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
http://www.zoglo.net/blog/kokuryeo 블로그홈 | 로그인

카테고리

※ 댓글

<< 2월 2019 >>
     12
3456789
10111213141516
17181920212223
2425262728  

방문자

홈 > 전체

전체 [ 67 ]

67    제4편: 열국의 쟁웅(爭雄)시대(대(對) 한족(漢族) 격전시대) 댓글:  조회:39  추천:0  2019-01-31
제1장: 열국(列國) 총론(總論) 열국 연대(年代)의 정오(正誤) 삼조선이 무너지고 신수두님 · 신한 · 말한 · 불구래 등의 참람 ( 僭濫 ) 한 칭호를 일컫는 자가 각지에서 들고 일어나, 열국 분립의 판국을 만들었음은 이미 앞에서 말하였거니와, 열국사 ( 列國史 ) 를 말하려면 전사 ( 前史 ) 에서 열국의 연대를 줄여버렸으므로 이제 그 연대부터 말해야겠다. 어찌하여 열국의 연대가 줄어졌다 하는가? 먼저 고구려 연대가 줄어진 것부터 말하리라. 고구려가 신라 시조 혁거세(赫居世) 21년, 기원전 37년에 건국하여 신라 문무왕 ( 文武王 ) 8년 ( 기원 668 년 ) 에 망하니 나라를 누리기를 도합 705 년이라고 일반 역사가들이 적어왔다. 그러나 고구려가 망할 때에, 9 백 년에 마치지 못한다 ( 不及九百 年 ). ”라고 한 비기 ( 秘記 ) 가 유행했는데, 비기가 비록 요망한 글이라 하더라도 그 시대에 그 비기가 인심 동요의 도화선이 되었으니, 이때 ( 문무왕 8 년 ) 에 고구려의 연조가 8 백 몇십 년 되었음이 명백하므로, 본기 ( 本紀 ) 의 705 년이 의문됨이 그 하나요, 고구려 본기로 보면 광개토왕이 시조 추모왕 ( 鄭후王 ) 의 13 세손밖에 안 되는데 광개토왕의 비문에, “ 17 세손 광개토경 평안호태왕에게 전하였다 ( 傳之十七世孫 廣開土境平安好太王 ). ”고 한 문구에 의거하면 광개토왕이 시조 추모왕의 13 세손이 아니라, 17 세손이다. 이같이 세대가 빠진 본기라, 그 705 년이라고 한 연조는 믿을 수 없음이 그 둘이요, 본기로써 상고하면 고구려 건국이 위우거 ( 衛右渠 ) 가 멸망한 지 72 년만이지마는, 북사 ( 北史 ) 고려전 ( 高麗傳 ) 에는 막래 ( 莫來 ) 가 서서 부여를 쳐 크게 깨뜨리고 이를 복속시켰는데, 한 ( 漢 ) 의 무제 ( 武帝 ) 가 조선을 토멸하고 사군 ( 四郡 ) 을 둘 때에 고구려를 현 ( 縣 ) 이라고 하였다. 막래는 해동역사 ( 海東繹史 ) 에, “모본 ( 慕本 ) 의 잘못인가? ” 하였으나, 막래는 `무뢰'로 읽을 것이니, 우박〔雹 〕이라는 뜻이고, 신 ( 神 ) 이라는 뜻이다 . 대주류왕 ( 大朱留王 ) 의 이름 `무휼 (憮恤 ) '과 음이 같을 뿐더러, 본기에도 동부여를 정복한 이가 곧 대주류왕이니, 막래는 모본왕 ( 幕本王 ) 이 아니라 대주류왕일 것이요, 막래 곧 대주류왕이 동부여를 정복한 뒤에 한나라 무제가 사군을 설치하였으니, 고구려 건국이 사군 설치보다 약 백 몇십년 전이 될 것이 의심없음이 그 셋이다. 고구려 당시의 비기 ( 秘記 ) 와 그 자손 제왕의 건립으로 된 비문이 먼저 분명히 증명하고, 비록 외국인이 전해 들은 기록이지마는 북사 ( 北史 ) 가 또한 증명하니, 고구려 연대의 백 몇십 년 줄어들었음이 더욱 확실하다. 안순암 ( 安順庵 : 安鼎福 ) 선생이 고구려 족자 ( 族子 ) 인 안승 ( 安勝 ) 을 봉한 신라 문무왕의 말에서, “햇수 거의 8 백년 ( 年將八百年 ) ”이라고 한 말을 인용하여 고구려의 연조가 줄어 들었음을 일정하였으나, 실은 8 백을 9 백으로 하는 게 옳을 것이다. 대개 고구려의 연대를 줄인 뒤에 9 백을 8 백으로 고쳐 고구려의 향국 ( 享國 ) 이 705 년이라는 위증을 만든 것이다. 어찌하여 고구려의 연대가 줄어들었는가? 이는 고대 건국의 선후 ( 先後 ) 로 국가의 지위를 다투는 풍기 ( 風氣 : 鄒牟와 松讓이 서울 세운 앞뒤를 다툰 따위 ) 가 있으므로, 신라가 그 건국이 고구려와 백제 보다 뒤짐을 부끄러이 여겨, 두 나라를 멸망시킨 뒤에 기록상의 세대 와 연조를 줄여 모두 신라 건국 이후의 나라로 만든 것이고, 동부여 · 북부여 등의 나라는 신라와 은혜나 원수가 없는 앞선 나라이지만 이미 고구려의 연조를 백 몇십 년이나 줄였으니, 사실의 관계상 고구려 · 백제의 부조 ( 父祖 ) 뻘인 동부여의 연대와 고구려 · 백제의 형제뻘인 가라 ( 加羅 ) · 옥저 ( 沃沮 ) 등의 나라의 연대까지 줄여버린 것이다. 그래서 이제 전사 ( 前史 ) 에 보인 고구려 건국 원년에서 백 몇십 년을 넘어, 기원전 190 년경의 전후 수십 년 동안을 동부여 · 북부여와 고구려의 분립한 시기로 잡고, 그 이하 모든 나라도 같은 시기로 잡아 열국사 ( 列國史 ) 를 서술하고자 한다. 열국의 강역(疆域)[편집] 여러 나라의 연대만 줄였을 뿐 아니라, 그 강역도 거의 다 줄여서, 북쪽의 나라가 수천 리를 옮겨 남쪽으로 온 것이 한둘이 아니다. 강역은 또 어찌하여 줄여졌는가? 신라 경덕왕 ( 景德王 ) 이 북쪽의 땅을 잃고, 그 북쪽의 옛 지명과 고적을 남쪽으로 옮김이 첫째 원인이 되고 고구려가 쇠약해져서 압록강 이북을 옛 땅으로 인정하지 못하여 전대 ( 前代 ) 의 지리를 기록할 때에 북쪽의 나라를 또한 남쪽으로옮긴 것이 많음이 둘째 원인이 되어, 조선의 지리 전고 ( 典故 ) 가 말할수 없이 뒤바뀌어, 비록 근세의 한구암 ( 韓久庵 : 韓百謙 ) · 안순암 등 여러 선유의 수정을 거쳐서 얼마쯤 회복이 되었으나, 열국 시대의 지리는 그 퇴축 ( 退縮 ) 됨이 전과 마찬가지다. 이제 그 대략을 말할 것이다. 첫째는 부여다. 신조선이 최초에 세 개의 부여로 나뉘었으니, 하나는 북부여이다. 북부여는 아사달에 도읍하였다. 삼국지에 “현도의 북쪽 천 리 ( 玄之北千里 ) ”라 하였으니, 지금의 합이빈인데 선유들은 지금의 개원 ( 開原 ) 이라고 하였다. 또 하나는 동부여인데, 동부여는 갈사나 ( 曷思那 ) 에 도읍하였다. 대무신왕 ( 大武神王 ) 이 동부여를 칠 때, `북벌 ( 北伐 ) 한다. '고 하였으니 고구려의 동북 --지금의 훈춘 ( 揮春 ) 등지가 동부여인데, 선유들은 지금의 강릉 ( 江陵) 이라고 하였다. 다른 하나는 남부여다. 대무신왕이 동부여를 격파한 뒤에 동부여가 둘로 나누어져 하나는 옛 갈사나에 머물렀으니, 곧 남부여다. 동부여는 오래지 않아 고구려에 투항하매, 국호가 없어지고 남부여는 문자왕 ( 文姿王 ) 3 년 ( 기원 494 년 ) 에 비로소 고구려에 병합되었다. 동부여 · 남부여는 곧 함흥인데, 선유들은 그 강역을 모를 뿐 아니라, 그 명칭조차 몰랐다. 둘째는 사군 ( 四郡 ) 이다. 위만 ( 衛滿 ) 이 동으로 건너온 패수가 위략의 만반한 ( 滿潘汗 ), 한서지리지의 요동군 ( 選東郵 ) 문번한 ( 沈睡규 ), 곧 지금의 해성 ·개평 등지이니 헌우란 ( ) 이 옳다. 한나라 무제 ( 武帝 ) 가 점령한 조선이 패수 부근, 위만의 옛 땅이니, 그가 설치한 사군만 삼조선의 국명과 지명을 가져다가 요동군 안에 가설한 것인데, 선유들은 매양 사군의 위치를 지금의 평안 · 강원 · 함경 등 여러 도와 고구려의 서울인 지금의 만주 환인 ( 桓仁 ) 등지에서 찾았다. 셋째는 낙랑국 ( 樂浪國 ) 이다. 낙랑국은 한 ( 漢 ) 의 낙랑군 ( 樂浪郡 ) 과 각각 다른, 지금의 평양에 나라를 세운 것인데 선유들은 이를 혼동하였고, 그 밖에 고구려 · 백제의 초대의 서울과 신라 · 가라의 위치는 선유들의 수정한 것이 대략 틀림이 없으나, 주군 ( 州那 ) 혹은 전쟁을 한 지점의 위치는 거의 신라 경덕왕 이후에 옮겨다 설치한 지명을 그대로 써서 착오가 생겼으므로 할 수 있는 대로 이를 교정하여 열국사를 서술해 나가고지자 한다. 동부여(東扶餘)의 분립(分立)[편집] 1) 解夫婁(해부루)의 東遷(동천)과 解幕漱(해모수)의 일어남 북부여와 두 동부여와 고구려의 네 나라는 신조선의 판도 안에서 나라를 세웠다. 그러나 신조선이 멸망하여 부여 왕조가 되고 부여가 다시 나누어져서 위의 세 나라가 되었는지, 부여는 곧 신조선의 별명이고 따로 부여라는 왕조가 없이 신조선으로 부터 위의 세 나라가 되었는지, 이는 상고할 길이 없거니와, 신조선이 흉노 모돈 ( 冒頓) 에게 패한 때가 기원전 200년 경이요, 동 ·북부여의 분립도 또한 기원전 200 년경 이니, 나중의 설이 혹 근사하지 않을까 한다. 전사 ( 前史 ) 에 동 ·북부여가 분립한 사실을 기록하여, “부여왕 해부루가 늙도록 아들이 없어 산천에 다니며 기도하여 아들 낳기를 구하다가 곤연 ( 鯤淵 : 鏡泊湖 경박호 ) 에 이르러서는 왕이 탄 말이 큰 돌을 보고 눈물을 흘리므로 이를 괴이하게 여겨 그 돌을 뒤집으니 금빛 개구리 모양의 어린아이가 있는지라 왕이 말하기를, “이는 하늘이 주신 내 아들이다.” 하고 데려다 길러서 이름을 금와 ( 金蛙 ) 라 하고 태자로 삼았다. 그 뒤 얼마만에 상 ( 相 ) 아란불 ( 阿蘭弗 ) 이 왕에게, “요사이 하늘이 저에게 내려오셔서 말씀하시기를 이 땅에는 장차내 자손으로 하여금 나라를 세우게 하려고 하니, 너희들은 동해변의 가섭원 ( 迦葉原 ) 으로 가거라, 그 땅이 기름져 오곡이 잘 되느니라고 하더이다.” 하고 서울을 옮기기를 청하므로, 왕이 그의 말을 쫓아 가섭원으로 천도하여, 나라 이름을 동부여라 하고 고도 ( 故都 ) 에는 천제 ( 天帝 ) 의 아들 해모수 ( 解募漱 ) 가 오룡거 ( 五龍車 ) 를 타고, 종자 백여 명은 흰 고니〔白鳥〕를 타고 웅심산 ( 熊心山 , 일명 阿斯山 , 또 일명은 鹿山이니 지금 哈爾濱의 宗達山 ) 에 내려와서, 채운 ( 彩雲 ) 이 머리 위에 뜨고 음악이 구름 속에서 울리기를 10 여일 만에, 해모수가 산 아래로 내려와, 새깃의 관을 쓰고 용광 ( 龍光 ) 의 칼을 차고, 아침에는 정사 ( 政事 ) 를 듣고 저녁에는 하늘로 올라가므로 세상 사람들이 천제의 아들이라 일컬었다.”고 하였다. 어떤 이는, “기록이 너무 신화적이라 믿을 수 없다.”고 하지마는, 어느 나라이고 고대의 신화시대가 있어 후세 역사가들이 그 신화속에서 사실을 캐내게 되는 것이다. 이를테면, `말이 돌을 보고 눈물을 흘렸다' `하늘이 아란불에게 내려왔다. ' 해모수가 오룡거를 타고 하늘에서 내려왔다. '고 한 말들은 다 신화이지만, 해부루가 남의 집 사생 아인 금와를 주워다가 태자를 삼았음도 사실이요, 해부루가 아란불의 신화에 의하여 천도를 단행한 것도 사실이요, 해모수가 천제의 아들이라고 일컫고 고도 ( 故都 ) 에 웅거하였음도 사실이니, 통털어 말하면 우리 북부여의 분립은 역사상 빼지 못할 큰 사실이다. 다만 우리가 유감으로 생각하는 것은, 이것이 북부여인이나 동부여인이 부여의 계통을 서술하기 위하여 기록한 것이 아니라, 한갓 고구려인이 그 시조 추모왕 ( 鄒牟王 ) 의 내력을 설명하기 위하여 기록한 것이므로 겨우 해부루 ·해모수 두 대왕이 동 ·북부여로 분립한 약사를 말했을 뿐이고, 그 이전의 부여 해부루의 내력에 대하여 말하지 아니 하였음이 그 하나요, 또한 그나마 고구려인이 기록한 원문이 아니라 신라 말엽의 한학자인 불교승이 개찬 ( 改撰 ) 한 것이므로, 신가를 고구려의 이두문대로 `상가 ( 相加 ) '라 쓰지 않고 한문의 뜻대로 상 ( 相 ) 이라 썼으며, `가시라'를 고구려 이두문대로 `갈사나 ( 曷思那 ) '라 쓰지 않고 불경 ( 佛經 ) 의 명사에 맞추어 가섭원 ( 加葉原 ) 이라 써서 본래의 문자가 아님이 그 둘이다. 당시의 제왕 ( 帝王 ) 은 제왕인 동시에 제사장 ( 祭司長 ) 이며, 당시의 장상 ( 將相 ) 은 장상인 동시에 무사 ( 巫師 ) 요, 복사 ( 卜師 ) 였으니, 해부루는 제사장 ---대단군의 직책을 세습한 사람이고 아란불은 강신술 ( 降神術 ) 을 가진 무사와 미래를 예언하는 복사의 직책을 겸한 상가 ( 相加 ) 였다. 대단군과 상가가 가장 높은 지위에 있지만, 신조선의 습관엔 내우외환 같은건 물론이요, 천재지변 같은 것도 그 허물이 대단군에게로 돌아간다 ( 삼국지에 홍수와 가뭄이 고르지 못하고 오곡이 잘 익지 아니하면 곧 그 허물이 왕에게로 돌아가서 왕을 바꿔야 한다고 하고, 혹은 마땅히 죽여야 한다 --水早不調 五穀不登 輒歸輒於 或 言當易 或言當殺 ) 고 하였다. 천시 ( 天時 ) 나 인사 (人事 ) 에 불행이 있으면 대단군을 대단군으로 인정치 않고 내쫓았는데, 이때가 흉노 모돈과 전쟁을 치른지 오래지 않았으니, 아마 패전의 부끄러움으로 말미암아 인민의 신망이 짧어져서 대단군의 지위를 보전할 수 없으므로 아란불과 모의해 갈사나 --지금의 훈춘 등지로 달아나서 새 나라를 세운 것이고, 해모수는 해부루 와 동족이며 고주몽 ( 高朱蒙 ) 의 아버지다. 삼국유사 왕력편 ( 王歷篇 ) 에 주몽을 단군의 아들이라 하였으니, 대개 해모수가 해부루의 동천 ( 東遷 ) 을 기회하여 하늘에서 내려온 대단군이라 스스로 일걷고 왕위를 도모한 것이고, 부여는 불 곧 도성 ( 都城 ) 혹은 도회를 일컬음이므로, 해부루가 동부여라 일컬으매, 해모수는 북부여라 일컬었을 것이니, 북부여라는 명칭이 역사에 빠졌으므로 최근 선유들이 두 가지를 구별 하기 위하여 비로소 왕 노릇한 부여를 북부여라 일컬었다. 2) 南北曷思·南北 沃沮의 두 東扶餘의 분립(남북갈사·남북옥저의 두 동부여의 분립) 해부루가 갈사나 --지금의 훈춘에 천도하여 동부여가 되었음을 앞서 말한 바와 같거니와, 갈사나란 무엇인가? 우리 옛말에 숲을 `갓' 혹은 `가시'라 하였는데, 고대에 지금의 함경도와 만주 길림의 동북부와 소련 연해주의 남쪽 끝에 나무가 울창하여 수천 리 끝이 없는 대삼림의 바다를 이루고 있어 이 지역을 `가시라'라 일컬었으니, `가시라'란 삼림국 ( 森林國 ) 이라는 뜻이다. `가시라'를 이두문으로 갈사국 ( 曷思國 ) ·가슬라 ( 加瑟羅 ) ·가서라 ( 迦西羅 ) ·아서량 ( 阿西良 ) 등 으로 적는데, 이는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와 지리지에 보인 것이고, 또 혹`가섭원기 ( 迦葉原記 ) '라고도 하였으니, 이는 대각국사 ( 大覺國師 ) 의 삼국사 ( 三國史 ) 에 보인 것이다. 지나사에서는 `가시라'를 `옥저 ( 沃沮 ) '라고 적었는데, 만주원류고 ( 滿洲源流考 ) 에 의하면 옥저는 `와지'의 번역이고, `와지'는 만주어의 숲이니, 예 ( 濊 ) 곧 읍루 ( 輯婁 ) 는 만주족의 선조요, 읍루가 당시 조선 열국 중 말〔言〕이 홀로 달라서 삼국지나 북사에 특기하였으니, 우리의 `가시라'를 예족 ( 濊族 ) 은 `와지'라 불렀으므로 지나인들은 예어를 번역하여 옥저라고 한 것이다. 두만강 이북을 북갈사 ( 北曷思 ) 라 일컫고, 이남을 남갈사 ( 南曷思 ) 라 일컬었는데, 북갈사는 곧 북옥저 ( 北沃沮 ) 요, 남갈사는 곧 남옥저 ( 南沃沮 ) 이니 지금의 함경도는 남옥저에 해당된다. 고사에 남·북옥저를 다 땅이 기름지고 아름답다고 하였으나, 지금의 함경도는 메마른 땅이니, 혹 옛날과 지금의 토질이 달랐던 것이 아닌가한다. 두 `가시라'의 인민들이 순박하고 부지런하여 농업과 어업에 종사하고 여자가 다 아름다우므로, 부여나 고구려의 호민 ( 豪民 ) 들이 이를 착취하여 어물과 농산물을 천 리 먼 길에 갖다 바치게 하고, 아름다운 여자를 뽑아다가 비첩 ( 婢妾 ) 을 삼았다고 한다. 해부루가 북 ` 가시라' --지금의 훈춘으로 옮겨가 동부여가 되어, 아들 금와를 거쳐 손자 대소 ( 帶素 ) 에 이르러 대소가 고구려 대주류왕 ( 大朱留王 ) 에게 패하여 죽고, 아우 모갑 ( 某甲 ) 과 종제 ( 從弟 ) 모을 ( 某 乙 ) 이 나라를 다투어 모을은 구도 ( 舊都 ) 에 웅거하여 북갈사 ( 北曷思 ) 혹은 남동부여 ( 南東扶餘 ) 라 하였는데, 그 자세한 것은 다음 장에서 말하려니와 지금까지의 학자들이, a) 동부여가 나뉘어 북동 ·남동의 두 부여로 되었음을 모르고 한 개의 동부여만 기록하고, b) 옥저가 곧 갈사 ( 曷思 ) 임을 모르고 옥저 이외에서 갈사를 찾으려 하고, c)북동 ·남 동의 두 갈사가 곧 남 ·북의 두 갈사 ( 兩加瑟羅 ) 요, 남북의 두 갈사가 곧 남북의 두 옥저임을 모르고 부여 ·갈사 ·옥저를 각각 다른 세 지방으로 나누고, d) 강릉 ( 江陵 ) 을 `가시라' --기슬나 ( 加瑟那 ) 라 함을 신라 경덕왕이 북쪽 땅을 잃은 뒤에 옮겨 설치한 고적인 줄을 모르고 드디어 기슬나가 동부여의 옛 서울이라고 하였다 . 그래서 지리가 문란하고 사실이 흔란해져서 갈피를 잡지 못하게 되었거니와, 이제 갈사 ( 曷思 ) ·가슬 ( 加瑟) ·가섭 ( 迦葉 ) 이 이두문으로 다 같이 `가시라'임 을 알고, 대소의 아우 모갑과 그 종제 모을이 나뉘어 있는 두 `가시라'의 위치를 찾아서 두 `가시라'가 곧 남·북 옥저임을 알고, 추모왕이 동부여에서 고구려로 올 때에 `남으로 달아났다 ( 南奔 ). '는 말과 , 주류왕 ( 朱留王 ) 이 고구려에서 동부여를 칠 때에, `북쪽을 쳤다 ( 北伐 ). '는 말로써 북 `가시라'의 위치를 알아서 위와 같이 정리하였다. 3)北扶餘의 문화 북부여의 역사는 오직 해모수가 도읍을 세운 사실 이외에는 겨우 북부여의 별명인 황룡국 ( 黃龍國 ) 이 고구려 유류왕 ( 備留王 ) 본기에 한번 보이고는 다시 북부여에 대한 말이 우리 조선인의 붓끝으로 전해진 것이 없고, 만일 전해진 것이 있다 하면 다 지나사에서 초록한 것이다. 북부여의 서울은 `아스라' --부사량 ( 扶斯樑 ) 이니, 곧 대단군 왕검의 삼경 ( 三京 )-- 세 왕검성의 하나요, 지금의 소련령 ( 領 ) 우수리[烏蘇里〕는 곧 `아스라'의 이름이 그대로 전해진 것이다. 그 본래의 땅은 지금의 합이빈이니, 망망한 수천 리의 평원으로 땅이 기름져서 오곡이 잘 되고, 종횡으로 굴곡 ( 屈曲 ) 한 송 ( 松 : 古名 아리라 ) 이 있어 교통의 편의를 주고, 인민이 부지런하고 굳세며, 대주 ( 大珠 ) ·적옥 ( 未玉 ) 의 채굴과 그림 비단과 수놓은 비단의 직포와 여우 ·삵·원숭이·담비 등의 가죽을 외국에 수출하며, 성곽 ·궁설의 건축과, 창고 저축의 많음이 다 옛 서울의 문명을 자랑했다. 왕검의 태자 부루가 하우에게 홍수 다스라는 법을 가르쳤다 운운하는 금간옥첩의 문자도 왕궁에 보관되어 있고, 신지 ( 神志 ) 라 일컫는 이두문의 역사류며, 풍월 ( 風月 ) 이라 일컫는 이두문의 시가집 ( 詩歌集 ) 도 대개 이 나라에 수집해 있었다. 해모수 이후에 북부여는 예와 선비를 정복하여 한때 강국으로 일컬어 지다가 뒤에 예와 선비가 반 ( 叛 ) 하여 고구려로 돌아가자, 국세가 마침내 쇠약해져서 조선 열국의 패권을 잃어버리기에 이르렸다. 고구려의 발흥(勃興)[편집] 1) 鄒牟王(추모왕)의 고구려 건국 고구려 시조 추모 ( 鄒牟 : 혹 朱蒙 ) 는 천생으로 용맹과 힘과 활 쏘는 재주를 타고나서, 과부 소서노 ( 召西奴 ) 의 재산으로 영웅호걸을 불러 모아 교묘하게 왕검 이래의 신화를 이용하여, 하늘의 알에서 강생 ( 降 生 ) 하였다 자칭하고 고구려를 건국하였다. 안으로 열국의 신임을 받아 정신적으로 조선을 통일하고 밖으로 그의 기이한 행적의 이야기를 지나 각지에 퍼뜨려서 그 제왕과 인민들이 교주로 숭배하기에 이르렀으므로, 신라 문무왕 ( 文武王 ) 은, `남해에 공을 세우고, 북산에 덕을 쌓았다 ( 立功南海 積德北山 ). ' 하는 찬사를 올렸고, 지나 2 천 년 이래의 유일한 공자 반대자인 동한 ( 東漢 ) 의 학자 왕충 ( 王充 ) 이 그 사적을 기록함에 이르렀다.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를 보면 기원전 58 년이 출생한 해요, 기원전 37 년이 그 즉위한 해이지만, 이는 줄어든 연대라 의거할 것이 못 되고, 추모 ( 鄒牟 ) 가 곧 해모수의 아들이니 기원전 200년 경 동 · 북부여가 분립하던 때가 출생한 때일 것이고, 위만과 같은 때 일 것이다. 처음에 아리라〔松花江〕의 부근에 있는 장자 ( 長者 ) 가, 유화 ( 柳花 ) · 훤화 ( 萱花 ) ·위화 ( 葦花 ) 의 세 딸을 두었는데, 다 절세의 미인이요, 유화가 더욱 아름다웠다. 북부여왕 해모수가 나와 다니다가 유화를 보고 놀라 사랑하여 야합해서 아이를 배었다. 그러나 이때 왕실은 호족과만 결혼하고 서민과는 결혼을 하지 아니했으므로 해모수가 그 뒤에 유화를 돌아보지 아니하였고, 서민은 서민과만 결혼하는데, 남자가 반드시 여자의 부모에게 가서 폐백을 드리고 사위되기를 두 번, 세 번 간곡히 빌어서 그 부모의 허락을 얻어서 결혼하고 결혼한 뒤에는 남자가 여자의 부모를 위해, 그 집의 머슴이 되어 3 년의 고역을 치르고야 딴 살림을 차려 자유로운 가정이 되었으므로 유화의 실행이 발각되매 그 부모가 크게 노하여 유화를 잡아 우발수 ( 優渤水 ) 에 던져 죽이려고 하였다. 그러나 어떤 어부가 그녀를 건져 동부여왕 해금와 ( 解金輕 ) 에게 바쳤다. 금와왕이 유화의 아름다운 자색을 사랑하여 후궁에 두어 첩을 삼았는데, 오래잖아 아이를 낳으니 곧 해모수와 야합한 결과였다. 금와왕이 유화를 힐문하니 유화가 이를, “해 그림자에 감응하여 낳은 천신 ( 天神 ) 의 아들이고, 자기가 아무 잘못을 범한 일이 없다.”고 했다. 금와왕이 그 말을 믿지 않고, 그 아이를 돼지에게 먹이려고 우리에 넣어도 보고 말에 밟혀 죽으라고 길에 내던져도 보고, 산짐승의 밥이 되라 하여 깊은 산속에 버려도 보았으나, 다 아무 소용이 없으므 로 이에 유화에게 거두어 기르기를 허락하였다. 그 아이가 자라니 그 또래에서 기운이 뛰어나고 활 잘 쏘기가 짝이 없으므로 이름을 추모 ( 鄒牟 ) 라고 하였다. 위서 ( 魏書 ) 에는 추모를 주몽 ( 朱蒙) 이라 쓰고, 주몽은 부여 말로 활 잘 쏘는 사람을 일컬은 것이라고 풀이하였으며 만주원류고 ( 滿洲源流考 ) 에는, “지금 만주에 활 잘 쏘는 사람을 `주릴무얼〔卓琳奔阿〕'이라 하니, 주몽은 곧 `주릴무얼'이다. '라고 하였다. 그러나 광개토왕의 비문에는 주몽을 추모라 하였으며, 문무왕 ( 文武王 ) 의 조서 ( 詔書 ) 에는 `중모 ( 中牟 ) '라 하고 `주몽'이라고 하지 않았다. 주몽이라 하였음은 지나사에 전해오는 것을 신라의 문사들이 그대로 써서 고구려 본기에 올리게 된 것인데 추모 · 중모는 `줌' 혹은 `주모'로 읽을 것이니, 이는 조선어요 주몽은 `주물'로 읽을 것이다. 이는 예어 ( 濊語 )-- 만주족 시대의 말로, 지나사의 주몽은 예어를 말한 것이니, 원류고에 말한 바가 이치에 가깝다고 할 것이다. 이 책에서는 비문에 따라 추모 ( 鄒牟 ) 라고 한다. 금와왕이 아들 7 형제를 두었는데, 맏아들이 대소이다. 대소가 추모의 재주를 시기하여 왕에게 권하여 죽이려고 하였는데, 늘 유화의 주선으로 화를 면했다. 추모가 19 살이 되자 대궐에서 기르는 말 먹이는 일을 맡아보았는데 말을 다 살찌고 튼튼하게 잘 먹였으나 오직 준마 하나를 골라 혀에 바늘을 꽂아놓아 말이 먹지 못해서 날로 여위어 졌다. 왕이 말들을 돌아보고는 추모의 말 잘 먹인 공을 칭찬하고, 그여윈 말을 상으로 주었다. 추모는 바늘을 뽑고 잘 길러서 신수두의 10 월 대제 ( 大祭 ) 에 타고나가 사냥에 참여하였는데, 왕은 추모에게 겨우 화살 하나를 주었지마는, 추모는 말을 잘 달리고 활을 잘 쏘아 그가 쏘아 잡은 집승이 대소 7 형제가 잡은 것보다 몇 갑절이 더 많았다. 이에 대소는 더욱 그를 시기하여 기어코 죽이려고 음모를 꾸였다. 추모가 이를 알고 예씨 ( 禮氏 ) 에게 장기들어 표면으로 가정생활에 안심하고 있음을 보이고 속으로는 은밀히 오이 ( 烏伊 ) ·마리 ( 摩離 ) ·협부 ( 父 ) 세 사람과 공모하여 비밀히 어머니 유화에게 작별을 고하고 아내를 버리고는 도망하여 졸본부여 ( 卒本扶餘 ) 로 갔는데, 이때 추모의 나이 22 살이었다. 졸본부여에 이르니 이곳의 소서노 ( 召西奴 ) 라는 미인이 아버지 연타발 ( 延陀渤 ) 의 많은 재산을 물려받아서, 해부루왕의 서손 ( 庶孫 ) 우태 ( 優台 ) 의 아내가 되어 비류 ( 沸流 ) ·온조 ( 溫祚 ) 두 아들을 낳고 우태가 죽어 과부로 있었는데, 나이 37 살이었다. 추모를 보자 서로 사랑하여 결혼하였는데 추모는 그 재산을 가지고 뛰어난 장수 부분노 ( 扶芬奴 ) 등을 끌어들이고 민심을 거두어 나라를 경영하여, 흘승골 ( 升骨 ) 의 산 위에 도읍을 세우고 나라 이름을 `가우리'라 하였다. `가우리'는 이두자 ( 吏讀字 ) 로 고구려 ( 高句麗 ) 라 쓰니, 중경 ( 中京 ) 또는 중국 ( 中 國 ) 이라는 뜻이었다. 졸본부여의 왕 송양 ( 松讓 ) 과 활쏘기를 겨루어 이를 꺾고 이어 부분노를 보내 그 무기고를 습격해서 빼앗아 마침내 그 나라를 항복받고, 부근의 예족 ( 濊族 ) 을 내쫓아 백성들의 폐해를 없앴으며, 오이 ( 烏 伊 ) ·부분노 등을 보내어 태백산 ( 太白山 ) 동남쪽의 행인국 ( 荇人國 : 지점 미상 ) 을 토멸하여 성읍 ( 城邑 ) 을 삼고, 부위염 ( 扶慰) 을 보내어 동부여를 쳐서 `북가시라'의 일부분을 빼앗으니 , 이에 고구려가 섰다. 전사 ( 前史 ) 에 왕왕 송양 ( 松讓 ) 을 나라 이름이라고 하였는데, 이상 국집 ( 李相國集 ) 동명왕편 ( 東明王篇 ) 에 인용한 구삼국사 ( 舊三國史 ) 를 상고해보면 비류왕 송양 ( 沸流王松讓 ) 이라고 하였으니, 비류는 곧 부여로 졸본부여를 일컬은 것이므로, 송양은 나라 이름이 아니라 졸본 부여왕의 이름이다. 또 추모가 졸본부여의 왕녀에게 장기들었는데, 왕이 아들이 없었으므로 왕이 죽은 뒤 그 자리를 이어 받았다고 하였으나 졸본부여의 왕녀 곧 송양의 딸에게 장가 든 사람은 추모의 아들 유류 ( 備留 ) 요, 추모가 장가든 소서노는 졸본부여의 왕녀가 아니다 . 추모왕을 본기 ( 本紀 ) 에 `동명성왕 ( 東明聖王 ) '이라 하였으나, 동명 ( 東明 ) 은 `한몽'으로 읽을 것이니, `한몽'이란신수두 대제 ( 大祭 ) 의 이름 이다. 추모왕을 신수두 대제에 존사 ( 尊祀 ) 하므로 한몽 --동명이라는 칭호를 올린 것이고, 성왕의 성 ( 聖 ) 은 `주무'의 의역 ( 義譯 ) 이다. 2) 東扶餘와 고구려의 알력 추모왕 다음으로 아들 유류왕 ( 儒留王 ) 이 왕위를 잇고, 유류왕 다음 에 그 아들 대주류왕 ( 大朱留王 ) 이 왕위를 이었다. 유류는 본기의 유리명왕 ( 琉璃明王 ) 유리 ( 類利 ) 이니, 유류 ( 儒留 ) ·유리 ( 琉璃 ) ·유리 ( 類 利 ) 는 다 `누리'로 읽을 것으로 세 ( 世 ) 라는 뜻이고 명 ( 明 ) 이라는 뜻이요, 대주류왕은 본기의 대무신왕 무휼( 大武神王無恤 ) 이니, 무 ( 武 ) · 주류 ( 朱留 ) ·무홀 ( 無恤 ) 은 다 `무뢰'로 읽을 것으로 우박〔雹〕의 뜻이고 신 ( 神 ) 의 뜻인데, 이제 유리 ( 琉璃 ) 와 명 ( 明 ) 은 시호로 쓰고, 유리 ( 類利 ) 는 왕의 이름을 쓰며, 무 ( 武 ) 와 신 ( 神 ) 은 시호로 쓰고, 무홀 ( 無恤 ) 은 이름으로 쓴 건 본기의 망령된 판단이다. 이제 여기서는 비문을 쫓아 유리 ( 琉璃 ) 를 유류 ( 儒留 ) 로, 대무신 ( 大武神 ) 을 대주류 ( 大朱留 ) 로 쓴다. 유류왕 때에 동부여가 강성하여 금와왕의 아들 대소왕 ( 帶素王 ) 은 왕위를 이어받자 고구려에게 신하 노릇하기를 요구하고 볼모[質子〕를 보내라고 하여, 왕이 그대로 하려고 하다가 두 태자를 희생하기에 이르렀다. 첫째 태자는 도절 ( 都切 ) 인데, 유류왕이 동부여에 볼모로 보내려고 하였으나, 도절이 듣지 아니하자 왕이 크게 노했으므로 도절이 울분으로 병이 나서 죽었다. 둘째 태자는 해명 ( 解明 ) 인데 그는 용맹이 뛰어났었다. 유류왕이 동부여의 침략을 두려워해 국내성 ( 國內 城 )-- 지금의 집안현 ( 輯安縣 ) 으로 서울을 옮기니, 해명이 이를 겁약 ( 怯弱 ) 한 일이라 하여 따라가지 아니하였다. 북부여왕 (北扶餘王 : 본보기의 黃龍國王 ) 이 해명에게 강한 활을 보내어 그 힘을 시험해보려고 하자 해명이 그 자리에서 그 활을 당겨서 꺾어 북부여 사람의 힘 없음을 조롱하였다. 왕이 이 말을 듣고 해명은 장차 나라를 위태롭게 할 인물이라하여 처음에는 북부여에 보내서 북부여왕의 손을 빌려 죽이려고 하였으나, 북부여왕이 해명을 공경하고 사랑하여 후히 대접해서 돌려보냈다. 유류왕은 더욱 부끄럽고 분하게 여겨 해명에게 칼을 주어 자살하게 하였다. 두 태자의 죽음은 혹 대궐 안 처첩들의 질투가 원인이 되기도 하였 겠지마는 그것은 대개 동부여와의 외교상 관계에서 온 것이었으니, 유류왕이 동부여를 얼마나 두려워했던가를 가히 미루어 알 것이다. 동부여왕 대소가 여러 번 수만 명 대병을 일으켜서 고구려를치다가 다 성공치 못하였으나, 고구려는 몹시 피폐해져서 동부여왕 대소가 또 사자를 보내 조공을 하지 아니함을 꾸짖자, 유류왕은 두려워서 애걸하는 말로 사자에게 회답해 보내려고 하였다. 그러니까 왕자 주류 ( 朱留 : 본기의 無恤 ) 는 이때 아직 어렸으나, 죽은 해명의 기개가 있어 부왕이 비굴하게 구는 것을 부당하다 하고 스스로 거짓 부왕의 명이라 하여 동부여의 사자에게 금와가 말 먹이는 비천한 직책으로 추모왕을 천대하고, 대소가 추모왕을 죽이려 한 일들을 낱낱이 들어서 죄를 나무라고 동부여의 임금과 신하의 교만함을 꾸짖어서 사자를 쫓아보냈다. 동부여 대소왕이 사자의 말을 듣고 크게 노하여 또다시 크게 군사를 일으켜서 침노해왔다. 유류왕은 왕자 주류 때문에 전쟁이 일어났다고 매우 노하였으나, 이제 노경 ( 老境 ) 에 있어 주류를 도절이나 해명처럼 죽일 수도 없었으므로 나라의 병마 ( 兵馬 ) 를 모두 주류에게 내어 주어서 나가 싸우게 하였다. 주류는 생각하기를 동부여는 군사의 수효가 많고 고구려는 적으며 동부여는 마병 ( 馬兵 ) 이고 고구려는 보병 ( 步兵 ) 이니, 적은 보병으로 많은 마병과 들판에서 싸우는 것은 이롭지 못하다 하고, 동부여의 군사가 지나갈 학반령 ( 鶴盤嶺 ) 의 골짜기에 복병시켰다가 동부여의 군사를 돌격하니, 길이 험하고 좁아서 마병이 불편한지라 동부여의 군사가 모두 말을 버리고 산 위로 기어올라갔다. 주류가 군사를 몰아서 그 전군을 섬멸하고 많은 말을 빼앗으니, 동부여의 정예가 이 싸움에서 전멸하여 다시는 고구려와 겨루지 못하였다. 싸움이 지나니 주류를 봉하여 태자로 삼고, 겸하여 병마의 모든 권한을 그에게 맡겼다. 3)大朱留王의 東扶餘 정복 대주류왕이 학반령의 싸움에서 동부여를 크게 무찌르고 유류왕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지 4 년에 5 만의 군사로 북벌 ( 北伐 ) 의 싸움을 일으켜서 동부여를 쳐들어갔는데, 도중에 창을 잘 쓰는 마로 ( 麻盧 ) 와 칼을 잘 쓰는 괴유 ( 怪由 ) 를 얻어 앞잡이를 삼아서 `가시라'의 남쪽에 이르러 진구렁을 앞에 두고 진을 쳤다. 대소왕이 몸소 말을 타고 고구려의 진을 바로 침범하다가, 말굽이 진구렁에 빠지자 괴유가 칼을 들어 왕을 베었다. 대소왕이 죽었으나 동부여 사람들은 더욱 분발하여 대소왕의 원수를 갚으려고 대주류왕을 겹겹이 포위하였다. 마로는 전사하고 괴유는 부상하여 고구려의 사상자가 헤아릴 수 없었으며 대주류왕은 여러번 포위를 뚫고나오려고 하였으나 되지 않아서 이레를 굶기에 이르렀다. 그런데 마침 큰 안개가 일어나서 지척을 분간할 수 없게 되었는 지라 대주류왕이 풀로 사람을 만들어 진 가운데 세워두고 나머지 군사를 이끌고 사잇길로 도망하였다. 이물림 ( 利勿林 ) 에 이르러서는 전군 이 굶주리고 피로하여 움직일 수가 없었으나, 들짐승을 잡아먹고 간신히 귀국하였다. 이 싸움은 동부여가 승리하기는 하였으나 대소왕이 죽고 태자가 없어서 대소왕의 여러 종형제가 왕위를 다투어 나라 안이 크게 어지러워 졌다. 계제 ( 季弟 ) 모갑 ( 某甲 ) 은 종자 백여 명과 함께 남가시라 ( 南沃沮 ) 로 나와 사냥하고 있는 해두왕 ( 海頭王 ) 을 습격해서 죽이고, 군사를 모아 남가시라를 완전히 평정하니, 이는 남동부여 ( 南東扶餘 ) 이고, 종제 모을 ( 某乙) 은 고도 ( 故都 ) 에서 스스로 서니 이는 북동부여 ( 北東扶餘 ) 이다. 그러나 그 밖의 여러 아우들이 제각기 군사를 모아 모을을 쳤으므로 모을은 군사 1 만여 명을 이끌고 고구려에 투항하여 대주류왕은 마침 내 북동부여를 전부 토평하였고 국호를 그대로 존속시켰다. 역사에 보인 갈사국은 곧 남동부여이고, 동부여는 곧 북동부여이며, 후한서, 삼국지 등의 옥저전 ( 沃沮傳 ) 에 보인 불내예 ( 不耐濊 ) 도 북동부여이고, 예전 ( 濊傳 ) 에 보인 불내예 ( 不耐濊 ) 는 남동부여이다. 4) 大朱留王의 樂良 최씨 ( 崔氏 ) 가 남낙랑을 차지하여, 낙랑왕 ( 樂浪王 ) 이라 일컬었음은 제 3 편 제 4 장에 말하였거니와, 그 끝의 임금 최이 ( 崔理 ) 의 대에 이르니 곧 대주류왕이 동부여를 정복한 때였다. 최이는 고구려의 위엄을 두려워하여 미인 딸 하나를 미끼로 삼아 고구려와 화친하고자 하였다. 이때 갈사국 ( 曷思國 : 남동부여 ) 의 왕이 그 손녀를 대주류왕의 후궁으로 바쳐서 아들을 낳았는데, 얼굴이 기묘하고 풍신이 썩 좋아 이름을 호동 ( 好童 ) 이라고 하였다. 호동이 외가인 남동부여에 가는 길에 낙랑국을 지나게 되었는데 , 최이가 출행 ( 出行 ) 하다 그를 만나보고 놀라, “그대의 얼굴을 보니, 북국 ( 北國 ) 신왕 ( 神王 ) 의 아들 호동이 분명하구나.” 하고, 드디어 호동을 데려다가 그 딸과 결혼시켰다. 낙랑국의 무기고에 북과 나팔이 있는데, 소리가 멀리까지 잘 들리므로 외적의 침입이 있으면 매양 이것을 울려 여러 속국의 군사를 불러서 적을 막았다. 호동이 그 아내 최녀 ( 崔女 ) 를 꾀어, “고구려가 낙랑을 침입하거든 그대가 그 북과 나팔을 없애버리시오.” 하고 귀국하여 대주류왕에게 권해서 낙랑을 쳤다. 최이가 북과 나팔을 울리려고 무기고에 들어가보니 북과 나팔이 산산이 부서져 있었다. 북과 나팔 소리가 나지 아니하니 속국이 구원을 오지 않았다. 최이는 그 딸의 소행임을 알고 딸을 죽인 뒤에 나가서 항복하였다. 호동은 이런 큰 공을 세웠으나, 왕후가 적자 ( 嫡子 ) 의 지위를 빼앗길까 두려워 대주류왕에게 호동이 자기를 강간하려 하였다고 참소하여, 호동은 자살하기에 이르렸다. 이에 아름다운 남녀 한 쌍의 말로가 다 같이 비극으로 되고 말았다.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에 의하면, 대주류왕 즉위 4 년 여름 4 월에 대소의 아우가 갈사왕 ( 曷思王 : 남동부여왕 ) 이 되었음을 기록하였고, 즉 위 15 년 여름 4 월에 호동이 최이의 사위가 되었음을 기록하였으며, 그 해 11 월에 호동이 왕후의 참소로 자살하였음을 기록하였다. 그러나 갈사왕이 있은 뒤에야 대주류왕이 갈사왕의 손녀에게 장가 들 수 있고, 또 그런 뒤에야 갈사왕 손녀의 소생인 호동이 있을 수 있는 것이니 , 설혹 대주류왕 4 년 , 남갈사 건국 원년 4 월에 대주류왕이 갈사왕의 손녀에게 장가 들어 그 달부터 태기가 있어 이듬해 정월에 호동을 낳았다 할지라도, 15 년에는 겨우 11 살의 어린아이니, 11 살 어린아이가 어찌 남의 남편이 되어 그 아내와 멸국 ( 滅國 ) 의 계획을 행할 수 있었으랴 11 살 난 어린아이가 어찌 적모 ( 嫡母 ) 강간의 참소로 부왕의 혐의를 받아 자살하기에 이르렀으랴? 동부여가 원래 북갈사에 도읍하였으니, 소위 갈사왕은 분립하기 전의 동부여를 가리킴이 아닌가하는 이도 있겠지마는 그러면 이는 대소 왕 ( 帶素王 ) 때가 되니, 대소왕이 그 딸을 대주류왕에게 준다는 것은 전혀 불가능한 일이다. 대개 신라 말에 고구려사의 연대를 줄이고 사실을 이리저리 옮겨 고쳤으므로 이같이 모순되는 기록이 생겼거니와, 대주류왕 20 년이 또, `낙랑을 쳐서 멸망시켰다 ( 伐樂浪滅之 ). '고 하였으니, 한 낙랑을 두 번 멸망시킬 수는 없는 노릇이라, 호동이 장가 들고 자살함이 다 20 년의 일이 아닌가 한다. 이상에 말한 북부여 ·북동부여 ·고구려 세 나라는 다 신조선 옛 강토에서 일어난 것이다. 백제의 건국과 마한(馬韓)의 멸망[편집] 1) 召西奴 女大王의 백제 건국 백제 본기 ( 百濟本紀 ) 는 고구려 본기보다 더 심하게 문란하다. 백 몇십 년의 감축은 물론이고, 그 시조와 시조의 출처까지 틀린다. 그 시조는 소서노 여대왕 ( 召西奴女大王 ) 이니 하북 ( 河北 ) 위례성 ( 慰禮城 ) --지금의 한양에 도읍을 정하고, 그가 죽은 뒤에 비류 ( 沸流 ) ·온조 ( 溫祚 ) 두 아들이 분립하여 한 사람은 미추홀 ( 彌鄒忽 : 지금의 仁川 ) 에, 또 한사람은 하남 ( 河南 ) 위례홀 ( 慰禮忽 ) 에 도읍하여 비류는 망하고 온조가 왕이 되었는데, 본기에는 소서노를 쑥 빼고 그 편 ( 篇 ) 첫머리에 비류 ·온조의 미추홀과 하남 위례홀의 분립을 기록하고, 온조왕 13 년에 하남 위례홀에 도읍하였음을 기록하였으니, 그러면 온조가 하남 위례홀에서 하남 위례홀로 천도한 것이 되니 어찌 우스갯소리가아니랴? 이것이 첫째 잘못이요, 비류 ·온조의 아버지는 소서노의 전남편인 부여사람 우태 ( 優台 ) 이므로, 비류 ·온조의 성도 부여요, 근개루왕 ( 近蓋婁王 ) 도 백제가 부여에서 나왔음을 스스로 인정하였는데, 본기에는 비류·온조를 추모 ( 鄒牟 ) 의 아들이라 하였음이 둘째 잘못이다. 이제 이를 개정하여 백제 건국사를 서술한다. 소서노가 우태의 아내로 비류·온조 두 아들을 낳고 과부가 되었다가, 추모왕에게 개가하여 재산을 기울여서 추모왕을 도와 고구려를 세우게 하였음은 이미 앞에서 말하였거니와 , 추모왕이 그 때문에 소서노를 정궁 ( 正宮 ) 으로 대우하고 , 비류·온조 두 아들을 친 자식같이 사랑하였는데 , 유류 ( 橋留 ) 가 그 어머니 예씨 ( 禮氏 ) 와 함께 동부여에서 찾아오니 , 예씨가 원후 ( 元后 ) 가 되고 소서노가 소후 ( 小后 ) 가 되었으며, 유류가 태자가 되고 비류 ·온조 두 사람의 신분이 덤받이자식 됨이 드러났다. 그래서 비류와 온조가의논하여, “고구려 건국의 공이 거의 우리 어머니에게 있는데, 이제 어머니는 왕후의 자리를 빼앗기고 우리 형제는 의지할 데 없는 사람이 되었다. 대왕이 계신 때도 이러하니, 하물며 대왕께서 돌아가신 뒤에 유류가 왕위를 이으면 우리는 어떻게 되겠는가, 차라리 대왕이 살아 계신 때에 미리 어머니를 모시고 딴 곳으로 가서 딴 살림을 차리는 것이 옳겠다.” 하여 그 뜻을 소서노에게 고하고 소서노는 추모왕에게 청하여, 많은 금 ·은 ·주보 ( 珠寶 ) 를 나누어 가지고 비류 ·온조 두 아들과 오간 ( 烏干 ) ·마려 ( 馬黎 ) 등 18 사람을 데라고 낙랑국을 지나서 마한으로 들어갔다. 마한으로 들어가니 이때의 마한 왕은 기준 ( 箕準 ) 의 자손이었다. 소서노가 마한왕에게 뇌물을 바치고 서북쪽 백 리의 땅 미추홀 --지 금의 인천과 하북 위례홀 --지금의 한양 등지를 얻어 소서노가 왕을 일컫고, 국호를 백제라 하였다. 그런데 서북의 낙랑국 최씨가 압록강의 예족 ( 濊族 ) 과 손잡아 압박이 심하므로 소서노가 처음엔 낙랑국과 친하고 예족만 구축하다가 나중에 예족의 핍박이 낙랑국이 시켜서 하는 것임을 깨닫고, 성책을 쌓아 방어에 전력을 다했다. 백제 본기에 낙랑왕 ( 樂浪王 ) 이라 낙랑태수 ( 樂浪太守 ) 라 기록되어 있는데, 이것은 백 몇십 년의 연대를 줄인 뒤에 그 줄인 연대를 가지고 지나의 연대와 대조한 결과로 낙랑을 한군 ( 漢郡 ) 이라 하여 낙랑태 수라고 쓴 것이며, 예 ( 濊 ) 라 쓰지 않고 말갈 ( 靺鞨 ) 이라 썼는데, 이것은 신라 말엽에 예를 말갈이라고 한 당 ( 唐 ) 나라 사람의 글을 많이 보고 마침내 고기 ( 古記 ) 의 예를 모두 말갈로 고친 것이다. 2)召西奴가 죽은 뒤 두아들의 分國과 그 흥망 소서노가 재위 l3 년에 죽으니, 말하자면 소서노는 조선 사상 유일한 여성 창업자일 뿐 아니라, 곧 고구려와 백제 두 나라를 건설한 사람이었다. 소서노가 죽은 뒤에 비류 · 온조 두 사람이 의논하여, “서북의 낙랑과 예가 날로 침략해오는데 어머니 같은 성덕 ( 聖德 ) 이 없고서는 이 땅을 지킬 수 없으니, 차라리 새 자리를 보아 도읍을 옮기는 것이 좋겠다.” 하고, 이에 형제가 오간 · 마려 등과 함께 부아악 ( 負兒岳 ) --지금 한양의 북악 ( 北岳 ) 에 올라가 서울될 만한 자리를 살폈는데, 비류는 미추홀을 잡고, 온조는 하남 위례홀을 잡아 형제의 의견이 충돌되었다. 오간 · 마려 등이 비류에게 간하기를, “하남 위례홀은 북은 한강을 지고, 남은 기름진 평야를 안고, 동은 높은 산을 끼고, 서는 큰 바다 를 둘러 천연의 지리가 이만한 곳이 없겠는데, 어찌하여 다른 데로 가려고 하십니까? ”라 하였으나 비류는 듣지 아니하므로 하는 수 없이 형제가 땅과 인민을 둘로 나누어 비류는 미추홀로 가고, 온조는 하남 위레홀로 가니, 이에 백제가 나뉘어 동 · 서 두 백제가 되었다. 본기에 기록된 온조의 13 년은 곧 소서노의 연조요, 그 이듬해 14 년 이 곧 온조의 원년이니, l3 년으로 기록된 온조 천도의 조서는 비류와 충돌된 뒤에 온조 쪽의 인민에게 내린 조서이고, 14 년 곧 온조 원년의, “한성의 백성을 나누었다 ( 分漢城民 ). ”고 한 것은 비류 · 온조 형제가 백성을 나누어 가지고 각기 자기 서울로 간 사실일 것이다. 미추홀은 `메주골'이요 , 위례홀은 `오리골' ( 본래는 아리골 ) 이다. 지금의 습속에 어느 동네이든지 흔히 동쪽에 오리골이 있고 서쪽에 메주골이 있는데 그뜻은 알 수 없으나, 그 유래가 또한 오래다. 그런데 비류의 미추홀은 땅이 습하고 물이 짜서 백성들이 살 수가 없어 많이 흩어져 달아났지마는, 온조의 하남 위례홀은 수토가 알맞고 오곡이 잘 되어 인민이 편안히 살아가므로 비류는 부끄러워서 병들어 죽고 그 신하와 인민은 다 온조에게로 오니, 이에 동 ·서 두 백제가 도로 하나로 합쳐 졌다. 3) 溫祚의 馬韓 襲滅 ( 온조의 마한 습멸 ) 백제가 마한의 봉토 ( 封土 ) 를 얻어서 나라를 세웠으므로 소서노 이래로 공손히 신하의 예로써 마한을 대하여, 사냥을 하여 잡은 사슴이 나 노루를 마한에 대하여, 사냥을 하여 잡은 사슴이나 노루를 마한에 보내고 전쟁을 하여 얻은 포로를 마한에 보냈는데, 소서노가 죽은 뒤 에 온조가 서북쪽의 예와 낙랑의 방어를 핑계하여, 북의 패하 (浿河 ) ---지금의 대동강으로부터 남으로 웅천 ( 熊川 )--- 지금의 공주 ( 公 州 ) 까지 백제의 국토로 정하여달라고 해서 마침내 그 허락을 얻고 그 뒤에 웅천에 가서 마한과 백제의 국경에 성책을 쌓았다. 마한왕이 사신을 보내어, “왕의 모자가 처음 남으로 왔을 때에 발 디딜 땅이 없어 내가 서북 백 리 땅을 떼어주어 오늘날이 있게 된 것인데, 이제 국력이 좀 튼튼해졌다고 우리의 강토를 눌러 성책을 쌓으니, 어찌 의리있는 짓이냐? ” 하고 꾸짖었다. 온조는 짐짓 부끄러워하는 빛을 보이고 성책을 헐었으나, 좌우에게, “마한왕의 정치가 옳은 길을 잃어 나라의 형세가 자꾸 쇠약해지니, 이제 취하지 아니하면 남에게 돌아갈 것이다.” 하고 오래지 않아 사냥한다 핑계하고 마한을 습격하여 서울을 점령하고, 그 50 여국을 다 토멸하고, 그 유민으로서 의병을 일으킨 주륵 ( 周勒 ) 의 온 집안을 다 목베어 죽이니, 온조의 잔학함이 또한 심하였다. 기준 ( 箕準 ) 이 남으로 달아나서 마한의 왕위를 차지하고 성을 한씨 ( 韓氏 ) 라 하여 자손에게 전해내려오다가 이에 이르러 망하니, 삼국지에, “기준의 후예가 끊어져 없어지고 마한인이 다시 스스로 서서 왕이 되었다 ( 準後滅絶 馬韓人 復自立爲王 ). ”라고 한 것이 이것을 말한 것인데, 온조를 마한 사람이라고 한 것은 지나인이 매양 백제를 마한이라 일컬었기 때문이다. 온조는 고구려의 유류 (儒留 ) ·대주류 ( 大朱留 ) 두 대왕과 같은 시대이니, 온조 대왕 이후에 낙랑의 침략을 기록한 것이 없음은 대주류왕 이 이미 낙랑을 토멸하였기 때문인 것으로 생각한다. 한(漢)나라 군대가 고구려에 패퇴한 사실(고구려의 9년 전쟁)[편집] 조선의 남북 여러 나라가 분립하는 판에 지나 한나라 무제(武帝)[1]의 침략이 있었다. 이것은 다만 한때 정치상의 큰 사건일 뿐 아니라, 곧 조선 민족 문화의 소장(消長)에도 비상한 관계를 가진 큰 사건이었다. 고대 동아시아에 불완전한 글자이나마 이두문을 써서 역사의 기록과 정치의 제도를 가져 문화를 가졌다고 할 민족은 지나 이외에 오직 조선뿐이었는데, 당시에 조선이 강성하여 매양 지나를 침략하고 혹은 항거하였으며, 지나도 제(齊) ·연 ( 熊 ) ·진 ( 奏 ) 이래로 조선에 대하여 방어하고 혹은 침략해왔음은 제 2 편에서 말한 바와 같이 매우 잦았거니와, 진 ( 奏 ) 이 망하고 한 ( 漢 ) 이 일어나서는 북쪽 흉노의 침략에 시달림을 받아서 한나라 고조 ( 高祖 ) 가 흉노 모돈 ( 冒頓 ) 을 공격하다가 백등 ( 白登 : 산서성 大同府부근 ) 에서 크게 패하여 세폐 ( 歲幣 ) 를 바치고 황녀 ( 皇女 ) 를 모돈의 첩으로 바치는 등 굴욕적 조약을 맺고, 그 뒤에 그대로 시행하여 고조의 증손 무제 ( 武帝 ) 에 이르렀다. 무제는 야심이 만만한 제왕이라, 백 년 태평한 끝에 나라가 부강해지자 흉노를 쳐서 선대의 수치를 씻는 동시에 조선에 대하여도 또한 이름없는 군사를 일으켜서 민족적 혈전을 벌였다. 그런데 무제가 침입한 조선이 둘이니, 한서(漢書) 식화지(食貨志 : 史記平準書도 같음)에, “무제가 즉위하고 수 년만에 팽오(彭吳)가 예맥조선(濊貊朝鮮)을 쳐서 창해(滄海)라는 군(郡)을 설치하였으니, 곧 연(燕)과 제(齊) 지방이 크게 소란해졌다 (武帝卽位數年 彭吳 穿濊貊 朝鮮 置滄海之郡 則燕齊之間 騷然騷動).”고 한 예맥조선이 그 하나요, 사기 조선열전 (朝鮮列傳)에, “누선장군(樓船將軍) 양복(楊僕)--- 좌장군 (左將軍) 순체(筍彘) 마침내 조선을 평정하여 사군(四那)을 만들었다(樓船將軍楊僕 左將軍 筍彘遂定朝鮮爲四郡).”라고 한 조선이 또 하나이다.[2] 뒤의 조선은 곧 조선열전으로 인하여 위씨(衛氏)의 조선인 것은 사람들이 다 알거니와, 앞의 조선은 식화지나 평준서에 이렇게 간단히 한 구절이 기록되어 있고 다른 전기(傳記)에서는 다시 발견되지 아니하므로 종래의 사학가들이 이를 어떤 조선인지를 말한 이가 없다. 그러나 나는 전자의 조선은 곧 동부여를 가리킨 것이니, 한무제가 위우거 ( 衛右渠 ) 를 토멸하기 전에 동부여를 저희 군현 ( 郡縣 ) 이라 하여 고구려와 9 년 동안 혈전하다가 패하여 물러난 일이 있은 것으로 생각 한다. 무엇으로 증거하는가? 후한서 ( 後漢書 ), 예전 ( 濊傳 ) 에, “한나라 무제 원삭 ( 元湖 ) 원년에 예의 남려왕 ( 南閭王 ) 등이 모반하여, 우거가 28 만 호구를 거느리고 요동으로 와서 항복하여, 한나라에서는 그 땅을 창해군 ( 滄海郡 ) 으로 만들었다 ( 漢武帝元朔元年 滅君南閭等叛 右案率 二十八萬口詣遼東降漢 以其地爲滄海郡 ). ”고 하였고, 한서 본기 ( 本紀 ) 에, “원삭 3 년 봄에 창해군을 폐지하였다 ( 元朔三年春罷滄海郡 ). ” 고 하였으며, 사기 공손홍전 ( 公孫弘傳 ) 에는, “공손홍이 여러번 간하여 창해군을 폐지하고 오로지 삭방 ( 朔方 ) 만 받들게 하기를 청하여 왕이 이를 허락하였다 ( 弘數諫---願罷---滄海 而專奉朔方 --- 上乃許之 ). ”고 하였으니, 종래의 학자들이 위 세 가지 책과 앞에 말한 `식화지 ( 食貨志 ) 의 본문을 합쳐, `예맥조선은 예임금 남려의 나라로 지금의 강릉이니, 강릉이 당시 우거의 속국으로서 모반하고 한에 항복했으므로 한이 팽오를 보내어 항복을 받고 그 땅으로써 창해군을 삼았다가 그 뒤에 땅이 너무나 멀고 비용이 많이 듦으로 그 전쟁을 그만둔 것이다.”라고 단정하였다. 그러나 이 단정이 잘못임이 다음과 같다. 1) 지나사에 매양 동부여를 예 ( 濊 ) 로 그릇 기록하였음과, 남 ·북 두 동부여가 하나는 지금의 훈춘이요, 또 하나는 지금의 함흥임은 이미 본편 제 2 장에서 서술하였거니와, 동부여를 지금의 강릉이라 함은 신라가 그 동북계 1천여 리를 잃고 그 잃은 지방의 고적을 내지 ( 內地 ) 로 옮길 때에 동부여의 고적을 지금의 강릉으로 옮겼음으로 하여 생긴 위설 ( 僞說 ) 이니, 예의 남려는 함흥의 동부여왕이요, 강릉의 임금이 아니며, 2) 식화지 ( 食貨志 ) 의 본문에 명백히, “무제가 즉위한 지 수년에 팽오 ( 彭吳 ) 가 예맥조선을 쳤다.”고 하였으니, 후한서에 기록된 창해군을 처음 설치한 해는 무제 즉위 13 년인데, 13 년을 수년이라 할 수 없을 뿐더러, 한서 주부언열전 ( 主父偃列傳 ) 의 원광 ( 元光 ) 원년 엄안 ( 嚴安 ) 의 상소에, “지금 예주 ( 濊州 ) 를 공략하여 성읍 ( 城邑 ) 을 설치하고자 한다 ( 今欲--- 略濊州 建治城邑 ). ”고 하였는데, 예주를 공략한다는 것은 곧 예맥조선 침략을 가리킨 것이요, 성읍을 설치하는 것은 창해의 설치 경영을 가리킨 것이며, 원광 원년, 곧 원삭 원년의 6 년 전에 엄안이 예에 대한 침략과 창해군 설치를 간하였으니, 남려의 항복과 팽오의 교통이 벌써 원광 원년의 일이요, 그 6 년 후인 원삭 원년의 일이 아니고, 3) 원광 원년 창해군 설치의 해는 기원전 134 년이요, 원삭 3 년 창해군 폐지의 해는 기원전 126 년이니, 그러면 한이 동부여를 침략하여 창해군을 만들려는 전쟁이 전후 9 년 동안이나 걸쳤으니, 동부여가 만일 우거의 속국이라면 우거가 가서 구원하지 않을 수 없으며, 만일 돌아와 구원하였다고 하면 사기 조선왕 만전 ( 滿傳 ) 에 우거의 한에 대한 관계, 진번진국 ( 眞番辰國 ) 의 옹알 ( 壅閼 ), 요동 동부도위 ( 東部都慰 ) 의 공격이며 살해 따위를 다 기록하고서 어찌 이보다 더 중대한 9 년 전쟁의 사실을 빼었으랴? 앞에서 말한 개정한 연대에 의하면 이때는 동부여가 고구려에게 정복된 뒤이니, 남려는 위씨 ( 衛氏 ) 의 속국이 아니라 고구려의 속국이다. 남려가 고구려의 속국이라면 왜 고구려를 배반하고 한나라에 항복하였는가? 남려는 대개 남동부여, 후한서와 삼국지의 예전 ( 濊傳 ) 에 기록된 불내예왕 ( 不耐濊王 ) 에게 시집 보낸 갈사왕이니, 그러면 남려는 대주류왕의 처조 ( 妻祖 ) 요, 대주류왕은 남려왕의 손자 사위요, 호동은 남려왕의 진외증손 ( 眞外曾孫 ) 이니, 말하자면 붙이가 가까운 터이다. 그러나 호동의 장인인 낙랑의 최이 ( 崔理 ) 도 토멸하는 판에 어찌 처 조와 진외증조를 알아보랴. 고구려의 동부여에 대한 압박이 심했던 것을 상상할 수 있다. 그러니 남려가 지난날 아버지와 형의 원수로든지, 당장의 압박의 고통으로든지, 어찌 고구려에 대하여 보복할 생각 이 없었으랴. 이에 같은 고구려에 대해 원한을 가진 낙랑의 여러 소국 들과 연합해서 몰래 우거에게 내통하여 고구려를 배척하려 하였으나, 우거가 고구려보다 미약하여 고구려에 항거하지 못하므로, 남려는 우거를 버리고 한 ( 漢 ) 에 통하려 한 것이다. 그러나 한에 통하려면 부득이 위씨 (衛氏)의 나라를 경유해야 하는데, 우거는 동부여가 혹 위씨 나라의 비밀을 한에 누설하지나 않을까 하여 국경의 통과를 허락하지 아니했으므로, 사기 조선 왕만전 (朝鮮 王滿傳)에는, “진번 옆의 여러 나라가 글을 올려 천자를 들어가 뵈려고 하였으나 우거가 또 막아 통하지 못하였다 (眞番旁衆國 欲上書入見天子 右渠又壅閼不通). ”고 하였다.[3] 진번 옆의 여러 나라란 곧 동남부여와 남낙랑 등을 가리킨 것이다. 그러나 남려는 마침내 바닷길로 한에 통하여 사정을 고하니, 야욕으로 가득 찬 한무제가 어찌 이 기회를 놓치랴. 드디어 동부여를 장래의 창해군으로 예정하고, 팽오를 대장으로 삼아 연제 ( 燕齊 )-- 지금의 직예 ( 直匠 ) ·산동 ( 山東 ) 의 군사와 양식을 총동원하여, 바다를 건너 고구려와 싸워 남동부여와 남낙랑 여러 나라를 구원하다가 고구려의 대항이 뜻밖에 강하여 9 년 동안 혈전을 계속하였는데, 한이 여러 번 패하여 창해군을 폐지한다는 말을 핑계로 삼아 군사를 거두어 전쟁을 결말 지은 것이다. 이같이 9 년 동안 두 나라 사이에 혈전이 있었으면 사마천이 어찌하여 사기 조선열전에 이 사실을 기록하지 아니하였는가? 이는 다름이 아니라, `중국을 위해 치욕을 숨기다 ( 爲中國諱恥 ). ' 하는 것이, 공구 ( 孔丘 ) 의 춘추 ( 春秋 ) 이래, 지나 역사가의 유일한 종지 ( 宗旨 ) 가 되었을 뿐 아니라, 삼국지 왕숙전 ( 王蕭傳 ) 에 의하면, “사마천이 사기에 경제 ( 景帝 ) 와 무제 ( 武帝 ) 의 잘잘못을 바로 썼더니, 무제가 이것을 보고 크게 노했으므로 효경본기 ( 孝景本記 ) 와 무제본기 ( 武帝本記 ) 를 삭제하였다 . 그러나 이로 말미암아, 그 뒤에 사마천은 부형 ( 腐刑 : 남자를 去勢하는 형벌 . 宮刑 ) 에 처해졌다.”고 하였으니, 만일 한의 패전을 바로 썼더라면 부형은 고사하고 목이 달아나는 참형까지 당했을 것이다. 그러니 그 사실이 빠졌음이 고의일 것이며, 평준서에 겨우 그 사실을 비추었으니, `팽오가 예맥조선을 멸망시켰다.'고 하여 마치 조선을 토멸한 듯이 쓴 것도 또한 꺼려함을 피한 것일 것이요, 반고 ( 班固 ) 의 한서 ( 漢書 ) 식화지 ( 食貨志 ) 에는 그 사실이 너무 바르지 못함을 싫어 하여, 멸 ( 滅 ) 자를 천 ( 穿 ) 자로 고쳤으나, 그 전부를 사실대로 기록하지 못하였음은 사마천과 마찬가지였다. 그러면 한무제와 싸운 이는 대주류왕, 곧 고구려 본기의 대무신왕( 大武神王 ) 일 것이다. 그러나 본기에는 연대를 줄였기 때문에 한무제와 같은 시대인 대주류왕이 한의 광무 ( 光武 ) 와 같은 시대가 되고, 지나사의 낙랑 기사와 맞추기 위해 대주류왕이 한에게 낙랑국을 빼앗 겼다는 거짓 기록을 쓴 것이었다. 한 무제(漢武帝)가 위씨(衛氏)를 쳐서 멸망시킴(위씨조선의 멸망)[편집] 한무제가 9 년이라는 오랫동안의 혈전에 패해 물러가서 그 이후 17 년 동안 조선의 여러 나라를 엿보지 못하였으나 그 마음에야 어찌 동방 침략을 잊고 있었으랴. 이에 위씨 ( 衛氏 ) 는 비록 조선 여러 나라 중 하나이나 그 왕조 ( 王朝 ) 가 원래 지나족 종자요, 그 장수와 재상들도 대개 한의 망명자의 자손들이었으므로 이들을 꾀어 조선의 여러 나라를 잠식하는 앞잡이를 만들려고 하는 중에, 더욱 위씨에게 길을 빌어 동부여를 구원하고 고구려를 치는 편의를 얻으려고 하여, 기원전 109 년에 한무제는 사신 섭하 ( 涉河 ) 를 보내서 먼저 한과 동부여를 왕래하는 사절이 위씨국의 국경을 통과하는 것을 허가하여 달라고 우거를 한의 국위 ( 國威 ) 로 워협하고, 금백 ( 金帛 ) 의 이익으로 꾀었으나 우거가 완강하게 쫓지 않았다. 섭하가 한무제의 비밀 명령에 의하여 귀국하는 길에 두 나라의 국경인 패수에 이르러서 우거가 보낸 전송하는 사자 우거의 부왕 ( 副王 ) 을 쩔러 중이고 달아나, 한으로 돌아가서 한무제에게 조선국 대장을 죽였다고 큰소리를 하니, 한무제는 실상 딴 흉계를 가지고 있었으므로, 그가 죽인 사람이 누구인지를 알아보지도 않고 그 공으로 섭하를 요통 동부도위 ( 東部都慰 ) 에 임명하였다. 섭하가 임지 ( 任地 ) 에 이른지 오래지 아니하여, 우거가 전의 일 ( 副王의 피살 ) 을 분하게 여겨 군사를 일으켜서 섭하를 공격해 죽였다. 무제는 이것으로 구실을 삼아 좌장군 ( 左將軍 ) 순체 ( 筍체 ) 는 보병 5 만으로 요수 ( 遙水 ) 를 건너 패수로 향하고, 누선장군 ( 樓船將軍 ) 양복 ( 楊僕 ) 은 병선 군사 7 천으로 발해를 건너 열수 ( 列水 ) 로 들어가서 우거의 서울 왕검성 ( 王儉城 : 조선 고대 세 왕검성의 하나 ) 을 좌우에서 협격 (挾擊 ) 하게 하였는데, 양복은 열구 ( 列口 ) 에 이르러 상륙하려다가 크게 패하여 산중으로 도망하여 남은 군사를 거두어 자신을 보호하고, 순체는 패수를 건너려고 하였으나 위씨의 군사가 항거해 지켜서 여의치 못하였다. 한무제는 두 장수가 패하였다는 말을 듣고 사신 위산 ( 衛山 ) 을 보내, 금백 ( 金帛 ) 을 뿌려 우거의 여러 신하들을 이간시켰다. 위씨의 나라는 원래가 조선과 지나의 도둑들의 집단이었으므로 그 신하들은 위씨에 대한 충성보다 황금에 대한 욕심이 매우 치열하였고, 그들은 전쟁을 주장하고 화평을 주장하는 두 파로 갈려 서로 다투었는데, 한의 금백이 비밀히 뿌려지자 화평을 주장하는 파가 갑자기 강해져서 우거로 하여금 그 태자를 한의 군중 ( 軍中 ) 에 보내서 한의 장수에게 사죄하고 군량과 말을 바치기로 하는 조약을 맺게 하려고 하였다. 그래서 우거는, “태자는 호위병만을 데리고 패수를 건너가 한의 장수를 만나보게 하여라.”고 하였고, 한의 장수는, “태자가 1 만의 군 사로 패수를 건너오려면 무장을 갖추지 말고 오라.”고 하여 양편이 서로 버티어 교섭이 깨어졌다. 그러나 그 돈과 비단이 효력을 나타내서 우거의 재상 노인 ( 路人 ) · 한음 ( 韓陰 ) · 삼 ( 參 ) 과 대장 왕겹 ( 王겹 ) 이 몰래 한에 내정을 알리고 전쟁에는 힘쓰지 아니하였으므로, 한의 장수 순체는 패수를 건너 왕검성의 서북쪽을 치고, 양복은 산에서 나와 왕검성의 동남쪽을 쳤다. 한 무제는 교섭이 결렬되자 위산 ( 衛山 ) 을 죄주어 참형에 처하고, 제남태수 ( 濟南太守 ) 공손수 ( 公孫遂 ) 로 사신을 삼아서 전권 ( 全權 ) 을 주어 두 장수를 감독하는 동시에, 더욱 많은 돈과 비단을 가지고 가서 우거의 여러 신하들을 매수하게 하였다. 이때에 순체와 양복이 항복하기를 다투어 서로 불화해지니, 공손수가 순체의 편을 들어 양복을 불러 순체의 군중에 가두고, 순체로 하여 금 양복의 군사를 합쳐 싸우게 하고, 한무제에게 돌아가 보고하였다. 무제는, “돈과 비단만 낭비하고 위씨 군신 ( 君臣 ) 의 항복을 받지 못 했다.” 하고 크게 노하여 공손수를 처형하였다. 오래지 않아 한음 · 왕 겹 · 노인 등의 뇌물받은 일이 탄로되어 노인은 참형을 당하고, 한음 · 왕겹 두 사람은 도망하여 한에 항복하였다. 이듬해 여름에 삼 ( 參 ) 이 우거를 암살하고, 성을 들어 항복하였다. 우거의 대신 성기 ( 成己 ) 가 삼을 치니, 우거의 왕자 장 ( 長 ) 이 삼에게 붙어 노인의 아들 최 ( 最 ) 와 힘을 합하여 성기를 죽이고 성문을 열어 항복해서 위씨가 이에 멸망하고 한무제는 그 땅을 나누어 진번 · 임둔 · 현도 · 낙랑의 네 군을 만들었다. 이때의 사실은 오직 사기 조선열전에 의거할 뿐인데, 거기에는 한 이 돈과 비단을 위씨의 여러 신하들에게 뇌물한 기록이 없음은 무슨 까닭인가? 이는 사마천이 무제 본기 ( 無帝本紀 ) 의 화 ( 福 : 앞절에 보 임 ) 로 부형 ( 腐刑 ) 을 당하고 동부여에 대한 한의 패전을 기록하지 못한 일이 있어, 바로 쓰지 못한 때문이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한이 전쟁에 패하고 뇌물로 성공한 사실이 글 가운데 뚜렷이 보이니, 이를테면, “위만은 병위 ( 兵威 ) 와 재물로 그 이웃 작은 고을을 침노하여 항복받아서 나라를 얻었다 ( 滿 得以兵威財物 侵降其旁小邑 ). ”고 하여 위만이 병위와 재물 두 가지로 건국을 성취하였음을 기록한 것은 은근하 한무제가 위씨를 당당히 병력으로 멸하지 못하고 재물로 적을 매수하는 비열한 수단으로 성취하였음을 비웃고 꼬집은 것이다. `위산을 보내 병위로써 우거를 타일렀다 ( 遺衛山 因兵威 往諭右渠 ). '고 하여 `병위' 두 자만 쓰고 `재물' 두 자는 빼었으나, 이때 순체와 양복은 이미 패전하고 후원병도 가지 아니하여서 병위가 도리어 우거의 군사보다 약한 때인데 무슨 병위가 있었으랴? 이는 곧 윗글의 `병위 ·재물' 넉 자를 이어받아, 위산이 가져간 것이 병위가 아니라 재물이라는 뜻을 내포하고 있는 것이고, 위산과 공손수가 다 까닭없이 처형되었음을 기록한 것은 한무제가 재물만 쓰고 성공치 못함에 노음을 표시한 것이고, 위씨가 멸망한 뒤에 순체와 양복이 하나는 침형당하고 하나는 파면되었는데, 봉후 ( 封候 ) 의 상을 받은 자는 도리어 위씨의 반역신인 노인 ( 路人 ) 의 아들 최와 왕겹 등 네 사람뿐이었으니, 이는 곧 위씨의 멸망이 한의 병력에 있지 않고 한의 재물을 받고 나라를 판 간신에게 있었음을 드러낸 것이다. 한사군(漢四郡)의 위치와 고구려의 대(對) 한(漢) 관계[편집] 위씨가 망하매 한이 그 땅을 나누어 진번 ·임둔 ·현도 ·낙랑 네 군 을 설치하였다고 하는데 , 사군의 위치 문제는 삼한 ( 三韓 ) 연혁의 쟁론 에 못잖은 조선사상 큰 쟁론이 되어왔다. 만반한 ·패수 ·왕검성 등 위씨의 근거지가 지금의 만주 해성 개평 동지 ( 이는 제 2 편 제 2 장에 자세히 설명했음 ) 일 뿐 아니라, 당시에 지금 의 개원 ( 開原 ) 이북은 북부여국 (北扶餘國 ) 이고, 지금의 흥경 ( 興京 ) 이 동은 고구려이고, 지금의 압록강 이남은 낙랑국이고, 지금의 함경도 내지 강원도는 동부여국이었으니, 이상 네 나라 이외에서 한의 사군 을 찾아야 할 것이므로, 사군의 위치는 지금의 요동반도 안쪽에서 찾 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사군의 위치에 대하여 이설 ( 異說 ) 이 백출 ( 百出 ) 함은 대개 다음에 열거한 몇 가지 원인에 의한 것이다. 첫째는 지명의 같고 다른 것을 잘 구별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를 테면 패수 ·낙랑 등은 다 `펴라'로읽을 것으로서, 지금의 대동강은 당시의 `펴라'라는 강이고, 지금의 평양은 당시의 `펴라'라는 서울이니, 강과 서울을 다 같이 `펴라'라고 한 것은 마치 지금의 청주 ( 淸州 ) `까치내'라는 물 옆에 `까치내'라는 마을이 있는 것처럼 `펴라'라는 강 위에 있는 서울이므로 또한 `펴라'라고 한 것이요, 패수 ( 浿水 ) 의 ' 패 ( 浿 ) 는 `펴라'의 `펴'의 음을 취하고, 수 ( 水 ) 는 `펴라'의 `라'의 음 을 취하여 `펴라'로 읽은 것이다. 그 밖에 낙랑·평양 ·평나 ( 平那 ) · 백아강 ( 百牙岡 ) 등도 다 `펴라'로 읽을 것이다. 그 해석은 여기서 생략하거니와, 한무제가 이미 위씨조선 곧 불조선을 토멸하여 요동군을 만들고는 가끔 신 · 말 두 조선의 지명을 가져다가 위씨조선의 옛 지명 을 대신하였으니, 지금의 해성 ( 海城 ) 헌우란의 본래 이름이 `알티' ( 혹 安地 혹 安市라 한 것 ) 인데, 이것을 고쳐 패수라 하였고, 사기의 작자 사마천은 그 고친 지명에 의하여 사군 ( 四郡 ) 이전의 옛 일을 설하였으므로, “한이 일어나 물러나서 패수로 경계를 삼았다 ( 漢興---退以浿水爲界 ). ”느니 , “위만--- 동으로 달아나 새외 ( 塞外 ) 로 나가서 패수를 건넜다 ( 滿---東走出塞 漢浿水 ). ”느니 하였으며, 진번 ( 員畵 ) 이 비록 신 · 불 두 조선을 합쳐 일컫는 것이지마는, 한은 이를 차지하여 고구려를 진번군으로 가정 ( 假定 : 아래에 자세히 말함 ) 하였다. 사기의, “처음에 전연 ( 全燕 ) 때 일찍이 진번조선을 약취 ( 略取 ) 하여 예속시 켰다 ( 始全燕時 嘗略屬眞番朝鮮 ). ”고 하고, “위만이 잠시 진번조선을 복속시켰다 ( 滿---稍役屬眞番朝鮮 ). ”고 한 진번조선은 신 · 불 두 조선을 가리킨 것이지마는, “진번 · 임둔이 다 와서 복속하였다 ( 眞番臨屯 皆來服屬 ). ”고 하고, “진번의 이웃 여러 나라가 글을 올려 천자를 뵙고자 하였다 ( 眞番旁衆國 欲上書見天子 ). ”고 한 진번은 다 사군의 하나인 진번을 가려킨 것으로써, 또한 나중에 고친 지명에 의하여 고사 ( 故事 ) 를 설한 것이다. 마치 을지문덕 이후에 살수 ( 薩水 ) 의 명칭이 청천강 ( 淸川江 ) 이 되었으니, 을지문덕 당시에는 청천강이라는 이름이 없었지마는 우리가, “을지문덕이 청천강에서 수 (隨 ) 나라 군사를 깨뜨렸다.”고 하는 따위와 같은 것인데, 종래의 학자들이 이를 모르고 사기의 패수와 진번 등을 사군 이전의 이름으로 아는 동시에, 헌우란 패수, 대동강 패수의 두 패수와 두 나라의 이름인 진번과 한 군 ( 郡 ) 의 이름인 진번의 두 진번을 혼동하여 설하였다. 둘째는 기록의 진위를 잘 분별하지 못한 때문이다. 이를테면 한서 본기 ( 本紀 ) 무제 ( 武帝 ) 원봉 ( 元封 ) 3 년 진번 · 임둔의 주 ( 註 ) 에 `무릉서 ( 茂陵書 ) 에 진번의 군치 ( 郡治 ) 삽현 ( 삽縣 ) 은 장안 ( 長安 ) 에서 7,640 리 임둔의 군치 동이현 ( 東이縣 ) 은 장안에서 6,138 리 ( 茂陵書 眞番郡治 삽縣 去長安 七千六百四十里 - - -臨屯郡治 東이縣、 去長安 六千 一百 三十 八 里 ). '라 했는데, 무릉서는 무릉사람 사마상여 ( 司馬相如) 의 저작이라 하나, 사기 사마상여전에, “상여가 죽고 5 년에야 천자가 비로 소 후토 (后土 ) 를 제사지냈다 ( 相如旣卒五歲 天子始祭后土 ) · ” 하고, 사기집해 ( 史記集解 ) 에는, “원정 ( 元鼎 ) 4 년 비로소 후토를 세웠다 ( 元鼎四年---始立后土 ) ·”고 하였는데, 원정 4 년은 기원전 113 년이요, 사마상여가 죽은 것은 그 5 년 전인 원수 ( 元狩 ) 6 년 ( 기원전 117 년 ) 이니, 상여는 원봉 ( 元封 ) 3 년 ( 기원전 l08 년 ) 진번 · 임둔군을 설치한 해보다 10 년 전에 이미 죽었으니, 10 년 전에 이미 죽은 상여가 어찌 l0 년 후의 두 군의 위치를 말할 수 있었으랴. 그러니 무릉서가 위서 ( 僞書 ) 인 동시에 그 글 가운데 진번 · 임둔 운운한 것은 위증 ( 鴻證 ) 임이 의심없으며, 또한 한서지리지에 요동군 군현지 ( 郡縣志 ) 이외에 따로 현도와 낙랑 두 군지 ( 郡志 ) 가 있으므로, 이를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요동반도 이외에서 현도 · 낙랑 두 군의 존재를 생각하게 하지마는, 위략의 만 반한이 곧 한서지리지 요동군의 문 · 번한임과 사기의 패수가 곧 요동 군 번한현 ( 番汗縣 ) 의 패수 (浿水 ) 임이 이미 확실한 증거가 있으니, 지리지의 현도 · 낙랑 운운한 것은 후세 사람의 위증임이 의심없는데 종래의 학자들이 이것을 모르고 매양 한서 본기의 진번, 임둔의 주나 지리지의 낙랑· 현도 두 군지를 절대로 움직일 수 없는 글로 그릇 믿었다. 이러한 원인으로 인하여 사군의 위치에 대한 고거 ( 考據 ) 가 비록 많으나, 하나도 그 정곡 ( 正鵠 ) 을 얻은 이가 없었던 것이라고 생각한다. 사군은 원래 땅 위에 구획을 그은 것이 아니고 종이 위에 그린 일종의 가정 ( 假定 ) 이니, 말하자면 고구려를 토멸하면 진번군을 만들리라, 북동부여 --- 북옥저 를 토멸하면 현도군을 만들리라, 남동부여 ---남옥저를 토멸하면 임둔군을 만들리라, 낙랑국을 토멸하면 낙랑군을 만들리라 하는 가정인 것이고, 실현된 것이 아니다. 한무제가 그 가정을 실현하기 위해 위의 여러 곳에 대하여 침략하기 시작했을 것이고, 낙랑과 두 동부여는 앞에 말한 것과 같이 고구려에 대한 오래된 원한이 있으므로 한의 힘을 빌려 고구려를 배척하려고 했을 것이고, 고구려는 또 전번에 대주류왕이 승전한 기세로 한과 결전하려고 했을 것이다. 그 전쟁이 대개 기원전 108 년쯤, 곧 위씨가 멸망한 해에 비롯하여 기원전 82 년에 이르러 끝이 났는데, 한이 패하여 사군 실현의 희망이 아주 끊어졌으므로 진번 · 임둔 두 군은 그 명칭을 폐지하고, 현 도 · 낙랑 두 군은 요동군 안에다 붙여서 설치함에 이르렀다. 한서 본기에는 진번군을 폐지했다고 하였을 뿐이고, 임둔군을 폐지했다는 말은 없으나, 후한서 예전 ( 滅傳 ) 에, “소제 ( 昭帝 ) 가 진번 · 임둔을 폐지하여 낙랑 · 현도에 합쳤다 ( 昭帝罷眞番臨屯 以井樂浪玄토 ). ”고 하였음을 보면, 임둔군도 진번군과 한때에 폐지하였던 것이다 . 후한서 예전에는 현도를 구려 ( 句麗 : 한의 고구려현을 가리킨 것 ) 로 옮겼다고 하였고, 삼국지 옥저전 (沃沮傳 ) 에는 처음에 옥저로 현도성 을 삼았다가 뒤에 고구려 서북쪽으로 옮겼다고 하였으나 옥저전의 불내예왕 ( 不耐歲王 ) 은 북동부여와 남동부여의 왕을 가리킨 것이요, 예전의 불내예왕은 낙랑왕을 가리킨 것이니, 두 동부여와 낙랑국은 다 당시에 독립된 왕국이다. 그렇다면 현도성이 옥저, 곧 북동부여에서 요동으로 옮겨간 것이 아니라, 다만 북동부여로 현도를 만들려던 계획이 실패로 돌아갔으므로, 비로소 요동---지금의 봉천성성 ( 奉天省城 ) 에 현도군을 붙이기로 설치한 것이고, 낙랑군도 또한 동시에 붙이기로 설치하였을 것인데 그 위치는 확언할 수 없으나, 대개 지금의 해성 ( 海城 ) 등지일 것이다. 어찌하여 진번 · 엄둔을 폐지하는 동시에 현도 · 낙랑 두 군을 붙이기로 설치하였는가? 이는 다름 아니라, 곧 앞서 말한 낙랑국과 남동 부여국이 고구려를 몹시 원망하여 한이 패해 물러간 뒤에도 두 나라가, 오히려 한에 사자를 보내 몰래 통하고 상민 ( 商民 ) 이 왕래하여 물자를 서로 사고 팔았으므로 한이 요동에 현도 · 낙랑 두 군을 붙이기로 설치하여 두 나라에 대한 교섭을 맡게 하고, 혹은 고구려와 전쟁이 벌어지는 경우에는 두 나라를 이용하였으니, 이것은 한의 두 나라에 대한 관계이고, 고구려는 매양 두 나라의 한과 통하는 증적 ( 證跡 ) 을 알아내면 반드시 죄를 묻는 군사를 일으켰다. 이는 고구려의 두 나라에 대한 관계이니, 수백 년 동안 두 나라로 인하여, 고구려의 한에 대한 진취 ( 進取 ) 를 방해하였다. 이 책에서는 두 낙랑을 구별하기 위하여 낙랑국은 남낙랑 ( 南樂浪 ) 이라 하고 한의 요동 낙랑군은 북낙랑 ( 北樂浪 ) 이라 하거니와,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에 보인 낙랑국은 다 남낙랑을 가리킨 것인데, 종래의 학자들이 매양 요동에 있는 북낙랑은 모르고 남낙랑을 낙랑군이라 주장하는 동시에 삼국사기 의 낙랑국 낙랑왕은 곧 한군태수의 세력이 동방을 웅시 ( 雄視 ) 하여 그 형세가 한 나라 왕과 같으므로 나라 또는 왕이라 일컬었다고 단언 ( 斷言 ) 하였으나, 고구려 와 경계가 닿은 요동태수를 요동국왕이라 일컫지 않았으며 현도태수를 현도국왕이라 일컽지 아니하였는데, 어찌 홀로 낙랑태수만 낙랑국 왕이라 일컬었으랴? 그것이 억설임이 의심없다. 이즘 일본인이 낙랑 고분에서 혹 한대 ( 漢代 ) 연호를 새긴 그릇을 발견하고 지금의 대동강 남쪽 기슭을 위씨의 옛 서울 곧 뒤의 낙랑의 군치 ( 郡治 ) 라고 주장하지마는 이러한 그릇은 혹 남낙랑이 한과 교통할 때에 수입한 것이거나, 그렇지 않으면 고구려가 한과의 싸움에 이겼을 때 노획한 것일 것이요, 이로써 지금의 대동강 연안이 낙랑 군치임을 단언하는 것은 옳지 못한 일이다. 계립령(鷄立嶺) 이남의 별천지(別天地)[편집] 계립령은 지금의 조령(鳥領 : 새재) 이다. 지금 문경읍(聞慶邑)의 북산(北山)을 계립령이라고 하지마는, 고대에는 조령의 이름이 '저릅 재'이니, '저릅'은 삼(麻)의 옛 말이다. '저릅'을 이두자의 음으로는 '계립(鷄立)'이라 쓰고, 뜻으로는 '마목(麻木)'이라 쓰는 것이니 그러므로 조령이 곧 계립령이다. 계립령 이남은 지금 경상남북도의 총칭인데, 계립령의 일대로 지금의 충청북도를 막으며, 태백산( 太白山 : 奉化의 태백산)으로 지금의 강원도를 막고, 지리산으로 지금의 충청남도와 전라남북도를 막으며, 동과 남으로 바다를 둘러 따로 한 판국이 되었으므로 조선 열국(列國)의 당시에 네 부여(고구려도 혹 卒本扶餘라 함)가 분립한다, 고구려가 동부여를 정복한다, 또 낙랑을 정복한다, 위씨가 한에게 망하여 그 땅이 사군(四郡)이 된다, 백제가 마한을 토멸한다---하는 소란이 있었지만 영(領) 이남은 그런 풍진(風塵)의 소식이 들리지 않아, 진한·변한의 자치령 수십 나라가 그 비옥하고 아름다운 토지에 의거하여 벼·보리·기장·조 등의 농업과 누에치기 ·길쌈 등을 힘써서 곡식과 옷감들을 생산하고 철을 채취하여 북쪽 여러 나라에 공급하고, 변진(弁辰)은 음악을 좋아하여 변한슬(弁韓瑟 : 불한고)이란 것을 창작하여 문화가 매양 발달하였으나, 일찍이 북방의 유민으로 마한의 봉지(封地)를 받았으므로 마한의 절제(節制)를 받고 마한이 망한 뒤에는 백제의 절제를 받았다. 그러나 그 절제는 소극적으로 a) '신수두'의 건설과 b) '신한' 칭호 쓰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며, 적극적으로 1) 해마다의 조알(朝謁)과 2) 토산물의 진공(進貢)을 행할 뿐이었는데, 나중에 진한 자치부는 신라국(新羅國)이 되고, 변진 자치부는 여섯 가락(加羅) 연맹국이 되어, 차차 백제에 반항하기에 이르렀다. 가라(加羅) 6국(國)의 건설[편집] 지금의 경상남도 등지에 변진의 12 자치부가 설립되었음은 제 3 편 제4 장에 말하였거니와, 위의 각 자치부를 대개 `가라'라 일컬었다. `가라' 란 큰 소〔大沼〕의 뜻이니, 각 부가 각각 제방을 쌓아서 냇불을 막아 큰 소를 만들고, 그 부근에 자치부를 설치하여 그 부의 이름을 `가라'라 일컬은 것이었다. `가라'를 이두문으로 `가라 ( 加羅 ) ' , `가락 ( 駕洛 ) ' , `가야 ( 加耶 ) ' , `구야 ( 狗邪) ' , `가야 ( 伽倻 ) ' 등으로 썼으니, 야 ( 耶 ) · 야 (邪) · 야 ( 倻 ) 등은 옛 음을 다 `라'로 읽은 것이고 , `가라'를 혹 `관국 ( 官國 ) '이라 썼으니 , `관 ( 官 ) '은 그 음의 초성 · 중성을 떼어 `가'로 읽고 , `국 ( 國 ) '은 그 뜻의 초성 · 중성을 떼어 `라'로 읽은 것이다. 기원 42 년경에 각 가라의 자치부원 ( 自治部員 ) · 아도간 ( 我刀 干) · 여도간 ( 汝刀干) · 피도간 ( 彼刀干) · 오도간 ( 五刀干 ) · 유수간 ( 留水干) · 유천간 ( 留天干) · 신천간 ( 神天干 ) · 신귀간 ( 神鬼干 ) · 오전간 ( 五天干 ) 등이 지금의 김해읍 ( 金海邑 ) 귀지봉 ( 龜旨峰 ) 위에 모여 대계 ( 大계 : 계는 당시 自治會의 이름 ) 를 베풀고, 김수로 ( 金首露 ) 6 형제를 추대하여 여섯 `가라'의 임금을 삼았다. 김수로는 제 1 가라, 곧 김해를 맡아 `신가라'라 일컬으니, `신'은 크다는 뜻이요, 첫째 우두머리라는 뜻이다. `신가라'는 전사 ( 前史 ) 에 금관국 ( 金官國 ) 이라 쓴 것이 옳은데, 가락 ( 駕洛 ) 혹은 구야 ( 狗邪) 라고 썼으니, 이 둘은 다 `가라'의 이두자이므로, 이로써 여섯 가라를 총칭 하는 것은 옳으나, 다만 `신가라'를 가리켜 일컬음은 옳지 않다. 둘째는 `밈라가라'니, 지금 고령 ( 高靈 ) 의 앞내를 막아 가라〔大沼〕를 만들고, 이두자로 `미마나 ( 彌摩那 )' 혹은 `임나 ( 任那 )'라 쓴 것으로서, 여섯 가라 중 그 후손이 가장 강대하였으므로 전사에 대가라 ( 大加羅 ) 혹은 대가야 ( 大加耶 ) 라 기록하였다. 셋째는 `안라가라'이니, 지금 함안 (咸安 ) 의 앞내를 막아 가라를 만 들고, 이두자로 `안라 ( 安羅 )', `아니라 ( 阿尼羅 )' 혹은 `아니량 ( 阿尼良 )'이라 기록한 것인데, 아니량이 나중에 와전하여 `아시라 ( 阿尸羅 )'가 되고 아시라가 다시 와전하여 `아라 ( 阿羅 )'가 되었다. 넷째는 `고링가라'이니, 지금의 함창 ( 咸昌 : 尙州郡 ) 으로 또한 앞내를 막아 가라를 만들고 이두자로 고령 ( 古寧 ) 이라 기록한 것인데, `고링가라'가 와전하여 `공갈'이 되었으니 지금의 `공갈못〔恭儉池〕'이 그 자리이다. 여섯 가라 고적 중 오직 이것 하나가 전해져 그 물에는 연꽃 · 연잎이 오히려 수천 년 전의 풍경을 말하는 듯하더니, 이조 광무 ( 光武 ) 시절에 총신 ( 龍臣 ) 이채연 ( 李采淵 ) 이 논을 만들려고, 그 둑을 헐어 아주 폐허가 되게 하였다. 다섯째는 `별뫼가라'이니, `별뫼가라'는 `별뫼'라는 산중에 만든 가라로서 지금의 성주 ( 星州 ) 다. 이두자로 `성산가라 ( 星山加羅 )' 혹은 `벽진가라 ( 碧珍加羅 )'로 기록한 것이다. 여섯째는 `구지가라'니, 지금 고성 ( 固城 ) 의 중도 ( 中島 ) 이다. 역시 내를 막아 가라를 만들고, 이두자로 `고자가라 ( 古資加羅 )'라 기록할 것인데, 여섯 나라 중 가장 작은 나라이므로 또한 `소가야 ( 小加耶 )'라 일컬었다. 여섯 가라국이 처음에는 형제의 연맹국이었으나 나중에 연대가 내려갈수록 촌수가 멀어져, 각각 독립국이 되어 각자의 행동을 취하였는데, 삼국사기에 이미 육가라 ( 六加羅 ) 본기 ( 本紀 ) 를 빼고 오직 신라 본기와 열전 ( 列專 ) 에서 신라와 관계된 가라의 일만 기록한 가운데, `신가라'를 금관국이라 쓴 이외에는 그 밖의 다섯 가라를 거의 구별이 없이 모두 가야 ( 加耶 ) 라 써서 그 가야가 어느 가라를 가리킨 것인지 모르게 된 것이 많다. 이제 이 책에서는 할 수 있는 대로 이를 구별하 여 쓰고, 여섯 가라의 연대도 삭감당한 듯하므로 신라의 앞에 기술하였다. 신라(新羅)의 건국[편집] 종래의 학자들이다, `신라사가 고구려·백제 두 국사보다 비교적 완전하다.'고 하였으나, 이는 아주 모르는 말이다. 고구려사와 백제사는 삭감이 많거니와, 신라사는 위찬(僞撰)이 많아서 사료로 근거 삼을 것이 매우 적으니, 이제 신라 건국사를 말함에 있어 이를 대강 논술하려 한다. 신라의 제도는 6부(部) 3성(姓)으로 조직되었는데, 신라 본기에 의거하면 6부는 처음에 알천양산(閼川楊山)·돌산고허(突山高墟)·무산대수(茂山大樹)·취산진지(觜山珍支 )·금산가리(金山加利)·명활산 고야(明活山高耶)의 여섯 마을이었는데,[편집자 주 1] 신라 건국 후 제3세 유리왕 9년 (기원32년)에 여섯 마을의 이름을 고치고 성을 주었다. 곧 알천양산은 양부(梁部)라 하고 성을 이(李)로 하였으며, 돌산고허는 사량부(沙梁部)라 하고 성을 최(崔)로 하였으며, 무산대수는 점량부(漸梁部: 一名 弁梁部)라 하고 성을 손(孫)으로 하였으며, 자산진지는 본피부(本彼部)라 하고 성을 정(鄭)으로 하였으며, 금산가리는 한기부(漢祇部)라 하고 성을 배(裵)로 하였으며, 금산가라는 한기부 (習比部) 라 하고 성을 설(薛)로 하였다고 한다. 3 성은 박 ( 朴 ) · 석 ( 昔 ) · 김 ( 金 ) 세 집이니, 처음에 고허촌장 ( 高墟村長 ) 소벌공 ( 蘇代公 ) 이, 양산 ( 楊山 ) 아래 나정 ( 羅井 ) 곁에 말이 꿇어앉아 우는 것을 바라보고 쫓아가보니, 말은 간 곳이 없고 큰 알 하나가 있으므로, 이것을 쪼개니 어린아이가 나왔다. 데려다가 기르고 성을 박이라고 하였는데, 그가 나온 큰 알이 박만하므로 `박'의 음을 딴 것 이라고 한다. 이름을 혁거세 ( 赫居世 ) 라고 하였는데, 혁거세는 그 읽는 법과 뜻이 다 전하지 않는다. 나이 13 살에 영특하고 숙성하므로 백성이 그를 높여 거서간 ( 居西干) 을 삼았다. 거서간은 그때의 말로 귀인 ( 貴人 ) 의 칭호라고 한다. 이것이 신라 건국 원년 ( 기원전 57 년 ) 이고, 이이가 박씨의 시조이다. 신라의 동쪽에 왜국 ( 倭國 ) 이 있고, 왜국의 동북쪽 1 천 리에 다파나국 ( 多婆那國 ) 이 있는데, 그 국왕이 여국왕 ( 女國王 ) 의 딸에게 장가 들어 아이를 밴 지 7 년만에 큰 알을 낳으므로, 왕이 상서롭지 못한 일이라 하여 내다 버리라고 하니, 여자가 차마 그럴 수 없어서 비단으로 싸고 금궤에 넣어 바다에 띄워보냈다. 그 금궤가 금관국의 해변에 이르니, 금관국 사람들은 괴이하게 여겨 가지지 아니하였는데, 진한의 아진포 ( 阿珍浦 ) 포구에 이르니 바닷가의 한 노파가 이를 건져냈다. 열고 보니까, 그 속에 어린아이가 있어 이 노파는 데려다가 길렀다. 이 때가 박혁거세 39 년 ( 기원전 19 년 ) 이었는데, 금궤에서 빠져나왔으므로 이름을 탈해 ( 脫解 ) 라 하고 금궤가 와 닿을 때에 까치〔鵲〕가 따라오면서 울었으므로 작 ( 鵲 ) 자의 변을 따서 성을 석 ( 昔 ) 이라 하니, 석씨의 시조다. 석탈해 ( 昔脫解 ) 9 년 ( 기원후 65 년 ) 에 금성 ( 金城 : 신라의 서울, 곧 慶 州 ) 서쪽 시림 ( 始林 ) 에서 닭 우는 소리가 나므로 대보 호공 ( 瓠公 ) 을 보내어 가보게 하였더니, 금빛 조그만 궤가 나뭇가지에 걸려 있고 그 아래에서 흰 닭이 울므로, 그 금궤를 가져다가 열어보니, 또 한 조그만 어린아이가 있으므로 데려다가 기르면서 이름을 알지 ( 閼智 ) 라 하고 금궤에서 나왔으므로 성을 김 ( 金 ) 이라 하니 이는 김씨의 시조라 하였다. 궤에서 나왔다, 알에서 깨어났다 하는 신화는 그때 사람이 그 시조 의 출생을 신이 ( 神異 ) 하게 장식한 것이거니와, 다만 6 부 · 3 성의 사적 이 고대사의 원본이 아니고 후세 사람의 보태고 줄임이 많음은 가석한 일이다. 이를테면 조선 고사의 모든 인명 · 지명이 처음엔 우리말로 짓고 이두자로 기록하였는데, 그 뒤 한문화 ( 漢文化 ) 가 성행하면서 한자로 고쳐 만들었으니, 원래는 `메주골'이라 하고, `미추홀 ( 彌鄒忽 )' 혹은 `매초홀 ( 買肖忽 )'이라 쓰던 것을 나중엔 인천 ( 仁川 ) 이라 고친 따위인데, 이제 알천양산 ( 閼天楊山 ) · 돌산고허 ( 突山高墟 ) 등 한자로 지은 여섯 마을의 이름이 6 부의 본 이름이고, 양부 ( 梁部 ) · 사량부 ( 沙梁 部 )---등 이두자로 지은 6 부의 이름이 여섯 마을의 나중 이름이라 함이 어찌 앞뒤의 순서를 뒤바꾼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이 있음이 그 하나다. 신라가 불경을 수입하기 전에는 모든 명사를 다만 이두자의 음이나 뜻을 맞추어 쓸 뿐이었는데, 불교가 성행한 뒤에 몇몇 괴벽한 중들이 비슷만 하면, 불경의 숙어에 맞추어 다른 이두자로 고쳐 만들었으니, 예를 들면 소지왕(炤智王)을 혹 비처왕(毘處主)이라 일컫는데, 소지나 비처가 다 '비치'로 읽은 것이지마는, 비처는 원래 쓴 이두자이고, 소지는 불경에 맞추어 고쳐 만든 이두자요, 유리왕 ( 圖理王 ) 을 혹 세리지왕 ( 世利智王 ) 이라 일컫는데, 유리나 세리가 다 `누리'로 읽은 것이 지마는, 유리는 원래 쓴 이두자이고, 세리는 또한 불경에 맞추어 고쳐 만든 이두자이다. 탈해왕 ( 脫解王 ) 도 그 주에 일명 `토해 ( 吐解 ) '라 하였는데, 탈해나 토해는 다 `타해' 혹 `토해'로 읽을 것이고, 그 뜻은 무엇인지 알 수 없으나, 당시의 속어로 된 명사임은 분명하니, 토해 ( 吐解 ) 는 본래 쓴 이두자이고, 탈해는 고쳐 만든 이두자로서, 불경에 해탈 ( 解脫 ) 이라는 말이 있으므로 토해의 뜻을 탈 ( 脫 ) 로 고쳐 만든 것이다. 원래는 당시 속어의 음을 취한 것이고, 탈출 ( 脫出 ) 혹은 해출 ( 解出 ) 의 뜻이 없으니, 금궤에서 탈출하였으므로 탈해라 하였다고 함이 괴벽한 중들의 부회 ( 附會 ) 임을 단언할 수 있음이 그 둘이다. 3 성의 시조가 다 큰 알에서 나왔으니, 그 큰 알은 다 `박'만 할 것인데, 어찌하여 3 성의 시조가 다 같은 박씨가 되지 않고, 박씨 시조 이 외에 두 시조는 석씨와 김씨가 되었는가? 석 · 김 두 성이 다 금궤에서 나왔는데 어찌하여 같은 김씨가 되지 아니하고, 하나는 석씨, 하나 는 김씨가 되었는가? 석탈해 ( 昔脫解 ) 의 금궤에 까치가 따라와 울었으므로, 작 ( 鵲 ) 자의 변을 따서 석씨 ( 昔氏 ) 가 되었으며, 김알지 ( 金斡智 ) 가 올 때에 닭이 따라와 울었으니, 계 ( 鷄 ) 자변을 따서 해씨 ( 采氏 ) 가 되어야 옳겠는데 어찌하여 두 사람에게 다른 예를 써써 앞에서는 김씨가 되지 않고 석씨가 되었으며, 뒤에서는 해씨가 되지 않고 김씨가 되었는가? 신화라도 이같이 뒤섞여 조리가 없을 뿐더러 게다가 한자 파자장 ( 破字匠) 의 수작이 섞여서 이두문 시대의 실례와 많이 틀림이 그 셋이다. 초년(初年)에 초창(草創)한 신라는 경주 한 구석에 의거하여 여러나라 중에서 가장 작은 나라였는데, '변한이 나라로 들어와서 항복하였다.' [편집자 주 2] 느니 , `동옥저가 좋은 말 200 마리를 바쳤다.'[편집자 주 3]느니 함이 거의 사세에 맞지 아니할 뿐 아니라, '북명인(北溟人)이 밭을 갈다가 예왕(濊王)의 도장을 얻어서 바쳤다.'[편집자 주 4] 함은 더욱 황당한 말인듯하다. 왜냐하면 북명(北溟)은 '북가시라'--- 북동부여의 별명으로 지금의 만주 훈춘 등지이고, 고구려 대주류왕의 시위장사(待衛壯士) 괴유(怪由)를 장사 지낸 곳인데, 이제 훈춘의 농부가 밭 가운데서 예왕의 도장을 얻어 수천 리를 걸어 경주 한 구석의 조그만 나라인 신라왕에게 바쳤다 함이 어찌 사실다운 말이랴? 이는 경덕왕(景德王)이 동부여 곧 북명의 고적을 지금의 강릉으로 옮긴 뒤에 조작한 황당한 말이니, 다른 것도 거의 믿을 가치가 적음이 그 넷이다. 신라가 여러 나라중에서 문화가 가장 늦게 발달하여 역사의 편찬이 겨우 그 건국 6 백 년 후에야 비로소 억지로 북쪽 여러 나라의 신화를 모방하여 선대사 ( 先代史 ) 를 꾸였는데, 그나마도 궁예 ( 弓裔 ) · 견훤 ( 甄萱 ) 등의 병화 ( 兵火 ) 에 다 타버리고, 고려의 문사들이 남산 · 북산의 검불을 주워다가 만든 것이므로, 신라 본기의 기록의 진위를 가려냄이 고구려 · 백제 두 나라 역사나 마찬가지인데, 역사가들이 흔히 신라사가 비교적 완벽된 것인 줄로 알아 그대로 믿었다. 나의 연구에 의하면, 신라는 진한 6부의 총칭이 아니고, 6부 중의 하나인 사량부이다. 신라나 사량은 다 '새라'로 읽을 것이요, '새라'는 냇물 이름이니, '새라'의 위에 있으므로 '새라'라 일컬은 것이고 사량은 사훼 (沙喙: 진흥왕 비문에 보임)라고도 기록하였으며, 사훼는 '새불'이니 또한 '새라'위에 있는 '불' --들판이기 때문에 일컬은 이름이다. 본기에 신라의 처음 이름을 '서라벌(徐羅筏)'이라 하였으나, 서라벌은 '새라불'로 읽을 것이니 또한 '새라'의 '불'이라는 뜻이다. 시조 혁거세는 곧 고허촌장 소벌공(蘇伐公)의 양자이고, 고허촌은 곧 사량부이니, 소벌공의 '소벌(蘇伐)'은 또한 사훼와 같이 '새불'로도 읽을 것이므로 지명이고, 공(公)은 존칭이니, 새불 자치회 (自治會)의 회장이므로 '새불공'이라 한 것이다. 말하자면 소벌공은 곧 고허촌장이라는 뜻인데, 마치 사람의 이름같이 씀은 역사가가 잘못 기록한 것이다. 새라 부장(部長)의 양자인 박혁거세가 6부의 총왕(總王)이 되었으므로 나라 이름을 '새라'라 하고 이두자로 신라(新羅)·사로(斯盧)·사라(斯羅)·서라(徐羅) 등으로 쓴 것이다 . 3 성의 박씨뿐 아니라 , 석씨 · 김씨도 다 사량부의 귀인의 성이니, 3 성을 특별히 존숭하는 것은 또한 삼신설 ( 三神說 ) 에 의방 ( 依倣 ) 한 것이다. 본기 석탈해왕 9 년 ( 기원65년 ) 에 비로소 김씨 시조인 영아 ( 영兒 ) 김알지를 주웠다고 하였으나, 파사왕 ( 婆娑王 ) 원년 ( 기원 80년) 에는 왕후 사성부인 ( 史省夫人 ) 김씨는 허루갈문왕 ( 許婁曷文王 : 추존한 왕을 갈문왕이라 함 ) 의 딸이라 하였으니, 그 나이를 따지면 허루 ( 許婁) 도 거의 알지의 아버지뻘되는 김씨인 것이니, 이로 미루어보면 박 · 석 · 김 3 성이 처음부터 사량부 안에 서로 연흔 ( 聯婚 ) 하는 거족 ( 巨族 ) 이었는데, 같이 의논한 끝에 6 부 전체를 가져 3 성이 서로 임금 노릇하는 나라를 만든 것이다. 이에 진한 자치제의 판국이 변하여 세습 제왕의 나라가 됨에 이르렀다.
