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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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    재일조선족의 밝은 미래 댓글:  조회:988  추천:0  2019-05-13
  일본땅을 밟은지 21년을 잡는 필자는 이 고유명사의 거침없는 울림이 반갑기만하다. 挑戦族(조선족일본발음과 같음)으로도 불리워왔다는 재일조선족 인재들이 쌓아올린 탑과도 같은 오늘이다. 그런 분들중의 한분을 만나려고 동경스이도바시(水道橋)에 자리잡고 있는 니혼대학(日本大学)경제학부를 찾았다. 「일본조선족연구학회」 회장이신 정형규 교수님이 반갑게 맞아 주었다. 훤칠한 키에 균형이 잡힌, 어딘가 스포츠의 요소를 담고 계시는 건강한 모습이 환한 웃음과 너무나 잘 어울렸다.     재일 조선족에 대한 평가와 조언   조선족은 일본어능력이 상당히 높기때문에 일본사회에서 적응이 비교적 빠르다. 재일조선족은 이미 자신들의 독특한 커뮤니티 즉 공동체를 형성하고 있다. 작년에 처음으로 조선족운동회가 열렸었는데 1500여명이 참가하여 여러가지 경기와 문예공연으로 친목을 다졌다. 우수한 인재들이 육속 자신이 조선족임을 밝히고 있으며 3개국 이상의 언어를 장악하고 있는 특점이 오라지 않아 조선족의 특권이 될 수도 있어 그 가치가 날로 높아 가고 있다. 한편 단결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하나로 뭉치여 지혜를 모으면 누구도 무시할 수 없는 존재로 될 수 있다. 그리고 일본인들속에 자리잡고 사회적으로 인정을 받아야 한다고 본다.   조선족으로 한계를 느껴 본적은 있습니까?   딱 한번 느낀적이 있었다. 엄격한 서류심사와 면접에 의해 나고야스기야마죠가쿠인대학(名古屋椙山女学院大学)에서 거의 취직이 결정되였을때의 일이다. 제일 마지막단계인 향후의 사무적인 요해과정에서 그 대학의 중국인교원이 정교수에게 조선족이 아니냐구 물었다. 이름자에서 알아본 것이 틀림없었고 구태여 속일 필요가 없었던 물음이라 그렇다고 대답을 했다. 결과는 이유불명의 불채용이었다. 중국어교원이라 조선족은 조건이 차하다고 판단하였었다면 큰 오산이다. 정교수는 한족과 별로 다름이 없는 중국어권의 조선족이기때문이다.   재일조선족의 자녀교육에 대하여   이는 목전 우리 재일조선족앞에 놓여진 커다란 과제이다. 조선족 2세3세가 일본에 건너와서 조선족 혹은 한족, 일본인들과 결혼하여 낳은 아이들이 거의 조선어와 중국어를 모르게 된다. 가정에서 부모가 가르치는 것만으로는 아주 부족한 언어환경이다. 하지만 단념하지 말아야 한다. 아이들이 납득을 하는 조건하에서 조금씩조금씩 익히게 하고 커서 흥미를 가지도록 인도를 해주어야 한다. 조선어뿐만아니라 중국어도 가르쳐야 한다. 아이들에게 조선족의 정체성을 심어주는 것이다.   조선족유학생실태   1979년이후 일본에 유학온 조선족은 상당히 많다. 역사적인 원인으로 중국국내 대학교 일본어전업에 많은 조선족학생들이 재학해 있었고 그들이 일본유학을 택한 것이다. 일본어를 배우는 사람이 세계적으로 두번째로 많은 중국에서 조선족의 비률이 30%를 점했던 역사가 있다(90년대). 니혼대학(日本大学)에도 조선족유학생이 비교적 많다. 과거에 비해 3개국 이상의 언어를 장악하고 있는 조선족학생들의 선택범위가 훨씬 넓어진 것이다.   조선족연구학회에 대하여   조선족연구학회는 그 전신인 「중국조선족연구회」를 토대로 2007년에 발족한 학술연구단체이다. 본 학회는 조선족에 관한 문화, 역사, 언어, 교육, 사회, 경제, 정치 등 여러분야의 문제를 연구하며 나아가서 조선족사회의 발전과 동북아시아 지역내의 각국간의 교류와 협력 및 세계의 평화적 발전에 기여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회원은 민족, 종교, 국적을 불문하고 조선족사회 및 조선족연구에 관심과 흥미를 갇고 있는 연구자, 회사원, 대학원생, 대학생, 일반시민 등 다양한 성원들로 구성되어 있다. 현재는 조선족연구자를 중심으로 하면서 일본인, 재일조선한국인(뉴커머도 포함), 재일중국인(한족)등 폭넓은 사람들이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60    국민,인종,민족으로 본 우리 민족 성분 및 계통 댓글:  조회:1194  추천:0  2019-05-03
  인구분포  대한민국 51,778,544 명한국인(韓國人)  조선민주주의인민              인민공화국 25,368,620 명 조선사람(朝鮮人)  중화인민공화국 2,542,620 조선족(朝鮮族)/조선인(朝鮮人)?  미국 2,492,252 한인(韓人)  일본 818,626 한인(韓人),조선인(朝鮮人)  캐나다 240,942 한인(韓人)  우즈베키스탄 181,077 고려인(高麗人)  오스트레일리아 180,004 한인(韓人)  러시아 169,680 고려인(高麗人)  카자흐스탄 109,132 고려인(高麗人)  필리핀 93,093 한인(韓人)  브라질 51,531 한인(韓人)  베트남 47,728 한인(韓人)  독일 40,170 한인(韓人)  영국 38,934 한인(韓人)  뉴질랜드 33,403 한인(韓人)  인도네시아 31,091 한인(韓人)  아르헨티나 24,194[2]한인(韓人)  태국 20,500 한인(韓人)  싱가포르 20,346 한인(韓人)  키르기스스탄 19,035 고려인(高麗人)  프랑스 16,251 한인(韓人)  우크라이나 14,880  고려인(高麗人)  말레이시아 13,122 한인(韓人)  스페인 12,610 한인(韓人)  멕시코 11,673 한인(韓人)  캄보디아 10,089 한인(韓人)  인도 10,296 한인(韓人)  그리스 8,449한인(韓人)  타이완 6,293한인(韓人) 총인구 약 8천460만 명 인구분포  대한민국 51,778,544 명 한민족(韓民族)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25,368,620 명 조선민족(朝鮮民民 族)  중화인민공화국 2,542,620 조선족(朝鮮族)/ 조선민족(朝鮮民族)  미국 2,492,252  한민족(韓民族)  일본 818,626 한민족(韓民族), 조선민족(朝鮮民族)  캐나다 240,942 한민족(韓民族)  우즈베키스탄 181,077 고려인(高麗人)/ 고려족(高麗族)?  오스트레일리아 180,004 한민족(韓民族)  러시아 169,680 고려인(高麗人)/ 고려족(高麗族)?  카자흐스탄 109,132 고려인(高麗人)/ 고려족(高麗族)?  필리핀 93,093 한민족(韓民族)  브라질 51,531 한민족(韓民族)  베트남 47,728 한민족(韓民族)  독일 40,170 한민족(韓民族))  영국 38,934 한민족(韓民族)  뉴질랜드 33,403 한민족(韓民族)  인도네시아 31,091 한민족(韓民族)  아르헨티나 24,194 한민족(韓民族)  태국 20,500 한민족(韓民族)  싱가포르 20,346 한민족(韓民族)  키르기스스탄 19,035 고려인(高麗人)/ 고려족(高麗族)?  프랑스 16,251 한민족(韓民族)  우크라이나 14,880  고려인(高麗人)/고려족(高麗族)?  말레이시아 13,122 한민족(韓民族)  스페인 12,610 한민족(韓民族)  멕시코 11,673 한민족(韓民族)  캄보디아 10,089 한민족(韓民族)  인도 10,296 한민족(韓民族)  그리스 8,449 한민족(韓民族)  타이완 6,293 한민족(韓民族) 1. 개요[편집] 在外同胞 해외에 사는 한국인과 한국계를 일컫는 표현. 재외 국민은 외국에 사는 한국 국적자를, 재외 교포는 외국 국적자를 가리키는 표현으로, 재외 동포는 한국계 외국인을 포함하는 좀 더 광범위한 표현이다. 2. 상세[편집] 대한민국 정부수립 이전에 형성된 재외 커뮤니티인 재중동포들은 1952년 중국의 소수민족(조선족)으로 남게 되었고 재소동포들은 1930년대 중반에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되면서 고려인으로 불리게 된다. 일본에 잔류한 조선인들은 재일 한국인이나 한국계 일본인이 되었으며 대부분은 대한민국 정부수립 이전에 넘어간 사람들이다. 그에 비해 재미 한국인이나 한국계 미국인은 1960년대 이후에 넘어간 사람들이 많다. 1970년대부터 재일교포의 경우에는 한국을 방문하는 게 가능했고 한국 정부는 한국 방문을 하기 위해 한국 국적을 취득하도록 하는 전략을 택했다. 대부분 한반도 남부 출신인 조선적들은 40만 가까이가 한국 국적을 얻었고 현재 남은 조선적은 5만 남짓이다. 30만 정도는 일본인으로 귀화했다. 1980년대에 냉전이 끝자락에 달하고 1988 서울 올림픽 등으로 한국이 소련과 중국과 교류하면서 재중동포나 재소동포의 고향 방문 등도 일부 열린다. 그리고 북방외교 등으로 소련과 외교가 수립되고 1992년엔 중화인민공화국과도 수교가 된다. 본격적으로 재외동포가 재한 외국인으로 들어온 것은 1999년부터이다. 외환위기를 겪으면서 김대중 대통령은 재미동포의 자본을 끌어들일 방안을 생각하여 관련 법을 기초하도록 하였고 1999년에 재외동포법이 생겼다. 이 법안은 재외동포를 다른 외국인과는 다르게 출입국 조처 등을 취하며 경제활동 등에 있어서도 다른 외국인보다는 우대한다. 이 일로 부정적인 표현인 검은머리 외국인이 생기기도 했다. 그러나 이 법안 재미교포와 조선적이 아닌 재일교포 위주였고 고려인이나 조선족을 배제했다. 2002년에 헌법재판소가 이를 평등 위반으로 보고 위헌 판결했기 때문에 재외동포법에는 한국계 혈통이 모두 포함된다.  외교부의 재외동포 현황 2년마다 갱신되는 것으로 한국 외교부가 파악하는 재외동포 현황이다. 동포 현황 재외국민 영주권자 1,108,559 일반체류자 1,115,353 유학생 276,834 소계 2,472,746 시민권자 4,472,126 계 7,184,872 3. 재중동포[편집] 조선족과 신조선족으로 나뉜다. 유학생이나 사업 등의 이유로 체류하는 사람도 굉장히 많다. 재외동포 인구의 1/3 가량. 이게 홍콩/마카오까지 합친 건지 추가바람. 동포 현황 재외국민 영주권자 4,161 일반체류자 307,142 유학생 57,723 소계 369,026 시민권자 2,335,968 계 2,704,994 4. 재일교포[편집] 주로 일제강점기 당시에 일본에 건너간 재일 한국인이나 조선족들이다. 최근에는 유학이나 사업 등의 이유로 가는 한국인이 많다. 일본 내 불법체류자2위가 한국인이다. 재외동포 인구의 1/8 가량. 동포 현황 재외국민 영주권자 461,627 일반체류자 96,146 유학생 20,362 소계 578,135 시민권자 326,671 계 904,806 5. 아메리카 대륙[편집] 재미교포 미국행 이민은 대한제국 때 시작됐지만 1960년대에 본격화됐다. 주로 친척 초청 등을 통해 이뤄졌다. 미국 내의 한국인 불법체류자는 20만 명 정도로 추정된다. 최근 미군은 영주권자를 받아들이는 경우가 있어 국적은 한국인 미군이 꽤 있다. 가끔 이들이 주한미군으로 한국에 왔다가 한국군에 입대하게 되는 요건이 떠 외교문제가 되기도 한다. 한국계 미국인참고. 재외동포 인구의 1/3 가량. 동포 현황 재외국민 영주권자 464,154 일반체류자 512,938 유학생 105,616 소계 1,082,708 시민권자 1,094,290 계 2,176,998 캐나다 동포 현황 재외국민 영주권자 85,951 일반체류자 20,084 유학생 19,001 소계 103,006 시민권자 102,666 계 205,993   브라질: 브라질이 불법체류자에 관대한 경향이 있어 영주권자 중 상당수가 불법체류자였다가 사면받은 사람들이다. 동포 현황 재외국민 영주권자 23,794 일반체류자 1,876 유학생 149 소계 25,819 시민권자 24,954 계 50,773   아르헨티나: 1960년대에 아르헨티나가 한국보다 잘 살던 시절에 농업 이민 등으로 건너간 사람들이다. 그 이후 아르헨티나 경제는 패망. 동포 현황 재외국민 영주권자 14,340 일반체류자 590 유학생 4 소계 14,934 시민권자 7,420 계 22,354   멕시코: 최근 멕시코 경제가 커지면서 한국인들이 점점 많이 간다. 다만, 현대 이전에 멕시코 이민자가 아예 없었던 것은 아닌데, 구한말 일본 인력소개업체의 꾐에 넘어가 멕시코에 힘들게 정착한 동포들이 현재 4~5세대까지 대를 잇고 있다. 이들은 일제강점기에 독립자금을 보내기도 했다고. 이중 일부는 유카탄 반도를 넘어 쿠바로 넘어가기도 했다. 동포 현황 재외국민 영주권자 1,607 일반체류자 8,929 유학생 388 소계 10,924 시민권자 876 계 11,800   6. 고려인[편집] 러시아 연해주로의 자발적 이주 후 이오시프 스탈린에 의해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당한 중앙아시아 고려인과, 일제에 의해 당시 일본 영토였던 사할린으로 강제 징용당한 사람들의 후손인 사할린 고려인으로 나뉜다. 재외동포 인구의 7% 가량. 국가 시민권자 동포 러시아 213,020 218,956 우즈베키스탄 171,300 173,600 카자흐스탄 105,235 107,130 키르기스스탄 17,299 18,230 우크라이나 12,711 13,053 그외 구소련 국가 3,977 4,841 계   535,810 7. 오세아니아 및 아시아 그 외 국가[편집] 1만명이 넘는 지역만 추렸으나 대만은 예외적으로 추가하였다. 정치적, 사회적으로 대한민국과 밀접했던 지역 치고는 한국인이 드물기에. 과거에는 중국어를 배우러 대만으로 유학갔으나 1992년 한중수교 이후론 대부분 본토로 간다. 뉴질랜드: 유학생 위주다. 동포 현황 재외국민 영주권자 8,436 일반체류자 5,739 유학생 6,319 소계 20,494 시민권자 7,926 계 28,420   호주: 뉴질랜드와 비슷하다. 동포 현황 재외국민 영주권자 42,741 일반체류자 26,111 유학생 33,556 소계 102,408 시민권자 29,879 계 132,287   대만: 시민권자들은 대체로 중국 국민당과 일했던 조선인들의 후손으로 추정된다. 동포 현황 재외국민 영주권자 283 일반체류자 2,579 유학생 686 소계 3,548 시민권자 420 계 3,968   말레이시아: 필리핀처럼 영어권이며, 싱가포르와 인접한 탓에 사업이나 교육 상의 목적으로 체류하는 사람이 많다. 동포 현황 재외국민 영주권자 38 일반체류자 11,628 유학생 2,737 소계 14,403 시민권자 6 계 14,409   베트남: 사업상의 이유로 체류하는 사람이 많다. 베트남어를 배우기 위해 유학하는 사람도 있다. 대부분은 외국인학교에 다니는 주재원이나 외교관 자녀겠지만. 한국 국적의 사람이 베트남인이 된 한국계 베트남인은 드물지만 한베혼혈인 라이따이한은 꽤 있다. 동포 현황 재외국민 영주권자 0 일반체류자 81,126 유학생 2,512 소계 83,638 시민권자 2 계 83,640   싱가포르: 말레이시아와 비슷한 패턴이다. 동포 현황 재외국민 영주권자 1,878 일반체류자 12,133 유학생 2,533 소계 16,544 시민권자 106 계 16,650   인도네시아 동포 현황 재외국민 영주권자 211 일반체류자 35,549 유학생 279 소계 36,039 시민권자 256 계 36,295   태국 동포 현황 재외국민 영주권자 114 일반체류자 16,833 유학생 500 소계 17,447 시민권자 53 계 17,500   필리핀: 영어를 배우러 가는 사람들이 많다. 필리핀의 20대 여자들은 미국식 영어를 잘 구사한다. 한국에서 귀화한 한국계 필리핀인은 드물지만 코피노란 이름으로 한국계 혈통이 있는 혼혈은 아래보다 많이 있다. 국적의 변동 위주로 파악하는 외교부 특성상 파악하기 어렵다. 동포 현황 재외국민 영주권자 757 일반체류자 66,304 유학생 29,545 소계 96,606 시민권자 26 계 96,632   8. 유럽[편집] 독일: 영주권자나 시민권자들은 간호사나 광부로 1960년대와 1970년대에 서독으로 일하러 간 사람들이다. 상당수는 귀환했지만 많은 수가 남았다. 간호사들은 독일 남자와 결혼한 경우가 많은데 한국에 아내와 함께 온 독일인 정착촌이 있다. 동포 현황 재외국민 영주권자 6,414 일반체류자 11,315 유학생 5,975 소계 23,704 시민권자 7,814 계 31,518   영국: 원래는 유럽에서 재독교포가 가장 큰 커뮤니티였지만 현재는 영어를 배우기 위한 유학생 증가 등으로 재영교포가 더 커졌다. 동포 현황 재외국민 영주권자 9,170 일반체류자 14,820 유학생 19,000 소계 42,990 시민권자 3,839 계 46,829   프랑스 동포 현황 재외국민 영주권자 2,268 일반체류자 3,305 유학생 6,325 소계 11,898 시민권자 786 계 12,684 9. 기타[편집] 아랍이나 아프리카 등은 모두 합쳐 1만명 내외다. 아프리카에선 다음이 제일 많다. 국가 시민권자 동포 남아공 126 3,386 알제리 0 1,181 아랍에선 다음이 제일 많다. 국가 시민권자 동포 아랍에미리트 5 5,607 사우디아라비아 43 2,521 카타르 5 2,184 따지고 보면 미수복 영토인 북한에 약 2,400만명이 있긴 하지만 북한은 한국의 영토이므로 재외동포에 포함되지 않는다. 다만 중국에 1~3만 명으로 추정되는 탈북자가 있다. 또한 각국에 수적으로 파악이 힘든 불법체류자들이 있는데 미국에만 20만명이 넘는다고 예측된다. 이들에 대한 정확한 파악은 이뤄지지 않는다.
59    창부타령(倡夫打令) 총 모음 댓글:  조회:948  추천:0  2019-04-30
창부타령(倡夫打令) 총 모음   후렴* 얼씨구나 지화자 좋네 아니 노지는 못하리라 1. 모진 간장(肝腸) 불에 탄들 어느물로 꺼주려나 뒷동산(東山) 두견성(杜鵑聲)은 귀촉도(歸蜀道) 귀촉도(歸蜀道) 나의 설음을 몰라 주고 옛날 옛적 진시황(秦始皇)이 만권시서(萬卷詩書)를 불 사를제 이별(離別) 두자를 못살랐건만 천하장사(天下壯士) 초패왕(楚覇王)도 장중(帳中)에 눈물을짓고 우미인(虞美人) 이별(離別)을 당(當)했건만 부모같이 중한 분은 세상천지 또 없건마는 임을 그리워 애타는 간장 어느 누가 알아주리 2.서산(西山)에 해 기울고 황혼(黃昏)이 짙었는데 안 오는 임 기다리며 마음을 죄일 적에 동산에 달이 돋아 온 천하를 비쳐 있고 외기러기 홀로 떠서 짝을 불러 슬피울 제 원망스런 우리 임을 한 없이 기다리다 일경(一更) 이경(二更) 삼(三) 사(四) 오경(五更) 어느듯이 새벽일세 추야장(秋夜長) 긴 긴 밤을 전전불매(輾轉不寐) 잠 못들제 상사일념(相思一念) 애타는줄 그대는 아시는가 둘 데 없는 이내 심사(心思) 어디다가 붙여 볼까 차라리 잊자해도 욕망이난망(欲忘而難忘)이라 차마 진정(眞情) 못잊겠네 얼씨구나 좋다 지화자 좋네 아니 노지는 못하리라 3.진국명산만장봉(鎭國名山萬丈峰)이 청천삭출금부용(靑天削出金芙蓉)은 서색(瑞色)은 반공(蟠空) 응상궐(凝象厥)이요 숙기(淑氣)는 종영출인걸(鍾英出人傑)하니 만만세지금탕(萬萬歲之金湯)이라 태평연월(太平烟月) 좋은 시절(時節) 전조사(前朝事)를 꿈꾸는 듯 유유(悠悠)한 한강(漢江)물은 말없이 흘러가고 인왕(仁旺)으로 넘는 해는 나의 감회(感懷) 돋우는듯 4.사랑 사랑 사랑이라니 사랑이란 게 무엇인가 알다가도 모를 사랑 믿다가도 속는 사랑 오목조목 알뜰 사랑 왈칵달칵 싸움 사랑 무월삼경(無月三更) 깊은사랑 공산야월(公山夜月) 달 밝은데 이별한임 그린 사랑 이내 간장 다 녹이고 지긋지긋이 애탠 사랑 남의 정(情)만 뺏어 가고 줄줄 모르는 얄민 사랑 이사랑 저 사랑 다 버리고 아무도 몰래 호젓이 만나 소곤소곤 은근(慇懃) 사랑 얼씨구좋다 내 사랑이지 사랑 사랑 참사랑아 5.요망(妖妄)스런 저 가이야 눈치없이 짖지 마라 기다리고 바라던 임 행여나 쫓을세라 임을 그려 애태우고 꿈에라도 보고지고 구곡간장(九曲肝腸) 다 녹을 제 장장추야(長長秋夜) 긴 긴 밤을 이리하여 어이 샐꼬 잊으려고 애를쓴들 든 정이 병이 되어 사르나니 간장이라 6.백두산(白頭山) 천지(天池)가엔 들쭉 열매 아름답고 굽이치는 압록강(鴨綠江)엔 뗏목 또한 경(景)이로다 금강산비로봉(金剛山毘盧峯)엔 기화이초(奇花異草) 피어있고 해금강(海金江) 총석정(叢石亭)엔 넘실대는 파도(波濤) 위에 백조(白鳥) 쌍쌍(雙雙) 흥(興)겨 운다 배를 타고 노(櫓)를 저어 대자연(大自然)좋은 풍경 마음대로 즐겨 볼까 7.섬섬옥수(纖纖玉手) 부여잡고 만단정회(萬端情懷) 어제런 듯 조물(造物)이 시기(猜忌)하여 이별(離別)될 줄 뉘라 알리 이리 생각 저리 궁리(窮理) 생각 끝에 한숨일세 얄밉고도 아쉬웁고 분(?)하고 그리워라 아픈 가슴 움켜잡고 나만 혼자 고민(苦憫)일세 8.추강월색(秋江月色) 달 밝은밤에 벗 없는 이내 몸이 어둠침침(沈沈) 빈 방(房) 안에 외로이도 홀로 누워 밤 적적(寂寂) 야심(夜深) 토록 침불안석(寢不安席) 잠 못 자고 몸부림에 시달리어 꼬꾜 닭은 울었구나 오날도 뜬눈으로 새벽맞이를 하였구나 9.어지러운 사바세계(娑婆世界) 의지(依支)할 곳 바이 없어 모든 미련(未練) 다 떨치고 산간벽절 찾아가니 송죽(松竹) 바람 슬슬(瑟瑟)한데 두견(杜鵑)조차 슬피우네 귀촉도불여귀(歸蜀道不如歸)야 너도 울고 나도 울어 심야삼경(深夜三更) 깊은 밤을 같이 울어 새워볼까 *오호(嗚呼) 한평생(平生) 허무(虛無)하구나 인생백년(人生百年)이 꿈이로다 10.a귀(貴)치 않은 이내 몸이 사자 사자 헤매어도 세파에 부대끼어 남은 것은 한(恨)뿐이라 만고풍상(萬古風霜) 비바람에 시달리고 시달리어 노류장화(路柳墻花) 몸이 되니 차라리 다 떨치고 산중(山中)으로 들어가서 세상번뇌(世上煩惱)를 잊어 볼까 b귀치 않은 이내 몸이 사자 사자 헤매어도 세파에 부딪끼어 남은 것은 한뿐이라.(추월춘풍 화개화락 몇몇성상이 지나갔나) 만고풍상 비바람에 시달리고 시달리어 노류장화 몸이 되니, 차라리 다 떨치고 산중으로 들어가서 세상번뇌를 잊어 볼까. 11.세파(世波)에 시달린 몸 만사(萬事)에 뜻이 없어 모든 시름 잊으려고 홀로 일어 배회(徘徊)할 제 만뢰(萬?)는 구적(俱寂)한데 귀뚜라미 슬피 울어 다 썩고 남은 간장(肝臟) 어이 마저 썩이느냐 가뜩이나 심란(心亂)한데 중천(中天)에 걸린 달은 강심(江心)에 잠겨 있고 짝을 잃은 외기러기 운소(雲宵)에 높이 떠서 처량(悽?)한 긴 소래로 짝을 불러 슬피 우니 춘풍호월(春風晧月) 저문 날에 두견성(杜鵑聲)도 느끼거든 오동추야단장시(梧桐秋夜斷腸時)에 차마 어찌 들을건가 12.한 송이 떨어진 꽃을 낙화(落花)진다고 설워 마라 한 번 피었다 지는 줄을 나도 번연히 알건마는 모진손으로 꺽어다가 시들기 전에 내버리니 버림도 쓰라리거든 무심코 밟고 가니 근들 아니 슬플 소냐 숙명적(宿命的)인 운명(運命)이라면 너무도 아파서 못 살겠네 13.세상공명(世上功名) 부운(浮雲)이라 강호어용(江湖漁翁) 되오리다 일엽편주(一葉片舟) 흘리저어 임기소지(任期所之)하올적에 만경창파(萬頃蒼波) 넓은물에 호호탕탕(浩浩蕩蕩)떠나간다 주경(舟輕)하니 산사주(山似走)요 파급(波急)하니 야여주(野如走)라 은린옥척(銀鱗玉尺) 펄펄 뛰고 백구(白鷗) 편편(翩翩) 비꼈는데 청풍(淸風)은 서래(徐來)하고 수파(水波)는 불흥(不興)이라 좌우산천(左右山川) 살펴보니 경개무궁(景槪無窮) 좋을씨고 격안전촌 (隔岸前村) 양삼가(兩三家)에 저녁 연기(煙氣) 일어나고 반조입강번석벽(返照入江?石壁)에 거울 낯을 벌였는데 언덕 위에 초동(樵童)이요 석벽(石壁) 아래 어옹(漁翁)이라 창랑일곡(滄浪一曲) 반겨 듣고 소리 좇아 내려가니 엄릉(嚴陵) 여울 다다랐다 천척단애(千尺斷崖) 높은 곳에 창송녹죽(蒼松綠竹) 푸르렀고 칠리청탄(七里淸灘) 고요한데 쌍쌍(雙雙) 오리 높이 떴다 고기 주고 술을 사서 취(醉)케 먹고 달을 띠고 돌아오니 대장부(大丈夫) 세상자미(世上滋味) 이에서 더할소냐 * 얼씨구 좋다 지화자 좋네 인생백년(人生百年)이 좋을씨고 14.때는 마침 어느때뇨 춘풍(春風)이 화창(和暢)하니 양춘가절(陽春佳節)이 아니냐 만산홍록(滿山紅綠) 요염(妖艶)하여 금수병(錦繡屛)을 둘렀는 듯 백화(百花) 만발(滿發) 난만(爛漫)한데 꽃을 찾는 벌나비는 향기(香氣)를 좇아 날아들고 휘늘어진 버들새로 황금(黃金) 같은 꾀꼬리는 벗을 불러 노래하고 시냇물 맑았는데 낙화(落花) 동동 떠나가니 이도 또한 경(景)이로다 * 얼씨구 절씨구 지화자 좋구려 아니 노지는 못하리라 15.명년삼월(明年三月) 오시마더니 명년(明年)이 한(限)이 없고 삼월(三月)도 무궁(無窮)하다 양류청양류황(楊柳靑楊柳黃)은 청황변색(靑黃變色)이 몇 번(番)이며 옥창앵도(玉窓櫻桃) 붉었으니 화개화락(花開花落)이 얼마인고 한단침(邯鄲枕) 빌어다가 장주호접(莊周蝴蝶)이 잠깐 되어 몽중상봉(夢中相逢) 하쟀더니 장장춘단단야(長長春短短夜)에 전전반측(輾轉反側) 잠 못 이뤄 몽불성(夢不成)을 어이하리 16.a기다리다 못하여서 잠이 잠깐 들었더니 새벽별 찬바람에 풍지(風紙)가 펄렁 날 속였네 행여나 임이 왔나 창문(窓門)열고 내다보니 임은 정녕 간 곳 없고 명월(明月)조차 왜 밝았나 생각끝에 한숨이요 한숨 끝에 눈물이라 마자마자 마쟀더니 그대 화용(花容)만 어른거려 긴 긴 밤만 새웠노라 b기다리다 못하여서 잠이 잠깐 들었더니 새벽별 찬바람에 풍지가 펄렁 날속였네. 행여나 님이 왔나 창문 열고 내다보니, 님은 정녕 간곳없고 명월조차 왜 밝아서, (생각사록 눈물이라) 마자마자 마자해도 그대 화용만 어른거려 긴 긴 밤만 새웠노라. 17.간밤 꿈에 기러기 보고 오늘 아침 오동(梧桐) 위에 까치 앉아 짖었으니 반가운 편지(片紙) 올까 그리던 임이 올까 기다리고 바랐더니 일락서산(日落西山) 해는 지고 출문망(出門望)이 볓 번인가 언제나 유정(有情) 임 만나 화류동산춘풍리(花柳東山春風里)에 이별(離別) 없이 살아 볼까 18.봄이 왔네 봄이 왔네 무궁화(無窮花) 이 강산(江山) 새봄이 왔네 방실방실 웃는 꽃들 우줄우줄 능수버들 비비배배 종달새며 졸졸 흐르는 물소리라 앞집 수탉이 꼬끼요 울고 뒷집 삽사리 컹컹 짖네 앞논의 암소가 엄매 뒷뫼의 산꿩이 끼긱끽 물 이고 가는 큰애기 걸음 삼춘(三春)의 흥(興)에 겨워 사뿐사뿐 아기장아장 흐늘거리며 걸어가네 *. 얼씨구 절씨구 지화자 좋구려 삼춘가절(三春佳節)이 좋을씨고 19.하늘같이 높은 사랑 하해(河海)같이 깊은 사랑 칠년대한(七年大旱) 가문 날에 빗발같이 반긴사랑 구년지수(九年之水) 긴 장마에 햇볕같이 반긴 사랑 당명황(唐明凰)의 양귀비(楊貴妃)요 이(李) 도령(道令)의 춘향(春香)이라 일년 삼백 육십 일에 하루만 못봐도 못 살겠네 20.오늘도 화창하니 이삼요우(二三僚友) 작반(作伴)하여 죽장망혜단표자(竹杖芒鞋單瓢子)로 부여팔경(夫餘八景) 구경 가세 부소산(扶蘇山) 저문 비에 황성(荒城)이 적막하고 낙화암(落花岩) 잠든 두견(杜鵑) 삼천궁녀(三千宮女) 죽은 원혼(?魂) 쌍쌍이 짝을 지어 전조사(前朝事)를 꿈꾸느냐 고란사(皐蘭寺) 쇠북 소래 사자루(泗자樓)를 흔드는 듯 선경(仙境)이 방불(彷彿)하다 21.증경(증?=꾀꼬리)은 쌍쌍(雙雙) 녹담중(綠潭中)이요 호월(皓月)은 단단(團團) 영창롱(映窓?)인데 적막한 나유(羅惟) 안에 촛불만 도두 켜고 인(人) 적적(寂寂) 야심(夜深)한데 귀뚜람 소리가 처량하다 금로(金爐)에 향진(香盡)하고 옥루(屋漏)는 잔잔(潺潺)한데 돋은 달이 지새도록 뉘게 잡히어 못 오시나 임이야 나를 생각하는지 나는 임 생각뿐이로다 독수공방(獨守空房) 홀로 누워 전전불매(輾轉不寐) 장탄수심(長嘆愁心) 남은 간장(肝腸) 다 썩는다 22.날 찾네 나를 찾네 그 누구라 날 찾나 기산(箕山) 영수(潁水) 별건곤(別乾坤)에 소부(巢父) 허유(許由)가 날 찾나 백화심처일승귀(百花深處一僧歸)라 춘풍석교화림중(春風石橋花林中)에 성진화상(性眞和尙)이 날 찾나 청산기주(靑山?洲) 백로탄(白鷺灘)에 여동빈(呂洞賓)이가 날 찾나 도화유수무릉(桃花流水武陵) 가자 어주속객(魚舟屬客)이 날 찾나 수양산(首陽山) 백이숙제(伯夷叔齊) 고사리(採o) 캐자 날찾나 부춘산(富春山) 엄자릉(嚴子陵)이 간의대부(諫議大夫) 마다 하고 칠리동강일사풍(七里桐江日斜風)에 함께 가자 날 찾나 기경선자(騎鯨仙子) 이태백(李太白)이 풍월(風月)짓자 날 찾나 상산사호(商山四皓) 네 노인(老人)이 바둑 두자 날 찾나 기주(嗜酒)하던 유영(劉怜)이가 동배주(同盃酒)하자고 날 찾나 칠석은하(七夕銀河) 견우직녀(牽牛織女) 한포(漢浦)로 지나다가 함께 가자 날 잧나 차산중운심(此山中雲深)한데 부지처(不知處) 오신 손님 날 찾을리 없건마는 그 누구라 날찾나 23.그대 나와 사귈 적에 이별(離別)하자 사귀었나 백년(百年)살자 굳은 언약(言約) 일조허사(一朝虛事) 뉘라 알리 임을 그려 애태다가 상사(想思)로 병(病)이 되니 조물(造物)이 시기하여 날 미워서 준 병(病)인가 안타까운 이내 심정(心情) 억제(抑制)할 길 바이 없어 일배일배부일배(一杯一杯復一盃)에 몽롱(朦朧)히 취(醉)케 먹고 울적(鬱寂)한 빈 방안에 외로이 혼자 앉아 옛일을 생각하니 만사(萬事)가 꿈이로다 상사불견(想思不見) 우리 임을 어느 때나 다시 만나 그린 회포(懷抱)를 풀어 볼까 24.일년 삼백 육십 일은 춘하추동(春夏秋冬) 사시절(四時節)인데 꽃 피고 잎이 나면 화조월석(花朝月夕) 춘절(春節)이요 사월남풍(四月南風) 대맥황(大麥黃)은 녹음방초(綠陰芳草) 하절(夏節)이라 금풍(金風)이 소슬(蕭瑟)하여 사벽충성(四壁蟲聲) 슬피 울면 구추단풍(九秋丹楓) 추절(秋節)이요 백설(白雪)이 분분(芬芬)하여 천산(千山)에 조비절(鳥飛絶)이요 만경(萬逕)에 인종멸(人踪滅)하면 창송녹죽(蒼松綠竹) 동절(冬節)이라 인간칠십고래희(人間七十古來稀)요 무정세월약류파(無情歲月若流波)라 사시풍경(四時風景) 좋은 시절(時節) 아니 놀고 어이 하리 25.a일각(一刻)이 삼추(三秋)라 하니 열흘이면 몇 삼추(三秋)요 제 마음 즐겁거니 남의 시름 어이 알리 얼마 아니 남은 간장(肝腸) 봄눈(春雪)같이 다 녹는다 이내 한숨 바람되고 눈물은 비가 되어 우리 임 자는 영창(映窓)밖에 불면서 뿌려나 주면 날 잊고 깊이 든 잠 놀래어 깨우고저 아서라 쓸데 없다 마자 마자 마자 해도 그대 생각뿐이로다 b일각이 삼추라 하니 열흘이면 몇 삼추요 제 마음 즐겁거니 남의시름 어이 알리. 얼마 아니 남은 간장 봄눈같이 다 녹는다. 이내 한숨 바람되고 눈물은 흘러 비가 되어 (세풍세우 흩날이며), 우리 님 자는 영창 밖에 불면서 뿌려 주면 날 잊고 깊이 든 잠 놀래어 깨우고저 아서라 쓸데없다 마자 마자 마자 해도 그대 생각 뿐이로다. 26.금풍(金風)은 소슬(蕭瑟)하고 휘영청 달 밝은 밤에 임 생각을 잊으려고 아픈 마음 달랠 적에 야속할손 외기러기 북천(北天)으로 날아가며 처량한 울음으로 나의 심회(心懷) 돋워 주고 지는 달 새는 밤에 귀뚜라미 슬픈 울음 사창(紗窓)에 여읜 잠을 살뜰히도 다 깨운다 무인동방(無人洞房) 홀로 누워 이리 딩굴 저리 딩굴 잠 못자고 애태우니 안타까운 이 심정을 어느 누가 알아주리 27.a.공도(公道)라니 백발(白髮)이요 면(免)치 못할 죽음이라 요순우탕(堯舜禹湯) 문무주공(文武周公) 공맹안증(孔孟顔曾) 정주자(程朱子)는 도덕(道德)이 관천(貫天)하여 만고성현(萬古聖賢) 일렀건만 미미(微微)한 인생(人生)들이 저 어이 알아보리 강태공(姜太公) 황석공(黃石公)과 사마양저(司馬穰?) 손빈오기(孫?吳起) 전필승(戰必勝) 공필취(攻必取)는 만고명장(萬古名將) 일렀건만 한번 죽음 못 면했네 멱라수(멱羅水) 맑은 물은 굴삼려(屈三閭)의 충혼(忠魂)이요 상강수(湘江水) 성긴 비는 오자서(伍子胥)의 정령(精靈)이라 b.공도라니 백발이요 면치 못할 죽음이라 천황 지황 인황이며 요순 우탕 문무 주공 성덕이 없어서 붕 했으며, 말 잘하는 소진 장의 육국제왕을 다 달랬으되 염라왕은 못 달래어 한 번 죽엄 못 면하고, 그러한 영웅들은 사후 사적이라도 있건마는. 초로 같은 우리 인생 아차 한번 죽어 지면 움이 나느냐 싻이 나나. 명사십리 해당화야 꽃 진다 잎 진다 설워 마라 명년삼월 봄 돌아오면 너는 다시 피련마는 우리 인생 늙어지면 다시 젊기 어려워라. 28.통일천하(統一天下) 진시황(秦始皇)은 아방궁(阿房宮)을 높이 짓고 만리장성(萬里長城) 쌓은 후에 육국제후(六國諸侯) 조공(朝貢)받고 삼천궁녀(三千宮女) 시위(侍衛)할 제 동남동녀(童男童女) 오백인(五百人)을 삼신산(三神山) 불사약(不死藥)을 구하려고 보낸 후에 소식조차 돈절(頓絶)하고 사구평대(砂丘平臺) 저문 날에 여산황초(驪山荒草) 뿐이로다 아서라 쓸데 없다 부귀공명(富貴功名) 뜬구름이니 아니 놀고 어이 하리 29.죽장망혜단표자(竹杖芒鞋單瓢子)로 천리강산(千里江山) 들어 가니 산은 높고 골은 깊어 두견접동(杜鵑) 날아든다 구름은 뭉게뭉게 상상고봉(上上高峯) 산(山)머리에 낙락장송(落落長松) 어려있고 바람은 슬슬 불어 구곡계변(九曲溪邊) 암석상(岩石上)에 꽃가지 떨뜨린다 경개무궁(景槪無窮) 절승(絶勝)하고 별유천지비인간(別有天地非人間)이니 아니 놀고 어이 하리 30.망망(茫茫)한 창해(滄海)이며 탕탕(蕩蕩)한 물결이라 범피중류(泛彼中流) 떠나가니 일모향관하처시(日暮鄕關何處是)요 연파강상사인수(烟波江上使人愁)는 최호(崔顥)의 유적(遺跡)이라 봉황대(鳳凰臺) 나려가니 악양루(岳陽樓) 고소대(姑蘇臺)는 호상(湖上)에 떠있는데 동남(東南)을 바라보니 오산(吳山)은 천첩(千疊)이요 초수(楚水)는 만중(萬重)이라 반죽(斑竹)에 어린 눈물 이비한(二妃恨)을 아뢰는 듯 동정호(洞庭湖)에 비친 달은 상하천광(上下天光)이 일색(一色)이라 삼협(三峽)에 잔나비는 슬피 울어 호소(呼訴)하니 천객소인(遷客騷人)이 몇이런가 31.창외삼경세우시(窓外三庚細雨時)에 양인심사(兩人心事) 깊은 정(情)과 야반무인사어시(夜半無人私語時)에 백년동락(百年同樂) 굳은 언약(言約) 이별(離別)될 줄 어이 알리 동작대(銅雀臺) 봄바람은 주랑(周郞)의 비웃음이요 장신궁(長信宮의 가을달은 한궁인(漢宮人)의 회포(懷抱)로다 지척(咫尺)이 천리(千里)되어 은하(銀河)를 사이하고 까막까치 흩어졌으니 건너갈 길 바이 없고 어안(魚雁)이 돈절(頓絶)하니 소식인들 뉘 전(傳)하리 못 보아 병(病)이 되고 못 잊어 원수(怨讐)로다 가뜩이나 썩은 간장(肝臟) 이 밤 새우기 어려워라 32.춘하추동(春夏秋冬) 사시절(四時節)을 허송세월(虛送歲月) 옥중고생(獄中苦生) 망부사(望夫詞)로 울음울 제 춘풍(春風)이 눈을 녹여 가지가지 꽃이 피니 반갑고도 서러워라 꽃이 피고 잎이 나니 녹음방초(綠陰芳草) 시절(時節)이라 버들은 실이 되고 꾀꼬리는 북이 되어 유상세지(柳上細枝) 늘어진 가지 구십삼춘(九十三春) 자아내고 잎이 지고 서리 치니 황국(黃菊)의 능상절(凌霜節)과 백설(白雪)이 분분(紛紛)할제 송죽(松竹)의 천고절(千古節)을 그 아니 불워하리 33.인생천지백년간(人生天地百年間)에 부귀공명(富貴功名) 뜬구름이라 차라리 다 버리고 세상풍경(世上風景) 완상차(翫賞次)로 용문(龍門)에 장도(壯途)타가 구점연(九點烟)에 산하원기(山河元氣) 동정호(洞庭湖) 운몽택(雲夢澤)을 흉중(胸中)에 삼킨후에 낙안봉(落雁峰) 다시 올라 사조(謝眺)의 경인구(驚人句)를 청천(靑天)에 낭음(朗吟)하고 장건(張騫)의 팔월사(八月?)를 은하(銀河)에 흘려 놓아 장생술(長生術)을 익혀가며 세상진미(世上珍味)를 읊어볼까 34.정월(正月)이라 상원일(上元日)에 달과 노는 소년(少年)들은 답교(踏橋)하고 노니는데 이월(二月)이라 청명일(淸明日)에 나무마다 춘기(春氣)들고 잔디잔디 속잎 나니 만물(萬物)이 화락(和樂)하는데 우리 임은 어디 가고 봄이 온 줄 모르는가 삼월(三月)이라 삼짇날에 강남(江南)서 나온 제비 왔노라 현신(見身)하고 소상강(瀟湘江) 기러기는 가노라 하직(下直)한다 이화도화(李花桃花) 만발(滿發)하고 행화방초(杏花芳草) 흩날린다 우리 임은 어디 가고 화류(花游)할 줄 모르느냐 35.청려장(靑藜杖) 둘러 짚고 북향산(北香山) 찾아가니 백두산(白頭山) 내맥(來脈)이요 청천강(淸川江) 근원根(源)이라 월림강(月林江) 건너가서 향산동구(香山洞口) 다다르니 계변(溪邊)에 우는 새는 춘흥(春興)을 노래하고 암상(岩上)에 피는 꽃은 원객(遠客)을 반기는 듯 외사(外寺)목 넘어들어 좌우(左右)를 살펴보니 창송(蒼松)은 울울(鬱鬱)하고 녹수(綠水)는 잔잔(潺潺)이라 심진정(尋眞亭) 높은 집은 대소행차(大小行次) 영송처(迎送處)라 어화 이 좋은 풍경(風景) 아니 취(醉)고 어이하리 36.a.휘황월야삼경(輝煌月夜三更)에 전전반측(輾轉反側) 잠 못 이뤄 겨우 한잠 들었을 제 오매불망(寤寐不忘) 우리 임 만나 일구월심(日久月深) 그리던 회포(懷抱) 반이나 이루려니 베갯머리 귀뚜라미 겨우 든 잠 놀라 깨니 곁에 임 간 곳 없고 임 잡았던 나의 손길은 빈주먹만 쥐었구나 야속타 저 귀또리 네 짝 잃고 울 양이면 나의 원통(?痛) 이사정(事情)을 이다지도 모르느냐 b.