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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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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고백, 미성(美声)처럼 들려오는... 댓글:  조회:1666  추천:8  2016-10-11
. 평론 .   고백, 미성(美声)처럼 들려오는...  -주향숙의 수필 '래생에 내가 만약 시인이라면'   김혁           그만 고백에 귀를 빌려주고 말았다. 긴 고백에 참다랗게 귀와 마음을 깡그리 빌려주었다. 수필은 마음속에 숨긴 일이나 생각한 바를 사실대로 솔직하게 털어놓는 고백의 문학일진대, 그 고백이 미성(美声)처럼 아름답게 들려온다.       '래생에는 시인이 되고싶다. 그리고 좀 더 아름다운 시를 쓸수 있도록 괜찮은 시인이 되고싶다.'   주향숙의 수필은 그닥 크지아니한 작은 소망을 고백하는것으로 시작된다.   시인이 되여서 '오염된 세상에서 순수한 사랑을', '메마른 세상에서 가슴 설레이는 사랑을' 할수 있기를 소망하고, '차가운 세상에서 따뜻한 사랑을' 누릴수 있게 해준 사랑에 대한 고마움을 전한다. 그리고 고백의 말미에 믿음을 싣는다. '세상으로부터 몰려오는 어둠과 추위와 두려움과 아픔들을 그 아름다운 사랑을 담은 시로서 충분히 막아낼수 있을것이라 믿는다.'      작가는 나지막한 고백에 이 소중한 전언을 하고싶었을것이다.     자칫 제목과 소재가 주는 상투성으로 인하여 독자의 감상이 가벼워지지는 않을가? 빤한 전개나 결론에 이르지 않을가? 념려하며 읽었지만 오히려 그 성질을 문학적으로 잘 소화시켜놓고 있어서 부질없는 기우를 해소시켜주었다.   단조로워 보이는 짧은 글이지만, 음미해 보면 그속에 산문시라도 읊는것 같은 시적인 함축의 정서를 내포하고있다. 이는 작가가 꽤 오래동안 수필과 시를 병행해 오며 벼린 붓에서 자연스레 흘러나오는 정서라 하겠다. 그동안 시인이 상습적으로 복용한 농도짙은 정서의 량이 작품의 행간마다에 잘 드러난다.     요즘은 자기 생각을 표현하면 모두 문학이 되리라는 소박한 인식으로 손쉽게 일기 수준의 글을 발표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 다른 작가, 작품과 변별성을 보여주려는 욕망에 문장을 화려하게 꾸미거나 감정의 과잉을 조장하기도 한다. 하지만 작가의 경우는 스스로 그 화려함의 과잉을 잠재운다. 그 감정에는 분식(粉飾)이 없다. 사랑이라는 가슴뛰게 하는 주체를 읊조리고있지만 작가는 평이한 심상과 안정된 붓놀림을 보여준다. 담백하게 담아낸 정서에 과장되지 않은 수사법이 접목된 필치에 누구나 한번쯤 겪었을 평범한 체험이 특화되여 새로운 감동으로 다가온다.   작품은 수필이 일반적으로 추구하는 세계를 무리없이 표현하였고, 그것을 담아내는 형식 또한 무난한 편이여서 비평의 대상이 될만한 특이한 사안을 찾기는 어렵다. 다만 수필이 고답적인 양식에 얽매여 있는것이 조금 안타까울뿐이다. 작가의 력량으로는 좀 더 컴퓨터 앞에 붙박혀 숙고의 키보드를 두드린다면 얼마든지 극복할수 있을것이였는데…   그럼에도 이 수필에는 그로서의 나름의 소리가 있다.   길지 않은 편폭에 난삽하지 않은 단어의 사용으로 느낌이 편안하게 다가오는데 이것은 아마도 별반 티나지 않는 형식에 일상적인 정서와 평이한 인식이 실려 생겨나는 도덕적 당위성때문일터이다. 하지만 나지막한 고백과도 같은 이런 편안함이나 잔잔한 감동이 나중에는 큰 울림통으로 다가오는것이다. 연주를 마치고 고느적히 누워있는 악기를 무심히 건드렸을 때 반응하듯 울림을 울었을 때 느끼는 놀라움과 은은한 여운… 작가의 가슴에서 되뇌이며 사색으로 빚어낸 화음들이 수필의 정서를 만들어내고 있는것이다.     작가는 '래생이 오면'이라는 용어를 도입부에 몇번이고 중복하고 있다. 단락마다 곁들인 그 추임새가 흥미롭고 아름답다. 자칫 탐미와 센티멘털로 흐를 페단은 있었지만 그 반복구에는 가슴을 휘돌게 하는 힘이 있다. '사랑'이 주는 안온함에 '래세'라는 종교적 화두에서 오는 감정의 견인이 있기때문이다. 그러한 설파로 주향숙의 수필은 또 명상적이고 래세추구적인 모습이 된다.     좋은 글월이나 좋은 음악은 우리에게 깊은 감동을 준다. 그 파장은 높고, 깊고 넓게 퍼져나가며 마침내는 세속의 온갖 잡음에 마모된 우리들의 눈을, 귀를 마음을 사로잡다. 주향숙의 이 수필이 바로 그렇게 귀와 눈과 마음을 빌려주고싶은 미성이다.   "흑룡강신문" 2016-06-20  수필   래생에 내가 만약 시인이라면    주향숙   주향숙 프로필   연길시 의란향에서 출생,  수필, 시 200여편(수)을 발표했다.  " 도라지문학상" 등  수차 수상。 수필집《누구에게도 기억되지 않는 자유》를 간행 연변대학 사범분원 부속소학교에 교원.    래생에 무엇이 되여 다시 태여날지 아무도 모른다. 날개를 가진 한마리 작은 새가 될지 또 푸르게 넘실거리는 한그루 나무가 될지 아무렇게나 굴러가는 하나의 돌덩이가 될지 아니면 이름 없는 나무에 이름도 없이 맺히는 한알의 열매가 될지… 또 기어이 인간의 모습으로 태여난다고 해도 어떤 모습이 되여있을지는 역시나 아무도 모른다. 사상가가 되여있을지 화가가 되여있을지 신학자가 되여있을지 아니면 가난한 농부거나 구제불능의 알콜 중독자거나…     래생에 나는 한 사람으로 태여나고싶다. 그리고 래생에는 시인이 되고싶다. 그리고 좀 더 아름다운 시를 쓸수 있도록 괜찮은 시인이 되고싶다.   시인이 된다면 노래하고싶은것이 참 많을것이다. 땅이며 하늘이며 불이며 공기며 바다며… 꽃이며 나무며 강아지며 토끼며 고래며…웅장하고 빛나고 우아하고 고상하고 참되고… 그렇게 우리의 세상에 넘쳐흐르는 아름다움을 마음껏 시로 표현할수 있다는것은 참으로 축복받은 인생일것이다.   그러나 나는 시인으로 태여날수 있다면 오로지 너와 나의 사랑만을 노래하고싶다. 이생에서 우리가 나눈 사랑을 래생에 고운 사랑시로 이야기하고싶다.     너와 나는 늘 추운 겨울에 만났었다. 기어이 그 시간을 택한것도 아니였는데 우리는 늘 한해의 끝자락에서 서로를 만나군 했다. 꼭 마치 추운 겨울을 뜨겁게 살아내고싶은 그 정열처럼. 그만큼으로 뜨거웠던 우리의 사랑은 내 살갗에 문신으로 새겨져서 너와의 기억을 나는 아주 섬세하게 그리고 생생하게 기억해낼수가 있다.   부드러운 잔디밭을 밟으며 걷던 순간 얼굴에 그려지던 설레임의 무늬이며 밤이면 이불속에서 팔다리가 섞여들고 호흡이 섞여들던 그 순간의 열락의 뜨거움이며 아침 깨여서 한 이불안에서 함께 푸르스름한 새벽을 바라볼 때의 감동이며 영화관에서 내 손을 잡고 엄지손가락으로 내 손등을 만져줄 때 가슴으로 소용돌이를 만들던 따뜻함이며 어느 골목길에서 뒤짐을 지고 걸어가는 너의 뒤잔등을 바라보며 웃음짓던 행복감이며 지하철역에서 서로 다른 방향으로 등을 돌리며 떠나야 했던 그 순간의 슬픔이며… 아무튼 나는 우리가 함께 했던 낮과 밤을 그리고 그속의 모든것들인 해살과 비와 눈과 바람과 그리고 거리와 지하철과 시장과 음식점과 층계와 그리고 밥과 반찬과 술과 그리고 목욕을 같이 하고 입맞춤을 하고 미소짓고 바라보고 서로 껴안고 사랑을 나누고…그 모두를 다 기억하고있다.     그러나 우리의 만남은 늘 짧았다. 만나기까지 그리워하고 기다리는 시간이 몸의 모든 세포가 갈증으로 타들어가도록 한없이 길었을뿐이다. 참을수 없는 그리움에 우울하기도 무기력해지기도 미친듯이 격해지기도 혼란스러워지기도 했다. 하지만 그 많은 그리움과 기다림을 나는 아름다움이라고 그 모든것과 상관없이 부를수 있었다. 그것은 우리는 언제나 뜨거운 불꽃으로 타올랐고 그것은 오랜 시간을 지나도 종래로 고갈되거나 희미해지거나 사라지지 않았기때문이다. 그리움은 늘 지속되였고 고조되였을뿐이다. 그 뜨겁고 화려한 색갈들은 자칫 회색빛으로 물들수 있는 우리의 외로움과 아픔의 시간들에 배여들어서는 보다 곱게 물들이고있었다. 그래서 세상은 늘 고운 빛갈로 차올랐고 늘 따뜻했고 늘 밝았다.   내 몸이 너의 몸을 찾는 그 절실함과 내 령혼 깊은 곳으로부터 너를 찾는 그 간절함 그것이 어떤것인지를 나는 잘 안다. 그러나 그 기쁨을 무어라 말할수 있으며 그 아픔을 무어라 말할수 있을지 나는 제대로 적을수가 없다. 나는 언어의 불충분함과 또 부적절함과 그 한계와 무력감을 느낀다. 그리고 오로지 아름다움이라는 이 형용사외에는 다른 단어를 고르지 못했다. 그리고 아름다움이라는 이 단어가 마음에 든다.     비록 늘 함께하지 못했지만 나는 감히 사랑이라고 부르고싶다.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우리의 아픔을 변명하고 위안받고싶은것은 절대 아니다. 기쁨만이 즐거움만이 행복만이 눈부시는것만이 사랑일수는 없다. 때로는 거리에서 때로는 무엇을 보다가 괜히 눈물이 나기도 한다. 그 무엇이 특별히 생각난것도 무엇이 불쌍해진것도 무엇이 슬픈것도 아닌데말이다. 때로는 밥을 먹는데도 길을 걷는데도 밤에 잠을 자거나 아침 깨여서 눈을 뜨는데도 다 커다란 용기가 수요된다는것을 깊이 느끼군 했다. 때로는 아무런 예고도 없이 심하게 두려워지기도 했다. 문득 네가 떠나버릴가봐 문득 내가 아파질가봐 문득 세계의 종말이 올가봐…그렇게 더는 너를 볼수 없을것같은 생각이 갈마들 때면 침착하지 못하게 허둥대군 했다. 하지만 사랑은 늘 자신의 신비로운 능력으로 다시금 제대로 일상을 살아내도록 다독여주었으며 나더러 자신의 빛갈을 알게 만들어주었고 뜨거운 열정으로 세상을 껴안고 살아가게 만들어주었다. 이 오염된 세상에서 순수한 사랑을, 이 메마른 세상에서 가슴 설레이는 사랑을, 이 차거운 세상에서 따뜻한 사랑을 누린 나는 이생에 태여나게 된것을 고마와하며 너와 한 하늘아래 살게 된것을 고마와한다.     래생에 내가 전생의 사랑을 시를 읊조린다면 너 역시 나를 알아볼것이라 믿는다. 이생에서 우리가 전생에서 그리워했음을 잘 알고있었듯이 말이다. 우리는 함께 했던 순간순간을 영원히보다 더 영원히 기억하고있을것이기때문이다.   래생에 내가 다시 시로 너를 만나면 우리 더는 이생처럼 아프게 사랑하지 말고 더 행복하게 더 평화롭게 더 그윽하게 사랑했으면 좋겠다. 슬픈 사랑을 나눈 어느 시인의 시구처럼 눈이 푹푹 내리는 날 흰 당나귀를 타고 깊은 시골에라도 찾아들고싶다. 그래서 사람들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그런 일상을 보는이에게는 되려 구질구질해보일지도 모르는 그런 일상을 함께 평범하게 살아보고싶다. 아침 문을 나서느라 몸을 굽혀 신을 신는 너를 무심히 바라보며 웃어주고싶고 함께 땀흘려 일하다가 서로 마주보며 너의 이마에 돋은 땀방울을 닦아주고싶고 그냥 최저의 말만으로 때론 말도 없이 변화없는 표정으로 바라보아도 좋을듯하고 낡은 밥상에 마주앉아 간단히 장국에 밥을 말아먹고싶고 네가 내 무릎을 베고 누우면 너의 머리칼을 만지고싶고 그러다가 너의 귀구멍을 파주고도싶고 밤이면 한 이불안에서 조용히 너의 우에 포개여져 잠들고싶고 그러다 혹 내가 먼저 깨여나면 너의 숨소리를 들으며 미소지으며 내려다보고싶고…이처럼 고요하고 밋밋하고 느릿하고 사소한 일상들이 내게 얼마나 충실하게 풍성하게 절실하게 다가오는지를 깨닫고싶다. 매일매일 같은 날이여도 리유도없이 친밀하고 소중해지는걸 깨닫고싶다. 나 혼자의 생명이 너와의 생명과 더불어 살아갈수 있다는게 아름다움이라는걸 깨닫고싶다.   래생에 내가 만약 시인이라면 나는 이렇게 이생에서 미치도록 불타올랐던 그 많은 그리움들을 시로 처절하게 읊조리고싶다. 어쩌다 만나면 허기진 령혼끼리 뜨겁게 비벼 광적인 열락을 만들던 그 절정으로 치닫던 찬란함을 시속에 라체로 드러내며 뒹굴고싶다. 비명을 지를만큼 강렬했지만 숨죽여울수밖에 없었던, 우리를 스쳐간 봄과 여름, 가을과 겨울의 계절속에 남아서 바람으로 울어대던 오열을 시로 터뜨리고싶다. 그리고 이제 래생에 다시 만나 사랑보다 더 뜨거운것이 더 가치있는것이 더 오래가는것이 무엇인지 모르고 나누게 될 우리의 사랑의 기적과 감사함을 시로 그려내고싶다.   그리고 래생의 다음 래생에는 그 무엇이 되여 어디에서 태여나더라도 너를 담은 나의 시를 새긴채 태여나고싶다. 그 시만으로 내 몸을 감싸고 행복하게 살아낼수 있을것 같다. 세상으로부터 몰려오는 어둠과 추위와 두려움과 아픔들을 그 아름다운 사랑을 담은 시로서 충분히 막아낼수 있을것이라 믿는다.     래생에 운좋게 한 시인으로 태여날수 있다면 더 바랄게 없겠다.    "흑룡강신문" 2016-06-07      ☞ 김혁 문학블로그: http://blog.naver.com/khk6699 ☜  
7    봄이라는 이미지의 풍연(風鳶) 댓글:  조회:1510  추천:9  2016-10-11
. 평론 .   봄이라는 이미지의 풍연(風鳶) - 조원의 수필 “바람이 불면 연을 날리고싶다”   김 혁   (그림: "연을 날리다" 박승호)     바람, 몸, 꽃, 연…   조원의 수필은 첫 시작부터 난삽한 이미지들로 가득하다. 그의 표현을 빌면 떨어지는 벚꽃처럼 “난분분 난분분” 내리는 이미지들…   현란한 그 이미지들이 다소 넘친다싶은 감도 없지는 않다. 하지만 문장이 매끄럽고 속도감이 있다. 재빠르게 바뀌는 이미지의 파편들을 통괄하여 보여주는 봄의 정경과 관찰자의 다각적인 시선들이 부담스럽지는 않고 그나마 도렷이 안겨온다.     “유독 봄이여야만 바람이 쓸어가는것과 바람에 실려오는것이 보이게 된다”라고 화자는 작품의, 봄의 들머리에서 말한다.   바람과 꽃에 대한 디테일한 묘사는 매우 사실적이다. 이러한 디테일의 사실성은 수필의 내러티브적인 성격을 이끌어 낸다. 식상한 일상의 공허해 질수밖에 없는 관념적이나 추상적인것들이 작품속에서 보여지는 이미지적인 모습들과 포개짐으로서 봄날이라는 현실성을 획득하고 작품은 상이한 매력을 발산한다. 봄날에 새라운 시선으로 바라본 이미지는 봄의 들머리에서 그동안 동면했던 정신적 감각에 호소함으로써 “타인을 바라보는 모순된 시각”으로 이어진다. 그리고 그 이미지들이 꽃순처럼 현실성을 감싸 안으면서 벙그레 만개하는것은 바로 “마음의 세부들에서 고요하게 일어서는 경이로운” 치유의 힘이다.     미국시인 에즈라 파운드는 “이미지란 지적, 정서적 복합체를 일순간에 보여주는것”이라 하였다. 좋은 수필의 생명력 창조는 이미지의 형상화 구축과 직결된다. 하나의 수필작품을 내놓을때  소재가 되는 사물을 단순히 묘사하거나 이야기로 풀어내서는 아니 되고 내면의 눈을 통해 일상적 사유를 뛰여넘는 자기만의 특화된 이미지를 그려내야 하기때문이다. 그런 수필이여야만 독자들의 안목에서 반듯한 이미지로 생생하게 살아 숨쉬며 “잘 쓴 작품”이라는 생명력을 갖게 된다. 때문에 이미지가 집중되면서 정서를 강하게 환기하는 작품이 오래 기억되는것은 당연하다.       이 작품에서 계절의 미세한 움직임을 디테일하게 묘파한 구절을 보면 마치 작가가 붓대가 아니라 초고속 촬영기로 촬영한 이미지를 보는것과도 같다.     “바람에 흩날리는 머리결”, “말라터진 입술”, “물기를 갖고자 하는 손”…     화자의 이미지는 이렇게 신체의 일부에서 부터 가슴에 숨겨둔 상처”, 보이지 않는 내면의 이미지에 까지 이른다. 봄에 대한 작가의 심상을 이미지로 형상화함으로서 감정이입을 유도하여 작가와 동일한 흠상에 다다르게 하고 있다. 그렇게 화자의 심중에 동면했던 이미지의 기원은 “그리움”이다.    그 그리움이 봄날의 꽃비에 떠밀려 독자에게 지각되면서 그리움의 정서를 공유하고자한다. 그리고 “외로워서 그리워서 함께 하고저 만나는 공간”인 위챗에서 “무시와 랭소, 눈치와 소외, 인맥과 허세, 질투와 의심 등등의 엇갈림”으로 곤혼스럽던 현대인의 통병을 추슬리고 “꽃의 슬픔을 사랑하듯 타인의 슬픔도 사랑”하기로 한다.     수필은 봄이라는 시간적 배경을 시의적절하게 선택하여 정서적 효과를 더했다. 계절의 화사한 정경과 화자의 심리적 변화가 잘 버무려진 글이다. 서두와 내용전개도 좋지만 결미가 멋지다. 조연은 수필의 말미에 뜬금없이 연을 날린다. 그리고 비로서 날리기로 한 마음의 연의 얼레줄에 많은 이미지를 감았다가 풀어 놓는다.   글의 행간에 깊숙히 감추었던 연을 그제야 들추어낸것은 이제 차거운 시각으로만 보았던 계절이 버겁지 않고 봄바람에 편승한 새로운 비상을 꿈꾼다는 암시일것이다.      흔히 시나 수필들에서 보여주는 이미지는 정태적인것이라기보다는 동태적이며 그 약동은 하나의 주제를 위한 장치가 되는수가 많다. 조원이 실사해낸 이미지는 “머리칼을 들추는 바람”, “망울 터지는 목련”, “비속에 지는 벚꽃”, “파란 하늘을 나는 연” 등 동태적인 이미지의 련쇄적인 방영이다. 그 이미지들은 자아성찰을 통해 봄날같이 변화많은 삶의 일단(一端)을 고스란히 내비치고 있다.   그리고 이와 같은 이미지의 련쇄를 통해서 날리는것은 “골목골목 바람 부는” 세상의 하늘을 가로지는 산뜻한 풍연같은 희망의 메세지이다.   “흑룡강신문” 2016년 5월 6일       수필   바람이 불면 연을 날리고싶다   (목단강) 조원     작가 조원   바람이 불어온다. 바람은 봄에만 있는듯 하다. 유독 봄이여야만 바람이 쓸어가는것과 바람에 실려오는것이 보이게 된다. 그래서 봄이면 바람 탓에 바람을 탄다. 봄을 탄다.   바람이 불어오면 대개 바빠진다. 패션 감각을 살리려고 당겨서 올리지 않았던 지퍼도, 잠그지 않았던 단추도 만져볼수 있다. 잘 정돈된 머리결은 바람에 흩날리면서 손빗이 한번쯤 더 가게 된다. 입술은 그동안 잊혀져서 외면당했던 시간들을 보상받고 존재를 알리기 위해서 말라가면서 터지려고 한다. 왼손과 오른손도 서로를 부비면서 알맞게 갖고저 하는 물기를 그리워한다. 이렇게 봄에 바람이 불어오면 바깥 세계에 드러난 몸의 일부들은 상처를 두려워한다. 누구든 가슴에 숨겨둔 상처 하나쯤은 있겠지만 입술에, 눈섭 사이에, 이마에, 코밑에, 손등에, 목과 가슴 사이에,종아리와 복사뼈에 내보여지는 상처는 누구든 싫어한다. 상처는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 숨겨야 하지만 함께 살아가고 있는 낯선 사람들에게조차도 례의가 있어야 할듯싶다. 그래서 은근히 봄이면 잊고 살았던 자신을 찾아가듯 마냥 바쁘기만 하다.   바람이 불어오면 길을 걷다가 멈추어 서서 물 오르는 나무가지 사이에 걸려있는 파란 하늘을 문득 보게 된다. 그런 하늘이라면 다른 누구의것도 될수 없는 온전히 자신만이 갖고있을 하늘이였었다는 만족을 느낀다. 봄나무의 가지 가지에서 막 터지려는 망울진 목련의 서두름을 보면서 천 .천 . 히. 천. 천. 히.  하고 곱씹으면서 피여나는 순간을 볼수 없음에 안타까워한다. 그리고 부피가 엷어져서 한결 가볍게 마주오는 사람들이 옷깃을 여미는 몸짓과 스쳐지나는 옷자락에 집중하게 된다.  바람은 미처 몰랐던, 아니면 애써 외면하려고 했던 주위의 세부들과 자신의 몸의 세부들, 마음의 세부들에서 고요하게 일어서는 경이로움을 발견하게 한다. 여태 자신이 아닌 오로지 타인을 향해 있던 목마름을 거두어들인다.   일상에서 불어오는 바람은 삶을 절정의 한순간이다싶게, 세계 말일이 코앞이다싶게 작열하듯 매일 매 순간마다 화려하게, 집요하게, 섬뜩하게, 비루하게, 끈적하게, 비릿하게 이어진다. 티비에서의 이미지들, 컴 화면의 요란한 세상사들, 폰에서의 속속 정보들… 세상을 알대로 알게 할만큼의 세상이지만 가까이 있는듯 하면서 아득히 멀어져 있는듯, 세상의 존재의 일부가 되였던듯 이방인이 되였던듯, 현실과 부재의 공간을 거듭하면서도 마침내는 속이 빈 허수아비는 아니여서 다행이라는 아이러니도 있다. 그러면서 타인의 기쁨이든 슬픔이든간에 무감각해진다.   타인의 슬픔이란… 지진과 화산, 테러와 전쟁, 사고와 충돌의 이미지들로 가득 메워지는 아침 뉴스는 꼬박꼬박 챙겨 먹는 아침식사와 함께 하는 고정 메뉴 따위로 된다. 멀쩡한 건물의 폭격의 장면을 보면서 할리우드 영화처럼 느껴져요 하고 쉽게 말할수 있다. 서서히 침몰해가는 선채, 추락되여 박살나버린 비행기의 잔해들을 보면서도 무심해진다. 허기와 갈증에 허덕이는 소년이 카메라를 응시하고있는 얼굴을 보면서 자신들의 얼굴을 바라볼수 있어서 련민이 생긴다. 련민의 끝에 따른는것은 다행이라는 안도감. 심지어 촬영사가 소년에게 연필이랑 사탕이랑 돈이랑 주면서 포즈를 취해보라고 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해본다. 타인의 슬픔도 번복되고 재탕되면 식상해져 버린다.   식상해지기 쉽게 하는 빠른 세상이다. 세상사를 다 함께 공유하는듯 하지만 서로가 서로에게서 멀어져 간다. 요즘 류행하는 위챗의 모멘트도 위험한듯 하다. 외로워서 그리워서 함께 하고저 만나는 공간이지만 무시와 랭소, 눈치와 소외, 인맥과 허세, 질투와 의심 등등의 엇갈림으로 곤혼스럽게 하지만 쉽게 로그아웃 시키지 못한다. 은근히 즐겨가고있고 이미 중독되여 있다. 위챗 모멘트에 따르는 곤혹은 타인의 기쁨을 바라보는 모순된 시각이다.     이 봄에, 벚꽃이 막 지려고 하는 무렵에 마침 비가 내렸고 마침 먼데서 친구가 왔다. 간밤의 숙취에 얼떠름한 이른 아침에 남자들의 벚꽃 구경은 환상이였다. 물안개가 사라져가는 공원 거리에 벚꽃이 꽃비가 되여 내리고있었다. 그 꽃, 지는 꽃을 보면서 친구를 안아버릴번 했다. “사쿠라꽃 피면 녀자 생각난다. 이것은 불가피하다. 사쿠라꽃 피면 녀자 생각에 쩔쩔맨다.”(소설가 김훈은 이렇게 말한다. 그러나 사쿠라라는 표현은 별로이다.) 아마도 소설가가 느꼈던대로 녀자 생각이 났었나 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설가가 말하고저 하는 녀자는 단지 성적으로 구별짓는 녀자가 아닌 간절하게 그리워지는 사람들이라고 고집해본다. 꽃에게도 슬픔이 있을가. 난분분 난분분 떨어지는 벚꽃 잎을 보면서 나무와 벚꽃이 같이 아파할거라고, 기어이 꽃의 슬픔이라고 우기고 보니 그리움이 생긴거다. 리유도 없이 상대도 없이 밀려오는 막무가내의 그리움. 꽃의 슬픔을 사랑하듯 타인의 슬픔도 사랑하기로 한다.  누군가를 사랑하기로 작정하고 나서 사랑을 시작하면 실패한다. 누구든 외롭다고 생각될 때 사랑이 시작된다. 자신의 곁으로 다가오는 누군가의 스치는 몸짓에서 그리움이 묻어난다면 사랑할 때인듯싶다.   봄이면, 바람이 불면 연을 날리고싶다. 바람을 등지고 하늘 높이로 연을 띄워 올리고싶다.  타인의 슬픔을 대체 알면 얼마나 알지싶지만 아픈 사람이 저기 연이 날리네 하면서 파란 하늘을 잠간이라도 볼수 있게 연을 날리고싶다. 봄이면 바람이 분다. 골목 골목에서 비집고 터져나오는 바람.   “흑룡강신문” 2016년 5월 6일     ☞ 김혁 문학블로그: http://blog.naver.com/khk6699 ☜  
