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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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나의 대학공부(김동진) 댓글:  조회:1442  추천:67  2008-06-12
나의 대학공부김동진문학강좌를 청취하는 어느 모임자리에서 오랜만에 만난 친구가 손을 잡고 건네는 인사말을 알아듣지 못한적이 있다. “당신은 늘 솔직해서 좋더라이.” 어두운 밤에 홍두깨 내밀듯이 하는 친구의 말에 나는 어안이 벙벙하여 “무슨 뜻인지?” 하고 반문을 하지 않을수 없었다. “략력을 쓸 때 말이요 언제 보나 ‘통신학부’라고 밝히는데 그게 좋단 말이요.” 친구의 해석에 나는 “아무 일도 아닌걸 가지고…”라고 얼버무리면서 멋적게 웃고말았다. 사실대로 쓴 학력인데 그것을 가지고 친구가 말을 만드는것이 조금은 이상스럽게 느껴지긴 했지만 돌이켜 생각해보니 그 말속에는 거짓학력으로 자기를 포장하는 인간들에 대한 경멸이 숨어있음을 엿볼수 있었다. 친구는 자기의 곧은 성미를 이렇게 표현했던것이다. 살다보면 간력이나 략력을 써야 할 일들이 많다. 특히나 글쟁이들에게는 짜증날 정도로 많은것이 략력쓰기이다. 신문 간행물에 손바닥만한 작품을 발표해도 략력을 요구하니 말이다. 개인저서로 단행본을 출판하는 경우에는 더구나 빼놓을수 없는 략력이고보면 략력이란 상당히 중요한것 같기도 하다. 나의 경우를 보면 략력을 쓸 때 제일 시끄러운것이 학력이다. 등기표의 “문화정도”란에는 “대학”이라고 적으면 되는데 학력을 증명하는 학교이름을 밝히라고 하는 경우에는 문제가 조금 달라진다. 눈을 질끈 감고 “연변대학”이라고 쓰자 하니 남을 속이는 일이여서 그렇게는 못하고 사실대로 적어넣는데 란이 작기에 작은 글씨로 “연변대학 통신학부 조문전업(본과)”이라고 밝힌다.  내가 굳이 이렇게 하는것은“통신학부”라는 네 글자가 특별히 빛나기때문이 아니라 내가 한 공부가 바로 그런 공부였고 그것으로 받은 고등학교졸업증서에 연변대학의 붉은 도장이 박히긴 했어도 통신학부 본과 조문전업 졸업생이라고 명백하게 씌여있기때문이다. 솔직히 말해 통신학부는 말 그대로 통신대학으로서 정규적인 대학과는 많이 다르다. 통신학부는 중등교육수준에 머물러 있는 중, 소학교 교원을 위주로 한 사회성원의 자질제고를 목적으로 하고 과외와 통신이라는 형식과 수단으로 교학을 진행한다. 그러므로 학원은 모두가 본직사업과 생산일터가 있는 사회인들로 구성되였다. 이렇듯 “연변대학”과 “연변대학 통신학부”는 운영방법이 서로 다른 두개의 개념이므로 분명히 밝힐 필요가 있는것이다. 그럼에도 지내보면 “통신학부”를 졸업한 사실을 감추려는 사람들이 있으니 이 역시 하나의 페단이 아닌가싶다. 졸업학교를 “연변대학”이라고 쓰고싶은 마음은 나도 마찬가지이다. “연변대학+통신학부”라고 쓰면 체면이 깎이는것 같고 남들의 눈에 시시하게 보일수 있다는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하여 정규대학을 다니지도 않고 다닌것처럼 꾸미고싶지 않은것은 그것이 나를 속이고 남을 속이는 비속한짓이기때문이다. 그리고 속인다 하여 나의 이름이나 몸값이 부쩍 오르거나 남들이 우러러보는것이 아니기때문이기도 하다. 나는 단 하나 나도 고등교육을 받았다는것만 나타낼수 있으면 그것으로 족한것이다. 말이 난김에 좀더 웃기는 일을 꼬집는다면 통신학부에도 단기반, 속성반을 망라한 3년제 전과반이 있었는데 그것을 졸업하고도 본과공부를 한것처럼 한점의 부끄러움도 없이 출판물에 “연변대학”이라고 올리는것이다. 전과를 다니고도 본과를 다닌것처럼 꾸미면 무슨 리득이라도 있는것일가? 당안에 기록되여있고 컴퓨터에 저장되여있는 사실을 속이려 들다니. 하긴 가짜증건이 범람하는 세월에 대학졸업장 하나 위조하는것쯤은 식은 죽 먹기겠지만 함께 다닌 동기생들과 곁에서 지켜본 동료들이 다 알고있다는 점을 망각하지 말아야 할것이다. 백번을 곱씹어도 나의 대학공부는 연변대학이 설치한 통신학부에서 한것이다. 그런 연고로 하여 나는 연변대학 통신학부를 잊을수 없다. 황차 그런 교학구조가 내가 지망하는 우리 글 공부를 체계적으로 많이 할수 있는 배움의 대문을 열어주었음에랴! 내가 연변대학 통신학부의 학원으로 된것은 1965년 7월이였다. 당시 나는 고중을 졸업하고 2년간 농사일을 한 뒤 시골중학교에서 민영교원으로 조선어문을 가르치고있었는데 어느날 우연하게 신문에 실린 연변대학 통신학부의 학생모집광고를 보았었다. 워낙 교편을 잡기에도 자신의 지식이 너무나 짧다는것과 더 배우지 않고서는 문학도 할수 없음을 고민하던차에 이런 기회를 만난것이다. 나는 무작정 신청수속을 하고 목단강에 설치된 시험장으로 향하였다. 시험은 글짓기였는데 나는 생산대의 로사양원이 추운 겨울밤에 새끼를 낳는 어미소를 보살피면서 송아지를 살리려고 자기의 이불을 가져다 덮어주는 이야기를 소재로 하여 어설픈 글 한편 써서 바치였고 그것이 통과되여 5년제본과생이라는 합격통지서를 받았다. 그때의 기쁨은 하늘의 별을 따온것만큼이나 가슴 벅찬것이였다. 이렇게 나는 그해 여름방학 이불짐을 메고 난생처음 연길로 가서 대학의 교정에 들어가보았고 대학의 학생식당에서 밥을 사먹었으며 대학생숙소에서 잠을 자보았고 계단식강당에서 강의를 들어보았다.  하지만 이런 좋은 날이 얼마 안되여 동강이 날줄이야…  겨우 한해(1학년)가 지나 1966년에 들이닥친 전국적인 대동란으로 풍지박산이 된것이다. 