휘황월야 삼경인데 전전반측 잠 못 이뤄 태고풍편에 오신 님 만나 그린 회포를 풀랴ㅆ더니, 벼갯머리 저 귀뚜리 서상가약을 그리느냐, 불승청원 실려 탄으로 귀똘귀똘 우는 소리 겨우 든 잠 놀라 깨니, 잡았던 님은 간곳 없고 들리느니 귀뜨람 소리 구곡간장 구비 구비 솟아 나느니 눈물이라, 야속하다 저 귀뚜리 네 짝을 잃고 울 양이면 남의 사정을 왜 모르나. 37.압록강(鴨綠江) 내리는 물 황해(黃海)로 돌아들고 한라(漢拏)에 이는 바람 백두(白頭)에 부딪쳐서 삼천리(三千里) 이 강산(江山)에 속속들이 불어온다 봄바람 따스할 제 꽃도 같이 보던 것을 여름날 시냇물에 서로 벗고 놀던 것을 철벽(鐵壁)에 가로막혀 못 본 지 몇몇 핸고 바람 불어 십년(十年)이요 물결쳐서 십년(十年)이라 언제나 다시 만나 이내시름 풀어 볼까 38.진상전(眞常殿) 해회당(海會堂)을 좌우(左右)로 살펴보니 만세루(萬歲樓) 올라서서 원근산천(遠近山川) 바라보니 남산(南山)의 웃는꽃은 춘색(春色)을 띠어 있고 청계(淸溪)의 맑은 물은 계곡(溪谷)을 둘러 있고 취운당(翠雲堂) 백운각(白雲閣)에 오작(烏鵲)이 쌍비(雙飛)하니 요지(瑤池)는 어디런지 선경(仙境)이 여기로다 여래탑(如來塔) 십구층(十九層)과 대보탑(大寶塔) 십이층(十二層)을 전후(前後)로 구경하고 대웅전(大雄殿) 들어가니 탑상(榻床)에 앉은 불상(佛像) 거룩하기 짝이없네 39.천황지황(天皇地皇) 개벽후(開闢後)에 인황구주(人皇九州) 분장(分張)하니 천만고(千萬古) 흥망사적(興亡事蹟) 남가일몽(南柯一夢)아니런가 홍몽일월(鴻?日月) 태고초(太古初)에 소박현풍(素朴玄風) 혼동(混同)하니 구목위소(構木爲巢) 순거곡식(?居穀食) 몇몇해나 지나간고 복희(伏羲) 신농(神農) 황제(黃帝) 요순(堯舜) 계천극립(繼天極立)하신후에 사도지직(司徒之職) 전악관(典樂官)이 상서학교(庠序學校) 열어내어 문장귀천(文章貴賤) 분별(分別)하고 예악교화(禮樂敎化) 선포(宣布)하니 인물(人物)이 혁혁(赫赫)하고 풍속(風俗)이 희희(熙熙)로다 40.응향각(凝香閣) 들어가서 오동향로(烏銅香爐) 구경하고 심검당(尋劍堂)과 관음전(觀音殿) 동림헌(東臨軒)과 미타전(彌陀殿) 망월루(望月樓)를 차례(次例)로 구경하고 유산(遊山)길 찾아가서 안심사(安心寺) 돌아드니 무수(無數)한 부도비(浮屠碑)는 도승(道僧)의 유적(遺跡)이라 명월(明月)은 교교(皎皎)하고 청풍(淸風)은 소슬(蕭瑟)이라 녹수청산(綠水靑山) 깊은 곳에 상원암(上院庵)을 찾아가서 대해포(大海浦) 구경하니 정신(精神)이 쇄락(灑落)하다 이층철사(二層鐵絲) 휘어잡고 인호대(引虎臺) 올라가니 송풍(松風)은 거문고요 두견성(杜鵑聲)은 노래로다 41.증광경과(增廣慶科) 택일(擇日)하여 문장(文章) 무사(武士) 다 모두어 초시회(初試會)를 설장(設場)하고 춘당대(春塘臺) 후원(後苑) 안에 대소과(大小科)를 창방(唱榜)하니 부(賦) 장원(壯元)에 굴원(屈原)이요 시(詩) 장원(壯元)에 이백(李白)이라 의(義) 장원(壯元)에 사마천(司馬遷)과 의심(義心) 장원(壯元) 한퇴지(韓退之)라 책문(策文) 장원(壯元) 동중서(董仲舒)요 표(表) 장원(壯元)에 왕발(王勃)이라 생원(生員) 진사(進士) 이백인(二百人)과 삼십삼인(三十三人) 호명(呼名)하니 반악(潘岳) 송옥(宋玉) 가의(賈誼) 유향(劉向) 반고(班固) 매승(枚乘) 조식(曹植)이요 두자미(杜子美) 송지문(宋之問)과 유자후(柳子厚) 두목지(杜牧之)와 가도(賈島) 잠삼(岑參) 맹동야(孟東野)와 백낙천(白樂天) 원진(元?)이라 구양공(歐陽公) 왕안석(王安石)은 소년성명(少年成名) 조달(早達)하고 소자첨(蘇子瞻) 소영빈(蘇潁濱)은 형제연벽(兄弟聯壁)호기(豪氣)로다 설문청(薛文淸) 이동공(李??)과 왕양명(王陽明)과 왕감주(王감州)라 문장재사(文章才士) 다 뽑으니 천하득인(天下得人) 영광(榮光)이라 *띠리리잇 띠리리 잇 띠리리리리리 아니 놀지는 못하리라 42.임이별 해본 사람들 몇몇이나 덴다드냐 임을 잃든 그날밤이 어디가 아프고 쓰리드냐 배지나간 바다위에는 파도와 물결만 남아있고 임떠나간 내 가슴에는 그 무었을 남겼느냐 장미화 꽃이 곱다고 해도 꺽고보니 가시로다 사랑이 좋다고 해도 남되고 보면 원수로다 *얼씨구 절씨구 절씨구 지화자 좋네 아니 놀지는 못하리라 43.a지리하구나 임이별은 생각사록 목이 메누나 인연없어 못보느냐 무정하여 그리느냐 인연도 없지 않고 유정도 하건마는 일성중안 같이 살며 왜 이다지 애가타 그려사나 차라리 몰랐드라면 뉘가 뉜줄 몰랐을걸 사귄것이 원수로구나 b 지리하구나 님 이별은 생각사록 목이 메고 인연 없어못 보느냐 무정하여 그리느냐, 인연도 없지 않고 유정도 하건마는, 일성중 안 같이 살며 (오매불망 우리님을) 왜 이다지도 그려사나, 차라리 물랐더라면 뉘가 뉜줄 몰랐을걸 사귄 것이 원수로구나 정 많이 든 것이 대원수로다 생각을 하고 또 생각해도 님의 화용이 그리워서 (참아진정) 못살겠네. *얼씨구나 지화자 좋네 아니 놀지는 못하리라 44.a.원수가 원수가 아니라 내 정은 뺏어가고 제정 안주니 그것이 모두가 원수로다 심중에 타는 불을 그 뉘라서 꺼줄손가 신롱서를 꿈에보고 불끌약을 물었더니 임으로 하여 난병이니 임이 아니면 못끈다네 서리맞어 병든 잎은 바람이 없어도 떨어지고 임그리워 애타는 가슴 병 아니 든다고 내 어이 사나 b.원수가 원수가 아니라 내 정은 뺏어가고 제 정은 안주니 그것이 모두 다 원수로다 심중에 타는 불을 그 뉘라서 꺼줄소냐 신롱씨를 꿈에 보고 불 끌 약을 물었더니 인삼 녹용도 쓸데 없고 화타 편작도 소용이없네 님으로 연하여 난병이니 님이 아니면 못 끈다네. *얼씨구 절씨구 절씨구 지화자 좋네 아니 놀지는 못하리라 45.잊어라 꿈이 로구나 모두 다 잊어라 꿈이 로구나 옛날 옛적 과거지사를 모두다 잊어라 꿈이로다 나를 싫다고 나를 마다고 나를 박차고 가신임을 잊어야만 올을줄을 나도 번연이 알건마는 어리섞은 미련이 남아 그래도 몾잊어 걱정일세 46.나 떠난다고 네가 통곡말고 나 다녀 올동안 마음 변치 말어라 제 몸에 병이 들었나 뉘게 잡히여 못오시나 해다저서 황혼이 되면 내 아니가도 제 오니 아마도 우리임은 남에 사랑이 분명하구나 47.지척동방 천리 되어 바라 보기 묘연하고 은하작교가 흩어졌으니 건너 갈 길이 아득하다. 인정이 끊텼으면 차라리 잊히거나, 아름다운 자태거동 이목에 매양 있어 못 보아병이로다. 못잊어 한이 되니 천추만한 가득한데 끝끝이 느끼워라. 48.창문을 닫쳐도 숨어드는 달빛 마음을 달래도 파고드는 사랑 사랑이 달빛이냐 달빛이 사랑이냐, 텅 비인 내가슴엔 사랑만 가득 쌓였구나. 사랑사랑 사랑이라니 사랑이란게 무엇이냐 보일듯이 아니 보이고, 잡힐듯하다 놓쳤으니 나혼자 고민 하는게 이것이 모두가 사랑이냐. 49. 바람아 광풍아 불지 마라 송풍낙엽이 다 떨어진다 명사십리 해당화야 꽃 진다 잎 진다 설워 마라. 동삼 석달 잠을 자다가 춘삼월이 다시 올제. 황금같은 꾀꼬리는 양류상으로 넘나들며 순제금을 희롱하고 탐화봉접이 춤을 출제 훈풍을 좇아서 또 피련마는 우리 인생 늙어지면 다시 젊지는 못하리로다. 50.만리장공에 하운이 흩어지고 무산십이봉에 월색도 유정하더라 님이 저리 다정하면 이별인들 있을 소냐. 이별 마자고 지은 맹서 태산같이 믿었더니, 태산이 허망하여 (백년동락 굳은 언약이) 무너질줄 뉘라 알리. 무정하다 저 달 빛은 천리원정에 님 잃은 서름 너는 어이 모르냐. 51.바람 불어 누운 남기 봄 비 온다고 일어나며 님으로 연하여 얻은 병이 약을 쓴다고 낳을 소냐. 우황 웅담으로 집을 짓고 청심환으로 왕토를 치고, 인삼 녹용으로 구들을 놓고 삼신산 불로초로 약을 지어서 먹은 후에, 화타 편작이 갱생(更生)을 해도 님으로 연하여 애타는 간장 이내 병 낫기는 만무로구나. 52.인간 이별 만사중에 날같은 사람 또 있는가 천지만물 분연후에 설른 이별이 몇몇이냐. 강산에 떠 가는 저 배는 가는 곳이 그 어디메뇨, 만단수회 실은 후에 천리 약수 건너 가서 임계산 곳에 풀고지고, 장탄단우 이내 설움 구곡간장 맺힌 한을 어이하면 풀어볼까. 53. 동정호 지는 달도 그믐이 지나면 또 볼수 있고 북경 길이 멀다해도 사신행차가 왕래하고, 하늘이 높다 해도 오경전에 이슬이 오고, 무한년 정배라도 사만 있으면 풀리는데 황천길은 얼마나 멀게 한번 가며는 영절인가. 54.창해월명 두우성은 님 계신곳 바쳐 있고 회포는 심란한데 해는 어이 수이 가노, 잘새는 집을 찾아 무리무리 날아들고, 야색은 창망하여 달빛 조차 희미 한데 경경히 그리는것은 간장 썩는 눈물이라. 55.춘풍화류 번화시에 애를 끊는 저 두견아 허다공산을 다 버리고 내 창전에 와 왜 우느냐. 밤중이면 네 울음 소리 억지로든잠 다 깨운다. 잠을 자느냐 꿈을 꾸느냐 날 생각 하느라고 번민이냐 생각을 하고 또 생각해도 님의 화용이 그리워 뭇살겠네. 56.뉘라서 장사라더냐 죽음 길에도 장사가 있나 누누중충 북망산을 뉘 힘으로 뽑아 내며 봉리춘풍 빠른 광음을 어느 재사라 막아 내리 명황도 눈물을 짓고 왕후장상도 울었으니 오는 백발을 어이하리 진시황 한무제도 채약구선 못 하고서 여산황릉 갚은 골에 모연주초 뿐이로다 고왕금래 영웅 호걸이 백발이 공도 되어 속절 없이 묻혔구나. 57.님과 날과 만날적에는 백년을 살자고 언약을 하고 태산을 두고 맹서를 하고 하해를 두고서 언약을 하더니, 산수지맹은 간 곳 없고 다만 남은건 이별이라, 이별 두자 누가 내며 사랑 두자를 그 누가 냇나 이별 두자 내인 사람 날과 한 백년 원수로다. 박랑사중 쓰고 남은 철퇴 천하장사 항우를 주어 깨치리로다 깨치리라 이별 두 자를 깨치리라. 58.억만장안 남북촌에 영웅호걸 재자가인 명기명창 가객이며 가진풍류를 갖추어 싣고, 순풍에 돛을 달어 범피중류 내려 갈제, 벽파상에 나는 백구는 흥에 겨워 춤을 추고 고기 잡는 어옹(漁翁) 들은 어기여차 노래한다. 세상공명 다 떨치고 풍월 따라 희롱하니 이도 또한 좋을시고. 59.봄이 왔네 봄이 왔네 원근산천에 봄이 왔네 먼 산의 아지랑이 아롱아롱 뒷 내에 실 버들 하늘하늘, 불탄 잔디 속 잎이 나니 봄은 분명 봄 이로구나. 강남 갔던 저 제비도 옛 집을 찾아 다시 오고 개나리 진달화 만발하니 벌 나비 잡충이 춤을 춘다. 우리 인생도 저 봄과 같이 다시 젊지를 왜 못하나. 원수로구려 원수로구려 무정세월이 원수로구려 검던 머리 곱던 양자 어언간에 백발일세. 백발이 날 찾아올 줄 알았으면 한 손에는 창을 들고 또 한 손에는 철퇴를 들고 오는 백발을 막을것을. 60.우연히 길을 갈적에 이상한 새가 울음을 운다 무슨 새가 울랴마는 적벽화전의 비운이라 하야구구(귀귀) 진토를 보고 설리 통곡 우는 모양 사람의 심리로서야 참아 진정 못 보겠네. 포연탄우 모진광풍에 천하장사 영웅호걸이 비명횡사가 몇몇일러냐. 일후에 그 원혼들이 와석종신 못 한 이한을 어느 누구에게 하소연 하느냐 61.서산에 해 기울고 황혼이 짙었는데 안 오는 님 기다리며 마음을 죄일 적에, 동산에 달이 돋아 온 천하를 비쳐 있고, 외기러기 홀로떠서 짝을 불러 슬피 울 제 원망스런 우리 님은 한없이 기다리다 일경이경 삼사오경 어느덧이 새벽일세. 추야장 긴 긴 밤을 전전불매 잠못 들제 상사일념 애타는 줄 그대는 아시는가, 둘데 없는 이내 심사 어디다가 붙여 볼까 차라리 잊자 해도 욕망이 난망이라 차마 진정 못 잊겠네. 62.산은 적적 월황혼에 두견접동 슬피 울고 오동 우에 비낀 달은 이내 회포를 돋우는데, 야월공산 깊은 밤에 님 그리워 설이울제. 독대등촉 벗을 삼아 전전불매 잠못 들고 상사일염 애 태우니, 옥장의 깊은 곳에 잠든 님을 생각을하고 남가일몽 꿈속에라도 잠깐이나마 보고 지고, 짝을 잃고 우는 저 두견아 남의 원통 이 사정을 너는 왜 이다지도 모르느냐. 63.손목을 잡고 작별을 하려고 눈물 씻고 자세히 보니 홍도와 같이 고운 얼굴에 앵도와 같이 붉은 입술 검은 눈섭을 그린듯이 깍은듯이 가는 허리가 활대와 같이 휘였구나 노란 저고리 다홍치마에 붉은 깃에 남 끝동에 물명주 삼팔 수건을 눈결과 같이 휘여잡고 들며 날며 곁눈질에 돈 없는 건달 마음 산란하다.
58    '위안부'(慰安婦)와 조선민족 남자 댓글:  조회:1004  추천:0  2019-04-29
'위안부'와 조선민족(조선,한국,중국조선족)남자 최근 언론에는 소리가 여느 때보다 많이 오르고 있다. 진짜 를 관심하는 것인지?! [정치인들의 눈 가림인지•••] < 위안부>는 세계 백여 개 나라, 몇 백 개 민족 속에 조선(한국)과 조선민족에게만 속하는 특유의 이다. < 위안부>는 한 세 기전 일본이 조선을 멸하고 조선과조선민족사내들에게 들씌운  치욕의 오강이다.. 나는 일본 애들 말하지 않는다.조선민족 여성들이 강 족에게 끌려 다닌 적이 처음이고, 일본애들 뿐이가? 예전부터 나는 조선민족사내들을 말한다. 나도 조선사내지만... 사내란 게 제 나라, 제 여자를 지키지 못하여 나라가 망하고 그 많은 아녀자들이 오랑캐들에 끌려 다니며 치욕 당했는가?! 역사상 그것도 한번 아니고... ...  세계 백여개 나라 몇 백 개 민족에 이런 일이 있었던가?! 왜 세계 그많은 나라, 민족 중에 유독 조선과 조선민족에게만 가 있고, 란 딱지가 붙는가?! 조선,한국,중국조선족 남자들이 사유해야 할 문제라고 생각한다. 조선의 역사와 문화를 슬쩍 살펴보면 외(外)족에 쫓기고 강적을 섬기며 동족끼리 살육하는 세월이었다고 본다.(지금도 마찬가지다.) 거기에 조정이 부패무능하고 관리, 양반들이 늘 기생, 여자들을 차고 강가, 숲 속을 누비며 북, 장단 속에 를 꼬부랑 외치며 아녀자들 치마속에 묻혀 삶의 을 향수하며 세월을 보낸다. 덕으로 이웃나라,  민족에게 큰 땅덩이를 다 때웠고 쪼고만 조선반도로 몰 리였다. 후로는 바다건너 작은 섬나라 일본 애들에게 망하는 꼴이 됐고 민족에게 [위안부]란 세계에 둘도 없는 치욕적인 단어도 얻게 되였다. 현재는 세계에서 유일하게 나라가 분열되고 혈육이 갈라져 사는 민족이다. 그 현황에서도 한시도 한 피 줄타고 난 형제를 비방하고 멸하지 못하여 이를 갈고 있다. 조선민족이 반성하고 사고해야 할 것이 아닌가 한다. 잍본을 규탄하고 배상을 요구할 것이 아니라, 우리여성들이 제 남자들을 원망하고 그들에게서 배상을 받아야 한다고 본다, 조선민족남자들이 나라를 굳건히 지키고 제 여자를 잘 보호하였으면 그 여자들이 외(外)족들에게 끌려 다니며 굴욕을 당 하 였게는가? ! 조선사내들이 제 책임을 다 하였으면 조선나라 조선민족에게 세상에 둘도 없는 란 치욕적인 딱지가 붙어 겠 는가?!조선민족사내들이 똑똑하고 잘하였으면 이런 일이 있었겠는가? 일본 애들이 사과할 것이 아니라 조선민족사내들이 우리여성들에게 심심히 허리 굽혀 사과해야 한다고 본다. 왜,조선민족이 이렇게 되였는가? 왜,조선민족에게 란 세계에서 둘도 없는 치욕적인 단어가 붙게 되였는가?! 전체 조선민족이 사유해 볼 일이라고 본다. 부끄럽게 떠들썩거리지 말고 숙고해보아야 한다고 본다.    한국경기도안성에서 여때 여건이 안 되여 써놓아 던 글을 이제야 올려 본다.   글 : 소옹 출처 : 동포투데이 
57    코리안드림과 조선족의 삶에 대한 사고 댓글:  조회:902  추천:0  2019-04-29
중국 조선족사회에 코리안드림 즉 한국행만큼 사람들의 주의력이 집중되고 이목을 끄는 화제는 없는 것 같다. 이는 또한 월경민족으로 인접하고 있는 고국인 남북이 항상 중국조선족과는 뗄래야 뗄 수 없는 인연으로 작용하기 때문으로 인식된다. 현재 코리안드림은 중국 조선족에게 희와 비의 명과 암이 엇갈리는 삶의 결과를 수없이 만들고 있는데 喜보다는 悲,明보다는 暗에 쏠리어 대우받고 사랑받는 일보다는 멸시받고 소외받는 일이 더 많은 듯싶어 조선족을 위해 정의와 양심을 호소하는 언론이 주도를 이루고 있다. 세상만사는 복잡다단하다. 한국에 체류 중인 조선족들의 실상을 들여다 볼 때 그들은 그들 나름의 욕망이 있다. 한마디로 아무리 이렇다 저렇다 해도 그들은 그래도 한국에 오래 머물고 싶어 한다는 것이다. 확실히 한국에는 아직 일자리가 많고 소비도 높지만 임금 또한 상대적으로 높아 있을 만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정책이 제정한 범위 내에서 성실하게 열심히 일하면 얼마든지 잘살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 것이다. 반면 우리가 더 관심을 가지고 주목해야 할 것은 한국에 나가 있는 재한동포들의 상황보다는 우리가 직접 몸담고 사는 중국 조선족사회의 현황이다. 조선족사회는 조선족으로서의 그 동질성과 정체성을 보존해 가려는 의지와 신념을 가진 사람들이 근간이 되어 유지되고 발전되어야 할 것 같다. 민족사회를 굳건히 견지해 나간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요즈음 민족사회에 관심과 애호를 가진 사람들이 민족의 동질성과 정체성을 두고 날이 갈수록 심각한 고민을 하고 있는 것은 개혁개방으로 나라의 발전 속도는 아주 빠르고 따라서 이에 힙 입어 주체민족은 잘되어 나가지만 어쩐지 그에 비해 우리는 못해가고 있지 않느냐는 의구심 때문이다. 때문에 정체성 유지는 이상으로 멀어져가고 대신 현실적 삶이 더욱 유혹적인 것이다. 그래서 지금 조선족은 그 어느 때보다 심각한 역사의 갈림길에 놓여있는 것 같다.가장 두려운 것은 지금까지 우리 민족 앞에 닥친 어떤 어려움들이 전 민족적인 것의 영향권에 있었다면 이제 이 어려움은 월경민족인 중국조선족 ㅡ우리만의 어려움이라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 누구도 아닌 바로 우리들이 이 난관을 헤쳐 나가야 할 역사적 임무가 가로 놓여 있다. 우리는 자칫하면 코리안드림으로 경제적인 실리는 챙겼지만 정신적으로는 혼란을 가져와 우리가 오래 몸 붙이고 산 이 땅의 믿음도 놓쳐 버릴 수 있다. 이러한 실제 난관을 헤쳐 나갈 돌파구를 객관적 원인에서 찾기보다는 바로 우리 민족 자신에게서 찾는 것이 더 바람직하지 않을까 .지난날 우리는 우리 부형들이 이룩한 공로의 발판을 딛고 나라에서 주는 소수민족 우대정책에 의거하여 살면서 자생력을 많이 잃고 살았던 것이 아닌가 싶다. 장기간 평균주의 의식 속에 자신도 모르게 잠재해 있던 이러한 약점은 한국에 가서도 자연스럽게 발로가 되어 한 민족, 같은 동포이기에 마땅히 한국정부로부터 돌봄을 받고 우대를 받아야 된다는 관념을 가지게 된 듯도 싶은데 우리는 조선민족이면서도 그 누구 아닌 바로 중국의 조선족이다. 이 점을 명심하지 않는다면 우리가 부딪치는 많은 난관 앞에서 쉽게 방황할 수 있다.항상 우리는 중국조선족이라는 이 점을 명기하고 그러한 자세로 사고하며 지혜와 방법을 모색하여 우리 나름의 길을 열어나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출처: 흑룡강신문 
이성계가 몽골족인지 여진족 인지 , 한족인지는 확실히 모르겠으나 , 확실한건 동북면 사람 이었다. 고려의 영토는 어디까지나 강동6주 까지 였고 동북면을 개척한건 공민왕 시절 이었다. "이성계가 고려인이다" 논리 로 보자니 18세 이안사 시절 산성별감이 전주로 부임하여 의주지사宜州知事 로 있던 이안사 에게 관기官妓를 요구하였으나 이안사가 거절하자 사병으로 이안사를 공격할려하자 이안사는 혈족과 외족 170여호를 이끌고 고려를 떠나 동북면으로 이주하여 원나라 다루가치 가 되었다는 것이다. 근데 원나라 시절 당시 어느정도 고려인 들이 몽골관직 받고 천호자리에 앉은 사람들이 있지만 그자들은 그냥 봐도 고려인 후손 인줄 알지만 이성계는 아니였다. 그 이유는 귀화한 사람들은 성씨를 안바꿨기 때문이다. 이성계가 정말 고려인 후손 이라면 성씨는 안바꿨을 것이다.   태종 26권, 13년(1413 계사 / 명 영락(永樂) 11년) 8월 6일(임자) 4번째기사 - 동북면 천호 등이 민호를 사사로이 사역하는 것을 없애다  동북면에 와서 사는 향화인(向化人) 가운데 천호(千戶) 김고시첩목아(金高時帖木兒)의 관하인 이구대(李求大)와 최야오내(崔也吾乃)의 관하인 김양용(金良龍) 등 7인이 고하기를,   - 고려인 가운데 원나라 천호 관직 받고 귀화한 사람들 보면 성씨는 안바꿨다. 참고로 고려사 보다 보면 어느정도 등장한다.   김씨 - 김고시첩목아(金高時帖木兒) 이씨 - 이구대(李求大) 최씨 - 최야오내(崔也吾乃) 기씨 - 기샤인테무르 이씨 - 이오로첨목아 최씨 - 최첩목아(崔帖木兒) 박씨 - 박불화(朴不花)   여진족 가운데 천호 받은 사람들 보면  여진(女眞) 금패천호(金牌千戶) 아라부카[阿羅不花] 천호 관직 대를 이은 투란테무르  투란테무르 는 고려로 귀화해 이두란 이 되었다 22세 이성계 는 아가바토르  21세 이자춘 은 우르스부카 [吾魯思不花] 20세 이춘 孛顔帖木兒(패안첩목아) * 추정하건대 이성계는 몽골세력의 지배를 받는 여진오랑캐와 한족의 혼혈혈통으로 고려에 귀화한 외국인임이 틀림없다.   [출처] 이성계 가 정말 고려인 인가|작성자 iece12345    
55    제3편: 삼조선(三朝鮮)의 분립 시대 댓글:  조회:786  추천:0  2019-01-31
제 1 장 삼조선(三朝鮮) 총론 삼조선(三朝鮮)이란 명칭의 유래 종래의 각 역사책에 삼조선 분립의 사실이 빠졌을 뿐 아니라, 삼조선이라는 명사까지도 단군·기자·위만의 세 왕조라고 억지 해석을 하였다. 삼조선은 신·불 ·말 삼한의 분립을 말한 것이니, `신한'은 대왕 ( 大王 ) 이요, 불·말 두 한은 부왕 ( 副王 ) 이다. 삼한이 삼경 ( 三京 ) 에 나뉘어 있어 조선을 통치하였음은 이미 제 1 편에서 말하였거니와, 삼조선은 곧 삼한이 분립한 뒤에 서로 구별하기 위하여 신한이 통치하는 곳은 신조선이라 하고, 말한이 통치하는 곳은 말조선이라 하고, 불한이 통치하는 곳은 불조선이라 하였다. 신·말·불 삼한은 이두문으로 진한 ( 辰韓 )·변한 ( 弁韓 ) 이라 기록된 것이고, 신·말 ·불 삼조선은 이두문으로 진 ( 眞 ) · 막 ( 莫 ) · 번 ( 番 ) 삼조선이라 기록된 것이다. 똑같은 신·말·불의 음역 ( 音譯 ) 이 어찌하여 하나는 진·마·변이라 하고 또 하나는 진·막·번이라 하여 같지 아니한가? 이는 남북의 이두문의 용자 ( 用字 ) 가 달랐기 때문이거나 혹은 지나인의 한자 음역이 조선의 이두문의 용자와 달랐기 때문일 것이다. 조선에는 고전 ( 古典 ) 이 거의 다 없어졌으므로 삼조선의 유래를 찾을 길이 없으나, 지나사 ( 支那史 ) 에는 왕왕 보인다. 사기 ( 史記 ), 조선열전 ( 朝鮮列傳 ) 에 `진번조선 ( 眞番朝鮮 ) '이라 한 것은 신·말 두 조선을 함께 말한 것이고, 주 ( 註 ) 에 “번 ( 番 ) 은 일에 막 ( 莫 ) 으로도 쓴다 ( 畵一作莫 ). ”고 하였는데, 번자를 막자로 대신하면 `진막조선 ( 眞莫朝鮮 ) '이 된다. 진막조선은 신·말 두 조선을 함께 말함이니, `진막번조선 ( 眞莫番朝鮮 ) ' 혹은 그대로 써서 신·말·불 삼조선을 다 말하지 않고, 혹은 막자를 빼어버리고 `진번조선 ( 眞番朝鮮 ) '이라 하거나 혹은 번자를 빼어버리고 `진막조선 ( 眞莫朝鮮 ) '이라 기록한 것은 무슨 까닭인가? 이는 지나인이 외국의 인명·지명 등 명사를 쓸 때에 매양 문예 ( 文藝 ) 의 평순 ( 平順 ) 을 위하여 축자 ( 縮字)를 쓰는 버릇으로 그렇게 쓴 것이다 . 목천자전 ( 穆天子傳 ) 의 한 ( 韓 ) 은 신한을 가리킨 것이요, 관자 ( 管子 ) 의 `발조선 ( 發朝鮮 ) '과 대대례 ( 大戴禮 ) 의 `발식신 ( 發息愼) '은 불조선을 가리킨 것이요, 오직 말조선은 지나와 멀리 떨어져 있었으므로 사기 이외에는 다른 책에 보이는 것이 없다. 삼조선(三朝鮮)의 위치와 범위 한 ( 韓 ) 은 나라 이름이 아니라 왕이란 뜻이니, 삼한이란 삼조선을 나누어 통치한 세 대왕을 말함이고, 삼조선이란 삼한 곧 세 왕이 나누어 통치한 세 지방임은 물론이어니와, 그 세 도읍의 위치와 강역 ( 疆域 ) 의 범위도 기술할 수 있을까? 삼한의 도읍은 1) 제 1 편에 말한 '아스라' ----지금의 합이빈, 2) '알티' ----지금의 개평현 ( 蓋平縣 ) 동북쪽 안시 ( 安市 ) 옛 터, 3) '펴 라' ----지금의 평양, 이 셋이다. 삼조선이 분립하기 전에는 신한이 온 조선을 통치하는 대왕이 되고, 불·말 두 한이 그 부왕 ( 副王 ) 이었으므로, 신한이 '아스라'에 머물러 있을 때에는 말·불 두 한은 하나는 '펴라'에, 하나는 '알티'에 머무르고, 신한이 '알티' 혹 '펴라'에 머물러 있을 때는 불·말 두 한은 또한 다른 두 서울을 나누어 지키다가 삼조선이 분립한 뒤에는 삼한이 각기 삼경 ( 三京 ) 의 하나를 차지하고, 조선을 셋으로 나누어 가졌다. 이때의 삼한이 차지한 부분을 상고하건대, 만주원류고 ( 滿洲原流考 )에, “한서지리지에 요동의 번한현 ( 番汗縣 ), 지금의 개평 등지가 변한 ( 弁韓 ) 의 고도 ( 古都 ) 이다.”라 했는데, 번한과 변한이 음이 같으니 개평 동북쪽의 '알티'가 불한의 옛 서울일 것이다. 삼국유사 ( 三國遺史 ) 에, “마한(馬韓 ) 은 평양의 마읍산 ( 馬邑山 ) 으로 이름한 것이다.”라고 하였는데, 마한으로 인하여 마읍산이 이름을 얻은 것이요, 마읍 ( 馬邑 ) 으로 인하여 이름을 얻은 것은 아니나, 마한은 곧 평양에 도읍하였다가 뒤에 남쪽으로 옮겼음이 사실이니, 평양 곧 '펴라'가 ( 말한 ) 의 옛 서울일 것이요, 신한은 비록 상고할 곳이 없으나 '알티'와 '펴라'의 두 서울이 불·말 두 한을 나누어 점령하였으니, '삼한'이 합이빈 곧 '아스라'에 도읍하였을 것이 의심없다. 이에 삼조선의 강역의 윤곽도 대개 그릴 수 있으니, 지금 봉천성 ( 奉天省 ) 의 서북과 동북 ( 開原 이북, 興京 이동 ) 과 지금 길림 ( 吉林 ) ·흑룡 ( 黑龍 ) 두 성 ( 省 ) 과 지금 연해주 ( 沿海州 ) 의 남쪽 끝은 신조선의 소유이고, 요동반도 ( 遼東半島 : 開原 이남 , 興京 이서 ) 는 불조선의 소유이며, 압록강 이남은 말조선의 소유였다. 그러나 전쟁의 세상에 고정된 강역이 있을 수 없으니, 시세를 따라 삼조선의 국토가 많이 늘었다 줄었다 하였을 것이다. 기록상 삼조선(三朝鮮)의 구별 조건 이제 역사를 읽는 이들이 귀에 서투른 '신조선' , '불조선' '말조선' 이라는 소리만 들어도 이미 놀랄 것인데, 하물며 전사 ( 前史 ) 에 아무 구별없이 쓴 '조선 ( 朝鮮 ) '이란 명사들을 가져다 구별하여, 갑의 역사에 쓰인 조선을 신조선이라 하고, 을의 역사에 쓰인 조선을 불조선이라 하고 , 병의 역사에 쓰인 조선을 말조선이라 하면 믿을 사람이 누구랴 ? 그러나 삼국사기를 읽어보면 고구려 본기 ( 本紀 ) 에 동·북 두 부여를 구별치 않고 다만 부여라 씌었고, 신라 본기에는 크고 작은 등 다섯 가야 ( 加耶 ) 를 구별치 않고 다만 가야라 씌어 있으니, 만일 전사 ( 前史 ) 에 구별하지 아니한 것이라고 하여 그대로 구별치 아니하면 두 부여사나 다섯 가야사 ( 加耶史 ) 의 본 면목을 회복할 날이 없을 것이 아닌가? 하물며 삼조선의 분립은 조선 고사에 있어서 유일한 큰 일이니, 이를 구별치 못하면 곧 그 이전에 대단군 왕검의 건국의 결론을 찾지 못할 것이요, 그 이후에 동북 부여와 고구려·신라·백제 등의 문화적 발전 서론 ( 緖論 ) 을 얻지 못할 것이니, 어찌 습견 ( 習見 ) 에 젖은 이의 두뇌에 맞추기 위해 삼조선의 사적 ( 事蹟 ) 을 구별하지 않으랴? 삼조선의 사적 ( 史的 ) 재료는 오직 사기 ( 史記 ), 위략 ( 魏略 ), 삼국지 ( 三國志 ) 등 지나사 ( 支那史 ) 뿐이지만 저 지나사의 저작자들이 그들의 유전적인 교오병 ( 驕傲病 ) 이 있어서, 조선을 서술할 때에 조선 그 자체를 위하여 조선을 계통적으로 서술하지 않고 오직 자기네와 정치적으로 관계되는 조선을 서술하였고, 그나마도 왕왕 피차의 성패와 시비를 뒤바꾸어 놓았음이 그 하나요, 조선의 나라 이름·지명 등을 기록할 때에 왕왕 조선인이 지은 본디의 명사를 쓰지 않고 자의로 딴 명사를 지어, 동부여 ( 東扶餘 ) 를 불내예 ( 不耐濊) 라 하고, 오열홀 ( 烏列忽 ) 을 요동성 ( 遼東省 ) 이라 하는 따위의 필법 ( 筆法 ) 이 많음이 그 둘이요, 조선은 특수한 문화가 발달하여 왔는데, 매양 기자 ( 箕子 ) 나 진 ( 奏 ) 나라 유민에게 공을 돌리려 하여 허다한 거짓 증거를 가짐이 그 셋이다. 그러므로 사마천이 사기를 지을 때에 연 ( 燕 ) 의 멸망이 오래지 않았으니 연과 삼조선에 관계된 사실의 상고할 만한 것이 적지 않았을 것이고, 한무제 ( 漢武帝 ) 가 조선의 일부분이요, 삼경 ( 三京 ) 의 하나인 '알티'의 문화고도 ( 文化故都 ) 를 점령하였으니, 고대의 전설과 기록이 적지 않았을 것인데도 불구하고 사기의 조선전 ( 朝鮮傳 ) 은 조선의 문화적·정치적 사실을 하나도 쓰지 않고, 오직 위만 ( 衛滿 ) 과 한병 ( 漢兵 ) 의 동침 ( 東侵 ) 을 썼을 뿐이니, 이는 조선전이 아니라 위만의 소전 ( 小傳 ) 이요, 한나라의 동방 침략의 약사 ( 略史 ) 이다. 위략, 삼국지 등의 책은 관구검 ( 母兵檢 ) 이 실어간 고구려의 서적으로 재료를 삼았으나 또한 그 폐습의 심리를 가지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러면 무엇에 의거하여 저들의 기록에 보인 조선들을 가지고 이것이 신조선이니, 말조선이니, 불조선이니 하는 구별을 내릴 것인가? 사기 조선에는 위만이 차지한 불조선만을 조선 ( 朝鮮 ) 이라 쓰는 대신에 신조선은 동호 ( 東胡 ) 라 일컬어서 흉노전에 넣었다. 그러니 이제 사기, 흉노전에서 신조선의 유사 ( 遺事 ) 를, 조선전에서 불조선의 유사를 초출 ( 抄出 ) 하고, 위략이나 삼국지의 동이열전 ( 東夷列傳 ) 의 기록을 교정하여 이를 보충하고 말조선은 지나와 멀리 떨어져 있어서 지나사의 필두에 오른 일은 적으나, 마한 ( 馬韓 ) ·백제 ( 百濟 ) 의 선대는 곧 말조선 말엽의 왕조이니, 이로써 삼조선이 갈라진 역사의 대강을 알 것이다. 삼조선(三朝鮮) 분립의 시작 대단군 ( 大檀君 ) 의 정제 ( 定制 ) 에는 비록 삼한이 있어 삼경에 나뉘어 머물렀으나, 신한은 곧 대단군이니 제사장으로서 겸하여 정치상의 원수가 되고, 말·불 두 한은 신한을 보좌하는 두 부왕에 지나지 않는 나라의 체제를 확립하였으므로, 삼조선이라는 명칭이 안는 나라의 체제를 확립하였으므로 삼조선이라는 명칭이 없었는데, 삼한이 분립한 뒤 삼조선이란 명사가 생겼음은 이미 앞에서 말하였거니와, 삼한이 어느 시대에 분립하였는가? 사기에 보인 진막벌조선은 전연시 (全燕時 ) 곧 연의 전성 시대라고 하였는데, 연의 전성 시대는 지나 전국시대 ( 戰國時代 ) 초이고, '발조선 ( 發朝鮮 ) '을 기록한 관자 ( 管子 ) 는 관중 ( 管仲 ) 이 지은 것이 아니고 전국시대의 위서 ( 僞書 ) 이며 '발숙신 ( 發肅愼 ) '을 기록한 대대례 ( 大戴禮 ) 는 비록 한인 ( 漢人) 대승 ( 載勝 ) 이 지은 것이지마는, 발식신 ( 發息愼) 운운 한것은 제인 ( 齊人 ) 추연 ( 鄒衍 ) 이 전한 것인데, 추연은 전국시대의 인물이다. 신·말·불 삼조선의 명사가 이같이 지나 전국시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렸으니, 삼조선의 분립은 곧 지나 전국시대의 일이요, 지나 전국시대는 기원전 4 세기경이니 , 그러면 기원전 땅 4세기 경에 신·말·불 삼조선이 분립한 것이겠다. 신조선은 성이 해씨 ( 解氏 ) 니, 대단군 왕검의 자손이라 일컬은 자이고, 불조선은 성이 기씨 ( 箕氏 ) 니 기자 ( 箕子 ) 의 자손이라 일컬은 자이고, 말조선은 성이 한씨 ( 韓氏 ) 니 그 선대의 연원은 알 수 없으나, 왕부 ( 王符 ) 의 잠부론 ( 潛夫論 ) 에, “한 ( 韓 ) 의 서쪽도 역시 성이 한 ( 韓 ) 인데 위만 ( 衛滿 ) 에게 토벌당해 바다 가운데로 옮겨가 살았다 ( 韓西亦姓韓 爲衛滿所伐 遷居海中 ). ”고 하였으니, 한서 ( 韓西 ) 는 대개 말조선에 딸린 곳이므로, 말조선은 성이 한씨 ( 韓氏 ) 인가 한다. 위략 ( 魏略 ) 에, “기자 ( 箕子 ) 의 후손 조선후 ( 朝鮮候 ) 는 주 ( 周 ) 가 쇠해지고 연 ( 燕 ) 이 자존 ( 自尊 ) 하여 왕이 되서 동쪽으로 땅을 공략하려고 하는 것을 보고, 조선후도 역시 스스로 왕을 일컫고 군사를 일으켜 연을 배후에서 쳐 주실 ( 周室 ) 을 높이려고 하다가 대부례 ( 大夫禮 ) 가 간하여 그만두고 대부례로 하여금 연을 설득하여 연은 공격하지 않았다 ( 箕子之後朝鮮候 見周衰 燕自尊爲王 欲東略地 朝鮮候亦自稱爲王 欲興兵逆擊燕 以尊周室 大夫禮 諫之乃止 使禮西說燕以之止 不攻 ). ”고 하였는데, 위략은 곧 서양의 백인종인 대진 ( 大秦 ) ·로마 ( 羅馬 ) 까지도 중국인의 자손이라 기록한 가장 지나식의 자존적 ( 自尊的 ) 병심리 ( 病心理 ) 를 발휘한 글이니, 그 글의 전부를 덮어놓고 믿을 수는 없으나 '신한', '불한'을 당시 조선에서 진한·마한·변한으로 음역한 이외에 '신한'은 혹 의역하여 '진왕 ( 辰王 ) ', '태왕 ( 太王 ) '이라고 하였으니 ( 다만 辰王의 辰은 음역 ) '신한'은 한자로 쓰면 조선왕 ( 朝鮮王 ) 이라 하였을 것이요, '말한', '불한'은 의역하여 좌보 ( 左輔 ) ·우보 ( 右輔 ) 라 하였으니, 한자로 쓰면 조선후 ( 朝鮮候 ) 라 하였을 것이므로 기자가 이 때에 '불한'의 지위에 었었으니 조선후라 일컬음이 또한 옳다. '불한' 조선후 기씨가 '신한' 조선왕 개씨를 배반하고 스스로 '신한'이라 일컬어서 삼조선 분립의 판국을 열었는데, '불한'이 '신한'을 일컬은 것이 연(燕)이 왕을 일컬은 뒤요, 연이 왕을 일컬은 것은사기 에 주 ( 周 ) 에 신정왕 ( 愼王 ) 46 년, 기원전 323 년이니 신·말·불 삼조선의 분립이 기원전 4 세기 경임을 확증하는 것이고, 대부례는 대개 '불한'의 유력한 모사 ( 謨士 ) 니, '불한'을 권하여 '신한'을 배반하고 역시 '신한'이라 일컫게 하고, 연과 결탁하여 동·서 두 새 왕국을 동맹하게 한 이가 또한 대부례이니 대부례는 삼조선 분립을 주동한 중심 인물일 것이다. 삼조선 분립 이전에는 '신한'이 하나였는데, 삼조선이 분립한 뒤에 는 '신한'이 셋이 되었다. 곧 신조선의 '신한'이 그 하나요, 말조선의 '신한'이 그 둘이요, 불조선의 '신한'이 그 셋이니, 곧 대왕 ( 大王 ) 이라는 뜻이다. 제 2 장 삼조선(三朝鮮) 분립 후의 '신朝鮮'[편집] 신朝鮮의 서침(西侵)과 연(燕)· 조(趙)· 진(秦)의 장성(長城)[편집] 삼조선이 분립한 뒤 오래지 않아서 신조선왕 모갑 ( 某甲 ) 이 영특하고 용감하여 마침내 말·불 두 조선을 다시 연합해 지금의 동몽고 ( 東蒙古 ) 둥지를 쳐서 선비를 정복하고 연을 쳐 우북평 ( 右北平 )---- 지금의 영평부 ( 永平府 ) 와 어양 ( 漁陽 )---- 지금의 북경 ( 北京 ) 부근과, 상곡 ( 上谷 )---- 지금의 산서성 ( 山西省 ) 대동부 ( 大同府 ) 등지를 다 차지하여 불리지 ( 弗離支 ) 의 옛 땅을 회복했다. 연왕 ( 燕王 ) 이 크게 두려워서 세폐 ( 歲輪 ) 를 신조선에 바치고 신하를 일걷고 태자를 보내서 볼모를 삼게 하였는데, 모갑이 죽고 모을 ( 某乙) 이 왕이 된 뒤에는 연의 태자가 돌아가서 연왕이 되어 장군 진개 ( 秦開 ) 를 왕자라 속여서 볼모로 보냈다. 모을이 그 속임수를 깨닫지 못하고 진개의 민첩하고 지혜로움을 사랑하여 가까이 두었다. 진개는 나라의 모든 비밀을 탐지해 가지고 도망해 돌아가서 군사를 거느리고 와 신조선을 습격, 신 ·말 ·불 세 나라의 군사를 깨뜨리고 서북 변경, 곧 전자에 신조선 왕 모갑이 점령한 상곡·어양·우북평 등지를 빼앗고 나아가 불조선의 변경을 습격해 요서 ( 遼西 )--- 지금의 노룡현 ( 盧龍縣 ) 과, 요동 ( 遼東 )--- 지금의 요양 ( 遼場 ) 부근을 함락시켜, 상곡·어양·우북평·요서·요동의 5 군을 두고, 2 천리 장성을 쌓아 조선을 막으니, 사기 조선열전 ( 朝鮮列傳 ) 에, “연의 전성시대에 일찍이 진번조선을 침략하여 복속시켰다 ( 全燕時嘗略屬眞番 朝鮮 ). ”고 한 것과 흉노열전에, “연의 어진 장수 진개 ( 秦開 )가 호 ( 胡 ) 에게 볼모가 되어 호가 깊이 믿었는데, 돌아와서 동호 ( 東胡 ) 를 습격하여 깨뜨리니, 동호는 1 천여 리를 퇴각하였다. 연이 또한 장성을 쌓고 조양 ( 造陽 ) 에서부터 양평 ( 襄平 ) 에까지 상곡·어양·우북평·요서·요동의 군을 설치하였다 ( 燕有賢將秦開 爲質於胡 胡甚信之 歸而襲破東胡 東胡却千餘里 燕亦築長城 自造陽 至襄平 置上谷漁陽 右北平 遼西 遼東郡 ). ”고 한 것과 위략에, 연이 장군 진개를 보내 그 서쪽을 공격하여 땅 2 천여 리를 빼앗아 만반한 ( 滿潘汗 ) 에까지 이르렀다 ( 燕乃遺將 秦開 攻其西方 取地二千餘里 至滿潘汗 ). ”고 한 것이 다 이를 가리킨 것이다. 그러나 진개가 볼모로 갔던 신조선이 아니므로, 사기에는 이를 흉노전과 조선전 두 곳에 나누어 기록하였고, 위략에는 비록 조선전에 기록하였으나, 진개의 볼모되었던 사실을 쓰지 아니하였다. 만반한은 조선의 역사 지리상 큰 문제이므로 다음 장에서 다시 말할 것이다. 이때 지나 북쪽의 나라로서 조선을 막기 위하여 장성을 쌓은 자는 연 한 나라뿐 아니다. 