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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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2    발해 대조영 후손들이 경북 경산에 모여사는 이유는… 댓글:  조회:11  추천:0  2021-09-17
  발해 대조영 후손들이 경북 경산에 모여사는 이유는… 태씨 집안 남성 142명의 얼굴을 종합해 분석한 결과 대조영 후손들은 머리 앞과 뒤가 발달해 있는 등 특징적인 부분이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프리랜서 공정식 지난 16일 경북 경산시 남천면 송백리. 태재욱(75) 발해왕조제례보존회장이 60㎡ 남짓한 건물 앞에 섰다. 지금은 터만 남은 사찰 상현사에서 쓰던 낡은 토담집이다. 단청을 수놓은 벽과 기둥, 서까래엔 금이 쩍쩍 갈라져 있고 깨진 기왓장 사이에선 잡초가 자라 있었다. 태 회장이 자물쇠를 풀고 창호문을 열어젖히자 어두컴컴한 방 안에 영정사진 하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발해시조 대조영 황제(?~719)의 영정. 영정의 크기는 170㎝가 넘었지만 건물이 너무 좁아 영정은 제사상 뒤에 놓여 있는 처지였다. 제사상 위로는 제례에 쓰이는 술잔과 촛대가 올려져 있었다. 발해 대조영의 표준영정이 모셔진 사당에서 후손인 발해왕조제례보존회 태재욱 회장이 분향하고 있다. 프리랜서 공정식 고구려의 옛 땅을 대부분 차지해 '해동성국(海東盛國)'이라 불렸던 고대국가 발해. 그곳에서 스스로 황제의 자리에 올랐던 대조영을 기리는 재실은 황제 영정을 모셨다고 믿기 어려울 정도로 초라했다. 영순태씨 43세손인 태재욱 회장은 창호문의 자물쇠를 다시 걸어 잠그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전해 내려오는 족보로 보나 발해왕궁터에서 발굴되는 유물로 보나 발해는 우리 역사가 분명한데도 발해의 유산을 부흥시키기 위한 노력은 처참한 수준"이라고 말했다. 주민들이 앞장서 발해마을을 알리기 위해 벽화도 그리고 홍보물도 만들지만 역부족인 상황이다. 태 회장은 "황제 영정을 시골 구석의 낡고 좁은 건물에 모셔놓아 후손 입장에서 가슴이 아프다"고 말했다. 대조영의 영정이 봉안된 곳은 '발해마을'이다. 대조영의 후손인 영순태씨 집안이 모여 살아 붙여진 이름이다. 만주와 연해주를 지배하던 발해의 후손들이 이주한 지역 치고는 꽤나 남쪽이다. 이들이 이곳에 터를 잡게 된 계기는 발해가 멸망한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발해는 거란의 침공으로 9세기 후반 멸망했다. 발해왕조의 마지막 세자 대광현은 934년 민중 수만 명과 함께 고려로 내려와 살았다.   이후 대장군 태금취(太金就)를 중시조(中始祖)로 삼은 영순태씨 일족이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난 해 피난하면서 경산에 자리를 잡았다. 이곳이 바로 국내 유일의 태씨 집성촌인 발해마을이다. 지금은 40여 가구에 60여 명 정도가 산다. 주민 중 80%가량이 태씨 집안 사람이다. 지난 16일 주민들이 마을회관 옆 대조영 벽화 앞에 모였다. 프리랜서 공정식 영순태씨가 어째서 대씨인 대조영의 후손일 수 있느냐는 의문도 있다. 하지만 이곳 주민들은 "영순태씨의 태(太)는 큰 대(大)와 서로 통용되는 글자"라고 했다. 크다의 의미인 '대'를 더욱 강조하기 위해 획을 하나 추가해 '태'로 썼다는 설명이다. 태 회장은 "중국의 역사 기록서인 『동사통감』에도 대조영을 '태조영'이라고 쓴 기록이 있고 고려시대 역사서 『고려사』도 고려 후기의 무신 대집성(大集成)을 태집성(太集成)과 혼용했다"고 말했다. 태 회장은 "1592년 송백리에 터를 잡으신 분이 태순금 할아버지다. 주역을 공부해 세상 이치를 꿰뚫어볼 수 있는 안목을 지녔던 태순금 할아버지는 송백리가 천하에 둘도 없는 명당이라고 하면서 터를 잡았다"면서 "여러 차례 일어난 국란에도 이곳은 멀쩡했고 태풍 사라와 매미가 한반도를 덮쳤을 때도 피해가 없었다"고 말했다. 지금 발해마을엔 곳곳에 발해를 상징하는 깃발이 걸려 있다. 대조영이 말을 타고 들판을 누비는 벽화도 3군데에 그려져 있다. 마을 입구에 발해마을을 알리는 안내판이 설치됐다. 집집마다 봉황이 그려진 문패도 걸어뒀다. 해동성국에 대해 잘 아는 사람이 거의 없다는 점을 안타깝게 여긴 주민들의 작품이다. 태영철(63) 송백2리 이장은 "마을 알리기에 나선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역사관과 역사공원을 반드시 조성하고 마을에 풍부한 대나무를 활용해 산책길도 만들어 사람들이 여행 오기 좋은 곳으로 만들려고 한다"고 했다. 태 이장은 "역사관에는 발해의 역사를 알리고 중국이 고구려와 발해 역사를 자기네 역사로 삼으려고 하는 동북공정(東北工程) 프로젝트의 허점에 대해 지적하는 자료를 채울 것"이라고 덧붙였다. 2015년부터는 춘분과 추분에 대조영을 추모하는 제사도 지내기 시작했다. 제사를 지내는 날엔 전국 각지에 흩어져 있는 영순태씨 후손들이 모두 모인다. 영순태씨와 협계태씨 등 태씨는 전국적으로 6000명쯤 된다고 전해진다. 태 회장은 "대조영 후손들이 고려에 내려왔을 때만 해도 왕조 제사를 지냈는데 세월이 흐르면서 중시조 제사로 작아졌다"면서 "지금이라도 시조에게 직접 제를 지내는 왕조 제사 형식을 갖추려고 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경북 경산시 남천면 발해마을에서 태씨 후손들이 대조영 황제의 향사를 지내는 모습. 안쪽에 대조영의 표준영정이 보인다. [사진 경산시] 제사에 내걸리는 표준영정엔 독특한 사연도 숨어 있다. 전국에 흩어져 살고 있는 태씨 집안 남성들의 얼굴이 이 영정에 스며 있어서다. 표준영정을 만들 때 모두 142명의 태씨 남성 얼굴 특징을 분석해 영정에 녹여냈다. 이 작업엔 석 달 정도가 걸렸다. 우선 182㎝ 떨어진 거리에서 105㎜ 망원렌즈로 정면과 측면, 45도 비스듬히 기울여 얼굴 사진을 찍었다. 한 명당 5장씩 142명을 찍어 모두 710장의 사진을 자료화했다. 이 사진들을 계량화해 한국인 남성 표준얼굴과 300~500군데 기준을 놓고 대조했다. 그렇게 표준얼굴에서 벗어나는 특징들만 추출해 얼굴을 만들고 이를 민두상으로 조각했다. 태씨 가문 남성은 평균 한국인 남성보다 머리의 앞과 뒤가 더 큰 특징이 있다고 한다. 이 모든 과정은 '얼굴박사'라고 불리는 조용진 한국얼굴연구소 소장이 진행했다. 서울교대 미술교육과 교수를 지낸 조용진 소장은 국내를 대표하는 미술해부학 권위자다. 조 소장은 "대조영의 실제 생김새가 전해지는 자료가 없기 때문에 대조영 후손들의 얼굴 특성을 분석해 표준영정을 만들었다"면서 "태씨 집안 남성 후손들의 얼굴을 종합 분석한 뒤 민두상을 만들고 그걸 기초로 권희연 숙명여대 교수가 영정을 그렸다"고 설명했다. 대조영 표준영정은 현재 정부 표준영정 제86호로 지정돼 있다. 조 소장은 "용모를 만드는 유전자는 그 수가 적기 때문에 후손들에게 잘 물려진다"며 "이런 방식으로 얼굴을 만들면 그 가문 사람들도 대부분 수긍한다"고 말했다. 발해 대조영의 흉상을 후손인 발해왕조제례보존회 태재욱 회장이 닦고 있다.프리랜서 공정식 장군복을 입은 대조영 흉상과 태재욱 회장. 경산=김정석기자 발해마을 주민들은 자부심이 대단하다. 이 마을에서 가장 나이가 어린 태형준(22)씨는 "마을 주민 모두가 발해의 옛 전통을 유지하려고 애쓰는 모습을 보면 뿌듯하고 자랑스럽다"고 말했다. 발해마을은 앞으로 대조영 왕릉을 마을 안에 재현할 계획이다. 태 회장은 "대조영 황제의 왕릉을 재현해 능 안에 중국 발해왕궁터에서 갖고 온 흙을 넣어 둘 생각"이라고 말했다. 그는 2013년 5월 27일 중국 지린성(吉林省) 발해왕궁이 있던 자리에서 흙을 한 되 퍼와 소중히 보관하고 있다. 태 회장은 "몇 해 전 대조영 황제 추모 향사를 지낼 때 한 유림이 '영정이 좁은 건물 안에 갇혀 제사상 위로도 못 올라가고 있으니 국가 기운이 떨어져 온갖 악재가 생긴 것'이라고 하더라"며 "앞으로 대조영 황제가 좋은 곳으로 모셔져 이 나라에도 행복한 일만 가득했으면 한다"고 말했다. 경산=김정석 기자 kim.jungseok@joongang.co.kr 경북 경산시 남천면 송월리 발해마을 위치. 자료: 네이버지도
81    연대객원교수가 본 조선족과조선족사회의 현실과 미래 댓글:  조회:43  추천:0  2021-09-13
내가 본 조선족과 조선족사회의 현실과 미래     Ⅰ. 서론  주최측에서 필자에게 요구하는 내용은 아마 한국교수로서 보는 둑특한 무엇을 기대하는 것 같으나 필자의 안목이 그렇게 깊지 못하여 부담감을 느낀다. 필자가 비록 한국에서 오긴 하였으나 필자의 관점에는 시간과 공간의 제약이 많다. 먼저 아직 온지 7개월밖에 안된 상태에서 그 보는바에 시간적 제약이 많다. 그리고 필자가 대하는 사람이 광범하지를 못하고 일부에 한정되여 있으므로 공간적인 제약 또한 고백하지 않을수 없다. 그럼에도 이 글을 씀은 주최측의 요구도 간곡하거니와 필자 역시 바로 하고 싶었던 말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 말이란것이 뭐 특별한것이 아니라 필자가 발간한 수기(隨記)에서도 이미 조금 비친 이야기요 또 다른 장소에서도 거듭 이야기한 바이다. 곧 조선족사회에 위기가 닥쳐오니 분발하라는 얘기다. 그런데 그 말이 많은 분들, 특히 지식인들의 귀에는 거슬리는 말이 될것 같아 조심스러우나 어디까지나 필자의 충정(衷情)이오니 량해하시고 경칭해주시기 바란다.  이 글은 학술적인 론문이라기보다 그저 제목 그대로 본바를 기술하는만큼 학술적인 론리성은 박약하고 객관성도 약함을 인정한다. 다만 본바를 솔직하게 얘기하여 한국인과 조선족이 서로를 보다 더 잘 리해하는데 일조를 하고 나아가 조선족과 한국인이 다같이 힘을 합쳐 허물어지는 조선족사회를 일으키는데 한몫을 감당하고자 하는데 그 목적이 있다.  론지를 전개함에는 먼저 필자가 본바, 생각한바의 조선족과 한국인을 론하고 이어 조선족사회를 론하며 나아가 이를 고치고 구할 방안을 나름대로 제시하는것으로 끝맺으려 한다.  Ⅱ. 내가 본, 한국인에게 있어서의 조선족  1.련민의 대상이다.  한국인과 중국의 조선족은 근 반세기 동안 서로를 잘 몰랐다. 그러다 한국과 중국이 국교를 성립하고부터 한국인들은 비로소 조선족을 알게 되였는데 이때 한국인들의 가슴에는 그 동안 오랜 세월 잊고 지낸 동포에 대한 죄책감이 들었다.  이 죄책감과 더불어 가난하게 사는 현실에 동정심을 갖게 된것이다. 이 죄책감과 동정심이 어울려 련민의 정을 낳은것이다. 이 정으로 하여 아직도 한국인은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조선족에 대해서 호의적이다.  2. 자선의 대상이다.  얄팍한 민족애를 가지고 너무도 가난한 동포를 몇푼의 돈으로 도울수 있다는데 많은 기쁨을 맛보는것이다. 일종 시혜(施惠)의 만족감을 누리는것이다.  3. 착취의 대상이다.  똑같은 일을 시키거나 더 혹독한 일을 시키면서도 한국인의 절반만 주어도 감지덕지하는 조선족은 한국인에게 있어서는 로동력을 착취할수 있는 가장 좋은 대상이다. 그리하여 한국의 많은 기업들은 중국의 조선족을 무더기로 받으며 환영하였다. 언어가 불편없이 소통되므로 다른 어떤 외국인보다 부리기 편리하고 또 그 성미가 순박하여 좋았던것이다.  4. 멸시의 대상이다.  불법 체류와 가난뿐만 아니라 조선족은 그 무뚝뚝한 말씨와 불친절한 태도, 약속 불리행 등 타기할수밖에 없는 습관들로 인하여 많은 한국인이 조선족을 멸시하는것이 사실이다.  5. 고토에의 향수로 인하여 그 고토(고구려부여,발해의 선조들의 옛 영토)를 지키는 조선족에게 일종의 감사를 느낀다. 그리고 그 고토에서 일찍이 누리지 못하였던 자신감을 대신 가지므로 민족적 자긍심마저 갖는다. 그러나 이 자긍심을 못갖는 조선족에 대하여 안타까워한다.     Ⅲ.내가 본, 조선족에게 있어서의 한국  1. 부자집 친정이다.  가기만 하면 얻어오고(한국산 전기밥솥 등등 날라오고 ㅋㅋ)  손만 벌리면 쥐여지는 부자집 친정이다.  2. 정신적 기둥으로 민족적 자긍심을 가지게 하여주는 자랑스런 친정이다. ? 모국 한국의 위상이 국제적으로 올라가므로 조선족동포들은 자연히 뿌듯해지고 자부심을  갖게 되는 것이다.  3. 노다지의 땅이다.  어떻게든 한번 가기만 하면 돈을 벌어올수 있으므로 노다지의 땅이 분명한것이다.  4. 고마움과 섭섭함이 교차되는 곳이다.  돈을 주어 고맙고 돈을 벌어 고마운데 동포라고 하면서 너무나 인간적 대우를 안 해주므로 섭섭한것이다. 그리고 한국인은 반가우면서도 얄미운 사람인것이다.  5. 의뢰심을 유발시키고 독립(자립심)정신과 중국내에서 진취심및 경쟁력을 상실케 하는곳이다.  많은 조선족은 조그만 일을 하면서도 자꾸 한국을 건너다 본다. 그러나 있는 한도내에서는 한국인의 10분의 1이든 100분의 1이든 성의를 보여야지 않는가? 무슨 성금을 가져오면 그 성금에서 그 손님을 접대하는 경비까지 쓰는 일은 없어야 한다. 이로 말미암아 자괴감, 무기력증, 나아가 비굴감까지 조성된다. 적어도 내 힘있는 한에서 힘을 합친다면 이런 일은 훨씬 적어질것이다.  6. 배금사상(황금만능주의)의 소굴이다.   돈 앞에 다른 무엇도 보이지 않는 모든 문제를 돈으로만 해결하려 드는그릇된 사상은 한국에서 잘못 배웠다.     Ⅳ. 조선족의 장단점  1. 장점  1) 끈기를 들고 싶다. 이 광활한 땅을 개척한 그 억척스럽고 끈질긴 정신을 보면 과연 조선족의 끈기를 볼수 있다.  2) 순진하다. 마음바탕에 아직은 때가 덜 묻었다.  3) 직설적이다. 솔직하다. 감정표현을 크게 숨기지 않는다.  4) 은근한 정이 있다.  5) 도전정신이 강하다. 온 세계로 진출하는 기개가 놀랍다.  6) 녀성지위가 향상되여있다.  7) 교육열이 강하다.  8) 민족을 지키려는 민중의 의지력이 강하다. 한복, 한식, 취학, 옷, 비녀, 말, 혼인 등에 있어서 은연중 민족의것을 고집스러이 지키고있다.  2. 단점  1) 일상생활에서의 례절이 부족하다. - 만씨, 인사, 불친절, 술, 담배, 시간관념 등  2) 일확천금에의 미련이 지나치다.  3) 소비성이 강하다. 월소득에 비하면 소비가 너무 높다. 한 달 3000원 안팍의 봉급에 어떻게 2000원 상당의 부조를 하며 그보다 더 많은 액수의 술자리를 벌일수 있겠는가?  4) 리혼률이 높아졌다. 이로 인한 민족전반, 가정과 사회적 파장이 얼마나 크겠는가?  5) 직업전문의식이 박약하다. 제 자리를 지키는 공직자가 적다 6) 봉사활동이 미정착되여 있다.     Ⅴ. 내가 보는바 조선족사회가 허물어지고있다.  지금 조선족사회는 허물어지는 와중에 있다. 이에는 외적요인과 내적인 요인이 있다. 이를 자세히 분석해 본다.  1. 외적요인  1) 인구가 마이너스 성장을 하고있다. 아이 하나만 낳는 풍조가 전 조선족사회에 풍만해 있다. 게다가 가임(可姙)녀성이 격감하고 있다. 이 녀성들의 대부분이 한국이나 도시로 진출하여 농촌에는 총각이 장가를 들지 못하고있다. 듣건데 대부분의 농촌에는 처녀 총각의 비률이 1: 30 이라고 한다. 심한 례로 백금향에서는 1: 70이라고 한다. 이러한 상황이니 어떻게 인구가 증가할수 있겠는가?  2) 집단마을이 축소,붕괴되고있다. 조선족의 집단마을에는 한집 두집 나가기 시작하고 그 자리에 한족이 들어오므로 조선족 마을로서의 정체성을 잃어가고 있는것이다. 그리하여 마을에서 간단한 회의를 하나 하더라도 이젠 더 이상 조선어가 공식용어가 되지 못한다. 10명 가운데 한 사람이라도 한족이 섞이면 공식 용어는 한어가 되여야 한다. 이러므로 차츰 조선족 마을로서의 전통이 유지되여 갈수가 없게 되는것이다.  3) 농촌인구가 줄어들므로 농촌학교가 영세화하거나 폐교가 되고있다. 자연 아이를 한족학교로 보낼수밖에 없다. 우리 말과 글을 제대로 모르는 상황에서 소학교부터 한족학교로 다니니 자연 동화될수밖에 없는것이다.  4) 조선족사회의 지도자가 결핍되고있다. 그래도 마을에 눌러앉아 마을의 촌민을 지도하고 아이를 올바로 교육시킬 엘리트들이 모두 떠나고 없으니 갈바를 모르고 휩쓸리는것이다. 농촌뿐만 아니라 도시 역시 엘리트집단은 외국이나 아니면 북경이나 상해 등 큰 도시로 나가고 없는것이다. 이런 엘리트지도자가 없고 또 양성되지 않고있으니 갈수록 락후될수밖에 없을것이다.  5) 민족교육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있다. 학교에서는 이미 조선의 력사를 교수하지 못하는지가 오래 되였다. 그러나 이에 대체하여 조선의 력사를 가르치고 조선의 혼을 심을 교육 공간이 전혀 없다. 어린이나 청소년들은 어디에서도 민족교육을 받을 기회도 없고 공간도 없고 나아가 이를 하고자 하는 사람도 없다. 하다못해 룡정의 “한글독서사” 같은 시설 하나도 조선족자치주의 수도인 연길에는 없다. 이런 실정이라 민족적 힘, 민족교육은 쇠약하다 할 지경이다.  2. 내적요인  1) 가장 큰 요인은 민족 자체에 대한 회의론이 조선족사회에 만연되고있다. 그냥 중국 국민으로 살아가면 되지 굳이 민족을 따져 뭐 할거냐는 사상이 팽배해 있는것이다. 대부분의 조선족은 민족을 찾을 절실함을 깨치지 못하고있다. 공연히 그런걸 찾다가 남의 주목만 받는데 뭐하러 찾느냐는것이다. 그리하여 심지어는 지식인가정에서 도리어 자녀를 한족학교로 취학시키는 사례가 늘어가고 있는것이다. 이미 중국 국민이니 중국 국민으로 잘 기르기 위해서 일찍부터 한족화 교육을 시킨다는 론리이다. 이 민족 정체성에의 회의론이 조선족 사회를 허무는 가장 큰 암적 존재인것이다.  2) 황금만능의 배금주의가 전 사회를 지배하여 “돈” 이외의 일체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게 되였다. 교육도 돈을 위해서 시키는것은 일반적인 추세이고 나아가 문화도 학문도 민족도 돈을 위해서 찾는 풍조가 풍미하고 있는것이다. 소신 (자신의 본분)에는 관심이 없고 제밥에만 눈독을 들이는 중들도 간혹 있다는 말이다.  3) 민족의 최후 보루로서 민족을 지키고 민족을 구해야 할 문인, 이 독립군들이 전의를 상실하고있다. 독립군 자신들이 적군에 대한 적개심이 희박하고 왜 싸워야 하는지 그 당위성에 대한 자각이 부족하고 게다가 후방의 응원군들이 예상외로 랭담하므로 전의를 상실하고 곁눈을 팔고 있는것이다. 필자가 조선족작가들의 소설을 몇편 분석한 결과 대부분 력사의식이 부족하였다.  4) 지식인들이 예상외로 이 민족문제에 대하여 랭담하다. 따라서 자라는 세대들도 자연 이 문제에 대해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는다.  5) 민족문제에 대하여 지각있는 지식인들도 이 뜻을 결집시키지 못하고있다. 저마다 걱정만 할뿐 이를 하나로 응집시켜 활동을 못하고 있는것 같다. 이 힘을 하나의 구심점에다 응집시켜서 민족문제를 랭철히 분석하고 연구할 장치를 못 만들고있다.  6) 민족대학으로 조선족의 상징이요 자부심인 연변대학이 자꾸만 변질되여 가고있다. 외형은 날로 발전하는데 내면은 날로 민족대학으로서의 정체성과 정신을 잃어가고있다. 단적인 례로 조선어의 위치가 저락하고 있는것이다. 전 대학에서 조선어문학부 이외에는 모두 한어가 공식용어가 되고있다. 조문학부 개설 50주년 기념식에서조차 총장은 한어로 축사를 하여야만 되고 개교 50주년 기념식에서도 한어가 공식용어로 쓰이였으며 조문학부의 교수 허룡구씨의 장례식도 한어로 진행되였다니 이제 조선어의 위상은 겨우 조선족자치주의 체면만을 유지하는 선에서 그 명맥을 잇고있는것이다.     Ⅵ. 내가 보는바 조선족의 미래를 위한 조언  이상에서 본바 조선족사회는 그 외적, 내적인 원인으로 인해 허물어지고있다. 이 허물어지는 조선족사회를 일으켜세우기 위해 조선족은 피눈물나는 노력을 취해야 하고 한국은 동포의 처지에서 적극적으로 도와야 한다. 이를 위한 몇가지 제언을 한다.  1. 조선족의 자발적 노력  1) 민족의식 교육을 시켜야 한다.  물론 학교에서의 민족교육이 제 구실을 못하는 가운데서 별달리 민족의식교육을 한다는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지금처럼 방임해 두어서는 결코 조선족으로 자라지를 못한다. 지금의 교육현실에서도 할수 있는 일이 많이 있다.  첫째로 국가와 민족의 관계를 분명히 인식시켜야 한다. 국가와 민족을 동일시하므로 갖가지 오해를 낳고 갈등을 빚는다. 중화인민공화국은 엄연한 다민족국가임을 명심시켜야 한다. 그러므로 조선족으로서 또한 중화인민공화국의 국민으로서 떳떳이 사는 길을 가르쳐야 한다.  둘째로 가장 민족적이여야 가장 세계적임을 알려야 한다. 바야흐로 세계화의 물결이 온 누리를 뒤덮는데 이 세계화란 바로 민족적인 것이 어울린다는 사실을 알려야 한다. 민족적이고 토속적인것이 없이는 영원히 세계화의 물결에 락오자가 되는것이다.  셋째로 민족의식교육에는 무엇보다 력사교육이 우선되여야 한다. 이를 위한 어떤 특별한 조치가 강구되여야 한다. 그러나 우선 주어진 범위내에서만이라도 가르치도록 노력해야 한다.  2) 문인들이 분발하여야 한다.  민족을 살리겠다는 투철한 사명감으로 참으로 독립군적인 자세로 나서야 한다. 지금과 같은 안이한 자세로는 안된다. 보다 더 철저한 투사적 정신이 요청된다. 민족을 살려야 민족문학도 산다. 독자 없는 문학이 존재할수가 없는것이다. 그런데도 필자의 얕은 눈에는 문인들의 그 자세가 보이지 않고 그 정신이 나타나지를 않는것이다.  3) 민족관계학자들이 분발하여야 한다.  죄송하지만 필자가 보기에는 많이 미흡하다. 학문이 현실과 너무 괴리되여 있다. 문학에만 보더라도 왜 많은 학자들이 “재만문학”에만 매달리는가? 이젠 연변의 문학도 제자리 매김을 해야할 때이다. 유치하다면 유치한대로 해야 한다. 그리고 후진을 제대로 길러야 한다. 조문학부는 어떤 의미에서 독립군의 군관을 기르는 사관학교가 아닌가? 그런데 그 예비군관들의 민족의식이 많이 부족하다. 조선문학전공의 연구생이 조선문학 전문지 하나도 안 읽는다면 이를 어떻게 설명해야 할것인가? 주문학부의 4학년 학생들이 아직 룡정에 가보지 않았다면 그 민족의식, 력사의식이 제대로 된것인가? 연변의 조문학부 학생이 홍범도장군을 모른다니 어떻게 해석해야 할것인가? 심지어는 조문학부에서 발간한 조문학부의 력사기록인 《겨레의 넋을 지켜》도 보지 않고있다. 이게 학생들만의 책임인가? 이렇게 교육을 받고 나가 어떻게 저들이 자기도 모르는 민족교육을 제대로 할것인가? 참으로 죄송하지만 문인들과 더불어 학자 여러분들에게도 필자는 민족적인 분발을 촉구하고자 한다.  이들이 민족의 장래인 어린이와 청소년들을 최일선에서 기르므로 이들에 대한 애정을 가지고 계속 민족의 혼을 불어넣도록 교육을 시켜야 한다.  2. 한국에서의 도움  민족을 살려야 한다. 국내야 물론이지만 해외의 민족도 살려야 한다. 피줄의 정을 떠나서도 영원한 우군이기 때문에도 살려야 한다. 가장 민족성이 강하고 장한 동포인 우리의 중국에 계신 민족, 조선족을 살려야 한다. 이를 위해서 모국인 한국은 책임을 감당해야 한다. 지금 조선족은 자체의 힘만으로는 일어나기가 너무 어려운 지경에 빠져 있다. 모국이 도와주어야 한다.  1) 과감한 인구 팽창정책을 펼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  인구팽창정책으로 우선 아이 더 낳기 운동을 장려해야 하는데 이에는 많은 재정이 소요된다. 그리고 아이를 더 갖지 않은 리유 가운데 가장 큰 리유는 과다한 학자금문제이므로 조선족학생 가운데 둘째아이 이후부터는 학자금을 보조하거나 대여해주는 방안을 세워야 한다.  2) 조선족학교를 대폭 지원해야 한다.  조선족학교가 시설면에서 월등히 뛰어나야 조선족학교로 학생이 온다.  3) 조선족교사들에게 특별한 혜택을 주어 우수 인재가 교직으로 나오도록 유도해야 한다. 지금과 같이 교사가 푸대접받는다면 우수인재는 교단을 떠난다. 교직에 매력이 있도록 한국 연수 등 련속적으로 어떤 혜택을 주어야 한다.  4) 민족교육의 공간을 마련해주어야 한다.  ''한국문화원”과 같은 기관을 이곳에 세워 조선족학생들이 조선의 책과 조선의 력사, 문화를 접할수 있게 해주어야 한다. 그리하여 이곳이 진정 조선족을 기르는 도량이 되도록 해야 한다.  Ⅶ. 결 론  이상으로 필자 나름대로 조선족과 조선족사회의 현실과 미래를 진단해 보았다. 먼저 조선족과 한국인과의 관계에서 서로를 어떻게 보고 있는지를 보고 조선족의 장단점도 진단해 보았다. 이는 서로가 리해하려는 자세로 나아가면 그 간격을 좁힐수 있으므로 큰 문제가 아니다.  그리고 조선족사회의 허물어지는 원인도 분석해 보았다. 그리고 이에 대한 방안도 제시하였다. 그러나 내가 보는 바로는 암담하다. 중화민족의 거대한 동화의 힘 앞에 여지없이 허물어지고있다. 이 현실앞에 수수방관하는듯하여 더욱 답답하다. 방법이 없으니 어쩌느냐고 한숨쉰다. 그러면서 20년을 못 버틴다고 패배감, 자멸감에 젖어 있다. 이 허허벌판을 굶어가며 개척한 그 기개는 어디로 가고 일제와 맨주먹으로 싸운 그 투지는 어디다 버렸는가? 물론 그 동안의 력사의 회오리 가운데 당한 고난으로 위축된 사정을 모르는바는 아니다. 그래도 어찌 이렇게도 한심하게 무너진단 말인가?  그러나 학자와 문인 등 독립군만 건설하면 능히 지킬수 있다.  서기 70년 로마에 의해 나라는 완전히 망하고 민족은 온 세계로 뿔뿔히 흩어진 유태민족을 2000년이나 지켜온 독립군은 바로 “랍비”들이였다. 이 랍비는 처음 딱 10명으로 출발하였다. 이 10명이 지리멸렬한 민족을 구하는 원동력이 되였다. 지금 조선족사회도 이 10명의 랍비를 구하고있다. 2000년이나 나라없이 흩어진 이 유태민족이 이리저리 피가 섞여 혈통적으로 유태인 구분이 어렵다고 한다. 그러나 유태인을 아는 단 한가지 진리가 있다. 곧 어머니가 유태인이면 그 자녀는 유태인인것이다. 이 튼튼한 어머니를 독립군들은 키워야 한다.  저자: 안병렬, 연변대학 조문학부 객원교수
80    조선/ 한국 역대 국가원수 및 정부수반 댓글:  조회:33  추천:0  2021-09-12
부여 국왕   한국 사서 초대  부여/  북부여  동부여 동부여 동부여  동명/  해모수 주의 ! 동일 인물이 아님. 해부루 금와왕 대소왕 고리국 갈사국 ? 초대 제2대 제3대 영품리왕 갈사왕 □왕 도두왕 중국 사서에서 등장 초대 제??대 제??대 제??대 동명왕 부여왕 시왕 부태왕 제??대 제??대 제??대 제??대 위구태왕 간위거왕 마여왕 의려왕 제??대 제??대 말대   의라왕 현왕 잔왕 기타 졸본부여 위거 · 부여울 · 해두국왕 해(고)주몽 고구려 태왕   초대 제2대 제3대 제4대 동명성왕 유리명왕 대무신왕 민중왕 제5대 제6대 제7대 제8대 모본왕 태조대왕 차대왕 신대왕 제9대 제10대 제11대 제12대 고국천왕 산상왕 동천왕 중천왕 제13대 제14대 제15대 제16대 서천왕 봉상왕 미천왕 고국원왕 제17대 제18대 제19대 제20대 소수림왕 고국양왕 광개토대왕 장수왕 제21대 제22대 제23대 제24대 문자명왕 안장왕 안원왕 양원왕 제25대 제26대 제27대 제28대 평원왕 영양왕 영류왕 보장왕 부흥운동 추존 불명 안승 대양왕 추 · 고여율 · 대흥왕 기타 신찬성씨록에 등장하는 왕들 대막리지 부여 졸본부여 비류국 역대 부여 국왕 (해)고주몽 송양   마한 비류국 십제 → 백제   비류 해온조   최씨낙랑국 가야국 사로국 최리 김수로 혁거세   가야 국왕   금관국 초대 수로왕 제2대 거등왕 제3대 마품왕 제4대 거질미왕 제5대 이시품왕 제6대 좌지왕 제7대 취희왕 제8대 질지왕 제9대 겸지왕 제10대 구형왕 금관국 소조정 제11대 김세종 제12대 김솔지 제13대 김무력 제14대 김서현 제15대 김문명 반파국 초대 이진아시왕 제?대 금림왕 제?대 하지왕 제9대 이뇌왕 16대 도설지왕 월광태자 반파국 안라국 탁순국 탁국 제?대 기본한기 제?대 가실왕※ 제?대 말금한기※ 말대 아리사등※ 기능말다간기※ 말대 함파한기 ※     발해 국왕   초대 제2대 제3대 제4대 제5대 고왕 무왕 문왕 폐왕 성왕 제6대 제7대 제8대 제9대 제10대 강왕 정왕 희왕 간왕 선왕 제11대 제12대 제13대 제?대 말대 대이진 대건황 대현석 대위해 대인선 속말 백산말갈족 추장 걸사비우 | 걸걸중상 | 대조영 멸망 이후 대광현 | 오사성발해왕 | 열만화 → 오현명 | 연파 | 오소도 → 오소경 | 대연림 | 고욕 | 고영창         사로국 국왕 에서(주의! 신라와는 전혀 다른 나라임.  선대 사로국이 멸망하고 후대에 신라가 일어남) 서라벌 실라신라  계림 신라 역대 통치자    초대 제2대 제3대 제4대 혁거세 거서간 남해 차차웅 유리 니사금 탈해 니사금 제5대 제6대 제7대 제8대 파사 니사금 지마 니사금 일성 니사금 아달라 니사금 제9대 제10대 제11대 제12대 벌휴 니사금 내해 이사금 조분 니사금 첨해 니사금 제13대 제14대 제15대 제16대 미추 니사금 유례 이사금 기림 이사금 흘해 니사금 제17대 제18대 제19대 제20대 내물 마립간 실성 마립간 눌지 마립간 자비 마립간 제21대 금씨 신라왕조  초대 제23대 제24대 소지 마립간 지증왕 법흥왕 진흥왕 제25대 제26대 제27대 제28대 진지왕 진평왕 선덕여왕 진덕여왕 제29대 제30대 제31대 제32대 태종 무열왕 문무왕 신문왕 효소왕 제33대 제34대 제35대 제36대 성덕왕 효성왕 경덕왕 혜공왕 제37대 제38대 제39대 제40대 선덕왕 열조 원성왕 소성왕 애장왕 제41대 제42대 제43대 제44대 헌덕왕 흥덕왕 희강왕 민애왕 제45대 제46대 제47대 제48대 신무왕 문성왕 헌안왕 경문왕 제49대 제50대 제51대 제52대 헌강왕 정강왕 진성여왕 효공왕 제53대 제54대 제55대 제56대 신덕왕 경명왕 경애왕 경순왕   후삼국시대     신라 제51대 제52대 제53대 제54대 제55대 제56대 진성여왕 효공왕 신덕왕 경명왕 경애왕 경순왕   후백제 초대 제2대 견훤 견신검   고려(후고구려)  마진 → 태봉 고려 궁예 태조 왕건   발해 제13대 제?대 말대 대현석 대위해 대인선   고려 국왕   초대 제2대 제3대 제4대 제5대 태조 혜종 정종定宗 광종 경종 제6대 제7대 제8대 제9대 제10대 성종 목종 현종 덕종 정종靖宗 제11대 제12대 제13대 제14대 제15대 문종 순종 선종 헌종 숙종 제16대 제17대 제18대 제19대 제20대 예종 인종 의종 명종 신종 제21대 제22대 제23대 제24대 임시 희종 강종 고종 원종 영종 제25대 제26대 제27대 제28대 제29대 충렬왕 충선왕 충숙왕 충혜왕 충목왕 제30대 제31대 제32대 제33대 제34대 충정왕 공민왕 우왕 창왕 공양왕     조선 국왕   초대 제2대 제3대 제4대 태조 정종 태종 세종 제5대 제6대 제7대 제8대 문종 단종 세조 예종 제9대 제10대 제11대 제12대 성종 연산군 중종 인종 제13대 제14대 제15대 제16대 명종 선조 광해군 인조 제17대 제18대 제19대 제20대 효종 현종 숙종 경종 제21대 제22대 제23대 제24대 영조 정조 순조 헌종 제25대     철종     한국 통감   임시 초대 제2대 제3대 히세가와 요시미치 이토 히로부미 소네 아라스케 데라우치 마사타케 조선 총독   대행·초대 제2대 제3대 대행 제4대 데라우치 마사타케 하세가와 요시미치 사이토 마코토 우가키 가즈시게 야마나시 한조 제5대 제6대 제7대 제8대 제9대 사이토 마코토 우가키 가즈시게 미나미 지로 고이소 구니아키 아베 노부유키 한국 통감 · 군정 사령관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반   국무총리 (1919) 지명 이승만 초대 이동녕 제2대 이동휘 임시대통령 (1919~1925) 초대 이승만 제2대 박은식 국무령 (1925~1927) 초대 이상룡 제2대 양기탁 제3대 이동녕 제4대 안창호 제5대 이동녕 제6대 홍진 제7대 김구 국무회의 주석 (1927~1940) 초대 김구 제2대 이동녕 제3대 이동녕 제4대 송병조 제5대 송병조 제6대 이동녕 제7대 이동녕 제8대 이동녕 제9대 김구 국무위원회 주석 (1940~1945) 제10대 김구 제11대 김구 * 한성정부, 대한국민의회, 상해임시정부 통합 이전     한국 군정기 지도자 [ 펼치기 · 접기 ] 소련군정 미군정 이반 치스차코프 존 리드 하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국가원수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 국가주석   초대 제2-4대 제5-9대 김두봉 최용건 김일성 권한대행 김정일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 국방위원장 국방위 제1위원장   국무위원장   제10-11대 제12대 제13-16대 김영남 김정일 권한대행 김정은 김정은   대한민국 대통령 [ 펼치기 · 접기 ] 제1-3대 제4대 제5-9대 제10대 이승만 윤보선 박정희 최규하 제11·12대 제13대 제14대 제15대 전두환 노태우 김영삼 김대중 제16대 제17대 제18대 제19대 노무현 이명박 박근혜 문재인  
79    발해국의 종말과 국가회복을 위한 발해유민들의 투쟁 댓글:  조회:17  추천:0  2021-09-10
발해국의 종말과 국가회복을 위한 발해유민들의 투쟁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께서는 다음과 같이 교시하시였다. 《조선인민은 예로부터 싸우다가 죽을지언정 원쑤앞에 굴할줄 모르는 용감하고 슬기로운 인민이다.》 조선인민의 강의한 애국심은 거란침략자들을 반대하는 발해인민들의 투쟁과정에서도 높이 발현되였다.    거란의 침입을 반대한 발해인민들의 투쟁 발해는 근 200년간 강대한 나라로 존속하여왔으나 9세기 말~10세기 초에 들어서면서 급속히 약화되였다. 이 시기 발해의 중앙 및 지방의 봉건세력들은 인민들의 토지를 대대적으로 략탈하고 착취와 억압을 전례없이 강화하였다. 한편 통치배들속에서는 상무의 기풍이 점차 없어지고 나약한 풍조가 휩쓸었으며 더 많은 재부와 권력을 독차지하기 위한 싸움만 계속 벌리였다. 발해귀족들 내부에 극히 나약한 풍조가 휩쓸었는데 당나라의 과거시험에 합격되는것을 《영예》로까지 생각하는 형편이였다. 그리하여 나라의 국력은 걷잡을수 없이 약화되게 되였다.       거란은 원래 서료하상류일대에 살고있던 유목종족이였다. 10세기 초에 급격히 강대한 세력으로 자라난 거란은 916년에 거란국가를 선포하였다. 이때 황제 야률아보기가 발해에 대한 침략의 마수를 뻗치였다. 발해는 거란의 침입에 대처하여 924년 5월에 거란이 차지하였던 료주(심양 서쪽)를 쳐서 큰 타격을 주었으나 그 성과를 공고히 하지 못하였다.       ㅡ 925~926년전쟁 이미 10세기 초부터 발해에 대한 침략을 꿈꾸어오던 거란침략자들은 925년 12월 말부터 거란왕 야률아보기가 직접 수만명의 침략군을 거느리고 대규모적인 무력침공을 감행하였다. 야률아보기가 거느린 거란침략군은 발해 서쪽의 주요성이였던 부여성을 포위하였다. 부여성의 군인들은 력량상 대비가 안되는 적과 용감히 싸웠으나 926년 1월 초에 성을 강점당하고말았다. 부여성을 강점한 적들은 동쪽으로 계속 밀려들었다. 적장 안단이 거느린 거란군의 선봉 1만명(기병)은 발해수도 서쪽가까이까지 침공하여왔다. 이때 발해의 대신 로상이 수도방위군을 이끌고나가 싸웠으나 우세한 적들을 물리치지 못하였다.       발해의 수도 상경룡천부의 홀한성은 거란침략자들의 포위에 들었다. 성안에 있던 전체 군민들은 거란침략군의 공격을 여러차례 물리치고 무리죽음을 주었다. 그러나 국왕 대인선을 비롯한 봉건통치배들은 싸우는 발해군민들을 배반하고 인민들의 전투행동을 중지시키는 반역행위를 저질렀다. 인민들의 투쟁은 비록 성공하지 못하였으나 발해군민들의 불굴의 투지와 용감성, 애국심을 다시금 시위하였다.       ㅡ 각지 인민들의 항전 거란침략자들은 인민들의 반항심을 무마시키려고 교활하게 책동하였다. 적들은 동단국을 조작하고 거란왕의 아들 야률배를 왕으로 임명하였으며 실권없는 벼슬자리에 투항한 일부 발해귀족들을 끼워넣었다. 이것은 인민들의 큰 분격을 자아냈다.       인민들은 도처에서 들고일어나 거란침략자들과 반역자들을 반대하여 투쟁하였다. 926년 3월 장령부, 안변부, 막힐부, 정리부의 군민들이 결사적으로 싸웠다. 그러나 그들의 투쟁은 통일적지휘밑에 전개되지 못하였기때문에 각개격파당하였다.       결국 발해는 926년에 자기의 존재를 마치였다. 925~926년전쟁과정은 봉건통치배들의 죄악으로 말미암아 침략자들을 물리치지 못하였으나 광범한 인민들의 높은 애국심을 뚜렷이 보여주었다. 발해말기의 력사는 아무리 강대한 나라라도 자만도취하고 안일해져 국력을 강화하는 사업을 게을리하면 망한다는 교훈을 남겼다.   국토회복을 위한 발해유민들의 투쟁 발해는 비록 존재를 마쳤으나 그 유민들은 거란에 의하여 나라가 무너진 다음에도 굴함없이 국토회복을 위해 줄기차게 싸웠다. 이 투쟁은 여러 지역에서 여러가지 형태로 오래동안 줄기차게 벌어졌다. 발해유민들은 발해의 옛 땅에 정안국과 오사성발해국을 비롯한 소독립국들을 세우고 강점자들을 반대하여 투쟁하였다. 정안국(定安國)은 오씨가 부여부의 동쪽 혼돈강(송화강), 압록강의 중상류일대에 세운 발해유민들의 소국이였으며 독자적인 년호까지 사용하였다.       정안국은 안으로 국력을 강화하는 한편 거란의 침략에 반거란동맹으로 대처하기 위한 대외활동을 적극 벌리였다. 970년에 제2대왕 오렬만화, 981년에 제3대왕 오현명은 송나라에 사신을 보내여 반거란동맹을 무을것을 제기하였으나 송나라의 나약한 태도로 하여 실현되지 못하였다. 그러나 정안국은 부단히 침입하는 거란침략군을 물리쳤고 때로는 적강점지역을 공격하여 타격을 주기도 하였다.       정안국은 동족의 나라 고려와도 련합하려고 노력하였다. 이러한 정안국이 언제까지 존재하였는지 정확한 자료는 없지만 기록에 의하더라도 할빈지방에서 80~90년간은 거란에 항거하면서 국권을 지켜왔다. 오사성발해국은 부여부를 중심으로 오씨가 세운 소국이였다. 수십만의 발해사람들이 동족의 나라인 고려로 이주하여 고려사람들과 함께 거란침략자들을 반대하여 투쟁하였다. 발해유민들의 투쟁은 특히 료동지방에서 치렬하게 벌어졌다.       오사성발해국도 송나라와 반거란동맹을 맺기 위한 대외활동을 벌리였다. 그러나 어부지리를 얻으려는 송나라의 태도로 하여 오사성발해국은 단독으로 싸우지 않으면 안되였다. 995년 오사성발해국의 군민들은 오소경(오소도)의 지휘밑에 거란의 침략대군을 격퇴하였다. 그후에도 오사성발해국의 인민들은 끊임없이 달려드는 거란침략자들과 용감히 싸워 물리쳤다.       《료사》의 기록에 의하면 1114년경에 녀진족이 거란을 공격할 때 오사성발해국이 참가한것으로 되여있다. 이것은 12세기 초경까지도 오사성발해국이 독립국의 지위를 유지해왔다는것을 보여준다.   국토회복을 위한 발해유민들의 투쟁은 끊임없이 계속되였다. 1029년 8월 초 동경도(거란관할하의 도, 직할현 9개, 소속 주, 부, 군, 성 87개)의 전체 발해유민들은 대연림의 지휘밑에 거란강점자들의 통치를 반대하는 폭동을 일으키였다. 대연림은 당시 발해군상은(동경도관하 발해군의 사령관격)이였다. 폭동군은 거란의 동경류수 부마도위 소효선과 그의 처 남양공주 최팔을 동경성(료양성)안에 잡아가두고 거란관리들을 처단하였으며 새로 발해유민들의 국가인 《흥료국》을 세웠다. 당시 대연림이 흥료국왕으로 되고 년호를 《천경》으로 정하였다. 흥료국은 료동지방의 전체 인민들을 반거란투쟁에로 일떠세우는 동시에 한인, 녀진인들이 이 투쟁을 적극 지지성원해나가도록 하였다. 또한 보주성의 장군 하행미로 하여금 투쟁에 합세하도록 련락을 보냈으나 배신당하였다. 흥료국의 군민들은 한결같이 거란침략군과 싸웠지만 대오안에 나타난 투항분자들에 의하여 실패하게 되였다.   발해유민들은 1116년 1월 동경료양부를 중심으로 거란침략자들을 반대하는 투쟁을 벌렸다. 1116년 고영창은 《대발해국》을 선포하고 황제가 되였으며 년호를 《륭기》라고 제정하였다. 대발해국은 산하 각 주들에 부대들을 파견하여 광범한 발해유민들을 집결하는 한편 거란인관리들을 처단하였다. 대발해국의 급속한 장성에 위협을 느낀 거란통치배들은 남부재상 장림에게 대병력을 주어 공격하도록 하였다. 대발해국의 군민들은 장림의 거란군과 30여차례의 격전을 벌려 큰 타격을 주었으며 항전 4~5개월동안 중첩되는 애로와 난관을 극복하면서 투쟁성과를 확대해나갔다. 그러나 대발해국의 국토회복을 위한 투쟁은 금(녀진)나라의 배신행위로 하여 5월에 실패하고말았다. 발해유민들은 침략자들을 반대하는 투쟁을 끊임없이 벌리였으나 통일성을 보장하지 못하였으며 간교한 적들의 책동으로 최후승리를 이룩하지 못하였다. 그후에도 발해유민들의 국권회복을 위한 투쟁은 근 200년간 계속되였다. 발해유민들의 완강한 투쟁은 비록 자기들의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였으나 조선인민의 높은 애국심과 강한 투지를 다시한번 뚜렷이 시위하였다.
