주군  하였다.  덕분에   나는   한결  마음이   가벼웠고 "가는것이  있으면   오는것이  있다"고  하지만   나는   오는것이  있으니  가는것이  있어   내가  시부모님한테  더  잘  할수  있었던것  같다.   ‍       시부모님은  퇴근   할때마다  서로  시합이나   하듯이   시아버님은   과일들을  이것  저것  한구럭씩  사들고  들어오고  시어머니는  채소  육류들을  사들고  들어와서는  나의  구미를  맟우느라  엄청  신경을   썼다.   지금처럼   유족한  때도   아닌   시절에   마음이   앞서지   않는다면   절대로   할수없는  일이였다.  그렇게   나는   시부모님들의   사랑을   듬뿍   받으며   첫애를   출산하게   되였고   둘째딸은   계획도   없었는데   완전히   시아버님   "지시"에   따라   낳았다.          "계획생육"   "독신자녀"를   극구   제창하던때에    우리   부부도   큰딸   하나로만   만족하고   시부모님  몰래   가만히   "독신자녀증"을   발급받았다.           몇해가   지나도   둘째를   출산하려는   기미가   보이지않자   시부모님은   은근히   손자를   기다리는   눈치였다.  우리는   그냥   모르는척   하고   둘째출산  말만   나오면   말머리를   다른데로  돌리군   하였다.  그런데   하루는   시아버님의   호출로     시집에   갔었는데   온집   식구가   저녁상에   마주앉기는   했어도   웬지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시아버님이  엄청  노여운  기색으로  저녁진지를   드시는데   나는   밥이  코구멍으로  들어가는지  입으로   들어가는지   생각할   겨를도 없이   후딱  먹고   일어  나려고  했다. 그런데   시아버님께서   나를  제지   시키기에   추측에   십상팔구는   나한테   무엇을    따지려고   한다는것을   눈치챘다.   속이   두근닷근이   되여서   내가   시부모님한테   무슨  잘못을   저질렀나   한참   생각하고  있는데   시아버님은   단도직입적으로  "둘째를   어느때   출산할건가"고   물으셨다.   나는  "갑자기   물어보니   뭐라   대답할지   모르겠습니다.   생각해보고  나중에  대답하겠습니다." 라고   했다.   하지만  시아버지는  여전히  굳어진   얼굴로 "  알고 있네. 자네들이 독신자녀증을   발급받았고   둘째는   계획도  없다는것을   말이네" 라고  하였다.   시아버님이   손자만   기다리는줄로   착각하고  있었던   나는   잔머리를   굴리며 "  형님네도   아들   낳는다고   둘째를   낳았어도   딸만  낳는것을   보고   저는  아들낳을   자신이   없어서   아예  포기하고   말았습니다."라고  말씀드렸다.   그러자  시아버님은   노기가  충천해서   "  딸이라도   자매간에  서로   의지하며   살아야지   왜   애들   커서  제   형제가   없으면   얼마나   외로울지를   생각하지   않소?  그리고   지금   젊은이들   자기   편할건만   생각하고   우리   조선족인구가   얼마나   줄어들고   있는지를   통  생각하지   않는다니깐!" 라고   말씀하는데   말문이   막힌   나는  한마디   대꾸도   할수가  없었다.         결과적으로   시아버님의   의사에  따라   "독신자녀증"을   물리고   둘째를   낳았는데   딸을  낳았다.   시아버님이   우리   조선족   인구  증장률까지   념두에   두고  있으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못했던   나는   지금도   그때일을   생각하면   나   자신이  부끄러워지게   된다.   시아버님의  예견대로   나의   두딸은   서로   의지하고   서로   도우면서   잘   살고   있을   뿐더러   부모한테도   너무나   지극정성이다.          시장경제의   충격속에  일찍   직장을   그만두고  장사의  길에   나섰던  나는   지방에서   10여년간   장사하다가   절강성   이우에   가서   또   10여년간    신발  무역을   하게  되였다.   그러다보니   해마다   설   명절때만  겨우  고향에   돌아와서   시부모님을   만날수  있었다.   그때마다    시부모님은   얼마나   기뻐하고   즐거워  하시던지.    명절   음식을   장만하고    부엌을   정리하다보면   내가   맨   나중에   음식상에   다가가게   되는데   그때마다  시부모님은 수저도   들지않고   나를   기다려   주었고   식사   끝나면 "상다리  부러지게   차려   잘   먹었다"고  치하   하시면서   "가족이   다   모이니   이제야   사람사는   집  갔다."고   하면서   엄청   외로움을   호소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그   외로움을   마음으로   받아   드리기까지는   엄청   큰   대가를   지불하였다.         세월을    이기는   장사가  없다고   시보모님의   년세가   고령으로  치달으자   두분의   자립이   어렵게   되여   나는  남편을    시부모님한테   보내여   돌보아  드리도록   하였다.   남편이   당신   부모님곁에서   수발을   들며   지극정성으로  모셨지만  시 부모님의   건강은   날에   날마다   못해갔다.   아무리   용맹한  수리개라해도    날개가   꺽이면  더는   하늘을   날수없듯이   한쪽   다리를   잘   쓰지못해   밖같    출입을   하지   못하게   되자   시어머님은   점  점  기력이   떨어지고   기억력도   나빠지면서   뇌졸증으로  인한   치매증세를   보이기   시작하였다.           나는   옆에서   돌보아  드릴수없으니  전화로   매일  시어머님한테   말  동무도  하여주고   치매방지   차원에서   손  놀림을   많이   하여야   하였기에  그냥   작품은   기대하지   말고   심심할때면   뜨개를   뜨라고   권유했다.  그런데   그  이듬해   음력설에   설   쇠러   시집에   갔다가   시어머님이    내놓은   선물에  깜짝   놀라고   말았다. 시어머님께서  손수  뜬   작품이였는데   나의   외손자   양말이였다.  물론   두짝의   색상이   제멋대로이고    크기도   엄청    크게   뜨셨지만   분명히    두쪽   양말의   크기가    똑   같았고  그  양말을   나의   외   손자한테   선물한다는   것이였다.   이제   겨우   유치원에   입학한  애   양말을  학교   갈   나이에  신겨도  빙글  빙글  돌아가게   크게   뜨셨지만   나는   외손자를   안아다   시어머니   무릅에    앉히고는   시어머님이   직접   증손자한테  양말을   신겨   보이게하였다.   너무   커서   장화처럼   무릅까지   올라온   양말을   보고   웃으운   나머지   애들처럼   손벽치며   좋아하는   시어머니를   보고   나는   속으로    눈물을    삼켰다.  생의  의욕에   나의   말대로   뜨개를   뜬것도   그렇지만   당신   생전에   증손자를   보게   해서   너무   기뻐하시며   증  손자한테까지   당신사랑을   쏟아  붓는   그  모습이   너무나도   나의  가슴을   뭉클하게  하였다.   금방  같이   밥상에   마주앉아   밥을   먹었는데도   기억을   못하시고   수시로   나에게   밥을   먹으라고   권하던   시어머니.  치매에   걸렸어도   마음에   항상   자식들이    있고   수시로   자식들을   챙기던   시어머님이였는데    자식들이   걱정되여   어떻게   우리곁을   떠났는지   모르겠다.          돌아가시던  날    저녁    8시경에   내가  시어머님한테    전화하여   건강  상태도   체크하고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다보니    40분   정도   통화했다.    여전히   전화기를   놓기   아쉬워하는   시어머니를   겨우   달래서   "편히   주무시라"고   인사하고는  끊으려고   하는데   느닷없이   시어머님이  "  경옥이  에미  지금까지   수고했소!"라고   하시고는   수화기를  놓으셨다.  나는   어안이  벙  벙하여   큰   딸애보고   "얘!   경옥아  너의  할머니  아래  우  말이   맞지않게   편히   쉬라는데   나한데   경옥이   에미   지금까지   수고했소!   라고   말씀하시는걸  보니   아마도   치매가   더   심해진것  같다.   래일   아침  너의    아버지한테  전화해서   할머니를   병원에   모시고   가서   다시   한번   에마라이를   찍어보라고   해야겠다. " 라고  하고는   외손자를   잠   재우고  나도  샤워하고는   자리에   누웠다    밤   11시경에   갑자기   전화별이   울리고    컴퓨터에   마주앉아있던  큰  딸애가  거의   비명에   가까운   소리를  지르며   전화를   받는데   "아!  시   어머님이   돌아   가셨구나!" 하는  느낌이  오면서   야구   방망이에    뒤통수를  한대   호되게   얻어맞은것처럼   나는   앞이   캄캄해나고   온   몸의   기운이   쏙   빠지는것만   같았다.           그날   나하고   전화   통화를   끝낸   시어머니는   기분좋게   바로   주무셨다는데   밤   11시경에   화장실   가려고   일어나다가   쓰러지곤   그   자리에서   생을   마감했다.          뭐가  그렇게   급하신지   마지막길도   당신   성격처럼   군인성격으로   가시고.   또  데면   데면한것  같으면서도    셈세했던    당신성격에   걸맞게   당신   운명까지   예측하고는   하고싶었던   마지막   인사까지   나에게   남기고간   시어머님을   생각하면   그   당시    치매라고   오산했던   내가   너무   너무   부끄럽고   돈이   뭔지?  "이제   한해만   더   하고   그만  두어야지."하면서도   돈버는  욕심에   장사를   그만두지   못하고   끝내는 시어머니를   곁에서   돌보아   드리지도   못하고   하늘나라로   보낸것이  너무 너무 가슴아프다.  ‍         당신들   생전에   일요일이나   명절이면   떡이랑   순대랑   가득  해놓고   세간난   자식들들   모두   불러들여   먹이고는   뭐가   그렇게   좋으신지  맨날   집이   떠나가라   호탕하게   웃으시던   시어머님.    설명절이나   생일때면   애   어른   할것없이   꼭  꼭  돈   봉투를  챙겨주고는   덕담을   아낌없이   하셨던   시아버님.   자식사랑이   남다르셨던   시부모님이시다.           해마다   돌아오는   설   명절이면   시부머님의   빈자리가   더   더욱   크게   다가오면서   나의    마음은   허전하기   짝이없다.  "있을때   잘해.   후회하지말고."하는   한국  노래가사의   깊은   의미를   이제야   진정  가슴으로   깨달았다.  "살아  생전에   조금만   더   잘했을걸   조금만   더   잘   했을걸" 하고   후회도   많이   해   보지만   흘러간   강물이고   차떠난  역에서   발을   동동  구르는  셈이   되였다.    ‍          하지만   천국에  계시는   시  부모님의   령혼은  아직도   우리가족의   깊은  위로를   필요로   할것이다.  그리하여   나는  해마다   돌아오는  청명  추석이면  정성을   쏟아부어    차례를   지내게  된다.           너나없이   가담한  한국행에   남편과   시형, 시동생네  가족들이  모두   한국으로  떠나  가서   작년  추석부터는  13살되는  외손자와   나만   시부모님의  산소를   찾아가게   되였다.  시집식구들이  모두   출국하고  없는데   시부모님   제사를   이젠   그만   지내도  괜찮다는  동료들의  만류에도   내가   고집을   꺽지   않는   단   한가지   리유,  그것은   이렇게  해서라도   시부모님한테  진  내   마음의   빚을   조금이나마   갚고   시부모님께   지은   불효를   진심으로   용서받기  위함이다.                  세월을  거슬러  시부모님을   모시고   함께   웃고   떠들며   시끌벅적   명절을   보냈던   행복한   추억이   이제는  그리움으로  변해   나의   가슴에   아련한   아픔으로   남는다.  내  마음의   아픔을  달래고   시부모님이    남기고   간   사랑을  기리는  마음으로   나는  해마다   오는   청명    추석이면   외손자를   앞세우고   시부모님의   산소로   찾아가   예쁜  조화로   묘소를   이쁘게   꾸며드리고   봄에는   싱싱한   국화꽃   한  묶음으로  만물이   소생하는   봄을,   가을에는   풍성한   가을   열매로   오곡백과  무르익는   황금가을을   알려   드리고  올   것이다.            시부모님은  가셨다.  하지만   두분이   남기고   간   사랑의   향기는   나에게   어떻게  살아야   후회의  씨앗을   남기지않는   삶인지를   알게  하였고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주어진   인생을  나이에   전전하지말고  가슴에  품은  꿈을   향해  또  한번  용감히   도전해  볼것을   권유하고  있다.          만물이   소생하는   화창한  봄날에   싱그러운   풀  내음의   향기를   맡으며   나는   차   한잔의  여유로   또  다시   시부모님이   남기고   간   사랑의   향기에   도취된채   새로운   미래를   향해   사랑의   향기가   한떨기의   목련화로   피여나는   현실에   도약할것이다!                                    
