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
http://www.zoglo.net/blog/kokuryeo 블로그홈 | 로그인

카테고리

※ 댓글

  • 등록된 코멘트가 없습니다
<< 3월 2024 >>
     12
3456789
10111213141516
17181920212223
24252627282930
31      

방문자

홈 > 고구려

전체 [ 53 ]

53    광고 중고책 사렵니다 댓글:  조회:69  추천:0  2024-03-17
동북조선민족교육출판사에서 출판된 록색 표지의 이야기책 상,하권을 중고로 사려고 합니다. 고서점을 하시거나 동북조선민족교육출판사에서 출판된 책을 소장하고 계신 분들은 련락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연변교육출판사에서 출판된 도서 《사내애들에게 들려주는 이야기》(상,하) 《녀자애들에게 들려주는 이야기》(상,하) 《녀자애들의 왕국, 남자애들의 천당》 이 이야기책들을 구매하려고 합니다. 이 책들을 가지고 계시거나 파시려는 분들은 련락주시기 바랍니다. 한국 궁중음식연구원에서 출간한 《조선왕조 궁중음식》책도 사렵니다. 전화, 위챗: 15944318256
52    고구려,백제, 신라,가야, 발해 왕계표 댓글:  조회:348  추천:0  2023-09-03
(7) 고구려 왕계표 왕명 : 왕, 태왕(太王), 대왕(大王), 열제(烈帝) - 성(姓) : 고(高) - 28대 705년(7161~7865, BC37?∼서기668) 대 왕 명 즉위년도 (한기-서기) 연호 재위기간 약 사 1 추모왕(芻慕 鄒牟) 주몽왕(朱蒙王) 동명성왕(東明聖王) 7161-BC37 다물 多勿 18 名은 주몽(朱蒙), 추모. 해모수의 4세손. 父는 불리지, 母는 하백의 딸 류화柳花. 2 유리명왕(琉璃明王) 7179-BC19 37 名은 유리, 유류(孺留), 여률(북사). 母는 예씨부인. 3 대무신왕(大武神王) 7215-18 26 대해주류왕. 名은 무휼(無恤), 막래(북사).母는 다물국 송양의 딸 송씨부인. 4 민중왕(閔中王) 7241-44 4 名은 해색주(解色朱). 대무신왕의 동생. 5 모본왕(慕本王) 7245-48 5 名은 해우(解憂), 해애루. 대무신왕의 원자. 6 태조왕(太祖王) 7250-53 융무 隆武 93 국조왕. 名은 궁(宮). 유리왕의 2대손. 륭무(隆武) 7 차대왕(次大王) 7343-146 19 名은 수성(遂成). 태조왕의 동생.명림답부에게 죽음 8 신대왕(新大王) 7362-165 14 名은 백고(伯固) , 백구(伯句). 태조왕의 막내동생. 9 고국천왕(故國川王) 7376-179 18 名은 남무(男武), 이이모(북사). 신대왕의 2자 10 산상왕(山上王) 7394-197 30 名은 연우(延憂) ,위궁(位宮).신대왕의4자(형 발기를 제끼고 왕이되어 형 발기가 반발하여 반란을 일으키다 죽음)선황후우(형수)를 황후로 맞이함.을파소 참전계경 11 동천왕(東川王) 7424-227 21 동양왕. 名은 우위거(憂位居). 12 중천왕(中川王) 7445-248 22 중양왕. 名은 연불(然弗). 13 서천왕(西川王) 7467-270 22 서양왕. 名은 약로(藥盧) , 약우(若友). 14 봉상왕(烽上王) 7489-292 8 치갈왕. 名은 상부(相夫) , 삽시루. 15 미천왕(美川王) 7497-300 31 호양왕. 名은 을불(乙弗) , 우불(憂弗). 서천왕2대손. 父는 고추가 돌고. 16 고국원왕(故國原王) 7528-331 永和 40 국강상왕. 名은 사유(斯由) , 쇠(釗). 백제 근초고왕의 공격으로 교전중 사망. 17 소수림왕(小獸林王) 7568-371 13 소해주류왕. 名은 구부(丘夫). 18 고국양왕(故國壤王) 7581-384 8 名은 이련(伊連) , 지지(只支) 소수림왕의 아우. 19 광개토태왕(廣開土太王) 7589-392 영락 永樂 21 광개토경호태왕, 名은 담덕(談德). 20 장수왕(長壽王) 7610-413 건흥 建興 79 장수홍제호태열제,名은 거련(巨連). 475년 백제 한성으로 공격하여 개로왕 주살. 21 문자명왕(文咨明王) 7689-492 명치 明治 27 문자호태열제,名은 나운(羅雲).장수왕 2대손.父는 조다(助多). 22 안장왕(安藏王) 7716-519 12 名은 흥안(興安). 23 안원왕(安原王) 7728-531 14 名은 보연(寶延). 안장왕의 아우. 24 양원왕(陽原王) 7742-545 14 양강왕. 名은 평성(平成). 25 평원왕(平原王) 7756-559 대덕 大德 31 평강상호태열제. 名은 양성(陽成), 탕(북사). 26 영양왕(拏陽王) 7787-590 홍무 弘武 28 영양무원호태열제, 名은 원(元), 대원.사서 5권 편찬.수나라 양왕 광의113만 대군을 대장군 을지문덕이 물리침. 27 영류왕(營留王) 7815-618 24 名은 건무(建武),성(成)영양왕의 이복동생.연개소문에게 죽음 28 보장왕(寶藏王) 7839-642 개화 開化 26 名은 장(臧). 영류왕의 아들 태양왕의 아들로 연개소문에 의해 옹립.당 이세민의 공격을 막아냈으나 연개소문의 세아들 남생,남건,남산의 분란으로 7865(AD668)년 나당연합군에 의해 멸망. (멸망) 7865-668 (8) 백제 왕계표 왕명 : 왕(王) - 성(姓) : 부여(夫餘,扶餘) - 32대 678년 (한기7180~7857, BC18?∼서기660) 대 왕 명 즉위년도 (한기-서기) 재위기간 약 사 소서노(召西努) 7156-BC42 고구려의 신하 연타발의 딸로, 비류와 온조의 어머니이다.(BC31)년에 고구려에 의해 제후로 인정. 1 온조왕(溫祚王) 7180-BC18 45 고주몽의 아들. 형은 비류(沸流). 2 다루왕(多婁王) 7225-28 49 온조왕의 맏아들. 처음으로 논에서 쌀농사 3 기루왕(己婁王) 7274-77 51 다루왕의 맏아들. 4 개루왕(蓋婁王) 7325-128 38 기루왕의 아들. 북한산성을 쌓았다. 5 초고왕(肖古王) 7363-166 48 소고(素古).개루왕의 아들. 6 구수왕(仇首王) 7411-214 20 귀수(貴須). 204년 위구태의 구태백제에 복속하여 온조백제는 구태백제의 후국이됨 7 사반왕(沙伴王) 7435-234 1 구수왕의 아들.사반왕이 너무어려 정사를 볼 능력이 없어 폐하고 고이왕이 왕위에 오름 8 고이왕(古爾王) 7436-234 52 초고왕의 아우. 9 책계왕(責稽王) 7483-286 12 고이왕의 아들. 청계(靑稽).AD298년 가을 9월, 한 나라가 맥인들을 이끌고 와서 침략하였다. 왕이 직접 나가서 방어하다가 전사하였다. 10 분서왕(汾西王) 7495-298 6 책계왕의 맏아들 11 비류왕(比流王) 7501-304 40 구수왕의 아들. 12 설왕(契王) 7541-344 2 분서왕의 맏아들 13 근초고왕(近肖古王) 7543-346 29 비류왕의 둘째아들. 고구려 평양성에 쳐들어가 고국원왕을 살해. 고흥이 서기 집필 14 근구수왕(近仇首王) 7572-375 9 휘수(諱須). 15 침류왕(枕流王) 7581-384 1 근구수왕의 맏아들. 16 진사왕(辰斯王) 7582-385 7 근구수왕의 둘째아들. 17 아신왕(阿莘王) 7589-392 13 아방(阿芳).침류왕의 아들 18 전지왕(전支王) 7602-405 15 직지(直支). 혹은 여영.아신왕의 맏아들. 19 구이신왕(久爾辛王) 7617-420 7 전지왕의 맏아들. 20 비유왕(毗有王) 7624-427 28 구이신왕의 맏아들. 21 개로왕(蓋鹵王) 7652-455 20 근개루(近蓋婁). 名은 경사(慶司).고구려 장수왕 공격으로 아차산에서 사망(475년) 22 문주왕(文周王) 7672-475 2 개로왕의 아들.웅진으로 도읍을 옮김.병관좌평 해구에 의해죽었다. 23 삼근왕(三斤王) 7674-477 2 임걸(壬乞). 문주왕의 맏아들. 24 동성왕(東城王) 7676-479 22 名은 모대(牟大) 혹은 마모(摩牟). 문주왕의아우 곤지(昆支)의 아들. 25 무령왕(武寧王) 7698-501 22 名은 사마(斯摩). 동성왕의 둘째아들.좌평 백가가 가림성을 거점으로 반란을 일으키니 왕이 군사를 거느리고 우두성에 가서 한솔 해명을 시켜 공격하게 하였다. 백가가 나와서 항복하자 왕이 백가의 목을 베어 백강에 던졌다. 26 성왕(聖王) 7720-523 31 名은 명농(明농). 도읍을 사비[소부리라고도 한다.]로 옮기고, 국호를 남부여라고 하였다. 27 위덕왕(威德王) 7751-554 44 名은 창(昌). 28 혜왕(惠王) 7795-598 1 名은 계(季). 성왕의 둘째아들. 29 법왕(法王) 7796-599 1 名은 선(宣) 혹은 효순(孝順). 30 무왕(武王) 7797-600 41 名은 장(璋). 31 의자왕(義慈王) 7838-641 19 7857(AD660)년 나당연합군에 의해 멸망. (멸망) 7857-660 (9) 신라 왕계표 왕명 : 거세간(居世干) ,차차웅(次次雄) ,이사금(尼師今) ,마립간(麻立干) , 왕(王) 성(姓) : 박(朴),석(昔),김(金) -56대 992년 (한기7141~8132, BC57 ∼ 서기935) 대 왕 명 즉위년도 (한기-서기) 재위기간 성 왕호칭 약 사 1 혁거세(赫居世) 7141-BC57 61 박? 거세간 나이 13세에 양산촌등 6부 촌장에 의해 왕으로 추대. 큰 알이 박의 모양과 비슷하게 생겼으므로 그의 성을 박이라고 하였다. 2 남해(南解) 7202-5 19 박 차차웅 혁거세의 아들. 3 유리(儒理) 7221-24 33 박 이사금 남해의 아들.6부의 이름을 고치고 각부의 성(姓)을 하사.관직을 이벌찬등 17등급으로 제정 시행. 4 탈해(脫解) 7254-57 23 석 이사금 토해(吐解).남해의 사위.김알지 탄생 5 파사(婆娑) 7277-80 32 박 이사금 유리의 둘째 아들. 6 지마(祇摩) 7309-112 22 박 이사금 지미(祇味). 파사의 아들 7 일성(逸聖) 7331-134 20 박 이사금 유리의 큰아들 혹은 일지(日知) 갈문왕의 아들이다. 8 아달라(阿達羅) 7351-154 30 박 이사금 일성의 맏아들. 9 벌휴(伐休) 7381-184 12 석 이사금 탈해의 2대손으로 아버지는 각간(角干) 구추(仇鄒)이다. 10 나해(奈解) 7393-196 34 석 이사금 벌휴의 손자. 11 조분(助賁) 7427-230 17 석 이사금 제귀(諸貴). 벌휴의 2대손으로 아버지는 골정(骨正) 갈문왕이다 12 첨해(沾解) 7444-247 15 석 이사금 조분의 동생이다. 13 미추(味鄒) 7459-262 21 김 이사금 미조. 김알지(金閼智)의 5대손 구도(仇道)의 아들. 14 유례(儒禮) 7480-283 15 석 이사금 조분의 장자. 15 기림(基臨) 7495-298 12 석 이사금 기립(基立)조분의 2대손 父는 이찬걸숙(乞淑) 16 흘해(訖解) 7507-310 46 석 이사금 나해의 2대손. 父는 각간 우로 (于老). 17 내물(奈勿) 7553-356 46 김 이사금 나밀(那密). 구도仇道)의 2대손. 父는 각간 말구(末仇). 18 실성(實聖) 7599-402 15 김 이사금 김알지의 후손. 父는대서지 이찬 19 눌지(訥祗) 7614-417 41 김 마립간 내물의 아들. 20 자비(慈悲) 7655-458 21 김 마립간 눌지의 맏아들. 21 소지(炤知) 7676-479 21 김 마립간 비처(毗處).자비의 맏아들. 22 지증(智證) 7697-500 14 김 마립간 名은 지대로(智大路). 내물 3대손 갈문왕 습보(習寶)의 아들. 23 법흥(法興) 7711-514 26 김 왕 名은 원종(原宗). 24 진흥(眞興) 7737-540 36 김 왕 名은 삼맥종(삼麥宗) 혹은 심 맥부(深麥夫) 법흥의 왕제 갈문왕 입종(立宗)의 아들. 25 진지(眞智) 7773-576 3 김 왕 名은 사륜(舍輪). 진흥의 2자. 26 진평(眞平) 7776-579 53 김 왕 名은 백정(白淨).진흥의 태자 동륜의 아들 27 선덕(善德) 7829-632 15 김 왕 名은 덕만(德曼). 진평의 장녀. 28 진덕(眞德) 7844-647 7 김 왕 名은 승만(勝曼). 진평의 모제 국반(國飯) 갈문왕의 딸. 29 무열(武烈) 7851-654 7 김 왕 名은 춘추(春秋). 진지의 아들 이찬 용춘 (龍春)의 아들. 백제를 멸망 시킴(A.D 660) 30 문무(文武) 7858-661 20 김 왕 名은 법민(法敏). 무열의 원자.당과 함께 고구려를 멸망시키고 삼국을 통일 31 신문(神文) 7878-681 11 김 왕 名은 정명(政明) 혹은 명지(明之) 문무의 장자 32 효소(孝昭) 7889-692 10 김 왕 名은 이홍(理洪). 신문의 태자. 33 성덕(聖德) 7899-702 35 김 왕 名은 흥광(興光)신문의 둘째아들로 효소의 동복 아우. 34 효성(孝成) 7934-737 5 김 왕 名은 승경(承慶)성덕의 둘째 아들 35 경덕(景德) 7939-742 23 김 왕 名은 헌영(憲英)효성 이복 동생 36 혜공(惠恭) 7962-765 15 김 왕 名은 건운(乾運). 경덕의 적자. 37 선덕(善德) 7977-780 5 김 왕 名은 양상(良相). 내물의 10대손 으로 아버지는 사찬 효방(孝芳). 38 원성(元聖) 7982-785 14 김 왕 名은 경신(敬信). 내물의 12대손. 39 소성(昭聖) 7996-799 1 김 왕 名은 준옹(俊邕). 원성의 태자 인겸(仁謙)의 아들. 40 애장(哀莊) 7997-800 9 김 왕 名은 청명(淸明). 소성의 태자. 41 헌덕(憲德) 8006-809 17 김 왕 名은 언승(彦昇)소성의 동복아우 42 흥덕(興德) 8023-826 10 김 왕 名은수종(秀宗)헌덕의동복아우 43 희강(僖康) 8033-836 2 김 왕 名은 제륭(悌隆).원성의 손자이고 이찬 헌정(憲貞)의 아들. 44 민애(閔哀) 8035-838 1 김 왕 名은 명(明). 원성의 증손이며대아찬 충공(忠恭)의 아들. 45 신무(神武) 8036-839 김 왕 名은 우징(祐徵). 원성의 손자이며상대등 균정(均貞)의 아들. 46 문성(文聖) 8036-839 18 김 왕 名은 경응(慶膺). 신무의 태자. 47 헌안(憲安) 8054-857 4 김 왕 名은 의정(誼靖)신무의이복아우 48 경문(景文) 8058-861 14 김 왕 名은 응렴(膺廉)희강의아들아찬 계명 (啓明)의 아들 49 헌강(憲康) 8072-875 11 김 왕 名은 정(晸). 경문의 태자. 50 정강(定康) 8083-886 1 김 왕 名은 황(晃) 경문의 둘째 아들. 51 진성(眞聖) 8084-887 10 김 왕 名은 만(曼). 헌강의 여동생. 52 효공(孝恭) 8094-897 15 김 왕 名은 요(嶢). 헌강의 서자. 53 신덕(神德) 8109-912 5 박 왕 名은 경휘(景暉). 아달라왕 (阿達羅王)의 후손 54 경명(景明) 8114-917 7 박 왕 名은 승영(昇英).신덕의 태자. 55 경애(景哀) 8121-924 3 박 왕 名은 위응(魏膺)경명의동복아우. 56 경순(敬順) 8124-927 8 김 왕 名은 부(傅) 문성왕의 후손으로 이찬 효종(孝宗)의 아들. 8132(AD935)년 나라를 고려에 넘기었다. (멸망) 8132-935 (10)가야 왕계표 왕명 : 왕(王) - 성(姓) : 김(金) - 10대 520년(한기7239~7759, 서기42 ∼ 562) 대 왕 명 즉위년도 (한기-서기) 재위기간 약 사 1 수로왕(首露王) 7239-42 157 2 거등(居登王) 7396-199 54 어머니는 허황후(許皇后). 기묘(己卯; 199) 3월 13일에 즉위(卽位), 치세(治世)는 39년으로 계유(癸酉; 253) 9월 17일에 죽음. 왕비(王妃)는 천부경(泉府卿) 신보(申輔)의 딸 모정(慕貞)이며 태자(太子) 마품(麻品)을 낳음. 3 마품(麻品王) 7450-253 38 신해(辛亥; 291) 1월 29일에 죽음. 왕비(王妃)는 종정감(宗正監) 조광(趙匡)의 손녀(孫女) 호구(好仇)로 태자(太子) 거질미(居叱彌)를 낳음. 4 거즐미(居叱彌王) 7488-291 55 금물(今勿)이라고도 하며 김씨(金氏). 영평(永平) 원년에 즉위.병오(丙午; 346) 7월 7일에 죽음. 왕비는 아궁아간(阿躬阿干)의 손녀 아지(阿志)로, 왕자(王子) 이시품(伊尸品)을 낳음. 5 이시품(伊尸品王) 7543-346 61 혹은 이품(伊品). 정미(丁未; 407) 4월 10일에 죽음. 왕비는 사농경(司農卿) 극충(克忠)의 딸 정신(貞信)으로, 왕자 좌지(坐知)를 낳음. 6 좌지(坐知王) 7604-407 14 용녀(傭女)에게 장가들어 그 여자의 무리를 관리로 등용하니 국내가 시끄러웠다. 용녀를 내쳐서 하산도(荷山島)로 귀양보내고, 정치를 고쳐 행하여 길이 백성을 편안하게 다스렸다.신유(辛酉; 421) 4월 12일에 죽음. 왕비는 도령대아간(道寧大阿干)의 딸 복수(福壽)로, 아들 취희(吹希)를 낳음. 7 취히(吹希王) 7618-421 30 질가(叱嘉)라고도 함. 김씨(金氏). 신묘(辛卯; 451) 2월 3일에 죽음. 왕비는 진사각간(進思角干)의 딸 인덕(仁德). 왕자(王子) 질지(질知)를 낳음. 8 질지 7648-451 41 김질왕(金질王)이라고도 함.이듬해에 시조(始祖)와 허황옥 왕후(許黃玉王后)의 명복(冥福)을 빌기 위하여 처음 시조(始祖)와 만났던 자리에 절을 지어 왕후사(王后寺)라 하고 밭 10결(結)을 바쳐 비용에 쓰게 함.임신(壬申; 492) 10월 4일에 죽음. 왕비는 김상사간(金相沙干)의 딸 방원(邦媛). 왕자 겸지(鉗知)를 낳음. 9 겸지(鉗知王) 7689-492 29 김겸왕(金鉗王)이라고도 함. 정광(正光) 2년 신축(辛丑; 521) 4월 7일에 죽음. 왕비는 출충각간(出忠角干)의 딸 숙(淑). 왕자 구형(仇衡)을 낳음. 10 구형(仇衡王) 7718-521 41 임오(壬午; 562) 9월에 신라 진흥왕(眞興王)의 침략으로 멸망. (멸망) 7759-562 * 좌지왕 이후 가야연맹체의 주도권이 대가야로 넘어가게 되었다. (11) 대진국(발해) 왕계표 왕명 : 제(帝),황제(皇帝) - 성(姓) : 대(大) - 15대 259년 (한기7865~8123, 서기668 ∼926) 대 왕 명 연호 즉위년도 (한기-서기) 재위 기간 명 약 사 묘호(廟號) 시 호(諡號) 1 세조(世祖) 진국열황제皇帝 중광 重光 7865-668 31 중상(仲象) 후고구려로 개국 2 태조(太祖) 성무고황제皇帝 천통 天统 7896-699 20 조영(祚榮) 대진국으로 개명 3 광종(光宗) 무황제(武皇帝) 인안 仁安 7916-719 19 무예(武藝) 동생 대문예 당으로 망명 4 세종(世宗) 광성문황제皇帝 대흥 大興 7935-738 56 흠무(欽茂) 국사 25권 편찬 5 대원의(大元義) 7991-794 세종의 아우.포악하여 바로쫏겨남 6 인종(仁宗) 성황제(成皇帝) 중흥 重興 7991-794 1 화여(華璵) 세종의 아들인 굉림 (宏臨)의 아들. 7 목종(穆宗) 강황제(康皇帝) 정력 正曆 7992-795 14 숭린(崇璘) 인종의 황숙(皇叔). 8 의종(毅宗) 정황제(定皇帝) 영덕 8006-809 3 원유(元瑜) 9 강종(康宗) 희황제(僖皇帝) 주작 朱雀 8009-812 5 언의(言義) 10 철종(哲宗) 간황제(簡皇帝) 태시 太始 8014-817 1 명충(明忠) 11 성종(聖宗) 선황제(宣皇帝) 건흥 建興 8015-818 14 인수(人秀) 대조영의 동생 대야발의4세손. 12 장종(莊宗) 화황제(화皇帝) 함화 咸和 8029-832 26 이진(尋震) 13 순종(順宗) 안황제(순皇帝) 대정 大正 8055-858 14 건황(虔晃) 14 명종(明宗) 경황제(景皇帝) 천복 天福 8069-872 29 현석(玄錫) 15 애황제(哀皇帝) 청태清太 8098-901 25 인선 8123(AD926)년 요에 의해 멸망. (멸망) 8123-926
51    옷차림의 특색 댓글:  조회:236  추천:0  2023-07-01
옷차림의 특색 조선민족의 옷차림은 자기의 발전행정에서 간단없이 개선되고 변화되였으며 민족적특색을 가지게 되였다. 예로부터 우리 민족의 조상들은 아한대지방에서 살았기에 옷차림도 내한과 내열에 알맞게 저고리, 바지, 치마, 겉옷, 쓰개, 신발 등으로 구성되였으며 여름에는 시원하고 겨울에는 따뜻하고 봄에는 화창하고 가을에는 청량하게 마련하였다. 또한 우리 민족의 조상들은 온돌에서 좌식생활을 해왔으므로 그 옷차림도 좌식생활에 알맞게 짜여졌다. 말하자면 녀자들의 치마는 폭이 넓고 길이가 길었으며 남자들의 바지 역시 폭에 여유가 있어 주저앉기와 서기에 편리하였고 걸터앉아도 보기 흉하지 않았다. 우리 민족의 옷은 체구와 조화되도록 지어졌다. 일반적으로 우리 조상들은 일체비례상 상체가 비교적 길고 하체가 상대적으로 짧았으므로 하반신이 긴 서양사람들의 양복과는 달리 웃옷(저고리)을 짧게 하고 아래옷(바지 혹은 치마)을 길게 함으로써 옷을 우리 조상들의 체격에 알맞게 조화시켰다. 특히 치마는 폭이 넓고 길이가 길어서 하체를 더 풍부하게 하는 것이 특징이다. 우리 민족의 옷은 일반적으로 몸의 선을 선명하게 나타내지 않고 자연스러운 옷의 선으로 몸의 선을 부드럽게 조화시키는 것을 중요시하였다. 우리 민족의 옷선은 단순하면서도 아름답고 세련된 그리고 민족적특색이 짙은 옷선이다. 우리 민족의 옷선은 직선과 곡선을 리용하였는데 옷고름 하나라도 그것이 실용가치를 가지게 하였을뿐만아니라 아주 자연스럽고도 우아한 선을 나타내게 하였다. 우리 민족의 옷선에서 직선이나 곡선 어느것을 막론하고 모두가 유기적으로 자연스럽게 배합되였으며 인공적인 무리감을 주지 않았다. 지어는 옷주름살같은것도 구김살을 보이지않고 조화롭게 만들어졌다. 사실 직선이란 선률적인 곡선보다 좀 딱딱하고 굳어보이지만 그러나 저고리에서는 곡선과 잘 배합되고 조화되여 선률을 이루는데 한결 더 운치를 돋구어주었다. 이를테면 녀자저고리에서 화장등선이라든가 뒤등골직선, 앞섶선 또는 끝동선 같은 직선들이 모두다 서로 어기고 곡선들의 도움을 받아 참으로 우아한감을 자아내고 있다. 그리고 저고리동정, 고대 또는 동정끝 꺾이선까지도 단아한 풍모를 보여주고 있다. 이와 같이 우리 민족의 옷선을 직선과 곡선의 대비방법으로, 때로는 십자형대비의 방법으로, 때로는 교차대비의 방법으로, 률동선으로 조화되게 한 것은 우리의 조상들이 사물조화의 원리를 잘 파악한 증거라고도 말할수 있다. 우리 민족의 옷선은 실로 아름다울뿐아니라 이런 옷선으로 특징되는 옷들은 강한 것 같으면서도 부드럽고 부드러운 것 같으면서도 강하고 단정해보이는 함축성과 깊이를 가지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예로부터 우리 민족은 흰옷을 즐겨입었다. 하여 우리 민족을 ,, 라는 말이 생겼다. 그렇다고 우리의 조상들이 꼭 흰옷만 입은 것은 아니였다. 처녀들은 노랑저고리에 분홍치마, 금박댕기를 늘여 개나리, 진달래를 나타내기도 했고 결혼한 부인들은 옥색저고리에 남색치마를 례복으로 입기도 했다. 그런데 우리 민족의 전통적인 옷은 많은 경우에 한 개 바탕(한가지 옷감-같은 색의 바탕)에 여러가지 색을 복잡하게 섞은 것이 아니라 되도록 단일한 색채로 그 특성을 두드러지게 나타내였다. 이를테면 한가지 옷감(같은 색의 바탕)에 무늬를 놓아도 동색으로 무늬를 놓아 진하고 연한 빛이 서로 어울려 아름다워보이게 하였다. 또한 우리 민족의 조상들은 옷색갈의 다채로움에도 류의하였다. 말하자면 색동저고리의 색배합을 보아도 5색이 령롱하게 그 하나하나의 채색의 특성을 그대로 보이면서 5색이면 5색, 7색이면 7색이 죄다 조화롭게 서로 합리적으로 배합되게 함으로써 다채로움과 화려성을 보여주었다. 상술한데서 알수 있는바 우리 민족의 전통적옷의 색갈은 매우 단순하고 간결하고 담박하고 우아하며 경우에 따라 다채롭고 화려한 것이 특색이다. 우리 민족의 전통적옷의 또 다른 하나의 특색은 사철옷이 기후의 각이한 특성에 알맞게 잘 마련되였다는 그것이다. 우선 겨울옷은 훈훈하고 포근하게 만들어 방한에 주의가 잘 돌려졌다. 봄옷은 화창한 기분을 돋구는 차렵옷, 겹옷 등이였다. 이를테면 봄철에는 꽃분홍이나 연보라, 연분홍치마우에 반회장저고리를 입었고 가을에는 봄철에 볼수 있는 더운 빛깔계통의 빛깔이 아니라 찬 빛깔계통의 색채 말하자면 더운 빛깔계통의 빛깔이 아니라 찬 빛깔계통의 색채 말하자면 진옥색 같은 빛깔을 맞추어 옷을 지어입었던것이다. 다음으로 우리 민족의 전통적인 옷빛갈은 절기의 자연조건을 떠나서 만들어진 것이 거의 없다. 만일 봄옷빛갈이 살구꽃, 배꽃, 복숭아꽃, 진달래꽃과 같은 꽃빛갈의 정취를 떠나지 않았다면 가을옷빛갈은 도라지꽃, 석죽화, 들국화, 산나리꽃 같은 경쾌하고 청상한감을 자아내는 그런 빛깔을 떠나지 않음으로써 옷과 자연이 서로 어울리도록 하였다. 여름옷의 경우도 례외가 아니다. 뜨거운 여름에는 시원한 느낌을 줄수 있는 옷감에 그런 색갈을 맞추어 옷을 지어입었다. 이를테면 여름에는 잠자리날개와 같은 한산세모시나 열두새 세부포나 꾀꼬리빛갈 같은 안동포로 치마와 적삼을 해입었던것이다. 모두어말하면 조선민족의 옷차림에는 조선민족의 고유한 성격과 기호가 반영되였으며 전통적인 옷 특히 녀자옷은 간편하고 활동적이며 단순하면서도 우아하고 산뜻하며 세련되였다. 하기에 우리 민족의 녀자옷은 지금도 자기의 생명력을 잃지 않고 자기의 우세를 자랑하고 있는것이다. 우리 민족 인민들은 옷차림을 단정하게 하는 것을 첫째가는 례절로 여기였다. 문밖을 나설 때면 꼭 옷매무시를 둘러보고 옷과 모자를 단정하게 손질하였다. 특히 손님을 맞을 때에도 외출할 때와 마찬가지로 옷차림을 단정히 하였다. 우리 민족 인민들은 웃옷을 벗은채로 손님을 맞는 일은 례답지 못한 것으로 여겼다. 언제나 깨끗한 것을 좋아한 우리 민족 인민은 옷이 더러워질세라 동정을 갈아달고 자주 빨아입었다. 그리하여 항상 단정하고 깨끗한 옷차림을 하여왔다.
50    상경룡천부 댓글:  조회:238  추천:0  2023-07-01
기행문]상경룡천부 160여년간 발해국의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지였던 상경룡천부옛성터(홀한성이라고도 함)는 흑룡강성 녕안시 발해진에 위치해있다. 3월 30일 이른 아침, 연길을 출발한 승용차는 4시간 여를 달려서야 발해진에 도착했다. 발해진에 들어서는 첫 어구에 옥수수술공장이 있는데 그 길목으로부터 외성이 시작된다. 외성은 방대한 평지성이였다. 성터우에 올라서서 사방을 바라보니 멀리 장광재령과 로야령이 아득히 보이는 사방 수백리의 평원지대였다. 상경룡천부외각으로 목단강이 흘러지나고 25킬로메터 떨어진 곳에 경박호까지 있으니 이곳은 수려하고 아름다운 황성옛터였음이 틀림없어보인다. 길가에 세워져있는 외성을 소개한 비문에는 외성의 길이는 18.5킬로메터, 평균높이는 2메터라고 적혀있었다. 시내길을 따라 곧추 들어가다 오른쪽으로 꺾어지는 길에 접어들어 조금 가니 바로 오봉루(일명 “오문”이라고도 함)라고 부르는 궁성정문이 보였다. 마당에는 상경룡천부유적비와 말을 매였던 돌들이 여기저기 세워져있거나 쓸어져있고 오른쪽으로 치우쳐 옛우물 하나가 있었다. 오문자리에 남아있는 기단은 6메터남짓 높아보이고 동서길이 60메터, 남북의 너비 20메터 남짓 되는것 같았다. 오문을 지나 뒤로 가보니 기단으로 오르는 계단이 있었다. 계단을 밟고 올르니 궁성내가 한눈에 안겨왔다. 잡초가 무성한 가운데 원모습 그대로거나 보건된 궁전터들이 쭉 늘어서 있었다. 한무리의 양떼들이 궁성내에서 뛰여다니면서 풀을 뜯고있었고 어디선지 경운기가 통탕거리는 소리가 들릴뿐 궁성은 자못 한적해보였다. 발밑을 내려다보니 수십개의 웅장한 초석이 단단히 박혀있었다. 그 초석이 받쳐주는 기둥에 루각이 건축되였겠으니 얼마나 웅위로웠을가. 궁성은 발해왕실의 거주지인 동시에 국가의 통치권력을 행사하던 곳이다. 오문에서 내려 200메터쯤 들어가니 제1궁전자리였다. 기단을 쌓은 돌은 옛돌 그대로 보였다. 기단의 높이는 3메터, 길이는 56메터, 너비는 25메터였다. 밖으로 돌을 쌓고 안에 흙을 다진 기단우에는 대형원형초석이 묻혀있는데 56개가 건재해있었다. 그 초석을 딛고 궁궐이 일어섰겠으니 그 웅위로움 또 얼마나 가관이였겠는가. 5개의 궁전이 한 개의 중추선우에 배렬되여있는데 제1궁전과 제2궁전사이는150메터, 제2궁전과 제3궁전 사이는 130메터, 제3궁전과 제4궁전 사이는 30메터, 제4궁전과 제5궁전 사이는 80메터였다. 궁전터 일부는 복원되였지만 더러는 기단이 허물어진 상태의것들이였다. 물론 궁전의 전각들은 모두 소실되여있고 기단우에는 원형모양의 초석들만 박혀있었다. 궁전터사이의 공지는 경작지로 리용되고있었다.궁전터곁이거나 밭머리에는 궁전터에서 주은 기와파편을 쌓아놓은 커다란 무지가 여기저기 있었다. 제2궁전자리의 동쪽에 “팔보유리정”이라는 패말이 세워져있는 옛우물이 있었다. 우물은 정자로 보호되여있었다. 돌을 던져보니 마른 우물이였다. 때마침 양치기늙은이가 다가와서 물었더니 이 우물은 원래 꿀은 탄것처럼 달고 시원한 샘이 솟는 우물이였다고 한다. 마을의 장난꾸러기 아이들이 돌과 나무가지를 무작정 던져넣어 지금은 페우물이 되었다는것이였다. 아쉬운 일이였다. 이상하게도 궁성내의 많은 고목이 말라죽고있었다. 다가가보니 나무밑턱을 누군가 둥그렇게 칼로 파놓아 우정 죽게 한것이였다. 한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까 오봉루에서 듣던 경운기소리는 제5궁전곁의 넓고 기름진 밭에서 들린것이였다. 농부들이 경운기로 한창 밭갈이를 하고있었다. 외성내에 있는 남대묘에 보전되여있는 석등탑 또한 유명한지라 이리저리 물어서 찾아가보았다. 석등탐은 발해시기 많은 유적, 유물 가운데서 가장 뛰여나고 잘 알려져있는 불교조각품이다. 이 탑은 현무암으로 만든것인데 밑부분은 지대석우에 복련화문을 조각한 하석대를 올려놓은 양식으로 만들고 그우에 원주형으로 된 간주석을 세웠으며 간주석우에는 양련화문을 조각한 상대석을 올렸다. 그우에는 8개의 창문과 16개 구멍을 낸 화사석을 놓았고 그우에는 8각의 옥개석이 올려져있다. 옥개석우의 상륜부는 7층의 보륜을 장식하였다. 석등탑의 높이는 5메터남짓 되어보였다. 탑은 능히 뜯을수도 있고 조합할수도 있다고 한다. 비록 천년동안의 비바람을 맞았지만 발해인들의 창조적이고 천재적인 재능에 기대여 오늘까지도 꿋꿋한 자태를 자랑하는 모습 멋지기만 하다. 외성의 흥륭사에 보존되여있는 대석불 또한 발해시기의 유명한 유물이라고 하는데 이날 유감스럽게 가보지 못했다. 발해는 818년 10대 선왕(830년까지 즉위)이 최고 흥성기를 이루었다. 선왕은 내분을 수습하고 대외정복활동을 벌여 발해력사상 최대의 령력을 확장했다. 중국의 사서 “신당서” 발해전에 서술한 사방 5천리땅내에 설치한 5경 15부 62주의 행정구역은 이때에 완비했던것이며 세상은 이를 두고 해동성국이라 불렀다. 상경룡천부는 755년부터 785년까지 30년간, 그후 성왕 대화여시기에 도읍을 다시 길림성 훈춘의 동경룡원부로부터 옮겨 망할 때까지 132년간, 도합 162년동안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지였다. 그러나 698년 대조영이 돈화의 동모산에서 일으켜 오동성, 중경현덕부(길림성 화룡시 서고성), 동경원룡부(길림성 훈춘시 팔련성)를 거쳐 상경룡천부에 이르기까지 228년동안 15대 왕을 이어오던 발해는 926년 내분과 자연재해(지진), 거란의 외침에 의해 망하게 된다. 발해의 흥망성쇠를 생각하니 귀로의 차안에서 밖을 바라보는 마음 저으기 안타깝기만 하다. 160여년의 력사와 문화의 숨결이 묻혀있는 상경룡천부, 궁성안에 당나라 장안성을 본딴 주작대로까지 건설해놓고 고관대작을 거느리던 황포의 발해사나이와 궁궐을 수놓았을 어여쁜 발해녀인들의 웃음, 대륙을 주름잡았을 발해의 무적의 장수들… 그들은 지금 어디에서 자신들이 엮었던 찬란한 꿈을 되돌아보고있을가. 발해진에서 멀어지는 차안에서 바라보는 홀한성의 외성은 시내를 멀리할수록 오히려 더 뚜렷히 눈에 안겨온다. 상경룡천부옛터는 참으로 웅장하고 기품이 있는 도읍지자리였다.