정규대학의 전반질서가 “홍색폭풍”에 의해 무너지는판에 통신학부의 운명이야 더 말해 무엇하랴.  그뒤로 11년이라는 잔혹한 세월이 흘러가고 마침내 먹장구름을 헤친 해빛을 볼수 있었기에 다행히도 나는 1978년 10월에 78년급생이라는 이름으로 학적을 회복할수 있었고 그렇게 다시 5년을 공부해서야 비로소 1983년 12월에 졸업증서를 받게 되였다. 따져보면 1965년 7월에 입학하여 1983년 12월에 졸업했으니 통신학부 하나를 마치는데 18년 하고도 반년이 더 걸린 셈이다. 21살에 시작하여 39살에야 졸업한 대학, 그 사이에 졸업도 하지 못하고 눈감은 학우들도 적지 않았으니 실로 지루하기 짝이 없는 18년이였다. “10년동란대학”까지 다녔으니 대학을 두개 나왔다고 할수도 있겠지만 아무튼 이런 비정상적인 이야기는 우리 세대에나 있을법한 일로서 이 정도이면 기네스북에도 오를수 있지 않을가싶다. 통신학부의 학습은 여러가지로 힘들었지만 그래도 좋았다. 방학이면 목단강, 계서, 오상, 할빈 등지로 교실을 옮기면서 10여일씩 집중연수에 돌격식강의를 듣고 만장 같은 숙제를 하고 시험을 치고… 그속에 배우는 즐거움이 있었던것이다. 그러한 간고한 나날이 있었기에 김기종, 류은종, 김운일, 림휘, 서일권, 최희수 등 여러 다학박식한 교수님들의 가르침을 받으면서 외국문학, 중국문학, 조선문학, 수사학, 론리학, 교육학, 심리학 등 18개 과목의 방대한 수업과정을 마칠수 있었고 바로 이러한 학업을 통하여 나는 지식이라는 힘으로 무지라는 악과 몰렴치를 벗어날수 있었다. 모르긴 해도 이만한 지식마저 없었다면 나의 인생은 많이 슬프고 암울했을것이라고 생각한다. 솔직히 말해서 나는 이 학력으로 하여 덕을 많이 보았다. 중학교 조선어문교학을 감당할수 있는 밑천을 장만하였고 문학을 견지하여 창작할수 있는 기초를 닦았으며 정규대학졸업생과 동등한 대우를 향수하는 혜택을 받았다. 하기에 나는 통신학부 졸업생이라는 말에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으며 체면이 깎인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와 반대로 우리의 통신학부에서 수많은 유능한 민족간부와 교학능수, 공정사와 기사, 작가와 시인이 육성, 배출되였다는 사실을 놓고 자호와 긍지를 느낀다. 꺼릴것도 없고 깎일것도 없고 부끄러울것도 없는데 무엇을 속일것이며 무엇을 감출것인가? 이것이 내가 오늘 “통신학부”를 들먹이는 리유이다. 나는 누가 나에게 언제 어느 대학을 다녔는가를 물으면 서슴없이 “연변대학 통신학부 조문전업(본과) 78년급생”이라고 대답한다. 나 같은 사람에게 대학물을 마실수 있도록 사회와 기층에 눈길을 돌린 당년의 연변대학 통신학부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말하는것이다.  <<연변문학>> 2008년 2월호
17    친구의 유언 댓글:  조회:938  추천:50  2008-05-18
[미니수필]친구의 유언김동진“내가 죽으면 화장터로 가기전에 학교운동장을 한바퀴 돌아주오. 마지막으로 우리 학교를 한번 더 볼수 있게 해주오…”이것이 D시조선족고급중학교에서 교편을 잡고있던 나의 친구 H가 병동에서 남긴 마지막 유언이다. 흑룡강대학 수학학부를 졸업하고 20여년간 고중수학을 가르쳐온 친구가 간암말기로 생명의 초불이 가물거릴 때 남긴 이 유언앞에서 살아있는 인간의 눈물이란 너무나 무색한것이였다. 병이 나아 다시 교단에 오를수 있기를 그처럼 갈망하던 40대의 생명이 이렇게 급급히 세상을 달리하다니…령구차는 유언대로 캠퍼스를 한바퀴 돌았고 그 뒤로 사생들의 긴 행렬이 뜨거운 눈물을 뿌리며 흘러갔다. 훌륭한 선생을 잃었다는 비애와 함께 그가 남긴 유언에 목이 멘것이다. 산 사람은 죽은 사람이 남긴 마지막 유언을 되새기며 머리를 숙이였고 무거운 사색에 잠기였다. 이런 교원들이 있기에 우리의 교육은 희망이 있는것이다. 나는 친구가 남겨놓은 마지막 령혼의 거울을 들고 나의 초라한 모습을 비춰보지 않을수 없었다. 도덕과 인격의 자대앞에 떳떳이 나설수 있다는것은 누구나 다 할수 있는 일이 아님을 깨우쳐보았다. 주어진 운명으로 한발 앞서간 친구여! 영원한 나의 친구여!
16    자연과 사는 일을 두고 댓글:  조회:839  추천:39  2008-05-18
[미니수필]자연과 사는 일을 두고김동진바람은 왜 불어야 하고 비는 왜 내려야 하는가를 묻지 않으련다.꽃은 왜 피여야 하고 새는 왜 울어야 하는가를 묻지 않으련다.화산은 왜 폭발해야 하고 해일은 왜 울부짖어야 하는가를 묻지 않으련다.그것은 동산에 뜨는 아침해를 보고 왜 뜨느냐고 묻는것과 같은것이다. 인생과 사랑을 놓고 정답을 요구하는것도 사실은 부질없는 짓이다. 왜 살아야 하고 왜 사랑해야 하는가를 물을 필요가 있는가? 목숨이 있으면 사는것이고 사랑하고 싶어서 사랑하는데 거기에 무슨 “왜?”라는 물음이 필요한가?죽음과 증오도 마찬가지이다. 숨이 끊어지면 죽는것이고 미워하고 싶어서 미워하는데 무엇때문에 “왜 죽느냐? 왜 증오하느냐?”하고 자꾸만 물어야 하는가?이 세상 모든것이 바람처럼 구름처럼 흘러가고 비처럼 눈처럼 내리고 안개처럼 이슬처럼 사라지는데 그 앞에서의 인간의 어떤 생각은 참으로 유치하다. 허장성세할줄 모르는 위대한 자연의 행위는 물음과 대답을 전제로 하지 않는다. 자연은 철저한 행위준칙으로 모든 언어를 대신한다. 그러한즉 행동보다 헛말이 많은 인간은 아무래도 자연앞에서 부끄러운 고급동물이다.
