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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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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사람이 사람을 쓰는 일 댓글:  조회:710  추천:10  2019-12-01
칼럼   사람이 사람을 쓰는 일 김혁       일전 “중국조선족인물전 심포지엄”이 중후하게 개최되였다.   작가협회기관과  대학가 연구소와 문학지가 손잡고 펼친 심포지엄은 파란많은 중국조선족력사에 커다란 족적을 남긴 민족의 인걸들의 일대기를 조명한다는 의취아래 김학철, 정률성, 주덕해 한락연 등 조선족 인물들을 선정, 작자와 학자, 평론가들이 진지하게 조명작업을 펼쳤다. 문단과 학계는 이를 두고 “중국조선족인물 전기문학에 대해 다각적으로 진맥한  처음으로 되는 학술모임이다”고 정평하고 있다.    중국조선족인물전기 문학은 지난세기 80년대 중반부터 조선족 기업인들의 창업사를 기록하는 것을 시작으로 그 추형을 보였다고 해도 무방할 것이다.  그 와중에 책자로 인물전 합집이 묶여져 나왔지만 그 선정인물이 조선족인물만을 다룬 작품은 아니였다. 하지만 이들이 민족사와 직결되는 인물이라는 점에서 나오자 환영을 받았다.   90년대 중기에 연변대학 정판룡 부교장의 자서전 격인 "고향 떠나 50년"이 절찬리에 련재되며 인물전의 새로운 양태를 보였고 그러다 류연산 작가를 필두로 90년대 말 이후로 인물전기 문학은 문학지와 출판계에서 다량 얼굴을 선보이기 시작했다.   인물선정분야도 다양성을 보여 예술인, 문학인으로는 김학철, 정률성, 김염, 한락연 등이, 정치인으로는 주덕해, 조남기, 조룡호, 최채, 오장숙 등이, 항일운동가로는 류자명, 양림, 최진동 등이, 교육자로는 림민호, 정판룡 등이, 사회인, 기업인으로는  석산린, 한성호, 리성일 등등의 인물전기가 창작되였다.   인물전심포지엄에서 창작담을 이야기하다     인물전창작이란 말그대로 사람을 쓰는 일이다. 사람이 사람을 쓴 다는 것이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력사 속에 박제화된 한 인물의 내면에 육박해 그 정신세계를 빈틈없이 포착해내야 하기때문이다. 한 인물의 생애를 면밀히 추적해 그 시대와 사회를 조망해 보는 데 인물연구의 특징이 있다.    사학가들은 "력사 자체가 인물사다”라고 단언한다. 시대에, 제반 분야에 굵직한 획을 그은 이들의 깊은 사상과 력동적인 몸짓을 남긴 걸물들의 인물전기, 력사의 물줄기를 바꾼 그 개인의 삶을 통해 우리는 한 시대와 만나고 그 시대의 공과를 헤아려볼 수 있다.    요즘 해내외의 여러 인물전기, 평전창작을 보면 이미 구색을 갖추었다. 스토리 텔링 인물전, 화전(画传), 그래픽 노블(图像小说) 인물전, 청소년 인물전 등 새로운 형태로 인물전 창작기법이 날로 진화하고 있다 하지만 우리의 전기문학은 걸음마타기이며 그 저변이 아직도 척박하다고 봐야겠다. 인물전기 독자군과 시장은 아직 열려 있지 않고 있고 작자들의 인물전창작에는 아직 허점이 보이고 미숙한 점도 많다.    적지않은 인물전은 실제 답사와 자료의 인용, 주해, 주석달기에서 근엄하지 못하다. 어떤 인물전은 그야말로 책상머리에서 작가의 년보를 그대로 베껴내고 짜깁기를 한 장편리력서격으로 되여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인물전 창작에 앞서 선정 인물들이 더 다양해 질 필요가 있다. 인물전기 대부분이 3,40년대를 살다간 인물들에 편중돼 있는데 력사적 균형감이 필요하다. 작가들의 필끝에 누가 선정되느냐에 따라 그 영향과 함의가 크게 달라질 수 있다. 또 우리 작가들의 인물연구나 창작에 대한 제도적 지원 시스템도 활성화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그리고 인물전 창작자의 모두가 “50후”, “60”후로 편중돼 있고 수고로움을 감내하며 인물전을 쓸 젊은 작가는 보이지 않는다.    오늘의 문단에서 개인 사이트나 위쳇 계정, 모멘트로 자기 글을 자유롭게 발표하는 기능이 가능해졌다. 독자들도 감수성만 잘 건드려주면 무명인의 작품에도 크게 공감한다. 재래의 열독방식에서 벗어나 타인의 삶이 정직하고 유익하고 즐거운 것이면 함께 누릴 여유도 갖추었다.    그때그때 짧은 기지와 재치를 전하는 트위터에 란무하는 짧은 글들도 좋지만, 그렇다고 인물전기 집필의 중요성은 줄어들지 않는다. 적어도 특정 분야에서 특출한 업적을 남긴 위인들은 오늘날 우리들에게 “역할 모델”로서 필수적이기 때문이다. 변화의 시대를 보아내고 넉넉한 삶을 예시하는 새로운 눈을 인물전기들은 갖게 한다. 그것은 분명 민족의 발전과 우리의 삶에 기(气)를 불어넣는 좋은 작업으로 될 것이다.  작가들의 노력으로 유려하면서도 중후하며 치밀하면서도 품격이 있는 인물전, 력사와 지식과 정보가 담긴 사람향기나는 인물전의 출현을 또 한번 기대해 본다.     연변일보 2019-12-22  
17    왕붓으로 돋을새김 할 그 이름 댓글:  조회:1409  추천:18  2017-04-27
  . 작가노트 . ​ 왕붓으로 돋을새김 할 그 이름​   김 혁   ​ ​십여년전부터 나는 내 고향 룡정의 력사와 인물을 정리하는 작업에 투신하기 시작했다. 중국조선족문화의 발상지이자 민족의 독립과 반일의 전초였던 룡정에 대한 긍지와 자호감을 머금고 시작한 벅찬 작업이였다. 휴일을 타서 혼자거나 혹은 동인들을 휘동하여 력사전적지 수십여곳을 일일이 답사하고 수백명의 관련 증인, 유가족, 학자들을 찾아 취재한 끝에 50만자에 달하는 장편력사기행 ”일송정 높은 솔 해란강 푸른 물”을 집필하여 대형문학지에 3년간 련재를 마쳤다. 그 와중에 한락연이라는 이름과 다시금 만나게 되였다. ​ 비록 예전의 력사총서들에서 한락연에 대해 접하지않은것은 아니지만 룡정의 대사기, 룡정이 배출한 인걸들의 력사를 세세히 쫓는 가운데서 나는 한락연은 응당 기행문의 한 단락으로 쉽게 묘사할 인물이 아니라 대서특필해야할 인물, 작은 글체로서가 아니라 대문자로 돋을새김해야 할 인물임을 황연대오(恍然大悟) 느끼게 되였다. ​ 한락연, 그를 지칭하는 칭호는 많다. “인민예술가”, “정치활동가”, “반파쑈투사”, “동북지구 공산당의 초기 창시자”, “조선족 첫 공산당원”, “중국의 피카소” … 여러가지 타이틀로 력사의 갈피에 그 이름이 우람하게 적혀있다. 한 사람을 두고 이렇듯 평가가 다채로운것은 그가 살아온 인생이 그만큼 다채롭다는 방증이다. 이주민의 후예로서 룡정에서 출생한 한락연은 짧은 생을 살았지만 그의 행동반경은 실로 종횡무진이였다. 세상의 모습을 올곧게 그려내는 한편 그는 그림에만 매달리는 다른 화가와 달리 좁은 화폭안에서 살아가는 화가로 만족하지 않았다. 민족의 독립과 해방의 사명을 짊어지고 거대한 중국대륙을 무대로 혁명투쟁에 혼신을 바쳤으며 국공량당의 통전사업에도 커다란 기여를 했다. 또한 서역의 문화재발굴에 선구자적인 업적을 남기기도 하였다. ​ 한락연은 그야말로 예술가로서, 열렬한 사회활동가로서, 굳건한 “력사문물의 지킴이”로서 시대적 사명에 충실한 지성인들의 귀감이였다  .  그 생애에 초연이 피여 오르는 력사의 현장에서 수많은 역경을 겪어왔지만 운명의 굴레에 짓눌려 지내지 않고 예술가적 기질을 보이고 실천한 동시에 고매한 혁명가적 기질로 커다란 업적을 남긴 한락연을 통해 우리는 예술에 대한 그의 순수한 열정과 고난을 대하는 그의 락관주의적 풍모를 대할수 있을것이다.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비록 그가 살았던 세상과는 상전벽해라고 할 정도로 많은것이 바뀌여버렸지만 그가 보여준 진취적인 삶과 정신만은 여전히 유효하다고 생각해 본다. ​ ​ 2013년에 출간된 나의 청소년 인물평전 "한락연의 이야기"   주은래 총리가 생전에 “왜 한락연을 위한 전기물이 나오지 않냐”고 애석해 했듯이 그에 대한 조명은 여러모로 진행되고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 완정한 인물전의 결여로 그의 생애는 편파적으로 알려져 있으며 이로서 커다란 유감을 남기고 있었다. 중국에서도 그에 대한 추모문집 한 두부가 나왔을 뿐이고, 해외에서도 그에 대한 조명한 문장이 더러 있으나 겨우 수만자 미만, 몇편 정도의 미비한 량에 그쳐 있었다. ​ 중국조선족의 수많은 인걸들중에서도 혁혁한 인물인 그에 대한 체계적인 인물평전조차도 없다는것은 어찌보면 우리 후세로서는 결례요, 실책이라 말해야 할것이다. 그리하여 한 고향의 위인에 대한 숭모의 감정을 품고 인물전기 집필에 열정을 불살라 착수했다.  2008년부터 사비를 털어 한락연의 자취를 찾아 심양, 할빈, 치치할, 상해, 중경 등 지역을 답사하였다.  그를 바탕으로 한락연 관련 신문기사, 인물소개들을 다각적인 쟝르를 동원하여 수차 간행물들에 기고, 발표하였고 연변일보 “종합신문”주간에 그의 인물전기를 8개월간 련재하였다. 그리고 청소년을 대상으로 한 한락연 인물전기를 책자로 묶었다. ​​ 한락연이라는 인물에 천착되여 관련 연구를 감행한지도 어언 8년철이다. 그만큼 힘든 시간, 벅찬 시간들이였다. 그리고 속필을 자랑하는 나였지만 감불생심 평전에 필을 대는 가벼움이나 서두름을 보이지 않았다. 아직도 한락연의 일대기에 대한 나의 집필은 선인들의 연구를 바탕으로 진지함을 기하는 진행형이라 해야할것이다. ​ ​ 한락연의 딸 한건립 녀사를 취재하고​   ​근년래 우리문단에서도 뒤미처 인물전기서들의 “봇물”이 터진듯 하다.  문학적 감동과 학술적 객관성을 함께 지닌 묵직한 분량의 인물전기들은 침체화, 단일화 경향을 보이던 우리 문단에 새로운 활력소를 주입해 주고 있다. 품격이 두드러진 인물전기 수작(秀作)을 읽을수 있기를 우리의 출판과 독자들은 바라고 있다. ​ 그에 편승하여 이 십여년동안 나는 한락연 외에도 자치주 성립의 산파인 주덕해, 겨레의 창공에 “별”처럼 빛나는 민족시인 윤동주, “조선족문단의 거목” 김학철, 상해와 태항산을 주름잡으며 일제와 싸운 항일녀걸 리화림, 무성영화시대 오렷한 소리와 자취를 남긴 “영화황제” 김염 등 우리들의 자랑스러운 인걸들을 장편소설, 인물평전, 청소년전기등 픽션과 논픽션물로 재현하는 작업에 몰두하여 관련서적들이 이미 출간되였거나 바야흐로 출간중에 있다.  수십년동안 매체의 기자와 소설가로서의 삶을 병행해 살았던 나에게 있어 “문학적 다큐멘터리”로 특징지을수 있는 저널리즘적 글쓰기가 남들과 차별화된 나만의 창작성향이라고 말하고싶다. ​ 사학자들은 력사란 “인간이 거쳐 온 모습이나 인간의 행위로 일어난 사실을 말하는 단어”라고 정의하고 있다. 력사의 물줄기를 바꾼 개인의 삶을 통해 우리는 한 시대와 만나고 그 시대의 공과를 헤아려볼수 있다. 변화의 시대를 보아내고 넉넉한 삶을 예시하는 새로운 눈을 인물전기들은 갖게 한다. 여기에 인물전의 매력이 있다.  시대에, 제반 분야에 굵직한 획을 그은 우리의 위인들을 조명하는 작업은 현재 변혁기의 소용돌이에 꺼둘리고있는 민족의 발전과 우리의 삶에 기(气)를 불어넣고 비젼을 제시하는 좋은 작업으로 될것이라고 나는 믿어 의심치 않는다. 그리하여 오늘도 나는 왕붓을 무겁게 고누고 만방에 자호 할 우리네 인호(人豪)들의 진영(真影)을 한 획, 한 자 경필(劲笔)로 그리고있다. 굵다랗게 돋을 새김하고 있다. ​ “장백산”2017년 1월호     김혁 문학블로그:http://blog.naver.com/khk6699  
16    노벨문학상수상자 막언(莫言)과 댓글:  조회:1540  추천:12  2017-02-10
 ​ 노벨문학상수상자 모옌과​ 지난 11월30일부터 11월3일까지 북경에서 열린 전국작가대표대회기간 중국대륙문단의 거목, 기라성 같은 문인들을 가까이 할수있었던건 아직도 행운이 아닐수 없었다.  그중에서도 막언선생과 함께 할수 있은건 크낙한 기쁨이였다.​ 나는 80년대 중기 막언의 출세작 “붉은 수수”를 스크린에서 본뒤로, 그의 전부의 작품을 소장해 읽었고, 영화, 텔레비드라마로 각색된 영상물도 모두다 갖출 정도로 그의 “골수팬”이다. “백구 그네대(白狗秋千架)”와 같은 그의 단편소설을 조선말로 번역 했었고 언감 평문도 달아보았으며 그의 노벨문학상 랑보(朗報)가 터져오르자 곧 평론, 대담, 칼럼, 방송등 다쟝르를 동원해 그의 작품들을 조선족 독자들에게 소개하기도 했었다.     중국인 최초로 노벨 문학상을 받은 막언은 장예모(張藝謀) 감독의 영화 의 원작 소설로 세계적으로 유명한 작가다. 막언은 1955년 2월 17일  산동성(山東省) 고밀(高密) 대란향(大欄鄕) 평안춘(平安村)의 빈한한 가정에서 출생했다. 본명은 관모업(管謨業)이나, 글로만 뜻을 표할 뿐 “말하지 않는다”는 뜻의 ‘모옌(莫言)’이란 필명을 쓴다. 초등학교 5학년 때 문화대혁명이 일어나자 학업을 포기하고 수년 간 농촌 생활을 하다가 소학교를 중퇴한 뒤 18세 되던 해 면화 가공 공장에서 직공으로 일했다. 1976년 20세 나이로 고향을 떠나 중국 인민해방군에 입대해 복무하던 중 문학에 눈을 돌려 1978년 소설을 쓰기 시작했으며, 해방군 예술학원에 입학, 1986년에 문학과를 졸업했다. 이후 베이징 사범대학과 루쉰 문학창작원에서 문학 석사학위를 취득했으며, 1981년부터 창작 활동을 시작하여 인민해방군 총참모부 소속 1급 작가로 일하다가 1997년 사직하고, ‘검찰일보’에 재직하면서 작품 활동을 계속했다.   1981년 격월간지 『련(蓮池)』에 단편소설 「봄밤에 내리는 소나기(春夜雨)」를 발표한 후 왕성한 작품 활동을 펼치기 시작했다. 1984년 발표한 「황금색 홍당무(金色的紅蘿蔔)」(1985년 「투명한 홍당무(透明的紅蘿蔔)」로 개작)가 좋은 평가를 얻게 되면서 문단의 주목을 받기 시작한다. 1987년 대표적인 장편소설 『홍까오량 가족』을 발표해 반향을 일으켰고, 그 작품의 일부를 장예모 감독이 영화 으로 제작해 1988년 베를린 영화제에서 황금곰상을 수상했다. 이는 막언의 작품이 전세계 20여 개국으로 번역 출간되는 계기가 되었다. 과   와 이후 장편소설 『천탕 마을 마늘종 노래(天堂蒜S之歌)』(1988), 『열세 걸음(十三步)』, 『술의 나라(酒國)』(1993), 『풀 먹는 가족(食草家族)』(1993), 『풍유비둔(豊乳肥臀)』(1995), 『탄샹싱(檀香刑)』(2001), 『사십일포』(2003), 『생사피로(生死疲勞, 인생은 고달파)』(2006) 등을 발표했다. 「환락」, 「생화를 품은 여인」, 「폭발」, 『사부님은 갈수록 유머러스해진다』등의 중편소설과 「그네 틀의 흰둥이」, 「메마른 강」, 「엄지수갑」, 「눈얼음 미녀」등의 단편소설을 발표하며 활발한 활동을 보여줬다. 이 중 『사부님은 갈수록 유머러스해진다』는 장예모 감독에 의해 영화 로 제작된 바 있다. 장편소설 와 『풍유비둔』은 그의 창작상 최고조에 오른 작품으로 평가되고 있으며, 『티엔탕 마을 마늘종 노래 1,2』는 1980년대 중국의 개혁ㆍ개방의 전성기를 배경으로 농촌 마을과 관료 사회의 부패 양상을 탁월한 주제의식과 기교로 그려낸 걸작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이외에도 많은 희곡과 텔레비전 드라마 극본을 썼는데, 1997년 창작한 희곡 「패왕별희(覇王別姬)」는 무대에 올려져 중국 대도시를 중심으로 두 달간 연속 공연되면서 대중들에게 인기를 끌기도 했다. 1993년에 출간된 『술의 나라』는 프랑스, 독일, 일본 등 여러 나라에 소개되어 큰 호평을 받았다.​ 그는 데뷔 후 중국 최고의 문학상인 대가大家)문학상을 비롯, 프랑스 루얼 파타이아 문학상, 이탈리아 노니로 문학상, 프랑스 예술문화훈장상, 홍콩 아시아문학상, 일본 후쿠오카 아시아 문화대상 등 다수의 문학상을 수상한 바 있다. 막언은 2012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하면서 중국의 첫 노벨 문학상 수상자라는 영예까지 얻었다.스웨덴 한림원은 막언이 “환상적인 리얼리즘을 민간 구전 문학과 역사, 그리고 동시대와 융합시켰다”며 “환상과 현실, 역사적 관점과 사회적 관점이 절묘하게 엮인 문학 세계를 창조했다”라고 수상 이유를 밝혔다. 막언의 문학성에 대해서는 윌리엄 포크너나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를 연상시킨다고 분석했다. 김혁 문학블로그: http://blog.naver.com/khk6699  
15    강경애:리얼하게 그리고 치렬하게 댓글:  조회:3087  추천:18  2016-04-18
리얼하게 그리고 치렬하게 -   룡두레 우물가에 족적을 남긴 녀류작가 강경애 리얼리즘문학 최고의 녀성작가 강경애   소학시절, 내가 다니던 신안학교(지금의 북안소학, 그 전신이 윤동주가 다녔던 광명학교이다)에서 봄, 가을로 원족가는 곳은 룡정 서남쪽에 우람하게 솟은 비암산이였다. 그 비암산으로 오르는 자드락길에 “녀성작가 강경애문학비”가 호젓이 서있다. 1999년 8월 8일, 룡정에 강경애 문학비가 건립되자 당시 “연변일보” 문화부 기자로 뛰고 있던 나는 열심히 취재하여 강경애 특집도 꾸몄었다. 룡정출신으로 문학에 환혹되여 있는 나에게서 그 동년의 아련한 추억이 서린 곳에 서있는 강경애문학비는 다른 이들보다 농도와 줄기 다른 감수로 안겨온다.   강경애(姜敬愛)는 일제 강점기에 활동한 얼마 안되는 녀성작가 가운데서 여느 작가들과는 흔치않게 일제식민통치의 암울했던 시기에 억업받는 하층의 로동자와 농민, 녀성을 대변한 작품과 만주 지역 항일무장운동가들의 고난의 삶을그려내여 근대문학의 대표적 녀성 작가로 자리매김했다. 나아가 당대 여느 작가들이 보지 못했던 식민지의 실상을 세밀하게 포착했고 이를 작품화했다. 학계는 “강경애는 식민지 시대 작가로서는 드물게 하층 녀성의 목소리를 공식 기록으로 끌어올린 식민지 시대 하층 녀성의 대변자이다.”고 그의 문학적 공적에 대해 평하고 있다. 그는 또 한동안 룡정에 체류해 활동하면서 간도체험을 많은 글로 펴내기도 했다.   우표에 오른 강경애    하지만 지난 2005년 해외의 한 매체에 “강경애가 김좌진장군 암살동거범”이라는 기사가 떠 커다란 혼선이 빚어졌다. 매체의 한 언론인이 무책임하게 써 내친 한편의 글이 그 곤고한 세월에도 치렬한 문학혼을 보여주면서20세기 30년대를 빛낸 한 우수한 녀류작가를 자칫하면 매도의 나락에로 밀어넣을수 있는 형국이였다. 이때 연변조선족문화발전추진회가 나섰다. 추진회에서는 조성일, 장춘식, 리광인등 평론가들과 함께 “문화산맥” 사이트의 "열린마당" 코너에 강경애 시시비비 사이버토론을 벌리고 유력한 리론적 증거로 강경애의 청백을 강력히 호소했다. 그와 더불어 한국의 량지가 있는 학자와 평론가들은 진상시정을 촉구하며 드센 반발을 들이댔다. 결국 강경애는 끝끝내 그해 3월의 "이달의 문화인물"로 선정되였다. 선정리유에는 “강경애는 불우한 가정환경과 극한의 궁핍을 극복하고 작가로 성장해 민족적, 계급적, 성적 억압에 고통받는 녀성들의 목소리를 대변했다. 나아가 하층 녀성의 시선을 넘어 당대 여느 작가들이 볼수 없었던 식민지의 실상을 두루 포착했고, 이를 작품화해 우리 근대문학사에서 일제시대 최고의 사실주의 작가로 자리잡았다”고 밝혔다. 그동안 “문화인물 선정"에서 비여 있었고 보류되였던 강경애는 마침내 루명을 씻고 마땅히 찾아야 할 위치에 오른것이다. 당시 “문화산맥”사이트의 편집을 맡고있던 나는 조성일등 문화파수군들의 진지한 학술적 자세와 로고에서 큰 감명을 받았었다. 그들과 함께 진상규명에 미력이라도 바치면서 나는 다시금 강경애라는 인물에 대해 주목하기 시작했었다.   황해도에서 태여나다   강경애는1906년 4월, 서해 바다를 향해 소뿔 모양으로 반도를 이룬 명승 조선 황해도 송화군의 한 가난한 농민의 딸로 태여났다. 이곳은 유명 녀류시인 로천명(盧天命)이 태여난 곳이기도 했다. 그가 세살나던 해인 1909년 겨울 아버지가 세상을 뜨자 가세는 기울어 나무껍질을 벗겨 먹어야 할 정도로 가난했다. 강경애가 다섯살이 되였을때 병약했던 그의 어머니는 후구지책으로 황해도 장연군 장연의 최도감의 후처로 재가했다. 의붓아버지는 돈은 있었으나 환갑이 지난데다 장애인이라 어머니는 거의 몸종 같은 신세였다. 하지만 워낙 총명하여 여덟살나던 무렵부터 한글을 깨친   강경애는 “춘향전”, “삼국지”, “옥루몽”, “숙향전” 등 구소설을 거의다 읽고 동네 사람들에게 읽어주기까지 했다. 영특하고 총명함이 파다하게 알려져 이에 동네사람들이 다투어 그를 데려다 사탕을 사먹이고 소설을 읽게 했다. 그래서 동네에서 “도토리 소설쟁이”라는 별명을 얻었다고한다.   의붓형제들 사이에서 힘든 유년기를 보내던 그는 열살이 지나서야 어머니의 애원과 간청으로 겨우 장연소학교에 입학하여 눈치공부를 하게 되였다. 그동안 월사금, 학용품값 등을 마련할수 없어 옆 친구의 돈과 물건을 훔치기라고 했으면 하는 절박한 심정으로 학교를 다녔다. 형부의 도움으로 1921년 평양 숭의녀학교에 입학했다. 숭의녀학교에 입학한뒤 평양의 진보적 학생들로 조직된 친목회 “독서조” 등에서 활동하던 강경애는 추석성묘를 미신이라고 규제하는 미국인 교장과 엄격한 기숙사 생활에 항의하는 동맹휴학에 참가한 연고로 학교에서 퇴학을 당했다.     1923년, 그녀 앞에 한 남자가 나타난다. 역시 황해도 출신 일본 류학생인 양주동이였다. 서양의 자유로운 사상에 물들어 련애 결혼, 리혼의 자유, 특히 련애지상주의를 크게 외치고있던 양주동에게 빠져든 강경애는 엉뚱하게도 어두운 저녁에 비를 철철 맞으며 찾아와서는 양주동에게 “선생님 나 영어 좀 가르쳐 줘요. 그리고 시도, 문학도, 문학적 소질은 충분히 있으니 좀 길러주세요.”라고 말했다. 당돌함과 랑만적 성격을 가진 강경애의 방문으로 두 사람은 사귀기 시작했고 동거라는 선택을 한다. 하지만 그는 다른 녀자의 남편이였고 이를 안 가족과 이웃의 비난으로 그녀는 무산과 간도 등지를 혼자 떠도는 신세가 된다.   그동안 양주동이 주재하던 “금성”지에 강가마라는 필명으로 “책 한 권”이라는 짤막한 시를 발표했다. 강경애는 원체 머리에 쌍가마가 있어서 강가마로 아명을 불리웠는데 이를 필명으로 적용한것이였다.     강경애의 문학스승이자 련인이었던 양주동 박사   글벗이요, 애인 관계에 있던 두 사람은 함께 서울로 가서 동덕여학교에서 1년 간 공부했지만 1924년 가을, 관계가 깨지고 말았다. 그러자 강경애의 학비를 대주던 형부가 련이은 중퇴와 련애사건에 실망하여 질책하며 뺨을 때린다고 한것이 잘못 되여 이후 강경애는 늘 귀병을 앓고 청력도 나빠졌다고 한다.   1924년 "책 한권", 1925년 "가을", 1926년 "다림불"과 같은 습작수준의 시를 발표한뒤 3년간의 공백을 거친후, 1929년 10월 "조선일보"에 민족과 계급의 절충을 내세우는 중도파인 양주동과 렴상섭을 비판하는 글 "염상섭씨의 론설 “명일의 길”을 읽고"를 발표하면서2년 뒤 같은 신문에 필명으로 “양주동군의 신춘평론-반박을 위한 반박”을 써서 옛 애인을 비판했다. 애증이였든 분노였든 결과적으로 양주동은 그녀의 필을 움직이게 만든 시작점이 된 남자였다.   간도 룡정으로 이주하다   고향에서 작가수업에 빠져들던 강경애는 수원 고등농림학교 출신으로 장연 군청에 부임한 황해도 황주 사람 장하일을 운명적으로 만나게 된다. 장하일은 조혼한 부인은 멀리 두고 어머니와 함께 장연으로 와서 강경애의 집에 세들어 살다 강경애와 사랑에 빠지게 되였다. 1931년 6월, 둘은 간단하게 결혼식을 올렸다. 그런데 장하일의 부인이 찾아오자 두 사람은 장연을 떠나 한동안 인천에서 품팔이를 하며 지내다가  “고향에서의 질식스러운 환경을 박차고” 간도 룡정으로 이주하여왔다.   두만강! 호탕한 장강을 연상하고 들었건만 지금에 보니 장강엔 어김없을망정  놀랄 만큼 좁다랐다… 내가 간도에 들어오기는 생각하니 지난 해 늦은 봄날이었다. “(간도풍경” “신녀성” 1932년 1월)    “내가 처음으로 두만강을 대하기는 1931년 봄 바야흐로 신록이 빛나는 그때였다. 나는 차창에 의지하여 두만강을 바라보았다.” ( “두만강례찬”. ”신동아” 1934년 7월호)   “내 고향을 떠난지 벌써 3년이 잡힌다. 그동안 고향에는 많은 변동이 생겼을것이다.”(“고향의 창공”.1935년 5월 “신가정”)   강경애의 상기 작품들에서 살펴 보면 강경애가 룡정에 발을 들여 놓은것은 1931년 봄이였다. 룡정에서 그는 때로는 강사노릇도 하고 때로는 무직업으로 있으면서 끼니도 넘기는 가난의 고초를 겪게 되었다. 이 간도에서의 방랑체험은1932년 9월 "삼천리"지에 "그 녀자"란 소설에서도 나온다. 룡정에서 남편 장하일은 동흥중학(지금의 룡정 3중)에 취직했다. 동흥중학은1940년경의 통계만 봐도 졸업생이 애초의 9명으로부터 211명이 나 됐다. 이런 급증한 학생수는 문학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바 간도지역은 특이한 이방감과 유난한 향수와 민족의식으로 한글문학이 왕성했던것이라고 평론가들은 분석하고있다.   