78    《해동성국》을 군사적으로 담보한 발해군대 댓글:  조회:14  추천:0  2021-09-10
《해동성국》을 군사적으로 담보한 발해군대 고구려멸망후 대중상과 대조영휘하의 고구려군사들을 골간으로 하여 진국의 성립과 발해건국과정을 거쳐 발전강화된 발해군대는 강력한 군사력으로 《해동성국》의 토대를 닦아놓았으며 국력의 발전을 군사적으로 담보하였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께서는 다음과 같이 교시하시였다. 《어떠한 국가를 물론하고 자주독립국가는 반드시 자기의 군대를 가지고있는것입니다.》 발해는 건국초기부터 봉건지배계급의 리익을 옹호하고 봉건제도를 유지강화하며 나라의 안전을 지키는 자기의 군대를 가지고있었다. 고구려재건투쟁을 벌리던 고구려유민들의 항전부대들을 모체로 하여 편성된 발해의 군대는 건국초기부터 봉건지배계급의 계급적리익을 옹호하는 수단으로 복무하였으며 발해의 높은 대외적지위와 강한 국력에 어울리게 방대한 규모에서 유지강화되였다.    발해군대의 병력수 발해 건국직전 대조영휘하의 군사는 40만이였다. 실학자 홍석주는 《발해세가》에서 우리 나라에서 전해오던 사료들뿐아니라 《오대회요》를 비롯한 중국측 기록들도 널리 참고하여 발해 초기 군사가 40만이라고 하였다. 발해가 건국과정에 료동지역을 비롯한 중국 동북지방의 적지 않은 지역과 우리 나라 북부의 넓은 령토를 차지할수 있었던것은 바로 40만의 대병력으로 위세를 떨쳤기때문이였다. 발해건국을 전후하여 대조영의 휘하에 모여든 40만의 대군은 모두 정규군인이 아니라 고구려회복이라는 공동의 목적을 지향하여나섰던 고구려유민들과 일부 말갈인들이였다. 건국이후 발해봉건정부는 고구려이래의 군대편성원칙과 조성된 정세에 맞게 군사제도를 새롭게 편성하고 군대를 질, 량적으로 강화하여나갔다.       《책부원귀》나 《구당서》 등 력사기록들에서는 발해의 병력수에 대하여 승병 수만이라고 밝히고있다. 그러나 이 수자는 발해의 병력수전체를 가리킨것이 아니라 금군의 수로 보이며 상비군전체를 가리킨 수자라고는 볼수 없다. 그것은 당나라에서 《안사의 란》이 일어났을 때 평로류후사 서귀도가 발해에 요청한 기병만 하여도 4만이나 되였으며 당나라에 대한 사대주의와 패배감에 물젖어 흑수말갈을 징벌할데 대한 무왕의 명령을 거부한 대문예가 발해의 군사력을 심히 과소평가하면서도 군대수를 10만이라고 하였기때문이다. 그러나 대문예의 말대로 군대수를 단순히 10만으로 볼수도 없다.       《료사》 병위지 상에는 발해의 군대수가 수십만이라고 기록되여있는데 이것이 발해의 총병력수를 가리킨 비교적 정확한 수자라고 볼수 있다.    발해군대의 군종 발해의 군대는 중앙군과 지방군으로 이루어져있었다. 발해의 중앙군은 8위와 금군이였다. 발해의 중앙군에는 좌맹분위, 우맹분위, 좌웅위, 우웅위, 좌비위, 우비위, 남좌우위, 북좌우위의 8개 위가 있었다. 8위에는 각각 대장군과 장군이 한명씩 배치되여있었으며 그 밑에 도장, 소장 등 여러 무관직이 있었다. 8위에는 부병의 한개 단위를 이루던 절충부가 소속되여있었다. 중앙군에 소속된 부병은 수도와 그 부근의 수비를 맡아보았으며 동시에 전국에 배치되여있던 8위소속의 절충부들에 가서 복역하면서 지방군과 결합된 중견력량으로 되여있었다. 발해의 중앙군에는 또한 금군이 있었다. 금군은 궁성수비를 위주로 하면서 직접 군주를 호위하는 시위군이였다. 발해의 지방군은 건국초기부터 중앙군과 함께 발해군사력의 중요한 부분을 이루고있었다. 고구려멸망후 각지에서 반침략투쟁을 벌리던 여러 항전세력들은 발해건국을 위한 투쟁에 합세하여나섰으며 그후에는 지방군으로 편성되였다. 발해봉건정부는 초기부터 지방군을 거느린 지방장관들에게 중앙의 관직을 겸임시킴으로써 그들의 지위를 높여주고 봉건정부에 더 잘 복무하도록 하면서 지방군강화에 특별한 관심을 돌리였다. 지방군은 지방행정단위인 부, 주, 현을 단위로 하여 편성, 배치되여있었다. 지방행정단위의 장관인 도독(절도사), 자사, 현승은 민사행정뿐아니라 군사지휘권도 틀어쥐고 지방군을 통솔하였다. 그리고 특별히 중요한 부들에는 도독이 아니라 절도사들이 파견되여 그 지역의 군사를 거느리고있었으며 후국과 속령들에 배치된 군대는 지방군의 구성부분으로 후국왕이나 번장들의 통솔하에 있었다. 지방군의 편성은 중앙군과 달리 병농칠치의 원칙에서 조직된 고구려인평민들이 기본을 이루고있었으며 말갈족출신의 군사들도 들어있었다. 이처럼 중앙군과 지방군으로 구성된 발해의 군대는 봉건왕권을 보호하고 지배계급의 계급적지배와 리익을 군사적으로 옹호하고 담보하는 역할을 수행하면서 220여년간 나라의 안전을 지켜냈다.    발해군대의 병종 발해군대의 병종구성을 놓고보면 강력한 지상군과 수군으로 이루어져있었다. 발해의 지상군은 기본전투력량으로서 외래침략자들을 물리치는 싸움들에서 용맹을 떨쳤다. 발해에서는 기병을 위주로 한 지상군의 위력이 대단히 강하였다. 755년 당나라에서 안사의 란이 일어났을 때 평로류후사 서귀도는 발해에 기병 4만을 보내여 도와줄것을 요청한 일이 있었다.       서귀도가 발해에 요청한 기병 4만은 결코 적은 수자가 아니였다. 서귀도가 그렇게 많은 수의 기병을 요청할수 있은것은 발해의 기병력이 량적으로 또 질적으로 상당히 높은 수준에 있다고 보았기때문이며 설사 이만한 수의 기병을 동원시킨다고 하여도 국가방위를 위한 전반적무력균형에서는 큰 공백이 생기지 않는다고 생각하였기때문이였다. 다시말하면 그들은 군사력 특히 기병이 강한 발해로서는 이만한 수의 기병을 얼마든지 동원시킬수 있다고 보았던것이다.         이것은 당시 고구려후국관내였던 오늘의 평안남도 녕원군에 발해성과 말을 사육하던 양마성이 있는것을 놓고서도 잘 알수 있다. 양마성에서는 말굴레와 말안장, 금속제활촉들이 많이 발굴되였는데 이것은 발해에서 말사육이 그 어떤 개별적인 지역에 국한된 사업이 아니라 나라의 군사력을 강화하는 중요한 일로서 전국의 여러 곳에서 활발히 진행되였으며 사육된 말들은 발해의 강력한 기병력을 끊임없이 보충하고 강화하였다는것을 보여준다. 발해는 강력한 수군도 가지고있었다. 발해가 수군을 가지게 된것은 나라의 지리적위치와 관련된다. 발해는 령역의 적지 않은 부분이 해안을 끼고있었는데 동쪽에는 조선동해, 서남쪽에는 조선서해가 있었다. 발해는 건국초기부터 당나라와 군사적으로 견제하는 립장에 있었기때문에 당나라와의 대립이 격화되고 그것이 언제 전쟁으로 번져질지 모르는 조건에서 수군력량을 강화하였다. 발해에서는 수군의 중요한 전투력인 함선을 건조할수 있는 배무이기술이 상당히 높은 수준에 있었다.       발해에서는 각이한 크기의 배를 건조하였는데 큰 배는 물동량을 고려하지 않고 한척에 100여명이 탈수 있었고 중형배는 40~70여명, 작은 배는 10여명가량 탈수 있었다. 발해사신들이 모진 풍랑을 무릅쓰고 일본에 자주 왕래할수 있었던것은 두려움을 모르는 발해사람들의 진취성과 함께 견고한 배가 마련되여있었기때문이였다.       일본측문헌기록들에 의하여 발해사신들이 타고 갔던 배를 상상해볼수 있는데 그중에는 키, 돛대, 노, 닻, 끌어당기는 바 등 여러가지 설비를 갖춘 조종인원이 28명이나 되는 큰 배도 있었다. 수군은 바로 이러한 배에 여러가지 무기를 설치하고 바다를 믿음직하게 지켰다. 대형배와 중형배는 기본전투함선의 역할을 하였고 소형배는 해안을 감시하고 해적행위를 하는 배들을 추적, 단속하는 임무를 수행하였다. 이처럼 발해군대는 기병위주의 강력한 지상군과 발전된 전투함선으로 장비된 수군으로 이루어져있었다. 이와 같이 발해는 건국이후 수십만의 군사를 상비군으로 가지고있었기때문에 령토확장도 성과적으로 진행할수 있었고 이웃 나라와의 군사적대결과 외교분쟁에서도 우세를 차지할수 있었던 동방의 강국이였다.
77    새롭게 정비강화된 정치제도 댓글:  조회:14  추천:0  2021-09-10
새롭게 정비강화된 정치제도 발해는 건국후 국력을 계속 강화하는 정책을 실시하여 수십년동안에 벌써 그 령토가 남쪽은 대동강과 덕원(원산북쪽)에서 신라와 접하고 료하일대와 부여의 땅인 송화강류역, 흑룡강이남의 말갈족거주지역까지 포괄하게 되였다. 발해는 국력이 강화됨에 따라 대외적지위를 공고히 한 결과 《해동성국》(동방의 강성한 나라)으로 불리우며 위력을 널리 떨치였다. 발해는 강화된 나라의 국력에 어울리게 정치제도를 새롭게 정비강화하였다. 위대한 령도자 김정일동지께서는 다음과 같이 교시하시였다. 《고구려를 계승한 발해는 7세기말부터 10세기초까지 200여년간 존재하였으며 정치, 경제, 문화가 크게 발전하여 〈해동성국〉으로 이름을 떨치였습니다.》    발해국의 최고권력자의 지위 봉건시대의 국가는 군주의 권력기구인것만큼 최고권력자의 지위는 국가의 지위를 규정짓는 중요한 징표의 하나이다. 발해의 지위와 성격을 규정짓는데서 제일 처음으로 론의되는것이 바로 발해대왕의 지위에 관한 문제이다. 발해봉건국가의 국가주권은 지주, 관료 등 봉건통치계급에게 속하였고 국가우에 있는 국왕은 최고의 권력자이며 최대의 착취자였다.  국왕은 대씨가문에서 원칙상 맏아들이 대대로 물려받았고 자식이 없을 경우에는 형제 또는 가까운 왕족에 의해 계승되였다.       발해에서는 왕을 《가독부》 또는 《성왕》, 《대왕》, 《황상》, 《기하》라고 불렀고 왕의 명령은 《교》 또는 《조》로, 왕의 아버지는 《로왕》, 어머니는 《태비》, 처는 《귀비》, 맏아들은 《부왕》, 그 아래의 자식들은 《왕자》라고 불렀다. 그리고 독자적인 년호를 만들어 사용하였으며 왕위는 세습되였다.       오늘까지 전해지는 많은 발해관계사료들은 발해대왕이 천자의 지위에 있었다는것을 보여준다. 그 가운데서도 독자적인 년호의 제정과 대왕, 황상, 성왕의 호칭, 3사3공제도의 존재 등은 국왕의 천자적지위와 발해가 천자국의 틀에 맞는 정치체제를 갖추고있던 대왕국이였다는것을 명백히 보여주고있다.   ㅡ 독자적인 시호, 년호의 제정 발해에서는 군주가 즉위하거나 그 어떤 상서로운 사변 또는 재난 등이 있을 때에는 년호가 새롭게 제정실시되군 하였다. 일반적으로 봉건사회에서 년호는 황제국가들에서만 독자적으로 제정실시될수 있으며 제후국이나 속국들에서는 자체로 제정할수 없고 다만 황제국의 년호를 그대로 사용하게 되여있었다. 그러므로 군주가 독자적인 년호를 제정하였는가 그렇게 하지 못하였는가 하는것은 최고통치자가 어떤 지위를 차지하고있었는가를 보여주는 중요한 징표의 하나라고 말할수 있다. 발해에서는 대조영으로부터 마지막 군주 대인선 집권시기에 이르기까지 모두 독자적인 년호들이 제정실시되였다. 오늘까지 전해지는 《협계태씨족보》, 《신당서》 발해전, 《정혜공주묘지병서》와 《정효공주묘지병서》와 같은 력사자료들과 금석문들에는 발해존립기간 제정실시된 각종 년호들이 기록되여있다.     력사기록들에 남아 전해지는 발해의 시호와 년호들은 발해가 존립 전기간 다른 나라의 년호를 쓴것이 아니라 독자적으로 년호를 제정하여 실시하였다는것, 그 최고통치자가 천자의 지위에 있었다는것을 보여주는 명백한 근거로 된다. ㅡ 발해군주에 대한 호칭 대왕, 황상, 성왕 발해에는 천자적지위에 있던 군주에 대한 여러가지 호칭이 있었다. 성왕이라는 호칭과 여러 금석문들에 남아있는 대왕, 황상이라는 호칭은 발해군주의 천자적지위를 명백히 증명하여준다. 현존하는 사료들에서 발해군주를 대왕으로 표현한것은 《정혜공주묘지병서》와 《정효공주묘지병서》, 《일본후기》의 기록이다. 《정혜공주묘지병서》와 《정효공주묘지병서》는 발해인들이 직접 남긴 금석문이며 대행대왕이라는 표현도 발해국왕의 국서에 올라있는 문구였다고 볼 때 대왕이라는 표현은 발해봉건사회에서 널리 사용되던 왕에 대한 호칭의 하나였다는것을 잘 알수 있다. 발해때의 대왕이라는 호칭은 고구려시기의 최고군주에 대한 칭호를 그대로 이어받은것이였다. 발해군주도 고구려의 최고주권자와 마찬가지로 제후세력들의 우에 있는 한급 높은 대왕으로서 천자급의 틀을 갖추고 행세하였다. 발해의 최고통치자는 천자급의 대왕이였기때문에 대왕이라는 호칭외에 황상, 성왕이라고도 불리웠으며 군주의 딸도 공주라고 하였다. 발해에서는 국왕의 신성불가침을 절대화하기 위하여 고구려시기의 성왕이라는 칭호를 그대로 왕에 대한 호칭으로 사용하였다. 특히 771년 문왕이 일본왕에게 보내는 국서에서 발해왕실이 천손 즉 천제의 자손이라고 하였다는것은 발해지배계급이 고구려시조 동명성왕때부터 시작된 천손사상으로 왕족혈통을 신성시하고 절대화하였다는것을 보여준다. 이처럼 대왕, 황상, 성왕 등으로 불리우던 발해군주는 전체 지배계급, 피지배계급우에 군림하고있던 최고통치자, 전제군주로서 발해의 통치체제는 천자국의 틀거리에 맞게 편성되여있었다.      발해의 중앙통치기구의 기본을 이룬 3성 6부 발해국가의 중앙정부기구에는 많은 관청들이 있었으나 기본을 이룬것은 3성 6부였다.       3성은 정당성, 선조성, 중대성이며 그 장관들인 대내상, 좌상, 우상을 3재상이라고 하였다. 6부는 충부, 인부, 의부, 지부, ​례부, 신부 등이였다.       발해국가의 행정은 기본적으로 이 3성 6부에 의하여 집행되였으며 봉건국왕의 《권위》를 보장하고 중앙집권적봉건통치를 강화하기 위한 실제적 집행단위였다. 발해에서 3성 6부제를 중심으로 하는 국가기구는 대체로 8세기 후반기에 와서 기본적으로 고정되였다. 6부의 각 장관은 경이라고 하였는데 이들은 정당성의 관리인 좌, 우사정의 아래에서 그의 지시를 받았다. 경의 아래에는 소경과 여러명의 랑중, 원외랑들이 있었다. 발해에는 3성6부보다 더 높은 위치에서 정치에 참가하는 《3사3공제도》도 있었다.       3사는 태사, 태부, 태보였는데 국왕은 이들을 신하로 대하지 않고 스승으로 대우하였다. 3공은 태위, 사도, 사공으로서 국왕을 도와 나라의 정치를 하며 어느 부서나 다 통관할수 있었다.       발해에는 3성 6부 아래에 많은 행정관청들이 있었다. 그러한 관청들로서는 중정대, 전중시, 종속시, 문적원, 태상시, 사빈시, 대농시, 사장시, 사선시, 주자감, 항백국, 화간원 등이 있었다. 이 기관들은 봉건관료기구의 내부조직과 관련된 임무를 수행하는것으로 되여있지만 실제적으로 인민들을 수탈하고 반항자들을 탄압하기 위한 폭압기구였다. 발해에서 이러한 기관들은 봉건귀족들 특히 왕실의 사치한 생활을 보장하는데 복무하였다.    발해의 지방통치제도 발해의 지방행정기구도 다른 봉건국가와 마찬가지로 중앙정부의 정책을 실현하기 위한 지방통치기구였다. 발해의 지방통치의 기본단위는 부, 주, 현이였고 그 아래에 일부 부곡과 촌 등이 있었으며 변방지역들에는 자치적성격을 띤 후국과 속령들이 있었다. 발해의 지방통치기구는 8세기 중엽에 5경 15부 62주로 정비되여있었고 각 주 밑에는 여러개의 현들이 있었다. 그리고 중요한 5개부에 경(京)을 두었다. 상경룡천부는 발해의 수도(녕안현 발해진)였으며 중경현덕부는 화룡, 남경남해부는 북청, 서경압록부는 집안, 동경룡원부는 부거에 위치하고있었다. 부의 장관을 도독, 주의 장관을 자사, 현의 장관을 현승이라고 하였는데 이들은 관할지역의 민사행정뿐아니라 재판권, 군사권까지도 그러쥐고 인민들을 가혹하게 억압착취하던 왕권의 대리자들이였다. 이처럼 발해의 중앙과 지방의 각급 관료들은 주로 고구려귀족들로 임명되였는데 그들은 그 지방의 군사권까지 모두 쥐고있은 권력자들이였다.
76    건국초기 발해국의 주요정책들 댓글:  조회:17  추천:0  2021-09-10
건국초기 발해국의 주요정책들 발해는 동방의 강국으로 위력을 떨치던 《해동성국》이였다. 발해가 초기부터 정치군사적위력을 강화하고 나라의 대외적지위를 높이면서 《해동성국》의 위용을 떨칠수 있게 된것은 건국직후 실시된 주요정책들의 직접적인 결과였다. 위대한 령도자 김정일동지께서는 다음과 같이 교시하시였다. 《정치에서 기본은 정책을 규정하고 집행하는것입니다.》 정치는 계급 또는 사회공동의 리익에 맞게 사람들의 활동을 통일적으로 조직하고 지휘하는 사회적기능으로서 여기에서 기본은 정책을 규정하고 집행하는것이다.       일반적으로 계급사회에서 정치를 한다는것은 일정한 계급이 자기의 요구와 리해관계에 맞게 정책을 작성하고 정치조직, 정치제도에 의거하여 그것을 집행해나가는 과정을 말한다. 정권을 쥔 계급이 어떤 정책을 작성하고 실시하는가 하는것은 그들의 계급적요구와 리해관계에 따르는것으로서 국가의 운영과 발전에 직접적인 영향을 준다.       △ 발해국에서 중무정책의 실시 발해는 건국초기 봉건국가의 안전을 지키고 국력을 강화하기 위한 중무정책을 실시하였다. 발해가 건국직후 실시한 중무정책은 무관을 중시하고 무예를 인재등용의 기본징표로 삼던 고구려의 상무적인 정치방식을 그대로 계승한것으로써 이 시기 정세발전의 요구에 맞게 봉건국가의 안전을 지키고 국력을 강화할수 있게 한 긍정적인 정책이였다. 발해가 중무정책을 실시한 시기는 건국직후부터 8세기 전반기경까지였다. 발해 초기의 대외관계에서 문관보다 무관의 역할이 매우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일본으로 간 발해의 첫 사신단은 조선동해를 건너 일본 동북부의 에조족(오늘의 아이누족의 조상)거주지역에 도착하였는데 24명가운데서 고인의이하 16명이 죽고 두령 고재덕 등 8명만이 겨우 살아남아 이데와에 도착하였다. 이 사신단의 사두는 무관인 녕원장군 랑장 고인의였으며 그밖에 우장군 과의도위 덕주와 별장 사항 등이 사신단성원으로 되여있었다.       그후 발해국은 759년까지 5차례에 걸쳐 사신단을 일본에 파견하였는데 일본에 파견된 사신단의 사두, 사사 등 주요인물들은 모두 무관직을 가진 사람들이였다.     일본뿐아니라 당나라에 파견된 사신들도 대부분 무관벼슬을 가진 관리들이였다.       발해는 당나라에도 많은 사신들을 파견하였다. 당나라사신 장행급과 최혼이 705년, 713년에 각각 발해를 방문한 후 두 나라사이의 관계가 어느정도 완화되면서 발해사신들의 당나라왕래가 빈번해지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8세기 중엽까지 여러가지 사명을 띤 발해사신들의 당나라왕래는 빈번하였지만 그들의 관직명을 정확히 전하는 사료는 거의 남아있지 않다. 그러나 이 시기 당나라에 파견된 발해사신들가운데서 당나라의 명예벼슬을 받은 사람들을 보면 대부분 무관의 벼슬이였다.       일반적으로 대외정책은 대내정책의 연장으로서 매개 나라의 대외관계에는 그 나라가 실시하고있는 대내정책이 그대로 반영된다. 해당 나라들의 대외관계는 사신들의 호상 래왕을 통하여 맺어지며 발전한다. 사신들은 봉건국가의 권력을 틀어쥐고 정치를 주도하는 정치세력을 대표하는 국가의 공식적인 인물들인것만큼 사신단성원들이 어떤 사람들로 구성되여있는가 하는것을 통하여 국가권력을 틀어쥔 정치세력에 대하여 알수 있다. 사신단성원들이 대부분 무관들로 구성되여있다는것은 당시 발해에서 무관들이 국가정치의 주역을 담당하고있었다는것을 보여준다. 이것은 결국 발해에서 군사를 중시하는 중무정책이 국가의 기본정책으로 되여있었다는것을 보여준다. 발해에서 중무정책은 8세기 50년대경까지 실시되였다. 그러면 발해가 건국 초기부터 중무정책을 실시한 목적이 어디에 있는가 하는것이다.       그 목적은 갓 창건된 봉건국가의 안전을 지키고 국력발전의 담보를 마련하기 위해서였으며 옛 고구려의 령토를 완전히 되찾고 강력한 봉건국가를 건설하기 위해서였다. 또한 고구려의 장수출신인 대조영이 발해건국을 위한 오랜 기간의 항전을 통하여 단련된 고구려군사들에 의거하여 국가정사를 운영하는것이 건국초기의 복잡한 정세하에서 권력지반을 공고히 하고 나라를 다스리는데서도 매우 유리하기때문이였다.       이처럼 건국후 8세기 전반기경까지 실시된 중무정책에 의하여 발해는 나라의 자주권과 안정을 지키고 강한 국력을 마련할수 있었다. 발해가 《해동성국》으로 출현할수 있었던 토대는 모두 중무정책에 의하여 마련되고 공고화되였으며 바로 여기에 발해정치사에서 중무정책의 실시가 가지는 의의가 있다.   중무정책에서 중문정책에로의 전환 중무정책에 의하여 발해의 국력이 강화되고 대외적지위가 높아진 8세기 후반기에 이르러 발해정치에서는 새로운 변화가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이 시기는 제3대왕 대흠무(문왕)집권시기(737년~793년)이다.       제2대왕(대무예)의 둘째 아들이였던 대흠무는 737년에 왕위에 올라 집권초기에 고왕(대조영)과 무왕(대무예)시기의 정책들을 계승하여 그것을 완수하는데 기본힘을 돌렸다. 특히 문왕은 무왕통치시기의 령토확장정책을 완수하는데 큰 힘을 넣었다.       문왕집권초기에 추진된 령토확장의 결과 8세기 40년대에 북부의 여러 말갈족들이 종속되고 그 지역들에 지방행정단위들을 설치할수 있는 조건이 마련되였다. 그리하여 발해건국직후부터 기본힘을 돌려온 발해변방의 여러 말갈족들에 대한 정복과 포섭이 기본적으로 일단락지어지고 나라의 령토는 훨씬 넓어지게 되였다. 당시 대외정세도 발해에 유리하게 변하고있었다.       732~733년 발해의 반침략전쟁이후에 발해에 대한 적대시정책의 실패와 저들에게 불리하게 변화된 대외적환경을 인정한 이웃나라들은 관계정상화를 지향하였으며 《안사의 란》을 전후하여 국내정세가 복잡하게 번져지자 발해와의 관계를 더욱 밀접히 하여 정치, 군사적인 도움을 받으려고 노력하였다. 당시 발해주변 나라들가운데는 발해에 대하여 정치, 군사적으로 위험을 조성하는 종족이나 나라가 없었으며 이것은 발해의 발전에 있어서 유리한 대외적환경으로 되였다.       발해는 중무정책에 의하여 유리하게 조성된 대내외적환경과 조건에 맞게 국력을 더욱 강화하기 위하여 8세기 50년대 말부터 정치방향을 변화시키기 시작하였다. 이 시기에 발해에서 실시된 기본정책은 종전의 중무정책과는 다른 중문정책이였다. 문왕통치시기의 정치를 중문이라고 하는것은 고왕과 무왕시기와 같이 주로 군사력에 의거하여 대내외정책을 수립하고 집행한것이 아니라 국가통치체제를 정비강화하고 그에 의거하여 경제, 문화발전에 힘을 넣으면서 정사를 운영하였기때문이다. 대흠무통치시기의 정치의 특징은 문왕이라는 왕의 시호에 명백히 나타나있다. 이런 의미에서 문왕통치중기이후 구체적으로 8세기 후반기를 발해정치에서 중문정책이 실시된 시기로 규정할수 있는것이다. 이처럼 발해에서 변화된 조건에 맞게 중무정책이 중문정책으로 이행되면서 중앙집권적봉건통치체제가 더욱 확대발전되였으며 국력도 더욱 강화되였다.
