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인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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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5    적정 속도의 파악이 참삶의 근본 댓글:  조회:1051  추천:0  2021-03-30
'인생의 후회 씨앗은 젊은 시절의 실속(失速)이다'라는 선조의 잠언이 나를 두고 하는 말 같다.최근 나이테 늘어가면서 과거날 내가 무작정 내달리며 저지른 실수나 과오들이 좌절과 실패를 자초하던 력사가 심심한 후회로 떠오르는데 이것이 바로 이 교시 정확성의 명증이 아닌가 본다.이젠 나의 존재가 인생의 가을이 되어 사회의 변두리에 와 있다고 의식하지 않을 수 없고 수시로 팽배하는 무력감도 주체하기 어려운데 그래도 젊은 시절의 그리움 때문일까.갈수록 이팔광음의 초상을 더듬어 보게된다.하여 내면 정신은 늘 생리 년령을 초월하여 새 세계를 바라보면서 삶에서 모아놓은 자아 성찰을 말하기 싶어진다.   우리는 일상생활에서 '후회없이 잘 살도록 해라!  때늦은 후회는 다 소용 없어! 없지른 물인데..'와 같은 충고를 자구 보고 듣게 된다.그러나 현실적으로 후회가 없는 인생이 있을 수 없고 설혹 있다해도 그 생활은 불완전하거나 무의미했다고 말하게 된다.철학적 시각에서 보면 노력의 과정에는 성취와 실추가 동반하게 되고 환락 역시 고난을 상반(相伴)하며  긍지와 후회도 늘 영형상수(影形相随)로 동행하는 것이다.사람의 생애는 결국 성공의 평야과 실패의 굴곡을 지나면서 희노애락을 맛보는 과정이 되게 된다.모든 사람이 거의 겪게 되는 이런 지난날은 로년이 되어서야 늘 뼈저린 각성으로 되고 나이가 오를수록 더욱 감회로워 지고 있는 것이 일반 법칙이 되고 있다.이 위인은 최근부터 늘 과거날의 회한이 후대나 타인의 질곡을 풀어가는 량약으로 쓰이여 긍정적 에너지로 남아야 한다는 바람도 간절해 지고 있다.더우기 후세인들의 인생 패착을 방지하는 백신으로 작용하기 바라는 속마음을 떨칠 수 없다.   현대 사회의 관념 부산물의 하나가  ‘속도 숭배’이다.목적의 달성을 위해 너나없이 속도에 가속을 붙이며 달리려는 것이 오늘 세태가 아닌가 본다.결과 남들보다 앞서가기 위해서라면 필수적 과정을 무시하며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건너뛰기식 맹속 전진을 시도하는 것이다.살아가면서 속도가 절대 필요한 것이지만 그 전진은 좌우전후와 조화되고 앞길에 숨어있는 걸림돌이나 수시로 복재(伏在)하는 함정과 수렁을 에돌아갈 수 있어 한다.하여 목적을 달성하려면 협력자들과 후원자가 함께 하는 속도여야 하는 점과 수시로 멈추고 뒤를 돌아보는 시간도 가져야 한다.이토록 자기에게 조건에 알맞는 속도를 찾아내는 지혜와 변하는 상황에 민감하게 대응하는 슬기를 배워야 한다.무작정 나갔다 좌초하고 원점에 돌아온다면 이미 돌이킬수 없는 악과를 들쓰는 때인 것이다.   현대인들은 일반적으로 서둘러 살아야 한다고 확신하는 결과 최대의 힘으로 최고 속도로 달려야 한다는 것이 일반적인 고집이다. 이리하여 힘과 속도의 평형감각을 잃고 질주하는 데만 주의력을 쏟아붓게 된다.마라톤 선수가 스타트 초기에  아무리 힘내어 빠르게 뛰어도 각 단계의 력량 분배가 잘 안 된다면 나중에 기맥 부족으로 뒤에 떨어지며 결코 우승을 기대할 수 없다.승리를 위해서라면  자신에게 비축된 역량을 고루 나누어 발휘하는 조절이 필요한 것이다.자신의 힘 한계를 모르고 무턱대고 나갔다 나중에 주저앉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자기를 모르고 마구 짓달리는사람은 파멸의 함정을 앞에 두고 서슴없이 달리는 청맹과니와 다를 바 없다.   1912년 침몰한 호화 유람선 타이타닉호 비극의 가장 큰 원인은 과속 항해를 했기에 빙산을 돌연히 만났을 때 돌이킬 수 없었던 것이다.인생의 배를 몰고 갈 때 속도를 설정하기 이전에 방향을 잘 선택하고 전방을 예리하게 주시해야 한다.인생의 행불행은 결국 방향과 목적의 성취에 있는 것이므로 일하는 속도의 느림과 빠름을 잘 핸들링하면서 나가는 방향이 바로 잡혔는가 수시로 파악해야 한다.속도를 낸답시고 방향을 잃고 미로에 들어간다면  삽시 사이에 인생을 말아먹는다는 사들을 잘 알아두어야  한다.특히 금전만능의 세속에 물젖어 정의와 공공리익을 도외시하고 사회 륜리를 무시하는 속도 문란은 헛된 인생을 자초하는 기폭제가 되고 있다는 점 명기할 바이다.   빠른 것이 늦은 것을 집어삼키는 사활적 경쟁은 오늘도 여전히 속도전을 불러일으키는 주 원인이 되고 있다.이리하여 모든 선의와 노력을 쏟아 붇고도 요절되거나 중간 랑패를 보는 수많은 사례들은 경종으로 울려오고 있다.그러나 부피의 크기, 힘의 대소나 속도의 쾌만에 의하여 성패가 결정되는 시대는 지나갔다.바야흐로 도래하는 지능화시대에서는 자신만의 적정 속도를 파악하고 전진의 방향타를 똑바로 잡고 있어야 성공의 기쁨과 행복의 진미를 만끽할 수 있다. (끝) 2021-03-25 연변일보
74    칩거(蛰居) 중의 철학 사고 댓글:  조회:2134  추천:0  2020-03-20
 금시초문인 신종코로나 바이러스가 무가내로 덮쳐들어 올해 구정 이후는 그냥 공황과 미망 속 생활이 련속이다.원래 이 음력설은 고향의 맛집들을 찾아 백흘불염(百吃不厌)의 전통식을 만끽하며 즐기려 작심하였는데 지독한 바이러스의  '위협사격'에 기겁하여 집 안에 깊이 숨는 은둔의 나날을 보내는 것이다.바다에 가라앉은 난파선 같은 칩거 나날에 바이러스 후퇴를 막연이 기다리며 매일 한다는 첫 일과가 인민일보 공식계정에 발표되는 역병 동태를 탐문하는 것이다.두문불출하면서 육신의 생명 유지가 절박하여 먹거리를 장만하려 시장을 나가도 사람들 서로가 흘깃거리며 거리를 두려고 애쓰는 조심한 태도와 수상한 표정을 보기가 민망하여 되도록 외출을 자제하며 되풀이 순환이 하루하루의 삶이었다.문밖에 나서면 온역 속의 대인관계에서 나타나는  신기한 반응 양식도 생생하게 경험하게 되는 것이다.어쩔 수 없이 지구촌이란 땅떵이에서 동정식(同鼎食)해야 할 인간은 무슨 마음 자세를 가지고 어떠한 방식으로 살아야 하는가는 난해한 과제도 생각해 보게 되었다.    동면 동물처럼 집에 박혀 있다 밖에 나가면 나서면 마스크 너머로  하는 들숨날숨 호흡 동작이 무척 버거웠고  어디서 무엇이 덥치지 않느냐는 불안감도 도저히 떨칠 수 없었다.요즘은  여러 지역마다 도시봉쇄,가택격리,수용치료가 주종으로 된  초강력 조치로 대응한 결과 종횡무진으로 휩쓸고 다니는 바이러스가 숨을 죽여가고 있다.따라서 감염자들의 치유가 가파른 상승 곡선을 타고 있으며 세간의 부산한 분위기가 수습되는 단계에 들어섰고 대중 정서도 소강 상태로 돌아섰다. 그러나 우리나라가 진정세를 보이는 가운데 주변 나라들과 타 대륙에 이 바이러스가 확산되여 누그러들던 세간 민심이 다시 탕개를 조이고 있다.하여 우리 나라는 내부 확산과 전역을 벌리는 동시에 역류입을 막는 전선을 확대하고 외부 감염자들을 대처하는 진지를 구축해야 한다.가장 보귀한 생명을 겁탈당하는 재앙을 앞두고 각자도생으로 자기방어에 나서고 외국인이 우리를 기피하며 우리가 외국인을 금기시하는 생물적 자위본능을 잘잘못이라 말한다면 자연법칙을 떠나는 과잉 반응이라 봐야 마땅하다.인간의 정확한 자세라면 역병의 재난 앞에서 시비곡직의 옥신각신을 삼가하고 서로간 량해,협력,소통의 너그러운 정신으로 서로간 상호지원하고 자타간 절장보단(截长补短)을 해야 하는 것이다.정감도 적아도 국경도 불문하는 잔학한 미생물은 우리 모두에 대하여 동시  '무차별 폭격'을 들이대기 때문이다. 모든 나라들과 세상 만민은 나와 내나라 구출에 나서는 동시에 모든 타인과 손잡고 협동작전을 전개하는 통합시스템을 형성하는 것이 유일한 바이러스 퇴치의 만전지책(万全之策)이다.내 나라에 잠입한 바이러스 소멸로 방역전이 끝날 수 없다는 이것이 인류에게  보내는 강력한 메시지가 아닌가 본다.   불시에 엄습하여 극성을 부리는 바이러스 시달림을 겪으며 인간 본성의 명암이 적라라하게 드러났다.물질지상주의가 활보하고 내가 잘 살면 그만이라는 물욕 제일이 압승하는 세태지만  나라에 재난이 덮치고 공포가 휩쓸자 수많은 기업가들과 자선인들 그리고 사회 책임을 건뜻 감수하려는 솔선분자들이 백천만억을 단위로한 거금을 재해 구조에 기부하여 인민들에게 새 삶의 희망을 가져다 준다.수천만의 의무 일군들은 생사를 도외시하고 역병의 최전선에 달려가 감염자 구출에 나서며 열혈 육신으로 생명 방어의 금성철벽을 쌓았다.그러나 수많은 영재들이 바이러스의 무자비한 공격에 격중되어 보귀한 생명의 끊을 놓아버렸다.이들의 폭발적인 헌신 정신은 바이러스를 절대 우세로 제압하면서  중국과 세계인들을 경악시켰다.이것이 바로 인류가 지구에 정착하며 살아올 수 있었던 불가항력의 긍정적 에너지일 것이다.이 비장한 현상은 인간의 령혼 심처에는 얼마나 거대한 선량의 힘이 존재하는가를 과시하였다.그러나 만민이 바이러스와의 전쟁을 벌이고 숱한 고귀한 생령이 생명 구출 작전의 마당에서 이슬로 사라지는 와중에 황급한 정서과 급급한 수요를 틈타 악덕 장사로 폭리를 취하는 얍삽한 간새군들이 나부댄다.자기 욕구만을 주장하며 타인의 공공질서를 헤집는 덜떨어진 불량자들도 꿈틀거렸다. 그리고 신성한 공직에서 기여할 대신 태만을 부리는 유효함량 미달자들이 눈에 띄이어 사람들은 눈을 흘겼다.거국적인 막대한 노력에 엇박자를 쳐대는 이런 추태를 보면서 재난은 인성의 미추선악 진면모를 말끔이 비춰내는 조요경이 아닐가 생각했다.어떠한 재앙이 들이닥쳐도 선두주자의 우수한 정신은 고양하고 조류를 거스르는 불합격자들에게 낯박살을 주어야 하는 것이다. 공덕 수립과 부정 징계의 강력 시스템은 영원한 필요한 사회적 장치가 아닐가 본다.   바이러스 질풍은 인간 사회에 세계화의 진정한 의미를 명시해 주고 있다.전 세계 주요 제조기업들이  중국에서 생산한 부품을 자국으로 수입해 조립하는 공급망을 형성하였지만 금번 역풍을 맞으며 중국 내 납품 공장이 멈추면서 글로벌 공급망이 엉망이 되었고 그 련쇄 파장이 세계로 향해 퍼지고 있다.바이러스 확산으로 시장이 불안하고 미래가 암울한데다 협력의 틀에서 움직이던 수많은 기업들이 멈출 수 밖에 없는 어처구니를 감수해야 하는 것이다.이 위기를 타개하는 방법은  신뢰를 바탕으로 한 국제적 협력이 지속적으로 살아남아야 하는 것이다.향후를 살아가기 위하여 글로벌 경제, 글로벌 협력, 글로벌 문화에 적응하는 이것은 필요성이 아니라 필수성이 되고 있다는 현실이다.비록 자기 나라나 민족의 정체성에 기반한 분쟁과 충돌이 가시화되는 듯하지만 지구촌에서 나라와 민족을 가르는 물리적 장벽이 점차 허물어지고 있고 교류와 상호보완이 활발해지는 추세는 더욱 거세지고 있다. 더불어 무역 장애의 완화와 국경을 초월한 기업 경영이 활발해지고 세계가 하나의 시장으로 단일화되는 의존 관계가 날로 심화되고 있다.현재 바이러스와의 전역은 인류가 내 나라 혹은 내 리익이라는 협소한 리기적 범위에서 벗어나 전체가 소속된 공동한 안전망을 구축해야 한다는 경고음을 날카롭게 울려주고 있다.혼자만의 삶이 있을 수 없는 인간은 일치한 보조로 질병의 진공을 막아야 세계화 구조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것이다.아니라면 나의 재앙이 타인의 재앙으로 번지고 타인의 재앙이 나의 재난으로 반전할 수 있기 때문이다.대방의 존재가 바로 내 존재의 전제로 된다는 암묵적 원리가 작용하기 때문이다..  바이러스 공격의 혼돈 속에서 우리는 진정한 애국주의가 무엇인가 하는 인식을 심화시켰다.애국은 한 국가 국민이 자연 발생적으로 가지게 되는 군체 정감으로서 민족 자존심, 민족 자신심과 민족 리익의 극대화로 표현된다.이 본능 정신은 자국을 발전시키는 강대한 원동력이 되고 있다.그러나 애국 정감이 비리성적 민족주의와 민족배타주의로 표현되는 경우가 허다한 바 이런 애국은 나라 리익이라는 목적을 리탈하여 오국(误国) 의 결과를 가져오게 된다.그러므로 애국 정신을 수립하는 동시에 타민족에 대한 존중과 인류애 정신을 동반시켜야 한다. 특히 배타적 반외 정감은 절대 자제해야 하는바 이런 막연한 애국심을 대중 속에 심어놓는다면 발전이라는 력사 조류를 거스르게 된다. 이 세계의 누구도 국가간의 윈윈(双赢) 합의와 서로간 우호의 정감을 배양하는 데 력점을 두지 않는다면 발전을 운운할 수 없고 도리어 퇴보를 초래하게 된다.정당한 민족 리익과 정체성을 고취해야 하지만 타국의 리익과 문화를 인정하는 공존의 방침을 견지해야 하는 것이다.지속적으로 인민의 물질 문화 생활을 수요를 만족시키려면 필요한 물자의 수입,선진적 과학기술의 도입,외국인 투자 유치, 외국인재유치 등의 내향적 세계화를 발전시키는 동시에 해외 수출,자본의 해외 진출,인적 자원의 해외 이주 등 외향적 세계화를 견지하고 상시화해야만 한다.위하여 외국인과 외국기업이 가장 정착하기 싶어하는 나라가 되어 세계 환대를 받을 수 있도록 처사하는 것이 진정한 애국이 되는 것이다.또 이래야만 우리 자신이 세계의 환영을 받는 것이다.진정한 애국이란 타자를 배척하는 플랫홈에서 실현될 수 없는바 애타(爱他)가 애기(爱己)라는 철학적 의미는 곰곰이 음미해도 모자람이 없다.이번 바이러스와의 싸움에서 나타나는 여러나라들 사이의 우호 협력과 상호지원의 장면을 지켜보며 '사랑도 엎음갚음'이란 리치를 명기해야 하고 하나의 엄격한 신조로 남겨야 한다고 생각했다.  슈퍼바이러스의 진공으로 세계가 난측의 혼돈 속에  빠져들고 인류는 생존을 위한 대싸움을 지속하고 있다.대개 16년 전 우리는 사스와 전쟁을 치른 침중한 교훈을 가지고 있다.당시 울려진 즉 바이러스 앞에서 인간의 힘이 얼마나 창백하고 힘겨웠는가 하는 경종이 오늘의 바이러스 전장에서 또 굉음으로 재생하여 울리고 있다.또 이러한 재난의 가능성은 꼭 다시 나타날 현실성으로 우리앞에 부각되고 있으며 인류는 늘 준비의 태세를 갖춰야 한다고 우리에게 암시하고 있다.재난의 교훈을 흡수하지 못하고 아픔의 망각으로만 넘어간다면 다음의 재난은 더 큰 비극은 되풀이 시킬 수 있다. 인류는 다양한 재난을 무난히 뛰어넘기 위하여 인간애,세계화 그리고 관용과 포용력이 충만된 개방적 애국주의 에너지를 불가항력의 세력으로 키워가야 한다. (끝) 3월 12일 연변일보