66    제3편: 삼조선(三朝鮮)의 분립 시대 댓글:  조회:30  추천:0  2019-01-31
제 1 장 삼조선(三朝鮮) 총론 삼조선(三朝鮮)이란 명칭의 유래 종래의 각 역사책에 삼조선 분립의 사실이 빠졌을 뿐 아니라, 삼조선이라는 명사까지도 단군·기자·위만의 세 왕조라고 억지 해석을 하였다. 삼조선은 신·불 ·말 삼한의 분립을 말한 것이니, `신한'은 대왕 ( 大王 ) 이요, 불·말 두 한은 부왕 ( 副王 ) 이다. 삼한이 삼경 ( 三京 ) 에 나뉘어 있어 조선을 통치하였음은 이미 제 1 편에서 말하였거니와, 삼조선은 곧 삼한이 분립한 뒤에 서로 구별하기 위하여 신한이 통치하는 곳은 신조선이라 하고, 말한이 통치하는 곳은 말조선이라 하고, 불한이 통치하는 곳은 불조선이라 하였다. 신·말·불 삼한은 이두문으로 진한 ( 辰韓 )·변한 ( 弁韓 ) 이라 기록된 것이고, 신·말 ·불 삼조선은 이두문으로 진 ( 眞 ) · 막 ( 莫 ) · 번 ( 番 ) 삼조선이라 기록된 것이다. 똑같은 신·말·불의 음역 ( 音譯 ) 이 어찌하여 하나는 진·마·변이라 하고 또 하나는 진·막·번이라 하여 같지 아니한가? 이는 남북의 이두문의 용자 ( 用字 ) 가 달랐기 때문이거나 혹은 지나인의 한자 음역이 조선의 이두문의 용자와 달랐기 때문일 것이다. 조선에는 고전 ( 古典 ) 이 거의 다 없어졌으므로 삼조선의 유래를 찾을 길이 없으나, 지나사 ( 支那史 ) 에는 왕왕 보인다. 사기 ( 史記 ), 조선열전 ( 朝鮮列傳 ) 에 `진번조선 ( 眞番朝鮮 ) '이라 한 것은 신·말 두 조선을 함께 말한 것이고, 주 ( 註 ) 에 “번 ( 番 ) 은 일에 막 ( 莫 ) 으로도 쓴다 ( 畵一作莫 ). ”고 하였는데, 번자를 막자로 대신하면 `진막조선 ( 眞莫朝鮮 ) '이 된다. 진막조선은 신·말 두 조선을 함께 말함이니, `진막번조선 ( 眞莫番朝鮮 ) ' 혹은 그대로 써서 신·말·불 삼조선을 다 말하지 않고, 혹은 막자를 빼어버리고 `진번조선 ( 眞番朝鮮 ) '이라 하거나 혹은 번자를 빼어버리고 `진막조선 ( 眞莫朝鮮 ) '이라 기록한 것은 무슨 까닭인가? 이는 지나인이 외국의 인명·지명 등 명사를 쓸 때에 매양 문예 ( 文藝 ) 의 평순 ( 平順 ) 을 위하여 축자 ( 縮字)를 쓰는 버릇으로 그렇게 쓴 것이다 . 목천자전 ( 穆天子傳 ) 의 한 ( 韓 ) 은 신한을 가리킨 것이요, 관자 ( 管子 ) 의 `발조선 ( 發朝鮮 ) '과 대대례 ( 大戴禮 ) 의 `발식신 ( 發息愼) '은 불조선을 가리킨 것이요, 오직 말조선은 지나와 멀리 떨어져 있었으므로 사기 이외에는 다른 책에 보이는 것이 없다. 삼조선(三朝鮮)의 위치와 범위 한 ( 韓 ) 은 나라 이름이 아니라 왕이란 뜻이니, 삼한이란 삼조선을 나누어 통치한 세 대왕을 말함이고, 삼조선이란 삼한 곧 세 왕이 나누어 통치한 세 지방임은 물론이어니와, 그 세 도읍의 위치와 강역 ( 疆域 ) 의 범위도 기술할 수 있을까? 삼한의 도읍은 1) 제 1 편에 말한 '아스라' ----지금의 합이빈, 2) '알티' ----지금의 개평현 ( 蓋平縣 ) 동북쪽 안시 ( 安市 ) 옛 터, 3) '펴 라' ----지금의 평양, 이 셋이다. 삼조선이 분립하기 전에는 신한이 온 조선을 통치하는 대왕이 되고, 불·말 두 한이 그 부왕 ( 副王 ) 이었으므로, 신한이 '아스라'에 머물러 있을 때에는 말·불 두 한은 하나는 '펴라'에, 하나는 '알티'에 머무르고, 신한이 '알티' 혹 '펴라'에 머물러 있을 때는 불·말 두 한은 또한 다른 두 서울을 나누어 지키다가 삼조선이 분립한 뒤에는 삼한이 각기 삼경 ( 三京 ) 의 하나를 차지하고, 조선을 셋으로 나누어 가졌다. 이때의 삼한이 차지한 부분을 상고하건대, 만주원류고 ( 滿洲原流考 )에, “한서지리지에 요동의 번한현 ( 番汗縣 ), 지금의 개평 등지가 변한 ( 弁韓 ) 의 고도 ( 古都 ) 이다.”라 했는데, 번한과 변한이 음이 같으니 개평 동북쪽의 '알티'가 불한의 옛 서울일 것이다. 삼국유사 ( 三國遺史 ) 에, “마한(馬韓 ) 은 평양의 마읍산 ( 馬邑山 ) 으로 이름한 것이다.”라고 하였는데, 마한으로 인하여 마읍산이 이름을 얻은 것이요, 마읍 ( 馬邑 ) 으로 인하여 이름을 얻은 것은 아니나, 마한은 곧 평양에 도읍하였다가 뒤에 남쪽으로 옮겼음이 사실이니, 평양 곧 '펴라'가 ( 말한 ) 의 옛 서울일 것이요, 신한은 비록 상고할 곳이 없으나 '알티'와 '펴라'의 두 서울이 불·말 두 한을 나누어 점령하였으니, '삼한'이 합이빈 곧 '아스라'에 도읍하였을 것이 의심없다. 이에 삼조선의 강역의 윤곽도 대개 그릴 수 있으니, 지금 봉천성 ( 奉天省 ) 의 서북과 동북 ( 開原 이북, 興京 이동 ) 과 지금 길림 ( 吉林 ) ·흑룡 ( 黑龍 ) 두 성 ( 省 ) 과 지금 연해주 ( 沿海州 ) 의 남쪽 끝은 신조선의 소유이고, 요동반도 ( 遼東半島 : 開原 이남 , 興京 이서 ) 는 불조선의 소유이며, 압록강 이남은 말조선의 소유였다. 그러나 전쟁의 세상에 고정된 강역이 있을 수 없으니, 시세를 따라 삼조선의 국토가 많이 늘었다 줄었다 하였을 것이다. 기록상 삼조선(三朝鮮)의 구별 조건 이제 역사를 읽는 이들이 귀에 서투른 '신조선' , '불조선' '말조선' 이라는 소리만 들어도 이미 놀랄 것인데, 하물며 전사 ( 前史 ) 에 아무 구별없이 쓴 '조선 ( 朝鮮 ) '이란 명사들을 가져다 구별하여, 갑의 역사에 쓰인 조선을 신조선이라 하고, 을의 역사에 쓰인 조선을 불조선이라 하고 , 병의 역사에 쓰인 조선을 말조선이라 하면 믿을 사람이 누구랴 ? 그러나 삼국사기를 읽어보면 고구려 본기 ( 本紀 ) 에 동·북 두 부여를 구별치 않고 다만 부여라 씌었고, 신라 본기에는 크고 작은 등 다섯 가야 ( 加耶 ) 를 구별치 않고 다만 가야라 씌어 있으니, 만일 전사 ( 前史 ) 에 구별하지 아니한 것이라고 하여 그대로 구별치 아니하면 두 부여사나 다섯 가야사 ( 加耶史 ) 의 본 면목을 회복할 날이 없을 것이 아닌가? 하물며 삼조선의 분립은 조선 고사에 있어서 유일한 큰 일이니, 이를 구별치 못하면 곧 그 이전에 대단군 왕검의 건국의 결론을 찾지 못할 것이요, 그 이후에 동북 부여와 고구려·신라·백제 등의 문화적 발전 서론 ( 緖論 ) 을 얻지 못할 것이니, 어찌 습견 ( 習見 ) 에 젖은 이의 두뇌에 맞추기 위해 삼조선의 사적 ( 事蹟 ) 을 구별하지 않으랴? 삼조선의 사적 ( 史的 ) 재료는 오직 사기 ( 史記 ), 위략 ( 魏略 ), 삼국지 ( 三國志 ) 등 지나사 ( 支那史 ) 뿐이지만 저 지나사의 저작자들이 그들의 유전적인 교오병 ( 驕傲病 ) 이 있어서, 조선을 서술할 때에 조선 그 자체를 위하여 조선을 계통적으로 서술하지 않고 오직 자기네와 정치적으로 관계되는 조선을 서술하였고, 그나마도 왕왕 피차의 성패와 시비를 뒤바꾸어 놓았음이 그 하나요, 조선의 나라 이름·지명 등을 기록할 때에 왕왕 조선인이 지은 본디의 명사를 쓰지 않고 자의로 딴 명사를 지어, 동부여 ( 東扶餘 ) 를 불내예 ( 不耐濊) 라 하고, 오열홀 ( 烏列忽 ) 을 요동성 ( 遼東省 ) 이라 하는 따위의 필법 ( 筆法 ) 이 많음이 그 둘이요, 조선은 특수한 문화가 발달하여 왔는데, 매양 기자 ( 箕子 ) 나 진 ( 奏 ) 나라 유민에게 공을 돌리려 하여 허다한 거짓 증거를 가짐이 그 셋이다. 그러므로 사마천이 사기를 지을 때에 연 ( 燕 ) 의 멸망이 오래지 않았으니 연과 삼조선에 관계된 사실의 상고할 만한 것이 적지 않았을 것이고, 한무제 ( 漢武帝 ) 가 조선의 일부분이요, 삼경 ( 三京 ) 의 하나인 '알티'의 문화고도 ( 文化故都 ) 를 점령하였으니, 고대의 전설과 기록이 적지 않았을 것인데도 불구하고 사기의 조선전 ( 朝鮮傳 ) 은 조선의 문화적·정치적 사실을 하나도 쓰지 않고, 오직 위만 ( 衛滿 ) 과 한병 ( 漢兵 ) 의 동침 ( 東侵 ) 을 썼을 뿐이니, 이는 조선전이 아니라 위만의 소전 ( 小傳 ) 이요, 한나라의 동방 침략의 약사 ( 略史 ) 이다. 위략, 삼국지 등의 책은 관구검 ( 母兵檢 ) 이 실어간 고구려의 서적으로 재료를 삼았으나 또한 그 폐습의 심리를 가지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러면 무엇에 의거하여 저들의 기록에 보인 조선들을 가지고 이것이 신조선이니, 말조선이니, 불조선이니 하는 구별을 내릴 것인가? 사기 조선에는 위만이 차지한 불조선만을 조선 ( 朝鮮 ) 이라 쓰는 대신에 신조선은 동호 ( 東胡 ) 라 일컬어서 흉노전에 넣었다. 그러니 이제 사기, 흉노전에서 신조선의 유사 ( 遺事 ) 를, 조선전에서 불조선의 유사를 초출 ( 抄出 ) 하고, 위략이나 삼국지의 동이열전 ( 東夷列傳 ) 의 기록을 교정하여 이를 보충하고 말조선은 지나와 멀리 떨어져 있어서 지나사의 필두에 오른 일은 적으나, 마한 ( 馬韓 ) ·백제 ( 百濟 ) 의 선대는 곧 말조선 말엽의 왕조이니, 이로써 삼조선이 갈라진 역사의 대강을 알 것이다. 삼조선(三朝鮮) 분립의 시작 대단군 ( 大檀君 ) 의 정제 ( 定制 ) 에는 비록 삼한이 있어 삼경에 나뉘어 머물렀으나, 신한은 곧 대단군이니 제사장으로서 겸하여 정치상의 원수가 되고, 말·불 두 한은 신한을 보좌하는 두 부왕에 지나지 않는 나라의 체제를 확립하였으므로, 삼조선이라는 명칭이 안는 나라의 체제를 확립하였으므로 삼조선이라는 명칭이 없었는데, 삼한이 분립한 뒤 삼조선이란 명사가 생겼음은 이미 앞에서 말하였거니와, 삼한이 어느 시대에 분립하였는가? 사기에 보인 진막벌조선은 전연시 (全燕時 ) 곧 연의 전성 시대라고 하였는데, 연의 전성 시대는 지나 전국시대 ( 戰國時代 ) 초이고, '발조선 ( 發朝鮮 ) '을 기록한 관자 ( 管子 ) 는 관중 ( 管仲 ) 이 지은 것이 아니고 전국시대의 위서 ( 僞書 ) 이며 '발숙신 ( 發肅愼 ) '을 기록한 대대례 ( 大戴禮 ) 는 비록 한인 ( 漢人) 대승 ( 載勝 ) 이 지은 것이지마는, 발식신 ( 發息愼) 운운 한것은 제인 ( 齊人 ) 추연 ( 鄒衍 ) 이 전한 것인데, 추연은 전국시대의 인물이다. 신·말·불 삼조선의 명사가 이같이 지나 전국시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렸으니, 삼조선의 분립은 곧 지나 전국시대의 일이요, 지나 전국시대는 기원전 4 세기경이니 , 그러면 기원전 땅 4세기 경에 신·말·불 삼조선이 분립한 것이겠다. 신조선은 성이 해씨 ( 解氏 ) 니, 대단군 왕검의 자손이라 일컬은 자이고, 불조선은 성이 기씨 ( 箕氏 ) 니 기자 ( 箕子 ) 의 자손이라 일컬은 자이고, 말조선은 성이 한씨 ( 韓氏 ) 니 그 선대의 연원은 알 수 없으나, 왕부 ( 王符 ) 의 잠부론 ( 潛夫論 ) 에, “한 ( 韓 ) 의 서쪽도 역시 성이 한 ( 韓 ) 인데 위만 ( 衛滿 ) 에게 토벌당해 바다 가운데로 옮겨가 살았다 ( 韓西亦姓韓 爲衛滿所伐 遷居海中 ). ”고 하였으니, 한서 ( 韓西 ) 는 대개 말조선에 딸린 곳이므로, 말조선은 성이 한씨 ( 韓氏 ) 인가 한다. 위략 ( 魏略 ) 에, “기자 ( 箕子 ) 의 후손 조선후 ( 朝鮮候 ) 는 주 ( 周 ) 가 쇠해지고 연 ( 燕 ) 이 자존 ( 自尊 ) 하여 왕이 되서 동쪽으로 땅을 공략하려고 하는 것을 보고, 조선후도 역시 스스로 왕을 일컫고 군사를 일으켜 연을 배후에서 쳐 주실 ( 周室 ) 을 높이려고 하다가 대부례 ( 大夫禮 ) 가 간하여 그만두고 대부례로 하여금 연을 설득하여 연은 공격하지 않았다 ( 箕子之後朝鮮候 見周衰 燕自尊爲王 欲東略地 朝鮮候亦自稱爲王 欲興兵逆擊燕 以尊周室 大夫禮 諫之乃止 使禮西說燕以之止 不攻 ). ”고 하였는데, 위략은 곧 서양의 백인종인 대진 ( 大秦 ) ·로마 ( 羅馬 ) 까지도 중국인의 자손이라 기록한 가장 지나식의 자존적 ( 自尊的 ) 병심리 ( 病心理 ) 를 발휘한 글이니, 그 글의 전부를 덮어놓고 믿을 수는 없으나 '신한', '불한'을 당시 조선에서 진한·마한·변한으로 음역한 이외에 '신한'은 혹 의역하여 '진왕 ( 辰王 ) ', '태왕 ( 太王 ) '이라고 하였으니 ( 다만 辰王의 辰은 음역 ) '신한'은 한자로 쓰면 조선왕 ( 朝鮮王 ) 이라 하였을 것이요, '말한', '불한'은 의역하여 좌보 ( 左輔 ) ·우보 ( 右輔 ) 라 하였으니, 한자로 쓰면 조선후 ( 朝鮮候 ) 라 하였을 것이므로 기자가 이 때에 '불한'의 지위에 었었으니 조선후라 일컬음이 또한 옳다. '불한' 조선후 기씨가 '신한' 조선왕 개씨를 배반하고 스스로 '신한'이라 일컬어서 삼조선 분립의 판국을 열었는데, '불한'이 '신한'을 일컬은 것이 연(燕)이 왕을 일컬은 뒤요, 연이 왕을 일컬은 것은사기 에 주 ( 周 ) 에 신정왕 ( 愼王 ) 46 년, 기원전 323 년이니 신·말·불 삼조선의 분립이 기원전 4 세기 경임을 확증하는 것이고, 대부례는 대개 '불한'의 유력한 모사 ( 謨士 ) 니, '불한'을 권하여 '신한'을 배반하고 역시 '신한'이라 일컫게 하고, 연과 결탁하여 동·서 두 새 왕국을 동맹하게 한 이가 또한 대부례이니 대부례는 삼조선 분립을 주동한 중심 인물일 것이다. 삼조선 분립 이전에는 '신한'이 하나였는데, 삼조선이 분립한 뒤에 는 '신한'이 셋이 되었다. 곧 신조선의 '신한'이 그 하나요, 말조선의 '신한'이 그 둘이요, 불조선의 '신한'이 그 셋이니, 곧 대왕 ( 大王 ) 이라는 뜻이다. 제 2 장 삼조선(三朝鮮) 분립 후의 '신朝鮮'[편집] 신朝鮮의 서침(西侵)과 연(燕)· 조(趙)· 진(秦)의 장성(長城)[편집] 삼조선이 분립한 뒤 오래지 않아서 신조선왕 모갑 ( 某甲 ) 이 영특하고 용감하여 마침내 말·불 두 조선을 다시 연합해 지금의 동몽고 ( 東蒙古 ) 둥지를 쳐서 선비를 정복하고 연을 쳐 우북평 ( 右北平 )---- 지금의 영평부 ( 永平府 ) 와 어양 ( 漁陽 )---- 지금의 북경 ( 北京 ) 부근과, 상곡 ( 上谷 )---- 지금의 산서성 ( 山西省 ) 대동부 ( 大同府 ) 등지를 다 차지하여 불리지 ( 弗離支 ) 의 옛 땅을 회복했다. 연왕 ( 燕王 ) 이 크게 두려워서 세폐 ( 歲輪 ) 를 신조선에 바치고 신하를 일걷고 태자를 보내서 볼모를 삼게 하였는데, 모갑이 죽고 모을 ( 某乙) 이 왕이 된 뒤에는 연의 태자가 돌아가서 연왕이 되어 장군 진개 ( 秦開 ) 를 왕자라 속여서 볼모로 보냈다. 모을이 그 속임수를 깨닫지 못하고 진개의 민첩하고 지혜로움을 사랑하여 가까이 두었다. 진개는 나라의 모든 비밀을 탐지해 가지고 도망해 돌아가서 군사를 거느리고 와 신조선을 습격, 신 ·말 ·불 세 나라의 군사를 깨뜨리고 서북 변경, 곧 전자에 신조선 왕 모갑이 점령한 상곡·어양·우북평 등지를 빼앗고 나아가 불조선의 변경을 습격해 요서 ( 遼西 )--- 지금의 노룡현 ( 盧龍縣 ) 과, 요동 ( 遼東 )--- 지금의 요양 ( 遼場 ) 부근을 함락시켜, 상곡·어양·우북평·요서·요동의 5 군을 두고, 2 천리 장성을 쌓아 조선을 막으니, 사기 조선열전 ( 朝鮮列傳 ) 에, “연의 전성시대에 일찍이 진번조선을 침략하여 복속시켰다 ( 全燕時嘗略屬眞番 朝鮮 ). ”고 한 것과 흉노열전에, “연의 어진 장수 진개 ( 秦開 )가 호 ( 胡 ) 에게 볼모가 되어 호가 깊이 믿었는데, 돌아와서 동호 ( 東胡 ) 를 습격하여 깨뜨리니, 동호는 1 천여 리를 퇴각하였다. 연이 또한 장성을 쌓고 조양 ( 造陽 ) 에서부터 양평 ( 襄平 ) 에까지 상곡·어양·우북평·요서·요동의 군을 설치하였다 ( 燕有賢將秦開 爲質於胡 胡甚信之 歸而襲破東胡 東胡却千餘里 燕亦築長城 自造陽 至襄平 置上谷漁陽 右北平 遼西 遼東郡 ). ”고 한 것과 위략에, 연이 장군 진개를 보내 그 서쪽을 공격하여 땅 2 천여 리를 빼앗아 만반한 ( 滿潘汗 ) 에까지 이르렀다 ( 燕乃遺將 秦開 攻其西方 取地二千餘里 至滿潘汗 ). ”고 한 것이 다 이를 가리킨 것이다. 그러나 진개가 볼모로 갔던 신조선이 아니므로, 사기에는 이를 흉노전과 조선전 두 곳에 나누어 기록하였고, 위략에는 비록 조선전에 기록하였으나, 진개의 볼모되었던 사실을 쓰지 아니하였다. 만반한은 조선의 역사 지리상 큰 문제이므로 다음 장에서 다시 말할 것이다. 이때 지나 북쪽의 나라로서 조선을 막기 위하여 장성을 쌓은 자는 연 한 나라뿐 아니다. 조 ( 趙 : 지금의 直匠省 서쪽 절반과 河南省 북쪽 끝과 山西省 ) 의 무령왕 ( 武靈王 ) 의 장성 ( 지금 山西의 북쪽 ) 이 또한 조선과 조선의 속민 ( 屬民 ) 인 담림 ( 澹林 )·누번 ( 樓煩 ) 등 때문에 쌓은 것이고, 진 ( 秦 : 지금의 陝西省 ) 소왕 ( 昭王 ) 의 장성은 의거 ( 義渠 ) 를 토멸하고 흉노를 막기 위하여 쌓은 것이지마는, 의거는 원래 조선 종족으로 지금의 감숙성 ( 甘肅省 ) 에 옮겨가서 성을 쌓고 대궐을 지었다. 농사가 발달하여 문화가 상당히 발달되었고 병력이 강하여 진 ( 秦 ) 을 압박하였다. 진의 선태후 ( 宣太后 : 秦始星의 高祖母 ) 는 절세의 미인이었는데, 의거가 진을 토멸할까 두려워서 의거왕을 꾀어 간통하여 두 아들을 낳게 하고는 의거왕을 불러다 쳐 죽이고, 두 아들까지 죽여버려 그 나라를 멸망시켰다. 창해역사(滄海力士)의 철퇴와 진시황의 만리장성 신조선이 연·조와 격전을 벌이는 동안에 진이 강성해져서 마침내 한 ( 韓 )·위 ( 魏 )·조 ( 趙 )·연 ( 燕 )·제 ( 齊 )·초 ( 楚 ) 등 지나의 여러 나라를 다 토멸하니, 한인 ( 韓人 ) 장량 ( 張良 ) 이 망국의 한을 품고 조선에 들어와 구원을 청하였다. 왕 모병 ( 某丙 ) 이 장사 여씨 ( 黎氏 ) 를 소개해 주어, 진시황의 순행 ( 巡幸 ) 을 기회하여 120 근 철퇴를 가지고 양무현 ( 陽武縣 ) 박랑사 ( 博浪沙 ) 가운데서 그를 저격하다가 잘못 부거 ( 副車 ) 를 부수고 성공치 못하였다. 사기에 장량이 창해군 ( 滄海君 ) 을 보고 장사를 구하였다고 하였으므로, 어떤 이는 창해를 강릉 ( 江陵 ) 이라 하고, 창해군을 강릉의 군장 ( 郡長 ) 이라고 하며, 장사 여씨를 강릉 출생이라 하였지마는, 창해는 동부여의 딴 이름이고, 동부여 두 나라는 1) 북갈사 ( 北曷思 : 지금의 琿春 ) 2) 남갈사 ( 南曷思 : 지금의 咸興 ) 에 도읍했으니, 창해는 이 두 곳 중의 하나요, 강릉이 창해라는 설은 근거없는 말이다. 얼마 안 가서 진시황이 동북쪽의 조선과 서북쪽의 흉노를 염려하여 옛날의 연·조 ·진의 장성을 연결하여 건축하는데, 전 지나의 인민을 동원하여 부역에 종사하게 하고 장군 몽념 ( 寒恬 ) 으로 하여금 30 만 군사를 거느려 감독케 해서 동양 사상 유명한 이른바 만리장성을 완성하였다. 기원전 210 년에 진시황이 죽고, 이세 ( 二世 ) 가 즉위하매, 이듬해에 진승 ( 陳勝 )·항적 ( 項籍 )·유방 ( 劉邦) 등 혁명 군웅이 봉기하여 진을 멸망시켰다. 이두산 ( 李斗山 ) 이 이를 논하여 말하기를, “진 ( 秦) 의 위력이 태고 이래로 짝이 없도록 팽창하여, 만성 ( 萬成 : 모든 사람 ) 이 바야흐로 시황을 천신 ( 天神 ) 으로 우러러보는데, 난데없이 벽력 같은 철퇴가 시황의 혼백을 빼앗고, 여섯 나라 ( 한 ·위 ·조 ·연 ·제 ·초 ) 의 유민의 적개심을 뒤흔들어 놓았으므로, 시황의 시체가 땅에 들어가기 전에 진을 멸망시키려는 깃발이 사방에 날렸으니, 이는 창해역사의 공이 아니랄 수 없다.”고 하였다 . 흉노 모돈(冒頓)의 동침(東侵)과 신조선의 위축 지나의 항적·유방 등의 8 년 동란이 계속되는 사이에 신조선왕 모정 ( 某丁) 이 서쪽으로 출병하여 상곡 ( 上谷 )·어양 ( 漁陽 ) 등지를 회복하고, 지금의 동부 몽고 일대 선비의 항복을 받아서 국위가 다시 떨치더니, 그 자손의 대에 마침내 흉노 모돈 ( 冒頓 ) 의 난을 만나 국세가 도로 쇠약해지고 말았다. 흉노는 제 1 편에서 말한 바와 같이 조선과 어계 ( 語系 ) 가 같고, 조선과 같이 `수두'를 신봉하여 조선의 속민이 되었었는데, 지금의 몽고 등지에 흩어져서 목축과 사냥에 종사하였다. 천성이 침략을 즐겨 자주 지나의 북부를 짓밟고, 신조선에 대하여도 배반과 귀부 ( 歸附 ) 가 무상하였는데, 기원전 200 년경에 두만 ( 頭曼) 이 흉노선우 ( 匈奴單于 : 흉노 大酋長의 호 ) 가 되어, 맏아들 모돈 ( 冒頓 ) 을 미워하고 작은 아들〔小子〕을 사랑하다가 모돈에게 죽고 모돈이 대신 선우가 되었다. 신조선왕은 그가 사납고 음흉함을 모르고 자주 물건을 요구하였는데, 모돈은 짐짓 그 환심을 사기 위해 신조선왕이 천리마를 구하면 그는 자기가 사랑하는 말을 주고, 신조선왕이 미인을 구하면 그는 그의 알씨 ( 閼氏 : 선우의 妻妾 ) 를 주니, 신조선왕은 더욱 모돈을 믿어 사자를 보내서 두 나라 중간의 천여리 구탈 ( 脫 ) 을 신조선의 소유로 달라고 하였다. 구탈이란 당시 중립 지대 빈 땅을 일컫는 말인데, 모돈이 이 청구를 받고는 크게 노하여, “토지는 나라의 근본인데 어찌 이것을 달라하느냐.” 하고 드디어 사자를 죽이고 전 흉노의 기병을 모두 내어 신조선의 서쪽인 지금의 동부 몽고 등지를 습격하여 주민을 유린하고 선비를 수없이 학살하였다. 신조선은 퇴각하여 장성 밖 수천 리의 땅을 버리고 선비의 남은 무리들은 선비산 ( 鮮卑山 )---- 지금의 내외 흥안령 ( 興安嶺 ) 부근으로 도주하니, 이로부터 신조선이 아주 미약하여 오랫동안 이웃 종족과 겨루지 못하였다. 엄복 ( 嚴復 : 淸末의 학자 ) 이 말하기를, “흉노를 물과 풀을 따라 옮겨다니는 야만족이니, 어찌 토지는 나라의 근본이란 말을 내었으랴? 이는 한갓 사마천의 과장된 글이 될 뿐이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사기, 한서 등을 참고해 보면, 흉노가 음산 ( 陰山 ) 의 험한 목을 빼앗긴 뒤엔 그 지방을 지나는 자가 반드시 통곡하였다 하고, 연지 ( 燕脂 ) 가 생산되는 언지산 ( 焉支山 ) 을 빼앗긴 뒤에는 슬픈 노래를 지어 서로 위로하였으니, 흉노의 토지 수요 ( 需要 ) 가 비록 문화적 민족과 같지 못하다 하더라도 아주 토지에 대한 관념이 없다 함은 편벽된 판단인가 한다. 제 3 장 삼조선(三朝鮮) 분립 후의 '불朝鮮' '불朝鮮'의 서북 변경을 빼앗김 불조선이 신조선과 합작하다가 연에게 패하였음은 이미 앞에서 말했으므로 여기에서는 다만 그 잃은 땅이 얼마나 되는가를 말하고자 한다. 위략에, “진개 ( 秦開 ) 가 그 서쪽을 공격하여 땅 2 천여 리를 빼앗아 만반한에까지 이르렀다 ( 秦開攻其西方 取地二千餘里 至滿播汗爲界 ). ”고 하여, 선유 ( 先儒 ) 들은 조선과 연의 국경을 지금의 산해관 ( 山海關 ) 으로 잡고, 진개가 빼앗은 2 천여 리를 산해관 동쪽의 종선 ( 從線 ) 2 천여 리로 잡아서 만반한을 대동강 이남에서 찾으려고 하였지마는 이는 큰 착오요 억지 판단이다. 사기나 위략을 참조해보면, 진개가 빼앗은 토지가 분명히 상곡에서 부터 요동까지이니 만반한을 요동 이외에서 찾으려 함은 옳지 못하다. 한서지리지에 의거하면 요동군현 ( 遼東郡縣 ) 중에 '문 ( 汶 ) · 번한 ( 番汗 )'의 두 현이 있으니, 만반한은 곧 이 문번한이다. 문현 ( 汶縣 ) 은 비록 그 연혁이 전해지지 못하였으나, 번한 ( 番汗) 은 지금의 개평 등지 이므로 문현도 개평 부근일 것이니, 반만한은 지금의 해성 · 개평 등의 부근일 것이다. 그런데 이제 만반한을 대동강 이남에서 구하려 함은 무엇에 의거함인가? 대개 만반한은 진개가 침략해왔을 때의 지명이 아니고, 후세 진 ( 秦) 나라 때 혹은 한 ( 漢 ) 나라 때의 명칭임을, 위략의 저작자가 이를 가져다가 진개 침략 때 두 나라의 국경을 입증한 것일 것이며, 번한 ( 番汗 ) 은 '불한'의 옛 서울 부근임으로 하여 이름한 것일 것이다. 사기의 1 천여 리는 신조선이 잃은 땅만 지적한 것이요, 위략의 2 천 여 리는 신 · 불 두 조선이 잃은 땅을 아울러 지적한 것이니, 상곡 · 어양 일대는 신조선이 잃은 땅이요, 요동 ( 遙東 ) · 요서 ( 遙西 ) · 우북평 ( 右北平 ) 일대는 불조선이 잃은 땅이다. 만반한은 사군 ( 四郡 ) 연혁의 문제와 관계가 매우 깊은 것이니, 이 절 ( 節 ) 은 독자가 잘 기억해두어야 한다. '불朝鮮'의 진(秦)·한(漢)과의 관계 연왕 ( 燕王 ) 희 ( 喜 ) 가 진시황에게 패하여 요동으로 도읍을 옳기니, 불조선이 지난날 연에 대한 오래된 원한을 잊지 못하여 진과 맹약하고 연을 토벌하였는데, 얼마 안 가서 진시황이 몽념으로 하여금 장성을 쌓아 요동에 이르렀다. 불조선이 진과 국경을 정하는데, 지금의 헌우란 ( ) 이남의 연안 수백 리 땅엔 두 나라의 백성이 들어가 사는 것을 금했다. 사기의 이른바 고진공지 ( 故秦空地 ) 란 이것을 가리킨 것이다. 위략에 의거하면 이때에 불조선왕의 이름을 '부 ( 否 ) '라 하였으나 위략과 마찬가지로 관구검이 실어간 고구려의 문헌으로 자료를 삼은 삼국지와 후한서의 동이열전 ( 東夷列傳 ) 에는 부 ( 否 ) 를 기록하지 아니하였으니, 위략에서 신조선 말엽의 왕 곧 동부여왕 ( 東扶餘王 ) 이 된 부루 ( 夫婁 ) 를 부 ( 否 ) 로 와전함인가 하여 여기에 채용하지 아니한다. 기원전 200 여 년경에 기준 ( 箕準 ) 이 불조선왕이 되어서는 진의 진승 · 항적 · 유방 ( 漢高祖 ) 등이 모반하여 지나가 크게 어지러워져서 상곡 · 어양 · 우북평 등지의 조선 옛 백성과 연 ( 燕) · 제 ( 齊 ) · 조 ( 趙 ) 의 지나인들이 난을 피하여 귀화하는 자가 많은지라, 기준이 이들에게 서쪽의 옛 중립 공지 ( 空地 ) 에 들어가 사는 것을 허락하였는데, 한고조 유방이 지나를 통일하자 기준이 다시 한과 약조를 정하여 옛 중립 공지는 불조선의 소유로 하고, 헌우란으로 국경을 삼았다. 사기 조선전 에, “한 ( 漢 ) 이 일어나니 물러나 패수 ( 浿水 ) 로 경계를 삼았다 ( 漢興...至浿水爲界 ). ”고 하고, 위략에, “한이 일어나자 노관 ( 盧) 으로 연왕 (燕王) 을 삼고, 조선은 연과 패수를 경계로 하였다 ( 乃漢以盧爲燕王 朝鮮興燕 界於水 ). ”고 한 것 ( 先儒들이 는 浿의 잘못이라 했으므로 이를 쫓는다 ) 이 다 이것을 가리킨 것이니, 대개 불조선과 연이 만반한으로 경계를 정했다가 이제 만반한 이북으로 물러났으니, 두 책의 패수 ( 浿水 ) 는 다 헌우란을 가리킨 것임이 분명하다. 선유들이 왕왕 대동강을 패수라고 고집함은 물론 큰 잘못이거니와, 근일 일본의 백조고길 ( 白鳥庫吉 ) 등이 압록강 하류를 패수라고 하니 또한 큰 망발이다. 위의 패수에 관한 논술은 앞 절의 만반한과 다음 절의 왕검성과 대조하여 볼 것이다. 위만(衛滿)의 반란과 '불朝鮮'의 남천(南遷) 기원전 194 년에 한 ( 漢 ) 의 연왕 ( 鮮王 ) 노관 ( 盧) 이 한을 배반하다가 패하여 흉노로 도망하고, 그의 무리 위만 ( 衛滿 ) 은 불조선으로 들어와 귀화하니, 준왕 ( 準王 ) 이 위만을 신임하여 박사관 ( 博士官 ) 에 임명해서 패수 서쪽 강변 ( 옛 중립 공지 ) 수백 리를 주어 그곳에 이주한 구민 ( 舊民 ) 과 연 · 제 · 조의 사람들을 다스리게 하였다. 위만이 이로 인하여 군사를 만들어 더욱 조선과 지나의 망명 죄인을 데려다가 결사대를 만들어, 그 병력이 강대해지자, “한나라 군사가 10도 ( 道 ) 로 침략해 들어온다.”는 거짓 보고를 준왕에게 보고하고 준왕에게 사자를 보내어, 들어와 왕을 시위하기를 청하여 허락을 얻어가지고 정병으로 달려와 기준의 서울 왕검성을 습격하니, 준왕이 항거해 싸우다가 전세가 불리하여 좌우 궁인 ( 宮人) 을 싣고 패잔한 군사로 바닷길을 쫓아 마한의 왕도 ( 王都 ) 월지국 ( 月支國 ) 으로 들어가서 이를 쳐 깨뜨리고 왕이 되었는데, 오래지 않아 마한의 여러 나라가 함께 일어나서 준왕을 토멸하였다. 왕검성은 대단군 ( 大檀君 ) 제 1 세의 이름으로 그 이름을 삼은 것인데, 대단군의 삼경 ( 三京 )---- 지금의 합이빈과 지금의 평양과 앞서 말한 불한의 옛 도읍인 지금의 개평 동북쪽 이 세 곳이다. 왕검성이란 이름을 가졌었을 것이니, 위만이 도읍한 왕검성은 곧 개평 동북쪽 이다. 한서지리지의, “요동군 ( 遼東郡 ) 험독현 ( 險瀆縣 : 註에 滿의 도읍이라 했다 ) ”이 그것이요, “마한의 왕도는 지금의 익산 ( 益山 ) 이다.” 라고 하나, 대개 잘못 전해진 것이다. 다음 장에서 논술할 것이다. 제4장 삼조선(三朝鮮) 분립 후의 '말朝鮮' '말朝鮮'의 천도(遷都)와 마한(馬韓)으로의 국호 변경 말조선의 처음 수도가 평양임은 이미 앞에서 말하였는 바, 그 후( 연대는 불명 )에 국호를 말한〔馬韓〕이라 고치고, 남쪽의 월지국으로 천도하였다가, 불조선왕 기준에게 망하였다. 그 천도한 원인이 무엇인지 이전 역사서에 보인 곳이 없으나, 대개 신 · 불 양 조선이 흉노와 중국의 잇따른 침략을 받아서 북방의 전운(戰雲)이 빈번하고 급하므로, 말조선왕이 난리에 염증을 느껴서 마침내 남쪽 멀리 떨어진 지방으로 천도하는 동시에 모든 침략주의를 가진 역대 제왕들의 칼 끝에서 빛나던 '조선'이라는 명사는 외국인이 시기하고 미워하는 바라 하여, 드디어 말조선이란 칭호를 버리고, 지난날에 왕호 ( 王號 ) 로 쓰던 '말한'을 국호로 써서 이두 로 마한 ( 馬韓 ) 이라 쓰고, 새로 쓰는 왕호인 '신한'은 이두로 진왕 ( 辰王 ) 이라 써서 '마한국 ( 馬韓國 ) 진왕 ( 辰王 ) '이라고 일컬었다. 똑같은 '한'이란 명사를 하나는 음을 따서 한 ( 韓 ) 이라 하여 국호로 쓰고 또 하나는 뜻을 따서 왕이라 하여 왕호로 씀은, 문자상 국호와 왕호의 혼동을 피한 것이다. 국호를 마한이라 쓰는 동시에 왕조는 한씨 ( 韓氏 ) 가 세습하여 국민들이 한씨왕의 존재만 아는 고로, 기준이 그 왕위를 빼앗고는 국민의 불평을 누그러뜨리기 위하여 본래의 성 기씨 ( 箕氏 ) 를 버리고 한씨 ( 韓氏 ) 로 고친 것이다. 삼국지에, “준 ( 準 )- - - 달아나 바다로 들어가서 한 ( 韓 ) 의 땅에서 살며 한왕 ( 韓王 ) 이라 이름하였다 ( 準- - - 走入海 居韓地 號韓王 ). ”고 하였고, 위략에는, “준의 아들과 친척으로 나라에 머물러 있는 자는 성을 한씨라 하였다 ( 準子及親 留在國者 冒姓韓氏). ”고 하였다 . 월지국을 전사 ( 前史 ) 에는 백제의 금마군 ( 金馬君 : 지금의 益山 ) 이라고 하였지마는, 이것은 속전 ( 俗傳 ) 의 익산군 마한 무강왕릉 ( 武康王陵 ) 이라는 것을 인하여 무강왕을 기준의 시호 ( 諡號 ) 라 하고, 부근 미륵산 ( 彌勒山 ) 의 선화부인 ( 善化夫人)의 유적을 기준의 왕후 선화 ( 善花 ) 의 유적이라 하여, 마침내 기준이 남으로 달아나서 금마군 ( 金馬郡) 에 도읍하였다고 한 것이다. 그러나 무강왕릉은 딴 이름이 말통대왕릉 ( 末通大王陵) 이요, 말통은 백제 무왕 ( 武王 ) 의 어릴 때 이름 ( 무왕의 이름은 '마동'이니 삼국유사의 薯童은 그 의역이고, 고려사 지리지의 末通은 그 음역 ) 이요, 선화는 신라 진평대왕 (眞平大王 ) 의 공주로서, 무왕의 후 ( 后 ) 가 된 아이고, 백제를 왕왕 마한이라 함은 역사에 그 예가 적지 아니하니, 이따위 고적은 한갓 익산 ( 益山 ) 이 백제의 옛 서울임을 증명함에는 부족할뿐더러, 마한 50 여국 중에 월지국과 건마국 ( 乾馬國 ) 이 있으니, 건마국이 금마군 ( 金馬郡) 곧 지금의 익산일 것이므로, 월지국 ----마한의 옛 서울은 다른 나라에서 찾음이 옳다. 그 확실한 지점은 알 수 없으나 마한과 백제 ( 백제 건국 13 년 ) 의 국경이 웅천 ( 熊川 )---- 지금의 공주 ( 公州 ) 이니, 월지국이 대개 그 부근일 것이다. 말한이 비록 국호가 되었지마는, 그 5,6 백 년 후에도 오히려 왕호 ( 王號 ) 로 쓴 이가 있다. 신라의 눌지 ( 訥祗 ) · 자비 ( 慈悲 ) · 소지 ( 炤智 ) · 지증 ( 智證 ) 네 왕은 다 '마립간 ( 麻立干 ) '이라 일컬었는데, 눌지 마립간 ( 訥祗麻立干 ) 의 주에, “마립은 말 ( 말뚝 ) 이다 ( 麻立也 ) ”라 하였으니, 궐 ( 橛 ) 은 글자 뜻이 '말'이므로, 마립 ( 麻立 ) 의 '마 ( 麻 ) '는 그 전성 ( 全聲 ) 을 취하여 '마'로 읽고, '입 ( 立 ) '은 그 초성 ( 初聲 ) 을 취하 여 ' 己 '로 읽고, '간 (干) '은 그 전성을 취하여 '한'으로 읽는 것임이 명백하므로 마립간은 곧 '말한'이요, 말한을 왕호로 쓴 증거이다. 낙랑(樂浪)과 남삼한(南三韓)의 대치[편집] 마한이 월지국으로 도읍을 옮긴 뒤에 그 옛 도읍 평양에는 최씨 ( 崔氏 ) 가 일어나서 그 부근 25 국을 통속하여 한 대국이 되었으니, 전사 ( 前史 ) 에 이른바 낙랑국 ( 樂浪國 ) 이 그것이다. 낙랑이 이미 분리되매, 마한이 지금의 임진강 이북을 잃었으나 오히려 임진강 이남 70여국을 통솔하더니, 오래지 아니하여 북방에서 지나와 흉노의 난리를 피하여 마한으로 들어오는 신 · 불 두 조선의 유민이 날로 많아지므로, 마한이 지금의 낙동강 연안 오른편의 1 백여 리 땅을 떼어 신조선의 유민들에게 주어 자치계 ( 自治: 고대에 모임을 계라 하였음 ) 를 세워서 이름을 '진한부 ( 辰韓部 ) '라 하고, 낙동강 연안 오른편의 땅을 얼마간 떼서 불조선의 유민들에게 주어 또한 자치계를 세워서 '변한부 ( 弁韓部 ) '라 일컬었다. 변한에는 신조선의 유민들도 섞여 살았으므로 변진부 ( 弁辰部 ) 라고도 일컬었다. 이것이 남삼한 ( 南三韓 ) 이니 마한이 구태여 진 · 변 두 한을 세운 것은 또한 삼신 ( 三神 ) 에 따라 삼의 수를 채운 것이다. 대단군 왕검의 삼한이 중심 주권자가 되고 말 · 불 두 한은 좌우의 보상 ( 輔相 ) 이 되었는데, 이제 남삼한은 말한 곧 마한이 가장 큰 나라, 곧 종주국이 되고, 신한 곧 진한과 불한 곧 변한이 두 작은 나라 ( 소속국 ) 가 된 것은, 그 이주민의 계통을 좇아 이름을 지었기 때문이거니와, 삼한이 다 왕을 '신한'이라 일컬어서 ( 이를테면 마한의 왕은 말한 나라의 신한이라 하고, 진한의 왕은 신한나라의 신한이라 하고, 변한의 왕은 불한나라의 신한이라 하였음 ) 신한이 셋이 되니, 대개 앞의 것 ( 신한 셋 ) 은 삼조선 분립 이후에 세 신한의 이름을 그대로 쓴 것이 며, 진 · 변 두 한의 두 신한은 자립하지 못하고 대대로 마한의 신한이 겸해 가져서 이름만 있고 실제가 없었으니 이는 남삼한의 창례 ( 創例 ) 이다. 삼한은 우리 역사상에 비상히 시비가 많은 문제로 되었지마는 종래의 학자들이 다만 삼국지 삼한전(三韓傳)의 삼한 곧 남삼한을 의거하여, 그 강역의 위치를 결정하려 할 뿐이고 1) 삼한의 명칭의 유래와, 2) 삼한의 예제(禮制)의 변혁을 알지 못하여, 비록 공력은 많이 들였으나 북방 원유(原有)의 삼한을 발견하지 못할 뿐 아니라, 남삼한과의 상호 관계도 명백히 알아내지 못하였다. 낙랑(樂浪) 25개국과 남삼한(南三韓) 70여국 낙랑의 여러 나라로 역사에 보인 것이 25 이니, 조선 ( 朝鮮 ) · 감한( 邯邯 ) · 패수 ( 浿水 ) · 함자 ( 含資 : 貪資라고도 함 ) · 점선 ( 黏蟬 ) · 수성 ( 遂城 ) · 증지 ( 增地 ) · 대방 ( 帶方 ) · 사망 ( 駟望 ) · 해명 ( 海冥 ) · 열구 ( 列 口 ) · 장잠 ( 長岑 ) · 둔유 ( 屯有 ) · 소명 ( 昭明 ) · 누방 ( 鏤方 ) · 제해 ( 提奚 ) · 혼미 ( 渾彌 ) · 탄렬 ( 呑列 ) · 동이 ( 東
65    제2편: 수두 시대 댓글:  조회:34  추천:0  2019-01-31
제 1 장 조선 고대 총론 조선민족의 구별 고대 아시아 동부의 종족이 1, 우랄 어족 2, 지나 어족의 두 갈래로 나누어졌는데, 한족(漢族) ·묘족 (苗族) ·요족 (요族) 등은 후자에 속 한 것이고, 조선족 ·흉노족 등은 전자에 속한 것이다. 조선족이 분화 (分化) 하여 조선·선비·여진·몽고·퉁구스 등 종족이 되고, 흉노족 이 이동하고 분산하여 돌궐 ( 突厥: 지금의 新疆族 ) ·흉아리 ( 匈牙利: 헝가리 ) ·토이기 ( 土耳其: 터키 ) ·분란 ( 芬蘭: 핀란드 ) 족이 되었다. 지금 몽고 ·만주 ·토이기 ·조선의 네 종족 사이에 왕왕 같은 말과 물건 이름이 있음은 몽고 ( 大元 ) 제국 시대에 피차의 관계가 많아서 받은 영향도 있으려니와, 고사를 참고하면 조선이나 흉노 사이에도 관명 (官名) ·지명 (地名) ·인명 (人名)의 같은 것이 많으니, 상고 (上古) 에 있어서 한 어족이었던 분명한 증명이다. 조선족의 동래(東來) 인류의 발원지에 대해 1, 파미르 고원 2, 몽고 사막이라는 두 설이 있는데, 아직 그 시비가 확정되지 못하였으나, 우리의 옛 말로서 참고 하면 왕성 (王姓) 을 ‘해 (解) ’라 함은 태양에서 뜻을 취한 것이고, 왕호 (王號)를 ‘불구래(弗矩內)’라 함은 태양의 빛에서 뜻을 취한 것이며, 천국(天國)을 환국(桓國) 이라 함은 광명(光明)에서 뜻을 취한 것이니, 대개 조선족이 최초에 서방 파미르 고원 혹은 몽고 등지에서 광명의 본원지를 찾아 동방으로 나와 불함산(不咸山)-- 지금의 백두산을 해와 달이 드나드는 곳, 곧 광명신(光明神)이 머물러 있는 곳으로 알아 그 부근의 토지를 ‘조선(朝蘇)’이라 일컬으니, 조선도 옛날의 광명이라는 뜻이다. 조선은 후세에 이두자(更讀字)로 조선이라 썼다. 조선족이 분포해 있었던 ‘아리라’ 우리의 옛 말에 오리를 ‘아리’라 하고, 강을 ‘라’라고 하였다. 압록 강·대동강 ·두만강 ·한강 ·낙동강과 만주 길림성 ( 吉林省 ) 의 송화강 ( 松花江 ), 봉천성 ( 奉天省 ) 의 요하 ( 遼河 ), 영평부 ( 永平府 ) 의 난하 ( 난河 ) 등을 이두자로 쓴 옛 이름을 찾아보면, 아례강 ( 阿禮江 ) ·아리수 ( 阿利水 ) ·욱리하 ( 郁利河 ) ·오열하 ( 烏列河 ) ·열수 ( 列水 ) ·무열하 ( 武列河 ) ·압자하 ( 鴨子河 ) 라 하였으니, 아례 ·아리 ·욱리 ·오열 ·열 ·무열은 다 ‘아리’의 음역 ( 音譯 ) 이고, 압자 ( 옛날에 오리를 아리라 함 ) 은 ‘아리’의 의역 ( 意譯 ) 이요, 강 ·하·수는 다 ‘라’의 의역이다. 위의 여러 큰 강들은 다 조선족의 조상이 지은 이름이다. 조선 고대의 문화는 거의 이 큰 강들의 강변에서 발생하였으므로 삼국지에도, ‘고구려는 큰 물을 의지하여 나를 만들어 산다 ( 句麗作國依 大水而居 ). ’라고 하였다 .’나라’는 옛 말의 ’라라’이니, 라라는 본래 진도 ( 津渡 ), 곧 ‘나루’를 가리키는 명사로서 국가를 가리키는 명사가 된 것이다. 고대 지명의 끝에 붙은 나 ( 那 ) ·라 ( 羅 ) ·노 ( 如 ) ·루 ( 婁 ) ·누 ( 누 ) · 양 ( 良 ) ·양 ( 浪 ) ·양 ( 穰) ·양 ( 壞 ) ·강 ( 岡 ) ·양 ( 陽 ) ·아 ( 牙 ) ·야 (야) 동은 다 ‘라’의 음역이고, 천 ( 川 ) ·원 ( 原 ) ·경 ( 京 ) ·국 ( 國 ) 등은 거의 ‘라’의 의역이며, 두 가지가 다 ‘라라’의 축역 ( 縮譯 ) 이니, 강이 어렵 ( 漁獵 ) 자원이 되고, 배를 교통하는 편의가 있으므로 상고 문명이 거의 강변에서 발원한 것이다. 조선의 최초를 개척한 부여(夫餘) 원시 인민이 강의 물고기와 산과 들의 짐승과 풀 ·나무의 열매 같은 여러 가지 천산물 ( 天産物 ) 로 양식을 삼다가 인구가 불어남에 따라 그 천산물의 부족을 보충하기 위하여 목축업과 농업이 발생하였다. 농업은 대개 불의 힘을 이용하여 초목을 태워서 들을 개척한 뒤에 발생하였으므로 옛 말에 야지 ( 野地 ) 를 ‘불’이라 하였다. 불의 이용의 발견은 한갓 농업을 유발하였을 뿐 아니라 불로 굴을 태워서 맹수도 죽이고, 그 가죽을 녹여 옷과 신을 만들고, 진흙을 구워 성벽을 쌓고, 쇠를 달구어 기구를 만들고 그 밖에 생활의 일용에 모든 편의를 주어 사람의 지혜를 개발하였으므로, 근세의 일반 사학가들이 고대 불의 이용의 발견을 곧 근세의 증기 ·전기의 발견과 같은 사회 생활의 대혁명을 일으킨 대 발견이라고 한다. 동서를 물론하고 고대의 인민들이 다 불의 발견을 기념하여 그리스의 화신 ( 火神 ) ·프 러시아의 화교 ( 火敎 ) ·지나의 수인씨 ( 燧人氏 ) 등 전설이 있고, 우리 조선에는 더욱 불을 사랑하여 사람의 이름을 ‘불’이라 지은 것이 많으니, 부루 ·품리 ( 稟離 ) 등이 다 불의 음역이요, 불이라 지은 지명도 적지 아니하여, 부여 ( 夫餘 ) ·부리 ( 夫里 ) ·불내 ( 不耐 ) ·불이 ( 不而 ) ·국내 ( 國內 ) ·불 ( 弗 ) ·벌 ( 伐 ) ·발 ( 發 ) 등이 다 불의 음역이다. 고기 ( 古記 ), 고사기 ( 古事記 ) 등을 참고하면 조선 문화의 원시 ‘수 두’의 발원이 거의 송화강가의 합이번 ( 哈爾賓: 만주 하얼빈 ) 부근인데, 합이빈은 그 고대의 부여이다. 그러니 송화강은 조선족이 처음으로 근거한 ‘아리라’요, 합이빈은 조선족이 최초로 개척한 야지 ( 野地 )곧 ‘불’이요, 그 이외의 모든 부여 ·부리동은 연대를 따라 차례로 개척된 야지 --불이다. 제 2 장 대단군(大檀君) 왕검(王儉)의 건국 조선 최초의 일반 신앙인 단군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조선족이 각 ‘아리라’에 분포하여 각 ‘불’을 개척하는 동시에 한 커다란 공동의 신앙이 유행하였으니 이른바 단군이다. 원시 인민은 우주의 형상을 과학적으로 해석할 지식이 없었으므로 가상적으로 우주에 신이 있다 정하고 모든 것을 신의 조작으로 돌려 신을 숭배하는 동시에 각기 천연 환경을 따라 혹은 모든 물건을 다 신으로 인정하여 이를 예배하고, 혹은 모든 물건 위에 한 신이 있다 하여 이를 예배하였으니, 이것이 이른바 종교요 원시 시대 각 민족 사회에 각기 고유한 종교를 가진 실재 ( 實在 ) 이다. 조선족은 우주의 광명 ( 제 1 장 참고 ) 이 숭배의 대상이 되어 태백산 ( 太白山 ) 의 숲을 광명신 ( 光明神 ) 이 살고 있는 곳으로 믿었는데, 그 뒤 인구가 번식하여 각지에 분포하매 각기 그 살고 있는 곳에 숲을 길러서 태백산의 숲을 모상 ( 模像 ) 하고, 그 숲을 이름하여 ‘수두’라 하였으 니, 수두란 신단 ( 神檀 ) 이라는 뜻이다. 해마다 5 월과 10 월에 백성들이 수두에 나아가 제사를 지내는데, 한사람을 뽑아 제주 ( 祭主 ) 를 삼아서 수두의 중앙에 앉히고 하느님 천신 ( 天神 ) 이라 이름하여 여러 사람이 제사를 드리고 수두의 주위에 금줄을 매어 한인 ( 閔人 ) 의 출입을 금하였다. 전쟁이나 그 밖의 큰 일이 있으면 비록 5 월과 10 월의 제사 지낼 시기가 아니라도 소를 잡아 수두에 제사 지내고, 소의 굽으로 그 앞에서 길흉을 점쳤는데, 굽이 떨어지면 흉하다 하고 붙어 있으면 길하다고 하였으니, 이것은 지나의 팔패 (八卦 ) 음획 양획 ( 陰劃陽劃 ) 의 기원이 되는 것이다. 강적이 침입하면 수두 소속의 부락들이 연합하여서 이를 방어하고 가장 공이 많은 부락의 수두를 첫째로 받들어 신수두’라 이름하니, ‘신’은 최고 최상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밖의 각 수두는 그 아래 딸려 있었으니, 삼한사 ( 三韓史 ) 에 보이는 ‘소도 ( 蘇塗 ) ’는 ‘수두’ 의 음역이고, ‘신소도 ( 臣蘇途 ) ’는 ‘신수두’의 음역이요, 진단구변국도 ( 震檀九變局道 ) 에 보이는 ‘진단 ( 震檀 ) ’의 진은 ‘신’의 음역이고, 단 ( 檀 ) 은 수두의 의역이요, 단군은 곧 ‘수두 하느님’의 의역이다. 수두 는 작은 단〔小檀〕이요, 신수두는 큰 단〔大檀〕이니, 수두에 단군이 있었으니까 수두의 단군은 작은 단군〔小檀君〕이요, 신수두의 단군은 큰 단군〔大檀君〕이다. 대단군(大檀君) 왕검(王儉)이 창작한 신설(神說) 고기 ( 古記 ) 에 이르기를, “환군제석 ( 桓君帝釋 ) 이 삼위 ·태백 ( 三危 ·太白: 둘 다 산 이름 ) 을 내려다보고 널리 인간 세상에 이익을 끼칠 만 한 곳이라 하여, 아들 웅 ( 雄 ) 을 보내 천부 ( 天符 ) 와 인 ( 印 ) 세 개를 가 지고 가 다스리게 하였다. 웅은 무리 3 천을 거느리고 태백산 신단수 ( 神 檀 樹 ) 아래에 내려와서 신시 ( 神市 ) 라 일컬으니, 이른바 환웅천왕 ( 桓雄天王 ) 이다. 웅은 풍백 ( 風伯 ) ·우사 ( 雨師 ) ·운사 ( 雲師 ) 를 지휘하여 곡식〔穀〕 ·명 ( 命 ) ·병 ( 病 ) ·형벌 ( 刑罰 ) ·선 ( 善 ) ·악 ( 惡 ) 등 세상의 360 여 가지 일을 다스렸다. 이때 곰 한 마리 범 한 마리가 있어 한 굴 속에 살면서 사람이 되기를 빌었다. 웅이 쑥 한 줌과 마늘 스무 쪽을 주면서 이것을 먹고 백날 동안 햇빛을 보지 않으면 사람의 모양을 얻을 것이라고 하였는데 범은 그대로 하지 못하고, 곰은 삼칠일 동안 그대로 하여 여자가 되었다. 그러나 결혼할 남자가 없으므로 매양 신단을 향해 아이 가지기를 원하므로 웅이 남자의 몸으로 가화 ( 假化 ) 하여 이와 결혼해서 단군 왕겸 ( 檀君王檢 ) 을 낳았다. ”고 하였다. 그러나 ‘제석 ( 帝釋 ) ’이니 ‘웅 ( 雄 ) ’이니 ‘천부 ( 天符 ) ’니 하는 따위가 거의 불전 ( 佛典 ) 에서 나온 명사이고 또 삼국사에 초기의 사회에도 여성을 매우 존중하였다고 했는데, 이제 남자는 신의 화신이고, 여자는 짐승의 화신이라 하여 너무 여성을 낮게 쳤으니, 나는 이것이 순수한 조선 고유의 신화가 아니요, 불교 수입 이후에 불교도의 점철 ( 點綴 ) 이 적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평양 ( 平壞 ) 의 옛 이름이 왕검성 ( 王檢城 ) 이요, 신라의 선사 ( 仙史 ) 에도, “평양은 선인 왕검의 집 ( 平壞者仙人 王檢之宅) ”이라고 했고, 위서 ( 魏書 ) 에도, “지난 2 천 년 전 단군 왕검이라는 이가 있어 아사달 ( 阿斯達 ) 에 나라를 세우고, 국호를 조선이라 하였다 ( 乃往二千載 前 有檀君王檢 立國阿斯達 國號朝鮮 ). ”고 하였으니, 그러면 조선 고대에 단군 왕검을 종교의 교조로 받들어왔음은 사실이고, 왕검을 이두자의 읽는 법으로 해독하면 ‘임금’이 될 것이니, 대개 ‘임금’이라 이름한 사람이 당시에 유행한 ‘수두’의 미신을 이용하여 태백산의 ‘수두’에 출현하여 스스로 상제 ( 上帝 ) 의 화신이라 일컫고 조선을 건국하였으므로, 이를 기념하여 역대 제왕의 칭호를 ‘임금’이라 하고, 역대 서울의 명칭도 ‘임금’이라고 한 것이다. ‘선인왕검 ( 仙人王檢 ) ’이라 함은 삼국 시대에 수두 교도의 단체를 ‘선배’라 일걷고, 선배를 이두로 선인 ( 仙人 ) 혹은 ‘선인 ( 先人 ) ’이라 기록한 것이고 선사 ( 仙史 ) 는 곧 왕검의 설교 이래 역대 선배의 사적을 기록한 것이다. 후세에 유 ·불 양교가 서로 왕성해지면서 ‘수두’의 교가 쇠퇴하고, 선사도 없어져서 그 자세한 것은 알 수 없으나, 지나의 고서 굴원 ( 屆原 ) 의 초사 ( 楚辭 ), 사마천 ( 司馬遷 ) 의 사기 ( 史記 ), 반고 ( 班固 ) 의 한서 ( 漢書 ) 에 여기저기 보이는 것으로써 오히려 그 대강을 알 수 있다. 사기의 봉선서 ( 封禪書 ) 의 삼일신 ( 三一神 ) 이란 천일 ( 天一 ) ·지일 ( 地 一) ·태일 ( 太一 ) 인데, 그 중에 태일이 가장 존귀하고, 오제 ( 五帝: 동 서남북중 다섯 방향의 신 ) 는 태일의 보좌 ( 補佐 ) 라 하였으며, 진시황 본기 ( 奏始皇本紀 ) 의 천황·지황 ( 地皇 ) ·태황 ( 泰皇 ) 가운데 태황이 가장 존귀하다고 하였으며, 초사에는 동황태일 ( 東皇太一 ) 이란 노래 이름이 있고, 한서예문지 ( 漢書藝文志 ) 에는 태일잡자 ( 太一雜子 ) 라는 책 이름이 있으니, 삼일신 ( 三一神 ) 과 삼황 ( 三皇 ) 은 곧 고기에 있는 삼신 ( 三神 ) ·삼성 ( 三聖 ) 등의 유이다. 삼일신을 다시 우리의 옛 말로 번역하면 천일 ( 天一 ) 은 ‘말한’이니 상제 ( 上帝 ) 를 의미하는 것이요, 태일은 ‘신한’이니 신은 최고 최상이라는 말, 신한은 곧, ‘하늘 위 하늘 아래에 하나이고 둘이 없다 ( 天上 天下獨一無二 ). ’는 뜻이다. 말한·불한·신한을 이두로 마한 ( 馬韓 ) · 변한 ( 弁韓 ) ·진한 ( 辰韓 ) 이라 적은 것이고, 오제 ( 五帝 ) 는 돗가·개가·소가·말가·신가 등 다섯 ‘가’ 곧 오방신 ( 五方神 ) 을 가리킨 것이다. 차례로 말하면 말한이 불한을 낳고 불한이 신한을 낳았으나 권위( 權位 ) 로 말하면. 신한이 신계 ( 神界 ) 와 인계 ( 人界 ) 의 대권 ( 大權 ) 을 모 두 차지하여 말한과 불한보다 고귀하므로 삼일 중에서 태일이 가장 고귀하다 하는 것이고, ‘오제 ( 곧 5 가 ) 는 곧 태일의 보좌이다. ’라 하였으니, 신가가 다섯 가의 수위 ( 首位 ) 임은 ‘신’의 어의 ( 語義 ) 로 말미암아 명백하니, 거북〔龜〕의 삼신 ·오제는 곧 왕검이 만든 전설이다. 신수두의 삼경(三京) 오부(五部) 제도 대단군 ( 大樓君 ) 왕검이 이에 삼신 ( 크神 ) ·오제 ( 五帝 ) 의 신설 ( 神說 ) 로 우주의 조직을 설명하고, 그 신설에 의하여 인간 세상 일반의 제도를 정하매, 신한·말한·불한·의 세한을 세워 대단군이 신한이 되니 신한은 곧 대왕 ( 王 ) 이요, 말한과 불한은 곧 좌우의 두 부왕 ( 副王 ) 으로 신한을 보좌한다〉 삼경을 두어 세 한이 나뉘어 머무르고 세 한의 아래에 돗가·개가·소가·말가·신가의 다섯 가를 두고 전국을 동 ·서 ·남 ·북 ·중 다섯 부 ( 部 ) 에 나누어 다섯 가가 중앙의 다섯 국무대신이 되는 동시에, 다섯 부를 나누어 다스리는 다섯 지방장관이 되고, 신가는 다섯 가의 우두머리가 된다. 전시 ( 戰時 ) 에는 다섯 부의 인민으로써 중 ( 中 ) ·전 ( 前 ) ·후 ( 後 ) ·좌( 左 ) ·우 ( 右 ) 의 오군 ( 五軍 ) 을 조직하여 신가가 중군대원수 ( 中軍大元 師 ) 가 되고, 그 밖의 네 가가 전 ·후 ·좌 ·우의 네 원수가 되어 출전한다. 지금까지 유행하고 있는 윷판이 곧 다섯 가의 출진도 ( 出陣圖 ) 이니, 그 그림은 다음과 같다. 그림 가운데 도 ( 刀 ) ·개 ( 介 ) ·걸 ( 乞 ) ·유 ( 兪 ) ·모 ( 毛 ) 는 곧 이두 글자로 쓴 다섯 가의 칭호이니, 도는 돗가요, 개는 개가요, 유는 옛 음에 소’니 소가요, 모는 말가요, 걸은 신가니, 걸로 신가를 기록함은 그 의의를 알 수 없으나 부여 시대에 견사 ( 犬使 ) 라는 관명 ( 官名 ) 이 있으니, 대개 견사는 신가의 별칭이므로 걸은 곧 견사의 견 ( 犬 ) 을 의역한 것이 아닌가 한다. 돗〔猪〕 ·개〔犬〕 ·소〔牛〕 ·말 〔馬〕 등 가축들로 오방 ( 五方 ) 의 신의 이름을 삼는 동시에, 이로써 벼슬 이름을 삼은 수렵 시대가 지나고 농목 ( 農收 ) 시대가 된 증적 ( 證跡 ) 이다. 제 3 장 수두의 홍포(弘布)와 문화의 발달 부루(夫婁)의 서행(西行) 고기 ( 古記 ) 에 이르기를, “단군 왕검이 아들 부루를 보내어 하우 ( 夏禹 ) 를 도산 ( 塗山 ) 에서 만났다. ”고 하였고, 또 오월춘추 ( 吳越春秋 ) 에도 이와 비슷한 기록이 있어, “당요 ( 庸寶 ) 때에 9 년 동안 홍수가 져서 당요가 하우에게 명하여 이를 다스리라 하였다. 우 ( 禹 ) 가 8 년 동안이나 공을 이루지 못하고 매우 걱정하여, 남악 ( 南嶽) ·형산 ( 衝山 ) 에 이르러 흰 말을 잡아 하늘에 제사 드려 성공을 빌었는데, 꿈에 어떤 남자가 스스로 현이 ( 玄夷 ) 의 창수사자 ( 蒼水使者 ) 라 일걷고, 우에게 말 하기를, 구산 ( 九山 ) 동남쪽의 도산 ( 逢山 ) 에 신서 ( 神書 ) 가 있으니, 석달동안 재계 ( 齋戒 ) 하고 그것을 꺼내보라 하므로 우가 그 말에 의하여 금간옥첩 ( 金簡玉牒 ) 의 신서를 얻어 오행통수 ( 五行通水 ) 의 이치를 알아 홍수를 다스려 성공하고, 이에 주신 ( 州愼 ) 의 덕을 잊지 못하여 정전 ( 井田 ) 을 제정하고, 율도량형 ( 律度量衡) 의 제도를 세웠다. ”고 하였다. 현이 ( 玄夷 ) 는 당시 조선의 동 ·남 ·서 ·북 ·중 오부를 남 ( 藍 ) ·적( 未 ) ·백 ( 白 ) ·현 ( 玄: 黑 ) ·황 ( 黃 ) 으로 별칭했는데, 북부가 곧 현부 ( 玄部 ) 이니 지나인이 현부를 가리켜 현이 ( 玄夷 ) 라고 한 것이요, 창수 ( 蒼水 ) 는 곧 창수 ( 擔水 ) 이고, 주신 ( 州愼 ) ·숙신 ( 肅愼 ) ·직신 ( 稷愼 ) 혹은 식신 ( 息愼 ) 으로 번역되었으니, 주신은 곧 조선을 가리킨 것이다. 옛 기록의 부루는 오월춘추 ( 吳越春秋 ) 의 창수사자이니, 이때 지나에 큰 홍수가 있었음은 여러 가지 옛 역사가 다 같이 증명하는 바인데, 단군 왕검이 그 수재를 구제해주려고 아들 부루를 창해사자 ( 滄海 使者 ) 에 임명하여 도산에 가서 하우를 보고, 삼선오제교 ( 三神五帝敎 ) 의 일부분인 오행설 ( 五行說: 水火金土木 ) 을 전하고 치수 ( 治水 ) 의 방법을 가르쳐주었으므로 우 ( 禹 ) 는 왕이 되자 부루의 덕을 생각하여 삼신오제의 교의를 믿고 이를 지나에 전포 ( 傳布 ) 하였으며, 정전과 율도량형도 또한 지나의 창작이 아니라 조선의 것을 모방한 것이었다. 그런데 어찌하여 ‘꿈에 창수사자를 만났다. ’고 하였는가 ? 신성 ( 神聖 ) 을 장식하여 사실을 신화화함이니, 이는 상고에 흔히 있는 일이다. 기자(箕子)의 동래(東來) 하우가 홍수를 다스린 공으로 왕이 되어 국호를 하 ( 夏 ) 라 하고, ‘수두’의 교를 흉내내어 도산에서 받은 신서 ( 神書 ) 를 홍범구주 ( 洪範九疇 )라 이름하여 신봉하였는데 하가 수백 년만에 망하고 상 ( 商 ) 이 뒤를 이어 또한 수백 년만에 망하고 주 ( 周 ) 가 일어나서는 주무왕 ( 周武王 ) 이 홍범구주를 배척하므로 은 ( 股 ) 의 왕족 기자 ( 箕子 ) 가 새로 홍범구주를 지어 무왕과 변론하고 조선으로 도망하니, 지금 상서 ( 尙書 ) 의 홍범 ( 洪範 ) 이 곧 그것이다. 홍범편 ( 洪範篇 ) 가운데, “초일 ( 初一 ) 은 오행 ( 五行 ) 이요, 차이 ( 次 二 ) 는 경용오사 ( 敬用五事 ) 요, 차삼 ( 次三 ) 은 농용팔정 ( 農用八政 ) 이요, 차사 ( 次四 ) 는 협용오기 ( 協用五紀 ) 요, 차오 ( 次五 ) 는 건용황극 ( 建用皇極 ) 이요, 차육 ( 次六 ) 은 예용삼덕 (乂 用三德 ) 이요, 차칠 ( 次七 ) 은 명용계의 ( 明用稽疑 ) 요, 차팔 ( 次八 ) 은 염용서정 ( 念用庶徵 ) 이요, 차구 ( 次 九 ) 는 향용오복 ( 嚮用五福 ) ·위용육극 ( 威用六極 ) 이다. 첫째 오행은 일은 수 ( 水 ), 이는 화 ( 火 ), 삼은 목 ( 木 ), 사는 금 ( 金 ), 오는 토 ( 土 ) 요, 둘째 오사 ( 五事 ) 는 일은 모 ( 貌 ), 이는 언 ( 言 ), 삼은 시 ( 視 ), 사는 청( 聽 ), 오는 사 ( 思 ) 요, 셋째 팔정 ( 八政 ) 은 일은 식 ( 食 ), 이는 화 ( 貨 ), 삼은사 ( 祝 ), 사는사공 ( 司空 ), 오는사도 ( 司徒 ), 육은사구 ( 司寇 ), 칠은 빈 ( 賓 ), 팔은 사 ( 師 ) 요, 넷째 오기 ( 五紀 ) 는 일은 세 ( 歲 ), 이는 월 ( 月 ), 삼은 일 ( 日 ), 사는 성진 ( 星辰 ), 오는 역수 ( 歷數 ) 요, 다섯째 황극 ( 皇極 ) 은 황건기유극 ( 皇建其有極 ), 여섯째 삼덕 ( 三德、 ) 은 일은 정직 ( 正直 ), 이는 강극 ( 剛克 ), 삼은 유극 ( 柔克 ) 이요, 일곱째 계의 ( 稽疑 ) 는 택건립복서인 ( 擇建立卜筮人 ) 이요, 여덟째 서징 ( 庶徵 ) 은 우 ( 雨 ) ·양 ( 暘 ) ·오 ( 오 ) ·한 ( 寒 ) ·풍 ( 風 ) 이요, 아홉째 오복 ( 五福 ) 은 일은 수 ( 壽 ), 이는부 ( 富 ), 삼은강녕 ( 康寧 ), 사는 유호덕 ( 攸好德 ), 오는 고종명 ( 考終命 ) 이요, 육극 ( 六極 ) 은 일은 흉단절 (凶短折 ), 이는 질 ( 疾 ), 삼 은 우 ( 憂 ), 사는 빈 ( 貧 ), 오는 악 ( 惡 ), 육은 약 ( 弱 ) 이다. ”라고 하였는 테, 이러한 문구는 곧도산 ( 塗山 ) ·신서 ( 神書 ) 의 본문이고, 그 나머지 는 기자 ( 箕子 ) 가 연술 ( 演述 ) 한 것이다. 천내석우 홍범구주 ( 天乃錫禹 洪範 九疇) 는 곧 기자가 단군을 가리켜 천 ( 天 ) 이라 하고 단군으로 부터 전수받은 것을 천이 주었다고 함이다. 이는 ‘수두’의 교의에 단군을 하늘의 대표로 보기 때문이고, 기자가 조선으로 도망한 것은 상 ( 商 ) 이 주 ( 周 ) 에게 망하는 동시에 상의 국교 인 ‘수두’교가 압박을 받으므로 고국을 버리고 수두교의 조국으로 돌아온 것이다. 한서 ( 漢書 ) 에 거북이 문자를 등에 지고 낙수 ( 洛水 ) 에서 나왔으므로 우 ( 禹 ) 가 홍범 ( 洪範 ) 을 연술하였다 했지마는, 역 ( 易 ) 의 계사 ( 擊辭 ) 에 ,“황하 ( 黃河 ) 에서 그림이 나오고 낙수 ( 洛水 ) 에서 글씨가 나와, 성인이 이것을 본받았다 ( 河出畵 洛出書 聖人則之 ). ”라 하여 분명히 하도 ( 河圖 ) 낙서 ( 洛書 ) 가 다 역괘 ( 易卦) 지은 원인임을 기록하였는데, 이제 낙수 거북의 글씨로 인하여 홍범을 지었다고 함은 어찌 망령된 증명이 아니랴 ( 위 일절은 淸儒 毛奇齡의 설을 채택함 ). 오월춘추에 의거하여 홍범 오행이 조선에서 전해간 것으로 믿음이 옳고, 또 초사 ( 楚辭 ) 에 의거하여 동황태일 ( 東皇太一 ) 곧 단군 왕검을 제사하는 풍속이 호북 ( 湖北 ) ·절강 ( 浙江 ) 등지에 많이 유행하였음을 보면, 대개 하우가 형산에서는 하늘에 제사하고, 도산에서는 부루에 게서 신서를 받은 곳이므로 가장 ‘수두교’가 유행한 지방이 된 것이다. 흉노(匈奴)의 휴도(休屠) ‘수두교’가 지나 각지에 퍼졌음은 앞에서 말한 바와 같거니와, 사기, 흉노전에 의거하면, 흉노도 조선과 같이 5 월에 하늘에 제사 지내 는데, 천제를 형상한동인 ( 銅人 ) 을‘휴도 ( 休屠 ) 라 불렀으니, 곧 ‘수두’ 의 번역이요, 휴도의 제사를 맡은 사람을 휴도왕 ( 休掉王 ) 이라하여 또 한 단군이라는 뜻과 비슷하며, 휴도에 삼룡 ( 三龍 ) 을 모시니, 용은 또 한 신을 가리킨 것이다. 삼룡은 곧 삼신이니, 흉노족도 또한 ‘수두교’ 를 수입하였음이 의심없다. 고대의 종교와 정치가 구별이 없어 종교상의 제사장이 곧 정치상의 원수이며, 종교가 전파되는 곳이 정치상의 속지 ( 屬地 ) 이니, 대단군 이래 조선의 교화가 지나 ·흉노 등의 각 민족에 널리 퍼졌음으로 언하 여 정치상 강역 ( 疆域 ) 이 확대되었음을 볼 것이다. 한자(漢字)의 수입(輸入)과 이두문(吏讀文)의 창작 조선 상고에 조선글이 있었다는 사람이 있으나, 이는 아무 증거가 없는 말이니 최초에 쓴 것이 한자일 것은 틀림없다. 한자가 어느 때 수입되었는지 알 수 없으나, 대개 땅이 지나와 이어져 있어서 두 민족은 기록 이전부터 교통이 있었을 것이니, 한자의 수입도 기록 이전의 일이었음이 명백하다. 왕검이 아들 부루를 보내어 도산에서 우에게 금간옥첩 ( 金簡玉牒 ) 의 글을 가르쳐주었는데, 이 글자는 곧 한자였을 것이니, 조선이 한자를 익혔음이 이미 오래 되었음을 볼 것이다. 그 뒤에 한자의 음 혹은 뜻을 빌려 이두문을 만들었는데, 이두문은 곧 조선 고대의 국문이라고 할 수 있다. 고대에는 ‘국서 ( 國書 ) ’ , ‘향 서 ( 獅書 ) ’ 혹은 ‘가명 ( 假名 ) ’이라 일컫고 고려조 이후에 비로소 이두문이라 일컬었으나, 이제 통속 ( 通俗 ) 의 편의를 위하여 고대의 것까지 이두문이라 하거니와, 흔히 이두문을 신라 설총 ( 韓聽 ) 이 지은 것이라고 하지마는 설총 이전의 옛 비석 ( 진흥왕 巡狩碑 따위 ) 에도 가끔 이두문으로 적은 시가 ( 詩歌 ) 가 있으니, 설총 이전에 만든 것임이 의심 없다. 그러면 어느 시대에 만들어진 것일까 ? 임금을 왕검이라 번역하여 왕 ( 王 ) 은 그 글자의 뜻에서 소리의 처음 절반을 취하여 ‘임’으로 읽고 검 ( 檢 ) 은 그 글자의 음에서 소리의 전부를 취하여 ‘금’으로 읽으며, ‘펴라’를 낙랑 ( 樂浪 ) 이라 번역하여 낙 ( 樂 ) 은 글자의 뜻에서 소리의 처음 절반을 취하여 ‘펴’로 읽고, 랑 ( 浪 ) 은 글자의 음에서 소리의 처음 절반을 취하여 ‘라’로 읽은 것이 곧 이두문의 시초니, 적어도 이제부터 3천 년 전 --기원 전 10 세기경에 이두문이 제작된 것 같다. 그림〔圖繪〕이 진보하여 글자 文字가 되고 형자 ( 形字 ) 가 진보하여 음자 ( 音字 ) 가 됨은 인류 문화사의 통칙이니, 형자인 한자를 가져다가 음자인 이두문을 만듬은 페니키아 인이 이집트 형자의 편방 ( 偏 傍: 글 자의 한 부분 ) 을 따라서 알파벳을 만듬과 같은 예로 볼 만한 문자사상의 한 진보라 할 것이요, 후세의 거란문〔契丹文〕 ·여진문 ( 女直文 ) 이 모두 이두문을 모방한 것이므로 인류 문화에 도움을 준 공덕도 적지 아니하다 하겠으나, 다만 그 모자라고 유감스러운 점은 a. 자음 모음을 구별하지 못함이니, 예컨대 ‘가’는 자음 ‘ㄱ’과 모음‘ ㅏ ’의 음철 ( 音綴 ) 이요, ‘라’는 자음 ‘ ㄹ’과 모음‘ ㅏ ’의 음철인데, 이를 구별치 아니하여 한 음철이 한 글자가 되어 ‘가’를 ‘加’ 혹‘家’로 쓰고, ‘라’ 는 ‘良’ 혹은 ‘羅’로 써서 음자 ( 音字 ) 의 수효가 너무 많으며, b. 음표 ( 音標 ) 를 확정하지 못함이니, 예컨대 백 ( 白 ) 자 한 자를 ‘백활 ( 白活 ) ’ 이라 쓰고는 ‘발’로 읽고, ‘위백제 ( 爲白齊 ) ’라고 쓰고는 ‘살’로 읽으 며, ‘이 ( 矣 ) ’자 한 자를 ‘의신 ( 矣身 ) ’이라 쓰고는 ‘의’로 읽고, ‘교의 ( 敎矣) ’라 쓰고는 ‘대’로 읽어 아무런 준직 ( 準則 ) 이 없으며, c. 상음 하몽 ( 上音下蒙 ) 의 이치를 획청 ( 劃淸 ) 하지 않음이니, 예컨대 ‘달이’를 ‘월이 ( 月伊 ) ’라 쓰지 않고 ‘윌리 ( 月利 ) ’라 써서 ‘달이’로 읽으며, ‘바람이’를 ‘풍이 ( 風伊 ) ’라 쓰지 않고 ‘풍미 ( 風味 ) ’라 써서 ‘바람이’로 읽어서, 언어의 근간 ( 根幹 ) 과 지엽 ( 技葉 ) 이 서로 뒤죽박죽이 되었다. 그러므로 이두문으로 적은 시나 글은 물론이요, 인명이나 지명이나 관명 같은 것도 오직 같은 시대, 같은 지방 사람들이 그 관습에 의하여 서로 해득할 뿐이고, 다른 시대, 다른 지방사람은 입을 벌릴 수가 없으니, 문자가 사회 진화에 도움된다 함은 저 사실과 사상을 이에 전달해주기 때문인데, 이제 이 같은 곤란이 있어 갑 시대, 갑 지방의 기록을 을 시대, 을 지방에서 해득하지 못한다면 어찌 문화 발전의 이기 (利器 ) 가 될 수 있으랴 ? 그런데 옛날 사람이 이두문을 쓴 지 1 천여 년 동안에 그 미비한 점을 개정하지 못한 원인이 어디에 있는가 ? 당시에는 늘 적국의 외환 ( 外愚 ) 으로 인해서 정치상 비밀을 지키기 위하여 일체 글을 적국 ( 敵國 ) 사람이 이해하지 못하게 하기 위하여 이 같이 불통일하고 불확실한 글을 쓴 것이고 삼조선 (三朝鮮) 이 무너지자 여러 나라가 병립하매 한조선 안에도 서로의 적국이 많아서 한 명사나 한 동사나 한 토거리를 더욱 가지각색으로 써서 동부여 사람이 북부여의 이두문을 알지 못하며, 신라 사람이 고구려의 이두문을 알지 못하였으니, 그러므로 이두문의 그같이 불통일하고 불확정한 방식으로 되었음이 학적 재지 ( 才智 ) 가 부족하여서 그렇게 된 것이 아니라 거의 정치상의 장애로 말미암은 것이다. 신지(神誌)의 역사 전사 ( 前史 ) 에 단군 때에 신지 ( 神誌 ) 라는 사람이 있어 사관 ( 史官 ) 이 됐다 하였으나, 사실은 신지는 곧 ‘신치’의 번역이요, ‘신치’는 ‘신크 치’의 약자요, ‘신크치’는 ‘신가’의 별칭이요, ‘신가’는 앞에서 말한 다섯 가의 수석 ( 首席 ) 대신이니, ‘신치’ 곧 ‘신가’가 늘 ‘신수두’의 제일 ( 祭日 ) 에 우주 창조의 신화와 영웅 ·용사 등이 행한 일과 예언, 유 의, 경계하는 이야기를 노래하여 역대로 예가 되었는데, 후세에 문사 ( 文士 ) 들이 그 노래를 거두어 한 책을 만들고, 그 벼슬 이름 ‘신치’로 책 이름을 한 것이니, 이른바 신지가 곧 그것이다. 이제 신지의 원서가 없어져서 그 가치의 어떠함을 알 수 없으나, 그 책 이름이 이두문으로 지은 것이니, 그 내용의 기사도 이두문으로 기재한 것일 것이다. 고려사 김위제전 ( 金謂 傳 ) 에 신지비사 ( 神誌秘詞 ) 의 ‘여칭추극기 ( 如秤錘極器 ) ·칭간부소량 ( 秤幹扶蘇樑 ) ·추자오덕지 ( 錘者五德地 ). 극기백아강 ( 極器百牙岡 ) ·조항칠십국 ( 朝降七十國 ) ·뇌덕호선정 ( 賴德 護神精 ) ·수미균평위 ( 首尾均平位 ) ·흥방정태평 ( 興邦定太平 ) ·약폐삼 유지 ( 若廢三 諭地 ) ·왕업유쇠경 ( 王業有衰傾) ’의 1O 구를 싣고, 부소량 ( 扶蘇樑 ) 은 지금의 송도 ( 松都 ), 오덕지 ( 五德地 ) 는 지금의 한양, 백아 강 ( 百牙岡) 은 지금의 평양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송도 ·한양 ·평양은 고려의 삼경 ( 三京 ) 이고, 단군의 삼경은 하나는 지금의 합이빈이니, 고사에 부소갑 ( 扶蘇岬) ·비서갑 ( 非西岬 ) 혹은 아사달 ( 阿斯達 ) 로 기록한 것이고, 하나는 지금의 해성 ( 海城 ) ·개평 ( 蓋平 ) 등지이니, 고사에 오덕지 ( 五德地 ) ·오비지 ( 五備地 ) ·안지홀 ( 安地忽 ) 혹은 안시성 ( 安市城 ) 으로 기록한 것이고, 또 하나는 지금의 평양이니, 고사에 백아강 ( 百牙岡 ) ·낙랑 ( 樂浪 ) ·평원 ( 平原 ) 혹은 평양 ( 平穰 ) 으로 기록한 것이다. 이두문 읽는 법에 부소 ( 扶蘇 ) ·비서 ( 非西 ) ·아사 ( 阿斯 ) 는 ‘ 아스’로 읽고, 오덕 ( 五德 ) ·오비 ( 五備 ) ·안지 ( 安地 ) 안시 ( 安市 ) 는 ‘아리’로 읽고, 백아강 ( 百牙岡 ) ·낙랑 ( 樂浪 ) ·평원 ( 平原 ) ·평양 ( 平穰) 은 ‘펴 라’로 읽는 것이니, 위의 비사 1O 구는 이두문의 신지를 한시로 번역한 것이다. 대개 삼국 말엽에 한학 ( 漢學 ) 이 흥성하여 한학자들이 전에 이두문 으로 기록된 시와 글을 한시와 한문으로 번역함을 시도하였으니 ( 최치원의 鄕藥雜詠 향약잡영 따위 ), 신지의 한시 번역도 그 한 예이다. 어찌하여 비사 ( 秘詞 ) 라 일컬었는가 ? 고대의 역사 종류를 성서 ( 聖書 ) 라 하여 대궐 안에 비장해두어 민간에 유행함을 허락하지 아니한 때문이다. 신지와 신지비사 따위가 어찌하여 하나도 후세에 전해지지 못하였는가 ? 이는 고구려와 백제가 멸망할 때 왕궁의 비장이 불에 타고 신라의 것이 겨우 전하여 고려조까지도 왕궁에 한 벌이 있어 이조에 와서는 이를 서운관 ( 書雲觀 ) 에 두었었는데, 역시 이조 임진왜란의 불에 타 버린 것이다. 조선의 전성시대 기원전 10 세기 경으로 부터 그 뒤 약 5,6 백 년 동안은 대 단군 조선의 전성시대이다. 수문비고 ( 修文備考 ) 에 고죽국 ( 孤竹國: 지금의 永平府 ) 은 조선종 ( 朝鮮種 ) 이라 하였는데 백이 ( 伯夷 ) ·숙제 ( 寂齊 ) 형제는 고죽국의 왕자로서 왕위 상속권을 헌신짝처럼 버리고 지나의 주 ( 周: 지금의 陝西省 ) 를 우람하다가 주무왕 ( 周武王 ) 에게 격렬히 비전론 ( 非戰論 ) 을 주장하였으며, 고대 지나의 강회 ( 江淮 ) 지역에 조선인이 많이 옮겨가 살아서 숱한 소왕국을 건설하였는데, 그 중 서어왕 ( 徐偃王 ) 이 가장 두드러지게 일어나서 인의 ( 仁義 ) 를 행하여 지나국으로부터 조공을 받았다. 이상은 조선의 본국과 정치적 관계가 없는 식민 ( 殖民 ) 중의 한두 호걸의 행동이거니와, 기원전 5,6 세기경에 불리지 ( 弗離支 ) 라는 사람이 조선의 군사를 거느리고 지금의 직예 ( 直匠) ·산서 ( 山西 ) ·산동 ( 山東 ) 등지를 정복하고, 대현 ( 代縣 ) 부근에 한 나라를 세워 자기의 이름으로 나라 이름을 삼아 불리지국 ( 弗離支國 ) 이라 하니, 주서 ( 周書 ) 의 ‘불령지 ( 弗令支 ) ’와 사기의 ‘이지 ( 離支 ) ’가 다 불리지국을 가리킨 것이다. 불리지는 또한 그가 정복한 지방을 그 성 ‘불 ( 弗 ) ’의 음으로써 지명을 지었으니, 요서 ( 遺西 ) 의 ‘비여 (肥如)나 산동 ( 山東 ) 의 ‘부역 ( 鳧繹 ) ’이나, 산서 ( 山西 ) 의 ‘비이 ( 卑耳: 管子라는 책에 보임 ) ’가 ‘불’의 번역이다. 상고에 요동반도와 산동반도가 다 땅이 연이어져 있었고, 발해는 하나의 큰 호수였는데, 발해의 발 ( 渤 ) 도 음이 ‘불’이고, 또한 불리지가 준 이름이니, 불리지가 산동을 정복한 뒤에 조선의 검은 원숭이 〔 〕 ·담비〔짧〕 ·여우〔孤〕 ·삵〔狸〕 등의 털가죽옷과 비단 등 직물을 수출하여 발해를 중심으로 하여 상업이 크게 떨쳤었다. 조선의 쇠약(衰弱) 기원전 7 세기 말에 조선이 고죽 ( 孤竹 ) 을 의거해서 불리지국 ( 弗離支國 ) 과 합하여 연 ( 戀 ) 과 진 ( 晉) 을 치니, 연과 진이 제 ( 齊 ) 에 구원을 청하였다. 이때 제의 환공 ( 桓公 ) 이 어진 재상 관중 ( 管仲 ) 과 이름난 장수 성부 ( 城父 ) 를 얻어 지나를 지배하고 있었는데, 조 ( 曺 ) ·위 ( 衛 ) ·허 ( 許 ) ·노 ( 魯 ) 등 10 여 나라의 군사를 거느리고 연을 구원하고자 태행산 ( 太行山 ) 을 넘어 불리지국을 격파하고, 연을 지나서 고죽과 싸워 이겼으므로 조선은 후퇴하여 불리지의 옛 땅을 다 잃었다. 지나인이 이 전쟁으로 말미암아 보전 ( 保全 ) 함을 얻었으므로 공구씨 (孔丘氏: 孔子 ) 가 관중의 공을 칭찬하여, “관중이 피발 ( 披髮 ) 좌임 ( 左 ) 을 징계하였다. ”고 하였는데, 피발은 조선의 머리 땋은 것을 가리킨 것이고, 좌임은 조선의 왼쪽으로 여미는 옷깃을 가리킨 것이다. 《관자 ( 管子 ) 》에 대략 이 전쟁의 결과를 적었는데, a) 지나의 문자가 부과 ( 浮誇: 부화하고 과장함 ) 가 많으며, 이러한 대외 전쟁에 더욱 심하고, b)《관자 》 는 관중의 저작이 아니라 전국시대 ( 戰國時代 ) 말엽에 어떤 사람이 지은 것이므로, 직접 눈으로 본 이야기가 아니기 때문에 다만 그 대체만 말하였다. 그러나 이 전쟁에서 조선이 서북 지방을 잃어 오랫동안 쇠약에 빠져 었었던 것은 가릴 수 없는 사실이다. 단군 연대(年代)의 고증(考證) 전사 ( 前史 ) 에는 단군 왕검 1220 년 후에 기자 ( 箕子 ) 의 왕조선을 기재하였으나, 기자는 기자 자신이 왕이 된 것이 아니고, 기원전 323 년경에 이르러 그 자손이 비로소 불조선왕이 되었으니, 이는 제 2 편 제 2 장에 기술하겠거니와, 이제 사실 ( 史實 ) 을 따라 기자조선을 삭제한다. 또 전사에 단군이 처음 평양에 도읍하였다가 뒤에 구월산 ( 九月山 ) 으로 옮기고, 그 자손에 이르러서는 기자를 피하여 북부여로 갔다고 하지마는 이도 또한 근거없는 망령된 말이다. 무릇 구월산에 도읍을 옮겼다 함은 고구려사에 초록 ( 抄綠 ) 한 위서( 魏書 ) 의, “단군 왕검이 아사달에 나라를 세우고 국호를 조선이라 하였다 ( 檀君王檢 立國阿斯達 國號朝鮮 ). ”고 한 구절로 인하여, 아사 ( 阿斯 ) 를 음이 아흡〔九〕에 가깝고, 달 ( 達 ) 은 음이 달〔月〕과 같다 하여 마침내 구월산을 아사달이라고 하는 것이지마는, 구월산은 황해도 문화현 ( 文化縣: 지금의 信川那 ) 에 있는 산인데, 문화현의 옛 이름이 궁홀 ( 弓忽 ) 이요, 궁홀은 이두문의 ‘궁골’로 읽을 것이니, 궁골에 있는 산이므로 궁골산이라 한 것으로서, 마치 개홀 ( 皆忽: 音 개골 ) 에 있는 산이므로, 개골산〔金剛山〕이라고 한 것과 같은 것인데, 어찌 궁골산을 구월산이라 와전하였으며, 구월산을 아홉달산으로 억지 해석을 하여 아사달산 ( 阿斯達山 ) 으로 망령되게 증거하니, 어찌 가소로운 일이 아니랴. 아사달은 이두문에 l ‘ 아스대’로 읽는 옛 말 소나무를 ‘ 아스’라 하고, 산을 대라 한 것이니, 지금 합이빈 ( 哈爾濱 ) 의 완달산 ( 完達山 ) 이 곧 아사달산이다. 이곳은 북부여의 옛 땅이니, 왕검의 상경 ( 上京 ) 이요, 지금의 개평현 ( 蓋平縣 ) 동북쪽 안시 ( 安市 ) 의 고허 ( 古噓) 인 ‘아리티’가 중경 ( 中京 ) 이요, 지금의 평양 ‘펴라’가 단군의 남경 ( 南京 ) 이니, 왕검 이래로 형편을 따라 삼경 중 하나를 골라 서울로 한 것이다. 그러나 그 본 도읍은 북부여의 땅 ‘ 아스대’인데, 이제 그 자손이 기자를 피하여 북부여로 갔다 함이 어디에 닿은 소리인가 ? 그러므로 이 설을 채용하지 아니하는 것이다. 또 전사에는 단군의 원년 ( 元年 ) 무진 ( 戊辰 ) 을 당요 ( 唐堯 ) 25 년이라 하였지마는, 지나도 주소 ( 周召) 공화 ( 共和: 기원전 841 년 ) 이후에야 연대를 기록하게 되었으니 어찌 당요 25 년인지를 알수 있으랴 ? 그러므로 단군 기원을 확실하게 지적하지 아니한다. 고기 ( 古記 ) 에 단군의 나이에 대해 1,048 세 혹은 1,908세 등의 설이 있으나, 이는 신라 말엽에 ‘신수두’를 진단 ( 震檀) 으로, 환국 ( 桓國 ) 을 환인 ( 桓因 ) 으로 고쳐서 불전 ( 佛典 ) 의 말로 조선 고사를 농락한 불교도들이, 인도 고전의 3 만 년, 3 천 년, 5 백 년 등 장수를 했다는 불조 ( 佛祖 ) 의 기록을 본받아서 만든 말이라, 한 마디의 반박도 할 가치가 없는 것이다. 이조 초에 권근 ( 權互 ) 이, “대를 물려 얼마나 되었던가, 해를 거듭하 여 천 년이 지났네 ( 傳世不知幾 歷年會過千 ). ”라는 시를 지어 이를 번안하였는데, 이는 다만 불가 ( 佛家 ) 의 허황한 말을 바로잡았다 할 수 있으나, 또한 단군의 시말 ( 始末 ) 을 모르는 말이다. 옛날 2 천년 전에 단군 왕검이 아사달에 나라를 세웠다고 하였으니, 고구려 건국 전 2천 년이 단군 왕검의 원년이요, 삼국 중엽까지도 ‘신 수두’를 받들어, 단군이 거의 정치상 반주권 ( 半主權 ) 을 가져 그 처음에서 끝까지 2 천 몇백 년이 될 것인데, 어찌 1 천 년만으로 헤아리랴. 그러나 삼조선이 분립한 뒤에 대왕과 대단군이 함께 서서 교정 ( 敎政 ) 분립의 싹이 시작되었으므로 본편은 이것으로 끝맺는다.  
64    제1편: 총론 댓글:  조회:67  추천:0  2019-01-31
제1장. 역사의 정의(正義)와 조선역사의 범위 역사란 무엇인가? 인류 사회의 “아(我)”와 “비아(非我)”의 투쟁이 시간으로 발전하고 공간으로 확대되는 심적(心的)활동 상태의 기록이니, 세계사라 하면 세계 인류가 그렇게 되어온 상태의 기록이요, 조선사라 하면 조선 민족이 이렇게 되어온 상태의 기록이다. 무엇을 “아” 라 하며 무엇을 “비아”라 하는가? 깊이 팔 것 없이 얕이 말하자면, 무릇 주관적 위치에 서 있는 자를 아라 하고, 그밖의 것은 비아라 한다. 이를테면 조선인은 조선을 아라 하고 영(英).로(露:러시아).법(法:프랑스).미(美) 등을 비아라고 하지마는 영.로.법.미 등은 저마다 제 나라를 아라 하고 조선을 비아라고 하며,무산(無産)계급은 무산 계급을 아라 하고 지주나 자본가를 비아라고 하지마는, 지주나 자본가는 저마다 제 붙이를 아라 하고.무산 계급을 비아라 한다. 이뿐 아니라, 학문에나 기술에나 직업에나 의견에나, 그 밖의 무엇에든지 반드시 본위(本位)인 아가 있으면 따라서 아와 대치되는 비아가 있고, 아 가운데 아와 비아가 있으면 비아가운데에도 아와 비아가 있다. 그리하여 아에 대한 비아의 접촉이 잦을수록 비아에 대한 아의 분투가 더욱 맹렬하여 인류 사회의 활동이 쉴 사이가 없으며, 역사의 전도가 완결될 날이 없다. 그러므로 역사는 아와 비아의 투쟁의 기록인 것이다. 아나, 아와 상대되는 비아의 아도 역사적 아가 되려면, 반드시 두 개의 속성이 있어야 한다. 첫째, 상속성(相續性)이니, 시간에 있어서 생명의 끊어지지 아니함이요, 둘째, 보편성이니, 공간에 있어서 영향의 파급이다. 그러므로 인류 아닌 다른 생물의 아와 비아의 투쟁도 없지 않지마는, 그 아의 의식이 너무 미약하거나 혹은 전연 없어서 상속적. 보편적이 되지 못하므로 마침내 역사의 조작(造作)은 인류에게만 주어졌다. 사회를 떠나 개인적인 아와 비아의 투쟁도 없지 않지마는 그 아의 범위가 너무도 약소하여 역시 상속적. 보편적이 못 되므로 인류에게 있어서도 사회적 행동이라야 역사가 되는데, 한사건으로 두가지 속성인 상속,보편의 강양을 보아 역사의 재료가 될 만한 분량의 크고 작음을 정하게 된다. 이를테면 김석문(金錫文)은 300년 전에 “지원설(地圓說)”을 창도(唱導)한 조선의 학자이지마는 이를 후루노의 지원설과 똑같은 역사적 가치를 쳐주지 못하는 것은, 저편은 그 학설로 인하여 신대륙을 발견한다 하였지마는 이편은 그러한 결과를 가져오지 못했기 때문이다. 정여립(鄭汝立)은 400년 전에 군신강상설(軍臣綱常說)을 타파하려한 동양의 위인이지마는 그를 민약론(民約論)을 저술한 루소와 동등한 역사적 인물이라 할수 없음은, 당시에 다소간 정여립의 설에 영향을 입은 검계(鈐稧)나 양반살육계(兩班殺戮稧:다무력폭동단체)등의 번갯불이 한 번 번쩍하는 것 같은 행동이 없지는 않았으나 결국 루소 이후의 파란만장한 프랑스 혁명에는 비길 수 없기 때문이다. 비아를 정복하여 아를 드러내면 투쟁의 승리자가 되어 미래 역사의 생명을 잇고, 아를 없애어 비아에 공헌하는 자는 투쟁의 패망자가 되어 과거 역사의 묵은 자취만 끼친다. 이는 고금 역사에 불변하는 원칙이라, 승리자가 되려 하고 실패자가 되지 않으려 함은 인류의 통성(通性)인데 번번이 예기와 어긋나서 승리자가 안 안되고 실패자가 됨은 무슨 까닭인가? 무릇 선천적 실질부터 말하면 아가 생긴 뒤에 비아가 생기는 것이지마는, 후천적 형식부터 말하면 비아가 있은 뒤에 아가 있다. 말하자면 조선민족 즉 아가 출현한 뒤에 조선민족과 상대되는 묘족(苗族:중국귀주성 호남성 운남성 등지에 살던 민족으로 중국민족에 점차 동화됨)이며 지나족(支那族)등 비아가 있었을 것이니, 이는 선천적인 것에 속하는 것이다. 그러나 만일 묘족,지나족 등 비아의 상대자가 없었더라면 조선이란 나라를 세운다, 삼경(三京)을 만든다, 오군(五軍:전.후.좌.우.중의 다섯군단)을 둔다 하는 등 아의 작용이 생기지 못하였을 것이니, 이는 후천적인 것에 속하는 것이다. 정신의 확립으로 선천적인 것을 호위하며 환경의 순응으로 후천적인 것을 유지하되 두 가지 중의 하나가 부족하면 패망의 구렁에 빠진다. 유태의 종교나 돌궐(突厥:몽고 중앙 아시아에 있던 유목민족)의 무력으로도 침륜(沈淪)의 화를 면치 못한 것은 후자(後者)가 부족한 까닭이며,남미(南美)의 공화(共和)와 애급(埃及:이집트) 말세의 학문의 융흥(隆興)으로도 쇠퇴의 환(患)을 구해내지 못한 것은 전자(前者)가 부족한 까닭이다. 이제 조선사를 서술하려 함에 있어 아(우리)의 단의로 잡아, (가) 우리의 생장 발달의 상태를 서술의 첫째 요건으로 하고 그리하여, 최초 문명의 기원이 어디서 되었는가. 역대 강역(彊域)의 신축(伸縮)이 어떠하였었던가. 각 시대 사상의 변천이 어떻게 되어왔는가. 민족적 의식이 어느 때에 가장 왕성하고 어느 떄에 가장 쇠퇴하였는가, 여진(女眞).선비(鮮卑).몽고(夢古).흉노(匈奴)등이 본래 우리의 동족으로 어느 때에 분리되고 분리된 뒤에 영향이 어떠하였는가. 우리의 현재의 지위와 부흥 문제의 성부(成否)가 어떠할 것인가 등을 서술하며. (나) 우리의 상대자인 주위 각 민족과의 관계를 서술의 둘째 요건으로 하고 그리하여. 우리에게서 분리된 흉노.선비.몽고와, 우리 문화의 강보(襁褓)에서 자라온 일본이 우리의 큰 적이 되어 있는 사실과, 인도는 간접으로, 지나는 직접으로, 우리가 그 문화를 수입하였는데, 어찌하여 그 수입의 분량을 따라 민족의 활기가 여위어 국토의 범위가 줄어졌는가. 오늘 이후는 서구의 문화와 북구의 사상이 세계사의 중심이 되었는데 우리 조선은 그 문화 사상의 노예가 되어 소멸하고 말 것인가, 한 그를 잘 씹고 소화하여 새 문화를 건설할 것인가 등을 서술하여 위의(가).(나) 두 가지로 본사(本史)의 기초로 삼고, (다) 말과 글 등 우리의 사상을 표현하는 연장의 날카롭고 둔함은 어떠하고 그 변화는 어떻게 되었으며, (라) 종교가 오늘 이후에는 거의 가치없는 폐물이 되었지마는 고대에는 확실히 한 민족의 흥망 성쇠의 관건이었는데, 우리의 신앙에 관한 추세가 어떠하였으며, (마) 학술.기예 등 우리의 천재를 발휘한 부분이 어떠하였으며, (바) 의.식.주 형편과 농.상.공의 발달과 땅의 분배와 화폐의 제도와 그 밖의 경제조직 등이 어떠하였으며, (사) 인민의 이동과 번식과 또 강토의 신축을 따라 인구의 많아지고 줄어듦이 어떻게 되었으며. (아) 정치제도의 변천이며 (자) 북벌(北伐:북쪽나라를 쳐서 故土를 회복)진취의 사상이 시대를 따라 나아가고 물러선 것이며 (차) 귀하고 천하고 가난하고 부유한 각 계급의 압제(壓制)와 서로 대항한 사실과 그 성해지고 쇠해진 대세며, (카) 지방자치제가 태고적부터 발생하였는데 근세에 와서는 형식만 남기고 정신이 사라진 원인과 결과며, (타) 외세의 침입에서 받은 거대한 손실과 그 반면에 끼친 다소의 이익과, (파) 흉노.여진 등이 한번 우리와 분리된 뒤에 다시 합쳐지지 못한 의문이며, (하) 옛날부터 문화상의 창작이 적지 아니하나, 매양 고립적. 단편적이 되고 연계적.계속적이 되지 못한 괴이한 원인 등을 힘써 참고하면서 논술하여 위의 (다).(라)이하 여러 문제로 본사(本社)의 요목(要目)을 삼아서, 일반 역사를 읽는 이로 하여금 조선의 면목의 만의 하나라도 알게 하려고 한다. 제2장 역사의 3대 원소와 조선 구사(舊史)의 결점 역사는 역사를 위하여 역사를 짓는 것이요, 역사 이외에 무슨 딴 목적을 위하여 짓는 것이 아니다. 다시 말하면 객관적으로 사회의 유동상태를 거기서 발생한 사실을 그대로 적은 것이 역사요, 저작자의 목적에 따라 그 사실을 좌우하거나 덧붙이고 혹은 달리 고칠 것이 아니다. 화가가 사람의 상을 그릴 때 연개소문(淵蓋蘇文)을 그리자면 모습이 괴걸(魁傑)한 연개소문을 그려야 하고. 강감찬(姜邯贊)을 그리자면 몸집이 왜루(矮陋)한 강감찬을 그려야 한다. 만일 이것과 저것을 억제하고 드날릴 마음으로 털끝만큼이라도 서로 바꾸어 그리면 화가의 본분에 어긋날 뿐 아니라 본인의 면목도 아닐 것이다. 이와같이 사실 그대로 영국사(英國史)를 지으면 영국사가 되고 노국사(露國史)를 지으면 노국사가 되며, 조선사를 지으면 조선사가 되는 것인데, 기왕에 조선에 조선사라 할 조선사가 있었더냐 하면 수긍하기 어렵다. 안정복(安鼎福)이 【동사강목】(東史綱目:箕子朝鮮에서 高麗 까지의 역사)을 짓다가 개연히 내란의 잦음과 외적의 출몰이 동국(東國:우리나라)의 고사(古史)를 흔적도 없게 하였음을 슬퍼하였으나, 나로서 보건대 조선사는 내란이나 외적의 전쟁에서 보다, 곧 조선사를 저술하던 그 사람들의 손에 의해 더 없어졌다고 본다, 어찌하여 그러한가 하면 역사란 머리에 쓴 말과 같이 시간적 공간적 발전으로 되어오는 사회 활동 상태의 기록이므로 때[時],곳[地],사람[人] 세 가지는 역사를 구성하는 세 가지 큰 원소가 되는 것인데 이 원소들이 올바르게 기록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한 예를 들자면 신라가 신라됨은 박(朴),석(昔),김(金) 세 성과, 동산 고헌촌(突山古墟村) 등 여섯 부(部)의 사람[人]으로써뿐 아니라, 또한 경상도인 그곳[地]과 고구려,백제와 한 시대인 때[時]로써 신라가 된 것이니, 만일 그보다 더 올라가 2천 년 전인 왕검(王儉)과 같은 연대이거나 더 내려와서 2천 년 뒤인 오늘과 같은 시국이라면, 비록 박혁거세(朴赫居世)의 성지(聖智)와 육부(六部) 사람들의 질직(質直)과 계림(鷄林:慶州)의 땅을 가졌을지라도 당시의 신라와 똑같은 신라가 될수 없으며 또 신라의 위치가 유럽에 놓였거나 아프리카에 있었다면 그 또한 다른 면목의 나라는 되었을지언정 당시의 신라는 되지 않았을 것이다. 이것은 지극히 명백한 이치인데 기왕의 조선의 역사가들은 매양 그 짓는 바 역사를 자기 목적의 희생으로 만들어서 도깨비도 떠 옮기지 못한다는 땅을 떠 옮기는 재주를 부려 졸본(卒本:고구려가 처음 개국한 압록강 북쪽)을 떠다가 성천(成川) 혹은 영변(寧邊)에 갖다놓으며, 안시성(安市城:만주 遼東에 있는 고구려의 성)을 떠다가 용강(龍岡)혹은 안주(安州)에 갖다놓으며, 아사산(阿斯山:단군이 國部를 옮긴 곳)을 떠다가 황해도의 구월산(九月山)을 만들며 가슬라(迦瑟羅)를 떠다가 강원도의 강릉군을 만들었다. 이와 같은 허다한 땅의 빙거(憑據)가 없는 역사를 지었다. 더 크지도 말고 더 작지도 말라고 한 압록강 이내의 이상적 강역을 획정(劃定)하려 하며(我邦彊域考), 무극(無?) 일연(一然) 등 불자(佛子)가 지은 역사책(三國遺事)에는 불법이 단 한 글자도 들어오지 않은 왕검시대에부터 인도의 범어(梵語)로 만든 지명'인명이 가득하며, 김부식(金富軾) 등 유가(儒家)가 적은 문자(三國史記)에는 공자'맹자의 인의를 무시하는 삼국(三國) 무사의 입에서 경전(經典)의 문구가 관용어처럼 외워지고, 삼국사(三國事:중국 역사책의 하나) 열전에 있는 여러 백년 동안 조선 전역의 인심을 지배하던 영랑(永郞)'술랑(述郞)'안상(安祥)'남석행(南石行) 등 네 대성(大聖)의 논설은 볼 수 없고 지나를 유학한 학생인 최치원(崔致遠)만 세세히 서술하였으며, 여사제강(麗史堤綱)에 원효(元曉)'의상(義湘) 등 여러 철인들의 불학(佛學)에 영향된 고려 일대의 사상의 어떠함은 볼 수 없고, 왕 태조(王太祖) 통일 이전에 죽은 최응(崔凝)이 통일 이후에 그가 올렸다는 간불소(諫佛疎)만 적혀 있다. 이와 같은 허다한 때[時]의 구속을 받지 않고 역사를 지어 자기의 편벽된 신앙의 주관적 심리에 부합시키려 하며, 심한 경우에는 사람[人]까지 속여 신라의 금왕(金王)을 인도의 찰제리종(刹帝利種:왕족)이라 하며(三國遺事), 고구려의 추모왕(鄒牟王)을 고신씨(高辛氏:五帝의 한 사람)의 후손이라 하며(三國史記),게다가 조선 사상의 근원이 되는 서운관(書雲觀:觀家臺)의 책들을 공자의 도(道)에 어긋난다 하여 불태워버렸다. 이두형(李斗馨:조선 正租때 사람)이 말하기를, “근일의 어느 행장(行狀)과 묘지명(墓誌銘)을 보든지, 그 주인공이 반드시 용모는 단엄(端嚴)하고 덕성은 충후(忠厚)하며, 학문은 정주(程朱:중국의 程子와 朱子 또 그들의 性理學)를 조종으로 삼고 문장은 한유(韓柳:중국의 문장가 韓愈와 柳宗元)를 숭상하여 거의 천편일률(千篇一律)이니, 이는 그 사람을 속일 뿐 아니라, 그 글도 가치가 없다,”고 하였는데, 이것은 개인 전기(傳記)의 실상을 잃은 데 대한 개탄일 뿐이지마는, 이제 임금을 높이고 백성을 천대하는 춘추(春秋)의 부월(斧鉞)아래에서 자라난 후세 사람들이 그러한 마음과 습속으로 삼국의 풍속을 이야기하며 문약(文弱) 편소(偏小)에 스스로 만족한 이조 당대의 사람들이 그러한 주관으로 상고지리(上古地理)를 그리니, 이에 조선(단군)이나 부여나 삼국이나 동북국(東北國:渤海)이나, 고려나 이조-5천 년 이래의 모든 조선이 거의 한도가니로 부어낸 것같이 땅이 늘고 줄어듦에 따라 민족 활동의 활발하고 약해진 점이나 시대의 고금을 좇아 국민사상이 갈린 금을 도무지 찾을 수가 없다. 크롬웰이 화가가 자기의 상을 그릴 때 그 왼쪽 눈 위의 혹을 빼는 것을 허락지 아니하고 나를 그리려면 나의 본 얼굴로 그리라고 하였으니, 이말은 화가의 아첨함을 물리칠 뿐 아니라 곧 자기의 참된 상을 잃을까 함이었다. 조선사를 지은 기왕의 조선의 사가(史家)들은 매양 조선의 혹을 베어내고 조선사를 지으려 하였다, 그러나 그네들이 쓴 안경이 너무 볼록하므로, 조선의 눈이나 귀나 코나 머리 같은 것을 혹이라 하여 베어버리고 어디서 수없는 정말 혹을 가져다가 붙여놓았다. 혹 붙인 조선사도 기왕에는 읽는 이가 너무 없다가, 세계가 서로 크게 통하면서 외국인들이 왕왕 조선인을 만나 조선사를 묻는데 어떤 이는 조선인보다 조선사를 더 많이 아는 고로 부끄러운 끝에 돌아와 조선사를 읽는 이도 있다. 그러나 조선인이 읽는 조선사나 외국인이 아는 조선사는 모두 혹 붙은 조선사요, 옳은 조선사가 아니었다. 기왕에 있는 기록이 그와 같이 다 틀린 것이라면 무엇에 의거하여 바른 조선사를 짓겠는가? 사금(沙金)을 아는 사람이 모래 한 말[一斗]을 일면 좁쌀만한 금을 하나 얻거나 혹은 하나도 얻지 못하기도 하나니, 우리의 문적(文籍)에서 사료를 구하기가 이같이 어려운지라, 혹 어떤 사람은 조선사를 연구하자면 우선 조선과 만주 등지의 땅 속을 파서 많은 발견이 있어야 하고, 금석학(金石學).고전학(古錢學).지리학.미술학.계보 등의 학자가 쏟아져 나와야 한다고 하는 이가 많은데, 그도 그러하거니와 현금에는 우선 급한 대로 있는 사책(史策)을 가지고 득실을 평하며 진위를 비교하여 조선사의 앞길을 개척함이 급무인가 한다 제3장 구사(舊史)의 종류와 그 득실의 간략한 평가 조선의 역사에 관한 서류를 찾는다면 신지(神誌)부터 비롯되겠는데, 신지는 권벽(權擘:선조 때 사람)의 응제시(應製蒔:임금의 명에 의해 지은 시)에서 단군 때 사관(史官)이라고 한 사람이다. 그러나 나로소 보건대 단군은 곧 수두[蘇塗] 임금이요, 신지는 사람의 이름이 아니라 수두 임금의 수좌(首佐)인 벼슬 이름 신치[臣智]이니 (蘇塗와 臣智의 자세한 것은 思想史에 보임), 역대의 신치 들이 해마다 10월 수두 대제(大祭)에 우주의 창조와 조선의 건설과 산천지리의 명승과 후세 사람의 거울 삼을 일을 들어 노래하였는데, 후세의 문사들이 그 노래를 혹은 이두문(吏讀文)으로 편집하고 혹은 한자의 오언시(五言詩)로 번역하여 왕궁에 비장하였으므로 신지비사(神誌秘詞) 또는 해동비록(海東秘錄) 등의 이름이 있었던 것이다. 고려에 와서는 저작자의 성명을 알 수 없는 삼한고기(三韓古記), 해동고기(海東古記), 삼국사(三國史) 등과 김부식의 삼국사기와 일연(一然)의 삼국유사가 있었으나, 지금에 전하는 것은 삼국사기와 일연유사뿐인데 그 전하고 전하지 아니하는 원인을 생각하건대 김부식, 일연 두사람만의 저작이 우수하여 전해진 것이 아니라, 대개 고려 초엽부터 평양(平壤)에 도읍을 정하고 나아가 북쪽의 옛땅을 회복하자는 화랑의 무사가 한 파를 이루고, 사대(事大)로 국시(國是)를 삼아서 압록강 안에 구차히 편안하게 있을 것을 주장하는 유교도(儒敎道)가 한 파가 되었다. 두파가 대치에서 논전을 벌이기 수백 년만에 불교도 묘청(妙淸)이 화랑의 사상에다가 음양가(陰陽家)의 미신을 보태어 평양에서 군사를 일으켜서 북벌을 실행하려다가 유교도 김부식에게 패망하고, 김부식은 이에 그 사대주의를 근본으로 하여 삼국사기를 지은 것이다. 그러므로 동.북 두 부여를 떼어버려 조선문화가 유래한 곳을 진토(塵土) 속에 묻고 발해를 버려 삼국 이래 결정된 문명을 초개(草芥)속에 던지고 이두문(吏讀文)과 한역(漢譯)의 구별에 어두워서 한 사람이 몇 사람이 되고 한 곳이 몇 군데가 된 것이 많으며, 내사(內史)나 외적(外籍)의 취사(取捨)에 홀려서 앞뒤가 모순되고 사건이 중복된 것이 많아 거의 사적 가치가 없다고 할 것이다. 불행히 그 뒤 얼마 안 가서 고려가 몽고에 패햐여 흘필렬(忽必烈:쿠빌라이)의 위풍이 전국을 놀라게 하여 황궁(皇宮)이니 제궁(帝宮)이니 하는 명사(名詞)들이 철폐되고, 해동천자(海東天子)의 팔관악부(八關樂府)가 금지되고, 이로부터 만일 문헌에 독립자존(獨立自存)에 관한 것이 있으면 일체 꺼려 피하게 되었으니, 이러한 때라 허다한 역사 저서 중에서 유일한 사대사상의 고취자인 김부식의 삼국사기와 그에 딸려 있는 삼국유사만이 전해질 수밖에 없게 되었던 것이다. 고려 당대의 사승(史乘)을 말한다면, 고려 말엽에 임금과 신하들이 고종(高宗)이전의 나라 형세가 강성하던 때의 기록은 더욱 몽고의 꺼리고 싫어함에 걸릴까보아 두려워서 깍아버리거나 고치고, 오직 말을 낮추고 후한 예폐(禮幣)로 북쪽 강대국들에게 복종하여 섬기던 사실만을, 혹은 부연하고 혹은 지어내서 민간에 퍼뜨렸다. 이러한 기록들이 곧 이조의 정인지(鄭麟趾)가 찬술한 고려사(高麗史)의 원전이 되었고, 이조 세종(世宗)이 비상하게 사책(史冊)에 유의하였으나, 다만 그의 할아버지인 태조(太祖)와 아버지인 태종(太宗)이 호두재상(虎頭宰相) 최영(崔塋)의 북벌군 중에서 모반하여 사대(事大)의 기치를 들고 혁명의 기초를 세웠으므로 권근(權近).정인지 등에게 명하여 조선사략(朝鮮史略), 고려사(高麗史),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등을 편찬하게 함에 있어 몽고의 압박을 받던 고려 말엽 이전의 조선의 각종 실기에 의거하여 역사를 짓지 못하고 몽고의 압박을 받은 이후 외국에 아첨한 글과 위조한 고사에 의거하여 역사를 지어 구차스럽게 사업을 마치고, 정작 전대(前代:고려)의 실록은 민간에 전해짐을 허락하지 않고 규장각(奎章閣) 안에 비장해두었는데 임진왜란의 병화(兵火)에 죄다 타버렸다. 그 뒤에 세조(世祖)가 단종(端宗)의 자리를 빼앗고, 만주 침략의 꿈을 품고서 강계(江界)에 둔병(屯兵)을 경영하다가, 자기네 태조의 존명건국(尊明建國)의 주의에 충돌되어 여러 신하들이 다투어 간하는 일이 분분하고, 지나 대륙에 용맹하고 억센 명나라 성조(成祖)가 있어 조선에 대한 감시가 엄중하고, 마침내 명나라 사신 장영(張寧)이 엄중히 둔병의 이유를 힐문하므로, 세조의 그 무(武)를 숭상하고 공을 좋아하는 마음이 사라지고 조선 문헌의 정리를 자임(自任)하여 불경을 간행하고 유학을 장려하는 외에 사료의 수집에도 전력하여 조선 역대 전쟁사인 동국병감(東國兵鑑)과 조선 풍토사인 동국여지승람(東國與地勝覽)을 편찬하고(동국병감은 文宗때, 여지승람은 成宗때 편찬), 그밖에도 허다한 서적을 간행하였으니 비록 큰 공헌은 없으나 얼마간 공적은 있었다 할 것이다. 선조(宣祖).인조(仁祖) 이후에는 유교계에 철학.문학의 큰 인물이 배출되고 사학계도 차차 진보되어 허목(許穆)의 단군.신라 등 각세기(世紀)가 너무 간략하기는 하나 왕왕 독특한 견해가 있으며, 유형원(柳馨遠)은 비록 역사에 관한 전문 저서가 없으나, 역대 정치제도를 논술한 반계수록(磻溪隋錄)이 또한 사학계에 보탬이 적지 않았으며, 한백겸(韓百謙)의 동국지리설(東國地理說)이 비록 수십 줄에 지나지 않는 간단한 논문이지마는 일반 사학계에 큰 광명을 열어서 그 뒤 정약용(丁若鏞)의 강역고(彊域考)며, 한진서(韓鎭書)의 지리(地理)며, 안정복의 동사강목(東史綱木)에 실린 강역론(彊域論)이며, 그 밖의 조선 역사 지리를 설(設)하는 사람은 모두 한 선행의 그 간단한 지리설을 부연하였을 뿐이다. 나로서 보건데, 그 지리설 중에 삼한과 조선을 분리함이 범엽(范曄:後漢書의저자)이 전한 동이열전(東夷列傳)의 지리를 설명함에는 족하나, 이로써 조선 고대 3천 년 동안의 지리를 단정하여, “동국(東國)은 옛날부터 한강 이남을 삼한(三韓)이라 하고 한강 이북을 조선이라 하였다.” 라는 결론을 내렸음은 너무도 맹목적이요, 무단적 (武斷的)이라고 생각한다. 이것은 선생이 삼신(三神) .삼경(三京) .삼한(三韓). 삼조선(三朝鮮).의 연락적 관계와 발조선(發朝鮮). 발숙신(發肅愼). 부여조선(夫餘朝鮮). 예맥조선(濊貊朝鮮). 진국(震國). 진번조선(眞番朝鮮). 진한(辰韓). 마립간(麻立干). 마한(馬韓). 모한(慕韓) 등이 동음이역(同音異譯)임을 몰랐으므로 이 같은 큰 착오가 있게 된 것이다. 그러나 동이열전에 보인 삼한의 위치는 선생이 비로소 간단명료하게 분석해서 밝혀 기왕에 역사의 기록만 있고 역사의 연구는 없었다고 할 만한 조선사학계에서 선생이 처음으로 사학의 실마리를 열었다 해도 좋을 것이다. 안정복은 평생을 열사 한 가지에만 노력한, 5백 년 이래 유일한 빈한한 선비로서 서적의 열람이 부족하여 삼국사기 같은 것도 그 늘그막에야 겨우 남이 베낀 틀린 글자가 많은 것을 얻어보았으므로 그가 저술한 동사강목에 궁예(弓裔)의 국호를 마진기(摩震紀)라 한 웃음거리를 남겼으며, 지나의 서적 중에서도 참고에 필요한 위략(魏略)이나 남제서(南濟書)를 같은 것이 있음을 몰라서 고루한 구절이 적지 아니하다. 게다가 시대에 유행하는 공구(孔丘:孔子)의 춘추(春秋)며, 주희(朱憙:朱子)의 강목(綱目)의 웅덩이에 빠져 기자본기(箕子本紀) 아래 단군과 부여를 덧붙이로 하였으며, 신라 마지막 판에 궁예와 왕건을 참주(僭主)로 한 망발도 있고 너무 황실 중심의 주의를 고수하여 정작 민족 자체의 활동을 무시함이 많았었다. 그러나 연구의 정밀하기로는 선생 이상 가는 이가 없었으므로 지지(地志)의 잘못의 교정과 사실의 모순의 변증(辯證)에 가장 공이 많다 하여도 좋을 것이다. 유혜풍(柳惠風)의 발해고(渤海考)는 대씨(大氏3백 년 동안 문치(文治)와 무공(武功)의 사업을 수록하여 1천여 년이나 사학가들이 압록강 이북을 베어버린 결함을 보충하였고 이종휘(李鍾?)의 수산집(修山集)은 단군 이래 조선 고유의 독립적 문화를 노래하여 김부식 이후 사학가의 노예 사상을 갈파하였는데, 특별한 발명과 채집(採集)은 없다 하더라도, 다만 이 한 가지만으로도 또한 영원히 남을 일이다. 한치윤(韓致奫)의 해동역사(海東繹史)는 오직 지나. 일본 등의 서적 가운데 보이는 우리역사에 관한 문자를 수집하여 거연히 방대한 저술을 이루었을 뿐 아니라 삼국사(三國史)에서 빠진 부여. 발해. 가락(駕洛). 숙신(肅愼) 등도 모두 한 편의 세기(世紀)를 구성하였으며, 동국통감(東國通鑑)에 없는 저근(姐瑾). 사법명(沙法名). 혜자(慧慈). 왕인(王仁) 등도 각각 몇 줄씩의 전기(傳記)가 있고 궁중어(宮中語). 문자. 풍속. 등의 부문이 있다. 게다가 그의 조카 한진서(韓鎭書)의 지리속(地理續)이 있어서 뒷사람들의 고증의 수고를 덜어주었으니 또한 역사학에 두뇌가 있었다고 할 것이다. 다만, 너무 글자 사이에서 조선에 관한 사실을 찾다가 민족 대세의 관계를 잃었으니 곧 부루(夫婁)와 하우(夏禹)의 대 국제교제로 볼 오월춘추(吳越春秋)의 주신(州愼)의 창수사자(蒼水使者)와 2천 년 동안 흉노와 연(燕)과 삼조선(三朝鮮)이 혹은 화의하고 혹은 싸운 전후 큰 일들을 다 빠뜨렸고, 유교의 위력에 눌려 고죽국(孤竹國)이 조선족의 갈래임을 발견치 못하는 동시에 백이(伯夷).숙제(叔齊)의 성명을 빠뜨렸고, 서적의 선택이 정확하지 못하였으니, 진서(晉書)의 속석전(束晳傳)에 의하면, “우(禹)임금이 백익(伯益)을 죽이고, 태갑(太甲)이 이윤(伊尹)을 죽였다.”는 등의 기록이 있는 것이 죽서기년(竹書紀年)의 진본(眞本)이요, 현존한 죽서기년은 가짜인데, 이제 그 가짜를 그대로 기재하였으며, 사마상여(司馬相如)의 무릉서(武陵書)는 당나라 사람의 위조인데, 그대로 신용하여 인용하였고, 이 밖에 지나인이나 일본인이 없는 사실을 만들어내서 우리 나라를 속이고 모욕한 것을 많이 그대로 수입하였으니, 이것이 그 책의 결점이라 아니할 수 없다. 이조 일대의 일을 적은 역사로 말하면, 내가 일찍이 정종조(正宗朝) 한때의 기록을 엮은 수서(修書)라는 아주 잔글자로 쓴 2백 권의 거질(巨帙)을 보았었고, 만일 관서(官書)인 국조보감(國朝寶鑑), 조야첨재(朝野僉載) 등을 비롯하여 허다한 개인 저술의 역사서까지 친다면 몇 백의 수레에 찰 것이다. 이 태조(李太祖) 이하의 사실을 적은 역사로는 조야집요(朝野輯要),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등 몇몇 책을 대강 훑어본 이외에는 자세히 다 읽어본 것이 없으므로 아직 그 낫고 못함을 말하지 못하거니와, 대개 열에 일고여덟이 사색(四色)의 당쟁사(黨爭史)임은 단언할수 있을 것이니 아, 이조 이래 수백 년 동안의 조선인의 문화사업은 이에 끊어졌도다. 