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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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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    제14강 절대적 탈영토화로서의 철학 댓글:  조회:284  추천:0  2019-03-17
▶ 들뢰즈와 가타리는 ‘절대적 탈영토화’로서의 철학에 정치적 과제를 부과한다.(『철학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곧 ‘새로운 민중’과 ‘새로운 대지’의 구성이다. 이런 맥락에서 철학의 ‘절대적 탈영토화’와 자본의 ‘상대적 탈영토화’가 구분된다.  들뢰즈와 가타리에게 ‘주체와 대상’은 사유의 빈곤한 근사치일 뿐이다. 사유는 영토(territory)와 대지(earth)의 관계를 포함해야 한다. 이 관계에서 일차적인 것은 대지 위에서 지속적으로 발생하는 탈영토화의 운동들이다.(영토는 대지 위에서 일정한 형태를 취한다) 탈영토화를 상대적으로 만드는 것은 대지가 영토의 운동들과 맺는 관계가 역사적으로 결정된다는 사실에 있다. 대지가 특정한 역사적 규정들에 제약되지 않는 ‘순수 내재면’으로 이행할 때, 그리고 ‘무한한 디아그람적 운동들’을 포함하는 존재와 자연에 대한 사유의 내재성에 들어갈 수 있을 때 탈영토화는 ‘절대적’이 된다.  1) 내재면 위에서의 탈영토화는 (형식들, 기능들, 감응들의) 재영토화를 배제하지 않는다. 오히려 ‘미래의 새로운 대지의 창조’에 입각해 재영토화를 정립한다.  2) 절대적 탈영토화는 “상대적 탈영토화와의 여전히 규정되어야 할 관계들에 관련해서 파악되고 작동된다. 따라서 여기에서 ‘절대적’이란 사회와 역사의 초월을 함축하지 않는다. 그것은 현재의 극복을 이끄는 개념이다.(베르그송의 지속과 비교)   ▶ 근현대 철학과 자본의 관계는 단지 이데올로기적인 것이 아니다. 근현대의 철학들은 사회적-역사적 규정을 하나의 무한점(無限點)에까지 밀어붙여 다른 어떤 차원으로 넘어가곤 했다. 들뢰즈/가타리에게 철학은 그 고유의 교환가치를 띤 ‘정신의 부드러운 상업행위’도 아니고 ‘서구의 민주주의적 대화’에 고유한 순수한(disinterested) 사교성도 아니다. 그것은 영토들 및 인구들(개체군들)의 운동과 긴밀한 연관성을 가져 왔다. 즉 소통, 교환, 합의, 의견에 복종하지 않는 것, 통념과 명제에 속하지 않는 ‘para-doxa’의 추구가 철학이며, 때문에 새로운 대지와 새로운 민중을 지향하는 철학은 늘 탈시대적 성격을 띤다. 이런 의미에서 철학은 유토피아적이다. 즉 철학은 자기 시대에 대한 비판을 극점(極點)으로까지 밀어붙이는 정치적 행위이다.  문제는 단지 자아도취적일 뿐인 비판이나 강도론적 방법의 무능함에 빠지지 않고 어떻게 철학이 (절대적 탈영토화의 구축을 통해) 정치적이 될 수 있는가이다. 들뢰즈의 사건론에는 이런 물음이 깃들어 있다. 사건을 위해 산다는 것(“사건의 자식이 되라”)이 중요하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철학이 현재에 관련되는 대목은 부끄러움이라고 본다. “우리는 우리가 우리 시대 바깥에 있지 않다는 것, 그것과 부끄러운 제휴를 지속하고 있다는 것을 느낀다.” 이것은 다음 물음을 야기시킨다: 내재면은 생명/삶을 해방시키는가 아니면 얻을 수 없는 것에 예속시키는가?   ▶ 들뢰즈와 가타리에게 철학은 현재에의 저항(resistance to the present)이며, 따라서 철학은 끝없이 스스로를 초월해야 한다. 이 점에서 들뢰즈는 베르그송을 이어받고 있다. 따라서 사유는 (개념의) 철학과 ‘현재의 환경=매트릭스(present milieu)’의 교차로에서 성립하며, 이것이 곧 정치철학 또는 정치적 철학이다. 철학의 사건은 역사의 선형적이고 진보주의적인 개념과는 관련이 없다. 철학은 오로지 그 (비물체적인, 잠재적인, 배아적인=싹트는, …) 사건의 개념을 가지고서 ‘살아 움직이고 있는 것(the lived)’에 관계할 뿐이다. 사건을 사유함에 있어 철학은 현실의 삶의 모든 것을 탐사한다. 그것은 일종의 사변적 생기론이다. 장래의 사건은 현실의 사태를 엔트로피적 힘으로부터 해방시킨다. 이런 맥락에서 ‘생성/되기’와 ‘역사’가 구분된다. 그러나 들뢰즈와 가타리는 이런 철학관이 함축하고 있는 문제점을 지적한다. 철학을 개념의 ‘자기조직적(autopoietic)’ 창조로 보는 것은 그것에 거짓된 독립성을 주는 것이다. 철학의 역사적 결정을 거부함으로써 들뢰즈는 사유의 사건과 철학의 과제들을 비결정적인 것으로 만들려는 것은 아니다. 핵심은 현대 사상의 역사적으로 특수한 곤경들에서 벗어나 내재면을 지향하는 것이다. 그러나 개념 위에서 출몰하는 문제들은 사건과 역사적 현실성 및 경험 사이의 복잡한 관계에서 발생한다. 이 점에서 철학적 생성/되기는 역사적 규정성에서 출발할 수밖에 없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사건과 사태는 존재의 전혀 다른 질서임을 강조한다. 혁명은 역사의 계기로서가 아니라 하나의 사건으로서, 개념으로서 의미를 가진다. 즉 역사의 연대기에 저장될 계기가 아니라 생성/되기일 뿐이다. 그러나 그러한 생성은 지금 여기에서 벌어지고 있는 자본주의와의 투쟁에 연결되지 않는다면 공허한 것이 된다. 그래서 사건은 역사에 구속되지는 않지만 역사를 디디고서 발생하게 된다. 아도르노는 베르그송주의는 생명의 미분화적 물결 속에서 변증법적 소금이 씻겨 내려가게 만든다고 비판한다. 즉 베르그송주의는 비합리적인 직접성의 컬트를 통해서 내재성의 자유와 역사적 현실의 사실성 사이의 이산(離散)=선언(選言)을 보지 못하게 한다. 그러나 들뢰즈의 새로운 베르그송주의는 아도르노의 이런 거친 비판을 논박하기 위해 구성된 것이다. 중요한 것은 개념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사건으로서의 개념을 창조해내는 것이다. 그것은 곧 생성/되기의 리듬과 함께 하는 개념들의 창조이다. ▶ 에릭 알리에즈는 들뢰즈의 베르그송이 함축하는 철학사적 의미를 칸트로부터 후설에 이르는 흐름에서 벗어나 체계적인 존재론적 일원론과 유물론을 제시한 점에서 찾는다. 베르그송주의는 존재를 ‘순수 긍정의 대상’으로 봄으로써 내재성에 전적으로 새로운 의미/방향과 감성(sense and sensibility)을 제공한 점에 있다는 것이다. 들뢰즈와 가타리가 강조하듯이, 실존의 양태와 삶의 가능성은 어떤 초월적 원리나 가치에도 독립적으로 평가되어야 한다. 유일한 규준은 실존의 성격, 삶의 강화(intensification)이다.   
52    제13강 기억을 넘어선 되기들 Ⅱ 댓글:  조회:277  추천:0  2019-03-17
▶ 그러나 『테스』를 반드시 이렇게 읽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테스가 리좀이, 탈주선이 되는 특이점들이 존재한다. 테스는 짙은 어두움 한가운데에서 모든 사람들과 떨어져 있다. 그 때에는 자연도 그녀에게 적대적이지 않다. 내부는 선별된 외부이고 외부는 투영된 내부인 시점이 도래한다. 거기에서 테스는 모든 것들과 격리되어 야생 동물이 된다. 그리고 그녀의 가슴속에서 ‘희망찬 삶의 맥놀이’가 뛰는 것을 느낀다. 그녀는 그 어떤 기억도 없는 외딴 곳을 꿈꾼다. 그렇다면 테스가 알렉 더버빌을 죽이는 장면은 운명에 복종할 수밖에 없는 테스의 한계를 뜻하는가, 아니면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는 행위를 통해 새로운 여인으로 탄생하는 되기를 뜻하는가? 후자로 읽는 것은 하디를 배치들을 통해 스스로의 정체성을 만들어나가는 인물들을 그린 작가로 보는 것이고, 그것은 곧 ‘되기의 블록’이라는 들뢰즈/가타리의 개념으로 보는 것이기도 하다. ▶ 들뢰즈/가타리에게 글쓰기란 되기이다. 그것은 재현의 이야기가 아니라 새로운 생명선/삶의 선의 창조이다. 탈기표적, 탈주체적 창조, 얼굴 없는 창조. “모든 사람들처럼 되기. 그러나 이것은 어떻게 그 누구도 아닌 사람, 어떤 사람도 아닌 사람이 될 수 있는지를 아는 사람만이 할 수 있는 되기이다. 회색 위에 회색을 덧칠하면서 스스로를 그리기.” ▶ 베르그송의 전통에 따라 들뢰즈와 가타리는 ‘souvenir’와 ‘memory’를 구분한다. “우리는 어릴 적 기억을 가지고서 쓰는 것이 아니다. 현재의 아이-되기인 아이와의 블록을 통해서 쓴다.” 사건에 실존을 부여하는 것이 중요하다. 사건을 시원이나 기억으로 흡수시키는 대신 그것을 특이점으로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 이것은 곧 사유와 감응의 새로운 길을 내는 것이다. 들뢰즈에게 이런 글쓰기는 정치적 함축을 띤다. 즉 그것은 소수 문학이며 ‘도래할 민중의 씨앗들’을 뿌리는 작업이다. 소수 문학은 한 몰적 집단은 민족학도 아니고 사적 관심사의 표현도 아니다. 그것은 분자적 개체군들에 주목한다.  
51    제12강 기억을 넘어선 되기들 I 댓글:  조회:160  추천:0  2019-03-17
▶ 『천의 고원』에서 바이스만의 생식질 개념은 탈기관체 개념으로 변환된다. 그리고 여기에는 중요한 윤리학적 함축이 깃든다. 탈기관체는 하나의 알(卵)로서, 이것은 강도=0의 순수 잠재성이다. 탈기관체는 하나의 자아가 자신의 되기를 실험하는 환경이다. 그러나 탈기관체가 층화의 반대편에 있는 것은 아니다. 탈기관체는 층화와 함께 있다. 탈기관체에의 추구는 기원에로의 되돌아감이 아니라, 자신의 존재 조건의 자발적 변이일 뿐이다. 탈기관체는 유기체적 차원에서만 성립하는 것이 아니다. 기표화와 주체화를 변이시켜 가는 것 또한 탈기관체를 통해서이다. 탈기관체는 탈아적(脫我的) 알(卵)이다. 그것은 타자성(alterity)의 장소이다. 그것은 창조적 첩화의 장소이다. 탈기관체는 ‘intense germen’(강도적 유아幼芽)이다. 그러나 이는 기원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창조적 생성/되기의 잠재성을 가리킨다. 기계적 이질생성과 리좀적 배치들에는 이런 생성/되기들이 항상 함축되어 있다. ▶ 일직선적인 계보학적 기억들로부터 창조적 되기로의 이런 이행을 예시하기 위해 토마스 하디의 『더버빌 家의 테스』를 생각해 보자. 테스는 유전자 결정론을 깔고 있는 비관주의적 소설이다. 여주인공은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는 ‘생식질’의 또 하나의 예이며, 하디는 철저한 다윈주의에 입각해 테스나 주드 같은 부적응자들이 어떻게 사회에서 도태되는가를 그린다. 주인공들은 “잔혹한 자연법칙이 그들에게 떨어뜨린 감정(emotion)의 무게에 눌려” 신음한다. 모이라와 하마르치아는 본능과 유전형질(inheritance)로 바뀐다. 테스는 여섯 명의 데비필드 아이들을 보면서 맬서스를 생각하게 된다. 이들은 모두 자연의 도안의 결과들일 뿐이다. 노도처럼 닥쳐오는 산업사회라는 객관적 환경, (에인젤 클레어를 실망하게 했던) 도덕적-문화적 환경 또한 한 인간으로서는 도저히 극복할 수 없는 힘이다.    ▶ 로렌스는 하디와 다른 입장에서 그의 작품을 분석한다. 로렌스에게 생명이란 잉여이며 넘침이다. 약동이 없는 것은 죽은 것과 마찬가지이다. 살아 있다는 것은 계속 약동이 있다는 것이다. 로렌스에게 생명은 탄력적인(elastic) 것이고 불연속적인(discontinuous) 것이다. 로렌스는 하디의 소설들이 언제나 같은 결론으로 치닫는다고 본다. 자연과 사회에 의한 개인의 압살. 로렌스는 이 점에서 근대의 비극에는 소포클레스나 셰익스피어에게도 볼 수 있는 위반(transgression)의 계기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한다.(그러나 이것은 사회적 맥락에서 그렇다) 하디의 소설에서 여성은 철저하게 수동적인 존재로 묘사된다. 법(칙)을 인식하고 사랑 안에서 그것을 극복하려는 노력을 강조하는 로렌스는 하디의 소설에서 사랑은 늘 법(칙)과 그것이 가져오는 죽음이라는 결과에 의해 으깨어진다고 본다. 기억이 있을 뿐 생성/되기는 없다. DNA를 물신화(物神化)하는 도킨스의 생각도 바이스만-하디의 연장선상에 있다.  