조 ( 趙 : 지금의 直匠省 서쪽 절반과 河南省 북쪽 끝과 山西省 ) 의 무령왕 ( 武靈王 ) 의 장성 ( 지금 山西의 북쪽 ) 이 또한 조선과 조선의 속민 ( 屬民 ) 인 담림 ( 澹林 )·누번 ( 樓煩 ) 등 때문에 쌓은 것이고, 진 ( 秦 : 지금의 陝西省 ) 소왕 ( 昭王 ) 의 장성은 의거 ( 義渠 ) 를 토멸하고 흉노를 막기 위하여 쌓은 것이지마는, 의거는 원래 조선 종족으로 지금의 감숙성 ( 甘肅省 ) 에 옮겨가서 성을 쌓고 대궐을 지었다. 농사가 발달하여 문화가 상당히 발달되었고 병력이 강하여 진 ( 秦 ) 을 압박하였다. 진의 선태후 ( 宣太后 : 秦始星의 高祖母 ) 는 절세의 미인이었는데, 의거가 진을 토멸할까 두려워서 의거왕을 꾀어 간통하여 두 아들을 낳게 하고는 의거왕을 불러다 쳐 죽이고, 두 아들까지 죽여버려 그 나라를 멸망시켰다. 창해역사(滄海力士)의 철퇴와 진시황의 만리장성 신조선이 연·조와 격전을 벌이는 동안에 진이 강성해져서 마침내 한 ( 韓 )·위 ( 魏 )·조 ( 趙 )·연 ( 燕 )·제 ( 齊 )·초 ( 楚 ) 등 지나의 여러 나라를 다 토멸하니, 한인 ( 韓人 ) 장량 ( 張良 ) 이 망국의 한을 품고 조선에 들어와 구원을 청하였다. 왕 모병 ( 某丙 ) 이 장사 여씨 ( 黎氏 ) 를 소개해 주어, 진시황의 순행 ( 巡幸 ) 을 기회하여 120 근 철퇴를 가지고 양무현 ( 陽武縣 ) 박랑사 ( 博浪沙 ) 가운데서 그를 저격하다가 잘못 부거 ( 副車 ) 를 부수고 성공치 못하였다. 사기에 장량이 창해군 ( 滄海君 ) 을 보고 장사를 구하였다고 하였으므로, 어떤 이는 창해를 강릉 ( 江陵 ) 이라 하고, 창해군을 강릉의 군장 ( 郡長 ) 이라고 하며, 장사 여씨를 강릉 출생이라 하였지마는, 창해는 동부여의 딴 이름이고, 동부여 두 나라는 1) 북갈사 ( 北曷思 : 지금의 琿春 ) 2) 남갈사 ( 南曷思 : 지금의 咸興 ) 에 도읍했으니, 창해는 이 두 곳 중의 하나요, 강릉이 창해라는 설은 근거없는 말이다. 얼마 안 가서 진시황이 동북쪽의 조선과 서북쪽의 흉노를 염려하여 옛날의 연·조 ·진의 장성을 연결하여 건축하는데, 전 지나의 인민을 동원하여 부역에 종사하게 하고 장군 몽념 ( 寒恬 ) 으로 하여금 30 만 군사를 거느려 감독케 해서 동양 사상 유명한 이른바 만리장성을 완성하였다. 기원전 210 년에 진시황이 죽고, 이세 ( 二世 ) 가 즉위하매, 이듬해에 진승 ( 陳勝 )·항적 ( 項籍 )·유방 ( 劉邦) 등 혁명 군웅이 봉기하여 진을 멸망시켰다. 이두산 ( 李斗山 ) 이 이를 논하여 말하기를, “진 ( 秦) 의 위력이 태고 이래로 짝이 없도록 팽창하여, 만성 ( 萬成 : 모든 사람 ) 이 바야흐로 시황을 천신 ( 天神 ) 으로 우러러보는데, 난데없이 벽력 같은 철퇴가 시황의 혼백을 빼앗고, 여섯 나라 ( 한 ·위 ·조 ·연 ·제 ·초 ) 의 유민의 적개심을 뒤흔들어 놓았으므로, 시황의 시체가 땅에 들어가기 전에 진을 멸망시키려는 깃발이 사방에 날렸으니, 이는 창해역사의 공이 아니랄 수 없다.”고 하였다 . 흉노 모돈(冒頓)의 동침(東侵)과 신조선의 위축 지나의 항적·유방 등의 8 년 동란이 계속되는 사이에 신조선왕 모정 ( 某丁) 이 서쪽으로 출병하여 상곡 ( 上谷 )·어양 ( 漁陽 ) 등지를 회복하고, 지금의 동부 몽고 일대 선비의 항복을 받아서 국위가 다시 떨치더니, 그 자손의 대에 마침내 흉노 모돈 ( 冒頓 ) 의 난을 만나 국세가 도로 쇠약해지고 말았다. 흉노는 제 1 편에서 말한 바와 같이 조선과 어계 ( 語系 ) 가 같고, 조선과 같이 `수두'를 신봉하여 조선의 속민이 되었었는데, 지금의 몽고 등지에 흩어져서 목축과 사냥에 종사하였다. 천성이 침략을 즐겨 자주 지나의 북부를 짓밟고, 신조선에 대하여도 배반과 귀부 ( 歸附 ) 가 무상하였는데, 기원전 200 년경에 두만 ( 頭曼) 이 흉노선우 ( 匈奴單于 : 흉노 大酋長의 호 ) 가 되어, 맏아들 모돈 ( 冒頓 ) 을 미워하고 작은 아들〔小子〕을 사랑하다가 모돈에게 죽고 모돈이 대신 선우가 되었다. 신조선왕은 그가 사납고 음흉함을 모르고 자주 물건을 요구하였는데, 모돈은 짐짓 그 환심을 사기 위해 신조선왕이 천리마를 구하면 그는 자기가 사랑하는 말을 주고, 신조선왕이 미인을 구하면 그는 그의 알씨 ( 閼氏 : 선우의 妻妾 ) 를 주니, 신조선왕은 더욱 모돈을 믿어 사자를 보내서 두 나라 중간의 천여리 구탈 ( 脫 ) 을 신조선의 소유로 달라고 하였다. 구탈이란 당시 중립 지대 빈 땅을 일컫는 말인데, 모돈이 이 청구를 받고는 크게 노하여, “토지는 나라의 근본인데 어찌 이것을 달라하느냐.” 하고 드디어 사자를 죽이고 전 흉노의 기병을 모두 내어 신조선의 서쪽인 지금의 동부 몽고 등지를 습격하여 주민을 유린하고 선비를 수없이 학살하였다. 신조선은 퇴각하여 장성 밖 수천 리의 땅을 버리고 선비의 남은 무리들은 선비산 ( 鮮卑山 )---- 지금의 내외 흥안령 ( 興安嶺 ) 부근으로 도주하니, 이로부터 신조선이 아주 미약하여 오랫동안 이웃 종족과 겨루지 못하였다. 엄복 ( 嚴復 : 淸末의 학자 ) 이 말하기를, “흉노를 물과 풀을 따라 옮겨다니는 야만족이니, 어찌 토지는 나라의 근본이란 말을 내었으랴? 이는 한갓 사마천의 과장된 글이 될 뿐이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사기, 한서 등을 참고해 보면, 흉노가 음산 ( 陰山 ) 의 험한 목을 빼앗긴 뒤엔 그 지방을 지나는 자가 반드시 통곡하였다 하고, 연지 ( 燕脂 ) 가 생산되는 언지산 ( 焉支山 ) 을 빼앗긴 뒤에는 슬픈 노래를 지어 서로 위로하였으니, 흉노의 토지 수요 ( 需要 ) 가 비록 문화적 민족과 같지 못하다 하더라도 아주 토지에 대한 관념이 없다 함은 편벽된 판단인가 한다. 제 3 장 삼조선(三朝鮮) 분립 후의 '불朝鮮' '불朝鮮'의 서북 변경을 빼앗김 불조선이 신조선과 합작하다가 연에게 패하였음은 이미 앞에서 말했으므로 여기에서는 다만 그 잃은 땅이 얼마나 되는가를 말하고자 한다. 위략에, “진개 ( 秦開 ) 가 그 서쪽을 공격하여 땅 2 천여 리를 빼앗아 만반한에까지 이르렀다 ( 秦開攻其西方 取地二千餘里 至滿播汗爲界 ). ”고 하여, 선유 ( 先儒 ) 들은 조선과 연의 국경을 지금의 산해관 ( 山海關 ) 으로 잡고, 진개가 빼앗은 2 천여 리를 산해관 동쪽의 종선 ( 從線 ) 2 천여 리로 잡아서 만반한을 대동강 이남에서 찾으려고 하였지마는 이는 큰 착오요 억지 판단이다. 사기나 위략을 참조해보면, 진개가 빼앗은 토지가 분명히 상곡에서 부터 요동까지이니 만반한을 요동 이외에서 찾으려 함은 옳지 못하다. 한서지리지에 의거하면 요동군현 ( 遼東郡縣 ) 중에 '문 ( 汶 ) · 번한 ( 番汗 )'의 두 현이 있으니, 만반한은 곧 이 문번한이다. 문현 ( 汶縣 ) 은 비록 그 연혁이 전해지지 못하였으나, 번한 ( 番汗) 은 지금의 개평 등지 이므로 문현도 개평 부근일 것이니, 반만한은 지금의 해성 · 개평 등의 부근일 것이다. 그런데 이제 만반한을 대동강 이남에서 구하려 함은 무엇에 의거함인가? 대개 만반한은 진개가 침략해왔을 때의 지명이 아니고, 후세 진 ( 秦) 나라 때 혹은 한 ( 漢 ) 나라 때의 명칭임을, 위략의 저작자가 이를 가져다가 진개 침략 때 두 나라의 국경을 입증한 것일 것이며, 번한 ( 番汗 ) 은 '불한'의 옛 서울 부근임으로 하여 이름한 것일 것이다. 사기의 1 천여 리는 신조선이 잃은 땅만 지적한 것이요, 위략의 2 천 여 리는 신 · 불 두 조선이 잃은 땅을 아울러 지적한 것이니, 상곡 · 어양 일대는 신조선이 잃은 땅이요, 요동 ( 遙東 ) · 요서 ( 遙西 ) · 우북평 ( 右北平 ) 일대는 불조선이 잃은 땅이다. 만반한은 사군 ( 四郡 ) 연혁의 문제와 관계가 매우 깊은 것이니, 이 절 ( 節 ) 은 독자가 잘 기억해두어야 한다. '불朝鮮'의 진(秦)·한(漢)과의 관계 연왕 ( 燕王 ) 희 ( 喜 ) 가 진시황에게 패하여 요동으로 도읍을 옳기니, 불조선이 지난날 연에 대한 오래된 원한을 잊지 못하여 진과 맹약하고 연을 토벌하였는데, 얼마 안 가서 진시황이 몽념으로 하여금 장성을 쌓아 요동에 이르렀다. 불조선이 진과 국경을 정하는데, 지금의 헌우란 ( ) 이남의 연안 수백 리 땅엔 두 나라의 백성이 들어가 사는 것을 금했다. 사기의 이른바 고진공지 ( 故秦空地 ) 란 이것을 가리킨 것이다. 위략에 의거하면 이때에 불조선왕의 이름을 '부 ( 否 ) '라 하였으나 위략과 마찬가지로 관구검이 실어간 고구려의 문헌으로 자료를 삼은 삼국지와 후한서의 동이열전 ( 東夷列傳 ) 에는 부 ( 否 ) 를 기록하지 아니하였으니, 위략에서 신조선 말엽의 왕 곧 동부여왕 ( 東扶餘王 ) 이 된 부루 ( 夫婁 ) 를 부 ( 否 ) 로 와전함인가 하여 여기에 채용하지 아니한다. 기원전 200 여 년경에 기준 ( 箕準 ) 이 불조선왕이 되어서는 진의 진승 · 항적 · 유방 ( 漢高祖 ) 등이 모반하여 지나가 크게 어지러워져서 상곡 · 어양 · 우북평 등지의 조선 옛 백성과 연 ( 燕) · 제 ( 齊 ) · 조 ( 趙 ) 의 지나인들이 난을 피하여 귀화하는 자가 많은지라, 기준이 이들에게 서쪽의 옛 중립 공지 ( 空地 ) 에 들어가 사는 것을 허락하였는데, 한고조 유방이 지나를 통일하자 기준이 다시 한과 약조를 정하여 옛 중립 공지는 불조선의 소유로 하고, 헌우란으로 국경을 삼았다. 사기 조선전 에, “한 ( 漢 ) 이 일어나니 물러나 패수 ( 浿水 ) 로 경계를 삼았다 ( 漢興...至浿水爲界 ). ”고 하고, 위략에, “한이 일어나자 노관 ( 盧) 으로 연왕 (燕王) 을 삼고, 조선은 연과 패수를 경계로 하였다 ( 乃漢以盧爲燕王 朝鮮興燕 界於水 ). ”고 한 것 ( 先儒들이 는 浿의 잘못이라 했으므로 이를 쫓는다 ) 이 다 이것을 가리킨 것이니, 대개 불조선과 연이 만반한으로 경계를 정했다가 이제 만반한 이북으로 물러났으니, 두 책의 패수 ( 浿水 ) 는 다 헌우란을 가리킨 것임이 분명하다. 선유들이 왕왕 대동강을 패수라고 고집함은 물론 큰 잘못이거니와, 근일 일본의 백조고길 ( 白鳥庫吉 ) 등이 압록강 하류를 패수라고 하니 또한 큰 망발이다. 위의 패수에 관한 논술은 앞 절의 만반한과 다음 절의 왕검성과 대조하여 볼 것이다. 위만(衛滿)의 반란과 '불朝鮮'의 남천(南遷) 기원전 194 년에 한 ( 漢 ) 의 연왕 ( 鮮王 ) 노관 ( 盧) 이 한을 배반하다가 패하여 흉노로 도망하고, 그의 무리 위만 ( 衛滿 ) 은 불조선으로 들어와 귀화하니, 준왕 ( 準王 ) 이 위만을 신임하여 박사관 ( 博士官 ) 에 임명해서 패수 서쪽 강변 ( 옛 중립 공지 ) 수백 리를 주어 그곳에 이주한 구민 ( 舊民 ) 과 연 · 제 · 조의 사람들을 다스리게 하였다. 위만이 이로 인하여 군사를 만들어 더욱 조선과 지나의 망명 죄인을 데려다가 결사대를 만들어, 그 병력이 강대해지자, “한나라 군사가 10도 ( 道 ) 로 침략해 들어온다.”는 거짓 보고를 준왕에게 보고하고 준왕에게 사자를 보내어, 들어와 왕을 시위하기를 청하여 허락을 얻어가지고 정병으로 달려와 기준의 서울 왕검성을 습격하니, 준왕이 항거해 싸우다가 전세가 불리하여 좌우 궁인 ( 宮人) 을 싣고 패잔한 군사로 바닷길을 쫓아 마한의 왕도 ( 王都 ) 월지국 ( 月支國 ) 으로 들어가서 이를 쳐 깨뜨리고 왕이 되었는데, 오래지 않아 마한의 여러 나라가 함께 일어나서 준왕을 토멸하였다. 왕검성은 대단군 ( 大檀君 ) 제 1 세의 이름으로 그 이름을 삼은 것인데, 대단군의 삼경 ( 三京 )---- 지금의 합이빈과 지금의 평양과 앞서 말한 불한의 옛 도읍인 지금의 개평 동북쪽 이 세 곳이다. 왕검성이란 이름을 가졌었을 것이니, 위만이 도읍한 왕검성은 곧 개평 동북쪽 이다. 한서지리지의, “요동군 ( 遼東郡 ) 험독현 ( 險瀆縣 : 註에 滿의 도읍이라 했다 ) ”이 그것이요, “마한의 왕도는 지금의 익산 ( 益山 ) 이다.” 라고 하나, 대개 잘못 전해진 것이다. 다음 장에서 논술할 것이다. 제4장 삼조선(三朝鮮) 분립 후의 '말朝鮮' '말朝鮮'의 천도(遷都)와 마한(馬韓)으로의 국호 변경 말조선의 처음 수도가 평양임은 이미 앞에서 말하였는 바, 그 후( 연대는 불명 )에 국호를 말한〔馬韓〕이라 고치고, 남쪽의 월지국으로 천도하였다가, 불조선왕 기준에게 망하였다. 그 천도한 원인이 무엇인지 이전 역사서에 보인 곳이 없으나, 대개 신 · 불 양 조선이 흉노와 중국의 잇따른 침략을 받아서 북방의 전운(戰雲)이 빈번하고 급하므로, 말조선왕이 난리에 염증을 느껴서 마침내 남쪽 멀리 떨어진 지방으로 천도하는 동시에 모든 침략주의를 가진 역대 제왕들의 칼 끝에서 빛나던 '조선'이라는 명사는 외국인이 시기하고 미워하는 바라 하여, 드디어 말조선이란 칭호를 버리고, 지난날에 왕호 ( 王號 ) 로 쓰던 '말한'을 국호로 써서 이두 로 마한 ( 馬韓 ) 이라 쓰고, 새로 쓰는 왕호인 '신한'은 이두로 진왕 ( 辰王 ) 이라 써서 '마한국 ( 馬韓國 ) 진왕 ( 辰王 ) '이라고 일컬었다. 똑같은 '한'이란 명사를 하나는 음을 따서 한 ( 韓 ) 이라 하여 국호로 쓰고 또 하나는 뜻을 따서 왕이라 하여 왕호로 씀은, 문자상 국호와 왕호의 혼동을 피한 것이다. 국호를 마한이라 쓰는 동시에 왕조는 한씨 ( 韓氏 ) 가 세습하여 국민들이 한씨왕의 존재만 아는 고로, 기준이 그 왕위를 빼앗고는 국민의 불평을 누그러뜨리기 위하여 본래의 성 기씨 ( 箕氏 ) 를 버리고 한씨 ( 韓氏 ) 로 고친 것이다. 삼국지에, “준 ( 準 )- - - 달아나 바다로 들어가서 한 ( 韓 ) 의 땅에서 살며 한왕 ( 韓王 ) 이라 이름하였다 ( 準- - - 走入海 居韓地 號韓王 ). ”고 하였고, 위략에는, “준의 아들과 친척으로 나라에 머물러 있는 자는 성을 한씨라 하였다 ( 準子及親 留在國者 冒姓韓氏). ”고 하였다 . 월지국을 전사 ( 前史 ) 에는 백제의 금마군 ( 金馬君 : 지금의 益山 ) 이라고 하였지마는, 이것은 속전 ( 俗傳 ) 의 익산군 마한 무강왕릉 ( 武康王陵 ) 이라는 것을 인하여 무강왕을 기준의 시호 ( 諡號 ) 라 하고, 부근 미륵산 ( 彌勒山 ) 의 선화부인 ( 善化夫人)의 유적을 기준의 왕후 선화 ( 善花 ) 의 유적이라 하여, 마침내 기준이 남으로 달아나서 금마군 ( 金馬郡) 에 도읍하였다고 한 것이다. 그러나 무강왕릉은 딴 이름이 말통대왕릉 ( 末通大王陵) 이요, 말통은 백제 무왕 ( 武王 ) 의 어릴 때 이름 ( 무왕의 이름은 '마동'이니 삼국유사의 薯童은 그 의역이고, 고려사 지리지의 末通은 그 음역 ) 이요, 선화는 신라 진평대왕 (眞平大王 ) 의 공주로서, 무왕의 후 ( 后 ) 가 된 아이고, 백제를 왕왕 마한이라 함은 역사에 그 예가 적지 아니하니, 이따위 고적은 한갓 익산 ( 益山 ) 이 백제의 옛 서울임을 증명함에는 부족할뿐더러, 마한 50 여국 중에 월지국과 건마국 ( 乾馬國 ) 이 있으니, 건마국이 금마군 ( 金馬郡) 곧 지금의 익산일 것이므로, 월지국 ----마한의 옛 서울은 다른 나라에서 찾음이 옳다. 그 확실한 지점은 알 수 없으나 마한과 백제 ( 백제 건국 13 년 ) 의 국경이 웅천 ( 熊川 )---- 지금의 공주 ( 公州 ) 이니, 월지국이 대개 그 부근일 것이다. 말한이 비록 국호가 되었지마는, 그 5,6 백 년 후에도 오히려 왕호 ( 王號 ) 로 쓴 이가 있다. 신라의 눌지 ( 訥祗 ) · 자비 ( 慈悲 ) · 소지 ( 炤智 ) · 지증 ( 智證 ) 네 왕은 다 '마립간 ( 麻立干 ) '이라 일컬었는데, 눌지 마립간 ( 訥祗麻立干 ) 의 주에, “마립은 말 ( 말뚝 ) 이다 ( 麻立也 ) ”라 하였으니, 궐 ( 橛 ) 은 글자 뜻이 '말'이므로, 마립 ( 麻立 ) 의 '마 ( 麻 ) '는 그 전성 ( 全聲 ) 을 취하여 '마'로 읽고, '입 ( 立 ) '은 그 초성 ( 初聲 ) 을 취하 여 ' 己 '로 읽고, '간 (干) '은 그 전성을 취하여 '한'으로 읽는 것임이 명백하므로 마립간은 곧 '말한'이요, 말한을 왕호로 쓴 증거이다. 낙랑(樂浪)과 남삼한(南三韓)의 대치[편집] 마한이 월지국으로 도읍을 옮긴 뒤에 그 옛 도읍 평양에는 최씨 ( 崔氏 ) 가 일어나서 그 부근 25 국을 통속하여 한 대국이 되었으니, 전사 ( 前史 ) 에 이른바 낙랑국 ( 樂浪國 ) 이 그것이다. 낙랑이 이미 분리되매, 마한이 지금의 임진강 이북을 잃었으나 오히려 임진강 이남 70여국을 통솔하더니, 오래지 아니하여 북방에서 지나와 흉노의 난리를 피하여 마한으로 들어오는 신 · 불 두 조선의 유민이 날로 많아지므로, 마한이 지금의 낙동강 연안 오른편의 1 백여 리 땅을 떼어 신조선의 유민들에게 주어 자치계 ( 自治: 고대에 모임을 계라 하였음 ) 를 세워서 이름을 '진한부 ( 辰韓部 ) '라 하고, 낙동강 연안 오른편의 땅을 얼마간 떼서 불조선의 유민들에게 주어 또한 자치계를 세워서 '변한부 ( 弁韓部 ) '라 일컬었다. 변한에는 신조선의 유민들도 섞여 살았으므로 변진부 ( 弁辰部 ) 라고도 일컬었다. 이것이 남삼한 ( 南三韓 ) 이니 마한이 구태여 진 · 변 두 한을 세운 것은 또한 삼신 ( 三神 ) 에 따라 삼의 수를 채운 것이다. 대단군 왕검의 삼한이 중심 주권자가 되고 말 · 불 두 한은 좌우의 보상 ( 輔相 ) 이 되었는데, 이제 남삼한은 말한 곧 마한이 가장 큰 나라, 곧 종주국이 되고, 신한 곧 진한과 불한 곧 변한이 두 작은 나라 ( 소속국 ) 가 된 것은, 그 이주민의 계통을 좇아 이름을 지었기 때문이거니와, 삼한이 다 왕을 '신한'이라 일컬어서 ( 이를테면 마한의 왕은 말한 나라의 신한이라 하고, 진한의 왕은 신한나라의 신한이라 하고, 변한의 왕은 불한나라의 신한이라 하였음 ) 신한이 셋이 되니, 대개 앞의 것 ( 신한 셋 ) 은 삼조선 분립 이후에 세 신한의 이름을 그대로 쓴 것이 며, 진 · 변 두 한의 두 신한은 자립하지 못하고 대대로 마한의 신한이 겸해 가져서 이름만 있고 실제가 없었으니 이는 남삼한의 창례 ( 創例 ) 이다. 삼한은 우리 역사상에 비상히 시비가 많은 문제로 되었지마는 종래의 학자들이 다만 삼국지 삼한전(三韓傳)의 삼한 곧 남삼한을 의거하여, 그 강역의 위치를 결정하려 할 뿐이고 1) 삼한의 명칭의 유래와, 2) 삼한의 예제(禮制)의 변혁을 알지 못하여, 비록 공력은 많이 들였으나 북방 원유(原有)의 삼한을 발견하지 못할 뿐 아니라, 남삼한과의 상호 관계도 명백히 알아내지 못하였다. 낙랑(樂浪) 25개국과 남삼한(南三韓) 70여국 낙랑의 여러 나라로 역사에 보인 것이 25 이니, 조선 ( 朝鮮 ) · 감한( 邯邯 ) · 패수 ( 浿水 ) · 함자 ( 含資 : 貪資라고도 함 ) · 점선 ( 黏蟬 ) · 수성 ( 遂城 ) · 증지 ( 增地 ) · 대방 ( 帶方 ) · 사망 ( 駟望 ) · 해명 ( 海冥 ) · 열구 ( 列 口 ) · 장잠 ( 長岑 ) · 둔유 ( 屯有 ) · 소명 ( 昭明 ) · 누방 ( 鏤方 ) · 제해 ( 提奚 ) · 혼미 ( 渾彌 ) · 탄렬 ( 呑列 ) · 동이 ( 東
54    제2편: 수두 시대 댓글:  조회:709  추천:0  2019-01-31
제 1 장 조선 고대 총론 조선민족의 구별 고대 아시아 동부의 종족이 1, 우랄 어족 2, 지나 어족의 두 갈래로 나누어졌는데, 한족(漢族) ·묘족 (苗族) ·요족 (요族) 등은 후자에 속 한 것이고, 조선족 ·흉노족 등은 전자에 속한 것이다. 조선족이 분화 (分化) 하여 조선·선비·여진·몽고·퉁구스 등 종족이 되고, 흉노족 이 이동하고 분산하여 돌궐 ( 突厥: 지금의 新疆族 ) ·흉아리 ( 匈牙利: 헝가리 ) ·토이기 ( 土耳其: 터키 ) ·분란 ( 芬蘭: 핀란드 ) 족이 되었다. 지금 몽고 ·만주 ·토이기 ·조선의 네 종족 사이에 왕왕 같은 말과 물건 이름이 있음은 몽고 ( 大元 ) 제국 시대에 피차의 관계가 많아서 받은 영향도 있으려니와, 고사를 참고하면 조선이나 흉노 사이에도 관명 (官名) ·지명 (地名) ·인명 (人名)의 같은 것이 많으니, 상고 (上古) 에 있어서 한 어족이었던 분명한 증명이다. 조선족의 동래(東來) 인류의 발원지에 대해 1, 파미르 고원 2, 몽고 사막이라는 두 설이 있는데, 아직 그 시비가 확정되지 못하였으나, 우리의 옛 말로서 참고 하면 왕성 (王姓) 을 ‘해 (解) ’라 함은 태양에서 뜻을 취한 것이고, 왕호 (王號)를 ‘불구래(弗矩內)’라 함은 태양의 빛에서 뜻을 취한 것이며, 천국(天國)을 환국(桓國) 이라 함은 광명(光明)에서 뜻을 취한 것이니, 대개 조선족이 최초에 서방 파미르 고원 혹은 몽고 등지에서 광명의 본원지를 찾아 동방으로 나와 불함산(不咸山)-- 지금의 백두산을 해와 달이 드나드는 곳, 곧 광명신(光明神)이 머물러 있는 곳으로 알아 그 부근의 토지를 ‘조선(朝蘇)’이라 일컬으니, 조선도 옛날의 광명이라는 뜻이다. 조선은 후세에 이두자(更讀字)로 조선이라 썼다. 조선족이 분포해 있었던 ‘아리라’ 우리의 옛 말에 오리를 ‘아리’라 하고, 강을 ‘라’라고 하였다. 압록 강·대동강 ·두만강 ·한강 ·낙동강과 만주 길림성 ( 吉林省 ) 의 송화강 ( 松花江 ), 봉천성 ( 奉天省 ) 의 요하 ( 遼河 ), 영평부 ( 永平府 ) 의 난하 ( 난河 ) 등을 이두자로 쓴 옛 이름을 찾아보면, 아례강 ( 阿禮江 ) ·아리수 ( 阿利水 ) ·욱리하 ( 郁利河 ) ·오열하 ( 烏列河 ) ·열수 ( 列水 ) ·무열하 ( 武列河 ) ·압자하 ( 鴨子河 ) 라 하였으니, 아례 ·아리 ·욱리 ·오열 ·열 ·무열은 다 ‘아리’의 음역 ( 音譯 ) 이고, 압자 ( 옛날에 오리를 아리라 함 ) 은 ‘아리’의 의역 ( 意譯 ) 이요, 강 ·하·수는 다 ‘라’의 의역이다. 위의 여러 큰 강들은 다 조선족의 조상이 지은 이름이다. 조선 고대의 문화는 거의 이 큰 강들의 강변에서 발생하였으므로 삼국지에도, ‘고구려는 큰 물을 의지하여 나를 만들어 산다 ( 句麗作國依 大水而居 ). ’라고 하였다 .’나라’는 옛 말의 ’라라’이니, 라라는 본래 진도 ( 津渡 ), 곧 ‘나루’를 가리키는 명사로서 국가를 가리키는 명사가 된 것이다. 고대 지명의 끝에 붙은 나 ( 那 ) ·라 ( 羅 ) ·노 ( 如 ) ·루 ( 婁 ) ·누 ( 누 ) · 양 ( 良 ) ·양 ( 浪 ) ·양 ( 穰) ·양 ( 壞 ) ·강 ( 岡 ) ·양 ( 陽 ) ·아 ( 牙 ) ·야 (야) 동은 다 ‘라’의 음역이고, 천 ( 川 ) ·원 ( 原 ) ·경 ( 京 ) ·국 ( 國 ) 등은 거의 ‘라’의 의역이며, 두 가지가 다 ‘라라’의 축역 ( 縮譯 ) 이니, 강이 어렵 ( 漁獵 ) 자원이 되고, 배를 교통하는 편의가 있으므로 상고 문명이 거의 강변에서 발원한 것이다. 조선의 최초를 개척한 부여(夫餘) 원시 인민이 강의 물고기와 산과 들의 짐승과 풀 ·나무의 열매 같은 여러 가지 천산물 ( 天産物 ) 로 양식을 삼다가 인구가 불어남에 따라 그 천산물의 부족을 보충하기 위하여 목축업과 농업이 발생하였다. 농업은 대개 불의 힘을 이용하여 초목을 태워서 들을 개척한 뒤에 발생하였으므로 옛 말에 야지 ( 野地 ) 를 ‘불’이라 하였다. 불의 이용의 발견은 한갓 농업을 유발하였을 뿐 아니라 불로 굴을 태워서 맹수도 죽이고, 그 가죽을 녹여 옷과 신을 만들고, 진흙을 구워 성벽을 쌓고, 쇠를 달구어 기구를 만들고 그 밖에 생활의 일용에 모든 편의를 주어 사람의 지혜를 개발하였으므로, 근세의 일반 사학가들이 고대 불의 이용의 발견을 곧 근세의 증기 ·전기의 발견과 같은 사회 생활의 대혁명을 일으킨 대 발견이라고 한다. 동서를 물론하고 고대의 인민들이 다 불의 발견을 기념하여 그리스의 화신 ( 火神 ) ·프 러시아의 화교 ( 火敎 ) ·지나의 수인씨 ( 燧人氏 ) 등 전설이 있고, 우리 조선에는 더욱 불을 사랑하여 사람의 이름을 ‘불’이라 지은 것이 많으니, 부루 ·품리 ( 稟離 ) 등이 다 불의 음역이요, 불이라 지은 지명도 적지 아니하여, 부여 ( 夫餘 ) ·부리 ( 夫里 ) ·불내 ( 不耐 ) ·불이 ( 不而 ) ·국내 ( 國內 ) ·불 ( 弗 ) ·벌 ( 伐 ) ·발 ( 發 ) 등이 다 불의 음역이다. 고기 ( 古記 ), 고사기 ( 古事記 ) 등을 참고하면 조선 문화의 원시 ‘수 두’의 발원이 거의 송화강가의 합이번 ( 哈爾賓: 만주 하얼빈 ) 부근인데, 합이빈은 그 고대의 부여이다. 그러니 송화강은 조선족이 처음으로 근거한 ‘아리라’요, 합이빈은 조선족이 최초로 개척한 야지 ( 野地 )곧 ‘불’이요, 그 이외의 모든 부여 ·부리동은 연대를 따라 차례로 개척된 야지 --불이다. 제 2 장 대단군(大檀君) 왕검(王儉)의 건국 조선 최초의 일반 신앙인 단군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조선족이 각 ‘아리라’에 분포하여 각 ‘불’을 개척하는 동시에 한 커다란 공동의 신앙이 유행하였으니 이른바 단군이다. 원시 인민은 우주의 형상을 과학적으로 해석할 지식이 없었으므로 가상적으로 우주에 신이 있다 정하고 모든 것을 신의 조작으로 돌려 신을 숭배하는 동시에 각기 천연 환경을 따라 혹은 모든 물건을 다 신으로 인정하여 이를 예배하고, 혹은 모든 물건 위에 한 신이 있다 하여 이를 예배하였으니, 이것이 이른바 종교요 원시 시대 각 민족 사회에 각기 고유한 종교를 가진 실재 ( 實在 ) 이다. 조선족은 우주의 광명 ( 제 1 장 참고 ) 이 숭배의 대상이 되어 태백산 ( 太白山 ) 의 숲을 광명신 ( 光明神 ) 이 살고 있는 곳으로 믿었는데, 그 뒤 인구가 번식하여 각지에 분포하매 각기 그 살고 있는 곳에 숲을 길러서 태백산의 숲을 모상 ( 模像 ) 하고, 그 숲을 이름하여 ‘수두’라 하였으 니, 수두란 신단 ( 神檀 ) 이라는 뜻이다. 해마다 5 월과 10 월에 백성들이 수두에 나아가 제사를 지내는데, 한사람을 뽑아 제주 ( 祭主 ) 를 삼아서 수두의 중앙에 앉히고 하느님 천신 ( 天神 ) 이라 이름하여 여러 사람이 제사를 드리고 수두의 주위에 금줄을 매어 한인 ( 閔人 ) 의 출입을 금하였다. 전쟁이나 그 밖의 큰 일이 있으면 비록 5 월과 10 월의 제사 지낼 시기가 아니라도 소를 잡아 수두에 제사 지내고, 소의 굽으로 그 앞에서 길흉을 점쳤는데, 굽이 떨어지면 흉하다 하고 붙어 있으면 길하다고 하였으니, 이것은 지나의 팔패 (八卦 ) 음획 양획 ( 陰劃陽劃 ) 의 기원이 되는 것이다. 강적이 침입하면 수두 소속의 부락들이 연합하여서 이를 방어하고 가장 공이 많은 부락의 수두를 첫째로 받들어 신수두’라 이름하니, ‘신’은 최고 최상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밖의 각 수두는 그 아래 딸려 있었으니, 삼한사 ( 三韓史 ) 에 보이는 ‘소도 ( 蘇塗 ) ’는 ‘수두’ 의 음역이고, ‘신소도 ( 臣蘇途 ) ’는 ‘신수두’의 음역이요, 진단구변국도 ( 震檀九變局道 ) 에 보이는 ‘진단 ( 震檀 ) ’의 진은 ‘신’의 음역이고, 단 ( 檀 ) 은 수두의 의역이요, 단군은 곧 ‘수두 하느님’의 의역이다. 수두 는 작은 단〔小檀〕이요, 신수두는 큰 단〔大檀〕이니, 수두에 단군이 있었으니까 수두의 단군은 작은 단군〔小檀君〕이요, 신수두의 단군은 큰 단군〔大檀君〕이다. 대단군(大檀君) 왕검(王儉)이 창작한 신설(神說) 고기 ( 古記 ) 에 이르기를, “환군제석 ( 桓君帝釋 ) 이 삼위 ·태백 ( 三危 ·太白: 둘 다 산 이름 ) 을 내려다보고 널리 인간 세상에 이익을 끼칠 만 한 곳이라 하여, 아들 웅 ( 雄 ) 을 보내 천부 ( 天符 ) 와 인 ( 印 ) 세 개를 가 지고 가 다스리게 하였다. 웅은 무리 3 천을 거느리고 태백산 신단수 ( 神 檀 樹 ) 아래에 내려와서 신시 ( 神市 ) 라 일컬으니, 이른바 환웅천왕 ( 桓雄天王 ) 이다. 웅은 풍백 ( 風伯 ) ·우사 ( 雨師 ) ·운사 ( 雲師 ) 를 지휘하여 곡식〔穀〕 ·명 ( 命 ) ·병 ( 病 ) ·형벌 ( 刑罰 ) ·선 ( 善 ) ·악 ( 惡 ) 등 세상의 360 여 가지 일을 다스렸다. 이때 곰 한 마리 범 한 마리가 있어 한 굴 속에 살면서 사람이 되기를 빌었다. 웅이 쑥 한 줌과 마늘 스무 쪽을 주면서 이것을 먹고 백날 동안 햇빛을 보지 않으면 사람의 모양을 얻을 것이라고 하였는데 범은 그대로 하지 못하고, 곰은 삼칠일 동안 그대로 하여 여자가 되었다. 그러나 결혼할 남자가 없으므로 매양 신단을 향해 아이 가지기를 원하므로 웅이 남자의 몸으로 가화 ( 假化 ) 하여 이와 결혼해서 단군 왕겸 ( 檀君王檢 ) 을 낳았다. ”고 하였다. 그러나 ‘제석 ( 帝釋 ) ’이니 ‘웅 ( 雄 ) ’이니 ‘천부 ( 天符 ) ’니 하는 따위가 거의 불전 ( 佛典 ) 에서 나온 명사이고 또 삼국사에 초기의 사회에도 여성을 매우 존중하였다고 했는데, 이제 남자는 신의 화신이고, 여자는 짐승의 화신이라 하여 너무 여성을 낮게 쳤으니, 나는 이것이 순수한 조선 고유의 신화가 아니요, 불교 수입 이후에 불교도의 점철 ( 點綴 ) 이 적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평양 ( 平壞 ) 의 옛 이름이 왕검성 ( 王檢城 ) 이요, 신라의 선사 ( 仙史 ) 에도, “평양은 선인 왕검의 집 ( 平壞者仙人 王檢之宅) ”이라고 했고, 위서 ( 魏書 ) 에도, “지난 2 천 년 전 단군 왕검이라는 이가 있어 아사달 ( 阿斯達 ) 에 나라를 세우고, 국호를 조선이라 하였다 ( 乃往二千載 前 有檀君王檢 立國阿斯達 國號朝鮮 ). ”고 하였으니, 그러면 조선 고대에 단군 왕검을 종교의 교조로 받들어왔음은 사실이고, 왕검을 이두자의 읽는 법으로 해독하면 ‘임금’이 될 것이니, 대개 ‘임금’이라 이름한 사람이 당시에 유행한 ‘수두’의 미신을 이용하여 태백산의 ‘수두’에 출현하여 스스로 상제 ( 上帝 ) 의 화신이라 일컫고 조선을 건국하였으므로, 이를 기념하여 역대 제왕의 칭호를 ‘임금’이라 하고, 역대 서울의 명칭도 ‘임금’이라고 한 것이다. ‘선인왕검 ( 仙人王檢 ) ’이라 함은 삼국 시대에 수두 교도의 단체를 ‘선배’라 일걷고, 선배를 이두로 선인 ( 仙人 ) 혹은 ‘선인 ( 先人 ) ’이라 기록한 것이고 선사 ( 仙史 ) 는 곧 왕검의 설교 이래 역대 선배의 사적을 기록한 것이다. 후세에 유 ·불 양교가 서로 왕성해지면서 ‘수두’의 교가 쇠퇴하고, 선사도 없어져서 그 자세한 것은 알 수 없으나, 지나의 고서 굴원 ( 屆原 ) 의 초사 ( 楚辭 ), 사마천 ( 司馬遷 ) 의 사기 ( 史記 ), 반고 ( 班固 ) 의 한서 ( 漢書 ) 에 여기저기 보이는 것으로써 오히려 그 대강을 알 수 있다. 사기의 봉선서 ( 封禪書 ) 의 삼일신 ( 三一神 ) 이란 천일 ( 天一 ) ·지일 ( 地 一) ·태일 ( 太一 ) 인데, 그 중에 태일이 가장 존귀하고, 오제 ( 五帝: 동 서남북중 다섯 방향의 신 ) 는 태일의 보좌 ( 補佐 ) 라 하였으며, 진시황 본기 ( 奏始皇本紀 ) 의 천황·지황 ( 地皇 ) ·태황 ( 泰皇 ) 가운데 태황이 가장 존귀하다고 하였으며, 초사에는 동황태일 ( 東皇太一 ) 이란 노래 이름이 있고, 한서예문지 ( 漢書藝文志 ) 에는 태일잡자 ( 太一雜子 ) 라는 책 이름이 있으니, 삼일신 ( 三一神 ) 과 삼황 ( 三皇 ) 은 곧 고기에 있는 삼신 ( 三神 ) ·삼성 ( 三聖 ) 등의 유이다. 삼일신을 다시 우리의 옛 말로 번역하면 천일 ( 天一 ) 은 ‘말한’이니 상제 ( 上帝 ) 를 의미하는 것이요, 태일은 ‘신한’이니 신은 최고 최상이라는 말, 신한은 곧, ‘하늘 위 하늘 아래에 하나이고 둘이 없다 ( 天上 天下獨一無二 ). ’는 뜻이다. 말한·불한·신한을 이두로 마한 ( 馬韓 ) · 변한 ( 弁韓 ) ·진한 ( 辰韓 ) 이라 적은 것이고, 오제 ( 五帝 ) 는 돗가·개가·소가·말가·신가 등 다섯 ‘가’ 곧 오방신 ( 五方神 ) 을 가리킨 것이다. 차례로 말하면 말한이 불한을 낳고 불한이 신한을 낳았으나 권위( 權位 ) 로 말하면. 신한이 신계 ( 神界 ) 와 인계 ( 人界 ) 의 대권 ( 大權 ) 을 모 두 차지하여 말한과 불한보다 고귀하므로 삼일 중에서 태일이 가장 고귀하다 하는 것이고, ‘오제 ( 곧 5 가 ) 는 곧 태일의 보좌이다. ’라 하였으니, 신가가 다섯 가의 수위 ( 首位 ) 임은 ‘신’의 어의 ( 語義 ) 로 말미암아 명백하니, 거북〔龜〕의 삼신 ·오제는 곧 왕검이 만든 전설이다. 신수두의 삼경(三京) 오부(五部) 제도 대단군 ( 大樓君 ) 왕검이 이에 삼신 ( 크神 ) ·오제 ( 五帝 ) 의 신설 ( 神說 ) 로 우주의 조직을 설명하고, 그 신설에 의하여 인간 세상 일반의 제도를 정하매, 신한·말한·불한·의 세한을 세워 대단군이 신한이 되니 신한은 곧 대왕 ( 王 ) 이요, 말한과 불한은 곧 좌우의 두 부왕 ( 副王 ) 으로 신한을 보좌한다〉 삼경을 두어 세 한이 나뉘어 머무르고 세 한의 아래에 돗가·개가·소가·말가·신가의 다섯 가를 두고 전국을 동 ·서 ·남 ·북 ·중 다섯 부 ( 部 ) 에 나누어 다섯 가가 중앙의 다섯 국무대신이 되는 동시에, 다섯 부를 나누어 다스리는 다섯 지방장관이 되고, 신가는 다섯 가의 우두머리가 된다. 전시 ( 戰時 ) 에는 다섯 부의 인민으로써 중 ( 中 ) ·전 ( 前 ) ·후 ( 後 ) ·좌( 左 ) ·우 ( 右 ) 의 오군 ( 五軍 ) 을 조직하여 신가가 중군대원수 ( 中軍大元 師 ) 가 되고, 그 밖의 네 가가 전 ·후 ·좌 ·우의 네 원수가 되어 출전한다. 지금까지 유행하고 있는 윷판이 곧 다섯 가의 출진도 ( 出陣圖 ) 이니, 그 그림은 다음과 같다. 그림 가운데 도 ( 刀 ) ·개 ( 介 ) ·걸 ( 乞 ) ·유 ( 兪 ) ·모 ( 毛 ) 는 곧 이두 글자로 쓴 다섯 가의 칭호이니, 도는 돗가요, 개는 개가요, 유는 옛 음에 소’니 소가요, 모는 말가요, 걸은 신가니, 걸로 신가를 기록함은 그 의의를 알 수 없으나 부여 시대에 견사 ( 犬使 ) 라는 관명 ( 官名 ) 이 있으니, 대개 견사는 신가의 별칭이므로 걸은 곧 견사의 견 ( 犬 ) 을 의역한 것이 아닌가 한다. 돗〔猪〕 ·개〔犬〕 ·소〔牛〕 ·말 〔馬〕 등 가축들로 오방 ( 五方 ) 의 신의 이름을 삼는 동시에, 이로써 벼슬 이름을 삼은 수렵 시대가 지나고 농목 ( 農收 ) 시대가 된 증적 ( 證跡 ) 이다. 제 3 장 수두의 홍포(弘布)와 문화의 발달 부루(夫婁)의 서행(西行) 고기 ( 古記 ) 에 이르기를, “단군 왕검이 아들 부루를 보내어 하우 ( 夏禹 ) 를 도산 ( 塗山 ) 에서 만났다. ”고 하였고, 또 오월춘추 ( 吳越春秋 ) 에도 이와 비슷한 기록이 있어, “당요 ( 庸寶 ) 때에 9 년 동안 홍수가 져서 당요가 하우에게 명하여 이를 다스리라 하였다. 우 ( 禹 ) 가 8 년 동안이나 공을 이루지 못하고 매우 걱정하여, 남악 ( 南嶽) ·형산 ( 衝山 ) 에 이르러 흰 말을 잡아 하늘에 제사 드려 성공을 빌었는데, 꿈에 어떤 남자가 스스로 현이 ( 玄夷 ) 의 창수사자 ( 蒼水使者 ) 라 일걷고, 우에게 말 하기를, 구산 ( 九山 ) 동남쪽의 도산 ( 逢山 ) 에 신서 ( 神書 ) 가 있으니, 석달동안 재계 ( 齋戒 ) 하고 그것을 꺼내보라 하므로 우가 그 말에 의하여 금간옥첩 ( 金簡玉牒 ) 의 신서를 얻어 오행통수 ( 五行通水 ) 의 이치를 알아 홍수를 다스려 성공하고, 이에 주신 ( 州愼 ) 의 덕을 잊지 못하여 정전 ( 井田 ) 을 제정하고, 율도량형 ( 律度量衡) 의 제도를 세웠다. ”고 하였다. 현이 ( 玄夷 ) 는 당시 조선의 동 ·남 ·서 ·북 ·중 오부를 남 ( 藍 ) ·적( 未 ) ·백 ( 白 ) ·현 ( 玄: 黑 ) ·황 ( 黃 ) 으로 별칭했는데, 북부가 곧 현부 ( 玄部 ) 이니 지나인이 현부를 가리켜 현이 ( 玄夷 ) 라고 한 것이요, 창수 ( 蒼水 ) 는 곧 창수 ( 擔水 ) 이고, 주신 ( 州愼 ) ·숙신 ( 肅愼 ) ·직신 ( 稷愼 ) 혹은 식신 ( 息愼 ) 으로 번역되었으니, 주신은 곧 조선을 가리킨 것이다. 옛 기록의 부루는 오월춘추 ( 吳越春秋 ) 의 창수사자이니, 이때 지나에 큰 홍수가 있었음은 여러 가지 옛 역사가 다 같이 증명하는 바인데, 단군 왕검이 그 수재를 구제해주려고 아들 부루를 창해사자 ( 滄海 使者 ) 에 임명하여 도산에 가서 하우를 보고, 삼선오제교 ( 三神五帝敎 ) 의 일부분인 오행설 ( 五行說: 水火金土木 ) 을 전하고 치수 ( 治水 ) 의 방법을 가르쳐주었으므로 우 ( 禹 ) 는 왕이 되자 부루의 덕을 생각하여 삼신오제의 교의를 믿고 이를 지나에 전포 ( 傳布 ) 하였으며, 정전과 율도량형도 또한 지나의 창작이 아니라 조선의 것을 모방한 것이었다. 그런데 어찌하여 ‘꿈에 창수사자를 만났다. ’고 하였는가 ? 신성 ( 神聖 ) 을 장식하여 사실을 신화화함이니, 이는 상고에 흔히 있는 일이다. 