12    '미움받을용기' 댓글:  조회:1964  추천:1  2015-10-21
    미움받을 용기     이미지 확대보기 '인간의 모든 고민은 인간관계로부터 비롯된다'   아마 누구나 생각해보게 될 것이다. '책의 주장대로 과연 내 모든고민이 그런것일까?' 라고 말이다. 처음엔 반박할 것이다. 허나 깊게 생각해보면,지금 가지고 있는 고민 속에는 내가 아닌 타인의 개입과 영향 그리고 시선이 존재한다는 것을 새삼스레 깨닫게 된다.   '미움받을 용기'는 현재 베스트셀러 대열에 자리잡고 있다. 그렇다면 이 책은 어떤점에서 독자들의 인기를 끌었을까? 나는 작가의 이야기전개방식이 큰 몫을 했다고 생각한다. 작가는 지루하게 줄줄 심리학을 서술하는 방식이 아닌, 가상인물들간의 대화를 통하여 어려운 심리학 이론을 보다쉽고 설득력있게 독자들에게 다가갈 수 있도록 서술해놓음으로써, 그들의 대화를 지켜보는 제3자의 역활인 나로 하여금 많은 생각과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지게 만든다. 책은 오로지 두 인물만이 등장한다. 아들러의 심리학을 이어받은 철학가. 그리고 자괴감에 빠져 그를 만나려는 청년.   여기서 청년캐릭터가 신의한수라 생각된다. 만약 책속에 청년캐릭터가 존재하지 않았다면, 읽는 내내 철학자가 말하는 사상에 많은 반감을 가지며 책을 읽었을 것이다. 하지만 청년이 나를 대신해서 철학자에게 질문하고 반박해주면서 가려웠던 부분을 계속해서 해소 해준다. 허나 역시나 모든 사상이 파고들수록 심오하고 난해해지는법. 아들러의 사상 역시 깊어갈수록 이해와 공감이 어려운 부분들이 있었다.   대부분 내용이 인간관계에 대한 철학적,심리학적인 부분을 다루고 있는 책이다. 과연 인간관계에서 명확한 해답이라는 것이 있을까? 나는 해답은 없다고 생각한다. 그저 무수히 많은 해결 방안이 있을 뿐이지. 그 중 하나의 방안을 책 '미움받을 용기'를 통해 만나본다. 이미지 확대보기 #1. 경험과 싸울 용기 같은 나쁜 과거사를 겪었다고 해도, 모두가 같은 트라우마를 가지는 것은 아니다. 어떤이는 쉽게 떨쳐버리지만, 어떤이는 그것을 평생토록 가져간다. 경험이라는것은 해가 동쪽에서 뜨는것과 같이 객관적인 것이 아니다. 지극히 모두에게 주관적으로 작용된다.   눈덩이가 굴러가면서 몸집이 커지듯이 누군가에게는 시간이 흐르면서 더 더욱 그 트라우마의 영향이 커지고,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맑은날에 잠깐 내렸던 여우비와 같은 존재일 뿐이다. '문제는 무엇이 있었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해석하느냐다' -책 본문중에서    무분별한 긍정은 오히려 독이된다. 하지만 그런 긍정보다, 더 안좋은것이 확대해석과 자기비하의 모습이라 생각된다. 책 속의 등장하는 청년이 바로 그런 사람이었다. 청년은 어렸을때부터 형과 비교되며 자랐고 그로인해 부모와 세상을 향한 원망을 품는다. 책 속의 철학자 주장처럼, 과거는 바뀌지 않는다. 타임머신이 존재한다고 해도 바꿀 수 없다. 그러니 우리는 바꿀수 있는 현재에 집중할 필요가 있다. 어떠한 지난 사건으로 인해 우리자신을 규정할 필요는 없다고 본다.  하지만 트라우마를 극복하기란 사실 말 처럼 쉽지 않다. 물에 빠져 죽을뻔했던 아이가 다이빙을 하기 힘든것처럼, 예전 악경험를 떨쳐버리기란 쉽지 않다. 그러니 혼자힘으로 힘들다면 청년처럼 누군가(사람,책)의 도움을 빌려 극복하려 시도와 용기가 필요한 것이 아닐까? 그때의 나를, 그때의 나로 남겨두고, 현재의 나로 딛고 일어서려면 말이다. 이미지 확대보기 #2. 시선과 싸울 용기. 사람들은 돈을 좋아한다. 하지만 근본적으로 돈이라는 물질을 좋아하는 것만은 아니다. 돈이 많음으로써 누릴 수 있는 것이 많아지기 때문이다. 누린다는 것은 무엇일까? 바로 타인으로부터의 인정을 받는다는 것이기도 하다.   그렇다. 우리는 인간이기에 누구나 인정받고 싶어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설령 내 마음이 내키지 않는 일이라도 남에게 보이는 좋은평판과 인정을 위해서 그렇게 하게 된다. 사람들로부터 보여지는 모습의 나. 나 스스로만이 알고있는 모습의 나. 이 두가지중 어떤모습이 진짜 나일까? 나 자신을 속여가며 타인에게 억지로 보여지는 모습은 과연 위선일까?   책은 무리속에 살아왔던 내 모습중 어떤것이 참된 나일지를 생각해보게 한다. 하지만 과연 철학가의 주장처럼 타인의 시선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 수 있을까? 사회 울타리안에서 타인과 함께 더불어 살아가는 우리에게 가장 풀기 어려운 문제다.   하지만 이 책의 제목처럼 우리에겐 '미움받을 용기'가 절실히 필요할지도 모른다. 남에게 맞춰 좋은평판을 듣지만, 정작 본인속은 썩어가는 사람이 있다. 이건 누구를 위한 삶이란 말인가? 내가 어떻게 하는지는 나의 과제이지만, 남이 어떻게 나를 생각하는지는 타인의 과제이다. 그러니 내 과제의 거짓없는 진솔한 모습과 일관성을 보여줘야 하지 않을까. 이미지 확대보기 #3. 마주할 용기. 우리는 사람을 만날때 상대방의 다양한면에서 사랑을 느낀다. 특히 외모와 조건에 사랑이라는 감정을 주입시키기도 한다. 그렇게 주입된 감정들은 결국 내면의 불화로 인해 갈라지게 된다.   우린 신이 아니기에 겉을 먼저 보게된다. 허나 유심히 봐야할 건 책에서 말하는 서로간의 정서적교류다. 그리고 그 교류속에는 무너지지 않을 굳건한 신뢰의 댐을 세워야한다. 한줄기 의심의 물줄기도 세어나오지 않을. 또한 저자는 마주한다는 것을 연인관계에만 국한하지 않는다. 친구와 부모자식간의 관계에서도 모두 예외일수는 없다. 누군가와 있을 때 구속받지도, 뻣뻣해지지도 않고 온전한 나로서 사랑과 인정 그리고 공헌할 수 있다면 그 관계는 서로 마주보는 관계가 될것이다.   생각해보면 우리 모두는 한 명이상의 베스트프렌드가 꼭 있다. 친구라 불리는 많은사람들중에 왜 이 친구들이 베스트일까? 그건 서로에게 무엇을 주고받는 사무적인관계가 아닌, 온전한 자신의 모습으로 스스럼없이 대하기 때문에 그들이 내 삶의 베스트리스트에 선정된 것이다.   이렇듯 진정 나를 마주본 사람들은 가면을 벗고 맨 얼굴로 나를 맞이한다. 그렇기에 나도 가면을 벗고 맨 얼굴로 그들을 대면하는 것이다. 가리지않고 보여줌으로써 우리는 서로에게 한발 더 다가가는 듯 하다. '현재에 강렬한 스포트라이트를 비추다'   작가는 마지막으로 인생을 '찰나의 연속'이라 말하며, 인생의 무대에 서있는 우리에게 현재무대에 스포트라이트를 비추라 말한다. 과거와 미래에 빛을 비추는것이 아닌 지금 이 순간의 무대에 말이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인내하는것을 잘한다. 책속의 청년같이, 나를 포함한 많은 사람이 미래를 위해 현재를 참고 견딘다. 내일을 위한 삶, 이것은 분명 좋다. 하지만 내일은 갑작스레 찾아오지 않을지도 모른다. 인생사 새옹지마니까. 내가 앞으로 서야할 미래의 무대를 지금부터 만드는것도 좋지만, 지금 내가 서있는 이 무대를 망치지 않아야 하지 않을까.     "지금, 여기를 진지하게 사는것, 그 자체가 춤일세." - 『미움받을용기』 본문中
11    문학의 경계인들, 분단과 전쟁을 딛고 서다 댓글:  조회:2340  추천:1  2015-03-27
멀리 머리에 구름을 두른 천산산맥이 바라다 보이는 도시. 중앙아시아 카자흐스탄의 수도 알마티다. 옛 소련 시절부터 현지 고려인의 한글 교육과 전통문화 보급에 힘써 온 원로시인 양원식씨가 자택 앞에서 괴한의 피습을 받아 비명에 숨졌다. 당시 74세. 2006년 5월의 일이다.  시인은 알마티에서 한글판을 발행하는 고려일보 주필을 지냈다. 1923년 연해주에서 ‘선봉’이란 이름으로 창간돼 레닌기치란 이름을 거쳐 오늘에 이른 고려일보는 그때까지 시인의 일터였다. 그가 생존해 활동하고 있던 2005년, 필자는 시인의 안내로 고려일보를 방문한 적이 있다. 후리후리한 키에 따뜻한 정감이 남달랐던 그는 그러나 역사의 물결에 휩쓸린 영원한 경계인이었다.  그가 쓴 시에 그의 조국은 세 개, 즉 조선과 카자흐스탄과 러시아라고 기록돼 있다. 북한 출신으로 한국전쟁 중임에도 모스크바 영화학교로 유학했을 만큼 촉망받는 인재였던 그는 당시 동료 학생들과 함께 평양으로 돌아가지 않고 망명자의 길을 걸었다. 그의 재능은 청년에서 노년에 이르기까지 고려인 시인의 표본으로 남았으나, 원인도 습격자도 밝혀지지 않은 채 비운의 생애를 마감했다.  ◆고려인 문학·음악 등에 큰 영향=‘북한이 버린 천재 작곡가’ 또는 ‘카자흐스탄의 윤이상’이란 호칭을 가진 정추는 어떤가. 그는 월북해 평양음대 교수를 지냈으며 모스크바 유학 중 다시 소련으로 망명했다. 세계 3대 음악원 중 하나인 러시아 차이코프스키 음악대학 최초로 졸업 작품 만점을 받았고, 소련의 세계 최초 우주비행 성공 기념행사에서 자신의 곡을 연주하기도 했다. 2010년 필자가 알마티에서 만난 그는 여러 차례 살해 위험을 넘겼다고 술회했다. 남북한에서 모두 외면당한 이 불우한 작곡가는 올 6월 90세를 일기로 타계하기까지 카자흐스탄 음악계의 거장으로 살았다.  문학평론가이자 문필가였던 정상진(필명:정률)도 있다. 북한 정권 수립에 일조하고 문화선전성 제1부상을 지냈으나 결국에는 축출돼 말년을 알마티에서 보냈다. 그의 『아무르만에서 부르는 백조의 노래』는 ‘북한과 소련의 문학·예술인들 회상기’란 부제가 붙어 있으며, 국내에서도 출간돼 널리 알려져 있다. 그는 정추 선생이 별세한 이틀 뒤에 역시 90세의 천수를 누리고 그 뒤를 따라갔다.  알마티에는 이들 외에도 한진·리진·연성용·라브렌티 송 등 그 지역에서 소중하게 인정받는 문인이 많다. 소련 국적 고려인으로 세계적인 명성을 얻은 작가는 소설 『켄타우로스 마을』 『다람쥐』 등을 쓴 아나톨리 김이다. 『해바라기 꽃잎 바람에 날리다』의 작가 미하일 박도 문명이 높다. 이제 후대 5·6세대에까지 이른 이 고려인 사회는 그 인구가 50만 명을 넘었다.  이 모두 바람 거세고 구름 높이 흘러가는 땅, 중앙아시아 대륙에서의 일이다. 북한은 물론 이들을 한민족의 울타리로 끌어안아야 할 한국에서조차 그 동안 아무런 손길도 건네지 않았다. 한민족 디아스포라의 비극 여러 편이 무슨 드라마처럼 펼쳐지는 역사 과정을, 강 건너 불 보듯 바라만 보면서 지나온 세월이었다. 그것은 남북한 이념과 체제의 갈등, 그리고 분단시대 곤고한 삶의 역정, 그 실상을 이국에서 증거한 형국이었다.  ◆조선족 문학의 개화=19세기 후반부터 한민족은 구(舊)소련 지역으로 이주해 고려인 집단을, 중국으로 이주해 조선족 집단을 형성했다. 이들의 문단 구성 초창기, 구소련에 조명희(1894~1938)가 있었다면 중국에는 안수길(1911~77)이 있었다. 중국 내부의 소수민족 가운데 하나가 된 조선족은 20세기 이후부터 문학 활동을 전개해 문학동인 단체 북향회를 발족하고 ‘북향’이라는 문예지를 발간하기 시작했다. 향토문인으로 작가 김창걸과 시인 리욱 등을 배출했다.  이 무렵 중국으로 건너간 강경애가 거기서 작품을 썼고, 최서해는 거기서 얻은 체험을 국내로 돌아와 작품화했다. 중국 조선족 문학을 대표할만한 작가로 꼽히는 『격정시대』의 김학철은 항일투사였던 자전적 기록을 소설에 담았고, 그와 같은 작품의 내용은 한민족 디아스포라 문학의 한 전형이 됐다. 현재 수많은 한글 문학이 창작되고 있는 중국 동북3성의 조선족 거주민은 200만 명을 넘는다.  북한과의 연접성을 위주로 기술한 만큼, 동포 60만 명이 넘는 일본이나 200만 명이 넘는 미국의 한민족 디아스포라 문학을 상술하지 못해 안타깝다. 특히 일본의 조총련계를 중심으로 한 ‘문학예술가동맹’의 문학적 축적은 보다 자세한 논의가 필요하다. 어쨌거나 김달수·김석범·이회성·양석일·이양지·유미리·현월·가네시로 가즈키 등이 이룩한 재일 조선인 문학, 김용익·김은국·노라 옥자 켈러·차학경·이창래·수잔 최·캐시 송 등이 이룩한 재미 한인 문학의 빛나는 성과가 퇴색하는 것은 아니다.  ◆한국문학의 영역 확장=이들이 한민족 문학사의 텃밭에 핀 귀한 꽃무리라면, 이들을 잘 가꾸고 그 명맥을 이어가도록 할 막중한 책임은 ‘한국문학’에 있다. 그 책임의식으로 남북한 문학, 납·월북 문인 문제를 디아스포라적 차원에서 살펴볼 때 덧붙여 언급해야 할 문제가 있다. 이 한민족 문화권의 논리와 의미망 가운데로, 해방 이래 한국문학과 궤(軌)를 달리할 수밖에 없었던 북한문학을 초치하는 일이다. 북한문학에 대결 구도의 인식으로 접근해서는 접점이나 소통의 전망을 마련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어떤 방안이 있을까. 여기에 한민족 문화권의 운동범주를 원용할 수 있겠다. 이는 남북한 문학을 포함해 재중앙아시아 고려인 문학, 재중국 조선족 문학, 재일 조선인 문학, 재미 한인 문학 등 재외 한글 문학의 전체적인 구도 속에서 남북한 문학의 지위를 자리매김 해 나가자는 논리이다. 그리하여 남북한 문학이 보다 자유롭게 만나고 그 효력의 대외적 확산을 도모하며 통일 이후에 개화(開化)할 새로운 민족문학의 장래를 예비하자는 것이다.  이는 한반도를 둘러싼 비핵화 논쟁의 당사국들이 벌이는 6자회담을, 문학의 이름으로 옮겨놓은 구도이다. ‘사람’이 있는 곳에 ‘힘’의 충돌이 있다는 뜻이다. 필자는 6자회담이란 정치적 이슈가 등장하기 전부터 남북한과 네 지역의 디아스포라 문학을 합하여 ‘2+4시스템’으로 불러왔다. 이 길은 남북한 문학, 더 넓게는 한민족 디아스포라 문학의 교류와 연대를 내다보는 새 통로이며, 정치나 국토 통합에 우선하는 문화통합의 추동력이 될 수 있다. 김종회(문학평론가, 경희대 교수)  ◆김종회=1955년 경남 고성 출생. 88년 ‘문학사상’으로 평론가 데뷔. 평론집 『위기의 시대와 문학』 『문학과 예술혼』 『디아스포라를 넘어서』 등. 김환태평론문학상·한국문학평론가협회상 등 수상 http://article.joins.com/news/article/article.asp?total_id=12130737&cloc=olink|article|default  
10    음력설 연휴 정상 영업하시는 집 정보 제공해주세요 댓글:  조회:1984  추천:0  2015-02-12
안녕하세요? 저는 연변에서 두번째라고 하면 서러운 정도로 못생긴 녀자입니다. 부탁의 말씀이 있습니다. 다름아니라 음력설 연휴에 정상 영업하는 식당(주점, 노래방 포함), 커피숍, 약방, 슈퍼, 배달 등 업무를 취급하는 영업소에서는 정보 제공 간절히 바랍니다. 지점은 연변이면 다 됩니다. 정보 공유를 하려고 준비중입니다. 음력설 연휴 추운 날씨에 오래만에 고향을 찾으신 가족분들과 연변을 사랑하는 우리 로백성분들이 빈걸음 할까봐 걱정되여서 정보공유 시도합니다. 14일 련인절이죠? 다른 선물 절대 필요없으니 좋은 정보 제공 부탁드립니다. 아~~ 영업소 명칭, 위치, 전화번호 필수입니다. 정보공유는 무료입니다. 
9    育兒는 育我다: 자녀가 있으면 행복해지는 이유 댓글:  조회:1882  추천:0  2014-11-18
뷔페 식당에서 나오는 내게 보내는 그녀의 눈길은 `측은함`이었다. 최소한 내게는 그렇게 읽혔다. 처음 그녀를 만난 장소는 뷔페식당의 정중앙. 이 곳에는 가로 세로 약 6m 안팎의 큰 돌이 있었고, 그 안에는 물이 가득했다. 10월이면 두 돌이 되는 필자의 아들은 물 속으로 뛰어들겠다며 한바탕 울음을 터뜨렸다. 마침 그 옆에는 필자의 아들과 엇비슷한 나이의 소년이 서 있었다. 소년은 얌전하게 물을 바라볼 뿐이었다. 음식 접시를 들고 소년의 뒤에 서 있던 그녀에게는 안정감이 느껴졌다. `소년의 어머니인가보다. 뷔페에서 저런 안정된 자세를 보이다니, 내게는 언제적 추억인가….` 잠깐 부러움을 느꼈을 찰나의 방심이 문제였다. 필자의 아들은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아버지의 손을 뿌리치고 물속으로 뛰어들었다. 그래도 다행이었다. 신발과 양말만 젖었다. 황급히 물속에서 아들을 꺼내는 순간, 아들은 돌 옆 모서리에 놓여 있던 `안내판`을 손에 쥐었다. 그리고는 힘껏, 그 안내판을 물속으로 내던졌다. 물이 주변으로 튀었다. 뛰어온 뷔페 직원의 한 마디. "아드님이 참 씩씩하네요." 이 밖에도 이날 필자의 아들이 선보였던 씩씩했던 다양한 신공들은 뷔페 직원들의 `불편한 관심`을 끌기에 충분했다. 어쨌든 뷔페 식당에서 나왔을 때, 그녀, 다시 말해 소년의 어머니와 우연히 엘리베이터 앞에서 마주쳤다. 그녀의 눈은 필자에 대한 `측은함`을 말하는 듯 했다. 그래도 다행이다. 필자 테이블 옆에 앉았던 한 중년 부인의 눈길은 `짜증` 그 자체였기 때문이다.       필자는 나이 마흔 둘에 첫 아이를 얻었다. 이후 필자의 삶은 많은 게 바뀌었다. 뷔페에서처럼 일면식이 없던 사람들로부터 `측은함`이나 `짜증`의 눈길을 받는 것은 그 중 하나일 뿐이다. 영화관에 간 건 최근 3년 새 단 한번이다. TV도 여유롭게 볼 수가 없다. 외식도 별로 못한다. 사정상 어쩔 수 없이 뷔페에서 외식을 할라치면 이 역시 고생이다. 금전적 여유도 줄어들었다. 잠도 덜 잔다. 휴일에도 오전 7시를 좀 지나면 일어나야 한다. 아들이 그 즈음에 일어나 아빠를 깨우기 때문이다. 그리고 걱정도 많이 늘었다. 필자가 쉰이 되면, 아들은 겨우 여덟 살이다. 56세까지 직장에 남아 있으면 도둑이라는 `오륙도` 시대에 과연 내가 아들을 잘 부양할 수 있을까. `더블 인컴 노 키드(double income no kid)`라며 아이를 낳지 않는 요즘 세태도 이런 이유 때문일까.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녀가 있는 사람은 자녀가 없는 사람보다 행복하다. 온갖 걱정에다 시간적, 경제적 악조건인 상황에서도 그렇다고 한다. 시빅사이언스(CivicScience)가 자녀가 있는 65만 6266명과, 자녀가 없는 39만 3787명으로부터 응답을 받아 조사한 결과다. 조사 결과를 보도한 쿼츠(QUARTZ) 기사에 따르면, 사실상 모든 항목에서 자녀가 없는 사람이 있는 사람보다 우위다. 하지만 유독 행복감만은 정반대라고 한다. 우선 자녀가 없는 사람은 잠을 더 많이 잔다. 8시간 이상 잠을 잘 확률이 75% 더 높다. 게다가 자녀가 없는 사람은 생활습관이 더 건강하다. 패스트 푸드를 먹을 확률, 담배를 피울 확률이 훨씬 낮다. 운동도 더 많이 한다. 재정적으로도 훨씬 여유가 있다. 소득의 20% 이상을 저축할 확률이 2배 가량 높다. 커리어도 더욱 자유롭게 쌓을 수가 있다. 이들은 생활도 즐거워 보인다. 한 달에 한번 이상 외식할 확률은 2배다. 여행도 훨씬 더 많이 다닌다. TV 드라마를 즐겨 본다고 응답할 확률은 95%가 더 높다. 한 달에 한 번 이상 영화를 볼 확률도 39% 더 높다. 반대로 자녀가 있는 사람들은 더 많이 걱정한다. 범죄나 폭력을 걱정한다고 응답할 확률이 27% 더 높았다. 경제와 공공 교육, 세금, 의료보험 등에 대해서도 더 많이 염려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스트레스 지수도 더 높았다. 스트레스와 불안 때문에 약을 먹을 확률은 16% 더 높았다. 하지만, 이 같은 악조건 상황에서도 자녀가 있는 사람들은 더욱 행복하다. `오늘 행복합니까`라는 질문에 대해 `매우 행복하다`고 답할 확률은 33%가 더 높았다. 자녀가 없는 사람들은 `행복하지 않다`, 또는 `매우 불행하다`고 답할 확률이 27%나 더 높았다. 이 같은 조사 결과는 역설적이다. 생활상의 악조건에 빠져 있는 사람들이 더 좋은 조건에 있는 사람보다 더 행복을 느끼며 살고 있다는 것을 뜻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 이유는 무엇일까? 자녀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인간은 행복감을 느끼기 때문일까? 단지 그것만은 아닐 것이다. 최근에 필자는 그 답에 대한 단서를 인터넷에서 우연히 발견했다. `딸 바보가 그렸어`라는 이름의 블로그에서 발견한 `육아는 육아다`(http://blog.naver.com/j_bro/220084492491)라는 제목이 달린 일련의 그림이었다. 아이를 키우는 육아(育兒)가 사실은 나 자신을 키우는 육아(育我)라는 뜻의 그림이었다. `너를 재우다가 새벽하늘이 참 예쁘다는 걸 알게 되었고/너를 잘 먹이려다 보니 인내심이 늘게 되었고/너와 걷다 보니 그냥 지나치던 들꽃을 보게 되었고/너를 가르치려다 보니 내가 먼저 조심하게 되었고`라는 글이 그림에 적혀 있었다. 이 그림의 마무리 글은 정말 아름답다. `그렇게 알게 되었어/네가 자랄 때 나도 자란다는 걸/너를 키우는 게 나를 키우는 거라는 걸/육(기를 육)아(아이 아)는 육(기를 육)아(나 아)다` 자녀를 키우는 것은 결국 나를 키우는 과정이다. 누군가를 사랑하고, 누군가를 가르치며, 누군가를 양육하는 과정에서 우리는 많은 것들을 배운다. 자연의 아름다움을 깨닫고, 성숙한 인간이 되기 위한 덕목을 배우며, 공동체의 윤리를 깨닫게 된다. 자녀 셋을 키우는 지인이 했던 말도 맥락은 똑 같다. 그의 말인즉 이랬다. " 아이 아버지가 되면, 부하 직원들에게 좀 너그러워져. 통솔하는 법도 배우게 되고. 그걸 어디서 연습하겠니. 말 안 듣는 아이 잘 달래고 하다 보면, 후배들 애 먹여도 어휴 하고 봐주고. 고함 지를 것도 참고. 좀 돌려서 이야기하고. 그런 아량도 늘어나고 한다." 아마도 이는 많은 회사에서 경력직원 채용 때 미혼인 남자보다 결혼한 남자에게 은밀한 가산점을 주는 이유가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해본다. (물론 개인차를 고려하지 않고, 단순히 자녀가 있고 없음에 따라 채용시 가산점이나 불이익을 주는 것은 명백하게 불법적인 차별이다. 이는 고쳐져야 할 일이다. 더욱 큰 문제는 경력직 여성을 채용할 때는 자녀가 없는 여성을 선호한다는 점이다. 대한민국의 출산률이 낮은 데에는 기업의 책임이 크다.) 결론적으로, 자녀를 키우면서 인간은 성장하고 성숙해진다. 인간은 자신의 성장을 느낄 때, 성취감과 더불어 행복감을 느낀다. 명확한 증거는 없지만, 자녀가 있는 사람이 없는 사람보다 더 행복하다고 느끼는 것도 이 때문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외신