강경애의 남편 장하일이 근무했던 동흥중학, 바로 지금의 룡중제3중학이다.    동흥중학 옛터에서의 필자.  강경애는 이주 초기, 이 학교의 사택에서 살았다고한다.   “기존의 한국문학사는 일본의 폭압이 점점 가혹해졌던 1939년 국민징용령 이후부터 1945년까지를 ‘암흑기’로 부르고 있다. 그러나 국내에서의 탄압상과 정비례하여 비교적으로 민족의식을 보유할 수 있었던 간도지역엔 학생수가 급증했다.” (임헌영 문학평론가, 한국 중앙대 교수) 동흥중학에서 교원, 교무주임으로 있었던 장하일은 언제나 제일 먼저 강경애의 작품을 읽고 조언해 주는 독자였으며 그의 병을 고쳐주기 위해 헌신적으로 노력했다. 장하일은 항일무장대오와도 련계가 있는 진보적인 지식인이였다. 1934년의 동흥중학교 교장은 일찍 조선공산당 만주총국 산하 동만도 골간으로 뛰였던 림계학이고 교원은 장하일 등 6명이였다. 교재는 일본 문부성에서 검정하고 조선 총독부에서 편찬한 교과서를 채용하였으나 장하일 등 교원들은 여전히 일체 교내외행사나 교수용어에서 한글을 사용하였다. 1939년 6월에 동흥중학교 전체학생들이 7일간의 동맹휴학을 단행하고 룡정총령사관의 밀정 김호연을 붙잡아 혼뜨검을 낼 때도 장하일은 선두에 나섰다. 장하일은 후에 귀국하여 “조선일보사” 총편집을 맡았고 광복후에는 조선 황해도 위원장, 로동신문 부주필로 뛰였다. 반일정신이 강한 행동하는 지식인이였던 남편의 영향하에서 강경애는 룡정에 이주한후 사회활동에서도 두각을 드러냈다.    대하소설 “북간도”의 작가 안수길은 당시 룡정에서 그녀의 이웃에 살았었다. 안수길의 수기에 따르면 강경애는 “물동이 몇개씩 깨드리면서까지 우물에 물 길러 다니고 양재물에 손끝이 빨갛게 벗겨지면서까지 빨래를 하여”, “수수한 품이 어느 부인네들과 같이 물동이를 이고 우물에서 물을 길어 살림을 하는등 이웃에서도 유명한 작가라는 것을 모르고 있을 정도였다”고 한다. 1932년 룡정에서 강경애를 만났던이는 다음과 같이 강경애에 대한 인상을 적었다. “아주 되는대로 차리고있는 옷모양, 물동이 이고, 밥 짓고, 나무 사들이고 하는 것이 보석반지, 피아노, 문화주택, 털 침대를 동경하는 현대 여학생들과 달라서 더욱 유쾌한 기분을 주었다.” (김경재 “최근의 북만정세- 동란의 간도에서” “삼천리” 1932.7.1)   강경애의 문단 진출은 잡지 “혜성”의 1931년 8월호에 그녀의 자전적 소설로 알려진 장편소설 “어머니와 딸”을 발표한것이 계기가 되였다. “어머니와 딸”은 봉건적 억압아래 비참하게 살아간 어머니에 비해 딸은 어려운 환경을 극복하고 새로운 인생을 개척한다는 내용을 담은 소설로서 봉건적 인습과 성적·경제적 억압으로부터의 녀성의 해방을 로동자 계급의 전망에서 찾고자 했다. 초기의 작품에서부터 강경애는 이미 시대정신을 주제로 삼았고 그 표현과 기법도 상당했다. 1931년 7월, 일제는 “9.18사변”을 일으켜 괴뢰정부만주국을 세웠고 "치안숙청"이란 이름으로 대대적인 토벌을 진행하였다. 특히 동만지방에 조선주둔군 제19사단을 "간도파견대"로 삼고 1932년 4월부터 잔혹한 대토벌을 시작하였다. 이런 아비규환의 수라장에 강경애는 일제의 토벌을 피하여 1932년 6월 잠시 룡정을 떠났다. 이때 그 심정을 토로한것이 "간도를 등지면서”, “간도야 잘있거라"에 세세히 적혀있다.   1933년에 강경애는 다시 룡정에 돌아왔다. 그동안 궁핍하고 비참한 생활을 목격하고 체험했으며 룡정 일대에서 항일대오의 진면목을 알기 위해 유격대에 들어가려고 하기도 했던 그는 자신의 감상주의적 문학관을 비판적으로 바라보게 되였다. 따라서 당시 일제의 폭압과 그에 대항해 나선 간도의 시대상을 증언하는것을 자기 문학의 중요한 과제로 삼았다. 근대문학사상의 다른 작가들과 구별되는 강경애의 작품 세계의 주요한 특징은 바로 작가 생애의 대부분을 보낸 간도 체험에서 나온것이다. 간도 방랑을 통해 얻은 이러한 입장과 내용으로 원고지를 메워가면 그는 간도에서 항일투쟁을 벌인 사람들의 삶의 실상을 검열을 피해 가며 세상 독자에게 알리는것을 작가로서의 의무로 생각했다. 1933년 11월, 룡정에서는 광명중학교 교원 리주복등의 발기로 민간문인단체인 “북향회”가 설립되였다. “북향회”는 민족문학을 발전시키고 동포대중을 불러일으켜 민족의 자주독립을 위해 견실한 기초를 닦는다는 취지로 설립되였다. “북향회”가 발간한 간행물 “북향”은 강렬한 민족사명감으로 민족문학의 수호와 발전에 큰 노력을 기울여 간도지역의 작가와 문학을 애호하는 청년문인들의 중요한 진지로 부상했다. 강경애는 박계주, 안수길, 윤영춘 등 당지의 유명 작가들과 함께 “북향회”의 발전을 이끌었다. 강경애의 대표작품으로는 1930년대 식민지 조선의 현실을 총체적으로 반영하여 근대 소설사 최고의 리얼리즘 소설의 하나로 꼽히는 장편소설 “인간문제”(1934)와 장애자들을 주인공으로 해서 빈궁의 극한 경지를 그려낸 “지하촌”(1936)으로 꼽는다. 특히 “인간문제”는 식민지 친일지주와 농민, 식민지 자본가와 로동자의 뚜렷한 갈등 구조 속에서 작품을 구성했을 뿐 아니라, 농촌의 각종 풍경, 생명 있는 것들을 사랑하는 농부의 마음과 그것을 빼앗길 때의 쓰라린 마음, 인천 부두 로동자의 세계, 식민지 대자본이 들어와 설립한 대규모 방적 공장의 내부 모습과 운영 방식, 그 당시 로동운동에 투신했던 대학생에 이르기까지 1930년대 식민지 사회의 전반적인 모습을 정확한 세부로써 묘사하는데 큰 성과를 내였다.   강경애는 “인간문제”를 통해 최고의 위치에 올라섰다. 이 작품은 로동자의 힘든 생활과 그 변혁의 노력을 장편소설의 형식에 담아낸 식민지시대 우리 리얼리즘 문학의 소중한 성과로서 리기영의 “고향”과 비등한 위치에 있는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련재당시 소설 “소금”의 삽화   간도에서의 체험을 바탕으로 써낸 “소금(1934), 역시 그의 대표작품이다. “소금”은 괴뢰정부 만주국에서 총을 들고 일어선 항일무장부대의 모습과 그에 대한 민중의 감정을 암시적으로 반영하고 있다. 이러한 작품들을 강경애는 일제의 검열을 교묘하게 피해가면서 한반도의 독자에게 전하려고 애썼다. 때문에 그의 허다한 작품들은 검열 때문에 시커멓게 붓질을 당하는 수난을 겪곤 했다. 집안문제, 연애문제로 고민하던 청춘남녀가 만주로 가서 항일무장투쟁에 헌신한다는 내용의 단편소설 “파금(破琴)”(1931)등이다.   강경애의 소설을 각색한 조선의 동명영화 “소금”의 포스터   간도에서 소박하고 평범한 주부로 자처하면서도 노력하는 작가인 강경애는 작품을 쓸 때 원고지에 쓰다가 찢고 또 쓰다가는 찢고 하여 엄청난 파지를 내면서 자신의 체험으로부터 소재를 구하여 직접 답사를 해가면서 글을  썼다고한다. 룡정에서 창작생활을 하면서 간도지역 문학단체인 "북향"회의 고문을 담당하는 한편 한때 "조선일보"사 간도지국장을 력임하기도 했다. 다년간 강경애 연구에서 개척적인 실적을 쌓은 한국과학기술원 인문사회과학부 교수 리상경 론문 “녀성의 대변자 강경애”에서 강경애의 룡정체험에 대해 이렇게 정리했다.  “강경애의 모든 소설은 간도에서 씌어졌다. 1931년 간도로 가서 1939년까지 8년 정도의 길지않는 기간이였지만 첫 작품을 제외한 전 작품이 모두 이 기간에 발표한 것으로 그의 작품의 특성과 한계 모두가 간도라는 땅과 밀접하게 련결되여있다고 볼수있다.   강경애보다 앞서서는 최서해나 안수길이 간도에서의 체험을 문학적 기초로 삼았지만, 녀성 작가로서는 강경애가 유일하다. 당대의 다른 녀성 작가들 대부분이 조선문화의 중심지인 서울에 살며 창작한것과 달리 서울을 멀리한 문단의 변두리이지만 항일무장투쟁의 중심지인 간도에 살면서 창작에 전념한것이 작가 강경애에게 예술적·정치적으로 긴장을 주었고 동시대 다른 작가들과 구별되는 강경애 작품세계의 기초가 되었다. 또 그러한 피부로 겪은 체험때문에 당대 어느 작가보다도 뛰여난 예술적 성취를 이룰수 있었다고 봐야 할것이다.”    고향에서 영면하다   1939년 경 고향 장연으로 돌아온 강경애는 1940년 짤막한 수필 2편을 끝으로 붓을 놓았고 병고에 시달리다가 1944년 4월 39세의 나이로  눈을 감았다. 강경애는 그녀의 문학적 재능에 비해 한민족 문단에서 뒤늦게 그리고 아직 도 불충분하게 인정받고있는 녀성 소설가이다. 가난한 가문의 녀성이라는 탓으로, 38세의 나이에 요절했던 탓으로 그리고 그녀의 소설이 지닌 저항적 성격 때문에 일제의 검열을 받으며 제대로 알려지지못한 탓에, 그녀가 30년대의 대부분을 간도지방에서 살면서 서울 중심의 문단과는 거리가 있은 탓이기도 했다. 이런 그를 발굴해준 사람이 바로 남편 장하일이였다. 강경애와 동지적 관계를 유지하면서 강경애가 쓴 원고를 최초로 읽고 조언해주는 좋은 독자였던 남편 장하일은 해방전후의 어수선한 상황에서도 안해의 작품을 간직하고 있다가49년 “인간문제”를 단행본으로 상재하여 안해에 대한 사랑을 구현했다.   그후로 강경애는 남북문단에 서서히 알려지기 시작했다. 조선에서는 강경애를 "해방전의 진보적이고 재능있는 녀류소설가"로 무산대중의 편에 서서 창작활동을 벌여 "일제식민지 통치하에서 착취받고 억압받는 사람들의 비참한 생활과 비극적 운명을 깊은 동정을 가지고 묘사하였으며 계급적 원쑤들에 대한 증오심과 항거의식을 형상했다"고 평가하고 있다. 그리고1961년,  조선에 “강경애론”(김헌순)이 출판되였다. 85년께에는 강경애의 소설을 각색한 영화 “소금”을 신필림촬영소 (신상옥감독, 최은희 주연)에서 제작하기도 했다. 86년에는 문학예술종합출판사에서 중편소설 “소금”과 함께 엮어 작품집 “인간문제”를 내놓았으며 94년에도 새로 출간된 “현대조선문학선집'”에 이 작품을 실었다 한국문단에서는 70년대 들어서 그녀의 문학적 성과가 평가되기 시작해 “인간문제”가 처음 단행본으로 출판되였지만 원작이 심하게 왜곡, 훼손된 상태, 신문련재본을 원본으로 한 “인간문제”단행본이 출판된것은 1992년이였다. 한국에서 리화녀대 리규희에 의해 “강경애론”이 나온것은 1974년, 서울대 리상경에 의한 석사학위론문 “강경애연구”는 1984년이다. 1999년 4월에는 리상경교수에 의해 “강경애전집”이, 2002년 5월에는 수정증보”강경애전집”(리상경엮음)이 해빛을 보았다. 2005년에는 한국에서“3월의 문화인물”로 떠올랐다. 일제의 검열에 의해 지워진 강경애의 대표 단편 “소금”결말부의 260자가 2006년 복원되면서 그녀는 또 한번 세상의 주목을 받게 되였다. 따라서 2007년엔 남북 첫 공동 론문집인 “강경애, 시대와 문학”이 출간되기도 했다. 연변에서도 룡정에 굵직한 족적을 남긴 그의 작품이 일찍 출판되였다. 연변인민출판사에서는 조선 로동신문사의 1949년 초판에 의해 1957년 6월에 그의 대표작 “인간문제”를 출판했고 또 조선 작가동맹출판사 1959년 4월 초판에 의해 1979년 10월에 재차 출판했다.   1999년 8월 8일, 뒤미처 룡정의 비암산에 그녀의 문학비를 세워 룡정 체험을 수작(秀作)으로 남긴 그의 문학과 생애를 기념했다. 찌는 듯이 무더운 그 날, 연변의 문인, 교수들은 한국의 학자들과 함께 비암산 소나무숲에서 강경애 문학비 제막식을 가졌고 뒤이어 연변대학에서 강경애문학연구학술발표회를 가졌다. 학술발표회의에서 연변대학 조문학부의 채미화교수의 "강경애 소설창작의 미학적특징"이라는 표제의 론문과 한국과학기술원 인문사회과학부의 리상경씨의 론문 "강경애와 간도체험"이 발표되였다.…     룡정의 비암산 자락에 건립된 강경애 문학비   비암산은 산정의 바위가 가마처럼 생겼다하여 일명 “가마산”이라 부르는 곳 이다. 머리에 두개의 가마를 가진 강경애의 어릴적 별명이 “쌍가매”이다. “쌍가마"라는 그 이역의 녀류작가는 “가마산”이라는 산에 그 문학혼을 묻었고 “가마산”아래의 뭇사람들이 기리고 있다. 그녀의 빼여난 문학업적때문이다. 그녀만큼 그녀처럼 남과 북 그리고 중국에서 공동으로 이의가 없이 높이 평가하는 문인도 드물다. 높이 2.6m의 강경애문학비는 오늘도 비암산 중턱에 외홀로 서있다. 관광기이면 일송정을 찾는 해외 관광객들이 발을 잇지만 관광뻐스들은 바로 일송정을 향하는 길녘 산중턱에 세워져 있는 그의 문학비를 지나치기가 일쑤다.   늘 소복차림이였다는 강경애처럼 하얗게 선 문학비에는 약력과 함께 "강경애는… 최하층 인민들의 생활을 동정하고 올곧은 문학정신으로 간악한 일제와 그 치하의 비정과 비리에 저항하면서 녀성 특유의 섬세하고 부드러운 언어로 아름다운 문학 형상들을 창조한 우리 현대문학의 대표적인 녀성 작가이다. … … "라고 새겨져 있다.   "장백산" 2014년 2월호    ☞ 김혁 문학블로그: http://blog.naver.com/khk6699 ☜아    ☞ 웹진.중국조선족문학: http://cafe.daum.net/wpd99 ☜ 아  
14    춘사(春史) 나운규 댓글:  조회:2286  추천:16  2016-04-11
  . 칼럼.      춘사(春史) 나운규       ■ 김혁         ▲ 룡정 명동학교 출신의 한국 영화의 거장 라운규 1,   한국영화의 개척자인 춘사 나운규 선생을 기리는 춘사영화상이 지난 5일 저녁 서울 삼성동 코엑스 오디토리움에서 이 개최됐다.   2016 춘사영화상 시상식에서 최우수 감독상은 상해에서의 친일파 척결을 다룬 을 연출한 최동훈 감독에게 돌아갔고 의 김혜수와 의 유아인이 남녀주연상을, 임권택 감독이 공로상을 수상했다. 위안부 소재를 다룬 영화 은 관객이 뽑은 최고 인기영화상으로 선정됐다.   시상식은 지난해 6개 부문에서 올해는 10개 부문으로 시상 규모가 커진 가운데 진행됐다.  춘사 영화상은 한 때 위상이 추락하며 개최가 중단되기도 했으나, 2014년 영화상 시상이 재개된지 3년이 지나면서 제 자리를 잡아가고 있음을 보여줬다.   한편 “춘사 영화상”은 한국영화계의 선구자인 춘사 나운규의 영화에 대한 열정과 삶에 대한 투혼을 기리고자 개최되는 영화제이다. 한국영화감독협회에서 제정, 지난 1990년 12월 24일 제1회 춘사영화예술상 시상식을 개최하면서 출범했다.   신인남우상은 의 강하늘이 수상했다. 지난 2월 나운규의 후배로, 같은 명동학교 출신인 시인 윤동주의 일대기를 영화화한 에서 윤동주로 열연했던 그가 트로피를 거머쥔데에 대하여 각별한 의미를 부여해 본다.   2,   북간도 명동학교의 수업시간. 모두다 산수풀이에 열중하고있는데 맨 뒤에서 키득키득 웃음 소리가 들려온다. 수학선생이 이상하여 슬그머니 다가와 보니 맨 뒤에 앉은 학생이 책뒤에 거울을 숨겨놓고 비춰보며 벙긋벙긋 웃음을 웃고 있다. 그 모습이 한심하여 선생은 학교의 김약연교장에게 이 일을 고해바쳤다. 이에 김교장은 웃음으로 넘기며 말했다.    “그 녀석이 장차 뭔가 되기는 될 거야”.   수학시간에 표정 연기에 열중하던 명동학교의 그 아이. 교장선생이 뭔가는 될 듯 하다고 “될성부른 떡잎”으로 예견한 그 아이가 바로 그후 불멸의 명화 “아리랑”을 제작한 한국영화계의 선두주자 나운규이다.        ▲ 용정 명동학교 시절의 나운규   춘사 나운규는 1902년 10월 함경북도 회령에서 나형권의 셋째 아들로 태여났다.    한말의 풍운기에 태여난 나운규는 일제의 발길에 짓밟혀가는 한반도의 북녘 끝 회령에서 유년시절을 보냈다.   나운규의 아버지 나형권은 구 한국군 부교(副校)로 지내다 군대가 해산당하자 집으로 돌아와 독학으로 한의학을 공부하여 한의사로 전신(轉身), 한약방을 하면서 후학들을 키웠다. 그는 아들 셋과 딸 셋 여섯 남매를 두었는 데 그중 셋째가 나운규었다.   나운규가 회령에서 신흥학교에 다니던 1915년 무렵은 개화기 신문화 류입의 한 물결인 신파극(新派劇) 운동이 한창 번져가고 있을때였다. 때때로 회령 읍내에도 이따금씩 신파극단이 찾아와 순회 공연을 했는데 나운규는 공연을 빠침없이 찾아 보며 이 신파극단에 흥미와 매력을 느끼게 되었다. 배우들의 과장된 몸짓과 말투를 며칠씩 두고 흉내를 냈다. 나운규의 연기 재질은 아마 이때부터 싹트기 시작했다.   1916년 8월, 14살의 나운규는 윤봉춘 등 죽이 맞는 친구들과 더불어 회령 읍내 유일의 극장 만년좌에서 최초의 자작극 “2전 5리(二錢五厘)”를 공연하려했다.   공연허가 신청을 받은 일본 헌병대에서는 미성년자들이라고 집에 가서 부친의 도장을 받아 오라고 퇴짜를 놓았다. 이에 나운규는 아버지의 도장을 훔쳐 찍고 다른 허가를 받아냈다.   그런 다음 가두 선전을 한답시고 울긋불긋한 차림의 무대 분장을 하고 회령 읍내 번화가를 누비며 퍼레이드를 벌렸다.   우여곡절 끝에 연극은 막을 올렸다. 한창 신나게 공연중인데 갑자기 입구 쪽이 시끄러워지더니 나운규와 동인의 부형들이 달려 들었다. 집안 망신시키는 놈들이라며 매타작을 퍼부으니 극장 안은 삽시간에 수라장이 되어 버리고 연극이고 뭐고 풍비박산이 나고 말았다.   이렇게 하여 나운규 대본  연출  주연의 최초의 자작극 공연은 실패로 돌아갔다.   나운규는 15살에 마음에도 없이 결혼한 녀인과의 사이에서 이듬해 아들 종익을 낳았고 19세가 되던 해에는 딸 행자를 낳았다.   예고도 없이 학교가던 길에 붙잡혀 말잔등에 태워져 강제로 결혼식을 올린 혼인이 싫어져 나운규는 무단 가출을 했다.   고향을 떠난 나운규가 직행한 곳은 북간도였다. 1918년 두만강을 건너 북간도에 있는 명동학교에 입학했다.   북간도에서의 나운규의 행적은 동인들에 의해 적지 않게 전해지고 있다.   북간도에서 나운규는 조선인들이 무은 간도국민회에 가입하였다. 북간도에서 발간하는 “독립신문”을 고향인 회령으로 배달하는 책임을 맡고 한 달에 몇 번씩 두만강을 은밀히 건너곤 했다.   그러다 도판부사건(圖判部事件)이라 불리는 사건에 휘말려 든다. 도판부 사건이라는 것은 북간도에 있던 반일독립군들이 두만강을 건너가 회령에 있던 경찰서와 수비대를 습격한 사건이다. 그 때에 나운규와 윤봉춘은 일제의 수비부대 간의 교통을 차단하기 위해 회령과 청진 사이에 있는 무산령 터널을 폭파하고 전신, 전화 시설을 끊는 일을 맡았다.    1919년 4월 초 나운규는 지인들과 함께  북간도 한인교회로부터 독립선언문과 태극기, 격문 수천장을 두만강을 넘나들며 회령을 비롯한 여러 고을에 잠입하여 나누어 주고 거사 날짜와 시간을 알려주었다.   하지만 예정시간을 눈앞에 두고 거사는 왜경에게 발각되고 말았다. 더 이상 지체할 수 없게 된 사람들은 거리로 뛰쳐나가 만세를 부르며 반일 시위에 들어갔다. 그러나 이미 준비를 갖추고 있던 왜경의 총칼에 수많은 사람들이 거리에서 피를 뿌리며 죽고 부상당하고 붙잡혀갔다.   나운규의 절친 윤봉춘은 이때 붙잡혀 치안유지죄 위반이라는 죄명을 쓰고 6개월간 징역살이를 하게 되였는데 민첩한 나운규는 용케도 왜경의 추적에서 벗어났다.   그때부터 나운규의 정처없고 고달픈 방황생활이 시작되었다. 나운규는 국자가(지금의 연길시), 두도구등지를 헤매다가 시베리아 연해주, 해삼위, 노령(露領)으로 정처없이 떠돌아 다녔다.   그렇게 죽을 고비를 다 겪어가며 돌다가 풍문이 가라앉고 거지꼴이 되어서 나운규는 다시 로령에 가까운 훈춘으로 건너왔다. 훈춘으로 온 운규는 친구 김용국과 함께 북간도국민회(北間島國民會) 소속 독립군에 가담하게 되었다.   여기서 인쇄물 운반, 군자금 모집 등의 활동을 하던중1920년 10월, 나운규는 김좌진이 이끄는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 부대가 청산리에서 일본군과 접전해 3천 여 명을 사살하는 대첩을 거두였다는 승전보를 들었다. 또 서로군정서 사관양성소에서 생도 298명을 북간도 왕청현의 부대에서 배출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나운규의 가슴은 북치듯 뜨겁게 울었다. 나운규는 김용국과 함께 신흥무관을 찾아가기로 마음먹었다.   신흥무관학교에서 6개월간 훈련을 받으면 광복군 소위로 임관된다는 이야기를 듣고 서둘러 출발했다.   용정에서 약 200리 떨어진 명월구(明月構)에 다달았을 무렵 여로에 지친 두 사람은 다 지쳐 드러눕고 말았다. 그런 두 사람에게 나이 많은 독립군 선배는 “젊은이들은 일단 집으로 돌아가 학문에 힘쓰고 배운 지식을 이후의 독립을 위해 쓰도록 하는 게 좋겠네”하고 타일렀다.   나운규는 선배들의 충고에 따르기로 작정하고 다시 두만강을 건너 회령으로 돌아갔다.   집으로 돌아온 나운규는 돌이 지난지 얼마 되지 않는 어린 딸 행자를 두고 다시 서울로 올라간다.   1921년 봄 중동학교 고등예비과를 거쳐 연희전문학교 문과에 입학했다.   당시는 영화의 전성시기였다. 단성사니 장안사니 연흥사니 하는 극장들이 서울 시내 여기저기에 세워졌고 “팔딱팔딱 뛰는 활동사진”이라 불리는 영화는 숱한 젊은 남녀들을 그 마력으로 현혹시켰다.   영화에 미치기 시작한 나운규는 학교에서 공부하는 날보다도 극장에 가서 활동사진 보는 시간이 더 많았으며 길을 가다가도 배우의 표정과 동작을 흉내 내기도 하였는데 이는 몇 년후 영화계의 혜성으로 등장할 나운규의 예고편이라고 할 수 있었다.   영화를 보고 돌아와서는 방에 붙박혀 감상문을 쓰고 각본을 만들어 보기도 했다.   그렇게 영화에 심취되여있던 나운규에게 1922년 봄, 또다시 시련이 닥쳐왔다.   회령경찰서에서 파견된 형사에게 친구 윤봉춘과 함께 지명수배자로 체포되였던 것이다. 북간도에서 면목이 있는 사람 하나가 순사 시험에 응시하면서 “도판부사건”의 연루자로 나운규와 윤봉춘 등 옛동지들을 팔아 넘겼던 것이었다.   21살의 나운규는 윤봉춘과 함께 1년 6개월의 이른바 치안유지법 위반징역형을 선고받고 청진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이때 형무소에 함께 수감 된 이춘성이라는 독립운동가를 알게 되었는데 그에게서 춘사(春史)라는 호를 지어 받았다고 한다.   감옥에서 치른 옥고는 북간도와 시베리아 벌판을 류랑하던 쓰라린 체험과 함께 그의 반일사상의 뿌리를 더욱 깊게 하였고 저항의식을 더욱 북돋아주어 훗날 그의 작품세계에도 이 극기의 고통은 여실히 반영되었다. 그의 대표작으로 지칭되는 “아리랑”, “풍운아”, “사랑을 찾아서” 등이 모두가 그 소산이었다.   1923년 출감 이후 나운규는 조선키네마에서 단역배우로 배우 인생을 시작하였다. 윤백남 감독의 “운영전”에 대사조차 없는 가마꾼으로 출연했던 나운규는 이듬해 백남프로덕션의 첫 번째 작품 “심청전”에 심봉사로 출연하였다. 또 조선키네마에서 만든, 자유련애에 대한 이야기를 다룬 “롱중조(笼中鸟)”에 조연으로 출연하여 연기력을 보이기 시작했다.   마침내 1926년 나운규는 조선키네마프로덕션의 지원을 받아 자신이 오랫동안 구상하고 각본을 쓴 “아리랑”을 제작했다. 자신이 감독하면서 1인 3역의 역할을 해냈다.  “아리랑”은 개봉하자마자 요즘의 형용어를 빈다면 그야말로 대박이 났다.   영화는 1926년 10월 1일 조선총독부 청사 완공 기념식이 있은 뒤 같은날 오후 5시 단성사에서 개봉되었다. 영화가 끝나자 객석은 온통 눈물로 얼룩졌다. 정신을 놓아버린 청년, 그의 녀동생, 그녀를 사랑하는 오빠의 친구가 친일파의 횡포에 저항하며 벌어지는 이야기는 일제 강점기, 식민의 고통에 시달리던 사람들에게 뜨거운 감동을 안겼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가수 이정숙은 울먹이며 아리랑을 불렀고 관객들 모두가 따라불렀다. 노래가 울려퍼지자 순경이 호각을 불어 상영을 중지시켰지만 관객들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나라 잃은 슬픔은 한 편의 영화를 통해 그렇게 터져나왔다.     ▲ 영화 "아리랑" 포스터   이렇게 해서 민족의 영화 “아리랑”은 서울뿐만이 아니라 전국 곳곳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얻으며 상영되었다. 평양에서는 관객이 너무 많이 들어서 극장의 들보가 부러지는 소동이 벌어지기도 했다.    “아리랑 고개를 넘어 서울로 아리랑 구경을 가자”는 유행어까지 생겼다   영화의 주제가인 “아리랑”을 부른 가수 리정숙은 이 노래로써 하루아침에 유명해졌고 “아리랑”이라는 민요는 이때로부터 온 민족의 애창곡이 되었다.    “아리랑”은 말 그대로 활동사진 영역에 머물러 있던 한국영화를 획기적으로 진전시켰다. 이전까지 신파물이나 외국 번안물이 대부분이었던 시절 “아리랑”은 영화계에도 신선한 충격을 안겨주였다.   “아리랑”이 상영되는 곳은 “의열단 단원이 폭탄을 던진것과 같은 열기가 감돌았다”는 등의 평가는 문헌이나 증언들 속에서 무수히 발견된다. “아리랑”은 일제시대 전 시기의 문화예술계를 통틀어 가장 강력한 민족주의적 생산물이 되였던 것으로 보인다.   “아리랑”의 성공으로 조선 키네마는 계속하여 나운규에게 각색과 감독과 주연을 아울러 맡겨서 1926년에는 “풍운아”를 제작하게 하였는데 이 영화도 또한 조선 극장에서 13일 동안이나 공연하는 성공을 거두었다. 이로써 나운규의 영화 재능은 충분히 증명되었다.   1927년 나운규는 윤봉춘 등과 함께 “나운규 프로덕션”을 설립했다. 이 자신의 이름을 건 프로덕션에서 “옥녀”·”사나이”·”사랑을 찾아서”를 만들었고 1929년에는 한국 최초의 문예영화라 할수있는 “벙어리 삼룡”을 제작하였다.     “아리랑”의 성공 이후 나운규는 한국영화사에 또 하나의 기록이 될 시도를 하였다. 새로 제작하는 “아리랑 3편”을 당시 막 인기를 끌기 시작한 발성영화로 제작한 것이다. 이때부터 한국영화는 변사가 대신 대사를 말해주던 무성영화시대에서 벗어나 배우가 그대로 대사를 하면서 연기하는 유성영화 시대로 들어가게 되었다.   그러나 나운규의 개인적 인기와는 달리 “나운규프로덕션”은 경영이 순조롭지 못했다. 결국 영화사는 해체되었다.   1931년 나운규는 “임자 없는 나루배”에 출연하여 오랜만에 관객들의 가슴에 남을 좋은 연기를 보여주였다. 일제 강점기 배사공 부녀가 겪는 비극적 현실을 그린 영화는 “아리랑”과 함께 일제시대 문제작으로 손꼽힌다.   이후에도 나운규는 여러 편의 영화를 자신이 감독하고 직접 출연하면서 만들어 내며 내내 한국영화의 중심에 있었다. 그러나 오래동안의 생활고와 작업의 과로 등이 겹쳐 지병인 폐결핵이 악화되면서 약관35세의 아까운 나이에 요절하고 말았다.     3,   나운규는 영화계에 입문해 활동한 약 15년 동안 29편의 작품을 남겼고 26편의 영화에 출연했다. 그 중에서 직접 각본·감독·주연을 맡은 영화가 15편이나 된다.   만약 력사서술에 가정이 허락된다면 나운규가 빠진 일제강점기의 조선영화사는 대단히 빈약했을 것임이 틀림없다.   그가 일관되게 추구한 예술테마는 식민통치의 억압과 수탈에 대한 저항, 통치권에 결탁한 자본가에 대한 비판이었다. 그는 “투철한 민족정신과 자유로운 영화 예술관을 가진 최초의 시나리오 작가이자 감독 그리고 배우였으며 초창기 한국영화를 이끈 영화계의 선구자”였다.     - “청우재(聽齋雨)”에서   [출처] 춘사(春史) 나운규|작성자 김 혁     ☞ 김혁 문학블로그: http://blog.naver.com/khk6699 ☜아