73    도시 개발과 력사 보존의 사이에서 댓글:  조회:2256  추천:2  2020-01-08
일전 고향에 갔다가 연변 력사에 의미가 짙은 유적에서 기념 사진을 남기려는 요량으로 원 연변조선족자치주 정부 청사를 찾았다.그런데 유감천만하게도 맘속에 애장(爱藏)했던 건물은 언녕 철거되고 그 자리에 엄엄할 정도로 으리으리한 연길시 정부 청사가 우뚝 솟은 것이다.고향 수부의 발전을 표방하는 공공건물을 바라보며 사회의 급속한 발전 변화라는 감동이 앞서지만 고향의 극히 중요한 사회 전환의 현장이었고 연변 발자취의 새 장을 표징하는 력사부호가 운산무소(云散雾消)같이 사라졌다는 아쉬움과 유감을 던질 수 없었다.     이 귀중한 건축물을 철거하고 새 구조물로 대체하면서 아마 왈가왈부의 시시비비가 수없이 오갔을 것이고 최후의 취사선택 결정을 내리면서 뼈아프게 심난한 과정도 있었을 것으로 짐작이 간다.그러나 연변조선족자치주 력사의 원천지었고 연변 발전의 지휘봉을 휘두르며 중차대한 결책을 수없이 내린 책원지었고 우리 민족 자치주의 참신한 기점에 되는 옛터라는 점을 감안한다면 자연 부식으로 인한 붕괴나 불가항력적 안전 위험이나 사세부득이(事势不得已)한 원인이 아니라면 어떠한 이유를 불문하고 보류하고 보존해야 될 것이 아닌가! 애석한 마음이 물결처럼 일어났다.물론 지역의 개발과 발전을 위하여 도시 건물에 대하여 끊임없는 존페신축(存废新筑)이 진행될 것은 불가피할 것이나 현대 도시의 건설에서 지역적,력사적,인문적 특성을 살려야만 비로소 문명사회의 수요에 부합되고 오직 이래야만 그 건설이 비로소 옳바르고 참된 발전이란 철칙을 명기해야 할 것이다.오직 이러한 개발만이 사회발전의 수요와 법칙에 부응하는 긍정적인 변화인 것이다.이런 견지에서 볼 때 력사 문화를 완벽히 보호하고 민족 특색을 살려야만 연변을 개혁개방의 튼튼한 전초기지와 세계화 교류의 생동활발한 지역으로 조성한다는 취지에 부합되는 것이다.   력사 문화재는 한 민족의 발전을 증명하는 문화 담체(担体)이고 그 민족문화와 민족정신의 정수를 육성하는 배양기(培养基)로서 시대의 흐름에 따라 그 가치는 가파르게 상승하는 오늘이다.한개 민족의 발자취와 령혼이 슴배인 유물에 대하여 우리는 엄격한 법률에 기초하여 행정적 민간적 등 수단으로 다층차 다차원적인 보호 우선의 전략을 실시해야 하는 것이다.특히 200년의 짧디짧은 조선족 력사라는 현실을 보면 보호의 절박성이 더 매섭게 제기되여야 한다.우리는 중화민족 수림 속의 조선족 문명이라는 차원에서 기존의 력사 유물을 최대한으로 보호하고 후대에게 전승해야 한다.오늘날 조선족 문화가 중국과 세계 문명의 바다에서 무게가 날로 커지고 그 발전의 필요성이 지속적으로 증대하는 점을 본다면 우리 민족문화의 보호는 세계 문명에 대한 기여로 봐야 한다.이리하여 력사가 짧고 실존량이 적은 이 문화 자원을 민족사회의 물질문명과 정신문명을 추진하는 동력원으로 만들어가야 하는 것이다.   력사 유산에 대한 보호 정도는 그 사회의 발전 수준을 반영하는 것이므로 단순한 경제 목적을 위하여 력사 유적을 분별없이 제거하였다면 이것은  발전이 아니라 발전에 대한 역행이거나 심지어 퇴보였다는 교훈은 심각히 받아들여야 할 바이다.즉 개발에는 력사와 문화 보호가 시종 관통되어야 하는 것이다.오늘 조선족사회가 인구의 격감,공동체의 해체,문화의 쇠락,교육의 위축이란 심각한 위기를 맞이하고 있을 때 문화재 보호는 전례없이 절박해 지고 있다.오늘의 이 터전은 우리의 것만이 아니고 차세대에게 넘어가야 할 유산이기 때문이다.현 상황에서 보호 우선의 원칙이 무력화 된다면 원래 희소한 문화 자원이 잊혀진 기억과 어느 책더미의 기록으로만 남게 되는 것이다.   력사 유산은 지역의 이미지를 급속히 높여주어 결국 경제 발전에 거대한 추동 작용을 하게 된다.문화 자원을 홀대하는 문화 빈곤의 자체는 사회 경제 발전의 상당한 제한적 요소로 작용하는 것이다.우리는 오늘의 력사 유산은 차세대의 지속적인 발전을 위한 사회적 화폭이고 민족의 미래 청사진을 실현하는 기반이 되기도 한다.그러므로 문화재 보호를 외면하는 경제 개발은 결국 인간의 기본 수요를 리탈하는 것이므로 진정한 문명 발전의 목표와 이배되는 것이다.문화유산의 가치는 무한량이고 그 가치의 증식도 무한대이다.그러므로 민족의 장원한 발전을 위하여 력사 유적들을 눈동자 같이 지켜가야 한다.   문화 유산은 파괴되면 돌이킬 수 없는 비가역적 특성을 가진다.그러므로 개발의 정당성을 들먹이며 불도저를 들이밀기 직전까지 나의 행위가 력사와 후대에 어떤 손실을 남기지 않는가 고민해야 한다.우리 고향민들은 자기 유적의 보호가 민족샇회 발전의 중요한 부분이라는 인식을 불변칙으로 만들어야 한다.현재 고향에서 고고학 연구,박물관 및 기념관 건립,고건축과 력사유적의 보호 사업에서 끊임없는 진보를 이룩한다는 정보가 부단히 입수되고 있다.력사 문화 자원에 대해서 조사,발굴,연구,보호 등 일체화 방침을 실시하여 새 성과를 이룩한다는 소식도 끊임없이 전해 온다.향후에도 상황의 여하를 불구하고 시대의 전환과 발전을 상징하는 가동적 혹은 불가동적 그리고 유형적 혹은 무형적 유산에 대하여 보호한다는 철칙을 무조건 무턱대고 앞세워야 한다고 주장해도 과분하지 않다.   우리 민족은 기존의 유물을 보호하는 동시에 새로운 유산들을 끊임없이 발굴하고 엄밀한 보호를 진행하면서 질적 및 양적 쌍방향 확충을 도모해야 한다.이리하여 우리 고향이 문화부자(文化富者)의 반렬에 가입하려 한다면   ‘생각만 꿀떡’인 비망(非望)일가. (끝)   연변일보 2020-01-02
72    형님전 상서 댓글:  조회:2151  추천:0  2019-11-14
대련 김인섭 2019-10-26 형님,이번 한가위를 부모님 선산에서 보내며 보고 느낀 바를 적어 올리겠습니다..   그날 오전 부모님들께 제사상을 올리면서 작년 이맘때 영생의 길에 오르신 어머니를 아버지 유택에 합장하고 형님과 나란히 엎드렸던 기억이 새삼스럽습니다.나이가 말미암인가요 어쩐지 지난날 굶주리며 헐벗어 배고프며 춥던 시절의 모진 사연들이 자꾸 눈앞에 떠오르며 우울해 지고 있습니다.부모님들이 우리 가족을 이끌고 보릿고개의 엉키고엉킨 가시덤불을 헤가르며 지어낸 만가지 고생담들이 가슴에서 교차되며 퍼그나 먹먹해 지었습니다.하산하는 산길에서 허허로운 벌판에 외홀로 서있다는 심란한 기분을 도저히 삭일 수도 없었습니다.   그날 제일 가슴을 저릿하게 하는 꼴불견이었다면 주위 선산에 온 제꾼 거의가 60대 혹은 70대인데 벌초객 중 젊은이의 모습은 눈을 씻어도 보이지 않았다는 것입니다.그러나 간혹 로구(老躯)를 이끌고 불편함에도 불구하고 어렵사리 올라오신 존장(尊长)들과 갈 길 바쁘신 로인들이 가을 옷자락을 여미며 조상 영전에 엎드린 모습은 보기에 숙연했습니다.각자가 당신의 예정을 짐작하는 듯 숙배(肃拜)를 올리는 자태에 파란이 많았던 지난 세월의 세례가 슴배었다고 류추해보니 무척 가긍해 보이기도 하였습니다.     형님,지금 문중벌초(门中伐草)의 분위기가 옛날과 완연히 달라졌습니다.화장이 법제화 된 현실에서 더 이상의 분묘를 들일 장소가 없다는 사실은 말말고 유구한 나날을 두고 전해오던 장묘의례(葬墓儀禮)가 사라지지 않는가는 우려를 떨칠 수 없었습니다.제사 흔적이 보이지 않는 묘소가 수두룩하고 가토 벌초를 했다해야 지난 시절과 대비가 안되는데 버려진 묘자리도 숱해였습니다.지난날 이랬다면 곱빼기로 욕을 얻어먹었을 행실이 오늘은 눈앞에 버젓이 펴져서 드러나 있습니다.오래지 않아 고향 산역을 주선하고 산소를 돌볼 후손이 씨가 말라가지 않겠는가 걱정했습니다.물질주의가 팽창하는 오늘 젊은이들에게 민족의 전통과 문화 그리고 핏줄을 근거로 사회를 전승시키고 조상과 고향을 습득시키기가 쉽지않을 같기만 합니다.뒤이어 들이닥칠 전환의 소용돌이는 우리 몫이 될 것만 같아서 당혹하기만 합니다.사뢰기 어려운 말씀입니다만 멀잖아 성묘의 발길마저 끊어질 고향의 선영들을 도대체 어찌 해야 할가요!?   이웃의 젯군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중 옛날 번성하던 민족 촌락의 대부분에는 아기 울음소리에 이어 초등학생마저 사라진 지 오래인데 절반도 남지않은 가옥들엔 로년 어른들 아니면 당신을 숙명에 맏겨버린채 최후 행사만을 기다리는 외짝들이 거의 전부라는 이야기입니다.지난날 우리 시대에는 경조사 행사 때 각지의 피붙이들이 모여앉아 서로 안부를 전해가며 뉴대를 맺아가던 미풍은 오늘 젊은이들에게는 생업의 부담으로만 느껴지는 모양입니다.혹시 참여한다 해도 그들에겐 강제로 불려나온 부역 이상의 의미는 없다는 것입니다.세상살이가 치열해진 탓이라 체면차리기조차 어렵다는 세월의 개탄이기도 합니다만 세태가 그러하니 그들을 나쁘다고 일갈(一喝)할 일만이 결코 아닌 같습니다.    더욱 심각한 것은 출산 문제입니다.지금 넘들은 기껏해야 아들 딸 구별없이 하나만 생산하는데 자식이 둘이면 치다꺼리로 되어 자신의 행복을 희생한다는 리유입니다.웰빙이라는 시대의 화두 앞에서  물질 풍요를 자기들만 누리면 된다고 오도된 잘살기 폐해입니다.대를 이을 아들이 있어 행복하거나 없어서 섭섭하다는 생각이 꼬물만치도 없다는 이것입니다.이렇게 몇 세대가 내려간다면 어떤 집안은 절손(絶孫)의 화를 면할 수 있을가요.제 핏줄을 이어가며 건사한다는 가장 기본적 본능이 사라지고 있는 엄중한 현실입니다.이제는 친족들의 혈통 관리가 어려워지고 고향 마을도 선산과 함께 사라질 것은 명약관화입니다..   이제는 자식이 어미나 아비의 성에서 골라 달아도 문제시 되지않는 세월이 되었습니다.자식이 제 어미의 성을 따를 수도 있게 된다 합니다.김씨 피붙이가 리씨의 혈육으로 둔갑하고 내 자손이 생면부지 남의 후손으로 매김되기도 하는 것이지요. 어느새 사촌부터 가파로운 망각 곡선을 타는 오늘인데 형제 자매의 성이 이렇게 갈라진다면 사촌끼리 혼인을 한들 하등의 거리낌이 없는 세상이 아니 될가요!   형님,이제는 지나간 불효의 변명이나 유아적인 슬픔을 거듭하지 않겠습니다.세태 조류인 양 밀려드는 심란한 과제들이 하나같이 벅찬 탓입니다.불평을 부리기엔 너무도 힘겹고 다급합니다.적지 않은 나이를 먹고 이제 남은 시간마저 길지 않다는 각성 때문입니다.유사이래 전례없는 풍요를 누린다고 너나없이 호언하는데 밀어닥친 시대의 소용돌이가 원망스럽습니다.우리 등 뒤로 겹쳐지는 고향마을의 상실과 문화전통이 퇴락하는 정경이 흡사 시대의 종막인 양 비감스러운 것입니다. 하필 이 비운이 왜 우리 인생에 드리워 질가요?아닌게 아니라 원망스럽습니다.   형님,무심코 간지를 짚어 보니 나도 예순갑자를 한 바퀴 돌고도 일곱 고개를 넘었다는 각성에 당혹스럽지 않을 수 없고 쌓여가는 나이 더미를 느끼지 않을 수도 없습니다.시계 시보판처럼 명백한 인생 단계의 확정 앞에서 아연치 않을 수가 없습니다.사실이 이러히 엄연하니 선배들과 부모님들이 지성으로 꾸려온 우리 민족사회가 우리의 손에서 거덜이 나지 않는가는 자책에 민망하고 무색해 지고 있습니다.   형님 늘 하던 버릇대로 수다가 도를 넘는 같습니다.이 생각 저 생각이 갈피없이 떠올라 되는대로 적었으니 괘념하지 마십시오.세월이 가는 대로 눈치나 보며 살다 보면 새로운 무엇이 나타나고 민족도 새 정착과 부흥을 이루겠지요.우리가 이러쿵저러쿵해도 력사는 그냥 자기 맥을 이어 가겠지요. 남의 뒤를 따르다 보면 새로운 질서야 생겨나지 않겠습니까?   하오나 형님,고향마을의 지난날들이 불현듯 그립습니다.그 공동체 속에서 동잇땀을 흘리던 나날의 어느 것이 그립지 않은 것 없습니다.더구나 농사의 계절마다와 설명절이면 동네 남녀로소가 모여 즐기었고 동네의 관혼상제 때면 좌상 어른들의 주선하에 제 풍속과 전통을 정연히 뽐내던 그 때가 바짝 그리워 지고 있습니다. (끝)