8    2015년 《연변문학》 구독안내 댓글:  조회:1668  추천:0  2014-11-04
2015년도 《연변문학》 주문이 시작되였습니다. 1951년에 창간된 《연변문학》은 60여년의 력사와 전통을 가지고있는 중국에서 가장 오래된 조선문 순수문학지입니다. 《연변문학》의 전신은 《연변문예》, 《천지》로서 오래동안 수많은 독자들의 사랑을 받아왔습니다. 그 전통을 이어받아 《연변문학》은 항상 독자들이 애독하는 잡지, 조선족문학의 발전을 위해 최선을 다하는 잡지로 거듭날것입니다. 새해 《연변문학》 주문을 환영합니다. 각지 우체국 주문: 192원/ 1년(12책) 本刊代号:12-13 본 편집부에 직접 주문할 경우 할인가격 150원/ 1년(12책) 联系人:朴珍华 汇款地址:吉林省延吉市友谊路363号《延边文学》编辑部 邮政编码:133000 联系电话:0433-2902885
7    편집광 앤드류 그로브(Andy Grove)의 리더십 댓글:  조회:2614  추천:0  2014-10-29
앤드류 그로브는 헝가리 태생 유대인으로 1956년 스무 살 나이에 단신으로 미국 망명을 선택, 온갖 고생 끝에 캘리포니아 대학에서 1963년 화학공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그 후 1968년 창립 때부터 인텔에 참여한 앤드류 그로브는 1979년 대표이사를 맡은 이래, 인텔을 세계 최고의 반도체 회사로 만들어 1998년 크레그 바렛에게 경영권을 인계했다. 이후 이사회 의장으로 활동, 현업에서 물러난 지금도 ‘존경받는 기업인’에서 수위를 달리고 있다. "성공은 만족을 낳고, 자기만족은 실패를 낳는다. 오직 편집광만이 살아남는다." 인텔은 1980년대 중반, 일본 경쟁사들의 거센 도전으로 위기를 맞게 되었다. 앤드류 그로브는 마이크로프로세서에 올인, 회사와는 무관한 제3자의 심정으로 핵심사업의 자원을 빼내 미래가 명확히 보이지 않는 곳에 투입했다. 사업 방향을 바꾸는 것은 운명을 거는 일이다. 초기에는 엄청난 적자에 직장 동료 7,200명을 떠나보내고 생산 공장을 두 곳이나 폐쇄하는 아픔이 뒤따랐으나, 1992년 마이크로프로세서 분야의 최강자로 뛰어오르며 제2의 전성기를 맞게 되었다.  앤드류의 혜안은 그 뒤에도 계속 빛을 발한다. 그는 브랜드가 기업의 최고 자산이 될 것으로 판단해 과감한 투자를 감행했다. 1991년 봄, 당시 엄청난 금액인 1억 달러를 투입해 ‘인텔 인사이드’ 개발에 착수한다. 주변에서는 설득과 반발이 강하게 제기됐지만 흔들리지 않았고,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브랜드 덕분에 인텔은 컴퓨터 제조회사들 사이에 강력한 파트너십을 구축하는 데 성공해 마이크로 칩 시장의 80%를 장악했다. 인텔 인사이드 로고를 부착한 컴퓨터는 가격이 10%나 높게 책정되었고 인텔은 나이키, 코카콜라 등과 함께 소비자에게 가장 인지도가 높은 회사가 되었다.  그로브의 결단력을 보여주는 또 다른 사례가 있다. 1994년 어느 수학교수가 펜티엄 칩의 계산 기능에 문제가 있다며 인터넷 포럼에 펜티엄 버그라는 글을 올렸다. 초기에는 한 명의 사용자가 2만 7천 년에 한 번 정도 겪는 오류로 쉽게 넘겼다. 그러나 근본적인 변화의 필요성을 느낀 순간, 고객의 신뢰를 회복하는 비용으로 5억 달러를 과감하게 지불하는 결단을 내렸다. 그는 "경영을 하는 모든 사람들은 실수를 인정하면 어렵게 얻어낸 존경심을 잃지 않을까 염려한다. 하지만 실제로 실수를 인정하는 것은 강함과 성숙함, 공명정대함의 표시이다."라고 실수에 솔직한 경영자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6    爱我中华 댓글:  조회:1297  추천:1  2014-10-10
我接棒:        无论我在哪里,我都愿意遵守公共秩序,不随手扔垃圾,不随地吐痰,不大声说话;开车礼让行人,不急按喇叭,对面来车不开远光灯;任何场合都会遵守秩序排队办事;上下楼梯、电梯靠右边,尊老爱幼 ;友好微笑!     如果您也愿意,请复制这条公益信息,2014 ,提高国民素质从我做起,从您做起,从我们自己做起,从身边的点点滴滴做起。         请接棒!  
5    [펌] 불충분한 문서가 만든 역사의 한가운데 댓글:  조회:1534  추천:2  2014-06-26
    표지ⓒ 다산책방 난 현재 평범하기 그지없는 생활을 하고 있다. 남들처럼 아침에 지친 몸을 일으켜 세워 아침도 먹지 않은 채 출근길을 재촉해 출근을 완료하고 정신없이 오전을 보낸다. 점심을 먹고 졸음을 참아가며 오후를 보내고 퇴근을 기다린다. 퇴근길에는 조금은 여유로운 마음으로 책을 탐독하고 집에서 저녁을 먹는다. 컴퓨터를 하고 TV를 보다가 잠자리에 든다. 너무나 단조롭고 평범한 일상이 계속 되다보니, 이 범주 밖에서의 기억들은 자연스레 해체된다. 기록으로 남기지 않는 한 시간이 흘러 온전히 기억되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그렇게 시간은 흘러간다.   누군가 나의 말이나 행동에 상처 받거나 감동을 받았을지 모른다. 나 또한 마찬가지다. 내 평생에 걸쳐 지워지지 않고 남아있는 장면이 있지만, 정작 장면 속 주인공은 기억하지 못할 때가 허다하다. 그래서 그에 관련된 무엇을 간직해 놓거나 기록해 놓는다. 그리고 그것을 보며 기억을 떠올려본다. 하지만 온전히 떠올리기에 불충분하다. 그렇게 부정확한 기억과 불충분한 문서가 만나 한 사람의 역사가 만들어진다. 그것이 평범한 사람들의 삶이다.   2011년 세계적 권위의 영어권 최고 문학상인 부커상을 수상한 줄리언 반스의 (다산책방)는 평범한 생활을 하고 있는 노년의 주인공이 불충분한 문서를 얻게 되면서 일어나게 되는 일을 다루고 있다. 주인공은 부정확한 기억에 의지해 이 문서가 무엇인지 추론해 보지만, 도무지 알 도리가 없다. 너무나 뜬금없고 생각지도 못했던 문서이다.   책은 1부와 2부로 나뉘어, 어린 시절(중학교 때)과 노년 시절을 구분 짓는다. 1부의 어린 시절은 주인공 토니의 부정확한 기억으로 기반한다. 그에겐 친한 두 친구가 있었고, 그 시절엔 으레 그렇듯이 허영심이 가득했다. 그런 그들 앞에 '진짜'가 나타난다. 전학생 에이드리언이다. 그는 결코 평범해 보이지 않았다. 아주 명철하고 이성적인 철학자와 같은 생각과 행동을 보였다.   그러던 중, 그리 친하지는 않은 친구인 롭슨이 자살을 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소문이 떠돌기 시작한다. 제일 유력한 진상으로 그와 여자친구 사이에서 아기가 생겨서 자살을 했다는 것이었다. 이에 토니와 에이드리언을 비롯한 친구들은 갖가지 허영심에 가득 찬 해석을 한다. 에이드리언은 역사 시간에 선생님의 질문인 '역사란 무엇인가'의 대답에서 롭슨의 자살을 예로 들며 이 해석에 종지부를 찍는 발언을 한다. 그리고 이 해석은 이 소설을 관통하는 주제와도 맞닿아 있다.   '역사는 부정확한 기억이 불충분한 문서와 만나는 지점에서 빚어지는 확신'입니다. (중략) 우린 그가 죽었다는 것, 그에게 여자친구가 있었다는 것, 그녀가 현재 임신했다는 것, 아니면 과거에 그랬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 외에 우리가 뭘 알고 있을까요?(본문 속에서)   토니에게 베로니카라는 여자친구가 생긴다. 허세만 있을 뿐 실세는 없는 토니는 베로니카에게 숙맥 같은 모습을 보인다. 베로니카는 이에 싫증을 느낀 것일까? 결국 그들은 헤어지고 시간이 흘러 베로니카는 에이드리언과 사귀게 된다. 에이드리언은 이를 허락받기 위해 토니에게 편지를 쓴다. 토니도 이에 성실히 답변을 해준다. '아주 유하게'   한편, 토니는 베로니카와 헤어지기 전 베로니카 집에 초대를 받는다. 그녀의 가족들은 알듯 모를 듯 뭔지 모를 위화감이 들게 한다. 그곳에서의 기억들이 훗날 토니에게 다가올 거대한 파국의 강도를 더욱 높이는 계기가 된다. 흩어져 있던 퍼즐이 하나씩 맞춰지면서.   그리고 시간이 흘러 토니는 에이드리언이 자살했다는 소식을 듣는다. 그는 친구들과 만나서 그가 왜 자살을 하게 되었는지에 대한 의견을 나눈다. 너무 똑똑해서 자살을 했다? 그들로써는 도무지 이해를 할 수 없는 에이드리언의 자살이었다.   2부는 토니의 현재인 노년 시절을 이야기한다. 작가가 묘사하는 노년 시절은 아주 섬세하고 실제적이다. 그 노년의 이야기만 놓고 보면 '필립 로스'의 (문학동네)에 필적하고도 남는다. 어떤 면에서는 더욱 와 닿기도 한다. 이 소설을 즐김에 있어 소설의 전체적인 내용과는 약간 다르지만 잠시 머리를 식히며 쉬어가는 페이지로 너무나 훌륭한 역할을 하고 있다.   위에서도 말했듯이 토니는 어느 날 우연히 문서를 발견한다. 그 문서는 편지봉투이다. '고 사라 포드 여사의 재산 처분 문제'로 집 주소를 확인하고 여권 사본을 보내 달라는 내용이었다. 오백 파운드와 두 개의 '문서'가 남겨졌다는 것. 오백 파운드는 포드 여사의 유산이다. 두 개의 문서 중 한 개는 포드 여사의 유언, 두 번째 편지는 에이드리언의 일기장이다. 이 일기장은 현재 베로니카의 소유로 되어 있다. 