6    어둠속, 삶의 통과의례 댓글:  조회:1548  추천:17  2016-04-11
. 평론 .   어둠속, 삶의 통과의례 - 김금희의 수필 “터널”   김 혁     김금희 소설가    “여느 터널들보다 더 좁고 깊고 어두운 터널”, “들쑥날쑥 터널안벽을 쌓아올린 오래된 돌들, 두껍게 얹혀있는 먼지와 푸른 이끼…” 작가가 보여준 터널의 어둠과 습도가 너무 생동하여 수필을 읽는동안 내 자신이 지나 온 터널이 바로 김금희 작가가 지나온 똑같은 그 터널이 아닌가 착각해 버렸다.    작가는 먼 려행지에서 돌아온 피곤한 행자처럼 누구나 한두번 겪어보았을 인생의 블랙홀같은 터널로 우리를 인도한다. 서사 중심, 1인칭 관찰자의 시점으로 작가는 우선 화자를 둘러싼 터널속 경관이나 미물을 보여주며 고단한 자신의 심정을 대변한다. “돌”, “이끼”는 물론 “비대한 몸집의 쥐”등이 그것이다. 어둠에 적응되면 모든 사물이 외려 명징하게 보인다. 어두운 터널속에서 작가는 “세상과 철저히 격리된채 오로지 자신의 내면에만 몰두”하고, 그 내면의 응시를 통해 “속모습들이 하나 둘 드러나기 시작하였고 스스로 괜찮다고, 정직한 편이라고 자위했던 내 외양의 심면에 그렇게 많은 상처와 그 상처로 인해 생긴 부패와 온갖 쓰레기와 지어 추악한 욕망들이 곳곳에 도사려 있는것”을 보아내게 된다. 터널밖에서의 타자에 대한 인식이 터널안에서의 자아안에 존재하는 내적 타자의 발견으로 어둠속에서 이어진다. 핍진한 체험의 느낌을 그대로 전달하려는 작가의 고뇌가 서사의 호흡을 거칠게 하고 독자들의 심중을 터널속으로 끌어들인다. 그리고 객체를 대상으로 던져두지 않고 주체에게 끌어들여 자아화하는 서사적인 양식을 작가는 미구에 보여준다.   간명한 내용이라 수필이라는 이름으로 발표했을뿐 사실상 소설의 양식을 그대로 가져온 느낌을 준다. 다름아닌 소설가의 수필이기때문이다. 이로 인하여 소설쟝르에서 볼수있는 긴장과 이완이 고루 균형을 이룬 탄탄한 수필이 태여난것이다. 소설쓰기에 주력해왔고 근년들어 볼만한 성적을 내고있는 작가는 어느 누구보다  묘사력에  강한 강점을 가지고 있다. 때문에 수필작품에서도 형상적인 리얼리티를 보게 된다.    “적막한 터널안에서 들리는것이란 자신의 외로운 발자국 소리뿐. 내 발자국 소리가 저랬던가싶을 정도로 그것은 터널안의 특이한 구조에 힘입어 전에 없이 크고 뚜렷하게 들린다. 가만히 귀기울이고 있느라면 청진기를 페 세포에 댄듯 헉헉후욱ㅡ 헉헉후욱ㅡ 들숨과 날숨이 정확히 구분되는 자신의 숨소리마저 확인할수 있다.”   이렇게 대체로 회색 이미지로 끌고 가던 수필은 다음 단락에 이르러 감정의 기복을 일으킨다. 무겁게 흘러온 긴장을 깨뜨리고 작품 분위기를 터널을 나선자와도 같은 밝은 분위기로 인도한다. 곧 화자중심에서 다시 객관의 시선으로 넘어가서 화자가 전달하고 싶은 심중을 서술하는것이다.    “내 속의 집에 또다시 다른 류형의 쓰레기가 몰래 쌓여가고 있지는 않는지, 혹은 더 많은 사회적 책임을 져야 할 나이에 아직도 비좁고 낡은 집에서 근근득식 거짓평안을 누리며 살고 있지는 않는지 알기 위해 자성(自省)의 터널을 다시 한 번 걸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작가의 “모든 변화의 시작, 긍정적인 결단은”, “내속 가장 안쪽 깊이에 있는 능동의 나로부터 발생”된다. 터널을 지날때 체감하게 되는 까닭모를 두려움이 자아성찰이라는 “스스로의 점검”속에서 봄날의 “여유만만”한 통로를 찾아 화음을 낸다. 그로서 어둠을 헤쳐나온 작가는 “참삶에 대한 간절한 소망”으로 자신을 추스르고 다시 터널로 향하여 “내면의 려행”을 떠난다.    이처럼 터널이라는 이미지의 련상에 의한 문학적인 효과를 이끌어내며 “아픔과 원망, 분노, 자책, 수치와 두려움들을” 떨쳐온 생의 철학적 의미를 공포, 진통, 고민, 경외, 설렘, 환희 등의 정서로 등가물(等價物)하고있다.  다만, 어둠을 극복해나가는 지난한 과정이 생략된 그 과도부분의 어색한 련결이 아쉬움으로 남는다.    작품은 일상에서 당착한 터널이라는 풍경을 다루면서, 인생살이에서의 통과의례와 같은 고난과 그 어둠을 이겨나가는 과정에서의 고민 또 그것이 갖는 존재 의미를 되새기게 한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극복해야 하고, 타개해야 하고, 닿아야할것에 대한 추구와 고뇌가 작은 수필속에 그득하다.    "흑룡강신문" 2016년 4월 7일   한국에서 출간된 김금희의 소설집     수필 터 널              김금희     지금 있는 세집으로부터 도보로 십분 남짓의 거리에 짧은 터널이 하나 있다. 장춘역을 지나는 기차길과 전차길을 나란히 머리우에 이고 있는 터널이다. 따듯한 봄이나 나른한 여름날의 오후, 시간적 여유가 있다 싶을 때 나는 장춘역까지 버스를 타고 와서는 그 터널을 지나 세집으로 걸어가군 한다. 터널들이 대개 그렇듯 그 짧은 터널의 안도 오랜 시간 직사광선을 받지 못한 탓에 늘 어둡고 습했다. 인행보도가 따로 있지만 쌩쌩 지나치는 차들의 경적소리가 너무 가까이 들리기때문으로 깜짝깜짝 놀라는 수도 적지 않았다. 그럼에도 그 터널을 통과하는것에서 얻는 어떤 독특한 체험은 다른 어떤 곳을 지나면서도 경험할수 없는 색다른 것임이 내게는 분명하다.   입구가 있고 출구도 있지만 일단 터널안에 들어서면 외계와 격리된 기분이다. 훤화하는 세계의 소리는 그치고 밝은 해빛도, 그 해빛아래 분주히 돌아치는 사람들의 모습도 모두 일순간에 사라진다. 어둠이 갑자기 엄습하는 바람에 시야는 찰나 좁고 흐려지며 그에 따르는 불안감때문에 분명히 있을 출구에 대한 확신마저 잠시 잊어버리게 된다. 또각또각. 적막한 터널안에서 들리는것이란 자신의 외로운 발자국 소리뿐. 내 발자국 소리가 저랬던가싶을 정도로 그것은 터널안의 특이한 구조에 힘입어 전에 없이 크고 뚜렷하게 들린다. 가만히 귀기울이고 있느라면 청진기를 페 세포에 댄듯 헉헉후욱 ㅡ 헉헉후욱ㅡ 들숨과 날숨이 정확히 구분되는 자신의 숨소리마저 확인할수 있다. 그 소리들이 너무 생동하여 나는 가끔 자신이 지나고 있는 터널안이 바로 내 속인가 착각할 때도 있다. 들쑥날쑥 터널안벽을 쌓아올린 오래된 돌들, 두껍게 얹혀있는 먼지와 푸른 이끼, 간혹 쓰레기더미속에서 스멀스멀 기여나오는 비대한 몸집의 쥐…  혹시 오래동안 청소 한번 않고 방치해둔 내 속이 저런 모습이 아닐가 하는 생각에 사뭇 숙연해지기까지 한다.   누구나 한두번 겪어보았을 인생의 터널이 내게도 있었다. 다른 여느 터널들보다 더 좁고 깊고 어두운 터널이였다. 손으로 벽을 더듬거리며 한발 한발 나갔지만 출구의 빛이 도무지 보이질 않아 막힌 동굴이려니 락담하고 주저앉기도 했었다. 그 속에서 나는 세상과 철저히 격리된채 오로지 자신의 내면에만 몰두할수밖에 없었다. 그동안 한번도 보지 못했던 나의 속모습들이 하나 둘 드러나기 시작하였고 스스로 괜찮다고, 정직한 편이라고 자위했던 내 외양의 심면에 그렇게 많은 상처와 그 상처로 인해 생긴 부패와 온갖 쓰레기와 지어 추악한 욕망들이 곳곳에 도사려 있는것을 보았다.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 (야고보서 1장15절) 혹간에서 말하는 인간의 탐욕, 또는 죄성때문에 내 마음속의 집이 그리 훼손되고 무질서하게 어지러워져서 내가 이토록 아프고 힘들었다는것을 깨달았다. 그 날 이후, 나는 나의 모든 정직함과 선함을 버리기로 하였다. ‘회칠한 무덤’이라는 낱말의 의미를 새겨 들었고 십자가 앞에서의 죽음을 처음으로 경험했다.   버리는것도, 소제하는것도, 다시 일어나 가는것도 쉬운 일은 아니였다. 죽음의 유혹에 버금가는 참삶에 대한 간절한 소망과 자신을 포함한 세상사람들을 두려워 않는 용기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였다. 어렵사리 일어서서 벽을 더듬거리며 걸어 나갈 때, 내 발밑으로 여러가지 모습의 아픔과 원망, 분노, 자책, 수치와 두려움들이 하나하나 지나가고 있었다. 이 끔찍한 터널이 어느 날 예고도 없이 내 앞에 무작정 펼쳐졌던것처럼 출구의 빛도 어느 순간 갑자기 찾아왔다. 다른 많은 사람들의 터널 통과와 마찬가지로 나도 그 시절 자신이 도대체 무엇을, 어떻게 함으로 그 속에서부터 빠져 나오게 되였던것인지 잘 알수 없다. 그저 나는 이미 헤쳐나온 터널을 뒤돌아보며 신에게 경이로움과 감사함을 표할수밖에 없었다.     무엇이 현실의 나를 강하게 만드는것일가. 또한 무엇때문에 삶속에서 나는 힘들고 아프고 약해 있는가. 그 끔찍한 터널을 통해 뼈저리게 깨달은것이 있다면, 결코 외계의 환경과 타인들의 행동이 근본의 원인으로 군림할수 없다는것이다. 모든 객관의 요소들은 문제의 참고사항이 될뿐 주관적인 나의 세계에서 나 자신의 동의없이 주인 노릇을 할수 없고 따라서 그것들에게 나는 최종적인 책임을 물을수 없었다. 나의 속세계가 얼마나 질서있고 탄탄하고 포용력이 있는지, 얼마만큼 상처를 복구시키고 세상의 악을 해독할수 있는지, 얼마나 사랑의 능력을 가지고 있는지에 따라 현실에 대처하는 나의 모습이 달라질수 있는것이였다.   그로부터 몇년이 지난 오늘, 내 속의 집에 또다시 다른 류형의 쓰레기가 몰래 쌓여가고 있지는 않는지, 혹은 더 많은 사회적 책임을 져야 할 나이에 아직도 비좁고 낡은 집에서 근근득식 거짓평안을 누리며 살고 있지는 않는지 알기 위해 자성(自省)의 터널을 다시 한 번 걸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육체를 위해 정기검진을 받듯 마음의 건강을 위해 정기적으로 내면려행을 떠나보는 일도 매우 필요하기 때문이다. 모든 변화의 시작, 긍정적인 결단은 내 속 가장 안쪽 깊이에 있는 능동의 나로부터 발생되는것이니까.   바야흐로 겨울이 지나고 있다. 두꺼운 의복에 웬만큼 질리고 힘들었던 계절이였다. 의복의 부피도 줄이고 불필요하게 증가된 몸무게도 빼고 이 참에 마음까지 새로이 보수해야 할가부다. 비물이 새는 곳이라든가 세상고초때문에 내려앉은 구석 모퉁이, 혹은 비우지 않은 쓰레기통에서 썩어가고 있는 음식물이나 처마밑에 몰래 기여든 능구렁이 따위들이 어디 없는지 한번쯤 스스로 점검해볼 일이다.   따뜻한 봄, 어느 여유만만한 오후나절이 되여서 혼자 그 적막한 터널을 찾아 다시 한 번 그 속을 또각또각 걸어보고싶다.     2016. 3. 장춘에서     [출처] 어둠속, 삶의 통과의례|작성자 김 혁   ☞ 김혁 문학블로그: http://blog.naver.com/khk6699 ☜
5    문학의 중심에서 쟝르를 웨치다 댓글:  조회:2428  추천:10  2014-08-11
. 대담 . 문학의 중심에서 쟝르를 웨치다 - 우리문학에서 소박맞고있는 쟝르문학에 대하여     대담자: 김혁&장춘식   김 혁 소설가, 연변작가협회 리사, 소설분과 주임   장춘식 평론가, 중국사회과학원 문학연구소 교수     김혁: 장춘식 평론가님 안녕하세요? 짜증나는 무더위에도 대담에 응해주셔 감사합니다. 북경은 지금 몹시 더웁지요. 장춘식: 네. 안녕하세요? 말그대로 불볕더위입니다.고향 연변도 무척 더울테지요? 김혁: 네. 어딜 가나 더위때문에 아우성이군요. "누가 이 찜통 더위를 벗어날수 있을가/더위 식힐 좋은 음식도, 피서 도구도 없으니/조용히 앉아 책 읽는게 최고로구나"하고 조선 숙종때 윤증이라는 학자가 읊었다고 합니다. 에어콘도, 랭장고도 없던 옛사람들에게 독서는 최상의 피서법이였다고 하네요. 책읽기를 뜻하는 한자말에는 독서말고도 “간서(看書)”, 그리고 “피서(披書)”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러고보니 “피서(披書)”와 더위를 피한다는 “피서(避暑)”는 음이 꼭 닮았네요. 짜증나는 더위에는 심오한 저서들보다는 쉽게 그리고 재밌게 읽을수 있는 추리나 멜로물이 좋을겁니다. 그래서 전 요즘 읽은 책이 할빈출판사 출판으로 된 일본추리소설 “고백”입니다. 일본에서 추리소설 신인상을 수상하며 등단한 신인작가 미나토 가나에(凑佳苗)의 첫 장편인데 데뷔작치고는 너무나 훌륭해 그토록 치밀하고 아름다운 이야기에 감탄하며 읽은 책이였습니다. 후덥지근한 날씨때문에 더위를 잊고자 든 책인데 외려 인간의 본성을 깊숙히 파헤친 책의 묵직한 내용에 저으기 심각해지고 말았네요. 책은 중학생들이 저지른 살인 사건행각과 자기가 가르친 학생에 의해 딸을 잃은 반주임 녀교사의 복수라는 충격적인 소재때문에 일본에서 거대한 찬반양론을 불러일으켰다고 합니다. 우리문단에서도 추리소설은 찬반양론이 심하게 엇갈리는 쟝르이지요. 그러면 오늘은 추리소설과 같은 쟝르문학에 대해 이야기해보도록 하지요. 평론가님은 요사이 어떤 책이나 영상물을 보았는지요. 쟝르문학쪽으로 굳이 뽑으라면? 장춘식: 최근에 본 국산 드라마중에 “정탐 적인걸(神探狄仁杰)”이 추리적인 축면에서 상당히 정교한 구성으로 짜여있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전에도 력사적으로 유명한 탐정 적인걸의 전기적인 이야기를 다룬 드라마들이 있었지요. 그런데 옛날의 드라마는 공안소설의 흔적이 많이 남아있었습니다. 김혁: 한때는 포공(包公)에 대한 공안(公案)소설을 각색한 드라마가 많더니 요즘은 적인걸이 대세인것 같습니다.적인걸은 당나라 무측천 시절에 거란(契丹)의 내습을 평정하여 공을 세운 실존했던 력사인물입니다. 적인걸에 관한 소재는 요사이 류덕화가 주연한 영화(狄仁杰之通天帝国)로도 한편 나왔습니다. 유명한 무협감독 서극이 메가폰을 잡은 영화로서 무협과 추리를 버무린 퓨전식의 오락물로서 아주 큰 흥행을 보였지요. 이처럼 요즘의 독자와 관객들에게는 무협과 추리 그리고 멜로와 같은 쟝르들이 각광받고 있네요. 장춘식: 네. 저는 사실 무협소설이나 추리소설, 판타지소설은 최근에 별로 읽은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한때는 저도 추리소설에 심취해있던 시기가 있었지요. 1990년대 초반으로 기억되는데, 당시 구해볼 수 있는 추리소설류 작품들, 일본의 추리소설, 한국작가 김성종의 추리소설, 그리고 특히 미국작가 시드니 쉴던의 추리소설들을 즐겨 읽었습니다. 거리 난전에서 팔고있는 해적판도 꽤 많이 사서 읽었지요. 해적판은 오역에 오자투성이지만 그래도 내용은 대충 알 수 있었으니까요. 김혁: 더 일찍 80년대에 이미 이러한 쟝르소설 열독붐이 일었다고 할수 있습니다. 제가 80년대 중기에 연길에 헌책가게 하나를 차린적 있습니다. 그래서 당시 무협과 추리 멜로물들의 열독상황에 대해 매우 익숙합니다. 당시 일본작가로는 모리무라 세이이찌, 한국작가로는 김성종 그리고 미국작가로는 시드니 쉴던(西德尼 . ·谢尔顿)의 작품들이 거의 서점가를 독점하다 싶이 했지요. 그리고 애거서. 크리스티(阿加莎·克里斯蒂)의 추리소설을 각색한 영화 “나일강 살인사건(尼罗河上的惨案)”과 “동방특급렬차 살인사건(东方快车谋杀案)”이 중국말로 더빙되여 나와 인기를 끌었지요. 인상에 남는 문학작품들로는 모리무라 세이이찌의 “인간의 증명”, 김성종의“피아노 살인”, “제5의 사나이”, 시드니 쉘던의 “가령 래일이 오면”이 있습니다. 제 기억이 틀리지않았다면 “가령 래일이 오면”은 당시 “천지”문학지에서 꾸리던 문학애호가들의 통신간물 “개간지”에 련재된적있습니다. 무협과 멜로쪽으로는 김용과 경요의 작품이 압권이였구요. 김성종의 추리소설은 그후로도 거의 20년가까이 서점가를 강타했고 모든 간행물들에서 그의 소설들을 다투어 련재했었지요. 우리의 번역가들에 의해 김성종의 많은 소설들이 중문으로 번역되였는데 지난해까지만도 진설홍, 윤금단등 번역가들에 의해 김성종의 소설이 중문으로 번역되여 서점가에 올랐습니다. 저도 연변일보 문예부에서 기자로 뛰던 시절 경요의 멜로물 “불타는 천당(失火的天堂)”을 우리말로 번역한적 있습니다. 장춘식: 그시대 사람들로말하면 인상깊은 열독추억이지요. 그때는 저도 아직 소설을 쓰고있었고 뭔가 팔릴 수 있는 소설이 없을까 생각던 끝에 추리소설을 나 자신의 소설에 접목시킬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했더랬습니다. 코난도일의 추리소설은 매우 정교하지만, 그래서 학계에서 추리소설의 전형으로, 고전으로 인정받고있지만 시대적 차이가 느껴지고 조금 따분한 느낌도 없지 않습니다. 일본의 추리소설이나 한국의 추리소설들이 우리의 구미에 잘 맞는다고 볼 수 있지요. 그런데 시드니 쉘던의 소설을 읽고는 왜 이 작가의 작품이 늘 베스트셀러에 오를 수 있었는지를 짐작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추리소설은 아무나 쓸 수 있는 소설이 아니라는 생각도 했구요. 시드니 쉘던의 너무 정교한 추리와 기발하고 풍부한 상상력에 감탄을 금할 수가 없었습니다. 김혁: 시드니 쉘던은 기네스북에 오를만큼 량산의 작가였고 탁월한 이야기 군이였지요. 그의 작품은 “가령 래일이 오면”을 완정하게 읽었습니다. 그외 “벌거벗은 얼굴”과 “천사의 분노”는 련환화로 보았지만 그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이야기에 흠뻑 매료되였더랬습니다. 시종 긴장감을 잃지 않으면서 사건의 진상과 결과에 대한 독자의궁금증을 유지하고 증폭시키는 작가의 필력이 당시 문학도였던  저에게는 거의 “신필”의 경지로 읽혔지요. 요즘 다시 읽어도 의학, 법학, 심리학에 대한 해박한 지식에 스릴감 강한 이야기로 요즘의 독자군에도 어필이 될만한 작품들이라 생각합니다. 그때는 단지 추리소설이라고 정의되여 나왔지만 지금 다시보면 의학소설,심리소설 등 여러가지 타이틀을 띈 작품, 쟝르문학의 범주에 드는 작품이였지요. 여기서 쟝르문학에 대해 다시한번 환기해보도록 합시다. 평론가들의 정의에 따르면 이른바 쟝르문학이란 추리, 공포, 력사, 련애소설 등으로 순수문학과 대비되는 매니아적 성격의 대중문학 혹은 상업문학을 뜻하지요. 특정 쟝르만의 규칙, 기호, 취향을 작가와 독자가 공유하고 그것을 전제로 글쓰기와 글읽기가 이뤄지는 문학을 말하는데 순문학작품과 대비되는 개념이기도 합니다.   사실 우리 조선족문단에도 오래전에 추리소설과같은 쟝르문학이 나왔다는 주장이 있지요. 70년대에 이미 계급투쟁주제의 탐정소설이 등장되였다고 하는데 아주 흥미로운 부분입니다. 그 력사 배경과 구체적인 작품에 대해 평론가님께서 분석해 주시지요. 장춘식: 네. 우리 문단에서 1970년대에 계급투쟁주제의 소설이 인물설정과 플롯구성에서 탐정소설화 현상이 나타났다는 주장은 지금도 변함이 없습니다. 문화대혁명 직전인 1960년대 중반에 들어서면서 계급투쟁의 주제가 우리 소설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기 시작했고 숨은 계급의 적, 채 개조되지 않은 지주, 부농, 계급이색분자 등이 부정적인 인물로 등장하면서 이들을 수색하고 반동적인 음모를 밝혀내는 과정이 소설의 플롯을 형성한 것이지요. 수색 수사 과정은 추리가 필요하고 따라서 탐정적인 요소가 가마되기 시작하지요. 그러나 문화대혁명 이전까지는 아직 추리적, 혹은 탐정적인 요소가 뚜렷하지는 않았습니다. 문화대혁명 후기, 다시 말하면 1970년대 초, 중반에 한동안 중단되였던 문학창작이 다시 시작되면서 이제 계급투쟁은 우리 소설의 기본적인 주제가 되고 작가들의 플롯구성이 점차 탐정적, 추리적인 방향으로 발전하기 시작합니다. 가령 김지훈의 단편 “첫 근무”(1976)에서는 녀 공인민병(工人民兵, 당시 비전문적인 치안요원) 봉순이가 주과부와 채무재라는 사람이 싸운 일때문에 조사를 가서 자초지종을 파악하고는 그것을 실마리로 주과부의 아들을 꼬드겨 기계부품을 훔쳐내다가 지하고물점을 통하여 팔아먹는 숨은 범죄자 송칠보를 검거해내는 과정을 그리고있는데 이야기 자체가 범죄사건의 수사로 되여있어서 당시로서는 전형적인 탐정소설 혹은 추리소설이라 볼 수 있습니다. 김청송, 황하성의 “철벽”(1976)은 더구나 상당히 정교한 탐정소설의 구조를 갖추고있습니다. 공안분야의 간첩수사과정을 다루고있고 그 과정이 상당히 탐정적 혹은 추리적인 형식으로 진행되고있기때문입니다. 이 두 작품은 플롯구성이 기본적으로 탐정소설의 구조를 갖추고있어 어느 정도 전형성을 띤다고 볼 수 있을겁니다.그러나 전형적이지는 않지만 이와 류사한 탐정구조를 갖춘 작품들이 많이 있었지요. 그리고 재미있는것은 이처럼 본격적인 탐정소설 혹은 추리소설이 아닌, 일반적으로 우리가 말하는 사회소설에 속하는 작품들이 탐정소설의 구조를 갖추고있다는 점입니다. 김희철의 중편소설 “전우의 딸”(1976)과 “림해의 풍파”(1977)가 대표적이지요. 당시 가장 인기가 있었고 또 당시로서는 보기 드물게 두편 모두 중편소설의 형식을 취하고있구요. 김혁: 당시는 이른바 “3돌출원칙”이라는 좌적인 철쇄에 매여 모든 작품들이 소재나 구성면에서 천편일률적인 자유롭지못한 상황이 아니였나요? 그러면 왜서 이런 창작경향이 일어났을까요? 장춘식: 두가지 측면에서 이런 현상을 해석할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하나는 소설 플롯구성의 중요한 방식으로 존재했던 련애이야기가 금기시되는 등 플롯구성과 인물설정의 측면에서 수많은 금지구역이 존재하였기때문에 작가들이 리용할 수 있는 플롯구성의 방식에 별로 여지가 없었던 사정과 관련되고 다른 하나는 문화대혁명전에 우리글로 번역소개되었던 쏘련의 탐정소설(“구리단추” 등)이나 70년대 중반 중국에서 방영되었던 조선의 탐정영화 등의 영향과 무관하지 않다는것입니다. 탐정소설이나 탐정영화, 당시에는 흔히 “반특”영화라 불렀던것 같군요. 김혁: 맞습니다. 조선영화로는 “숨길수 없는 정체”, 쏘련영화로는 “발자욱”, 그외 알바니아와 루마니아의 반특 영화들이 있었지요. 몇편 안되는 혁명적 본보기극 영화들만이 란무하던 그시절에 몇번이고 다시보았던 영화들이였습니다. 그나마 단일한 제재의 반복에 식상했던 그 시대 사람들의 문화생활에 이채를 보태여준 작품들이라 볼수 있겠지요. 