13    “드래곤” 신채호 댓글:  조회:1709  추천:11  2015-12-09
칼럼   “드래곤” 신채호   김혁     ​   1 애니메이션 “드래곤 길들이기2”가 제72회 골든글로브 시상식에서 장편 애니메이션상을 수상하는 영예를 안았다. 또 한번 드래곤 소재가 애니메이션 영역에서 어필한 것이다. 중국에서도 며칠전 드래곤을 소재로 한3D 애니메이션 “드래곤네스트 (龍之谷)” 가 개봉, 흥행을 보이고있다. 드래곤 소설도 다시 강세를 보여 판타지 소설 “드래곤 라자”의 해외 인세 수입이 5억원을 돌파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1998년 출간돼 한국 판타지 문학 붐을 주도, 지금까지 모두 130만부 이상 팔려나간 이 드래곤 소설 은2005년 일본에서 출간돼 50만부, 2007년 타이완에 출간돼 30만부가 팔렸으며 “해리포터”의 작가 조앤 K 롤링과 함께 “올해의 해외 인기작가 20인”에 선정되였다. 게임, 만화, 라디오 드라마로 제작된 데 이어 고등학교 교과서에 수록되기도 했다. ​ 드래곤은 소설과 영화에서는 자주 등장하는 소재이다. "이용자들의 상상력을 자극하기 쉽다는 특징으로 최근에는 모바일 게임에까지도 단골소재로 등장하고 있다"고 전문가들은 분석한다.   2 80여 년전에 이미 우리 작가가 쓴 드래곤 소설이 있다. “용과 용의 대격전”이라는 제목의 신채호(申采浩)의 장편소설, 1928년에 창작되었다. 신채호가 베이징에서 망명 생활 말기에 유고로 남긴 이 작품은 우화형태의 혁명소설로아나키즘(개인을 지배하는 모든 정치 조직이나 권력, 사회적 권위를 부정하고 개인의 자유와 평등, 정의, 형제애를 실현하고자 하는 사상이나 운동)의 교본(敎本)으로 알려져 있다. 동양의 드래곤과 서양의 드래곤이 격투를 벌이는 내용이다. 민중의 편에서 동양의 용 미리와 맞서 싸우는 서양의 용 드래곤. 미리가 끊임없이 민중을 억누르는 봉건주의 압제자의 대표라면, 드래곤은 지상의 민중혁명을 구현해 가는 지도자로 상징된다. ​ 조선 말기의 무력한 봉건왕조와 사대부에 실망한 단재 선생은 룡의 꿈틀임에 빗대어 민족의 활로를 소망하였던 듯하다.   ​ 3 단재 신채호 선생 탄생 135주년 기념식이 일전 한국 청주 충청북도교육청 화합관에서 열렸다.  단재문화예술제추진위원회와 단재 신채호 기념사업회가 주최한 이날 기념식에서 충북지사, 충북도교육감, 시민사회단체 관계자 등 150여명이 참석해 단재 선생의 약력보고,  헌시 랑송, 단재 시 랑송 등의 형식으로 아버지의 고향인 청주시 상당구 낭성면에서 유년기를 보낸 신채호선생을 기리였다.    탄생일을 맞아 일제강점기 역사학자, 독립운동가, 언론인, 문학인 등 팔방에서 이름을 떨친 단재 신채호선생의 일대기를 반추해 보았다. ​ 신채호는 1880년 12월 8일 충청남도 대덕군 산내면 어남리에서 신광식과 밀양 박씨 사이에서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호는 단재(丹齋), 한놈, 연시몽인 등을 필명으로 사용하였다. 8세에 아버지를 여의고 할아버지 신성우 슬하에서 한학을 공부했다. 9세에 자치통감을 배우고, 14세에는 사서삼경을 모두 마쳐 신동이라는 소리를 들었다. 삼국지와 수호지를 애독하고 한시를 읊을 정도로 한문실력이 높아졌다. 19세에 나던 해인1898년 성균관에 입학하였으며 독립협회 활동을 하여 투옥을 당하기도 하는 등 이 무렵부터 애국계몽활동을 시작하였다. 1905년, 황성신문의 논설위원으로 위촉되어 장지연이 을사늑약에 반대하는 “시일야방성대곡”의 집필을 도왔으며 장지연이 투옥되자 그를 대신해서 황성신문을 이끌었다. 이후 황성신문이 폐간되자 1906년에 박은식의 도움으로 대한매일신보의 주필로 초빙되었다. 이 시기 신채호는 활발한 저술 활동을 펼쳐 많은 논설과 전기를 다수 출판하는 등 활발하게 언론 활동을 하였다. 1907년에는 안창호가 주도하여 비밀리에 결성한 신민회에 가입하여 신민회 취지문을 작성하였으며, 국채보상운동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 국권의 피탈이 확실시되자 신채호는 애국지사들과 협의하여 1910년 4월, 중국으로 망명하였다. 중국 칭다오에서 안창호, 이갑 등 신민회의 간부들과 독립군 기지 창건 문제를 논의하여 만주 밀산현에 신한민촌을 만들어 “독립군기지로 활용하자”는 계획을 세웠다. 9월, 러시아 제국의 블라디보스토크 인근에서 신한촌이 형성되는데 참여하였으며 연해주에서 발간된 한글 신문인 해조신문의 발행에도 참여했다. 1911년 12월 권업회라는 교민단체를 조직하고 권업신문을 발행하여 독립사상을 고취하였으며 1912년에는 광복회를 만들어 활동하였다. 1915년 이회영의 권고로 북경으로 옮겨 1919년까지 4년간 체류하였다. 북경에 체류하면서 “조선사통론”, “조선사문화편”, “사상변천편”, “강역고”, “인물고” 등을 집필하였다. 또한 신규식과 함께 신한청년단을 조직하고 박달학원을 설립하여 한인 청년들의 단결과 교육에 힘썼다.   1919년 2월에 일명 “무오독립선언서”에 서명하였으며, 3.1 운동이 일어나자, 상해로 가서 “29인 모임”에 참석하여 임시정부를 발기하기 위한 회의인 임시의정원을 4월 11일 개회하였다. 1921년 1월, 북경에서 독립운동 잡지 월간 “천고”를 창간하였다. 1922년 그는 상하이에 와서 의열단 선언, 즉 “조선혁명선언”을 작성하고 국민대표회의에도 참석하였다. 1923년 창조파 임시정부가 러시아에서 해체되자, 신채호는 실의와 좌절에 빠져 무정부주의와 불교에 관심을 더 깊이 보이게 되었고, 북경의 순치문 안에 있는 석등암에서 출가하여 승려가 되었다. 이후 국사연구에 뜻을 더 깊게 두고 연구에 전념하였다. 1922년 중국역사연구법을 쓴 양계초의 역사연구 방법에 영향을 받아 “조선상고사”를 집필하였다. 1923년 신채호는 의열단장 김원봉의 요청에 따라 상하이로 와서 한국독립운동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의열단 선언, 즉 “조선혁명선언”을 집필했다. 1928년 4월 그는 북경에서 “무정부주의동방연맹 북경회의”를 조직하였고, 이 회의에서 무정부주의동방연맹의 선전기관을 설립하고 일제의 관공서를 폭파하기 위하여 폭탄제조소를 설립하기로 결의하였다. 잡지발행을 위한 자금을 가지러 5월 8일 대만의 기륭항에 상륙하다가 체포되어 7개월간 구속되었으며 재판에서는 “나라를 찾기 위하여 취하는 수단은 모두 정당한 것이니 사기가 아니며 민족을 위하여 도둑질을 할지라도 부끄럼이나 거리낌이 없다”고 갈파하였다. ​ 1929년 5월, 신채호는 조선총독부 경찰에 체포되어 10년형의 언도를 받고 뤼순 감옥에 수감되었다. 1936년 2월 18일, 감옥 독방에서 뇌일혈로 쓰러졌고 사흘 뒤 사망하였다.   용띠로 태어나 평생 민족을 위한 용틀임을 했던 단재 신채호 선생, 그의 행동과 오래된 판타지 작품 속에서 우리는 이 시대 우리가 나아가야 할 한 방향을 엿볼 수 있을 것이다.   -“청우재(听雨斋)”에서                ☞ 김혁 문학블로그: http://blog.naver.com/khk6699 ☜아도 전  
12    영화를 통해 반일운동을 한 김염 댓글:  조회:2915  추천:16  2015-11-03
  . 칼럼 .      영화를 통해 반일운동을 한 김염    김 혁            1,    11월1일 방송된 MBC '신비한TV- 서프라이즈'에서 '그 남자의 진실' 편이 방송되였다.  영화에 빠진 한 젊은 청년이 독립운동가였던 아버지가 일본 첩자에 의해 암살되자 왜경을 피해 중국 상하이로 넘어간 후 40여편의 항일 영화에 출연한 영화 같은 이야기가 방송되였다. 그 주인공이 바로 조선인 영화배우 김염이다.    아시아 영화권에서 세계적으로 이름을 날린 곳은 홍콩, 베이징, 대만이다. 그러나 이곳의 영화는 모두 그 뿌리를 1930년대의 상하이 영화에 두고있다. 1930년대의 상하이는 중국 영화사상 최고의 황금기를 구가하며 “동양의 할리우드”로 불렸다. 바로 그 당시 상하이 영화계에 혜성 같이 나타나 약관의 나이에 “영화황제”로 등극한 한 조선인 청년이 있었다. 바로 김염이였다.    2,    김염(金焰)의 본명은 김덕린이다. 김염은 상하이에서 영화에 출연할 때 바꾼 예명(藝名)으로서 불꽃 ‘염(焰)’자는 루쉰의 산문시 “사화(死火)” 혹은 볼셰비키 기관지 “이스크라”에서 따온 것으로 보인다.    ▲ 김염의 아버지, 반일,독립운동가 김필순   김염은 1910년 4월 7일 서울의 명문 의사집안에서 태여났다.  독립운동자금을 조달했던 아버지 김필순은 중국 치치하얼로 망명했고 이어 일본인에게 독살 당했다. 가족들은 뿔뿔이 흩어졌고 어린 김염은 고모의 집에 의탁되었다. 고학으로 중,고등학교를 다니면서도 운동과 예술 분야에서 감출수없는 끼를 보였던 김염은 1927년 열일곱 살 때 친구들이 마련해준 차비로 단돈 7원을 갖고 상하이로 향했다.    당시 세계에서 뉴욕과 시카고 다음으로 가장 번화한 금융 도시이자 무역 중심지였던 상하이에서 무일푼으로 비참한 생활을 영위하던 김염은 1929년 손유 감독의 과감한 기용으로 드디어 꿈을 펼치게 되였다.  손유감독은 콧날이 오뚝하고 눈매가 시원시원한 발군(拔郡)의 풍모를 금세 알아 보고는 그를 무성영화 “풍류검객”에 주연으로 내세웠다. 영화 속에서 펼치는 그의 개성적 연기, 준수한 외모와 건강미, 지성미는 당시 고정적인 매너리즘에 빠져있던 중국 영화계에 일대 충격을 안겨주며 새로운 영화스타의 탄생을 예고했다.    그후로 김염은 ”일전매'(1931년) “도화읍혈기'(1932년) “모성지광'(1933년) 등에 주연으로 발탁된다. 내용은 대부분 중국 봉건시대의 계급을 뛰어넘는 사랑 이야기로 그의 뛰여난 연기력과 용모를 연거번거 확인해 주었다.  1932년 김염은 서생과 건달의 경계를 넘나드는 인물을 그려낸 영화 “야초한화(野草闲花)”에서 열연을 보이며 일약 스타덤에 올랐다.  출연작마다 대성공을 거둔 김염은 중국 전역을 대상으로 실시한 조사에서 “영화 황제”로 뽑혔고, 중국 영화계에서 유일한 이 계관을 쓴 사람으로 그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했다.    1934년 김염은 손유감독과 손잡고 대표적 항일영화경전인 “대로(大路)”를 제작했다. 영화, 특히 영화의 주제곡은 관중들 속에서 강렬한 반응과 공명을 일으켰다.  훗날, 중화인민공화국 국가의 작곡가로 된 저명한 음악가인 섭이(聶耳)가 영화의 주제곡인 "대로가(大路歌)"를 작곡했고 김염이 직접 노래를 불렀다. 이 노래는 당시 인민들 속에서 가장 즐겨 부르는 애국가곡으로 되었으며 많은 청년들을 항일열조를 불러일으키는 힘으로 되였다. 이렇듯 김염의 항일영화들은 사람들의 발길을 극장으로 향하게 하는 힘이 있었다.        ▲ 김염의 대표작, 중국의 경전 반일영화 "대로"   김염은 또 조선침탈의 괴수 이토 히로부미 저격사건을 다룬 “애국혼'과 항일영화 “장공만리' 등에 출연하는 등 예술인으로서 반일활동에 적극 가담했다.  항일 영화인 “장지릉운'(1936년)은 일본이 홍콩을 점령했을 때 가장 먼저 필림을 찾아 없애버린 영화이기도 하다.  김염은 "9.18사변"이 발발하자 자신의 싸인을 담은 브로마이드(肖像)를 판매 해 항일 자금을 지원하기도 했다.  그야말로 영화를 통해 독립운동을 한 김염이였다.    중일 전쟁이 터졌고 상하이가 함락되자 일본군은 곧 “영화황제”에게 눈독을 들였다. 군부인사가 직접 나서서 김염더러 일본군국주의를 선양하는 영화에 출연하라고 강요했다. 그러나 김염은 "기관총으로 나를 겨눈다고 해도 그런 영화는 찍지 않을 것"이라고 일언지하에 거절하고는 홍콩으로 피신했다.    1947년 녀배우 진이(秦怡)와 재혼했다.  주은래 총리가 “중국의 공주”라 격찬할만큼 뛰어난 미모를 가진 진이는 “녀자농구선수 5번” 등 영화에 출연하며 “일급 배우”의 칭호를 받았다.    몇해전 중국정부가 중국영화 90주년을 기념하여 선정했던 력대 10대 남녀배우에 두 사람은 모두 포함됐다.  현재 구순(九旬)의 고령에도 간간히 스크린에 얼굴을 뵈이고 영화감독까지 맡아 해 “중국영화계의 산증인, 기적”으로 불리는 그는 "남편은 주로 항일투쟁을 다룬 영화에 단골로 출연했다"고 회고했다.    ▲ 김염과 마지막까지 함께 한 부인 진이, 그는 중국영화계의 유명한 원로 여배우로서 "여자농구선수" 등 경전영화에 출연했다.   1962년 은퇴 할 때까지 30여년간 총 40여편의 영화에 출연하며 김염은 중국 영화사에 커다란 궤적을 남겼다.  신중국이 성립된후 김염은 상하이 영화제작소 부주임, 상하이시 인민대표대회 대표, 중국영화작가협회 이사 등으로 활발히 활동했다.  하지만 그의 생활은 여느 거장의 운명과 마찬가지로 그렇게 순탄하지만은 않았다. 리혼의 아픔에다 재혼한 진이와의 사이에 태여난 아들이 정신질환을 앓게되는 불행을 겪었으며 전대미문의 문화대혁명때는 농촌으로 하방되고 안해와 함께 수용소에 갖히는 비운을 경험했다.  장기간의 고역에서 얻은 폐기종 등의 합병증으로 투병 생활을 하던 김염은 1983년 12월 27일 73세로 상하이에서 눈을 감았다.    현재 상하이시내 용화렬사릉원 기념관에 그의 유골이 안치되여 있고 베이징영화박물관에 기념공간이 따로 마련 돼 있다.    3,    김염에 대해 조명한 인물전은 적지 않게 나왔다.    중국에서는 2008년에 “김염과 진이 화전(金焰与秦怡画传)”이, 2011년에 “영화황제 김염전”이 출간되였고, 한국에서는 김염의 외손녀인 박규원이 쓴 김염 평전- “상하이 올드 데이스”가 나와 제1회 “올해의 논픽션상”공모에서 대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그 붐에 편승하여 연변인민출판사에서도 김창석 저로 된 “중국영화황제 김염”을 출간했다.   기자, 작가, 친지들이 앞다투어 영화계의 “황제”, 겨레의 인걸을 다루는 그 행렬에 필자도 합류했다.      필자의 차기 장편소설은 “영화황제” 김염의 일대기를 소설화 한 “수은등(水银灯)의 황제”이다. 작품의 기획은 지난해  전국소수민족문학중점작품지지항목에 선정됐다.  이 항목은 중국작가협회가 소수민족작가들의 작품창작을 지지하기 위해 내놓은 정책으로, 선정된 작품에는 창작기금을 지원하고 출판, 중문번역, 영화, 드라마로의 개편등 혜택을 제공한다.     집필을 다그치면서 제목을 “무성시대(无声时代)”로 고쳐 달았다.  수천권의 영화CD를 소장하고있고 “영화로 읽는 중국조선족”등 장편시리즈를 창작, 련재하면서 영화에 편집광적인 애호를 갖고있는 열혈 매니아로서, 또 근년래 겨레의 인걸들을 픽션과 논픽션으로 번갈아 다루는 작업에 골몰하고있는 필자로서는 우리의 배우 김염은 빠칠수 없는 소재였다.     김염의 영화작품중 대부분은 흑백영화이고, 무성영화이다. 당시 색채도 소리도 없는 어딘가 툽상스러운 영상기술이였지만 한 조선인의 끼끗한 외모와 불타는 열연은 걸음마를 타기 시작한 무성영화에 소리와 색채를 압도하는 이채로움을 보태주었다.     수난많은 민족사와 중국영화사에 커다랗게 클로즈업된 우리민족의 걸출한 예술가- 김염, 그의 모습은 퇴색하지않는 한 컷의 필림으로 지금도 스크린을 빛내이고 있다.    2015-11-1  -“청우재(听雨斋)”에서                  ☞ 김혁 문학블로그: http://blog.naver.com/khk6699 ☜아도 전편을 다시보실 수       
11    전승절열병식과 조선족 작곡가 정률성 댓글:  조회:3313  추천:13  2015-09-04
칼럼   전승절 열병식과 조선족 작곡가 정률성   김혁      1   9월 3일 중국의 수도 북경 천안문 광장에서 “중국인민 항일전쟁 승리 및 세계 반(反)파시스트 전쟁 승리 70주년” 기념식과 사상 최대 규모의 열병식이 개최되였다.   중국의 간거했던 항일전쟁 승리의 의미를 되새기는 동시에 첨단 무기를 통해 중국의 군사굴기를 과시하면서 주요 2개국(G-2)으로 올라선 중국의 “글로벌 파워”를 대내외적으로 천명하는 자리에서, 블라지미르 푸틴 로씨야 대통령, 박근혜 한국 대통령,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 누르술탄 나자르바예프 까자흐스탄 대통령, 최룡해 조선 로동당 비서 등 정상급 외빈 50여명과 각국 외교사절, 중국의 전,현직 지도부 등이 천안문 성루에서 지켜보는 가운데 조선족 음악가의 선률이 천안문광장의 상공에 울려퍼졌다. 그 작곡자는 바로 중국의 군가 “태양따라 앞으로”의 작곡가 정률성이다. ​   2   정률성은 1914년 7월 7일, 한국 전라남도 광주남구 양림정에서 태여났다. 원명은 정부은(郑富恩), 음악도의 꿈을 키우면서 이름을 '선율을 이룬다'는 뜻을 따서 '율성'(律成)으로 바꾸었다. 아버지 정해업(鄭海業)은 일본이 한일병탄을 하자 벼슬을 버리고 향리에 내려와 은거했다. 민족의식이 투철했던 정해업은 자식들에게 일본의 노예교육을 받지 않도록 하기위해 모두 사립학교에 보냈다. 정률성의 첫째, 둘째 형인 정효룡(鄭孝龍)과 정인제(鄭仁濟)는 1919년 '3.1독립만세 운동'에 참가했다가 일본경찰의 체포령을 피해 중국으로 건너갔다. 그들은 이후 중국공산당에 가입했다. 큰 형 정효령은 국내와 중국을 오가며 독립운동을 하다 체포돼 1934년 감옥에서 병사했다. 둘째 형 정인제는 윈난 강무학당을 졸업한뒤 국민혁명군 24군의 중교(中校) 참모로 근무하다 뇌막염으로 세상을 떴다. 부형(父兄)의 영향을 받아 침략자 일본을 증오한 정율성은 어린 나이인 15살 때 전주 사립 신흥중학교를 다니다 광주학생운동에 참여했다. 정률성의 매형 박건웅(朴健雄)은 황포군관학교를 졸업한뒤 북벌전쟁에 참여한바 있다. 그는 1932년 조선 독립투쟁 단체인 의렬단 단장 김원봉(金元鳳)이 교장으로 있는 '조선혁명 군사정치 간부학교'의 교육 주임으로 있었다. 1933년, 정률성은 중국으로 망명한 형들을 따라 부산, 일본, 상하이를 거쳐 중국 남경에 이르렀다. 남경에서 “의렬단”이 꾸린 조선혁명간부학교에 입학하여 군사학과를 배우고 이어 조선민족혁명당에 가입하였다. 이곳에서 정율성은 의렬단 단장 김원봉의  지시로 난징과 상하이간의 일본인 전화를 도청하는 비밀공작을 했다. 김원봉은 정율성이 음악을 좋아하는 것을 알고 주말에 상하이에 가서 공부하도록 지원했다. 반일활동을 하는 한편 시간을 짜내 러시아인 크리노와교수에게서 성악을 배웠다. 크리노와교수는 정율성의 음악천부를 높이 평가하여 그를 이탈리아의 저명한 음악가에 비하여 “동방의 카루소”라고 격찬하였다.   20대의 정률성    1937년 정률성은 상해 부녀구국회 지도자이며 조선혁명가 김성숙의 안해인 두군혜의 도움으로 “중국혁명의 성지” 연안으로 떠나게 된다. 열아홉살의 정률성은 바이올린과 만돌린 그리고 “세계명곡집”을 지니고 간난신고를 겪으며 연안에 도착하였다. 연안에서 로신예술학원을 나왔고 “팔로군 행진곡”, “연수요”, “항전돌격운동가”등 50여 수의 악곡을 창작하였다. 팔로군은 1937년 제2차 국공합작 후에 설립 된 공산당의 주력부대로서 신사군과 함께 화북 지방에서 항일전의 최전선을 담당했다. 당시 팔로군과 손잡고 조선의용대도 눈부신 활약을 펼쳤다. 팔로군의 통일전선 파트너였던 조선의용대는 대일 전선에서 스파이와 배후교란 등 매우 위험한 임무를 기꺼이 맡고있었다. ​   연안시절의 정률성   정률성은 연안에서 탁월한 작사자 두 명을 만나는데 “팔로군 행진곡”의 작사자인 공목(公木)과 “연안송(延安頌)”의 작사자인 녀전사 막야(莫耶)이다. 1939년 정률성은 시인 공목에게 자신이 구상하고 있던“팔로군 행진곡”의 노래말을 써줄것을 부탁한다. 전선에서 풍부한 전투경험을 쌓았던 공목은 자신의 생생한 경험을 녹인 노랫말을 정률성에게 건네주었고 정률성은 같은해 8월에 곡을 완성한다.   “전진 전진 전진!/ 태양을 향한 우리의 대오/ 조국의 대지 위에 섰다/ 민족의 희망을 안은/ 우리의 힘 막을자 누구냐/ 우리는 싸움의 전위/ 우리는 민중의 무장/ 두려움없이 굴함 없이 용감하게 싸워/ 왜놈들을 국경밖으로 몰아내자/아,나팔소리 울린다/ 아 항전의 노래 우렁차다......!”   1939년 겨울, “팔로군 행진곡”은 로예술학원 음악부에서 등사판 소책자로 책으로 엮어져 연안 전체와 전군, 전후방 할것 없이 배포되였다. 이듬해 정률성의 지휘 아래 “팔로군 행진곡”의 첫 공연이 연안에서 열렸다. “팔로군 행진곡”은 건조한 황토고원에서 불붙듯 삽시간에 퍼지면서 모든 항일전사들의 가슴에 깊이 아로 새겨졌다. 격정과 기백이 차넘치는 “팔로군 행진곡”은 군민의 항일의지를 북돋우어주면서 재빨리 널리 류전되였다. 그후 이 노래는 “중국인민해방군행진곡”으로, 1988년에 이르러서는 “중국인민해방군군가”로 채택되였다. 1990년 9월 북경에서 열린 아시안게임 개막식 역시 정률성 작곡의 이 노래의 연주로 시작됐다.   연안 시절 정률성은 그 후날 중국 최초의 여성대사로 주 덴마크, 주 네덜란드대사가 된 정설송과 결혼하여 화제를 뿌리기도 했다. 열아홉 살 나는 사천의 처녀 정설송은 뛰여난 사업 능력과 미모로 연안에서 소문 높은 인기 인물이였다. 그녀는 “연안송”의 작곡자인 정률성을 몹시 숭배하였다. 하지만 정률성의 외국인 신분에 걸려 둘의 사랑은 곤경에 처하였다. 이때 마침 팔로군 포병퇀 퇀장 조선인 무정장군이 마침 연안에 도착하여 정률성에 대해 담보하고 나섰다.    무정은 정율성을 무척 좋아해 막내 동생으로 여겼다. 무정은 두 사람의 순탄치 않은 연예관계를 듣고 이렇게 말했다. "난 정율성을 잘 안다. 뿐만 아니라 율성의 큰형과 둘째 형을 알고 있다. 정율성은 아무런 문제가 없다. 그의 집안은 혁명가의 가정이다. 나와 율성의 둘째 형은 한 지부에서 조직생활을 한일도 있다." 이국적 청춘남녀는 시련을 거쳐 드디여 1941년 말 혁명성지에서 결혼식을 올리게 되었다.  이듬해 딸 정소제(郑小提)가 태여났다. 결혼후 정률성은 무정장군을 따라 조선의용군 소재지인 태항산에서 조선혁명군사학교 교육장을 담임하였다. 그는 학생들을 이끌고 탄우가 비발치는 전쟁터에서 선전을 벌리기도 하고 대중가요창작활동도 펼쳐 나갔다. 그가 창작한 “조선의용군행진곡”과 ”혁명가”등은 중국의 하북과 동북의 항일근거지의 조선의용군들속에서 널리 불려졌다. ​   숙명의 동반자 정설송과   1945년 8.15해방을 맞은 뒤 정률성은 조선의용군과 함께 조선으로 나갔다. 황해도 선전부장을 지냈으며, 해주음악전문학교를 세웠고 보안간부훈련대대부협주단(조선인민군협주단의 전신)을 창건하여 초대 단장을 역임했으며 조선국립음악대학 작곡학부장에도 부임했다. 그 몇 년사이 ”두만강”, “동해어부” 등 30수의 가곡 그리고 “조선인민군군가”를 작곡했다. 김일성 주석은 1948년 그 공로를 인정해 정률성 선생에게 표창장을 수여하기도 했다. “조선인민군군가”는 지난 2006년과 2007년 방북한 김대중 대통령과 로무현 대통령을 맞이해 인민군 군악대가 연주하기도 했다. 중국의 저명한 음악평론가 겸 작곡가 당하(唐河)는 “전 세계에서 한 사람이 두 나라의 군가를 동시에 작곡한것은 극히 드문 일일것”이라고 극찬했다. 