하지만 포드 여사의 유서 내용 상으로는 토니의 것이기에 토니는 베로니카를 찾아 나선다. 그녀와 만나게 되고,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거대한 파국으로 점점 다가가게 된다.   그런데 토니에게는 궁금한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베로니카의 어머니인 하라 포드 여사가 왜 유산과 유언을 자신에게 남겼고, 에이드리언의 일기장을 왜 하라 포드 여사가 가지고 있었는지, 그걸 또 어떻게 베로니카가 소유하고 있는지. 이 모든 궁금증을 풀기 위해선 베로니카를 만나야 했다.   결국 베로니카를 만나게 되었고, 그녀로부터 충격적 사실을 듣게 된다. 에이드리언이 토니에게 베로니카와 사귀는 것을 허락 받는 편지를 보냈고 이에 대해 토니가 답장을 보냈을 때, 그 내용은 '아주 유하게'가 아니라 '아주 격하게'였다는 것이다. 그의 기억은 완전히 반대로 되어 있었다.   나는 이 편지를 몇 번에 걸쳐 읽고 또 읽었다. 내가 그 편지를 썼다는 사실이나 그렇게 험담을 퍼부었다는 것을 부인하기가 어려웠다. 행여 하소연할 수 있는 게 있다면, 그 편지를 쓴 당시의 나와 현재의 나는 다르다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정말이지, 나의 어떤 성정이 나를 부추겨 그런 편지를 쓰게 했는지 나는 알 수가 없다.(본문 속에서)   '부정확한 기억'에 대한 충격, 그리고 에이드리언과 베로니카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꿔 놓은 토니의 아주 격한 편지에 대한 충격. 그리고 이어지는 베로니카가 데리고 다니는 조금은 지능이 낮아 보이는 아이에 얽힌 충격. 여기에 또 다시 이어지는 베로니카의 어머니 사라 포드 여사와 에이드리언에 얽힌 충격적 반전.   소설은 토니의 정확해 보이는 기억에 기반한 어린 시절을 시작으로, 그의 평온한 노년 시절을 지나, 마구 쏟아지는 충격과 거대한 비극적 반전으로 끝을 맺는다. 부정확한 기억과 닫힌 뇌의 폐쇄 회로는 '모르는 게 약이다'라는 경구를 무색하게 만든다. 그 끝에는 거대한 혼란만이 남아 있다.   언뜻 보면, '예감은 틀리지 않았다'는 제목은 소설의 내용과는 정반대의 뜻을 내포하고 있다. 읽는 사람에 따라 확실히 호불호가 갈릴 것으로 보인다. 개인적으로는 마케팅적인 측면이 강한 제목이었다고 생각된다. 책으로 눈을 돌리게 만드는 데는 탁월한 솜씨를 발휘했지만 읽을 때는 오히려 방해가 되지 않았나 싶다.   내용면에서도 호불호가 갈릴 것으로 보인다. 작가인 줄리언 반스의 특징이기도 하지만, 스토리에 완전히 녹아들지 만은 않는 내용들이 언뜻 언뜻 보인다. 이런 내용들이 누구에게는 좋게 다가오고 누구에게는 너무 생소하고 뜬금없어 나쁘게 다가올 것이다.   마지막 최후의 반전에 대해서 언급하지 않을 수 없지만, 내용을 밝히지는 않겠다. 마지막 두 페이지에서 최후의 반전이 전개되는데, 웬만한 독자도 이 반전을 알게 된 후 바로 책을 덮지는 못할 것이다. 중간 중간 메모를 하지 않은 이상, 앞을 다시 뒤적일 수밖에 없다. 어느 정도 예상을 한 반전이지만, 주인공 1인칭 시점이 발목을 잡는다. 시종일관 토니의 입장에서만 서술되기 때문에 소설이 끝날 때까지도 독자가 아는 사실은 거의 없다. 토니의 부정확한 기억과 토니가 얻게 된 불충분한 문서가 전부이다.   그래서 이 소설은 읽고 나서도 뒷맛이 개운치 만은 않다. 여전히 모르는 것들이 너무 많다. 모든 걸 해결하는 사실을 알게 되지만, 그렇게 되기까지의 과정은 알 도리가 없다. 처음 읽을 때는 주인공의 시선을 쫓아가기 바쁘겠지만, 다시 한 번 읽게 될 때는 모든 등장인물들의 말과 행동 하나하나에 집중하게 될 것이다. 짧고 잘 읽히는 이 소설이 결코 짧게만 느껴지지는 않는 이유이다. 소설 작법으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탁월한 소설이다. 네이버 "책으로 책하다"에서 모셔온 글입니다.  
4    긍정적인 밥 /함민복[모셔온글] 댓글:  조회:1437  추천:0  2014-06-23
긍정적인 밥 /함민복 시 한 편에 삼만 원이면 너무 박하다 싶다가도 쌀이 두 말인데 생각하면 금방 마음이 따뜻한 밥이 되네 시집 한 권에 삼천 원이면 든 공에 비해 헐하다 싶다가도 국밥이 한 그릇인데 내 시집이 국밥 한 그릇만큼 사람들 가슴을 따뜻하게 덥혀줄 수 있을까 생각하면 아직 멀기만 한데 시집이 한 권 팔리면 내게 삼백 원이 돌아온다 박리다 싶다가도 굵은 소금이 한 됫박인데 생각하면 푸른 바다처럼 상할 마음 하나 없네 -시집 '모든 경계에는 꽃이 핀다'에서 ▶(한국) 함민복=1962년 충북 충주 출생. 1988년 세계의 문학으로 등단. 시집 '꽃봇대' '눈물은 왜 짠가?' 등. 젊은예술가상, 김수영문학상, 박용래문학상, 윤동주문학상 수상. 시(詩)로 지은 밥, 시밥 한 상 받아놓고 목이 멥니다. 그렁그렁 눈 두둑을 차고 넘치는 별이 시집 위로 쏟아졌습니다. 그나마 3만 원 원고료를 받을 수 있어 다행입니다. 눈물로 씻어 앉힌 밥, 환한 가슴으로 지핀 밥, 고슬고슬 마음 궁굴려 지은 밥, '긍정적인 밥'을 읽는 내내 끓어 넘치는 밥물처럼 제 서러움이 차올랐습니다. 피가 되고 살이 되고 뼈가 되는 밥 마음 꿇어앉아 먹었습니다. 시집 한 권 팔리면 300원 손에 쥐는 시인의 통장에 슬쩍 동그라미 하나 둘 셋 그려 넣습니다. '긍정적인 밥' 꼬옥! 사 드시길 빕니다. 전다형(한국)·시인 ------------------------------------ 개인적으로 제일 즐기는 시입니다.
3    미국의 문학 댓글:  조회:2200  추천:0  2014-06-11
지역 문학은 언제나 미국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해왔다. 코튼 매더를 비롯한 뉴잉글랜드 작가의 글이 19세기가 끝날 무렵까지 미국 문학을 장악했으며, 당시 쓰여진 글의 상당부분은 설교 및 종교관련 소책자였다. 청교도 견지에서 볼 때, 좋은 글이란 신을 경배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점과 인간의 영혼이 직면한 영적 위험을 철저히 깨닫도록 하는 글이었다. 그리고, 청교도 문학 유형은 복잡한 형이상학적 시에서부터 일반 저널 및 종교사에 이르기까지 상당히 다양했다. 18세기 미국 계몽주의는 전통보다 합리성, 무조건 수용해야 하는 종교 교리 대신 과학적 탐구, 군주제 대신 대표 정부를 강조한 운동이다. 계몽주의 사상가 및 문인은 정의, 자유, 평등은 인간의 타고난 기본권이라는 이상을 펼치는데 전념했다. 스코틀랜드 철학자 데이빗 흄이 미국 “최초의 위대한 문인”이라 칭한 벤자민 프랭클린은 인간의 합리성이라는 계몽주의 이상을 구현한 인물이다. 1820년 무렵 낭만주의 운동이 미국에 도달했다. 유럽과 마찬가지로, 미국에서도 낭만주의의 참신한 비전이 예술계 및 지식인 계층에 열풍을 몰고 왔다. 하지만, 미국 낭만주의가 국가 확장 및 명확한 미국의 목소리 발견 시기와 일치했다는 점에서 두 대륙의 사조는 중요한 차이점을 지니고 있다. 국가 정체성 확립과 당시 분출하던 낭만주의 이상 및 열정은 랠프 왈도 에머슨과 헨리 데이빗 소로우 같은 작가가 걸작을 창조하는데 큰 영감을 주었다. 19세기 중반, 미국은 현대 산업국가로 변모하였다. 그리고, 산업화가 진행되면서 인간의 소외 또한 심화되었다. 스테픈 크레인과 잭 런던 작품에서 볼 수 있듯, 당시 전형적인 미국 소설은 경제적 요소 및 소외가 사회 취약계층에게 안겨준 상처와 피해를 그리고 있다. 생존자들, 예를 들어 마크 트웨인 작품에 나오는 허클베리 핀은 친절을 수반한 내적 강인함, 적응성, 그리고 무엇보다 자신의 고유한 개인성을 통해 어려운 상황을 이겨내고 있다. The Flying DutchmanElbridge Kingsley Copy after Albert Pinkham Ryder published 1887 Smithsonian American Art Museum 1969.26.9 두 번의 세계대전 사이의 미국 산문은 관점 및 형식 면에서 다양한 실험을 이행하였으며, 전반적으로 어네스트 헤밍웨이를 비롯한 미국 작가는 유럽 작가보다 사실성을 한층 강조하는 작품을 썼다. 윌리엄 포크너는 미시시피주의 ‘열기와 먼지’, 다시 말해 그곳의 자세한 현실을 자신의 강렬한 남부 소설에 담았다. 1920년대와 1930년대에는 현실 직시의 중요성이 주요 문학 주제로 자리잡았고, F 스콧 피츠제럴드 같은 소설가들은 희미한 꿈을 부여잡고 살아가는 자들의 비극을 작품에 담았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서사문학은 너무나 다양한 양상을 지니고있어 일반화 자체가 불가능하다. 미국 서사문학은 유럽의 실존주의 및 라틴아메리카의 마술적 사실주의(magical realism) 같은 국제 조류의 영향을 받으며 활기를 더해갔다. 무엇보다, 미국의 고도로 복잡한 다언어 정보문화에 초점을 맞춘 야심찬 신진 작가세대의 부상이 가장 큰 특징이라 할 수 있다. 그 중 가장 잘 알려진 조나단 프랜즌의 소설 ≪교정, The Corrections≫은 2001년 수 개월동안 베스트셀러 목록에 등재되는 기록을 세웠다. 시 또한 다양한 양식을 지니고 있지만, 소설 세계의 다작 및 다양성이 많은 시인에게는 절망적 분열 형태로 비춰졌다. 몇 년 전, 미국의 시인 세계는 크게 “형식주의자(formalist)”와 다양한 유형의 “자유(frbf)” 운문 시인으로 나누어졌지만, 현재는 상황이 다소 바뀌어 언어를 일상세계 표현을 위한 매체로 사용하는 시인과 언어가 스스로 고유의 영역을 창출한다는 시인으로 나누어진다. 지금까지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미국 작가는 싱클레어 루이스, 유진 오닐, 펄 벅, 윌리엄 포크너, 어네스트 헤밍웨이, 존 스타인벡, 솔 벨로우, 아이작 바셰비스 싱어, 토니 모리슨, 모두 9명에 이른다. Mark TwainA photograph of Samuel Clemens, who wrote under the name Mark Twain. Twain was and is one of America's most famous authors. 1907(Courtesy of the Library of Congress Prints and Photographs Division) 본 자료는 국무부 산하 미국공보처(IIP) 및 기타 미국 정부 자료에서 발췌한 것이다.  