71    민족 발전의 뉴노멀(新常态) 시대 댓글:  조회:2253  추천:0  2019-03-12
지난해 조선반도의 남북 정상이 수차례 정상 회담을 가지면서 조선반도에는 학수고대하던 화해 무드가 조성되었다. 거기에 가세하여 여러 관련 당사국들의 외교적 노력이 활발해 지고 세계적 범위의 뜨거운 성원이 고조되면서 작디 작은 조선반도는 줄곧 세인의 주목을 세차게 끌고 있으며 반도 남북의 인민들은 물론 우리 민족사회도 그 평화 번영에 대한 갈망으로 설레이고 있다.   조선반도에서 불신 시대에 종지부를 찍고 민족 대화합의 력사드라마가 연출된다면 이것은 아세아 지역의 정치와 경제, 외교, 문화 등 모든 면에서 새로운 국제 판도가 구축되고 그의 모든 적극적 변화는 틀림없이 전세계에 상당한 파급효과를 일으킬 것이다.동시에 중국의 최대 조선족 집거지인 연변은 자기의 특수한 지정학적 위치에 힘입어 우리나라를 포함한 동북아세아의 중요한 전략 거점으로 부상한다는 판단이 내려지게 된다.특히 중국과 륙지로 잇닿아있고 력사적으로 깊은 우호 뉴대를 가진 반도는 전례없던 발전 시기에 진입하게 될 것이다.그렇다면 중국의 개혁개방과 국제화 교류의 시련 속에서 경제,문화와 국제적 기반을 닦아온 조선족은 이 새 마당에서 가장 활약적인 군체로 될 수 밖에 없고 경쟁 상대가 없는 사회 집단으로 부상하게 될 것이다.이리하여 조선족 사회는 중국과 남북의 우호 교류를 추진하고 남북 교류에 기여해야 하는 뉴노멀(新常态) 시대를 맞아오게 되는 것이다.   조선족은 조선반도와 문화 동질성을 구비한 동일 민족으로서 반도의 분단 조건에서도 북조선, 한국과 동시에 우호적 교류를 진행하여 왔고 다층차적 우호 뉴대를 건립하였다는 장점이 있을 뿐만 아니라 조선반도 문화에 사정이 밝고 서로 간의 이질성을 조화롭게 다루어 갈 인재들이 수많이 육성되어 있다.때문에 만약 조선반도에 참신한 국제적 환경이 마련된다면 이것은 민족의 새 번영을 이룩하는 인류사 상에서도 보기 드문 민족의 ‘생태인프라’로 전화될 것이다.하여 민족사회 무대는 가배로 확장되고 민족사회 가치도 배가로 급등할 것은 의심할 바 없다.   조선족이 나라 발전과 중한 우호교류를 추진하는 충실한 사회적 력량이며 국제화 조류에서도 선두주자라는 사실은 세인이 공인하는 사실이다.특히 조선족이 개혁개방 과정에서 루적한 경험은 부동한 체제와 제도하에서 발생되는 수많은 트러블을 풀어가고 서로 융화시키는 걸출한 지혜로 전화하기에도 충분하다.바로 이러한 조선족이기에 중국과 조선반도 그리고 조선, 한국 사이에서 상호 간의 교류를 추진할 수 있는 최상의 자격요건을 갖추었다면 우리 민족이라는 정평이 있는 것이다.   반도의 평화가 가시화되는 정세에 대비하여 우리는 새 관념을 수립하고 새로운 방식으로 다가오는 찬란한 미래에 접근해야 한다.현재 우리 나라와 조선반도 간의 우호관계가 지속적으로 발전하는 추세를 관찰해 보고 민족사회의 현유 조건을 고려한다면 우리는 아래 세개 방면의 중대한 사업에 착안해야 합니다.   뉴노멀 시대에 민족사회 작용을 극대화하기 위하여 새 정세의 수요에 부합되는 방침을 연구하고 정책화하는 준비를 진행해야 한다.이것은 고도의 원칙성, 전문성과 과학성을 가진 테마로서 이런 제도화 조치들은 대중의 지혜를 결집시킨다는 집사광익(集思广益)의 군중로선에 따라 나라의 방침과 일치되는 실효적인 실천 방안으로 승화되어야 한다.특히 조선반도가 아직 분단 상태에 있는 상황에서 여러가지 변화에 대처하는 정부 차원의 준비를 갖추는 동시에 대중을 나라 로선과 일치되는 정확한 방향으로 유도해야 하는 것이다.이리하여 우리는 시종 나라와 반도의 우호를 추진하고 내지는 반도의 번영에 기여하는 교두보로 되어야 한다는 사명감을 사회적 측면에서 대중 속에 수립시켜야 한다.   민족사회가 경제적이나 외형적으로 더없이 거창하더라도 만약 튼튼한 문화의 뒷받침이 없다면 내실과 안정이 구비된 지속 발전은 도저히 불가능하다.그러므로 우리는 민족문화의 본연 가치를 살리고 문화 전승과 교육에 물심량면의 자원을 대량 투입해야 한다.문화로 민족사회 발전의 활로를 넓혀가고 다져가는 것은 그 존속과 발전을 이룩하는 근본적 보장이다.    우리 민족이 다양한 분야에서 발전의 결실을 얻을 수 있었던 극히 중요한 요인이라면 타민족과 단결하고 타문화를 포용하였기 때문이였습니다.민족사회 공동체를 새롭게 건설하고 민족문화를 창조적으로 발전시키는 중대한 과제를 풀어감에 있어서 광범한 사회적 공조와 공감을 끌어내지 못한다면 그 목표의 실현은 전혀 불가능하다.타민족과 단결하고 부동한 문화를 적극적으로 수용하는 것은 민족사회 발전의 결정적인 외부환경이고 뉴노멀 시대 민족 발전의  우선적인 외부 조건임을 명심해야 한다.   오는 27일 조미 정상이 새로운 만남을 약속하였다.이 메시지는 요즘 글로벌적 빅뉴스로 부상하고 있다.그러나 불신의 뿌리가 깊고 쌓여진 난제들이 산적하고 있어 조선반도 평화 실현의 길에는 수많은 난항이 예상되고 있다.그러나 평화적 발전이라는 력사 변증법은 막을 막을 수 없을 것이고 화해,평화,협력,번영의 시대를 반드시 열어야 한다는 각측의 신념도 확고하게 일치하다.이러한 상황에서 회담의 결과가 어떠할 것인가는 예단은 버려두고 두 거물이 만난다는 그 자체는 평화의 분위기를 고조시키고 동토같이 견고하던 대립의 장벽을 허문다는 중요한 력사적 의의를 가지고 있다고 인식해야 한다.    ‘늦어도 황소걸음’으로 나가는 조선반도의 평화는 불원한 장래에 현실화될 것이다.이 터전에서 우리는 경제,문화,국제교류,민족교육의 뉴노멀 시대를 맞이하게 된다.우리는 숭고한 자긍심과 다부진 자세로 민족사회의 새로운 도약 시대를 대기해야 할 것이다. (끝)
70    여름날 관광의 여감 댓글:  조회:2316  추천:0  2018-07-27
천하절색도 늘 보면 볼멋을 잃는가 보다.이 위인에게는 무슨 기호가 없고 별다른 재주 솜씨도 없다보니 소일이라면 집구석 이것저것을 뒤적거리거나 쇼핑을 다니거나 혹은 술좌석에 알뜰히 참여하는 게 고작이다.이토록 ‘이랑이 고랑이 되고 고랑이 이랑이 되는’ 일상을 보내다 보면 걱정이란 털고 털어도 쌓이기만 하는 같다.하여 조용할 때면 늘 무념무상으로 유유자적한 힐링 순간을 만들려는 욕망이 치밀어오른다.오늘도 집에 같혀 무료감과 싸우다 주위 변화도 확인하고 도시 바람에 피폐해진 속뜰도 정리해보려 동네 구경에 훌쩍 나섰다.   이 동네는 경제적으로 나라의 일익을 차지하고 있으며 지리 요새라는 지정학적  요충지로서 전략적 무게도 과시하고 있다.하여 근대 력사에는 렬강들이 패권 쟁탈을 위하여 대판 혈투를 벌인 기록도 있다.특히 21세기에 진입하여 유엔에서는  ‘세계 베스트환경 500개 도시’ 하나로 지정하여 천혜의 국제급 관광도시로서 급부상시켰다.동네는 삼면이 황해와 발해에 둘러쌓이고 아열대의 습윤한 계절풍 기후에 속하여 겨울에 엄동이 없고 여름에 혹서가 없는 풍요로운 경승지이다.게다가 군산,바다,하늘과 파다한 지피식물들이 신비로운 천지조화를 이루면서 거창한 동양화 미경을 펼치기도 한다.고산준령과 잔산단록(残山短麓)이 주를 이룬 해변의 사이사이에는 수려한 해만과 물굽이들이 절묘하게 끼이며 절승경개를 연출하여 지리학자들 사이에는 유러시아대륙에서 가장 령적(灵的)인 반도 지형이라는 정평이 있다.    반도는 또한 중국 북방 생태의 핵심 벨트로서 해마다 세계 각지의 다수 생태지리학자들이 운집하여 고찰과 연구를 진행하고 그 자연경관과 생물다양성을 세상에 홍보하는데 그가 발산하는 복운(福运)은 지역 경제와 관광 발전을 힘차게 조력하고 있다.당지의 바다는 수질이 명결하며 온도가 적정하고 바다 연안은 지질이 비옥하여 부존하는 천연 해산물과 산야의 금수어충(禽兽鱼虫) 화초수목은 생태적 및 학술적 가치를 해외까지 빛내고 있다.세세만년의 년륜을 자랑하는 고목들은 주변의 동식물 세계와 완벽한 조화미를 이루는데 그것이 바다 수평선에 안받침되어 신적 숭배의 정감을 불러일으키면서 해마다 백만 단위의 관객들을 불러들여 억수의 감탄을 쏟게 한다.   그런데 차에 몸을 맡기고 머리에 각인된 옛풍경을 더듬으며 창밖을 넘어보니 세상이 변해도 크게 변했고 선변(善变)이 아닌 악변(恶变)이라는 전률같은 느낌이 뇌리를 스쳤다.몇해 전까지 산고수청을 자랑하던 산자락과 골짜기는 통조림 군단을 방불케하는 고층 아파트의 진렬장이 되어 버리고 말았다.그리고 부유층들이 부를 과시하는  별장들이 틈틈이 게실게실 널려있다.전민이 소유하고 향유해야 할 축복의 경관이 소수인의 락토로 전화되었다.인간의 산업문명이 자연에 가하는 적라라한 폭력 구조를 목도하게 되었고 눈앞의 리득과 소수인의 편안을 위하여 삶의 성지를 무참히 허무는 란폭성이 심중에 투영되었다.세인이 공유할 환경 가치가 소수인의 재운에 충당된다는 생각에 뒷맛이 씁쓸하였다.억겁의 세월에 조물주가 일군 자연지모와 자연식생이 겉치례 행정과 총산치강령과 거액축재를 위한 탐욕에 의해 사라졌다는 아쉬움도 맘 속에서 굽이쳤다.   속세에 헤아릴 수 없는 행운을 불러오던 복지가 부동산의 적이 되어 뭉개지고 메워지고 뒤짚이어 그럴듯한 꼴불견이다.이른바 도시건설과 발전론리라는 당위성을 추켜들고 조금의 가책도 없이 자행되는 자연 침해는 ‘황금알을 위하여 황금거위 배를 가르는’ 강도극이라 혹평해도 과분할 게 없다.금전만능의 눈바람에 거칠어진 심성의 려과없는 발로가 아닐 수 없다.   자연보호의 신성한 책임이 경제 론리 앞에서 무색해 진다면 나라의 미래는 암담해 진다.자연에는 인류의 역사, 문화와 민족정기 그리고 모든 생령들의 희망이 담겨있으니 환경보호 무한책임은 령도자의 금과옥조로 되고 불리행이나 침범하면 끝장을 보는 대전고압선(带电高压线)으로 정립되어야 할 것이다.지도자에게 ‘생태맹(生态盲)’ 질환이 있다면 즉시 개정해야 하고 아니면 즉시 퇴장해야 한다.이리하여 돈벌이에 넋을 잃고 눈앞의 수판알을 튕기면서 영원히 아름다워야 할 삶터를 짓밟는 패착을 막아야 한다.그리고 자연을 갉아 축재하려 얍삽한 머리를 굴리는 위인들이 혼뜨검을 당하는 법치 건립도 곱씹어 볼 일이다.   인구가 많은 것이 중국특색 중의 제일 특색이다.그렇다면 개발과 자연보호의 관계 처리에서 만인 공유의 자연공간,자연경관,자연생태가 공유재산으로 영존시켜야 함은 만사를 제친 우선 특색이 되어야 한다.이 자원이 소수인이 재부를 쌓는 호재로 일변했다면 누군가 침중한 대가를 치러야 한다.그 악사(恶事)를 꾸며낸 발안자(发案者)나 발기자에게 강펀치(重拳)를 날리는 엄단 조치가 적용한다면 무리일가.   “자연 파괴는 어머니를 죽이는 패륜이다”라고 했다.이 현시대 경구가 사는 터전의 경관과 생태를 보호하는 명약이 되기를 바란다. (끝) 2018-07-27 연변일보 게재  
69    봄날의 찬송가 댓글:  조회:2297  추천:0  2018-06-30