이로서 정률성은 두 나라 군가 작곡자로 세계에 유례없는 기록을 남겼다. ​   평양에서 어머니를 모시고   1952년 정률성은 중국에 돌아와 북경인민예술극원, 중앙악단에서 전업작곡가로 있었다. 이 시기 그는 중국의 윈남, 따리등 오지를 찾아다니며 민요수집에 전력하였고 아이들을 위하여 ”평화의 비둘기”등 명동요를 창작하였으며 또 모택동주석의 시사 34수에 곡을 붙이기도 했다. 10년의 “문화대혁명”이 결속되자 창작의 봄을 맞이했던 정률성은1976년 12월 7일 북경 교외의 강에서 물고기를 낚다가 뇌익혈로 쓰러졌다. 향년 62세였다. 사후 정률성은 “팔보산 혁명렬사릉”에 묻혔다. 비문엔 이런 구절이 새겨져 있다. “인민은 영원하며, 률성동지의 노래도 영원하다. 중국인민은 그의 노래를 부르면서 일제 침략자들을 몰아냈고, 낡은 중국을 뒤엎었으며, 새 중국을 건립했다.” ​   만년의 정률성   1978년 북경 음악출판사에서 “정률성가곡선”이 출판되였고 2009년에는 “신중국 창건영웅 100인”중의 한 사람으로 당선되었다. 40여년의 음악생애에서 각종 쟝르의 음악작품 360여수를 창작한 정률성은 중국현대음악사의 한 획을 그으면서 영원한 “인민음악가”로 추앙받고 있다. ​ 3   정률성의 일대기는 일찍 중국의 조선족 영화인들에 의해 영화로 제작되여 스크린에 오른바 있다. 2002년 연변 조선족 자치주 성립 50주년을 기념해 제작된 영화에는 중국영화계의 쟁쟁한 일군들이 대거 투입되었다. 감독으로는 중국드라마부분 최고의 상인 “금독수리”상과 “비천”상을 석권한 중국인 감독과 조선족 감독인 박준희가 메가폰을 잡았고 중국영화계 최고의 상인 “금계상”과 “백화상” 수상자들이 정률성과 부인 부인 정설송역을 맡았다. 영화는 연안에서 뿐만 아니라 북경, 톈진, 창춘 그리고 연변지역을 폭넓게 전전하면서 외경을 찍었다. 영화는 만들어진 후 평양국제영화제에서 특별상을 받았고 한국광주영화제에도 초청, 상영되였다.   지난해7월 방한한 시진핑 주석이 서울대 강연에서 중·한 우의의 상징으로 정률성을 언급하다시피 중국에서의 정률성의 위상은 높다. 하지만 고향이 한국인 한국사회에서 정률성이라는 이름은 오래동안 금기시 되어왔다. 지난 세월 이념과 랭전(冷戰)의 장벽속에 갇혀서 정률성 선생의 실체는 한국인들에게는 오래동안 베일속에 가려 있었던것이였다. 그러다 최근 정률성 탄생 100주년을 계기로 중한 량국에서는 기념음악회, 일대기 영화화 등 관련 행사들이 잇달아 열리면서 그에 대한 재평가 움직임이 활발히 일고 있다.   한국에서는 아직도 정률성에 대해 이념의 색안경을 건 시각으로 보는 사람들이 많다. 심한 이데올로기의 질곡이 여전히 한 천재음악가의 명성과 자유를 옥죄고 있다. 때문에 정률성과 그의 가족들에 대한 항일독립투쟁 포상은 물론 공적조차도 제대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일제의 살벌하고 등등한 치하 당시 수많은 독립운동가, 애국투사들이 사회주의 계열에서 활동했는데 이는 독립운동의 한 방편이었음은 엄연한 사실이고 그들의 치렬한 반일의식에 대해서도 세상이 다 아는 일임에도 말이다. 정률성선생이 한국 광주에서 태여나 중국에서 반일에 투신했고 음악을 무기로 우리 민족의 혼을 전해 세계인을 감동 시킨 민족의 대음악가라는것을 잊어서는 안된다. 두 나라의 군가를 작곡한 진귀한 기록을 세워놓은 인물로서 선생은 일제치하 중국대륙을 무대로 항일독립운동에 투신하면서 국가의 자존과 민족의 얼을 잊지않았고 몸과 혼을 불살랐다. 음악가로서나 혁명가로서나 그이는 온 민족의 추앙을 받을 만한 선각자임이 분명하다.   총 100분 가량 진행된 전승절 열병식 전 과정은 중국중앙 텔레비의 주요채널들을 통해 생중계되고 인터넷을 통해 전 세계로 전송됐다. 그와함께 정률성이 남긴 장쾌한 선률은 온 누리에 메아리쳤다.   2015년 9월 3일   -“청우재(听雨斋)”에서  ☞ 김혁 문학블로그: http://blog.naver.com/khk6699 ☜   중국 인민해방군가 정률성 작곡/ 공목 작사  (삼각버튼을 누르세요)  
10    육필, 련꽃무늬 밥상 위를 달리다 댓글:  조회:1986  추천:11  2015-07-27
육필, 련꽃무늬 밥상 위를 달리다 - 대하소설 "해란강"의 저자 리태수선생을 만나   김 혁 리태수 선생님과    지난해의 이 봄날, 연길시 도심에서 위치한 시대광장에서 제2회 독서절활동이 성황리에 펼쳐지고있었다. 그때 광장의 가녁에 설치된 도서코너에서 나의 눈길을 대번에 사로잡는 책이 있었다. “해란강"... 정다운 고향의 강 이름을 딴 책의 제명이 마음에 들었고 그 저자가 다름아닌 고향의 문학스승 리태수선생의 작품이라는데서 좋았고 무엇보다도 대하소설이라는 부피가 주는 충격에 사로잡혀 들었다. 그로부터 얼마후 나는 선생님께서 몸소 싸인해 보내주신 “해란강”의 전(前) 4권을 무겁게 받아들었다. 그리고 봄양기가 꿈틀거리는 이 봄날 다녀온지 퍽 오래되는 고향으로, 문학스승 리태수선생님이 계시는 룡정으로 나는 달려 갔다.   룡정 안민소학교부근에 위치한 선생님의 집에 까지 도착했을 때이른 아침임에도 불구하고 선생님은 밖에 나와 기다리고계셨다. 너무 오랜만에 만나는 선생님의 손을 꼭잡고 유명작가의 이름에 어덴가 걸맞지 않을 낡은 건물 낮은 층수의 선생님의 집에 들어섰다. 문학도시절 대중없이 찾아가도 언제나 특유의 엎딘 자세로 글을 쓰시던 선생의 모습이 순간 뇌리에 떠올랐다. 인테리어가 퍽 오래된 낡은 집, 하지만 집안 가득 “문자향 서권기(文字香 书卷气)”는 배여 있었다. 서재에 들어서자 선생이 밥상을 펴놓았고 차탁대신 밥상에 쏘파대신 맨땅에 우리는 마주 앉았다. 역시 퍽 오래된 밥상, 옻칠이 군데군데 벗겨져있는 두리넓적한 밥상이였다. 하지만 련꽃무늬는 아직도 남아 서기롭게 피여있었다. 그 밥상이 선생님의 창작전초(前哨)라고 했다. 꿈많은 문학도시절이였던 80년대 중기, 나는 룡정의 문학도들과 어우러져 문학동아리인 “희망봉”협회를 만들었고 리태수선생님을 비롯하여 김재권, 오흥진 등 당시의 중견작가들이 흔쾌히 우리의 고문을 맡아주셨다. 선생님의 사모님과 나의 어머니가 한 학교동료라는 “우세”를 빌어 나는 시시때때 선생님의 집으로 뛰여들곤했다. 난삽하고 미숙한 작품임에도 부끄러움도 모르고 정독했고 선생님은 빙그레 미소를 띈채 그 긴 작품들을 마지막까지 들어주셨고 세세하게 수개평을 달아주시곤했다. 나의 처녀작 “피그미의 후손”이 발표되자 기뻐마지 않으며 우리 집까지 친히 찾아오셔 축하의 술잔을 들어주었다. 그후 선생님을 위시로하여 룡정의 작가들이 “보름회”라는 문학동호회를 창설했다. 기성작가들과 문학애호가 20여명으로 구성된 동호회는 보름에 한번씩 작품합평회를 가졌다. 그때 이미 연길의 “길림신문사”에 전근해 있었지만 나는 보름에 한번씩 룡정으로 달려가 작품합평회 그 열기의 현장에 뛰여들었다. 그때의 그 열렬하고 진지했던 문학분위기는 열혈문학도였던 나에게 아직도 화인(火印)처럼 남아있다. 그런 인연의 대스승님이였기에 선생님의 대하소설의 출산을 두고 나의 기쁨은 그 누구보다 진실했고 크기만 했다. 어제에 대한 회포가 잠간 오간뒤 거두절미하고 문학에 대한 화제가 밥상우에 진담으로 굴렀다. 그 련꽃무늬의 밥상을 마주하고 앉아 나는 선생님의 생애와 작품을 더듬어보는 시간을 가졌다. 선생님은 정밀한 기억력으로 지난 시간들을 반추해 냈다. 리태수(李泰洙)선생은 1936년 10월 길림성 연길현 평안구 유신촌에서 아버지 리종식과 어머니 김숙자사이에서 항렬 셋째로 태여났다. 그래서 문필활동을 시작한후 때로 필명을 리삼(李三)이라 짓기도 했다. 룡정에서 학업을 마치고 1956년에 중국인민지원군에 입대했다. 원체 선생의 꿈은 흰 가운을 걸친 의사였다. 광복이 나던 무렵, 동생이 당시 괴질이였던 장질부사로 죽었고 동생의 주검을 지켜보면서 꼭 세상질병을 치유할수 있는 의사로 되여야겠다는 생각을 눈물과 함께 머금었었다. 의과대학 지망생이였지만 가정 여건으로 꿈을 이루지 못했고 미련은 남아 문화대혁명기간 맨발의사로 활약하기도 했다. 지금도 어중간한 두통, 설사쯤은 침 몇대로 고칠수 있다는 선생의 서가에 얹혀있는 빛나는 침통이 보였다. 무선전병이 되여 강원도 이천에으로 종군한 그는 손풍금도 잘치고 시랑송도 곧잘하는 매력덩어리 젊은 군인이였다. 기온이 찬 강원도에서 눈속에 피여있는 진달래를 보고 부푸는 애련과 감수를 머금었고 감흥을 못이겨 조기천의 시를 소리높여 읊기도 했다. 1959년에 복원, 처녀시 “복원군인의 노래”를 《연변문학》 3월호에 발표했다. 그후로 련줄로《연변일보》에 등지에 시 “초상화”, “새해에 드리는 세배”등 여러수를 발표했다. 화학공장에 취직하여서도 넘치는 끼를 주체못하고 업여연출대를 휘동하고 다녔고 가사도 쓰고 연출도 맡고 손풍금 연주도 했다. 1971년 연길현문화관으로 전근, 관원을 거쳐 군중문화보도조 조장을 맡았다. 당시 문화관에서는 매년 200일 하향이라는 규제가 있었는데 그렇게 오랜 시일 깊은 산골에서 순박한 농군들과 함께 하면서 많은 작품소재를 얻었다. 시창작외에도 연극창작에도 기량을 보여 대창극 “꽃피는 양돈장”, 촌극 “쓸데없는 경쟁” 등을 써냈고 주과외연극콩쿠르 창작1등상을 받기도 했다. 소설은 1974년 10명의 합집으로 된 총서에 단편 “우두봉의 매” 를 발표하면서 시작했다.  한편 아동문필회에 다니면서 아동문학쟝르에도 흥미를 보여 1982년 “세계동물운동회” 라는 동화집 단행본을 펴내기도 했다. 1984년 단행본 “체포령이 내린 ‘강도’”를 출판, 당시 십분 류행되였던 반특(反 特)제재인 작품은 동북3성 조선문우수도서 3등상, 전국 우수도서 2등상을수상했다. 1986년에는 5막6장으로 된 대형가극 “기생 봉선아씨”를 창작, 룡정현예술단의 공연으로 무대에 올렸다. 20년대 룡정에서 발생한 15만원 탈취사건 등 반일사건을 모티브로하여 박진감있는 스토리로 엮어진 가극은 당시 작지 않은 센세이숀을 일으켰다. 다쟝르를 넘나드는 선생님의 행보는 이에 그치지 않았다. 1988년 텔레비죤소품 “홈”(합저)을 창작, 전국콩쿠르에서 “금우상” 1등상 수상핶고1988년 가사 “산향길”와 “들놀이 가자 꽃놀이 가자”로 주정부 진달래문예상 수상, 1989년 국경 40주년 전국과외문예콩쿠르에서 “특등상”을 수상했다. 복격적인 소설창작으로 단편소설 “달동네” 등 80여편을 발표했고 텔레비죤극본 “한석봉과 그의 어머니”, “깍쟁이량반”등을 내놓았으며 “진달래꽃동산”, “산간의 마방울소리” 등 가사를 150여수 발표했다. 그중 “사회주의조국을 노래부르자”, “어머니 당이여 고맙습니다.”, “고향산”, “따사로운 품” “고임돌” 등 작품들은 중소학교 교과서에 수록되여 지금까지 읽혀지고있다. 여러가지 쟝르와 문체의 집필에 대해 선생은 장기간 문화관 일군으로 지낸 직업적 특수성에서 인기된것이지만 또한 작가라면 어느한 쟝르나 문체에 얽동여서는 안된다고 주장한다. “시창작을 하면서 형상사유를 제고할수 있었고 연극에서는 대화를 정제하는 법을 배웠으며 동화쓰기에서는 작가의 심리를 정화할수 있었다”고 선생은 정리해 낸다. 그리고 매쟝르에는 정도 다르게 자신이 경험한 삶의 편린(片鱗)들이 슴배여 있다고 말한다.  이러한 쟝르에 대한 다양한 수용과 탐구는1993년 《이야기천지》를 창간하기에 이른다. 리태수선생이 1임 주필을 담당한 통속문학지 “이야기 천지”는  내부간행물에 불황의 출판풍토에도 불구하고 발행부수 1만5천부라는 놀라운 “전적(前績)”을 자랑했고 독자들의 다양한 수요에 걸맞는  출판모식의 실험에서 좋은 본을 보여주었다. 선인들이 내놓은 “량춘백설” “하리바인”의 도리는 오늘날에도 적용되는바 창작과 출판에서 과감하게 시장수요에 맞추어야 한다고 선생님은 력설한다. 하여 신문의 폐간을 가슴아파 하며 무순에 까지 찾아가 타지방 신문과의 제휴방안을 내놓으며 신문발행번호를 얻으려 로심초사했던 그였다.  “문학은 한 민족의 얼굴이다. 민족의 세태, 의식주, 례의범절, 풍속, 종교신앙 등 거의 모든 부분들을 문학으로 기록할수 있는데 문학을 보면 그 민족이 알린다.”고 말하고있는 선생님은 그만큼 여러 쟝르에 민족적 소재만을 끈끈히 담아온 창작에 게을리 하지 않았다. 1996년 정년퇴직했지만 만년에도 여전히 필경(筆耕)에 주력하여 다산작가로서의 식지않은 정열을 보여주었다. 단행본 “춘삼월”, 중편소설집 “사랑은 S“를 펴내였고 2001년 《연변문학》에 장편소설 “재박골의 새 이야기”를 련재했다. 고희의 오늘에 이르기까지 고도(古都) 룡정에만 붙박혀 고향의 문화지킴이로 전력해온 선생님은 단지 개인적인 창작에만 그치지 않았다. 룡정문화발전추진회, 3.13기념사업위원회 등 단체의 요직을 맡고 우리것을 지키고 일으켜 세우기 위해 팔을 걷어부쳤다. 1992년 선생님은 조선족민속풍토를 다각적으로 보여준 다큐멘터리 “중국조선족민속”을 집필, 책은 국가관광국출판사에서 화책으로 출판되였고 한국 서울프라이즈(KBS)해외부문 1등상 수상했다.  수십년간 중국작가협회, 연변작가협회, 연변희곡가협회에서 활약하며 1급작가라는 직함과 수식도 갔고 있지만 선생님은 복잡한 문단의 패거리에 끼거나 손쉽게 문명(文名)을 팔려하지 않았다. 그저 나서 뼈를 굵혀온 고향을 뜨지않고 량산의 글농사로만 자신의 창작생애를 집계했을뿐이였다. 그 올곧은 외줄다리기의 결과가 조선족문단 최초의 대하소설을 출산하게 만들었다. 요즘 문단의 큰 이슈로 되고있는 대하소설 “해란강”은 룡정 해란벌의 “농민영웅” 김시룡을 원형으로 파란만장한 호조합작사시기로부터 개혁개방시기에 이르기까지의 장장 60여년의 조선족 농민들의 력사와 운명, 그리고 해란강지역의 독특한 력사와 풍속, 인정과 세태를 거대한 리얼리즘의 사시적인 기법으로 대하소설이라는 큰 그릇에 담고 있다. “중국조선족은 일찍 동북의 넓은 광야를 개척하여 삶의 터전을 마련했고 가렬한 항일전쟁, 해방전쟁에서 피흘리고 목숨을 바쳤다.   건국후 호조조, 합작화, 인민공사화 운동가운데서도 전국에 이름을 날린 김시룡과 같은 ‘농민영웅’을 배출했다. 이러한 우리의 력사를 어떻게 정리해야 할가? “하는 질문으로부터 필을 들었고 “애초에 거창하게 나온 것이 아니라 한글자 두글자 쓰다보니 그 파란많은 력사의 경륜을 원고지 부피가 꽤 두텁게 새기게 되였다.” 고 선생님은 집필동기에 대해 겸손하게 피력했다. 어찌보면 선생님의 평생의 창작리념과 경험을 집대성한 “해란강”은 1996년에 집필하기 시작하여 꼭 10년만인2007년에 마무리되였다. 오랜시간 문화파종의 구실을 톡톡히 하고있는 문화관에서 근무하면서 기층에 자주 내려가고 밑바닥 삶과 호흡을 같이 했던 과정에 피부로 절감해왔던 대중들의 생존상황이 그에게 그들의 모습을 원고지에 담아야할 충동을 느끼게 했던것이다. 모택동주석의 접견을 20여번이나 받은 “농민영웅” 김시룡, 빈농협회 회장이였던 삼촌의 경력과 구술, 당안관에 널린 방대한 자료의 수집 등 번쇄한 로동속에 자신의 주변에 떠다니는 서사의 무수한 조각들을 조합하여 “해란강”이라는 큰 곬의 창창한 흐름에 에워넣었던것이다.  문단과 독자들의 주목속에 “해란강”은 이미 4권까지 출간되여 서점가에 올려졌고 무난하면 명년까지 모두 출간될수 있다고 한다. “’해란강’ 은 작자가 20여년의 신근한 필경을 통해 우리 농민의 60여년의 력사를 반영하려는 전무유일의 장엄하고 힘겨운 시도인바 그 치렬한 작가정신과 민족적사명감을 충분히 긍정함과 아울러 그간의 로고에 우선 경의를 드린다”고 비평가들은 평한다. 한면 어떤 부분에서는 사관(史观)이 몽롱하여 단순한 흑백론리로 흐르고 가치판단의 문제점을 로정(露呈)한 아쉬움에 대해서도 제기되면서 작가가 조선족농민의 생활을 독창적으로 파악하고 특색있게 형상화하여 우수한 대서사시적 화폭을 창출할것을 문단과 독자들은 기대하고있다. 이제 작품에 대한 수정과 보완을 위해 또한번 볼펜을 잔뜩 거머쥐어야할것 같다고 선생님은 말했다. 늘 버리지않고 있는 창작태세에 대한 새로운 긴장감의 힘이 선생님과 작품을 또한번 거듭나게 할것 같다. 요즘 빨리 쉽게 써서 재빨리 인정받으려는 작가들이 스스로 호흡이 짧아짐을 느끼지 못해서인지 아니면 독자들이 짧고 쉬운 작품만을 요구하는 스낵식 풍토 때문인지 우리 문단에서 장편소설이 많이 나오지 못하고있다. 그러는 동안 우리 문단밖에서는 중국과 서구와 일본의 장편소설이 홍수를 이룬다. 작가가 작품을 통해 시대적 상황을 비춰 주는 거울의 역할을 하거나 한 미족의 시대정신 혹은 그 위대한 철학이나 사상을 구체화하기 위해서는 호흡이 긴 장편소설은 필요하다. 고금중외 명작가의 명작들은 긴 호흡으로 사회상황을 인간조건과 련결시켜 큰 성공을 거두지 않았던가! 조선족 공동체 삶의 문학적형상화는 우리 문학의 기본사명의 하나이다. 더구나 요즘처럼 큰 진통을 겪고있는 시점에서는 더 필요하며 그것이 대하소설과 같은 큰 편폭으로 루어질 때 더 값있는것일것이다. 때문에 이번 대하소설의 출산은 그 선보임이라는 선각적인 행위 하나만으로도 가지는 의의가 크다고 나는 선배에 대한 편파적인 존경만이 아닌 긍정의 분석을 해보았다. 선생님의 서재에는 미국에 류학 간 딸이 마련해준 컴퓨터가 있었지만 선생님은 컴퓨터를 쓰지않는다고 한다. 그러니 어마어마한 분량의 대하소설이 모두 육필로 나왔다는 이야기가 된다. “해란강”에는 등장인물이 165명 실제 실존한 력사인물만도 20여명으로 그들이 경과한 60년의 력사를 380만자의 편폭으로 새기고있다. 선생님이 뒤이어 내놓은 “해란강”의 원고들을 보고 부지중 감탄을 흘릴수 밖에 없었다. 마분지로 겉가위를 댄 원고지 묶음이 저그만치 15개, 원고지의 모서리는 모두다 닳아있었다. 작품에 투여된 시간의 흔적이 느껴지는 원고지 묶음이였다. 250자원고지에 써내려간 원고뭉치를 쌓으니 족히 1메터 반은 되였다. 원고지의 필적(筆跡) 또한 선생님처럼 단아했다. 단정한 기운의 글씨가 원고지 칸을 가득가득 채워 원고지가 아주 묵직해 보였다. 그리고 선생님은 여태 원주필로 원고를 집필한다고했다. 그러면 연필을 깎거나 잉크를 채우는 등 번거로움을 줄일수 있다는것이다.  육필로 15권, 380여만자를 써내려가면서 손목에 무리가 와서 근 한달간이나 치료를 받으며 집필을 중단했던적도 있었다고 한다. 그렇게 이야기하는 선생님의 손목은 오랜 글쓰기의 고역에 엄중하게 변형되여있었다. 원체 엎디여 글쓰는 습관이 있었는데 가슴에 통증이 와서 이제는 밥상앞에 마주 앉아 쓴다고 했다. 옻칠이 벗겨진 련꽃무늬의 밥상, 그 밥상이 선생님의 10여년 로고의 견증자가 된것이다. 사실 선생님은 컴퓨터와 같은 기계문명에 대해 거부 반응을 보이는 기피자는 아니였다. 철자 익히는 애들처럼 컴퓨터 지법을 외손녀에게서 배웠는데 이제 몸이 따라주지 않아 타이핑 속도가 늦다고했다. 키보드를 두드려 온 하루 5,6천자를 쓰지못하는데 육필로는 8천자는 거뜬히 써내려갈수 있다며 선생님은 무가내의 웃음을 보였다. 그래서 아예 몸에 배인 육필사용을 고수한다고 한다. 우리문단에서 6, 70대 이상 작가들 가운데서 컴퓨터를 활용, 집필에서 워드 프로세서를 사용하는 분들도 적지않다. 50대도 대부분도 꽤 능숙하게 컴을 사용하고있고 40대는 모두가 쓰지 않고 친다. 그 아래 세대는 치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키보드우를 날아다닌다. 따라서 속도가 우선인 이 시대, 글씨 쓰기가 메모나 서명의 범주로만 남아 있는 이 디지털 무한 복제시대에 필자의 정성과 령혼이 담겨 있는 육필(肉筆) 원고는 좀처럼 찾아보기 힘들다. 선생님의 정감이 묻어나는 손글씨가 새겨져있는 원고지들을 지켜보며 “나는 온몸으로 글을 쓴다”고 선언했던 어느 유명작가의 경구(警句)를 머리에 떠올려 보았다. 그리고 작가의 본령이라 할수있는 올바른 작가정신에 대해 다시한번 생각해 보았다. 각박한 표현 같지만 요즘들어 치렬한 작가태도와 작가의식을 지닌 작가가 별로 눈에 띄지 않는다. 오늘날의 작가들은 창작 외의 일에 너무 관심이 많은것같다. 작가혼은 오간데 없고 속도나 경쟁 그리고 독선만이 보인다. 이러한 빈번히 풍토속에서 선생님과 같이 육필을 고수하는 이들은 시대에 떨어진 모습으로 오인(误认)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는 진정 부박(浮薄)한 속도의 가치에 저항하면서 한획한획 새겨나가는 철저한 장인정신의 표출이 아닐가! 넝쿨지지도 잔가지도 치지도 않고 반듯한 이파리와 환한 꽃잎을 피워올리는 련꽃, 그 무늬가 새겨진 낡은 밥상을 마주하고 선생님과 이야기를 나누며 나는 오늘의 작가들은 어디에 살고 있으며 그들이 살고 있는 공간의 의미는 무엇일까? 작가에게 창작의 공간은 과연 몇평이면 족할까?하는 생각을 굴려보았다. 작가가 거주하는 삶의 공간이 창작의 공간과 같을 수는 없겠지만, 세계와의 뉴대와 자기 동일성이 형성되는 실존의 중심공간임은 분명할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낡은 밥상의 반경이 주는 공간이 내게는 너무나 크게 보였다. 선생님의 모습을 내가 꾸미고있는 문학블로그에 담고저 선생님을 향해 카메라의 앵글을 맞추었다. 세상의 번화함을 멀리한 조촐한 서재에서 련꽃무늬 밥상앞에 마주 앉아 육필을 부여잡고 원고지를 메워나가는 선생님의 모습, 고감도 영상에 포착된 선생님의 모습에서 나는 어떤 아우라(Aura. 문학이나 예술 작품에서 흉내낼수 없는 고고한 분위기)를 보았다.    "연변문학" 2008년 4월호    ☞ 김혁 문학블로그: http://blog.naver.com/khk6699 ☜        
9    “한국의 쉰들러”와 윤동주 댓글:  조회:2488  추천:17  2015-03-12
. 칼럼 . “한국의 쉰들러”와 윤동주 김혁   ▲ 한국영화 "국제시장"의 포스터   1 무조건적인 희생으로 가족을 위해 로심초사하며 한 시대를 묵묵히 살아냈던 아버지의 모습을 그린 영화 “국제시장”이 한국 력대영화 2위를 기록하며 흥행신화를 쓰고있는 가운데 영화의 들머리에 재현 된 “흥남대탈출사건”이 다시 회자되고있다. “흥남 대탈출”은 한반도에서 벌어진 수많은 전사(戰史) 중에서도 특별한 력사적 사건이다. 전시의 긴박한 상황에서 민간인의 철수를 돕기 위해 군인들이 자기 목숨과도 같이 여기는 작전용 중장비를 수송선에서 내려놓고 그 공간에 더 많은 피란민을 태워 수송했는데 그 수효가 무려 10만명에 이른다. “쉰들러 리스트”로 잘 알려진 독일인 오스카 쉰들러(Oskar Schindler, 1908-1974)가 나치 수용소에서 구해낸 유대인의 수는 약 1,200명이라고 한다. 그런데 흥남에는 10일간의 짧은 기간 동안 10만 명의 피난민을 구출하는데 성공했다. 이는 세계 전사를 통틀어 가장 많은 민간인을 탈출시킨 작전으로 기록돼 있다. “흥남 대탈출”은 오로지 인종, 국경, 종교, 이념이라는 모든 벽을 훌쩍 뛰여넘은 인간사랑이라는 큰마음이 움직였기에 가능했던 대서사극이였다.  “흥남대탈출”의 장거를 주도한 주인공은 바로 “의인”으로 불리는 현봉학이였다.   ▲ 대탈출 당시 흥남부두의 모습 2 미군의 철수작전이 펼쳐지던 흥남부두에서 현봉학은 아비규환을 목격했다. 령하 30도의 혹한속에서 추위와 굶주림에 시달리며 울부짖는 피난민들의 모습은 차마 눈 뜨고 볼수가 없었다. 그는 미10군단의 아먼드 장군을 붙들고 “저들을 살려달라”고 간청에 간청을 거듭했다. 현봉학의 눈물겨운 노력에 감동한 장군은 군수물자를 버리고 피난민들을 태웠다. 이렇게 해서 배 193척에 나눠 타고 목숨을 구한 피난민은 9만8000여명. 마지막 수송선에 탄 1만4000여명은 12월25일 거제에 도착해 후일 “크리스마스의 기적”으로 불리웠다. 이 배에서 5명의 어린 생명이 태여났다. “한국의 쉰들러” 현봉학(玄鳳學) 선생은 1922년 함경북도에서 태여나 세브란스 의전을 졸업, 모교에서 림상병리학을 강의했다. 미국 리치먼드의대에서 공부한 뒤 1950년 3월 한국으로 귀국, 석달만에 6·25를 맞았다. 전쟁중 한국 해병대사령관 고문과 미10군단 사령관 민사부 고문으로 근무하던중 흥남부두에 이르렀고 10만여명의 피난민을 구하는 신화를 남겼던것이였다. 휴전후 다시 미국으로 간 현봉학은 펜실베이니아의대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토머스제퍼슨의대 등에서 교수를 력임했고, 연세대와 아주대 등 한국의 대학가에서도 후학 양성에 힘썼다. 2007년 86세로 별세했다.   ▲ 현봉학 박사 3 윤동주의 묘소가 조선문학에 깊이 심취되된 일본학자 오오무라 교수에 의해 발견되여 세간에 공개되였음은 일반이 아는 사실이다. 하지만 사실 오오무라 이전에 윤동주의 묘소를 찾으려 시도한 사람이 또 한분 있었다. 바로 현봉학 박사였다. 70세 로인이 될 때까지 윤동주를 전혀 몰랐던 현봉학박사는1984년 봄에 우연히 낡고 바래진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의 초간본을 읽고 크나큰 감동과 충격을 받았다고 했다. 그리하여 그해 8월 현봉학 박사는 재미동포 13명을 인솔하고 중국용정행차를 했다. 연변의 유지들과 지치주정부 외사처에 윤동주의 유적, 특히 묘소를 찾아주기를 부탁했다. 그러나 고향 사람들은 윤동주가 누구인지 알지도 못했다. 실망은 했으나 그들에게 윤동주가 뛰여 난 민족시인이였음을 역설하고 래년에 다시 방문할터이니 꼭 그 유적을 찾을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신신당부했다. 오오무라에 의해 윤동주의 묘소가 발굴된 소식을 접한 현봉학박사는 또 서둘러 룡정으로 날아왔다. 1988년 6월, 현봉학 선생이 주동이 된 미중한인우호협회의 연증(捐贈)으로 룡정중학교 동창회가 수선을 하여 윤동주 묘소의 첫 개수 작업이 이루어졌다. 지금 우리가 룡정 동산마루에 가면 볼수 있는 시인의 유택은 그렇게 많은 “의인”들의 도움으로 세인들과 만났다.     ▲ 개수를 마친뒤의 80년대 윤동주 묘소의 모습   은퇴후 현봉학 박사는 윤동주 장학회를 설립하고, 룡정중학에 윤동주의 시비를 건립하는 등 오직 윤동주 추모사업에 헌신하다가2007년에 타계했다. 지금도 시인의 고향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룡정중학의 시비를 마주할 때마다 이 고마운 의인을 떠올리고 있다. - “청우재(聽齋雨)”에서   ☞ 김혁 문학블로그: http://blog.naver.com/khk6699 ☜   흥남부두 철수를 노래말에 담은 옛 노래 "굳세어라 금순아"      