50    제11강 동물-되기 댓글:  조회:269  추천:0  2019-03-17
▶ 들뢰즈/가타리의 사유는 층화와 공재면/탈기관체가 밀고 당기는 세계를 그리고 있다. 생명체는 층화되기만 하는 것이 아니다. 들뢰즈/가타리는 ‘인간의 비인간적 되기들’이 존재함을 역설한다. 모든 되기는 분자적이다. 이는 곧 생명체를 본질=종을 넘어 개체군으로 보는 것이고, 나아가 개체군으로 통계처리를 할 수 없는 ‘분자’의 차원에서 봄을 뜻한다. 의식적인 동물-되기는 인간에게서만 성립하지만, 자연세계에서도 동물-되기는 성립한다. 말벌의 양란-되기와 양란의 말벌-되기가 그 좋은 예이다.     양란 (tropical orchid)     ▶ 행동학적 접근에서 신체는 기관들과 기능들, 종과 유로 규정되기보다는 ‘감응(感應)’(스피노자의 ‘affectus’)하는 신체는 해부학이나 분류학의 대상이 아니다. 그것은 다른 동물들에 감응하고 스스로의 특이성들과 강도들의 장, 즉 ‘氣’를 변화시켜 자신의 존재 여건을 자발적으로 바꾸어가는 존재이다. 감응하는 신체의 감각은 식별 불가능 또는 규정 불가능의 지대(地帶)를 통과한다. 한 개별화된 배치의 부분을 형성하는 동물의 능동적/수동적 감응들에 대한 윅스퀼의 논의는 스피노자와 연결될 때 중요한 통찰을 제공한다. 예컨대 진드기의 예에서 중요한 것은 생리학적 특성들이 아니라 관계, 정도, 그리고 속도의 리듬이다. ▶ 동물-되기는 태초의 시원으로 돌아가려는 융적인 시도가 아니라 차라리 층화가 더욱더 무너지고 공재면이 두드러질 미래를 염두에 둔 논의이다. 동물-되기는 인간적 욕망을 오이디푸스 삼각형에 가두어 이해하는 정신분석학과 대립한다. 동물-되기는 표상/재현의 문제가 아니라 감응의 문제이다. 꼬마 한스와 말의 관계는 주관적 몽상의 관계가 아니다. 동물-되기의 감응은 실재적인(real) 것이다. 분자-되기는 종과 유라는 몰적 질서를 일탈한다. ▶ 표상/재현은 인간적 형식과 질서를 절대시하는 문화주의와 도덕주의를 은폐하고 있다. 동물-되기를 문자 그대로 해석하는 것은 표상의 함정에 빠지는 것, 즉 신체를 기관들과 기능들의 질서로 국한시키는 것이다. 첩화에 있어 동물의 왕국은 강도와 근접성(진동들과 운동들)의 지대들에 의해 정의되는 탈기관체로 화한다. 여기에서 꼬마와 동물은 ‘주체들’이 아니라 복잡한 배치들에서의 ‘사건들’로 화한다. 배치들은 환경과 얽혀 있다. 시공간적 관계들은 사물의 술어들이 아니라 배치들 또는 복수성들의 차원들이다. 동물들은 공생적 복합체들에 들어가 활동한다.(포식 동물의 시공간)   ▶ 둔스 스코투스는 ‘이것’ 즉 개체화하는 차이 개념을 제시했다.(라이프니츠의 ‘완전 개념’과 비교) ‘이것’은 기존의 분류 방식을 깨는 무수한 ‘entities’들이다. 그것은 분자들/입자들 사이의 운동과 정리라는 경도적 관계들과 감응을 주고받는 위도적 능력들에 관련된다. 그것은 전통적인 실체도 주체도 아닌 어떤 개체이다. 주체들은 이 속도의 경도들과 감응의 위도들의 카르토그라피 내의 개체군들로서 존재한다. 자연은 집단적 배치들로 존재하며 이는 ‘탈주체적 개체화들’로 채워진다. 그리고 속도들과 역능들/감응들을 통해 진화한다.  중요한 것은 몰적인 것과 분자적인 것을 단순히 대립시키는 것이 아니다. 모든 몰적 구성체는 분자적 무의식을 가지는 것이다. 또한 되기는 언제나 몰적 외연을 포함한다. 정신분석학은 되기들을 하나의 콤플렉스에, 몰적 규정의 콤플렉스(오이디푸스, 거세)로 환원시킨다. 프로이트가 늑대 인간의 여러 늑대들을 하나 즉 아버지로 환원시킨 것이 그 예이다.  ▶ 분열분석 또는 리좀학의 목적은 인종, 혈족, 종, 유 등과 같은 몰적 구분들의 한계를 비판하고 이 덩어리진 현상들의 선험적 환상을 폭로하는 것이다. 생물학적 맥락에서 이것은 미시물리적 차원과 생물학적 차원이 별개가 아님을 말한다. 이 차원에서는 열역학조차도 통하지 않을 수 있다. 배치는 통계학이 무너지는 탈주선들을 함축하고 있기 때문이다. 기계의 생성은 분열생성(schizogenesis)이며, 횡단적 소통, 포함적 선언들(inclusive disjunctions), 다성적(多聲的) 연언들(polyvocal conjunctions)을 통한 생성이다.  ▶ 몰적 구성체들은 분자적 힘들의 통합이자 총체화이다. 분자적 무질서의 부분적 대상들이 결핍으로 보이는 것은 이 때문이다. 그래서 모든 욕망은 결핍으로 파악된다. 예컨대 정신분석학은 분자적 복수성의 적극적 산포가 아니라 (신경증이나 거세 유형들에서 볼 수 있는) 거시적 규정성들의 주체들만을 다룬다. 욕망을 결핍으로 봄으로써 사람들은 욕망을 개인적인 것이든 집단적인 것이든 특정한 목적, 목표, 의도에 연관시킨다. 이로써 욕망은 생산의 실제 과정에서 유리되어 표상의 구조 속으로 들어가게 된다.  
49    제10강 ‘behaviour’의 행동학에서 배치들의 행동학으로 Ⅱ 댓글:  조회:261  추천:0  2019-03-17
▶ 배치들의 관계는 선형적인 인과관계들이 아니라 횡단적 소통들에 의한 영토화와 탈영토화에 있다. 로렌츠나 틴버겐 같은 (동물)행동학자들은 본능이 학습에 끼치는 영향에 주목해 왔다. 예컨대 ‘반사(reflex)’ 같은 개념은 중추신경 같은 신체의 특정 부위에 초점을 맞추어 자극-반응의 메커니즘을 연구한다. 로렌츠는 본능적 행동은 해부학적 구조만큼이나 항상적이고 고정적이라고 말한다. 보다 복잡한 상황에서는 ‘본능적 복잡화 메커니즘’이 작동하는 것으로 이해한다. 로렌츠나 틴버겐은 이 메커니즘에 근거해서 종, 유, 나아가 문(phylum)까지도 분류할 수 있다고 믿었다. 이런 생각은 환원주의와 실체주의의 전형을 보여준다. 최근의 행동학은 행동의 패턴을 행위의 강도 조절, 시간 조절, 속도 조절에 기인하는 것으로 보고 있다.(Thorpe, Merleau-Ponty) 더 중요한 것은 환원주의와 실체주의를 벗어나 동물과 환경의 관계에 초점이 맞추어진다는 점이다. 선천성과 후천성을 둘러싼 게으른 논쟁에서 벗어나 하나의 행동에 있어서 문제가 되는 항목이 환경적으로 안정적인가 그렇지 않은가가 다루어지고 있다. 나아가 동물들의 적응(adaptation) 자체가 학습에 크게 의존한다는 것도 강조되고 있다.(McFarland) 가변성과 유연성이 중요하다. 관계는 타자를 향해 열려 있는 것이다. 그리고 설사 자기가 자기를 완벽하게 안다 가정해도 타자가 어떻게 나올지는 시간 속에서 결정되는 것이다. 최근의 행동학은 이런 존재론적 진리에 가까이 다가서고 있다.   ▶ 모든 영토는 다른 종들의 영토들을 포괄하거나 가로질러 간다. 로렌츠가 말한 것처럼 공격성이 영토성을 낳는 것이 아니라 영토성이 공격성을 낳는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윅스퀼을 따라, 이런 구도에서의 자연을 음악적으로 파악한다. 즉 자연에 대한 선율적인, 다성음악적인, 대위법적인 파악이다. 새들의 노래, 거미의 집짓기, 연체동물(예컨대 소라)의 껍질, 진드기 등이 그 예이다. 연체동물의 죽음은 소라게의 거주지를 만들어낸다. 이것은 목적론적 자연 개념에서 선율적 자연 개념으로의 이행을 함축한다. 여기에서 자연의 기예(技藝)와 인간의 기예는 날카롭게 구분되지 않는다. 연체동물의 껍질과 게 사이에는 대위법적 관계가 성립하며, 여기에서 성립하는 되기에는 기능적인 요소들(성, 생식, 출산, 양육 등)만이 아니라 ‘sensibilia’도 포함된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진화의 이 창조적 양태를 ‘art=기예’라 부른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윅스퀼의 분석을 더 밀고 나아가, 동물-되기는 적응의 대상들(traits)의 선별만이 아니라 물리-화학적 강도들과 근접성의 영역들(zones of proximity)의 작용까지 포함한다고 말한다. 이것들이 퓔룸적 혈통들을 가로지르며, 따라서 생명은 음악적인 ‘생성/되기’를 포함하는 것이다. 따라서 중요한 것은 본능과 학습을 둘러싼 논의가 아니라 ‘공재성(consistance)’에 주목하는 것이다. 공재성에 주목했을 때 리좀적 배치를 탐구할 수 있다.  ▶ 들뢰즈와 가타리는 행동을 중심들과 활동(activation) 사이의 선형적이고 위계적인 관계들로 모형화할 수 없다고 본다. 생물학적-행동적 기계학(machinique)이 필요하다. 여기에서 선천적인 것은 탈코드화되고 획득된 것은 영토화된다. 행동에서 배치로. 어떤 국소적 작용도 다른 것들과 얽혀 있고(coordinated) 중심적 주체가 없이 거대한 결과가 현실화된다/동시화된다. 여왕개미는 없다. 이는 곧 창발성(emergence)의 논리이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뇌들, 신체들, 분자들, 세계들(이들 모두는 서로의 영토들과 겹치면서 존재한다)을 포괄하는 ‘산포된 지능(distributed intelligence)’을 통해 행동이 이해되어야 한다고 본다. 카우프만이 강조했던 자기촉매작용은 하나의 유기체 내에서가 아니라 배치들 전체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따라서 인간의 탄생도 특정한 메커니즘의 결과가 아니라 새로운 산포의 결과일 뿐이다. 지연된 발생(예컨대 幼生生殖), 기관들의 특별한 탈영토화(예컨대 손과 발), 그리고 특히 환경의 상관적인 탈영토화(숲에서 초원으로). ‘잃어버린 고리’는 하나의 메커니즘이 아니라 배치의 변환인 것이다.
48    제9강 ‘behaviour’의 행동학에서 배치들의 행동학으로 I 댓글:  조회:271  추천:0  2019-03-17
▶ 지능에 대한 보다 역동적인 이해를 추구한 선구적인 인물로서 폰 윅스퀼이 거론된다. 하이데거, 메를로-퐁티, 들뢰즈 등이 모두 윅스퀼을 중요하게 다루었다. 윅스퀼 (1864~1944) 독일의 동물학자, 비교심리학자 인간이 아닌 동물을 중심으로 동물의 행동을 객관적으로 관찰하여 동물과 그 동물이 속해 있는 환경과의 관계를 '기능환(機能環)'으로 표현하고, 각 동물은 다시 넓은 자연 속에서 그 종(種 )의 독특한 환경 세계를 주체적으로 만든다는 이른바 '환경세계론'을 제창하였다. 그의 환경 세계론은 새로운 생물행동학의 기초가 되었으며, 생물행동학자인 로렌츠나 틴버겐에게 사상적으로 영향을 주었다. 오늘날 클라크 같은 사람도 마음을 ‘a leaky organ’으로 규정하면서 행동주체(agent)의 표상주의적 개념화들을 벗어난 심신론을 전개하고 있다. 이런 입장들에 따르면 지능은 상이한 물질적 공재(共在)들에 입각해 이해되어야 한다. 즉 지능은 행동의 다각도의 측면들과 더불어 이해되어야 하며, 행동은 개체들을 관통하는 복잡한 물질적 체계들(배치들) 및 계통적 혈통들과 유기체의 경계들을 가로지르는 리좀들에 입각해 이해되어야 한다. 창조적 진화는 되기의 블록들을 포함하는 것이다. 이제 ‘행동학(ethology)’은 행동주체의 ‘behaviour’에 대한 관한 담론에서 배치들의 운동에 대한 담론이 된다. 배치들의 관계는 선형적인 인과관계들이 아니라 횡단적 소통들에 의한 영토화와 탈영토화에 있다.  