1.봄을 막는 겨울이 있더냐! 동장군(冬将军)의 횡포에 못이겨 오리털패딩을 꺼내 입으며 춘래불사춘(春来不似春)이라 투덜대다 막말도 튕겨나갔다.기온은 령상인데 체감온도는 한겨울을 방불케하는 것이다.겨울 추위도 볼일을 다 봤으면 북국에 유턴(回转)해야 마땅한데 어버리크게도 진을 치고 덮치는 훈풍과 힘을 겨룬다.   그러나 소나무는 청푸름색으로 탈을 바꾸고 꽃망울도 터치우는 절정으로 그냥 치닫고 있다.한풍이 풍세대작(风势大作)해도 피어나는 백화만발을 막을 길 없고 봄바람은 그냥 생욕이상(生欲异常)에 걸린 삼라만상에 소생의 힘을 넣는다.생물권 왕좌에 군림한 인간들은 자연의 순환을 넘겨보며 착지자세(着地姿势)를 부동자세로부터 비행자세로 바꾸고 시각을 요밀하게 조정하며 봄맞이를 하고 있다.   동면하던 생명과 숙침하던 꽃들은 늑장을 치는가 했는데 피기 시작하니 기세가 세차다.이 봄이 봄이냐 겨울이지!라 투정을 부리던 인간들도 돋아나는 생명의 합창에 태도가 의연해 졌고 추위에 찌프렸던 철학자의 얼굴도 쭉 펴이였다.    '뭇꽃이야 피고지고 봄철은 불고요, 구름이야 오고가고 뫼산은 무탄이라-花开花落春不顾,云去云来山无惮'.날씨가 춥던말든 자연의 봄철은 생령들의 오한을 치유하고 풍성한 봄나물 반찬을 세상에 선사하고 있다.   위대한 대지에 봄의 짜릿한 전율이  흐를 때 창생의 생명을 부활시킨 선단(仙丹)은 엄동의 눈꽃이 빚어낸 봄날 유즙 이외에 따로 없는 것이다.   2.봄을 가꾸는 농부들 으쓱한 바람이 분탕질 해도 온갖 생명은 깨어나 소생을 윽벼르고 있다.그러나 농사 준비에 분주한 농부의 꿈이야말로 봄꿈 중의 대몽이고 기몽(绮梦)일 것이다.이 어진 사람들의 농심을 확인하고 자연의 숭고한 섭리를 헤아리려 보니 이름 모를  만감이 교차되며 사색에 잠기게 된다.   불철주야로 땀을 쏟는 이들이 바로 인간 생명을 떠멘 장본인들이다.그러나 그들의 바람이란 지극히 간단하다.세월에 풍년이 들어 태평한 나날이 되고 밭작물이 세나게 팔리고 비싸게 팔리는 이것이다.간혹 신은(神恩)이 안 따르고 속세가 어수선하면 허리띠를 졸라매거나 한해 농사 나무아미타불이란 운명도 감내해야 한다.   올봄에는 우순풍조 길보와 음양화합의 호소식이 줄을 지으니 순직한 농군들은 올해는 알곡 뒤주가 꽉 차고 반찬 단지를 터질거라며 술렁거리다.혹시 무례한 불청객이 뛰어들어 야기를 부려도 륭숭한 봄나물 반찬으로 대접하면 끝이란다.   이 봄의 운세가 농부들께 돌에 꽃이 피는 재수을 하사한다 하니 속세가 선계(仙界)로 되는 천지조화가 아닌가 의심한다.   3.고향의 봄눈 입하를 지척에 두고 내 고향에 함박꽃눈이 내렸다.내려도 듬뿍 내리며 마력을 내뿜는 송이눈은 혁명연극의 서막을 맞이하는 서설(瑞雪)마냥  고향 산천에서 백설 세계를 연출하였다.백설의 참뜻을 밝혀보고자 위챗에 눈덩이를 담아 놓고 지켜보는 인간 모습이 더 가상했다.   거기다 봄비마저 보조연출을 펼치어 기후변천사에 기묘한 한 페지를 남긴다며 쑥덕거리는 사람도 있었다.흰 구름사이로 태양이 햇살을 쏟아놓으니 그 형체가 삽시로 녹아내렸다고  ‘봄눈 녹듯 녹다’는 관용어가 생겼다는 력사 전설도 있다.     봄눈이란,조물주가 갑자기 설점(雪点)을 만들어 수증기를 눈으로 변화시키는 것인데 그 용의는 공기 속 유해물을 정화시켜 생물계를 가호한다는 성념(圣念)이고 삽시에 녹여버리는 용단은 화초수목의 동해를 말려주는 용심처사라는 어설픈 설화도 있다니 정말인가 알아보기로 했다.   똑 같은 조물주의 창조물인 인간 세상에서도 란마같은 갈등이 술술 풀리고 적층(积层)같이 쌓인 앙금도 춘설같이 사라져야 한다.   4.수런거리는 봄 우수가 지났는데 수은주가 툭하면 빙점으로 떨어지다가 봄빛이 내려오면 령상으로 턱걸이 하듯 돌아온다.올해 초봄에는 재수불공(财数佛供)도 없었는데 다양한 복음이 인간의 갈망과 어우러지고 덕담노래들이 들여온다.인정이 오롯이 담긴 말자루가 열리더니 고개를 일시에 주억거리는 사람무리 모습도 가관이다.   봄날에 한서(寒暑) 변덕이 많으면 인간도 주춘증(注春症)이나 춘곤증 같은 봄앓이에 말려들고 알레르기 비염으로 콜록거리는 것 쯤은  대수할 게 없다.정신없이 살다 보면 내 몸에 둔감해지고 통증감각에 이상이 생기는 것도 대개 정상이다.일교차가 심하여 어디가 편찮고 여기가 말째다며 섣부른 판단을 내리는 것도 인간 세계의 일상사이다.이것이 바로 계절 변화의 통과의례인 것이다.   날씨가 이러저러해도 날짐승들은 저끼리 짝을 짓고 안식처를 마련하는 장관이 벌여진다.그들은 심술궂은 먹이사슬 적수들의 침략을 대피하여 나무 끝가지의 가장귀를 찾아 둥우리를 지어낸다.위태롭게 매달린 이 둥지는 인간의 눈에는 당장 곤두박질하여 망가질 루옥일 것이나 그들에게는 애정의 결실인 후대를 낳아 키우는  성전인 것이다.속세의 황금대궐과 눈금차도 없는 구중궁궐이다.   그들도 인간의 버들피리에 노래재담을 보내며 인간과 한결같은 래일을 그리고 있지 않는가.   5.을 열창하는 아이들. 요즘 ‘고향의 봄’을 열창하는 아이들이 이상하게 많아졌다.”나의 살던 고향은 꽃피는 산골...,그 속에서 놀던 때가 그립습니다’며 열망을 부르짖는다.이들이 바로 새날을 풍미할 후예들이고 미래를 주재할 황제주(皇帝株)들이다.바로 그들의 희망은 래일을 가늠하는 잣대요 도덕률인 것이다.   아직 설익은 그들의 모습에는 봄과 상통하는 순수 향기가 있다.기성세대는 새싹들의  '무균발아'를 위하여 모든 억제물질을 제거하고 봄씨앗의 봄부침부터 알차게 해나가야 한다.하여 춘심에 들뜬 이 귀염바치들에게 풍년 추수를 안겨주기 위해 소임을 다 해야 할 것이다.나의 혈육지신으로 그들에게 공방이 동시 가능한 난공불락 성채를 쌓아줘야 한다.   선배들은 평화산업을 일궈내고 의심병으로 고생하는 철학자의 고민을 풀어주고 보수가의 언땅같은 머리도 돌려놔야 한다.   평화운동으로 매일을 일관하여 그들이 봄물결을 타고 축복의 궁전에 입궁하도록 시대 길을 열어주자!   7.봄날에 맞춰본 부절(符节) 고대 왕실에서 사자나 장군을 파견할 때 금속이나 돌에다 서화를 그려놓고 절반을 끊어 주고 일후 신분을 확정하는 증명물로 사용하였다.이것이 부절인데 기원을 아는 사람이 아주 적다.   옛날 한 시골 가정에 쌍둥이가 있었는데 아버지는 나라 충정을 키워기 위하여 언필충신 행필성실(言必忠信,行必诚实)이란 일과를 부단경(不断经)으로 송문(诵文)하며 애지중지 키워왔다.그런데 어느 해 천신의 조화로 곡식이 타버리고 역신(疫神)이 덮쳐들어 백성들이 떼죽음을 당하는 처참한 재앙이 발생했다.쌍둥이 부모도 역병으로 세상과 하직하게 되었다.임종에 아버지는 두 아들을 두 집에 나누어 입양하도록하고 얇은 돌 조각을 절반으로 끊어 두 아이의 품에 넣어주면서 어느 때던 만나면 이 돌조각을 맞춰보고 형제 가부를 확인하라 유언하고 눈을 감았다.이것이 바로 부절의 유래이다.   그 후 수재,한재와 황충재가 멎지 않고 파벌 대립과 할거가 발생하며 고을이 조나라와 월나라로 분할되었고 입양된 두 쌍둥이도 두 나라에 갈라졌다.   각설하고,세월이 흘러 천성이 천재이고 충신인 쌍둥이는 각각 나라 임금으로 군림했다.그런데 어느 봄날 조왕 측에서 심기전환이 발생하여 피를 나눈 형제를 떠올리며 내 형제를 찾으라는 어명을 내리고 월나라에도 통보했다.소식을 들은 월왕은 즉시 말을 달려 찾아가  무릎을 맞대고 돌 조각을 맞춰보니 자기들은 일란성쌍생아였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어이없어했다는 눈물겨운 상봉이다.   이리하여 조나라 렬녀 춘향이와 월나라 효녀 심청이도 서로 만나 비화(悲话)로 밤을 새우며 흘린 눈물이 대한불갈(大旱不渴) 강을 이루어 가물은 사라지고 때를 맞춰 역신도 자취를 감춰 두 나라는 화합이 되고 인민은 행복했단다.   끝말. 봄을 이기는 겨울이 없고,꽃이 없는 봄이 없으며;춥다고 겨울인 게 아니고, 덥다고 봄인 게 아니며; 봄은 그저 봄일 뿐이다.봄의 평화는 오다가 막히면 에돌아오고,에돌아도 막히면 넘쳐서 오고, 넘쳐도 안되면 터드리고 오는 것이 만고불변의 세상 리치이다. 끝맺이를 하려니 맘속의 춘정을 채 쏟지 못하여 석연치 않다.만약 필력이 된다면 이 봄을 앞에 놓고 세상 최고의 산문을 써내여 해해년년 두둑한 저작권료도 받고 싶다. 2018-05-18 연변일보
68    문화지능 향상은 민족번영의 포석(布石) 댓글:  조회:2051  추천:1  2018-05-15
무심히 책장을 뒤적거리다 어느 기업의 인재공모 문안에 ‘문화지능이 높은 자’가 우선이란 조건이 명시되었는데 ‘최우선 참작’이라는 포인트까지 돌출시켜 눈길이 끌렸다.문화지능이란 술어는 말글에 아주 드물게 쓰이는 신조어인데 오늘 행간에 떠오르니 시대를 선도하는 어느 선각자의 발빠른 고급동작으로 랭철히 받아들였다. 문화지능이란 한 문화에 대하여 언어로부터 력사 연원과 특성까지 심각히 리해하고 그 세계의 사람들과 원활한 융화를 이뤄가는 능력을 가리킨다.세부적으로 말하면 다른 문화 배경을 지닌 사람들과 장애나 격의 없이 어울리는 문화 수준이다.현재 일반적으로 타문화와의 의사 교류 능력을 언어로 가늠하는데 오늘은 언어의 장악부터 문화 습득과 소통 기능을 일괄하여 문화지능으로 표술하고 있다.이것은 시대 발전상이 언어에 투영된 것이며 그는 기업뿐이 아닌 어느 민족이나 단체 혹은 개체의 불가피적 소질로 부상한다는 표지이기도 하다. 세계화 조류와 과학의 발전은 여러 민족 간의 교류 필요성과 기회를 대대적으로 증가시킴으로서 타문화와 어울리는 더욱 높은 기량을 수요하고 있다.이리하여 국제시장을 겨냥하는 회사들은 자연히 직원들의 문화 적응 능력에 눈을 박게 된다.사회 관리의 행정사무에서 국제적 경제문화 교류의 요소가 부단히 늘면서 타문화와의 접촉이 상시화되고 있다.그러므로 모든 민족과 개인의 발전에 있어서 문화지능은 불가피적 요소 혹은 상황에 따라 결정적 요인이 된다는 인식이 산생하는 것이다.  오늘 조선족사회는 인구 이동,인구 격감,공동체 해체,교육 위축, 문화 쇠락 등등 부작용으로 고초를 겪고 있지만 이것은 ‘청소년 생장기’의 성장통으로서 광의적 시각에서 보면 민족사회에 일어난 합법칙적 변화이다.조선족은 이 과정에서 낡은 체제의 구각을 벗어던지고 새로운 생업 구조를 성공적으로 구축하였고 중국의 사회발전에 기여하면서 개혁개방의 선두주자로서 참신한 이미지를 육성하여 왔다.조선족은 이미 개혁개방 초기의 문화적 혼돈의 단계를 넘어 이질 문화와 슬기롭게 융합하는 탄탄대로에 들어섰다.오늘의 민족사회에서 나타난 성과는 결국 민족의 문화지능이 이룩한 결과물이라 리해해야 한다. 조선족사회는 과거 20,30년 전에 대비하여 이미 상전벽해의 변화가 일어났고이젠 한국과 일분을 중심으로 이국 땅과 국내의 주요 경제 지역에서 공동체를 고착해 나가는 추세를 보이고 있다.이것은 조선족사회가 새 발전을 이룩하는  새로운 지정학적 자원을 형성하였다는 것이다.역시 지속적으로 우리나라의 우수 민족으로 발돋음하고 세계 한민족과 중국의 우호적 교류를 추진하는 새 발판이며 도약대인 것이다.우리는 이 새로운 출발선에서 고차원의 민족 문화지능 향상에 주마가편(走马加鞭)이란 박차를 가해야 한다.    조선족사회의 전통적 문화지리와 경제지리가 구조적으로 달라지고 인구 감소도 현재 진행형이고, 민족문화도 그냥 난국에 물려있고, 교육도 여전히 불안의 고전을 겪고 있다.그러나 민족문화 가치는 상승하고, 민족인재의 수요가 박절하며, 민족문화 부흥의 대중 의지가 높아지는 새 형세가 이루어지고 있다.이것은 민족문화 발전에 새 희망과 재생에너지를 부여하고 있다.우리는 이 시류를 타고 새로운 문화지능의 발전전략을 수립하고 대응하는 추진방향과 실천방침을 기치선명하게 세워야 할 것이다. 문화는 그 민족의 언어,생활양식,가치관념,풍속습관을 바탕으로 형성된 물질문명와 정신문명의 종합체이다.조선족문화는 중한 두 민족문화가 융합되어 선명한 중국특색을 가지게 되는바 이것은 조선족의 생존,발전과 사회공헌의 기본적 자본이 된다.우리는 력사를 총화하고 현실에 립각하여 새로운 문화륭성으로 번영의  도로를 개척해야 한다.이것이 바로 조선족 문화지능의 근간이다. 조선족에게는 문화지능으로 국제화 교류의 선두주자로 되었고 중국과 세계 한민족의 우호교류를 발전시켰다는 력사 증명이 있다.우리는 지속하여 자신을 일류의 문화지능을 소유한 문화민족으로 건설해야 한다.이것이 바로 닥쳐오는 지능화시대에 민족사회를 꽃피우는 불가결의 포석이다. (끝) 연변일보 2018-05-10
67    앉은장사도 융합사고로... 댓글:  조회:2225  추천:0  2018-03-27
요즘 물건을 팔아 장사하려면 먼저 당신 앞의 소비자가 누구인가를 깐깐이 훑어볼 일이다.그들은 뻔뻔하게 천연해도 속셈은 간사할 정도인데 교활 수준을 훌쩍 넘었다.필자도 지금 물건사러 외출하는 경우가 아주 드문데 혹시 뭐가 필요하면 백화점이나 매장을 돌면서 상품 정보를 정탐하고 홈사이트를 뒤지며 저렴하게 사버린다.특히 소비 주류인 젊은 세대 구매 방식은 제가끔 교묘하고 천차만별이다.   최근 떠오른 신조어인 쇼루밍(店看货,网上购)이 이 현상을 지칭하는 것이다.현재 전통적인 상업은 전자상거래의 충격 속에서 불경기,페업,전업등 극심한 고전을 겪고 있다.소비자들은 인터넷 가상세계에서 상품 정보를 수집하며 개성적 수요에 따라 가성비(性价比)를 꼼꼼이 따지며 시공간 제한이 없이 살 수 있다.홈쇼핑사이트,소셜네트워크(社交网络),이동인터넷 등 정보기술은 소비자를 완벽하고 명실상부하게 왕좌에 끌어올렸다.시장조사,원가계산,판가확정,이익정산 등 지난날의 수자계산식 경영으로는 변화의 물결을 따르기나 할가 바로 침몰이 운명이다.   쇼루밍 충격이 몰고오는 위기를 해소하기 위해 발빠른 소매업자들은 인터넷 정보기술과 실체점포가 결합된 O2O(线上预定、线下购买) 경영방식을 도입하고 있다.그들은 O2O 플랫홈에서 저가성,편리성을 무기로 한 홈쇼핑 공격에 힘겹게 대처하며 몸가누기 균형감각을 찾고 있다.최근 효과를 보고 있다는 소문도 들리는데 이 현대 관리방식 역시 근거리무선통신(NFC),알리페이,위챗페이,이차원코드 등 신기술이 뒷바침하며 풀무질을 해주기  때문이다. 미래 상업 경영의 공통분모로 불리우는 O2O 수단은 장사군들의 필수 일과로 떠오르고 있다.     나무숲만 보고 숲속의 생태조건과 매개 개체들의 물리화학 성질을 외면한다면 산림의 본질과 변화를 알 수 없다.시장의 광대함과 소비자의 표면적 추구만 보고 그 저변에서 맴도는 심리를 파악하지 못하면 그냥 태재급급한 앉은장사치 지경에서 감돌게 된다.소비자 구매동작의 기저에 깔린 의중을 투시하고 내 서비스가 그들에게 남기는 인상을 학문적 시각으로 읽어내야 한다.미국의 세븐일래븐(711便利店) 창시자인 스즈키 사토부미(铃木敏文)는 현대 비지니스에서 가장 필요한 것이 경제학이 아니라 심리학이라고 말한다. 다가오는 지능화시대에 필수되는 융합사고는 과학과 산업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다.경영에 대한 수자계산에 명철하고 소비자의 눈높이를 명찰하고 지능화 무기로 재정비해야 한다.즉 경영 계산, O2O 리용,심리학 습득이란 이 삼자 결합의 융합사고가 당신의 생존 기회와 갈길을 열어 줄 것이다.아니라면 아예 장마당에서 퇴출하는 결단이 돈벌이 명단(明断)이다. (끝)    2018-03-08 길림신문 