15    시맥(詩脈)따라 40년(김동진) 댓글:  조회:921  추천:45  2007-12-19
시맥(詩脈)따라 40년김동진손꼽아 헤여보니 시맥따라 허우적거린지도 40년을 넘기였다. 비록 금노다지는 캐지 못하고 버럭만 가득 쌓았지만 인생 60에 40년이나 시를 안고 방아를 찧었으니 그런대로 문학인생을 살았다고 말할수 있으리라. 문학인생― 참 듣기좋은 말이다. 그것은 이른바 상부구조 (상층건축)에 속하는 문학예술은 특정된 하나의 업종으로서 누구나 다할수 있는 일이 아니기때문이다. 나는 이런 특종에 매달려 정신을 팔며 오늘까지 살아왔다. 그것은 선택과 애착, 추구와 아집으로 지속된 내 삶의 길이였다. 길다고 할수도 있고 짧다고 할수도 있는 40년간 내가 이룩한 성과는 보잘것 없지만 그렇다고 하여 나는 스스로 선택한 나의 문학인생을 후회하지 않는다.  나에게 문학이라는 생명을 움트게 한것은 1950년대초 소학시절에 퀴즈풀이를 맞춘 기념으로 연변인민출판사인지 연변교육출판사인지 하는데서 보내준 64절지 아동독물 《섣달그믐날밤》이였다. 세상에 태여나 처음 접촉한 이 손바닥만한 소책자가 나더러 책속에 빠지게 하였고 책을 사랑하게 하였으며 이런 책을 만드는 사람들을 부러워하게 하였다. 초중때에는 《라이라크》라는 엉터리시가 교내의 간행물에 실림으로 하여 글짓기에 더구나 애착을 가지게 되였는데 그 뒤로 가정방문을 오신 담임선생님이 나의 부모님앞에서 《이 집 아이는 장차 문학을 하면 될것 같습니다》 라고 하시여 내 가슴속의 문학생명이 다시 한번 꿈틀하는 계기가 되였었다. 그러던 어느날 문병교라는 학급친구가 나를 찾더니 앞으로 문학가가 되라고 하면서 나의 힘으로는 살수도 없고 구할수도 없는 《조기천선집》을 선물로 주는것이였다. 그때 나는 그 책을 받아들고 눈물이 글썽하도록 얼마나 감격했는지 모른다. 그 책을 통하여 나는 세상에 이렇게 좋은 시가 있다는것을 알게 되였다. 그때로부터 마흔 일곱해가 지났지만 그 책은 지금도 나의 서재에 영원한 기념으로 소중히 보관되여있다. 문인으로 된 사람들이 다 그러했듯이 나도 독서로 무수한 밤을 팼고 무엇을 쓴다고 쉴새없이 끈적거리였다. 그러다가 1962년 고중을 졸업하게 되였는데 대학입시를 며칠 앞두고 채운묵이라는 동창과 두만강을 건너갈 월경밀모를 하였다. 원인이라면 당시의 시국이 너무나 복잡하여 조선족은 대학에 가기 힘들다는 사회여론때문이였다. 그런데 친구가 약속을 지키지 않아 조선에 가서 문학공부를 하려던 망상도 철저히 무너지고말았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 정말 가출했더라면 나의 인생그라프는 완전히 다시 그려야 했을것이다. 헤염을 모르니 두만강물귀신이 될수도 있고 변방초소에 걸려 돌아올수도 있고 요행 건너갔다 해도 그다음의 일을 알수가 없으니 말이다. 그리하여 나는 친구가 약속을 지키지 않은것이 나를 도와준것이라고 생각한다. 그후 나는 농사일을 하면서 《봉화청년》이라는 등사판 신문을 꾸리였고 그 누구의 가르침도 없는 홀로의 자학을 견지하였다. 《지성이 감천이면 돌우에도 꽃이 핀다》더니 마을에서 10리나 떨어진 농막의 이불속에서 쓴 《봄비》라는 시가 1963년 《송화강》잡지에 실리였다. 나는 환성을 질렀다. 나도 하면 된다는 자신감에 온몸이 뜨거워났던것이다. 이런 밑천으로 2년후에는 공사중학교의 조선어문교원으로 초빙되였고 16년이라는 조선어문교수에 몸을 담그게 되였다. 그사이에 동란이라는 어지러운 년대가 끼워 다른 교수는 할수 없었지만 《모주석시사》가 있어 급한 목을 막을수 있었고 나는 《모주석시사》 35수를 몽땅 암기할수 있었다. 세월이 아무리 조화를 부려도 교단에 오른 16년은 내가 조선어문공부를 다시한 16년이였다. 그러다가 나의 신변에서 《기적》이 일어난것은 1980년 서정서사시《거리의 울음소리》가 《연변문예》에 실린것이다. 이 한수의 《폭로문학》이 《연변문예》 제1회문학상을 수상함으로 하여 나의 이름은 정식으로 문단에 오르게 되였다. 그해 6월에 중국작가협회 연변분회에서 나를 회원으로 비준한다는 통지서를 보내왔다. 《동진동무: 좋은 글 많이 쓰십시오.  김철.》 입회통지서의 아래쪽 여백에는 당시의 작가협회주석이며 우리 시단의 저명한 시인이신 김철선생님의 친필까지 있었다. 나는 지금도 가끔 이 통지서를 꺼내보면서 무량한 감회에 젖어들군 한다. 그것은 그해부터 나에게 진정한 문학생명― 단체가 승인하는 문학생명이 부여되였기때문이다. 처녀작을 발표해서부터 작가협회 회원이 되기까지의 17년은 나에게 있어서 문단밖에서 문단에로 접근하는 기인 과정이였다. 이 과정을 통하여 가슴에 품어온 아이적 문학생명의 싹은 마침내 해빛을 보게 되였다. 내가 구구하게 문학을 생명과 밀착시키는것은 나로서의 리유가 있어서이다. 