47    제8강 자기조직화와 기계적 이질생성 댓글:  조회:258  추천:0  2019-03-17
※ 지금까지 배운 내용 복습 ▶ ‘기계적 이질생성(machinic heterogenesis)’이라는 가타리의 개념은 중요한 역할을 한다. 자기조직화 이론은 현대 사상의 중요한 한 요소이고 들뢰즈/가타리에 의해서도 수용되지만(이 이론은 ‘센트럴 도그마’로 대변되는 환원주의와 결정론을 논박할 수 있는 중요한 개념이다), 동시에 들뢰즈/가타리의 시각에서 볼 때 일정한 한계를 노정한다. 이는 진화의 ‘기계적’ 성격과 관련된다. ▶ ‘횡단적 소통’은 진화에서의 계통수들(genealogical trees)을 뒤섞는다. 물론 이 뒤섞임의 개념은 계통수들의 존재를 전제한다. 그러나 뒤섞임까지 포함한 전체적 지형도를 볼 필요가 있다. 계통적 계열들은 그보다 근본적인 기계적 퓔룸을 전제한다. 기계적 퓔룸은 여러 계통들을 낳지만 동시에 물질적 힘들의 횡단적 움직임들을 통해 새로운 생성들을 낳는다. 계통수들은 덜 분화된 것에서 더 분화된 것으로 진행되며, 친자관계/分岐(filiations)에 입각해 진행된다. 그러나 새로운 생성들은 새로운 결연들(alliances)을 통해 진행된다. 생성의 선은 특정한 매듭들을 가지지 않는다. 거기에는 오로지 ‘중간(middle)’만이 있다. 이 중간을 통해서 생명은 ‘운동의 절대 속도’를 향유한다. 들뢰즈/가타리에게 ‘사이(entre=in-between)’ 개념은 중요하다. 모든 것은 사이에서 벌어진다. 사이는 카오스이다. 카오스는 생성의 장이다. 카오스를 통해서 개체들의 코스모스가 생성한다. 이러한 생성이 도태압을 무너뜨린다. 물론 도태압은 엄연히 존재한다. 그러나 도태압은 그것에 대응하는/응답하는 유기체들의 활동을 고려해 이해되어야 하는 것이다. 이런 활동들은 곧 행동학적 배치들(ethological assemblages)을 함축하고 있다. ▶ 기계적 배치들에의 주목은 ‘창조적 진화’의 이해를 위해 중요하다. 자기조직화와의 비교를 통해 계방계들로서의 생명계들에 대한 이해를 넓혀 주기 때문이다. 자기조직화 개념은 생명체란 자기차이성(自己差異性)을 보여주는 존재임을 잘 설명해 준다. 이는 곧 생명체가 계방계임을 말해 준다. 자기조직적 유기체 즉 ‘기계’(= 신체)의 기능은 그것의 특수한 유전적 구조 또는 조성(composition)으로 환원될 수 없다. 중요한 것은 계의 구성요소들이 아니라 그것들 사이의 역동적인 관계들이다. 자기조직적 존재들은 스스로의 조직화와 경계들을 만들어낸다. 즉 그것들은 “조직화를 통해 닫힌” 존재들이다. 따라서 자기조직적 존재들의 진화는 차이들의 와류에서 계속 메타동일성들을 만들어내는 과정들로 이해된다.(이케다 기요히코) 그런 동일성을 만들어내지 못할 때 해체(disintegration)가 발생한다. 따라서 자기조직화 이론은 자기동일성을 지키려는 개체들의 속성에 주안점을 두고 있으며, 바로 그 때문에 진화 전체의 창조성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다. 이것은 학문적 사실의 문제를 넘어 삶 자체를 바라보는 시선과 관련된다. ▶ 기계적 진화는 이질생성들을 종합하며 또 ‘공재(共在=consistency)’의 형성을 포함한다. 기계적 배치들은 포텐셜 장들과 잠재적 요소들을 통해서 場을 만들어나가며, 종과 유의 구조를 넘어 기술적-존재론적 문턱들을 가로지른다. 자기조직화가 있다면 그것은 이 장 위에서이다. 이것은 기계적 자기조직화를 기계적 이질생성으로 봄을 뜻하며, 자기조직화라는 모델에 창조적 진화의 이해를 위한 비평형 개념을 도입함을 뜻한다. 여기에서 타자성(alterity)은 보다 넓은 경지에서는 창조적 진화를 위한 조건으로서 이해된다. 이는 배치들의 행동학과 관련된다.  
46    제7강 공재면, 창조적 첩화 Ⅱ 댓글:  조회:267  추천:0  2019-03-17
▶ 들뢰즈 사유의 구도는 결국 고대의 본질철학과 근대의 주체철학에 대립한다. 또 철학을 언어철학이나 사회철학, … 등으로 환원시키려는 경향들과도 대조된다.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을 동시에 사유하지만 그러나 경험주의적 태도를 견지하였다.  → 자연과학과의 연관성, 예술과의 연관성, 종합적-횡단적 사유를 통해 새로운 개념들을 창조. ▶ 창조적 첩화  들뢰즈와 가타리는 진화를 일체의 목적론적 함축을 배제하고서 사유하고자 한다. 발생의 정도, 복잡성에 입각한 위계를 비롯해 일체의 일방향적 사고는 배제된다. 횡단적 소통에 의한 ‘괴물들’의 탄생, 분자적 층위에서의 탈영토화, 퓔룸이라는 물질적 바탕에서의 새로운 존재들의 생성이 사유된다. 횡단적 소통들은 창조적 첩화를 가능케 한다. 리좀의 개념. 베르그송에 여전히 함축되어 있는 진화의 방향성조차 거부된다. 창조적 첩화는 ‘동물-되기’와도 관련된다. 동물-되기는 인간의 의식적 되기의 맥락과 생명철학적 맥락으로 구분된다. 후자의 경우 동물-되기는 횡단적 소통을 통한 창조적 첩화를 뜻하며, 횡단적 소통은 또한 ‘되기의 블록’, ‘생성의 블록’과 관련된다.  첩화는 퇴행이 아니다. 예컨대 프로이트에게서 나타나는 퇴행은 창조적 첩화와는 대극적인 사유이다. 또 들뢰즈/가타리에게서 중요한 것은 분화(differenciation)가 아니라 블록들의 생성이다.  다윈주의자들이 볼 때, 또 결정론적 태도를 가진 과학자들이 볼 때 리좀적 생성을 무조건 강조하는 것은 사실상 아무것도 말해 주는 바가 없다고 할 수도 있다. 조금 완화된 결정론자들의 경우 들뢰즈/가타리의 사유는 법칙의 복잡성이나 유연성을 강조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 그에 비해 들뢰즈/가타리의 사유는 훨씬 급진적이며, 실증적 연구들의 통해 이런 대립이 해결되어 나가야 할 것이다. ▶ 들뢰즈/가타리의 가설을 받쳐 주는 요소들 중 하나는 진화에서의 전염성, 유행성 변화이다. 이는 리좀적 방식의 진화를 뒷받침해 주는 좋은 예이며, 도킨스 같은 유전자 결정론자조차 이 점을 강조하고 있다. 비루스=바이러스의 역할이 매우 중요하다. 이질적인 존재들(인간, 동물, 박테리아, 비루스, 분자, 미세기관들, …) 사이에서의 전염과 유행은 분명 진화를 복잡하게 만드는 핵심적인 요인이다. 도킨스는 이런 점을 인정하면서도 유전자 결정론과 다위니즘을 견지한다. 캠피스는 이 점을 비판하면서 도킨스의 ‘extended phenotype’을 보다 급진적으로 발전시켜 나간다. 들뢰즈/가타리의 생각은 매걸리스가 『세포 진화에서의 공생』에서 전개한 논의와 매우 가깝다. 진화에서 도태의 역할은 의심할 바 없다. 그러나 신다윈주의로 충분히 설명할 수 없다. 진화에서의 진정 새로운 변화는 상이한 퓔룸들을 가로지르면서 나타나는 합병, 연합을 통해서이다. 합병과 연합을 통해서 유전자 자체에서의 큰 변화가 나타난다. 따라서 유전자에 입각한 일방향적 인과나 유전자를 항구적인 동일성으로 보려는 생각들은 거부된다. 더 나아가 개체군의 사유는 일상적인 의미에서의 개체들 이하로까지 내려가야 한다. 중층결정. 들뢰즈/가타리의 사유는 최근 나타나고 있는 ‘개방계적 연구방식(open systems approach)’을 선취하고 있다 하겠다.  
45    제6강 공재면, 창조적 첩화 I 댓글:  조회:252  추천:0  2019-03-17
▶ 공재면으로서의 자연 조프루아 쌩-틸레르의 ‘추상동물’은 퀴비에가 그어놓은 경계선들을 무너뜨린다. 기관과 기능, 구조와 발생 유형들의 존재 가능성을 열어젖힘으로써 속도와 강도에 기반하는 자연의 보편적인 면(面)을 발견했다. 조직화의 도안(조직면)은 무한히 유연한 추상기계로 화한다. 그것은 모든 것이 거기에서 발생한다는 점에서 내재면이고, 또 모든 것에 대해 같은 의미에서 존재한다는 점에서 일의성의 면(일의면)이다. 이는 곧 스피노자의 자연이며, 장횡거의 태허(太虛)이다. 이 개념을 통해 개체화된 현실성의 세계로부터 전개체적-비인칭적 잠재성의 세계로 사유를 확장시킬 수 있다. 그리고 이를 통해 생명계에서의 비정상적 결연, 창조적 첩화, 횡단적 소통들이 사유될 수 있다. * 태허(太虛): 중국 사상의 기본적 개념의 하나로 우주의 본체 또는 기(氣)의 본체. 장자에게 있어 도는 일체의 것, 전체 공간(空間)에 확산되고 명칭도 표현도 초월한 실재(實在)이므로 이를 ‘태허’라 불렀다. ‘태허’가 기의 본체를 가리킨다고 한 사람은 송(宋)의 장횡거(張橫渠)로 그는 기일원론(氣一元論)의 입장에서 ‘태허즉기(太虛卽氣)’라 하고 기는 태허에서 생기고 모여서 만물을 생성하며 기가 흩어지면 함께 만물은 소멸하나 기는 다시 태허로 돌아간다. 즉, 기가 흩어진 모습이 태허라고 설명하였다. ▲ 공존면: 현실화된 존재들의 공존 / 공재면: 잠재적 차원에서 모든 것들이 공존. ▲ 일자성과 일의성의 차이 ▲ 장자의 제동(齊同)의 의미 ▲ 공재면 자체의 생성 (베르그송적 차이를 사유하기) ▲ 차이와 동일성  
44    제5강 복수성: 베르그송과 다윈 Ⅱ 댓글:  조회:268  추천:0  2019-03-17
▶ 베르그송-들뢰즈에 의해 ‘복수성’이라는 말은 실사(實辭)가 되었다. 다시 말해, 이미 존재하는 실체들을 셈으로써 성립하는 서술어로서 ‘많음’이 아니라 그 자체 하나의 실사인 ‘다양체’가 되었다. 다양체가 포함하는 차이들은 ‘크기들(magnitudes)’이 아니라 ‘거리들(distances)’이다. 크기들은 등질적 공간에서 성립하고, 거리들은 연속적 변이가 발생하는 다질적 공간에서 성립한다. 전자에서 성립하는 수는 ‘소산적 수’이고 후자에서 성립하는 수는 ‘능산적 수’이다. 능산적 수는 곧 잠재적 수이다.  다양체는 강도들을 통해 측정된다. 강도는 크기들이 아니다. 20도와 20도를 합친다고 40도의 날씨가 되지는 않는다. 시속 60킬로로 10킬로를 두 번 달리는 것과 시속 120킬로로 10킬로를 달리는 것은 같지 않다. 단순한 양이 성립하는 것은 등질적 공간에서이다. 세계를 강도로 볼 때 수학적 환원주의는 거부된다. ‘intensity’는 ‘intension’과 통한다.(우리말 ‘강도’와 ‘내포’가 잘 결합되지 않기 때문에 이 경우에는 ‘intension’을 ‘내포도’ 또는 ‘內含度’로 번역하는 것이 좋다.) 다양체는 선들과 차원을 가진다. 다양체는 계열들로 형성된다. 다양체가 함축하는 질적 복수성은 차원으로 이해될 수 있다. 차원이 달라지는 것은 (재)영토화와 탈영토화 때문이다. 다양체는 늘 생성한다. 접속, 영토화/탈영토화, 탈주선, ‘코드의 잉여가치’, 리좀, 창조적 첩화 등이 모두 이와 연관해서 이해된다.    생명체/주체 또한 다양체이다. 들뢰즈에게서 ‘균열된 나  ’가 문제가 되는 것은 이 때문이다.   ▶ ‘진화’는 다양체의 생성의 역사라고 볼 수 있다. 다양체들의 생성은 곧 복합적인 형태의 소통을 함축한다. 이것은 매걸리스의 ‘공생적 발생(symbiogenesis)’ 개념과 통한다. 이는 리좀적 진화로서 기존의 분류학적-계보학적 틀을 깨는 횡단적 배치들(transversal assemblages)을 통해 진화를 이해한다. DNA는 작은 레플리콘들(복제 단위들) ― 플라스미드들(자기 복제를 통해 증식하는 유전인자), 비루스들, 트랜스포손들(레플리콘들 사이에서 전이되는 유전자군) 등 ― 의 형태로 쉽게 돌아다닌다. 리좀 형태의 횡단적 소통들은 창조적 첩화를 낳는다. 중요한 것은 계열들의 속도와 방향이다. 때문에 리좀학은 ‘반계보학’이며 라마르크적인 방향성은 거부된다.  베르그송과 다윈은 공히 개체군들을 사유한다는 점에서 복수성의 사상가들이다. 특히 신다윈주의는 발생을 속도, 비율, 계수들, 미분적 관계 등으로 파악한다. 발생은 미리 접혀 있는 것이 펼쳐지는 것이 아니다. 이제 발생의 정도는 증가하는 완전도, 또는 분화, 부분들의 복잡성의 증가에 의해서가 아니라 도태압, 촉매작용, 전파 속도, 성장비, 진화, 돌연변이 등과 같은 미분적 관계들과 계수들에 의해 측정된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개체군을 몰적으로 이해하는데 그치지 않고 분자적으로 이해한다. 이것은 대수의 법칙에 근간하는 통계학, 그리고 이에 근거하는 고전적 다윈주의에 대한 비판을 함축한다. 리좀적 차원에 주목하는 것은 곧 분자적 운동들에 주목하는 것이다. 이는 개체들의 역할에 주목하는 것이며, 사유의 수준을 개념적 유기성의 차원에서 구체적 지각의 차원으로 끌어내리는 것에 해당한다. 이는 곧 가장 구체적인 차이의 운동들에 주목하는 경험주의적 태도를 함축한다.    
43    제4강 복수성: 베르그송과 다윈 I 댓글:  조회:271  추천:0  2019-03-17
▶ 베르그송은 두 종류의 복수성(multiplicite)을 구분: ①수적, 공간적, 현실적 복수성과 ②질적, 시간적, 잠재적 복수성. → 이 구분은 과학적 사유와 형이상학적 사유, 물질과 생명을 구분하는데 매우 중요하다. 질적 복수성을 ‘다양체’로 부를 수 있다. 전통 사유가 일자와 다자의 조각그림-오려-맞추기의 사유(樹木型 사유)를 펼쳤다면, 베르그송-들뢰즈에게서 문제가 되는 것은 생성하는 다양체이다. ▶ 베르그송과 들뢰즈의 차이 1) 들뢰즈에게는 베르그송적인 급진적인 연속주의는 함축되지 않는다. 2) 들뢰즈에게는 물체와 생명체의 날카로운 구분보다는 이들이 함께 형성하는 배치가 문제가 된다. 3) ‘진화’의 뉘앙스가 훨씬 복잡하게 된다. (리좀, ‘산종(散種)’, ‘창조적 첩화’.) 4) 베르그송: 氣가 물질성과 생명성으로 이원화되는 구도 / 들뢰즈: 氣가 리좀 상태로 탈주하는 방향과 층화되고 석화되는 방향으로 이원화되는 구도.  