장춘식: 네 이러한 영화나 소설들의 기법을 습득할 수 있는 여건이 존재했고 마침 앞에서 언급한바 있는, 숨어있는 반동분자가 계급투쟁주제의 소설에서 중요한 요소로 등장하기때문에 이를 수사하는 과정을 탐정적인 방법, 혹은 추리적인 방법으로 처리하기에 안성맞춤이었다는 점, 이런 상황이 서로 접합점을 찾아 탐정소설화 현상이 일어난것이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개혁개방이 시작되면서 계급투쟁주제의 소설은 점차 자취를 감추는데, 소설 플롯구성에서의 이와 같은 탐정,혹은 추리적인 수법의 관성은 그후 김경련의 중편소설 “흉수는 누구?”에까지 영향을 미치고있습니다. 김혁: “흉수는 누구”는 “아리랑”총서에 몇회에 나뉘어 련재되였던것으로 기억됩니다. 그이후로 리만호의 “국장과 나리꽃”등 몇부의 소설들이 통속소설의 형태를 띄고 창작되여 당시로는 작지않은 센세이숀을 일으켰지요. 그외도 추리소설에 대한 창작시도를 보여준 분들이 몇분 있었습니다.  연변 로투구출신의 윤송이라는 젊은 작가도 있었고 경찰계통에서 사업했던 룡정의 전강이라는 작가가 추리소설을 몇부 내놓았지만 량적으로 적었고 수작을 내놓지못했기에 쟝르문학 창작군을 뭇기에는 그 기세가 판부족이였습니다. 부끄러운 고백이지만 저도 80년대에 추리소설을 발표하려 고심한적 있었습니다. “꿈의 변두리”라는 제목으로 4만자되는 꽤 큰 편폭으로 창작했는데 여러 문예지들에서 퇴짜를 맞고 나중에는 당시 번역작품들을 전문 싣다가 페간된 “갈피리”라는 잡지에 그나마 실려 추리소설 창작에 대한 감질난 창작욕구를 무마한적 있습니다. 저의 경우에서도 강하게 느낀바이지만 우리 문단에서 쟝르문학에 대한 수용태도는 그닥 원활하지 못하다고 생각됩니다. 때문에 추리소설외에도 쟝르소설의 주류를 이루고있는 무협이나 과학환상소설, 판타지같은것은 아예 전무하다싶이 되여 있지요. 과학환상은 아이들을 상대로 한 환상동화가 그런대로 몇편 나왔지만 성인을 상대로 한 것은 리태학선생이 “아리랑”지에 발표한 겨우 한두부로 알고있습니다. 무협형태의 작품역시 80년대 내부간행물인 “개간지”에 당시 문학통신원출신의 젊은 작가였던 류순호씨에 의해 겨우 한편이 나온것으로 알고있습니다. 장춘식:    쟝르소설의 부진은 결국 우리 소설의 쟝르가 다양하지 않다는 말로 리해할 수가 있겠습니다. 쟝르의 다양화는 몇가지 조건이 필요합니다. 문학교육에서의 다양한 쟝르 설정이 그 하나가 되겠고 다양한 쟝르의 접촉이 또 하나의 여건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 소설시장의 규모와 다양화가 중요한 여건이 될 것입니다. 문학교육에 대해 먼저 얘기해보지요. 우리의 문학교육은 소설의 경우 전통적으로 사회소설 혹은 예술소설을 모델로 가르치고 있습니다.(대학교육도 그렇고 관련 리론도 마찬가지입니다) 심지어 수호전이나 삼국연의 같이 상당정도 무협적인 요소가 있는 소설을 가르칠 때도 무협적인 요소는 별로 주목받지 못하고 거기에 함유된 사회적 혹은 력사적인 측면에 초점을 맞추고있지요. 초중등교육에서는 물론이거니와 대학교육에서도 이 점은 별 차이가 없습니다. 소설에도 여러가지 다양한 쟝르가 있다는 것을 제시하는 것으로 만족할 뿐이지요. 김혁: 네, 그리고 또 거부와 폄하가 또 이러한 쟝르문학의 정체를 빚어내지 않았나 하는 생각도 듭니다. 우리의 일부 주류문학 연구자들은 자신들이 추천하고 언급하고 연구하는 것만을 배타적으로 문학으로 간주하"며"쟝르문학같은 것은 순수문학으로부터 배제된 "상업주의 문학”, 지어 “하위문학”이라고 락인을 찍고 있습니다.이러한 쟝르가 우리가 흔히 접해 온 근대소설의 외양과 다르다고 해서 쉽게 배척하는 것은 변조하고있는 문학을 대체하는 게으름과 무지의 소산이기에 쉽다고 감히 말해 봅니다. 이렇게 쟝르문학을 “수준 낮은 문학”으로 치부하는 시선들이 있기때문에 쟝르문학에 아예 근접해보지도 못하고 너나가 이른바 순수문학쪽으로 몰려가는 것도 쟝르문학이 정체되는 리유 중 하나가 아닐가요? 우리 문단의 작가들과 독서성향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어보면서 쟝르문학의 최고봉으로 꼽는 조앤 롤링의“해리 포터”나 댄 브라운의 “다빈치 코드”, 톨킨의 “반지의 제왕”을 읽은 사람이 몇 사람 되지 않을 정도여서 그 독서량의 편식에 놀란적도 있었습니다. 사실 저는 국외의 쟝르문학작품들을 대량 사들여 소장하고 읽으면서 나름 쟝르문학창작에서 시도를 많이 해보았습니다. 아동력사소설에 미스터리와 무협요소를 가미한 “거북구술”과 “신라의 검”을 “별나라”에 발표했고 “문학과 예술지”에 “환을 말하다” 라는 평론을 게재하여 판타지문학의 추세에 대해 분석도 해보았고 “도라지”에서 호러작품 몇편도 발표하여 평론가들의 찬반의 평론을 이끌어 내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연변문학”지에 판타지 “불의 제전”을 발표하여 “연변문학”윤동주문학상을 수상하기도 했지요. 당시 문단의 첫 판타지였음에도 그 새로운 쟝르를 존중해 큰상에 뽑아준 심사위원들에 감사를 느꼈지만 거의 7년이 지난 오늘까지도 판타지작품은 아직도 거의 한편도 보이지 않아 갑갑한 마음입니다. 쟝르문학의 결여에 대한 그 일례로 개인에 대한 사례가 많이 들어가 미안하지만 그만큼 이렇게 이야기를 담아내는 새로운 매체나 틀이 등장하였을때 관습적인 서사형태로 독점적 권한을 행사하던 우리 작가들과 평론가들은 불편한 심기를 드러내는 경우가 잦았습니다. 소위 “문학성 혹은 예술성이 없다”는 론리로 이러한 신생사물들을 몰아붙였지요. 쟝르문학은 순수문학에 비해 문학성이 뒤처진다는 “편견”이 따라붙지만 독자들의 수요를 외면한 섣부른 추측은 금물이라고 봅니다. 국외의 경우 쟝르문학은 대중깊이 침투되여 있습니다. 누구나 즐겨 읽고 명인들도 자신의 독서성향에서 쟝르소설을 우선 꼽고 있습니다. 미국의 클린톤 대통령이 취임하던 당시 기자들이 즐겨읽는 책을 소개하라고 하자 서슴없이 “추리소설을 매일밤마다 읽는다”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만약 우리의 유명작가들이나 령도분들이 공중장소에서 이런 말을 했더라면 어떻게 받아들였을가요? 사실 오래전부터 유럽의  명사들은 자신이 지적이고 품위있으며 교양이 넘치는 신사라는 것을 나타내기 위하여 세가지 취미를 내 세우는데 그 세가지인즉 첫째- 사냥, 둘째- 승마, 셋째- 추리소설 읽기라고 합니다. 이는 백여년전부터 귀족이나 상류사회의 신사들이 즐기던 일이였지요. 클린톤 이전에도 링컨도 추리문학을 좋아했고 루즈벨트는 독자의 한계를 넘어 작품을 직접 구사하고 작가들에게 부탁해 쓰게 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작가들중에서 쟝르문학에 심취한 이들로는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프랑스의 앙드레 지드, “인간의 굴레”의 저자인 영국소설가 서머셋 모옴등이 그 대표적인 인물들이라 합니다. 특히 서머셋 모옴은 “미래에 살아남는 문학은 추리소 설뿐이다. 책방에도 도서관에도 추리가 넘쳐날것이다”고 예견하기도 했지요. 중국의 지도자 등소평도 그렇고 수학가 화라경도 무협지의 충실한 독자였습니다. 김용의 무협지 “련성결(連城訣)”은 등소평이 가장 즐겨 읽은 소설이라고 합니다. 추리소설이 단순한 추리가 아니고 “소설”의 체제를 갖춘 추리요, 추리를 위한 “소설”인만큼 문학의 쟝르임에 틀림없으며 문학의 쟝르인한 문학상을 부정할수는 없습니다. 만약 문학성을 완전히 배제하고 순전히 추리에 대한 문제의 제시와 해답만을 기술한다면 그것은 소설은 커녕 원고지 몇장이면 충분한 퀴즈풀이에 지나지 않을것입니다. 우리문단에서의 쟝르문학의 정체는 흥미로움과 경박함이 문학의 외피를 쓰고 범람하는 풍조에 대한 거부인지 가늠하기는 쉽지 않지만 판단은 이러한 문학을 향유하는 독자의 몫이기도 하겠지요. 장춘식: 네. 그러면 우리 독자들의 독서환경을 한번 살펴보도록 합시다. 독서환경의 경우 문학교육의 경우보다는 조금 나은 편이라 하겠는데요, 그래도 일반적인 사회소설에 비하면 다양한 쟝르의 소설들은 양적으로 너무 보잘것 없지요. 이 두가지 여건에서 우리의 작가지망생들은 소설을 공부하게 되는데, 그러다보니 다양한 쟝르의 소설공부를 할 기회가 매우 적다는 사실을 금방 알 수 있을것입니다. 그래도 마음 먹고 다양한 쟝르의 소설을 공부하고자 하면 할 수는 있겠지요. 요즘은 인터넷이 발달하여 옛날보다는 훨씬 유리한 조건이 형성되어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김혁: 그렇지요. 인터넷을 통해 또 새 세기에 들어 거족적으로 발달된 중국의 출판, 도서시장을 통해 세계각지의 우수한 쟝르작품들을 시효성있게 접할수있습니다. 요즘은 서구의 판타지와 일본의 추리가 대세인데 그러한 베스트셀러들을 중국에서도 불과 일년안에 번역본을 접할수 있습니다. 그리고 원작을 개작한 영상물과 같은 다양한 참조계를 통하는등 여러 가지 방식으로 접할수 있지요. 장춘식: 그런데 또 하나 중요한 요소, 즉 작가들이 다양한 쟝르에 손댈 수 있는 욕구가 필요한데 이것이 너무 미약하다 할 수 있습니다. 다양한 쟝르의 창작에 관심을 가질 수 있는 가장 강력한 욕구는 독서시장의 요청과 밀접한 관련을 가집니다.베스트셀러라는 말의 의미에서 알 수 있는바와 같이 무협소설이나 추리소설, 판타지소설은 이 잘 팔리는 책의 개념과 직접적으로 관련됩니다. 그런데 우리 독서시장은 워낙 규모가 작기때문에 아무리 재미있는 소설을 쓰더라도 소설을 써서 돈을 번다는것이 비현실적이지요. 김혁: 네. 우리 작가들이 그것도 자비로 출판한 책들이 겨우 300부를 소화하기도 버거운 우리말 출판시장의 침체는 말할것도 없고 중국이나 외국의 영화나 텔레비죤과 같은 영상매체 및 컴퓨터 사이버 매체에 경도된 조선족독자들에 의해 점차 소멸해가는 장르의 하나로 스스로를 규정할 수밖에 없게 되지 않나 위기의식에 작가들은 시달리고있습니다. 하기에 더욱더 생존의 길을 뚫어야겠지요. 생존화하려면 다양화, 그리고 분화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다면 쟝르문학을 바로 분화. 다양화의 한가지 중요한 방식으로 봐도 무방하겠지요. 전 세계 수천만의 독자들의 검증으로 쟝르문학의 최고의 반렬에 오른 “다빈치 코드”의 작가 댄 브라운은 자신의 작품에서 문학적 정교함이 떨어진다는 비난에 “나는 노벨문학상이 아닌 수백 수천만 명의 독자들을 위해 글을 쓴다”라고 호언하기도 했습니다. “오늘의 시대는 대중이 문화의 중심에 위치하고, 대중에 의해 문화가 창조된다.”고 전문가들은 말합니다.이러한 정론은 쟝르문학에 대한 긍정적인 시선을 가지게 합니다. 독자들의 흥미를 무시하고 독자를 외면하며쓰여진 작품은 비록 작품성이 뛰여나다 할 지라도 “읽히지 않은 소설”이라는 모순에서 벗어날 수 없을겁니다.때문에 우리의 문단은 편협한 변두리 사유에서 벗어나 첨단 다매체 시대에 걸맞게 활용 매체에 부합되고 대중적으로 어필하는 소통 전략을 필요로 해야 할것입니다. 작은 시장, 엷은 독자층을 가진 우리 문단, 우리 작가로서는 그런것이 하루아침에 되진 않겠지만 서서히 극복하고 넘어서는 것이 우리 문학의 다양화와 정체의 극복을 위해선 상당히 중요하다고 봅니다. 장춘식: 조선이나 한국을 포함시킨다면 물론 작은 시장은 아닙니다만 이들의 독서시장에 진출하기 위해서는 또다른 수련과 적응과 연구가 필요한데 선천적으로 우리는 불리한 위치에 처해있는 상황이지요. 김혁: 중국조선족이라는 우리만의 특유의 정서와 소재로 한번 승부사를 던져본다면 가능성이 없는것도 아니지 않을가요? 외려 한국에서 우리의 소재를 활용하여 책도 내고 영화도 만들고 있던데요. 그와중에 상업효과만 쫓아가고 조선족에 대한 진정한 리해의 결핍때문에 조선족 독자와 관객들의 불평의 소리도 때때로 들립니다. 여기서 우리 조선족 작가들이 해외에서 사뭇 선호하는 쟝르문학에 대한 연구와 동참의식에 대해 한번 호출해보는것도 무리가 아니겠지요. 우리문단에서 나름 시도가 없는것도 아니였습니다. 일전에 문단에서는 참으로 반갑게 전문 인터넷 문학상이 공모되였는데 그 문학상에 오른 작품들을 읽으면서 생각되는바가 많았습니다. 인터넷 문학이라는 쟝르문학의 요소에 거의 근접하지도 못한 작품들이 대부분이였기때문입니다. 안타깝지만 심사위원 모두가 우리의 인터넷 작가들의 문학 전반에 대한 리해와 예술적 안목이 성숙되지 않았다는 정평을 내리지 않을수 없었습니다.    참여의식과 열기는 보였지만 우리의 인터넷소설이  문단에서 하나의 새로운 력랑으로 자리매김한다는 것은 아직 성급한 판단이라고 봅니다. 해외에서도 학자들이 인터넷 소설을 부정적으로 보는 시각에는 “기존의 소설 양식이 가지고 있는 구성의 치밀성과 예술성이 떨어지고, 언어에 대한 투철한 자각이 결여되여 있어 민족어의 상실과 그로 인한 민족의 정체성이 위협받는다는 지적”이 나오고있는데 우리의 인터넷 문학에도 적용되는 말이라 생각됩니다. 장춘식: 저도 이번 인터넷문학 문학상 행사에 심사위원으로 참여했습니다만 얼마간 실망하기도 했었습니다. 눈에 들어오는 작품이 별로 없었으니까요. 그런데 이것 또한 문단의 선배로서 저에게도 책임이 없을 수 없지요. 가장 절실한 느낌은 우리 문학청년들이 아직 인터넷문학에 대한 인식이 피상적이라는 점이였습니다. 문학작품을 새로운 미디어인 인터넷 공간에 올려놓으면 곧바로 인터넷문학이 되는것은 아닙니다. 하기야 종이신문이나 잡지에 게재했던 작품을 인터넷에 올려놓기만 해도 어느 정도 인터넷문학의 기능을 하기는 하지요. 쌍방향의 소통이 가능하니까요. 그러나 이것을 인터넷문학의 전부라고 생각하면 그건 너무나도 인터넷을 단순하게 보는 편협한 생각이라고 생각합니다. 신형의 미디어로서 인터넷은 종이신문이나 잡지, 서적, 영화나 텔레비죤 등 전통적인 미디어와는 다른, 나름대로의 특징을 가지고있습니다. 김혁: 네. 인터넷문학을 비롯한 쟝르문학 작품들은 우리가 갖고 있던 소설에 대한 정의와 가치 기준으로 보면 맞아떨어지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우리가 인식하고 있는 기존의 문학이나 소설에 대한 정의, 역할등 면에서 현격한 관점의 차이를 보이면서 기존의 양식과 구분되고있지요. 요즘의 인터넷 문학을 보면 인터넷 작가들만의 환상작인 소재, 파격적인 구성방식, 그들만이 오가는 은어,전용어 즉 축약되거나 변용된 부호의 인용, 마치 삽화처럼 사용되고 있는 이모티콘등으로 그들만의 창작방식이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인터넷 문학작품들에서는 그러한 요소들이 거의 보이지 않았습니다. 오프라인에서 온라인에 오른다고 해서 그것이 인터넷문학인 것은 아니지요. 장춘식: 그런만큼 인터넷문학 또한 인터넷이라는 미디어의 장점을 최대한 리용할 수 있는 형태의 문학이여야 하겠지요. 아직 많이는 개발되지 않았습니다만, 가령 이미지나 음향, 음악 등을 동반한 시문학, 하이퍼링크식의 소설구성 등은 쉽게 생각할수 있는 인터넷문학만의 특징이 되겠지요. 하이퍼링크라는 개념은 쉽게 말하면 인터넷사용자들이 자주 접촉하게 되는것인데요, 하나의 링크를 클릭하면 새로운 화면이 뜨는 현상을 말하지요. 례를 들면 이런것입니다. 전통적인 소설과 꼭 같은 형태의 스토리가 진행되다가 어느 순간 클릭을 필요로 하도록 설정합니다. 하나 이상, 가령 2개나 3개의 링크를 설정하여 원하는 링크를 클릭하였을 때 이어서 스토리가 진행되게 하는겁니다. 링크마다 스토리의 진행상황이 달라지고 특히 결말부분에서 몇개의 서로 다른 링크를 걸어놓으면 독자의 궁금증을 배가시키게 되지요. 그러니까 시작이 같은 소설이 중간에서 스토리의 방향이 몇개로 나뉘여질수도 있고 또 몇개의 서로 다른 결말이 설정될수도 있다는 말이 되지요. 이런 형태는 종이미디어에서는 불가능하니까 인터넷만의 특징이 되는겁니다. 이외에도 인터넷의 끊임없는 발전과 더불어 인터넷의 특징과 개성을 리용한 수많은 새로운 문학창작양식이 개발될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김혁: 우리 문단에서 쟝르문학이 언제면 제 명성을 찾을수 있을 것인지? 안타깝지만 당장은 어려워 보입니다. 그럼에도 희망적인 것도 보이기도 합니다. 요즘의 신진들은 선배들의 고답적 문학 형식을 거부하는 한편, 작품들이저마다의 개성과 작품성을 보이면서 시대의 변화에 민감하게 맞서는 창조적 글쓰기의 순발력을 보여주고있습니다. 작품에 따라 편차가 있겠지만 그럼에도 기존의 작품들과는 언어와 플롯면에서 완연 분별되는 쟝르물의 문법을 끌어들이면서 독자층을 사로잡는 깜찍발랄한 작품들, 감히 수작이라고 부를수 있는 작품들이 씨앗처럼 퍼지고 있습니다. 그런 소설이나 신예들을 발견하면 반가움과 동시에 안타까움이 찾아옵니다. 소설이 더는 사람들에게 진지한 쟝르로 인정받지 못하게 된지 오래인데도 여전히 소설의 인문학적 가치를 고려하는 습작생이기에 반갑고 또한 그 습작생을 어떤 문체방식으로 이끌어야 할지에 안타깝기도 합니다. 그들은 언제쯤 싹을 틔울수 있을까. 쟝르문학의 황무지 같은 이 곳에서, 조금은 간절하게 그 순간을 기다려봅니다. 그들에 의해 우리의 쟝르문학도 꽃을 피워 우리만의 특색의 “적인걸”이 나오고 “홈즈”가 등장할 날이 있겠지요. 장춘식: 소설쟝르의 다양화 혹은 쟝르소설의 발달은 문학교육, 독서환경, 시장요청 등 세가지 측면에서 생각해볼수 있겠는데, 알수 있듯이 어느 한 측면에서도 우리 문단은 소설쟝르의 다양화나 쟝르소설의 발달에 유리한 상황이 조성되지 않고있습니다. 김혁: 이에 반해 해외의 경우는 “순수문학”과 “쟝르문학” 사이의 경계조차 허물어지고 있습니다. 이 경계가 허물어지고 있다는 이야기가 나오기 시작한 게 벌써 십년 저쪽의 일입니다. 추리와 과학환상판타지, 로맨스, 무협 같은쟝르소설들이 본격문학의 령역안으로 대거 밀고 들어오는 한편, 순수문학 쪽과의 대화를 시도하고 있지요. 이른바 순문학 작가들은 쟝르소설적 틀과 장치를 적극 활용한 작품들을 다투어 내놓고 있습니다. 이들은 “문학의 외연을 넓히고 독자와 정면승부하자는게 취지”라고 창작의취에 대해 설명하고있습니다. 일종의 세를 형성하면서 뚜렷한 흐름으로 자리잡아 가는 요즘 우수한 쟝르작품들은 쟝르작품들이 갖는 특유의 기계적 장치를 크게 차용하고 의지하면서도 인간과 세계에 대한 깊이 있는 철학적 통찰을 담고 현실에 대해발언하고 있어 눈길을 끌고있습니다. 사실 이러한 작품들에서 추리적인 것이나 무협적인 것 환상적인 것은 배경에 불과하다고 말할수 있습니다. 혹은 인간의 어떤 내면을 보여주기 위한 적극적인 소재이자 계기에 불과하기도합니다. 상상력은 보조에 불과할뿐 결국 작품을 이끌어나가는 것은, 그리고 작품을 완성시키는 것은 소설로써의“이야기”, 문학으로써의 완성도인 것입니다. 그리고 태고적에 칼날을 휘두르고 은하계밖에서 날아예고 피투성이의 복수극을 펼치던 쟝르문학이 이제는 사회속으로 깊이 들어가고있습니다. 쟝르문학 전문작가들은 그 시대의사회문제를 포착하고 민감하게 의식하고 있었고 대중들도 관심을 가질만한 우리 사회의 다양한 문제들을 담아내고 있습니다. 이로부터 한국의 경우에는 순수문학과 대중문학의 구분이 엄격한 그들의 문학 풍토에서 쟝르문학 시장이 활성화함에 따라 일부에서는 하위쟝르로 폄하되던 쟝르소설들이 미래의 문학을 이끌어갈지도 모른다고 문단과 학계가 조심스레 점치기도 합니다. 쟝르문학이 가지고 있는 오락성은 분명 순수문학의 엄숙성과는 구분지어질 특징이라 할만도 합니다. 그러나 쟝르문학의 가치 전부가 부정적으로 판단될 성격의것은 아니라고 봅니다. 교훈적이기보다는 오락적인 재미를 얻기 위해 소설을 접하는 독자들에게 이른바 순수문학이 추구하는 목적 달성의 “일석이조”의 효과도 줄수 있다면 쟝르문학의 가치를 작지않게 매길수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몇해전에 “도라지”에 내였던 호러작품에서 저는 단지 공포물이라는 취미로 쟝르문학에 접한 것이 아니라 이를 통해 변혁기 농촌사회의 붕괴와 그 와중에 겪게되는 농촌총각들의 실의와 아픔에 대해 다루려 했습니다.그리고 판타지 “불의 제전”에서는 민족의 렬근과 분단의 아픔에 대해 말하려 꾀했구요. 오래동안 엄숙한 자세로 소설창작에 림해온 작가로서 저는 기존의 본격소설은 쟝르문학과 같은 다양한 자양분을 수용해야 그 지평을 넓힐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궁극적으로는 더 많은 독자들을 섭렵하고있는 쟝르문학의 흥미가 종국에는 순문학으로 이끄는 힘이 되길 바라마지 않고있습니다. 장춘식: 이를 어느 정도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을 찾자면 가령 문학교육에서 다양한 소설쟝르를 가르치고 다양한 쟝르의 소설들이 독자에게 배급되고 마지막으로 조선과 한국을 포함한 한글문화권을 대상으로 시장개척을 시도해보아야 하겠지요. 한어로의 창작도 생각해볼수 있지만 그렇게 되면 사실상 우리 조선족문학이라는 개념과는 점차 멀어질수밖에 없습니다. 문학선배로서 책임감을 통감하며 함께 노력해야겠다는 말밖에는 더이상 할 말이 없습니다. 김혁: “호불호”가 엇갈릴지라도 현재의 디지털 시대를 살아가는 독자들의 양식과 감각은 사회를 구성하고 문화의양상을 결정지운다는 점에서 쟝르문학은 결코 가볍게 보아서는 안될 중요한 령역입니다. 그렇다고 우리의 순수문학이 지금 당장 그동안의 중국이나 구쏘련등의 주류문학을 고스란히 접해오고 중국조선족이라는 락인이 찍히게끔 노력해왔던 전통과 결별하고 오로지 가벼운 상업주의와 내통해야 한다는 것은 아닙니다. 문학의 위기론이 매일이고 들려오는 오늘, 해원의 길을 모색해나가고 있는 또 한 방편으로 쟝르문학의 부재에 대해 질호해 봤던것입니다. 오늘 저희들의 쟝르문학에 대한 새삼스러운 환기와 구구한 담론은 산업화시기에 맞닥뜨려 어딘가 무력해진 우리 문학의 현황과 하지만 그 문학의 생존을 갈망하는 열정때문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문학이 문화 전체의 구조속에서 차지하는 위상은 재조정될것이고 탈변에 탈변을 거듭할것이지만  그 과정에서 더욱 문학답게 정련될 것이며 그것만의 절대적인 기능을 갖게 될것이라고 우리는 믿고 싶습니다. 오늘 우리가 우리문단의 빈 구석을 찾아보며 대중문화담론을 구구히 늘여놓는것도 바로 이러한 믿음과 무관하지 않을것입니다. 무더위를 잊게 한 좋은 대담 감사합니다. 장춘식: 감사합니다.     “도라지” 2011년 4월호   ☞ 김혁 문학블로그: http://blog.naver.com/khk6699 ☜      
4    명작, 그 영원한 인류의 메시지 댓글:  조회:2717  추천:11  2011-06-29