75    《해동성국》 발해의 건국 댓글:  조회:15  추천:0  2021-09-10
《해동성국》 발해의 건국 고구려유민들은 신라통치배들이 또다시 적들과 결탁한 다음에도 외래침략자들을 반대하여 계속 줄기차게 싸웠다. 침략자들을 반대하는 고구려유민들의 투쟁은 676년이후 여러가지 어렵고 복잡한 정황이 조성되였으나 조금도 수그러들지 않았으며 오히려 압록강이북지역을 중심으로 더욱 고조되였다. 위대한 령도자 김정일동지께서는 다음과 같이 교시하시였다. 《고구려를 계승한 발해는 7세기말부터 10세기초까지 200여년간 존재하였으며 정치, 경제, 문화가 크게 발전하여 〈해동성국〉으로 이름을 떨치였습니다.》     △ 대중상과 대조영에 의한 진국의 성립 고구려유민들의 줄기찬 투쟁과정에 점차 고구려를 계승한 새 나라를 세울수 있는 기초가 마련되여나갔으며 새로운 소국들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이 시기에 압록강류역과 그 부근일대의 고구려유민들에 의해 태백산(백두산)일대에서 《진국》이라는 고구려유민들의 소국이 출현하였다. 《삼국유사》와 《제왕운기》의 자료에 근거해보면 진국은 678년경에 처음으로 나타났으며 684년경에 자기 존재를 더욱 뚜렷이 하였다고 볼수 있다. 진국왕(진국공)은 대조영의 아버지 대(걸걸)중상이였다. 668년 9월 고구려왕조가 멸망한후에 침략자들은 전국 각지에 자기 군대를 파견하여 그곳을 강점하고 새로 저들의 지배체계를 세워보려고 획책하였다.       고구려멸망 당시 국가장부에 등록된 호구는 5부, 176개의 성에 69만여호였는데 침략자들은 그때 저들이 정복한 나라들에 대하여 실시한 상투적수법에 따라 초기에 계획하였던 9개의 《도독부》(도에 해당함), 42개의 《주》(군에 해당함), 100개의 《현》(작은 군에 해당함)가운데서 불과 도독부 4개와 주 10개밖에 설치하지 못하였다. 평양성에는 《안동도호부》라는것을 설치하고 설인귀를 그 장관(《안동도호》)으로 임명하여 2만의 군대를 가지고 통치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각 지방의 《도옥》, 《자사》, 《현령》 등의 자리에는 저들에게 투항한 반역자들을 앉히고 거기에 저들의 관리들을 끼워서 그들을 통제하려고 하였다.       고구려지역에 대한 침략자들의 강점책동은 고구려유민들을 강점자들을 몰아내기 위한 투쟁에로 적극 떨쳐나서게 하였다. 이러한 형편에서 강점자들은 저희들의 관리들을 통하여 실시하고있던 직접적통치방식을 철회하고 투항한 이전 고구려의 왕족들과 관리들을 통한 간접통치방식으로 그 방법을 변화시키게 되였다. 그리하여 고구려가 멸망한지 9년만인 677년에 강점자들에게 끌려가있던 고구려의 마지막왕인 고보장이 다시 료동지역에 나타나게 되였다.       《삼국사기》 권22 고구려본기 보장왕조에는 《의봉2년(667년-인용자) 정축년 봄 2월에 투항한 왕을 료동주도독으로 삼고 조선왕으로 책봉하였다. 료동에 돌아가서 남은 사람들을 안착시키도록 하였다. …왕이 료동에 이르러 반역을 꾀하면서 몰래 말갈과 내통하였다.》라고 기록되여있다.       강점자들은 보장왕을 조선국왕으로 임명하여 옛 고구려지역에 파견하면서도 그가 고구려유민들과 손을 잡고 저희들을 반대하여 나설것이 두려워 료동성에 있었던 《안동도호부》를 신성(료하서쪽 신민현부근, 후의 료빈탑으로 인정되고있음)으로 옮겨가 있게 하고 연남생을 《도호》로 임명하여 보장왕의 행동을 감시통제하게 하였다. 이것은 고구려를 속령화하고 투항한 고구려의 관리들을 내세워 간접적으로 통치하는 방법으로 넘어갔다는것을 의미한다. 한편 옛 고구려지역에서는 고구려유민들이 고국회복투쟁을 줄기차게 벌리고있었다. 여기에서 주도적역할을 한 사람이 바로 대중상과 대조영이였다. 대중상과 대조영은 말갈인 추장 걸사비우가 지휘하는 말갈인부대와 련합하여 수개월간 영주의 동쪽과 동남쪽의 여러 성들을 탈환하여 고국땅에서 강점자들을 소멸하고 9월에는 료서 고성에 옮겨와있던 《안동도호부》를 공격하여 이에 큰 타격을 주었다. 료동지역까지 세력범위를 확대하면서 고국회복투쟁을 벌리고있던 대중상과 대조영은 료동지역에 돌아온 보장왕을 리용하려고 그와 련계를 맺게 되였다. 빼앗긴 왕권을 회복하려는 의도를 가지고있던 보장왕도 대중상 등에게 의거하였다.       《협계태씨족보》 발해국왕세략사 태조 진국왕조에는 보장왕이 《료동에 이르러 중상(태조 진국왕 즉 대조영을 가리킴-인용자)과 서로 통하여 모반하려고 하였다.》고 씌여져있다. 즉 《삼국사기》에 기록된 보장왕이 내통한 《말갈》이란 바로 대중상과 대조영이 거느린 고구려유민세력을 비속화하여 가리킨 말이라는것을 알수 있다.       그러나 680년대에 들어서면서 고구려유민들의 고국회복투쟁에서는 새로운 변화가 생겼다. 그것은 고구려재건투쟁에서 중심적역할을 놀던 이전 고씨왕족들이 더이상 고국회복투쟁에 관여할수 없게 된것이였다. 677년에 료동지역에 온 이후 고구려유민들의 투쟁을 지지하고 그에 의거하여 왕권회복을 실현해보려던 보장왕은 그 내막이 탈로나 681년 강점자들에 의하여 다시 공주로 끌려갔다. 공주로 끌려간 보장왕은 그 다음해 682년에 그곳에서 죽었다. 더우기 683년에는 고구려의 고씨왕족이 세웠던 고구려국까지 사라짐으로써 옛 고구려령토에는 고구려왕족이 관여하는 고국회복투쟁이 완전히 없어지게 되였으며 이것은 항전세력들에게 새로운 조건을 조성해주었다. 이렇게 되자 대중상과 대조영은 이를 계기로 왕족을 내세우려던 종전의 방법을 바꾸어 독자적인 정치세력으로 나설것을 결심하게 되였다.       이에 대하여 《제왕운기》 하권 동국군왕개국년대병서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여있다. 《고구려의 옛 장수 대조영이 태백산 남쪽성에 의거하여 주나라 측천무후 원년 갑신(684년)에 나라를 세우고 이어 발해라고 이름을 삼았다.》       《제왕운기》의 기록과 제반사실들로 미루어보아 684년에 대중상과 대조영을 중심으로 한 고구려유민들이 발해대왕국의 전신국가로서 봉건소국 진국을 수립하였다는것을 알수 있다. 대중상과 대조영을 중심으로한 정치세력들이 봉건소국 진국을 세움으로써 고구려재건투쟁에서 자기의 지위를 더욱 높일수 있게 되였다. 684년이후 진국은 국력을 강화하면서 고구려를 재건하기 위한 투쟁을 더욱 적극적으로 벌려나갔으며 이로하여 압록강류역이북지역에서 침략자들은 더는 배겨낼수 없게 되였다.   ❖ 력사이야기: 대중상과 진국​   △ 침략자들을 반대한 고구려유민들의 투쟁, 발해의 건국 침략자들을 반대하는 고구려유민들의 투쟁은 영주지방에서 힘차게 벌어졌다. 영주지방의 고구려유민들은 696년에 고구려의 옛 장수인 대조영의 지휘밑에 말갈인, 거란인들과 합세하여 폭동을 일으켰다. 폭동군은 침략자들의 아성인 영주성을 들이쳐 도독을 처단하고 이 일대의 강점세력을 격파한 다음 고구려땅을 향해 동쪽으로 진격하기 시작하였다. 대조영이 거느린 고구려유민군사들이 동쪽으로 진격한 목적은 옛 고구려땅에서 침략자들을 완전히 몰아내고 그땅에 고구려사람들의 나라를 세우자는데 있었다.       침략자들은 영주지방에서 일어난 거란인들의 폭동을 진압한 다음 많은 무력을 동원하여 고구려유민군사들을 추격하여왔다. 그리하여 698년에 천문령 (료녕성 창무서쪽의 령)에서 치렬한 전투가 벌어지게 되였다. 이 전투에서 고구려유민군사들은 강점군을 완전히 섬멸하여버렸다. 이 반격이 얼마나 드세찼는가 하는것은 적장 리해고가 겨우 목숨만 건져가지고 혼자서 도망친 사실만으로도 잘 알수 있다.         천문령전투에서 참패를 당한 침략자들은 다시는 고구려유민군사들을 추격하지 못하였다. 천문령전투에서 결정적승리를 이룩한 대조영은 계속 동쪽으로 진격하여 동모산에 자리를 잡았다. 그는 이전 고구려령역안의 광범한 인민들을 집결하고 적의 침입에 대처하여 방어를 한층 강화하였다.   이처럼 침략자들과의 투쟁과정에 대조영을 중심으로 한 새 봉건세력집단이 형성강화되였는데 이들은 이미 이룩한 군사적승리와 정치적력량관계에 기초하여 698년에 소국인 진국을 확대발전시켜 발해국의 창건을 세상에 선포하였다. 발해국의 1대왕은 대조영이였고 초기수도는 동모산이였다.   ❖ 력사인물: 대조영   발해가 성립됨으로써 고구려의 옛땅을 차지하려던 침략자들의 기도는 완전히 파탄되게 되였으며 그후 거듭되는 외적들의 침입을 물리치고 민족의 자주권을 지켜나갈수 있는 담보가 마련되게 되였다. 세 나라 인민들 특히 고구려유민들의 완강하고도 줄기찬 투쟁에 의하여 침략자들이 우리 강토에서 종국적으로 쫓겨나고 발해가 성립됨으로써 신라통치배들의 외세의존정책에 의하여 빚어졌던 엄중한 민족적위기는 완전히 극복되고 우리 조국 력사상에는 이전의 세 나라를 대신하여 발해와 후기신라 두 나라가 존재하게 되였다.
74    7세기 당나라침략군을 몰아낸 세나라인민들의 투쟁 댓글:  조회:14  추천:0  2021-09-10
 7세기 당나라침략군을 몰아낸 세나라인민들의 투쟁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께서는 다음과 같이 교시하시였다. 《만일 삼국시기에 고구려, 신라, 백제 세 나라가 단합하여 외적을 물리쳤더라면 우리 조국은 더욱 발전하였을것입니다.》 삼국시기 고구려는 외적의 침략을 물리치기 위한 투쟁을 끊임없이 벌리지 않으면 안되였다. 그러나 백제와 신라통치배들은 고구려와 단합하여 외적을 물리칠 대신 내부싸움을 자주 벌려놓음으로써 우리 나라의 전반적발전을 저애하였다.    7세기 중엽 당나라와 신라통치배들의 결탁 신라통치배들은 남의 힘을 빌어서라도 고구려의 삼국통일정책을 가로막고 저들의 지배권을 넓히려는 야망밑에 당나라와 결탁(야합)하는 반역의 길로 나갔다. 신라통치배들의 이러한 기도는 7세기 40년대이후 더욱 로골화되였다. 640년대 전반기 신라통치배들은 당나라에 접근하기 시작하였다.       신라통치배들은 643년(선덕녀왕 12년) 9월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여 두 나라 군대가 《련합》하여 백제, 고구려를 공격할것을 요청하였으며 645년 당나라의 고구려침공때에는 그를 도와 3만명의 군대를 동원하는 죄악을 저질렀다.       640년대 후반기이후 신라는 당나라와 결탁하는 매국적인 행위를 감행하였다. 648년(진덕녀왕 2년) 신라 김춘추[金春秋(603-661년) -후의 태종무렬왕]가 당나라를 방문하여 범죄적결탁을 밀약한것은 그 중요한 계기로 되였다. 고구려침략에서 련속 패배를 당한 당나라는 이 무렵 종래와는 달리 신라와 본격적인 야합을 기도하였다. 이러한 시기에 김춘추가 당나라를 방문하였다.       당나라를 방문한 김춘추는 당나라와 매국적인 흥정판을 벌려놓고 두 나라 군대가 《련합》하여 고구려와 백제를 무너뜨린 다음 대동강이남의 땅은 신라가 차지하고 대동강이북의 광활한 고구려령토는 당나라가 차지한다는 내용의 비밀협약을 맺었다. 그런데 당시 당나라의 야심에는 또 다른것이 있었다. 그것은 신라와 결탁하여 고구려, 백제를 무너뜨린 다음 신라마저 정복하자는것이였다.       당나라는 신라통치배들과 밀약을 하였으나 고구려와의 전쟁에서 돌이킬수 없는 참패를 당한 까닭에 대규모적인 침략전쟁에 선뜻 뛰여들수 없었다. 그리하여 밀약후에도 10여년동안이나 기회를 엿보며 침략전쟁준비를 하였다. 한편 신라통치배들은 당나라군을 하루빨리 끌어들일 기도밑에 관료의복제도를 당나라식으로 고치는가 하면 당나라의 년호를 쓰는 등 사대주의적인 조치를 취하였으며 659년에 또다시 사신을 파견하여 원정군을 보내줄것을 요청하였다. 이처럼 신라통치배들은 백제, 고구려를 무너뜨리고 신라마저 먹으려는 당나라와 결탁하고 당나라군대를 끌어들임으로써 우리 민족사에 씻을수 없는 엄중한 죄악적후과를 남기였다.    라당련합군의 침공을 반대한 백제, 고구려인민들의 투쟁 당나라침략자들은 7세기 60년대에 이르러 신라의 청병을 구실로 대규모적인 무력침공에 들어섰다. 당시 당나라침략자들은 먼저 라당련합으로 백제를 무너뜨린 다음 그길로 신라를 정복하고 제일 강대한 고구려를 공격하여 먹어보자는것이였다. 만일 신라를 당장 정복할수 없는 경우 련합을 유지하여 고구려를 먼저 정복하고 다음에 신라를 먹을것을 계획하고있었다. 당나라와 신라는 660년에 먼저 백제를 대규모적인 무력으로 침공하였다. 660년 6월 소정방이 거느린 13만명의 당나라침략군은 1 900여척의 배로 덕물고를 거쳐 금강하구로 기여들었고 김유신이 거느린 5만명의 신라군은 동쪽으로부터 공격을 개시하였다.       당시 백제의 형편은 국력이 심히 약화되고 혼란이 조성되여 불안정한 상태였다. 그것은 의자왕과 봉건통치배들속에서 부화방탕한 생활이 계속되고 간신이 성행하여 충신들이 모해를 당하고있었기때문이였다. 이렇게 안일해이되여있던 백제의 의자왕과 봉건통치배들은 대응책을 시급히 세울 대신 당나라를 먼저 막아야 한다거니, 신라를 먼저 막아야 한다거니 하면서 시간을 보내였으며 이 사이에 라당련합군은 백제의 국내깊이까지 기여들수 있었다.       660년 7월 신라군은 별로 저항을 받음이 없이 천년의 요새 탄현을 넘어 황산벌(충청남도 론산군 련산동쪽 5리지점)로 밀려들었으며 당나라침략군은 금강을 거슬러올랐다. 이리하여 라당련합군은 백제의 수도 사비성으로 물밀듯이 쓸어들었다. 백제의 인민들과 군인들은 때늦게나마 결사적으로 싸웠다. 계백장군이 거느린 5 000명의 백제군사들은 황산벌에서 5만명의 신라군을 맞받아 용감히 싸웠다. 황산벌전투에서 그들은 4차례나 신라군의 공격을 물리치고 적들의 사비성공격을 지연시켰다.    혁명일화: 계백은 애국적인물​     한편 백제군은 금강을 거슬러오는 당나라침략군 13만명이 소정방의 지휘밑에 기여들자 2차례의 완강한 방어전을 벌리여 큰 타격을 주었다. 적들이 사비성을 포위공격하게 되자 백제의 의자왕과 대신들은 제 한목숨만을 건지려고 수도를 버리고 웅천(공주)으로 도망쳤다. 사비성은 7월 13일 적의 손아귀에 들어가게 되였으며 의자왕은 싸우는 인민들을 배반하고 7월 18일 적에게 항복하고말았다. 이리하여 백제봉건왕조는 멸망하였다.     백제강점후 라당련합군은 고구려침공에 집중하였다. 당나라침략자들은 660년 말~662년에 고구려에 대한 대규모적인 무력침공을 감행하였다.       고구려인민들은 연개소문장군의 지휘밑에 적들의 침략을 짓부셔버리였다. 특히 고구려군은 662년 1월 당나라의 소정방, 방효태가 거느린 침략군과의 사수(합장강)격전에서 방효태와 그의 아들 13명을 포함한 1개 군단을 모조리 소멸하였다. 적장 소정방은 어찌나 혼쌀이 났던지 산속에 숨었다가 겨우 도망쳐 목숨을 건지였다고 한다.       그러나 그후 고구려내부의 정세는 연개소문이 죽은 후 급변하였다. 연개소문이 666년에 죽자 당나라는 그 기회에 고구려를 내부로부터 와해시키려고 기도하였으며 적들의 간교한 책동에 의하여 연개소문의 세 아들사이에는 권력싸움이 벌어지게 되였다. 연개소문이 죽은 뒤 대막리지자리를 차지하고 군사지휘권을 잡고있던 연남생은 권력싸움에서 밀리우게 되자 넓은 지역과 많은 군대를 끌고 당나라에 투항하는 반역행위를 감행하였으며 연개소문의 동생 연정토도 자기관하 12개성의 많은 주민들을 끌고 신라에 투항하였다. 고구려통치층안에서 일어난 추악한 권력싸움과 정치적혼란, 투항변절은 강력한 중앙집권적통치체제를 뒤흔들어놓았으며 나라의 방위력을 급격히 약화시켰다.   라당련합군은 668년 고구려에 대한 총공격을 개시하였다. 50만의 당나라침략군과 20만의 신라군은 륙지와 바다, 북쪽과 남쪽에서 물밀듯이 쓸어들었다.         당나라침략군의 주력은 반역자 연남생을 길잡이로 앞세우고 압록강을 건너 평양으로 공격하였고 남쪽에서는 류인궤가 거느린 당나라침략군과 신라군이 평양성으로 북상하였다. 이리하여 평양성은 668년 8월 수십만대군의 완전포위에 들게 되였다.       이 엄혹한 형편에서도 고구려인민들은 평양성을 지키기 위하여 결사적으로 싸웠으며 적들에게 심대한 타격을 주었다. 치렬한 공방전은 한달이상이나 계속되였다. 그러나 668년 9월 고구려군의 지휘를 맡았던 신성이 변절투항하였고 보장왕을 비롯한 봉건통치배들은 싸우는 인민들을 배반하고 투항하였다. 결국 근 1 000년간 동방대강국으로 위용을 떨치던 고구려는 무너지게 되였다.       고구려말기의 력사는 나라의 통수체제, 방위체제가 마비되고 국내의 단합이 이루어지지 못하면 아무리 강대한 국력을 가진 나라라 하더라도 그 힘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고 망하게 된다는것을 교훈으로 남기였다. 고구려가 무너진것은 힘이 약해서가 아니라 집권층안에서 일어난 추악한 권력싸움과 연개소문의 아들의 변절투항으로 강대한 자기의 힘을 제대로 발휘할수 없었기때문이며 라당련합군의 공격때문이였다.       결국 신라통치자들의 반역적인 외세의존행위로 하여 강대했던 고구려는 무너지고 거의 완성단계에 이르렀던 삼국통일도 실현되지 못하였다. 당나라침략자들은 고구려가 무너지자 평양에 《안동도호부》를 설치하고 설인귀를 그 우두머리(안동도호)로 들여앉히였다. 그리고 그 밑에 9개의 도독부를 두어 동방침략의 거점으로 삼았다. 이때부터 고구려인민들은 강점자들을 자기 강토에서 몰아내기 위한 투쟁을 벌리지 않으면 안되였다.    669~676년 당나라강점군을 몰아내기 위한 삼국인민들의 단합된 투쟁 고구려가 무너진 후 당나라침략자들은 신라마저 집어삼킬 흉계를 로골적으로 드러내면서 정복전쟁을 기도하였다. 이리하여 온 나라 온 민족이 외세에게 먹히울수 있는 긴박한 정세가 조성되였다. 이것은 신라통치배들의 외세의존정책에 의해 빚어진 산물이였다.       이 엄혹한 시기에 세나라인민들은 힘을 합쳐 당나라침략군을 몰아내기 위한 투쟁에 일떠섰다. 이 투쟁은 본질에 있어서 외적에게 빼앗긴 자기의 령토와 겨레를 되찾기 위한 정의의 싸움이였다. 한편 이 시기 신라통치배들은 당나라가 처음의 《약속》과는 달리 고구려, 백제땅을 독차지하고 신라마저 먹으려는 조건에서 당나라침략군과의 싸움에 나서지 않을수 없었다.       이때에도 신라통치배들은 대동강이남지역까지만 차지하려고 하였다. 당나라강점군을 몰아내기 위한 세나라인민들의 투쟁은 669년경부터 시작되여 온 나라 각지에서 벌어졌다. 북방에서는 고구려항전군이 이르는 곳마다에서 당나라강점군에 대한 공세를 취하였다.       670년 3월 태대형 고연무가 지휘한 1만의 고구려항전군은 설오유가 지휘하는 1만의 신라군과 합세하여 압록강을 건너 옥골로 진출하여 적에게 큰 타격을 안기였으며 672년 8월에는 백수성에서 적들에게 심대한 타격을 주고 수천명의 목을 잘라버리였다.       고구려인민들의 투쟁은 압록강이남지역에서도 치렬하게 벌어졌다. 668년 말부터 각지에서 당나라강점자들을 반대하는 싸움을 힘있게 벌리고있던 고구려인민들은 평양에 설치되여있던 《안동도호부》를 669년경에 료동지방의 신성(중국 료녕성 무순부근)으로 쫓아버렸다. 한편 고구려의 수림성사람인 대형 검모잠은 항전부대를 조직하여 국모성을 중심으로 맹렬한 활동을 벌리였으며 남으로 진격하면서 당나라의 관리들을 처단하였다. 그리고 조선서해 사야도(소야도)에 피신해있던 보장왕의 서자 안승을 한성(장수산일대)에 데려다놓고 《고구려국》의 재건을 선포하였다.     남방에서는 백제인민들이 670년 7월 신라군과 함께 백제땅에서 당군을 격파하고 63개의 성을 탈환하였으며 672년 초에는 백제의 거의 전지역을 회복하였다. 669년 2월에 당나라침략군의 우두머리의 하나였던 리적이 자기 왕에게 보낸 보고에는 압록강이북지역에서 저들이 장악한 성은 14개뿐이라고 씌여있었다. 이것은 고구려군민들이 처음부터 완강한 투쟁을 벌려 강점자들에게 치명적타격을 주었으며 압록강이북의 많은 성들에 적들이 미치지 못하고있었다는것을 보여준다. 당나라통치배들은 수십만의 대군을 내몰아 675년경부터 새로운 공세를 기도하였다. 이때 세나라인민들은 과감한 투쟁을 벌려 적의 공세를 걸음마다 분쇄, 격파하였다.       신라군은 675년 9월 천성(례성강어구)에 침입한 당나라침략군 1 400명을 소탕하고 적선 40여척, 군마 1 000필을 로획하는 승리를 거두었다. 9월 말에는 매초성(경기도 양주)에 둥지를 틀고있던 20만의 당나라침략군을 공격하여 수만명을 살상포로하고 군마 3만여필과 수많은 군수물자들을 로획하는 전과를 이룩하였으며 도주하는 적을 추격하여 지금의 강원도 덕원, 문천일대로 진출하였다.       675년 10월 이후에도 크고작은 18차례의 전투를 진행하여 6 000여명의 적을 소탕하고 수백마리의 군마를 로획하였다. 676년 11월 신라군은 기벌포(금강하구)에서 적장 설인귀가 거느린 당나라 수군과 22차에 걸치는 격전끝에 4 000여명을 소멸하는 승리를 거두었다. 그후 적들은 압록강이남으로 더는 기여들 엄두를 내지 못하였다. 이처럼 세나라인민들은 669~676년간에 100여차의 전투를 벌려 당나라강점자들을 압록강이남지역에서 완전히 몰아내는데 성공하였다. 이것은 이 시기 민족의 위기를 극복해나가는데서 세나라인민들이 이룩한 큰 성과였다. 신라통치배들의 매국배족행위로 말미암아 세나라 전 강토가 당나라침략자들에게 강점당할 위기를 겪게 되였지만 애국적군민들은 희생적인 투쟁으로 적들을 압록강이남지역에서 몰아내고 위기를 극복하였다. 그러나 신라통치배들은 인민들의 투쟁에 편승하여 백제의 전지역과 고구려의 대동강이남지역을 차지한 다음 투쟁대오에서 떨어져나감으로써 또 하나의 큰 죄악을 저질렀다.
73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 대한민국의 국보國寶 댓글:  조회:58  추천:0  2021-09-01
      번호 국보 지역 시대 재건시대 비고 001 평양성 평양시 중구역 고구려     002 안학궁성  평양시 대성구역 안학동  고구려     003 보통문 평양시 중구역 보통문동  고구려 1473년    004 대동문 평양시 중구역 대동문동  고구려 1635년    005 숭인전 평양시 중구역 종로동 고구려 1352~1428년    006 숭령전 평양시 중구역 종로동 조선 1714년  동명왕 사당  007 보현사 구층탑 평안북도 향산군 향암리  고려     008 대성산성 평양시 대성구역 대성동  고구려     009 청암리성 평양시 대성구역  고구려     010 대성산남문 평양시 대성구역 대성동  고구려     011 대성산련못떼 평양시 대성구역 대성동  고구려     012 대성산고구려무덤떼 평양시 대성구역 대성동  고구려   세계유산 고구려 고분군 013 법운암 평양시 만경대구역 룡봉리  고구려 조선    014 용곡서원 평양시 만경대구역 룡봉리 조선 1713년    015 룡산리고구려무덤떼 평양시 력포구역 룡산리  고구려   세계유산 고구려 고분군 016 연광정 평양시 중구역 대동문동 고구려 1670년    017 부벽루 평양시 중구역 금수산 고구려 1614년    018 칠성문 평양시 중구역 경상동 고구려 1711, 1764년    019 을밀대 평양시 중구역 경상동 고구려 1714년    020 청류정 평양시 중구역 경상동 고구려 1716년    021 최승대 평양시 중구역 모란봉 고구려 1716, 1849년    022 전금문 평양시 중구역 경상동 고구려 1714년    023 평양종 평양시 중구역 대동문동 조선     024 홍복사7층탑 평양시 모란봉구역 개선동 룡화사  고려     025 금강사터  평양시 대성구역 청암토성내  고구려     026 호남리사신무덤 평양시 삼석구역 호남리  고구려   세계유산 고구려 고분군 027 검은모루유적 평양시 상원군 흑우리 선사시대     028 강서세무덤 남포시 강서구역 삼묘리 고구려   세계유산 고구려 고분군 029 약수리벽화무덤 남포시 강서구역 약수리  고구려   세계유산 고구려 고분군 030 수산리벽화무덤 남포시 강서구역 수산리 고구려   세계유산 고구려 고분군 031 백상루 평안남도 안주시 안주읍 고려 1753년    032 강선루 및 동명관 평안남도 성천군 성천읍 고려 1768년  성천객사  033 훈련정 평안남도 평원군 평원읍 미두산  조선     034 안국사 평안남도 평성시 봉학동 청룡산 고구려 1785년    035 방선문 평안남도 성천군 성천읍  조선 1727년  성천객사의 바깥문  036 동명왕릉 평양시 력포구역 룡산리  고구려 1994년  세계유산 고구려 고분군 037 황룡산성 남포시 룡강군 옥도리 오석산 고구려 919년  세계유산 고구려 고분군 038 자모산성 평안남도 평성시 어중리  고구려     039 쌍기둥무덤 남포시 룡강군 룡강읍  고구려   세계유산 고구려 고분군 040 보현사 평안북도 향산군 향암리 묘향산 고려     041 상원암 평안북도 향산군 향암리 묘향산  고려   보현사 암자 042 축성전 평안북도 향산군 향암리 묘향산  조선   보현사  043 불영대 평안북도 향산군 향암리 묘향산  조선   보현사  044 구성남문 평안북도 구성시 동문동  고려   구주성 남문  045 창성향교 평안북도 창성군 창성읍  조선   보광전, 천주루  046 천주사 평안북도 영변군 영변읍  조선     047 륙승정 평안북도 영변군 영변읍  조선     048 천리장성 평안북도 창성군 금야리  고려     049 녕변남문 평안북도 영변군 영변읍  고려     050 서운사 평안북도 영변군 영변읍 약산  고려     051 통군정 평안북도 의주군 의주읍 고려     052 의주남문 평안북도 의주군 의주읍  조선     053 금광사 평안북도 의주군 금광리  조선     054 심원사 평안북도 박천군 상양리  후기신라     055 양화사 평안북도 태천군 상단리  후기신라     056 룡오리산성 평안북도 태천군 룡상리  고구려     057 관음전 평안북도 향산군 향암리  고려   보현사  058 백마산성 평안북도 피현군 백마로동자구  고구려     059 성동리다라니석당 평안북도 향산군 향암리  고려     060 구주성 평안북도 구성시 고려     061 룡한산성 평안북도 곽산군 곽산읍 릉한산 고구려     062 룡골산성 평안북도 염주군, 피현군 고구려     063 녕변철옹성 평안북도 영변군 영변읍 고구려     064 인풍루 자강도 강계시 충성동  조선     065 강계망미정 자강도 강계시 부창동  조선   강계읍성의 남장대  066 강계아사 자강도 강계시 북문동  조선   강계력사박물관으로 사용 중  067 고국원왕릉(안악 3호분)  황해남도 안악군 오국리  고구려   세계유산 고구려 고분군 068 부용당 황해남도 해주시 부용동  조선     069 해주석빙고 황해남도 해주시 옥계동  고려     070 해주9층탑 황해남도 해주시 해청동 고려     071 해주5층탑 황해남도 해주시 옥계동 고려     072 순명문 황해남도 해주시 영광동 고려   해주읍성 남문  073 안악제1호무덤 황해남도 안악군 대추리  고구려   세계유산 고구려 고분군 074 안악제2호무덤 황해남도 안악군 대추리  고구려   세계유산 고구려 고분군 075 월정사 황해남도 안악군 월정리  후기신라     076 로암리고인돌 황해남도 안악군 로암리  청동기 시대     077 강서사 황해남도 배천군 강호리 고려     078 룡동리고인돌 황해남도 배천군 룡동리 청동기 시대     079 소현서원 황해남도 벽성군 석담리 조선     080 자혜사 황해남도 신천군 서원리 고려     081 현암 황해북도 재령군 서림리  후기신라     082 해주다라니석당 황해남도 해주시 해청동  고려     083 학림사5층탑 장연군 학림리  고려     084 관산리고인돌 황해남도 은율군 관산리  청동기 시대     085 광조사진철대사비 황해남도 해주시 학현동 고려     086 연안읍성 황해남도 연안군 연안읍  고구려     087 성불사 황해북도 사리원시 정방리  후기신라     088 정방루 황해북도 사리원시 정방리  고려   정방산성의 남문  089 정방산성 황해북도 사리원시 정방리  고려     090 성장김성업비 황해북도 사리원시 정방리  조선     091 연탄심원사 황해북도 연탄군 연탄읍  고려     092 귀진사 황해북도 서흥군 송월리  고려     093 태백산성 황해북도 평산군 산성리  고구려     094 석왕사 강원도 금강군 설봉리  고려     095 신계사터 강원도 금강군 온정리 고구려     096 장안사터 강원도 금강군 내강리 고구려     097 표훈사 강원도 금강군 내강리 후기신라     098 보덕암 강원도 금강군 내강리 신라     099 정양사 강원도 금강군 내강리 신라   금강산4대사찰  100 금장암사자탑 강원도 금강군 내강리 고려     101 장연사3층탑 강원도 금강군 내강리 후기신라   금강산3옛탑  102 묘길상 강원도 금강군 내강리 고려     103 가학루 강원도 안변군 안변읍  후기신라     104 보현사 강원도 안변군 령신리  후기신라     105 명적사 강원도 원산시 영삼리  신라     106 주둔리 무지개다리 고성군 주둔리  고려     107 함흥본궁 함경남도 함흥시 사포구역 소나무동  조선   함흥성 북장대의 누정  108 구천각 함경남도 함흥시 동흥산구역  고려   함경감찰사 감영 109 선화당 함경남도 함흥시 동흥산구역  조선     110 황초령 진흥왕 순수비 함경남도 함흥시 동흥산구역  신라   함흥역사박물관 111 마운령 진흥왕 순수비 함경남도 함흥시 동흥산구역  신라   함흥역사박물관 112 정광사 함경남도 리원군 원사리  조선     113 량천사 함경남도 고원군 락천리  후기신라     114 군자루 함경남도 금야군 금야읍  조선     115 룡흥사 함경남도 영광군 봉흥리  고려     116 동덕사 함경남도 단천시 두연리  고려     117 공민루 함경남도 단천시 양산동  조선     118 경성읍성 함경북도 경성시 승암로동자구  고려     119 경성읍성남문 함경북도 경성시 승암로동자구  고려     120 개심사 함경북도 명천군 보천리 칠보산 발해     121 쌍계사 함경북도 화성군 부암리  조선     122 만월대 개성시 송악동  고려     123 공민왕릉 개성시 하선리  고려     124 개성남대문 개성시 북안동  조선     125 관음사 개성시 박연리  고려     126 대흥산성 개성시 박연리  고려     127 개성 성균관 개성시 방직동  고려     128 숭양서원 개성시 선죽동  고려     129 발어참성 개성시 송악동  후기신라     130 개성옛성 개성시 송악동  후고구려      131 첨성대 개성시 송악동  고려     132 흥국사탑 개성시 방직동  고려   고려박물관 133 령통사5층탑 개성시 룡흥리  고려     134 화장사부도 개성시 룡흥리  고려     135 불일사5층탑 개성시 방직동  고려   고려박물관 136 연복사종 개성시 북안동  고려     137 적조사철조여래좌상 개성시 방직동  고려   고려박물관 138 표충비 개성시 선죽동  조선     139 현화사7층탑 개성시 방직동  고려   고려박물관 140 글자새긴성돌 평양시 중구역 종로동  고구려     141 영산전 평안북도 향산군 향암리  고려     142 김응서집 남포시 룡강군 옥도리  조선     143 수충사 평안북도 향산군 향암리  조선     144 보현사8각13층탑 평안북도 향산군 향암리  고려     145 경암루 황해북도 사리원시 경암동  조선     146 칠렬사터 평안남도 안주시 안주읍        147 중흥사당간지주 평양시 모란봉구역 인흥동  고구려     148 영명사8각석불감 평양시 모란봉구역 개선동  고려     149 보현사비 평안북도 향산군 향암리  고려     150 광제사 함경남도 북청군 죽상리  조선     151 현화사비 개성시 방직동  고려   고려박물관 152 광통보제선사비 개성시 해선리  고려     153 오룡사법경대사비 개성시 룡흥리  고려     154 관음사대리석관음상 평양시 중구역 대동문동  고려     155 령통사대각국사비 개성시 룡흥리  고려     156 덕흥리벽화무덤 남포시 강서구역 덕흥동  고구려   세계유산 고구려 고분군 157 진북루 량강도 갑산군 갑산읍  조선     158 안주성 평안남도 안주시 안주읍  고구려     159 선죽교 개성시 선죽동  고려     160 고구려나무다리 평양시 대성구역 휴암동, 청호동  고구려     161 덕화리무덤 평안남도 대동군 덕화리  고구려     162 유점사종 강원도 고성군 월비산리  조선     163 룡화사 평양시 모란봉구역 개선동  고려     164 광법사 평양시 대성구역 대성동  고구려     165 원산리청자가마터제1호 황해남도 봉천군 원산리  고려     166 원산리청자가마터제2호 황해남도 봉천군 원산리  고려     167 원산리청자가마터제3호 황해남도 봉천군 원산리 고려     168 원산리청자가마터제4호 황해남도 봉천군 원산리 고려     169 자혜사5층탑 황해남도 신천군 서원리  고려     170 자혜사석등 황해남도 신천군 서원리  고려     171 패엽사터 황해남도 안악군 패엽리  고려     172 고산동고구려우물 평양시 대성구역 고산동  고구려     173 정릉사 평양시 력포구역 룡산리  고구려     174 단군릉 평양시 강동군 문흥리  고구려(고조선)      175 순장무덤 평안남도 성천군 룡산리  청동기 시대     176 석왕사호지문 강원도 고산군 설봉리  조선     177 안양암마애삼존불상 강원도 금강군 내강리  고려     178 온정리마애불립상 강원도 고성군 온정리  고려     179 왕건릉 개성시 해선리  고려     180 온달장군과 평원왕의 공주의 무덤(진파리4호무덤)  평양시 력포구역 룡산리  고구려   세계유산 고구려 고분군 181 장군고흘의 무덤(진파리1호무덤)  평양시 력포구역 룡산리  고구려   세계유산 고구려 고분군 182 향단리 돌관무덤 평양시 강동군 향단리  청동기 시대     183 황대성과 고인돌 평양시 강동군 향목리  청동기 시대     184 정릉사8각7층탑 평양시 력포구역 룡산리  고구려     185 광법사8각5층탑 평양시 대성구역 대성동  고려     186 정양사3층탑 강원도 금강군 내강리  후기신라     187 청해토성 함경남도 북청군 하호리  발해     188 화성동제단 평양시 룡성구역 화성동  고조선     189 삼성사 황해남도 안악군 패엽리 구월산  조선     190 룡강큰무덤 남포시 룡강군 룡강읍  고구려     191 신계사 강원도 고성군 온정리  신라     192 령통사 개성시 룡흥리  고려     193 북관대첩비 함경북도 김책시 임명리  조선           1 서울 숭례문(남대문) 국보  1호 서울 