이상에 열거한 역사서를 다시 말한다면 대개가 정치사요, 문화사에 해당하는 것은 몇이 못 됨이 첫째 유감이요, 정치사 중에서도 동국통감, 동사강목 이외에는 고금을 회통한 저서가 없고, 모두 한 왕조의 흥하고, 망한 전말로 글의 수미(首尾)를 삼았음이 유감이요, 공구의 춘추(春秋)를 역사의 절대적인 준칙으로 알아 그 의례를 본받아서 임금을 높이고 신하를 억누르기를 위주하다가 마지막에는 자기나라까지 비방하는 편벽된 논란을 벌임이 셋째 유감이요, 국민의 자감(資鑑)에 이바지하려 함보다 외국인에게 아첨하려 한 의사가 더 많고(李修山 일파를 제하고) 자기 나라의 강토를 조각조각 베어주어 마지막에 가서는 건국 시대의 수도까지 모르게 만들었음이 넷째 유감이다. 우리의 사학계가 이와같이 눈멀고, 귀먹고, 절름발이 등 온갖 병을 죄다 가져서 정당한 발달을 얻지 못함은 무슨 까닭인가? 너무 자주 내란과 외환(비교적 오래 편안했던 이조 일대는 제하고)과 자연의 재난이 잦았던 것은 그만두고라도 인위(人爲)의 장애를 이룬 것을 들건대, 1) 신지(神誌) 이래의 역사를 비장해두는 버릇이 역사의 고질이 되어 이조에서도 중엽 이전에는 동국통감, 고려사 등 몇몇 관에서 간행한 책 이외에는 사사로이 역사를 짓는 것을 금하였으므로 이수광(李?光)은 내각에 들어가서야 고려 이전의 비사(秘史)를 많이 보았다 하였고 이언적(李彦迪)은 사벌국전(沙伐國傳)을 지어가지고도 친구에게 보임을 꺼려했다. 당대 왕조의 잘잘못을 기록하지 못하게 함은 다른 나라에도 간혹 있거니와, 지나간 고대의 역사마저 사사로이 짓거나 읽는 것을 금함은 우리 나라에만 있었다. 그리하여 역사를 읽는 이가 별로 없었고, 2) 송도(松都)를 지나다가 만월대(滿月臺)를 쳐다보라. 반쪽의 기와가 남아 있는가? 한 개의 주초가 남아 있는가? 막막히 넓은 밭에 이름만 만월대라 할 뿐이 아닌가? 슬프다, 만월대는 이조의 아버지뻘로 멀지 않은 고려조의 대궐인데, 무슨 병화에 탔다는 설도 없이 어찌 이와같이 정(情)이 없는 빈터만 남았는가? 이와 똑같은 예로서 부여에서 백제의 유물을 찾아볼 수 없으며, 평양에서 고구려의 옛 모습을 찾아볼 수 없다. 이에서 나오는 결론은 뒤에 일어난 왕조가 앞의 왕조를 미워하여 역사적으로 자랑할 만한 것은 무엇이든지 파괴하고, 태워버리기를 위주한 것이다. 신라가 일어나매 고구려.백제 두 나라 역사가 볼 것이 없게 되었고, 고려가 되매 신라의 역사가 볼 것이 없게 되었으며, 이조가 대신하메 고려의 역사가 볼것이 없게 되어 매양 현재로서 과거를 계속하려 아니하고 말살하려 하였다. 그리하여 역사에 쓰일 자료가 박약해졌으며, 3) 현종(顯宗)이, “조총(鳥銃)의 길이가 얼마나 되오?”하니, 유혁연(柳赫然)이 두 손을 들어, “이만합니다.”하고 형용하였다. 기주관(記注官:기록을 맡은 관리)은 그 문답한 정형(情形)을 받아쓰지 못하고 붓방아만 찧고 있었다. 유혁연이 그를 돌아보며, “전하께서 유혁연에게 조총의 길이를 물으시니(相問鳥銃之長於柳赫然) 혁연이 손을 들어, ”자, 남짓이 하고 이만합니다,“고 대답하였다(然擧手尺餘以對曰如是)라고 쓰지 못하느냐?” 하고 구짖었다, 숙종(肅宗)이 박태보(朴太輔)를 친히 문초하는데, “이리저리 잔뜩 결박하고 뭉우리돌로 때려라.”하니, 주서(注書) 고사직(高司直)이 서슴없이, 필(必)자 모양으로 결박하여 돌로 때려라(必字形縛之無隅石擊之).“라고 썼다 그래서 크게 숙종의 칭찬을 받았다고 한다. 이것들이 궁정의 한 가화(佳話)로 전하는 이야기이지마는, 반면에 남의 글로 내 역사를 기술하기 힘듦을 볼 것이다. 국문이 늦게 나오기도 했지마는, 나온 뒤에도 한문으로 저술한 역사만 있음이 또한 기괴하다. 이는 역사 기록의 기구가 부족함이요, 4) 회재(晦齋:李彦迪)나 퇴계(退溪:李滉)더러 원효나 의상의 학술사상(學術史上) 위치를 물으면 한 마디의 대답을 못 할 것이요, 원효와 의상에게 소도(蘇塗:솟대)나 내을(奈乙:박혁거세의 탄생지)의 신앙적 가치를 말하면 반분의 이해를 못 할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이조의 인사들이 고려 시대의 생활의 취미를 모르며, 고려나 삼국의 인사들은 또 삼한 이전의 생활의 취미를 모를 만큼 반식(飯食). 거처(居處). 신앙. 교육 등 일반 사회의 형식과 정신이 모두 몹시 변하여 오늘의 아메리카 사람으로 내일 러시아 사람됨과 같은 엄청난 차이가 있으니, 이는 역사 사상의 연락이 끊어짐이라, 어디서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 구명할 동기가 생기랴? 이상 몇 가지 원인으로 하여 우리의 역사학이 올바르게 발달하지 못한 것이다. 3백 년 동안 사색(四色)의 당파 싸움이 크게 국가에 해를 끼쳤다 하지마는, 당론이 극렬할수록 제각기 나는 옳고 저는 그르다는 것을 퍼뜨리기 위하여 사사로운 기술이 성행하고 당의 시비가 매양 국정에 관계되므로 따라서 조정의 잘잘못을 논술하게 되어 모르는 사이에 역사의 사사로운 저작의 금지가 깨뜨려져서 마침내 한백겸. 안정복. 이종휘. 한치윤 등 사학계에 몇몇 인물이 배치되었음도 그 결과이다. 혹 어떤 이는, “사색 이후의 역사는 피차의 기록이 서로 모순되어 그 시비를 가릴 수가 없어서 가장 역사의 난관이 된다.”고 하지마는, 그들의 시비가 무엇인가 하면 아무 당이 이조의 충신이니, 역적이니, 아무 선생이 주자학의 정통이니 아니니 하는 문제들뿐이라, 오늘날 우리의 눈으로 보면 서릿발 같은 칼을 휘둘러 임금의 시체를 두 동강이 낸 연개소문을 쾌남아라 할 것이요, 자기의 의견을 주장하여 명륜당(明倫堂) 기둥에 공자를 비평한 글을 붙인 윤백호(尹白湖)를 걸물(傑物)이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만 냉정한 두뇌로써 회재.화담(花潭:徐敬德). 퇴계.율곡(栗谷:李珥) 등의 학술상 공헌의 많고 적음을 알아야 할 것이다. 주자학의 정통이 되고 안 됨은 희담(戱談)이 될 분이요, 노론(老論).소론(少論).남인(南人).북인(北人)의 다툼은 그 정치상에 미친 영향의 좋고 나쁨을 물을 뿐이며, 이조의 충성된 종 되고 못 됨은 잠꼬대에 지나지 않을 뿐이요, 개인의 사사로운 덕의 결점을 지적하여 남의 명예를 더럽히고 혹은 애매한 사실로 남을 모함하여 죽인 허다한 사건들은 그 반면에 있어서 당시 사회 알력의 나쁜 습속으로 국민과 나라를 해친 일종의 통탄할 사료가 될 뿐이다. 만일 시어머니의 역정과 며느리의 푸념 같은 것에 지나지 않는 일에 낱낱이 재판관을 불러 그 굽고 곧음을 판결하려 한다면 이는 스펜서의 이른바 이웃집 고양이 새끼 낳았다는 보고 같아서 도리어 이로써 사학계의 다른 중대한 문제를 등한히 할 염려가 있으니, 그냥 던져둠이 옳다. 그리고 빨리 지리 관계라든가, 국민생활 관계라든가, 민족의 성쇠라든가 하는 큰 문제에 주의하여 잘못을 바로잡고 참된 것을 구하여 조선 사학계의 표준을 세움이 급무 중의 급무라 생각한다. 제4장 사료의 수집과 선택에 관한 참고[편집] 만일 한 걸음 더 나아가 어디서 무엇으로 어떻게 우리의 역사를 연구하여야 하겠느냐 하면 , 그 대답이 매우 곤란하나, 우선 나의 경과부터 말하고자 한다. 이제부터 16년 전에 국치(國恥:한일합방)에 발분하여 비로소 동국통감(東國痛鑑)을 읽으면서 사평체(史評體)에 가까운 독사신론(讀史新論)을 지어 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 지상에 발표하고, 이어서 수십 학생들의 청구에 의하여 지나식(支那式)의 연의(蓮義)를 본받은 역사도 아니고 소설도 아닌 대동사천녀사(大東史千年史)란 것을 짓다가, 두 가지 다 사고로 인하여 중지하고 말았었다.그 논평의 독단(獨斷)과 행동의 대담하였음을 지금까지 스스로 부끄러워하거니와, 그 이후 얼마만큼 분발하여 힘쓴 적도 없지 아니하나 나아간 것이 촌보(寸步)쯤도 못 된 원인을 오늘에 와서 국내 일반 독사계(讀史界)에 호소하고자 한다. 1) 옛 비석의 참조에 대하여 일찍이 사곽잡록(四郭雜錄:저자미상)을 보다가 “신립(申砬)이 선춘령(先春領)아래에 고구려 옛 비가 있다는 말을 듣고(申砬聞先春領下有高句麗舊碑), 몰래 사람을 보내 두만강을 건너가서 탁본(拓本)을 떠왔는데(潛遣人 渡豆滿江 模本而來), 알아볼 만한 글자가 3백여 자에 지나지 않았다(所可辨識者 不過三百餘字).그 글에 황제라고 한 것은 고구려왕이 스스로를 일컬은 것이요(其曰皇帝 高句麗王自稱也), 그 상가(相加)라고 한 것은 고구려의 대신을 일컬은 것이었다(其曰相加 高句麗大臣之稱也).“고 한 일절이 있음을 보고 크게 기뻐서, 만주 깊은 산중에 천고(千古) 고사(故事)의 이빠진 것을 보충할 만한 비석쪽이 이것 하나뿐 아닐 것이라 생각하고 해외에 나간 날부터 고구려 발해의 옛 비석을 답사하리라는 회포가 몹시 깊었었다. 그러나 해삼위(海參威:브라디보스토크)에서 하바로프스크를 왕래하는 선객들에게 그 항로 중에서 전설로 내려오는 석혁산악(錫赫山嶽)에 우뚝 서 있는 윤관(尹瓘, 혹은 蓋蘇文)의 기공비(紀功碑)를 보았다는 말이며, 봉천성성(奉天省成)에서 간접으로 이통주(伊通州)를 유람하였다는 사람이 그 고을 동쪽 70리에 남아 있는 해부루(解夫婁:夫餘의 왕)의 송덕비(頌德碑)를 보았노라는 이야기며, 발해의 옛 서울에서 온 친구가 폭이 30리인 경박호(鏡泊湖:古史에는忽汗海)의 앞쪽(북쪽)에 미국 나이아가라 폭포와 겨룰 만한 1만 길 비폭(飛瀑)을 구경하였다고 하는 말이며, 해룡현(海龍縣)에서 나온 나그네가 죽어서 용이 되어 일본의 세 섬을 가라앉히겠노라고 한 문무대왕(文武大王:신라)의 유묘(遺廟)를 예배하였다는 이야기 등이 나에게는 귀로 들을 인연만 있었고 눈으로 볼 기회는 없었다. 한번 네댓 친구와 동행하여 압록강 위의 집안현(輯安縣), 곧 고구려 제2의 환도성(丸都成)을 얼씬 보았음이 나의 인생에 기념할 만한 장관이라 할 것이나, 그러나 여비가 모자라서 능묘(陵墓)가 모두 몇인지 세어볼 여가도 없이 능으로 인정할 것이 수백이요, 묘가 1만 내외라는 억단(臆斷)을 하였을 뿐이었다. 마을 사람이 주는 댓잎 그린 금척(金尺)과 그곳에 거주하는 일본인이 박아서 파는 광개토왕 비문을 값만 물어보았으며(깨어진 그 땅 위에 나온 부분만), 수백의 왕릉 가운데 천행으로 남아 있는 8층 석탑, 사면이 네모진 광개토왕릉과 그 오른편의 제천단(祭天壇)을 붓으로 대강 그려서 사진을 대신하였고 그 왕릉의 넓이와 높이를 발로 재고 몸으로 견주어서 자로 재는 것을 대신하였을 뿐이었다 (높이 10길 가량이고, 아래층의 둘레는 80발인데, 다른왕릉은 위층이 파괴되어 높이는 알 수 없고 그 아래층의 둘레는 대개 광개토왕과 같음). 왕릉의 위층에 올라가 돌기둥이 섰던 자취와 덮은 기와의 남은 조각과 드문드문 서있는 소나무, 잣나무를 보고 후한서(後韓書)에, “고구려 사람들은 금은과 재백(財帛)을 다하여 깊이 장사지내고, 돌을 둘러 봉하고 또한 소나무, 잣나무를 심는다(高句麗人金銀財帛 盡於厚葬 環石爲封 亦種松柏).”고 한 아주 간단한 문구의 뜻을 비로소 충분히 해석하고, ‘수백 원만 있으면 묘 하나를 파볼 수 있을 것이요, 수천 원 혹은 수만 원이면 능 하나를 파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 수천 년 전 고구려 생활의 활사진을 볼 수 있을 것인데.’ 하는 꿈 같은 생각만 하였다. 아! 이와 같은 천장비사(天藏秘史)의 보고(寶庫)를 만나서 나의 소득이 무엇이었던가? 인재(人材)와 물력(物力)이 없으면 재료가 있어도 나의 소유가 아님을 알았다. 그러나 하룻동안 그 외부에 대한 어설픈 관찰만 이었지마는 고구려의 종교. 예술. 경제력 등의 어떠함이 눈앞에 살아 나타나서 그 자리에서 “집안현을 한번 봄이 김부식의 고구려사를 만번 읽는 것보다 낫다,” 하는 단안을 내렸다. 그 뒤 항주(杭州) 도서관에서 우리 나라 금석학자 김정희(金正喜:秋史)가 발견한 유적을 가져다가 지나인이 간행한 해동금석원(海東金石苑)을 보니, 신라말 고려초의 사조(思潮)와 속상(俗尙)의 참고가 될 것이 많았고, 한성의 한 친구가 보내준 총독부 발행의 조선고적도보(朝鮮古蹟圖譜)도 그 조사한 동기의 어떠함이나 주해의 억지로 끌어다 붙인 몇몇 부분만을 제외하면, 또한 우리 고사 연구에 도움될 것이 많았다. 이것이나 저것이나 다 우리 한미한 서생(書生)의 손으로는 도저히 성취하지 못할 사료임을 스스로 깨달았다. 2) 각 서적의 호증(互證)에 대하여 ① 일찍이 고려 최영전(崔塋傳)에 의거하건대, 최영이 말하기를, “당나라가 삼십만 군사로 고구려를 침범하여, 고구려는 승군(僧軍) 삼만을 내어 이를 대파하였다.” 고 했으나, 삼국사기(三國史記) 50권 중에 이 사실이 보이지 아니한다. 그러면 승군이란 무엇인가 하면, 서긍(徐兢)의 고려도경(高麗圖經)에 “재가(在家)한 화상은 가사도 입지 아니하고 계율도 행하지 아니하며, 조백으로 허리를 동이고 맨발로 걷고, 아내를 가지고, 자식을 기르며, 물건의 운반, 도로의 소제, 도랑의 개척, 성실(城室)의 수축 등 공사(公事)에 복역하며, 국경에 적이 침입하면 스스로 단결하여 싸움에 나서는데, 중간에 거란(契丹)도 이들에게 패하니, 그 실은 죄를 지어 복역한 사람들로서, 수염과 머리를 깍았으므로 이인(夷人:오랑캐)이 그들을 화상이라 한 것이다.”라고 하였으니, 이것에서 승군의 면목을 대강 알 수 있다. 그러나 그 내력이 어디서 비롯하였느냐 하는 의문이 없지 않다. 통전(通典).신당서(新唐書)등 이름있는 책에 의하면, 조의선인이라는 관명(官名)이 있었고, 고구려사에는 명림답부(明臨答夫:고구려 재상)를 연나조의라 하였고, 후주서(後周書)에는 조의선인을 예속선인이라고 하였으니, 선인(先人) 선인(仙人)은 다 국어 ‘선인’을 한자로 음역한 것이고, 조의 혹 백의(帛衣)란 고려도경(高麗圖經)에 이른바 조백으로 허리를 동이므로 이름함이다. 선인(仙人)은 신라 고사(故事)의 국선(國仙)과 같은 종교적 무사단(武士團)의 단장이요, 승군(僧軍)은 국선 아래 딸린 단병(團兵)이요, 승군이 재가한 화상(和尙)이라 함은 후세 사람이 붙인 별명이다. 서긍이 외국의 사신으로 우리 나라에 와서 이것을 보고 그 단체의 행동을 서술함에 있어서, 그 근원을 물으니 복역한 사람이라는 억측의(名詞)를 말해준 것이다. 이에 고려사로 인하여 삼국사에 빠진 승군을 알게 되고, 고려도경으로 인하여 고려사에 자세치 않은 승군의 성질을 알게 되고 통전. 신당서. 후주서와 신라의 고사 등으로 인하여 승군과 선인(先人)과 재가의 화상이 같은 단체의 무리임을 알게 되었으니, 다시 말하면 당나라의 30만 침입군이 고구려의 종교적 무사단인 선인군(先人軍)에게 크게 패하였다는 몇십 자의 약사(略史)를 6,7가지 서적 수천 권을 뒤진 결과로써 비로소 알아낸 것이다. ②당나라 태종(太宗)이 고구려를 침략하다가 안시성(安市城)에서 화살에 맞아 눈이 상하였다는 전설이 있어 후세 사람이 매양 이것을 역사에 올리는데, 이색(李穡)의 정관음(貞觀吟:정관은 당나라 태종의 연호)에도,“어찌 현화(玄花:눈)가 백우(白羽)에 떨어질 줄 알았으리(那知玄花落白羽).”라고 하여 그것이 사실임을 증명하였으나, 김부식의 삼국사기와 지나인의 신구당서(新舊唐書)에서는 보이지 않음은 무슨까닭인가? 만일 사실의 진위를 묻지 않고 그것을 그대로 받아들이거나 또는 버렸다가는 역사상의 위증죄를 범하는 것이 된다, 그래서 당나라 태종의 눈 상한 사실을 지나의 사관(史官)이 뺀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을 가지고 그 해답을 구하였다. 명(明)나라 태종(太宗)이 거란을 치다가 흐르는 화살에 상하여 달아나 돌아가서, 몇 해 후에 필경 그 상처가 덧나서 죽었다,“고 하였는데, 이것이 송사(宋史)나 요사(?史)에는 보이지 아니하고, 사건이 여러 백 년 지난 뒤에 진정이 고증(考證)하여 발견한 것이다. 이에 나는 지나인은 그 임금이나 신하가 다른 민족에게 패하여 상하거나 죽거나 하면 그것을 나라의 수치라 하여 숨기고 역사에 기록하지 않은 실증을 얻어서 나의 앞의 가설을 성립시켰다. 그러나 지나인에게 국치(國恥)를 숨기는 버릇이 있다 하여 당나라 태종이 안시성에서 화살에 맞아 눈을 상하였다는 실증은 되지 못하므로, 다시 신구당서를 자세히 읽어보니, 태종본기(太宗本紀)에 태종이 정관(偵觀) 19년 9월에 안시성에서 군사를 철수하였다 하였고, 유박전(劉泊傳)에는 그 해 12월에 태종의 병세가 위급하므로 유박이 몹시 슬퍼하고 두려워하였다고 하였으며, 본기(本紀)에는 정관 20년에 임금의 병이 낫지 아니하여 태자에게 정사를 맡기고, 정관23년 5월에 죽었다고 하였는데, 그 죽은 원인을 강복(綱目)에는 이질(痢疾)이 다시 악화한 것이라고 하였고, 자치통감(資治痛鑑)에는 요동에서부터 병이 있었다고 하였다. 대개 높은 이와 친한 이의 욕봄을 꺼려 숨겨서, 주천자(周天子)가 종후(鄭侯)의 화살에 상했음과 노(魯)나라의 은공(隱公).송공(昭公) 등이 살해당하고 쫓겨났음을 춘추(春秋)에 쓰지 아니하였는데, 공구(孔丘)의 이러한 편견이 지나 역사가의 버릇이 되어, 당나라 태종이 이미 빠진 눈을 유리쪽으로 가리고, 그의 임상병록(臨床病錄)의 기록을 모두 딴 말로 바꾸어놓았다. 화살의 상처가 내종(內腫:몸 속으로 곪음)이 되고 눈병이 항문병(肛門病)으로 되어 전쟁의 부상으로 인하여 죽은 자를 이질이나 늑막염으로 죽은 것으로 기록해놓은 것이다. 그러면 삼국사기에는 어찌하여 실제대로 적지 않았는가? 이는 신라가 고구려.백제. 두 나라를 미워하여 그 명예로운 역사를 소탕하여 위병(魏兵)을 격파한 사법명(沙法名)과 수군(隨軍)을 물리친 을지문덕(乙支文德)이 도리어 지나의 역사로 인하여 그 이름이 전해졌으니(을지문덕의 이름이 삼국사기에 보이는 것은 곧 김부식이 지나사에서 끌어다 쓴 것이므로 그 논평에, ”을지문덕은 중국사가 아니면 알 도리가 없다“고했음), 당태종이 눈을 잃고 달아났음이 고구려의 전쟁사에 특기할 만한 명예로운 일이라 신라인이 이것을 빼버렸음이 또한 있을 수 있는 일이었다. 그러니까 우리가 당태종의 눈 잃은 일을 처음에 전설과 목은집(牧隱集)에서 어렴풋이 찾아내어 신구당서나 삼국사기에 이것을 기재하지 않은 의문을 깨침에 있어서ㅡ 진정의 야산묵담(兩山墨談)에서 같은 종류의 사항을 발견하고, 공구의 춘추(春秋)에서 그 전통의 악습을 적발하고, 신구당서, 통감강목(痛鑑綱目) 등을 가져다 그 모호하고 은미(隱微)한 문구 속에서 첫째로 당태종 병록(이질 등)보고가 사실이 아님을 갈파하고, 둘째로 목은의 정관음(貞觀吟:당태종의 눈 잃은 사실을 읊은 시)의 신용할 만함을 실증하고, 셋째로 신라 사람이 고구려 승리의 역사를 말살함으로써 당태종의 패전과 부상한 사실이 삼국사기에 빠지게 되었음을 단정하고 이에 간단한 결론을 얻으니 이른바, ‘당태종이 보장왕(寶藏王)3년(서기644)에 안시성에서 눈을 상하고 도망하여, 돌아가서 당시 외과 의사의 불완전으로 거의 30달을 앓다가, 보장왕 5년에 죽었다. ’라는 것이었다. 이 수십자를 얻기에도 5,6종 서적 수천 권을 반복하여 읽어보고 들며 나며 혹은 무의식중에서 얻고 혹은 무의식중에서 찾아내어 얻은 결과이니 그 수고로움이 또한 적지 아니하였다. 승군(僧軍)의 내력을 모르면 무엇이 해로우며 당태종이 부상한 사실을 안들 무엇이 이롭기에 이런 사실을 애써서 탐색하느냐 할 이가 있겠지만, 그러나 사학(史學)이란 것은 하나하나를 모으고 잘못 전하는 것을 바로잡아서 과거 인류의 행동을 여실하게 그려내어 후세 사람들에게 깨쳐주는 것이니, 승군 곧 선인군(先人軍)의 내력을 모르면 다만 고구려가 당나라 군사만을 물리친 원동력뿐 아니라, 뒤따른 명림답부(明臨答夫)의 혁명군의 중심과 강감찬의 거란을 격파한 군대의 주력(主力)이 다 무엇이었던지 모르고, 따라서 삼국에서부터 고려까지의 1천여 년 군제상(軍制上) 중요한 점을 모를 것이며, 당태종이 눈을 잃고 죽은 줄을 모른다면 안시성 전국(戰局)이 속히 결말이 난 원인을 모를 뿐만 아니라 그것이 신라와 당나라가 연맹하게 된 배경이요, 당나라 고종(高宗)과 그 신하가 모든 희생을 돌아보지 않고 고구려와 흥망을 겨룬 전제(前提)요, 백제와 고구려가 서로 손을 맞잡게 된 동기이던 것을 모를 것이다. 그러나 위에 든 것은 그 한두 예일 뿐이고, 이 밖에도 이 같은 일이 얼마인지를 모를 것이니, 그러므로 조선사의 황무지를 개척하자면 도저히 한두 사람의 힘으로 단시일에 완결시킬 것이 아님을 깨달았다. 3) 각종 명사(名詞)의 해석에 대하여 우리 나라는 고대 후에니키 인이 이집트의 상형문자를 가져다 알파벳을 만든 것처럼 한자를 가져다가 이두문을 만들었는데, 그 초창기에는 한자의 음을 딴 것도 있고 혹은 그 뜻을 딴 것도 있으니, 삼국사기에 보이는 사람의 이름으로는, ‘소지(疎智), 일명 비처(毘處)’라 함은 빛의 뜻이 소지가 된것이고 음이 비처로 된 것이요, ‘소나(素那), 일명 금천(金川)’이라 함은 뜻이 금천, 음이 소나로 된 것이요, ‘거칠부(거漆夫), 일명 황종(荒宗)’이라 함은 ‘거칠위’의 음이 거칠부, 뜻이 황종으로 된 것이요, ‘개소문(蓋蘇文), 일명 개금(蓋今)’은 ‘신’ 의 음이 소문, 뜻이 금으로 된 것이요, ‘이사부(異斯夫), 일명 태종(笞宗)’은 ‘잇위’의 음이 이사부, 뜻이 태종(訓蒙子會에 笞를 ‘잇’으로 읽음)으로 된 것이다. 지명(地名)으로는 ‘밀성(密城), 추화(推火)라고도 함’ 은 ‘밀무’의 음이 밀성, 뜻이 추화로 된 것이요, ‘웅산(熊山) 공목달(功木達)이라고도 함’은 ‘곰대’의 뜻이 웅산, 음이 공목달로 된 것이요, ‘계립령(鷄立領), 일명 마목령(麻木領)’이라 함은 ‘저름(겨릅)’의 음이 계립, 뜻이 마목으로 된 것이요, ‘모성(母城), 막성(莫城)이라고도 함’은 ‘어미’ 의 뜻이 모, 음이 막으로 된 것이요, ‘흑양(黑壤), 금물노(今勿奴)라고도 함’은 ‘거물라’의 ‘거물’의 뜻이 흑, 음이 금물로 된 것이요, 양과 노는 다 ‘하’의 음을 취한 것이다. 관명(官名)으로는 ‘각간(角干)을 혹은 발한(發翰)이라함’은 ‘불’의 뜻이 각, 음이 발로 된 것이고, 간(干)과 한(翰)은 다 ‘한’의 음을 취한 것이나, 불한은 군왕(郡王)을 일컬음이요, ‘누살(薩)을 혹 도사(道使)라 함’은 ‘라’의 뜻이 도, 음이 누로 된 것이고, ‘살’의 뜻이 사, 음이 사로 된 것이니, ‘라살’은 지방장관을 일컬음이요, ‘말한’ ‘불한’, ‘신한’은 삼신(三神)에서 근원한 것인데, 뜻으로는 천일(天一).지일(地一).태일(太一)이 되고, 음으로는 마한.변한.진한으로 된 것이요, ‘도가’,‘개가’,‘크가’,‘소가’,‘말가’는 다서 대신의 칭호인데, ‘도.개.크.소.말’등은 뜻으로,‘가’는 음으루 저가(猪加).구가(狗加).대가(大加).우가(牛加).마가(馬加)로 된 것이다. 이같이 자질구레한 고증이 무슨 역사상의 큰 일이 되는가? 이것은 자질구레한 듯하나 지지(地誌)의 잘못도 이로써 바로잡을 수 있고, 사료의 의혹도 이로써 보충할 수 있으며 고대의 문학에서부터 모든 생활 상태까지 연구하는 열쇠가 되는 것이다. 예를 들자면, 해모수(解募漱)와 유화왕후(柳化王后)가 만난 압록강이 어디인가? 지금의 압록강이라 하면 당시 부여의 서울인 합이빈(哈爾濱)과 너무 멀리 떨어져 있고, 다른 곳이라면 달리 또 압록이 없어 그 의문을 깨뜨리지 못하였더니,첫 걸음에 광개토호태왕(廣開土好太王)의 비에 지금의 압록강을 아리수(阿利水)라 하였음을 보고 압록의 이름이 아리(阿利)에서 나왔음을 깨달았다. 두 번째로 요사(遼史)에 ‘요흥종(遼興宗)이 압자하(鴨子河)를 혼돈강(混同江)이라 이름을 고쳤다.’고 한 것을 보고 ‘압자(鴨子)가 곧 ‘아리’인즉, 혼돈강 곧 송화강(松花江)이 고대의 북압록강(北鴨綠江)인가?‘ 하는 가설을 얻었고, 다음에 동사강목(東史綱目)고이(考異)에, ’삼국유사의 ‘요하(遼河) 일명 압록(鴨綠)’과 주희의 여진이 일어나 압록강에 웅거하였다.‘고 한 것을 들어 ’세 압록(鴨綠)이 있다,‘고 하였음을 보고 송화강이 고대에 한 압록강이었음을 알고, 따라서 해모수 부부가 만난 압록강이 곧 송화강임을 굳혔다. 마한전(馬韓傳)에 ‘비리(卑離)’를 건륭제(乾隆帝)의 삼한정류(三韓訂謬)에는 만주의 패륵(貝勒:패리)과 같은 관명(官名)이라고 하였으나, 나는 생각하기를 삼한의 비리는 삼국지리지(三國地理志)백제의 부리(夫里)이니, 비리나 부리는 다 ‘울’의 취음(取音)이요, 도회(都會)의 뜻이다. 마한의 비리와 백제의 부리를 참조하면, 마한의 벽비리(壁卑離)는 백제의 파부리(波夫里)요, 여래비리(如來卑離)는 이릉부리(爾陵夫里)요, 모로비리(牟盧卑離)는 모량부리(毛良夫里)요, 감해비리(鑑奚卑離)는 고막부리(古莫夫理)요, 초산도비리(楚山途卑離)는 미동부리(未冬卑離)요, 고랍비리(古臘卑離)는, 고막부리(古莫夫里)니, 비록 이 음과 저 뜻이 이역(異譯))이 있기는 하나 그 대략을 얻을 수 있을 것이며, 따라서 조선이 관중(管仲)과 싸우던 때에 지나 산서성(山西省)이나 영평부(永平府)에 비이(卑耳)의 계(谿)를 두었으니, 비이는 비리 곧 ‘울’의 번역이다. 이에서 조선 고대의 ‘울’이 곧 산해관(山海關)서족까지에 이르렀음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자질구레한 고증이 역사상의 큰 일이 아니지마는 도리어 역사상의 큰 일을 발견하는 연장이라 하겠다. 만일 한 걸음 더 나아가서 훈몽자회(訓蒙字會), 처용가(處容歌), 훈민정음(訓民正音) 등에서 옛 말을 연구하고, 삼국유사에 씌어있는 향가에서 이두문의 용법을 연구하면 역사상 허다한 발견이 있을 것 같다. 필자가 일찍이 이에 유의한 바 있었는데, 해외에 나간 뒤로 부터는 한 권의 책을 얻기가 심히 어려워서, 10년을 두고 삼국유사를 좀 보았으면 하였으나 또한 얻어볼 수 없었다. 4) 위서(僞書)의 판별과 선택에 대하여 우리나라는 고대에 진귀한 책을 태워버린 때(이조 太宗의 焚書같은)는 있었으나 위서를 조작한 일은 별로 없었으므로, 근래에 와 천부경(天符經), 삼일신고(三一神誥)등이 처음 출현하였으나 누구의 변박(辨駁)도 없이 고서로 인정하는 이가 없게 되었다. 그러므로 우리 나라 책은 각 씨족의 족보 가운데 그 조상의 일을 혹 위조한 것이 있는 이외에는 그다지 진위의 변별에 애쓸 필요가 없거니와, 우리와 이웃해 있는 지나. 일본 두 나라는 예로부터 교제가 빈번함을 따라서 우리 역사에 참고될 책이 적지 않지마는 위서 많기로는 지나 같은 나라가 없을 것이니, 위서를 분간하지 못하면 인용하지 않을 기록을 우리 역사에 인용하는 착오를 저지르기 쉽다. 그렇지마는 그 가짜에 구별이 있다. 하나는 가짜 중의가짜이니, 예를 들면 죽서기년(竹書紀年)은 진본이 없어지고 위작이 나왔음을 앞에서 이미 말하였거니와, 옛날 사학가들이 늘 고기(古記)의, ‘단군은 요임금과 함께 무진년에 섰다(檀君 興堯竝立戊辰).’고 한 글에 의하여 단군의 연대를 알고자 하는 이는 항상 요 임금의 연대에 비교 하고자 하며 요 임금의 연대를 찾는 이는 속강목(續綱目:金仁山저술)에 고준(考準)한다. 그러나 주소(周召: 周公과 召公)의 공화(王이 달아나고 주공과 소공이 의논하여 정치를 행한 14년)이전의 연대는 지나 역사가의 대조(大祖)라 할 만한 사마천(司馬遷)도 알지 못하여, 그의 사기(史記)연표에 쓰지 못하였거늘 하물며 그보다도 더 요원한 요 임금의 연대랴. 그러므로 속강목은 다만 가짜 죽서기년에 의거하여 적은 연대이니, 이제 속강목에 의거하여 고대의 연대를 찾으려 함은 도리어 연대를 흐리게 함이다. 공안국(孔安國)의 상서전(尙書傳)에, ‘구려 한맥(句麗?貊)’이라는 구절을 인용하여 고구려와 삼한이 지나의 주무왕(周武王)과 교통하였음을 주장하는 이도 있으나, 사기(史記)공자세가(孔子世家)에,“안국(安國)이 지금의 황제의 박사(博士)가 되었는데 일찍 죽었다(安國爲今皇帝博士蚤卒).”고 하였으니, ‘지금의 황제’는 무제(武帝)이다. 무제를 '지금의 황제‘하 한 것은 사마천이 무제가 죽어서 무제라는 시호를 받은 것을 못 보았기 때문이고, 안국을 ’일찍 죽었다.‘고 한 것은 사마천이 생전에 안국의 죽음을 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면 공안국은 사마천보다 먼저 죽고 사마천은 무제보다 먼저 죽었음이 명백한데 , 상서전에는 무제의 아들인 소제(昭帝)시대에 창설한 금성군(金城郡)이란 이름이 있으니, 공안국이 그가 죽은 뒤에 창설된 지명을 예언할 만한 점쟁이라면 모르거니와, 만일 그렇지 않다고 하면 상서대전이 위서(僞書)임이 또한 분명하고 거기 기록된 구려. 한맥 등도 자연 명백해질 것이다. 다음은 진짜 중의 가짜인데, 이것을 다시 둘로 나누면, ① 하나는 본서의 위증(僞證)이니, 초학집(初學集), 유학집(有學集)등은 전겸익(錢謙益)이 저술한 실제로 있는 것이지마는, 그 글 가운데 씌어 있는 우리 나라에 관한 일은 대개 전겸익의 위조요, 실제로없는 것이 많으니, 이런 따위가 바로 그것이다. 그러나 이는 우리 나라 역사에 그것을 반박할 확고한 증거들이 있거니와 , 만일 우리 역사의 반박할 재료가 없어지고 저네의 거짓 기록만 유전(流轉)된 것이 있으면 다만 가설의 부인만으로는 안 될 것이니 어찌하면 옳을까? 옛날에 장유(長維)가 사기(史記)의, “무왕이 기자(箕子)를 조선에 봉하였다(武王封箕子干朝鮮).”고 한 것을 변정하는데, 첫째로 상서(尙書)에, “나는 남의 신하가 되지 않겠다고”한 말을 들어 기자가 이미 남의 신하가 되지 않겠다고 스스로 맹세하였으니, 무왕의 봉작(封爵)에, “기자가 조선으로 몸을 피하였다(箕子避地朝鮮).”고 한 것을 들어 반고(班固)는 사기를 지은 사마천보다 성실하고 정밀한 역사가로서 사마천의 사기에 기록된 기자의 봉작설을 빼버리고 봉작은 사실이 아니라고 단언을 내렸으니, 이는 인증(人證)이다. 삼국 이후 고려 말엽 이전(몽고 침입 이전)에 우리 나라 형세가 강성하여 지나에 대하여 전쟁으로 맞설 떄에도 저에게 보낸 국서에 우리를 낮추어 한 말이 많이 있었거니와, 그들은 다른 나라가 사신을 보내면 반드시 내조(來朝:조공왔다)라고 썼음은 지나인의 병적인 자존성에 의한 것이니, 이는 근세 청조(淸朝)가 처음 서양과 통할 때 영(英).로(露) 등 여러 나라가 와서 통상한 사실을 죄다 “모국이 신하를 일컫고 공물을 바쳤다(某國稱臣奉貢).”고 썼음을 보아도 가히 알수 있는 일이니, 그네의 기록을 함부로 믿어서는 안 된다. 또 지나인이 만든 열조시집(列朝詩集), 양조평양록(兩朝平讓錄) 등 시화(詩話) 가운데 조선 사람의 시를 가져다가 게재할 때에 대담하게 한 구절 한 줄을 고쳤음을 볼 수 있으니, 우리의 역사를 적을 때에도 자구를 고쳤었음을 알 것이다. 그리고 몽고의 위력이 우리 나라를 뒤흔들 때, 우리의 악부(樂府).사책(史冊)을 가져다가 황도(皇都).제경(帝京).해동천자(海東天子). 등의 자구를 모두 고친 사실이 고려사에 보였으니, 그 고친 기록을 바로잡지 못한 삼국사. 고려사 등도 지나와 관계된 문제는 실제의 기록이 아님을 알 것이다. 이것은 사증(事證)이다. 연전에 김택영(金澤榮)의 역사집략(歷史輯略)과 장지연(張志淵)의 대한강역고(大韓彊域考)에 , 일본의 신공여주(神功女主) 18년에 신라를 정복했다는 것과, 수인주(垂仁主) 2년에 임나부(任那府)를 설치하였다는 것을 모두 일본서기(日本書紀)에서 그대로 따다가 적고 그 박식함을 자랑하였다. 그러나 신공 18년은 신라 내해왕(柰解王) 4년(서기 199년)이요, 내해왕 당년에는 신라가 압록강을 구경한 이도 별로 없었을 테인데, 이제 내해왕이 아리나례(阿利那禮:압록강)을 가리키며 맹세하였다 함이 무슨 말이며, 수인주는 백제와 교통하기 이전의 일본의 임금이니, 백제의 봉직(縫織)도 수입이 안 된 때인데, 수인주 2년에 임나국(任那國) 사람에게 붉은 비단[赤絹] 2백 필을 주었다 함은 어쩐 말인가? 이 두가지 의문에 답하기 전에 그 두 사건의 기사가 스스로 부정하고 있으니, 이것은 이증(異證)이다. 이렇게 고인의 위증(僞證)을 인(人)으로 사(事)로 또 이(理)로 증명하여 부합되지 않으면 그것은 거짓임을 알 것이다. ② 후세 사람의 위증이니, 원서에는 본래 거짓이 없었는데 후세 사람이 문구를 보태어 위증한 것이다. 마치 당태종이 고구려를 치려 하여, 그 사기(史記), 한서(漢書). 후한서(後漢書), 삼국지(三國志), 진서(晉書), 남사(南史), 북사(北史) 등에 보인 조선에 관한 사실을 가져다 자기네에게 유리하도록 안사고(顔師古) 등으로 하여금 곡필(曲筆)을 잡아 고치고 보태고 바꾸고 억지의 주를 달아서, 사군(史郡:樂浪.臨屯.眞番.玄?)의 연혁이 가짜가 진짜로 되고, 역대 두 나라의 국서가 더욱 본래대로 전해지는 것이 없게 되었다, 이러한 증거는 본편 제2장 지리연혁(地理沿革)에서 볼 수 있을 것이다. 다음은 가짜가운데 진짜니, 마치 관자(管子)같은 것은 관중(管仲)의 저작이 아니고 지나 육국(六國) 시대의 저작인 위서(僞書)이나 조선과 제(齊)의 전쟁은 도리어 그 실상을 전한 자이니, 위서로서도 진서(眞書)이상의 가치를 가진 것이라 할 것이다. 5) 만(滿). 몽(蒙). 토(土) 여러 종족의 언어와 풍속의 연구이다. 김부식은 김춘추(金春秋). 최치원(崔致遠) 이래의 모화주의(慕華主義)의 결정(結晶)이니, 그가 저술한 삼국사기에 “고주몽(高朱蒙)은 고신씨(高辛氏:고대 중국 5제의 한 사람)의 후예다” “김수로(金首露)는 금천씨(金天氏:皇帝의 아들 少昊)의 후예다“ “진한(辰韓)은 중국 진인(秦人)이 동래(東來)한 것이다” 하여, 말이나 피나 뼈나 교나 풍속이 한가지도 같은 것이 없는 지나족을 동종(同宗)으로 보아, 말살에다 쇠살을 묻힌 어림없는 붓을 놀린 뒤로 그 편벽된 소견을 간파한 이가 없었으므로, 우리 부여의 계(族系)가 분명치 못하여 드디어는 조선사의 위치를 캄캄한 구석에 둔 지가 오래였다. 언제인가 필자가 사기(史記) 흉노전(匈奴傳)을 보니, 삼성(三性)의 귀족 있음이 신라와 같고, 좌우 현왕(賢王) 있음이 고려나 백제와 같으며, 5월의 제천(祭天)이 마한과 같고, 무기일(戊己日)을 숭상함이 고려와 같으며, 왕공(王公)을 한(汗)이라 함이 삼국의 간(干)과 같고, 벼슬 이름 끝 글자에 치라는 음이 있음이 신지(臣智)의 지(智)와 한지(旱支)의 지(支)와 같으며, 후(后)를 알씨(閼氏)라 함이 곧 ‘아씨’의 번역이 아닌가 하는 가설이 생겼다. 인축(人畜). 회계(會計)하는 곳을 담림혹은 대림이라 함이 ‘살임’의 뜻이 아닌가 하는 의문이 나고, 휴도(休屠)는 소도(蘇塗)와 음이 같을 뿐 아니라, 나라 안에 대휴도(大休屠)를 둔 휴도국(休屠國)이 있고, 각처에 또 소 휴도가 있어서 더욱 삼한의 소도와 틀림이 없었다. 이에 조선과 흉노가 3천 년 전에는 한방 안의 형제였다는 의안(疑案)을 가져 그 해결을 구하다가, 그 뒤에 건륭제(乾隆帝)가 명하여 지은 만주원류고(滿洲源流告)와 요(遼). 금(金). 원(元) 세 역사의 국어해(國語解)를 가지고 비교하여보았더니, 비록 그 가운데 부여의 대신 칭호인 ‘가(加)’를 음으로 풀이하여 조선말 김가 이가 하는 ‘가’와 같은 뜻이라 하지 않고 뜻으로 주석하여 가(家)의 잘못이라 하였으며, 금사(金史). 발극렬(勃極烈)을 음으로 맞는 신라의 불구래(弗矩래內)에 상당한 것이라 하지 않고 청조(淸朝)의 패륵(貝勒:패리)의 동류라 한 것 등의 잘못이 없지 아니하나, 주몽(朱蒙)이 만주어(滿洲語) ‘주림물’ 곧 삼림의 뜻이라 하고, 삼한의 벼슬 이름의 끝자 지(支)가 곧 동몽고(東蒙古)의 중을 만나 동몽고 말의 동.서.남.북을 물으니 연나.준나.우진나.회차라고 하여, 고려사의, “도부를 순나라 하고(東部曰順那),서부를 연나라 하고(西部曰涓那), 남부를 관나라 하고(南部曰灌那), 북부를 절나라 하고(北部曰絶那)”고 한 것과 같음을 알았다. 또 그 뒤 일본인 조거용장(鳥居龍欌)이 조사 발표한 조선. 만주. 몽고. 토이기 네 종족의 현행하는 말로 같은 것이 수십 종(이에 나의 기억하는 바는 오직 貴子를 ‘아기’라, 乾醬을 ‘메주’라 하는 한두 가지뿐임)이 있음을 억단(臆斷)을 내렸고, 지나 24사(史)의 선비.흉노.몽고등에 관한 기록을 가지고 그 종교와 풍속의 같고 다름을 참조하고, 서양사로써 흉노의 유종(遺種)이 토이기(土耳其:터키).흉아리(匈牙利:헝가리) 등지로 옮겨간 사실을 고열(考閱)하여, 조선. 만주. 몽고. 토이기 네종족은 같은 혈족이라는 또 하나의 억단을 내리게 된 것이다. 이 억단의 옳고 그름은 고사하고 조선사를 연구하자면 조선의 고어뿐 아니라 만주어. 몽고어. 등도 연구하여 고대의 지명. 벼슬 이름의 뜻을 깨닫는 동시에, 이주(移住)하고 교통한 자취며, 싸우고 빼앗은 자리며, 풍속의 같고 다른 차이며, 문야(文野:문명과 야만)의 높고 낮은 원인을 구명하고, 그 밖에 허다한 사적의 탐구와 잘못된 문헌의 교정 등에도 힘을 기울여야 하겠다. 이상의 다섯 가지는 재료의 수집과 그 선택 등의 수고로움에 대하여 나 자신의 경력을 말한 것이다. 조선. 지나. 일본 등 동양 문헌에 대한 대 도서관이 없으면 조선사를 연구하기가 정말 어려울 것이다. 일본의 학자들은 국내에 아직 십분 만족하다 할 도서관은 없으나,그러나 동양으로는 제일이고 또 지금에 와서는 또 조선의 소유가 그 외부(外部)의 곳집이 되고 또 서적의 구독과 각종 자료의 수집이 우리같이 표랑생활 중에 있는 한사(寒士)보다 월등히 나을 것이요, 게다가 새 사학에 상당한 소양까지 있다고 자랑하기에 이르렀으나, 지금까지 동양학(東洋學)에 위걸(偉傑)이 나지 못 함음 무슨 까닭인가. 저들 중에서 가장 명성이 높은 자가 백조고길(白鳥庫吉)이라 하지마는, 그가 저술한 신라사(新羅史)를 보면, 배열. 정리의 새로운 형식도 볼 수 없고 한두 가지 발명도 없음은 무슨 까닭인가? 좁은 천성(天性)이 조선을 헐뜯기에만 급급하여 공평을 결함으로 인한 것인가? 조선사람으로서 어찌 조선 사학이 일본인으로부터 개단(開端)하기를 바라리요 마는 보장(寶藏)을 남김없이 가져다가 암매(暗昧)중에 썩임을 개탄하고 아까워하지 않을 수 없다. 제5장 역사서의 개조에 대한 소견(所見)[편집] 역사 재료에 대하여 그 없어진 것을 채우고 빠진 것을 기우며, 거짓을 제거하고 헐뜯은 것을 밝혀서 완전하게 하는 방법의 대략을 이미 말하였거니와, 편찬하고 정리하는 절차에 있어서도 옛날 역사의 투를 고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근일에 왕왕 새로운 체제의 역사를 지었다는 한두 가지 새 저서가 없지 아니하나, 그것은 다만 신라사.고려사. 하던 왕조 독립의 식을 고쳐 상세(上世).중세(中世).근세(近世)라 하였고, 권1, 권2라 하던 통감(痛鑑).분편(分編)의 이름을 고쳐 제1편, 제2편이라 하였으며, 그 내용을 보면 재기(才技).이단(異端)이라 하던 것을 예술이라 학술이라 하여 그 귀천의 위치가 바뀌었을 뿐이요, 근왕(勤王)이라 한외(外:외적을 막음)라 하던 것을 애국이라 민족적 자각이라 하여 그 신구(新舊)의 명사(名詞)가 다를 뿐이니, 털어놓고 말하자면 한장책(韓裝冊)을 양장책(洋裝冊)으로 고쳤음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이에 나의 어리석은 소견으로 우리 역사의 개조 방법의 대강을 말하자면, 1) 그 계통을 찾을 것이다. 구사(舊史)에는 갑(甲)대왕이 을(乙)대왕의 아버지요 정(丁)대왕이 병(丙) 대왕의 아우이니 하여 왕실의 계통을 찾는 외에 다른 곳에서는 거의 계통을 찾지 않았으므로, 무슨 사건이든지 공중에서 거인이 내려오고, 평지에서 신산(神山)이 솟아오른 듯하여, 한 편의 신괴록(神怪錄)을 읽는 것 같다. 역사는 인과의 관계를 밝히자는 것인데, 만일 이와 같은 인과 이외의 일이 있다 하면 역사는 하여 무엇하랴. 그것은 지은 사람의 부주의에 의한것이요, 본질이 그러한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구사에는 그 계통을 말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우리가 이를 찾을 수 있으니, 삼국사기, 신라사에 적힌 신라의 국선(國仙)이 진흥대황(眞興大王) 때부터 문무대왕(文武大王)때까지 전성하여, 사다함(斯多含) 같은 이는 겨우 열 대여섯 살의 소년으로 그 제자의 수가 지나의 대성(大聖) 공구와 겨루게 되었고, 이밖에 현상(賢相).양장(良將).충신.용사가 모두 이 가운데서 났다(삼국사기에 인용한 金大問의 설)고 하였으나, 그 동안이 수십 년에 지나지 않고 성식(聲息)이 아주 끊어져서, 국선 이전에 국선의 개조(開祖)도 볼 수 없고, 국선 이후 국선의 후계자도 볼 수 없이 갑자기 왔다가 갑자기 갔으니, 이것이 어찌 신라의 신괴록이 아니랴? 고기(古記)에서 왕검이 국선의 개조임을 찾으매, 고구려사에서 조의(衣)선인(先人) 등을 알 것이며, 고려사에서 이지백(李知白)이, “선랑(仙郞)을 중흥시키자.”고 한 쟁론과, 예종(睿宗)이, “사선(四仙)의 유적을 영광스럽게 하라.”하고, 의종(毅宗)이, “국선의 복로(伏路)를 다시 열라.”고 한 조서를 보매, 고려에까지도 오히려 국선의 유통(遺統)이 있었음을 볼지니 이것을 계통을 찾는 방법의 한 예로 든다. 2) 그 회통(會通)을 구할 것이다. 회통이란 전후.피차의 관계를 유취한다는 말이니, 구사에도 회통이라는 명칭은 있으나 오직 예지(禮志), 과목지(科目志)-회통의 방법이 완미하지 못하지만-이 밖에는 이 명칭을 응용한 곳이 없다. 그러므로 무슨 사건이든지 홀연히 모였다가 홀연히 흩어지는 구름과도 같고, 돌연히 불다가도 그치는 선풍(돌개바람)과도 같아서 도저히 붙잡을 수가 없다. 고려사 묘청전(妙淸傳)을 보면, 묘청이 일개 서경(西京:평양)의 한 중으로서, “평양에 도읍을 옮기고 금국(金國)을 치자.” 하매, 일시에 군왕 이하 많은 시민의 동의를 얻어서 기세가 혁혁하다가, 마침내 평양에 웅거하여 나라 이름을 대위(大爲)라 하고, 연호를 천개(天開)라 하고, 인종(仁宗)더러 대위국 황제의 자리에 오르라고 협박장 식의 상소를 올렸는데 반대당의 수령인 한낱 유생 김부식이 왕사(王師)로서 와서 문죄(問罪)하니, 묘청이 변변히 싸워보지도 못하고 부하에게 죽었으므로 묘청을 미친 자라고 한 사평(史評)도 있지마는, 당시의 묘청을 그처럼 신앙한 이가 많았음은 무슨 까닭이며, 묘청이 하루아침에 그렇게 패한 것은 무슨 까닭인가? 고려사의 세기(世紀)와 열전(列傳)을 참고하여 보면 태조 왕건이 거란(契丹:뒤의遼)과 국교를 끊고 북방의 옛 강토를 회복하려 하다가 거사하지 못하고 죽었으므로 그 후예 되는 임금 광종(光宗).숙종(肅宗) 같은 이는 다 태조의 유지를 성취하려 하였고, 신하에도 이지백(李知白).곽원(郭元).왕가도(王可道) 같은 이들이 열렬하게 북벌을 주장하였으나 다 실행치 못하고 윤관(尹瓘)이 군신이 한마음으로 두만강 이북을 경영하려는 창끝을 약간 시험하다가 너무 많아서 그 이미 얻은 땅의 구성(九城)까지 금(金)의 태조에게 다시 돌려주니 이는 당시 무사들이 천고에 한되는 일로 여겼다. 그 뒤에 금의 태조가 요(遼)를 토멸하고 지나 북방을 차지하여 황제를 일컫고 천하를 노려 보았다. 금은 원래 백두산 동북의 여진(女眞)부락으로서 우리에게 복종하던 노민(奴民:高麗圖經에, “여진은 종으로 고려를 섬긴다(女眞奴奉高麗).”고 하였고, 고려사에 실린 金景組의 국서에도, “여진이 고려를 부모의 나라로 삼았다(女眞以高麗爲父母之邦)”고 하였음)이었는데 갑자기 강성해져서 형제의 위치로 바뀌었다(고려사에 실린 金景祖의 국서에, 형 大金皇帝가 글을 아우 고려왕에게 보낸다(兄大金皇帝致致書于弟高麗國王).“고 하였음). 이에 나라 사람들 가운데 좀 혈기가 있는 사람이면 모두 국치에 눈물을 뿌렸다. 묘청은 이러한 틈을 타 고려 초엽부터 전해오는 ”평양에 도읍을 정하면 36나라가 조공온다(定都平壤三十六國來朝).“하는 도참(圖讖)을 가지고 부르짖으니, 사대주의의 편벽된 소견을 가진 김부식 등 몇몇 사람 이외에는 모두 묘청에게 호응하여, 대문호인 정지상(鄭知常)이며, 무장(武將)인 최봉심(崔逢深)이며, 문무가 겸전(兼全)한 윤언이(尹彦?:尹瓘의 아들)등 이 모두 북벌론을 주창함으로써 묘청의 세력이 일시에 전성하였다. 오래지 않아 묘청의 하는 짓이 미치고 망령되어 평양에서 왕명도 없이 나라 이름을 고치고 온 조정을 협박하니, 이에 정지상은 묘청의 행동을 반대하였고, 윤언이는 도리어 주의가 다른 김부식과 함께 묘청 토벌의 선봉이 되었다. 이것이 묘청이 실패한 원인이다. 그런데 김부식은 출정하기 전에 정지상을 죽이고 묘청을 토벌한 후에 또 윤언이를 내쫓아서 북벌론자의 뿌리를 소탕해버렸다. 김부식은 성공하였으나 이로 하여 조선이 쇠약해질 터전이 잡혔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참고하여 보면, 묘청의 성패한 원인과 그 패한 뒤에 생긴 결과가 본명하지 않은가. 이로써 회통(會通)을 구하는 한 예를 보인 것이다. 3)심습(心習)을 제거할 것이다. 영국 해군성(海軍省)의, “세계 철갑선(鐵甲船)의 비조(鼻組)는 1592년경의 조선 해군 대장 이순신이다.”라고 한 보고가 영국사에 실려 있는데, 일본인들은 모두 당시 일본 배가 철갑(鐵甲)이요, 이순신의 것은 철갑이 아니라면서 그 보고는 틀린 것이라고 반박하고, 조선의 집필자들은 이것을 과장하기 위하여 그 보고를 그대로 인용해서 조선과 일본 어느 나라가 먼저 철갑선을 창조하였는가를 논쟁하게 되었다. 일본인의 말은 아무런 뚜렷한 증거가 없는 위안(僞案)이라 족히 따질 것이 없거니와 이충무공전서(李忠武公全書)에 설명한 귀선(龜船)의 제도를 보건대, 배는 널빤지로 꾸미고 철판으로 꾸민 것이 아닌 듯 하니, 이순신을 장갑선의 비조라고 함은 옳으나, 철갑선의 비조라 함은 옳지 않을 것이다. 철갑선의 창조자라 함이 보다 더 명예가 되지마는, 창조하지 않은 것을 창조하였다고 하면 이것은 진화(進化)계급을 어지럽힐 뿐이다. 가령 모호한 기록 중에서 부여의 어떤 학자가 물리학을 발명하였다든가, 고려의 어떤 명장(名匠)이 증기선을 창조하였다는 문구가 발견되었다 하더라도 우리가 신용치 못한 것은 속일 수 없는 일이다. 뿐만 아니라 스스로를 속이는 것도 옳지 않기 때문이겠다. 4) 본색(本色)을 보전할 것이다. 대동운부군옥(大東韻府群玉)에,“국선(國仙) 구산(瞿山)이 사냥을 나가서 어린 짐승이나 새끼 가진 짐승을 함부로 낭자하게 죽였는데, 주막의 주인이 저녁 밥상에 자기의 다리살을 베어놓고, 공(公)은 어진 이가 아니니 사람의 고기도 먹어보라고 하였다.”고 한말이 있다. 이는 대개 신라 당시에는 영량(永郞).술랑(述郞) 등의 학설이 사회에 침투되어 국선 오계(五戒)의 한 가지인, ‘살상은 골라서 하라.'고 하는 것을 사람들이 다 실행하던 때이므로, 이를 위반하는 자는 사람의 고기도 먹으리라는 반감으로 주막의 주인이 이렇게 참혹하게 무안을 준 것이다. 그것이 수십자에 지나지 않는 기록이지마는, 신라 화랑사의 일부라 할 수 있다. 고구려사 미천왕기(美川王記)에, “봉상왕(烽上王)이 그 아우 돌고(固)가 딴 마음을 품고 있다고 하여 죽이니, 돌고의 아들 을불(乙弗:美川王의 이름)이 겁이나서 달아나 수실촌(水室村) 사람인 음모(陰牟:당시 부호의 이름인듯)의 집에서 머슴살이를 하였는데, 음모가 밤마다 기와와 돌을 집옆의 늪에 던져 개구리가 울지 못하게 하라 하고, 낮이면 나무를 해오라고 하여 잠시도 쉬지 못하게 하였다. 을불은 견디다 못 하여 1년 만에 달아나서 동촌(東村)사람 재모(再牟)와 소금장수가 되어 압록강에 이르러 소금 짐을 강동(江東) 사수촌사람의 집에 부렸다. 한 노파가 외상으로 소금을 달라고 하므로 한 말쯤 주었더니, 그 후에 또 달라고 하므로 이를 거절하였는데 노파는 앙심을 품고 몰래 짚신 한 켤레를 소금 짐 속에 묻었다가 을불이 길을 떠난 뒤에 쫓아와서 도둑으로 몰아 압록제(鴨綠宰)에게 고발하여 짚신 한 켤레의 값으로 소금 한 짐을 빼앗고 매질까지 한 뒤에 놓아 보냈다,”라는 이야기가 있다. 이것도 불과 몇 줄 안 되는 기록이지마는 또한 봉상왕 시대의 부호의 포학과 시민과 수령의 사악한 행위를 그린 약도이니, 그 시대 풍속사의 일반이라 할 것이다. 그러나 삼국사기나 고려사는 아무 맛 없는, ‘어느 임금이 즉위하였다’, ‘어느 대신이 죽었다.’ 하는 등의 연월이나 적고, 보기좋은 ‘어느 나라 어느 나라가 사신을 보내왔다.’ 하는 등의 사실이나 적은 것들이요, 위의 3), 4) 두 절과 같이 시대의 본색을 그린 글은 보기 어렵다. 이는 유교도의 춘추필법과 외교주의가 편견을 낳아서, 전해내려오는 고기를 제멋대로 고쳐서 그 시대의 사상을 흐리게 한 것이다. 옛날 서양의 어느 역사가가 이웃집에서 두 사람이 다투는 말을 역력히 다 들었다, 그런데 그 이튿날 남들이 말하는 그 두 사람의 시비는 자기가 들은 것과는 전연 달랐다. 이에, ‘옛날부터의 역사가 모두 이 두 사람의 시비와 같이 잘못 전해진 것이 아닌가?’ 하고 자기가 저술한 역사책을 모두 불태워버렸다. 탐보원이 들어다가 보고하고 편집원이 다시 교정하고 그러고도 잘못이 생기는 예가 있는 신문.잡지의 기사도 오히려 그 진상과 큰 차이가 있는 것이 허다할 뿐 아니라, 갑의 신문이 이러하다 하면 을의 신문은 저렇하다 하여, 어느 것을 믿을 수 없는 일이 많으니, 하물며 고대의 한두 사학가가 자기의 좋아하고 싫어하는대로 아무 책임감 없이 지은 것을 어떻게 믿을 수 있으랴? 그리고 이성계가 고려의 마지막 왕 우(禑)의 목을 베고 그 자리를 빼앗을 때, 후세 사람이 신하로서 임금을 죽인 죄를 나무랄까 하여 백방으로 우는 원래 왕씨의 왕통을 잇지 못할 요망한 중 신돈의 천첩 반야의 소생이라 하고, 경효왕(敬孝王:慕愍王?)이 신돈의 집에서 어떻게 데려왔다느니, 반야가 우를 궁인 한씨소생으로 정하는 것을 보고 통한하여 울부짖어 우니 궁문도 그 원통함을 알고 무너졌다느니 하여 아무쪼록 우가 신씨임을 교묘하게 증명하였다. 그러나 우는 오히려 송도 유신들이 있어 굴 속에 숨어서까지 우의 무함당함을 절규하였으므로, 오늘날 사학가들이 비록 확실한 증거는 없으나 오히려 우가 왕씨요, 신씨가 아님을 믿는 이도 있다. 또 왕건이 궁예의 장군으로 궁예의 은총을 받아 대병을 맡게 되자 드디어 궁예를 쫓아내어 객사케 하고 또한 신하로서 임금을 죽였다는 죄를 싫어하여 전력을 집중하여 궁예를 죽여 마땅한 죄를 구하였으니, ‘궁예는 신라 헌안왕(憲安王)의 아들인데, 왕이 그를 5월5일에 났음을 미워하여 버렸더니, 궁예가 이를 원망하여 군사를 일으켜서 도둑을 쳐 신라를 멸망시키려고 어느 절에서 벽에 그려진 헌안왕의 상까지 칼로 쳤다.'고 하였고, 다시 확실한 증거를 만들고자, ‘궁예가 나자 헌안왕이 엄명을 내려 궁예를 죽이라고 하여 궁녀가 누각위에서 아래로 내던졌는데, 유모가 누락 아래에서 받다가 손가락이 잘못 아이의 눈을 찔러 한쪽 눈이 멀었다, 그 유모가 데려다가 비밀히 길렀는데, 10살이 되자 장난이 몹시 심하므로 유모가 울면서 말하기를, 왕이 너를 버리신 것은 내가 차마 버려둘 수 없어서 데려다 길렀는데, 이제 네가 이렇듯 미치광이 짓을 하니 만일 남이 알면 너와 내가 다 죽을 것이다, 하였다. 궁예가 이 말을 듣고 울며 머리를 깍고 중이 되었다. 그 후에 신라의 정치가 문란함을 보고 군사를 모아 큰 뜻을 성취하리라 하고 도둑의 괴수 양길에게로 가서 후한 대우를 받고 군사를 나누어 동으로 나아가서 땅을 차지하였다.’고 하였다. 가령 위의 말이 다 참말이라면 이는 궁예와 유모의 평생 비밀일 것인데, 그것을 듣고 전한 자가 누구이며, 가령 궁예가 왕이 되어 신라의 형법(刑法)밖에 있게 된 뒤에 스스로 발표한 말이라 하면, 그 말한 날짜나 곳은 적지 않는다 하더라도 어찌하여 데리고 말할 사람을 기록하지 않았는가? 오늘날의 눈으로 보면 부모를 부모라 함은 나를 낳은 은혜를 위함인데, 만일 나를 낳음이 없고 나를 죽이려는 원수가 있는 부모야 무슨 부모이겠는가? 궁예가 헌안왕의 아들이라 하더라도 만일 사관(史官)의 말과 같이 그가 세상에 나오던 날 죽으라고 누각 위에서 내던진 날로부터 아버지라는 명의가 귾어졌으니, 궁예가 헌안왕의 몸에 칼질을 하여도 아비를 죽인 죄가 될 것 없고 신라의 서울과 능(陵)을 유린한다 할지라도 조상을 모욕한 논란이 될 것 없거늘 하물며 왕의 그림을 치고 문란한 신라를 혁명하려 함이 무슨 큰 죄나 논란이 되랴마는 고대의 좁은 논리관으로는 그 두 가지 일, 헌안왕의 초상과 신라에 대한 불공(不恭)만 하여도 궁예는 죽어도 죄가 남을 것이니, 죽어도 죄가 남을 궁예를 죽이는 데야 무엇이 안 되었으랴? 이에 왕건은 살아서 고려 통치권을 가지고 죽어서도 태조문성(太祖文聖)의 존시(尊諡)를 받아도 추호의 부끄러움이 없을 것이니, 이것이 고려 사관이 구태여 세달사(世達寺)의 한 비렁뱅이 중이던 궁예를 가져다가 고귀한 신라 왕궁의 왕자로 만듦인가 한다. 제왕이라 역적이라 함은 성패의 별명일 뿐이요, 정론이라,사론이라 함은 많고 적은 차이일 뿐인데, 게다가 보고 들은 데 잘못이 있고, 쓰는 사람의 좋아하고 싫어하는 생각이 섞이지 않았는가? 사실도 흘러가는 물과 같이 한 번 가면 다시 돌아오지 못한다. 이미 간 사실을 그리는 역사를 저술하는 이도 어리석은 사람이거니와, 그 써놓은 것을 가지고 앉아서 시비곡직을 가리려는 역사를 읽는 이가 더욱 어리석은 사람이 아닌가? 아니다, 역사는 개인을 표준으로 하는 것이 아니요, 사회를 표준으로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우의 성이 왕(王)인가? 신(辛)인가를 조사하여 바로잡느니보다 다만 당시의 지나에 대하여 선전(宣戰)하고, 요동 옛 땅을 회복하려 함이 이루어질 일인가? 실패할 일인가, 성패간에 그 결과가 이로울까 해로울까부터 정한 후에 이를 주장한 우와 반대한 이성계의 시비를 말함이 옳을 것이고, 궁예의 성이 궁(弓)인가 김(金)인가를 변론하는 것보다, 신라이래 숭상하던 불교를 개혁하여 조선에 새 불교를 성립시키려 함이 궁예 패망의 도화선이니, 만일 왕건이 아니더면 궁예의 그 계획이 성취되었을까? 성취되었다면, 그 결과를 확인한 뒤에야 이를 계획하던 궁예와 대적하던 왕건의 옳고 그름을 말함이 옳다고 생각한다. ‘개인으로부터 사회를 만드느냐? 사회로부터 개인을 만드느냐?’ 이는 고대로부터 역사학자들이 논쟁하는 문제다. 이조 전반기의 사상계는 세종대왕의 사상으로 지배되고, 후반기의 사상계는 퇴계산인(李滉) 사상으로 지배되었다. 그러면 이조 5백 년 동안의 사회는 세종,퇴계가 만든 것이 아닌가? 신라 후기로부터 고려 중엽까지의 6백 년 동안은 영랑,원효가 각기 당시 사상계의 한방면을 차지하여 영랑의 사상이 성해지는 때에는 원효의 사상이 물러나고 원효의 사상이 성해지는 때에는 영랑의 사상이 물러나서 일진일퇴 일왕일래로 갈아들어 사상계의 패왕이 되었으니, 6백 년 동안의 사회는 그 두 사람이 만든 것이 아닌가? 백제의 정치 제도는 온조대왕이 마련하여 고이대왕(古爾大王)이 마무리하였고, 발해의 정치 제도는 고제(高帝)가 마련하여 선제(宣帝)가 마무리하였으니, 만일 온조왕과 고이왕이 아니었더라면 백제의 정치가 어떤 형식으로 되었을는지, 고제와 선제가 아니었더라면 발해의 정치가 어떤 형식으로 되었을는지 또한 모를 일이다. 삼경(三京)오도(五都)의 제도가 왕검과 부루(夫婁)로부터 수천 년 동안 정치의 모형이 되었으니, 이로써 보면 한 사람의 위대한 인격자의 손끝에서 사회라는 것이 되어지는 것이고, 사회의 자주성은 없는 것이 아닌가? 그러나 다시 한편으로 살펴보자. 고려 말엽에 불교의 부패가 극도에 이르러 원효종은 이미 쇠미해지고 임제종(臨濟宗)에도 또한 뛰어난 이가 없고, 다만 10만 명의 반승회(飯僧會:중에게 음식을 대접하는 모임)와 백만 명의 팔관회(八關會:천신에 제사 지내어 나라와 왕실의 태평을 빌고 온갖 놀이도 즐기는 모임)로 제물과 곡식을 낭비하여 국민이 머리를 앓을 뿐 아니라, 사회는 이미 불교 밖에서 새로운 생명을 찾기에 급급하였다. 이에 안유(安裕).우탁(禹倬)이며 정몽주가 유교의 목탁을 들었고. 그 밑에서 세종이 나고 퇴계가 났으니, 그러면 세종의 세종됨과 퇴계의 퇴계됨이 세종이나 퇴계 그 자신이 스스로 된 것이 아니요, 사회가 그렇게 만들었다고 함이 옳지 않을까? 삼국 말엽, 그 수백 년 동안에 찬란히 발달한 문학과 미술의 영향을 받아 소도천군(蘇塗天君)의 미신이나 율종소승(律宗小乘)의 하품(下品)불교로는 영계(靈界)의 위안을 줄 수가 없어서 사회가 그 새 생명을 찾은 지가 또한 오래이므로 신라의 진흥대왕이나 고구려의 연개소문이 다 여러 교종 통일의 새로운 안을 내놓으려 한 일이 있었다. 그 때에 영랑이 도령(徒領)의 노래를 부르고 원효가 화엄(華嚴)의 자리를 배풀었으며, 최치원이 유도에서 불도로 불도에서 선도로 바꾸는 신통한 재주를 보이니 이에 각계가 갈체하여 이 세 사람을 맞았다. 그러니 영랑이나 원효나 최치원이 다 본인 자신이 그렇게 된 것이 아니요, 사회가 그렇게 만든 것이 아닌가? 이에 따라서 하나의 의문이 생긴다. 원효는 신라 그때에 났기에 원효가 된 것이요, 퇴계는 이조 그때에 났기에 퇴계가 된 것이다. 만일 그들이 희랍 철학의 강단에 났더라면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가 되지 않았을까? 프랑스나 독일의 현대에 났더라면 베르그송이나 오이켄이 되지 않았을까? 나파륜(拿破崙:나폴레옹)의 뛰어난 재주와 큰 계략으로도 도포 입고 대학(大學)읽던 시절에 도산사원(陶山書院)부근에 태어났더라면, 물러가 송시열이 되거나 나아가 홍경래가 되었을 뿐이 아니었을까? 크고 작은 분량으로 그와 같이 되지는 않는다 하더라도 그 면목이 아주 달라졌을 것은 단언할 수 있다. 논조가 여기에까지 미쳤으나, 개인은 사회라는 불무에서 이루어질 뿐이니, 개인의 자주성은 어디에 있는가? 개인도 자주성이 없고 사회도 자주성이 없으면 역사의 원동력은 어디에 있는가? 나는 이것을 볼 때 개인이나 사회의 자주성은 없으나 환경과 시대를 따라서 자주성이 성립한다고 생각한다. 조선이며 만주며 토이기며 헝거리가 3천 년 전에는 다 뚜렷한 한 혈족이었다. 그러나 혹은 아시아에 그대로 있고 혹은 유럽으로 옮겨가서 대륙의 동서가 달라지고, 혹은 반도 혹은 대륙으로 혹은 사막 혹은 비옥한 땅으로, 혹은 온대 혹은 한대로 분포하여 땅의 멀고 가까움이 다르고, 목축이나 농업, 침략이나 보수 등으로 생활과 풍속이 해와 달을 지내는 대로 더욱 간격이 생겨서 각자의 자주성을 가졌다. 이것이 곧 환경을 따라 성립한 민족성이라 하는 것이다. 같은 조선으로도 이조 시대가 고려 시대와 다르고, 고려 시대는 또 동북국(東北國:渤海.滅貊등)과 다르고, 동북시대는 삼국과 같지 아니하며, 왕검. 부루 시대와도 같지 아니하다. 멀면 1천년의 전후가 다르고, 가까우면 1백 년의 전후가 다르니, 지금부터 이후로는 문명의 진보가 더욱 빨라서, 10년 이전이 홍황(鴻荒:오랜 옛날)이 되고, 1년 이전이 먼 옛날이 될는지 모르는 일이니, 이것이 이른바 시대를 따라 성립하는 사회성(社會性)이다. 원효와 퇴계가 시대와 경우를 바꾸어 났다 하면, 원효는 유자(儒者)가 되고 퇴계는 불자(佛者)가 되었을는지 모르는 일이거니와, 도양(跳揚)발달한 원효더러 주자(朱子)의 규구(規矩)만 삼가 지키는 퇴계가 되라 한다면 이는 불가능한 일이며, 충실하고 용졸(庸拙)한 퇴계더러 불가의 별종(別宗)을 수립하는 원효가 되라 한다면 이도 또한 불가능한 일일 것이니, 왜냐하면 시대와 경우가 인물을 낳는 원료 됨과 같으나 인물이 시대와 환경을 이용하는 능력은 다르기 때문이다. 민족도 개인과 같이 어느 곳 어느 때에 갑이라는 민족이 가서 그 성적이 어떠하였으니, 을이라는 민족이 갔더라도 마찬가지 성적을 이루었을 것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너무 성급한 판단이다. 대개 개인이나 민족이 두 가지 개성이 있으니, 그 하나는 항성(恒性)이요, 다른 하나는 변성(變性)이다, 항성은 제1의 자주성이요, 변성은 제2의 자주성이니 항성이 많고 변성이 적으면 환경에 순응치 못하여 절멸(絶滅)할 것이요, 변성이 많고 항성이 적으면 나은 자에게 정복당하여 패할 것이니, 늘 역사를 회고하여 두 가지 자주성의 많고 적음을 조절하고 무겁고 가벼움을 평균하게 하여, 그 생명이 천지와 한 가지로 장구하게 하려면 오직 민족적 반성에 의하는 수밖에 없다. 5) 역사의 개조에 대한 두 가지 결론 역사의 개조에 대한 나의 우견으로 이상에 의하여 개인과 사회의 관계에 대하여 두 가지 결론을 지었으니, ① 사회의 이미 정해진 국면에서는 개인이 힘쓰기 매우 곤란하고 ② 사회의 아직 정해지지 않은 국면에서는 개인이 힘쓰기 아주 쉽다는 것이다. 정여립이,“충신은 두 임금을 섬기지 아니하고 열녀는 두 지아비를 바꾸지 않는다,” 하는 유교의 윤리관을 여지없이 말살하고,“인민에게 해되는 임금은 죽이는 것도 가하고 행의(行義)가 모자라는 지아비는 버리는 것도 가하다,”고 하고 “하늘의 뜻, 사람의 마음이 이미 주실(周室)을 떠났는데, 존주(尊周:주나라를 존중함)가 무엇이며, 군중과 땅이 벌써 조조(曹操)와 사마(司馬)에게로 돌아갔는데, 구구하게 한 구석에서 정통이 다 모엇하는 것이냐.”하며 공자. 주자의 역사 필법을 반대하니, 그의 제자 신극성(辛克成)등은, “이는 참으로 전의 성인이 아직 말하지 못한 말씀이다.”하고 재상과 학자들도 그의 재기와 학식에 마음을 기울이는 이가 많았으나, 세종대왕의 삼강오륜의 부식(?植)이 벌써 터를 잡고 퇴계 선생의 존군모성(尊君慕聖)의 주의가 이미 깊이 박혀 전 사회가 안돈된 지 오래이니, 이같이 엉뚱한 혁명적 학자를 어찌 용납하랴. 그러므로 애매모호한 한 자의 고발장에 목숨을 잃고 온 집안이 폐허가 되었으며, 평생의 저술이 모두 불 속에 들어갔다. 이는 곳①에 속하는 것이다. 최치원이 지나 유학생으로 떠나갈 때 그의 아버지가, “10년이 되어도 과거를 하지 못하면 나의 아들이 아니다.”라고 하여 하나의 한문 졸업생이 되는 것을 바랐을 뿐이었고, 최치원이 돌아와서, “무협(巫峽)첩첩한 봉우리를 헤치고 중원에 들어가 급제하여 벼슬에 놀기3년, 금의로 동국에 돌아왔다.” 하고 노래하여 또한 스스로 하나의 한문 졸업생 되었음을 자랑하였다. 그 사상은 한(漢)나라나 당(唐)나라에만 있는 줄로 알고 신라에 있는 줄은 모르며, 학식은 유서(儒書)나 불전(佛典)을 관통하였으나, 본국의 고기(古記) 한 편도 보지 못하였으니, 그 주의는 조선을 가져다가 순 지나화하려는 것뿐이고, 그 예술은 청천(靑天)을 백일(白日)을 대하며, 황화(黃化)로 녹초(綠草)를 대하는 사륙문(四六文:네 글자와 여섯 글자를 기본으로 하는 한문 문체의 하나)에 능할 뿐이었다. 당시 영랑과 원효의 두 파가 다 노후하여 사회의 중심이 되는 힘을 잃고, 새 인물에 대한 기대가 마치 굶주린 사람이 밥을 구함과 같았으니 그래서 대선생의 칭호가 한낱 한문 졸업생에게로 돌아가고 다음에는 천추(千秋)의 혈식(血食:나라에서 제사를 지냄)까지 그에게 바쳐, 고려에 들어와서는 영랑과 원효 두 파의 자리를 마주 대하게 되었다. ‘때를 만나면 더벅머리도 성공한다.’ 함은 이를 두고 한 말이니, 이는 ②에 속하는 것이다. 어찌 학계뿐이랴. 모든 사업이 그러하니, 기휜(箕萱)과 양길(梁吉)도 한때에 크게 펼처짐은 신라 말엽의 안정되지 않은 판국에서 일어남이요, 이징옥(李澄玉)이나 홍경래가 거연히 패망함이 이조의 안정되어 있는 판국에서 그리 된 것이다. 백호(白湖) 임제(林悌)가 말하기를, “나도 중국의 육조(六朝:後漢이 망한 뒤에 일어난 吳.東晋.宋.濟.梁.陳의 여섯 왕조)나 오계(五季:後五代, 곧 唐과 宋 사이 53년 동안에 일어났다 사라진(後粱.後唐.後晋.後漢.後周의 다섯왕조)를 만났더라면 돌림천자는 얻어 했겠다.”고 하였다. 임백호 같은 시인에게 육조.오계의 유유(劉裕:南宋의 武帝).주전충(朱全忠:後粱의 太祖) 같은 도둑의 괴수와 같이 되어 돌림천자나마 돌아오게 할 위력이 있다고는 할 수 없으나, 그러나 지나의 천자를 경영하려면 한. 당의 치세보다 육조.오계의 난세가 더 쉬울 것은 자명한 이치일 것이다. 이미 안정된 사회의 인물은 늘 전의 사람의 필법을 배워서 이것을 부연하고 이것을 확장할 뿐이니, 인물되기는 쉬우나 그 공이나 죄는 크지 못하며, 혁명성을 가진 인물(정여립 같은)은 매양 실패로 미칠 뿐 아니라, 사회에서도 그를 원망하고 미워하여 한 말이나, 한 일의 종적까지 없애버리므로 후세에 끼치는 영향이 거의 영도(零度)가 되고, 오직 3백 년이나 5백 년 뒤에 한두 사람 마음이 서로 통하는 이가 있어 그의 유음(遺音)을 감상할 뿐이요, 안정되지 않은 사회의 인물은 반드시 창조적.혁명적 남아라야 할 듯하나, 어떤 때에는 꼭 그렇지도 아니하여, 작은 칼로 잔재주를 부리는 하품의 재주꾼(최치원같은)으로서 외국인의 입을 흉내내서 말하고 웃고 노래함이 그럴듯하여 사람들을 움직일 만하면 거연히 인물의 지위를 얻기도 하나, 인격적 자주성의 표현은 없고 노예적 습성만 발휘하여 전 민족의 항성(恒性)을 파묻어버리고,변성(變性)만 조장하는 나쁜 기계가 되고 마나니, 이는 사회를 위하여 두려워하는 바요, 인물되기를 뜻하는 사람이 경계하고 삼가야 할 일이다.
63    조선상고사 댓글:  조회:44  추천:0  2019-01-31
제1편: 총론 제2편: 수두 시대 제3편: 삼조선(三朝鮮)의 분립 시대 제4편: 열국의 쟁웅(爭雄)시대(대(對) 한족(漢族) 격전시대) 제1장: 열국(列國) 총론(總論) 제2장: 열국(列國)의 분립 제3장: 한 무제(漢武帝)의 침입 제4장: 계립령(鷄立嶺) 이남의 두 신국(新國) 제5편: 고구려의 전성시대 제6편: 고구려의 쇠미와 북부여의 멸망 제7편: 고구려·백제 두 나라의 충돌 제8편: 남방 여러 나라의 대(對) 고구려 공수동맹 제9편: 삼국 혈전(血戰)의 시작 제10편: 고구려와 수의 전쟁 제11편: 고구려와 당의 전쟁 제12편: 백제의 강성과 신라의 음모
62    가짜 역경 주역을 말한다 댓글:  조회:443  추천:0  2019-01-04
역경(易經)은 인류 역사를 통틀어서 가장 위대하고 심오한 이치를 담고 있는 책이다. 인류역사에서 경(經)이라고 부를 만한 책이 역경(易經) 말고는 없다. 역경(易經)에는 우주와 만물에 대한 모든 이치와 사람이 살아가는데 필요한 모든 지혜가 담겨 있다. 역경은 8천 년 전에 살았던 복희씨(伏羲氏)가 처음 만들어 자손들한테 전한 것이다. 그러나 역경이 긴 세월을 전해 오는 동안 내용의 거의 모든 부분이 훼손되고 왜곡되어 잘못 전해졌다. 지금 전해 오는 역경은 3천여 년 전에 주나라 문왕(文王) 창(昌)과 흔히 강태공(姜太公)이라고 부르는 강상(姜尙)이 수십 년에 걸쳐 고의로 왜곡한 것이다. 문왕과 강태공은 역경을 연구하여 편찬한다는 명목으로 역경의 순서와 내용을 교묘하게 뒤바꾸고 뜯어고쳐서 상(商)나라를 뒤엎고 나라를 빼앗는 도구로 삼았다. 문왕과 강태공은 가장 위대한 책을 가장 사악한 목적으로 활용한 것이다. 그러므로 지금 전해 오는 역경은 문왕과 강태공이 찬역(贊易)을 한다는 핑계로 훼손하고 왜곡한 가짜 역경(易經)이다. 역경을 주역(周易)이라고 부르는데 주나라의 문왕이 만들었다고 하여 주역이라는 이름을 붙인 것이다. 문왕이 교묘하게 만든 가짜 주역을 그 뒤로 3천 년 동안 모든 사람들이 진짜로 잘못 알고 있는 것이다. 문왕과 강태공이 만든 가짜 주역에 날개를 달아 그 위상을 가장 크게 높이고 온 세상에 널리 알려지게 한 사람이 공자(孔子)이다. 공자는 일생 동안 주역을 기록되어 있는 죽간(竹簡)을 묶은 가죽 끈이 세 번이 닳아 없어질 만큼 주역을 연구했으나 그것이 문왕과 강태공이 만든 가짜라는 것을 알지 못하고 오히려 역경(易經)의 괘상(卦象)에 해석을 붙여 십익(十翼)을 지어 가짜 주역에 날개를 달아 주었다. 십익(十翼)의 익(翼)은 날개 익(翼)이다. 새는 두 개의 날개만 갖고도 구만리장천(九萬里長天)을 마음대로 날아다닐 수 있는데 유학(儒學)의 시조(始祖)이며 성인(聖人)으로 칭송을 받는 공자가 열 개나 되는 날개를 달아 주었으니 이 가짜 주역이 얼마나 이 세상을 힘차게 잘 날아다닐 수 있었겠는가? ​ ​   그 뒤로 가짜 주역이 온 천하의 모든 학문을 장악했다. 교묘하게 왜곡된 가짜 주역이 천문학, 명리학, 자연과학, 수학(數學) 인문학, 생물학, 점술학 등 거의 모든 학문의 기초가 되었다. 그러나 공자(孔子) 뒤로 2천 5백 년 동안 주역이 가짜라는 것을 조금이라도 의심하거나 알아차린 사람이 단 한 사람도 없었다. 인류는 거의 3천 년 동안 가짜 주역(周易)의 절대적인 영향력 아래에서 암흑의 세월을 살아왔다. 지금까지도 훼손되고 왜곡된 이 가짜 주역이 온 세상을 설치면서 종횡무진(縱橫無盡)하고 있다. 이것은 중세 유럽에서 타락한 천주교(天主敎)가 인간 정신을 말살하고 하나님의 이름으로 멀쩡한 여인들을 마녀로 몰아 사냥하고 면죄부를 판매하여 재물을 모으고 다른 종교를 가진 이민족을 상대로 전쟁을 일으켜 무자비한 살생을 자행한 것과 같은 것이다.  ​그러나 칠흑 같은 밤이 지나고 밝은 태양이 떠오르면 마침내 밝은 낮이 오는 법이다. 올빼미는 칠흑 같은 어둠 속을 썩은 고기를 찾아서 날아다니지만 낮이 되면 컴컴한 속에서 숨어서 지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역경(易經)의 잘못된 부분을 바로잡아서 본래의 원본과 같이 복원하는 것이 인류 역사에서 누군가가 반드시 해야 할 가장 크고 중요한 일이다. 본래 온전한 상태로 전해 오던 역경을 가장 크게 훼손하고 조작하여 지금의 주역(周易)과 같은 가짜로 경서(經書)로 만든 자는 3천여 년 전에 살았던 주나라의 문왕(文王)과 강태공(姜太公)이다. 강태공은 중국을 페르시아 민족들한테 팔아넘긴 인류 역사에서 둘도 없는 최고의 매국노(賣國奴)다. 문왕은 모반을 꾀하다가 붙잡혀 유리옥이라고 하는 교화소에 있으면서 7년 동안 역학을 연구하여 복희팔괘(伏羲八卦)를 교묘하게 뜯어고쳐서 문왕팔괘(文王八卦)를 만들고 강태공을 국사(國師)로 받들어 가장 높은 벼슬을 주고 함께 역경의 대부분을 교묘하게 뜯어고치고 훼손하여 진짜처럼 위조하였다. 지금부터 3천 1백년 쯤 전에 고공단보(古公亶父)라고 하는 페르시아 사람이 그 종족 간에 있었던 세력다툼에서 패하여 패잔병과 그 가족들 1,000여 가구를 데리고 중국으로 망명하여 지금의 중국 서안(西安) 지방에 정착하였다. 그 때 서안 지방에 있었던 강(姜)나라의 귀족 여성 강녀(姜女)가 고공단보가 서양 사람의 외모를 지니고 있는 것에 반하여 내연관계를 맺었다. 그런 다음에 호색가(好色家)였던 고공단보는 강녀를 첩으로 삼았다. 고공단보는 강녀를 첩으로 얻은 뒤에 힘을 길러서 강나라를 집어삼키고 그 지역 일대의 모든 영토(領土)를 다스리는 제후(諸侯)가 되었다. 그로부터 3대가 지난 뒤에 고공단보의 손자인 문왕과 천하제일의 책략가 강태공이 결탁하여 온갖 위계술(僞計術)과 유언비어(流言蜚語)로 백성들의 민심(民心)을 조작하고 선동(煽動)하여 전쟁을 일으켜 상나라를 쳐서 뒤집어엎고 통일 왕국을 세웠다. 강태공은 육도삼략(六韜三略)이라는 병법서(兵法書)를 지은 전술가(戰術家)로 위계술(僞計術)과 이간(離間)질에 가장 뛰어난 능력을 지닌 사람이다. 그들은 상나라를 멸망시키고 왕위를 찬탈하기 위한 준비로 상업을 크게 일으켜서 실크로드를 통해 서양을 왕래하면서 무역을 해서 엄청난 부를 축적하고 힘을 길렀다. 상(商)나라의 주왕(紂王)이 이를 알고 문왕(文王)을 서쪽에 있는 모든 제후들을 다스리는 서백(西伯)이라는 큰 벼슬을 주었다. 그 때에 문왕이 그 아버지 계력(季歷) 등과 함께 비밀리에 상나라를 뒤엎으려고 역적모의를 하다가 발각되어 문왕의 큰아들 백읍고(伯邑考)를 포함한 일당 4-5명이 현장에서 체포되었다. 형리들이 문왕의 큰 아들 백읍고를 잡아서 문초(問招)를 하였더니 백읍고는 어쩔 수 없이 아버지 문왕이 주모자(主謀者)이고 모든 것을 아버지가 시켜서 한 것이라고 사실대로 실토(實吐)를 하였다. 그래서 문왕을 주모자로 붙잡아 와서 문초를 하였더니 문왕은 태연하게 나는 그 놈과는 아무런 연관이 없으며 본래부터 그 놈은 불효막심(不孝莫甚)한 놈이므로 나를 해치기 위하여 모함을 하였을 뿐이라고 주장하였다. 중국은 인의예지(仁義禮智)를 숭상하는 나라이다. 아무리 역모(逆謀)를 꾸민 죄인이라고 해도 자백을 받지 않은 상태에서 명백한 증거 없이 짐작만으로 사람을 처벌할 수 없는 것이다. 문왕을 심문한 형리들이 그렇다면 틀림없이 대역죄(大逆罪)를 지은 네 아들을 죽여서 그 고기로 국을 끓여서 너한테 줄 것이니 그것을 먹을 수겠는가 하고 물었다. 문왕은 그 놈은 국가에 반역하고 나한테도 큰 불효를 저지른 놈이므로 만 번 죽어 마땅하고 나는 그 놈의 고기를 아주 맛있게 먹을 뿐만 아니라 먹고 나서 한 그릇 더 달라고 할 것이라고 대답하였다. 그 말을 듣고 상나라의 형리(刑吏)들은 문왕이 아들이 역적모의를 한 것과는 별로 연관이 없는 것으로 여기고 문왕을 죽이지는 않고 감옥(監獄)에 가두어 두었다. 상나라 형리들은 대역죄를 지은 백읍고를 능지처참(凌遲處斬)하여 죽였다. 능지처참(凌遲處斬)은 역적(逆賊)을 처형하는 가장 잔인한 형벌로 죄인을 십자가에 묶어놓고 산 채로 살을 회를 떠서 2-3일에 걸쳐 가장 고통스럽게 천천히 죽이는 것으로 천도만과(千刀萬剮)라고도 부른다. 천도만과는 천 번 살을 베어내고 만 번 뼈와 살을 발라낸다는 뜻이다. 실제로 살을 얇게 발라내어 수천 번을 칼질을 해서 죽인다. 형리들이 백읍고의 고기로 국을 끓여 감옥에 있는 문왕한테 갖다 주었더니 문왕은 눈도 한 번 깜빡하지 않고 태연하게 맛있게 먹고 나서 한 그릇 더 달라고 해서 한 그릇을 더 먹었다고 한다. 반역을 꾀한 주모자라는 의심을 풀고 살아남기 위해 마음속으로는 이들 부득부득 갈면서 겉으로는 아주 태연하게 아들의 고기를 먹은 것이다. 형리들은 그러나 그의 행적(行蹟)에 미심쩍은 부분이 남아 있으므로 문왕을 유리옥(羑里獄)이라는 곳에 두어 근신(謹愼)하게 하였다. 유리옥은 감옥이 아니라 교화소(敎化所)와 같은 곳이다. 이것은 죄를 지은 것에 대해 벌이 아니라 아들을 잘못 키운 것 곧 수신제가(修身齊家)를 제대로 하지 못한 것에 대한 질책으로 유리옥에서 교화(敎化)를 받게 한 것이다. 그러나 그 전에 이미 문왕은 강태공을 만나서 밀서(密書)를 주고 받으면서 천하를 뒤엎을 계략을 짜 놓고 은밀하게 추진하고 있는 중이었다. 문왕은 열 명이 넘는 아들이 있었다. 큰 아들 백읍고가 죽은 뒤로 문왕은 유리옥에 있으면서 둘째 아들인 무왕(武王)과 셋째 아들인 주공(周公), 강태공과 서로 밀약(密約)을 맺고 역경(易經)을 편찬한다는 명목으로 곧 찬역(贊易)을 빙자(憑藉)하여 7년 동안에 걸쳐서 역경의 괘사(卦辭)를 모조리 뜯어고쳤다. 지금 남아 있는 가짜 주역(周易)은 본래 복희씨가 만든 원본이 그대로 남아 있는 부분도 있고 교묘하게 뜯어 고친 부분도 있다. 중간에 있던 부분을 찢어내고 위조한 글로 바꿔치기를 한 것이 제일 많다. 한문은 본디 우리나라 글이므로 우리말과 어순(語順)이 같다. 그런데 어순과 어법을 영어와 같은 방식으로 뜯어고친 것도 그 때부터 비롯된 것이다. 그래서 우리말과 같았던 중국말의 어순(語順)이 영어처럼 순서가 반대로 뒤바뀐 것이다. 나중에 역경 편찬을 끝냈다고 하면서 내어 놓았을 때 그것을 살펴 본 검사관(檢査官)이 역경(易經)은 본디 어려운 것이라고 하여 제대로 살펴보지 않고 지나쳐 버렸기 때문에 가짜 주역이 지금까지 그대로 남아 있게 되었다. 역경은 문왕이 90퍼센트 정도를 훼손(毁損)하고 위조(僞造)하여 그것을 온갖 반역 행위의 기본 술책(術策)을 담은 경전(經典)으로 삼았다. ​문왕이 죽고 나서 그의 아들 무왕(武王)이 강태공을 군사(軍師)로 하여 마침내 상나라를 무너뜨리고 천하를 통일하여 주나라를 세우고 첫 임금이 되어 중국 대륙 전체를 다스리는 주인이 되었다. 강태공은 주나라의 건국공신이며 문왕의 스승이고 무왕과 주공(周公)의 태사부(太師父)가 되었다. 이렇게 하여 중국 대륙 전체가 서양에서 망명한 페르시아 민족 곧 서융(西戎) 족한테 완전히 넘어가게 된 것이다. 그러나 사기(史記)를 비롯한 지금 남아 있는 모든 역사 기록에는 고공단보(古公亶父)가 서융 족이 아니라 5천 년 전에 살았던 우리 민족의 시조인 황제(黃帝)의 35대손이며 후직(后稷)의 12대 손이라고 적혀 있다. 그러나 이것은 문왕과 무왕, 강태공은 반역으로 국가를 찬탈한 것을 합리화(合理化)하기 위해 조상들의 족보를 비롯하여 모든 역사 기록을 자신들한테 유리하게 조작(造作)한 것이다. 모든 역사(歷史)의 기록은 승자(勝者)가 기록한 것이다. 승자는 모든 역사를 자신의 편에 유리하게 기록하고 패자(敗者)를 불리하게 기록한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권력에 대한 정당성을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게 하여 가장 곧고 바른 임금이었던 상나라의 주왕(紂王)은 역시 최고의 호걸(豪傑)이었던 하나라의 걸왕(傑王)과 함께 주지육림(酒池肉林)을 일삼은 폭군(暴君)의 대명사가 되었다. 주왕(紂王)의 주(紂)는 곧을 주(紂) 또는 먹줄 주(紂)이고 걸왕(傑王)의 걸(傑)은 호걸 걸(傑) 또는 뛰어날 걸(傑)이다. 주왕은 먹줄처럼 곧은 임금이었고 걸왕은 가장 뛰어난 호걸과 같은 임금이었다. 문왕과 무왕 강태공, 이윤(伊尹) 같은 자들이 권력을 얻은 다음에 가장 훌륭하고 뛰어난 인물들을 가장 악한 인물로 만들어 모함하고 깎아내려서 모든 역사 기록을 조작한 것이다. 걸왕과 주왕은 인류 역사에서 가장 훌륭한 임금으로 첫손에 꼽을 수 있는 임금들이었다. 중국 역사에서 4대 악녀(惡女) 중에 하나로 꼽는 달기(妲己)와 말희(末喜) 또한 요부(妖婦)가 아니라 중국 역사에서 3대 귀인(貴人) 중에 하나로 꼽을 만큼 훌륭한 여인들이었다. 지금 중국에는 역경을 제대로 알고 아해할 수 있는 사람이 없다. 중국 문화는 주나라의 영향으로 서양과 같아져 버린 지 이미 수천 년이 지났다. 중국을 동양이라고 하는데 중국은 동양이 아니다. 우리나라에서 보면 중국은 서양이다. 본래 우리나라를 기준으로 하여 서양과 동양을 나누는 것이다. 어디에 있든지 내가 서 있는 곳이 중심이다. 중국은 우리나라의 서쪽에 있으므로 서양이며 결코 동양이라고 할 수 없다. 서방(西方)은 금(金)이고 금극목(金克木)의 이치에 따라 우리나라는 목(木)이므로 금(金)과 목(木)은 절대 서로 화합할 수 없다. 금(金)은 쇠로 만든 창칼과 같은 무기이며 목(木)은 나무와 풀이다. 풀과 나무는 쇠로 만든 톱과 도끼와 낫으로 자르는 것이다. 지금까지 역사 기록에 남아 있는 것만 대충 따져 보아도 중국은 우리나라를 950번이나 침략하였다. 중국이 부강해지고 힘이 생기면 언제나 우리나라를 침략하였다. 중국은 이제 미국과 패권(覇權)을 다툴 수 있을 만큼 국력이 강해졌다. 앞으로도 중국은 반드시 우리나라를 침략할 것이다. 공자와 맹자는 이와 같은 사실을 전혀 눈치 채지 못하고 문왕과 무왕을 성인으로 여기고 존경하고 칭찬하였다. 공자는 주공(周公)을 존경하여 늙어서 기력이 쇠약하여 꿈에서라도 주공을 만나지 못하게 된 것을 한탄하였다고 적혀 있다. 맹자는 공자의 제자로 공자보다 늦게 태어난 사람이지만 여러 면에서 자질이 공자보다 더 나은 사람이었다. 춘추(春秋)는 공자가 노나라 사관(史館)이 기록한 역사책에 자신의 글을 적어서 다시 편찬한 노나라의 역사책이다. 의(義)에 기준을 두고 가장 공정하게 춘추필법(春秋筆法)으로 역사를 평가하고 기록해야 한다고 주장한 공자 자신이 가장 흉악(凶惡)한 인물인 문왕과 무왕을 가장 위대하고 훌륭한 인물로 착각하고 잘못 기록한 것이다. 문왕은 처음부터 끝까지 백성들을 선동하여 성군(聖君)을 폭군(暴君)으로 조작하여 모함(謀陷)하고 온갖 유언비어(流言蜚語)를 퍼뜨려서 백성들의 마음을 이탈시키고 제후(諸侯)들의 마음을 사로잡아 그들과 연합하여 상나라를 무너뜨리고 그 영토를 나누기로 밀약을 맺고 계략(計略)과 힘을 합쳐서 마침내 나라를 강탈(强奪)하였다.
61    종묘제례악의 변질과 전통음악의 타락 - ⑤ 댓글:  조회:219  추천:0  2018-11-25
현재의 기성 국악권력을 가진 이들의 역사는  1911년에 만들어진 이왕직 아악부로부터 비롯된다. 한일 강제병합 후 일제는 천황의 통치 아래 식민지 조선의 형식적 권력기구인 ‘이왕직’을 두었다. 물론 실질적인 통치는 조선총독부가 했고  이왕직은 허수아비로서 조선왕가의 일을 맡은 관청이었다. 태생이 이러한 이왕직 산하의 음악기구인 아악부가  친일음악을 했을 것은 너무 자명한 일이었다. 그 중에는 울분에 못 이겨 그만둔 이도 있었고 먹고 사는 일이라고 위로하며 소극적으로 활동을 한 이도 있었지만 김기수처럼 최초의 친일국악창작곡 을 작곡하여 일제에 대한 예술가적 충성심을 발휘한 사람들도 있었다. (친일문학에는 서정주, 친일국악에는 김기수) 이왕직 아악부(이하 그들이라고 부른다)가 종묘제례악을 왜곡한 것은 남상숙 선생의 연구를 통해 충분히 밝혔는데 그들이 한 짓은 그뿐이 아니었다. 아악은 궁중의 행사(조회, 제례, 회례)에 쓰는 음악의 통칭이다. 그러므로 아악부는 궁중음악만을 연주하는 기관이다. 그런데 어쩐 일인지 그들은 일제 강점기 중반부터 자신들의 음악 레퍼토리를 확장하기 시작한다. 은 궁중음악이 아니다. 가곡, 가사, 시조도 마찬가지. 풍류음악의 일종인 와 도 그렇다. 그들은 이런 음악들을 민간음악인들을 초빙하여 배우기 시작한다. 해방이 되고 한국 전통음악계는 이왕직 아악부 출신과  민간음악가 출신으로 이루어진 으로 나누어졌다. 이왕직은 소수였고 은 절대다수였지만 이왕직들에게는 정치인들과의 연줄이 있었다. 1951년 전쟁의 와중에 임시 수도 부산에서 국립국악원이 결성되었을 때  이왕직들은 국립국악원의 핵심 요직을 차지했다. 그들은 일제 강점기의 음악권력을 다시 찾았다. 그들은 1947년 서울대 음대가 생길 때 끼어들더니 1959년 서울대 국악과가 만들어지자 튼튼한 철옹성을 구축했다. 그들은 이왕직 시절 자신들이 익힌 음악을 정악(正樂)이라고 명명하고 나머지 전통음악을 민속악(民俗樂)이라 부르며 멸시하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판소리, 산조, 농악, 민요, 무속음악 등을 국악과의 커리큘럼에서 철저히 배제했고 정악과 민속악이라는 편가르기를 했다. 서울대 국악과에서 배출된 이왕직의 제자들은  국립국악원, 국악고, 타 대학의 국악과에서 활약을 하게 되었고 국악개론도 만들었다. 서울대 국악과 출신인 단국대 국악과 서한범 교수는 자신이 쓴 총 346페이지 중에서  민속악의 설명에 단 두 페이지만을 허용했다. 학문이 아니라 만행이었다. 서울대 국악과에서 석사과정을 했던 백대웅 교수는 석사논문을 세 번이나 써야 했다. 민속악인 판소리를 주제로 논문을 썼기 때문이었다. 백교수는 퇴짜 맞은 논문을 모아 라는 책을 냈고 정악과 민속악의 이분법에서 벗어난 국악개론서 을 집필했다.   남상숙 선생은 환갑이 넘은 연세인데 여전히 국악계의 비주류였다. 지금까지 전임직 하나 얻지 못하고 보따리 장사로 계시다가 한국예술종합학교 겸임교수로 재직중이다.      이 스토리의 결말은 해피앤딩도 아니고 비극도 아니다. 이 스토리는 현재진행형이다. 결말은 아무도 모른다.  
60    종묘제례악의 변질과 전통음악의 타락 - ⑤ 댓글:  조회:154  추천:0  2018-11-25
현재의 기성 국악권력을 가진 이들의 역사는  1911년에 만들어진 이왕직 아악부로부터 비롯된다. 한일 강제병합 후 일제는 천황의 통치 아래 식민지 조선의 형식적 권력기구인 ‘이왕직’을 두었다. 물론 실질적인 통치는 조선총독부가 했고  이왕직은 허수아비로서 조선왕가의 일을 맡은 관청이었다. 태생이 이러한 이왕직 산하의 음악기구인 아악부가  친일음악을 했을 것은 너무 자명한 일이었다. 그 중에는 울분에 못 이겨 그만둔 이도 있었고 먹고 사는 일이라고 위로하며 소극적으로 활동을 한 이도 있었지만 김기수처럼 최초의 친일국악창작곡 을 작곡하여 일제에 대한 예술가적 충성심을 발휘한 사람들도 있었다. (친일문학에는 서정주, 친일국악에는 김기수) 이왕직 아악부(이하 그들이라고 부른다)가 종묘제례악을 왜곡한 것은 남상숙 선생의 연구를 통해 충분히 밝혔는데 그들이 한 짓은 그뿐이 아니었다. 아악은 궁중의 행사(조회, 제례, 회례)에 쓰는 음악의 통칭이다. 그러므로 아악부는 궁중음악만을 연주하는 기관이다. 그런데 어쩐 일인지 그들은 일제 강점기 중반부터 자신들의 음악 레퍼토리를 확장하기 시작한다. 은 궁중음악이 아니다. 가곡, 가사, 시조도 마찬가지. 풍류음악의 일종인 와 도 그렇다. 그들은 이런 음악들을 민간음악인들을 초빙하여 배우기 시작한다. 해방이 되고 한국 전통음악계는 이왕직 아악부 출신과  민간음악가 출신으로 이루어진 으로 나누어졌다. 이왕직은 소수였고 은 절대다수였지만 이왕직들에게는 정치인들과의 연줄이 있었다. 1951년 전쟁의 와중에 임시 수도 부산에서 국립국악원이 결성되었을 때  이왕직들은 국립국악원의 핵심 요직을 차지했다. 그들은 일제 강점기의 음악권력을 다시 찾았다. 그들은 1947년 서울대 음대가 생길 때 끼어들더니 1959년 서울대 국악과가 만들어지자 튼튼한 철옹성을 구축했다. 그들은 이왕직 시절 자신들이 익힌 음악을 정악(正樂)이라고 명명하고 나머지 전통음악을 민속악(民俗樂)이라 부르며 멸시하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판소리, 산조, 농악, 민요, 무속음악 등을 국악과의 커리큘럼에서 철저히 배제했고 정악과 민속악이라는 편가르기를 했다. 서울대 국악과에서 배출된 이왕직의 제자들은  국립국악원, 국악고, 타 대학의 국악과에서 활약을 하게 되었고 국악개론도 만들었다. 서울대 국악과 출신인 단국대 국악과 서한범 교수는 자신이 쓴 총 346페이지 중에서  민속악의 설명에 단 두 페이지만을 허용했다. 학문이 아니라 만행이었다. 서울대 국악과에서 석사과정을 했던 백대웅 교수는 석사논문을 세 번이나 써야 했다. 민속악인 판소리를 주제로 논문을 썼기 때문이었다. 백교수는 퇴짜 맞은 논문을 모아 라는 책을 냈고 정악과 민속악의 이분법에서 벗어난 국악개론서 을 집필했다.   남상숙 선생은 환갑이 넘은 연세인데 여전히 국악계의 비주류였다. 지금까지 전임직 하나 얻지 못하고 보따리 장사로 계시다가 한국예술종합학교 겸임교수로 재직중이다.      이 스토리의 결말은 해피앤딩도 아니고 비극도 아니다. 이 스토리는 현재진행형이다. 결말은 아무도 모른다.  
59    종묘제례악의 변질과 전통음악의 타락 - ④ 댓글:  조회:187  추천:0  2018-11-25
남상숙 선생의 종묘제례악 왜곡론은 기성 국악계에 난데없는 날벼락이었지만 그들의 카르텔은 공고했다. 이왕직 아악부 출신인 성경린은 ‘전통론’을 들고 나왔다. 그는 말했다. “전통이라는 것은 스승에게서 배운 것을  그대로 이어오는 것으로 고악보의 것을 그대로 복원한다고 하여도  그것은 이미 전통의 맥은 끊어진 것이다“ (성경린이 글로 쓴 것인데 어법도 안 맞는다)  그의 말을 서양 클래식에 비유해보자. 베토벤의 이 있는데 수백 종의 악보가 같은 표기로 전해져 왔다. 그런데 20세기 초에 선율은 같은데 리듬이 전혀 다른 악보가 발견되었고 악기편성도 축소된 형태였다고 치자. 그리고 그 변형된 악보대로 을 연주한 일단의 사람들이 그것을 진짜라 하고 제자들을 가르쳤다. 그 제자들이 스승에게 배운 베토벤의 을 진짜라고 한다. 왜? 전통은 스승에게서 배운 것이기 때문에 베토벤의 친필 악보를 복원한다고 해도 그것은 이미 전통이 아니다. 이런 황당한 전통론은  남선생의 기습에 당황한 기성 국악계에 빛과 소금이 되었다. 남선생은 2003년 이후로 지금까지 이 문제와 관련하여 10여 편의 논문을 썼지만 단 한 편의 반박 논문도 나오지 않았다. 그들도 사실이라는 걸 알았다. 문제는 사실을 순순히 인정하면 그들이 지금까지 쌓아온 권력이 맥없이 무너진다는 걸 알고 있었다는 것이다. 사실 기성 국악계의 문제가 한 둘이 아닌데  어느 하나를 인정하면 나머지도 우르르 쏟아질 테니 그들로서는 크나큰 위협에 직면하게 된 것이었다. 그들은 교활하게 논쟁을 피하고 무대응으로 일관했다. 가끔씩 ‘전통론’을 방패삼아 얘기하면 되었다. 그들은 각 대학교 국악과의 권위 있는 교수였고 실기를 하는 학생들은 그들만큼의 이론적 소양이 없었다. 그들이 이렇게 용렬하게 된 데에는  슬픈 한국음악의 역사가 있었다.    
58    종묘제례악의 변질과 전통음악의 타락 - ③ 댓글:  조회:137  추천:0  2018-11-25
남상숙 선생은 여러 차례 논문을 발표하여 종묘제례악이 위조라는 걸 주장했다. 그런데 국악계의 반응이 이상했다. 제대로 된 논문을 써서 반박하는 이는 하나도 없고 사적인 대화를 통해 모멸감을 주거나 학술대회에서는 말꼬리 잡기를 하며 논지를 흐리기 바빴다. 그러나 손바닥으로 해를 가릴 수는 없었다. 언론에서는 연일 종묘제례악이 위조였다는  남선생의 주장을 대서특필했다. 철학자 도올 김용옥까지 가세하여 이 문제에 대한 토론회가 열리고  분위기는 종묘제례악의 왜곡을 인정하는 쪽으로 흘렀다. 국립국악원은 남선생의 논문게재를 불허하는 등 가리기에만 급급하다가 회심의 일격을 준비했다. 2005년 서울 국립국악원에서는 이채로운 연주회가 열렸다. 이 연주회는 남선생의 주장을 반박하기 위해 국립국악원이 기획한 것이었다. 바로 조선후기 고악보인 에 나오는 종묘제례악과  이왕직 아악부 악보를 계승한 현행 종묘제례악을 한 무대에 올려 청중들에게 비교, 평가를 받겠다는 것이 국립국악원의 속셈이었다. 연주되지 않은 지 100년 넘는 음악과  100년 동안 연주되어온 음악을 비교하다니 남선생의 패배가 확실한 듯 했다. 청중들은 국악학자, 국악실기인, 그리고 일반 대중들이었다.  그런데 연주회가 끝나고 청중들의 반응은 예상외였다. 500년 동안 유지되던 본래의 악기편성을 갖추고 규칙적인 장고 장단에 맞추어 가사단락마다 박이 오는 의 종묘제례악은  현행 종묘제례악과는 비교되지 않을 만큼 듣기에 편하고 아름다웠다. 고악보의 종묘제례악을 듣고 난 청중들은  왜 이렇게 좋은 음악을 이제야 연주하느냐고 했다. 국립국악원 홈페이지의 자유게시판에 복원된 종묘제례악을 찬양하는 글이 폭주했다. 꼼수를 부린 국립국악원의 완벽한 패배였다. 이 문제는 이렇게 해피앤딩으로 끝날 것 같았다.
57    종묘제례악의 변질과 전통음악의 타락 - ② 댓글:  조회:144  추천:0  2018-11-25
2003년 남상숙 선생은 종묘제례악이  일제강점기 위조된 가짜라는 논문을 발표했다. 그 논문의 단초가 된 악보가 있었으니 다. 는 종묘제례악의 변질을 기록한 최초이자 유일무이한 악보다. 조선시대 악보 중에서 이외의 어떤 악보에서도  이와 같은 종묘제례악 장단은 나타나지 않았다. 남선생이 연구한 바에 따르면  는 조선왕조의 관찬악보가 아니라 일제강점기에 조작된 악보라는 것이다. 는 19세기 말에 쓰여진 것으로 되어 있는데 를 위조하려다보니 그보다 100년 전에 쓰여진 의 영산회상부분도 위조했음을 밝혀내었다. 남선생은 서예학자를 대동해 서체 감정을 받고 종이 연대측정법까지 동원해 이를 밝혀내었다. 그 결과 역시 일제 강점기에 일부 악보를 위조하여 합본한 것임을 밝혔다. 요약해보면 18세기 정조 때의 악보인 의 일부(영산회상)를 위조하여 18세기에 이미 음악의 장단 변화가 시작된 것처럼 꾸몄고 19세기 말에 만들어진(거짓말이었다) 에서 종묘제례악을 1자1음식으로 바꾸고  전통적으로 내려오던 6대강구조(세조때 정간보 기입시  3·2·3·3·2·3 정간으로 갈라 6대강(六大綱)으로 구분하였는데 이 16정간 6대강법은 조선 말기까지 계속 되었다)를 해체하여 4구로 된 음악으로 만들었다. 선율은 세종 때 그대로인데 장단만 변했다. 이렇게 되면 그 음악은 불구가 되는 것이다. 의 이러한 장단변질은  일제강점기 에 고스란히 옮겨졌다. 진실을 말하자면  일제는 종묘제례악 같은 수준 높고 장엄한 음악이 그대로 전승되는 걸 두고 볼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이왕직 아악부를 통해 박과 절주가 무너진  절름발이 종묘제례악을 만들었고 그 사실을 숨기기 위해 라는 악보를 만들어 마치 조선왕조의 장악원에서 편찬한 관찬악보인 양 꾸몄다. 조선시대 관찬악보에 편찬시기가 기록된 악보는 하나도 없다. 그런데 에는 편찬시기가 다섯 번이나 기록되었다. 제발 19세기 악보라는 걸 믿어 달라고 부탁하는 것처럼... 
56    종묘제례악의 변질과 전통음악의 타락 - ① 댓글:  조회:141  추천:0  2018-11-25
이제부터 연재하는 글은 남원농악 이수자인 김정헌박사의 것입니다. 일반인에게는 잘 알려져 있지 않은 전통음악, 종묘제례악의 치욕의 역사와 그 극복을 함께 생각해 보고자 하는 마음에서 마련한 것이오니 많은 관심을 바랍니다.   ※ 종묘 제례악은 조선왕조 역대 임금과 왕후의 신위(神位)를 모신 종묘에 제사드릴 때 연주하는 기악·노래·무용의 총칭으로 '종묘악'이라고도 한다.   현행 종묘제례악 악보는  이왕직 아악부의 학생이었던  김기수의 악보를 모본으로 하여 만든 것이고 김기수의 악보는 이왕직 아악부의 악보를 모본으로 만든 것이다. 김기수는 1939년 최초의 국악창작곡이자  최초의 친일국악곡인 을 작곡했다. 해방 이후에는 국립국악원 예술사, 서울대 국악과 강사, 중요무형문화재 제1호 종묘제례악 예능보유자, 중요무형문화재 제39호 처용무 예능보유자, 국립국악원장, 국립국악고등학교 교장 등을 역임하는 등 그야말로 출세가도를 달려온 인물로 현행 종묘제례악은 이 사람의 의중대로 전수된 것이다. 종묘제례악은 정대업11곡 보태평11곡으로 구성되었다. 단순한 악기 연주가 아니라 악,가,무의 종합예술이다. 세종이 종묘제례악을 당악(중국음악)으로 하지 않고 우리 고유의 전통음악인 향악으로 만든 이유는 우리 나라 귀신에게 제사를 지내는데  우리 음악을 사용하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현행 종묘제례악은 그 장단이 이상하다. 연주 시작부터 끝까지 단 한 번도 규칙적인 리듬이 나타나지 않는다. 그래서 학자들은 ‘무패턴 불규칙형’ 장단이라고 명명했다. ‘무패턴’이라는 건 장고의 패턴,  즉 쌍(덩),편(따),고(쿵),요(더러러러)의 타법이  일정하게 정해진 패턴이 없다는 말이며 ‘불규칙’이라는 건 박자구조가 들쭉날쭉하여 몇 박자인지 알 수가 없다는 뜻이다. 무슨 이런 거지같은 음악이 다 있을까? 원시인들도 이런 음악 안 할 거다. 우리가 종묘제례악을 들으면서 불편한 이유 중의 하나가  바로 장단이 무패턴 불규칙형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럼 원래 세종 때부터 이렇게 만들어졌을까? 조선전기의 악보인 , 조선후기의 악보인 등에 실린 종묘제례악은 모두 그 장단이 규칙형 장단이다. 이게 어찌된 노릇인가?  
55    조선족 치안문제: 준법의식의 변화 댓글:  조회:178  추천:0  2018-11-19
최근 들어 중국동포(조선족)들의 치안사례가 늘어나 화제가 되고 있다. 일부 매스컴에서는 이를 과장보도하고 일부 동포들의 사례를 들어  70만 재한중국동포사회를 매도하고 있으며 일부 중국동포로부터 피해의식을 느끼는 한국인들은 때를 만났다고 중국동포 때리기에 나서고 있다.이는 그 동안 중국동포와 한국사회가 쌓아온 어설픈 관계에도 악영향을 미칠 전망이다.  한국에서 중국동포의 준법의식을 두개 단계로 관찰할수 있다.   우선, 불법체류시기이다. '한국약장사'의 종료와 함께 단기비자로 노동시장에 투입된 중국동포들은 줄곧 불법체류라는 죄의식 속에서 한국생활을 해야 했고 신고로 이어지는 강제추방이 두려워 사회공공질서를 비롯한 한국의 법을 눈가림으로나마 잘 지켜야 했다. 또 임금체불이 두려워 불이익을 감내해야 했으며 나아가 언감생심 사회적 물의를 일으킬 엄두도 내지 못 했다.       다음, 합법화시기이다. 재입국과 방문취업제로 합법화된 중국동포들은 법무부와 노동부가 내놓은 번거로운 합법절차를 버거워하면서도 장기체류가 현실화 되어 느긋한 일상으로 돌아갔다. 그들은 경찰과 닭장차만 보아도 숨 막히던 과거에서 해탈되어 친절한 한국경찰들과 대화를 하기에 이른다. 그리고는 성차지 않아서 고향에서처럼 담차게 신호등도 무시해 보고 한국인들에게서 모욕감을 느낄 때면 말 대꾸도 하고 시비도 걸어본다. 심지어 고향에서처럼 쓰레기 무단 투척, 신호등도 마음대로 무시하기, 길거리에 아무데나 가래침 뱉기, 밤샘으로 카지노 (마작에 카드 입씨름하기 ) 심지어 손찌검하기 ,성매매, 밀수에 , 칼부림하기 살인사건에 이르기까지 못하는 짓이 없다!  퇴폐적인 생활도 재현시켜 한국생활을 '풍요롭게' 하고 대신 주변 한국인들과 동포들에게 심각한 정신적 피해를 주기에 이른다.   그러나 이런 현상은 소수동포들의 맹동이라고 하기에는 아주 심각한 수준에 이르렀다.  범죄를 저지른 사람들이 헤아릴수 없이 많아 예전에는 소수가 사고친거라고 말들 했지만 이제는 더 그런 말을 하지 못할 정도로 범죄, 사건신고수가  수없이 많아 많은 재한 중국동포들이 이로 인해 수치심을 느끼고 있다 !  우리 이미지는 우리 매개인 스스로 가꾸고 지켜가는 것이다!  아직도 많은 중국동포들은 성실하게 노무활동에 종사하고 있으며 한국사회에 적응하고 한국인들의 눈높이를 맞추려고 안깐힘을 쓰고 있다.  계속 이어지는 사건사고는 많은 조선족들의 노력을 공든 탑이 무너지게 한다.   70만 명이나 되는 집단에 범죄가 없으라는 법도 없다. 모자를 꾹 눌러쓰고 마스크를 끼고 수건으로 수갑을 덮고 TV에 등장하는 한국의 범죄자들을 보면서 한국인에 대해 편견을 가진다면 그건 경솔한 처사이다. 마찬가지로 소수의 중국동포들의 행위규범이 한국사회에 저촉되고 범죄로 이어진다고 하여 70만 중국동포사회를 싸잡아 비난하는 것은 불문곡직의 사람들이나 할 수 있는 일이다.   한국에서 일부 중국동포들의 준법의식이 문제가 되고 있다.  그들이 범하는 행위를 보면 저 문화에서 오는 병폐, 중국현지사회에서 오는 병폐와 한국 하층사회에서 오는 병폐 등 종합적인 병폐로 나타나고 있다. 이는 한국사회에 피해를 주고 있고 70만 중국동포사회의 형상에도 먹칠을 하고 있다. 그러나 무질서하게 산재되어 조직이 없고 체계가 없는 중국동포사회에 영향력을 행사하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우선, 문제가 자주 발생하는 동네마다 '중국동포쉼터'를 마련하여 운영할 수 있다. 쉼터는 열람실을 비롯한 문화 오락 법제교육의 장으로 쓸 수 있으며 동포들이 정보를 교류하고 지역내의 치안에 귀를 기울임으로써 서로 감독할 수 있는 자율방범망으로 활용할 수 있다.   다음, 한국정부는 현재 취업교육에 역점을 두고 취업교육이 단순 노동교양에 그치지 말고 지난 90년대 초 통일원에서 중국동포를 상대로 조직한 연수처럼 민속교육으로부터 한민족공동체교육 남북통일 등 실질적인 민족교육을 첨가함으로써 중국동포들이 민족을 사랑하고 고국을 사랑하도록 인도해야 한다. 이는 중국동포들의 준법의식의 제고를 동반하여 줄 것이다.