66    참삶의 최우선 조건 댓글:  조회:2189  추천:0  2018-02-26
정유년이 365일, 그 8760시간을 어디다 써버렸는지 아리숭한데 무술년이 찾아온다.가치는 날고 말은 뛰고 산간 석암들은 좌이부동으로 세상 만물과 같이 새해에 돌입한다.허나 삼라만상은 잠잠한데 지구 생태계의 독재자로 군림한 인간만이 송구가 아쉽고 영신이 즐겁다며 시끌거리는 같다.   해마다 이때면 례년 행사로 친구 모임이 벌어지는데 나름대로 입수한 뉴스와 눈동냥귀동냥 정보를 가지고 집합하다보니 이야기판은 늘 백화만발 백가쟁명의 생동활발한 국면이고 권커니 잡거니 술잔이 몇 순배 돌면 취담취설(醉谈醉说) 연출이 불문률처럼 막을 올린다.이번 모임의 오가는 말 가운데서 목소리 톤이 가장 높은 친구 연설이 인상적이었다.설이 박두하니 년하 메시지들이 날아오는데 이왕이라면 그런대로 즐거웠고 ‘나그네 말죽 먹이 듯’ 회답도 보냈는데 정년퇴직 후부터는 이런 인사범절이 질색이란다.더구나 그닥찮게 보던 친구들이 내 쎄다고 입김 큰 소리를 전해올 때면 실소리 생소리에 대포도 놓으며 맞장단을 쳐야 제격인데 짝진 기분에 응답이 고역이란다.그들은 지식도 사상도 일재간도 나보다 어방없는데 감투 사냥에 령악하고 관운(官运)이 좋아 상감마마 관복(官福)을 누리며 으시댄단다.부언하여 나도 제 푼수를 잘 알고 처신했더면 웬만한 강산은 쥐락펴락할 호랑이었을 거라며 우통을 썼다.     그 열변을 들으며 속이 씁쓸하고 귀가 따가웠지만 의기투합한 이심전심(以心传心)이 원인인지 ‘자기를 아는 자가 현자’라는 자지자명(自知者明) 리치에는 수긍이 갔다.세월의 징검다리를 뛰넘으며 살아오다 인생의 가을하늘에 몰골을 여겨보니 어색하게 비치는 나이다.차분히 생각해 보면 내가 무엇이고 어디에 써먹을 ‘원자재’인지를 불문에 부치고 무작정 덤빈 업보가 아닌가 본다.지난날 삶의 현장을 돌아보면 무엇을 이뤄도 보고 실패나 좌절을 피하려 애면글면했지만 늘 밀운불우(密云不雨) 형국에서 탈출하지 못하였던 자신이다.오늘 내 삶에서 발생했던 수많은 시행착오와 자가당착 교훈의 창고를 뒤져보니 나를 잘 알아야 참삶을 산다는 소견의 진리성을 골수로 느끼게 된다.    특히 생계 전쟁에 출진한 전사들에게 있어서 내가 무슨 ‘재료’인가를 파악하는 것이 더 결정적 의미가 있다.내가 나무인데 강철이라 고집하면 인생이 희극 놀이가 되고 자신이 나팔꽃 풀이 분명한데 장미꽃을 피우려 한다면 뜬구름만 잡게 된다.자신의 지능지수(IQ), 감성지수(EQ)와 천성을 포함한 생득 기질부터 나의 강점과 복잡한 생존 여건을 알아가며 성취 가능한 분야에 투신해야 한다.쾌락을 추구하는 범인의 삶이거나 가치를 추구하는 아인(雅人)의 삶이거나를 막론하고 내라는 물질의 ‘물리 화학적 성질’에 대한 분석 판단이 정확해야 바른 길에 들어설 수 있다.자지(自知)가 자신(自信)의 전제로 되어야 하고 자기의 본바탕 그대로 완벽히 인식하는 것이 희망을 열어가는 선결적 필수조건이라는 것이다.     자기를 알았다면 오로지 자신이 되어야 한다.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것이 자기로 되는 것이라 말한다.사람은 늘 타인을 배우고 타인이 되려는 심리적 경향을 가지게 된다.그러나 량약은 체질에 맞아야 좋은 약이고 고가 패션도 체형에 맞아야 고급 옷이 된다.그렇다면 자기 본체에 대한 자아진단이 우선이다.위하여 늘 스스로를 돌이켜보고, 남이 평판을 귀담아 듣고,남의 찬사에 현혹되지 말고,남의 비판을  감수(甘受)해야 한다.이리하여 자기만의 개성과 정체성을 수립해야 한다.   현대인은 자아의식이 발달하고 아집이 세며 집착이 강하여 외부의 정평을 쉽사리 마이동풍(马耳东风)으로 흘려버린다.물건의 무게를 알려면 저울추를 봐야 하듯  내가 어떤가를 알려면 남의 눈에 비춰봐야 한다.허심탄회하면 진보하고 자만자존하면 락후한다는 현인들의 교시는 명기해야 할 지침이다.그리고 장점을 극대화하고 단점을 극소화시키고 무효화시키는 노력은 평생의 과업으로 떠메야 한다.   오늘의 세계는 자동화, 디지털화를 넘어 지능화시대의 해일을 맞고 있다.새 세상을 마주하여 시대를 따르는 여세추이(与世推移) 정신으로 자기에게 알맞는 전문성을 키우지 않는다면 도태의 신세를 면하기도 어렵다.하여 남의 뒤를 여영부영 따르지 말고 자아개발과 자아실현의 아성을 구축하는 것이 현명한 선택임을 류념해야 할 것이다.   내 ‘재질’을 알고 자기의 적재적소(适材适所)를 분명히 판가름한다면 인생 대성(大成)은 말고라도 유유자적 호강살이는 별문제일 것이라 단언한다. (끝)   2018-02-23일 연변일보 원문,
65    작은 부탁 댓글:  조회:2244  추천:0  2018-01-19
2017년이 작별없이 사라졌는데 륙십갑자에 따라 지어진 정유년도 무술년으로 넘어간다.세계의 다수 나라들이 양력 1월1일을 새해로 다루는데 대비해 우리 나라에서는 음력설에 새해맞이 무게가 실려있다.이상하게도 어떤 나라들은 3월 중순이나 4월이 신년인가 하면 춘분 혹은 하지날에 설맞이 행사를 치르는 민족도 있으니 세상이 실로 천자만태이다.그러나 부동한 민족이 부동한 문화방식,세계관과 신앙에 따라 설맞이에 명절색을 띄우며 앙천축수하여도 번영창성이나 부귀공명을 바라는 마음 하나는 일매지다.   지난날 이맘 때면 이 자신도 늘 요행수나 노리고 공떡을 바라며 천행만복이 구천직하로 떨어지라 들먹거렸는데 재수는 늘 용케도 비켜가고 찬송가처럼 외웠던 기원사는 그냥 공념불이 되면서 유야무야 한 해가 되풀이 되었다.이런 까닭에 작년에 세신 때면 송구영신이란 프로그램을 아예 지워버리고 매일매일을 새해로 삼고 살자는 결의를 다지였었다.그런데 주위에서 또 다사다난한 한해였는데 새해는 어쩌고저쩌고 부산을 떨고 있으니 겉잡을 수 없는 심동(心动) 이 덩달아 일어난다.집단의식에 어쩔 수 없이 끌리는 것도 인간의 제어불능  본능욕이 아닌가 본다.   자기 의지를 떠나 주어진 지리적 여건이나 사회 환경에서 살아야 하고 거기에 걸맞는 신념과 가치관을 가지는게 인간의 숙명이다.그러니 주위 생활 요소들이 변하면서 기존의 리념과 바람이 따라 바뀌는 것 역시 불가항력 변증법칙으로 봐야 한다.사람들이 년륜이 늘고 신체생리의 구동력과 세간에서 활동 반경이 줄면서 자기 미래에 대한 희망은 서서히 줄고 욕망도 그냥 소박해 진다는 사실도 이 합법칙성의 소산일 것이다.자신도 이 법칙의 한계를 초월하지 못하는 느낌인데 반대로 아이들 앞날에 대한 희망은 시너브로 더 커지고 이름 모를 근심걱정이 속구석에서 그냥 붙어도는 연유는 어디에 있을가.넘어야만 했던 인생 곡절과 감내해야 했던 시대적 고초, 이런 현실에 덜미를 잡혀 살아온 가닭일가.지난날 겪었던 사실(史实)들이 기억의 화석으로 남았다가 때가 되면 자꾸 불끈거린다.오늘도 황량하고 힘들었던 길에서 결실과 보람을 탐닉하며 써내려 온 경험집에서 무엇을 골라 내 아이들께 설파하려는 갈증이 일어난다.     인간이 자아의식이 터서부터의 생활은 선택과 포기의 련속이 아닐 수 없다.성공을 희망하면 안일을 포기해야 하고,영예를 얻으려면 사욕을 포기하고,인민 공복이 되려면 부패를 포기해야 하고, 남을 신임을 얻으려면 자신을 낮추어야 한다.체경을 앞에서 보면 뒤면을 못 보듯 무엇을 소유하고 취득하려면 그 대립면을 포기해야 한다.어떤 일에 집착한 나머지 시비곡직과 선악청탁을 분별없이 외면하면 늘 인생 자체를 포기하는 사태를 맞기도 한다.요즘 항간에서 립신양명하려면 기회 선택이 우선이라는 설이 넘치고 있다.그러나 정확한 포기가 없는 선택이라면 부어놓은 정성의 다소를 막론하고 간단히 도로나무아미타불(徒劳南无阿弥陀佛)이 된다는 교훈이 무시되는 같다.그렇다면 옳바른 선택과 정확한 포기는 이음동의어(异音同意语)로 봐야 마땅하다.사람이 살아가려면 갈래갈래 나뉘는 로터리(环状交叉路)를 수시로 지나야 하는데 이 때의 정확한 포기 가치는 옳바른 선택의 중요성을 훨씬 릉가하게 된다.   필승의 신념을 가지고 한가지에 결사적 노력을 해야만 했던 우리 세대,우리들에게는 참고 견디며 투쟁하는 것이 최상의 미덕이고 지혜였다.자주 선택의 터전이 너무도 척박했던 시대적 원인도 있었지만 선택과 포기의 변증법에 숙맥이었던 자기부족이 실패와 좌절을 초래하는 내적원인이었다는 더욱 절감하게 된다.그 시절 첨예한 고민에 빠져 우왕좌왕하던 어두운 기억들이 아직도 처절한 가슴앓이로 남아있다.오늘은 정보와 기회들이 파도처럼 덮치는데 수많은 호기와 도약의 찬스의 홍수 속에는 버려야 할 대량의 무용지물과 오사리잡것들이 뒤섞여있다.불가능성과 가능성이 얼기설기 헷갈리는 이런 세상에서 혹독한 시련을 참고 견디는 정신만이 찬양을 받던 시절은 먼 력사로 되였다.선택의 폭과 깊이가 급속히 넓어지고 깊어지는 때 물심량면의 효과를 어떻게 극대화하는가는 선택과 포기가 얼마나 귀중한지 모른다.때문에 유해물과 장애물을 포기하는 지혜의 가치가 빛나는 것이다.   말글에는 ‘한 번 실족이 천고의 한이 된다’는 관용어가 자주 등장한다.추론해 보면 페기물 눌러두면 한생의 후회를 빚는다는 뜻이다.물욕이 넘치고 인심이 박해지는 세상일수록 실리를 위해 묘언이나 묘수를 앞세우는 론리가 금물임을 명기해야 할 것이다.그리고 어떤 일에 전력투구하더라도 포기 프로그램을 늘 련동시키야 함을 좌우명으로 지켜야 한다.   지난날 포기불능 증후군(综合症)이 골병이 되어 좌충우돌하던 나를 돌아보니 왜 그리도 둔감했을가 우습다.세상 만물의 더미에서 불량품과 말짜들을 적시적기에 골라 포기하는 용단이야말로 참삶을 살아가는 첫 요건임을 통감하고 있다.하여 마주오는 지능사회를 무난히 살자면 선택 고수가 되기 이전에 포기 달인이 되어야 한다고 호소하게 되는 것이다.   정유년 세모와 무술년 정초,이것이 내 아이들께 보낸 작고 지극한 부탁이다.   (끝) 2018-01-19 연변일보
64    조선족의 긍정적 자아의식 댓글:  조회:2441  추천:0  2017-12-24