중구 조선 태조 2 원각사지 십층석탑 국보  2호 서울 종로구 조선 초기 3 북한산 신라 진흥왕순수비 국보  3호 서울 종로구 신라 진흥왕 4 고달사지 부도 국보  4호 경기 여주군 통일신라 경덕왕 5 법주사 쌍사자석등 국보  5호 충북 보은군 통일신라 성덕왕 6 중원 탑평리 칠층석탑 국보  6호 충북 충주시 통일신라 7 봉선 홍경사 사적 갈비 국보  7호 충남 천안시 고려 현종 8 성주사 낭혜화상 백월보광 탑비 국보  8호 충남 보령시 통일신라 진성여왕 9 부여 정림사지 오층석탑 국보  9호 충남 부여군 백제 후기 10 실상사 백장암 삼층석탑 국보 10호 전북 남원시 통일신라   11 미륵사지 석탑 국보 11호 전북 익산시 백제 후기 12 화엄사 각황전앞 석등 국보 12호 전남 구례군 통일신라 13 무위사 극락전 국보 13호 전남 강진군 조선 세종 14 은해사 거조암 영산전 국보 14호 경북 영천시 조선 초기 15 봉정사 극락전 국보 15호 경북 안동시 고려 후기 16 안동 신세동 칠층전탑 국보 16호 경북 안동시 통일신라 17 부석사 무량수전앞 석등 국보 17호 경북 영주시 통일신라 18 부석사 무량수전 국보 18호 경북 영주시 고려 중기 19 부석사 조사당 국보 19호 경북 영주시 고려 후기 20 불국사 다보탑 국보 20호 경북 경주시 통일신라   21 불국사 삼층석탑 국보 21호 경북 경주시 통일신라 22 불국사 연화교 칠보교 국보 22호 경북 경주시 통일신라 23 불국사 청운교 백운교 국보 23호 경북 경주시 통일신라 24 석굴암 석굴 국보 24호 경북 경주시 통일신라 25 신라 태종무열왕릉비 국보 25호 경북 경주시 통일신라 26 불국사 금동 비로자나불좌상 국보 26호 경북 경주시 통일신라 경덕왕 27 불국사 금동 아미타여래좌상 국보 27호 경북 경주시 통일신라 28 백률사 금동 약사여래입상 국보 28호 경북 경주시 통일신라 29 성덕대왕 신종 (에밀레종) 국보 29호 경북 경주시 통일신라 혜공왕 30 분황사 석탑 국보 30호 경북 경주시 신라 선덕여왕   31 경주 첨성대 국보 31호 경북 경주시 신라 32 해인사 대장경판 국보 32호 경남 합천군 고려 33 창녕 신라 진흥왕 척경비 국보 33호 경남 창녕군 신라 진흥왕 34 창녕 술정리동 삼층석탑 국보 34호 경남 창녕군 통일신라 35 화엄사 사사자 삼층석탑 국보 35호 전남 구례군 통일신라 36 상원사 동종 국보 36호 강원 평창군 통일신라 37 경주 구황리 삼층석탑 국보 37호 경북 경주시 통일신라 38 고선사지 삼층석탑 국보 38호 경북 경주시 통일신라 초기 39 월성 나원리 오층석탑 국보 39호 경북 경주시 통일신라 초기 40 정혜사지 십삼층석탑 국보 40호 경북 경주시 통일신라   41 용두사지 철당간 국보 41호 충북 청주시 고려 광종 42 목조 삼존불감 (송광사) 국보 42호 전남 순천시 고려? 43 고려 고종제서 (송광사) 국보 43호 전남 순천시 고려 고종 44 보림사 삼층석탑 및 석등 국보 44호 전남 장흥군 통일신라 경문왕 45 부석사 소조여래좌상 국보 45호 경북 영주시 고려 중기 46 부석사 조사당 벽화 국보 46호 경북 영주시 고려 후기 47 쌍계사 진감선사 대공탑비 국보 47호 경남 하동군 통일신라 정강왕 48 월정사 팔각구층석탑 국보 48호 강원 평창군 고려 초기 49 수덕사 대웅전 국보 49호 충남 예산군 고려 충렬왕 50 도갑사 해탈문 국보 50호 전남 영암군 조선 성종   51 강릉 객사문 국보 51호 강원 강릉시 고려 후기 52 해인사 장경판전 국보 52호 경남 합천군 조선 성종 53 연곡사 동부도 국보 53호 전남 구례군 통일신라 54 연곡사 북부도 국보 54호 전남 구례군 고려 초기 55 법주사 팔상전 국보 55호 충북 보은군 조선 인조 56 송광사 국사전 국보 56호 전남 순천시 조선 초기 57 쌍봉사 철감선사탑 국보 57호 전남 화순군 통일신라 경문왕 58 장곡사 철조 약사여래좌상부석조대좌 국보 58호 충남 청양군 통일신라 후기 59 법천사 지광국사 현묘탑비 국보 59호 강원 원주시 고려 선종 60 청자 사자 유개향로 국보 60호 서울 종로구 고려   61 청자 비룡형주자 국보 61호 서울 종로구 고려 62 금산사 미륵전 국보 62호 전북 김제시 조선 인조 63 도피안사 철조비로자나불좌상 국보 63호 강원 철원군 통일신라 경문왕 64 법주사 석연지 국보 64호 충북 보은군 통일신라 65 청자 기린 유개향로 국보 65호 서울 성북구 고려 66 청자 상감 유죽연로원앙문정병 국보 66호 서울 성북구 고려 67 화엄사 각황전 국보 67호 전남 구례군 조선 숙종 68 청자상감 운학문매병 국보 68호 서울 성북구 고려 69 개국원종공신록권 국보 69호 부산 서구 조선 태조 70 훈민정음 국보 70호 서울 성북구 조선 세종   71 동국정운 (권1,6) 국보 71호 서울 성북구 조선 세종 72 금동 계미명 삼존불 국보 72호 서울 성북구 백제 위덕왕 73 금동 삼존불감 국보 73호 서울 성북구 고려 초기 74 청자 압형수적 국보 74호 서울 성북구 고려 75 표충사 청동함은향완 국보 75호 경남 밀양시 고려 명종 76 이충무공 난중일기 부서간첩 임진장초 국보 76호 충남 아산시 조선 선조 77 의성 탑리 오층석탑 국보 77호 경북 의성군 통일신라 전기 78 금동 미륵보살반가상 국보 78호 서울 종로구 삼국시대 79 경주 구황리 금제 여래좌상 국보 79호 서울 종로구 통일신라 초기 80 경주 구황리 금제 여래입상 국보 80호 서울 종로구 통일신라 초기   81 감산사 석조 미륵보살 입상 국보 81호 서울 종로구 통일신라 성덕왕 82 감산사 석조 아미타불 입상 국보 82호 서울 종로구 통일신라 83 금동 미륵보살반가상 국보 83호 서울 종로구 삼국시대 후기 84 서산 마애삼존불상 국보 84호 충남 서산시 백제 후기 85 금동 신묘명 삼존불 국보 85호 경기 용인시 삼국시대 86 경천사 십층석탑 국보 86호 서울 종로구 고려 충목왕 87 금관총 금관 국보 87호 경북 경주시 신라 88 금관총 과대 및 요패 국보 88호 서울 종로구 신라 89 금제교구 국보 89호 서울 종로구 평남 석암리 90 금제 태환이식 국보 90호 서울 종로구 신라   91 도제 기마인물상 국보  91호 서울 종로구 신라 92 청동 은입사포유수금문 정병 국보  92호 서울 종로구 고려 93 백자 철화포도문호 국보  93호 서울 종로구 조선 94 청자 소문과형병 국보  94호 서울 종로구 고려 95 청자 칠보투각향로 국보  95호 서울 종로구 고려 96 청자 귀형수병 국보  96호 서울 종로구 고려 97 청자 음각연화당초문매병 국보  97호 서울 종로구 고려 98 청자 상감 모란문항 국보  98호 서울 종로구 고려 99 갈항사 삼층석탑 국보  99호 서울 종로구 통일신라 경덕왕 100 남계원 칠층석탑 국보 100호 서울 종로구 고려   101 법천사 지광국사 현묘탑 국보 101호 서울 종로구 고려 선종 102 정토사 홍법국사 실상탑 국보 102호 서울 종로구 고려 현종 103 중흥산성 쌍사자 석등 국보 103호 광주 북구 통일신라 104 전흥법사 염거화상탑 국보 104호 서울 종로구 통일신라 문성왕 105 산청 범학리 삼층석탑 국보 105호 서울 종로구 통일신라 106 계유명 전씨 아미타불 삼존석상 국보 106호 충북 청주시 통일신라 초기 107 이조백자 철사포도문호 국보 107호 서울 서대문구 조선 108 계유명 삼존천불비상 국보 108호 충남 공주시 통일신라 109 군위 삼존석굴 국보 109호 경북 군위군 통일신라 초기 110 익재 영정 국보 110호 서울 종로구 고려 충숙왕   111 회헌 영정 국보 111호 경북 영주시 고려 충숙왕 112 감은사지 삼층석탑 국보 112호 경북 경주시 통일신라 초기 113 화청자양류문통형병 국보 113호 서울 종로구 고려 114 청자상감 모란국화문과형병 국보 114호 서울 종로구 고려 115 청자상감 당초문완 국보 115호 서울 종로구 고려 116 청자상감 모란문표형병 국보 116호 서울 종로구 고려 117 보림사 철조 비로자나불좌상 국보 117호 전남 장흥군 통일신라 헌안왕 118 금동 미륵반가상 국보 118호 경기 용인시 삼국시대 119 연가7년명 금동여래입상 국보 119호 서울 종로구 삼국시대 120 용주사 범종 국보 120호 경기 화성시 고려   121 하회탈 및 병산탈 국보 121호 경북 안동시 고려 중기 122 진전사지 삼층석탑 국보 122호 강원 양양군 통일신라 123 익산 왕궁리 오층석탑내 발견유물 국보 123호 전북 전주시 고려 124 순금 금강경판 국보 123-1호 전북 전주시 고려 125 유리제 사리병 국보 123-2호 전북 전주시 고려 126 금제방합 국보 123-3호 전북 전주시 고려 127 청동 여래입상 국보 123-4호 전북 전주시 고려 128 기타유물 국보 123-5호 전북 전주시 미상 129 한송사 석조보살좌상 국보 124호 서울 종로구 고려 130 녹유골호 국보 125호 서울 종로구 통일신라   131 불국사 삼층석탑내 발견유물 국보  126호 경북 경주시 통일신라 132 금동제 사리외함 국보  126-1호 경북 경주시 통일신라 133 은제 사리외합 국보  126-2호 경북 경주시 통일신라 134 은제 사리내합 국보  126-3호 경북 경주시 통일신라 135 유향 국보  126-4호 경북 경주시 통일신라 136 금동 방형사리합 국보  126-5호 경북 경주시 통일신라 137 무구정광대다라니경 국보  126-6호 경북 경주시 통일신라 138 동환 국보  126-7호 경북 경주시 통일신라 139 경옥제곡옥 국보  126-8호 경북 경주시 통일신라 140 홍마노환옥 국보  126-9호 경북 경주시 통일신라   141 수정 절자옥 국보 126-10호 경북 경주시 통일신라 142 수정 보주형옥 국보 126-11호 경북 경주시 통일신라 143 수정 환옥 국보 126-12호 경북 경주시 통일신라 144 녹색 유리환옥 국보 126-13호 경북 경주시 통일신라 145 담청색 유리제과형옥 국보 126-14호 경북 경주시 통일신라 146 유리제 소옥 국보 126-15호 경북 경주시 통일신라 147 향목편 국보 126-16호 경북 경주시 통일신라 148 청동제 비천상 국보 126-17호 경북 경주시 통일신라 149 동경 국보 126-18호 경북 경주시 통일신라 150 동제채자 국보 126-19호 경북 경주시 통일신라   151 목탑 국보 126-20호 경북 경주시 통일신라 152 수정대옥 국보 126-21호 경북 경주시 통일신라 153 홍마노 국보 126-22호 경북 경주시 통일신라 154 수정제가지형옥 국보 126-23호 경북 경주시 통일신라 155 유리제과형옥 국보 126-24호 경북 경주시 통일신라 156 유리소옥 국보 126-25호 경북 경주시 통일신라 157 심향편 국보 126-26호 경북 경주시 통일신라 158 섬유잔결 국보 126-27호 경북 경주시 통일신라 159 묵서지편 국보 126-28호 경북 경주시 통일신라 160 삼양동 금동 관음보살입상 국보 127호 서울 종로구 삼국시대   161 금동 관음보살입상 국보 128호 경기 용인시 백제 162 금동 보살입상 국보 129호 경기 용인시 통일신라 163 선산 죽장동 오층석탑 국보 130호 경북 구미시 통일신라 164 이태조 호적원본 국보 131호 서울 종로구 고려 공양왕 165 징비록 국보 132호 경북 안동시 조선 선조 166 청자진사연화문표형주자 국보 133호 경기 용인시 고려 167 금동 보살삼존상 국보 134호 경기 용인시 백제 168 혜원풍속도 국보 135호 서울 성북구 조선 후기 169 용두보당 국보 136호 경기 용인시 고려 170 대구 비산동 출토동기류 국보 137호 경기 용인시 선사   171 동검 검경 및 동모부속구 국보 137-1호 경기 용인시 선사 172 광봉동모 및 검장 국보 137-2호 경기 용인시 선사 173 금관 및 부속금구 국보 138호 경기 용인시 삼국시대 174 군선도병 국보 139호 경기 용인시 조선 후기 175 나전단화금수문경 국보 140호 경기 용인시 선사 176 다뉴세문경 국보 141호 서울 동작구 청동기 177 동국정운 1질 국보 142호 서울 광진구 조선 세종 178 화순 대곡리 출토 청동유물 국보 143호 광주 북구 미상 179 청동검 국보 143-1호 서울 종로구 미상 180 청동팔령구 국보 143-2호 서울 종로구 미상   181 청동쌍령구 국보 143-3호 서울 종로구 미상 182 청동삭구 국보 143-4호 서울 종로구 미상 183 청동공부 국보 143-5호 서울 종로구 미상 184 청동세문경 국보 143-6호 서울 종로구 미상 185 월출산 마애여래좌상 국보 144호 전남 영암군 통일신라 후기 186 귀면청동로 국보 145호 서울 용산구 백제 187 강원도 출토 일괄유물 국보 146호 경기 용인시 미상 188 팔수형동령 국보 146-1호 경기 용인시 미상 189 동조령부병두 국보 146-2호 경기 용인시 미상 190 동조환상쌍두령 국보 146-3호 경기 용인시 미상   191 동조령식초 국보  146-4호 경기 용인시 미상 192 울주 천전리 각석 국보  147호 울산 울주군 신라 법흥왕 193 십칠사찬고금통요 국보  148호 서울 관악구 조선 태종 194 권지16 국보  148-1호 서울 관악구 조선 태종 195 권지17 국보  148-2호 서울 서초구 조선 태종 196 동래선생교정북사상절 국보  149호 서울 성북구 조선 태종 197 권지4,5 국보  149-1호 서울 성북구 조선 태종 198 권지6 국보  149-2호 서울 중구 조선 태종 199 송조표전총류 국보  150호 서울 관악구 조선 태종 200 조선왕조실록 국보  151호 서울 관악구 조선시대   201 조선왕조실록 정족산본 국보 151-1호 서울 관악구 조선시대 202 태백산본 국보 151-2호 부산 연제구 조선시대 203 오대산본 국보 151-3호 서울 관악구 조선시대 204 기타산엽본 국보 151-4호 서울 관악구 조선시대 205 비변사등록부의정부등록 국보 152호 서울 관악구 조선후기 206 비변사등록 국보 152-1호 서울 관악구 미상 207 의정부등록 국보 152-2호 서울 관악구 미상 208 일성록 국보 153호 서울 관악구 조선후기 209 금제관식 국보 154호 충남 공주시 백제시대 210 금제관식 국보 155호 충남 공주시 백제시대   211 금제심엽형이식 국보 156호 충남 공주시 백제시대 212 금제수식부이식 국보 157호 충남 공주시 백제시대 213 금제경식 국보 158호 충남 공주시 백제시대 214 금제뒤꽂이 국보 159호 충남 공주시 백제시대 215 은제팔찌 국보 160호 충남 공주시 백제시대 216 청동신수경 국보 161호 충남 공주시 백제시대 217 청동신수경 국보 161-1호 충남 공주시 백제시대 218 의자손수대경 국보 161-2호 충남 공주시 백제시대 219 수대경 국보 161-3호 충남 공주시 백제시대 220 석수 국보 162호 충남 공주시 백제시대   221 지석 국보 163호 충남 공주시 백제시대 222 두침 국보 164호 충남 공주시 백제시대 223 족좌 국보 165호 충남 공주시 백제시대 224 백자철화매죽문대호 국보 166호 서울 종로구 조선시대 225 청자인형주자 국보 167호 서울 종로구 고려시대 226 백자진사매국문병 국보 168호 서울 종로구 조선시대 227 청자양각죽절문병 국보 169호 경기 용인시 고려시대 228 청화백자 매조죽문호 국보 170호 서울 종로구 조선시대 229 청동 은입사 보상당초봉황문합 국보 171호 경기 용인시 고려시대 230 진양군 영인정씨묘 출토유물 국보 172호 경기 용인시 조선 세조   231 백자상감 초화문편병 국보 172-1호 경기 용인시 조선 세조 232 묘지 국보 172-2호 경기 용인시 조선 세조 233 잔 국보 172-3호 경기 용인시 조선 세조 234 청자철채퇴화점문나한좌상 국보 173호 서울 강남구 고려시대 235 금동수정감장촉대 국보 174호 경기 용인시 통일신라 236 백자상감 연당초문대접 국보 175호 서울 종로구 조선시대 237 청화백자 송죽문호 국보 176호 서울 중구 조선 성종 238 분청사기 인화문태호 국보 177호 서울 성북구 조선시대 239 분청사기 조화어문편병 국보 178호 서울 서대문구 조선시대 240 분청사기 박지연어문편병 국보 179호 서울 관악구 조선시대   241 완당세한도 국보 180호 서울 종로구 조선 헌종 242 장량수급제패지 국보 181호 경북 울진군 고려 희종 243 금동여래입상 국보 182호 대구 수성구 통일신라 244 금동보살입상 국보 183호 대구 수성구 신라시대 245 금동보살입상 국보 184호 대구 수성구 신라시대 246 묘법연화경 국보 185호 서울 종로구 고려 공민왕 247 양평 금동여래입상 국보 186호 서울 종로구 삼국시대 248 봉감모전오층석탑 국보 187호 경북 영양군 통일신라 249 천마총 금관 국보 188호 경북 경주시 신라시대 250 금모 국보 189호 경북 경주시 신라시대   251 금제과대 및 요패 국보 190호 경북 경주시 신라시대 252 금관 및 수하식 국보 191호 경북 경주시 신라시대 253 금제과대 및 요패 국보 192호 경북 경주시 신라시대 254 유리제병 및 배 국보 193호 경북 경주시 신라시대 255 금제경식 국보 194호 경북 경주시 신라시대 256 토우장식장경호 국보 195호 경북 경주시 신라시대 257 신라백지묵서대방광불화엄경 국보 196호 경기 용인시 통일신라 경덕왕 258 청룡사 보각국사 정혜원륭탑 국보 197호 충북 충주시 고려 후기 259 단양 신라적성비 국보 198호 충북 단양군 신라 진흥왕 260 단석산 신선사 마애불상군 국보 199호 경북 경주시 신라시대   261 금동보살입상 국보 200호 부산 남구 통일신라 262 봉화북지리마애여래좌상 국보 201호 경북 봉화군 신라시대 263 대방광불화엄경 진본 국보 202호 서울 중구 고려 숙종 264 대방광불화엄경 주본 국보 203호 서울 중구 고려시대 265 대방광불화엄경 주본 국보 204호 서울 중구 고려시대 266 중원 고구려비 국보 205호 충북 충주시 고구려 267 해인사 고려각판 국보 206호 경남 합천군 고려시대 268 묘법연화경 국보 206-1호 경남 합천군 고려시대 269 화엄경관자재보살소설법문별행소 국보 206-2호 경남 합천군 고려시대 270 대불정여래밀인수증료의제   보살만행수능엄경 국보 206-3호 경남 합천군 고려시대   271 대방광불화엄경세주묘엄품 국보 206-4호 경남 합천군 고려시대 272 금강반야바라밀경 국보 206-5호 경남 합천군 고려시대 273 금강반야바라밀경 국보 206-6호 경남 합천군 고려시대 274 화엄경보현행원품 국보 206-7호 경남 합천군 고려시대 275 법화경보문품 국보 206-8호 경남 합천군 고려시대 276 인천보감 국보 206-9호 경남 합천군 고려시대 277 불설예수십왕생칠경 국보 206-10호 경남 합천군 고려시대 278 삼십팔분공덕소경 국보 206-11호 경남 합천군 고려시대 279 불설아미타경 국보 206-12호 경남 합천군 고려시대 280 대방광불화엄경략신중 국보 206-13호 경남 합천군 고려시대   281 화엄경변상도 국보 206-14호 경남 합천군 고려시대 282 대방광불화엄경 국보 206-15호 경남 합천군 고려시대 283 대방광불화엄경 국보 206-16호 경남 합천군 고려시대 284 대방광불화엄경 국보 206-17호 경남 합천군 고려시대 285 대방광불화엄경소 국보 206-18호 경남 합천군 고려시대 286 대방광불화엄경수소연의초 국보 206-19호 경남 합천군 고려시대 287 금강반야바라밀경 국보 206-20호 경남 합천군 고려시대 288 불설장수멸죄호저동자다라니경 국보 206-21호 경남 합천군 고려시대 289 대각국사문집 국보 206-22호 경남 합천군 고려시대 290 대각국사외집 국보 206-23호 경남 합천군 고려시대   291 남양선생시집 국보 206-24호 경남 합천군 고려시대 292 백화도장발원문약해 국보 206-25호 경남 합천군 고려시대 293 당현시범 국보 206-26호 경남 합천군 고려시대 294 약제경론염불법문왕생정토집 국보 206-27호 경남 합천군 고려시대 295 십문화쟁론 국보 206-28호 경남 합천군 고려시대 296 천마도장니 국보 207호 서울 종로구 신라시대 297 금동육각사리함 국보 208호 경북 김천시 조선시대 298 보협인석탑 국보 209호 서울 중구 미상 299 감지은니불공견색신변진언경 국보 210호 경기 용인시 고려 충렬왕 300 백지묵서묘법연화경 국보 211호 서울 관악구 고려 우왕   301 대불정여래밀인수증료   의제보살만행수능엄경 국보 212호 서울 중구 조선 세조 302 금동대탑 국보 213호 경기 용인시 고려 초기 303 흥왕사명청동은입사운룡문향완 국보 214호 경기 용인시 고려 충렬왕 304 감지은니대방광불화엄경 국보 215호 경기 용인시 고려 충숙왕 305 인왕제색도 국보 216호 경기 용인시 조선 영조 306 금강전도 국보 217호 경기 용인시 조선 영조 307 아미타삼존도 국보 218호 경기 용인시 고려시대 308 청화백자 매죽문호 국보 219호 경기 용인시 조선시대 309 청자상감 용봉모란문개합 국보 220호 경기 용인시 고려시대 310 상원사 목조문수동자좌상 국보 221호 강원 평창군 조선 세조   311 청화백자 매죽문호 국보 222호 서울 관악구 조선시대 312 경복궁 근정전 국보 223호 서울 종로구 조선 고종 313 경복궁 경회루 국보 224호 서울 종로구 조선 고종 314 창덕궁 인정전 국보 225호 서울 종로구 조선 순조 315 창경궁 명정전 국보 226호 서울 종로구 조선 광해군 316 종묘정전 국보 227호 서울 종로구 조선 광해군 317 천상열차분야지도각석 국보 228호 서울 중구 조선 태조 318 보루각 자격루 국보 229호 서울 중구 조선시대 319 혼천시계 국보 230호 서울 성북구 조선 현종 320 용범 국보 231호 서울 동작구 청동시대   321 의안백이화개국공신록권 국보 232호 전북 정읍시 조선 태조 322 영태2년명납석제호 국보 233호 부산 남구 신라 혜공왕 323 감지은니묘법연화경 국보 234호 경기 용인시 고려 충숙왕 324 감지금니대방광불화엄경보현행원품 국보 235호 경기 용인시 고려 후기 325 월성 장항리사지 서 오층석탑 국보 236호 경북 경주시 통일신라 초기 326 고산 구곡시화병 국보 237호 경기 고양시 조선 순조 327 소원화개첩 국보 238호 경기 고양시 조선 안평대군 328 송시열상 국보 239호 서울 종로구 조선 효종 329 윤두서상 국보 240호 전남 해남군 조선 숙종 330 초조본대반야바라밀다경 국보 241호 경기 용인시 고려 현종   331 울진 봉평 신라비 국보 242호 경북 울진군 신라시대 332 현양성교론 국보 243호 경기 용인시 고려시대 333 유가사지론 국보 244호 경기 용인시 고려시대 334 신찬일체경원품차록 국보 245호 서울 종로구 고려시대 335 대보적경 국보 246호 서울 종로구 고려시대 336 공주 의당금 동 보살입상 국보 247호 충남 공주시 백제시대 337 조선방역지도 국보 248호 경기 과천시 조선 명종 338 동궐도 국보 249호 서울 성북구 조선 순조 339 개국원종공신록권 국보 250호 서울 중구 조선 태조 340 대승아비달마잡집론 국보 251호 서울 중구 고려 현종   341 청자음각연화문매병 국보 252호 경기 용인시 고려시대 342 청자양인각연당초,상감모란문은구대접 국보 253호 서울 종로구 고려시대 343 청자음각연화절지문매병 국보 254호 서울 중구 고려시대 344 전충남출토 청동방울일괄 국보 255호 경기 용인시 청동시대 345 팔주령 국보 255-1호 경기 용인시 청동시대 346 쌍두령 국보 255-2호 경기 용인시 청동시대 347 조합식 쌍두령 국보 255-3호 경기 용인시 청동시대 348 간두령 국보 255-4호 경기 용인시 청동시대 349 초조본대방광불화엄경주본 국보 256호 경기 용인시 고려시대 350 초조본대방광불화엄경주본 국보 257호 충북 단양군 고려 현종   351 청화백자 죽문각병 국보 258호 경기 용인시 조선시대 352 분청사기 상감용문호 국보 259호 서울 종로구 조선시대 353 분청사기 박지모란문철채자라병 국보 260호 서울 종로구 조선시대 354 백자호 국보 261호 경기 용인시 조선시대 355 백자대호 국보 262호 서울 중구 조선시대 356 청화백자 산수화조문대호 국보 263호 서울 중구 조선시대 357 영일 냉수리 신라비 국보 264호 경북 포항시 신라시대 358 초조본대방광불화엄경주본 국보 265호 서울 영등포구 고려시대 359 초조본대방광불화엄경주본 국보 266호 서울 관악구 고려시대 360 초조본아비달마식신족론 국보 267호 서울 관악구 고려시대   361 초조본아비담비파사론 국보 268호 서울 관악구 고려시대 362 초조본불설최상근본대락금강불공   삼매대교왕경 국보 269호 서울 관악구 고려시대 363 청자모자원형연적 국보 270호 서울 성북구 고려시대 364 초조본현양성교론 국보 271호 서울 종로구 고려시대 365 초조본유가사지론 국보 272호 서울 종로구 고려시대 366 초조본유가사지론 국보 273호 서울 종로구 고려시대 367 기마인물형토기 국보 275호 경북 경주시 삼국시대 368 초조본유가사지론 국보 276호 인천 남동구 고려시대 369 초조본대방광불화엄경주본 국보 277호 전북 전주시 고려시대 370 태종11년이형원종공신록권부함 국보 278호 충북 영동군 조선 태종   371 초조본대방광불화엄경주본 국보 279호 충북 단양군 고려 현종 372 성거산 천흥사 동종 국보 280호 서울 종로구 고려 헌종 373 백자주자 국보 281호 서울 관악구 조선시대 374 흑석사 목조아미타불좌상병복장유물 국보 282호 경북 영주시 통일신라 375 불상 국보 282-1호 경북 영주시 조선 세조 376 전적 국보 282-2호 경북 영주시 고려말 377 직물류 국보 282-3호 경북 영주시 조선 세조 378 기타 복장물 오향, 칠약, 오곡,   칠보류, 사리함 국보 282-4호 경북 영주시 조선 세조 379 통감속편 국보 283호 경북 경주시 조선 세종 380 초조본대반야바라밀다경   국보 284호 서울 강남구 고려 정종   381 울산 대곡리 반구대 암각화 국보 285호 울산 울주군 선사시대 382 백자발 국보 286호 경기 용인시 조선 초기 383 부여 능산리출토 백제금동대향로 국보 287호 충남 부여군 백제시대 384 백제 창왕 명석조사리감 국보 288호 충남 부여군 백제시대 385 익산 왕궁리 5층석탑 국보 289호 전북 익산시 고려시대 386 통도사 대웅전 및 금강계단 국보 290호 경남 양산시 조선 인조 387 용감수경 국보 291호 서울 성북구 고려시대 388 오대산 상원사 중창권선문 국보 292호 강원 평창군 조선 세조 389 금동관세음보살입상 국보 293호 서울 종로구 삼국시대 390 청화백자 철사진사국화문병 국보 294호 서울 성북구 조선시대   391 나주 신촌리고분 출토 금동관 국보 295호 서울 종로구 백제시대 392 칠장사 오불회괘불탱 국보 296호 경기 안성시 조선 인조 393 안심사 영산회괘불탱 국보 297호 충북 청원군 조선 효종 394 갑사 삼신불괘불탱 국보 298호 충남 공주시 조선 효종 395 신원사 노사나불괘불탱 국보 299호 충남 공주시 조선 인조 396 장곡사 미륵불괘불탱 국보 300호 충남 청양군 조선 현종 397 화엄사 영산회괘불탱 국보 301호 전남 구례군 조선 효종 398 청곡사 영산회괘불탱 국보 302호 경남 진주시 조선 경종 399 승정원일기 국보 303호 서울 관악구 조선시대 400 여수 진남관 국보 304호 전남 여수시 조선 선조   401 통영 세병관 국보 305호 경남 통영시 조선 중기 402 삼국유사 국보 306호 서울 종로구 조선시대 403 삼국유사 국보 306-1호 서울 종로구 조선 초기 404 삼국유사 국보 306-2호 서울 관악구 조선 중종 405 태안 마애삼존불 국보 307호 충남 태안군 삼국시대        1 서울 숭례문(남대문) 국보  1호 서울 중구 조선 태조 2 원각사지 십층석탑 국보  2호 서울 종로구 조선 초기 3 북한산 신라 진흥왕순수비 국보  3호 서울 종로구 신라 진흥왕 4 고달사지 부도 국보  4호 경기 여주군 통일신라 경덕왕 5 법주사 쌍사자석등 국보  5호 충북 보은군 통일신라 성덕왕 6 중원 탑평리 칠층석탑 국보  6호 충북 충주시 통일신라 7 봉선 홍경사 사적 갈비 국보  7호 충남 천안시 고려 현종 8 성주사 낭혜화상 백월보광 탑비 국보  8호 충남 보령시 통일신라 진성여왕 9 부여 정림사지 오층석탑 국보  9호 충남 부여군 백제 후기 10 실상사 백장암 삼층석탑 국보 10호 전북 남원시 통일신라   11 미륵사지 석탑 국보 11호 전북 익산시 백제 후기 12 화엄사 각황전앞 석등 국보 12호 전남 구례군 통일신라 13 무위사 극락전 국보 13호 전남 강진군 조선 세종 14 은해사 거조암 영산전 국보 14호 경북 영천시 조선 초기 15 봉정사 극락전 국보 15호 경북 안동시 고려 후기 16 안동 신세동 칠층전탑 국보 16호 경북 안동시 통일신라 17 부석사 무량수전앞 석등 국보 17호 경북 영주시 통일신라 18 부석사 무량수전 국보 18호 경북 영주시 고려 중기 19 부석사 조사당 국보 19호 경북 영주시 고려 후기 20 불국사 다보탑 국보 20호 경북 경주시 통일신라   21 불국사 삼층석탑 국보 21호 경북 경주시 통일신라 22 불국사 연화교 칠보교 국보 22호 경북 경주시 통일신라 23 불국사 청운교 백운교 국보 23호 경북 경주시 통일신라 24 석굴암 석굴 국보 24호 경북 경주시 통일신라 25 신라 태종무열왕릉비 국보 25호 경북 경주시 통일신라 26 불국사 금동 비로자나불좌상 국보 26호 경북 경주시 통일신라 경덕왕 27 불국사 금동 아미타여래좌상 국보 27호 경북 경주시 통일신라 28 백률사 금동 약사여래입상 국보 28호 경북 경주시 통일신라 29 성덕대왕 신종 (에밀레종) 국보 29호 경북 경주시 통일신라 혜공왕 30 분황사 석탑 국보 30호 경북 경주시 신라 선덕여왕   31 경주 첨성대 국보 31호 경북 경주시 신라 32 해인사 대장경판 국보 32호 경남 합천군 고려 33 창녕 신라 진흥왕 척경비 국보 33호 경남 창녕군 신라 진흥왕 34 창녕 술정리동 삼층석탑 국보 34호 경남 창녕군 통일신라 35 화엄사 사사자 삼층석탑 국보 35호 전남 구례군 통일신라 36 상원사 동종 국보 36호 강원 평창군 통일신라 37 경주 구황리 삼층석탑 국보 37호 경북 경주시 통일신라 38 고선사지 삼층석탑 국보 38호 경북 경주시 통일신라 초기 39 월성 나원리 오층석탑 국보 39호 경북 경주시 통일신라 초기 40 정혜사지 십삼층석탑 국보 40호 경북 경주시 통일신라   41 용두사지 철당간 국보 41호 충북 청주시 고려 광종 42 목조 삼존불감 (송광사) 국보 42호 전남 순천시 고려? 43 고려 고종제서 (송광사) 국보 43호 전남 순천시 고려 고종 44 보림사 삼층석탑 및 석등 국보 44호 전남 장흥군 통일신라 경문왕 45 부석사 소조여래좌상 국보 45호 경북 영주시 고려 중기 46 부석사 조사당 벽화 국보 46호 경북 영주시 고려 후기 47 쌍계사 진감선사 대공탑비 국보 47호 경남 하동군 통일신라 정강왕 48 월정사 팔각구층석탑 국보 48호 강원 평창군 고려 초기 49 수덕사 대웅전 국보 49호 충남 예산군 고려 충렬왕 50 도갑사 해탈문 국보 50호 전남 영암군 조선 성종   51 강릉 객사문 국보 51호 강원 강릉시 고려 후기 52 해인사 장경판전 국보 52호 경남 합천군 조선 성종 53 연곡사 동부도 국보 53호 전남 구례군 통일신라 54 연곡사 북부도 국보 54호 전남 구례군 고려 초기 55 법주사 팔상전 국보 55호 충북 보은군 조선 인조 56 송광사 국사전 국보 56호 전남 순천시 조선 초기 57 쌍봉사 철감선사탑 국보 57호 전남 화순군 통일신라 경문왕 58 장곡사 철조 약사여래좌상부석조대좌 국보 58호 충남 청양군 통일신라 후기 59 법천사 지광국사 현묘탑비 국보 59호 강원 원주시 고려 선종 60 청자 사자 유개향로 국보 60호 서울 종로구 고려   61 청자 비룡형주자 국보 61호 서울 종로구 고려 62 금산사 미륵전 국보 62호 전북 김제시 조선 인조 63 도피안사 철조비로자나불좌상 국보 63호 강원 철원군 통일신라 경문왕 64 법주사 석연지 국보 64호 충북 보은군 통일신라 65 청자 기린 유개향로 국보 65호 서울 성북구 고려 66 청자 상감 유죽연로원앙문정병 국보 66호 서울 성북구 고려 67 화엄사 각황전 국보 67호 전남 구례군 조선 숙종 68 청자상감 운학문매병 국보 68호 서울 성북구 고려 69 개국원종공신록권 국보 69호 부산 서구 조선 태조 70 훈민정음 국보 70호 서울 성북구 조선 세종   71 동국정운 (권1,6) 국보 71호 서울 성북구 조선 세종 72 금동 계미명 삼존불 국보 72호 서울 성북구 백제 위덕왕 73 금동 삼존불감 국보 73호 서울 성북구 고려 초기 74 청자 압형수적 국보 74호 서울 성북구 고려 75 표충사 청동함은향완 국보 75호 경남 밀양시 고려 명종 76 이충무공 난중일기 부서간첩 임진장초 국보 76호 충남 아산시 조선 선조 77 의성 탑리 오층석탑 국보 77호 경북 의성군 통일신라 전기 78 금동 미륵보살반가상 국보 78호 서울 종로구 삼국시대 79 경주 구황리 금제 여래좌상 국보 79호 서울 종로구 통일신라 초기 80 경주 구황리 금제 여래입상 국보 80호 서울 종로구 통일신라 초기   81 감산사 석조 미륵보살 입상 국보 81호 서울 종로구 통일신라 성덕왕 82 감산사 석조 아미타불 입상 국보 82호 서울 종로구 통일신라 83 금동 미륵보살반가상 국보 83호 서울 종로구 삼국시대 후기 84 서산 마애삼존불상 국보 84호 충남 서산시 백제 후기 85 금동 신묘명 삼존불 국보 85호 경기 용인시 삼국시대 86 경천사 십층석탑 국보 86호 서울 종로구 고려 충목왕 87 금관총 금관 국보 87호 경북 경주시 신라 88 금관총 과대 및 요패 국보 88호 서울 종로구 신라 89 금제교구 국보 89호 서울 종로구 평남 석암리 90 금제 태환이식 국보 90호 서울 종로구 신라   91 도제 기마인물상 국보  91호 서울 종로구 신라 92 청동 은입사포유수금문 정병 국보  92호 서울 종로구 고려 93 백자 철화포도문호 국보  93호 서울 종로구 조선 94 청자 소문과형병 국보  94호 서울 종로구 고려 95 청자 칠보투각향로 국보  95호 서울 종로구 고려 96 청자 귀형수병 국보  96호 서울 종로구 고려 97 청자 음각연화당초문매병 국보  97호 서울 