49    호태왕비 댓글:  조회:247  추천:0  2023-07-01
호태왕비(김철호) (사진은 1998년에 찍은 호태왕비이다.) 집안시고구려유적답사.5 ㅡ힘찬 남성을 방불케 하는 6.39메터의 거대석 우뚝 솟은 웅장한 기세와 힘찬 남성을 방불케 하는 호태왕비을 바라보노라면 우선 그 거대함에 압도당하게 된다. 집안시 태왕향 태왕촌에 세워져있는 호태왕비는 고구려 제20대 장수왕이 부왕 담덤(淡德) 즉 호태왕의 공로와 수묘인의 관리제도를 알리기 위해 세운 비석이다. 호태왕은 고구려 제19대 왕인데 호는 령락태왕, 시호는 국강상관개토경평안호태왕이다. 18세에 등극하여 39세에 작고하기까지 22년간 64개의 성과 1천4백개의 촌락을 정복하면서 서북으로 료하를 넘어 료서지방을 공략하고 북으로 잔존촌락을 모두다 통합하였다. 남으로 백제를 공격하여 조공을 받았으며 한강계선의 백제령토를 점령하였다. 한편 동남으로 신라를 위압하여 또한 조공을 바치게 하였으며 락동강하루지방의 가야족에 침입해온 왜족을 격퇴시키면서 광대한 지역에 세력을 떨친 고구려에서의 가장 걸출한 국왕이다. 비석은 높이 6.39메터, 각면의 너비 1.3ㅡ2메터 사이이고 중량이 37톤이나 되는 하나의 방추체자연형모양의 회색 응회암(凝灰岩)의 화산석을 조금 다듬어서 만든것이다. 석좌(石座) 역시 거대한 화강석으로 다져졌는데 보매 원래는 한덩이였댔으나 어떤 원인으로 깨여져 지금은 세쪽으로 되였지만 의연히 땅에 단단히 배겨있으면서 비석을 굳게 받들고있었다. 호태왕비의 석재는 모래구성이 있는 응회암으로서 이런 종류의 석재는 오직 화산구부근에서만 발견되는 돌이다. 집안경내에서는 이와 같은 돌이 나는곳이 없다. 그러니 가능하게 백두산천지주위에서 채굴하여 옮겨온것으로 사료된다. 머리속에 거대석재를 운반하는 장면을 상상만 해보아도 저절로 혀가 차진다. 애급의 금자탑을 세우는 그 장면과 뭐가 다를바가 있겠는가. 또 37톤이나 되는 거석을 들어 올릴수 있는 설비도 없었던 그 시기에 이 돌을 어떻게 세웠으며 무슨 수로 1580여년의 자연계와 인류사회의 온갖 풍파를 겪으면서도 끄떡 않게끔 고정해놓았을가. 그리고 사면 석면에는 어떻게 글을 새겼고… 비석은 1면에 11줄, 2면에 10줄, 3면에 14줄, 4면에 9줄 이렇게 모두 44줄의 글자를 새겨넣었는데 한줄에 41자가 새겨져 1804자가 되겠으나 결자가 생겨 실제로는 1775자이다. 줄과 줄사이에는 세로로 칸을 나누어 선을 그었으며 좌로부터 우의 순서에 따라 정방형으로 조각하였는데 글씨의 크기는 손만큼 했다. 《옛날에 시조 추모왕이 고구려를 세울 때 북부여에서 왔노라. 그이는 하느님의 아들이요, 어머니는 하백의 딸이였노라. 알을 깨고 출생하매 원래부터 성스러운 덕이 있었노라…(惟昔始祖鄒牟王之創基也, 出自北夫餘, 母河伯女郞, 剖卵降世, 生子有聖德…)》 이렇게 고구려의 건국신화로터 서술되여있는 비석에는 왕위의 계승과 전쟁업적, 조상의 묘를 지키고 생계를 유지하는 등 당시의 당부까지 까근히 기록되여있어 그야말로 고구려력사를 연구하는 진귀한 자료가 아닐수 없다. 15세기 좌우, 조선의 사람들은 압록강 건너편에서 이쪽을 바라보면서 이 거대석을 금나라 황제의 묘비가 아닐가 의심했다고 한다. 그러다가 1870년에 와서야 당지 채벌농민들에 의해 이끼가 차고 넝쿨이 덮인 선돌로 발견되여 소문이 났는데 청나라 화인현 현지사 아래에서 일하는 관원 관월산(關月山)이라는 사람에 의해 그 깊이가 파지게 된다. 관월산은 돌에 낀 이끼를 뜯다가 뜻밖에도 글이 새겨져있는것을 발견하고 미칠듯이 기뻐했다고 한다. 그는 탁본을 만들려고 했지만 이끼가 덮여 도무지 되지 않아 겨우 뜯어낸곳에서부터 몇글자를 탁본할수밖에 없었다. 그는 탁본한것을 친구들께 선물로 주기도 했다고 한다. 그후 사람들은 우분, 마분을 바르고 마른후 불을 달아 이끼를 없애고 탁본을 만들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그때 불에 달구어지면서 돌이 튀는 바람에 귀중한 몇글자를 손상받게 되였다. 찬찬히 바라보니 불에 튄것 같은 자리와 금이 선곳이 보였다. 우리의 안내를 맡은 태왕체창시자이며 태왕체서예학회 회장인 진유국씨는 호태왕비의 서예에 대해 이렇게 설명해주었다. 《호태왕비의 서법은 소박하고 무게가 있으며 웅위롭고 대범하며 안정된 산과 같이 드맄없이 자연스러우면서도 호방하다.》 호태왕비건립년대는 기원 414년, 바로 중국의 동진시대로서 진나라 황실이 남하하면서 남북이 대치하는 국면이 형성된 시기이다. 이로인해 중원지구가 계속 전화를 겪고 황실이 흔들리자 이 혼란한 틈을 타 고 구려가 이 지역에서 신흥력량을 이루었다. 고구려정권이 형성된후 무력이 끊임없이 증강되고 령토 역시 부단히 확대되여 직접 황실까지 위협하자 진나라 조정에서는 고구려에 많은 군사를 파하여 토벌과 진압을 단행했으나 이러한 전쟁은 오히려 고구려로 하여금 더욱더 정치경제의 높은 봉우리로 밀어올려주었을뿐이였다. 또 이 전쟁은 중원의 서법예술을 북방에 전달하는 역활을 하여 고구려민족의 기질과 상호 융합되게 한것이다. 호태왕비는 고구려의 형성과 발전의 력사를 탐색하는데 극히 중대한 사료를 제공해주는 자료보고(寶庫)이며 고구려민족의 지혜가 슴배인 건축예술의 명주이다. 호태왕비는 압록강 푸른물을 바라보면서 고구려의 유풍을 영원히 보존하는 기념비로 솟아 세인들을 불러들일것이다. 우리들은 경탄의 마음을 가까스로 누르면서 호태왕비를 우러러 크게 머리를 숙였다. 연변일보 1999년 3월 26일
48    화려한 고구려고분벽화 댓글:  조회:179  추천:0  2023-07-01
기행문]화려한 고구려고분벽화 집안시고구려유적답사.4 ㅡ1400년 추월추풍에도 색바래지 않은 고구려고분벽화 길림성 백산시문물관리소에서 일하고있는 태왕체창시자이며 태왕체서예학회 회장인 진유국씨가 이날 우리를 인도해 오회분탐방을 진행했다. 진유국씨는 다년간 고구려유적에 대해 깊이 탐구한 한족학자로서 집안의 유적지를 들고꿰는 사람이였다. 오회분참관도 금지되여 있는 상황이었지만 관리일군과 막연한 사이였는지라 손쉽게 기회를 가질수 있었다. 그 덕분에 우리는 묘에 대한 시간적 제한없는 참관을 할수도 있었다. 아래에 서술되는 묘실에 대한 묘사와 벽화에 대한 묘사는 진유국씨가 그날 구체적이고 생동하게 설명해주어 가능했었다. 또 그가 다년간 연구한 자료와 《집안문물지(集安文物志)》가 큰 도움을 주었다. 통구고분군 우산묘구에는 5기의 높고 큰 봉토묘가 있는데 동서 한일자로 배렬되여있고 5개의 큰 투구같기때문에 이곳 사람들은 오회분(五盔墳) 또는 오괴분(五塊墳)이라고 부르고있다. 오회분은 통구평원중부 우산묘구 최남단에 위치해있는데 남면은 철도주택구이며 북면은 논밭이다. 남으로 집안역과 350메터쯤 떨어져있고 서에서 동으로 다섯번째 묘가 바로 5호묘인데 민간에 유일하게 개봉한 벽화무덤이다. 이 묘는 항일전쟁때 이미 도굴다했었다. 바깥문을 따라 묘도에 들어서니 넓은 공간이 있고 묘실로 인도하는 용도(甬道)좌우에는 힘찬 력사(力士)가 그려져있었다. 한사람은 활에 살을 먹여 당기고있고 다른 한사람은 손에 창을 쥔채 묘실을 지키는 모습이였다. 순간 묘실안은 신비로운 분위기에 싸이면서 종교적성역에 들어선것 같은 착각이 오는것 같았다. 묘실의 평면은 반듯한 정방형으로 동서길이 4.37메터, 남북 너비 3.56메터에 정교하게 다듬은 큰 화강암석재로 쌓았고 백회로 틈을 메웠다. 네벽은 높이가 2.18메터로 약간 안으로 경사졌고 그 우로 량방(樑枋)을 바로 두었다. 량방우는 말각천정으로 교차되는 구조이며 맨 우는 반듯한 돌로 천정을 막았다. 묘실의 높이는 4메터쯤 되여보였다. 묘실안에는 세개의 돌로 된 관대를 두었는데 동서로 배렬되였다. 관은 없고 텅빈 관대만이 남아았었다. 용도 좌우벽을 비롯해서 묘실 네벽, 천정에 화려한 벽화가 그려져있었는데 그 절묘하고 신비로움에 저절로 탄성이 터져나왔다. 벽화는반듯한 석재 암면우에 직접 그려졌는데 찬란하고 다채로우며 화려하고 웅장했을뿐만아니라 뛰여나고 류창했다. 묘실 네벽에는 큰 폭의 사신도(四神圖)가 그려져있어 전체 벽화의 주체를 이루고있었다. 머리는 남을 향해 치켜세우고있는 자태인데 황, 록, 홍갈색을 입혔다. 사지는 흰 날개가 달려있고 발톱은 예리했다. 이 묘의 벽화중에는 룡이 모두 39마리 있다고 한다. 서벽에 그려져있는 벽화는 남으로 뛰여나오는 자세였다. 몸은 백색이고 묵선으로 얼룩무늬를 묘사했으며 복부는 분홍색이였다. 다리뒤에 흰 날개가 달려있었다. 남벽은 용도를 사이에 두고 동서 량단으로 나누어지는데 각각 주작을 한마리씩 그렸다. 부리는 뾰족하고 가늘며 붉은 색은 불타듯 강렬했다. 몸은 홍색, 꼬리와 날개는 황색, 홍색으로 구분되여있었다. 머리를 치켜들고 서로 마주보며 복판 련화자에 서있는 모습이 금방 날개치며 날아갈것만 같았다. 북벽은 현무(玄武)인데 거북과 뱀이 뒤엉켜있었다. 거북은 몸은 서쪽으로 향하면서 머리를 돌려 우를 향하여 아래로 뻗쳐있는 뱀머리와 상대하고있었다. 묘실 네귀퉁이에는 괴수가 천정기둥을 받치고있는데 모두 짐승얼굴에 사람몸이였다. 뿌리있는 라체였다. 신비하고 상징적인 주제를 합리적인 배치와 보완적인 배렬을 통해 현란한 색채와 동중정(動中靜)의 붓길로 표현한 기교에 저절로 혀가 차졌다. 벽화의 다른 부분의 내용은 신선, 우인(羽人), 비천(飛天)으로 천정석말각에 교차된 천정우에 그려졌다. 첫번째 천정석의 4면에는 각각 룡이 한마리씩 그려져있는데 발은 량방에 서있고 배와 등은 천정끝에 닿아있었다. 입은 크게 벌려져있어 마치 석벽우의 작은 구명을 물고있는것 같았다. 구멍안에 백회흔적이 보이는것으로 미루어 진주거나 옥석같은것을 상감으로 장식했었지 않았을가 짐작된다. 동남면 말각석우에는 오른쪽으로 소머리를 한 사람과 비천이 있었다. 소머리를 한 사람의 눈은 송록석(松綠石)을 상감했고 몸체는 선인의 형태로 갈색의 깃이 뽀족하고 소매가 넓은 옷을 입었고 허리에는 록색의 천이 졸라매여져있었다. 오른 손에는 벼이삭을 쥐고 뒤를 향해 무엇인가를 부르고있었다. 그 뒤는 비천인데 머리를 풀어헤치고 코수염을 길렀다. 황색의 깃이 뾰족하고 소매가 긴 도포를 입었는데 오른 손에는 홰불을 들고있었다. 동북에는 복희, 여와의 일월신이 그려져있었다. 동방의 천지창조신이다. 서북에는 룡을 탄 선인과 나는 기발을 탄 사람이 그려져있었다. 서북에는 수레바퀴를 만드는 제륜신(制輪神)이 있다. 그리고 제륜신의 오른쪽에는 갈색의 긴 우의(羽衣)를 입은 사람이 보리수아래에서 허리를 굽히고 무언가를 조작하고있는데 틀림없는 야철신(冶鐵神)이다. 고구려 제철업의 일단을 보여주기도 하는 벽화이다. 두번째 천정석의 각면에는 룡을 타고 앉은 기악천인(伎樂天人)이 그려져있었다. 천정석아래와 천정의 두껑돌에는 몸을 틀고있는 룡 또는 룡호상박의 그림이 그려져있었다. 추상적인 소재의 현실적인 표현은 그야말로 조화의 극치를 이루고있었다. 진유국선생의 소개에 따르면 이 묘의 벽화에는 원래 도금무늬가 입혀져있었고 조수(鳥獸)의 눈은 청옥(靑玉)으로 상감되여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지금은 한 선인의 오른쪽 눈에 송록석이 박혀있는 외에 그 나머지 상감물은 존재하지 않고 그저 상감을 입힌 흔적만 있을 따름이였다. 봉토의 규모, 화면내용의 풍부하고 화려함으로 볼 때 이 묘임자는 고구려왕족임이 틀림없다. 그리고 굉장한 묘실구조와 완숙한 회화기교로부터 고구려인들의 뛰여난 재능을 충분히 볼수 있었다. 1400년의 추월추풍속에서도 의연히 생동한 색채를 보존하고있는 벽화를 우러르노라니 한편 고구려는 강대한 국력을 갖고있는 문화의 대국이였겠다는 생각이 들면서 가슴이 뿌듯해났다. 연변일보 1999년 3월 23일
47    동방의 피라미트ㅡ장군총 댓글:  조회:175  추천:0  2023-07-01
[기행문]동방의 피라미트ㅡ장군총 집안시고구려유적답사.3 피라미트형의 고분 장군총(將軍塚)은 집안시교의 동북쪽 5킬로메터쯤 상거한 룡산기슭에 우뚝 솟아있다. 마주하는 순간 애급의 피라미트를 바라보는것 같은 착각이 들면서 누구라 없이《금자탑!》하고 부르짖게끔 웅위롭기 한량없는 고구려의 적석고분이였다. 뭇박힌듯 우두커니 서서 그 장엄함에 매혹되여 련속 경탄을 터치는데 예쁘게 생긴 안내원 한족아가씨가 장군총에 대해 까근히 해설해주었다. 장군총의 외형은 잘 다듬은 화강암을 사용하여 방형 7단의 피라미드형으로 만들었는데 바닥밑변 한변의 길이는 35.6메터, 높이는 12.4메터 된다. 웃부분은 뽀족하여 면마다 보호하기 위한 큰돌이 세개씩 세워져있다. (12개 받침돌가운데 1개가 잃어져 지금은 11개가 남아있다.) 1100여개의 세밀히 가공된 석재가 사용되였는데 가장 큰 석재의 길이는 5.7메터, 너비는 1.12메터, 두께는 1.10메터나 되였다. 장군총에서 서북 20킬로메터 떨어진 양차향 고대촌 상록수다리부근에서 고구려채석장 하나를 발견했는데 장군총석재와 석질이 똑 같다고 한다. 지금도 정자리가 또렷한 돌과 채 다듬지 않은 석재가 널려있는 채석장은 장군총석재의 원지임이 틀림없다고 하니 돌을 캐여 현지에서 잘 다듬은후 20킬로메터의 험하고 가파로운 산길을 운반했음이 분명하다. 여름의 땡볕에 그을고 겨울의 한풍에 얼면서 선혈로 이룩한 고루려사람들의 장거이다. 맨 밑층의 석재는 허리께를 넘었다. 잘 드는 칼로 썩둑 벤든 곱게 다듬은 석재를 손으로 쓸어보니 너무도 깔끔했다. 정자리 하나 없이 다듬느라니 얼마마한 정력과 지혜가 들었으랴. 자그마한 오차도 없이 모가 딱 맞게 다듬은 석재는 현대도구로 가공한대도 이렇게 바를수가 있을가. 작은돌 무게 15톤 릉묘의 무너지을 방지해 기대여놓은 보호석은 다듬지 않은 자연석이였는데 높이가 3.5메터쯤씩 되여 보였고 가장 작은 돌의 무게가 15톤 넘는다고 한다. 이러한 장대석을 받쳐놓은 곳은 지금도 평형을 잡고있는 반면 하나 잃어져있는 뒤면 오른쪽 벽은 돌의 틈새가 벌어지면서 곧 무너져내릴것만 같았다. 참으로 멋으로 기대여놓은 장대석이 아니라 1600여년의 세월을 버티여주게 한 기둥석이였구나 하는 생각이 들면서 고구려사람들의 건축공예에 다시 한번 혀가 차졌다. 다섯번째 층에 묘실까지 통하는 구명이 나있는데 일찍 도굴당할 때 낸 구멍자리라고 한다. 거대의 암석을 어떻게 깨고 들어갔는지가 의문이다. 서늘한 기운이 풍기는 묘실에 들어서니 길이와 너비가 5메터쯤 되고 높이가 그보다 좀 더 높아보이는 널방에 장방형 석관좌가 두개조로 나뉘여져있는것이 보였다. 왕과 왕후의 관을 놓았던 자릴일것이라고 한다. 이 무덤의 서남쪽 1킬로메터쯤 되는 지점에 관개토왕비가 서있어 이 무덤이 가능하게 광개토왕릉묘라고 하는 일설도 있으나 아직 고증이 확실치 않아 어느 왕의 릉묘인지 모르나 확실히 왕의 릉묘인것만은 사실인것 같았다. 고구려벽화무덤의 기원을 3세기무렵까지 밀고올라갈수 있다고 하니 이 적석총은 그 이전의 무덤이 아닐가 생각된다. 빤빤한 묘실벽에 한점 벽화도 그려저있지 않은건 묘주의 신분이 낮아서가 아니라 아직 그러한 문화가 도래되지 않았기때문일것이다. 탄성이 나오는 암괴 묘실의 정상부는 한개의 통 암괴로 덮였는데 60평방메터의 50톤 되는 돌판이라고 한다. 저런 암괴를 어떻게 얹었을가. 탄성이 나오지 않을수 없다. 그 돌판을 버티게 쌓은 묘실벽은 가쯘히 다듬은 석재로 6층되게 쌓아올렸는데 귀가 딱맞고 틈서리가 조금도 없이 맞물려있었다. 묘실을 나와 무덤꼭대기에 오르면 회색무늬의 기와쪼각 같은것을 손쉽게 주을수 있었다. 네면 가장자리의 돌에 인공으로 다듬은 기둥구멍이 일정한 간격을 두고 질서있게 많이 뚫려있는데 보아하니 전각을 세웠던 자리인것 같았다. 고구려의 대형적석묘 웃부분에는 건축물이 축조되여 있었다는 기재도 있으니 전각이 세워졌댔음이 틀림없어 보인다. 장군총뒤의 북쪽 50메터쯤 떨어진 곳에 순장무덤 한자리가 있는것이 보였다. 그 형태는 돌기초우에 세운 돌막이였다. 이런 무덤이 원래 다섯자리 있었다고 하나 지금에 남아있는것이 이것 하나뿐이다. 역시 도굴당해서 이쪽에서 저쪽으로 빤히 내다보일만큼 구멍이 펑 뚫려있고 한모서리가 허무러져내리기까지 했다. 태양이 면바로 직하하고있는 점심때쯤이라 장군총꼭대기에 름름히 서서 허리에 손을 찌르고 사위를 둘러봄이 사뭇 위무당당한 기분이였다. 무덤의 방향은 정면이 서남이 되도록 되여있고 네 모서리가 각각 동서남북을 가리키고있었다. 북쪽으로 룡산을 등지고 남쪽을 바라보니 비탈에 옹기종기 모여있는 촌락들과 조선의 군산이 눈에 잡혀온다. 이 땅에 살면서 위대한 문화를 창조한 고구려사람들의 뜨거운 숨결이 금방 피부에 닿는것만 같았다. 연변일보 1999년 2월 22일.
46    동북아의 찬란한 문화의 중심지 환도산성 댓글:  조회:199  추천:0  2023-07-01
기행문]동북아의 찬란한 문화의 중심지 환도산성 환도산성전경 집안시 고구려유적지답사.2 환도산성은 국내성에서 2.5킬로메터 떨어진 환도산에 위치해 있다. 삼국사기에《유리왕 22년(기원 3년) 수도를 졸본ㅡ오년산성에서 국내성으로 옮기고 위나암을 쌓았다》고 기록돼 있는데 위나암이 바로 환도산성이다. 환도산성은 동북쪽에서 서남으로 이어져내려 압록강북안의 여러 산봉우리들을 거느리고있는 장백산계 로령산맥의 산악에 위치해 있다. 웅장한 암산(岩山)을 타고 축조되여 남향개면(南向開面)하였고 고구려산성의 특징인 포곡형(包谷形)으로 골짜기를 끌어안은 모양이 보기에도 마음이 무거워나면서 걸음마저 들떠졌다. 여기가 바로 만주땅을 호령하고 중원까지 힘줄을 뻗치면서 동북아의 호랑이로 틀고앉았던 고구려제국의 발전기지였단 말인가. 옹성을 가진 성문이 있었다는 남문유적지를 쑥 꿰면서 곧바로 성내로 걸어들어가는 마음이 자꾸만 설레이였다. 발부리에 걸채이는 허무러진 성벽의 돌들, 여기저기 널려있는 기와파편을 바라보노라니 탄성이 절로 터졌다. 환도산성은 국내성의 외각에 있던 군사수비성으로 국내성과 거의 동시에 쌓은것으로 판단되고있다. 고구려는 수도근처에 반드시 일종의 대피하거나 장기전쟁을 대비하기 위한 수비성을 두고 때로는 수도로 쓰기도 하였다. 환도(丸都)는《알맹이》라는 뜻이다. 즉 중핵도시란 의미와 함께 수도를 가리킨다. 그러니 우리가 한창 밟고있는 이 땅이 거의 2천년전부터 400여년을 고구려문화를 형성하고 그 빛발을 만방에 뽐냈던 황성옛터인것이다. 남문을 금방 통과한후 곧추 바라보니 옹성북쪽에 산 같아보이는 둔덕이 눈에 띄였다. 전투지휘소로 알려지는 점장대라는것이다. 바로 그 둔덕의 동남쪽에 50평방메터쯤 되여보이는 작은 늪이 멀리서도 파란 물기를 반뜩이고있는데 유명짜한《음마지(飮馬池)》라고 한다. 고구려 제3대 임금 대무신왕(재위 기원 18년ㅡ44년) 11년 7월, 한나라 료동태수가 군사를 거느리고 공격해왔다. 왕이 여러 신하들을 모아놓고 대전방안을 짜는데 좌보(左輔) 을두지가 맞서싸우자는 다른 사람의 의견을 접어놓으면서 수적으로 렬세이기에 꾀로 물리쳐야 한다고간했다. 왕은 을두지의 계략에 머리를 끄덕인후 성문을 굳게 닫고 적들의 군사가 피로해지기를 기다렸다. 수십일을 굳게 지켰으나 적들이 도무지 포위를 풀려고 않자 급해난 왕이 다시 을두지에게 계략을 물었다. 이에 을두지는 한나라군사들은 오래동안 포위함으로써 우리들이 견뎌내지 못하기를 기다리고있으니 못속에 잉어를 잡아서 술을 곁들여 한나라 군사들에게 보내는것이 좋겠다고 했다. 한나라 군사들은 과연 잉어와 술을 받고는 곱다라니 포위를 푼후 퇴각해버렸다. 성안에 물과 고기, 량식이 충족한줄로 여겼던것이다. 이런 유명한 사화의 산지인 음마지를 바라고 금방 가을밭갈이를 마친 밭사이를 꿰지르는 걸음이 급하기만 했다. 마른 풀에 둘레를 가리우고있는 작은 늪은 대군의 식수원으로는 천만 부족했다. 잉어인것이 아니라 미꾸라지도 기르기엔 지금엔 힘든 늪이였다. 그러나 늪가에 앉아 맑은 물에 손을 잠그고 지략이 넘치였던 고구려장군의 충혼을 빌기에는 마음이 넉넉하기만 했다 음마지에서 자리를 떠 높이 11ㅡ12메터쯤 되여보이는 점장대에 올라서니 압록강으로 흘러가는 통구하와 집안시의 한모퉁이가 눈에 들어온다. 여기서 산성의 지형이 더욱 눈에 잘 안겨왔다. 자연이 만든 봉우리들의 등성이를 리용하여 석축된 산성은 동, 서, 북의 3면은 거의 반원형을 이룬 험준한 암산릉선을 돌아가기때문에 성외는 깎아지른듯한 절벽이고 안으로는 넓다란 언덕을 이루며 남벽만이 지세가 낮아진 강안절벽우에 있어서 천연적으로 키모양을 이루고있었다. 10만명을 능히 주둔할만큼의 장소였다. 성벽 총둘레가 길이가 6951메터, 가장 높은 봉우리가 해발 676메터이다. 성안에는 4ㅡ5세기에 만든것으로 보이는 36기의 무덤이 남아있고 주추돌이 줄지어놓여있는 3개의 건물터가 있는데 아직도 고구려의 기와와 유물들이 많이 발견되고있다고 한다. 동쪽 그닥 높지 않은 릉선우에서 바깥쪽을 바라보니《산성하고분군》이 한눈에 잡혀왔다. 아름다웠다. 아니, 웅위로웠다. 세계에서 가장 큰 고분군의 하나인 산성하고분군은 한폭의 거대한 화폭처럼 눈앞에 펼쳐졌다. 이 환도산성주변에만 무려 4700여기의 고분이 있으며 집안지역 전체에는 1만2000여기가 있다고 한다. 작은 고분도 있지만 직경이 60메터 넘는 엄청난 크기의 고분도 적지 않다는것이다. 이같이 거대한 고분군은 고구려의 문화수준과 함께 경제력도 뛰여났음을 시사해준다. 고구려를 위대한 나라로 만든 강한 힘은 과연 무엇이였을가. 700여년 강국으로 존속할수 있은 그 위대한 힘의 뿌리는 어디에 있었을가. 고구려는 강한 군사력으로 대외팽창을 강행했으며 특히 광개토왕과 장수왕시기는 동북아세아의 력학관계가 급변하면서 다중방사상(多重放射狀)외교라는 복잡한 신질서가 구축됐다. 이 틀속에서 고구려는 지리적리점과 황해의 해양활동권을 활용해서 중핵조정자로서의 역활을 했다. 5ㅡ6세기경의 고구려령토에는 동만주와 연해주일대의 수렵삼림문화, 동몽골과 북방방면의 유목문화, 화북에서 올라오는 한족의 농경문화, 해양을 통해서 들어오는 해양남방문화 그리고 조선반도 남부의 문화 등이 하나로 모였다. 그러니 고구려가 동북아세아에서 가장 다양한 문화가 집결된 중심지였다는 얘기다. 이러한 문화가 군사력과 경제력을 우쩍 키워 고구려제국의 찬란한 력사를 이룩했을것이다. 연변일보 1999년 1월 28일
45    고구러의 두번째 도읍 국내성 댓글:  조회:198  추천:0  2023-07-01
기행문]고구러의 두번째 도읍 국내성 ㅡ집안시 고구려유적지답사.1 기원 3년부터 400여년간 고구려의 두번째 수도로 그 력사를 짙에 수놓았던 압록강중류지역 집안시, 고구려 제2대 유리왕때 졸본 또는 홀성골성에서 천도한 국내성(國內城)의 초로한 잔해는 집안시내 주택가의 아빠트단지에 포위되여있었다. 유적은 지상 2메터 정도까지 돌이 남아있을뿐 볼품없이 방치돼있어 마주선 마음이 쓰리고 아팠다. 장방형의 석재로 5메터 높이의 성벽을 거의 2700메터나 쌓았다는 웅기의 풍치는 어데로 가고 페허를 방불케 하는 돌각담으로 남았을가. 국내성은 동쪽의 룡산, 북쪽의 우산 그리고 서쪽으로 통구하를 건너 칠성산으로 둘러싸여있고 남쪽으로는 압록강이 유유히 흐르는 풍수상 전형적인 배산림수(背山臨水)의 지형, 지키기는 쉬우나 공격하기 어려운 천험의 요새요 천혜의 도읍이였다. 서쪽과 남쪽의 천연적인 해자(垓子)외에도 동쪽과 북쪽의 성벽을 따라 건해자(乾垓子)의 흔적이 있는데 폭이 10메터쯤에 이르렀으나 시가지로 형성되면서 흔적이 거의 없이 메워지기도 했다. 이러한 천혜의 땅을 도읍으로 정한 유리왕은 어떤 사람인가. 기원전 37년, 북부여의 기성세력의 등쌀에 배겨낼수 없었던 고구려시조 주몽은 단신으로 탈출, 졸본(卒本)에 고구려의 첫 도읍을 세우고 동명성왕(東明聖王)이 되였으나 아들 유리는 어머니 례씨와 함께 부여에 남아 남들로부터《애비없는 후례자식》이라는 대접을 받아야 한다. 아버지의 신상을 지꿎게 따지는 유리의 물음에 어머니는《일곱모진 바위돌우의 소나무아래에 유물을 묻어두었으니 그것을 찾아가지고 오면 아들로 인정하겠다》는 떠날 때 한 아버지의 말을 전한다. 유물을 찾아 산과 물을 샅샅이 뒤지다가 결국 자기 집 퇴마루밑에서 일곱모진 주출돌과 주추돌우에 세운 소나무기둥을 발견하고 거기서 부러진 칼토막을 찾아가지고 아버지를 찾아가 끝내 태자로 된후 왕업까지 이어받는다. 유리왕 21년 3월에 나라의 교제(郊祭)에 쓸 됒가 달아났다. 옛날 고구려사람들은 돼지를 신에게 바치는 례물임과 동시에 국도를 정해주거나 왕위를 이을 아들을 점지해주는 신통력을 지닌 짐승으로 인정했다. 그러한 돼지가 달아났으니 큰일이 아닐수 없었다. 왕은 장생(掌生) 설지를 시켜 돼지를 쫓아가게 하였더니 국내 위나암(國內尉那岩)에 이르러 돼지를 붙잡아 국내 사람의 집에 가두어 기르게 한후 돌아와 아뢰기를 국내위나암은 산이 험하고 물이 깊으며 땅은 오곡을 키우기에 마땅하며 또한 노루와 고라니와 자라와 물고기가 많이 나니 왕이 만약 도읍을 옮기면 백성의 리익이 무궁할뿐만아니라 또한 병혁(兵革)의 두려움도 면할수 있다고 하였다. 이해 9월 왕은 국내에 가서 지세를 살피고 온후 유리왕 22년(기원 3년) 국내에 천도하였다. 그러니 국내성은 돼지가 점지해준 수도인것이다. 성의 평면구조는 거의 네모꼴이며 산하(山河) 의 방향을 따르고있다고 할수 있어 동남향이다. 둘레는 2686메터, 성내의 도로는 남북을 관통하는 조양가와 동서를 가로지나는 승리로, 북쪽의 단결로로 이루어졌는데 옛 고구려시기에도 성중의 주요한 도로였다고 여겨지며 이들 도로가 통하는 6개의 문 역시 옛터일것이다. 40년대까지만 하여도 성문과 성벽이 그 위용을 과시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지금은 국내성은 아빠트나 상가가 들어차고 그 사이로 길이 가로세로 뻗어 성문은 물론 성벽마저 거의 파괴되여가고있었다. 다만 북쪽의 아빠트단지 사이에 마치 뚝처럼 5ㅡ6단 정도가 남아 동서로 뻗어있다. 통구하옆 주택지안에 있는 서벽은 잡초가 우거진채 민가마다 헛간이나 측간의 벽으로 사용되고있었다. 집안시박물관마당에 아무렇게나 방치되여있는 고구려석재유물을 바라보면서 우리는 다시 한번 한숨을 톺았다. 그 하나하나가 비할데 없이 귀중한 유물이건만 마치 임자없는 물건마냥 사철 눈비를 맞으며 구석에 처박혀있으니 가슴아프지 않을수 없다. 박물관을 참관하면서 구겨졌던 마음이 조금 풀려지는것 같았다. 고구려건국전후의 각종 류형의 출토문물과 건축유적모형, 환도산성지형모형, 대형호태왕비탁본 및 사진, 국내외 학자들이 호태왕비를 연구한 저작, 자료, 고구려무덤의 연변관정을 보여주는 도편과 왕릉사진, 고분벽화사진…. 이러한것들이 체계적으로 잘 소개되고있었다. 기원 3년부터 기원 427년 장수왕때 평양에 천도하기전까지의 424년의 그 비운의 고구려력사가 금방 눈앞에 펼쳐지는것 같아 가슴이 뜨거워났다. 이제 다녀보아야 할 환도산성, 호태왕비, 장군총, 고분벽화 등을 눈앞에 그리면서 마음을 가까스로 달래여야 했다. 연변일보 1999년 1월 1일
44    白衣民族 朝鲜族 댓글:  조회:227  추천:0  2023-02-24
白衣民族---朝鲜族 发布时间:2017-07-21 来源:中国网 朝鲜族的源流 公元十四世纪,李氏朝鲜建立,这个民族复被称为朝鲜族。此后一个时期居住在朝鲜半岛东北部的女真人,部分北迁成为女真族枣满族的一部分,部分南徙加入于朝鲜民族之中。 朝鲜族是我国邻邦朝鲜的主体民族。但由于近代有不少朝鲜族迁居到我国东北地区,因此朝鲜族也是我国东北地区的民族之一。要讨论东北民族的源流,也就不能不讨论朝鲜族的源流。同时我国东北地区和朝鲜仅一水之隔,两国各族之间经常互相交往、融合。因此早在历史上,我国东北民族的源流就和朝鲜民族的源流有着千丝万缕的联系。正确认识朝鲜民族的源流,对促进我国各族人民的团结和中朝友谊都有积极作用。 朝鲜民族在其形成过程中,和世界其他民族一样曾经不断融合进许多民族和种族成分。 朝鲜民族的主源,或者说朝鲜半岛最早的居民是韩和秽。他们的先人早在旧石器时代就一直居住在朝鲜半岛。韩种族属于南方蒙古人种,居住朝鲜半岛的南部。秽种族属于北方蒙古人种,居住在朝鲜半岛的北部及我国东北地区。韩、秽两种族早就人口众多,并创造了灿烂文化。他们是朝鲜半岛旧石器以至新石器时代诸文化的主人。 在我国商、周之时(公元前十一世纪),原来居住在我国辽东地区的东夷人,开始迁徙到辽东半岛。商朝贵族箕子东走建朝鲜的记载,应当是这一迁徙在史籍上的反映。辽东式石棚及青铜短剑的分布于朝鲜半岛北部,也应当是东夷族进入朝鲜半岛的遗迹。据《后汉书·东夷传》载:“昔武王封箕子于朝鲜,箕子教以礼义、田 ,又制八条之教。”《三国志·东夷传》也有相同的记载。表明古朝鲜是由箕子所率领东走的商人(东夷人的一支)和朝鲜半岛土著的秽人结合而成。 中外史学家对箕子王朝鲜之说,颇有争议,存在两种不同的看法。朝鲜的多数学者否认“箕子东来说”,少数人则认为是历史事实。南朝鲜史学界有人认为箕子是存在的,并要求在“国史”中加以记述。有人则否认箕子朝鲜的存在,认为“华北文化”传入朝鲜,“并不和哪个特定人物--箕子的东来相关联”。我国史学界,有些认为箕子朝鲜说“未必完全可靠,可能是后人的牵强附会”。也有人认为此说是能够成立的。但不论分歧如何,双方都认为我国华北地区文化进入朝鲜半岛是无可置疑的,即使不把它和箕子联系起来,有一部汉族先人早在青铜时代及以前就迁居朝鲜半岛也应当是事实。其二,即使主张箕子建古朝鲜者,也不否认朝鲜半岛早有居民存在。这也是双方一致公认的。其三,对见于大量史籍记载的“箕子东走说”轻易否定还是不妥当的,至少从目前看,否定者还提不出强有力的根据。司马迁的《史记》综合了古代史籍中关于箕子的记载,在《宋微子世家》中作了系统的科学的论述。并在《朝鲜列传》中,明确地记载了当时朝鲜侯姓箕,照应了他们和箕子的承袭关系。还是可信的。 公元前三世纪左右,燕人占取辽东,并攻占了古朝鲜西部的土地,促使了居住在辽东的夷人和新牵来的燕人(华夏族的一支)融合成新的燕人,不久并入于秦,成为今汉族的一部分。而居住朝鲜半岛的夷人,则和当地的秽人融合成了古朝鲜族。 公元前二世纪,我国秦汉之交,中原战乱,“燕、齐、赵民避地朝鲜者数万口”4。汉初,燕人卫满东走出塞,“度贝水,居朝鲜之西界秦故空地上下障。满诱亡党(中国移民)众稍多,乃攻准,准逃亡。”卫满建立了卫氏朝鲜。卫氏朝鲜的建立,表明了燕人的进一步迁入朝鲜半岛北部。 与此同时,箕氏的后代箕准南走马韩为王。此外在秦代还有一部分汉人,为逃避秦的徭役,逃亡到朝鲜半岛的东南部,与当地土著韩族结合形成了汉代的辰韩。北方民族进入了朝鲜半岛的南部。 公元前一O八年,汉武帝灭卫氏朝鲜,于朝鲜半岛北部建立了乐浪等郡县,汉民更进一步迁居朝鲜半岛。 汉魏之时,在朝鲜半岛南部,居住着韩种的三支,马韩、辰韩、弁韩。史载马韩有五十四国总十余万户。辰韩、弁韩各有二十国。共七十八国。共计为二十万户,约近百万人。 公元一世纪开始,原居住在鸭绿江流域的高句丽人逐渐南下占有朝鲜半岛北部,公元四世纪攻占了乐浪郡。部分汉人如张统等迁居辽西、退出了朝鲜半岛。部分汉人留居朝鲜半岛和古朝鲜人、秽人一起在高句丽人统治下,逐渐融合成新的民族。同时,高句丽人有部分南下与朝鲜半岛南部的韩人相结合建立了百济国。辰韩(由南迁的秦人和当地的土著的韩人结合而成)的苗裔建立了新罗国家。朝鲜半岛初步形成了三个并列的小民族。 公元七世纪,新罗和唐联合,攻灭了高句丽和百济,不久唐兵被迫撤出朝鲜半岛。新罗基本上统一了朝鲜半岛,在朝鲜半岛上第一次形成了一个统一的民族枣新罗民族。 但当时朝鲜的东北部还为渤海国所占,渤海族是以粟末摸和及高丽遗民为主融合其他秽百人形成的一个民族。高句丽民族一部分迁居我国中原地区加入于汉族之中,一部分加入渤海族之中,一部分加入新罗民族之中。 公元十世纪,辽灭渤海,将渤海人西迁,部分渤海人南投新罗,加入新罗族中。而同时,原居牡丹江流域的女真人南下,占有了朝鲜半岛的东北部。 也在公元十世纪初,王建创立了高丽王朝,新罗人改称高丽人。高丽人与新罗人不同是前者吸收了十余万渤海人,但主体是一样的。高丽人和高句丽人却根本不同。高句丽人是横跨中朝两国国土,但又不包括朝鲜半岛南部的一个古民族。而高丽人则是纯属朝鲜半岛上的一个民族。 公元十四世纪,李氏朝鲜建立,这个民族复被称为朝鲜族。此后一个时期居住在朝鲜半岛东北部的女真人,部分北迁成为女真族枣满族的一部分,部分南徙加入于朝鲜民族之中。 朝鲜民族虽在长期发展过程中吸收了许多民族,但它的主体是秽和韩,以后又加入了大量汉人(东夷也是汉人先人的一支)和高句丽人。 朝鲜民族迁居我国东北地区是清代以来的事。清朝为了统治全国各族把满族人大批迁移到全国各地,使东北很多地区荒芜,朝鲜人开始北度图们江进入我国东北地区。成为今天我国东北的一个民族。但他们并不是长期居住东北的土著民族。过去学术界有一种错误认识,认为我国古代东北地区的夫余人、高句丽人都是今天朝鲜族的祖先。我国古代东北地区的夫余人和高句丽人是有相当一部分加入了今天的朝鲜族,但更多的是加入于我国的汉族之中。现在居住在我国东北的朝鲜族并不是古代居住在我国东北地区的高句丽人的直接后裔。如果说他们含有高句丽人的血统,也只能说他们中包含了部分居住在朝鲜半岛的高句丽人的血液。 弄清这些,就可正确认识中朝各族既有同源,又有区别的关系;认清中国各族(特别是东北诸族)和朝鲜民族血肉相连的关系。就没有必要再为东北地区世上一些民族的归属,进行一些过分的影响中朝友谊的争论。即使对历史上一些古民族的源流,学者间还有一些分歧的看法、但任何人都不能否定中朝各族人民血肉不可分的关系。在这一基本事实上,学者们可以求同存异,继续争论,这种争论的目的应该是求同,是促进团结。(作者 孙进己) 孙进己:民族史学家 据《中国文物报 》2006.7.21的报道称,孙进己先生是辽宁省社会科学院历史所专门研究东北民族史的研究员。时年75岁,仍然笔耕不已,仍以每天写3000字的进度在从事写作,进行民族史的研究。 孙先生著作等身,著有《东北民族史稿》、《东北民族源流》、《东北各民族文化交流史》、《东北民族史论研究》、《东北民族史研究》(一)、《北方民族史研究》(一)等书,发表论文一百余篇。 但很少有人知道,这位民族史学家、原中国辽金契丹女真史研究会会长的前半生是相当坎坷的。1957年整风反右时,正是他在东北人大历史系(现吉大)即将毕业之际,却被补定为右派。20年后才知当时并非正式审批。其间,他曾在长春搪瓷厂劳动改造;在海龙师范任教,“文革”中以走“白专道路”受到批判,被关入“牛棚”;尽管命运如此不幸,可是他始终没有放弃对民族史的学习与研究。此间,他通读了二十四史的大部分,写出了《海龙女真摩崖》、《柳河上游新石器遗址调查》、《东北民族史》两卷约20万字,并将史稿刻印本寄谭其骧、陈述、李文信等先生征求意见。1978年党的十一届三中全会召开,同年9月孙进己先生被调到辽宁省社会科学院历史所,专门研究东北民族史。1979年以后是他在学术上取得成就最多最快的时期。 理清东北民族源流,他认为单靠文献是解决不了的,必须掌握有关考古学、历史地理学、民族学、民俗学、人类学、语言学等相关学科的有关问题。 孙进己在四十多年从事东北民族史的研究中,他的主要体会是,我们决不能囿于成说,要分清假设和定论,往往前人提出的许多观点都仅是一种假说,还要经过检验;也不可以为自己提出的观点就都是定论,其中有的也可能还是假说。因此就要不断用新的事实来反复检验、更新,只有反复检验被证实的,才能说是定论。 朝鲜族民族乐器 朝鲜族民间乐器原有40多种,流传至今的只有伽倻琴、唢呐、洞箫、长鼓、片鼓、横笛、短箫、筚篥等十余种。 长鼓:打击乐器,亦称“扙鼓”。流行于吉林、黑龙江、辽宁的朝鲜族地区。长约70厘米,鼓身木质呈圆筒形,鼓的两端粗空,鼓面蒙皮,鼓腰细小而中实。以铁圈为框,系皮条或绳索,可以调整鼓的音高。演奏时,右手执细竹条敲击,左手敲击鼓的另一面。两手节奏交错,技法丰富。在乐队中,将鼓放在演奏者前面的鼓架上,在歌舞中一般将鼓挂在身前。常用于声乐和舞蹈的演奏。 细筚篥(Xie Pi Li):朝鲜族吹奏乐器。流行于朝鲜族聚居地区。用细竹管制成,长约25厘米,开有8个按音孔(前7后1),哨长4厘米,双簧。用于独奏和民间歌舞的伴奏。它的装饰性颤音很具有朝鲜族音乐的特色。 伽倻琴:为朝鲜族传统弦乐器之首,是民族色彩很浓的弹拔乐器。它的形状近似于汉族民乐器古筝。伽倻琴由共鸣箱、琴弦、琴码三部分组成。共鸣箱长150厘米,宽25厘米、中间厚5厘米。质料分别用梧桐树板和桦木板制作。琴线用蚕丝制作。共13根弦,琴弦的两头各固定在琴头和琴尾,在琴头有弦枕。13根琴弦用码子支柱,琴头可以左右移动,调节音阶。伽倻琴富有表演力,是善于表达民族柔和情感的民间乐器。因此,伽倻琴弹唱是各族人民喜闻乐见的一种表演形式。 短萧:朝鲜族吹奏乐器。朝鲜语称“单扫”。流行于延边朝鲜族自治州。形制如汉族洞箫,短细,长约35厘米,传统短萧,上端开一吹孔,管身开五个按音孔,可吹奏五声音阶的曲调。解放后改革的短萧,开七个按音孔,有的加键,并在吹孔与按音孔间加镶铜插口,可演奏七声音阶的乐曲。音色柔和高亮。 朝鲜族民间习俗——捣衣 朝鲜族民间习俗——捣衣   朝鲜族民间习俗——捣衣 捣衣是朝鲜族特有的风俗之一,每年的仲秋时节,朝鲜族妇女都要拆洗衣服被褥,进行浆洗晾晒,待衣物半干后,将其叠成长方形放在砧板上棰打,这就是捣衣。捣衣有两点好处,一是捣后的衣物平整、光洁;二是再洗时易于清除衣物表面的污垢,因为衣物带浆进行捶打后,一般的油垢多浮在衣物的表面,渗不进纤维里。 捣衣用的砧板是用约 50 厘米长、 22 厘米宽、 17 厘米厚的硬木或石头做成。砧面磨得光滑洁净,为了减轻重量而在砧底横竖挖出宽槽。捶打用的棒槌类似洗衣棒,用硬木制作而成,磨得十分光滑。 捣衣的形式多样,可以对坐交叉捶打,也可以一人拿一棒或双手各拿一棒捶打。每当少妇、少女对坐捶打时,通常表现出捶打的艺术和劳作的乐趣,或慢或快,或轻或重,如鼓手击鼓,棒槌声和清脆的笑声此起彼伏,宛如一首清新明快的协奏曲。 朝鲜族服装特点 朝鲜族人民不仅能歌善舞,喜爱音乐,而且注重衣着打扮,讲究仪表。 白色是朝鲜族最喜欢的服装颜色,象征着纯洁、善良、高尚、神圣,故朝鲜族自古有"白衣民族"之称,自称"白衣同胞"。随着纺织工业的发展,如今妇女们穿用的衣料颜色更是绚丽多彩、不拘一格,但短衣长裙这一传统民族风格久久不变,因为它符合朝鲜族妇女的审美心理,充分反映了她们温顺、善良和勤劳淳朴的美德。朝鲜民族服装的结构自成一格,上衣自肩至袖头的笔直线条同领子、下摆、袖肚的曲线,构成曲线与直线的组合,没有多余的装饰,体现了"白衣民族"的古老袍服的特点。 朝鲜族传统女装 朝鲜族民族服装根据穿着者的年龄和场合,选用各种质地、颜色的面料制作。女子婚前穿鲜红的裙子和黄色的上衣,衣袖上有色彩缤纷的条纹 ;婚后则穿红裙子和绿上衣。年龄较大的妇女,可在很多颜色鲜明、花样不同的面料中选择。 朝鲜族妇女的短衣长裙,是朝鲜族服饰中最具传统的服装,这也是朝鲜族妇女服装的一大特色。短衣在朝鲜语中叫"则高利",是朝鲜族最喜欢的上衣,以直线构成肩、袖、袖头,以曲线构成领条领子,下摆与袖笼呈弧形,斜领、无扣、用布带打结,在袖口、衣襟、腋下镶有色彩鲜艳的绸缎边,只遮盖到胸部,颜色以黄、白、粉红等浅颜色为主,女性穿起来潇洒、美丽、大方;长裙,朝鲜语也叫做"契玛",是朝鲜族女子的主要服饰,腰间有长皱褶,宽松飘逸。这种衣服大多用丝绸缝制而成,色彩鲜艳,分为缠裙、筒裙、长裙、短裙、围裙。年轻女子和少女多爱穿背心式的带褶筒裙,裙长过膝盖的短裙,便于劳动。中老年妇女多穿缠裙、长裙,冬天在上衣外加穿棉(皮)坎肩。缠裙为一幅未经缝合的裙料,由裙腰、裙摆、裙带组成。上窄下宽,裙长及脚面,裙摆较宽,裙上端有许多细褶,穿时缠腰一圈后系结在右腰一侧,穿这种裙子时,里面必须加穿素白色的衬裙。 此外朝鲜族服饰中还有一种七彩上衣,用七彩缎做成,象征幸福和光明,一般是在集会和喜庆活动时穿戴。 朝鲜族传统男装 朝鲜族男子一般穿素色短上衣,外加坎肩,下穿裤腿宽大的裤子。外出时,多穿以布带打结的长袍。男子短衣朝鲜语也叫"则高利";成年男子的上衣衣长较短,斜襟、宽袖、左衽、无纽扣,前襟两侧各钉有一飘带,穿衣时系结在右襟上方。他们还喜欢黑色外套或其它颜色的带纽扣的"背褂"即“坎肩”,"坎肩"朝鲜语叫"古克", 一般套在"则高利"上衣的外面,多用绸缎作面,毛皮或布料做里,有三个口袋,五个扣,穿上显得特别精神。 朝鲜男子爱穿"灯笼裤",这种裤子裤长腰宽,而且白色居多。"巴基"是指传统的朝鲜族服饰"裤子",其裤裆、裤腿肥大。由于朝鲜族传统房屋都有火炕供暖系统,人们常常是坐卧在地面的垫子或席子上,穿这种裤子便于在炕上盘腿而坐,随便轻松,裤腿系有丝带,外出时可以防寒保暖。 朝鲜族传统儿童装 朝鲜族儿童服装主要是七彩衣,是用七色绸缎给儿童做的衣服,好像彩虹在身。朝鲜族认为彩虹是光明和美丽的象征,或出于审美心理,或出于避邪的目的,意在让儿童美丽幸福,使孩子们显得更加聪慧、活泼可爱。还有的认为是过去朝鲜妇女善于保存各种颜色的布块,用来给孩子做衣服等等。 朝鲜官服 过去朝鲜族的官服,随官职、身份而异,但基本式样大体上是冕服,用黑色绸缎做团领,受中国冕服十二章纹饰的影响,肩部亦有带色之龙,袖口画有火、华虫、宗彝等图案。裳用红绸缎缝制,裳前有藻、粉米的纹饰图案。 朝鲜泡菜 制作泡菜 制作泡菜 泡菜是朝鲜族具有代表性的传统发酵食品。朝鲜族泡菜做工精细,享有盛誉,是入冬后至第二年春天的常备菜肴。泡菜味道的好坏,也是主妇烹调手艺高低的标志。 辣白菜是泡菜的一种,泡菜是朝鲜族具有代表性的传统发酵食品,是以米饭为主的朝鲜族饮食生活中最重要的副食之一。相传的哪怕一日无泡菜,都难以吃下饭啦。 泡菜的酱汁,可以补充米饭中缺乏的蛋白质。另外,在泡菜酵的过程中,虾酱、凤尾鱼酱、黄石鱼酱等含有的蛋白质分解为氨基酸。 蔬菜中含有钙、铜、磷、铁、盐等丰富的无机物,促进维生素C和对以米饭主食的人尤为重要的维生素B的吸收。 