42    제3강 탈기관체와 유기체 댓글:  조회:275  추천:0  2019-03-17
▲ 들뢰즈/가타리는 분자 수준과 단백질 수준을 내용과 표현으로 파악.  ▲ 내용으로부터 표현이 연역되는 것이 아니다. → 일방향적 설명(환원주의), 유전자 결정론을 비판. ▲ ‘번역’이 아니라 코드의 잉여가치.  ▲ 다윈주의는 대수(大數) 개념에 입각한 통계적 덩어리들을 다루는 몰적 사유.  ▲ ‘비정상적인’ 동물-되기들.  ▲ 탈영토화 개념이 코드의 잉여가치에서 자연스럽게 도출. (탈주선의 일차성도 상기.) 이로써 바이스만의 생식질 개념(동일성의 사유)에서 벗어난다. ▲ ‘진화’라는 개념의 뉘앙스 자체를 비판적으로 볼 것.  ▲ 단지 이행, 다리 놓기, 턴넬 뚫기가 있음. creative involution! 퇴행도 점진도 아닌 되기가 있을 뿐.   ▶ 들뢰즈와 가타리는 층화(stratification)의 세 양태로서 유기체화, 기표화, 주체화를 든다. 유기체화로부터의 탈주는 탈기관체(corps sans organes) 개념에 응축되어 있다. 유기체는 하나의 통일성을 보존하려는 존재이기 때문에, 마투라나와 바렐라가 지적했듯이 그 부분들은 그것들이 유기체를 위해 존재하는 한에서 극소의 자율성만을 가진다. 지구라는 탈기관체는 ‘자유 강도들’과 ‘유목적 특이성들’을 나른다. 그러나 거기에서는 또한 층화가 발생한다. 층들의 체계는 코드화와 영토화를 통해 강도들과 특이성들을 ‘포획’한다. 유기체적 층화는 자유 강도들과 유목적 특이성들로 구성된 ‘체(corps)’를 ‘유기체’로 만드는 과정이다. 유기층에서 유기체가 형성되는 것이다. 유기체와 탈기관체 사이에서의 ‘윤리학’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 들뢰즈와 가타리는 아르토에게서 유래한 탈기관체 개념을 자신들의 체계로 흡수해 독특한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탈기관체는 내재적 장이다. 그것은 강도들을 산출하고 분배하는 ‘욕망’(의 장)이다. 탈기관체는 유기체 이전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달리 말해 유기체들이 탈기관체 “위에서” 성립하는 것이 아니다) 탈기관체는 유기체와 함께 있으며 늘 일정한 과정 속에 있다. 탈기관체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탈기관체는 한 유기체의 구성에 포함되어 있는 접힘들, 침전들, 엉김들의 발생의 터가 되는 ‘초저속의(얼음 같은) 실재’를 구성한다. 그에 비해 유기체는 이 체 위에 존재하는, 그것에 형식들, 기능들, 위계적 조직화들, 초월성들을 주는/부과하는 층(stratum)을 구성한다. 그러나 유기체와 탈기관체가 불연속적 타자로서 대립하는 것은 아니다. 1) 탈기관체는 층들 속에서 작동하기도 하고 또 탈층화된 공재면 위에서 작동하기도 한다. 즉 하나의 층으로 간주되는 유기체에 (기관들의 견고한 조직화에 대립하는) 탈기관체가 존재하지만, 동시에 유기체의 층에 속하는 그것[유기체]의 탈기관체가 존재하기도 한다. 즉 유기체가 부정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유기체를 힘들, 강도들, 지속들의 보다 넓은 장 속에 위치시켜 보자는 것이다. 이 장 안에서 탈유기적 생명과 층화된 생명의 끝없는 상추(相推)가 계속된다. 베르그송 및 기학과 비교. 2) 탈기관체들의 ‘되기’는 ‘이것-임’/특이성을 통한 개체화, 그리고 영도(零度)에서 시작하는 강도들의 산출을 포함한다. 이는 구분되는 계통들을 가로지르는 횡단성(橫斷性)을 낳는다. 결국 들뢰즈/가타리가 비판하는 유기체 개념은 위계화되고 초월화된 조직화로 이해된 유기체이다. 들뢰즈/가타리는 분자적 층위 또는 리좀적 층위를 선험적 장으로 제시함으로써 카오스와 코스모스가 얽히는 카오스모스의 자연철학을 전개하고 있는 것이다. ▶ 그러나 탈기관체 개념은 자연철학만이 아니라 윤리학적 함축을 띠기도 한다. 스피노자는 우리가 신체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조차 모른다고 했다. 신체=‘기계’에는 무한한 잠재성이 내재해 있다. 신체의 잠재성을 이끌어내는 것, 다른 신체들과의 좋은 만남을 이루는 것, 새로운 변양과 감응을 시도하는 것, 의미 있는 배치를 만들어내는 것, …이 중요하다. 이것은 들뢰즈/가타리와 기학을 함께 사유하는 방식이기도 하다. 그러나 거친 탈층화는 오히려 불행한 결과들을 낳기도 한다. 강도 높은 신체가 되는 것, 유기체로서 탈영토화의 운동을 찾아가는 것이 중요하다.  
41    제2강 복잡성과 유기체 댓글:  조회:258  추천:0  2019-03-17
▶ 들뢰즈/가타리의 주요 개념은 ‘creative involution’이다. 이 개념은 들뢰즈/가타리를 다윈뿐만 아니라 베르그송과도 구분할 수 있게 해 준다. 그리고 스피노자에 대한 새로운 해석으로 우리를 이끈다.(『스피노자와 실천철학』에서 「스피노자와 우리」 참조) 이제 문제가 되는 것은 생물학적 유기체로서의 인간이 아니라 기계적 배치의 한 요소로서의 인간이다. 이제 인간의 ‘진화’가 논의된다면 자연 및 생명체들과의 관련 하에서의 진화보다 기계들과의 관련 하에서의 진화가 더 중요하다. ‘환경’의 의미 자체가 바뀌었다. ‘기계적 퓔룸(machinic phylum)’의 개념이 중요하다. 퓔룸은 연속적 변이(정도의 사유, 베르그송주의)의 바탕/주체로서 특이성을 실어 나른다. 퓔룸의 차원에서는 인간과 自然이 통합된다. 퓔룸은 디아그람과 쌍을 이루어 추상기계를 형성한다. 추상기계가 구체적인 형상을 띠게 되면 배치가 된다.(기계적 배치와 언표적 배치)  메카닉들은 인간-주체의 발명품으로서가 아니라 인간을 포함한 배치로서 다루어진다. 그러나 인간이 메카닉에 흡수된 비관적 현실을 가리키는 것은 아니다. 인간과 메카닉, 그리고 동식물들 등이 함께 형성하는 기계적 배치가 문제될 뿐이다. 아울러 언표적 배치가 함께 고려되면서 문화의 차원이 함께 다루어진다.   ‘공재면’, ‘내재면’은 카오스에 대한 들뢰즈/가타리의 개념화로 보아도 무방하다. 구조-섬들 아래에 또는 그것들 사이에 존재하는 근본적인 장, 구조-섬들이 거기에서 개별화되어 나오고 또 그리로 돌아가는 기(氣)가 공재면, 내재면이다. 태허(太虛)에 해당한다. 氣, 太虛는 또한 스토아학파와 스피노자적 의미에서의 실체=자연=신이기도 하다. 같은 논리가 보다 구체적인 여러 층차들에서 적용될 때 ‘탈기관체’ 개념이 성립한다.   ▶ 들뢰즈/가타리는 다윈, 바이스만, 베르그송으로 이어지는 한 생각을 이어받고 있다. 유기체보다 그 아래에서 지속되고 있는 ‘생식질’(바이스만)에 중점을 두고서 사유한다는 점이다. 그래서 (시몽동으로 대변되는) 개체화가 중요한 문제가 된다. 이것은 구조주의와는 다른 성격의 탈주체주의 사유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들뢰즈/가타리는 이런 생각의 한 급진화인 유전자 결정론을 받아들이지는 않는다. 이들에게 유전이나 진화는 생물학에서보다는 더 복잡하고 넓은 함의를 띠기 때문이다. 들뢰즈/가타리는 현재 주류 이론인 신다윈주의, 유전학, 분자생물학을 흡수하지만 그 테두리에 갇히지는 않는다.   바이스만의 생물학과 더불어 복잡성 이론 및 자기조직화 이론 또한 중요하다. 여기에서 복잡성 이론은 물리학적 맥락보다는 생물학적 맥락을 가리킨다. ‘complexity’는 글자 구성 그대로 “함께-접혀-있음”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이는 곧 ‘공진화(共進化=coevolution)’의 이론이다. 자연도태의 주인공은 환경이고 생명체는 도태/생존의 순서를 기다리는 존재가 아니다. 생명체와 환경은 연속적이며, 생명체는 개방계(open system)을 구성한다. 생명체는 단지 삶을 반복하는 것이 아니다. 환경에 응답하는(repliquer) 것이다.(베르그송)  굿윈의 말처럼 생명체는 단순한 내적(유전자 수준에서의) 변이의 결과가 아니며 스스로를 만들어가는 능력을 갖춘 존재이며, 또 캠피스의 말처럼 적응이 해결해야 할 문제들은 그 자체 진화 과정의 산물이다. 과정과 산물들은 변증법적 관계에 있는 것이다. (베르그송의 『물질과 기억』도 이런 구도에서 이해해야 한다) 바렐라에 따르면 생명체와 환경은 ‘상호 종화’와 ‘공결정(codetermination)’의 관계를 맺는다. 그리고 보다 발달한 생명체일수록 이런 연계성의 복잡성도 커진다. 이 생각은 ‘탈영토화’ 개념으로 이어진다.   철저한 다윈주의자인 모노에게도 이런 생각은 나타나 있다. ‘도태압(淘汰壓=selective pressures)’은 유사한 생태권들(ecological niches) 내에서 살아가는 상이한 유기체들 사이에서의 종적(種的) 상호작용들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유기체는 이 과정에서 ‘선별적인’ 역할을 하며, 유기체가 더 발달될수록 자율성은 점점 더 커진다.   ▶ 들뢰즈/가타리의 사유가 ‘기계’와 ‘메카닉’을 구분하며, 모든 기계들을 내재면에 놓고서 생각한다는 점이 중요하다. “내부는 단지 선별된 외부이며, 외부는 단지 투영된 내부일 뿐이다.” 이는 윅스켈과 메를로-퐁티를 거쳐 들뢰즈/가타리로 이어지는 생각이다(메를로-퐁티와 들뢰즈/가타리의 차이도 음미). 그리고 생명체의 자율성은 배치와 탈영토화에 관련해 이해되며 자기조직화도 이런 개념틀 속에서 이해된다. 이런 이유 때문에 칸트로부터 오늘날의 자기조직화 이론에까지 이어져 내려오는 통일성, 안정성, 동일성의 개념은 비판된다(그러나 이케다가 강조하는 동일성의 역할도 음미). 들뢰즈와 가타리의 사유는 유전자 결정론과 대립한다. 최근의 생물학은 생명 현상을 더 이상 물질적 구조의 부대현상(epiphenomenon)으로 보지 않으려는 입장을 다듬어 왔다. 유기체의 생명은 비선형적인 피드백 공정들을 포함하는, 복잡한 자기조직계들(autopoietic systems)의 창발성(創發性)으로 이해된다. 유기체들은 자기조직 및 자기조절(self-regulation) 능력을 가진다. 생명은 DNA가 아니다. 분자들의 활동, 유전자들의 활동, 형태발생적 맥락 등은 단순한 연역관계를 맺지 않는다. 로버트 로젠은 바이스만의 생각을 전복시킨다. 체세포와 유기체가 중요한 것이다. 생명이란 형태발생의 과정을 통해 나타나는, 복잡계들의 창발적 현상이다. 진화 없이 생명을 생각할 수는 있어도, 생명 없이 진화를 생각할 수는 없다. 생명체들은 단지 진화 과정의 매듭들인 것이 아니다. 생명체의 활동이 진화의 가능성의 조건들을 제공하는 것이다.  
40    제1강 들뢰즈/가타리 사유 개관 댓글:  조회:258  추천:0  2019-03-17
▶ 이 강의는 『천의 고원』 중 「변신」 장을 생명철학적으로 심화시켜 이해하려는 강의이다. 피어슨의 저작(Pearson, Germinal Life, Routledge, 1999)을 따라 강의할 것이다. 마누엘 데란다의 저작(Manuel DeLanda, Intensive Science & Virtual Philosophy, Continuum, 2002)이 들뢰즈 사유의 자연과학적 이해/확장에 매우 중요한 저작이다. 브라이언 마수미의 저작들(Brian Massimi, A User's Guide to Capitalism & Schizophrenia, MIT Press, 1992; Parables for the Virtual, Duke Uni. Press, 2002) 또한 뛰어나다. 군지-페기오 유키오의 『生成する生命』도 들뢰즈를 기초적인 원천으로 삼고 있다. ▶ 변신에 대한 들뢰즈/가타리의 사유를 베르그송, 둔스 스코투스, 스피노자와 연결시켜 이해하는 것이 중요한다.  개별화된 존재들, 개체들은 카오스의 바다 위에 떠 있는 섬들과도 같다. 그러나 카오스는 단순한 암흑이나 무질서가 아니라 개체들이 거기에서 나와 거기에로 돌아가는 근원적 氣, 太虛와도 같은 것이다. 이를 ‘공재면(plan de consistance)’이라 부른다. 따라서 개체화되어 있는 차원을 근거로 하는 사유들은 적어도 이런 관점에서는 피상적이다. “배경(ground)을 일깨우고 형태[피겨]를 와해시키는 것보다 더 큰 죄(sin)는 없다.”(『차이와 반복』) 그러나 피상적 차원이 소홀히 되는 것은 아니다. ‘superficial’의 차원, 즉 표면의 차원은 깊이의 차원과 대등하게 중요하다. 『차이와 반복』이 잠재성과 강도 개념을 중심으로 한 깊이의 철학이라면, 『의미의 논리』는 사건과 계열화 개념을 중심으로 한 표면의 철학이다.   들뢰즈/가타리의 사유는 베르그송적 구도를 띤다. 형상들은 물질-생명의 운동에서 파생하는, 그것도 우발적으로 파생하는 것으로 전락한다. 시간이 우주의 근본 주재자가 된다. 전개체적-비인칭적 차원을 염두에 두고서 ‘존재론’(전통적 의미)을 생각할 때 ‘이것(haecceitas)’에 관한 둔스 스코투스의 생각이 새로운 조명을 받게 된다. 기존의 존재론들이 포착하지 못했던 존재들(entities)을 우리 시야에 펼쳐 주는 존재론. 이 존재론은 또한 ‘이것들’의 잠재적 장으로서의 ‘탈기관체(corps sans organes)’를 설정하게 만든다. (공재면은 궁극적 탈기관체이다)    개체화된 존재들 ― ‘기계들’(이 말에는 스토아, 스피노자, 라이프니츠, …로부터 현대적 맥락까지 다양한 맥락이 스며들어 있다) ― 사이에서는 한편으로 영토화/탈영토화의 과정이 발생하고, 그와 더불어 감응(affectus)에서의 변화도 발생한다. 이로부터 갖가지 윤리적-정치적 문제들이 발생한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창조적 행동학(ethology)을 구상한다.  