종로구 고려 98 청자 상감 모란문항 국보  98호 서울 종로구 고려 99 갈항사 삼층석탑 국보  99호 서울 종로구 통일신라 경덕왕 100 남계원 칠층석탑 국보 100호 서울 종로구 고려   101 법천사 지광국사 현묘탑 국보 101호 서울 종로구 고려 선종 102 정토사 홍법국사 실상탑 국보 102호 서울 종로구 고려 현종 103 중흥산성 쌍사자 석등 국보 103호 광주 북구 통일신라 104 전흥법사 염거화상탑 국보 104호 서울 종로구 통일신라 문성왕 105 산청 범학리 삼층석탑 국보 105호 서울 종로구 통일신라 106 계유명 전씨 아미타불 삼존석상 국보 106호 충북 청주시 통일신라 초기 107 이조백자 철사포도문호 국보 107호 서울 서대문구 조선 108 계유명 삼존천불비상 국보 108호 충남 공주시 통일신라 109 군위 삼존석굴 국보 109호 경북 군위군 통일신라 초기 110 익재 영정 국보 110호 서울 종로구 고려 충숙왕   111 회헌 영정 국보 111호 경북 영주시 고려 충숙왕 112 감은사지 삼층석탑 국보 112호 경북 경주시 통일신라 초기 113 화청자양류문통형병 국보 113호 서울 종로구 고려 114 청자상감 모란국화문과형병 국보 114호 서울 종로구 고려 115 청자상감 당초문완 국보 115호 서울 종로구 고려 116 청자상감 모란문표형병 국보 116호 서울 종로구 고려 117 보림사 철조 비로자나불좌상 국보 117호 전남 장흥군 통일신라 헌안왕 118 금동 미륵반가상 국보 118호 경기 용인시 삼국시대 119 연가7년명 금동여래입상 국보 119호 서울 종로구 삼국시대 120 용주사 범종 국보 120호 경기 화성시 고려   121 하회탈 및 병산탈 국보 121호 경북 안동시 고려 중기 122 진전사지 삼층석탑 국보 122호 강원 양양군 통일신라 123 익산 왕궁리 오층석탑내 발견유물 국보 123호 전북 전주시 고려 124 순금 금강경판 국보 123-1호 전북 전주시 고려 125 유리제 사리병 국보 123-2호 전북 전주시 고려 126 금제방합 국보 123-3호 전북 전주시 고려 127 청동 여래입상 국보 123-4호 전북 전주시 고려 128 기타유물 국보 123-5호 전북 전주시 미상 129 한송사 석조보살좌상 국보 124호 서울 종로구 고려 130 녹유골호 국보 125호 서울 종로구 통일신라   131 불국사 삼층석탑내 발견유물 국보  126호 경북 경주시 통일신라 132 금동제 사리외함 국보  126-1호 경북 경주시 통일신라 133 은제 사리외합 국보  126-2호 경북 경주시 통일신라 134 은제 사리내합 국보  126-3호 경북 경주시 통일신라 135 유향 국보  126-4호 경북 경주시 통일신라 136 금동 방형사리합 국보  126-5호 경북 경주시 통일신라 137 무구정광대다라니경 국보  126-6호 경북 경주시 통일신라 138 동환 국보  126-7호 경북 경주시 통일신라 139 경옥제곡옥 국보  126-8호 경북 경주시 통일신라 140 홍마노환옥 국보  126-9호 경북 경주시 통일신라   141 수정 절자옥 국보 126-10호 경북 경주시 통일신라 142 수정 보주형옥 국보 126-11호 경북 경주시 통일신라 143 수정 환옥 국보 126-12호 경북 경주시 통일신라 144 녹색 유리환옥 국보 126-13호 경북 경주시 통일신라 145 담청색 유리제과형옥 국보 126-14호 경북 경주시 통일신라 146 유리제 소옥 국보 126-15호 경북 경주시 통일신라 147 향목편 국보 126-16호 경북 경주시 통일신라 148 청동제 비천상 국보 126-17호 경북 경주시 통일신라 149 동경 국보 126-18호 경북 경주시 통일신라 150 동제채자 국보 126-19호 경북 경주시 통일신라   151 목탑 국보 126-20호 경북 경주시 통일신라 152 수정대옥 국보 126-21호 경북 경주시 통일신라 153 홍마노 국보 126-22호 경북 경주시 통일신라 154 수정제가지형옥 국보 126-23호 경북 경주시 통일신라 155 유리제과형옥 국보 126-24호 경북 경주시 통일신라 156 유리소옥 국보 126-25호 경북 경주시 통일신라 157 심향편 국보 126-26호 경북 경주시 통일신라 158 섬유잔결 국보 126-27호 경북 경주시 통일신라 159 묵서지편 국보 126-28호 경북 경주시 통일신라 160 삼양동 금동 관음보살입상 국보 127호 서울 종로구 삼국시대   161 금동 관음보살입상 국보 128호 경기 용인시 백제 162 금동 보살입상 국보 129호 경기 용인시 통일신라 163 선산 죽장동 오층석탑 국보 130호 경북 구미시 통일신라 164 이태조 호적원본 국보 131호 서울 종로구 고려 공양왕 165 징비록 국보 132호 경북 안동시 조선 선조 166 청자진사연화문표형주자 국보 133호 경기 용인시 고려 167 금동 보살삼존상 국보 134호 경기 용인시 백제 168 혜원풍속도 국보 135호 서울 성북구 조선 후기 169 용두보당 국보 136호 경기 용인시 고려 170 대구 비산동 출토동기류 국보 137호 경기 용인시 선사   171 동검 검경 및 동모부속구 국보 137-1호 경기 용인시 선사 172 광봉동모 및 검장 국보 137-2호 경기 용인시 선사 173 금관 및 부속금구 국보 138호 경기 용인시 삼국시대 174 군선도병 국보 139호 경기 용인시 조선 후기 175 나전단화금수문경 국보 140호 경기 용인시 선사 176 다뉴세문경 국보 141호 서울 동작구 청동기 177 동국정운 1질 국보 142호 서울 광진구 조선 세종 178 화순 대곡리 출토 청동유물 국보 143호 광주 북구 미상 179 청동검 국보 143-1호 서울 종로구 미상 180 청동팔령구 국보 143-2호 서울 종로구 미상   181 청동쌍령구 국보 143-3호 서울 종로구 미상 182 청동삭구 국보 143-4호 서울 종로구 미상 183 청동공부 국보 143-5호 서울 종로구 미상 184 청동세문경 국보 143-6호 서울 종로구 미상 185 월출산 마애여래좌상 국보 144호 전남 영암군 통일신라 후기 186 귀면청동로 국보 145호 서울 용산구 백제 187 강원도 출토 일괄유물 국보 146호 경기 용인시 미상 188 팔수형동령 국보 146-1호 경기 용인시 미상 189 동조령부병두 국보 146-2호 경기 용인시 미상 190 동조환상쌍두령 국보 146-3호 경기 용인시 미상   191 동조령식초 국보  146-4호 경기 용인시 미상 192 울주 천전리 각석 국보  147호 울산 울주군 신라 법흥왕 193 십칠사찬고금통요 국보  148호 서울 관악구 조선 태종 194 권지16 국보  148-1호 서울 관악구 조선 태종 195 권지17 국보  148-2호 서울 서초구 조선 태종 196 동래선생교정북사상절 국보  149호 서울 성북구 조선 태종 197 권지4,5 국보  149-1호 서울 성북구 조선 태종 198 권지6 국보  149-2호 서울 중구 조선 태종 199 송조표전총류 국보  150호 서울 관악구 조선 태종 200 조선왕조실록 국보  151호 서울 관악구 조선시대   201 조선왕조실록 정족산본 국보 151-1호 서울 관악구 조선시대 202 태백산본 국보 151-2호 부산 연제구 조선시대 203 오대산본 국보 151-3호 서울 관악구 조선시대 204 기타산엽본 국보 151-4호 서울 관악구 조선시대 205 비변사등록부의정부등록 국보 152호 서울 관악구 조선후기 206 비변사등록 국보 152-1호 서울 관악구 미상 207 의정부등록 국보 152-2호 서울 관악구 미상 208 일성록 국보 153호 서울 관악구 조선후기 209 금제관식 국보 154호 충남 공주시 백제시대 210 금제관식 국보 155호 충남 공주시 백제시대   211 금제심엽형이식 국보 156호 충남 공주시 백제시대 212 금제수식부이식 국보 157호 충남 공주시 백제시대 213 금제경식 국보 158호 충남 공주시 백제시대 214 금제뒤꽂이 국보 159호 충남 공주시 백제시대 215 은제팔찌 국보 160호 충남 공주시 백제시대 216 청동신수경 국보 161호 충남 공주시 백제시대 217 청동신수경 국보 161-1호 충남 공주시 백제시대 218 의자손수대경 국보 161-2호 충남 공주시 백제시대 219 수대경 국보 161-3호 충남 공주시 백제시대 220 석수 국보 162호 충남 공주시 백제시대   221 지석 국보 163호 충남 공주시 백제시대 222 두침 국보 164호 충남 공주시 백제시대 223 족좌 국보 165호 충남 공주시 백제시대 224 백자철화매죽문대호 국보 166호 서울 종로구 조선시대 225 청자인형주자 국보 167호 서울 종로구 고려시대 226 백자진사매국문병 국보 168호 서울 종로구 조선시대 227 청자양각죽절문병 국보 169호 경기 용인시 고려시대 228 청화백자 매조죽문호 국보 170호 서울 종로구 조선시대 229 청동 은입사 보상당초봉황문합 국보 171호 경기 용인시 고려시대 230 진양군 영인정씨묘 출토유물 국보 172호 경기 용인시 조선 세조   231 백자상감 초화문편병 국보 172-1호 경기 용인시 조선 세조 232 묘지 국보 172-2호 경기 용인시 조선 세조 233 잔 국보 172-3호 경기 용인시 조선 세조 234 청자철채퇴화점문나한좌상 국보 173호 서울 강남구 고려시대 235 금동수정감장촉대 국보 174호 경기 용인시 통일신라 236 백자상감 연당초문대접 국보 175호 서울 종로구 조선시대 237 청화백자 송죽문호 국보 176호 서울 중구 조선 성종 238 분청사기 인화문태호 국보 177호 서울 성북구 조선시대 239 분청사기 조화어문편병 국보 178호 서울 서대문구 조선시대 240 분청사기 박지연어문편병 국보 179호 서울 관악구 조선시대   241 완당세한도 국보 180호 서울 종로구 조선 헌종 242 장량수급제패지 국보 181호 경북 울진군 고려 희종 243 금동여래입상 국보 182호 대구 수성구 통일신라 244 금동보살입상 국보 183호 대구 수성구 신라시대 245 금동보살입상 국보 184호 대구 수성구 신라시대 246 묘법연화경 국보 185호 서울 종로구 고려 공민왕 247 양평 금동여래입상 국보 186호 서울 종로구 삼국시대 248 봉감모전오층석탑 국보 187호 경북 영양군 통일신라 249 천마총 금관 국보 188호 경북 경주시 신라시대 250 금모 국보 189호 경북 경주시 신라시대   251 금제과대 및 요패 국보 190호 경북 경주시 신라시대 252 금관 및 수하식 국보 191호 경북 경주시 신라시대 253 금제과대 및 요패 국보 192호 경북 경주시 신라시대 254 유리제병 및 배 국보 193호 경북 경주시 신라시대 255 금제경식 국보 194호 경북 경주시 신라시대 256 토우장식장경호 국보 195호 경북 경주시 신라시대 257 신라백지묵서대방광불화엄경 국보 196호 경기 용인시 통일신라 경덕왕 258 청룡사 보각국사 정혜원륭탑 국보 197호 충북 충주시 고려 후기 259 단양 신라적성비 국보 198호 충북 단양군 신라 진흥왕 260 단석산 신선사 마애불상군 국보 199호 경북 경주시 신라시대   261 금동보살입상 국보 200호 부산 남구 통일신라 262 봉화북지리마애여래좌상 국보 201호 경북 봉화군 신라시대 263 대방광불화엄경 진본 국보 202호 서울 중구 고려 숙종 264 대방광불화엄경 주본 국보 203호 서울 중구 고려시대 265 대방광불화엄경 주본 국보 204호 서울 중구 고려시대 266 중원 고구려비 국보 205호 충북 충주시 고구려 267 해인사 고려각판 국보 206호 경남 합천군 고려시대 268 묘법연화경 국보 206-1호 경남 합천군 고려시대 269 화엄경관자재보살소설법문별행소 국보 206-2호 경남 합천군 고려시대 270 대불정여래밀인수증료의제   보살만행수능엄경 국보 206-3호 경남 합천군 고려시대   271 대방광불화엄경세주묘엄품 국보 206-4호 경남 합천군 고려시대 272 금강반야바라밀경 국보 206-5호 경남 합천군 고려시대 273 금강반야바라밀경 국보 206-6호 경남 합천군 고려시대 274 화엄경보현행원품 국보 206-7호 경남 합천군 고려시대 275 법화경보문품 국보 206-8호 경남 합천군 고려시대 276 인천보감 국보 206-9호 경남 합천군 고려시대 277 불설예수십왕생칠경 국보 206-10호 경남 합천군 고려시대 278 삼십팔분공덕소경 국보 206-11호 경남 합천군 고려시대 279 불설아미타경 국보 206-12호 경남 합천군 고려시대 280 대방광불화엄경략신중 국보 206-13호 경남 합천군 고려시대   281 화엄경변상도 국보 206-14호 경남 합천군 고려시대 282 대방광불화엄경 국보 206-15호 경남 합천군 고려시대 283 대방광불화엄경 국보 206-16호 경남 합천군 고려시대 284 대방광불화엄경 국보 206-17호 경남 합천군 고려시대 285 대방광불화엄경소 국보 206-18호 경남 합천군 고려시대 286 대방광불화엄경수소연의초 국보 206-19호 경남 합천군 고려시대 287 금강반야바라밀경 국보 206-20호 경남 합천군 고려시대 288 불설장수멸죄호저동자다라니경 국보 206-21호 경남 합천군 고려시대 289 대각국사문집 국보 206-22호 경남 합천군 고려시대 290 대각국사외집 국보 206-23호 경남 합천군 고려시대   291 남양선생시집 국보 206-24호 경남 합천군 고려시대 292 백화도장발원문약해 국보 206-25호 경남 합천군 고려시대 293 당현시범 국보 206-26호 경남 합천군 고려시대 294 약제경론염불법문왕생정토집 국보 206-27호 경남 합천군 고려시대 295 십문화쟁론 국보 206-28호 경남 합천군 고려시대 296 천마도장니 국보 207호 서울 종로구 신라시대 297 금동육각사리함 국보 208호 경북 김천시 조선시대 298 보협인석탑 국보 209호 서울 중구 미상 299 감지은니불공견색신변진언경 국보 210호 경기 용인시 고려 충렬왕 300 백지묵서묘법연화경 국보 211호 서울 관악구 고려 우왕   301 대불정여래밀인수증료   의제보살만행수능엄경 국보 212호 서울 중구 조선 세조 302 금동대탑 국보 213호 경기 용인시 고려 초기 303 흥왕사명청동은입사운룡문향완 국보 214호 경기 용인시 고려 충렬왕 304 감지은니대방광불화엄경 국보 215호 경기 용인시 고려 충숙왕 305 인왕제색도 국보 216호 경기 용인시 조선 영조 306 금강전도 국보 217호 경기 용인시 조선 영조 307 아미타삼존도 국보 218호 경기 용인시 고려시대 308 청화백자 매죽문호 국보 219호 경기 용인시 조선시대 309 청자상감 용봉모란문개합 국보 220호 경기 용인시 고려시대 310 상원사 목조문수동자좌상 국보 221호 강원 평창군 조선 세조   311 청화백자 매죽문호 국보 222호 서울 관악구 조선시대 312 경복궁 근정전 국보 223호 서울 종로구 조선 고종 313 경복궁 경회루 국보 224호 서울 종로구 조선 고종 314 창덕궁 인정전 국보 225호 서울 종로구 조선 순조 315 창경궁 명정전 국보 226호 서울 종로구 조선 광해군 316 종묘정전 국보 227호 서울 종로구 조선 광해군 317 천상열차분야지도각석 국보 228호 서울 중구 조선 태조 318 보루각 자격루 국보 229호 서울 중구 조선시대 319 혼천시계 국보 230호 서울 성북구 조선 현종 320 용범 국보 231호 서울 동작구 청동시대   321 의안백이화개국공신록권 국보 232호 전북 정읍시 조선 태조 322 영태2년명납석제호 국보 233호 부산 남구 신라 혜공왕 323 감지은니묘법연화경 국보 234호 경기 용인시 고려 충숙왕 324 감지금니대방광불화엄경보현행원품 국보 235호 경기 용인시 고려 후기 325 월성 장항리사지 서 오층석탑 국보 236호 경북 경주시 통일신라 초기 326 고산 구곡시화병 국보 237호 경기 고양시 조선 순조 327 소원화개첩 국보 238호 경기 고양시 조선 안평대군 328 송시열상 국보 239호 서울 종로구 조선 효종 329 윤두서상 국보 240호 전남 해남군 조선 숙종 330 초조본대반야바라밀다경 국보 241호 경기 용인시 고려 현종   331 울진 봉평 신라비 국보 242호 경북 울진군 신라시대 332 현양성교론 국보 243호 경기 용인시 고려시대 333 유가사지론 국보 244호 경기 용인시 고려시대 334 신찬일체경원품차록 국보 245호 서울 종로구 고려시대 335 대보적경 국보 246호 서울 종로구 고려시대 336 공주 의당금 동 보살입상 국보 247호 충남 공주시 백제시대 337 조선방역지도 국보 248호 경기 과천시 조선 명종 338 동궐도 국보 249호 서울 성북구 조선 순조 339 개국원종공신록권 국보 250호 서울 중구 조선 태조 340 대승아비달마잡집론 국보 251호 서울 중구 고려 현종   341 청자음각연화문매병 국보 252호 경기 용인시 고려시대 342 청자양인각연당초,상감모란문은구대접 국보 253호 서울 종로구 고려시대 343 청자음각연화절지문매병 국보 254호 서울 중구 고려시대 344 전충남출토 청동방울일괄 국보 255호 경기 용인시 청동시대 345 팔주령 국보 255-1호 경기 용인시 청동시대 346 쌍두령 국보 255-2호 경기 용인시 청동시대 347 조합식 쌍두령 국보 255-3호 경기 용인시 청동시대 348 간두령 국보 255-4호 경기 용인시 청동시대 349 초조본대방광불화엄경주본 국보 256호 경기 용인시 고려시대 350 초조본대방광불화엄경주본 국보 257호 충북 단양군 고려 현종   351 청화백자 죽문각병 국보 258호 경기 용인시 조선시대 352 분청사기 상감용문호 국보 259호 서울 종로구 조선시대 353 분청사기 박지모란문철채자라병 국보 260호 서울 종로구 조선시대 354 백자호 국보 261호 경기 용인시 조선시대 355 백자대호 국보 262호 서울 중구 조선시대 356 청화백자 산수화조문대호 국보 263호 서울 중구 조선시대 357 영일 냉수리 신라비 국보 264호 경북 포항시 신라시대 358 초조본대방광불화엄경주본 국보 265호 서울 영등포구 고려시대 359 초조본대방광불화엄경주본 국보 266호 서울 관악구 고려시대 360 초조본아비달마식신족론 국보 267호 서울 관악구 고려시대   361 초조본아비담비파사론 국보 268호 서울 관악구 고려시대 362 초조본불설최상근본대락금강불공   삼매대교왕경 국보 269호 서울 관악구 고려시대 363 청자모자원형연적 국보 270호 서울 성북구 고려시대 364 초조본현양성교론 국보 271호 서울 종로구 고려시대 365 초조본유가사지론 국보 272호 서울 종로구 고려시대 366 초조본유가사지론 국보 273호 서울 종로구 고려시대 367 기마인물형토기 국보 275호 경북 경주시 삼국시대 368 초조본유가사지론 국보 276호 인천 남동구 고려시대 369 초조본대방광불화엄경주본 국보 277호 전북 전주시 고려시대 370 태종11년이형원종공신록권부함 국보 278호 충북 영동군 조선 태종   371 초조본대방광불화엄경주본 국보 279호 충북 단양군 고려 현종 372 성거산 천흥사 동종 국보 280호 서울 종로구 고려 헌종 373 백자주자 국보 281호 서울 관악구 조선시대 374 흑석사 목조아미타불좌상병복장유물 국보 282호 경북 영주시 통일신라 375 불상 국보 282-1호 경북 영주시 조선 세조 376 전적 국보 282-2호 경북 영주시 고려말 377 직물류 국보 282-3호 경북 영주시 조선 세조 378 기타 복장물 오향, 칠약, 오곡,   칠보류, 사리함 국보 282-4호 경북 영주시 조선 세조 379 통감속편 국보 283호 경북 경주시 조선 세종 380 초조본대반야바라밀다경   국보 284호 서울 강남구 고려 정종   381 울산 대곡리 반구대 암각화 국보 285호 울산 울주군 선사시대 382 백자발 국보 286호 경기 용인시 조선 초기 383 부여 능산리출토 백제금동대향로 국보 287호 충남 부여군 백제시대 384 백제 창왕 명석조사리감 국보 288호 충남 부여군 백제시대 385 익산 왕궁리 5층석탑 국보 289호 전북 익산시 고려시대 386 통도사 대웅전 및 금강계단 국보 290호 경남 양산시 조선 인조 387 용감수경 국보 291호 서울 성북구 고려시대 388 오대산 상원사 중창권선문 국보 292호 강원 평창군 조선 세조 389 금동관세음보살입상 국보 293호 서울 종로구 삼국시대 390 청화백자 철사진사국화문병 국보 294호 서울 성북구 조선시대   391 나주 신촌리고분 출토 금동관 국보 295호 서울 종로구 백제시대 392 칠장사 오불회괘불탱 국보 296호 경기 안성시 조선 인조 393 안심사 영산회괘불탱 국보 297호 충북 청원군 조선 효종 394 갑사 삼신불괘불탱 국보 298호 충남 공주시 조선 효종 395 신원사 노사나불괘불탱 국보 299호 충남 공주시 조선 인조 396 장곡사 미륵불괘불탱 국보 300호 충남 청양군 조선 현종 397 화엄사 영산회괘불탱 국보 301호 전남 구례군 조선 효종 398 청곡사 영산회괘불탱 국보 302호 경남 진주시 조선 경종 399 승정원일기 국보 303호 서울 관악구 조선시대 400 여수 진남관 국보 304호 전남 여수시 조선 선조   401 통영 세병관 국보 305호 경남 통영시 조선 중기 402 삼국유사 국보 306호 서울 종로구 조선시대 403 삼국유사 국보 306-1호 서울 종로구 조선 초기 404 삼국유사 국보 306-2호 서울 관악구 조선 중종 405 태안 마애삼존불 국보 307호 충남 태안군 삼국시대     
72    세종대왕이 발명한 문자는 한글일까? 조선글일까? 댓글:  조회:48  추천:0  2021-08-29
세종대왕이 발명한 문자는 한글일까? 조선글일까?     바로가기 복사하기 본문 글씨 줄이기 본문 글씨 키   SNS 기사보내기 페이스북(으)로 기사보내기트위터(으)로 기사보내기카카오스토리(으)로 기사보내기네이버밴드(으)로 기사보내기URL복사(으)로 기사보내기이메일(으)로 기사보내기다른 공유 찾기기사스크랩하기 한국에서 10월 9일을 한글날로 정하고 기념한다. 한글은 세종대왕이 1444년 집현전에 유생을 모아 만들도록 지시했고 2년 후인 1446년에 완성되었으며 훈민정음이라 칭했다.    필자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세종대왕이 만들었다고 하는 훈민정음이 현재 조선글, 한글 두 가지로 불리고 있는데 이북에서는 한글이란 표현을 수용하지 않고 이남에서는 조선글이란 말을 쓰지 않는다는 것이며, 아울러 이남과 이북이 서로의 표현에 대해 거부감 내지 적대감마저 갖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이런 현상은 정치적인 요소에 의해 생겨난 것으로서 이남에서는 문자도 한국, 한민족, 한인, 한국어 등의 표현에 따라 한글이라 하고 이북에서는 조선, 조선민족, 조선사람, 조선어 등의 표현에 따라 문자를 조선글이라 한다.  만약 세종대왕이 살아 계신다면 어느 쪽의 손을 들어줄까?    먼저 타민족의 상황을 살펴보자.    중국 인구 93%를 차지하는 주체민족을 한족이라 부르며, 외국인들이 흔히 말하는 중국어를 중국 내에서는 한어, 중국인이 쓰는 문자는 한자라 하는데 한족, 한어, 한자 등 개념은 유방이 세운 한조(漢朝)에 의해 유래되었다.     한족의 전신은 화하족(華夏族)인데, 화하족은 화의 제족과 하의 제족이 합쳐진 총칭으로서 통일된 민족 개념이 아니었다. 서한시기 경학통치의 확립에 따라 사회가 대통합을 이루면서 본래 2만 여개의 성씨가 점차 470여 개의 성씨로 줄어들었다. 성씨가 줄어든 것은 많은 민족과 부족이 유실되고 문화가 통합되고 풍속습관이 통합되고 언어와 문자도 통합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되었으며 따라서 언어, 문자, 문화, 의학 등 여러 면에서 전례 없는 발전을 이룩하게 되었고 국토도 전례 없이 넓어졌다. 한조는 이러한 대통합을 바탕으로 왕망이 정권을 탈취했던 시간을 빼면 서한과 동한이 400여 년의 통치를 지속했다.    한족, 한어, 한자 등의 개념은 바로 한조의 이러한 대통합을 바탕으로 이루어진 번영과 발전에 의해 생겨난 것이며 비록 기원 220년에 한조가 멸망을 고했으나 현재까지도 유효하게 사용되고 있다.     현재 중국에서는 중국 내의 주체민족을 한족이라 하고 해외에 거주하고 있는 중국계 사람을 화인(거주국의 국적을 소유한 자), 화교(거주국의 국적이 없는 자)라 부르며 한족들이 대외에 자민족을 자랑스럽게 말할 때 화하민족이라 한다. 화(華)는 한족과 화인, 화교를 모두 아우르는 개념이며 ‘국제 화상대회’라는 회칭이 바로 이를 입증하고 있다. 일본은 자민족을 야마토(大和)민족이라 한다.   중국인과 일본인에 비해 우리민족은 민족호칭이 유태인만큼이나 복잡하다. 이는 아마 유태인과 우리민족이 모두 대재 다난했던 수난의 역사와 직접적인 관련이 있을 것이다.    위에서 말했듯, 반도 남쪽에서는 한민족, 한인, 한국어, 한글이라 하고 북쪽에서는 조선민족, 조선사람, 조선어, 조선글이라 부른다. 그리고 해외에 흩어진 사람들은 거주국에 따라 민족호칭도 다르고 복잡하다.  만약 민족, 언어, 문자에 대한 남쪽에서 쓰는 호칭과 북쪽에서 사용하는 호칭을 서로 수용하고 거부감을 갖지 않는다면 문제 될 것이 없으나 실제로는 서로 상대가 사용하는 호칭에 대해 적대감마저 갖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이 때문에 조선족은 비록 중국 내에서는 조선사람, 조선어, 조선글이라 말하지만 한국인을 만나면 조선민족, 조선어, 조선글 등 표현을 쓰지 말아야 하고 북조선인을 만나면 한민족, 한국어, 한글이라는 표현을 조심해야 하는 이중성격으로 살아가는 비극을 초래하고 있다.    여기서 남북의 이 면에 대한 갈등의 이해를 돕기 위해 조선(朝鮮)과 한(韓)의 유래를 살펴보기로 하자.    전설에 의하면 4천 년 전, 즉 중국의 요(堯)와 동시대에 단군이 나라를 세웠는데 국호를 조선이라 했다고 한다. 그후 지금으로부터 3천 년 전 기자(箕子)가 조선을 다스렸다고 해서 기자조선(현재 한국의 일부학자들은 기자조선을 인정하지 않는다.)이라 불렀고 기원 전 3세기에 조선이 중국의 연나라에 의해 멸망했다. 그후 부여, 예맥, 삼한, 고구려, 백제, 신라, 통일신라, 고려로 흘러오다가 1392년 이성계가 고려를 무너뜨리고 새로운 나라를 세우게 되었는데 명나라의 지시에 의해 국호를 조선이라 했으며 1910년 한일합방 전까지 500여 년의 역사를 지니게 되었다. 1948년 10월 이북에서 김일성이 세운 정권이 조선을 계승한다는 의미로서 국호를 ‘조선인민민주주의공화국’이라 했다.    韓은 지금으로부터 2천 년 전 아리수(阿利水:한강의 고칭) 이남에 마한, 진한, 변한이란 이른바 삼한이 있었다. 그후 삼한이 각각 마한은 백제, 진한은 신라, 변한은 가야로 바뀌어 韓이란 호칭이 사라지게 되었다. 하지만 2천년 동안 우리 일상 삶 속에 韓文化는 간간히 명맥을 이어왔는데, 한복(韓服)이란 호칭이 바로 그것이다.    1887년 일본이 조선을 청나라의 손아귀에서 빼앗아 내려는 수단으로 ‘대한제국’으로 국호를 바꾸도록 종용했다. 제국이란 본래 정치, 경제, 문화 등 여러 면에서 대외에 영향력을 행사해야 의미가 있으나 당시 대한제국은 말이 제국이지 그러한 힘이 근본 없었다. 이로서 알 수 있듯이 대한제국은 말 그대로 일본의 꼭두각시 역할을 했을 뿐이다. 그 후 1948년 9월 이남에서 이승만이 먼저 단독 정부를 세우면서 국호를 대한민국이라 정했다.    자아! 문제는 남북이 분단 이후 서로 자신들이 역사를 계승한 전통국가라 주장하고 상대에 대해 적대감을 갖는 동시에 민족, 언어, 문자 등 호칭마저 상대의 표현을 사용하지 않고 또 서로 인정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이북에서는 조선이란 호칭이 단군조선과 조선조 500년을 합치면 2500년의 역사를 지니고 있었기 때문에 유래가 깊을 뿐만 아니라 정통이라 주장하고 따라서 민족은 조선민족, 언어는 조선어, 문자는 조선글이라 부르는 것이 옳다는 것이다. 더욱이 세종대왕이 문자를 발명해 냈다면 세종대왕은 분명히 조선시대의 임금이었고, 조선시대에 만들어졌다면 마땅히 조선글이라 불러야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조선시대에 만들어진 문자가 어떻게 한글이라 말할 수 있는가는 것이다.    이에 비해 현재 한국의 주장은 이렇다. 한국은 대한제국의 연속인 대한민국임시정부를 계승한 국가이다. 한편으로 이남 사람들은 자신들이 마한, 진한, 변한의 후예라고 여기고 있는데서 韓의 표현을 선호하고 있다는 것이다.  한국인이 韓의 표현을 선호하고 朝鮮의 표현을 기피하고 있는데서 다음과 같은 아이러니가 생겨나고 있다.    한국인의 잠재의식 속에 朝鮮의 표현이 이북과의 정치적인 대립의 측면, 이를테면 이북국호 ‘조선’을 인정할 경우 이북이 고조선과 조선을 계승한 정통국가로 인정하는 셈이 되기 때문에 꺼리는 외에, 힘없고 못살던 “죠센짹을 상징하기에 기피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일간지로 가장 유명한 신문의 명칭이 ‘조선일보’이고 조선간장, 조선된장, 조선옥돌 등 표현은 이중성을 보여주는 현상이 아닌가?    한국인이 만약 남북 간의 정치적인 대립에 의해 朝鮮이란 표현을 꺼려한다면 다소나마 이해가 가지만, 그렇지 않고 朝鮮이란 표현이 힘없고 못살던 “죠센짹을 상징하기 때문에 거부한다면 이는 불효자식이다. 왜냐하면 조상이 잘살았던 못살았던 힘이 있었던 없었던 우리 조상이다. 한국인이 우리도 5천년 역사를 지닌 민족이라 말하는데 이는 절대 韓에서 온 것이 아니라 朝鮮에서 유래된 것이 아닌가? 한국인이 좋은 것은 韓이고 궂은 것은 朝鮮이란 인식은 참으로 이중성의 문제가 아닌가?  다음으로 지적할 것은 한국인이 우리민족을 총칭하여 한민족, 한인, 한국어, 한글 등 표현을 사용하는 것이 어폐가 있다는 것이다.  현재 이북의 2천만과 중국조선족, 중앙아시아고려인, 일본조총련과 조선적 등 많은 사람들이 한민족, 한인, 한국어, 한글이란 표현을 사용하지 않고 있다. 여기에는 역사적인 원인도 정치적인 요소도 있을 것이고 습관적인 문제도 있을 것이다.    분명한 것은 현재 중국조선족은 엄연히 민족 명칭이 조선족이고 언어와 문자도 두음법칙을 보나 문법을 보나 분명히 조선민족, 조선인, 조선어, 조선글이지 결코 한민족, 한인, 한국어, 한글이 아니다.  1995년에 연변대학 역사학부 전춘원 교수가 ‘早期東北亞文化圈的朝鮮’이란 책을 발표했는데, 1999년 한국 집문당 출판사에서 번역 출판할 때 제목을 ‘조기동북아문화권에서의 한민족의 역할’로 고쳤다. 즉 조선을 한민족으로 바꿔놓았다. 이 외에도 조선족이거나 이북에서 신문, 잡지, 책에서의 조선민족, 조선사람, 조선어, 조선글 등 표현이 한국에 옮겨질 경우 한국인은 임의로 韓으로 고친다.  이는 분명히 한국인의 옳지 못한 처사이다. 그 이유를 말하자면, 첫째 한국인은 마땅히 조선족과 이북의 표현을 그대로 존중해야 한다. 둘째 한국인이 조선민족, 조선인, 조선어, 조선글 등의 표현을 거부하는 것은 조상을 부인하는 현상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지난 10월 5일 서울에서 제1회 세계한인의 날을 기념하는 대회가 열렸다. 한국인은 남북 및 해외 겨레를 모두 한인으로 여기고 있는데 이는 분명히 비현실적이다. 만약 제2회, 제3회 우리 겨레에 관한 행사를 이북에서 개최한다면 한인이란 표현을 쓸 수 있을까? 중국연변에서 개최해도 똑 같은 문제가 대두된다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다.    예전의 분단국들은 국호가 우리처럼 혼란스럽지 않았다. 이를테면 동서독일, 남북베트남 등이 그것이고 독일은 분단 중에 게르만민족이란 호칭을 서로 사용했고 서로 국호, 민족, 문자에 대한 호칭에 거부감이나 적대감이 없었다. 베트남도 마찬가지였다.   세상에서 우리민족만이 국호, 민족, 언어, 문자에 대한 호칭에 서로 거부감 내지 적대감을 갖고 있는 민족은 없다. 참으로 비극이다. 남북이 통일하려면 정치적인 통일에 앞서 민족호칭, 언어호칭, 문자호칭 등이 먼저 통일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조선글이냐, 한글이냐? 세종대왕이 죽은지가 500년이 넘었으니 그를 중재자로 모실 수도 없고 참으로 답답한 일이다.    
71    신단실기 족통원류 댓글:  조회:50  추천:0  2021-08-24
신단실기   종족   단군의 자손을 배달종족이라고 한다. 나뉘어서 5파가 되었는데 첫째는 조선족, 둘째는 북부여족, 세째는 예맥족(濊貊族)네째는 옥저족, 다섯째는 숙신족이다.   부여족扶餘族 북부여족은 다섯 갈래로 나뉘었다. 하나는 동부여족에게 전했고, 하나는 고구려족에게 전했고, 하나는 백제족에게 전했고, 하나는 규봉족과 합하고, 하나는 선비족이 되었다.   동부여東扶餘는 고구려족으로 들어간다.   고구려는 또 둘로 나뉘어서, 하나는 신라와 합하고, 하나는 발해족에게 전하고, 발해는 여진족(女眞族)에게 전하고, 여진은 금족(金族)에게 전하고, 백제는 신라와 합해서 고려족으로 들어갔다.       규봉은 부여족으로 들어갔다.   선비는 거란족(契丹族)에게 전했고, 거란은 발해와 합해서 요족(遼族)에게 전했고, 요는 여진족(女眞族)으로 들어갔다.   예맥족(濊貊族) 예맥족은 두 종족을 합쳐서 이르는 것이니, 곧 예와 맥이다, 이들은 모두 고구려족으로 들어갔다.   옥저족(沃沮族) 옥저족은 둘로 나뉘어서, 하나는 예맥(濊貊)과 합하고, 하나는 발해족으로 들어갔다.   숙신족(肅愼族) 숙신족은 읍루족(挹婁)에 전했고, 읍루는 물길족(勿吉)에게 전했고, 물길은 말갈족(靺鞨)에게 전했고, 말갈은 발해족과 합쳤다.   조선족(朝鮮族; 예족濊族)   조선족은 부여 해부루(해모수의 아들)의 후손이니, 조선이 한족(韓族)에게 전했고, 한(韓)이 반배달(半倍達)과 합하여 두가지로 나뉘이니, 하나는 진한족(辰韓族)이며 하나는 변한족(弁韓族)이다. 진한은 신라족(新羅族)에게 전했고, 신라는 고려족(高麗族)에게 전했고, 고려는 지금의 조선족에게 전했다. 변한은 가락족(駕洛族,伽倻族)에게 전했고, 가락은 신라족으로 들어갔다. 반배달(半倍達)은 일명 후조선족이니, 기자(箕子)의 후손이다. 반배달이 마한족에게 전했고, 마한이 한족(韓族)과 합하여 세 가지로 나뉘었으니, 하나는  백제와 합하고, 하나는 고구려와 합해서 정안족(定安族)에게 전하고, 하나는 탐라족(耽羅族)이 되었다.