54    연변대학(한국)교수가 본 조선족과 조선족사회의 미래 댓글:  조회:178  추천:0  2018-11-19
Ⅰ. 서론  주최측에서 필자에게 요구하는 내용은 아마 한국교수로서 보는 둑특한 무엇을 기대하는 것 같으나 필자의 안목이 그렇게 깊지 못하여 부담감을 느낀다. 필자가 비록 한국에서 오긴 하였으나 필자의 관점에는 시간과 공간의 제약이 많다. 먼저 아직 온지 7개월밖에 안된 상태에서 그 보는바에 시간적 제약이 많다. 그리고 필자가 대하는 사람이 광범하지를 못하고 일부에 한정되여 있으므로 공간적인 제약 또한 고백하지 않을수 없다. 그럼에도 이 글을 씀은 주최측의 요구도 간곡하거니와 필자 역시 바로 하고 싶었던 말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 말이란것이 뭐 특별한것이 아니라 필자가 발간한 수기(隨記)에서도 이미 조금 비친 이야기요 또 다른 장소에서도 거듭 이야기한 바이다. 곧 조선족사회에 위기가 닥쳐오니 분발하라는 얘기다. 그런데 그 말이 많은 분들, 특히 지식인들의 귀에는 거슬리는 말이 될것 같아 조심스러우나 어디까지나 필자의 충정(衷情)이오니 량해하시고 경칭해주시기 바란다.  이 글은 학술적인 론문이라기보다 그저 제목 그대로 본바를 기술하는만큼 학술적인 론리성은 박약하고 객관성도 약함을 인정한다. 다만 본바를 솔직하게 얘기하여 한국인과 조선족이 서로를 보다 더 잘 리해하는데 일조를 하고 나아가 조선족과 한국인이 다같이 힘을 합쳐 허물어지는 조선족사회를 일으키는데 한몫을 감당하고자 하는데 그 목적이 있다.  론지를 전개함에는 먼저 필자가 본바, 생각한바의 조선족과 한국인을 론하고 이어 조선족사회를 론하며 나아가 이를 고치고 구할 방안을 나름대로 제시하는것으로 끝맺으려 한다.  Ⅱ. 내가 본, 한국인에게 있어서의 조선족  1.련민의 대상이다.  한국인과 중국의 조선족은 근 반세기 동안 서로를 잘 몰랐다. 그러다 한국과 중국이 국교를 성립하고부터 한국인들은 비로소 조선족을 알게 되였는데 이때 한국인들의 가슴에는 그 동안 오랜 세월 잊고 지낸 동포에 대한 죄책감이 들었다. 또 6.25 때 중공군으로 참전하였다고 원쑤시하였던데 대한 죄책감도 곁들었다. 이 죄책감과 더불어 너무도 가난하게 사는 현실에 동정심을 갖게 된것이다. 이 죄책감과 동정심이 어울려 련민의 정을 낳은것이다. 이 정으로 하여 아직도 한국인은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조선족에 대해서 호의적이다.  2. 자선의 대상이다.  얄팍한 민족애를 가지고 너무도 가난한 동포를 몇푼의 돈으로 도울수 있다는데 많은 기쁨을 맛보는것이다. 일종 시혜(施惠)의 만족감을 누리는것이다.  3. 착취의 대상이다.  똑같은 일을 시키거나 더 혹독한 일을 시키면서도 한국인의 절반만 주어도 감지덕지하는 조선족은 한국인에게 있어서는 로동력을 착취할수 있는 가장 좋은 대상이다. 그리하여 한국의 많은 기업들은 중국의 조선족을 무더기로 받으며 환영하였다. 언어가 불편없이 소통되므로 다른 어떤 외국인보다 부리기 편리하고 또 그 성미가 순박하여 좋았던것이다.  4. 멸시의 대상이다.  불법 체류와 가난뿐만 아니라 조선족은 그 무뚝뚝한 말씨와 불친절한 태도, 약속 불리행 등 타기할수밖에 없는 습관들로 인하여 한국인은 모두가 조선족을 멸시하는것이 사실이다.  5. 고토에의 향수로 인하여 그 고토를 지키는 조선족에게 일종의 감사를 느낀다. 그리고 그 고토에서 일찍이 누리지 못하였던 자신감을 가지므로 민족적 자긍심마저 갖는다. 그러나 이 자긍심을 못갖는 조선족에 대하여 안타까워한다.     Ⅲ.내가 본, 조선족에게 있어서의 한국  1. 부자집 친정이다.  가기만 하면 얻어오고 손만 벌리면 쥐여지는 부자집 친정이다. 때로 좀 속상하기도 하고 아니꼽기도 하고 부끄럽기도 하지만 그래도 아쉬우면 손 벌릴수 있는 유일한 곳이다.  2. 정신적 기둥으로 민족적 자긍심을 가지게 하여주는 자랑스런 친정이다.  한국의 위상이 국제적으로 올라가므로 조선족은 어깨가 자연히 으쓱해지는것이다. 그리하여 조선족임을 떳떳이 말할수 있게 하는것이다.  3. 노다지의 땅이다.  어떻게든 한번 가기만 하면 완전히 팔자를 바꿀수 있는 돈을 벌어올수 있으므로 노다지의 땅이 분명한것이다.  4. 고마움과 섭섭함이 교차되는 곳이다.  돈을 주어 고맙고 돈을 벌어 고마운데 동포라고 하면서 너무나 인간적 대우를 안 해주므로 섭섭한것이다. 그리고 한국인은 반가우면서도 얄미운 사람인것이다.  5. 의뢰심을 유발시키고 독립정신을 상실케 하는곳이다.  많은 조선족은 조그만 일을 하면서도 자꾸 한국을 건너다 본다. 어쩌면 민족에 관계되는 일은 무엇이든 한국인의 도움 없이 이루어지는 일이 없을 지경이다. 돈이 없음은 사실이다. 그러나 있는 한도내에서는 한국인의 10분의 1이든 100분의 1이든 성의를 보여야지 않는가? 무슨 성금을 가져오면 그 성금에서 그 손님을 접대하는 경비까지 쓰는 일은 없어야 한다. 이로 말미암아 자괴감, 무기력증, 나아가 비굴감까지 조성된다. 적어도 내 힘있는 한에서 힘을 합친다면 이런 일은 훨씬 적어질것이다.  6. 배금사상의 배움터이다.  모든 문제를 돈으로만 해결하려 들고 돈 앞에 다른 무엇도 보이지 않는 사상은 한국에서 많이 배워왔다.     Ⅳ. 내가 본 조선족의 장단점  1. 장점  1) 끈기를 들고 싶다. 이 광활한 땅을 개척한 그 억척스럽고 끈질긴 정신을 보면 과연 조선족의 끈기를 볼수 있다.  2) 순진하다. 마음바탕에 아직은 때가 덜 묻었다.  3) 솔직하다. 감정표현을 크게 숨기지 않는다.  4) 은근한 정이 있다.  5) 도전정신이 강하다. 온 세계로 진출하는 기개가 놀랍다.  6) 녀성지위가 향상되여있다.  7) 교육열이 강하다. 그러나 부작용도 많다.  8) 민족을 지키려는 민중의 의지력이 강하다. 취학, 옷, 비녀, 말, 혼인 등에 있어서 은연중 민족의것을 고집스러이 지키고있다.  2. 단점  1) 일상생활에서의 례절이 부족하다. - 만씨, 인사, 불친절, 술, 담배, 시간관념 등  2) 일확천금에의 미련이 지나치다.  3) 소비성이 강하다. 월소득에 비하면 소비가 너무 높다. 한 달 1000원 안팍의 봉급에 어떻게 200원 300원의 부조를 하며 그보다 더 많은 액수의 술자리를 벌일수 있는가?  4) 리혼률이 급상승하고있다. 3쌍 가운데 2쌍이 이리하고 있다고 한다. 이로 인한 사회적 파장이 얼마나 크겠는가?  5) 직업의식이 박약하다. 제 자리를 지키는 공직자가 적더라.  6) 봉사활동이 미정착되여 있다.     Ⅴ. 내가 보는바 조선족사회가 허물어지고있다.  지금 조선족사회는 허물어지는 와중에 있다. 이에는 외적요인과 내적인 요인이 있다. 이를 자세히 분석해 본다.  1. 외적요인  1) 인구가 마이너스 성장을 하고있다. 아이 하나만 낳는 풍조가 전 조선족사회에 풍만해 있다. 게다가 가임(可姙)녀성이 격감하고 있다. 이 녀성들의 대부분이 한국이나 도시로 진출하여 농촌에는 총각이 장가를 들지 못하고있다. 듣건데 대부분의 농촌에는 처녀 총각의 비률이 1: 30 이라고 한다. 심한 례로 백금향에서는 1: 70이라고 한다. 이러한 상황이니 어떻게 인구가 증가할수 있겠는가?  2) 집단마을이 붕괴되고있다. 조선족의 집단마을에는 한집 두집 나가기 시작하고 그 자리에 한족이 들어오므로 조선족 마을로서의 정체성을 잃어가고 있는것이다. 그리하여 마을에서 간단한 회의를 하나 하더라도 이젠 더 이상 조선어가 공식용어가 되지 못한다. 10명 가운데 한 사람이라도 한족이 섞이면 공식 용어는 한어가 되여야 한다. 이러므로 차츰 조선족 마을로서의 전통이 유지되여 갈수가 없게 되는것이다.  3) 농촌인구가 줄어들므로 농촌학교가 영세화하거나 페교가 되고있다. 자연 아이를 한족학교로 보낼수밖에 없다. 우리 말과 글을 제대로 모르는 상황에서 소학교부터 한족학교로 다니니 자연 동화될수밖에 없는것이다.  4) 조선족사회의 지도자가 궁핍되고있다. 그래도 마을에 눌러앉아 마을의 촌민을 지도하고 아이를 올바로 교육시킬 엘리트들이 모두 떠나고 없으니 갈바를 모르고 휩쓸리는것이다. 농촌뿐만 아니라 도시 역시 엘리트집단은 외국이나 아니면 북경이나 상해 등 큰 도시로 나가고 없는것이다. 이런 엘리트지도자가 없고 또 양성되지 않고있으니 갈수록 락후될수밖에 없을것이다.  5) 민족교육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있다. 학교에서는 이미 조선의 력사를 교수하지 못하는지가 오래 되였다. 그러나 이에 대체하여 조선의 력사를 가르치고 조선의 혼을 심을 교육 공간이 전혀 없다. 어린이나 청소년들은 어디에서도 민족교육을 받을 기회도 없고 공간도 없고 나아가 이를 하고자 하는 사람도 없다. 하다못해 룡정의 “한글독서사” 같은 시설 하나도 조선족자치주의 수도인 연길에는 없다. 이런 실정이라 민족교육은 거의 없다고 할 지경이다.  2. 내적요인  1) 가장 큰 요인은 민족 자체에 대한 회의론이 조선족사회에 만연되고있다. 그냥 중국 국민으로 살아가면 되지 굳이 민족을 따져 뭐 할거냐는 사상이 팽배해 있는것이다. 대부분의 조선족은 민족을 찾을 아무런 절실함을 느끼지 못하고있다. 공연히 그런걸 찾다가 남의 주목만 받는데 뭐하러 찾느냐는것이다. 그리하여 심지어는 지식인가정에서 도리어 자녀를 한족학교로 취학시키는 사례가 늘어가고 있는것이다. 이미 중국 국민이니 중국 국민으로 잘 기르기 위해서 일찍부터 한족화 교육을 시킨다는 론리이다. 이 민족 정체성에의 회의론이 조선족 사회를 허무는 가장 큰 암적 존재인것이다.  2) 황금만능의 배금주의가 전 사회를 지배하여 “돈” 이외의 일체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게 되였다. 교육도 돈을 위해서 시키는것은 일반적인 추세이고 나아가 문화도 학문도 민족도 돈을 위해서 찾는 풍조가 풍미하고 있는것이다. 심지어는 - 대단히 죄송한 말씀이오나 - 민족 운운해야 한국으로부터 재정적 원조를 받기에 민족을 들먹이는 경우도 없지 않아 더러 있는것이다. 념불에는 관심이 없고 제밥에만 눈독을 들이는 중들도 간혹 있다는 말이다.  3) 민족의 최후 보루로서 민족을 지키고 민족을 구해야 할 문인, 이 독립군들이 전의를 상실하고있다. 독립군 자신들이 적군에 대한 적개심이 희박하고 왜 싸워야 하는지 그 당위성에 대한 자각이 부족하고 게다가 후방의 응원군들이 예상외로 랭담하므로 전의를 상실하고 곁눈을 팔고 있는것이다. 필자가 조선족작가들의 소설을 몇편 분석한 결과 대부분 력사의식이 부족하였다.  4) 지식인들이 예상외로 이 민족문제에 대하여 랭담하다. 허물어지는 민족을 부여잡고 고민하는 흔적이 적다. 따라서 자라는 세대들도 자연 이 문제에 대해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는다.  5) 민족문제에 대하여 지각있는 지식인들도 이 뜻을 결집시키지 못하고있다. 저마다 걱정만 할뿐 이를 하나로 응집시켜 활동을 못하고 있는것 같다. 이 힘을 하나의 구심점에다 응집시켜서 민족문제를 랭철히 분석하고 연구할 장치를 못 만들고있다.  6) 조선족 민족대학으로 조선족의 상징이요 자부심인 연변대학이 자꾸 변질되여 가고있다. 외형은 날로 발전하는데 내면은 날로 민족대학으로서의 정체성을 잃어가고있다. 단적인 례로 조선어의 위치가 저락하고 있는것이다. 전 대학에서 조선어문학부 이외에는 모두 한어가 공식용어가 되고있다. 조문학부 개설 50주년 기념식에서조차 총장은 한어로 축사를 하여야만 되고 개교 50주년 기념식에서도 한어가 공식용어로 쓰이였으며 조문학부의 교수 허룡구씨의 장례식도 한어로 진행되였다니 이제 조선어의 위상은 겨우 조선족자치주의 체면만을 유지하는 선에서 그 명맥을 잇고있는것이다.     Ⅵ. 내가 보는바 조선족의 미래를 위한 제언  이상에서 본바 조선족사회는 그 외적, 내적인 원인으로 인해 허물어지고있다. 이 허물어지는 조선족사회를 일으켜세우기 위해 조선족은 피눈물나는 노력을 취해야 하고 한국은 동포의 처지에서 적극적으로 도와야 한다. 이를 위한 몇가지 제언을 한다.  1. 조선족의 자발적 노력  1) 민족의식 교육을 시켜야 한다.  물론 학교에서의 민족교육이 제 구실을 못하는 가운데서 별달리 민족의식교육을 한다는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지금처럼 방임해 두어서는 결코 조선족으로 자라지를 못한다. 지금의 교육현실에서도 할수 있는 일이 많이 있다. 첫째로 국가와 민족의 관계를 분명히 인식시켜야 한다. 국가와 민족을 동일시하므로 갖가지 오해를 낳고 갈등을 빚는다. 중화인민공화국은 엄연한 다민족국가임을 명심시켜야 한다. 그러므로 조선족으로서 또한 중화인민공화국의 국민으로서 떳떳이 사는 길을 가르쳐야 한다. 둘째로 가장 민족적이여야 가장 세계적임을 알려야 한다. 바야흐로 세계화의 물결이 온 누리를 뒤덮는데 이 세계화란 바로 민족적인 것이 어울린다는 사실을 알려야 한다. 민족적이고 토속적인것이 없이는 영원히 세계화의 물결에 락오자가 되는것이다. 셋째로 민족의식교육에는 무엇보다 력사교육이 우선되여야 한다. 이를 위한 어떤 특별한 조치가 강구되여야 한다. 그러나 우선 주어진 범위내에서만이라도 가르치도록 노력해야 한다.  2) 문인들이 분발하여야 한다.  민족을 살리겠다는 투철한 사명감으로 참으로 독립군적인 자세로 나서야 한다. 지금과 같은 안이한 자세로는 안된다. 보다 더 철저한 투사적 정신이 요청된다. 민족을 살려야 민족문학도 산다. 독자 없는 문학이 존재할수가 없는것이다. 그런데도 필자의 얕은 눈에는 문인들의 그 자세가 보이지 않고 그 정신이 나타나지를 않는것이다.  3) 민족관계학자들이 분발하여야 한다.  죄송하지만 필자가 보기에는 많이 미흡하다. 학문이 현실과 너무 괴리되여 있다. 문학에만 보더라도 왜 많은 학자들이 “재만문학”에만 매달리는가? 이젠 연변의 문학도 제자리 매김을 해야할 때이다. 유치하다면 유치한대로 해야 한다. 그리고 후진을 제대로 길러야 한다. 조문학부는 어떤 의미에서 독립군의 군관을 기르는 사관학교가 아닌가? 그런데 그 예비군관들의 민족의식이 많이 부족하다. 조선문학전공의 연구생이 조선문학 전문지 하나도 안 읽는다면 이를 어떻게 설명해야 할것인가? 주문학부의 4학년 학생들이 아직 룡정에 가보지 않았다면 그 민족의식, 력사의식이 제대로 된것인가? 연변의 조문학부 학생이 홍범도장군을 모른다니 어떻게 해석해야 할것인가? 심지어는 조문학부에서 발간한 조문학부의 력사기록인 《겨레의 넋을 지켜》도 보지 않고있다. 이게 학생들만의 책임인가? 이렇게 교육을 받고 나가 어떻게 저들이 자기도 모르는 민족교육을 제대로 할것인가? 참으로 죄송하지만 문인들과 더불어 학자 여러분들에게도 필자는 민족적인 분발을 촉구하고자 한다.  이들이 민족의 장래인 어린이와 청소년들을 최일선에서 기르므로 이들에 대한 애정을 가지고 계속 민족의 혼을 불어넣도록 교육을 시켜야 한다.  2. 한국에서의 도움  민족을 살려야 한다. 국내야 물론이지만 해외의 민족도 살려야 한다. 피줄의 정을 떠나서도 영원한 우군이기 때문에도 살려야 한다. 가장 민족성이 강하고 장한 동포인 우리의 중국에 계신 민족, 조선족을 살려야 한다. 이를 위해서 모국인 한국은 책임을 감당해야 한다. 지금 조선족은 자체의 힘만으로는 일어나기가 너무 어려운 지경에 빠져 있다. 모국이 도와주어야 한다.  1) 과감한 인구 팽창정책을 펼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  인구팽창정책으로 우선 아이 더 낳기 운동을 장려해야 하는데 이에는 많은 재정이 소요된다. 그리고 아이를 더 갖지 않은 리유 가운데 가장 큰 리유는 과다한 학자금문제이므로 조선족학생 가운데 둘째아이 이후부터는 학자금을 보조하거나 대여해주는 방안을 세워야 한다.  2) 조선족학교를 대폭 지원해야 한다.  조선족학교가 시설면에서 월등히 뛰어나야 조선족학교로 학생이 온다.  3) 조선족교사들에게 특별한 혜택을 주어 우수 인재가 교직으로 나오도록 유도해야 한다. 지금과 같이 교사가 푸대접받는다면 우수인재는 교단을 떠난다. 교직에 매력이 있도록 한국 연수 등 련속적으로 어떤 혜택을 주어야 한다.  4) 민족교육의 공간을 마련해주어야 한다.  미국정부가 외국에 둔 “문화원”과 같은 기관을 이곳에 세워 조선족학생들이 조선의 책과 조선의 력사, 문화를 접할수 있게 해주어야 한다. 그리하여 이곳이 진정 조선족을 기르는 도량이 되도록 해야 한다.  Ⅶ. 결 론  이상으로 필자 나름대로 조선족과 조선족사회의 현실과 미래를 진단해 보았다. 먼저 조선족과 한국인과의 관계에서 서로를 어떻게 보고 있는지를 보고 조선족의 장단점도 진단해 보았다. 이는 서로가 리해하려는 자세로 나아가면 그 간격을 좁힐수 있으므로 큰 문제가 아니다.  그리고 조선족사회의 허물어지는 원인도 분석해 보았다. 그리고 이에 대한 방안도 제시하였다. 그러나 내가 보는 바로는 암담하다. 중화민족의 거대한 동화의 힘 앞에 여지없이 허물어지고있다. 이 현실앞에 수수방관하는듯하여 더욱 답답하다. 방법이 없으니 어쩌느냐고 한숨쉰다. 그러면서 20년을 못 버틴다고 패배감, 자멸감에 젖어 있다. 이 허허벌판을 굶어가며 개척한 그 기개는 어디로 가고 일제와 맨주먹으로 싸운 그 투지는 어디다 버렸는가? 물론 그 동안의 력사의 회오리 가운데 당한 고난으로 위축된 사정을 모르는바는 아니다. 그래도 어찌 이렇게도 한심하게 무너진단 말인가?  그러나 학자와 문인 등 독립군만 건설하면 능히 지킬수 있다.  서기 70년 로마에 의해 나라는 완전히 망하고 민족은 온 세계로 뿔뿔히 흩어진 유태민족을 2000년이나 지켜온 독립군은 바로 “랍비”들이였다. 이 랍비는 처음 딱 10명으로 출발하였다. 이 10명이 지리멸렬한 민족을 구하는 원동력이 되였다. 지금 조선족사회도 이 10명의 랍비를 구하고있다. 2000년이나 나라없이 흩어진 이 유태민족이 이리저리 피가 섞여 혈통적으로 유태인 구분이 어렵다고 한다. 그러나 유태인을 아는 단 한가지 진리가 있다. 곧 어머니가 유태인이면 그 자녀는 유태인인것이다. 이 튼튼한 어머니를 곡립군들은 키워야 한다.  저자: 안병렬, 연변대학 조문학부 객원교수
잃어버린 배달사상과 동양사상의 기원    (보급판) 우리 민족의 고유사상  제주대학교 사범대학 윤리교육과    교수  안창범(安昶範) ·우리민족은 원래 고유철학과 고유종교가 없었던가?  ·불교의 교주 석가모니는 원래 인도 사람인가? 한국 사람인가?  ·도교의 삼황내문, 불교의 대승경, 유교의 주역은 어디에서 나왔는가?  ·원래 도교·불교·유교의 발상지는 어디인가?  ·우리나라의 백두산이 세계의 중심이며, 동양사상의 발상지라는 사실을 아는가?  ·인도에 우리민족의 언어와 문자가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                                  머 리 말 우리나라는 서구도 아니고 인도도 아니다. 그러나 거리마다 서구의 교회당이며, 골짜기마다 인도의 사찰이다. 그밖에도 일본계·지나계·아랍계 등 외래종교 신자가 전체 인구의 절반 이상이다. 이는 곧 우리민족의 절반 이상이 다른 민족의 민족신과 교조를 섬기면서도 제 민족의 하나님과 국조를 섬기지 아니하고, 남의 나라의 종교와 사상을 배우고 믿으면서도 제 민족의 종교와 사상에는 관심마저 없다는 것이 아닌가? 완전히 신앙과 종교교육에 있어 주객이 전도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나라에는 외래종교와 외래사상을 가르치는 신학대학과 철학과(서양철학과)는 수없이 많아도 제 민족의 종교와 사상을 가르치는 한국학대학과 한국철학과는 찾아보기 어렵다. 기독교의 신학박사와 서양철학박사는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이 많아도 한국철학 박사는 4천 5백만 인구 중에 겨우 한 두 사람에 불과하다. 대학과 대학원을 졸업하고 박사학위를 받아도 한국철학 강좌를 한번도 수강해 보지 못한 채 졸업하게 되는 학생이 전체의 95% 이상이다. 이러한 한국사회의 종교적 교육적 현실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한국 사람에게 한국혼이 없다는 것이 아닌가? 곧 한국 사람에게는 주인의식이 없다는 것이다. 예컨대, 시청에도 주인이 없고, 도청에도 주인이 없으며, 그밖에 정부의 어느 부처에도 주인이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부정부패가 만연할 수 밖에 없고, 윤리도덕이 타락될 수 밖에 더 있는가? 여기에서 잃어버린 고유사상을 탐색하고 재정립을 위해 노력하게 된 동기가 있다. 그 결과 천만 뜻밖에도 우리민족에게는 배달국 시대에 이미 한웅천황이 설한 너무나 위대한 사상이 있음을 발견하고 놀랐다. 그 사상은 불변적 진리인 천도(天道)를 발생원리로 하는 배달사상 곧 신선도였다. 노자의 도교·석가의 불교·공자의 유교·우리민족의 동학이 모두 그 원류는 배달사상 곧 신선도였다. 도교의 삼황내문·불교의 대승경·유교의 주역이 모두 신선도의 경전이었다. 심지어 지나인들이 지상선경이라 선망하는 해중(海中)의 삼신산(三神山)과 산의 조종이라는 신비의 곤륜산(崑崙山) 그리고 석가세존의 고행성도지라는 설산(雪山)이 모두 같은 산으로써 우리나라의 백두산이었다. 그와 같이 이 책에 실려있는 내용은 모두 새로운 내용들이다. 필자 자신도 처음 그러한 사실을 발견했을 때, 당황하고 믿어지지 않았다. 이러한 내용을 처음 접촉하는 독자들은 너무나 어리둥절한 나머지 믿어지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읽어보면 근거가 분명하고 우리민족의 배달사상이 위대함을 경탄하게 될 것이다. 21세기 태평양 시대에는 한국사상이 세계인류를 지도하게 될 것이라는 게오르규의 예언이 적중됨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여하간 배달사상은 발생학적 원리와 배경부터 현대사상과는 전혀 다른 원융무애한 세계주의사상이다. 서양에도 동양에도 없는 새로운 사상이다. 과거에도 현재에도 듣지 못했던 새로운 사상임을 밝혀둔다.  끝으로 이 책은 {잃어버린 배달사상과 동양사상의 기원}을 요약정리한 보급판임을 밝혀둔다. 원문도 없고 각주도 없는 것은 그 때문이다. 그러므로 좀더 자세한 내용과 전거를 알고자 하는 독자는 원본을 참고해 주기 바란다. 독자들의 냉철한 판단과 비판을 기대한다. 연락처는 본서 뒤에 밝혔다.                                                            개천 5894(서기 1997). 1. 15.                                                            저자 안 창 범(安 昶 範) 삼가 씀 《서 평》                   우리민족의 위대한 경륜서                                                    한국뿌리찾기연합회장 철학박사 이 항 녕 우리나라의 고유종교인 신선도가 유교·불교·도교를 다 포용하고 있다는 것은 최치원의 난랑비서에 분명히 밝히고 있지만 그 신선도를 자세하게 기록한 {선사}라는 책이 지금 전하지 않아 신선도의 실체를 알기가 어렵게 되어있다. 그 어려운 문제를 해결한 것이 안교수의 본서이다. 안교수는 먼저 여러가지 문헌을 섭렵하고 증거를 제시하면서 天地人 三神一體인 신선도의 내용을 체계적으로 정리했다. 그리고 불교의 기원문제에 들어가 석가세존이 인도 사람이 아니라 한국 사람인 것과 석가세존의 고행성도지가 인도의 부다가야가 아니라 우리나라의 백두산이며, 초전법륜지가 인도의 사르나드가 아니라 우리나라 제주도의 한라산이고, 대승경이 인도에서 출현된 것이 아니라 우리나라 신선도의 경전이며, 대승경에 쓰여 있는 범어가 인도어가 아니라 상고시대 우리민족의 언어임을 밝혀냈다. 유교의 기원문제에 들어가 중국문화의 발상지라는 곤륜산(崑崙山)이 중국 대륙 서쪽에 있는 어떤 산이 아니라 우리나라의 백두산인 것과 중국유교의 시조인 복희·신농·황제의 삼황과 그 다음의 요·순과 유학을 집대성(集大成)한 공자가 모두 지나족이 아니라 동이족이고, 동이족은 곧 우리민족이라는 사실을 밝혀냈다. 그리고 유교의 중심사상인 仁사상과 행동훈인 五倫이 원래 신선도의 덕목임을 밝혀냈다.  다음에 도교의 기원문제에 들어가 도교인의 이상향인 (三神山)이 백두산이며, 도교의 시조인 황제가 도(道)를 물었다는 광성자(廣成子)도 동이족이요 도덕경을 저술한 老子도 동방 사람인 것을 밝혀냈다. 그러므로 불교와 유교와 도교가 근본적으로 신선도에 근원을 두고 있다는 것이다.  안교수는 더 나아가 동학을 고찰하고, 동학의 발생지라는 용담은 경주에 있는 용담정이 아니라 백두산 정상의 용왕담 곧 천지이고, 신선도가 최치원 선생을 거쳐 최재우 선생에게 전승되고, 신선도와 동학의 발생원리가 근본적으로 동일함을 밝혀냈다. 그래서 동학의 도·불·유 삼교일체 사상은 신선도를 재현한 것으로 동학과 신선도는 동일하다고 하였다. 우리민족은 지금 한반도의 좁은 지역에 자리하고 있지만 상고시대에는 광활한 만주벌판과 중원대륙에서 뛰놀던 민족이다. 우리민족의 고유신앙은 지금 저속한 무속으로 타락하여 제대로 종교구실을 못하여 외래종교가 판을 치고 있지만 우리민족의 고유신앙은 유교·불교·도교를 원래부터 포함한 동양사상의 원류이다. 오랫동안의 사대주의와 식민사관 바람에 우리 민족은 스스로의 정체를 모르고 자기비하와 열등감에 젖어있는 지금 이 책은 민족의 부흥을 선도하는 위대한 경륜서(經綸書)이다. 일찍이 고려시대에 몽고의 침략에 시달려 국민들이 갈바를 모르고 있을 때 일연 선사(一然 禪師)가 {삼국유사}를 지어 우리의 위대한 국조 단군왕검을 선양함으로써 민족에게 희망을 주었다. 지금 내우외환 바람에 갈길을 모르고 헤매이고 있는 우리민족에게 이 책은 하나의 등불이 될 것이 틀림없다. 안교수의 노고를 진심으로 감사하는 바이다.  《추 천 사》                       우리 조상의 깊은 지혜                                                                          해동철학회장 철학박사 최 민 홍 이 책의 저자 안창범 교수는 최근 몇년 동안에 {민족사상의 원류}, {한민족의 신선도와 불교}, {하나님 사상과 불교의 기원} 등의 출간에 이어 금번에는 {잃어버린 배달사상과 동양사상의 기원}이라는 좋은 책을 펴내어 한국 고대사상과 동양사상의 관계를 체계적으로 알 수 있게 하였다. 그 열의와 노고에 깊은 감사를 드리는 바이다. 격변하는 국내외의 정세 속에서 한민족은 모든 분야에서 해야 할 일이 많다. 그 가운데서도 가장 시급한 것이 세계사관 수립문제이다. 자타가 공인하는 보편타당성을 내포한 세계사관을 세우기 위해서는 그 내용이 충실하고 공정해야 한다. 이 같은 요구에 만족을 줄 수 있는 것이 바로 이 책으로 판단된다. 따라서 이 책은 한민족의 세계사관 연구에 좋은 참고서로 믿어 의심치 않는다. 21세기를 지도할 평화사상이라 할 수 있다.  우리나라의 일부 학자들은 이 땅에 태어나서 자기나라의 사상을 연구발전시키지 않고, 다른 나라의 사상을 가져다가 대리연구하여 사상적으로 남의 나라에 예속되어 있는 것을 본다. 우리나라의 대학에는 자기 나라의 사상과 철학을 연구하는 한국철학과는 없고 외래사상과 외래철학을 연구하는 철학과(서양철학과)는 거의 모두 있다. 한국철학 박사는 그리 없고 서양철학 박사와 외래종교 박사는 수만명이다. 대학을 졸업하고 박사학위를 받아도 한국사상 강좌를 한번도 수강해보지 못한 채 졸업하게 되는 학생이 전체의 95%이상이다. 이런 사람들은 자기의 것을 남의 것이라고 한다. 중국 {예기} 18장에 의하면 공자가 말하기를 소련과 대련이 부모의 상을 잘 치려 삼일동안 게을리 하지 않고 석달동안 상복을 벗지 않으며 초하루 보름과 제사 날이면 슬퍼하면서 삼년동안 근심 걱정을 하니 동이의 아들이다(禮記, 十八章 : 孔子曰 少連 大連 善居喪 三日不怠 三月不解 期悲哀 三年憂 東夷之子也)라고 하였다. 현재 우리가 말하는 효는 공자의 말대로 하면 우리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교에서 온 것이라고 하는 것은 근본을 모르고 하는 말이다. 여기서 東夷라 함은 한민족의 조상을 두고 한 말이다. 없는 것도 있다고 하는 세상에 있는 것을 없다고 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필자는 외국 대학에서 우리의 고유한 한철학을 강의하는 과정에서 그 발상경위와 역사적 유구성을 문헌으로 설명하여 청강자로 하여금 감탄케 하는 때가 많았다. 이 책을 읽는 도중에 그러한 현상을 보게 되는데 우리 사상에 관한 자랑으로 생각된다.  어느 폐이지를 펼쳐도 우리 조상들의 깊은 지혜와 슬기로운 로고스가 담겨 있어서 오늘을 살아가는데 좋은 정신생활의 샘터가 되므로 각계 각층의 모든 분들에게 일독을 권하는 바이다.                   본 연구의 부정에 대한 부정 본서의 내용과 우리나라의 교육현실이 서로 상반되고 있다. 즉, 본서는 상고시대부터 우리민족사회에 고유종교와 고유철학이 있었음을 밝히고 있는 반면, 현재 우리나라의 교육현장에서는 우리민족은 원래부터 고유종교와 고유철학이 없었고, 외래사상만을 수용했던 것으로 가르치고 있다. 본서는 불교·유교·도교 등 동양사상의 발원지가 우리나라임을 밝히고 있는 반면, 우리나라의 교육현장에서는 불교의 발원지를 인도로, 유교와 도교의 발원지를 지나라 가르치고 있다. 이상과 같음으로써 외래사상에 물든 사람들은 본서를 일고의 가치도 없는 것이라 일축하고 무조건 반대하기 쉽다. 이제 그 부당성을 간략히 비판한다. 첫째, 외래종교 신자들은 교당에 나가면 다른 민족의 신에게 절을 하고 다른 민족의 교조를 성인이라 숭배하며 다른 민족의 역사와 사상만을 가르치고 배운다. 그러면서도 제 민족의 역사와 사상을 가르치지도 않고 배우지도 않으며 제 민족의 국조에게 절도 않는다. 그럼으로써 외래종교 신자들은 무조건 본 연구를 부정하기 쉽다. 여기에서 생각해 보자. 신앙이 중요한가? 아니면 민족이 중요한가? 어느 종교이든 우리나라에 전래될 때는 우리민족을 위해 전래된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외래종교 신자라 하더라도 제 민족의 역사와 사상을 연구하고 배워야 할 것이 아닌가? 그런데 제 민족의 역사와 사상을 부정하거나 거부하고 있으니, 그것은 외래종교의 최초 전래목적에 위배되고 반민족적 반국가적 행위가 아닌가?  둘째, 본 연구에서의 주장은 거룩한 도사(道士)나 조사(祖師) 또는 일류대학의 유명한 학자의 주장이 아니라 지방대학 평범한 종교 사학자의 주장이라 하여 무조건 반대하기 쉽다. 필자의 연구에 의하면 도교·불교·유교는 노자·석가·공자의 독창도 아니고 중국이나 인도의 고대사상에 연원을 두고 있는 것도 아니라, 우리민족의 신선도에 그 연원을 두고 있었다. 그렇다면 도교·불교·유교에 박식한 조사나 일류대학의 유명한 학자라 하더라도 우리민족의 신선도를 모르면 이들 사상의 원류를 밝힐 수 없을 것이다. 여기에 지방대학의 평범한 종교 사학자의 연구라 하더라도 무조건 부정함은 논리상 모순임을 이해해야 할 것이다. 셋째, 본 연구는 너무나 충격적이고 새로운 학설로서 우리민족의 사상사는 물론 세계사를 뒤엎는 문제라 하여 반대하기 쉽다.  예컨대, 중세까지만 해도 천동설(天動說)이 통설이었으나 현재는 지동설(地動說)이 통설이다. 그와 같이 세계문화는 철석같이 믿던 통설이 무너지고 새로운 학설이 등장하면서 발전되어 왔다. 만약 본 연구를 민족의 사상사와 세계사를 뒤엎는 학설이라 하여 부정하면 그것은 새로운 연구를 봉쇄하는 결과가 되어 진리탐구의 정신에 위배되며, 민족문화나 세계문화의 발전에 역행하는 처사임을 이해하여야 할 것이다.  넷째, 예컨대 불교의 유적과 유물이 인도에 있는데 불교가 우리나라에서 기원되었다함은 어불성설이 아니냐 하는 문제이다. 인도의 유물과 유적은 석가세존의 종교활동을 상징하는 것이며, 불교가 반드시 인도에서 발생했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것은 아니다. 예컨대, 어느 사람이 거주했던 집이 어느 곳에 있다하여 그곳을 그 사람의 출생지라 할 수 없는 것과 같은 격이다. 다섯째, 고고학적 실증이 있느냐 하고 반대하기 쉽다.  고고학은 18∼19세기부터 일부 학자들에 의하여 시작되었으나, 아직도 걸음마 단계에 불과한 학문이다. 그러므로 고고학에 근거할 경우 하나를 인정하고 열을 부정하게 되며, 근세사를 인정하고 고대사를 부정하게 된다. 그래서 과거의 영국·일본·독일·불란서·스페인·미국 등 제국주의 국가들이 식민지의 역사를 말살시킬 목적으로 이용하던 학문이다. 그러므로 고고학적 실증을 이유로 무조건 부정해서도 안된다는 것이다.  여섯째, 본 연구에서의 주장을 받아들인다면 불교·유교·도교 신자들의 신앙심이 흔들릴 것이 아니냐 하고 반대하기 쉽다.  예컨대, 불교를 신앙한다는 것은 석가세존의 인격과 그 가르침을 믿는 것이며, 인도를 믿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 본 연구는 석가세존의 인격과 가르침을 훼손시키는 것이 아니라, 왜곡되었던 불교의 역사를 바로 잡고, 잃어버렸던 부처님을 찾아오는 것으로써 일그러진 민족혼에 생기를 불어넣는 작업이다. 따라서 불자들의 신앙에 아무런 장애가 될 수 없고, 오히려 애국 애족심과 더불어 더욱 진실한 신앙심을 심어주게 되리라 믿는다.  이상과 같이 볼 때, 본 연구에서의 주장을 맹목적으로 부정함은 하나의 기우에 불과한 것이며, 반대로 본 연구의 주장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일 때, 우리민족에 대한 세계인의 인식이 달라지고, 세계의 석학들이 우리나라로 몰려들게 되리라 믿는다. 이에 따라 민족적으로 긍지와 자부심이 생기고 희망찬 민족사가 전개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우리민족은 세계무대에 위대한 민족으로 등장될 수 있다고 믿는다. 그러므로 불교·유교·도교 신자들은 본 연구에서의 주장을 부정하기에 앞서 그 부족한 점을 자진하여 연구하고 보완하여야 할 것이며, 그 홍보에 적극 노력하는 것이 민족과 국가를 위한 국민으로서의 사명이라 생각한다. 적극적인 협조와 동참을 기대한다. 차 례  머 리 말 2  《서 평》우리민족의 위대한 경륜서  한국뿌리찾기 연합회장 철학박사 이 항 녕 4  《추천사》우리 조상의 깊은 지혜  해동철학회장 철학박사 최 민 홍 6  본 연구의 부정에 대한 부정 8   제1편 신선도는 참종교이다 Ⅰ. 신선도의 유래 19  1. 환국시대의 신선도 20  2. 한웅천황의 개천입교(開天立敎)와 개천절 23  3. 단군조선 시대의 신선도 26  4. 삼국시대의 신선도 28  5. 신화론자들의 저의와 오류 30  Ⅱ. 신선도의 사상 36  1. 도(道)·불(佛)·유(儒) 삼교일체(三敎一體) 사상 36  2. 삼교일체의 사상적 성격 39  3. 문제점의 논의 41  Ⅲ. 신선도의 성립배경 43  1. 天一·地一·人一 삼신일체(三神一體)의 원의 43  2. 삼신일체와 3원적 품부와 삼교일체 사상의 성립 46  3. 삼신일체와 3대인종과 삼교일체 사상의 성립 51  4. 삼신일체와 음양오행 사상의 성립 55  Ⅳ. 신선도의 성립계기 56  1. 우리나라의 기온과 민족성과 신선도의 성립 56  2. 우리민족의 식생활과 민족성과 신선도의 성립 60  3. 산삼과 수도생활과 신선도의 성립 62  Ⅴ. 백두산과 한웅천황과 신선도의 성립 69  1. {삼국유사}의 태백산에 대한 이설(異說) 69  2. 태백산의 보편성과 특수성 73  3. {삼국유사}의 태백산과 우리나라 백두산의 동일성 75  4. 한웅천황의 백두산 고행과 신선도의 성립 78  Ⅵ. 삼신일체의 사상적 접근 83  1. 종교사상 84  2. 정치사상 91  Ⅶ. 서구종교와 신선도와 세계주의 96  1. 신선도와 서구종교의 비교 96  2. 신선도는 세계주의사상이다 110  Ⅷ. 신선도의 숭배대상과 종교의식 113  1. 숭배의 대상과 삼신하나님 113  2. 소도제천의식 118  Ⅸ. 신선도의 실재적 근거 125  1. 신선도의 유적이 있다 125  2. 샤마니즘과 돌무덤은 신선도의 유풍유속이다 130  Ⅸ. 결 론 135 제2편 불교의 발상지는 우리나라이다 Ⅰ. 서 론 140  Ⅱ. 석가세존은 한국사람이다 141  1. 석가세존의 탄생지는 가비라이다 141  2. 가비라는 네팔의 타라이가 아니다 143  3. 가비라는 우리나라의 백두산 남쪽기슭이다 146  4. 석가세존의 씨족적 근원은 단군족이다 147  Ⅲ. 석가세존은 우리나라의 백두산에서  고행성도하였다 150  1. 석가세존의 고행성도지는 설산이다 150  2. 설산은 어떤 산인가? 152  3. 인도북부의 히말라야 산맥에는 설산이 없다 153  4. 인도의 부다가야는 설산이 아니다 154  5. 설산은 우리나라의 백두산이다 156  Ⅳ. 석가세존의 최초 설법지는  제주도 한라산이다 159  1. 석가세존의 최초 설법지는 파라날 녹야원이다 159  2. 파라날 녹야원은 인도의 사르나드가 아니다 161  3. 파라날 녹야원은 제주도 한라산이다 164  Ⅴ. 석가세존의 고조선 행적과 유적 168 Ⅵ. 대승경은 우리나라에서 기원되었다 170  1. 대승경의 출처는 바다이다 171  2. 바다는 수미세계이다 173  3. 수미세계는 환국과 고조선을 의미한다 175  4. 대승경의 출천인 수미세계는 고조선이다 176  5. 지나에 대승경을 전한 월지국(月支國)은  고조선의 수도이다 178  Ⅶ. 대승경의 범서는 우리민족의 범서이다 180  1. 범어(梵語)는 어떤 언어인가? 181  2. 범어는 인도어(語)도 북셈계어(語)도 아니다 182  3. 상고시대의 우리나라에 범서(梵書)가 있었다 183  4. 범어는 우리민족의 언어와 동일하다 184  Ⅷ. 인도에 우리민족의 문자와 언어가 있다 187  1. 상고시대의 우리나라에 한글이 있었다 187  2. 한글은 세종대왕의 창제가 아니다 188  3. 인도에 우리민족의 한글이 있다 189  4. 남인도에 우리민족의 언어가 있다 190  Ⅸ. 불교는 신선도와 근본적으로 동일하다 191  1. 기본사상이 동일하다 191  2. 고유명사와 전문용어가 동일하다 194  3. 신선도의 천산(天山)과  불교의 수미산(須彌山)이 동일하다 197  Ⅹ. 결 론 199 제3편 유교의 발상지는 우리나라이다 Ⅰ. 서 론 203  Ⅱ. 유교는 우리나라에서 기원되었다 204  1. 지나문화의 발상지인 곤륜산(곤륜산)  우리나라의 백두산이다 204  2. 유교의 창시자는 우리민족이다 208  3. 한자의 창제는 우리민족에서 비롯되었다 210  Ⅲ. 유교사상과 우리민족의 신선도 216  1. 주역(周易)은 신선도의 경전이다 216  2. 홍범구주(洪範九疇)는 우리민족의 사상이다 219  3. 인사상(仁思想)은 우리민족의 사상이다 200  4. 제례(祭禮)의 기원은 우리민족에 있다 221  Ⅳ. 오륜(五倫)은 원래 신선도의 덕목이다 222  1. 오륜은 지나족의 창작이 아니다 223  2. 오륜의 발상지는 배달국이다 225  3. 오륜은 신선도와 불가분의 연관성을 지닌다 226  Ⅴ. 결 론 230 제4편 도교의 발상지는 우리나라이다 Ⅰ. 서 론 236  Ⅱ. 도교인의 이상향인 삼신산은  우리나라의 백두산이다 237  1. 도교인의 이상향은 삼신산이다 237  2. 삼신산은 우리나라의 백두산이다 238  Ⅲ. 우리민족의 신선도서(神仙道書)가  지나로 전승되었다 241  Ⅳ. 도교의 시조는 동이족이다 243  1. 광성자(廣成子)와 동이족 243  2. 노자(老子)와 동이족 245  Ⅴ. 도교와 신선도의 동일성 246  1. 기본사상의 동일성 246  2. 전문용어의 동일성 249  Ⅵ. 결 론 250 제5편 동학은 신선도의 재현이다 Ⅰ. 문제의 제기 254  Ⅱ. 동학의 도·불·유 삼교일체 사상 255  Ⅲ. 동학의 신선도 전승 258  1. 백두산 정상의 용왕담(龍王潭)과 동학의 연원 258  2. 한웅천황과 최고운(崔孤雲)과 동학의 신선도 전승 259  Ⅳ. 신선도와 동학의 동일성 261  1. 발생원리의 동일성 261  2. 기본사상의 동일성 263  Ⅴ. 결 론 266   【부록】  우리민족의 종교교육 비판  1. 종교교육의 기능 268  2. 민족총화와 종교교육 270  3. 우리민족의 종교교육과 그 폐단 272  4. 우리민족의 종교교육과 식민지 교육 281  5. 종교교육의 신토불이(身土不二) 284 저자소개 제1편         신선도는 참 종교이다             배달사상은 세계주의 사상이다 Ⅰ. 신선도의 유래 진정으로 우리민족은 원시적 무속신앙과 외래의 도·불·유(道·佛·儒) 밖에 없는 민족인가? 반만년의 역사를 자랑하면서 고유철학도 고유종교도 없었단 말인가? 그러나 {주역} 풍지관에 따르면 "한늘(하늘)의 신비한 법도를 보니 사시(四時)의 운행이 어김없는지라, 이에 성인이 신비한 법도로서 종교를 세우니 천하가 복종하더라"하여 {주역}이 상고시대부터 천도(天道)에 바탕을 둔 종교가 있었음을 밝혀주고 있다. 그뿐만 아니라 천도에 바탕을 둔 심오한 {주역}이 있다는 것 자체가 태고시대부터 종교가 있었다는 증거가 아닌가? 또한 신도(神道)·신교(神敎)·신선도·신선교 등이 있었다는 기록도 있고, 신교가 전승되면서 삼한(고조선)에서는 천신교(天神敎), 부여에서는 대천교(代天敎), 고구려에서는 경천교(敬天敎), 신라에서는 숭천교(崇天敎), 발해에서는 진종교(眞倧敎), 요(遼)와 금(金)에서는 배천교(拜天敎), 만주에서는 주신교(主神敎) 등으로 불렸다는 기록도 있다. 최남선도 "조선에는 예로부터 고유신앙이 있었고 이 민족교는 유교·불교에 앞서 있었으며, 유교·불교가 들어온 뒤에도 그대로 나란히 존재하였다"고 주장한다. 김교헌은 단군신교의 일파가 지나로 전포하여 선교(仙敎)라 칭하였다 하고, 신채호 역시 우리민족의 삼신오제교(三神五帝敎)가 지나에 전포되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사상·계율·의식·목적·내세관·숭배의 대상·경전 그리고 발생원리와 발생학적 배경 등 종교적 구성요건에 따라 체계적으로 주장하는 학자가 한 사람도 없으니 그것이 문제이다. 본서에서도 그러한 것 모두를 다루기가 너무나 번잡하여 중요한 내용만을 다루고 있다. 그러므로 구체적인 내용은 본서의 원본을 참고해 주기 바란다.   1. 환국시대의 신선도 신선도에 대한 근본문제를 다루기 전에 우리민족의 태고사를 간단히 일별해 보기로 한다. 그러나 우리민족의 태고사는 지금까지 연구의 범위에서 제외되어왔고, 사학을 전문적으로 연구하는 학자는 무슨 소리를 하느냐 하고 비웃을지 모른다. 그러나 시대가 바뀌는 것처럼 학문하는 풍토 역시 바뀌어야 할 것이 아닌가 한다.  {한단고기(桓檀古記)}는 {삼성밀기(三聖密記)}를 전거로 들면서 우리민족의 태고사를 밝혀주고 있는데 그 내용을 요약하면 "옛날 파내류산(波柰留山) 아래에 한인씨의 나라가 있었으니 천해(天海) 동쪽의 땅을 파내류국이라 한다. 그 땅의 넓이는 남북이 5만여리요 동서가 2만여리니 합하여 한국(桓國)이라 하고 나누면 12개 나라이다. 천해는 지금의 북해(北海)다" 하였다. 또한 {조대기}를 인용하여 "옛날에 환국(桓國)이 있었다. 백성은 부유하고 또한 건실했다. 처음에 한인이 천산(天山)에 살면서 도(道)를 터득하여 오래 살고 몸을 닦아 병이 없었다. 한늘을 대신하여 사람을 교화하니 병란이 없고 사람들이 모두 일하기에 힘써 부지런하므로 스스로 굶거나 추위에 떠는 일이 없었다.혁서한인·고시리한인·주우양한인·석제임한인·구을리한인·지위리한인에 이르렀는데 혹 단인이라고도 하며 7세를 전하고 역년은 3301년 혹은 63182년이라 하였다". 이상과 같이 지금부터 약 1만년에서 6천년 어간의 중앙 아시아에 환국이 있었음을 {한단고기}는 밝혀주고 있다. 그런데 인간이 집단을 이루면 거기에는 반드시 교육이 따르게 마련이며 교육을 좀더 체계화시키고 구체화시킨 것이 종교교육이다. {태백일사}를 보면 "삼신(三神)은 한늘을 생성하고(生天) 만물을 가꾸시며(造物) 한인은 사람을 가르쳐 의(義)를 세우니 이로부터 자손이 서로 의(義)와 교(敎)를 전하고, 현묘한 법도를 깨달아 광명이세(光明理世)하였다. 이에 천지인(天地人) 삼극(三極)은 대원일(大圓一)하는 서물(庶物)의 원의인 즉, 천하구환(天下九桓)의 예락이 곧 삼신고제(三神古祭)의 풍속이 아니고 무엇이리요, 전하는 바에 의하면 삼신의 뒤를 환국이라 하고, 환국은 천제가 사는 나라다"고 하였다. 다시 말하면 지금부터 약 9천 1백여년 전, 아니면 6만 9천여년 전, 중앙 아시아의 천산을 중심으로 광활한 환국이 있었고, 그 나라에 일곱 분의 득도한 한인천제가 있었으며, 천지인 삼신일체에 바탕을 둔 종교가 있었음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한단고기}가 밝혀주고 있는 환국시대의 종교교육(신앙)을 간략히 요약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 환국에 삼신신앙(三神信仰)이 있었다. 삼신은 신선도의 숭배대상임과 동시에 발생원리이며 사상으로서 가장 중요한 몫을 차지한다. 그러므로 이 문제에 대해서는 뒤에 자세히 설명한다.  2) 한인천제는 신앙의 최정상에서 삼신에게 제사지내는 일을 주관하고 무위이화(無爲而化)하였다. 무위이화란 종교적 자연주의 교육을 의미한다.  3) 환국에 오훈(五訓)이 있었다. 오훈은 ? 성신불위(誠信不僞), ? 경근불태(敬勤不怠), ? 효순불위(孝順不違), ? 염의불음(廉義不淫), ? 겸화불투(謙和不鬪)이다.  4) 환국에 오사(五事)가 있었다. 오사는 ? 우가(牛加)의 주곡(主穀), ? 마가(馬加)의 주명(主命), ? 구가(狗加)의 주형(主刑), ? 저가(猪加)의 주병(主病), ? 양가(羊加) 또는 계가(鷄加)의 주선악(主善惡)이다.  5) 매일 조석으로 일출일몰(日出日沒)시에 의식이 있었다.  6) 신선도의 경전으로서 천부경(天符經)이 있었다. 이상은 태고시대의 환국과 그 종교교육(신앙)에 대한 기록을 약술한 것이다. 이는 서구적 사고방식에 의하면 원시시대의 신앙에 관한 기록이다. 그러므로 이를 부정하는 학자도 있을 것이며, 긍정하는 학자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거기에는 타당한 근거가 있어야 한다. 타당한 근거없이 기록 그대로 믿는다면 그것은 과학적 사고와 판단을 결여한 맹목적 신앙이라 할 수 있고, 반대로 무조건 부정하면 이 역시 서구학설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한 비과학적 비주체적 사고의 폐단이라 할 수 있다. 우주에 성주괴공(成住壞空)이 있고, 년중에 춘하추동(春夏秋冬)과 하루에도 조주석야(朝晝夕夜)가 있어 돌아가듯, 인류의 문화에도 생성소멸(生成消滅)이 있어 그것이 돌아간다는 자연법칙을 이해할 것이다. 이를 이해하면 현재나 과거나 마찬가지로 어느 한쪽에 고도로 발전된 문명사회가 있는가 하면 다른 한쪽에는 미개한 원시사회가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을 이해할 것이다. 개인에 천재가 있고 조숙한 사람이 있듯, 민족에도 천재적 민족이 있고 조숙한 민족이 있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원시의 개념을 모든 민족에게 일률적으로 적용시킴은 부당한 억지라 아니할 수 없고, 환국사회에 어느 정도 개화된 문명이 있었다고 할 때, 이를 무조건 부정함은 논리상 모순임을 알아야 할 것이다. 최근에 소련의 고고학자 비탈리라리체프가 {시베리아 구석기문화}에서 1975년 고고학적 발굴을 통해 시베리아 중부 노보시비로크산(Novosibirok山)및 아바칸(Abakan) 산맥의 계곡에서 3만 5천년 전의 구석기 유물이 발굴되었다고 하였다. 말라이아뉘아 구석기 유물로 알려진 이 자료는 우리의 것과 매우 유사하여 주목을 끌고 있다. 이 유물들 가운데는 탁월한 예술적 가치를 지닌 것도 있어서 종래의 서양학자들이 설정하여 놓은 원시인의 개념을 완전히 뒤엎고 있다. 특이한 것은 외부로부터 영향을 받은 듯한 아무런 흔적이 없다는 것이다 이 아바칸 산맥은 중앙 아시아의 바이칼 호수와 매우 가까운 곳으로 한인왕조가 7대 3301년 간 통치할 때의 중심지로 알려져왔는데, 아바칸 산맥의 계곡에서 발견된 유물이 우리의 것과 매우 유사하고 탁월한 예술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고 할 때, 그 때보다도 몇만년 이후인 환국시대의 문화는 상당히 더 발전됐다고 아니할 수 없다. 따라서 한인의 환국시대가 비록 태고시대라 하더라도 선사시대(원시시대)라 할 수 없고 그 시대의 종교교육(신앙)을 함부로 부정할 수 없다는 이론이 성립된다.   2. 한웅천황의 개천입교(開天立敎)와 개천절 다음은 배달국과 그 종교교육이다. {삼국유사(三國遺事)} 고조선기에 의하면 한웅천황은 한인의 서자로서 한늘에서 풍백·우사·운사 등 3천의 무리를 거느리고 태백산 신단수 밑에 내려와 곡(穀)·명(命)·병(病)·형(刑)·선악(善惡) 등 인간의 3백 60여사를 주관하여 홍익인간(弘益人間) 재세이화(在世理化)했다고 한다. 이에 대해 신화같이 풀이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러나 실은 우리민족의 상대비사(上代秘史)이며 신선도의 비기(秘記)로서 한웅천황이 중앙 아시아의 천산(天山)에서 우리나라의 백두산으로 이동하여 득도하고 배달국을 세워 홍익인간 재세이화했음을 은유적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신시역대기}에 의하면 배달은 한웅이 정한 호니 그가 도읍한 곳은 신시요, 뒤에 청구국(靑邱國)으로 옮겨 18세를 전하고 역년은 1565년이었다 하고, 이어서 18세 한웅의 명호와 재위기간 및 생존한 년세를 하나 하나 모두 밝혀주고 있다. 또한 {한단고기} 삼성기전 하편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고 있다. "환국의 말에 안파견(安巴堅)이 삼위산과 태백산을 내려다 보고 모두가 홍익인간할 만하므로 누구를 보낼 것인가를 생각하고 있었다. 오가첨이 말하기를 서자부(庶子部)에 한웅(桓雄)이 있는데 용기에 겸하여 어질고 지혜가 있습니다. 일찍이 홍익인간으로 세상을 개혁할 뜻이 있으므로 태백산에 보내어 다스리게 함이 좋을 듯 합니다 했다. 이에 천부인(天符印) 삼종(三種)을 주고 조칙(詔勅)하여 이르기를 '이제 군(君)은 수고로움을 아끼지 말고, 교도 3천을 이끌고 가서 천도를 깨치어 종교를 세우고 재세이화하여 만세홍범이 되게 하라'하였다.‥‥이에 한웅이 3천의 교도를 거느리고 태백산 정상의 신단수(神檀樹) 밑에 내려오니 이곳을 신시(神市)라 하고, 이 분을 한웅천황이라 하였다. 풍백·우사·운사를 거느리고, 주곡·주명·주형·주병·주선악하고 무릇 인간의 3백 60여사를 주관하여 재세이화하고 홍익인간 하였다. 이 때에 일웅(一熊)과 일호(一虎)가 이웃에 함께 살았는데 일찍이 신단수에 빌어 신계(神戒)의 백성이 되기를 원하므로 한웅이 주술(呪術)로서 신이 되어 깨우친 다음 신령한 쑥 한 심지와 마늘 20개를 주고 경계하여 이르기를 '너희들은 그것을 먹고 100일 동안 햇빛을 보지 않으면 사람의 형상을 얻을 것이다' 하였다. 웅호이족(熊虎二族)은 그것을 받아먹고, 삼칠일(三七日) 동안 웅은 능히 배고품과 추위를 참고 계율을 지키어 의용을 얻었으나, 호는 방만하여 선업(善業)을 얻지 못하였다.‥‥한웅천황이 천도를 크게 깨치어 교화를 베풀 때, 천경을 연(演)하고 신고를 강(講)하여 크게 무리를 가르쳤다.‥‥때에 구환(九桓)이 모두 하나같이 삼신을 조상으로 하였다. 소도를 주관하고 관경을 주관하여 무리와 의론하여 하나로 화백(和白)하고 아울러 지(智)와 생(生)을 모두 닦아 천궁(天宮)에서 살았다".   위의 기록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 한웅천황의 원주지는 중앙아시아 천산(天山) 환국(桓國) 서자부(庶子部)였다.  2) 한웅천황이 태백산에 이르러 "천도를 깨치어 삼신으로 종교를 세우고(開天以三神立敎)"     권선징악하는 법을 세웠다.  3) 한웅천황이 천부경과 삼일신고를 강설하였다.  4) 한웅천황이 소도를 주관하고 무리와 의론하여 하나로 화백하였다.  5) 한웅천황이 주곡·주명·주형·주병·주선악 등 5사와 그밖에 3백 60여사를 주관하여     홍익인간 재세이화하였다. 이를 종합해 말하면 한웅천황이 백두산에서 천일·지일·인일 삼신일체의 천도를 크게 깨치어 도교·불교·유교 삼교일체의 신선도를 설파하고 홍익인간 재세이화하였다는 것이다. 즉 세계인류가 원시의 미몽에서 깨기 전 우리민족은 합리적인 종교를 창설했다는 것이다. 참으로 믿기 어려운 사건이다. 그래서 이것을 믿지 않으려 한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우리민족은 그 기념행사를 해마다 치르고 있으니 이를 어떻게 부정할 것인가?  단군세기에 의하면 단군왕검이 개천(開天) 1565년 음력 10월 3일에 이르러 백두산 단목 밑에서 삼신(三神)에게 제사를 올리고 구환(九桓)의 추대를 받아 조선국을 세웠다고 하였다. 금년은 단기 4330년이다. 따라서 한웅천황이 백두산 천지 신단수 밑에서 개천입교(開天立敎:천도를 깨치어 종교를 세우다)한 때는 지금으로부터 5894년 전 음력 10월 3일인 것이다. 즉, 4330+1565-1=5894년 음력 10월 3일인 것이다. 또한 단군왕검이 조선국을 건국한 때는 지금부터 4329년 전 음력 10월 3일이 된다. 따라서 우리민족이 해마다 치르는 개천절 행사는 첫째, 한웅천황이 백두산 천지 신단수 밑에서 천도를 크게 깨치어(開天) 지금부터 5894년 전 음력 10월 3일에 신선도를 베푼데 대한 기념행사이며. 둘째, 단군왕검이 지금부터 4329년 전 음력 10월 3일, 백두산 신시 단목하에서 조선국을 건국한 데에 대한 기념행사이다. 이는 마치 오늘날 8월 15일이 일본 제국주의로부터 우리민족이 해방되고, 대한민국 정부수립을 선포했다는 두 가지 뜻을 지니는 것과 같은 격이다. 우리민족에게 있어서 음력 10월 3일의 개천절 행사는 민족혼의 탄생과 국가의 탄생이라는 두 가지의 뜻을 기념하는 행사로써 최대 최고의 명절이며 기념행사인 것이다. 그래서 음력 10월은 년중 상달(上달;최고의 달)이 되는 것이다.  따라서 개천절이야 말로 한웅천황이 개천입교(開天立敎)하여 신선도를 설파했다는 살아있는 증거라 할 수 있다. 여기에서 잃어버린 민족혼을 반은 찾은 기분이다. 민족적 주체의식도 되살아나고, 칠흑같은 광야에 먼동이 떠오르듯 민족의 전도가 밝아오는 기분이다. 참으로 통쾌하기 그지없다.   3. 단군조선 시대의 신선도 다음은 단군조선 시대의 종교교육(신앙)이다. {한단고기}에 의하면 단군조선은 초대 단군왕검(한검단군)으로부터 시작하여 단군 고열가제까지 47세 2096년 간 계속된다. {신단실기} 교화원류편을 보면 단군왕검도 신인으로서 풍백·우사·운사 등 신관을 거느리고, 종교를 세워 주곡·주병·주형·주선악 및 의복·음식·궁실·편발(編髮) 등 인간의 366사로서 흑수(黑水)에서 한남(漢南)에 이르는 구족(九族)을 다스렸다 하고, {단군세기}에는 단군왕검이 삼신에게 제사하고 조선국을 세운 후 신시의 옛 규범을 부활하여 천범팔조(天範八條)를 설했다고 했다. 제11세 단군 도해제조를 보면 좀더 구체적으로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그해 10월에 대시전(大始殿)을 세우도록 명령하고 매우 장려하였다. 천제 한웅유상(桓雄遺像)을 봉안했는데 두상에는 태양처럼 광채가 섬섬하였다. 둥근 빛은 온 우주를 비추고 단수 아래 환화의 위에 앉아 계시니 하나의 살아있는 신이 둥근 원의 가운데에 앉아 있는 것 같았다. 천부인(天符印)을 가지고, 대원일(大圓一)의 그림을 누전에 걸었으니 이를 일러 거발한(居發桓)이라 하였다. 사흘동안 재계(齋戒)하시고 이레 동안 그 뜻을 말씀하시니 위풍이 사해(四海)를 움직이는 듯 했다.‥‥3월에 남산에서 삼신에게 제사를 지냈다. 술과 선물을 바치고 나서 치사를 한 후에 술을 따랐다. 이 날밤 술을 특사하여 국인과 더불어 환음하고, 백희(百戱)를 보았다. 누전에 올라 경(經)을 논(論)하고 고(誥)를 연(演)하였다. 오가(五加)에게 이르기를 이후부터는 죽이는 것을 금하고 방생하며 옥을 풀어 밥을 먹이고 사형을 없애라고 하였다. 내외의 사람들이 듣고 기뻐하였다. 이상을 보면 고조선 시대의 신앙은 오늘날 불교사찰의 본당인 대웅전에 불상을 모시고 불교행사를 치르는 것과 다름이 없다. 그러므로 고조선 시대는 신선도가 극히 융성했다고 볼 수 있다.   4. 삼국시대의 신선도 또한 {청학집(靑鶴集)}을 보면 한인은 동방선파(東方仙派)의 조종(祖宗)으로서 그 신선사상이 한웅천황과 단군왕검을 거쳐 문박씨(文朴氏)를 매개로 신라의 영랑(永郞)에게 전승되고 있는데, 이능화의 {조선도교사}를 보면 한인의 신선사상이 문박씨를 거쳐 을밀(乙密)·영랑(永郞)·안유(晏留)·보덕(普德)·성여(聖女) 등 고구려·백제·신라의 선인들에게 전해졌다고 하였다. 그런데 신선도가 신라에 와서도 대행하여 고려 의종 23년 3월 무자일에 내린 신령(新令)을 보면 "선풍을 숭상하라. 옛날 신라에 선풍이 대행하여 그로 말미암아 용천(龍天:임금)이 환열하고 민물(民物:백성)이 안녕하였다"고 했는가 하면, 신라의 사선(四仙)이 놀던 유적으로 고성의 삼일포(三日浦), 통천의 사선봉(四仙峰)과 총석정(叢石亭), 간성의 선유담(仙遊潭)과 영랑호(永郞湖), 금강산의 영랑봉(永郞峰), 장연의 아랑포(阿郞浦)와 강릉의 한송정(寒松亭) 등이 있다. 이상과 같이 삼국시대까지만 해도 신선사상이 대행하였고, 고려 때에도 왕검교(王儉敎)니 재가승(在家僧)이니 하여 다소 그 명맥이 유지되고 있었다. 그러던 차에 원나라 몽고군이 약 백년에 걸쳐 고려를 지배할 때, 그 탄압에 못이겨 신선도는 완전히 불교 속으로 은닉하게 되었다. 또한 근세조선 때에는 송나라의 주자학 일변도 정책으로 다른 사상을 거론하면 그러한 사람을 사문난적(斯門亂賊)이라 하여 타도의 대상으로 하였고, 일제시대 또한 식민정책에 의해 고유사상을 근거없는 미신 또는 사이비종교로 취급하여 타도의 대상으로 하였다. 이로 인해 신선도는 우리민족의 기억에서 거의 사라져 "삼신상제·삼신제왕·삼신할머니·삼신풀이"니 하는 이름으로 겨우 그 뿌리만이 민속에 남아있을 정도이고, 그 사상이나 계율이 무엇인지 오리무중이다. 따라서 신선도의 발생원리가 천도(天道)라 하나, 원시시대에 천도란 있을 수 있느냐 하고 무시하게 되며, 그 사상이나 계율의 존재도 부정하게 된다. 그래서 신선도의 모든 것을 외래적인 관점에서 보게 되고, 그에 대한 기록이나 서적을 왜곡하거나 위서로 보게 되었던 것이다. 여기에서 합리적 성립종교인 신선도는 원시적인 무교(巫敎)로, 신선도를 설한 한인·한웅·한검(단군왕검)의 삼성(三聖)은 신화적인 존재로, 아시아의 황금시기에 찬란하였던 민족문화는 근거없는 것으로, 동방예의지국이니 군자지국이니 하는 것도 국수주의자들의 과장된 표현으로 보게 되고, 민족문화의 원류는 중국이나 인도 아니면 시베리아나 서구로 보게 된다. 그래서 우리민족은 세계사의 무대에서 하잘것 없고, 외국문화만을 받아들인 미개민족으로 자학하게 되는가 하면, 신선도를 부활시키고 이를 계승한 대종교·단군교·천도교·수운교·증산도 등 자생적 민족종교의 전통적 고유사상도 이를 부정하여 모두 외래사상을 흡수·종합·재구성한 짬뽕종교(sinclynitism)라고 매도한다. 곧 민족주체사상을 잃어버림으로써 학자들마저 민족혼을 상실하여 제 민족의 사상을 매도하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주체의식과 동포의식이 없는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어찌 제 민족의 자생종교를 그렇게 매도하고 학대할 수 있단 말인가? 깊이 반성할 문제인 것이다.   5. 신화론자들의 저의와 오류 1) 신화론자들의 저의 이상과 같이 기록사적으로 보거나 실증사학적으로 볼 때 우리민족에게는 환국과 배달국이 있었고, 한인·한웅·한검도 신화적인 존재가 아니라 역사적 실재인물이었다. 그리고 그들에 의하여 도·불·유 삼교일체의 신선도가 베풀어졌고, 오늘날 우리민족이 해마다 치르는 개천절 행사는 한웅천황이 천도를 깨치어 신선도를 베푼데 대한 기념행사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웃 민족인 지나족·몽고족·만주족·일본족 및 그 추종자들인 근세조선의 광신적 주자학자들과 일제의 친일사학자 그리고 최근에 와서는 친 서구적 기독교 신자들도 우리민족의 상고사와 개천절을 신화로 취급한다. 그러면 그 이유는 무엇인가? 사실대로 인정하면 그것은 이웃 민족이 우리민족에 대해 다음과 같은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첫째, 우리민족의 역사는 9193년 전부터 시작됐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 된다(단기 4330년 현재). 그것은 세계에서 어느 민족의 역사보다도 가장 오래됨을 인정하는 것이 된다. 그러나 그에 대해서는 고고학적 근거가 부족하다 하여 인정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한웅천황의 배달국과 신선도 설파는 이를 부정할 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민족의 역사는 적어도 5894년 전부터 시작됐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 된다. 그것은 지나의 황하문명 이전에 우리민족의 문명이 있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 된다. 둘째, 지나족과 몽고족과 만주족 그리고 러시아가 점유하고 있는 북경 이북과 몽고 및 만주대륙 일대와 러시아의 연해주가 원래 그들 민족만의 영토가 아니라 우리민족과 공동소유였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 된다.  셋째, 도교·불교·유교 삼교일체의 신선도가 합리적 성립종교임을 인정하는 것으로써 노자의 도교·석가의 불교·공자의 유교 등 동양사상이 모두 우리민족에서 연원함을 인정하는 것이 된다. 곧 지나족·인도족·일본족·몽고족·만주족이 모두 우리민족의 문화와 사상밑에서 자란 하찮은 민족임을 인정하는 것이 된다.  넷째, 한인천제와 한웅천황과 한검단군(단군왕검)은 신화적인 존재가 아니라 신선도를 설파한 부처님이며 성인이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 된다. 즉 우리민족은 부처님과 성인을 탄생하여 그 교화를 받은 민족이며, 우리나라는 부처님과 성인이 세운 나라로서 원래 군자국이었고 신선지국이었으며 예의지국이었고 천축국(天竺國)이었으며 월지국(月支國)이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 된다. 다섯째, 우리민족은 세계인류가 원시의 미몽에서 깨기전에 종교를 설파한 민족으로서 세계에서 가장 조숙한 민족이며 영리하고 훌륭한 민족이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 된다.  여섯째, 우리민족은 종손민족이라는 이론이 성립되고, 이웃 민족인 지나족·몽고족·만주족·일본족은 우리민족을 우러러 받들어야 한다는 이론이 성립된다.  우리민족의 상대역사를 사실대로 인정할 경우, 이상과 같은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된다. 그것은 이웃 민족의 자존심에 허락되지 않는 문제들일 뿐만 아니라, 굴욕감을 느끼게 할 것이다. 그러므로 이웃 강대민족은 우리민족의 상대역사를 절대 인정할 수 없는 것이다.  반대로 우리민족의 상대역사와 개천절을 왜곡하여 신화로 풀이할 경우, 다음과 같이 우리민족에게 불리하고 이웃 민족들에게 유리하게 된다. 첫째, 우리민족의 역사는 극히 짧아지고 상대역사는 신화속에 파묻히게 된다.  둘째, 우리민족의 강토는 한반도에 국한되어 지나족·몽고족·만주족·일본족이 우리민족과 영토분쟁을 하지 않게 된다.  셋째, 한인천제와 한웅천황과 한검단군은 신화속의 인물로 추락되어 우리민족의 구심점은 무너지게 된다.  넷째, 우리민족은 고유종교와 고유철학이 없는 하찮은 민족으로 전락된다. 이에 따라 국가기강이 해이되고 민족혼이 흐려지게 된다. 그렇게 되면 이웃 강대민족이 우리민족을 마음대로 지배할 수 있게 된다.  다섯째, 지나족은 유교와 도교를, 인도족은 불교를 창설한 민족같이 되고, 일본족·몽고족·만주족도 사상적으로 우리민족에게 눌리지 않게 된다.  우리민족의 상대역사와 개천절을 신화로 풀이하는 경우 이상과 같이 이웃 민족들에게 유리하고 우리민족에게 불리하게 된다. 따라서 우리민족의 상대역사를 신화로 풀이하는 것은 원래 외세인 이웃 민족이 우리민족을 제 민족보다 하위로 떨어뜨리고 지배하기 위한 저의에서 비롯됐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우리민족의 국서고(國書庫)가 이웃 강대민족들에 의해 불태워졌고 사서(史書)가 모두 멸실됐던 것이며, 상대역사가 이들 민족에 의해 왜곡되었고, 우리민족에게 유리하게 기술된 사서는 모두 위서(僞書)로 몰리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중독·왜독·양독 등 외래사상에 물든 일부 외래종교 신자와 학자들도 이웃 민족들의 그러한 저의를 깨닫지 못하고, 제 민족의 상대역사를 마치 남의 일같이 신화로 해석한다. 참으로 얼빠진 사고방식이라 아니할 수 없다.  그뿐만 아니라 사계의 저명한 학자들도 대단히 용기 있고 양심적이며 애국 애족심이 투철한 학자가 아니면 본 학설을 인정하려 아니할 것이다. 왜냐하면 본 학설을 인정할 경우, 자신의 연구에 대해 다음과 같은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1) 본 연구와 관련하여 지금까지 자신이 진행해 온 연구와 주장이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시인하는 것이 된다.  2) 본 연구와 관련된 자신의 업적이 지금부터 무효화되어도 좋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 된다.  3) 지금까지 수행해온 자신의 연구가 솔직하고 진실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 된다.  4) 본의는 아니라 하더라도 민족을 속이고 명예를 누려왔다는 죄책감을 지니게 된다.  이상과 같은 이유로 사계의 대다수 학자들은 본 학설을 인정할 수 없게 된다. 그래서 본 학설을 발표한지 근 10년이 되어도 극소수의 학자를 제외하면 긍정하는 학자도 없고 부정하는 학자도 없다. 대체로 침묵을 지키고 있는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다른 나라의 학자들도 본 학설을 쾌히 수용하려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본 학설을 받아들인다고 해서 자기 나라에 이익될 일이 그리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깊이 반성할 문제라고 생각한다. 개인의 명예가 더 중요한가? 민족의 명예가 더 중요한가? 나아가서 온 인류의 명예가 더 중요한가? 어느 쪽이 더 중요한가를 깊이 생각해 봅시다. 지금은 과거처럼 민족과 국가를 팔아 개인이 호의호식할 수 있는 어리석은 시대가 아니다. 어느 강대국의 이익을 위해 약소국이 무조건 희생당하는 그러한 시대는 지나갔다. 다시 말하면 개인의 이익이나 명예보다도 민족의 이익이나 명예가 더 중요하고, 강대국의 이익이나 명예보다도 온 인류의 이익과 명예가 더 중요하다. 또한 그러한 시대가 올 것이다. 아울러 우리민족도 다른 나라의 식민지였다는 치욕스런 오명을 벗고, 그 지혜와 능력과 홍익인간 정신을 세계적으로 인정받게 되는 시대가 올 것이다. 그때가 되면 본 학설도 자연히 국제적으로 인정받게 되리라 믿는다. 그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학자들의 아집과 아만이 아무리 심하다 하더라도 그때가 되면 어쩔 수 없이 본 학설을 받아들이게 될 것이다. 그러나 애족심과 애국심이 있는 학자라면 그때가 되기 전이라도 객관적인 입장에서 냉정히 본 학설을 비판하고 수용하리라 믿는다. 만사는 사필귀정(事必歸正)이기 때문이다.   2) 신화론자들의 오류 끝으로 신화론자들에게 묻겠다.  첫째, 현재 자신의 신앙이 잘못되고 있거나, 과거 자신이 받은 교육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하지 않는가? 사실 우리민족의 절반 이상이 외래종교 신자이므로 외래종교의 교회당이나 법당 ,도관에서 다른 민족의 역사와 사상을 가르치고 배우면서도 제 민족의 역사와 사상을 배울 기회를 갖지 못했다. 그뿐만 아니라 근세조선 시대에는 지나의 사기(史記)·한서(漢書)·후한서(後漢書) 등 삼사(三史)와 논어·맹자·대학·중용·시경·서경·주역·예기·춘추 등 사서오경(四書五經)과 제자백가서(諸子百家書) 등을 배우느라 자기민족의 역사와 사상을 배우지 못하였고, 일본 제국주의 시대에는 일본의 식민정책 때문에, 1945년 해방 이후에는 서구의 사상과 과학기술을 배우느라 자기민족의 역사와 사상을 제대로 배우지 못하고 있다. 여건이 그러하므로 자기민족의 역사와 사상을 모를 수 밖에 없었고, 자기민족의 역사와 사상을 모르므로 자기민족의 역사와 사상을 부정할 수 밖에 더 있겠는가? 상대역사의 신화론자들은 이 점을 깊이 깨달아야 하고, 정부당국에서도 깊이 반성하여야 할 문제인 것이다.  둘째, 재판하려면 누구보다도 법을 많이 알고 응용할 수 있어야 한다. 사람을 보고 평가하려면 인생에 대한 갖가지의 경험과 깊은 수양을 많이 쌓아야 한다. 그와 마찬가지로, 상고시대의 문화와 사상을 평가하려면 그에 대한 선행연구가 상당히 되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 그에 대하여 얼마나 연구하고 고심하였기에 상대역사를 함부로 부정하고 단군관계 역사를 신화로 매도하려는가? 자신의 연구경력을 반성하여 보아야 할 것이다.  셋째, 상대역사를 확고히 고증하기에 아직도 고고학적 실증사학적 증거가 다소 부족한 감이 없지 않다. 그것은 유적이나 유물 또는 그밖의 자료가 많이 소실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면 그 보관이나 관리소홀의 책임은 누구에게 있다고 생각하는가? 그러한 책임이 자신에게 있다고 자책하여 본 경험이 있는가? 이 나라의 주인은 누구인가? 역사학자만이 주인인가?  넷째, 우리민족의 고도로 발전된 상대문화를 서구적 원시개념이나 사회발전론에 근거하여 부정한다면, 서구적 원시개념이나 사회발전론을 우리가 꼭 믿어야 할 이유가 무엇인가? 그것은 불변적 진리인가? 그것이 불변적 진리로 대우받아야 할 불변적 근거가 있는가?  다섯째, 한인·한웅·한검은 우리민족의 국조이시고 시조이시다. 그런데 만약 이들을 신화적인 존재로 취급한다면, 우리민족은 어디에서 나왔다는 말인가? 그전에는 지구상에 사람이 없었다는 말인가? 과학이 밝힌 바에 의하면 지구상에 인간이 생존한지 약 250만년이다. 이를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Ⅱ. 신선도의 사상 1. 도·불·유 삼교일체 사상 그러면 한인·한웅·한검이 신화적인 존재가 아니라 그들에 의하여 천도에 바탕을 둔 신선도가 베풀어졌다면 그 기본사상이 무엇이냐 하는 문제이다. 이 문제가 지금까지 왜곡되어 밝혀지지 않음으로써 합리적인 신선도가 무교로 추락되었고, 우리민족은 고유종교도 고유철학도 없는 미개민족같이 여겨지고 있는 것이다. "최치원 난랑비서"에 의하면 신선도는 현묘지도(玄妙之道)로서 모든 종교의 원천이며, 도·불·유(道·佛·儒) 삼교일체(三敎一體)의 사상을 근본적으로 자체 내에 지닌 합리적인 종교이다. 최치원 난랑비서의 원문은 다음과 같다. 崔致遠鸞郞碑序 曰 國有玄妙之道 曰 風流 設敎之源 備詳仙史 實  최치원난랑비서 왈 국유현묘지도 왈 풍류 설교지원 비상선사 실  乃包含三敎 接化群生, 且如入則孝於家 出則忠於國 魯司寇之旨也  내포함삼교 접화군생, 차여입즉효어가 출즉충어국 노사구지지야  處無爲之事 行不言之敎 周柱史之宗也, 諸惡莫作 諸善奉行 竺乾  처무위지사 행불언지교 주주사지종야, 제악막작 제선봉행 축건  太子之化也  태자지화야 다음은 위의 원문에 대한 필자의 국역이다.  최치원난랑비서에 이르기를 나라에 현묘한 도(道)가 있으니 풍류라 한다. 이는 종교를 일으킨 원천으로써 신선도의 사서에 상세히 실려 있거니와 근본적으로 (도·불·유)3교의 사상을 이미 자체 내에 지니어 모든 생명을 가까이 하면 저절로 감화한다. 이를테면 집에 들어온 즉 효도하고 나아간 즉 나라에 충성함은 노나라 사구(공자의 벼슬)의 교지와 같고, 하염없는 일에 머무르고 말없이 가르침을 실행함은 주나라 주사(노자의 벼슬)의 종지와 같으며, 모든 악한 일을 짓지 않고 모든 선한 일을 받들어 실행함은 축건태자(가비라국 정반왕의 태자)의 교화와 같다. 이상이 최치원 난랑비서의 내용이다. 우선 본문에 표현된 개념들 사이의 상호관계를 밝히면 난랑 즉 화랑도·현묘지도·풍류도·신선도는 등식관계로써 실내포함삼교(實乃包含三敎)한 종교라는 것이다.  실내포함삼교란 근본적으로 도(道)·불(佛)·유(儒) 삼교일체(三敎一體)의 사상을 이미 자체 내에 지니고 있다는 뜻이다. 즉, 신선도나 화랑도 그리고 풍류도는 모두 동계사상이며 현묘지도로서 모든 종교의 원천이며, 도·불·유 삼교일체의 사상을 근본적으로 자체 내에 지닌 종교라는 뜻이다. 이것이 지금까지 미궁에 빠졌던 우리민족의 고유사상이다. 고유사상이 사대주의자들에 의해 외래사상으로 왜곡되고 있었던 것이다. 여기에서 신선도는 비합리적 미신이 아니라 사상과 철학을 가진 어엿한 성립종교라는 사실이 제1차로 드러난 셈이다.  그러면 그러한 사실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다음과 같은 사실을 추정할 수 있다고 본다.  첫째, 우리민족은 태고시대부터 합리적인 사상과 종교를 가진 문화민족이었다고 추정할 수 있다.  둘째, 우리민족은 세계의 어느 민족보다도 영리한 민족이며, 조숙한 민족이었다고 추정할 수 있다.  셋째, 우리민족은 세계의 중심민족이며 종손민족이라고 추정할 수 있다. 이상과 같이 추정할 수 있다.  독자들은 지금부터 서서히 그러한 자부심을 가져도 부끄럽지 않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불원간 신선도가 과거에도 현재에도 들어보지 못한 참종교라는 사실이 증명될 것이기 때문이다. 과거 1천년 동안 우리민족은 사상적으로 핍박을 받았으니 거기에서 해방될 때가 된 것이다. 역사는 돌고 도는 것이다.  이어서 삼교일체의 의미를 부연 해설해보자. 그것은 어떠한 의미를 지니고 있는가? 그것은 일물삼면(一物三面)적인 체일용삼(體一用三)·집일함삼(執一含三)·회삼귀일(會三歸一)사상이란 뜻이다. 즉 신선도를 나누면 도·불·유가 되고, 도·불·유를 귀일하면 신선도가 되어 신선도는 도·불·유의 본체가 되고, 도·불·유는 신선도의 쓰임인 지류가 된다는 뜻이다. 마찬가지로 그 사상을 비교하여 보면, 신선도는 노자의 도교나 석가의 불교 및 공자의 유교 등 이들 종교의 본체가 되고, 이들 종교는 신선도의 쓰임인 지류가 된다는 뜻이다.. 그래서 신선도는 이들 종교의 개별적인 측면에서 보면 고도교(古道敎)·고불교(古佛敎)·고유교(古儒敎)가 되며, 신선도를 설한 한인·한웅·한검은 고선(古仙)·고불(古佛)·고성(古聖)이 되고, 동시에 삼선(三仙)·삼불(三佛)·삼성(三聖)이 된다. 즉, 한인·한웅·한검은 신화적인 존재가 아니라 역사적 실존인물로서 부처님이었고 성인이었다는 사실이 논증됐다고 할 수 있다.  여기에서 인도(印度)를 남천축(南天竺)이라 하면 배달국과 고조선은 부처님이 세운 나라로서 북천축(北天竺)이라는 사실이 증명됐다고 할 수 있고, 동시에 신선지국(神仙之國)이었으며, 군자지국(君子之國)이었고, 동방예의지국(東方禮儀之國)이었으며, 수미세계(須彌世界)였고, 인도의 시성(詩聖) 타고르의 말대로 아득한 옛날 아시아의 황금시기에 빛났던 등불이었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우리 민족은 중국이나 인도의 문화만을 일방적으로 받아들였던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의 문화를 중국이나 인도로 수출하였다고 추정할 수 있다.   2. 삼교일체의 사상적 성격 신선도가 도·불·유 삼교일체의 사상임을 최치원난랑비서에 의하여 확인하였다. 본항에서는 도·불·유 삼교일체의 사상을 분석적으로 고찰하여 신선도의 사상적 성격을 밝히고자 한다.  첫째, 신선도는 체일용삼(體一用三) 사상이다.  신선도는 도·불·유 사상을 동시에 지니고 있다. 이는 신선도를 분석하면 거기에서 도·불·유 사상을 도출하여 낼 수 있고, 반대로 이들 도·불·유 사상을 모이면 신선도가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신선도는 이를 나누면 셋이나 모이면 하나인 三敎一體 사상으로서 신선도가 본체라면 도·불·유는 쓰임이 된다. 그래서 신선도는 體一用三 사상이다.  둘째, 신선도의 三敎一體 사상은 이를 바로 인식치 못하고 오인할 경우, 외래사상으로 곡해되기 쉽다.  학자들은 흔히 자기의 전공에 열중하다 보면, 그것이 일종의 신앙같이 되고 객관적인 사고를 할 수 없는 경우가 있다. 그렇게 될 경우, 신선도에 내포되고 있는 도교적인 요소는 노장의 도교사상 같이 보일 수도 있고, 불교적인 요소는 석가의 불교사상 같이 보일 수도 있으며, 유교적인 요소는 공맹의 유교사상 같이 보일 수도 있다. 그래서 신선도의 다른 표현인 화랑들의 신선같은 생활태도를 보면, 화랑도가 중국 도교의 영향을 받은 것 같이 보여 그렇게 주장하는 학자들이 있는가 하면, 신선도의 오계(世俗五戒)도 불교학자가 보면 석가불교의 영향을 받은 것 같이 보여 그렇게 주장하는 학자들이 있고, 유교학자가 보면 공맹유교의 영향을 받은 것 같이 보여 그렇게 주장하는 학자들이 있다. 그밖에 어떤 학자는 석가의 불교와 공맹의 유교사상을 절충적으로 수용하였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이와 같이 신선도는 지금까지 많은 오해를 받아 그 주체사상인 도·불·유 사상은 외래사상으로 곡해되어왔는가 하면, 한편 외래사상 속에 흡수되었고, 그 지엽사상(枝葉思想)들은 무교로 취급되어 지금까지 합리적 성립종교인 신선도가 근 1천년 동안이나 매장되어 왔던 것이다.  셋째, 신선도는 세계의 어느 종교보다도 가장 광범한 사상을 지닌 종교이다.  신선도는 하나이면서 도·불·유 3대종교 사상을 동시에 지니고 있으므로 노장의 도교보다도, 석가의 불교보다도, 공맹의 유교보다도, 나아가서 세계의 어느 종교보다도 가장 광범한 사상을 지닌 종교라고 할 수 있다.  넷째, 신선도는 이상과 중용과 현실을 넘나드는 현묘지도이다.  신선도는 현실적인 유교사상과 이상적인 도교사상을 지님으로써 어느 한쪽에 치우치려면, 중도적인 불교사상에 의하여 조화와 통일을 이루어 중용을 지키게 되고, 중용에만 고집하려면 현실적인 유교사상과 이상적인 도교사상에 의하여 현실과 중용과 이상을 넘나들게 된다. 즉, 신선도는 이상과 중용과 현실을 자유롭게 넘나드는 현묘지도이다. 그와 같이 우리민족의 성격도 중용에만 고집하지 않고 이상과 현실을 넘나든다. 그것은 우리민족의 생활습속에 지금도 신선도의 유풍·유속이 남아 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를 잘못 이해하면 우리민족을 이상주의적이라 또는 현실주의적이라 또는 안일주의적이라 오해할 수도 있다.  다섯째, 신선도는 원융무애사상이다. 신선도는 형이상학적인 도교사상과 형이하학적인 유교사상 그리고 그 중도적인 불교사상을 지님으로써 형이상학적인 문제는 도교사상에 의해서, 형이하학적인 문제는 유교사상에 의해서, 그리고 그 중도적인 문제는 불교사상에 의해서 풀리게 된다. 즉, 신선도는 시공을 초월해서 형이상하(形而上下)의 어떠한 문제도 풀 수 있고, 어느 누구와도 화목할 수 있으므로 신선도는 원융무애사상이다.  사상은 민족성의 반영이라 할 때, 신선도가 이상과 같이 심오하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우리민족의 성격과 지혜가 심오하고 창의적임을 의미한다. 따라서 이 한가지 사실로만 보아도 장차 우리민족은 세계에 중심민족으로 부상하게 된다는 사실을 알 수 있을 것이다. 3. 문제점의 논의 화랑도가 신선도와 동계사상으로서 하나의 합리적 성립종교이며, 상고시대부터 있었다고 할 경우, 제기될 수 있는 문제점에 대한 논의이다.  첫째, {삼국사기} 신라본기 진흥왕 37년에 화랑을 처음으로 받들었다는 기록을 어떻게 해명할 것이냐의 문제이다.  만약, 이 기록을 믿는다면 그 보다 14년 전 진흥왕 23년 9월에 가야가 배반하자 이사부(異斯夫)와 함께 출정하였던 사다함(斯多含)을 화랑이라 하였으니 그 이유를 설명할 수 없다. 따라서 진흥왕 37년이라는 연도문제는 신빙성이 없다고 할 수 있다. 그뿐만 아니라 {삼국유사}에는 진흥왕이 즉위하자(원년) 민가의 어진 자녀 가운데 아름다운 자를 뽑아서 원화(原花)로 받들었다 하여 진흥왕 37년도 이전에 화랑제도가 있었음을 말하고 있고, 더욱이 {태백일사}를 보면 삼한고속(三韓古俗)에도 여랑(女郞)을 원화(源花)라, 남랑(男郞)을 화랑(花郞) 또는 천왕랑(天王郞)이라 칭하여 삼한시대(고조선시대)부터 화랑제도가 있었다. 따라서 {삼국사기} 신라본기 진흥왕 37년에 처음으로 화랑을 받들었다는 연도는 모순임을 알 수 있다. 이래서 {삼국사기}의 기록을 어느 면에서 불신하게 된다.  둘째, 최치원 선생이 사학에 대해서 박학한지 의문이고 후대인이 기록한 선대의 역사적 사실을 어떻게 믿을 수 있느냐 하는 반론이다.  최치원 선생보다 박학한 사람도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그는 신라가 낳은 유일한 대문호이며 대사상가이고 도인이다. 그러한 사람의 기록을 믿을 수 없다면 어느 누구의 기록도 믿을 수 없다. 그리고 난랑비서가 후대인의 기록이라 하더라도 "풍류설교지원 비상선사(風流設敎之源 備詳仙史)"라 하여 {선사(仙史)}라는 고서를 근거로 제시하고 있다. 이는 오늘날 사가들의 사서가 모두 저자보다 전대에 관한 기록들이지만 전거를 제시하고 있는 것과 같은 격이다. 그러므로 오늘날 사가들의 사서를 믿어야 한다면 당연히 난랑비서의 기록도 믿어야 하고, 더욱이 한국사상을 말하는 사람치고 최치원 난랑비서를 언급하지 않는 사람이 없음을 생각하면 난랑비서의 기록을 믿지 않을 수 없다. 셋째, 도·불·유는 老·釋·孔에 의해서 집대성(集大成)되었고 창안된 종교인데, 이들 종교보다 신선도나 화랑도가 선행종교라면 어떻게 선대의 사상이 후대의 사상을 지닐 수 있느냐 하는 반론이다.  이 문제가 지금까지 규명되지 않음으로써 우리민족은 철학도 종교도 없는 미개민족같이 자학하여 왔고, 금석지문(金石之文)인 최치원난랑비서가 고의적으로 곡해되고 있는가 하면, 선대의 고도한 문화사상도 부정하게 되고 그에 대한 기록도 위서로 몰리게 되었다고 본다. 도·불·유 사상은 대자연의 운행원리인 천도에 바탕을 두고 설하여진 사상이다. 어느 누구에 의해서 조작되거나 창안될 수 있는 사상도 아니며, 중국이나 인도에만 국한해서 존재할 수 있는 사상도 아니다. 그러므로 본 문제는 도·불·유 사상이 신선도의 지류로서 대자연의 운행원리인 천도에 의해서 발원되었고 역수입됐음을 증명하면 풀리게 된다. 이 문제만 풀리면 기타의 사소한 문제는 모두 풀리게 됨으로 본 문제의 논의는 여기에서 그친다. 다음의 항목부터 더욱 유의하여 주기 바란다. Ⅲ. 신선도의 성립배경 1. 天一·地一·人一 삼신일체의 원의 전술한 바, 한웅천황이 천도를 대각하여 三神으로 종교를 세웠다고 하였다. 우리의 민속에도 三神상제·三神제왕·三神할머니·三神풀이니 하는 三神신앙이 있다. 그러면 三神이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한단고기}는 '고려팔관기(高麗八觀記)'의 三神說을 인용하여 그 뜻을 자세히 밝혀주고 있는데, 요약하면 三神이란 天一·地一·太一(人一의 강조)이라 하고, 天一은 조화의 작용을, 地一은 교화의 작용을, 太一은 치화의 작용을 주관한다고 하였다. 또한 삼신을 쓰임(用), 그 본체(體)를 하나님(一上帝)이라 하였다. 즉 삼라만상의 생성소멸과 동정변화가 우주의 天一·地一·人一 곧 三神一體의 작용에 의해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인간을 비롯하여 만유를 낳고 양육하며 교육시키고 가꾸며 다스리고 벌을 주기도 하는 기능 곧 풀 한 포기가 나고 자라고 죽는 것도 모두 삼신일체의 작용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삼신일체는 시대적 사회적 배경에 의해서 인위적으로 조작된 사상이 아니라 우주운행의 근본원리 또는 만유가 생성소멸하는 원인으로써 우주의 진여이법(眞如理法) 곧 천도(天道)인 것이다. 다음은 三神一體의 구체적 의미이다.  첫째, [一]의 뜻이다.  자전에 의하면 [一]은 "하나일·온통일"자로서 하나에서 전체를 의미한다. 또 [一]은 神과 氣의 의미도 포용한다. 따라서 天一·地一·人一할 때의 [一]은 天地人의 작용과 역할의 변화에 따라 무궁무진한 의미를 지니게 된다.  둘째, [氣]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氣는 유와 무, 양과 음을 초월한 원초적 단위로서 동학에 의하면 만물이 그리로 나고 그리로 돌아가는 天地의 뿌리이며 만물의 어머니이고 생명에너지이다.  셋째, 天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天은 천계(天界)·상계·천국·우주·한늘·태양·태양계를 의미하고, 사람에 있어서는 아버지·남편·남성을 의미한다. 역학적으로 天은 건방(乾方;서북방)·건계(乾季;한겨울)·한대·양성 등을 의미한다. 따라서 天에 "一·氣·神"을 더한 天一·天神·天氣는 천계의 신비적인 성격과 작용과 이법을 의미하게 된다.  넷째, 地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地는 天과 반대의 뜻으로 지계(地界)·지옥(地獄)·하계(下界)·우주의 땅세계·지구·지구계(地球系;지구와 달)를 의미하고, 사람에 있어서는 어머니·아내·여성을 의미한다. 역학적으로 地는 곤방(坤方;서남방)·곤계(坤季;한여름)·열대·음성 등을 의미하고, 地에 "一·神·氣"를 더한 地一·地神·地氣는 지계(地界)의 신비적인 성격과 작용과 이법을 의미하게 된다.  다섯째, 人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人은 天一의 조화작용과 地一의 교화작용에 의하여 태어나고 양육되는 것으로 생명체·생명계·인체·인체계를 의미하고, 사람에 있어서는 자녀·어린이·중성을 의미한다. 그리고 人은 仁자와 같은 뜻도 지니므로 역학적으로 木에 해당되어 동방·봄·온대 등을 의미한다. 또한 人에 "一·氣·神"을 더한 人一·人神·人氣는 생명계와 인간계 및 인체계의 신비한 성격과 작용과 이법을 의미하게 된다.  이래서 天一·地一·人一의 삼신일체는 어디에나 없는 데 없고 무엇이나 이루지 못함이 없는 우주운행의 원리 내지 만유가 생성소멸하는 원인으로써 天道를 의미하고, 종교적으로는 삼신하나님·삼신상제·삼신제석·삼신제왕·삼신할머니라 하여 숭배의 대상이 된다. 이에 대해서는 신선도의 숭배대상에서 상설된다.   2. 삼신일체와 3원적 품부(稟賦)와 삼교일체 사상의 성립                                  *품부(稟賦): 선천적으로 타고나는 것.  시대적 이데올로기는 역사적 경험을 발생학적 배경으로 한다. 그것이 곧 현대사상이기도 하다. 그러나 위대한 사상은 인간의 보편적 의지와 이성적 욕구에 바탕을 두게 마련이며, 그것은 인간이 타고난 천부적 품부(稟賦)에 기인되기 마련이다. 그러면 天一·地一·人一의 삼신일체는 인간이 타고난 천부적인 품부와 어떠한 관계에 있고, 거기에서 어떻게 도·불·유 삼교일체사상이 발원되는가의 문제이다. 이 문제는 가장 중요하고, 또한 그 이론전개에 있어서 가장 어려운 문제이다. 그래서 이 문제가 풀리지 않음으로써 신선도가 하잘것 없는 미신같이 취급되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독자들은 여기에서부터 정신을 가다듬고 단어 하나 하나를 음미하면서 정독해 주기 바란다.  서양철학이나 서양종교에서는 우주의 구성계기를 정신과 물질 또는 선신(善神)과 악신(惡神)의 2원적 계기로 본다. 동양의 성리학에서도 우주의 구성계기를 이(理)와 기(氣)의 2원적 계기로 본다. 그래서 인체계의 구성도 영과 육의 2원적 계기로 본다. 이것이 우주와 인간에 대한 현대철학의 일반적 시각이다.  이와 달리 신선도에서는 三神一體의 논리에 따라 하나의 완성된 체계나 생명체를 3원적 계기(契機)로 본다. 즉 이 우주의 구성을 天一·地一·人一의 3원적 계기로 보고, 만물에도 3원적 계기가 그대로 나타나 인체계의 구성도 호흡·감정·감각(息感觸)의 삼문(三門)과 원기·마음씨·몸짓(氣心身)의 삼방(三房)과 목숨·성품·정력(命性精)의 삼진(三眞) 등 3원적 계기로 본다.  그런데 天一은 호흡·원기·목숨(息氣命)과 불가분적인 연관성을 지니고, 地一은 감정·마음씨·성품(感心性)과 불가분적인 연관성을 지니며, 人一은 감각·몸짓·정력(觸身精)과 불가분의 연관성을 지닌다. 그런데 호흡·원기·목숨을 닦고 수련하는 것이 도교이고, 감정·마음씨·성품을 닦고 수련하는 것이 불교이며, 감각·몸짓·정력을 닦고 수련하는 것이 유교이다.  이를 좀더 구체적으로 설명하면, [一]은 氣의 의미를 지닌다. 그러므로 天一은 天氣로 표현될 수도 있는데, 天氣는 햇볕과 공기를 의미하고, 햇볕과 공기는 인체계의 호흡(息)·원기(氣)·목숨(命)과 불가분의 관계를 지닌다. 곧 인간을 비롯하여 만유는 일순간도 숨을 쉬지 않으면 살 수 없고, 햇볕을 쬐지 않으면 원기가 떨어져 죽게 된다. 이와 같이 天氣는 인간의 호흡(息)·원기(氣)·목숨(命)과 직결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의 목숨은 한늘에 있다(人命在天)고 말한다. 그런데 숨을 고르게 쉬고(調息), 원기를 길러서(養氣) 불로장수 즉 장명(長命)하여 신선이 되자(成仙)는 사상이 무엇인가? 그것이 바로 도교이다.  地一은 地氣로 표현될 수 있는데, 地氣는 땅에서 나는 물(水)과 곡물(穀物)을 의미한다. 우리인간은 물과 곡물을 먹지 않으면 한 순간도 살 수 없는데, 물과 곡물이 인체에 섭취되면 체질을 형성하고, 체질은 감정(感)·마음씨(心)·성품(性)과 불가분의 관계를 지닌다. 그런데 모든 감정을 끊어버리고(止感), 마음을 밝게 하여(明心), 본래의 성품을 깨달아(見性) 성불(成佛)하자는 사상이 무엇인가? 그것이 바로 불교이다.  人一은 人氣로 표현될 수 있는데, 人氣는 부모와 조상의 정기를 의미한다. 우리인간은 부모와 조상의 정기 없이는 이 세상에 태어날 수 없다. 부모와 조상의 정기는 감각(觸)·몸짓(身)·정력(精)과 불가분의 관계를 지닌다. 그런데 감각 즉 관능적인 욕구를 억제하고(禁觸), 몸가짐을 닦아(修身), 정성(精誠)스런 성인이 되자(作聖)는 사상이 무엇인가? 그것이 바로 유교이다.  그런가 하면 삼신일체란 모든 생명체와 완성된 개체는 비록 하나일지라도 그것이 이루어지는 데는 천일·지일·인일의 삼신이 하나가 되어 작용한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목숨(命)도 햇볕·공기·물·곡식·부모의 유전 등 三神의 작용과 불가분적 연관성을 지니고, 성품(性)도, 정력(精)도 三神의 작용과 불가분적 연관성을 지닌다는 것이다. 즉 명·성·정(命性精) 각각의 형성에 삼신(三神)이 모두 작용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도교의 성립에도 天一·地一·人一의 三神一體가 작용하고, 불교의 성립에도, 유교의 성립에도 天一·地一·人一의 三神一體가 작용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노장의 도가사상에도 석가의 불교적인 요소와 공맹의 유교적인 요소가 있고, 석가의 불교사상에도 노장의 도교적인 요소와 공맹의 유교적인 요소가 있으며, 공맹의 유교사상에도 노장의 도교적인 요소와 석가의 불교적인 요소가 있는 것이다. 이상을 도표화하면 도표(1)과 같다.  도표(1) 三神과 3원적 품부와 三敎의 연관표 三 神 天氣 호흡 원기 목숨  調息 養氣 長命 成仙 道敎 三 敎   地氣 감정 마음 성품 止感 明心 見性 成佛 佛敎  人氣 관능 몸짓 정력 禁觸 修身 精誠 成聖 儒敎   동학을 설파한 최제우 선생도 말하기를 "유·불·선(도교의 고전적인 표현)은 천도의 일부분이니 유의 윤리와 불의 각성과 선의 양기는 인성의 자연한 품부이며 천도의 고유한 부분이니 우리의 도는 그 무극대원(無極大源)을 잡은 자이다"고 하였다. 이를 음미하여 보면 유의 윤리는 수신(修身)하는 것이며, 불의 각성(覺性)은 명심(明心)함에 있고, 도(선)의 양기(養氣)는 기(氣)를 기르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기(氣)·심(心)·신(身)을 닦고 기르는 것이 도·불·유라는 것이다. 기(氣)·심(心)·신(身)은 인체계의 삼방(三房)이다. 따라서 동학의 도·불·유 삼교일체 사상도 천일·지일·인일 삼신일체의 천도에서 발원된다는 것이다. 동학의 일파인 수운교의 경전 {동도전서;東道全書}에도 이 세 가지를 나누어 말하면 유·불·선 3가(三家)의 가르침이요, 합하여 말하면 하나의 天道라 하고 있다. 그러므로 신선도의 도·불·유 삼교일체 사상은 天一·地一·人一의 三神一體의 천도를 발생원리로 하고, 인간의 천부적 이성적 욕구인 신선이 되는 것(成仙)과 부처가 되는 것(成佛)과 성인이 되는 것(作聖)을 목적으로 성립되고 있는 것이다. 이래서 {단서구결}에도 "天·地·人을 三才라 하고, 도·불·유를 三敎라 하니, 삼재(三才)가 바로 서면 이에서 三敎가 나온다"고 하였다.  다른 측면에서 三神一體와 三敎와의 관계를 설명하면, 天一은 조화, 地一은 교화, 人一은 치화의 작용을 의미한다. 그런데 도교는 조화, 불교는 교화, 유교는 치화작용과 불가분의 관계를 지닌다. 하나의 예를 들면 도교의 지상목표는 무위자연적 道의 경지에 들어가는 것인데, {도덕경}에 "道는 하나를 낳고, 하나는 둘을, 둘은 셋을, 셋은 만물을 났는다"고 하여 道의 주요작용은 낳음(生)이다. 낳음은 조화작용이다. 조화는 天一의 작용을 의미한다. 불교의 지상목표는 상구보리(上求菩提) 하화중생(下化衆生)으로서 그 주요작용은 교화이다. 교화는 地一의 작용을 의미한다. 유교의 지상목표는 수신제가(修身齊家) 치국평천하(治國平天下)로서 그 주요작용은 치화이다. 치화는 人一의 작용이다.  다시 말하면 도교는 천일의 조화작용과 불가분의 관계를 지니고, 불교는 지일의 교화작용과 불가분의 관계를 지니며, 유교는 인일의 치화작용과 불가분의 관계를 지닌다.  이상과 같이 天一·地一·人一의 三神과 도·불·유 三敎는 불가분적인 연관성을 지니고, 三神思想에서 三敎思想이 발원된다. 이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다음과 같이 연역할 수 있다고 본다.  1) 삼신일체는 불변적 천도이며 진리임을 의미한다.  2) 최치원난랑비서의 내용이 조작된 내용이 아니라 사실임을 의미한다.  3) 신선도는 어느 개인의 역사적 경험이나 필요에 의해서 인위적으로 조작된 개념이 아니라 인간의 천부적 이성적 욕구에 의해서 성립된 자연주의 사상임을 의미한다.  4) 도·불·유 사상은 인도나 중국에 국한해서 존재하였던 민족주의 사상이 아니라 어느 인간사회에도 항존하는 보편적 진리임을 의미한다.  이상과 같이 연역할 수 있고, 여기에서 신선도는 현대종교 이상의 참종교라는 사실이 드러나기 시작했다고 할 수 있다. 아울러 태고시대라 하더라도 우리민족사회는 미개사회가 아니라 정신적 사상적으로는 현대사회 이상의 고도한 사회라 할 수 있다는 논리가 성립되고, 신선도를 설한 한웅천황은 성인 중 성인이시며, 부처 중 부처였다는 논리가 성립된다.  3. 삼신일체와 3대인종과 삼교일체 사상의 성립 위대한 사상은 세계인류를 발생학적 배경으로 성립되기 마련이다. 세계인류는 크게 한대인종(백인종)·열대인종(흑인종)·온대인종(황인종) 등 삼대인종으로 나눌 수 있다. 그런데 역학적으로 삼신일체의 天一은 한대인종을 의미하고, 地一은 열대인종을 의미하며, 人一은 온대인종을 의미한다. 다시 말하면 삼신일체는 한대·열대·온대 등 세계인류 전체를 의미하기도 한다.  한대인종은 육식을 주식으로 하고, 열대인종은 초식을 주식으로 하며, 온대인종은 육식과 초식의 혼식을 주식으로 한다. 그럼으로써 민족성도 그와 같이된다.  상설하면, 한대인종은 육식을 주식으로 함으로써 그 체력이 건장하고 강건하며 그 성격도 야성적이다. 야성적이므로 무서운 것 없이 적극적이고 활동적이며 진취적이다. 또한 동물은 잔인하여 그들의 사회는 약육강식의 사회인데, 한대인종도 때로 잔인하고 인간사회의 약육강식을 자기의 생존을 위한 당연한 수단으로 본다. 그래서 한대인종은 이기적이고 지배적이며 인간사회를 힘으로 다스리려 한다.  열대인종은 나무의 열매를 주식으로 한다. 그럼으로써 열대인종은 그 체력이 나약하고 그 성격도 초목을 닮아서 고정적이고 상향적이다. 고정적이고 상향적이므로 정적 수동적 소극적 무저항적 이상적이다. 또 초목은 혼자서 독립적으로 생활하지 못하고 군생하며 서로 의지하여 지내는데, 열대인종도 인간사회를 호혜적 조화적으로 파악하고 윤리도덕으로 총섭하려 한다.  온대인종은 육식과 초식의 혼식을 한다. 그럼으로써 온대인종의 체력은 그렇게 강하지도 않고 나약하지도 않으며, 그 성격은 한대인종과 열대인종의 성격을 어느 정도 모두 겸하게 되어 활동적인가 하면 수동적이며, 투쟁적인가 하면 평화적이고, 이상적인가 하면 현실적이며, 개인주의적인가 하면 혼란스럽고 이기적이다.  이상과 같이 식생활은 인간의 체질을 형성하고 변화시키며, 체질은 또 성격을 결정한다. 그래서 A형 체질에 A형 성격이 깃들고, B형 체질에 B형 성격이 깃든다. 동물을 예로 들면 육식동물은 사납고, 초식동물은 온순한데, 민족성도 그와 같이 식생활에 따라 형성되고 결정된다는 것이다.  공자께서도 이르기를 "너그럽고 부드러움으로써 가르치고 무도한 자에게도 보복하지 않는 것은 남방의 강함이니 군자가 이에 처하느니라. 무기와 갑옷을 깔고서 죽어도 싫어하지 아니함은 북방의 강함이니 강폭한 자가 이에 처하느니라"고 하였다. 이는 남북의 기온 차이에서 오는 인종의 성격을 말한 것으로 남방의 열대지방 인종은 군자같이 너그럽고 부드러우며, 북방의 한대지방 인종은 마치 용감한 군인같아서 두려움이 없고 강폭하다는 것이다. 또 Hippokrates(B.C.460-375)는 온난한 기후는 주민으로 하여금 평화를 사랑하게 하고, Aristoteles(B.C.384-322)는 말하기를 한지민은 대담하고 난지민은 복종과 굴종에 만족한다고 했다.  이를 종합 음미해 보면 한대인종의 성격에 있어서 그 장점은 활동적이고 적극적인 점이라 할 수 있으나, 그 단점은 이기적이고 포악한 데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열대인종의 성격에 있어서 그 장점은 이상적이고 너그러운 점이라 할 수 있으나, 그 단점은 소극적이고 사회적으로 차별대우를 받아도 저항할 줄 모르는 점이라 할 수 있다. 온대인종의 성격에 있어서 그 장점은 활동적이고 평화적인 점이라 할 수 있으나, 그 단점은 가치관이 지나치게 다양하여 혼란에 빠지기 쉽고 이기주의적인 점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도교는 무위자연주의를 기본사상으로 함으로써 한대인종의 성격상 장점인 활동성과 적극성을 살릴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어린이 같이 소박한 심리상태로 돌아가기를 가르침으로 한대인종의 성격상 단점인 이기심과 포악성을 다스리는데 기여할 수 있다. 따라서 신선도가 한대인종의 교화에 맞게 적절히 변용된 사상이 곧 도교라 할 수 있다. 불교는 상구보리(上求菩提) 하화중생(下化衆生)을 가르쳐 열대인종의 훌륭한 성격인 이상과 관용성을 더욱 신장시킬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적극성과 활동성을 고취시켜 소극적인 성격을 개혁할 수 있고, 개유불성(皆有佛性) 내지 생명평등사상(生命平等思想)을 가르침으로 그 사회의 차별대우를 타파하는 데에 기여할 수 있다. 그래서 신선도가 열대인종의 교화에 맞게 적절히 변용된 사상이 곧 불교라 할 수 있다.  유교는 수신제가(修身齊家) 치국평천하(治國平天下)를 가르쳐 온대인종의 성격상 장점인 평화지향성을 살릴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엄격한 생활덕목 예컨대 오계(五戒)와 오륜(五倫)을 가르침으로써 혼란한 가치관의 통일을 이루고 이기주의를 극복하는데 기여할 수 있다. 그래서 신선도가 온대인종의 교화에 맞게 적절히 변용된 사상이 곧 유교라 할 수 있다.  또한 한대인종은 추위에 견디기 위해 육식을 해야 한다. 그런데 도교는 살생을 묵인한다. 열대인종은 더위를 피하기 위해 육식을 아니하는 것이 좋다. 그런데 불교는 살생을 금지(不殺生)한다. 온대인종은 기온이 따뜻함으로 많은 육식이 필요치 않다. 그런데 유교는 살생을 가리도록(殺生有擇) 한다. 이를 도표화하면 도표(2)와 같다.  도 표(2) 3대인종과 三敎의 연관표  3대 인종 한대인종 육식 殺 生 현실주의 포 악 성 도교 三敎  열대인종 초식 不 殺 生 이상주의 안일주의 불교  온대인종 혼식 殺生有擇 평화주의 혼 란 성 유교   이상과 같이 도교는 한대인종, 불교는 열대인종, 유교는 온대인종과 불가분적 연관성을 지니어 이들 인종의 성격상 훌륭한 점을 더욱 신장시키고, 모순점을 극복하는 데에 기여할 수 있다. 따라서 신선도는 만민일체를 발생학적 배경으로 성립된 홍익인간 이화세계 사상이며, 현대종교를 능가하는 고등종교요 참종교라 할 수 있다. 아울러 신선도를 설한 한인·한웅·한검은 신화적인 존재가 아니라 석가모니나 공자 그리고 노자보다도 더욱 위대한 성인이었고, 부처님이었다는 사실이 거의 증명됐다고 할 수 있다.   4. 삼신일체와 음양오행 사상의 성립 음양오행 사상은 도·불·유에 공통되는 사상이다. 그런데 天一·地一·人一의 삼신일체에서 음양오행 사상이 발원된다. 이를 약설하면 음양이란 밝은 것과 어두운 것, 한늘과 땅, 남성과 여성 같이 상대관계가 서로 경쟁관계가 아니라 상부상조의 불가분적 관계임을 의미하고, 이에는 태양(太陽)과 태음(太陰), 소양(少陽)과 소음(少陰)의 4상(四象)이 있다. 五行은 우주의 삼라만상이 목(木)·화(火)·토(土)·금(金)·수(水)의 다섯 가지로 동정변화 내지 생성소멸 등 순환함을 의미한다. 이러한 음양오행사상이 삼신일체의 천도에서 발원된다.  三神一體의 天一은 태양계, 地一은 지구계(지구와 달)를 의미하기도 한다. 태양계에서는 혹성이 해의 주위를 순환하고, 지구계에서는 달이 지구의 주위를 순환한다. 이는 해와 혹성, 지구와 달의 불가분적 상호 인력작용에 의하여 생긴다. 이를 음양에 비유하면 해와 혹성의 관계는 태양과 태음의 관계에 해당되고, 지구와 달의 관계는 소양과 소음의 관계에 해당된다. 왜냐하면, 해와 혹성, 지구와 달은 서로 끌고 당기며 순환하고 상부상조의 불가분적 양과 음의 관계에 있기 때문이다. 음양관계를 인체계에 부합시키면 인체에 天·地·人을 상징하는 머리·몸통·하반신이 있고, 팔·다리·손가락·발가락의 세 마디가 모두 천·지·인을 상징한다고 한다. 또 음양을 상징하는 두개의 눈, 두개의 귀, 두개의 콧구멍이 있고, 4상을 상징하는 4지(四肢)가 있으며, 그밖에 5장(五臟)과 6부(六腑)도 음양관계로 나뉘어진다. 이래서 음양사상은 삼신일체의 천도에서 발원된다.  오행사상도 삼신일체의 천도에서 발원된다. 지구가 태양의 주위를 공전함으로써 봄·여름·가을·겨울의 4계(四季)가 생기고, 4계의 성격과 작용을 간략히 표현한 것이 木·火·金·水이다. 즉 봄이 되면 초목의 뿌리는 땅속으로 뻗고 줄기는 위로 올라가는데 이를 표현한 것이 木이고, 여름이 되면 몹시 더웁고 햇볕이 쨍쨍한데, 이를 표현한 것이 火이며, 가을이 되면 오곡이 누렇게 무르익어 딴딴한데, 이를 표현한 것이 金이고, 겨울이 되면 비가 몹시 내리고 눈보라가 내리치는데, 이를 표현한 것이 水이며, 그것은 지구의 자전과 공전에 의해 생기므로 지구인 土가 중앙에 위치하여 木·火·土·金·水로 된다. 이것이 五行이다. 오행을 인체에 부합시키면 인체에 오행을 상징하는 5지(指)와 5장(臟)이 있고, 각 부위와 기관의 기능도 五行으로 나뉘어진다. 10천간과 12지지와 60갑자에 대한 설명은 생략한다. Ⅳ. 신선도의 성립계기 1. 우리나라의 기온과 민족성과  신선도의 성립 사상은 민족성의 집약적 표현이며, 민족성은 정치·종교·교육 등 문화의 영향을 받아 형성되고 바뀌어지기도 하지만, 기온(기후) 및 식생활과 밀접한 연관성을 지닌다. 즉, 기온이 한대냐 열대냐 온대냐에 따라 민족성이 다르고, 민족성이 다르면 사상도 그에 따라 다르게 된다는 것이다. 식생활에 있어서도 주식(主食)이 육식이냐 초식이냐 혼식이냐에 따라 민족성이 다르고, 민족성이 다르면 사상도 그에 따라 다르게 된다는 것이다. 종합해 말하면 기온과 식생활과 문화의 공동작용이 민족성을 형성하고, 민족성은 사상형성의 밑바탕이 된다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나라의 기온은 어떠한가? 우리나라의 기온은 세계에서 유일무이하다. 다른 나라에도 일년에 봄·여름·가을·겨울의 4계가 있지만 우리나라는 대륙과 대양에 인접하여 대륙성 기후와 해양성 기후의 영향을 받아 1년 4계의 기온 차이가 몹시 심하다. 다른 나라에 있어서 여름과 겨울의 평균 기온 차이는 섭씨 10℃ 안팎이라 하지만 우리나라에 있어서 여름과 겨울의 평균기온 차이는 섭씨 30℃ 이상이라고 한다. 그래서 우리나라의 중부 이북을 보면 여름의 삼복(三伏) 더위 때는 마치 열대지방의 기온과 같고, 겨울의 대소한(大小寒) 때는 마치 한대지방의 기온과 같으며, 봄과 가을의 춘분과 추분 때는 온대지방의 기온과 같다.  여기에서 우리나라의 기온과 우리민족의 성격을 연관시켜 보면 우리민족의 성격은 한대성·열대성·온대성의 3중 구조적 성격을 복합적으로 지니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즉 차디찬 겨울이 있다는 것은 용감한 군인같이 적극적이고 활동적이며 두려워하지 않는 용덕(勇德)을 지닌 민족성을 낳았다고 볼 수 있고, 무더운 여름이 있다는 것은 인자한 군자와 같이 포용적이고 이상적이며 부드러운 인덕(仁德)을 지닌 민족성을 낳았다고 볼 수 있다. 또한, 따뜻한 봄과 서늘한 가을이 있다는 것은 연예인이나 학자와 같이 평화적이고 낙천적이며 풍류적이고 사색적인 지덕(智德)을 지닌 민족성을 낳았다고 볼 수 있다. 또한 겨울에는 삼한사온(三寒四溫)이 있다. 삼한사온이란 3일 춥고 4일 따뜻하다는 뜻이기도 하지만 7일을 두고 일기에도 희·노·애·구·애·오·욕(喜·怒·哀·懼·愛·惡·欲)의 일곱 가지 변화가 일어난다는 뜻이니, 우리민족의 성격도 이를 닮아서 희·노·애·구·애·오·욕의 7정(情)을 지녀 감정의 변화가 몹시 심하고 사고도 다각적이다. 그래서 우리민족은 너무나 다양한 가치관을 지니게 되는 결점도 있지만 풍부한 감수성과 천재적인 재능을 천부적으로 지니게 되어 독창적이고 창의적인 능력을 지니게 된다. 즉, 한대인종이나 열대인종은 강경함이 아니면 온유함 어느 한쪽만을 지닌 편파적·일방적 성격을 지니고 있다면, 우리민족은 보편적·포괄적인 성격을 지녀 강경함과 온유함, 엄격함과 관대함, 이상과 현실, 선과 악, 그리고 그 중간의 3중구조적 성격을 복합적으로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즉, 우리민족은 백인종의 한대성·흑인종의 열대성·황인종의 온대성을 동시에 복합적 총체적으로 모두 지니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를 달리 표현하면 우리민족은 영웅호걸형·성인군자형·문예인형을 동시에 포괄적으로 지니어 신비스러운가 하면, 멋지고 신나는 민족성을 지니고 있다고 할 수 있다.  3중 구조의 성격을 三神一體에 대입시키면, 한대적 성격 즉 용덕은 아버지와 같은 성격으로서 天一에 해당되고, 열대적 성격 즉 인덕은 어머니와 같은 성격으로서 地一에 해당되며, 온대적 성격 즉 지덕은 어린이 같은 성격으로서 人一에 해당된다. 따라서 우리민족의 성격을 표현한 것이 天一·地一·人一의 三神一體이며, 도·불·유 三敎一體의 신선도라 할 수 있다. 다시 말하면, 우리민족은 천부적으로 도·불·유 삼교일체의 성격을 지니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도·불·유 삼교일체의 신선도는 이 강토 이 민족에 한해서 잉태하거나 배태할 수 있는 사상이라 할 수 있다. 바꿔 말하면 다른 풍토 다른 민족에게는 잉태하거나 배태할 수 없는 사상이란 것이다. 이상을 도표화하면 도표(3)와 같다. 도표(3) 우리민족의 성격과 신선도의 연관표 3중적  성 격 한대성 용 덕 영웅호걸형 父 性 天 一 도 교 三 敎  (神仙道)  열대성 인 덕 성인군자형 母 性 地 一 불 교  온대성 지 덕 문예인형 中 性 人 一 유 교   이래서 우리민족은 태고시대부터 사고와 생활방식에 있어서 도·불·유 삼교일체적이었으니, "한국인들은 사회적으로는 유교도이고, 철학적으로는 불교도이며, 고난을 당하였을 때는 영혼숭배자가 된다"고 평하는 외국인들도 허다하다. 실로 우리민족이 일상생활에 있어서 기쁠 때나 슬플 때, 하나님에게 기도함은 도교인과 같고, 집에서 아침 저녁으로 좌선하고 독경함은 불교인과 같으며, 나아가 대인관계에서 예의 바름은 유교인과 같다.  우리민족의 이러한 도·불·유 삼교일체적 성격이나 생활방식을 외부에서 전래된 도·불·유의 영향이라 할지 모르나 그렇지 아니하다. 왜냐하면, 외래의 도·불·유가 우리나라에 전래된 이래 지금까지 어느 시대이든 전체 민족을 신앙적으로 지배하여 본 일도 없으며, 가령 어느 계층이 신앙하였다 하더라도 도·불·유 가운데 어느 하나를 신앙하였고, 도·불·유 삼교를 모두 신앙한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민족의 도·불·유적 성격이나 생활방식은 외래 도·불·유의 영향이라 할 수 없고, 고유한 신선도의 유풍 유속과 풍토에서 오는 민족성 때문이라 할 수 있다. 이 강토에서 자라는 짐승들도 보면, 까마귀는 이를 효조(孝鳥)라 하는데 어미와 헤어지려면 그전에 어미에게 3개월 동안 공양하고 헤어진다 하며, 미개한 곤충인 벌도 제 어미인 여왕벌이 죽으면 몽상(蒙喪)을 입고, 수달피는 어미가 죽으면 장례식을 지내며, 승냥이는 어미가 죽으면 춘분과 추분에 제사를 지낸다고 한다. 백두산의 범·표범·곰·이리는 날쌔고 용맹하면서도 사람을 함부로 해치지 아니한다. 미개한 짐승들의 그러한 행동을 보아도 우리민족은 풍토적으로 도·불·유 삼교일체적인 성격과 생활방식을 지니고 있다고 할 수 있고, 도·불·유 삼교일체의 신선도는 우리민족이 아니면 잉태하거나 발원될 수 없는 사상이라 할 수 있다.   2. 우리민족의 식생활과 민족성과  신선도의 성립 다음은 식생활에 따른 민족성과 민족사상은 어떠한가의 문제이다. 우리민족은 육식도 초식도 모두 하는 혼식민족이다. 혼식 민족이므로 우리민족의 성격은 원래 육식민족과 초식민족의 성격을 모두 겸하게 된다. 그래서 우리민족의 성격은 온유한가 하면 강인하고, 정적인가 하면 동적이며, 수동적인가 하면 능동적이고, 무저항적인가 하면 저항적이며, 현실적인가 하면 이상적이고, 이기적인가 하면 이타적이며, 개인주의적인가 하면 협동적이다. 그리고 그 중도적인 성격을 지니기도 한다.  