기자(箕子)의 동래(東來) 하우가 홍수를 다스린 공으로 왕이 되어 국호를 하 ( 夏 ) 라 하고, ‘수두’의 교를 흉내내어 도산에서 받은 신서 ( 神書 ) 를 홍범구주 ( 洪範九疇 )라 이름하여 신봉하였는데 하가 수백 년만에 망하고 상 ( 商 ) 이 뒤를 이어 또한 수백 년만에 망하고 주 ( 周 ) 가 일어나서는 주무왕 ( 周武王 ) 이 홍범구주를 배척하므로 은 ( 股 ) 의 왕족 기자 ( 箕子 ) 가 새로 홍범구주를 지어 무왕과 변론하고 조선으로 도망하니, 지금 상서 ( 尙書 ) 의 홍범 ( 洪範 ) 이 곧 그것이다. 홍범편 ( 洪範篇 ) 가운데, “초일 ( 初一 ) 은 오행 ( 五行 ) 이요, 차이 ( 次 二 ) 는 경용오사 ( 敬用五事 ) 요, 차삼 ( 次三 ) 은 농용팔정 ( 農用八政 ) 이요, 차사 ( 次四 ) 는 협용오기 ( 協用五紀 ) 요, 차오 ( 次五 ) 는 건용황극 ( 建用皇極 ) 이요, 차육 ( 次六 ) 은 예용삼덕 (乂 用三德 ) 이요, 차칠 ( 次七 ) 은 명용계의 ( 明用稽疑 ) 요, 차팔 ( 次八 ) 은 염용서정 ( 念用庶徵 ) 이요, 차구 ( 次 九 ) 는 향용오복 ( 嚮用五福 ) ·위용육극 ( 威用六極 ) 이다. 첫째 오행은 일은 수 ( 水 ), 이는 화 ( 火 ), 삼은 목 ( 木 ), 사는 금 ( 金 ), 오는 토 ( 土 ) 요, 둘째 오사 ( 五事 ) 는 일은 모 ( 貌 ), 이는 언 ( 言 ), 삼은 시 ( 視 ), 사는 청( 聽 ), 오는 사 ( 思 ) 요, 셋째 팔정 ( 八政 ) 은 일은 식 ( 食 ), 이는 화 ( 貨 ), 삼은사 ( 祝 ), 사는사공 ( 司空 ), 오는사도 ( 司徒 ), 육은사구 ( 司寇 ), 칠은 빈 ( 賓 ), 팔은 사 ( 師 ) 요, 넷째 오기 ( 五紀 ) 는 일은 세 ( 歲 ), 이는 월 ( 月 ), 삼은 일 ( 日 ), 사는 성진 ( 星辰 ), 오는 역수 ( 歷數 ) 요, 다섯째 황극 ( 皇極 ) 은 황건기유극 ( 皇建其有極 ), 여섯째 삼덕 ( 三德、 ) 은 일은 정직 ( 正直 ), 이는 강극 ( 剛克 ), 삼은 유극 ( 柔克 ) 이요, 일곱째 계의 ( 稽疑 ) 는 택건립복서인 ( 擇建立卜筮人 ) 이요, 여덟째 서징 ( 庶徵 ) 은 우 ( 雨 ) ·양 ( 暘 ) ·오 ( 오 ) ·한 ( 寒 ) ·풍 ( 風 ) 이요, 아홉째 오복 ( 五福 ) 은 일은 수 ( 壽 ), 이는부 ( 富 ), 삼은강녕 ( 康寧 ), 사는 유호덕 ( 攸好德 ), 오는 고종명 ( 考終命 ) 이요, 육극 ( 六極 ) 은 일은 흉단절 (凶短折 ), 이는 질 ( 疾 ), 삼 은 우 ( 憂 ), 사는 빈 ( 貧 ), 오는 악 ( 惡 ), 육은 약 ( 弱 ) 이다. ”라고 하였는 테, 이러한 문구는 곧도산 ( 塗山 ) ·신서 ( 神書 ) 의 본문이고, 그 나머지 는 기자 ( 箕子 ) 가 연술 ( 演述 ) 한 것이다. 천내석우 홍범구주 ( 天乃錫禹 洪範 九疇) 는 곧 기자가 단군을 가리켜 천 ( 天 ) 이라 하고 단군으로 부터 전수받은 것을 천이 주었다고 함이다. 이는 ‘수두’의 교의에 단군을 하늘의 대표로 보기 때문이고, 기자가 조선으로 도망한 것은 상 ( 商 ) 이 주 ( 周 ) 에게 망하는 동시에 상의 국교 인 ‘수두’교가 압박을 받으므로 고국을 버리고 수두교의 조국으로 돌아온 것이다. 한서 ( 漢書 ) 에 거북이 문자를 등에 지고 낙수 ( 洛水 ) 에서 나왔으므로 우 ( 禹 ) 가 홍범 ( 洪範 ) 을 연술하였다 했지마는, 역 ( 易 ) 의 계사 ( 擊辭 ) 에 ,“황하 ( 黃河 ) 에서 그림이 나오고 낙수 ( 洛水 ) 에서 글씨가 나와, 성인이 이것을 본받았다 ( 河出畵 洛出書 聖人則之 ). ”라 하여 분명히 하도 ( 河圖 ) 낙서 ( 洛書 ) 가 다 역괘 ( 易卦) 지은 원인임을 기록하였는데, 이제 낙수 거북의 글씨로 인하여 홍범을 지었다고 함은 어찌 망령된 증명이 아니랴 ( 위 일절은 淸儒 毛奇齡의 설을 채택함 ). 오월춘추에 의거하여 홍범 오행이 조선에서 전해간 것으로 믿음이 옳고, 또 초사 ( 楚辭 ) 에 의거하여 동황태일 ( 東皇太一 ) 곧 단군 왕검을 제사하는 풍속이 호북 ( 湖北 ) ·절강 ( 浙江 ) 등지에 많이 유행하였음을 보면, 대개 하우가 형산에서는 하늘에 제사하고, 도산에서는 부루에 게서 신서를 받은 곳이므로 가장 ‘수두교’가 유행한 지방이 된 것이다. 흉노(匈奴)의 휴도(休屠) ‘수두교’가 지나 각지에 퍼졌음은 앞에서 말한 바와 같거니와, 사기, 흉노전에 의거하면, 흉노도 조선과 같이 5 월에 하늘에 제사 지내 는데, 천제를 형상한동인 ( 銅人 ) 을‘휴도 ( 休屠 ) 라 불렀으니, 곧 ‘수두’ 의 번역이요, 휴도의 제사를 맡은 사람을 휴도왕 ( 休掉王 ) 이라하여 또 한 단군이라는 뜻과 비슷하며, 휴도에 삼룡 ( 三龍 ) 을 모시니, 용은 또 한 신을 가리킨 것이다. 삼룡은 곧 삼신이니, 흉노족도 또한 ‘수두교’ 를 수입하였음이 의심없다. 고대의 종교와 정치가 구별이 없어 종교상의 제사장이 곧 정치상의 원수이며, 종교가 전파되는 곳이 정치상의 속지 ( 屬地 ) 이니, 대단군 이래 조선의 교화가 지나 ·흉노 등의 각 민족에 널리 퍼졌음으로 언하 여 정치상 강역 ( 疆域 ) 이 확대되었음을 볼 것이다. 한자(漢字)의 수입(輸入)과 이두문(吏讀文)의 창작 조선 상고에 조선글이 있었다는 사람이 있으나, 이는 아무 증거가 없는 말이니 최초에 쓴 것이 한자일 것은 틀림없다. 한자가 어느 때 수입되었는지 알 수 없으나, 대개 땅이 지나와 이어져 있어서 두 민족은 기록 이전부터 교통이 있었을 것이니, 한자의 수입도 기록 이전의 일이었음이 명백하다. 왕검이 아들 부루를 보내어 도산에서 우에게 금간옥첩 ( 金簡玉牒 ) 의 글을 가르쳐주었는데, 이 글자는 곧 한자였을 것이니, 조선이 한자를 익혔음이 이미 오래 되었음을 볼 것이다. 그 뒤에 한자의 음 혹은 뜻을 빌려 이두문을 만들었는데, 이두문은 곧 조선 고대의 국문이라고 할 수 있다. 고대에는 ‘국서 ( 國書 ) ’ , ‘향 서 ( 獅書 ) ’ 혹은 ‘가명 ( 假名 ) ’이라 일컫고 고려조 이후에 비로소 이두문이라 일컬었으나, 이제 통속 ( 通俗 ) 의 편의를 위하여 고대의 것까지 이두문이라 하거니와, 흔히 이두문을 신라 설총 ( 韓聽 ) 이 지은 것이라고 하지마는 설총 이전의 옛 비석 ( 진흥왕 巡狩碑 따위 ) 에도 가끔 이두문으로 적은 시가 ( 詩歌 ) 가 있으니, 설총 이전에 만든 것임이 의심 없다. 그러면 어느 시대에 만들어진 것일까 ? 임금을 왕검이라 번역하여 왕 ( 王 ) 은 그 글자의 뜻에서 소리의 처음 절반을 취하여 ‘임’으로 읽고 검 ( 檢 ) 은 그 글자의 음에서 소리의 전부를 취하여 ‘금’으로 읽으며, ‘펴라’를 낙랑 ( 樂浪 ) 이라 번역하여 낙 ( 樂 ) 은 글자의 뜻에서 소리의 처음 절반을 취하여 ‘펴’로 읽고, 랑 ( 浪 ) 은 글자의 음에서 소리의 처음 절반을 취하여 ‘라’로 읽은 것이 곧 이두문의 시초니, 적어도 이제부터 3천 년 전 --기원 전 10 세기경에 이두문이 제작된 것 같다. 그림〔圖繪〕이 진보하여 글자 文字가 되고 형자 ( 形字 ) 가 진보하여 음자 ( 音字 ) 가 됨은 인류 문화사의 통칙이니, 형자인 한자를 가져다가 음자인 이두문을 만듬은 페니키아 인이 이집트 형자의 편방 ( 偏 傍: 글 자의 한 부분 ) 을 따라서 알파벳을 만듬과 같은 예로 볼 만한 문자사상의 한 진보라 할 것이요, 후세의 거란문〔契丹文〕 ·여진문 ( 女直文 ) 이 모두 이두문을 모방한 것이므로 인류 문화에 도움을 준 공덕도 적지 아니하다 하겠으나, 다만 그 모자라고 유감스러운 점은 a. 자음 모음을 구별하지 못함이니, 예컨대 ‘가’는 자음 ‘ㄱ’과 모음‘ ㅏ ’의 음철 ( 音綴 ) 이요, ‘라’는 자음 ‘ ㄹ’과 모음‘ ㅏ ’의 음철인데, 이를 구별치 아니하여 한 음철이 한 글자가 되어 ‘가’를 ‘加’ 혹‘家’로 쓰고, ‘라’ 는 ‘良’ 혹은 ‘羅’로 써서 음자 ( 音字 ) 의 수효가 너무 많으며, b. 음표 ( 音標 ) 를 확정하지 못함이니, 예컨대 백 ( 白 ) 자 한 자를 ‘백활 ( 白活 ) ’ 이라 쓰고는 ‘발’로 읽고, ‘위백제 ( 爲白齊 ) ’라고 쓰고는 ‘살’로 읽으 며, ‘이 ( 矣 ) ’자 한 자를 ‘의신 ( 矣身 ) ’이라 쓰고는 ‘의’로 읽고, ‘교의 ( 敎矣) ’라 쓰고는 ‘대’로 읽어 아무런 준직 ( 準則 ) 이 없으며, c. 상음 하몽 ( 上音下蒙 ) 의 이치를 획청 ( 劃淸 ) 하지 않음이니, 예컨대 ‘달이’를 ‘월이 ( 月伊 ) ’라 쓰지 않고 ‘윌리 ( 月利 ) ’라 써서 ‘달이’로 읽으며, ‘바람이’를 ‘풍이 ( 風伊 ) ’라 쓰지 않고 ‘풍미 ( 風味 ) ’라 써서 ‘바람이’로 읽어서, 언어의 근간 ( 根幹 ) 과 지엽 ( 技葉 ) 이 서로 뒤죽박죽이 되었다. 그러므로 이두문으로 적은 시나 글은 물론이요, 인명이나 지명이나 관명 같은 것도 오직 같은 시대, 같은 지방 사람들이 그 관습에 의하여 서로 해득할 뿐이고, 다른 시대, 다른 지방사람은 입을 벌릴 수가 없으니, 문자가 사회 진화에 도움된다 함은 저 사실과 사상을 이에 전달해주기 때문인데, 이제 이 같은 곤란이 있어 갑 시대, 갑 지방의 기록을 을 시대, 을 지방에서 해득하지 못한다면 어찌 문화 발전의 이기 (利器 ) 가 될 수 있으랴 ? 그런데 옛날 사람이 이두문을 쓴 지 1 천여 년 동안에 그 미비한 점을 개정하지 못한 원인이 어디에 있는가 ? 당시에는 늘 적국의 외환 ( 外愚 ) 으로 인해서 정치상 비밀을 지키기 위하여 일체 글을 적국 ( 敵國 ) 사람이 이해하지 못하게 하기 위하여 이 같이 불통일하고 불확실한 글을 쓴 것이고 삼조선 (三朝鮮) 이 무너지자 여러 나라가 병립하매 한조선 안에도 서로의 적국이 많아서 한 명사나 한 동사나 한 토거리를 더욱 가지각색으로 써서 동부여 사람이 북부여의 이두문을 알지 못하며, 신라 사람이 고구려의 이두문을 알지 못하였으니, 그러므로 이두문의 그같이 불통일하고 불확정한 방식으로 되었음이 학적 재지 ( 才智 ) 가 부족하여서 그렇게 된 것이 아니라 거의 정치상의 장애로 말미암은 것이다. 신지(神誌)의 역사 전사 ( 前史 ) 에 단군 때에 신지 ( 神誌 ) 라는 사람이 있어 사관 ( 史官 ) 이 됐다 하였으나, 사실은 신지는 곧 ‘신치’의 번역이요, ‘신치’는 ‘신크 치’의 약자요, ‘신크치’는 ‘신가’의 별칭이요, ‘신가’는 앞에서 말한 다섯 가의 수석 ( 首席 ) 대신이니, ‘신치’ 곧 ‘신가’가 늘 ‘신수두’의 제일 ( 祭日 ) 에 우주 창조의 신화와 영웅 ·용사 등이 행한 일과 예언, 유 의, 경계하는 이야기를 노래하여 역대로 예가 되었는데, 후세에 문사 ( 文士 ) 들이 그 노래를 거두어 한 책을 만들고, 그 벼슬 이름 ‘신치’로 책 이름을 한 것이니, 이른바 신지가 곧 그것이다. 이제 신지의 원서가 없어져서 그 가치의 어떠함을 알 수 없으나, 그 책 이름이 이두문으로 지은 것이니, 그 내용의 기사도 이두문으로 기재한 것일 것이다. 고려사 김위제전 ( 金謂 傳 ) 에 신지비사 ( 神誌秘詞 ) 의 ‘여칭추극기 ( 如秤錘極器 ) ·칭간부소량 ( 秤幹扶蘇樑 ) ·추자오덕지 ( 錘者五德地 ). 극기백아강 ( 極器百牙岡 ) ·조항칠십국 ( 朝降七十國 ) ·뇌덕호선정 ( 賴德 護神精 ) ·수미균평위 ( 首尾均平位 ) ·흥방정태평 ( 興邦定太平 ) ·약폐삼 유지 ( 若廢三 諭地 ) ·왕업유쇠경 ( 王業有衰傾) ’의 1O 구를 싣고, 부소량 ( 扶蘇樑 ) 은 지금의 송도 ( 松都 ), 오덕지 ( 五德地 ) 는 지금의 한양, 백아 강 ( 百牙岡) 은 지금의 평양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송도 ·한양 ·평양은 고려의 삼경 ( 三京 ) 이고, 단군의 삼경은 하나는 지금의 합이빈이니, 고사에 부소갑 ( 扶蘇岬) ·비서갑 ( 非西岬 ) 혹은 아사달 ( 阿斯達 ) 로 기록한 것이고, 하나는 지금의 해성 ( 海城 ) ·개평 ( 蓋平 ) 등지이니, 고사에 오덕지 ( 五德地 ) ·오비지 ( 五備地 ) ·안지홀 ( 安地忽 ) 혹은 안시성 ( 安市城 ) 으로 기록한 것이고, 또 하나는 지금의 평양이니, 고사에 백아강 ( 百牙岡 ) ·낙랑 ( 樂浪 ) ·평원 ( 平原 ) 혹은 평양 ( 平穰 ) 으로 기록한 것이다. 이두문 읽는 법에 부소 ( 扶蘇 ) ·비서 ( 非西 ) ·아사 ( 阿斯 ) 는 ‘ 아스’로 읽고, 오덕 ( 五德 ) ·오비 ( 五備 ) ·안지 ( 安地 ) 안시 ( 安市 ) 는 ‘아리’로 읽고, 백아강 ( 百牙岡 ) ·낙랑 ( 樂浪 ) ·평원 ( 平原 ) ·평양 ( 平穰) 은 ‘펴 라’로 읽는 것이니, 위의 비사 1O 구는 이두문의 신지를 한시로 번역한 것이다. 대개 삼국 말엽에 한학 ( 漢學 ) 이 흥성하여 한학자들이 전에 이두문 으로 기록된 시와 글을 한시와 한문으로 번역함을 시도하였으니 ( 최치원의 鄕藥雜詠 향약잡영 따위 ), 신지의 한시 번역도 그 한 예이다. 어찌하여 비사 ( 秘詞 ) 라 일컬었는가 ? 고대의 역사 종류를 성서 ( 聖書 ) 라 하여 대궐 안에 비장해두어 민간에 유행함을 허락하지 아니한 때문이다. 신지와 신지비사 따위가 어찌하여 하나도 후세에 전해지지 못하였는가 ? 이는 고구려와 백제가 멸망할 때 왕궁의 비장이 불에 타고 신라의 것이 겨우 전하여 고려조까지도 왕궁에 한 벌이 있어 이조에 와서는 이를 서운관 ( 書雲觀 ) 에 두었었는데, 역시 이조 임진왜란의 불에 타 버린 것이다. 조선의 전성시대 기원전 10 세기 경으로 부터 그 뒤 약 5,6 백 년 동안은 대 단군 조선의 전성시대이다. 수문비고 ( 修文備考 ) 에 고죽국 ( 孤竹國: 지금의 永平府 ) 은 조선종 ( 朝鮮種 ) 이라 하였는데 백이 ( 伯夷 ) ·숙제 ( 寂齊 ) 형제는 고죽국의 왕자로서 왕위 상속권을 헌신짝처럼 버리고 지나의 주 ( 周: 지금의 陝西省 ) 를 우람하다가 주무왕 ( 周武王 ) 에게 격렬히 비전론 ( 非戰論 ) 을 주장하였으며, 고대 지나의 강회 ( 江淮 ) 지역에 조선인이 많이 옮겨가 살아서 숱한 소왕국을 건설하였는데, 그 중 서어왕 ( 徐偃王 ) 이 가장 두드러지게 일어나서 인의 ( 仁義 ) 를 행하여 지나국으로부터 조공을 받았다. 이상은 조선의 본국과 정치적 관계가 없는 식민 ( 殖民 ) 중의 한두 호걸의 행동이거니와, 기원전 5,6 세기경에 불리지 ( 弗離支 ) 라는 사람이 조선의 군사를 거느리고 지금의 직예 ( 直匠) ·산서 ( 山西 ) ·산동 ( 山東 ) 등지를 정복하고, 대현 ( 代縣 ) 부근에 한 나라를 세워 자기의 이름으로 나라 이름을 삼아 불리지국 ( 弗離支國 ) 이라 하니, 주서 ( 周書 ) 의 ‘불령지 ( 弗令支 ) ’와 사기의 ‘이지 ( 離支 ) ’가 다 불리지국을 가리킨 것이다. 불리지는 또한 그가 정복한 지방을 그 성 ‘불 ( 弗 ) ’의 음으로써 지명을 지었으니, 요서 ( 遺西 ) 의 ‘비여 (肥如)나 산동 ( 山東 ) 의 ‘부역 ( 鳧繹 ) ’이나, 산서 ( 山西 ) 의 ‘비이 ( 卑耳: 管子라는 책에 보임 ) ’가 ‘불’의 번역이다. 상고에 요동반도와 산동반도가 다 땅이 연이어져 있었고, 발해는 하나의 큰 호수였는데, 발해의 발 ( 渤 ) 도 음이 ‘불’이고, 또한 불리지가 준 이름이니, 불리지가 산동을 정복한 뒤에 조선의 검은 원숭이 〔 〕 ·담비〔짧〕 ·여우〔孤〕 ·삵〔狸〕 등의 털가죽옷과 비단 등 직물을 수출하여 발해를 중심으로 하여 상업이 크게 떨쳤었다. 조선의 쇠약(衰弱) 기원전 7 세기 말에 조선이 고죽 ( 孤竹 ) 을 의거해서 불리지국 ( 弗離支國 ) 과 합하여 연 ( 戀 ) 과 진 ( 晉) 을 치니, 연과 진이 제 ( 齊 ) 에 구원을 청하였다. 이때 제의 환공 ( 桓公 ) 이 어진 재상 관중 ( 管仲 ) 과 이름난 장수 성부 ( 城父 ) 를 얻어 지나를 지배하고 있었는데, 조 ( 曺 ) ·위 ( 衛 ) ·허 ( 許 ) ·노 ( 魯 ) 등 10 여 나라의 군사를 거느리고 연을 구원하고자 태행산 ( 太行山 ) 을 넘어 불리지국을 격파하고, 연을 지나서 고죽과 싸워 이겼으므로 조선은 후퇴하여 불리지의 옛 땅을 다 잃었다. 지나인이 이 전쟁으로 말미암아 보전 ( 保全 ) 함을 얻었으므로 공구씨 (孔丘氏: 孔子 ) 가 관중의 공을 칭찬하여, “관중이 피발 ( 披髮 ) 좌임 ( 左 ) 을 징계하였다. ”고 하였는데, 피발은 조선의 머리 땋은 것을 가리킨 것이고, 좌임은 조선의 왼쪽으로 여미는 옷깃을 가리킨 것이다. 《관자 ( 管子 ) 》에 대략 이 전쟁의 결과를 적었는데, a) 지나의 문자가 부과 ( 浮誇: 부화하고 과장함 ) 가 많으며, 이러한 대외 전쟁에 더욱 심하고, b)《관자 》 는 관중의 저작이 아니라 전국시대 ( 戰國時代 ) 말엽에 어떤 사람이 지은 것이므로, 직접 눈으로 본 이야기가 아니기 때문에 다만 그 대체만 말하였다. 그러나 이 전쟁에서 조선이 서북 지방을 잃어 오랫동안 쇠약에 빠져 었었던 것은 가릴 수 없는 사실이다. 단군 연대(年代)의 고증(考證) 전사 ( 前史 ) 에는 단군 왕검 1220 년 후에 기자 ( 箕子 ) 의 왕조선을 기재하였으나, 기자는 기자 자신이 왕이 된 것이 아니고, 기원전 323 년경에 이르러 그 자손이 비로소 불조선왕이 되었으니, 이는 제 2 편 제 2 장에 기술하겠거니와, 이제 사실 ( 史實 ) 을 따라 기자조선을 삭제한다. 또 전사에 단군이 처음 평양에 도읍하였다가 뒤에 구월산 ( 九月山 ) 으로 옮기고, 그 자손에 이르러서는 기자를 피하여 북부여로 갔다고 하지마는 이도 또한 근거없는 망령된 말이다. 무릇 구월산에 도읍을 옮겼다 함은 고구려사에 초록 ( 抄綠 ) 한 위서( 魏書 ) 의, “단군 왕검이 아사달에 나라를 세우고 국호를 조선이라 하였다 ( 檀君王檢 立國阿斯達 國號朝鮮 ). ”고 한 구절로 인하여, 아사 ( 阿斯 ) 를 음이 아흡〔九〕에 가깝고, 달 ( 達 ) 은 음이 달〔月〕과 같다 하여 마침내 구월산을 아사달이라고 하는 것이지마는, 구월산은 황해도 문화현 ( 文化縣: 지금의 信川那 ) 에 있는 산인데, 문화현의 옛 이름이 궁홀 ( 弓忽 ) 이요, 궁홀은 이두문의 ‘궁골’로 읽을 것이니, 궁골에 있는 산이므로 궁골산이라 한 것으로서, 마치 개홀 ( 皆忽: 音 개골 ) 에 있는 산이므로, 개골산〔金剛山〕이라고 한 것과 같은 것인데, 어찌 궁골산을 구월산이라 와전하였으며, 구월산을 아홉달산으로 억지 해석을 하여 아사달산 ( 阿斯達山 ) 으로 망령되게 증거하니, 어찌 가소로운 일이 아니랴. 아사달은 이두문에 l ‘ 아스대’로 읽는 옛 말 소나무를 ‘ 아스’라 하고, 산을 대라 한 것이니, 지금 합이빈 ( 哈爾濱 ) 의 완달산 ( 完達山 ) 이 곧 아사달산이다. 이곳은 북부여의 옛 땅이니, 왕검의 상경 ( 上京 ) 이요, 지금의 개평현 ( 蓋平縣 ) 동북쪽 안시 ( 安市 ) 의 고허 ( 古噓) 인 ‘아리티’가 중경 ( 中京 ) 이요, 지금의 평양 ‘펴라’가 단군의 남경 ( 南京 ) 이니, 왕검 이래로 형편을 따라 삼경 중 하나를 골라 서울로 한 것이다. 그러나 그 본 도읍은 북부여의 땅 ‘ 아스대’인데, 이제 그 자손이 기자를 피하여 북부여로 갔다 함이 어디에 닿은 소리인가 ? 그러므로 이 설을 채용하지 아니하는 것이다. 또 전사에는 단군의 원년 ( 元年 ) 무진 ( 戊辰 ) 을 당요 ( 唐堯 ) 25 년이라 하였지마는, 지나도 주소 ( 周召) 공화 ( 共和: 기원전 841 년 ) 이후에야 연대를 기록하게 되었으니 어찌 당요 25 년인지를 알수 있으랴 ? 그러므로 단군 기원을 확실하게 지적하지 아니한다. 고기 ( 古記 ) 에 단군의 나이에 대해 1,048 세 혹은 1,908세 등의 설이 있으나, 이는 신라 말엽에 ‘신수두’를 진단 ( 震檀) 으로, 환국 ( 桓國 ) 을 환인 ( 桓因 ) 으로 고쳐서 불전 ( 佛典 ) 의 말로 조선 고사를 농락한 불교도들이, 인도 고전의 3 만 년, 3 천 년, 5 백 년 등 장수를 했다는 불조 ( 佛祖 ) 의 기록을 본받아서 만든 말이라, 한 마디의 반박도 할 가치가 없는 것이다. 이조 초에 권근 ( 權互 ) 이, “대를 물려 얼마나 되었던가, 해를 거듭하 여 천 년이 지났네 ( 傳世不知幾 歷年會過千 ). ”라는 시를 지어 이를 번안하였는데, 이는 다만 불가 ( 佛家 ) 의 허황한 말을 바로잡았다 할 수 있으나, 또한 단군의 시말 ( 始末 ) 을 모르는 말이다. 옛날 2 천년 전에 단군 왕검이 아사달에 나라를 세웠다고 하였으니, 고구려 건국 전 2천 년이 단군 왕검의 원년이요, 삼국 중엽까지도 ‘신 수두’를 받들어, 단군이 거의 정치상 반주권 ( 半主權 ) 을 가져 그 처음에서 끝까지 2 천 몇백 년이 될 것인데, 어찌 1 천 년만으로 헤아리랴. 그러나 삼조선이 분립한 뒤에 대왕과 대단군이 함께 서서 교정 ( 敎政 ) 분립의 싹이 시작되었으므로 본편은 이것으로 끝맺는다.  
53    제1편: 총론 댓글:  조회:889  추천:0  2019-01-31
제1장. 역사의 정의(正義)와 조선역사의 범위 역사란 무엇인가? 인류 사회의 “아(我)”와 “비아(非我)”의 투쟁이 시간으로 발전하고 공간으로 확대되는 심적(心的)활동 상태의 기록이니, 세계사라 하면 세계 인류가 그렇게 되어온 상태의 기록이요, 조선사라 하면 조선 민족이 이렇게 되어온 상태의 기록이다. 무엇을 “아” 라 하며 무엇을 “비아”라 하는가? 깊이 팔 것 없이 얕이 말하자면, 무릇 주관적 위치에 서 있는 자를 아라 하고, 그밖의 것은 비아라 한다. 이를테면 조선인은 조선을 아라 하고 영(英).로(露:러시아).법(法:프랑스).미(美) 등을 비아라고 하지마는 영.로.법.미 등은 저마다 제 나라를 아라 하고 조선을 비아라고 하며,무산(無産)계급은 무산 계급을 아라 하고 지주나 자본가를 비아라고 하지마는, 지주나 자본가는 저마다 제 붙이를 아라 하고.무산 계급을 비아라 한다. 이뿐 아니라, 학문에나 기술에나 직업에나 의견에나, 그 밖의 무엇에든지 반드시 본위(本位)인 아가 있으면 따라서 아와 대치되는 비아가 있고, 아 가운데 아와 비아가 있으면 비아가운데에도 아와 비아가 있다. 그리하여 아에 대한 비아의 접촉이 잦을수록 비아에 대한 아의 분투가 더욱 맹렬하여 인류 사회의 활동이 쉴 사이가 없으며, 역사의 전도가 완결될 날이 없다. 그러므로 역사는 아와 비아의 투쟁의 기록인 것이다. 아나, 아와 상대되는 비아의 아도 역사적 아가 되려면, 반드시 두 개의 속성이 있어야 한다. 첫째, 상속성(相續性)이니, 시간에 있어서 생명의 끊어지지 아니함이요, 둘째, 보편성이니, 공간에 있어서 영향의 파급이다. 그러므로 인류 아닌 다른 생물의 아와 비아의 투쟁도 없지 않지마는, 그 아의 의식이 너무 미약하거나 혹은 전연 없어서 상속적. 보편적이 되지 못하므로 마침내 역사의 조작(造作)은 인류에게만 주어졌다. 사회를 떠나 개인적인 아와 비아의 투쟁도 없지 않지마는 그 아의 범위가 너무도 약소하여 역시 상속적. 보편적이 못 되므로 인류에게 있어서도 사회적 행동이라야 역사가 되는데, 한사건으로 두가지 속성인 상속,보편의 강양을 보아 역사의 재료가 될 만한 분량의 크고 작음을 정하게 된다. 이를테면 김석문(金錫文)은 300년 전에 “지원설(地圓說)”을 창도(唱導)한 조선의 학자이지마는 이를 후루노의 지원설과 똑같은 역사적 가치를 쳐주지 못하는 것은, 저편은 그 학설로 인하여 신대륙을 발견한다 하였지마는 이편은 그러한 결과를 가져오지 못했기 때문이다. 정여립(鄭汝立)은 400년 전에 군신강상설(軍臣綱常說)을 타파하려한 동양의 위인이지마는 그를 민약론(民約論)을 저술한 루소와 동등한 역사적 인물이라 할수 없음은, 당시에 다소간 정여립의 설에 영향을 입은 검계(鈐稧)나 양반살육계(兩班殺戮稧:다무력폭동단체)등의 번갯불이 한 번 번쩍하는 것 같은 행동이 없지는 않았으나 결국 루소 이후의 파란만장한 프랑스 혁명에는 비길 수 없기 때문이다. 비아를 정복하여 아를 드러내면 투쟁의 승리자가 되어 미래 역사의 생명을 잇고, 아를 없애어 비아에 공헌하는 자는 투쟁의 패망자가 되어 과거 역사의 묵은 자취만 끼친다. 이는 고금 역사에 불변하는 원칙이라, 승리자가 되려 하고 실패자가 되지 않으려 함은 인류의 통성(通性)인데 번번이 예기와 어긋나서 승리자가 안 안되고 실패자가 됨은 무슨 까닭인가? 무릇 선천적 실질부터 말하면 아가 생긴 뒤에 비아가 생기는 것이지마는, 후천적 형식부터 말하면 비아가 있은 뒤에 아가 있다. 말하자면 조선민족 즉 아가 출현한 뒤에 조선민족과 상대되는 묘족(苗族:중국귀주성 호남성 운남성 등지에 살던 민족으로 중국민족에 점차 동화됨)이며 지나족(支那族)등 비아가 있었을 것이니, 이는 선천적인 것에 속하는 것이다. 그러나 만일 묘족,지나족 등 비아의 상대자가 없었더라면 조선이란 나라를 세운다, 삼경(三京)을 만든다, 오군(五軍:전.후.좌.우.중의 다섯군단)을 둔다 하는 등 아의 작용이 생기지 못하였을 것이니, 이는 후천적인 것에 속하는 것이다. 정신의 확립으로 선천적인 것을 호위하며 환경의 순응으로 후천적인 것을 유지하되 두 가지 중의 하나가 부족하면 패망의 구렁에 빠진다. 유태의 종교나 돌궐(突厥:몽고 중앙 아시아에 있던 유목민족)의 무력으로도 침륜(沈淪)의 화를 면치 못한 것은 후자(後者)가 부족한 까닭이며,남미(南美)의 공화(共和)와 애급(埃及:이집트) 말세의 학문의 융흥(隆興)으로도 쇠퇴의 환(患)을 구해내지 못한 것은 전자(前者)가 부족한 까닭이다. 이제 조선사를 서술하려 함에 있어 아(우리)의 단의로 잡아, (가) 우리의 생장 발달의 상태를 서술의 첫째 요건으로 하고 그리하여, 최초 문명의 기원이 어디서 되었는가. 역대 강역(彊域)의 신축(伸縮)이 어떠하였었던가. 각 시대 사상의 변천이 어떻게 되어왔는가. 민족적 의식이 어느 때에 가장 왕성하고 어느 떄에 가장 쇠퇴하였는가, 여진(女眞).선비(鮮卑).몽고(夢古).흉노(匈奴)등이 본래 우리의 동족으로 어느 때에 분리되고 분리된 뒤에 영향이 어떠하였는가. 우리의 현재의 지위와 부흥 문제의 성부(成否)가 어떠할 것인가 등을 서술하며. (나) 우리의 상대자인 주위 각 민족과의 관계를 서술의 둘째 요건으로 하고 그리하여. 우리에게서 분리된 흉노.선비.몽고와, 우리 문화의 강보(襁褓)에서 자라온 일본이 우리의 큰 적이 되어 있는 사실과, 인도는 간접으로, 지나는 직접으로, 우리가 그 문화를 수입하였는데, 어찌하여 그 수입의 분량을 따라 민족의 활기가 여위어 국토의 범위가 줄어졌는가. 오늘 이후는 서구의 문화와 북구의 사상이 세계사의 중심이 되었는데 우리 조선은 그 문화 사상의 노예가 되어 소멸하고 말 것인가, 한 그를 잘 씹고 소화하여 새 문화를 건설할 것인가 등을 서술하여 위의(가).(나) 두 가지로 본사(本史)의 기초로 삼고, (다) 말과 글 등 우리의 사상을 표현하는 연장의 날카롭고 둔함은 어떠하고 그 변화는 어떻게 되었으며, (라) 종교가 오늘 이후에는 거의 가치없는 폐물이 되었지마는 고대에는 확실히 한 민족의 흥망 성쇠의 관건이었는데, 우리의 신앙에 관한 추세가 어떠하였으며, (마) 학술.기예 등 우리의 천재를 발휘한 부분이 어떠하였으며, (바) 의.식.주 형편과 농.상.공의 발달과 땅의 분배와 화폐의 제도와 그 밖의 경제조직 등이 어떠하였으며, (사) 인민의 이동과 번식과 또 강토의 신축을 따라 인구의 많아지고 줄어듦이 어떻게 되었으며. (아) 정치제도의 변천이며 (자) 북벌(北伐:북쪽나라를 쳐서 故土를 회복)진취의 사상이 시대를 따라 나아가고 물러선 것이며 (차) 귀하고 천하고 가난하고 부유한 각 계급의 압제(壓制)와 서로 대항한 사실과 그 성해지고 쇠해진 대세며, (카) 지방자치제가 태고적부터 발생하였는데 근세에 와서는 형식만 남기고 정신이 사라진 원인과 결과며, (타) 외세의 침입에서 받은 거대한 손실과 그 반면에 끼친 다소의 이익과, (파) 흉노.여진 등이 한번 우리와 분리된 뒤에 다시 합쳐지지 못한 의문이며, (하) 옛날부터 문화상의 창작이 적지 아니하나, 매양 고립적. 단편적이 되고 연계적.계속적이 되지 못한 괴이한 원인 등을 힘써 참고하면서 논술하여 위의 (다).(라)이하 여러 문제로 본사(本社)의 요목(要目)을 삼아서, 일반 역사를 읽는 이로 하여금 조선의 면목의 만의 하나라도 알게 하려고 한다. 제2장 역사의 3대 원소와 조선 구사(舊史)의 결점 역사는 역사를 위하여 역사를 짓는 것이요, 역사 이외에 무슨 딴 목적을 위하여 짓는 것이 아니다. 다시 말하면 객관적으로 사회의 유동상태를 거기서 발생한 사실을 그대로 적은 것이 역사요, 저작자의 목적에 따라 그 사실을 좌우하거나 덧붙이고 혹은 달리 고칠 것이 아니다. 화가가 사람의 상을 그릴 때 연개소문(淵蓋蘇文)을 그리자면 모습이 괴걸(魁傑)한 연개소문을 그려야 하고. 강감찬(姜邯贊)을 그리자면 몸집이 왜루(矮陋)한 강감찬을 그려야 한다. 만일 이것과 저것을 억제하고 드날릴 마음으로 털끝만큼이라도 서로 바꾸어 그리면 화가의 본분에 어긋날 뿐 아니라 본인의 면목도 아닐 것이다. 이와같이 사실 그대로 영국사(英國史)를 지으면 영국사가 되고 노국사(露國史)를 지으면 노국사가 되며, 조선사를 지으면 조선사가 되는 것인데, 기왕에 조선에 조선사라 할 조선사가 있었더냐 하면 수긍하기 어렵다. 안정복(安鼎福)이 【동사강목】(東史綱目:箕子朝鮮에서 高麗 까지의 역사)을 짓다가 개연히 내란의 잦음과 외적의 출몰이 동국(東國:우리나라)의 고사(古史)를 흔적도 없게 하였음을 슬퍼하였으나, 나로서 보건대 조선사는 내란이나 외적의 전쟁에서 보다, 곧 조선사를 저술하던 그 사람들의 손에 의해 더 없어졌다고 본다, 어찌하여 그러한가 하면 역사란 머리에 쓴 말과 같이 시간적 공간적 발전으로 되어오는 사회 활동 상태의 기록이므로 때[時],곳[地],사람[人] 세 가지는 역사를 구성하는 세 가지 큰 원소가 되는 것인데 이 원소들이 올바르게 기록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한 예를 들자면 신라가 신라됨은 박(朴),석(昔),김(金) 세 성과, 동산 고헌촌(突山古墟村) 등 여섯 부(部)의 사람[人]으로써뿐 아니라, 또한 경상도인 그곳[地]과 고구려,백제와 한 시대인 때[時]로써 신라가 된 것이니, 만일 그보다 더 올라가 2천 년 전인 왕검(王儉)과 같은 연대이거나 더 내려와서 2천 년 뒤인 오늘과 같은 시국이라면, 비록 박혁거세(朴赫居世)의 성지(聖智)와 육부(六部) 사람들의 질직(質直)과 계림(鷄林:慶州)의 땅을 가졌을지라도 당시의 신라와 똑같은 신라가 될수 없으며 또 신라의 위치가 유럽에 놓였거나 아프리카에 있었다면 그 또한 다른 면목의 나라는 되었을지언정 당시의 신라는 되지 않았을 것이다. 이것은 지극히 명백한 이치인데 기왕의 조선의 역사가들은 매양 그 짓는 바 역사를 자기 목적의 희생으로 만들어서 도깨비도 떠 옮기지 못한다는 땅을 떠 옮기는 재주를 부려 졸본(卒本:고구려가 처음 개국한 압록강 북쪽)을 떠다가 성천(成川) 혹은 영변(寧邊)에 갖다놓으며, 안시성(安市城:만주 遼東에 있는 고구려의 성)을 떠다가 용강(龍岡)혹은 안주(安州)에 갖다놓으며, 아사산(阿斯山:단군이 國部를 옮긴 곳)을 떠다가 황해도의 구월산(九月山)을 만들며 가슬라(迦瑟羅)를 떠다가 강원도의 강릉군을 만들었다. 이와 같은 허다한 땅의 빙거(憑據)가 없는 역사를 지었다. 더 크지도 말고 더 작지도 말라고 한 압록강 이내의 이상적 강역을 획정(劃定)하려 하며(我邦彊域考), 무극(無?) 일연(一然) 등 불자(佛子)가 지은 역사책(三國遺事)에는 불법이 단 한 글자도 들어오지 않은 왕검시대에부터 인도의 범어(梵語)로 만든 지명'인명이 가득하며, 김부식(金富軾) 등 유가(儒家)가 적은 문자(三國史記)에는 공자'맹자의 인의를 무시하는 삼국(三國) 무사의 입에서 경전(經典)의 문구가 관용어처럼 외워지고, 삼국사(三國事:중국 역사책의 하나) 열전에 있는 여러 백년 동안 조선 전역의 인심을 지배하던 영랑(永郞)'술랑(述郞)'안상(安祥)'남석행(南石行) 등 네 대성(大聖)의 논설은 볼 수 없고 지나를 유학한 학생인 최치원(崔致遠)만 세세히 서술하였으며, 여사제강(麗史堤綱)에 원효(元曉)'의상(義湘) 등 여러 철인들의 불학(佛學)에 영향된 고려 일대의 사상의 어떠함은 볼 수 없고, 왕 태조(王太祖) 통일 이전에 죽은 최응(崔凝)이 통일 이후에 그가 올렸다는 간불소(諫佛疎)만 적혀 있다. 이와 같은 허다한 때[時]의 구속을 받지 않고 역사를 지어 자기의 편벽된 신앙의 주관적 심리에 부합시키려 하며, 심한 경우에는 사람[人]까지 속여 신라의 금왕(金王)을 인도의 찰제리종(刹帝利種:왕족)이라 하며(三國遺事), 고구려의 추모왕(鄒牟王)을 고신씨(高辛氏:五帝의 한 사람)의 후손이라 하며(三國史記),게다가 조선 사상의 근원이 되는 서운관(書雲觀:觀家臺)의 책들을 공자의 도(道)에 어긋난다 하여 불태워버렸다. 이두형(李斗馨:조선 正租때 사람)이 말하기를, “근일의 어느 행장(行狀)과 묘지명(墓誌銘)을 보든지, 그 주인공이 반드시 용모는 단엄(端嚴)하고 덕성은 충후(忠厚)하며, 학문은 정주(程朱:중국의 程子와 朱子 또 그들의 性理學)를 조종으로 삼고 문장은 한유(韓柳:중국의 문장가 韓愈와 柳宗元)를 숭상하여 거의 천편일률(千篇一律)이니, 이는 그 사람을 속일 뿐 아니라, 그 글도 가치가 없다,”고 하였는데, 이것은 개인 전기(傳記)의 실상을 잃은 데 대한 개탄일 뿐이지마는, 이제 임금을 높이고 백성을 천대하는 춘추(春秋)의 부월(斧鉞)아래에서 자라난 후세 사람들이 그러한 마음과 습속으로 삼국의 풍속을 이야기하며 문약(文弱) 편소(偏小)에 스스로 만족한 이조 당대의 사람들이 그러한 주관으로 상고지리(上古地理)를 그리니, 이에 조선(단군)이나 부여나 삼국이나 동북국(東北國:渤海)이나, 고려나 이조-5천 년 이래의 모든 조선이 거의 한도가니로 부어낸 것같이 땅이 늘고 줄어듦에 따라 민족 활동의 활발하고 약해진 점이나 시대의 고금을 좇아 국민사상이 갈린 금을 도무지 찾을 수가 없다. 크롬웰이 화가가 자기의 상을 그릴 때 그 왼쪽 눈 위의 혹을 빼는 것을 허락지 아니하고 나를 그리려면 나의 본 얼굴로 그리라고 하였으니, 이말은 화가의 아첨함을 물리칠 뿐 아니라 곧 자기의 참된 상을 잃을까 함이었다. 조선사를 지은 기왕의 조선의 사가(史家)들은 매양 조선의 혹을 베어내고 조선사를 지으려 하였다, 그러나 그네들이 쓴 안경이 너무 볼록하므로, 조선의 눈이나 귀나 코나 머리 같은 것을 혹이라 하여 베어버리고 어디서 수없는 정말 혹을 가져다가 붙여놓았다. 혹 붙인 조선사도 기왕에는 읽는 이가 너무 없다가, 세계가 서로 크게 통하면서 외국인들이 왕왕 조선인을 만나 조선사를 묻는데 어떤 이는 조선인보다 조선사를 더 많이 아는 고로 부끄러운 끝에 돌아와 조선사를 읽는 이도 있다. 그러나 조선인이 읽는 조선사나 외국인이 아는 조선사는 모두 혹 붙은 조선사요, 옳은 조선사가 아니었다. 기왕에 있는 기록이 그와 같이 다 틀린 것이라면 무엇에 의거하여 바른 조선사를 짓겠는가? 사금(沙金)을 아는 사람이 모래 한 말[一斗]을 일면 좁쌀만한 금을 하나 얻거나 혹은 하나도 얻지 못하기도 하나니, 우리의 문적(文籍)에서 사료를 구하기가 이같이 어려운지라, 혹 어떤 사람은 조선사를 연구하자면 우선 조선과 만주 등지의 땅 속을 파서 많은 발견이 있어야 하고, 금석학(金石學).고전학(古錢學).지리학.미술학.계보 등의 학자가 쏟아져 나와야 한다고 하는 이가 많은데, 그도 그러하거니와 현금에는 우선 급한 대로 있는 사책(史策)을 가지고 득실을 평하며 진위를 비교하여 조선사의 앞길을 개척함이 급무인가 한다 제3장 구사(舊史)의 종류와 그 득실의 간략한 평가 조선의 역사에 관한 서류를 찾는다면 신지(神誌)부터 비롯되겠는데, 신지는 권벽(權擘:선조 때 사람)의 응제시(應製蒔:임금의 명에 의해 지은 시)에서 단군 때 사관(史官)이라고 한 사람이다. 그러나 나로소 보건대 단군은 곧 수두[蘇塗] 임금이요, 신지는 사람의 이름이 아니라 수두 임금의 수좌(首佐)인 벼슬 이름 신치[臣智]이니 (蘇塗와 臣智의 자세한 것은 思想史에 보임), 역대의 신치 들이 해마다 10월 수두 대제(大祭)에 우주의 창조와 조선의 건설과 산천지리의 명승과 후세 사람의 거울 삼을 일을 들어 노래하였는데, 후세의 문사들이 그 노래를 혹은 이두문(吏讀文)으로 편집하고 혹은 한자의 오언시(五言詩)로 번역하여 왕궁에 비장하였으므로 신지비사(神誌秘詞) 또는 해동비록(海東秘錄) 등의 이름이 있었던 것이다. 고려에 와서는 저작자의 성명을 알 수 없는 삼한고기(三韓古記), 해동고기(海東古記), 삼국사(三國史) 등과 김부식의 삼국사기와 일연(一然)의 삼국유사가 있었으나, 지금에 전하는 것은 삼국사기와 일연유사뿐인데 그 전하고 전하지 아니하는 원인을 생각하건대 김부식, 일연 두사람만의 저작이 우수하여 전해진 것이 아니라, 대개 고려 초엽부터 평양(平壤)에 도읍을 정하고 나아가 북쪽의 옛땅을 회복하자는 화랑의 무사가 한 파를 이루고, 사대(事大)로 국시(國是)를 삼아서 압록강 안에 구차히 편안하게 있을 것을 주장하는 유교도(儒敎道)가 한 파가 되었다. 두파가 대치에서 논전을 벌이기 수백 년만에 불교도 묘청(妙淸)이 화랑의 사상에다가 음양가(陰陽家)의 미신을 보태어 평양에서 군사를 일으켜서 북벌을 실행하려다가 유교도 김부식에게 패망하고, 김부식은 이에 그 사대주의를 근본으로 하여 삼국사기를 지은 것이다. 그러므로 동.