작가협회는 정당에 가입하는것처럼 주먹을 들고 선서하지는 않지만 분명 장정이 있고 규약이 있는 이 사회의 조직체이기에 그 조직에 가담하면 그에 따르는 생명을 가지기 마련이다. 정당에 문학을 비하는것은 타당하지 못하지만 생명의 도리는 마찬가지라는 말이다. 다른 생명이 자연연소일 때 문인의 생명은 의식적으로 가슴을 불태워 만든 빛과 열을 남들에게 나누어주는것이라고 하면 틀리는 말일가? 시를 쓰면서 나는 문인의 문학생명에도 제한이 있음을 깨달았다. 백년을 산다 해도 중도에 필을 놓거나 다른 일을 한다면 그의 문학생명은 그로서 끝나는것이다. 단명을 살았다 해도 그가 남긴 작품이 세인의 가슴속에 살아있다면 그의 문학생명은 영원한것이다. 한평생 쭉정이글만 썼다면 그 문학생명도 육체의 사멸과 함께 소실될것이다. 문인의 문학생명이란 바로 이러한것이다. 도리는 이렇듯 명백한데 유감스럽게도 나의 문학생명은 리상적이 되지 못하고있다. 문학을 한다는 간판을 들고 농촌에서 교단―문화관―문련―창작실로 전전하면서 수십개의 가을을 넘어왔건만 상기도 나의 문학의 열매는 여물지 못하였고 그윽한 향기를 풍기지 못하니 사람들앞에서 감히 문학을 했노라고 떳떳이 말할 체면이 없다. 엄마의 메주는 발효를 거쳐 그처럼 맛있는 된장, 간장, 고추장이 되는데 나의 문학《메주》가 그렇지 못한것을 보면 분명 소금을 덜 먹었거나 바람간수를 제대로 못한탓이리라.  어쩌면 저 하늘의 별을 혼자서 다 따올것처럼 술덤벙 물덤벙 너무 욕심을 부린것 같기도 하다. 남보다 우월하지 못한, 너무나 평범한 lQ(지력상수)와 EQ(정서상수, 교육지수)를 가지고 명작을 만들겠다고 꿈낟가리를 쌓았으니 그 생각부터가 우직했 다고하겠다. 속담에 《우물을 파도 한우물을 파라》고 했는데 나는 자신이 천재가 아닌 둔재임을 망각하고 여기저기 조금씩 다 뚜져보았다. 재담, 방송소품, 실화, 동요동시, 동화, 번역, 가사. 시조, 수필, 통신… 이렇게 닥치는대로 기웃거린건 말할것도 없고 한때는 소설을 쓴다고 설치기도 했으니 결국 지금의 요 모양 요 꼴이 되고말았다. 게다가 시를 쓴다는것이 《아, 오》라는 감탄사를 끌어안고 문학의 본연이 무엇인지도 모른채 정치에 종속된 문학을 하느라고 아까운 생명을 허비했으니 이 역시 불행이 아닐수 없다. 그리하여 지금 와서 단행본이라고 출간한 이른바 《저서》를 펼치면 《쓰레기의 집대성》이라고 해도 변명할 말이 없게 되였다.  시대가 변하여 늦게야 눈을 떴지만 내가 추구하는 전통과 현대의 접목이 잘 이루어지지 않아 새로운 고민과 고독으로 새로운 가슴앓이를 하지 않으면 안될 처지, 하지만 숙명으로 받아들인 문학이고 여직껏 아껴온 문학생명이기에 필을 꺾을 생각은 없다. 이미 내친걸음이니 죽이 되든 밥이 되든 끝까지 가야 한다는 일념으로  오늘도 많은 시간을 《무엇을 어떻게 쓸것인가?》를 생각하는데 소모하고있다. 한편 독서를 게을리하지 않고 사이버문학을 뒤적거리며 남들의 좋은 글을 탐독하면서 내나름의 《행복한 고독》을 만들기도 한다. 나의 손에 필을 들수 있는 날까지 시맥을 찾고 시맥을 따르는 나의 작업은 계속될것이다. 이는 시맥따라 살아온 나의 문학생명앞에 털어놓는 나의 고백이며 언약이다. 지금 나의 귀전에는 《너는 왜서 아직도 남들처럼 훌륭한 시를 쓰지 못하느냐?》 라는 질문이 끊임없이 메아리치고있다. 그러니 이 글은 이만큼 쓰고 그 답안부터 찾아야 하겠다. 2006. 4. 10 <<연변문학>> 2007년 11월호
14    질경이 (김동진) 댓글:  조회:983  추천:43  2007-12-19
질경이 김동진민들레랑 냉이랑 이웃하여  시골에 사는 무던한 아낙네 메뚜기랑 개미랑 불러놓고 살아가는 이야기를 나누다 각골한 살림을 떠메고 흙처럼 살아가는 저 질긴 힘줄― 조상이 물려준 생명의 피가 마를줄 모르는 저 가슴― 질기지 않으면 못사는 세상임을  엄마의 배속에서부터 알았나보다  <<연변문학>> 2007년 11월호
13    비여있는 집 (김동진) 댓글:  조회:962  추천:40  2007-12-19
비여있는 집 김동진황토벽에 삿갓을 눌러쓴  할아버지때부터 뿌리박은 터가 소버짐을 앓기 시작함 사람내음이 떠나버린 개바자는 오붓하다는 맛갈스러운 고유어가  가난앞에서 더는 오붓할수 없다는 서글픈 증언의 패말로 남아 바라보는 눈알을 아리게 함 내장을 뽑아내고 박제된 두더지같은 빈집앞에는 이따금 지나가는 바람이 들려 때묻은 노루발쪽손잡이를 만지다가 어느 까마귀가 파먹은 구멍이 펑 뚫린 창문을 기웃거리며 근심걱정 한바가지 쏟아놓고 돌아섬 그렇게 시간은 흘러가고 잡초의 향연에 묻혀버린 빈집들은 기쁠것도 없고 슬플것도 없는 무정하게 텅 빈 가슴으로 촌민명책에서 사라진 이름을 부르며 한무지의 흙으로 무너짐 <<연변문학>> 2007년 11월호
12    저기 저 마을 (김동진) 댓글:  조회:922  추천:36  2007-12-19