. 대담 .     명작, 그 영원한 인류의 메시지    대담자   김혁&한춘   김혁: 소설가, 연변작가협회 소설창작위원회 주임 한춘: 시인, 전 흑룡강신문사 문예부 주임       김혁:      한춘선생님 안녕하십니까? 요즘은 통신수단의 눈부신 발달로 이렇게 메일로 “변강의 오지” 연변에서 “동방의 빠리” 할빈에 있는 선생님과 시공간의 제한을 받지않고 대화를 나눌수 있어 참 기쁘군요. 한춘: 반갑습니다. 김혁작가님. 김혁: 그런데 생님이 보내신 대담고가 저의 컴퓨터의 시스템이 구식이여서 파일이 열리지않아 애를 먹었습니다. 선생님께서 외려 신식 시스템을 쓰시는군요. 오늘 저희들이 이야기하려는 화제와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요즘 각 TV채널들에서 드라마 “신판 수호전”을 방영하고 있는데 그 붐을 타서 90년대판 “옛 수호전”도 어떤 채널들에서 더불어 방영되고 있습니다. 신구 드라마를 비교하하면서 시청하노라니 느끼는바가 새롭습니다. 오늘은 불변하는 명작의 매력이라는 화두를 가지고 이야기를 나누어 볼가 합니다. 한춘: 네.마침 중국 항간에 도는 이런 말이 떠 오릅니다."나이들어서는'삼국(연의)'를 읽지 않고 어려서는'수호(전)'을 읽지 않는다(老不看三国,少不看水浒)" 말하자면 다 명작은 명작인데 부동한 년령에 따라 부동한 자세로 작품을 접수한다는것입니다.그러니 그것이 명작일진데는 명작으로서의 '매력'이 객관적으로 내재하고 있습니다.  명작이라 할때 응당 독자들이 보편적으로 긍정하고 보편적으로 존중하고 보편적으로 선호한다는 공성을 띄고 있어 사람을 사로잡는 보이지 않는 힘이 있습니다. 언젠가 학생들과 이런 대담을 나눈 일이 있습니다.  "조설근의 ”홍루몽” 원문을 읽은 사람은 손을 드시오."  손을 드는 학생은 한사람도 없었습니다.  "”홍루몽”의 이야기를 아는 사람은 손을 드시오." 30명 되는 학생들이 거의 다 손을 들었습니다.  어떻게 되여 그 내용을 알게 되었는가 물었습니다. 대답은 각기 달랐습니다. 드라마를 보고 알게 되였다는 것, 만화책을 읽고 알게 되였다는 것, 영화를 보고 알게 되였다는 것, 에니메이션을 보고 알게 되였다는 것, 테레비 특강을 듣고 알게 되엇다는 것,남들의 이야기를 듣고 알게 되엇다는 등 그 도경은 각기 달랐습니다.그러나 한가지 공동한 점이 있으니 ”홍루몽”이 중국의 명작이고 보옥, 대옥, 보차의 삼각관계를 대충 알고 있습니다는 점입니다.말하자면 그들은 비록 작품 원문을 읽지 않았지만 ”홍루몽”이란 작품을 대체로 긍정하고 대체로 선호하며 대체로 숭상한다는 이 점입니다.  김혁: 네, 세월이 흘러도 변치 않은 가치를 지닌 명작은 우리에게 영원한 감동으로 다가옵니다. 발표이후 오랜 시간 국계와 민족을 넘어 여러계층의 인류에 회자되는 명작들은 지난 세대의 향수를 불러일으키고 자라나는 신세대들에게는 삶의 지혜를 물려주는 역할을 하고있지요. 홍수처럼 쏟아지는 책의 물결속에 “옥석”을 가려내기는 쉽지않습니다. 여기서 널리 회자된 명작들을 찾아드는것이 바로 그 옥석을 가려내는 가장 보편적이고 쉬운 방법일겁니다. 그러고보면 명작들은 달리 “불로장생”을 구가하는게 아닙니다. 명작만이 가지고있는 매력은 우리 독자들 더욱이 우리 문학창작자들이고 보면 영원히 읽어가야 할, 연구해 나가야할 화두이겠지요. 한춘: 네 그런데 문제는 요즘의 아이들이 그 명작들을 소외하고 있다는 그점이지요. 학생들에게 다른 한 문제를 물어 보았습니다."곽경명(郭敬明)의 소설 ”꿈속에 지는 꽃잎 얼마이던가(夢里花落知多少)를 읽어본 사람이 있습니까?"하고 물었더니 아이들이 수풀처럼 손을 들더군요. 나는 이 책을 한 30페지쯤 읽고 더는 읽어내려가지 못했습니다. 작품의 재미는 20대 좌우 청춘남녀들의 구미에 맞는 그런 내용이었기에 일흔을 바라는 나의 독서취미에는 맞지 않았습니다. 김혁:     곽경명은 어느 설문조사에서 로신, 파금(巴金), 로사(老舍), 가평오(贾平凹), 여추우(余秋雨)와 더불어 중국10대작가명단에 올라 커다란 파장을 일으킨 20대작가이지요. 제 딸애도 곽경명의 팬 입니다. 곽경명이 주필을 맡고있는 잡지 “최소설(最小说)”을 창간호부터 소장해 두고 있습니다. 몇백만부가 나가는 신세대들이 가장 선호하는 잡지로 알고있습니다. “소설월보”나 “수확”, “망종”같은 80년대 베스트 잡지를 읽어온 저의 세대에게서는 신선한 충격으로 보이는 잡지였습니다. 다른건 제쳐놓고도 오늘의 세대와 오늘 독자층의 미감을 겨냥한 모던한 잡지로서 그 정교함의 극치를 달리는 디자인이 아주 인상적이였습니다. 그 잡지를 딸애네 또래들은 걸탐스레 읽고있었습니다. 하지만 명작을 읽으라고 몇권 굳이 추천하니 “그런 ‘구닥다리’를 꼭 읽어야 하나요? 하고 반문하더군요. 딸애또래들의 이런 반응을 보노라니 곽경명이 10대작가에 선정된것을 두고 갑론을박을 벌리던 비평가들의 론설이 떠올랐습니다. 그중 한 비평가의 남다른 분석이 지금도 기억에 남습니다. “청소년들은 류행문화의 분위기속에서 성장하고있고 독자의 독서취미와 문화형성은 종합적인 형성과정이다. 례를 들면 류행가요, 네트워크 등은 청소년들의 문화형성에 거름을 주고있으며 문학은 단지 류행문화의 일부분일뿐이다.하기에 억지로 독자들에게 로사,파금의 작품을 읽게 하는것은 이제 더는 현실적인 독서방법이 아니다.”   이러한 론점으로 볼때 신세대들을 위한 그들만의 적성에 맞는 열독방식에 대한 연구가 있어야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한춘: 그래서 저도 학생들에게 베스트셀러와 명작의 구별점을 화닥닥 팔리는 것과 오래 오래 줄곧 팔리는 것으로 설명해 주었습니다.사실 지금 신세대들이 책을 읽지 않는것은 아닙니다. 다만 그들의 취미에 따라 나름대로의 선택이 있을 따름입니다.그러나 명작은 어느 한 사람의 취미로 결정하는 것이 아니지요. 모든 사람은 다 문학감상과 예술감상에서 자기의 취미를 가질 권리가 있습니다. 누구나 다 자기의 내심 수요에 따라 좋아하는 어느한 풍격이라던가 어느 한 내용이라던가 혹은 어느 한 형식에 취미를 가질수있습니다.이런 취미는 타고 난 천성이며 천성이기 때문에 당당한 당위성과 합리성이 있습니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취미의 각도와 시점과 층차와 차원이 각기 부동할 뿐입니다.  여기에 개인적인 표준과 대중적인 표준이란 두가지 표준이 있습니다.때로는 대중적 표준과 개인적 표준이 통일되지 않을 때도 있습니다.때문에 한 작품을 두고 그 작품의 매력이 어디에 있는가 물어 본다면 백사람이면 백 하나의 답이 있을수 있습니다. 김혁: 이른바 명작이라 함은 “제목은 알지만 읽지는 않은 책”이라고들 요즘 독자들은 우수개로 말하더군요. 높은 명성에 비하여 실제로는 별로 읽혀지지 않는게 “명작”이라는것입니다. 시대의 변화와 함께 요즘들어 달라진 독자들의 “열독취미”대로 명작은 대저 두가지로 나누어 볼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중 하나는 “걸리버 려행기”,  “돈키호테” 같은 작품들입니다. 이른바 “잘 읽혀지는 명작”이라 할수 있지요. 이 경우는 말하자면 대중성, 통속성이 두드러지면서 여러차례 영화, 드라마, 연극 등으로 만들어져 원래 텍스트를 읽지 않았지만 어쩐지 읽은듯한 느낌이 강하게 드는 작품들이라 하겠지요. “제인에어”, “몽떼그리스도 백작”, “삼총사”같은 작품도 여기에 해당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민족의 고전명작 “춘향전”도 이러한 범주에 해당되겠죠. 다음 한가지는 숄로호브의 “고요한 돈강”, 또스또엡스키의 “카라마조프가의 형제”,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스”, 까뮈의 “페스트”, 유고의 “93년”같은 작품들입니다. 누구나 작가와 작품의 줄거리와 주인공의 캐릭터에 대해 어느정도 알고는 있는듯하지만 막상 작품을 완정한 문학 텍스트로 읽지 못한 이들이 많지요. 책의 분량이나 문체의 표현, 구성방식이 독자들뿐아니라 전문 창작자들도 감내하기 어려운 작품의 경우가 아닐가 생각해봅니다. 그리고 프랑스의 문호 빅또르 유고의 “레미제 라블”같은 명작은 이런 두 가지 경우에 모두 해당되는듯 합니다. 한춘: 여기서 독자들의 시각을 헤아려 볼수 있겠지요. 로신이 ”홍루몽”을 두고 이렇게 평가했습니다.".....독자의 감수에 따라 각기 다를 수 있다. 경학자들이 읽으면 '점치기'로 볼것이요 도가들이 보면 남녀 상열지사로 볼것이며 문인들이 보면 사랑이야기로 볼것이며 혁명가들이 보면 청나라를 반대하는것으로 볼것이고 난봉꾼이 보면 대궐안의 스캔들이라 볼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명작이라 할 때 명작으로서의 기본 요소가 구비되어 있습니다. 말하자면 명작은 명작으로서의 예술표준이 있다는 말입니다. 명작 예술 표준에도 여러가지 설법이 있겟지만 적어도 아래 세가지 요소가 내포되어 있을 때라야 비로서 명작이라고 할수 있습니다고 봅니다. 첫째 독자의 기본 심성을 불러 일으키는 매력 요소입니다. 이 매력요소란 과거 우리가 교과서에서 배운 문학리론과는 좀 다른 견해일것입니다.모택동은 ”홍루몽”을 세번이나 읽었다면서 처음에는 그저 이야기로만 읽었는데 후에 두번 다시 읽으면서 홍루몽을 통해 봉건제도가 붕괴되는 력사를 읽었습니다고 말했습니다. 즉 작품의 심각한 철리, 사상, 시대성 등으로 그 작품의 매력을 평하였습니다. 그런데 가령 철리나 사상이라 할때 이와같은 사상이나 철리는 다 우리 내심의 기본심성 본체에 존재해 있는 것이 아니라 외부세계에 존재한것입니다.공자나 로자, 장자, 그리고 맑스나 헤겔이나 칸드의 사상이 다 위대한것은 의심할바 없습니다. 고금중외 대현인, 대사상가,대철학가의 사상과 철학이 세상만물을 보는 우리의 눈을 튀워줄 수는 있어도 인생의 기본 심성의 각성을 대치할수는 없는것입니다. 명작이라 할때 작품에서 제시하려는 사상을 자기가 체득한 인간 심성의 보편적인 감수로 전환시켜 표현함으로써 읽는이로 하여금 감동을 받고 그 감동이 일생동안 가슴의 내부에서 번득이는 영원한 메아리로 남아 있게 합니다.즉 명작은 작자의 감수를 표현하였을 뿐만 아니라 독자의 감수를 새롭게 살려내는 매력이 있습니다.       둘째 명작은 사람들에게 잠자고 있는 심층의식를 개우쳐 준다.인간심층의식이란 사람들에게 존재하는 타고난 가장 기본적인 인간성을 지칭한다. 이것은 지역성을 초월하여, 시간의 전후를 초월하여, 피부색이나 민족을 초월하여 장기적으로 인류에게 전달하는 하늘의 메시지나 다름이 없다.예하면 궤테의 ”파우스트”는 사람의 욕망이란 끝이 없으며 일단 그 희구가 실현되었던가 자기가 바라는 목적에 도달하면 그 즉시 파멸, 추락, 죽음을 가져오게 된다는 영원한 추구의 힘을 실어다 줍니다.이점은 인간 실존의 기본이라고도 말할수 있거니와 이와같은 시공간을 초월한 심층의식의 각성은 작품의 예술감화력, 즉 작품의 매력과 정비례가 됩니다.   셋째 명작은 남다른 독특한 작품 형식과 수사법으로 읽는 이의 신경을 끌어 당기는 힘이 있습니다. 중국 근대소설의 초석을 쌓은 ”금병매(金甁梅)”는 역사이야기를 쓴 ”삼국연의”나, 영웅전기를 담은 ”수호전”이나. 판타지같은 ”서유기”와 달리 인정세태, 세상물정을 쓴 명작입니다.서문경이 갑부로 된 이야기로부터 그가 쇠락하는 과정을 통해 당시의 인정세태를 묘파하기 위하여 작자 란릉소소생(蘭陵笑笑生)은 그에 합당한 형식인 간결한 묘사(白描)법을 아주 능란하게 운용하였습니다. 로신은 ”중국소설사략”에서 ”금병매”를 두고 이렇게 평가했습니다. "작자는 당시 인정세태와 세상물정을 통달하였으며 손금보듯 환하게 잘 알고 있다. 작자가 형용한 것을 보면 혹은 류창하게, 혹은 우회적으로 혹은 노골적인 폭로로, 혹은 함축적인 풍자, 때로는 여러가지 수법을 겸용하여 서로 어울리어 변화무쌍하게 하는 등 정말 무릎을 칠 정도다.’금병매’작자의 간결한 묘사법에 관한 한 평론가의 말을 들어보자,"한 인믈을 쓸때 그 말투로부터 시종 일관하게 그 인물의 기본 성격을 그려냈는바 간결한 묘사 몇 마디로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이라는 것을 명확하게 전달하여 주었다" 그 어떤 형식을 취했든, 그 어떤 수법을 취했던 작품의 표달방식과 전달형태에서 독특한 개성을 구비했을 때 독자들의 취미를 불러 일으킬수 있는 틀, 즉 형식이 있으며 이 형식이야 말로 읽은 사람의 가슴에 깊은 인상을 심어줄수 있습니다. 김혁: 네 때문에 비록 손쉽게 접하는 명작이라 해도 읽는자의 시각에 따라 틀릴수도 있겠지요. 앞서 말씀드렸지만 사실 “걸리버 려행기”는 그 극적인 스토리와 뛰여난 판타지성격으로 하여 어린 독자들에게도 매우 많이 읽혀지고 있지만 사실 “걸리버 려행기”는 뛰여난 정치소설, 걸출한 풍자소설로서 젊은 층들이 접하기에 적절하지 않은 외설적인 대목도 들어 있어 베스트라는 쉬운 범주로는 묶을수 없습니다. “돈키호테” 역시 어눌한자의 코믹한 무용담으로 보이겠지만 상징성이 매우 높은 작품이지요. 또 서구 최초의 근대소설이라는데서 그 작품이 가지는 가치가 있습니다. 그래서 명작에 대한 번안, 개작작업은 그 추종자들에 의해 지칠줄 모르고 끊임없이 진행되고있는것이지요. 그중 중국, 한국 일본에서의 끊임없이 번안되고 드팀없는 사랑을 받는 “삼국지”를 일례로 들수 있겠지요. 한춘: 아시다싶이 중국, 한국, 일본은 이른바 한자문화권, 유교문화권으로서 고대로부터 상호간 문화교류가 활발하였습니다. 일찍 당나라시기 일본과 신라는 많은 유학생을 중국 장안으로 파견하였으며 당나라는 빈공과를 설치하여 이와같은 외국 유학생의 과거길을 열어주기까지 하였다. 뿐만 아니라 불법을 구하기 위하여 일본과 신라에서 많은 승려를 중국으로 파견하였으니 그중 일본 승려 원인(圓仁)의 ”입당구법순례행기(入唐求法巡禮行記)”에 취록한 장보고의 적산법화원과 신라방 사적이 유명합니다.즉 활발한 문화교류를 통해 중국의 많은 문화가 일본과 한국으로 전해졌다. 한국의 상황을 살펴볼때 조선조 초기 선조(1568――1608제위)가 ”삼국지연의”를 읽었습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당시 명나라를 다니는 사절단들이 중국의 소설을 행장에 몰래 넣어 들여 왔고 가장 처음 정음으로 소설을 지은 허균(1569――1618)의 중국문학소개를 보면 ”삼국지연의”,”수호전”, ”금병매”, ”서유기”등 중국의 명작이 이미 한국에 전파되였습니다.원래 유일하게 문화교류를 진행한 국가가 중국이며 이로서 중국문화에 경사되어 있는 상황에서 명나라 시기 아주 발달한 중국의 소설문학의 전래와 더불어 한국의 문인들이 중국 소설에 경도되는것은 가히 리해할만한 일입니다.이때로부터 ”삼국지연의”에 관한 내용이 한국 문인들에 의해 여러가지 형태로 재탕되었는데 시조에도 자주 나오고 서울 잡가에도 나오며 유명하기는 판소리 열두마당의 한 마당으로 자리를 굳혀 한국인들에게는 아주 익숙한 역사이야기로 남게 되였다.이 사실은 역사적으로 중화사상에 물젖은 한국인들의 사유방식과도 갈라 놓을수 없습니다.   현대에 이르러 인쇄문화의 발달과 다매체의 활약에 힘입어 삼국지를 한국어로 옮기는 작업에 열중하고 기타 여러 가지 형태의 삼국지 파생물이 소비자들의 구미를 한껏 돋우어 주고 있는 상황입니다.  번역의 경우, 한국에서는 일찍 월탄 박종화의 번역이 있었으며 이어 리문열, 황석영의 번역서와 중국 조선족 리동혁의 번역서가 줄줄 이어 나오면서 한국독서계의 장안화제로 되기까지 했습니다. 이것은 삼국연의란 명작 자체의 브랜드 자원을 빌린것도 있겠지만 전투장면의 세밀한 묘사, 대규모 전쟁의 용병술, 일대 일 교전의 충격,명책사, 명재상, 명장군 등 각 부동한 력사인물의 개성적인 성격과 그들의 운명 등이 가슴에 구멍이 나도록 사람을 사로잡는 힘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한국으로 놓고 볼때 문화적으로 수용성이 높고 적극적으로 외국 문화를 접수하는 전통이 있으며 한국의 고전 군담소설에서 삼국지와 같이 인기를 끌수 있는 작품이 없는 상태에서 이미 익숙하고 또 접수 수용에 거부감이 적은 중국의 삼국연의를 재탕에 재탕을 거듭하는 것은 선진문화에 대한 력동적인 문화력의 체현이라고 볼수 있습니다. 김혁: 력동적인 문화력의 체현이라는 그 정평이 맞다고 생각됩니다. 지금 방영되고있는 “신판 수호전”에 앞서 “신삼국연의”가 새로운 버전의 드라마가 만들어져 지금까지도 화제가 끊기지않고 있지요. 총 95회라는 방대한 용량에 중국 최고의 연기자 군단과 거대한 투자가 결합되어 화려하고도 거대한 영상미와 숨 가쁜 영웅들의 활약상을 그려냈습니다. 여기서 진정 명작이라는 그 웅숭깊은 문화력의 력동을 보아낼수 있었습니다. 한춘: 이 현상은 마치 오월단오가 중국에서 유래되였다고 하더라도 오월단오에 담은 문화내역이 완전히 한국화되었고 또한 극대화 되어 강릉단오제가 세계 무형유산으로 지정되여 유네스코에 기록된것과 같은 상황입니다. 이런 상황은 중국에서 전파된 유교도 한국의 종묘제레 및 종묘제례악이 세계 무형문화로 지정되고  불교가 중국에서 전파되었지만 한국 경주의 불국사와 석굴암이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는 등 여러 문화, 종교 령역에서도 잘 보여 주고 있습니다. 문화라는것은 류동하고 접목되고 파생하는 특징을 갖고 잇다. 어느 민족이나 어느 나라나 다 자체의 국한성과 제한성과 빈 공간이 있기 마련입니다. 이 때문에 타국이나 타민족의 우수한 문화를 접수, 수용, 개조, 활용하여 자체의 새로운 문화를 창조하는것이 인류뮨화발전의 법칙입니다. 김혁: 장예모의 영화작품들을 보면서 그런 느낌을 많이 받습니다. 영화 “영웅”에서 그 복색차림이나 미술배경이 일본의 유명감독 구로사와 아키라(黑 擇 明) 의  영화 “란(亂)”을 많이 닮았다고 비평가들이 꼬집었는데 면바로 보았지요. 그 복장설계는 다름아닌 구로사와의 손녀가 맡았던거지요. 그만큼 구로사와의 영화를 보며 자라난 세대로서 장예모는 그 우수한 영상미를 수용하고 활용해 냈던거지요. 사실 구로사와 자신도 영화 “란”의 모티브는 쉑스피어의 “리어 왕”에서 따오지 않았습니까. 장예모의 경우 그의 영화 “붉은 등롱 높이 걸렸네”는 류항(刘恒)의 명작 “복희(伏羲伏羲)”를 개편한것이고 그 영화가 다시 무극으로 개편된적 있습니다. 또 이딸리아의 작곡가 푸치니의 세계적인 오페라 “투란도트(图兰朵)”도 장예모에 의해 새롭게 태여난적 있습니다. 조선족의 저명한 테너 김영철도 극중에서 한 인물을 맡은걸로 알고있는데요. 이렇게 명작은 다양한 표현방식으로 독자들과 끊임없이 만나면서 그 과정에서 서로 수용하고 서로 보완하면서 새로운 명작으로 거듭나게 됩니다. 현대미감에 걸맞는 새로운 쟝르와 문체로 변화하여 새로운 독자와 새로운 방식으로 만나고 있는거지요. 새로운 방식으로의 변화를 말하자면 그중 명작의 게임, 애니메이션의 개편현상도 일례로 들수가 있겠습니다. 한춘: 명작의 게임, 애니메이션으로 변화된것은 커뮤니케이선이 고도로 발달하고 시장경제가 고도로 발달한 나라가 그 진원지라고 말할수 있습니다. 가령 “삼국지”를 놓고 볼때 일본에서 가장 먼저 이런 문화제품을 개발했다고 말할수 있습니다. 김혁: 네. 일본은 애니메이션의 왕국이란 호칭이 붙어 있는 나라이지요. 일본에서는 오래전 90년대초에 이미 “삼국지”를 애니메이션으로 만들었고 중국에서는 2009년전에야 삼국지를 애니메이션화 했는데 그것도 제작진을 살펴보니 일본의 애니메이션계의 베테랑들이 대거 포진해 있었습니다. 한춘: 네 그것이 이제는 또 게임으로 변화되였고 한국으로 건너와 한국에서 또 한차례의 고조를 이루었으며 지금 중국도 청소년들이 여기에 매몰되어 제 정신을 못차리고 있는 상황입니다. 내가 말하는 게임은 도박성 게임을 두고 하는 말인데 중국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도박에 빠지면 집을 저당잡히는것도 마다하지 않고 아편에 빠지면 안해까지 팔아 먹는다." 도박이 사람을 끄는 그 보이지 않는 마력이 얼마나 큰것인가를 알수 있습니다. 명작 게임같은것은 주로 청소년을 대상으로 하기 때문에 자제력이 약한 그들에 끼치는 피해는 너무너무 엄청나다고 할수 있습니다. 그것이 단순한 오락형 게임이라고 하더라도 인간이란 태여나면서 즐거움에 대한 본능적인 욕구가 있기 때문에 역시 한번 빨려 들어가면 다시 헤어나오기 어려운것은 번연한 일입니다. 그러나 이를 선호하고 이를 좋아하고 이를 반기는 청소년들이 많아 시장전경은 언제나 밝다. 이것이 명작 게임이 시들지 않는 원인입니다. 에니메이션은 게임과는 좀 다른 시각으로 접근하는것이 좋을것 같습니다. 내 손녀가 지금 1학년에 다니는데 학교 가기전까지는 장난감을 가지고 놀던데로부터 지금은 테레비나 컴퓨터앞에 나서겠다고 합니다. 글자도 한 2천자쯤은 읽을수 있는 형편이며 슈제트 발전변화도 가히 알수 있는 처지라 집에서 저녁 6시부터 8시까지 두시간을 할애하여 손녀에게 주었습니다. 물론 아동프로만 보는데 주로는 에미메이션을 봅니다. 일단 거기에 끌려 들어갔다하면 할매 할배의 말도 귀에 들리지 않고 밥도 테레비 앞에서 독상을 차리고 먹습니다.아주 생동하고 기이한 인물 이미지 디자인, 그리고 층격을 주는 등장인물(등장물)의 엑션동작, 맑고 밝은 화면설계 등은 어린이들의 호기심을 끄는데는 너무도 충족합니다.  나는 그것을 허락했습니다. 손녀의 생활이 너무도 단조롭기에 테레비나 컴퓨터를 통해서라도 견문을 넓히고 상상력을 키운다는 뜻에서 출발한것입니다. 그리고 드문 드문 그 내용을 물어보면 제접 청산류수로 이야기의 맥을 제대로 이어 엮는다.말하자면 에니메이션은 아동들의 지력개발에 일정한 도움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김혁: 하기에 애니메이션제작이 요즘 영상 제작자들이 호시탐탐 노리는 “미식”으로 되여 있지요. 요즘 어린이들이 즐겨보는 “꼬마양과 승냥이(喜羊羊 与灰太狼)”라는 애니메이션은 그 간단한 캐릭터에 권선징악의 낡은 제재를 되풀이함에도 불구하고 이미 7억여원의 수입흥행을 보았다고 합니다. 한춘: 그러나 여기에 역작용도 있을것입니다. 그 역작용은 적어도 두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에니메이션을 보면서 테레비같은 시청에 취미를 붙이면 앞으로 독서취미를 잃게 될 가능성이 너무 큽니다.  