북 두 부여를 떼어버려 조선문화가 유래한 곳을 진토(塵土) 속에 묻고 발해를 버려 삼국 이래 결정된 문명을 초개(草芥)속에 던지고 이두문(吏讀文)과 한역(漢譯)의 구별에 어두워서 한 사람이 몇 사람이 되고 한 곳이 몇 군데가 된 것이 많으며, 내사(內史)나 외적(外籍)의 취사(取捨)에 홀려서 앞뒤가 모순되고 사건이 중복된 것이 많아 거의 사적 가치가 없다고 할 것이다. 불행히 그 뒤 얼마 안 가서 고려가 몽고에 패햐여 흘필렬(忽必烈:쿠빌라이)의 위풍이 전국을 놀라게 하여 황궁(皇宮)이니 제궁(帝宮)이니 하는 명사(名詞)들이 철폐되고, 해동천자(海東天子)의 팔관악부(八關樂府)가 금지되고, 이로부터 만일 문헌에 독립자존(獨立自存)에 관한 것이 있으면 일체 꺼려 피하게 되었으니, 이러한 때라 허다한 역사 저서 중에서 유일한 사대사상의 고취자인 김부식의 삼국사기와 그에 딸려 있는 삼국유사만이 전해질 수밖에 없게 되었던 것이다. 고려 당대의 사승(史乘)을 말한다면, 고려 말엽에 임금과 신하들이 고종(高宗)이전의 나라 형세가 강성하던 때의 기록은 더욱 몽고의 꺼리고 싫어함에 걸릴까보아 두려워서 깍아버리거나 고치고, 오직 말을 낮추고 후한 예폐(禮幣)로 북쪽 강대국들에게 복종하여 섬기던 사실만을, 혹은 부연하고 혹은 지어내서 민간에 퍼뜨렸다. 이러한 기록들이 곧 이조의 정인지(鄭麟趾)가 찬술한 고려사(高麗史)의 원전이 되었고, 이조 세종(世宗)이 비상하게 사책(史冊)에 유의하였으나, 다만 그의 할아버지인 태조(太祖)와 아버지인 태종(太宗)이 호두재상(虎頭宰相) 최영(崔塋)의 북벌군 중에서 모반하여 사대(事大)의 기치를 들고 혁명의 기초를 세웠으므로 권근(權近).정인지 등에게 명하여 조선사략(朝鮮史略), 고려사(高麗史),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등을 편찬하게 함에 있어 몽고의 압박을 받던 고려 말엽 이전의 조선의 각종 실기에 의거하여 역사를 짓지 못하고 몽고의 압박을 받은 이후 외국에 아첨한 글과 위조한 고사에 의거하여 역사를 지어 구차스럽게 사업을 마치고, 정작 전대(前代:고려)의 실록은 민간에 전해짐을 허락하지 않고 규장각(奎章閣) 안에 비장해두었는데 임진왜란의 병화(兵火)에 죄다 타버렸다. 그 뒤에 세조(世祖)가 단종(端宗)의 자리를 빼앗고, 만주 침략의 꿈을 품고서 강계(江界)에 둔병(屯兵)을 경영하다가, 자기네 태조의 존명건국(尊明建國)의 주의에 충돌되어 여러 신하들이 다투어 간하는 일이 분분하고, 지나 대륙에 용맹하고 억센 명나라 성조(成祖)가 있어 조선에 대한 감시가 엄중하고, 마침내 명나라 사신 장영(張寧)이 엄중히 둔병의 이유를 힐문하므로, 세조의 그 무(武)를 숭상하고 공을 좋아하는 마음이 사라지고 조선 문헌의 정리를 자임(自任)하여 불경을 간행하고 유학을 장려하는 외에 사료의 수집에도 전력하여 조선 역대 전쟁사인 동국병감(東國兵鑑)과 조선 풍토사인 동국여지승람(東國與地勝覽)을 편찬하고(동국병감은 文宗때, 여지승람은 成宗때 편찬), 그밖에도 허다한 서적을 간행하였으니 비록 큰 공헌은 없으나 얼마간 공적은 있었다 할 것이다. 선조(宣祖).인조(仁祖) 이후에는 유교계에 철학.문학의 큰 인물이 배출되고 사학계도 차차 진보되어 허목(許穆)의 단군.신라 등 각세기(世紀)가 너무 간략하기는 하나 왕왕 독특한 견해가 있으며, 유형원(柳馨遠)은 비록 역사에 관한 전문 저서가 없으나, 역대 정치제도를 논술한 반계수록(磻溪隋錄)이 또한 사학계에 보탬이 적지 않았으며, 한백겸(韓百謙)의 동국지리설(東國地理說)이 비록 수십 줄에 지나지 않는 간단한 논문이지마는 일반 사학계에 큰 광명을 열어서 그 뒤 정약용(丁若鏞)의 강역고(彊域考)며, 한진서(韓鎭書)의 지리(地理)며, 안정복의 동사강목(東史綱木)에 실린 강역론(彊域論)이며, 그 밖의 조선 역사 지리를 설(設)하는 사람은 모두 한 선행의 그 간단한 지리설을 부연하였을 뿐이다. 나로서 보건데, 그 지리설 중에 삼한과 조선을 분리함이 범엽(范曄:後漢書의저자)이 전한 동이열전(東夷列傳)의 지리를 설명함에는 족하나, 이로써 조선 고대 3천 년 동안의 지리를 단정하여, “동국(東國)은 옛날부터 한강 이남을 삼한(三韓)이라 하고 한강 이북을 조선이라 하였다.” 라는 결론을 내렸음은 너무도 맹목적이요, 무단적 (武斷的)이라고 생각한다. 이것은 선생이 삼신(三神) .삼경(三京) .삼한(三韓). 삼조선(三朝鮮).의 연락적 관계와 발조선(發朝鮮). 발숙신(發肅愼). 부여조선(夫餘朝鮮). 예맥조선(濊貊朝鮮). 진국(震國). 진번조선(眞番朝鮮). 진한(辰韓). 마립간(麻立干). 마한(馬韓). 모한(慕韓) 등이 동음이역(同音異譯)임을 몰랐으므로 이 같은 큰 착오가 있게 된 것이다. 그러나 동이열전에 보인 삼한의 위치는 선생이 비로소 간단명료하게 분석해서 밝혀 기왕에 역사의 기록만 있고 역사의 연구는 없었다고 할 만한 조선사학계에서 선생이 처음으로 사학의 실마리를 열었다 해도 좋을 것이다. 안정복은 평생을 열사 한 가지에만 노력한, 5백 년 이래 유일한 빈한한 선비로서 서적의 열람이 부족하여 삼국사기 같은 것도 그 늘그막에야 겨우 남이 베낀 틀린 글자가 많은 것을 얻어보았으므로 그가 저술한 동사강목에 궁예(弓裔)의 국호를 마진기(摩震紀)라 한 웃음거리를 남겼으며, 지나의 서적 중에서도 참고에 필요한 위략(魏略)이나 남제서(南濟書)를 같은 것이 있음을 몰라서 고루한 구절이 적지 아니하다. 게다가 시대에 유행하는 공구(孔丘:孔子)의 춘추(春秋)며, 주희(朱憙:朱子)의 강목(綱目)의 웅덩이에 빠져 기자본기(箕子本紀) 아래 단군과 부여를 덧붙이로 하였으며, 신라 마지막 판에 궁예와 왕건을 참주(僭主)로 한 망발도 있고 너무 황실 중심의 주의를 고수하여 정작 민족 자체의 활동을 무시함이 많았었다. 그러나 연구의 정밀하기로는 선생 이상 가는 이가 없었으므로 지지(地志)의 잘못의 교정과 사실의 모순의 변증(辯證)에 가장 공이 많다 하여도 좋을 것이다. 유혜풍(柳惠風)의 발해고(渤海考)는 대씨(大氏3백 년 동안 문치(文治)와 무공(武功)의 사업을 수록하여 1천여 년이나 사학가들이 압록강 이북을 베어버린 결함을 보충하였고 이종휘(李鍾?)의 수산집(修山集)은 단군 이래 조선 고유의 독립적 문화를 노래하여 김부식 이후 사학가의 노예 사상을 갈파하였는데, 특별한 발명과 채집(採集)은 없다 하더라도, 다만 이 한 가지만으로도 또한 영원히 남을 일이다. 한치윤(韓致奫)의 해동역사(海東繹史)는 오직 지나. 일본 등의 서적 가운데 보이는 우리역사에 관한 문자를 수집하여 거연히 방대한 저술을 이루었을 뿐 아니라 삼국사(三國史)에서 빠진 부여. 발해. 가락(駕洛). 숙신(肅愼) 등도 모두 한 편의 세기(世紀)를 구성하였으며, 동국통감(東國通鑑)에 없는 저근(姐瑾). 사법명(沙法名). 혜자(慧慈). 왕인(王仁) 등도 각각 몇 줄씩의 전기(傳記)가 있고 궁중어(宮中語). 문자. 풍속. 등의 부문이 있다. 게다가 그의 조카 한진서(韓鎭書)의 지리속(地理續)이 있어서 뒷사람들의 고증의 수고를 덜어주었으니 또한 역사학에 두뇌가 있었다고 할 것이다. 다만, 너무 글자 사이에서 조선에 관한 사실을 찾다가 민족 대세의 관계를 잃었으니 곧 부루(夫婁)와 하우(夏禹)의 대 국제교제로 볼 오월춘추(吳越春秋)의 주신(州愼)의 창수사자(蒼水使者)와 2천 년 동안 흉노와 연(燕)과 삼조선(三朝鮮)이 혹은 화의하고 혹은 싸운 전후 큰 일들을 다 빠뜨렸고, 유교의 위력에 눌려 고죽국(孤竹國)이 조선족의 갈래임을 발견치 못하는 동시에 백이(伯夷).숙제(叔齊)의 성명을 빠뜨렸고, 서적의 선택이 정확하지 못하였으니, 진서(晉書)의 속석전(束晳傳)에 의하면, “우(禹)임금이 백익(伯益)을 죽이고, 태갑(太甲)이 이윤(伊尹)을 죽였다.”는 등의 기록이 있는 것이 죽서기년(竹書紀年)의 진본(眞本)이요, 현존한 죽서기년은 가짜인데, 이제 그 가짜를 그대로 기재하였으며, 사마상여(司馬相如)의 무릉서(武陵書)는 당나라 사람의 위조인데, 그대로 신용하여 인용하였고, 이 밖에 지나인이나 일본인이 없는 사실을 만들어내서 우리 나라를 속이고 모욕한 것을 많이 그대로 수입하였으니, 이것이 그 책의 결점이라 아니할 수 없다. 이조 일대의 일을 적은 역사로 말하면, 내가 일찍이 정종조(正宗朝) 한때의 기록을 엮은 수서(修書)라는 아주 잔글자로 쓴 2백 권의 거질(巨帙)을 보았었고, 만일 관서(官書)인 국조보감(國朝寶鑑), 조야첨재(朝野僉載) 등을 비롯하여 허다한 개인 저술의 역사서까지 친다면 몇 백의 수레에 찰 것이다. 이 태조(李太祖) 이하의 사실을 적은 역사로는 조야집요(朝野輯要),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등 몇몇 책을 대강 훑어본 이외에는 자세히 다 읽어본 것이 없으므로 아직 그 낫고 못함을 말하지 못하거니와, 대개 열에 일고여덟이 사색(四色)의 당쟁사(黨爭史)임은 단언할수 있을 것이니 아, 이조 이래 수백 년 동안의 조선인의 문화사업은 이에 끊어졌도다. 이상에 열거한 역사서를 다시 말한다면 대개가 정치사요, 문화사에 해당하는 것은 몇이 못 됨이 첫째 유감이요, 정치사 중에서도 동국통감, 동사강목 이외에는 고금을 회통한 저서가 없고, 모두 한 왕조의 흥하고, 망한 전말로 글의 수미(首尾)를 삼았음이 유감이요, 공구의 춘추(春秋)를 역사의 절대적인 준칙으로 알아 그 의례를 본받아서 임금을 높이고 신하를 억누르기를 위주하다가 마지막에는 자기나라까지 비방하는 편벽된 논란을 벌임이 셋째 유감이요, 국민의 자감(資鑑)에 이바지하려 함보다 외국인에게 아첨하려 한 의사가 더 많고(李修山 일파를 제하고) 자기 나라의 강토를 조각조각 베어주어 마지막에 가서는 건국 시대의 수도까지 모르게 만들었음이 넷째 유감이다. 우리의 사학계가 이와같이 눈멀고, 귀먹고, 절름발이 등 온갖 병을 죄다 가져서 정당한 발달을 얻지 못함은 무슨 까닭인가? 너무 자주 내란과 외환(비교적 오래 편안했던 이조 일대는 제하고)과 자연의 재난이 잦았던 것은 그만두고라도 인위(人爲)의 장애를 이룬 것을 들건대, 1) 신지(神誌) 이래의 역사를 비장해두는 버릇이 역사의 고질이 되어 이조에서도 중엽 이전에는 동국통감, 고려사 등 몇몇 관에서 간행한 책 이외에는 사사로이 역사를 짓는 것을 금하였으므로 이수광(李?光)은 내각에 들어가서야 고려 이전의 비사(秘史)를 많이 보았다 하였고 이언적(李彦迪)은 사벌국전(沙伐國傳)을 지어가지고도 친구에게 보임을 꺼려했다. 당대 왕조의 잘잘못을 기록하지 못하게 함은 다른 나라에도 간혹 있거니와, 지나간 고대의 역사마저 사사로이 짓거나 읽는 것을 금함은 우리 나라에만 있었다. 그리하여 역사를 읽는 이가 별로 없었고, 2) 송도(松都)를 지나다가 만월대(滿月臺)를 쳐다보라. 반쪽의 기와가 남아 있는가? 한 개의 주초가 남아 있는가? 막막히 넓은 밭에 이름만 만월대라 할 뿐이 아닌가? 슬프다, 만월대는 이조의 아버지뻘로 멀지 않은 고려조의 대궐인데, 무슨 병화에 탔다는 설도 없이 어찌 이와같이 정(情)이 없는 빈터만 남았는가? 이와 똑같은 예로서 부여에서 백제의 유물을 찾아볼 수 없으며, 평양에서 고구려의 옛 모습을 찾아볼 수 없다. 이에서 나오는 결론은 뒤에 일어난 왕조가 앞의 왕조를 미워하여 역사적으로 자랑할 만한 것은 무엇이든지 파괴하고, 태워버리기를 위주한 것이다. 신라가 일어나매 고구려.백제 두 나라 역사가 볼 것이 없게 되었고, 고려가 되매 신라의 역사가 볼 것이 없게 되었으며, 이조가 대신하메 고려의 역사가 볼것이 없게 되어 매양 현재로서 과거를 계속하려 아니하고 말살하려 하였다. 그리하여 역사에 쓰일 자료가 박약해졌으며, 3) 현종(顯宗)이, “조총(鳥銃)의 길이가 얼마나 되오?”하니, 유혁연(柳赫然)이 두 손을 들어, “이만합니다.”하고 형용하였다. 기주관(記注官:기록을 맡은 관리)은 그 문답한 정형(情形)을 받아쓰지 못하고 붓방아만 찧고 있었다. 유혁연이 그를 돌아보며, “전하께서 유혁연에게 조총의 길이를 물으시니(相問鳥銃之長於柳赫然) 혁연이 손을 들어, ”자, 남짓이 하고 이만합니다,“고 대답하였다(然擧手尺餘以對曰如是)라고 쓰지 못하느냐?” 하고 구짖었다, 숙종(肅宗)이 박태보(朴太輔)를 친히 문초하는데, “이리저리 잔뜩 결박하고 뭉우리돌로 때려라.”하니, 주서(注書) 고사직(高司直)이 서슴없이, 필(必)자 모양으로 결박하여 돌로 때려라(必字形縛之無隅石擊之).“라고 썼다 그래서 크게 숙종의 칭찬을 받았다고 한다. 이것들이 궁정의 한 가화(佳話)로 전하는 이야기이지마는, 반면에 남의 글로 내 역사를 기술하기 힘듦을 볼 것이다. 국문이 늦게 나오기도 했지마는, 나온 뒤에도 한문으로 저술한 역사만 있음이 또한 기괴하다. 이는 역사 기록의 기구가 부족함이요, 4) 회재(晦齋:李彦迪)나 퇴계(退溪:李滉)더러 원효나 의상의 학술사상(學術史上) 위치를 물으면 한 마디의 대답을 못 할 것이요, 원효와 의상에게 소도(蘇塗:솟대)나 내을(奈乙:박혁거세의 탄생지)의 신앙적 가치를 말하면 반분의 이해를 못 할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이조의 인사들이 고려 시대의 생활의 취미를 모르며, 고려나 삼국의 인사들은 또 삼한 이전의 생활의 취미를 모를 만큼 반식(飯食). 거처(居處). 신앙. 교육 등 일반 사회의 형식과 정신이 모두 몹시 변하여 오늘의 아메리카 사람으로 내일 러시아 사람됨과 같은 엄청난 차이가 있으니, 이는 역사 사상의 연락이 끊어짐이라, 어디서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 구명할 동기가 생기랴? 이상 몇 가지 원인으로 하여 우리의 역사학이 올바르게 발달하지 못한 것이다. 3백 년 동안 사색(四色)의 당파 싸움이 크게 국가에 해를 끼쳤다 하지마는, 당론이 극렬할수록 제각기 나는 옳고 저는 그르다는 것을 퍼뜨리기 위하여 사사로운 기술이 성행하고 당의 시비가 매양 국정에 관계되므로 따라서 조정의 잘잘못을 논술하게 되어 모르는 사이에 역사의 사사로운 저작의 금지가 깨뜨려져서 마침내 한백겸. 안정복. 이종휘. 한치윤 등 사학계에 몇몇 인물이 배치되었음도 그 결과이다. 혹 어떤 이는, “사색 이후의 역사는 피차의 기록이 서로 모순되어 그 시비를 가릴 수가 없어서 가장 역사의 난관이 된다.”고 하지마는, 그들의 시비가 무엇인가 하면 아무 당이 이조의 충신이니, 역적이니, 아무 선생이 주자학의 정통이니 아니니 하는 문제들뿐이라, 오늘날 우리의 눈으로 보면 서릿발 같은 칼을 휘둘러 임금의 시체를 두 동강이 낸 연개소문을 쾌남아라 할 것이요, 자기의 의견을 주장하여 명륜당(明倫堂) 기둥에 공자를 비평한 글을 붙인 윤백호(尹白湖)를 걸물(傑物)이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만 냉정한 두뇌로써 회재.화담(花潭:徐敬德). 퇴계.율곡(栗谷:李珥) 등의 학술상 공헌의 많고 적음을 알아야 할 것이다. 주자학의 정통이 되고 안 됨은 희담(戱談)이 될 분이요, 노론(老論).소론(少論).남인(南人).북인(北人)의 다툼은 그 정치상에 미친 영향의 좋고 나쁨을 물을 뿐이며, 이조의 충성된 종 되고 못 됨은 잠꼬대에 지나지 않을 뿐이요, 개인의 사사로운 덕의 결점을 지적하여 남의 명예를 더럽히고 혹은 애매한 사실로 남을 모함하여 죽인 허다한 사건들은 그 반면에 있어서 당시 사회 알력의 나쁜 습속으로 국민과 나라를 해친 일종의 통탄할 사료가 될 뿐이다. 만일 시어머니의 역정과 며느리의 푸념 같은 것에 지나지 않는 일에 낱낱이 재판관을 불러 그 굽고 곧음을 판결하려 한다면 이는 스펜서의 이른바 이웃집 고양이 새끼 낳았다는 보고 같아서 도리어 이로써 사학계의 다른 중대한 문제를 등한히 할 염려가 있으니, 그냥 던져둠이 옳다. 그리고 빨리 지리 관계라든가, 국민생활 관계라든가, 민족의 성쇠라든가 하는 큰 문제에 주의하여 잘못을 바로잡고 참된 것을 구하여 조선 사학계의 표준을 세움이 급무 중의 급무라 생각한다. 제4장 사료의 수집과 선택에 관한 참고[편집] 만일 한 걸음 더 나아가 어디서 무엇으로 어떻게 우리의 역사를 연구하여야 하겠느냐 하면 , 그 대답이 매우 곤란하나, 우선 나의 경과부터 말하고자 한다. 이제부터 16년 전에 국치(國恥:한일합방)에 발분하여 비로소 동국통감(東國痛鑑)을 읽으면서 사평체(史評體)에 가까운 독사신론(讀史新論)을 지어 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 지상에 발표하고, 이어서 수십 학생들의 청구에 의하여 지나식(支那式)의 연의(蓮義)를 본받은 역사도 아니고 소설도 아닌 대동사천녀사(大東史千年史)란 것을 짓다가, 두 가지 다 사고로 인하여 중지하고 말았었다.그 논평의 독단(獨斷)과 행동의 대담하였음을 지금까지 스스로 부끄러워하거니와, 그 이후 얼마만큼 분발하여 힘쓴 적도 없지 아니하나 나아간 것이 촌보(寸步)쯤도 못 된 원인을 오늘에 와서 국내 일반 독사계(讀史界)에 호소하고자 한다. 1) 옛 비석의 참조에 대하여 일찍이 사곽잡록(四郭雜錄:저자미상)을 보다가 “신립(申砬)이 선춘령(先春領)아래에 고구려 옛 비가 있다는 말을 듣고(申砬聞先春領下有高句麗舊碑), 몰래 사람을 보내 두만강을 건너가서 탁본(拓本)을 떠왔는데(潛遣人 渡豆滿江 模本而來), 알아볼 만한 글자가 3백여 자에 지나지 않았다(所可辨識者 不過三百餘字).그 글에 황제라고 한 것은 고구려왕이 스스로를 일컬은 것이요(其曰皇帝 高句麗王自稱也), 그 상가(相加)라고 한 것은 고구려의 대신을 일컬은 것이었다(其曰相加 高句麗大臣之稱也).“고 한 일절이 있음을 보고 크게 기뻐서, 만주 깊은 산중에 천고(千古) 고사(故事)의 이빠진 것을 보충할 만한 비석쪽이 이것 하나뿐 아닐 것이라 생각하고 해외에 나간 날부터 고구려 발해의 옛 비석을 답사하리라는 회포가 몹시 깊었었다. 그러나 해삼위(海參威:브라디보스토크)에서 하바로프스크를 왕래하는 선객들에게 그 항로 중에서 전설로 내려오는 석혁산악(錫赫山嶽)에 우뚝 서 있는 윤관(尹瓘, 혹은 蓋蘇文)의 기공비(紀功碑)를 보았다는 말이며, 봉천성성(奉天省成)에서 간접으로 이통주(伊通州)를 유람하였다는 사람이 그 고을 동쪽 70리에 남아 있는 해부루(解夫婁:夫餘의 왕)의 송덕비(頌德碑)를 보았노라는 이야기며, 발해의 옛 서울에서 온 친구가 폭이 30리인 경박호(鏡泊湖:古史에는忽汗海)의 앞쪽(북쪽)에 미국 나이아가라 폭포와 겨룰 만한 1만 길 비폭(飛瀑)을 구경하였다고 하는 말이며, 해룡현(海龍縣)에서 나온 나그네가 죽어서 용이 되어 일본의 세 섬을 가라앉히겠노라고 한 문무대왕(文武大王:신라)의 유묘(遺廟)를 예배하였다는 이야기 등이 나에게는 귀로 들을 인연만 있었고 눈으로 볼 기회는 없었다. 한번 네댓 친구와 동행하여 압록강 위의 집안현(輯安縣), 곧 고구려 제2의 환도성(丸都成)을 얼씬 보았음이 나의 인생에 기념할 만한 장관이라 할 것이나, 그러나 여비가 모자라서 능묘(陵墓)가 모두 몇인지 세어볼 여가도 없이 능으로 인정할 것이 수백이요, 묘가 1만 내외라는 억단(臆斷)을 하였을 뿐이었다. 마을 사람이 주는 댓잎 그린 금척(金尺)과 그곳에 거주하는 일본인이 박아서 파는 광개토왕 비문을 값만 물어보았으며(깨어진 그 땅 위에 나온 부분만), 수백의 왕릉 가운데 천행으로 남아 있는 8층 석탑, 사면이 네모진 광개토왕릉과 그 오른편의 제천단(祭天壇)을 붓으로 대강 그려서 사진을 대신하였고 그 왕릉의 넓이와 높이를 발로 재고 몸으로 견주어서 자로 재는 것을 대신하였을 뿐이었다 (높이 10길 가량이고, 아래층의 둘레는 80발인데, 다른왕릉은 위층이 파괴되어 높이는 알 수 없고 그 아래층의 둘레는 대개 광개토왕과 같음). 왕릉의 위층에 올라가 돌기둥이 섰던 자취와 덮은 기와의 남은 조각과 드문드문 서있는 소나무, 잣나무를 보고 후한서(後韓書)에, “고구려 사람들은 금은과 재백(財帛)을 다하여 깊이 장사지내고, 돌을 둘러 봉하고 또한 소나무, 잣나무를 심는다(高句麗人金銀財帛 盡於厚葬 環石爲封 亦種松柏).”고 한 아주 간단한 문구의 뜻을 비로소 충분히 해석하고, ‘수백 원만 있으면 묘 하나를 파볼 수 있을 것이요, 수천 원 혹은 수만 원이면 능 하나를 파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 수천 년 전 고구려 생활의 활사진을 볼 수 있을 것인데.’ 하는 꿈 같은 생각만 하였다. 아! 이와 같은 천장비사(天藏秘史)의 보고(寶庫)를 만나서 나의 소득이 무엇이었던가? 인재(人材)와 물력(物力)이 없으면 재료가 있어도 나의 소유가 아님을 알았다. 그러나 하룻동안 그 외부에 대한 어설픈 관찰만 이었지마는 고구려의 종교. 예술. 경제력 등의 어떠함이 눈앞에 살아 나타나서 그 자리에서 “집안현을 한번 봄이 김부식의 고구려사를 만번 읽는 것보다 낫다,” 하는 단안을 내렸다. 그 뒤 항주(杭州) 도서관에서 우리 나라 금석학자 김정희(金正喜:秋史)가 발견한 유적을 가져다가 지나인이 간행한 해동금석원(海東金石苑)을 보니, 신라말 고려초의 사조(思潮)와 속상(俗尙)의 참고가 될 것이 많았고, 한성의 한 친구가 보내준 총독부 발행의 조선고적도보(朝鮮古蹟圖譜)도 그 조사한 동기의 어떠함이나 주해의 억지로 끌어다 붙인 몇몇 부분만을 제외하면, 또한 우리 고사 연구에 도움될 것이 많았다. 이것이나 저것이나 다 우리 한미한 서생(書生)의 손으로는 도저히 성취하지 못할 사료임을 스스로 깨달았다. 2) 각 서적의 호증(互證)에 대하여 ① 일찍이 고려 최영전(崔塋傳)에 의거하건대, 최영이 말하기를, “당나라가 삼십만 군사로 고구려를 침범하여, 고구려는 승군(僧軍) 삼만을 내어 이를 대파하였다.” 고 했으나, 삼국사기(三國史記) 50권 중에 이 사실이 보이지 아니한다. 그러면 승군이란 무엇인가 하면, 서긍(徐兢)의 고려도경(高麗圖經)에 “재가(在家)한 화상은 가사도 입지 아니하고 계율도 행하지 아니하며, 조백으로 허리를 동이고 맨발로 걷고, 아내를 가지고, 자식을 기르며, 물건의 운반, 도로의 소제, 도랑의 개척, 성실(城室)의 수축 등 공사(公事)에 복역하며, 국경에 적이 침입하면 스스로 단결하여 싸움에 나서는데, 중간에 거란(契丹)도 이들에게 패하니, 그 실은 죄를 지어 복역한 사람들로서, 수염과 머리를 깍았으므로 이인(夷人:오랑캐)이 그들을 화상이라 한 것이다.”라고 하였으니, 이것에서 승군의 면목을 대강 알 수 있다. 그러나 그 내력이 어디서 비롯하였느냐 하는 의문이 없지 않다. 통전(通典).신당서(新唐書)등 이름있는 책에 의하면, 조의선인이라는 관명(官名)이 있었고, 고구려사에는 명림답부(明臨答夫:고구려 재상)를 연나조의라 하였고, 후주서(後周書)에는 조의선인을 예속선인이라고 하였으니, 선인(先人) 선인(仙人)은 다 국어 ‘선인’을 한자로 음역한 것이고, 조의 혹 백의(帛衣)란 고려도경(高麗圖經)에 이른바 조백으로 허리를 동이므로 이름함이다. 선인(仙人)은 신라 고사(故事)의 국선(國仙)과 같은 종교적 무사단(武士團)의 단장이요, 승군(僧軍)은 국선 아래 딸린 단병(團兵)이요, 승군이 재가한 화상(和尙)이라 함은 후세 사람이 붙인 별명이다. 서긍이 외국의 사신으로 우리 나라에 와서 이것을 보고 그 단체의 행동을 서술함에 있어서, 그 근원을 물으니 복역한 사람이라는 억측의(名詞)를 말해준 것이다. 이에 고려사로 인하여 삼국사에 빠진 승군을 알게 되고, 고려도경으로 인하여 고려사에 자세치 않은 승군의 성질을 알게 되고 통전. 신당서. 후주서와 신라의 고사 등으로 인하여 승군과 선인(先人)과 재가의 화상이 같은 단체의 무리임을 알게 되었으니, 다시 말하면 당나라의 30만 침입군이 고구려의 종교적 무사단인 선인군(先人軍)에게 크게 패하였다는 몇십 자의 약사(略史)를 6,7가지 서적 수천 권을 뒤진 결과로써 비로소 알아낸 것이다. ②당나라 태종(太宗)이 고구려를 침략하다가 안시성(安市城)에서 화살에 맞아 눈이 상하였다는 전설이 있어 후세 사람이 매양 이것을 역사에 올리는데, 이색(李穡)의 정관음(貞觀吟:정관은 당나라 태종의 연호)에도,“어찌 현화(玄花:눈)가 백우(白羽)에 떨어질 줄 알았으리(那知玄花落白羽).”라고 하여 그것이 사실임을 증명하였으나, 김부식의 삼국사기와 지나인의 신구당서(新舊唐書)에서는 보이지 않음은 무슨까닭인가? 만일 사실의 진위를 묻지 않고 그것을 그대로 받아들이거나 또는 버렸다가는 역사상의 위증죄를 범하는 것이 된다, 그래서 당나라 태종의 눈 상한 사실을 지나의 사관(史官)이 뺀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을 가지고 그 해답을 구하였다. 명(明)나라 태종(太宗)이 거란을 치다가 흐르는 화살에 상하여 달아나 돌아가서, 몇 해 후에 필경 그 상처가 덧나서 죽었다,“고 하였는데, 이것이 송사(宋史)나 요사(?史)에는 보이지 아니하고, 사건이 여러 백 년 지난 뒤에 진정이 고증(考證)하여 발견한 것이다. 이에 나는 지나인은 그 임금이나 신하가 다른 민족에게 패하여 상하거나 죽거나 하면 그것을 나라의 수치라 하여 숨기고 역사에 기록하지 않은 실증을 얻어서 나의 앞의 가설을 성립시켰다. 그러나 지나인에게 국치(國恥)를 숨기는 버릇이 있다 하여 당나라 태종이 안시성에서 화살에 맞아 눈을 상하였다는 실증은 되지 못하므로, 다시 신구당서를 자세히 읽어보니, 태종본기(太宗本紀)에 태종이 정관(偵觀) 19년 9월에 안시성에서 군사를 철수하였다 하였고, 유박전(劉泊傳)에는 그 해 12월에 태종의 병세가 위급하므로 유박이 몹시 슬퍼하고 두려워하였다고 하였으며, 본기(本紀)에는 정관 20년에 임금의 병이 낫지 아니하여 태자에게 정사를 맡기고, 정관23년 5월에 죽었다고 하였는데, 그 죽은 원인을 강복(綱目)에는 이질(痢疾)이 다시 악화한 것이라고 하였고, 자치통감(資治痛鑑)에는 요동에서부터 병이 있었다고 하였다. 대개 높은 이와 친한 이의 욕봄을 꺼려 숨겨서, 주천자(周天子)가 종후(鄭侯)의 화살에 상했음과 노(魯)나라의 은공(隱公).송공(昭公) 등이 살해당하고 쫓겨났음을 춘추(春秋)에 쓰지 아니하였는데, 공구(孔丘)의 이러한 편견이 지나 역사가의 버릇이 되어, 당나라 태종이 이미 빠진 눈을 유리쪽으로 가리고, 그의 임상병록(臨床病錄)의 기록을 모두 딴 말로 바꾸어놓았다. 화살의 상처가 내종(內腫:몸 속으로 곪음)이 되고 눈병이 항문병(肛門病)으로 되어 전쟁의 부상으로 인하여 죽은 자를 이질이나 늑막염으로 죽은 것으로 기록해놓은 것이다. 그러면 삼국사기에는 어찌하여 실제대로 적지 않았는가? 이는 신라가 고구려.백제. 두 나라를 미워하여 그 명예로운 역사를 소탕하여 위병(魏兵)을 격파한 사법명(沙法名)과 수군(隨軍)을 물리친 을지문덕(乙支文德)이 도리어 지나의 역사로 인하여 그 이름이 전해졌으니(을지문덕의 이름이 삼국사기에 보이는 것은 곧 김부식이 지나사에서 끌어다 쓴 것이므로 그 논평에, ”을지문덕은 중국사가 아니면 알 도리가 없다“고했음), 당태종이 눈을 잃고 달아났음이 고구려의 전쟁사에 특기할 만한 명예로운 일이라 신라인이 이것을 빼버렸음이 또한 있을 수 있는 일이었다. 그러니까 우리가 당태종의 눈 잃은 일을 처음에 전설과 목은집(牧隱集)에서 어렴풋이 찾아내어 신구당서나 삼국사기에 이것을 기재하지 않은 의문을 깨침에 있어서ㅡ 진정의 야산묵담(兩山墨談)에서 같은 종류의 사항을 발견하고, 공구의 춘추(春秋)에서 그 전통의 악습을 적발하고, 신구당서, 통감강목(痛鑑綱目) 등을 가져다 그 모호하고 은미(隱微)한 문구 속에서 첫째로 당태종 병록(이질 등)보고가 사실이 아님을 갈파하고, 둘째로 목은의 정관음(貞觀吟:당태종의 눈 잃은 사실을 읊은 시)의 신용할 만함을 실증하고, 셋째로 신라 사람이 고구려 승리의 역사를 말살함으로써 당태종의 패전과 부상한 사실이 삼국사기에 빠지게 되었음을 단정하고 이에 간단한 결론을 얻으니 이른바, ‘당태종이 보장왕(寶藏王)3년(서기644)에 안시성에서 눈을 상하고 도망하여, 돌아가서 당시 외과 의사의 불완전으로 거의 30달을 앓다가, 보장왕 5년에 죽었다. ’라는 것이었다. 이 수십자를 얻기에도 5,6종 서적 수천 권을 반복하여 읽어보고 들며 나며 혹은 무의식중에서 얻고 혹은 무의식중에서 찾아내어 얻은 결과이니 그 수고로움이 또한 적지 아니하였다. 승군(僧軍)의 내력을 모르면 무엇이 해로우며 당태종이 부상한 사실을 안들 무엇이 이롭기에 이런 사실을 애써서 탐색하느냐 할 이가 있겠지만, 그러나 사학(史學)이란 것은 하나하나를 모으고 잘못 전하는 것을 바로잡아서 과거 인류의 행동을 여실하게 그려내어 후세 사람들에게 깨쳐주는 것이니, 승군 곧 선인군(先人軍)의 내력을 모르면 다만 고구려가 당나라 군사만을 물리친 원동력뿐 아니라, 뒤따른 명림답부(明臨答夫)의 혁명군의 중심과 강감찬의 거란을 격파한 군대의 주력(主力)이 다 무엇이었던지 모르고, 따라서 삼국에서부터 고려까지의 1천여 년 군제상(軍制上) 중요한 점을 모를 것이며, 당태종이 눈을 잃고 죽은 줄을 모른다면 안시성 전국(戰局)이 속히 결말이 난 원인을 모를 뿐만 아니라 그것이 신라와 당나라가 연맹하게 된 배경이요, 당나라 고종(高宗)과 그 신하가 모든 희생을 돌아보지 않고 고구려와 흥망을 겨룬 전제(前提)요, 백제와 고구려가 서로 손을 맞잡게 된 동기이던 것을 모를 것이다. 그러나 위에 든 것은 그 한두 예일 뿐이고, 이 밖에도 이 같은 일이 얼마인지를 모를 것이니, 그러므로 조선사의 황무지를 개척하자면 도저히 한두 사람의 힘으로 단시일에 완결시킬 것이 아님을 깨달았다. 3) 각종 명사(名詞)의 해석에 대하여 우리 나라는 고대 후에니키 인이 이집트의 상형문자를 가져다 알파벳을 만든 것처럼 한자를 가져다가 이두문을 만들었는데, 그 초창기에는 한자의 음을 딴 것도 있고 혹은 그 뜻을 딴 것도 있으니, 삼국사기에 보이는 사람의 이름으로는, ‘소지(疎智), 일명 비처(毘處)’라 함은 빛의 뜻이 소지가 된것이고 음이 비처로 된 것이요, ‘소나(素那), 일명 금천(金川)’이라 함은 뜻이 금천, 음이 소나로 된 것이요, ‘거칠부(거漆夫), 일명 황종(荒宗)’이라 함은 ‘거칠위’의 음이 거칠부, 뜻이 황종으로 된 것이요, ‘개소문(蓋蘇文), 일명 개금(蓋今)’은 ‘신’ 의 음이 소문, 뜻이 금으로 된 것이요, ‘이사부(異斯夫), 일명 태종(笞宗)’은 ‘잇위’의 음이 이사부, 뜻이 태종(訓蒙子會에 笞를 ‘잇’으로 읽음)으로 된 것이다. 지명(地名)으로는 ‘밀성(密城), 추화(推火)라고도 함’ 은 ‘밀무’의 음이 밀성, 뜻이 추화로 된 것이요, ‘웅산(熊山) 공목달(功木達)이라고도 함’은 ‘곰대’의 뜻이 웅산, 음이 공목달로 된 것이요, ‘계립령(鷄立領), 일명 마목령(麻木領)’이라 함은 ‘저름(겨릅)’의 음이 계립, 뜻이 마목으로 된 것이요, ‘모성(母城), 막성(莫城)이라고도 함’은 ‘어미’ 의 뜻이 모, 음이 막으로 된 것이요, ‘흑양(黑壤), 금물노(今勿奴)라고도 함’은 ‘거물라’의 ‘거물’의 뜻이 흑, 음이 금물로 된 것이요, 양과 노는 다 ‘하’의 음을 취한 것이다. 관명(官名)으로는 ‘각간(角干)을 혹은 발한(發翰)이라함’은 ‘불’의 뜻이 각, 음이 발로 된 것이고, 간(干)과 한(翰)은 다 ‘한’의 음을 취한 것이나, 불한은 군왕(郡王)을 일컬음이요, ‘누살(薩)을 혹 도사(道使)라 함’은 ‘라’의 뜻이 도, 음이 누로 된 것이고, ‘살’의 뜻이 사, 음이 사로 된 것이니, ‘라살’은 지방장관을 일컬음이요, ‘말한’ ‘불한’, ‘신한’은 삼신(三神)에서 근원한 것인데, 뜻으로는 천일(天一).지일(地一).태일(太一)이 되고, 음으로는 마한.변한.진한으로 된 것이요, ‘도가’,‘개가’,‘크가’,‘소가’,‘말가’는 다서 대신의 칭호인데, ‘도.개.크.소.말’등은 뜻으로,‘가’는 음으루 저가(猪加).구가(狗加).대가(大加).우가(牛加).마가(馬加)로 된 것이다. 이같이 자질구레한 고증이 무슨 역사상의 큰 일이 되는가? 이것은 자질구레한 듯하나 지지(地誌)의 잘못도 이로써 바로잡을 수 있고, 사료의 의혹도 이로써 보충할 수 있으며 고대의 문학에서부터 모든 생활 상태까지 연구하는 열쇠가 되는 것이다. 예를 들자면, 해모수(解募漱)와 유화왕후(柳化王后)가 만난 압록강이 어디인가? 지금의 압록강이라 하면 당시 부여의 서울인 합이빈(哈爾濱)과 너무 멀리 떨어져 있고, 다른 곳이라면 달리 또 압록이 없어 그 의문을 깨뜨리지 못하였더니,첫 걸음에 광개토호태왕(廣開土好太王)의 비에 지금의 압록강을 아리수(阿利水)라 하였음을 보고 압록의 이름이 아리(阿利)에서 나왔음을 깨달았다. 두 번째로 요사(遼史)에 ‘요흥종(遼興宗)이 압자하(鴨子河)를 혼돈강(混同江)이라 이름을 고쳤다.’고 한 것을 보고 ‘압자(鴨子)가 곧 ‘아리’인즉, 혼돈강 곧 송화강(松花江)이 고대의 북압록강(北鴨綠江)인가?‘ 하는 가설을 얻었고, 다음에 동사강목(東史綱目)고이(考異)에, ’삼국유사의 ‘요하(遼河) 일명 압록(鴨綠)’과 주희의 여진이 일어나 압록강에 웅거하였다.‘고 한 것을 들어 ’세 압록(鴨綠)이 있다,‘고 하였음을 보고 송화강이 고대에 한 압록강이었음을 알고, 따라서 해모수 부부가 만난 압록강이 곧 송화강임을 굳혔다. 마한전(馬韓傳)에 ‘비리(卑離)’를 건륭제(乾隆帝)의 삼한정류(三韓訂謬)에는 만주의 패륵(貝勒:패리)과 같은 관명(官名)이라고 하였으나, 나는 생각하기를 삼한의 비리는 삼국지리지(三國地理志)백제의 부리(夫里)이니, 비리나 부리는 다 ‘울’의 취음(取音)이요, 도회(都會)의 뜻이다. 마한의 비리와 백제의 부리를 참조하면, 마한의 벽비리(壁卑離)는 백제의 파부리(波夫里)요, 여래비리(如來卑離)는 이릉부리(爾陵夫里)요, 모로비리(牟盧卑離)는 모량부리(毛良夫里)요, 감해비리(鑑奚卑離)는 고막부리(古莫夫理)요, 초산도비리(楚山途卑離)는 미동부리(未冬卑離)요, 고랍비리(古臘卑離)는, 고막부리(古莫夫里)니, 비록 이 음과 저 뜻이 이역(異譯))이 있기는 하나 그 대략을 얻을 수 있을 것이며, 따라서 조선이 관중(管仲)과 싸우던 때에 지나 산서성(山西省)이나 영평부(永平府)에 비이(卑耳)의 계(谿)를 두었으니, 비이는 비리 곧 ‘울’의 번역이다. 이에서 조선 고대의 ‘울’이 곧 산해관(山海關)서족까지에 이르렀음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자질구레한 고증이 역사상의 큰 일이 아니지마는 도리어 역사상의 큰 일을 발견하는 연장이라 하겠다. 만일 한 걸음 더 나아가서 훈몽자회(訓蒙字會), 처용가(處容歌), 훈민정음(訓民正音) 등에서 옛 말을 연구하고, 삼국유사에 씌어있는 향가에서 이두문의 용법을 연구하면 역사상 허다한 발견이 있을 것 같다. 필자가 일찍이 이에 유의한 바 있었는데, 해외에 나간 뒤로 부터는 한 권의 책을 얻기가 심히 어려워서, 10년을 두고 삼국유사를 좀 보았으면 하였으나 또한 얻어볼 수 없었다. 4) 위서(僞書)의 판별과 선택에 대하여 우리나라는 고대에 진귀한 책을 태워버린 때(이조 太宗의 焚書같은)는 있었으나 위서를 조작한 일은 별로 없었으므로, 근래에 와 천부경(天符經), 삼일신고(三一神誥)등이 처음 출현하였으나 누구의 변박(辨駁)도 없이 고서로 인정하는 이가 없게 되었다. 그러므로 우리 나라 책은 각 씨족의 족보 가운데 그 조상의 일을 혹 위조한 것이 있는 이외에는 그다지 진위의 변별에 애쓸 필요가 없거니와, 우리와 이웃해 있는 지나. 일본 두 나라는 예로부터 교제가 빈번함을 따라서 우리 역사에 참고될 책이 적지 않지마는 위서 많기로는 지나 같은 나라가 없을 것이니, 위서를 분간하지 못하면 인용하지 않을 기록을 우리 역사에 인용하는 착오를 저지르기 쉽다. 그렇지마는 그 가짜에 구별이 있다. 하나는 가짜 중의가짜이니, 예를 들면 죽서기년(竹書紀年)은 진본이 없어지고 위작이 나왔음을 앞에서 이미 말하였거니와, 옛날 사학가들이 늘 고기(古記)의, ‘단군은 요임금과 함께 무진년에 섰다(檀君 興堯竝立戊辰).’고 한 글에 의하여 단군의 연대를 알고자 하는 이는 항상 요 임금의 연대에 비교 하고자 하며 요 임금의 연대를 찾는 이는 속강목(續綱目:金仁山저술)에 고준(考準)한다. 그러나 주소(周召: 周公과 召公)의 공화(王이 달아나고 주공과 소공이 의논하여 정치를 행한 14년)이전의 연대는 지나 역사가의 대조(大祖)라 할 만한 사마천(司馬遷)도 알지 못하여, 그의 사기(史記)연표에 쓰지 못하였거늘 하물며 그보다도 더 요원한 요 임금의 연대랴. 그러므로 속강목은 다만 가짜 죽서기년에 의거하여 적은 연대이니, 이제 속강목에 의거하여 고대의 연대를 찾으려 함은 도리어 연대를 흐리게 함이다. 공안국(孔安國)의 상서전(尙書傳)에, ‘구려 한맥(句麗?貊)’이라는 구절을 인용하여 고구려와 삼한이 지나의 주무왕(周武王)과 교통하였음을 주장하는 이도 있으나, 사기(史記)공자세가(孔子世家)에,“안국(安國)이 지금의 황제의 박사(博士)가 되었는데 일찍 죽었다(安國爲今皇帝博士蚤卒).”고 하였으니, ‘지금의 황제’는 무제(武帝)이다. 무제를 '지금의 황제‘하 한 것은 사마천이 무제가 죽어서 무제라는 시호를 받은 것을 못 보았기 때문이고, 안국을 ’일찍 죽었다.