저기 저 마을 김동진산 좋고 물이 맑은 저기 저 마을 수양버들 실실이 푸른 내가에 방치소리 토닥이는 하얀 살결의  쌍가매랑 이쁜이랑 고운 이름의 어시 닮은 가시내들 잘도 크더니 아지랑이 꼬물대는 언덕을 찾아 징검다리 건너는 싸리바구니 파란 수건 빨간 수건 봄물에 젖은  냉이 먹고 달래 먹고 민들레 먹고 이슬 맺힌 가시내들 잘도 크더니 울담에 노니는 해살 더불어 봉숭아꽃 물들인 손톱눈으로 외태땋고 량태땋고 갑사댕기의 삼단 같은 검은 머리 출렁거리며 옷깃 여민 가시내들 잘도 크더니 동네방네 즐거운 단오날이면  분홍저골 초록치마 구김살 펴고 외씨버선 하얀 코 오똑 세우고 구름밖을 날아보는 고운 날개의  해달 같은 가시내들 잘도 크더니 잘도 크더니… 잘도 크더니… <<연변문학>> 2007년 11월호
11    두만강 새벽안개 (김동진) 댓글:  조회:918  추천:40  2007-12-19
두만강 새벽안개  김동진천리 두만강을 거슬러오르며 무슨 말을 간곡히 여쭈려는가 은은한 전통의 가락을 햇솜처럼 피루며 빛으로 다가오는 하얀 몸짓이여 백모시치마자락에 신들린 장삼소매 허리꼬기에 어깨놀리기 술래잡기에 감돌아들기 새벽강 즈려밟아 한결 가벼운 외씨버선발 새날의 비상승천을 꿈꾸는 두만강녀인의 한마당 춤사위 어이 할거나 터질듯 터질듯이 부풀어오른 저 앞섶을… <<연변문학>> 2007년 11월호
10    그곳에는 (김동진) 댓글:  조회:835  추천:35  2007-12-19
그곳에는김동진세상과 많이 떨어져 살면 궁핍으로 초라하기 마련인것을 스스로 감내하는 세월이 오고 그곳에는 뿌리를 떠날수 없는 나이만큼이나 허리굽은 나무와 기억만큼이나 작디작은 풀꽃들이 서로를 보듬어 살고있다 옹이가 검버섯처럼 가득 돋은 한백년 묵은 땅나무는 매일같이 동구밖으로 나와 하루에 한번씩 오고가는 푸른색 뻐스를 바라보고 순박과 인고로 노래에나 가끔 오르내리는 평생 키낮은 풀꽃들이 한적한 길섶에 모여앉아 구름이 된 자식들을 이야기한다 이렇게 그곳에는 뿌리를 떠날수 없는  고생만큼이나 허리굽은 나무와  이름만큼이나 작디작은 풀꽃들이 된장에 풋고추 찍어먹는 우리 말로 된 마을 하나를 빈약한 가슴으로 지키고있다 <<연변문학>> 2007년 11월호
9    봉선화련상(김동진) 댓글:  조회:855  추천:32  2007-12-06
봉선화련상김동진앞뜨락에 심은 봉선화가 꽃망울을 터뜨리기 시작하면 나는 조건반사로 조용한 공간에서 봉선화련상에 잠기군 한다. 봉선화에 얽힌 수많은 사연중에도 선참으로 떠오르는것이 《울밑에 선 봉선화》(김형준 작사 홍란파 작곡) 의 정한에 젖은 노래가락이다. 《울밑에 선 봉선화야 네 모습이 처량하다/ 길고 긴 날 여름철에 아름답게 꽃필적에/ 어여쁘신 아가씨들 너를 반겨 놀았도다// 어언간에 여름가고 가을바람 솔솔 불어/ 아름다운 꽃송이를 모질도록 침노하니/ 락화로다 늙어졌다 네 모습이 처량하다》 내가 이 노래를 처음 들은것은 시골에서 농사일을 할 때였다. 싸란(沙蘭)이라는 산골에서 우리 마을로 이사온 리정안이라는 친구가 흘러간 옛노래를 어찌나 잘 부르는지 오락판에서 한몫을 단단히 하고있었다. 도깨비장물까지 몇잔 들어가는 날이면 누가 시키지 않아도 눈을 지긋이 감고 저가락장단을 두드리며 노래를 부르는데 《눈물젖은 두만강》으로부터 시작하여 무슨 《나그네 설음》이요, 《물방아 도는 래력》이요, 《리별의 부산항구》요 하면서 제목조차 알수 없는 노래를 밑도 끝도 없이 이어대는것이였다. 들어보니 모두가 망국의 설음을 달래는 한의 노래여서 그 슬픈 가락 하나하나가 듣는이의 가슴을 아프게 하였다.  노래 《울밑에 선 봉선화》도 그 친구가 어느 되놀이술판에서 눈물이 글썽하여 부른것으로서 역시 동양적이고 민족적인 우리의 노래였다. 조선반도의 비운을 울밑에 핀 한송이 봉선화로 이미지화한 이 노래가 그토록 나의 기억에 생생히 남게 된것은 단순한 애정가요의 쓸쓸함과 가냘픈 애수에서 벗어난 3절의 가사내용때문이였다. 랭혹한 계절에 형체는 사라졌어도 령혼은 죽지 않았으니 해빛 따사로운 새봄에 다시 소생하기를 바라는 그 애절한 념원이 바로 우리 민족이 살아남을수 있는 정신바탕으로 내 가슴에 다가온것이다. 하여 이 노래는 세월이 많이 흘러갔어도 변함이 없이 봉선화만 보면 떠오르는 앞세대의 노래로 내 가슴에 뿌리를 내렸다. 여름 한철, 농가의 바자굽이나 장독대옆, 그리고 원두막 밭머리와 길섶에서 흔히 만날수 있는 꽃중의 하나가 봉선화이다. 흙이 있고 습도가 조금 있으면 아무런 투정도 없이 잘 자라는 민초의 꽃 봉선화는 일명 봉숭아라는 오동통한 이름으로 우리네 삶의 뜨락에서 향기를 풍기였고 나비와 꿀벌을 불러들였다. 날개와 깃 그리고 발까지 봉황을 닮았다고 하여 봉선화라 부르는 이 꽃이 분홍에 선홍에 보라에 흰색으로 여러가지 색갈의 꽃망울을 터칠 때면 볼을 붉히며 아미를 숙인 모습이 마치 열아홉살 처녀의 순정을 보는것 같아 공연이 가슴이 설레이기도 했었다. 