韩国研究人员认为,泡菜在发酵过程中,乳酸菌不仅令泡菜味道鲜美,而且还可以抑制肠内有害细菌的繁殖。 泡菜随着发酵的成熟产生酸味的乳酸菌,不仅使泡菜更加美味,食用后还能抑制肠内的其他有害菌哦。 朝鲜泡菜是朝鲜半岛人民日常生活中最普通的食品,也是朝鲜半岛的第一美食,从古代起就是每餐必备的食品。由于朝鲜半岛山地较多,油和食物运输比较困难,而泡菜制作方法简单,易于保存,一年四季皆可食用。朝鲜半岛的妇女是制作泡菜的能手,尽管使用材料一样,可每家做出的泡菜味道却各不相同。朝鲜泡菜是以白菜、萝卜为主要原料,以芥菜、水芹菜、葱、生姜、大蒜为辅料,用盐、辣椒面、酱油和各种虾酱、鱼酱等进行调味后,再经过发酵而成。泡菜的发酵过程非常重要,直接决定着泡菜的味道。在通常情况下,夏天腌渍的泡菜一般只需要两天的时间就可以发酵成熟。 朝鲜医书《东医宝鉴》 《东医宝鉴》对日本“汉方医学”也产生了一定的影响 《东医宝鉴》对日本“汉方医学”产生了一定的影响(图片来源于光明网) 《东医宝鉴》:《东医宝鉴》是朝鲜医学家许浚所著。公元1596年(李王朝宣祖二十九年),宣祖王命许浚编纂一本医书,许浚与太医杨寿礼、金应铎、李命源、郑礼男等一同设编辑局,着手编辑医书,不幸于翌年遇上“丁酉再乱”(“丁酉再乱”是指日本侵略朝鲜的战争),使参与编纂工作的诸医分散,编辑局拆散。乱后,宣祖王改命许浚一人独自编纂。许浚经过十几年坚持不懈的努力,到了光海君二年(公元1610年)终于完成编撰任务。于公元1613年(光海君五年),用内医院训练都监之活字上梓开刊。 此书共25卷,包括目录2卷、内景篇4卷、外形篇4卷、杂病篇11卷、汤液篇3卷、针灸篇1卷。此书主要参考中国医书如《素问》、《灵枢》、《伤寒论》、《证类本草》、《圣济总录》、《直指方》、《世医得效方》、《医学正传》、《古今医鉴》、《医学入门》、《万病回春》、《医学纲目》等71种和高丽医学古有的医书《乡药济生集成方》、《御医撮要方》等撰集而成,确立高丽医学理论体系的朝鲜传统医学一“高丽医学”的最高峰之作,不仅对“高丽医学”的发展起了极大作用,而且对整个东方传统医学的发展起了很大作用。因此,朝鲜李王朝光海君称《东医宝鉴》为“医学的统合,高度评价许浚说:"东垣为北医,丹溪为南医,刘宗厚为(陕)西医,许浚则朝鲜之医,亦可谓之‘东医’”。又说:“鉴者明照万物。元朝罗谦甫著《卫生宝鉴》,本朝龚信著《古今医鉴》”,故许浚之著作,“亦可名为《东医宝》”。此医书已有36种不同版本。 该书明末清初传入我国,乾隆丙戍年(1766)由顺德人左翰文在广东刻版,嘉庆丙辰年(1796)又在江宁重刻,于1955年人民卫生出版社根据朝鲜重刊本影印发行。该书在朝鲜和中国医学的发展中有积极的影响。 朝鲜族秋千(图) 荡秋千 朝鲜族是爱好体育运动的民族,压跳板和荡秋千是朝鲜族妇女最喜爱的传统民间体育运动。秋千和跳板具有悠久的历史,从文献上来看,朝鲜人荡秋千和跳跳板最晚也起源于十三世纪,是朝鲜族妇女喜爱的运动项目,它们的特征是具有朝鲜族独特的运动形式,表现了朝鲜族人民热爱生活,富于创造和活泼大方的民族气质,是朝鲜族代表性的体育运动形式,它们对丰富和完善中国民族体育竞技形式具有重要的意义。 荡秋千:也叫“打秋千”,是朝鲜族传统体育项目,多在元宵、端午和中秋节举行。尤其受到妇女们的喜爱,并经常进行该项目的比赛。比赛时评定优胜者有几种方法:一种是以秋千架前方高树上的树叶或花朵为目标,用脚碰着或咬掉树叶(花朵)者为胜;一种是在踏板底下挂一根长绳,测量秋千荡起的高度,高者为胜;还有一种是在秋千架前方竖两根树杆,杆上横拉一根系有铃铛的绳子,荡秋千者以碰铃次数多少决定胜负。 秋千活动具有高、飘、悠、巧、柔、美的特点。秋千绳一般拴在高大的树木结实的横枝上,在秋千的前方上空悬有彩带或铃当,秋千板要触及这个标志才能获得欢呼与赞扬。常常是一人荡起,众人瞩目,场边喝彩连连。大型荡秋千竞技比赛更为迷人,比赛中常常可见到空中悬挂着一面皮鼓,荡秋千的姑娘们在观众的助威声中高高荡起,在空中用力踢鼓,谁踢响的次数最多,谁就将成为冠军。 朝鲜族说唱艺术传承人申玉花 居住在沈阳市苏家屯区民主街道的申玉花是朝鲜族说唱艺术的代表性传承人,虽然年事已高,但申玉花仍然能够表演《春香传》等朝鲜族说唱艺术的经典作品。据了解,作为朝鲜族说唱艺术的保护单位,苏家屯区文化馆多年来为传承和保护这一非物质文化遗产项目做出了许多努力。 朝鲜族说唱艺术是一种叙事性说唱艺术,历史悠久。表演中大多一人饰演多个角色,以说唱为主,用长鼓伴奏,伴以舞蹈形式来叙述一个长篇故事。名叫“板唆哩”,是朝鲜族音乐中一个重要的组成部分,流行于东北三省朝鲜族聚居地。朝鲜族说唱艺术的代表作品共有12种,内容均取自民间传说和古典小说,如《春香传》、《沈清传》等。说唱艺术中“说”的部分又叫“叙唱”,没有固定的节奏,可以随词意自由变化;“唱”的部分则节奏感强,以民歌曲调为主,风格明快流畅。一个曲目大多以“短歌”,即一种抒情叙事歌开头。 被评为苏家屯区优秀民间艺人的申玉花是苏家屯区朝鲜族说唱艺术最具代表性的传承人,她曾在延边歌舞团担任演员、在延边艺校任教,退休后居住在沈阳苏家屯区从事朝鲜族说唱艺术的教学、演出和研究活动,并于1990年、1995年、2000年分别获得国家级、省级表演艺术奖项。除了89岁的申玉花不遗余力地传承朝鲜族说唱艺术,还有48岁的金春玉积极传承这一宝贵的非物质文化遗产。据金春玉介绍,在不同时期,朝鲜族说唱艺术有着不同的艺术特征,对朝鲜族说唱艺术进行深入的挖掘整理,对于研究朝鲜族音乐以及民俗具有重要价值。 朝鲜族说唱艺术是在民间产生,在民间流传的一种独特的艺术形式,具有曲调优美,说唱结合的特征,富有艺术感染力和表现力,表达了朝鲜族人民对生活的热爱,是传承民族历史文化的重要载体。朝鲜族说唱艺术是朝鲜族传统艺术,其发声方式、表演技巧难度较高,并且受到现代音乐的冲击,因此,朝鲜族说唱艺术的传承人寥寥无几。朝鲜族说唱艺术濒危的状况引起了苏家屯区有关部门的重视。据了解,苏家屯区文化体育广播电视新闻出版局非物质文化遗产调查组曾对朝鲜族说唱艺术进行了一次全面调查,对其历史价值、传承谱系等有了一个基本的认识和了解。朝鲜族说唱艺术不仅被列为苏家屯区非物质文化遗产名录,而且于日前被列为沈阳市第三批非物质文化遗产名录。 沈阳市苏家屯区文化馆将对朝鲜族说唱艺术进行进一步的挖掘和整理,继续收集相关资料,保存音像资料。下个阶段需要做的工作就是要进行一次全面细致的普查工作,彻底摸清朝鲜族说唱艺术的发展历史沿革,充分掌握传承人及道具、服装、现存作品及其价值等全部状况,然后将普查所掌握的文字、音像资料全部进行分类整理和存档。 沈阳市非物质文化遗产保护中心重点保护传承人,促进其传承发展,给予培训和经费方面的资助,进行活性保护传承;建立相关档案,将申玉花演出过程录像保存。保护和传承朝鲜族说唱艺术的重中之重就是大力培养传承人,以及定期举办朝鲜族说唱艺术专场演出。加强对朝鲜族说唱艺术的保护和传承对增进民族团结,推动文化建设将起到积极的作用。
43    朝鲜族 댓글:  조회:329  추천:0  2023-02-15
朝鲜族 朝鲜族,是东亚主要民族之一。朝鲜族主要分布在朝鲜半岛及临近的中国东北和俄罗斯远东地区等地区,是朝鲜和韩国的主体民族,两国共有七千多万人口的朝鲜族人;朝鲜族人口过百万的国家有中华人民共和国和美国,人口均在两百万以上。 在中华人民共和国境内的朝鲜族是中国官方认定的一个少数民族,也被称为中国朝鲜族。在美国境内的朝鲜族属于美国亚裔少数民族,被称为韩裔美国人,根据2006年美国社区人口调查,韩裔美国人约有152万人。 朝鲜族 起源 朝鲜族是古亚洲人和新亚洲人在新石器时代到青铜器时代之间陆续从欧亚大陆迁徙到朝鲜半岛后形成的。 朝鲜族是多起源民族,虽然今天的朝鲜族早已成为血缘高度统一的单一民族,但在历史上确是从石器时代开始就在东北亚繁衍生息的原住民和陆续从西伯利亚迁徒到朝鲜半岛的各部落和民族融合形成的民族。早在石器时代,朝鲜半岛就有人类居住遗迹,朝鲜半岛也是除欧洲大陆以外,青铜器时代人类遗迹支石墓被发现最多的地区。老亚洲人在旧石器时代,最先到达朝鲜半岛,之后一直到青铜器时代,以阿尔泰人为主的新亚洲人陆续从欧亚大陆迁徙到朝鲜半岛,形成了今天的朝鲜族。 朝鲜半岛第一个国家,古朝鲜在遭受汉的侵略后灭亡,之后在朝鲜半岛出现了无数个大大小小的国家,有扶余,沃沮,东濊,三韩,耽罗等,而三韩细分的话,总共有76国 辰韩12国,马韩54国,弁韩12国。其中斯卢国统一了辰韩成为新罗,伯济国统一马韩成为百济,弁韩统一后成为了伽倻。在北部,扶余贵族解慕漱带领族人离开扶余,建立了高句丽,在灭掉沃沮,东濊的残部后,最终朝鲜半岛形成了高句丽、百济、新罗并存的三国局面,迎来了原三国时代。 朝鲜半岛在原三国时代,时而联合,时而争战,互相牵制,保持了相当长久的三国割据状态,这其中高句丽的势力在广开土太王时代,不断壮大,致使新罗和百济改变策略,引外部势力,与之对抗,百济与倭国合作,新罗与唐合作,先后使百济和高句丽灭亡,之后新罗和唐又互相争战,这样持续了几十年,最终唐势力又逐渐退出了朝鲜半岛。 朝鲜族舞蹈 朝鲜族舞蹈 高句丽在灭亡时,有69万户,近350万人口,灭亡时,大部分高句丽人居住于朝鲜半岛中北部,即首都平壤周围,史书记载,高句丽有60万户,即大约300万高句丽人被唐迁移到了唐,因此可以得到的结论是,高句丽的大部遗民都去了唐朝,这也成为朝鲜族来源的一部分。 新罗灭后,三国遗民曾经一度恢复各自的国家,分别出现了后高句丽、后百济、后新罗,但很快就被后高句丽统一,成为了朝鲜族第一个统一的国家高丽。 蒙古曾经一度对高丽用兵无果,此期间大量女真和契丹人遗留在此。 元帝国出现内乱时,高丽曾派兵协助蒙古平叛,不料高丽派出去的将军李成桂发动政变,推翻了高丽,建立朝鲜。 当代的朝鲜族在16世纪基本形成。在这个形成过程中,朝鲜半岛北部的夫余、沃沮、东濊、鲜卑、高句丽人、渤海人、女真、契丹及汉族等东北亚民族也有一部分融合进朝鲜族中。与他们最近的民族是尼夫赫人及科里亚克族。经过基因、文化、民俗证明,扶余、高句丽、百济、新罗是朝鲜族的直系祖先. 文化 朝鲜半岛最初的原始宗教是巫教。随着当地与中国的交往,佛教和儒教后来由中国传入朝鲜半岛。佛教在高丽时期曾红极一时。但在李氏朝鲜时期,佛教曾受到限制,佛教寺院和佛教徒只能在乡村存在,不许在城市出现,取而代之的是儒教。儒家思想一度成为朝鲜的国家理念。直到现在儒家思想对朝鲜还有着很深的影响,尊敬长辈的儒家思想依然是朝鲜家庭的重要部分。但在当今的韩国,天主教和基督新教等基督宗派有着更大的影响力。
42    발해국의 종말과 국가회복을 위한 발해유민들의 투쟁 댓글:  조회:1125  추천:0  2021-09-10
발해국의 종말과 국가회복을 위한 발해유민들의 투쟁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께서는 다음과 같이 교시하시였다. 《조선인민은 예로부터 싸우다가 죽을지언정 원쑤앞에 굴할줄 모르는 용감하고 슬기로운 인민이다.》 조선인민의 강의한 애국심은 거란침략자들을 반대하는 발해인민들의 투쟁과정에서도 높이 발현되였다.    거란의 침입을 반대한 발해인민들의 투쟁 발해는 근 200년간 강대한 나라로 존속하여왔으나 9세기 말~10세기 초에 들어서면서 급속히 약화되였다. 이 시기 발해의 중앙 및 지방의 봉건세력들은 인민들의 토지를 대대적으로 략탈하고 착취와 억압을 전례없이 강화하였다. 한편 통치배들속에서는 상무의 기풍이 점차 없어지고 나약한 풍조가 휩쓸었으며 더 많은 재부와 권력을 독차지하기 위한 싸움만 계속 벌리였다. 발해귀족들 내부에 극히 나약한 풍조가 휩쓸었는데 당나라의 과거시험에 합격되는것을 《영예》로까지 생각하는 형편이였다. 그리하여 나라의 국력은 걷잡을수 없이 약화되게 되였다.       거란은 원래 서료하상류일대에 살고있던 유목종족이였다. 10세기 초에 급격히 강대한 세력으로 자라난 거란은 916년에 거란국가를 선포하였다. 이때 황제 야률아보기가 발해에 대한 침략의 마수를 뻗치였다. 발해는 거란의 침입에 대처하여 924년 5월에 거란이 차지하였던 료주(심양 서쪽)를 쳐서 큰 타격을 주었으나 그 성과를 공고히 하지 못하였다.       ㅡ 925~926년전쟁 이미 10세기 초부터 발해에 대한 침략을 꿈꾸어오던 거란침략자들은 925년 12월 말부터 거란왕 야률아보기가 직접 수만명의 침략군을 거느리고 대규모적인 무력침공을 감행하였다. 야률아보기가 거느린 거란침략군은 발해 서쪽의 주요성이였던 부여성을 포위하였다. 부여성의 군인들은 력량상 대비가 안되는 적과 용감히 싸웠으나 926년 1월 초에 성을 강점당하고말았다. 부여성을 강점한 적들은 동쪽으로 계속 밀려들었다. 적장 안단이 거느린 거란군의 선봉 1만명(기병)은 발해수도 서쪽가까이까지 침공하여왔다. 이때 발해의 대신 로상이 수도방위군을 이끌고나가 싸웠으나 우세한 적들을 물리치지 못하였다.       발해의 수도 상경룡천부의 홀한성은 거란침략자들의 포위에 들었다. 성안에 있던 전체 군민들은 거란침략군의 공격을 여러차례 물리치고 무리죽음을 주었다. 그러나 국왕 대인선을 비롯한 봉건통치배들은 싸우는 발해군민들을 배반하고 인민들의 전투행동을 중지시키는 반역행위를 저질렀다. 인민들의 투쟁은 비록 성공하지 못하였으나 발해군민들의 불굴의 투지와 용감성, 애국심을 다시금 시위하였다.       ㅡ 각지 인민들의 항전 거란침략자들은 인민들의 반항심을 무마시키려고 교활하게 책동하였다. 적들은 동단국을 조작하고 거란왕의 아들 야률배를 왕으로 임명하였으며 실권없는 벼슬자리에 투항한 일부 발해귀족들을 끼워넣었다. 이것은 인민들의 큰 분격을 자아냈다.       인민들은 도처에서 들고일어나 거란침략자들과 반역자들을 반대하여 투쟁하였다. 926년 3월 장령부, 안변부, 막힐부, 정리부의 군민들이 결사적으로 싸웠다. 그러나 그들의 투쟁은 통일적지휘밑에 전개되지 못하였기때문에 각개격파당하였다.       결국 발해는 926년에 자기의 존재를 마치였다. 925~926년전쟁과정은 봉건통치배들의 죄악으로 말미암아 침략자들을 물리치지 못하였으나 광범한 인민들의 높은 애국심을 뚜렷이 보여주었다. 발해말기의 력사는 아무리 강대한 나라라도 자만도취하고 안일해져 국력을 강화하는 사업을 게을리하면 망한다는 교훈을 남겼다.   국토회복을 위한 발해유민들의 투쟁 발해는 비록 존재를 마쳤으나 그 유민들은 거란에 의하여 나라가 무너진 다음에도 굴함없이 국토회복을 위해 줄기차게 싸웠다. 이 투쟁은 여러 지역에서 여러가지 형태로 오래동안 줄기차게 벌어졌다. 발해유민들은 발해의 옛 땅에 정안국과 오사성발해국을 비롯한 소독립국들을 세우고 강점자들을 반대하여 투쟁하였다. 정안국(定安國)은 오씨가 부여부의 동쪽 혼돈강(송화강), 압록강의 중상류일대에 세운 발해유민들의 소국이였으며 독자적인 년호까지 사용하였다.       정안국은 안으로 국력을 강화하는 한편 거란의 침략에 반거란동맹으로 대처하기 위한 대외활동을 적극 벌리였다. 970년에 제2대왕 오렬만화, 981년에 제3대왕 오현명은 송나라에 사신을 보내여 반거란동맹을 무을것을 제기하였으나 송나라의 나약한 태도로 하여 실현되지 못하였다. 그러나 정안국은 부단히 침입하는 거란침략군을 물리쳤고 때로는 적강점지역을 공격하여 타격을 주기도 하였다.       정안국은 동족의 나라 고려와도 련합하려고 노력하였다. 이러한 정안국이 언제까지 존재하였는지 정확한 자료는 없지만 기록에 의하더라도 할빈지방에서 80~90년간은 거란에 항거하면서 국권을 지켜왔다. 오사성발해국은 부여부를 중심으로 오씨가 세운 소국이였다. 수십만의 발해사람들이 동족의 나라인 고려로 이주하여 고려사람들과 함께 거란침략자들을 반대하여 투쟁하였다. 발해유민들의 투쟁은 특히 료동지방에서 치렬하게 벌어졌다.       오사성발해국도 송나라와 반거란동맹을 맺기 위한 대외활동을 벌리였다. 그러나 어부지리를 얻으려는 송나라의 태도로 하여 오사성발해국은 단독으로 싸우지 않으면 안되였다. 995년 오사성발해국의 군민들은 오소경(오소도)의 지휘밑에 거란의 침략대군을 격퇴하였다. 그후에도 오사성발해국의 인민들은 끊임없이 달려드는 거란침략자들과 용감히 싸워 물리쳤다.       《료사》의 기록에 의하면 1114년경에 녀진족이 거란을 공격할 때 오사성발해국이 참가한것으로 되여있다. 이것은 12세기 초경까지도 오사성발해국이 독립국의 지위를 유지해왔다는것을 보여준다.   국토회복을 위한 발해유민들의 투쟁은 끊임없이 계속되였다. 1029년 8월 초 동경도(거란관할하의 도, 직할현 9개, 소속 주, 부, 군, 성 87개)의 전체 발해유민들은 대연림의 지휘밑에 거란강점자들의 통치를 반대하는 폭동을 일으키였다. 대연림은 당시 발해군상은(동경도관하 발해군의 사령관격)이였다. 폭동군은 거란의 동경류수 부마도위 소효선과 그의 처 남양공주 최팔을 동경성(료양성)안에 잡아가두고 거란관리들을 처단하였으며 새로 발해유민들의 국가인 《흥료국》을 세웠다. 당시 대연림이 흥료국왕으로 되고 년호를 《천경》으로 정하였다. 흥료국은 료동지방의 전체 인민들을 반거란투쟁에로 일떠세우는 동시에 한인, 녀진인들이 이 투쟁을 적극 지지성원해나가도록 하였다. 또한 보주성의 장군 하행미로 하여금 투쟁에 합세하도록 련락을 보냈으나 배신당하였다. 흥료국의 군민들은 한결같이 거란침략군과 싸웠지만 대오안에 나타난 투항분자들에 의하여 실패하게 되였다.   발해유민들은 1116년 1월 동경료양부를 중심으로 거란침략자들을 반대하는 투쟁을 벌렸다. 1116년 고영창은 《대발해국》을 선포하고 황제가 되였으며 년호를 《륭기》라고 제정하였다. 대발해국은 산하 각 주들에 부대들을 파견하여 광범한 발해유민들을 집결하는 한편 거란인관리들을 처단하였다. 대발해국의 급속한 장성에 위협을 느낀 거란통치배들은 남부재상 장림에게 대병력을 주어 공격하도록 하였다. 대발해국의 군민들은 장림의 거란군과 30여차례의 격전을 벌려 큰 타격을 주었으며 항전 4~5개월동안 중첩되는 애로와 난관을 극복하면서 투쟁성과를 확대해나갔다. 그러나 대발해국의 국토회복을 위한 투쟁은 금(녀진)나라의 배신행위로 하여 5월에 실패하고말았다. 발해유민들은 침략자들을 반대하는 투쟁을 끊임없이 벌리였으나 통일성을 보장하지 못하였으며 간교한 적들의 책동으로 최후승리를 이룩하지 못하였다. 그후에도 발해유민들의 국권회복을 위한 투쟁은 근 200년간 계속되였다. 발해유민들의 완강한 투쟁은 비록 자기들의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였으나 조선인민의 높은 애국심과 강한 투지를 다시한번 뚜렷이 시위하였다.
41    《해동성국》을 군사적으로 담보한 발해군대 댓글:  조회:1070  추천:0  2021-09-10
《해동성국》을 군사적으로 담보한 발해군대 고구려멸망후 대중상과 대조영휘하의 고구려군사들을 골간으로 하여 진국의 성립과 발해건국과정을 거쳐 발전강화된 발해군대는 강력한 군사력으로 《해동성국》의 토대를 닦아놓았으며 국력의 발전을 군사적으로 담보하였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께서는 다음과 같이 교시하시였다. 《어떠한 국가를 물론하고 자주독립국가는 반드시 자기의 군대를 가지고있는것입니다.》 발해는 건국초기부터 봉건지배계급의 리익을 옹호하고 봉건제도를 유지강화하며 나라의 안전을 지키는 자기의 군대를 가지고있었다. 고구려재건투쟁을 벌리던 고구려유민들의 항전부대들을 모체로 하여 편성된 발해의 군대는 건국초기부터 봉건지배계급의 계급적리익을 옹호하는 수단으로 복무하였으며 발해의 높은 대외적지위와 강한 국력에 어울리게 방대한 규모에서 유지강화되였다.    발해군대의 병력수 발해 건국직전 대조영휘하의 군사는 40만이였다. 실학자 홍석주는 《발해세가》에서 우리 나라에서 전해오던 사료들뿐아니라 《오대회요》를 비롯한 중국측 기록들도 널리 참고하여 발해 초기 군사가 40만이라고 하였다. 발해가 건국과정에 료동지역을 비롯한 중국 동북지방의 적지 않은 지역과 우리 나라 북부의 넓은 령토를 차지할수 있었던것은 바로 40만의 대병력으로 위세를 떨쳤기때문이였다. 발해건국을 전후하여 대조영의 휘하에 모여든 40만의 대군은 모두 정규군인이 아니라 고구려회복이라는 공동의 목적을 지향하여나섰던 고구려유민들과 일부 말갈인들이였다. 건국이후 발해봉건정부는 고구려이래의 군대편성원칙과 조성된 정세에 맞게 군사제도를 새롭게 편성하고 군대를 질, 량적으로 강화하여나갔다.       《책부원귀》나 《구당서》 등 력사기록들에서는 발해의 병력수에 대하여 승병 수만이라고 밝히고있다. 그러나 이 수자는 발해의 병력수전체를 가리킨것이 아니라 금군의 수로 보이며 상비군전체를 가리킨 수자라고는 볼수 없다. 그것은 당나라에서 《안사의 란》이 일어났을 때 평로류후사 서귀도가 발해에 요청한 기병만 하여도 4만이나 되였으며 당나라에 대한 사대주의와 패배감에 물젖어 흑수말갈을 징벌할데 대한 무왕의 명령을 거부한 대문예가 발해의 군사력을 심히 과소평가하면서도 군대수를 10만이라고 하였기때문이다. 그러나 대문예의 말대로 군대수를 단순히 10만으로 볼수도 없다.       《료사》 병위지 상에는 발해의 군대수가 수십만이라고 기록되여있는데 이것이 발해의 총병력수를 가리킨 비교적 정확한 수자라고 볼수 있다.    발해군대의 군종 발해의 군대는 중앙군과 지방군으로 이루어져있었다. 발해의 중앙군은 8위와 금군이였다. 발해의 중앙군에는 좌맹분위, 우맹분위, 좌웅위, 우웅위, 좌비위, 우비위, 남좌우위, 북좌우위의 8개 위가 있었다. 8위에는 각각 대장군과 장군이 한명씩 배치되여있었으며 그 밑에 도장, 소장 등 여러 무관직이 있었다. 8위에는 부병의 한개 단위를 이루던 절충부가 소속되여있었다. 중앙군에 소속된 부병은 수도와 그 부근의 수비를 맡아보았으며 동시에 전국에 배치되여있던 8위소속의 절충부들에 가서 복역하면서 지방군과 결합된 중견력량으로 되여있었다. 발해의 중앙군에는 또한 금군이 있었다. 금군은 궁성수비를 위주로 하면서 직접 군주를 호위하는 시위군이였다. 발해의 지방군은 건국초기부터 중앙군과 함께 발해군사력의 중요한 부분을 이루고있었다. 고구려멸망후 각지에서 반침략투쟁을 벌리던 여러 항전세력들은 발해건국을 위한 투쟁에 합세하여나섰으며 그후에는 지방군으로 편성되였다. 발해봉건정부는 초기부터 지방군을 거느린 지방장관들에게 중앙의 관직을 겸임시킴으로써 그들의 지위를 높여주고 봉건정부에 더 잘 복무하도록 하면서 지방군강화에 특별한 관심을 돌리였다. 지방군은 지방행정단위인 부, 주, 현을 단위로 하여 편성, 배치되여있었다. 지방행정단위의 장관인 도독(절도사), 자사, 현승은 민사행정뿐아니라 군사지휘권도 틀어쥐고 지방군을 통솔하였다. 그리고 특별히 중요한 부들에는 도독이 아니라 절도사들이 파견되여 그 지역의 군사를 거느리고있었으며 후국과 속령들에 배치된 군대는 지방군의 구성부분으로 후국왕이나 번장들의 통솔하에 있었다. 지방군의 편성은 중앙군과 달리 병농칠치의 원칙에서 조직된 고구려인평민들이 기본을 이루고있었으며 말갈족출신의 군사들도 들어있었다. 이처럼 중앙군과 지방군으로 구성된 발해의 군대는 봉건왕권을 보호하고 지배계급의 계급적지배와 리익을 군사적으로 옹호하고 담보하는 역할을 수행하면서 220여년간 나라의 안전을 지켜냈다.    발해군대의 병종 발해군대의 병종구성을 놓고보면 강력한 지상군과 수군으로 이루어져있었다. 발해의 지상군은 기본전투력량으로서 외래침략자들을 물리치는 싸움들에서 용맹을 떨쳤다. 발해에서는 기병을 위주로 한 지상군의 위력이 대단히 강하였다. 755년 당나라에서 안사의 란이 일어났을 때 평로류후사 서귀도는 발해에 기병 4만을 보내여 도와줄것을 요청한 일이 있었다.       서귀도가 발해에 요청한 기병 4만은 결코 적은 수자가 아니였다. 서귀도가 그렇게 많은 수의 기병을 요청할수 있은것은 발해의 기병력이 량적으로 또 질적으로 상당히 높은 수준에 있다고 보았기때문이며 설사 이만한 수의 기병을 동원시킨다고 하여도 국가방위를 위한 전반적무력균형에서는 큰 공백이 생기지 않는다고 생각하였기때문이였다. 다시말하면 그들은 군사력 특히 기병이 강한 발해로서는 이만한 수의 기병을 얼마든지 동원시킬수 있다고 보았던것이다.         이것은 당시 고구려후국관내였던 오늘의 평안남도 녕원군에 발해성과 말을 사육하던 양마성이 있는것을 놓고서도 잘 알수 있다. 양마성에서는 말굴레와 말안장, 금속제활촉들이 많이 발굴되였는데 이것은 발해에서 말사육이 그 어떤 개별적인 지역에 국한된 사업이 아니라 나라의 군사력을 강화하는 중요한 일로서 전국의 여러 곳에서 활발히 진행되였으며 사육된 말들은 발해의 강력한 기병력을 끊임없이 보충하고 강화하였다는것을 보여준다. 발해는 강력한 수군도 가지고있었다. 발해가 수군을 가지게 된것은 나라의 지리적위치와 관련된다. 발해는 령역의 적지 않은 부분이 해안을 끼고있었는데 동쪽에는 조선동해, 서남쪽에는 조선서해가 있었다. 발해는 건국초기부터 당나라와 군사적으로 견제하는 립장에 있었기때문에 당나라와의 대립이 격화되고 그것이 언제 전쟁으로 번져질지 모르는 조건에서 수군력량을 강화하였다. 발해에서는 수군의 중요한 전투력인 함선을 건조할수 있는 배무이기술이 상당히 높은 수준에 있었다.       발해에서는 각이한 크기의 배를 건조하였는데 큰 배는 물동량을 고려하지 않고 한척에 100여명이 탈수 있었고 중형배는 40~70여명, 작은 배는 10여명가량 탈수 있었다. 발해사신들이 모진 풍랑을 무릅쓰고 일본에 자주 왕래할수 있었던것은 두려움을 모르는 발해사람들의 진취성과 함께 견고한 배가 마련되여있었기때문이였다.       일본측문헌기록들에 의하여 발해사신들이 타고 갔던 배를 상상해볼수 있는데 그중에는 키, 돛대, 노, 닻, 끌어당기는 바 등 여러가지 설비를 갖춘 조종인원이 28명이나 되는 큰 배도 있었다. 수군은 바로 이러한 배에 여러가지 무기를 설치하고 바다를 믿음직하게 지켰다. 대형배와 중형배는 기본전투함선의 역할을 하였고 소형배는 해안을 감시하고 해적행위를 하는 배들을 추적, 단속하는 임무를 수행하였다. 이처럼 발해군대는 기병위주의 강력한 지상군과 발전된 전투함선으로 장비된 수군으로 이루어져있었다. 이와 같이 발해는 건국이후 수십만의 군사를 상비군으로 가지고있었기때문에 령토확장도 성과적으로 진행할수 있었고 이웃 나라와의 군사적대결과 외교분쟁에서도 우세를 차지할수 있었던 동방의 강국이였다.
40    새롭게 정비강화된 정치제도 댓글:  조회:815  추천:0  2021-09-10
새롭게 정비강화된 정치제도 발해는 건국후 국력을 계속 강화하는 정책을 실시하여 수십년동안에 벌써 그 령토가 남쪽은 대동강과 덕원(원산북쪽)에서 신라와 접하고 료하일대와 부여의 땅인 송화강류역, 흑룡강이남의 말갈족거주지역까지 포괄하게 되였다. 발해는 국력이 강화됨에 따라 대외적지위를 공고히 한 결과 《해동성국》(동방의 강성한 나라)으로 불리우며 위력을 널리 떨치였다. 발해는 강화된 나라의 국력에 어울리게 정치제도를 새롭게 정비강화하였다. 위대한 령도자 김정일동지께서는 다음과 같이 교시하시였다. 《고구려를 계승한 발해는 7세기말부터 10세기초까지 200여년간 존재하였으며 정치, 경제, 문화가 크게 발전하여 〈해동성국〉으로 이름을 떨치였습니다.》    발해국의 최고권력자의 지위 봉건시대의 국가는 군주의 권력기구인것만큼 최고권력자의 지위는 국가의 지위를 규정짓는 중요한 징표의 하나이다. 발해의 지위와 성격을 규정짓는데서 제일 처음으로 론의되는것이 바로 발해대왕의 지위에 관한 문제이다. 발해봉건국가의 국가주권은 지주, 관료 등 봉건통치계급에게 속하였고 국가우에 있는 국왕은 최고의 권력자이며 최대의 착취자였다.  국왕은 대씨가문에서 원칙상 맏아들이 대대로 물려받았고 자식이 없을 경우에는 형제 또는 가까운 왕족에 의해 계승되였다.       발해에서는 왕을 《가독부》 또는 《성왕》, 《대왕》, 《황상》, 《기하》라고 불렀고 왕의 명령은 《교》 또는 《조》로, 왕의 아버지는 《로왕》, 어머니는 《태비》, 처는 《귀비》, 맏아들은 《부왕》, 그 아래의 자식들은 《왕자》라고 불렀다. 그리고 독자적인 년호를 만들어 사용하였으며 왕위는 세습되였다.       오늘까지 전해지는 많은 발해관계사료들은 발해대왕이 천자의 지위에 있었다는것을 보여준다. 그 가운데서도 독자적인 년호의 제정과 대왕, 황상, 성왕의 호칭, 3사3공제도의 존재 등은 국왕의 천자적지위와 발해가 천자국의 틀에 맞는 정치체제를 갖추고있던 대왕국이였다는것을 명백히 보여주고있다.   ㅡ 독자적인 시호, 년호의 제정 발해에서는 군주가 즉위하거나 그 어떤 상서로운 사변 또는 재난 등이 있을 때에는 년호가 새롭게 제정실시되군 하였다. 일반적으로 봉건사회에서 년호는 황제국가들에서만 독자적으로 제정실시될수 있으며 제후국이나 속국들에서는 자체로 제정할수 없고 다만 황제국의 년호를 그대로 사용하게 되여있었다. 그러므로 군주가 독자적인 년호를 제정하였는가 그렇게 하지 못하였는가 하는것은 최고통치자가 어떤 지위를 차지하고있었는가를 보여주는 중요한 징표의 하나라고 말할수 있다. 발해에서는 대조영으로부터 마지막 군주 대인선 집권시기에 이르기까지 모두 독자적인 년호들이 제정실시되였다. 오늘까지 전해지는 《협계태씨족보》, 《신당서》 발해전, 《정혜공주묘지병서》와 《정효공주묘지병서》와 같은 력사자료들과 금석문들에는 발해존립기간 제정실시된 각종 년호들이 기록되여있다.     력사기록들에 남아 전해지는 발해의 시호와 년호들은 발해가 존립 전기간 다른 나라의 년호를 쓴것이 아니라 독자적으로 년호를 제정하여 실시하였다는것, 그 최고통치자가 천자의 지위에 있었다는것을 보여주는 명백한 근거로 된다. ㅡ 발해군주에 대한 호칭 대왕, 황상, 성왕 발해에는 천자적지위에 있던 군주에 대한 여러가지 호칭이 있었다. 성왕이라는 호칭과 여러 금석문들에 남아있는 대왕, 황상이라는 호칭은 발해군주의 천자적지위를 명백히 증명하여준다. 현존하는 사료들에서 발해군주를 대왕으로 표현한것은 《정혜공주묘지병서》와 《정효공주묘지병서》, 《일본후기》의 기록이다. 《정혜공주묘지병서》와 《정효공주묘지병서》는 발해인들이 직접 남긴 금석문이며 대행대왕이라는 표현도 발해국왕의 국서에 올라있는 문구였다고 볼 때 대왕이라는 표현은 발해봉건사회에서 널리 사용되던 왕에 대한 호칭의 하나였다는것을 잘 알수 있다. 발해때의 대왕이라는 호칭은 고구려시기의 최고군주에 대한 칭호를 그대로 이어받은것이였다. 발해군주도 고구려의 최고주권자와 마찬가지로 제후세력들의 우에 있는 한급 높은 대왕으로서 천자급의 틀을 갖추고 행세하였다. 발해의 최고통치자는 천자급의 대왕이였기때문에 대왕이라는 호칭외에 황상, 성왕이라고도 불리웠으며 군주의 딸도 공주라고 하였다. 발해에서는 국왕의 신성불가침을 절대화하기 위하여 고구려시기의 성왕이라는 칭호를 그대로 왕에 대한 호칭으로 사용하였다. 특히 771년 문왕이 일본왕에게 보내는 국서에서 발해왕실이 천손 즉 천제의 자손이라고 하였다는것은 발해지배계급이 고구려시조 동명성왕때부터 시작된 천손사상으로 왕족혈통을 신성시하고 절대화하였다는것을 보여준다. 이처럼 대왕, 황상, 성왕 등으로 불리우던 발해군주는 전체 지배계급, 피지배계급우에 군림하고있던 최고통치자, 전제군주로서 발해의 통치체제는 천자국의 틀거리에 맞게 편성되여있었다.      발해의 중앙통치기구의 기본을 이룬 3성 6부 발해국가의 중앙정부기구에는 많은 관청들이 있었으나 기본을 이룬것은 3성 6부였다.       3성은 정당성, 선조성, 중대성이며 그 장관들인 대내상, 좌상, 우상을 3재상이라고 하였다. 6부는 충부, 인부, 의부, 지부, ​례부, 신부 등이였다.       발해국가의 행정은 기본적으로 이 3성 6부에 의하여 집행되였으며 봉건국왕의 《권위》를 보장하고 중앙집권적봉건통치를 강화하기 위한 실제적 집행단위였다. 발해에서 3성 6부제를 중심으로 하는 국가기구는 대체로 8세기 후반기에 와서 기본적으로 고정되였다. 6부의 각 장관은 경이라고 하였는데 이들은 정당성의 관리인 좌, 우사정의 아래에서 그의 지시를 받았다. 경의 아래에는 소경과 여러명의 랑중, 원외랑들이 있었다. 발해에는 3성6부보다 더 높은 위치에서 정치에 참가하는 《3사3공제도》도 있었다.       3사는 태사, 태부, 태보였는데 국왕은 이들을 신하로 대하지 않고 스승으로 대우하였다. 3공은 태위, 사도, 사공으로서 국왕을 도와 나라의 정치를 하며 어느 부서나 다 통관할수 있었다.       발해에는 3성 6부 아래에 많은 행정관청들이 있었다. 그러한 관청들로서는 중정대, 전중시, 종속시, 문적원, 태상시, 사빈시, 대농시, 사장시, 사선시, 주자감, 항백국, 화간원 등이 있었다. 이 기관들은 봉건관료기구의 내부조직과 관련된 임무를 수행하는것으로 되여있지만 실제적으로 인민들을 수탈하고 반항자들을 탄압하기 위한 폭압기구였다. 발해에서 이러한 기관들은 봉건귀족들 특히 왕실의 사치한 생활을 보장하는데 복무하였다.    발해의 지방통치제도 발해의 지방행정기구도 다른 봉건국가와 마찬가지로 중앙정부의 정책을 실현하기 위한 지방통치기구였다. 발해의 지방통치의 기본단위는 부, 주, 현이였고 그 아래에 일부 부곡과 촌 등이 있었으며 변방지역들에는 자치적성격을 띤 후국과 속령들이 있었다. 발해의 지방통치기구는 8세기 중엽에 5경 15부 62주로 정비되여있었고 각 주 밑에는 여러개의 현들이 있었다. 그리고 중요한 5개부에 경(京)을 두었다. 상경룡천부는 발해의 수도(녕안현 발해진)였으며 중경현덕부는 화룡, 남경남해부는 북청, 서경압록부는 집안, 동경룡원부는 부거에 위치하고있었다. 부의 장관을 도독, 주의 장관을 자사, 현의 장관을 현승이라고 하였는데 이들은 관할지역의 민사행정뿐아니라 재판권, 군사권까지도 그러쥐고 인민들을 가혹하게 억압착취하던 왕권의 대리자들이였다. 이처럼 발해의 중앙과 지방의 각급 관료들은 주로 고구려귀족들로 임명되였는데 그들은 그 지방의 군사권까지 모두 쥐고있은 권력자들이였다.
39    건국초기 발해국의 주요정책들 댓글:  조회:992  추천:0  2021-09-10
건국초기 발해국의 주요정책들 발해는 동방의 강국으로 위력을 떨치던 《해동성국》이였다. 발해가 초기부터 정치군사적위력을 강화하고 나라의 대외적지위를 높이면서 《해동성국》의 위용을 떨칠수 있게 된것은 건국직후 실시된 주요정책들의 직접적인 결과였다. 위대한 령도자 김정일동지께서는 다음과 같이 교시하시였다. 《정치에서 기본은 정책을 규정하고 집행하는것입니다.》 정치는 계급 또는 사회공동의 리익에 맞게 사람들의 활동을 통일적으로 조직하고 지휘하는 사회적기능으로서 여기에서 기본은 정책을 규정하고 집행하는것이다.       일반적으로 계급사회에서 정치를 한다는것은 일정한 계급이 자기의 요구와 리해관계에 맞게 정책을 작성하고 정치조직, 정치제도에 의거하여 그것을 집행해나가는 과정을 말한다. 정권을 쥔 계급이 어떤 정책을 작성하고 실시하는가 하는것은 그들의 계급적요구와 리해관계에 따르는것으로서 국가의 운영과 발전에 직접적인 영향을 준다.       △ 발해국에서 중무정책의 실시 발해는 건국초기 봉건국가의 안전을 지키고 국력을 강화하기 위한 중무정책을 실시하였다. 발해가 건국직후 실시한 중무정책은 무관을 중시하고 무예를 인재등용의 기본징표로 삼던 고구려의 상무적인 정치방식을 그대로 계승한것으로써 이 시기 정세발전의 요구에 맞게 봉건국가의 안전을 지키고 국력을 강화할수 있게 한 긍정적인 정책이였다. 발해가 중무정책을 실시한 시기는 건국직후부터 8세기 전반기경까지였다. 발해 초기의 대외관계에서 문관보다 무관의 역할이 매우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일본으로 간 발해의 첫 사신단은 조선동해를 건너 일본 동북부의 에조족(오늘의 아이누족의 조상)거주지역에 도착하였는데 24명가운데서 고인의이하 16명이 죽고 두령 고재덕 등 8명만이 겨우 살아남아 이데와에 도착하였다. 이 사신단의 사두는 무관인 녕원장군 랑장 고인의였으며 그밖에 우장군 과의도위 덕주와 별장 사항 등이 사신단성원으로 되여있었다.       그후 발해국은 759년까지 5차례에 걸쳐 사신단을 일본에 파견하였는데 일본에 파견된 사신단의 사두, 사사 등 주요인물들은 모두 무관직을 가진 사람들이였다.     일본뿐아니라 당나라에 파견된 사신들도 대부분 무관벼슬을 가진 관리들이였다.       발해는 당나라에도 많은 사신들을 파견하였다. 당나라사신 장행급과 최혼이 705년, 713년에 각각 발해를 방문한 후 두 나라사이의 관계가 어느정도 완화되면서 발해사신들의 당나라왕래가 빈번해지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8세기 중엽까지 여러가지 사명을 띤 발해사신들의 당나라왕래는 빈번하였지만 그들의 관직명을 정확히 전하는 사료는 거의 남아있지 않다. 그러나 이 시기 당나라에 파견된 발해사신들가운데서 당나라의 명예벼슬을 받은 사람들을 보면 대부분 무관의 벼슬이였다.       일반적으로 대외정책은 대내정책의 연장으로서 매개 나라의 대외관계에는 그 나라가 실시하고있는 대내정책이 그대로 반영된다. 해당 나라들의 대외관계는 사신들의 호상 래왕을 통하여 맺어지며 발전한다. 사신들은 봉건국가의 권력을 틀어쥐고 정치를 주도하는 정치세력을 대표하는 국가의 공식적인 인물들인것만큼 사신단성원들이 어떤 사람들로 구성되여있는가 하는것을 통하여 국가권력을 틀어쥔 정치세력에 대하여 알수 있다. 사신단성원들이 대부분 무관들로 구성되여있다는것은 당시 발해에서 무관들이 국가정치의 주역을 담당하고있었다는것을 보여준다. 이것은 결국 발해에서 군사를 중시하는 중무정책이 국가의 기본정책으로 되여있었다는것을 보여준다. 발해에서 중무정책은 8세기 50년대경까지 실시되였다. 그러면 발해가 건국 초기부터 중무정책을 실시한 목적이 어디에 있는가 하는것이다.       그 목적은 갓 창건된 봉건국가의 안전을 지키고 국력발전의 담보를 마련하기 위해서였으며 옛 고구려의 령토를 완전히 되찾고 강력한 봉건국가를 건설하기 위해서였다. 또한 고구려의 장수출신인 대조영이 발해건국을 위한 오랜 기간의 항전을 통하여 단련된 고구려군사들에 의거하여 국가정사를 운영하는것이 건국초기의 복잡한 정세하에서 권력지반을 공고히 하고 나라를 다스리는데서도 매우 유리하기때문이였다.       이처럼 건국후 8세기 전반기경까지 실시된 중무정책에 의하여 발해는 나라의 자주권과 안정을 지키고 강한 국력을 마련할수 있었다. 발해가 《해동성국》으로 출현할수 있었던 토대는 모두 중무정책에 의하여 마련되고 공고화되였으며 바로 여기에 발해정치사에서 중무정책의 실시가 가지는 의의가 있다.   중무정책에서 중문정책에로의 전환 중무정책에 의하여 발해의 국력이 강화되고 대외적지위가 높아진 8세기 후반기에 이르러 발해정치에서는 새로운 변화가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이 시기는 제3대왕 대흠무(문왕)집권시기(737년~793년)이다.       제2대왕(대무예)의 둘째 아들이였던 대흠무는 737년에 왕위에 올라 집권초기에 고왕(대조영)과 무왕(대무예)시기의 정책들을 계승하여 그것을 완수하는데 기본힘을 돌렸다. 특히 문왕은 무왕통치시기의 령토확장정책을 완수하는데 큰 힘을 넣었다.       문왕집권초기에 추진된 령토확장의 결과 8세기 40년대에 북부의 여러 말갈족들이 종속되고 그 지역들에 지방행정단위들을 설치할수 있는 조건이 마련되였다. 그리하여 발해건국직후부터 기본힘을 돌려온 발해변방의 여러 말갈족들에 대한 정복과 포섭이 기본적으로 일단락지어지고 나라의 령토는 훨씬 넓어지게 되였다. 당시 대외정세도 발해에 유리하게 변하고있었다.       732~733년 발해의 반침략전쟁이후에 발해에 대한 적대시정책의 실패와 저들에게 불리하게 변화된 대외적환경을 인정한 이웃나라들은 관계정상화를 지향하였으며 《안사의 란》을 전후하여 국내정세가 복잡하게 번져지자 발해와의 관계를 더욱 밀접히 하여 정치, 군사적인 도움을 받으려고 노력하였다. 당시 발해주변 나라들가운데는 발해에 대하여 정치, 군사적으로 위험을 조성하는 종족이나 나라가 없었으며 이것은 발해의 발전에 있어서 유리한 대외적환경으로 되였다.       발해는 중무정책에 의하여 유리하게 조성된 대내외적환경과 조건에 맞게 국력을 더욱 강화하기 위하여 8세기 50년대 말부터 정치방향을 변화시키기 시작하였다. 이 시기에 발해에서 실시된 기본정책은 종전의 중무정책과는 다른 중문정책이였다. 문왕통치시기의 정치를 중문이라고 하는것은 고왕과 무왕시기와 같이 주로 군사력에 의거하여 대내외정책을 수립하고 집행한것이 아니라 국가통치체제를 정비강화하고 그에 의거하여 경제, 문화발전에 힘을 넣으면서 정사를 운영하였기때문이다. 대흠무통치시기의 정치의 특징은 문왕이라는 왕의 시호에 명백히 나타나있다. 이런 의미에서 문왕통치중기이후 구체적으로 8세기 후반기를 발해정치에서 중문정책이 실시된 시기로 규정할수 있는것이다. 이처럼 발해에서 변화된 조건에 맞게 중무정책이 중문정책으로 이행되면서 중앙집권적봉건통치체제가 더욱 확대발전되였으며 국력도 더욱 강화되였다.