‘고 한 것은 사마천이 생전에 안국의 죽음을 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면 공안국은 사마천보다 먼저 죽고 사마천은 무제보다 먼저 죽었음이 명백한데 , 상서전에는 무제의 아들인 소제(昭帝)시대에 창설한 금성군(金城郡)이란 이름이 있으니, 공안국이 그가 죽은 뒤에 창설된 지명을 예언할 만한 점쟁이라면 모르거니와, 만일 그렇지 않다고 하면 상서대전이 위서(僞書)임이 또한 분명하고 거기 기록된 구려. 한맥 등도 자연 명백해질 것이다. 다음은 진짜 중의 가짜인데, 이것을 다시 둘로 나누면, ① 하나는 본서의 위증(僞證)이니, 초학집(初學集), 유학집(有學集)등은 전겸익(錢謙益)이 저술한 실제로 있는 것이지마는, 그 글 가운데 씌어 있는 우리 나라에 관한 일은 대개 전겸익의 위조요, 실제로없는 것이 많으니, 이런 따위가 바로 그것이다. 그러나 이는 우리 나라 역사에 그것을 반박할 확고한 증거들이 있거니와 , 만일 우리 역사의 반박할 재료가 없어지고 저네의 거짓 기록만 유전(流轉)된 것이 있으면 다만 가설의 부인만으로는 안 될 것이니 어찌하면 옳을까? 옛날에 장유(長維)가 사기(史記)의, “무왕이 기자(箕子)를 조선에 봉하였다(武王封箕子干朝鮮).”고 한 것을 변정하는데, 첫째로 상서(尙書)에, “나는 남의 신하가 되지 않겠다고”한 말을 들어 기자가 이미 남의 신하가 되지 않겠다고 스스로 맹세하였으니, 무왕의 봉작(封爵)에, “기자가 조선으로 몸을 피하였다(箕子避地朝鮮).”고 한 것을 들어 반고(班固)는 사기를 지은 사마천보다 성실하고 정밀한 역사가로서 사마천의 사기에 기록된 기자의 봉작설을 빼버리고 봉작은 사실이 아니라고 단언을 내렸으니, 이는 인증(人證)이다. 삼국 이후 고려 말엽 이전(몽고 침입 이전)에 우리 나라 형세가 강성하여 지나에 대하여 전쟁으로 맞설 떄에도 저에게 보낸 국서에 우리를 낮추어 한 말이 많이 있었거니와, 그들은 다른 나라가 사신을 보내면 반드시 내조(來朝:조공왔다)라고 썼음은 지나인의 병적인 자존성에 의한 것이니, 이는 근세 청조(淸朝)가 처음 서양과 통할 때 영(英).로(露) 등 여러 나라가 와서 통상한 사실을 죄다 “모국이 신하를 일컫고 공물을 바쳤다(某國稱臣奉貢).”고 썼음을 보아도 가히 알수 있는 일이니, 그네의 기록을 함부로 믿어서는 안 된다. 또 지나인이 만든 열조시집(列朝詩集), 양조평양록(兩朝平讓錄) 등 시화(詩話) 가운데 조선 사람의 시를 가져다가 게재할 때에 대담하게 한 구절 한 줄을 고쳤음을 볼 수 있으니, 우리의 역사를 적을 때에도 자구를 고쳤었음을 알 것이다. 그리고 몽고의 위력이 우리 나라를 뒤흔들 때, 우리의 악부(樂府).사책(史冊)을 가져다가 황도(皇都).제경(帝京).해동천자(海東天子). 등의 자구를 모두 고친 사실이 고려사에 보였으니, 그 고친 기록을 바로잡지 못한 삼국사. 고려사 등도 지나와 관계된 문제는 실제의 기록이 아님을 알 것이다. 이것은 사증(事證)이다. 연전에 김택영(金澤榮)의 역사집략(歷史輯略)과 장지연(張志淵)의 대한강역고(大韓彊域考)에 , 일본의 신공여주(神功女主) 18년에 신라를 정복했다는 것과, 수인주(垂仁主) 2년에 임나부(任那府)를 설치하였다는 것을 모두 일본서기(日本書紀)에서 그대로 따다가 적고 그 박식함을 자랑하였다. 그러나 신공 18년은 신라 내해왕(柰解王) 4년(서기 199년)이요, 내해왕 당년에는 신라가 압록강을 구경한 이도 별로 없었을 테인데, 이제 내해왕이 아리나례(阿利那禮:압록강)을 가리키며 맹세하였다 함이 무슨 말이며, 수인주는 백제와 교통하기 이전의 일본의 임금이니, 백제의 봉직(縫織)도 수입이 안 된 때인데, 수인주 2년에 임나국(任那國) 사람에게 붉은 비단[赤絹] 2백 필을 주었다 함은 어쩐 말인가? 이 두가지 의문에 답하기 전에 그 두 사건의 기사가 스스로 부정하고 있으니, 이것은 이증(異證)이다. 이렇게 고인의 위증(僞證)을 인(人)으로 사(事)로 또 이(理)로 증명하여 부합되지 않으면 그것은 거짓임을 알 것이다. ② 후세 사람의 위증이니, 원서에는 본래 거짓이 없었는데 후세 사람이 문구를 보태어 위증한 것이다. 마치 당태종이 고구려를 치려 하여, 그 사기(史記), 한서(漢書). 후한서(後漢書), 삼국지(三國志), 진서(晉書), 남사(南史), 북사(北史) 등에 보인 조선에 관한 사실을 가져다 자기네에게 유리하도록 안사고(顔師古) 등으로 하여금 곡필(曲筆)을 잡아 고치고 보태고 바꾸고 억지의 주를 달아서, 사군(史郡:樂浪.臨屯.眞番.玄?)의 연혁이 가짜가 진짜로 되고, 역대 두 나라의 국서가 더욱 본래대로 전해지는 것이 없게 되었다, 이러한 증거는 본편 제2장 지리연혁(地理沿革)에서 볼 수 있을 것이다. 다음은 가짜가운데 진짜니, 마치 관자(管子)같은 것은 관중(管仲)의 저작이 아니고 지나 육국(六國) 시대의 저작인 위서(僞書)이나 조선과 제(齊)의 전쟁은 도리어 그 실상을 전한 자이니, 위서로서도 진서(眞書)이상의 가치를 가진 것이라 할 것이다. 5) 만(滿). 몽(蒙). 토(土) 여러 종족의 언어와 풍속의 연구이다. 김부식은 김춘추(金春秋). 최치원(崔致遠) 이래의 모화주의(慕華主義)의 결정(結晶)이니, 그가 저술한 삼국사기에 “고주몽(高朱蒙)은 고신씨(高辛氏:고대 중국 5제의 한 사람)의 후예다” “김수로(金首露)는 금천씨(金天氏:皇帝의 아들 少昊)의 후예다“ “진한(辰韓)은 중국 진인(秦人)이 동래(東來)한 것이다” 하여, 말이나 피나 뼈나 교나 풍속이 한가지도 같은 것이 없는 지나족을 동종(同宗)으로 보아, 말살에다 쇠살을 묻힌 어림없는 붓을 놀린 뒤로 그 편벽된 소견을 간파한 이가 없었으므로, 우리 부여의 계(族系)가 분명치 못하여 드디어는 조선사의 위치를 캄캄한 구석에 둔 지가 오래였다. 언제인가 필자가 사기(史記) 흉노전(匈奴傳)을 보니, 삼성(三性)의 귀족 있음이 신라와 같고, 좌우 현왕(賢王) 있음이 고려나 백제와 같으며, 5월의 제천(祭天)이 마한과 같고, 무기일(戊己日)을 숭상함이 고려와 같으며, 왕공(王公)을 한(汗)이라 함이 삼국의 간(干)과 같고, 벼슬 이름 끝 글자에 치라는 음이 있음이 신지(臣智)의 지(智)와 한지(旱支)의 지(支)와 같으며, 후(后)를 알씨(閼氏)라 함이 곧 ‘아씨’의 번역이 아닌가 하는 가설이 생겼다. 인축(人畜). 회계(會計)하는 곳을 담림혹은 대림이라 함이 ‘살임’의 뜻이 아닌가 하는 의문이 나고, 휴도(休屠)는 소도(蘇塗)와 음이 같을 뿐 아니라, 나라 안에 대휴도(大休屠)를 둔 휴도국(休屠國)이 있고, 각처에 또 소 휴도가 있어서 더욱 삼한의 소도와 틀림이 없었다. 이에 조선과 흉노가 3천 년 전에는 한방 안의 형제였다는 의안(疑案)을 가져 그 해결을 구하다가, 그 뒤에 건륭제(乾隆帝)가 명하여 지은 만주원류고(滿洲源流告)와 요(遼). 금(金). 원(元) 세 역사의 국어해(國語解)를 가지고 비교하여보았더니, 비록 그 가운데 부여의 대신 칭호인 ‘가(加)’를 음으로 풀이하여 조선말 김가 이가 하는 ‘가’와 같은 뜻이라 하지 않고 뜻으로 주석하여 가(家)의 잘못이라 하였으며, 금사(金史). 발극렬(勃極烈)을 음으로 맞는 신라의 불구래(弗矩래內)에 상당한 것이라 하지 않고 청조(淸朝)의 패륵(貝勒:패리)의 동류라 한 것 등의 잘못이 없지 아니하나, 주몽(朱蒙)이 만주어(滿洲語) ‘주림물’ 곧 삼림의 뜻이라 하고, 삼한의 벼슬 이름의 끝자 지(支)가 곧 동몽고(東蒙古)의 중을 만나 동몽고 말의 동.서.남.북을 물으니 연나.준나.우진나.회차라고 하여, 고려사의, “도부를 순나라 하고(東部曰順那),서부를 연나라 하고(西部曰涓那), 남부를 관나라 하고(南部曰灌那), 북부를 절나라 하고(北部曰絶那)”고 한 것과 같음을 알았다. 또 그 뒤 일본인 조거용장(鳥居龍欌)이 조사 발표한 조선. 만주. 몽고. 토이기 네 종족의 현행하는 말로 같은 것이 수십 종(이에 나의 기억하는 바는 오직 貴子를 ‘아기’라, 乾醬을 ‘메주’라 하는 한두 가지뿐임)이 있음을 억단(臆斷)을 내렸고, 지나 24사(史)의 선비.흉노.몽고등에 관한 기록을 가지고 그 종교와 풍속의 같고 다름을 참조하고, 서양사로써 흉노의 유종(遺種)이 토이기(土耳其:터키).흉아리(匈牙利:헝가리) 등지로 옮겨간 사실을 고열(考閱)하여, 조선. 만주. 몽고. 토이기 네종족은 같은 혈족이라는 또 하나의 억단을 내리게 된 것이다. 이 억단의 옳고 그름은 고사하고 조선사를 연구하자면 조선의 고어뿐 아니라 만주어. 몽고어. 등도 연구하여 고대의 지명. 벼슬 이름의 뜻을 깨닫는 동시에, 이주(移住)하고 교통한 자취며, 싸우고 빼앗은 자리며, 풍속의 같고 다른 차이며, 문야(文野:문명과 야만)의 높고 낮은 원인을 구명하고, 그 밖에 허다한 사적의 탐구와 잘못된 문헌의 교정 등에도 힘을 기울여야 하겠다. 이상의 다섯 가지는 재료의 수집과 그 선택 등의 수고로움에 대하여 나 자신의 경력을 말한 것이다. 조선. 지나. 일본 등 동양 문헌에 대한 대 도서관이 없으면 조선사를 연구하기가 정말 어려울 것이다. 일본의 학자들은 국내에 아직 십분 만족하다 할 도서관은 없으나,그러나 동양으로는 제일이고 또 지금에 와서는 또 조선의 소유가 그 외부(外部)의 곳집이 되고 또 서적의 구독과 각종 자료의 수집이 우리같이 표랑생활 중에 있는 한사(寒士)보다 월등히 나을 것이요, 게다가 새 사학에 상당한 소양까지 있다고 자랑하기에 이르렀으나, 지금까지 동양학(東洋學)에 위걸(偉傑)이 나지 못 함음 무슨 까닭인가. 저들 중에서 가장 명성이 높은 자가 백조고길(白鳥庫吉)이라 하지마는, 그가 저술한 신라사(新羅史)를 보면, 배열. 정리의 새로운 형식도 볼 수 없고 한두 가지 발명도 없음은 무슨 까닭인가? 좁은 천성(天性)이 조선을 헐뜯기에만 급급하여 공평을 결함으로 인한 것인가? 조선사람으로서 어찌 조선 사학이 일본인으로부터 개단(開端)하기를 바라리요 마는 보장(寶藏)을 남김없이 가져다가 암매(暗昧)중에 썩임을 개탄하고 아까워하지 않을 수 없다. 제5장 역사서의 개조에 대한 소견(所見)[편집] 역사 재료에 대하여 그 없어진 것을 채우고 빠진 것을 기우며, 거짓을 제거하고 헐뜯은 것을 밝혀서 완전하게 하는 방법의 대략을 이미 말하였거니와, 편찬하고 정리하는 절차에 있어서도 옛날 역사의 투를 고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근일에 왕왕 새로운 체제의 역사를 지었다는 한두 가지 새 저서가 없지 아니하나, 그것은 다만 신라사.고려사. 하던 왕조 독립의 식을 고쳐 상세(上世).중세(中世).근세(近世)라 하였고, 권1, 권2라 하던 통감(痛鑑).분편(分編)의 이름을 고쳐 제1편, 제2편이라 하였으며, 그 내용을 보면 재기(才技).이단(異端)이라 하던 것을 예술이라 학술이라 하여 그 귀천의 위치가 바뀌었을 뿐이요, 근왕(勤王)이라 한외(外:외적을 막음)라 하던 것을 애국이라 민족적 자각이라 하여 그 신구(新舊)의 명사(名詞)가 다를 뿐이니, 털어놓고 말하자면 한장책(韓裝冊)을 양장책(洋裝冊)으로 고쳤음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이에 나의 어리석은 소견으로 우리 역사의 개조 방법의 대강을 말하자면, 1) 그 계통을 찾을 것이다. 구사(舊史)에는 갑(甲)대왕이 을(乙)대왕의 아버지요 정(丁)대왕이 병(丙) 대왕의 아우이니 하여 왕실의 계통을 찾는 외에 다른 곳에서는 거의 계통을 찾지 않았으므로, 무슨 사건이든지 공중에서 거인이 내려오고, 평지에서 신산(神山)이 솟아오른 듯하여, 한 편의 신괴록(神怪錄)을 읽는 것 같다. 역사는 인과의 관계를 밝히자는 것인데, 만일 이와 같은 인과 이외의 일이 있다 하면 역사는 하여 무엇하랴. 그것은 지은 사람의 부주의에 의한것이요, 본질이 그러한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구사에는 그 계통을 말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우리가 이를 찾을 수 있으니, 삼국사기, 신라사에 적힌 신라의 국선(國仙)이 진흥대황(眞興大王) 때부터 문무대왕(文武大王)때까지 전성하여, 사다함(斯多含) 같은 이는 겨우 열 대여섯 살의 소년으로 그 제자의 수가 지나의 대성(大聖) 공구와 겨루게 되었고, 이밖에 현상(賢相).양장(良將).충신.용사가 모두 이 가운데서 났다(삼국사기에 인용한 金大問의 설)고 하였으나, 그 동안이 수십 년에 지나지 않고 성식(聲息)이 아주 끊어져서, 국선 이전에 국선의 개조(開祖)도 볼 수 없고, 국선 이후 국선의 후계자도 볼 수 없이 갑자기 왔다가 갑자기 갔으니, 이것이 어찌 신라의 신괴록이 아니랴? 고기(古記)에서 왕검이 국선의 개조임을 찾으매, 고구려사에서 조의(衣)선인(先人) 등을 알 것이며, 고려사에서 이지백(李知白)이, “선랑(仙郞)을 중흥시키자.”고 한 쟁론과, 예종(睿宗)이, “사선(四仙)의 유적을 영광스럽게 하라.”하고, 의종(毅宗)이, “국선의 복로(伏路)를 다시 열라.”고 한 조서를 보매, 고려에까지도 오히려 국선의 유통(遺統)이 있었음을 볼지니 이것을 계통을 찾는 방법의 한 예로 든다. 2) 그 회통(會通)을 구할 것이다. 회통이란 전후.피차의 관계를 유취한다는 말이니, 구사에도 회통이라는 명칭은 있으나 오직 예지(禮志), 과목지(科目志)-회통의 방법이 완미하지 못하지만-이 밖에는 이 명칭을 응용한 곳이 없다. 그러므로 무슨 사건이든지 홀연히 모였다가 홀연히 흩어지는 구름과도 같고, 돌연히 불다가도 그치는 선풍(돌개바람)과도 같아서 도저히 붙잡을 수가 없다. 고려사 묘청전(妙淸傳)을 보면, 묘청이 일개 서경(西京:평양)의 한 중으로서, “평양에 도읍을 옮기고 금국(金國)을 치자.” 하매, 일시에 군왕 이하 많은 시민의 동의를 얻어서 기세가 혁혁하다가, 마침내 평양에 웅거하여 나라 이름을 대위(大爲)라 하고, 연호를 천개(天開)라 하고, 인종(仁宗)더러 대위국 황제의 자리에 오르라고 협박장 식의 상소를 올렸는데 반대당의 수령인 한낱 유생 김부식이 왕사(王師)로서 와서 문죄(問罪)하니, 묘청이 변변히 싸워보지도 못하고 부하에게 죽었으므로 묘청을 미친 자라고 한 사평(史評)도 있지마는, 당시의 묘청을 그처럼 신앙한 이가 많았음은 무슨 까닭이며, 묘청이 하루아침에 그렇게 패한 것은 무슨 까닭인가? 고려사의 세기(世紀)와 열전(列傳)을 참고하여 보면 태조 왕건이 거란(契丹:뒤의遼)과 국교를 끊고 북방의 옛 강토를 회복하려 하다가 거사하지 못하고 죽었으므로 그 후예 되는 임금 광종(光宗).숙종(肅宗) 같은 이는 다 태조의 유지를 성취하려 하였고, 신하에도 이지백(李知白).곽원(郭元).왕가도(王可道) 같은 이들이 열렬하게 북벌을 주장하였으나 다 실행치 못하고 윤관(尹瓘)이 군신이 한마음으로 두만강 이북을 경영하려는 창끝을 약간 시험하다가 너무 많아서 그 이미 얻은 땅의 구성(九城)까지 금(金)의 태조에게 다시 돌려주니 이는 당시 무사들이 천고에 한되는 일로 여겼다. 그 뒤에 금의 태조가 요(遼)를 토멸하고 지나 북방을 차지하여 황제를 일컫고 천하를 노려 보았다. 금은 원래 백두산 동북의 여진(女眞)부락으로서 우리에게 복종하던 노민(奴民:高麗圖經에, “여진은 종으로 고려를 섬긴다(女眞奴奉高麗).”고 하였고, 고려사에 실린 金景組의 국서에도, “여진이 고려를 부모의 나라로 삼았다(女眞以高麗爲父母之邦)”고 하였음)이었는데 갑자기 강성해져서 형제의 위치로 바뀌었다(고려사에 실린 金景祖의 국서에, 형 大金皇帝가 글을 아우 고려왕에게 보낸다(兄大金皇帝致致書于弟高麗國王).“고 하였음). 이에 나라 사람들 가운데 좀 혈기가 있는 사람이면 모두 국치에 눈물을 뿌렸다. 묘청은 이러한 틈을 타 고려 초엽부터 전해오는 ”평양에 도읍을 정하면 36나라가 조공온다(定都平壤三十六國來朝).“하는 도참(圖讖)을 가지고 부르짖으니, 사대주의의 편벽된 소견을 가진 김부식 등 몇몇 사람 이외에는 모두 묘청에게 호응하여, 대문호인 정지상(鄭知常)이며, 무장(武將)인 최봉심(崔逢深)이며, 문무가 겸전(兼全)한 윤언이(尹彦?:尹瓘의 아들)등 이 모두 북벌론을 주창함으로써 묘청의 세력이 일시에 전성하였다. 오래지 않아 묘청의 하는 짓이 미치고 망령되어 평양에서 왕명도 없이 나라 이름을 고치고 온 조정을 협박하니, 이에 정지상은 묘청의 행동을 반대하였고, 윤언이는 도리어 주의가 다른 김부식과 함께 묘청 토벌의 선봉이 되었다. 이것이 묘청이 실패한 원인이다. 그런데 김부식은 출정하기 전에 정지상을 죽이고 묘청을 토벌한 후에 또 윤언이를 내쫓아서 북벌론자의 뿌리를 소탕해버렸다. 김부식은 성공하였으나 이로 하여 조선이 쇠약해질 터전이 잡혔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참고하여 보면, 묘청의 성패한 원인과 그 패한 뒤에 생긴 결과가 본명하지 않은가. 이로써 회통(會通)을 구하는 한 예를 보인 것이다. 3)심습(心習)을 제거할 것이다. 영국 해군성(海軍省)의, “세계 철갑선(鐵甲船)의 비조(鼻組)는 1592년경의 조선 해군 대장 이순신이다.”라고 한 보고가 영국사에 실려 있는데, 일본인들은 모두 당시 일본 배가 철갑(鐵甲)이요, 이순신의 것은 철갑이 아니라면서 그 보고는 틀린 것이라고 반박하고, 조선의 집필자들은 이것을 과장하기 위하여 그 보고를 그대로 인용해서 조선과 일본 어느 나라가 먼저 철갑선을 창조하였는가를 논쟁하게 되었다. 일본인의 말은 아무런 뚜렷한 증거가 없는 위안(僞案)이라 족히 따질 것이 없거니와 이충무공전서(李忠武公全書)에 설명한 귀선(龜船)의 제도를 보건대, 배는 널빤지로 꾸미고 철판으로 꾸민 것이 아닌 듯 하니, 이순신을 장갑선의 비조라고 함은 옳으나, 철갑선의 비조라 함은 옳지 않을 것이다. 철갑선의 창조자라 함이 보다 더 명예가 되지마는, 창조하지 않은 것을 창조하였다고 하면 이것은 진화(進化)계급을 어지럽힐 뿐이다. 가령 모호한 기록 중에서 부여의 어떤 학자가 물리학을 발명하였다든가, 고려의 어떤 명장(名匠)이 증기선을 창조하였다는 문구가 발견되었다 하더라도 우리가 신용치 못한 것은 속일 수 없는 일이다. 뿐만 아니라 스스로를 속이는 것도 옳지 않기 때문이겠다. 4) 본색(本色)을 보전할 것이다. 대동운부군옥(大東韻府群玉)에,“국선(國仙) 구산(瞿山)이 사냥을 나가서 어린 짐승이나 새끼 가진 짐승을 함부로 낭자하게 죽였는데, 주막의 주인이 저녁 밥상에 자기의 다리살을 베어놓고, 공(公)은 어진 이가 아니니 사람의 고기도 먹어보라고 하였다.”고 한말이 있다. 이는 대개 신라 당시에는 영량(永郞).술랑(述郞) 등의 학설이 사회에 침투되어 국선 오계(五戒)의 한 가지인, ‘살상은 골라서 하라.'고 하는 것을 사람들이 다 실행하던 때이므로, 이를 위반하는 자는 사람의 고기도 먹으리라는 반감으로 주막의 주인이 이렇게 참혹하게 무안을 준 것이다. 그것이 수십자에 지나지 않는 기록이지마는, 신라 화랑사의 일부라 할 수 있다. 고구려사 미천왕기(美川王記)에, “봉상왕(烽上王)이 그 아우 돌고(固)가 딴 마음을 품고 있다고 하여 죽이니, 돌고의 아들 을불(乙弗:美川王의 이름)이 겁이나서 달아나 수실촌(水室村) 사람인 음모(陰牟:당시 부호의 이름인듯)의 집에서 머슴살이를 하였는데, 음모가 밤마다 기와와 돌을 집옆의 늪에 던져 개구리가 울지 못하게 하라 하고, 낮이면 나무를 해오라고 하여 잠시도 쉬지 못하게 하였다. 을불은 견디다 못 하여 1년 만에 달아나서 동촌(東村)사람 재모(再牟)와 소금장수가 되어 압록강에 이르러 소금 짐을 강동(江東) 사수촌사람의 집에 부렸다. 한 노파가 외상으로 소금을 달라고 하므로 한 말쯤 주었더니, 그 후에 또 달라고 하므로 이를 거절하였는데 노파는 앙심을 품고 몰래 짚신 한 켤레를 소금 짐 속에 묻었다가 을불이 길을 떠난 뒤에 쫓아와서 도둑으로 몰아 압록제(鴨綠宰)에게 고발하여 짚신 한 켤레의 값으로 소금 한 짐을 빼앗고 매질까지 한 뒤에 놓아 보냈다,”라는 이야기가 있다. 이것도 불과 몇 줄 안 되는 기록이지마는 또한 봉상왕 시대의 부호의 포학과 시민과 수령의 사악한 행위를 그린 약도이니, 그 시대 풍속사의 일반이라 할 것이다. 그러나 삼국사기나 고려사는 아무 맛 없는, ‘어느 임금이 즉위하였다’, ‘어느 대신이 죽었다.’ 하는 등의 연월이나 적고, 보기좋은 ‘어느 나라 어느 나라가 사신을 보내왔다.’ 하는 등의 사실이나 적은 것들이요, 위의 3), 4) 두 절과 같이 시대의 본색을 그린 글은 보기 어렵다. 이는 유교도의 춘추필법과 외교주의가 편견을 낳아서, 전해내려오는 고기를 제멋대로 고쳐서 그 시대의 사상을 흐리게 한 것이다. 옛날 서양의 어느 역사가가 이웃집에서 두 사람이 다투는 말을 역력히 다 들었다, 그런데 그 이튿날 남들이 말하는 그 두 사람의 시비는 자기가 들은 것과는 전연 달랐다. 이에, ‘옛날부터의 역사가 모두 이 두 사람의 시비와 같이 잘못 전해진 것이 아닌가?’ 하고 자기가 저술한 역사책을 모두 불태워버렸다. 탐보원이 들어다가 보고하고 편집원이 다시 교정하고 그러고도 잘못이 생기는 예가 있는 신문.잡지의 기사도 오히려 그 진상과 큰 차이가 있는 것이 허다할 뿐 아니라, 갑의 신문이 이러하다 하면 을의 신문은 저렇하다 하여, 어느 것을 믿을 수 없는 일이 많으니, 하물며 고대의 한두 사학가가 자기의 좋아하고 싫어하는대로 아무 책임감 없이 지은 것을 어떻게 믿을 수 있으랴? 그리고 이성계가 고려의 마지막 왕 우(禑)의 목을 베고 그 자리를 빼앗을 때, 후세 사람이 신하로서 임금을 죽인 죄를 나무랄까 하여 백방으로 우는 원래 왕씨의 왕통을 잇지 못할 요망한 중 신돈의 천첩 반야의 소생이라 하고, 경효왕(敬孝王:慕愍王?)이 신돈의 집에서 어떻게 데려왔다느니, 반야가 우를 궁인 한씨소생으로 정하는 것을 보고 통한하여 울부짖어 우니 궁문도 그 원통함을 알고 무너졌다느니 하여 아무쪼록 우가 신씨임을 교묘하게 증명하였다. 그러나 우는 오히려 송도 유신들이 있어 굴 속에 숨어서까지 우의 무함당함을 절규하였으므로, 오늘날 사학가들이 비록 확실한 증거는 없으나 오히려 우가 왕씨요, 신씨가 아님을 믿는 이도 있다. 또 왕건이 궁예의 장군으로 궁예의 은총을 받아 대병을 맡게 되자 드디어 궁예를 쫓아내어 객사케 하고 또한 신하로서 임금을 죽였다는 죄를 싫어하여 전력을 집중하여 궁예를 죽여 마땅한 죄를 구하였으니, ‘궁예는 신라 헌안왕(憲安王)의 아들인데, 왕이 그를 5월5일에 났음을 미워하여 버렸더니, 궁예가 이를 원망하여 군사를 일으켜서 도둑을 쳐 신라를 멸망시키려고 어느 절에서 벽에 그려진 헌안왕의 상까지 칼로 쳤다.'고 하였고, 다시 확실한 증거를 만들고자, ‘궁예가 나자 헌안왕이 엄명을 내려 궁예를 죽이라고 하여 궁녀가 누각위에서 아래로 내던졌는데, 유모가 누락 아래에서 받다가 손가락이 잘못 아이의 눈을 찔러 한쪽 눈이 멀었다, 그 유모가 데려다가 비밀히 길렀는데, 10살이 되자 장난이 몹시 심하므로 유모가 울면서 말하기를, 왕이 너를 버리신 것은 내가 차마 버려둘 수 없어서 데려다 길렀는데, 이제 네가 이렇듯 미치광이 짓을 하니 만일 남이 알면 너와 내가 다 죽을 것이다, 하였다. 궁예가 이 말을 듣고 울며 머리를 깍고 중이 되었다. 그 후에 신라의 정치가 문란함을 보고 군사를 모아 큰 뜻을 성취하리라 하고 도둑의 괴수 양길에게로 가서 후한 대우를 받고 군사를 나누어 동으로 나아가서 땅을 차지하였다.’고 하였다. 가령 위의 말이 다 참말이라면 이는 궁예와 유모의 평생 비밀일 것인데, 그것을 듣고 전한 자가 누구이며, 가령 궁예가 왕이 되어 신라의 형법(刑法)밖에 있게 된 뒤에 스스로 발표한 말이라 하면, 그 말한 날짜나 곳은 적지 않는다 하더라도 어찌하여 데리고 말할 사람을 기록하지 않았는가? 오늘날의 눈으로 보면 부모를 부모라 함은 나를 낳은 은혜를 위함인데, 만일 나를 낳음이 없고 나를 죽이려는 원수가 있는 부모야 무슨 부모이겠는가? 궁예가 헌안왕의 아들이라 하더라도 만일 사관(史官)의 말과 같이 그가 세상에 나오던 날 죽으라고 누각 위에서 내던진 날로부터 아버지라는 명의가 귾어졌으니, 궁예가 헌안왕의 몸에 칼질을 하여도 아비를 죽인 죄가 될 것 없고 신라의 서울과 능(陵)을 유린한다 할지라도 조상을 모욕한 논란이 될 것 없거늘 하물며 왕의 그림을 치고 문란한 신라를 혁명하려 함이 무슨 큰 죄나 논란이 되랴마는 고대의 좁은 논리관으로는 그 두 가지 일, 헌안왕의 초상과 신라에 대한 불공(不恭)만 하여도 궁예는 죽어도 죄가 남을 것이니, 죽어도 죄가 남을 궁예를 죽이는 데야 무엇이 안 되었으랴? 이에 왕건은 살아서 고려 통치권을 가지고 죽어서도 태조문성(太祖文聖)의 존시(尊諡)를 받아도 추호의 부끄러움이 없을 것이니, 이것이 고려 사관이 구태여 세달사(世達寺)의 한 비렁뱅이 중이던 궁예를 가져다가 고귀한 신라 왕궁의 왕자로 만듦인가 한다. 제왕이라 역적이라 함은 성패의 별명일 뿐이요, 정론이라,사론이라 함은 많고 적은 차이일 뿐인데, 게다가 보고 들은 데 잘못이 있고, 쓰는 사람의 좋아하고 싫어하는 생각이 섞이지 않았는가? 사실도 흘러가는 물과 같이 한 번 가면 다시 돌아오지 못한다. 이미 간 사실을 그리는 역사를 저술하는 이도 어리석은 사람이거니와, 그 써놓은 것을 가지고 앉아서 시비곡직을 가리려는 역사를 읽는 이가 더욱 어리석은 사람이 아닌가? 아니다, 역사는 개인을 표준으로 하는 것이 아니요, 사회를 표준으로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우의 성이 왕(王)인가? 신(辛)인가를 조사하여 바로잡느니보다 다만 당시의 지나에 대하여 선전(宣戰)하고, 요동 옛 땅을 회복하려 함이 이루어질 일인가? 실패할 일인가, 성패간에 그 결과가 이로울까 해로울까부터 정한 후에 이를 주장한 우와 반대한 이성계의 시비를 말함이 옳을 것이고, 궁예의 성이 궁(弓)인가 김(金)인가를 변론하는 것보다, 신라이래 숭상하던 불교를 개혁하여 조선에 새 불교를 성립시키려 함이 궁예 패망의 도화선이니, 만일 왕건이 아니더면 궁예의 그 계획이 성취되었을까? 성취되었다면, 그 결과를 확인한 뒤에야 이를 계획하던 궁예와 대적하던 왕건의 옳고 그름을 말함이 옳다고 생각한다. ‘개인으로부터 사회를 만드느냐? 사회로부터 개인을 만드느냐?’ 이는 고대로부터 역사학자들이 논쟁하는 문제다. 이조 전반기의 사상계는 세종대왕의 사상으로 지배되고, 후반기의 사상계는 퇴계산인(李滉) 사상으로 지배되었다. 그러면 이조 5백 년 동안의 사회는 세종,퇴계가 만든 것이 아닌가? 신라 후기로부터 고려 중엽까지의 6백 년 동안은 영랑,원효가 각기 당시 사상계의 한방면을 차지하여 영랑의 사상이 성해지는 때에는 원효의 사상이 물러나고 원효의 사상이 성해지는 때에는 영랑의 사상이 물러나서 일진일퇴 일왕일래로 갈아들어 사상계의 패왕이 되었으니, 6백 년 동안의 사회는 그 두 사람이 만든 것이 아닌가? 백제의 정치 제도는 온조대왕이 마련하여 고이대왕(古爾大王)이 마무리하였고, 발해의 정치 제도는 고제(高帝)가 마련하여 선제(宣帝)가 마무리하였으니, 만일 온조왕과 고이왕이 아니었더라면 백제의 정치가 어떤 형식으로 되었을는지, 고제와 선제가 아니었더라면 발해의 정치가 어떤 형식으로 되었을는지 또한 모를 일이다. 삼경(三京)오도(五都)의 제도가 왕검과 부루(夫婁)로부터 수천 년 동안 정치의 모형이 되었으니, 이로써 보면 한 사람의 위대한 인격자의 손끝에서 사회라는 것이 되어지는 것이고, 사회의 자주성은 없는 것이 아닌가? 그러나 다시 한편으로 살펴보자. 고려 말엽에 불교의 부패가 극도에 이르러 원효종은 이미 쇠미해지고 임제종(臨濟宗)에도 또한 뛰어난 이가 없고, 다만 10만 명의 반승회(飯僧會:중에게 음식을 대접하는 모임)와 백만 명의 팔관회(八關會:천신에 제사 지내어 나라와 왕실의 태평을 빌고 온갖 놀이도 즐기는 모임)로 제물과 곡식을 낭비하여 국민이 머리를 앓을 뿐 아니라, 사회는 이미 불교 밖에서 새로운 생명을 찾기에 급급하였다. 이에 안유(安裕).우탁(禹倬)이며 정몽주가 유교의 목탁을 들었고. 그 밑에서 세종이 나고 퇴계가 났으니, 그러면 세종의 세종됨과 퇴계의 퇴계됨이 세종이나 퇴계 그 자신이 스스로 된 것이 아니요, 사회가 그렇게 만들었다고 함이 옳지 않을까? 삼국 말엽, 그 수백 년 동안에 찬란히 발달한 문학과 미술의 영향을 받아 소도천군(蘇塗天君)의 미신이나 율종소승(律宗小乘)의 하품(下品)불교로는 영계(靈界)의 위안을 줄 수가 없어서 사회가 그 새 생명을 찾은 지가 또한 오래이므로 신라의 진흥대왕이나 고구려의 연개소문이 다 여러 교종 통일의 새로운 안을 내놓으려 한 일이 있었다. 그 때에 영랑이 도령(徒領)의 노래를 부르고 원효가 화엄(華嚴)의 자리를 배풀었으며, 최치원이 유도에서 불도로 불도에서 선도로 바꾸는 신통한 재주를 보이니 이에 각계가 갈체하여 이 세 사람을 맞았다. 그러니 영랑이나 원효나 최치원이 다 본인 자신이 그렇게 된 것이 아니요, 사회가 그렇게 만든 것이 아닌가? 이에 따라서 하나의 의문이 생긴다. 원효는 신라 그때에 났기에 원효가 된 것이요, 퇴계는 이조 그때에 났기에 퇴계가 된 것이다. 만일 그들이 희랍 철학의 강단에 났더라면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가 되지 않았을까? 프랑스나 독일의 현대에 났더라면 베르그송이나 오이켄이 되지 않았을까? 나파륜(拿破崙:나폴레옹)의 뛰어난 재주와 큰 계략으로도 도포 입고 대학(大學)읽던 시절에 도산사원(陶山書院)부근에 태어났더라면, 물러가 송시열이 되거나 나아가 홍경래가 되었을 뿐이 아니었을까? 크고 작은 분량으로 그와 같이 되지는 않는다 하더라도 그 면목이 아주 달라졌을 것은 단언할 수 있다. 논조가 여기에까지 미쳤으나, 개인은 사회라는 불무에서 이루어질 뿐이니, 개인의 자주성은 어디에 있는가? 개인도 자주성이 없고 사회도 자주성이 없으면 역사의 원동력은 어디에 있는가? 나는 이것을 볼 때 개인이나 사회의 자주성은 없으나 환경과 시대를 따라서 자주성이 성립한다고 생각한다. 조선이며 만주며 토이기며 헝거리가 3천 년 전에는 다 뚜렷한 한 혈족이었다. 그러나 혹은 아시아에 그대로 있고 혹은 유럽으로 옮겨가서 대륙의 동서가 달라지고, 혹은 반도 혹은 대륙으로 혹은 사막 혹은 비옥한 땅으로, 혹은 온대 혹은 한대로 분포하여 땅의 멀고 가까움이 다르고, 목축이나 농업, 침략이나 보수 등으로 생활과 풍속이 해와 달을 지내는 대로 더욱 간격이 생겨서 각자의 자주성을 가졌다. 이것이 곧 환경을 따라 성립한 민족성이라 하는 것이다. 같은 조선으로도 이조 시대가 고려 시대와 다르고, 고려 시대는 또 동북국(東北國:渤海.滅貊등)과 다르고, 동북시대는 삼국과 같지 아니하며, 왕검. 부루 시대와도 같지 아니하다. 멀면 1천년의 전후가 다르고, 가까우면 1백 년의 전후가 다르니, 지금부터 이후로는 문명의 진보가 더욱 빨라서, 10년 이전이 홍황(鴻荒:오랜 옛날)이 되고, 1년 이전이 먼 옛날이 될는지 모르는 일이니, 이것이 이른바 시대를 따라 성립하는 사회성(社會性)이다. 원효와 퇴계가 시대와 경우를 바꾸어 났다 하면, 원효는 유자(儒者)가 되고 퇴계는 불자(佛者)가 되었을는지 모르는 일이거니와, 도양(跳揚)발달한 원효더러 주자(朱子)의 규구(規矩)만 삼가 지키는 퇴계가 되라 한다면 이는 불가능한 일이며, 충실하고 용졸(庸拙)한 퇴계더러 불가의 별종(別宗)을 수립하는 원효가 되라 한다면 이도 또한 불가능한 일일 것이니, 왜냐하면 시대와 경우가 인물을 낳는 원료 됨과 같으나 인물이 시대와 환경을 이용하는 능력은 다르기 때문이다. 민족도 개인과 같이 어느 곳 어느 때에 갑이라는 민족이 가서 그 성적이 어떠하였으니, 을이라는 민족이 갔더라도 마찬가지 성적을 이루었을 것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너무 성급한 판단이다. 대개 개인이나 민족이 두 가지 개성이 있으니, 그 하나는 항성(恒性)이요, 다른 하나는 변성(變性)이다, 항성은 제1의 자주성이요, 변성은 제2의 자주성이니 항성이 많고 변성이 적으면 환경에 순응치 못하여 절멸(絶滅)할 것이요, 변성이 많고 항성이 적으면 나은 자에게 정복당하여 패할 것이니, 늘 역사를 회고하여 두 가지 자주성의 많고 적음을 조절하고 무겁고 가벼움을 평균하게 하여, 그 생명이 천지와 한 가지로 장구하게 하려면 오직 민족적 반성에 의하는 수밖에 없다. 5) 역사의 개조에 대한 두 가지 결론 역사의 개조에 대한 나의 우견으로 이상에 의하여 개인과 사회의 관계에 대하여 두 가지 결론을 지었으니, ① 사회의 이미 정해진 국면에서는 개인이 힘쓰기 매우 곤란하고 ② 사회의 아직 정해지지 않은 국면에서는 개인이 힘쓰기 아주 쉽다는 것이다. 정여립이,“충신은 두 임금을 섬기지 아니하고 열녀는 두 지아비를 바꾸지 않는다,” 하는 유교의 윤리관을 여지없이 말살하고,“인민에게 해되는 임금은 죽이는 것도 가하고 행의(行義)가 모자라는 지아비는 버리는 것도 가하다,”고 하고 “하늘의 뜻, 사람의 마음이 이미 주실(周室)을 떠났는데, 존주(尊周:주나라를 존중함)가 무엇이며, 군중과 땅이 벌써 조조(曹操)와 사마(司馬)에게로 돌아갔는데, 구구하게 한 구석에서 정통이 다 모엇하는 것이냐.”하며 공자. 주자의 역사 필법을 반대하니, 그의 제자 신극성(辛克成)등은, “이는 참으로 전의 성인이 아직 말하지 못한 말씀이다.”하고 재상과 학자들도 그의 재기와 학식에 마음을 기울이는 이가 많았으나, 세종대왕의 삼강오륜의 부식(?植)이 벌써 터를 잡고 퇴계 선생의 존군모성(尊君慕聖)의 주의가 이미 깊이 박혀 전 사회가 안돈된 지 오래이니, 이같이 엉뚱한 혁명적 학자를 어찌 용납하랴. 그러므로 애매모호한 한 자의 고발장에 목숨을 잃고 온 집안이 폐허가 되었으며, 평생의 저술이 모두 불 속에 들어갔다. 이는 곳①에 속하는 것이다. 최치원이 지나 유학생으로 떠나갈 때 그의 아버지가, “10년이 되어도 과거를 하지 못하면 나의 아들이 아니다.”라고 하여 하나의 한문 졸업생이 되는 것을 바랐을 뿐이었고, 최치원이 돌아와서, “무협(巫峽)첩첩한 봉우리를 헤치고 중원에 들어가 급제하여 벼슬에 놀기3년, 금의로 동국에 돌아왔다.” 하고 노래하여 또한 스스로 하나의 한문 졸업생 되었음을 자랑하였다. 그 사상은 한(漢)나라나 당(唐)나라에만 있는 줄로 알고 신라에 있는 줄은 모르며, 학식은 유서(儒書)나 불전(佛典)을 관통하였으나, 본국의 고기(古記) 한 편도 보지 못하였으니, 그 주의는 조선을 가져다가 순 지나화하려는 것뿐이고, 그 예술은 청천(靑天)을 백일(白日)을 대하며, 황화(黃化)로 녹초(綠草)를 대하는 사륙문(四六文:네 글자와 여섯 글자를 기본으로 하는 한문 문체의 하나)에 능할 뿐이었다. 당시 영랑과 원효의 두 파가 다 노후하여 사회의 중심이 되는 힘을 잃고, 새 인물에 대한 기대가 마치 굶주린 사람이 밥을 구함과 같았으니 그래서 대선생의 칭호가 한낱 한문 졸업생에게로 돌아가고 다음에는 천추(千秋)의 혈식(血食:나라에서 제사를 지냄)까지 그에게 바쳐, 고려에 들어와서는 영랑과 원효 두 파의 자리를 마주 대하게 되었다. ‘때를 만나면 더벅머리도 성공한다.’ 함은 이를 두고 한 말이니, 이는 ②에 속하는 것이다. 어찌 학계뿐이랴. 모든 사업이 그러하니, 기휜(箕萱)과 양길(梁吉)도 한때에 크게 펼처짐은 신라 말엽의 안정되지 않은 판국에서 일어남이요, 이징옥(李澄玉)이나 홍경래가 거연히 패망함이 이조의 안정되어 있는 판국에서 그리 된 것이다. 백호(白湖) 임제(林悌)가 말하기를, “나도 중국의 육조(六朝:後漢이 망한 뒤에 일어난 吳.東晋.宋.濟.梁.陳의 여섯 왕조)나 오계(五季:後五代, 곧 唐과 宋 사이 53년 동안에 일어났다 사라진(後粱.後唐.後晋.後漢.後周의 다섯왕조)를 만났더라면 돌림천자는 얻어 했겠다.”고 하였다. 임백호 같은 시인에게 육조.오계의 유유(劉裕:南宋의 武帝).주전충(朱全忠:後粱의 太祖) 같은 도둑의 괴수와 같이 되어 돌림천자나마 돌아오게 할 위력이 있다고는 할 수 없으나, 그러나 지나의 천자를 경영하려면 한. 당의 치세보다 육조.오계의 난세가 더 쉬울 것은 자명한 이치일 것이다. 이미 안정된 사회의 인물은 늘 전의 사람의 필법을 배워서 이것을 부연하고 이것을 확장할 뿐이니, 인물되기는 쉬우나 그 공이나 죄는 크지 못하며, 혁명성을 가진 인물(정여립 같은)은 매양 실패로 미칠 뿐 아니라, 사회에서도 그를 원망하고 미워하여 한 말이나, 한 일의 종적까지 없애버리므로 후세에 끼치는 영향이 거의 영도(零度)가 되고, 오직 3백 년이나 5백 년 뒤에 한두 사람 마음이 서로 통하는 이가 있어 그의 유음(遺音)을 감상할 뿐이요, 안정되지 않은 사회의 인물은 반드시 창조적.혁명적 남아라야 할 듯하나, 어떤 때에는 꼭 그렇지도 아니하여, 작은 칼로 잔재주를 부리는 하품의 재주꾼(최치원같은)으로서 외국인의 입을 흉내내서 말하고 웃고 노래함이 그럴듯하여 사람들을 움직일 만하면 거연히 인물의 지위를 얻기도 하나, 인격적 자주성의 표현은 없고 노예적 습성만 발휘하여 전 민족의 항성(恒性)을 파묻어버리고,변성(變性)만 조장하는 나쁜 기계가 되고 마나니, 이는 사회를 위하여 두려워하는 바요, 인물되기를 뜻하는 사람이 경계하고 삼가야 할 일이다.