39    제12강 리좀을 구성하는 원리들 Ⅲ 댓글:  조회:155  추천:0  2019-03-12
    양란 (tropical orchid) 탈영토화의 운동들과 재영토화의 과정들이 끝없이 가지를 쳐 나가고, 서로가 서로에게서 발견된다면, 그것들이 어떻게 서로 상대적이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양란(洋蘭)은 하나의 이미지, 말벌의 트레이싱을 형성함으로써 스스로를 탈영토화한다. 그러나 말벌은 이 이미지에 스스로를 재영토화한다. 그러나 말벌은 그 자체 양란의 생식 기구의 한 부품이 됨으로써 스스로를 탈영토화하며, 꽃가루를 실어 나름으로써 양란을 재영토화하는 것이다. 말벌과 양란은 둘이 이질적인 한에서 리좀을 형성한다. 물론 양란이 기표적 방식으로 말벌의 이미지를 재생산해냄으로써 말벌을 흉내 낸다고(미메시스, 의태적 모방, 속임수 등) 말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는 층들의 층위에서만 참이다. 즉 흉내는 두 층 사이의 평행관계에서 성립하며, 양란에서의 식물적 조직화가 말벌에서의 동물적 조직화를 흉내내는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리좀에서는 전혀 다른 어떤 것이 문제가 된다. 흉내/모방 이상의 그 어떤 것, 즉 코드의 포획, 코드의 잉여가치, 원자가의 증가, 진정한 되기가 발생하고 있는 것이다. 양란의 말벌-되기, 말벌의 양란-되기, 이 되기들 각각은 한 항의 탈영토화와 다른 한 항의 재영토화를 함축하며, 두 되기는 탈영토화를 계속 더 멀리 밀고나가는 강도들의 순환을 따라 서로를 이끌어내고 또 서로 교대한다. 흉내내기나 유사성의 문제가 아니다. 두 이질적 계열들이 공통의 리좀으로 구성된 탈주선에서 파열되고 있는 것이다. 레미 쇼뱅은 이 점을 정확히 지적한다: “서로 아무런 관련도 없는 두 존재의 비평행적 진화.” 보다 일반적으로 말해, 진화의 도식들이 수목형 모델 및 혈통 모델 같은 낡은 형식들을 버리는 일도 가능할 것이다. 어떤 조건들 하에서 하나의 비루스는 생식세포들에 접속해 스스로를 하나의 복합종의 세포유전자로 바꿀 수 있다. 물론 그것은 전혀 다른 어떤 종의 세포들로 흘러들어갈 수 있으며, 그럴 때면 이전 숙주에서 유래한 ‘유전정보들’을 옮기기도 한다. 진화의 도식들은 보다 덜 분화된 것에서 보다 더 분화된 것으로 나아가면서, 즉 수목형의 혈통 모델들을 따라서만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것들은 하나의 리좀을 따라 이질적인 것에서 직접적으로 작동하며 이미 분화된 하나의 선에서 다른 하나의 선으로 건너뛴다. 원리 5와 원리 6: 지도 제작과 전사의 원리 리좀은 어떠한 구조적 모델이나 발생적 모델에도 의존하지 않는다. 리좀은 발생축이나 심층 구조 같은 관념을 알지 못한다. 발생축은 대상 안에서 일련의 단계들을 조직해가는 통일성으로서의 주축이다. 심층 구조는 오히려 직접적 구성요소들로 분해할 수 있는 기저 시퀀스(suite de base)와도 같은 것인 반면, 생산물의 통일성은 변형을 낳는 주관적인 다른 차원으로 넘어간다. 우리는 이처럼 나무나 뿌리라는 재현 모델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이는 낡아빠진 사유의 변주이다. 우리는 발생축이나 심층 구조에 대해 이렇게 말하겠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무한히 복제될 수 있는 본뜨기의 원리라고. 모든 나무의 논리는 본뜨기의 논리이자 복제의 논리이다. 정신분석과 마찬가지로 언어학의 대상은 무의식인데, 무의식은 그 자체로 재현적이며 코드화된 콤플렉스로 결정화되고 발생축 위에서 재분배되거나 통합체적 구조 안에서 분배된다. 언어학은 사태를 기술하거나 상호 주관적 관계들 사이에서 다시 균형을 잡거나 무의식을, 이미 거기에 존재하고 있으며 기억과 언어의 어두운 구석에 숨어 있는 무의식을 탐색하는 것을 목표로 삼는다.   언어학은 덧코드화 구조나 지지축에서 출발해서 이미 주어진 어떤 것을 본뜬다. 나무는 사본들을 분절하고 위계화한다. 사본들은 나무의 잎사귀들과 같다. 리좀은 그와는 완전히 다른 어떤 것이다. 그것은 사본이 아니라 지도이다. 지도를 만들어라. 그러나 사본은 만들지 말아라. 서양란은 말벌의 사본을 재생산하지 않는다. 서양란은 리좀 속에서 말벌과 더불어 지도가 된다. 지도가 사본과 대립한다면, 그것은 지도가 온몸을 던져 실재에 관한 실험 활동을 지향하고 있기 때문이다. 지도는 자기 폐쇄적인 무의식을 복제하지 않는다. 지도는 무의식을 구성해 낸다. 지도는 장(場)들의 연결접속에 공헌하고, 기관 없는 몸체들의 봉쇄-해제에 공헌하며, 그것들을 고른판 위로 최대한 열어놓는 데 공헌한다. 지도는 그 자체로 리좀에 속한다. 지도는 열려 있다. 지도는 모든 차원들 안에서 연결접속될 수 있다. 지도는 분해될 수 있고, 뒤집을 수 있으며, 끝없이 변형될 수 있다. 지도는 찢을 수 있고, 뒤집을 수 있고, 온갖 몽타주를 허용하며, 개인이나 집단이나 사회 구성체에 의해 작성될 수 있다. 지도는 벽에 그릴 수도 있고, 예술 작품처럼 착상해낼 수도 있으며, 정치 행위나 명상처럼 구성해낼 수도 있다. 언제나 많은 입구를 가지고 있다는 점은 아마도 리좀의 가장 중요한 특징 중의 하나일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쥐 굴은 동물 리좀이다. 쥐 굴에서는 이동 통로로서의 도주선과 저장이나 서식을 위한 지층들이 때때로 분명하게 구분된다. 지도는 다양한 입구를 갖고 있는 반면, 사본은 항상 “동일한 것으로” 회귀한다. 지도가 언어수행(performance)의 문제인 반면, 사본은 항상 이른바 “언어능력(competence)”을 참조한다.  
38    제11강 리좀을 구성하는 원리들 Ⅱ 댓글:  조회:147  추천:0  2019-03-12
원리 3: 다양체의 원리 복수적인 것이 (주체 또는 대상으로서, 자연적 실재 또는 정신적 실재로서, 이미지로서 그리고 세계로서의) 一者와 관계를 끊게 되는 것은 오로지 그것이 실제 실사(實詞)로서 이해될 때, 즉 다양체로서 이해될 때뿐이다. 다양체들은 리좀적이며, 수목형(樹木型)의 사이비-다양체들을 파기한다. 대상 내에서 축의 역할을 하는 통일성도, 또 주체 내에서 분할되는 통일성도 존재하지 않는다. 나아가 대상 안에서 유산(流産)할 통일성도, 또 주체 안으로 “되돌아올” 통일성도 존재하지 않는다. 하나의 다양체는 주체도 대상도 가지지 않는다. 오로지 규정성들, 크기들, 차원들만을 가질 뿐이다. 그리고 이것들이 증가할 때는 오로지 다양체의 본성이 바뀔 때이다(따라서 다양체가 커지면 조합의 법칙들도 증가한다). 리좀 즉 다양체인 한에서 꼭두각시의 실들은 예술가나 흥행사의 것과 같은 의지에가 아니라 신경섬유들의 다양체에 근거한다. (그리고 이 섬유들은 다시 첫 번째의 것들에 연결된 다른 차원들을 따라 또 다른 꼭두각시를 형성한다)  “꼭두각시들을 움직이는 실들을 망상조직(trame)이라 부르자. 사람들은 그것의 다양체가 그것을 텍스트에 투사하는 배우의 인칭 속에 있다고 반대할 것이다. 그렇다고 하자. 그러나 그의 신경섬유들은 다시 하나의 망상조직을 형성한다. 그리고 그것들은 회색의 덩어리, 격자를 가로질러 아페이론에 이르기까지 내려가며, […] 놀이는 신화가 ‘운명의 여신들’로 형상화하는 실 짜는 이들의 순수 활동에 근접한다.” (에른스트 윙거) 하나의 배치란 정확히 한 다양체 내에서의 차원들의 이런 증가이며, 다양체는 그 접속들을 증가시키는 그만큼 필연적으로 본성을 바꾸어나간다. 하나의 구조, 나무, 뿌리에서는 점들과 위치들을 찾아낼 수 있어도, 하나의 리좀에서는 그것들을 찾아낼 수 없다. 리좀에는 선들만이 존재한다. 글렌 굴드가 연주의 강도를 높여갈 때, 그는 단지 거장의 면모를 보여주는데 그치는 것이 아니다. 그는 음악적 점들을 선들로 바꾸고 있는 것이며, 그 총체를 증대시켜 가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서 수는 요소들을 일정한 차원 내에서 그것들이 차지하는 자리에 입각해 측정하는 일종의 보편적 개념이기를 그친다. 그것은 고려된 차원들을 따라 변하는 하나의 다양체가 되는 것이다. 우리는 측정의 통일성들이 아니라 오로지 측정의 다양체들을 가질 뿐이다. 통일성의 개념은 하나의 다양체 내에서 기표에 의한 권력의 포획이 또는 주체화에 상응하는 과정이 발생할 때에만 등장한다. 그래서 객관적인 요소들 또는 점들 사이에 일대일 대응관계들의 총체를 정초하는 축-통일성이, 또는 주체 안에서 분화의 이항 논리의 법칙에 따라 분할되는 一者가 존재하게 된다. 통일성은 언제나 고려된 계의 차원을 보조하는 하나의 공차원(空次元)내에서 작동한다(초코드화). 그러나 바로 리좀 즉 다양체는 초코드화하지 않으며, 그 선들의 수 즉 이 선들에 부착되는 수들의 다양체를 보조하는 차원을 끌어들이지 않는다. 모든 다양체들은 그것들이 그 모든 차원들을 채우고 차지하는 한에서 평탄하다(plates). 그래서 우리는 다양체들의 혼효면에 대해 말할 수 있다. 이 ‘면(面)’이 그 위에서 생성하는 접속들의 수에 따라 증가하는 차원들에 속할지라도 말이다. 다양체들은 바깥에 의해서, 추상선(抽象線), 탈주 또는 탈영토화의 선에 의해 정의되며, 이 선들을 따라 다른 다양체들과 접속함으로써 본성을 바꾸어나간다. 혼효면(격자)은 모든 다양체들의 바깥이다. 탈주선은 여러 가지를 동시에 뜻한다: 다양체가 실제 채우게 되는 유한한 수의 차원들의 실재, 모든 보조적 차원들의 불가능성(다양체는 이 선을 따라 변형된다), 동일한 혼효면 또는 외부성 위에서 이 모든 다양체들 ― 그 차원들이 얼마이든 ―을 평탄하게 만들 수 있는 가능성과 만들어야 할 필요성. 한 권의 책의 이상이란 바로 그러한 외부성의 면에, 하나의 유일한 페이지에, 하나의 동일한 폭에 모든 것들 ― 체험된 사건들, 역사적 사실들, 사유된 개념들, 개체들, 집단들, 사회구성체들 ―을 펼치는 것이리라. 클라이스트는 이러한 유형의 글쓰기를, 감응들의 파편화된 고리를, 언제나 바깥과 관련을 맺는 가변적 속도들, 급변들, 변형들을 가지고서, 발명해냈다. 열린 고리들. 또한 이 텍스트들은 실체 또는 주체의 내부성으로 구성된 고전주의와 낭만주의의 책과는 모든 면에서 대립한다. 국가의 책 ― 장치와 대립하는 책 ― 전쟁기계. n-차원의 평탄한 다양체들은 기표화를 벗어나며 주체화도 벗어난다. 그것들은 부정관사들을 통해, 아니 차라리 부분관사들을 통해 지시된다(그것은 개밀속 조각, 리좀 조각, …이다).   원리 4: 탈기표(작용)적 도약의 원리 구조들을 분리시키는, 또는 그 중 하나를 가로지르는, 그래서 기표(작용)적인 단절들에 대항. 하나의 리좀은 임의의 어떤 곳에서 끊어지고 꺾어질 수 있으며, 그것의 이런저런 선들에 따라 그리고 다른 선들에 따라 수선하기도 한다. 이는 개미들에서조차 확인된다. 개미들은 동물-리좀을 형성한다. 그 가장 큰 부분이 파괴되기도 하며, 또한 끝없이 복구되기도 한다. 모든 리좀들은 자체의 절편선들을 내포하며, 이 선들을 따라 층화, 영토화, 조직화, 기표화, 귀속, … 등을 겪는다. 그러나 리좀들은 또한 탈영토화의 선들도 포함하며, 이 선들을 따라 끝없이 탈주한다. 절편선들이 하나의 탈주선에서 파열할 때마다 리좀에는 도약이 발생하지만, 탈주선은 리좀의 부분을 이룬다. 이 선들은 서로가 서로를 참조하기를 멈추지 않는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좋음과 나쁨이라는 기초적인 형식으로조차도, 이원론 또는 이항 분할에 근거할 수 없다. 우리는 하나의 도약을 만들어내고 하나의 탈주선을 긋지만, 늘 그 위에서 다시금 전체를 재층화하는 조직화들을, 하나의 기표에 권력을 재부여하는 구조들을, 하나의 주체를 재구성하는 귀속들을 되찾을 위험에 처하곤 한다. 집단들과 개인들은 오로지 응결되기만을 요구하는 미시-파시즘들을 내포한다. 그렇다, 개밀속도 리좀이다. 좋음과 나쁨은 능동적이고 일시적인, 다시 시작되어야 할 어떤 선별의 산물일 뿐이다.  