해마다 7∼8월이면 물이 잘 오른 통통한 줄기와 잎 사이에서 여러개의 꽃망울을 빚어올리는 봉선화는 보슴털이 보시시한 씨주머니가 익을 때면 손끝이 살짝 스치기만 해도 톡 하고 터지는것이 어쩌면 요술쟁이 같기도 하다. 돌이켜보면 봉선화씨주머니를 건드리면서 장난치는것도 나또래의 개구쟁이시절에는 하나의 재미있는 놀음이였다. 나이를 먹으면서 언젠가는 이 꽃이 연분홍저고리에 초록치마를 날리며 생글거리던 옆집 누나 같다는 생각도 해보았다. 어릴 때 동네의 단발머리 녀자애들이 봉선화를 짓쪼아 손톱에 붙이고 헝겊오리로 싸매는것을 본적이 있다. 시간이 얼마쯤 지나 그것을 풀어내면 손톱에 분홍물이 드는것이였다. 썩 후에야 나는 그것이 소녀들의 심심풀이 놀음만이 아닌, 자신을 예쁘게 가꾸려는 녀인들의 마음이라는것과 그속에는 붉은색으로 악귀의 범접을 막아내려는 민간신앙의 의념도 깃들어있다는것을 알게 되였다. 메니큐어와 같은 현대식화장품과는 거리가 너무나 멀었던 그 세월에 우리의 녀인들은 이렇게 원시적인 소박한 미용법을 활용했던것이다. 인간과 가까이하는 꽃마다 전설을 안고있듯이 봉선화에 관한 민담도 한두가지가 아니다. 지금도 내 기억속에 아래와 같은 이야기가 남아있다. 옛날 한 집에 봉선이라고 부르는 딸이 있었는데 출중한 외모에 총명을 겸하여 어려서부터 거문고를 잘 다루었다고 한다. 그런데 어느날 갑자기 대국에서 공녀공출을 독촉하여 미녀를 물색하는중에 봉선이가 뽑혔다. 봉선이는 이국땅에 가서 대왕의 총애를 받는 후궁이 되였지만 떠나온 고향과 자기를 낳아준 부모님 생각에 그만 병이 나고말았다. 그녀는 병석에서도 식음을 전페하고 매일같이 거문고만 뜯다보니 다슬어버린 여린 손가락에서 붉은 피가 흘러내렸다. 그러다가 눈감은 그녀의 무덤에 후날 피방울 같은 꽃이 피여났다. 사람들은 그 꽃이  틀림없이 봉선이의 혼백이 살아난것이라 하여 봉선화라 이름지었다는 유래의 이야기이다. 옛말이긴 하지만 눈물겨운것으로서 봉선화의 색조가 한 많고 설음 많은 우리 민족의 빛갈임을 암시하는건 아닐런지? 봉선화전설은 서양에도 있다. 옛날 그리스의 한 녀인이 억울하게 도적으로 몰려 올프스산에서 추방당하였다. 그녀는 자신의 결백을 증명하려고 스스로 목숨을 끊어버렸다. 후날 그녀의 무덤에 피여난 꽃이 봉선화라고 한다. 이야기의 줄거리는 다르지만 조금만 건드리면 열매를 터뜨려 속을 뒤집어보이는것에 대한 해석에는 일치성이 있으니 다름아닌 자신의 순결과 결백을 증명하려는 성급하고 과단적인 행위표현이라는것이다.  이런 이야기가 구전되여 봉선화는 인간의 정서생활속에서 사랑의 꽃, 눈물의 꽃, 피의 꽃으로 피여나는것이리라!. 《손대면 톡하고 터질것만 같은 그대/ 봉선화라 부르리》라는 가사의 글귀도 결코 우연하게 씌여진것이 아님을 알것 같다. 얼마전 조카의 결혼식을 보려고 시골에 다녀왔었다. 그곳에도 봉선화는 흐드러지게 피고있었다. 하지만 봉선화가 피여나는 동네에 봉선화 같은 처녀들이 하나도 없다는 사실앞에서 개운한 심태를 가질수 없었다. 처녀가 없는 마을에서 속절없이 피였다 지는 봉선화를 평온한 눈길로 바라볼수 없었다는 말이다. 아기들의 울음소리가 없고 처녀들의 웃음소리가 없는 동네에서 내가 본것은 우리 조선족농촌에 무겁게 드리운 생존우환의 그림자였다.  노래에도 많이 오르고 이야기도 많은 봉선화! 순정의 꽃, 결백의 꽃이면서 여전히 애수의 꽃으로 필수밖에 없는 봉선화! 력사적인 아픔과 현실적인 애환을 숙명으로 감내하면서 오늘을 살아가는 봉선화! 나는 이런 봉선화앞에서 《울밑에 선 봉선화》의 3련 가사를 되새겨보았다. 그것은 시대가 다르고 환경이 다르지만 《봉선화》가 화창한 새봄에 더욱 아름답게 피여나기를 바라는 우리의 소망만은 변함이 없다는것을 믿기때문이다. 《북풍설한 찬바람에 네 형체는 없어져도 평화로운 꿈을 꾸는 너의 혼은 예 있으니 화창스런 봄바람에 환생키를 바라노라》 <<연변문학>> 2007년 9월호
8    려명의 천사(김동진) 댓글:  조회:827  추천:39  2007-11-25
려명의 천사 김동진천사의 예쁜 손이 어둠의 면사포를 살며시 벗기면 장닭이 먼저 알고 소리지른다 꿈을 털고 다가선 창문너머로 펼쳐지는 물빛치마자락 이 세상의 하많은 희망과 사랑이 늘 푸르게 살아있는 리유를 알만하다 망울 터치는 꽃나무의 전률에 무늬지으며 흔들리는 새벽호수 가위눌린 가슴들이 부풀어오르도록 흘러내리는 싱싱한 강물이여 우리의 아름다운 노래와 춤사위가 영원히 마르지 않는 까닭도 알겠다 하늘과 땅 사이를 정화하는 이슬 젖은 맑은 향아 오늘도 어둠속에서 동트는 새아침의 아기를 낳았도다 <<연변문학>> 2007년 7월호
7    말하는 이끼 (김동진) 댓글:  조회:906  추천:44  2007-11-25