김혁: 저희 세대까지도 흑백텔레비 그리고 컴퓨터는 아예 상상하지도 못했던 문화환경을 지내왔습니다. 변변한 대중매체가 없어 어차피 도서에 친숙하게 되였지요. 그런 우리의 과거와 달리 다양한 매체에 로출된 요즘 세대가 독서에만 매여 있는다는게 사실 쉽지않은 일로 되여버렸습니다. 그만큼 인터넷, 모바일등 을 통한 다양하고 현대화한 기기들을 통해 새로운 독서방식이 새 세대들에게 널리 풍미되고있습니다. 한춘: 도서는 인류문명에서 지금까지 창조한 가장 최고, 최상의 문화자원입니다. 이 자원을 어떻게 잘 활용하는가 하는것은 한 사람의 성장에 너무도 중요합니다. 그런데 독서취미는 어렸을 때부터 양성하여야 하는것이지 다 큰 다음에 새로 독서습관을 키운다는것은 가능성이 별로 많지 못합니다. 다른 하나는 만약 문학을 지망한다던가 인문과학에 취미를 붙였다면 몰라도 대체로 일반 사람들에게 있어서 에니메이션 등을 통해 이미 명작의 내용을 거의 다 알게 되면 앞으로 명작 본문을 읽을 욕망이 사라지게 될것입니다.결과 그는 명작의 매력이 어떤것인지 모르게 됩니다. 명쟉을 읽고 읽지 않는것은 한 사람의 문화품위와 관계되는 일이라 생각됩니다. 하긴 컴퓨나 테레비가 없을 때도 명작을 제대로 읽은 사람은 많지 못합니다. 취미생활이 아주 다양해진 지금 작가지망생이 아니면 꼭 명작 원작을 읽어야 한다고 고집한다것 또한 고루한 생각일것입니다.  김혁: 네, 절주빠른 요즘의 현대생활에서 몇권 지어 수십권짜리 세계명작을 쌓아놓고 읽어 내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라고 봐야겠지요. 오래된 작품의 문장호흡이나 원작의 리듬이 요즘 사람들의 감각에 적절히 부응하기 어려운 등 여러가지 탓도 있을 것이구요. 때문에 명작을 번안함에서의 현대독자들의 새로워진 감수에 맞추기 위해 제작자들은 고심하고 있지요. 그 좋은 일레가 삼국지라고 생각합니다. 기존에도 중국 방송국들은 삼국지를 드라마로 만들어왔지만, 이번 작품은 완연 다른 뚜렷한 개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선 력사를 보는 시각이 달라졌습니다. “삼국지”의 재래의 판본들은 전체적으로 류비를 높이 평가하는 반면 조조를 폄하하는 경향을 보이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번 작품은 이러한 틀을 버리고, 삼국의 인물들을 상대적으로 공평하게 그려냈으며 “간웅” 조조를 시대의 영웅으로 발굴해 새롭게 력사의 무대에 올려세우고 있습니다. 우리가 “삼국지”하면 무조건 그 장면으로부터 시작되였던 “도원결의”는 이번 작품에서 아예 생략해 버렸습니다. 언어면에서도 기존의 작품들이 정통사극 형식을 따르면서 매우 “난해한” 용어들이 많았다면, 신작의 경우에는 신세대의 구미에 맞는 말들로 가득합니다. 또한 컴퓨터그래픽의 도움으로 웅장하고 스케일이 넘치는 화면이 가득합니다. 이러한 시도로 바쁜 절주에 지친 사람들 그리고 다양한 참조계의 “성찬”에 미뢰을 잃고 갈피를 잡지못하고 있는 독자군에게 명작의 진미를 다시금 환기시키고 있지요. 서점가에서 보니 “자동차족(汽车族)”들에게 명작의 일독을 권하는 코너가 있었습니다. “자동차족들의 CD명작”이라는 이름으로 세계명작 고전들을CD로 제작하여 시리즈로 나오고있었습니다.  정말로 좋은 시도라 볼수 있습니다. 명품차를 몰고 달리면서 “동으로 흐르는 강물/ 물거품이 영웅들의 시비성패 다 씻어가 버렸네”하고 “삼국지”를 경청하는 장면, 그야말로 현대인의 맛과 멋이 우러나는 쿨한 풍경이 아닌겠습니까! 아닌게 아니라 요즘의 젊은 세대들에 의해 온라인에서 절찬을 받으며 련재되고있는 “타임머신 삼국지”에서는 “보마”승용차를 몰고 동한말기로 돌입하는 장면이 있습니다. 여기서 명작의 패러디 현상에 대해서도 얘기해 볼가 합니다. 명작에 대한 패러디는 상업에 치우친 결과물일가요? 아니면 명작에 대한 비하일가요? 한춘:  명작의 페러디 현상을 단순한 모방작으로 국한시키는것이 아니라 넓게 파생작품으로 확대하여 볼때 할말이 많아집니다.  십수년 전 섬서성의 유명한 작가 가평오(贾平凹)가 장편소설 “페허의 도읍(廢都)”을 발표한 즉시 평단의 빛발같은 지탄을 받았다. “금병매”를  흉내냈다는 것입니다. 내가 읽어보아도 그 지탄이 과분한것은 아니라고 생각되였다. 왕씨 노친이 서문경에거 금병매를 접근할때 술상에서 맘을 떠는 열가지 수작을 서술한 “금병매”와 “수호전”의 그 단락을 그대로 옮겨 놓았습니다. 그러나 그 작품은 서안일대의 인정세태를 반영한 작품으로는 수작이 틀림이 없다. 곽경명의 성공작(成名作) “꿈속에 지는 꽃 그 얼마이던가”는 완전히 도작이라는 볍원결론까지 나온 작품입니다. 비록 그가 도작한것은 명작은 아니지만 그가 도작하여 새로 쓴 작품은 베스트가 되였다. 곽경명은 도작이라는것을 승인하면서도 공개사과서는 절대 쓰지 않겠다고 우겨 지금까지 나왔다. 이처럼 패러디 현상이 문단을 흐리는 일이 없지 않아 있습니다. 내가 말하려 하는것은 이런 패러디가 아니라 파생작, 이를테면 명작을 견본으로 한 다른 예술쟝르의 개작, 예하면, 후속작(續作), 개작(아동판, 축소판), 드라마, 영화, 회곡, 만화, 에니메이션, 음악, 미술작품 등을 두고 몇마디 할 말이 있습니다. 우선 말하고 싶은 것은 그 어떤 형식으로 파생되었던간 명작 원작은 이로서 괴멸됩니다는 점입니다. 즉 원작은 사라지고 개변된 작품만 살아있게 됩니다. 개변된 작품은 원작을 두번이나 껍질을 벗기는 작업을 한다. 첫째는 예술형식의 개변이요, 두번째는 시대적 개변입니다. 부동한 예술 형식은 부동한 예술 언어가 있기 때문에 아무리 원작에 충실한다하여도 원작 원유의 예술의 매력을 살려내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부동한 시대에 부동한 해석이 있기 때문에 원작의 원유 예술의 지향과 멋과 맛과 향기를 변형없이 살려낸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지금 중국에서 열기를 올리고 있는 드라마 “신편삼국연의”와 “신편수호전”, 그리고 얼마전에 구설이 많았던 “신편홍루몽”은 거대한 투자와 최고의 출연진, 최고의 연출 들이 동원되었지만 다른 사람은 모르겠는데 나는 보다가 그만 두었습니다.  원작에 물든 사람을 끌기에는 택부족한 것입니다. “삼국연의”나 “수호전”은 그나마 전쟁장면이나 격투 장면이 있어 스토리가 재미있기 때문에 일정하게 안구를 흡인할수 있지만 “홍루몽”은  안구를 끌수 있는 장면을 만들 그런 ‘감’이 별로 없어 드라마의 매력은 전혀 볼품없이 됩니다. 예하면 림대옥의  ‘명작’, “홍루몽”의 주제시라고 할수 있는 “꽃을 묻으며 읊은 시(葬花詩)” 는 림대옥의 애절한 심경을 가장 핍진하게 전달하는 대목입니다. 소설을 읽는다면 이 대목에서 천천히 음미하면서 림대옥의 심정을 가늠할 수 있지만 영화나 드라마는 일차적인 시청각 예술로서 시청자의 시간적 음미여지를 주지 못한다. 때문에 림대옥의 인물성격을 요해하는데 일정한 장애를 설치하게 됩니다. 이와같은 예는 얼마든지 있습니다. 그러나 명작은 명작대로 하나의 문화자원으로 존재하고 자원은 그것을 활용할때라야 충분히 자원의 가치를 발휘하게 됩니다. 문화자원의 가치는 시장가치와 예술가치가 있습니다. 한때 중국에서 “문화가 무대를 만들고 경제가 주역이 되어 출연한다”라는 말이 성행했고 각지의 관원들의 입말이 될 정도였다. 그때 나는 이 말에 어페가 있습니다고 생각했습니다. 문화도 하나의 산업이 되어 얼마든지 재부를 창출할수 있습니다는 일념이 선것입니다. 장이모오의 영화 한편의 입장권 요금이 2억원을 넘는것이 있습니다고 하니 그가 창조한 문화제품의 재부는 대단한것입니다. 명작의 여러가지 파생물은 문화자체가  문화자원을 개발하여 일정한 예술가치와 시장가치를 잘 결합시키려는 한 도경이라 말할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월극(越剧)  “홍루몽”은 원작의 묘미를 다 살려내지는 못했지만 월극으로서의 예술미는 충분히 표현하였으며 또한 월극이 중국의 국수(國粹)나 다름없기 때문에 문화자원을 잘 활용한 예라고 할수 있습니다. 그러나 완전히 시장을 겨누고 명작을 리용하는것은  예술의 ‘매력’이 아니라 호기심을 자극하는것일뿐입니다. 지금 많은 명작 파생물에 돈냄새가 너무 나는것이 현실이며 이 또한 어쩔수 없는 시장경제의 한 단면이라고 생각합니다. 김혁: 네 같은 생각입니다. 명작은 영화나 예술 작품에 무궁무진한 모티브를 제공해왔습니다. 원형 그대로가 아닌 쟝르와 국적, 세대간의 벽을 넘어 새롭게 재탄생된 명작들이 수두룩합니다. “서유기”의 경우를 보아도 그 패러디 작품들이 수두룩한데 그중 홍콩의 코믹영화의 선두주자 주성치가 패러디한 몇부는 이제 오승은판 서유기가 아닌 주성치판 서유기로 새로운 경전으로 자리매김되여있습니다. 영화에서 손오공은 시시때때 깝쳐대는 원숭이가 아니라 사랑의 순애보에 빠진 인물로, 당승은 진지한 승려가 아닌 수다스러운 아낙네로 나오고 대사도 지어 영어나 신조어로 란무하지만 그 기저에 깔려있는 사랑이라는 영원한 주제 그리고 제법 깔끔한 촬영화면, 공력들인 몬따쥬 구성으로 영화팬들의 환영을 받고있는것입니다. 그러데 문제는 시장경제에 매여 란발하는 차용이나 그 시장의 생리에 무릎꿇은 조야한 개편입니다. 어느 세계적인 피겨경기에서 명성에 대해 급급한 욕망으로 젊은 피겨선수가 히틀러의 복장을 하고 나치스의 행위를 패러디하다가 그자리에서 분노한 관중들과 심판들에 의해 쫓겨난 해프닝이 있었습니다. 또 고전의 굴지로 꼽히는 “홍루몽”도 “외설 홍루몽”이라는 아예 에로영화로 개편된 일례도 있습니다. 이렇게 그 패턴의 정신적 진수가 아닌 겉면에 대한 모방에만 그치고 지어 왜곡한다면 그건 오래가지 못할뿐더러 독자들의 타매를 받게 되는거지요. 이처럼 다양한 가치의 혼돈세계에서 자맥질하고있는 현대인들은 자신의 모랄(moral)을 찾고 패턴(样式)을 찾는 과정에 명작을 패러디 하고 적극 번안하면서 그 무진한 매력속에서 자신의 생활에서의 답안을 찾으려 합니다.    그래서 또 명작을 차용한 직장생활 지침서들도 수두룩히 쏟아져 나오고있지요. 한춘: 2003년 성군억(成君憶)이 “삼국연의로 본 경영관리(水煮三国)”란 책을 출판하여 한때 베스트가 되였습니다. 그는 중국 본토에서 가장 환영받는 경영류 도서작자라는것을 대충 알고 있었고 또 “삼국연의”와 경영을 어떻게 비빔했는가가 궁금하여 해적판 한 권을 구입해 보았다. 제법 재미있게 썼다. 다른 경영류 도서를 읽지 않아 비교할수 없은 탓인지 인상이 괜찮았다.매마르고 까다롭고 추상적인 경영학, 시장학, 관리학의 이론을 삼국지의 인물에 담긴 이야기와 묘하게 빈죽하여 유모어적이고 해학적으로 '정숙'하게 썼다. 새롭고 기이하고 생동하고 재미있는것을 추구하는 독자들의 독서구미에는 맞을것 같았다.   2005년 여름 마침 성군억이가 할빈에 와서 서명판매활동을 가지게 되였다.그날 서명판매가 거의 끝날 때쯤 내가 그 앞에 나타났습니다. 책 한권을 사든 나는 그에게 기자인데 몇마디 이야기를 나눌 생각이 있습니다니깐 시간이 없다면서 사절했습니다. 하긴 그는 중국 경영류 도서 1인자라는 평가를 받는 사람이니깐 지방신문의 기자쯤은 별로 눈에 차지 않았을것입니다. 이때 내가 한국의 출판계와 잘 아는 사이인데 이 책은 전에 이미 읽어보았고 시장전경이 괜찮아 보여 한국과 판권무역을 추진할 생각이 있습니다고 말했습니다. 이것이 내가 그를 찾아 본 주요 목적이기도 합니다. 그의 눈에 반짝 정기가 돌았더군요.메일주소와 전화번호를 받았습니다.후에 메일이 두세번 오고 갔는데 판권가격이 맞지 않아 판권 무역은 파탄 되였습니다. 그후에 도서시장을 보니 성군억의 '水煮'란 아이디를 빌려 후삼국이니 초한풍류니 춘추전국이니 잇달이 얼굴을 내밀었습니다. 복제품이 이처럼 줄지어 내려오는 현상은 력사를 설쩍 데쳐 낸것이 아니라 아예 폭삭 무르게 끓여 버리고 말게 된것입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나는 이런 도서는 독서구미나 당기게 할수 있지 직장생활에는 아무런 도움도 되지 못할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하긴 부동한 직장인에게 부동한 역할이 있겠지만 이런 직장 지침서에 취급한 그 비결, 책략, 수양,인격, 품위 등은 어느 한두권의 책을 보아 형성되는것이 아니라 현실상생활중에서 터득하고 갈고 닦아야 하는것입니다. 경영관리는 과학입니다. 현실의 시장경제는 성실, 신뢰를 앞세웠을 때라야 그것이 장기적인 운영이 가능합니다. 일차적이고 일시적인 수작을 쓰는 한탕치기로는 그 성공을 보장받지 못할것입니다. 독서 취미가 았는 사람이라면 좀 문학적으로 다룬 책자를 선택해 재미로 읽고 유모감이나 해학담을 키우는것쯤은 바랄만 합니다. 전업 리론이 아닌 이야기식 이른바 '경영학'책은 실제 경영에 도움을 주지 못할것이라는게 나의 견해다.그래서 나는 경영, 관리 지침서는 이 한권으로 완전 졸업했습니다.    김혁: 요즘은 “시크릿(秘密)”이라는 지침서가 대세이군요. 인생을 뒤바꿀 마법 같은 비밀에 대해 탐구한다는 책인데 돈, 건강, 인간관계, 행복 등 인생의 모든 면에서 그 비밀을 활용하는 법을 가르치는 책, 한국에서도 중국에서도 여러가지 판본으로 나와 있더군요. 요즘 사람들에게는 이러한 지침서와 같은 논픽션(非虚构)서적들이 소설과 같은 픽션(非虚构)서적보다 더 잘읽히고 있습니다. 그래서 서점마다 지침서 전문코너가 따로 비치되여있는거지요. 한춘: 인생지침서는 이와같은 실리적인 지침서와 좀 다르다고 생각됩니다. 예를 들어 한때 베스터 1위에 올랐던 “누가 나의 치즈를 옮겼는가(谁动了我的奶酪)”는  인생의 생존 본질은 부단한 추구와 노력과 애로를 극복하는 과정이라는 도리를 설파하고 있는데 이는 가히 실천에 옮길수 있는 인생지침서다. 인생 지침서는 심심하면 이책 저책 둘쳐 읽는다. 그중에서 나를 가장 끄는 인생지침서는 공자의 “론어”와 로자의 “도덕경”입니다.  남들은 이 책을 치국(治國)지침서로 읽는다는데 나는 수신(修身)지침서로 읽고 있습니다. 김혁: 네. 번안작품, 애니메이션, 지침서 여러가지 참조물을 통해 여러가지 문체로 명작을 다시 접해보는 그 감수의 농도와 줄기가 다릅니다. 요즘 저도 명작들을 다시한번 체계적으로 읽어보려고 독서계획을 다시 세우고있습니다. 바쁜 일정이지만 하루에 단 몇페지씩 읽더라도 오랜 시간을 잡고 죽- 다시 읽어내려가려 합니다. 사실 살면서 맞닥뜨린 불운한 운명때문에 희망이 저버려지는 순간순간에도 버릇처럼 되여버린 독서로 명작들을 다시금 읽으며 감동을 받고 아픔을 잊는 시간은 내 창작과 독서생애에 가장 값진 시간이라 할수 있습니다. 그만큼 문학도 시절 읽은 눈과 지금의 읽고있는 눈은 많이 달라졌습니다. 어제는 남이 읽으니 나도 읽는다는 식으로 멋모르고 닥치는 대로 읽었고 지어 학교와 선생들의 강요에 가까운 권장에 숙제하듯이 읽기까지 했던 명작들 을 다시 읽으면서 그 작품들의 갈피갈피에 면면에 녹아들어간 놀랄만한 현재성과 보편성을 나이들면서 하나씩 깨치는건 남다른 맛입니다. 10여년후, 지어 20여년후 다시 읽는 순간 나는 그전에 느꼈던 전혀다른 백설공주와 어린왕자와 달따냥과 에드몽 당떼스와 에스메랄다와 보바리와 그랑데와 쏘렐과 닥터 지바고를 만날수 있었습니다. 이전에는 흥미진진 스토리를 쫓아가며 읽었다면 지금은 그 스토리를 있게한 력사와 사회배경을 읽게 되고 이전에는 주인공의 용모를 살폈다면 지금은 주인공의 내심 심경을 살피며 읽게됩니다. 그리하여 진지한 얼굴,  성숙된 얼굴로 명작과 다시금 무릎을 맞대고 앉아 이전의 주인공사이의 해피엔딩에 대한 바람과 같은 설익은 질문이 아닌 전혀 다른 인생과 사랑과 종교와 민족에 관련된 대담을 건넬수 있었습니다. 이전에 “명작”을 읽었다면 지금은 “명저”를 읽게되지요. 여기서 작(作)은 지을 작이지만 저(著)는 두드러질 저로도 읽히기도 합니다. 말장난같지만 그저 이름난 작품에서 빼여나고 두드러진 작품으로 그 진미를 알고 읽게 된거지요. 명작에 대한 진수를 인제야 깨쳐 알고 읽기시작했다는 얘기가 됩니다. 그만큼 책을 많이 읽을수록 외려 생겨나는 지적 공허감, 그 공복의 꾸르럭대는 욕망의 소리 같은 허전한 부분을 달래주는 것이 바로 명작이 아닐가 생각해봅니다. 명작은 세계 문화권의 공동 문화자산이며 강물처럼 흘러온 인류문화의 원천 같은 것입니다. 인류의 유산가운데 그렇게 훌륭한 명작들이 우리 주위에 널려있다는 것은 사실 얼마나 복된 일인가요. 이러한 명작들이야말로 우리의 인성을 고매하게 만들고 정신적 생활을 풍요롭게 하여 삶의 조건을 바람직하게 꾸미는 자양분이 되겠지요. 읽지 않고서도 아는듯한 명작, 때로 아는체 했던 명작, 방대한 분량앞에서 읽을 기회를 놓친 명작, 과거 발달되지못한 참조계나 왜곡된 미디어로 잘못 접했던 명작. 그러나 삶을 충만하게 채우고 진정한 “나”를 찾고 싶은 모든 이에게 동서양의 명작들은 여전히 커다란 감동으로 서가의 한구석에서 크게 팔을 벌린채 우리들을 기다리고 있는지 모릅니다.  오늘 온라인으로라도 이렇게 좋은 말씀 듣게 되여, 아니 보게 되여 감사합니다. 수고많으셨습니다. 그리고 저도 빨리 컴퓨터와 머리속에 시스템을 새로 깔도록 하지요. 한춘: 감사합니다. 새로운 시스템을 깔고 새로운 이야기를 나누도록 합시다. 안녕히.     "도라지" 2011년 2월호              
3    그 인물 그 시대와 만나는 프리즘 댓글:  조회:2575  추천:12  2011-06-29
   . 대담 . 그 인물 그 시대와 만나는 프리즘 - 조선족문단의 인물전기문학에 대해 진맥해 본다   대담자: 김혁/리혜선     김 혁 - 룡정에서 출생 연변작가협회 리사, 소설분과 주임, 연변일보 "종합신문" 편집부 주임 장편소설 “시인 윤동주”, “마마꽃, 응달에 피다”. “국자가에 서있는 그녀를 보았네”, 소설집 “천재 죽이기”. 장편실화 “천국의 꿈에는 색조가 없었다”, 위인전기 “주덕해의 이야기” 등 다부 연변작가협회“김학철문학상”, 연변문학“윤동주문학상”, “도라지”문학상, “장백산”문학상, 연변일보“해란강”문학상, 연변조선족 자치주정부 “진달래”문예상, 전국소수민족신문보도상. 한국재외동포재단 제1회 한민족 청년상  등 수차 수상 현재 홍색화가 한락연의 일대기를 다룬 평전을 련재중   리혜선- 연길시에서 출생. 1981년 연변대학 조문학부 졸업. “연변일보”사, “길림신문”사 기자, 편집부 부주임 력임. 연변작가협회 창작실 주임 중편소설집 “푸른잎은 떨어졌다”, 장편소설 “빨간 그림자”, 위인전기 “김학철의이야기”등 다부. “천지”문학상, 전국소수민족문학상, 연변조선족 자치주정부 “진달래”문예상 등 수상. 현재 인민음악가 정률성의 일대기를 다룬 평전을 집필중   김혁: 안녕하십니까? 선배님 리혜선: 네, 안녕하세요! 김혁: “정률성 평전은 마무리 돼 가는지요? 이 작품의 기획이 우리 문단 처음으로 전국중점지지작품으로 선정되면서 모두가 퍽 기대하고 있는데요. 리혜선: 네,“정률성 평전”은 아직도 한동안 집필해야 할것 같습니다. 우선 취재에 상당한 시간이 들었습니다. 정률성의 발자취를 따라 취재하고 자료를 구했지요. 그가 태여난 곳이 한국이다보니 한국 광주, 서울을 다니며 지인들을 찾아 취재하고 자료를 구했습니다. 중국은 상해, 남경, 서안, 연안, 태항산, 북경, 심양, 할빈 등지를 다니며 취재했습니다. 그의 가족 및 그의 동시대 지인들을 취재했답니다. 특히 그와 일을 함께 한 중국 일류의 음악가, 예술가, 그리고 그의 직접 상급이었던 중앙문화부 부장에 이르기까지 많은 분들을 취재했지요. 그이가 사망된지 30여년이 되다보니 일차적인 자료를 찾기가 상당히 어려웠습니다. 다행이 기성자료를 보완해줄수 있는 많은 일차적인 자료를 많이 찾을수 있어서 기쁩니다. 그리고 집필이지요. 정률성이 섭이, 신성해와 나란히 중국 100년 영웅모범인물에 선정된 그의 인생역정을 살펴보면서 그가 어찌하여 이런 평가를 받기에 이르렀는지에 대해 연구했습니다. 그는 어찌하여 한국 광주에서 태여나 중국 100년 3대음악가로 되었는지, 그의 인생의 기적이라 할만한 큰 그라프는 이미 그려져있습니다. 이를 글로 표현한다는것은 대단히 어려운 작업입니다. 그의 인생의 모든 대목에 그것을 안받침해줄만한 근거와 계기가 있어야 하거든요. 그것은 정률성의 업적에 대한 단순한 찬양이 아닌 그의 인간적인 성격의 비약에 대한 증명이 되는거지요. 즉 그가 걸어온 마음의 려정을 그린다는것은 쉬운 일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리하여 진전이 마음과 같이 빨리 진행되지는 못하는군요.   하지만 열심히 노력하고있습니다. 김혁씨도 화가 한락연 평전을 집필하고있는것으로 알고있는데요. 김혁: 네. 일년여의 준비작업을 거쳐 올해부터 “예술세계”지에 련재중입니다. 나 자신이 룡정에서 태여난 문인으로서 고향의 위인에 대한 경모감을 안고 절박한 마음으로 일단 착수 했습니다. “중국의 피카소”로 지칭되는 저명한 화가이자 중국전역과 지어 유럽지역까지 아우른 사회활동가이며 또 국공통일전선사업에도 기여한 소장(少將)이자 비단의 길을 넘나든 고고학자이기도 한 그의 거대한 발자취를 내 작은 붓으로는 다루기가 내심 어렵네요. 련재를 하면서 계속 탁마를 하고있는데 아직도 여러 곳의 현지답사를 더 보완해야 하고 신고를 많이 치러야할 것 같습니다. 리혜선: 우리 문단에서 인물전기가각광받는풍토가일고있군요. 김혁: 네, 그렇습니다. 독특한 매력을 가진 이 쟝르에 대해 조선족 작가들도 주목을 돌리기 시작했고 따라서 우리문단에서도 뒤미처 인물전기서들의 “봇물”이 터진듯 합니다. 시대와 제반 분야에 굵직한 획을 그은 이들의 깊은 사상과 력동적인 몸짓을 남긴 걸물들의 인물전기가 문단과 출판계에서 인기를 누리고있는 요즘의 추세입니다. 이 현상에 대해 일전에 신문기사로 다룬적 있습니다. 그중 수작(秀作)들을 몇편 추려 대략 꼽아보았습니다.  연변대 김호웅 교수와 김학철옹의 자제분인 김해양의 공저로 된 “김학철 평전”이 나왔습니다. 책은 한국의 최대 포털 사이트인 네이버에 의해 “오늘의 책”으로 선정되기도 했습니다. 연변조선족자치주 초창기지도자의 한분인 “조룡호 전기” 도 나왔습니다. 안룡정의 집필로 된 전기는 조룡호의 항미원조시기로부터 자치주창립, 문화대혁명, 개혁개방시기에 이르기까지의 파란많은 려정을 비교적 완정하게 기록하여 연변조선족자치주 발전력사를 료해하고 연구하는데 있어서 중요한 사료적 가치가 있다는 평판을 받고있습니다. 김수영 저로 된 장편인물전기 “중한우호의 전기인물 한성호” 도 나왔습니다. 