37    제10강 리좀을 구성하는 원리들 I 댓글:  조회:161  추천:0  2019-03-12
제10강 리좀을 구성하는 원리들 I    리좀 개념을 보다 분명히 하기 위해 들뢰즈/가타리는 리좀을 구성하는 여섯 가지의 원리를 제시한다.  원리 1: 연결접속의 원리, 원리 2: 다질성의 원리 한 리좀의 그 어느 점(點)이든 다른 어떤 모든 점들과 접속할 수 있으며 또 접속해야 한다. 그것은 하나의 점, 하나의 질서/순서를 고정시키는 나무 또는 뿌리와는 전적으로 다르다. 촘스키가 구사하는 언어학적 나무는 여전히 하나의 점 S에서 출발해 이분법에 따라 진행한다. 리좀에서는 그와 반대로 각각의 특질이 필연적으로 하나의 언어학적 특질에 근거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촘스키의 언어학적 특질은 전형적인 수목형의 사유를 보여준다. ‘homme’는 생명체/무생명체에서 생명체, 척추동물/무척추동물에서 척추동물, …로 이어지는 스무고개 놀이를 통해서 그 언어학적 특질을 부여받는다. 들뢰즈와 가타리의 특질(trait)은 촘스키적 특질(하나의 사물이 ‘유기적 재현’에서 차지하는 자리)도 아니고 일상적 의미에서의 ‘성질들’도 아니다. 성질들이 관찰에 관련되는 형용사적 특징들이라면, 특질들은 감응과 강도에 관련되는 동사적 특징들이다. 그것은 무엇“인가” 즉 존재(esse)가 아니라 무엇“을 하는가” 또는 “할 수 있는가” 즉 능력(posse)의 문제이다. 짐을 끄는 말과 소 사이의 거리는 짐말과 경주용 말 사이의 거리보다 훨씬 가깝다. 독문학자와 하이데거 사이의 거리는 하이데거와 콰인 사이의 거리보다 훨씬 가깝다. 들뢰즈와 가타리에게 중요한 것은 한 사물이 분류도에서 차지하는 자리도, 관조 속에 드러내는 성질들도, 내면적 감정들도 아니다. 행동/행위와 과정에서, 강도로, 감응으로 드러내는 특질들이 중요한 것이다.  다시 말해, 리좀에서는 각종의 기호학적 고리들이, 상이한 기호체제들만이 아니라 상이한 지위의 사태들까지도 작동시킴으로써, 매우 다양한 코드화에 접속된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소쉬르에서 연원하는, 기표 중심의 ‘기호론’보다 퍼스에서 연원하는 ‘기호학’을 선호한다.) 언표행위의 집단적 배치들은 사실상 기계적 배치들 내에서 직접적으로 작동하며, 때문에 기호체제들과 그 대상들 사이에 날카로운 금을 긋는 것은 불가능하다. 언어학의 경우, 그것이 명료한 것에만 논의를 국한시키고 랑그에 대해 어떤 것도 전제하지 않고자 할 때조차도, 여전히 배치의 양태들과 특정한 사회적 권력의 유형들을 함축하는 어떤 담론의 영역에 머무르게 된다. 촘스키가 말하는 문법성, 모든 문장들을 지배하는 정언적 상징인 S는 통사론적 표식 기구이기 이전에 이미 권력의 표식 기구이다 ― 문법적으로 올바른 문장들을 구성하라, 각각의 언표를 명사 통합체와 동사 통합체(첫 번째 二分, …)로 나누어라. 우리는 이러한 언어학적 모델이 너무 추상적이라고 비난하지 않는다. 차라리 충분히 추상적이지 못하다고, 하나의 랑그를 의미론적이고 화용론적인 내용들에, 언표행위라는 집단적 배치들에, 사회적 장의 모든 미시정치에 연결시키는 추상기계에 도달하지 못했노라고 비난한다. 하나의 리좀은 기호학적 고리들을, 권력의 조직화들을, 예술들, 과학들, 사회적 투쟁들에서 발생하는 출현들(우발적 사건들)을 끊임없이 접속시킨다. 하나의 기호학적 고리는 다양한 언어학적 행위들뿐만 아니라 지각적, 모방적, 신체언어적, 인식적 행위들을 얽는 덩이줄기와도 같다. 따라서 자체로서의 랑그는 없으며, 언어의 보편성이라는 것도 없다. 다만 방언들, 사투리들, 속어들, 특수언어들의 경쟁이 있을 뿐이다. 화자-청자의 이상(理想) 같은 것은 없으며, 등질적인 언어적 공동체도 마찬가지이다. 바인라이히의 공식화에 따르면, 랑그는 “본질적으로 다질적인 실재”이다. 모어(母語) 같은 것은 없으며, 다만 한 정치적 다양체 내에서 지배적인 한 랑그에 의해 권력의 장악이 있을 뿐이다. 랑그는 소교구, 주교구, 수도의 주위에서 안정된다. 그것은 구근(球根)을 이룬다. 그것은 줄기들과 지하수들을 통해서, 계곡물들을 따라, 또는 철로들을 따라 진화하며, 기름자국들처럼 번져간다. 우리는 언제라도 내적인 구조적 분해를 통해 랑그를 변화시킬 수 있으나, 이것은 근본적으로 뿌리들에 대한 탐구와 다르지 않다. 나무에는 늘 계통학적인 무엇인가가 있다. 그것은 민중적인 방법이 아니다. 반면 리좀적인 유형의 방법은 언어를 다른 차원들로 그리고 다른 등록부들(registres)로 탈중심화함으로써만 분석할 수 있다. 하나의 랑그는 무능력해질 때에만 자체의 차원에 폐쇄되는 것이다. 원리 3: 다양체의 원리 복수적인 것이 (주체 또는 대상으로서, 자연적 실재 또는 정신적 실재로서, 이미지로서 그리고 세계로서의) 一者와 관계를 끊게 되는 것은 오로지 그것이 실제 실사(實詞)로서 이해될 때, 즉 다양체로서 이해될 때뿐이다. 다양체들은 리좀적이며, 수목형(樹木型)의 사이비-다양체들을 파기한다. 대상 내에서 축의 역할을 하는 통일성도, 또 주체 내에서 분할되는 통일성도 존재하지 않는다. 나아가 대상 안에서 유산(流産)할 통일성도, 또 주체 안으로 “되돌아올” 통일성도 존재하지 않는다. 하나의 다양체는 주체도 대상도 가지지 않는다. 오로지 규정성들, 크기들, 차원들만을 가질 뿐이다. 그리고 이것들이 증가할 때는 오로지 다양체의 본성이 바뀔 때이다(따라서 다양체가 커지면 조합의 법칙들도 증가한다). 리좀 즉 다양체인 한에서 꼭두각시의 실들은 예술가나 흥행사의 것과 같은 의지에가 아니라 신경섬유들의 다양체에 근거한다. (그리고 이 섬유들은 다시 첫 번째의 것들에 연결된 다른 차원들을 따라 또 다른 꼭두각시를 형성한다)  “꼭두각시들을 움직이는 실들을 망상조직(trame)이라 부르자. 사람들은 그것의 다양체가 그것을 텍스트에 투사하는 배우의 인칭 속에 있다고 반대할 것이다. 그렇다고 하자. 그러나 그의 신경섬유들은 다시 하나의 망상조직을 형성한다. 그리고 그것들은 회색의 덩어리, 격자를 가로질러 아페이론에 이르기까지 내려가며, […] 놀이는 신화가 ‘운명의 여신들’로 형상화하는 실 짜는 이들의 순수 활동에 근접한다.” (에른스트 윙거) 하나의 배치란 정확히 한 다양체 내에서의 차원들의 이런 증가이며, 다양체는 그 접속들을 증가시키는 그만큼 필연적으로 본성을 바꾸어나간다. 하나의 구조, 나무, 뿌리에서는 점들과 위치들을 찾아낼 수 있어도, 하나의 리좀에서는 그것들을 찾아낼 수 없다. 리좀에는 선들만이 존재한다. 글렌 굴드가 연주의 강도를 높여갈 때, 그는 단지 거장의 면모를 보여주는데 그치는 것이 아니다. 그는 음악적 점들을 선들로 바꾸고 있는 것이며, 그 총체를 증대시켜 가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서 수는 요소들을 일정한 차원 내에서 그것들이 차지하는 자리에 입각해 측정하는 일종의 보편적 개념이기를 그친다. 그것은 고려된 차원들을 따라 변하는 하나의 다양체가 되는 것이다. 우리는 측정의 통일성들이 아니라 오로지 측정의 다양체들을 가질 뿐이다. 통일성의 개념은 하나의 다양체 내에서 기표에 의한 권력의 포획이 또는 주체화에 상응하는 과정이 발생할 때에만 등장한다. 그래서 객관적인 요소들 또는 점들 사이에 일대일 대응관계들의 총체를 정초하는 축-통일성이, 또는 주체 안에서 분화의 이항 논리의 법칙에 따라 분할되는 一者가 존재하게 된다. 통일성은 언제나 고려된 계의 차원을 보조하는 하나의 공차원(空次元)내에서 작동한다(초코드화). 그러나 바로 리좀 즉 다양체는 초코드화하지 않으며, 그 선들의 수 즉 이 선들에 부착되는 수들의 다양체를 보조하는 차원을 끌어들이지 않는다. 모든 다양체들은 그것들이 그 모든 차원들을 채우고 차지하는 한에서 평탄하다(plates). 그래서 우리는 다양체들의 혼효면에 대해 말할 수 있다. 이 ‘면(面)’이 그 위에서 생성하는 접속들의 수에 따라 증가하는 차원들에 속할지라도 말이다. 다양체들은 바깥에 의해서, 추상선(抽象線), 탈주 또는 탈영토화의 선에 의해 정의되며, 이 선들을 따라 다른 다양체들과 접속함으로써 본성을 바꾸어나간다. 혼효면(격자)은 모든 다양체들의 바깥이다. 탈주선은 여러 가지를 동시에 뜻한다: 다양체가 실제 채우게 되는 유한한 수의 차원들의 실재, 모든 보조적 차원들의 불가능성(다양체는 이 선을 따라 변형된다), 동일한 혼효면 또는 외부성 위에서 이 모든 다양체들 ― 그 차원들이 얼마이든 ―을 평탄하게 만들 수 있는 가능성과 만들어야 할 필요성. 한 권의 책의 이상이란 바로 그러한 외부성의 면에, 하나의 유일한 페이지에, 하나의 동일한 폭에 모든 것들 ― 체험된 사건들, 역사적 사실들, 사유된 개념들, 개체들, 집단들, 사회구성체들 ―을 펼치는 것이리라. 클라이스트는 이러한 유형의 글쓰기를, 감응들의 파편화된 고리를, 언제나 바깥과 관련을 맺는 가변적 속도들, 급변들, 변형들을 가지고서, 발명해냈다. 열린 고리들. 또한 이 텍스트들은 실체 또는 주체의 내부성으로 구성된 고전주의와 낭만주의의 책과는 모든 면에서 대립한다. 국가의 책 ― 장치와 대립하는 책 ― 전쟁기계. n-차원의 평탄한 다양체들은 기표화를 벗어나며 주체화도 벗어난다. 그것들은 부정관사들을 통해, 아니 차라리 부분관사들을 통해 지시된다(그것은 개밀속 조각, 리좀 조각, …이다).    