38    《해동성국》 발해의 건국 댓글:  조회:958  추천:0  2021-09-10
《해동성국》 발해의 건국 고구려유민들은 신라통치배들이 또다시 적들과 결탁한 다음에도 외래침략자들을 반대하여 계속 줄기차게 싸웠다. 침략자들을 반대하는 고구려유민들의 투쟁은 676년이후 여러가지 어렵고 복잡한 정황이 조성되였으나 조금도 수그러들지 않았으며 오히려 압록강이북지역을 중심으로 더욱 고조되였다. 위대한 령도자 김정일동지께서는 다음과 같이 교시하시였다. 《고구려를 계승한 발해는 7세기말부터 10세기초까지 200여년간 존재하였으며 정치, 경제, 문화가 크게 발전하여 〈해동성국〉으로 이름을 떨치였습니다.》     △ 대중상과 대조영에 의한 진국의 성립 고구려유민들의 줄기찬 투쟁과정에 점차 고구려를 계승한 새 나라를 세울수 있는 기초가 마련되여나갔으며 새로운 소국들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이 시기에 압록강류역과 그 부근일대의 고구려유민들에 의해 태백산(백두산)일대에서 《진국》이라는 고구려유민들의 소국이 출현하였다. 《삼국유사》와 《제왕운기》의 자료에 근거해보면 진국은 678년경에 처음으로 나타났으며 684년경에 자기 존재를 더욱 뚜렷이 하였다고 볼수 있다. 진국왕(진국공)은 대조영의 아버지 대(걸걸)중상이였다. 668년 9월 고구려왕조가 멸망한후에 침략자들은 전국 각지에 자기 군대를 파견하여 그곳을 강점하고 새로 저들의 지배체계를 세워보려고 획책하였다.       고구려멸망 당시 국가장부에 등록된 호구는 5부, 176개의 성에 69만여호였는데 침략자들은 그때 저들이 정복한 나라들에 대하여 실시한 상투적수법에 따라 초기에 계획하였던 9개의 《도독부》(도에 해당함), 42개의 《주》(군에 해당함), 100개의 《현》(작은 군에 해당함)가운데서 불과 도독부 4개와 주 10개밖에 설치하지 못하였다. 평양성에는 《안동도호부》라는것을 설치하고 설인귀를 그 장관(《안동도호》)으로 임명하여 2만의 군대를 가지고 통치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각 지방의 《도옥》, 《자사》, 《현령》 등의 자리에는 저들에게 투항한 반역자들을 앉히고 거기에 저들의 관리들을 끼워서 그들을 통제하려고 하였다.       고구려지역에 대한 침략자들의 강점책동은 고구려유민들을 강점자들을 몰아내기 위한 투쟁에로 적극 떨쳐나서게 하였다. 이러한 형편에서 강점자들은 저희들의 관리들을 통하여 실시하고있던 직접적통치방식을 철회하고 투항한 이전 고구려의 왕족들과 관리들을 통한 간접통치방식으로 그 방법을 변화시키게 되였다. 그리하여 고구려가 멸망한지 9년만인 677년에 강점자들에게 끌려가있던 고구려의 마지막왕인 고보장이 다시 료동지역에 나타나게 되였다.       《삼국사기》 권22 고구려본기 보장왕조에는 《의봉2년(667년-인용자) 정축년 봄 2월에 투항한 왕을 료동주도독으로 삼고 조선왕으로 책봉하였다. 료동에 돌아가서 남은 사람들을 안착시키도록 하였다. …왕이 료동에 이르러 반역을 꾀하면서 몰래 말갈과 내통하였다.》라고 기록되여있다.       강점자들은 보장왕을 조선국왕으로 임명하여 옛 고구려지역에 파견하면서도 그가 고구려유민들과 손을 잡고 저희들을 반대하여 나설것이 두려워 료동성에 있었던 《안동도호부》를 신성(료하서쪽 신민현부근, 후의 료빈탑으로 인정되고있음)으로 옮겨가 있게 하고 연남생을 《도호》로 임명하여 보장왕의 행동을 감시통제하게 하였다. 이것은 고구려를 속령화하고 투항한 고구려의 관리들을 내세워 간접적으로 통치하는 방법으로 넘어갔다는것을 의미한다. 한편 옛 고구려지역에서는 고구려유민들이 고국회복투쟁을 줄기차게 벌리고있었다. 여기에서 주도적역할을 한 사람이 바로 대중상과 대조영이였다. 대중상과 대조영은 말갈인 추장 걸사비우가 지휘하는 말갈인부대와 련합하여 수개월간 영주의 동쪽과 동남쪽의 여러 성들을 탈환하여 고국땅에서 강점자들을 소멸하고 9월에는 료서 고성에 옮겨와있던 《안동도호부》를 공격하여 이에 큰 타격을 주었다. 료동지역까지 세력범위를 확대하면서 고국회복투쟁을 벌리고있던 대중상과 대조영은 료동지역에 돌아온 보장왕을 리용하려고 그와 련계를 맺게 되였다. 빼앗긴 왕권을 회복하려는 의도를 가지고있던 보장왕도 대중상 등에게 의거하였다.       《협계태씨족보》 발해국왕세략사 태조 진국왕조에는 보장왕이 《료동에 이르러 중상(태조 진국왕 즉 대조영을 가리킴-인용자)과 서로 통하여 모반하려고 하였다.》고 씌여져있다. 즉 《삼국사기》에 기록된 보장왕이 내통한 《말갈》이란 바로 대중상과 대조영이 거느린 고구려유민세력을 비속화하여 가리킨 말이라는것을 알수 있다.       그러나 680년대에 들어서면서 고구려유민들의 고국회복투쟁에서는 새로운 변화가 생겼다. 그것은 고구려재건투쟁에서 중심적역할을 놀던 이전 고씨왕족들이 더이상 고국회복투쟁에 관여할수 없게 된것이였다. 677년에 료동지역에 온 이후 고구려유민들의 투쟁을 지지하고 그에 의거하여 왕권회복을 실현해보려던 보장왕은 그 내막이 탈로나 681년 강점자들에 의하여 다시 공주로 끌려갔다. 공주로 끌려간 보장왕은 그 다음해 682년에 그곳에서 죽었다. 더우기 683년에는 고구려의 고씨왕족이 세웠던 고구려국까지 사라짐으로써 옛 고구려령토에는 고구려왕족이 관여하는 고국회복투쟁이 완전히 없어지게 되였으며 이것은 항전세력들에게 새로운 조건을 조성해주었다. 이렇게 되자 대중상과 대조영은 이를 계기로 왕족을 내세우려던 종전의 방법을 바꾸어 독자적인 정치세력으로 나설것을 결심하게 되였다.       이에 대하여 《제왕운기》 하권 동국군왕개국년대병서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여있다. 《고구려의 옛 장수 대조영이 태백산 남쪽성에 의거하여 주나라 측천무후 원년 갑신(684년)에 나라를 세우고 이어 발해라고 이름을 삼았다.》       《제왕운기》의 기록과 제반사실들로 미루어보아 684년에 대중상과 대조영을 중심으로 한 고구려유민들이 발해대왕국의 전신국가로서 봉건소국 진국을 수립하였다는것을 알수 있다. 대중상과 대조영을 중심으로한 정치세력들이 봉건소국 진국을 세움으로써 고구려재건투쟁에서 자기의 지위를 더욱 높일수 있게 되였다. 684년이후 진국은 국력을 강화하면서 고구려를 재건하기 위한 투쟁을 더욱 적극적으로 벌려나갔으며 이로하여 압록강류역이북지역에서 침략자들은 더는 배겨낼수 없게 되였다.   ❖ 력사이야기: 대중상과 진국​   △ 침략자들을 반대한 고구려유민들의 투쟁, 발해의 건국 침략자들을 반대하는 고구려유민들의 투쟁은 영주지방에서 힘차게 벌어졌다. 영주지방의 고구려유민들은 696년에 고구려의 옛 장수인 대조영의 지휘밑에 말갈인, 거란인들과 합세하여 폭동을 일으켰다. 폭동군은 침략자들의 아성인 영주성을 들이쳐 도독을 처단하고 이 일대의 강점세력을 격파한 다음 고구려땅을 향해 동쪽으로 진격하기 시작하였다. 대조영이 거느린 고구려유민군사들이 동쪽으로 진격한 목적은 옛 고구려땅에서 침략자들을 완전히 몰아내고 그땅에 고구려사람들의 나라를 세우자는데 있었다.       침략자들은 영주지방에서 일어난 거란인들의 폭동을 진압한 다음 많은 무력을 동원하여 고구려유민군사들을 추격하여왔다. 그리하여 698년에 천문령 (료녕성 창무서쪽의 령)에서 치렬한 전투가 벌어지게 되였다. 이 전투에서 고구려유민군사들은 강점군을 완전히 섬멸하여버렸다. 이 반격이 얼마나 드세찼는가 하는것은 적장 리해고가 겨우 목숨만 건져가지고 혼자서 도망친 사실만으로도 잘 알수 있다.         천문령전투에서 참패를 당한 침략자들은 다시는 고구려유민군사들을 추격하지 못하였다. 천문령전투에서 결정적승리를 이룩한 대조영은 계속 동쪽으로 진격하여 동모산에 자리를 잡았다. 그는 이전 고구려령역안의 광범한 인민들을 집결하고 적의 침입에 대처하여 방어를 한층 강화하였다.   이처럼 침략자들과의 투쟁과정에 대조영을 중심으로 한 새 봉건세력집단이 형성강화되였는데 이들은 이미 이룩한 군사적승리와 정치적력량관계에 기초하여 698년에 소국인 진국을 확대발전시켜 발해국의 창건을 세상에 선포하였다. 발해국의 1대왕은 대조영이였고 초기수도는 동모산이였다.   ❖ 력사인물: 대조영   발해가 성립됨으로써 고구려의 옛땅을 차지하려던 침략자들의 기도는 완전히 파탄되게 되였으며 그후 거듭되는 외적들의 침입을 물리치고 민족의 자주권을 지켜나갈수 있는 담보가 마련되게 되였다. 세 나라 인민들 특히 고구려유민들의 완강하고도 줄기찬 투쟁에 의하여 침략자들이 우리 강토에서 종국적으로 쫓겨나고 발해가 성립됨으로써 신라통치배들의 외세의존정책에 의하여 빚어졌던 엄중한 민족적위기는 완전히 극복되고 우리 조국 력사상에는 이전의 세 나라를 대신하여 발해와 후기신라 두 나라가 존재하게 되였다.
37    7세기 당나라침략군을 몰아낸 세나라인민들의 투쟁 댓글:  조회:974  추천:0  2021-09-10
 7세기 당나라침략군을 몰아낸 세나라인민들의 투쟁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께서는 다음과 같이 교시하시였다. 《만일 삼국시기에 고구려, 신라, 백제 세 나라가 단합하여 외적을 물리쳤더라면 우리 조국은 더욱 발전하였을것입니다.》 삼국시기 고구려는 외적의 침략을 물리치기 위한 투쟁을 끊임없이 벌리지 않으면 안되였다. 그러나 백제와 신라통치배들은 고구려와 단합하여 외적을 물리칠 대신 내부싸움을 자주 벌려놓음으로써 우리 나라의 전반적발전을 저애하였다.    7세기 중엽 당나라와 신라통치배들의 결탁 신라통치배들은 남의 힘을 빌어서라도 고구려의 삼국통일정책을 가로막고 저들의 지배권을 넓히려는 야망밑에 당나라와 결탁(야합)하는 반역의 길로 나갔다. 신라통치배들의 이러한 기도는 7세기 40년대이후 더욱 로골화되였다. 640년대 전반기 신라통치배들은 당나라에 접근하기 시작하였다.       신라통치배들은 643년(선덕녀왕 12년) 9월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여 두 나라 군대가 《련합》하여 백제, 고구려를 공격할것을 요청하였으며 645년 당나라의 고구려침공때에는 그를 도와 3만명의 군대를 동원하는 죄악을 저질렀다.       640년대 후반기이후 신라는 당나라와 결탁하는 매국적인 행위를 감행하였다. 648년(진덕녀왕 2년) 신라 김춘추[金春秋(603-661년) -후의 태종무렬왕]가 당나라를 방문하여 범죄적결탁을 밀약한것은 그 중요한 계기로 되였다. 고구려침략에서 련속 패배를 당한 당나라는 이 무렵 종래와는 달리 신라와 본격적인 야합을 기도하였다. 이러한 시기에 김춘추가 당나라를 방문하였다.       당나라를 방문한 김춘추는 당나라와 매국적인 흥정판을 벌려놓고 두 나라 군대가 《련합》하여 고구려와 백제를 무너뜨린 다음 대동강이남의 땅은 신라가 차지하고 대동강이북의 광활한 고구려령토는 당나라가 차지한다는 내용의 비밀협약을 맺었다. 그런데 당시 당나라의 야심에는 또 다른것이 있었다. 그것은 신라와 결탁하여 고구려, 백제를 무너뜨린 다음 신라마저 정복하자는것이였다.       당나라는 신라통치배들과 밀약을 하였으나 고구려와의 전쟁에서 돌이킬수 없는 참패를 당한 까닭에 대규모적인 침략전쟁에 선뜻 뛰여들수 없었다. 그리하여 밀약후에도 10여년동안이나 기회를 엿보며 침략전쟁준비를 하였다. 한편 신라통치배들은 당나라군을 하루빨리 끌어들일 기도밑에 관료의복제도를 당나라식으로 고치는가 하면 당나라의 년호를 쓰는 등 사대주의적인 조치를 취하였으며 659년에 또다시 사신을 파견하여 원정군을 보내줄것을 요청하였다. 이처럼 신라통치배들은 백제, 고구려를 무너뜨리고 신라마저 먹으려는 당나라와 결탁하고 당나라군대를 끌어들임으로써 우리 민족사에 씻을수 없는 엄중한 죄악적후과를 남기였다.    라당련합군의 침공을 반대한 백제, 고구려인민들의 투쟁 당나라침략자들은 7세기 60년대에 이르러 신라의 청병을 구실로 대규모적인 무력침공에 들어섰다. 당시 당나라침략자들은 먼저 라당련합으로 백제를 무너뜨린 다음 그길로 신라를 정복하고 제일 강대한 고구려를 공격하여 먹어보자는것이였다. 만일 신라를 당장 정복할수 없는 경우 련합을 유지하여 고구려를 먼저 정복하고 다음에 신라를 먹을것을 계획하고있었다. 당나라와 신라는 660년에 먼저 백제를 대규모적인 무력으로 침공하였다. 660년 6월 소정방이 거느린 13만명의 당나라침략군은 1 900여척의 배로 덕물고를 거쳐 금강하구로 기여들었고 김유신이 거느린 5만명의 신라군은 동쪽으로부터 공격을 개시하였다.       당시 백제의 형편은 국력이 심히 약화되고 혼란이 조성되여 불안정한 상태였다. 그것은 의자왕과 봉건통치배들속에서 부화방탕한 생활이 계속되고 간신이 성행하여 충신들이 모해를 당하고있었기때문이였다. 이렇게 안일해이되여있던 백제의 의자왕과 봉건통치배들은 대응책을 시급히 세울 대신 당나라를 먼저 막아야 한다거니, 신라를 먼저 막아야 한다거니 하면서 시간을 보내였으며 이 사이에 라당련합군은 백제의 국내깊이까지 기여들수 있었다.       660년 7월 신라군은 별로 저항을 받음이 없이 천년의 요새 탄현을 넘어 황산벌(충청남도 론산군 련산동쪽 5리지점)로 밀려들었으며 당나라침략군은 금강을 거슬러올랐다. 이리하여 라당련합군은 백제의 수도 사비성으로 물밀듯이 쓸어들었다. 백제의 인민들과 군인들은 때늦게나마 결사적으로 싸웠다. 계백장군이 거느린 5 000명의 백제군사들은 황산벌에서 5만명의 신라군을 맞받아 용감히 싸웠다. 황산벌전투에서 그들은 4차례나 신라군의 공격을 물리치고 적들의 사비성공격을 지연시켰다.    혁명일화: 계백은 애국적인물​     한편 백제군은 금강을 거슬러오는 당나라침략군 13만명이 소정방의 지휘밑에 기여들자 2차례의 완강한 방어전을 벌리여 큰 타격을 주었다. 적들이 사비성을 포위공격하게 되자 백제의 의자왕과 대신들은 제 한목숨만을 건지려고 수도를 버리고 웅천(공주)으로 도망쳤다. 사비성은 7월 13일 적의 손아귀에 들어가게 되였으며 의자왕은 싸우는 인민들을 배반하고 7월 18일 적에게 항복하고말았다. 이리하여 백제봉건왕조는 멸망하였다.     백제강점후 라당련합군은 고구려침공에 집중하였다. 당나라침략자들은 660년 말~662년에 고구려에 대한 대규모적인 무력침공을 감행하였다.       고구려인민들은 연개소문장군의 지휘밑에 적들의 침략을 짓부셔버리였다. 특히 고구려군은 662년 1월 당나라의 소정방, 방효태가 거느린 침략군과의 사수(합장강)격전에서 방효태와 그의 아들 13명을 포함한 1개 군단을 모조리 소멸하였다. 적장 소정방은 어찌나 혼쌀이 났던지 산속에 숨었다가 겨우 도망쳐 목숨을 건지였다고 한다.       그러나 그후 고구려내부의 정세는 연개소문이 죽은 후 급변하였다. 연개소문이 666년에 죽자 당나라는 그 기회에 고구려를 내부로부터 와해시키려고 기도하였으며 적들의 간교한 책동에 의하여 연개소문의 세 아들사이에는 권력싸움이 벌어지게 되였다. 연개소문이 죽은 뒤 대막리지자리를 차지하고 군사지휘권을 잡고있던 연남생은 권력싸움에서 밀리우게 되자 넓은 지역과 많은 군대를 끌고 당나라에 투항하는 반역행위를 감행하였으며 연개소문의 동생 연정토도 자기관하 12개성의 많은 주민들을 끌고 신라에 투항하였다. 고구려통치층안에서 일어난 추악한 권력싸움과 정치적혼란, 투항변절은 강력한 중앙집권적통치체제를 뒤흔들어놓았으며 나라의 방위력을 급격히 약화시켰다.   라당련합군은 668년 고구려에 대한 총공격을 개시하였다. 50만의 당나라침략군과 20만의 신라군은 륙지와 바다, 북쪽과 남쪽에서 물밀듯이 쓸어들었다.         당나라침략군의 주력은 반역자 연남생을 길잡이로 앞세우고 압록강을 건너 평양으로 공격하였고 남쪽에서는 류인궤가 거느린 당나라침략군과 신라군이 평양성으로 북상하였다. 이리하여 평양성은 668년 8월 수십만대군의 완전포위에 들게 되였다.       이 엄혹한 형편에서도 고구려인민들은 평양성을 지키기 위하여 결사적으로 싸웠으며 적들에게 심대한 타격을 주었다. 치렬한 공방전은 한달이상이나 계속되였다. 그러나 668년 9월 고구려군의 지휘를 맡았던 신성이 변절투항하였고 보장왕을 비롯한 봉건통치배들은 싸우는 인민들을 배반하고 투항하였다. 결국 근 1 000년간 동방대강국으로 위용을 떨치던 고구려는 무너지게 되였다.       고구려말기의 력사는 나라의 통수체제, 방위체제가 마비되고 국내의 단합이 이루어지지 못하면 아무리 강대한 국력을 가진 나라라 하더라도 그 힘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고 망하게 된다는것을 교훈으로 남기였다. 고구려가 무너진것은 힘이 약해서가 아니라 집권층안에서 일어난 추악한 권력싸움과 연개소문의 아들의 변절투항으로 강대한 자기의 힘을 제대로 발휘할수 없었기때문이며 라당련합군의 공격때문이였다.       결국 신라통치자들의 반역적인 외세의존행위로 하여 강대했던 고구려는 무너지고 거의 완성단계에 이르렀던 삼국통일도 실현되지 못하였다. 당나라침략자들은 고구려가 무너지자 평양에 《안동도호부》를 설치하고 설인귀를 그 우두머리(안동도호)로 들여앉히였다. 그리고 그 밑에 9개의 도독부를 두어 동방침략의 거점으로 삼았다. 이때부터 고구려인민들은 강점자들을 자기 강토에서 몰아내기 위한 투쟁을 벌리지 않으면 안되였다.    669~676년 당나라강점군을 몰아내기 위한 삼국인민들의 단합된 투쟁 고구려가 무너진 후 당나라침략자들은 신라마저 집어삼킬 흉계를 로골적으로 드러내면서 정복전쟁을 기도하였다. 이리하여 온 나라 온 민족이 외세에게 먹히울수 있는 긴박한 정세가 조성되였다. 이것은 신라통치배들의 외세의존정책에 의해 빚어진 산물이였다.       이 엄혹한 시기에 세나라인민들은 힘을 합쳐 당나라침략군을 몰아내기 위한 투쟁에 일떠섰다. 이 투쟁은 본질에 있어서 외적에게 빼앗긴 자기의 령토와 겨레를 되찾기 위한 정의의 싸움이였다. 한편 이 시기 신라통치배들은 당나라가 처음의 《약속》과는 달리 고구려, 백제땅을 독차지하고 신라마저 먹으려는 조건에서 당나라침략군과의 싸움에 나서지 않을수 없었다.       이때에도 신라통치배들은 대동강이남지역까지만 차지하려고 하였다. 당나라강점군을 몰아내기 위한 세나라인민들의 투쟁은 669년경부터 시작되여 온 나라 각지에서 벌어졌다. 북방에서는 고구려항전군이 이르는 곳마다에서 당나라강점군에 대한 공세를 취하였다.       670년 3월 태대형 고연무가 지휘한 1만의 고구려항전군은 설오유가 지휘하는 1만의 신라군과 합세하여 압록강을 건너 옥골로 진출하여 적에게 큰 타격을 안기였으며 672년 8월에는 백수성에서 적들에게 심대한 타격을 주고 수천명의 목을 잘라버리였다.       고구려인민들의 투쟁은 압록강이남지역에서도 치렬하게 벌어졌다. 668년 말부터 각지에서 당나라강점자들을 반대하는 싸움을 힘있게 벌리고있던 고구려인민들은 평양에 설치되여있던 《안동도호부》를 669년경에 료동지방의 신성(중국 료녕성 무순부근)으로 쫓아버렸다. 한편 고구려의 수림성사람인 대형 검모잠은 항전부대를 조직하여 국모성을 중심으로 맹렬한 활동을 벌리였으며 남으로 진격하면서 당나라의 관리들을 처단하였다. 그리고 조선서해 사야도(소야도)에 피신해있던 보장왕의 서자 안승을 한성(장수산일대)에 데려다놓고 《고구려국》의 재건을 선포하였다.     남방에서는 백제인민들이 670년 7월 신라군과 함께 백제땅에서 당군을 격파하고 63개의 성을 탈환하였으며 672년 초에는 백제의 거의 전지역을 회복하였다. 669년 2월에 당나라침략군의 우두머리의 하나였던 리적이 자기 왕에게 보낸 보고에는 압록강이북지역에서 저들이 장악한 성은 14개뿐이라고 씌여있었다. 이것은 고구려군민들이 처음부터 완강한 투쟁을 벌려 강점자들에게 치명적타격을 주었으며 압록강이북의 많은 성들에 적들이 미치지 못하고있었다는것을 보여준다. 당나라통치배들은 수십만의 대군을 내몰아 675년경부터 새로운 공세를 기도하였다. 이때 세나라인민들은 과감한 투쟁을 벌려 적의 공세를 걸음마다 분쇄, 격파하였다.       신라군은 675년 9월 천성(례성강어구)에 침입한 당나라침략군 1 400명을 소탕하고 적선 40여척, 군마 1 000필을 로획하는 승리를 거두었다. 9월 말에는 매초성(경기도 양주)에 둥지를 틀고있던 20만의 당나라침략군을 공격하여 수만명을 살상포로하고 군마 3만여필과 수많은 군수물자들을 로획하는 전과를 이룩하였으며 도주하는 적을 추격하여 지금의 강원도 덕원, 문천일대로 진출하였다.       675년 10월 이후에도 크고작은 18차례의 전투를 진행하여 6 000여명의 적을 소탕하고 수백마리의 군마를 로획하였다. 676년 11월 신라군은 기벌포(금강하구)에서 적장 설인귀가 거느린 당나라 수군과 22차에 걸치는 격전끝에 4 000여명을 소멸하는 승리를 거두었다. 그후 적들은 압록강이남으로 더는 기여들 엄두를 내지 못하였다. 이처럼 세나라인민들은 669~676년간에 100여차의 전투를 벌려 당나라강점자들을 압록강이남지역에서 완전히 몰아내는데 성공하였다. 이것은 이 시기 민족의 위기를 극복해나가는데서 세나라인민들이 이룩한 큰 성과였다. 신라통치배들의 매국배족행위로 말미암아 세나라 전 강토가 당나라침략자들에게 강점당할 위기를 겪게 되였지만 애국적군민들은 희생적인 투쟁으로 적들을 압록강이남지역에서 몰아내고 위기를 극복하였다. 그러나 신라통치배들은 인민들의 투쟁에 편승하여 백제의 전지역과 고구려의 대동강이남지역을 차지한 다음 투쟁대오에서 떨어져나감으로써 또 하나의 큰 죄악을 저질렀다.
36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 대한민국의 국보國寶 댓글:  조회:764  추천:0  2021-09-01
      번호 국보 지역 시대 재건시대 비고 001 평양성 평양시 중구역 고구려     002 안학궁성  평양시 대성구역 안학동  고구려     003 보통문 평양시 중구역 보통문동  고구려 1473년    004 대동문 평양시 중구역 대동문동  고구려 1635년    005 숭인전 평양시 중구역 종로동 고구려 1352~1428년    006 숭령전 평양시 중구역 종로동 조선 1714년  동명왕 사당  007 보현사 구층탑 평안북도 향산군 향암리  고려     008 대성산성 평양시 대성구역 대성동  고구려     009 청암리성 평양시 대성구역  고구려     010 대성산남문 평양시 대성구역 대성동  고구려     011 대성산련못떼 평양시 대성구역 대성동  고구려     012 대성산고구려무덤떼 평양시 대성구역 대성동  고구려   세계유산 고구려 고분군 013 법운암 평양시 만경대구역 룡봉리  고구려 조선    014 용곡서원 평양시 만경대구역 룡봉리 조선 1713년    015 룡산리고구려무덤떼 평양시 력포구역 룡산리  고구려   세계유산 고구려 고분군 016 연광정 평양시 중구역 대동문동 고구려 1670년    017 부벽루 평양시 중구역 금수산 고구려 1614년    018 칠성문 평양시 중구역 경상동 고구려 1711, 1764년    019 을밀대 평양시 중구역 경상동 고구려 1714년    020 청류정 평양시 중구역 경상동 고구려 1716년    021 최승대 평양시 중구역 모란봉 고구려 1716, 1849년    022 전금문 평양시 중구역 경상동 고구려 1714년    023 평양종 평양시 중구역 대동문동 조선     024 홍복사7층탑 평양시 모란봉구역 개선동 룡화사  고려     025 금강사터  평양시 대성구역 청암토성내  고구려     026 호남리사신무덤 평양시 삼석구역 호남리  고구려   세계유산 고구려 고분군 027 검은모루유적 평양시 상원군 흑우리 선사시대     028 강서세무덤 남포시 강서구역 삼묘리 고구려   세계유산 고구려 고분군 029 약수리벽화무덤 남포시 강서구역 약수리  고구려   세계유산 고구려 고분군 030 수산리벽화무덤 남포시 강서구역 수산리 고구려   세계유산 고구려 고분군 031 백상루 평안남도 안주시 안주읍 고려 1753년    032 강선루 및 동명관 평안남도 성천군 성천읍 고려 1768년  성천객사  033 훈련정 평안남도 평원군 평원읍 미두산  조선     034 안국사 평안남도 평성시 봉학동 청룡산 고구려 1785년    035 방선문 평안남도 성천군 성천읍  조선 1727년  성천객사의 바깥문  036 동명왕릉 평양시 력포구역 룡산리  고구려 1994년  세계유산 고구려 고분군 037 황룡산성 남포시 룡강군 옥도리 오석산 고구려 919년  세계유산 고구려 고분군 038 자모산성 평안남도 평성시 어중리  고구려     039 쌍기둥무덤 남포시 룡강군 룡강읍  고구려   세계유산 고구려 고분군 040 보현사 평안북도 향산군 향암리 묘향산 고려     041 상원암 평안북도 향산군 향암리 묘향산  고려   보현사 암자 042 축성전 평안북도 향산군 향암리 묘향산  조선   보현사  043 불영대 평안북도 향산군 향암리 묘향산  조선   보현사  044 구성남문 평안북도 구성시 동문동  고려   구주성 남문  045 창성향교 평안북도 창성군 창성읍  조선   보광전, 천주루  046 천주사 평안북도 영변군 영변읍  조선     047 륙승정 평안북도 영변군 영변읍  조선     048 천리장성 평안북도 창성군 금야리  고려     049 녕변남문 평안북도 영변군 영변읍  고려     050 서운사 평안북도 영변군 영변읍 약산  고려     051 통군정 평안북도 의주군 의주읍 고려     052 의주남문 평안북도 의주군 의주읍  조선     053 금광사 평안북도 의주군 금광리  조선     054 심원사 평안북도 박천군 상양리  후기신라     055 양화사 평안북도 태천군 상단리  후기신라     056 룡오리산성 평안북도 태천군 룡상리  고구려     057 관음전 평안북도 향산군 향암리  고려   보현사  058 백마산성 평안북도 피현군 백마로동자구  고구려     059 성동리다라니석당 평안북도 향산군 향암리  고려     060 구주성 평안북도 구성시 고려     061 룡한산성 평안북도 곽산군 곽산읍 릉한산 고구려     062 룡골산성 평안북도 염주군, 피현군 고구려     063 녕변철옹성 평안북도 영변군 영변읍 고구려     064 인풍루 자강도 강계시 충성동  조선     065 강계망미정 자강도 강계시 부창동  조선   강계읍성의 남장대  066 강계아사 자강도 강계시 북문동  조선   강계력사박물관으로 사용 중  067 고국원왕릉(안악 3호분)  황해남도 안악군 오국리  고구려   세계유산 고구려 고분군 068 부용당 황해남도 해주시 부용동  조선     069 해주석빙고 황해남도 해주시 옥계동  고려     070 해주9층탑 황해남도 해주시 해청동 고려     071 해주5층탑 황해남도 해주시 옥계동 고려     072 순명문 황해남도 해주시 영광동 고려   해주읍성 남문  073 안악제1호무덤 황해남도 안악군 대추리  고구려   세계유산 고구려 고분군 074 안악제2호무덤 황해남도 안악군 대추리  고구려   세계유산 고구려 고분군 075 월정사 황해남도 안악군 월정리  후기신라     076 로암리고인돌 황해남도 안악군 로암리  청동기 시대     077 강서사 황해남도 배천군 강호리 고려     078 룡동리고인돌 황해남도 배천군 룡동리 청동기 시대     079 소현서원 황해남도 벽성군 석담리 조선     080 자혜사 황해남도 신천군 서원리 고려     081 현암 황해북도 재령군 서림리  후기신라     082 해주다라니석당 황해남도 해주시 해청동  고려     083 학림사5층탑 장연군 학림리  고려     084 관산리고인돌 황해남도 은율군 관산리  청동기 시대     085 광조사진철대사비 황해남도 해주시 학현동 고려     086 연안읍성 황해남도 연안군 연안읍  고구려     087 성불사 황해북도 사리원시 정방리  후기신라     088 정방루 황해북도 사리원시 정방리  고려   정방산성의 남문  089 정방산성 황해북도 사리원시 정방리  고려     090 성장김성업비 황해북도 사리원시 정방리  조선     091 연탄심원사 황해북도 연탄군 연탄읍  고려     092 귀진사 황해북도 서흥군 송월리  고려     093 태백산성 황해북도 평산군 산성리  고구려     094 석왕사 강원도 금강군 설봉리  고려     095 신계사터 강원도 금강군 온정리 고구려     096 장안사터 강원도 금강군 내강리 고구려     097 표훈사 강원도 금강군 내강리 후기신라     098 보덕암 강원도 금강군 내강리 신라     099 정양사 강원도 금강군 내강리 신라   금강산4대사찰  100 금장암사자탑 강원도 금강군 내강리 고려     101 장연사3층탑 강원도 금강군 내강리 후기신라   금강산3옛탑  102 묘길상 강원도 금강군 내강리 고려     103 가학루 강원도 안변군 안변읍  후기신라     104 보현사 강원도 안변군 령신리  후기신라     105 명적사 강원도 원산시 영삼리  신라     106 주둔리 무지개다리 고성군 주둔리  고려     107 함흥본궁 함경남도 함흥시 사포구역 소나무동  조선   함흥성 북장대의 누정  108 구천각 함경남도 함흥시 동흥산구역  고려   함경감찰사 감영 109 선화당 함경남도 함흥시 동흥산구역  조선     110 황초령 진흥왕 순수비 함경남도 함흥시 동흥산구역  신라   함흥역사박물관 111 마운령 진흥왕 순수비 함경남도 함흥시 동흥산구역  신라   함흥역사박물관 112 정광사 함경남도 리원군 원사리  조선     113 량천사 함경남도 고원군 락천리  후기신라     114 군자루 함경남도 금야군 금야읍  조선     115 룡흥사 함경남도 영광군 봉흥리  고려     116 동덕사 함경남도 단천시 두연리  고려     117 공민루 함경남도 단천시 양산동  조선     118 경성읍성 함경북도 경성시 승암로동자구  고려     119 경성읍성남문 함경북도 경성시 승암로동자구  고려     120 개심사 함경북도 명천군 보천리 칠보산 발해     121 쌍계사 함경북도 화성군 부암리  조선     122 만월대 개성시 송악동  고려     123 공민왕릉 개성시 하선리  고려     124 개성남대문 개성시 북안동  조선     125 관음사 개성시 박연리  고려     126 대흥산성 개성시 박연리  고려     127 개성 성균관 개성시 방직동  고려     128 숭양서원 개성시 선죽동  고려     129 발어참성 개성시 송악동  후기신라     130 개성옛성 개성시 송악동  후고구려      131 첨성대 개성시 송악동  고려     132 흥국사탑 개성시 방직동  고려   고려박물관 133 령통사5층탑 개성시 룡흥리  고려     134 화장사부도 개성시 룡흥리  고려     135 불일사5층탑 개성시 방직동  고려   고려박물관 136 연복사종 개성시 북안동  고려     137 적조사철조여래좌상 개성시 방직동  고려   고려박물관 138 표충비 개성시 선죽동  조선     139 현화사7층탑 개성시 방직동  고려   고려박물관 140 글자새긴성돌 평양시 중구역 종로동  고구려     141 영산전 평안북도 향산군 향암리  고려     142 김응서집 남포시 룡강군 옥도리  조선     143 수충사 평안북도 향산군 향암리  조선     144 보현사8각13층탑 평안북도 향산군 향암리  고려     145 경암루 황해북도 사리원시 경암동  조선     146 칠렬사터 평안남도 안주시 안주읍        147 중흥사당간지주 평양시 모란봉구역 인흥동  고구려     148 영명사8각석불감 평양시 모란봉구역 개선동  고려     149 보현사비 평안북도 향산군 향암리  고려     150 광제사 함경남도 북청군 죽상리  조선     151 현화사비 개성시 방직동  고려   고려박물관 152 광통보제선사비 개성시 해선리  고려     153 오룡사법경대사비 개성시 룡흥리  고려     154 관음사대리석관음상 평양시 중구역 대동문동  고려     155 령통사대각국사비 개성시 룡흥리  고려     156 덕흥리벽화무덤 남포시 강서구역 덕흥동  고구려   세계유산 고구려 고분군 157 진북루 량강도 갑산군 갑산읍  조선     158 안주성 평안남도 안주시 안주읍  고구려     159 선죽교 개성시 선죽동  고려     160 고구려나무다리 평양시 대성구역 휴암동, 청호동  고구려     161 덕화리무덤 평안남도 대동군 덕화리  고구려     162 유점사종 강원도 고성군 월비산리  조선     163 룡화사 평양시 모란봉구역 개선동  고려     164 광법사 평양시 대성구역 대성동  고구려     165 원산리청자가마터제1호 황해남도 봉천군 원산리  고려     166 원산리청자가마터제2호 황해남도 봉천군 원산리  고려     167 원산리청자가마터제3호 황해남도 봉천군 원산리 고려     168 원산리청자가마터제4호 황해남도 봉천군 원산리 고려     169 자혜사5층탑 황해남도 신천군 서원리  고려     170 자혜사석등 황해남도 신천군 서원리  고려     171 패엽사터 황해남도 안악군 패엽리  고려     172 고산동고구려우물 평양시 대성구역 고산동  고구려     173 정릉사 평양시 력포구역 룡산리  고구려     174 단군릉 평양시 강동군 문흥리  고구려(고조선)      175 순장무덤 평안남도 성천군 룡산리  청동기 시대     176 석왕사호지문 강원도 고산군 설봉리  조선     177 안양암마애삼존불상 강원도 금강군 내강리  고려     178 온정리마애불립상 강원도 고성군 온정리  고려     179 왕건릉 개성시 해선리  고려     180 온달장군과 평원왕의 공주의 무덤(진파리4호무덤)  평양시 력포구역 룡산리  고구려   세계유산 고구려 고분군 181 장군고흘의 무덤(진파리1호무덤)  평양시 력포구역 룡산리  고구려   세계유산 고구려 고분군 182 향단리 돌관무덤 평양시 강동군 향단리  청동기 시대     183 황대성과 고인돌 평양시 강동군 향목리  청동기 시대     184 정릉사8각7층탑 평양시 력포구역 룡산리  고구려     185 광법사8각5층탑 평양시 대성구역 대성동  고려     186 정양사3층탑 강원도 금강군 내강리  후기신라     187 청해토성 함경남도 북청군 하호리  발해     188 화성동제단 평양시 룡성구역 화성동  고조선     189 삼성사 황해남도 안악군 패엽리 구월산  조선     190 룡강큰무덤 남포시 룡강군 룡강읍  고구려     191 신계사 강원도 고성군 온정리  신라     192 령통사 개성시 룡흥리  고려     193 북관대첩비 함경북도 김책시 임명리  조선           1 서울 숭례문(남대문) 국보  1호 서울 중구 조선 태조 2 원각사지 십층석탑 국보  2호 서울 종로구 조선 초기 3 북한산 신라 진흥왕순수비 국보  3호 서울 종로구 신라 진흥왕 4 고달사지 부도 국보  4호 경기 여주군 통일신라 경덕왕 5 법주사 쌍사자석등 국보  5호 충북 보은군 통일신라 성덕왕 6 중원 탑평리 칠층석탑 국보  6호 충북 충주시 통일신라 7 봉선 홍경사 사적 갈비 국보  7호 충남 천안시 고려 현종 8 성주사 낭혜화상 백월보광 탑비 국보  8호 충남 보령시 통일신라 진성여왕 9 부여 정림사지 오층석탑 국보  9호 충남 부여군 백제 후기 10 실상사 백장암 삼층석탑 국보 10호 전북 남원시 통일신라   11 미륵사지 석탑 국보 11호 전북 익산시 백제 후기 12 화엄사 각황전앞 석등 국보 12호 전남 구례군 통일신라 13 무위사 극락전 국보 13호 전남 강진군 조선 세종 14 은해사 거조암 영산전 국보 14호 경북 영천시 조선 초기 15 봉정사 극락전 국보 15호 경북 안동시 고려 후기 16 안동 신세동 칠층전탑 국보 16호 경북 안동시 통일신라 17 부석사 무량수전앞 석등 국보 17호 경북 영주시 통일신라 18 부석사 무량수전 국보 18호 경북 영주시 고려 중기 19 부석사 조사당 국보 19호 경북 영주시 고려 후기 20 불국사 다보탑 국보 20호 경북 경주시 통일신라   21 불국사 삼층석탑 국보 21호 경북 경주시 통일신라 22 불국사 연화교 칠보교 국보 22호 경북 경주시 통일신라 23 불국사 청운교 백운교 국보 23호 경북 경주시 통일신라 24 석굴암 석굴 국보 24호 경북 경주시 통일신라 25 신라 태종무열왕릉비 국보 25호 경북 경주시 통일신라 26 불국사 금동 비로자나불좌상 국보 26호 경북 경주시 통일신라 경덕왕 27 불국사 금동 아미타여래좌상 국보 27호 경북 경주시 통일신라 28 백률사 금동 약사여래입상 국보 28호 경북 경주시 통일신라 29 성덕대왕 신종 (에밀레종) 국보 29호 경북 경주시 통일신라 혜공왕 30 분황사 석탑 국보 30호 경북 경주시 신라 선덕여왕   31 경주 첨성대 국보 31호 경북 경주시 신라 32 해인사 대장경판 국보 32호 경남 합천군 고려 33 창녕 신라 진흥왕 척경비 국보 33호 경남 창녕군 신라 진흥왕 34 창녕 술정리동 삼층석탑 국보 34호 경남 창녕군 통일신라 35 화엄사 사사자 삼층석탑 국보 35호 전남 구례군 통일신라 36 상원사 동종 국보 36호 강원 평창군 통일신라 37 경주 구황리 삼층석탑 국보 37호 경북 경주시 통일신라 38 고선사지 삼층석탑 국보 38호 경북 경주시 통일신라 초기 39 월성 나원리 오층석탑 국보 39호 경북 경주시 통일신라 초기 40 정혜사지 십삼층석탑 국보 40호 경북 경주시 통일신라   41 용두사지 철당간 국보 41호 충북 청주시 고려 광종 42 목조 삼존불감 (송광사) 국보 42호 전남 순천시 고려? 43 고려 고종제서 (송광사) 국보 43호 전남 순천시 고려 고종 44 보림사 삼층석탑 및 석등 국보 44호 전남 장흥군 통일신라 경문왕 45 부석사 소조여래좌상 국보 45호 경북 영주시 고려 중기 46 부석사 조사당 벽화 국보 46호 경북 영주시 고려 후기 47 쌍계사 진감선사 대공탑비 국보 47호 경남 하동군 통일신라 정강왕 48 월정사 팔각구층석탑 국보 48호 강원 평창군 고려 초기 49 수덕사 대웅전 국보 49호 충남 예산군 고려 충렬왕 50 도갑사 해탈문 국보 50호 전남 영암군 조선 성종   51 강릉 객사문 국보 51호 강원 강릉시 고려 후기 52 해인사 장경판전 국보 52호 경남 합천군 조선 성종 53 연곡사 동부도 국보 53호 전남 구례군 통일신라 54 연곡사 북부도 국보 54호 전남 구례군 고려 초기 55 법주사 팔상전 국보 55호 충북 보은군 조선 인조 56 송광사 국사전 국보 56호 전남 순천시 조선 초기 57 쌍봉사 철감선사탑 국보 57호 전남 화순군 통일신라 경문왕 58 장곡사 철조 약사여래좌상부석조대좌 국보 58호 충남 청양군 통일신라 후기 59 법천사 지광국사 현묘탑비 국보 59호 강원 원주시 고려 선종 60 청자 사자 유개향로 국보 60호 서울 종로구 고려   61 청자 비룡형주자 국보 61호 서울 종로구 고려 62 금산사 미륵전 국보 62호 전북 김제시 조선 인조 63 도피안사 철조비로자나불좌상 국보 63호 강원 철원군 통일신라 경문왕 64 법주사 석연지 국보 64호 충북 보은군 통일신라 65 청자 기린 유개향로 국보 65호 서울 성북구 고려 66 청자 상감 유죽연로원앙문정병 국보 66호 서울 성북구 고려 67 화엄사 각황전 국보 67호 전남 구례군 조선 숙종 68 청자상감 운학문매병 국보 68호 서울 성북구 고려 69 개국원종공신록권 국보 69호 부산 서구 조선 태조 70 훈민정음 국보 70호 서울 성북구 조선 세종   71 동국정운 (권1,6) 국보 71호 서울 성북구 조선 세종 72 금동 계미명 삼존불 국보 72호 서울 성북구 백제 위덕왕 73 금동 삼존불감 국보 73호 서울 성북구 고려 초기 74 청자 압형수적 국보 74호 서울 성북구 고려 75 표충사 청동함은향완 국보 75호 경남 밀양시 고려 명종 76 이충무공 난중일기 부서간첩 임진장초 국보 76호 충남 아산시 조선 선조 77 의성 탑리 오층석탑 국보 77호 경북 의성군 통일신라 전기 78 금동 미륵보살반가상 