52    조선상고사 댓글:  조회:763  추천:0  2019-01-31
제1편: 총론 제2편: 수두 시대 제3편: 삼조선(三朝鮮)의 분립 시대 제4편: 열국의 쟁웅(爭雄)시대(대(對) 한족(漢族) 격전시대) 제1장: 열국(列國) 총론(總論) 제2장: 열국(列國)의 분립 제3장: 한 무제(漢武帝)의 침입 제4장: 계립령(鷄立嶺) 이남의 두 신국(新國) 제5편: 고구려의 전성시대 제6편: 고구려의 쇠미와 북부여의 멸망 제7편: 고구려·백제 두 나라의 충돌 제8편: 남방 여러 나라의 대(對) 고구려 공수동맹 제9편: 삼국 혈전(血戰)의 시작 제10편: 고구려와 수의 전쟁 제11편: 고구려와 당의 전쟁 제12편: 백제의 강성과 신라의 음모
51    가짜 역경 주역을 말한다 댓글:  조회:1510  추천:0  2019-01-04
역경(易經)은 인류 역사를 통틀어서 가장 위대하고 심오한 이치를 담고 있는 책이다. 인류역사에서 경(經)이라고 부를 만한 책이 역경(易經) 말고는 없다. 역경(易經)에는 우주와 만물에 대한 모든 이치와 사람이 살아가는데 필요한 모든 지혜가 담겨 있다. 역경은 8천 년 전에 살았던 복희씨(伏羲氏)가 처음 만들어 자손들한테 전한 것이다. 그러나 역경이 긴 세월을 전해 오는 동안 내용의 거의 모든 부분이 훼손되고 왜곡되어 잘못 전해졌다. 지금 전해 오는 역경은 3천여 년 전에 주나라 문왕(文王) 창(昌)과 흔히 강태공(姜太公)이라고 부르는 강상(姜尙)이 수십 년에 걸쳐 고의로 왜곡한 것이다. 문왕과 강태공은 역경을 연구하여 편찬한다는 명목으로 역경의 순서와 내용을 교묘하게 뒤바꾸고 뜯어고쳐서 상(商)나라를 뒤엎고 나라를 빼앗는 도구로 삼았다. 문왕과 강태공은 가장 위대한 책을 가장 사악한 목적으로 활용한 것이다. 그러므로 지금 전해 오는 역경은 문왕과 강태공이 찬역(贊易)을 한다는 핑계로 훼손하고 왜곡한 가짜 역경(易經)이다. 역경을 주역(周易)이라고 부르는데 주나라의 문왕이 만들었다고 하여 주역이라는 이름을 붙인 것이다. 문왕이 교묘하게 만든 가짜 주역을 그 뒤로 3천 년 동안 모든 사람들이 진짜로 잘못 알고 있는 것이다. 문왕과 강태공이 만든 가짜 주역에 날개를 달아 그 위상을 가장 크게 높이고 온 세상에 널리 알려지게 한 사람이 공자(孔子)이다. 공자는 일생 동안 주역을 기록되어 있는 죽간(竹簡)을 묶은 가죽 끈이 세 번이 닳아 없어질 만큼 주역을 연구했으나 그것이 문왕과 강태공이 만든 가짜라는 것을 알지 못하고 오히려 역경(易經)의 괘상(卦象)에 해석을 붙여 십익(十翼)을 지어 가짜 주역에 날개를 달아 주었다. 십익(十翼)의 익(翼)은 날개 익(翼)이다. 새는 두 개의 날개만 갖고도 구만리장천(九萬里長天)을 마음대로 날아다닐 수 있는데 유학(儒學)의 시조(始祖)이며 성인(聖人)으로 칭송을 받는 공자가 열 개나 되는 날개를 달아 주었으니 이 가짜 주역이 얼마나 이 세상을 힘차게 잘 날아다닐 수 있었겠는가? ​ ​   그 뒤로 가짜 주역이 온 천하의 모든 학문을 장악했다. 교묘하게 왜곡된 가짜 주역이 천문학, 명리학, 자연과학, 수학(數學) 인문학, 생물학, 점술학 등 거의 모든 학문의 기초가 되었다. 그러나 공자(孔子) 뒤로 2천 5백 년 동안 주역이 가짜라는 것을 조금이라도 의심하거나 알아차린 사람이 단 한 사람도 없었다. 인류는 거의 3천 년 동안 가짜 주역(周易)의 절대적인 영향력 아래에서 암흑의 세월을 살아왔다. 지금까지도 훼손되고 왜곡된 이 가짜 주역이 온 세상을 설치면서 종횡무진(縱橫無盡)하고 있다. 이것은 중세 유럽에서 타락한 천주교(天主敎)가 인간 정신을 말살하고 하나님의 이름으로 멀쩡한 여인들을 마녀로 몰아 사냥하고 면죄부를 판매하여 재물을 모으고 다른 종교를 가진 이민족을 상대로 전쟁을 일으켜 무자비한 살생을 자행한 것과 같은 것이다.  ​그러나 칠흑 같은 밤이 지나고 밝은 태양이 떠오르면 마침내 밝은 낮이 오는 법이다. 올빼미는 칠흑 같은 어둠 속을 썩은 고기를 찾아서 날아다니지만 낮이 되면 컴컴한 속에서 숨어서 지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역경(易經)의 잘못된 부분을 바로잡아서 본래의 원본과 같이 복원하는 것이 인류 역사에서 누군가가 반드시 해야 할 가장 크고 중요한 일이다. 본래 온전한 상태로 전해 오던 역경을 가장 크게 훼손하고 조작하여 지금의 주역(周易)과 같은 가짜로 경서(經書)로 만든 자는 3천여 년 전에 살았던 주나라의 문왕(文王)과 강태공(姜太公)이다. 강태공은 중국을 페르시아 민족들한테 팔아넘긴 인류 역사에서 둘도 없는 최고의 매국노(賣國奴)다. 문왕은 모반을 꾀하다가 붙잡혀 유리옥이라고 하는 교화소에 있으면서 7년 동안 역학을 연구하여 복희팔괘(伏羲八卦)를 교묘하게 뜯어고쳐서 문왕팔괘(文王八卦)를 만들고 강태공을 국사(國師)로 받들어 가장 높은 벼슬을 주고 함께 역경의 대부분을 교묘하게 뜯어고치고 훼손하여 진짜처럼 위조하였다. 지금부터 3천 1백년 쯤 전에 고공단보(古公亶父)라고 하는 페르시아 사람이 그 종족 간에 있었던 세력다툼에서 패하여 패잔병과 그 가족들 1,000여 가구를 데리고 중국으로 망명하여 지금의 중국 서안(西安) 지방에 정착하였다. 그 때 서안 지방에 있었던 강(姜)나라의 귀족 여성 강녀(姜女)가 고공단보가 서양 사람의 외모를 지니고 있는 것에 반하여 내연관계를 맺었다. 그런 다음에 호색가(好色家)였던 고공단보는 강녀를 첩으로 삼았다. 고공단보는 강녀를 첩으로 얻은 뒤에 힘을 길러서 강나라를 집어삼키고 그 지역 일대의 모든 영토(領土)를 다스리는 제후(諸侯)가 되었다. 그로부터 3대가 지난 뒤에 고공단보의 손자인 문왕과 천하제일의 책략가 강태공이 결탁하여 온갖 위계술(僞計術)과 유언비어(流言蜚語)로 백성들의 민심(民心)을 조작하고 선동(煽動)하여 전쟁을 일으켜 상나라를 쳐서 뒤집어엎고 통일 왕국을 세웠다. 강태공은 육도삼략(六韜三略)이라는 병법서(兵法書)를 지은 전술가(戰術家)로 위계술(僞計術)과 이간(離間)질에 가장 뛰어난 능력을 지닌 사람이다. 그들은 상나라를 멸망시키고 왕위를 찬탈하기 위한 준비로 상업을 크게 일으켜서 실크로드를 통해 서양을 왕래하면서 무역을 해서 엄청난 부를 축적하고 힘을 길렀다. 상(商)나라의 주왕(紂王)이 이를 알고 문왕(文王)을 서쪽에 있는 모든 제후들을 다스리는 서백(西伯)이라는 큰 벼슬을 주었다. 그 때에 문왕이 그 아버지 계력(季歷) 등과 함께 비밀리에 상나라를 뒤엎으려고 역적모의를 하다가 발각되어 문왕의 큰아들 백읍고(伯邑考)를 포함한 일당 4-5명이 현장에서 체포되었다. 형리들이 문왕의 큰 아들 백읍고를 잡아서 문초(問招)를 하였더니 백읍고는 어쩔 수 없이 아버지 문왕이 주모자(主謀者)이고 모든 것을 아버지가 시켜서 한 것이라고 사실대로 실토(實吐)를 하였다. 그래서 문왕을 주모자로 붙잡아 와서 문초를 하였더니 문왕은 태연하게 나는 그 놈과는 아무런 연관이 없으며 본래부터 그 놈은 불효막심(不孝莫甚)한 놈이므로 나를 해치기 위하여 모함을 하였을 뿐이라고 주장하였다. 중국은 인의예지(仁義禮智)를 숭상하는 나라이다. 아무리 역모(逆謀)를 꾸민 죄인이라고 해도 자백을 받지 않은 상태에서 명백한 증거 없이 짐작만으로 사람을 처벌할 수 없는 것이다. 문왕을 심문한 형리들이 그렇다면 틀림없이 대역죄(大逆罪)를 지은 네 아들을 죽여서 그 고기로 국을 끓여서 너한테 줄 것이니 그것을 먹을 수겠는가 하고 물었다. 문왕은 그 놈은 국가에 반역하고 나한테도 큰 불효를 저지른 놈이므로 만 번 죽어 마땅하고 나는 그 놈의 고기를 아주 맛있게 먹을 뿐만 아니라 먹고 나서 한 그릇 더 달라고 할 것이라고 대답하였다. 그 말을 듣고 상나라의 형리(刑吏)들은 문왕이 아들이 역적모의를 한 것과는 별로 연관이 없는 것으로 여기고 문왕을 죽이지는 않고 감옥(監獄)에 가두어 두었다. 상나라 형리들은 대역죄를 지은 백읍고를 능지처참(凌遲處斬)하여 죽였다. 능지처참(凌遲處斬)은 역적(逆賊)을 처형하는 가장 잔인한 형벌로 죄인을 십자가에 묶어놓고 산 채로 살을 회를 떠서 2-3일에 걸쳐 가장 고통스럽게 천천히 죽이는 것으로 천도만과(千刀萬剮)라고도 부른다. 천도만과는 천 번 살을 베어내고 만 번 뼈와 살을 발라낸다는 뜻이다. 실제로 살을 얇게 발라내어 수천 번을 칼질을 해서 죽인다. 형리들이 백읍고의 고기로 국을 끓여 감옥에 있는 문왕한테 갖다 주었더니 문왕은 눈도 한 번 깜빡하지 않고 태연하게 맛있게 먹고 나서 한 그릇 더 달라고 해서 한 그릇을 더 먹었다고 한다. 반역을 꾀한 주모자라는 의심을 풀고 살아남기 위해 마음속으로는 이들 부득부득 갈면서 겉으로는 아주 태연하게 아들의 고기를 먹은 것이다. 형리들은 그러나 그의 행적(行蹟)에 미심쩍은 부분이 남아 있으므로 문왕을 유리옥(羑里獄)이라는 곳에 두어 근신(謹愼)하게 하였다. 유리옥은 감옥이 아니라 교화소(敎化所)와 같은 곳이다. 이것은 죄를 지은 것에 대해 벌이 아니라 아들을 잘못 키운 것 곧 수신제가(修身齊家)를 제대로 하지 못한 것에 대한 질책으로 유리옥에서 교화(敎化)를 받게 한 것이다. 그러나 그 전에 이미 문왕은 강태공을 만나서 밀서(密書)를 주고 받으면서 천하를 뒤엎을 계략을 짜 놓고 은밀하게 추진하고 있는 중이었다. 문왕은 열 명이 넘는 아들이 있었다. 큰 아들 백읍고가 죽은 뒤로 문왕은 유리옥에 있으면서 둘째 아들인 무왕(武王)과 셋째 아들인 주공(周公), 강태공과 서로 밀약(密約)을 맺고 역경(易經)을 편찬한다는 명목으로 곧 찬역(贊易)을 빙자(憑藉)하여 7년 동안에 걸쳐서 역경의 괘사(卦辭)를 모조리 뜯어고쳤다. 지금 남아 있는 가짜 주역(周易)은 본래 복희씨가 만든 원본이 그대로 남아 있는 부분도 있고 교묘하게 뜯어 고친 부분도 있다. 중간에 있던 부분을 찢어내고 위조한 글로 바꿔치기를 한 것이 제일 많다. 한문은 본디 우리나라 글이므로 우리말과 어순(語順)이 같다. 그런데 어순과 어법을 영어와 같은 방식으로 뜯어고친 것도 그 때부터 비롯된 것이다. 그래서 우리말과 같았던 중국말의 어순(語順)이 영어처럼 순서가 반대로 뒤바뀐 것이다. 나중에 역경 편찬을 끝냈다고 하면서 내어 놓았을 때 그것을 살펴 본 검사관(檢査官)이 역경(易經)은 본디 어려운 것이라고 하여 제대로 살펴보지 않고 지나쳐 버렸기 때문에 가짜 주역이 지금까지 그대로 남아 있게 되었다. 역경은 문왕이 90퍼센트 정도를 훼손(毁損)하고 위조(僞造)하여 그것을 온갖 반역 행위의 기본 술책(術策)을 담은 경전(經典)으로 삼았다. ​문왕이 죽고 나서 그의 아들 무왕(武王)이 강태공을 군사(軍師)로 하여 마침내 상나라를 무너뜨리고 천하를 통일하여 주나라를 세우고 첫 임금이 되어 중국 대륙 전체를 다스리는 주인이 되었다. 강태공은 주나라의 건국공신이며 문왕의 스승이고 무왕과 주공(周公)의 태사부(太師父)가 되었다. 이렇게 하여 중국 대륙 전체가 서양에서 망명한 페르시아 민족 곧 서융(西戎) 족한테 완전히 넘어가게 된 것이다. 그러나 사기(史記)를 비롯한 지금 남아 있는 모든 역사 기록에는 고공단보(古公亶父)가 서융 족이 아니라 5천 년 전에 살았던 우리 민족의 시조인 황제(黃帝)의 35대손이며 후직(后稷)의 12대 손이라고 적혀 있다. 그러나 이것은 문왕과 무왕, 강태공은 반역으로 국가를 찬탈한 것을 합리화(合理化)하기 위해 조상들의 족보를 비롯하여 모든 역사 기록을 자신들한테 유리하게 조작(造作)한 것이다. 모든 역사(歷史)의 기록은 승자(勝者)가 기록한 것이다. 승자는 모든 역사를 자신의 편에 유리하게 기록하고 패자(敗者)를 불리하게 기록한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권력에 대한 정당성을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게 하여 가장 곧고 바른 임금이었던 상나라의 주왕(紂王)은 역시 최고의 호걸(豪傑)이었던 하나라의 걸왕(傑王)과 함께 주지육림(酒池肉林)을 일삼은 폭군(暴君)의 대명사가 되었다. 주왕(紂王)의 주(紂)는 곧을 주(紂) 또는 먹줄 주(紂)이고 걸왕(傑王)의 걸(傑)은 호걸 걸(傑) 또는 뛰어날 걸(傑)이다. 주왕은 먹줄처럼 곧은 임금이었고 걸왕은 가장 뛰어난 호걸과 같은 임금이었다. 문왕과 무왕 강태공, 이윤(伊尹) 같은 자들이 권력을 얻은 다음에 가장 훌륭하고 뛰어난 인물들을 가장 악한 인물로 만들어 모함하고 깎아내려서 모든 역사 기록을 조작한 것이다. 걸왕과 주왕은 인류 역사에서 가장 훌륭한 임금으로 첫손에 꼽을 수 있는 임금들이었다. 중국 역사에서 4대 악녀(惡女) 중에 하나로 꼽는 달기(妲己)와 말희(末喜) 또한 요부(妖婦)가 아니라 중국 역사에서 3대 귀인(貴人) 중에 하나로 꼽을 만큼 훌륭한 여인들이었다. 지금 중국에는 역경을 제대로 알고 아해할 수 있는 사람이 없다. 중국 문화는 주나라의 영향으로 서양과 같아져 버린 지 이미 수천 년이 지났다. 중국을 동양이라고 하는데 중국은 동양이 아니다. 우리나라에서 보면 중국은 서양이다. 본래 우리나라를 기준으로 하여 서양과 동양을 나누는 것이다. 어디에 있든지 내가 서 있는 곳이 중심이다. 중국은 우리나라의 서쪽에 있으므로 서양이며 결코 동양이라고 할 수 없다. 서방(西方)은 금(金)이고 금극목(金克木)의 이치에 따라 우리나라는 목(木)이므로 금(金)과 목(木)은 절대 서로 화합할 수 없다. 금(金)은 쇠로 만든 창칼과 같은 무기이며 목(木)은 나무와 풀이다. 풀과 나무는 쇠로 만든 톱과 도끼와 낫으로 자르는 것이다. 지금까지 역사 기록에 남아 있는 것만 대충 따져 보아도 중국은 우리나라를 950번이나 침략하였다. 중국이 부강해지고 힘이 생기면 언제나 우리나라를 침략하였다. 중국은 이제 미국과 패권(覇權)을 다툴 수 있을 만큼 국력이 강해졌다. 앞으로도 중국은 반드시 우리나라를 침략할 것이다. 공자와 맹자는 이와 같은 사실을 전혀 눈치 채지 못하고 문왕과 무왕을 성인으로 여기고 존경하고 칭찬하였다. 공자는 주공(周公)을 존경하여 늙어서 기력이 쇠약하여 꿈에서라도 주공을 만나지 못하게 된 것을 한탄하였다고 적혀 있다. 맹자는 공자의 제자로 공자보다 늦게 태어난 사람이지만 여러 면에서 자질이 공자보다 더 나은 사람이었다. 춘추(春秋)는 공자가 노나라 사관(史館)이 기록한 역사책에 자신의 글을 적어서 다시 편찬한 노나라의 역사책이다. 의(義)에 기준을 두고 가장 공정하게 춘추필법(春秋筆法)으로 역사를 평가하고 기록해야 한다고 주장한 공자 자신이 가장 흉악(凶惡)한 인물인 문왕과 무왕을 가장 위대하고 훌륭한 인물로 착각하고 잘못 기록한 것이다. 문왕은 처음부터 끝까지 백성들을 선동하여 성군(聖君)을 폭군(暴君)으로 조작하여 모함(謀陷)하고 온갖 유언비어(流言蜚語)를 퍼뜨려서 백성들의 마음을 이탈시키고 제후(諸侯)들의 마음을 사로잡아 그들과 연합하여 상나라를 무너뜨리고 그 영토를 나누기로 밀약을 맺고 계략(計略)과 힘을 합쳐서 마침내 나라를 강탈(强奪)하였다.
50    종묘제례악의 변질과 전통음악의 타락 - ⑤ 댓글:  조회:1224  추천:0  2018-11-25
현재의 기성 국악권력을 가진 이들의 역사는  1911년에 만들어진 이왕직 아악부로부터 비롯된다. 한일 강제병합 후 일제는 천황의 통치 아래 식민지 조선의 형식적 권력기구인 ‘이왕직’을 두었다. 물론 실질적인 통치는 조선총독부가 했고  이왕직은 허수아비로서 조선왕가의 일을 맡은 관청이었다. 태생이 이러한 이왕직 산하의 음악기구인 아악부가  친일음악을 했을 것은 너무 자명한 일이었다. 그 중에는 울분에 못 이겨 그만둔 이도 있었고 먹고 사는 일이라고 위로하며 소극적으로 활동을 한 이도 있었지만 김기수처럼 최초의 친일국악창작곡 을 작곡하여 일제에 대한 예술가적 충성심을 발휘한 사람들도 있었다. (친일문학에는 서정주, 친일국악에는 김기수) 이왕직 아악부(이하 그들이라고 부른다)가 종묘제례악을 왜곡한 것은 남상숙 선생의 연구를 통해 충분히 밝혔는데 그들이 한 짓은 그뿐이 아니었다. 아악은 궁중의 행사(조회, 제례, 회례)에 쓰는 음악의 통칭이다. 그러므로 아악부는 궁중음악만을 연주하는 기관이다. 그런데 어쩐 일인지 그들은 일제 강점기 중반부터 자신들의 음악 레퍼토리를 확장하기 시작한다. 은 궁중음악이 아니다. 가곡, 가사, 시조도 마찬가지. 풍류음악의 일종인 와 도 그렇다. 그들은 이런 음악들을 민간음악인들을 초빙하여 배우기 시작한다. 해방이 되고 한국 전통음악계는 이왕직 아악부 출신과  민간음악가 출신으로 이루어진 으로 나누어졌다. 이왕직은 소수였고 은 절대다수였지만 이왕직들에게는 정치인들과의 연줄이 있었다. 1951년 전쟁의 와중에 임시 수도 부산에서 국립국악원이 결성되었을 때  이왕직들은 국립국악원의 핵심 요직을 차지했다. 그들은 일제 강점기의 음악권력을 다시 찾았다. 그들은 1947년 서울대 음대가 생길 때 끼어들더니 1959년 서울대 국악과가 만들어지자 튼튼한 철옹성을 구축했다. 그들은 이왕직 시절 자신들이 익힌 음악을 정악(正樂)이라고 명명하고 나머지 전통음악을 민속악(民俗樂)이라 부르며 멸시하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판소리, 산조, 농악, 민요, 무속음악 등을 국악과의 커리큘럼에서 철저히 배제했고 정악과 민속악이라는 편가르기를 했다. 서울대 국악과에서 배출된 이왕직의 제자들은  국립국악원, 국악고, 타 대학의 국악과에서 활약을 하게 되었고 국악개론도 만들었다. 서울대 국악과 출신인 단국대 국악과 서한범 교수는 자신이 쓴 총 346페이지 중에서  민속악의 설명에 단 두 페이지만을 허용했다. 학문이 아니라 만행이었다. 서울대 국악과에서 석사과정을 했던 백대웅 교수는 석사논문을 세 번이나 써야 했다. 민속악인 판소리를 주제로 논문을 썼기 때문이었다. 백교수는 퇴짜 맞은 논문을 모아 라는 책을 냈고 정악과 민속악의 이분법에서 벗어난 국악개론서 을 집필했다.   남상숙 선생은 환갑이 넘은 연세인데 여전히 국악계의 비주류였다. 지금까지 전임직 하나 얻지 못하고 보따리 장사로 계시다가 한국예술종합학교 겸임교수로 재직중이다.      이 스토리의 결말은 해피앤딩도 아니고 비극도 아니다. 이 스토리는 현재진행형이다. 결말은 아무도 모른다.  
49    종묘제례악의 변질과 전통음악의 타락 - ⑤ 댓글:  조회:931  추천:0  2018-11-25
현재의 기성 국악권력을 가진 이들의 역사는  1911년에 만들어진 이왕직 아악부로부터 비롯된다. 한일 강제병합 후 일제는 천황의 통치 아래 식민지 조선의 형식적 권력기구인 ‘이왕직’을 두었다. 물론 실질적인 통치는 조선총독부가 했고  이왕직은 허수아비로서 조선왕가의 일을 맡은 관청이었다. 태생이 이러한 이왕직 산하의 음악기구인 아악부가  친일음악을 했을 것은 너무 자명한 일이었다. 그 중에는 울분에 못 이겨 그만둔 이도 있었고 먹고 사는 일이라고 위로하며 소극적으로 활동을 한 이도 있었지만 김기수처럼 최초의 친일국악창작곡 을 작곡하여 일제에 대한 예술가적 충성심을 발휘한 사람들도 있었다. (친일문학에는 서정주, 친일국악에는 김기수) 이왕직 아악부(이하 그들이라고 부른다)가 종묘제례악을 왜곡한 것은 남상숙 선생의 연구를 통해 충분히 밝혔는데 그들이 한 짓은 그뿐이 아니었다. 아악은 궁중의 행사(조회, 제례, 회례)에 쓰는 음악의 통칭이다. 그러므로 아악부는 궁중음악만을 연주하는 기관이다. 그런데 어쩐 일인지 그들은 일제 강점기 중반부터 자신들의 음악 레퍼토리를 확장하기 시작한다. 은 궁중음악이 아니다. 가곡, 가사, 시조도 마찬가지. 풍류음악의 일종인 와 도 그렇다. 그들은 이런 음악들을 민간음악인들을 초빙하여 배우기 시작한다. 해방이 되고 한국 전통음악계는 이왕직 아악부 출신과  민간음악가 출신으로 이루어진 으로 나누어졌다. 이왕직은 소수였고 은 절대다수였지만 이왕직들에게는 정치인들과의 연줄이 있었다. 1951년 전쟁의 와중에 임시 수도 부산에서 국립국악원이 결성되었을 때  이왕직들은 국립국악원의 핵심 요직을 차지했다. 그들은 일제 강점기의 음악권력을 다시 찾았다. 그들은 1947년 서울대 음대가 생길 때 끼어들더니 1959년 서울대 국악과가 만들어지자 튼튼한 철옹성을 구축했다. 그들은 이왕직 시절 자신들이 익힌 음악을 정악(正樂)이라고 명명하고 나머지 전통음악을 민속악(民俗樂)이라 부르며 멸시하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판소리, 산조, 농악, 민요, 무속음악 등을 국악과의 커리큘럼에서 철저히 배제했고 정악과 민속악이라는 편가르기를 했다. 서울대 국악과에서 배출된 이왕직의 제자들은  국립국악원, 국악고, 타 대학의 국악과에서 활약을 하게 되었고 국악개론도 만들었다. 서울대 국악과 출신인 단국대 국악과 서한범 교수는 자신이 쓴 총 346페이지 중에서  민속악의 설명에 단 두 페이지만을 허용했다. 학문이 아니라 만행이었다. 서울대 국악과에서 석사과정을 했던 백대웅 교수는 석사논문을 세 번이나 써야 했다. 민속악인 판소리를 주제로 논문을 썼기 때문이었다. 백교수는 퇴짜 맞은 논문을 모아 라는 책을 냈고 정악과 민속악의 이분법에서 벗어난 국악개론서 을 집필했다.   남상숙 선생은 환갑이 넘은 연세인데 여전히 국악계의 비주류였다. 지금까지 전임직 하나 얻지 못하고 보따리 장사로 계시다가 한국예술종합학교 겸임교수로 재직중이다.      이 스토리의 결말은 해피앤딩도 아니고 비극도 아니다. 이 스토리는 현재진행형이다. 결말은 아무도 모른다.  
48    종묘제례악의 변질과 전통음악의 타락 - ④ 댓글:  조회:1172  추천:0  2018-11-25
남상숙 선생의 종묘제례악 왜곡론은 기성 국악계에 난데없는 날벼락이었지만 그들의 카르텔은 공고했다. 이왕직 아악부 출신인 성경린은 ‘전통론’을 들고 나왔다. 그는 말했다. “전통이라는 것은 스승에게서 배운 것을  그대로 이어오는 것으로 고악보의 것을 그대로 복원한다고 하여도  그것은 이미 전통의 맥은 끊어진 것이다“ (성경린이 글로 쓴 것인데 어법도 안 맞는다)  그의 말을 서양 클래식에 비유해보자. 베토벤의 이 있는데 수백 종의 악보가 같은 표기로 전해져 왔다. 그런데 20세기 초에 선율은 같은데 리듬이 전혀 다른 악보가 발견되었고 악기편성도 축소된 형태였다고 치자. 그리고 그 변형된 악보대로 을 연주한 일단의 사람들이 그것을 진짜라 하고 제자들을 가르쳤다. 그 제자들이 스승에게 배운 베토벤의 을 진짜라고 한다. 왜? 전통은 스승에게서 배운 것이기 때문에 베토벤의 친필 악보를 복원한다고 해도 그것은 이미 전통이 아니다. 이런 황당한 전통론은  남선생의 기습에 당황한 기성 국악계에 빛과 소금이 되었다. 남선생은 2003년 이후로 지금까지 이 문제와 관련하여 10여 편의 논문을 썼지만 단 한 편의 반박 논문도 나오지 않았다. 그들도 사실이라는 걸 알았다. 문제는 사실을 순순히 인정하면 그들이 지금까지 쌓아온 권력이 맥없이 무너진다는 걸 알고 있었다는 것이다. 사실 기성 국악계의 문제가 한 둘이 아닌데  어느 하나를 인정하면 나머지도 우르르 쏟아질 테니 그들로서는 크나큰 위협에 직면하게 된 것이었다. 그들은 교활하게 논쟁을 피하고 무대응으로 일관했다. 가끔씩 ‘전통론’을 방패삼아 얘기하면 되었다. 그들은 각 대학교 국악과의 권위 있는 교수였고 실기를 하는 학생들은 그들만큼의 이론적 소양이 없었다. 그들이 이렇게 용렬하게 된 데에는  슬픈 한국음악의 역사가 있었다.    
47    종묘제례악의 변질과 전통음악의 타락 - ③ 댓글:  조회:993  추천:0  2018-11-25
남상숙 선생은 여러 차례 논문을 발표하여 종묘제례악이 위조라는 걸 주장했다. 그런데 국악계의 반응이 이상했다. 제대로 된 논문을 써서 반박하는 이는 하나도 없고 사적인 대화를 통해 모멸감을 주거나 학술대회에서는 말꼬리 잡기를 하며 논지를 흐리기 바빴다. 그러나 손바닥으로 해를 가릴 수는 없었다. 언론에서는 연일 종묘제례악이 위조였다는  남선생의 주장을 대서특필했다. 철학자 도올 김용옥까지 가세하여 이 문제에 대한 토론회가 열리고  분위기는 종묘제례악의 왜곡을 인정하는 쪽으로 흘렀다. 국립국악원은 남선생의 논문게재를 불허하는 등 가리기에만 급급하다가 회심의 일격을 준비했다. 2005년 서울 국립국악원에서는 이채로운 연주회가 열렸다. 이 연주회는 남선생의 주장을 반박하기 위해 국립국악원이 기획한 것이었다. 바로 조선후기 고악보인 에 나오는 종묘제례악과  이왕직 아악부 악보를 계승한 현행 종묘제례악을 한 무대에 올려 청중들에게 비교, 평가를 받겠다는 것이 국립국악원의 속셈이었다. 연주되지 않은 지 100년 넘는 음악과  100년 동안 연주되어온 음악을 비교하다니 남선생의 패배가 확실한 듯 했다. 청중들은 국악학자, 국악실기인, 그리고 일반 대중들이었다.  그런데 연주회가 끝나고 청중들의 반응은 예상외였다. 500년 동안 유지되던 본래의 악기편성을 갖추고 규칙적인 장고 장단에 맞추어 가사단락마다 박이 오는 의 종묘제례악은  현행 종묘제례악과는 비교되지 않을 만큼 듣기에 편하고 아름다웠다. 고악보의 종묘제례악을 듣고 난 청중들은  왜 이렇게 좋은 음악을 이제야 연주하느냐고 했다. 국립국악원 홈페이지의 자유게시판에 복원된 종묘제례악을 찬양하는 글이 폭주했다. 꼼수를 부린 국립국악원의 완벽한 패배였다. 이 문제는 이렇게 해피앤딩으로 끝날 것 같았다.
46    종묘제례악의 변질과 전통음악의 타락 - ② 댓글:  조회:978  추천:0  2018-11-25
2003년 남상숙 선생은 종묘제례악이  일제강점기 위조된 가짜라는 논문을 발표했다. 그 논문의 단초가 된 악보가 있었으니 다. 는 종묘제례악의 변질을 기록한 최초이자 유일무이한 악보다. 조선시대 악보 중에서 이외의 어떤 악보에서도  이와 같은 종묘제례악 장단은 나타나지 않았다. 남선생이 연구한 바에 따르면  는 조선왕조의 관찬악보가 아니라 일제강점기에 조작된 악보라는 것이다. 는 19세기 말에 쓰여진 것으로 되어 있는데 를 위조하려다보니 그보다 100년 전에 쓰여진 의 영산회상부분도 위조했음을 밝혀내었다. 남선생은 서예학자를 대동해 서체 감정을 받고 종이 연대측정법까지 동원해 이를 밝혀내었다. 그 결과 역시 일제 강점기에 일부 악보를 위조하여 합본한 것임을 밝혔다. 요약해보면 18세기 정조 때의 악보인 의 일부(영산회상)를 위조하여 18세기에 이미 음악의 장단 변화가 시작된 것처럼 꾸몄고 19세기 말에 만들어진(거짓말이었다) 에서 종묘제례악을 1자1음식으로 바꾸고  전통적으로 내려오던 6대강구조(세조때 정간보 기입시  3·2·3·3·2·3 정간으로 갈라 6대강(六大綱)으로 구분하였는데 이 16정간 6대강법은 조선 말기까지 계속 되었다)를 해체하여 4구로 된 음악으로 만들었다. 선율은 세종 때 그대로인데 장단만 변했다. 이렇게 되면 그 음악은 불구가 되는 것이다. 의 이러한 장단변질은  일제강점기 에 고스란히 옮겨졌다. 진실을 말하자면  일제는 종묘제례악 같은 수준 높고 장엄한 음악이 그대로 전승되는 걸 두고 볼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이왕직 아악부를 통해 박과 절주가 무너진  절름발이 종묘제례악을 만들었고 그 사실을 숨기기 위해 라는 악보를 만들어 마치 조선왕조의 장악원에서 편찬한 관찬악보인 양 꾸몄다. 조선시대 관찬악보에 편찬시기가 기록된 악보는 하나도 없다. 그런데 에는 편찬시기가 다섯 번이나 기록되었다. 제발 19세기 악보라는 걸 믿어 달라고 부탁하는 것처럼... 
45    종묘제례악의 변질과 전통음악의 타락 - ① 댓글:  조회:975  추천:1  2018-11-25
이제부터 연재하는 글은 남원농악 이수자인 김정헌박사의 것입니다. 일반인에게는 잘 알려져 있지 않은 전통음악, 종묘제례악의 치욕의 역사와 그 극복을 함께 생각해 보고자 하는 마음에서 마련한 것이오니 많은 관심을 바랍니다.   ※ 종묘 제례악은 조선왕조 역대 임금과 왕후의 신위(神位)를 모신 종묘에 제사드릴 때 연주하는 기악·노래·무용의 총칭으로 '종묘악'이라고도 한다.   현행 종묘제례악 악보는  이왕직 아악부의 학생이었던  김기수의 악보를 모본으로 하여 만든 것이고 김기수의 악보는 이왕직 아악부의 악보를 모본으로 만든 것이다. 김기수는 1939년 최초의 국악창작곡이자  최초의 친일국악곡인 을 작곡했다. 해방 이후에는 국립국악원 예술사, 서울대 국악과 강사, 중요무형문화재 제1호 종묘제례악 예능보유자, 중요무형문화재 제39호 처용무 예능보유자, 국립국악원장, 국립국악고등학교 교장 등을 역임하는 등 그야말로 출세가도를 달려온 인물로 현행 종묘제례악은 이 사람의 의중대로 전수된 것이다. 종묘제례악은 정대업11곡 보태평11곡으로 구성되었다. 단순한 악기 연주가 아니라 악,가,무의 종합예술이다. 세종이 종묘제례악을 당악(중국음악)으로 하지 않고 우리 고유의 전통음악인 향악으로 만든 이유는 우리 나라 귀신에게 제사를 지내는데  우리 음악을 사용하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현행 종묘제례악은 그 장단이 이상하다. 연주 시작부터 끝까지 단 한 번도 규칙적인 리듬이 나타나지 않는다. 그래서 학자들은 ‘무패턴 불규칙형’ 장단이라고 명명했다. ‘무패턴’이라는 건 장고의 패턴,  즉 쌍(덩),편(따),고(쿵),요(더러러러)의 타법이  일정하게 정해진 패턴이 없다는 말이며 ‘불규칙’이라는 건 박자구조가 들쭉날쭉하여 몇 박자인지 알 수가 없다는 뜻이다. 무슨 이런 거지같은 음악이 다 있을까? 원시인들도 이런 음악 안 할 거다. 우리가 종묘제례악을 들으면서 불편한 이유 중의 하나가  바로 장단이 무패턴 불규칙형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럼 원래 세종 때부터 이렇게 만들어졌을까? 조선전기의 악보인 , 조선후기의 악보인 등에 실린 종묘제례악은 모두 그 장단이 규칙형 장단이다. 이게 어찌된 노릇인가?  
44    조선족 치안문제: 준법의식의 변화 댓글:  조회:933  추천:0  2018-11-19
최근 들어 중국동포(조선족)들의 치안사례가 늘어나 화제가 되고 있다. 일부 매스컴에서는 이를 과장보도하고 일부 동포들의 사례를 들어  70만 재한중국동포사회를 매도하고 있으며 일부 중국동포로부터 피해의식을 느끼는 한국인들은 때를 만났다고 중국동포 때리기에 나서고 있다.이는 그 동안 중국동포와 한국사회가 쌓아온 어설픈 관계에도 악영향을 미칠 전망이다.  한국에서 중국동포의 준법의식을 두개 단계로 관찰할수 있다.   우선, 불법체류시기이다. '한국약장사'의 종료와 함께 단기비자로 노동시장에 투입된 중국동포들은 줄곧 불법체류라는 죄의식 속에서 한국생활을 해야 했고 신고로 이어지는 강제추방이 두려워 사회공공질서를 비롯한 한국의 법을 눈가림으로나마 잘 지켜야 했다. 또 임금체불이 두려워 불이익을 감내해야 했으며 나아가 언감생심 사회적 물의를 일으킬 엄두도 내지 못 했다.       다음, 합법화시기이다. 재입국과 방문취업제로 합법화된 중국동포들은 법무부와 노동부가 내놓은 번거로운 합법절차를 버거워하면서도 장기체류가 현실화 되어 느긋한 일상으로 돌아갔다. 그들은 경찰과 닭장차만 보아도 숨 막히던 과거에서 해탈되어 친절한 한국경찰들과 대화를 하기에 이른다. 그리고는 성차지 않아서 고향에서처럼 담차게 신호등도 무시해 보고 한국인들에게서 모욕감을 느낄 때면 말 대꾸도 하고 시비도 걸어본다. 심지어 고향에서처럼 쓰레기 무단 투척, 신호등도 마음대로 무시하기, 길거리에 아무데나 가래침 뱉기, 밤샘으로 카지노 (마작에 카드 입씨름하기 ) 심지어 손찌검하기 ,성매매, 밀수에 , 칼부림하기 살인사건에 이르기까지 못하는 짓이 없다!  퇴폐적인 생활도 재현시켜 한국생활을 '풍요롭게' 하고 대신 주변 한국인들과 동포들에게 심각한 정신적 피해를 주기에 이른다.   그러나 이런 현상은 소수동포들의 맹동이라고 하기에는 아주 심각한 수준에 이르렀다.  범죄를 저지른 사람들이 헤아릴수 없이 많아 예전에는 소수가 사고친거라고 말들 했지만 이제는 더 그런 말을 하지 못할 정도로 범죄, 사건신고수가  수없이 많아 많은 재한 중국동포들이 이로 인해 수치심을 느끼고 있다 !  우리 이미지는 우리 매개인 스스로 가꾸고 지켜가는 것이다!  아직도 많은 중국동포들은 성실하게 노무활동에 종사하고 있으며 한국사회에 적응하고 한국인들의 눈높이를 맞추려고 안깐힘을 쓰고 있다.  계속 이어지는 사건사고는 많은 조선족들의 노력을 공든 탑이 무너지게 한다.   70만 명이나 되는 집단에 범죄가 없으라는 법도 없다. 모자를 꾹 눌러쓰고 마스크를 끼고 수건으로 수갑을 덮고 TV에 등장하는 한국의 범죄자들을 보면서 한국인에 대해 편견을 가진다면 그건 경솔한 처사이다. 마찬가지로 소수의 중국동포들의 행위규범이 한국사회에 저촉되고 범죄로 이어진다고 하여 70만 중국동포사회를 싸잡아 비난하는 것은 불문곡직의 사람들이나 할 수 있는 일이다.   한국에서 일부 중국동포들의 준법의식이 문제가 되고 있다.  그들이 범하는 행위를 보면 저 문화에서 오는 병폐, 중국현지사회에서 오는 병폐와 한국 하층사회에서 오는 병폐 등 종합적인 병폐로 나타나고 있다. 이는 한국사회에 피해를 주고 있고 70만 중국동포사회의 형상에도 먹칠을 하고 있다. 그러나 무질서하게 산재되어 조직이 없고 체계가 없는 중국동포사회에 영향력을 행사하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우선, 문제가 자주 발생하는 동네마다 '중국동포쉼터'를 마련하여 운영할 수 있다. 쉼터는 열람실을 비롯한 문화 오락 법제교육의 장으로 쓸 수 있으며 동포들이 정보를 교류하고 지역내의 치안에 귀를 기울임으로써 서로 감독할 수 있는 자율방범망으로 활용할 수 있다.   다음, 한국정부는 현재 취업교육에 역점을 두고 취업교육이 단순 노동교양에 그치지 말고 지난 90년대 초 통일원에서 중국동포를 상대로 조직한 연수처럼 민속교육으로부터 한민족공동체교육 남북통일 등 실질적인 민족교육을 첨가함으로써 중국동포들이 민족을 사랑하고 고국을 사랑하도록 인도해야 한다. 이는 중국동포들의 준법의식의 제고를 동반하여 줄 것이다.