말하는 이끼김동진 더는 크게 뜰수 없는 작은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았네 그 이상 더는 작아질수 없는 작디작은 귀로 바람소리, 새소리 그리고 세상이 떠드는 소리를 들었네 함박꽃같은 웃음도 없이 장미꽃같은 향기도 없이 살아서 위대할수가 없고 죽어서 영광스러울수가 없는 기막히게 작은 가슴으로 천년바위와 나무와 함께 조용히 조용히 살았네 하늘이 어찌하여 나를 만들었는지 나는 그것을 몰라도 좋네 더는 작아질수 없는 가슴에 바늘귀같은 뙤창을 만들고 푸른 하늘 흘러가는 구름을 보며 나도 시간의 하늘을 오고가는 한오리 바람인줄 알았네 <<연변문학>> 2007년 7월호
6    수석(김동진) 댓글:  조회:1457  추천:47  2007-11-21
수석 김동진   잠자듯 고요로운 수석 저 가슴이 죽어도 살아있는 영원한 신화로다 태초의 음양을 쪼아 수놓은 천지무늬 숨이 없다면야 그리도 생생할가 물방아로 다듬어낸 선사(先史)의 춤과 노래 무궁한 신비에 젖어 몽경인가 하노라 <<연변문학>> 2007년 4월호  
5    연변의 봄(김동진) 댓글:  조회:854  추천:36  2007-11-21
연변의 봄김동진 장백의 산자락에 꽃샘추위 몰려와도 연분홍 진달래는 사랑에 뜨겁구나 올해도 연변의 봄맞이는 진달래잔치로다 눈서리 헤치고 불을 지핀 가슴으로 방울소리 울리며 달려오는 초록마차 좋구나 진달래꽃향기 설레이는 연변이여 <<연변문학>> 2007년 4월호
4    노을강을 건너가는 무아의 날개(김동진) 댓글:  조회:740  추천:35  2007-11-16
노을강을 건너가는 무아의 날개김동진두만강하류의 훈춘땅에는 고인 물 진흙속에 뿌리를 박았으나 속세에 젖을줄 모르는 천사의 꽃이 있다. 미모와 향기를 다 지녔음에도 교만과 교태를 부리지 않는 선녀의 꽃, 연분홍날개를 가볍게 저어 바람따라 물결따라 노을강을 건너가는 전설의 꽃, 그 꽃을 우리는 《두만강홍련》이라고 부른다. 동북아의 금삼각으로 세인의 눈길을 모으는 훈춘이라는 아름다운 개방도시에 1억 3천 5백만년의 력사를 아로새긴 붉은 련꽃이 있다는것은 장백의 천지와 함께 우리 연변의 또 하나의 자랑이 아닐수 없다. 2천 7백년이라는 련꽃재배사를 기록하고있는 우리 나라에는 무려 200여 가지의 련꽃품종이 있다고 하는데 그중에서도 꽃송이가 류달리 크고 아름다운 두만강 붉은 련꽃의 품질이 으뜸이라 하니 이 어찌 자랑이 아닐손가? 내가 두만강 붉은 련꽃을 처음 본것은 5년전의 여름날, 시에서 열리는 농촌문예콩클준비로 하여 경신진에 갔을 때였다. 마침 련꽃철이라 하기에 우리 일행은 행장을 풀기 바쁘게 마을 서쪽의 작은 늪으로 달려갔었다. 련꽃이라는 소리에 저마다 보고싶은 마음이 다급했던것이다. 거짓말이 아니였다. 그것은 내 눈을 의심할 정도로 황홀한 풍경이였다. 붉은색, 흰색, 분홍색이 어울려 노을처럼 활짝 피여난 련꽃늪을 바라보는 순간 우리는 아이들처럼 환성을 터뜨렸다. 《와― 련꽃이다! 두만강 붉은 련꽃이다!》 진흙이 깔린 흙탕물속에서 이처럼 호함지고 깨끗하고 어여쁜 생명이 피여나다니! 우리는 내 먼저 네 먼저 하면서 련꽃을 배경으로 부지런히 카메라샤타를 눌렀다. 실로 선경에 취해보는 기회였다. 이 절호의 기회를 놓칠수 없어 경신에 체류하는 한달동안 나는 매일 한번씩 련꽃늪에 가서 련꽃의 속삭임을 엿들었다. 련꽃은 아무데서나 아무렇게나 피여나는 꽃이 아니다. 청신하고 우아하고 고결한 기품에 고상한 정신지조를 가진 련꽃은 천혜의 땅에서만 피여나는 천혜의 꽃이라고 한다. 련꽃은 중화의 10대 명화중의 하나로서 일명 부용(芙蓉)이라고도 하고 하화(荷花)라고도 하는데 자고로 수많은 시인들의 시문과 화가들의 회화 그리고 촬영가들의 포토속에 끊임없이 오른것만 보아도 그 존재의 고귀함은 알고도 남음이 있다. 련꽃은 화중군자이다. 흐르는 물도 아니고 깨끗한 물도 아닌 고인 물에 살지만 줄기와 잎과 꽃 전체가 조금도 흐트러지지 않는 청고함을 지니고있다. 진흙속에 태여나 고인 물을 먹고 살아도 더러움에 물들지 아니하는 몸가짐, 마음가짐이 다름아닌 화중군자의 정신바탕이 아닌가싶다. 부드러운 곡선미에 문양이 예쁜 여덟개의 커다란 꽃잎으로 사바세계를 포용할줄 아는 련꽃의 자태에서 나는 천년을 흘러도 퇴색을 모르는 화중군자의 매력을 보았다. 그윽한 향기로 구질구질한 세상을 정화할줄 아는 꽃! 향긋한 미소로 고리타분한 인생을 다독일줄 아는 꽃! 련꽃은 상징성이 높은 꽃이다. 련꽃은 우선 문학예술이 추구하는 진선미와 깨달음의 상징이다. 우리의 선인들이 련꽃을 무심과 무아의 경지에 다달으는 불심의 초석으로 삼은것도 이에 비롯함이였다. 련꽃의 이미지를 떠난 불교의 도를 상상할수 없는것은 련꽃이 유구한 인류력사와 더불어 찬란한 불교문화속에 용해되였기때문이다. 