국보 78호 서울 종로구 삼국시대 79 경주 구황리 금제 여래좌상 국보 79호 서울 종로구 통일신라 초기 80 경주 구황리 금제 여래입상 국보 80호 서울 종로구 통일신라 초기   81 감산사 석조 미륵보살 입상 국보 81호 서울 종로구 통일신라 성덕왕 82 감산사 석조 아미타불 입상 국보 82호 서울 종로구 통일신라 83 금동 미륵보살반가상 국보 83호 서울 종로구 삼국시대 후기 84 서산 마애삼존불상 국보 84호 충남 서산시 백제 후기 85 금동 신묘명 삼존불 국보 85호 경기 용인시 삼국시대 86 경천사 십층석탑 국보 86호 서울 종로구 고려 충목왕 87 금관총 금관 국보 87호 경북 경주시 신라 88 금관총 과대 및 요패 국보 88호 서울 종로구 신라 89 금제교구 국보 89호 서울 종로구 평남 석암리 90 금제 태환이식 국보 90호 서울 종로구 신라   91 도제 기마인물상 국보  91호 서울 종로구 신라 92 청동 은입사포유수금문 정병 국보  92호 서울 종로구 고려 93 백자 철화포도문호 국보  93호 서울 종로구 조선 94 청자 소문과형병 국보  94호 서울 종로구 고려 95 청자 칠보투각향로 국보  95호 서울 종로구 고려 96 청자 귀형수병 국보  96호 서울 종로구 고려 97 청자 음각연화당초문매병 국보  97호 서울 종로구 고려 98 청자 상감 모란문항 국보  98호 서울 종로구 고려 99 갈항사 삼층석탑 국보  99호 서울 종로구 통일신라 경덕왕 100 남계원 칠층석탑 국보 100호 서울 종로구 고려   101 법천사 지광국사 현묘탑 국보 101호 서울 종로구 고려 선종 102 정토사 홍법국사 실상탑 국보 102호 서울 종로구 고려 현종 103 중흥산성 쌍사자 석등 국보 103호 광주 북구 통일신라 104 전흥법사 염거화상탑 국보 104호 서울 종로구 통일신라 문성왕 105 산청 범학리 삼층석탑 국보 105호 서울 종로구 통일신라 106 계유명 전씨 아미타불 삼존석상 국보 106호 충북 청주시 통일신라 초기 107 이조백자 철사포도문호 국보 107호 서울 서대문구 조선 108 계유명 삼존천불비상 국보 108호 충남 공주시 통일신라 109 군위 삼존석굴 국보 109호 경북 군위군 통일신라 초기 110 익재 영정 국보 110호 서울 종로구 고려 충숙왕   111 회헌 영정 국보 111호 경북 영주시 고려 충숙왕 112 감은사지 삼층석탑 국보 112호 경북 경주시 통일신라 초기 113 화청자양류문통형병 국보 113호 서울 종로구 고려 114 청자상감 모란국화문과형병 국보 114호 서울 종로구 고려 115 청자상감 당초문완 국보 115호 서울 종로구 고려 116 청자상감 모란문표형병 국보 116호 서울 종로구 고려 117 보림사 철조 비로자나불좌상 국보 117호 전남 장흥군 통일신라 헌안왕 118 금동 미륵반가상 국보 118호 경기 용인시 삼국시대 119 연가7년명 금동여래입상 국보 119호 서울 종로구 삼국시대 120 용주사 범종 국보 120호 경기 화성시 고려   121 하회탈 및 병산탈 국보 121호 경북 안동시 고려 중기 122 진전사지 삼층석탑 국보 122호 강원 양양군 통일신라 123 익산 왕궁리 오층석탑내 발견유물 국보 123호 전북 전주시 고려 124 순금 금강경판 국보 123-1호 전북 전주시 고려 125 유리제 사리병 국보 123-2호 전북 전주시 고려 126 금제방합 국보 123-3호 전북 전주시 고려 127 청동 여래입상 국보 123-4호 전북 전주시 고려 128 기타유물 국보 123-5호 전북 전주시 미상 129 한송사 석조보살좌상 국보 124호 서울 종로구 고려 130 녹유골호 국보 125호 서울 종로구 통일신라   131 불국사 삼층석탑내 발견유물 국보  126호 경북 경주시 통일신라 132 금동제 사리외함 국보  126-1호 경북 경주시 통일신라 133 은제 사리외합 국보  126-2호 경북 경주시 통일신라 134 은제 사리내합 국보  126-3호 경북 경주시 통일신라 135 유향 국보  126-4호 경북 경주시 통일신라 136 금동 방형사리합 국보  126-5호 경북 경주시 통일신라 137 무구정광대다라니경 국보  126-6호 경북 경주시 통일신라 138 동환 국보  126-7호 경북 경주시 통일신라 139 경옥제곡옥 국보  126-8호 경북 경주시 통일신라 140 홍마노환옥 국보  126-9호 경북 경주시 통일신라   141 수정 절자옥 국보 126-10호 경북 경주시 통일신라 142 수정 보주형옥 국보 126-11호 경북 경주시 통일신라 143 수정 환옥 국보 126-12호 경북 경주시 통일신라 144 녹색 유리환옥 국보 126-13호 경북 경주시 통일신라 145 담청색 유리제과형옥 국보 126-14호 경북 경주시 통일신라 146 유리제 소옥 국보 126-15호 경북 경주시 통일신라 147 향목편 국보 126-16호 경북 경주시 통일신라 148 청동제 비천상 국보 126-17호 경북 경주시 통일신라 149 동경 국보 126-18호 경북 경주시 통일신라 150 동제채자 국보 126-19호 경북 경주시 통일신라   151 목탑 국보 126-20호 경북 경주시 통일신라 152 수정대옥 국보 126-21호 경북 경주시 통일신라 153 홍마노 국보 126-22호 경북 경주시 통일신라 154 수정제가지형옥 국보 126-23호 경북 경주시 통일신라 155 유리제과형옥 국보 126-24호 경북 경주시 통일신라 156 유리소옥 국보 126-25호 경북 경주시 통일신라 157 심향편 국보 126-26호 경북 경주시 통일신라 158 섬유잔결 국보 126-27호 경북 경주시 통일신라 159 묵서지편 국보 126-28호 경북 경주시 통일신라 160 삼양동 금동 관음보살입상 국보 127호 서울 종로구 삼국시대   161 금동 관음보살입상 국보 128호 경기 용인시 백제 162 금동 보살입상 국보 129호 경기 용인시 통일신라 163 선산 죽장동 오층석탑 국보 130호 경북 구미시 통일신라 164 이태조 호적원본 국보 131호 서울 종로구 고려 공양왕 165 징비록 국보 132호 경북 안동시 조선 선조 166 청자진사연화문표형주자 국보 133호 경기 용인시 고려 167 금동 보살삼존상 국보 134호 경기 용인시 백제 168 혜원풍속도 국보 135호 서울 성북구 조선 후기 169 용두보당 국보 136호 경기 용인시 고려 170 대구 비산동 출토동기류 국보 137호 경기 용인시 선사   171 동검 검경 및 동모부속구 국보 137-1호 경기 용인시 선사 172 광봉동모 및 검장 국보 137-2호 경기 용인시 선사 173 금관 및 부속금구 국보 138호 경기 용인시 삼국시대 174 군선도병 국보 139호 경기 용인시 조선 후기 175 나전단화금수문경 국보 140호 경기 용인시 선사 176 다뉴세문경 국보 141호 서울 동작구 청동기 177 동국정운 1질 국보 142호 서울 광진구 조선 세종 178 화순 대곡리 출토 청동유물 국보 143호 광주 북구 미상 179 청동검 국보 143-1호 서울 종로구 미상 180 청동팔령구 국보 143-2호 서울 종로구 미상   181 청동쌍령구 국보 143-3호 서울 종로구 미상 182 청동삭구 국보 143-4호 서울 종로구 미상 183 청동공부 국보 143-5호 서울 종로구 미상 184 청동세문경 국보 143-6호 서울 종로구 미상 185 월출산 마애여래좌상 국보 144호 전남 영암군 통일신라 후기 186 귀면청동로 국보 145호 서울 용산구 백제 187 강원도 출토 일괄유물 국보 146호 경기 용인시 미상 188 팔수형동령 국보 146-1호 경기 용인시 미상 189 동조령부병두 국보 146-2호 경기 용인시 미상 190 동조환상쌍두령 국보 146-3호 경기 용인시 미상   191 동조령식초 국보  146-4호 경기 용인시 미상 192 울주 천전리 각석 국보  147호 울산 울주군 신라 법흥왕 193 십칠사찬고금통요 국보  148호 서울 관악구 조선 태종 194 권지16 국보  148-1호 서울 관악구 조선 태종 195 권지17 국보  148-2호 서울 서초구 조선 태종 196 동래선생교정북사상절 국보  149호 서울 성북구 조선 태종 197 권지4,5 국보  149-1호 서울 성북구 조선 태종 198 권지6 국보  149-2호 서울 중구 조선 태종 199 송조표전총류 국보  150호 서울 관악구 조선 태종 200 조선왕조실록 국보  151호 서울 관악구 조선시대   201 조선왕조실록 정족산본 국보 151-1호 서울 관악구 조선시대 202 태백산본 국보 151-2호 부산 연제구 조선시대 203 오대산본 국보 151-3호 서울 관악구 조선시대 204 기타산엽본 국보 151-4호 서울 관악구 조선시대 205 비변사등록부의정부등록 국보 152호 서울 관악구 조선후기 206 비변사등록 국보 152-1호 서울 관악구 미상 207 의정부등록 국보 152-2호 서울 관악구 미상 208 일성록 국보 153호 서울 관악구 조선후기 209 금제관식 국보 154호 충남 공주시 백제시대 210 금제관식 국보 155호 충남 공주시 백제시대   211 금제심엽형이식 국보 156호 충남 공주시 백제시대 212 금제수식부이식 국보 157호 충남 공주시 백제시대 213 금제경식 국보 158호 충남 공주시 백제시대 214 금제뒤꽂이 국보 159호 충남 공주시 백제시대 215 은제팔찌 국보 160호 충남 공주시 백제시대 216 청동신수경 국보 161호 충남 공주시 백제시대 217 청동신수경 국보 161-1호 충남 공주시 백제시대 218 의자손수대경 국보 161-2호 충남 공주시 백제시대 219 수대경 국보 161-3호 충남 공주시 백제시대 220 석수 국보 162호 충남 공주시 백제시대   221 지석 국보 163호 충남 공주시 백제시대 222 두침 국보 164호 충남 공주시 백제시대 223 족좌 국보 165호 충남 공주시 백제시대 224 백자철화매죽문대호 국보 166호 서울 종로구 조선시대 225 청자인형주자 국보 167호 서울 종로구 고려시대 226 백자진사매국문병 국보 168호 서울 종로구 조선시대 227 청자양각죽절문병 국보 169호 경기 용인시 고려시대 228 청화백자 매조죽문호 국보 170호 서울 종로구 조선시대 229 청동 은입사 보상당초봉황문합 국보 171호 경기 용인시 고려시대 230 진양군 영인정씨묘 출토유물 국보 172호 경기 용인시 조선 세조   231 백자상감 초화문편병 국보 172-1호 경기 용인시 조선 세조 232 묘지 국보 172-2호 경기 용인시 조선 세조 233 잔 국보 172-3호 경기 용인시 조선 세조 234 청자철채퇴화점문나한좌상 국보 173호 서울 강남구 고려시대 235 금동수정감장촉대 국보 174호 경기 용인시 통일신라 236 백자상감 연당초문대접 국보 175호 서울 종로구 조선시대 237 청화백자 송죽문호 국보 176호 서울 중구 조선 성종 238 분청사기 인화문태호 국보 177호 서울 성북구 조선시대 239 분청사기 조화어문편병 국보 178호 서울 서대문구 조선시대 240 분청사기 박지연어문편병 국보 179호 서울 관악구 조선시대   241 완당세한도 국보 180호 서울 종로구 조선 헌종 242 장량수급제패지 국보 181호 경북 울진군 고려 희종 243 금동여래입상 국보 182호 대구 수성구 통일신라 244 금동보살입상 국보 183호 대구 수성구 신라시대 245 금동보살입상 국보 184호 대구 수성구 신라시대 246 묘법연화경 국보 185호 서울 종로구 고려 공민왕 247 양평 금동여래입상 국보 186호 서울 종로구 삼국시대 248 봉감모전오층석탑 국보 187호 경북 영양군 통일신라 249 천마총 금관 국보 188호 경북 경주시 신라시대 250 금모 국보 189호 경북 경주시 신라시대   251 금제과대 및 요패 국보 190호 경북 경주시 신라시대 252 금관 및 수하식 국보 191호 경북 경주시 신라시대 253 금제과대 및 요패 국보 192호 경북 경주시 신라시대 254 유리제병 및 배 국보 193호 경북 경주시 신라시대 255 금제경식 국보 194호 경북 경주시 신라시대 256 토우장식장경호 국보 195호 경북 경주시 신라시대 257 신라백지묵서대방광불화엄경 국보 196호 경기 용인시 통일신라 경덕왕 258 청룡사 보각국사 정혜원륭탑 국보 197호 충북 충주시 고려 후기 259 단양 신라적성비 국보 198호 충북 단양군 신라 진흥왕 260 단석산 신선사 마애불상군 국보 199호 경북 경주시 신라시대   261 금동보살입상 국보 200호 부산 남구 통일신라 262 봉화북지리마애여래좌상 국보 201호 경북 봉화군 신라시대 263 대방광불화엄경 진본 국보 202호 서울 중구 고려 숙종 264 대방광불화엄경 주본 국보 203호 서울 중구 고려시대 265 대방광불화엄경 주본 국보 204호 서울 중구 고려시대 266 중원 고구려비 국보 205호 충북 충주시 고구려 267 해인사 고려각판 국보 206호 경남 합천군 고려시대 268 묘법연화경 국보 206-1호 경남 합천군 고려시대 269 화엄경관자재보살소설법문별행소 국보 206-2호 경남 합천군 고려시대 270 대불정여래밀인수증료의제   보살만행수능엄경 국보 206-3호 경남 합천군 고려시대   271 대방광불화엄경세주묘엄품 국보 206-4호 경남 합천군 고려시대 272 금강반야바라밀경 국보 206-5호 경남 합천군 고려시대 273 금강반야바라밀경 국보 206-6호 경남 합천군 고려시대 274 화엄경보현행원품 국보 206-7호 경남 합천군 고려시대 275 법화경보문품 국보 206-8호 경남 합천군 고려시대 276 인천보감 국보 206-9호 경남 합천군 고려시대 277 불설예수십왕생칠경 국보 206-10호 경남 합천군 고려시대 278 삼십팔분공덕소경 국보 206-11호 경남 합천군 고려시대 279 불설아미타경 국보 206-12호 경남 합천군 고려시대 280 대방광불화엄경략신중 국보 206-13호 경남 합천군 고려시대   281 화엄경변상도 국보 206-14호 경남 합천군 고려시대 282 대방광불화엄경 국보 206-15호 경남 합천군 고려시대 283 대방광불화엄경 국보 206-16호 경남 합천군 고려시대 284 대방광불화엄경 국보 206-17호 경남 합천군 고려시대 285 대방광불화엄경소 국보 206-18호 경남 합천군 고려시대 286 대방광불화엄경수소연의초 국보 206-19호 경남 합천군 고려시대 287 금강반야바라밀경 국보 206-20호 경남 합천군 고려시대 288 불설장수멸죄호저동자다라니경 국보 206-21호 경남 합천군 고려시대 289 대각국사문집 국보 206-22호 경남 합천군 고려시대 290 대각국사외집 국보 206-23호 경남 합천군 고려시대   291 남양선생시집 국보 206-24호 경남 합천군 고려시대 292 백화도장발원문약해 국보 206-25호 경남 합천군 고려시대 293 당현시범 국보 206-26호 경남 합천군 고려시대 294 약제경론염불법문왕생정토집 국보 206-27호 경남 합천군 고려시대 295 십문화쟁론 국보 206-28호 경남 합천군 고려시대 296 천마도장니 국보 207호 서울 종로구 신라시대 297 금동육각사리함 국보 208호 경북 김천시 조선시대 298 보협인석탑 국보 209호 서울 중구 미상 299 감지은니불공견색신변진언경 국보 210호 경기 용인시 고려 충렬왕 300 백지묵서묘법연화경 국보 211호 서울 관악구 고려 우왕   301 대불정여래밀인수증료   의제보살만행수능엄경 국보 212호 서울 중구 조선 세조 302 금동대탑 국보 213호 경기 용인시 고려 초기 303 흥왕사명청동은입사운룡문향완 국보 214호 경기 용인시 고려 충렬왕 304 감지은니대방광불화엄경 국보 215호 경기 용인시 고려 충숙왕 305 인왕제색도 국보 216호 경기 용인시 조선 영조 306 금강전도 국보 217호 경기 용인시 조선 영조 307 아미타삼존도 국보 218호 경기 용인시 고려시대 308 청화백자 매죽문호 국보 219호 경기 용인시 조선시대 309 청자상감 용봉모란문개합 국보 220호 경기 용인시 고려시대 310 상원사 목조문수동자좌상 국보 221호 강원 평창군 조선 세조   311 청화백자 매죽문호 국보 222호 서울 관악구 조선시대 312 경복궁 근정전 국보 223호 서울 종로구 조선 고종 313 경복궁 경회루 국보 224호 서울 종로구 조선 고종 314 창덕궁 인정전 국보 225호 서울 종로구 조선 순조 315 창경궁 명정전 국보 226호 서울 종로구 조선 광해군 316 종묘정전 국보 227호 서울 종로구 조선 광해군 317 천상열차분야지도각석 국보 228호 서울 중구 조선 태조 318 보루각 자격루 국보 229호 서울 중구 조선시대 319 혼천시계 국보 230호 서울 성북구 조선 현종 320 용범 국보 231호 서울 동작구 청동시대   321 의안백이화개국공신록권 국보 232호 전북 정읍시 조선 태조 322 영태2년명납석제호 국보 233호 부산 남구 신라 혜공왕 323 감지은니묘법연화경 국보 234호 경기 용인시 고려 충숙왕 324 감지금니대방광불화엄경보현행원품 국보 235호 경기 용인시 고려 후기 325 월성 장항리사지 서 오층석탑 국보 236호 경북 경주시 통일신라 초기 326 고산 구곡시화병 국보 237호 경기 고양시 조선 순조 327 소원화개첩 국보 238호 경기 고양시 조선 안평대군 328 송시열상 국보 239호 서울 종로구 조선 효종 329 윤두서상 국보 240호 전남 해남군 조선 숙종 330 초조본대반야바라밀다경 국보 241호 경기 용인시 고려 현종   331 울진 봉평 신라비 국보 242호 경북 울진군 신라시대 332 현양성교론 국보 243호 경기 용인시 고려시대 333 유가사지론 국보 244호 경기 용인시 고려시대 334 신찬일체경원품차록 국보 245호 서울 종로구 고려시대 335 대보적경 국보 246호 서울 종로구 고려시대 336 공주 의당금 동 보살입상 국보 247호 충남 공주시 백제시대 337 조선방역지도 국보 248호 경기 과천시 조선 명종 338 동궐도 국보 249호 서울 성북구 조선 순조 339 개국원종공신록권 국보 250호 서울 중구 조선 태조 340 대승아비달마잡집론 국보 251호 서울 중구 고려 현종   341 청자음각연화문매병 국보 252호 경기 용인시 고려시대 342 청자양인각연당초,상감모란문은구대접 국보 253호 서울 종로구 고려시대 343 청자음각연화절지문매병 국보 254호 서울 중구 고려시대 344 전충남출토 청동방울일괄 국보 255호 경기 용인시 청동시대 345 팔주령 국보 255-1호 경기 용인시 청동시대 346 쌍두령 국보 255-2호 경기 용인시 청동시대 347 조합식 쌍두령 국보 255-3호 경기 용인시 청동시대 348 간두령 국보 255-4호 경기 용인시 청동시대 349 초조본대방광불화엄경주본 국보 256호 경기 용인시 고려시대 350 초조본대방광불화엄경주본 국보 257호 충북 단양군 고려 현종   351 청화백자 죽문각병 국보 258호 경기 용인시 조선시대 352 분청사기 상감용문호 국보 259호 서울 종로구 조선시대 353 분청사기 박지모란문철채자라병 국보 260호 서울 종로구 조선시대 354 백자호 국보 261호 경기 용인시 조선시대 355 백자대호 국보 262호 서울 중구 조선시대 356 청화백자 산수화조문대호 국보 263호 서울 중구 조선시대 357 영일 냉수리 신라비 국보 264호 경북 포항시 신라시대 358 초조본대방광불화엄경주본 국보 265호 서울 영등포구 고려시대 359 초조본대방광불화엄경주본 국보 266호 서울 관악구 고려시대 360 초조본아비달마식신족론 국보 267호 서울 관악구 고려시대   361 초조본아비담비파사론 국보 268호 서울 관악구 고려시대 362 초조본불설최상근본대락금강불공   삼매대교왕경 국보 269호 서울 관악구 고려시대 363 청자모자원형연적 국보 270호 서울 성북구 고려시대 364 초조본현양성교론 국보 271호 서울 종로구 고려시대 365 초조본유가사지론 국보 272호 서울 종로구 고려시대 366 초조본유가사지론 국보 273호 서울 종로구 고려시대 367 기마인물형토기 국보 275호 경북 경주시 삼국시대 368 초조본유가사지론 국보 276호 인천 남동구 고려시대 369 초조본대방광불화엄경주본 국보 277호 전북 전주시 고려시대 370 태종11년이형원종공신록권부함 국보 278호 충북 영동군 조선 태종   371 초조본대방광불화엄경주본 국보 279호 충북 단양군 고려 현종 372 성거산 천흥사 동종 국보 280호 서울 종로구 고려 헌종 373 백자주자 국보 281호 서울 관악구 조선시대 374 흑석사 목조아미타불좌상병복장유물 국보 282호 경북 영주시 통일신라 375 불상 국보 282-1호 경북 영주시 조선 세조 376 전적 국보 282-2호 경북 영주시 고려말 377 직물류 국보 282-3호 경북 영주시 조선 세조 378 기타 복장물 오향, 칠약, 오곡,   칠보류, 사리함 국보 282-4호 경북 영주시 조선 세조 379 통감속편 국보 283호 경북 경주시 조선 세종 380 초조본대반야바라밀다경   국보 284호 서울 강남구 고려 정종   381 울산 대곡리 반구대 암각화 국보 285호 울산 울주군 선사시대 382 백자발 국보 286호 경기 용인시 조선 초기 383 부여 능산리출토 백제금동대향로 국보 287호 충남 부여군 백제시대 384 백제 창왕 명석조사리감 국보 288호 충남 부여군 백제시대 385 익산 왕궁리 5층석탑 국보 289호 전북 익산시 고려시대 386 통도사 대웅전 및 금강계단 국보 290호 경남 양산시 조선 인조 387 용감수경 국보 291호 서울 성북구 고려시대 388 오대산 상원사 중창권선문 국보 292호 강원 평창군 조선 세조 389 금동관세음보살입상 국보 293호 서울 종로구 삼국시대 390 청화백자 철사진사국화문병 국보 294호 서울 성북구 조선시대   391 나주 신촌리고분 출토 금동관 국보 295호 서울 종로구 백제시대 392 칠장사 오불회괘불탱 국보 296호 경기 안성시 조선 인조 393 안심사 영산회괘불탱 국보 297호 충북 청원군 조선 효종 394 갑사 삼신불괘불탱 국보 298호 충남 공주시 조선 효종 395 신원사 노사나불괘불탱 국보 299호 충남 공주시 조선 인조 396 장곡사 미륵불괘불탱 국보 300호 충남 청양군 조선 현종 397 화엄사 영산회괘불탱 국보 301호 전남 구례군 조선 효종 398 청곡사 영산회괘불탱 국보 302호 경남 진주시 조선 경종 399 승정원일기 국보 303호 서울 관악구 조선시대 400 여수 진남관 국보 304호 전남 여수시 조선 선조   401 통영 세병관 국보 305호 경남 통영시 조선 중기 402 삼국유사 국보 306호 서울 종로구 조선시대 403 삼국유사 국보 306-1호 서울 종로구 조선 초기 404 삼국유사 국보 306-2호 서울 관악구 조선 중종 405 태안 마애삼존불 국보 307호 충남 태안군 삼국시대        1 서울 숭례문(남대문) 국보  1호 서울 중구 조선 태조 2 원각사지 십층석탑 국보  2호 서울 종로구 조선 초기 3 북한산 신라 진흥왕순수비 국보  3호 서울 종로구 신라 진흥왕 4 고달사지 부도 국보  4호 경기 여주군 통일신라 경덕왕 5 법주사 쌍사자석등 국보  5호 충북 보은군 통일신라 성덕왕 6 중원 탑평리 칠층석탑 국보  6호 충북 충주시 통일신라 7 봉선 홍경사 사적 갈비 국보  7호 충남 천안시 고려 현종 8 성주사 낭혜화상 백월보광 탑비 국보  8호 충남 보령시 통일신라 진성여왕 9 부여 정림사지 오층석탑 국보  9호 충남 부여군 백제 후기 10 실상사 백장암 삼층석탑 국보 10호 전북 남원시 통일신라   11 미륵사지 석탑 국보 11호 전북 익산시 백제 후기 12 화엄사 각황전앞 석등 국보 12호 전남 구례군 통일신라 13 무위사 극락전 국보 13호 전남 강진군 조선 세종 14 은해사 거조암 영산전 국보 14호 경북 영천시 조선 초기 15 봉정사 극락전 국보 15호 경북 안동시 고려 후기 16 안동 신세동 칠층전탑 국보 16호 경북 안동시 통일신라 17 부석사 무량수전앞 석등 국보 17호 경북 영주시 통일신라 18 부석사 무량수전 국보 18호 경북 영주시 고려 중기 19 부석사 조사당 국보 19호 경북 영주시 고려 후기 20 불국사 다보탑 국보 20호 경북 경주시 통일신라   21 불국사 삼층석탑 국보 21호 경북 경주시 통일신라 22 불국사 연화교 칠보교 국보 22호 경북 경주시 통일신라 23 불국사 청운교 백운교 국보 23호 경북 경주시 통일신라 24 석굴암 석굴 국보 24호 경북 경주시 통일신라 25 신라 태종무열왕릉비 국보 25호 경북 경주시 통일신라 26 불국사 금동 비로자나불좌상 국보 26호 경북 경주시 통일신라 경덕왕 27 불국사 금동 아미타여래좌상 국보 27호 경북 경주시 통일신라 28 백률사 금동 약사여래입상 국보 28호 경북 경주시 통일신라 29 성덕대왕 신종 (에밀레종) 국보 29호 경북 경주시 통일신라 혜공왕 30 분황사 석탑 국보 30호 경북 경주시 신라 선덕여왕   31 경주 첨성대 국보 31호 경북 경주시 신라 32 해인사 대장경판 국보 32호 경남 합천군 고려 33 창녕 신라 진흥왕 척경비 국보 33호 경남 창녕군 신라 진흥왕 34 창녕 술정리동 삼층석탑 국보 34호 경남 창녕군 통일신라 35 화엄사 사사자 삼층석탑 국보 35호 전남 구례군 통일신라 36 상원사 동종 국보 36호 강원 평창군 통일신라 37 경주 구황리 삼층석탑 국보 37호 경북 경주시 통일신라 38 고선사지 삼층석탑 국보 38호 경북 경주시 통일신라 초기 39 월성 나원리 오층석탑 국보 39호 경북 경주시 통일신라 초기 40 정혜사지 십삼층석탑 국보 40호 경북 경주시 통일신라   41 용두사지 철당간 국보 41호 충북 청주시 고려 광종 42 목조 삼존불감 (송광사) 국보 42호 전남 순천시 고려? 43 고려 고종제서 (송광사) 국보 43호 전남 순천시 고려 고종 44 보림사 삼층석탑 및 석등 국보 44호 전남 장흥군 통일신라 경문왕 45 부석사 소조여래좌상 국보 45호 경북 영주시 고려 중기 46 부석사 조사당 벽화 국보 46호 경북 영주시 고려 후기 47 쌍계사 진감선사 대공탑비 국보 47호 경남 하동군 통일신라 정강왕 48 월정사 팔각구층석탑 국보 48호 강원 평창군 고려 초기 49 수덕사 대웅전 국보 49호 충남 예산군 고려 충렬왕 50 도갑사 해탈문 국보 50호 전남 영암군 조선 성종   51 강릉 객사문 국보 51호 강원 강릉시 고려 후기 52 해인사 장경판전 국보 52호 경남 합천군 조선 성종 53 연곡사 동부도 국보 53호 전남 구례군 통일신라 54 연곡사 북부도 국보 54호 전남 구례군 고려 초기 55 법주사 팔상전 국보 55호 충북 보은군 조선 인조 56 송광사 국사전 국보 56호 전남 순천시 조선 초기 57 쌍봉사 철감선사탑 국보 57호 전남 화순군 통일신라 경문왕 58 장곡사 철조 약사여래좌상부석조대좌 국보 58호 충남 청양군 통일신라 후기 59 법천사 지광국사 현묘탑비 국보 59호 강원 원주시 고려 선종 60 청자 사자 유개향로 국보 60호 서울 종로구 고려   61 청자 비룡형주자 국보 61호 서울 종로구 고려 62 금산사 미륵전 국보 62호 전북 김제시 조선 인조 63 도피안사 철조비로자나불좌상 국보 63호 강원 철원군 통일신라 경문왕 64 법주사 석연지 국보 64호 충북 보은군 통일신라 65 청자 기린 유개향로 국보 65호 서울 성북구 고려 66 청자 상감 유죽연로원앙문정병 국보 66호 서울 성북구 고려 67 화엄사 각황전 국보 67호 전남 구례군 조선 숙종 68 청자상감 운학문매병 국보 68호 서울 성북구 고려 69 개국원종공신록권 국보 69호 부산 서구 조선 태조 70 훈민정음 국보 70호 서울 성북구 조선 세종   71 동국정운 (권1,6) 국보 71호 서울 성북구 조선 세종 72 금동 계미명 삼존불 국보 72호 서울 성북구 백제 위덕왕 73 금동 삼존불감 국보 73호 서울 성북구 고려 초기 74 청자 압형수적 국보 74호 서울 성북구 고려 75 표충사 청동함은향완 국보 75호 경남 밀양시 고려 명종 76 이충무공 난중일기 부서간첩 임진장초 국보 76호 충남 아산시 조선 선조 77 의성 탑리 오층석탑 국보 77호 경북 의성군 통일신라 전기 78 금동 미륵보살반가상 국보 78호 서울 종로구 삼국시대 79 경주 구황리 금제 여래좌상 국보 79호 서울 종로구 통일신라 초기 80 경주 구황리 금제 여래입상 국보 80호 서울 종로구 통일신라 초기   81 감산사 석조 미륵보살 입상 국보 81호 서울 종로구 통일신라 성덕왕 82 감산사 석조 아미타불 입상 국보 82호 서울 종로구 통일신라 83 금동 미륵보살반가상 국보 83호 서울 종로구 삼국시대 후기 84 서산 마애삼존불상 국보 84호 충남 서산시 백제 후기 85 금동 신묘명 삼존불 국보 85호 경기 용인시 삼국시대 86 경천사 십층석탑 국보 86호 서울 종로구 고려 충목왕 87 금관총 금관 국보 87호 경북 경주시 신라 88 금관총 과대 및 요패 국보 88호 서울 종로구 신라 89 금제교구 국보 89호 서울 종로구 평남 석암리 90 금제 태환이식 국보 90호 서울 종로구 신라   91 도제 기마인물상 국보  91호 서울 종로구 신라 92 청동 은입사포유수금문 정병 국보  92호 서울 종로구 고려 93 백자 철화포도문호 국보  93호 서울 종로구 조선 94 청자 소문과형병 국보  94호 서울 종로구 고려 95 청자 칠보투각향로 국보  95호 서울 종로구 고려 96 청자 귀형수병 국보  96호 서울 종로구 고려 97 청자 음각연화당초문매병 국보  97호 서울 종로구 고려 98 청자 상감 모란문항 국보  98호 서울 종로구 고려 99 갈항사 삼층석탑 국보  99호 서울 종로구 통일신라 경덕왕 100 남계원 칠층석탑 국보 100호 서울 종로구 고려   101 법천사 지광국사 현묘탑 국보 101호 서울 종로구 고려 선종 102 정토사 홍법국사 실상탑 국보 102호 서울 종로구 고려 현종 103 중흥산성 쌍사자 석등 국보 103호 광주 북구 통일신라 104 전흥법사 염거화상탑 국보 104호 서울 종로구 통일신라 문성왕 105 산청 범학리 삼층석탑 국보 105호 서울 종로구 통일신라 106 계유명 전씨 아미타불 삼존석상 국보 106호 충북 청주시 통일신라 초기 107 이조백자 철사포도문호 국보 107호 서울 서대문구 조선 108 계유명 삼존천불비상 국보 108호 충남 공주시 통일신라 109 군위 삼존석굴 국보 109호 경북 군위군 통일신라 초기 110 익재 영정 국보 110호 서울 종로구 고려 충숙왕   111 회헌 영정 국보 111호 경북 영주시 고려 충숙왕 112 감은사지 삼층석탑 국보 112호 경북 경주시 통일신라 초기 113 화청자양류문통형병 국보 113호 서울 종로구 고려 114 청자상감 모란국화문과형병 국보 114호 서울 종로구 고려 115 청자상감 당초문완 국보 115호 서울 종로구 고려 116 청자상감 모란문표형병 국보 116호 서울 종로구 고려 117 보림사 철조 비로자나불좌상 국보 117호 전남 장흥군 통일신라 헌안왕 118 금동 미륵반가상 국보 118호 경기 용인시 삼국시대 119 연가7년명 금동여래입상 국보 119호 서울 종로구 삼국시대 120 용주사 범종 국보 120호 경기 화성시 고려   121 하회탈 및 병산탈 국보 121호 경북 안동시 고려 중기 122 진전사지 삼층석탑 국보 122호 강원 양양군 통일신라 123 익산 왕궁리 오층석탑내 발견유물 국보 123호 전북 전주시 고려 124 순금 금강경판 국보 123-1호 전북 전주시 고려 125 유리제 사리병 국보 123-2호 전북 전주시 고려 126 금제방합 국보 123-3호 전북 전주시 고려 127 청동 여래입상 국보 123-4호 전북 전주시 고려 128 기타유물 국보 123-5호 전북 전주시 미상 129 한송사 석조보살좌상 국보 124호 서울 종로구 고려 130 녹유골호 국보 125호 서울 종로구 통일신라   131 불국사 삼층석탑내 발견유물 국보  126호 경북 경주시 통일신라 132 금동제 사리외함 국보  126-1호 경북 경주시 통일신라 133 은제 사리외합 국보  126-2호 경북 경주시 통일신라 134 은제 사리내합 국보  126-3호 경북 경주시 통일신라 135 유향 국보  126-4호 경북 경주시 통일신라 136 금동 방형사리합 국보  126-5호 경북 경주시 통일신라 137 무구정광대다라니경 국보  126-6호 경북 경주시 통일신라 138 동환 국보  126-7호 경북 경주시 통일신라 139 경옥제곡옥 국보  126-8호 경북 경주시 통일신라 140 홍마노환옥 국보  126-9호 경북 경주시 통일신라   141 수정 절자옥 국보 126-10호 경북 경주시 통일신라 142 수정 보주형옥 국보 126-11호 경북 경주시 통일신라 143 수정 환옥 국보 126-12호 경북 경주시 통일신라 144 녹색 유리환옥 국보 126-13호 경북 경주시 통일신라 145 담청색 유리제과형옥 국보 126-14호 경북 경주시 통일신라 146 유리제 소옥 국보 126-15호 경북 경주시 통일신라 147 향목편 국보 126-16호 경북 경주시 통일신라 148 청동제 비천상 국보 126-17호 경북 경주시 통일신라 149 동경 국보 126-18호 경북 경주시 통일신라 150 동제채자 국보 126-19호 경북 경주시 통일신라   151 목탑 국보 126-20호 경북 경주시 통일신라 152 수정대옥 국보 126-21호 경북 경주시 통일신라 153 홍마노 국보 126-22호 경북 경주시 통일신라 154 수정제가지형옥 국보 126-23호 경북 경주시 통일신라 155 유리제과형옥 국보 126-24호 경북 경주시 통일신라 156 유리소옥 국보 126-25호 경북 경주시 통일신라 157 심향편 국보 126-26호 경북 경주시 통일신라 158 섬유잔결 국보 126-27호 경북 경주시 통일신라 159 묵서지편 국보 126-28호 경북 경주시 통일신라 160 삼양동 금동 관음보살입상 국보 127호 서울 종로구 삼국시대   161 금동 관음보살입상 국보 128호 경기 용인시 백제 162 금동 보살입상 국보 129호 경기 용인시 통일신라 163 선산 죽장동 오층석탑 국보 130호 경북 구미시 통일신라 164 이태조 호적원본 국보 131호 서울 종로구 고려 공양왕 165 징비록 국보 132호 경북 안동시 조선 선조 166 청자진사연화문표형주자 국보 133호 경기 용인시 고려 167 금동 보살삼존상 국보 134호 경기 용인시 백제 168 혜원풍속도 국보 135호 서울 성북구 조선 후기 169 용두보당 국보 136호 경기 용인시 고려 170 대구 비산동 출토동기류 국보 137호 경기 용인시 선사   171 동검 검경 및 동모부속구 국보 137-1호 경기 용인시 선사 172 광봉동모 및 검장 국보 137-2호 경기 용인시 선사 173 금관 및 부속금구 국보 138호 경기 용인시 삼국시대 174 군선도병 국보 139호 경기 용인시 조선 후기 175 나전단화금수문경 국보 140호 경기 용인시 선사 176 다뉴세문경 국보 141호 서울 동작구 청동기 177 동국정운 1질 국보 142호 서울 광진구 조선 세종 178 화순 대곡리 출토 청동유물 국보 143호 광주 북구 미상 179 청동검 국보 143-1호 서울 종로구 미상 180 청동팔령구 국보 143-2호 서울 종로구 미상   181 청동쌍령구 국보 143-3호 서울 종로구 미상 182 청동삭구 국보 143-4호 서울 종로구 미상 183 청동공부 국보 143-5호 서울 종로구 미상 184 청동세문경 국보 143-6호 서울 종로구 미상 185 월출산 마애여래좌상 국보 144호 전남 영암군 통일신라 후기 186 귀면청동로 국보 145호 서울 용산구 백제 187 강원도 출토 일괄유물 국보 146호 경기 용인시 미상 188 팔수형동령 국보 146-1호 경기 용인시 미상 189 동조령부병두 국보 146-2호 경기 용인시 미상 190 동조환상쌍두령 국보 146-3호 경기 용인시 미상   191 동조령식초 국보  146-4호 경기 용인시 미상 192 울주 천전리 각석 국보  147호 울산 울주군 신라 법흥왕 193 십칠사찬고금통요 국보  148호 서울 관악구 조선 태종 194 권지16 국보  148-1호 서울 관악구 조선 태종 195 권지17 국보  148-2호 서울 서초구 조선 태종 196 동래선생교정북사상절 국보  149호 서울 성북구 조선 태종 197 권지4,5 국보  149-1호 서울 성북구 조선 태종 198 권지6 국보  149-2호 서울 중구 조선 태종 199 송조표전총류 국보  150호 서울 관악구 조선 태종 200 조선왕조실록 국보  151호 서울 관악구 조선시대   201 조선왕조실록 정족산본 국보 151-1호 서울 관악구 조선시대 202 태백산본 국보 151-2호 부산 연제구 조선시대 203 오대산본 국보 151-3호 서울 관악구 조선시대 204 기타산엽본 국보 151-4호 서울 관악구 조선시대 205 비변사등록부의정부등록 국보 152호 서울 관악구 조선후기 206 비변사등록 국보 152-1호 서울 관악구 미상 207 의정부등록 국보 152-2호 서울 관악구 미상 208 일성록 국보 153호 서울 관악구 조선후기 209 금제관식 국보 154호 충남 공주시 백제시대 210 금제관식 국보 155호 충남 공주시 백제시대   211 금제심엽형이식 국보 156호 충남 공주시 백제시대 212 금제수식부이식 국보 157호 충남 공주시 백제시대 213 금제경식 국보 158호 충남 공주시 백제시대 214 금제뒤꽂이 국보 159호 충남 공주시 백제시대 215 은제팔찌 국보 160호 충남 공주시 백제시대 216 청동신수경 국보 161호 충남 공주시 백제시대 217 청동신수경 국보 161-1호 충남 공주시 백제시대 218 의자손수대경 국보 161-2호 충남 공주시 백제시대 219 수대경 국보 161-3호 충남 공주시 백제시대 220 석수 국보 162호 충남 공주시 백제시대   221 지석 국보 163호 충남 공주시 백제시대 222 두침 국보 164호 충남 공주시 백제시대 223 족좌 국보 165호 충남 공주시 백제시대 224 백자철화매죽문대호 국보 166호 서울 종로구 조선시대 225 청자인형주자 국보 167호 서울 종로구 고려시대 226 백자진사매국문병 국보 168호 서울 종로구 조선시대 227 청자양각죽절문병 국보 169호 경기 용인시 고려시대 228 청화백자 매조죽문호 국보 170호 서울 종로구 조선시대 229 청동 은입사 보상당초봉황문합 국보 171호 경기 용인시 고려시대 230 진양군 영인정씨묘 출토유물 국보 172호 경기 용인시 조선 세조   231 백자상감 초화문편병 국보 172-1호 경기 용인시 조선 세조 232 묘지 국보 172-2호 경기 용인시 조선 세조 233 잔 국보 172-3호 경기 용인시 조선 세조 234 청자철채퇴화점문나한좌상 국보 173호 서울 강남구 고려시대 235 금동수정감장촉대 국보 174호 경기 용인시 통일신라 236 백자상감 연당초문대접 국보 175호 서울 종로구 조선시대 237 청화백자 송죽문호 국보 176호 서울 중구 조선 성종 238 분청사기 인화문태호 국보 177호 서울 성북구 조선시대 239 분청사기 조화어문편병 국보 178호 서울 서대문구 조선시대 240 분청사기 박지연어문편병 국보 179호 서울 관악구 조선시대   241 완당세한도 국보 180호 서울 종로구 조선 헌종 242 장량수급제패지 국보 181호 경북 울진군 고려 희종 243 금동여래입상 국보 182호 대구 수성구 통일신라 244 금동보살입상 국보 183호 대구 수성구 신라시대 245 금동보살입상 국보 184호 대구 수성구 신라시대 246 묘법연화경 국보 185호 서울 종로구 고려 공민왕 247 양평 금동여래입상 국보 186호 서울 종로구 삼국시대 248 봉감모전오층석탑 국보 187호 경북 영양군 통일신라 249 천마총 금관 국보 188호 경북 경주시 신라시대 250 금모 국보 189호 경북 경주시 신라시대   251 금제과대 및 요패 국보 190호 경북 경주시 신라시대 252 금관 및 수하식 국보 191호 경북 경주시 신라시대 253 금제과대 및 요패 국보 192호 경북 경주시 신라시대 254 유리제병 및 배 국보 193호 