8    외발로 력사의 질곡을 넘다 댓글:  조회:3175  추천:21  2015-03-06
소설가 김혁의 인물만필 시리즈 (1)   김학철:외발로 력사의 질곡을 넘다   일전 “중국조선족 문단의 대부” 김학철의 일대기를 다룬 장편문학전기 “송엽장아래의 자국”을 작가출판사와 연변인민출판사에서 중문으로 펴냈다. 모순문학상 입선후보작을 펴낸 실력있는 한족작가 우뢰에 의해 창작된 전기는 장장 70여만자의 호흡이 긴 편폭에 정의를 위해 무기와 펜을 고누잡고 일평생 싸워 온 김학철의 파란많은 자취를 추적해 냈다. 이는 처음 중문으로 창작된 김학철관련 인물전기로서 중국의 주류문단에 김학철이라는 한 조선족 작가를 다각적이면서도 립체적으로 알리는데 작지않은 역할을 놀것으로 사료된다. 책의 겉장은 중국소수민족문학관 관사 정원에 주조된 김학철의 동상으로 디자인했다. 량쪽 겨드랑이에 송엽장을 짚고 우람하게 뻗쳐 선 척각의 로인, 깨끗이 늙은 강파른 얼굴에 사려 깊고 슬기가 넘치는 한쌍의 눈. 김학철옹의 그 강건한 모습이 다시한번 우리들의 면억(緬憶)을 불러 낸다.   김학철은 1916년 11월 4일 북조선의 함경남도 원산에서 누룩제조업자의 둘째 아들로 태여났다. 본명은 홍성걸(洪性杰.). 7세에 부친을 여의고 홀어머니의 슬하에서 자랐다. 원산에서 제2공립보통학교를, 서울에서 보성고등학교를 다녔다. 재학 시절 왜적에게 폭탄을 던진 윤봉길의 거사와 리상화의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를 읽고 커다란 충격을 받는다. 그리고1932년 약관 17세에 빼앗긴 조국을 찾겠다는 웅지를 품고 중국으로 들어온다. 상해에서 의렬단에 가입, 반일지하테러활동에 종사했다. 흰 셔츠에 검은 넥타이, 호주머니에 권총 한자루- 전형적인 당시 아나키스트(無政府主義者)들의 전형적인 행색으로 쿨하게 상해탄의 황포강변을 누볐다. 이때로부터 김학철이라는 가명을 사용, 반일활동을 위해 썼던 가명을 마지막까지 자기 이름으로 썼다. 1936년 조선민족혁명당에 가입해 김원봉(金元鳳)의 부하가 된다. 1937년 장개석이 교장으로 있는 중앙육군군관학교 즉 황포군관학교에 입학한다. 제1대대 제4중대에 편입되였으며 교관이던 김두봉, 석정 등의 영향으로 단순한 민족주의자로부터 맑스주의자로 탈바꿈한다. 중일전쟁으로 3년제과정을 1년간 앞당겨 마친 김학철은 1938년 10월 조선의용대 (대장 김원봉)에 가입, 창립대원으로 제1지대에 소속된다. 조선의용대는 중국국민당 정부와의 기나긴 협상을 통해 중국 대륙에서 최초로 합법화된 한국인 무장조직이다. 창립대회 당시 주은래와 국민혁명군사위원회 정치부 제3청 청장 곽말약도 참석했다. 이후 조선의용군은 팔로군과 련합전선을 형성해 혁혁한 전과를 거뒀고 후날 중국 팔로군에 편입됐다. 김학철은 화북항일전장에서 분대장으로 활약상을 보인다. 1939년부터 호남성 북부일대에서 항일무장선전활동을 전개, 그 이듬해 중국공산당에 가입했다. 1940년 가을에는 팔로군에 참가하여 태항산항일근거지에서 조선독립동맹 선전부의 선전간사로 일하였다. 부대의 수요에 따라 신문편집, 연극 극본, 가사집필도 하면서 문학적 끼를 선보였다. 이시기 단막극 “서광”, “승리”, “등대”등을 창작하여 무한, 류양, 태항산 등지에서 공연하였다. 1941년, 여름 김학철은 조선의용군 화북지대 제2분대장으로 참전, 그해 12월 12일 하북성 원씨현 호가장(胡家庄)에서 있은 치렬한 전투에서 대퇴골관통상을 입고 부상당한 몸으로 일본군의 마수에 떨어진다. 5개월간 석가장의 일본총령사관 경찰서 류치장에 갇혀있다가 그후 예심에서 치안유지법위반죄라는 판정을 받고 1942년 5월 일본의 나가사끼형무소에 이송된다. 1943년 4월 29일 나가사끼 지방재판소에서 징역 10년, 미결가산 200일 언도를 받았다. 김학철은 나가사끼형무소에서 그 무시무시한 원폭피해흫 요행 면할수 있었다. 하지만 단지 전향서 쓰기를 거부했기에 총상을 입은 다리를 치료받지 못하다가 수감 3년6개월 만에 왼쪽 다리를 절단하는 수술을 받고 학처럼 외다리로 선다.   1945년 10월 6일 정치범을 무조건 석방할데 관한 맥아더사령부의 명령에 따라 석방된다. 해방받은 몸으로 서울로 돌아와 조선독립동맹 서울위원회 서울시 위원으로 활동한다. 문학에 대한 열정에 다시 기름을 부어 1945년 12월 “주간건설” 잡지에 소설 “지네”를 발표했으며 그 후 1년간 륙속 “담배국”, “균렬”,등 10여편을 여러 문학지에 발표했다. 왕성한 창작 활동을 하다가1947년 사회주의 리념을 실천코자 38선을 넘어 조선으로 간다.  평양에서 “로동신문”기자, 외금강휴양소 소장, “민족군대”주필등 직을 지내다가 조선전쟁이 일자 중국으로 들어와 저명한 녀류작가 정령이 소장으로 있는 북경 중앙문학연구소에서 연구원으로 지낸다. 이동안 중편소설 “범람”, 단편집 “군공메달”을 중문으로 출판했다. 1952년 12월 조선족자치주 주장 주덕해의 요청으로 연길로 와서 연변문학예술련합회 준비위원회 주임으로 임명 되나 반년만에 사직하고 전업작가로 맹활동했다. 단편집 “새집 드는 날”, 장편소설 “해란강아 말하라!” 소설집 “고민” 중편소설 “번영”을 출간했으며 로신의 “아Q정전”을 번역출판하기도 했다. 그는 로신의 작품을 맨처음 조선문으로 번역한 작가이다. 1957년 중국 전역에서 불어친 반우파투쟁속에서 “반동분자”로 획분되였다. 그는 극단적인 개인숭배로 치닫던 동란의 년대에 이의를 표하며 시류와 불화했다. 드문 반골기질에 자신을 엄격히 규률한 그는 자유와 정의를 위한 길에서 불의와 한치도 타협하지 않았다. 1964년부터 문제작인 장편소설 “20세기의 신화”를 창작하기 시작하여 1965년 5월에 완성한다. 1966년 전대미문의 문화대혁명이 폭발, 그해 12월 반란파들에게 “20세기의 신화” 원고가 발견되면서 필화를 입는다.  10년 유기징역을 언도받고 산과 물에 둘린 추리구(秋梨沟)의 감옥에서 복역한다. 문화대혁명이 결속되자 1977년 12월에 만기석방되였다. 하지만 그 후 3년간 의연히 반혁명전과자 취급을 당하는 신세였다. 1980년 12월 연변주법원에서 “원판결을 파기하고 무죄로 선고한다”고 선포, 1983년에야 정식으로 루명을 벗었다. “20세기의 신화”는 미발표작인만큼 사회에 영향을 주지 않았으며 원고의 집필 자체는 범죄를 구성하지 않는다는 리유에서였다. 1983년 국적문제를 해결보아 중국국적을 가졌으며1989년에는 49년만에 당적을 회복하여 항일로간부의 대우를 받게 되였다. 장장 24년의 정치박해로 상처받은 몸을 추슬리고 김학철은 다시 일어섰다. 이미 65세의 나이였지만 녹쓴 펜을 닦고 잃은 시간을 벌충하듯 창작에 일로매진한다.   1983년 항일회상기 “항일별곡”이 흑룡강조선민족출판사에서, 1985년 “김학철단편소설집”이 연변인민출판사에서, 1986년에는 장편소설 “격정시대”가 료녕민족출판사에서, 1987년에는 “김학철작품집”이 연변인민출판사에서 련이어 출간되였다. 이밖에 자서전 “최후의 분대장”이 한국의 문학과 지성사에 의해 1995년에 출간되였고 1996년과 2001년에 걸쳐 장편소설 “20세기의 신화”와 산문집 “우렁이속 같은 세상”이 한국의 창작과 비평사에서 출간되였다. 그동안 촌철살인의 수필과 잡문에 심취되여 수백편을 발표. 연변인민출판사에서 다권집 “김학철문집” 을 출판하면서 중국조선족문단은 물론 세계 한겨례 문단에서도 한획을 긋는다. 조선족 학계는 “김학철선생의 문학은 우리가 세계문학과 대화할수 있는 하나의 큰 창구인바 그의 작품이 우리 민족의 정신사에 있어서의 하나의 리정표로, 영원한 고전으로 될것”이라고 자호감을 머금었다. 한국의 평론가들은 김학철의 작품은 1990년대 랭전붕괴 이후 그때까지 “좌익금기”에 속박당했던 한국의 문학지형을 흔들고 현대사를 다시 쓰게 만들었다고 높이 평가했다.  한국의 유명 평론가 김윤식은 “김학철은 그 자체가 력사요, 기구한 한•중•일 현대사의 광대한 미발굴 지층 탐사의 한 리정표“라고 정평했다. 또 중국의 왕혜 청화대 교수는 "식민주의와 자본주의에 어떻게 유효하게 저항하고 그것들을 바꿔나갈 것인가" 하는 아시아 근대의 력사적 과제를 풀고 새로운 아시아를 상상하는 데 김학철 문학이 긴요한 역할을 할수 있다”고 말한다.   중국소수민족문학관에 건립된 김학철 동상   2001년 9월 25일 오후 3시 39분, 김학철은 85세를 일기로 연길에서 보무당당하던 걸음을 멈추었다.   타계 20일전부터 자기의 병이 완치될 가망이 없음을 알고 가족의 부담을 덜기 위하여 자진 절식을 단행, 조금도 흐트러짐이 없이 깨끗한 모습으로 조용히 죽음을 맞았다. 본인의 소원대로 유체는 화장해 두만강에 뿌려졌고 일부는 우편함에 담아 동해바다로 띄워 보냈다. 우편함에는 “원산 앞바다 행 김학철(홍성걸)의 고향 가족, 친우 보내드림” 이라고 적었다. 유언으로 자신이 평생 지켜온 생활신조를 남겼는데 바로 편안하게 살려거든 불의에 외면을 하라! 그러나 사람답게 살려거든 그에 도전을 하라! 그것이였다.   반일투사이며 민족작가로서 그이는 일평생 곡절로 점철된 인생길을 걸어왔다. 이렇게 파란많은 인생길을 걸은 작가는 고금중외에도 드물다고 해야할것이다. 어려서 민족독립의 청운을 안고 일제와 사투를 벌렸고 그 최전선에서 한쪽 다리를 잃은 뒤에는 문학이라는 또 다른 수단으로 잊혀진 민족사를 묘파하고 복원하는데 평생을 바쳤다. 부상, 탄압, 망명, 옥살이 등 범인들로는 상상하기 어려운 현실로 인해 글쓰기가 쉽지 않았지만 죽는날까지 붓을 놓치않았다. 자신이 경험했던 시대와 너무도 많은 경험을 토대로 하여 간결하면서도 맛깔스러운 문체로 격동적인 시대와 그 도가니속 삶들을 파노라마처럼 펼쳐내였다.  척각(隻脚)의 몸이지만 중국조선족을 대변하는 문단의 거봉으로 우뚝 선 김학철, 등 따습고 배불러 정신이 둔감해져 있는 물욕화에 절은 오늘날, 그이의 올곧고 강인한 작가정신과 실천적이고 치렬한 인고의 삶은 우리 문학에 미래지향적인 동력을 안겨주는 보귀한 재부로 간주되고있다.   “중국민족” 2014년 1월호    ..   SBS스페셜 「나의 할아버지 김학철 조선의용대 최후의 분대장」   ☞ 김혁 문학블로그: http://blog.naver.com/khk6699 ☜  
7    북간도의 하늘에 비낀 “반달” 댓글:  조회:4916  추천:13  2014-08-18
  . 장편력사기행  .   일송정 높은 솔 해란강 푸른물 (련재15)   김 혁    ​ 북간도의 하늘에 비낀 “반달”   ​ 푸른하늘 은하수 하얀 쪽배엔 계수나무 한 나무 토끼 한 마리 돛대도 아니 달고 삿대도 없이 기도 잘도 간다 서쪽나라로   하수를 건너서 구름나라로 구름나라 지나선 어디로 가나 멀리서 반짝 반짝 비추이는 건 새별 등대란다 길을 찾아라’ … …   “반달”, 우리 겨레들이 너무나 익숙히 알고있고 몇 세대를 거쳐 동년시절의 1순위로 자리매김되였던 명동요이다.   까치 까치 설날은 어저께고요 우리 우리 설날은 오늘이래요 곱고 고운 댕기도 내가 드리고 새로 사온 신발도 내가 신어요   해마다 새해의 벽두가 열리면 집들마다에서 울려나오는 “설날” 역시 이름난 동요이다. 이러한 귀에 쟁쟁한 명곡을 작사, 작곡한 이가 윤극영이다. 윤극영   겨레의 아동음악가 윤극영선생은 룡정과 떼여 놓을수 없는 인연을 가지고 있다. 윤극영은1903년 9월 6일 서울 소격동에서 아버지 윤정구(尹政求)와 어머니 청송 심씨(靑松 沈氏)사이에 1남 3녀중 막내아들로 태여났다. 4살 때부터 회초리를 맞아가며 할아버지한테 천자문을 배웠다. 관아의 하급관리였던 아버지 뜻에 따라 경성법학전문학교에 들어갔지만 1921년 중퇴하고 일본으로 류학을 떠났다. 도꾜음악학교에 입학해 체계적으로 음악을 배웠다. 그 시절 친척 아저씨 댁인 하숙집에서 작곡가 홍난파를 만나기도 했다. 그가 동요에 관심을 두게 된데는 일화가 있다. 1923년 어느 날,  윤극영의 도꾜 하숙집으로 체격이 건장한 젊은이가 찾아왔다. 그가 바로 유명 아동문학가 방정환이였다. “이보게 미래의 작곡가 윤극영님, 장차 민족을 이끌어 갈 우리 어린이들이 즐겨 부를 노래가 없네. 자신만을 위해 음악공부해서 무슨 소용이 있는가, 어린이들이 부를 노래를 만드세나”라고 방정환은 열기에 넘쳐 권장했다.   그리하여 그해 5월1일 방정환과 윤극영 등 지기들은 “색동회”를 발족시켰다. “색동회”는 어린이들에게 순 우리말과 노래로 우리 고유의 아름다운 마음씨를 일깨워주려는 취지의 동호회였다. 그후로 윤극영은 조선가사를 붙인 찬송가곡이나 일본 노래뿐인 시대에서 적극적으로 우리말 동요 창작을 시도하였다. 1923년 7월 서울에서 개최된 “전조선소년지도자대회”에 참가하여 “동요에 대한 실재론”이라는 제목으로 강연하기도 하였다. 민족동요의 대표곡으로 지금까지 애창되고 있는 “반달”에 따른 일화가 많다. 1923년 일본에서는 관동대지진이 일었고 그 란장에 동포들이 일본인들에 의해 무차별 학살 당하는 살벌한 기운이 감돌았다. 일본에서 더 이상 배길수 없게 된 윤극영은 귀국을 했다. 아버지는 윤극영이 귀가하자 뒤뜰에 음악을 할수 있는 자그마한 별채를 지어주었다. “일성당(一聲堂)”이라는 이름의 그곳에서 집에 모여드는 어린이들을 모아 윤극영은 “달리아회”라는 합창단을 만들었다.  “달리아회”는 착실하게 동요 보급단체의 구실을 했다. 그 “달리아회”를 위해 처음으로 지은 곡이 바로 “설날”이라는 노래였다. 1924년 9월 타향으로 출가한 윤극영의 맏누이가 별세해 집안이 슬픔에 쌓여 있었다. 윤극영이 5살 때 시집간 맏누이는 고생만 하다 30대의 젊음에 세상을 등졌다. 한숨을 쉬며 하늘을 쳐다보니 하얀 조각달이 하늘에 비스듬히 걸려 있었는데 대낮에 달을 보니 더 슬퍼져 시상이 떠오를 것만 같았다. 낮에 뜬 외로운 반달이 죽은 누이의 슬픔에 우리 민족이 처한 슬픔까지 떠올려 주었다. 그렇게 지은 곡이 바로 명동요 “반달”이였다. “반달”은 자유롭고 행복한 세상에 대한 동경과 그것을 념원하는 조선민족의 소박한 심정을 표현하고있다. 노래말중의 “새별의 등대”, “길을 찾아라”등 구절들은 일제의 시선을 피해 토로한 현실에 대한 비판이며 부정인 동시에 행복한 생활에 대한 절절한 갈망이였다. 당시 조선에서는 일제의 가혹한 탄압에 의하여 민족적이고 애국적인 창가들이 자취를 감추게 되였다. 이런 시기에 윤극영을 비롯한 민족 음악가들은 창가와 동요라는 새로운 음악쟝르의 창작을 통하여 애국, 애족 사상을 반영하였으며 민족의 장래에 대한 희망과 동경을 걸었다. 윤극영은 등사판을 구해 지은 노래를 몰래 찍어 학교 선생님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설날” “반달”과 함께 뒤에 나온 “할미꽃” “따오기” “고드름”, “소금쟁이” 등을 비밀리에 보급했는데 삽시간에 전국으로 번져나갔다. 우리말 노래에 대한 일제의 탄압이 심했지만 ‘설날”, “반달”과 같은 노래들이 한반도를 넘어 일본, 중국에까지 알려지자 총독부에서도하는수없이 해제령을 내리고 부르도록 했다. 윤극영이 중국으로 건너와 할빈에 있을때 일이다. 할빈에서 아시아 전역의 일본화를 지원키 위한 일본 연예단의 공연이 있었다. 일본의 한 가수가 “반달”을 부르고는 무대우에서 "이 곡은 조선인이 작곡했다고 잘못 전해지고 있는데 일본인의 작곡이요."라고 어처구니없는 설명을 했다.  마침 이 자리에 있던 윤극영과 그의 동료들이 벌떡 일어나 항의를 했다. 그날 밤 일본인은 몰래 윤극영의 집으로 찾아와 "작곡자가 이런데 있는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하며 사과를 했다고한다. 1926년 윤극영은 “반달”이라는 제목으로 동요집과 레코드 집을 펴냈다. 동요집에는 “반달”·”설날”·”꾀꼬리”·”귀뚜라미”·”두루미”·”꼬부랑할머니”·”흐르는 시내”·”소금쟁이”·”고드름”·”파랑새를 찾아서” 등 모두 10편의 동요가 실렸다. 이는 한국의 “최초의 창작동요곡집”으로 된다. “반달”은 또 윤극영의 최초의 동요극 “파랑새를 찾아서”의 주제곡으로 쓰이기도 했다. “반달”은 또 조선에서 최초로 방송전파를 타기도 했다. 1924년 12월 17일 오후 1시. 영화를 상영하기엔 한참 이른 시각인데도 경성 관철동의 영화관 “우미관(優美館)”앞은 인산인해를 이뤘다. 조선일보사가 주최한 무선전화 공개방송시험, 즉 라디오 시험방송을 들어보려고 온 사람들이였다. 수표동 조선일보사의 기와집 사옥에서 쏘아 올린 전파가 우미관 무대 대형수신기의 나팔에서 흘러나왔다. 객석에서 우레와 같은 박수가 터졌다. 조선말이 라디오 스피커를 타고 흘러나온것 자체가 처음이였다. 3일간 이어진 시험방송의 프로그램은 다채로웠다. 이동백(李東伯) 송만갑, 박녹주등 판소리 명창들의 노래와 리왕직 아악부(李王職 雅樂部·국립국악원의 전신) 명수들의 거문고, 퉁소, 해금 등 연주가 방송됐다. 동요 작곡작사가이자 성악가였던 21세 청년음악가 윤극영이 마이크 앞에서 “반달”을 불렀고, 26세 홍난파의 바이올린 독주도 조선일보 전파를 탔다. (김명환. “조선일보에 비친 '모던 조선'”. “조선일보” 2011년 3월 8일) ​ 1926년 발간된 뒤 동요집 “반달”은 류실되여 그 원본을 찾을길 없었다. 그러다가 한국 근대서지학회가 2012년에 일본에서 그 원본을 찾았다. 가로 19센티메터 세로 26센치메터 크기로 22쪽으로 돼있는 그 동요집은 가위에 쪽배를 타고 나팔을 부는 날개 달린 천사가 그려져있고 속지 첫 장에는 “도라간(돌아간) 누이동생 덕윤이 영전에”라고 적혀 있었다. 학자들은 “동요곡집이 일본에서 발견된것은 출간 당시 일본내에서도 ‘반달’이 인기가 높았다는 이야기가 사실임을 보여준다"고 말했다. ​ ​ 일본에서 발견된 “반달”의 원본 동요집   윤극영의  룡정행차는 친척 윤익선의 영향이 컸다. 보성전문학교의 교장을 지낸 윤익선은 룡정에서 학교를 운영하면서 교육인으로 활동하였다. 간도교육협회장을 맡기도 하는 등 당시 간도 지역 교육계의 중심 인물이였다. 그가 윤극영의 간도행의 차비도 대주었다. 한편 윤극영의 룡정행차의 결정적인 요인은 그의 드라마틱한 로맨스와 관련되여 있다. 윤극영은16살에 부모가 정해준 사람과 결혼을 해 딸까지 두었다. 1925년에 “달리아회”에서 그가 작곡한 창가극 “파랑새를 찾아서”를 공연할 때 피아노 반주를 맡은 오인경과 처음 만났다. 녀 피아니스트와 함께 서울 공연을 하고 개성에등지를 돌며 공연할 때 서로 사랑을 느끼게 되였다. 그녀와 함께 간도 룡정으로 “사랑의 도피”를 했던것이다. 기차를 타고 원산으로 가서 배를 타고 청진으로 가서 다시 청진에서 회령까지 기차를 타고 이틀만에 국경지대인 상상봉에 도착했다. 둘은 걸어서 꽁꽁 언 두만강을 건넜다. 추위를 가르며 두만강을 건너 룡정에 도착했을때 어느 려염집에서인가 윤극영의 “반달” 노래소리가 들려왔다. “아, 간도땅에서도 ‘반달’을 들을수 있다니. 노래는 나보다 먼저 여기에 왔구나” 무량한 감개가 끓어올라 두사람은  끌어안고 눈물을 흘렸다. ​ 윤극영은 룡정의 동흥중학교, 광명중학교, 광명녀고에서 교편을 잡고 학생들에게 음악을 가르쳤다. 윤익선의 소개로 윤극영은 룡정동흥중학교(지금의 룡정3중학)를 찾았다. 교장이 반갑게 맞으며 교사자리를 내주었다. ​ ​ 광명학교 옛터 표지석앞에서의 필자  첫날 동흥중학의 교단에 섰을때 윤극영은 학생들에게 슈베르트의 “보리수”를 불러 주었다. 그러자 누군가 “선생님, 그거 말고 ‘반달’을 불러주세요”하고 소리질렀다. 박수소리가 터져오르며 학생들은 한결같이 “반달”을 주문했다. “반달”은 이미 간도지역에서도 익숙히 알려지고 널리 불려진 노래였던것이다. 그렇게 윤극영의 룡정생활은 시작되였다. 하지만 며칠후의 어느날 새벽 경찰이 윤극영의 거처에 들이닥쳤다. 윤극영은 룡정의 경찰서에 련행되였다. 오인경이 집에 알리지않고 가만히 서울을 떠났기에 그의 가족은 윤극영이 그녀를 랍치한것으로 알고 신고했던것이다. 오인경의 해석으로 경찰에서 풀려났으나 서울에서 온 인경의 오빠가 그녀를 서울로 끌고 가버렸다. 홀로 간도땅에 남은 윤극영이였지만 그는 음악을 버리지 않았다. 1927년에 윤극영은 룡정에서 음악교학을 하는 한편 음악에 뜻이 많는 이들과 손잡고”예우사(艺友社)”를 창립했다. “예우사”는 중소학교 음악교원들을 묶어서 음악창작과 평론활동도 벌리였으며 잡지 “예우(艺友)“도 등사본으로 발간하여 민족음악과 가요창작에서의 넓은 길을 열어놓았다. 이시기에”제비남매”, “우산 셋이 나란히”, “고기잡이”, “외나무다리” 등 많은 동요를 작곡하였다. (중국조선민족문화사대계 3- “예술사” 북경대학 조선문화연구소편. 민족출판사 1994년) 윤해영 작사, 조두남 작곡으로 된 “룡정풍경가”도 바로”예우사”의 영향으로 창작되였다. 그 무렵 오인경이 서울에서 다시 윤극영을 찾아왔다. 룡정 광명유치원의 보모로 일자리를 찾고 윤극영의 음악활동을 위해 내조를 해주었다. ​ ​ 20년대 음악수업을 보고있는 룡정의 녀학생들 ​ 1936년1월 윤극영은 룡정을 떠나 재차 일본으로 건너가 뮤지컬 연출가로 활동했다. 도꾜의 “무랑루즈”라는 극장에서 가수로도 활동했다. 멀리 룡정에 있는 안해 오인경을 생각하며 “두만강의 노래”라는 련가를 지어 불렀는데 크게 성공을 거두었다. “요미우리”신문에서도 “한국 예술인의 동경진출”이라는 제목아래 그와 무용가 최승희에 대한 특집을 싣기도 했다. 그러나 친지들은 모두 고향으로 돌아갔기 때문에 얼마후 윤극영은 곧 무원조한 처경이 되고 말았다. 어느날 히비야 공원 벤치에 우두커니 앉아 있는데 갑자기 바람이 불어와 곁에 있던 쓰레기통으로부터 신문 한 장이 바람에 말려 튀여나왔다. 무심하게 그 신문을 보았는데 “조선의 대표적인 민요를 경성에서 중계한다”는 기사가 눈에 들어왔다. 자세히 읽어보니 그 민요속에는 “반달”등 자신의 작품이 다섯곡 들어 있었다. 윤극영은 그 길로 방송국으로 달려가 자신이 작곡자라며 이름을 밝히고 15원의 곡 사용료를 받았다. 그 돈으로 당장 급박한 처지를 해결했다. 1940년 윤극영은 더 큰 음악의 꿈을 이루기 위해 흑룡강성 할빈으로 향했다. 할빈 중심가의 건물의 2층을 빌리고 10여명의 로씨야 예인들과 통역, 매니저등을 모집했다. 이렇게 “할빈 예술단”이 탄생되였다. 윤극영은 예술단을 거느리고 중국의 동북지역을 돌며 공연한다음 다시 서울에 가서 공연할 꿈을 꾸고 있었다. 하지만 일년도 못되여 예술단은 일제의 탄압으로 해산되고 말았다. 그후 윤극영은 그동안 때가 묻은 룡정으로 다시 돌아와 간장, 된장을 만드는 공장을 차리기도 했고 역마차 몇대를 사서 운수업에도 종사하였다. 풍운의 조화는 가늠할수 없었다. 생계를 위해 일본이 관여하는 협회에 가입해 아쉬운 얼룩을 남겼던 윤극영은1946년 룡정에서 투쟁을 받고 사형에 언도되였다. 사형직전까지 갔던 고비에 그가 유명한 작곡가임을 알아본 한 공산당간부에 의해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질수 있었다. 그가 바로 당시 중공 연길현위원회 부서기, 연길현 현장이였던 문정일(文正一) 이였다.   사형수들 명단을 하나하나 체크하여 싸인을 하던 중 문정일은 윤극영이라는 이름 석자에 놀란 기색을 지었다.  “이 사람은 음악가가 아니요?” 문정일은 그가 바로 “반달”의 작곡가 윤극영이 맞음을 확인하고 나서 한동안 생각을 더듬다가 단호하게 말했다. “죽이지 마시오. 그 음악재질이 아깝다고 생각되지 않소. 이러한 인재들은 머리를 개조해서 유용하게 써야 하오.”라고 하였다. 문정일의 그 한마디에 윤극영은 죽음의 문턱까지 갔다가 다시 헤여 나올수 있었다. “윤극영의 친일”에 대한 론의는 그동안 갑론을박으로 오래동안 이어졌다. 룡정에서 친일단체인 오족협화회에 가입·활동한 전력 때문에 문인과 연구자들로부터 “친일파”로 지목되기도 했고 “불충분한 고증과 일방적인 시각에 의해 지나치게 폄하되거나 매도당한 면이 없지 않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그는 잠시 침략전쟁의 부역자로 동원됐지만 일제와 전쟁을 찬양하는 글을 한 편도 쓰지 않았다”고 주장하는 일각도 있다. 