70    중국조선족의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전망 (삭제금지) 댓글:  조회:107  추천:0  2021-08-08
연변대학 정판룡 교수와의 인터뷰 -현재 중국에서의 조선족의 위치를 어떻게 평가하는가? 21세기를 눈앞에 두고 총화적인 각도에서 법칙성적인 것에 대해 말하고 싶다. 변화하고 있는 현실에 대해 사실만을 가지고 론할 것이 아니라 리성적인 인식을 바탕으로 우리 민족을 분석해야 만이 21세기에 새로운 도약을 할수 있을 것이다. 20세기는 우리 민족이 이 땅에 정착한 세기라고 할 수 있다.조선민족이 중국으로 대량 이민해오기는 19세기중엽부터라 하겠다. 물론 학술계에서는 19세기 20년대요,40년대요,60년대요 하지만 확정적으로 그 어느날부터 라고는 말하기 어렵다.19세기60년대에 조선북부지역에서 련속 재황이 일어나 리재민들이 월강금지령에도 불구하고 살길을 찾아 중국에 넘어온 초기 이주민들은 청나라의 민족차별시정책의 유린을 몹시 당했는데 청나라는 우리 민족을 환영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청나라 사람들처럼 머리태를 땋고 호복을 입을 것을 강요하면서 “변발이복,귀화입적”의 동화정책을 썼다. 1910년 한일강제합병을 전후하여 많은 우국지사들도 중국으로 건너왔다. 그러므로 그때부터의 이민은 단순히 살기 위한 이민만이 아니라 상당수가 나라를 찾기 위한 정치망명이민이였다. 그리고 흑룡강지역은 일본이 만주땅을 침략한 뒤에 대량적인 이민이 생겼다.우리 민족의 이민은 1945년도까지였다고 할 수 있는데 50년 사이에 많이 류입되였다. 그러기에 20세기는 우리 민족이 이 땅에 들어와 정착한 시기라고 불수 있다. 정착문제에서 거주국과의 관계문제가 제기된다. 거주국에서 신임하고 그 국가에서 뿌리를 박아야 하는 문제인데 이는 해외에 나간 우리 민족이 그 어느 곳에서도 부딪치게 되는 문제이다. 이민한 사람이 거주국의 말을 잘 듣고 거주국에 유리해야지 불리하면 배척을 당하게 된다. 우리 민족도 진통을 겪었다. 우에서도 얘기했지만 청나라 때에는 환영을 받지 못하였기에 분규도 많았다. 그 뒤로는 봉계군벌 즉 동북군벌이 우리 민족을 배척하는 정책을 썼다. 왜나하면 일본은 조선을 강점한 뒤에 조선사람은 자기 사람이라고 하고 동북을 칠 때 조선사람을 많이 리용했고 또 조선사람을 보호한다는 수법을 썼기 때문이다.그래서 장학량군벌은 당시 조선사람을 두 번째 일본사람으로 봤다. 장개석의 국민당정부도 우리 민족이 소수민족이라는 것을 워낙 승인하지 않았고 우리 민족을 다만 “한교 ‘대한민국교민’”라고 여겼다.허나 유일하게 중국공산당은 우리 민족을 소수민족으로 인정하고 단합의 대상으로 삼았다. 왜냐하면 여기에 온 우리 민족은 대부분이 가난한 사람이고 또 일제를 반대해 나섰고 지주,자본가를 반대해 나섰으니 이는 중국공산당의 주장과 맞았기 때문이다. 여기에 온 우리 민족은 20년대부터 중국공산당과 함께 일제와 싸웠고 또 중국의 해방을 위해 국민당과 싸우면서 피를 많이 흘렸다. 이렇게 우리 민족은 이 땅에서 그 어느 민족보다 적극적으로 시종 진두에서 싸우면서  중화인민공화국의 창립에 기여했다. 그래서 우리 민족은 중국공산다의 신임을 얻고 중국인민의 신임을 얻게 되었으며 떳떳한 중화민족의 일원으로 주인공의 위치를 찾게 되었다. 이는 20세기 다른 국가에 이민 간 동포들과 비교해볼 때 아주 잘된 일이라고 볼 수 있다. -조선족이 중국이라는 이 큰 땅덩어리우에서 한족들 속에 섞여 살면서도 자기의 민족성을 보존할 수 있는 근본 원인은 어디에 있는가? 우리가 민족성을 보존할 수 있게 된 가장 중요한 원인은 중국의 민족정책이 좋았기 때문이다.비로 소수민족이 자기의 언어와 문화를 발전시킬수 있다는 정책이다.이 정책이 없다면 아무리 독불장군이라도 민족성을 보존할 수 없다.다른 하나는 집거구가 형성되였기 때문이다.집거구가 형성되였기에 조선족자치주도 세워졌고 언론매체도 세워졌다.그리하여 자기의 문화도 잊지 않고 계승할 수 있게 되었다.러시아에 살고 있는 우리 민족은 거주국과의 마찰은 없는데 민족성을 보존하는 면에서 문제가 있다. 러시아의 경우 강제이민이다보니 집거구가 형성되지 못해서 민족성 보전에 큰 영향을 주었다. 중국에는 많은 조선족집거구가 있는데 연변집거구,할빈을 중심으로 하는 송화강집거구,심양소가툰을 중심으로 하는 집거구, 목단강집거구 또 그 속에는 조선족향,촌이 있어 민족성을 보존할 수 있는 근거지가 있고 이것이 또 온상이 되었다. 셋째로 민족성을 보존할 수 있는 것은 우리 문화의 선진성에 있다.우리 문화가 한족문화보다 높다는 것은 아니지만 여기에 와 정착해보니 다른 동네의 한족보다 문화자질이 높았고 또 벼농사도 잘 했고 허리띠를 졸라매면서라도 애들의 공부만은 등한시하지 않았다. -해외동포와 조선족은 어떤 다른 점이 있는가? 세가지면에서 그 차이를 보아낼 수 있다.첫째로는 주인공위치이고 둘째로는 민족성보존이고 셋째로는 생활수준이다. 이 세가지면에서 볼 때 미국의 동포들은 거주국과의 관계는 큰 문제가 아니기 때문에 주인공위치도 큰 문제가 안되고 잘 살기도 하지만 민족성보존과 발전에 큰 문제가 생기고 있다. 미국에 사는 동포들, 특히 젊은 세대들이 우리 말을 잘 모르고 민족문화도 발전하지 못하고 있다. 일본의 동포들은 정치적문제가 해결되지 못했기 때문에 주인공위치,민족성보존이 큰 문제로 되고 있다.허나 살기는 잘살고 있다.러시아의 동포들은 강제이민이다보니 주인공위치,민족성보존에 큰 문제로 될 뿐만 아니라 잘 살지도 못하고 있다. -조선족이 잘 살지 못하는 원인은 어디에 있는가? 조선족이 여기로 이주한 목적은 잘 살기 위해서였다. 못살기 위해 외국으로 나가는 법은 없다. 헌데 우리는 지금 세계 어느 나라의 동포들보다도 못살고 있다. 그 주요한 원인은 중국이 아직 발전도상의 나라(실지 워낙 락후하다)이기 때문이다. 당시 조선(한)인은 중국의 땅만 보았지 “집형편”은 보지 못했고 또 건너오기 쉬웠기 때문이다.다른 하나의 중요한 장기적인 전쟁과 정치투쟁이였다. 조선족은 이민온 날부터 즉 19세기말부터 20세기 50년대까지 싸웠다.의병투쟁,독립운동,항일투쟁,해방전쟁,조선전쟁 또 이어서 반우파투쟁, 문화대혁명 등 정치운동만 하다보니 언제 경제건설을 할 기회가 있었는가?연변은 또 구쏘련과 국경을 사이둔 곳이기에 극히 페쇄되였으며 공업기초란 운운할 수 없는 지역이였다. 개방이 되면서 우리 조선족은 생활향상을 위한 조급성이 생기였다.조급성이 생기니 맹목성도 생기게 되었다.이에 따른 집거구인구감소로 연변만 해도 400여개소 중소학교가 문을 닫게 되었다. 물론 생활의 질은 어느 정도 향상되였으나 자녀교양에 큰 문제가 생기고 있고 문화교육질이 낮아지면서 민조선진성도 낮아지고 있다. 그제날 모택동시대에는 조선전우들과 함께 싸웠기 때문에 우리 민족과의 감정이 깊었다. 특히 국민당과 공산당이 대립상태에 있을 때 우리 민족은 국민당과 별로 거래하지 않고 무산계급감정으로 공산당에 의거해 잘 싸웠기 때문에 전쟁시기 중요한 경비는 다 조선족전사들이 맡을 정도로 신임을 얻었다. 허나 지금은 달라졌다. 특히 조선(한)반도가 분단된 상태에서 한국이 중국에 진출하면서 또 구쏘련이 민족분렬로 해체되면서 정부는 민족문제에서 그 어느 때보다 경각성을 높이고 있는네 이는 우리가 응당 리해해야 한다. -그러고 보면 주인공위치를 확고히 해야 하는 문제도 제기되는것이 아닌가? 그렇다.우리는 당당한 중화인민공화국 국민이다. 그제날 우리 민족은 이 땅에서 공동히 나라를 건설했을 뿐만 아니라 제일 말을 잘 듣는 민족이였는데 지금은 법을 잘 지키지 않고 말을 잘 듣지 않는 민족으로 되었다.그래서 주체민족의 눈에는 정치상의 불신임,도덕상의 불신임이 생겼다.또 한국의 일부 사람들은 연변 땅은 한반도 땅이요, 하는 바람에 정부의 신경을 건드리고 있다.우리가 100여년 동안 중국에서 힘들게 쌓은 신임이 무너지고 있는 것이다. 주인공위치도 확고히 하고 민족성도 발전시켜야 한다.특히 경제발전을 다그쳐야 하지만 너무 성급해서는 안된다.중국의 특성에 맞게 실제에 근거해서 처사해야지 맹동해서는 안된다. 주인공의 자세를 잃고 있는데 대해 우리는 반성해야 한다. -국외나들이,도시진출로 조선족거주판도가 크게 바뀌고 있는데 조선족의 대량 이동은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 대이동은 불가피적이다.꼭 벼농사만 지어야 하고 농촌을 고수해야 할 필요성은 없다.그제날 어디에 정착했으면 거기를 고수하라는것은 틀린 틀린 생각이다.우리가 대대손손 몇천년 살아오던 고향도 떠나올라니 왜 더 살기좋은 고장으로 이동하지 않겠는가?척박한 두메산골에서만 살지 말고 우리도 발달한 지역으로,바다가의 해변도시에도 나가 살아야 한다.지금 리론적으로는 농촌집거구를 보장해야 한다고 말하는데 나는 그런 사람들에게 “왜 그럼 당신은 거기에 가서 살지 않고 남만 거기서 살라고 하는가?”럭ㅎ 반문하고 싶다. 미국에 가보니 동포가 많이 살고있는 곳이 첫째로 로스안젤스이도 둘째로 뉴욕이고 셋째로 시카고이다.일본도 동포가 제일 많이 살고있는 곳이 대도시인 오사까와 도꾜이다.헌데 우리가 왜 멍청이라고 산골만 차지하고 대도시에 이동해서 살지 말아야 하는가,지금 학교가 줄어 드는것은 이동과도 관계되잠ㄴ 관건적인 문제는 아이를 하나만 낳기 때문이다.교육,문화가 발달한 연길시의 조선족인구는 불어나고 있는데 이는 매우 좋은 일이다.교육,문화를 발전시키려면 애들이 발달한 지역에서 교육을 받아야 되지 않겟는가.이는 일존 진보로 봐야 한다.우리는 개혁개방의 기회에 우리의 거주분포를 조정해야 한한다.흑룡강은 할빈을 중심으로 하는 큰 집거구를 새로 형성하고 료녕은 심양을 중심으로 하는 큰 집거구를 형성해야 한다.교통이 발달하고 경제가 발달한 지역에 집거구를 형성하고 열심히 돈을 벌게 되면 거기에 자연히 학교가 서게 될것이고 교육,문화기과도 발전하게 될것이다.현재 북경에도 우리 학교가 서고있고 산동에도 우리 학교가서고있지 않는가. 물론 새로 일떠선 집거구에 우리 학교가 세워지자면 수속 때문에 애로가 많지만 그것이 큰 문제가 아니다. 앞으로 반드시 국영학교만 세워야 한다는 도리는 없기에 민영학교도 설수 잇으니 우리가 가서 배워주면 되지 않는가? 여기서 더 언급할 것은 전망없는 두메산골은 내버려두고 전망있는 농촌은 교통을 하루속히 발전시켜 도시화로 나가야 한다는 점이다. 여기 연변도 돈을 번 사람들이 조선족이 많이 모여사는 연길,룡정 등 도시에 투자해 민족경제를 하루 빨리 춰세워야 한다. 취재를 마친 기자는 조선족사회의 건전한 발전을 도모하는 차원에서 지성인들이 거시적인 안목으로 조선족의 실태를 분석하고 진로를 제시해야 할 필요성을 다시 한번 절실히 느끼게 되었다.
69    중국조선족과 한국인간의 갈등 ABC (삭제금지) 댓글:  조회:79  추천:1  2021-08-08
1992년도에 중한수교가 이루어지면서 한국인과 조선족들 사이에 접촉이 빈번해 지기 시작했다. 서로간에 힌 피줄이였지만 처음에는 신비한 눈길로 조심스레 접촉하면서 상호간의 신뢰도를 쌓으려 노력했으나 오늘에 이르러서는 도리어 갈등씨앗이 점차적으로 자라 다른 민족들도 경멸의 눈길를 보내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필자는 다년간 한국을 다녀 오면서 느낀 점과 조선족동포사회를 취재하면서 느낀 점을 요약해서 정리하오니 이 글이 한국인과 조선족동포사회의 갈등해소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된다면 기쁘게 생각한다. 갈등A:고국인과 이주민으로서의 갈등씨앗 조선족의 이민사를 간략해보면 1627년부터 1867년 사이에는 청나라가 봉금령을 실시하다보니 대량의 조선(한)인들은 “간도”땅에 오지 못했다. 하여 이 시기의 이민은 목숨을 걸고 들어온 시기라 볼 수 있다.1869년과 1870년의 대기황으로 말미암아 청나라에서 봉금령을 페지하는 바람에 1910년까지 수많은 조선인들이 죽기내기로 “간도”땅에 건너왔다.1910년부터 1945년 사이에는 망국의 설음을 안은 조선(한)이들이 또 수없이“간도”땅을 찾아왔고 일제와 싸우기 위해 많은 항일투사들도 “간도”땅을 찾아왔다.1945년도까지의 통계에 따르면 중국지역(주로 동북3성)에 찾아온 조선(한)인은 216만여 명으로서 지금의 조선족인구보다 더 많았었다.여기에서 지적해야 할 것은 중국땅에 찾아온 절대다수의 조선(한)인은 기황과 일제의 침략에 견디지 못해 삶을 위해 찾아왔다는 점이다. 1921년도에 중국공산당은 설립된 날부터 무산계급로고대중을 위하여 군벌과 싸우고 제국주의를 타도하자는 기치를 내들었다. 이 기치가 중국땅에 이주한 조선(한)인들의 투쟁목표와 공통점이 있게 되었다. 그리하여 무수한 조선(한)인들은 중국공산당과 어깨겯고 전장에서 피를 흘렸고 또한 조선(한)인들은 해방전쟁시기에 국민당을 쳐부수는 전장에서도 혁혁한 공훈을 세우기도 했다. 당시 팔로군은 동족으로서의 대립인 국민당의 간첩들이 요새에 잠복해 있을가봐 될 수만 있으면 조선(한)인 투사들을 요직에 두었다 한다. 1945년도에 광복이 되면서 중국공산당은 토지개혁을 실시하게 되었고 따라서 나라를 잃었던 조선(한)인들도 중국땅에서 토지를 분여받게 되었으니 이만큼 더 큰 희열이 어디에 있었겠는가. 하여 조선(한)인 청장년들은 또 중국해방전쟁에도 용약 참가했다.통계에 따르면 중국해방전쟁시기에만 해도 조선(한)인들이 6만 3000여명이나 해방군에 가입했는데 이는 여기 조선(한)인 인구의 5%도 넘으며 목숨을 잃은 조선(한)인은 길림성 렬사의 93%를 차지했다.이로해 조선사람도 아니고 중국사람도 아니였던 조선(한)인들은 1953년도에야 비로소 연변조선족자치구(현재는 주)가 설립되면서 중국정부로부터 법적으로 승인받는 소수민족으로서의 조선족명칭을 달게 되었다. 하여 조선족은 사회주의체제하에서의 사회주의 리념을 갖게 되었다. 그러다보니 조선족은 점차적으로 자본주의사회에 대한 배타성을 갖게 되었는바 이것이 한국인과의 원천적인 갈등이라 해도 과언은 아니다. 이런 원천적인 갈등으로 하여 조선족은 조선과는 친혈육처럼 지냈지만 한국과는 자본주의국가라는 시점에서 배타적으로 지내왔다. 갈등B:문화적인 차이 1989년도 최초로 한국에 다녀갔을 때 한국인들과의 접촉 중에서 공동점이라면 공산당은 “폭군”이 아닌가 하는 질문이였다. 이로 보아서 그제날 한국의 교육체제는 철저하게 사회주의배척체제교육을 실시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당시에 내가 접촉한 거의 모든 사람들은 “공산당은 머리에 뿔이 달렸다고 하는데 정말인가”고 롱담절반, 진담절반으로 문의했다. 그리하여 중국사회는 그런 사회가 아니라고 여차여차하게 설명해서야“그럼 그렇겠지 사람 사는 곳은 모두 똑 같지 않는냐”라고 개탄했다. 따라서 조선족들도 그제날에는 “자본주의나라는 거지가 욱실거리는 나라,깡통을 차고 빌어먹다가 숨진 암흑사회”라는 교육을 철저하게 받아왔다. 이러할진대 자본주의 체제에서 생활해온 한국인들이 사회주의체제에서 생활해온 조선족을 불신할 수 있을 수 있고 또 조선족들이 한국인을 불신할 수 있다는 것은 자명한 일이다. 이런 사회체제교육시각의 엄청난 차이점으로 하여 한국인과 조선족사이에는 심리상의 갈등과 오해가 자연히 생겨난 것이다. 다음 력사문화에 대한 인식차이를 살펴보자. 지금 중국에 살고있는 조선족청소년들은 물론 50대 지어는 60대에 이른 사람들도 우리 민족의 력사를 거의 모르고있다. 지어는 우리 글을 창제한 사람(세종대왕)이 누구인지도 모르는 사람이 적지않다. 이는 우리의 민족교육체제에서의 엄청난 비극이 아니라 할 수 없다. 자기 민족의 력사를 모른다면 고국인들과의 융합이 힘들 것이다. 그래서 한국인들이 여기 조선족들을 만나서 이러저러한 력사를 되풀이하면 모르고 모르다 보니 크게 관심을 돌리지 않고 또 이러저러한 력사를 알고 있느냐 하고 문의하면 안다고 떳떳이 말할 수 있는 조선족이 많지 못하다. 이에 한국인들은 한탄을 금치 못할 수 밖에 없다. 지어는 자기 민족의 력사도 모르니 어찌 한피줄이겠는가 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제날의 중국조선족은 망국의 설음을 안아오던 나머지 조선(한국)사람도 아니고 중국사람도 아닌 정체가 상당히 불투명해진 존재였다. 허나 중화인민공화국이 창건되면서 중국에 살고 있던 조선(한)인들은 자기의 피땀과 신근한 노력으로 떳떳하게 중화인민공화국의 공민으로 탈바꿈했다.그래도 조선족들에게 조상의 고향이 어디냐고 물어보면 조선 혹은 한국의 어느 도,어느 군 어느 면,어느 리라고 대답하지 중국의 어느 고장이라 대답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허나 일부 조선족은 조상의 고향을 모르고 있고 지어는 자기의 성씨 족보관계도 모르는 사람이 적지않다.한국에서는 자기의 족보를 모르는 사람을 “상놈”으로 취급한다. 필자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소학교시절에는 부친이 족보관계를 가르쳐주지않았고 (주;혹시 너무 어려서 가르쳐주지 않았을 것이다)중학교 1학년때에 문화대혁명이 터지면서 아버지가 력사반혁명으로 몰리고 어머니가 조교(조선교민)라는 리유로 집이 풍지박산 되다보니 집에  간직해 뒀던 족보마저 반란파들에 의해 불타버렸으니 어떻게 족보를 알겠는가? 다행히도 공부를 하면서 또 한국에 갔을 때 족보관계를 알게 되였기 때문이다. 이는 결코 조선족의 문제인 것이 아니라 력차의 중국의 정치운동 그리고 교육체제에서 생긴 문제라고 볼 수 밖에 없다. 또 례를 들 수 있는 것은 조선족의 세시문화이다, 설명절이 돌아오면 차례를 지낸다든가, 아침에 일어나서 아들, 며느리가 부모에게 이침인사를 한다든가...등등의 세시문화는 지금 조선족동포사회에서 거의 사라지고 있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현재 의학계의 학자들은 한개민족이 이역에 50년이상 거주하게 되면 그 나라의 정치,교육,문화 등 제반 요소에 의해 유전인자까지 변이한다는 설을 제기하고있다.이 설이 성립되면 중국의 조선족은 분명히 한족들에게 상당한 면에서 동화되어있다는 것을 제기하고 싶다. 한족들의 “만만디”기질이 조선족의 심령에 싹트기 시작했고 어떤 부분들에서는 한족들보다 더 “만만디”기질로 발전하고있다. 허나 조선족의 정체적인 문화심리를 분석하면 조선(한)도는 분명히 “친부모”이고 중국은 분명히 “양부모”라는 관점을 지니고 있다. 망국의 설음을 안은 중국조선족은 그 어느 민족과 달리 이중성을 띤 민족이다. 이런 견지에서 볼 때 조선족은 언제나 “친부모”와 대화하려 하고 “친부모”에게 그제날의 설음을 토로하고 싶어한다. 갈등C:시장경제에서의 갈등 1953년도에 조선(한)반도에서 건너온 조선(한)인들이 조선족이라는 법적인 지위가 차례지게 되었다. 한마디로 “양부모”의 집에 와서 이름을 새로 지었다는 얘기로 된다. 지위가 확정되면서 조선족은 사회주의 시장경제 즉 계획경제속에서 세월을 지내게 되었다. 그러다보니 경제도약에 대한 개념도 점차적으로 희박해지게 되고 또 수십년 동안 언론매체에서도 한목소리로 세계에서 가장 우월하게 사는 사회주의나라로 선전하다보니 자본주의 발전형태는 알 길이 없었다. 또 가만히 자본주의국가 방송을 듣거나 언론을 퍼뜨린다면 대뜸 “반혁명”이요,“반사회주의 분자”라는 모자를 들씌워 놓으니 워낙 민감해진 조선족들은 감히 자본주의경제를 연구하지 못하게 되었다. 헌데 서울에서 88올림픽을 성공적으로 치렀다는 소식을 알게 되었고 또 1992년도에 중한수교가 이루어지면서 중국의 조선족은 두려움과 신비감으로 가득찬 눈길로 “쪽문”을 슬그머니 열고 바깥세상을 보기 시작했다.그제날 토막나무를 때면서 이밥을 먹으면 대만족이라고 여겼던 관념이 180도로 바뀌여지기 시작했다. 그제날에는 자전거도 없어 몇십리 지어는 몇백리 길을 걸어 다녀야 했고 시골에서는 지금도 소수레를 주요교통도구로 쓰고있는 조선족은 한국에서는 자전거를 보건체육용으로 리용하고 소는 식용으로 하기 위해 기르며 수레는 “골동품”으로 취급되여 박물관에서 력사적사명을 완수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더우기 한국은 일인당 소득이 만딸라,중국의 일인당 소득이 몇백딸라밖에 안된다는 것을 알게 된 조선족사회는 마른 장작개비에 불이 확 달린셈이 되었다.일확천금 “한국꿈”이 조선족사회에 온역처럼 퍼져나가면서 한국에 가면 길바닥에 딸라가 널려져있어 허리 아파 줏지 못할 정도라고 착각까지 했다. 그제날 교육에서 파생된 경제창조가치개념에 큰 오차가 생긴 것이다. 그제날 계획경제모식속에서 수십년동안 살아온 조선족은 로동재부창조성군단으로 발전한 것이 아니라 의존성군단으로 자리매김을 했다.이런 와중에 한국초청사기,한국인랍치사건들도 빈번하게 생기고 있다.아직까지도 1만6000여 가구의 한국초청사기피해자들이 눈물을 휘뿌리며 떠돌이생활을 하고있다. 또한 한국에 간 조선족들도 불법체류란 딱지를 쓰고 어지럽고 힘들고 위험한 이른바 “3D업종”에서 일하면서 월급도 제대로 받지 못한 조선족들이 기수부지이고 사고로 사망하고 병들어 사망한 사람들의 골회함이 아직도 재대로 구중천에 가지 못하고 영안실에 그대로 방치돼있다고 한다.또한 불법체류라는 리유로 숱한 돈을 쓰고 한국에 갔다가 쫓기워 온 사람이 그 얼마인가? 료해한데 의하면 일본은 자기 민족에 한해서는 절대적인 관용정책을 실시하고 그제날 중국땅에 남아있던 일본인들을 몽땅 본국에 데려갔을 뿐만아니라 중국땅에 묻혔던 일본인들의 뼈까지도 파갔다고 한다.(필자의 대학 동창생 한 사람도 아버지가 일본인이여서 일본으로 귀화해 갔음)물론 나라와 나라와의 외교문제도 있겠지만... 여기에서 조선족도 하루속히 경제의존성군단으로부터 로동재부창조성군단으로 나가야 한다는 것을 깊이 깨달아야 한다. 어느 한 교육심리학자는 “조선족교육은 민족의 주인을 양성하기 위한 교육인 것이 아니라 일군을 양성하기 위한 교육이다”라고 첨예하게 지적했다. 주인의식이 없다는 것은 창조성의식이 없다는 얘기이다. 따라서 일군의식이라는 것은 의존성의식 즉 남이 시키는 대로만 하는 의식이라 하겠다. 그리하여 해방된지 50여년이 흘러도 중국의 조선족은 노래나 잘 부르고 춤이나 잘 추는 민족으로 불리웠지 경제의식이 삐여진 민족으로는 인식되지 못했다. 물론 그제날 우리의 조상들은 근로하고 용감한 민족으로 각광받았지만 오늘날에 와서는 그 경제의식 정체가 상당히 희미해졌다. 이는 시장경제론리로 볼 때 아주 위험한 민족의식이라 하겠다.이런 의식으로 하여 조선족은 궁극적으로 다른 민족에게 업심을 당하게 될 것은 물론 동족인 한국인에게도 업심을 당하게 될 것이라는 것은 의심할 나위가 없다. 오늘날 한국인과 조선족사이의 갈등이 생기게 된 것은 결코 우연한 것이 아니다. 지나온 력사배경, 교육, 문화, 체제의 차이, 경제가치관념의 차이로 말미암아 오늘날 특정된 시기에서 갈등이 폭발한 것이다.그러므로 이런 갈등해소는 제반 조선족사회와 한국인사회에서 공동히 풀어나가야 할 중대한 과제도 되고 있다.
조화로운 중한-한중관계가 국가 사이는 물론 중국에서 살고 있는 200만 중국 조선족 그리고 중국에 진출한  한국인으로 놓고 볼 때 더 말하지 않아도 굉장히 중요하다. 양국간에 불협화음이 생기면 양국의 이익에 큰 손해를 주는 것은 물론 중국조선족과 재중한국인 또한 재한 중국인들에게 있어서 큰 피해가 생길 수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할 시점이다. 양국의 정상들이 올해 양국관계를 '전략적인 동반자'관계로 업그레이드 하고 있는 것은 양국정부는 물론 양국 국민들 사이에 평화로운 사회를 구축하는데 그 의미가 굉장히 깊다. 그러나 요즘 이른바 혐한, 혐중 정서가 생기고 있는 것 또한 현실이다. 그래서 본사 미국LA지사와 길림성지사는 중국조선족이 대거 집거해 있고 또 조선족자치제도를 실시하고 있는 연변에서 본사 연변지사의 주관하에 '조화로운 중한관계에서의 중국조선족 역할'이란 테마로 중국조선족사회가 해결해야 할 문제를 갖고 연변지역의 일부 학자, 교수, 언론인, 법률인, 문학인, 기업인 등 20명 인사들을 모시고 10월 6일에 연길시에서 좌담회를 가졌다.  중국현지 혐한상황,한국 현지에서 반중국 상황에서의 중국조선족사회가 갖추어야 할 자세  "중국 조선족사회는 그 누구보다 혐한현상의 심각성과 결과를 염두에 두어야 한다"고 박준덕 연변아리랑매체발전유한회사 이사장은 밝히고 나서 다음과 같이 얘기했다. 혐한 현상이 발전하면 중국조선족사회의 경제, 생활, 사업 등 면에서 큰 영향을 초래하기 때문에 한국 혹은 한국인에 대한 비난과 불만만 토로할 것이 아니라 존재하는 문제와 그 해결책을 찾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우선 쌍방의 도움은 상호간에 인식해야 한다. 즉 서로돕기 차원을 업그레이드 해야 한다. 사실 중국조선족은 한국에서 얻으려는 심리가 더욱 많다. 중한수교 16년래 조선족이 한국의 도움을 많이 받았고 얻은 것도 많지만 중국에 진출한 한국인들에게 진정한 인도와 봉사적인 도움이 결핍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정부는 외자유치에만 신경쓰고 또 민간단체에 후원자금에만 신경쓰고 한국인들에 대한 실질적인 봉사와 봉착한 곤란을 해결해 주는데는 인색했다.  또 중국사회의 혐한 현상의 허와 실을 잘 파악하여 동민족이고 고국인 한국도 이해해주고 중국사회에서 적극적인 역할을 해야 한다. 절대 불붙는 데 키질하는 나쁜 행실을 자제하고 한국에서 생기는 일부 현상을 전부로 해석해서는 안 된다.  이런 현상을 자제하자면 중국조선족들 사이에 화합이 잘 되어야 하며 조상 타령만 하지 말고 끈질기게 노력하는 자질을 제고해야 한다.  중국조선족이 역할을 잘 하자면 중국 주류사회에 적극 진입해야 유연산 연변대학 교수는 "민간단체와 학자들이 구심점이 되어 주류사회 즉 한족사회에 적극적으로 진입해야 한다. 왜냐하면 중국조선족의 '친부모는 조선반도'이고 양부모는 '중국'이기에 한족사회와의 교류를 확대해 믿음을 가지게 해야 하며 또 한족들이 중국조선족사회를 알게하기 위해서는 전문 중국조선족사회를 반영하는 '중문 신문'을 발간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했다. 서봉학 연변중국생태문화발전추진회 부회장은 "민속발굴에서 보면 중국조선족의 뿌리는 조선반도에 있지만 여기의 민속자원을 개발하고 발전시키자면 한족간부들을 설득시키는 것이 중요하다"며 얼마 전에 연변중국조선족생태문화발전추진회를 설립했는데 한족인 중공연변주위서기 등개가 이 보고를 수렴한 후 이렇게 좋은 사업을 왜 지지하지 않겠는가 하면서 후에 곤란한 일이 있으면 제기하라고 하면서 자금도 지원해 주겠다고 선뜻 나섰다고 했다. 또 중국조선족 자원을 개발하는 텔레비전프로그램을 제작해 중문으로 번역해 중앙에 보내는 과정에서 자금문제가 봉착하니 바로 해결해 주었다고 했다. 중국조선족 민간외교역할을 잘하려면 우선 민간을 대표할수 있는 조직이 있어야 허명철 연변대학 교수는 "역사적으로 또 민족적 차원에서 중한관계를 진맥해 보아야 하는데 특히 간도문제, 고구려 문제, 문화재 등록 등 역사문제에 있어서 견해가 부동하다"며 다음과 같이 얘기했다. 중한관계,한중관계에서 중국조선족의 참여로 생기는 문제가 없는가 하는 것을 우선 잘 검토해야 할 것이다.중국의 차원에서 한국인과 중국조선족은 동일민족이라는 것을 인정하고 있다. 이번 방문취업문제는 전적으로 중국 조선족을 위한데 있다. 오래전에 한국 일부 브로커와 중국의 일부 조선족이 합작해 초청사기, 위장결혼 알선 법률위반 등 좋지 않는 일들이 많았는데 이는 중한관계 더욱이는 한국과 중국조선족 사이에 아주 나쁜 영향을 끼쳤다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  그럼 중국 조선족은 중한관계, 한중관계에서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가? 민간외교관역할을 해야 한다.그러자면 힘을 단합할 수 있는 집단이 있어야 하고 뒷심이 있어야 한다. 그러나 아직까지 정부차원의 뒷심이 모자라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중국조선족은 힘이 미약하다. 문화적인 집단적인 작용이 적으면 민간외교작용도 활발하게 벌어질 수 없다. 현재 중국의 동북3성은 물론 산동, 베이징 등지에 각종 명목의 중국조선족 민간단체들이 아주 많지만 이런 민간단체들이 결집된 단체의 장이 형성되지 못하고 있는데 이는 중국조선족사회가 풀어나가야 문제이다.  언론의 작용을 잘 발휘해야 장경률 연변일보 기자는 "중국에서 지금 조화로운 사회를 구축하고 있는데 이제 더 나아가서는 세계적인 조화사회를 구축하려고 하고 있다"고 하면서 다음과 같이 얘기했다.  중한관계에서 잡음이 생길 수 있으며 앞으로도 또 새로운 정세하에서 다른 잡음이 생길 수 있는데 이는 필연적이다. 한중수교 이후 중국조선족들이 많은 발전을 가져왔다. 따라서 한국문화를 중국에 적극 홍보하는 것은 중국조선족 언론의 책임이다.  서로간의 문화적인 이해는 조화로운 중한관계 - 한중관계에서 아주 중요하다. 한국이 경제가 발달했기에 중국조선족의 위신도 높아가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한국은 진보적이고 선진적인 나라라는 점을 인정하지 않으면 안 된다. 한국 덕분으로 중국조선족들이 잘 살게 된 것 만은 사실이다.  처음에는 개별적인 초청, 후에는 친척방문, 60세 이상 초청, 취업비자, 특종업초청발급 등 모든 면에서 한국은 조선족들에게 편리를 도모해 주었다. 그러나 출국상황을 보면 지식층, 재력가, 권위층, 젊은이들은 한국에 간 비례가 적다. 돈 없고 살기 힘든 40대 안팎의 사람들이 대부분 출국한 것이 연변의 현실이다.  세계적인 구도로 볼 때 정치, 경제, 군사, 언론 이런 순이었는데 지금은 정치 다음으로 언론이다. 그래서 중국에서도 언론을 몹시 중시하고 있어 언론의 힘이 커져 두 번째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그러므로 중국조선족언론에서는 정면적인 소식들을 많이 실어야 하고 또 언어문자면에서도 한국어를 빨리 보급해 불필요한 오해를 피해야 할 것이다.  중한-한중법률관계에서 중국조선족변호사들이 해결해야 할 문제  허귀철 변호사는 "중국과 한국은 법률적인 차원이 많이 다르다"며 다음과 같이 얘기했다. 중한관계-한중관계를 법률로 보아도 많은 면에서 다르다. 중국조선족이 법률적으로 해결해 주지 못하는 문제들이 아주 많고 또 할 수 없는 역할도 많다. 한국은 국민을 위해 법률이 제정되었고 중국은 중국차원에서 법률을 제정했다.  중한수교가 이루어 진 뒤에 이른바 위장결혼이 급증해 법률사건으로 번져 불안정한 요소로 대두되어 사회적인 문제가 되고 있다. 특히 한국인과의 결혼에서 절대 다수는 결혼이란 제도를 통해서 외국에 나가 돈을 벌려는데 목적이 있다. 그러나 모두 위장결혼이 아니다. 진짜결혼도 적지 않다. 중국인이 한국인과 결혼하자면 1차에 16가지, 2차에 19가지 증명서류가 넘어가야 하는데 모두 진짜 서류이다. 즉 모두 공증된 서류라 하겠다.  이른바 위장결혼이든 진짜결혼이든 마찬가지로 이같은 서류들을 작성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한국의 혼인법률에 따라 되돌아오는 조선족도 적지 않다. 그래서 조선족변호사로서는 아주 안타깝기 그지없다. 비록 이런 법률조항으로 놓고 볼 때 조선족변호사로서 역할이 크지 못하고 있지만 향후 필연적으로 조선족 변호사들이 나서서 해결해야 할 일이다. 이런 결혼사기 등을 갖고 여러번 한국에 가서 변호로 나서고 있는데 다행히도 이런 문제들을 받아들여 한국 경찰청에서 한국 위장결혼 브로커들을 600여명이나 체포했는데 이는 아주 고무적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지금 이런 법률문제에서 국가 간의 공조체제가 잘 이루어 지지 못한 현실에서 민간적인 법률구조사업을 밀고 나가야 하기에 중국조선족 변호사들의 개입이 필수적이라고 보아진다.  각종 사기 등에 대해 배동걸 씨는 "중국조선족과 한국과의 사이는 많이 교류해야만 교감이 생긴다"며 "취업비자문제에서 수두룩한 문제점이 생기고 있다. 향후 10만 명 선이 방취제 시험을 칠 것으로 보고 있는데 대부분이 비자를 받자면 몇 년은 걸려야 한다. 이들은 등록비 외에 외지에 시험치러가야 하기때문에 출장비도 적지 않게 들고 거기에 어떤 사람은 집 팔고 땅 팔고 하면서 한국행을 기다린다"고 한다. "이런 문제들이 하루속히 해결하지 않으면 불신의 갈등이 생길 수 밖에 없어 한국에서 정책을 펴낼 때 중국조선족사회의 호소를 잘 들어야 사기행각 등 법률적인 문제들을 미연에 방지할 수 있다"고 했다.  중국조선족지역 문화관광업 발전은 상호 이해에 큰 도움  김기호 연변해란강여행사 사장은 "지금 용정에 오는 한국관광객이 크게 줄어들고 있다."며 "중국조선족지역의 관광업을 발전시키는 것은 한국과 조선족사회는 물론 중한관계발전에서 큰 도움이 된다"며 다음과 같이 얘기했다.  중국에서의 관광업이 늦게 시작되었고 또 관광기초시설이 잘 되지 못하고 있다. 관광지를 잘 건설해야 한국.미국 혹은 일본손님이 많이 올 수 있으며 따라서 문화교류가 빈번해질 수 있다. 이렇게 자주 내왕하면 외국인들은 투자할 곳을 쉽게 찾을 수 있다. 관광지의 기초시설은 물론 소프트웨어 환경이 좋으면 한국인들은 다투어 투자하려 한다. 연변주 기둥산업인 관광업이 발전하면 연변의 경제가 같이 발전한다. 연변에서 상품의 질을 꼭 보장해야 한다. 한국인들은 장백산 다음에는 유서깊은 용정을 꼽는다. 관광시설이 차하면 오려던 관광객도 잃는다.  정세봉 소설가는 "우리말과 글 얼이 살아 숨쉬는 이 땅에서 문화라는 이 테마로 서로 보슬비처럼 습윤하게 되면 서로의 접근이 스스로 되고 또 접근이 잦으면 스스로 문제들이 풀어질 수 있다"고 했다.  중국조선족 문화교류를 전제로 경제교류를 중심으로 원활한 역할을 해야 손동식 전 연변대학 교장은 "중한관계-한중관계는 나라 차원으로도 중요한 문제이다. 중국은 미국, 러시아, 일본과의 관계를 잘 해야만 주변국인 한국과의 관계도 반드시 잘 해야 한다. 바로 이런 차원에서 후진타오 주석은 베이징올림픽이 끝나자 바로 한국을 방문했던 것이다"고 말했다.  물론 중국이 다른 나라들과 관계를 적극 발전시키고 있지만 모순이 생기는 것은 정상적이다. 한국이 미국을 떠날 수 없는 것은 현실이고 또 중국을 떠날 수도 없다. 큰 모순은 국가차원에서 해결해야 하지만 중국 조선족은 문화교류를 전제로하는 경제교류를 중심으로, 양국 간의 관계에서 원활한 역할을 해야 한다. 특히 중국과 한국은 문화적으로 봐도 옛날부터 유교문화권에 속해 있어 많은 동질성을 갖고 있다. 지금 연변대학은 한국의 도움이 크다. 연변대학생이 한국에서 석사, 박사학위를 수여받은 사람이 백여명, 또 연대에 온 한국 유학생이 400여명 있다. 이들이 중한관계를 잘 알고 있으므로 후에 큰 자원이 된다. 또 중국조선족 사회가 한국과의 활발한 과학기술 교류도 조화로운 중한관계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다. 특히 조선족은 중국의 소수민족이란 개념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지만 정치적인 인재도 많아야 한다.그러나 지금 보면 국내 소수민족가운데 중국조선족이 정치적으로 아주 약한 민족이기에 중국조선족 정치인들을 많이 배출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67    동이전東夷傳 고구려高句麗 사료史料 모음 댓글:  조회:109  추천:0  2021-07-14