2    '악의 꽃' 쓴 프랑스 천재 시인 댓글:  조회:2239  추천:2  2014-04-09
1821.4.9 프랑스 파리에서 시인 보들레르 태어나다 "내 인생은 처음부터 저주받았음이 틀림없습니다. 이러한 운명은 평생 계속되었지요." 시인은 이렇게 자신은 태어나면서부터 저주를 받았다고 회고했다. 프랑스, 파리의 우울, 악의 꽃, 금치산, 댄디즘. 시인을 생각하면 떠오르는 단어다. 19세에 이미 현대성을 획득한 이 천재 시인은 자신의 태생을 '저주'라는 무서운 단어와 결부시켰다. 보들레르는 1821년 4월9일 아버지 프랑수아 보들레르와 어머니 카롤린느 드파이, 두 사람 사이에서 태어났다. 환갑의 나이에 젊은 여인과 결혼한 그의 아버지는 환속한 사제 출신으로 당대 자유주의 사상에 영향을 받은 대단히 지적이고 특이한 인물이었다. 미술에 대한 전문적인 지식을 갖췄고, 아마추어 화가이기도 했다. 보들레르가 훗날 미술에 관한 비평과 스케치를 한 연유를 그의 핏줄에서 찾아볼 만하다 19세에 이미 현대성을 획득한 천재 시인의 아버지는 보들레르가 6살 때 별세했으니, 어린 보들레르에게는 인자한 할아버지와 같은 인상만 남아 있었다. 사제 출신의 남편과 34살이나 차이 나는 젊은 엄마는 건장하고 전도가 유망한 오픽 장군과 재혼을 한다. 그리고 돌아가신 친부가 어린이 보들레르에게 물려준 재산을 관리하는 가족회의가 구성되었고, 군인 출신의 계부 아래서 예술가의 피를 이어받은 아이는 고독했다. 보들레르의 이미지인 고통과 우울, 비참한 삶, 모멸감과 같은 정서는 유년기의 외로움에서 스며들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탄생을 저주받았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환속한 사제의 아들이니 신의 노여움을 산 것일까? 보들레르, "[악의 꽃]에 세상의 모든 고통을 담아 놓았다."   보들레르는 자신의 유일한 시집인 [악의 꽃]을 남김으로써 시인 보들레르가 되었다. 시인이 시집을 낸다는 건, 자신의 생명과 시간을 조탁한 언어의 집을 독자들에게 보여주는 것이다. 보들레르는 이 시집을 '세상의 모든 고통을 담아 놓은 사전'이라고 자평했다. 그의 생명과 시간의 집인 시집에 거주하는 고통들을 통하여 우리는 그 '상징'의 숲으로 걸어 들어간다. 시인은 이란 '영혼이 초자연적인 어떤 상태에 있을 때 아무리 평범한 풍경이나 사물일지라도 그 속에 생명의 깊이가 그대로 드러날 수가 있다. 이것이 곧 상징이 된다'라고 쓴다. 시인과 보통 사람들은 같은 세상에 살면서 같은 풍경이나 사물을 본다. 세상은 시인에게만 특별한 풍경이나 사물을 선물하지 않는다. 그러나 시인은 그것들과 교감하고 소통하여 '영혼의 초자연적인 어떤 상태'로 자신을 끌어올린다. 거대한 새가 날개를 펴는 모습이고, 항구를 출발한 범선이 돛을 올리는 이미지이다. 보들레르는 19세기를 살면서 이미 근대의 폭풍우를 지나 '현대'라는 항구에 닻을 내린 시인이다. 그가 교감하고자 하는 세상은 현실적으로 매우 지난한 세상이었다. "그 시절 어머니는 저와 함께 오랫동안 산책을 하며 다정한 모습을 보여주셨지요. 저는 아직도 그 강둑을 기억하는데, 저녁 풍경이 어찌나 슬퍼 보였던지. 아! 어머니의 정을 느낄 수 있었던 행복한 순간이었어요. 어머니에게는 틀림없이 고통스러웠을 순간을 제가 행복한 시간이라고 부르는 것을 용서해 주세요. 어머니는 어린 저에게 우상이며 동시에 친구였으니까요." 보들레르가 40살 되던 해에 어머니에게 보내는 편지의 일부이다. 시인이 말하고 있는 행복한 순간은 보들레르가 6살 되던 해, 즉 보들레르의 아버지가 죽고 어머니가 재혼하기 전까지 2년이 조금 안 되는 기간이다. 만 스물한 살 되자 떼를 써서 아버지 유산을 받은 뒤부터 방탕한 생활   계부인 오픽 소령은 결혼 후에, 장군으로 승진하고, 콘스탄티노플(이스탄불) 주재 전권공사를 거쳐 외교관 생활을 하다가 상원의원으로 진출하는 잘 나가는 인생의 전형이었다. 하지만 이러한 계부와는 달리 보들레르는 파리 대학 법학과에 입학하면서부터 '노르망디파'라고 불린 문학 동아리에 참여했고, 어둠 속으로 빠져 들어간다. 거리의 창녀를 알게 되고 매독에 걸려 평생의 지병이 된다. 보들레르는 1842년 4월 9일 만 21세로 법적인 성인이 되자 선친의 유산을 달라고 떼를 써 가족들로부터 금화 십만 프랑을 받았다. 그 돈으로 대학을 다니면서 방탕한 생활을 하느라 진 빚을 다 갚고 펑펑 돈을 써대기 시작했다. 그 무렵에 그의 평생 연인이자 고통의 동굴인 잔느 뒤발을 만나 사랑에 빠진다. 이 역시 행복한 시간이기도 하다. 그녀는 단역배우 출신이라고는 하지만 모계 3대가 창녀 집안인 '아름다운' 창녀였다. (두 사람의 관계는 이후 14년간이나 지속되다가 끊어지게 된다. 하지만 보들레르가 '검은 비너스'라고 노래한 그녀와의 인연은 그의 문학과 인생에 생명 줄과 같은 것이었다. 관계를 끝냈다고는 하지만 그녀가 중풍에 걸리자, 경제적으로 다시 돌보아주는 연민의 정을 보여주기도 했다. 육감적이고 아름다운 여인은 늙고 병들어 거기에다 중풍에 걸려 목발을 짚고 어두운 파리 거리를 걸어 다니다가 사라져 버렸다.) 유산을 받고 쓰기 시작한 지 2년이 지나자 어머니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보들레르에게는 천형과 같은 '금치산 선고'를 의뢰하고 법원은 그를 법적으로 미성년자로 취급하여 금치산자 선고를 내렸다. 그는 46세의 나이로 죽을 때까지 경제적으로는 미성년자였다. 그의 인생은 항상 빚을 지고, 어머니에게 돈을 달라고 조르고, 빚쟁이에게 쫓겼다. 지병인 매독이 불청객이 되어 간헐적으로 온몸에 찾아들고 보들레르는 이러한 고통 속에서 시인으로 단련되었고, 숙성되었다. 진흙 속에서 연꽃이 피었다.  "내게 생각하는 법을 가르쳐 준 이는 드 메스트로와 에드거 앨런 포" 시인 보들레르의 첫 번째 저작은 이다. 미술전시회에 출품된 작품을 연구 평가한 글이다. 보들레르는 연이어 도 출판한다. 미술비평가로서도 보들레르는 꾸준히 활동했다. 그는 화가 들라크루아를 높게 평가했고, 독일의 바그너 공연을 보고 열광하여 음악 평론도 쓴다. 그는 시와 음악 미술을 모두 받아들인 지성이었다. 그리고 1847년에 에드거 앨런 포의 작품을 만나게 된다. 보들레르와 에드거 앨런 포는 국적만 달랐지 여러 가지로 공감대가 형성되는 시인들이었다. 작품을 통하여 천재는 천재를 알아보았고, 보들레르는 포의 작품을 번역하면서 배우고 익히고, 교감했다. 그는 포를 만난 것을 행운으로 여기고 '내게 생각하는 법을 가르쳐 준 이는 드 메스트르와 에드거 앨런 포이다'라고 고백했다. 역시 저주받은 천재 포와 마찬가지로 어려운 경제적인 환경과 광기 어린 생활을 하던 보들레르의 영혼은 당시 부르주아들의 안락한 생활을 속물적인 것으로 보았다. 보들레르는 세속적인 부르주아를 극단적으로 혐오하고 부정하면서 귀족주의적 태도를 취한다. 그는 실용주의적인 세상에 맞서 '댄디즘'으로 무장했다. 지금도 문학청년들은 한 때 댄디즘의 세례를 받는다. 댄디즘은 가난한 시인이 입기 좋은 외투가 되기도 한다. 하지만 그 외투 안에서는 배고픈 위장이 있다. 19세기에 이미 현대적인 시를 쓴 시인이 물질주의와 민중, 민주주의에 대해 갖는 거부감은 묘한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공중 도덕 훼손죄'로 기소된 시집 [악의 꽃] 1857년 소설가 플로베르의 [보바리 부인]이 외설죄로 재판을 받고 무죄가 선고 되었다. 이즈음에 보들레르는 [악의 꽃]의 원고를 풀레-말리사스 출판사에 넘겼다. 그리고 그 해 4월 계부인 오픽 장군이 사망하고 홀로 된 어머니는 옹플뢰르의 별장으로 이사했다. 보들레르의 [악의 꽃]은 6월 25일 출간된다. 초판 [악의 꽃]에는 모두 100편의 시가 실렸다. [악의 꽃]이 '풍기문란하다'라는 서평에 자극을 받은 프랑스 내무부 공안국이 이 책을 고발했고, 보들레르와 출판사는 '공중도덕 훼손죄'로 기소되었다. 플로베르에 이은 필화사건이었다. 저자와 출판사는 벌금형을 받았고 시 6편은 삭제 명령을 받았다. ([악의 꽃]에 대해 법적인 구속이 없어진 것은 한 세기가 지난 1949년이었다. 프랑스 대법원은 보들레르의 [악의 꽃]에 대한 유죄선고를 파기하고, 그와 작품에 법적인 명예를 회복시켜 주었다. 그날은 8월 31일 그의 제삿날이었다. 이 시집으로 그는 현대시의 시조가 되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이후 시인은 파리를 떠나 어머니 곁에 머물 생각도 하고, 단상집인 [벌거벗은 내 마음]의 원고를 쓴다. 이 작업은 보들레르 말년의 내면 풍경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산문들이다. 절망적인 상태의 금치산자, 연인 잔느 뒤발과의 결별, 고독, 우울, 매독, 집필 구상 중인 원고에 대한 절망감 등 보들레르 존재 자체를 위협하는 가시나무와 같은 단상들이다. 이 단상과 더불어 산문시집인 [파리의 우울]은 그가 인생의 마지막 나날들에 기록한 산문 시편들이다. 그리고 보들레르의 단편소설인 [라 팡파를로]는 그의 유일한 소설이고, 문학청년 시절 소설에 대한 보들레르의 관심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이 소설은 단행본으로 출간되어 12,000부를 발행한다.  '시인은 폭풍우를 넘나들고 사수들을 비웃는 구름의 왕자와 비슷하다' 보들레르는 우울한 파리를 떠나 벨기에로 인생의 마지막 여행길에 올랐다. 