43    서양인들이 우리민족에 대한 긍정적평가 댓글:  조회:1130  추천:0  2018-10-01
1. 마크 트롤로프는 그의 책 [The Church in Corea](1915)에서   한국인에 대한 인상을 말하면서 일본사람들보다는 어깨 위로 머리 하나 만큼은 크며 건강하고 잘 생겼다고 했다.   특히 천주교인들이 신앙을 위하여 순교하는 충실함을 찬양하고 있다. 또한   조국을 위해 일제에 항거하는 등 용기있는 백성이라고 언급하고 있다.   2. 정확하고 빠른 운동에서는   조선인은 일본인보다 강한 자립심과 자유로운 동작을 보이고 있고, 크기와 강한 점에서   중국인과 비슷하고 일본인보다는 우월하다.   국민의 좋은 특징과 질적 우월성을 비교하면 조선이 중국에 비해 단연 우위이다.  (독일인 Ernst Oppert 의 중)   3. 한국인은 참신한 인상을 주었다. 그들은 중국인과도 일본인과도 닮지 않은 반면에 ,   그 두 민족보다 훨씬 잘 생겼다. 한국인의 체격은 일본인보다 훨씬 좋다.... 한국인은 대단히 명민하고 똑똑하다.   한국인들은 스코틀랜드식으로 말해 '말귀를 알아듣는 총명함'를 상당히 타고 났다.   외국인 교사들은 한결같이 입을 모아 한국인의 능숙하고 기민한 인지능력과 외국어를 빨리 습득하는 탁월한 재능, 나아가 중국인과 일본인보다 한국인들이 훨씬 좋은 억양으로 더 유창하게 말한다는 사실을 증언한다.  (영국인 이사벨라 버드 비숍의 중) . 전체적으로 볼 때 한국인은 잘 생긴 민족이다. 한국인의 얼굴은 타원형이고 정면에서 볼 때는 대체로 길지만,    옆 모습은 약간 오목하다. 코가 양미간에서 약간 평평하고 콧구멍이 넓기 때문이다.  송나라 사신이 본 고려인의 특징  ".... 인물과 의복은 비록 대략은 중국과 같지마는 고려인은 대개 머리에 침골(枕骨)이 없으나 중이 되어 머리를 깎아 버리면 침골없는 것이 보이는데 퍽 놀랍고 이상하다. 옛날 [진사(晉史)]에는, 삼한(三韓) 사람들은 갓난 아이를 곧 돌로 그 머리를 눌러 납작하게 만든다고 하였으나 옳지 않다. 대체로 종류와 타고난 기품에 따라 그렇게 (납작하게) 되는 것이지 반드시 돌 때문에 넙적해지는 것은 아닐 것이다. " ( [고려도경] 중에서 )       5. 한국인들의 일상적 표현은 당혹스러움을 느끼게 할 정도로 활기차다.   얼굴 생김새는 가장 잘 생긴 사람들을 기준으로 보아 힘이나 의지의 강인함보다는 날카로운 지성을 나타낸다.   한국인들은 확실히 잘 생긴 종족이다. 체격도 좋은 편이다. 성인 남자의 평균 신장은 163.4센티미터이다.   여자의 평균 신장은 확인할 수 없는데, 세상에서 제일 보기 흉한 옷 때문에 그 결점이 과장되는 여자들의 모습은 땅딸만하고 펑퍼짐하다. 남자들은 힘이 매우 세어서 짐꾼들에게 45킬로그램의 짐은 보통이다.   가족 생활은 대가족제이며 도덕적으로 지극히 건강하다. (이사벨라 버드 비숍의 위의 책 중)       6. 조선인은 대단한 지적 능력이 있으며 예리하고 탐구력이 있을 뿐만 아니라   결단력을 갖춘 자랑할만한 민족. 조선은 위대한 가능성의 나라. (영국 선교사 알렉산더 윌리엄슨의 글 (1870) )   10. 근사한 기후, 풍부하지만 혹독하지는 않은 강우량, 기름진 농토, 내란과 도적질이 일어나기 힘든 훌륭한 교육.   한국인은 길이 행복하고 번영할 민족임에 틀림없다.    협잡을 업으로 하는 관아의 심부름꾼과 그들의 횡포, 그들의 악행이 강력한 정부에 의해 줄어들고 소작료가 적정히 책정되고 수납된다면 반드시 그러할 것이다...... 여행자들은 한국인의 게으름에 많은 느낌을 가진다.   그러나 러시아령 만주에서의 한국인들의 에너지와 근면함 그리고 그들의 검소하고 유족하고   안락한 집의 가구들을 보고 난 후에 나는 그것이 기질의 문제로 오해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모든 한국 사람들은 가난이 그들의 최고의 방어막이며, 그와 그의 가족에게 음식과 옷을 주는 것 이외에 그가 소유한 모든 것은 탐욕스럽고 부정한 관리들에 의해 빼앗길 것이라는 사실을 안다. 관리들의 수탈이 아주 견딜 수 없게 되고, 생존할 수 있는 최소한의 수입마저도 빼앗겼을 때에만 한국의 농민들은 폭력을 통한 절망적인 방법에 의지하게 된다.... ...   한국인들은 어떤 행정적인 계기만 주어지면 무서운 자발성을 발휘하는 국민들이다.  (이사벨라 버드 비숍)    11. 마을마다 북과 나팔, 피리, 몇 개의 솥 뚜껑이 있어서, 흔히 여름철의 고달픈 노동 시간 중에   한참 동안 일손을 멈추고 힘껏 합주하여 피로를 푼다.....   조선 사람의 커다란 미덕은 인류애 법칙을 선천적으로 존중하고 나날이 실행하는 것이다.    여러 가지 동업 조합이나 특히 친척이 서로 보호하고 서로 원조하고 서로 의지하고 서로 부조하기 위해 긴밀히 결합된 단체를 이루고 있다. 그러나 이 동포 감정은 혈족 관계와 조합의 한계를 넘어 확대되어 간다.   상호부조와 모든 사람에 대한 혼현한 대접은 이 나라 국민성의 특징인데, 속직히 말하여 그런 특징은 조선 사람을 우리 현대 문명의 이기주의에 물든 여러 국민들보다 훨씬 우위에 서게 하는 것이다.  ( 프랑스 신부 달레(C.C. Dallet)의 중 )     12. 조선인은 일반적으로 모나지 않고 상냥하며 남에게 순종을 잘하는 성품을 갖고 있다.   그들은 중국어를 이해하며 학문을 좋아하고 음악과 춤에 천품을 지니고 있다.   그들의 고운 마음씨는 예나 다름이 없어 다른 민족의 모범이 되기에 넉넉하다.  (프랑스 선교사이며 지리학자인 뒤 알드(Du Halde)의 글)     13. 아시아 민족 중에서 조선인보다 더 음악에 대하여 열렬한 애호심을 가진 민족은 없을 것이다. 군부의 어느 대신이 손풍금의 연주에 감동하여 평소의 엄숙한 태도를 던져버리고 박자에 맞추어 춤을 추고 노래를 불렀다. (오페르트) * 우리민족은 예로부터 어느 민족보다 노래부르기를 좋아한다. 그 이유를 전문가들은 우리 전통사회가 드물게 보는 억압적인 사회였기에 물리적으로 감당할 수 없는 압력을 정서적으로 발산시키는 수법으로 노래가 이용됐다는 이론을 든다. 한이나 원을 스스로 풀어야 하는 성격 때문에 우리 민족은 노래 중에서도 독창이 발달했고 그 때문에 밀폐된 공간에서 혼자 미친듯이 악을 쓸 수 있는 노래방이 폭발적 인기를 누린 것이다.     ". .... 한국은 기대 이상이었다. 한국에 있게 된 것이 만족스러운 가장 큰 이유는 '한국은 내가 가본 나라 중에서 가장 노래를 많이 부르는 나라'라는 것이다. 나는 핀란드 스웨덴 덴마크 러시아 뉴질랜드 일본 태국 베트남 영국 아일랜드 등 여러 나라에서 살았고 여행도 해보았다. 그러나 어떤 나라에서도 모든 사람들이 이처럼 노래를 잘하는 경우는 보지 못했다. 한국인들은 언제 어느 곳에서라도 노래를 부를 자세가 되어있다. 혼자서도 부르고 여럿이 같이 부르기도 한다. 라디오를 따라 흥얼거릴 때도 있고 텔레비젼 가요 프로그램을 보면서 같이 부를 때도 있고, 길을 걷거나 차를 운전하면서 노래를 부른다. 5년 동안 근무한 일본에서도 동료들이나 친구들과 함께 자주 가라오케에 가곤 했다. 몇몇 대회에 나가 상을 탄 적도 있고 텔레비젼에 출연한 일도 있다. 그런데 거기에는 뭔가 한 가지 빠진 것이 있다.   일본인들은 한국인과 같은 '노래하는 사람들'이 아니라는 것이다. 한국 사람들은 노래하기 위해 사는 것 같은데 일본 사람들은 그렇지는 않다....... 정말 한국인은 어디서나 노래를 부른다고 생각지 않을 수 없다. 박찬호 선수가 공을 던질 때도 노래를 할까? 잠실 야구장에 가서도 관중들이 응원하는 광경에 감동받았다. 야구장에서 관중들이 얼마나 노래를 많이 부르는지, 도대체 이 사람들이 노래하러온 것인지 야구를 보러온 것인지 분간이 안될 정도였다. 그러나 지금까지 들은 노래 중 가장 놀라운 것은 일요일 명동성당 미사에 갔을 때 들은 합창이다. 미국의 성당에서 다 같이 노래하는 것은 대개 억지로 하는 일 같은 것으로 하고 싶지 않지만 해야 하는 일같지만한국 카톨릭 신자들이 노래하는 것은 진짜로 노래하는 것이다. 내가 그 자리에서 느낀 것은 그들이 정말로 그곳에 있고 싶어 하고 행복해하고 있다는 것이다. 바로 그런 의미일까. 한국인들은 행복하기 때문에 노래를 부르는가. 한국을 떠나기 전에 누군가 이 의문을 풀어주었으면 좋겠다."  (주한 美 공보원 공보관 패트릭 리네핸. 주간조선 97.8.7일자)     14. 조선 사람들은 양반이나 서민이나 활쏘기를 좋아한다. 정부는 이 운동이 훌륭한 사수를 길러내는 하나의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하여 장려하고 있다. ..... 조선인들은 유약하다거나 비겁하지 않다. 신체의 단련이며, 활쏘기, 사냥에 많은 취미를 가지고 있고, 피로 앞에 굴복하지 않는다.  (위 달레 신부의 글 중 )   15. 남자들은 석전(石戰)을 매우 진지하게 하기 때문에 여기서 잠깐 언급할 필요가 있겠다. 이른 봄이 되면 서로 적수인 두 마을 사람들은 얼어붙은 들판에 모여 어느 편이 힘이 센지를 겨루는 시합을 한다. 머리에 새.끼줄로 만든 헬멧을 쓰고 곤봉으로 무장한 선발대가 중립 지대를 가로 질러 상대편에게 덤벼들면 후방에서 방어를 하고 있던 사람들은 언덕을 달려 내려가 상대편 마을 사람들을 향해 돌팔매질을 한다. 이들은 돌팔매질을 능숙하게 하기 때문에 돌팔매질은 대단한 위력을 발휘한다......일반적으로 이러한 실감나는 싸움 끝에는 몇몇의 사망자와 심한 부상자들이 많이 생긴다. 내가 조선에 도착한 지 얼마 안 되었을 때다. 이러한 싸움이 벌어진 후, 전두골의 두개골판이 부숴져 뇌가 들여다 보이도록 심하게 다친 한 남자가 나를 찾아 왔다. (헐랭-_-;;;;;다이나믹) ( 의사, 외교관이었던 H. A. 알렌의 중) 16. 조선에서 내가 처음으로 한 절단 수술은 호랑이의 공격을 받은 어느 조선인의 팔을 절단하는 일이었다. 말할 것도 없이 그것은 조선에서 처음으로 행한 절단 수술이었다. 그 환자는 팔꿈치 위쪽의 팔뼈가 물려 살이 썩고 있었다. 그러나 다행히도 건강하게 회복되어 그 환자의 친구들은 무척 놀라워했다. 그는 호랑이와 외국인 의사로부터 살아서 돌아갔지만, 이제는 팔 없이 조상에게 가야 할 형편이었다. (알렌의 글 중 )   17. 한국에서 호환이나 금에 관한 이야기만큼 많은 화제거리가 있을까 싶다. 한국은 금생산지로서 자부심이 대단하며 금부스러기들을 마치 금의 사태가 나기라도 한 것처럼 이야기 한다. .... 호랑이와 귀신에 대한 공포 때문에 사람들은 밤에는 거의 여행하지 않는다. 관리의 신분증을 가진 사람들이 부득이 밤에 여행해야 할 경우에는 마을에 들러 횃불가진 사람들의 호위를 부탁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야행할 경우 길손들은 보통 몇몇이 서로를 끈으로 묶고 등불을 밝히고 횃불을 흔들며, 고함을 지르고 꽹과리를 치며 길을 간다. 한국 사람의 호랑이에 대한 공포는 너무나 유명해서 '한국 사람은 일년의 반을 호랑이를 쫓느라 보내고 일년의 나머지 반을 호랑이에게 잡아먹힌 사람의 문상을 가느라 보낸다'는 중국 속담이 거짓말이 아님을 알 수 있다. (비숍 여사의 글 중 )   18. 사람이 수백 명이나 살고 있는 꽤 큰 마을에서 나는 벌써 여러 번이나 키가 서로 틀리지만 나무로 만든 막대기가 여러 개 길가에 서 있는 것을 본 일이 있는데, 과연 이것은 특별한 관심을 끌지 않을 수 없는 것이었다. 그런데 내가 이것을 자세히 보았을 때 나의 놀라움은 얼마나 컸던가! 자세히 알고 보니 이것은 바로 동리의 우상신이었으며, 사원 혹은 기도소를 대신하는 것이었다. 더구나 이것을 보호할 생각이라고는 하나도 없이 행길 가의 땅바닥에 그냥 박아 놓았을 뿐이지 그 이상은 아무 의식도 갖추지 않고 있었다. 키가 대강 두 자에서 네 자 가량 되는 통나무 토막에 하느라고 하였다는 장식이라는 것은 다음과 같았다. 사람들이 그 나무 껍질을 벗기고 그 위쪽 끝에다가 가장 원시적인 기술로 기분 나쁘게 찡그린 얼굴을 새긴 것이 곧 모든 장식이다. ( 오페르트)   19. 한국은 유교로부터 윤리를, 불교를 통해 미래의 소원을, 그리고 일상 생활에서 병이나 초상 등 민감한 사안이 발생했을 때는 무속 신앙에 의존한다. 동시에 여러 가지 종교를 무리 없이 포용하는 그들의 삶은 인상적이다.  (한국을 방문한 프랑스 학자)   20. 한국 사람들은 과음하는 관습이 유난스러워서 주정뱅이들이 보이지 않는 날이 거의 없었다   관찰한 결과로는 취해버리는 것은 한국인들의 독특한 특징이다라고 단언할 수 있다. 그리고 이것은 그리 품위를 떨어 뜨리는 일도 아니다. 한국에서는 어떤 사람이 이성을 잃을 정도로 곡주를 마신다 하더라도 누구도 그를 짐승으로 여기지 않는다.... 한국인이 술을 좋아하는 첫번째 원인은 아마 도시에서조차도 차를 사용하는 일이 거의 전무하다는 것과 사치스러운 청량음료들이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는 것을 듯하다. 아마도 식수로 쓰는 물이 훌륭해서 대부분 그냥 먹을 수 있는 탓일 것이다. 농부들은 식사 후에 뜨거운 숭늉을 마시며, 꿀물은 사치품으로 생각하고, 잔치 같은 경우에는 귤 껍질이나 생강에서 우려낸 액체를 마신다. 귤껍질을 말리는 것은 한국 주부들의 큰 일 중의 하나이다. 모든 초가집 지붕에는 말린 귤 껍질들이 고드름처럼 매달려 있다. (비숍 여사)   고려시대 음주 문화  " 고려인들은 술을 좋아하되 좋은 술은 얻기가 어렵고, 서민들이 마시는 것은 맛도 싱겁고 빛깔도 탁한데도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맛있게 마신다." ( 宋의 사신 서긍의 [고려 도경] 중에서 )     21. 동북 아시아 지방에 있는 주택에는 고래가 있다. 고래는 관(管)으로 된 일종의 화덕으로서 감자를 굽듯 사람을 굽는다. 서양 사람들이 벽돌로 침대를 만들고 그 밑에 발을 따뜻하게 하는 난로를 설치한 것과 똑 같다. 집의 한쪽 끝에 있는 아궁이로부터 다른쪽 끝의 굴뚝에 이르기까지 연관(煙管) 위를 벽돌이나 구들로 덮는다. 그래서 부엌에서 주전자의 물을 끓이고 고기를 굽는 불은 저쪽 방 안에서 앉아 있거나 자고 있는 사람을 따뜻하게 하는 데 사용된다. 다만 불을 때지 않으면 방이 차갑게 식고 밑불을 죽이면 열을 지속시킬 수 없다는 애로가 있다.  (W.E. Griffis의 중)     22. 농부나 일꾼들이 사는 집이 아무리 누추하다 하더라도 항상 깔끔한 작은 침실이 딸려 있는데, 진한 갈색의 유지가 발라져 있는 구들과 시멘트로 된 방바닥은 하루에 두 번씩 밥을 하느라고 때는 불 때문에 항상 따뜻하다.   이러한 점에서 보면 이들은 이웃 나라 사람들보다 더 편하게 산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일본의 집들은 춥기로 유명하고, 유일한 난방 시스템은 손가락을 따뜻하게 하는데 사용되는 화로가 전부이며, 또 중국의 집들은 아주 추운 겨울에도 따뜻한 법이 없기 때문이다. 중국인들이 사용하는 한가지 난방 시스템은 북쪽 지방에서 사용되는 식으로 불에 달군 돌 이외에는 집을 따뜻하게 하는 방법이 없다. 그러나 중부의 가옥들은 매우 추울 경우에도 집이 전혀 따뜻하지 않아 사람들은 몸을 따뜻하게 하기 위해 그저 옷을 더 껴입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영국인 여행가인 헨리 노먼은 조선을 여행하는 동안 놀랍고 아름다운 이 나라를 매우 칭찬하였으며, 베이징을 방문한 후에 조선의 수도인 서울은 베이징과 비교하면 천국이라고 쓰곤 했다.  (알렌의 견문록 중 )   23. 조선인들이 등으로 크고 무거운 짐들을 쉽사리 운반할 수 있다는 것에는 벌써 주목을 하였지만, 이곳 공주(公州)에서는 운반하는 짐의 무게가 차원이 달라 두눈을 의심할 지경이었다. 하지만 조선인들의 짐을 운반하는 기술에는 수천년의 경험이 어려 있다. 최소한의 힘을 들여 최대한의 무게를 운반하는 비결은 그들에게는 더 이상 비결이라 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들의 지게는 아주 이상적으로 고안이 되어 있어서, 엉덩이와 등, 어깨에 무게를 고르게 전달한다. 이런 이유로 다리만 지탱할 수 있는한 엄청난 짐을 운반할 수 있는 것이다. 조선인을 빼놓고는 이 방법을 착안한 민족이 없다.   세계에서 가장 운반력이 강한 중국인과 폴리네시아인들의 경우, 어깨 위에 걸친 막대의 양쪽에 짐을 걸고 무게 중심을 맞추는데, 만약에 짐이 분할할 수 없는 성질의 것일 때에는 막대의 다른 한편에 무게가 같은 물건을 걸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다. 또한 운반하는 데 넓은 공간이 필요해서, 이렇게 운반하는 사람을 지나칠 경우, 이 사람이 갑자기 방향을 틀 때는 운반대에 죄없이 한 대 맞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그러나 지게의 경우는 훨씬 간단하다........ 이런 원시적인 방법으로 대량의 짐을 장거리 운반하는 능력과 엉망인 도로 사정은 코레아가 수백 년 동안 대부대의 행상을 갖게 된 원인이 되었다. (스웨덴 기자 아손 그렙스트의 중 )     26. 남편들이 계속 흰 옷을 고집하는 한 빨래는 한국 여인들의 신산한 운명과도 같은 것이다. 이런 냄새나는 하천에서, 궁궐 후원의 우물에서, 전국 방방 곡곡의 모든 물웅덩이에서, 아니 주택 밖 실오라기만한 개울이라도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한국의 여인들은 빨래를 하고 있다. 어떤 빨래감은 실을 뽑아 다시 꿰매야 하며, 또 어떤 빨래감은 부뚜막에서 적어도 세 번은 삶아야한다. 표면이 울퉁불퉁한 나무판에 억척스럽게 문지르거나, 판판한 돌 위에 놓고 무거운 방망이로 힘겹게 두드려야 한다. 그런 다음에 이것들을 들고가 빨랫줄에 널어 말린다. 빨래가 다 마르고 난 뒤에는 다시 다듬잇돌에 올려놓고 둥근 나무 방망이로 두꺼운 공단처럼 광택이 날 때까지 한없이 두드린다. 한국의 여인들은 빨래의 노예다. 서울의 깊은 밤, 그 괴괴한 정적을 깨뜨리는 유일한 소리가 있다면 한밤내 잠 못 자고 다닥 빨래감을 두드리고 있는 다듬이 방망이의 그 쓸쓸한 소리이다. (비숍 여사의 글 중)   27. 옷은 특히 모시 옷일 경우에는 다림질하는 대신에 비단과 같은 광택이 나도록 하기 위해 다듬이질을 한다. .... 네개의 방망이가 내는 율동적인 소리는 매우 기이하여 한번 들으면 쉽게 잊혀지지 않는다.... 은둔 생활을 하는 조선의 여인들은 인내성이 강하지만, 극단적인 상황에 몰리면 일변하여 매우 광포해지기 때문에 생각하기조차 무시무시하다. 그때 다듬이 방망이는 무시하지 못할 믿음직한 무기가 되며, 남자들도 그 방망이를 무서워한다.. (알렌의 글 중)       참고6> 조선민족과 흰 옷  ① 고대 한국인들도 흰 옷을 즐겨 입었던 것으로 보인다. 부여인들은 흰 옷을 숭상하여 흰 베로 만든 소매가 큰 두루마기와 바지를 입었다. 이러한 풍습은 고구려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중국문헌에는 신라인들이 흰색 옷을 숭상했다는 사실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그리고 백제에 대해서도 의복이 청결하다는 점을 일부러 밝혀놓고 있다. 이를 통해 우리 민족이 흰 옷을 즐겨 입는 것은 밝고 깨끗하고 우아한 것을 좋아하는 우리 민족의 정서가 의복 생활에 반영된 것임을 알 수 있다.   ② 프랑스 캐주얼 브랜드 [라코스테]의 국내 라이선스를 갖고 있는 (주)서광이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한국인이 가장 좋아하는 옷 색깔은 하얀색이다. 국내에 내놓은 45개 색상 라코스테 셔츠 중에서 지난해 판매율이 가장 높은 것이 [흰 색]으로 28.7%를 차지했다. 2위는 빨강 7%, 이어 하늘색(6.8%), 검정(6.4%), 밝은 핑크(6%), 짙은 청색(5%), 연두색(4.6%), 베이지색(4.4%), 노랑(2.7%) 순이었다. 이에 비해 유럽인은 짙은 청색(네이비 블루)를 즐겨 입는다. (조선일보 97.5.27일자    29. 모자를 쓰지않은 한국인의 모습을 생각할 수 없다. 모자의 종류도 수천종에 이를 것으로 추정된다.... 한국은 모자 왕국이다. 세계 어디서도 이렇게 다양한 모자를 지니고 있는 나라를 본 적이 없다. 공기와 빛이 잘 통하고 여러 용도에 따라 제작된 한국모자의 패션을 파리인들은 꼭 알아둘 필요가 있다고 본다. ( 프랑스인의 기록 )    1877년 영국 화보지 그래픽지 [조선의 모자]라는 특집 다룸.   30. 영국인 여행가는 신변보호를 위해 경호원을 쓰는 대신 한국인들이 가장 호기심을 갖는 서양의 잼, 통조림, 빵 등을 소지하였으며, 위험한 상황이 닥칠 때마다 이것들을 보이며 어려움을 돌파했다. 특히 조선인들은 성냥에 매료돼 서로 성냥을 켜보려고 몰려들기도 했다. 이 덕분으로 조선의 지방 여행을 안전하게 마칠 수 있었다.  ( 영국의 화보잡지 [그래픽] 1888년 12월 22일자)   31. 사당에서 정상을 올려다 보면 가슴이 사무치도록 아름다운 광경이 펼쳐진다. 구비구비 이어진 숲의 물결, 시냇물의 아스라한 반짝임, 구릉의 완만한 선들, 그 위로 해발 1829미터가 넘는 금강산에서 가장 높은 산봉우리가 솟아 있었다. 아, 나는 그 아름다음, 그 장관을 붓끝으로 표현할 자신이 없다. 진정 약속의 땅 ( A fair land of promise ) 인저! 진정코 !  (비 숍 여사)     32. 러시아와 일본이 한국의 운명을 놓고 서로 대결한 상태에 , 내가 한국을 떠나게 된 것은 매우 유감스럽다. 내가 처음에 한국에 대해서 느꼈던 혐오감은 이젠 거의 애정이랄 수 있는 관심으로 바뀌었다. 이전의 어떤 여행에서도 나는 한국에서보다 더 섭섭하게 헤어진 사랑스럽고 친절한 친구들을 사귀어보지 못했다. 나는 가장 사랑스러운 한국의 겨울 아침을 감싸는 푸른 벨벳과 같은 부드러운 공기 속에서 눈 덮인 서울의 마지막 모습을 보았다. 다음날 영국 정부의 작은 기선인 상하이행 헨릭호를 타고 무자비하고 엄혹한 북풍에 실려 제물포를 떠났다. 그리고 헨릭호가 강 위로 천천히 증기를 발산하며 움직일 때, 옛스러워 흥취있는 한국의 국기는 나에게 말할 수 없는 감회와 의문들을 자아내었다. (비 숍 여사)     33. “‘코리아’ 민족은 양반들뿐만 아니라 가장 신분이 낮은 사람 들조차도 귀족의 티가 흐른다.  체격과 외모 면에서도 일본인, 중국인들과 비교해 매우 귀족적이다. 특히 여성들은 일본, 중국 여성들보다 훨씬 미모가 뛰어나다. 또한 머리 전체를 뒤로 땋아 넘 긴 여성들의 머리 스타일은 헝가리 여성들의 머리 스타일과 매우 비슷하여 퍽 인상적이었다.” (헝가리 민족학자 바라소시 1929년 '코리아..'펴내)  
42    역사드라마 목록 "사극史劇으로 역사를 배워요~ " 댓글:  조회:1795  추천:0  2018-09-25
역사 시대별 드라마 목록 삼국 ~ 남북국 시대 CE 5세기 이전 차례 제목 년대 핵심인물 주연배우 제작년도 방송사 1 주몽朱蒙(고구려) 기원전  주몽, 소서노, 대소, 금와왕 송일국, 한혜진, 김승수, 전광렬 2006년 MBC 2 바람의 나라 风之国(고구려) 4년~28년 무휼, 연(해씨 부인), 도진, 유리, 대소 송일국, 최정원, 박건형, 정진영, 한진희 2008년 KBS2 3 왕녀 자명고 王女自鸣鼓(고구려) CE 1세기 초반 자명공주, 낙랑공주, 호동, 대무신왕, 매설수 정려원, 박민영, 정경호, 문성근,  성현아 2009년 SBS 4 김수로金首露(가야) CE 1세기 초반 김수로, 허황옥, 정견비, 신귀간, 이진아시 지성, 서지혜, 배종옥, 유오성, 고주원 2010년 MBC 5 근초고왕近肖古王(백제) 341년~375년 근초고왕, 부여화, 고국원왕, 진승, 해건, 위홍란 감우성, 김지수, 이종원, 안재모, 이지훈, 이세은 2010년 KBS1 6 태왕사신기太王四神记(고구려) CE 4세기 후반 담덕, 서기하, 수지니, 연호개, 연가려, 대장로 배용준, 문소리, 이지아, 윤태영, 박상원, 최민수 2007년 MBC 7 광개토태왕广开土(大)太王(고구려) CE 4세기 후반 담덕, 고운, 모용보, 도영, 약연, 아신 이태곤, 김승수, 임호, 오지은, 이인혜, 박정철 2011년 KBS1 CE 5세기 이후   제목 년대 핵심인물  주연배우  제작년도 방송사 1 제왕의 딸 수백향帝王的女儿(백제) CE 6세기 초반 수백향/설난, 설희, 명농, 진무 서현진, 서우, 조현재, 전태수 2013년 MBC 2 서동요薯童谣(백제,신라) CE 6세기 후반 무왕, 선화공주, 아좌태자, 사택기루 조현재, 이보영, 정재곤, 류진 2005년 SBS 3 선덕여왕善德女王(신라) CE 7세기 초반 덕만, 미실, 비담, 김유신, 김춘추 이요원, 고현정, 김남길, 엄태웅, 유승호 2009년 MBC 4 삼국기三国记 CE 7세기 중반 연개소문, 김유신, 무열왕, 의자왕, 계백 조경환, 서인석, 송영창, 길용우, 유동근 1992년 KBS1 5 연개소문渊盖苏文(고구려) 598년~668년 연개소문, 이세민, 양제, 영류왕 유동근, 이태곤, 서인석, 김갑수, 최종환 2006년 SBS 6 칼과 꽃剑与花(고구려) CE 7세기 초반 무영, 연충 , 영류왕, 연개소문 김옥빈, 엄태웅, 김영철, 최민수 2013년 KBS2 7 계백阶伯(백제) CE 7세기 중반 계백, 은고, 의자왕, 사택왕후 이서진, 송지효, 조재현, 오연수 2011년 MBC 8 대왕의 꿈大王之梦(신라) CE 7세기 중반 태종무열왕, 김유신, 선덕여왕, 승만왕후 최수종, 김유석, 홍은희[1], 이영아 2012년 KBS1 9 대조영大祚荣(발해) 645년~719년 대조영, 이해고, 설인귀, 초린, 숙영 최수종, 정보석, 이덕화, 박예진, 홍수현 2006년 KBS1 10 해신海神(신라) CE 8세기 후반 장보고, 자미부인, 염장, 정화 최수종, 채시라, 송일국, 수애 2004년 KBS2 후삼국 ~ 고려 시대 고려 건국 ~ 천리장성   제목 시대적 배경 핵심인물  주연배우  제작년도 방송사 1 태조 왕건 太祖王建 870년 ~ 936년 왕건, 궁예, 견훤, 강비, 종간 최수종, 김영철, 서인석, 김혜리, 김갑수 2000년 KBS1 2 제국의 아침 帝国之晨 943년 ~ 975년 광종, 대목왕후, 정종, 균여 김상중, 전혜진, 최재성, 정승호 2002년 KBS1 3 달의 연인 - 보보경심 려 月之恋人 步步惊心 丽 태조 ~ 광종 광종, 해수, 정종, 왕욱, 최지몽 이준기, 이지은, 홍종현, 강하늘, 김성균 2016년 SBS 4 빛나거나 미치거나 945년 ~ 960년 정종, 광종, 쌍기, 대목왕후, 왕욱 류승수, 장혁, 오연서, 이하늬, 임주환 2015년 MBC 5 천추태후 千秋太后 955년 ~ 1031년 천추태후, 김치양, 강조, 강감찬, 성종 채시라, 김석훈, 최재성, 이덕화, 김명수 2009년 KBS2 무신정변 ~ 대몽 항쟁 순번 제목 년대 핵심인물 주연배우  제작년도 방송사 1 무인시대 武人时代 1170년 ~ 1219년 이의방, 정중부, 경대승, 이의민, 최충헌 서인석, 김흥기, 박용우, 이덕화, 김갑수 2003년 KBS1 2 무신 武臣 1215년 ~ 1268년 김준, 송이, 최우, 최양백, 최충헌, 김약선 김주혁, 김규리, 정보석, 박상민, 주현, 이주현 2012년 MBC 원 간섭기 ~ 조선 건국   제목 년대 핵심인물 주연배우 제작년도 방송사 1 신돈 辛盹 1348년 ~ 1374년 신돈, 공민왕, 노국공주, 반야 손창민, 정보석, 서지혜 2005년 MBC 2 개국 开国 1351년 ~ 1392년 공민왕, 이성계, 노국공주, 최영, 정몽주 임혁, 임동진, 선우은숙, 신구, 송재호 1983년 KBS 3 신의 神医/信义 고려 공민왕 최영, 유은수, 기철, 공민왕, 노국공주 이민호, 김희선, 유오성, 류덕환, 박세영 2012년 SBS 4 대풍수大风水 공민왕 ~ 조선초기 지상, 이성계, 이정근, 해인, 반야 지성, 지진희, 송창의, 김소연, 이윤지 2012년 SBS 5 정도전郑道传 1374년 ~ 1398년 정도전, 이성계, 이인임, 최영, 정몽주, 이방원 조재현, 유동근, 박영규, 서인석, 임호, 안재모 2014년 KBS 6 육룡이 나르샤 六龙飞天 고려말 ~ 조선초기 이성계, 정도전, 이방원, 이방지, 무휼, 분이 천호진, 김명민, 유아인, 변요한, 윤균상, 신세경 2015년 SBS 7 왕은 사랑한다 王在相爱 고려 충선왕 왕원, 은산, 왕린 임시완, 임윤아, 홍종현 2017년 MBC 조선 ~ 대한제국 시대 위화도 회군 ~ 을묘왜변   제목 년대 핵심인물 주연배우 재작년대 벙송사   용의 눈물 龙之泪 1388년 ~ 1422년 이성계, 이방원, 원경왕후, 정도전, 양녕대군 김무생, 유동근, 최명길, 김흥기, 이민우 1996년 KBS1 2 조선왕조 오백년 朝鲜王朝五百年 1392년 ~ 1910년 이성계, 세종, 선조, 인조, 숙종 김무생, 한인수, 현석, 유인촌, 강석우 1983년 MBC 3 대왕 세종大王世宗 1409년 ~ 1446년 세종, 태종, 원경왕후, 황희, 소헌왕후 김상경, 김영철, 최명길, 김갑수, 이윤지 2008년 KBS2 4 뿌리깊은 나무树大根深 1409년 ~ 1446년 세종, 강채윤, 소이 한석규, 장혁, 신세경 2011년 SBS 5 장영실张英实 태종~세종 장영실, 세종, 태종, 소현옹주, 장희제 송일국, 김상경, 김영철, 박선영, 이지훈 2016년 KBS 6 한명회韩明浍 1450년 ~ 1506년 한명회, 세조, 인수대비, 김종서, 단종 이덕화, 서인석, 김영란, 임동진, 정태우 1994년 KBS2 7 공주의 남자公主的男人 1452년 ~ 1468년 김승유, 이세령, 경혜공주, 신면, 정종 박시후, 문채원, 홍수현, 송종호, 이민우 2011년 KBS2 8 왕과 비王和妃 1452년 ~ 1506년 세조, 인수대비, 단종, 연산군, 한명회 임동진, 채시라, 정태우, 안재모, 최종원 1998년 KBS1 9 인수대비仁粹大妃 1452년 ~ 1506년 인수대비, 정희왕후, 세조, 한명회, 도원군, 폐비 윤씨 함은정, 채시라, 김미숙, 김영호, 손병호, 백성현, 진지희, 전혜빈 2011년 JTBC 10 대군 - 사랑을 그리다 가상의 중세 조선 이휘, 이강, 성자현, 대비 심씨, 양안대군 윤시윤, 주상욱, 진세연, 양미경, 손병호 2018년 TV조선 11 파천무 1452년 ~ 1457년 수양대군, 김종서, 설리, 정인지, 한명회 유동근, 이순재, 김혜선, 이신재, 주호성 1990년 KBS2 12 왕과 나王与我 1452년 ~ 1506년 김처선, 폐비 윤씨, 성종, 정현왕후 오만석, 구혜선, 고주원, 이진 2007년 SBS 13 역적 : 백성을 훔친 도적逆贼:窃取百姓的盗贼 15세기 중반 ~ 1506년 아모개, 홍길동, 가령, 연산군, 숙용 장씨 김상중, 윤균상, 채수빈, 김지석, 이하늬 2017년 MBC 14 7일의 왕비七日王妃 신채경, 이역, 이융 박민영, 연우진, 이동건 KBS2 15 장녹수 1476년 ~ 1506년 연산군, 장녹수, 성종, 인수대비, 김자원 유동근, 박지영, 현석, 반효정, 정호근 1995년 KBS2 16 대장금大长今 1482년 ~ 1545년 서장금, 민정호, 중종, 최금영 이영애, 지진희, 임호, 홍리나 2003년 MBC 17 여인천하女人天下 1506년 ~ 1565년 정난정, 문정왕후, 윤원형, 경빈 박씨, 중종 강수연, 전인화, 이덕화, 도지원, 최종환 2001년 SBS 18 황진이黄真伊 조선 중종 황진이, 김정한, 부용, 김은호, 벽계수 하지원, 김재원, 왕빛나, 장근석, 류태준 2006년 KBS2 19 천명天命 조선 인종 ~ 명종 최원, 홍다인, 문정왕후, 이호 이동욱, 송지효, 박지영, 임슬옹 2013년 KBS2 20 옥중화狱中花 조선 명종 ~ 1565년 옥녀, 윤태원, 윤원형, 정난정, 문정왕후, 이환 진세연, 고수, 정준호, 박주미, 김미숙, 서하준 2016년 MBC 21 임꺽정林巨正 1522년 ~ 1562년 임꺽정, 이봉학, 박유복, 양주팔, 윤원형 정흥채, 차광수, 정규수, 이정길, 박근형 1996년 SBS 을묘왜변 ~ 병자호란   제목 년대 핵심인물 주연배우  재작년도 방송사 1 불멸의 이순신不灭的李舜臣 1554년 ~ 1598년 이순신, 원균, 선조, 도요토미 히데요시 김명민, 최재성, 최철호, 이효정 2004년 KBS1 2 서궁西宫 1583년 ~ 1623년 김개시, 인목대비, 광해군, 원표, 이이첨 이영애, 이보희, 김규철, 김보성, 서인석 1995년 KBS2 3 구가의 서 1570년대 ~ 임진왜란 이전 최강치, 담여울, 조관웅, 담평준, 박태서, 박청조 이승기, 배수지, 이성재, 조성하, 유연석, 이유비 2013년 MBC 4 왕의 여자王的女人 1591년 ~ 1623년 광해군, 김개시, 선조, 인목왕후 지성, 박선영, 임동진, 홍수현 2003년 SBS 5 동의보감东医宝鉴 1559년 ~ 1615년 허준, 예진, 유의태, 유도지, 다희 서인석, 이응경, 이순재, 최불암, 이경진 1991년 MBC 6 허준许浚 1559년 ~ 1615년 허준, 예진, 유의태, 유도지, 다희 전광렬, 황수정, 이순재, 김병세, 홍충민 1999년 MBC 7 구암 허준龟岩许浚 1559년 ~ 1615년 허준, 예진, 유의태, 유도지, 다희 김주혁, 박진희, 백윤식, 남궁민, 박은빈 2013년 MBC 8 천둥소리 1569년 ~ 1618년 허균, 광해군, 이이첨, 허난설헌 최재성, 김주승, 선동혁, 하다솜 2000년 KBS2 9 징비록惩毖录 1589년 ~ 1598년 유성룡, 선조, 광해군, 도요토미 히데요시 김상중, 김태우, 노영학, 김규철 2015년 KBS1 10 왕의 얼굴王的面孔 1589년 ~ 1608년 광해군, 선조, 김상궁, 김도치 서인국, 이성재, 조윤희, 신성록 2014년 KBS2 11 화정华政 1603년 ~ 1645년 광해군, 정명공주, 홍주원, 소성대비, 능양군 차승원, 이연희, 서강준, 신은정, 김재원 2015년 MBC 12 일지매一枝梅 조선 인조 일지매, 이화, 정란, 허균, 설화 장동건, 염정아, 임채원, 김동현, 박순애 1993년 MBC 13 일지매一枝梅 조선 인조 일지매, 변시후, 변은채, 봉순 이준기, 박시후, 한효주, 이영아 2008년 SBS 14 돌아온 일지매一枝梅归来 조선 인조 일지매, 여월희, 달이, 구자명, 백매 정일우, 윤진서, 김민종, 정혜영 2009년 MBC 15 탐나는도다 조선 인조 장버진, 박규, 윌리엄, 서린, 얀 서우, 임주환, 황찬빈, 이승민, 이선호 2009년 MBC 16 명가名家 조선 인조 최국선, 한단이, 김원일 차인표, 한고은, 김성민 2010년 KBS1 17 홍길동洪吉童 가상의 조선 홍길동, 이업, 임성중, 우용두 김석훈, 김상중, 이덕화, 이종원 1998년 SBS 18 쾌도 홍길동快刀洪吉童 가상의 조선 홍길동, 허이녹, 이창휘, 심수근 강지환, 성유리, 장근석, 박상욱 2008년 KBS2 19 전우치田禹治 가상의 조선 전우치, 이치, 홍무연, 강림, 이혜령 차태현, 유이, 이희준, 백진희 2012년 KBS2 20 야경꾼 일지巡夜人日志 가상의 조선 이린, 도하, 무석, 박수련, 조상헌, 사담 정일우, 고성희, 유노윤호, 서예지, 윤태영, 김성오 2014년 MBC 정축하성 ~ 신유박해   제목 년대 핵심인물 주연배우 재작년대 방송사 1 궁중잔혹사 - 꽃들의 전쟁宫中残酷史 1637년 ~ 1645년 조귀인, 인조, 김자점, 민회빈 강씨, 소현세자,봉림대군 김현주, 이덕화, 정성모, 송선미, 정성운, 김주영 2013년 JTBC 2 추노推奴/追奴 병자호란 이후 이대길, 송태하, 김혜원, 황철웅, 업복이 장혁, 오지호, 이다해, 이종혁, 공형진 2010년 KBS2 3 최강칠우最强七友 병자호란 이후 최칠우, 소윤, 흑산, 민승국 문정혁, 구혜선, 유아인, 전노민 2008년 KBS2 4 대명待命 조선 효종 봉림대군, 최명길, 임경업 김흥기, 김성원, 백일섭 1981년 KBS1 5 마의马医 조선 현종 백광현, 강지녕, 이명환, 장인주, 이성하 조승우, 이요원, 손창민, 유선 ,이상우 2012년 MBC 6 동이同伊 1681년 ~ 1725년 동이, 숙종, 장희빈(장옥정), 차천수, 서용기 한효주, 지진희, 이소연, 배수빈, 정진영 2010년 MBC 7 장희빈张禧嫔 1670년 ~ 1701년 장희빈(장옥정), 숙종, 인현왕후, 장희재 정선경, 임호, 김원희, 길용우 1995년 SBS 8 장희빈张禧嫔 1681년 ~ 1720년 장희빈(장옥정), 숙종, 인현왕후, 숙빈 최씨 김혜수, 전광렬, 박선영, 박예진 2002년 KBS2 9 장옥정, 사랑에 살다张玉贞为爱而生 조선 숙종 장희빈(장옥정), 숙종, 인현왕후, 숙빈 최씨 김태희, 유아인, 홍수현, 한승연 2013년 SBS 10 다모茶母 조선 숙종 (1692년) 장채옥, 황보윤, 장성백 하지원, 이서진, 김민준 2003년 MBC 11 장길산张吉山 조선 숙종 장길산, 묘옥, 이갑송, 이지용 유오성, 한고은, 정준하, 류수영 2004년 SBS 12 대박大发 조선 숙종~영조 숙종, 영조, 이인좌, 백대길, 담서, 숙빈 최씨 장근석, 여진구, 전광렬, 최민수, 임지연, 윤진서 2016년 SBS 13 대왕의 길大王之路 조선 영조 영조, 사도세자, 혜경궁 홍씨, 숙빈 최씨 박근형, 임호, 홍리나, 김영애 1998년 MBC 14 어사 박문수御史朴文秀 조선 영조 박문수, 영조, 이연희, 소화련 유준상, 조민기, 임지은, 한혜진 2002년 MBC 15 군주 - 가면의 주인君主假面的主人 가상의 조선 왕세자 이선, 한가은, 천민 이선, 김화군, 편수회 대목 유승호, 김소현, 김명수, 윤소희, 허준호 2017년 MBC 16 비밀의 문秘密之门 조선 영조~정조 이선, 영조, 서지담, 혜경궁 홍씨, 나철주 이제훈, 한석규, 김유정, 박은빈, 김민종 2014년 SBS 17 무사 백동수武士白东修 1742년~1778년 백동수, 여운, 황진주 , 유지선, 김광태 지창욱, 유승호, 윤소이 , 신현빈, 전광렬 2011년 SBS 18 이산李祘 1762년 ~ 1800년 이산(정조), 의빈 성씨, 영조, 박대수, 혜경궁 홍씨, 효의왕후, 홍국영, 정순왕후 이서진, 한지민, 이순재, 이종수, 견미리, 박은혜, 한상진, 김여진 2007년 MBC 19 왕도王道 조선 정조 홍국영, 정조, 혜경궁 홍씨, 정순왕후, 순지 김영철, 강석우, 정영숙, 김자옥, 박순애 1991년 KBS1 20 홍국영 조선 정조 홍국영, 정후겸, 수절녀 서씨, 여옥, 정조 김상경, 정웅인, 이태란, 정소영, 정재곤 2001년 MBC 21 바람의 화원风之画员 조선 정조 신윤복, 김홍도, 정향, 정조 문근영, 박신양, 문채원, 배수빈 2008년 SBS 22 거상 김만덕巨商金万德 조선 정조 김만덕, 정홍수, 오문선, 강유지, 할매 이미연, 한재석, 박솔미, 하석진, 고두심 2010년 KBS1 23 소설 목민심서 조선 정조 정약용, 비안, 정약전, 정조, 심환지 이진우, 김성령, 김규철, 김흥기, 임혁 2000년 KBS2 24 성균관 스캔들成均馆绯闻 조선 정조 이선준, 김윤희, 구용하, 문재신 박유천, 박민영, 송중기, 유아인 2010년 KBS2 25 한성별곡-정汉城别曲-情 1800년 박상규, 이나영, 양만오, 정조 진이한, 김하은, 이천희, 안내상 2007년 KBS2 26 정조암살미스터리-8일正祖暗杀之谜-8天 조선 정조 정조, 혜경궁 홍씨, 정약용 김상중, 정애리, 박정철 2007년 채널CGV 세도 정치 ~ 경술국치   제목 년대 핵심인물 주연배우 재작년도 방송사  1 상도商道 1803년 ~ 1840년 임상옥, 박다녕, 정치수, 박주명, 홍득주 이재룡, 김현주, 정보석, 이순재, 박인환 2001년 MBC 2 태양인 이제마太阳人 1837년 ~ 1900년 이제마, 설이, 구운영 최수종, 김유미, 유호정 2002년 KBS2 3 풍운风云 1857년 ~ 1898년 흥선대원군, 명성황후, 고종, 조대비 이순재, 김영애, 박칠용, 반효정 1982년 KBS1 4 명성황후明成皇后 1861년 ~ 1898년 명성황후, 고종, 흥선대원군 이미연, 최명길, 이진우, 유동근 2001년 KBS2 5 찬란한 여명灿烂的黎明 1863년 ~ 1895년 이동인, 김옥균, 박영효, 이하응, 민비 김갑수, 정보석, 이민우, 변희봉, 하희라 1995년 KBS1 6 조선총잡이朝鲜神枪手 개화기 박윤강, 정수인, 최혜원, 김호경, 최원신 이준기, 남상미, 전혜빈, 한주완, 유오성 2014년 KBS2 7 조선 과학수사대 별순검别巡检 개화기 강웅비, 김사율, 서은, 조달환, 홍법률 이기영, 정유석, 조안, 최규환, 이재포 2005년 MBC 8 별순검 시즌1别巡检1 개화기 강승조, 김강우, 여진, 배복근 류승룡, 온주완, 박효주, 안내상 2007년 MBC 9 별순검 시즌2别巡检2 개화기 진무영, 한다경, 선우현, 지대한 이종혁, 이청아, 박광현, 박원상 2008년 MBC 10 제중원济众院 개화기 황정, 유석란, 백도양 박용우, 한혜진, 연정훈 2010년 SBS 11 독립문独立门 조선 고종, 순종 고종, 이승만 박칠용, 서인석 1984년 KBS1 12 미스터 션샤인 Mr.Sunshine 조선 고종, 순종 유진 초이, 고애신 이병헌, 김태리 2018년 tvN 13 대망大望 가상의 조선 박재영, 윤여진, 박시영, 최동희 장혁, 이요원, 한재석, 손예진 2002년 SBS 14 해를 품은 달拥抱太阳的月亮 가상의 조선 허연우, 이훤, 양명, 윤보경 한가인, 김수현, 정일우, 김민서 2012년 MB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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