동이전東夷傳   고구려 자료 모음     後漢書       高句麗(고구려)       '고구려'는 '요동'의 동쪽 천리에 있다. 남으로 '조선' '예맥'이 있고, 북으로 부여에 접한다. 지방이 이천리이다. 큰산이 많고 계곡이 깊어 사람들이 따라 거한다. 작은 밭일이라 힘써 지어도 족하지 않으니 스스로를 헤아렸다. 고로 그 풍습이 절약하여 밥을 먹고, 집을 크게 하는 것을 좋아한다. '동이'가 서로 전하기를 부여의 다른 종류라 한다. 고로 언어와 법등 많은 것이 같아 한쪽 다리를 끌며 꿇어 앉아 절하고 걸음걸이는 모두 달리는 것과 같다. 무릇 다섯종족이 있는데,     '소노부'[혜동에 말하길 '消'는 위지에 '涓(연)'으로 되어 있다.], '절노부', '순노부', '관노부', '계루부'로[고려오부는 하나 '내부'로 일명 '황부' 즉 '계루부'이며 둘은 '북부' 일명 '후부' 즉 '절노부'이고 삼은 '동부' 일명 '좌부'로 즉 '순노부'이고 사는 '남부' 일명 '전부' 즉 '관노부'이며 오는 '서부' 일명 '우부' 즉 '소노부'이다.] 본래 '소노부'에서 왕을 하였는데, 점점 약해져 '계루부'에서 이를 이었다. 그 벼슬을 세워 '상가', '대노', '패자', '고추대가',[위지에는 '고추가'이다. 고려에서 손님을 접대하는 관직으로 '홍려(관직명)'와 같다.] '주부', '우태', '사자',[위지에 '사자' 위에 '승'이 있다.] '백의', '선인'이 있다.[위지는 '帛'는 ' (조)'자로 서로 비슷하여 혼란되어 바뀌었다. 조일청의 삼국지주보의 환우기에 '조의'의 우두머리는 '대형'이다. '동이'가 서로 전하길 '조의','선인'이다.라고 하였다.]       '무제'가 '조선'을 멸하고, 이로써 고구려를 현으로 하였다. [전서에 '원봉'중에 '조선'을 정하여 '진번' '임둔' '낙랑' '현도' 사군으로 하였다.] '현도'에 속하게 하고, 북과 피리와 광대를 주었다. 그 풍속이 음란하여, 모두 깨끗한 옷을 두르기를 즐겨 밤이 오면 쉽게 남녀가 모여 가무와 음악을 즐겼다. 귀신과 토지신, 영성 [전서 음의에 '용성'의 좌각을 말하여 '천전'이라하니 즉 농사에 상서로운 것이다 진일에 우성에 제사지내니 불러 '영성'이라 한다. 풍속지에 진의 신을 '영성'이라 한다. 고로 진일에 동남에 제사한다.]에게 제사하길 좋아하여 시월에 큰 모일을 가져 하늘에 제사시내니 일명 '동맹'이라 한다. 기 나라 동쪽에 큰 구멍이 있어 불러 수신이라 한다[위지 통지에 ' '이 '隧'로 적혀있다.]. 또한 시월을 맞이하여 이에 제사지낸다. 공적인 모임에는 의복이 모두 비단으로 금과 은으로 스스로를 치장하였다. '대가'와 '주부'는 모두 머리띠를 하는데 관과 같고 뒤가 없다. '소가'는 절풍을 하는데 모양은 고깔과 같다. 감옥이 없어 죄가 있으면 여러 가들이 심의하여 이를 살인에 처하고 그 처자는 노비로 삼았다. 혼인은 모두 부인의 집에서 치루고 자식을 낳아 다 크면 그런 연후에 마땅히 돌아온다. 사람을 보낼때가 되면 그 도구를 갖추었다. 금 은 재물 비단이 다될때까지 후하게 장사지내고 돌을 쌓아 봉분을 만들고 또한 소나무와 잣나무씨를 뿌렸다.  그 백성의 성품이 흉하고 급하고 기력이 있어 전투를 익히고 노략질을 좋아하였다. '옥저', '동예'가 모두 소속되어 있다.   '구려'는 일명 '맥'이다. 그 갈라짐이 있으니,[심흠한이 말하길 구려에는 종류가 있으니 일명 '맥이'이다. 통지에 '맥'이라 하고 '이'자가 없다. 이 '이'자는 첨언한것이다.] 작은 물에 의지하여 거하면, 이를 명하여 '소수맥'이라 한다. 좋은 활이 나온다. 이를 소위 '맥궁'이라 한다.[위씨춘추에 말하길 '요동군''서안평현'북쪽이다. 작은 물이 있어 남쪽으로 흘러 바다로 들어간다. '구려'의 다른 종류를 명하여 '소수맥'이라 한다.]   '왕망'초에 '구려'의 병사를 보내어 '흉노'를 정벌하려고 하였으나, 사람들이 가고자 하지 않았다. 강제로 이에 파견하니 모두 도망하여 변방에서 노략질 하였다. '요서'대윤 '전담'이 쫓아 공격했으나 전사하였다. '망'이 장수 '암우'에게 이를 공격하라고 명했으나, 구려후 '추'를 꾀어 변방으로 들어가[위지에는 '騶(추)'가 ' (도)'로 되어 있고 전한서 왕망전에는 '騶'로 되어 있다.] 이를 베어 '장안'에 머리를 전했다. 망이 크게 말하길, '고구려왕'의 명을 고쳐 낮추어 '구려후'라 하였다. '맥인'의 변방 약탈이 더욱 심하였다. '건무' 팔년 고구려가 사신을 파견하여 조공하였다. '광무' 다시 왕호를 회복했다. 이십삼년 겨울 '구려' '만우락'대가 '대승'등 만여호가 '낙랑'의 안에 이르러 속했다. 이십오년 붐 '구려'가 '우북평' '어양' '상곡' '태원'에 침입하자 요동태수 '제융'이 은혜와 믿음으로 이에 구하니 모두 변방으로 돌아갔다.       후에 구려왕 '궁'이 태어나자 눈을 뜨고 능히 보니, 나라사람이 꺼려하였다. [위지에 '懷'는 '惡(미워하다)'오 기록되어 있다. '懷'는 마땅히 '괴(괴이하다)'가 잘못된 것이다. 옛부터 '懷'자는 많이 ' (두려워하다)'와 섞어 썼다. 고로 잘못되어 바뀐 것이다.] 이에 자라 용맹한 장사가 되니 여러번 변경을 침범하였다. '화제''원흥'원년 봄 요동에 다시 들어와 육현을 빼앗아 노략질 하니 태수 '경기'가 나아가 이를 격파하여 그 큰 장수를 베었다. '안제' '영초' 오년 '궁'이 사신을 파견하여 조공하며 '현도'에 속하길 구했다. '원초' 오년 다시 '예맥'이 '현도'를 노략질하고 '화려성'을 공격하였다.[화려는 현이고 '낙랑군'에 속한다.] '건원'원년 봄 유주자사 '풍환', 현도태수 '요광', 요동태수 '채풍'등이[위지 북사에 '諷'이 '風'으로 기록되어 있고 안제기에 '諷'으로 되어있다. 통감도 이와 같다.] 병사로 변방에 나아가 이를 공격했다. '예맥'의 큰 장수들을 베고 포로로 삼으니 병마와 재물을 얻었다. '궁'이 이에 아들 '수성'과 장병 이천여명을 '광'등에게 보내며 사신을 보내어 거짓 항복하자 '광'등이 이를 믿었다. '수성'이 이에 험하고 좁은 지형으로 대군을 막고 삼천명으로 몰래 들어가 '현도'와 '요동'을 공격하여 성곽을 불사르고 이천여명을 죽이고 상처입혔다. 이에 '광양' '어양' '우북평' '탁군여국'이 삼천여 기병으로 동시에 이를 구하고자 파견하였으나 맥인은 이미 가버렸다. 여름 '요동''선비'의 팔천여명으로 '요수'를[현의 이름이다. 요동군에 속한다.] 공격하여 빼앗아 사령과 백성을 죽였다. '채풍'등이 뒤쫓아 '신창'으로 나아갔으나 전몰 하였다. 공조'경모', 병조연'용서' 병마연'공손포'가 몸으로 '채풍'을 막았으나 병사들과 함께 죽었다. 죽은자가 백여명이다. 가을 '궁'이 '마한''예맥'의 수천여기병을 이끌고 현도를 포위하자 부여왕이 아들 '위구태'와['台'는 또한 '治'이다.] 장병 이만여명을 파견하고, 주군의 병력을 합하여 이를 깨뜨리고 정벌하니 그 머리를 오백여개나 베었다.       이해에 '궁'이 죽고 아들 '수성'이 올랐다. '요광'이 위에 말하길 '이 상으로 인하여 병사를 파견하여 이를 공격하자' 하니 의논한자들이 모두 이를 가히 허락하였다. 상서 '진충'이 말하길 궁은 전의 '걸'과 같고 교활하니, '광'은 능히 깨지 못할 것이다. 죽음으로 이를 공격하는 것은 의가 아니니 조문의 파견해야 한다. 인하여 전의 죄를 책망하고 용서하여 가히 처벌하지 않아 후에 친선을 취해야 한다. 하니 '안제'가 이를 쫓았다. 다음해 '수성'이 한나라에 살아있는 백성들을 돌려 보내기 위해 '현도'에 항복하니 고하기를 '수성'등이 포악하고 배반함이 형용할수 없어 마땅히 베어 절단하여 절임으로써 백성에게 보여야 하나, 다행히 용서를 받아 죄를 청하여 항복하길 빈다. '선비' '예맥'은 해마다 노략질 하고 백성을 빼앗아 핍박하니, 수천이요, 마름질하여 보내는 자는 수십에 백명이니, 이는 교화될 마음이 아니다. 이 후로 현과 관은 전쟁하지 말것이며 친하고 따르며 살아있는 자를 보내니 모두 바로 그 세를 바쳐야 한다. 사람당 비단 사십필이고 어린이는 그 반이다.       '수성'이 죽자 아들 '백고'가 올랐다. 그후에 '예맥' 복속하여 따랐다. 동쪽으로 작은일들만이 있었다. '순제''양가' 원년 '현토군'에 둔전 육부를 두었다. '질'과 '항'사이에 요동 서안평을 다시 침범하니 '대방'의 령을 죽이고,[군국지에 '서안평' '대방'은 현으로 '요동군'에 속한다.] 낙랑태수의 처자을 잡았다. '건녕'이년 현토태수 '경임'이 이를 쳤다. 수백의 머리를 베니 '백고'가 다시 항복하여 '현도'에 속하길 구걸했다.       三國志       高句麗 (고구려)       '고구려'는 '요동'의 동쪽 천리에 있다. 남쪽은 '조선''예맥'이 있고, 동쪽은 '옥저'가 있으며, 북쪽은 '부여'에 접한다. 도성은 '환도'로, 사방 이천리 이며 호수는 삼만이다. 큰 산과 깊은 계곡이 많으며, 벌판과 호수가 없다. 산과 골짜기를 따라 거주하며, 계곡물을 마신다. 좋은 밭이 없어, 비록 힘써서 밭을 경작하지만, 열매가 충분하지 않아, 배가 고프다. 풍속에 음식을 절약하고, 집을 관리하는 것을 즐겨 그 거하는 곳에 큰 집을 좌우에 세우고, 귀신에 제사지낸다. 또한 신령스런 별과 토지신에게도 제사 지낸다. 그 사람들의 성품이 흉악하고 급하여, 도둑질함을 즐긴다. 그 나라에 왕이 있고 관직이 있어 '상가', '대로', '패자', '고추가', '주부', '우태승', '사자', '조의','선인'이라 하니, 높고 천함의 등급이 각각 있다. 동이의 오랜 말로써 '부여'의 다른 종류로 언어가 여러 가지이나, '부여'와 같은 것이 많다. 그러나, 그 성질과 기운과 의복은 다름이 있다. 본래는 다섯 부족으로 '연노부', '절노부', '순노부', '관노부', '계루부'가 있다. 본래 '연노부'에서 왕을 했는데, 점점 약해저, 이제는 '계루부'에서 대를 잇는다.       한나라때에 북치고 피리부는 재주를 가진 사람을 하사하였는데, 항상 '현토군'에서 조복과 의책을 받아갔다. '고구려'를 영주로서 그 이름을 기록하였다. 후에 점점 교만해지고 방자해 지더니. 군에 복종하지 않고, 또한 동쪽 경계에 작을 성을 쌓았다. 조복과 의책을 그 가운데 두면, 해마다 이를 가질러 왔다. 이제 '호'들 조차도 그 성의 이름을 '책구루'라 한다. '구루'라는 것은 '구려'의 성의 이름이다. 이곳에 관을 두고 '대로'을 두면, '패자'를 두지 않고, '패자'를 두면. '대로'를 두지 않았다. 왕의 종족으로 '대가'는 모두 '고추가'로 칭하는데, '연노부'가 본래 나라의 주인으로 이제는 비록 왕이 아니라 하더라도, 혈통을 잇는 대인으로 '고추가'가 칭한다. 역시 종묘를 세우고, 영성과 사직에 제사를 지낼 수가 있다. '절노부'는 세세토록 왕과 혼인을 하는여, '고추'라는 이름을 얻었다. 여러 대가들은 역시 스스로 '사자', '조의', '선인'을 두어 그 이름을 모두 왕에게 알리는데, '대부' 벼슬하는 집의 신하들은 모임에 앉거가 일어서는데 있어, 왕가의 '사자', '조의', '선인'과 같은 반열을 얻지는 못한다.       그 나라의 대가들은 밭을 갈지 않는데, 앉아서 밥 먹는 자가 만여호나 이른다. 아랫사람들이 멀리서부터 쌀과 양식과 물고기와 소금을 짊어지고 와서 공손히 보태준다. 그 백성들은 노래와 춤추는 것을 좋아하여, 나라의 읍락에서는 밤이 되면 남녀가 무리지어 모여들어, 서로 따르며 노래하고 춤춘다. 큰 창고는 없으나 집집마다 스스로 작은 창고가 있어, 이름하여 '부경'이라 한다. 사람들은 탐욕이 없지만, 좋은 술을 감춰두는 것을 좋아한다. 꿇어 엎드려 절할 때 다리 하나를 뻗는데, '부여'와 이것이 다르다. 길을 갈때는 모두 달린다. 시월에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것이 나라의 큰 모임으로 '동명'이라고 한다. 공적인 모임때의, 의복은 모두 비단이고 금과 은으로 스스로를 꾸민다. '대가'나 '주부'는 머리에 두건을 하는데, 수건같이 생기고, 뒤가 없다. '소가'는 절풍을 하는데, 형태가 고깔과 같다.       그 나라의 동쪽에 큰 굴이 하나 있는데, '수혈'이라 한다. 시월 나라의 큰 모임에서  수혈신을 맞이하여 나라 동쪽에서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데, 나무로 수혈신의 자리를 만들어 둔다. 감옥이 없고, 죄가 있으면, 여러 '가'들이 모여 의논하여, 이를 죽인후 처자는 노비로 삼는다. 그 혼인하는 풍속은 말로써 이미 정해지면, 여자의 큰 집 뒤에 작은 집을 짓는데, 이를 '서옥'이라 한다. 사위 될 사람이 저녁무렵에 여자의 집 대문 밖에 이르러, 스스로의 신분을 밝힌 후 꿇어 엎드려 절한 후에 여자와 하룻밤 자기를 청하는데, 보통 두세번 한다. 여자의 부모님이 받아들여 작은집에서 잠잘 수 있게 하면, 돈과 비단을 내 놓는다. 아들은 낳아 장성하게 되면, 이에 마땅히 부인과 집으로 돌아 온다. 그 풍속은 음란하다. 남녀가 결혼만 하면, 조금씩 죽어서 입을 옷을 만든다. 장사는 후하게 하는데, 금은 비단을 죽은자에게 보낸다.(함께 묻는다.??) 돌을 쌓아 봉분을 하고, 소나무와 잣나무를 심는다. 말들은 모두 작아, 산을 오르기에 편하다. 나라 사람들은 기력이 있고, 전투를 익힌다. '옥저', '동예'가 모두 속하였다. 또한 '소수맥'도 속하였다. '구려'가 나라를 일으킬 때 큰 물을 의지하여 일어났는데, '서안평현'북쪽에 소수가 잇어 남쪽으로 흘러 바다로 들어간다. '구려'의 별종으로 소수를 의지해 나라를 일으키니, 인하여 '소수맥'이라고 이름한다. 좋은 활이 나오니, 소위 '맥궁'이라 한다.       '왕망'초에 '고구려'병사를 일으켜 '호'를 치려고 하는데, 가고자 하질 않았다. 강제로 다그쳐 이에 파견하였는데, 모두 변방에서 달아나 버려 도둑이 되었다. 요서 대윤 '전담'을 보내어 이를 공격하게 하였는데, 거기에서 살해 당하였다. 주군현에서 '구려후 추'에게 허물을 돌리자, '엄우'가 진언하길 '맥인이 법을 범한 것이니, 죄는 '추'에게 있지 않습니다.오히려 위로함이 마땅합니다. 이제 큰 죄를 뒤집에 쒸우면, 반란을 일으킬까 두렵습니다.' 하였으나, '망'이 듣지 않고, '우'에게 공격하라 명하니, '우'가 '구려후 추'를 꾀어, 만나길 약속하자, '추'가 이르자 이를 베고, 그 머리를 '장안'으로 보내었다. '망'이 크게 기뻐하며, 천하에 포고하길 '고구려'의 이름을 '하구려'로 바꾸어 명하게 하였다. 마땅히 이때부터 후국이 되었다. '한''광무제' 팔년 '고구려왕'이 사신을 파견하여 조공하자, 왕이라 칭하기 시작했다.       '상제'와 '안제'의 사이에 이르러, '구려왕 궁'이 수차례 '요동'을 침범하자 다시'현토'가 속하게 하였다. 요동태수 '제풍과 현토 태수 '요광'이 '궁'이 두 고을에 해가 된다 하여, 군사를 일으켜 이를 쳤다. '궁'이 거짓 항복하며 화친하길 청하자, 두 군이 나아가질 않았다. '궁'이 비밀히 군사를 보내어 '현토'를 공격하여, '후성'을 불사르고, '요수'에 들어와 관리와 백성을 죽였다. 후에 '궁'이 다시 '요동'을 침범하자, '제풍'이 제빨리 군사를 내어 이를 토벌하려 했지만, 군사가 패하고 말았다.       '궁'이 죽고 아들 '백고'가 섰다. '순제'와 '환제' 사이에 다시 '요동'을 침범하여 '신안','겨향'을 약탈하고, 또한 '서안평'을 공격하였다. 길위에서 '대방' 태수를 살해하고, '낙랑'태수의 처자를 얻어, 사로잡았다. '영제 건안' 이년 '현토'태수 '경임'이 고구려를 침공하여 포로 수백의 머리를 베자 '백고'가 항복하여, '요동'에 속하였다. '가평'중에 '백고'가 '현토'에 속하길 빌었다. '공손도'의 웅지가 바다동쪽에 이르자, '백고'가 대가 '우거'와 주박 '연인'등을 파견하여, '공손도'를 도와 '부산'의 적을 공격하는데 도움을 주어, 이를 깨뜨렸다.       '백고'가 죽었는데, 두아들이 있어, 장자는 '발기'이고, 작은 아들은 '이이모'이다. '발기'가 불초하여 나라사람들이 함께, '이이모'를 왕위에 세웠다. '백고'때에 수차례 '요동'을 침략하고, 또한 망한 '호'의 오백여가를 받아들였다. '건안'중에 '공손강'이 군사를 내어, 공격하여, 그 나라를(고구려) 깨뜨리고, 고을을 불살랐다. '발기'가 형으로써, 왕이 되지 못함을 원망하여, '연노부'의 '가'와 백성 삼만여호를 데리고, '공손강'에 항복하고, '비류수'로 돌아와 살았다. 항복한 '호' 역시 '이이모'를 배반하였다. '이이모'가 다시 새로운 나라를 세웠는데, 금일의 있는 것이 이것이다. '발기'는 '요동'으로 가고, 아들을 '구려국'에 남겼는데, 지금의 고추가인 '교위거'가 이것이다. 후에 다시 '현토'를 공격하자, '현토'가 '요동'과 함께 공격하여 크게 깨뜨렸다.       '이이모'는 아들이 없어, '관노부'와 음란하여 아들을 낳으니, '위궁'이다. '이이모'가 죽고 왕위에 섰다. 지금의 '구려왕 궁'이 이것이다. 그 증조의 이름도 '궁'인데, 태어나서 능히 눈을 뜨고 보았다. 그 나라 사람들이 이를 싫어 하였다. 장성하자, 흉악하고 사나워져, 수차례 도둑질과 노략질을 하여, 나라를 헤롭게 하고, 깨지게 하였다. 지금의 왕도 타지에서 태어나 역시 능히 눈을 뜨고 사람을 보니, '구려'사람들이 그 증조와 닮았다 하여, 서로 부르기를, '위궁'이라 하였다. '위궁'은 힘과 용기가 있고, 말을 잘 타며, 궁술에 능하였다. '경초'이년 태사'사마선왕'이 군사를 이끌고, '공손연'을 치자, '궁'이 주박 과 대가인 장수와 병사 수천인을 파견하여 도왔다. '정시'삼년 '궁'이 '서안평'을 침략하고, 오년 '유주자사 관구검'에게 깨졌다. '검전'에 있어 전한다.       宋書       高句麗 (고구려)       '고구려'는 '부여'에서 나왔다. 스스로 말하길 선조는 '주몽'이다. '주몽'의 어머니는 하백의 딸로, '부여왕'이 궁실안에 잠그었으나 태양이 이곳을 밝게 비추어, 몸을 끌었으나 이를 피하였지만, 태양의 그림자가 또한 쫒아 왔다. 그러는 동안에 아이를 베니 알 하나를 낳았다. 크기가 다섯되나 되었다. '부여왕'이 이를 버려 개에게 주었지만, 개는 먹지 않고, 다시 버려 돼지에게 주었지만, 역시 먹지 않았다. 이를 길가에 버렸지만, 소와 말이 이를 피했다. 후에 이를 들에 버렸는데, 새의 무리가 털로써 이를 길렀다. '부여왕'이 이를 쪼개어 나눌려고 했지만, 능히 깰수 없었다. 그 어미에게 돌려 주자, 어미가 이를 보자기에 싸서 따뜻한 곳에 두니 한 사내 아이가 알을 깨고 나왔다. 이미 자라 있으니, 이름을 '주몽'이라 하였다. 풍속에 '주몽'이란 말은 '활을 잘 쏜다'이다. 부여사람이 '주몽'이 사람에서 태어난 것이 아니라, 장차 다른 뜻이 있을 것이다 하여 주몽을 죽이자고 청하였으나, 왕이 듣지 않고, 그를 말지기에 명하였다. '주몽'이 매양 사사로이 실험하여, 좋은말과 나쁜말이 있음을 알고, 좋은 말은 음식을 적게 주어 여위게 하고, 나쁜 말은 잘 길러 살찌우게 하였다. '부여왕'이 살찐 말은 스스로 타고, 여윈말은 '주몽'에게 주었다. 후에 사냥을 할 때, 주몽은 활을 잘 쏘아 하나의 화살을 쏠 시간동안에 적은 화살로 많은 짐승을 잡았다. 부여의 신하들이 또한 '주몽'을 모살할려고 하자 조몽의 어미가 은밀히 이를 알고, '주몽'에게 말하길, "나라에서 장차 너를 해치려 한다. 너는 재주로써, 마땅히 먼 곳에 가야한다."  '주몽'이 이에, '오인','오위' 두사람과 함께, '부여'를 버리고, 동남쪽으로 도망하였다. 도중에 우연히 큰물가에 이르러, 건너려고 하였으나, 다리가 없었다. '부여'인들이 이들을 급히 쫓았다. 주몽이 물에 고하여 말하길 "나는 태양의 아들이요, 하백의 외손이다. 오늘 도망하여 달아나는데, 병사가 쫓아와 이에 이르렀다. 어찌 건널수 있겠는가?" 그러자, 물고기와 자라가 함께 떠올라 다리를 이루었다. '주몽'이 건너자, 물고기와 자라가 이에 흩어저, 쫓아온 기병들은 건너지 못하였다. '주몽'이 '보술수'에 이르러, 우연히 세 사람을 만났는데, 한 사람은 마의를 입고, 한사람은 납의를 입고, 한사람은 수한의를 입었다. '주몽'과 함께 '흘승골성'에 이르러, 거처를 정하고, '고구려'라 불렀다. 이런 연후로 성씨를 고씨(?)라 하였다.     처음 '주몽'이 '부여'에 있을 때, 아내가 아이를 배었는데, '주몽'이 도망한후 남자 아이를 낳았다. 이름을 '시여해'라 하였다. 자라, 주몽이 나라의 주인임을 알고, 곧 어미와 함께 도망하여, 이에 돌아오니, 이름을 '여달'이라 하고, 나라의 일을 맡기었다. '주몽'이 죽고, '여달'이 대를 이어 섰다. '여달'이 죽고, 아들 '여율'이 섰고, '여율'이 죽고, 아들 '막래'가 섰다. 이에 '부여'를 침공하여 '부여'가 크게 패하니, 속하였다. '막래'의 자손이 서로 전하여 '궁'에 이르렀다. 나면서부터 눈을 떠 능히 보니, 나라사람이 미워하였다. 자라 흉폭하고, 사나우니, 나라가 깨어졌다. '궁'의 증손 '위궁'이 또한 나면서부터 보았다. 사람들이 증조 '궁'과 같다하여, 고로 이름을 '위궁'이라 하였다. 고구려에서 서로 같음을 '위'라 하였다. '위궁'역시 용력이 있고, 활과 말타기를 잘하였다. '위'나라 '정치' 중에 '요서' '안평'을 침입하였는데,[삼국위지 동이전과 수서 고려전에 '요서안평'은 '서안평'으로 적혀있다. 후한서 군국지에 '안평'은 '기주'에 속하며, 삼국지에 '서안평'은 '유주' '요동군'에 속한다. '요서군'은 '안평' 혹은 '서안평현'에 있다. 이중에 '요'자가 남았거나, 혹은 '요'자 밑에 '동'자가 빠졌다.] 유주자사 '관구검'이 깨뜨렸다. 그 현손 '을불리'와 '리'의 아들 '쇠'가 '열제'때에 함께 '모용씨'와 서로 공격하였다. '건국' 사년 '모용원진'이 무릴 거느리고 이를 정벌하고 '남섬'에 스스로 들어와서 '목저'에서 싸워 '쇠'군을 크게 깨뜨렸다. 승승장구 하더니, '환도'에 이르르자 '쇠'가 달아나 숨었다. '원진'이 '쇠'의 아버지 묘를 파해치고, 그 주검을 싣고, 그 어미와 처와, 보물과 남녀오만여명을 함께 노략질 하고, 그 궁실을 불살라, '환도성'이 패허가 되자 돌아 왔다. 그 후로 '쇠'는 사신을 보내 알현함이 멀어지고, 서로 막혀 원수처럼 지냈는데, 뒤에 가서 '쇠'는 '백제'에게 죽었다.       '세조'때에 '쇠'의 증손 '련'이 사자 '안동'을 파견하여, 표를 받으러 방물을 받치기 시작하면서, 나라의 이름을 받기를 청하였다. '세조'가 그 정성을 아름다이 여기어, 조서를 내리어 그 나라의 이름을 내리니 '원외산기시랑''이오'를 보내어 '련'에게 내리길 '도독요해제군사 정동대장군 영호동이중랑장 요동군개국공 고구려왕'이라 하였다. '오'가 거하는 '평양성'에 이르러 여러 가지 일을 물었다. 말하길, '요'는 동남으로 일천여리이고, 동쪽은 '책성'에 이르고, 남쪽은 '소해'에 이르고 북쪽은 옛날 '부여'에 이른다. 백성은 전의 '위'날 때보다 3배이다. 그 땅은 동서로 이천리이고 남북이 일천여리 이다. 백성은 모두 땅에 정주하며, 산과 골짜기에 근거하여 거한다. 옷은 베와 비단과 가죽으로 하고, 흙과 밭이 척박하여 양잠과, 농사가 족하지 않아 사람들이 음식을 절약한다. 그 풍속이 음란하고, 노래와 춤을 좋아하며, 밤이 되면 곧 남녀가 무리지어 모여 즐기니, 귀한과 천함의 절도가 없다. 그러하여, 깨끗함을 스스로 즐기니, 왕도 그 궁실을 다스리길 좋아한다. 관명에는 '알사''태사''대형''소형'이라 불리우는게 있다. 머리에는 절풍을 하는데 그 형태가 고깔과 같고, 두루 새의 깃털을 꽂아 귀천의 차이를 두고, 서 있을 때는 팔짱을 끼고 꿇어엎드려 절을 할 때엔 한 쪽 다리를 뻗는다. 걸음은 달리는 것과 같다. 항상 시월에 하늘에 제사를 하니 나라에서 큰 모임이다. 그들이 공회에서 입는 옷은 모두 비단에 금이나 은으로 수를 놓아서 장식을 한다. 그들은 또 걸터앉기를 좋아하고 음식에는 그릇을 이용한다. 삼척마가 나는데, 원래 주몽이 타던 것이라고 한다. 말의 종류가 즉 과하마이다. 그 뒤로부터는 사신을 보내서 서로 찾았고, 해마다 황금 이백 근과 백은 사백 근을 바쳤다.       이때 '풍문통'이 무리를 거느리고 도망하니, '세조'가 산기상기'봉발'을 파견하여 '련'에게 고하길 '문통'을 보내라 하니, '련'이 상서와 '문통'을 함께 갖추어 왕화를 받들겠다 하나, 끝내 보내기 않았다. '세조가 노하여, 가서 이를 정벌하려고 하였다. '낙평왕''비'등이 의논하여 나중에 일어나자고 하니, '세조'가 이네 중지하였다. '문통'은 또한 '련'에게 살해를 당하였다.       후에 '문명태후'가 '현조'가 육궁이 아직 준비 되지 않았다 하여, '련'에게 칙서를 내려 그 여식을 받치라 하니, '련'이 칙서를 받들어, 말하길 여식은 이미 출가 하여, 구하여 동생의 여식으로 응하니, 조정에서 응하였다. 이에 '안락왕''진과 상서 '이부'를 파견하여, 그 곳에 이르러 비단을 보내었다. 그 좌우에서 말하자, '련'이 미혹되니, 말하길 조정에서 옛날에 '풍씨'와 혼인을 하였는데, 낌새도 없이 나라가 멸망당하였다. '은'나라의 본보기가 멀지 않습니다. 마땅히 방편으로써 사양해야 합니다. '련'이 상서를 올려 계집이 죽었다고 거짓으로 칭하니, 조정에서 그 교사를 의심하여 또한 가산기상시'정준'을 파견하여 이를 꾸짓고, 만일 여식이 죽었으면, 다시 일가 친척에서 가려뽑아 청해야 한다. 하니 '련'이 말하길 "만일 천자가 전의 잘못을 용서한다면, 삼가 마땅히 받들겠다."하였다. 때마침 '현조'가 붕하니, 이내 그치었다.       '고조'때에 이르러 '련'이 2배의 공물을 받쳤다. 그 하사품도 또한 점점 더하였다. 이 때에 '광주'가 바다 가운데에서 '련'이 '소도성'에 파견하는 사자 '여노'등을 궁궐에 보내왔다. '고조'가 조서를 내려 '련'을 책망하여 말하길, " '도성'이 친히 그 임금을 죽이고 왕의 이름을 도둑질해서 '강'의 왼쪽에 있으니, 짐이 바야흐로 군사를 일으켜 그 나라를 멸하고, 끊어졌던 대를 '유씨'에게 이어 주려 했는데, 경은 국경을 넘어 외교를 해서 멀리 찬역하는 적들과 통하니 이 어찌 번신의 절조를 지키는 의리란 말인가. 그러나 이제 이 한가지 과실로 해서 경의 지난날의 정성을 가려 버리고 싶지 않기로 곧 돌려 보내 주는 것이니, 경은 여기에 감동하여 그 허물을 뉘우치고 다만 조정의 밝은 법에 순종하여 편안히 맡은 바 땅을 다스리고 그 곳의 형편을 알려 주기 바란다] 했다.       '태화'십오년 '련'이 죽으니, 백여세였다. '고조'가 동쪽 성밖에서 슬피 울고, 알자복사 '이안상'을 파견하여 '거기대장군 태부 요동군개국공 고구려왕'을 더하고, 시호를 '강'이라 하였다. 또한 '대홍려'를 파견하여 '련'의 손자 '운'에게 '사시절도독 발해제군사 정동장군 영호통이중랑장 요동군개국공 고구려왕'을 내리고, 의관과 복물, 거기 등의 장식을 하사했다. 또한 조서를 내려 '운'에게 세자를 입조하는데 보내어, 교구의예를 치루라고 하였다. '운'이 상서하여 병을 핑계되고, 그 종숙 '승우'를 사신과 함께하여 보내어, 궁궐에 이르자, 엄하게 이를 꾸짓었다. 스스로 이해부터 늘상 조공을 하였다. '정치'중에 '세종'이 동당에서 그 사신 '예실불'을 불로 보았다.[다른 여러본에는 '종'이 '조'로 적혀 있다. 북사에는 '선무'라고 적혀 있으나 '정치'란 호는 '세종'이 지은 것이니 북사는 그 제호를 바꾸어야 한다.] '실불'이 나아가 말하길 " '고려'는 멀리 하늘 끝에 걸리어 있어 해마다 순수한 정성을 바쳐 왔습니다. 그러나 이 땅에서는 나는 물건들은 바칠 것이 없아옵고, 다만 황금이 '부여'에서 나고, 옥이 '섭라'에서 나옵니다. 이제 '부여'는 '물길'을 섬기고, '섭라'는 '백제'에 병합되니, 나라의 왕이며 신하인 '운'이 끊어진 의를 이를려고 생각하여, 백성들을 모두 국경 안으로 옮겼아오니, 두 물건이 왕부에 오르지 못하는 것은 실상 이 두 적들 때문입니다." 했다. '세종'이 말하길, " '고려'는 대대로 상장직을 떠 맡아,바다밖을 제도 하고, 구이를 사로잡고, 실로 이를 정벌하여야 할 것인데, 이제 모든 부끄러움을 끼치고 있으니 이는 누구의 허물이겠는가?. 