경북 경주시 신라시대 255 금제경식 국보 194호 경북 경주시 신라시대 256 토우장식장경호 국보 195호 경북 경주시 신라시대 257 신라백지묵서대방광불화엄경 국보 196호 경기 용인시 통일신라 경덕왕 258 청룡사 보각국사 정혜원륭탑 국보 197호 충북 충주시 고려 후기 259 단양 신라적성비 국보 198호 충북 단양군 신라 진흥왕 260 단석산 신선사 마애불상군 국보 199호 경북 경주시 신라시대   261 금동보살입상 국보 200호 부산 남구 통일신라 262 봉화북지리마애여래좌상 국보 201호 경북 봉화군 신라시대 263 대방광불화엄경 진본 국보 202호 서울 중구 고려 숙종 264 대방광불화엄경 주본 국보 203호 서울 중구 고려시대 265 대방광불화엄경 주본 국보 204호 서울 중구 고려시대 266 중원 고구려비 국보 205호 충북 충주시 고구려 267 해인사 고려각판 국보 206호 경남 합천군 고려시대 268 묘법연화경 국보 206-1호 경남 합천군 고려시대 269 화엄경관자재보살소설법문별행소 국보 206-2호 경남 합천군 고려시대 270 대불정여래밀인수증료의제   보살만행수능엄경 국보 206-3호 경남 합천군 고려시대   271 대방광불화엄경세주묘엄품 국보 206-4호 경남 합천군 고려시대 272 금강반야바라밀경 국보 206-5호 경남 합천군 고려시대 273 금강반야바라밀경 국보 206-6호 경남 합천군 고려시대 274 화엄경보현행원품 국보 206-7호 경남 합천군 고려시대 275 법화경보문품 국보 206-8호 경남 합천군 고려시대 276 인천보감 국보 206-9호 경남 합천군 고려시대 277 불설예수십왕생칠경 국보 206-10호 경남 합천군 고려시대 278 삼십팔분공덕소경 국보 206-11호 경남 합천군 고려시대 279 불설아미타경 국보 206-12호 경남 합천군 고려시대 280 대방광불화엄경략신중 국보 206-13호 경남 합천군 고려시대   281 화엄경변상도 국보 206-14호 경남 합천군 고려시대 282 대방광불화엄경 국보 206-15호 경남 합천군 고려시대 283 대방광불화엄경 국보 206-16호 경남 합천군 고려시대 284 대방광불화엄경 국보 206-17호 경남 합천군 고려시대 285 대방광불화엄경소 국보 206-18호 경남 합천군 고려시대 286 대방광불화엄경수소연의초 국보 206-19호 경남 합천군 고려시대 287 금강반야바라밀경 국보 206-20호 경남 합천군 고려시대 288 불설장수멸죄호저동자다라니경 국보 206-21호 경남 합천군 고려시대 289 대각국사문집 국보 206-22호 경남 합천군 고려시대 290 대각국사외집 국보 206-23호 경남 합천군 고려시대   291 남양선생시집 국보 206-24호 경남 합천군 고려시대 292 백화도장발원문약해 국보 206-25호 경남 합천군 고려시대 293 당현시범 국보 206-26호 경남 합천군 고려시대 294 약제경론염불법문왕생정토집 국보 206-27호 경남 합천군 고려시대 295 십문화쟁론 국보 206-28호 경남 합천군 고려시대 296 천마도장니 국보 207호 서울 종로구 신라시대 297 금동육각사리함 국보 208호 경북 김천시 조선시대 298 보협인석탑 국보 209호 서울 중구 미상 299 감지은니불공견색신변진언경 국보 210호 경기 용인시 고려 충렬왕 300 백지묵서묘법연화경 국보 211호 서울 관악구 고려 우왕   301 대불정여래밀인수증료   의제보살만행수능엄경 국보 212호 서울 중구 조선 세조 302 금동대탑 국보 213호 경기 용인시 고려 초기 303 흥왕사명청동은입사운룡문향완 국보 214호 경기 용인시 고려 충렬왕 304 감지은니대방광불화엄경 국보 215호 경기 용인시 고려 충숙왕 305 인왕제색도 국보 216호 경기 용인시 조선 영조 306 금강전도 국보 217호 경기 용인시 조선 영조 307 아미타삼존도 국보 218호 경기 용인시 고려시대 308 청화백자 매죽문호 국보 219호 경기 용인시 조선시대 309 청자상감 용봉모란문개합 국보 220호 경기 용인시 고려시대 310 상원사 목조문수동자좌상 국보 221호 강원 평창군 조선 세조   311 청화백자 매죽문호 국보 222호 서울 관악구 조선시대 312 경복궁 근정전 국보 223호 서울 종로구 조선 고종 313 경복궁 경회루 국보 224호 서울 종로구 조선 고종 314 창덕궁 인정전 국보 225호 서울 종로구 조선 순조 315 창경궁 명정전 국보 226호 서울 종로구 조선 광해군 316 종묘정전 국보 227호 서울 종로구 조선 광해군 317 천상열차분야지도각석 국보 228호 서울 중구 조선 태조 318 보루각 자격루 국보 229호 서울 중구 조선시대 319 혼천시계 국보 230호 서울 성북구 조선 현종 320 용범 국보 231호 서울 동작구 청동시대   321 의안백이화개국공신록권 국보 232호 전북 정읍시 조선 태조 322 영태2년명납석제호 국보 233호 부산 남구 신라 혜공왕 323 감지은니묘법연화경 국보 234호 경기 용인시 고려 충숙왕 324 감지금니대방광불화엄경보현행원품 국보 235호 경기 용인시 고려 후기 325 월성 장항리사지 서 오층석탑 국보 236호 경북 경주시 통일신라 초기 326 고산 구곡시화병 국보 237호 경기 고양시 조선 순조 327 소원화개첩 국보 238호 경기 고양시 조선 안평대군 328 송시열상 국보 239호 서울 종로구 조선 효종 329 윤두서상 국보 240호 전남 해남군 조선 숙종 330 초조본대반야바라밀다경 국보 241호 경기 용인시 고려 현종   331 울진 봉평 신라비 국보 242호 경북 울진군 신라시대 332 현양성교론 국보 243호 경기 용인시 고려시대 333 유가사지론 국보 244호 경기 용인시 고려시대 334 신찬일체경원품차록 국보 245호 서울 종로구 고려시대 335 대보적경 국보 246호 서울 종로구 고려시대 336 공주 의당금 동 보살입상 국보 247호 충남 공주시 백제시대 337 조선방역지도 국보 248호 경기 과천시 조선 명종 338 동궐도 국보 249호 서울 성북구 조선 순조 339 개국원종공신록권 국보 250호 서울 중구 조선 태조 340 대승아비달마잡집론 국보 251호 서울 중구 고려 현종   341 청자음각연화문매병 국보 252호 경기 용인시 고려시대 342 청자양인각연당초,상감모란문은구대접 국보 253호 서울 종로구 고려시대 343 청자음각연화절지문매병 국보 254호 서울 중구 고려시대 344 전충남출토 청동방울일괄 국보 255호 경기 용인시 청동시대 345 팔주령 국보 255-1호 경기 용인시 청동시대 346 쌍두령 국보 255-2호 경기 용인시 청동시대 347 조합식 쌍두령 국보 255-3호 경기 용인시 청동시대 348 간두령 국보 255-4호 경기 용인시 청동시대 349 초조본대방광불화엄경주본 국보 256호 경기 용인시 고려시대 350 초조본대방광불화엄경주본 국보 257호 충북 단양군 고려 현종   351 청화백자 죽문각병 국보 258호 경기 용인시 조선시대 352 분청사기 상감용문호 국보 259호 서울 종로구 조선시대 353 분청사기 박지모란문철채자라병 국보 260호 서울 종로구 조선시대 354 백자호 국보 261호 경기 용인시 조선시대 355 백자대호 국보 262호 서울 중구 조선시대 356 청화백자 산수화조문대호 국보 263호 서울 중구 조선시대 357 영일 냉수리 신라비 국보 264호 경북 포항시 신라시대 358 초조본대방광불화엄경주본 국보 265호 서울 영등포구 고려시대 359 초조본대방광불화엄경주본 국보 266호 서울 관악구 고려시대 360 초조본아비달마식신족론 국보 267호 서울 관악구 고려시대   361 초조본아비담비파사론 국보 268호 서울 관악구 고려시대 362 초조본불설최상근본대락금강불공   삼매대교왕경 국보 269호 서울 관악구 고려시대 363 청자모자원형연적 국보 270호 서울 성북구 고려시대 364 초조본현양성교론 국보 271호 서울 종로구 고려시대 365 초조본유가사지론 국보 272호 서울 종로구 고려시대 366 초조본유가사지론 국보 273호 서울 종로구 고려시대 367 기마인물형토기 국보 275호 경북 경주시 삼국시대 368 초조본유가사지론 국보 276호 인천 남동구 고려시대 369 초조본대방광불화엄경주본 국보 277호 전북 전주시 고려시대 370 태종11년이형원종공신록권부함 국보 278호 충북 영동군 조선 태종   371 초조본대방광불화엄경주본 국보 279호 충북 단양군 고려 현종 372 성거산 천흥사 동종 국보 280호 서울 종로구 고려 헌종 373 백자주자 국보 281호 서울 관악구 조선시대 374 흑석사 목조아미타불좌상병복장유물 국보 282호 경북 영주시 통일신라 375 불상 국보 282-1호 경북 영주시 조선 세조 376 전적 국보 282-2호 경북 영주시 고려말 377 직물류 국보 282-3호 경북 영주시 조선 세조 378 기타 복장물 오향, 칠약, 오곡,   칠보류, 사리함 국보 282-4호 경북 영주시 조선 세조 379 통감속편 국보 283호 경북 경주시 조선 세종 380 초조본대반야바라밀다경   국보 284호 서울 강남구 고려 정종   381 울산 대곡리 반구대 암각화 국보 285호 울산 울주군 선사시대 382 백자발 국보 286호 경기 용인시 조선 초기 383 부여 능산리출토 백제금동대향로 국보 287호 충남 부여군 백제시대 384 백제 창왕 명석조사리감 국보 288호 충남 부여군 백제시대 385 익산 왕궁리 5층석탑 국보 289호 전북 익산시 고려시대 386 통도사 대웅전 및 금강계단 국보 290호 경남 양산시 조선 인조 387 용감수경 국보 291호 서울 성북구 고려시대 388 오대산 상원사 중창권선문 국보 292호 강원 평창군 조선 세조 389 금동관세음보살입상 국보 293호 서울 종로구 삼국시대 390 청화백자 철사진사국화문병 국보 294호 서울 성북구 조선시대   391 나주 신촌리고분 출토 금동관 국보 295호 서울 종로구 백제시대 392 칠장사 오불회괘불탱 국보 296호 경기 안성시 조선 인조 393 안심사 영산회괘불탱 국보 297호 충북 청원군 조선 효종 394 갑사 삼신불괘불탱 국보 298호 충남 공주시 조선 효종 395 신원사 노사나불괘불탱 국보 299호 충남 공주시 조선 인조 396 장곡사 미륵불괘불탱 국보 300호 충남 청양군 조선 현종 397 화엄사 영산회괘불탱 국보 301호 전남 구례군 조선 효종 398 청곡사 영산회괘불탱 국보 302호 경남 진주시 조선 경종 399 승정원일기 국보 303호 서울 관악구 조선시대 400 여수 진남관 국보 304호 전남 여수시 조선 선조   401 통영 세병관 국보 305호 경남 통영시 조선 중기 402 삼국유사 국보 306호 서울 종로구 조선시대 403 삼국유사 국보 306-1호 서울 종로구 조선 초기 404 삼국유사 국보 306-2호 서울 관악구 조선 중종 405 태안 마애삼존불 국보 307호 충남 태안군 삼국시대     
35    동이전東夷傳 고구려高句麗 사료史料 모음 댓글:  조회:947  추천:0  2021-07-14
동이전東夷傳   고구려 자료 모음     後漢書       高句麗(고구려)       '고구려'는 '요동'의 동쪽 천리에 있다. 남으로 '조선' '예맥'이 있고, 북으로 부여에 접한다. 지방이 이천리이다. 큰산이 많고 계곡이 깊어 사람들이 따라 거한다. 작은 밭일이라 힘써 지어도 족하지 않으니 스스로를 헤아렸다. 고로 그 풍습이 절약하여 밥을 먹고, 집을 크게 하는 것을 좋아한다. '동이'가 서로 전하기를 부여의 다른 종류라 한다. 고로 언어와 법등 많은 것이 같아 한쪽 다리를 끌며 꿇어 앉아 절하고 걸음걸이는 모두 달리는 것과 같다. 무릇 다섯종족이 있는데,     '소노부'[혜동에 말하길 '消'는 위지에 '涓(연)'으로 되어 있다.], '절노부', '순노부', '관노부', '계루부'로[고려오부는 하나 '내부'로 일명 '황부' 즉 '계루부'이며 둘은 '북부' 일명 '후부' 즉 '절노부'이고 삼은 '동부' 일명 '좌부'로 즉 '순노부'이고 사는 '남부' 일명 '전부' 즉 '관노부'이며 오는 '서부' 일명 '우부' 즉 '소노부'이다.] 본래 '소노부'에서 왕을 하였는데, 점점 약해져 '계루부'에서 이를 이었다. 그 벼슬을 세워 '상가', '대노', '패자', '고추대가',[위지에는 '고추가'이다. 고려에서 손님을 접대하는 관직으로 '홍려(관직명)'와 같다.] '주부', '우태', '사자',[위지에 '사자' 위에 '승'이 있다.] '백의', '선인'이 있다.[위지는 '帛'는 ' (조)'자로 서로 비슷하여 혼란되어 바뀌었다. 조일청의 삼국지주보의 환우기에 '조의'의 우두머리는 '대형'이다. '동이'가 서로 전하길 '조의','선인'이다.라고 하였다.]       '무제'가 '조선'을 멸하고, 이로써 고구려를 현으로 하였다. [전서에 '원봉'중에 '조선'을 정하여 '진번' '임둔' '낙랑' '현도' 사군으로 하였다.] '현도'에 속하게 하고, 북과 피리와 광대를 주었다. 그 풍속이 음란하여, 모두 깨끗한 옷을 두르기를 즐겨 밤이 오면 쉽게 남녀가 모여 가무와 음악을 즐겼다. 귀신과 토지신, 영성 [전서 음의에 '용성'의 좌각을 말하여 '천전'이라하니 즉 농사에 상서로운 것이다 진일에 우성에 제사지내니 불러 '영성'이라 한다. 풍속지에 진의 신을 '영성'이라 한다. 고로 진일에 동남에 제사한다.]에게 제사하길 좋아하여 시월에 큰 모일을 가져 하늘에 제사시내니 일명 '동맹'이라 한다. 기 나라 동쪽에 큰 구멍이 있어 불러 수신이라 한다[위지 통지에 ' '이 '隧'로 적혀있다.]. 또한 시월을 맞이하여 이에 제사지낸다. 공적인 모임에는 의복이 모두 비단으로 금과 은으로 스스로를 치장하였다. '대가'와 '주부'는 모두 머리띠를 하는데 관과 같고 뒤가 없다. '소가'는 절풍을 하는데 모양은 고깔과 같다. 감옥이 없어 죄가 있으면 여러 가들이 심의하여 이를 살인에 처하고 그 처자는 노비로 삼았다. 혼인은 모두 부인의 집에서 치루고 자식을 낳아 다 크면 그런 연후에 마땅히 돌아온다. 사람을 보낼때가 되면 그 도구를 갖추었다. 금 은 재물 비단이 다될때까지 후하게 장사지내고 돌을 쌓아 봉분을 만들고 또한 소나무와 잣나무씨를 뿌렸다.  그 백성의 성품이 흉하고 급하고 기력이 있어 전투를 익히고 노략질을 좋아하였다. '옥저', '동예'가 모두 소속되어 있다.   '구려'는 일명 '맥'이다. 그 갈라짐이 있으니,[심흠한이 말하길 구려에는 종류가 있으니 일명 '맥이'이다. 통지에 '맥'이라 하고 '이'자가 없다. 이 '이'자는 첨언한것이다.] 작은 물에 의지하여 거하면, 이를 명하여 '소수맥'이라 한다. 좋은 활이 나온다. 이를 소위 '맥궁'이라 한다.[위씨춘추에 말하길 '요동군''서안평현'북쪽이다. 작은 물이 있어 남쪽으로 흘러 바다로 들어간다. '구려'의 다른 종류를 명하여 '소수맥'이라 한다.]   '왕망'초에 '구려'의 병사를 보내어 '흉노'를 정벌하려고 하였으나, 사람들이 가고자 하지 않았다. 강제로 이에 파견하니 모두 도망하여 변방에서 노략질 하였다. '요서'대윤 '전담'이 쫓아 공격했으나 전사하였다. '망'이 장수 '암우'에게 이를 공격하라고 명했으나, 구려후 '추'를 꾀어 변방으로 들어가[위지에는 '騶(추)'가 ' (도)'로 되어 있고 전한서 왕망전에는 '騶'로 되어 있다.] 이를 베어 '장안'에 머리를 전했다. 망이 크게 말하길, '고구려왕'의 명을 고쳐 낮추어 '구려후'라 하였다. '맥인'의 변방 약탈이 더욱 심하였다. '건무' 팔년 고구려가 사신을 파견하여 조공하였다. '광무' 다시 왕호를 회복했다. 이십삼년 겨울 '구려' '만우락'대가 '대승'등 만여호가 '낙랑'의 안에 이르러 속했다. 이십오년 붐 '구려'가 '우북평' '어양' '상곡' '태원'에 침입하자 요동태수 '제융'이 은혜와 믿음으로 이에 구하니 모두 변방으로 돌아갔다.       후에 구려왕 '궁'이 태어나자 눈을 뜨고 능히 보니, 나라사람이 꺼려하였다. [위지에 '懷'는 '惡(미워하다)'오 기록되어 있다. '懷'는 마땅히 '괴(괴이하다)'가 잘못된 것이다. 옛부터 '懷'자는 많이 ' (두려워하다)'와 섞어 썼다. 고로 잘못되어 바뀐 것이다.] 이에 자라 용맹한 장사가 되니 여러번 변경을 침범하였다. '화제''원흥'원년 봄 요동에 다시 들어와 육현을 빼앗아 노략질 하니 태수 '경기'가 나아가 이를 격파하여 그 큰 장수를 베었다. '안제' '영초' 오년 '궁'이 사신을 파견하여 조공하며 '현도'에 속하길 구했다. '원초' 오년 다시 '예맥'이 '현도'를 노략질하고 '화려성'을 공격하였다.[화려는 현이고 '낙랑군'에 속한다.] '건원'원년 봄 유주자사 '풍환', 현도태수 '요광', 요동태수 '채풍'등이[위지 북사에 '諷'이 '風'으로 기록되어 있고 안제기에 '諷'으로 되어있다. 통감도 이와 같다.] 병사로 변방에 나아가 이를 공격했다. '예맥'의 큰 장수들을 베고 포로로 삼으니 병마와 재물을 얻었다. '궁'이 이에 아들 '수성'과 장병 이천여명을 '광'등에게 보내며 사신을 보내어 거짓 항복하자 '광'등이 이를 믿었다. '수성'이 이에 험하고 좁은 지형으로 대군을 막고 삼천명으로 몰래 들어가 '현도'와 '요동'을 공격하여 성곽을 불사르고 이천여명을 죽이고 상처입혔다. 이에 '광양' '어양' '우북평' '탁군여국'이 삼천여 기병으로 동시에 이를 구하고자 파견하였으나 맥인은 이미 가버렸다. 여름 '요동''선비'의 팔천여명으로 '요수'를[현의 이름이다. 요동군에 속한다.] 공격하여 빼앗아 사령과 백성을 죽였다. '채풍'등이 뒤쫓아 '신창'으로 나아갔으나 전몰 하였다. 공조'경모', 병조연'용서' 병마연'공손포'가 몸으로 '채풍'을 막았으나 병사들과 함께 죽었다. 죽은자가 백여명이다. 가을 '궁'이 '마한''예맥'의 수천여기병을 이끌고 현도를 포위하자 부여왕이 아들 '위구태'와['台'는 또한 '治'이다.] 장병 이만여명을 파견하고, 주군의 병력을 합하여 이를 깨뜨리고 정벌하니 그 머리를 오백여개나 베었다.       이해에 '궁'이 죽고 아들 '수성'이 올랐다. '요광'이 위에 말하길 '이 상으로 인하여 병사를 파견하여 이를 공격하자' 하니 의논한자들이 모두 이를 가히 허락하였다. 상서 '진충'이 말하길 궁은 전의 '걸'과 같고 교활하니, '광'은 능히 깨지 못할 것이다. 죽음으로 이를 공격하는 것은 의가 아니니 조문의 파견해야 한다. 인하여 전의 죄를 책망하고 용서하여 가히 처벌하지 않아 후에 친선을 취해야 한다. 하니 '안제'가 이를 쫓았다. 다음해 '수성'이 한나라에 살아있는 백성들을 돌려 보내기 위해 '현도'에 항복하니 고하기를 '수성'등이 포악하고 배반함이 형용할수 없어 마땅히 베어 절단하여 절임으로써 백성에게 보여야 하나, 다행히 용서를 받아 죄를 청하여 항복하길 빈다. '선비' '예맥'은 해마다 노략질 하고 백성을 빼앗아 핍박하니, 수천이요, 마름질하여 보내는 자는 수십에 백명이니, 이는 교화될 마음이 아니다. 이 후로 현과 관은 전쟁하지 말것이며 친하고 따르며 살아있는 자를 보내니 모두 바로 그 세를 바쳐야 한다. 사람당 비단 사십필이고 어린이는 그 반이다.       '수성'이 죽자 아들 '백고'가 올랐다. 그후에 '예맥' 복속하여 따랐다. 동쪽으로 작은일들만이 있었다. '순제''양가' 원년 '현토군'에 둔전 육부를 두었다. '질'과 '항'사이에 요동 서안평을 다시 침범하니 '대방'의 령을 죽이고,[군국지에 '서안평' '대방'은 현으로 '요동군'에 속한다.] 낙랑태수의 처자을 잡았다. '건녕'이년 현토태수 '경임'이 이를 쳤다. 수백의 머리를 베니 '백고'가 다시 항복하여 '현도'에 속하길 구걸했다.       三國志       高句麗 (고구려)       '고구려'는 '요동'의 동쪽 천리에 있다. 남쪽은 '조선''예맥'이 있고, 동쪽은 '옥저'가 있으며, 북쪽은 '부여'에 접한다. 도성은 '환도'로, 사방 이천리 이며 호수는 삼만이다. 큰 산과 깊은 계곡이 많으며, 벌판과 호수가 없다. 산과 골짜기를 따라 거주하며, 계곡물을 마신다. 좋은 밭이 없어, 비록 힘써서 밭을 경작하지만, 열매가 충분하지 않아, 배가 고프다. 풍속에 음식을 절약하고, 집을 관리하는 것을 즐겨 그 거하는 곳에 큰 집을 좌우에 세우고, 귀신에 제사지낸다. 또한 신령스런 별과 토지신에게도 제사 지낸다. 그 사람들의 성품이 흉악하고 급하여, 도둑질함을 즐긴다. 그 나라에 왕이 있고 관직이 있어 '상가', '대로', '패자', '고추가', '주부', '우태승', '사자', '조의','선인'이라 하니, 높고 천함의 등급이 각각 있다. 동이의 오랜 말로써 '부여'의 다른 종류로 언어가 여러 가지이나, '부여'와 같은 것이 많다. 그러나, 그 성질과 기운과 의복은 다름이 있다. 본래는 다섯 부족으로 '연노부', '절노부', '순노부', '관노부', '계루부'가 있다. 본래 '연노부'에서 왕을 했는데, 점점 약해저, 이제는 '계루부'에서 대를 잇는다.       한나라때에 북치고 피리부는 재주를 가진 사람을 하사하였는데, 항상 '현토군'에서 조복과 의책을 받아갔다. '고구려'를 영주로서 그 이름을 기록하였다. 후에 점점 교만해지고 방자해 지더니. 군에 복종하지 않고, 또한 동쪽 경계에 작을 성을 쌓았다. 조복과 의책을 그 가운데 두면, 해마다 이를 가질러 왔다. 이제 '호'들 조차도 그 성의 이름을 '책구루'라 한다. '구루'라는 것은 '구려'의 성의 이름이다. 이곳에 관을 두고 '대로'을 두면, '패자'를 두지 않고, '패자'를 두면. '대로'를 두지 않았다. 왕의 종족으로 '대가'는 모두 '고추가'로 칭하는데, '연노부'가 본래 나라의 주인으로 이제는 비록 왕이 아니라 하더라도, 혈통을 잇는 대인으로 '고추가'가 칭한다. 역시 종묘를 세우고, 영성과 사직에 제사를 지낼 수가 있다. '절노부'는 세세토록 왕과 혼인을 하는여, '고추'라는 이름을 얻었다. 여러 대가들은 역시 스스로 '사자', '조의', '선인'을 두어 그 이름을 모두 왕에게 알리는데, '대부' 벼슬하는 집의 신하들은 모임에 앉거가 일어서는데 있어, 왕가의 '사자', '조의', '선인'과 같은 반열을 얻지는 못한다.       그 나라의 대가들은 밭을 갈지 않는데, 앉아서 밥 먹는 자가 만여호나 이른다. 아랫사람들이 멀리서부터 쌀과 양식과 물고기와 소금을 짊어지고 와서 공손히 보태준다. 그 백성들은 노래와 춤추는 것을 좋아하여, 나라의 읍락에서는 밤이 되면 남녀가 무리지어 모여들어, 서로 따르며 노래하고 춤춘다. 큰 창고는 없으나 집집마다 스스로 작은 창고가 있어, 이름하여 '부경'이라 한다. 사람들은 탐욕이 없지만, 좋은 술을 감춰두는 것을 좋아한다. 꿇어 엎드려 절할 때 다리 하나를 뻗는데, '부여'와 이것이 다르다. 길을 갈때는 모두 달린다. 시월에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것이 나라의 큰 모임으로 '동명'이라고 한다. 공적인 모임때의, 의복은 모두 비단이고 금과 은으로 스스로를 꾸민다. '대가'나 '주부'는 머리에 두건을 하는데, 수건같이 생기고, 뒤가 없다. '소가'는 절풍을 하는데, 형태가 고깔과 같다.       그 나라의 동쪽에 큰 굴이 하나 있는데, '수혈'이라 한다. 시월 나라의 큰 모임에서  수혈신을 맞이하여 나라 동쪽에서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데, 나무로 수혈신의 자리를 만들어 둔다. 감옥이 없고, 죄가 있으면, 여러 '가'들이 모여 의논하여, 이를 죽인후 처자는 노비로 삼는다. 그 혼인하는 풍속은 말로써 이미 정해지면, 여자의 큰 집 뒤에 작은 집을 짓는데, 이를 '서옥'이라 한다. 사위 될 사람이 저녁무렵에 여자의 집 대문 밖에 이르러, 스스로의 신분을 밝힌 후 꿇어 엎드려 절한 후에 여자와 하룻밤 자기를 청하는데, 보통 두세번 한다. 여자의 부모님이 받아들여 작은집에서 잠잘 수 있게 하면, 돈과 비단을 내 놓는다. 아들은 낳아 장성하게 되면, 이에 마땅히 부인과 집으로 돌아 온다. 그 풍속은 음란하다. 남녀가 결혼만 하면, 조금씩 죽어서 입을 옷을 만든다. 장사는 후하게 하는데, 금은 비단을 죽은자에게 보낸다.(함께 묻는다.??) 돌을 쌓아 봉분을 하고, 소나무와 잣나무를 심는다. 말들은 모두 작아, 산을 오르기에 편하다. 나라 사람들은 기력이 있고, 전투를 익힌다. '옥저', '동예'가 모두 속하였다. 또한 '소수맥'도 속하였다. '구려'가 나라를 일으킬 때 큰 물을 의지하여 일어났는데, '서안평현'북쪽에 소수가 잇어 남쪽으로 흘러 바다로 들어간다. '구려'의 별종으로 소수를 의지해 나라를 일으키니, 인하여 '소수맥'이라고 이름한다. 좋은 활이 나오니, 소위 '맥궁'이라 한다.       '왕망'초에 '고구려'병사를 일으켜 '호'를 치려고 하는데, 가고자 하질 않았다. 강제로 다그쳐 이에 파견하였는데, 모두 변방에서 달아나 버려 도둑이 되었다. 요서 대윤 '전담'을 보내어 이를 공격하게 하였는데, 거기에서 살해 당하였다. 주군현에서 '구려후 추'에게 허물을 돌리자, '엄우'가 진언하길 '맥인이 법을 범한 것이니, 죄는 '추'에게 있지 않습니다.오히려 위로함이 마땅합니다. 이제 큰 죄를 뒤집에 쒸우면, 반란을 일으킬까 두렵습니다.' 하였으나, '망'이 듣지 않고, '우'에게 공격하라 명하니, '우'가 '구려후 추'를 꾀어, 만나길 약속하자, '추'가 이르자 이를 베고, 그 머리를 '장안'으로 보내었다. '망'이 크게 기뻐하며, 천하에 포고하길 '고구려'의 이름을 '하구려'로 바꾸어 명하게 하였다. 마땅히 이때부터 후국이 되었다. '한''광무제' 팔년 '고구려왕'이 사신을 파견하여 조공하자, 왕이라 칭하기 시작했다.       '상제'와 '안제'의 사이에 이르러, '구려왕 궁'이 수차례 '요동'을 침범하자 다시'현토'가 속하게 하였다. 요동태수 '제풍과 현토 태수 '요광'이 '궁'이 두 고을에 해가 된다 하여, 군사를 일으켜 이를 쳤다. '궁'이 거짓 항복하며 화친하길 청하자, 두 군이 나아가질 않았다. '궁'이 비밀히 군사를 보내어 '현토'를 공격하여, '후성'을 불사르고, '요수'에 들어와 관리와 백성을 죽였다. 후에 '궁'이 다시 '요동'을 침범하자, '제풍'이 제빨리 군사를 내어 이를 토벌하려 했지만, 군사가 패하고 말았다.       '궁'이 죽고 아들 '백고'가 섰다. '순제'와 '환제' 사이에 다시 '요동'을 침범하여 '신안','겨향'을 약탈하고, 또한 '서안평'을 공격하였다. 길위에서 '대방' 태수를 살해하고, '낙랑'태수의 처자를 얻어, 사로잡았다. '영제 건안' 이년 '현토'태수 '경임'이 고구려를 침공하여 포로 수백의 머리를 베자 '백고'가 항복하여, '요동'에 속하였다. '가평'중에 '백고'가 '현토'에 속하길 빌었다. '공손도'의 웅지가 바다동쪽에 이르자, '백고'가 대가 '우거'와 주박 '연인'등을 파견하여, '공손도'를 도와 '부산'의 적을 공격하는데 도움을 주어, 이를 깨뜨렸다.       '백고'가 죽었는데, 두아들이 있어, 장자는 '발기'이고, 작은 아들은 '이이모'이다. '발기'가 불초하여 나라사람들이 함께, '이이모'를 왕위에 세웠다. '백고'때에 수차례 '요동'을 침략하고, 또한 망한 '호'의 오백여가를 받아들였다. '건안'중에 '공손강'이 군사를 내어, 공격하여, 그 나라를(고구려) 깨뜨리고, 고을을 불살랐다. '발기'가 형으로써, 왕이 되지 못함을 원망하여, '연노부'의 '가'와 백성 삼만여호를 데리고, '공손강'에 항복하고, '비류수'로 돌아와 살았다. 항복한 '호' 역시 '이이모'를 배반하였다. '이이모'가 다시 새로운 나라를 세웠는데, 금일의 있는 것이 이것이다. '발기'는 '요동'으로 가고, 아들을 '구려국'에 남겼는데, 지금의 고추가인 '교위거'가 이것이다. 후에 다시 '현토'를 공격하자, '현토'가 '요동'과 함께 공격하여 크게 깨뜨렸다.       '이이모'는 아들이 없어, '관노부'와 음란하여 아들을 낳으니, '위궁'이다. '이이모'가 죽고 왕위에 섰다. 지금의 '구려왕 궁'이 이것이다. 그 증조의 이름도 '궁'인데, 태어나서 능히 눈을 뜨고 보았다. 그 나라 사람들이 이를 싫어 하였다. 장성하자, 흉악하고 사나워져, 수차례 도둑질과 노략질을 하여, 나라를 헤롭게 하고, 깨지게 하였다. 지금의 왕도 타지에서 태어나 역시 능히 눈을 뜨고 사람을 보니, '구려'사람들이 그 증조와 닮았다 하여, 서로 부르기를, '위궁'이라 하였다. '위궁'은 힘과 용기가 있고, 말을 잘 타며, 궁술에 능하였다. '경초'이년 태사'사마선왕'이 군사를 이끌고, '공손연'을 치자, '궁'이 주박 과 대가인 장수와 병사 수천인을 파견하여 도왔다. '정시'삼년 '궁'이 '서안평'을 침략하고, 오년 '유주자사 관구검'에게 깨졌다. '검전'에 있어 전한다.       宋書       高句麗 (고구려)       '고구려'는 '부여'에서 나왔다. 스스로 말하길 선조는 '주몽'이다. '주몽'의 어머니는 하백의 딸로, '부여왕'이 궁실안에 잠그었으나 태양이 이곳을 밝게 비추어, 몸을 끌었으나 이를 피하였지만, 태양의 그림자가 또한 쫒아 왔다. 그러는 동안에 아이를 베니 알 하나를 낳았다. 크기가 다섯되나 되었다. '부여왕'이 이를 버려 개에게 주었지만, 개는 먹지 않고, 다시 버려 돼지에게 주었지만, 역시 먹지 않았다. 이를 길가에 버렸지만, 소와 말이 이를 피했다. 후에 이를 들에 버렸는데, 새의 무리가 털로써 이를 길렀다. '부여왕'이 이를 쪼개어 나눌려고 했지만, 능히 깰수 없었다. 그 어미에게 돌려 주자, 어미가 이를 보자기에 싸서 따뜻한 곳에 두니 한 사내 아이가 알을 깨고 나왔다. 이미 자라 있으니, 이름을 '주몽'이라 하였다. 풍속에 '주몽'이란 말은 '활을 잘 쏜다'이다. 부여사람이 '주몽'이 사람에서 태어난 것이 아니라, 장차 다른 뜻이 있을 것이다 하여 주몽을 죽이자고 청하였으나, 왕이 듣지 않고, 그를 말지기에 명하였다. '주몽'이 매양 사사로이 실험하여, 좋은말과 나쁜말이 있음을 알고, 좋은 말은 음식을 적게 주어 여위게 하고, 나쁜 말은 잘 길러 살찌우게 하였다. '부여왕'이 살찐 말은 스스로 타고, 여윈말은 '주몽'에게 주었다. 후에 사냥을 할 때, 주몽은 활을 잘 쏘아 하나의 화살을 쏠 시간동안에 적은 화살로 많은 짐승을 잡았다. 부여의 신하들이 또한 '주몽'을 모살할려고 하자 조몽의 어미가 은밀히 이를 알고, '주몽'에게 말하길, "나라에서 장차 너를 해치려 한다. 너는 재주로써, 마땅히 먼 곳에 가야한다."  '주몽'이 이에, '오인','오위' 두사람과 함께, '부여'를 버리고, 동남쪽으로 도망하였다. 도중에 우연히 큰물가에 이르러, 건너려고 하였으나, 다리가 없었다. '부여'인들이 이들을 급히 쫓았다. 주몽이 물에 고하여 말하길 "나는 태양의 아들이요, 하백의 외손이다. 오늘 도망하여 달아나는데, 병사가 쫓아와 이에 이르렀다. 어찌 건널수 있겠는가?" 그러자, 물고기와 자라가 함께 떠올라 다리를 이루었다. '주몽'이 건너자, 물고기와 자라가 이에 흩어저, 쫓아온 기병들은 건너지 못하였다. '주몽'이 '보술수'에 이르러, 우연히 세 사람을 만났는데, 한 사람은 마의를 입고, 한사람은 납의를 입고, 한사람은 수한의를 입었다. '주몽'과 함께 '흘승골성'에 이르러, 거처를 정하고, '고구려'라 불렀다. 이런 연후로 성씨를 고씨(?)라 하였다.     처음 '주몽'이 '부여'에 있을 때, 아내가 아이를 배었는데, '주몽'이 도망한후 남자 아이를 낳았다. 이름을 '시여해'라 하였다. 자라, 주몽이 나라의 주인임을 알고, 곧 어미와 함께 도망하여, 이에 돌아오니, 이름을 '여달'이라 하고, 나라의 일을 맡기었다. '주몽'이 죽고, '여달'이 대를 이어 섰다. '여달'이 죽고, 아들 '여율'이 섰고, '여율'이 죽고, 아들 '막래'가 섰다. 이에 '부여'를 침공하여 '부여'가 크게 패하니, 속하였다. '막래'의 자손이 서로 전하여 '궁'에 이르렀다. 나면서부터 눈을 떠 능히 보니, 나라사람이 미워하였다. 자라 흉폭하고, 사나우니, 나라가 깨어졌다. '궁'의 증손 '위궁'이 또한 나면서부터 보았다. 사람들이 증조 '궁'과 같다하여, 고로 이름을 '위궁'이라 하였다. 고구려에서 서로 같음을 '위'라 하였다. '위궁'역시 용력이 있고, 활과 말타기를 잘하였다. '위'나라 '정치' 중에 '요서' '안평'을 침입하였는데,[삼국위지 동이전과 수서 고려전에 '요서안평'은 '서안평'으로 적혀있다. 후한서 군국지에 '안평'은 '기주'에 속하며, 삼국지에 '서안평'은 '유주' '요동군'에 속한다. '요서군'은 '안평' 혹은 '서안평현'에 있다. 이중에 '요'자가 남았거나, 혹은 '요'자 밑에 '동'자가 빠졌다.] 유주자사 '관구검'이 깨뜨렸다. 그 현손 '을불리'와 '리'의 아들 '쇠'가 '열제'때에 함께 '모용씨'와 서로 공격하였다. '건국' 사년 '모용원진'이 무릴 거느리고 이를 정벌하고 '남섬'에 스스로 들어와서 '목저'에서 싸워 '쇠'군을 크게 깨뜨렸다. 승승장구 하더니, '환도'에 이르르자 '쇠'가 달아나 숨었다. '원진'이 '쇠'의 아버지 묘를 파해치고, 그 주검을 싣고, 그 어미와 처와, 보물과 남녀오만여명을 함께 노략질 하고, 그 궁실을 불살라, '환도성'이 패허가 되자 돌아 왔다. 그 후로 '쇠'는 사신을 보내 알현함이 멀어지고, 서로 막혀 원수처럼 지냈는데, 뒤에 가서 '쇠'는 '백제'에게 죽었다.       '세조'때에 '쇠'의 증손 '련'이 사자 '안동'을 파견하여, 표를 받으러 방물을 받치기 시작하면서, 나라의 이름을 받기를 청하였다. '세조'가 그 정성을 아름다이 여기어, 조서를 내리어 그 나라의 이름을 내리니 '원외산기시랑''이오'를 보내어 '련'에게 내리길 '도독요해제군사 정동대장군 영호동이중랑장 요동군개국공 고구려왕'이라 하였다. '오'가 거하는 '평양성'에 이르러 여러 가지 일을 물었다. 말하길, '요'는 동남으로 일천여리이고, 동쪽은 '책성'에 이르고, 남쪽은 '소해'에 이르고 북쪽은 옛날 '부여'에 이른다. 백성은 전의 '위'날 때보다 3배이다. 그 땅은 동서로 이천리이고 남북이 일천여리 이다. 백성은 모두 땅에 정주하며, 산과 골짜기에 근거하여 거한다. 옷은 베와 비단과 가죽으로 하고, 흙과 밭이 척박하여 양잠과, 농사가 족하지 않아 사람들이 음식을 절약한다. 그 풍속이 음란하고, 노래와 춤을 좋아하며, 밤이 되면 곧 남녀가 무리지어 모여 즐기니, 귀한과 천함의 절도가 없다. 그러하여, 깨끗함을 스스로 즐기니, 왕도 그 궁실을 다스리길 좋아한다. 관명에는 '알사''태사''대형''소형'이라 불리우는게 있다. 머리에는 절풍을 하는데 그 형태가 고깔과 같고, 두루 새의 깃털을 꽂아 귀천의 차이를 두고, 서 있을 때는 팔짱을 끼고 꿇어엎드려 절을 할 때엔 한 쪽 다리를 뻗는다. 걸음은 달리는 것과 같다. 항상 시월에 하늘에 제사를 하니 나라에서 큰 모임이다. 그들이 공회에서 입는 옷은 모두 비단에 금이나 은으로 수를 놓아서 장식을 한다. 그들은 또 걸터앉기를 좋아하고 음식에는 그릇을 이용한다. 삼척마가 나는데, 원래 주몽이 타던 것이라고 한다. 말의 종류가 즉 과하마이다. 그 뒤로부터는 사신을 보내서 서로 찾았고, 해마다 황금 이백 근과 백은 사백 근을 바쳤다.       이때 '풍문통'이 무리를 거느리고 도망하니, '세조'가 산기상기'봉발'을 파견하여 '련'에게 고하길 '문통'을 보내라 하니, '련'이 상서와 '문통'을 함께 갖추어 왕화를 받들겠다 하나, 끝내 보내기 않았다. '세조가 노하여, 가서 이를 정벌하려고 하였다. '낙평왕''비'등이 의논하여 나중에 일어나자고 하니, '세조'가 이네 중지하였다. '문통'은 또한 '련'에게 살해를 당하였다.       후에 '문명태후'가 '현조'가 육궁이 아직 준비 되지 않았다 하여, '련'에게 칙서를 내려 그 여식을 받치라 하니, '련'이 칙서를 받들어, 말하길 여식은 이미 출가 하여, 구하여 동생의 여식으로 응하니, 조정에서 응하였다. 이에 '안락왕''진과 상서 '이부'를 파견하여, 그 곳에 이르러 비단을 보내었다. 그 좌우에서 말하자, '련'이 미혹되니, 말하길 조정에서 옛날에 '풍씨'와 혼인을 하였는데, 낌새도 없이 나라가 멸망당하였다. '은'나라의 본보기가 멀지 않습니다. 마땅히 방편으로써 사양해야 합니다. '련'이 상서를 올려 계집이 죽었다고 거짓으로 칭하니, 조정에서 그 교사를 의심하여 또한 가산기상시'정준'을 파견하여 이를 꾸짓고, 만일 여식이 죽었으면, 다시 일가 친척에서 가려뽑아 청해야 한다. 하니 '련'이 말하길 "만일 천자가 전의 잘못을 용서한다면, 삼가 마땅히 받들겠다."하였다. 때마침 '현조'가 붕하니, 이내 그치었다.       '고조'때에 이르러 '련'이 2배의 공물을 받쳤다. 그 하사품도 또한 점점 더하였다. 이 때에 '광주'가 바다 가운데에서 '련'이 '소도성'에 파견하는 사자 '여노'등을 궁궐에 보내왔다. '고조'가 조서를 내려 '련'을 책망하여 말하길, " '도성'이 친히 그 임금을 죽이고 왕의 이름을 도둑질해서 '강'의 왼쪽에 있으니, 짐이 바야흐로 군사를 일으켜 그 나라를 멸하고, 끊어졌던 대를 '유씨'에게 이어 주려 했는데, 경은 국경을 넘어 외교를 해서 멀리 찬역하는 적들과 통하니 이 어찌 번신의 절조를 지키는 의리란 말인가. 그러나 이제 이 한가지 과실로 해서 경의 지난날의 정성을 가려 버리고 싶지 않기로 곧 돌려 보내 주는 것이니, 경은 여기에 감동하여 그 허물을 뉘우치고 다만 조정의 밝은 법에 순종하여 편안히 맡은 바 땅을 다스리고 그 곳의 형편을 알려 주기 바란다] 했다.       '태화'십오년 '련'이 죽으니, 백여세였다. '고조'가 동쪽 성밖에서 슬피 울고, 알자복사 '이안상'을 파견하여 '거기대장군 태부 요동군개국공 고구려왕'을 더하고, 시호를 '강'이라 하였다. 또한 '대홍려'를 파견하여 '련'의 손자 '운'에게 '사시절도독 발해제군사 정동장군 영호통이중랑장 요동군개국공 고구려왕'을 내리고, 의관과 복물, 거기 등의 장식을 하사했다. 또한 조서를 내려 '운'에게 세자를 입조하는데 보내어, 교구의예를 치루라고 하였다. '운'이 상서하여 병을 핑계되고, 그 종숙 '승우'를 사신과 함께하여 보내어, 궁궐에 이르자, 엄하게 이를 꾸짓었다. 스스로 이해부터 늘상 조공을 하였다. '정치'중에 '세종'이 동당에서 그 사신 '예실불'을 불로 보았다.[다른 여러본에는 '종'이 '조'로 적혀 있다. 북사에는 '선무'라고 적혀 있으나 '정치'란 호는 '세종'이 지은 것이니 북사는 그 제호를 바꾸어야 한다.] '실불'이 나아가 말하길 " '고려'는 멀리 하늘 끝에 걸리어 있어 해마다 순수한 정성을 바쳐 왔습니다. 그러나 이 땅에서는 나는 물건들은 바칠 것이 없아옵고, 다만 황금이 '부여'에서 나고, 옥이 '섭라'에서 나옵니다. 이제 '부여'는 '물길'을 섬기고, '섭라'는 '백제'에 병합되니, 나라의 왕이며 신하인 '운'이 끊어진 의를 이를려고 생각하여, 백성들을 모두 국경 안으로 옮겼아오니, 두 물건이 왕부에 오르지 못하는 것은 실상 이 두 적들 때문입니다." 했다. '세종'이 말하길, " '고려'는 대대로 상장직을 떠 맡아,바다밖을 제도 하고, 구이를 사로잡고, 실로 이를 정벌하여야 할 것인데, 이제 모든 부끄러움을 끼치고 있으니 이는 누구의 허물이겠는가?. 옛날에 공물을 바치지 않은 허물도 그 책임이 그대들에게 있는 것이니 경은 마땅히 짐의 뜻을 경의 임금에게 전하여 짐의 생각하는 바의 대략을 알도록 힘써, 무리를 해치는 자들을 잘라 없애고 동쪽 백성들을 편안히 하여 두 고을로 하여금 옛터를 회복하도록 하고 토산물도 빠짐없이 바쳐 오도록 하라] 했다.       '신귀'주에 운이 죽자, '영태후'가 동당에서 슬퍼하였다. 사신을 파견하여, '거기대장군 영호동이교위 요동군개국공 고구려왕'을 하사하고, 또한 세자 '안'에게 '안동장군 영호동이교위 요동군개국공 고구려왕'을 내렸다. '정광' 초에 '광주'가 또한 '소연'이 '안'에게 '영동장군의 옷, 관, 검, 패를 하사하는 것을 바다 가운데에서 얻었다. 