오족협화회에 들어가 일했던것은 윤극영에게는 평생의 상처와 고통으로 남아있었음이 틀림없다. 지금도 겨레들은 윤극영의 력사적 오점을 감안해내면서 그가  창작한 “반달”, ”설날”, “할미꽃”과 같은 동요를 애창하고 있고 거의 거부감 없이 그를 아동음악의 대가로, 유명음악가로 추앙함은 그의 음악에 대한 공적과 기여이기 때문일것이다. 3년형 선고를 받고 연길감옥에서 복역했다. 마침 감옥의 한 간수가 동흥학교의 제자였는데 그의 도움으로 보석되였고1947년서울로 돌아갔다. 3.8선을 넘다가 또 한번 붙잡혔다 도망하는구사일생의 고비를 겪으면서 도착한 한국에서는 또”6.25”전쟁을 겪었다. 부산으로 피난한 윤극영은 당금 입에 풀칠할 돈이 없어 은행에 찾아가 돈을 빌었다. 키는 크지만 피골이 상접하고 허리가 구부정한 빈 털털이 윤극영이 누구인지 모른 은행지점장은 안된다고 잘라 말했다. 락망하여 은행문을 나서던 윤극영은 다시 은행 문을 열고 지점장을 찾아갔다. "지점장님! 혹시 반달을 아십니까?" "반달이라니요?" "왜 '푸른 하늘 은하수, 하얀 쪽배엔, 계수나무 한 나무, 토끼 한 마리....'라는 반달이라는 동요가 있지 않소?" "네, 알지요." "바로 내가 ‘반달’을 만든 윤극영이라는 사람이요." "아, 선생님! 몰라 뵈어서 죄송합니다." "죄송할 거야 무엇이 있겠오. 그런데 지점장! 나 한푼도 없으니, 그 '반달'을 저당 잡혀 돈 좀 꾸어 주시요." 윤극영은 이렇게 자신의 작품때문에 생활의 질고에서 벗어날수 있었다. (리재철. “동요 ‘반달’에 숨어있는 시대적 의미”) 친구의 도움으로 포목점을 차려 안정을 되찾은 뒤 다시 동요 작곡에 매달렸다. 윤석중 작사로 된 “어린이날 노래”를 작곡하는 등 2년여 동안 에 무려 1백곡의 동요를 지었다. 그후 윤극영은 색동회를 다시 만들고 방정환 선생의 동상 건립을 추진했으며 여생을 어린이를 위한 사업에 바쳤다. ​ ​ ​만년의 윤극영 ​ 경기 양평 학곡마을에 건립된 “반달” 동요비   ​ 언제나 해맑고 순수해 수줍은 아이 같은 동심으로 6백여 편이 넘는 동요를 남긴 윤극영은1988년 11월 15일 향년 86세의 나이로 “하얀 쪽배기”를 타고 “서쪽나라’로 떠났다. 일제 암흑기에 어린이들에게 희망의 메시지를 담은 음악으로 어린문화 보급에 평생을 바쳤던 그는 한국에서 “홍난파 박태준과 함께 어린이 음악의 개척자”로 평가 받고 있다”. 1968년 그의 업적을 기리는 노래비가 어린이대공원에 섰다. 모든 동심을 부드럽게 사로잡은 “반달”은 중국에서도 큰 애대를 받았다. 1950년대 초 북경에서 김정평과 김철남 부자간이“반달”을 중국어로 번역 편곡하여 레코드로 취입하였다. “반달”은 그후 중국전역에서 수차 재판된 “외국가요 200수”에 수록되였다. 1979년 “반달”은 “하얀쪽배 小白船”라는 제목으로 중국의 통용 음악교과서에 수록되기도 했다. 윤극영은 룡정에서 선후로 15년의 시간을 지냈다. 그동안의 음악적공적에 대해 음악계는 높이 긍정하고있다. 1926년 윤극영의 중국이주는 중국조선족의 동요창작을 시작해 놓은데 그 음악사적의의를 가지게 된다. 그때로부터 조선민족학교들의 노래교재는 학생들의 심리특점에 부합되는 방향에로 나갔는바 저급학년 어린이들에게는 “짝짜꿍’(윤석중 작사, 정순철 작곡), “산토끼”(리일래 작곡), “봄나들이”(윤석중 작사, 권태호 작곡)등을, 중급학년과 상금학년 학생들에게는 “고향의 봄”(리원수 작사, 홍란파 작곡), “고드름”(유지영 작사, 윤극영 작곡)등을 교재의 노래로 선택하였다.” (김덕균 외 “조선민족예술교육사” 동북조선민족교육출판사 1992년 제42~43페지) “전후 15년이나 중국에 있으면서 그는 조선민족 음악교육에 심형을 기울이였고 많은 동요곡을 작곡하여 조선민족아동음악의 발전에 적극적인 기여를 하였다.” (“20세기 중국조선족 음악문화” 중국조선족음악연구회 편. 민족출판사 2005년) 이즈러졌다 둥글어지며 그 빛을 이루어 가는 달처럼 “반달”은 영욕과 더불어 오늘날까지도 룡정사람들이 애창하고 전 민족이 애창하는 동요로 불려지고있다.   "장백산" 2014년 4월호   ☞ 김혁 문학블로그: http://blog.naver.com/khk6699 ☜              
6    민족교육계몽의 타종(打鐘)꾼 댓글:  조회:3248  추천:10  2014-06-16
소설가 김혁의 인물만필 시리즈 (2)   민족교육계몽의 타종(打鐘)꾼 - 김 약 연 … 땡. 땡. 땡. 종소리가 울렸다. 종소리는 부채살처럼 펼쳐져 명동의 벌판에 가득히 내려앉고 있었다.  그 소리에 외양간에서 소가 음메! 울었고 홰대우에 앉았던 닭들이 푸드득 깃을 쳤다.    모난 계명의 소리는 잠자는 마을을 깨우고 있었다. 규암 김약연은 교회 옆 느티나무에 얹은 종각아래에서 종을 치고 있다. 깊은 눈매에 형형한 눈빛, 하늘 향해 쳐들 린 카이저 콧수염, 하얗게 빛나며 휘날리는 두루마기… 종소리의 은은한 여운 속에 김약연은 독락(独乐)하는 듯한 표정으로 소리 없는 미소를 머금고 마을을 지켜보고 있다. ... ... 나의 장편소설 “시인 윤동주”에 나오는 첫 구절이다.      지금으로부터 100여 년 전, 북간도지역에 이주민들의 “리상촌”을 건설하고 민족교육계몽의 종소리를 높게 울린 이가 있으니 바로 규암(圭巖) 김약연이다.   명동촌과 명동학교를 말하기에 앞서 이주민들을 휘동하여 언땅에 개간의 보습을 박고 지탑을 잡은 김약연에 대해 말하지 않을수 없다.   1899년 2월 18일, 종성출신들인 성암  문병규 학자를 선두로 남평 문씨 가문의 40명, 규암 김약연 학자의 전주 김씨 가문 31명, 김약연의 스승인 남도천 학자 가문 7명과 회령 출신인 소암 김하규 학자의 김해 김씨 가문의 63명— 도합 141명이 두만강을 넘고 있었다. 철판처럼 얼어붙은 두만강을 건너 고향을 등진 자의 한숨처럼 늘 찬 오랑캐령을 넘어 그들이 다다른 곳은중국의 간도 화룡현 지신사 (오늘의 룡정시 지신진 명동촌)에 들어섰다. 인적 하나 없고 오직 외로운 비둘기떼의 구슬픈 소리만이 맞아주는 “부걸라자”에 이른 이들은 수백 정보의황무지를 사들이고 서둘러 개척의 날을 박았다. 그리고 마을 이름을 다시 “명동”이라고지었다. 이렇게 드디어 바람 세찬 간도땅에도 명동이 일어 섰다. 서울의 명동처럼 화려하지 않은 황량한 벌판. 하지만 동쪽, 즉 조선을 밝힌다”(明東)는 그 이름대로 개척민들이 운집한 이곳에서 조선인들의 공동체인 명동촌은 명실공히 이주민들이 선망하는 “간도 제1촌”으로 되였다. 장대한 이주대오를 이끌고 낯설고 물 설은 고장에 이른 개척단의 선두주자로 는 당년 32세, 눈부신 활약을 펼치고 있던 김약연이였다. 김약연은 1868년 10월 24일 조선 함경북도 회령 동촌행관에서 태여났다. 김약연은 회령에서도 인끔높은 유가적 가풍의 집안에서 자랐다. 그는 어려서 유학 경전에 통달했다. 17세에 벌써 맹자를 만독하여 거유(巨儒)의 칭호를 얻은 유학자였다. 김약연, 문병규, 남도천, 김하규 이들 네 학자는 모두 고향땅인 종성과 회령일대에서 서재를 꾸리던 훈장들로 알려진다. 명동일대에 이주한 후 문병규, 남도천 두 학자는 환갑이 넘어 서재에서 손을 뗐으나 김하규는 대사동에 소암재를,  남도천의 아들 남위언은 중영촌에 함한재를 각기 서재를 설치하고 학동들을 받아들이였다. 김약연도1901년 4월에 장재촌에 "규암재”라 일컫는 서당을 꾸렸다. 자신의 호를 딴 서당이였다. 주로 한학을 전수하는 구식교육이었으나 이것이 북간도 한인들의 첫 배움터로서 교육사상 아주 큰 의의가 있는 것이다.   김약연의 "규암재"뜨락에 모인 명동사람들   리상설의 "서전서숙"이 일제의 간섭과 탄압으로 폐숙 (废塾)되자 김약연의 사촌동생인 김학연을 비롯한 "서전서숙" 출신의 일부 선생과 학생들이 명동에 오게 되였다. 김약연은 그들과 협상한 결과 작은 서당을 그만두고신학교육을 실시하는 새로운 서숙을 차리기로 했다. 김약연 등은 규암재를 토대로 몇 개 서재를 합쳐 사립 명동서숙을 세우고 페교 된 룡정 서전서숙의 정신을 이어 받았다. 그리하여 "명동서숙"이 1908년 4월 27일에 창립, 초대숙장으로는 김약연이 맡게 되였다. "명동서숙"은 창립된 첫해부터 잘 꾸려져 이듬해 4월에 현대 멋이 물씬 풍기는 명동학교로 개창 되였다.  2010년 복원된 명동학교의 모습   1910년에는 3년제 중학부가 증설되였다. 1911년 3월 김약연은 여성교육의 필요성을 느끼고 명동학교에 녀학부를 세웠다. 이것 역시 중국조선족 이주사에서 처음으로 있은 녀성교육으로 된다. 김약연은 마을 학교의 교장직을 맡고있지만 사실상 마을의 터주대감격이였다. 그 인물됨이 아주 커서 마을사람들의 깊은 존경을 받고있었다. 관후장자의 풍모를 지닌 풍채가 당당했을뿐만아니라 매사에 너그러웠고 환했고 정이 넘쳤다. 김약연을 기억하는 사람들이 하나같이 경모의 마음을 감추지 못한 것은 또 솔선수범하는 그의 삶 때문이였다. 그는 명동학교 교장일을 보면서도 친히 학교에서 교수를 담당하였고 마을사람들을 이끌고 학전(学田)의 밭갈이, 기음, 수확과 탈곡을 하였으며 교사의 수건 심지어 방구들을 고치고 까래를 결는 등 궂을 일도 가리지 않으면서 이신작칙의 본을 보였다. 그의 휘동하에 학교와 마을의 질서는 정연하고 옳바르게 잡혀나가게 되였다. 당시 명동학교의 학과목을 보면 소학부에 국어, 성경, 산수, 력사, 지리, 체조 등 13개 과목이고 중학부에 국어, 수신, 력사, 지지(地志), 신한독립사, 사범교육학 등 23개 과목이였다. 김약연은 학과목의 중심을 조선민족의 말과 글을 가르치고 조선의 유구한 력사와 지리를 가르치는데 두고 학생들에게 민족자부심과 반일의식을 키워주기에 힘썼다. 후에 일제침략자들이 사립학교들에서 조선어와 조선력사, 조선지리를 가르치지 못하게 하던 시기에도 김약연은 여전히 조선어와 조선국문, 조선력사와 조선지리, 조선노래를 의연히 가르치게 하였다. 김약연은 학교운영에 힘쓰는 한편 민중교육에도 힘을 아끼지 않았다. 그는 명동학교를 둘러싸고 명동촌,장재촌, 신동촌 등 6개 마을에 야학을 꾸리고 문화를 널리 보급하며 반일계몽운동을 활발히 벌리였다. 규암이 조직한 명동학교는 갈수록 생기를 띠고 명성이 높아져 뜻있는 청년들은 연변 각지와 남북만, 조선,로씨야의 연해주 등지에서 륙속 모여 들었다. 명동학교는 일약 조선국내의 오산학교와 쌍벽을 이룬 독립지사 양성기관으로 발돋움했다. 1914년 5월 28일자 “신한민보”에는 이런 기사가 실렸다.  “간도에 있는 명동예수교학교는 설립한 지 4년에 교무가 날로 진흥하며 학생 수가 더욱 증가하여 150여 명에 달하였으므로 장차 학교를 크게 건축하고 교육을 더욱 확장하고자 하는 중이라 하더라”    명동학교 제17회 졸업사진  (앞줄 오른쪽 세번째가 김약연, 가운데 줄 맨 오른쪽이 시인 윤동주)   1919년 3월 13일 룡정을 중심으로 한 북간도 각지에서3만여 명 조선인들이 운집해 “조선독립만세”를 고창한 “해란강반의 봄 우뢰”로 불리는 만세시위운동이 일었다. "3.13"시위는 일제와 일제의 사촉을 받아 출동한 만군에 의해 무자비하게 탄압되였다. 탄압으로 희생된19명 시위자들 가운데는 3대독자이고 16세밖에 안되는 명동학교 중학부학생  김홍식도 들어있었다. 당시 “전러한족중앙총회(全露韩族中央总会. 그 뒤 국민의회로 개칭)”에 초청되여 갔던 김약연은 비보를 전해 듣고 로씨야에서 부랴부랴 귀로에 올랐다. 명동에 온뒤 김약연은 독립운동을 구체화 하기 위해 간도독립운동 기성총회를 발족시켰으며 리동휘, 구춘선, 황병길이 조직한 독립무장대오를 지원할 군자금 모금 운동을 벌였다. 1920년 2월 김약연은 중국 민국관청에 체포되였다. 그후로 김약연은 국자가 감옥에서 2년동안 연금되여 지냈다 . 봉오동전투와 청산리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던 홍범도부대와  김좌진 부대 그리고 1920년 1월 3일 명동과 불과 10여리 리 떨어진 동량리어구에서 군자금을 모으기 위해 조선 회령으로부터 룡정으로 보내는 일화 15만원을"철혈광복단"에서 탈취한 의거에는 명동학교 출신이거나 명동과 관련된 독립군 용사들이 적지 않았다. 명동촌은 당연히 일제의 눈에 든 가시”로 되였다. 일제는 명동을 이단으로 간주하고 더욱 엄밀히 감시하였다. 1920년 10월 북간도지역을 피바다로 만든 "경신년 대토벌"이 일제에 의해 일어났다. 당시 일제는 갑자기 명동에 덮쳐 들어 명동학교에 불을 질러 명동사람들이 터를 닦고 세운 명동학교를 재더미로 만들었다. 1922년 가을, 민국관청에서 석방되여 명동에 돌아온 김약연은 또다시 명동학교의 교장으로 재임하였다. 그러나 1924년 갑자년 특대 흉년이 덮쳐왔다. 명동학교는 운영난에 시달렸고 왕년의 생기를 잃어갔다. 노령에도 불구하고 명동을 지켜내려는 김약연의 노력은 외롭고 처절했다.  하지만 그 이듬해 중학부가 취소되고 중학부의 교원들과 일부 학생들이 룡정의 여러 중학교로 옮겨지자 명동학교도 교회에서 경영하는, 남녀공학학교로 바뀌었다. 1928년 환갑연의 김약연은 명동을 떠났다. 솔가하여 룡정으로 떠났다. 명동촌은 김약연이 퇴장하면서 일약 빛을 잃었다. 명동은 마을의 지탑을 잡고 향도의 종소리를 울리던 옛 주인을 잃었다. 하지만 그 주인이 창설한 명동학교는 력사의 갈피에 그 존재를 또렷이 적었다. 명동학교가 창설되여서부터 중학부가 1925년에 페지 될 때까지 18년간 학교는 무려 1천명의 애국청년들을양성하여 졸업시켰다. 이 졸업생들은 모두가 항일투쟁에 나섰거나 민족교육사업 그리고 문학가와 저명한 예술가로 청사에 길이 빛날 업적들을 쌓았다. 그 중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읊조렸던 윤동주는 김약연의 누이동생의 아들이자 명동학교 학생으로서 김약연이 가르친 제자였다. 그리고 영화 “아리랑”을 만든 춘사 라운규, “통일의 아버지”  문익환,조선 최초의 비행사 서왈보 등 기라성 같은 명사들이 이곳에서 자라면서 신앙을 물려받았고, 근대교육을 통해 민족의식을 키웠다. 김약연의 룡정자택 옛터를 확인한 필자   1938년 2월에 김약연은 다시 룡정으로 돌아왔다. 은진학교 리사장, 기독교 목사의 신분으로 룡정에서 활발한 사회활동을 펼치던 규암 김약연은 1942년 10월 24일 병환으로 룡정자택에서 영면했다. 향년 75세였다. 선종(善終)하면서 애통해 울던 가족과 제자들이 유언을 부탁하자 이런 한 마디를 남기셨다. “나의 행동이 나의 유언이다” 이는 김약연이 숨을 거두며 하신 마지막 포효였다. 윤동주 생가 정원에 세워진 김약연 송덕비    룡정을 찾는 유람객들이면 의례 들려보는 명동촌의 윤동주 생가, 그 생가와 불과 몇십보 떨어진 더기에 위치한 명동교회 바로 그 동쪽켠에 낮다란 4각정자를 씌운 “김약연 공덕비(金跃淵功德碑)”가 서있다. 1942년 그이가 안식에 든 후 간도조선인사회 유지들과 명동마을사람들이 공동으로 만들어 세운 것이다. 공덕비는 윗머리 한 귀퉁이가 떨어져 나갔다. 광복 후 토지개혁 당시 김약연 일가가 당지에서 지주로 치부되여 청산을 맞게 되면서 이 비석도 버려졌다. 비석은 한때 마을 앞 개울의 징검다리로 씌었다고 한다. 1980년 대 마을 사람들은 흙속에 묻힌 이 비석을 찾아서 원 자리에 복구를 했다. 김약연 선생의 묘소는 선생의 생가와 “규암재”가 있던 장재촌의 뒤산기슭에 고이 모셔져 있다. 장채촌 뒤산의 김약연 묘소를 찾은 필자    당년 명동의 화신으로, 이름난 독립운동가, 교육가로서 북간도 조선인 사회를 밀고 나가는 수령으로 되기에 손색이 없었던 김약연, 그의 일생은 솔선수범하는 삶, 높은 인격, 남다른 지도력, 기독교적인 사랑으로 앞장서서 그 시대의 아픔을 건져 올려 치료하고 구제하려고 몸을 바쳐 온 일생이였다.     “중국민족” 2014년 2월호    김혁 문학블로그: http://blog.naver.com/khk6699
5    향토작가 김창걸 댓글:  조회:3457  추천:28  2011-01-11
  . 인물 다큐 .   향토작가 김창걸   김 혁   스튜디오, 사회자: 중국 조선족문학은 조선족의 파란만장한 삶이 그스란히 그려낸 장엄한 화폭입니다. 100여년의 민족이주사와 함께 펼쳐진 그 화폭에는 우리 중국 조선족문학을 이루고 게으름없는 작품창작과 문학활동으로 중국 조선족문학사에 빛나는 페이지를 남긴 문인들의 얼굴이 비껴있습니다. 매양 그 화폭을 접하게 될때마다 우리는 일찍 자신의 심혈을 다바쳐 그 화폭에 일획을 그으신 문학의 거장들을 경모의 마음으로 바라보게 됩니다. (“김창걸단편소설선집”을 들어보이며) 오늘 소개하게 될 조선족의 저명한 소설가 김창걸 선생님이 바로 그 중의 한분이십니다. 장재촌 풍경 (내레이션):    룡정시 지신진 장재촌은 김창걸선생의 고향이다. 장재촌은 시인 윤동주의 고향으로 많이 알려진 명동촌과는 삼합으로 가는 길 하나 사이에 두고 동쪽으로 2리쯤 상거해 있다. 장재촌으로 가면 륙도하 기슭에 하얀 비석 하나가 유표하게 보인다. 바로”김창걸문학비”이다. 문학비는 룡정시문학예술계련합회, 연변대학조선언어학부, 한국한민족문화연구소에서 2000년 8월 3일에 김창걸선생에 대한 경모의 정을 담아 세웠다. 김창걸선생은 1936년 1943년사이에 단편소설 20여편을 발표했는데 그중 “암야”가 대표작이다. 대리석을 다듬어 세운 문학비 정면에는 “암야”의 한글귀가 새겨져있다. 이 어두운 밤이 밝으면 빛나는 대낮이 되듯이 나의 고분이와의 앞길에도 이 어두운 밤이 지나가고 밝은 해발이 비쳐주기를 마음속으로 빌면서 나는 어두운 이 밤길을 빨리하였다. 무용장면, 암야의 대표적인 례문 랑독: …”인간의 칠십은 고래희인데 요렇게 살려고 태여를 낳는가?…” 어쩐지 노래를 불러도 신통치 않다. 어릴 때 김참사집 머슴 영돌이가 부르던 노래는 그렇게도 신이 나기에 따라다니며 졸라서 듣군 했는데 나는 아무리 그처럼 부르려 해도 도무지 되질 않는다. 아마도 내 마음이 가라앉지 않고 들떴기때문인가보다. 만일에 지금이라도 고분이가 바구니를 끼고 나물캐러 와서 내 노래를 들어준다면 더 신이 날는지 모르지만 봄은 이름뿐이고 아직 풀싹도 돋아나지 않았으니 벌써 나물캐러 나설리 없다. 흥, 왜 하필 이때 이 땅에 가난뱅이로 태여났는가? 스물두살 먹도록 장가도 못가는 주제에 왜 사내로 태여는 났는가? 생각하면 모두다 귀찮다. 나는 베던 나무춤도 거둘 생각이 없이 일어서서 마을을 내려다보았다. 옹지종기 쓰러지는듯한 오막살이들이 열댓집 늘어선 우리 마을에서는 최령감네 집만이 호기있게 뻗대는듯하다. 논이라고는 구경도 못하는 산골, 만주는 눈이 모자라 끝이 보이지 않는 넓은 들판이라더니 하도 떨어질데가 없어 십년을 앉은자리에서 산골놈이 되고마는가! 생각하면 통분한 일이지만 고분이가 사는 동네이니 나는 떠나고싶지는 않다. 봄바람에 여우가 눈물을 흘린다더니 참으로 그렇긴 하다. 남풍은 분명히 남풍이련만 오장륙부가 으스스 떨리고 눈에선 매운 눈물이 똑똑 떨어진다. 남의 눈을 도적하며 한가지 두가지 발등에 얹으며 베여놓은 나무춤이언만 삽시에 바람에 다 불려서 날려가고만다. 그러나 나는 한가지 두가지 흩어진 나무가지를 모으고싶지는 않다. 내 눈에는 분명 고분이가 보이지 않는가! 저 최령감네 집 울타리밑 우물에서 물동이를 이고 담모퉁이를 돌아서 가는것은 확실히 고분이가 아닌가. 자주저고리에 검정치마, 최령감네 울타리높이와 물동이 꼭대기가 거의 같지 않은가! 내가 일년내 두고두고 얼마나 눈여겨보았기에 빗보았을리 있는가. 그리고 삼단 같은 머리채도 바람에 하늘거리지 않는가! 그래도 처음엔 혹여나 잘못 보지나 않았을가 해서 오른손으로, 바늘로 쏘는듯한 매운 바람을 막으며 한참이나 서서 보았지만 아니나 다를가 그 물동이 임자는 고분이 집 찌그러진 부엌문을 열고 다리를 굽혀 키를 낮추어가지고 들어가지 않는가! 고분이와 나는 왜 빨쥐(박쥐)처럼 낮에는 꼼작못하고 밤에만 좋아하는지 모르겠다. 박쥐의 신세도 될수 없는 운명이라면 모르겠으나 버젓하게 대낮에 서로 좋아하지 못하는것은 아무래도 안타까운 일이다. 그러나 밤에만 만나서 좋아하는 고분이래도 나는 조금도 고분이를 잊을수 없다. 지금 잎나무는 벤다고 해도 고분이의 생각만이 머리에 간절하다. 고분이의 낯은 왜 웃을 때면 량쪽 볼에 쌍우물이 폭 패이는지, 그러니 나는 죽을듯이 미칠수밖에 없다. … … … … 스튜디오, 사회자: 학계는 김창걸선생에게 “연변땅을 토양으로 자라난 첫 향토작가이며 평생을 이 땅의 인민들과 운명을 같이 한 우리 문학의 개척자이며 선구자이다.”라고  큰 평가를 내리고 있습니다. 김창걸 문학비앞, 리광일: 김창걸선생님은 1911년 12월 생, 원적 조선 함경북도 명천군에서 출생하였습니다. 1926년 3월 룡정은진중학 입학했고 1927년초 대성중학 전학했다가1928년 가정난으로 중퇴하게 됩니다. 농사, 야학교원, 혁명활동을 하면서 조선 서울, 관북지방, 중국 북부지방, 쏘련 연해주 등지를 편답하였습니다.   1934년 귀향하여 소학교원, 회사사무원등 직을 지냈습니다. 1936년 처녀작으로 단편소설을 내놓습니다. 1943년 를 쓰기까지 8년 간 무려 20여편의 소설을 창작하였습니다. 1943년 등이 일본어판으로 바뀌자 를 쓰고 붓을 놓았습니다. 1949년 연변대학이 창립되자 조문학부에서 교단에 섰으며 1950년 소설을 쓰면서 다시 붓을 들었습니다. 1950년부터 선후로 연변문예연구회 문학부장, 연변문련 부주석직을 력임하셨습니다.   주요작품:으로는 해방전”무빈골전설”,”암야”등 수십편. 해방후 “새로운 마을”,”행복을 아는 사람들”등 수십편. “김창걸단편소설집”(해방전편) 이 있으며 번역작품으로는”시경”,”홍루몽”등과 공동편찬으로 “한조사전”,”조선어속담사전”등이 있습니다.   스튜디오, 사회자: 김창걸 선생님은 일찍 위만주국시기부터 룡정의 장재촌, 명동촌을 무대로 문학창작을 시작했습니다. 그의 작품들에는 조선이주민들의 애환이 그대로 깃들어있습니다. 땅 없고 힘없고 돈 없고, 모든것이 없는 사람들, 있는것이란 서러움뿐이지만 그래도 삶의 희망을 잃지 않고 성실하고 끈질기게 살아가는 모습들이 정겹습니다. 단편소설「암야」를 보면 바로 가난이 청춘남녀들의 아름다운 사랑이 짓밟히는 비극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지만 김창걸의 작품은 그렇게 비극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지요 주인공 명손이는 결국 사랑하는 처녀 고분이를 데리고 ‘암야’를 헤치며 ‘광명’을 찾아 나아갑니다. 이 작품의 우수성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이것은 그 어떤 역경 속에서도  굴하지 않고 꿋꿋이 살아온 중국 조선족 이주민들의 삶의 참 모습을 보여준 것이기때문입니다. 북경 호텔, 장춘식:   지금까지 김창걸의 작품을 론의할때 거의 모든 론자들이 “암야”를 김창걸의 대표작으로 꼽고있고 또 해방 전 조선족 소설창작의 가장 큰 성과작으로 평가하고 있습니다.   이 작품의 가치는 우선 갈등을 이룬 량대 세력이 잘사는 사람과 못사는 사람으로 되여있다는 점, 즉 계급적 대립을 통하여 문제를 풀어나갔다는데 있을 것입니다. “어쨌든 양복쟁이신사보다도 보리마당질에 보리거스러미를 잔뜩 뒤집어쓴 내 얼굴이 고분이에게 더 좋은 것은 회박을 뒤집어쓴 거리계집보다도 보리방아 찧고 보리겨를 담뿍 쓰고 나온 고분이 얼굴이 나에게 더 어여쁘고 더 좋은 것이나 마찬가지일 것이다. 내가 뾰죽구두 짜리에게 장가 못 갈 것이나 고분이가 양복쟁이한테 시집 못 갈 것이나 마찬가지 신세이긴 하다. 그러니 촌사람은 촌사람끼리, 없는 놈은 없는 놈끼리가 늘 좋은 법이다.” 이는 이 작품의 주제를 분석할 때 흔히 인용되는 예문입니다. 작품의 주제의식을 형상적으로 잘 표현한 부분이라 하겠습니다. 특히 작품에서는 그러한 갈등을 주인공인 명손이라는 시골 젊은이의 시점에서 고분이라는 처녀에 대한 사랑의 감정과 관련시켜 전개시킴으로써 보다 리얼리티를 획득하고있다. 이러한 분석은 다수의 평자들이 일반적으로 지적하는 부분입니다.   그러나 필자는 오히려 매매혼인이라는 사건의 시점에서 이 작품을 이해하고 싶습니다. 즉 고분이는 빚 때문에 외통눈이 남가가 아니면 나이 오십에 아들이 없어 소실로 고분이를 사려는 윤주사에게 팔려가야 할 운명입니다. 최령감네 빚을 변리까지 일백오십 원 졌기 때문이지요. 그리고 최령감은 딸을 팔아 부자가 되였기 때문에 그에게서 얻은 빚은 도무지 미룰 수가 없기 때문이다. “응, 네놈의 딸은 궁녀더냐, 선녀더냐, 대감집 규수더냐? 이놈아, 내 돈도 딸을 팔아 모은 돈이다. 네 자식만 딸이더냐? 나두 다리 저는 놈에게 후실루 딸을 줄 때에는 생각이 좋지 못했다. 내 딸은 썩은 호박새낀 줄 아느냐?” 이것이 최령감의 빚을 갚지 않으면 안된 이유가 되는 셈입니다. 우리 민족 이주민들이 간도 땅에 뿌리를 내리기 위해 얼마나 가슴아픈 대가를 치렀는지를 보여준 대목이라 하겠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돈을 모아 부자가 된 최령감은 자신의 지난날의 아픔을 또 다른 가난한 사람에게 전가(轉嫁)시키고자 합니다. 여기서 있는 자와 없는 자간의 갈등이 다시 발생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어두운 밤이 밝으면 빛나는 대낮이 되듯이 나와 고분이와의 앞길에도 이 어두운 밤이 지나가고 밝은 해발이 비쳐주기를 마음속으로 빌면서 나는 어두운 이 밤길을 빨리하였다.” 이는 「암야의 결구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전성호는 “특히 소설의 주인공 청년 남녀의 야간도주는 비록 그것이 소극적이고 자연발생적이기는 하지만, 그 사회적 현실에 대하여 부정(否定)하고 현실극복의 자세와 저항적 의지를 표명함에 있어서는 커다란 문학적 의의를 산생시킨다. 그리하여 작자는 야간도주를 하고 있는 그들의 앞길에 밝은 미래를 제시하였던 것이다.”고 평가하고있다. 대체적으로 정확한 평가라 할 수 있습니다. 정제된 묘사와 형상적인 인물표현으로 그리고 함경도사투리의 적절한 사용 등 측면에서도 “암야”는 해방후 우리 소설문학에 중요한 모범이 된 작품입니다.   장재촌 모습 (내레이션): 김창걸 선생은 조선족 문단에서 '향토작가'라고 불리고 있다. 그의 소설적 특징 이 바로 조선인의 인정 세태와 풍속 습관 등을 잘 그려내고 있기때문이다. 사회적 배경과 자연의 풍광을 묘사한 부분을 살펴보면 그의 향토 작가적 특징이 두드러진다. 선바위 앞에 드러누운 황무지속의 밭뙈기, 우비우비 파고 심은 곡식, 팔뚝 같은 강냉이 이삭, 베개 같은 감자들에 대한 묘사는 사회적 배경과 함께 땅에 대한 작가의 애정과 관심을 함께 잘 표현해내고 있는것이다. 사진속 김창걸의 모습 (내레이션) 김창걸 선생은 시종일관 사실주의적 창작방법에 충실하면서 민족에 대한 뜨거운 애정 그리고 민족의 미래에 대한 락관인 희망을 버리지 않았던 작가였다. 그의 작품은 또한 당시 우리 민족의 다양한 삶의 모습을 소재로 하였으며 동시에 현실에 대한 날카로운 작가적 안목과 함께 예술적 형상미를 지닌 작가로서 기억할 필요가 있다고 하겠다. 스튜디오, 사회자: 지난 100여 년의 력사 속에서 중국 조선민족은 근면으로 자신들의 삶의 공동체를 형성하였을 뿐만 아니라 자랑할만한 우리 조선족문학도 이루어 냈습니다. 오늘날 중국 조선족문학은 그 지역적, 력사적 특수성으로 중국문단과, 한반도 문학권에서 더욱 두드러지게 부각되고 있으며 그 의미가 더욱 새로워 지고있습니다. 따라서 김창걸 선생님과 같은 문학의 선각자들이 피워 올린 꽃은 오늘날에도 그 향기를 잃지 않고 더욱 큰 꽃망울로 더욱 짙은 향기로 만개될것입니다.   연변위성TV 종합문화프로 “두만강” 제3회   김혁 문학블로그: http://blog.naver.com/khk6699      