36    제9강 책의 두 가지 유형 댓글:  조회:151  추천:0  2019-03-12
※ 『천개의 고원』 텍스트 읽기 - 서론: 리좀 부분 (p.14~20)   우리가 말하고 있는 건 다름 아니라 다양체, 선, 지층과 절편성, 도주선과 강렬함, 기계적 배치물과 그 상이한 유형들, 기관 없는 몸체와 그것의 구성 및 선별, 고른판, 그 각 경우에 있어서의 측정 단위들이다. 지층 측정기들, 파괴 측정기들, 밀도의 CsO 단위들, 수렴의 CsO 단위들 ― 이것들은 글을 양화할 뿐 아니라 글을 언제나 어떤 다른 것의 척도로 정의한다. 글은 기표작용과는 아무 상관도 없다. 글은 비록 미래의 나라들일지언정 어떤 곳의 땅을 측량하고 지도를 제작하는 것과 관련되어 있다.  책의 첫 번째 유형은 뿌리-책이다. 나무는 이미 세계의 이미지이다. 또는 뿌리는 세계-나무의 이미지이다. 그것은 유기적이고 의미를 만들며 주체의 산물인(이런 것들이 책의 지층들이다), 아름다운 내부성으로서의 고전적인 책이다. 예술이 자연을 모방하듯이 책은 세계를 모방한다. 책만이 가진 기법들을 통해서. 이 기법들은 자연이 할 수 없거나 더 이상 할 수 없게 된 것들을 훌륭히 해낸다. 책의 법칙은 반사의 법칙이다. 즉 가 둘이 되는 것이다. 책의 법칙은 어떻게 자연 속에 존재할 수 있는 것일까? 그것이 세계와 책, 자연과 예술 사이의 나눔을 주재하니 말이다. 하나가 둘이 된다. 이 공식을 만날 때마다, 설사 그것이 모택동에 의해 전략적으로 언표된 것이고 세상에서 가장 “변증법적으로” 파악된 것이라 할지라도 우리는 가장 고전적이고 가장 반성되고 최고로 늙고 더없이 피로한 사유 앞에 있는 것이다. 자연은 그런 짓을 하지 않는다. 자연에서 뿌리 자체는 축처럼 곧게 뻗어 있지만 이분법적으로 분기하는 것이 아니라 측면으로 원 모양으로 수없이 갈라져 나간다. 정신은 자연보다 늦게 온다. 심지어 자연적 실재로서의 책조차도 축을 따라 곧게 뻗어 있고, 주위에는 잎사귀들이 나 있다. 그러나 정신적 실재로서의 책은, 그것이 의 이미지로 이해되건 의 이미지로 이해되건, 둘이 되는 하나 그리고 넷이 되는 둘… 이라는 법칙을 끊임없이 펼쳐간다. 이항 논리는 뿌리-나무의 정신적 실재이다. 언어학 같은 “선진적인” 학문조차도 이 뿌리-나무를 기본적인 이미지로 갖고 있는데, 이 이미지는 언어학을 고전적인 사유에 병합시킨다(점 S에서 시작해서 이분법적으로 진행되는 촘스키의 통합체적 나무가 그러하다). 이 사유 체계는 결코 다양체를 이해한 적이 없었다. 정신의 방법을 따라 둘이 도달하려면 강력한 근본적 통일성을 가정해야 한다. 그리고 대상의 측면을 보자면, 우리가 자연의 방법을 따라 하나에서 셋, 넷, 다섯으로 직접 갈 수 있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러나 이는 언제나 곁뿌리들을 받쳐 주는 주축뿌리 같은 강력한 근본적 통일성이 있다는 조건 아래에서만 그러하다. 하지만 이것이 사태를 크게 호전시키는 것은 아니다. 계속 이어지는 원들 사이의 일대일 대응 관계가 이분법의 이항 논리를 대체한 것일 뿐이다. 주축뿌리가 이분법적 뿌리보다 다양체를 더 잘 이해하도록 해주는 것은 아니다. 주축뿌리가 대상 안에서 작동한다면 이분법적 뿌리는 주체 안에서 작동한다. 이항 논리와 일대일 대응 관계는 여전히 정신분석(슈레버에 대한 프로이트의 해석에서 나타나는 망상의 나무), 언어학, 구조주의, 나아가 정보이론까지도 지배하고 있다.   어린뿌리 체계 또는 수염뿌리 체계는 책의 두 번째 모습인데, 우리 현대인은 곧잘 그것을 내세운다. 이번에 본뿌리는 퇴화하거나 그 끄트머리가 망가진다. 본뿌리 위에 직접적인 다양체 및 무성하게 발육하는 곁뿌리라는 다양체가 접목된다. 이번에는 본뿌리의 퇴화가 자연적 실재인 것 같지만 그래도 뿌리의 통일성은 과거나 미래로서, 가능성으로서 여전히 존속하고 있다. 그리고 우리는 물어보아야 한다. 그 가 더 포괄적인 비밀스런 통일성 또는 더 광범위한 총체성을 요구함으로써 이러한 사태를 보상하는 건 아닌지. 버로스의 잘라 붙이기 기법을 보자. 한 텍스트를 다른 텍스트에 포개 쓰기. 이렇게 하면 다양한 뿌리들과 심지어 잡뿌리까지도 생겨난다(꺾꽂이처럼). 그러나 이 작업은 해당되는 텍스트들의 차원을 보완하는 차원을 상정하고 있다. 포개 쓰기가 함축하는 이 보완적 차원 속에서 통일성은 정신적 노동을 계속해 나간다. 아무리 파편적인 작품이라도 이나 으로 제시될 수 있는 것은 바로 이런 의미에서이다. 계열들을 증식시키거나 다양체를 커지게 하기 위해 사용하는 대부분의 현대적 방법들은 어떤 방향에서는, 예컨대 선형적(線型的)인 방향에서는 완전히 타당하다. 한편 총체화의 통일성은 다른 차원에서, 원환이나 순환의 차원에서 훨씬 더 확고하게 확증된다. 다양체를 구조 안에서 파악하는 사람들은 언제나 다양체의 증대를 조합의 법칙으로 환원시켜 상쇄시키고 만다. 여기서 통일성을 유산시키는 자들은 정말이지 천사를 만드는 자들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진정 천사가 지닐 만한 우월한 통일성을 긍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조이스의 언어들은 정당하게도 “다양한 뿌리를 두고 있다”고들 하는데, 적절한 말이다. 조이스의 언어가 단어들, 나아가 언어 자체의 선형적 통일성을 부숴버리는 것은, 그것이 문장이나 텍스트, 또는 지식의 순환적 통일성을 만들어낼 때뿐이다. 니체의 아포리즘이 지식의 선형적 통일성을 부숴버리는 것은, 사유 속에 로서 현존하는 영원 회귀의 순환적 통일성을 만들어낼 때뿐이다. 바꿔 말하면 수염뿌리 체계는 이원론, 주체와 객체의 상보성, 자연적 실재와 정신적 실재의 상보성과 진정으로 결별하지 않는다. 즉 통일성은 객체 안에서 끊임없이 방해받고 훼방당하지만 새로운 유형의 통일성이 또다시 주체 안에서 승리를 거두고 만다. 세계는 중심축을 잃어버렸다. 주체는 더 이상 이분법을 행할 수조차 없다. 하지만 주체는 언제나 대상의 차원을 보완하는 어떤 차원 속에서 양가성 또는 중층결정이라는 보다 높은 통일성에 도달한다. 세계는 카오스가 되었지만 책은 여전히 세계의 이미지로 남는다. 뿌리-코스모스 대신 곁뿌리-카오스모스라는 이미지로. 파편화된 만큼 더더욱 총체적인 책이라는 이상야릇한 신비화. 세계의 이미지로서의 책이라, 이 얼마나 무미건조한 생각인가. 사실상 라고 말하는 것으로는 충분치 않다. 물론 이렇게 외치는 것도 어려운 일이지만. 유려한 인쇄, 어휘, 심지어 능숙한 문장조차도 사람들이 그러한 외침을 듣도록 만드는 데는 충분치 않다. 다양, 그것을 만들어야만 한다. 하지만 언제나 상위 차원을 덧붙임으로써가 아니라 오히려 반대로 가장 단순하게, 냉정하게, 이미 우리에게 익숙한 차원들의 층위에서, 언제나 n-1에서(하나가 다양의 일부가 되려면 언제나 이렇게 빼기를 해야 한다). 다양체를 만들어내야 한다면 유일을 빼고서 n-1에서 써라. 그런 체계를 리좀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땅밑 줄기의 다른 말인 리좀은 뿌리나 수염뿌리와 완전히 다르다. 구근(球根)이나 덩이줄기는 리좀이다. 뿌리나 수염뿌리를 갖고 있는 식물들도 아주 다른 각도에서 보면 리좀처럼 보일 수 있다. 즉 식물학이 특성상 완전히 리좀 형태로 되어 있다는 것을 아는 것이 중요하다. 심지어 동물조차도 떼거리 형태로 보면 리좀이다. 쥐들은 리좀이다. 쥐가 사는 굴도 서식하고 식량을 조달하고 이동하고 은신 출몰하는 등 모든 기능을 볼 때 리좀이다. 지면을 따라 모든 방향으로 갈라지는 확장에서 구근과 덩이줄기로의 응고에 이르기까지, 리좀은 매우 잡다한 모습을 띠고 있다. 쥐들이 서로 겹치면서 미끄러질 때도 있다. 리좀에는 감자, 개밀, 잡초처럼 가장 좋은 것과 가장 나쁜 것이 있다. 동물이자 식물이어서, 개밀은 왕바랭이(crab-grass)이다. 하지만 우리가 리좀의 개략적인 몇몇 특성들을 말해주지 않는다면 아무도 납득하지 못할 듯하다.   원리 1과 원리 2. 연결접속의 원리와 다질성의 원리 : 리좀의 어떤 지점이건 다른 어떤 지점과도 연결접속될 수 있고 또 연결접속 되어야만 한다. 그것은 하나의 점, 하나의 질서를 고정시키는 나무나 뿌리와는 전혀 다르다. 촘스키 식의 언어학적 나무는 여전히 한 점 S에서 시작해서 이분법을 통해 진행되어 간다. 반대로 리좀의 특질들은 굳이 언어학적 특질에 가둘 필요는 없다. 리좀에서는 온갖 기호계적 사슬들이 생물학적, 정치적, 경제적 사슬 등 매우 잡다한 코드화 양태들에 연결접속되어 다양한 기호 체제뿐 아니라 사태들의 위상까지도 좌지우지한다. 실제로 언표행위라는 집단적 배치물은 기계적 배치물 속에서 곧바로 기능한다. 기호 체제와 기호들의 대상 사이에 근본적인 절단을 수립할 수는 없는 것이다. 언어학이 명시적인 것에 머물면서 언어에 관해 아무 것도 전제하지 않을 때에도 우리는 여전히 특정한 배치물의 양태들과 특정한 사회 권력 유형들을 함축하는 담론 영역 내부에 머물러 있다. 촘스키 문법의 핵심, 모든 문장들을 지배하는 정언적 상징 S는 통사론적 표지이기 이전에 먼저 권력의 표지이다. 문법적으로 올바른 문장을 구성하라, 각각의 언표를 명사구와 동사구로 나누어라(최초의 이분법)……. 우리는 그러한 언어학적 모델을 너무 추상적이라고 비판하지 않는다. 오히려 충분히 추상적이지 않다고, 언어를 언표의 의미론적, 화행론적 내용과 연결접속시키고 언표행위라는 집단적 배치물과 연결접속시키고 사회적 장의 모든 미시정치와 연결접속시키는 추상적인 기계에 이르지 못했다고 비판한다. 리좀은 기호계적 사슬, 권력 기구, 예술이나 학문이나 사회 투쟁과 관계된 사건들에 끊임없이 연결접속한다. 기호계적 사슬은 덩이줄기와도 같아서 언어 행위는 물론이고 지각, 모방, 몸짓, 사유와 같은 매우 잡다한 행위들을 한 덩어리로 모은다. 그 자체로 존재하는 랑그란 없다. 언어의 보편성도 없다. 다만 방언, 사투리, 속어, 전문어들끼리의 경합이 있을 뿐이다. 등질적인 언어 공동체가 없듯이 이상적 발화자-청취자도 없다. 바인라이히의 공식을 따르면 언어란 “본질적으로 다질적인 실재”이다. 모국어란 없다. 단지 정치적 다양체 내에서 권력을 장악한 지배적인 언어가 있을 뿐이다. 언어는 소교구, 주교구, 수도 부근에서 안정된다. 구근을 이루는 셈이다. 그것은 땅밑 줄기들과 땅밑의 흐름들을 통해 하천이 흐르는 계곡이나 철길을 따라 전개되며 기름 자국처럼 번져나간다. 언어는 언제나 내적인 구성요소로 분해될 수 있다. 이는 뿌리에 대한 탐색과 근본적으로 다르지 않다. 나무에는 항상 계보적(계통적)인 무언가가 있다. 그것은 민중의 방법이 아니다. 반대로 리좀 유형의 방법은 언어를 다른 차원들과 다른 영역들로 탈중심화시켜야만 그것을 분석해낼 수 있다. 언어는 제 기능이 무기력해진 경우에만 자기 안에 폐쇄된다.  