또한 사신 '강법성'등을 서울로 보내었다. '안'이 죽고 아들 '연'이 섰다. '출제' 초에 '연'에게 조서를 내려 더하길 '사지절 산기상시 거기대장군 영호동이교위 요동군개국공 고구려왕'이라 하고 의관과 복물과 거기를 하사하였다. '태평'중에 조서를 내려 '연'에게 '시중 표기대장군'을 더하고 나머지는 전과 같다. '연'이 죽고, 아들 '성'이 서고, '무정'말에 이르기 까지 공물과 사신이 끝이는 해가 없었다.       南       高麗國(고려국 :고구려)       '동이'의 '고려국'은 서쪽으로 '위노'와 경계하고 있다. '송'말에 '고려왕 낙랑공 고련'을 사지절 산기상시 도독 영 평이주 제군사 거기대장군 개부의동삼사로 삼았다. '태조''건원' 원년 표기대장군으로 승진하였다. 삼년 사신을 보내어 공물을 받치고, 배를 타고 바다로 가서 역참을 통하여 항시 통하였다. 역시 '위노'에 사신을 통하니, 강성해져서 제도를 받지 않았다.       '노'에서는 여러나라의 사신을 집에 두었는데, '제'가 첫째이고, '고려'가 다음이었다. '영명'칠년 평남참군 '안유명'과 용종복사 '유사효'를 '위노'에 보냈는데, '위노'도 '원회'를 보내와 '고려'와 서로 엇갈렸다. '유명'이 위주객랑 '배숙명'에게 이르기를 나와 다른 사람이 중국의 명을 받들어 경의 나라에 온 것은 적을 막고자 함이니, '위'가 여기에 있음이다. 스스로 나머지 바깥의 이들은 먼지가 일어나듯이 얻을 려고 바라지 않아도 다스리니, 하물며 동이의 소맥이야 신하로 조정에 속하게 되니, 오늘에서야 감히 내가 이른것입니다. 하였다. '사효'가 남부상서 '이사충'에게 말하길 나의 성조가 '위'의 사산에게 일찍이 소국처럼 대하지 않음은 경도 역시 알 것이다. 하였다. '사충'이 말하길 실로 그러하다. 다만 주와 부가 임금의 소리를 듣지 못하였다. 그  앉고 일어섬의 차이가 심히 높으니 서로 아는 것으로 그친 것이다. 하니 '사효'가 말하길 '이도고'가 옛날 사신이었을 때 의관을 바로하고 갔는데, '위국'에서는 반드시 갓끈을 늘여뜨리니, 어찌 얼굴을 보는데 물리치지 않겠는가? '유명'이 또 '노주'에게 말하길 두나라는 서로 비슷하니 오직 '제'와 '위'와 친하다. 변방의 작은 오랑캐로 감히 이르러 신하로써 따른다. 하였다.     '고려'는 풍속에 옷은 궁고를 입고, 관은 절풍하나를 쓴는데, 이를 책이라 한다. '오경'을 알고 있다. 사신이 서울에 있어 중서랑 '왕융'이 이를 놀리며 말하길 옷입는데 정성스러움이 없으면, 몸에 재앙이 온다. 머리위에 있는 것은 어떤 물건인가? 하니 답하여 말하길 이것은 곧 옛부터 내려 오는 고깔이 남은 것입니다. 하였다.       '고련'이 백여세에 죽었다. '융창'원년에 '고려왕 낙랑공 고운'을 사지절 산기상시 도독 영평 이주 제군사 정동대장군 고려왕 낙랑공으로 삼았다. '건무' 삼년 (이 밑의 글자는 파본으로 알수 없다.)       周書       高麗 (고려:고구려)       '고려'는 먼저 '부여'에서 나왔다. 스스로 말하길 시조는 '주몽'이라 한다. '하백'의 여자가 태양의 그림자를 느끼어 그곳에서 아이를 배었다. '주몽'이 자라나 다스림의 재주가 있어, '부여'사람들이 미워하니 이에 쫓겨났다. 땅을 '흘두골성'에 잡고, 스스로 '고구려'라 불렀다. 이에 '고'로 씨를 삼았다. 그 손자 '막래'때에 점점 성하더니, '부여'를 공격하여 이에 신하로 삼았다. '막래'의 후손중에 '련'이 있는데, 처음으로 '후위'에 사신을 보내어 통하였다.       그 땅은 동쪽으로 '신라'에 이르고, 서쪽으로 '요수'를 건너 이천리이며, 남쪽으로 '백제'에 접하며, 북쪽으로 천여리에 '말갈'과 이웃한다. '평양성'에서 다스린다. 그 성은 동서로 육리이고, 남쪽은 '패수'에 임한다. 성내에는 오직 창고에 그릇을 쌓아두고 대비하는데, 도적이 이르르면, 사방에서 들어와 오로지 수비한다. 왕은 그 곁에 집을 나누어 짓는데, 항상 이에 거처하지는 않는다. 그 외에 '국내성'과 '한성'이 있다. 즉 다른 도읍이다. 다시 '요동', '현토'등 수십성이 있는데, 모두 관리를 두고, 이로써 서로 관리한다.       큰 관리로 '대대로'가 있고, 다음으로 '태대형', '대형', '소형', '의사사', '오졸', '태대사자', '대사자', '소사자', 그리고 '욕살'이 아우르는 '욕사' '예속' '선인'으로 무릇 십삼등급으로 내외사를 나눈다. '대대로'는 강하고 약함의 법칙으로써 뺏았아 스스로 오르는 것이로 왕이 관리로써 두는 것이 아니다. 그 형법에 모반한자는 먼저 불살라 죽인고, 그 후에 목을 베며. 그 집안을 모두 죽인다. 도적질한 자는 십여배로 갑고, 만약 가난하여 준비하지 못하면, 빗을 지개 하여 잘잘못을 살피여 그 아들 딸 모두 노비로 삼아 이에 갚도록 한다.       장부의 옷은 동수삼(소매와 윗도리가 통자)과 대구고(허리품이 넓은 바지)이고, 흰색 가죽으로 허리띠를 메고, 황색 가죽으로 신을 신는다. 그 관은 '골소'라고 하는데, 붉은 비단을 포개어 이를 만들고, 금은으로 이를 꾸민다. 벼슬이 있는 자는 또한 새의 깃털을 위쪽에 두 개를 꽂고, 이에 다름을 표시한다. 부인은 치마와 저고리를 입는데, 옷고리와 소매에 모두 선을 두른다. 서적으로는 '오경' '삼사' '삼국지' '진양추'가 있다. 병기로는 갑옷, 노, 활, 화살, 창이 있다. 조세는 명주나 화폐 곡식으로 하는데, 그 있는 곳까지 쫓아가 빈부의 차이를 두어 이에 걷는다. 땅은 척박하고, 거처는 검소하다. 하지만 그들의 행동은 거짓이 많고, 말하는 것은 거칠고 더럽다. 친하거나 소원하거나 가리지 않고 한 내에서 목욕하고 한 방에서 잔다. 풍속이 음란한 것을 좋아하며 이것을 부끄러이 여기지 않는다. 유녀(기생)가 있으며 남편은 평범한 사람이 아니다. 결혼하는 예는 재물이나 비단이 없고 만일 재물을 얻는자는 노비로 판다고 이르로, 풍속에서 매우 부끄러워 한다. 부모나 남편이 상을 당하면, 그 옷은 중국과 한가지 이다. 형제일때는 삼개월을 한계로 한다. 불법을 공경하고 믿으며, 더욱이 음사를 좋아한다. 또한 신을 모시는 곳이 두 곳이 있는데, 하나는 '부여신'으로 나무를 깍아 여인네의 모양이고, 하나는 '등고신'으로 말하길 시조 '부여신'의 아들이라 한다. 관사에 함께 두고, 사람을 보내어 지키고 간수한다. 대개 '하백'의 딸과 '주몽'이라 말한다.       '련'의 오세손은 '성'이다. '대통' 십이년 사신을 보내어 방물을 받쳤다. '성'이 죽자 아들 '탕'이 섰다. '건덕' 육년 '탕'이 또한 사신을 보내어 조공하였다. '고조'가 '탕'을 상개부의동대장군 요동군 개국공 요동왕으로 삼았다.       南史       高句麗(고구려)       '고구려'는 '요동'의 동쪽 천리에 있어, 그들이 나온 것은 '북사'에 자세히 나와있다. 땅은 가히 이천리이고 가운데에 '요산'이 있고, '요수'가 나온다. '한'과 '위'때에 남으로는 '조선', '예맥' 동으로는 '옥저' 북으로는 '부여'에 접하고 있다. 그 왕의 도읍은 '환도산'아래에 있는데, 땅은 큰산과 깊은 계곡이 많고, 깊은 연못은 없으며, 백성들이 이에 의지하여 사는데, 계곡물을 먹는다. 비록 토착하여 살지만 좋은 밭이 없어서 풍속에 식량을 절약하며, 궁실을 짓기를 좋아한다. 거하는 곳의 좌우측에 큰 집을 짓고, 귀신에 제사를 지내며, 또한 별과, 땅의 신에게도 제사를 지낸다. 사람들은 흉폭하고, 급하며, 노략질 하길 좋아한다. 관식은 '상가·대로·패자·고추가·주부·우태·사자·조의·선인이 있으며, 높고 낮음에 각각 등급이 있다. 언어는 여러 가지가 있는데, 모두 '부여'와 같은 것은 것으로 성질과 기후 의복등은 다름이 있다. 본래 다섯부족으로 '소노부'·'절노부'·'신노부'·'관노부'·'계루부'이다. 본래는 '소노부'에서 왕을 하였는데, 점점 약해져, '계루부'에서 대를 잇는다. 관직을 두는데 있어, 대로가 있으면, 패자를 두지 않고, 패자가 있으면 대로를 두지 않는다. 풍속에 노래와 춤을 좋아하여, 나라의 읍락에서 남녀가 매양 밤에 무리를 이루어 노래하며 즐긴다. 사람들은 깨끗함을 좋아하고, 몰래 술을 담구어 먹으며, 다리를 뻗어 절을 하며, 걸을때는 달음질을 한다. 시월에는 크게 모여 하늘에 제사를 지낸다.  공적인 모임에는 모두 비단옷을 입고, 금은으로 스스로 꾸미는데, 대가와 주부의 머리에는 건과 같은 것을 머리에 쓰는데, 뒤가 없다. 소가들은 절풍을 쓰는데, 모양은 고깔과 같다. 그 나라에는 감옥이 없는데, 죄를 지은자가 있으면, 여러 가들이 모여 의논하여 중죄인은 죽이고, 그 처자도 죽인다. 풍속에 음란함을 좋아하여 남녀가 서로 꼬시어 예를 갖추지 않고, 결혼함이 많다. 이미 결혼하면, 나중에 잘살게 되면 결국에는 옷을 보내온다. 죽은 자를 장사지내는데 있어서 곽은 있으나 관이 없다. 후이 장사지냄을 좋아하여 금은과 재물과 비단을 모두 죽은자를 위해 보낸다. 돌을 쌓아 봉분을 만들고, 소나무와 잣나무를 주위에 심어 놓는다. 형이 죽으면 형수를 아내로 삼고 말은 모두 작은데 산을 오르기에는 편하다. 나라사람들은 기력을 숭상하여, 활과 화설 칼과 창을 잘 다루고, 갑옷이 있으며, 전쟁을 익힌다. '옥저'와 '동예'가 모두 속해 있다.       '진' '안제''의희' 구년 '고려왕 고련'이 장사 '고익'을 보내어 표를 받치며, 붉은빛나는 백마를 받치자, '진'이 '련'을 사지절 도독 영주 제국사 정동장군 고려왕 낙랑공으로 삼았다. '송''무제'가 보위에 오르자, '정동대장군'을 더하고 나머지는 옛날과 같이 하였다. 삼년 '련'에게 산기상시를 더하고, 독평주제군사를 보태었다. '소제''경평'이년 '련'이 장사 '마루'등을 보내어 방물을 받치자 '주소백'과 '왕소자'를 보내어 이에 위로하였다.       '원가' 십오년 '풍홍'이 '위'을 공격하다가 패하여 '고려''북풍성'으로 도망하였는데, 표를 올려  맞이하여 접할 수 있기를 청하였다. '문제'가 '왕백구'와 '조차흥'을 보내어 맞도록 하고, 아울러 '고려'에 재물을 보내었다. '련'이 '홍'을 남쪽에 두고자 하지 않아, 이에 장수 '손수'와 '고구'를 보내어 엄습하여 이를 죽였다. '백구'등이 칠천여명을 거느리고 가서 '수'를 사로잡고, '구'등 두사람을 죽였다. 이에 '련'이 '백구'등이 마음데로 죽였다고, 사신을 보내어 잡아 보내달라고 하였다. 임금이 먼나라의 뜻을 어기고자 하지 않아, '백구'등을 옥에 가두었다가 풀어 주었다.     '련'이 매양 해마다 사신을 보내었다. 육십년 '문제'가 '위'를 침략하고 하여 '련'에게 말을 보내 달라고 하니, 팔백필을 받쳤다.       '효무' '건녕' 이년 '련'이 장사 '동승'을 보내어 표를 받들며, 나라의 슬픈 일을 두루 위로하며 함께 방물을 받쳤다. '대명'이년 또 '숙신씨'가 고시와 돌화살촉을 받쳤다. 칠년 '련'을 거기대장군 개부의동삼사 로 삼고 나머지 관직은 옛날과 같이 하였다. '명제''태시' '후발제''원미'중에 공물을 받치기를 끊이질 않았다. '제'에서도 작위를 내렸는데 백여세에 죽었다. 아들 '운'이 섰다. '제''융창' 중에 사지절 산기상시 도독 영평이주 정동대장군 고려왕 낙랑공을 삼았다.       '양''무제'즉위년에 '운'에게 차기대장군을 더하였다. '천감'칠년 무동대장군 개부의동삼사를 삼고 지절 상시 도독 왕은 전과 같았다. 십일년 십오년 연달아 사신을 보내어 공물을 받쳤다. 십칠년 '운'이 죽고 아들 '안'이 섰다. '보통' 원년 '안'에게 봉작을 내리고, 지절 독 영평이주제군사 영동장군으로 삼았다. 칠년 '안'이 죽자 아들 '연'이 서고, 사신을 보내와 공물을 받쳤다. '연'에게 작위를 내렸다. '중대통' 사년 육년 '대동'원년 칠년 더불어 표를 받들어 방물을 받쳤다. '태청' 이년 '연'이 죽자 그 아들 '성'에게 '연'을 잇는 작위를 내렸다.       北史       高句麗 (고구려) -이하 고려란 고구려를 가르킨다-       '고구려'는 먼저 '부여'에서 나왔다. 왕이 일찍이 '하백'의 여자를 얻어, 인하여 집안에 가두어 두었는데, 태양이 비추자, 몸을 피하였으나, 태양이 또 몸은 따라다녔다. 이미 아이를 베고 있었는데 알 하나를 낳았다. 크기가 다섯되나 되었다. '부여왕'이 버려 개에게 주었으나, 개는 먹지 않고, 돼지에게 주었으나 돼지도 먹지 않았다. 길에 버리자 소나 말이 이를 피하고, 들에 버렸으나 새들이 무리지어 털로써 보호하였다. 왕이 이를 쪼갤려고 하였으나 능히 깨뜨릴 수 없어, 다시 그 어미에게 돌려주었다. 어미가 이를 보자기에 싸서 따뜻한 곳에 두니, 한 남자가 깨뜨리고 나왔다. 장성하자 이름을 '주몽'이라 하였다. 그 풍속에 '주몽'이란 말은 활을 잘 쏜다 라는 것이다. '부여'사람들이 '주몽'이 사람이 태어난 것과 다르다고 해서, 버리기를 청하였으나, 왕이 듣지 않고, 말기지에 명하였다. '주몽'이 사사로이 시험하여 좋은 것과 나쁜 것을 알아 좋은 말은 밥을 적게 주어 여위게 하고, 둔한 말은 잘 길러 살찌게 하였다. '부여왕'이 살찐말을 타고, 여윈 말은 '주몽'에게 주었다. 후에 밭에서 사냥을 하는데, '주몽'이 활을 잘 쏜다 하여 화살 하나를 주었다. '주몽'이 화살 하나로 짐승을 많이 잡았다. '부여'의 신하들이 주몽을 모살할려고 하자 그 어미가 '주몽'에게 고하자, '주몽'이 이에 '언' '위'등 두명과 동남으로 달아났다. 길을 다는 중에 우연히 큰 물을 만나, 건너고자 하나 다리가 없었다. 부여 사람들이 급히 뒤쫓아 오는데, '주몽'이 물에 고하여 말하기를, 나는 태양의 아들이요, '하백'의 외손이다. 이제 병사들이 쫓아 오니 어찌하면 건널수 있겠는가? 이때에 물고기와 자라가 다리를 만들어서 '주몽'이 건널수 있었다. '주몽'이 '흘승골성'에 이르러 여기에 거하였다. '고구려'라 부르는 것이다. 인하여 '고'씨로 성을 삼았다. '부여'에 남아있던 처가 아이를 베었는데, '주몽'이 달아난 후였다. 아들을 낳으니 '시여해'라 하여, 장성하여 '주몽'을 알자 나라의 왕이 되었다. 이미 어미는 돌가가신 뒤였다. 이름을 '여달'이라 하니 나라의 일을 맡기었다.       '주몽'이 죽자 아들 '여율'이 서고, '여율'이 죽자 아들 '막래'가 섰는데, 이에 '부여'를 병합하였다.       한 무제 원봉 사년 '조선'을 멸하고 '현토군'을 두었다. '고구려'를 현으로 삼고, 이를 속하게 하였다. '한나라'때에 옷과 두건 조복과 북과 피리를 하사하니, 항상 '현토군'에 나와 이를 받았다. 후에 점점 교만해 지더니 군에 나와 복속하지 않고, 다만 동쪽경계에 작을 성을 쌓고, 이를 받았다. 그 성을 '책구루'라 부렀다. '구루'라는 것은 '구려'의 성 이름이다. '왕망' 초에 '고구려'의 병사를 일으켜 호를 쳤는데, 가고자 하지 않아, '망'이 강제로 다그치어 이를 보냈는데, 모두, 요새에서 나가 도적이 되었다. 주군에서 허물을 '구려후' '추'에게 돌리니, '암우'가 꾀어 이를 베었다. '망'이 크게 기뻐하고, 다시 이름을 '고구려', '고구려후'라 하였다. '광무' '건원' 팔년 '고구려' 사신을 보내어 조공하였다.     '상'과 '안' 사이에 이르러, '막래'의 후손 '궁'이 수차례 '요동'을 도적질 하였다. '현토' 태수 '제풍'이 이를 벌하였는데, 능히 금할 수 없었다.       '궁'이 죽자 아들 '백고'가 섰다. '순'과 '화' 사이에 다시 여러번 '요동'을 범하여, 노략질 하였다. '영제' '건녕' 이년 '현토' 태수 '경임'이 이를 벌하고, 포로 수백을 베었다. '백고'가 이에 항복하여 '요동'에 속하였다. '공손도'가 해동에서 일어나자 '백고'가 통하여 좋아하였다.       '백고'가 죽자 아들 '이이모'가 섰다. '이이모'는 스스로 '백고'때에 이미 수차례 '요동'을 침략하였다. 또한 망한 호인 오백호를 얻었다. '건안' 중에 '공손강'이 군사로 공격하여 그 나라를 깨뜨리고, 수도를 불사르자, 항복한 호가 역시 모반하였다. '이이모'가 다시 새로운 나라를 열었다. 그 후에 '이이모'가 다시 '현토'를 공격하였는데, '현토'가 '요동'과 함께 공격하여 크게 이를 깨뜨렸다.       '이이모'가 죽자 아들 '위궁'이 섰다. '위궁'은 증조부 '궁'에서 시작하는데, 태어나서부터 눈을 뜨고 능히 볼 수 있어, 나라 사람들이 이를 싫어 하였다. 장성하자 흉폭해지고 사나워져, 나라를 해치고, 깨어졌다. '위궁' 역시 태어나서부터 사람을 보아 '고려'에서 서로 비슷하다를 '위'라 하는데, 증조부 '궁'과 비슷하니 고로 이름이 '위궁'이다. '위궁' 역시 용력이 있고, 말을 잘 타고, 활과 사냥에 능하였다. '위나라' '경초' 이년 태부 '사마선왕'을 보내어 무리를 이끌고 '공손문의'를 쳤는데, '위궁'이 주부, 대가의 장수 수천을 보내어 군사를 도왔다. '정시' 삼년 '위궁'이 '요'의 '서안평'을 도적질하고, 오년 '유주자사 관구검'이 만여명으로 '현토'에서 나와 '위궁'을 쳤다. '비류'에서 크게 싸웠다. 패하여 달아나니 '검'이  ??고개에 이르기까지 쫓아가서 '환도선'에 올라 그 도읍을 무찔렀다. '위궁'이 단지 아내와 멀리 숨었다. 육년 '검'이 다시 이를 쳤는데, '위궁'이 재빨리 여러 가들과 '옥저'로 달아났다. '검'이 장군 '왕기'를 보내어 쫓았지만, '옥저' 천여리에서 그만 두었다. '숙신'의 남쪽에 이르러, 돌에 그 공을 새기었다. 또한 '환도산'을 깍아 '불함성'이라 새기고 돌아 왔다. 그 후에 다시 중국과 통하였다.       '진나라' '영가'의 난리때 '선비'의 '모용귀'가  '창려' '대극성'에서 일어났는데, '원제'가 '평주 자사'를 내렸다. '위궁'의 손자 '을불리'가 빈번히 '요동'을 노략질 하니 '귀'가 능히 제도하지 못하였다.       '불리'가 죽자 아들 '쇠'가 섰다. '위 건국' 사년에 '모용귀'가 아들 '황'으로 이를 치니, 스스로 '남합'에 들어와 '목저'에서 전쟁을 하였는데, '쇠'의 군사를 크게 깨고, '환도'까지 쫓아갔다. '쇠'가 홀로 말을 타고 달아나 숨으니, '황'이 '쇠'의 아비의 묘를 파해치고, 그 어미와 처 보물과 남녀 오만여명을 노략질 하고 그 궁궐을 불살르며, '환도성'을 허물고 돌아 왔다. '쇠'는 후에 '백제'에 의해 살해 당했다.       '진나라 효무 태원' 십년에 이르러, '구려'가 '요동', '현토군'을 공격하였다. '후연의 모용수'가 동생 '농'을 보내어 '구려'를 쳤서, 다시 이군을 회복하였다. '수'의 아들 '보'가 '구려왕 안'을 '평주 목'에 삼고 '요동', '대방' 이국왕으로 봉하여 장사 사마 참군관을 두었다. 후에 '요동군'을 다스렸다.       '태무'때에 '쇠'의 증손 '련'이 처음 사자를 보내어 '안동'에 이르러 표를 받들어 방물을 받치며, 나라의 휘를 함께 하길 청하였다. 사신 원외산기시랑 '이오'가 '련'에게 절하며 연을 '도독 요해제군사 정동장군 영동이중랑장 요동군공 고구려왕'으로 삼았다. '오'가 그 처소에 이르렀는데, '평양성'에 거하고 있었다. 찾아가 여러 가지일을 물었는데, 말하길 '요동'에서 남쪽으로 일천여리를 가면 동쪽으로 '책성'에 이르고, 남쪽으로 작은 바다에 이른다. 북쪽으로는 옛날 '부여'이고 호수는 '전위'때의 세배이다. 후에 사신을 보내어 공물을 받쳤는데 해마다 황금 이백근과 은 사백근을 받쳤다. 이때 '풍홍'이 무리를 이끌고 도망갔는데, 태무가 산기상시 '봉발'을 보내어 '련'에게 고하기를 '홍'을 보내달라 하였다. '련'이 상서하여 '홍'이 왕화됨을 받들었다고 하여 끝내 보내주지 않았다. '태무'가 노하여 장군을 보내어 이를 쳤다. '낙평왕 비'등이 의논하여 기다리다가 후에 일어나라고 하니 '태무'가 이에 그치었다. '홍'은 역시 '련'에게 죽임을 당하였다.       후에 '문명태후'가 '헌문'이 육궁을 갖추지 않았다 하여 조서를 내려 '련'이 여자를 천거하게 하였다. '련'이 표를 받들어 말하길, 여자가 없어, 아우의 여자를 구하여 응합니다 하였다. 조정에서 이에 허락하니 '안락왕 진'을 보내었다. 상서에는 '이오'등이 그 곳에 비단을 보냈다 하였다. '련'이 그 좌우의 말에 의심하였는데, 이르기를 조정에서는 옛날 '풍씨'와 혼인하였는데 얼마있지 않아 그 나라가 망하였습니다. 하였다. '은'의 때가 멀지 안음을 생각하십시오. 마땅히 방편을 말해야 합니다. '련'이 상서하여 거짓으로 여자가 죽었다 하니 조정에서는 이를 거짓이라 의심하고, 또한 가산기상시 '정준'을 보내어 끊고 이를 책하여, 만약 여자가 죽었으면 다시 여자를 가려 뽑아 청하라. 하였다. '련'이 말하길 만일 천자가 앞의 허물을 용서한다면 삼가 조서를 받들겠습니다. '헌문'이 죽자 이내 그치었다. '효문'때에 이르러 '련'이 앞서의 두배의 공물을 받치니 그 하사품 역시 점점 더하였다. 이때 '광주'의 바다에서 '련'이 '제에 보내는 사신 '여노'등을 얻어 대궐에 보내었다. '효문'이 책하여 고하길, '도성'이 그 임금을 죽이고 '강'의 왼쪽에서 몰래 일어나, 짐이 그 나라를 없애고 옛나라를 세워 '유씨'의 대를 끊고자 한다. 이에 경이 바깥으로 그 경계를 넘어 적들과 통하니, 어찌 이것이 신하로써 지켜야할 의라 할 것인가? 이제 하나의 잘못으로 옛날의 정성을 가리지 말라. 곧 돌려 보낼 것이다. 허물을 생각하여 용서함을 감사히 여기고 밝은 법을 받들어 공경하여 거느리는 바를 화목하고 편하게 하니 동정으로 삼가 받들라. 하였다.       '태화' 십오년 '련'이 죽으니 백여세 였다. '효문'이 동쪽 성밖에서 슬퍼하고, 아뢰는 자로 복사 '이안상'을 보내어, 책을 '거기대장군 태전 요동군공 고구려왕'을 더하여 시호를 '강'이라 하였다. 또 대홍려를 보내어 '련'의 손자 '운'에게 절하며 '사지절 도독요해제군사 정동장군 영호동이중랑장 요동군공 고구려왕'으로 삼았다. 옷과 관 복과 물건 수례와 기를 꾸미는 것을 하사하였다. 또한 '운'에게 고하길 세자를 입조하라 하여 성밖에서 예를 차리는 것을 명하였다. '운'이 상서에 병을 핑계삼아 숙부 '승우'를 보내고 사신으로 대궐까지 수행하게 하였다. 이를 엄히 책하니 스스로 이에 세마다 항시 공물을 받쳤다. '정시'중에 '선무'가 사신 '예실불'을 동당에 불러 보니, 나아가 말하길, '고려'는 정성으로 하늘을 잇어 그 정성이 쌓여 땅에는 토모가 산출되어 왕의 공물에는 허물이 없습니다. 다만 황금은 '부여'에서 나오고, 옥이 '섭라'에서 나와, 이제 '부여'가 '물길'을 내 쫓고, '섭라'가 백제와 어울립니다. 나라의 왕인 신하 '운'이 의의 계통을 이어 모두다 경내에 옮기었습니다. 두 물건을 왕의 곳간에 채우지 않고, 양적의 제물을 베풉니다. '선무'가 말하길 '고려'를 어찌 천자를 책망하는가? 오로지 해외를 제도하고 영리한 오랑캐를 벌하여 재물을 얻었다. 지난달 방물을 받친 허물은 꾸짓어서 복종하게 되니, 마땅히 짐이 경에게 말하길, 힘써 위엄으로 다스리고, 두 읍은 옛날로 돌려 보내라. 토모가 잘못된 공물은 아닌 것이다. 하였다.       '신귀'중에 '운'이 죽자 '영태후'가 동당에서 슬퍼하였다. 사신을 파견하여 '거기대장군 령호동이교위 요동군공 고려왕'을 더하였다. 또 절하여 그 세자 '안'에게 '진동장군 령오동이교위 요동군공 고려왕'을 삼았다. '정광' 초에 또 '광주'의 바다 가운데에 '양나라'가 '안'에게 내리는 영동장군의 의관과 검 노리게를 얻었다. 이에 사신 '강법성'등을 서울로 보냈다.       '안'이 죽자 아들 '연'이 섰다. '효무제' 초에 고하길 '연'에게 '사지절 산기상시 거기대장군 영호동이교위 요동군공 고구려왕'을 더하였다. '천평' 중에 '연'에게 '시중 표기대장군'을 더하고 나머지는 옛날과 같다.       '연'이 죽고 아들 '성'이 섰다. '무정'에 이르러 왔었는데, 해마다 오지 않음이 없었다. '대통' 십이년 사신이 '서위'에 이르러 조공하였다. '제'가 '동위'를 합병한 해에 사신을 '제'에 보냈다. '제'의 '문선'이 '성'에게 '사지절 시중 표기대장군'을 더하고 '령동이교위 요동군공 고려왕'은 옛날과 같다. '천보' 삼년 '문선'이 '영주'에 이르러 사신'박릉'과 '최유'를 '고려'에 보내어 '위'의 유민을 구하라 하니. 조서에서 '유'가 말하길 만일 좇지 안는다면, 의당 일을 좇아야 한다 하였다. 이르렀으나 허락을 받지 못하였다. '유'가 눈을 크게 뜨고 꾸짓고, 주먹질을 하자, '성'이 마루아래로 떨어졌다. '성'이 숨을 몰아쉬고 감히 움직이지 못하고, 이에 사죄를 하자 '유'가 오천여호를 되돌렸다.       '성'이 죽고 아들 '탕'이 섰다. '건명' 원년에 '제'의 '폐제'가 탕을 '사지절 령동이교위 요동군공 고려왕'을 삼았다. '주 건덕' 육년 '탕이 사신을 보내어 '주'에 이르르니, '무제'가 '탕'을 '상개부의동대장군 요동군공 요동왕'을 삼았다. '수' '문제'가 선양 받자 '탕'이 사신을 보내어 궐에 이르렀다. 나아가 대장군을 받고 고쳐 '고려왕'을 봉함 받고 이때부터 해마다 사신을 보내어 조공이 끊이질 않았다.       그나라는 동쪽이 '신라'이고 서쪽은 '요'를 넘어 이천리이다. 남쪽은 '백제'와 접하고, 북쪽은 '말갈'과 이웃하니, 일천여리이다. 사람들은 토착하고, 산과 계곡에 의지하여 거쳐한다. 옷은 베와 비단과 가죽으로 하고, 땅이 척박하여 양잠하고 농사지어도 족하지 않다. 고로 사람들은 음식을 절약한다. 그 왕은 좋은 궁실을 닦아 도읍을 '평양성'이라 하고 또 말하길 '장안성'이라고 한다. 동서가 육리이고 산의 굴곡에 있어 남쪽은 '패수'에 임한다. 성내에 오직 창고에 쌓아두고 대비하는데, 적이 이르르면 들어와 지킨다. 왕은 따로 그 곁에 집을 짓는데 항상 거기에 거하지는 않는다. 그 밖에 '국내성'과 '한성'이 있는데 역시 다른 도읍지이다. 그 나라에서 삼경이라 부른다. 다시 '요동' '현토'등 십여성이 있는데 모두 관리를 두어 다스렸다. '신라'가 매양 침범하니 전쟁이 끊이질 않았다.       관직은 대대로, 태대형, 대형, 소형, 경후사, 오졸, 태대사자, 대사자, 소사자, 욕사, 예속, 선인으로 무릇 십이등급이 있다. 나누어 내외의 일을 맡는다. 대대로는 강하고, 약함에 따라 빼앗아 스스로 오르는데, 왕이 두는 것이 아닌다. 다시 내평과 오부욕살이 있다. 사람들은 모두 절풍건을 머리에 쓰는데 형태가 고깔과 같고, 선비는새의 깃털을 양쪽에 꽂는다. 귀한 자는 관을 소골이라고 하는데, 자줏빛비단을 사용하고 금은으로 꾸민다. 옷은 소매가 넓고, 큰 바지에 가죽혁대 황색 가죽신발을 신는다. 부인은 치마와 저고리에 선을 두른다. 책은 '오경'과 '삼사' '삼국지' '진양추'가 있고, 병기는 중국과 같다. 봄 가을로는 사냥을 하는데 왕이 친히 이를 주제하고, 세는 포 오필과 곡 오석이고 유랑인은 삼년에 한번 세를 내고, 열명이 세포일필을 낸다. 조는 호당 일석, 다음은 칠두, 아래는 오두,이다. 형법에 배반하거나 모반하는 자는 기둥에 묶어 불사른 후에 베고, 집안도 몰살한다. 도적은 열배로 갚고, 만일 가난해서 갚지 못하면 빚을 지는데, 모두 청해 듣고 자녀를 노비로 삼아 갚는다.       형벌은 엄하여, 범하는 자가 드물다. 악기는 오현, 금, 쟁, 필률, 횡취, 소, 고지속이 있고, 피리는 굽어 있다. 매년 초에 '패수'위에서 모여 즐기는데, 왕은 가마를 타고 이를 지켜본다. 일을 마치면 왕이 옷을 물속에 넣고 좌우 두 개로 나누어 돌로싸 던진다. 떠들며 달리고 쫓기를 다시 세 번한 후 그친다. 풍속에 깨끗함을 좋아하고, 절제함을 숭상하고, 달리는 것을 공경한다. 절은 한쪽 다리를 끌고, 서 있을 때는 두 손을 맞 잡고 있고, 걸을때는 반드는 손을 낀다. 성격은 속임이 많고, 언사는 더럽고 추악하며, 책을 가까이 하지 않는다. 부자가 같은 내에서 목욕을 하고, 공실에서 같이 잠을 자고, 노래하고 춤추는 것을 좋아하고, 항시 시월에 하늘에 제사지내는데 공적인 모임으로 의복을 입고, 모두 비단과 금은으로 장식한다. 걸터 않는 것을 좋아하고, 음식을 할 때 도마를 쓰고, 삼척마가 나온다. 이르기를 본래 '주몽'이 타던 말의 종류라 하는데, 즉 과하라 한다. 풍속에 음란함을 좋아하여, 부끄러워 하지 않는다. 풍속으로 유녀가 많아, 지아비로 아무나 삼는다. 밤이 되면 남녀가 무리지어 노는데, 귀천의 절도가 있지 않았다. 결혼을 할 때는 남녀가 서로 좋아하는 것을 인정하는데, 남자집에서 돼지와 술을 보내어 마친다. 재물이 없이 가는 것이 예로 혹 재물을 받는 사람이 있으면, 사람들이 이를 부끄러이 여기어, 여자종으로 파는 것으로 여기었다. 죽으면 염하여 집안에 놓는데, 삼년만에 길일을 탹하여 장사지낸다. 부모나 남편이 상을 당하면 옷을 삼년간 입고 형제는 삼개월간이다. 처음부터 끝까지 울며 읍하는데, 장사의 법칙은 북치고, 춤추고, 음악하면서 죽은자를 보내는 것이다. 묻을 때에는 죽은자가 태어났을때의 옷과 익숙한 수레 말을 묘의 곁에 두는데, 장사에 모인자들이 다투어 취한후 가지고 간다. 불법을 믿고 귀신을 공경하고 음사가 많다. 신묘는 두곳이 있는데, 하나를 '부여신'이라 부르고 나무를 부인모양으로 깍은 사람의 형상이다. 나머지 하나는 '高登神'으로 이르기를 시조 '부여신'의 아들이라 한다. 함께 관사에 두고 사람을 파견하여 보호하니, 대개 '하백녀'와 '주몽'을 일컷는 것이다.       '수'가 '진'을 평정한 후에 '탕'이 크게 두려워 하여 병사를 진치고, 곡식을 쌓아 수비의 책을 만들었다. '개황' 십칠년 임금이 새서를 보내어 책하기를 매양 해마다 사신을 보내어 조공을 하더니 비록 변방에 붙어 산다고 하더라도 정성이 부족하다. '말갈'은 핍박해 오고, '거란'은 굳게 방비한다. 지난해 재화를 가지고 가는데, 작은 무리들이 사사로이 군사를 움직여서, 귀국으로 숨었다. 어찌 거두지 않고자 함이 아니면 고로 도둑이 아닌가? 객사에만 앉아 있지 말고, 더욱 수비를 증가해야 할 것이다. 또한 수차례 기병을 보내어 변방인을 죽이고, 항상 의심이 있어 숨을 죽이고 있다. 점차로 스스로 새로워지기를 바란다. '탕'이 서를 받고 두려워하더니 표를 올려 사죄하였다. 병으로 죽으니,       아들 '원'이 이었다. 문제가 사신을 보내어, '원'을 '상개부의동삼사'로 삼고, '요동공'의 작위를 이으니, 옷을 하사하였다. '원'이 표를 받들어 감사하고, 상서에 하례하며 '왕'을 봉하기를 청하였다. '문제'가 칙서를 내려 왕으로 삼았다. 다음해, '말갈'을 거느리고 만여기병으로 '요서'를 도둑질 하자 '영주' 총관 '위세충'이 공격하자 달아났다. 제가 크게 노하여, 명하여 '한왕' '양'을 원수로 삼아, 수륙양군으로 이에 토벌하고, 그 작위를 물렸다. 때를 맞추어 운송하는 길이 이어지지 않자 여섯 군대가 굶주리고, '임유관'까지 갔다 질병을 만나 돌아오니, 왕사가 구할수 없었다. 다음으로 '요수'에 미치어, '원'이 역시 두려워 하여 사신을 보내어 사죄하며 표를 올리며 칭하기를 '요동의 하찮은 신하 원'이라 운운하였다. 임금이 이에 병사를 물리고, 처음과 같이 하였다. '원' 역시 해마다 조공하였다.       '양제'가 서니 천하의 전성기이다. '고창왕'과 '돌궐의 계인가한'이 함께 궐에 와서 공물을 받쳤는데, 이때 '원'을 입조하라 불렀는데, '원'이 두려워하여 오랑캐의 예의로 대궐에 무례하였다.(?) '대업' 칠년 제가 장차 '원'의 죄를 벌하려고 하여, 수레를 타고 '요수'를 건너 '요동'의 땅에 멈추어 영을 세웠다. 길을 나누어 나아가 각각 그 성의 아래에 당도 하였다. '고려'는 나아가 싸우는 것이 불리하다고 여기어 모두 성을 굳게 지키었다. 제가 여러 군사들에게 공격하라 명하고, 또 여러 장수들에게 칙서를 내리니, '고려'가 만약 항복한다면, 곧 마땅히 위로하며 얻어야 하고, 병사들이 들어가 불을 놓지 못하도록 하라. 하였다. 성이 장차 함락되려 하자, 도적들이 문득 항복하려는 말을 하고, 교지를 받들고자 하나 감히 나아가질 못한다고 하였다. 먼저 나아가 아뢰고 이를 보고하자, 적이 또 갖추오 방비 하고 다시 나와 방어전을 하였다. 이와 같음을 세 번을 하였는데, 제가 깨닫지를 못하였다. 이로말이암아 식량이 다 되고, 병사들이 지치자, 보급도 잇지 못하니 여러 군사들이 많이 패하여, 반이 되었다. 이 행함에 오직 '요수'의 서쪽 '무려라'만 빼앗고, '요동군'에 소속시키고, '통정진'으로 돌아왔다. 구년 제가 다시 친히 정벌하여 칙서를 여러 군사들에 내려 따르게 하였다. 여러 장수들이 길을 나우어 성을 공격하는데, 적의 기세가 그 날로 사그라졌다. '양현감'이 무리를 모아 반란을 일으키자, 제가 크게 두려워 하여 곧 그날로 여섯 군대를 거느리고 돌아갔다. 병부시랑 '곡사정'이 망하여 '고려'에 들어갔는데, '고려'가 이 사실을 알고 정예군으로 뒤쫓으니 많은 군사가 패하였다. 십년 다시 천하의 병사를 일으켜 도적을 치려고 일어났는데 그 있는곳이 험하여 많은 군사를 잃어버렸다. '요수'에 이르자 '고려'도 역시 약해져서 사신을 보내어 항복을 빌고 '곡사정'을 보내며 속죄하였다. 제가 이를 허락하자, '회원진'에서 항복을 받고, 이어 사로 잡힌 병사들을 돌려 받았다. 도성에 도착하자 '고려'가 시신을 보내어 친히 사당에 고하자 이를 사로잡았다. 이에 '원'을 입조하라 하였으나, '원'이 오지 않았다. 제가 다시 후에 일어나길 꾀하였으나, 천하가 어지러워 다시 가질 못하였다.       隋書       高麗 (고려:고구려)       '고려'는 선조가 '부여'에서 나왔다. '부여왕'이 일찍이 '하백'의 딸을 얻어 실내에 가두어 놓았는데, 햇빛이 따라와 이를 비추니, 감화되어 아이를 배었다. 큰 알 하나를 낳았는데. 한 남자 아이가 껍질을 깨고 나오니, 이름을 '주몽'이라 하였다. '부여'의 신하들이 '주몽'을 보통 사람처럼 태어나지 않았다 하여 모두 이를 죽이기를 청하였으나 왕이 듣지 않았다. 장성하여 사냥을 따라 갔는데, 많은 짐승을 잡았다. 또 죽이고자 청하니 그 어미가 '주몽'에게 알리어 '주몽'이 '부여'를 버리고 동남으로 달아났다. 한 큰 물을 만나 깊어 가히 건널수가 없었다. '주몽'이 말하길 나는 하백의 외손이고 태양의 아들이다. 이제 어려움이 있어 병사들이 장차 이르려고 하니 어찌 하면 건널 수 있겠는가? 하니 이때 물고기와 자라가 포개어 다리를 만드니 '주몽'이 건널수 있었다. 기병이 가까이 왔으나 건널 수가 없어 돌아갔다.       '주몽'이 나라를 세우니 '고구려'라 하여, '고'씨로 성을 삼았다. '주몽'이 죽자 아들 '여달'이 대를 잇고, 그 손자 '막래'에 이르러 병사를 일으켜 '부여'를 아울렀다. 그 후손 '위궁'대에 이르러 '위''정시'중에 '서안평'을 침략하니, '관구검'이 이를 깨뜨렸다. '위궁'의 현손(손자의 손자)의 아들은 '소열제'인데 '모용씨'에게 깨졌다. '환도'에 들어가 궁실을 불사르고 크게 노략질 한 후에 돌아 갔다. '소열제'는 후에 '백제'에게 죽임을 당하였다. 그 증손 '련'은 '후위'에 사신을 보내었다. '련'의 육세손 '탕'은 '주'에 사신을 보내어 조공하자, '무제'가 '탕'에게 상개부 요동군공 요동왕을 내렸다. '고조'가 즉위하자 '탕'이 다시 사신을 보내어 궐에 이르러 대장군을 수여 받고 '고려왕'으로 봉함을 받았다. 해마다 조공이 끊이질 않았다.       그 나라의 동서는 이천리이고 남북은 천여리 이며, 도읍은 '평양성'으로 또한 '장안성'이라 부른다. 동서가 육리이고 산을 따라 굽어 있으며, 남쪽으로는 '패수'에 접한다. 다시 '국내성'과 '한성'이 있는데, 이 두 도읍은 번화한 곳으로 그 나라에서는 '삼경'이라 부른다. '신라'와 매양 서로 침략하니 전쟁이 끊이질 않았다. 관직은 태대형, 대형, 소형, 대로, 의후사, 오절, 태대사자, 대사자, 소사자, 욕사, 예속, 선인등 십이등급이다. 다시 내평, 외평, 오부욕살이 있다. 사람들은 모두 가죽관을 쓰고, 벼슬아치들은 새 깃털을 꽂는다. 귀한자는 관을 자줏빛 비단으로 하고 금은으로 꾸민다. 옷은 소매가 큰 윗도리에 구멍이 큰 바지를 입고, 흰색으로 허리띠를 매고, 황색 가죽으로 신발을 신는다. 부인은 치마저고리에 선을 두른다. 병기는 중국과 같으며 매양 봄 가을로 사냥을 가르치는데, 왕이 친히 이를 내려 본다. 인세로는 베 오필, 곡물 오석이고 떠돌아 다니는 사람은 삼년에 한번 세를 내는데, 열사람이 모아서 세포 한필이다. 조세는 호당 일석이고 다음은 칠두, 다음은 오두이다. 반역한 자는 기둥에 묶어서 불살은 후에 목을 베고 그 가족도 모두 죽인다. 도적질하면, 열배로 갚고, 형벌이 엄하여 범하는 자가 드물다. 악기에는 오현·금·쟁·필률·횡취·소·고가 있고 노를 불어서 화답한다. 매년 초에 '패수'위에 모여서 왕이 수레위에서  대열을 지켜본다. 일을 마치면, 왕이 옷을 물속에 넣고 좌우로 두부로 나누어, 물에서 돌을 던지면서  떠들썩하게 고함치며 쫓고 쫓기기를 세 번한 후에 그친다. 풍속에 걸터 앉는 것을 좋아하고 깨끗함을 즐기며, 달음질 치는 것을 공격하며, 다리하나를 뻗어 절을 하고, 서있을 때는 두팔을 깍지끼고, 움질일때는 반드시 팔을 흔든다. 성품에 거짓으로 복속함이 많다. 부자가 같은 내에서 목욕을 하고, 같은 방에서 잠을 잔다. 부인은 음란하여 풍속에 노는 여자들이 많다. 결혼은 남녀가 서로 좋아해야 하고 그런후에야 결혼을 한다. 남자집에서 돼지고기와 술을 보내고, 재물없이 찾아가는 것이 예이다. 혹 재물을 받는 자는 사람들이 함께 이를 부끄러워 한다. 죽은 자는 집안에서 염을 하고 삼년후에 길일을 택하여 장사지낸다. 부모나 지아비의 상에는 복을 삼년간 입고 형제는 삼개월을 지낸다. 처음부터 끝까지 슬피 우는데, 장사를 지내때에 북치고 음악을 하여 춤추며 이를 보낸다.  이에 이르러 시신을 묻는데 모두 죽은자가 살아있을때의 옷이나 수레 말등을 묘의 곁에 두는데 장사지내는데 모였던 자들이 다투어 취한후에 간다. 귀신을 공경하고 음사가 많다.     '개황'초에 빈번히 사신이 입조하였다. '진'의 평정이후 '탕'이 크게 두려워 하여 병사와 곡식을 준비하여 수비할 수 있도록 하였다. 십칠년 임금이 '탕'에서 서를 내려 말하길       짐은 천명을 받들어 기르기를 좋아하고 선비를 이끌었다. 왕을 바다 한쪽에 위임하니 베풀어 조정에 화되어 천지의 도를 쫓는 마음을 얻고자 한다. 왕은 매양 사신을 보내어 해마다 조공하니 비록 변방이라 칭한다 하더라도 정성에는 다함이 없다. 왕은 이미 남의 신하로, 모름지기 짐의 덕과 한가지로 하여, 이에 '말갈'을 내몰고, '거란'에 대비하여야 한다. 여러 변방들이 머리를 조아리며 나의 신하가 되는데, 선한사람들이 따르는 것을 분히 여기니 어찌 해치고자 하는 마음이 깊은가? 태부의 공인이 그 수가 적지 않으니, 왕은 반드시 아뢰어 들을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지난해 비밀히 재화를 가지고, 소인이 이를 따라 움직여 사사로이 활쏘는 자가 하국으로 숨게 하니 어찌 병기를 고치어 올바르지 못한 뜻을 품고 밖의 소문을 두려워하니 도둑질을 하는 것이 아닌가?. 이제 사자에게 명을 내리어, 왕과 신하를 위무하고, 본래 사람의 뜻을 묻고자 하고, 정치와 기술을 가르치려고 하였다. 그러나 왕은 공허한 객사에 앉아 엄히 방비하고, 눈과 귀를 막고, 영원히 듣고, 보려 하지 않으니, 가히 악함이 있어 사람들이 아는 것을 막고, 관리를 제도함을 막아 살피는 것을 두려워 하는가? 또 수차례 기병을 보내어 변방을 약탈하고, 모략을 꾀하고 간사한 말을 퍼트리며, 마음이 온당치 못하다.       짐은 모든 생명에 적자처럼 대하고, 왕에게 땅과 집을 주고, 관직과 작위를 주어 깊은 은혜로 윤택하게 하니 멀고 가까운 곳에서 분명하게 들어났다. 왕은 오로지 믿음을 품지 못하여 항상 시샘하고 의심하여 사신을 몰래 보내어 관찰하니, 순수한 신하의 뜻이 이와 같은 것인가? 이는 대개 짐의 가르침이 밝지 않아 왕이 죄를 어긴 것이니 한번 용서를 한다. 금일 이후로는 반드시 개혁하여 번신의 절도를 지키고, 조정의 법을 받들며, 스스로 신하가 되어 다른 나라를 거스리지 말면 곧 오래도록 부귀를 누릴 것이니 실로 짐의 마음이니라. 다른 나라들은 비록 땅이 좁고 사람이 적지만 널리 하늘아래에 있는 짐의 신하이니, 이제 만약 왕이 물리친다면, 가히 버려 둘수가 없어 끝내는 다시 관속을 뽑아 이들을 편안히 위무해야 한다. 