40만자에 달하는 작품은 중한수교의 물꼬를 트는데 기여한 한 애국화교의 노력을 진실하고도 감동적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연변대학 전 총장 림만호 평전도 발간됐습니다. “이 세상 사람들 모두 형제여라”라는 부제로 역시 김호웅 교수가 집필한 평전에서는 연변대학교 창시자의 한 사람으로 대학발전의 기틀을 마련한 한 교육자의 삶이 파노라마로 펼쳐집니다. 자치주 부주장을 지냈던 최채에 대한 인물전기 “불멸의 영령”도 조한문으로 출간되였고 오장숙 평전 “내를 건너 고개 넘어”도 나왔습니다. 일전 안타깝게 타계하신 류연산 작가님의 작품들이지요. 앞선 이들의 발자취를 더듬어 그들이 이루어낸 업적에 대해 방대한 자료를 통해 재구성하고 기술하면서 문학적 감동과 학술적 객관성을 함께 지닌 묵직한 분량의 인물전기들은 근년래 침체화, 단일화 경향을 보이던 우리 문단에 새로운 활력소를 주입해 주고 있습니다. 리혜선: 네. 전기와 자서전, 회고록의 출판 역시 증가세를 보이고 있지요. 이는 우리 문학이 력사와 문학의 접목을 통해 새로운 시기 민족력사를 조명, 표현하는것으로 한걸음 성숙한 표현이라고 생각합니다.   김혁: 우리 문단과 출판계에서의 “바람직한 흐름”이라 생각됩니다. 혹자는 “력사 자체가 인물사다”라고 단언합니다. 한 인물의 생애를 면밀히 추적해 그 시대와 사회를 조망해 보는데 인물전기의 특징이 있습니다. 남다른 삶을 살았던 인물들을 통해 자아를 확립하게 하고 다른 형태의 예술에 소재를 제공한다는 점” 등으로 볼 때 평전이 가진 가치를 무시할수 없는거지요. 인물의 삶에는 드라마가 있습니다. 피와 땀이 슴배여 있고 숨결이 살아있는 인생의 면면은 지나간 시대를 오롯이 복원해 냅니다. 인물사가 그 자체로 력사인 리유입니다. “한 인물의 삶을 리해하는것만큼 그 리론과 시대를 잘 받아들이는 방법은 없을것”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변혁기의 거대한 소용돌이속에서 독자들은  불황과 불안한 상황속에 믿고 따를만한 “롤 모델”을 책을 통해 찾아나서고 있는거지요. 우리는 삶의 굽이굽이에서 당착하게 되는 방황 혹은 고난앞에서 당혹감을 품고 앞서 떠났던 이들의 발자국을 더듬거리게 마련이지요. 급변하는 요즘 세상에서 나아갈 길이 보이지 않을때 올곧게 주어진 길을 걸어나간 이들의 삶을 더듬는것, 이것이 바로 독자들이 평전을 찾는 리유가 아닐가 봅니다. 실제로 격동의 력사를 치렬하게 살아낸 사람들의 이야기를 통해 어려운 시기를 헤쳐나갈 방법을 찾으려 하는 거지요. 리혜선: 평전 출간이 증가하는것은 우리의 출판 시장의 다양화와 독서 수준이 높아졌다는 방증으로 볼수도 있겠지요. 김혁: 네 하지만 사실 저희는 어려서 인물전기를 읽을수 없는 동년을 지냈습니다. 어쩌구려 제가 처음 읽은 인물전이란 비판용으로 된 책자 “공가점의 둘째 주구- 맹자”였습니다. 그리고 상앙의 이야기”와 같은것도 있었구요. 련환화로 된 “베쮼의 이야기”가 그나마 인상적이였습니다. 그후 비교적 온정한평전을읽은건꾸바의혁명가체게바라의 평전이 처음이였습니다. 의대를 나왔지만 청진기가 아닌 총을 들고 남미, 아프리카 등 세계를 돌며 무장 혁명 봉기에 헌신하면서 불꽃처럼 살다간 그의 평전을 작가출판사에서 출판한 화전(畵傳)으로 읽었습니다. 읽고나서 붉은 별이 박힌 베레모를 쓰고서 먼 곳을 응시하는 체게바라의 모습이 내내 가슴에 남아있었습니다. 이젠 하나의 아이콘으로 신화로 된 그의 삶을 읽으면서 처음으로 평전이라는 쟝르가 주는 매력에 흠뻑 빠졌더랫습니다. 그후로 우리 문단에는 왜 인물전기가 없을가 하는 아쉬움을 머금었었지요. 사실 우리문단에서도 90년대에 인물전기라는 쟝르에서 시도를 보였습니다. 김운룡의 “김구평전”이나 김송죽의 “설한”이나 허영길, 임철, 리송덕 공저로 된 “항일영웅 김광식”등이 그 사례입니다.   리혜선: 네 그중에는 로익장을 과시하는 김영금선생님의 작품도 있지요. 비록 어느 한 개인에 대한 평전은 아니지만 중국 최고의 조선족과학자들에 대한 인물전을 출판해 우리들에게 깊은 감동과 가슴 뿌듯한 긍지감을 안겨주었습니다. 김혁: 하지만 그간 계획경제에서 시장경제로 넘으면서 경제, 상업분야에서 성공한 인물들에 대해 “추어올리기”, “자화자찬”식의 인물전들도 나와 독자들에게서 그다지 큰 관심을 받지 못했고 지어 외면당했던것도 사실입니다. 리혜선: 이 쟝르에서는 류연산선생이 선두주자로 달려왔다고 봐야겠지요. 우리 문단에서 류연산선생은 전기문학을 가장 먼저 쓰고 가장 많이 쓴 작가의 한사람입니다. 그에 의해 류자명평전, 심여추평전, 최채평전 등이 나왔고 모두 훌륭한 작품들입니다. 김혁: 네. 다년간 내용이 충실한 전기물들을 연줄로 량산해내여 독자들의 눈길을 끌고 출판계의 이슈를 빚었지요. 우리문단의 전기문학창작에서 많은 작가들과 함께 류연산작가는 중요한 일익을 담당했다고 봅니다. 류연산 작가는 인물연구의 지향으로서 하나의 좋은 본을 보이면서 시사점을 우리에게 던져주었습니다. 리혜선: 류연산선생은 원시자료를 얻기 위해 두발로 뛰여서 글을 쓰는 작가입니다. 그는 상기 작품들을 쓰기 위해 한국과 중국의 수많은 곳을 답사했습니다. 인물전기는 력사배경을 떠날 수 없습니다. 각 시기 민족력사에 대한 투철한 연구를 했고 그속에서 력사의 락인이 찍힌 력사인물을 발굴했고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새로운 력사를 발굴했습니다. 때문에 그가 쓴 평전들은 하나의 력사서이고 인물의 마음의 려정의 기록입니다. 그는 인물전기문학집필에 있어 우리 민족사 보존의 차원에서 사명감을 가지고 마음으로 글을 썼습니다. 때문에 그의 전기를 읽노라면 저도몰래 가슴에 뜨거운 피가 끓고있음을 느끼게 됩니다   김혁: 우리 민족사 보존의 차원에서 사명감을 가지고 마음으로 글을 쓴다는 말이 참 가슴에 와 닿습니다. 제가 아동작품도 두루쓰면서 아이들과 나눈 이야기에서 알게된 사실인데, 우리 민족의 수령 주덕해를 알지 못하는 아이들이 적지 않았습니다. 이에 커다란 충격을 받았습니다. 집집마다 위인전 같은 책자들을 두루 갖추고있지만 거개가 해외인물판이나 고대인물판이고 우리의 근현대사, 그리고 우리 민족의 쟁쟁한 인물들이 바로 조명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지요. 그래서 우리 아이들은 손오공이나 해리포터는 알지만 주덕해, 정률성을 모르고 있는거지요. 이는 물론 작품의 공리성을 쫓아가며 이러한 훌륭한 쟝르를 홀대한 우리 작가들의 잘못도 크다고 봅니다. 제가 장편 “시인 윤동주”를 끝내기 바쁘게 서둘러 청소년용 위인전기 “주덕해의 이야기”를 집필하게 된것도 이러한 리유에서 입니다. 여기서 어린이용 인물전기도 주목해야 할 화제가 제기됩니다. 선배님도 김학철의 일대기를 다룬 어린이용 전기물을 출간한바 있지요? 리혜선: 네. 한국 웅진주니어 출판으로 나왔습니다. “김학철 이야기”는 “자유찾아 만리길”이라는 부제가 붙은 청소년용 전기물입니다. 원산에서 태여난 철부지 소년이 조선의용군 분대장으로 성장하고 중국조선족 문단을 대표하는 최고의 작가로 눈감을때까지의 파란만장한 삶을 극력 아이들의 눈에 맞추어 그려냈습니다. 광주학생운동, 조선의용군 창설, 중일전쟁과 문화대혁명 등 파란많은 력사의 소용돌이속에서 자유를 억누르는 그 어떤 권력과 불의에도 굴복하지 않은 인간 승리의 신화를 보여주려 했습니다. 김혁: “김학철 이야기”는 윤정석아동문학상도수상했지요. 의용군 활동, 문화대혁명과 같은 중대한 력사사건들을 아이들의 눈높이에 맞추어 알리고 생생하게 보여준 전기물 저도 잘 읽었습니다. 아이들의 미래를 설계하는데 위인전만큼 효과적인것도 없다는 교원과 작가들과 부모들의 믿음은 변함이 없습니다. 우리 문단에서 우리 민족사와 민족의 위인을 다룬 인물전기가 거의 전무하다는 상황, 이면에 책임감을 가지고 필봉을 돌려여함을 환기시키고 싶습니다.  그러자면 무엇보다 21세기를 사는 오늘의 아이들에게 그 아이들만의 새로운 위인상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TV, 인터넷, MP3과 같이 현대화한 참조계가 다양한 요즘 아이들에게 위인전은 때로 단조롭고 지루해 보일 수도 있을겁니다. 필요한것은, 그들과 가장 근접한 인물상을 다양한 출판방식으로 만들어냄으로써 아이들이 위인전을 손에 들게 하는것이지요.  아이들에게 직관적이고 생동한만화 형식의 삽화 등을 적극 활용해야지요. 저는 “주덕해의 이야기”를 집필하면서 오랫동안 아이들을 위한 출판사업에 종사해온 한 화가와 손잡았는데 동심에 꼭 걸맞을 정교한 그 삽화들은 어른인 제가 봐도 흐뭇합니다. 리혜선: 저의 작품도 한국 홍익대학교에서 시각디자인을 전공한 화가 강소희가 삽화를 그렸는데 “금상첨화”라 할가요. 참 동심에 걸맞는 좋은 삽화였습니다.   김혁: 우리의 평전출판, 특히 조선족인물에 대한 평전은 여전히 걸음마 단계로 봐야할것입니다. 우리 작가들의 줄기찬 노력이 아직도 소요(所要)됩니다. 그러자면 작가들지간의 창작의취나 비결과같은것도 서로 많이 교류해야 할 것 같구요. 리혜선: 네, 근간 평전집필에 정력을 몰부으면서 느낀바인데요. 평전을 씀에 있어 가장 중요한것은 원시자료발굴이라고 생각합니다. 정률성 평전집필때문에 국내외의 많은 평전을 읽었습니다. 정률성과 관계되는 동시대 인물에 대한 평전도 많이 읽었지요. 그러다보니 이 책의 오류와 저 책의 오류도 발견하게 됩니다. 오류발생이 가장 큰 원인은 자료를 참고함에 있어 고증을 거치지 않고 베끼기를 하는것입니다. 한번 잘못 끼인 단추는 그 다음 단추도 잘못 끼이게 합니다. 원시자료발굴을 중시하지 않고 이 책에서 베끼고 저 책에서 베끼면 자칫 잘못 쓰여진 자료를 계속 인용하여 잘못된 평전을 쓰게 되는 오류를 범할수 있습니다. 특히는 인터넷자료들이 틀린 경우가 상당히 많습니다. 자료는 그 책의 자료를 인용하더라도 그것이 맞는지를 먼저 고증하고 인용하는게 좋을듯 합니다. 가장 좋기는 원시자료를 찾아 고증하는것이지요. 저는 이 점을 상당히 경계하고있습니다. 김혁: 동감입니다. 소설적 상상력과 구성력, 공인하는 필력만 갖췄다고 해서 모두 평전을 쓸수 있는것은 아니라고 봅니다. 발품을 팔아가는 철저한 취재는 두말할 필요도 없지요. 이미 공표(公表)된 문헌의 내용이나 제한된 범위의 사적 인터뷰를 근거로 삼고 섣뿌른 판단을 내리거나 이 책 저 책을 베껴서 짜깁기하는 식의 “책상머리 평전”은 결코 설득력을 얻을수 없게 됩니다. 오랜시간에 걸친 자료 조사와 많은 증언자들에 대한 인터뷰등을 바탕으로 때로는 현미경을 들이대듯 세세하고 구체적으로, 때로는 망원경으로 내다보듯 거대하게 다양한 앵글의 포착속에 그 인물을 조망해야 합니다. 리혜선: 정률성 평전을 집필하면서 한국과 중국에서 이미 나온 정률성 관련 자료들을 살펴보고 원시자료를 찾아 고증해보았는데 많은 오류를 발견하게 되였습니다. 가족의 증언도 고증을 거쳐보면 틀린것이 많습니다. 특수한 시대를 살아온 사람들이여서 그들 자신이 알고있는 생일도 틀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세월은 기억을 풍화, 산화시킵니다. 시간에 대한 기억에는 오차가 생기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다보면 그것을 뒷받침해주고 해석해주는 당시 력사배경도 틀리게 되지요. 김혁: 때문에 산더미처럼 무져있는 기록의 무질서함속에서 있는 자료를 나름대로 총괄하고 해석하고 되씹기를 거듭하는 장인의 작업을 이어나가야 할것입니다. 단 한치의 오차도 허용하지 않는 그 꼼꼼함과 성실함속에서 우리 인걸들의 삶이 제대로 그리고 더욱 립체적으로 두드러져 나올겁니다. 리혜선: 문제는 이러한 오차로 그 사건을 뒤받침해주는 인간관계, 계기도 틀리게 되는것입니다. 계기란 그 인물의 선택 및 성격을 좌우지하는 가장 중요한 대목이기때문에 이것이 틀리면 인물의 마음의 려정이 잘못 그려지게 되고 평전은 의미를 상실하게 되지요. 그러므로 평전은 사실일뿐더러 고증을 거친 사실을 통한 그 인물의 마음의 려정에 대한 기록, 성격에 대한 부각이라고 생각합니다. 김혁: 맞습니다. 한 인물의 내면에 육박해 그 정신세계를 정확히 그리고 빈틈없이 포착해내야 하지요. 년대기적으로 삶의 행적을 좇아만 가는것이 아니라 삶의 미묘하고 섬세한 결을 좇아가는것이지요. 그 인물의 열정적인 삶을 개인사와 시대사를 넘나들며 정확하게 다루되 그에 관한 감상적인 대목은 걷어내고 삶의 실체에 접근해야 합니다. 그만큼 한 인물의 진면목, 그 마음의 번지수를 제대로 파악하는 일은 십분 중요하다는 얘기가 되겠습니다. 그렇지 못하고 형식적고 필재를 믿고 겉멋만 피우다보면 그 화려한 이미지는 동영상으로 이어지지 못한 정지화면의 단면체로 남게 됩니다. 따라서 그 깊이도 결여되여 력동적인 령혼의 설계를 살핀 흔적은 볼수 없게 되지요. 이처럼 우리의 인물전기창작은 그 문제점도 드러내고 있습니다. 거개가 탄생- 성장- 고난- 성취- 죽음으로 이어지는 영웅신화의 서사를 그대로 차용하고 있습니다. 어디서 나서 어디서 자라고 어디서 죽는 지루하고 평면적인 일대기와 자료의 라렬로 그치곤 합니다. 영웅사관에 갇힌 학계의 좁은 틀에 스스로를 가두고 독자들을 얽매고 있지요. 인물연구의 외연을 확장하기 위해서 극복해야 할 문제입니다. 이제 평전이 출판의 인기종목으로 자리를 굳히고 어느정도 독자들의 인가를 받고있는 이상, 그 장르적 성격에 대한 고민이 필요합니다. 왜 평전을 쓰는지, 좋은 평전과 그렇지 못한 평전은 무엇인지?에 대해서 말입니다.  우리 문단에서의 평전쓰기는 아직까지는 글쓰기 형식에 대한 미개발, 그리고 인물에 대한 접근방식이 갖고 있는 서투룸때문에 아직도 한참 달려야할 것 같습니다. 리혜선: 평전을 집필함에 있어서 우리가 명심해야 할것이 또 하나 있습니다. 우리의 인물들이 한국등 다른 곳에서 다루었거나 다루게 되는 인물이 될 가능성이 큽니다. 그러나 인물전기를 쓰는 측면이 다르다는 점을 파악하는것이 명지하다고 생각합니다. 김혁: 네, 동감입니다. 시대의 변화에 따라 기존의 틀에서 보던 인물의 서로 다른 평가가 가능하지요. 뿐만 아니라 전자가 구애된 주관적인 중심의 서술에서 놓친 다른 부분을 후자가 더 많은 편폭을 할애해 발굴해 낼수도 있지요. 저는 윤동주의생애를처음으로소설화하면서송우혜작가님의“윤동주평전”을 거듭 읽었습니다. 시인의 생의 순간순간에 현미경을 들이댔는데 그 일거수 일투족을 묘사하는 세밀성은 가히 압권이라 할수있었습니다. 대상에 대한 장악력, 작자의 상상력과 내러티브, 묘사가 생생한 인물전의 진수를 보여준 평전이였습니다.  윤동주라는 인물연구의 결정체요, 평전문학의 진수라 할 만합니다. 그리고 부족하지만 저도 언감 윤동주평전을내보려기획하고있습니다. 소설을 쓰면서 픽션만으로 부족하다는 생각을 내내 가졌습니다. 윤동주를이민작가의류형으로정하고“외계에서 들여다 본 윤동주”가 아닌, “고향에서 내다본 윤동주”로서의 시각의 차이를 바꾸고 윤동주가오래동안생활해온룡정지역이라는이유구한곳의지역특색의문화풍토를덧입히려하고생각합니다. 지금 새로운 자료수집과 수십차의 답사를 마친 상태입니다. 명년 2012년이 윤동주탄생 95주기가 되는데 저의 창작 스케줄과 그 기념일에 맞추어 그때가서 꼭 내놓으려 합니다. 리혜선: 여러가지 쟝르와 문체로 우리 민족의 인물들을 다각적으로 조명하려는 그 시도가 참 좋습니다.   김혁: 여러 출판사들에서 평전시리즈를 기획하고 있고 저도 그 기획에 동참한적 있습니다. 모두다 어떻게 시리즈를 내놓을가 고민들이 만만치 않습니다. 그러면 선배님은 조선족인물에 대한 조명은 어떤 류형으로 전개돼야 한다고 생각하는지요? 리혜선: 기사년대천입부터 계산하더라도 중국조선족력사가 현재 140년가량 되는것만큼 각 단계 인물에 대한 평전이 기록되리라고 생각합니다. 중국조선족중에 신해혁명이 참가한 사람이 있고 북벌전쟁시기, 항일전쟁시기, 해방전쟁시기와 중화인민공화국 창건후 현재까지 우수한 인물들이 많습니다. 이렇게 단계별 조명이 필요할뿐더러 류형에 따른 조명이 필요합니다. 즉 우리에게는 우수한 항일투사들이 있는가 하면 우수한 예술인, 문화인들이 있으며 또한 우수한 과학자들도 있습니다. 김혁: 이렇게 방대한 인물들을 시대별, 류형별로 그려내자면 우리 작가들이 각고의 노력이 소요돼야 할테지요. 요즘 같이 문학의 가치보다는 그 환금성이 부풀려지는 세월에 바보천치의 우수운 이야기처럼 들릴지 모르지만 우선 작가의 사명감이 안받침돼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류연산작가는 “최채 평전”의 후기에서 이렇게 적고있습니다. “나 혼자만의 향수를 우리 모두 공유해야 한다는 민족적의무감과 시대적 사명감에 떠밀려 모든 계획을 뒤로 미루고 최채선생의 삶의 행적을 좇기로 결심했다.” 만약 사명감이 가미되지 않았다면 류연산작가처럼 그렇게 초부하적인 창작에 매진할수도 짧은 시간에 그렇게 많은 작품들을 량산해 낼수도 없었을겁니다. 그의 타계가 특히 안타까운것은 어쩌면 문학에서도 자기 령역을 공들여 지키는 이가 드문 시대가 되였다는 그 점때문입니다. 리혜선: 그렇지요. 바로 책임감입니다. 저 역시 우선 중국에서도 위인이지만 조선족으로 놓고 볼때에도 크나큰 자랑이고 존경하는 위인이기에 민족작가로서의 책임감으로 정률성의 집필에 착수하게 되였습니다. 중국조선족은 기타 여러민족과 함께 손에 손을 잡고 새중국의 창건에 마멸할수 없는 기여를 했습니다. 이에 대한 기록은 여러민족 문화력사에 대한 기록인 동시에 중국조선족의 민족정신에 대한 기록입니다. 이 위대한 력사에 대해 우리의 문학은 반드시 기억하고 기록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올해 2011년은 중국공산당 창건 90주년이고 신해혁명 100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년초에저는정부에“홍색세월에 대한 기록과 문화강주건설”이라는 제언을 드렸습니다. 광의적인 의미에서 말하면 어떠한 정당 또는 어느 한 차례 혁명 모두 사람의 력사입니다. 인간이 생존을 위해, 인간의 가치와 권리를 위해 그를 저애하는 모든 반동세력에 대해 항쟁한 력사이지요. 위대한 력사에 대한 기록은 우리 문학의 사명이며 이는 또한 우리 문학의 정품창출의 물질적 자원이기도 합니다. 김혁: 이 력사적인 기념일을 맞아 타성의 작가들의 반응과 움직임이 크다고 들었는데요. 리혜선: 현재 중국작가협회를 비롯해 전국의 기타 작가협회들은 중국공산당 창건 90주년, 신해혁명 100주년을 기념하는 활동을 통해 문학의 새로운 정신자원 및 물질자원을 찾아내고있습니다. 중국작가협회는 정강산 등에 대한 홍색취재답사활동을 조직했는데 이미 40명의 작가들이 중국작가협회에 중점작품지원을 신청한 상황입니다.    아시다싶이 주류문단에는 이미 장편소설 “장정”, “위만주국”, “해방전쟁”, 그리고 “항일전쟁”장편소설총서 등 거폭의 력사화면을 담은 대작들이 많이 나오고있습니다. 우리의 문학은 지극히 개인적인 생활을 통해 인생의 철리와 실존의 고뇌를 표현할수 있고 독자들에게 큰 충격을 줄수가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문학은 또한 인류의 생존에 거대한 충격과 변화를 주었던 위대한 력사에 대한 기록을 통해 정신적인 자원을 개발하고 대중독자들의 공명을 이끌어내기도 하지요.   김혁: 우리작가들도 움직여야 하지 않을가요? 지난 한해 젊은 지성인들과 함께 력사문화동호회를 뭇고 연변지역을 수십차 답사했는데 아시다싶이 “산마다 진달래요 촌마다 진달래”인 연변지역에도 어디에 내놓아도 손색이 없을 “홍색세월”의 발자취들이 많았습니다. 우리의 작가들에게 사실상 거대한 소재를 제공하고 있는거지요. 하지만 그 영광의 력사에 대해 미온(微溫)적인 우리의 작가들과 우리의 소재의 협소함이 안타깝습니다. 리혜선: 사실상 우리 연변작가협회 작가들중에도 거폭의 홍색력사화면을 작품에 담아내려 노력을 보이고있는 작가들이 있습니다. 항일투사이고 원로작가인 김학철에대한평전, 그리고 전기소설, 저항시인 윤동주에관한장편소설, 항일투사이고 우수한 지도자 “최채 전기”, 항일 투사 “심여추 평전”, 항일투사이고 과학자인 “류자명 평전” 등이 련재되고 있거나 국내외에서 출간됐습니다. 또 우리 작가들중에는 우리 민족 지사들의 발자취를 따라 답사취재를 한 작가들도 있습니다. 례를 들면 2만5천리장정에 참가한 30여명 조선족홍군중 유일하게 살아남아 중국인민해방군 포병창시인의 한명으로 된 “무정 전기”를 쓰기 위해 태항산, 연안 등을 취재한 작가가 있습니다. 또 2만5천리 장정에 참가하고 군위간부퇀 참모장으로 황하도강작전에서 대군의 도강을 엄호하고 희생된 양림에 대한 전기를 쓰기 위해 그 현장을 취재한 작가도 있습니다. 전한, 섭이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30년대 중국의 영화“황제”로 인정되였던 김염, 중국인민해방군 군가 작곡가 정률성 , 연변조선족자치주 초대 주장 주덕해 등에 대한 평전을 준비하는 작가들도 있습니다. 김혁: 이러한 력사의 대사변과 그속에서의 위대한 인들물의 삶을 들여다보는데는 그에 대한 애정 그리고 상당한 노력은 상당할듯 합니다. 한 사람의 령혼에 대한 깊이 있는 리해와 애정에서 읽는 이를 설득하는 감화력이 나옵니다. 또 이러한 애정으로 한사람 또 한사람의 평전이 쏟아져 나오게 될겁니다. 우리가 평전의 집필에서 우선시해야 할 가장 중요한 기준이란 바로 이런것이 아닐가요. 리혜선: 맞는 말씀입니다. 우리의 홍색력사에 작품을 통해 전국은 조선족을 이해하고 연변을 이해하고 조선족은 전국으로 나가고 세계로 나가게 됩니다. 이러한 작품활동은 한편으로는 중국조선족의 이미지를 창출해내게 되지요. 우리 문화의 무형의 자산이 우리 경제의 유형의 자산으로 전변되는 중요한 과정이 됩니다. 김혁: 참 좋은 제언입니다. 이 벅찬 작업을 위해 우리가 풀어나가야 할 과제들은 무엇일가요? 리혜선: 우선 홍색세월의 기억속으로 들어가 직접 취재하고 체험해야 합니다. 우리의 시대어로 말한다면 “실제에 접근하고 생활에 접근하고 대중에 접근한다”라는 것이지요. 력사는 시간적으로 우리와 점점 더 멀어져가고있어 사장될 가능성이 큽니다. 이런 절박감 때문에 책임감있는 작가들의 노력이 절실합니다. 김혁: 그렇지요. 전기문학작가들이면 저마다 느끼게 되는것이 바로 절박함 그것입니다. 한락연의 경우만 봐도 일찍 70년대에 주은래 총리마저 “한락연에 관한 책자가 왜 나오지 않고 있느냐. 참 애석하다”고 말한바 있지만 지금까지 완정한 전기와 평전이 나오지 않고 있는 실정입니다. 