지난 14일 본지에 실린 이란 일문에서 세계라는 시각에서 미래 방향타를 잡는 작자의 긍정적 자아의식을 보아냈다.고난의 력사 속에서 수립된 새 가치관의 축도로 보아진다.세월의 파도에서 좌지우지하던 민족이 일천지하에서 자리매김하려는 이러한 새 사상에 찬사를 보내야 할 것이다.여세추이(与世推移)의 철학 정신이 내비치는 이 객관적 시각에 명견만리 명단(名断)란 고평(高评)을 주어도 리유가 충분하다.   모든  시대에는 특정한 과제가 있고 그 시대인은 걸맞는 소명을 안게 된다.개혁개방에 따른 변혁이 조선족을 빈곤, 좌절과  패배의식에서 탈출하는 목표를 향해 나가도록 촉구하였다면 우리 구성원들은 세계를 무대로 희노애락의 시대를 압축하여 왔다.물론 공동체 해체,인구 격감,교육 위축 같은 비싼 대가를 치렀지만 명암이 헷갈리는 위기를 무난히 넘어온 결과 민족사회의 부피는 줄었어도 속대가 굳어지고 현대주의 사상이 뿌리를 내렸고 세계 무대에서 새 터전을 마련하였다.이 기상은 조선족 사회가 세계화의 초입에 들어섰다는 명증이다.   이젠 구시대의 발상으로 미래를 마름질하고 리해관계를 규정한다면 력사를 역행하는 위험동작이 될 수 밖에 없다.그 동안 비록 조선족에 대한 비관적인 논조가 끊임없었지만 조선족은 개혁의 물결에서 나라 정책과 세계 질서를 성공적으로 활용하면서 세계 발전의 선두에 섰다고 자신할 수 있다.조선족 사회에는  지속적 발전을 인도할 수 있는 인적 자원이 형성되었고 이미 형성된 경제적 기반도 미래 사회의 주추돌이 되기에 충분하다.지금 수많은 조선족 민간 단체들과 문화 단체들이 한국을 중심으로 세계무대에서 활약상을 보이고 있다.   개혁개방은 민족사의 물줄기를 바꿔놓았다.조선족의 현실과 미래는 한국를 떠나서 운운할 수 없게 되었지만 전세계를 향하는 수많은 지류가 동시에 이러지었다.지난 세기 90년대 초반부터의 민족적 대이동은 결국 농촌으로부터 도시에 진출과  한국에로 줄지은 붐이었느나 오늘에는 중국 각지에 조선족 집거지가 형성되고 한국에까지 조선족 타운이 정착하는 추세를 이루고 있다.국내에서 수많은 조선족 기업들이 규모화와 브랜드화적 발전을 이룩하고 있으며 대한국 투자와 창업도 급증하고 있다.이것은  민족사회 발전의 새 기원으로 밖에 볼 수 없다.   요즘 일본에 800여 개의 조선족 기업이 자리잡았다는 매체 소식이 전해온다.그리고 산업계,학계,언론, 재계와 많은 글로벌회사들에서 조선족 인재들이 중견으로 활동한다는 쟁쟁한 소식들도 끊임없다.민족 엘리트들은 각 분야에서 특수한 기능을 발휘하여 조선족 이미지는 가파로운 상승 곡선을 귿고 있다.조선족의 문화 항선은  일본 땅에서 민족사회 금자탑으로 승화된다고 갈채를 쏟는 사람이 수두룩하다.그 땅에서 민족사회 구조의 맹아가 싹트고 성장하는 양상이 이채스럽지 않을 수 없다.   분명 조선족은 ‘중국조선족'이던 시대를 지나 동북아조선족과 글로벌조선족으로 진화하고 있다.유러시아대륙에서 중국 굴기와 더불어 조선족 사회는 세계 한민족이 중국과 교류를 진행하는 현대화적 교두보가 되어야 한다는 기대가 다시 설레이고 있다.이것은 조선족에게만 주어진 자원이고 새로운 력사적 기회이다.물론 여기에는 조선족이 자기 문화자원을 경제자원과 자연자원으로 전화시키야 한다는 전제가 있다.위하여 우리는 민족문화에 대한 력사적 비판의식과 명철한 긍정적 자아인식을 가져야 한다.   보는 바와 같이 조선족은 민족적 자긍심을 가질 사회적 및 력사적 기반을 충분히 가지고 있다.그러므로 우리 기성세대들은 중국 조선족 특색의 문화를 더욱 잘 전승하고 발전시켜여야  한다는 력사적 책임을 훌륭히 짊어져야 한다.그리고 후대들에게 이 발전력사을 이어가야 할 신성한 책임을 각인시키고  의무를 감당해야 할 핵심사상을 주입시켜야 한다.   조선족이 세계를 무대로 민족중흥의 새날을 열어가는 뱃길은 활짝 열려있다.다만 소망의 성불성은 하기 나름이다.우리는 모든 역경을 숙명으로 감내하며 오늘처럼 전진해야 한다.변혁의 시대에 순행하면 융성하고 답보하면 퇴보하고 역행하면 쇠망한다는 론리,이것이 력사의 불변칙임을 명기하자.  (끝) 2017-12-01흑룡강신문
63    걸으며 생각하며 댓글:  조회:3927  추천:0  2017-12-01
증년(增年)하며 온다는 심리적 변화인가 무력감,무위감과 무료감(无聊感) 등 이상감각이 스멀거리며 감지된다.그래선지 원래 웬만한 용무가 아니라면 나들이가 질색이더니 요즘엔 늘 원인불명의 충동이 일며 어디론가 가고 싶은 생각이 불뚝거린다.오늘도 심심해 나더니 100년사를 자랑하는 근처의 식물원을 돌아보려 털고 일어난 것이다.이 동네에 와 살면서 강산이 두번이나 변했는데 지척에 두고도 가보지 않은 관광명소이다. 입구에 세워진 조감도를 보니 여기에는 중국 북방의 거의 전부 교목들이 자라고 있고 타국 수종과 극지식물도 다수가 귀화되어 생장하고 있다는 얘기다.록음이 우거진 계곡에 조성된 자그마한 인공호수를 중심으로 주위에 정교한 조형물들과 여러가지 대중 서비스 시설들이 축조되었는데 사계절 전천후(全天候)로 관광과 레저를 즐기는 명당으로 충분하다.게다가 희귀멸종위기식물의 번식,자생지 재현, 신품종 개발, 화단 조성 등 자연복원 프로젝트가 속속 진행되면서 식물학 데이터뱅크(资料仓库) 로 불리우며 전문학자들과 대학생들이 운집하는 과학연구와 교육 장소이기도 하다.심청색으로 청푸르른 나무숲과 종종색색의 백화가 릴레이를 펼치는 화단들은 단지 관상 공간이 아니라 식물계를 번영시키고 생태계 가치를 살려내는 보고라 해야 할 것이다. 북방 식물의 본산(本山)이라 불리는 이 공원을 거닐면서 유서깊은 이 자연경관이 몇세대 지성인들의 심혈의 결과물이라는 사실을 확인하게 되었다.오늘도 제복을 정히 차려입은 정원사들은 전지가위를 들고 무더위 속에서 여름 정지에 정진하는 진지한 모습을 선보인다.나무밑 제초, 화단의 풀뽑기와 병충해 방지에 전념하는 원예사들의 여념이 없는 자태와 홀로서기 어려운 나무들에 지지대를 세우는 년장자들이 더위 속에서 고전을 겪는 모습은 가상하다고 형용이 된다.이 천혜의 관광지는 세세대대 로동자들 노력의 생생한 력사 기록인 것이다.바로 그들의 기름땀이 이 촌지의 땅을 식물창고,관광지,레저명소로 건설하였고 관객들의 발걸음을 가볍게 해 주면서 도시의 꾸밈새에 생기와 활력소를 불어넣고 있는 것이다. 대자연의 순환에 따라 오는 여름인데 오늘의 감회는 사뭇 다르다. 봄에 씨앗을 뿌리고 가을의 수확을 바라는 것은 인지상정이라 해야 한다.그러나 그 씨앗이 싹트는 봄을 거쳐 숲을 이루며 열매를 맺는 결실은 여름의 고역이라는 단계를 넘어야만 알찬 수확을 얻는 것이다.그렇다면 뭇사람들에게 자연과 교감의 기회를 만들어 주고 멎진 추억을 만드는 이 관광지에는 인간의 지혜와 땀과 열의가 가득 담겨있고 속을 말리는 심사숙고와 슬기로운 실천이 쏟아져있을 것이다.목적한 바를 이루려면 개조해야 할 사물의 본질을 파악하고 가능성과 현실성을 가늠하면서 지속적이고 섬세한 사업을 전개했다는 명증인 것이다.   지난날 치기와 만용을 부리며 내달리던 나를 돌아본다. 새싹을 틔우던 약관(弱冠)의 20대와 체면의 승화를 꾀하던 이립(而立)의 30대는 희망을 향해 도전하며 치닫는 나날의 연속이었다.대자연의 칠팔월 같은 불혹(不惑)의 40대 장년세월은 결실을 위해 나름대로 호흡 조절을 하며 담금질과 면려(勉励)를 지속하던 고난의 길이었다.그렇다면 인생의 초가을이라 부르는 지천명 50대에는 풍성한 결과물과 웃음보따리를 앞에 놓고 빈정거려야 되지 않았을가.그런데  이순(耳顺)이 되고 봐도 별로 내놓을 게 없어 황당하기도 하다.더구나 어쩔수없이 사회의 가장자리에 밀리는 현실이 박두하고 있는데 받아들이자니 참 어렵다.   세상을 살면서 모든 것을 꿰뚫는 지혜를 지녔다라면 좋았을텐데 불행하게도 나에게는 그런 재치가 없었다.그러면서도 늘 청운만리의 과욕을 부리고 착실한 실천을 외면하면서 개구리 뜀질로 살아왔다.거기다 교만에 잠기며 인생 여름의 필수 작업을 허투루한 업보가 삶을 랑비하고 지치게 한 원흉이 아닐가 본다.’여름에 하루 놀면 겨울에 열흘 굶는다.’라는 전언을 새겨본다.여기서 류추하여 ‘여름에 하루 잘 못하면 겨울에 백날을 굶는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 성공적인 인생을 살려면 높이 서서 멀리 보기 전에 낮게 서서 자세히 보는 것,닫는 말에 채찍질 하기 전에 띄염띄염 걸어도 황소 걸음을 걷는 것,대업을 바라기에 앞서 이소성대(以小成大)의 정신으로 모든 작은 일들을 부러지게 하는 것,이것이 인생의 좌우명이어야 한다.간혹 젊은이들과 인생담을 나눌 때면 이것이 내 생의 실패작에서 얻은 교훈이라고 뇌까리기도 한다. (끝) 2017-09-01연변일보 원문.
62    남의눈으로 본 《청년경찰》 댓글:  조회:2330  추천:0  2017-10-29
한국 영화《청년경찰》이 빚어낸 론란이 그냥 발효하고 있다.한국 땅에서 차별과 수모를 받으며 누적된 상처가 긁히어 발로되는 아픔일 것이다.   영화가 조선족을 악역으로 내세우고 애꿎은 대림동마저 마적굴로 만들어 500만의 관객에게 전염성 메시지를 건넸으니 혈한을 쏟던 조선족들이 침묵으로 일관할 수 없다.그들은 이미  한국 생활의 부조화 단계를 뛰어넘어 지역 사회에 융합되고 지역민들과 화합을 이루는 새 시대를 열었는데 이 친구들이 지엽으로 나무숲을 가리는 시나리오를 꾸민 편협한 사고가 이상하다.꺼지는 불에 기름을 쏟고 ‘동족상잔’ 정서를 부추기는 행태이니 피해 당사자들과 지성인들의 반발은 리유가 충분하다.이 작품을 반민족적이라 문책하면 도를 넘지만 그의 사촌 친척이라면 모자람도 없다.   대림동은 재한 조선족들이 ‘코리안 드림’을 펼치며 일궈낸 집거지로서 한국에서 일명 차이나타운이라고도 부른다.그들은 몇십년간 설음을 이겨내며 생계 전쟁을 거치면서 여기는 이미  한국,중국,조선족 문화가 어울린 독특한 문화지역으로 변신하였으며 미래 한국의 다문화사회 모델이라는 긍정적인 기대도 부풀고 있다.물론 조선족들의 범죄나 후진적 작태들이 오래동안 이슈화되기도 하였으나 현재는 초기 적응이라는 원시 수준을 뛰어넘어 지역사회 건설에 책임지는 성숙된 이방인으로 변신하고 있다.그런데《청년경찰》이라니  ’아닌 밤중에 홍두깨’다.   오늘 한국 속의 조선족 사회 형성은 주류사회의 드팀없는 지원,지지와 지도가 결정적인 요인이었다고 단언한다.조선족들도 병주고향(竝州故鄕)을 건설한다는 진지한 감정으로 자체 도덕 개선의 절박성을 인식하며 주인적 자태로 나서고 있다.현실은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영화는 단점을 들추고 침소봉대식으로 과장하며 동족 화합의 숲에 악병(恶病) 바이러스를 뿌려댄다.자기보다 나은 사람이면 환대하고 가난하고 힘 없는 사람이면 멸시하는 한국 사회의 저급문화의 발현이라고 지성인들이 말하고 있다.   지난 50,60년대 한국이 어렵던 시기 수많은 한국 남녀들이 독일에 건너가 그 나라 사람들이 기피하는 광부와 간호사로 되어 핏땀을 쏟으면서 가난한 조국에 종잣돈을 만들어 보냈다.수만으로 헤아리는 사람들이  ‘아메리칸 드림’에 매혹되어 쓸만한 수단은 다 부려가며 가난한 조국을 숙명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던가.또 중국을 내놓고도 미국,유럽 지역에서 한국인들의 범죄가 쟁점으로 되어 한국에 먹물을 들씌우던 무색할 통양(痛痒)도 수없이 있었다.이것은 오늘 조선족의 '코리안 드림'과  궤적(轨迹)을 같이 하는 한국 력사의 단면이다.그렇다면  영화의 제작진들은 역지사지(易地思之)의 명철한 사고로 조선족의 현실을 직시해야 할 것이다.   각설하고, 《청년경찰》을 도문질타(到门叱咤)할 때 삶의 개선을 위해 찾아간 조선족들은 그 나라의  법질서와  인민들에 책임을 지는 신실한  자태가 있었던가 성찰이 있어야 한다.지연,혈연,인연 등등 연고 문화가 뿌리깊고 혹독한 상하서열과 위계질서를 지켜야 하는 한국 땅이었다.자기 치부를 감추는 가추불외양(家丑不外扬)  심리와 아니꼬운 남이면 흉을 가배로 불궈놓는 속심은 인간 본성의 일부분이다.어느 외인이던 그 공동체 속에서 불미스런 행위를 저지른다면  랭대는 말말고 공격의 과녁이 되고 동네북이 되는 현실은 자연스러운 인간세태이다. ‘한가마밥을 먹은 사람이 한울음을 우는’ 필연성도  당연한 인지상정으로 각인되고 있다.그럴진대 재한 조선족들고 같은 처지면 똑 같아 진다는 역지개연 (易地皆然) 의 당위성으로부터  영화의 매개 측면을 고루 인식하고 만약 내라면 어떻겠나 관대하게 헤아려봐야  할 것이다.   현재 조선족 사회는 한국에 정착하는 추세를 이루고 있으며 많은 경제,문화,예술 단체들도 이미지 개선과 소통,상생,화목을 위하여 다양한 활동을 벌이고 있으며 대림동이 ‘조선족 수도’로 격상한다는 소문도 파다하다.뭐라해도 한국 땅은 조선족들에게 있어서 매력이 넘치는 땅이 틀림없다.그렇다면《청년경찰》을 향해 진상 규명과 시비 판단을 호소할 때 영화 소재를 제공한 당신은 무었이었던가를 동시 고민해야 마땅하다.특히  ‘로마에 가면 로마법’을 따르는 종시속(从时俗)의 고마운 실천이 관철되였던가를 내성(内省)하고 반성해야 한다.       언행범절의 곱냐밉냐에 따라  ‘주러 와도 미운 놈 있고, 가지러 와도 고운 놈 있다’는 세속의 도리는 따져볼 만한 리치이다.조선족들에게 ‘가지고도 고운 놈’이 되는 지혜가 없을 것인가. (끝) 2017-10-28 흑룡강신문
61    실향자(失乡者)의 넋두리 댓글:  조회:2492  추천:0  2017-08-11