4    리화림 녀사 댓글:  조회:3580  추천:30  2010-02-24
  .  칼럼 .   리화림 녀사 김 혁   30년대의 리화림   1 10대부터 문학에 심취되여 이러구러 량산하다보니 그에 따라 받아안은 문학상이20여차는 된다. 수상마다 사연이 있고 감회가 있겠지만 그중 잊을수없는 상이 화림신인문학상이다. 나는 1994년 아동중편소설 “거북구슬”로 제3차 화림신인문학상을 수상했다.  그 상을 잊을수없는건 나의 첫 중편이고 첫 력사소설이며 또 관행대로 그 상의 수상을 계기로 중국작가협회 연변분회 아동분과에 입회할수 있었기때문이다. (지금은 소설분과에 몸담그고 있지만 애초에 나는 아동분과로 작가협회에 입문, 후에 나의 직성에 맞는 쪽으로 분과를 바꾸었다) 리화림녀사를 만나본것은 연변일보사에 입사하여 문화부기자로 뛰던 1994년경이였다. 대련시조선족문화관에서 조선족민속절을 개최했는데 취재차로 대련에 갔다가 그이의 존안을 뵈였다. 민속절이 열리는 운동장의 가녁에 곤색옷에 하얀 운동모를 눌러쓴 가녀린 몸매의 한 로파가 앉아있었는데 역시 나처럼 화림문학상을 수상한 대련의 한 문학도가 그가 바로 리화림할머니라고 알려주었다. 나는 어줍게 다가가 연변에서 왔으며 화림문학상의 수혜자라고 인사를 드렸다.. “연길에서 왔다고?” 반색하며 할머니는 나의 손을 꼭 잡아주었다.   말그대로 신인때이라 어리뜩하기 짝이 없었던 나는 할머니와 몇마디를 나누지 못했고 사진 한장도 남기지 못하고말았다. 하지만 지금도 그 존함이 나오면 당시 하얀 운동모, 안존한 얼굴의 로파가 떠오르군한다. 2 1932년 4월 29일 아침, 상해의 홍구(虹口)공원. 일본 천황의 생일인 천장절(天長節)기념행사가 열리는 식장에 스프링 코트 차림의 남자와 세련된 양장 차림의 한 젊은 녀인이 도시락과 물통을 들고 들어섰다. 녀인은 남자가 공원안으로 무사히 들어가는것을 확인한 다음 골목으로 사라졌다. 그날 상해는 발칵 뒤집혔다. 스프링코트차림의 남자가 도시락 폭탄을 던져 상해주둔군 일본군 총사령관 시로가와 대장 등 일본인 수십명이 폭사하고 부상을 당한 거사가 발생한 것이다. 사건의 주인공 윤봉길은 현장에서 일본경찰에게 체포되였다. 그날 윤봉길을 도와 삼엄한 검문검색을 통과한 양장을 한 27살의 녀인이 바로 리화림이였다. 1932년, “한인애국단”은 두차례 테러작전으로 일본침략괴수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고 세인을 놀래웠는데 윤봉길 폭탄투척사건 이 일기 몇달전인 1월 8일에는 리봉창의사가 도꾜로 건너가서 일본천황 히로히도를 요격하여 혼비백산시킨바 있는데 당시 김구의 명을 받고 리봉창의사가 폭탄을 숨겨 운반한 그 특제 “훈도시”를 만들어준 사람 역시 리화림녀사였다. 원체 윤의사의 홍구공원 의거에는 리화림 녀사가 윤의사와 부부로 변장해 식장에 들어가기로 돼 있었다. 이에 따라 두 사람은 사전에 공원내 지형을 살펴보고 거사 지점까지 잡아놓았다. 그러나 이 계획은 리녀사가 일본어를 잘 모르는 데다 두사람이 함께 행동하면 로출될 념려가 있다는 념려로 취소되고 결국 윤의사 혼자 거사하는것으로 결정됐다. 리화림 녀사는 홍구공원거사에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직접 개입함으로써 우리 민족의 항일사에 두고두고 전해질 두거사에 직접 참여한 력사의 증인으로 되였다.   윤봉길 의사  리봉창 의사 리화림은 1905년1월 6일, 평양에서 태여났다. 본명은 리춘실, 미국인 선교사가 운영하는 교원학교에 다닐무렵, 평양의 고등학교 학생들이 주축이 된 력사문학연구회에 들어가 사회주의사상을 익혔다. 열네살때 "3.1"운동에 참가했으며1927년 조선공산당에 가입했다. 1930년 3월 압록강을 건너 중국 상해로 갔다. 상해에 도착한 리화림은 리동해라고 이름을 바꾸고 백범 김구가 이끄는 애국단에 자원했다. 리화림은 심한 재정난을 겪고 있는 조직의 부담을 덜기 위해 나물장사, 빨래, 수놓기 등을 하면서 생계를 꾸리고 푼돈을 모아 활동경비로 썼다. 그러면서 밀정 처단, 연락활동 등 주어진 임무를 충실히 수행하여 김구의 신임을 한몸에 받았다. 비서로 늘 가까이서 일한데서 두 사람이 애인 사이란 소문이 날 정도였다. 테러단으로는 조선의 해방과 혁명을 이룰수 없다는 “고민”으로 계속 함께 싸우자는 김구의 만류를 뿌리치고 혁명의 기지 광주로 떠났다. 1932년 늦가을, 리화림은 의열단의 추천을 받아 광주 중산(中山)대학 법률학부에 입학했다. 중산대학은 손중산이 세운 종합대학으로 본래 광동대학이였다가 손중산의 사후 그를 기리기 위해 중산 대학으로 이름을 바꾼 곳이다. 중산대학에는 조선인 학생들이 상당수 있었는데 그 중 대부분이 광주봉기에 참가할 정도로 혁명운동의 산실역할을 했다. 리화림은 법학부에서 2학기동안 공부한뒤 의학부로 옮겨 대학부속병원 견습간호사로 일하면서 의학공부에 메진했다. 한편 1935년 7월, 남경에서는 김원봉(金元鳳)이 의열단을 비롯한 5개 단체를 통합하여 민족혁명당을 창립했다. 김구의 애국단과 중국공산당 소속 조선인이 참여하지 않아 명실상부한 민족유일단은 못 되었지만, 중국을 무대로 활동하는 여러 세력들을 통합한 민족혁명당의 의의는 매우 크다. 민족혁명당은 1942년 임시정부에 참여하여 김구가 이끄는 한국독립당과 함께 림시정부의 량대 축을 이룬다. 리화림은 1936년 1월 민족혁명당에 입당하여 남경으로 갔다. 남경에서 리화림은 민족혁명당 부녀대 부대장직을 맡아 주로 의료보건사업에 주력했다. 부녀대는 조선녀성의 조직화, 중국녀성들과의 통일전선결성을 목표로 항일선전활동을 폈다. 이때 리화림은 리집중과 가정을 이룬다. 중일전쟁이 한창인 1938년 10월 10일, 한구(韓口)에서 조선민족전선련맹의 무장부대로 조선의용대가 창설되였다. 조선민족전선 연맹은 조선민족혁명당(김원봉), 조선민족해방운동자연맹(김성숙 등), 조선혁명자연맹(유자명, 유림), 조선청년전위동맹이 련합한 좌파연합체다. 그 무렵 김구는 한국국민당(김구), 한국독립당(조소앙 등), 조선혁명당(지청천, 일명 이청천 등)등이 모인 우파연합체 광복단체연합회를 이끌고 있었다. 1939년 3월, 이회림은 조선의용대 본부가 옮겨가 있는 계림으로 가서 부녀대 부대장이 되였다. 당시 조선의용대는 300여명의 대원이 3개 지대와 부녀대, 3.1소년단으로 편성되여있었으며 부녀대의 주된 활동은 선전사업이였다. 조선의용대의 선전활동은 훌륭한 성과를 거두었던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적의 진지 바로 앞까지 접근해서 “염전반전(厭戰反戰)”정서를 불러일으키는 공작을 벌렸고 항일투쟁정서를 높이는 가극을 공연하기도했다. 이같은 선전활동에서 리화림과같은 녀성들의 활약이 특히 두드러졌다. 1940년 11월 열린 조선의용대확대간부회의는 국민당이 소극적으로 항일하는 형세하에 조선의용대는 팔로군의 항일근거지로 가야만 전도가 있다는 견해로 합치되여 화북지방으로 주전장을 옮기기로 결정했다. 우선 20여명의 선발대가 락양으로 파견되었는데 리화림은 이 선발대의 한 사람으로 뽑혔다. 이때 리화림은 전신무장을 하고 일본군진지 앞에 몸을 숨긴 채 메가폰을 들고 일본군에게 선전하거나 삐라 같은 선전물을 적 진지 안에 뿌려넣는 등 무장선전전을 수행한며 락양으로 향했다. 1942년5월에 있은 반소탕전후 조선의용대의 활동중심지는 팔로군 129사단이 주둔중인 태항산(太行山)으로 옮겨졌다. 리화림은 조선인 간부들을 위한 훈련반에 들어가 중국혁명사, 중국공산당의 항일방침 등을 공부하고 부녀대 대장이 되였다. 그무렵 태항산 근거지의 생활은 무척이나 어려웠다. 적들의 진절머리나는 소탕속에서 전사들은 군사훈련도 하고 정치문화학습도 하였다. 당시 의용군부녀대 대장 겸 의사로 있은 리화림도 사회과학원 간부양성반에서 반년동안 배우면서 전투생활을 하였다. 곡식이 제대로 나지 않는 산악지대여서 보통 강냉이가루에다 겨를 섞어 먹었는데 강냉이가루마저 없으면 겨만 먹어야 했다. 조선의용군은 전투가 없는 날이면 감자밭을 일구고 모택동의 대생산운동에 발맞춰 방직공장, 병원, 리발소, 상점 등을 차려서 직접 운영하는 자립활동을 했다. 태항산 기슭에는 돌미나리가 많았다. 리화림은 녀성대원들을 이끌고 돌미나리를 캐여 김치도 담그고 볶아서 반찬을 만들었고도토리를 주워다가 삶아서 가루를 내어 먹기도 했다. 하루는 나물을 캐면서 노래를 지어 동료 대원들에게 가르쳐주고 그 날 점심시간에 합창공연을 했다. 민요「도라지」에 맞춰 가사를 새로 지은 「미나리타령」이 그것이다.   미날,미날,돌미나리 태항산 골짜기의 돌미나리 한두 뿌리만 뜯어도 대바구니가 찰찰 넘치누나 에헤야 데헤야 좋구나 어여라 뜯어라 지화자자 캐어라 이것도 우리의 혁명이란다 대원들은 모두 이 노래를 좋아했다. 특히 “이것도 우리의 혁명이란다”하는 구절을 마음에 들어했는데 당시 대원들이 갖고 있던 “황무지 일구고 산나물 캐는 것이 혁명인가”하는 회의감을 떨치게 해주었기 때문이다. 리화림은 1943년 봄부터 병원에서 일하다가 그해 조선의용군이 연안으로 이동하자 1944년 4월 연안으로가 다음해 1월 연안 의대에 입학하여 못다한 의학공부를 시작했다. 리화림은 연안에서 렬화충천하는 대생산운동에도 참가하고 군정대학 교장 수하에서 자료간사사업도 하였으며 조선의용군 무정총사령의 파견을 받고 중국의과대학에서 공부도 하였다. 공부와 생산로동을 병행하는 고된 생활이였지만 리화림은 근면과 열성으로 이를 감당해나갔다. 뿐만아니라 격주에 한번씩 현지 주민들에게 당 정책과 시사문제를 해결하고 보건위생상식을 가르쳤다. 서툰 중국어이긴했지만 주민들은 그의 이야기를 무척 흥미있어 했다. “일본놈들은 언제 투항하나요?”, “국공합작을 또 하나요?”에서부터 “감기는 왜 걸리나요?” 등등 벼라별 질문을 들이대도 리화림은 짜증내는 일이 없이 일일이 해설해 주군했다. 1945년 8월 15일 일본이 항복한뒤 조선의용군은 동북으로 진군을 시작했다. 그러나 리화림은 그대로 남아 의학공부를 계속하기로 했다. 무정은 리화림에게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동무를 의대에 보낸건 앞으로의 우리 혁명사업에 전문훈련을 받은 의학자들이 필요하기때문이요. 지금 항일전쟁이 승리했지만 우리앞에는 더 간고하고 복잡한 혁명과업들이 나서고 있소. 동무는 절대 의학공부를 중도에 폐하지 말고 잘 배운다음 부대에 돌아오도록 하오. 그때 가서  내가 꼭 동무를 데려가겠으니 안심하오.” 1946년 11월 21일  리화림은 중국공산당에 가입했다. 국내해방전쟁과 항미원조전쟁에 뛰여들었고 전후에는 새중국의 의료보건사업에 정력을 몰부었다.  1952년 와방점 후방병원 기술과 과장으로, 심양의사학교 부교장으로, 국가교통부 위생처 기술과장으로 일하였으며 1956년 중앙당학교를 졸업하고는 연변위생학교 교장, 연변조선족자치주 위생처 부처장, 위생국 부국장을 지냈다. 문화대혁명시기 박해를 받다가 1978년에 중앙조직부의 도움으로 억울한 루명을 벗고 연변자치주정치협상회의 상무위원, 기관당위 상무위원으로 있었고 대련시정부시찰원, 대련시정치협상회의 상무위원으로 활약하였다. 1984년에 리직휴양했다. 리직후 리화림은 소박한 가장집물에 1950년대부터 입어오던 옷을 입어가면서 아껴먹고 아껴써서 알뜰히 모은 로임 2만여원을 1985년 한번에 당비로 바쳤으며 1986년에는 아동작품작가들을 장려하도록 1만2천여원을 중국작가협회 연변분회 아동문학상기금회에 기부하였다. 스무살 꽃다운 처녀에서 아흔살 할머니가 되기까지 혁명가로 중국 대륙을 누비며 족적을 남겼던 리화림은1999년 2월 10일 14:30분에 대련에서 서거, 향년 95세였다. 리화림은 림종전에도 유언을 남겨 자기의 전재산인 5만원을 대련시조선족학교에 기부하였다. 3 일전 제9회 연변작가협회 화림문학상 시상식이 있었다. 소설, 수필, 시, 아동문학 등 다양한 장르의 작품 20여부가 접수되였는데 최종 전정옥의 수필 “빛과 그림자”와 조옥자의 수필 “잊혀진 다듬이소리”가 선정, 산재지역에서 온 두 신인이 감격스럽게 상을 받아안았다. 리화림 녀사의 생전 숙원이 오늘도 이어져 빛을 발하는 장면이였다. 그동안 력사의 뒤안길에서 민족을 위해, 주의(主義)를 위해 위해 자신의 안일은 초개와 같이 여기며 산화(散花)해간 선렬들이 있다. 저 작열하는 태양보다 뜨거운 피로 강산을 물들이며 스러져간 이들의 고귀한 희생이 있어 오늘의 행복은 가능했다. 물질만능주의가 팽배하고 우리의 공동체가 흔들림을 의식하고있는 오늘날, 우리에게는 조금씩 잊혀져만 가는 민족정기를 되살리고 발전시키려는 노력이 어느때보다 절실히 요구된다. 우리 조선족공동체 구성원 각자가 자기 위치에서 최선을 다하면서 선각자들의 고귀한 희생정신과 업적을 알고 마음 깊이 되새기면서 민족의 번영과 발전에 전역을 경주해야 할것이다. 우리 모두가 그들이 흘린 피와 땀의 소중함에 대하여 다심금 생각해보는 뜻깊은 시간을 가졌으면 하는 바람을 가져본다.     "종합신문" 2010- 2- 22 김혁 문학블로그: http://blog.naver.com/khk6699        
3    조조가 온다 댓글:  조회:2888  추천:41  2010-01-21
  . 칼럼 .   조조가 온다 김 혁       1, 내 인생의 책 10권을 굳이 뽑으라면 그중에 단연 “삼국연의”가 있다. 있을뿐더러 그 순위가 세손가락안에 꼽힌다. 어릴적 상해미술출판사에서 손바닥 크기의 련환화로 된 “삼국연의”가 40권으로 출간되였는데 나는 한권한권 모조리 사들였다. 그때는 지금처럼 세트로  한꺼번에 나오지 않고 한주일 혹은 보름에 한권씩 나온데서 그 책을 기다리는것이 어린 나에게서는 그야말로 “몽룡을 기다리는 춘향”이도 무색할 지경으로 일일이 여삼추였다.” 그렇게 모은 책은 지금도 나의 서가에 색바랜채 깊숙히 꽂혀있다. 나는 “삼국연의”에 편집광(偏执狂)적으로 빠져든 매니아라해도 과언이 아니다. 삼국관련 서적만 나오면 모조리 사들이곤한다. 중앙TV”백가론단”프로에서 시리즈로 강연을 가졌고 책자로도 묶여져 나오면서 삼국열풍을 주도한 하문대학 교수 역중천(易中天)의 “품삼국(品三国)”은 물론 “정품(正品)삼국”, “삼국묘설(妙说)”, “삼국십강(十讲)”등 연구저서들이 서가의 전문코너를 만들정도로 수두룩하다. “삼국연의”를 각색한 드라마며 오우삼감독의 2부작 영화 “적벽”, 애니메이션으로 된 일본판 삼국지영화 지어 중국의 명창 선전방(单田芳)의 삼국연의 평서(评书)도 CD로 갖추어 놓았다. 뿐만아니라 삼국지관련 전문 블로그 “삼국지에 살고 삼국지에 죽다(http://blog.ohmynews.com/sgz333)”도 개설하여 운영하고있다. 일전에는 흑룡강민족출판사에 의해 “삼국연의”가 다시 완역되였는데 이미 중국판본, 한국판본, 연변인민출판사의 80년대 판본으로  갖추었음에도 또 한질을 사들이고 서로 대조하여 읽노라니 기락무궁(其乐无穷), 그 재미가 끝날길 바이없다. 한국의 리문렬, 장정일 등 소설가들이 현대인들의 취향에 걸맞게 삼국연의를 번안하여 재창작했는데 나 역시 그들처럼 언감 “삼국연의”를 한번 번안해보려는 막연하나마 거창한 꿈을 내내 가지고있다. 2, 그런 나와같은 “삼국연의” 매니아들을 흥분케하는 사건이 일었다. “삼국연의”의 주역 조조의 무덤이 발굴된것이다. 무덤은 하남성 안양(安阳)현 안풍(安丰)향 서고혈(西高穴)촌에서 발견, 하남성문물국은 발굴 작업을 하면서 력사, 고고, 고문학 방면의 전문가들을 동원해 수십차례의 현장 검증과 토론을 거쳐 조조의 묘라는 결론을 얻었다.이번에 발굴된 무덤은 지하 15m에 위치한 갑자(甲字) 형태의 구조로 총 6개의 묘실을 갖추고 있으며 전체 면적이 740㎡에 이른다고 한다. 금을 비롯한 각종 보석 200여 점이 출토됐으며 특히 위 무왕이 사용하던 창, 돌베개 등의 명문(銘文)도 찾아냈다고한다. 진위논란이 일고있지만 삼국연의 매니아들에게는 하늘같은 기쁨을 선사했고 이에 편승해 전국 나아가 아시아지역에서 “삼국연의” 열풍이 다시 거세차게 일고있다. 3, "조조"하면 사람들은 거개가 간웅(奸雄)의 대명사로 알고 있다. 중국의 국수(国粹)인 경극에서도 조조는 얼굴을 하얗게 분칠한 역신(逆臣)의 모습으로 나온다. 하지만 사실 조조만큼 력사적으로 오해를 받는 인물도 드물것이다. 현재 우리가 알고있는 조조의 이미지는 삼국시대가 끝난후 1000여년도 지난 원말명초에 살았던 라관중이라는 글쟁이가 쓴 소설속에 나오는 조조이다. 재미있는 소설은 딱딱한 정사보다도 강한 흡인력을 지녔고 그리하여 어찌보면 동양 최고 영웅 이였던 조조는 악의 화신으로 우리들의 머리속에 각인되게 된것이다. “삼국연의” 매니아로서 깊이 읽을수록 느끼게되는것은 라관중의 소설도 력사에 바탕했지만 그 당시 정치 권력과 야합할수밖에 없은 일종의 정치 교과서였다는것이다. 하지만 너무나 뛰여난 경전이였기에  조조 또한 억울하게 너무나 오래동안 오명을 뒤집어 썼던것이다. 소설속 허구를 걷어내면 조조의 새로운 면모가 드러난다. 조조는 결단력과 실행력이 뛰여난 인물로서 법령과 상벌을 엄격하게 집행했고 인재를 적극 등용했으며 겸손한 태도와 본받으려는 자세를 지닌 흠잡을데 없는 주군이였다. 이뿐만 아니다. 조조는 자신만의 안목을 키우고 자신감으로 도전하고 작은것은 버릴 줄 알며 실패를 성공의 밑거름으로 삼을줄 알았다. 이러한 덕성때문에 전란이 분분한 삼국시대에 가장 먼저 천하제일의 자리에 오를수 있었던것이다. “우정”과 “신의”를 바탕으로 다양한 “지략”과 “처세술”로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이들에게 삶의 진리와 교훈을 안겨 주는 “삼국연의”는 오늘도 베스트셀러로 서점가에 넘쳐나고 잊혀졌던 영웅 조조도 다시 사람들사이에 회자(膾炙)되고있다. 이제라도 조조를 다시한번 찬찬히 읽어볼 일이다.  "연변일보" 週刊 "종합신문" 2010- 1-18   김혁 문학블그: http://blog.naver.com/khk6699     모아민 드라마三國演義(삼국연의)주제곡
2    솔제니친과 김학철 댓글:  조회:5049  추천:75  2007-06-29
. 잡문 .    솔제니친과 김학철  김 혁     솔제니친의 경우    지난 여름, 말복더위에 서재에서 머리맡 가까이에 선풍기를 돌리면서 요즘 회자(膾炙)되는 신간을 읽다가 버릇처럼 컴을 열었는데 그 부음을 접했다. 쏘련이 낳은 문학의 거장 알렉산드르 솔제니친이 서거한 소식이였다. 세계적 지성- 솔제니친은 8월 3일 오전 11시, 향년 89세로 영원한 안식에 들었다. 네티즌들이 올린 도편자료와 동영상에서 솔제니친의 모습을 다시 한번 찬히 뜯어보았다. 수난과 고집, 지성을 말해주듯 깊고 형형한 눈길과 몹시 벗겨진 머리와 수북하고 흰 수염은 일견에도 지성적인 어떤 현자(贤者)의 풍모를 보여주고 있었다. 인터넷에 널려있는 그이의 생애와 문학업적에 대한 편린(片鱗)들을 뽑고 정리하여 나의 문학블로그에 올리면서 한 지성의 인생궤적을 따라 가보는 시간을 가졌다. 화려한 문학사적 명성과는 달리 솔제니친의 삶은 기나긴 고난의 려정이였다. 알렉산드르 이싸예비치 솔제니친은 1918년 12월 11일 북깝까즈의 도시 끼슬로보드스끄에서 태여난다. 태여나기 6달 앞서 그의 부친인 세묘노비치 솔제니친은 불의의 사고로 당금 태여날 아들을 보지못한채 세상을 떠난다. 어머니 따이샤 자하로브나는 속기사(速记师)였다. 교양있는 어머니의 교육으로 솔제니친은 일찍부터 문학에 눈을 뜨며 장래 희망이 작가였던 소년은 고향을 떠나 모스크바로 향한다. 로스토프대학에서 물리수학을 전공하면서 한면 모스크바대학 통신학생이 되여 력사, 철학, 문학을 배운다. 배우수업도 했지만 발성에 문제가 있어 배우의 꿈을 접는다. 대학을 나와 평범한 수학교사로 지내던중 2차대전이 발발(勃发), 1941년 히틀러가 쏘련을 침공하자 조국을 위하여 분연히 전장에 나선다. 로씨야군 포병장교로 용감하게 싸워 무공훈장을 두번이나 받는다. 그러나 1945년 친구에게 보낸 편지속에 불온한 대목이 있다는 죄장으로 무공훈장을 단 젊은 장교는 인생의 일대 전환을 맞고 일조일석에 나락으로 굴러떨어진다. 정치범으로 투옥되여 10년 동안 동토(冻土)의 수용소에서 온갖 고초를 겪는다. 광부, 벽돌공, 주물공으로 육체를 혹사하며 게다가 불치의 종양 수술까지 받는다.   솔제니친은 흐루쇼브 시대인 1962년 해빙기를 틈타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를 발표하며 문명(文名)을 알리기 시작한다. 문학지 “노비미르”지에 발표한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는 절제된 문체와 심리적 깊이로 수용소에서의 한 평범한 개인의 일상을 충격적으로 묘사한 작품이다. 당시 잡지의 편집장은 작가의 수감시절 겪었던 시련을 바탕으로 한 이 원고의 출판여부를 결정하지 못해 공산당 총서기였던 흐루쇼브에게 보여줬는데 흐루쇼브는 감동의 눈물을 흘리며 출판을 지지했다고 한다. 그러나 1964년 흐루쇼브가 실각하고 브레쥐네브가 취임한후 문화활동의 리념적 규제가 심해지면서 그는 반체제 인사라는 꼬리표를 달게 된다.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 “암 병동”, 그리고 “수용소 군도” 와 같은 위대한 작품들은 모두다 그가 실제로 체험한 무서운 경험을 바탕으로 하고있다. 10년여의 수용소 생활은 “억압에 대한 저항”을 주제로 하는 그의 작품세계의 기본적 질료(质料)가 됐으며 그때가 바로 그의 저항정신과 문학의 시발점이 됐다. 그의 작품활동은 쏘련의 이른바 “수용소 문학”을 개척한것으로 평가된다. 특히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는 전체주의의 억압에 대한 고발이라는 주제의식뿐아니라 수용소 죄수들의 은어를 사실감 있게 사용하고, 참혹한 수용소 생활과 죄수들의 유머를 대비하는 등 구성과 문체 면에서도 탁월한 수작으로 꼽힌다. 당국의 탄압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솔제니친은 불굴의 창작의욕을 고시(告示)한다. 그의 작가적 량심은 드디여 “수용소 군도”라는 대작을 이끌어낸다. 솔제니친은 원고지 1만장이 넘는 대작 “수용소 군도”를 통해 외부세계로부터 철저히 차단된 채 기아와 폭력에 시달리며 정치범 수용소에서 중로동을 해야 했던 류형자들의 삶을 그려낸다. 