민족성이 그러함으로 교육이 잘못되거나 정치·경제·사회·문화가 이기적으로 흘러 사회가 부패하게 되면, 거기에 저항하거나 반대로 타협하게 되고, 아니면 방관하게 된다. 그래서 우리사회에는 데모군중이 있는가 하면 강 건너 불 보듯 하는 방관자들도 있고, 심지어는 비리와 타협하는 모사꾼들도 있다. 반면에 평소에는 생업에 종사하면서 독서나 하던 사람이 국가민족이 환란을 당하여 위태롭게 되면 용감한 장수로 돌변하는가 하면, 탁월한 지략가가 되기도 하고, 열렬한 애국자가 되기도 한다. 이는 임진왜란 때와 조선조 말엽을 보면 이해될 것이다. 이와 같이 식생활에서 파악하여도 우리민족의 성격은 다양하여 그 장점만을 볼 경우 우리민족의 성격을 지·덕·체(智·德·體) 또는 지·정·의(知·情·意)로 보는 학자도 있으니 그러한 성격의 표현이 天一·地一·人一의 삼신일체이며, 도·불·유 삼교일체의 신선도라 할 수 있다.  또한 우리민족은 혼식민족이지만 그 중에서도 특히 쌀·보리·조·콩 등을 상식으로 하는 곡식민족이다. 그래서 우리민족의 성격은 한편 쌀을 닮게 마련이다. 쌀은 벼의 알맹이이며, 벼는 익을 수록 고개를 숙인다. 우리민족도 나이를 먹을 수록 예의 바르고 겸손하며 남의 인격을 존중한다. 또한 쌀은 닦으면 하얗고 깨끗하나 똘똘하여 잘 뭉치지 못하는 결점을 지니고 있다. 그와 같이 우리민족도 수양을 쌓으면 청렴결백하고 솔직담백하나 야무지고 자존심이 강하며 개인주의적인 성격을 지니어 잘 뭉치지 못하는 결점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쌀은 거기에 물을 붓고 끓이면 밥이 되어 백천만 개의 쌀이 한 덩어리가 된다. 그와 같이 우리민족도 그 정신에 얼을 불어넣는 애국교육 내지 민족교육을 잘시키면 전체 민족이 '하나'로 응집하고, 모든 사람을 '우리'라는 울타리 속으로 총섭하리라 확신한다. "하나 내지 우리"의식은 모든 상대관계를 일체관계로 보는 조화사상이며, 호혜사상으로써 지금도 보유하고 있는 우리민족의 고유의식이다. 이러한 민족성에서도 삼신일체 내지 삼교일체의 신선도를 잉태할 수 있는 가능성을 발견하게 된다. 이상의 소론을 요약해 말하면 우리 민족은 백·흑·황 등 3대인종의 성격인 한대성·열대성·온대성과 육식성·초식성·혼식성을 모두 지니고, 3대인종에게 필요한 사상인 도·불·유 삼교일체 사상을 근본적으로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첫째, 우리민족은 온 인류를 대표할 수 있는 자질을 천부적으로 지니고 있다고 할 수 있으며,  둘째, 한국사상은 세계사상을 포용하고 대표할 수 있다는 이론이 성립된다.  따라서 어느 민족도 우리민족의 성격을 이해할 수 있고, 사상을 받아들일 수 있다는 논리가 성립된다. 여기에서 우리민족은 자연적으로 세계무대에 중심민족으로 부상될 것이 예상되고, 우리민족은 세계인류와 세계사상을 지도하여야 할 사명을 천부적으로 타고났다고 할 수 있다. 지금부터 독자들도 포부와 이상을 높게 가져 전쟁과 빈곤에서 시달리는 인류를 구제하고 홍익인간 광명이세하겠다는 원대한 포부를 지니고 책을 읽어야 할 것이다.   3. 산삼과 수도생활과 신선도의 성립 1) 산삼의 약리적 효능과 수도생활의 발생 우리민족의 성격이 근본적으로 도·불·유 삼교일체적이라 하더라도 그러한 성격이 체계화되어 하나의 합리적인 종교로 성립되려면 위대한 부처나 성인의 탄생없이 불가능하다. 부처나 성인은 언제 어디서나 탄생되는 것이 아니라 특수한 계기와 지기(地氣)에서 탄생된다.  계기란 성인이 탄생될 수 있는 어떤 자극 내지 동기를 의미하고, 지기란 땅의 정기로서 그 결정체를 토정(土精) 또는 지정(地精)이라 한다. 우리나라의 지정은 세계에 유례가 없는 것으로 사람의 모양을 하고, 그 뿌리를 약용으로 쓰는 자연생 인삼 곧 산삼을 의미한다. 산삼은 백두산을 중심으로 한반도·만주·러시아의 연해주 등 상고시대 고조선의 강토에서만 자생하는 불로초니 불사약이니 하는 식물이다. {부도지}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고 있다. 시(市)에 온 사람들은 영주(瀛洲) 대여산(垈輿山) 계곡에서 삼영근(三靈根)을 얻으니 곧 인삼이었다. 그것을 영주 해삼(海蔘)이라 하며, 능히 삼덕(三德)을 보전하고 돌아갈 수 있었다. 대개 인삼은 그 수격(數格)을 갖추어 자삭방(磁朔方)에 난 것은 반드시 장생하니 40세(歲)를 1기(期)로 휴면하고, 13기를 1삭(朔)으로 축정하며, 4삭을 경과하여 씨(子)를 맺어 화(化)하니 이러한 것은 부도(符都)의 지역이 아니고는 얻을 수가 없었다. 그러므로 방삭초(方朔草)라 하니 세상에서 불사약(不死藥)이라 하는 것이 이것이다. 그 혹 작은 뿌리라도 부도의 지역에서 나는 것은 모두 영효가 있으므로 시(市)에 온 사람들은 반드시 그것을 구하였다. 대개 삼근영초(三根靈草)인 인삼과 오엽서실(五葉瑞實)의 잣과 칠색보옥(七色寶玉)의 부인(符印)은 진실로 불함삼역(不咸三域)의 특산이요, 사해제족(四海諸族)의 천혜(天惠)였다. 여기에서 말하는 불함삼역(不咸三域)의 불함은 주지하는 바와 같이 백두산이며, 삼역(三域)은 주(註)에 의하면 방장(方丈)·봉래(蓬萊)·영주(瀛洲)의 삼신산(三神山)을 가리킨다. 그러면 백두산에서 불사약인 환혼불로(還魂不老)의 인삼이 생산되었다는 것이다.  또한 자삭방에 난 산삼은 수격을 갖추어 장생하는데 40세를 1기로 휴면하고, 13기를 1삭으로 축정하고, 4삭(40×13×4=2080년)을 경과하여 씨를 맺는데, 중국의 진시황과 한무제가 방사들을 보내어 구하여 오게 하였던 불사약(不死藥)이 바로 이것이라는 것이다.  그러한 산삼의 약리적 효능은 어떠한가? 확실히 알 수 없으나, {신농본초경;神農本草經}에 의하면 주로 오장을 보호하고, 정신을 안정시키며, 혼백을 여일하게 하고, 경기를 멈추게 하며, 삿된 기운을 없애고, 어두웠던 눈을 밝게 하며, 마음을 열리게 하고, 지혜를 더하게 하며, 오래 먹으면 몸이 가볍고 장수하게 한다고 하였다. 이래서 산삼을 먹으면 세 사람의 힘이 나며, 불로장수와 함께 불치병은 물론 기사회생하는 영약으로 친다. 노인이 먹으면 흰 머리가 검어지고, 주름진 얼굴이 홍안이 되며, 무거웠던 몸도 어린아이 같이 가벼워지고, 마음이 열리고, 지혜가 트이며, 어두웠던 눈이 밝게 되어 언제나 젊음을 누릴 수 있다고 믿어오고 있다. 그래서 산삼을 유일무이한 만병통치약이라 하고, 선초(仙草) 내지 신선초(神仙草)라 한다.  그러나 산삼은 보통 숲에 가리어 잘 보이지 아니하는데, 천수(天壽)를 다한 산삼은 좋은 심마니에게 텔레파시로 자기가 있는 곳을 알리고, 심마니(채삼업자)는 비몽사몽 간에 산신령의 계시를 받아 산삼을 채취하게 되는 것이 전체의 80% 이상이라고 한다. 더욱이 부정하면 산신령이 노하여 산삼을 주지 않고 독사나 맹수의 위해를 받는다고 믿어오고 있다. 여기에서 마음을 닦고 정신을 집중시키는 좌선과 수도생활이 발생된다.  현재 심마니들의 수도생활을 보아도 산에 들어가기 3일 내지 7일 전부터 부정한 사람과 접촉을 아니하고, 매일 목욕재계하며, 금욕생활·불육식은 물론 언행을 조심하고, 상주·관(棺)·동물의 시체를 보는 것조차 피하여 몸과 마음을 청결히 한다. 또한 심마니의 가족들도 위와 같은 수도생활을 한다.   2) 수도생활과 신선도의 성립 구체적으로 수도생활이란 어떠한 생활을 의미하는가? 평소에도 재계하는 것을 수도라 하고, 재계는 정제(整齊)와 지계(持戒)를 의미한다. 정제는 사물(邪物)을 막아 기욕(耆慾)을 끊는 것으로 귀로는 음악을 듣지 아니하고, 손으로 악기를 연주하지 않으며, 입으로 악업을 짓지 않고, 눈으로 나쁜 것을 보지 않으며, 마음으로 사특한 것을 생각치 않고, 행동을 구차하게 움직이지 않아 뜻을 산란하게 하지 않는 것이다. 지계는 일정한 계율을 지키는 것이다.  수도방법에는 어떠한 것이 있는가? 신선도의 경전 {삼일신고}를 보면 수도방법이 소개되고 있다. "뭇 사람들은 선악(善惡)과 청탁(淸濁)과 후박(厚薄)을 서로 섞어서 가닥길을 따라 마음대로 달리다가 나고 자라고 늙고 병들어 죽는 괴로움에 빠지나 밝은이는 지감(止感)·조식(調息)·금촉(禁觸)하고, 한 뜻으로 되어가서 가닥길을 돌이켜 참으로 나아가면 크게 신기(神機)를 발하나니"하여 {삼일신고}는 수도의 요체를 지감·조식·금촉이라 설하고 있다. 즉, 수도방법에는 지감법·조식법·금촉법이 있다는 것이다.  지감법(止感法)은 주로 불가에서 행해지는 수양방법으로 모든 감정을 억제하고 마음을 닦아 견성성불하는 데에 목적을 둔다. 그 수양방법으로는 가장 기초적인 수양법으로 오정심관(五停心觀)인 부정관(不淨觀)·인연관(因緣觀)·자비관(慈悲觀)·수식관(數息觀)·불상관(佛像觀) 외에 사념처(四念處)·사정근(四正勤)·사신족(四神足)·오근(五根)·오력(五力)·칠각지(七覺支)·팔정도(八正道) 등 37도품(道品)이 있다.  조식법(調息法)은 주로 도가에서 행해지는 수양방법으로 숨쉬기를 일정하고 고요하게 함으로써 산란한 마음을 안정시키고 양기하여 무병장수하는 신선이 되는 데에 목적을 둔다. 그 수양방법으로는 중기단법(中氣丹法)·건곤단법(乾坤丹法)·원기단법(元氣丹法)·진기단법(眞氣丹法)·삼합단법(三合丹法)·조리단법(造理丹法)등이 있고, 그에 따른 3백 66개의 동작이 있다. 이는 현재 국선도(國仙道)에서 행해지고 있다.  금촉법(禁觸法)은 주로 유가에서 행해지는 수양방법으로 행실을 닦고 기개를 굳게 하여 불의와 타협치 않는 성인군자 양성을 목적으로 한다. 그 수양방법에는 삼륜·오계·오륜·팔조·구서·팔리훈(참전계) 등이 있고, 유교의 덕목이 모두 수신법인 것이다.  이상의 조식법·지감법·금촉법을 도교·불교·유교에서는 삼신일체가 되도록 통일적으로 하지 않고, 어느 하나만을 한다. 그것은 완전한 수도생활이라 할 수 없다. 노자·석가·공자 등 성인이 탄생한 이래 도교·불교·유교에서 대 성인이 탄생하지 못한 이유도 그 때문이라 할 수 있다.  이에 반해 신선도에서는 그러한 수도를 하나씩 따로 따로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동시에 추구한다. 곧 삼신일체가 되도록 한다. {태백일사} 삼신오제본기에 "감(感)은 식(息)을 떠나지 아니하고, 식은 감을 떠나지 아니하며, 촉(觸)도 그 중에 존재한다"함이 이를 의미한다. 이러한 수도생활을 우리민족은 상고시대부터 하였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생각해보자. 지감·조식·금촉의 수도생활을 계속하면서, 눈을 밝게 하고, 마음을 열리게 하며, 지혜를 더하게 하는 신비의 산삼을 장복하였다고 할 경우, 어떻게 되겠는가? 바로 부처님이나 위대한 성인이 탄생되지 않겠는가? 따라서 한인천제와 한웅천황과 한검단군은 부처님이었으며 위대한 성인이었다고 아니할 수 없고, 그들에 의하여 신선도가 베풀어졌다는데 대하여 의심의 여지가 없게 된다. 곧 "신선도의 성립(성인의 탄생)=수도생활+산삼의 신비적인 효능"이라는 등식이 성립된다.  그래서 산삼을 먹고 신통력을 얻었다는 야사도 있고 당(唐)나라 함통(咸通)시대의 박사 피일휴(皮日休)는 산삼에서 불로장수하는 신선사상이 나왔다고 하였는가 하면, {인삼사}에 당후 인나자(唐侯 姻蘿子)·여도사(女道士) 등이 특이한 인삼을 먹고 신선이 되었다는 고사도 있다. 그밖에도 산삼은 민족신앙의 대표적 식물이며, 산삼을 캐는 심마니들이나 산삼을 동경하는 사람들의 신앙이 그대로 민족신앙으로 표현되었다고 주장하는 학자들도 있다.   3) 산삼과 신선도와의 연관성 이상과 같이 신선도는 수도생활에서, 수도생활은 산삼에서 나왔다면, 산삼과 신선도는 상호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이하에서 밝히는 바와 같이 호칭·성격·기능·구조 등을 비교하여 보면 산삼과 신선도는 상호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첫째, 산삼은 세 개의 가지에 중심 일경의 삼아일경초(三?一莖草)인데, 산삼을 먹으면 세 사람의 힘이 나며, 또한 나라를 다스리는데 있어서 대신 세 사람의 공과 맞먹는 성군과 비유된다고 한다. 그래서 산삼의 蔘은 원래 參자이다. 이는 天·地·人의 일체, 父·母·子의 일체, 君·師·父의 일체 등 三位一體를 뜻하는데, 신선도 역시 天一·地一·人一의 三神一體에서 발원된다. 또한 산삼은 세개의 가지에 잎이 다섯이 있는 삼아오엽초(三?五葉草)인데, 신선도의 계율은 三神五帝의 원리에서 발원된다. 그래서 신채호는 신선도를 삼신오제교(三神五帝敎)라고도 하였다. 이와 같이 산삼과 신선도의 구조가 모두 3·1 또는 3·5로서 서로 동일하다.  둘째, 산삼은 너무 건조하지도 않고 너무 축축하지도 않으며, 지나치게 양달도 아니고 지나치게 음달도 아닌 곳에서 잘 자란다. 이는 산삼의 성격이 중도적임을 말한다. 신선도 역시 이상적인 도교사상과 중용적인 불교사상 그리고 현실적인 유교사상을 지녀 서로 견제하고 조화하여 중도적 중용적이다. 이는 산삼과 신선도가 그 성격면에서 서로 일치함이다.  셋째, 산삼은 정신과 질환에는 물론 내과나 외과 질환에도 모두 유효하여 만병통치약이라 칭한다. 그러나 불량하고 불륜한 환자에게는 그리 효험이 없고, 선량하고 진실한 환자에게만 효력을 잘 발휘한다고 한다. 그래서 산삼을 신약(神藥) 또는 신초(神草)라 한다. 신선도 역시 도·불·유 삼교일체 사상으로서 한대·열대·온대 등 어느 민족도 가까이 하면 저절로 감화(接化群生)하고, 그 교육적 효능이 너무나 신비하므로 신도(神道) 또는 신교(神敎)라고도 한다. 이는 산삼과 신선도가 그 기능면에서 서로 일치함이다.  넷째, 산삼은 불로초니 불사약이니 하는 바와 같이 좀처럼 죽지 아니하여 십장생(十長生) 중의 하나이다. 신선 역시 지감·조식·금촉하여 불로장수한다고 한다. 이는 산삼과 신선이 수명에 있어서 서로 유사함이다. 이를 도표화하면 도표(4)와 같다. 도표(4) 산삼과 신선도의 연관표 구 분 호 칭 기 능 구 조 성 격 수 명  山 蔘 神草·仙草 萬病通治 三?一莖  三?五葉 中途的 不老草·不死藥  神仙道 神敎·仙敎 接化群生 三神一體  三神五帝 中庸的 不老不死   이상과 같이 상고시대 고조선의 강토에 한해서 자생하는 산삼과 신선도가 서로 불가분의 연관성을 맺고 있다고 할 때, 그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天一·地一·人一의 삼신일체는 인위적 조작적 개념이 아니라 자연적 절대적 천도임을 증명하는 것이라 할 수 있고, 도·불·유 사상 역시 인위적 조작적 사상이 아니라 불변적 천도임을 증명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天一·地一·人一의 삼신일체 원리는 이 강토 아니면 성립될 수 없는 사상이라 할 수 있고, 도·불·유 삼교일체의 신선도 역시 원래 이 강토가 아니면 성립되거나 발원될 수 없는 사상이라 할 수 있다. 곧 중국이나 인도에서는 발원될 수 없는 사상이라 할 수 있다.  도·불·유 사상이 동양사상의 근간이라 할 때, 이 강토는 동양사상의 발원지임을 증명하는 것이라 할 수 있고, 도·불·유 사상이 한대인종·열대인종·온대인종 등 세계인류의 성격과 자질을 배경으로 성립되었다면 이 강토는 세계의 축소판이며, 세계사상의 진원지라 할 수 있다.  성인의 탄생도 이 강토가 아니면 불가능하고, 한인·한웅·한검은 대성인이었고 부처님이었음을 증명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백두산을 중심으로 한 이 강토는 지구의 정기가 서린 금수강산이며, 지구의 중심이며 정수리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점에서 이 땅에 사는 우리민족은 한늘이 내려준 은혜를 받은 민족이라 할 수 있다. Ⅴ. 백두산과 한웅천황과 신선도의 성립 1. {삼국유사}의 태백산에 대한 이설(異說) {삼국유사}의 고조선기를 보면 한웅천황이 홍익인간 재세이화의 큰 뜻을 품고, 풍백·우사·운사의 신관과 3천의 무리를 거느리고, 태백산 정상의 신단수 밑에 내려와 곡·명·병·형·선악 등 무릇 인간의 360여사를 주관해서 신시(神市)를 베풀었다 하고, 한웅천황의 아들인 단군왕검은 홍익인간의 뜻을 받들어 조선국을 세웠다고 하였다. {한단고기} 삼성기전 하편에는 좀더 자세히 기록되고 있는데, 한웅천황이 태백산 정상의 신단수 밑에서 삼신일체(三神一體)의 천도(天道)를 크게 깨치시고 종교를 베풀었다(桓雄開天以三神設敎)는 사실까지 밝혀주고 있다. 이를 생각하면 {삼국유사}의 태백산은 우리민족의 성산(聖山)으로서 지금의 백두산이다. 또한 그것이 현재의 통설이기도 하다.  그러나 여기에서 말하는 태백산에 대하여 최근 어떤 학자는 중앙 아시아(중국 신강성)의 천산(天山)이라 주장하고, 또 어떤 학자는 중국 감숙성(甘肅省) 돈황(敦煌)의 삼위산(三危山)이라 주장한다. 이에 따라 부득이 이들 주장의 오류에 대해 비판한다.   1) 중국 신강성의 천산설과 그 비판 어떤 학자는 "천산(天山)에서 동으로 뻗어내린 준령을 따라가면 삼위태백(三危太白)과 흑수(黑水)가 있고, 이어서 곤륜산맥(崑崙山脈)이 뻗어내렸다"고 주장하면서 {삼국유사}의 태백산(太白山)을 중국 신강성(新疆省)의 천산(天山)이라 주장한다. 심지어는 태백산·천산·곤륜산·설산·백두산이 모두 동일한 산이라 주장한다. 다시 말하면, {삼국유사}의 태백산과 우리민족이 신성시하는 백두산은 같은 산인데 중앙 아시아의 천산을 지칭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주장은 무엇을 근거로 하고, 과연 옳은가 하는 문제이다. 세계지도를 펴고 보면 중앙 아시아(중국 신강성)에 천산산맥과 천산(天山)이 있고, 삼위산도 있다. 또한 중국대륙 서쪽에 곤륜산맥도 있다. 특히 {중국고금지명대사전(中國古今地名大辭典)}에 천산을 설산 또는 백산(태백산)이라 하고, 설산을 히마리아산(喜馬拉雅山)이라, 또한 곤륜산(崑崙山)을 히마리야산(喜馬拉耶山)이라 하였다. 또한 우리나라의 백두산을 태백산이라고도 한다. 곧 어느 측면에서 보면 태백산·천산·설산·곤륜산·백두산은 동일한 산을 지칭하기도 한다. 여기에서 만약 {삼국유사}의 태백산을 중앙 아시아의 천산이라 가정할 경우, 백두산이라는 호칭도 중앙 아시아의 천산을 지칭한다고 주장하게 된다. 그러면 그러한 주장이 과연 옳은 주장인가 하는 문제이다. 문제의 발단부터 알아보기로 한다.  첫째, 우리나라의 백두산이 태백산이라는 사실은 학계에 널리 알려지고 있으나, 동시에 천산이며 설산이고 곤륜산인데, 그러한 사실이 학계에 알려지지 않았기 때문이라 할 수 있고,  둘째, 중국 대륙 서쪽에 곤륜산맥이 있음으로써 곤륜산도 중국에 무조건 있다고 믿는 지리지식의 부족에 있다고 할 수 있다.  다음으로 이 학설의 모순을 지적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근거로 제시한 문장을 보면 "천산(天山)에서 동으로 뻗어내린 준령을 따라가면 삼위태백(三危太白)이 있다"고 하여 천산과 삼위태백은 다른 산임에도 불구하고 동일한 산으로 파악한 모순을 범하고 있다.  둘째, 天山에서 동으로 준령을 따라가면 三危太白이 있다고 했는데, 지도에 삼위산과 태백산은 있으나 삼위태백은 없다. 또한 {중국고금지명대사전}에도 삼위산과 태백산은 있으나 삼위태백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삼위태백이 있다고 한 근거는 어디에 있느냐 하는 점이다. 더욱이 {한단고기} 삼성기전 하편을 보면, {한단고기} 삼성기전 하편을 보면, 환국의 말에 천산에서 한웅천황 일행이 동으로 이동할 때, 한웅천황은 태백산으로 내려갔고, 반고(盤固)는 삼위산으로 내려갔다고 하여 태백산과 삼위산은 서로 다른 산이다. 그런데 삼위태백을 하나의 산으로 파악한 오류를 범하고 있다. 그렇지 않고 만약 삼위태백이 하나의 산이라면 그 근거를 제시하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셋째, 태백산이란 이름은 이 지구상의 특정 산에만 붙여진 고유명사가 아니라, 여러 지역, 여러 개의 산에 붙여진 보통명사이다. 곧 태백산은 우리나라에도 있고, 일본에도 있으며, 중국에도 있다. 그래서 중앙 아시아의 천산과 우리나라의 백두산이 일명 태백산일 수 있다. 이 경우 {삼국유사}의 태백산이 오로지 중앙 아시아의 천산을 지칭하고, 우리나라의 백두산을 지칭하지 않는다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 근거를 제시하지 않고 있는 점이다.   2) 중국 감숙성의 삼위산설과 그 비판 또 어떤 학자는 중국 감숙성(甘肅省) 돈황(敦煌)의 삼위산(三危山)을 {삼국유사}의 태백산이라 주장한다. 아울러 백두산이라는 호칭도 중국의 삼위산을 지칭한다고 주장한다. 이를 비판하면,  첫째, {중국고금지명대사전} 태백산조를 보면, 중국 섬서성(陝西省) 미현(慟縣)에 대태백(大太白)·이태백(二太白)·삼태백(三太白)이 있고, 거기에 삼지(三池)가 있다고 하였다. 그런데 이를 근거로 태백산을 삼위태백(三危太白)이라 단정함은 지나친 비약이 아니냐 하는 것이다. 곧 삼지삼태백(三池三太白)이 삼위태백(三危太白)이라는 근거가 어디에 있느냐 하는 문제이다. 또한 섬서성 미현의 삼지삼태백(三池三太白)이 삼위산(三危山)이라면 어째서 감숙성 돈황의 삼위산을 섬서성 미현의 삼지 삼태백에 가져다 붙이느냐 하는 문제이다.  둘째, 삼위태백은 하나의 산을 지칭하는 표현이 아니라 두 개의 산을 지칭한 표현이다. 그런데 삼위태백을 하나의 산으로 착각하고 있다. 만약 삼위태백이 하나의 산이라면 그 근거를 제시하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셋째, 태백산이란 이름은 고유명사가 아니라 보통명사이다. 따라서 중국 감숙성 돈황의 삼위산과 우리나라의 백두산이 모두 태백산일 수 있다. 그런데 {삼국유사}의 태백산은 오로지 중국의 삼위산을 지칭하고, 우리나라의 백두산을 지칭하지 않는다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 근거를 제시하지 않고 무조건 주장하는 점이 모순이라 할 수 있다.   2. 태백산의 보편성과 특수성 1) 태백산은 고유명사가 아니라 보통명사이다. 우선 태백산이 어떤 산인가의 문제부터 밝힌다. {중국고금지명대사전}을 보면, 중국 길림성(吉林省)의 장백산(長白山) 곧 우리나라의 백두산을 태백산이라 지칭하고 있다. 그밖에 하남성(河南省) 절천현(浙川縣) 동남 80리에도 태백산이 있고, 절강성(浙江省) 승현(?縣) 서쪽 70리에도 태백산이 있으며, 섬서성(陝西省) 미현(慟縣) 남쪽 양현(洋縣) 경계에도 태백산이 있고, 감숙성(甘肅省) 경양현(慶陽縣) 북쪽 150리에도 태백산이 있다. 이와 같이 태백산이란 이름은 중국지역에만도 특정 산에만 붙여지고 있는 고유명사가 아니라 여러 개의 산에 붙여지고 있는 보통명사이다.  또한 우리나라에도 태백산이란 이름은 백두산 외에 여러 개가 있다. 예컨대, 강원도 삼척군 장성읍과 경상북도 봉화군 소천면 경계 곧 황지에 태백산이 있고, 경남 진해 장복산 동쪽에도 있고, 경남 창령 성산면 정령리와 대합면 합리 경계에도 있으며, 경남 합천 대양면 백암리와 초계면 신촌리 경계에도 있고, 경북 영일 지행 읍내 동악산 아래에도 있으며, 충남 당진 당진읍 시곡리와 원당리에 걸쳐 있는 산도 태백산이라 한다(한글학회,{한국 땅이름 큰사전}, 태백산).  이처럼 태백산이란 이름은 어느 한 나라 특정 지역의 특정 산에만 붙여진 고유명사가 아니라 여러 나라 여러 곳의 여러 산에 붙여진 보통명사이다. 따라서 중국 신강성의 천산과 감숙성의 삼위산을 태백산이라 지칭한다는 기록이 있다 하더라도, 이들 산을 무조건 {삼국유사}의 태백산이라 단정할 수 없는 것이다. 2) {삼국유사} 태백산의 성립요건(특수성) 그러면 {삼국유사}의 태백산(한웅천황이 홍익인간 재세이화한 태백산)은 어느 산인가? 중국 신강성의 천산인가? 아니면 중국 감숙성의 삼위산인가? 아니면 우리나라의 백두산인가? 여기에서 태백산에 대한 판단기준이 요청된다. 곧 {삼국유사}의 태백산은 어떤 성립요건(특수성)을 지니고 있느냐의 문제이다.  한웅천황이 태백산에서 천일·지일·인일 삼신일체(三神一體)의 천도를 깨치시고, 거기에 바탕을 둔 신선도를 베풀었고, 홍익인간 재세이화했다. 거기에서 단군왕검은 조선국을 세웠다. 이를 생각하면 {삼국유사}에서 말하는 태백산은 수도처이며, 天一·地一·人一의 三神사상을 반영하는 천산(天山)이고, 우리민족이 우러러 받드는 성산(聖山)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중국고금지명대사전}에 천산을 설산 내지 백산(태백산)이라 하고, 설산을 히마리야산, 히마리야산을 곤륜산이라 하였다. 이를 종합하면 {삼국유사}에서 말하는 태백산의 성립요건은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 {삼국유사}의 태백산은 천산이다.  ? {삼국유사}의 태백산은 설산다.  ? {삼국유사}의 태백산은 곤륜산이다.  ? {삼국유사}의 태백산은 성산이다.  ? {삼국유사}의 태백산은 수도처이다.  어느 산이든 이상의 요건을 모두 갖추고 있다면 그 산을 {삼국유사}의 태백산이라 할 수 있고, 반대로 갖추고 있지 않다면 {삼국유사}의 태백산이라 할 수 없다는 이론이 성립된다. 이하에서 우리나라의 백두산이 {삼국유사}의 태백산임을 논증한다.   3. {삼국유사}의 태백산과 우리나라 백두산의 동일성 1) {삼국유사}의 태백산은 천산인데, 우리나라의 백두산도 천산이다 {삼국유사}의 태백산은 천산이다. 천산은 세계의 중심 내지 지구의 중심이라는 의미를 지닌다. 세계지리학회는 인공위성에서 지구를 촬영한 결과 우리나라의 백두산이 지구의 중심에 있다고 하였다(세계일보, 1992. 2. 22. 2면. 說往說來). 그리고 백두산 정상의 천지와 송화·압록·두만의 삼강일지(三江一池)는 강이 흐르는 방향으로 볼 때, 天一(乾方)·地一(坤方)·人一(仁方) 三神一體의 천도를 반영한다고 볼 수 있다(이에 대해 후술함). 그밖에도 백두산이 3층으로 되고 있으며, 백두산을 삼신산이라고도 한다. 따라서 백두산은 천산(天山)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대종교의 {삼일철학 역해종경사부합편(三一哲學 譯解倧經四部合編)}을 보면 "천궁(天宮)은 오직 천상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지상에도 있으니 태백산(지금의 백두산) 남북종(南北宗)이 신국(神國)이요, 산상의 신강처(神降處)가 천궁(天宮)이니 태백산은 천산(天山)이며 지금의 백두산이다"고 하여 우리나라의 백두산이 곧 태백산이며 천산이라 하였다. 2) {삼국유사}의 태백산은 설산 내지 곤륜산인데, 우리나라의 백두산도 설산 내지 곤륜산이다 {삼국유사}의 태백산은 설산 내지 곤륜산이다. 그런데 {석가방지(釋迦方志)}와 {석가씨보(釋迦氏譜)} 및 {신증동국여지승람}과 그밖에 여러 백과사전의 기록을 종합해 보면 우리나라의 백두산도 설산 내지 곤륜산이다. 이에 대해서는 본서 제2편과 제3편을 보아주기 바란다. 3) {삼국유사}의 태백산은 성산인데, 우리나라의 백두산도 성산이다. {삼국유사}의 태백산은 성산(聖山)이다. 성산이므로 거기의 초목과 금수는 모두 희다고 {괄지지}에 기록되고 있다. 그런데 우리나라의 백두산을 등반하여 보면 백두산 북쪽의 나무들은 거의 백양목이며 소나무 중에 백송(白松)도 있다. 가을이 되어 산상에서 북쪽의 산밑을 내려다 보면 하얗게 보일 정도이다. 그래서 그곳을 흐르는 강물 이름을 이도백하(二道白河)·두도백하(頭道白河) 등 백하(白河)라 부른다. 또한 백두산 밑에는 흰사슴·흰돼지·흰매들이 지금에도 서식하고 있다.  또한 태백산은 성산이므로 거기에 호랑이·표범·곰·이리가 있으나 사람을 해치지 않으며, 사람들도 산에 올으면 더럽힐가 하여 오줌을 눕지 않는다고 {위서} 물길전에 기록되고 있다. 이러한 기록은 태백산이 이웃 민족들에게 지극한 성산(聖山)임을 의미한다. 그런데 몽고족과 만주족 그리고 우리민족은 각각 국가의 건국시원을 백두산에 둠으로써 백두산을 지극한 성산으로 모신다. 이상과 같이 태백산이 성산인데 백두산도 성산이다. 4) {삼국유사}의 태백산은 수도처인데, 우리나라의 백두산도 수도처이다. 태백산에서 한웅천황이 천도를 깨치시고 신선도를 베풀었다. 따라서 {삼국유사}의 태백산은 수도처로서 거기에는 수도에 필요한 자연적 조건을 갖추고 있어야 한다. 그런데 우리나라의 백두산은 수도에 필요한 자연적 조건을 모두 갖추고 있다. 이에 대해서는 뒤에 상설되고 있다. 5) {삼국유사}의 태백산은 우리나라의 백두산이다 {삼국유사}의 태백산은 천산·설산·곤륜산이다. 이상에서 밝힌 바와 같이 우리나라의 백두산도 천산·설산·곤륜산이었다. 따라서 {삼국유사}의 태백산은 곧 우리나라의 백두산이며, 우리나라의 백두산이 곧 {삼국유사}의 태백산이라는 논리가 성립된다.  한국정신문화연구원이 편찬한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태백산 조)에도 "산에 대한 구체적 묘사를 역사적 사실과 비교하면 단군신화에 나타난 태백산은 오늘날의 백두산(白頭山)을 지칭한 것이다"고 하여 {삼국유사}의 태백산이 백두산임을 밝히고 있다.  여기에서 중국 신강성의 천산과 감숙성의 삼위산이 일명 태백산이고 수도처이며, 거기에 비록 천산·설산·곤륜산이라는 명칭이 붙고, 또한 거기에 하늘에 제사하는 제천단과 한웅천황을 모신 천황당 그리고 산의 정상에 천지(天池)가 있다 하더라도, 천산·설산·곤륜산 그리고 수도처로서의 요건을 모두 갖추고 있지 않은 한 {삼국유사}의 태백산이라 할 수 없다는 이론이 성립된다. 곧 {삼국유사}의 태백산이 중국 신강성의 천산이라는 주장과 감숙성의 삼위산이라는 주장은 부정된다. 4. 한웅천황의 백두산 고행과 신선도의 성립 1) 한웅천황의 백두산 고행 이상과 같이 우리나라의 백두산이 한웅천황이 홍익인간 재세이화한 태백산임을 논증했다. 그러나 한웅천황이 백두산에 왔었다는데 대해 우리민족이 광명을 숭상하기 때문에 태양에 가까운 곳인 백두산 정상에 내려왔다고 주장하는 견해가 있는가 하면, 백두산은 험준하고 연중 눈이 내릴 때가 많기 때문에 사람이 살 수 없는 곳이라 하여 한웅천황이 백두산에 왔었다는 사실을 신화라 하면서 아예 부정하여 버리는 견해가 있다.  전자의 견해이든 후자의 견해이든, 한웅천황 일행의 행동목적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꿈속에서 일으키는 것과 같은 무의식적 행동을 제외하면 어떠한 행동이든 인간의 행동에는 유의적 목적이 있다. 그 목적과 행동이 일치되었을 때, 인간은 어떠한 난관이나 괴로움도 극복할 수 있다.  예컨대, 불교의 출가수도승들은 상구보리(上求菩提) 하화중생(下化衆生)의 큰 뜻을 품고, 견성(見性)과 해탈(解脫)을 위해서 피나는 고행을 한다. 그들은 기름진 평야에서 농사를 지으며 수도하는 것이 아니라, 험준한 고산암벽 밑 눈보라와 싸워가면서 좌선을 한다. 그들은 진수성찬을 먹으면서 수도하는 것이 아니라, 벽곡(抗穀)을 하고 생식(生食)을 한다. 인간과 대화하는 것이 아니라, 초목이나 금수와 대화한다. 그들에게는 여름도 없고 겨울도 없으며, 깨끗한 것도 없고 더러운 것도 없다. 기쁨도 없고 슬픔도 없으며, 행복도 없고 괴로움도 없다. 가진 것도 없고 없는 것도 없다. 한늘이 그들의 집이고 자연이 그들의 재산이다. 암벽의 동굴이 그들의 침실이고, 숲과 나무가 그들의 옷이다. 불교의 출가수도승들은 이와 같이 뼈를 깎고 살을 에는 지난한 고행을 하고, 이를 극복하여 드디어는 대자연과 일체가 되는 대각을 목적으로 한다.  한웅천황 일행이 백두거악에 온 것도 실은 그와 같은 수도고행을 위해서 였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재세이화(在世理化) 홍익인간(弘益人間)의 큰 뜻을 품고 물 좋고 산 좋은 백두거악에 온 것을 보면 그것이 분명하다. 따라서 한웅천황 일행의 백두거악에서의 생활은 폭풍우에 견디고 눈보라와 싸워 이를 극복하는 피나는 고행과 수도생활의 노정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 결과 신단수 밑에서 천도를 대각하여 천부경과 삼일신고 등 신선도를 설하였으니 그 기념행사가 오늘날 음력 10월 3일의 개천절 행사인 것이다. 이는 마치 석가세존이 설산고행을 하고 보리수 밑에서 대각하여 처음으로 녹야원(鹿野園)에서 다섯 비구들에게 해탈을 설함으로써 불교를 일으켰던 것과 같다고 할 수 있다. 2) 백두산의 수도생활 조건 그러나 이상의 소론을 누가 믿겠는가? 이를 증명하려면 그것을 뒷받침할 수 있는 자연적 수도생활 조건이 백두산에 갖추어 있어야 한다. 수도생활에 필요한 자연조건이 갖춰 있지 않으면 장기간의 수도생활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자연적 수도생활 조건이란 예컨대 천기(天氣)와 지기(地氣)를 풍부히 잘 받을 수 있는 자연조건과 건강을 유지하고 지혜를 명석하게 할 수 있는 자연생 식품의 자생 그리고 겨울에도 목욕재계할 수 있는 온천의 분출, 또한 혹한과 혹서, 폭설과 폭우를 피할 수 있는 자연동굴 등이 있어야 한다.  첫째, 백두산 정상에는 수지영부(水之靈府)이며 무열뇌지(無熱惱池)인 천지(天池)가 있다.  천지는 바다와 같은 산상호수인데 그 북쪽 달문(達門)을 통하여 하루에도 수천만톤의 물이 넘쳐 흐르는 수지영부(水之靈府)로서 물이 파랗게 맑고 차며 백두산 정상에 앉아 천지를 내려다 보면 모든 고통과 번민, 오뇌와 신음이 사그러지는 듯 하니, 천지를 무열뇌지(無熱惱池)라고도 한다.  이러한 산상호수에 달이 비칠 때, 목욕재계하고 산의 정상에 앉아 천지를 눈앞에 보고 그리며 선정에 든다면 모든 번뇌 망상이 사라지고 절로 지혜가 솟아날듯 하니 천지는 수도처로서 그 이상의 적지가 없다고 본다.  둘째, 백두산은 신약 또는 불사약이라 불리는 산삼의 고장이다.  {부도지}를 보면 백두산 천지 영주에서 삼근영초(三根靈草)인 산삼이 난다 하였고, 1961년 8월에 백두산 남쪽 산록에서 오래 묵은 산삼을 캤는데, 그 길이는 79.5cm였고, 그 무게는 아홉량 두돈으로 그것은 100여년 이래 최대의 산삼이었다고 한다. 또 백두산에는 산삼씨만 따먹고 사는 인삼조(人蔘鳥)가 있다. 이러한 기록이나 보고들은 명실공히 백두산이 산삼의 고장임을 말한다. 그밖에도 백두산에는 녹용(鹿茸)과 초피(貂皮)와 오엽서실(五葉瑞實)의 잣과 칠색보옥(七色寶玉)의 부인(符印)이 생산되었다. 이와 같이 백두산은 자연생 식품 겸 약품의 원산지이므로 수도처로서 최적지가 된다.  셋째, 백두산에는 겨울에도 목욕재계할 수 있는 백두산 온천과 위장병과 신장병 등 만성병에 효험이 있는 천연 약수천이 있다.  넷째, 백두산의 한 가닥인 묘향산에 단군굴이 있고, 백두산의 관면봉(冠冕峰) 아래에 신선이 수련한다는 얼음굴이 여러 개 있다.  이상과 같이 백두산이 수도처로서의 자연조건을 모두 갖추고 있다. 그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첫째, 백두산이 수도처로서의 최적지임을 증명하는 것이며,  둘째, 한웅천황 일행은 수도인으로서 백두산에서 고행했음을 증명하는 것이라 할 수 있고,  셋째, 백두산이 신선도의 발상지임을 간접적으로 증명해 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3) 백두산의 특수성과 삼신일체의 연관성 그렇다면 백두산의 특수성과 신선도는 어떠한 연관성을 지녀야 한다. 이는 마치 산삼과 신선도가 불가분적 연관성을 지니는 것과 같은 격이다.  첫째, 백두산의 삼강일지(三江一池)는 삼신일체(三神一體)와 불가분의 관계를 지닌다.  왜냐하면 백두산 정상에는 늘지도 줄지도 않는 약 20만 톤의 물에 바다와 같은 천지가 있고, 거기에서 송화·압록·두만의 3강이 발원하여 흐르는데, 송화강은 천일의 방향인 건방(乾方)으로, 압록강은 지일의 방향인 곤방(坤方)으로, 두만강은 인일의 방향인 인방(仁方)으로 흐르고, 또한 이들 3강은 모두 오른 쪽으로 돌아흘러 지구의 회전방향을 나타내기 때문이다.  둘째, 신선도는 삼신사상(三神思想)을 발생원리로 하는데, 백두산이 삼신산(三神山)이다.  봉래·방장·영주의 총칭을 삼신산이라 하고, 이들 산이 모두 백두산에 있으므로 백두산이 곧 삼신산이다. 또 {태백일사}에 옛날의 삼신산은 곧 태백산이며 지금의 백두산이라 하였다. 안호상 박사 역시 여러가지 전거를 들면서 삼신산을 백두산이라 하였다. 이에 대해서는 본서 제4편에서 상설된다.  셋째, 신선도는 3수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는데,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백두산이 3층으로 되었다고 하였다. 실제 백두산을 답사하여 보거나 사진을 보아도 3층이다. 또 천지의 좌우에는 금선(金線)·옥장(玉漿)·은류(隱流) 등 세 개의 샘이 있다. 천지의 동북쪽에 인만(麟巒)·봉만(鳳巒)·벽라(碧螺) 등 세 개의 산이 있다. 이와 같이 백두산은 3수와 연관이 깊다.  이상과 같이 백두산의 지리적 특수성이 삼신일체를 그대로 반영하고, 삼신일체 사상에서 도·불·유 삼교일체 사상이 발원되었다고 할 때, 그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다음과 같은 사실을 연역할 수 있다.  1) 백두산은 그 원명이 삼신산 내지 천산(天山)이다.  2) 백두산은 삼신일체 사상의 발원지이다.  3) 백두산은 도·불·유 사상의 발원지이다.  4) 백두산은 한웅천황의 고행성도지이다.  5) 백두산은 산의 조종이며 세계의 중심이다.  그래서 {태백일사} 신시본기에 "한웅천황의 조강(肇降)이 이미 이 산(백두산)에서 있었으며, 또한 이 산은 신주흥왕(神州興王)의 영지(靈地)인 즉 소도제천(蘇塗祭天)의 고속(古俗)은 반드시 이 산에서 시작되었으며, 자고로 한족(桓族)의 숭경(崇敬) 또한 이 산에서 시작되었으니 심상한 것이 아닌 것이다"라고 하였다. 최근(6월 26일) 홍콩의 성도일보(星島日報) 역시 중국관영 신화통신(新華通信)을 인용하여 백두산에서 40기(基)의 고대제단(古代祭壇) 유적과 함께 각종 유물을 발견하였다고 보도하였다. 이에 대하여 고고학계에서는 새로운 고대문화의 유적이라고 하였다. 이것 역시 백두산이 신선도의 발상지임을 증명하고 소도제천의 고속이 백두산에서 시작되었음을 증명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를 생각하여 볼 때, 신선도가 비록 중앙 아시아의 천산에서 백두산으로 이동되었다 하더라도, 원래의 발상지는 백두산이 아니었던가 하는 의문이 생긴다. 또한 삼신사상이 우리민족의 민족성과 불가분의 연관성을 맺고 있다고 할 때, 인류역사상 신선사상을 최초로 체계화시킨 민족이 또한 우리민족이며, 우리민족은 상고시대 세계문화의 지도적 위치에 있었고, 동아문화의 창조자라는 안호상 박사의 주장이 사실임을 증명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Ⅵ. 삼신일체의 사상적 접근 天一·地一·人一의 三神一體는 구체적으로 어떠한 의미를 지니느냐의 문제이다. 우선 三神一體를 국역하면 세 가지로 풀이할 수 있다.  ? 三神一體는 천일·지일·인일을 하나로 모이면 하나의 개체 또는 생명체가 됨을 의미한다. 즉 삼신일체는 (천일)+(지일)+(인일)=(일체)라는 등식을 의미한다. 다시 말하면 만유가 天·地·人의 3단원 내지 3원적 계기로 구성되어 있음을 의미한다. 삼신일체을 "하나를 잡으면 셋이 들어있다(집일함삼:執一含三)"고 풀이함이 그 뜻이다.  ? 三神一體란 주체는 하나이나 그 작용이 천일(조화)·지일(교화)·인일(치화) 등 셋이라는 뜻이다. 삼신일체을 "주체는 하나이나 그 쓰임이 셋이다(체일용삼;體一用三)"고 풀이함이 그 뜻이다.  ? 三神一體는 天·地·人이 그 구조와 성격에 있어서 서로 같거나 비슷하다는 뜻이다. 다시 말하면 태양계·지구계·인체계의 구조와 성격이 어느 측면에서 서로 비슷하다는 의미이다. 곧 인체계는 天地의 축소판이며 천지는 인체계의 확대임을 의미한다.  三神一體를 이렇게 풀이할 때, 그것은 천태만상의 무궁무진한 묘리를 나타내어 三神一體가 현묘지도임을 알게 된다. 그래서 {태백일사} 삼신오제본기에 "三神一體는 서물(庶物)의 원리가 되어 높고도 크며 불가사의한 현묘한 이치라"하였다. 신채호 역시 "대단군왕검이 이미 三神五帝의 신설(神說)로써 우주의 조직을 설명하고, 그 신설에 의하여 인세 일반의 제도를 정하였다"고 하였다. 이 말은 태양계나 자연계 및 인체계의 구조도 삼신일체의 원리로 구성되어 있고, 상고시대 우리민족의 정치·종교·사회·문화·군사 등의 모든 제도 역시 삼신일체의 원리에 의해서 구성되었다는 뜻이다. 역설하면, 삼신일체의 원리에 의해서 태양계나 자연계 및 인체계 등 대우주의 운행법칙도 설명할 수 있고, 정치·종교·사회·문화·군사 등 상고시대 우리민족의 사회현상도 설명할 수 있다는 뜻이다. 그에 따라 본 항목에서는 삼신일체를 구체적으로 해석하여 신선도의 사상을 밝힌다. 1. 종교사상 첫째, 삼신일체는 만법귀일(萬法歸一)사상이다.  만법귀일이란 모든 현상이나 사물은 왔던 곳으로 되돌아가면 결국 근본이 동일하다는 뜻이다. 삼신일체도 체일용삼(體一用三)사상으로서 하나는 셋으로, 셋은 아홉으로, 아홉은 만유로 파생되는데, 이를 역으로 헤아리면 삼신일체는 만법귀일사상이 된다. 만법귀일 사상을 예를 들어 좀더 자세히 설명하면, 도교·불교·유교·기독교·회교·힌두교 등 모든 종교는 발생연원을 추적해 그 원천으로 되돌아가면 근본이 동일하고, 황인종·백인종·흑인종도 이동경로를 따라 근본을 찾아 원천으로 되돌아가면 조상이 동일하여 같은 동포이며, 지나족·만주족·몽고족·일본족·우리민족도 씨족적 근본을 추적해 원천으로 되돌아가면 조상이 동일한 같은 형제임을 의미한다. 그와 같이 모든 현상이나 사물이 근본으로 되돌아가면 하나가 된다는 만법귀일 사상이 곧 한사상이며 삼신일체사상인 것이다.  들째, 삼신일체는 개벽사상(開闢思想)이다.  삼신일체는 天一·地一·人一의 일체이다. 이 경우 '一'을 인격의 의미로 보면, 삼신일체는 천즉인(天卽人), 인즉지(人卽地)의 의미로서 인간이 우주나 자연과 일체가 될 수 있음을 의미한다. 이는 미개한 인간을 한늘과 같은 신성한 경지와 땅과 같은 자애로운 성격으로 개조하고, 인간 사회를 천국과 같은 낙원으로 개조할 수 있다는 개벽사상이다. 풀어 말하면, 삼신일체는 의식·사상·기술·문화 등 모든 측면에서 인간개벽·민족개벽·사회개벽·세계개벽을 의미한다. 곧 인격완성에 의한 성인군자 양성과 견성성불울 의미하고, 지상선경 또는 불국토 내지 대동세계 건설을 의미한다.  셋째, 삼신일체는 신선사상이다.  삼신일체는 天一·地一·人一의 동일성을 의미하는데, '一'을 능력의 의미로 파악하면, 인간의 능력이 한늘이나 땅의 능력과 같이 될 수도 있고 되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인간이 배우고 닦고 수양하여 최고의 영각을 터득하여 한늘과 땅의 영기와 삼위일체가 되면, 한늘 같이 풍운조화를 일으킬 수도 있고, 땅과 같이 풀이나 나무의 싹을 손바닥에서 트게 하고 자라게 할 수도 있다는 의미이다. 즉 삼신일체는 인간능력의 무한한 발전 가능성과 인간 능력의 무한함을 의미한다. 따라서 삼신일체는 신선사상이다. 이는 노자의 도교사상이나 석가의 불교사상과 일치된다.  이렇게 신선도를 이해할 때, 상대비사(세칭 단군신화)에 등장하는 풍백(風伯)·우사(雨師)·운사(雲師)는 바람귀신·비귀신·구름귀신이 아니라 바람과 비와 구름을 자유자재로 일으키고 조정하는 신관(神官)이라 할 수 있으며, 석가·예수·원효·서산·사명·수운·증산 등의 성인들과 도인들에 얽혀있는 여러가지 초인적인 이야기가 허무맹랑한 꾸민 이야기가 아니며, 축지(縮地)와 장풍(掌風)과 사물이동(事物移動)이 가능하다는 논리가 성립된다. 즉 신변자재(身變自在)하고 불로장수(不老長壽)하는 신선의 실재가 허무맹랑한 전설이 아니라는 것이다.  넷째, 삼신일체는 만물동근사상 내지 생명평등사상이다.  만물동근사상(萬物同根思想) 내지 생명평등사상이란 인간·동물·식물 그밖에 일체 만유의 근본을 들여다 보면, 모두가 한 뿌리에서 나와 근본이 같고 평등하다는 사상이다. 이는 노(老)·석(釋)·공(孔)의 도(道)·불(佛)·유(儒) 모두에 공통되는 사상이다.  ? 天一·地一·人一의 '一'을 기(氣) 또는 신(神)의 의미로 보면 삼신일체는 인간·동물·식물이 모두 일기(一氣) 또는 일신(一神)의 조화로서 근본이 동일하다는 뜻이다. 따라서 삼신일체는 만물동근사상이다.  ? '一'을 인격의 의미로 보면 삼신일체는 天·地·人이 상하(上下) 또는 존비(尊卑)의 관계가 아니라 수평관계로서 평등하다는 뜻이다. 즉 인간이나 동물 그리고 식물 등 일체 만유가 한늘이나 땅과 같이 존엄하고 평등하다는 뜻이다. 따라서 삼신일체는 일체 만유의 차별상을 부정하고 존엄성을 긍정하는 생명평등사상이다.  이에 대하여 서구적 관점에서는 어째서 인간과 동물이 평등하느냐 하고 반론을 제기할 수 있다. 인간에게도 동물과 같은 야성이 있고, 동물에게도 인간과 같은 지성이 있다. 즉 인간에게 영이 있고 마음이 있고 지혜가 있고 사랑이 있듯이, 동물에게도 영이 있고 마음이 있고 지혜가 있고 사랑이 있다. 이에 대하여 최근의 과학이 다소 입증하고 있지만 사람이 혹사당하면 괴로워하듯 동물도 혹사당하면 괴로워하고, 인간이 죽음에 임박하면 서러워하듯 동물도 죽음에 임박하면 서러워하며, 인간이 교육을 받으면 더욱 영리하여지듯 동물도 교육을 받으면 더욱 영리하여지고, 인간이 자식을 사랑하듯 동물도 자식을 사랑하며, 인간이 부모에게 효도하듯 동물도 부모에게 효도하는 동물이 있다. IQ가 80이 못되는 인간이 있는가 하면, IQ가 80을 넘는 동물이 있다. 제 자식과 제 부모를 죽이는 인간이 있는가 하면 사경에 이른 제 새끼와 제 어미를 살리는 동물이 있다. 이와 같이 인간과 동물 사이에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이고, 그 근본은 인간이나 동물이 동일하다. {삼일신고}에 "사람과 만물이 다 같이 세 가지 참함을 받나니, 이는 성품과 목숨과 정기라, 사람은 그것을 온전하게 받으나 만물은 치우치게 받느니라"함이 바로 그러한 이론을 뒷받침한다. 여기에서 생명평등사상 내지 만물동근사상이 이론적으로나 실증적으로 성립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생 인류는 동물을 혹사하다가 도살하여 자기의 배를 채운다. 동물의 입장에서 볼 때, 인간은 폭군이고 전제군주인 것이다. 깊이 반성하여야 할 문제라 할 수 있다.  다섯째, 삼신일체는 유신론(有神論)과 무신론(無神論)을 다 포용하는 유무불이(有無不二)의 사상이다.  일반적으로 종교에서 창조주라 할 때, 창조주는 이 우주가 아닌 다른 세계에 있으면서 초인적 불가사의한 능력으로 인간은 물론 만유와 우주까지도 창조하시고 조화를 부리며 인간 위에 있으면서 인간에게 화와 복을 내리는 최상의 신(神)을 의미한다. 삼신일체의 논리에 의하면 그러한 의미의 신(神)이 없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 삼신일체의 '신(神)'은 天一·地一·人一의 '一'로서 우주의 어디에나 있으면서 만유의 근본이고 만유를 포용하며 만유를 조화·교화·치화하는 신비적인 작용을 의미한다. 마치 서구종교의 창조주와 같은 작용을 한다. 그러나 별개의 세계에 있으면서 만유를 지배하고 창조하는 그러한 의미의 신이 아니다.  ? 삼신일체는 天·地·人을 대립적 위계적으로 파악한 표현이 아니라, 일체적 수평적으로 파악한 표현이다. 즉 삼신일체는 신본위의 사상도 아니고, 인간본위의 사상도 아니다. 인간 위에 신이 없고, 인간 밑에 신이 없으며, 신 위에 인간 없고, 신 밑에 인간 없다는 의미이다. 인간이 곧 신이며, 신이 곧 인간이라는 의미이다. 삼신일체는 신인일체(神人一體)의 표현이다. 이와 같은 이유에 의하여 삼신일체의 논리는 절대자로서의 신, 창조자로서의 신, 지배자로서의 신을 부정한다. 즉 삼신일체는 무신론이다.  그러나 한편 삼신일체는 물활론(物活論) 내지 범신론(汎神論)적 일신론(一神論)으로서 유신론(有神論)이다. 물활론이란 일체의 만유에 의식과 생명이 있다는 사상이며, 범신론이란 물활론을 영적 신비적인 차원에서 파악한 사상으로서 태양이든 지구이든 일체의 만유에 영혼이 있다는 사상이다.  삼신일체는 그러한 의미의 물활론 내지 범신론적 일신론이다. 즉, 天一·地一·人一의 '一'을 생명의 의미로 파악하면 삼신일체는 만유에 생명이 있다는 뜻이며, '一'을 하나님의 의미로 파악하면 만유는 모두 하나님의 속성을 지니고 있다는 뜻이며, 태양계와 지구계와 생명계가 모두 하나님의 이법에 따라 일체를 이루고 있다는 뜻이다. 다시 말하면 삼신일체란 태양계와 지구계와 생명계가 따로 따로 독립된 생명체이면서 하나님의 이법에 따라 움직이는 거대한 하나의 생명체라는 뜻이다. 즉 전체우주가 거대한 하나의 생명체라는 것이다. 이는 마치 인간의 육체를 구성하는 각 기관이 따로 따로 움직여 하나의 독립된 생명체같이 보이나 중추신경의 지시에 따라 일체를 이루는 것과 같은 격이다.  따라서 삼신일체는 물활론 내지 범신론적 일신론으로서 유신론이다. 여기에서 위에서 밝힌 바를 아울러 생각하면 삼신일체는 유신론과 무신론을 다 포용하는 유무불이의 사상이다.  여섯째, 삼신일체는 순환론이다.  여기에서 말하는 순환론이란 봄·여름·가을·겨울이 돌아가 듯, 시작이 있는 듯 하면서 없고, 끝이 있는 듯 하면서 없으며, 세상만사가 돌고 돌아간다는 의미이다.  天一·地一·人一의 '一'을 공간 또는 시간의 의미로 보면, 삼신일체는 천계(天界)·지계(地界)·인계(人界)의 삼계일체(三界一體)를 의미하며, 과거·현재·미래의 삼세일체(三世一體)를 의미한다. 즉 삼신일체는 시간과 공간을 미시적 분석적으로 파악하면 천계·지계·인계가 각각 다르고 독립적으로 존재하나, 거시적 통일적으로 파악하면 천계·지계·인계도 연결된 하나의 공간이며, 과거·현재·미래도 연결된 하나의 시간이라는 의미이다. 그러므로 삼신일체는 시간과 공간에 있어서 시작도 없고 끝도 없다는 무선무후(無先無後) 무두무미(無頭無尾)의 일원사상(一圓思想)이다. {천부경}의 일시무시일(一始無始一)과 일종무종일(一終無終一) 및 만왕만래(萬往萬來)가 이를 의미한다. 이는 시작이 있는 듯 하면서 없고, 끝이 있는 듯 하면서 없으며, 세상만사가 가고 온다는 의미이다. 그러므로 삼신일체사상은 불교의 윤회사상과 근본원리를 같이 하는 순환론이다. 이러한 사상을 하나의 형상으로 나타내면, 그것은 만(卍)자가 된다. 오늘날 만(卍)자가 불교의 표상같이 여기고 있으나, 그것은 원래 신선도의 표상이다.  일곱째, 삼신일체는 3원론적 1원론이다.  天一·地一·人一의 '一'을 단원의 의미로 보면, 삼신일체는 양성(天)·음성(地)·중성(人)의 3단원을 모으면 하나의 완성된 체계 내지 생명체가 되고, 이를 나누면 양성·음성·중성의 3단원이 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따라서 은하계·태양계·지구·인체(人體)·원자 등 우주에 존재하는 어떤 것이든 그것이 하나의 완성된 체계이거나 생명체라면, 양성·음성·중성의 3단원으로 구성되었다는 3원론적 1원론이 삼신일체이다.  예컨대, 인체는 머리·몸통·사지의 3단원으로 구성되어 있고, 손가락·발가락이 모두 세 마디로서 3단원으로 구성되어 있다. 또한 인체계를 보면 기(氣)·심(心)·신(身) 내지 명(命)·성(性)·정(精)의 3단원으로 구성되어 있다. 지구도 지각·맨틀·핵의 3단원으로 구성되어 있고, 원자도 양성자·중성자·전자의 3단원으로 구성되어 있다.  여덟째, 삼신일체는 호혜일체사상이다.  天一·地一·人一의 삼신일체는 3원론적 1원론으로서 어느 쌍방이 대립하게 되면 나머지 1방의 중재와 조정에 의해 화해를 이루게 된다. 따라서 삼신일체는 호혜일체사상이다. 예컨대, 삼신일체는 천인합일(天人合一)·인내천(人乃天)·성속일체(聖俗一體)·물심쌍전(物心雙全)·문무양전(文武兩全)·교정일체(敎政一體)·충효양전(忠孝兩全)·주객일체(主客一體)·자타일여(自他一如)·개전일체(個全一體)·사해동포주의(四海同胞主義)·우리의식(意識)·홍익인간(弘益人間)사상이며, 또한 그렇게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아홉째, 삼신일체는 삼달덕(三達德)을 의미한다.  삼신일체를 인성적인 측면에서 파악하면 천일은 한대적인 성격을, 지일은 열대적인 성격을, 인일은 온대적인 성격을 의미한다. 한대적인 성격은 용덕에 해당되고, 열대적인 성격은 인덕에 해당되며, 온대적인 성격은 지덕에 해당된다. 따라서 삼신일체는 용(勇)·인(仁)·지(智)의 삼달덕(三達德)의 일체를 의미한다. 즉 인간이든 국가이든 사회이든 어느 개체이거나 집단이 건전하려면 용인지의 삼달덕을 모두 갖추어야 한다는 것이다. 역설하면 삼달덕이 균형을 유지하지 못할 때 그 집단이나 개체는 불안하다는 것이다.  열째, 삼신일체는 무극대도(無極大道)이다.  무극대도란 가이없이 무한히 큰 진리란 뜻이니, 삼신일체의 이법을 고대사회에 적용하면, 그 당시의 정치·종교·교육의 원리를 알 수 있고, 광대무변한 우주의 현상에 적용하면 우주의 구조를 파악할 수 있다는 것이다.  삼신일체는 天一·地一·人一의 일체를 의미한다. 이는 태양계·지구계·인체계의 구조가 서로 동일하고, 양성·음성·중성의 3단원으로 구성되어있으며, 그 중심은 강력한 일기(一氣)의 집합체임을 의미한다. 이러한 논리를 확대부연하면 1단원도 다시 3단원으로 구성되어 태양계와 지구계와 인체계가 각각 9단원으로 구성되었음을 의미하고, 나아가서 이 우주도 거시적으로는 3중 구조이지만 미시적으로는 9중 구조로 되었음을 의미하며, 그 중심은 강력한 일기의 집합체임을 의미한다. 그래서 동양종교에서는 우주를 말할 때, 삼천세계(三天世界) 또는 구천세계(九天世界)라고 말한다.  그러한 이론을 아는 대로 실제에 적용시키면, 인체에 삼천세계(三天世界)의 정기를 받은 명(命)·성(性)·정(精) 삼진(三眞)이 있고, 구천세계(九天世界)의 정기를 받는 구규(九竅)와 구단(九丹)이 있다. 또한 지구도 지각·맨틀·핵의 3중 구조로 되고 있는가 하면, 지구상의 인류도 크게는 백인종·흑인종·황인종의 3대 인종으로 나뉘고, 고대의 우리민족은 인류를 구이(九夷)로, 지구의 온 땅을 구주(九州)로 나누기도 하였다. 또한 태양계에도 실제 9개의 혹성이 있다. 이와 같이 삼신일체의 이법(理法)이 너무나 오묘하여 과학적으로도 사실과 부합일치된다. 그래서 삼신일체는 무극대도(無極大道)인 것이다.   2. 정치사상  삼신일체의 정치학적 해석이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상고시대는 교정일치(敎政一致) 내지 제정일치(祭政一致) 사회였다. 즉, 종교지도자가 정치지도자였고, 종교체제가 정치체제였으며, 종교행사가 정치행사였고, 종교원리가 정치원리였으며, 종교영역이 정치영역이었다는 것이다. 그러한 원칙에 의해서 삼신일체의 원리를 정치에 적용시켜 상고시대 우리민족사회의 정치적 성격과 형태를 알아보기로 한다.  첫째, 삼신일체는 만민일체 내지 세계동포주의 사상이다.  만민일체(萬民一體) 사상이란 백인종·흑인종·황인종의 차별이 없고 평등하며, 온 인류를 일체로 보는 사상이다. "제1편 Ⅲ의 1"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天은 건(乾), 地는 곤(坤), 人은 인(仁)의 뜻을 지니고 있으므로 [一]을 기온이라는 측면에서 파악하면 天一은 한대를, 地一은 열대를, 人一은 온대를 의미하고, [一]을 인종적인 측면에서 파악하면 天一은 한대인종을, 地一은 열대인종을, 人一은 온대인종을 의미한다. 즉, 天一·地一·人一의 삼신일체는 인종적인 측면에서는 백인종·흑인종·황인종의 일체 곧 만민일체를 의미한다. 또한 모든 생명체는 天一·地一·人一의 작용에 의해 태어난다. 그러므로 삼신은 만민의 조상이 되는 것이며, 만민은 동포관계이고 형제관계가 된다. 곧 삼신일체사상은 세계동포주의 내지 세계형제주의사상이기도 하다.  그러한 유습이 지금도 우리사회에 남아있으니 동성동본 끼리의 혼인을 금하고, 가급적 인연이 먼 타성 끼리의 혼인을 사회관습적으로 권장하는 것이나, 가까운 이웃 끼리 사돈을 맺음보다도 가급적 먼 거리와 사돈을 맺도록 권장하는 풍습이 바로 만민일체의 평등사상 내지 세계동포주의를 지향하였던 데서 나온 유습이 아니었던가 한다. 그러한 유습이 삼국시대 이후 많이 사라져 근세조선에 와서 유교의 영향에 의하여 다소 부활되었으나 삼국시대 이전 상고시대로 올라갈 수록 더욱 강하였다고 추정할 수 있다.  둘째, 삼신일체는 최대의 인권존중사상이다.  삼신일체는 天一·地一·人一의 일체이다. 이는 한늘과 땅과 사람이 일체라는 뜻으로 사람을 한늘과 같이 섬기고 땅과 같이 소중히 여기라는 뜻이기도 하다. 또한 한늘은 아버지에, 땅은 어머니에 비유되기도 하므로 삼신일체는 사람 섬기기를 아버지 섬기듯 하고, 어머니 모시듯 하라는 뜻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삼신일체는 최대의 인권존중사상이다.  셋째, 삼신일체는 인간평등사상이다.  天一·地一·人一의 '一'을 인격적인 측면에서 파악하면 삼신일체는 신분의 상(天)·중(人)·하(地)의 일체를 의미한다. 즉. 삼신일체는 신분의 상하·노사·귀천·장유·남녀의 차별이 없는 일체를 의미한다. 따라서 삼신일체는 인간평등사상이다. 그래서 삼국시대 초까지만 하여도 우리민족사회에는 여성을 극히 존중하였다고 한다. 이는 신라시대 선덕·진덕·진성 등 여성으로서 왕위에 오른 것을 보아도 알 수 있다.  넷째, 삼신일체는 국민전체의 합의제도(合意制度)이다.  天一·地一·人一의 '一'을 의견의 의미로 보면 삼신일체는 天·地·人의 의견일치를 의미한다. 즉, 上·中·下의 의견일치, 정부·국민·개인의 의견일치, 경제인·교육자·정치인의 의견일치 등 전체 국민의 의견일치를 의미한다. 다수결에 의하는 것이 아니라 전원일치의 합의제도를 의미한다. {단군세기}를 보면 단군왕검이 천제(天帝)가 된 것도 구한(九桓:국민전체)의 추대에 의하여 되었으며, 고구려의 제가평의(諸加評議), 백제의 국상회의(國相會議), 신라의 화백제도(和白制度)가 모두 전원일치의 합의제도였다.  다섯째, 삼신일체는 상고시대 우리 민족의 정치체제가 3권분립 합의제도였음을 의미한다.  3권분립 합의제도란 입법·사법·행정이 독립적으로 업무를 집행하지만 업무의 결정은 3권의 합의에 의하여 결정함을 의미한다.  삼신일체를 기능적인 측면에서 파악하면 天一은 조화의 작용을, 地一은 교화의 작용을, 人一은 치화의 작용을 의미한다. 이를 정치나 법에 적용시키면, 조화는 제정 즉 입법에, 교화는 교도 즉 사법에, 치화는 정치 즉 행정에 해당된다. 일체(一體)는 의견의 일치를 의미한다. 따라서 삼신일체는 3권분립 합의제도가 된다. 이러한 제도는 현대의 3권분립제도 보다도 더욱 민주적이라 할 수 있다. 이에 대한 증거의 문제는 본서의 원본을 참고해 주기 바란다.  여섯째, 삼신일체는 상고시대 국토경영원리가 일국삼체제 연립공화정(一國三體制 聯立共和政)이었음을 의미한다.  일국삼체제 연립공화정이란 1국을 3분하여 주권·국민·영토의 독립을 인정하고, 거기에 수도와 통치자가 각각 따로 있어 정치함을 의미하나, 중대한 업무의 결정이나 시행은 3왕의 합의에 의하지만 중앙의 대왕이 중심이 되고, 좌우의 부왕은 보좌역이 되는 그러한 정치체제를 편의상 지칭함이다.  삼신일체는 그러한 의미의 정치체제를 뜻하기도 한다. 즉 한늘과 땅은 인간에게 은혜를 베풀고 인간은 그 은혜를 받는다. 그러므로 이 경우 인간은 주체가 되고, 한늘과 땅은 보좌역이 된다. 이를 정치에 적용시키면, 人一은 太一이 되어 대왕격이 되고, 天一과 地一은 부왕격이 된다. 그러므로 삼신일체는 일국삼체제 연립공화정이 된다.  신채호 역시 {조선상고사}에서 고조선의 국토경영원리가 일국삼체제였다고 한다. 즉 단군왕검이 이미 삼신오제(三神五帝)의 신설(神說)로써 우주의 조직을 설명하고, 그 신설에 의해서 인세 일반의 제도를 정하였으니, 신한과 말한과 불한의 3한(三韓)을 세워 대단군이 신한이 되니, 신한은 곧 대왕이요, 말한과 불한은 곧 좌우의 양부왕(兩副王)이니 신한을 협조하는 자더라. 한(韓)은 국명이 아니라 왕(王)이란 뜻이니, 삼한은 고조선을 분통한 3대왕이며, 고조선은 3한이 분통한 3대지방이라 하였다.  일곱째, 삼신일체는 상고시대 우리민족의 생활원리였다.  삼신일체는 한편 성속일체(聖俗一體) 사상이기도 하다. 성속일체는 종교와 세속의 일체를 의미한다. 종교인이 세속인이고 세속인이 종교인이며, 교당이 가정이고 가정이 교당이라는 뜻이다. 그래서 가정마다 삼성(三聖)을 모시는 선반(仙盤)이 있었고 제사를 올렸으며, 나아가 마을에서도, 관아에서도, 조정에서도 제사를 올렸다.  또한 삼신일체의 원리가 그대로 사회에 반영되어 인명도 성(姓)과 이름의 세 글자, 가족구조에 있어서 조부모·부모·자녀의 삼대동거가족구조(三代同居家族構造), 혼인에 있어서 신랑댁·신부댁·중매의 삼자합의제도(三者合意制度), 식사에 있어서 밥·국·찬의 불가분적 삼위일체(三位一體)관계, 일일삼식제도(一日三食制度), 제사 때의 3헌·3헌관·3배, 신분에 있어서 군·사·부 삼위일체(三位一體), 부· 모·자의 삼위일체(三位一體), 글을 쓸 때도 서론·본론·결론의 3단계, 오락을 즐길 때도 노래·춤·악기(북과 장구)의 삼위일체 등 이러한 것은 모두 삼신일체의 반영이라 할 수 있다.  삼신일체의 원리에서 음양오행사상이 발원되는데, 우리의 식사풍속에 오행을 상징하는 오곡밥과 오합주가 있고, 한약을 제조할 때도 음양오행의 원리에 의하며, 우리의 일상생활에서 활용하는 역법도 일월화수목금토(日月火水木金土)의 음양오행으로 되어있다. 이를 보면 역법 역시 삼신일체의 원리에서 발원한 우리민족의 소산이라 추정할 수 있고, 중국이나 서구소산이 아님을 알 수 있다. {태백일사} 마한세가를 보아도 한웅조 시대의 자부선생이 칠회제신지역(七回祭神之曆)을 지었다 하였고, 한웅천황이 1년을 365일 5시간 48분 46초로 하여 역법을 만들었다 하고, 이것을 삼신일체의 상존지유법(上尊之遺法)이라 하였다. 이를 보면 역법 역시 우리민족에 의해서 창안된 신선도의 유법이라 추정할 수 있다.  이상과 같이 이론이 전개됨을 볼 때, 天一·地一·人一의 삼신일체는 서물(庶物)의 원리로서 크고도 넓고 깊어 그 진리를 모두 파헤치기 어렵다. 과거에도 진리요 현재에도 진리이며 미래에도 진리일 것임에 틀림없다. Ⅶ. 서구종교와 신선도와 세계주의 1. 신선도와 서구종교의 비교 인류사회에 정치·종교·교육이 있은지 이미 오래되었다. 이들 분야는 모두 인류의 복지와 평화를 위하여 봉사한다고 한다. 그러나 인류사회는 날이 갈 수록 더욱 이기적이고 호전적이며 포악해지고 있으니 그 원인이 어디에 있는가? 인구의 증가와 사회의 조밀화 그리고 자원의 고갈과 정치에도 큰 원인이 있겠지만 그 보다도 근본적으로 종교에 더 큰 원인이 있다고 본다. 왜냐하면, 종교를 신앙과 교육으로 나눌 수 있는데, 인간의 행동은 선행이든 악행이든 모두 의식과 사고의 지배를 받고, 의식과 사고는 신앙과 교육의 지배를 받기 때문이다. 따라서 인간의 행동은 종교가 지배한다고 하여도 과언이 아니다. 이러한 이유로 우리민족의 신선도와 세계에서 가장 막강한 세력을 갖고 있는 서구종교(기독교와 회교)의 기본사상을 비교하면서 사회악의 근본적 원인을 규명하고, 신선도가 참다운 평화사상임을 논증코자 한다. 이 문제는 다가오는 21세기의 세계평화를 위하여 가장 중요한 문제인 만큼 기독교 측과 회교 측은 널리 이해하여 주기 바란다.  첫째, 서구종교의 생명불평등사상에 의하면 약육강식(弱肉强食)이 당연지리(當然之理)라는 이론이 성립된다. 그러나 신선도의 생명평등사상에 의하면 만물이 공존공영하는 평화사상이 성립된다.  서구종교의 바이블 구약(기독교와 회교가 동일함)을 보면 제일 먼저 창세기가 나온다. 창세기는 서구종교의 기본사상인 창조론을 다루고 있다. 창조론이란 창조주 여호와(알라)에 의하여 인간과 동물과 식물 그밖에 만유가 창조되었다는 서구종교의 우주관이다. 그러므로 서구종교의 모든 사상은 창조론의 논리대로 전개되고 창조론이 바탕이 된다.  그러면 창조론은 어떠한 사상인가? 창조론에 의하면 제일 상위에 여호와(알라)가 있고, 그 하위에 인간이 있으며, 인간 밑에 동물이 있고, 동물 밑에 식물, 식물 밑에 광물과 토양이 있다. 그래서 창조론에 의하면 창조주 여호와(알라는 지금부터 생략함)와 피조물 인간과 동물 그리고 식물의 수직적 위계관계와 아울러 생명불평등이론이 성립된다. 그러한 생명불평등이론에 의하면, 창조주에 대한 인간의 복종, 동물에 대한 인간의 지배는 자연법칙이며 창조주의 섭리로서 조금도 양심에 가책을 느끼지 않게 된다. 또한 그러한 이론을 확대 부연하면 약자에 대한 강자의 지배, 약한 민족에 대한 강한 민족의 지배, 미개민족에 대한 개화민족의 지배도 자연법칙이며, 창조주의 섭리라는 이론이 성립되고 당연한 처사로 받아들이게 된다. 즉 인간사회에서의 약육강식이 당연지사(當然之事)라는 패권주의이론(覇權主義理論)이 성립된다. 그래서 서구종교를 신봉하는 사회에서는 자연보호를 외치면서 자연을 예사로 파괴하고, 동물애호를 강조하면서 동물을 아무런 죄없이 도살하여 포식한다. 인권옹호를 외치면서 타민족의 인권을 무참히 유린하였고, 사해동포주의를 외치면서 타민족을 무력으로 식민지화하여 착취를 지능적으로 하여왔다. 그러고서도 창조주 여호와 앞에 조금도 죄책감을 느끼는 일이 없었다. 그러므로 창조론과 생명불평등사상을 바탕으로 하는 서구종교의 교리에 의하면 인간사회의 평화란 기대하기 어렵다는 논리가 성립된다.  이에 반하여 신선도는 그 발생학적 기본원리가 天一·地一·人一의 삼신일체로서 그것은 곧 하나님과 인간과 만물 사이에 차별적 위계관계가 없는 만물평등사상이며 생명평등사상이다. 그러므로 동물을 무고히 죽인다든가, 약한 사람이나 약한 민족 또는 미개민족이라 하여 무고히 지배한다든가, 그 재산을 어떤 수단에 의하여 무고히 착취하였다면, 엄숙한 종교적 심판을 받게 된다. 다시 말하면 강자와 약자, 강한 민족과 약한 민족, 개화민족과 미개민족, 부국과 빈국 사이에 약육강식이나 지배복종의 논리가 성립되지 아니하고 일체관계가 성립된다. 따라서 신선도는 어떤 개인이나 어떤 민족과도 더불어 공존공영하는 평화사상이라는 논리가 성립된다.  둘째, 서구종교의 2원론이 대립적 투쟁적이라면, 신선도의 3원론적 1원론은 호혜적 "우리의식 또는 하나의식"으로서 평화적이다.  서구종교의 창조설에 의하면, 시작(처음)이 있고 끝(마침)이 있으므로, 새 것이 있고 묵은 것이 있어, 좋은 것과 나쁜 것, 선과 악, 영과 육의 2원적 구조로 사물을 파악하게 되고, 이들 관계를 2원적 상대적 대립관계로 파악하게 된다. 그래서 나와 너, 자민족과 타민족, 자국과 타국, 자종교와 타종교, 개인주의와 전체주의, 유신론과 무신론, 자유주의와 사회주의, 보수와 혁신의 관계를 대립적 경쟁적 투쟁관계로 파악하게 된다. 또한, 이들 사이의 대립이나 갈등을 자기의 생존을 위한 하나의 당연한 수단으로 본다. 즉, 2원론은 정·반·합(正·反·合)의 논리에 따라 이 사회를 경쟁과 투쟁과 합의의 반복순환으로 본다. 그래서 서구종교국가인 기독교국가와 회교국가들은 평화를 주장하면서 칼을 갈고, 화해를 주장하면서 음모를 꾸민다.  이와 반대로, 신선도는 3원론적 1원론이다. 3원론에 의하면 어느 쌍방이 대립하게 되면 나머지 일방이 조정하거나 중재하게 되는가 하면, 서로 견제하여 평화와 화목을 유지하게 된다. 예컨대, 가정은 아버지·어머니·자녀의 삼단원으로 구성되고 있다. 여기에서 아버지와 어머니 사이의 불화는 자녀가 화해를 돕고, 아버지와 자녀 사이의 불화는 어머니가, 어머니와 자녀 사이의 불화는 아버지가 화해를 도와 가정의 평화와 화목을 유지하게 된다. 자연현상을 예로 들면, 사람의 인체계는 기(氣)·심(心)·신(身)의 삼방(三房)으로 되고 있는데, 기·심·신이 각각 제 기능을 다할 때, 인간은 건강을 유지하게 된다. 만약 기의 공급이 차단되거나 그 회전에 장애가 생긴다면, 인간은 질식하게 되거나 병을 앓게 되고, 마찬가지로 심(心)과 신(身) 가운데 어느 하나에 이상이 생긴다면 인간은 정신이상자가 되거나 식물인간이 되고, 아니면 병들어 죽게 된다. 하나의 예를 더 들면, 원자는 양성자와 중성자 그리고 전자의 3단원으로 구성되고 있는데, 전자의 회전에 의하여 양성자와 중성자가 핵을 이루어 안정을 유지하게 된다. 만약 전자가 분리된다면, 양성자와 중성자도 분리되어 원자는 파괴되고 만다. 마찬가지로 양성자와 중성자 가운데 어느 하나가 분리된다면 원자는 파괴되고 만다. 이와 같이 만유는 삼원적이고 각각 제 기능을 원만히 다할 때 일체관계를 이루게 된다. 그와 같이 정치·종교·교육도 삼단원으로 구성되고 각각 제 역할을 다할 때 일체가 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정치가 입법·사법·행정으로 분리독립되어 각각 제 역할을 원만히 수행하면서도 서로 유대를 이루어 일체가 되어야 하고, 교육도 지(智)·덕(德)·체(體) 또는 지(知)·정(情)·의(意)의 삼단원으로 나뉘어 각각 제 역할을 원만히 수행하면서도 서로 유대를 이루어 일체가 되어야 하며, 종교도 도(道)·불(佛)·유(儒) 삼교로 나뉘어 각각 제 역할을 원만히 수행하면서도 서로 유대를 이루어 일체를 이루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내 것이 네 것이고, 너희 고통이 내 고통이라는 자타일여(自他一如)·주객일체(主客一體)라는 "우리의식 내지 하나의식"이 형성되어 나와 너, 자민족과 타민족, 자국과 타국, 자종교와 타종교, 개인주의와 전체주의, 유신론과 무신론, 자유주의와 사회주의, 보수와 혁신의 관계를 대립적 경쟁적 투쟁관계가 아니라, 호혜적 일체관계로 파악하여 개인사회는 물론 민족사회와 인류사회의 분쟁을 해소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오늘날 인류사회의 보수와 혁신, 자본주의와 공산주의, 기독교와 회교, 구교와 신교, 백인과 흑인의 대립과 갈등을 해소시키기 위해서는 사회의 3원적 구조를 인정해야 하고 사회가 3원적 구조로 구성되어야 한다는 이론이 성립된다.  셋째, 서구종교의 유일신 신앙이 종교분쟁 내지 국제분쟁의 원인이라면, 신선도의 유무불이(有無不二)의 신관은 평화적이다.  유일신 신앙이란 신이 하나만 있고 그 신만을 믿으라는 뜻이 아니라, 여러 신들 가운데 하나의 신만을 믿으라는 뜻이다. 서구종교에서 히브리어 Eloah를 번역하면 영어로는 God인데 우리 말로 하나님이라 국역함으로써 유일신 신앙이 하나님 신앙같이 이해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에는 "하나님들"이라는 복수어가 없다. 그러나 Eloah(신)에는 Elohim(신들)이라는 복수어가 있고, God(신)에도 Gods(신들)라는 복수어가 있다. 또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1996년 10월 23일 바티칸에서 "생명의 기원과 진화"를 주제로 총회를 열고 있던 평신도 단체 "교황청 과학아카데미"에 메시지를 보내어 "다원의 진화론이 단순한 가설 이상이라며, 진화론이 카톨릭 교의에 모순되지 않는다"고 선언하고, 이어서 "인간의 육체는 진화해도 영혼은 신에 의해 창조되었다"고 강조했다. 이는 신에 의한 인간육체의 창조를 부정하는 것으로 카톨릭측에서도 창조주의 존재를 반은 부정하고 있는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여호와께서 시나이산에서 모세에게 내렸다고 하는 10계명을 보아도 유일신 신앙이 하나님 신앙이 아님을 잘 알 수 있다. 그 내용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있게 말지니라.  ? 너는 나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또 위로 한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 속에 있는 것의 아무 형상이든지 만들지 말며, 그것들에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나 여호와 너의 하나님은 질투하는 하나님(하느님)인 즉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비로부터 아들에게로 삼 사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  위의 내용을 검토해 보면 '너'라 함은 애굽땅의 종이 되었던 민족으로 유태민족을 가리키고, 여호와는 애굽땅에서 유태민족을 인도해 낸 신이다. '하나님'은 영어의 "God 또는 Gods", 히브리어의 "Elohim 또는 Eloah"의 우리말 번역이다. 따라서 여호와 하나님은 유태민족의 민족신을 가리키고, 순수한 하나님을 의미하지 않는다. 곧 여호와 역시 피조물임을 의미한다. 또 "위로 한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 속에 있는 것"이라 함은 여호와 외에 다른 신 또는 다른 민족의 신이 많음을 의미한다. 또 "나 외에 다른 신들을 네게 있게 말지니라"함은 신이 하나만 있고 그 신만을 섬기라는 뜻이 아니라 여러 신들 또는 다른 민족의 신들 가운데 유태민족은 유태민족의 여호와신 하나만을 섬기라는 뜻이다.  이상을 종합적으로 고찰하면 유태민족은 많은 신들과 많은 종교 가운데 유태민족의 신과 유태민족의 종교만을 믿고 다른 민족의 신과 다른 민족의 종교를 믿어서는 절대 안된다는 것이다. 이것이 유일신 신앙인 것이다. 그래서 유태민족은 다른 민족의 신과 다른 민족의 종교를 절대 신앙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제 민족의 신인 여호와와 제 민족의 종교인 유태교만을 신앙한다. 이를 다른 민족의 입장에서 해석하면 어느 민족이든 제 민족의 신과 제 민족의 종교만을 신앙하고 다른 민족의 신과 다른 민족의 종교를 신앙해서는 절대 안된다는 뜻이다. 예컨대, 우리민족은 우리민족의 신인 하나님과 한인·한웅·한검의 국조만을 숭배하고, 다른 민족의 신과 종교인, 여호와와 기독교, 석가와 불교, 공자와 유교, 노자와 도교, 천조대신과 천리교, 알라와 회교 등을 숭배함은 오히려 기독교의 10계명에 어긋난다는 것이다.  그러나 한국의 목자들은 10계명에 대한 서구인들의 해석을 그대로 받아들임으로써 크나큰 과오를 범하고 있는 것이다. 서구국가는 한때 제국주의 국가들로서 식민지를 지배하고 통치해야만 했다. 식민지를 용이하게 지배하고 통치하기 위해서는 그 민족의식을 해이시켜야 하며, 민족의식을 해이시키기 위해서는 그 주체사상을 말살시켜야 하고, 주체사상을 말살시키기 위해서는 그 민족의 신앙을 부정해야 하며, 신앙을 부정하기 위해서는 그 민족의 신앙대상인 민족신을 부정해야 한다. 그런데 기독교의 10계명에 의하면 여호와신만을 인정하고 다른 민족의 신을 전적으로 부정하게 된다. 그래서 서구 제국주의 국가들은 10계명을 고의적으로 제 민족의 입장에서 제 민족에게 유리하게 해석하여 식민지 지배수단으로 활용했던 것이다. 이 점을 한국의 목자들은 깊이 통찰하여 10계명을 한국인의 입장에서 새로이 해석해야 할 것이다.  또한 신명기 13장 6절에서 10절까지를 보면 "네 동복 형제나 네 자녀나 네 품의 아내나 너와 생명을 함께 하는 친구가 가만히 너를 꾀어 이르기를 너와 네 열조가 알지 못하던 다른 신들 곧 네 사방에 둘러 있는 민족 혹 네게서 가깝든지 네게서 멀든지 땅 이 끝에서 저 끝까지 있는 민족의 신들을 우리가 가서 섬기자 할지라도 너는 그를 쫓지 말며 듣지 말며 궁휼리 보지 말며 애석히 여기지 말며 덮어 숨기지 말고 너는 용서없이 그를 죽이되 죽일 때에 네가 먼저 그에게 손을 대고 후에 뭇 백성이 손을 대라. 그는 애굽 땅 종되었던 집에서 너를 인도하여 내신 네 하나님 여호와에게서 너를 꾀어 떠나게 하려 한 자니 너는 돌로 쳐 죽이라"하여 다른 민족의 신을 믿자 할 때 사람까지 죽이라 하고 있다. 더욱이 자기의 아내와 자녀와 형제와 친구까지도 가혹하게 돌로 쳐서 죽이라 하고 있다. 이는 10계명의 유일신 신앙을 더욱 강력하게 뒷받침하고 있는 것이다. 이래서 유태민족은 다른 민족의 신과 종교를 절대 믿지 않고 총단합을 이루게 된다.  그러면 어째서 유태민족은 여호와신만을 믿고 유태교만을 믿으라 강요하고 있는가? 그 성립배경을 잠깐 살펴보기로 한다. 유태민족은 원래 샘계통의 히브리 민족으로 단일 민족이었으나 B.C. 17세기 이후 유태와 이스라엘로 갈리고, 신앙에 있어서도 여호와(JHVH 또는 YHVH)와 엘로힘(Elohim) 등 12 지파로 분열되어 동족상잔을 벌리게 되었다. 그 원인이 신앙의 분열에 있다고 파악한 모세는 몰록신·그모스신·네르갈신·아드람멜렉신과 아남멜렉신 등 많은 신들 가운데 교세가 가장 강한 여호와와 엘로힘을 하나로 묶어 오로지 여호와신만을 섬기도록 10계명에 정하고 그 밖의 다른 민족의 신을 섬기는 자에게 삼 사대까지 벌을 준다고 강력한 벌칙까지 규정하게 됐던 것이다. 즉, 본 계명은 이스라엘 민족의 분열을 방지하고 총단합을 위해 만들어진 계명으로 다른 민족의 신과 신앙을 절대 갖지 못하게 하는 강력한 규정인 것이다. 그래서 유태민족은 총단합하고 애족적 애국적이다.  그러나 10계명 제작의 근본정신을 이해하지 못하고 문화풍토가 다른 이질사회 또는 다종교 사회에서 그러한 계명을 맹목적으로 실행에 옮길 경우 어떻게 되겠는가? 곧 다른 문화와 사상을 부정하게 되고 다른 종교와 마찰을 가져오게 될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그러한 예로서 우리나라의 기독교인들을 보면 그들은 자기 조상 섬기는 것도 우상숭배라 하여 배격하며, 다른 종교를 모함하고 공격한다. 또한 기독교와 회교는 서로 종교분쟁 내지 종교전쟁을 일으키고, 다른 민족의 문화와 역사까지 파괴했던 것이다. 따라서 서구종교는 기독교든 회교든 10계명의 근본정신을 이해하지 못하고 표현 그대로 믿을 경우 단일종교 사회에서는 전체민족의 총단합을 위해 도움이 된다 하더라도 2개 또는 그 이상의 다종교 사회 또는 문화풍토가 다른 사회에서는 민족의 분열을 조장하고 평화의 장애물이라 아니할 수 없다.  이에 반하여 신선도는 유신론과 무신론을 모두 포용하는 유무불이(有無不二)의 사상이다. 이는 유와 무, 생과 사, 흑과 백, 선과 악을 초월하는 사상으로서 천당과 지옥을 초월하는가 하면, 내 종교와 남의 종교를 초월하고, 내 것과 남의 것을 초월하며, 소유와 무소유를 초월한다. 여기에 대립이나 갈등 및 전쟁이란 있을 수 없다. 그러므로 신선도는 평화사상인 것이다. 지금까지 우리민족이 타민족을 먼저 침략한 역사를 갖지 못하였고, 항상 타민족으로부터 침략만을 당한 것도 그러한 사상 때문이라 할 수 있다.  넷째, 서구종교의 천당지옥설은 인간의 선행을 유도하는 계기도 되지만 사유를 제한하고 이기주의적인 인간을 만든다. 그러나 신선도의 삼신일체사상은 인간의 사유를 무한히 넓게 하고, 원만한 인격체를 만든다.  인간은 크게 보면 정신과 육체로 되고 있어 영원한 이상세계를 꿈꾸는가 하면, 무한한 관능적 욕구도 채우려 한다. 그러므로 서구종교에 있어서 사후 극락세계인 천당은 인간의 이상적 욕구의 산물이며, 지옥은 저주와 공포의 산물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 육체를 저주하고 금욕생활을 하게 한다. 동시에 원죄의식을 심어주어 회개하게 하고, 자아를 비판하게 한다. 그러나 천당과 지옥을 체험한 사람도 없고 가 본 사람도 없으며 눈으로 본 사람도 없다. 실증사학적으로 볼 때, 비과학적 하나의 가설이라 할 수 있다. 이를 정당화시키기 위하여 소위 성직자라는 사람들이 마치 가본 듯이 맹목적 신앙을 강요하고, 공포심을 조장시킨다. 인간은 하나님을 위하고, 하나님의 종이 되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이는 곧 하나님으로부터 선택받고 사랑과 은혜를 받기 위함이다. 여기에서 진실하고 감수성이 예민한 사람은 사유에 제한을 받게 되고 자기중심적 이기주의적인 성격의 소유자로 된다. 더욱이 천당의 무한한 복락과 영광은 생시의 자그마한 선행에 대한 보답이며, 지옥의 혹독한 괴로움은 생시의 자그마한 잘못에 대한 응징이다. 이는 마치 자그마한 자본을 들여 큰 이익을 얻는 상행위와 같다. 그러므로 천당 지옥설은 인간으로 하여금 선행을 하게 하는 좋은 계기도 되지만, 타산적 이기주의적인 인간을 만든다는 모순을 지니고 이다.  신선도의 天一·地一·人一의 삼신일체는 천계(天界)·지계(地界)·인계(人界)의 삼계일체관(三界一體觀)이기도 하다. 삼계일체관은 천당과 지옥과 인간세상을 다르게 보지 않고 연결된 하나의 공간으로 본다. 따라서 이 세상이 잘 이화되면 그것이 곧 천국이고, 잘 못되면 지옥으로서 지상선경(지상천국) 건설을 목적으로 한다. 즉, 홍익인간 이화세계의 건설을 목적으로 한다. 여기에서 정치·종교·교육이 모두 성인군자 양성을 목적으로 하게 되고 그와 같이 교육하게 됨으로 사회는 자연히 안정되고 원만한 인격체를 만들게 된다.  다섯째, 서구종교의 신인차별관(神人差別觀)에 의하면 대철인이나 대성인이 출현될 수 없으나, 신선도의 신인일체관(神人一體觀)에 의하면 천인합일(天人合一)의 대철인이나 대성인이 출현될 수 있다는 논리가 성립된다.  서구종교의 신관은 인간 위에 여호와(창조주)가 있고, 여호와 밑에 인간이 있다는 신인상하(神人上下)의 차별 사상으로서 숭배의 대상이 여호와이다. 즉, 인간은 여호와의 하위에 존재하고, 여호와에 예속되어 있는 존재이며, 여호와보다 하잘 것 없는 존재이다. 인간의 괴로움과 즐거움도, 잘되고 못됨도 오로지 여호와의 의사에 의하여 결정되며, 인간이 태어나고 자라고 수양하여 성인군자가 되는 것도 오로지 여호와의 은총에 의한 것으로 본다. 그러므로 서구종교의 신관에 의하면 인간의 활동과 사유도 여호와가 부여한 일정한 범위(예컨대, 바이블)를 벗어날 수 없다. 다시 말하면, 인간의 활동과 사유가 여호와와 대등하게 된다거나 여호와를 뛰어넘을 수 없다. 그것은 상상할 수도 없고 여호와에게 크나 큰 죄악이 된다. 따라서 서구종교의 신인차별관(神人差別觀)에 의하면 여호와와 대등한 천인합일의 대철인이나 대성인이 출현한다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고, 그렇게 되어서도 안된다는 이론이 성립된다.  반면에 신선도는 신인일체(神人一體) 사상으로서 숭배의 대상이 없다. 신본위 사상도 아니고 인간본위 사상도 아니다. 그렇다고 신과 인간이 대등한 1대1의 2원론적 상대론도 아니다. 신과 인간이 둘이 아닌 신즉인(神卽人) 인즉신(人卽神)이라는 것이다. 여기에서 인간의 사유는 제한이 없고 무한히 광활하게 된다. 그러므로 신선도의 이론에 의하면 자신의 수양과 노력에 따라 우주와 하나가 되는 천인합일의 대철인이나 대성인이 출현될 수 있다는 이론이 성립된다.  여섯째, 서구종교는 발생학적 배경을 민족에 둠으로써 국지적이고 배타적이라면, 신선도는 발생학적 배경을 온 인류에 둠으로써 보편적이고 포용적이다.  예컨대, 기독교의 바이블 구약 창세기 제28장 13절을 보면, "또 본즉 여호와께서 그 위에 서서 가라사대 나는 여호와니 너희 조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라 너 누운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하였고, 15절을 보면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지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하였으며, 출애굽기 제3장 6절을 보면, "또 이르시되 나는 네 조상(祖上)의 하나님이니 하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니라"하였다. 또 출애굽기 제20장 2절과 3절을 보면, "나는 너를 애굽땅, 종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너의 하나님 여호와니라.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있게 말지니라"하였다. 여기에서 말하는 아브라함은 이스라엘 민족의 시조이며 이삭은 아브라함의 아들이고 야곱은 이삭의 둘째 아들이다. 그리고 너라 함은 이스라엘 민족을 말한다. 그러므로 기독교의 숭배대상인 여호와는 이스라엘의 민족신이다. 또한 예레미야 44장 7절, 11절, 25절에도 분명히 "나는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라 하여 여호와는 이스라엘 민족의 민족신이다. 따라서 기독교는 어디까지나 이스라엘 민족을 위한 이스라엘의 민족종교이다.  기독교는 이스라엘 민족의 민족종교이므로 이스라엘 민족을 하나님으로부터 선택받은 민족 또는 세계의 중심 민족이라 극찬하게 되고, 또한 10계명을 보면 같은 이스라엘 민족 사이에는 서로 인격을 존중하고 애국적이며 효성스럽다. 더욱이 살인·강도·절도·탐욕·간음과 거짓말도 못하게 한다. 그러나 여호와를 배신할 경우, 그것은 곧 이스라엘 민족을 배반하는 것이 됨으로써 누구든지 살육의 대상이 되며, 이스라엘 민족의 이익과 배치될 때 무엇이나 파괴와 투쟁의 대상이 된다. 예컨대, 신명기 2장 33절에서 36절을 보면, "야하스에서 싸울 때에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를 우리에게 붙이시매 우리가 그와 그들과 그 모든 백성들을 쳤고 그 때에 우리가 그 모든 성읍을 취하고 그 각 성읍을 그 남녀와 유아와 함께 하나도 남기지 아니하고 진멸하였고 오직 그 육축과 성읍에서 탈취한 것은 우리의 소유로 하였으며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 모든 땅을 우리에게 붙이심으로 아르논 골짜기 가에 있는 아로엘과 골짜기 가운데 있는 성읍으로부터 길르앗에 까지 우리가 모든 높은 성읍을 취하지 못한 것이 하나도 없었느니라"하여 인명을 살상하고 성읍과 육축과 재물과 땅까지 탈취한 이야기, 그밖에도 예컨대, 신명기 1장 4절, 3장 3절에서 4절, 6절에서 8절, 13장 6절에서 10절 등을 보면 살인행위들로 가득 차 있고, 민수기 31장 7절에서 11절, 여호수아 8장 1절에서 2절, 15절에서 19절, 22절에서 25절, 29절을 보면, 살인과 탈취행위들로 가득 하다. 이와 같이 기독교는 유태민족의 입장에서 모든 것을 파악하여 싫으면 이를 모두 악(惡)이라 하여 징계하고 있으니 기독교는 민족적 국지적 배타적 파괴적이라 아니할 수 없다. 이에 대하여 기독교 측은 구약은 그러하나 신약은 그렇지 않다고 변명할 것이다. 그러나 신약 역시 구약에 바탕을 두고 있으며, 현재에도 엄연히 신구약을 한책으로 묶어 신자들에게 가르치고 있지 않는가? 그리고 {신약성경} 누가복음 19장 27절에도 예수께서 "나의 왕됨을 원치 아니하면 저 원수들을 이리로 끌어다가 내 앞에서 죽이라" 하였다. 그러므로 기독교는 이상과 같은 비판을 면할 수 없다고 본다.  그러나 신선도는 한대민족·열대민족·온대민족 등 온 인류에 발생학적 배경을 둠으로써 어떤 민족도 다 포용하고, 어떠한 것도 다 사랑하여야 한다고 가르친다. 그래서 신선도의 경전에는 일절 탈취·파괴·살인 등의 행위를 조장하는 내용이 없고, 심지어 그러한 행위를 할 경우,『참전계경』제306사에서 제320사를 보면 그만한 재앙을 받는다 하여 악행을 절대 금하고 있다. 또한 신선도의 경전에는 특정 국가의 국명이나 특정 인명도 일체 등장하지 아니한다. 그래서 지금까지 우리민족은 다른 민족을 먼저 침략하여 본 경험마저 없고 어떠한 민족과도 다 호혜적이다. 따라서 신선도는 포용적이고 평화적이라 할 수 있다.  이상과 같이 서구종교와 신선도를 비교하여 볼 때, 서구종교는 교리적으로 사회문제의 해결은 커녕 오히려 가치관의 혼란을 초래하고, 인간을 이기적이고 사악하게 만들뿐만 아니라, 종교 사이의 갈등과 전쟁을 일으킬 수 있는 원인을 자체 내에 지니고 있다. 그러므로 오늘날도 기독교와 회교로 인한 사회문제가 빈번히 일어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기독교와 회교가 개입되지 아니한 종교전쟁이 없을 정도이다.  반면에 신선도는 평화적이고 포용적이며 세계적이다. 따라서 프랑스의 세계적인 석학 게오르규가 "21세기의 태평양 시대에는 한국인이 낳은 홍익인간 사상이 세계평화를 주도할 것이다"고 예언하였던 것이 과연 옳다고 아니할 수 없다.   2. 신선도는 세계주의사상이다 1) 세계주의의 성립요건 세계주의 사상은 민족과 국가를 초월하여 만인이 공동으로 믿고 받아들여 참여할 수 있는 만민일체의 사상으로서 황인종·흑인종·백인종 등 온 인류의 성격과 욕구에 바탕을 두고 그 행복과 번영을 목적으로 하는 평화사상이라 할 수 있다. 여기에서 세계주의사상의 성립요건을 인출하면 다음과 같이 제시할 수 있을 것이다.  첫째, 세계주의사상은 불변적 자연법칙인 천도(天道)에 발생학적 배경을 두어야 한다. 왜냐하면 시대적 사회적 배경에 의해서 인위적으로 조작된 사상은 시대와 사회가 바뀌거나 민족이나 국가가 다르게 되면 거기에 부합될 수 없고, 자연법칙인 천도에 의해서 발원된 사상은 자연법칙이 불변적이고 어디에나 차별없이 베풀어지듯, 민족이나 국가를 초월하여 어느 시대, 어느 민족에게나 차별없이 그에 맞게 변용(變用)될 수 있기 때문이다.  둘째, 세계주의사사은 그 숭배의 대상이 보편타당하여야 한다. 즉 지구상의 모든 민족이 공동으로 믿고 받아들여 참여할 수 있는 숭배대상이어야 한다. 따라서 어느 민족이 숭배하는 민족신과 성인이나 위인은 온 인류의 숭배대상이 될 수 없을 것이다.  셋째, 세계주의사상은 만민일체 사상이어야 한다. 즉 세계주의 사상은 황인종·흑인종·백인종을 일체로 포용해야 한다. 따라서 인종과 인종, 민족과 민족 사이에 우열을 두거나 차별을 하는 사상이나 종교는 세계주의 사상이라 할 수 없는 것이다.  넷째, 세계주의사상은 황인종·흑인종·백인종 등 온 인류의 사상을 대표할 수 있어야 한다. 그렇지 못할 경우 온 인류가 그 가르침을 믿지도 않고 따르지도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다섯째, 세계주의 사상은 민주주의 사상이어야 한다. 왜냐하면 민주주의 사상은 인류가 발견한 최상의 정치사상이며, 이권존중과 인간평등을 기본사상으로 하기 때문이다.  여섯째, 세계주의사상은 이상의 문제 외에 어떤한 문제도 해결할 수 있는 원융무애 사상이어야 한다. 왜냐하면 세계인류는 여러 인종과 민족으로 구성되어 있고, 인종과 민족에 따라 욕구와 사상이 다르다. 그러나 다양한 욕구와 사상을 받아들여 해결할 수 없다면 세계평화는 기대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상의 여섯 가지 기본요건을 모두 갖추었을 때 세계주의사상이라 하면, 그러한 요건을 모두 갖춘 사상이 바로 지금까지 탐구한 신선도임을 논증코자 한다. 2) 신선도와 세계주의의 동일성 첫째의 성립요건으로서 신선도가 천도에 발생학적 배경을 두고 있느냐 하는 문제이다. 그런데 신선도의 발생학적 기본원리는 天一·地一·人一의 三神一體이며, 그것은 곧 불변적 천도임을 앞에서 밝혔다.  둘째의 성립요건으로서 신선도의 숭배대상이 보편타당한가의 문제이다. 신선도의 숭배대상은 天神·地神·人神 三神一體의 하나님이다. 삼신일체의 하나님의 은혜가 없으면 만유는 이 세상에 태어날수도 없고 잠시도 생존할 수 없다. 그러므로 삼신일체의 하나님은 보편타당한 존재로서 온 인류가 받들어야 할 숭배대상이 된다. 이에 대해서는 뒤에 상설한다.  셋째의 성립요건으로서 신선도가 만민일체의 평등사상이냐 하는 문제이다. 세계인류는 크게 나누어 한대민족·열대민족·온대민족의 삼대인종으로 나뉜다. 그런데 신선도는 天一·地一·人一의 三神一體에서 발원되는데, 天一은 한대민족, 地一은 열대민족, 人一은 온대민족을 의미하기도 한다. 따라서 신선도는 만민일체의 평등사상이다. 이에 대해서는 앞에서 상설하였다.  넷째의 성립요건으로서 신선도가 세계사상을 대표할 수 있느냐 하는 문제이다. 세계인류는 크게 한대민족·열대민족·온대민족으로 나눌 수 있다. 그런데 신선도의 도교사상은 한대민족의 사상을 대표하고, 불교사상은 열대민족의 사상을 대표하며, 유교사상은 온대민족의 사상을 대표한다. 이에 대해서도 앞에서 상설하였다.  다섯째의 성립요건으로서 신선도가 민주주의 사상이냐 하는 문제이다. 앞에서 설명한 바, 신선도는 삼권분립 합의제도이며, 인권존중사상이고 인간편등사상이며 만민일체사상이었다. 따라서 신선도는 민주주의사상이다.  여섯째의 성립요건으로서 신선도가 원융무애사상이냐 하는 문제이다. 곧 신선도가 어떠한 문제도 풀 수 있느냐 하는 문제이다. 신선도의 도교사상은 이상적이면서 한대민족의 사상을 대표하고, 신선도의 불교사상은 중용적이면서 열대민족의 사상을 대표하며, 신선도의 유교사상은 현실적이면서 온대민족의 사상을 대표한다. 그러므로 이상적인 문제와 한대민족의 문제는 도교정신에 의해서 풀 수 있고, 중용적인 문제와 열대민족의 문제는 불교정신에 의해서 풀 수 있으며, 현실적인 문제와 온대민족의 문제는 유교정신에 의해서 풀 수 있다는 이론이 성립된다. 기타 자세한 내용은 앞에서 상설했다.  이상과 같이 신선도는 세계주의의 성립요건을 모두 갖추고 있고, 여기에 모순이 없다면 신선도는 세계주의사상이라는 이론이 성립된다. Ⅷ. 신선도의 숭배대상과 종교의식 1. 숭배의 대상과 삼신하나님  1) 신선도에는 원래 숭배의 대상이 없다. 신선도는 삼신일체의 천도에서 발원된다. 삼신일체는 한늘·땅·사람이 평등하며 일체라는 뜻이다. 곧 인간이 하나님이고 하나님이 인간이라는 뜻이다. 인간 위에 하나님 없고, 하나님 밑에 인간 없다는 뜻이다. 인간은 어느 무엇의 위에 존재하지도 아니하고 밑에 존재하지도 아니한다는 뜻이다. 그뿐만 아니라 인간은 곧 우주이며 우주인으로서 활연개오(豁然開悟)하면 대자연과 더불어 소요하고, 광대무변한 대우주와 일체가 된다는 뜻이다. 곧 인간이 활연개오하면 하나님이요 부처님이요 옥황상제라는 뜻이다. 따라서 신선도에는 원래 숭배의 대상이 존재할 수 없다. 2) 신선도는 하나님을 숭배의 대상으로 한다. 그러나 인간을 비롯한 만유는 하나님의 은혜를 입지 아니하면 이 세상에 태어날 수도 없고 존재할 수도 없다. 그러므로 신선도에서는 하나님을 숭배의 대상으로 한다. 이에 대해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하나님은 삼신일체에 대한 경칭이다. 삼신일체는 天神(조화)·地神(교화)·人神(치화)의 일체를 의미한다. 天神·地神·人神의 일체는 "天神+地神+人神"과 같은 의미를 지닌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전체 우주의 "조화+교화+치화"작용의 총체에 대한 경칭인 것이다. 즉 하나님은 우주의 삼라만성이 동정변화하고 생성소멸하는 원리이며 원인이다. 한마디로 하나님은 우주운행의 진여이법(眞如理法)에 대한 경칭인 것이다.  삼일신고 신훈에 "하나님은 위없는 첫 자리에 계시사 큰 덕과 큰 슬기와 큰 힘으로 우주를 조화하시고 수없는 누리를 주관하시며 만물을 가꾸시되 티끌만한 것도 빠뜨림이 없으시며 밝고도 밝아 신령하고 신령하시니 감히 이름지어 헤아릴 길이 없느니라" 했는데,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작용을 표현한 말이다. 또 삼일신고 천훈에 "한늘은 허울도 바탕도 없고, 시작도 끝도 없으며, 위 아래 사방도 없고, 텅텅 비고 비어 어디에나 없는 데 없으며, 무엇이나 싸지 않음이 없느니라"했다. 그것은 전지전능하며 무소부재한 하나님의 존재 양상을 표현한 말이다. 즉 하나님은 시간과 공간, 유와 무, 음과 양을 초월한 천지의 뿌리이며 만유의 근본인 것이다. 여기에서 하나님은 만유의 숭배대상이 된다.  이를 인간에 국한해서 설명하면, 인간은 한늘의 공기와 햇볕이 아니면 이 세상에 잠시도 생존할 수 없는데, 天神은 바로 한늘의 그러한 작용을 의미한다. 또 인간은 땅에서 나는 물과 곡식을 먹지 않으면 이 세상에 잠시도 생존할 수 없는데, 地神은 땅의 그러한 작용을 의미한다. 또 인간은 조상과 부모의 정기가 아니면 이 세상에 태어날 수도 없고 양육받을 수도 없는데, 人神은 조상과 부모의 그러한 가호를 의미한다. 天神과 地神과 人神을 총칭한 것이 삼신일체이다. 여기에서 삼신일체를 삼신상제(上帝), 삼신제석(帝釋), 삼신제왕(帝王), 삼신할머니, 삼신하나님 또한 단순히 하나님 하고 숭배하지 않을 수 없게 되고, 삼신하나님은 우리 민족만의 숭배대상이 아니라 온 인류의 숭배대상이며, 인간만의 숭배대상이 아니라 만유의 숭배대상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신선도의 특이한 점이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3) 하나님은 "한늘·한울·한얼"의 총체에 대한  경칭이다 한늘의 [한]은 한울·한얼의 [한]으로서 우주를 의미하고, [늘]은 "항상·언제나"의 뜻으로서 무한한 시간과 공간을 의미한다. 곧 한늘은 무한한 우주시간과 우주공간인 천계(天界)를 의미한다. 한울의 [울]은 "울타리·우리"의 뜻으로 한정된 공간을 의미한다. 곧 한울은 우주의 땅세계인 지계(地界)를 의미한다. 한얼의 [얼]은 "혼·넋"의 뜻으로 생명체의 얼을 의미한다. 곧 한얼은 우주의 생명계인 인계(人界)를 의미한다. 다시 말하면 한늘은 천계, 한울은 지계, 한얼은 인계를 의미한다. 또한 천계·지계·인계의 일체 곧 삼신일체에 대한 경칭이 하나님이다. 따라서 하나님은 한늘님도 아니고, 한울님도 아니며, 한얼님도 아니라, "한늘(님)+한울(님)+한얼(님)"의 총체에 대한 경칭인 것이다. 한늘님, 한울님, 한얼님은 하나님의 일부분인 것이다. 4) 하나님은 한인 한웅 한검의 총체에 대한 경칭이다. {신리대전}에 의하면 "하나님은 한인(桓因) 한웅(桓雄) 한검(桓儉)이시니, 한인은 조화의 지리에 계시고, 한웅은 교화의 자리에 계시며, 한검은 치화의 자리에 계시니라. 한늘에서는 그 보다 더 위에 계신 이가 없으시며, 만물에는 그 보다 먼저 비롯된 이가 없으시며, 사람에는 그 보다 먼저 된 이가 없느니라. 나누면 셋이요, 합하면 하나이니 셋과 하나로서 한얼님 자리가 정해지느니라(이상, 신위). 또한 한배검의 이치는 셋과 하나일 뿐이니, 하나만 있고 셋이 없으면 이는 쓰임(用)이 없음이요, 셋만 있고 하나가 없으면 이는 체(體)가 없음이라. 그러므로 하나는 셋의 체가 되고 셋은 하나의 쓰임이 되느니라(이상, 신교)"하였다. 이를 보면 하나님의 작용이 한인 한웅 한검인데, "한인+한웅+한검"의 총체에 대한 경칭이 하나님이다. 5) 天一·地一·人一과 한늘님·한울님·한얼님과  한인·한웅·한검은 같은 의미의 다른 표현이다. 이상 논한 바를 정리하면 한인은 조화의 위에 계시다 하여 천일과 같고, 한웅은 교화의 위에 계시다 하여 지일과 같으며, 한검은 치화의 위에 계시다 하여 인일과 같다. 그리고 천일은 한늘, 지일은 한울, 인일은 한얼임을 밝혔다. 따라서 천일과 한늘님과 한인, 지일과 한울님과 한웅, 인일과 한얼님과 한검은 같은 의미의 다른 표현이라 할 수 있다. 이를 도표화하면 도표 (5)과 같다. 도표 (5) 삼신의 상호 관련표 三神일체의 하나님 天 一 한늘님 桓 因 조화의 작용  地 一 한울님 桓 雄 교화의 작용  人 一 한얼님 桓 儉 치화의 작용   이상에서 말한 한인·한웅·한검은 하나님의 작용을 셋으로 나누어 신격화한 칭호이다. 그런데 그 칭호가 우리민족의 국조이신 삼성과 동일하다. 그뿐만 아니라 三神이라 할 경우, 우주의 진여이법인 천일·지일·인일을 의미하는 경우와 한인·한웅·한검을 의미하는 경우가 있고, 그밖에 역사적 인물로서의 우리민족의 국조를 의미하는 경우가 있다. 그러므로 이 점을 잘 구별해서 이해해야 할 것이다. 6) 하나님은 여러가지의 현상으로 표현된다. 천일·지일·인일의 삼신일체를 존칭하여 하나님이라 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천일·지일·인일로 삼분하여 천일(한늘)을 연상하면 그것은 우선 해와 달과 별을 연상할 수 있는데, 여기에서 하나님 신앙은 태양숭배(太陽崇拜)·일월신앙(日月信仰)·성신신앙(星辰信仰)·칠성신앙(七星信仰)으로 변모하게 되고, 또 지일(땅)을 연상하면 그것은 산과 들(野)과 바다를 연상할 수 있는데, 여기에서 산신제·토신제·용왕제가 생겨나게 된다. 또 인일(사람)을 연상하면 우선 나를 낳아 키우고 교육시켜 준 조상과 부모의 은혜를 잊을 수 없는데, 여기에서 기일제사와 시제(時祭) 등 조상숭배사상이 생겨나게 되고, 또 한인·한웅·한검의 국조가 없으면 이 나라와 이 민족이 존재할 수 없는데, 여기에서 삼성사(三聖祠)가 생겨나게 된다. 그밖에 국가와 민족을 위해 신명을 받친 충효열사(忠孝烈士)와 역대 제왕이 없으면 이 나라가 존재할 수 없는데, 여기에서 단사전묘(壇祠殿廟) 제도가 생겨나게 된다. 이를 생각하면 우리의 민속에 있는 여러가지의 신앙이 신선도의 유풍유속임을 추정할 수 있게 된다. 그렇다고 오늘날도 하나님 신앙을 여러가지로 세분하여 신앙하라는 것은 아니다.   2. 소도제천의식 1) 문제의 제기 불교와 기독교를 보면, 교주 탄신일이나 성도일 또는 부활절을 맞아 일정한 종교의식이 있다. 신선도에도 한웅천황이 개천시교(開天施敎)한 달을 상달이라 하여 매년 10월이면 三神하나님에게 제사하는 소도제천의식(蘇塗祭天儀式)이 있었다. 그러나 지금까지 소도제천의식을 자연발생적 미신의 일종으로 여겨왔고, 거기에 별다른 의의를 부여하지 않았다. 부여하였다면 소도제천의식을 막연히 하나님을 섬기고 오곡의 풍작을 비는 경천의식(敬天儀式) 또는 풍년제(豊年祭)의 일종으로 생각하여 왔던 것이다.  생각컨대, 소도제천의식이 자연발생적인 것이라면 제천의 대상이 일정치 못하여 한늘·태양·달·별 그리고 산·바다·바위·큰 나무·사나운 짐승·소·말·돼지 등 여러가지 자연물이나 자연현상 가운데 각 집단의 취향에 따라 어느 하나 아니면 몇개를 택하여 숭배의 대상으로 할 수 있다. 제천의 시기와 횟수도 일정치 못하여 1년 12월 가운데 어느 달이든 한번만 아니라 몇번이든 편의에 따라 택할 수 있다. 제천의 절차나 방법에 있어서도 일정치 못하여 재계할 수도 있고 아니할 수도 있으며, 제물을 올릴 수도 있고 아니올릴 수도 있으며, 절을 할 수도 있고 아니할 수도 있다. 고개만 숙이는 묵념, 양손을 합장하여 주문을 외우는 기도만으로 끝낼 수도 있다. 즉, 모든 것이 각 집단이나 각 지방에 따라 각양각색일 수 있다.  그러나 소도제천의식에 있어서는 전체 민족이 숭배의 대상이나 시기에 있어서 일정하고 제천의 내용이 교육적이다. 이하에서는 소도제천의식의 유래·의의·내용·형식 등을 소개하고 이어서 신선도와의 연관성을 밝혀 소도제천의식이 자연발생적인 미신행위가 아니라 신선도의 종교의식이었음을 밝히려 한다.   2) 소도제천의식의 유래 {규원사화}의 기록을 보면 "대개 하늘에 제사를 지내고 조상에 보답하는 예식은 단군에서 비롯되었다. 후세의 역대 여러 나라들이 제사를 지내지 않는 나라가 없었으니, 부여·예·맥·마한·신라·고구려 등 제국은 10월로서 하고, 백제는 4중월로서 하되, 도천(禱天)·무천(舞天)·제천(祭天)·교천(郊天)·영고(迎鼓)·동맹(東盟)이라 한다" 하였다. 또 이르기를 "음력 10월에 제천하던 것이 만세의 풍속이 되었으니 이것이 동방 특유의 성대한 제전(祭典)이요, 다른 나라와 비교할 수 없는 것이 되었다" 하고, {신단실기}에도 이르기를 생각컨대 "단군이 제천단을 설치한 것은 무릇 백성으로 하여금 멀리 근본을 쫓아 보본케 하기 위한 의도이다. 그러므로 단군이 어천(御天) 후에 인민이 그 유교를 준수하여 태백에 보본단과 아사달에 삼성사(三聖祠)를 건립하고 역대 제왕의 단·사·전·묘(壇·祠·殿·廟)를 각각 세우니 그 시원(始原)은 하나님을 섬기는 예에 있는 것이다"고 하였다. {규원사화}와 {신단실기}에는 소도제천의식의 시원이 하나님에게 제사하는 데에 있고, 단군 때부터 비롯된 것 같이 기록되고 있으나, 다음의 기록을 보면 한인의 환국 때부터 비롯되었다.  {태백일사}를 보면 "상고하건대 삼신(三神)은 한늘을 낳고(生天) 만물을 가꾸시며(造物) 한인은 사람을 가르쳐 의(義)를 세우니 이로부터 자손이 서로 의(義)와 교(敎)를 전하고, 현묘한 법도를 깨달아 광명이세(光明理世)하였다. 실로 천지인(天地人) 삼극(三極)은 대원일(大圓一)하는 서물(庶物)의 원의인 즉, 천하구환(天下九桓)의 예락이 곧 삼신고제(三神古祭)의 풍속이 아니고 무엇이리요 하였다. 여기에서 보면 소도제천의식은 단군왕검 이전 한인의 환국에서 天地人 三神一體의 하나님에게 보본하는 데서 비롯되고 있다.  다음 {한단고기} 삼성기전하편 배달국 시대를 보면, "한웅천황이 처음으로 개천(開天)하여 백성에게 교화를 베풀 때, 천경(천부경)을 연(演)하고 신고(三一神誥)를 강(講)하여 크게 무리를 가르쳤다. 이후로 치우천황이 토지를 개간하고 구리와 쇠를 캐서 병사를 단련하고 산업을 일으켰다. 소도(蘇塗)를 주관하고 무리와 의논하여 하나로 화백(和白)하고 아울러 지·생(知生)을 쌍수(雙修)하여 천궁에서 살았다"고 하였다. 즉 배달국 시대에도 소도제천의식이 있었다.  {단군세기} 고조선 시대를 보면 개천 1565년(B.C. 2333년) 10월 3일에 이르러 신인(神人) 왕검이 오가(五加)의 우두머리가 되어 무리 800을 이끌고 단목의 밑에 와서 삼신에게 제사를 드렸다고 하였다. 또한 단군왕검 무오 51(B.C. 2283)년, 제(帝)가 운사(雲師) 배달신에게 명하여 혈구(穴口;지금의 강화)에 삼랑성(三郞城)을 쌓고 마리산(마니산)에 제천단을 쌓았다. 지금의 삼랑성이 그것이다 10월에 국중대회를 열고 하나님에게 제사를 지내니 백성들이 기뻐하며 즐겼다. 이로부터 황화(皇化)가 구역(九域)의 먼 곳에 까지 적시어 덕교(德敎)를 즐김이 점차 널리 퍼져 나갔다고 하였다. 또한 16세 단군 위나제조를 보면 무술 28년 구환(九桓)의 제한(諸汗)이 영고탑(寧古塔)에 모여 삼신하나님에 한인·한웅·치우 및 단군왕검을 배향하여 제사를 지내고 무리와 더불어 5일 대연을 베풀었다고 하였다.  이상의 기록을 보면 원래 10월의 소도제천의식은 한웅의 개천입교(開天立敎)를 기념하고, 천일·지일·인일의 삼신하나님에게 보본하기 위한 데서 비롯되었던 것이다. 삼신하나님에 한인·한웅·한검(치우)을 배향하여 모신 것은 단군왕검 어천 이후의 일이다. 이것만을 보아도 소도제천의식은 신선도의 종교의식임을 알 수 있다.  3) 소도제천의식의 내용 소도제천의식이 신선도의 종교의식임을 논증하기 전에 그 내용을 먼저 알아보기로 한다.  첫째, 소도제천의식의 목적은 근본에 보답하는 데에 있었다.  {신단실기}에 이르기를 "제천단을 설치한 것은 무릇 백성으로 하여금 멀리 근본을 쫓아 보본케 하기 위한 것이다. 태백에 보본단을 설치하고 아사달에 삼성사(三聖祠)를 건립하여 역대 제왕의 단·사·전·묘(壇·祠·殿·廟)를 각각 세우니 그 시원은 하나님을 섬기는 예에 있는 것이라 하였고, {태백일사} 소도경전본훈을 보면 "무릇 제사하는 것은 반드시 선조가 살아있을 때를 본떠서 선조가 항상 살아있는 것처럼 지성을 드려야 한다. 신주를 세우고 설상(設床)하여 제물을 드리는 것은 곧 친히 뵙는 예의를 표현하고자 하는 것이다. 지나간 먼 일을 사모하여 조상에 보답하는 것은 지금의 삶이 거듭 이어지기를 바라는 후손에 대한 가르침인 것이다" 하여 소도제천의식이 삼신하나님과 역대 제왕과 선조의 은혜에 대한 보답임을 밝히고 있다.  둘째, 숭배의 대상이 삼신오제(三神五帝)이다. 즉 三神하나님과 五方의 五帝이다.  정인보는 {사기} 봉선서에 근거하여 五帝란 동·서·남·북·중앙의 오방신(五方神)이라 하고, 부여의 영고, 예와 맥의 무천, 마한의 천군 등 소도제천의식도 삼신제단(三神祭壇)을 설치하고 삼신오제에 제사를 지내는데 5방 고산(五方 高山)에서 지낸다고 하였다. 즉 숭배의 대상이 삼신오제라는 것이다.  셋째, 10월에 소도제천의식을 지냈다.  {규원사화}를 보면 "제천하는데 부여·예·맥·마한·신라·고구려 등 제국은 10월로서 하고, 백제는 4중월로서 하되, 도천·무천·제천·교천·영고·동맹이라 한다"고 하였다. 즉 백제를 제외하면 전체 민족이 음력 10월에 소도제천의식을 지냈다는 것이다.  넷째, 모든 정성을 다하는 것이다.  {마한세가}(하)를 보면 "제천하는 예는 마땅히 국전에 있으니 지나침이 없도록 하라. 반드시 옛 사실을 징거하여 정성껏 공경하는데 이르러야 한다. 지금 제사를 지내고 맞이함에 있어 정제하고 신역(神域)을 샅샅이 청소하고, 희생을 깨끗이 준비하여 패백을 써서 삼신에게 보답하여야 한다. 이때 帝가 7일 재계하고 여원홍에게 향과 축을 내려주었다고 하였다.  여기에서 보면 삼신하나님에게 제사를 지내는데 검소하면서도 정성과 공경을 다하여 7일 전부터 재계하고, 향과 축, 희생과 패백을 사용하는 등 모든 정성을 다하고 있다.  다섯째, 경(천부경)을 읽고, 덕(德)을 기리는 노래를 불렀다.  {단군세기}를 보면 신시(神市) 이래로 국중대회를 열고 제천하는데, 덕(德)을 기리고 서로 화합하는 어아가(於阿歌)와 애환가(愛桓歌)를 불렀다. 또한 왕이 누전에 올라 경(經;천부경)을 논(論)하고 고(誥;삼일신고)를 연(演)하였다고 하였다.  여섯째, 살생을 금하고, 옥문을 열어 대사(大赦)하였다.  {단군세기} 제11세 도해제조와 {삼국지} 위지 동이전 부여조를 보면 삼신에게 제사를 지내는데 살생을 금하고 방생하였으며, 옥을 풀어 밥을 먹이고 죄수를 풀어주었다고 하였다. 이를 보면 백제 법왕이 금살령(禁殺令)을 내린 것도 불교의 영향만이 아니라 상고시대부터 내려온 관행이라 할 수 있다.  일곱째, 삼륜구서(三倫九誓)의 훈(訓)을 행하였다.  {마한세가}를 보면 제3세 가륵 원년에 소도를 세워 삼륜구서의 훈을 베푸니 치화가 크게 행하여졌다고 하였다.  여덟째, 경당(?堂)을 설치하여 각종의 교육을 실시하였다.  {태백일사}를 보면 소도가 선 곳에는 충효신용인(忠孝信勇仁)의 오상(五常)의 도(道)가 있었다 하고, 소도의 옆에는 반드시 경당을 세워 미혼자제(未婚子弟)에게 사물을 강습케 하였는데, 대개 독서(讀書)·습사(習射)·치마(馳馬)·예절(禮節)·가락(歌樂)·권박(拳搏)겸 검술(劍術) 등의 육예(六藝)였다고 하였다. 신채호 역시 소도의 경기 내용으로 한맹(寒盟)·수박(手搏)·검술(劍術)·궁시(弓矢)·격구(擊球)·금환(金丸)·주마(走馬)·회엽(會獵)이라 하였다.  이상과 같은 목적과 절차 및 내용으로 볼 때, 소도제천의식은 자연발생적인 미신행위가 아니라 종교의식임에 틀림없는 것이다.   4) 소도제천의식과 신선도와의 연관성 소도제천의식이 하나의 종교의식이라 할 때, 신선도와 어떠한 관계에 있느냐 하는 문제이다.  첫째, 한웅천황이 개천입교(開天立敎)한 것이 10월이며, 단군왕검이 조선국을 건국한 것도 10월이고, 소도제천의식도 10월이다. 따라서 10월은 년중 상달이 되는 것이며, 한웅천황의 개천입교와 단군왕검의 조선국 건국 및 소도제천의식은 서로 불가분적인 관계에 있다고 할 수 있다.  둘째, 신선도의 발생원리인 삼신오제와 소도제천의식의 숭배대상이 동일하다.  신선도의 도·불·유 삼교일체 사상은 삼신일체 원리에서 발원되고, 충·효·신·용·인(忠·孝·信·勇·仁)의 오상(五常)의 도(道)는 오제사상(五帝思想)에서 발원된다. 즉, 신선도는 삼신오제(三神五帝)사상에서 발원된다. 그런데 소도제천의식에서는 오방(五方)의 명산(名山)에서 삼신오제(三神五帝)에게 제사를 지낸다. 이는 신선도의 발생원리를 신격화시켜 소도제천의식에서 숭배의 대상으로 하고 있는 것이다.  셋째, 신선도와 소도제천의식은 그 유래를 함께 한다.  이상을 미루어 생각하면 소도제천의식이 신선도와 더불어 함께 발원되었다고 추정할 수 있는데, {태백일사}에 천하구환(天下九桓)의 예락(禮樂)이 삼신고제(三神古祭)의 풍속이 아니고 무엇이리요 하였는가 하면, {한단고기} 삼성기전 하편에는 한웅천황이 소도를 직접 주관하였다 하고, 이능화도 {조선무속고}에서 부여의 영고, 고구려의 동맹, 예와 맥의 무천 등 소도제천의식이 단군신교의 유풍 유속이라 하였다. 이와 같이 소도제천의식의 유래도 태고시대의 신선도와 함께 시원되고 있다.  이상과 같이 신선도와 소도제천의식이 서로 불가분적 연관성을 지니고 있다. 또한 소도제천의식의 내용도 어느 종교의식에 뒤짐이 없었다. 