‘아닌 밤중에 홍두깨’다. 고향 동네의 보스(首领)가 마을 총회가 있으니 지정한 시간에 지정한 장소에 도착하여 출석하도록 하쇼!  지령을 보내왔다.마을의 전답들이 도시 개발의 저변에 깔려 들어간다는 부언이다.하여 내 유소년 시절의 희노애락이 서려있고 청춘의 꿈을 키워주던 고향으로 허겁지겁 찾아떠났다.    사나운 시류에 떠밀려 바닷가 어느 동네에 터를 잡고 살아가는 누구이다.오래 동안 부평초 방랑살이의 빗바람을 실컷 마시고 타향살이의 쓴맛 단맛을  만끽하며 떠돌았어도 고향을 전혀 등지고 산 것은 아니다.고향의 변천에 시시로 눈을 주고 그 뉴스를 무시로 렴탐하면서 사모불망(思慕不忘)으로 지나왔다.타지에서 생계가 급하여 허둥대면서도 조용할 때면 늘 진한 향수(乡愁)에 젖어 고향 모습을 그리었고 가고파의 회포로 가슴을 젖히군 하였던 나다.   마을에 들어서니 추억은 살아 숨 쉴 뿐 눈앞에 펼쳐진 정경에 기분은 나락으로 떨어진다.낯선 아스팔트의 량켠에 주인을 잃은 빈집들이 수두룩하고 세월의 무게를 감내하지 못해 땅으로 가라앉은 집들과 서까래가 처진 모습도 보이는데 빈터에 자란 무성한 잡초가 삭막한 풍경을 그려내며 정신적 공황을 불렀다.뜰과 마당을 어림할 수 없는 터전에서 길건너에 줄지은 현대화 건물을 보며 가슴 속의 고향은 옛날과 오늘의 경계에서 오락가락하였다.어느 때일가 돈에 혈안이 된 개발자가 돈다발을 내던지고 삼켜버릴 신세,내 사랑하는 고향이 분명 새로운 숙명을 맞이하고 있었다.   마중 나온 친구와 술좌석으로 직행했다.고향을 떠나 장장 30여년,강산이 세번도 더 변하고 마주한 친구 향친들의 머리에는 폭설이 내렸다.그래도 술잔을 기울이며 안부를 확인하고 깜박거리는 기억을 더듬으며 덕담에다 잡다한 이야기를 섞어가며 말 꽃을 피웠다.말말결에 동네에서 아기의 도고한 고고성이 울린지는 어느 옛날이고 70대면 장년,60대면 청년,50대면 소년,40대면 어린애라는 소리다.거의가 땅을 버린채 현대판 디아스포라(离散的犹太人)식 류랑민으로 전락하였는데 인구의 격감으로 기존의 년령대 구분 문법이 허물어 진 것이다.향민들이라 해야 세부득이 사정으로 본가를 지키는 로년자들, 팔자 사주에 따라 움찍거리는 약자들, 고향의 돈벌이도 짭짤하다는 몇몇 젊은이들이 탯자리 파수군으로 남아있다.그러나  어느 땐가 무슨 낌새가 나면 철새처럼 날아갈 그들이다.고향의 존망이 불보듯 뻔하다는 말이다.   농업이 나라의 기본이라며 정부는 갖가지 진흥책을 단골 메뉴로 등장시키나 돈이 으뜸인 향민들에게는 외쳐본다 해야 버럭질이고 군짓이다.역빠르고 잽싸고 상황에 따라 비굴해지기도 해야 하는 세태인데 그 땅뙈기는 언녕 어느 전문인에게 이양되고 모두가 삶의 바다에서 산산히 흩어져 나간다.그들에게 있어서 가난의 티를 벗고 상류층 향상을 위한 생존 투쟁은 아직도 필연적인 미완의 과제인 것이다.이 선량한 향민들이 언제면 희망의 피안에 이르고 그 가족단란의 소박한 꿈은 언제나 이뤄질 것인가.   유명을 달리 하신 우리 선조들,  보리고개 춘궁기(春穷期) 때면 영양실조로 얼굴이 누렇게 뜨시면서 일년에 300일을 웃도는 고된 로동에 부대끼셨다.그들은 이 땅을 옥토로 만들어 해해년년 풍작을 이룩하고 후세들에게 배불리 먹고 따뜻하게 입는 풍의족식의 태평성대를 만들어주려 불철주야의 로고를 바치셨다.하늘 땅과 싸워 이 고장을 산좋고 물맑은 안락정토로 건설하여 세세대대의 자자손손이 이 땅에서 영화를 누리는 것이 그들의 최고 리상이었었다.이 선조들의 혈한으로 얼룩진 희망의 땅들이 건설의 세찬 물결에 말끔이 사라진단다.   그 세월이 남긴 난감한 기억들을 말끔히 지우고 싶다.지난 세기의 50년대 우리의 유치원 시절은 농업합작화의 초기, 어른들이 밤교대 탈곡을 하시다 잠간 휴식이 되면  허기진 배를 채우시려 삶은 무우를 간장에 찍어 드시던 희한한 장면이 새삼스럽다.이 옛일을 젊은 넘들에게 들먹거렸더니.”아니,그 사람들이 머리가 열번 돌고 얼이 백번 빠진거 아니여요? 자기의 땅에서 자기 힘으로 지은 자기 곡식인데 왜 쌀밥을 지어 배 터지게 안 먹어요?!” 라며 두눈을 동그라미로 만든다.“아니야!배부르면 좋은 걸 그들이 왜 몰라! 그것은 그 시대인들의 기성도덕이었고 그 세대가 떠멘 운명이었어.바로 그 나날의 력사를 창조하는 길에서 그이들이 그렇게 쌓아 온 행복의 열망이 개혁개방의 장엄한 서막을 세차게 열어제낀 원동력이 아니였겠냐?” 나의 궁색한 답변이었다.   오늘의 력사를 이어가는 후대들,이들은 풍요의 시대를 즐기면서 비단 같은 포장도로 위에서 자가용을 슬슬 몰고 다니며 그 옛날   장원급제했던 반가(班家) 도령의 금의환향(锦衣还乡)에 짝질게 없다고 자신하며 고을 원님도 부러울 게 없다고 자부할 것이다.현대화 정보기기를 휘두르며 고기 반찬 속에서 야채만 골라집는 세대들이다.새로운 시대,새로운 가치관, 새로운 목표를 가진 후예들 어깨에 가늠이 어려운 고향의 미래가 놓여 있다.   정보사회를 대변하는 스마트폰도 알기 전에 지능사회가 물살을 일구며 몰려오는데 다음 시대의 고향 모습은 무엇일 것인가. 오래지않아 고향 주소는 지도에서 가뭇없이 사라지고 인터넷 가상공간에나 한줄로 남을 것만은 틀림없다.그때면 우리는 완벽한 실향민이 될 것이 아닌가.   인생의 모년에 파 들고 싶던 안식처,영고성쇄(荣枯盛衰)의 만장 력사를 침잠한 기억의 낚시터,락엽귀근(落叶归根)의 본거지, 이 고향이 가속으로 사라진다. 만감이 서린 가슴을 안고 집에 돌아온지가 이슥한데 그 상실감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이 위인은 아직도 심한 열병을 앓고 있다. (끝)     연변일보 .2017-08-11일
60    민족문화로 기회비용의 최소화 댓글:  조회:2060  추천:0  2017-07-27
개인 진로의 선택에는 대가가 따르는데 그를 기회비용(机会成本)이라 부른다.인간은 동일한 시간에 두가지 이상의 선택이 불가능하기에 하나만을 택하는데 그중에서 하나를 선택하면 다른 대안은 포기해야 한다.례하면 타민족 학교를 선택하면 조선족 학교를 포기하는데 이 결정이 대가로 된다.다시말하면 타민족 학교를 선택한 결과로 조선족학교에 입학하여 얻을 수 있었던 리익 이것이 바로 지불되는 기회비용이다.그러므로 여러 대상 가운데서 최대의 가치항을 선택해야만 기회비용을 최소화시킬 수 있다.   이 동네에 70년대에 태어나 유치원부터 타민족 교육을 받은 조선족 친구가 있다 조선어가 깜깜이고 번지는 말구절이란 ‘밥 먹어? 밥 먹어라!’ 이 정도인데 그나마 반버버리 더듬이다.부모는 순수 조선족 고학력자들인데 조선족학교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들을 조선어와 완벽하게 리탈시켰다.시대적 원인이었을가 조선어는 아무짝에도 쓸모없다는 아집이었다.그는 동년배 조선족 친구들 거개가 외향형 기업에서 일하거나 외향형 창업을 하고 있는데 수입,사회지위,소비와 문화생활 전반에서 자기는 그들의 바닥을 돈다고 말한다.지불한 기회비용이 결코 적다고 볼 수 없다.   초년의 진로 선택은 틀림없이 한생을 좌우하게 된다.조선족은 두개 문화 속에 융화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나라의 정책지원을 받는 우위에 서 있다.이 문화가 조선족을 중국내서 한민족 교류의 교두보 지위에 떠밀어올린 것이다.특히 중한 이중언어는 만인이 선망하는 보고이고 노다지이다.이 언어는 배워두고 당장은 필요 없더라도 일생을 두고두고 써먹을 수 있는 도구이고 무기이고 ‘구명보트’이다.인공지능 로봇이 몰고오는 지능사회를 마주하며 이중언어와 민족문화를 멸시하던 패착을 재범하지 말아야 한다.   현재 조선족의 이동과 인구감소는 여전히 진행형에 처해있으나 중국의 발전과 세계 일체화의 추세에는 도리어 가속도가 붙고 있다.이것은 조선족 문화에 더 큰 중요성과 필요성을 실어주고 있으며 특히 후대들에게 이중언어를 잘 할 것이 아니라 출중하게 해야 한다는 가치 방향을 제출하고 있다.조선족은 중한 이중언어 분야에서의 패권자라는 충족조건과 민족사회를 지속적으로 발전시킬 충분한 가능성과 현실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이중언어의 문화는 민족사회의 번영과 발전을 지키는 감제고지(瞰制高地)라는 점 명심하고 명기해야 할 것이다..   “인생의 길은 멀고 느리지만 긴요한 대목은 한 걸음이다”.이 걸음을 정확히 내디디도록하는 부모의 책임은 태산 이상으로 무겁고 높다.자식의 미래 창조는 부모에게 할당된 천직이지만 천혜적인 민족문화로 기회비용을 절감한다는 진리를 한번 쯤 강조해 보고 싶다.  (끝) 2017-07-25길림신문
59    ‘조선어경제학’ 댓글:  조회:2105  추천:0  2017-07-07
고향에 용무로 갔다가 친구 모임에 참가하였다.모두가 지긋한 년상약(年相若) 은퇴자들인데 잡다한 이야기에 꽃을 피우는 말말결에는 ‘자랑중의 으뜸’이란 아들딸 자랑이 상당한 비례를 차지한다. ‘자식 자랑이 많아지면 쓸쓸한 로년’이란 사실감이 곧이곧대로 드러난다.   그 중 한 친구의 이야기가 귓맛을 당기었다.아들은 조선족 학교가 없는 고장에서 태어나 애초부터 조선어 교육은 뒷전이었고 부모들이 자모음과 생활어  몇마디를 배워준 것이 고작이었다.그래도 대학문은 나왔는데 일자리가 여의치 못하여 고민하는 와중에 친척의 주선으로 부산의 한 회사에 입사하였다.초기에는 의사 불통으로 심각한 충격과 트러블로 고민했으나  건성으로 배워둔 뜯개말들이 밑천이 되어 목잘리는 봉변은 모면하였다.이리하여 한국어 공부에 정진했더니 불과 2년 만에 이중언어를 소유자로 받들리어 대중국 업무 담당자로 발탁되는 행운이 따랐고 매달 월급에다 두툼한 보너스를 얹어 받는다는 얘기다.대수 배운 말 덕에 대박몽을 이뤘으니 ‘호박이 넝쿨째’로 떨어지는 재수가  붙었다고  맞장구를 쳐주었다.   한국 업체의 대중국 진출과 조선족의 외국과 도시에로 대이동은 많은 부작용을 초래하였으나 이것은 개혁개방 과정에서 피치 못할 단계이고 경제난으로 고전을 겪는 조선족에게 있어서 정확한 선택일 수 밖에 없었다.생계가 박절했고 돈벌이가 급선무였다.이 사회적 대류동이 있었기에 우리 민족은 새생활을 꾸려가는데서 최우선인 경제적 기초를 확보하게 되었다.바로 이 생계 전쟁에서 다른 게 아닌 이중언어가 제일의 장사 밑천이었고 산전수전을 이겨가는 최상의 도구였다.오래 동안 페쇄된 체제 속에서 홀대를 받던 조선어가 개방과 국제화 물결을 헤가르는 악전 속에서 참값을 발휘한 것이다.   신구 체제 전환의 고비에서 조선족의 이중언어의 막중한 작용은 조선족이 국제 교류와 모든 경제 활동에서의 맹활약을 끌어내는 촉매였고 결과적으로 민족이  정체성을 유지하고 튼튼한 경제 기반을 구축하여 선진 민족의 실력을 키우는 데서 복합영양제의 역할을 발휘하였다는 사실이다.우리는 이중언어를 확보하였기에 개혁개방에서 제시한 경제발전과  빈곤해탈이란 목표를 앞장에서 달성하고 나라 전략에 급속히 부응할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사회 발전을 추동하는 선두주자로 될 수 있었다.국내건설,해외진출, 대외교류에서 물론이고 생산,교환과 소비의 전반 과정에서 일으키는 경제적 효과를 본다면  우리 민족언어의 자본적 역할이 지속적으로 커지고 가시화가 될 것은 틀림없다.   국제적 시각에서 조선족을 중국내 세계 한민족의 교두보로 보편적으로 인정하고 있는데 이것은 명실이 상부되는 평가이다.한민족 사회가 중국과 교류하는 과정에서 특히 경제적 교류를 진행하는 방면에서 조선족 사회는 튼튼한 기반이 되여왔고 우리 나라의 발전과 국제적 위상을 수립시키는데서 자타가 공인하는 기여를 하였다.오늘 우리나라는 아시아태평양 지역과 ‘일대일로’ 경제공동체에서 새로운 거물로 부상하고 있다.이 14억 인구의 땅에서 우리 민족사회가 한민족의 대중교류의 확고한 근거지로 자리매김하는 것은 나라의 발전과 민족사회의 동시 발전을 실현하는데 있어서 장원한 의미가 있다.여기서 결정적인 에너지 원천은 이중언어에 있다.   그러나 현재의 일반적 경향을 보면 민족어를 단순히 사유와 교제의 수단이라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그러나 국제적인 교류가 활발해 지고 언어의 보급 응용도 선명한 산업화 추세로 이루는 형세에서 보면 언어의 경제자원적 성격이 증폭되고 있으며 그를 리용하여 경제적 효과성을 추구하는 패러다임(新时代思想)도 신속히 확산되고 있다.이것은 경제가 발전하고 국제화 수준이 높아질수록 언어의 산업적 작용이 고양된다는 사실을 설명하는 것이다.   경제학은 어떻게 최소의 투입으로 특정된 경제적 목표를 성사하고 그 성과를 극대화시키는가를 연구하는 학문이다.조선족의 발전 과정을 보면 경제와 언어 사이에는 밀접한 련동 관계가 발생하고 언어 역시 경제적 가치,효용,비용,수익 등 활약적인 요소로 된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 수 있다.만약 어느 학자나 문사가 경제학 시각에서 ‘조선어경제학’  론저를  펴낸다면 열심히 읽을 심산이다. (끝) 2017-07-06 연변일보
58    대학 진학과 일터 댓글:  조회:2040  추천:1  2017-06-21