련꽃을 생각하면 련화방석에 모신 불상과 련꽃무늬로 장식한 법당, 련꽃기와를 얹은 처마가 떠오른다. 한국 경주박물관에서 천년의 풍우에도 사그라지지 않은 련꽃무늬의 기와를 본적이 있다. 그것은 불교문화가 찬란했던 신라 천년고도의 문물로서 련꽃을 가슴에 품고 살아온 선조들의 지향을 느끼게 하는것이였다. 그밖에 벼슬아치들이 쓴 련꽃모자(련관)와 왕실에 드리운 부용막, 거실에 세운 련화병풍 역시 련꽃을 받드는 인간의 심태에서 기인된것이니 우리의 문화와 생활에 예술로 승화된 련꽃의 력사를 뉘라서 감히 과소평가할수 있을것인가? 소위 극락세계를 가리켜 《련방》 또는 《련옥》이라고 하는것을 보면 련꽃은 정토의 상징이기도 하다. 《련》자는 극락정토에 대한 인간소망을 고도로 함축한 대명사로서 우리 민족이 녀자들의 이름을 짓는데 특별히 애용되고있는바 《련옥, 련화, 련심, 련금, 련자, 춘련, 혜련, 봉련, 애련…》 등등 이루다 헤아릴수 없다. 모르긴 해도 그 함의는 속세에 찌들지 않는 련꽃 같은 녀자로 곱게 살라는 뜻일것이다. 근자에 인터넷을 통한 연변의 사이트를 보아도 련꽃의 이미지를 살리는 자발적이면서 사회적인 민간동아리들의 이름이 꽤나 많이 등장하고있다. 례하면 《련우포럼》, 《련우산악회》 등 나는 이런 이름들이 하나 같이 련꽃 같은 친구들의 모임이 되고자 하는 발기자의 갈구와 소망으로 명명된것이라고 생각한다. 련꽃은 또한 풍요와 다산의 상징이기도 하다. 련꽃은 씨주머니에 많은 씨앗을 담고있기에 민간에서는 다산의 징표로 선호하고있다. 그리하여 건축물과 녀성들의 의복, 수놓이 등에 없어서는 안될 전통과 예술로 자리매김하였다. 하지만 풍진세상에서 련꽃 같은 삶을 영위하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무한대로 팽창하는 인간의 무리한 욕심이 도덕사회를 부패하게 만들고있어 삶의 기준과 인생가치가 여지없이 흔들리는것을 어찌하랴. 련꽃 같은 삶은 누가 가져다주는것이 아니기에 스스로 만들어야 한다. 자신이 자신을 다스릴줄 알아야 한다는 말이다. 령혼을 부식하는 금전과 녀색과 권력에 대한 탐욕을 버리고 이 세상과 대화할수 있다면 가히 인간답다고 말할수 있으리라. 주지하다싶이 련꽃 같은 사람의 핵심은 가슴에 품은 인간에 대한 애심에 있다. 우리 모두의 가슴에 인간에 대한 사랑의 향기가 차고넘친다면 우리가 살고있는 이 땅은 긍정코 두만강 붉은 련꽃이 피여나는 경신의 풍요로운 산과 들처럼 평화와 안녕, 우애와 친목으로 번창할것이다… 두만강 붉은 련꽃은 이처럼 나를 깊은 상념에 빠지게 하였다. 그뒤로 5년이란 세월이 지나갔지만 지금도 나의 가슴에는 석양 비낀 경신늪에서 반겨주던 그날의 그 붉은 련꽃의 미소와 향기가 오롯이 남아있다. 세속의 때와 먼지로 얼룩진 몸과 마음에 정화의 미소와 향기를 안겨준 두만강 붉은 련꽃! 그것은 찬연한 노을강을 건너가는 무아의 날개였고 인간정토의 길을 가리키는 영항의 불빛이였다.                                  2006년 12월 <<연변문학>> 2007년 2월호
3    [시] 라목의 길 (김동진) 댓글:  조회:849  추천:36  2007-04-20
라목의 길 김동진아름답게 눈부시던 단풍옷을훌훌 벗어버린 겨울나무들이고난의 행군길에 올랐다 하늘의 뜻을 받들어몸과 마음 다스리기에알몸이여도 부끄러움이 없다 서있는듯 가고있는 나무잠자는듯 가고있는 나무겨울의 턴넬을 뚫고있다굴이 통하는 그곳에파아란 바람이 있다는것을스스로 알고있는 나무… -《료녕조선문보》1월 21일
2    [시] 눈꽃 향기 (김동진) 댓글:  조회:915  추천:53  2007-04-20
눈꽃 향기 김동진낮게 드리운 하늘이흰나비의 날개같은 백장미꽃잎을아름 따서 뿌리는 날이면산에 들에 감도는아늑한 평화의 향기 슬픔과 괴로움과 아픔그리고 얄미운 상처까지도살포시 안아주는 포근한 가슴에서나이팅게일(*)의 향기가 풍겨오고 백장미 꽃잎으로 장식한인생의 포장마차에서깨끗한 삶을 기원하는태고연한 명상의 음악이백모시향기로 흘러내린다.(*) 나이팅게일:《싸움터의 천사》로 불리운 영국의 간호사 -《료녕조선문보》2005년 1월 21일
1    [시] 산 (김동진) 댓글:  조회:836  추천:33  2007-04-20
산 김동진산은솟다가 멈춘 그 자리에죽은듯이 눈을 감은한마리 도마뱀이다 봄이면연두색 고운 빛으로 기여오고여름이면검푸른 비늘이 일어선다 가을이면불타는 놀빛으로 꿈틀거리고겨울이면새하얀 이불속에 똬리를 튼다 산은탈피하는 계절을 따라다니며새록새록 새옷을 갈아입는한마리 카멜레온이다. -《도라지》2005년 제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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