따라서 력사의 순간순간을 함께 했던 유명인물 그 증언자들이 세상떴거나 로쇠로 기억을 잃어가고 있습니다. 그 력사의 증인들을 인간문화재들을 우리는 기록하고 그 값진 사료들을 정리하여 남겨해야할 의무가 있습니다. 우리의 선인들이 걸어온 발자취를 외면하고 쌓아온 휘황한 공적에 대해 무시하고 그것이 안타깝게 사장된다면 그건 우리 후배들, 그리고 현역작가들로서는 “불효”요 부끄러움이 아닐가요? 리혜선: 그럼요. 우리의 빛나는 력사는 력사학가들에 의해 학술서로는 일부 반영되여왔지만 우리의 문학작품에는 적게, 또는 아직 반영되지 않은 부분이 많습니다. 동북항일련군의 피타는 투쟁은 이미 많이 알려져있습니다. 11개 군의 부대들에는 조선족장병들이 많이 활동했고 많은 군장, 사장들이 조선족지휘관들이였습니다.  또 예를 들면 북벌전쟁, 남창봉기, 광주봉기 등 대혁명시기의 큰 사변들에 조선족투사 200여명이 참가했고 대부분이 장열히 희생되습니다. 이 외에도 중국력사의 빛나는 한폐이지를 기록한 투사 양림, 무정, 리철부, 진광화, 석정, 김산, 주문빈, 예술가 한락연, 김염, 항일투사이고 초대주장인 주덕해 평전 등은 현재 일부는 집필에 착수했으나 대부분은 경제여건 때문에 집필되지 않은 상태입니다. 김혁: 정률성과 더불어 “백명영웅모범인물”에 선정된 “8녀투강”중의 조선족 인물 안순복과 리봉선도 아직도 그 빛나는 이름에 불구하고도 조명이 제대로 이루어지지않은 상태이지요.. 리혜선: 때문에 조건을 창조하여 작가들이 홍색세월의 기억속으로 들어갈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산발적이고 개인적인 취재도 중요하지만 개인이 모든 경제부담을 안고 취재하기에는 우리 작가들의 경제수준에 한계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조직적인 취재가 필요합니다. 김혁: 그렇지요. 창작자의 수고가 많이 드는 작업이지요. 한 인물의 생애 전체를 추적해야 하는만큼 상당한 시간과 발품 그리고 경제력이 필요합니다. 저의 경우를 봐도 한락연평전 집필을 위해 지난해 사비를 털어 한락연이 초기에 활동했던 할빈, 치치하르 등 동북지역을 답사했습니다. 하지만 저 같은 문인의 박봉으로는 전 중국을 무대로 활보한 그의 족적을 쫓아가기에는 정말로 힘에 부친 일이 아닐수 없었습니다. 현재의 인물전기라는 쟝르에 투신하는 작가에 대한 창작지원금이 전혀 없거나 있다해도 그 시스템이 인물전기가 활성화되지 못하는 원인 중 하나라고 봅니다.   또한 단기적이고 가시적인 창작성과에 편향되다보니 장시간을 소요하는 인물전기같은 쟝르는 지원을 기대하기 힘든거지요. 리혜선: 때문에 정품화를 실현하려면 반드시 작가의 노력, 중점작품에 대한 연변작가협회의 조직, 정부의 경제지원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또 중국조선족기업인들의 사명감과 지지가 따라준다면 더욱 가능한 것이지요. 저의 경우 “정률성  평전” 등은 우리 자치주 선전부의 지지와 자치주정부 재정적인 지원 및 중국작가협회 등의 지원을 받아 연안, 태항산 등을 비롯해 취재가 광범위하게 이루어졌고 집필진전이 비교적 순조롭습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작가들은 아무런 지원이 없는 상황에서 작업을 해나가고있습니다. 경제여건때문에 작가의 고생은 이루 말할것 없지만 작품의 질에도 큰 차질이 빚어집니다. 그리고 조선족독서인구의 한계 때문에 우리의 작품은 시장의 순환에 들어가지 못하며 따라서 경제적인 리익으로 환원되지 못하고있습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소수민족지구 특수성 문제로 인해 홍색문화정품창출은 취재 뿐 아니라 출판, 번역의 환절에서도 반드시 국가재정 및 민간경제의 지원과 배려가 필요합니다.   김혁: 면면을 살핀 참 좋은 제언이라고 생각됩니다. 그러면 우리 조선족문단에서 평전문학의 미래상은 어떻다고 생각하시는지? 리혜선: 현재 우리의 평전문학은 중요한 기초단계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의 문학은 금방 전기문학에 눈을 뜨기 시작했기 때문에 그 수량이 아주 적고 상당 부분의 인물은 첫 평전이 됩니다. 금방 기초를 쌓기 시작하는 단계이지요. 인물들과의 거리가 시간적으로 많이 멀어진 상태에서 작업을 하기때문에 많은 자료들이 사장돼있어 참으로 참다운 자세로 발굴에 림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한 인물에 대한 평가는 그 작가가 처한 단계의 한계만큼이나 한계를 가지고있습니다. 현재 개혁개방, 글로벌사회로 나가고있는 상황에서 우리가 발굴하는 인물들은 지금 단계 지금 작가들의 시각을 말해줍니다. 그러므로 새로운 력사단계에는 새로운 시각의 조명이 필요하며 새로운 자료들이 보충되게 되지요. 때문에 후세 작가들의 새로운 작업을 위해서라도 일단 자료수집에는 진지한 자세가 필요합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의 지금의 작업은 어떤 의미에서는 포전인옥(抛磚引玉)하는 작업이 될수도 있겠지요. 민족위인전기 집필작업은 또한 우리 민족의 사상적인 기반을 다져주는 일로서 후세들에게 우리의 자랑스러운 력사를 알려 민족적 긍지감을 가지게 하고 이들에게 민족문화보존의 계주봉을 넘겨주는 작업이기도 합니다. 조선족문단의 평전문학의 미래는 틀림없이 지금보다 훨씬 좋으리라고 생각합니다. 다만 그것은 현역작가들의 지금의 노력에 정비례한다는 것을 전제로 해야만 가능합니다고 생각합니다. 그 기초작업을 우리가 하고있기 때문이지요. 김혁: 맞습니다. 우리의 이한 작업은 아직 도정(道程)우에 있습니다. 력사의 뒤안길에 스러져간 많은 삶들은 아직도 더 많은 연구와 조명을 필요로 하고있습니다. 다시한번 짚어보지만 력사의 물줄기를 바꾼 개인의 삶을 통해 변화의 시대를 보아내고 넉넉한 삶을 예시하는 새로운 눈을 인물전기들은 갖게 합니다. 력사속에 박제화된 인물들을 피가 돌고 살냄새 나는 인간으로 다시 만날 수 있다는데 평전의 진정한 매력이 있습니다. 시대와 민족의 발전을 위해 기여한 인물과 그 력사에 대한 새로운 조명열은 분명 민족의 발전과 우리의 삶에 기(气)를 불어넣는 좋은 작업으로 될것입니다. 우리 작가들이 한계를 극복하고 실천속에서 노력을 경주한다면 지식과 정보가 담긴 향기나는 평전들을 우리는 언제쯤 읽을수 있을겁니다. 오늘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리혜선: 감사합니다!   “도라지” 2011년 1월호   ☞ 김혁 문학블로그: http://blog.naver.com/khk6699 ☜    
2    환(幻)을 말하다 댓글:  조회:3620  추천:45  2007-09-30
. 평론 . 환(幻)을 말하다                                        김 혁    《해리포터》와 《반지의 제왕》 이론의 여지없이 21세기는 “판타지의 세기”다. 현재진행형인 판타지물은 현학(玄學), 신화, 무협, 과학환상, 동화, 로맨스, 추리, 호러 등 요소를 용납해들여 읽을라치면 “현혹”될수밖에 없는 신종의 쟝르로 급부상하고있다. 그 정상에 오른 작품으로는 단연 «해리포터»와 «반지의 제왕»을 들수 있다. «해리포터»는 영국에서 출간된 이래 전세계 46개 언어로 번역돼 1억2천만권의 판매기록을 세웠다. 세계 각종 상을 휩쓸었고 영국 최고문학상인 위트브레드상에서 노벨문학상 수상작가인 셔머스 ․ 히니와 각축을 벌인 끝에 한표 차로 2위를 차지하기도 했다. 그 작가인 30대의 아기엄마 조앤 K ․ 롤링은 명가의 덤에 올라 권위지가 선정한 세계 저명인사 100명중 25위를 기록했고 녀왕으로부터 대영제국훈장을 수여받았다. «해리포터»의 열풍이 얼마나 대단했던지 어른용까지 출간됐을 정도다. 현재 6권까지 출간, 모두 7권으로 완결될 예정이다. «해리포터»시리즈를 읽는 즐거움중 하나는 소설속에 감추어진 주제들을 찾아내는것이다. 작자 롤링은 «해리포터»에서 보통 판타지문학에서 즐겨 다루는 단순한 선과 악의 구도를 초월하는 다양한 주제들을 탐색하고있다. 이 소설에서 두드러진 주제는 혼혈 마법사들에 대한 순수혈통 마법사의 편견이라는 주제이며 또 한가지 상류층 출신과 중류층 출신사이의 계층갈등이다. 그리고 이 세상에 절대적진리란 없다는것, 우리는 미지의 존재에 대해 근거없는 두려움을 갖고있다는 포스트모던적인 주제도 발견할수 있다.      남아프리카의 작가 J ․ R ․ R ․ 톨킨(1892 - 1973) 이 창작한 «반지의 제왕»도 출간된후부터 «기독교인이 성서를 읽지 않는것은 용서될수 있지만 소설의 독자들이 을 읽지 않는것은 용서될수 없는 일»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하고있다. 20세기를 마감하면서 각종 영미문학 걸작 25위, 20세기 최고의 소설 4위, «100권의 책»중 4위 등의 위치를 차지하기도 했다. 이미 전세계 10억명 이상의 독자가 «반지의 제왕»을 읽었다. 딱히 영미권에 살고있는 사람이 아니라도, 판타지애호가가 아니라도 누구나 한번쯤은 접할만한, 시대를 초월한 명저이다. 톨킨이 최초로 출판한 책은 «호빗»이라는 동화였다. 전설의 일부 요소들이 등장하는 «호빗»은 예상외로 독자들의 엄청난 반응을 끌어냈고 후편의 출판에 대한 문의가 비발쳤다. 이렇게 해서 씌여진 작품이 바로 «반지의 제왕»이다. 인간과 다양한 종족이 살고있는 중간계(Middle Earth)라는 가상의 세계를 창조하고 다양한 종족들의 언어와 풍습까지 만들어낸 «반지의 제왕»은 1954년에 처음 출간된후 12년만에 완성됐다. «반지의 제왕»은 판타지모험소설로서뿐만아니라 러브스토리로도 그리고 당대 사회에 대한 강력한 고발장으로도 읽을수 있다. 우선 이 판타지는 위험한 려정을 떠나기 위해 뭉친 인간과 마법사들 사이의 상호교류를 묘사하면서 위기의 시기에 일어나는 각기 다른 인종들 사이의 사랑과 애정 그리고 동정과 리해의 가능성을 탐색하고있다. 톨킨은 그 반지가 절대권력을 추구하는 인간 욕망의 상징이라고 암시한다. 사람들은 누구나 반지를 소유하려고 하는것이다. 그러나 반지를 찾으러 가는것이 아니라 반지를 버리러 간다는 사실은 대단히 상징적이다. 그것은 곧 절대권력은 갖는것보다 버리는것이 더 힘들다는것을 의미한다. 2004년 2월 29일, 76회 아카데미시상식에서 누구도 꿈꾸지 못했을 기적이 일어났다. «반지의 제왕 ․ 3»이 자그만치 11개 부문의 상을 독식하며 이날의 주인공이 됐는데, 특히 세인들의 주목을 끈것은 이 작품이 력사상 최초로 아카데미작품상을 거머쥔 판타지영화라는 점이였다. 전세계의 관객과 평론가들은 수십년 동안이나 가상의 괴물과 마법사, 난쟁이들을 스크린에서 목격하고도 판타지물의 진정한 가치를 이날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인정”하게 된것이다. 그후 «반지의 제왕»시리즈는 시사주간지 «타임»이 선정한 «영화사에서 가장 위대한 100대 영화»에 뽑혔다. 가족판타지물로 각색된 «해리포터»도 아직 완결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이미 세계적으로 관림인수 9억2610만명의 흥행성적을 거두었다. «해리포터»와 «반지의 제왕»은 여러가지로 다른 지점에 있는 작품이다. 하지만 세계적인 명성을 얻은 이 두 작품 모두가 판타지작품이라는 점에서 판타지라는 쟝르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을 환기시키고있다. 판타지란? 우리 작가와 독자들에게는 어딘가 낯설은 이른바 판타지란 영상, 상상을 뜻하는 그리스어로서 우리의 경험, 현실과는 다른 시공간에서 초자연적 존재들에 의해 펼쳐지는 초자연적인 사건을 다루는 일종의 가상소설(假想小說)과 같은 쟝르문학을 가리켜 말한다. 19세기말 E ․ 네즈비트는 마술적존재를 그린 아동문학을 발표하면서 이러한 주제들을 “일상의 마술”이라 하여 판타지라는 이름을 붙여 처음으로 명확한 정의를 내렸다. 오늘날에는 환상문학 가운데 괴기(怪奇)와 공포를 주제로 하지 않는 작품, 공상과학소설 가운데 과학리론에 구애받지 않는 자유로운 발상에 의한 작품, 현실과 전혀 다른 가공의 신화적세계를 무대로 영웅모험담을 그린 작품 등을 가리킨다.   영국에서는 판타지의 독자적인 뜻이 인정되여 문학의 최고 형식이라 불리는 동화와 함께 문학적으로 성숙하였고 프랑스에서는 18-19세기에 걸쳐 요정이야기가 류행하였지만 괴기소설, 암흑소설에 밀려 A ․ 생텍쥐페리의 «어린 왕자»(1943) 등을 제외하고는 공포이야기가 판타지로 불리는 례가 많았다. 따라서 판타지걸작은 잉글랜드 및 북유럽권에서 많이 나왔으며 우리가 잘 알고있는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1865), «오즈의 마법사»(1900) 등이 그 대표적인 작품이다. 20세기 후반에는 특히 근대의 아동용 공상이야기를 전승(傳承)문학으로부터 구별하는 쟝르로서 “판타지”를 쓰고있다. 한편 심리학용어로서 판타지는 현실에 있을수 없는 일을 떠올려 욕망의 충족을 꾀하는 마음의 움직임을 나타낸다. 최근 심층심리학, 정신분석학은 공상력의 작용이 무의식과 깊은 관계가 있음을 발견, 판타지문학과 심리학을 련관시킨 연구를 진행하고있다 중국은 판타지의 비조(鼻祖)? 중국에서는 판타지를 기환(奇幻)소설, 혹은 현환(玄幻)소설이라 부른다. 일찍 륙조(六朝)시대에 지괴소설(志怪小說)이라는 쟝르가 십분 풍미되였다. 오늘의 판타지를 꼭 닮은, 귀신, 선술(仙術), 괴담, 이문(异聞) 등의 내용으로 이루어진 소설인데 후날 당대(唐代)의 전기(傳奇)를 거쳐 명청(明淸)으로 그 맥을 이어간다. 대표적인 작품을 들어보면 «신이경(神异經)», «렬이전(列异传)», «사기 ․ 유협렬전(史记 ․ 游侠列传)», «수신기(搜神记)», «장한가전(长恨歌传)», «남가전(南柯传)》 등을 들수 있다.  모두가 익숙한 «서유기», «봉신연의», «료재지이» 등은 «신마소설(神魔)»이라는 명칭을 띠고있지만 두말할것없이 오늘날의 기환, 현환작품의 범주에 드는 작품들인것이다. 로신선생도 이러한 류의 작품을 쓴적이 있다. 바로 «고사신편(故事新编)»에 수록된 «미간척(眉间尺)»이다.      마찬가지로 우리말 고전도 환상을 떠나서는 존립하기 어렵다. «구운몽», «춘향전», «홍길동전», «박씨부인전»이 그 대표적인 례이다. «구운몽»은 조선 중기의 전형적인 량반사회의 리상을 반영한 본격적인 고전이다. 현실에서 꿈, 꿈에서 현실에로 돌아오는 구조를 바탕으로 한 소설은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환몽구조를 가진 작품들의 원형이 되고있다. 판소리를 텍스트로 한 «심청전»은 장님인 아버지를 위해 인당수에 몸을 던진 심청이가 룡궁에서 환생하고 아버지가 눈을 뜨는 등 환상적인 요소가 다분하다. «박씨부인전»에서는 못생겼다고 구박받던 박씨부인이 어느날 아름다운 녀인으로 변한후, 초인간적 힘으로 17세기에 조선을 침입한 청나라 장수를 물리쳐 나라를 구한다. 최초의 국문소설인 허균의 «홍길동전»은 조선 인조 때를 배경으로 적서(嫡庶)차별이라는 사회적 모순을 고발하고있는데 서자로 태여나 출세길이 막힌 홍길동은 도술을 부려 탐관오리를 응징하고, 억압받는 서민들의 한을 대변한다. 왜 판타지인가? 문학계에서뿐만아니라 영화계에서 2001년부터 작년까지 6년 련속 세계 박스오피스 1위 자리는 판타지영화가 독식(獨食)했다. 판타지영화만 나오면 북미 흥행 3억딸라는 기본으로 먹고들어가는 초대형 판타지시리즈도 바로 이 시기에 탄생했다. 그렇다면 대중들이 21세기 들어서 판타지의 매력에 갑자기 푹 빠져버린 근본적 리유는 뭘가? 독자가 판타지소설에 중독되는 리유는 답답하고 궁색하고 진부한 현실의 일상에서 벗어나 우리의 빈약한 상상력을 자극하는 원대한 스케일안에서 위대한 영웅을 만나고 랑만적인 로맨스를 대리경험하면서 한번쯤 상상해봄직한 환상의 세계를 누려보기 위함일것이다. 판타지소설의 주인공에 자신의 감정이 이입되면서 현실에서는 못이룰 꿈을 이루는 쾌거를 맛볼수 있게 해주는것이다. 현실의 삶이 어렵거나 마음대로 되지 않을 때 사람들은 종종 공상의 세계로 빠져든다. «해리포터»의 작가인 롤링은 남편 없이 어린 딸을 키우며 외롭고 힘든 나날을 보내던 음울하고 어두컴컴한 아파트에서 «해리포터»를 탄생시켰다. 이렇게 환상의 세계가 있어 현실에서 초라하고 비참한 나대신 행복하고 근사한 자기를 꿈꿀수 있었던것이다. 사실 여태껏 판타지물은 문학이나 영화쪽에서도 가장 경계가 모호한 쟝르로 치부되여왔다. 문학사에서 판타지문학은 오래동안 문학의 주류로부터 제외되여왔다. 부적절하고 받아들여질수 없는것으로 취급되여 눈에 띄지 않았으며 주변부에 위치해왔다. 환상문학이 문단에서 차지하는 주변적인 위치때문에 작가들은 판타지소설쓰기를 꺼려 했으며 비평가들 역시 그것이 비리성과 광기를 포용한다는 리유로 판타지문학을 늘 폄하해왔다. 톨킨의 «반지의 제왕»시리즈도 발간 애초에 숱한 비평가들로부터 “유치한 쓰레기작품”이라는 지금은 믿기지 않는 혹평을 받아왔다. 그 근본적인 리유는 19세기이후 팽배한 사실주의숭배 풍조때문이라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오래동안 독자와 관객과 평론가들의 작품평가의 척도는 리얼리즘쪽에만 머물러있었다. 판타지물이 독자로 하여금 현실의 책임과 사고를 회피하도록 유도하며 그들을 무지에 빠지게 한다는것이 비평계의 주장이다. 판타지물의 직선적 세계관이나 권선징악적 주제, 인종차별적요소 역시 집중 비평대상이였다. 그러나 21세기에 접어들면서 상황은 크게 바뀌였다. 판타지문학은 상상속의 환상적즐거움을 위해 현실세계를 버리지는 않았다. 전혀 단순하지 않으며 현실도피적이지도 않는것이다. 오늘의 판타지문학은 환상속으로의 려행을 통해 리얼리즘의 관습을 재점검하며 현대 독자들에게 맞는 새로운 리얼리티를 찾아내는 작업을 한다. 우리를 환상속으로 데리고 들어감으로써 판타지문학은 우리의 일상 리얼리티가 사실은 얼마나 환상적인가를 리해하도록 해준다. 오늘의 판타지문학은 언제나 자아와 타자, 픽션과 리얼리티, 또는 사회와 개인사이의 관계에 관심을 돌리고있다. 따라서 판타지물의 구조를 바라보는 시각이 예전과 크게 달라졌다. 전통적인 정의에 따르면 판타지물은 “마법, 초자연현상, 가상의 동물, 공상의 세계 등을 다룬 일련의 작품들”이라 할수 있다. 하지만 현실세계와 병존하는 가상의 세계를 다룬 판타지물들은 현실적이며 대중친화적이였다. 많은 독자, 관객과 평론가들은 21세기의 판타지물들이 현실의 도피도구가 아닌, 현실을 해명하는 도구로 그 역할이 변질됐음을 주목했다. 오히려 이전까지 현실과 전혀 관계없는 별천지였던 판타지의 세계가 점점 현실세계에 가까워지고있다는 점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였다. 덕분에 독자와 관객들은 비로소 마법과 상상의 동물 등 판타지물의 허무맹랑한 요소들을 아무런 거부감없이 받아들이게 됐다. 이런 경향은 평론가들이 목놓아 웨치던 “리얼리즘”이라는 요소를 판타지물이 자발적으로 흡수한 결과로 해석되기도 한다. 포스트모던시대에 리얼리티의 또 다른 측면인 환상령역을 탐색하는 판타지문학이 새로운 주요 소설쟝르로 부상하게 된것은 자연스러운 일이 아닐수 없다. 따라서 급기야 판타지열풍이 일기 시작한것이다. 우리들의 판타지 세계를 강타하는 판타지붐에도 무감각한 우리 문단에 얼굴 붉히며 나는 몇해전 늦깎이로나마 판타지 한편을 만들어보았다. «불의 제전»- 민족의 통일을 얼개로 영원한 주제인 로맨스와 한 예술가의 구도자적인 삶을 형상화한 작품은 나의 소심한 출산이였지만 이외로 반응이 괜찮았다.  먼저 나의 홈페이지며 블로그에 등재, 다시 문학지에 투고했는데 톱소설로 실리고 그해 «윤동주문학상» 본상을 수상했다. 첫 판타지를 만들면서 박래품에 대한 모방으로 그치지 않으려 애썼다. 북유럽권의 판타지 베스트와 중국 고전의 장점을 두루두루 따서 그리고 풍부한 유산인 우리의 민속풍토를 많이 차용해서 이 쟝르의 첫 습작에서 보이는 모자람의 틈새를 메우고 우리 특색의 판타지를 만들려 시도해보았다. 문학의 원형이라 말하는 체험을 토대로 작가는 작품세계를 형성해간다. 그러나 상상의 활동을 통해서 작가의 그 체험이 비로소 보편적인 확대와 효력의 힘을 얻을수 있다고 볼 때, 이러한 표현방식이야말로 과학적인 개념과 대응되는 이른바 문학의 궁극적인 단위가 아닐가. 우리 문단에서 가히 처음으로 되는 판타지물을 만들며 가지는 감흥은 깊었다. 판타지는 환상, 상상 등 력동적인 단어로 묶인 새로운 쟝르다. 판타지문학은 그만의 순발력으로 앞으로 살아남을뿐만아니라 순수문학이 남겨놓은 진공상태를 차지하며 번창해나갈것이라고 평론가들은 예견하고있다. 또한 고대 신화와 전설과 민담, 그리고 컴퓨터게임 모두의 영향을 받은 판타지문학은 과거와 현재, 그리고 픽션과 리얼리티를 효과적으로 뒤섞으며 현대사회와 리얼리티를 충실하게 반영해나갈것이다. «반지의 제왕»이나 «해리포터» 시리즈같은 탁월한 수준의 문학을 산출할수 있는 한, 판타지문학의 미래는 분명 밝고 고무적일것이다.     아직은 미개척지인 우리의 판타지의 모습은 어떠할지 아렴풋이 기대해본다. 문학과 예술 2007년 제4호  
1    바람부는 날이면 충무로로 가야한다 댓글:  조회:3301  추천:73  2007-06-29