년부년(年復年)으로 치러지는 대학 입시장 문어귀에는 자식의 대박을 기원하여 몰려든 부모들이 어디다 찰떡 도배를 하는 장면이 가관 그 자체이다.아이의 피가 되기 싶은 갈망과 타오르는 향학열을 잠재울 길 없어 안절부절하는 그 모습에다 누가 야유하고 시야비야 론지를 부칠 리유가 없다. 저출산 시대에 태어나 모두가 공주이고 왕자인데 립신양명(立身扬名)하고 출세 가도를 달리라는 어시들의 주옥같은 애심에야 티끌 하나 없으니 말이다.    우리가 살던 옛날에 누가 대학에 진학했다면 온 동네 남녀로소가 누구 집 누구가 하늘의 별을 따왔다고 서로 전하며 야단을 때리던 기억이 그냥 새삼스럽다.말그대로 대학 진학은 신분의 수직상승을 위한 사닥다리이며 선망하는 직업을 꿰차는 지름길이고 번듯한 지위를 예약하는 보증수표였다.사무직이나 공무원 혹은 웬만하면 엄두도 못내는 전문 직종의 화이트칼러(白领层) 계급은 굳혀놓은 것이고 그 부모들도 이 세상 복을 독차지하는 기분일 것은 당연하였다.이처럼 대학이란 학위효과를 통해 사회의 상류에 오른다는 고착 관념은 바로 력사를 초월할 수 없었던 그 시대인의 시대사상이었을 것이다.     세월이 변하여 지금은 중증 장애자 이외에 줄에만 서도 대졸 모자 쯤은 걱정이 없다.도리어 우수생 고급인력마저 공급과잉인 시대가 도래하여 석박사의 기발을 들고 다녀도 변변한 일자리를 구할 수 없다는 탄식에 거세지고 있다.이리하여 대졸자 실업이 갈수록 뚜렷한 사회 문제로 되어 현재까지 탄탄대로를 달리듯 확 풀리는 해법을 내놓은 위인이 없다.전지전능한 창조주가 인간세계 통치자로 군림해도 근본적 해결 묘책이 없다는 맥빠진 소리들 뿐이다.그렇다면 사회적 가치관과 개인적 의식의 변화나 직업의 귀천을 가리지않는 자체적 노력이 선결되어야 취직의 오리무중에서 헤어 나올 수 있다는 결론이다 .   생계가 급하여 허둥대는 사이에 디지털정보시대도 뒤로 밀려가고 제4차산업혁명이 파도처럼 밀려온다.무인매표소,무인은행창구,무인자동차,로봇생산라인 등등 새 세기를 상징하는 차디찬 기기들이 우리의 생활 속에 파고 들어 전통적 일자리에서 인간을 몰아내고 있다.지능화시대의 도래를 예고하는 주의보이다.첨단기술이 현재의 대부분 직종을 력사의 저변에 매몰시키고 새 형태의 직업이 속속 만들어 질 것임이 틀림없다.이제 바로 사회의 산업 풍경이 뒤집히듯 바뀌고 문화 생태와 삶의 방식이 ‘뽕밭이 바다 되듯’ 변해 갈 것이다.오늘 등을 밀어 대학문에 들여보내는 아이들이 사회에 진출할 때는 극소수 최정예 그룹을 제외한 이외 모든 학문적 지위가 바닥을 치는 삶을 살아야 한단다.   이 시대를 맞이하기 위하여 대학의 초기부터 자기개발에 몰두해야 한다.자신의 능력,적성 및 특성 등을 확인하여 강점을 살리고 약점을 보완하는 작업을 세심하게 진행하여 학교 시절에 적어도 두가지 이상의 기초 직업 능력을 개발해야 한다.오래지 않아 판단과 추리 등 인간만의 지적 령역의 다부분마저 인공지능이 담당하고 일반적 직종 거의는 지능 로봇에 의해 대체된다.때문에 자신만의 개성적 목표를 수립하고 외부 세계와 공감대를 형성하면서 상호 협력을 진행하는 인맥을 구축하고 여기에 수요되는 감성교제 능력을 육성하는 것으로 참신한 직업 세계를 대비해야 한다.   조선족의 이중언어는 두 개 외국어로 충분히 이용되고도 남음이 있다.새 시대에는 지능화 기기들의 강력한 도움으로 기술이나 실무 기능을 장악하는 것은 전례없이 간단해 지게 된다.그러나 언어는 글이나 보고쓰고 하며 일조일석에 배워지는 것이 아니라 그 문화 환경 속에 푹 젖으며 온몸에 스며들어야 장악되는 것이다.우리의 이중언어는 이런 특정한 중한 문화 환경 속에서 존속하는 데다 정부의 정책적 지원을 받고 있다.이리하여 두개 언어의 원어민으로 불리어지는 조선족의 민족 가치는 국제화 속도와 정비례로 상승하는 사실이 날로 선명해 진다.조선족의 이중언어는 력사적 급변의 선와(漩涡) 속에서 침몰 탈출을 위한 ‘비상구명구(应急救命具)’가 아니었던가!   100년은 몰라도 10년, 20년 앞은 보며 살아야 할 세대들, 다가오는 불확실성 세계를 사는 기법을 배워야 하고 기성 새대도 이 시대적 사명을 함께 안아야 한다.오늘의 대학 진학은 과거 식자관(识字关) 수준의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지금 키워드(关键词)는 대학이란 계관이 아니라 심각한 자기개발과 정통한 이중언어이다.이것은 과제가 아니라 과업임을 가슴벽에 새겨지도록 명기하자! 2016-06-16일 길림신문
57    인재관의 재정립 댓글:  조회:2222  추천:0  2017-06-15
인재가 지식,지혜와 지력의 담체(担体=载体)이며 사회 발전을 추진하는 결정적인 요소라는 관념이 보편적 리성인식으로 자리 잡고 있다.더우기 국제화 경쟁 속에서 그 가치는 가파로운 상승선을 긋고 있으며 인적 자원에 대한 전략과 정책도 나라마다 끊임없이 다원화 다양화로 나가고 있다.   1.인재의 정의. 중국어와 한국어 사전에서는 인재를 학식,능력이나 재주가 뛰어난 사람들이라고 정의하며 人才 혹은 人材로 표기되는데 이는 동일한 단어의 두 가지 표기이다.그러나 최근 사회적 분업과 계층이 복잡해 지면서 인재는 성숙된 인재(人才)와 인재의 소지를 갖춘 인재(人材)로 구분해야 한다는 주장이 바짝 제기되고 관련 연구는 반드시 人才와 人材를 부동한 시각에서 다루어야 한다고 피력하고 있다.   이 견해는 일반적인 동조를 받고 있는바 보건대 현실의 변화에 부합되는 의미확대 해석이다.그리하여 기존의 인재란 개념의 내포를 세분화하고 외연을 확장하여 적재적처(适材适处)에 쓰이는 모든 기능자들을 마땅히 인재 범주로 분류해야 하는 과제가 제기된다.   2.협의적 인재와 광의적 인재 일반적으로 고층차 전문인들을 인재로 지칭하는데 이것은 기초사회 각 분야의 선행자(先行者,善行者),걸인(杰人),달인(达人),장인(匠人)들이 외면되는 협의적 인재관이다.최고 과학기술의 집적인 우주선도 우수한 연구 개발자와 수만개의 최정밀 수제(手制) 부품을 제조하는 순수경험을 루적한 노동자들이 수요된다.이 비행물의 어느 부분에 극소 오차에 생겨도 훼멸적인 결과를 가져온다.그러므로 불가결 필수적이라는 의미에서 지위의 고저를 떠나서 참여한 전체 성원들에게 인재 가치를 부여하는 광의적 인재관 수립이 필요하다   그러므로 인재의 개발과 육성의 사업은 사회의 모든 계층을 대상하여 누구도 인재로 편입될 수 있다는 리념을 동시에 보급해야 한다.광의성,층차성,상대성,군체성 이것이 새시대 인재 군체의 특성이다.   3.인재의 선발 중국 고대의 ‘천리마는 상존인데 백락은 드물다’는 명언은 사회 생산력이 락후하고 지역 간 소통이 페쇄된 환경에서 산생한 한 시인의 한탄이다.그러나 아직도 인재의 선택에서 어느 특정한 개인에게 의뢰하는 이 관습과 경향이 상당히 농후하다.   ‘백락의 말 선택’의 구습을 타파하고 ‘경기장에서 말을 선택’하는 법적 제도를 확립되어야 한다.인재 선발에서 공개성,공정성,공평성과 경쟁성을 가진 메카니즘(机制)를 구축함으로서 인재들이 백락의 출현을 애처롭게 기다리는 현상을 근절해야 한다.   4.인재의 자아교육 디지털 지능과학이 폭발적으로 발전하는 오늘 지공공자금을 대거 투입하여 후속적 교육을집중적으로 진행한다는 것은 비효률적이고 다량의 랑비를 조성하게 된다.지속교육 혹은 평생교육은 자아의 몫에 맞기고 불적격자는 가차없이 탈락되는 위기 환경을 조성해야 한다.특수한 전문 교육을 제외하고 이미 선발된 권역(圈域)내 성원의 범위에서 진행하는 공공교육은 종식되어야 한다.   인재들의 활력소는 우승열패(优胜劣败)의 법적 장치이다.오직 이 기초에서만 인재들이 부단히 자아 제고를 시도하며 그의 소질과 덕행을 제고할 수 있다.   인재 영입의 다원화 디지털 정보화 시대의 인재의 영입에는 다양한 변화가 일고 있는데 특히 호구,주택,높은 대우 등을 조건으로 인재를 본지에 영입하는 방식은 신속히 락후로 되도 있다.지역적 장벽을 타파하고 기술자문,기술지원,지재권 이양 등 계약 형식으로 필요한 기술적 혹은 전문적 난제를 해결하는 것은 현대적 방식으로 부상되고 있다.   현재 소속 관계와 거주지를 불변하고 여러가지 계약을 리행하는 탄력적 방식으로 과학 기술상의 문제들을 해결하는 방식이 광범히 류행된다.이것은 인재를 영입하고 지혜를 인입하고 연구성과를 도입하는 하는 것으로서 선진적이고 다각적인 영입으로 간주할 수 있다.   인재 문제에서의 악재 뒷문거래와 친분에 따라 사람을 등용하는 인재 문제에서의 완고한 적폐를 제거해야 한다.이 진부한 악습은 직위를 사고 파는 부패의 배양기(培养基)로서 사회의 공분을 사고 있다.   요컨대, 공공인재,관리인재와 전문인재에 관련된 모든 사업에서 공공인재 전략은 전 사회 인재 정책의 축도로 되고 있다.그러므로 공공인재 등용 정책의 최적화,제도화,법제화는 시종 그 사회의 인재 발전의 견인차 역할을 하게 될 것이다. (끝)
56    디지털 시대의 창의성 배양 댓글:  조회:2484  추천:0  2017-05-24
요즘, 90년대생들과 80년대생들의 업무 특성을 보면서 확연한 차이를 발견하였다. 전자는 컴퓨터나 스마트폰에는 무결한 악돌이나 독서나 필기에선 여무진 베돌인데 문장을 만들라면  단문을 쓰라해도 오사(误写),오자(误字),별자(别字)투성이라는 이것이다.문제가 생겨도 전자 기기를 뒤적이며 기성 해법이나 해답을 찾느라 헤매인다.후자도 물론 정보 기기가 필수지만 그래도 책을 보고 메모에 정성을 넣고 문장도 잘 만들고 어려운 문제에 부딪치면 머리를 굴리며 분석하고 해결책을 고안해 낸다.물론 다른 상황도 있고 세대와 경력의 차이도 있지만 기본적 창의력 차이가 눈에 띄게 나타나고 있다.    이 동네 고등학교 교사와 이 현상을 담론하였는데 그는 디지털정보 기기의 광범히 보급에 따라 보편적으로 발생하는 부수적 현상이라고 단언하였다.지식과 지력의 성장 단계에 처한 사람들이 인터넷에서 얻은 짧은 정보에 익숙해 지면서 기억하려는 의지가 약화된 두뇌 현상으로 보고 있다.현재 젊은이들의 정보 수집과 처리 과정을 보면 일반적으로 검색, 복사, 붙여넣기로 일관된 단순한 조작 과정으로 되어버리고 장문 읽기,쓰기와 기억의 뇌력적 심로(心劳)를 외면한 이것이 직접 원인이라는 것이다.그러니 자체로 새 정보를 만들기보다 외부적인 기존 정보 찾기에 물젖어 있다고 한다.결국 실시간의 간단하고 피상적인 정보가 란무하고 짧은 문장에 유혹된 결과이다.   전문가들의 연구에 따르면 영국·덴마크·노르웨이 등 서구 선진국의 젊은 층들의 지능지수(IQ)가 1990년대 후반을 정점으로 지속적으로 저하되고 있는데 과학기술의 발달로 인류의 지능이 상승하리라는 기대와 정반대 결과이다.그 가장 중요한 원인이 바로 게임기,컴퓨터,스마트폰 등 디지털 기구의 과도한 사용이다.하여 IT 업계의 거장들도 자녀들의 컴퓨터나 스마트폰 사용을 엄격히 제한하며 극력 종이책 독서와 필기 및 사고를 권장하고 있다.독서를 하고 책장을 펼치며 다양한 주제들을 다루어야만 주의력을 배양하고 감각 기능을 발달시키고 사고의 융통성을 향상시킬 수 있다는 주장이다.   정보 기술의 신속한 발전에 따른 디지탈 기기의 등장에 따라 전통적인 교사(教师)와 책 중심의 아날로그식 교육은 구시대의 유물이라고 오해하는 세태이다.그러나 창의적인 인재를 키우는데서 아날로그식으로 읽고,쓰고,풀고,토론하는 식의 교육은 영구불변의 진리라고 심리학자들도 말한다.교육은 분명 미래 지향적 사업으로서 지식에 대한 습득과 지능의 기본 전제인 주의력과 기억력과 사고력을 배양한다는 영구적인 의무를 완수하여야 한다.위하여 정보기기의 지지아래서 책장을 번지는 독서와 손을 써가는 필기와 풀기를 기본으로 한 새 사물의 창조 기능을 키워야 한다.이런 정보야만이 장기간 두뇌에 남아 숙성되는 과정을 거치면서 창조적 사유의 ‘원자재’로 승화된다는 진리는 기억해야 할 바이다.   창조적인 지식과 정보로서 부가가치를 창출하는 것은 개인적으로도 승자가 되는 길이다.교육 단계에 있는 후대들에게서 발생하는 독서의 감소와 단문 중심의 글읽기 습관은 우려해야 할 심각한 사안이다.책에 의한 공부는 단순히 글읽기를 넘어서 사색,평가,추론 그리고 문제 해결을 포함하는 복합적 론리적 과정이다. 디지털 교육이란 이 아날로그 교육이 중심이라는 이 방침을 이탈하면 창의력 인재가 아닌 오직 정보의 전달 기능만 소유한 로동자로 자랄 가능성을 내포하게 된다.디지털 기기에도 익숙하고 아날로그식 활동에도 능한 창의성과 감수성을 키워야 미래사회가 요구하는 일군으로 성장할 수 있다는 점은 명기해야 할 바이다.   현재 디지털 기기의 과도한 리용이 인류의 지적 능력을 훼멸하는 ‘판도라상자(潘多拉魔盒) 로 된다는 개연성을 제기하는 사람도 많다.인류가 디지털 문명의 풍요 속에 사고를 게을리하는 둔부(钝夫)로 된다 한다면 ‘기나라 사람의 하늘이 꺼질 근심’일테지만  지능화 디지털이 확장에 박차를 가하는 시점에서 아날로그식 교육을 지켜가야 한다는 필연성과 필요성이 눈앞의 현실로 발현되고 있다.   그러므로 후대들에 대한 아날로그식 교육 특히는 독서와 필기는 선택이 아닌 필연의 교육적 가치이다. 우리는 차디찬 디지털을 감성이 풍부한 아날로그 교육에 적용하여 지능화 시대를 주도할 글로벌 인재를 키워가야 한다.. (끝) 2017-05-20 훅룡강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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