왕이 맘을 씻고 바꾸어 법에 따르면 곧 짐의 좋은 신하아니 어찌 좋은 선비를 뽑아 보낼 필요가 있겠는가? 옛 제왕들이 법을 일으킬 때 어짐과 믿음을 먼저 하고 선함에는 받드시 상을 주고 악함에는 필히 벌을 주니 사해의 안쪽이 짐의 뜻을 듣고자 한다. 만약 왕이 죄가 없는데도 짐이 홀연 병사를 낸다면 나머지 번국들이 짐을 어찌 여기겠는가? 왕은 반드시 마음을 비우고 짐의 이 뜻을 받들어 의심하지 말고, 다른 생각을 하지 말도록 하라.       옛날에 "진숙보"란 자가 대를 이어 "강음"에 있으면서 사람들을 죽이니 놀라 움직이니 내가 경계하자 내 변방을 노략질 하였다. 짐이 앞서 경계하고 뒤에서 위로하니 십년에 이르러 저들이 "장강"의 바깥임을 믿고 무리들을 모아 교만해져 미쳐 날뛰어 짐의 말을 따르지 않으니, 장수들에게 명하여 저들을 베니 가고 오는데 달이 차지 않았고 병사는 수천을 넘지 않았다. 도둑들이 번갈아 달아나고 하루 아침에 깨끗이 쓸어 멀고 가까운곳을 베어 편안히 하니 사람과 귀신이 모두 기뻐하였다. 이제 왕이 한함을 탄식하고 홀로 슬퍼하고 상심하는 것을 들으니 내쫓고 올려 서는 것은 관리가 맡아 할 일이다. 왕을 죄 준대도 "진"처럼 멸망시키지는 않을 것이요, 왕을 상 준대도 "진"처럼 두지는 못할 일이다. 그런데 화를 즐겨하고 어지러운 것을 좋아하다니 이 무슨 까닭인가?  왕이 일컷길 "요수"의 넓음이 "장강"만 한가? "고려" 사람의 많고 적음이 "진국"만 한가? 짐이 만일 백성을 기를 생각을 하지 않고, 왕의 전날 잘못만 책한다면 한 장군에 명하면 될 것인데 어찌 많은 힘이 필요하겠는가?. 짐이 이렇듯 은근하게 타일러서 왕이 마음을 새롭게 하기를 기다리는 것이니, 왕은 마땅히 짐의 마음을 알아서 스스로 많은 복을 구하도록 하라 했다       "탕"이 서를 받고 두려워 하여, 표를 받들어 사죄하고, 병이 들어 죽었다. 아들 "원"이 이어 섰다. "고조"가 사신을 보내어 "원"을 상개부 의동삼사로 삼고, 요동군공을 봉하고, 옷을 하사하였다. "원"이 표를 받들어 은혜에 감사하고, 이 일을 치하하고, 아울러 왕으로 봉해주기를 청하였다. "고조"가 이에 "원'을 왕으로 봉하였다.       다음해 "원'이 "말갈" 만여기병을 이끌고, "요서"를 침범하자, "영주"총관 "위충"이 맞서니 도망하였다. "고종"이 이를 듣고, 크게 노하여 "한왕" "량"을 원사로 명하여 수군과 육군으로 정벌하고 그 작위를 취소하였다. 이때에 흉년이 들어 더 이상 일어나지 못하여 여섯군이 밥을 굶고, "임해관"에 이르렀을 때 질병이 돌아 왕은 더 이상 나아가지 못하였다. "요수"에 이르자, "원"이 역시 두려워 하여 사신을 보내어 죄를 빌며, 표를 보내기를 "요동"의 똥같은 신 "원"이라 말하였다. 임금이 이에 병사를 그치고, 처음과 같이 하니, "원"이 해마다 조공하였다.       "양제"가 즉위하자 천하의 전성기다. "고창왕", "돌궐"의 "계인가한"이 함께 대궐에 이르러 공물을 받쳤다. 이에 "원"도 입조하라 하였는데, "원"이 두려워하여 대궐의 예를 어기었다. "대업"칠년 제가 장차 "원"의 죄를 벌하려고 하여, 수레에 올라 "요수"를 건너, "요동성"에서 길을 나누어 나아가자 각각 병사들이 그 성아래에 모였다. "고려"도 병사를 이끌고 방어 하였는데, 전쟁에 불리하자, 성을 둘러싸고 굳게 지키었다. 제가 여러 군에 공격하길 명하고, 장수들에게 말하길 "고려"가 만약 항복하려고 하면, 곧 어루만져 병사를 이끌고 얻으려 하지 말라 하였다. 성이 장차 함락되려 하자 적은 거짓 항복을 청하고, 장수들은 표를 받들어 감히 나아가지 못하고, 먼저 아뢰었다. 이 보고가 이르르자. 적은 다시 준비하여 수비하였다. 이와 같음을 여러번 했으나, 제가 깨닫지 못하였다. 식량이 다되고, 병사들이 쇠하여 지고, 보급이 이어지지 못하며, 군사들이 많이 손상되어, 반밖에 안 남았다. 이렇게 하여 요수의 서쪽인 "무려라"만 빼앗고, "요동군" "통영진"을 설치하고 돌아왔다.       구년 제가 다시 친히 정벌하여 군사들에게 명하니 마땅히 따랗다. 여러 장수들이 길을 나누어 성을 공격하니 적의 기세가 사그라진 듯 했다. "양현감"이 난을 일으켰다는 소식이 이르자 제가 크게 두려워 하여 그날 여섯군대를 이끌고 돌아갔다. 병부시랑 "곡사정"이 "고려"에 항복하니, "고려"가 이 사실을 알고, 모든 군대로 뒤 쫓으니, 제의 군대가 많이 패하였다. 십년 또 병사를 일으켰으나 도적들이 일어나 사람들이 흩어지고 길이 끊어져 군사들을 많이 잃어 버렸다. "요수"에 이르렀는데 "고려" 또한 곤궁하여, 사신을 보내어 항복을 청하며, 죄인 "곡사정"을 보내면서 죄를 속죄하였다. 제가 이를 허락하여, "회원진"에서 그 항복을 받았다. 인하여 포로를 돌려 보내었다. 서울에 이르러 "고려"가 사신을 보내어 조정에 고하니 이에 잡아두어 머물게 하고, "원"을 입조하라 불렀지만, "원"은 끝내 가지 않았다. 제께서 군사들을 독려하여 엄히 다시 일어날 것을 꾀하자 천하에 큰 난이 일어가 다시 가지 못하였다.       唐書       고려(高麗)   고려는 부여로부터 나온 별종이다. 그 나라는 평양성(平壤城)에 도읍하고 있으나 곧 한나라 낙랑군의 옛 땅으로서 경사의 동쪽 5천 1백 리에 있다. 동쪽으로 바다를 건너 신라에 이르고 서북쪽은 요수(遼水)를 건너 영주(營州)에 이르며, 남쪽은 바다를 건너 백제에 이르고 북쪽은 말갈에 이른다. 동서가 3천 1백 리요 남북이 2천 리이다.   그 관직에는 큰 것을 대대로1)(大對盧)라 부르니 1품에 비견되며 나라의 일을 총괄하여 주재하는데 3년에 한 차례씩 교체함에 만약 그 직위에 적합한 자면 햇수의 제한에 거리끼지 않는다. 교체하는 날에는 혹은 서로 공경하여 복종하지 않으면 모두 군대를 이끌고 서로를 공격하여 이기는 자가 된다. 왕은 단지 궁문을 닫고 스스로 호위할 뿐 제어하지 못한다.   다음을 태대형(太大兄)이라고 하는데 정 2품에 비견된다. 대로(對盧) 이하의 관직은 모두 12등급이다. 지방에는 주(州)와 현(縣)에 60남짓의 성을 둔다. 큰 성에는 녹살( 薩) 한 명을 두니 도독(都督)에 비견된다. 모든 성에는 도사(道使)를 두니 자사(刺史)에 비견된다. 그 아래에는 각기 요좌(僚佐)가 있어서 관청의 일을 나누어 관장한다. 의상과 복식은 단지 왕만이 다섯 가지의 채색을 사용하며 흰 비단으로 머리관을 만들고 흰 가죽으로 작은 허리띠를 두르는데 그 관과 띠에는 모두 금으로 장식을 한다. 관직의 지위가 높은 자는 푸른 비단으로 관을 만들고 그에 버금가는 자는 붉은 비단으로 하고는 새의 깃털 두 개를 꽂고 더불어 금, 은으로 장식을 하며, 적삼에 대통소매를 하고 바지는 입구가 크며, 무두질한 흰 가죽으로 띠를 하고 무두질한 누런 가죽으로 신발 만든다. 나라 사람들은 거친 털옷을 입고 고깔(弁)을 쓰며 부인들은 머리에 머릿수건(巾 )을 쓴다.   바둑과 투호의 놀이를 좋아하며 발로 공을 차는 유희에 능하다. 음식을 먹을 때는 변두( 豆)와 보궤(  ) 및 준조( 俎)와 뇌세( 洗) 등을 사용하니 자못 기자(箕子)가 후세에 남겨준 풍습이 남아 있다.       그들이 거처하는 곳은 반드시 산과 계곡에 의지하여 모두 띠 풀로 집의 지붕을 이는데 단지 절과 신의 사당 및 왕궁과 관청 등은 기와를 사용한다. 민간에는 빈곤하여 초췌한 자가 많으며 겨울이면 모두 긴 아궁이를 만들고 아래로 숯불을 지펴서 따뜻하게 한다. 밭에 식물을 심고 누에를 치는 것 등은 대략 중국과 같다. 그들의 법에는 모반이나 반역을 한 자가 있으면 곧 군중을 모아 횃불을 가지고 다투어 불사른 뒤 온몸이 모두 불에 데어 살이 문드러진 연후에 머리를 베고 집안은 모두 관가에서 몰수하면 성을 지키다가 적에게 항복을 하거나 싸움에 임해서 패하여 달아나거나 또는 살인이나 강도를 한 자는 참수하며 물건을 훔친 자는 12배로 갚게 하며 소나 말을 죽인 자는 그를 잡아들여 노비로 삼는다. 대체로 법을 시행하는데 있어 엄격하게 하기에 범하는 자가 적으며 또한 길에는 떨어져 있는 물건도 줍지 않는다.   그 풍속에 함부로 지은 사당이 많으니 영성(靈星)의 신과 해의 신 그리고 가한신(可汗神)과 기자신(箕子神) 등을 섬긴다. 도읍 동쪽에 신수(神隧)라 이름하는 큰 동굴이 있는데 10월이면 언제나 왕이 몸소 제사를 지낸다. 습속에 서적을 좋아하는데 누추한 문에 땔나무를 해서 사는 집에 이르기까지 각기 큰 거리에 커다란 집을 짓고 이를 일컬어 경당( 堂)이라 하여 자제들이 혼인하기 전에 밤낮으로 여기에서 글을 읽고 활을 익히게 한다. 서책으로 오경(五經)과 사기(史記) 한서(漢書), 범엽(范曄)의 후한서(後漢書) 삼국지(三國志) 손성(孫盛)의 진춘추(晉春秋) 옥편(玉篇) 자통(字統) 자림(字林)등이 있으며 또한 문선(文選)이 있는데 이것을 매우 좋아하여 중히 여긴다.       그들의 왕 고건무(高建武)는 바로 앞선 왕 고원(高元)의 배다른 아우이다. 무덕(武德618-626) 2년에 사신을 보내 들어와 예방하였다. 4년에 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고조가 수(隋) 말기에 사졸들이 그 땅에 많이 묻힌 것을 생각하여 5년에 고건무에게 글을 내려 이르기를 [짐은 보배로운 명을 삼가 받들어 임금으로 온 세상에 임하였으니 천지인(天地人)의 신령에게 공경으로 따르며 만국을 평안히 할 것이오. 하늘 아래로 두루 사랑을 고르게 하여 어루만져 기르니 해와 달이 비치는 곳에는 모두 잘 다르셔져 편안한 것이요. 왕은 이미 요수(遼水)의 왼편을 도맡아 다스리고 대대로 번복의 땅에 거처하며 정삭(正朔)을 사모하여 받들고 멀리서 조공의 직분을 좇아왔소. 그런 까닭에 사자를 보내 산을 넘고 물을 건너 정성을 펼치니 짐이 매우 기쁘구료. 바야흐로 이제 천하가 편안히 화락하고 온 세상이 잘 다르셔 지니 패옥과 비단이 한껏 왕래를 하고 도로는 막히는 곳이 없소. 이제 한창 화목함을 펼쳐 초빙의 호의를 영원히 도탑게 하고 각자의 강역을 보존하니 어찌 훌륭하고 아름답지 않겠소? 단지 수나라 말년에 군사가 이어지고 환난이 얽어졌으니 전투로 공방을 치르던 곳에는 각자 자신의 백성들을 잃게 되었었소 마침내 골육들이 어그러져 멀어지고 가족들이 나뉘어 갈라지니 해가 많이 지났다지만 홀아비와 홀어미들은 가슴에 맺힌 한을 풀지 못하였소. 이제 두 나라가 평화롭게 왕래하여 간격이나 차이를 둘 이유가 없기에, 이곳에 있는 모든 고려인 등은 이미 영을 내려 찾아 모아 놓았기에 얼마지 않아 곧 보낼 것이니, 그곳에 있는 이 나라의 사람들은 왕이 놓아 돌려보내 줌으로써 어루만져 기르는 방안을 힘써 다해 인의로써 용서해 주는 도리를 함께 널리 펴야 할 것이오] 하였다. 그리하여 고건무는 중화 사람들을 모두 수색하여 모으고 예의로 인도하여 보내니 속속 이르는   자가 1만의 숫자가 되므로 고조가 크게 기뻐하였다.       7년에 전 형부상서 심숙안(沈淑安)을 파견하여 가서 고건무를 상주국 요동군왕 고려왕으로 책봉하고, 아울러 천존상(天尊像)과 도사(道士)를 데리고 그곳에 가서 그들을 위하여 노자(老子)를 강의하니 그 왕 및 도인과 속인 등 보고 듣는 자가 수천 명이었다. 고조가 일찍이 시위하고 있던 신하에게 이르기를 [명분과 실리 사이의 이치는 모름지기 서로 적합해야 한다. 고려가 수나라에 신하라 칭하였지만 끝내는 양제에게 저항하였는데 이 또한 어찌 신하라는 것이 있을 수 있는가! 짐이 만물로부터 존경을 받고자 하는 것은 교만하거나 귀하게 되고자 함이 아니라 단지 이 나라에 자리하며 힘써 베풂으로써 백성들을 편안케 하고자 한 것인데, 하필이면 그들로 하여금 신하라 일컫게 하여 스스로 잘난 체해야 할 것인가, 곧 조서로서 그들로 하여금 신하라 일컫게 하여 스스로 잘난 체해야 할 것인가, 곧 조서로서 짐의 이 마음을 서술하도록 하라] 하니 시중 배구(裴矩)와 중서시랑 온언박(溫彦博)이 이르기를 [요동의 땅은 주(周)나라 때는 기자(箕子)의 나라였으며 한나라 때는 현도군(玄 郡)일 뿐입니다. 위(魏)나라와 진(晉)나라 이전에는 피봉된 강역(彊域) 안쪽으로 가까이 있었으니 신하라고 칭하지 않음을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더욱이 중국이 이적(夷狄)에 대해서는 마치 늘어선 별들에 대한 태양과도 같으니 존귀함을 낮추실 이유가 없으며, 머리를 숙이는 것은 번신의 강역과 같아짐을 말하는 것입니다.] 하니 고조가 이에 그만 두었다. 9년에 신라와 백제가 사신을 보내 고건무를 송사하여 이르기를 길을 폐쇄하여 조정에 들어올 수 없다고 하였다. 또 서로 더불어 틈이 있으면 누차 서로를 침략하였다. 조서를 내려 원외산기시랑 주자사(朱子奢)가 가서 그들을 화해시켰다. 건무가 표를 올리고 사죄하며 신라와 더불어 사신을 마주하고 회맹(會盟)할 것을 청하였다.       정관(貞觀677-649) 2년에 돌궐의 힐리가한( 利可汗)을 격파하니 고건무가 사신을 보내 표를 올리고 하례하였으며 아울러 피봉받은 강역의 지도를 올렸다. 5년에 조서를 내려 광주도독부사마 장손사(長孫師)를 파견하여 가서 수나라 때 전사한 해골을 거두어 매장하고 고려가 세운 경관(京觀)을 허물었다. 건무는 그 나라가 정벌당할까 두려워하여 이에 장성을 쌓으니 동북의 부여성(夫餘城)으로부터 서남의 바다에 이르니 1천여 리가 되었다. 14년에 그들의 태자 환권(桓權)을 들여보내 예방하고 아울러 토산물을 바치니 태종이 후하게 대접하고 노고를 위로함에 있어 매우 지극하였다.       16년 서부대인 개소문(蓋蘇文)이 관직을 거머쥐고 왕을 범하려 하자 여러 대신들이 고건무와 더불어 논의하여 그를 주살하고자 하였다. 일이 누설되자 소문이 이에 통솔하고 있던 병사들을 모두 소집하여 사열을 펼친다고 말하고 아울러 성의 남쪽에 술과 음식을 성대하게 차려 놓으니 여러 대신들이 모두 와서 사찰하였는데 개소문이 병사들을 부려 모두 살해하지 죽은 자가 1백여 명이었다. 창고를 불사르며 왕궁으로 달려들어가 건무를 살해하고 건무의 아우인 대양(大陽)의 아들 장(藏)을 세워 왕으로 삼았다. 스스로 자리에 올라 막리지(莫離支)가 되었는데 중국의 병부상서 겸 중서령의 관직과 같은 것이니 그로부터 나라의 정치를 마음대로 하였다. 개소문의 성씨는 천씨(泉氏)인데 수염이 많은 얼굴에 매우 장대하고 형체가 걸출하며 몸에는 다섯 자루의 칼을 차고 있기에 좌우에서 감히 우러러보지도 못하였다. 항상 그의 부하에게 땅에 부복하게 하고는 그를 밟고 말에 오르며, 말에서 내릴 때도 역시 그렇게 하였다. 길을 나설 때는 먼저 호위대를 풀어놓고 길을 인도하는 자가 길게 호령하여 길 가는 사람들을 물러나게 하는데 백성들은 두려워 피하며 모두 스스로 구덩이나 골짜기로 뛰어든다.       태종이 고건무의 죽음을 듣고 그를 위하여 애도식을 거행하고 사신에게 부절을 주어 조문하게 하였다. 17년에 자리를 이은 왕인 장(藏)을 봉하여 요동군왕고려왕으로 삼았다. 또 사농승 상리현장(相里玄奬)을 파견하여 새서를 지니고 가서 고려를 말로 타일러 신라를 공격하지 말도록 하였다. 개소문이 상리현장에게 말하기를 [고려와 신라는 원한으로 틈이 진 지 이미 오래오. 예전 수(隋)나라 왕실에서 침략해 올 때 신라가 기회를 타고 고려 5백 리의 땅을 약탈하고 그 성읍들을 신라가 모두 차지하고 있소. 스스로 땅과 성을 돌려주지 않으면 이번 싸움은 아마도 그칠 수 없을 것이오] 하였다. 그러자 상리현장이 이르기를 [이미 지나간 일인데 어찌 뒤쫓아 논할 것인가?] 하였으나 개소문이 끝내 따르지 않았다. 태종이 시위하고 있던 신하를 돌아보며 이르기를 [막리지는 그의 주인을 해치고 대신들을 모두 살해하였으며 형벌을 시행하는 것이 구덩이에 파묻고 함정에 빠뜨리는 것과 같을 뿐이니 백성들은 더욱이 자칫하면 번번이 죽임을 당하기에 원한과 고통을 마음에 담아두고 길거리에서는 눈짓만 하고 있다. 무릇 군사를 출정시켜 백성을 위로하고 반역자를 문죄하여 토벌하면 모름지기 그 명분이 있을 것이요, 임금을 시해하고 백성을 학대하였기에 패퇴시키기는 매우 쉬울 것이다.] 하였다.       19년 명을 내려 형부상서 장량(張亮)을 평양도 행군대총관(平壤道 行軍大總官)을 삼아 장군 상하를 거느리고 강(江), 회(淮), 영(嶺), 협( ) 등지의 굳센 병사 4만명과 전선 5백 척을 통솔하여 내주(萊州)로부터 바다를 건너 평양으로 향하게 하였으며 또 특진영국공 이적(李勣)을 요동도 행군대총관(遼東道 行軍大總官)을 삼고 예부상서 강하왕(江夏王) 도종(道宗)을 부관으로 삼아 장군 장사귀 등을 거느리고 보병과 기병 6만 명을 통솔하여 요동(遼東)으로 향하게 하였으며 양군이 세력을 합하여 태종이 친히 거느린 천자의 군대와 모이게 하였다.       여름 4월에 이적의 군대가 요수를 건너 나아가서 개모성(蓋牟城)을 공격하여 빼앗고 포로 2만명을 노획하였으며 그 성에 개주(蓋州)를 설치하였다. 5월에 장량의 부장 정명진이 사비성을 공격하여 빼앗고 그곳의 남녀 8천여 명을 노획하였다. 이날 이적은 요동성으로 군대를 나아가게 하였다. 제께서 요택(遼澤)에 머무르며 조서를 내려 이르기를 [지난날 수나라 군대가 요수(遼水)를 건넜으나 그때는 하늘이 돕지 않아 종군하던 사졸들은 해골이 된 채 서로를 바라보며 드넓은 들녘에 두루 흩어져 있으니 진실로 애석하고 탄식할 일이다. 백골을 덮어 주는 도의는 참으로 무엇보다 우선되어야 하니 명령으로 모두 거두어들여 매장하도록 하라] 하였다. 국내성(國內城)과 신성(新城)의 보병과 기병 4만 명이 와서 요동을 도왔으나 강하왕 도종이 기병 4천 명을 거느리고 되받아쳐서 크게 격파하고 1천여 급의 머리를 베었다. 제께서 요수를 건넌 뒤 조서를 내려 교량을 치움으로써 사졸들의 의지를 굳게 하였다. 제께서 요동성(遼東城) 아래에 이르러 사졸들이 흙을 져서 해자를 매우는 것을 보고 제께서 그 중 제일 무거운 것을 나누어 친히 말 위에 실었다. 시종하던 관리들이 송구하여 어쩔 줄을 모르다가 다투어 흙을 지고 성 아래로 옮겼다. 이때 이적은 이미 군사를 거느리고 요동성을 공격하였다. 고려는 우리에게 3백 근의 돌을 1리 밖까지 날리는 투석수레가 있다는 것을 듣고 매우 두려워하여 성 위에 나무를 쌓아 전투누각을 만들어 그것으로 날아오는 돌을 막게 하였다. 이적이 수레를 열 지어 놓고 돌을 쏘아 그 성을 공격하니 맞는 곳은 모두 무너졌다. 또 충차(衝車)를 밀어 그 누각에 부딪치니 기울어져 넘어지지 않는 것이 없었다. 제께서 친히 기갑 1만여 명을 거느리고 이적과 더불어 회맹하여 그 성을 에워쌌다. 급작스레 남   풍이 매우 맹렬하기에 그 서남쪽의 누각에 불을 놓을 것을 명하니 연이어 성 가운데로 연소되어 가옥들이 모두 타버렸다. 전사들이 성에 오르니 적들이 크게 무너지고 불타 죽은 자가 1만여 명이었으며, 그들의 날랜 군사 1만여 명을 포로로 하고 그 성을 요주로 삼았다. 처음에 제께서 정주로부터 매 수십 리마다 봉화대 하나씩 설치를 명하여 요동성까지 이어지게 하고 태자와 약조하기를 요동을 극복하면 봉화불을 올릴 것이라 하였다. 이날 제께서 봉화를 올릴 것을 명하니 그 불길이 전달되어 변방의 요새로 들어갔다.     군대를 백애성(白崖城-백암성)에 자리하고 공격을 명하니 우위대장군 이사마가 쇠뇌의 화살에 맞았기에 제께서 친히 피를 빨아 주었더니 장군과 사졸들이 이를 듣고 감동하여 격려되지 않는 이가 없었다. 그 성은 산에 의자하고 물에 임하여 사면이 험난하게 단절되어 있었다. 이적이 충차로 부딪치고 돌을 날리며 화살을 성 가운데로 빗발같이 집중시켜 쏘았다. 6월에 제께서 그 서북쪽에 이르자 성주 손벌음이 몰래 사신을 보내 항복을 청하며 이르기를 [신이 이미 항복을 원하였으나 그 중에 두 마음을 품은 자가 있습니다.] 하므로 조서로서 기치(旗幟)를 하사하여 이르기를 [반드시 항복할 것이면 이것을 성 위에 세워라] 하였다. 손벌음이 성 위에 기치(旗幟)를 세우니 고려는 당의 군사가 성에 오른 것이라 여기고 이에 모두 항복하였다.   이보다 앞서 요동이 함락되자 손벌음이 항복을 구걸하였다가 중도에 후회하여서 제께서 그가 언행이 이랬다 저랬다 한다고 노여워하여 성 안의 사람과 물건들을 전사들에게 나누어 줄 것을 허락하였었다. 항복을 받기에 이르자 이적이 제에게 여쭙기를 [전사들이 분발하여 앞을 다투며 화살과 돌에 신경 쓰지 않는 것은 노획물을 탐하기 대문일 뿐입니다. 이제 성을 거의 빼앗았는데 어찌하여 다시 그들의 항복을 허락하여 까닭 없이 장군과 사졸의 마음들 저버리십니까?] 하였으니 제께서 이르기를 [장군의 말이 옳다 그러나 병사를 풀어놓아 살육하게 하고 그들의 아내와 자식들을 포로로 삼게 하는 것은 짐이 참을 수 없는 일이다. 장군의 휘하에 공이 있는 자는 짐이 곳간의 물건으로 상을 줄 것이니 바라건대 장군은 이 한 성의 죄를 면해 주도록 하라] 하였다. 마침내 항복을 받아들이니 남녀 1만 명과 날랜 병사 2천 4백 명을 노획하고 그 성에 암주를 설치하였으며 손벌음을 암주자사에 제수하였다. 우리의 군대가 요수를 건너자 막리지가 가시성(加尸城)의 700명을 보내 개모성을 지키게 했는데 이적이 그들을 몽땅 사로잡으니 그 사람들이 모두 군대를 따르며 스스로 공적을 세울 것을 청하였다. 태종이 이르기를 [그 누가 너희들의 힘을 사용하고자 하지 않겠는가 마는 너희들의 가족들은 모두 가시성(加尸城)에 있으니 너희가 나를 위하여 싸우면 저들은 장차 죽음을 당할 것이다. 한 집안의 처자를 파산시키면서 한 사람의 힘이 사용되기 바라는 것은 내가 참을 수 없는 것이다.] 하며 모두 놓아 돌아가게 하였다.       천자의 수레가 나아가서 안시성(安市城)의 북쪽에 머무르며 영을 펼쳐놓고 군사를 진격시켜 공격하였다. 고려의 북부녹살(北部 薩) 고연수와 남부누살(南部 薩) 고혜정이 고려와 말갈의 무리 15만 명을 거느리고 와서 안시성을 도왔다. 적중에 대로(對盧)가 있어 나이가 많고 일에 익숙하였는데 고연수에게 이르기를 [내 듣기로 중국이 크게 어지럽자 영웅들이 함께 일어났다고 합니다. 진왕(秦王)은 뛰어난 무예로 향하는 곳에는 적이 없었으며 마침내 천하를 평정하고 남면하여 황제가 되니 북쪽 오랑캐는 항복을 청하고 서쪽 오랑캐는 정성을 바쳤습니다. 지금은 국력을 기울여 이곳에 도착하였기에 용맹한 장수와 날랜 병졸들이 모두 여기에 모여 있으므로 그 날카로운 기세는 가히 막아서지 못할 것입니다. 지금 계략이 될 만한 것은 만약 군사를 조아려 싸우지 않고 오래도록 지켜 버티며 날래고 굳센 군사를 나누어 보내 그들의 군량로를 끊으면 열흘을 넘기지 못하고 군량이 반드시 다할 것이니 싸우고자 하여도 싸울 수 없고 돌아가고자 하여도 길이 없을 것인즉 이는 싸우지 않고서 승리를 쟁취하는 것입니다.] 하였으나 연수가 따르지 않고 군대를 이끌고 바로 나아갔다. 태종이 밤중에 모든 장수를 불러 몸소 친히 지휘하였다. 이적(李勣)을 파견하여 보병과 기병 1만 5천 명을 거느리고 성의 서쪽 고개에 진을 치게 하였으며 장손무기(長孫無忌)는 우진달(牛進達) 등 정병 1만 1천명을 거느리고 기습군이 되어 산의 북쪽으로부터 좁은 계곡에서 나와서 그들의 후미를 들이치게 하였으며 태종은 직접 보병과 기병 4천을 데리고 북과 뿔피리를 숨기고 깃발과 표지를 가로누이고서 적 병영 북쪽의 높은 봉우리 위로 향하고는 모든 군대에 명령하여 북과 뿔피리 소리가 들리면 일제히 군사를 나아가게 하였다. 그리하여 해당관리에게 명을 내려 조당(朝堂)의 곁에 항복 받을 막사를 차리게 하고 이르기를 [내일   오시(午時)에 여기에서 오랑캐의 항복을 받을 것이다.] 하고 마침내 군대를 거느리고 나아갔다.       다음날 고연수가 단지 이적(李勣)의 군사만을 보고 더불어 싸우려 하였다. 태종이 무기(無忌)의 군대에서 먼지가 이는 것을 머리서 바라보고 영을 내려 북과 뿔피리를 함께 불게 하며 기치를 일제히 들게 하였다. 적의 무리가 크게 두려워하며 창을 지닌 보병 1만 명으로 그들을 공격하니 고연수의 무리가 패하였다. 무기가 군사를 풀어놓아 그들의 후미로 타고 오르게 하고 태종이 또 산으로부터 내려와 군대를 이끌고 그곳에 다다르니 적들이 크게 무너졌으며 1만여 급의 머리를 베었다. 고연수 등이 그 나머지 도적들을 거느리고 산에 의지하여 스스로 지켰다. 그리하여 무기와 이적 등에게 명하여 군사를 이끌고 그들을 애워싸고는 동쪽 하천의 교량을 치워 돌아갈 길을 끊었다. 태종이 고삐를 당기고 서서히 나아가며 적의 진영을 바라보고는 시위하고 있던 신하에게 이르기를 [고려는 국력을 기울여 왔기에 존망이 달여있는데 한번 패하였으니 하늘이 우리를 도운 것이다.] 하며 말에서 내려 두 번 절을 올리고 하늘에 감사하였다. 고연수와 고혜진 등이 15만 6천8백 명을 거느리고 항복을 청하니 태종은 원문(轅門)으로 인도하여 들였다. 연수 등이 무릎으로 기며 앞으로 나와 깊이 절하고 명을 청하였다. 태종이 녹살( 薩) 이하 추장 3천5백 명을 가려내어 군대의 벼슬을 수여하고 내지(內地)로 옮겼다. 말갈 천3백 명은 거두어들여 모두 구덩이에 파묻고 나머지 무리들은 놓아 주어 평양으로 돌아가게 하였다. 말 3만 필과 소 5만 두 및 명광갑(明光甲) 5천 벌을 노획하였으며 다른 장비들도 그만큼은 되었다. 고려국이 깜짝 놀라 두려움에 떨더니 후황성(后黃城)과 은성(殷盛) 등은 모두 스스로 발을 빼고 도망하여 수백 리에 사람과 인가의 기척이 없었다. 그리하여 천자가 행차하였던 산을 이름하여 주필산(駐 山)이라 하고 장작(將作)에게 영을 내려 파진도(波陣圖)를 작성하게 하였으며 중   서시랑 허경종(許敬宗)에게 명하여 글을 짓게 하고 돌에 새겨 그 공로를 기록하였다. 고연수에게 홍려경(鴻 卿)을 그리고 고혜진에게는 사농경을 제수하였다. 장량(張亮)이 또 고려와 더불어 건안성(建安城) 아래에서 다시 싸워 모두 격파하니 길게 늘어서서 에워싸고 공격하게 되었다.       8월에 진영을 안시성(安市城) 동쪽으로 옮기자 이적이 마침내 안시성을 공격하며 고연수 등 항복한 무리들의 진영을 그 성 아래로 끼워 놓고 그들을 불러내었다. 성 안의 사람들은 견고하게 지키고 움직이지 않으며 매번 태종의 지휘 깃발이 보이면 반드시 성에 올라 북을 치고 시끄럽게 굴며 저항하였다. 제께서 매우 노여워하자 이적이 이르기를 [적을 격파하는 날 남자들을 모두 주살하고자 합니다.] 하니 성 안에서 이 말을 듣고 사람들이 모두 죽음으로 항거하였다. 이에 강하왕 도종에게 영을 내려 흙산을 쌓게 하여 성의 동남쪽 모퉁이를 공격하게 하였더니 고려 역시 성가퀴(치-雉)와 성벽의 담을 더욱 올려 저항하였다. 이적이 그들의 서쪽을 공격하여 발석거와 충차로 그들의 망루와 성가퀴(雉)를 허물어 버리자 성 안에서 담이 붕괴됨에 따라 즉각 나무를 세워 목책(木柵)을 만들었다. 도종이 나뭇가지에 흙을 싸서 땅을 만들고 이를 언덕에 쌓아 올려 산을 이루고는 그 중간에 다섯 길을 내어 나무를 대로 흙으로 그 위를 덮으며 밤낮을 가리지 않으니 점차 성에 가까이 다다르게 되었다. 도종이 과의도위 부복애(傅伏愛)를 보내 군대의 병력을 거느리고 산꼭대기에서 적을 막게 하며 흙산을 점차 높이 올려 그 성을 밀치니 성이 붕괴되었다. 마침 부복애가 사사로이 통솔하던 곳을 떠나 있었더니 고려인 1백 명이 스스로 성을 무너뜨리고 싸웠으며 마침내 흙산을 점거하여 구덩이를 끊고 불을 쌓아 방패를 둘러 스스로 지켰다. 태종이 크게 노하고 부복애의 머리를 베어 두루 돌려보게 하였다. 모든 장수에게 명하여 공격하게 하였으나 사흘이 되도록 극복할 수 없었다.       태종이 요동의 곳간에 쌓여 있는 것이 얼마 없고 사졸들이 추위에 떨고 얼어죽으니 이에 조서를 내려 군대를 돌렸다. 그 성을 지나치자 성 안에서 모두 소리를 죽이고 깃발을 가로뉘었으며 성주가 성에 올라 손으로 절을 하며 받들어 배웅하였다. 태종이 그들의 견고한 수비를 가상히 여겨 명주 1백 필을 하사하고 이로써 임금을 섬기는 충절을 격려하였다. 처음에 요동성을 공격하여 함몰시킨 뒤 그 성이 천자의 군대에 항거한 까닭에 응당 노비로 몰수된 자가 1만 4천 명이었는데 모두 앞서 모아 유주(幽州)로 보냈다가 장차 장수와 사졸들에게 나누어 주려고 하였다. 태종은 그들이 부모와 처자가 하루 아침에 흩어질 것을 가엾게 여겨, 벼슬아치에게 영을 내려 그들의 값어치에 준하여 베와 비단으로 속 값을 치르게 하고 사면하여 백성으로 삼았다. 그 무리들이 환호하는 소리가 3일이 되도록 그치지 않았다. 고연수는 스스로 항복한 뒤 항상 탄식을 거듭하다 얼마지 않아 병으로 죽었다. 고혜진은 결국 장안에 이르렀다.       20년에 고려가 사신을 보내와 사죄하고 아울러 두 미녀를 바쳤다. 태종이 그들의 사신에게 일러 이르기를 [돌아가서 너희 군주에게 이르라. 미색이라는 것은 사람이 소중하게 여기는 것이다. 너희가 바친 것은 실로 아름답고 곱다. 그러나 본국에서 부모형제와 떨어져 온 것을 가련하게 여기기에 그들을 머물러두게 하는 것은 그들의 친지를 염두에 두지 않는 것이요, 그들의 미색을 사랑하는 것은 그들의 마음을 상처 입게 하는 것이기에 나는 취하지 않을 것이다.] 하며 모두 돌려보냈다.       22년에 또 우무위장군 설만철(薛萬徹) 등을 파견하여 청구도로 가서 그들을 정벌하니 설만철은 바다를 건너 압록수로 들어가 진격하여 박작성(泊灼城)을 격파하고 노획한 포로가 매우 많았다. 태종이 또 강남에 명하여 큰 배를 만들게 하고 섬주자사 손복가(孫伏伽)를 보내 용감한 사졸들을 불러 모집하게 하였으며 내주자사 이도유(李道裕)에게 군량과 장비를 운송하여 오호도(烏胡島)에 쌓아두게 하고는 장차 크게 거사하여 이로서 고려를 정벌하고자 하였다. 미처 시행하지 못하고 제께서 세상을 떠났다. 고종이 제위를 잇고 또 병부상서 임아상(任雅相)과 좌 무위대장군 소정방(蘇定方) 및 좌 효위대장군 계필하력(契苾何力) 등에게 명하여 속속 그를 토벌하게 하였으나 모두 큰 공 없이 돌아왔다.       건봉(乾封-666~668)원년에 고장(高藏)이 그의 아들을 들여보내 예방하고 태산 아래서 시중들게 하였다. 그해 개소문(蓋蘇文)이 죽자 그의 아들 남생(男生)이 대를 이어 막리지(莫離支)가 되었는데 그 아우 남건(男建) 및 남산(男産)과 화목하지 못하고 각기 붕당을 수립하여 서로 공격하였다. 남생이 둘째 아우에 의해 축출되자 국내성(國內城)으로 달아나 자리잡고 죽음으로 지켰으며 그의 아들 헌성(獻誠)은 궁궐로 찾아들어 구원하여 줄 것을 애원하였다. 조서를 내려 좌 효위대장군 계필하력(契苾何力)에게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그를 맞아들이게 하였다. 남생이 몸을 탈출해 도망하니 조서를 내려 특진?요동대도독 겸 평양도 안무대사에 제수하고 현도군공에 봉하였다. 11월에 사공, 영국공 이적에게 명하여 요동도 행군대총관으로 삼고 비장 곽대봉등을 거느리고 고려를 정벌하게 하였다. 2년 2월에 이적이 요수를 건너고 신성에 이르러 모든 장수에게 이르기를 [신성은 고려의 서쪽 경계에 진영을 둔 성으로 가장 요해지이니 만약 먼저 도모하지 못한다면 나머지 성 역시 쉽게 항복시킬 수 없다.] 하고는 마침내 군사를 이끌고 신성의 서남쪽에서 산에 의지하여 목책을 쌓아 놓고 공격도 하고 수비도 하니 성 안에서는 곤궁하고 급박하여 몇 차례 항복하는 자가 있었으며 이로부터 향하는 곳마다 극복하여 크게 승리하였다. 고장과 남건이 태대형(太大兄) 남산을 보내 수령 98명을 데리고 흰 깃발을 가지고 나와 항복하며 또한 들어가 알현할 것을 청하니 이적이 예의를 갖추고 불러들여 만나보았다. 남건은 여전히 문을 닫고 굳게 지켰다. 총장(總長-668~670)원년 9월에 이적이 또 진영을 평양성의 남쪽으로 옮기니 남건이 번번히 군사를 보내어 나와 싸웠으나 모두 크게 패하였다. 남건 휘하의 착병총관승 신성(信誠)이 비밀리에 사람을 보내 군중을 찾아들고 성   문을 열어 안에서 호응할 것을 허락하였다. 5일이 지나자 신성이 과연 문을 열게 하여 이적이 군사를 거느리고 들어가 성에 올라 북을 치고 떠들썩하게 하며 성문의 누각을 불사르니 사면에서 불길이 일어났다. 남건이 곤궁하고 급박해지자 자신을 찔렀으나 죽지 않았다. 11월에 평양성을 쳐서 빼앗고 고장과 남건 등을 포로로 하였다. 12월에 경사에 이르러 함원궁(含元宮)에 포로를 바치고 승리를 알리는 의식을 치렀다. 조서를 내려 고장은 그 정치가 자기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라 하여 사평태상백을 제수하고 남산(男産)을 선봉으로 섰기에 사재소경에 제수하고 남건(男建)은 검주(黔州)에 유배시켰으며 남생(男生)은 길을 인도한 공이 있기에 우위대장군에 제수하고 변국공(卞國公)에 봉하였으며 특진 등의 관직은 예전처럼 하였다. 고려국(高麗國)은 예전에 다섯 부로 나뉘어져 성이 1백76개, 호구가 69만 7천이었으니 이에 그 땅을 나누어 9개 도독부(都督部)와 42개 주(州) 그리고 1백여 개의 현(縣)을 설치하였으며 또 안동도호부(安東都護府)를 두어 통치하게 하였다. 우두머리로 공로가 있는 자들을 뽑아 도독(都督)과 자사(刺史) 및 현령(縣令)을 제수하고 중화인과 더불어 백성들을 가지런히 다스리게 하였다. 이에 좌무위장군 설인귀를 파견하여 군사를 총괄하고 진정시키게 하였으나 그 후에 도망하여 흩어지는 자가 제법 있었다.       의봉(儀鳳-678~679)연간에 고종이 고장(高藏)을 개부의동삼사, 요동도독에 제수하고 조선왕에 봉하여 안동에 거처하게 하며 본지의 오랑캐들을 진압하여 군주가 되게 하였다. 고장이 안동에 이르자 몰래 말갈과 더불어 서로 왕래하며 반역을 꾀하였다. 일이 드러나자 불러 소환하고 공주(恐州)에 유배하였으며, 아울러 그의 사람들을 나누어 옮겨 하남(河南)과 농우( 右) 등 여러 주로 흩어지게 하고 빈약한 자들은 안동성(安東城) 부근에 머무르게 하였다. 영순(永淳-682~683)초 고장이 죽자 위위경에 추증하고 조서를 내려 운구하여 경사에 이르게 한 뒤 힐리( 利)의 묘 좌측으로 매장지를 하사하고 겸하여 비석을 세워 주었다. 수공(垂拱-685~688)2년에 또 고장의 손자 보원(寶元)을 봉하여 조선군왕으로 삼았다. 성력(聖曆-698~700)원년에 좌응양위대장군으로 올려 제수하고 충성국왕으로 봉하여 안동의 옛 가구들을 통솔하여 다스리도록 위임하였지만 결국에는 실행되지 않았다. 2년에 또 고장의 아들 덕무(德武)를 제수하여 안동도독으로 삼고 본지의 오랑캐들을 거느리게 하였다. 이로부터 고려의 옛 가구로서 안동에 있는 것이 점차 줄어들었으며 나뉘어져 돌궐과 말갈 등에 의지하여 머무르니 고씨 임금은 마침내 단절되었다.       의봉(儀鳳-676~679)초에 남생(男生)이 장안에서 죽으니 병주대도독에 추증하였다. 아들 헌성(獻誠)은 우위대장군 겸 영우림위상하에 제수하였다. 천수(天授-690~692)연간에 즉천(則天)이 일찍이 안 대궐로부터 금은 보물을 내어 재상 및 남북 관청의 문무관으로 하여금 은밀히 활을 잘 쏘는자 다섯 명을 가려 뽑게 하여 함께 내기를 하였다. 내사 장광보가 먼저 헌성에게 제일의 자리를 사양하자 헌성이 다시 우옥검위대장군 설토마지(薛土摩支)에게 사양하였으며 설토마지가 또 헌성에게 사양하니 헌성이 아뢰기를 [폐하께서 활에 능한 자 다섯 명을 가려뽑을 것을 명하셨는데 간택되는 자가 대부분 한나라의 관리가 아닙니다. 신은 이후로부터 한나라의 관리가 활 쏘는 기술에 뛰어나다는 명성이 없을까 두려우니 엎드려 바라건데 명궁을 가려뽑는 일을 중도에 그만두었으면 합니다.] 하니 즉천이 가상히 여기고 그의 말을 따랐다. 이때 혹독한 내준신이 항상 헌성에게 재물을 요구하였는데 헌성이 거절하고 답하지 않으니 마침내 준신이 그가 반란을 꾀한다고 거짓을 꾸며 목을 옭아 죽였다. 즉천이 후에 그의 억울함을 알고 우우림우대장군에 추증하고 예절로서 장례를 다시 치러 주었다.      
34    되는 집안과 안되는 집안. 댓글:  조회:1243  추천:0  2021-05-21
되는 집안과 안되는 집안. 01.되는 집안은 웃음 꽃이 가득하고          안 되는 집안은 근심걱정이 가득하다. 02.되는 집안은 감사와 기쁨이 주식이고    안되는 집안은 불평과 원망이 주식이다.   03.되는 집안은 돌똘뭉쳐 하나가 되고       안되는 집안은 뿔뿔이 흩어져 콩가루 된다.   04.되는 집안은 어른을 공경하고             안되는 집안은 자식을 공경한다.   05.되는 집안은 가정을 위하고 안되는 집안은 가옥을 위한다.   06.되는 집안은 온기가 가득하고 안되는 집안은 냉기가 가득하다.   07.되는 집안은 잘 될 이유를 말하고 안 되는 집안은 안될 이유만 말한다.   08.되는 집안은 나눔의 즐거움을 알고 안 되는 집안은 돈세는 즐거움만 안다.   09.되는 집안은 마음을 뜯어고치고 안되는 집안은 얼굴만 뜯어고친다.   10.되는 집안은 자신을 위해 관리비를 쓰고 안되는 집안은 아파트 관리비만 사용한다.   11.되는 집안은 칭찬과 격려에 침이 마르고 안되는 집안은 원망과 비난에 밤을 새운다.   12.되는 집안은 나은 방법을 찾아 행동으로 옮기지만 안 되는 집안 그 날이 그 날이다.   13.되는 집안은 ‘성실’이 가훈이고 안되는 집안은 ‘실성’이 가훈이다.   14.되는 집안은 적극적인 언어를 사용하고 안 되는 집안은 부정적인 언어를 사용한다.   15.되는 집안은 대상을 가려서 싸우지만 안 되는 집안은 아무하고나 부딛힌다.   16.되는 집안은 ‘고마워’가 통용어이고 안되는 집안은 ‘이게 뭐야?’가 상용어다.   17.되는 집안은 할말 안할 말 가려하고 안 되는 집안은 싫어하는 말만 골라서한다.   18.되는 집안은 사람이 들끓고 안되는 집안은 해충만 들끓는다.   19.되는 집안은 ‘잘해보자’고 말하고 안되는 집안은 ‘해보나마나 뻔하다.’고 말한다.   20.되는 집안은 자신을 바꾸고 안 되는 집안은 상대를 바꾼다.   21.되는 집안은 계획세워 살아가고 안 되는 집안은 대충대충 뒤죽박죽 살아간다.   22.되는 집안은 하루하루를 금쪽같이 사용하고 안되는 집안은 휴지처럼 낭비한다.   23.되는 집안은 사랑과 의욕이 불타고 안 되는 집안은 증오와 원망이 불탄다.   24.되는 집안은 좋은 글 좋은 말이 보물이고 안되는 집안은 연속극이 보물이다.   25.되는 집안은 ‘위하여’살아가고 안 되는 집안은 건배할 때만 ‘위하여!’다. 26.되는 집안은 좋은 친구가 많고 안되는 집안은 나쁜 친구가 많다. 27.되는 집안은 상대의 말에 귀기울이고 안되는 집안은 혼자 열변을 토한다. 28.되는 집안은 노래소리 드높고 안되는 집안은 고함소리 드높다. 29.되는 집안은 ‘나부터 잘해야지’하는데 안 되는 집안은 ‘너나 잘하라’한다. 30.되는 집안은 가슴을 맞대고 안 되는 집안은 등을 맞댄다 31.되는 집안은 보람으로 일하고 안되는 집안은 죽지 못해 일한다. 32.되는 집안은 팥으로 메주쑨대도 믿어주고 안되는 집안은 콩으로 쑨대도 안믿는다.   33.되는 집안은 절망도 희망이고 안되는 집안은 희망도 절망이다.   34.되는 집안은 좋은 방법을 행동으로 보여주고 안 되는 집안은 말만 무성하다.   35.되는 집안은 약속이 생명이고 안되는 집안은 부도가 생명이다.   36.되는 집안은 하늘을 두려워하고 안 되는 집안은 하늘에 대고 삿대질을 한다.   37.되는 집안은 감사와 기쁨으로 살아가고 안되는 집안은 외면하고 살아간다.   38.되는 집안은 남이 잘할때 박수치고 안되는 집안은 남이 못될때 통쾌한 웃음을 날린다.   39.되는 집안은 친절이 상표이고 안 되는 집안은 교만이 상표다.   40.되는 집안은 문제를 개선하여 향상하고 안되는 집안은 문제를 덮어둬 속으로 썩게된다.
‹처음  이전 1 2 3 다음  맨뒤›
조글로홈 | 미디어 | 포럼 | CEO비즈 | 쉼터 | 문학 | 사이버박물관 | 광고문의
[조글로•潮歌网]조선족네트워크교류협회•조선족사이버박물관• 深圳潮歌网信息技术有限公司
网站:www.zoglo.net 电子邮件:zoglo718@sohu.com 公众号: zoglo_net
[粤ICP备2023080415号]
Copyright C 2005-2023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