하지만 그 생활 역시 저주받은 시인을 행복하게 하지는 못했다. 오히려 더 어려운 지경이 되어 보들레르는 [불쌍한 벨기에여]라는 산문집을 집필하면서 그곳의 사람들에게 독설을 퍼부었다. 시인은 브뤼셀에서 현기증과 구토를 극심하게 일으키고 결국 반신마비의 상태가 되어 늙은 어머니의 손을 잡고 파리로 돌아왔다. 그가 사랑하고 미워하였던 우울한 파리에서 이 세상의 여행을 끝냈다. 1867년 8월 31일 오전 11시, 시인의 나이 46세였다. '알바트로스'라는 새가 있다. 거대한 바닷새이다. 우주의 심연과 같은 바다 위를 날아다니는 장자의 대붕과 같은 이 새는 간혹 항해를 하는 선원들의 손에 잡혀 무기력한 모습이 되기도 한다. 보들레르는 자신의 모습을 알바트로스에 투영한다. 자주 선원들은 심심풀이로 붙잡는다. 거대한 바다 새인 알바트로스를 아득한 심연 위를 미끄러지듯 나아가는 배를 태평스레 뒤따르는 길동무를. 선원들이 갑판 위에 내려놓자마자 창공의 왕자는 서툴고 창피해하며 그 크고 하얀 날개를 배의 노처럼 가련하게 질질 끌고 다닌다. 날개 달린 이 여행객은 얼마나 어색하고 무기력한가! 조금 전까지도 멋있던 그는 얼마나 우습고 추해 보이는지 선원 하나가 담뱃대로 그의 부리를 성가시게 하고 절뚝거리며 다른 이는 더 이상 날지 못하는 불구자를 흉내 내는구나 시인은 폭풍우를 넘나들고 사수들을 비웃는 이 구름의 왕자와 비슷하다. 야유 속에 지상에 유배당하니 거인의 날개가 걷기조차 힘겹게 하는구나. 이 시는 1859년인 그의 인생 하반기에 발표된 시이지만, 이 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1842년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시인의 가족들이 방탕한 생활을 하는 청년 보들레르를 인도행의 배에 실어 바다 위에 올려놓았다. 환락의 도시에서 먼 이국으로 유배를 보낸 셈이다. 시인은 항해 도중 폭풍우를 만나 잠시 머물렀던 열대 이국의 섬들을 보고 그 정서를 마음에 담았다. 시인은 인도 행을 거부하고 10개월 만에 다시 파리로 되돌아 왔다. 중년의 나이가 된 시인은 그때 보았을 거대한 바다 새를 떠올리면서 '지상에 유배' 당한 자신의 삶을 시로 노래했다. 나다르와 카르자가 촬영한 보들레르의 사진에 담긴 우울한 눈빛 카르자가 찍은 보들레르의 사진을 들여다본다. 마치 회화 작품과도 같은 절묘한 사진 한 장이다. 미술 평론가인 보들레르는 사진을 경멸하곤 했지만(그는 '현대의 대중과 사진'이라는 에세이에서 사진을 '이것은 재능이 없다거나 게을러서 실패한 모든 화가들의 피난처가 되었다'라고 했다.) 당대 사진예술가였던 나다르와 카르자는 보들레르를 보들레르 답게 찍어서 우리들에게 보여주고 있다. 이것은 보들레리앙에게는 일종의 축복이다. 보들레르는 말년에 젊은 말라르메와 베를렌이 자신에게 열광하는 모습을 보고 '이 젊은이들은 나를 몹시 무섭게 한다'고 했다. 병들고 피곤한 육체는 이제 후배 시인들의 열광마저도 부담스러웠다. 시인이란 누구인가? 간혹 그런 생각을 한다. 그때 보들레르의 사진 한 장이 떠오른다. 어둡고, 외롭고, 무서운 어둠 속에서 별처럼 빛나는 보들레르의 우울한 눈빛을 떠올린다. 필자가 추천하는 덧붙여 읽으면 좋은 책 보들레르의 [악의 꽃(문학과 지성사)]을 우선 권한다. 보들레리앙 윤영애 선생의 번역으로 나온 이 시집은 보들레르가 남긴 단 한 권의 시집이다. 낭만주의 정신을 담고 있으며 동시에 낭만주의의 결점을 뛰어넘어 상징주의, 초현실주의 등 현대시에 길을 터놓은 것으로 평가되는 작품이다. 1861년 출간된 제2판을 번역 텍스트로 삼았다. 더불어 역시 윤영애 선생의 번역인 [파리의 우울(민음사)]은 [악의 꽃]과 함께 보들레르의 독창적인 시 세계를 보여주는 산문시집이다. 그가 개척한 이 산문시라는 형식은 베를렌, 랭보, 로트레아몽, 말라르메 등 근대 상징파 시인들에게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시인은 노파, 거리의 소녀, 노름꾼, 넝마주의 등 파리의 거리를 헤매는 모든 서글픈 암시들을 산문 시편으로 그려내고 있다. 그리고 김붕구 선생의 명저인 [보들레에르(문학과지성사)]를 읽어야만 한다. '알면 보인다'라는 말처럼 이 평전을 통하여 한 시인의 총체적인 모습과 시에 대한 이해가 깊어질 것이다. 김붕구 선생도 지난한 삶을 살아오신 분이다. 문학청년 시절 이 두툼한 책 한 권을 끼고 혜화동 거리를 배회하던 생각이 난다. 그땐 보들레르의 외투를 입고 싶었다. 가난해서 댄디한 척 하고 다녔었다. 마지막으로 [지상의 낯선 자 보들레르(민음사)]도 곁에 둔다면 다 읽지는 않더라도 행복할 것이다. 한국 원재훈
1    못만날지도 모릅니다… 화들짝 달아날 ‘목련꽃 엔딩’ 댓글:  조회:2490  추천:1  2014-04-03
경주 불국사의 가장 깊은 자리에 세워진 관음전 주변의 아름드리 목련 군락에서 큼지막한 꽃들이 가득 피어난다. 경주라면 누구나 구름처럼 피어나는 벚꽃의 아름다움을 첫손으로 꼽지만, 도처에서 무리 지어 소담스럽게 피어나는 목련의 정취도 벚꽃에 밀리지 않는다. 올봄의 꽃구경은 영 재미가 없습니다. 동시다발. 연일 따스한 날씨에 봄꽃들이 두서없이 한꺼번에 피어난 까닭입니다. 꽃의 개화 순서도 다 무너졌고, 지역의 순서도 가리지 않습니다. 올해의 봄꽃 구경은 이제나 저제나 화신(花信)의 북상을 기다리던 기대도, 투전판에서 뒷장의 화투패를 서서히 밀어 올릴 때의 두근거림도 다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일제히 피었다는 건 지는 일도 한순간이라는 뜻. 그래서 올봄의 꽃놀이는 많이 서둘러야겠습니다. 평소보다 잰걸음으로 경주를 다녀왔지만, 경주의 목련 만개 소식을 채 알리기도 전에 서울 여의도 벚꽃의 꽃망울이 한꺼번에 터져버렸으니 낭패도 이런 낭패가 없습니다. 그래서 개화 속도에 맞춰 뛸 수밖에 없었습니다. 경주 사람들만 숨겨두고 찾아가는 경주 안강의 벚꽃 명소와 벚꽃이 늦게 당도하는 곳들을 두루 들러보느라 어찌나 숨이 가쁘던지요. 그곳에서 이르게 만난 꽃소식을 여기 전합니다. # 벚꽃보다 화려하다…경주의 목련 목련에 대한 생각 하나. 사실 봄꽃 중에서 목련은 뒷전이다. 가장 먼저 봄의 기미를 알리는 역할로는 매화에 뒤지고, 가지마다 다닥다닥 피어 숨 막힐듯 향을 뿜는 벚꽃에는 화려함으로 밀린다. 화사함으로는 개나리에, 강렬하기로는 진달래나 철쭉에 어림도 없다. 그저 따스한 봄볕 아래 이따금 드문드문 집 마당쯤에 서서 후덕한 인상으로 소담스러운 봄의 기운을 알려줄 뿐이다. 여기에 동의한다면 틀림없이 당신은 경주의 목련을 제대로 보지 못한 것이다. 벚꽃보다 더 화려한 경주의 목련이 얼마나 화사하게 꽃송이를 터뜨리는지는 불국사에 가보면 알 수 있다. 불국사로 드는 산문 주위는 지금 분홍빛 벚꽃과 버드나무 신록으로 온통 파스텔의 색감이 번져가고 있다. 향기 짙은 봄꽃과 신록이 아찔하다. 그러나 불국사를 통틀어 가장 아름다운 봄꽃은 대웅전 뒤편 무설전의 회랑을 지나 당도하는 관음전에 숨겨져 있다. 경주 대릉원의 봄밤에 만난 풍경. 능과 능의 부드러운 선이 만나는 자리에 심어둔 목련에 꽃이 활짝 피어났다. 야간조명을 받은 만개한 목련 딱 한 그루만으로 봄밤의 그윽함이 꽉 채워진다. 불국사의 관음전은 대웅전보다 더 깊고 높은 자리에 있다. 해마다 봄이면 관음전 주변으로 목련의 꽃 사태가 난다. 거대한 목련들이 군락을 이뤄 꽃을 피우는데, 어른 손바닥보다 큰 탐스러운 꽃들이 가지마다 피어난다. 관음전 담장에 기대 서서 절집을 내려다보면 첩첩이 겹쳐진 불국사의 법당 처마를 배경으로 나무마다 가지가 휘어질듯 피어난 큼지막한 목련이 하늘을 다 가리고 있는 모습을 만날 수 있다. 목련이 이처럼 무리 지어 한꺼번에 피어나는 모습은 일찍이 다른 데서는 보지 못한 풍경이다. 순백의 흰꽃이 무더기로 피어서 마치 절집을 맑은 정신으로 장엄(莊嚴)하고 있는 듯하다. 경주 오릉에 피어나는 목련의 화려함도 그에 못지않다. 경주의 오릉은 신라의 시조인 박혁거세와 알영왕비 그리고 신라왕 셋의 능이 모여 있는 곳. 목련은 오릉의 담장과 박혁거세의 제사를 모시기 위해 지은 숭덕전과 후손들이 기거하는 그 곁의 살림집 주변에 피어난다. 건물 둘레에 심은 목련은 이제 활짝 꽃을 피워서 숭덕전을 아예 꽃구름 속에 가뒀다. 후드득 떨어지기 시작하는 꽃잎들은 아직 상하지 않아 바닥을 온통 희게 물들이고 있다. 목련이 아름답기로는 또 한 곳, 첨성대도 빼놓을 수 없다. 여기 목련은 특히 야간 조명이 켜질 때 가장 아름답다. 조명을 받아 은은하게 떠오르는 첨성대 주위로 순백의 꽃잎이 환하게 빛나는 모습이라니…. 봄밤의 정취 중 으뜸이 ‘밤 벚꽃놀이’라지만, 첨성대 주변의 풍경만 놓고 본다면 ‘밤 목련놀이’도 그에 못지않을 듯하다. 마침 밝은 보름달이 피어나 순백의 꽃잎과 어우러지는 봄밤이라면 더 좋겠다. # 딱 한 그루 목련이 만드는 봄의 풍경 경주에는 사람들을 불러들이는 딱 한 그루 목련도 있다. 경주를 찾는 이들이라면 누구나 들르는 곳이 대릉원이다. 미추왕릉과 천마총이 있는 대릉원의 곳곳에도 목련이 심어져 있는데, 그중에서도 거대한 두 개의 능이 유려한 곡선으로 만나는 자리에 심어진 아름드리 목련 한 그루는 가히 화룡점정의 아름다움을 뽐낸다. 딱 한 그루의 목련이 빚어내는 건 수묵화의 아름다움이다. 부드러운 선과 공간의 가장 적절한 자리에 딱 한 그루의 목련이 심어졌고, 그 목련이 가장 아름다운 봄날의 초입에 무성한 꽃을 매달고 피어난다. 