그러므로 소도제천의식은 신선도의 종교의식이라고 결론을 내릴 수 있고, 아울러 신선도는 합리적 성립종교라는 사실이 거의 증명되었다고 할 수 있다. Ⅸ. 신선도의 실재적 근거 상고시대부터 합리적 성립종교가 있었다면, 천재지변이 극히 심하여 유적이 모두 유실되고 없어졌다 하더라도 그 유적이 있던 자리 곧 유적지(遺跡址)는 없어질 수 없다. 그러나 고유신앙이 사라지게 되면서 민족적 주체의식도 사라져 사고방식도 외국화될 수 밖에 없었으니 여기에서 심각한 문제가 발생되지 않을 수 없다. 다시 말하면 까만 안경을 쓰고 보면 사물이 까맣게 보이고, 파란 안경을 쓰고 보면 사물이 파랗게 보이는 것과 같이, 남의 나라의 사상을 배우고 남의 나라의 신을 섬기다 보면 사고방식도 남의 나라 사람 같이 되어 자기 것도 남의 나라의 것으로 보이게 되니 여기에 문제가 있는 것이다. 그러한 점을 고려해서 본 항목을 읽어야 할 것이다.   1. 신선도의 유적이 있다 첫째, 신선도의 제천처와 사당이 있다.  신선도의 숭배대상은 원래 천일·지일·인일의 삼신하나님이다. 곧 하나님을 숭배의 대상으로 한다. 그래서 신선도에서는 명산 대천에서 삼신하나님께 제사를 올리었다. 그러나 세계가 이기화되고 민족주의의식이 고취되면서 한인천제와 한웅천황과 치우천황의 삼성을 삼신하나님으로 섬겼는가 하면, 한인천제와 한웅천황과 단군왕검의 삼성을 삼신하나님으로 모시기도 하였다. 곧 인간이 신격화된 것이다. 오늘날 일본에서 자기나라의 군주를 천황이라 신격화시켜 하나님 같이 모시고, 불교에서 정반왕의 태자 석가모니를 신격화시켜 응신불(應身佛)로 모시고, 기독교에서 요셉의 아들 인간 예수를 신격화시켜 하느님(하나님)의 아들로 모시는 것과 같은 격이라 할 수 있다. 또한 오늘날 각 종교에서 인간을 신격화시켜 모시는 것도 신선도의 유풍 유속이라 할 수 있다.  삼성 또는 삼신을 모셨던 유적으로 현재 남아있는 것은 한밝산의 보본단, 묘향산의 단군굴, 평양의 단군묘, 서울의 사직단(社稷壇)과 인왕산의 국사당(國師堂), 강화도 마니산의 제천단(참성단)과 정족산의 삼랑성(三郞城), 황해도 구월산의 삼성사(三聖祠)와 어천대(御天臺), 금강산의 천제단, 태백산의 천황단과 단군성전 및 황지, 서울 인왕산 활터인 황학정(黃鶴亭), 조선호텔 앞의 제천단인 원구단(圓丘壇), 전북 진안 솟도산인 마이산(馬耳山), 전남 해남읍의 천진전(天眞殿), 경북 김천 직지사를 비롯해서 사찰의 한쪽에 모셔있는 삼성각, 울진군 북면 나곡리의 성황당과 신목, 제주도 북제주군 송당리 만장굴 본향당 등을 들 수 있다.  둘째, 신선도의 절터가 있다.  {삼국유사}가섭불연좌석편을 보면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옥룡집(玉龍集)과 자장전(慈藏傳) 및 제가전기(諸家傳記)에 다 이르기를 신라의 월성(月城) 동쪽 용궁(龍宮)의 남쪽에 가섭불의 연좌석이 있으니 그곳은 전불시절 가람의 터이다. 지금 황룡사의 지역은 일곱 절터 중의 하나이다. 국사(國史)에 의하면 진흥왕 즉위 14년인 개국(開國) 3년 계유(553) 2월에 월성 동쪽에 신궁(新宮)을 건축할 때에 그 지역에서 황룡이 나타나므로 왕이 의아히 생각하여 황룡사로 개조하였는데 연좌석은 불전 후면에 있었다. 전에 한번 참배한 바 돌의 높이는 5-6척 가량이며 그 둘레는 겨우 세발이다. 우뚝 섰는데 위는 편편하였다. 진흥왕이 절을 세운 뒤로 두번이나 화재를 겪어 돌에 갈라진 곳이 생겼으므로 절의 중이 쇠를 붙여 보호하였다".  위의 기록을 보면 옥룡집·자장전·제가전기 등 전거에 근거하여 황룡사의 터를 전불시절 일곱 절터 중의 하나라 하고 있다. 즉 전불교인 신선도의 절터가 신라의 고도 계림에 있다는 것이다. 더욱이 역사적 실재 인물인 신라 제24대 진흥왕이 전불시대의 가람의 터에 절을 지었다는 것과 가섭불의 연좌석에 참배하였다는 점, 화재를 만나 연좌석에 금이 난 것을 절의 스님이 쇠를 붙이고 잘 보호하였다는 점 등, 이러한 역사적 사실들을 미루어 생각할 때, 위의 기록을 믿지 않을 수 없다. 또한 {삼국유사} 아도기라 편을 보면, 아도본비를 근거로 일곱 절터와 거기에 새로이 들어선 불교사찰의 명칭을 하나 하나 밝혀주고 있다.  ? 금교(金橋) 동쪽 천경림(天鏡林 : 지금의 興輪寺址)  ? 삼천기(三川岐; 지금의 永興寺址)  ? 용궁(龍宮) 남쪽(지금의 黃龍寺址)  ? 용궁(龍宮) 북쪽(지금의 芬皇寺址)  ? 사천미(沙川尾 ; 지금의 靈妙寺址)  ? 신유림(神遊林 ; 지금의 天王寺址)  ? 서청전(斷請田 ; 지금의 曇嚴寺址)  이상 외에도 경기도 양주군 천보산 회암사의 터를 서천축(西天竺)의 지공선사(指空禪師)는 상세칠불(上世七佛)시절의 큰 절터라고 하였다.  이상과 같이 전불시절의 절터가 우리나라에 있다. 이 사실 하나만으로도 우리나라에 신선도가 있었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석가불교에 의하여 그 사고방식이 인도화된 일부 불교신자와 불교학자들은 무조건 위의 기록을 부정하려 할 것이다. 이것이 문제인 것이다.  셋째, 만주 길림성 영안에 단군조선 시대의 영고탑(寧古塔)이 있었다.  {단군세기}를 보면 제16세 단군 위나제(尉那帝) 무술 28년(B.C.1583) 구한(九桓)의 제한(諸汗)이 영고탑(寧古塔)에 모여 삼신상제께 배향하였다는 기록이 있고, 제20세 단군 고홀제(固忽帝) 병신 36년에 영고탑을 수리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이를 보면 단군조선 시대에 영고탑이 있었다. 또한 {국어대사전}을 보면 영고탑을 영안이라 하고 영안은 만주 길림성에 있는 역사적 고성(古城)이라 하였다. 이를 보면 영고탑은 만주 길림성 영안에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넷째, 석가불교가 전래되기 이전 만주 요동에 불탑이 있었다.  고구려에 불교가 전래된 것은 소수림왕 2년 서기 372년이다. 그런데 {삼국유사} 요동성육왕탑 편을 보면 소수림왕 이전 성왕이 요동을 순행하다 보니 삼중토탑(三重土塔)이 있었다 하고, 또 성왕이 이로 인하여 신앙심이 생겨 칠중목탑(七重木塔)을 세웠는데, 그후에 불법이 들어왔다고 하였다. 즉 석가불교 전래 이전에 이미 우리나라에 불탑이 있었다는 것이다.  다섯째, 불교사찰 본당 대웅전은 신선도의 대웅전이다.  불교에서는 사찰본당에 비로자나불을 모셨으면 비로전, 미륵불을 모셨으면 미륵전, 아미타불을 모셨으면 (아)미타전, 약사여래를 모셨으면 약사전이라 한다. 그와 같이 석가불을 모셨으면 석가전이라 하여야 할 것이다. 그런데 그와 달리 불찰본당의 명칭을 대웅전이라 하였다. 대웅이란 불타의 십불호(十佛號)에도 없는 명호이다. 불교에서 대웅(大雄)이란 대자(大慈)·대비(大悲)·대혜(大慧)와 같이 어느 사람의 인격을 의미하는 말로서 석가세존만을 지칭하는 고유명사가 아니다. 그런데 대웅전이라 하였다. 그 이유는 어디에 있는가?  {태백일사}를 보면 "대웅전이란 승도(僧徒)들이 고사를 답습하여 잉칭한 것이며, 본래는 승가의 말이 아니라 하고, 또 말하기를 승도와 유생은 다 랑가(郞家)에 예속되었다. 이로써 가히 알 것이다"라고 하였다. 즉 불찰본당의 대웅전은 옛 사실을 답습한 것으로서 원래 불교의 말이 아니라는 것이다. 또한, 우리말 '한'은 '대(大)'의 의미를 지니고 있는데, "한웅을 대웅이라"고도 한다. 따라서 대웅전은 곧 한웅전으로서 신선도의 본당 명칭이라 할 수 밖에 없고, 그 안의 삼불(三佛)도 삼신(三神)에서 유래되었다고 할 수 밖에 없다. 따라서 대웅전이란 간판의 존재는 석가불교 전래 이전 상고시대부터 우리나라에 고불교인 신선도가 있었고, 석가불교가 신선도를 계승하였다는 살아있는 증거라 할 수 있다.  여섯째, 상고시대부터 한웅신상을 봉안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단군세기} 제11세 단군 도해(道奚) 조를 보면 "10월에 대시전(大始殿)을 세우고 장려하도록 명령하고 천제한웅의 유상(遺像)을 만들어 모시었는데, 그 머리 위에는 광채가 번쩍 번쩍하여 마치 큰 태양과 같았으며, 둥근 빛은 온 누리를 비추고 박달나무 밑 환화(桓花)의 위에 앉아 계시니 하나의 살아있는 신이 둥근 원의 가운데 앉아있는 것 같았다. 원심에 천부인표(天符印標)를 지닌 대원일지도(大圓一之圖)가 누전에 걸려 있었다. 호(號)를 거발한(居發桓)이라 한다"고 하였다. 거발한이란 천·지·인(天·地·人)삼신일체의 천도를 크게 깨달은 성인을 지칭함이다.  여기에서 보면 한웅유상을 모셨음이 불찰본당 대웅전의 중앙에 모셔있는 불타상과 꼭 같다. 누전에 대원일지도가 걸려있다는 것은 불타상의 후면벽에 걸려있는 일원상과 같고, 환화의 위에 한웅유상이 앉아 있다함은 연화대 위에 불타상이 앉아있는 것과 같다. 이를 보아도 불찰본당의 대웅전은 신선도의 고사를 답습한 것이라 아니할 수 없다.  일곱째, 고고학적 근거가 있다.  1983-85년에 걸쳐 중국 요령성 눙원현 우하량 유적지를 발굴조사하였는데, 그 구릉상에서 제사유적과 신전 및 여자신상이 발견되었다. 이를 방사선 측정한 결과 기원전 3500년으로 나왔다. 중국 요령성은 옛날 청구(靑邱)라 불리웠던 곳이며, 청구는 고대의 우리나라를 말한다. 따라서 이번에 중국 요령성에서 발견된 제사유적과 신전 및 여자신상은 신선도의 실재성을 고고학적으로 증명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여덟째, 오늘날 10월 3일의 개천절행사가 한웅천황이 신선도를 설하고 신선도가 있었다는 또 하나의 살아있는 증거라 할 수 있다. 이에 대해서는 앞에서 설명하였다.   2. 샤마니즘과 돌무덤은  신선도의 유풍·유속이다 1) 샤마니즘 샤마니즘(샤머니즘)은 우랄알타이어족을 주축으로 하여 아시아 일대와 나아가서는 전 세계에 널리 유포되고 있는 민간신앙의 한 형태이다. 주술과 제사와 예언을 통하여 기복과 재액을 목적으로 하는 자연종교의 한 형태로 여겨왔다. 한자의 살만(薩蔓)·찰만(札蠻)·철만(撤蠻)·산만(珊蠻)은 모두 샤만의 음역(音譯)이다. 우리말에서 샤만은 무당이라 불리는 것이 보통이고 중부 이남의 방언에서는 "당굴 또는 당골"이라 불리기도 한다. 이제 샤만의 연원이 신선도와 동일함을 밝힌다.  첫째, 샤만의 어원은 고조선의 삼한(三韓)이다.  샤만의 어원이 팔리어의 사마나(Samana), 대승불교의 사문(沙門), 페르샤어의 우상이나 사(祠)를 의미하는 세멘(Schemen)에서 나왔을 것이라는 설도 있으나, 팔리어(Pali語)를 쓰는 드라비다족(族)이나 페르샤어(Persia語)를 쓰는 아리안족(族)은 우랄알타이어족(族)이 아니다. 그뿐만 아니라 발음의 유사성만으로는 그 근거가 너무나 빈약하다. 또한 대승불교의 사문에서 샤마니즘이 나왔을 것이라는 주장 역시 샤만이 대승불교보다 후에 나왔다는 주장으로서 어불성설이다.  이에 반하여 벤자로프는 샤만의 어원을 만주어라 하였다. 만주는 과거의 우리나라 고조선의 영토로서 고대의 만주는 진(辰)·변(辨)·마(馬)의 삼한(三韓)이 웅거하던 곳이다. "삼한은 곧 三王이다". 삼왕은 교정일치(敎政一致) 시대의 통치자임과 동시에 제사장이며 주술자이고 예언가이다. 이들은 백성에게 복을 빌어주고 재앙을 면하게 하는 것을 통치의 목적으로 한다. 기능면에서 샤만과 삼한(삼왕)이 동일하다. 또한 발음도 삼한→삼안→샤만으로 자연스럽게 전음될 수 있어 샤만과 삼한은 원래 같은 음이다. 따라서 샤만의 어원은 벤자로프의 주장과 같이 만주어로서 고조선의 삼한이라 할 수 있다.  둘째, 우주관 및 신관이 동일하다.  샤마니즘에서는 우주를 상계·중계·하계로 나누어 상계는 상제와 선신(善神)이 주관하고, 중계는 인간과 생물이 사는 곳이며, 하계는 악신이 있는 곳이라 한다. 신선도에서도 삼신일체의 원리에 따라 우주를 상계(천계)·중계(인계)·하계(지계)의 삼계(三界)로 나누고, 천신(天神)·인신(人神)·지신(地神)의 삼신(三神)으로 나누기도 한다. 이래서 샤마니즘과 신선도의 우주관이나 신관이 동일하다. 그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무속에서는 천신·지신·인신을 삼신제왕이라 하여 주신으로 섬기고, 무(巫)자도 파자하면 무(巫)의 상획은 하늘을 의미하고, 하획은 땅을 의미하는데, 두 사람이 하늘과 땅을 연결시키는 형상이다. 즉 '무(巫)'자는 천·지·인(天·地·人) 삼신일체(三神一體)의 회의문자이다. 이를 보아도 샤마니즘과 신선도는 우주관과 신관 그리고 그 발생원리에 있어서 서로 동일함을 알 수 있다.  셋째, 인체계의 구성계기를 3원적 구조로 보는 것이 동일하다.  뿌리아트의 샤마니즘에서는 사람의 육체계를 ? Oyeye 즉 Material body : 육체. ? Amin 즉 약간 하등되는 영혼: 숨. ? Sunyesun 즉 사람만의 영혼 등 세 부분으로 나누어 인체계의 구성계기를 육체·숨·영혼의 3원적 구조로 보고 있다. 신선도에서도 인체계의 구성계기를 숨(氣)·마음(心)·육체(身)의 3원적 구조로 본다. 이것 역시 샤마니즘과 신선도가 서로 동일하다.  넷째, 살생유택(殺生有擇)사상이 동일하다.  샤마니즘에서는 어느 동물 또는 식물과 자기 종족과의 사이에 혈연적 관계가 있는 것으로 알고 그것을 종족의 수호자로 숭배하여 그 살상(殺傷)·식용(食用)·남용(濫用)을 금하고, 일정한 경우에 한해서 의례적으로 살상·식용한다. 즉 샤마니즘에서는 때와 물건을 가리어 살생한다. 신선도의 오계(五戒)에도 때와 물건을 가리는 살생유택(殺生有擇)이 있다.  다섯째, 신선도가 도·불·유 삼교일체 사상인데, 샤마니즘에서도 도·불·유 삼교의 용어를 혼용한다.  위의 내용으로 보아서 샤마니즘은 자연종교가 아니라 원래 성립종교라 할 수 있는데, 샤마니즘의 경전을 보면, 어느 경을 보아도 거기에 도·불·유 삼교의 용어가 혼재하고 있다. {삼신태자경}을 예로 들면, 거기에 천황(天皇)·지황(地皇)·인황(人皇)과 유황유소·제곡도당·수인·여와·황제헌훤 등의 삼황오제(三皇五帝)가 나오고, 팔궤·삼신·삼십삼천·도솔천·도시왕·칠성님·지부대왕·서천서역·불전·옥황상제·세존님·108염주·관세음보살·아미타불·육자염불·임록·관록 등의 각종의 록, 옥경·12제국·백부왕 등등 도·불·유의 용어가 혼용되고 있다. 현실적으로 무당들의 푸닥거리를 보아도 도·불·유의 용어를 혼용한다.  이상과 같이 샤마니즘과 신선도의 근본이 동일하다. 그것은 무엇을 우리들에게 가르치고 있는가?  첫째, 샤마니즘과 신선도가 같은 데서 연원되었거나, 아니면 이능화의 주장과 같이 샤마니즘은 신선도의 유풍 유속이라 할 수 있다.  둘째, 우리나라 중부 이남 지방에서 무당을 당굴 또는 당골이라 하는 것이나, 몽고어의 Tengri도 "단군"의 음(音)에서 유래된 것이라 할 수 있고,  셋째, 샤마니즘 현상은 서구보다도 아시아 일대에 특이한데 그것은 우리민족의 고대문화가 아시아 일대에 넓게 영향을 주었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라 할 수 있고, 좁게는 신선도의 영향이 그만큼 컸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여기에서 배달사상 곧 신선도는 동방사상의 원류이며, 우리민족은 동아문화의 창조자라는 안호상 박사의 지론이 타당함을 알 수 있고, 한국의 무속은 신선도와 더불어 민족사상의 본산이며, 고대 한국은 세계무속의 진원지라 할 수 있다. 2) 돌무덤 동이민족의 시신매장 시설은 다른 민족과 달리 돌을 가지고 축조하였는데 그것을 돌무덤 또는 석묘(石墓)라 한다. 돌무덤 중에는 돌무지무덤(적석총), 돌널무덤(석관묘), 돌덧널무덤(석곽묘), 돌방무덤(석실묘), 고인돌무덤(지석묘) 등이 있다. 그중에서 대표적인 무덤형식의 하나가 바로 돌널무덤이다.  이와 같은 돌무덤은 신석기 시대로부터 청동기 시대에 이르기까지 오랫동안 만주와 한반도에서 크게 유행하였는데 남쪽으로는 일본의 구주지방과 유구열도에 이르기까지 분포되어 있고, 서쪽으로는 멀리 시베리아 지역에서도 이와 비슷한 돌무덤이 발견되었다.  이로 인해 지금까지 한반도의 돌무덤의 기원을 청동기시대에 시베리아로부터 내려왔다고 보는 경향이 일반적이었다. 그래서 신석기시대의 빗살무늬 토기가 시베리아에서 전래되었다고 믿었던 것처럼 한반도의 돌무덤도 북방에서 전래되었다는 북방전래설(서구전래설)이 주장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1983-1985년에 걸쳐 중국 요령성 능원현 우하량 적석총 유적에서 15개의 돌널무덤이 발견되었다. 이들 돌널무덤의 안에서 빗살무늬 토기를 비롯하여 채색토기·옥기 등 전형적인 홍산문화유형의 유물이 발견되었는데, 그 연대는 기원전 4000-3000년 경에 해당된다. 시베리아에서 비교적 이른 시기의 돌무덤의 연대는 기원전 2500-1200년 경으로 추산된다. 따라서 요령성 유역 돌널무덤의 축조년대는 시베리아보다 무려 2000년 이상이나 빠른 셈이다. 그러므로 동북아 돌널무덤의 기원을 발해연안으로 믿을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고인돌 역시 돌무덤과 더불어 신석기 시대 후기 내지 청동기 시대(기원전 1500-200)에 한반도와 만주의 요동지방에서 유행한 대표적인 돌무덤 중의 한 형태이다. 고인돌은 지석(支石)을 표현한 말로써 일본어로는 "トルメン:도루멘", 영어로는 "Dolmen:돌멘"인데 이러한 말의 어원이 일본인들에게나 서구인들에게는 무슨 뜻이지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는 말로서 일본어도 아니고 영어도 아니다. 순수한 우리말 "돌멩이"인 것이다. 이를 보아도 돌무덤이나 고인돌의 기원이 우리나라임을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단기고사}에 의하면 원래 고인돌의 개석(蓋石)은 천일(天一)을, 지석(支石)은 지이(地二)를 상징하고 하늘에 제사지내는 제천단이라 하였다. 이를 보면 고인돌이 무덤으로 변하기 전에는 제천단이었던 것이다.  이와 같이 샤마니즘 현상이나 돌무덤이 신선도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고, 그것이 아시아 일대에 널리 펴져 있음은 신선도의 사상이 그만큼 세계적이고 보편적이며 실재하였음을 증명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Ⅹ. 결 론 지금까지 신선도에 대하여 살펴보았다. 이를 종교의 일반적 구성요건에 대입시키면,  첫째, 설주로서 한인천제·한웅천황·단군왕검의 삼성이 있다.  둘째, 숭배의 대상으로서 삼신하나님이 있다.  세째, 종교적 목적으로서 홍익인간 이화세계건설이 있다.  넷째, 사상으로서 도·불·유 삼교일체사상이 있다.  다섯째, 계율로서 삼륜·오계·오륜·팔조·구서 등이 있다.  여섯째, 의식으로서 소도제천의식과 가정에서의 제사의식이 있다(본서에서는 가정에서의 제사에 대한 설명은 생략하였다).  일곱째, 경전으로서 천부경·삼일신고·참전계경이 있다(본서에서는 설명을 생략하였다).  또한 이상의 일반적인 종교적 구성요건 외에 신선도는 다음과 같은 특수성을 지닌다.  1) 서구종교의 숭배대상은 여호와 또는 알라로서 국지적 민족적인데 신선도의 숭배대상은 삼신하나님으로서 보편적 세계적이다.  2) 서구종교의 신앙목적은 신의 구원에 의한 사후의 천국탄생으로서 개인주의적인데, 신선도의 신앙목적은 신인일체(神人一體) 내지 천지인합일(天地人合一)의 인격완성을 통한 성인군자 내지 견성성불(見性成佛)의 지향과 홍익인간 이화세계 건설로서 개인주의적이면서 세계주의적이다.  3) 서구종교는 어느 개인에 의하여 인위적으로 조작된 종교로서 거기에 발생원리도 없다. 그러나 신선도는 불변적 진리인 천도(天道) 곧 삼신일체를 발생원리로 한다.  4) 서구종교의 교리와 사상은 시대적 민족적 소산으로서 국지적 민족주의적인데, 신선도의 교리와 사상은 명·성·정(命·性·精) 삼진(三眞)의 수련과 백·흑·황의 삼대인종을 배경으로 성립되어 보편적 세계주의적이다.  5) 서구종교는 수양방법으로서 단지 기도와 독경과 자선행위 뿐인데, 신선도는 수양방법으로서 기도와 독경과 자선행위 외에 명(命)·성(性)·정(精)의 삼원적 품부를 수련하는 조식법(調息法)·지감법(止感法)·금촉법(禁觸法)이 있다.  6) 서구종교는 신인상하(神人上下)의 생명불평등사상인데, 신선도는 천지인(天地人) 일체의 생명평등사상이다.  7) 서구종교는 2원론으로서 대립과 투쟁을 자기의 생존을 위한 당연한 수단으로 보는데, 신선도는 3원론적 1원론으로서 조화사상이었다.  신선도는 이상과 같이 종교적 구성요건과 서구종교와 다른 특수성을 지니고 있다. 또한 신선도는 지금부터 근 6천년 전, 세계인류가 원시의 미몽에서 깨기 전에 성립되었다. 이러한 사실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 신선도는 시대적 국지적 민족주의 종교가 아니라 보편적 세계주의 종교임을 의미한다.  ? 상고시대의 우리나라는 부처님이 세운 나라로서 천축국(天竺國)이 었으며, 예의지국이었고 군자지국이었으며 신선지국이었다는 기록이 사실임을 의미한다.  ? 신선도를 설한 한인천제와 한웅천황과 단군왕검은 신화적인 존재가 아니라, 오히려 석가모니·공자·노자·예수보다도 더욱 위대한 성인이시며 부처님이었다는 이론이 성립된다.  ? 우리민족은 상대문명의 주인공으로서 동방문화의 개척자요 세계문명의 지도자였다는 이론이 성립된다.  ? 우리민족은 다른 민족과 다른 특수한 사상과 문화를 일찍이 개척함으로써 이웃 민족들로부터 시기와 질투의 대상이 되었다. 우리민족의 문화가 말살당하게 된 동기도 거기에 있었던 것이다.  ? 노자의 도교·석가의 불교·공자의 유교 등 이들 종교의 원류는 신선도로서 현재 국내에 있는 도교·불교·유교는 역수입되었다는 이론이 성립된다. 이에 대해서는 제2부에서 상설한다.  ? 신선도는 현대철학이나 현대종교 이전의 선행종교로서 동양사상의 원류요 세계사상의 원조이며 모체라는 이론이 성립된다.  ? 서양 사람들이 설정하여 놓은 원시니 선진이니 하는 개념은 이제 수정되어야 하고, 문화에도 생성소멸의 원칙이 적용되어야 한다는 이론이 성립된다.  ?서구문화기원설·북방문화기원설·남방문화유입설·중국문화수입설·인도문화수입설 등 종래의 학설들은 당연히 수정돼야 한다는 이론이 성립된다.  이상과 같이 결론을 내릴 수 있다. 그러나 본 연구는 천수백년만에 처음으로 제기되는 문제이며 너무나 새롭고 의외의 문제로서 당장 받아들이기 어려울 것이다. 더욱이 배달사상에 대하여 백지이면서 안호상 박사께서 말한 바, 중독·왜독·양독 등 외래사상에 중독된 사람들은 더욱 받아들이기 어려울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그러한 사람들은 사소한 결함을 빙자하여 내용을 깊이 연구하여 보지도 않고, 무조건 부정하려 할 것이다. 물론 본 연구는 새로운 연구요 자료도 얼마 없는 데서 이루어진 연구로서 여러가지로 보완하여야 할 곳이 많으리라 생각한다. 이러한 점을 이해하지 못하고 마치 미운 사람을 대하듯 무조건 흠집만 찾아내고 부정하려는 사람이 있을 수 있다. 그러한 이들에게 직언하나니 부정하려면 반드시 반증을 제시하여야 한다. 반증없는 부정은 학자의 도리가 아니요, 무조건 자기의 학설이나 통설만을 고집하려는 안일주의자요, 민족이나 인류의 명예보다도 자기 개인의 명예를 더 소중하게 여기는 이기주의자라는 혹평을 면치 못할 것이다. 깊은 자성이 있기를 촉구한다.  오호라! 여기에서 다소나마 우리민족은 미개민족이라는 오명에서 벗어나는 것 같다. 칠흑같이 어두웠던 긴긴 밤에 먼동이 트는 것이 아닌가 싶다. 해돋이 땅 동방의 금수강산에 밝은 해가 떠오르는 것이 아닌가 한다. 해중선국(海中仙國) 군자지국(君子之國)에 반드시 대운이 열리리라 믿는다. 7천만 민족의 3천년 한이 풀리고, 세계에 참다운 평화가 오리라 믿는다. 독자들은 분발하라. 민족과 인류를 위하여 용기를 내라. 배달사상은 젊은 독자들의 적극적인 연구를 기다리고 있다. 배달사상이 21세기의 세계를 지도하게 될 것이다. 부족한 점을 보완 재정비하고, 세계에 널리 알려야 할 것이다. 그것이 현재를 사는 우리들의 사명이 아니겠는가? 그것이 곧 국가의 위신을 세우고 민족의 명예를 회복하는 길이며, 세계평화를 위하는 길이 아니겠는가!   제2편 불교의 발상지는 우리나라이다         홍익인간 광명이세 Ⅰ. 서 론 제1편에서 상고시대의 우리나라에 고불(古佛 : 한인·한웅·한검)이 있었고, 그 고불에 의하여 천일·지일·인일 삼신일체의 천도에 바탕을 둔 도·불·유 삼교일체의 신선도가 성립되어 외래종교가 전래되기 전에 상고시대부터 우리나라에 있었음을 밝혔다.  이에 근거하여 우선 석가불교의 유래를 추적하여 본 결과 석가불교는 근본적으로 인도종교가 아니라 우리민족의 고유종교였다. 즉, 석가세존(釋迦世尊)의 씨족적 근원은 인도의 원주민도 아니었고 드라비다계도 아니었으며 아리아계도 아니라 단군족이었고, 그 출생지인 가비라도 네팔의 타라이가 아니라 우리나라의 백두산 남쪽 기슭으로서 석가세존은 근본적으로 우리민족이었다. 석가세존의 고행성도지인 설산 염부주(閻浮洲) 역시 인도의 히말라야산맥 어느 곳도 아니고, 인도 중부의 부다가야도 아닌 우리나라의 백두산 천지였다. 초전법륜지(初轉法輪地)인 녹야원(鹿野園)도 인도 중부의 사르나드(Sarnath)가 아니라 제주도 한라산이었다.  또한 불경은 소승경과 대승경으로 나뉘어지는데, 소승경(4부아함경)은 석가세존이 직접 설하신 경전이지만 대승경은 우리나라 고조선에서 인도로 전승된 신선도의 경전이었다. 대승경을 기록한 범어(산스크리트어)도 인도어가 아니라 상고시대 우리민족의 글자와 언어였다. 불교의 사상과 의식과 고유명사 및 전문용어도 우리민족의 신선도와 일치되었다. 따라서 석가불교의 원류는 전적으로 우리나라의 신선도였다.  이러한 학설은 석가불교가 우리나라에 역수입(逆輸入)되어 1600여년 만에 처음 제기되는 문제로서 불교학자와 불자들에게는 물론 일반인들에게도 너무나 이색적이고 상식을 벗어나는 이설(異說)이라 할 수 있다. 이래서 본 연구를 주체적 애국적 대다수의 불자들에게는 민족적 긍지와 자부심을 북돋우는 일이라 하여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겠지만, 반면에 수도에만 전념하여 조국도 민족도 떠나야 한다는 극히 이상적인 불자들에게는 아무런 관심도 흥미도 생기지 아니할 것이다. 그런가 하면, 불교를 지나치게 믿던 나머지 인도를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나라로 동경하고, 인도민족을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민족으로 극찬하면서도, 제 민족의 역사와 사상을 잘 모르고 제 민족에 대하여 관심이 그리 없는 극소수의 불자들에게는 석가세존이 우리민족이고 불교가 우리나라에서 나왔다고 할 경우, 무조건 거부반응이 생기고 불쾌하게 느껴질 것이다. 그래서 본 연구에서의 주장은 불교의 신앙사회를 교란시키는 처사라 하여 지탄의 대상이 될 수도 있다. 널리 이해하고 냉정한 마음으로 객관적인 입장에서 본 연구를 정독해 오해가 있으면 그것을 너그러운 마음으로 풀고 높으신 비판과 가르침이 있기를 진심으로 기대한다. Ⅱ. 석가세존은 한국사람이다. 1. 석가세존의 탄생지는 가비라이다. 석가세존이 한국 사람이냐 아니냐 하는 문제부터 풀어나가기로 한다. 이 문제는 석가세존의 탄생지와 성장지는 어디이며, 씨족적 근원은 어디냐 하는 문제로 나눌 수 있다. 첫째의 문제, 즉 석가세존의 탄생지와 성장지는 어디냐 하는 문제이다.  {장아함경} 대본경을 보면 "내 아버지는 정반(淨飯)이라 이름하는 찰제리의 왕족이요, 어머니의 이름은 대청정묘(大淸淨妙)이다. 왕이 다스리는 성은 가비라(迦毘羅)라 이름하였다. 부처님은 다시 계송으로 말씀하시기를 아버지는 찰제리, 이름은 정반, 어머니는 대청정묘, 땅은 넓고 백성은 풍족하였으니 나는 거기에서 태어났노라"하였다. 곧 석가세존은 가비라성에서 태어났음을 말하고 있다. 가비라성은 동서남북에 4개의 문이 있고 수십채의 궁전이 있는 자그마한 성읍국가로서 마갈타국에 속해 있었다. 이는 누구나 알고 있는 일반상식이다. 그러면 가비라성은 어디에 있는 어떤 성인가?  {석가씨보(釋迦氏譜)}에 의하면 가비라는 염부주 중의 한 지역으로 지구에서 가장 중심이라 하였고, 과거의 고불(古佛)이 모두 이곳에서 일어났다고 하였다. {중아함경} 유연경에는 "나(석가세존)를 위하여 여러 채의 궁전, 곧 봄 궁전과 여름 궁전과 겨울 궁전을 지었으니, 나를 잘 노닐게 하기 위해서 였다"고 하여 가비라에 봄·여름·가을·겨울의 4계가 있었고, 석가세존 혼자만을 위한 궁전도 세채임을 말하고 있다. {근본설 일체유부 비나야파승사(根本說一切有部毘奈耶破僧事)} 제5를 보면, "설산 남쪽 기슭 경가하(古伽河) 곁이 가비라 선인이 사는 곳이니 가비라성과 멀지 않다"하여 가비라성이 설산 남쪽 기슭에 있었음을 말하고 있다. 석가세존께서도 가섭에게 말하기를 "까마득한 옛날 나는 설산선인(雪山仙人)으로서 설산에 살면서 보살행을 닦았다"고 했다. 이를 보면 석가세존의 탄생지 및 성장지인 가비라는 설산 남쪽 기슭에 있었던 것이 틀림없는 것이다. 또한 우리나라 근세조선 세조 수양대군의 저술인 {석보상절}에 따르면 석가세존이 입멸하여 화장하자, 여덟섬 너말(8만 4천개)의 사리(舍利)가 나왔는데 이를 제천(諸天)과 용왕(龍王)에게 나누어주니 모셔다가 7보탑을 세웠다 하고, 그 중에서도 특히 명기하기를 "인간 세상에 큰 탑이 넷이니, 가비라국 부처가 나신 곳에 하나와 마갈제국 성도하신 곳에 하나와 파라날국 녹야원 전법하신 곳에 하나와 구시국 열반하신 곳에 하나가 있더라"고 하였다. 즉 석가세존이 입멸하자 탄생지인 가비라에 석가세존의 사리불탑을 세웠다는 것이다.  이상의 기록에 근거하여 가비라성의 성립요건을 인출하면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첫째, 가비라는 마갈타국에 속해 있는 성읍국가였다.  둘째, 가비라성은 설산 남쪽 기슭에 있었다.  셋째, 가비라는 지구(세계)의 중심에 있었다.  넷째, 과거의 고불이 모두 가비라에서 일어났다.  다섯째, 가비라에는 봄·여름·가을·겨울의 4계가 있다.  여섯째, 가비라성 내에는 동서남북에 4개의 성문이 있었다.  일곱째, 가비라성의 넓이는 수만평이라 추정된다.  여덟째, 가비라성에는 수십채의 건물부지가 있다고 추정된다.  아홉째, 가비라성에 석가세존의 사리불탑이 있다.  열째, 가비라성 곁을 경가하가 흐른다.  위의 요건은 가비라성의 특수요건임과 동시에 성립요건으로서 여기에 부합일치되면 가비라성이라 할 수 있고, 부합일치되지 않으면 가비라성이라 할 수 없다는 이론이 성립된다.   2. 가비라는 네팔의 타라이가 아니다 그러면 석가세존의 탄생지인 가비라성은 어디인가? 지금까지 석가세존의 탄생지 및 성장지를 네팔의 타라이라 생각해왔고, 그것이 통설로 되고 있다. 이제 그것이 사실인가 아닌가를 위에 제시한 가비라성의 성립요건에 대입하여 확인해 보기로 한다.  첫째, 가비라성은 마갈타국에 속해 있었다고 했다. 그런데 타라이가 마갈타국에 속했었느냐의 문제이다.  네팔(과거의 인도)은 과거 영국의 식민지로서 고대역사는 모두 말살되어 알 수 없다. 따라서 타라이가 마갈타국에 속했는지 아닌지를 알 수 없다. 이 문제는 논외로 한다.  둘째, 가비라성이 설산 남녘 기슭에 있었다고 했다. 그런데 타라이가 설산 남녘 기슭에 있느냐의 문제이다.  타라이 북쪽에 히말라야산맥이 있다. 그래서 타라이를 가비라성으로 오해하기 쉽다. 그러나 히말라야산맥 가운데 설산이 없다. 이에 대해서는 다음장에서 상설한다. 여기에서 근본적으로 타라이는 가비라성지가 아니라는 사실이 드러났다고 할 수 있다.  셋째, 가비라는 지구의 중심에 있다고 했다. 그런데 타라이가 지구의 중심에 있느냐의 문제이다.  가비라성은 아시아의 중심이 아니라 지구의 중심에 있었다고 했다. 그런데 타라이는 아시아의 중심에 있다고 볼 수는 있으나, 지구의 중심에 있다는 주장이나 기록을 본적이 없다. 육안으로 세계지도를 보아도 네팔이 지구의 중심에 속한다고 볼 수 없다. 따라서 이 문제 역시 부정된다.  넷째, 가비라에서 과거의 고불이 모두 일어났다고 했다. 그런데 타라이에서 과거의 고불이 일어났다는 기록을 본 바 없다.  다섯째, 가비라에 봄·여름·가을·겨울의 4계가 있다고 했다. 그런데 타라이에는 봄·여름·가을·겨울의 4계가 없고 우기와 건기만이 있다.  여섯째, 가비라성에 4개의 성문이 있었다고 했다. 그러면 타라이에 있는 가비라성지라는 그곳에 4개의 성문부지가 없었다.  현지답사 결과 동서에 두개의 성문부지 밖에 없었다. 곧 남북에는 성문부지가 없었다. 이 문제 역시 부정된다.  일곱째, 가비라성지의 넓이는 수만평에 이른다고 추정된다. 그러면 타라이에 있는 가비라성지라는 그 곳의 넓이가 수만평이 되느냐의 문제이다.  현지를 답사할 때, 목측에 의하면 동서의 길이 약 150m, 남북의 길이 약 80m로서 성의 넓이는 약 2천평 전후라 추정되었다. 수만평이란 생각할 수도 없는 문제였다. 이 문제 역시 부정된다.  여덟째, 가비라성 내에 수십채의 건물이 있었다고 추정된다. 그러면 타라이에 있는 가비라성지라는 그곳에 수십채의 건물부지가 있느냐의 문제이다.  석가세존이 거처하던 세 채의 부지와 부왕과 모후께서 거처하던 건물부지 그리고 신하들의 사무실과 시녀들의 숙소인 건물부지를 생각하면 가비라성지 내에 수십채의 건물부지가 있어야 한다. 그런데 타라이에 있는 가비라성지라는 그곳에는 다만 두 개의 건불부지만이 있었다. 따라서 이 문제 역시 부정된다.  아홉째, 가비라성 내에 석가세존의 사리불탑이 있다고 했다. 그러면 타라이에 있는 가비라성지라는 그곳에 석가세존의 사리불탑이 있었느냐의 문제이다.  현지를 답사할 때 안내원의 설명 가운데 사리불탑이 있었다는 이야기가 전혀 없었다. 마야 부인이 친정 고리국으로 가던 도중에 룸비니 동산에서 석가세존을 출산했는데 룸비니 동산이라는 거기에도 석가세존의 사리불탑이 없었다. 룸비니 동산이라는 그곳 역시 동산이 아니라 평지였다.  열째, 가비라성 곁을 강물이 흐른다고 했다. 그런데 타라이나 그 곁을 흐르는 강물이 없었다. 강이 있었다는 설명도 듣지 못했다.  이상과 같이 네팔 당국이 석가세존의 탄생지라고 주장하는 타라이는 어느 하나도 가비라성의 성립요건에 부합되지 않는다. 따라서 네팔의 타라이는 가비라성지가 아니라고 결론을 내릴 수 있다. 3. 가비라는 우리나라의 백두산 남쪽기슭이다 그러면 우리나라의 백두산 남쪽 기슭이 가비라성의 성립요건에 부합되느냐의 문제이다.  첫째, 가비라성은 마갈타국에 속해 있었다. 우리나라에도 상고시대부터 삼국시대까지 백두산의 남쪽과 동쪽 그리고 북쪽에 걸쳐 말갈국이 있었고, 어느 사학자의 말에 의하면 가비라성도 우리나라의 상고사에 나온다고 한다. 석가세존의 어머니는 그 친정이 고리국(?離國)인데 우리나라의 상고사에도 고리국이 나온다. 따라서 백두산 남쪽 기슭은 가비라성의 성립요건과 제1차로 부합일치된다.  둘째, 가비라성이 설산 남쪽기슭에 있었다. 그런데 백두산이 설산이다. 이 문제는 다음 장에서 상설된다.  셋째, 가비라는 지구의 중심에 있다고 했다. 그런데 백두산이 지구의 중심에 있다.  백두산을 중심으로 세계지도를 보면 일본열도는 좌청룡, 지나대륙은 우백호에 해당되며, 남북아메리카 대륙은 외청룡, 아프리카 대륙과 유럽대륙은 외백호에 해당되고, 시베리아 대륙은 현무, 오세아니아주는 주작에 해당되어 백두산이 비교적 지구에서 가장 중심인데, 세계지리학회에서 위성사진을 근거로 백두산을 지구의 중심이라 했다. 따라서 백두산 남쪽 기슭은 가비라성의 성립요건과 제3차로 부합일치된다.  넷째, 과거의 고불이 모두 가비라에서 일어났다고 했다. 그런데 백두산에서도 과거의 고불이 일어났다.  우리나라의 역사기록에 의하면 한웅·한검 등 과거의 고불이 모두 백두산에서 일어났다. 이에 대해서는 본서 제1편에서 밝혔다. 따라서 백두산 남쪽 기슭은 가비라성의 성립요건과 제4차로 부합일치된다.  다섯째, 가비라에 봄·여름·가을·겨울의 4계가 있다고 했다. 그런데 백두산에도 봄·여름·가을·겨울의 4계가 있다. 이는 가비라성의 성립요건과 제5차로 부합일치되는 것이다.  이상에서 밝힌 것 외에 나머지 성립요건은 확인할 수 없는 문제이므로 논외로 한다.  이상과 같이 백두산 남쪽 기슭과 석가세존의 탄생지라는 가비라성이 서로 부합일치된다. 다만 부수적인 문제만이 몇가지 확인할 수 없는 입장에 있다. 따라서 석가세존의 탄생지인 가비라성이 설산 남쪽 기슭에 있었다는 불서의 기록이 틀림없다면 가비라성은 백두산 남쪽 기슭에 있었던 것이 틀림없다는 이론이 성립된다. {최문창후전집:崔文昌侯全集} 대숭복사비명병서(大嵩福寺碑銘?序)에도 "석가세존은 우이(?夷 : 해돋이땅)의 태양인데 서토(西土)에서 드러냈으나 동방에서 출생하였다"하여 석가세존의 탄생지는 인도가 아니라 동방 해돋이땅에서 태어났음을 말하고 있다. 해돋이땅이란 동이족이 사는 동방을 지칭하는데. 동이족이 사는 동방은 우리나라를 의미한다. 따라서 석가세존은 우리나라에서 태어났음을 {최문창후전집}이 확인해주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서 석가불은 우리민족이라는 사실이 반은 증명됐다고 할 수 있다.   4. 석가세존의 씨족적 근원은 단군족이다. 석가세존의 탄생지인 가비라가 우리나라의 백두산 남쪽 기슭이라면 당연히 그 씨족적 근원도 단군족 곧 우리민족이라 추정할 수 있다. 그런데 불타의 三十二大人相을 보면, 불타는 전신이 황금색이라 하고, 불상을 보아도 전신이 황금색이며, 두상(頭上)에는 우리민족의 고대 풍속인 왕의 상투가 있다. 이를 보아도 석가세존은 우리민족이라 추정할 수 있다. 그러면서도 종래의 통속적인 관념에 의하여 무조건 석가세존은 인도 사람이며, 흑인종으로 생각해왔다. 왜냐하면 불체(佛體)의 황금색은 석가세존을 존경하는 마음에서 종교적으로 미화하여 우리들 황인종의 심성에 맞게 도색한 것으로 생각하고, 머리의 상투는 새가 새끼를 까고 간 새의 둥우리라는 전설을 믿어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러한 생각이나 전설은 근거없는 독단이며, 기록을 보면 석가세존은 우리민족과 같은 단군족이었고 석가세존은 그 후예였다.  종남산(終南山) 도선(道宣)의 {석가씨보(釋迦氏譜)}에 의하면 부처님의 성씨를 구담(瞿曇)·감자(甘蔗)·석가(釋迦)·사이(舍夷)·일종(日種)이라 하였고, 승우(僧祐)의 {석가보(釋迦譜)}에는 좀더 자세히 밝혀 주고 있는데, 구담을 사이라 하고 사이는 외국의 귀성(貴姓)이라 하였다. 감자는 묘족(苗族)의 후예라 하고 석가는 단종 찰제리(檀種刹帝利)라 하였다. 사이의 이(夷)는 동이(東夷)·서이(西夷)의 이(夷)이며, 사이는 외국의 귀성이라 하였으므로 사이는 인도의 원주민도 아니고, 드라비다계(系)도, 아리아계(系)도 아니라 외국에서 인도로 이주한 동이(東夷)나 서이(西夷)의 일파로서 넓게는 알타이족(族)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석가세존은 알타이족이라 할 수 있다. 우리민족도 주지하는 바와 같이 알타이족이다. 여기에서 석가세존은 넓은 의미에서 우리민족과 같은 황인종이라 할 수 있다.  묘족은 사전에 의하면 옛 몽고계 인종이라 하였다. 영국의 인도 사학자 빈센트 스미스(Vincent Smith)도 석존을 몽고계 인종이라 주장하였다. 우리민족도 몽고계 인종이다.  '몽고'을 서구식으로 발음하면 "몽골리아(Mongolia)"이고, 본토의 발음은 "?고려(Mongolia)"이다. 그 어원을 말하면 [?]은 말(馬)의 고어이며, 고려는 왕건태조가 세운 근세 우리나라의 국명이기도 하지만 상고시대부터 불러오던 우리나라 지역에 대한 이칭(異稱)이다. 즉 '?고려'는 '말고려'란 뜻으로 말을 잘 기르고, 잘 다루며, 잘 타는 고려족이란 뜻이다. 따라서 몽고족은 원래 우리민족의 지류이다. {단군세기}를 보아도 몽고족은 단군조선 제4세 단군 오사구(烏斯丘)의 동생 오사달(烏斯達)의 후손으로서 우리민족의 지류이다. 여기에서 석가세존이 몽고계 인종이라면 곧 우리민족이라 할 수 있다.  단종(檀種)도 단군종족이란 뜻으로서 직접 우리민족을 가리키고, 찰제리(刹帝利)도 {삼국유사}에 신라왕을 찰제리라 하였으므로 우리민족을 가리키며, 일종(日種)은 광명을 숭상하는 태양족이란 뜻인데 우리민족도 광명을 숭상하는 태양족으로서 일종 역시 우리민족을 가리킨다. 이와 같이 어느 측면에서 보아도 석가세존은 우리민족이다.  더욱이 석가세존의 초상화를 보면, 그 모습이 동양적인 이목구비(耳目口鼻)에 복장이 인도풍(印度風)이 아니라 우리민족 고유의 한복선이다. 이를 보아도 석가세존은 한국사람임에 틀림없다고 결론을 내릴 수 있고, 우리민족은 부처님을 낳은 민족이 된다.  그러나 그러한 기록이 문화인류학 또는 형질인류학 등의 과학적 이론에 근거한 것인지, 아니면 단순한 전설이나 추정에 의한 것인지 알 수 없다. 그렇다 하더라도 위의 소론은 불교론사들의 저술인 {석가씨보} 및 {석가보}와 만인이 공인하는 사전에 의한 주장으로 함부로 부정될 수 없다고 본다.  이러한 사실로만 보아도 후대가 선대의 사상을 계승한다고 볼 때, 석가세존은 우리민족의 상대사상인 신선도를 수용할 가능성을 지니게 된다.  그러나 일반상식으로는 석가세존이 우리민족이라면 무엇 때문에 머나먼 인도에까지 갔느냐 하고 의문을 품을 수 있다. 신선도의 교리에 의하면 세계인류는 모두 삼신에 의해서 태어난 동포이며 한집안 식구이다. 따라서 인도인의 고민이 곧 우리민족의 고민이며 인도인의 행복이 곧 우리민족의 행복이다. 그런데 인도인은 지금도 브라만·찰제리·바이샤·수드라의 사성계급(四姓階級)으로 시달리고 있듯이 과거에는 더욱 시달렸으리라 추정할 수 있다. 여기에 석가세존이 인도로 가게 된 동기가 있고, 인도에 불교가 보급되게 된 동기가 있는 것이다. Ⅲ. 석가세존은 우리나라의 백두산에서 고행성도하였다. 1. 석가세존의 고행성도지는 설산이다. 석가세존이 단군족의 후예라면 당연히 고행성도지(苦行成道地) 역시 우리나라라고 추정할 수 있다. 그런데 주지하다시피 석가세존은 보살 당시 설산(雪山) 염부주(閻浮洲)에서 6년동안 고행 끝에 그 남녘 기슭 니련선하(尼連禪河)에서 목욕하고 그 곁의 가야산(伽倻山 또는 가사산;伽寐山)에서 수도고행중 동방계명성(東方啓明星)의 밝은 별빛을 보고 도를 깨치었다고 한다. 그후 설산 총림방 중의 진귀조사(眞歸祖師)로부터 종지를 받았다고 한다.  그러면 설산은 인도 북부 히말라야 산맥 가운데 있는 어느 산인가? 아니면 우리나라의 백두산인가?  더욱이 백두산에도 눈이 일년 내내 녹지 않으므로 백두산을 일명 설산이라 하며, 백두산을 우리민족의 순수한 고유어로 표현할 경우, 그것은 히머리산, 히마리산, 히마리야산이 되고, 히마리야산을 영어로 표기하면 "Himalya"산이 되며, 이를 발음하면 히말리야산이 되며, 히말리야가 전음되어 히말라야(Himalaya)산이 된다.  염부주도 신주(神州) 또는 진단(振旦)이라 하는데, 우리나라의 백두산 일대 또는 천지일대(天池一帶)도 거기에서 신선도가 베풀어졌고, 신선과 성인들이 살았으므로 신시(神市) 또는 신주(神州)라 하고, 그곳은 불사약인 자연생 인삼의 원산지여서 진단(震檀·振旦·震丹·眞丹)이라 불리웠던 것이 후에 우리나라의 이칭이 되기도 하였다.  여기에서 석가세존의 고행성도지인 설산 염부주가 인도 북부의 히말라야산맥 어디에 있는 것인가? 아니면 우리나라의 백두산과 천지주변을 의미하는가? 하는 문제가 제기된다. 이러한 경우 흔히 아전인수격(我田引水格)으로 해석하여 자기에게 유리한 쪽을 택한다. 그것은 학문하는 올바른 자세라고 할 수 없다. 학문은 어디까지나 미확정적인 문제에 대해서는 객관적인 입장에서 어떠한 판단기준에 의하여 확정하여야 한다. 이때 인용하는 방법이 가설검증법(test of hypothesis)이다.  가설검증법이란 어떠한 가설 즉 어떤 판단기준을 세우고 그 판단기준에 의하여 미확정적인 문제를 확정하는 방법이다. 이 경우 판단기준은 불서의 기록 밖에 달리 있을 수 없다. 따라서 불서의 설산과 염부주가 우리나라 및 인도의 그것 가운데 어느 것과 일치하느냐에 따라 석가세존의 고행성도지가 확정되게 된다. 2. 설산은 어떤 산인가? 그러면 석가세존이 고행성도한 설산과 염부주는 어떠한 특성을 지니고 있는가? 우선 판단기준으로서 불서에 기록된 염부주와 설산의 특수요건을 요약정리한다. 참고서적은 장아함경·중아함경·석가씨보·석가방지 등이다. 우선 염부주의 성립요건이다.  ? 염부주는 수미산 남쪽 해중(海中)에 있다.  ? 염부주는 3변이 비등하나 북은 넓고 남은 좁아(北闊南狹) 인면상(人面像)이다.  ? 염부주를 진단 또는 신주라 한다.  ? 염부주 중에 한 개의 큰 못인 아뇩달지가 있고, 4방으로 4대하가 흐르는데 모두 오른쪽으로 돌아 흐른다.  다음은 설산의 성립요건이다.  ? 설산은 지구의 중심에 있다.  ? 설산은 3층이다.  ? 설산은 하수의 원천으로서 수지영부(水之靈府)이다.  ? 설산의 정상에 큰 못인 아뇩달지(阿?達池)가 있고, 이를 당(唐)에서는 무열뇌지(無熱惱池)라 하였다.  ? 아뇩달지에서 북쪽으로 굉장한 폭포(謎羅川)가 흐른다.  ? 아뇩달지의 둘레는 8백리이다.  ? 아뇩달지에 용왕이 산다(龍王住處).  ? 아뇩달지에서 4방으로 4대하가 흐르는데, 모두 오른쪽으로 돌아 흐른다.  ? 아뇩달지의 4안(四岸)이 보물장식 같다.  아뇩달지의 정남과 동쪽에 대단한 평지가 있는데 동서로 경사를 이루고, 5천리에 이른다.  아뇩달지의 정남은 첨처(尖處)이며, 그 밑은 지옥이다.  이상은 석가세존이 6년간 고행성도한 염부주와 설산의 성립요건을 정리한 것이다. 따라서 어느 지역이나 어느 산이 위의 성립요건에 부합일치되면 그곳이 염부주 또는 설산이라 할 수 있고, 부합일치되지 않으면 염부주 또는 설산이라 할 수 없다는 이론이 성립된다. 3. 인도북부의 히말라야 산맥에는  설산이 없다 그러면 불자들이 성산으로 모시는 히말라야 산맥 가운데 어느 산이 위에 제시한 설산의 성립요건에 부합일치되느냐의 문제이다. 최소한 히말라야산맥 가운데 어느 산의 정상에 하수의 원천인 큰 못이 있느냐의 문제이다. 동아일보의 보도에 의하면 세계적으로 가장 높은 산상호수는 페루와 볼리비아 국경에 있는 티티카호와 소련의 레닌그라드 근처에 있는 라도카호라 하여 인도 히말라야산맥의 어느 산의 정상에도 큰 못(호수)이 없음을 확인하여 주고 있다. 이는 곧 인도 북부 히말라야 산맥에는 석가세존이 고행성도한 설산이 없음을 확인하여 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뿐더러 현장(玄濱)의 {대당서역기:大唐西域記}를 비롯하여 어느 불서를 보아도 석가세존이 히말라야 산맥의 어느 산에서 고행했다는 기록을 일절 찾아볼 수 없다. 더욱이 학자들의 불교사서를 보면 석가세존의 설산고행을 허무맹랑한 전설같이 흘려버리고 있다. 그것은 인도 지역에 불서에 기록된 그러한 설산이 없기 때문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인도 북부의 히말라야 산맥에는 석가세존의 고행성도지인 설산이 없는 것이 분명한 것이다. 4. 인도의 부다가야는 설산이 아니다. 그러면 인도 중부의 부다가야가 석가세존의 고행성도지인가? 현재 인도 당국은 부다가야를 석가세존의 고행성도지라 하여 여러가지의 시설을 갖추어놓고 있으나 이제 기록과 현지를 비교하면서 그 부당성을 지적하고 비판한다.  첫째, 부다가야는 산악이 아니라 평지이다.  석가세존의 고행성도지인 설산은 산악이다. 이는 불교신자라면 누구나 다 아는 일반상식이다. 그런데 인도 중부의 부다가야는 산악이 아니라 평지이다. 그밖에도 부다가야는 설산의 특수요건을 어느 하나도 갖추고 있지 않다. 이에 대해 인도를 방문해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잘 알 것이다. 그리고 부다가야는 인도 중부에 가까운 곳으로 인도 북부의 히말라야산맥 중의 어느 산을 설산이라 할 경우 거기에서 2천여리 이상 남쪽으로 떨어져 있다.  둘째, 부다가야의 네란자라강은 불서의 니련선하가 아니다.  석가세존은 6년 고행 마지막에 니련선하(尼連禪河)에서 목욕하고, 가야산(가사산 또는 고석산)의 보리수 밑에서 성도했다. 니련선하는 종교용어로서 강물이나 그 주변의 풍경을 나타낸 표현이다. 그 뜻으로 말하면 강바닥에 깔려 있는 모래가 보일 정도의 깨끗하고 맑은 물을 의미하며, 강변에 연이어 서 있는 병풍석은 마치 비구니가 줄지어 서서 기도하는 것 같은 선경을 의미한다.  인도의 부다가야 가까이에도 네란자라강이 흐른다. 네란자라강은 건기에는 말라 버리고 우기에만 흐르는 강으로서 맑지도 않고 강변은 흙과 모래로 된 얕은 언덕으로서 병풍석이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또한 니련선하는 설산에서 동남해로 들어가는 항하의 지류로서 동쪽 아니면 동남쪽으로 흐르는 강이라 추정할 수 있다. 그런데 부다가야의 근교를 흐르는 네란자라강은 인도 중부의 데칸고원을 시발로 하여 남쪽에서 동북쪽으로 흐르는 강이다. 그러므로 부다가야의 네란자라강은 불서의 니련선하라 할 수 없다.  셋째, 부다가야에 석가세존의 불탑이 없다.  수양대군의 저술인 {석보상절}에 의하면 석가세존의 고행성도지에 불탑이 있어야 한다. 그런데 석가세존의 고행성도지라는 부다가야에 석가세존의 불탑이 없다. 있다면 석가세존이 입멸하여 약 2백년 후에 아쇼카왕이 세웠다는 돌기둥과 정사와 그후에 만들어졌거나 다른 데서 옮겨온 승려들의 불탑만이 있을 뿐이다.  넷째, 부다가야는 조작되고 있다.  부다가야는 가야에 부다를 붙인 명칭으로써 가야보다 후에 조작된 명칭이라 할 수 있다. 즉 가야를 힌두교의 성지로 만들면서 어쩔 수 없이 붙인 명칭인 것이다. 그런데 부다가야의 불탑들은 다른 데서 옮겨온 것인가 하면, 정사의 작은 원판 자체가 근대의 위작이라는 학자(B.M.Barua)도 있으니, 부다가야의 유물과 유적들은 인도인의 긍지를 높이고 인도를 찾아오는 외국불자들의 기대에 어긋나지 않기 위하여 후대에 와서 조성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상과 같은 이유에 근거하여 인도의 부다가야는 석가세존의 고행성도지가 아니라고 결론을 내릴 수 있다. 다시 말하면 인도의 부다가야는 석가세존이 고행성도한 설산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다가야를 석가세존의 고행성도지라고 믿는 우리나라의 승려들이나 불교학자들의 심리를 전혀 이해할 수 없다. 더욱이 부다가야에 막대한 금액을 드리면서 절까지 지으니, 신앙이란 그렇게도 맹목적인가? 맹목적 신앙으로 어떻게 견성성불할 수 있단 말인가? 참으로 통탄할 일이라 아니할 수 없다. 5. 설산은 우리나라의 백두산이다 인도 북부의 히말라야 산맥도 석가세존의 고행성도지가 아니며, 인도 중부의 부다가야도 석가세존의 고행성도지가 아니다. 그렇다면 석가세존의 고행성도지는 어디인가? 자연히 우리나라의 백두산이라고 추정할 수 밖에 없다. 그러나 과학적 근거가 있어야 한다. 이에 따라 염부주와 백두산의 천지(신시), 설산과 백두산을 비교한다. 먼저 염부주와 백두산의 천지를 비교한다. 참고문헌은 {신증동국여지승람}과 학자의 논문들이다.  1) 염부주는 海中에 있다고 했는데, 고조선을 海中이라 한다. 이에 대해서는 뒤에 상설한다.  2) 염부주는 3변이 비등하며 북은 넓고 남은 좁아 인면상인데, 백두산의 천지 모형도 3변이 비등하며 북은 넓고 남은 좁아 인면상이다.  3) 염부주를 진단 또는 신주라 했는데, 백두산의 천지주변을 진단 또는 신주 또는 신시라 한다.  4) 염부주에 아뇩달지라는 못이 있어 거기에서 사방으로 4대하가 흐르는데, 백두산 정상에도 천지라는 못이 있고 거기에서도 사방으로 4대하가 흐른다.  이상과 같이 백두산 천지의 특수요건이 염부주의 성립요건에 부합일치된다. 이러한 사실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염부주가 인도가 아니라 우리나라의 백두산 천지 곧 신시임을 의미한다. 또한 {석가방지}를 보면 "염부주를 크게 3분하면 2분은 북쪽인데, 땅은 넓고 사람은 드물며, 흉노가 사는데, 도(道)에 힘쓰지 않는다. 1분은 남쪽인데 3면이 바다에 닿았고, 사람은 많으나 마음이 맑고 성인의 교화를 잘 받은 대성도(大聖都)라"고 하였다. 이를 보면 염부주는 한편 만주·러시아의 연해주·한반도를 포괄하는 상고시대의 고조선 강역 전체를 가리키기도 한다.  이와 같이 볼 때, 염부주는 좁게는 백두산 천지 곧 신시를 의미하며, 넓게는 상고시대의 고조선 강역 전체를 의미한다.  다음은 설산과 백두산의 비교이다.  1) 설산을 히마리야산이라 하는데, 백두산도 우리민족의 순수한 고유어로 표현하면, 히마리야산이며, 한편 설산이라 한다.  2) 설산은 지구의 중심에 있다. 그런데 백두산이 지구의 중심에 있다고 세계지리학회에서 발표하였다.  3) 설산이 3층인데 백두산도 3층이다.  4) 설산은 하수의 원천으로서 수지영부인데, 백두산도 하수의 원천으로서 수지영부이다.  5) 설산의 정상에 아뇩달지라는 큰 못이 있고, 당나라에서는 그 못을 무열뇌지라 하였다. 그런데 백두산의 정상에도 천지라는 큰 못이 있고, 천지를 최남선은 무열뇌지라 하였다.  6) 아뇩달지는 3변이 비등하며 북은 넓고 남은 좁아 인면상인데, 백두산의 천지 모형도 3변이 비등하며 북은 넓고 남은 좁아 인면상이다.  7) 아뇩달지에서 사방으로 4대하가 흐르고, 그 하수는 오른쪽으로 돌아 흐르는데, 천지에서도 사방으로 4대하가 흐르고 그 하수 역시 오른쪽으로 돌아 흐른다.  8) 아뇩달지 북쪽에 굉장한 폭포(謎羅川)가 흐르는데, 천지의 북쪽에도 굉장한 폭포가 흐른다.  9) 아뇩달지 정남벽상에 첨처가 있고, 그 밑에 지옥이 있는데, 천지의 정남벽상에도 예각직암이 높이 솟아있고, 그 밑은 낭떠러지이다.  10) 아뇩달지의 남쪽과 동쪽에 5천리에 이르는 대단한 평지가 있다. 그런데 백두산 천지의 남쪽과 동쪽에도 약 4만km2의 대평지인 개마고원이 있다.  11) 아뇩달지의 못 둘레가 8백리라 한다. 그런데 천지의 못 둘레는 80리라 한다. 단위는 과거와 현재, 인도와 중국과 우리나라가 서로 다르므로 [8]이라는 숫자에 의의가 있는 것이다.  12) 아뇩달지의 4안이 보물장식 같다는데, 천지의 4위도 형형색색하여 보물장식 같다.  13) 아뇩달지는 용왕주처(龍王住處)인데, 백두산 천지를 용왕담(龍王潭) 또는 용담(龍潭)이라 한다. 이상을 도표화하면 도표(6)과 같다. 도 표(6) 설산과 백두산의 비교표 설 산 A 아뇩달지 인면상 미 라 천 정남첨처 4안보식 龍王住處  B 지구중심 4 대하 수지영부 동,남평지 3 층 池周8백리  a 천 지 인면상 천지폭포 정남직암 4위보식 龍 王 潭   백두산 b 지구중심 4 대하 하수원천 동,남고원 3 층 池周8십리 "A와 a, B와 b를 비교하시요" 이상과 같이 우리나라의 백두산의 특수성이 설산의 성립요건에 부합일치되고, 인도에는 그러한 설산이 없다. 따라서 다음과 같이 연역할 수 있다고 본다.  1) 불서의 설산은 우리나라의 백두산이다.  2) 염부주도 인도가 아니라 우리나라의 백두산 천지이다.  3) 석가세존이 설산 염부주에서 6년 고행 끝에 그 남녘 기슭 가야산에서 성도한 것이 사실이라면, 그것은 우리나라의 백두산 천지에서 6년 고행 끝에 그 남녘 기슭의 가야산(우리나라의 {신교총화;神敎總話}에도 나오는 산으로서 고유명사가 아니라 승려들이 수도하는 산)에서 성도하였음을 의미한다.  4) 석가세존에게 종지를 넘겨준 진귀조사 역시 인도 사람이 아니라 우리나라 사람이다.  5 석가세존의 탄생지인 가비라성도 우리나라의 백두산 남녘 기슭에 있었다.  6) 석가세존은 근본적으로 우리민족이다. Ⅳ. 석가세존의 최초 설법지는 제주도 한라산이다  1. 석가세존의 최초 설법지는     파라날 녹야원이다. 석가세존은 원래 한국 사람으로서 우리나라의 백두산에서 고행성도하였다. 그렇다면 석가세존이 먼 인도에까지 가기 전에 먼저 우리나라에서 법을 설할 수 있다. 그러나 지금까지 석가세존의 최초 설법지를 중인도 베나레스시(Benares市)의 사르나드(Sarnath)라고 생각해 왔다. 여기에서 석가세존의 최초 설법지가 우리나라인가? 아니면 인도인가 하는 문제가 제기된다. 그리고 그 판단기준은 무엇인가 하는 문제이다.  {중아함경} 라마경을 보면, 석가세존이 성도한 후 파라날(波羅捺) 선인(仙人)이 사는 녹야원 가시도읍(加尸都邑)에서 교진녀(?陳女) 등 다섯 비구들을 제일 먼저 만나고 거기에서 사제(四諦)의 법을 설한 것으로 기록되어있다. 즉 석가세존의 최초 설법지(이를 흔히 初轉法輪地라 표현함)는 파라날(波羅捺) 녹야원(鹿野園)이라는 것이다. 이어서 녹야원에 대한 자세한 기록으로 {아비달마대비바사론;阿毘達磨大毘婆娑論} 제183권을 보면 녹야원은 예로부터 선인이 사는 곳이라 하여 선인주처(仙人住處)라 하며, 예로부터 선인이 법을 설하던 곳이라 하여 선인논처(仙人論處)라 하고, 500 선인이 공중을 비행하던 중에 인연을 잃고 그곳에 떨어졌다 하여 선인타처(仙人墮處)라 하며, 뭇 사슴이 서식한다 하여 녹림(鹿林) 또는 녹원(鹿園)이라 하고, 보리수가 많다 하여 보리수처(菩提樹處)라 하였다. 또한 수양대군의 저술인 {석보상절}에 의하면 녹야원에 석가세존의 사리불탑이 있어야 한다. 여기에서 판단기준으로서 녹야원의 성립요건을 제시하면 다음과 같다.  ? 녹야원은 산악이다.  ? 녹야원은 녹림 내지 녹원이다.  ? 녹야원은 선인주처 내지 선인논처이다.  ? 녹야원은 선인타처이다.  ? 녹야원은 보리수처이다.  ? 녹야원에 석가세존의 사리불탑이 있다.  ? 녹야원에 가시도읍이 있다.  이상의 일곱 가지 요건이 녹야원인가 아닌가를 판단하는 성립요건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위의 일곱 가지 요건을 충족시키면 그곳이 곧 녹야원으로서 석가세존의 최초 설법지라 할 수 있으며, 만약 충족시키지 못하면 그곳은 녹야원도 아니고 석가세존의 최초 설법지도 아니라고 할 수 있다. 2. 파라날 녹야원은  인도의 사르나드가 아니다. 그러면 인도 당국이 석가세존의 최초 설법지라고 주장하는 인도 중부의 사르나드가 녹야원인가 아닌가 하는 문제부터 먼저 따져 보기로 한다. {불교사전}의 기록을 보면 "바라날은 중인도 마갈타국의 서북쪽에 있는 나라로서 별명을 가시라 하고 지금의 오우드 지방, 베나레스시(Benares市)에 해당하며, 석가세존이 성도한지 三七日후에 이 나라의 녹야원에서 처음으로 법을 설하여 교진녀 등 다섯 비구를 제도하고, 그후 2백년이 지나서 아육왕(아쇼카왕)이 그 영지를 표시하기 위하여 두 개의 석주를 세웠다"고 하였다. 또한 다른 기록을 보면 "최초 설법의 땅은 현재 사르나드라고 불리며 베나레스시 북동쪽 약 7km되는 지점에 있다. 이는 '사랑가 나타(사슴의 왕)'를 생략한 말에서 유래한다. 이 지역은 경전에 '사슴동산이나 선인이 사는 곳' 등으로 기록되어 있는 곳이다"고 서술되어 있다. 이상의 기록과 현지답사를 근거로 인도의 사르나드를 녹야원의 성립요건에 대입시켜 보기로 한다.  ? 녹야원은 산악인데, 인도의 사르나드는 약 2천평 정도의 평지였고 산악이 아니었다.  ? 녹야원은 녹림 내지 녹원인데, 인도의 사르나드는 산악이 아닌 자그마한 들판으로서 사슴이 살만한 곳도 못되었고, 사르나드에 사슴이 살았다는 기록도 본 바 없다.  ? 녹야원은 선인주처 내지 선인논처인데, 인도의 사르나드는 평지로서 근본적으로 선인주처 내지 선인논처가 될 수 없는 곳이었다.  ? 녹야원은 거기에 500 선인이 떨어졌다는 선인타처인데, 인도의 사르나드에서 5백신선에 대한 어떠한 물증도 찾아볼 수 없었고, 그에 대한 전설도 기록도 본 바 없다. 따라서 인도의 사르나드는 선인타처가 아니었다.  ? 녹야원은 보리수처인데, 인도의 사르나드는 보리수처가 아니었다.  보리수에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동인도(東印度)에서 자라는 뽕나무과에 속하는 나무로서 키가 30m쯤 되고, 잎은 염통꼴로 끝이 뾰족하며 가죽바탕으로 윤이 나고, 꽃은 은두화로 무화과와 같은 열매가 열린다. 이 나무를 인도에서 보리수라 한다.  또 하나는 보리수과에 속하는 나무로서 제주방언으로는 '볼레낭'이라 한다. 키는 3m 정도이고, 잎은 타원형이며, 흰 비늘이 덮이고 어긋나게 나는데 빨간 물렁 열매가 가을에 붉게 무르 익는데 그 열매를 먹는다. 이 나무는 줄기를 잘라버려도 좀처럼 죽지 않고 새싹이 돋아난다. 이를 평하면 전자는 뽕나무과에 속하는 나무로서 원래의 이름은 보리수가 아닌 것이다. 단지 인도에서 보리수라 부르므로 보리수가 되고 있는 것이다. 후자는 보리수과에 속하고 끈질긴 생명력으로 볼 때 진짜 보리수라 할 수 있다. 그런데 후자의 보리수과에 속하는 나무 즉 제주 방언으로 볼레낭이라 불리우는 보리수는 인도의 사르나드에는 한 그루도 없었다. 따라서 인도의 사르나드는 보리수처가 아닌 것이다.  ? 녹야원에 석가세존의 사리불탑이 있어야 한다. 그런데 인도의 사르나드에 석가세존의 불탑이 없었다.  불탑은 거의 돌로 만들어진 것으로서 사람이 고의적으로 없애버리지 않는 한 몇 천년이고 그대로 남을 수 있다. 그런데 인도의 사르나드에 석가세존이 입멸하자 조성하였다는 불탑이 없었고, 있었다는 기록도 본 바 없다. 아육왕이 그 영지를 표시하기 위하여 두 개의 석주를 세운 것도 석가세존이 초전법륜한 지 약 2백년 후라 하였다. 그밖에 스투파·불상·승원 등이 사르나드에 있으나 그것은 모두 B.C. 3세기 이후에 조성된 것들이었다.  ? 녹야원에 가시도읍이 있었다. 그런데 인도의 사르나드에 가시도읍이 없었다.  {중아함경}에 의하면 파라날에 녹야원이 있고, 녹야원에 가시도읍이 있다. 그런데 녹야원이라는 사르나드 자체가 약 2천평 정도로서 그 속에 가시라는 도읍지가 존재할 수 없었고, 베나레스시의 별명을 가시라 하여 불서의 기록과 맞지 않는다.  이상과 같이 인도의 사르나드는 판단기준인 녹야원의 성립요건에 어느 하나도 부합되지 않는다. 따라서 인도의 사르나드는 녹야원이라 할 수 없고, 석가세존의 초전법륜지라 할 수도 없다. 더욱이 대성자이시며 대각자인 부처님이 초전법륜한 곳을 입멸하여 2백년 후까지 그대로 방치하였다는 것이나, 1794년 베나레스왕의 대신이 사르나드의 유적을 파괴한 것도 이유있는 일이라 할 수 있다. 이렇게 볼 때, 사르나드를 녹야원이라 한 것은 석가세존 당시 또는 입멸 후 비유적으로 불리던 것이 후세에 이르러 인도인의 긍지를 높이고 찾아오는 외국의 불자들에게 기대에 어긋나지 않기 위해 비유를 사실같이 조성시킨 것에 불과하다고 할 수 있다. 3. 파라날 녹야원은 제주도 한라산이다. 글자의 뜻으로 볼 때 파라날은 물결치는 나라 곧 섬나라를 의미하는데, 제주도(濟州島)가 바로 물결치는 나라 곧 섬나라이며, 녹야원이란 사슴이 서식하는 산악을 의미하는데 제주도 한라산에 사슴이 살았고, 정상의 연못에서 흰사슴이 물을 먹었으므로 그 연못을 백록담(白鹿潭)이라 한다. 그 동쪽은 녹산장(鹿山場)으로서 사슴이 놀던 들판이다. 또한 제주도 한라산에는 우거진 숲도 많고 공기도 맑으며 생수도 많다. 이러한 것만 보아도 제주도 한라산이 녹야원이 아니었던가 하는 의문이 생긴다. 그러나 과학적 근거가 있어야 한다. 이제 제주도 한라산이 녹야원인가 아닌가를 확인하기 위하여 녹야원의 성립요건에 대입시켜 보기로 한다.  첫째, 녹야원은 산악이다. 그런데 제주도 한라산도 산악이다.  제주도 한라산은 1950m의 한국 제2의 명산이다. 이는 누구나 다 아는 사실로서 설명이 필요없다고 본다.  둘째, 녹야원은 녹림 내지 녹원이다. 그런데 제주도 한라산도 녹림 내지 녹원이다.  한라산은 삼신산의 하나인 영주로서 선산(仙山)이다. 선산이란 선인이 거처하는 산을 의미하는데, 선인은 동물 중에서 그 품행이 고결하고 장생한다는 사슴과 벗을 한다.  조관빈의 {한라산기}를 보면 "한라산에 본시 사슴이 많았는데 매양 새벽과 저녁이면 사슴들이 백록담에 나와 물을 마신다. 어느 때 한 사냥꾼이 활을 들고 못가의 바위 뒤에 숨어앉아 기다리다가 문득보니 사슴의 떼가 몰려 나오는데 100인지 1000인지를 헤아릴 수가 없었다. 그중에 가장 큰 사슴의 몸 빛은 희고 광채가 났다. 어이한 백발 노옹이 그 등 위에 올라탔었다. 사냥꾼은 활을 들러 쏘기는 커녕 그만 놀라 어찌할 줄을 몰랐다. 이윽고 맨 끝으로 따라가는 작은 사슴 하나를 쏘았더니, 또 사슴을 타고 오는 신선이 있어 손가락으로 사슴을 헤아리는 듯하므로 엽사는 가슴을 두근거리다가 다시 문득 보니 그들은 간 곳이 없었다"하여 한라산에 신선과 함께 사슴이 살고 있었음을 말하고 있다. 또한 한라산 동쪽 허리에 사슴이 논다는 녹산장(鹿山場)과 아울러 소록봉(小鹿峯)과 대록봉(大鹿峯)이 있다. 한라산 서남쪽 중문동에도 겨울이면 사슴이 내려와 서식한다는 녹하악(鹿下岳)이 있다. 이를 보면 제주도 한라산은 녹림 내지 녹원이었고, 동시에 선인녹원(仙人鹿園)이었다.  셋째, 녹야원은 선인주처 내지 선인논처이다. 그런데 제주도 한라산도 선인주처 내지 선인논처이다.  앞에서 한라산의 백록담에 신선이 나타났었다는 기록을 소개하였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도 정의·김녕·함덕에 신선이 많다 하였고, 한라산은 원산(圓山)이니 곧 바다 가운데 있다는 원교산(圓矯山)이고 그 동은 동무소협(東巫小峽)인데 신선이 사는 곳이라 하였다. {법주기}에도 박가범(薄伽梵) 부처 당시에 16존자의 한 사람인 발타라존자께서 한라산 영실(靈室)에 있었다고 하였다. 영실에서 수양한 사람의 말에 의하면 영실은 10평 전후의 신령스러운 자연동굴인데 거기에는 자연석으로 된 불상이 있고, 봄·여름·가을·겨울 언제나 온도의 변화가 없으며, 지금도 계절따라 선인들이 영실에 와서 수도한다고 한다. 따라서 제주도 한라산은 예로부터 신선이 살았다는 선인주처 내지 선인논처인 것이다.  넷째, 녹야원은 선인타처이다. 그런데 제주도 한라산도 선인타처이다.  선인타처란 신화적인 이야기이지만 녹야원에 500선인과 관련된 어떤 물증이 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한라산 서쪽 기슭에 부처님이 왔었다는 불래악(佛來嶽)이 있고, 불래악 맞은 편에 500개의 자연석이 우뚝 서 있다. 이 500개의 자연석이 마치 도(道)를 닦는 수도승 같아서 이를 500나한(羅漢)이라 부르고, 그 일대를 수행동(修行洞)이라 한다. 그러므로 한라산 불래악 수행동에 있는 500개의 자연석이 곧 500신선의 상징이라 할 수 있으니, 제주도 한라산은 선인타처인 것이다.  다섯째, 녹야원은 보리수처이다. 그런데 제주도 한라산도 보리수처이다.  인도에서는 뽕나무의 일종을 보리수라 부른다. 그러나 그것은 보리수과에 속하지 않으며 단지 인도인들이 보리수라 부를 따름이다. 그런데 제주도 한라산에는 부리수과에 속하는 볼래나무가 많다. 그러므로 제주도 한라산은 보리수처라 할 수 있다.  여섯째, 녹야원에 석가세존의 진신사리탑이 있다. 그런데 한라산 존자암의 터에 상고시대의 부도가 있다.  존자암(尊者庵)은 한라산 정상에서 서쪽 수행동(修行洞, 속칭 靈室) 불래악에 있는데, 김상헌의 {남사록}에 의하면 고량부(高梁夫) 삼성이 처음 일어날 때부터 (정의·대정·목안)삼읍(三邑)이 정립될 때까지 있었다고 하였다. 이는 존자암(尊者庵)이 탐라국 건국초부터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면 탐라국은 언제부터 있었는가?  {한단고기} 마한세가(상)을 보면, 단군 을아(乙阿) 을유(B.C. 1596년)에 탐몰라인(탐라인)이 마한왕에게 말 30필을 바치었다고 하였다. 이는 탐라국이 B.C. 1596년 전부터 존재하였다는 것으로 존자암은 석가세존의 출생하기 이전부터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기에 석가세존이 존자암에 올 수도 있었고, 석가세존이 왔었기에 존자암의 산등성이를 불래악(佛來嶽)이라 부르고, 영실에 석가세존의 석상이 있는 것이 아닌가 한다. 제주의 민담(民譚)이나 무가(巫歌)에도 부처가 바다에서 제주로 왔다는 설화도 있다. 바다란 수미세계 곧 고조선을 의미한다. 그런데 이 존자암의 터에 그 조성년대를 알 수 없고, 다른 지역에서 찾아볼 수 없는 특이한 부도(불탑)가 있다. 이론적으로 말하면 이 부도는 석가세존의 진신사리불탑(眞身舍利佛塔)이라 할 수 있다.  일곱째, 녹야원에 가시도읍이 있었다고 하였다. 그런데 제주도 한라산에 가시리(加尸里;加時里)가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제주목에 한라산 동쪽은 동무소협(東巫小峽)으로서 신선들이 살았다고 하였는데 그곳에 가시리가 있다. 가시리에 상가시리와 하가시리가 있고, 상가시리에는 노폭(路幅)이 7-8m되는 넓은 길이 있다. 이 길은 너무나 오래되어 그 길이 만들어진 년대를 알 수 없다고 한다. 이를 생각하면 가시리는 그 역사가 극히 오래되었다고 할 수 있고, 탐라국 시대부터 있었던 것이 아니었던가 한다.  이상과 같이 제주도 한라산은 녹야원의 성립요건을 모두 갖추고 있다. 따라서 논리적으로 볼 때, 파라날은 제주도를 의미하고, 제주도 한라산은 녹야원이며 석가세존의 초전법륜지라 할 수 있다. 만약 이를 부정하면 인도의 사르나드도 녹야원이 아니니 석가세존의 초전법륜지는 허무맹랑한 전설이 되고 만다. 증거가 부족하면 독자들이 협력해 주기 바란다. 협력도 하지 않으면서 무조건 흠만 잡으려는 사람은 아마도 다른 나라 사람이 아닌지 자문자답해 보기 바란다. 이것이 또한 남의 일이 아님을 자각해 주기 바란다. Ⅴ. 석가세존의 고조선 행적과 유적 {삼국유사}를 보면 부처님이 우리나라에 왔었다는 기록들이 있다. 예컨대 어산불영(魚山佛影)편에 따르면 "대정 12년 경자(1180) 즉 명종 11년에 처음으로 만어사(萬魚寺)를 지었는데 동량보림(棟梁寶林)의 장주(狀奏)에 이르기를 이 산 중에 기이한 자취가 세 가지 있는데 그 중의 하나가 부처영상의 서북쪽에 반석이 있어 항상 물이 괴어 끊어지지 않는데 이곳은 부처가 가사를 빨던 곳이라"하여 부처가 우리나라 경상남도 밀양에 있는 만어산(萬魚山)에 이르러 거기에서 가사를 빨았다고 하였다. 또한 동편에 {관불삼매해경(觀佛三昧海經)} 제7권을 인용하여 "부처가 야건가락국 고선산에 이르렀다"고 하였는데, 고선산의 고선(古仙)은 한인·한웅·한검이라 할 수 밖에 없다. 그러면 곧 고선산은 삼신산을 의미한다. 삼신산은 백두산을 지칭하므로 부처가 고선산에 이르렀다 함은 곧 부처가 백두산에 왔었다는 것이다. 그밖에도 동서 황룡사장육(皇龍寺丈六) 편을 보면 황용사의 터는 석가불과 가섭불이 강연하던 곳이라 하였고, 그밖에도 경상남도 남해 금산 쌍홍문(雙紅門)의 안내간판에 석가세존이 그곳에 왔었다는 기록이 있다. 이러한 기록들에 대하여 지금까지는 무의미한 것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었으나, 앞으로는 의미심장하게 숙고하여야 할 것으로 본다.  돌이켜 생각하면 석가세존은 한국에서 태어난 한국 사람으로서 한국 땅에서 고행하고 성도한 후 만리 길도 멀다 않고 인도로 건너가 혹심한 빈곤과 차별대우에 시달리는 서민들을 구제하기 위하여 구걸행각을 하면서 일생을 보냈다고 생각할 때, 인도 사람이라면 누구든 석가세존의 조국인 우리나라를 은인의 나라로 받들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며, 신앙의 조국으로 생각하고 무척이나 동경하였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이는 통일교 외국신자들이 우리나라를 신앙의 조국 곧 아버지 나라라고 생각하는 것과 같은 격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삼국유사} 가락국기를 보면 인도 아유타국의 공주가 바다 건너 우리나라에 와서 가락국의 김수로왕의 비(妃)가 되었다는 기록이 있고, 금관성 파사석탑기를 보면 금관성 호계사의 파사석탑(婆娑石塔)은 김수로왕의 비 아유타국의 공주가 서역 아유타국에서 싣고 온 것이라 하였다.  이와 같이 만여리가 넘는 인도에서 공주의 몸으로 우리나라에 왔었다는 것은 굳건한 신앙이 아니면 절대 불가능한 일이었다고 할 수 있고, 석탑을 싣고 온 것은 신앙의 조국에 대한 감사의 표현이라 할 수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도 "금불상 53구가 서역으로부터 바다 건너 한(漢)나라 평제 원시 4년(서기4년) 갑자에 금강산에 보내졌고, 이로 인하여 절(유점사)을 세웠다"고 하였다. 그때는 중국에도 석가불교가 전래되기 이전이므로 인도인들이 우리나라를 숭모하고 은혜에 보답하기 위하여 보내 온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밖에도 {삼국유사} 황룡사장육 편을 보면 신라 진흥왕이 황룡사를 지으려 할 때, 서천축의 아육왕이 황철과 황금 및 일불이보살상(一佛二菩薩像)의 모형까지 보내와 장육존상(丈六尊像)을 주조하였다고 하였는데, 황룡사의 터는 석가불과 가섭불(迦葉佛)이 강연하던 곳으로 거룩한 인연이 있기 때문이라 하였다.  이상과 같이 교통수단도 발달하지 아니한 그 때에 만여리가 넘는 인도에서 바다 건너 우리나라로 공주가 오고 불상과 불탑까지 보내왔다는 것은 예사일이 아닌 것이다. 이는 우리나라를 신앙의 성지, 신앙의 조국, 부처님이 나신 나라로 믿는 굳건한 신앙이 아니면 불가능한 일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기에 인도의 시성 타고르가 조선을 가리켜 아득한 옛날 아시아의 황금시기에 빛나는 등불이었다고 하였던 것이 아닌가? 이제야 그 시(詩)의 의미를 알게 된다. Ⅵ. 대승경은 우리나라에서 기원되었다.  본항에서는 대승경이 우리나라 고조선에서 인도로 전승되었다는 문제를 논증하려한다. 본 문제의 논증방법은 3단논법이다. 즉 A=B, B=C, 그러므로 A=C라는 논법이다. 이에 대하여 유의하기 바란다.  불교사상의 자료에는 경장(經藏)·율장(律藏)·논장(論藏)의 3장이 있다. 이 중에서 경장과 율장은 불타께서 직접 설하신 법을 의미하고, 논장은 논사들의 저술을 의미한다. 또한 불교경전은 소승경(북방불교에는 장아함·중아함·잡아함·증일아함 등 四部阿含經이 있고, 남방불교의 파리어 대장경에는 장아함·중아함·승육다아함·앙굴다아함·굴타가아함의 五阿含經이 있다)과 대승경(소승경을 제외한 팔만대장경)으로 크게 둘로 나뉘어지는데, 대소승 경전에 경율론(經律論) 3장이 따로 있고, 특히 소승경만이 석가세존이 35세에 성도해서 80세에 입멸할 때까지 45년 동안 직접 설하신 경전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대승경에도 논사들의 저술인 논장이 따로 있고, 불타께서 직접 설하신 경장과 율장이 따로 있으니, 이는 누구의 설이냐 하는 문제가 제기된다. 그래서 김동화는 "서기 565년 전에 탄강해서 그후 35년후에 성도하고 45년간의 설법이 원시경전(소승경)이고, 80세에 입멸하신 것으로 되어있으니, 도대체 이 대승의 경율 2장은 어느 때에 설하였단 말인가? 만약 시대적으로 본다면 소승논부(小乘論部) 이후의 설이라 하여야 정당한데, 사실상 모든 대승경전은 불설로 되어있으니, 이 모순을 어떻게 할 것인가?"하고 장탄식을 한다.  일반상식으로 생각해도 석가세존이 대성자이시고 부처님이라 해도 8만 대장경을 혼자서 모두 설할 수 있느냐 하는 의문이 생기고, 또한 아난(阿難)의 기억력이 신통하였다 하더라도 8만 대장경을 모두 암송할 수 있느냐 하는 의문이 제기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무조건 대승불교 측에서는 갖가지 이유를 대면서 대승경도 석가세존이 직접 설하신 경전이라고 주장하는가 하면, 소승불교 측에서는 대승경을 마구니의 조작이니 조달(調達)의 조작이니 하면서 석가불설이 아니라고 공박한다. 그런가 하면 최근에는 어느 개인이 탁불(托佛)하여 대승경을 위작한 것 처럼 주장하는 고승도 있다. 이와 같이 대승경의 출처는 지금까지 오리무중에 빠져 그 동안 유명한 보살과 조사, 대덕(大德)과 대지(大智)에 의해서도 해결하지 못하고 내려오는 난해한 문제이다. 그러한 문제에 대하여 지금부터 하나 하나 풀어나가기로 한다.   1. 대승경의 출처는 바다이다.  그러면 대승경의 출처는 어디인가? {용수보살전}에 의하면, 용수(龍樹)는 출가후 입산하여 불탑(佛塔)에 이르렀던 바, 출가계(出家戒)를 받아 90일에 3장을 모두 암송하고 깊은 뜻을 통하여 다시 다른 경을 구하였으나 도무지 얻지 못하다가 설산(雪山) 중의 한 늙은 비구니로부터 마하연경(摩訶衍經)을 얻고 통리하지 못하여 여러 나라를 주류하면서 다른 경을 구하던 차에 수정방(水精房) 중의 대룡보살(大龍菩薩)을 만나 바다 속의 궁전에 들어가 칠보장(七寶藏)을 열어 위없는 묘법인 방등심오의 경전을 주니 그것을 받고 90일에 통해한 후 염부제(염부주) 중의 무량한 경전 가운데 한 상자를 얻고 남천축(南天竺 곧 인도)에 돌아가 불교를 크게 유포시킨 것으로 기록은 밝혀주고 있다.  용수는 대승불교를 일으킨 제1인자인데, 그에 의하여 대승경을 설산과 염부주 바다궁전에서 인도로 전하여 대승불교를 크게 유포시켰다는 것이다. 용수가 대승불교를 일으켰다는 것은 모든 학자들이 공인한다. 그러나 지금까지 설산과 염부주와 바다의 문제가 풀리지 않음으로써 대승경의 출처가 모호해지고 오리무중에 빠졌던 것이다.  과거를 되돌아 보면 옛날의 인도인들이 우리나라를 부처님이 탄생한 나라라 하여 우리나라로 시집을 오고, 불상과 불탑을 보내오듯, 지금 우리나라의 불자들이 인도만을 우러러 보고, 인도의 역사·철학·종교·사상을 연구하고 잘 알면서도, 제 나라의 역사·철학·종교·사상을 모르는 데서 천축 또는 염부주라면 무조건 인도로 착각하고, 설산이라면 무조건 인도 북부의 히말라야산맥 중의 어느 산으로 추정하며, 부처라면 무조건 석가세존으로 오인한 데서 문제가 풀리지 않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앞에서 우리나라의 국조인 한인·한웅·한검이 고불(古佛)임을 밝혔고, 설산은 우리나라의 백두산이며, 염부주도 좁게는 우리나라의 백두산 천지이고, 넓게는 고조선 강역 전체임을 밝혔다. 이것만 보아도 대승경의 출처가 상고시대의 우리나라 고조선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바다'가 어디를 가리키느냐의 문제가 남아있다. 이 문제가 지금까지 풀리지 않음으로써 '바다'라면 무조건 태평양이나 대서양 같은 짠물바다로 생각하는 데에 문제가 발생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불교에서 용(龍)이라면 무조건 비를 내리는 바다의 용으로, 용궁이라면 바다속의 궁전으로, 용왕이라면 바다 속의 용왕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용에 대한 개념이 없는 인도에서는 용같은 코브라로 용을 대신하는가 하면, 용과 같은 종류의 물고기로 변형되고 있다. 이래서 합리적이고 과학적이며 철학적인 불교가 비합리적이고 비과학적인 허무맹랑한 미신같이 곡해되어 서구인들에게 불신당하고 있는가 하면, 대승경의 출처도 수천년 동안 안개 속에 가리워졌던 것이다.   2. 바다는 수미세계이다. 그러면 불교에서 바다는 어디를 가리키는가? 사해동포(四海同胞)라 할 때의 해(海)와 고해중생(苦海衆生)이라 할 때의 해(海)도 태평양·대서양·인도양 같은 짠물바다(소금물바다)를 가리키는가? 불교철학이 심오하다는 것을 누구나 다 잘 알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교에서의 바다를 무조건 짠물바다·소금물바다로만 수천년 동안 이해하여 왔으니 참으로 이상하다 아니할 수 없다.  먼저 바다의 의미부터 알아보자. 바다는 깊고 무한하여 전 대륙을 포용하고 있는가 하면, 생명의 원천이며, 지혜와 재화의 보고이고 무차별의 세계이다. 무섭기는 폭군 같기도 하고 인자하기는 어머니 같기도 하다. 곧 바다는 원융무애하고 대승적 성격을 지니어 크고 작은 것, 좋고 나쁜 것, 희고 검은 것 할 것 없이 모든 것을 받아들인다. 그래서 불교에서 바다는 다음과 같은 의미로 쓰인다.  첫째, 불교에서 바다는 원융무애의 정신세계를 의미한다.  예컨대, 대원해(大願海) 여래공덕해(如來功德海)·무량삼매해(無量三昧海)·법문해(法門海)·생사해(生死海)·지혜해(智慧海)니 하는 경우 등이다. 이와 같이 불교에서의 바다는 태평양·인도양·대서양 같은 짠물바다·소금물바다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형이상학적 원융무애의 정신세계를 의미한다.  둘째, 불교에서의 바다는 수미세계(須彌世界)를 의미한다.  불교의 세계설에 의하면 이 세상 중앙에 수미산이 높이 솟아 있고, 수미산 정상에는 제석천(帝釋天)이 살며 중턱에는 사천왕(四天王)이 산다. 금·은·유리·파리의 4보(四寶)로 이루어져 북쪽은 황금, 동쪽은 백은, 남쪽은 유리, 서쪽은 파리인데, 해와 달이 그 주위를 회전하면 보광을 발산하여 4방의 허공을 물들인다. 수미산 둘레에는 일곱 겹의 금산(金山)으로 둘러있고, 수미산과 금산, 금산과 금산 사이에는 7개의 바다(七海)가 있다. 마지막 금산 밖에는 짠물바다(鹹海)로 둘러있고, 짠물바다 건너에 철위산이 둘러있어 수미세계의 외곽을 이룬다고 하였다.  이를 보면 태평양·대서양·인도양 같은 진짜바다는 이를 짠물바다(鹹海)라 이르고, 바다는 수미산과 금산, 금산과 금산 사이의 수미세계를 의미하고 있다. 또한 "바다는 문명의 중심지, 종교적 메카라는 뜻의 비유로 쓰인다 하여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라고 주장하는 학자도 있다. 이와 같이 불교에서 말하는 바다는 수미세계를 의미하는 경우가 있다.  그러면 수미세계는 어떠한 세계를 의미하는가? 수미세계는 최상의 위치에 제석천과 같은 종교지도자가 있고, 중간에 사천왕과 같은 법왕이 있어 해와 달이 자연적으로 돌아가듯, 사회질서도 법이 있으나 없으나 순리대로 돌아가며, 사방에서 금·은·유리·파리의 4보가 보광을 발하듯, 사민(四民)의 기풍도 홍익인간 광명이세하여 태평가를 부르는 평화세계로서 종교의 메카, 종교의 발상지, 종교의 요람, 최고의 종교사회 곧 불국토 내지 신선지국을 의미한다. 예컨대, 우리나라의 경상남도에 김해(金海)·남해(南海) 등의 지역이 있으나 이들 지역이 바다가 아니라 과거에 종교의 요람이었던 것과 같은 격이다.  그러면 용수보살이 대승경을 가져갔다는 바다는 어디를 가리키는가? 태평양·인도양·대서양 같은 짠물바다인가? 대원해니 무량삼매해니 하는 원융무애한 정신세계인가? 아니면 종교의 요람인 수미세계인가? 바다에 궁전과 칠보장과 경전이 있었다는 것으로 보아서 이 경우의 바다는 원융무애의 정신세계도 아니고, 태평양·인도양·대서양 같은 짠물바다라고도 할 수 없으며, 종교의 요람인 수미세계라고 할 수 밖에 없다. 왜냐하면, 정신세계나 짠물바다 속에 실제의 궁전도, 칠보장도, 경전도 있을 수 없고, 수미세계에만이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용수보살이 대승경을 남천축으로 가져갔다는 바다는 수미세계인 것이다. 즉 대승경의 출처는 수미세계라는 것이다.   3. 수미세계는 환국과 고조선을 의미한다. 수미세계는 종교의 메카, 종교의 발상지, 종교의 요람, 불국토, 신선의 나라를 의미한다면 과거에 그러한 나라가 어디에 있었느냐 하는 문제이다.  첫째, 수미세계는 중앙아시아의 환국을 의미한다.  제1편에서 밝혔듯이 고불교인 신선도는 태고시대 중앙 아시아의 환국 즉 알타이 사회에서 비롯됐으니 고불인 한인이 천산에 살면서 득도하여 삼신하나님에게 제사하고 7세나 계승하면서 무위자연적 신교국가를 이룬다. 따라서 태고시대 중앙 아시아의 환국 즉 알타이 사회는 수미세계였다고 할 수 있다.  둘째, 수미세계는 우리나라 고조선(古朝鮮)을 의미한다.  환국에 이어 한웅천황이 우리나라의 백두산 천지에서 천도를 크게 깨치고 지금으로부터 5894년 전 10월 3일 신선도를 설파하였으며, 그후 1565년이 지나 다시 단군성조에 의하여 고등종교로 발전되었다. 따라서 배달국과 고조선은 부처님이 세운 나라로서 수미세계라 할 수 있다. 그래서 상고시대의 우리나라를 가리켜 동방예의지국(東方禮儀之國)이라 군자지국(君子之國)이라 또는 신선지국(神仙之國)이라 하였다. 인도의 시성 타고르도 고조선을 가리켜 일찍이 아시아의 황금 시기에 빛나는 등불이라 하였다.  불교에 관한 기록에서 천독(天毒) 또는 천축(天竺)이라 함은 수미세계를 의미하는데, {산해경} 해내경에 조선을 천독이라 하였다. 이는 고조선이 수미세계임을 확인하여 주는 것이다. 또한 인도를 남천축(南天竺)이라 하고, "월지국(月支國)을 북천축(北天竺)이라" 하는데, 월지국은 고조선의 진왕이 직접 다스리던 수도를 지칭한다. 이래서 고조선은 수미세계임에 틀림없는 것이다.   4. 대승경의 출처인 수미세계는 고조선이다. 그러면 대승경의 출처는 중앙 아시아의 환국인가? 아니면 우리나라 고조선인가? 하는 문제가 제기된다.  그러나 용수보살이 설산 염부주 바다궁전에서 대승경을 남천축 인도로 가져갔다고 했다. 그런데 설산은 우리나라의 백두산을 가리키고, 염부주는 백두산 천지 또는 고조선 강역 전체를 가리킨다. 따라서 용수보살이 대승경을 인도로 가져갔다는 바다 곧 수미세계는 중앙 아시아의 환국이 아니라 우리나라 고조선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알 수 있다. 따라서 대승경의 출처는 고조선인 것이다.  다음은 우리나라를 바다로 표현한 실례를 직접 들어보기로 한다. 사마천의 {사기}에 보이는 "해중유삼신산(海中有三神山)"이나, "동지우해등환산(東至于海登丸山)"의 삼신산과 환산은 백두산을 의미하는데, 백두산은 우리나라에 있다. 그러므로 바다(海中)는 우리나라를 의미한다. 또한 학자들 역시 이 경우의 해(海)를 발해(渤海)로 해석한다. 발해는 흔히 대조영이 세운 국명으로 알고 있으나, 그 나라의 처음 이름은 대진국(大震國)이며, 발해는 대진국 건국 이전 춘추전국 시대의 저술인 {열자(列子)}에도 보이는 상고시대 우리나라의 이칭이다. {화엄경} 제보살주처품에도 "해중에 금강산이 있는데 예로부터 법기(法起)보살이 1200권속과 더불어 법을 설하였다"는 구절이 있는데, 금강산은 우리나라에만 있는 산으로서 해중은 곧 우리나라를 의미한다. 그런데 중국의 청량국사의 소(疏)에도 해중을 우리나라로 해석하고 있다. 또한 {화엄경} 입법계품에 "마니산 기세계 해중 유불 출현(摩尼山 其世界 海中 有佛 出現)"이라 하였는데, 마니산은 인도나 중국에는 없고 우리나라 경기도 강화에 있는 산이다. 더욱이 부처님이 출현했다고 했으므로 해중 곧 바다는 우리나라임에 틀림없는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바다와 용궁"은 우리나라 고조선을 의미한다고 주장하는 학자도 있다. 이와 같이 바다는 짠물바다 외에 상고시대의 우리나라 고조선을 의미하는 경우가 있다.  이상의 소론을 요약하면, 대승경의 출처는 설산 염부주 바다궁전인데, 설산은 우리나라의 백두산을 의미하고, 염부주는 백두산의 천지주변 또는 고조선의 강역전체를 의미하며, 바다는 우리나라 고조선을 의미한다. 따라서 대승경의 출처는 우리나라 고조선으로서 대승경은 원래 우리민족의 경전이라는 사실이 이론적으로 성립된다. 즉 방대한 불교의 대승경이 인도소산이 아니고 원래 우리민족의 소산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불교는 원래부터 우리민족의 사상인데 지금까지 인도사상이라 오해하여 왔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잃어버린 우리민족의 고유사상을 거의 찾은 기분이 든다.  또한 원시 대승경이 용수보살에 의해서만 인도로 전승된 것이 아니라 그 이전에도 전승되었다고 볼 수 있다. 왜냐하면, 석가세존이 우리나라에서 태어나 우리나라에서 수도고행하였고, 백두산(설산) 총림방 중의 진귀조사로부터 종지를 받았다고 하였으므로 석가세존에 의하여 가장 기본적인 경전이 인도에 전승되었다고 볼 수 있다. 더욱이 대승경은 범어로 쓰여 있는데, 후술하는 바와 같이 범자는 지금부터 약 5200여년 전에 배달국 시대의 복희에 의하여 창제되었고, 지금부터 약 3500년 전에 성립되었다고 보여지는 인도의 리그베다(Rigveda)도 범자로 쓰여 있으므로 대승경은 리그베다 성립이전, 적어도 지금부터 3500년 전, 범어의 인도이입과 더불어 인도로 전승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이래서 대승경은 용수보살 이전에 이미 인도로 전승되었다는 것이다.   5. 지나에 대승경을 전한 월지국은  고조선의 수도이다.  대승경이 고조선에서 먼 인도에까지 전승되었다면 인접한 지나에는 그보다 먼저 직접 전수될 수 있는 문제이다. 그런데 대승경의 중국전승에 대한 기록을 보면, 주(周)나라 목왕(穆王) 때(B.C. 1001∼B.C. 947)에 문수와 목련이 서역에서 건너와 목왕을 교화하였다는 기록이 있는가 하면, 진시황 4년(B.C. 243)에 불경을 중국에 전하였다는 기록도 있다. 이에 대하여 일반적인 통설은 부정한다. 왜냐하면 주나라 목왕 때는 석가세존마저 세상에 태어나기 전이며, 진시황 때는 대승불교가 성립되기 전이다. 따라서 불교가 인도에서 발생하였다고 할 경우, 그때에 문수와 목련이 서역에서 중국으로 건너와 목왕을 교화하였다거나 불경이 중국에 전래되었다 함은 있을 수 없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러면서도 월지국(月支國) 아니면 안식국(安息國)에서 대승경이 중국으로 전승되었다고 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부정하지 않고, 이들 국가를 인도 가까이에 있는 대월씨국(大月氏國)에 결부시키려 한다.  여기에서 안식국은 논외로 하고 월지국에 대해 알아보기로 한다. {삼국지} 위서 동이전을 보면, 한(韓)에는 세 종류가 있으니, 첫째는 마한(馬韓), 둘째는 진한(辰韓), 셋째는 변한(弁韓)인데, 진한을 옛 진국(辰國)이라 하고, 진왕(辰王)이 월지국을 통치하였다고 했다. 이긍익의 {연려실기술}에도 월지국은 진주(辰主)의 치소(治所)라 했다. 곧 월지국은 진국의 도읍지라는 것이다. 그외 신채호의 {조선사연구초} 전후삼한고(前後三韓考)와 최동(崔棟)의 {조선상고민족사}를 보아도 한결같이 월지국이 고대의 우리나라 고조선임을 밝히고 있다. 또한 {국어대사전}을 보아도 월지국을 목지국(目支國)이라 하고 목지국은 옛 진국의 한 부족국가라 하였다. 옛 진국이란 고조선을 지칭한다.  그러나 {불교사전}에 "월지(月支)는 월씨(月氏)라고도 하며, 서역에 있던 큰 왕국"이라 하여 월지국(月支國)을 서역에 있던 대월씨(大月氏)에 결부시키고 있다. 만약 불경이 터키계통의 대월씨국에서 중국에 전승되었다면, 대월씨국은 중국보다도 먼저 불교가 보급되었다는 것으로 지금쯤은 서구사회에 불교가 일반화되고 있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서구사회에는 이제야 겨우 불교가 발을 붙일까 말까 할 정도인 것을 보아도 중국에 불경을 전한 월지국은 대월씨국이 아닌 것이다.  근세에도 우리나라에서 중국으로 불경이 전승되었다는 연구보고가 있다. 경북대학교 허흥식(許興植) 교수는 "고려에 남긴 철산경(鐵山瓊)의 행적"에서 {고려국대장이안기(高麗國大藏移安記)}는 아직까지 국내 학계에 소개된 바 없는데, 거기에 중국 남송(南宋) 임제종(臨濟宗) 양지파(楊枝派)의 고승 철산경이 1304년 고려에 와서 3년 동안 머물다가 6천권의 대장경을 가지고 중국으로 돌아갔다고 주장한다. Ⅶ. 대승경의 범서는  우리민족의 범서이다. 원시 대승경의 출처가 우리나라 고조선이었다. 그렇다면 원시 대승경에 쓰여 있는 범서는 당연히 상고시대 우리민족의 언어와 문자여야 한다. 그러나 그것은 논리적인 귀결이고 실재적 증명이 아니다. 그러면 어떻게 증명해야 할 것인가?  첫째, 범어는 어떠한 언어인가를 밝혀야 한다.  둘째, 범서가 인도 문자도 아니고 언어도 아님을 밝혀야 한다.  셋째, 상대의 우리나라에 범서가 있었다는 사실을 밝혀야 한다.  넷째, 우리민족의 범서가 대승경의 범서임을 증명해야 한다.  이상을 순서에 따라 밝혀 나가기로 한다.   1. 범어는 어떤 언어인가? 운허용하의 {불교사전}을 보면 범어는 B.C. 800년 경에 인도로 전래된 셈계통의 외래어라 하여 간략히 소개되고 있으나, 컬러판 {교육세계백과대사전}을 보면 {대영백과사전}의 기록을 인용하여 자세히 밝혀주고 있는데, 그 내용을 간추려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범어》범어는 산스크리트어(語)라고도 하는데 고대로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전 인도에 쓰이는 고급 문장어이다. 산스크리트는 라는 뜻으로 속어에 대한 아어(雅語)를 의미한다. 범어라고 한 까닭은 이 언어를 범천소설(梵天所說)의 언어라고 믿는 데에 있다.  《특질》범어는 명사·대명사 및 형용사의 성·수·격(性·數·格)의 어미변화로 주어·목적어 등을 나타내며, 또한 인칭·수·시상·법·태(人稱·數·時相·法·態)를 주로 동사의 어미변화로 나타낸다.  《문자》범어의 서사 인쇄에 쓰이는 문자를 데바나가리(Devan?gar?)라 부른다. 이 문자는 47자의 자음과 모음으로 이루어지며, 자음은 33자로서 언제나 모음(a)를 동반한다. 이 문자의 기원은 멀리 북셈계(Sham系) 문자로서 가장 오래된 페니키아 문자에 있다. 오른쪽으로부터 왼쪽으로 쓰는 셈문자의 특징을 보존하고 있다. 둘 이상의 연속자음을 나타내려면 그 자음문자를 연합하여 하나의 결합문자를 만드는 따위가 이 문자의 특징이다.  《문법》문의 구조에 있어서 주어가 선두에 오고 동사가 끝에 오며, 수식어는 피수식어에 선행한다.   2. 범어는 인도어도 북셈계어도 아니다. 이상의 설명을 보면 산스크리트나 범어라는 어의에 인도나 그 민족을 나타내는 의미가 전혀 없다. 고급 문장어라 함은 고급문장에만 쓰이는 언어로서 생활어가 아니라는 뜻이다. 그래서 수억이 되는 인도인 가운데 오늘날 범어를 쓰는 인구수는 겨우 1,000여명에 불과하다고 한다. 그러므로 범어는 인도의 고유어가 아니라 외래어라는 사전의 기록이 틀림없음을 알 수 있다. 더욱이 범어를 데바나가리라 하는데, '데바'는 천신(天神)이란 뜻이며, '나가'는 용(龍)이란 뜻으로서 데바나가리에도 인도를 상징하는 뜻이 전혀 없다. 더욱이 인도에는 천신이란 개념과 용이란 개념이 없으므로 천신 대신 제사를 뜻하는 브라흐만(Brahman), 또는 진아(眞我)를 뜻하는 아트만(Atman)을 종교적 최고의 개념으로 사용하고, 용 대신 뱀의 일종인 코브라 또는 물고기를 등장시킨다. 이를 보아도 범어는 원래 인도어가 아니라 외래어임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범자는 북셈계의 페니키아 문자인가? 그것도 아니다. 왜냐하면 "페니키아 문자의 자음이 22자인데" 범자는 자모가 47자, 자음이 33자로서 오히려 선대문자(先代文字)라고 하는 페니키아 문자보다 그 자모가 더 많다. 문자는 후대에 제작된 것일 수록 간소화되어 자모가 적은데 그 반대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쓴다는 것도 북셈계 페니키아 문자만이 아니라 우리민족의 고대 필순(筆順)도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썼기 때문이다. {사전}에 대승경의 범자를 북셈계 페니키아 문자에서 기원되었다고 함은 서구인에 의한 서구중심적 발상을 그대로 기재한 것이라 할 수 있다.   3. 상고시대의 우리나라에 범서가 있었다. 다음은 우리민족에게도 범서가 있었느냐 하는 문제이다. 현재에도 원시사회가 있고 문명사회가 있듯이 상고시대에도 원시사회가 있는 반면, 문명사회가 있을 수 있다. 더욱이 그러한 사회에 합리적 성립종교가 있었고 경전이 있었다면, 당연히 문자가 있어야 한다. {태백일사}를 보면 "신시에 녹서(鹿書)가 있었고, 자부에 우서(雨書)가 있었으며, 치우에 화서(花書)가 있었다. 투전문속(鬪佃文束)은 그 남은 흔적이다. 복희에도 용서(龍書)가 있었고, 단군에 신전(神篆)이 있었다. 이런 종류의 글자와 글이 백산·흑수·청구 등 구려(九黎)에 널리 쓰여졌다"고 하였다.  이와 같이 상고시대의 우리나라에 문자와 글이 있었으며, 여기에 보이는 복희의 용서가 곧 범서인 것이다. 왜냐하면 범서는 이를 데바나가리라 하는데, 데바나가리는 용서(龍書)라는 뜻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이래서 복희의 용서는 곧 범서라 추정할 수 있고, 범서는 곧 복희의 용서라 추정할 수 있다.  {삼국유사} 요동성육왕탑기에도 고구려 동명성왕이 요동을 순례하던 중에 삼중토탑(三重土塔)을 발견하였는데, 그 밑에 묻혀 있던 명(銘)에도 범서가 쓰여 있었다고 하였다. 그러나 명에 쓰인 범서를 일연 승은 그 해설에서 서역문자라 함으로써 그 범서가 상고시대의 우리나라 문자인가, 아니면 인도에서 전래된 문자인가 하는 의문을 제기시켰다. 삼중토탑을 발견한 때는 고구려 동명성왕 때로서 B.C.1세기 후반이다. 그때는 인도와 가까운 중국에도 석가불교가 전래되기 전이며, 우리나라에도 전래되기 전이다. 더욱이 그때는 대승불교마저 성립되기 전이다. 그러므로 삼중토탑을 석가불교의 불탑이라 할 수 없고, 명에 쓰인 범서도 인도에서 전래된 문자라 할 수 없는 것이다. 이외에도 {단기고사} 제12세 단제 편에 "지금 황해도 구월산의 마한촌에 고대의 국문비 (國文碑) 한 개가 존재하니 범문과 비슷하다"고 하였다. 이는 범어를 모르는 사람이 범서를 보고 한 말이라 할 수 있다. 이를 보면 상고시대의 우리나라에 범서가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그렇다면 원시 대승경이 상고시대의 우리나라에서 인도로 전승되었다고 할 경우, 원시 대승경에 쓰여진 범서는 당연히 우리민족의 범서라고 할 수 있다. 더욱이 범어는 인도의 고유어가 아니라 외래어이고, 북셈계 문자도 아님을 생각하면 당연히 그와 같은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4. 범어는 우리민족의 언어와 동일하다. 그러나 실제적 증거가 있어야 한다. 여기에서 생각할 수 있는 것이 어의(語義)·어법(語法)·문자의 동일성 등을 증명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첫째, 범어의 어의가 우리말의 어의와 동일한 경우가 많다.  대승불교가 성립된 이래 대승경이 수차에 걸쳐 결집되면서 대승경에 쓰여진 범어의 용어가 인도어로 바뀌어 질 수도 있고, 우리민족의 어의도 2천여년 전부터 중국문화의 영향을 받게 되었고, 한문를 일상어에 병용하면서 변질에 변질을 거듭하였다. 그러므로 대승경 범서의 어의와 우리말의 동일성을 증명하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단어의 동일성을 몇 개 지적하면  ? 석가세존의 열반지인 구시국(拘尸國)을 구시나라(拘尸那羅)라 하는데, '나라(那羅)'는 곧 국가를 의미한다. 우리말에서도 국가를 '나라'라고 한다.  ? '차마(叉摩)'는 '참다(忍)'는 뜻인데 우리말의 '참다'와 같다.  ? 파라사화(波羅奢華)는 '파란 잎'을, 파라니밀(波羅尼蜜)은 '파란 하늘'을 의미한다. 이를 보면 '파라'는 우리말의 '파랗다(靑)'와 같은 의미이다.  이와 같이 범어의 어의와 우리말의 어의가 동일하다. 이것 하나만을 보아도 대승경의 범어는 우리민족의 범어임을 추정할 수 있다.  둘째, 범어의 어법이 우리말의 어법과 동일하다.  ? 범서는 그 문장구조에 있어서 감탄문을 제외하면 어떤 경우에도 주어가 선두에 오고 동사가 끝에 오며 수식어는 피수식어에 선행하는데, 이는 전적으로 우리말의 어법과 그대로 일치된다.  ? 범서는 명사·대명사·형용사의 성·수·격이 그 어미 변화로 주어·목적어 등을 나타내며, 또한 인칭·수·시상·법·태를 주로 동사의 어미변화로 나타낸다. 우리의 언어도 범어와 같이 명사·대명사·형용사의 어미변화 즉 조사의 변화에 의해 주어·목적어 등을 나타내며(예컨대, 명사 또는 대명사에 "는·은·가·이"를 붙이면 주어가 되고, "을·를"를 붙이면 목적어가 된다), 또한 동사의 어미변화로 인칭·수·시상·법·태를 나타낸다(예컨대, 하였다·하다·할 것이다·하겠다·하라·하겠습니다·하자·합시다·하시오·되었다·되다·될 것이다·되겠다·되라·되겠습니다·되자·됩시다·되시오 등으로 변해서 인칭·수·시상·법·태를 나타낸다). 이 문제는 하나의 상식으로서 독자의 판단에 맡긴다.  ? 범서는 자음마다 언제나 모음과 주로 (a)를 동반하는데, 우리의 언어를 표기하는 한글도 자음마다 언제나 모음을 동반한다. 그러나 모음 (葡)를 특별히 동반하지는 않는다. 이는 역사의 변천에 따른 음운의 변화 때문이라 할 수 있다.  ? 고대의 범서는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썼는데, 우리민족의 고대 필순도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썼다.  이상과 같이 범서의 어법도 우리민족의 어법과 그대로 일치한다. 여기에서 더욱 대승경의 범서는 우리민족의 범서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셋째, 대승경 범자의 자형이 우리민족의 범자와 유사하다고 추정된다.  일연 승은 우리민족의 범자를 서역문자라 하였다. 이는 우리민족의 범자의 자형이 대승경의 범자와 동일함을 의미한다. 그런데 우리민족의 범자를 용서라 하여 그 글자 모형이 용 같음을 추정할 수 있는데, 대승경의 범자가 일률적으로 용의 형상을 띠고 있다. 또한 "범자와 한글이 그 자형이나 자음에 있어서 서로 유사한 점이 많아 한글이 범자에서 기원되었다"고 주장하는 학자들도 있다.  지금까지의 소론을 간략히 정리하면  ? 대승경의 범어(범서)는 인도의 고유어가 아니라 외래어였다.  ? 대승경 범자의 기원이 북셈계 페니키아 문자와 무관하였다.  ? 상고시대의 우리나라에 범서가 있었다.  ? 대승경 범어의 어의가 우리말의 어의와 같은 경우가 많았다.  ? 대승경 범어의 어법이 우리말의 어법과 그대로 일치되었다.  ? 대승경 범자의 자형이 우리민족의 범자와 동일하다고 추정되었다.  이상과 같으므로 원시 대승경의 범서는 상고시대 우리민족의 범서라고 결론을 내려도 무리는 아니라고 본다. 더욱이 범어는 이를 천축어(天竺語)라고도 한다. 그런데 석가세존 이전의 천축은 우리나라 고조선인 것이다. 이를 생각하면 범어는 당연히 상고시대 우리민족의 언어라 할 수 있다. Ⅷ. 인도에 우리민족의 문자와 언어가 있다. 1. 상고시대의 우리나라에 한글이 있었다. 종교란 위대한 성인이나 부처님이 불변적 진리에 입각해서 일반대중을 위하여 설하신 교육의 기본지침이요 인생이 나아갈 바를 제시한 것이다. 그것이 곧 경장과 율장으로써 난해한 문자와 용어로 쓰여 있게 마련이고, 이를 서민대중을 위하여 간이한 문자와 평상어로 누구나 알기 쉽게 해설한 것이 논장이다. 그래서 부처님이나 위대한 성인이 설하신 종교가 있는 곳에는 반드시 함축적 의미의 종교문자와 간이한 상용문자가 있게 마련이다. 즉 한자나 범자와 같은 종교문자가 있는가 하면, 한글과 같은 상용문자가 있게 마련이라는 것이다. 그러면 상고시대에도 한글과 같이 간이한 문자가 있어야 한다.  신채호에 의하면 단군조선 시대에 국문(한글)이 있었다 하고, {단기고사}에도 제3세 단군 가륵 2년 봄에 박사 을보륵에게 명하여 국문정음(國文正音)을 정선하였다고 하였다. 앞에서 소개한 바와 같이 {태백일사}에도 단군신전(檀君神篆)이 있었다 하고, {단군세기} 제3세 단군 가륵 2년조를 보면 고대 한글을 원형 그대로 밝혀주고 있다. 그 전문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경자 2년(B.C.2181) 시속(時俗)이 같지 아니하고 방언이 달랐다. 상형표의(象形表意)의 진서(眞書;漢字)가 있었으나 10가(十家)의 고을에서도 말이 통하지 못하는 일이 많고 100리의 국가에서는 글자를 서로 이해하기 어려웠다. 이에 삼랑(三郞) 을보륵(乙普勒)에게 명을 내려 정음 38자를 만들게 하니 이를 가림토라 한다(그 글에는 현대 한글에 없는 문자가 있고, 또한 콤퓨터에 없기 때문에 실치못했음. {한단고기} 단군세기 제3세 단군 가륵제조와 태백일사 소도경전본훈에 원문에 실려있으므로 참고하시기 바람). 이와 같이 단군조선 시대에 이미 한글과 같은 가림토가 있었다. 또한 가림토의 모어로 보이는 최고형의 문자가 최근 만주와 경상남도 산청군 단속사터에서 발견되기도 하였다. 그렇다면 현재의 한글은 어떻게 된 것이냐 하는 문제가 제기될 수 있다.   2. 한글은 세종대왕의 창제가 아니다. 세종어제훈민정음서문(世宗御製訓民正音序文)에 의하면 세종대왕이 훈민정음 28자를 신제(新製)하였다고 하였다. 신제란 구제(舊製)의 반대말로서 구제에 근거하여 새로 제작하였다는 뜻이다. 당시 집현전 학자 정인지의 훈민정음 서문에도 고전(古篆)을 모방하여 훈민정음을 만들었다 하였고, 최만리의 상소에도 언문은 본래 옛 문자로서 새로운 문자가 아니라고 하였다. 세종 23년 갑자에 반포한 {세종실록} 103권에도 "언문은 모두 옛 글자를 본받아 되었고, 새 글자는 아니다. 언문은 전 조선시대에 있던 것을 빌어다 쓴 것이다"하였으며, 또 계해 25년 12월조에도 "10월 초 친히 말글 28자를 만드시니 그 글자는 옛 전자를 모방하였다"고 하였다. 이와 같이 {세종실록}에도 한글은 고조선(전조선)시대의 문자를 모방했다고 하였다.  그뿐만 아니라 신선도는 三神五帝의 원리 곧 天地人 三才와 木火土金水의 五行을 발생원리로 한다. 그런데 훈민정음도 天地人 三才와 木火土金水의 五行을 발생원리로 하여 제작되었다. 이와 같이 훈민정음도 신선도와 같은 원리에서 제작되었으므로 고조선의 가림토문자(단군신전)를 더욱 발전시킨 문자라 할 수 있다.  여기에서 세종대왕이 한글을 새로이 만들기 이전 단군조선 시대에 이미 한글이 있었다는 사실이 확연히 드러났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대승경이 우리나라에서 인도로 전승되었다면 인도에도 고대 한글이 있을 수 있다고 추정할 수 있다.   3. 인도에 우리민족의 한글이 있다. 그런데 남인도 구자라트주(州)의 간판에서 한글이 발견되었다는 것이다. {신왕오천축국전(新往五天竺國傳)}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고 있다. 구자라트주의 간판에서 기이하게도 한글과 비슷한 글자를 발견하고 놀랐다. 무슨 뜻인지는 알 수 없지만 한글과 너무나 비슷하여 한글식대로 읽어나갈 수가 있었다. 독일의 어느 학자가 옛날에 한글이 인도의 드라비디안어와 닮은 데가 있다는 논문을 발표한 일이 있었는데, 드라비디안어(語)가 아니라 구자라트어(語)를 잘못 알고 쓴 것이 아닌가 싶다. 특히 구자라트어에 한글의 모양과 많이 닮은 것은 자음 가운데 ? 遁 ? ? ? 걁 둁 등이고, 모음은 葡 蒡 ? ? ? ? ? ? ? ?의 열자가 꼭 같았다. 종자음(終子音) 즉 받침까지도 비슷하게 쓰고 있다. 우리들은 구자라트에 있는 동안 소리를 내어 간판을 한글식으로 읽으며 다녔다. 이상과 같이 고조선 시대에 이미 한글이 있었고, 남인도 구자라트주에 한글과 비슷한 문자를 쓰고 있다니, 그 문자는 고조선 시대의 한글이라 할 수 밖에 없으며, 신선도의 경전이 남인도에 전해짐으로써 고대 한글도 전해진 것이라 할 수 있다.  인도 외에 일본에도 가림토문자가 전해져 신대문자(神代文字)인 아히루(阿比留) 문자가 되었는데, 이는 지금 일본 대마도(對馬島) 이즈하라(嚴原) 대마역사 민속자료관과 일본의 국조신인 천조대신을 모신 이세신궁(伊勢神宮) 등에 아직도 보관되어있다. 그 밖에도 2300년 전에 지은 스리랑카의 캔디시(市) 부근 패엽경사(貝葉經寺) 바위에도 사찰건립 당시에 쓴 것으로 보이는 가림토문자 같은 것이 새겨져 있으며, 남미의 볼리비아 글자도 가림토와 비슷하다고 한다.   4. 남인도에 우리민족의 언어가 있다. 우리나라의 경전이 남인도에 전하여졌다면, 경전은 곧 문자화된 언어로서 우리민족의 언어도 남인도에 전해질 수 있다. 프랑스의 선교사 달레(1874년, 조선교회사:朝鮮敎會史)와 미국인 선교사 헐버트(1906년, 한국어와 드라비다 제어의 비교문법)는 한국어와 드라비다어가 동계임을 주장하면서 지금도 드라비다어 가운데 우리말과 같은 말이 1300여개나 된다고 하였다. 예컨대, 우리말의 아버지는 드라비다어로 아바지(appacchi), 엄마는 암마(amma), 도령은 도렌(toren), 얼(정신)은 얼(ul), 꽁지는 꼰티(konti), 눈은 눈이(nuni), 목은 막(mak), 남(他人)은 남(nam), 님은 님(nim), 골(谷)은 골리(kolli), 도랑은 두라이(turai), 나라는 날(nar), 바람은 발리(vali), 그물은 굼(kum), 풀은 풀(pul) 등이다. 미국의 언어학자 클리핀저(Clippinger)도 인도 고대어인 드라비다어종(語種) 속에서 한국어의 수 많은 단어들을 찾을 수 있었다고 하였다. 예컨대, 우리말의 쌀(米)은 드라비다어의 '살', 벼(禾)는 '비야', 풀(草)은 '풀', 알(粒)은 '아리' 등이다. 이런 유사한 단어들을 이 미국학자는 100개나 찾아내었다. 이는 조선일보의 보도내용이다. Ⅸ. 불교는 신선도와 근본적으로 동일하다. 석가세존이 우리민족으로서 우리나라의 백두산에서 6년간 고행하고 성도한 후, 종지(宗旨)까지 받고 인도로 건너 갔다면, 그리고 불교의 대승경이 우리민족의 경전이라면, 석가불교의 원류는 전적으로 우리나라의 신선도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신선도와 석가불교에 있어서 그 기본사상이 서로 불가분적 동일성을 지녀야 하고, 그밖에 고유명사·전문용어·종교의식 등이 서로 같거나 유사하게 마련이다.   1. 기본사상이 동일하다. 우선 기본사상의 동일성을 지적한다.  첫째, 신선도와 불교는 다 같이 우주의 진여이법(眞如理法)을 숭배의 대상으로 한다.  즉, 신선도는 천일(한늘님)·지일(한울님)·인일(한얼님) 삼신일체(三神一體)의 하나님을 숭배의 대상으로 하고, 불교에서는 법신불·보신불·응신불의 삼불일체(三佛一體)를 숭배의 대상으로 한다. 이는 천일·지일·인일의 삼신일체에 해당하는 대우주의 진여이법을 의미한다. 그러나 현재에 와서 응신불에 석가불을 대응시키고 있으나, 응신불 역시 원래는 진여이법의 한 쓰임에 불과한 것이다. 그러므로 신선도와 불교는 다 같이 인간을 숭배의 대상으로 하지 않고, 우주운행의 근본원인 즉 진여이법을 숭배의 대상으로 한다.  둘째, 신선도와 불교는 다 같이 3원론적 1원론이다.  신선도의 기본사상은 천일·지일·인일의 삼신일체사상이며, 불교의 기본사상은 법신(法身)·보신(輔身)·응신(應身)의 삼불일체(三佛一體)사상이다. 곧 3원론적 1원론인 것이다.  셋째, 신선도와 불교는 다 같이 조화사상이다.  삼원론적 일원론은 일방의 중재에 의해 자타일여(自他一如)·물심불이(物心不二)·선악일체(善惡一體)·성속일체(聖俗一體)·개전일체(個全一體) 등 조화사상이 된다.  넷째, 신선도와 불교는 다 같이 순환론(윤회사상)이다.  윤회사상 역시 불교의 기본사상으로서 사계의 모든 학자들이 공인한다. 신선도의 삼신일체 사상도 공간과 시간에 있어서 시작도 끝도 없다는 순환론인데, {천부경}의 일시무시일(一始無始一)과 일종무종일(一終無終一) 및 만왕만래(萬往萬來)가 순환론으로써 신선도 역시 윤회사상인 것이다.  다섯째, 신선도는 곧 신선사상인데 불교 역시 신선사상이다.  신선이란 늙지 않고 오래 살며 자유자재로 몸을 변화시킬 수도 있는 특이한 사람을 지칭한다. 그런데 불교의 비바시불은 8만4천세, 시기불은 7만세, 비사부불은 6만세를 살았다 하여 불로불사(不老不死)의 신선이라 하고, 아미타불은 무량수(無量壽)라는 뜻으로 장생불사(長生不死)의 신선이라 하며, 불(佛)은 신선 가운데 최고라는 뜻으로 대선(大仙)을 지칭한다. 관세음보살은 세상을 교화함에 있어 신변자재하는데 33신(三十三身)이 있다고 한다. 지장보살은 천상에서 지옥까지 일체 중생을 교화하기 위하여 몸을 6도(六道)에 나타낸다고 한다. 