수용소에서 자행된 불법적 재판과 고문, 탈주, 폭동, 수형자들간의 갈등, 미성년자들의 타락상을 생생하게 보여주면서 그 누구보다도 적라라하게 당시 쏘련의 체제가 전통, 인격, 도덕 등 정신세계를 얼마나 파괴했는지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1972년 파리에서 출간된 “수용소 군도”는 발표직후 쏘련을 넘어 유럽 전체에서 커다란 센세이숀을 일으킨다. 그 방대한 리얼리티(真实感)에 담긴 핍진하고도 정확한 력사의 증언은 문학작품의 경계를 확장시켰다는 호평을 받는다. 작품 활동에 방해를 받게 되면서 더이상 쏘련에서는 공식적으로 출판이 어려워지자 결국 그는 국외에서 활동을 전개해나간다. “암병동”을 비롯한 주요 작품들은 해외에서 먼저 출간된다. 따라서 세계문단은 똘스또이를 이을 거장의 출현을 반겼고 그의 용기에 주목한다. 작품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 “암 병동”등 작품들은 1970년 솔제니친을 노벨문학상 수상작가의 반렬에 오르게 한다. 1970년 그에게 노벨문학상이 수여되지만 당국의 불허로 스웨덴의 스톡홀름에서 열린 수상식에 참석조차 못한다. 망명의 길에 올랐던 1974년에야 그는 자신의 노벨상을 수거(收去)한다. 빠리에서 최우수 소설상을, 스톡홀름에서 노벨문학상까지 수상한 사람이 모스크바 작가동맹으로부터는 제명당한다. 시민권까지 박탈당하고 차디찬 시베리아에 류배된다. 1974년 쏘련으로부터 추방되며 그때로부터 20여년에 거친 망명생활에 들어간다. 이후 독일ㆍ스위스ㆍ미국 등지에서 망명생활을 했던 솔제니친은 “수용소 군도” 2부와 3부를 펴내는 등 꾸준한 창작활동을 펼친다. 한 작가를 포용(包容)하는 그릇이 되지못했던 정부때문에 추방되였지만 그를 맞아준 서구사회 역시 그가 원하는 대안은 아니였다. 쏘련에 대한 미국의 이데올로기 선전전(宣传战)의 전위(前位)를 맡는 일을 그는 거부한다. 서방세계에 안주했다면 가능했을 안락한 삶을 또다시 스스로 포기한 셈이다. 서방세계는 그가 쏘련을 비난하고 서구의 가치를 높이 평가하기를 바랐지만 솔제니친은 늘 자기를 버린 조국을 마음에 품고 산다. 1974년 망명의 길에 올라 프랑크푸르트 공항에 도착한 그는 "작가는 조국을 떠나서는 존재할수 없다"고 감회를 토로한다. 그만큼 “나는 글 한 줄을 쓰는 데 1년이 걸린다”라고 말한것처럼 모어의 낱말 하나, 장절 하나하나에 깊은 사랑을 바친 작가였다. 1978년 하버드대 졸업식 연사로 초대되였던 솔제니친은 미국등 서구의 정치체제에 대한 신랄한 비판을 거침없이 쏟아낸다. 물질문명의 오염과 황금만능풍조가 만연한 미국에 대해서도 비난했고 구미의 도덕적 타락과 방종, 물신숭배에 대한 비판을 서슴지 않는다. 도덕성과 정신의 파괴에 맞먹는 서구 자유주의 기본개념에 대해 불만을 표시하면서 “서구가 쏘련의 대안적 모델이 될수없다"고 선언한다. 이에 반체제에 주목했던 서방은 자신들의 병리(病理)를 지적하는 “망명객” 솔제니친에게서 흥미를 잃어갔고 그를 반쏘 지성인의 상징으로 칭송하던 서구의 우파지식그룹은 그를 반자유주의자로 락인찍는다. 이러한 그의 태도는 많은 사람들에게서 자신을 소외시켰고 그의 망명 생활을 더욱 외롭게 한다. 인고의 망명생활중에서 그는 내내 조국을 그리워한다. 1990년 마침내 로씨야 시민권이 회복되여 1994년 “언젠가는 되돌아 갈것”이라고 되뇌였던 고국으로 돌아온다. 우여곡절 끝에 고국으로 돌아왔으나 그의 눈에 비친 현실은 그다지 밝지 않았다. 예리친의 로씨야는 령토가 축소되고 민주주의와 시장주의의 이름하에 부정과 부패로 얼룩진 정신적으로 파괴된 조국일뿐이였다. 몰락해가는 조국의 참담한 실상에 작가는 또한번 장탄식과 함께 깊은 고뇌에 빠진다. 자신의 80회 생일을 맞아 펴낸 시사평론집 “이 잔혹한 시대의 내 마지막 대화”는 분리독립 등으로 산산조각이 나버린 기막힌 현실에 대해 "로씨야는 과연 진정한 로씨야로 존재할수 있는가"라고 통절하게 부르짖는다. 우여곡절 고국의 품에 안긴 뒤에도 그는 여전히 비판의 칼날을 차갑게 세운다. 비판으로 일관된 삶을 살아온 그를 일각에서는 “욕쟁이 할아버지”라고까지 비난한다. 하지만 그는 물질주의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를 높여 전통적이고 도덕적인 가치로 돌아갈것을 촉구한다. 그가 비판한것은 로씨야의 물질주의에로의 경도(倾倒) 였고 그가 지키고자 했던것은 물질문명에 훼손되지 않는 로씨야, 바로 민족적인 가치였다. 로씨야를 경제위기로 몰아넣은 예리친대통령과도 극심한 불화를 보인다. 1998년 예리친이 80회 생일을 맞은 그에게 로씨야 최고권위의 “성 안드레이 피르보조반니사도” 훈장을 수여하겠다고 제의해오나 로씨야를 파국으로 이끈 정권이 주는 상은 받지 않겠다며 일언지하(一言之下)에 거부해버린다. 그는 "로씨야에 세번의 위기가 있었는데 로마노프 왕조가 들어선 17세기, 1917년 볼쉐위크 혁명 그리고 예리친의 취임"이라고 예리친을 통렬하게 비꼰다. 따라서 그는 공인(公人)들의 관심 밖으로 사라지며 교외에서 은둔생활을 한다. 2007년 6월 푸틴대통령은 솔제니친에게 로씨야 예술가들의 최고 명예로 꼽히는 국가공로상을 수여한다. 수상식에 불참한 솔제니친은 영상을 통해 이렇게 답사를 보낸다. “나는 생의 마지막날까지 력사가 우리의 기억뿐아니라 량심을 되살린다는것을 믿는다.” 2006년 그의 작품 전집이 발간에 들어가 2010년 완간될 예정, 하지만 끝을 보지 못하고 알렉산드르 이싸예비치 솔제니친은 세상을 천착(穿鑿)했던 눈을 감는다. 솔제니친의 사망소식이 알려지자 세계 주요 언론사들은 그의 타계 소식을 주요뉴스로 내보내고 문학과 생애를 자세히 소개하며 애도의 뜻을 표했다. 뉴욕타임스, AP통신 등은 “솔제니친은 20세기 로씨야의 가장 위대한 량심이였다”, “솔제니친의 량심에 대한 신념, 그리고 불굴의 저항정신은 이데올로기와 정치를 초월해 세계 독자들의 심금을 울렸다”, “유럽의 좌파 지식인에게 경종을 울린 작가"이며 "서구 물질만능주의를 비판하는 등 평생 지식인의 역할에 충실했다", "그가 남긴 작품 중 일부는 20세기 가장 위대한 문학적 업적"이라고 보도했다. 평론가와 사학가들은 "그는 인간가치의 문제를 모럴(도덕,륜리)의 차원에서 접근하고 철저한 사실주의적 기법을 사용하는 등 똘스또이와 도스도예프스끼의 리얼리즘의 계보를 잇는 작가"라며 " 20세기 로씨야 문학의 정점에 있는 작가"라고 말한다. “대문호 똘스또이와 도스도예프스끼가 19세기 로씨야 문학을 대표한다면 20세기 로씨야 문학을 대표하는 작가는 바로 솔제니친이라고 할수 있는바 솔제니친은 전세계를 통틀어 20세기의 가장 위대하고 영향력있는 작가중 대표적인 작가라고 할수 있다.”고 정평한다. 이렇듯 세계가 그의 죽음을 각별히 경건하게 애도하는 리유는 그가 어두운 철의 장막속에서 “인간의 자유”를 위해 펜 하나로 거대한 체제와 외롭게 싸우면서 투옥-추방-귀환”으로 이어지는 굴곡진 삶에서도 꼿꼿하게 자신의 철학을 지키는 위엄있는 일생을 보냈기때문이다.      김학철의 경우  다투어 솔제니친의 부음을 전하는 인터넷 사이트에서 눈에 확 띄는 제목이 있었다. “로씨야의 가치 지키려 시대와의 불화로 살다”라는 제목이였다. 불의와의 타협을 거부한 그의 인생을 퍽 잘 압축한 느낌의 글이였다. 부음과 그의 생평을 읽노라니 또 하나의 인물이 나의 뇌리를 선점(先占)하며 나타났다. 바로 우리문단의 거장 김학철옹이였다.   조선족 문인이라면 애대를 머금고 익숙하게 알고있겠지만 우리가 때때로 범문이나 사전을 찾아 판독(判读)하듯이 다시 한번 그이의 생애를 반추해 보기로 하자. 김학철은 1916년 11월 4일 함경남도 원산에서 누룩제조업자의 둘째 아들로 태여난다. 서울에서 보성고에 다니던 시절 윤봉길의 상해 홍구공원 폭탄거사에 충격받고 리상화의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에 감동받아 1932년 17세에 포부를 품고 상해림시정부를 찾아 교복을 입은채 무작정 중국행 기차에 몸을 싣는다. 의렬단과 조선민족혁명당을 거쳐 1937년 장개석이 교장을 담임한 중앙육군군관학교에 입학, 1938년 7월에 졸업한다. 1938년 10월 조선의용대에 참가한다 조선의용군 하북지대 제2대 분대장이 되여 용맹히 싸우다 1941년 12월 10일 호가장전투에서 일본군 총탄에 왼쪽다리를 맞고 생포된다. 나가사키 형무소로 이송되여 징역 10년을 언도 받는다. 회유와 협박에도 굴하지않고 전향서 쓰기를 거부한데서 3년 6개월 동안 상처를 치료 못받아 결국 다리를 잘라내고 만다. 1945년 광복과 함께 출소, 1945년 12월 “주간건설” 잡지에 소설 “지네”를 발표하며 그후 륙속 “담배국”, “균렬” 등 작품을 발표한다. 1946년 조선에서 로동신문 기자로, 인민군신문 주필로 돌다가 조선전쟁이 터지자 1950년 10월 다시 중국으로 건너온다. 저명한 녀류작가 정령이 소장으로 있는 북경 중앙문학연구소연구원으로 몇년 있으면서 중편소설 “범람”, 단편집 “군공메달”등을 중문으로 출판한다. 1952년 12월 연길로 와서 연변문학예술연합회 준비위원 주임사업을 맡아하다가 반년후 사직하고 전업작가로 활동한다. 이동안 소설 “새집 드는 날”, “번영”, 소설집 “고민”, 장편소설 “해란강아 말하라!” 1, 2, 3 부를 창작 출간, 로신의 “아Q정전”을 번역출판하기도 한다. 1957년 반우파투쟁확대화속에서 “반동분자”로 획분된다. 공직도 없고 로임도 없고 글을 발표할 자격도 박탈당한다. 1964년부터 개인숭배와 극좌교조주의를 비판한 27만자에 달하는 장편소설 “20세기의 신화”를 창작하기 시작하여 1965년 5월에 완성한다. 1966년 12월 반란파들에게 “20세기의 신화” 원고가 발견되어 기소, 감금 되며 징역 10년형을 받고 당적을 박탈당한다. 1980년 복권, 65살의 나이에 빼앗겼던 필을 찾아들고 창작활동을 재개한다. 문전에 “한인막고문 (闲人莫敲门. 한가한 사람은 문을 두드리지 마시오)”라고 써붙이고 잃은 시간을 벌충하듯 20년간 문학창작에만 일로매진한다. 2001년 9월, 풍진세월 외다리로 버텨온 몸이 더는 가망이 없다는것을 확인한 85살의 김학철은 “사회의 부담을 덜기 위해 가족의 고통을 줄이기 위해 더는 연연하지 않고 깨끗이 떠나간다”는 유서를 써놓고 곡기(谷气)를 끊어 21일간 단식끝에 세상을 뜬다. 유언에 따라 그의 골회는 두만강에 뿌려진다. 그 파란만장한 생애에 “항전별곡” “격정시대” “해란강아 말하라” “태항산록” “최후의 분대장”, “20세기의 신화”…등 작품을 출간, 몸속에 체화된 력사의 진실을 문학으로 뿜어낸다. 그야말로 드물디 드문 반골(反骨)기질이다. 식민지시대의 고난을 맛보아온 비애의 소년시절, 항일전쟁의 피와 불의 세례를 겪은 격정의 청춘시절, 정치박해의 철쇄에 묶인 인고의 중년시절, 65세의 나이에 다시 붓을 들어 창작의 왕성기를 맞이한 충만한 만년. 연연을 버린 깨끗한 마지막 길… 이렇게 파란만장한 인생길을 걸은 작가는 고금중외에도 드물것이다. 로신을 사표(師表)로 삼아 자신을 엄격히 규률한 그는 권력과 불의에 맞서 사투를 벌렸으며 자유와 정의를 위한 길에서 한치도 타협하지 않았고 좌우를 가리지 않고 항거했다. 그냥 보기에는 량쪽 겨드랑이에 목발을 낀 척각의 볼썽사나운 로인일지모르지만 력사와 후세의 눈에 비친 그는 분명 거인이다. 왜놈들에 의해 떨어져 뒹구는 외짝다리를 랭철하게 바라보면서 인간적 슬픔을 초월한 결연한 의지를 내보였고, 동란시기 비인간적인 숙청대회에서 아갈잡이를 당하면서도 결코 머리를 숙이지 않고 인간의 존엄이 무언지를 몸으로 보여주었던 그는 척각으로 서 있어도 이 땅에서 가장 꿋꿋이 서있었다. 우리들의 경우  문학과 민족에 대한 사랑으로 평생을 불태웠던 사람들이 있다. 한때 부당했던 체제는 그들에게서 소중한 필을 앗아갔고 지지리한 옥살이를 시켰으며 망명의 서러움도 지니게 했다. 하지만 그들의 문학은 정신의 올곧은 길이였으며 그 길에서 타협이란 없었다. 그들은 정말로 꼭같게도 민족의 운명에 대한 지대한 관심을 지니고 사회의 모순과 비인간성을 고발했고 인간의 존재에 대한 근원적 질문을 던졌다. 그 텍스트를 력사라는 큰 줄기에서 육골을 바친 삶으로 초연하게 써내려갔다. 그러한 근원적인 명제에 천착했고 삶과 문학이 그처럼 요약되는 작가였다는 점에서 문필가로서의 김학철과 솔제니친은 같은 길을 걸었다고 할수 있다. 아는 바처럼 솔제니친이나 김학철의 삶과 문학은 꼬장꼬장함 그 자체다. 주의와 정의를 위해 “천자도 손가락질”하고 “룡의 수염도 건드린” 대바름을 보여주었고 긴긴 투옥과 비인간적인 학대, 암과 상처와의 사투에서 초인간적인 경지를 보여줬다. 생애 전반에 거쳐 들이닥친 역경을 인고로 견뎌내며 암흑속에 사자후(师子吼)같은 작품을 토해냈다. 솔제니친과 우리의 김학철은 정말 여러모로 많이 닮았다. 솔제니친의 문화코드(符号)가 가장 투철한 역경속에서도 굴하지 않고 불의에 대한 저항 및 존재인식을 통한 시대정신과의 소통이라면 김학철의 창작모토(座右铭)도 여기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비극적 정서를 통해 민족의 고통과 비극적 력사에 대해 사유하면서 현실의 모순과 비리에 대한 가차없는 비판으로 특징지어는 사실주의로 점철되여 있는 점에서도 서로 문화적 맥은 통한다.  프랑스의 저명한 언론인 장 프랑수아 칸은 그의 저서 “NO!”에서 삶의 권태와 시대의 반력사성에 NO라고 외친 인물들의 리스트(名单)를 실어 그들의 생애를 조명했다. “인류 력사를 진전시킨 신념과 용기의 외침”이라는 부제가 달린 책에는 세상의 부조리와 맞서 싸우다 간 200여명의 “NO 맨”들이 등장한다. 그중에는 당연 솔제니친도 포함돼 있다. 이 서방에서 명성 자자한 언론인이 동방사회에 대한 료해가 어느정도일지 모르지만 아마 우리의 김학철을 알았다면 역시 그 리스트에 당연한 일석을 내주었을것이다. 지성이란 무엇인가? 여기서 문뜩 이런 질문이 떠오른다. 바로 차가운 머리와 뜨거운 가슴으로 모순된 사회에 비판적 량심의 역할을 하면서 일관성있는 대안을 제시하는것을 의미한다. 즉 모순과 부조리에 대해 끊임없는 도전과 자기혁신을 일삼는 행위와 사유를 말하는것이다. 솔제니친이나 김학철이 바로 이러한 비판적 지성에 가장 합당한 인물이라는 점에 감히 NO!를 웨치는 사람은 없을것이다. 초지일관하게 시대의 모순에 대해 발언을 했던 “비판적 지성인의 전형”으로 그이들을 평가할수 있다. 솔제니친의 비판에서 얻을수 있는 중요한 교훈은 로씨야적인것의 재발견과 유지라할 때 그의 민족정신에 대한 집착은 우리에게 큰 의미가 있다고 보여진다. 전통의 련속과 재발견의 필요성은 지금 흔들림속에서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불안을 느끼고 있는 우리 민족에게 많은것들을 환기시켜주고 있다. 지금 중국조선족은 격변기의 물굽이에서 흔들리고있다. 비록 솔제니친과 김학철이 살아왔던 시대와는 그 상황이 다르기는 하지만 중국조선족이란 공동체는 지금 또다른 절체절명의 위기에 시달리고있다. 이대로 침몰되느냐 아니면 순항을 계속 하느냐 하는 판가름의 중요한 력사시기, 바로 이 시기에 우리의 작가들은 문학의 펜을 들고있다. 하지만 우리의 삶이 공간이 위축되고 문단의 위상이 위축되는 급박한 상황에서도 격변하는 세상에 대해 의문을 제기할줄도 모르고 대안에 대한 연구에 주목할줄도 모른채 공리적인 작은 욕망이나 웃기는 독선을 부담없이 드러내고 편안해 하는 요즘 문인들의 부화뢰동(附和雷同)의 행보는 결코 미덥지 못한 모습이다. 편협하고 비생산적인 소제(小題)에 그야말로 신명을 걸고 영원히 마를줄 모르는 침샘으로 질퍽한 설왕설래(舌往舌來)의 설전(舌战), 몇해고 그냥 피페하기만한 문인상경(文人相轻)의 풍토에서 돌이켜보면 김학철이나 솔제니친의 문학과 사상의 핵심이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신뢰라고 할때 우리는 그 일그러진 자화상에 참괴(惭愧)를 가져야 할것이다. 대서사시를 읊조리듯 장대한 느낌구조로서 루루세월속의 어마어마한 사태를 모조리 내포한 그들의 생애를 매개 작자들의 몸속에다 체화시키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들의 삶을 그냥 스토리가 강한 소설보듯이 하면서 비바람 세찬 현장으로의 출두를 거부한채 일껏 꾸민 으늑한 보금자리에서 키보드를 악기건반처럼 한가롭게 두다리며 음풍영월의 가벼운 미문(美文)만 량산하는 작태에 빠져서는 안된다. 이것은 결코 솔제니친이나 김학철이 바라는 이 시대 작가들의 진정한 모습은 아닐것이다. 주어진 자리에 안주하며 자사리기주의에 빠진 우리의 작가들에게 솔제니친, 김학철의 궤적은 오늘날에도 류통기한이 지나지 않은 새로운 가르침이 아닐수 없다. 우리의 작은 문단에 세계적인 문호, 지성들과 비견(比肩)할만한 작가가 있다는데서 때때로 큰 자호감을 머금게 된다. 불굴의 저항의식으로 강렬한 비판정신을 통해 끊임없이 새로운 정체성을 찾아가려던 솔제니친과 김학철의 행보는 리뉴얼을 요구하며 고심하는 우리문학의 상황을 풀어갈수 있는 코드가 될수있고 우리 사회와 시대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찾아낼수 있는 계시로도 될수을것이다.  거장의 서거를 계기로 이제 우리문단의 지적력량(知的力量)에 얼마만한 여유 공간이 있는지 점검하는 자성(自省)의 시간을 가져봄이 좋을듯 하다.  "연변문학" 2008년 12월호           ☞ 김혁 문학블로그: http://blog.naver.com/khk6699 ☜  
1    매란방과 최승희 댓글:  조회:5522  추천:75  2007-06-29
                  . 칼럼 .   매란방과 최승희          김 혁       1 영화 “매란방”이 개봉되면서 세계적으로 다시 중국의 국수(国粹)인 경극에 관심이 모이고있다. “매란방”은 “신도 뛰여 넘을수 없다”는 재능을 가진 전설의 경극배우  매란방의 일대기를 그린 영화. 중국제5대감독의 대표주자인 진개가 감독이 메가폰을 잡았고 중국과 향항의 톱스타들인 려명, 장자이 등이 열연을 펼쳤다. 영화 "매란방" 포스터 개봉과 동시에 2주 련속 박스오피스 1위를 기록하고 관련 드라마, 도서가 제작되며 전국전역에 다시한번 “매란방 열풍”을 일으켰다. 제 59회 베를린 영화제 주요경쟁부문에도 출품되여 베를린에서 유럽지역 개봉식을 가지며 반응이 좋아 영화표가 몽땅 매진되는 등 경극의 매력을 만방에 자랑하고있다.    세계에서 유일무이한 중국의 경극200년사에서 최고로 지칭되는 천재 경극배우 매란방. 경극에서 녀자역할을 맡는 남자 배우 화단(花旦)연기의 일인자로 중국대륙은 물론 미국 브로드웨이에 까지 진출하며 전세계에 경극의 아름다움을 알린 신화적 존재이다. 매란방은 1894년 강소성 양주에서 할아버지, 아버지, 큰아버지 모두가 경극계의 명배우들인 경극세가(世家)에서 태여났다. 1934년경 두각을 나타내였고 그후 20여 년 간 북경을 중심으로 활약하며 경극의 황금시대를 열었다. 매란방은 새로운 형식의 녀장남우를 연기하면서 형식문제에만 그치지 않고 고전극에 일대전환을 가져왔는데, 극의 내용과 연출법에서 큰 변화를 가져왔다. 1919, 1924, 1956년의 3회에 걸친 일본 공연에서 대단한 호평을 받았다. 또 그동안 미국, 쏘련을 비롯한 세계 각국의 순회공연을 통해 경극의 존재와 그 진가를 세계에 널리 인식시켰다.  매란방과 세계적인 희극대가 채플린  중화인민공화국의 성립후에도 경극의 전통적 체계를 보전하면서 그 개혁과 발전에 힘썼다. 배우로 활약하는 한편, 중국 희곡연구원 원장을 맡아 후배 육성에 힘쓰고 많은 배우를 배출했다. 나아가 전국인민대표, 중화전국문학예술계련합회 부주석 등 요직에 있으면서 문화적정치적으로 많은 공적을 남겼다.  모택동 주석의 접견을 받는 매란방 (우로부터 두번째) 대표작으로는 “천녀산화(天女散花),”백사전(白蛇传)”, ”귀비취주 (贵妃醉酒)”, ”패왕별희 覇王別姬”, ”대옥장화 (黛玉葬花)”등이 있다.  중국 우표에 오른 매란방  매란방을 경극계의 공전절후한 왕이라 불러도 과언이 아니다. 여기 그의 인기를 실감하는 작은 일화를 곁들어 본다. 매란방의 출연료는 금괴 10개에 상당했다고 한다. 해방후 부자가 사라진 중국, 당시 최고 로임을 받는 사람이 바로 매란방이였다. 50년대 국가 주석 모택동의 로임은 408.8원(인민폐), 매란방은 자유직업자인만큼 출연료가 순 수입이었는데 1956년 매란방이 주동적으로 월급을 낮춘 후의 로임이 2100원(인민폐)에 이르렀다. 당시 청화대학의 교수는 매달 식사비 8원(인민폐)으로 산해진미를 먹을 수 있었다는 상황에 대비해 매란방의 로임 2100원은 어떤 개념인지 가히 가늠할 수 있다. 때문에 항미원조때 대포도 아닌 비행기를 직접 기증할 수 있었다는 매란방의 경제력이 더이상 놀라운 일이 아니다. 2 여기 또 한분의 춤의 대가가 있다. 바로 민족 신무용의 개척자- 최승희이다. 강원도에서 태여나 서울에서 숙명여자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한 최승희는 1926년 일본에 류학하여 현대무용가 이시이 바쿠에게서 춤을 배웠다. 1929년 귀국하여 서울에 최승희무용연구소를 차리고 1930년 2월 경성공회당에서 처음으로 신작발표회를 가졌다. 이 공연은 한국인 최초의 독자적인 춤 공연이였다. 두차례 일본 류학 이후에 국내에서 독자적인 근대 무용 공연을 가지면서 대중적으로 큰 인기를 모으게 되었고 영화에 출연하고 자서전을 출간할 정도로 유명해졌다. 1930년대 후반부터 유럽과 전미를 감동의 물결로 휩쓸며 '동양의 진주' '금강산의 화신'이란 갈채를 받았으며 피카소, 장 콕토, 로맹 롤랑, 가와바타 야스나리 등 당대 최고의 명사들을 반하게 했다.  1947년 조선으로 건너가 최승희무용연구소를 세워 소장에 취임하고 조선춤을 체계화하며 무용극 창작에 힘쓰다가1969년 타계했다.   조선 최초의 월드스타였던 최승희, 최승희의 삶은 그야말로 “격동의 20세기”를 관통해 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살얼음과도 같은 시대에 그는 오로지 춤만 고집하면서 험난한 근현대사를 가로질러 세계로 발돋움하여 우리의 민족무용을 현대화하는데 헌신했다. 그녀의 작품세계에는 민족주의적, 국제주의적 성향이 짙게 배여있으며 그가 민족 무용계에 끼친 영향은 지대하다. 그는 쉼없는 춤사위를 통해 대중의 폭발적인 인기를 모으며 당시 춤작품의 류통구조에 신기원을 열었으며 춤에 대한 천부적 자질과 함께 춤으로 세상에 군림한 신화적 존재로 각인되였다. 3  연변대학 예술학원 리애순교수는 최근 발표한 론문 “중국무용의 현대화와 최승희의 역할” 에서 최승희가 중국에 예술무용을 전파하며 중국무용사에 어떠한 영향을 끼쳤는지에 대해 체계적으로 소개하고 있다. 최승희는 세계 공연을 마치고 중국으로 와서 1941년부터 1946년까지 차원높은 예술무용을 공연하여 중국예술계에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1944년 북경의 북해부근에 “동방무용연구소”를 차리고 중국 제자들을 가르치면서 중국 예술전통을 익혀나갔다. 바로 이 시기 매란방과 최승희는 력사적인 조우를 가진다. 매란방등 경극계의 명배우들은 최승희를 수차 방문했고 그와 함께 무대예술방법에 대한 대화를 나누었다. 최승희의 높은 무용예술표현, 견해는 매란방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당시 중국의 “화경일보”는 “노래를 위주로 하는 옛 경극은 최승희 무용의 영향으로 말미암아 종국에 가서 변혁을 일으킬것 같다”는 소식까지 실으며 최승희의 실력과 역할을 강조했다.  중국경극에 출연한 매란방과 최승희  (좌, 우) 중국 병영의 문예일군들에게 무용 강의를 하고있는 최승희. 경극대사 매란방과 교류하면서 최승희는 경극을 토대로 한 무용 창작론과 기본 동작을 모형화하고 교수체계를 정립해 중국 무용을 현대화하는데 기여했다. 한편 자신의 무용세계를 살찌우는데서 중국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최승희는 실제 중국무용의 실험적 창작에도 참여해 여러 류형의 창작물을 탄생시켰다. 그중 중국의 고전문학과 경극의 검무를 소재로 만든 “패왕별희”와 당나라 양귀비의 이야기를 소재로 한 “양귀비연무지도”가 대표적이다. 퓨전(서로 다른 두종류 이상의것이 합해져 새로운것이 됨)의 시대로 불리는 요즘이다. 모든것의 경계가 소멸되고 다양한것들이 서로 뒤섞이는 탈중심시대, 새로운 퓨전문화가 우리주변을 노크하고 깃들고있다. 이러한 새로운 변화를 어떻게 접근하고 어떻게 읽어나가야 하는지를 대가들의 앞선 행보는 보여주고있다. 새로운 매체를 통해 새로운 형식으로 다시 조명되고있는 예술대가들의 모습들, 다시한번 경모를 머금고 보고 듣고 읽어본다.        김혁 문학블로그: http://blog.naver.com/khk66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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