그 모습이 얼마나 매혹적이던지 해마다 이맘때면 이제나 저제나 개화를 기다려온 전국의 아마추어 사진가들이 대릉원의 목련 한 그루를 보겠다고 경주로 몰려들 정도다. 대릉원의 목련도 첨성대의 목련과 마찬가지로 낮보다 밤이다. 푸른 어둠과 은은한 조명으로 능의 윤곽이 선명하게 살아나는 시간에 만나는 목련은 한 그루만으로도 충분하다. 흔전만전한 꽃잎도, 아찔한 향기도 없이 정갈하게 피어난 목련 한 그루의 존재감만으로 그윽한 봄밤의 정취를 한 폭의 그림으로 불러오는 것이다. 경주 통일전 부근의 정강왕릉에서 만난 진달래. 경주에는 목련이 터널을 이룬 길도 있다. 경주 남산 자락의 경상북도 산림환경연구원. 곳곳에 명소와 신라의 유적이 즐비한 경주에서 관광객의 발길이 미처 닿지 않는 곳이지만, 다른 계절에는 몰라도 봄에는 이곳을 빼놓을 수 없다. 오래 머물며 볼 건 좀 모자라는 듯하지만, 메타세쿼이아 가로수의 신록과 작은 개울을 끼고 가득 피어나는 목련, 살구꽃, 벚꽃들로 마음이 다 환해지는 곳이다. 이즈음 이곳에서 가장 인상적인 것은 연구원 초입의 오솔길에 피어난 ‘산목련 터널’이다. 큼지막한 꽃을 치렁치렁 달고 수형이 넓게 펼쳐지는 일반 목련과는 달리 산목련은 꽃이 잘고 띄엄띄엄하며 나무는 수직으로 높게 자란다. 그다지 긴 길은 아니지만 가지마다 꽃을 피워낸 산목련이 만들어낸 소실점의 터널로 들어가는 기분이 색다르다. 산목련 터널 앞에서 뒤로 돌면 이번에는 살구꽃 터널이다. 얼핏 벚꽃처럼 보이는 연분홍 살구꽃 아래서는 꽃향기를 담뿍 느낄 수 있다. 이쯤에서 솔직히 털어놓자. 경주의 목련은 이번 주말이면 늦다. 주중에 서두른다면 겨우 만날 수 있겠지만, 그래도 절정은 넘긴 뒤다. 꽃 소식이 빨리 당도한 만큼 지는 속도로 빠른 까닭이다. 봄꽃이 며칠 사이에 이렇듯 전국에서 폭죽처럼 터질 줄 누가 알았을까. 지난 주말까지만 해도 경주에서 벚꽃은 ‘아직’이었다. 개화율이 30%나 됐을까. 경주 벚꽃의 절정과 북상 속도를 가늠해 보았지만, 허망하게도 딱 이틀 만에 서울 여의도의 벚꽃이 피기 시작했다. 경주의 목련은 후드득 지고 있다는 소식. 올해 놓쳤다면 경주의 목련꽃 정취는 내년을 기약할 밖에…. 아무튼 남녘으로부터 전해지는 화신의 가슴 두근거림이 없으니 올해의 봄꽃 구경은 영 재미없다. # 자전거로, 또 도보로 즐기는 벚꽃들 경주의 봄 벚꽃 명성은 익히 알려진 바다. 경주는 도처에 벚꽃이다. 시내에도 유적지에도 오래된 사찰에도 어김없이 화려한 꽃을 매단 벚나무 가로수가 늘어서 있다. 울산에서 경주역으로 이어지는 7번 국도도, 경부고속도로 경주나들목에서 포항 쪽으로 이어지는 길에도, 불국사 너머 석굴암 가는 길에도, 보문단지의 호수 주위에도 온통 벚꽃이 피운 꽃구름으로 가득 차 있다. 흔전만전. 따로 찾아다닐 것도 없이 경주시내 전체가 벚꽃 동산이고 벚꽃 천지다. 경주에 이처럼 벚꽃이 화려하게 피는 건 1971년 경주관광개발 계획을 확정하면서 경주 일원의 도로마다 가로수로 벚나무를 심었기 때문이다. 애초에 10년생 안팎의 벚나무를 심었으니 그때 심어진 벚나무들이 수령 50년의 아름드리로 자라났다. 경주 개발이 끝난 1979년 뒤로도 벚나무는 계속 심어져 경주 주요도로와 사적지의 벚나무만 3만5000여 그루에 달한다. 경주 전역의 벚나무까지 다 합치면 그 숫자는 30만 그루로 늘어난다. 봄이면 도시 전체가 벚꽃에 파묻히는 진해의 35만 그루에 육박하는 숫자다. 발견 당시 모습 그대로인 경주 남산의 열암곡 마애여래입상. 경주의 벚꽃은 아직 늦지 않았다. 올해 경주 벚꽃은 서울 여의도와 거의 동시에 피고 있다. 차이가 난다 해도 고작 하루 이틀이다. 그러니 이번 주 중반을 넘겨서 주말까지, 좀 더 여유 있게 잡으면 내주 초까지가 경주의 가장 화려한 벚꽃을 만나는 절정의 시간이다. 경주 한복판의 대릉원과 첨성대, 월성 일대는 따로 일러주지 않더라도, 경주에 갔다면 누구나 들르는 곳. 이곳에도 벚꽃이 흐드러진다. 봄볕 따스한 낮이면 낮대로, 화려한 벚꽃과 조명이 어우러진 밤이면 밤대로 벚꽃놀이의 즐거움을 만끽할 수 있는 곳이다. 여기서 살짝 귀띔 한마디. 월성동 주민센터에서 분황사까지 이어지는 천군로를 달리는 즐거움을 빼놓지 말기를…. 이 구간은 차로 달려서는 재미없다. 자전거를 빌려 타고 봄볕 아래 쏟아지는 꽃비를 맞으며 달리기에 제격인 곳이다. 경주에서 벚꽃 좋기로야 호수의 물빛과 화려한 꽃이 어우러지는 보문호 일대가 으뜸. 하지만 벚꽃 필 무렵의 주말이나 휴일이면 일대는 아예 주차장이 되고 만다. 한꺼번에 몰려든 행락객들도 하루 종일 북새통을 이루고 늦은 밤까지도 벚꽃 반 사람 반이다. 이보다 좀 덜 붐비는 곳이 김유신장군묘 인근의 송화산 아래 흥무공원이다. 흥무공원으로 이어지는 서천변의 벚나무 가로수길도 좋지만, 김유신장군묘 주차장에서 흥무로 쪽으로 내려오는 짧은 일방통행 도로도 놓치면 아쉽다. 여기서는 일제히 하늘을 찌를 듯 솟아 있는 여윈 벚나무들을 만날 수 있는데 차를 두고 비처럼 쏟아지는 벚꽃잎 아래로 걸을 수 있다. # 꼭꼭 숨겨둔 벚꽃의 명소…풍산 봄이면 한꺼번에 몰려드는 관광객들로 온통 북적이는 경주에서 떠들썩한 행락이 아닌 ‘호젓한 벚꽃놀이’가 가능할까. 결론부터 말하자. 가능하다. 경주에는 경주시내의 벚꽃 풍경을 관광객들에게 다 내주고 주민들만 몰래 찾아가는 벚꽃명소가 있다. 경주시내에서 차로 20분 남짓 걸리는 안강읍의 방위산업체 풍산 공장. ‘꽃놀이에 웬 공장이냐’고 반문하겠지만, 경주 일대의 화사한 벚꽃 곁에서 생활하는 주민들이 엄지손가락을 치켜들고 ‘명소 중의 명소’라고 치켜세우는 곳이니 믿어보자. 한옥의 기와와 썩 잘 어울리는 순백의 목련. 풍산은 방위산업체라 평소에는 일반인들의 출입이 엄격히 통제되지만 지난 2002년부터 일대의 벚꽃이 흐드러지는 4월 첫 주에 한해 공장 문을 열고 벚꽃행락객들을 맞아들인다. 올해도 2일부터 13일까지 공장 문을 개방한다. 기대 반 의심 반으로 풍산 공장을 찾아가는 길. 공장으로 들어서는 4차로 진입도로부터 1978년부터 심어 가꿨다는 벚꽃의 화려한 위용에 입이 딱 벌어진다. 공장 안으로 들어서면 벚꽃의 꽃 사태는 점입가경이다. 특히 공장 담벼락과 칠평천 둑 사이의 비포장 흙길 좌우에 펼쳐진 벚꽃의 아름다움은 그야말로 숨이 턱 막힌다. 사원아파트 진입로도 온통 벚꽃 천지다. 벚꽃 만개한 날 이곳에 가보는 건 그야말로 행운이다. 호젓한 벚꽃놀이를 즐기는 또 하나의 방법은 벚꽃의 절정기를 피해 분분히 낙화할 때를 겨눠서 가는 것이다. 벚꽃이 절정으로 치닫는 때를 놓쳤다 해도 실망할 건 없다. 경주에는 시내의 벚꽃이 떨어질 무렵, 뒤늦게 절정의 순간을 맞는 벚꽃 명소가 비밀처럼 숨어 있다. 먼저 덕동호 끝에서 암곡동의 동대봉산 무장사지로 이어지는 벚꽃길. 이쪽은 관광객들에게 알려지지 않아 호젓하기도 하거니와, 경주시내의 벚꽃보다 딱 일주일 정도 늦게 피고 늦게 져 ‘지각 꽃놀이’를 즐기는 데 그만이다. 대릉원 부근의 벚꽃이 분분히 지고 행락객들이 썰물처럼 빠져나가고 난 뒤에야 암곡 일대의 벚꽃은 절정으로 들어선다. 이 길의 벚나무 발치에는 개나리까지 군락을 이루고 있다. 경주수목원에서 통일전으로 올라가는 길도 늦은 벚꽃놀이를 즐길 수 있는 곳이다. 이쪽에서 피는 벚꽃은 경주의 다른 벚꽃과는 좀 다르다. 경주의 벚나무는 대부분 왕벚나무들인데 이쪽의 벚나무는 겹벚나무다. 겹벚나무는 왕벚나무보다 개화가 늦어 벚꽃축제가 막을 내린 뒤에 비로소 핀다. 벚꽃 군락의 규모는 작은 편이지만 겹벚나무는 색이 진하고 채도도 높아 늦은 벚꽃을 즐기기에 적격이다. # 신라 왕릉과 마애불에서 꽃을 보다 봄날의 경주로 꽃구경을 간다고 꽃만 보고 돌아올 수는 없는 일. 여기에 가볍게 다녀올 수 있는 명소 두 곳을 더 보탠다. 남산 자락의 정강왕릉 그리고 열암곡의 마애여래입상이다. 통일전 인근의 그윽한 솔숲에 있는 정강왕릉은 신라의 50대 왕 정강왕이 묻힌 능으로 전해진다. 헌강왕에 이어 왕위에 오른 정강왕은 신라의 국운이 기울어가는 때 즉위한 데다 고작 1년 만에 여동생 진성여왕에 왕위를 물려주고 세상을 떠났다. 그러니 이렇다 할 업적은커녕 잠겨 있는 이야기도 없지만, 정강릉으로 가는 솔숲의 정취만큼은 빼어나다. 남산 자락은 이즈음 솔숲 아래 선명한 붉은 진달래가 한창이다. 숲길의 길이는 고작 200m가 채 안 될 정도로 짧지만, 진달래와 소나무가 입체적으로 어우러진 호젓한 봄날의 숲길을 산책 삼아 잠깐 거니는 맛이 훌륭하다. 남산의 최고봉인 고위산의 남쪽 자락인 열암곡에는 지난 2007년 인근 석불좌상 주변을 조사하다 우연히 발견한 마애여래입상이 있다. 남산 새갓골 주차장에서 넉넉잡아 30분쯤 산자락을 걸어 오르면 마애여래입상을 만날 수 있다. 암반층에 45도 경사로 엎어진 채 발견된 마애불은 발견 당시의 모습 그대로 관람객들에게 공개되고 있다. 1300여 년 전에 깎아 세웠던 이 불상은 얼마나 오랜 시간 이런 자세로 있었던 것일까. 70t이 넘는 대형 불상을 세울 일이 막막해 문화재청은 엎드린 그대로 비닐 천막을 치고 철망을 통해 불상을 관람할 수 있도록 해놓았다. 철망 틈으로 들여다본 입상의 선명한 눈매와 날선 콧날은 자못 감동적이다. 마치 땅에 키스를 하는 듯한 마애불의 표정은 온화하고 엄숙했다. 경주의 아름다움이 어디 꽃뿐일까. 두 손을 모은 신라 사람들의 간절한 희망을 다 받아주고 1300여 년을 땅속에 묻혀 있었던 불상의 현신도 어쩌면 가장 향기로운 꽃이 아니던가. 한국 박경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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