이래서 불경에 신선이니 선인이니 하는 용어가 자주 등장하고, 불교를 대선도(大仙道)라 칭한다.  이상과 같이 신선도와 불교는 사상적인 측면에서도 서로 일치한다. 더욱이 고대 인도의 정통사상과 불교사상을 비교하여 보면, 고대 인도의 정통사상은 다신론적 일신론(多神論的 一神論)으로서 창조론(創造論)인데, 불교는 범신론적 무신론이며 윤회사상이다. 불교와 인도 사람들의 사유를 비교하여 보아도 불교는 생명평등 내지 인간평등 사상인데, 인도 사람들은 바라문·찰제리·바이샤·수드라의 불평등한 4성계급(四姓階級)을 그대로 받아들인다. 불교는 원래 대승적이어서 관대하면서도 강경하고 온유하면서도 엄격하다. 그래서 정의에는 순응하고 불의에는 항거하는데, 인도 사람들은 대체로 만사에 순응하고 무저항적이다. 또한 불교가 인도 사람들의 사유나 성격적 욕구에 바탕을 두고 있다면, 어떤 위기에 부닥쳐 일시 쇠퇴하였다 하더라도 기회가 호전되면 다시 소생하여야 할 것이다. 그런데 이슬람교의 침입에 의하여 불교와 힌두교가 다 같이 박해를 받고 멸망하게 되었지만 힌두교는 다시 부활되어 현재 인도 전체 인구의 태반(83%)을 신자로 하고 있는데, 불교는 인도 전역에서 거의 그 자취를 찾아볼 수가 없다. 외국 사람들이 근래에 이르러 세운 사찰만이 몇 곳에 있을 뿐이다.  이를 보아도 불교는 원래 인도사상이 아니며, 석가세존의 독창도 아니라, 우리민족의 신선도에 바탕을 두고 있다는 것이 더욱 분명해진다. 예수의 기독교가 유태교에 바탕을 두고,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의 철학이 고대 그리스의 밀교인 orpheus교를 배경으로 하는 것과 같은 격이라는 것이다.  2. 고유명사와 전문용어가 동일하다. 대승경이 인도에 전승된 이래 몇 번에 걸쳐 결집되면서 경전의 용어가 인도화되었다 하더라도 어쩌면 산명(山名)과 지명(地名) 등 고유명사는 발음 그대로 남아있을 수 있다. 이러한 착안에 따라 불경에서 우리의 고유명사와 전문용어를 찾아보기로 한다. 그러나 필자의 고어지식(古語知識)의 부족으로 한계가 있고, 참고문헌은 {화엄경} 일부와 우리말 사전임을 밝혀둔다.  첫째, {화엄경}에서 발견된 우리의 고유명사를 예시하면, 단군조선 시대부터 천신제를 지내던 강화도의 마니산(摩尼山), 신라의 네 신선이 유오(遊娛)하던 강원도의 금강산, 인삼의 고장을 지칭하는 진단(震旦), 신라의 옛 이름인 시라(尸羅), 유리이사금 때에 지었다고 하는 도솔가의 도솔(兜率), 그밖에 오대산(五臺山)·우두산(牛頭山)·가야(伽倻) 등이 발견되었다.  그러나 본서의 소론을 이해하지 못하거나 무시할 경우, 우리나라의 지명이나 산명이 불교가 전래된 이후 그 영향에 의하여 붙여진 이름이 아니냐 하고 반문할 수 있다. 불교가 공식적으로 우리나라에 전래되기는 고구려 소수림왕 2년 서기 372년인데, 위의 산명과 지명들은 그 이전부터 있었거나, 아니면 자연적인 지형이나 지리적 조건에 따라 붙여진 이름이다. 예컨대, 금강산은 개울에 사금(沙金)이 흐르고 멀리서 보면 금빛이 난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으로써 그 시원을 알 수 없고, 시라(尸羅)는 B.C. 57년 신라 건국초의 옛 이름이며, 가야는 {신교총화(神敎總話)}에도 나오는 것을 보면 승려들의 수도생활에서 유래된 이름으로써 김수로왕의 금관 가락국 건국 이전 즉 서기 42년 이전부터 있던 우리나라 남부지방의 이름이다. 마니산은 경기도 강화에 있는 산으로서 '마니'는 산의 돌이 탄탄하여 그 빛을 멀리서도 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할마니·어마니·심마니·어인마니"의 마니로서 수호신 같은 의미를 지닌 우리민족의 고어이다. 진단은 한자로 震旦·震檀·震丹·振旦·眞丹 등 여러가지로 표기되는데, 인삼의 고장을 상징하는 우리나라의 이칭이다.  이렇게 볼 때, 상기의 산명과 지명이 불교의 영향에 의하여 붙여진 이름이라 볼 수 없다. 또한 산명이나 지명 등 고유명사는 어느 책이나 경전을 보아도 원래의 이름을 그대로 기재하고 임의로 번역하여 기재하지 아니한다. 더욱이 가야를 제외하면 그러한 산명이나 지명이 인도에 없으니 절대 불교의 영향이라 볼 수 없다.  둘째, 신선도에 한웅천황 이전 칠세(七世) 한인이 있었는데, 불교에도 석가불 이전 칠불(七佛)이 있었으며, 칠세 한인 가운데 한분의 명호가 석제임한인(釋提壬桓因)인데, 불교에서 33천의 주신을 석제한인(釋提桓因)이라 한다. {삼국유사} 황룡사장육편을 보면 우리나라에 가섭불(迦葉佛)이 있었는데, 불교에도 가섭불이 있다.  셋째, 신선도의 본당 명칭이 대웅전인데, 불교의 본당 명칭도 대웅전이다. 이에 대해서는 제1편에서 상설하였다.  넷째, 신선도는 단군조선에 와서 특히 발전되었으므로 단(檀)과 깊은 관련이 있다. 그런데 불교에서 신도를 단도(檀徒)라, 신도의 집을 단가(檀家)라, 시주(施主)를 단월(檀越) 또는 단나(檀那)라, 가장 큰 목향을 전단(?檀)이라 한다. 전단과 백단(白檀)으로 만든 불상을 단상(檀像)이라, 석가세존이 입산수도한 산을 단특산(檀特山)이라 한다. 이와 같이 불교용어에 단(檀)자를 많이 쓰고 있다.  다섯째, 신선도에 '三'수가 가장 기본수여서 '三'으로 된 전문용어가 많다. 예컨대, 삼신일체(三神一體)·삼극일체(三極一體)·회삼귀일(會三歸一)·집일함삼(執一含三)·삼일신고(三一神誥)·삼륜(三倫)·삼강(三綱)·삼진(三眞)·삼문(三門)·삼관(三關)·삼방(三房) 등이 있다. 불교에도 삼불일체(三佛一體)·삼승즉일승(三乘卽一乘)·회삼귀일(會三歸一)·집일함삼(執一含三)·삼계일체(三界一體)·삼각(三覺)·삼관(三觀)·삼론(三論)·삼보(三寶)·삼장(三藏)·삼혼(三魂) 등 많다. 이외에도 유사한 전문용어가 많으나 번잡하므로 생략한다.  여섯째, 불교에서 출가교도를 승(僧)이라 하는데, 신선도에서도 출가교도를 화랑(花郞) 또는 조의(?衣)라 하는 외에 승(僧)이라 한다.  일곱째, 대체로 고유명사와 전문용어의 발음을 보면, 우리의 발음이 지나족의 발음보다 원어(범어)에 더 가깝다. 예컨대, 석가모니(釋迦牟尼)를 예로 들면, 범어로 "샥까무니(Sakga-Muni)", 지나어로 "씨지아모우니(Shigia-Mouni)", 우리말로는 "석가모니"이다. 불타(佛陀)는 범어로 "붇다(Budda)", 지나어로 "호뚜오(Fotuo)", 우리말로는 "불타"이다. 이와 같이 우리민족의 발음이 원어(범어)에 더 가깝고, 지나족의 발음은 원어(범어)와 거리가 멀다. 그 이유를 지나족의 발음이 시대에 따라 변화한 때문이라 할지 모르나, 한자의 발음기호(반절음;反切音)는 옛날이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으며, 고유명사와 전문용어의 발음은 시대가 바뀌어도 변하지 아니한다. 따라서 우리민족의 발음이 지나족의 발음보다 원어에 더 가깝다는 것은 대승경이 중국을 거쳐 우리나라에 전래된 것이 아니라, 인도에서 우리나라로 직접 전래됐거나, 아니면 우리나라에서 인도로 직접 전승됐음을 의미한다.  이상과 같이 대승경의 고유명사와 전문용어가 우리민족의 그것과 동일하다. 그것 역시 불교의 원류가 신선도에 있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3. 신선도의 천산과  불교의 수미산이 동일하다 신선도가 우리나라 백두산에서 한웅천황과 단군왕검에 의하여 설해지고 발전되었다 하더라도 그 시원을 찾아 올라가면 그 최초의 발상지는 중앙 아시아의 천산(天山)이다. 또한 석가불교는 이 세상 중앙에 높이 솟아있다고 하는 수미산과 불가분의 관계를 지닌다. 그런데 천산에 대한 중앙 아시아 칼마크인(Kalmuck人)의 전설과 수미산에 대한 불교의 전설을 비교해 보면 두 개의 산이 그 특수성에 있어서 서로 동일하다.  ? 중앙 아시아 칼마크인의 전설에 천산이 물(淡水) 밑으로 8만 리그(league) 뻗어있고, 물 위로 8만 리그 솟아있다고 했다. 그런데 불교의 수미산 역시 물(바다) 밑으로 8만 유순 뻗어있고, 물 위로 8만 유순 솟아있다고 했다. 곧 천산과 수미산의 높이가 물의 밑과 위로 8만 유순(리그)이라 함이 동일하다.  ? 칼마크인의 전설에 천산의 남면은 청(靑), 서면은 적(赤), 북면은 금(金), 동면은 은(銀)의 광채를 발산한다고 했다. 그런데 불교의 수미산 역시 사보(四寶)로 이루어져 남면은 유리, 서면은 파리, 북면은 황금, 동면은 백은으로 이루어져 해와 달이 그 주위를 회전하면 보광을 발산한다고 했다. 곧 천산과 수미산이 모두 그 동서남북에서 금은주옥의 보광을 발산한다는 점이 동일하다.  ? 천산의 주위를 7개의 산이 둘러싸고 있다고 했다. 그런데 불교의 수미산 역시 그 주위를 7개의 금산(金山)이 둘러싸고 있다고 했다. 즉 7개의 산이라는 점이 동일하다.  ? 천산의 주위를 둘러싼 7개의 산 사이에 7개의 물(淡水)이 있다고 했다. 그런데 불교의 수미산 역시 그 주위를 둘러싼 7개의 금산 사이에 7개의 물(바다)이 있다고 했다. 곧 천산과 수미산이 모두 7개의 물로 둘러 싸여있다는 점이 동일하다.  ? 천산을 둘러싼 마지막 산맥 밖을 소금물 바다(大洋)이 둘러싸고 있다고 하였다. 그런데 불교의 수미산 역시 마지막 금산 밖을 짠물바다(鹹海)가 둘러싸고 있다고 했다. 다시 말하면 천산과 수미산의 외곽이 모두 소금물바다 곧 짠물바다로 둘러싸여 있다는 점이 동일하다.  ? 천산을 둘러싼 소금물 바다 주위를 철위산(鐵圍山)이 둘러싸고 있다고 하였다. 그런데 불교의 수미산 역시 짠물바다 밖을 철위산이 둘러싸고 있다고 했다. 곧 천산과 수미산의 짠물바다(대양) 밖을 모두 철위산이 둘러싸고 있다는 점이 동일하다.  ? 천산의 4방에는 소금물 바다 위에 하나씩의 땅이 있다고 했다. 그런데 불교의 수미산을 둘러싼 짠물바다 위에도 4대주가 있다고 했다. 곧 천산과 수미산의 주위에 4대주(四大州)가 있다는 점이 동일하다.  이상과 같이 천산과 수미산은 서로 동일하다. 이는 곧 천산이 수미산이고 수미산이 천산임을 의미한다. 그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신선도와 불교의 발상지가 동일함을 의미한다. 이를 보아도 불교는 신선도의 한 유파임에 틀림없는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중국 상해에서 간행된 {산해경} 해내경 원본을 보아도 여러 전거를 들면서 조선을 천독(天毒) 즉 천축(天竺)이라 하고, 불도(佛道)가 그 나라에서 나왔다고 하였다.   Ⅹ. 결 론 이상 논한 본편의 소론을 요약 정리하면  1) 석가세존은 우리나라에서 태어나 우리나라에서 고행성도한 단군족으로서 근본적으로 한국 사람이다. 다시 말하면 석가세존은 인도 사람이 아니다.  2) 석가세존이 고행성도한 설산은 우리나라의 백두산으로서 인도의 부다가야는 석가세존의 고행성도지가 아니다.  3) 석가세존이 초전법륜지인 녹야원은 인도 중부의 사르나드가 아니라 우리나라 제주도 한라산이다.  4) 대승경의 출처는 바다로서 우리나라 고조선이다.  5) 대승경의 범서는 인도의 문자도 언어도 아니라, 상고시대 우리나라의 글자와 언어이다.  6) 남인도에 우리나라의 고대 한글과 언어가 있다.  7) 신선도와 불교의 기본사상이 전적으로 일치되고, 의식도 유사하다. 그밖에 대승경에 있는 산명과 지명이 인도에 없고, 우리나라에는 있다.  8) 불교의 수미산과 신선도의 천산이 동일하다.  이상을 근거로 결론을 내리면 석가불교의 원류는 전적으로 상고시대 우리민족의 배달사상인 신선도라 할 수 있다. 이를 대소승불교로 나누어 말하면, 소승불교는 신선도를 바탕으로 성립된 신선도의 지류라 할 수 있고, 대승불교는 전적으로 우리나라의 신선도와 동일한 종교라 할 수 있다. 이를 생각하면 우리나라에 있는 대승불교는 비록 외래종교라 하더라도 역수입된 고유종교라 할 수 있고, 불교인들은 실재에 있어서 외래종교 신자가 아니라 고유종교 신자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신앙이란 백지에 글을 쓴 격이니 좀처럼 지워지지 않는다. 신심(信心)이 두터우면 두터울 수록 제 신앙만을 고집하고, 조국도 민족도 부모형제도 신앙 다음으로 친다. 냉정히 자신의 신심을 반성하여 보자. 석가모니는 따지고 보면 원래 우리나라 사람이다. 그러나 지금까지 다른 나라 사람 곧 인도 사람이라 믿어왔다. 그런데 다른 나라 사람인 석가모니를 절의 가장 중앙 대웅전에 안치하여 조석으로 공양하면서도, 제 민족의 국조이시고 대성인이신 한인·한웅·한검을 모시고 있는 절도 얼마 없거니와 모시고 있다 하더라도 대웅전 밖 어느 한쪽 모퉁이에 방치하고 있다. 이는 주인을 내쫓고 손님을 안방에 안치한 격이며, 선배를 무시하고 후배를 높이는 격이 아닌가? 제 조상을 옆에 두고 남의 조상에게 의지하는 격이며, 제 부모를 박절하고 남의 부모에게 매달리는 격이 아닌가? 그것이 과연 윤리도덕에 부합되는 일인가? 애국적인 행동인가? 부처님의 가르침인가? 한국 사람이 한국 땅에서 한국에서 나는 곡식을 먹고 살면서 외국을 동경하고 외국종교를 믿고 외국 사람을 신봉하는 것이 과연 이치에 합당한 일인가? 그것이 주객전도가 아니고 무엇인가? 요는 석가세존을 섬기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석가세존이 단군족의 후예라는 사실과 불교가 원래부터 우리민족의 고유사상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여 제 민족의 국조이시고 성인이신 한인·한웅·한검을 대웅전에 석가세존과 함께 모시고 섬기라는 것이다.  깊이 자성하고 신심이 원시반본(原始返本)될 때, 비로소 외래종교 신자라는 허탈감에서 해방되어 참다운 신앙을 할 수 있게 되리라 믿는다. 참다운 신앙을 할 때, 자신과 가정에 기쁨과 행복이 오고, 견성성불할 수 있으며, 국가적으로는 1천 2백만 애국동포를 얻는 것이 된다. 또한 그리 될 때, 불교계도 자연적으로 의식개혁을 하게 되어 부처님의 자비가 내리고 7천만이 하나가 될 수 있고, 아울러 국토통일만이 아니라 사상통일까지 이루게 되어 민족의 전도가 밝게 될 수 있다고 믿는다. 불교계의 각성과 공식적인 수용을 촉구한다. 제3편 유교의 발상지는 우리나라이다         홍익인간 광명이세 Ⅰ. 서 론 본편에서는 지나족에게 뺏겼던 유학을 찾는 문제를 다루려한다. 그러므로 특히 주자학자들은 정신을 한층 가다듬고 본편을 읽어야 할 것이다. 다시 말하면 자신이 한국 사람인가? 아니면 지나족인가를 분명히 확인한 다음 본편을 읽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유교의 사서삼경(四書三經) 외에 제 민족의 역사서와 사상서를 몇권이나 읽었는지를 반성하고 본편을 읽어주기 바란다. 인간은 원래 객관적이 못된다. 곧 파란 안경을 쓰고 사물을 보면 사물이 파랗게 보이고, 빨간 안경을 쓰고 사물을 보면 사물이 빨갛게 보이며, 무색안경을 쓰고 사물을 보면 사물이 사실대로 보인다. 그와 같은 이치를 이해한다면 자신이 어떤 사람인가를 반성아니할 수 없는 것이다. 곧 주자학 제일주의와 지나중심주의적 사고를 버려야 한다는 것이다. 또 그러한 입장에서 제 민족의 역사와 사상을 연구하고, 지나족의 역사와 사상을 연구하여 양자를 비교하여 보라. 그러면 지나의 삼황오제(三皇五帝)는 우리민족의 지손(支孫)이요, 유교의 사서삼경(四書三經)도 신선도의 한 가닥에 불과함을 알게 될 것이다. 갑골문(甲骨文)이 우리민족에 의해서 비롯되었고, 한자(漢字)도 우리민족에 의해서 창제되기 시작하였다. {주역(周易)}이 우리민족에 의해서 비롯되었고, 음양오행사상(陰陽五行思想)을 비롯하여 홍범구주(洪範九疇)가 우리민족에서 지나로 전승되었다. 인(仁)사상은 우리민족의 고유사상이요, 오상오륜(五常五倫)은 원래 우리민족의 고유덕목이었다. 곧 유교의 원류가 우리나라의 신선도로서 유교 자체가 곧 우리민족의 고유사상이었다. 지나족의 이상세계이며 중국문화의 발상지라는 신비의 곤륜산(崑崙山), 산의 조종이라는 곤륜산도 우리나라의 백두산이었다. 이러한 학설은 근세조선 때라면 사문난적(斯門亂賊)이라 하여 타도의 대상이 될 것이며, 현재에도 제 나라의 역사와 사상에는 관심이 없고 지나를 우러러 받드는 일부 골수 주자학자들에게는 일고의 가치도 없는 것이라 하여 무시당할지 모른다. 그러나 제 나라의 역사와 사상에 대하여 관심이 많은 대다수 유학자들에게는 새로운 연구자료가 될 수 있다고 믿는다. 그러나 이는 초보적인 연구로서 완성된 것이 아니며, 앞으로도 많은 연구가 필요하다. 객관적인 비판을 기다린다. Ⅱ. 유교는 우리나라에서 기원되었다 1. 지나문화의 발상지인 곤륜산은  우리나라의 백두산이다 1) 곤륜산은 어떤 산인가? 지나인들은 곤륜산(崑崙山)을 지나문화의 발상지, 지나인의 정신적 고향, 지상선경, 산의 조종으로 믿는다. 그러면서도 곤륜산맥이 지나대륙 서쪽에 있음으로써 곤륜산도 곤륜산맥의 어디에 있을 것이라 막연히 추정할뿐 그 위치가 신비속에 가려져 있다. 마치 불교에서 설산과 바다가 지금까지 신비속에 가려 있었듯이 곤륜산도 지금까지 신비속에 가려져 있는 것이다.  그러면 우선 곤륜산은 어떤 산인가? 곤륜산의 성립요건부터 알아보기로 한다. 참고문헌은 학원출판공사의 {학원세계대백과사전}, 동아출판사의 {동아원색세계대백과사전}, 이희승의 {국어대사전}, 불교의 {석가방지} 등이다. 이들 서적에 의하면 곤륜산의 성립요건을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1) 곤륜산은 그 정상에 아름다운 못이 있다. 그 못을 당(唐)나라에서는 아나타답다라 하고, 불교 명칭으로는 아뇩달지라 한다.  2) 못의 3면이 비등한데 북은 넓고 남은 좁아 인면상(人面像)이다.  3) 곤륜산은 하수의 원천으로서 못의 북쪽에 큰 폭포가 있고, 4방으로 4대하가 흐른다.  4) 곤륜산은 3층으로 되어있다.  5) 곤륜산은 신선이 사는 곳이다.  6) 곤륜산은 불사약이 나는 곳이다.  7) 곤륜산은 아름다운 옥(玉)이 나는 곳이다.  8) 곤륜산에 서왕모(西王母)에 대한 전설이 있다.  9) 곤륜산은 지구의 중심에 있다.  곤륜산의 성립요건이 이상 외에도 많으나 대체로 생략하고 위에 제시한 요건에 한정해서 곤륜산이 어디에 있는 어떤 산인가를 확인해 보기로 한다. 2) 곤륜산은 지나대륙에 없다. 지나대륙의 서쪽에 곤륜산맥이 있는데 거기에 곤륜산이 있느냐의 문제이다. 다시 말하면 위에 제시한 요건을 갖춘 그러한 곤륜산이 곤륜산맥에 있느냐의 문제이다. 이 지구상에 같은 이름을 가진 산은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 그렇다고 그 산을 모두 같은 산이라 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런데 곤륜산맥 가운데 어느 산의 정상에도 강하의 원천인 아름다운 못(호수)이 있다는 기록을 본바 없고, 동아일보의 보도에 의해도 세계적으로 가장 높은 산상호수는 페루와 볼리비아의 국경에 있는 티티카호(湖)와 소련의 레닌그라드 근처에 있는 라도카호(湖)라 하여 곤륜산맥 가운데 어느 산의 정상에도 큰 못(호수)이 없음을 확인하여 주고 있다. 이는 곧 지나 서쪽 곤륜산맥에 곤륜산이 없음을 확인하여 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는 우리나라의 함경도에 함경산맥이 있으나 거기에 함경산이 없는 것과 같은 격이며, 인도 부부에 히말라야 산맥이 있으나 거기에 히말라야산이 없는 것과 같은 격이다. 동아출판사의 {동아원색세계대백과사전}에도 곤륜산은 중국의 곤륜산맥과는 아무런 상관이없다고 기록하고 있다. 3) 곤륜산은 우리나라의 백두산이다 그러면 곤륜산은 우리나라의 백두산이라는 추정이 가능하게 된다. 왜냐하면 {석가방지}에 곤륜산을 곧 설산이라 했고, 설산이 백두산이라는 사실이 증명됐기 때문이다. 그러면 구체적으로 백두산의 특수성을 곤륜산의 성립요건에 대입시켜 보기로 한다.  1) 곤륜산의 정상에 아름다운 못이 있다고 하였다. 그런데 백두산의 정상에도 형형색색의 병풍석으로 둘러싸인 아름다운 못인 천지가 있다.  2) 곤륜산 정상의 못이 그 모형에 있어서 3면이 비등하나 북은 넓고 남은 좁아 인면상이다. 그런데 백두산 천지의 모형도 3면이 비등하고 북은 넓고 남은 좁아 인면상이다.  3) 곤륜산은 하수의 원천으로서 못의 북쪽으로 큰 폭포가 흐르고 4방으로 4대하가 흐른다. 그런데 백두산도 하수의 원천으로서 천지의 북쪽으로 큰 폭포인 천지폭포가 흐르고 4방으로 4대하가 흐른다.  4) 곤륜산이 3층으로 되어있다. 그런데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백두산도 3층으로 되어있고, 실제 답사하여 보거나 사진을 보아도 3층이다.  5) 곤륜산에 신선이 살았다고 한다. 그런데 백두산에도 한웅·한검·자부선인 등 신선이 살았으므로 백두산 일대를 신시(神市) 또는 신주(神州)라 한다.  6) 곤륜산에서 불사약이 난다고 하였다. 그런데 {부도지}에 의하면 백두산에서도 삼근영초(三根靈草)인 산삼(山蔘)이 나고 이를 불사약이라 하였다.  7) 곤륜산에서 아름다운 옥이 난다고 하였다. 그런데 {부도지}에 의하면 백두산에서도 7색보옥(七色寶玉))이 생산되었다고 하였다.  8) 곤륜산에 서왕모에 대한 전설이 있다. 그런데 백두산에도 서왕모에 대한 전설이 있다.  9) 곤륜산은 지구의 중심에 있다고 하였다. 그런데 백두산을 중심으로 세계지도를 보면 일본열도는 좌청룡, 지나대륙은 우백호에 해당되며, 남북아메리카 대륙은 외청룡, 아프리카 대륙과 유럽대륙은 외백호에 해당되고, 시베리아 대륙은 현무, 오세아니아주는 주작에 해당되어 백두산이 비교적 지구에서 가장 중심인데, 세계지리학회에서 위성사진을 근거로 백두산을 지구의 중심이라 하였다. 참으로 놀라운 사실을 우리민족사 연구에 제공해 주고 있는 것이다. 모든 것은 중심에서 사방으로 뻗어나가기 때문이다.  이상과 같이 백두산이 곤륜산의 성립요건과 부합일치된다. 이는 백두산이 곧 곤륜산이고, 곤륜산이 곧 백두산임을 의미한다. 백두산 토착민들도 백두산을 곤륜산이라 하였다. 청(淸)나라의 제4대 강희제(康熙帝)도 지나의 태산(泰山)은 물론 한국·지나·만주의 모든 산이 백두산에서 뻗어나간 지맥임을 주장했다. 즉 곤륜산이 모든 산의 조종인데, 백두산이 모든 산의 조종임을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중국문화와 유교가 곤륜산에서 기원된 것이 사실이라면, 우리나라의 백두산에서 기원되었다는 이론이 성립되고, 공맹의 유교가 우리나라 신선도에서 기원되었다는 사실이 제1차적으로 증명되었다고 할 수 있다.   2. 유교의 창시자는 우리민족이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중국문화의 개조(開祖)는 복희(伏羲)·신농(神農)·황제(黃帝)이다. 이들 삼황은 어느 민족에 속하는가?  주지하다시피 복희는 배달국 태우의한웅(太虞儀桓雄)의 막내아들로서 동이족이다. 복희가 동이족이라는 사실은 부사년(傅斯年) 등 중국학자들도 인정한다. 신농(神農)씨는 소전(少典)의 아들이다. 소전은 고시(高矢)씨의 방계(傍系) 후손이다. 고시씨는 농경을 맡은 단군왕검의 직속 신하이다. 그러므로 신농씨 역시 동이족인 것이다. 오늘날 강(姜)씨의 시조이기도 하다. 황제 헌원 역시 소전(少典)의 별파로서 동이족이다. 그래서 {초사:楚詞}에 "황제는 백민태생(白民胎生)이고 원래 동이족이라"고 하였다.  삼황 다음 유학은 누구에 의해서 전승되었는가? {중용}을 보면 "중니(仲尼:孔子의 字)는 요순(堯舜)의 도를 조술하고 문왕(文王)과 무왕(武王)의 법도를 헌장으로 하였다"고 했다. 또한 유학의 계통을 당(唐)나라 시대의 한자(韓子)는 {맹자집주} 서설에서 "요(堯)임금은 인의(仁義)의 도(道)를 순(舜)임금에게 전하고, 순임금은 이것을 하(夏)나라의 우(禹)임금에게 전하고, 우임금은 이것을 은(殷)나라의 탕(湯)임금에게 전하고, 탕임금은 이것을 주(周)나라의 문(文)·무(武)·주공(周公)에게 전하고, 문·무·주공은 공자에게 전하고, 공자는 맹가(맹자)에게 전하였다"고 밝히고 있다.  이를 보면 복희·신농·황제 다음, 중국문화와 유학은 요임금과 순임금에 의하여 전승되고 있다. 이들은 어느 민족에 속하는가? {사기}에 의하면 요임금은 황제 헌원의 5세손으로 동이족이다. 요임금이 동이족이란 것은 안호상과 최동 등 여러 학자들이 여러 전거를 들면서 주장한다. 또한, {맹자}를 보면 순임금의 출생지·거주지·사망지가 모두 동이지방임을 밝히면서 순임금도 동이족임을 밝히고 있다. 이에 대해서도 사계의 모든 학자들이 공인한다.  유학을 집대성한 공자는 어느 민족에 속하는가? 공자는 은(殷) 왕실과 송(宋) 왕실의 후손이다. 은왕실과 송왕실은 동이계이다. 그러므로 공자 역시 동이계이다.  이상과 같이 중국문화와 유학을 개창한 개조가 모두 동이족이다. 여기에서 우리민족은 동아문화의 개창자라는 사실이 더욱 분명히 드러났다고 할 수 있고, 공맹의 유교는 우리민족의 신선도에서 갈려나간 신선도의 지류라는 사실이 제2차로 드러났다고 할 수 있다. 3. 한자의 창제는 우리민족에서 비롯되었다 한자의 전래와 더불어 유학이 우리나라에 전래되었을 것이라는 추정이 있다. 이는 한자가 지나족에 의하여 창제되었을 것이라는 가정에서 이루어진 추정이다. 그러면 한자를 어느 민족이 먼저 창제하기 시작했는가? 다시 말하면 한문의 사용문제가 아니라 한자의 기원문제이다. 이는 마치 영어는 영국어이지만 영어를 표기하는 알파벳(Alphabet)의 기원은 영국에 있는 것이 아니라 페니키아문자 또는 그리스문자에 있다고 하듯, 한문은 지나어이지만 한문을 표기하는 문자 곧 한자의 기원이 어디에 있느냐 하는 문제이다.  한자는 중국을 위시로 하여 한국·일본·동남아 등 아시아권 일원에서 거의 쓰여지고 있다. 그 제작도 동양 각국에서 이루어져 한자는 동방문자라 할 수도 있다. 그러나 문자의 기원에 대한 기록을 보면 {태백일사} 소도경전본훈에 "신시에 녹서(鹿書)가 있었고, 자부에 우서(雨書)가 있었으며, 치우에 화서(花書)가 있었다. 투전문속(鬪佃文束)은 그 남은 흔적이다. 복희에 용서(龍書)가 있었다. 단군에 신전(神篆)이 있었다. 이러한 글자와 글이 백산·흑수·청구 등 구려(九黎)의 지역에서 널리 쓰여졌다"고 하였다. 또 이어서 "부여인(扶餘人) 왕문(王文)은 처음에 전(篆)을 번거롭게 만들었으나 점점 그 획을 생략하여 새로이 부예(符隸;예서의 서체)를 만들어 그것을 썼다. 진(秦) 때에 정막(程邈)이 숙신(肅愼)에 봉사하여 한수(漢水)에서 왕문의 예법(隸法)을 얻었다. 또 그 획을 가지고 약간 바꾼 것이 지금의 팔분체(八分體)이다. 진(晉) 때에 왕차중(王次仲)이 또 해서(楷書)를 만들었는데 차중은 왕문의 원예(遠裔)이다. 지금 문자의 기원을 궁구하여 보면 다 신시의 유법이며 지금의 한자 역시 그 지류를 이은 것이 분명하다"고 기록하고 있다. {단군세기} 제3세 단군 가륵(嘉勒) 2년조를 보아도 상형표의(象形表意)의 진서(眞書) 곧 한자(漢字)가 있었다 하고, 단군왕검이 처음으로 나라를 세울 때도 국호를 한자로 "조선(朝鮮)"이라 하였다. 이는 단군왕검 시대에도 한자를 사용하였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유학이 한자와 더불어 전래됐을 것이라는 추정은 성립되지 않는다.  그러나 일반 사학계에서는 위의 기록을 믿으려 아니한다. 그러므로 일반적인 통설에 따라 한자의 유래를 따져보기로 한다. 그러면 한자의 창제설에 어떤 것이 있는가? 크게 두 가지 학설이 있다. 하나는 지금으로부터 약 3천 5백년 전 은(殷)나라의 한 때 도읍지였던 안양(安陽)에서 발견된 갑골문자가 한자로 발전되었을 것이라는 갑골문자 발달설이 있고, 다른 하나는 지금으로부터 약 5천년 전 창힐(蒼?) 등 어느 개인이 한자를 창제하였다는 학설이 있다.   1) 갑골문과 한자의 기원 갑골문이란 점을 치는데 사용됐던 문자로서 거북의 등딱지인 귀갑(龜甲)이나 소와 말의 어깨뼈에 새겨진 문자를 말한다. 이 문자는 1899년 왕의영(王懿榮)과 유악(劉?) 등에 의하여 발견된 후 많은 연구에 의하여 은(殷)나라의 것임이 밝혀졌고, 은나라는 B.C. 17세기 경에서 B.C. 11세기 중반까지 지나 황하유역에 존재하였던 나라이다.  그러면 은나라는 어떠한 나라인가? 은나라는 상(尙)나라라고도 한다. 상나라의 시조는 설(契)이다. 설의 아버지는 제곡고신(帝嘗高辛)이다. 제곡고신의 할아버지는 소호금천(少昊金天)이다. 소호금천은 황제 헌원의 맏아들이다. 황제 헌원은 동이족이다. 이래서 은민족은 우리민족과 같이 백의를 입었고, 천신제를 지냈으며, 수골에 의하여 점을 치고, 순장제도(殉葬制度)였으며, 시조의 탄생설이 난생설(卵生說)로서 은왕실과 은민족이 동이족이라는 것은 학계의 일반적인 정설이다. 즉 은민족은 우리민족과 동일계의 민족이라는 것이다. 또한 단군조선 시대에도 이미 한자가 있었다. 그렇다면 갑골문 역시 동이족의 본거지인 동부지방에서 서쪽으로 전승된 것이라고 할 수 있고, 지나에서 우리민족 사회로 전래됐을 것이라는 논리는 성립되지 않는다.   2) 한자의 창제와 우리민족 한자의 창제설에 어느 개인을 두고 말할 때는 ?복희설 ?창힐설 ?주양설(朱襄說) ?저송(沮誦)·창힐설(蒼?說) ?범(梵)·거려(?廬)·창힐설(蒼?說) 등이 있다. 이 다섯 가지 설을 비교하여 보면 가장 공통적인 학설이 창힐설이다. 그래서 창힐을 한자의 최초 창제자로 꼽는다.  그러면 창힐(蒼?;倉?)은 어느 시대 사람이며 어느 민족에 속하는가? 이에 대해서는 두 가지 학설이 있다.  ? 창힐은 상고시대의 황제(黃帝)이다.  ? 창힐은 황제(黃帝)의 사관(史官)이다.  이들 두 가지 설 가운데 어느 설이 정확한지 알 수 없다. 그러나 창힐이 황제라 할 경우 황제는 동이족이므로 창힐은 동이족이다. 또한 황제의 사관이라 할 경우, 황제는 동이족이므로 창힐 역시 동이족일 가능성이 많다. 그런데 {태백일사} 신시본기에 "창힐과 고신(高辛) 역시 다 치우의 묘예(苗裔)다"하였는데 치우는 동이족이다. 그러므로 창힐은 어떻게 보든 동이족이다. 여기에서 한자의 지나족 창제설은 두번째로 부정된다. 3) 한자의 상형과 우리민족 이상과 같이 한자의 기원이 동이족 곧 우리민족에 있었다면 한자의 제작원리인 한자의 상형(象形) 역시 자연적인 현상 외에 우리민족의 생활과 그 습속을 나타내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 명지대학교의 진태하(陳泰夏)교수는 한자의 형성과정에 우리민족이 절대적인 영향을 미쳤다는 자료를 제시하여 국내 언어학계에 충격을 던져주고 있다. 진태하 교수가 제시하고 있는 근거를 몇가지 소개한다.  첫째, '집가(家)'자는 집면(?)자 안에 '사람인(人)'자가 들어가 있어야 당연한데 '돼지시(豕)'자가 들어가 있다. 따라서 집가(家)자는 집 안에 돼지를 키웠던 민족, 즉 한민족만이 만들 수 있는 글자라는 것이다.  둘째, '날일(日)'자는 해 모양을 상징한 문자이다. 그렇다면 해와 같이 둥글게 그리면 그만이다. 그런데 해 안에 까마귀 그림이 들어있다. 그러니까 이 문자를 만든 민족은 금까마귀 신화를 가진 민족이다. '날일(日)'자가 만들어지기 이전 수만년 전부터 그러한 신화를 전하여 오는 민족은 한민족 밖에 없다. 그러므로 '날일(日)'자 역시 우리민족만이 만들 수 있는 문자라는 것이다.  셋째, 지나에서는 종자를 나타낼 때 '씨(氏)'라고 쓰지 않는다. '씨(氏)'는 그런 의미도 아니다. 오직 성씨만을 '씨(氏)'라고 한다. 그런데도 성씨를 나타낼 때 쓰는 '씨(氏)'자는 씨앗에서 뿌리가 내리고 싹이 트는 모습에서 나왔다. 지나족이 이 문자를 만들었다면 종자를 '씨(氏)'라고 표현하는 말이 있어야 한다. 그런데 없다는 것이다. 우리말의 '씨(氏)'는 종자와 성씨 모두에 사용된다. 따라서 '씨(氏)'자 역시 한민족만이 만들 수 있는 문자라는 것이다.  진태하 교수는 이상과 같이 근거를 제시하면서 한자(漢字)라는 명칭은 옳지 않으며, 고대 한민족의 글이라는 "옛한글 혹은 동방문자(東方文字)"라고 불러야 옳다고 하였다. 진교수는 "젊은 세대들은 특히 한민족에 대한 인식을 다시 하여야 할 시점이다. 한민족은 세계에서 가장 발달한 표의문자도 만들었고, 가장 과학적인 표음문자도 만들었다. 세계에서 유일무이한 이 일은 한민족의 큰 자랑이다"라고 강조한다. 4) 한자의 반절음은 우리민족 중심이다 한자는 자형(字形)·자음(字音)·자의(字義)의 3요소로 구성되어있다. 자음을 표기하는 발음부호를 반절음(反切音)이라 한다. 반절음은 한자(漢字)로써 한자의 자음(字音)을 표기한 일자일음(一字一音)의 발음부호로써 한자를 창제한 민족의 발음을 기준으로 이루어지게 마련이다. 따라서 반절음과 일치되거나 가깝게 발음하는 민족이 한자의 창제와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면 지나족의 발음과 우리민족의 발음 가운데 어느 민족의 발음이 반절음과 일치되거나 가까운가를 알아보기로 한다.  백두산(白頭山)을 예로 들면, 백(白)의 반절음은 박맥절(薄陌切)로서 원음이 '백'이다. 지나족의 발음은 '바이(bai)'인데, 우리민족의 발음은 '백'이다. 두(頭)의 반절음은 도후절(徒侯切)로서 원음이 '두'이다. 지나족의 발음은 '또우(tou)'인데, 우리민족의 발음은 '두'이다. 산(山)의 반절음은 사한절(師閒切)로서 원음이 '산'이다. 지나족의 발음도 '산(shan)'인데, 우리민족의 발음도 '산'이다. 이와 같이 우리민족의 발음은 반절음과 일치하고, 지나족의 발음은 반절음과 틀리는 경우가 많다. 더욱이 한자의 발음은 원래 일자일음(一字一音)인데 지나족의 발음은 일자이음(一字二音)인 경우가 많다.  그리고 임승국은 한자 53,525자의 발음부호인 반음절이 모두 우리말 기준으로 되어있다는 사실을 지적하면서 "동이계가 황하문명의 주인공임을 조금도 의심치 않는다"고 하였다. 이를 보아도 한자의 기원이 우리민족에 있음을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이상과 같이 한자의 발생기원을 탐색하여 보면 그것은 우리민족에서 먼저 발원되었다. 그러나 {단군세기}를 보면 "상형표의(象形表意)의 한자(眞書)가 있었으나 서로 뜻이 통하지 못하고, 국가 사이에도 서로 이해하기 어려움으로써 삼랑(三郞) 을보륵(乙普勒)에게 명하여 정음(正音) 38자를 만들게 하였다"는 기록으로 볼 때, 우리민족은 한자를 먼저 창제하였으나 그 난해성으로 인하여 고대에 이미 그 사용을 포기하였다고 볼 수 있다. 이에 반하여 지나는 전한(前漢)과 후한(後漢)에 걸쳐 한자문화가 크게 발전하여 글자 수가 늘어나면서 한자(漢字)라는 이름을 붙이게 되었고, 그럼으로써 한자가 마치 지나족에 의하여 창제된 것처럼 인식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한자와 더불어 유교가 우리나라에 전래되었을 것이라는 추정은 부정되어야 할 것이다. Ⅲ. 유교사상과 우리민족의 신선도 1. 주역은 신선도의 경전이다 {주역}은 유교의 기본경전으로서 8괘(八卦)와 64괘(六十四卦) 그리고 이를 설명한 괘사(卦辭)와 효사(爻辭) 및 십익(十翼)으로 구성되어 있다. 8괘는 천지만물이 회통하는 이치 곧 천지인삼재지리(天地人三才之理)와 봄·여름·가을·겨울이 돌아가는 이치 곧 음양오행사상(陰陽五行思想)을 기본원리로 하여 만들어진 것이고, 64괘는 8괘를 더욱 발전시켜 길흉화복(吉凶禍福)이 돌아가는 이치를 나타낸 것이라고 한다. 괘사는 괘의 총체적 뜻을 설명한 것이고, 효사는 육효(六爻)에 대한 설명인 것이다. 1) 역(易)은 동이족에서 비롯되었다. {소도경전본훈}을 보면 역(易)에는 환역(桓易)과 희역(羲易) 그리고 금역(今易)이 있다. 희역은 복희의 역을 의미한다. {태백일사} 신시본기를 보면, 복희가 어느날 꿈에 "삼신(三神)이 몸에 강령하여 만리를 통철하게 되고 인하여 삼신산에 가서 하늘에 제사를 지내고 천하(天河;지금의 송화강)에서 괘도를 얻었는데 삼절(三絶;┏陰爻) 삼연(三連;?陽爻)하여 위치를 바꾸면서 그 이치를 궁구하면 묘하게도 삼극(三極)을 품고 있어 변화가 무궁하였다"고 하였다. 즉 괘도를 복희가 천하에서 얻었다고 하였다. 이는 복희가 괘도를 처음으로 제작하였다는 뜻이 아니라 이미 전승되고 있던 것을 복희가 얻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삼성기전} 상편을 보면, "환국을 이어서 한웅씨가 일어나 괘(卦)를 그리어 미래를 알고 괘상을 잡아 신통력을 부렸다"고 하여 한웅천황에게서 역(易)이 비롯되고 있다. 신시본기에도 황제중경(黃帝中經) 오행치수법(五行治水法)의 근본은 신시(神市) 구정균전(邱井均田)의 유법이라 하여 {주역}의 근본원리인 음양오행사상이 신시에 이미 존재하고 있음을 밝히고 있다.  이상 {한단고기}의 기록에 의하면 역은 한웅천황에 의하여 기원되고 복희에 와서 좀더 구체화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역의 저작에 대하여 학설이 각각이다. 일반적인 학설을 소개하면 제1설로는 8괘와 64괘를 모두 복희씨가 저작하였다는 위(魏)의 왕필설(王弼說)이 있고, 제2설로는 8괘는 복희씨가 저작하고, 64괘와 괘효사(卦爻辭)는 문왕이 저작하였다는 사마천설(司馬遷說)이 있다. 여기에서 제2설이 통설로 되고 있다. 그 이유를 보면 복희씨는 전설적인 인물이고, 8괘 창안에 대한 역사적 자료가 없다는 것이다.  앞에서 밝혔듯이 복희씨는 동이족이며 좁게는 우리민족이다. 우리민족은 3국시대 이후만하여도 931회의 외침을 당하였다고 한다. 외침을 당할 때마다 사료가 소실되었고 멸실되었다. 여기에서 우리민족에게는 사료가 없을 수 밖에 없고, 사료가 없으니 상고시대의 인물이 전설적인 인물로 될 수 밖에 없다. 그러므로 사료가 없다거나 전설적인 인물이라 하여 복희씨의 64괘 창제설을 부정함은 모순인 것이다. 더욱이 위에서 밝혔듯이 복희씨에 의하여 괘도가 제작되었다는 기록 외에 한웅천황에 의하여 그려졌다는 기록도 있다. 그러므로 역은 한웅천황에 의하여 비롯되고 복희와 문왕에 의하여 더욱 발전되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생각한다.   2) 주역과 신선도의 동일성 역(易)은 날일(日)자와 달월(月)자의 회의문자인 바꿀역(易)자이다. 곧 역이란 해와 달이 바뀌고 돌아감을 의미한다. 그런데 {주역} 계사상전 제11장을 보면 "역은 천지(天地)에 준거하여 만들어진 것이라"하였고, 계사상전 제2장에는 "육효(六爻)의 움직임은 천지인(天地人) 세 가지의 지극한 이치를 표현한 것이라"하였다. 또한 "그런 까닭에 역의 이치에는 태극이 있고, 태극이 하늘과 땅 두 현상을 낳고, 하늘과 땅은 태양·태음·소양·소음의 4상을 낳고, 그런 까닭에 법의 현상은 하늘과 땅보다 더 큰 것이 없고, 변하고 통하는 것은 봄·여름·가을·겨울의 4계절보다 더 큰 것이 없다"고 하였다.  여기에서 주역과 신선도의 동일성을 지적하면,  첫째, 신선도의 일기(一氣)와 {주역}의 태극은 같은 뜻을 지닌다.  둘째, 신선도와 주역은 모두 천지인 삼재(天地人 三才)와 음양오행(陰陽五行) 사상을 발생원리로 한다.  셋째, 신선도의 숭배대상은 하나님인데, {주역}에서도 숭배의 대상이 하나님이다.  넷째, 신선도는 순환론인데, {주역} 역시 순환론이다.  이와 같이 {주역}과 신선도의 기본사상이 동일하다. 여기에 괘(卦)가 한웅천황과 복희에 의하여 기원되었다는 것을 아울러 생각하면 {주역}은 원래 동이족의 사상이며 신선도의 경전이라 할 수 있다. 2. 홍범구주는 우리민족의 사상이다 홍범구주(洪範九疇)란 첫째, 오행(五行). 둘째, 경용오사(敬用五事). 셋째, 농용팔정(農用八政). 넷째, 협용오기(協用五紀). 다섯째, 건용황극(建用皇極). 여섯째, 예용삼덕(乂用三德). 일곱째, 명용계의(明用稽疑). 여덟째, 염용서징(念用庶徵). 아홉째, 향용오복 위용육극(嚮用五福 威用六極)이다. 이를 부연한 것이 유교라 할 수도 있다. 그러면 홍범구주는 어디에서 유래되고 있는가?  {태백일사} 신시본기에는 오행치수법(五行治水法)인 황제중경지서(黃帝中經之書)가 태자 부루(扶婁)에게서 나와서 우(虞)의 사공(우임금)에게 전하여지고 후에 다시 주왕(紂王)에게 기자(箕子)가 진술한 것이 홍범(洪範)이 되었으니 바로 그것이 황제중경(黃帝中經) 오행치수(五行治水)의 설(說)인 즉 대개 그 학문의 근원은 신시(神市) 구정균전(邱井均田)의 유법(遺法)인 것이다 라고 하였다. 즉 지나에 전승된 홍범구주(洪範九疇)는 신시(神市)에서 연원되었다는 것이다.  신채호 역시 여러 전거를 들면서 말하기를 {상서:尙書}에 "홍범(洪範)은 하우씨(夏禹氏)가 전하는 바라" 하였고, {오월춘추;吳越春秋}에 "하우씨가 치수(治水)할 때에 현토사자(玄?使者)로부터 중경(中經)을 받았다"고 하였으며, 고기(古記)에 "단군 태자 부루(扶婁)가 하우(夏禹)씨를 도산(塗山)에서 보았다"고 하였으므로 이 세 가지 사실을 고찰하여 볼 때, 기자(箕子)의 홍범(洪範)은 곧 부루의 중경(中經)을 강술한 것이라 하였다. 아울러 {한서(漢書)}에 거북이가 문자를 지고 낙수(洛水)에서 나오므로 우(禹)가 홍범을 연(演)하였다 하나, 그것은 망증(妄證)이라 하였다. 3. 인사상은 우리민족의 사상이다 인(仁)자는 사람인(人)변에 두이(二)자로서 천·지·인(天地人)의 회의문자(會意文字)이다. 그래서 인사상은 신선사상이라는 것을 곧 알 수 있고, 유학의 핵심사상을 이루어 사서(四書)의 하나인 {논어}에만도 인(仁)에 대한 말씀이 무려 50여회나 나타난다. 그러면 인사상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고 어디의 무엇에서 유래되고 있는가?  첫째, 고대에 있어서 인(仁)과 인(人)과 이(夷)는 같은 의미로 쓰였다. 즉 인(仁)은 동이족을 의미하였다.  중국의 학자 노간(勞幹)도 말하기를 "우리들이 동방 사람들을 동이(東夷)라고 부른다. 이(夷)자와 인(仁)자는 통용된다. 인(仁)자와 인(人)자는 또한 한 근원에서 나온 것이다. 그러므로 중국에 있어서 인(人)자를 일컫는 것은 그 근원이 동방에서 나왔으며, 만약 동이족이 문화적으로 선진이고, 먼저 '인(人)'을 사용하였다고 하면 후대에 와서 서방에서 기원한 부족들이 이를 빌어 전인류의 명사로 쓴 것이다"고 하였다. 다시 말하면 사람인(人)자와 어질인(仁)자는 동이족에서 나온 동이족을 의미하였다는 것이다. {설문}에도 어질인(仁)자는 오랑캐이(夷)자의 고자(古字)라 하였다.  둘째, 인(仁)은 동이족의 성격을 의미한다.  {후한서} 동이열전에 동방을 이(夷)라 한다. 말을 어질게 하고 인생을 즐기며, 만물이 땅에 근본하여 태어난다. 그러므로 천성이 유순하고 이치로써 다스리니 군자들이 사는 불사지국에 이르렀다 하고, {신이경;神異經} 동황경(東荒經)에도 동방 사람들은 항상 공손히 앉아 서로 거스르지 않으며 서로 칭찬은 하되 서로 헐뜯지 않고 남의 환란을 보면 몸을 던져 죽어도 구제하니 이를 일컬어 착함이라 하였다. 또한 중국 고서 {이아;爾雅}에 "구이는 동방에 사는데 동방은 해돋이 땅으로 태평스러운 사람들이다. 그들은 어질다. 땅의 정기가 그러한 때문이다고 하여 땅의 정기로 인하여 동이족은 원래 어질다고 하였다. 따라서 인(仁)은 동이족의 성격을 의미한다.  셋째, 인(仁)은 도·불·유 삼교의 근원사상이다.  {최문창후전집} "지증화상비명병서"에 의하면 "인의예지신(仁義禮智信)의 오상(五常)을 방위에 따라 나누니 동방에 짝한 바가 仁이다. 인은 道·佛·儒 三敎를 일으켰으니 정역에 드러낸 이름이 불(佛)이다. 인심(仁心)이 곧 불(佛)이며, 불목(佛目)은 능인(能仁)의 법칙이라"하였다. 즉 인(仁)은 동방사상인데 인사상에서 도·불·유 삼교가 나왔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사상은 신선사상이며 우리민족의 고유사상이다. 이에 대하여서는 제1편에서 상설하였다. 4. 제례의 기원은 우리민족에 있다 지나의 유교에 상제(上帝)와 조상신을 모시는 제례풍속이 있다. 이것은 언제 어디에서 유래되고 있는가? 이것 역시 지금까지 서술한 바에 의히면 당연히 우리나라에서 지나로 전승되었다고 추정할 수 있다. 이제 그 유래를 간략히 알아보기로 하자.  {서경} 우서를 보면 순(舜)임금이 제위(帝位)에 오르자 상제(上帝)와 육종(六宗)과 명산대천(名山大川)에 두루 제사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그런데 {규원사화}에 의하면 "음력 10월에 제천하던 것이 만세의 풍속이 되니, 그것이 동방 특유의 성대한 제전이요 다른 나라와 비교할 수 없는 것이 되었다. 순이 제위에 올랐을 때 상제께 제사를 올리고 육종(六宗)에 제사를 지내며 차례로 산천제신(山川諸神)에게 두루 제사하니 이는 일찍이 순(舜) 이전에는 없던 일로 이 역시 동방에서 제천보본하는 의식과 산악하천(山嶽河川)이나 해양소택(海洋沼澤)에 봉명하는 사상에 근원한 것이다"라고 하여 10월의 소도제천의식에서 제사풍속이 연원되었고, 지나의 제례풍속도 이에서 유래되었음을 말하고 있다. {태백일사} 삼신오제본기에도 "천지인(天地人) 삼극(三極)이 모든 것을 하나로 규합하는 서물(庶物)의 원의(原義)인 즉, 천하구환(天下九桓)의 예락(禮樂)이 곧 삼신고제(三神古祭)의 풍속이 아니고 무엇이리요"하여 모든 예의법속이 삼신사상에서 유래되었음을 말하고 있다. 따라서 지나족의 제례풍속 역시 우리나라에서 지나족 사회로 전승되었다는 것이다. Ⅳ. 오륜은 원래 신선도의 덕목이다.  부자유친(父子有親)·군신유의(君臣有義)·부부유별(夫婦有別)·장유유서(長幼有序)·붕우유신(朋友有信)의 오륜사상(五倫思想)도 지나의 유교에 뺏겨 지나족에 의하여 창안된 외래사상으로 인식되고 있다. 이제 그러한 인식을 떨쳐버리고 오륜사상이 원래부터 우리민족의 고유사상이며 신선도의 덕목임을 논증하려 한다. 그러한 논증이 성립되기 위해서는  첫째, 오륜사상이 지나족에 의하여 창제되었다는 종래의 관념이 부정되어야 하며.  둘째, 오륜사상이 동이족에서, 좁게는 단군조선 또는 배달국 시대에 발원되었다는 사실이 밝혀져야 하고.  셋째, 오륜사상이 신선도의 덕목이었다는 사실이 증명되어야 할 것이다.  이상의 세 가지 사실이 밝혀진다면 오륜사상이 오늘날 공맹유학에서 빼놓을 수 없는 중심덕목이라 하더라도 원래부터 우리민족의 사상이며 신선도의 덕목이었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이하에서 위의 세 가지 문제를 순서대로 하나씩 밝혀나가기로 한다. 1. 오륜은 지나족의 창작이 아니다.  {동몽선습}에 의하면 "하늘과 땅 사이의 만물 가운데 오직 사람이 가장 귀하니, 사람이 귀한 것은 오륜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맹자}에 이르기를(孟子曰) 부자유친(父子有親)하며 군신유의(君臣有義)하며 부부유별(夫婦有別)하며 장유유서(長幼有序)하며 붕우유신(朋友有信)이라 하시니 사람으로서 오상(五常)을 알지 못하면 금수에 가까워짐이 먼데 있지 않으니라" 하였다. 이 원문을 잘못 이해하면 마치 오륜사상이 맹자에 의해서 창작되고 가르쳐진 것처럼 오해하기 쉽다. 그러나 {맹자} 등문공장구(상)에 기록되기를 "사람의 도리에 있어서 배불리 먹고 따뜻이 입으며, 안일하게 지내면서 가르침이 없으면 금수에 가까워지기 쉽나니 성인(聖人)이 이를 근심하여 설(契)로 하여금 사도(司徒)를 삼아 인륜(人倫)을 가르치게 하였으니, 부자유친·군신유의·부부유별·장유유서·붕우유신이 그것이다"하였다. 이를 보면 {동문선습}에서 말하는 {맹자}는 사람이 아니라 책자이며, 오륜사상은 맹자에 의하여 성립된 것이 아니라 고대의 성인(聖人)과 설(契)로 올라간다.  그러면 그 성인은 누구를 가리키는가? 중국에서 성인이라면 공자를 가리킨다. 그러나 공자는 설(契)과 동시대의 인물이 아니라, 설 보다 약 1천 8백여년 뒤의 인물이다. 그러므로 공자가 유학을 집대성(集大成)한 성인이라 하더라도 {맹자}에서 말하는 성인이 될 수 없다.  그러면 "맹자}에서 말하는 성인은 누구인가? 공자께서 문왕과 무왕의 법도를 밝혔다고 하였다. 그렇다면 문왕과 무왕이 {맹자}에서 말하는 성인인가? 문왕과 무왕도 설(契)과 동시대의 인물이 아닌 천여년이나 후대의 인물이라는 것은 사계의 학자들이 다 아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그들도 {맹자}에서 말하는 성인이라 할 수 없다. 또한 공자께서 요임금과 순임금의 사상을 조술하였다 했다. 그러면 이들이 설(契)과 동시대의 인물인가? 그렇다 그들이 바로 설(契)과 동시대의 인물이다. 그러면 {맹자}에서 말하는 성인은 요임금 아니면 순임금이라 추정할 수 있다. 그러나 {서경} 요전(堯典)이나 {논어} 요왈편(堯曰篇) 등 기타 요임금에 대한 기록을 보면 어디에도 요임금이 설(契)과 더불어 오륜을 가르쳤다는 기록이 없다. 따라서 {맹자}에서 말하는 성인은 요임금이라 할 수 없다. 그런데 {서경} 우서 순전을 보면 거기에 {맹자}의 기록과 일치되는 대목이 있다. 즉 "임금(舜임금)이 말하기를 설(契)이여! 백성들이 화친하지 않으며 오품(五品)을 따르지 않고 있소. 그대를 사도(司徒)에 임명하니 오교(五敎)의 가르침을 삼가 펴서 너그럽게 하기 바라오" 하였고, 그 주(註)에 오품(五品)이란 부자(父子)·군신(君臣)·부부(夫婦)·장유(長幼)·붕우(朋友)의 다섯을 가리키는 위계적 등급이라 하였다. 오교(五敎)는 부자유친(父子有親)·군신유의(君臣有義)·부부유별(夫婦有別)·장유유서(長幼有序)·붕우유신(朋友有信)의 다섯임이 당연한 이치라 하였다. 그렇다면 {맹자}에서 말하는 성인은 순임금이 틀림없다고 단언할 수 있다. 왜냐하면 도표(7)과 같이 {맹자}의 기록을 {서경}의 기록에 대입시킬 경우 서로 일치되기 때문이다. 도표(7) {맹자}와 {서경}의 기록 비교 맹자의 기록 聖 人 설(契) 司徒 五倫  서경의 기록 舜임금 설(契) 司徒 五敎   즉 {맹자}에 성인이 설(契)로 하여금 사도(司徒)를 삼아 오륜을 가르치도록 하였다 하고, {서경}에는 순임금이 설을 사도에 임명하여 오교(五敎)를 가르치도록 하였다 하였으므로 {맹자}의 성인은 곧 순임금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순임금과 설은 지나족이 아니다. 따라서 오륜(五倫)사상은 지나족에 의하여 창제된 것이 아니라고 거의 확정적으로 결론을 내릴 수 있다. 2. 오륜의 발상지는 배달국이다.  순임금과 설(契)이 지나족이 아니라면 어느 민족에 속하는가 하는 문제부터 규명하여 보자. {맹자} 이루장구 하(離婁章句 下)에 순임금은 제풍(諸馮)에서 낳고, 부하(負夏)로 옮겼다가 명조(鳴條)에서 운명하였으니 동이인(東夷人)이라 하고, 그 주(註)에 제풍·부하·명조는 모두 지명일 뿐더러 동이족이 다스리던 곳이라 하였다. 즉 {맹자}에는 순임금의 출생지·거주지·사망지가 모두 동이지방이라는 증거를 들면서 순임금을 동이인이라 하였다. 그리고 사마천의 {사기}에도 순임금을 동이인이라 하였다. 또한 {단기고사}에 의해도 순임금은 단군왕검의 중신인 고시(高矢)의 형 고수(高未)의 아들이다. 그리고 안호상을 비롯하여 여러 학자들이 중국의 고서를 전거로 들면서 설(契) 역시 동이족임을 밝히고 있다.  이상과 같이 전거나 학자들의 고증에 의하면 지나족에게 처음으로 오륜사상을 보급한 순임금과 설(契)이 동이족이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그것은 오륜사상의 성립연원이 동이족 사회라는 것을 말한다.  국내고서인 {단기고사}에 의해도 오륜사상이 단군조선 또는 그 이전 배달국에 이미 있었다. 즉 {단기고사} 제1세 단제 왕검편에 단군왕검께서 수두교를 창설하시고, 중신(重臣)인 신우(神佑)에게 명하여 백성에게 오륜을 가르치도록 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이는 오륜의 성립이 단군조선 시대에 있었고 신선도(수두교)와 함께 함을 의미하고 있다. 그러나 실제에 있어서 신선도는 단군왕검에 의해 성립된 것이 아니라 그 이전 한웅천황에 의하여 성립되었으므로 오륜의 성립은 한웅조인 배달국 시대에 있었다고 할 수 있다. 또한 {태백일사} 마한세가(상)에 유중유일(惟中惟一)의 도(道)는 아비가 되어서는 마땅히 효도하고, 임금이 되어서는 마땅히 충성하고, 부부가 되어서는 마땅히 서로 존경하고, 형제가 되어서는 마땅히 서로 사랑하고, 노소(老少)는 마땅히 차례가 있고, 벗은 마땅히 믿음이 있다고 하였다. 이와 같이 우리의 고서에도 오륜사상이 그대로 나타나 있다. 이를 보아도 오륜사상의 성립연원이 우리민족에 있음을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3. 오륜은 신선도와 불가분의 연관성을 지닌다. 오륜사상이 단군조선 또는 배달국에서 성립된 우리 민족의 고유덕목이라면 신선도와 불가분의 연관성을 지녀야 한다. 즉 三倫이 三神사상에서, 五戒가 五帝사상에서 발원되었다면 오륜은 五行사상에서 발원되어야 한다.  우선 오륜과 오행의 공통점을 지적하면.  첫째, 오행이란 만유의 존재현상이 木·火·土·金·水의 다섯 가지로 동정변화하면서 돌아가는 자연법칙을 의미한다. 그런데 五倫의 倫은 사람인(人)자와 둥글륜(侖)자의 회의문자로서 오륜은 인간관계가 부자·부부·붕우·군신·장유로 돌아가는 예법을 의미한다. 즉 오행이 자연법칙이라면, 오륜은 인간관계의 법칙이다.  둘째, 오행은 지전(地轉)에서 생기고, 지전은 태양과 지구의 인력에서 생긴다. 즉, 오행은 태양과 지구의 쌍무관계에서 생긴다. 그런데 오륜의 부자유친은 부자자효(父慈子孝)로, 군신유의는 군인신충(君仁臣忠)으로, 부부유별은 부화부순(夫和婦順)으로, 장유유서는 장혜유순(長惠幼順)으로, 붕우유신은 상교이신(相交以信)으로 풀이 된다. 즉 오륜 역시 상부상조하는 쌍무관계이다. 이와 같은 공통점으로만 보아도 오륜사상이 신선도의 오행사상에서 나온 신선도의 고유덕목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하에서 오행을 하나씩 설명하면서 오행과 오륜과의 연관성을 밝힌다. 이해의 편의상 일반적인 순서를 바꿔 설명한다.  ① 土 : 토는 흙이다. 흙은 농토로 쓰면 농토가 되고, 집을 지으면 집터가 되며, 겨울이 되면 습토가 되고 여름이 되면 초토가 되어 때와 장소에 순응할 뿐이다. 그뿐인가? 모든 생물은 흙에서 태어나 흙으로 돌아간다. 그래서 흙은 생명의 보금자리이며 생활의 근본이다. 흙의 그러한 성격으로 토(土)는 방위로 말하면 동·서·남·북의 중앙으로서 사방(四方)에 모두 관련을 지니는가 하면, 계절로 말해도 장하(長夏)로서 사계(四季)의 중앙이다. 그 덕목으로 말하면 부자·부부·붕우·군신·장유는 물론 정치·경제·사회·문화의 모든 인간관계에 필요로 하는 덕목이 토에 해당한다. 그러한 덕목이 무엇인가? 그것은 오상(五常) 중 신(信)이며, 오륜 중 붕우유신(朋友有信)의 신(信)이다. 신은 진실(眞實)·불기(不欺)·무망(無妄)을 의미한다. 그래서 신은 토를 상징한다.  ② 木 : 목은 물질로 볼 때 나무를 뜻한다. 나무는 습도와 온도 등 적절한 조건에 해당되는 시기가 되면 뿌리에서 줄기가 나오고 뻗어나간다. 이는 하나의 출발이다. 이를 계절에 비유하면 그것은 봄(春)이며, 방위에 비유하면 해가 처음으로 떠오르는 동방이다. 사업에 비유하면 시작이다. 인생에 비유하면 그것은 유년기에 해당되는데, 어린 자녀를 교육시키고 양육하는데 가장 필요한 기본덕목이 무엇인가? 그것은 사랑(仁)과 친절(親)이다. 사랑과 친절은 오상(仁·義·禮·智·信) 중 인(仁)이며, 오륜 중 부자유친의 친(親)이다. 그래서 인(仁)과 친(親)은 오행(五行) 중 木에 해당된다.  ③ 火 : 화는 木을 바탕으로 이루어진 불이다. 불은 빛과 열을 발산한다. 이는 계절로 말하면 여름(夏)에 해당되며, 방위로 말하면 남방에 해당된다. 사업으로 말하면 번성기이며 성장위주의 시기이다. 인생으로 말하면 한창 뻗어나가는 청년기로서 그 감정으로 볼 때는 가장 정열적이고 격정적인 시기이며, 태도로 볼 때는 의기양양하고 투쟁적이다. 이러한 시기의 인간에게 가장 필요한 기본적인 덕목이 무엇인가? 그것은 서로 남의 인격을 존중하는 예절이며, 남녀 간에는 분별이다. 이는 오상(五常) 중 예(禮)이며, 五倫 중 부부유별 또는 남녀유별의 별(別)이다. 이래서 예(禮)와 별(別)은 火에 해당된다.  ④ 金 : 금은 쇠붙이로서 단단하면서도 빛난다. 그래서 금은 완성으로 접어든 단계를 상징한다. 火가 양적 성장기라면 금은 질적 성숙기이다. 이를 계절에 비유하면, 그것은 오곡이 무르익는 가을(秋)에 해당되며, 방위로 말하면 황혼이 깃든 서방에 해당된다. 사업으로 말하면 성장위주에서 공익사업으로 전환하는 시기이다. 인생으로 말하면 40∼50대의 장년기에 해당된다. 이 시기는 정치적 사회적 활동을 많이 하여야 하는 시기이다. 이러한 시기의 인간에게 가장 필요한 기본적인 덕목이 무엇인가? 어떠한 상량적 계산이나 불의(不義)와 타협하지 않는 확고부동한 의지와 투철한 가치관 그리고 인도주의 정신이 요청된다. 그러한 정신을 한마디로 표현하면 그것은 의로움(義)이다. 의로움은 五常 중 의(義)이며 오륜중 군신유의(君臣有義)의 의(義)이다. 이래서 의(義)는 오행 중 금에 해당된다.  ⑤ 水 : 수는 물이다. 물은 생물의 생장과 발육에 필수적인 것이기도 하지만 북방에서 찬바람과 함께 몰아닥치는 찬이슬과 눈보라는 생물을 말라 죽게 한다. 그런 때가 되면 웬만한 동물은 땅속에서 잠을 자게 되고, 씨앗이나 뿌리도 땅속에서 잠을 자며, 내년을 기다린다. 이는 계절로 볼 때 겨울(冬)이며 방위로는 북방에 해당된다. 즉 외형적으로는 소멸하였지만 내적으로는 다음 단계를 위하여 응고하고 있는 상태이다. 이는 인생으로 볼 때, 유년기·청년기·장년기를 거친 노년기에 해당된다. 노년기는 지나온 사회적 경험과 축적된 지혜를 정리하여 후예를 양성하고 사회에 은혜를 베풀어야 하는 시기이다. 이러한 시기에 가장 필요로 하는 기본적인 덕목이 무엇인가? 그것은 과거를 정리(序)하면서 지혜(智)를 구하는 것이다. 이는 五常 중 지(智)이며, 五倫 중 장유유서의 서(序)이다. 이래서 지(智)와 서(序)는 수(水)에 해당된다.  이상과 같이 오륜의 기본사상이 모두 신선도의 오행사상과 일치되고 있다. 그뿐만 아니라 오륜이 지나족에 의하여 체계화되었다거나 창제되었다는 기록도 없었고, 오히려 지나족에게 오륜사상을 전한 순임금과 설(契)이 모두 동이족이었고, 단군조선 사회에도 오륜사상이 있었다. 따라서 오륜이 오늘날 공맹유교의 중심덕목이라 하더라도 그 성립연원이 단군왕검 시대 또는 그 이전 한웅천황 시대로 볼 수 있고, 오륜사상은 원래 우리민족의 고유사상이며 신선도의 고유덕목이었다고 결론을 내릴 수 있다. Ⅴ. 결 론 이상에서 논한 바를 요약 정리하면  1) 지나인의 정신적 고향이며 지나문화의 발상지라는 신비의 곤륜산이 우리나라의 백두산이다.  2) 유교가 공자에 의하여 집대성(集大成)되었다 하더라도 그 유래를 찾아 올라가면 복희·신농·황제·요임금·순임금으로 소급된다. 그런데 이들이 모두 동이족이다.  3) 한자의 전래와 더불어 유교가 우리나라에 전래되었을 것이라는 추정이 있다. 그런데 한자의 창제기원 역시 동이족에 있었다.  4) 지나의 고대문화는 음양오행사상을 비롯해서 홍범구주(洪範九疇)를 바탕으로 이루어졌다. 그런데 음양오행사상과 홍범구주는 단군조선에서 지나로 전승되었다.  5) 유교의 기본경전은 {주역}이다. {주역}은 여러 사람에 의하여 완성되었다. 그러나 {주역}은 동이족에 의해서 비로소 창제되기 시작하였다.  6) 유교의 기본사상은 인(仁)사상이다. 그런데 인은 원래 동이족과 그 성격 및 그 사상을 의미한다.  7) 유교의 기본덕목이 오륜인데, 오륜은 원래 신선도의 덕목이었다.  8) 기타 사상에 있어서 숭배의 대상·우주관·발생원리·제례의식·종교적 목적이 신선도와 동일하였다.  9) 유교사상을 지나족이 최초로 설파하였다는 기록도 없다.  이상을 종합적으로 생각하여 볼 때, 지나의 유교는 비록 공자에 의하여 집대성되고 체계화되었다 하더라도 그 원류는 우리나라의 신선도로서 그 유파라 아니할 수 없고, 이제 유교는 발상지인 조국으로 되돌아온 격이라 할 수 있다. 곧 유교는 원래 우리민족의 고유사상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유교는 송(宋)나라와 명(明)나라에 걸쳐 정이천(程伊川)·정명도(程明道)·주희(朱熹)에 의하여 지나족 중심의 주자학으로 변질되었다. 그러한 사상을 고려말엽에 수입한 이래, 근세조선은 5백년 동안 국시로 하여 정치·종교·교육의 기반으로 삼았다. 지금의 대학에 해당되는 성균관이나, 지금의 중등교육에 해당되는 향교에 나가면 한국 사람으로서 지나족인 공자·안자·증자·자사·맹자 등 5성과 공자의 제자 10철 및 72제자 그리고 송나라의 6현에게 절을 하여야 했고, 지나의 역사인 사기(史記)·한서(漢書)·후한서(後漢書) 등 삼사(三史)와 지나의 종교서적이며 사상서인 논어·맹자·대학·중용·시경·서경·주역·예기·춘추 등 사서오경(四書五經)과 그밖에 제자백가서(諸子百家書)를 배워야 하였다. 사회적으로 관혼상제도 지나의 풍속을 따라야 하였다. 그러면서도 제 민족의 조상인 한인·한웅·한검의 삼성(三聖)을 모신 사당은 평양 구월산의 한쪽 구석에 방치하여 한 왕조에 한번 돌아볼까 말까 할 정도였고, 제 민족의 역사와 사상은 일체 가르치지 않았으며, 국가고시인 과거시험 과목에도 제 민족의 역사와 사상에 대한 과목이 없었다. 그럼으로써 근세조선 시대의 우리민족은 지나의 삼대(夏·殷·周) 역사는 이를 잘 알면서도 제 민족의 삼한(고조선의 마한·진한·변한) 역사는 전혀 몰랐다. 지나의 삼황오제(三皇五帝)는 잘 알면서도 제 민족의 삼신오제(三神五帝)는 전혀 몰랐다. 또한 지나의 사서삼경(四書三經)은 줄줄 외우면서도 제 민족의 배달성전(삼화경)은 있는 줄도 몰랐다. 그러면서도 이를 부끄럽게 생각치도 않았다. 그러한 것이 근세조선의 사회적 풍토였다. 좀 가혹한 표현을 쓰면 근세조선 500년은 지나의 사상적 식민지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곧 외래종교 신자인 주자학자들만이 이 나라의 주인이었고, 고유의 토속신앙을 지키는 서민들은 노예였고 하인이었다. 그래서 서민을 노예처럼 하인처럼 혹사하고 착취했던 것이다. 이로 인해 수차에 걸쳐 민란이 일어났고, 드디어는 동학혁명이 일어나자 외세가 개입하면서 나라마저 송두리채 멸망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은 어떠한가? 근세조선 때의 지나풍 대신 오늘날은 미국 중심의 서구풍으로 바뀌었고, 주자학 대신 서양종교로 바뀌었을 뿐 근세조선과 다른 것이 무엇인가? 참으로 통탄할 일이라 아니할 수 없다. 여기에서 유교도와 더불어 반성하여야 할 문제점을 몇가지 꼬집고자 한다.  첫째, {주역}을 해설한 계사상전의 천존지비(天尊地卑) 이론과 이를 계승한 정주학의 이존기비(理尊氣卑) 이론이 과연 타당하고 합리적이냐의 문제, 그러한 이론을 국가에 적용시켜 다른 나라인 지나를 대국(大國)·부국(父國)·중국(中國)·중화(中華)라 받들고, 제 나라를 스스로 소국(小國)·자국(子國)·이적(夷狄)·소중화(小中華)라 천시하여 서민들에게 열등의식을 심어주었던 행위, 또한 이존기비이론을 자기민족에 적용시켜 관존민비(官尊民卑)·남존여비(男尊女卑) 사상을 만들어내어 서민을 천민으로, 나약한 여성을 비열한 인간으로 취급하여 혹사하고 착취를 예사로 하였던 행위가 과연 옳았던 일인가?  둘째, 우리민족은 지나족이 아니다. 지나족과 다른 역사와 사상을 가진 민족이다. 그러므로 지나족의 역사와 사상을 배우기 전에 제 민족의 역사와 사상을 먼저 배우는 것이 순서가 아닌가? 그런데 근세조선 시대에는 지나의 주자학을 국시로 함으로써 지나족의 역사와 사상만을 가르쳤고 제 민족의 역사와 사상을 가르치지 않았다. 제 민족의 역사와 사상은 하찮은 것으로 묵살되었고, 오히려 제 민족의 역사와 사상을 가르치고 배우면 이를 사문난적이라 하여 매도하였다. 그러한 교육환경에서 어떻게 민족적 긍지와 자부심이 생기겠는가? 지금은 어떠한가? 성균관이나 향교에서 제 민족의 사상서인 천부경·삼일신고·참전계경을 가르치고 있는가? 정주학이 이 나라에 전래된 것이 누구를 위해서인가? 이 민족을 위해서 전래된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유교의 사서오경과 더불어 제 민족의 성전도 함께 가르쳐야 옳은 일이 아닌가?  셋째, 주자학 교육기관인 성균관과 향교는 누구의 땅에 누구를 위하여 누가 세웠는가? 한국땅에 한민족을 위해서 한국 사람이 한국 사람의 노력과 재력으로 세운 것이 아닌가? 그런데 거기에 지금도 누구를 모시고 누가 누구에게 절을 하고 있는가? 지나족인 공자·맹자 등 五聖과 十哲과 七十二弟子 그리고 宋나라의 六賢을 모시고 거기에 한국 사람이 절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이들 지나인들은 한인·한웅·한검에 비유하면 까마득한 후배이며 손님이다. 그런데 주인과 선배를 물리치고 후배인 손님이 선배처럼 또 주인처럼 대우받고 있는 것이 아닌가? 제 할아버지와 제 할머니를 무시하고, 남의 할아버지와 남의 할머니에게 절을 하도록 시키면서 부모조상에게 효도하라는 격이 아닌가? 또 성균관이나 향교의 집례관인 주자학자들은 지나의 하수인격이 아닌가? 그것이 과연 공자와 맹자가 바라고 윤리도덕에 부합되는 일인가? 이는 주객전도가 아니고 무엇인가? 참으로 상식 밖의 일이라 아니할 수 없다. 그러한 종교의식 아래서 어떻게 민족적 주체의식이 나오겠는가? 민족적 주체의식이 없는데 어떻게 애국애족심은 나오겠는가? 젊은 세대들의 가치관을 탓하기에 앞서 기성 종교인들의 가치관이 전도되고 있다는 사실을 자각해야 할 것이다. 윗물이 맑아야 아랫 물이 맑아진다는 사실을 이해해야 할 것이다. 전체 민족이 깊이 반성해야 할 문제라고 생각한다.  제4편 도교의 발상지는          우리나라이다         홍익인간 광명이세 Ⅰ. 서 론 지나의 도교는 신선사상이며, 지나는 우리나라와 인접하여 있다. 지나문화의 시조인 삼황오제가 모두 동이족이었고, 이들은 우리민족의 시조인 한인과 한웅보다 후대의 인물들이었다. 그리고 지나에서 언제 누가 신선사상을 최초로 설파하였다는 기록도 없다. 우리나라에는 지금으로부터 약 6천년 전 한웅천황이 삼신산(三神山)인 백두산에서 삼신일체(三神一體)의 원리에 의하여 신선도를 설파했다는 전거가 있고 근거가 있다. 이를 생각하면 지나 도교의 원류는 당연히 우리민족의 신선도라 추정할 수 있고, 지나에서 도교가 우리나라에 전래되었다 함은 역수입된 것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도교가 지나에서 발원되어 우리나라에 전래된 것으로 믿고 있다. 그뿐만 아니라 본 문제는 도교가 우리나라에 역수입된 이래 처음 제기되는 문제이며, 전체 민족의 대다수가 외래종교 신자이다. 외래종교 신자는 민족적 주체의식이 없거나 박약하다. 곧 도교신자는 지나를 정신적 고향, 신앙의 성지, 아버지 나라라고 믿는다. 자기를 낳고 키워준 제 나라는 그 다음으로 친다. 그럼으로써 좀더 구체적이고 명백한 증거를 필요로 한다. 따라서 지나의 진시황(秦始皇)과 한무제(漢武帝)가 지상선경이라 동경하던 삼신산(三神山)이 어디에 있는 어떤 산인가의 문제, 언제 누구에 의하여 신선도의 경전이 우리나라에서 지나로 전승되었는가의 문제를 하나씩 밝혀 나가기로 한다. 끝으로 도교와 신선도의 동일성을 밝힌다. Ⅱ. 도교인의 이상향인 삼신산은  우리나라의 백두산이다 1. 도교인의 이상향은 삼신산이다 지나의 도교인들이 지상선경이라 동경하였던 삼신산은 어디에 있는 어떤 산인가? 그 어의로 말하면 삼신산이란 삼신과 연관성을 지니고, 삼신을 상징하는 산을 의미하며, 또한 세개의 神山 곧 仙山을 의미한다.  그러면 구체적으로 삼신산이란 어떤 산인가? 사마천의 {사기}를 근거로 삼신산의 성립요건을 인출하면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첫째, 삼신산은 삼신과 연관성을 지닌다.  둘째, 삼신산은 봉래·방장·영주의 총칭이다.  셋째, 삼신산은 발해 내지 바다에 있다.  넷째, 삼신산은 신선이 사는 곳이다.  다섯째, 삼신산은 불사약이 나는 곳이다.  여섯째, 삼신산의 초목과 금수는 모두 희다.  일곱째, 삼신산에는 황금과 백은으로 궁궐을 지었다.  이상의 성립요건을 충족시키면 그 산이 곧 삼신산이라 할 수 있고, 신선사상의 발원지라 할 수 있다. 그러면 그러한 산이 어디에 있느냐의 문제이다.   2. 삼신산은 우리나라의 백두산이다 삼신산은 발해에 있다고 하였다. 발해는 고대 우리나라이다. 그러므로 삼신산은 우선 우리나라에 있다고 추정할 수 있고, 백두산에서 한웅천황이 신선도를 베풀었으므로 백두산이 우선 삼신산이 아닌가 하고 추정할 수 있다. 이에 따라 삼신산의 성립요건에 백두산의 특수성을 대입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삼신산은 삼신과 연관성을 지닌다. 그런데 백두산도 삼신과 연관성을 지니고 있다.  삼신이란 천일·지일·인일 또는 한인·한웅·한검을 의미하는데, 본서 제1편에서 천일·지일·인일의 삼신일체의 원리에 의하여 신선도가 백두산에서 베풀어졌음을 밝혔다. 또한 {삼국유사}에 의하면 한웅천황이 아버지 한인의 뜻에 따라 풍백·우사·운사 등 신관과 3천의 무리들을 거느리고 백두산정의 신단수 밑에 내려와 홍익인간 이화세계의 신시를 베풀었고, 한웅의 아들 한검(단군왕검)이 조선국을 세운 곳이다. 이래서 백두산은 삼신과 불가분의 연관성을 지닌다. 이 한 가지 사실만을 보더라도 백두산이 삼신산임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둘째, 삼신산은 봉래·방장·영주의 총칭이다. 그런데 백두산에 봉래·방장·영주의 삼신산이 있다.  {부도지}에 '불함삼역(不咸三域)'이라는 말이 나온다. 불함은 백두산을 의미하며, '그 주(註)에 삼역'은 봉래·방장·영주를 지칭한다고 하였다. 즉 백두산 내에 삼신산이 있다는 것이다. {태백일사} 신시본기에도 백두산을 논하는 대목에서 봉래는 쑥이 무성하게 자라는 묵정밭 곧 천왕이 내려온 곳이며, 방장은 사방이 일장(一丈)인 각(閣) 즉 소도(蘇塗)가 있는 곳이며, 영주는 못이 섬을 둘러싼 모양 즉 천지(天池)가 나오는 곳이며, 이것들을 말하여 삼신산이라 한다고 하였다. 즉 백두산에 봉래·방장·영주의 삼신산이 있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문제를 제기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삼신산이란 봉래·방장·영주를 의미하고, 봉래는 금강산, 방장은 지리산, 영주는 한라산을 의미하는데, 이에 대하여 어떻게 해명할 것이냐 하는 문제이다. 인간의 신체에 상단전(上丹田)·중단전(中丹田)·하단전(下丹田)이 있다. 그와 같이 땅에도 상단전·중단전·하단전이 있을 수 있다. 그렇다면 백두산은 상단전, 한반도는 중단전, 각 지방은 하단전에 해당된다고 할 수 있다. 이렇게 보면 금강산·지리산·한라산은 중단전에 있는 삼신산이라 할 수 있고, 각 지방에도 봉래·방장·영주의 삼신산이 있을 수 있다. 따라서 금강산·지리산·한라산도 이들 하나 하나는 선산(仙山)이지만 이를 총칭해서 말하면 삼신산인 것이다.  셋째, 삼신산은 바다에 있다고 했다. 그런데 바다는 우리나라 고조선을 의미한다.  바다는 태평양이나 대서양 같은 실제의 짠물바다를 의미하기도 하지만 종교적으로는 종교의 발상지, 종교의 요람, 선인주처(仙人住處), 수미세계(須彌世界)를 의미하고, 그곳은 과거의 우리나라 고조선을 지칭하였다. 이에 대해서는 본서 제2부 제1편 Ⅵ에서 상설하였다.  넷째, 삼신산에 신선이 살았다고 했다. 그런데 백두산에 신선이 살았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태백산(백두산)은 한웅천황이 풍백·우사·운사 등 선인(仙人)을 거느리고 내려온 곳이며, 단군왕검 선인이 조선국을 세운 곳이다. {태백일사} 신시본기에도 "백두거악(白頭巨嶽)은 대황중(大荒中)에 튼튼히 자리잡았으니 배달천국의 진산(鎭山)이요, 신인의 오르내림은 실로 이곳에서 시작되었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백두산은 신선이 살았던 곳이다.  다섯째, 삼신산은 불사약이 나는 곳이다. 그런데 백두산도 불사약이 나는 곳이다.  {부도지}에 의하면 불함산(백두산)의 영주 대여산 자삭방에서 인삼이 나는데, 이는 4삭(2080년)을 경과해야 꽃을 피는 삼근영초로서 이를 세상에서 불사약이라 한다고 하였다. 실제에 있어서도 백두산에는 산삼씨만 따먹고 사는 인삼조(人蔘鳥)가 있을 정도로 백두산은 산삼의 고장으로서 산삼을 백두산 삼보(三寶) 중의 하나로 친다.  여섯째, 삼신산의 초목과 금수가 희다고 했다. 그런데 백두산의 초목과 금수도 희다.  {역대소사}에 의하면 백두산(태백산)의 초목과 금수가 모두 희다고 하였다. 그런데 백두산 북쪽 기슭에는 백양목이 많고, 흰사슴·흰돼지·흰매들이 지금에도 서식하고 있다.실재 백두산을 등반하여 보아도 백두산 북쪽의 나무들은 거의 백양목이고 소나무 중에 백송(白松)도 있다. 가을이 되어 산상에서 북쪽의 산밑을 내려다보면 하얗게 보일 정도이다. 그래서 그곳을 흐르는 강물 이름을 이도백하(二道白河)·두도백하(頭道白河) 등 백하(白河)라 부른다.  일곱째, 삼신산에 황금과 백은으로 궁궐을 지었다는 문제이다.  이 문제는 너무나 과장된 나머지 비합리적이고 실제 있을 수 없는 문제이므로 논외로 한다.  이상 외에 백두산이 삼신산임을 반영하는 특수성을 지적하면 본서 제1편 Ⅳ의 4에서 밝힌 바와 같이 백두산이 3층으로 되어있다는 점, 삼강일지(三江一池)라는 점, 천지의 좌우에 금선(金線)·옥장(玉漿)·은류(隱流) 등 세 개의 온천과 천지의 동북쪽에 인만(麟巒)·봉만(鳳巒)·벽라(碧螺) 등 세 개의 특수한 산이 있다는 점 등 거의가 3수로 된 점 등이다.  이상과 같이 백두산은 삼신산의 성립요건을 모두 충족시키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밖에도 삼신사상을 반영하는 특수성을 지니고 있고, 백두산에서 천일·지일·인일 삼신일체의 천도에 의하여 신선도가 설해졌다. 그러므로 백두산을 삼신산이라 아니할 수 없는 것이다. {태백일사} 신신본기에도 "옛날의 삼신산은 곧 태백산이다. 또한 지금의 백두산이다"라고 하였다. 그밖에도 백두산에 대한 기록이라면 거의 백두산이 곧 삼신산임을 밝히고 있다. 이래서 삼신산이 백두산임에 틀림없는 것이다. 여기에서 지나 도교의 원류는 우리나라의 신선도라는 증거가 제1차로 드러났다고 할 수 있다. Ⅲ. 우리민족의 신선도서가 지나로 전승되었다 우리나라의 신선도서(神仙道書)가 지나로 전승되었다는 문제이다. {도서전집;道書全集}·{음부경;陰符經}·{삼황옥결;三皇玉訣} 서문에 의하면 황제가 신선도서(神仙道書)인 삼황내문(三皇內文)을 대산(大山)의 천단(天壇)에서 받아갔다고 했다. 삼황내문은 모두 천상의 전서(篆書)로 쓰여졌고 삼백여자가 세권으로 나뉘어졌는데, 상권은 천황(天皇), 중권은 지황(地皇), 하권은 인황(人皇)이었다(이래서 이를 삼황내문이라 한다). 상권에는 신선과 우주론에 대한 것이 담겨 있고, 중권에는 부국안민(富國安民)의 법이 담겨 있으며, 하권에는 강병전승(强兵戰勝)의 술과 천지(天地)·음양(陰陽)·만물의 조화원리가 담겨 있으니, 치국(治國)·제가(齊家)·지신(持身)·불사(不死)의 도(道)는 모두 이 경에서 나온 것이다고 했다.  그런데 삼황내문을 황제가 대산의 천단에서 지나로 가져갔다고 했다. 그러면 대산은 어디에 있는 어떤 산인가? 대산은 큰산·일산(一山)·환산(桓山)·백산(白山)·백두산과 그 뜻이 통한다. 또 이 산이 있는 곳이 청주(靑州)라 하였는데 청주는 청구(靑邱)이다. 이렇게 본다면 황제가 신선도서인 삼황내문을 가져간 대산이 우리나라의 백두산이라 추정할 수 있다. 다시 말하면 신선도서인 삼황내문의 출처가 우리나라의 백두산이라 추정된다는 것이다.  서기 4세기 경 중국의 갈홍(葛洪)이 지은 {포박자;抱朴子} 내편에 "옛적에 황제(黃帝)가 있었는데 동으로 청구(靑邱)에 이르러 풍산(風山)을 지나다가 자부선생(紫府先生)을 뵈옵고, 삼황내문을 받아 갔다"하고, {태백일사}에도 이르기를 "삼황내문을 자부선생(紫府先生)이 황제 헌원(黃帝 軒轅)에게 주어서 마음을 밝히고 의(義)로 돌아가게 하였다. 선생은 항상 삼청궁(三淸宮)에 계시니 그 궁은 청구국(靑邱國) 대풍산(大風山)의 양지(陽地)에 있다. 헌후(헌원)가 친히 치우(蚩尤)를 조현(朝見)하려고 가는 길에 명화(名華)가 있어 승문(承聞)한 것이다. 경전은 신시(神市)의 녹도(鹿圖)로서 그것을 기록하였다. 나누어 삼편(三篇)이 되었다. 후인(後人)이 추연(推演)하고 가주(加註)하여 별도로 신선음부지설(神仙陰符之說)이 되었다"고 하였다. 여기에서 보면 지나인의 기록인 {포박자}의 기록과 우리민족의 기록인 {태백일사}의 기록이 서로 일치되고 있다. 그러므로 여기에 하등의 이의가 있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서 말하는 청구(靑邱)는 어디를 가리키고, 풍산은 어디에 있는 어떤 산이며, 자부선생은 누구냐 하는 문제이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청구는 지금의 만주 요령지방으로서 고대에 있어서 우리나라의 지역이었다. 풍산(風山)은 백두산의 이칭이라고 안호상은 말한다. 자부선생은 {태백일사} 소도경전본훈에 의하면 발귀리(發貴理)의 후예이며, 발귀리는 백두산 신시시대(神市時代)의 선인이다. 이렇게 볼 때, 황제가 삼황내문을 가져갔다는 대산과 풍산은 백두산이라 단정할 수 밖에 없고, 그것이 사실이라면 황제에 의하여 신선도서인 삼황내문이 우리나라에서 지나로 전승되었다고 할 수 있다. 도교를 황로교(黃老敎)라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는 것이다.  그밖에 신선도서로서 {주역(周易)} 등이 우리나라에서 지나로 전승되었다는 문제에 대해서는 본서 제3편에서 밝혔다. 여기에서 지나 도교의 원류는 우리나라의 신선도라는 증거가 제2차로 드러났다고 할 수 있다. Ⅳ. 도교의 시조는 동이족이다 1. 광성자와 동이족 황제가 공동산(空同山)에서 도를 물었다는 광성자(廣成子)는 누구인가의 문제이다. 흔히 광성자를 가공인물 또는 신화적인 인물로 취급한다. 그러나 광성자가 실존인물이라 할 경우, 그는 지나 도교의 창시자는 아니라 하더라도 시조라 할 수 있고, 지나의 도교에 있어서 중요한 인물이라 할 수 있다.  그러면 광성자는 실재인물이라 할 경우, 지나족인가 아니면 동이족인가의 문제이다. 위의 기록에는 광성자가 어느 민족인지에 대하여 일체의 언급이 없다. 그러나 광성자가 수도하였다는 공동산이 큰 근거가 된다. 즉 공동산이 지나지역에 있는가, 아니면 동이지역에 있는가에 따라 광성자의 민족적 소속을 추정할 수 있다.  이능화는 이수광(李?光)의 {지봉유설;芝峰類說}과 진자앙(陳子昻)의 시(詩)를 인용하여 말하기를 "공동산(空同山)이 계구(?丘)에 있다 하였는데, 계구가 역시 청구에 있고 요동에 가깝다. 요동은 예로부터 선적(仙跡)이 많은 곳이다" 라고 하였다. 즉 광성자가 수도하던 공동산이 요동에 가까운 곳, 청구에 있다는 것이다. 청구는 우리민족의 고토이다. 그러면 공동산은 고대 우리민족의 지역 내에 있는 산으로서 광성자는 당연히 우리와 같은 동이족이라 추정할 수 있다. 지나의 신화에 나오는 반고를 비롯해서 지나문화를 개척한 삼황오제가 모두 동이족인데 광성자만이 지나족일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광성자는 지나족이라 절대 볼 수 없고, 동이족이라 강력히 추정된다. 광성자가 동이족이라 할 경우 지나 도교의 시원은 당연히 동이족에 있다는 논리가 성립된다.  그러나 여기에서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가 있다. 근세조선 시대에 쓴 조여적의 {청학집}에 의하면 "한인진인(桓因眞人)은 명유(明由)에게서 수업하였고, 명유는 광성자에게서 수업하였는데 광성자는 상고의 선인(仙人)이다"하여 광성자는 한인보다 지위도 높고 선대의 인물로 취급되고 있다.  앞의 기록에 의하면 황제가 광성자에게 도를 물었다 하였고, 황제는 치우에게 조현하였다 하였으므로 광성자는 황제나 치우보다 선배라 하더라도 이들 세 사람은 동시대의 인물이다. 치우는 배달국의 제14세 자오지천황으로서 한웅보다 1000여년 이후의 인물이며, 한인보다 4300여년 이후의 인물이다. 따라서 광성자가 한인보다 선배라는 것은 도저히 있을 수 없는 문제이다. 이를 생각하면 {청학집}의 기록은 지나를 상국으로 받드는 근세조선 시대의 기록으로서 그 시대의 영향에 의하여 쓰여진 곡필이라 할 수 밖에 없고, 진실성이 결여된 기록이라 할 수 있다. 2. 노자와 동이족  도교에 있어서 황제(黃帝)와 노자(老子)는 가장 중요한 인물이다. 왜냐하면 황제는 신선도서인 삼황내문을 직접 지나로 수입한 인물이고, 노자(老子)는 {도덕경}을 저술한 인물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이들은 어느 민족에 속하는가? 황제는 동이족이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이미 앞에서 밝혔다. 문제는 노자가 어느 민족에 속하느냐 하는 문제이다.  일반적으로 알려진 바에 의하면 노자는 주(周)왕실 주사직(柱史職)을 지냈다. 그리고 노자의 후손은 지나에 있어도, 노자의 선조는 지나에 없다. 또한 노자(老子)를 노담(老聃) 또는 이이(李耳)라 하는데 성씨가 노(老)인지 이(李)인지, 아니면 그밖에 다른 성씨인지 하는 것도 확실치 않다.  그런데 {태백일사}에 의하면 노자 이이(李耳)는 그의 성(姓)이 한(韓)씨요, 동이족이다. 즉 "계미(B.C.518)에 노인(魯人) 공구(孔丘)가 주(周)에 가서 노자(老子) 이이(李耳)에게 예(禮)를 물었다. 이이의 아버지는 그 성(姓)이 한(韓)이고 이름은 건(乾)이며, 그 선조는 풍인(風人)인데 서쪽으로 관문(關門)을 나가 내몽고를 경유하여 아유타에 이르러 그 백성을 교화하였다"고 하였다. 이러한 기록을 보면 노자의 성은 원래 한(韓)씨로서 동이족이며, '이이(李耳)'의 '이(李)'는 '목(木)의 자(子)' 즉 동방의 아들이란 뜻이고, 노자(老子)는 늙은 학자라는 의미인 것이다. 여기에서 지나 도교의 원류는 우리나라의 신선도라고 거의 확정적으로 결론을 내릴 수 있다고 본다.   Ⅴ. 도교와 신선도의 동일성 지나 도교의 원류가 우리나라의 신선도라면 그 기본사상이나 숭배의 대상 및 전문용어 등에 있어서 서로 동일하거나 유사하여야 한다. 이하에서 그 유사성을 몇 가지 지적코자 한다. 1. 기본사상의 동일성 첫째, 신선도와 도교는 모두 하나님(옥황상제)을 숭배의 대상으로 한다.  신선도는 천일(한늘님)·지일(한울님)·인일(한얼님)의 삼신일체인 하나님을 숭배의 대상으로 한다. 도교 역시 천황씨(天皇氏)·지황씨(地皇氏)·인황씨(人皇氏) 즉 천보군(天寶君)·신보군(神寶君)·영보군(靈寶君)의 삼존신일체(三尊神一體)인 옥황상제(원시천존)를 숭배의 대상으로 한다. 옥황상제(玉皇上帝)는 곧 하나님을 의미한다. 이는 신선도의 삼신하나님과 그대로 일치한다. 부전자승격(父傳子承格)이라 할 수 있다.  둘째, 신선도와 도교는 모두 '하나'를 만유의 본원으로 본다.  신선도에서는 {천부경}에 "하나에서 비롯하나 하나의 비롯은 없으니, 하나를 나누면 셋이 되어도 근본은 다함이 없느니라"하여 '하나(一)'를 만유의 본원으로 본다.  도교에서도 {도덕경} 제42장에 "도(道)는 하나를 낳고, 하나는 둘을 낳고, 둘은 셋을 낳고, 셋은 만물을 낳는다"하여 만물이 생성소멸하는 근본원인을 도(道)와 하나(一)로 보고 있다. 그러면서도 제39장에는 "한늘은 하나(一)를 얻어서 맑아지고, 땅은 하나를 얻어서 편안하여지며, 신(神)은 하나를 얻어서 영묘하여지며, 골짜기는 하나를 얻어서 가득차게 되며, 만물은 하나를 얻어서 태어나게 되며, 임금은 하나를 얻어서 천하를 올바르게 다스린다. 그것을 그렇게 만드는 것은 하나인 것이다" 하여 도교는 도(道)와 마찬가지로 하나(一)를 만유의 본원으로 본다. 이와 같이 신선도와 도교는 '하나'를 만유의 본원으로 본다.  셋째, 신선도와 도교는 모두 만물동근 내지 만물일체사상이다.  신선도에서는 만유의 근본을 '하나'로 보는가 하면, '하나'는 한알→하날의 전음으로서 그 원의는 숫자적 의미의 '하나' 외에 한늘의 영기(생명 에너지)를 의미하는데, {태백일사}에 "하나의 기(一氣)가 능히 움직여 조·교·치(造·敎·治) 삼화(三化)의 신(神)이 된다" 하여 만유의 근본을 일기(一氣)로 본다. 즉 만유의 근본이 "하나 즉 기(氣)"로서 신선도는 만물동근사상이다. 또한 신선도는 천일·지일·인일의 일체사상으로서 만물일체사상이다.  도교의 경전인 {장자}에도 "사람의 생(生)은 기(氣)의 모임이니, 기가 모이면 생(生)이 되고, 흩어지면 사(死)가 된다. 이와 같이 생사는 같은 무리이니 내 또한 괴로워할 것이 무엇이리요, 그러므로 만물은 하나니라"하여 만유의 근본을 기로 보고 만유를 평등하게 보고 있다.  넷째, 신선도와 도교는 모두 순환론이다.  {천부경}에 "만가지가 가고 만가지가 돌아온다(萬往萬來)"하였고, {참전계경} 제91사(조)에 "순환이라 함은 형상있는 한늘의 윤회이니, 형상있는 한늘은 윤회에 일정한 도수가 있어서 조금도 어김이 없느니라"하여 순환론을 말하고 있는가 하면, 제95사에는 "무극이라 함은 돌아서 처음으로 되돌아오는 원기이니 만약에 잠시라도 그침이 있으면 천리가 멸하느니라. 사람이 신의를 기름도 저 무극의 원기와 같으니 털끝만치라도 그침이 용납되면 인도(人道)는 폐하느니라"하여 사람의 도리에도 순환론이 적용됨을 말하고 있다. 즉 신선도는 순환론이다.  {도덕경} 제25장을 보면 "나는 그 이름을 알지 못하므로 그것을 도(道)라 이름지었고, 억지로 그것을 대(大)라 부르기로 하였다. 대라는 것은 끊임없이 변하여 간다. 끊임없이 변하는 것은 멀리 극도에 이른다. 멀리 극도에 다다르면 제자리로 돌아온다"하였고, 제16장에도 "마음을 극도로 허하게 하고 독실히 고요함을 지키면 만물이 아울러 생겨나고 그것들이 그 근원으로 돌아감을 본다. 만물이란 번성하고 번성하면 제 각기 그 근본으로 돌아간다"고 하였다. 이와 같이 도교 역시 순환론이다.  다섯째, 신선도와 도교는 음양오행사상을 기본사상으로 한다.  본서 제1편에서 천일·지일·인일의 삼신일체원리에서 음양오행사상이 발원됨을 밝혔다. 또한 제3편에서 음양오행사상이 우리나라에서 지나로 전승되었음을 밝혔다. 그런데 도교는 불로장수를 목적으로 함으로써 연단술(煉丹術)과 양생술(養生術)을 닦게 되고, 연단술과 양생술에서는 음양오행사상을 기본원리로 한다. 이와 같이 도교 역시 음양오행사상을 기본사상으로 한다. 이 역시 부전자승격(父傳子承格)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유교도 음양오행사상을 기본사상으로 한다. 이에 대하여 신선도를 모르는 유교학자들은 도교가 유교사상을 수용하였다고 주장할 수 있고, 도교학자들은 유교가 도교사상을 수용하였다고 주장할 수 있다. 신선도와 유교, 신선도와 도교는 부자관계격(父子關係格)이며, 유교와 도교는 동복형제격(同腹兄弟格)으로 서로 같은 사상을 동시에 지니게 마련이다. 그래서 도교와 유교는 신선도의 음양오행사상을 지니게 된다.  여섯째, 신선도와 도교는 모두 조화사상이다.  신선도는 삼극일체(三極一體) 사상으로서 개전일체(個全一體)·선악일체(善惡一體)·유무불이(有無不二)의 양극일체 내지 조화사상이다. 이에 대하여서는 제1편에서 상설하였다.  도교 역시 {도덕경} 제37장을 보면 "도는 언제나 무위하지만 하지 않는 것이 없다"고 한 말이 도의 양극일체의 성격을 단적으로 표현한 말이라 할 수 있다. 예컨대, 제41장에서는 "도에 밝은 것은 어두운 듯이 보이고 도에 나아가는 것은 물러나는 듯이 보이며, 평탄한 도는 울퉁불퉁한 듯이 보이고, 훌륭한 덕은 속된 듯이 보인다. 크게 결백한 것은 욕된 듯이 보이고, 광대한 덕은 부족한 듯이 보이며, 튼튼한 덕은 간사한 듯이 보인다. 바탕이 참된 것은 더렵혀진 듯이 보이고, 크게 모난 것은 모퉁이가 없는 듯이 보인다"하고, 제45장에서도 "크게 곧은 것은 굽은 듯이 보이고, 크게 교묘한 것은 졸열한 듯이 보이고, 크게 말 잘하는 것은 말을 더듬는 듯이 보인다"고 하여 도교 역시 양극일체 내지 조화사상이다.   2. 전문용어의 동일성 신선도와 도교는 그 전문용어에 있어서도 서로 유사하다. 신선도에서는 삼수(三數)가 가장 기본수여서 삼수로 된 전문용어가 많다. 예컨대, 삼일신고(三一神誥)·삼화경(三化經)·삼극일체(三極一體)·삼신일체(三神一體)·삼교일체(三敎一體)·삼륜(三倫)·삼진(三眞)·삼방(三房)·삼관(三關)·삼문(三門)·삼도(三途)·삼강(三綱)·삼덕(三德)·천부삼인(天符三印)·삼천도(三千徒) 등이다.  도교에도 삼수로 된 용어가 많다. 이는 부전자승(父傳子承)하는 격이다. 예컨대, 삼존신(三尊神)·삼황(三皇)·삼황내문(三皇內文)·삼원(三元)·삼계(三界)·삼청(三淸)·삼기(三氣)·삼군(三君)·삼통(三洞)·삼태성(三台星)·삼천공(三千功)·삼화(三華)·삼목(三木)·삼요(三要) 등 삼수로 된 전문용어가 많다.   Ⅵ. 결 론 이상에서 논한 바를 요약 정리하면  1) 우리나라에는 한웅천황이 신선도를 창설했다는 기록이 있다.  2) 지나사회에는 지나족이 도교를 창설했다는 기록이 없다.  3) 도교인들의 이상향인 삼신산은 우리나라의 백두산이다.  4) 우리나라의 신선도서인 {주역}과 {삼황내문}이 지나로 전승되었다.  5) 지나 도교의 시조인 광성자는 동이족이라 추정되었고, 황제와 노자는 동이족이었다.  6) 도교와 신선도는 그 기본사상에 있어서 서로 동일하였다.  이상을 종합적으로 생각하면, 지나의 도교는 지나족에 의하여 종교화되었다 하더라도 그 사상적 원류는 우리나라의 신선도이며, 그 유파라고 아니할 수 없다. 따라서 한국도교는 원래 외래종교가 아니라 역수입된 고유종교라 할 수 있다.  다시 말하면 한국도교 신자는 외래종교 신자가 아니라 고유종교 신자라는 것이다. 곧 한국사람으로서 한국종교를 신앙하고 있다는 사실을 자각하고 깨달아야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한국 도교신자는 한민족을 위해 봉사해야 하고, 한민족의 주체성을 확립하고 강화하는데 적극적으로 기여해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고 한국도교가 지나에서 발생한 외래종교라 하더라도 우리 나라에 처음 전래될 때는 우리민족을 위해 전래됐다. 그래서 그 도관이 한국땅에 한국사람의 재력과 노력에 의해 세워졌다. 그 소유권과 운영권이 지나족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민족에 있다. 따라서 한국도교는 한민족을 위해 봉사해야 하고, 한민족의 주체의식을 확립하고 강화하는데 적극적으로 기여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한국도교의 도관에 누구를 모시어 누가 누구에게 절을 하고 있는가? 도교가 우리민족을 위해 전래됐다면 우리민족의 국조인 한인·한웅·한검을 모시고 절을 해야 할 것이 아닌가? 그런데 한국도교의 도관(道觀)에 자연신인 옥황상제(玉皇上帝)와 문창제군(文昌帝君)과 북두진군(北斗眞君) 외에 태상노군(太上老君)에 도덕경을 저술한 주(周)나라의 노자(老子는 실은 한국사람이라 하더라도 이를 믿지 않은 한 지나족인 것이다), 무재신(武財神)에 촉한(蜀漢)의 무장 관우(武將 關羽), 문재신(文財神)에 은(殷)나라 주왕(紂王)의 충신 비간(比干), 오현재신(五顯財神)에도 역시 은나라 주왕의 신하 조현단(趙玄壇)을 중심으로 한 다섯 신하, 당(唐)나라의 선인(仙人) 여조(呂祖), 복건성(福建省) 보전현(?田縣) 임씨(林氏)의 딸 마조(復祖), 곤륜산(崑崙山)의 서왕모(西王母), 지나의 오악(五岳) 중의 하나인 태산(泰山)을 신격화시킨 동악대제(東岳大帝) 등 지나의 민족신들에게 한국사람이 절을 하고 공양한다. 이를 어떻게 생각하는가? 비유컨대, 부모에 대한 효도를 강조하면서 제 할아버지와 할머니에 대해서는 돌아보지도 않고, 남의 할아버지와 할머니만을 모시고 섬기는 격이 아닌가? 그러한 종교의식으로 어떻게 민족적 주체의식이 확립되고 강화될 수 있겠는가? 또한 윤리도덕은 건전할 수 있겠는가? 깊이 반성할 문제인 것이다.  또한 한국도교의 도관에 나가면 무엇을 가르치는가? 지나족의 역사와 사상과 아울러 우리민족의 역사와 사상도 가르치는가? 아니면 지나족의 역사와 사상만을 가르치는가? 곧 한국의 도관에 나가면 한국사람에게 도덕경·남화경·황정경·참동계 등 지나족의 도장경만을 가르치고 배운다. 한국 사람이 한국 사람에게 한민족의 경전을 가르치지 않고, 지나족의 역사와 사상만을 가르치고 배운다는 것이다. 곧 교육내용이 아무리 훌륭하다고 하더라도 교육대상과 불일치되고 있다. 비유컨대, 고가(高價)의 양약(良藥)이라 하더라도 그 약이 병의 증상이나 원인과 맞지 않는 격이다. 곧 잘못된 처방과 투약으로 병을 치유하자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한국도교의 신앙과 교육에 있어서 주객이 전도되고 있다. 곧 주인은 손님이 되고, 손님은 주인이 되고 있다. 따라서 지나도교의 신앙과 교육은 다음과 같은 문제를 일으키게 된다.  첫째, 지나를 신앙의 조국 또는 성지로, 지나족을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민족이라 우러르고, 제 나라와 제 민족을 그 다음으로 보게 되며, 나아가서 무시하게 된다는 것.  둘째, 그럼으로써 민족적 긍지와 주체의식이 해이되고, 애국심과 애족심이 사라지게 된다는 것.  셋째, 애국심과 애족심이 없는 사람들에게 윤리도덕을 가르쳐도 그 공효(功效)가 없게 된다는 것.  넷째, 사회는 결국 타락되고 이기주의 사회가 된다는 것.  다섯째, 궁극에 가서는 국가와 민족보다도 나 개인의 신앙을 더욱 소중하게 여기게 됨으로써 국가와 민족을 위해 목숨을 바칠 사람이 없게 된다는 것이다.  실례를 들면, 고구려는 그 말엽 도교가 극성하게 되었을 때, 도교국가인 당나라 군대의 침략을 받게 되었다. 그러나 도교신자인 고구려 백성들은 거기에 대항하여 싸우지 않았다. 그래서 고구려는 한번 싸워보지도 못하고 당나라에게 망하게 되었다. 그와 같이 신앙에 빠지면 이기주의자가 되어 국가와 민족보다도 일신의 영화를 더욱 소중하게 여기게 된다. 한국도교인들은 역사적 경험을 거울삼아 깊이 반성하고 뉘우쳐야 할 것이다. 제5편 동학은 신선도의 재현이다         홍익인간 광명이세 Ⅰ. 문제의 제기 동학은 근세조선 말엽 수운 최제우(水雲 崔濟愚;서기 1824-1864년) 선생에 의하여 설해졌다. 그때는 외래의 道·佛·儒가 우리나라에 전래되어 천수백년이 지난 이후이며, 기독교(가톨릭)가 전래되어 근 백년이 경과한 이후이다. 그리고 현재도 배달국 시대의 한웅천황에 의하여 설해진 도·불·유 三敎一體의 신선도가 상고시대부터 우리나라에 있었다는 사실을 일반 학계에서는 깨닫지 못하고 있다. 더욱이 한웅천황이라면 신화적인 존재로 인식한다. 그럼으로써 동학에 내포되고 있는 도·불·유 삼교일체의 사상을 동양의 전통적 외래사상의 수용 또는 종합 내지 재구성이라고 주장하는 학자들이 있는가 하면, 기독교의 선진적 요소까지 수용하였다고 주장하는 학자들이 있다. 그것이 오늘날 사계 학자들의 일반적 견해이다.  그러나 동학발생의 시원을 찾아 올라가면 동학은 신화적 허구로 버림받고 있는 배달국 시대의 한웅천황에 의하여 설파된 신선도에 바탕을 두고, 신라(新羅) 말엽의 대문호 고운 최치원(孤雲 崔致遠) 선생을 거쳐 그 25세손인 수운 최제우 선생에게 전수된다. 그래서 신선도와 동학은 다 같이 天一·地一·人一의 三神一體인 天道를 발생학적 본원으로 하고, 도·불·유 三敎一體를 기본사상으로 하며, 그밖에도 지기론(至氣論)·순환론·생명평등사상 내지 만물일체사상·민주주의사상 그리고 하나님을 숭배의 대상으로 하는 것이나, 포교의 목적을 포덕천하(布德天下) 광제창생(廣濟蒼生) 내지 홍익인간 광명이세에 두는 것 등 모든 사상이 동일하다. 따라서 동학의 도·불·유 삼교일체 사상은 동양의 전통적 외래사상을 수용한 것이 아니라 배달사상인 신선도의 전승이었다. 이러한 문제를 새롭게 밝혀 잃어버린 고유사상을 재발굴하고 재정립하는 데에 일조하고자 하는 것이 본연구의 목적이다. 다시 말하면 동학이 동양의 전통적 외래의 도·불·유 삼교사상을 수용하여 종합 내지 재구성하였다는 일반적 견해에 대한 반론인 것이다. 이에 따라 본고에서는  첫째, 동학이 도·불·유 삼교일체 사상임을 밝히고.  둘째, 동학이 신선도를 전승하였다는 전거를 제기할 것이며,  셋째, 신선도와 동학이 그 발생원리에 있어서 서로 동일하고, 그외의 사상도 동일함을 밝힌다. 그밖의 문제는 논외로 한다.  그러나 본고의 내용은 새로운 시도로써 거기에 대한 자료도 희귀할 뿐만 아니라 그밖에 보완하여야 할 점이 많을 것으로 본다. 널리 이해하여 주기 바란다. Ⅱ. 동학의 도·불·유 삼교일체 사상 본고에서 문제삼고 있는 동학사상이다. 동학사상(東學思想)은 수운 최제우 선생이 서기 1860년(단기 4193) 경신 4월 5일 득도(得道)함에서 드러난다. 그 사상은 도·불·유의 삼교일체 사상이다. 송월당(松月堂)이라는 노승(老僧)과의 문답내용을 보면 최제우 선생은 도·불·유를 하지는 않지만 좋아한다 하고, 비유하면 두 팔 가운데 어느 팔을 좋아하고 어느 팔을 싫어할 수 없는 것과 같다고 하였다. 왜냐하면, 천도는 없는 곳이 없고, 없는 곳이 없으므로 전체를 사랑할 수 밖에 없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즉 동학사상은 도·불·유 삼교일체 사상임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최제우 선생께서 그 제자 해월 최시형(海月 崔時亨;초명은 崔慶翔)을 향하여 말하되 "우리 道는 원래 儒도 아니고 佛도 아니며 仙(道敎의 고전적 표현)도 아니니라. 그러나 우리 道는 유·불·선 합일이니라. 天道는 유·불·선이 아니로되, 유·불·선은 천도의 일부분이니라. 유의 윤리와 불의 각성(覺性)과 선(仙)의 양기(養氣)는 인성(人性)의 자연한 품부(稟賦)이며 천도의 고유한 부분이니, 우리 道는 그 무극대원(無極大源)을 잡은 자니라. 후에 道를 쓰는 자는 이를 오해하지 말도록 지도하라"하시었다. 즉 동학의 도·불·유 삼교사상은 인성의 자연한 품부를 수련하는 사상으로서 천도의 고유한 부분이니 따로 따로 전래되어 종합되거나 재구성될 수 없는 사상이란 것이다. 원래부터 동학은 도·불·유의 삼교일체 사상이란 것이다.  그래서 동학경전에 천령(天靈)·천주(天主)·폁?님(목판본)·하날님(동경대전 원본)·하늘님(수운교 경전)·한울님(천도교 {동경대전}근세판)·천명(天命)·천리(天理)·천도(天道)·천덕(天德)·천성(天性)·천지인 삼재(天地人 三才)·음양오행(陰陽五行)이라는 천도에 관한 용어와 사상이 나오고, 신선(神仙)·선풍도골(仙風道骨)·선약(仙藥)·불사약(不死藥)·불로불사(不老不死)·무위이화(無爲而化)·지상선경(地上仙境)이니 하는 도교적인 용어와 사상, 부처·팔도불전(八道佛前)·산신불공(山神佛供)·윤회(輪廻)·연화(蓮花)·삼십삼천(三十三天)·도솔천(兜率天)이니 하는 불교적인 용어와 사상, 그리고 상제(上帝)·도성덕립(道成德立)·삼강오륜(三綱五倫)·성인군자(聖人君子)·충효열사(忠孝烈士)·효자효부(孝子孝婦)하는 유교적인 용어와 사상이 나온다. 그밖에도 중국의 삼황오제(三皇五帝)·요(堯)임금과 순(舜)임금·공자(孔子)와 맹자(孟子)·제갈량(諸葛亮)·주렴계(周濂溪) 그리고 주역(周易)·대학(大學)·중용(中庸) 등이 거론된다. 그것은 학자들이 하나의 연구물을 발표할 때 기성의 연구물을 원용하는 것과 같은 격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동학경전을 보면 거기에 최제우 선생이 도·불·유 삼교일체의 사상을 창설하였다는 말도 없고, 동양의 전통적 도·불·유 사상을 수용하였다는 말도 없다. 오히려 "유교는 명절(名節)에 구애되어 아직 현묘의 역(域)에 이르지 못하였고, 불교는 적멸(寂滅)로 들어가 윤상(倫常)을 절(絶)하였으며, 선교(도교)는 자연에만 유적(悠適)하여 치평(治平)의 술(術)을 결(缺)하였다"하고, 이 세상은 요순(堯舜)의 정치로도 족(足)히 건지지 못할 것이요, 공·맹(孔·孟)의 도덕으로도 또한 다스리지 못하리라 하는가 하면, 유도(儒道)·불도(佛道) 누천년(累千年)에 운(運)이 또한 다하였도다 하여 동양의 전통적 도·불·유 사상을 혹평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계의 일부 학자들은 동학의 도·불·유 사상을 동양의 전통적 도·불·유 사상을 수용하였다느니 종합하였다느니 재구성하였다고 주장한다. 이는 최제우 선생의 가르침을 안믿으려는 것으로서 제자가 스승의 가르침에 대하여 반발하고 거역하는 것과 같은 격이라 할 수 있고, 어느 종교의 신자가 다른 종교의 교리를 부정하는 것과 같은 격이라 할 수 있으며, 스스로 제부모를 헐뜻는 것과 같은 격이라 할 수 있다. 실로 무례하기 그지없고 선인에 대한 모독이라 아니할 수 없다. 이것이 오늘날 한국의 학자가 한국사상을 대하는 태도요, 우리사회의 학문하는 풍토이다.   Ⅲ. 동학의 신선도 전승 1. 백두산 정상의 용왕담과 동학의 연원 {동경대전} 절구와 {천도교창건사}를 보면, 최제우 선생이 그 제자 최시형에게 도통(道統)을 전수(傳授)하는 말 가운데 "용담(龍潭)에서 물이 흐르니 사해(四海)의 근원이 되었다"고 하였다. 이는 용담에서 사방으로 강물이 흐르는 것을 의미하고, 이를 동학의 연원에 비유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최시형 선생께서도 제자들에게 도통을 전수할 때 "산상(山上)에서 물이 흐르니 우리 교의 도통연원(道統淵源)이라. 이 현묘한 기틀과 참다운 이치를 깨달은 연후에야 개벽(開闢)의 운(運)과 무극(無極)의 도(道)를 알게 되리라. 오호라! 뿌리없는 나무가 없고 근원없는 물이 없으니 만사가 오직 그와 같으니라"하여 동학의 연원이 최제우 선생의 창작도 아니고 외래사상의 수용도 재구성도 종합도 아니라, 산상의 용담임을 말하고 있다. 그런데 우리나라 백두산 정상의 천지(天池)를 용담(龍潭) 또는 용왕담(龍王潭)이라 하고, 거기에서 압록·송화·소화·두만의 4대강하(四大江河)가 사방으로 흐르며, 한웅천황에 의하여 도·불·유 삼교일체의 신선도가 설파되었다. 따라서 최제우 선생이 말한 용담과 최시형 선생이 말한 산상의 물은 백두산 정상의 용담(천지)이라 할 수 있고, 그곳이 동학의 발원지라 할 수 있다.  그러나 흔히 최제우 선생의 고향인 경주의 가정리에 용담이 있는 것으로 이해한다. {동경대전} 수덕문에 의하면 "난간이 못가에 다다르니 주렴계(周濂溪)의 뜻과 다름이 없고, 정자의 이름을 용담이라 하였으니 제갈양(諸葛亮)을 사모하는 마음이 아니겠는가"하여, 용담이 정자의 이름임을 말하고 있는데, {용담유사} 용담가에서도 "구미산하 일정각((龜尾山下 一亭閣)을 용담이라 이름하고"하여 일반적으로 이해하고 있는 용담은 물이 아니라 정자의 이름이다. 그뿐만 아니라 그 곳이 산의 정상도 아니고 거기에서 4방으로 물이 흐르는 것도 아니다.  따라서 동학 발원지로서의 용담은 경주 가정리의 용담(정)이 아니라 백두산 정상의 용담이며, 그 곳이 동학의 발원지로서 동학의 도·불·유 삼교일체 사상은 동양의 전통적 노(老)·석(釋)·공(孔)의 외래사상을 수용하여 종합하거나 재구성한 것이 아니라, 상고시대부터 전래된 신선도의 도·불·유 삼교일체 사상을 전승하였다는 증거가 제1차로 드러났다고 할 수 있다.   2. 한웅천황과 최고운(崔孤雲)과  동학의 신선도 전승  또한 {동경대전}을 보면 "산하대운(山河大運)이 모두 이 도(道)에 돌아오니 그 근원이 극히 깊고 그 이치가 심히 멀도다" 하여 동학의 근원이 극히 심오함을 말하고 있는데, {천도교창건사}를 보면 최시형 선생이 말씀하시기를 "오도(吾道)의 대운(大運)은 천황씨(天皇氏)의 근본원리를 회복한 무극지운(無極之運)이며, 천황씨는 선천개벽(先天開闢)의 시조를 의미한다"고 하였다. 의암 손병희(義菴 孫秉熙) 선생도 "우리 대선생(최제우 선생)께서 비로소 무극대도(無極大道)와 대덕(大德)의 근본원리와 접령강화(接靈降話)의 이치를 밝혔다고 하나, 개벽초(開闢初)의 천황씨로부터 처음 비롯된 운이라 하니 의심하지 말라"고 하였다. 선천개벽 또는 개벽초라 함은 우리나라 개국초의 개벽을 의미하고 개벽은 개천시교(開天施敎)를 의미하니, 천황씨는 우리나라 개국초에 도·불·유 삼교일체의 신선도를 베푼 한웅천황이라 할 수 밖에 없다. 한웅천황 외에 신선도를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베푼 천황이 없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동학의 도·불·유 삼교일체 사상은 동양의 전통적 노·석·공의 외래사상을 수용하여 종합하거나 재구성한 것이 아니라, 배달국 시대의 한웅천황에 의해 설해진 신선도의 도·불·유 삼교일체 사상을 전승하였다는 증거가 제2차로 드러났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제1편 제Ⅱ장에서 밝힌 바, 최제우 선생의 제25세 선조이신 고운 최치원 선생의 난랑비서에 "우리나라에 현묘지도로서 도·불·유 삼교일체 사상을 근본적으로 자체 내에 지닌 신선도(화랑도)가 있었다"고 하였다. 그런데 {동경대전} 논학문을 보면 최제우 선생께서 "내 또한 동에서 나서 동에서 받았다"하고, 절구(絶句)를 보면 "평생에 받은 천명은 천년운수요, 성덕(聖德)은 우리 집에 내려오는 백세의 업(業)이라"하였다. 즉 동학사상은 최씨 집안에서 천년 동안이나 전승된 가업이었다는 것이다. 최치원 선생의 호를 고운(孤雲) 또는 해운(海雲)이라 하고, 최제우 선생의 호를 수운(水雲), 최시형 선생의 호를 해월(海月)이라 하여 조손(祖孫) 사이에 그 호가 일맥상통하는 것을 보아도 동학사상이 최씨 집안에서 대대로 전승되어왔음을 알 수 있다. 여기에서 다시 동학의 도·불·유 삼교일체 사상은 동양의 전통적 노·석·공의 외래사상을 수용하여 종합하거나 재구성한 것이 아니라, 배달국 시대의 한웅천황에 의해 설해진 신선도의 도·불·유 삼교일체 사상을 전승하였다는 증거가 제3차로 드러났다고 할 수 있다.   Ⅳ. 신선도와 동학의 동일성 지금까지 동학의 도·불·유 사상이 동양의 전통적 노·석·공의 외래사상을 수용한 것이 아니라 신선도의 사상을 전승한 것임을 밝혔다. 이는 곧 신선도와 동학이 근본적으로 동일함을 뜻한다. 그렇다면 신선도와 동학은 다 같이 그 발생원리와 그밖에 기본사상이 모두 동일하여야 한다. 사람에 비유하면 조손관계(祖孫關係)나 부자관계(父子關係)에 있어서 그 유전인자와 혈액형이 서로 같거나 불가분적 상관관계를 지니는 것과 같은 격이라 할 수 있다. 그러한 문제를 본항에서 규명하여 나가기로 한다.   1. 발생원리의 동일성 우리의 민속을 보면, 삼신상제(三神上帝)·삼신제왕(三神帝王)·삼신제석(三神帝釋)·삼신(三神)할머니 하는 삼신신앙(三神信仰)이 있고. 삼신사상을 발생원리로 도·불·유 삼교일체의 신선도가 한웅천황에 의하여 설파되었다. 삼신은 천일·지일·인일을 의미하고, 삼신이 사람에 있어서는 식(息)·감(感)·촉(觸)과 기(氣)·심(心)·신(身)과 명(命)·성(性)·정(精)이 된다. 여기에서 도·불·유 삼교일체 사상이 성립된다. 약설하면 숨을 고르게 쉬고(調息) 원기를 길러(養氣) 불로장수(長命)하는 신선을 추구하는 사상이 도교이고, 모든 느낌을 끊어 버리고(止感) 마음을 맑게 하여(明心) 본래의 성품을 깨달아(覺性) 성불을 추구하는 사상이 불교이며, 모든 육체적 감각(관능적인 욕구)을 극복하여(禁觸) 행실을 닦고(修身) 정기(정력)를 성실하게 함으로써(精誠) 성인군자를 추구하는 사상이 유교이다. 즉 인체계의 3원적 품부인 식·기·명에서 도교, 감·심·성에서 불교, 촉·신·정에서 유교가 발원되고 있는 것이다.  동학을 설파한 최제우 선생도 말하기를 "유·불·선(도교의 고전적인 표현)은 천도의 일부분이니 유의 윤리와 불의 각성과 선의 양기는 인성의 자연한 품부이며 천도의 고유한 부분이니 우리도는 그 무극대원(無極大源)을 잡은 자이다"고 하였다. 이를 음미하여 보면 유의 윤리는 몸을 닦는 것(修身)이며, 불의 각성은 마음을 맑게 함(明心)으로써 성취될 수 있고, 도(선)의 양기(養氣)는 원기를 기르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원기(氣)와 마음(心)과 몸(身)을 닦고 기르는 것이 도·불·유라는 것이다. 신선도의 도·불·유 사상도 원기(氣)와 마음(心)과 몸(身)을 닦는데서 발원된다. 따라서 신선도와 동학은 다 같이 그 발생원리에 있어서 동일하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신선도와 동학은 다같이 천일·지일·인일의 천도에서 발원되고 있는 것이다. 동학의 일파인 수운교의 경전 {동도전서}에도 "이 세가지를 나누어 말하면 유·불·선 삼가(三家)의 가르침이요, 합하여 말하면 하나의 천도라"하였다. 그러므로 동학의 도·불·유 삼교일체 사상도 신선도와 마찬가지로 천일·지일·인일 삼신일체의 천도에서 발원되고 있는 것이다.  이상과 같이 동학의 도·불·유 삼교일체사상은 신선도와 동일한 원리에서 발원되고 있다. 따라서 동학의 도·불·유 사상은 외래사상을 수용한 것이 아니라 고유사상인 신선도를 전승하였다는 논리가 성립된다.   2. 기본사상의 동일성 다음은 기본사상의 동일성이다.  첫째, 신선도와 동학은 다같이 지기론(至氣論)이다.  {한단고기} 소도경전본훈에 의하면 "일기(一氣)가 곧 하늘(天)이요 공(空)이다. 그러나 스스로 중일(中一)의 신(神)이 있어 능히 삼(三)이 된다. 삼신(三神)은 곧 천일(天一)·지일(地一)·태일(太一)이다. 일기(一氣)가 스스로 동작하여 조(造)·교(敎)·치(治)의 삼화(三化)의 신(神)이 된다. 신(神)은 곧 기(氣)이다" 하여 지기론(至氣論)이 신선도의 가장 기본사상이다.  동학에서도 "기(氣)는 허령(虛靈)하고 창창하여 간섭하지 않는 것이 없고 명령하지 않는 것이 없어 형용이 있는 것 같으면서도 형상하기 어렵고, 들리는 것 같으면서도 보기 어려우니 이것은 또한 혼원한 일기(一氣)니라"하여 지기론이 동학의 기본사상을 이룬다. 이래서 신선도와 동학은 다같이 지기론을 기본사상으로 한다.  둘째, 신선도와 동학에서는 모두 하나님을 숭배의 대상으로 한다.  우리의 민속에 하나님 신앙이 있고, 하나님 사상에서 도·불·유 삼교일체의 신선도가 성립됐으며, 하나님이 아니면 만물이 이 세상에 태어날 수도 없고 존재할 수도 없다. 그러므로 신선도에서는 하나님을 숭배대상으로 한다.  동학에서도 "그말 저말 다 던지고 하나님(하날님)을 공경하면 아동방(我東方) 삼년괴질(三年怪疾) 죽을 염려 있을소냐"하는가 하면, "성경이자(誠敬二字) 지어내어 하나님을 공경하면 자아시(自兒時)있던 신병(身病) 물약자효(勿藥自效)아닐런가"하였고, 동학의 기본주문인 "지기금지 원위대강 시천주조화정 영세불망만사지(至氣今至 願爲大降 侍天主造化定 永世不忘萬事知)"에도 천주(天主) 즉 하나님을 모셔야 한다고 강조하여 동학의 숭배대상 역시 하나님이다.  셋째, 신선도와 동학은 다같이 순환론이다.  신선도의 경전 {천부경}에 "만왕만래(萬往萬來)"라 하였고, {참전계경} 제91사에 신선도가 순환론임을 밝히고 있다. 그런데 동학에서도 {용담유사} 권학가에 "쇠운(衰運)이 지극하면 성운(盛運)이 오지마는 현숙한 모든 군자 동귀일체(同歸一體)하였던가"하고, 교훈가에 "부하고 귀한 사람 이전 시절 빈천(貧賤)이요, 빈하고 천한 사람 오는 시절 부귀로세, 천운이 순환하사 가고 아니 돌아옴이 없나니"하여 동학 역시 순환론이다.  넷째, 신선도와 동학은 다같이 생명평등사상 내지 만물동근사상이다.  신선도에서 천일·지일·인일의 삼신일체는 만물동근사상 내지 생명평등사상을 의미하기도 한다. 그런데 신선도의 경전 {삼일신고}에 "사람과 만물이 다같이 삼진(三眞)을 받았나니 이는 성(性)·명(命)·정(精)이라. 사람은 그것을 온전하게 받았으나 만물은 치우치게 받았나니라"하여 사람과 만물이 근본적으로 성·명·정을 지니고 있다고 하였다. 