35    제8강 혼효면, 혼화면, 기계 댓글:  조회:164  추천:0  2019-03-12
들뢰즈와 가타리가 묻는 것은 책이 무엇과 더불어 작동하는지, 어떤 새로운 강도들을 창출해내는지, 다른 다양체들과 접속해 어떤 다양체를 만들어 가는지, 다른 탈기관체와 접속해 어떻게 혼효면/혼화면에로 나아가는지 등이다. 그래서 중요한 것은 재현/표상도 기표화도 해석도 아니다. 글쓰기를 양화하는 것, 즉 관련되는 선들과 농도들을 측정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달리 말해, 배치/다양체로서의 책을 구성하는 선들과 농도들(강도들)을 측정하는 것(질적 측정으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새로운 선들과 농도들을 창조해내는 것이 중요하다. 혼효면/혼화면(plan de consistance)이란 무엇인가? ‘조직화의 도안’ 즉 조직화의 면은 근대 생물학의 성립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기관들의 구조와 기능은 일정한 도안/면에 입각해 이해되었고, 퀴비에의 비교해부학은 이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생명체의 모든 기관들, 구조, 기능은 수미일관한 정합성을 통해 이해되었다. 모더니즘 건축은 건축가의 일관된 도안/면(‘플랜’)에 입각해 기하학적 도시들을 만들어냈으며, 형상을 질료에 구현하는 데미우르고스의 모델에 입각해 작업했다. 구부러진 길들은 ‘당나귀의 길들’이다. 르 꼬르뷔지에의 ‘데카르트적 마천루들’은 거대한 조직화의 도안/면을 보여준다. 조직화면은 기계들 위에, 그것들을 초월해 존재하는 고착화된 코드이다. 기계들의 존재방식은 전적으로 이 초월적 코드에 입각해 이루어진다. 그것은 하나의 도덕이다. 그러나 혼효면/혼화면은 어디까지나 “순수하게 면일 뿐(plat)”이다. 평평하든 복잡하게 굴곡져 있든 면 위로 솟아올라 있는 초월성은 없다. 모든 것은 면 자체-내에서, 즉 면의 내재성에 입각해 성립한다. 기계들을 미리 조감(鳥瞰)하고 있는 청사진은 없다. 관계들에 입각해, ‘사이들’에 입각해 이루어지는 운동들이 있을 뿐이다. 이것은 윤리이다. 혼효면/혼화면은 곧 내재면이다.   “한 권의 책이 그렇게 그 자체 하나의 작은 기계라면, 그것 ― 그 또한 측정 가능한 이 문학 기계 ― 은 전쟁기계, 사랑기계, 혁명기계, …등과, 그리고 이것들을 낳는 추상기계와 어떤 관련을 맺는 것일까? 어떤 사람들은 우리가 너무 자주 문학자들을 인용한다고 비난했다. 그러나 우리가 글을 쓸 때 제기되는 유일한 물음은 문학기계가 어떤 다른 기계에 접속해 나갈 수 있는가, 또 (잘 작동하기 위해서) 나가야만 하는가 하는 것이다. 클라이스트와 미친 전쟁기계, 카프카와 전대미문의 관료기계, … (누군가가 문학에 의해 동물이나 식물이 되었다 한들 무슨 상관인가? 어차피 문학적으로 그렇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기에 말이다. 우리가 동물이 되는 것은 우선 목소리에 의해서가 아닌가?) 문학은 하나의 배치이다. 그것은 이데올로기와는 아무 관련이 없다. 이데올로기는 존재하지 않으며, 존재했던 적도 없다.” 추상기계(machine abstraite) ― 들뢰즈와 가타리에게 기계란 ‘물질’=氣가 物로 화한 모든 것이다. 그러나 개별적인 기계는 의미를 가지지 못한다. 기계는 다른 기계들과 접속해서 배치를 형성할 때에만 구체적인 의미를 띠게 된다. 때문에 들뢰즈/가타리에게 기계란 항상 개별적 기계가 아니라 여러 이질적인 기계들이 접속해서 형성되는 기계이다. 이 점에서 기계는 사실상 기계적 배치이다. 그리고 이 배치는 (재)영토화와 탈영토화를 겪으면서 역동적으로 작용한다. 청소기는 전기 코드를 통해 거대한 전력 기계들과 접속해 작동한다. 책은 책상, 연필, 스탠드, … 등과 접속해 공부-기계를 구성하기도 하고, 때로는 커피잔과 접속해 받침대-기계가 되기도 한다. 기계는 인공적인 기계들만이 아니라 식물들, 동물들, 인간들을 모두 포함하는 커다란 외연을 가진다. 세계에서 가장 다양한 접속을 이루면서 연속적으로 변이(變移)해 가는 기계, 가장 유연하면서도 복잡한 기계는 아마 사람의 몸일 것이다. 몸은 하루에도 수십 번 새로운 배치를 형성하면서 기계들을 만들어낸다. 이보다 훨씬 큰 기계들도 존재한다. 무수히 다양한 기계들의 접속을 통해 이루어지는 서울-기계, 더 나아가 한국-기계도 있다. 이런 기계들은 ‘사회적 기계들’을 형성한다. 이질적인 기계들로 이루어지는 배치, (재)영토화와 탈영토화를 겪으면서 층화의 방향과 탈기관체의 방향을 오가는 기계 즉 기계적 배치가 세계를 구성한다. * 따라서 기계를 구성하는 물질은 날카로운 불연속을 형성하지 않는다. 물질은 ‘연속적 변이’를 겪는 무한히 유연하고 잠재적인 氣이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이를 ‘기계적 퓔룸(phylum)’이라 부른다. 기계적 퓔룸은 특이성들과 강도들(또는 표현의 특질들)을 나른다. 이 퓔룸이 (추상기계에 의해) 어떤 역동적 구조 즉 디아그람을 통해 구체화될 때 기계적 배치가 형성된다. 추상기계는 특정한 시공간에 구체화된 기계적 배치가 아니라 여러 가지 방식으로 구체화될 수 있는 비물체적인(그러나 구체적 물질성을 떠나서는 존재하지 않는) 반복적 기계이다. 밥을 먹을 때 우리는 숟가락과 젓가락을 사용한다. 밥을 차릴 때 우리는 상과 그릇들을 놓는다. 좀더 추상적으로 생각하자. 식사-기계는 경우에 따라 다른 기계들(갖가지 상들, 그릇들, 수저들, 요리들, …)과 다른 코드들(“한 상 가득히 차려내는” 전통 상, ‘코스’로 먹는 서구식 상, …)을 작동시키지만 늘 식사-추상기계로 작동한다. 다른 기계들과 다른 코드들을 작동시키지만, 서대문 형무소, 정신병원, (러시아 아가씨들을 가두는) 방, … 등은 모두 감금-추상기계를 사용한다. 여러 형태의 공들(축구공, 야구공, 농구공, …), 다양한 유형의 선수들과 심판들, 관중들, 다르게 생긴 경기장들, 다른 코드들(‘룰들’), … 가동시킴에도 모든 경기들은 어떤 반복되는 추상기계 즉 경기-추상기계를 가동시킴으로써 성립한다. 추상기계, 배치, 다양체가 맥락에 따라 차이를 드러냄에도 기본적으로 유사한 개념임을 알 수 있다.  들뢰즈와 가타리에게 중요한 것은 문학이냐 철학이냐, … 하는 것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전쟁기계, 사랑기계, 혁명기계, 문학기계, … 등 다양한 추상기계들을 어떻게 접속시키고 어떤 새로운 삶을 창출하는가 하는 것이다. 따라서 문제는 이데올로기가 아니다. 실재와 그 허위적인 반영으로서의 이데올로기가 대립하는 것이 아니다.    
34    제7강 글쓰기의 양화 댓글:  조회:154  추천:0  2019-03-12
들뢰즈/가타리에게서 형상과 코라의 관계는 전복된다. 코라는 그것을 초월해 있는 형상들의 흔적에 따라 마름질되는 질료가 아니다. 코라는 가능한 모든 형상들을 보듬고 있는 충만한 잠재성, 물질이다. 그러나 이 물질은 정신을 비롯한 비물질적인 차원들과 대립하는 물질이 아니라 그것들을 포용하는 물질이다. 그것은 차라리 우리말 ‘氣’에 가까운 뉘앙스에서의 물질이다. 이것은 들뢰즈/가타리가 탈기관체를 스피노자의 실체라고 말할 때 보다 분명하게 확인된다. 스피노자의 실체는 물질-속성과 정신-속성 그리고 그 외의 무한한 속성들로 표현되는 실체이기에 말이다. ※ 그래서 세 가지가 구분된다. 실체적 속성들 : 강도=0(remissio)의 탈기관체들. 예컨대 물질-속성은 무한한 물질적 양태들로 변양되는 물질적-측면에서의-실체이다. 무한 양태들을 머금고 있는(특정한 양태들로 규정되어 있지 않은, 논리적으로 休止 상태에 있는) 잠재성으로서의 속성이 강도=0으로서의 탈기관체이다. 위도(latitudo): 강도=0에서 특정한 강도로 변양된 결과들. 산출된 강도들. 특히 감응들.(위도와 ‘경도=longitudo’를 그리는 것이 카르토그라피이다) 실체 : 경우에 따라서는 가능한, 모든 탈기관체들의 집합. “그 탈기관체”. ‘혼화면(Omnitudo)’. 여기에서 들뢰즈와 가타리가 스피노자의 존재론을 살짝 비틀고 있는 것이 확인된다. 스피노자에게서는 속성들은 소통 불가능하며 평행을 달릴 뿐이지만, 들뢰즈와 가타리의 ‘혼화면’은 모든 속성들의 ‘혼화(混化)’를 말하고 있다. 그리고 들뢰즈와 가타리가 궁극 실체를 ‘물질’로 말하는 한에서 이 혼화면은 결국 물질이라는 내재면(內在面) ― 그 바깥에 어떤 것도 없는 면 ― 이다. 이것은 어떤 면에서는 스피노자의 물질-속성으로 다른 모든 속성들을 녹아 넣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들뢰즈와 가타리가 의식이나 정신, 영혼, 마음 등을 부정하는 거친 유물론이 아니라는 점에서 이 혼화면, 물질, 내재면은 차라리 氣라 부르는 것이 훨씬 적절해 보인다. 또 하나, 탈기관체 개념이 차이들을 어떤 용광로에 녹여버리는 일자의 철학을 지향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보아야 한다. 그것은 ‘특수성-일반성’의 사유를 ‘단독성-보편성’의 사유로, 즉 보편성의 지평 위에서 무한히 새로운 방식의 차이창출을 실천하는 사유로 나아가려는 시도로 이해되어야 한다. 다음 구절은 매우 미묘한 구절이다. “내재성의 장 즉 혼효면은 구성되어야 한다. […] 한 조각 한 조각씩. 문제는 차라리 조각들이 서로 이어지는가, 그러려면 어떤 댓가를 치루어야 하는가 하는 것이다. 틀림없이 괴물과도 같은 교차들이 존재하게 될 것이다. 혼효면은 모든 탈기관체들의 총체이며, 일반화된 탈영토화의 운동에 처해 있는 […] 순수한 내재성의 다양체로서 […]”(MP, 195) 탈기관체는 분명 혼효면을 지향하지만 혼효면의 존재가 아프리오리하게 단정되는 것은 아니다.(바디우나 지젝처럼 들뢰즈를 ‘일자의 철학자’로 보는 것이 곤란한 이유들 중 하나) 한 조각 한 조각씩 더 포용적인 탈기관체가 만들어져야 하며, 그 사이에 겪어야 하는 불연속들, 빗나간 탈기관체-되기, …등을 각오해야 하는 것이다. ‘신중함’이 요청되는 것은 이 때문이다. 들뢰즈와 가타리의 사유는 실재적인 것(the real)의 사유이지 상상적인 것(the imaginary)의 사유가 아니다. 상징적인 것(the symbolic)과의 투쟁은 상상을 통해서가 아니라 실재를 통해서 가능한 것이다. 중요한 것은 상상에서의 도피가 아니라 실재에서의 탈주이다. 들뢰즈/가타리의 개념적 구분을 형식논리학적 대립으로 이해하면 곤란하다는 것을 지적했거니와, 또 하나 중요한 것은 이들의 개념적 구분에 실체화된 가치를 부여하는 일이다. 정주적인 것은 나쁜 것이고, 유목적인 것은 좋은 것이 아니다. 층화는 나쁜 것이고 탈기관체는 좋은 것이 아니다. 홈 패인 공간은 나쁜 것이고 매끄러운 공간은 좋은 것이 아니다. 이것들은 개념적 구분일 뿐이다. 개념적 구분이 현실에 적용될 때 지역적, 시대적, 집단적, …인 무수한 맥락들을 고려해야 하는 것이다. 이런 고려 없는 가치론적 실체화가 속류 노마디즘을 낳는다. ‘예수쟁이’가 예수의 적이고, 좌익 소아병자가 맑스의 적이듯이, 속류 노마디즘이 노마디즘의 가장 위험한 적이다. 들뢰즈와 가타리가 ‘신중함(prudence)’의 기예를 언급하는 것은 이런 맥락에서이다. 층화를 덮어놓고 부정하는 것은 아무런 대안 없는 반항에 불과하다. “조잡하게 탈층화해서는 탈기관체에, 그것의 혼효면에 도달할 수 없다.”(MP, 199) 그래서 혼효면 ― 차라리 혼화면 ― 을 지향하는 탈기관체와 대책 없는 탈층화가 만들어내는 공허한 탈기관체는 구분되어야 한다. 그러나 이 구분보다 더 중요한 구분, 즉 제 3의 탈기관체가 있다. 그것은 암적인 탈기관체이다. 유기체에서 암은 기존의 유기화를 탈층화하면서 혼효면을 만들어내지만, 그것은 창조적인/충만한 탈기관체가 아니라 파괴적이 탈기관체만을 낳으며 유기체를 죽음으로 이끌어간다. 이와 마찬가지로 기표화의 차원에서는 독재자의 등장과 파시즘의 출렁임은 창조적인 탈기표적 운동이 아니라 암적인 기표화를 낳는다. 주체화의 경우에도 역시 기존의 주체화를 벗어나는 듯 보이지만 결국 기존의 주체화가 보존하는 안일함조차도 누리지 못하게 하는 폭력적인 탈주체화들이 곳곳에서 난무할 수 있다. 더 나아가 화폐의 암적인 탈기관체(인플레이션)을 비롯해 무수한 형태의 암적인 탈기관체들이 형성될 수 있다. 충만한 탈기관체로 가지 못하고 공허한 탈기관체로 갈 때, 남는 것은 자기파괴뿐이다. 나아가 창조적인 탈기관체와 암적인 탈기관체를 혼동하는 것은 더욱 위험하며 자기만이 아니라 타인까지도 파괴한다. 탈기관체로 가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충만한 탈기관체로 가는 것이 중요하다. “책의 탈기관체는 무엇일까? 관련되는 선들의 본성에 따라, 각각에 고유한 농도에 따라, (그것들의 선별을 보장해 부는) ‘혼화면’에의 수렴 가능성에 따라, 여러 개[의 탈기관체]가 존재한다. 다른 곳에서와 마찬가지로 여기에서도 본질적인 것은 측정 단위들이다. 글쓰기를 양화하라. 한 권의 책이 말하는 바와 그것이 만들어진 방식 사이에는 차이가 없다. 따라서 책은 대상도 가지지 않는다. 배치인 한에서 그것은 단지 그 자체, 다른 탈기관체들과 맞물리면서, 다른 배치들과 접속되어 있을 뿐이다. 우리는 한 권의 책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기표인지 기의인지 묻지 않을 것이며, 이해해야 할 바가 무엇인지 결코 찾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그것이 무엇과 더불어 작동하는지, 무엇과 접속해 강도들을 이행하게 또는 이행하지 않게 만드는지, 어떤 다양체들 내에서 자체의 다양체를 도입하고 변신시키는지, 어떤 탈기관체들과 더불어 자체의 탈기관체를 [혼화면에로] 수렴하게 만드는지를 물을 것이다. 책은 바깥에 의해서만 그리고 바깥에서만 존재한다.” 책의 주체에 대한 비판에 이어 대상에 대한 비판이 이어진다. 책의 대상은 책이 그것을 재현/표상하고자 하는 대상이다. 이 경우 책은 대상의 거울이 된다. 그러나 책을 바깥에 입각해, 외부성에 입각해 이해할 때 책은 자체가 하나의 배치일 뿐이며 “다른 탈기관체들과 맞물리면서 다른 배치들과 접속되어 있을 뿐”이다. 그래서 들뢰즈와 가타리는 책이 무엇을 재현/표상했는가 라는 고전적인 물음을 파기한다.(이것은 책과 세계의 관계를 끊는 것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 오히려 책과 세계가 어떻게 내재적 지평에서 관계 맺고 있는가를 문제 삼으려 하는 것이다) 나아가 이들은 구조주의자들처럼 책의 기표나 기의를 묻고자 하지 않으며, 해석학자들처럼 그 책에 “숨겨져 있는 의미”가 무엇인지를 이해하고자 하지도 않는다. 이들이 묻는 것은 책이 무엇과 더불어 작동하는지, 어떤 새로운 강도들을 창출해내는지, 다른 다양체들과 접속해 어떤 다양체를 만들어 가는지, 다른 탈기관체와 접속해 어떻게 혼효면/혼화면에로 나아가는지 등이다. 그래서 중요한 것은 재현/표상도 기표화도 해석도 아니다. 글쓰기를 양화하는 것, 즉 관련되는 선들과 농도들을 측정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달리 말해, 배치/다양체로서의 책을 구성하는 선들과 농도들(강도들)을 측정하는 것(질적 측정으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새로운 선들과 농도들을 창조해내는 것이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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