바람부는 날이면 충무로로 가야한다 - 한국 영상물의 흥행과 중국영화계의 전망에 대한 문화적 시각 김  혁   한국영화의 산실- 충무로에서의 필자   한국의 영화나 드라마들을 중국의 음반가게들에서 찾아내는 것은 어렵지 않은 일이다. "친구(朋友)", "쉬리(生死諜變)", "공동경비구역", "엽기적인 그녀(我的野蠻女友)", "무사(武士)", "태극기 휘날리며(太極旗飄揚)"... 한국의 흥행영화들을 죄다 찾아 볼수 있다. 중국 변강의 오지인 연길에도 10여개 소의 음악, 영상소프트점(音響店)이 있는데 이 소프트점들마다에는 한국영화매장 전문코너가 설치돼 있다. 게다가 컴퓨터판매업체들마다 끼여서 팔고있는 것도 함께 넣어 추산해보면 50여 개도 넘는 곳에서 한국영상제품이 팔리고 있다는 얘기다. 이전에는 비디오로 간혹 한두 편의 한국영화가 카세트음악테이프 매장에서 선보이긴 했지만, 요즘 들어서는 VCD, DVD로 하루가 멀다하게 시장에 출시되고있다. 봇물처럼 쏟아져 나오고 어느 곳에서나 수시로 접할 수 있는 영상제품은 한국영화와 드라마의 붐을 일으키게 한다. 전형적인 사례로 "엽기적인 그녀"가 일으킨 열풍은 상상을 초월했다. 영화는 중국에서 한 해 동안에 해적판을 포함해 400만장 이상 팔린 것으로 추산된다. 그야말로 엽기적이다. "태극기 휘날린" 한국영화 한국영화는 근년 들어 장족(長足)의 발전을 해오고 있다. 고품격 고품질의 작품으로 아세아 내지 세계의 주목을 받고있고 현란한 영화권내에서 일석(一席)의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한국영화가 부흥의 조짐을 보인 것은 불과 6. 7년 사이의 일이다. 1999년 한국 감독 강제규는 영화에 한국영화계에서는 천문수자인 350만 딸라라는 거액을 투입하여 남북간첩전을 다룬 영화 “쉬리”를 만들었다. 운명을 건 영화는 매표와 비디오테프 판매에서 3500만 딸라를 수입하는 거대한 흥행을 보았다. 또한 한국유사이래 최고의 관객률을 기록해 1997년 할리우드의 “타이타닉호(泰坦尼克)”가 거둔 417만 명의 관객 수를 누르고 660만 명의 관객을 유치했다. 이는 한국영화가 처음으로 할리우드영화를 격파한 사례로 된다. 그후 리창동 감독이 “오아시스(綠洲)”로, 임권택 감독이 “취화선(醉畵仙)”으로, 김기덕 감독이 “빈방(空房間)”으로 칸영화제, 베니스영화제 등 국제영화제에서 연이어 수상하는 첩보를 올렸다. 한국감독들의 세계영화무대에서의 련이은 쾌거에 한국관객들은 환호했고 세계는 한국영화에 괄목의 눈길을 돌리기 시작했다. 년도별로 몇 부의 작품에 대한 관객들의 반응을 따져보면 전성기를 맞은 한국영화의 현황을 읽을 수 있다. “태극기 휘날리며(太極旗飄揚)” 2004년, 1150만명 “실미도(實尾島)” 2004년, 1110만명 “친구(朋友)” 2001년, 820만명 “공동경비구역(共同警備區域)” 2000년, 580만명 “쉬리(生死諜變)” 1999년, 620만명 그 기세는 "그야말로 하늘을 찌를 듯"하다. 한국영화산업은 이제는 년 수입5.8억 딸라의 규모를 이루고 있다. 이는 아세아에서 일본(19.3억 딸라)과 인도(8.2억 딸라) 다음으로 가는 위치이다. 우리는 한국의 인구가 일본의 3분의 1, 인도의 20분의 1밖에 안 됨을 알아둘 필요가 있다. 세계의 언론은 "한국의 영화와 TV극은 이미 아세아시장개척에 성공을 거두었고 한국오락산업에 큰 자산이 되였다"고 격찬하고 있다. 안방드라마의 위력 중국에서 한국 영상물(物)은 영화보다 드라마가 먼저 전파를 탔다. 중국에 처음 상륙한 한국드라마는 연변의 한 문화인의 연줄로 97년 들여온 "사랑이 뭐 길래"이다. CCTV에서 방영된 이 드라마는 중국TV프로그램 사상 3위의 높은 시청률을 기록했다. 이에 CCTV는 "목욕탕 집 남자들", "별은 내 가슴에(星夢奇緣)", "해바라기(妙手情天)"등도 수입해 연이어 방영했다. 각 지역방송들도 그에 가세했다. 잇달아 "안녕 내 사랑(泡沫靑春)", "청춘의 덫(靑春的陷穽)", "모델(靑春風雲)","초대(最愛是誰)"."도시남녀(都市男女)","이브의 모든 것(女主播故事)" 등 한국드라마들이 대거 등장, 중국 관중들에게 깊은 인상을 심어줬다. 그중 KBS TV드라마 "가을동화 (중국명- 藍色生死戀)"는 중국의 안방들을 강타하면서 히트를 했다. 이 드라마가 성공하면서 중국어로 번역된 소설 역시 대박을 터뜨려 이미 50만부 이상 팔렸다고 한다. 한국 드라마는 이젠 중국인들의 생활 곳곳에 보금자리를 틀고 있다. 중국에 드라마채널은 수도 없이 많은데 이런 방송국들이 근 8년째 한국 드라마를 계속 수입 방영하고 있다. 한국드라마들은 본국에서 끝나자마자 중국으로 건너온다. 불과 얼마 전 한국에서 방영된 드라마 "대장금(大長金)도 지금 한참 중국가정들의 브라운관을 달구고 있다. 드라마 한 편이 끝나면 재방송하고, 재방송이 끝나면 다른 채널로 옮겨서 재 재방송까지 한다. 따라서 매일 저녁 같은 시간대에 이 채널 저 채널에서 꼭 같은 드라마들이 동시에 방영되는 경우가 허다하다. 흥행요소 ABC 한국의 영화, 드라마의 이 같은 공전의 휘황(輝煌)에 대해 아래 몇 가지로 분석할 수 있다. 1, 정부차원에서 영화에 대해 관심의 눈길을 주고 있다. 한국영화진흥위원회는 한국영화에 대한 정책, 제도, 인재육성 등 방면에서 성원을 아끼지 않는다. 우선 한국정부는 민족보호주의 색채를 띈 “영화배액제(電映配額制)”를 실행했다. 모든 영화관들에서 해마다 146일은 국산영화를 상영해야 하며 전국의 TV방송도 일정한 비례의 국산영화를 방영해야 한다고 규정지었다. 민주화 진척과 더불어 영화심사제도에서 동였던 "수족"을 풀어놓았다. 심사제도의 원활함은 영화인들의 창작자유를 보장해 주고 있다. 따라서 창작에서 다원화가 나타나고 심각한 시대적 내용을 가지고 력사를 반성하는 영화들이 생산 되였다 지금도 한국정부는 외국영화를 포함한 매표수입중의 30프로를 떼 내여 국산영화의 지지에 돌리고 있다. 이에 한국영화계의 "대부" 임권택 감독은 “정부의 일련의 영화우대정책은 문화에 대한 보호일뿐더러 민족에 대한 애대로서 이런 작법은 한국의 전통을 영화라는 형식으로 세계에 알리게 했다”고 격찬하고 있다. 2, 그들만의 독특한 서사문법에 있다. 한국 영화, 드라마는 자신들의 창의력과 자체의 독특한 이미지로 아세아 관중들의 심금을 울려 준다. 한국의 영화인들은 작품마다에서 "한국 특유의 이미지"를 각인 하고자 한다. 반도문화의 특징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외형적인 포장은 미국과 일본의 것을 그대로 따라가는 듯 하지만 내형으로는 자신만의 정서적 조률을 잘 해나간다. 이들은 외국영화의 답습에 그치지 않고 동방인의 함축되고도 감칠맛 나는 정감과 격조를 어떻게 반영하는가 하는 것에 시종 머리를 써왔다. 바로 류행문화에 깊은 뜻을 담은 창의력, 특히 한민족의 자신감과 진취적인 심리를 잘 반영하고 있는 것이다. 일부 지식인들은 한국 드라마의 기본 바탕은 유교 정신이라고 말한다. 그들은“한국의 영화와 드라마가 동남아에서 큰 인기를 끄는 비결은 그 속에 동양적인 유교문화가 대단히 사실적으로 표현되고 있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3, 조화를 이룬 상업과 예술이 정신과 시각의 향연을 마련해 준다. 한국영화계에서 근 현대사의 굴곡 어린 시선으로 현실에 천착해 들어가는 영화들이 많이 나왔다. 흥행수입이 가장 높은 몇 부의 영화는 모두 남북문제에 관한 정치적 소재의 영화이다. 이 영화들은 모두 상업영화 모식(模式)으로 만들었는데 이로서 관중들로 하여금 영화관을 찾게 만들었다. 이런 영화들의 내용은 대중의 사상, 정감과 직접련계가 있는 문제를 다루었지만 영화의 창작모식은 모두 상업적인 틀을 빌려왔다. 관념상에서 한국의 영화인들과 관중들은 영화가 상업활동이 아니라 일종의 문화사업이라는 공감을 갖고 있다. 4, 할리우드의 운영방식을 적극 따라 배우고 있다. 오래동안 루적해 온 경험에서 한국의 영화인들은 배급과 홍보가 제작에 못지 않게 중요함을 보아내고 제작후의 공작에 투자를 아끼지 않고 있는데 이는 할리우드를 닮은꼴이다. "할리우드라는 황새를 쫓는 뱁새'라는 혹평도 있지만 그 답습의 과정에 한국영화는 자신들의 직성에 맞는 시장운영경험과 선진적인 기술수단을 소유하게 되였는데 이로서 한국 영화는 국내외시장에서 활개칠수 있었다. 5, 영화를 죽도록 사랑하는 팬들과 갈라놓을 수 없다. 한국에는 자질이 높고 민족자부심이 강한 관객들이 얼마든지 있다. 90년대 이후 2천여만 명의 관객들이 영화관에 흘러들어 국산영화를 관람했다. 한국인구의 반수이상이 자신들의 영화에 심취해 있다는 얘기가 된다. 한국에서 견학하고 돌아온 중국의 영화제작인들은 한국관객들의 높은 감상수준에 놀라움을 금치 못한다. 보통관중일지라도 전업인사들이 토론할 문제를 내들고 진지하게 담론하는 것이다. 이런 영화애호가들로 보면 그들이 그 누구보다 영화라는 이 쟝르를 애착하는데도 있지만 그 배후에는 일종의 애국적인 정서가 숨어 있는 것이다. 그들은 본토영화의 궐기를 한국문화, 내지 민족의 궐기로 자부하고 있다. 중국이 한국 영상물에 열광하는 리유 한국영화와 드라마는 중국사람들에게 청신한 느낌으로 다가왔고 청신한 나머지 이제는 화끈한 느낌까지 갖게 한다. 마치 한국특산의 불고기에 시원한 한국의 명 소주 "진로(眞露)"를 거나하게 마신 듯한 느낌이다. 중국에 한국영화가 소개된 것은 불과 몇년 전, 2000년 5월 북경영화대학 한국류학생회의 주도하에 한국영화 12편이 처음으로 상영됐다. 일주일간 열린 이 영화제는 중국 언론과 영화계의 큰 관심을 모았다. 중국 감독중의 선두주자 장예모(張藝謨)를 비롯해 중국관객들이 관람했고 한국영화에 놀라워하는 표정을 감추지 않았다. 이 영화제가 한국영화 붐을 일으키는 결정적인 계기가 됐다. 한국영화와 드라마의 중국 등지에서의 빅히트 원인을 분석해면- 우선, "한류"라는 거대한 선풍에 편승했기 때문이라는 시선을 깔고 있다. 언제인가부터 중국과 대만, 홍콩, 윁남, 몽골 등지에서 한국의 대중문화 선풍이 일고있는데 일각에서는 이를 "한류(韓流)"라 일컫는다. "한류"는 대중음악, 드라마, 영화에 이르기까지 현대 문화산업의 전 령역으로 확대되면서 "한국신드롬"을 일으키고 있다. 90년대 후반을 기점으로 하면 벌써 7∼8년째다. 전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한국 관련행사에 참가하고, 한국 관련 서적을 구입하고 한국패션을 선호하고 있다. 한국식 식사를 즐기고, 한국어를 공부하는 사람도 늘어나고 있다. 따라서 한국의 영화와 드라마는 그들의 둘도 없는 선택이다. 물론 "한류"의 공로에만 밀어붙일 수는 없지만 그것이 주춧돌로 크게 작용한 것은 부인할 수 없다. 다음, 한국의 영화와 드라마에 우리와 심정적 공감대를 가능하게 하는 문화적 류사성이 있기 때문이다. 중국사람들은 한국문화에서 생소하면서도 익숙한 느낌을 받는다. 한국의 영화와 드라마에서 중국인들은 이질감을 느끼지 못했고 외려 자신과 비슷한 기질을 발견했다. “한국 드라마는 인물 성격이나 가치관이 우리와 비슷해서 젊은이들은 물론 나이든 층에서도 인기 있다”고 모두들은 말한다. 한국영화를 좋아하는 또 다른 이유는 바로 이러한 "정서적 친밀감" 때문이다. 한국 드라마가 보여주는 현대생활에서 겪는 정신적 압력과 사소한 사건들은 자신들도 경험하고있는 일들이라 "동병상련"의 느낌을 준다. 하여 한국에서 건너온 "낯선 듯 하면서도 낯익은" 드라마를 발견하고 중국인들은 반가워 마지않는 것이다. 한국인의 생활방식은 서양의 영향을 크게 받았지만 한국의 영상작품들은 서양문화를 동양적으로 변형시켰기 때문에 동양정서를 가진 이들은 쉽게 접할 수 있었다. 서양 드라마와 달리 한국 드라마에 동양적 도덕률이 담겨있는 것도 중국인들이 쉽게 받아들이는 요소라 볼수 있다. 다음, 한국의 영화와 드라마는 시대로부터 소외됐던 시청자들이라는 "틈새시장"을 파고든 것이다. 오래동안 변형되고 폐쇄적인 문화환경에서 중국인에게는 다양한 문화를 접할 기회가 상대적으로 적었다. 실제로 중국의 중, 장년 층이 청춘시절을 보낸 60, 70년대는 정감을 운운할수 없었던 시대였다. 그 시절 시대적 흐름 속에서 억압됐던 중, 장년 층이 한국의 영화, 드라마에서 소외된 정신적 의지를 찾은 것이다. 중국인들은 한국 드라마에서 개방적이고 쾌활한 개성, 창조적 생활 등에 흥취와 함께 동경을 느낀다. 영화나 드라마를 통해 자유분방함과 윤택한 문화생활에 대해 대리만족을 느끼는 것이다. 중국의 한 영화제작인은 “한국드라마가 대체로 감성을 축으로 갈등과 반전을 거듭하는 진부한 구조로 되여있지만 소외된 시대를 살아온 중국의 중장년 세대에게는 의연히 신선감을 주고, 그들의 아픔을 무마하는 기제로 작용하고 있다”고 평가한다. 중국은 지금 급격한 현대화과정을 겪고 있다. 그 과정에서 기존문화 대신 현실의 어려움을 해결하거나 상상력을 만족시킬 수 있는 통속문화의 필요성이 대두되고 있다. 그러한 환경에서 한국 영화, 드라마의 독특한 예술성 특히 그의 화려함은 중국 사람들을 매료시켰다. 한국 대중문화의 친근감이 인지되기 시작한 것이다. 네티즌들 은 중국드라마와 한국 드라마를 비교하면서 그 우렬을 이렇게 가리고 있다. 한 네티즌은“중국 드라마는 매일 치고 박고 죽이고 체포하고 갑자기 일확천금을 버는 갱영화나 무협드라마뿐 현실적인 드라마는 적다”고 말했고 또 다른 네티즌은 “한국영화의 주제는 중국영화보다 광범위하고 한국 드라마는 현실감 있어 좋고 드라마에서 풍기는 사람냄새가 너무 좋다”며 “사람들의 삶을 아주 세밀하게 표현하고 있는데 중국 드라마는 왜 못하는지 모르겠다”고 유감을 표했다. 현대인들의 생활을 현실감 있게 보여준다는 점도 장점으로 꼽혔다. 한국 영화 특히 드라마는 재미난 이야기 선을 끌고 나가면서 그 기저에 가족 가치관을 깔고 있는데 이는 사람들의 큰 동감을 얻어내고 있다. 보통 사람들의 일상생활에서 소재를 잡고 섬세하게 터치하며 점입가경으로 끌고 가는 것이다. 허다한 드라마의 갈등요소가 거의 "금전"인 데 비해 한국 드라마는 순수한 사랑과 정염을 보여주는 것이 많다. 아름다운 사랑, 이상적인 사랑, 고난을 이겨내는 사랑... 사람들은 특히 그 부분에 매료되는 것 같다. 중국 어느 한 신문은 한국 드라마를 "평화와 중용의 생활내용 위에 서양 잼을 얹은 한 조각 빵"으로 비유하고 있다. 참으로 걸 맞는 비유이다. 대체로 력사물이거나 주선률 제재의 작품에 열성 올리고 있는 중국 드라마들 사이에서 세련되고 생활적인 한국 드라마들이 중국의 거칠거칠한 것과는 다른 매끄러운 감각이 묘한 친근감을 주었고 호감으로 받아들여졌을 가능성도 있다. 그 다음 또 하나는 한국인들이 우상을 만들어내는 능력에 감복해서이다 안재욱 송승헌 송혜교 김남주 김희선 장동건 원빈 이나영 차인표… 지금 중국에서 이들의 인기가 하늘을 찌른다. 영화, 드라마에 노래, 전 방위로 물량공세를 펼치니 한국 연예인들이 인기가 오르지 않는다면 그게 이상할 것이다. 그들은 중국 언론이 일거수일투족을 소개할 정도로 젊은 팬들의 우상이 됐다. 사이트마다는 한국 인기배우들의 뉴스가 넘치고 있다. 인터넷을 매개로 국제적인 팬클럽이 생기는가 하면 한국 배우들 뒷이야기가 매일 연예신문 면을 뒤덮는다. 그중 김희선 열풍은 "김희선 성형"으로 이어질 정도다. 중국 청도(靑島)의 한 병원은 ‘김희선처럼 만들어달라’는 중국 젊은이들을 상대로 16건의 성형수술을 해줬다고 신화통신이 최근 전했다. 전례없던 문화대혁명을 경험했던 중국에는 오랜 시간동안 요즘처럼 대중적 우상이 없었다. 그때의 우상이라면 모두가 정치인물들뿐 이였다. 그러했던 그들은 세련된 이미지에 정서적 스타일을 갖춘 한국의 스타들의 등장에서 가히 환혹(幻惑)할만도 했다. 중국의 많은 남자들은 한국 영화나 드라마에 등장하는 한국녀성들의 순수하면서도 아름다운 모습에 홀딱 반해 버린다. 특히 중국과는 완연 다르게 녀자들이 남자에 대한 공경태도에 감탄한다. 반면에 중국 녀자들은 한국 녀성들의 자기 감정을 대담하게 표현하고 자기 운명에 도전하는 정신을 부러워하고 공감한다. 특히 청소년들에게는 극중 인물의 멋진 모습이 큰 영향을 미치면서 한국영화나 드라마에 대한 좋은 인상을 갖는다. 그들의 말을 빌면 "예쁘면서도 모던한 배우들, 섬세하고 풍부한 스토리, 화려하고 자극적인 구조로 잘 포장된 극을 누가 싫어하겠는가"이다. 또 서양 연예인들은 아름답긴 하지만 가까이 하기에 너무 먼 반면, 한국 연예인들은 도시의 평범한 남녀와 다를 바 없어 친근감을 느끼게 한다고 평했다. 한국 연예인들은 진실한 사랑을 이야기하고, 밥도 스스로 해먹고, 화장실도 가는, 생활적인 모습도 보여주기 때문에 중국 팬들은 친근한 기분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이다. 한편 한국의 영상물은 중국에서의 일본문화의 위치를 밀어 내였다. 80년대 중국의 문화소비욕구를 어느 정도 충족시켜준 것은 일본대중문화였다. 영화 "추격(追捕)" "그리운 고향(望鄕)", "생사련(生死戀)" 드라마 "의심스러운 혈형", '오싱'을 비롯해 한동안 일본 영상물들이 중국에서 오랫동안 강세를 보여왔다. 야마구찌 모모에와 다까구라 겐 등 영화배우들은 지금의 장동건, 김희선에 못지 않게 중국에서 많은 팬들을 확보하고 있었다. 당시는 중국의 가정들에 가전제품이 갓 보급되던 시대였는데 일본 드라마를 보기 위해 중국전역에서 가전제품을 다투어 사들이는 전례 없던 구매열조가 일어나기까지 했다. 그런 특수한 상황에서 인 일본문화열풍은 몇 년 지나지 못해 곰삭고 말았다. 일본에 어느 정도 익숙해진 중국에 미국 한국 문화가 새롭게 들어오기 시작한 것이다. 영상작품에서의 다원화 경향을 보이며 먼저 홀리우드가 등장, 단순하던 중국인들의 "맛 망울"을 강타했다. 그리고 한국이 등장해 일본과 경쟁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짚고 넘어갈 다른 한가지가 있다. 중국인들의 시야에서 일본은 아세아에서 가장 서구화되고 현대화된 앞선 나라이지만, 호감의 대상은 아니였다. 중국관객들이 한국문화를 수용하는 데는 아무런 걸림돌이 없다. 하지만 일본문화를 받아들일 때에는 정서적 장애가 있다. 왜냐면 과거 일본이 중국을 침략했고 이루다 말할수 없는 만행을 저질렀던 력사를 모든 중국인이 가슴깊이 새기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도 일본인들을 욕하는 "왜놈"이라는 말은 가장 악독하고 무서운 존재로 사람들의 뇌리에 각인되여 있다. 물론 일본 경제의 불황과 극우 세력에 대한 혐오감, 등 여러 가지 원인도 있다. 마지막 원인의 하나는 기존에 중국의 조류를 선도하던 홍콩과 대만의 문화가 새로운 볼거리를 제공하지 못하고 있는 데도 있다고 본다. 대중 문화는 새로움과 다양함이 없으면 금세 식상해버리기 때문이다. 중국영화 정보로 갓! 빠른 시일 내에 아세아 나아가 세계적으로 주목할만한 성적가리를 쌓아올리면서 엄청난 파급효과를 낳고있는 한국영화는 관객률이 가련할 정도로 낮고 국제시장으로 나가는 길에서 오금 꺾기를 거듭하는 중국영화와는 선명한 대비를 이루고 있다. 중국영화와 같은 경륜을 기록하고 있지만 앞서 달리고 있는 한국영화의 궐기는 강렬한 충격파로 되여 같은 동방민족으로서 그 문화배경도 아주 비슷한 중국영화인들이 연구해야할 숙제를 내주고 있다. 중국영화는 올해로 백년탄신을 맞는다. 중국영화협회 오이궁(吳貽弓)주석은 “목전의 중국영화는 아직도 험난일로를 걷고 있다.”고 감개를 토하고 있다. 진부한 중국영화에 대해 소급해 보면- 우리는 줄곧 영화를 정치선전도구로 간주 해왔다. 이러한 형이상학적 영화관념이 우리로 하여금 고배를 마시게 하고 있는 것이다. “좌익영화(左翼電影)”가 나타났던 지난 세기말로부터 중국영화계는 줄곧 영화의 교화작용만 강조해 왔고 오락공능에 대해서는 부정하는 태도를 보였다. 이는 중국의 영화와 드라마가 쇄락한 중요한 원인의 하나이다. 아직도 중국에서 상업과 오락은 많은 감독들에 의해 "허드레"로 치부되고 있다. 그들은 이른바 "고상한 분위기"에 천착하면서 "좋은 영화", "큰 영화"만 만들려 상상의 로적가리를 쌓고 있다. 영화를 단 순 예술품으로만 간주하는 편협하고 사치스러운 생각이 근본적으로 관중들의 수요와 통하는 다리를 끊어버렸고 .영화산업화와 공업화를 저애하고 있는 것이다. 때문에 중국의 영화인들은 영화의 시장과 그 배급의 규률에 대해 세세하게 따지는 면에서 한국 영화인들에 비해 차이가 많다. 한국에서는 영화와 드라마가 숱한 대중문화 코드와 경향을 생성하면서 이미 대중소비문화의 중심축으로 편입되고 있다. 영화, 드라마를 "문화상품" 이라고 부르는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다. 영화나 드라마를 문화적 테두리 안에서만 리해하려는 사람은 이제 없다. 한때 영화가가 정치의 도구로 전락되였여 그 효용(效用)에만 에워 넣었던 시절을 우리는 경유해 왔다. 그러나 개혁개방 이후 소비의 대중화 시대가 본격화하면서 영화와 드라마는 더 이상 관객들의 감성적 범위에서만 안주하지 않는다. 문화적 테두리 안에서만 자족했던 영화 드라마에 이처럼 영화나 드라마의 "또 다른 잠재가치와 력량"이 다양하게 평가받기 시작한 것은 비교적 최근의 일이다. 중국에는 연예기획사가 많지만 정예하지는 못하고 크게 발달하지 못했다. 그에 비해 한국은 그 관리가 훨씬 체계적인 것 같다. 중국 영화는 관중의 수요에 대한 연구가 부족하다. 한국영화인들은 한편의 영화제작에 앞서 상세한 시장조사를 진행하는데 극본, 배우에서뿐만 아니라 보다 많이는 관중의 심리를 연구한다고 한다. 그들처럼 관중을 연구하고 시장을 연구하며 영화제작인과 창작인, 발행인이 관중을 관심하는 기풍이 형성돼야 중국영화가 진정으로 시장화에로 나아갈수 있는 것이다. 주류상업영화로 시장을 개척하고 자기 민족의 문화적 내함을 깊이 발굴하며 자질이 높고 본토영화를 지지하는 관객들을 육성해야 하는데 이런 것은 중국영화에서 아직 부족한 면이다 영화기제와 체재개혁의 심입과 더불어 중국의 영화산업의 보폭도 빨라지고 있다. 따라서 우리는 하루빨리 중국영화에 씌워진 이런 녹 쓴 "굴레"를 벗어버려야 한다. 중국영화의 잠재시장과 문화소비량이 엄청 크다는 것은 세인이 아는 바다. 중국은 말 그대로 대륙이다. 땅이 한국의 40배가 넘고 그 문화도 다양하다. 중국에는 56개 민족이 어우러진 다양한 문화가 공존한다. 이들은 2억 7천만대의 텔레비를 갖추고 있다. 중국의 영상시장에 대해 외신이 평론했듯이“이는 영화인들로 말하면 하나의 거대한 케익이 아닐수 없다." 따라서 중국관중들은 재미있고 자신들의 정감수요에 만족 줄 대량의 영화와 드라마를 기대하고 있는 것이다. 이로 감안해 볼 때 중국영화의 전망은 밝고 비전은 있다. 서울에 가면 충무로 라는 거리가 있다. 한국 영화계의 정영(精英)들이 운집한 이곳은 한국영화의 중심지대로 불린다. 아직도 거센 맞바람에 맞서며 가고 있는 중국영화인들, 한국 영화계의 성공에서 유익한 경험을 얻고자 사고를 거듭하는 그들에게 바람 부는 날이면 충무로로 가보라고 권장해 본다.  "문학과 예술"            봄비를 맞으면서 충무로 걸어갈 때 쇼윈도 그라스엔 눈물이 흘렀다 이슬처럼 꺼진 꿈속에는 잊지 못할 그대 눈동자 샛별같이 십자성같이 가슴에 어린다     "서울야곡"    중국조선족영화동호회 블로그: http://blog.daum.net/kh66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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