이는 불교에서 만물이 다같이 불성을 지니고 있다(皆有佛性)는 말과 같은 뜻이다. 따라서 신선도는 생명평등사상 내지 만물동근사상이다.  동학에서도 "천지(天地)·귀신(鬼神)·조화(造化)라는 것은 유일한 지기(至氣)로 생긴 것이며, 만물이 또한 지기로 생긴 것이니 이렇게 보면 하필 사람만이 천주를 모셨으랴. 천지만물이 하나님을 모시지 아니함이 없나니, 사람이 다른 물건을 먹음은 이는 곧 한늘이 한늘을 먹음이라"하여 모든 생명체가 하나님의 조화이고, 하나님을 모신 존재로서 존귀함을 말하고 있다. 따라서 동학 역시 생명평등사상 내지 만물동근사상이다.  다섯째, 신선도와 동학은 모두 민주주의사상이다.  천일·지일·인일의 삼신일체는 천일합일(天人合一)사상으로서 한늘이 곧 인간이고 인간이 곧 한늘이라는 최대 최고의 인권존중사상이며, 상·중·하 일체의 인간평등사상이다. 그러므로 신선도는 곧 민주주의사상이다.  동학에 있어서 시천주(侍天主) 사상도 최시형 시대에 이르러서는 사인여천(事人如天) 사상으로 발전되고, 손병희 시대에 이르러서는 인내천(人乃天) 사상으로 발전된다. 인내천사상 역시 한늘이 곧 인간이고 인간이 곧 한늘이라는 뜻으로 최대 최고의 인권존중사상이며 인간평등사상이다. 박종홍(朴鍾鴻) 박사는 "현대사상에서도 천도교의 인내천(人乃天)만큼 보다 인간의 존엄성을 강조하는 사상을 찾아볼 수 없다. 사람이 곧 한늘이라면 전통적인 기독교인은 깜짝 놀랄 일이다. 그보다 더 큰 죄악이 없기 때문이다. 그만큼 특색이 있다 인내천의 종지는 현대의 그 어느 민주주의보다도 철저하고 깊은 것이 아닐 수 없다"고 하여 인내천사상이 곧 민주주의사상임을 강조하고 있다. 이래서 신선도의 삼신일체사상과 동학의 인내천사상은 다같이 반상(班常)·적서(嫡庶)·노사(勞使)·남녀(男女)·노소(老少)·빈부(貧富)·귀천(貴賤)의 차별이 없는 인간평등사상이며 최대 최고의 인권존중사상으로서 민주주의사상인 것이다. Ⅴ. 결 론 이상에서 논한 바를 간단히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우리민족의 신선도가 도·불·유 삼교일체 사상인데, 최제우 선생이 설한 동학에도 도·불·유 삼교사상이 일체를 이루고 있다.  둘째. 신선도가 백두산 정상의 용담(천지)에서 한웅천황에 의하여 비로소 설파되었는데, 동학이 산상의 용담과 개벽초의 천황씨에 발생연원을 두고 있다.  셋째. 신선도가 고운 최치원 선생의 난랑비서에 잘 나타나고 있는데, 그 25세손인 최제우 선생은 동학을 천년 동안이나 집안에서 전하여온 백세의 가업(家業)이라 하였다.  넷째. 동학의 발생원리가 신선도와 동일하였다.  다섯째. 그밖에도 지기론·숭배의 대상·순환론·생명평등사상 내지 만물일체사상·민주주의사상 등이 동일하였다.  그러므로 동학의 도·불·유 삼교일체 사상은 동양의 전통적 노·석·공의 외래사상을 수용하여 종합하거나 재구성한 것이 아니라, 배달국 시대부터 전승된 신선도의 도·불·유 삼교일체 사상을 계승하였다고 결론을 내릴 수 있다.  여기에서 동학은 배달사상인 신선도의 재현이며 부활이라 할 수 있고, 최제우 선생과 최시형 선생은 사라져가는 민족혼과 민족사상을 일깨우고 부활시킨 대종교가요 대학자요 대사상가요 대혁명가라고 아니할 수 없다.  그와 같이 사계의 학자들도 외래사상과 아울러 고유사상에로, 또한 현세사상이나 근세사상과 아울러 고대사상에로 연구의 폭을 넓혀야 할 것으로 본다. 다시 말하면 자료가 많고 편의한 데에만 머무를 것이 아니라 문제의 해결에 노력하여야 하고, 연구물의 평가도 자신의 견해와 종전의 통설에만 의존할 것이 아니라, 새로운 학설에도 귀를 기울이는 자세가 필요하다고 본다. 세계문화는 철석같이 믿던 통설이 무너지면서 발전되어왔다는 사실을 상기하여 주기 바란다. 최시형 선생이 말한 바, "천황씨의 본심을 회복하지 아니하면 어떻게 보국안민(輔國安民)하리요"하였듯이 새로운 자세로 동학사상과 신선도를 재조명하여 민족혼을 일깨우는 데에 일조하여야 할 것으로 믿는다. 또한 동학이 곧 신선도요 신선도가 곧 동학으로서 세계주의사상이요, 만물일체사상이다. 다가오는 21세기에는 세계의 석학이 우리민족을 연구하고 신선도를 연구하게 된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할 것이다. 【부록】 우리민족의 종교교육 비판 1. 종교교육의 기능 어느 종교이든 그 교육을 보면 윤리도덕을 가르치고 인간의 정서를 순화시키며 남을 위해 사회에 봉사하게 하고 사회의 복지와 번영을 추구하며 지상낙원 건설을 목표로 한다. 또한 문화사업과 교육사업 그리고 구호사업을 직접 벌리면서 사회에 지대한 공헌을 한다. 그러므로 종교교육을 통해 가정이 화평케 되고 고매한 인격자가 배출되기도 하며, 어느 면에서 사회발전이 크게 이루어지기도 한다. 그뿐만 아니라 같은 종파의 종교인들 끼리는 공동체의식이 투철하여 서로 화합하고 단결하며 상부상조하고 동고동락한다. 그래서 어떤 민족은 종교교육을 통해 총화단결하고 부강하게 되는가 하면, 화합하고 예의바른 민족이라 칭찬을 받는다. 그러한 점에서 종교교육은 이를 나무랄데 없는 가장 이상적인 교육제도같이 보인다.  그러나 다(多)종교사회인 경우 문제는 다르다. 각 종교의 세부적인 측면을 들여다 보면, 역사적 사회적 발생동기·사상적 발생배경·발생민족·발생지·숭배의 대상·교조·경전·계율·의식과 관행이 각각 다르다. 그리고 각 종교마다 제 종교의 신앙대상을 전지전능하고 유일무이한 하나님(하느님)·주님·알라·부처님·옥황상제·천조대신이라 찬양하고, 제 종교의 교조를 가장 위대한 성인이라 추앙한다. 그리고 그 나라를 신앙의 성지라 하여 동경하고, 그 민족을 가장 거룩한 민족이라 찬양하면서 그 민족의 역사와 사상을 가르치고 배운다. 여기에서 어느 나라를 불구하고 다종교사회인 경우 종교교육에 있어서 크나큰 모순이 들어나게 된다.  첫째, 신자는 신앙이 독실할 수록 제 종교의 신앙대상을 절대적인 존재라 섬기고 거기에 사후의 운명까지 의탁한다. 따라서 어느 종교의 가르침이 객관적으로 볼 때 옳지 않다 하더라도 신자 자신은 그 가르침을 절대적인 진리라 믿고 따르게 된다. 이를 파브로프의 조건반사 원칙이라 한다. 그래서 신앙은 아편같다고도 하며, 신앙에 빠진 사람들은 아편중독자 같기도 하여 이들에게는 객관적인 비판력과 자제력도 없게 되고, 다른 종교를 유사종교·미개종교·미신신앙·우상숭배라 하여 무조건 멸시하거나 부정하게 된다. 즉 다종교사회에 있어서 각 종교는 다른 종교를 포용하는 것이 아니라 배척하여 사회불안의 원인이 된다는 것이다.  둘째, 각 종교마다 제 종교의 교조를 가장 위대한 성인이라 숭배한다. 그것은 제 종교의 교조보다 다른 종교의 교조와 성인은 하위에 있는 존재임을 의미한다. 따라서 웃 어른이나 선배라 하더라도 종교가 다르면 내심으로 하찮은 존재라 업신여기게 된다. 여기에서 다종교사회에 있어서의 종교교육은 윤리도덕을 가르치면서 윤리도덕을 무너뜨리고 있다는 이론이 성립된다.  셋째, 각 종교마다 그 종교의 발생지를 신앙의 성지라, 그 민족을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민족이라 찬양하면서 그 나라를 순방하고 그 발생지를 순례한다. 이를 성지순례라 한다. 그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자기를 낳고 키워준 제 나라는 성지가 아니며 제 민족은 위대한 민족이 아니라는 것을 시사한다. 여기에서 제 나라와 제 민족을 무시하고 다른 나라와 다른 민족을 동경하는 사대주의 의식이 싹트게 되며, 애국심과 애족심은 상처를 입게 된다.  넷째, 각 종교마다 그 민족의 위대성을 찬양하면서 주로 그 민족의 역사와 사상만을 가르치고 배운다. 곧 외래종교인들은 주로 다른 민족의 역사와 사상만을 가르치고 배운다. 이에 따라 자기 민족의 역사와 사상을 업신여기고 소홀리 하거나 가르치지 않게 된다. 그러한 풍조가 오래 계속될 경우, 제 민족의 문화는 낙후되고 외래화되기 마련이며, 민족의식은 사대주의에 빠지게 되고, 국가기강과 사회기강은 해이되기 마련이다.  다섯째, 신앙이 독실할 수록 종파를 중심으로 신도들은 똘똘 뭉치게 된다. 그것은 종파와 종파, 또는 종교와 종교 사이가 가깝지 않게 됨을 의미한다. 따라서 전체민족은 종교 또는 종파의 숫자만큼 분열되기 마련이다. 그래서 다종교사회에서는 단결이 잘 안될 뿐만 아니라 단결할 수도 없는 것이다.  이상과 같이 다종교사회에 있어서의 종교교육은 개인적으로 정서를 순화시키고 인격을 도야시키는 긍정적인 측면도 있지만, 사회적으로 민족정서를 파괴하고 분열시키는 부정적인 측면이 더욱 강하다. 그래서 종교가 많이 생기고 교회와 교당이 거리마다 늘어설수록 윤리도덕이 건전하기는 커녕 더욱 타락되고 사회는 이기화되기 마련이다. 그러면 우리사회의 종교교육은 어떻게 되고 있으며, 어떻게 종교교육을 하는 것이 가장 이상적인가의 문제이다. 2. 민족총화와 종교교육 이상적인 종교교육이라 할 수는 없으나 민족총화를 위한 종교교육으로써 유대민족의 종교교육을 예로 들어 설명한다. 유대민족은 수백만의 인구로서 수억의 아랍인구에 대항하리만큼 민족적 화합을 굳건히 하고 애족적 애국적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떤 종교 지도자는 유대민족을 하나님으로부터 선택받은 민족 또는 세계의 중심민족이라 극찬하면서 유대민족을 본받으라고 한다.  첫째, 유대민족은 어려서부터 자기민족의 전통적 역사교육과 아울러 종교교육을 철저히 받고 문화유적을 탐방하면서 자기민족의 위대성을 배운다. 곧 유대민족의 교육은 어려서부터 인성개발과 아울러 애국자 양성에 중점을 둔다(교육방송, 주한 이스라엘대사 특별초대 강연중에서). 이래서 유대민족은 화합적이고 애국적 애족적이다.  둘째, 유대민족의 교회에서는 다른 민족의 역사와 사상을 절대 가르치지 않고, 제 민족의 역사와 사상만을 바이블 속에 하나로 묶어 전체 민족에게 매주 가르치고 뉘우치게 한다(바이블 구약 참조). 여기에서 유대민족은 더욱 애국적 애족적인 민족이 되기 마련이다.  셋째, 유대민족은 여러 개의 신을 섬기지 않고 하나의 신만을 섬기며, 다른 민족의 신을 섬기지 않고 자기 민족의 신만을 섬긴다. 이를 유일신 신앙(唯一神 信仰)이라 한다. 그래서 유대민족은 자기민족의 여호와신 하나만을 섬기고, 유대교 하나만을 신앙한다. 다시 말하면 몰록신(구약 열왕기하 제23장 10절)·그모스신(구약 사사기 제11장 24절)·네르갈신(구약 에래미야 제39장 3절과 13절)·아드람멜렉신과 아남멜렉신(구약 열왕기하 제17장 31절) 등 많은 신들을 물리치고 교세가 가장 강한 여호와와 엘로힘을 하나로 묶어 여호와신(여호와 엘로힘) 하나만을 섬기고 다른 신을 절대 섬기지 못하도록 계명으로 정하고 있다(구약 출애굽기 20장 5절. 신명기 5장 9절). 심지어 다른 민족의 신을 믿자 할 때, 아내·자녀·형제·친구까지도 돌로 쳐서 죽이라고 가르치고 있다(신명기 13장 6절에서 10절). 이에 따라 유대민족 사회에는 여호와신을 섬기는 유대교 외에 다른 민족의 신을 섬기는 종교는 교리상 절대 존재할 수 없다. 그러나 다만 근래에 이르러 여호와를 섬기고 유대교에 뿌리를 둔 기독교를 믿는 교파가 일부 있을 뿐이고, 다른 신을 믿는 이슬람파가 극소수 있으나 그것은 비밀조직으로써 타도의 대상이다. 곧 유대사회에서는 여호와를 섬기고 유대교(또는 기독교)를 신앙해야만이 유대인으로서의 자격을 인정받고, 다른 신을 섬기거나 다른 종교를 신앙하면 유대인으로 인정받지 못한다. 그와 같이 유대민족은 하나의 신만을 섬기고 하나의 종교만을 신앙함으로써 전체민족이 총화단결하여 똘똘 뭉치고 있는 것이다.  요약해 말하면, 유대민족이 동포의식과 공동체의식이 투철하고 전체민족이 총화단결하며 애국하고 애족하게 되는 이유는 제 민족의 역사교육과 사상교육을 철저히 받고 제 민족의 신만을 섬기며 제 민족의 종교만을 신앙하는데 있다고 할 수 있다.  일본인 역시 거의 전체민족이 자기민족의 천조대신(天照大神)만을 섬기고, 자기민족의 신도(神道는 사실 우리민족의 신선도가 일본으로 전래된 종교임)와 이를 접목시킨 불교 곧 일본화된 불교만을 신앙한다. 그리고 신사(神社;法堂)에 나가면 자기민족의 역사와 사상을 가르치면서 자기 조상들의 위대성을 찬양한다. 그래서 일본인들은 잘 단합하고 예의바른 민족이라 칭찬을 받는다.  이를 생각하면 어느 민족이든 전체민족이 총화단결하고 굳건한 국가기강의 확립을 위해서는 제 민족의 국조와 존현을 잘 섬기고, 제 민족의 종교를 신앙하며, 제 민족의 역사교육과 사상교육을 철저히 받고 회개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3. 우리민족의 종교교육과 그 폐단 그러면 오늘날 우리민족의 종교교육은 어떠한가? 우리민족은 유대민족과 정반대의 종교교육을 받고 있다. 즉 유대민족은 제 민족의 종교교육만을 받고 다른 민족의 종교교육을 절대 받지 않는데, 우리민족의 절반정도(외래종교인)는 제 민족의 종교교육을 받지 않고, 다른 민족의 종교교육만을 받는다. 이를 세분하여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유대민족은 오로지 제 민족의 신과 교조에게만 절을 하고 다른 민족의 신과 교조에게는 절대 절을 않는데, 우리민족의 절반정도는 제 민족의 하나님과 국조에게 절을 않고, 다른 민족의 신과 교조에게 절을 한다. 이와 같이 우리민족은 숭배의 대상에 있어서 유대민족과 정반대의 신앙을 하고 있다. 더욱이 그러한 신앙풍토가 이제는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예컨대, 불교의 예식을 보면, 대웅전의 중앙 연화대 위에 부처님을 모시고 남무아미타불 아니면 석가모니불을 부른다. 남무아미타불은 우주의 진여이법(眞如理法)을 상징하는 假像佛이지만, 석가모니불은 인간으로서 따지고 보면 원래 우리민족이라 하더라도 지금까지 불교측은 이를 깨닫지 못하고 인도 사람이라 믿고 있다. 그렇다면 한국 사람이 한국 사람을 섬기지 않고 다른 나라 사람을 섬기고 있는 것이다.  유교는 어떠한가? 그 교육기관인 성균관이나 향교에서의 예식을 보면, 대성전(大成殿)에 공자를 비롯한 안자·자사·증자·맹자 등 오성(五聖)과 공자의 제자 십철(十哲) 및 칠십이제자(七十二弟子) 그리고 송왕조육현(宋王朝六賢), 마지막에 우리나라의 주자학자 십팔현(十八賢) 등 대체로 지나족(종족 이름에는 支那로, 국명에는 중국으로 표기했다)의 위인들을 모시어 거기에 공양을 하고 절을 한다.  도교는 어떠한가? 도교에서도 자연신인 옥황상제와 미륵불 외에 대체로 지나족의 위인들을 모시어 공양하고 절을 한다. 예컨대 복희·신농·황제·노자·서왕모·마조·여조·유비·관우·장비·공명 등 지나의 위인들을 신격화시켜 거기에 공양하고 절을 한다.  기독교는 어떠한가? 기독교에서도 유대민족의 성인인 예수를 모시어 하나님의 아들이라 또 그 어머니 마리아를 모시어 성모라 섬기고, 유대민족의 민족신인 여호와를 할렐루야 하고 찬양한다.  여기에서 생각해보자. 우리나라는 인도도 아니고 중국도 아니며 이스라엘도 아니라 한국이다. 또한 우리민족은 인도족도 아니고 지나족도 아니며 유태민족도 아니라 한국 사람이다. 곧 우리나라는 한국이며, 우리민족은 한국 사람이다. 그런데 한국사람이 한국땅에서 한국의 건물 중앙에 다른 민족의 민족신과 위인을 모시어 거기에 공양을 하고 절을 하고 있는 것이다. 곧 내가 내집 안방에 내 조상을 모시지 않고 남의 조상을 모시어 공양을 하고 절을 하고 있는 격이다. 그러한 행동을 자주 반복할 때, 우리민족의 사유체계와 의식구조는 어떻게 되고, 국가관과 민족관은 어떻게 되겠는가? 우리는 신앙을 떠나 한국인의 입장에서 또 자연인의 입장에서 냉정히 생각해보자.  불교·유교·도교·기독교 등 외래종교가 우리나라에 전래될 때는 우리민족을 위해 전래됐다. 그것은 외래사상을 수입하여 민족사상의 모자란 점을 보완하고 민족문화를 발전시키기 위함이었다. 외래종교의 노예가 되고 외국의 사상적 식민지가 되기 위함이 아니었다. 그래서 법당과 도관과 교당이 한국 사람의 노력과 재력에 의해 한국땅에 세워졌다. 그 소유권이 한국사람에게 있는 것이다. 외국사람의 소유가 아니며 외국사람을 위해 세워진 것이 아니다. 그런데 그 법당과 도관과 교당의 중앙에 다른 민족 곧 특정민족의 민족신과 성인을 안치하여 거기에 한국 사람이 공양을 하고 절을 하고 있는 것이다. 한국땅에 태어나서 한국의 의식(衣食)으로 살면서 다른 민족의 귀신을 섬기고 다른 민족의 종교를 신봉하고 있는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불교·유교·도교·기독교 등의 예식을 보면 거기에 우리민족의 하나님과 국조를 모시지도 않고 섬기지도 않는다. 일부 불교사찰에서 우리민족의 국조인 한인·한웅·한검의 삼성을 모시고 있다 하더라도 대웅전 밖, 어느 한쪽 구석에 형식상 모시고 있을 뿐이다. 근세조선의 유교도들도 우리민족의 국조를 모시었다고 하나 평양의 구월산 한 모퉁이에 형식상 모시었을 뿐이다. 더욱이 기독교측에서는 형식상일망정 제 민족의 국조를 모시기는 커녕 이를 우상숭배라 배격하고 단군성전 건립을 방해한다. 이를 어떻게 생각하는가?  그것은 손님을 모시기 위해 주인을 내쫓는 격이며, 남의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남의 할아버지와 할머니를 모셔다가 섬기면서 제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제 할아버지와 할머니를 박절하는 격이다. 이를 유추해석하면 자기의 이익과 부귀영화를 위해서는 국가사직도 무너뜨릴 수 있고, 부모형제라도 쫓아낼 수 있으며, 절친한 친구라도 용서없이 처단할 수 있다는 신앙인 것이다. 그것이 과연 애국적이고 윤리도덕에 부합되는 신앙인가? 석가·공자·노자·예수의 가르침인가? 신앙의 주객전도가 아니고 무엇이며, 정신나간 신앙이 아니고 무엇인가? 더욱이 사람은 돌맹이나 나무를 섬겨도 지성으로만 섬기면 거기에서 신비감을 느끼고 영적 감응을 받게 된다는 사실을 생각할 때, 다른 민족의 민족신을 지성으로 섬기고 다른 민족의 역사와 사상만을 열성으로 배울 경우, 민족의식은 어떻게 되겠는가? 다른 민족은 훌륭하게 느껴지는 반면, 제 민족은 고유종교와 고유철학도 없는 하찮은 민족이라고 스스로 제 민족을 멸시하게 될 것이 아닌가? 곧 우리민족의 사유체계와 의식구조는 자연히 외국화되어 국가기강이 해이해지고 민족의식이 무너지게 될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볼 때, 불교·유교·도교·기독교 등 외래종교측은 너무나 큰 과오를 범하고 있다고 아니할 수 없다.  둘째, 유대민족은 제 민족의 교조(위인)를 가장 위대한 성인이라 숭배한다. 그런데 우리민족의 절반정도는 다른 민족의 교조를 가장 위대한 성인이라 숭배한다. 그것은 제 민족의 국조인 한인·한웅·한검도 석가모니·공자·노자·예수 보다 하위에 있는 존재임을 스스로 자인하는 것이다. 곧 우리나라에는 옛날이나 지금이나 위대한 성인이 없었고 없다는 것을 스스로 자인하는 것이다. 그래서 국제적으로 우리민족은 성인도 하나 배출하지 못하는 미개민족이라 멸시받게 되고, 민족적으로는 열등의식에 사로잡혀 스스로 자기민족을 멸시하고 모함하며, 시기하고 질투하게 된다. 또한 사회적으로는 존현과 웃어른을 무시하고 자신만이 잘난체하게 된다. 그래서 사람을 널리 포용하지 못하고 파당을 짓게 된다.  셋째, 유대민족은 신앙의 성지가 곧 자기 나라로서 자기 민족을 하나님으로부터 선택받은 민족이라 교육한다. 즉 유대민족은 종교교육을 통해 민족적 자부심과 긍지를 심어준다. 그래서 유대민족은 세계적인 위인과 유명한 학자들을 많이 배출하였다. 그러나 우리민족의 절반정도인 경우, 신앙의 성지가 다른 나라인 것이다. 곧 기독교인의 성지는 이스라엘(그러나 개신교는 미국에서 전래됐으므로 미국을, 성공회는 영국에서 전래됐으므로 영국을 예루살렘 다음의 성지로 친다)이며, 불교인의 성지는 인도와 네팔이고, 유교인과 도교인의 성지는 중국이다. 그래서 이들 외래종교인들은 이스라엘·미국·영국·인도·중국을 신앙의 성지 또는 신앙의 조국이라 하여 동경하고 선망하면서 그 나라를 순방하고 그 발생지를 순례한다. 그뿐만 아니라 거기에 대대적인 불찰 또는 교회당을 건립한다. 여기에서 우리나라는 신앙의 성지가 아니며 우리민족은 위대한 민족이 아니라는 열등의식을 갖게 되며, 사대주의 의식이 싹트게 된다.  넷째, 유대민족의 교회에서는 제 민족의 역사와 사상만을 가르치고 다른 민족의 역사와 사상을 절대 가르치지 않는데, 우리민족의 불교·유교·도교·기독교 등 외래종교측에서는 다른 민족의 역사와 사상만을 가르치고 우리민족의 역사와 사상을 가르치지 않는다.  예컨대, 불교의 법당에 나가면 반야경·금강경·법화경·화엄경 등 팔만대장경(불경은 대승경과 소승경으로 나뉘어지고, 소승경은 석가세존께서 직접 설하신 법이지만 대승경은 용수보살에 의해 우리나라에서 인도로 전승된 경전이다. 그러나 불교계에서는 아직도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만을 가르치고 배우며, 유교의 성균관이나 향교에 나가면 지나족의 삼사(三史; 한서·후한서·사기)와 사서오경(四書五經)과 제자백가서(諸子百家書)만을 가르치고 배운다. 도교의 도관에 나가면 지나족의 도덕경·남화경·참동계·황정경 등 도장경만을 가르치고 배우며, 기독교의 예배당에 나가면 유대민족의 역사책인 구약과 신약 등 바이블만을 가르치고 배운다. 그러면서 우리민족의 역사와 사상에 대해서는 가르치지도 배우지도 않는다. 특히 기독교인들은 우리민족의 역사와 사상과 종교에 대해 마치 남의 것을 대하듯 하면서 우리민족의 상고사를 불합리한 신화같이 취급하고, 우리민족의 사상과 종교를 비과학적인 미신같이 멸시한다. 그러면서 신도들에게 사회에 봉사하고 국가와 민족을 위해 봉사하고 충성하라고 가르친다. 곧 외래종교측에서는 그 교육내용이 교육목적과 불일치되고 있다.  이를 어떻게 생각하는가? 정상적인 교육이라 생각하는가? 교육의 주객전도가 아니고 무엇인가? 혼없는 교육이 아니고 무엇인가? 한국의 불자와 유생과 목자와 도인 등 성직자들은 정신이 있는 것인가? 없는 것인가? 더욱이 기독교의 목자들은 신도들에게 유대민족을 본받으라고 가르친다. 그러면서 유대민족과 정반대의 신앙을 유도하고 교육을 한다. 곧 외래종교측은 한가지 병에 의사마다 다른 처방을 내리고 다른 약을 쓰는 격이며, 고가(高價)의 양약이라 하더라도 그 처방이 병의 증상이나 원인과 맞지 않는 격이다. 그와 같이 우리나라의 불교·유교·도교·기독교 등 외래종교측과 그 성직자들은 조국과 민족 앞에 너무나 큰 과오를 범하고 있는 것이다. 이상 논한 바를 도표화하면 다음과 같다. 유태민족과 우리민족의 종교교육 비교표 구 분 유태민족의 종교교육 우리민족의 종교교육  숭배대상 제 민족의 민족신만을 숭배함.  오로지 하나의 신만을 숭배함. 다른 민족의 민족신을 숭배하고, 여러개의 신을 숭배함.  교조찬양 제 민족의 교조와 시조 그리고 성인만을 찬양함.  다른 민족의 교조와 시조 그리고 성인을 찬양함.  교육방향 교당내에서는 제 민족의 역사와 사상만을 교육하면서 뉘우치게 하고, 다른 민족의 역사와 사상을 교육하지 아니함. 그럼으로써 오로지 제 민족의 사상으로 무장함. 교당내에서 다른 민족의 역사와 사상을 가르치고, 제 민족의 역사와 사상을 가르치지 아니함. 그럼으로써 다른 민족의 사상을 소지하게 되고 민족분열을 초래케 됨.   민족찬양 제 나라를 신앙의 성지라 찬양하고, 제 민족을 하나님으로부터 선택받은 민족이라 찬양함. 다른 나라를 신앙의 성지라 찬양하고, 제 민족을 비하하고 멸시함.   그러나 유교·불교·도교·기독교 등 외래종교인들은 종교인이기 때문에 어쩔수 없지 않으냐 하고 이의를 제기할 것이다. 그것은 종교지상주의적인 사고방식이라 할 수 있다. 종교인들도 원래 종교인이기에 앞서 하나의 자연인이었다. 자연인이므로 누구이든 민족적 혈통을 지니고 있다. 민족적 혈통은 이 세상에서 목숨이 다될 때까지 불변적이다. 그러나 신앙은 얼마든지 바꿀 수 있다. 곧 가변적이다. 가변적인 것보다 불변적인 것이 우선한다. 따라서 신앙에 앞서 민족이 우선한다. 민족이 우선하므로 다른 민족의 신앙보다도 제 민족의 민족사와 민족사상교육이 우선하고, 다른 민족의 신을 섬기기에 앞서 제 민족의 하나님과 국조를 먼저 섬겨야 한다. 한국의 기독교인을 예로들면, 유태인으로서 기독교를 믿는 것이 아니라 한국 사람으로서 기독교를 믿는 것이다. 그러므로 기독교인들도 기독교 신앙에 앞서 제 민족의 민족사와 민족사상을 먼저 가르치고 배워야 하며, 여호와를 찬양하고 예수와 마리아를 섬기기에 앞서 제 민족의 하나님과 국조를 먼저 섬겨야 한다는 이론이 성립된다. 유태인으로서 기독교를 믿는다면 당연히 유태의 역사와 사상을 배우고 유태민족의 신인 여호와를 할렐루야 하고 찬양해야 하며, 예수와 마리아를 섬기고 그에세 공양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한국의 기독교인은 유태인이 아니라는 것이다. 어떠한 종교를 믿어도 한국인이라는 민족적 혈통을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이다. 곧 자기의 주체를 분명히 파악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외눈박이(비정상인) 사회에 가면 두눈박이(정상인)는 병신취급받고 외눈박이가 정상인으로 대우받는다. 악화가 양화를 구축한다. 그와 같이 우리사회에서는 외래종교 세력이 막강함으로써 외래종교에 대한 역사교육과 사상교육은 정당한 대우를 받고, 자기민족에 대한 역사교육과 사상교육은 하찮은 것으로 멸시받고 있다. 그래서 현재의 우리사회에는 불교대학과 유교대학이 있고, 특히 기독교 대학은 그 숫자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수 백개이지만(약 800개, 그중 인가대학은 226개, 1995년 현재, 종교신문) 당연히 있어야 할 한국학 대학은 하나도 없으며, 서양사상을 가르치는 철학과는 각 대학에 모두 있어도 한국사상을 가르치는 한국철학과는 성균관대를 제외하면 찾아보기 어렵다. 그래서 불교와 유교 박사가 있고, 특히 기독교의 신학박사와 서양철학 박사는 수만명이지만 한국철학 박사는 4천 5백만 인구중에 한 두 사람에 불과하다. 또한 대학 때부터 한국철학을 전공한 전문교수도 전혀 없다. 대학 4년 동안 자기민족의 사상이나 철학을 한 강좌도 수강하지 못한채 졸업하게 되는 학생이 전체의 95% 이상이다. 이에 따라 기독교의 바이블, 불교의 대장경, 유교의 사서오경, 도교의 도장경에 대해서는 잘 알면서도 제 민족의 천부경·삼일신고·참전계경은 있는 줄도 모른다. 지나의 공자·맹자·노자·관우·장비와 기독교의 12사도에 대해서는 잘 알면서도 환국의 7세 한인, 배달국의 18대 한웅, 단군조선의 47대 한검(단왕)에 대해서는 전혀 모른다. 이러한 교육적 풍토밑에서 어떻게 민족정기를 바로 세우고 민족문화를 발전시키며 국가기강과 사회기강을 바로 잡을 수 있겠는가? 더욱이 상대의 민족사와 사상사를 말하면 국수주의자 아니면 민족지상주의자라 푸대접하니 이러한 사회풍토속에서 어떻게 민족정서가 건전할 수 있겠는가?  다섯째, 유대민족은 학교에서는 세계 여러나라의 역사와 종교와 사상에 대해서 배운다. 그러나 교회에 나가면 하나의 신과 하나의 종교만을 신앙하고, 하나의 역사와 사상 곧 자기민족의 역사와 사상만을 철저히 가르치고 배운다. 그런데 우리민족은 한국계·서구계·인도계·중국계·일본계·아랍계 등 수백개의 신과 종교를 신앙하고, 수십개의 역사와 사상을 가르치고 배운다. 이는 아버지와 어머니, 할아버지와 할머니, 형과 누나의 가르침이 다른 격이다. 그러면 그 어린이는 어떻게 되겠는가? 무엇을 어떻게 할 바를 모르고 우왕좌왕할 것이 아닌가?  그와 같이 우리민족은 방향을 못잡고 있는 것이다. 곧 정신분열 내지 철학없는 민족이 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정치인들은 철학이 없어 이해따라 이합집산하게 되고 교육자도 철학이 없어 조변석개하게 된다. 무엇이 정의이고 무엇이 진리이며 무엇이 옳은 것인지 그 기준이 없는 것이다. 각자 자기의 주관대로, 편리한 대로, 좋은 대로 하면 그것이 정의이고 진리인 것이며, 서로 충돌이 생길 경우 힘쎄거나 다수 쪽이 이기게 된다. 그래서 각 개인은 유력한 우두머리(boss)와 이익집단을 중심으로, 또는 종파를 중심으로 단합할 수 밖에 없고, 개인주의 또는 집단이기주의로 흐를 수 밖에 없게 된다. 그래서 우리민족은 단결이 잘 안되고 또 단결할 수도 없는 것이다.  그러면서 이 사회의 불합리한 점은 모두 민족성 탓으로 돌린다. 이기적이고 개인주의적이며 단결이 잘 안되는 것도 민족성 탓이며, 시기 질투하고 모함하는 것도 민족성 탓으로 돌린다. 나쁜 것은 모두 민족성 탓으로 돌린다.   4. 우리민족의 종교교육과 식민지 교육 오늘날 우리민족의 교육은 어느 면에서 일제시대 식민지 교육의 연장이라 할 수 있고, 또한 종교교육은 식민지 지배전략과 밀접한 관계를 지닌다. 그러므로 오늘날 우리민족의 종교정책은 일제시대 조선총독부가 우리민족을 지배하기 위한 식민지 지배전략과 어떠한 유사성을 지닌다고 추정할 수 있다. 그 점을 알아보기로 한다.  첫째, 조선총독부는 우리민족을 일본의 신사(神社)에 나가서 일본의 천조대신(天照大神)과 천황에게 배례하게 했다. 그와 같이 오늘날 우리나라의 외래종교측에서도 우리민족에게 다른 민족의 신과 교조에게 공양하게 하고 배례하게 한다.  둘째, 조선총독부는 우리민족의 역사교육과 사상교육을 탄압하고 일본의 역사교육과 사상교육만을 시켰다. 그와 같이 오늘날 우리나라의 외래종교측에서도 우리민족에게 우리민족의 역사교육과 사상교육을 시키지 않고 다른 민족의 역사교육과 사상교육만을 시키고 있다.  셋째, 조선총독부는 우리민족의 고유종교를 유사종교니 사이비종교니 멸시하면서 타파의 대상으로 삼았다. 그와 같이 오늘날 우리나라의 어느 외래종교측에서도 우리민족의 고유종교를 미신숭배니 미개종교니 멸시하고, 불교사찰을 방화하는가 하면 불상을 파괴하고 훼손한다.  넷째, 조선총독부는 우리민족의 상고사를 신화라 부정하면서 단군왕검을 역사적 실재 인물로 인정하지 않고, 평양 구월산의 삼성사(三聖祠)를 헐어버렸다. 그와 같이 우리나라의 어느 외래종교측에서도 우리민족의 상고사를 신화라 부정하면서 단군왕검을 신화적인 인물로 취급하고 단군성전 건립을 방해한다. 그래서 지금까지 단군성전 건립을 못하고 있다.  다섯째, 조선총독부는 우리민족의 성씨를 가내무라·구니모도·야나가와·요시가와 등 일본식으로 개명하게 했다. 그와 같이 한국의 어느 외래종교측에서도 우리민족의 성명을 교명(敎名)이라 하여 마리아·요셉·안나·요왕·요안·요환·세레나데·베드로 등 서구식으로 개명하게 한다.  이상과 같이 우리나라의 외래종교 교육정책이 조선총독부의 식민지 교육정책과 유사하다. 특히 어느 종교의 교육정책은 조선총독부의 식민지 교육정책과 그대로 일치된다. 그러한 사실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우연의 일치라 할 수 있으나 놀랍게도 다음과 같은 이론이 성립된다.  1) 우리나라의 외래종교 교육정책 특히 어느 종교의 교육정책은 일제시대 조선총독부의 식민지 교육정책과 일치된다. 따라서 우리나라의 어느 외래종교 당국은 일제시대 조선총독부와 다름이 없으며, 그 종교지도자들은 일제시대 친일파와 다름이 없다는 이론이 성립된다.  2) 일제시대 조선총독부의 식민지 교육이 우리민족의 민족혼을 말살시키고 국가기강을 문란케 하기 위한 교육이었다면, 우리나라의 외래종교 교육도 우리민족의 민족혼을 말살시키고 국가기강을 문란케 할 수 있다는 이론이 성립된다. 그래서 1941년 태평양전쟁 발발 이후 우리나라의 외래종교인들이 일본군에 참가하면서도 독립군에 참가한 애국지사가 몇명이나 되었는가? 거의 없지 않는가? 이와 같이 외래종교 교육은 민족혼을 말살시키고 있는 것이다.  3) 일제시대 조선총독부의 식민지 교육이 우리민족에게 독립의욕을 말살시키고 사대주의 의식과 맹종적 노예근성을 심어주어 일본을 우러러 받들고 일본에 예속시키기 위한 교육이었다면, 오늘날 우리나라의 외래종교 교육도 우리민족에게 독립의욕을 말살시키고 사대주의 의식과 맹종적 노예근성을 심어주어 이스라엘·로마·미국·인도·중국 등 다른 나라를 우러러 받들고 다른 나라에 예속시키기 위한 교육이나 다름 없다는 이론이 성립된다. 그래서 오늘날 우리 민족이 남북으로 분단되어 반세기가 흘러도 적극적 통일의욕이 없지 않는가? 이와 같이 외래종교교육은 민족혼을 말살시키고 동포의식을 흐리게 하고 있는 것이다.  특히 어느 외래종교측의 과오는 너무나 크다고 아니할 수 없다. 논리대로 해석하면 어느 외래종교 지도자들은 우리나라가 서구국가 특히 미국의 종교적 식민지로 전락되기를 바라는 격이며, 미국의 하수인과 같다는 이론이 성립된다. 그래서 미국정부나 미국국민이 볼 때, 우리민족은 미국의 심부름꾼 같고 용병(傭兵) 같으며 미개민족 같이 보인다는 것이다. 우리민족은 외국인들에게 절대 좋게 보이지 않고 무시당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 때문에 우리민족이 국제적으로 무시를 당하고, 3년전 미국 LA교민들이 흑인들로부터 수난을 당했는지 모른다. 그렇다면 우리나라의 외래종교 교육은 우리나라를 다른 나라의 식민지로 오해받게 하고 국제적으로 망신시키는 교육인 것이다. 이와 같이 외래종교측은 많은 과오를 범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할 것이다.   5. 종교교육의 신토불이(身土不二) 그러면 궁극적으로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공자께서 임금은 임금 닮아야 하고 아버지는 아버지 닮아야 한다고 했다. 그렇다면 한국 사람은 한국 사람 닮아야 하는 것이다. 한국 사람이 한국 사람 닮지 못하고, 이스라엘·미국·영국·로마(이태리)·인도·중국·일본 사람 닮은 데에 문제가 있는 것이다. 즉 우리민족은 거의가 의식과 신앙에 있어서 외국 사람이 되고 있는 것이다. 한국 사람이 아닌 것이다. 한국혼이 없는 사람들인 것이다. 여기에 문제가 있는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유대민족이 유대교만을 믿고 유대의 역사와 사상을 철저히 가르치고 배우듯이 한국 사람은 한국의 종교를 믿고 한국의 역사와 사상을 철저히 가르치고 배우는 것이라 할 수 있다.  한국의 역사는 지금부터 약 1만년전 한인의 환국(桓國)시대부터 시작된다. 그러나 그것은 근거가 부족하다 하여 부정하고, 그 이후 한웅의 배달국 시대를 우리나라 역사의 기점으로 보더라도 우리나라의 역사는 약 6천년전부터 시작된다. 그때는 세계인류가 원시의 미몽에서 깨기 전이다. 그때에 이미 우리민족은 위대한 사상을 성립시켰다. 그 사상은 신선사상이다. 신선사상은 天一·地一·人一 三神一體의 천도를 발생원리로 한다. 그래서 한대민족·열대민족·온대민족 등 온 인류를 발생학적 배경으로 하는 홍익인간 사상이며, 인간의 지닌 기(氣)·심(心)·신(身)를 잘 닦아 모든 사람이 성인군자를 지향하게 하는 이화주의(理化主義) 사상이다. 신선사상은 현대사상의 모체이며 동양사상의 원류였다. 어느 사상에도 뒤지지 않는 가장 위대한 사상으로서 21세기를 지도할 사상이었다. 그러한 신선사상이 외래사상에 의해 지금까지 가려지고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외래종교인들도 이제는 제 나라의 종교와 사상을 배우고 연구해야 할 때에 이른 것이다. 곧 농산물만이 신토불이(身土不二)가 아니라, 신앙이 신토불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될 때 사상이 신토불이 되고, 사상이 신토불이 될 때 의식이 신토불이 되어 민족의식과 동포의식이 확립되고, 국가기강과 사회기강이 굳건히 되어 세계열강과 대등한 세계화도 이룰 수 있고, 나아가 세계의 지도적 중심국가로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상의 소론을 이해한다면 외래종교측은 다음의 사실을 받아들여야 마땅하다.  첫째, 외래종교측은 한국인의 입장에서 외래종교를 받아들이고 신앙해야 한다.  둘째. 외래종교측은 제 종교가 손님종교임을 자각하여 민족종교에 대해 예의를 지키고 주인행세 말아야 한다.  셋째, 외래종교측은 외래종교가 우리 민족을 위해 전래됐음을 인정해야 한다. 이를 인정한다면 외래종교측도 우리 민족을 위해 진정으로 봉사해야 하고, 또 우리 민족을 위해 진정으로 봉사한다면 우리 민족의 역사와 사상과 종교를 받아들이고 연구해야 마땅하다. 따라서 외래종교측은 한인·한웅·한검의 역사 곧 환국사(桓國史)·배달국사·고조선사 그리고 그 사상인 신선사상을 인정하고 적극적으로 연구해야 마땅하다. 아울러 대종교(단군교)와 동학(천도교와 수운교)과 증산도(대순진리회와 태극도 등)와 원불교 등 자생종교를 주인종교로 예우해야 하고 연구해야 마땅하다. 그것이 제 나라와 민족을 위하는 종교인의 자세라 생각한다. 만약 그렇지 않고 제 종교(외래종교)의 사상과 교리만을 연구하고 믿으면서 그것을 제일이라 선전한다면 그것은 제 민족의 역사와 사상과 종교를 무시하는 행위이며, 아울러 제 조상과 국조를 멸시하는 행위로서 반인륜적 반민족적 반국가적 행위임을 깨달아야 할 것이다.  이상과 같은 논리에 근거하여 다음과 같이 구체적인 사항을 건의한다.  첫째, 신선사상에서는 우주와 삼라만상의 이법을 간략히 天一·地一·人一의 三神一體(삼신일체)라 표현한다. 그것은 만물이 하늘이나 땅과 같이 존엄하다는 뜻이기도 하고, 만물의 근본은 같다는 뜻이기도 하며, 우주와 만물이 그러한 원리로 구성됐음을 의미한다. 또한 하늘·땅·사람은 모든 종교의 존경대상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그에 대한 상징물을 제작하여 그것을 최상의 신앙대상으로 함이 마땅하다. 그것은 종교통일의 기초이기도 하다.  둘째, 모든 종교의 교조는 인류를 위해 공헌한 바 크다. 그러므로 각 종교집단은 만성당(萬聖堂)을 지어 모든 종교의 교조들을 모셔야 마땅하다. 그리고 우리민족의 국조인 한인·한웅·한검의 삼성을 제 종교의 교조와 함께 봉안하여 섬겨야 마땅하다. 더욱이 불교측부터 먼저 만성당을 지어 예수를 모시고 대웅전에 자기 민족의 국조를 석가와 더불어 모신다면 아무리 극악한 기독교인이라 하더라도 제 종교의 교조를 모시고 제 민족의 국조를 모신 사찰을 함부로 방화하거나 파괴하지 못하리라 생각한다. 그것은 기독교와 불교의 불화를 예방하는 길이기도 하다.  셋째, 외래종교측에서도 신도들에게 제 종교의 경전과 함께 천부경·삼일신고·참전계경 등 우리민족의 경전과 우리나라의 역사와 사상을 가르쳐야 마땅하다. 더욱이 필자의 연구에 의하면 도교·불교·유교는 신선도의 지류로서 원래 우리민족의 고유종교였다. 기독교 역시 신선도의 유파라 추정된다. 즉 모든 종교의 근원은 하나로서 우리민족의 신선사상이라는 사실이 밝혀지고 있다. 그러므로 도교·불교·유교·기독교 등 모든 외래종교가 제 고향으로 돌아온 격이며, 제 고향으로 돌아왔으니 제 민족의 역사와 사상을 배우고 연구해야 마땅하다. 그것이 곧 원시반본인 것이다.  넷째, 기독교대학(신학대학)·불교대학·유학대학 등 외래종교의 각 대학에 배달철학과(한국철학과)와 배달사학과를 설치하여 성직 희망생들에게 우리나라의 철학과 종교와 역사를 가르치고, 도교·불교·유교·기독교 등 외래종교와 배달사상과의 역사적 관계를 연구케 해야 할 것이다. 그래야 모든 종교가 원시반본되고 한국화될 것이며, 참다운 한국화는 곧 세계화와 동일함을 알아야 할 것이다.  다섯째, 불교·기독교·유교·도교·천리교·이슬람교 등 외래종교측은 진정으로 제 나라와 제 민족을 위한다면 제 종교의 대학과 대학원 설립보다도 제 나라와 제 민족을 위한 한국의 역사·정치·종교·철학·교육·문학·음악·미술·체육 등 한국학 전반을 종합적으로 가르치는 한국학 대학교와 한국학 대학원을 세워야 마땅하다. 지금까지의 과오를 반성하는 뜻에서라도 한국학 대학교와 한국학 대학원을 하루 빨리 세워야 할 것이다. 더욱이 고유종교측에는 그러할만한 재력이 없고, 불교측과 기독교측은 남의 나라에까지 막대한 자본을 던지면서 불찰과 교당을 세울 정도이다. 이를 생각하면 자기 나라에서 제 민족을 위해 한국학 대학교와 한국학 대학원을 세우는 것은 너무나 손쉽고 당연한 일이라 하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돈이 생기면 골짜기마다 불찰만을 짓고, 골목마다 교회당만을 세우는가 하면 기껏해야 제 종교의 대학과 대학원만을 세우면서 제 민족을 위한 한국학 대학교와 한국학 대학원 설립을 싫어한다거나 꺼려한다면, 그것은 동포를 동포로 보지 않고 조국을 조국으로 보지 않기 때문이라 할 수 있다. 곧 반국가적 반민족적 신앙 때문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미워도 내 동포요 싫어도 내 조국이 아닌가? 깊이 깊이 생각해서 불교측과 기독교측부터 솔선하여 한국학 대학교와 한국학 대학원을 설립하시길 간절히 청원한다. 그러면 우선적으로 불교측과 기독교측 사이에 따뜻한 바람이 불고, 각 종교 사이에 이해와 협조의 분위기가 조성될 것이다. 외래종교측의 이해와 각성과 참여와 협조를 촉구한다.   저자소개 성명 : 안창범(安昶範). 서기 1933년생(호적상 1936년생), 제주도 태생.  학력 : 만학(晩學). 제주대학교 법학과졸(1972).  고려대학교 대학원 교육학과졸 (1978).  경력 : 자영. 제주교육대학 강사. 제주실업전문대학 강사.  제주시 교원단체 연합회 이사. 제주대학교 교수(현재).  상벌 : 제주대학교 학술상 수상(1989).  저서 : 민족사상의 원류(1988). 한민족의 신선도와 불교(1993).  하나님 사상과 불교의 기원(1994). (역술)배달성전(1995).  잃어버린 배달사상과 동양사상의 기원(1996)  논문 : 花郞道의 外來 道·佛·儒 三敎受容說 批判.  古神仙敎의 宗敎的 體系. 석가불교의 기원과 한국의 신선도.  中國儒學의 淵源과 東夷 등 20여편.  연락처(학교) : 제주대학교 사범대학 윤리교육과  제주도 제주시 아라동 1번지.  학과 전화 (064)54-3260. 연구실 전화 (064)54-3262  (자택) : 제주도 제주시 일도2동 1045의 8  전화 (064)52-4906. 전송 (064)21-7934.  ')
지나온 선배로서 후배나 친구들이 대학시험을 다시 보고 싶은 상황에도 대학시험을 보지 못하고 꿈을 접고 허송세월을 보내는 안타까운 현상을 많이 보아온지라 주변의 가족, 친지,친구중에 학생이 있거나 대학시험(高考)를 다시 볼수 있는 정황이라면 적극 알리길 바란다.  대학시험에서 락방되었거나 혹은 대학시험을 보고 싶은데 건강상의 이유로 집에서 자습하는 친 구들, 그리고 성적이 잘 안나와 어쩔수없이 다시 재학해야만 하는 상황, 그런데 재학하기는 싫고 성적도 잘 안나와 연변1중등 중점고등학교에서 받아주지 않는다면 스스로 자습할수밖에 없다. 이번에 자습하면서 다시 대학시험重新考高考를 칠수 있는 방법을 소개하려 한다.  1.스스로 자습하면서 대학시험을 보려면 주,시 학생모집사무실市招生办에 가서 등록하여야 한 다.  2.매년 10월에 대학시험모집高考报名이 있다. 이때를 놓치지 말고 10월쯤 (둘째 주 )되면 招生办에 연락하여 학생모집날자를 알고 报名날에 신청, 참여하여야 한다.  2018年高考填报志愿时间及方式汇总 吉林 2018年普通高考网上报名时间为2017年10月10日至19日进行,现场确认时间为2017年10月11日至20日。 二代身份证、户口簿等所需证件资料。 https://gkbm.jleea.com.cn;https://gkbm.jleea.edu.cn 全文 3.학생모집사무실을 찾아가서 朝考를 친다고 말해야 한다. 朝考란 조선어로 시험보는 걸 말한다.  4. 모집당일 가족들이 招生办에 자녀들과 동행해주는 것이 좋다. 모집당일에는 현장모집现场报名 이라 호구부, 신분증,유관 학력증명서 (초중,고중 졸업장)을 가지고 가야 한다. 그리고 그 날에 招 生办사람들이 학생이 거주하는 사회구역社区에가서 거주증명신고居住证明을 떼여올것을 요구한 다. 그러면 미리 사회구역社区에가서 招生办에서 주는 증명서,추천서에 사회구역社区도장을 맞아 오면 된다. 모집당일에는 학생 본인이 반드시 있어야 하는바 신청과정이 컴퓨터신청이고 한족학생 들이 엄청나게 많아 줄을 서서 기다려야 하기때문에 아침 일찍 가는 것이 좋다. 사진은 당일에 찍 는다. 대학시험 高考참가비는 300원 좌우이다.  5. 학생모집사무실高考办公室 전화:0433-2903925 서효민徐晓敏 : 13504728822  전승호全胜虎: 13089318773  ( 10월 2번째주에 이 분들과 련계하여 대학시험모집일高考报名日을 알아야 한다. ) 황금녀 黄今女: 13844372608 6. 연길시 교원진수학교가는 길 : 연길시 학생모집판공실延吉市招生办은 연길시교원진수학교내 延吉教师进修学校 2층 서쪽에 있다. 연길시교원진수학교내延吉教师进修学校는 연길시 9중 延吉 市九中부근에 있다. 버스를 타면 9중역에 내려야 한다. 9중으로 통하는 버스로는 1선,11선, 37선,60선등이 있다. 교원진수학교에 들어가서 2층복도에서 서쪽끝으로 가면된다. 연길시 9중역 에서 내린다. 큰길을 건너서 (9중) 서쪽에 골목길이 있다. 쭉 더 올라가서 골목길을 돌면 교원진수 학교가 보인다.  학생여러분들이 신심을 잃지 말고 대학시험에서 우수한 성적을 따내길 바란다 ! 8. 대학시험을 다시 보고 싶으면 다시 볼수 있다.  한족학생들 가운데서  여러해동안 신청하고 시험을 보는 학생들이 적지 않다.      
51    서양인들이 우리민족에 대한 긍정적평가 댓글:  조회:380  추천:0  2018-10-01
1. 마크 트롤로프는 그의 책 [The Church in Corea](1915)에서   한국인에 대한 인상을 말하면서 일본사람들보다는 어깨 위로 머리 하나 만큼은 크며 건강하고 잘 생겼다고 했다.   특히 천주교인들이 신앙을 위하여 순교하는 충실함을 찬양하고 있다. 또한   조국을 위해 일제에 항거하는 등 용기있는 백성이라고 언급하고 있다.   2. 정확하고 빠른 운동에서는   조선인은 일본인보다 강한 자립심과 자유로운 동작을 보이고 있고, 크기와 강한 점에서   중국인과 비슷하고 일본인보다는 우월하다.   국민의 좋은 특징과 질적 우월성을 비교하면 조선이 중국에 비해 단연 우위이다.  (독일인 Ernst Oppert 의 중)   3. 한국인은 참신한 인상을 주었다. 그들은 중국인과도 일본인과도 닮지 않은 반면에 ,   그 두 민족보다 훨씬 잘 생겼다. 한국인의 체격은 일본인보다 훨씬 좋다.... 한국인은 대단히 명민하고 똑똑하다.   한국인들은 스코틀랜드식으로 말해 '말귀를 알아듣는 총명함'를 상당히 타고 났다.   외국인 교사들은 한결같이 입을 모아 한국인의 능숙하고 기민한 인지능력과 외국어를 빨리 습득하는 탁월한 재능, 나아가 중국인과 일본인보다 한국인들이 훨씬 좋은 억양으로 더 유창하게 말한다는 사실을 증언한다.  (영국인 이사벨라 버드 비숍의 중) . 전체적으로 볼 때 한국인은 잘 생긴 민족이다. 한국인의 얼굴은 타원형이고 정면에서 볼 때는 대체로 길지만,    옆 모습은 약간 오목하다. 코가 양미간에서 약간 평평하고 콧구멍이 넓기 때문이다.  송나라 사신이 본 고려인의 특징  ".... 인물과 의복은 비록 대략은 중국과 같지마는 고려인은 대개 머리에 침골(枕骨)이 없으나 중이 되어 머리를 깎아 버리면 침골없는 것이 보이는데 퍽 놀랍고 이상하다. 옛날 [진사(晉史)]에는, 삼한(三韓) 사람들은 갓난 아이를 곧 돌로 그 머리를 눌러 납작하게 만든다고 하였으나 옳지 않다. 대체로 종류와 타고난 기품에 따라 그렇게 (납작하게) 되는 것이지 반드시 돌 때문에 넙적해지는 것은 아닐 것이다. " ( [고려도경] 중에서 )       5. 한국인들의 일상적 표현은 당혹스러움을 느끼게 할 정도로 활기차다.   얼굴 생김새는 가장 잘 생긴 사람들을 기준으로 보아 힘이나 의지의 강인함보다는 날카로운 지성을 나타낸다.   한국인들은 확실히 잘 생긴 종족이다. 체격도 좋은 편이다. 성인 남자의 평균 신장은 163.4센티미터이다.   여자의 평균 신장은 확인할 수 없는데, 세상에서 제일 보기 흉한 옷 때문에 그 결점이 과장되는 여자들의 모습은 땅딸만하고 펑퍼짐하다. 남자들은 힘이 매우 세어서 짐꾼들에게 45킬로그램의 짐은 보통이다.   가족 생활은 대가족제이며 도덕적으로 지극히 건강하다. (이사벨라 버드 비숍의 위의 책 중)       6. 조선인은 대단한 지적 능력이 있으며 예리하고 탐구력이 있을 뿐만 아니라   결단력을 갖춘 자랑할만한 민족. 조선은 위대한 가능성의 나라. (영국 선교사 알렉산더 윌리엄슨의 글 (1870) )   10. 근사한 기후, 풍부하지만 혹독하지는 않은 강우량, 기름진 농토, 내란과 도적질이 일어나기 힘든 훌륭한 교육.   한국인은 길이 행복하고 번영할 민족임에 틀림없다.    협잡을 업으로 하는 관아의 심부름꾼과 그들의 횡포, 그들의 악행이 강력한 정부에 의해 줄어들고 소작료가 적정히 책정되고 수납된다면 반드시 그러할 것이다...... 여행자들은 한국인의 게으름에 많은 느낌을 가진다.   그러나 러시아령 만주에서의 한국인들의 에너지와 근면함 그리고 그들의 검소하고 유족하고   안락한 집의 가구들을 보고 난 후에 나는 그것이 기질의 문제로 오해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모든 한국 사람들은 가난이 그들의 최고의 방어막이며, 그와 그의 가족에게 음식과 옷을 주는 것 이외에 그가 소유한 모든 것은 탐욕스럽고 부정한 관리들에 의해 빼앗길 것이라는 사실을 안다. 관리들의 수탈이 아주 견딜 수 없게 되고, 생존할 수 있는 최소한의 수입마저도 빼앗겼을 때에만 한국의 농민들은 폭력을 통한 절망적인 방법에 의지하게 된다.... ...   한국인들은 어떤 행정적인 계기만 주어지면 무서운 자발성을 발휘하는 국민들이다.  (이사벨라 버드 비숍)    11. 마을마다 북과 나팔, 피리, 몇 개의 솥 뚜껑이 있어서, 흔히 여름철의 고달픈 노동 시간 중에   한참 동안 일손을 멈추고 힘껏 합주하여 피로를 푼다.....   조선 사람의 커다란 미덕은 인류애 법칙을 선천적으로 존중하고 나날이 실행하는 것이다.    여러 가지 동업 조합이나 특히 친척이 서로 보호하고 서로 원조하고 서로 의지하고 서로 부조하기 위해 긴밀히 결합된 단체를 이루고 있다. 그러나 이 동포 감정은 혈족 관계와 조합의 한계를 넘어 확대되어 간다.   상호부조와 모든 사람에 대한 혼현한 대접은 이 나라 국민성의 특징인데, 속직히 말하여 그런 특징은 조선 사람을 우리 현대 문명의 이기주의에 물든 여러 국민들보다 훨씬 우위에 서게 하는 것이다.  ( 프랑스 신부 달레(C.C. Dallet)의 중 )     12. 조선인은 일반적으로 모나지 않고 상냥하며 남에게 순종을 잘하는 성품을 갖고 있다.   그들은 중국어를 이해하며 학문을 좋아하고 음악과 춤에 천품을 지니고 있다.   그들의 고운 마음씨는 예나 다름이 없어 다른 민족의 모범이 되기에 넉넉하다.  (프랑스 선교사이며 지리학자인 뒤 알드(Du Halde)의 글)     13. 아시아 민족 중에서 조선인보다 더 음악에 대하여 열렬한 애호심을 가진 민족은 없을 것이다. 군부의 어느 대신이 손풍금의 연주에 감동하여 평소의 엄숙한 태도를 던져버리고 박자에 맞추어 춤을 추고 노래를 불렀다. (오페르트) * 우리민족은 예로부터 어느 민족보다 노래부르기를 좋아한다. 그 이유를 전문가들은 우리 전통사회가 드물게 보는 억압적인 사회였기에 물리적으로 감당할 수 없는 압력을 정서적으로 발산시키는 수법으로 노래가 이용됐다는 이론을 든다. 한이나 원을 스스로 풀어야 하는 성격 때문에 우리 민족은 노래 중에서도 독창이 발달했고 그 때문에 밀폐된 공간에서 혼자 미친듯이 악을 쓸 수 있는 노래방이 폭발적 인기를 누린 것이다.     ". .... 한국은 기대 이상이었다. 한국에 있게 된 것이 만족스러운 가장 큰 이유는 '한국은 내가 가본 나라 중에서 가장 노래를 많이 부르는 나라'라는 것이다. 나는 핀란드 스웨덴 덴마크 러시아 뉴질랜드 일본 태국 베트남 영국 아일랜드 등 여러 나라에서 살았고 여행도 해보았다. 그러나 어떤 나라에서도 모든 사람들이 이처럼 노래를 잘하는 경우는 보지 못했다. 한국인들은 언제 어느 곳에서라도 노래를 부를 자세가 되어있다. 혼자서도 부르고 여럿이 같이 부르기도 한다. 라디오를 따라 흥얼거릴 때도 있고 텔레비젼 가요 프로그램을 보면서 같이 부를 때도 있고, 길을 걷거나 차를 운전하면서 노래를 부른다. 5년 동안 근무한 일본에서도 동료들이나 친구들과 함께 자주 가라오케에 가곤 했다. 몇몇 대회에 나가 상을 탄 적도 있고 텔레비젼에 출연한 일도 있다. 그런데 거기에는 뭔가 한 가지 빠진 것이 있다.   일본인들은 한국인과 같은 '노래하는 사람들'이 아니라는 것이다. 한국 사람들은 노래하기 위해 사는 것 같은데 일본 사람들은 그렇지는 않다....... 정말 한국인은 어디서나 노래를 부른다고 생각지 않을 수 없다. 박찬호 선수가 공을 던질 때도 노래를 할까? 잠실 야구장에 가서도 관중들이 응원하는 광경에 감동받았다. 야구장에서 관중들이 얼마나 노래를 많이 부르는지, 도대체 이 사람들이 노래하러온 것인지 야구를 보러온 것인지 분간이 안될 정도였다. 그러나 지금까지 들은 노래 중 가장 놀라운 것은 일요일 명동성당 미사에 갔을 때 들은 합창이다. 미국의 성당에서 다 같이 노래하는 것은 대개 억지로 하는 일 같은 것으로 하고 싶지 않지만 해야 하는 일같지만한국 카톨릭 신자들이 노래하는 것은 진짜로 노래하는 것이다. 내가 그 자리에서 느낀 것은 그들이 정말로 그곳에 있고 싶어 하고 행복해하고 있다는 것이다. 바로 그런 의미일까. 한국인들은 행복하기 때문에 노래를 부르는가. 한국을 떠나기 전에 누군가 이 의문을 풀어주었으면 좋겠다."  (주한 美 공보원 공보관 패트릭 리네핸. 주간조선 97.8.7일자)     14. 조선 사람들은 양반이나 서민이나 활쏘기를 좋아한다. 정부는 이 운동이 훌륭한 사수를 길러내는 하나의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하여 장려하고 있다. ..... 조선인들은 유약하다거나 비겁하지 않다. 신체의 단련이며, 활쏘기, 사냥에 많은 취미를 가지고 있고, 피로 앞에 굴복하지 않는다.  (위 달레 신부의 글 중 )   15. 남자들은 석전(石戰)을 매우 진지하게 하기 때문에 여기서 잠깐 언급할 필요가 있겠다. 이른 봄이 되면 서로 적수인 두 마을 사람들은 얼어붙은 들판에 모여 어느 편이 힘이 센지를 겨루는 시합을 한다. 머리에 새.끼줄로 만든 헬멧을 쓰고 곤봉으로 무장한 선발대가 중립 지대를 가로 질러 상대편에게 덤벼들면 후방에서 방어를 하고 있던 사람들은 언덕을 달려 내려가 상대편 마을 사람들을 향해 돌팔매질을 한다. 이들은 돌팔매질을 능숙하게 하기 때문에 돌팔매질은 대단한 위력을 발휘한다......일반적으로 이러한 실감나는 싸움 끝에는 몇몇의 사망자와 심한 부상자들이 많이 생긴다. 내가 조선에 도착한 지 얼마 안 되었을 때다. 이러한 싸움이 벌어진 후, 전두골의 두개골판이 부숴져 뇌가 들여다 보이도록 심하게 다친 한 남자가 나를 찾아 왔다. (헐랭-_-;;;;;다이나믹) ( 의사, 외교관이었던 H. A. 알렌의 중) 16. 조선에서 내가 처음으로 한 절단 수술은 호랑이의 공격을 받은 어느 조선인의 팔을 절단하는 일이었다. 말할 것도 없이 그것은 조선에서 처음으로 행한 절단 수술이었다. 그 환자는 팔꿈치 위쪽의 팔뼈가 물려 살이 썩고 있었다. 그러나 다행히도 건강하게 회복되어 그 환자의 친구들은 무척 놀라워했다. 그는 호랑이와 외국인 의사로부터 살아서 돌아갔지만, 이제는 팔 없이 조상에게 가야 할 형편이었다. (알렌의 글 중 )   17. 한국에서 호환이나 금에 관한 이야기만큼 많은 화제거리가 있을까 싶다. 한국은 금생산지로서 자부심이 대단하며 금부스러기들을 마치 금의 사태가 나기라도 한 것처럼 이야기 한다. .... 호랑이와 귀신에 대한 공포 때문에 사람들은 밤에는 거의 여행하지 않는다. 관리의 신분증을 가진 사람들이 부득이 밤에 여행해야 할 경우에는 마을에 들러 횃불가진 사람들의 호위를 부탁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야행할 경우 길손들은 보통 몇몇이 서로를 끈으로 묶고 등불을 밝히고 횃불을 흔들며, 고함을 지르고 꽹과리를 치며 길을 간다. 한국 사람의 호랑이에 대한 공포는 너무나 유명해서 '한국 사람은 일년의 반을 호랑이를 쫓느라 보내고 일년의 나머지 반을 호랑이에게 잡아먹힌 사람의 문상을 가느라 보낸다'는 중국 속담이 거짓말이 아님을 알 수 있다. (비숍 여사의 글 중 )   18. 사람이 수백 명이나 살고 있는 꽤 큰 마을에서 나는 벌써 여러 번이나 키가 서로 틀리지만 나무로 만든 막대기가 여러 개 길가에 서 있는 것을 본 일이 있는데, 과연 이것은 특별한 관심을 끌지 않을 수 없는 것이었다. 그런데 내가 이것을 자세히 보았을 때 나의 놀라움은 얼마나 컸던가! 자세히 알고 보니 이것은 바로 동리의 우상신이었으며, 사원 혹은 기도소를 대신하는 것이었다. 더구나 이것을 보호할 생각이라고는 하나도 없이 행길 가의 땅바닥에 그냥 박아 놓았을 뿐이지 그 이상은 아무 의식도 갖추지 않고 있었다. 키가 대강 두 자에서 네 자 가량 되는 통나무 토막에 하느라고 하였다는 장식이라는 것은 다음과 같았다. 사람들이 그 나무 껍질을 벗기고 그 위쪽 끝에다가 가장 원시적인 기술로 기분 나쁘게 찡그린 얼굴을 새긴 것이 곧 모든 장식이다. ( 오페르트)   19. 한국은 유교로부터 윤리를, 불교를 통해 미래의 소원을, 그리고 일상 생활에서 병이나 초상 등 민감한 사안이 발생했을 때는 무속 신앙에 의존한다. 동시에 여러 가지 종교를 무리 없이 포용하는 그들의 삶은 인상적이다.  (한국을 방문한 프랑스 학자)   20. 한국 사람들은 과음하는 관습이 유난스러워서 주정뱅이들이 보이지 않는 날이 거의 없었다   관찰한 결과로는 취해버리는 것은 한국인들의 독특한 특징이다라고 단언할 수 있다. 그리고 이것은 그리 품위를 떨어 뜨리는 일도 아니다. 한국에서는 어떤 사람이 이성을 잃을 정도로 곡주를 마신다 하더라도 누구도 그를 짐승으로 여기지 않는다.... 한국인이 술을 좋아하는 첫번째 원인은 아마 도시에서조차도 차를 사용하는 일이 거의 전무하다는 것과 사치스러운 청량음료들이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는 것을 듯하다. 아마도 식수로 쓰는 물이 훌륭해서 대부분 그냥 먹을 수 있는 탓일 것이다. 농부들은 식사 후에 뜨거운 숭늉을 마시며, 꿀물은 사치품으로 생각하고, 잔치 같은 경우에는 귤 껍질이나 생강에서 우려낸 액체를 마신다. 귤껍질을 말리는 것은 한국 주부들의 큰 일 중의 하나이다. 모든 초가집 지붕에는 말린 귤 껍질들이 고드름처럼 매달려 있다. (비숍 여사)   고려시대 음주 문화  " 고려인들은 술을 좋아하되 좋은 술은 얻기가 어렵고, 서민들이 마시는 것은 맛도 싱겁고 빛깔도 탁한데도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맛있게 마신다." ( 宋의 사신 서긍의 [고려 도경] 중에서 )     21. 동북 아시아 지방에 있는 주택에는 고래가 있다. 고래는 관(管)으로 된 일종의 화덕으로서 감자를 굽듯 사람을 굽는다. 서양 사람들이 벽돌로 침대를 만들고 그 밑에 발을 따뜻하게 하는 난로를 설치한 것과 똑 같다. 집의 한쪽 끝에 있는 아궁이로부터 다른쪽 끝의 굴뚝에 이르기까지 연관(煙管) 위를 벽돌이나 구들로 덮는다. 그래서 부엌에서 주전자의 물을 끓이고 고기를 굽는 불은 저쪽 방 안에서 앉아 있거나 자고 있는 사람을 따뜻하게 하는 데 사용된다. 다만 불을 때지 않으면 방이 차갑게 식고 밑불을 죽이면 열을 지속시킬 수 없다는 애로가 있다.  (W.E. Griffis의 중)     22. 농부나 일꾼들이 사는 집이 아무리 누추하다 하더라도 항상 깔끔한 작은 침실이 딸려 있는데, 진한 갈색의 유지가 발라져 있는 구들과 시멘트로 된 방바닥은 하루에 두 번씩 밥을 하느라고 때는 불 때문에 항상 따뜻하다.   이러한 점에서 보면 이들은 이웃 나라 사람들보다 더 편하게 산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일본의 집들은 춥기로 유명하고, 유일한 난방 시스템은 손가락을 따뜻하게 하는데 사용되는 화로가 전부이며, 또 중국의 집들은 아주 추운 겨울에도 따뜻한 법이 없기 때문이다. 중국인들이 사용하는 한가지 난방 시스템은 북쪽 지방에서 사용되는 식으로 불에 달군 돌 이외에는 집을 따뜻하게 하는 방법이 없다. 그러나 중부의 가옥들은 매우 추울 경우에도 집이 전혀 따뜻하지 않아 사람들은 몸을 따뜻하게 하기 위해 그저 옷을 더 껴입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영국인 여행가인 헨리 노먼은 조선을 여행하는 동안 놀랍고 아름다운 이 나라를 매우 칭찬하였으며, 베이징을 방문한 후에 조선의 수도인 서울은 베이징과 비교하면 천국이라고 쓰곤 했다.  (알렌의 견문록 중 )   23. 조선인들이 등으로 크고 무거운 짐들을 쉽사리 운반할 수 있다는 것에는 벌써 주목을 하였지만, 이곳 공주(公州)에서는 운반하는 짐의 무게가 차원이 달라 두눈을 의심할 지경이었다. 하지만 조선인들의 짐을 운반하는 기술에는 수천년의 경험이 어려 있다. 최소한의 힘을 들여 최대한의 무게를 운반하는 비결은 그들에게는 더 이상 비결이라 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들의 지게는 아주 이상적으로 고안이 되어 있어서, 엉덩이와 등, 어깨에 무게를 고르게 전달한다. 이런 이유로 다리만 지탱할 수 있는한 엄청난 짐을 운반할 수 있는 것이다. 조선인을 빼놓고는 이 방법을 착안한 민족이 없다.   세계에서 가장 운반력이 강한 중국인과 폴리네시아인들의 경우, 어깨 위에 걸친 막대의 양쪽에 짐을 걸고 무게 중심을 맞추는데, 만약에 짐이 분할할 수 없는 성질의 것일 때에는 막대의 다른 한편에 무게가 같은 물건을 걸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다. 또한 운반하는 데 넓은 공간이 필요해서, 이렇게 운반하는 사람을 지나칠 경우, 이 사람이 갑자기 방향을 틀 때는 운반대에 죄없이 한 대 맞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그러나 지게의 경우는 훨씬 간단하다........ 이런 원시적인 방법으로 대량의 짐을 장거리 운반하는 능력과 엉망인 도로 사정은 코레아가 수백 년 동안 대부대의 행상을 갖게 된 원인이 되었다. (스웨덴 기자 아손 그렙스트의 중 )     26. 남편들이 계속 흰 옷을 고집하는 한 빨래는 한국 여인들의 신산한 운명과도 같은 것이다. 이런 냄새나는 하천에서, 궁궐 후원의 우물에서, 전국 방방 곡곡의 모든 물웅덩이에서, 아니 주택 밖 실오라기만한 개울이라도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한국의 여인들은 빨래를 하고 있다. 어떤 빨래감은 실을 뽑아 다시 꿰매야 하며, 또 어떤 빨래감은 부뚜막에서 적어도 세 번은 삶아야한다. 표면이 울퉁불퉁한 나무판에 억척스럽게 문지르거나, 판판한 돌 위에 놓고 무거운 방망이로 힘겹게 두드려야 한다. 그런 다음에 이것들을 들고가 빨랫줄에 널어 말린다. 빨래가 다 마르고 난 뒤에는 다시 다듬잇돌에 올려놓고 둥근 나무 방망이로 두꺼운 공단처럼 광택이 날 때까지 한없이 두드린다. 한국의 여인들은 빨래의 노예다. 서울의 깊은 밤, 그 괴괴한 정적을 깨뜨리는 유일한 소리가 있다면 한밤내 잠 못 자고 다닥 빨래감을 두드리고 있는 다듬이 방망이의 그 쓸쓸한 소리이다. (비숍 여사의 글 중)   27. 옷은 특히 모시 옷일 경우에는 다림질하는 대신에 비단과 같은 광택이 나도록 하기 위해 다듬이질을 한다. .... 네개의 방망이가 내는 율동적인 소리는 매우 기이하여 한번 들으면 쉽게 잊혀지지 않는다.... 은둔 생활을 하는 조선의 여인들은 인내성이 강하지만, 극단적인 상황에 몰리면 일변하여 매우 광포해지기 때문에 생각하기조차 무시무시하다. 그때 다듬이 방망이는 무시하지 못할 믿음직한 무기가 되며, 남자들도 그 방망이를 무서워한다.. (알렌의 글 중)       참고6> 조선민족과 흰 옷  ① 고대 한국인들도 흰 옷을 즐겨 입었던 것으로 보인다. 부여인들은 흰 옷을 숭상하여 흰 베로 만든 소매가 큰 두루마기와 바지를 입었다. 이러한 풍습은 고구려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중국문헌에는 신라인들이 흰색 옷을 숭상했다는 사실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그리고 백제에 대해서도 의복이 청결하다는 점을 일부러 밝혀놓고 있다. 이를 통해 우리 민족이 흰 옷을 즐겨 입는 것은 밝고 깨끗하고 우아한 것을 좋아하는 우리 민족의 정서가 의복 생활에 반영된 것임을 알 수 있다.   ② 프랑스 캐주얼 브랜드 [라코스테]의 국내 라이선스를 갖고 있는 (주)서광이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한국인이 가장 좋아하는 옷 색깔은 하얀색이다. 국내에 내놓은 45개 색상 라코스테 셔츠 중에서 지난해 판매율이 가장 높은 것이 [흰 색]으로 28.7%를 차지했다. 2위는 빨강 7%, 이어 하늘색(6.8%), 검정(6.4%), 밝은 핑크(6%), 짙은 청색(5%), 연두색(4.6%), 베이지색(4.4%), 노랑(2.7%) 순이었다. 이에 비해 유럽인은 짙은 청색(네이비 블루)를 즐겨 입는다. (조선일보 97.5.27일자    29. 모자를 쓰지않은 한국인의 모습을 생각할 수 없다. 모자의 종류도 수천종에 이를 것으로 추정된다.... 한국은 모자 왕국이다. 세계 어디서도 이렇게 다양한 모자를 지니고 있는 나라를 본 적이 없다. 공기와 빛이 잘 통하고 여러 용도에 따라 제작된 한국모자의 패션을 파리인들은 꼭 알아둘 필요가 있다고 본다. ( 프랑스인의 기록 )    1877년 영국 화보지 그래픽지 [조선의 모자]라는 특집 다룸.   30. 영국인 여행가는 신변보호를 위해 경호원을 쓰는 대신 한국인들이 가장 호기심을 갖는 서양의 잼, 통조림, 빵 등을 소지하였으며, 위험한 상황이 닥칠 때마다 이것들을 보이며 어려움을 돌파했다. 특히 조선인들은 성냥에 매료돼 서로 성냥을 켜보려고 몰려들기도 했다. 이 덕분으로 조선의 지방 여행을 안전하게 마칠 수 있었다.  ( 영국의 화보잡지 [그래픽] 1888년 12월 22일자)   31. 사당에서 정상을 올려다 보면 가슴이 사무치도록 아름다운 광경이 펼쳐진다. 구비구비 이어진 숲의 물결, 시냇물의 아스라한 반짝임, 구릉의 완만한 선들, 그 위로 해발 1829미터가 넘는 금강산에서 가장 높은 산봉우리가 솟아 있었다. 아, 나는 그 아름다음, 그 장관을 붓끝으로 표현할 자신이 없다. 진정 약속의 땅 ( A fair land of promise ) 인저! 진정코 !  (비 숍 여사)     32. 러시아와 일본이 한국의 운명을 놓고 서로 대결한 상태에 , 내가 한국을 떠나게 된 것은 매우 유감스럽다. 내가 처음에 한국에 대해서 느꼈던 혐오감은 이젠 거의 애정이랄 수 있는 관심으로 바뀌었다. 이전의 어떤 여행에서도 나는 한국에서보다 더 섭섭하게 헤어진 사랑스럽고 친절한 친구들을 사귀어보지 못했다. 나는 가장 사랑스러운 한국의 겨울 아침을 감싸는 푸른 벨벳과 같은 부드러운 공기 속에서 눈 덮인 서울의 마지막 모습을 보았다. 다음날 영국 정부의 작은 기선인 상하이행 헨릭호를 타고 무자비하고 엄혹한 북풍에 실려 제물포를 떠났다. 그리고 헨릭호가 강 위로 천천히 증기를 발산하며 움직일 때, 옛스러워 흥취있는 한국의 국기는 나에게 말할 수 없는 감회와 의문들을 자아내었다. (비 숍 여사)     33. “‘코리아’ 민족은 양반들뿐만 아니라 가장 신분이 낮은 사람 들조차도 귀족의 티가 흐른다.  체격과 외모 면에서도 일본인, 중국인들과 비교해 매우 귀족적이다. 특히 여성들은 일본, 중국 여성들보다 훨씬 미모가 뛰어나다. 또한 머리 전체를 뒤로 땋아 넘 긴 여성들의 머리 스타일은 헝가리 여성들의 머리 스타일과 매우 비슷하여 퍽 인상적이었다.” (헝가리 민족학자 바라소시 1929년 '코리아..'펴내)  
50    역사드라마 목록 "사극史劇으로 역사를 배워요~ " 댓글:  조회:618  추천:0  2018-09-25
역사 시대별 드라마 목록 삼국 ~ 남북국 시대 CE 5세기 이전 차례 제목 년대 핵심인물 주연배우 제작년도 방송사 1 주몽朱蒙(고구려) 기원전  주몽, 소서노, 대소, 금와왕 송일국, 한혜진, 김승수, 전광렬 2006년 MBC 2 바람의 나라 风之国(고구려) 4년~28년 무휼, 연(해씨 부인), 도진, 유리, 대소 송일국, 최정원, 박건형, 정진영, 한진희 2008년 KBS2 3 왕녀 자명고 王女自鸣鼓(고구려) CE 1세기 초반 자명공주, 낙랑공주, 호동, 대무신왕, 매설수 정려원, 박민영, 정경호, 문성근,  성현아 2009년 SBS 4 김수로金首露(가야) CE 1세기 초반 김수로, 허황옥, 정견비, 신귀간, 이진아시 지성, 서지혜, 배종옥, 유오성, 고주원 2010년 MBC 5 근초고왕近肖古王(백제) 341년~375년 근초고왕, 부여화, 고국원왕, 진승, 해건, 위홍란 감우성, 김지수, 이종원, 안재모, 이지훈, 이세은 2010년 KBS1 6 태왕사신기太王四神记(고구려) CE 4세기 후반 담덕, 서기하, 수지니, 연호개, 연가려, 대장로 배용준, 문소리, 이지아, 윤태영, 박상원, 최민수 2007년 MBC 7 광개토태왕广开土(大)太王(고구려) CE 4세기 후반 담덕, 고운, 모용보, 도영, 약연, 아신 이태곤, 김승수, 임호, 오지은, 이인혜, 박정철 2011년 KBS1 CE 5세기 이후   제목 년대 핵심인물  주연배우  제작년도 방송사 1 제왕의 딸 수백향帝王的女儿(백제) CE 6세기 초반 수백향/설난, 설희, 명농, 진무 서현진, 서우, 조현재, 전태수 2013년 MBC 2 서동요薯童谣(백제,신라) CE 6세기 후반 무왕, 선화공주, 아좌태자, 사택기루 조현재, 이보영, 정재곤, 류진 2005년 SBS 3 선덕여왕善德女王(신라) CE 7세기 초반 덕만, 미실, 비담, 김유신, 김춘추 이요원, 고현정, 김남길, 엄태웅, 유승호 2009년 MBC 4 삼국기三国记 CE 7세기 중반 연개소문, 김유신, 무열왕, 의자왕, 계백 조경환, 서인석, 송영창, 길용우, 유동근 1992년 KBS1 5 연개소문渊盖苏文(고구려) 598년~668년 연개소문, 이세민, 양제, 영류왕 유동근, 이태곤, 서인석, 김갑수, 최종환 2006년 SBS 6 칼과 꽃剑与花(고구려) CE 7세기 초반 무영, 연충 , 영류왕, 연개소문 김옥빈, 엄태웅, 김영철, 최민수 2013년 KBS2 7 계백阶伯(백제) CE 7세기 중반 계백, 은고, 의자왕, 사택왕후 이서진, 송지효, 조재현, 오연수 2011년 MBC 8 대왕의 꿈大王之梦(신라) CE 7세기 중반 태종무열왕, 김유신, 선덕여왕, 승만왕후 최수종, 김유석, 홍은희[1], 이영아 2012년 KBS1 9 대조영大祚荣(발해) 645년~719년 대조영, 이해고, 설인귀, 초린, 숙영 최수종, 정보석, 이덕화, 박예진, 홍수현 2006년 KBS1 10 해신海神(신라) CE 8세기 후반 장보고, 자미부인, 염장, 정화 최수종, 채시라, 송일국, 수애 2004년 KBS2 후삼국 ~ 고려 시대 고려 건국 ~ 천리장성   제목 시대적 배경 핵심인물  주연배우  제작년도 방송사 1 태조 왕건 太祖王建 870년 ~ 936년 왕건, 궁예, 견훤, 강비, 종간 최수종, 김영철, 서인석, 김혜리, 김갑수 2000년 KBS1 2 제국의 아침 帝国之晨 943년 ~ 975년 광종, 대목왕후, 정종, 균여 김상중, 전혜진, 최재성, 정승호 2002년 KBS1 3 달의 연인 - 보보경심 려 月之恋人 步步惊心 丽 태조 ~ 광종 광종, 해수, 정종, 왕욱, 최지몽 이준기, 이지은, 홍종현, 강하늘, 김성균 2016년 SBS 4 빛나거나 미치거나 945년 ~ 960년 정종, 광종, 쌍기, 대목왕후, 왕욱 류승수, 장혁, 오연서, 이하늬, 임주환 2015년 MBC 5 천추태후 千秋太后 955년 ~ 1031년 천추태후, 김치양, 강조, 강감찬, 성종 채시라, 김석훈, 최재성, 이덕화, 김명수 2009년 KBS2 무신정변 ~ 대몽 항쟁 순번 제목 년대 핵심인물 주연배우  제작년도 방송사 1 무인시대 武人时代 1170년 ~ 1219년 이의방, 정중부, 경대승, 이의민, 최충헌 서인석, 김흥기, 박용우, 이덕화, 김갑수 2003년 KBS1 2 무신 武臣 1215년 ~ 1268년 김준, 송이, 최우, 최양백, 최충헌, 김약선 김주혁, 김규리, 정보석, 박상민, 주현, 이주현 2012년 MBC 원 간섭기 ~ 조선 건국   제목 년대 핵심인물 주연배우 제작년도 방송사 1 신돈 辛盹 1348년 ~ 1374년 신돈, 공민왕, 노국공주, 반야 손창민, 정보석, 서지혜 2005년 MBC 2 개국 开国 1351년 ~ 1392년 공민왕, 이성계, 노국공주, 최영, 정몽주 임혁, 임동진, 선우은숙, 신구, 송재호 1983년 KBS 3 신의 神医/信义 고려 공민왕 최영, 유은수, 기철, 공민왕, 노국공주 이민호, 김희선, 유오성, 류덕환, 박세영 2012년 SBS 4 대풍수大风水 공민왕 ~ 조선초기 지상, 이성계, 이정근, 해인, 반야 지성, 지진희, 송창의, 김소연, 이윤지 2012년 SBS 5 정도전郑道传 1374년 ~ 1398년 정도전, 이성계, 이인임, 최영, 정몽주, 이방원 조재현, 유동근, 박영규, 서인석, 임호, 안재모 2014년 KBS 6 육룡이 나르샤 六龙飞天 고려말 ~ 조선초기 이성계, 정도전, 이방원, 이방지, 무휼, 분이 천호진, 김명민, 유아인, 변요한, 윤균상, 신세경 2015년 SBS 7 왕은 사랑한다 王在相爱 고려 충선왕 왕원, 은산, 왕린 임시완, 임윤아, 홍종현 2017년 MBC 조선 ~ 대한제국 시대 위화도 회군 ~ 을묘왜변   제목 년대 핵심인물 주연배우 재작년대 벙송사   용의 눈물 龙之泪 1388년 ~ 1422년 이성계, 이방원, 원경왕후, 정도전, 양녕대군 김무생, 유동근, 최명길, 김흥기, 이민우 1996년 KBS1 2 조선왕조 오백년 朝鲜王朝五百年 1392년 ~ 1910년 이성계, 세종, 선조, 인조, 숙종 김무생, 한인수, 현석, 유인촌, 강석우 1983년 MBC 3 대왕 세종大王世宗 1409년 ~ 1446년 세종, 태종, 원경왕후, 황희, 소헌왕후 김상경, 김영철, 최명길, 김갑수, 이윤지 2008년 KBS2 4 뿌리깊은 나무树大根深 1409년 ~ 1446년 세종, 강채윤, 소이 한석규, 장혁, 신세경 2011년 SBS 5 장영실张英实 태종~세종 장영실, 세종, 태종, 소현옹주, 장희제 송일국, 김상경, 김영철, 박선영, 이지훈 2016년 KBS 6 한명회韩明浍 1450년 ~ 1506년 한명회, 세조, 인수대비, 김종서, 단종 이덕화, 서인석, 김영란, 임동진, 정태우 1994년 KBS2 7 공주의 남자公主的男人 1452년 ~ 1468년 김승유, 이세령, 경혜공주, 신면, 정종 박시후, 문채원, 홍수현, 송종호, 이민우 2011년 KBS2 8 왕과 비王和妃 1452년 ~ 1506년 세조, 인수대비, 단종, 연산군, 한명회 임동진, 채시라, 정태우, 안재모, 최종원 1998년 KBS1 9 인수대비仁粹大妃 1452년 ~ 1506년 인수대비, 정희왕후, 세조, 한명회, 도원군, 폐비 윤씨 함은정, 채시라, 김미숙, 김영호, 손병호, 백성현, 진지희, 전혜빈 2011년 JTBC 10 대군 - 사랑을 그리다 가상의 중세 조선 이휘, 이강, 성자현, 대비 심씨, 양안대군 윤시윤, 주상욱, 진세연, 양미경, 손병호 2018년 TV조선 11 파천무 1452년 ~ 1457년 수양대군, 김종서, 설리, 정인지, 한명회 유동근, 이순재, 김혜선, 이신재, 주호성 1990년 KBS2 12 왕과 나王与我 1452년 ~ 1506년 김처선, 폐비 윤씨, 성종, 정현왕후 오만석, 구혜선, 고주원, 이진 2007년 SBS 13 역적 : 백성을 훔친 도적逆贼:窃取百姓的盗贼 15세기 중반 ~ 1506년 아모개, 홍길동, 가령, 연산군, 숙용 장씨 김상중, 윤균상, 채수빈, 김지석, 이하늬 2017년 MBC 14 7일의 왕비七日王妃 신채경, 이역, 이융 박민영, 연우진, 이동건 KBS2 15 장녹수 1476년 ~ 1506년 연산군, 장녹수, 성종, 인수대비, 김자원 유동근, 박지영, 현석, 반효정, 정호근 1995년 KBS2 16 대장금大长今 1482년 ~ 1545년 서장금, 민정호, 중종, 최금영 이영애, 지진희, 임호, 홍리나 2003년 MBC 17 여인천하女人天下 1506년 ~ 1565년 정난정, 문정왕후, 윤원형, 경빈 박씨, 중종 강수연, 전인화, 이덕화, 도지원, 최종환 2001년 SBS 18 황진이黄真伊 조선 중종 황진이, 김정한, 부용, 김은호, 벽계수 하지원, 김재원, 왕빛나, 장근석, 류태준 2006년 KBS2 19 천명天命 조선 인종 ~ 명종 최원, 홍다인, 문정왕후, 이호 이동욱, 송지효, 박지영, 임슬옹 2013년 KBS2 20 옥중화狱中花 조선 명종 ~ 1565년 옥녀, 윤태원, 윤원형, 정난정, 문정왕후, 이환 진세연, 고수, 정준호, 박주미, 김미숙, 서하준 2016년 MBC 21 임꺽정林巨正 1522년 ~ 1562년 임꺽정, 이봉학, 박유복, 양주팔, 윤원형 정흥채, 차광수, 정규수, 이정길, 박근형 1996년 SBS 을묘왜변 ~ 병자호란   제목 년대 핵심인물 주연배우  재작년도 방송사 1 불멸의 이순신不灭的李舜臣 1554년 ~ 1598년 이순신, 원균, 선조, 도요토미 히데요시 김명민, 최재성, 최철호, 이효정 2004년 KBS1 2 서궁西宫 1583년 ~ 1623년 김개시, 인목대비, 광해군, 원표, 이이첨 이영애, 이보희, 김규철, 김보성, 서인석 1995년 KBS2 3 구가의 서 1570년대 ~ 임진왜란 이전 최강치, 담여울, 조관웅, 담평준, 박태서, 박청조 이승기, 배수지, 이성재, 조성하, 유연석, 이유비 2013년 MBC 4 왕의 여자王的女人 1591년 ~ 1623년 광해군, 김개시, 선조, 인목왕후 지성, 박선영, 임동진, 홍수현 2003년 SBS 5 동의보감东医宝鉴 1559년 ~ 1615년 허준, 예진, 유의태, 유도지, 다희 서인석, 이응경, 이순재, 최불암, 이경진 1991년 MBC 6 허준许浚 1559년 ~ 1615년 허준, 예진, 유의태, 유도지, 다희 전광렬, 황수정, 이순재, 김병세, 홍충민 1999년 MBC 7 구암 허준龟岩许浚 1559년 ~ 1615년 허준, 예진, 유의태, 유도지, 다희 김주혁, 박진희, 백윤식, 남궁민, 박은빈 2013년 MBC 8 천둥소리 1569년 ~ 1618년 허균, 광해군, 이이첨, 허난설헌 최재성, 김주승, 선동혁, 하다솜 2000년 KBS2 9 징비록惩毖录 1589년 ~ 1598년 유성룡, 선조, 광해군, 도요토미 히데요시 김상중, 김태우, 노영학, 김규철 2015년 KBS1 10 왕의 얼굴王的面孔 1589년 ~ 1608년 광해군, 선조, 김상궁, 김도치 서인국, 이성재, 조윤희, 신성록 2014년 KBS2 11 화정华政 1603년 ~ 1645년 광해군, 정명공주, 홍주원, 소성대비, 능양군 차승원, 이연희, 서강준, 신은정, 김재원 2015년 MBC 12 일지매一枝梅 조선 인조 일지매, 이화, 정란, 허균, 설화 장동건, 염정아, 임채원, 김동현, 박순애 1993년 MBC 13 일지매一枝梅 조선 인조 일지매, 변시후, 변은채, 봉순 이준기, 박시후, 한효주, 이영아 2008년 SBS 14 돌아온 일지매一枝梅归来 조선 인조 일지매, 여월희, 달이, 구자명, 백매 정일우, 윤진서, 김민종, 정혜영 2009년 MBC 15 탐나는도다 조선 인조 장버진, 박규, 윌리엄, 서린, 얀 서우, 임주환, 황찬빈, 이승민, 이선호 2009년 MBC 16 명가名家 조선 인조 최국선, 한단이, 김원일 차인표, 한고은, 김성민 2010년 KBS1 17 홍길동洪吉童 가상의 조선 홍길동, 이업, 임성중, 우용두 김석훈, 김상중, 이덕화, 이종원 1998년 SBS 18 쾌도 홍길동快刀洪吉童 가상의 조선 홍길동, 허이녹, 이창휘, 심수근 강지환, 성유리, 장근석, 박상욱 2008년 KBS2 19 전우치田禹治 가상의 조선 전우치, 이치, 홍무연, 강림, 이혜령 차태현, 유이, 이희준, 백진희 2012년 KBS2 20 야경꾼 일지巡夜人日志 가상의 조선 이린, 도하, 무석, 박수련, 조상헌, 사담 정일우, 고성희, 유노윤호, 서예지, 윤태영, 김성오 2014년 MBC 정축하성 ~ 신유박해   제목 년대 핵심인물 주연배우 재작년대 방송사 1 궁중잔혹사 - 꽃들의 전쟁宫中残酷史 1637년 ~ 1645년 조귀인, 인조, 김자점, 민회빈 강씨, 소현세자,봉림대군 김현주, 이덕화, 정성모, 송선미, 정성운, 김주영 2013년 JTBC 2 추노推奴/追奴 병자호란 이후 이대길, 송태하, 김혜원, 황철웅, 업복이 장혁, 오지호, 이다해, 이종혁, 공형진 2010년 KBS2 3 최강칠우最强七友 병자호란 이후 최칠우, 소윤, 흑산, 민승국 문정혁, 구혜선, 유아인, 전노민 2008년 KBS2 4 대명待命 조선 효종 봉림대군, 최명길, 임경업 김흥기, 김성원, 백일섭 1981년 KBS1 5 마의马医 조선 현종 백광현, 강지녕, 이명환, 장인주, 이성하 조승우, 이요원, 손창민, 유선 ,이상우 2012년 MBC 6 동이同伊 1681년 ~ 1725년 동이, 숙종, 장희빈(장옥정), 차천수, 서용기 한효주, 지진희, 이소연, 배수빈, 정진영 2010년 MBC 7 장희빈张禧嫔 1670년 ~ 1701년 장희빈(장옥정), 숙종, 인현왕후, 장희재 정선경, 임호, 김원희, 길용우 1995년 SBS 8 장희빈张禧嫔 1681년 ~ 1720년 장희빈(장옥정), 숙종, 인현왕후, 숙빈 최씨 김혜수, 전광렬, 박선영, 박예진 2002년 KBS2 9 장옥정, 사랑에 살다张玉贞为爱而生 조선 숙종 장희빈(장옥정), 숙종, 인현왕후, 숙빈 최씨 김태희, 유아인, 홍수현, 한승연 2013년 SBS 10 다모茶母 조선 숙종 (1692년) 장채옥, 황보윤, 장성백 하지원, 이서진, 김민준 2003년 MBC 11 장길산张吉山 조선 숙종 장길산, 묘옥, 이갑송, 이지용 유오성, 한고은, 정준하, 류수영 2004년 SBS 12 대박大发 조선 숙종~영조 숙종, 영조, 이인좌, 백대길, 담서, 숙빈 최씨 장근석, 여진구, 전광렬, 최민수, 임지연, 윤진서 2016년 SBS 13 대왕의 길大王之路 조선 영조 영조, 사도세자, 혜경궁 홍씨, 숙빈 최씨 박근형, 임호, 홍리나, 김영애 1998년 MBC 14 어사 박문수御史朴文秀 조선 영조 박문수, 영조, 이연희, 소화련 유준상, 조민기, 임지은, 한혜진 2002년 MBC 15 군주 - 가면의 주인君主假面的主人 가상의 조선 왕세자 이선, 한가은, 천민 이선, 김화군, 편수회 대목 유승호, 김소현, 김명수, 윤소희, 허준호 2017년 MBC 16 비밀의 문秘密之门 조선 영조~정조 이선, 영조, 서지담, 혜경궁 홍씨, 나철주 이제훈, 한석규, 김유정, 박은빈, 김민종 2014년 SBS 17 무사 백동수武士白东修 1742년~1778년 백동수, 여운, 황진주 , 유지선, 김광태 지창욱, 유승호, 윤소이 , 신현빈, 전광렬 2011년 SBS 18 이산李祘 1762년 ~ 1800년 이산(정조), 의빈 성씨, 영조, 박대수, 혜경궁 홍씨, 효의왕후, 홍국영, 정순왕후 이서진, 한지민, 이순재, 이종수, 견미리, 박은혜, 한상진, 김여진 2007년 MBC 19 왕도王道 조선 정조 홍국영, 정조, 혜경궁 홍씨, 정순왕후, 순지 김영철, 강석우, 정영숙, 김자옥, 박순애 1991년 KBS1 20 홍국영 조선 정조 홍국영, 정후겸, 수절녀 서씨, 여옥, 정조 김상경, 정웅인, 이태란, 정소영, 정재곤 2001년 MBC 21 바람의 화원风之画员 조선 정조 신윤복, 김홍도, 정향, 정조 문근영, 박신양, 문채원, 배수빈 2008년 SBS 22 거상 김만덕巨商金万德 조선 정조 김만덕, 정홍수, 오문선, 강유지, 할매 이미연, 한재석, 박솔미, 하석진, 고두심 2010년 KBS1 23 소설 목민심서 조선 정조 정약용, 비안, 정약전, 정조, 심환지 이진우, 김성령, 김규철, 김흥기, 임혁 2000년 KBS2 24 성균관 스캔들成均馆绯闻 조선 정조 이선준, 김윤희, 구용하, 문재신 박유천, 박민영, 송중기, 유아인 2010년 KBS2 25 한성별곡-정汉城别曲-情 1800년 박상규, 이나영, 양만오, 정조 진이한, 김하은, 이천희, 안내상 2007년 KBS2 26 정조암살미스터리-8일正祖暗杀之谜-8天 조선 정조 정조, 혜경궁 홍씨, 정약용 김상중, 정애리, 박정철 2007년 채널CGV 세도 정치 ~ 경술국치   제목 년대 핵심인물 주연배우 재작년도 방송사  1 상도商道 1803년 ~ 1840년 임상옥, 박다녕, 정치수, 박주명, 홍득주 이재룡, 김현주, 정보석, 이순재, 박인환 2001년 MBC 2 태양인 이제마太阳人 1837년 ~ 1900년 이제마, 설이, 구운영 최수종, 김유미, 유호정 2002년 KBS2 3 풍운风云 1857년 ~ 1898년 흥선대원군, 명성황후, 고종, 조대비 이순재, 김영애, 박칠용, 반효정 1982년 KBS1 4 명성황후明成皇后 1861년 ~ 1898년 명성황후, 고종, 흥선대원군 이미연, 최명길, 이진우, 유동근 2001년 KBS2 5 찬란한 여명灿烂的黎明 1863년 ~ 1895년 이동인, 김옥균, 박영효, 이하응, 민비 김갑수, 정보석, 이민우, 변희봉, 하희라 1995년 KBS1 6 조선총잡이朝鲜神枪手 개화기 박윤강, 정수인, 최혜원, 김호경, 최원신 이준기, 남상미, 전혜빈, 한주완, 유오성 2014년 KBS2 7 조선 과학수사대 별순검别巡检 개화기 강웅비, 김사율, 서은, 조달환, 홍법률 이기영, 정유석, 조안, 최규환, 이재포 2005년 MBC 8 별순검 시즌1别巡检1 개화기 강승조, 김강우, 여진, 배복근 류승룡, 온주완, 박효주, 안내상 2007년 MBC 9 별순검 시즌2别巡检2 개화기 진무영, 한다경, 선우현, 지대한 이종혁, 이청아, 박광현, 박원상 2008년 MBC 10 제중원济众院 개화기 황정, 유석란, 백도양 박용우, 한혜진, 연정훈 2010년 SBS 11 독립문独立门 조선 고종, 순종 고종, 이승만 박칠용, 서인석 1984년 KBS1 12 미스터 션샤인 Mr.Sunshine 조선 고종, 순종 유진 초이, 고애신 이병헌, 김태리 2018년 tvN 13 대망大望 가상의 조선 박재영, 윤여진, 박시영, 최동희 장혁, 이요원, 한재석, 손예진 2002년 SBS 14 해를 품은 달拥抱太阳的月亮 가상의 조선 허연우, 이훤, 양명, 윤보경 한가인, 김수현, 정일우, 김민서 2012년 MBC
49    조선족 민족교육사 (19세기말부터 문화대혁명까지) 댓글:  조회:607  추천:0  2018-07-30
1.19세기말의 민족교육 2.중화인민공화국 성립 초기 (1949년~1957년)의 민족교육 3.우파투쟁과 대약진시기의 민족교육 4.문화대혁명시기의 민족교육  1.19세기말 1883년,연변에서 최초의 조선인학당이 설립되였다.학당에서의 교육은 조선국내의 교육과  다른점 없이 ,어학공부는「史記」와 같은 漢書를 조선어로 음독하는 것이 였다. 1906년,룡정에서 연변 최초의 조선인학교로 불리우는 [瑞甸書塾(서전서숙)]을 李相卨(리상설 1870~1917 대한제국 황제 고종의 밀사 )선생님께서 설립하였다 .하지만 일본인이 설치한 統監府間島派出所의 감시와 방해가 강화되자 1908년에 문을 닫게 되었다. 1910년 日韓合併후,연변의 조선인 인수가 급속히 증가되였고 1926년 까지만 하여도 연변에는 400개( 일본인이 설립한 학교 포함)이상의 학교가 설립되였다. 중화민국,만주국 ,국공내전 시기의 교육사는 생략.   2.중화인민공화국 성립 초기 (1949년~1957년) 1949년1월31일,중국인민해방군이 북경에 입성하고,10월1일 중국인민공화국을 성립하였다. 그후 동북지역의 조선인교육은 [朝鲜族教育]으로 임명되였다.1950년8월,중화인민공화국 교육부는 소수민족학교에서는 중국어와 민족언어를 같이 배워줄  것을 제창하였다.이것은  少数民族二语言教育의 공식적시작이였다. 이와같은 중앙의 방침을 받아 ,东北教育部는 「一九五一年后期小学教育事业补助指示」에 의하여 ,민족학교의 중국어학습을 강화할것을 요구하였고 ,延边教育部는 중국어 수업의 시작을 초중1학년으로부터 소학교5학년으로 결정하였으며 수업시간은 매주일 3시간으로부터 매주일 4시간으로 변경하였다.또 중국어를 한어로 변경하였고 조선어는 「中国语」중의 한부분으로 결정하였으며 사용과발전의 권력을 보장하였다.동시에 조선족의 한어학습도 명확히 자리를 잡기 시작하였다   한어학습의 강화는 그때 당시의 수요도 있었다.1950년6월,조선전쟁이 발생되자,중공은 조선에 의용군을 보내 抗美援朝를 시작하였다.이로하여 중국어와 조선어을 통달하는 인재의 수요가 높아졋다.또한 연변의 조선족초급중학교필업생은 중국어를 배우지 못한채로 중국고급중학교에  입학하였으며,정부기관과 기업의 취직률이 낮은 것으로 한어학습 강화를 할수 밖에 없었다. 이로 한어교육의 강화를 위해 ,1950에 설립된 延吉县语文专门学校에서 소학교의 한어교사 배양을 진행하였으며 1954년에는 吉林省教育部는 延边朝鲜族师范学校에 한어반을 설립하여  ,고등소학교의 한어교사의 배양을  진행하였다.따라 1955년,연변대학에 한어학부를 설립하였다.하지만 조선족 한어학습강화에 대한  신중한 태도는 계속 남어있었다. 延边教育部의 1950년 사업총결에서는 는 리유로 부터 고 하였다. 이와같이 신중한로선으로부터 성급한로선으로 전환된 것은 「社会主义初级阶段의 완성」이 발표된 1956년이 였다.같은 해,연변자치주 교육부는 조선족에 대한 한어교육은  한족대학의 신청과 국내 회사 취업에 큰 영향을 준다는 리유로  한어수업의 시작을 소학교 3학년으로  결정하였다. 다음은 력사교육의 변화를 보자. 3.반우파투쟁과 대약진 1956년4월,모택동은 中共政治局会议에서 「여러가지 학술사상은 옳고 그름을 막론하고 제출해야할 것이며 당국은   간섭하지 않을 것이다」라는 백화제방,백가쟁명을 제창하였고,1957년2월에는 「인민내부의 모순을 정확히 처리하는 문제에 대하여」라는 등 회의를 통해 言者无罪를 강조하였다.이에 대응하여 조선족 지식인과 민주당파는 ,중국공산당은 비판,론과 분산된 조선족을 집중시키는 의 실시,등 을 요구하느 목소리가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각지방에서 공산당과 사회주의에 대한 비판소리가  끊임없이 나오자,모택동은 6월8일 인민일보에 「이건 대체 어떻게 된 것인가」를 제목으로 문장을 발표 하고,반우파투쟁을 시작하였다. 전술한 비판과 주장은 「조국의 분렬과 공산주의통일단결의 원칙을 파괴하려는 반역행위」로 되였고 ,발언자에게는 지방민족주의분자의 루명을 씌웠다.례를 들어 의 주장은 「한족을 중심으로 하는 민족단결의 강화는 제국주의의 침략을 방지하고,사회주의의 건설을 보장한다.」「어느 민족이든 한족과 타민족의 방조가 없이는 번영발전 할수없다 」의 인식하에 인민의 현실적 수요를 교려하지 않고 력사바퀴의 역회전을 음모하며,조선족인민을 각 민족과의 공동발전,공동번영의 길로부터 리탈하려한다고 반우파투쟁의 대상으로 삼았다. 반우파투쟁은 전국에서 55만명을 해구,투옥,로동개조에 몰아넣었다.이로하여 「지방민족주의분자」가 배제당한후,1958년에 시작된 대약진운동에서는 「민족간의 차이를 감소하고,공통점을 촉진하여야    공산주의의 발전이 가능하며,소수민족은 한족과 융합하지 않으면 않된다.」는 민족융합론이 머리를 들기시작하였다. 1958년 9월17일 ,  민족학교의 700명이상되는  교직원들은 모여서 「한어학습대약진회의」 를 열었고 ,민족학교의 수업언어를 한어로 하자는 운동을 전개하였다.대약진의 결과 ,조선족학교의 한어수업시작은 소학교 일학년까지 앞당겨 졌고 수업시간수는 1950년의 870시간으로부터 57년에는2300시간으로, 60년에 와서는 2688시간으로 급증가되였다.민족학교 필업생의 대학시험은 연변의 3개대학(연변대학,연변농학원,연변의학원)외에는 모두 한어로 시험을 봐야하여 조선어는 대학시험과목에서 최소되였다.료녕성에서는 한어대약진을 통해 1960년에 조선어 수업을 취소 하기도 하였다.   1963년 10월23일,국가교육부는 길림성 교육부가 작성한「朝鲜族中学63年~64年教科课程」에 대하여 ,초중에서의 조선지리「朝鲜地理」는 독립적인 과목으로 수업을 진행하는 것은 타당하지 않기에  「世界地理」의 범위에 넣어야 할것이며 따라 조선사「朝鲜史」도 「世界历史」의 범위에 넣어야한다고 지시했다. 이 지시는 조선족학생의 조국관념을 배양 하고 교민사상侨民思想의 앙양을 배격하기 위해서 라고 볼수있다. 중공은 건국후 라고 재삼 지적하였고,조선족학교에서는 중국주의교육과 국제주의교육의 실시를 가장 중요한 문제로 삼았다. 4.문화대혁명 1966년,중공중앙은 문화대혁명을 발동하였다.혁명에서 교육전체가 황페해지면서 민족교육도 큰 타격을 받게되였다.사회주의시기는 민족융합의시기라고 인식하면서, 민족문제의 존재를 부정하였다. 50년대에 설립한 민족교육부와 민족학교가 페지되였으며 번역기관도 페지되어 각종회의에서는 조선어번역이 없이 진행되였다. 따라 조선어에 한어어휘가 무질서하게  대량으로 사용되었다. 「민족융합의 혁명형식」으로 민족련합학교가 대폭 증가되었다.돈화현을 례를 들면 조선족소학교의 23%가페지되고, 45%가 한족학교와 융합되었다.조선족학교에서는 한족학교의 교육원칙을 그대로 받아들였으며,많은 교과서는 한어로 편집되었다. 학생에 대해서는 는 조선어무용론으로 소학교1학년으로부터 그뒤 10년기간의 조선어 시간수는 혁명전보다 1000시간이상 줄어들었다.는 사회적풍조로 ,적지않은 조선족부모들은 자식을 한족학교에 입학시켰다. (당시 한때 연길시에서는 50%이상이 한족학교에 입학하였다고 함) 연변이외의 조선족거주지역은 피해가 더욱 심했다.례를들면,장춘시 조선족중학교에서는 1970년부터 1974년 까지 조선어수업을 취소하였으며 ,흑룡강성치치하얼시 조선족중학교는 강제해산,탕원(湯原)현 7개조선족중학교는 농촌으로 강제이동되었다. 조선족학교의 최고봉인 연변대학은 「민족분렬주의을 실시하는 반동거점」으로 되었고「연변대학을 부셔버리자!」는 소리가 높아졌으며,많은 교수들은 하향 로동개조를 받았다. 문화대혁명은 사인방의 추방으로 끝났다.문화대혁명 기간 전국에서는 40만명이상의 사망자와 1억명이나되는 피해자가 나왔으면 ,연변자치주만 해도 억울한 죄명으로 사망한 자를 포함하여  3000명(대부분 조선족 ,자치주주장인 주덕해도 백두산문제로 박해를 받음 )이상의 간부와 교육자가 박해를 받았다. 문화대혁명이 끝나자 ,조선족학교에서는 민족언어교육을  다시 시작하였고,한어로 수업을 진행했던것을 다시 조선어로 복귀시켰으며, 1977년 조선어는 다시 대학시험과목으로 인증되였다.1980년 11월,조선족자치주 제2회 조선어문공작회의가 열렸고,조선어를 자치주 제일언어로 결정하였다. 중국동북지역에 이주해온 조선인의 교육은,반일교육으로 시작하여 ,항일전쟁,국공내전,조선전쟁을 거쳐 지금의 중국소수민족교육까지 한세기를 넘는 력사를 가지고있다.한세기가 넘는 민족교육은  모두 당시 사람들의 주체적선택으라고 말하기가 힘들다. 정확히 알고 ,섬세하게 느끼고 ,정확한 주체적선택을 내리자!
48    조선족인구 댓글:  조회:526  추천:0  2018-07-30
2010年全国人口普查 - 朝鲜族人口统计分析 2014-01-21 朴光星、肖人夫 민족문화의 숲 ♦ 数据可以给我们的感性的认识带来一个清晰路径的呈现。本文以年龄、性别、地区、职业等角度提供了较为准确的数据,可以看出优势在哪里、问题在哪里、不足在哪里。   2010年全国人口普查 - 朝鲜族人口统计分析 朴光星、肖人夫(中央民族大学社会学副教授) 2010년 제6차 전국인구보편조사 통계자료중 조선족부분에 대해 집중연구를 하고 있는 중앙민족대학 박광성 부교수가 놀라운 수치들을 본사에 제공했다.아래는 박 부교수가 제공한 수치와 그에 대한 그의 분석이다. 10년간 약 10만명 줄어 인구절대수감소 중국민족중 유일 2010년에 행해진 제6차 전국인구보편조사에서 조선족인구는 183만 929명으로 집계됐다. 2000년 제5차 전국인구보편조사에서 집계된 192만3842명보다 9만2913명이 줄어든 수치이다. 통상 인구의 증장은 증가률감소에서 절대수감소로 가려면 30~50년의 시간이 걸린다고 한다. 그런데 조선족인구는 1994년부터 감소추세를 보이기 시작하여 절대수감소가 확정되기까지 단 16년의 시간밖에 걸리지 않았다. 중국 56개 민족중 인구절대수감소민족은 조선족밖에 없다. 그 원인에 대해 박교수는 “이주,외국유출 등으로 기계적으로 증감된것이 주 요인이며 이는 인구증감법칙을 어겨 엄중히 파괴된것”이라고 분석했다. (도표1:2010년 조선족성별,년령별 인구정황)   2010年朝鲜族分年龄、性别人口状况 年龄组 男 女 合计 性别比 人数百分比(%) 0-4岁 28930 27177 56107 106.5 3.1 5-9岁 23746 22575 46321 105.2 2.5 10-14岁 26218 25023 51241 104.8 2.8 15-19岁 42696 42723 85419 99.9 4.7 20-24岁 78947 78068 157015 101.1 8.6 25-29岁 74788 74053 148841 101.0 8.1 30-34岁 71074 66400 137474 107.0 7.5 35-39岁 81818 73874 155692 110.8 8.5 40-44岁 88666 82290 170956 107.7 9.3 45-49岁 96206 91797 188003 104.8 10.3 50-54岁 87015 85941 172956 101.2 9.4 55-59岁 73457 75919 149376 96.8 8.2 60-64岁 50959 55448 106407 91.9 5.8 65-69岁 33410 40731 74141 82.0 4.0 70-74岁 28431 36949 65380 76.9 3.6 75-79岁 15775 23684 39459 66.6 2.2 80-84岁 6030 11852 17882 50.9 1.0 85-89岁 1864 4505 6369 41.4 0.3 90-94岁 400 1081 1481 37.0 0.1 95-99岁 101 289 390 34.9 0.0 100岁及以上 4 15 19 26.7 0.0 总计 910535 920394 1830929 98.9 100.0 相关数据: 年龄中位数:42.12岁; 少儿系数:8.39%; 老年系数:17.01%; 出生性别比:108.3; 性别比:98.9 朝鲜族人口占全国总人口的0.137%,相对于2000年1923842人,占全国人口比例的0.155%。 相关数据: 年龄中位数:42.12岁; 少儿系数:8.39%; 老年系数:17.01%; 出生性别比:108.3; 性别比:98.9 朝鲜族人口占全国总人口的0.137%,相对于2000年1923842人,占全国人口比例的0.155%。 相对于2000年1923842人,占全国人口比例的0.155%。 조선족 합계출산률 세계 최저수준 한 개 인구군체가 인구 현유수를 유지하려면 대체출산률(代替出 率)이 2.1을 유지해야 되는데 이는 1쌍 부모가 2명의 자녀를 출산해야 현재인구규모를 유지한다는 말이다. 합계출산률( 合生育率PFR), 즉 1명 녀성이 출산하는 자녀가 1.1명일 때 그 인구군체는 30년단위로 절반씩 줄어든다고 한다. 조선족녀성은 현재 합계출산률이 0.98명이다. 박교수는 “이 같은 상황이 유지되면 계산적으로는 조선족인구가 30년뒤에현재수준의 절반으로 줄어들 것이다”고 말했다. 조선족사회는 이미 고도 로령화사회 정상적인 사회의 인구년령구조에 대한 국제표준에서 평균년령대(年 中位)는 35세이다. 그런데 조선족인구의 평균년령대는 42.12세이다. 국제표준에서 로년계수(系 )가 7%이면 로령화사회로 분류되고 14%를 넘으면 고도로령화사회라고 한다. 그런데 조선족인구의 로년계수는 무려17.01%이다. 박광성 부교수는 “조선족사회가 이미 국제표준을 훨씬 넘긴 고도로령화사회이다.”고 진맥했다. (도표1:2010년 조선족성별,년령별 인구정황) 조선족 도시화률 세계선진국수준   개혁개방후 조선족사회의 도시화률은 이미 69%로 중국평균 51%을 초과하였을뿐만아니라 중국에서도 도시화률 1위민족으로 부상했다.구체적으로 상주인구(6개월이상 장기거주)비률을 보면 도시(城市)상주인구는 99만9237명,진( ) 상주인구는 27만1198명,촌(村)상주인구는 56만 494명이다.1만명이상 거주하는 성,직할시순으로는 1위 길림성 104만167명,2위 흑룡강성 32만7806명,3위 료녕성 23만9537명,4위 산동성 6만1556명,5위 북경시 3만7380명, 6위 상해시 2만2257명,7위 내몽고자치구 1만8464명,8위 천진시 1만8247명,9위 광동성 1만7615명,하북성 1만1296명이다. (도표2.표3:2010년 조선족성별,지구별 인구분포) 조선족 합계출산률 세계 최저수준 한 개 인구군체가 인구 현유수를 유지하려면 대체출산률(代替出 率)이 2.1을 유지해야 되는데 이는 1쌍 부모가 2명의 자녀를 출산해야 현재인구규모를 유지한다는 말이다. 합계출산률( 合生育率PFR), 즉 1명 녀성이 출산하는 자녀가 1.1명일 때 그 인구군체는 30년단위로 절반씩 줄어든다고 한다. 조선족녀성은 현재 합계출산률이 0.98명이다. 박교수는 “이 같은 상황이 유지되면 계산적으로는 조선족인구가 30년뒤에현재수준의 절반으로 줄어들 것이다”고 말했다. 조선족사회는 이미 고도 로령화사회 정상적인 사회의 인구년령구조에 대한 국제표준에서 평균년령대(年 中位)는 35세이다. 그런데 조선족인구의 평균년령대는 42.12세이다. 국제표준에서 로년계수(系 )가 7%이면 로령화사회로 분류되고 14%를 넘으면 고도로령화사회라고 한다. 그런데 조선족인구의 로년계수는 무려17.01%이다. 박광성 부교수는 “조선족사회가 이미 국제표준을 훨씬 넘긴 고도로령화사회이다.”고 진맥했다. (도표1:2010년 조선족성별,년령별 인구정황) 조선족 도시화률 세계선진국수준 개혁개방후 조선족사회의 도시화률은 이미 69%로 중국평균 51%을 초과하였을뿐만아니라 중국에서도 도시화률 1위민족으로 부상했다.구체적으로 상주인구(6개월이상 장기거주)비률을 보면 도시(城市)상주인구는 99만9237명,진( ) 상주인구는 27만1198명,촌(村)상주인구는 56만 494명이다.1만명이상 거주하는 성,직할시순으로는 1위 길림성 104만167명,2위 흑룡강성 32만7806명,3위 료녕성 23만9537명,4위 산동성 6만1556명,5위 북경시 3만7380명, 6위 상해시 2만2257명,7위 내몽고자치구 1만8464명,8위 천진시 1만8247명,9위 광동성 1만7615명,하북성 1만1296명이다. (도표2.표3:2010년 조선족성별,지구별 인구분포) 2010年朝鲜族分地区、性别人口状况 地区 合计 男 女 人数百分比(%) 北京 37380 17437 19943 2.04 天津 18247 9303 8944 1.00 河北 11296 5358 5938 0.62 山西 663 316 347 0.04 内蒙古 18464 9016 9448 1.01 辽宁 239537 118896 120641 13.08 吉林 1040167 517257 522910 56.81 黑龙江 327806 164200 163606 17.90 上海 22257 10292 11965 1.22 江苏 9525 4920 4605 0.52 浙江 6496 3288 3208 0.35 安徽 1200 570 630 0.07 福建 2157 1088 1069 0.12 江西 543 226 317 0.03 山东 61556 31229 30327 3.36 河南 1457 664 793 0.08 湖北 1960 1025 935 0.11 湖南 1180 583 597 0.06 广东 17615 9118 8497 0.96 广西 2701 1417 1284 0.15 海南 973 456 517 0.05 重庆 637 331 306 0.03 四川 1548 787 761 0.08 贵州 664 318 346 0.04 云南 1343 698 645 0.07 西藏 26 18 8 0.00 陕西 1129 534 595 0.06 甘肃 559 273 286 0.03 青海 312 152 160 0.02 宁夏 403 207 196 0.02 新疆 1128 558 570 0.06 全国 1830929 910535 920394 100.00 2010年朝鲜族分年龄、性别人口状况(分城市、镇、乡村) 地区 城市 镇 乡村 小计 男 女 小计 男 女 小计 男 女 北京 35004 16203 18801 1385 706 679 991 528 463 天津 15971 8194 7777 1567 813 754 709 296 413 河北 5131 2517 2614 3693 1831 1862 2472 1010 1462 山西 543 264 279 77 33 44 43 19 24 内蒙古 8546 4136 4410 3605 1790 1815 6313 3090 3223 辽宁 166972 82205 84767 22379 11144 11235 50186 25547 24639 吉林 536972 262603 274369 185328 92808 92520 317867 161846 156021 黑龙江 109321 54028 55293 42267 21040 21227 176218 89132 87086 上海 18506 8439 10067 3527 1737 1790 224 116 108 江苏 8043 4132 3911 729 390 339 753 398 355 浙江 5071 2561 2510 1148 587 561 277 140 137 安徽 891 456 435 168 65 103 141 49 92 福建 1692 841 851 320 179 141 145 68 77 江西 262 107 155 218 86 132 63 33 30 山东 58215 29611 28604 1691 884 807 1650 734 916 河南 1216 567 649 109 52 57 132 45 87 湖北 944 453 491 317 151 166 699 421 278 湖南 908 448 460 144 76 68 128 59 69 广东 16873 8688 8185 408 233 175 334 197 137 广西 1786 949 837 710 364 346 205 104 101 海南 715 344 371 202 82 120 56 30 26 重庆 543 291 252 60 31 29 34 9 25 四川 914 457 457 365 195 170 269 135 134 贵州 417 191 226 96 49 47 151 78 73 云南 878 458 420 235 120 115 230 120 110 西藏 14 8 6 5 3 2 7 7   陕西 1010 477 533 98 44 54 21 13 8 甘肃 372 177 195 163 84 79 24 12 12 青海 242 118 124 48 24 24 22 10 12 宁夏 377 190 187 13 8 5 13 9 4 新疆 888 438 450 123 60 63 117 60 57 全国 999237 490551 508686 271198 135669 135529 560494 284315 276179 ------------------------------------------------------------------- 2010年朝鲜族15-64岁妇女平均活产子女数和平均存活子女数 15-64岁 妇女人数 活产子女总数 存活子女总数   小计 男 女 小计 男 女     55473 54870 28857 26013 54417 28563 25854   存活子女数占活产子女数的百分比:99.17 妇女平均活产子女数:0.99 妇女平均存活子女数:0.98 ------------------------------------------------------------------------ 2010年朝鲜族按生育孩次分的育龄妇女人数(2009.11.1-2010.10.31)   男 女 小计 百分比(%) 一孩 303 244 547 80.80 二孩 70 54 124 18.32 三孩 2 4 6 0.89 四孩 0 0 0 0.00 五孩及以上 0 0 0 0.00 合计 375 302 677 100.00 ------------------------------------------------------------------- 2010年朝鲜族分性别、行业的人口状况 行业 男 女 小计 百分比(%) 农、林、牧、渔业 11093 8049 19142 26.46 采矿业 323 85 408 0.56 制造业 5847 3364 9211 12.73 电力、燃气及水的生产和供应业 566 162 728 1.01 建筑业 3880 381 4261 5.89 交通运输、仓储和邮政业 2784 533 3317 4.58 信息传输、计算机服务和软件业 713 408 1121 1.55 批发和零售业 4831 5832 10663 14.74 住宿和餐饮业 3058 6042 9100 12.58 金融业 606 581 1187 1.64 房地产业 418 199 617 0.85 租赁和商务服务业 649 492 1141 1.58 科学研究、技术服务和地质勘查业 237 115 352 0.49 水利、环境和公共设施管理业 212 99 311 0.43 居民服务和其他服务业 981 1608 2589 3.58 教育 1268 1900 3168 4.38 卫生、社会保障和社会福利业 636 854 1490 2.06 文化、体育和娱乐业 555 346 901 1.25 公共管理和社会组织 1838 801 2639 3.65 国际组织 2 1 3 0.00 合计 40497 31852 72349 100.00 -------------------------------------------------------------------- 2010年朝鲜族分性别、职业的人口状况 职业 男 女 小计 百分比(%) 国家机关、党群组织、企业、事业单位负责人 2025 771 2796 3.86 专业技术人员 4527 5203 9730 13.45 办事人员和有关人员 3194 1533 4727 6.53 商业、服务业人员 9800 14057 23857 32.97 农、林、牧、渔、水利业生产人员 11034 8034 19068 26.36 生产、运输设备操作人员及有关人员 9868 2236 12104 16.73 不便分类的其他从业人员 49 18 67 0.09 合计 40497 31852 72349 100 ------------------------------------------------------------------- 2010年朝鲜族分性别未工作的人口状况   男 女 小计 百分比(%) 在校学习 5263 5641 10904 18.75 丧失工作能力 3269 4600 7869 13.53 毕业后未工作 967 784 1751 3.01 因单位原因失去工作 847 415 1262 2.17 因本人原因失去工作 1223 783 2006 3.45 承包土地被征用 239 163 402 0.69 离退休 7810 10110 17920 30.82 料理家务 949 9501 10450 17.97 其他 3348 2228 5576 9.59 合计 23915 34225 58140 100.00 -------------------------------------------------------------------- 2010年朝鲜族的死亡人口状况(2009.11.1-2010.10.31) 死亡人口 男 女 小计 城市 2717 1867 4584 镇 871 622 1493 乡村 2545 1715 4260 合计 6133 4204 10337 -------------------------------------------------------------------- 2010年朝鲜族分性别、受教育程度的6岁及以上人口   男 女 小计 百分比(%) 未上过学 5752 17037 22789 1.29 小学 97090 139782 236872 13.42 初中 390498 376501 766999 43.46 高中 235929 220637 456566 25.87 大学专科 69018 61621 130639 7.40 大学本科 73435 67907 141342 8.01 研究生 4727 4948 9675 0.55 合计 876449 888433 1764882 100.00 ------------------------------------------------------------------ 2010年朝鲜族分性别、婚姻状况的15岁及以上人口   男 女 小计 百分比(%) 未婚 18656 14401 33057 25.33 有配偶 39675 40137 79812 61.16 离婚 4057 3407 7464 5.72 丧偶 2024 8132 10156 7.78 合计 64412 66077 130489 100.00  
‹처음  이전 1 2 3 4 다음  맨뒤›
조글로홈 | 미디어 | 포럼 | CEO비즈 | 인물 | 단체 | 블로그 | 쉼터 | 레터 | 포토 | 조글로뉴스 | 칼럼 | 문학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