옛날에 공물을 바치지 않은 허물도 그 책임이 그대들에게 있는 것이니 경은 마땅히 짐의 뜻을 경의 임금에게 전하여 짐의 생각하는 바의 대략을 알도록 힘써, 무리를 해치는 자들을 잘라 없애고 동쪽 백성들을 편안히 하여 두 고을로 하여금 옛터를 회복하도록 하고 토산물도 빠짐없이 바쳐 오도록 하라] 했다.       '신귀'주에 운이 죽자, '영태후'가 동당에서 슬퍼하였다. 사신을 파견하여, '거기대장군 영호동이교위 요동군개국공 고구려왕'을 하사하고, 또한 세자 '안'에게 '안동장군 영호동이교위 요동군개국공 고구려왕'을 내렸다. '정광' 초에 '광주'가 또한 '소연'이 '안'에게 '영동장군의 옷, 관, 검, 패를 하사하는 것을 바다 가운데에서 얻었다. 또한 사신 '강법성'등을 서울로 보내었다. '안'이 죽고 아들 '연'이 섰다. '출제' 초에 '연'에게 조서를 내려 더하길 '사지절 산기상시 거기대장군 영호동이교위 요동군개국공 고구려왕'이라 하고 의관과 복물과 거기를 하사하였다. '태평'중에 조서를 내려 '연'에게 '시중 표기대장군'을 더하고 나머지는 전과 같다. '연'이 죽고, 아들 '성'이 서고, '무정'말에 이르기 까지 공물과 사신이 끝이는 해가 없었다.       南       高麗國(고려국 :고구려)       '동이'의 '고려국'은 서쪽으로 '위노'와 경계하고 있다. '송'말에 '고려왕 낙랑공 고련'을 사지절 산기상시 도독 영 평이주 제군사 거기대장군 개부의동삼사로 삼았다. '태조''건원' 원년 표기대장군으로 승진하였다. 삼년 사신을 보내어 공물을 받치고, 배를 타고 바다로 가서 역참을 통하여 항시 통하였다. 역시 '위노'에 사신을 통하니, 강성해져서 제도를 받지 않았다.       '노'에서는 여러나라의 사신을 집에 두었는데, '제'가 첫째이고, '고려'가 다음이었다. '영명'칠년 평남참군 '안유명'과 용종복사 '유사효'를 '위노'에 보냈는데, '위노'도 '원회'를 보내와 '고려'와 서로 엇갈렸다. '유명'이 위주객랑 '배숙명'에게 이르기를 나와 다른 사람이 중국의 명을 받들어 경의 나라에 온 것은 적을 막고자 함이니, '위'가 여기에 있음이다. 스스로 나머지 바깥의 이들은 먼지가 일어나듯이 얻을 려고 바라지 않아도 다스리니, 하물며 동이의 소맥이야 신하로 조정에 속하게 되니, 오늘에서야 감히 내가 이른것입니다. 하였다. '사효'가 남부상서 '이사충'에게 말하길 나의 성조가 '위'의 사산에게 일찍이 소국처럼 대하지 않음은 경도 역시 알 것이다. 하였다. '사충'이 말하길 실로 그러하다. 다만 주와 부가 임금의 소리를 듣지 못하였다. 그  앉고 일어섬의 차이가 심히 높으니 서로 아는 것으로 그친 것이다. 하니 '사효'가 말하길 '이도고'가 옛날 사신이었을 때 의관을 바로하고 갔는데, '위국'에서는 반드시 갓끈을 늘여뜨리니, 어찌 얼굴을 보는데 물리치지 않겠는가? '유명'이 또 '노주'에게 말하길 두나라는 서로 비슷하니 오직 '제'와 '위'와 친하다. 변방의 작은 오랑캐로 감히 이르러 신하로써 따른다. 하였다.     '고려'는 풍속에 옷은 궁고를 입고, 관은 절풍하나를 쓴는데, 이를 책이라 한다. '오경'을 알고 있다. 사신이 서울에 있어 중서랑 '왕융'이 이를 놀리며 말하길 옷입는데 정성스러움이 없으면, 몸에 재앙이 온다. 머리위에 있는 것은 어떤 물건인가? 하니 답하여 말하길 이것은 곧 옛부터 내려 오는 고깔이 남은 것입니다. 하였다.       '고련'이 백여세에 죽었다. '융창'원년에 '고려왕 낙랑공 고운'을 사지절 산기상시 도독 영평 이주 제군사 정동대장군 고려왕 낙랑공으로 삼았다. '건무' 삼년 (이 밑의 글자는 파본으로 알수 없다.)       周書       高麗 (고려:고구려)       '고려'는 먼저 '부여'에서 나왔다. 스스로 말하길 시조는 '주몽'이라 한다. '하백'의 여자가 태양의 그림자를 느끼어 그곳에서 아이를 배었다. '주몽'이 자라나 다스림의 재주가 있어, '부여'사람들이 미워하니 이에 쫓겨났다. 땅을 '흘두골성'에 잡고, 스스로 '고구려'라 불렀다. 이에 '고'로 씨를 삼았다. 그 손자 '막래'때에 점점 성하더니, '부여'를 공격하여 이에 신하로 삼았다. '막래'의 후손중에 '련'이 있는데, 처음으로 '후위'에 사신을 보내어 통하였다.       그 땅은 동쪽으로 '신라'에 이르고, 서쪽으로 '요수'를 건너 이천리이며, 남쪽으로 '백제'에 접하며, 북쪽으로 천여리에 '말갈'과 이웃한다. '평양성'에서 다스린다. 그 성은 동서로 육리이고, 남쪽은 '패수'에 임한다. 성내에는 오직 창고에 그릇을 쌓아두고 대비하는데, 도적이 이르르면, 사방에서 들어와 오로지 수비한다. 왕은 그 곁에 집을 나누어 짓는데, 항상 이에 거처하지는 않는다. 그 외에 '국내성'과 '한성'이 있다. 즉 다른 도읍이다. 다시 '요동', '현토'등 수십성이 있는데, 모두 관리를 두고, 이로써 서로 관리한다.       큰 관리로 '대대로'가 있고, 다음으로 '태대형', '대형', '소형', '의사사', '오졸', '태대사자', '대사자', '소사자', 그리고 '욕살'이 아우르는 '욕사' '예속' '선인'으로 무릇 십삼등급으로 내외사를 나눈다. '대대로'는 강하고 약함의 법칙으로써 뺏았아 스스로 오르는 것이로 왕이 관리로써 두는 것이 아니다. 그 형법에 모반한자는 먼저 불살라 죽인고, 그 후에 목을 베며. 그 집안을 모두 죽인다. 도적질한 자는 십여배로 갑고, 만약 가난하여 준비하지 못하면, 빗을 지개 하여 잘잘못을 살피여 그 아들 딸 모두 노비로 삼아 이에 갚도록 한다.       장부의 옷은 동수삼(소매와 윗도리가 통자)과 대구고(허리품이 넓은 바지)이고, 흰색 가죽으로 허리띠를 메고, 황색 가죽으로 신을 신는다. 그 관은 '골소'라고 하는데, 붉은 비단을 포개어 이를 만들고, 금은으로 이를 꾸민다. 벼슬이 있는 자는 또한 새의 깃털을 위쪽에 두 개를 꽂고, 이에 다름을 표시한다. 부인은 치마와 저고리를 입는데, 옷고리와 소매에 모두 선을 두른다. 서적으로는 '오경' '삼사' '삼국지' '진양추'가 있다. 병기로는 갑옷, 노, 활, 화살, 창이 있다. 조세는 명주나 화폐 곡식으로 하는데, 그 있는 곳까지 쫓아가 빈부의 차이를 두어 이에 걷는다. 땅은 척박하고, 거처는 검소하다. 하지만 그들의 행동은 거짓이 많고, 말하는 것은 거칠고 더럽다. 친하거나 소원하거나 가리지 않고 한 내에서 목욕하고 한 방에서 잔다. 풍속이 음란한 것을 좋아하며 이것을 부끄러이 여기지 않는다. 유녀(기생)가 있으며 남편은 평범한 사람이 아니다. 결혼하는 예는 재물이나 비단이 없고 만일 재물을 얻는자는 노비로 판다고 이르로, 풍속에서 매우 부끄러워 한다. 부모나 남편이 상을 당하면, 그 옷은 중국과 한가지 이다. 형제일때는 삼개월을 한계로 한다. 불법을 공경하고 믿으며, 더욱이 음사를 좋아한다. 또한 신을 모시는 곳이 두 곳이 있는데, 하나는 '부여신'으로 나무를 깍아 여인네의 모양이고, 하나는 '등고신'으로 말하길 시조 '부여신'의 아들이라 한다. 관사에 함께 두고, 사람을 보내어 지키고 간수한다. 대개 '하백'의 딸과 '주몽'이라 말한다.       '련'의 오세손은 '성'이다. '대통' 십이년 사신을 보내어 방물을 받쳤다. '성'이 죽자 아들 '탕'이 섰다. '건덕' 육년 '탕'이 또한 사신을 보내어 조공하였다. '고조'가 '탕'을 상개부의동대장군 요동군 개국공 요동왕으로 삼았다.       南史       高句麗(고구려)       '고구려'는 '요동'의 동쪽 천리에 있어, 그들이 나온 것은 '북사'에 자세히 나와있다. 땅은 가히 이천리이고 가운데에 '요산'이 있고, '요수'가 나온다. '한'과 '위'때에 남으로는 '조선', '예맥' 동으로는 '옥저' 북으로는 '부여'에 접하고 있다. 그 왕의 도읍은 '환도산'아래에 있는데, 땅은 큰산과 깊은 계곡이 많고, 깊은 연못은 없으며, 백성들이 이에 의지하여 사는데, 계곡물을 먹는다. 비록 토착하여 살지만 좋은 밭이 없어서 풍속에 식량을 절약하며, 궁실을 짓기를 좋아한다. 거하는 곳의 좌우측에 큰 집을 짓고, 귀신에 제사를 지내며, 또한 별과, 땅의 신에게도 제사를 지낸다. 사람들은 흉폭하고, 급하며, 노략질 하길 좋아한다. 관식은 '상가·대로·패자·고추가·주부·우태·사자·조의·선인이 있으며, 높고 낮음에 각각 등급이 있다. 언어는 여러 가지가 있는데, 모두 '부여'와 같은 것은 것으로 성질과 기후 의복등은 다름이 있다. 본래 다섯부족으로 '소노부'·'절노부'·'신노부'·'관노부'·'계루부'이다. 본래는 '소노부'에서 왕을 하였는데, 점점 약해져, '계루부'에서 대를 잇는다. 관직을 두는데 있어, 대로가 있으면, 패자를 두지 않고, 패자가 있으면 대로를 두지 않는다. 풍속에 노래와 춤을 좋아하여, 나라의 읍락에서 남녀가 매양 밤에 무리를 이루어 노래하며 즐긴다. 사람들은 깨끗함을 좋아하고, 몰래 술을 담구어 먹으며, 다리를 뻗어 절을 하며, 걸을때는 달음질을 한다. 시월에는 크게 모여 하늘에 제사를 지낸다.  공적인 모임에는 모두 비단옷을 입고, 금은으로 스스로 꾸미는데, 대가와 주부의 머리에는 건과 같은 것을 머리에 쓰는데, 뒤가 없다. 소가들은 절풍을 쓰는데, 모양은 고깔과 같다. 그 나라에는 감옥이 없는데, 죄를 지은자가 있으면, 여러 가들이 모여 의논하여 중죄인은 죽이고, 그 처자도 죽인다. 풍속에 음란함을 좋아하여 남녀가 서로 꼬시어 예를 갖추지 않고, 결혼함이 많다. 이미 결혼하면, 나중에 잘살게 되면 결국에는 옷을 보내온다. 죽은 자를 장사지내는데 있어서 곽은 있으나 관이 없다. 후이 장사지냄을 좋아하여 금은과 재물과 비단을 모두 죽은자를 위해 보낸다. 돌을 쌓아 봉분을 만들고, 소나무와 잣나무를 주위에 심어 놓는다. 형이 죽으면 형수를 아내로 삼고 말은 모두 작은데 산을 오르기에는 편하다. 나라사람들은 기력을 숭상하여, 활과 화설 칼과 창을 잘 다루고, 갑옷이 있으며, 전쟁을 익힌다. '옥저'와 '동예'가 모두 속해 있다.       '진' '안제''의희' 구년 '고려왕 고련'이 장사 '고익'을 보내어 표를 받치며, 붉은빛나는 백마를 받치자, '진'이 '련'을 사지절 도독 영주 제국사 정동장군 고려왕 낙랑공으로 삼았다. '송''무제'가 보위에 오르자, '정동대장군'을 더하고 나머지는 옛날과 같이 하였다. 삼년 '련'에게 산기상시를 더하고, 독평주제군사를 보태었다. '소제''경평'이년 '련'이 장사 '마루'등을 보내어 방물을 받치자 '주소백'과 '왕소자'를 보내어 이에 위로하였다.       '원가' 십오년 '풍홍'이 '위'을 공격하다가 패하여 '고려''북풍성'으로 도망하였는데, 표를 올려  맞이하여 접할 수 있기를 청하였다. '문제'가 '왕백구'와 '조차흥'을 보내어 맞도록 하고, 아울러 '고려'에 재물을 보내었다. '련'이 '홍'을 남쪽에 두고자 하지 않아, 이에 장수 '손수'와 '고구'를 보내어 엄습하여 이를 죽였다. '백구'등이 칠천여명을 거느리고 가서 '수'를 사로잡고, '구'등 두사람을 죽였다. 이에 '련'이 '백구'등이 마음데로 죽였다고, 사신을 보내어 잡아 보내달라고 하였다. 임금이 먼나라의 뜻을 어기고자 하지 않아, '백구'등을 옥에 가두었다가 풀어 주었다.     '련'이 매양 해마다 사신을 보내었다. 육십년 '문제'가 '위'를 침략하고 하여 '련'에게 말을 보내 달라고 하니, 팔백필을 받쳤다.       '효무' '건녕' 이년 '련'이 장사 '동승'을 보내어 표를 받들며, 나라의 슬픈 일을 두루 위로하며 함께 방물을 받쳤다. '대명'이년 또 '숙신씨'가 고시와 돌화살촉을 받쳤다. 칠년 '련'을 거기대장군 개부의동삼사 로 삼고 나머지 관직은 옛날과 같이 하였다. '명제''태시' '후발제''원미'중에 공물을 받치기를 끊이질 않았다. '제'에서도 작위를 내렸는데 백여세에 죽었다. 아들 '운'이 섰다. '제''융창' 중에 사지절 산기상시 도독 영평이주 정동대장군 고려왕 낙랑공을 삼았다.       '양''무제'즉위년에 '운'에게 차기대장군을 더하였다. '천감'칠년 무동대장군 개부의동삼사를 삼고 지절 상시 도독 왕은 전과 같았다. 십일년 십오년 연달아 사신을 보내어 공물을 받쳤다. 십칠년 '운'이 죽고 아들 '안'이 섰다. '보통' 원년 '안'에게 봉작을 내리고, 지절 독 영평이주제군사 영동장군으로 삼았다. 칠년 '안'이 죽자 아들 '연'이 서고, 사신을 보내와 공물을 받쳤다. '연'에게 작위를 내렸다. '중대통' 사년 육년 '대동'원년 칠년 더불어 표를 받들어 방물을 받쳤다. '태청' 이년 '연'이 죽자 그 아들 '성'에게 '연'을 잇는 작위를 내렸다.       北史       高句麗 (고구려) -이하 고려란 고구려를 가르킨다-       '고구려'는 먼저 '부여'에서 나왔다. 왕이 일찍이 '하백'의 여자를 얻어, 인하여 집안에 가두어 두었는데, 태양이 비추자, 몸을 피하였으나, 태양이 또 몸은 따라다녔다. 이미 아이를 베고 있었는데 알 하나를 낳았다. 크기가 다섯되나 되었다. '부여왕'이 버려 개에게 주었으나, 개는 먹지 않고, 돼지에게 주었으나 돼지도 먹지 않았다. 길에 버리자 소나 말이 이를 피하고, 들에 버렸으나 새들이 무리지어 털로써 보호하였다. 왕이 이를 쪼갤려고 하였으나 능히 깨뜨릴 수 없어, 다시 그 어미에게 돌려주었다. 어미가 이를 보자기에 싸서 따뜻한 곳에 두니, 한 남자가 깨뜨리고 나왔다. 장성하자 이름을 '주몽'이라 하였다. 그 풍속에 '주몽'이란 말은 활을 잘 쏜다 라는 것이다. '부여'사람들이 '주몽'이 사람이 태어난 것과 다르다고 해서, 버리기를 청하였으나, 왕이 듣지 않고, 말기지에 명하였다. '주몽'이 사사로이 시험하여 좋은 것과 나쁜 것을 알아 좋은 말은 밥을 적게 주어 여위게 하고, 둔한 말은 잘 길러 살찌게 하였다. '부여왕'이 살찐말을 타고, 여윈 말은 '주몽'에게 주었다. 후에 밭에서 사냥을 하는데, '주몽'이 활을 잘 쏜다 하여 화살 하나를 주었다. '주몽'이 화살 하나로 짐승을 많이 잡았다. '부여'의 신하들이 주몽을 모살할려고 하자 그 어미가 '주몽'에게 고하자, '주몽'이 이에 '언' '위'등 두명과 동남으로 달아났다. 길을 다는 중에 우연히 큰 물을 만나, 건너고자 하나 다리가 없었다. 부여 사람들이 급히 뒤쫓아 오는데, '주몽'이 물에 고하여 말하기를, 나는 태양의 아들이요, '하백'의 외손이다. 이제 병사들이 쫓아 오니 어찌하면 건널수 있겠는가? 이때에 물고기와 자라가 다리를 만들어서 '주몽'이 건널수 있었다. '주몽'이 '흘승골성'에 이르러 여기에 거하였다. '고구려'라 부르는 것이다. 인하여 '고'씨로 성을 삼았다. '부여'에 남아있던 처가 아이를 베었는데, '주몽'이 달아난 후였다. 아들을 낳으니 '시여해'라 하여, 장성하여 '주몽'을 알자 나라의 왕이 되었다. 이미 어미는 돌가가신 뒤였다. 이름을 '여달'이라 하니 나라의 일을 맡기었다.       '주몽'이 죽자 아들 '여율'이 서고, '여율'이 죽자 아들 '막래'가 섰는데, 이에 '부여'를 병합하였다.       한 무제 원봉 사년 '조선'을 멸하고 '현토군'을 두었다. '고구려'를 현으로 삼고, 이를 속하게 하였다. '한나라'때에 옷과 두건 조복과 북과 피리를 하사하니, 항상 '현토군'에 나와 이를 받았다. 후에 점점 교만해 지더니 군에 나와 복속하지 않고, 다만 동쪽경계에 작을 성을 쌓고, 이를 받았다. 그 성을 '책구루'라 부렀다. '구루'라는 것은 '구려'의 성 이름이다. '왕망' 초에 '고구려'의 병사를 일으켜 호를 쳤는데, 가고자 하지 않아, '망'이 강제로 다그치어 이를 보냈는데, 모두, 요새에서 나가 도적이 되었다. 주군에서 허물을 '구려후' '추'에게 돌리니, '암우'가 꾀어 이를 베었다. '망'이 크게 기뻐하고, 다시 이름을 '고구려', '고구려후'라 하였다. '광무' '건원' 팔년 '고구려' 사신을 보내어 조공하였다.     '상'과 '안' 사이에 이르러, '막래'의 후손 '궁'이 수차례 '요동'을 도적질 하였다. '현토' 태수 '제풍'이 이를 벌하였는데, 능히 금할 수 없었다.       '궁'이 죽자 아들 '백고'가 섰다. '순'과 '화' 사이에 다시 여러번 '요동'을 범하여, 노략질 하였다. '영제' '건녕' 이년 '현토' 태수 '경임'이 이를 벌하고, 포로 수백을 베었다. '백고'가 이에 항복하여 '요동'에 속하였다. '공손도'가 해동에서 일어나자 '백고'가 통하여 좋아하였다.       '백고'가 죽자 아들 '이이모'가 섰다. '이이모'는 스스로 '백고'때에 이미 수차례 '요동'을 침략하였다. 또한 망한 호인 오백호를 얻었다. '건안' 중에 '공손강'이 군사로 공격하여 그 나라를 깨뜨리고, 수도를 불사르자, 항복한 호가 역시 모반하였다. '이이모'가 다시 새로운 나라를 열었다. 그 후에 '이이모'가 다시 '현토'를 공격하였는데, '현토'가 '요동'과 함께 공격하여 크게 이를 깨뜨렸다.       '이이모'가 죽자 아들 '위궁'이 섰다. '위궁'은 증조부 '궁'에서 시작하는데, 태어나서부터 눈을 뜨고 능히 볼 수 있어, 나라 사람들이 이를 싫어 하였다. 장성하자 흉폭해지고 사나워져, 나라를 해치고, 깨어졌다. '위궁' 역시 태어나서부터 사람을 보아 '고려'에서 서로 비슷하다를 '위'라 하는데, 증조부 '궁'과 비슷하니 고로 이름이 '위궁'이다. '위궁' 역시 용력이 있고, 말을 잘 타고, 활과 사냥에 능하였다. '위나라' '경초' 이년 태부 '사마선왕'을 보내어 무리를 이끌고 '공손문의'를 쳤는데, '위궁'이 주부, 대가의 장수 수천을 보내어 군사를 도왔다. '정시' 삼년 '위궁'이 '요'의 '서안평'을 도적질하고, 오년 '유주자사 관구검'이 만여명으로 '현토'에서 나와 '위궁'을 쳤다. '비류'에서 크게 싸웠다. 패하여 달아나니 '검'이  ??고개에 이르기까지 쫓아가서 '환도선'에 올라 그 도읍을 무찔렀다. '위궁'이 단지 아내와 멀리 숨었다. 육년 '검'이 다시 이를 쳤는데, '위궁'이 재빨리 여러 가들과 '옥저'로 달아났다. '검'이 장군 '왕기'를 보내어 쫓았지만, '옥저' 천여리에서 그만 두었다. '숙신'의 남쪽에 이르러, 돌에 그 공을 새기었다. 또한 '환도산'을 깍아 '불함성'이라 새기고 돌아 왔다. 그 후에 다시 중국과 통하였다.       '진나라' '영가'의 난리때 '선비'의 '모용귀'가  '창려' '대극성'에서 일어났는데, '원제'가 '평주 자사'를 내렸다. '위궁'의 손자 '을불리'가 빈번히 '요동'을 노략질 하니 '귀'가 능히 제도하지 못하였다.       '불리'가 죽자 아들 '쇠'가 섰다. '위 건국' 사년에 '모용귀'가 아들 '황'으로 이를 치니, 스스로 '남합'에 들어와 '목저'에서 전쟁을 하였는데, '쇠'의 군사를 크게 깨고, '환도'까지 쫓아갔다. '쇠'가 홀로 말을 타고 달아나 숨으니, '황'이 '쇠'의 아비의 묘를 파해치고, 그 어미와 처 보물과 남녀 오만여명을 노략질 하고 그 궁궐을 불살르며, '환도성'을 허물고 돌아 왔다. '쇠'는 후에 '백제'에 의해 살해 당했다.       '진나라 효무 태원' 십년에 이르러, '구려'가 '요동', '현토군'을 공격하였다. '후연의 모용수'가 동생 '농'을 보내어 '구려'를 쳤서, 다시 이군을 회복하였다. '수'의 아들 '보'가 '구려왕 안'을 '평주 목'에 삼고 '요동', '대방' 이국왕으로 봉하여 장사 사마 참군관을 두었다. 후에 '요동군'을 다스렸다.       '태무'때에 '쇠'의 증손 '련'이 처음 사자를 보내어 '안동'에 이르러 표를 받들어 방물을 받치며, 나라의 휘를 함께 하길 청하였다. 사신 원외산기시랑 '이오'가 '련'에게 절하며 연을 '도독 요해제군사 정동장군 영동이중랑장 요동군공 고구려왕'으로 삼았다. '오'가 그 처소에 이르렀는데, '평양성'에 거하고 있었다. 찾아가 여러 가지일을 물었는데, 말하길 '요동'에서 남쪽으로 일천여리를 가면 동쪽으로 '책성'에 이르고, 남쪽으로 작은 바다에 이른다. 북쪽으로는 옛날 '부여'이고 호수는 '전위'때의 세배이다. 후에 사신을 보내어 공물을 받쳤는데 해마다 황금 이백근과 은 사백근을 받쳤다. 이때 '풍홍'이 무리를 이끌고 도망갔는데, 태무가 산기상시 '봉발'을 보내어 '련'에게 고하기를 '홍'을 보내달라 하였다. '련'이 상서하여 '홍'이 왕화됨을 받들었다고 하여 끝내 보내주지 않았다. '태무'가 노하여 장군을 보내어 이를 쳤다. '낙평왕 비'등이 의논하여 기다리다가 후에 일어나라고 하니 '태무'가 이에 그치었다. '홍'은 역시 '련'에게 죽임을 당하였다.       후에 '문명태후'가 '헌문'이 육궁을 갖추지 않았다 하여 조서를 내려 '련'이 여자를 천거하게 하였다. '련'이 표를 받들어 말하길, 여자가 없어, 아우의 여자를 구하여 응합니다 하였다. 조정에서 이에 허락하니 '안락왕 진'을 보내었다. 상서에는 '이오'등이 그 곳에 비단을 보냈다 하였다. '련'이 그 좌우의 말에 의심하였는데, 이르기를 조정에서는 옛날 '풍씨'와 혼인하였는데 얼마있지 않아 그 나라가 망하였습니다. 하였다. '은'의 때가 멀지 안음을 생각하십시오. 마땅히 방편을 말해야 합니다. '련'이 상서하여 거짓으로 여자가 죽었다 하니 조정에서는 이를 거짓이라 의심하고, 또한 가산기상시 '정준'을 보내어 끊고 이를 책하여, 만약 여자가 죽었으면 다시 여자를 가려 뽑아 청하라. 하였다. '련'이 말하길 만일 천자가 앞의 허물을 용서한다면 삼가 조서를 받들겠습니다. '헌문'이 죽자 이내 그치었다. '효문'때에 이르러 '련'이 앞서의 두배의 공물을 받치니 그 하사품 역시 점점 더하였다. 이때 '광주'의 바다에서 '련'이 '제에 보내는 사신 '여노'등을 얻어 대궐에 보내었다. '효문'이 책하여 고하길, '도성'이 그 임금을 죽이고 '강'의 왼쪽에서 몰래 일어나, 짐이 그 나라를 없애고 옛나라를 세워 '유씨'의 대를 끊고자 한다. 이에 경이 바깥으로 그 경계를 넘어 적들과 통하니, 어찌 이것이 신하로써 지켜야할 의라 할 것인가? 이제 하나의 잘못으로 옛날의 정성을 가리지 말라. 곧 돌려 보낼 것이다. 허물을 생각하여 용서함을 감사히 여기고 밝은 법을 받들어 공경하여 거느리는 바를 화목하고 편하게 하니 동정으로 삼가 받들라. 하였다.       '태화' 십오년 '련'이 죽으니 백여세 였다. '효문'이 동쪽 성밖에서 슬퍼하고, 아뢰는 자로 복사 '이안상'을 보내어, 책을 '거기대장군 태전 요동군공 고구려왕'을 더하여 시호를 '강'이라 하였다. 또 대홍려를 보내어 '련'의 손자 '운'에게 절하며 '사지절 도독요해제군사 정동장군 영호동이중랑장 요동군공 고구려왕'으로 삼았다. 옷과 관 복과 물건 수례와 기를 꾸미는 것을 하사하였다. 또한 '운'에게 고하길 세자를 입조하라 하여 성밖에서 예를 차리는 것을 명하였다. '운'이 상서에 병을 핑계삼아 숙부 '승우'를 보내고 사신으로 대궐까지 수행하게 하였다. 이를 엄히 책하니 스스로 이에 세마다 항시 공물을 받쳤다. '정시'중에 '선무'가 사신 '예실불'을 동당에 불러 보니, 나아가 말하길, '고려'는 정성으로 하늘을 잇어 그 정성이 쌓여 땅에는 토모가 산출되어 왕의 공물에는 허물이 없습니다. 다만 황금은 '부여'에서 나오고, 옥이 '섭라'에서 나와, 이제 '부여'가 '물길'을 내 쫓고, '섭라'가 백제와 어울립니다. 나라의 왕인 신하 '운'이 의의 계통을 이어 모두다 경내에 옮기었습니다. 두 물건을 왕의 곳간에 채우지 않고, 양적의 제물을 베풉니다. '선무'가 말하길 '고려'를 어찌 천자를 책망하는가? 오로지 해외를 제도하고 영리한 오랑캐를 벌하여 재물을 얻었다. 지난달 방물을 받친 허물은 꾸짓어서 복종하게 되니, 마땅히 짐이 경에게 말하길, 힘써 위엄으로 다스리고, 두 읍은 옛날로 돌려 보내라. 토모가 잘못된 공물은 아닌 것이다. 하였다.       '신귀'중에 '운'이 죽자 '영태후'가 동당에서 슬퍼하였다. 사신을 파견하여 '거기대장군 령호동이교위 요동군공 고려왕'을 더하였다. 또 절하여 그 세자 '안'에게 '진동장군 령오동이교위 요동군공 고려왕'을 삼았다. '정광' 초에 또 '광주'의 바다 가운데에 '양나라'가 '안'에게 내리는 영동장군의 의관과 검 노리게를 얻었다. 이에 사신 '강법성'등을 서울로 보냈다.       '안'이 죽자 아들 '연'이 섰다. '효무제' 초에 고하길 '연'에게 '사지절 산기상시 거기대장군 영호동이교위 요동군공 고구려왕'을 더하였다. '천평' 중에 '연'에게 '시중 표기대장군'을 더하고 나머지는 옛날과 같다.       '연'이 죽고 아들 '성'이 섰다. '무정'에 이르러 왔었는데, 해마다 오지 않음이 없었다. '대통' 십이년 사신이 '서위'에 이르러 조공하였다. '제'가 '동위'를 합병한 해에 사신을 '제'에 보냈다. '제'의 '문선'이 '성'에게 '사지절 시중 표기대장군'을 더하고 '령동이교위 요동군공 고려왕'은 옛날과 같다. '천보' 삼년 '문선'이 '영주'에 이르러 사신'박릉'과 '최유'를 '고려'에 보내어 '위'의 유민을 구하라 하니. 조서에서 '유'가 말하길 만일 좇지 안는다면, 의당 일을 좇아야 한다 하였다. 이르렀으나 허락을 받지 못하였다. '유'가 눈을 크게 뜨고 꾸짓고, 주먹질을 하자, '성'이 마루아래로 떨어졌다. '성'이 숨을 몰아쉬고 감히 움직이지 못하고, 이에 사죄를 하자 '유'가 오천여호를 되돌렸다.       '성'이 죽고 아들 '탕'이 섰다. '건명' 원년에 '제'의 '폐제'가 탕을 '사지절 령동이교위 요동군공 고려왕'을 삼았다. '주 건덕' 육년 '탕이 사신을 보내어 '주'에 이르르니, '무제'가 '탕'을 '상개부의동대장군 요동군공 요동왕'을 삼았다. '수' '문제'가 선양 받자 '탕'이 사신을 보내어 궐에 이르렀다. 나아가 대장군을 받고 고쳐 '고려왕'을 봉함 받고 이때부터 해마다 사신을 보내어 조공이 끊이질 않았다.       그나라는 동쪽이 '신라'이고 서쪽은 '요'를 넘어 이천리이다. 남쪽은 '백제'와 접하고, 북쪽은 '말갈'과 이웃하니, 일천여리이다. 사람들은 토착하고, 산과 계곡에 의지하여 거쳐한다. 옷은 베와 비단과 가죽으로 하고, 땅이 척박하여 양잠하고 농사지어도 족하지 않다. 고로 사람들은 음식을 절약한다. 그 왕은 좋은 궁실을 닦아 도읍을 '평양성'이라 하고 또 말하길 '장안성'이라고 한다. 동서가 육리이고 산의 굴곡에 있어 남쪽은 '패수'에 임한다. 성내에 오직 창고에 쌓아두고 대비하는데, 적이 이르르면 들어와 지킨다. 왕은 따로 그 곁에 집을 짓는데 항상 거기에 거하지는 않는다. 그 밖에 '국내성'과 '한성'이 있는데 역시 다른 도읍지이다. 그 나라에서 삼경이라 부른다. 다시 '요동' '현토'등 십여성이 있는데 모두 관리를 두어 다스렸다. '신라'가 매양 침범하니 전쟁이 끊이질 않았다.       관직은 대대로, 태대형, 대형, 소형, 경후사, 오졸, 태대사자, 대사자, 소사자, 욕사, 예속, 선인으로 무릇 십이등급이 있다. 나누어 내외의 일을 맡는다. 대대로는 강하고, 약함에 따라 빼앗아 스스로 오르는데, 왕이 두는 것이 아닌다. 다시 내평과 오부욕살이 있다. 사람들은 모두 절풍건을 머리에 쓰는데 형태가 고깔과 같고, 선비는새의 깃털을 양쪽에 꽂는다. 귀한 자는 관을 소골이라고 하는데, 자줏빛비단을 사용하고 금은으로 꾸민다. 옷은 소매가 넓고, 큰 바지에 가죽혁대 황색 가죽신발을 신는다. 부인은 치마와 저고리에 선을 두른다. 책은 '오경'과 '삼사' '삼국지' '진양추'가 있고, 병기는 중국과 같다. 봄 가을로는 사냥을 하는데 왕이 친히 이를 주제하고, 세는 포 오필과 곡 오석이고 유랑인은 삼년에 한번 세를 내고, 열명이 세포일필을 낸다. 조는 호당 일석, 다음은 칠두, 아래는 오두,이다. 형법에 배반하거나 모반하는 자는 기둥에 묶어 불사른 후에 베고, 집안도 몰살한다. 도적은 열배로 갚고, 만일 가난해서 갚지 못하면 빚을 지는데, 모두 청해 듣고 자녀를 노비로 삼아 갚는다.       형벌은 엄하여, 범하는 자가 드물다. 악기는 오현, 금, 쟁, 필률, 횡취, 소, 고지속이 있고, 피리는 굽어 있다. 매년 초에 '패수'위에서 모여 즐기는데, 왕은 가마를 타고 이를 지켜본다. 일을 마치면 왕이 옷을 물속에 넣고 좌우 두 개로 나누어 돌로싸 던진다. 떠들며 달리고 쫓기를 다시 세 번한 후 그친다. 풍속에 깨끗함을 좋아하고, 절제함을 숭상하고, 달리는 것을 공경한다. 절은 한쪽 다리를 끌고, 서 있을 때는 두 손을 맞 잡고 있고, 걸을때는 반드는 손을 낀다. 성격은 속임이 많고, 언사는 더럽고 추악하며, 책을 가까이 하지 않는다. 부자가 같은 내에서 목욕을 하고, 공실에서 같이 잠을 자고, 노래하고 춤추는 것을 좋아하고, 항시 시월에 하늘에 제사지내는데 공적인 모임으로 의복을 입고, 모두 비단과 금은으로 장식한다. 걸터 않는 것을 좋아하고, 음식을 할 때 도마를 쓰고, 삼척마가 나온다. 이르기를 본래 '주몽'이 타던 말의 종류라 하는데, 즉 과하라 한다. 풍속에 음란함을 좋아하여, 부끄러워 하지 않는다. 풍속으로 유녀가 많아, 지아비로 아무나 삼는다. 밤이 되면 남녀가 무리지어 노는데, 귀천의 절도가 있지 않았다. 결혼을 할 때는 남녀가 서로 좋아하는 것을 인정하는데, 남자집에서 돼지와 술을 보내어 마친다. 재물이 없이 가는 것이 예로 혹 재물을 받는 사람이 있으면, 사람들이 이를 부끄러이 여기어, 여자종으로 파는 것으로 여기었다. 죽으면 염하여 집안에 놓는데, 삼년만에 길일을 탹하여 장사지낸다. 부모나 남편이 상을 당하면 옷을 삼년간 입고 형제는 삼개월간이다. 처음부터 끝까지 울며 읍하는데, 장사의 법칙은 북치고, 춤추고, 음악하면서 죽은자를 보내는 것이다. 묻을 때에는 죽은자가 태어났을때의 옷과 익숙한 수레 말을 묘의 곁에 두는데, 장사에 모인자들이 다투어 취한후 가지고 간다. 불법을 믿고 귀신을 공경하고 음사가 많다. 신묘는 두곳이 있는데, 하나를 '부여신'이라 부르고 나무를 부인모양으로 깍은 사람의 형상이다. 나머지 하나는 '高登神'으로 이르기를 시조 '부여신'의 아들이라 한다. 함께 관사에 두고 사람을 파견하여 보호하니, 대개 '하백녀'와 '주몽'을 일컷는 것이다.       '수'가 '진'을 평정한 후에 '탕'이 크게 두려워 하여 병사를 진치고, 곡식을 쌓아 수비의 책을 만들었다. '개황' 십칠년 임금이 새서를 보내어 책하기를 매양 해마다 사신을 보내어 조공을 하더니 비록 변방에 붙어 산다고 하더라도 정성이 부족하다. '말갈'은 핍박해 오고, '거란'은 굳게 방비한다. 지난해 재화를 가지고 가는데, 작은 무리들이 사사로이 군사를 움직여서, 귀국으로 숨었다. 어찌 거두지 않고자 함이 아니면 고로 도둑이 아닌가? 객사에만 앉아 있지 말고, 더욱 수비를 증가해야 할 것이다. 또한 수차례 기병을 보내어 변방인을 죽이고, 항상 의심이 있어 숨을 죽이고 있다. 점차로 스스로 새로워지기를 바란다. '탕'이 서를 받고 두려워하더니 표를 올려 사죄하였다. 병으로 죽으니,       아들 '원'이 이었다. 문제가 사신을 보내어, '원'을 '상개부의동삼사'로 삼고, '요동공'의 작위를 이으니, 옷을 하사하였다. '원'이 표를 받들어 감사하고, 상서에 하례하며 '왕'을 봉하기를 청하였다. '문제'가 칙서를 내려 왕으로 삼았다. 다음해, '말갈'을 거느리고 만여기병으로 '요서'를 도둑질 하자 '영주' 총관 '위세충'이 공격하자 달아났다. 제가 크게 노하여, 명하여 '한왕' '양'을 원수로 삼아, 수륙양군으로 이에 토벌하고, 그 작위를 물렸다. 때를 맞추어 운송하는 길이 이어지지 않자 여섯 군대가 굶주리고, '임유관'까지 갔다 질병을 만나 돌아오니, 왕사가 구할수 없었다. 다음으로 '요수'에 미치어, '원'이 역시 두려워 하여 사신을 보내어 사죄하며 표를 올리며 칭하기를 '요동의 하찮은 신하 원'이라 운운하였다. 임금이 이에 병사를 물리고, 처음과 같이 하였다. '원' 역시 해마다 조공하였다.       '양제'가 서니 천하의 전성기이다. '고창왕'과 '돌궐의 계인가한'이 함께 궐에 와서 공물을 받쳤는데, 이때 '원'을 입조하라 불렀는데, '원'이 두려워하여 오랑캐의 예의로 대궐에 무례하였다.(?) '대업' 칠년 제가 장차 '원'의 죄를 벌하려고 하여, 수레를 타고 '요수'를 건너 '요동'의 땅에 멈추어 영을 세웠다. 길을 나누어 나아가 각각 그 성의 아래에 당도 하였다. '고려'는 나아가 싸우는 것이 불리하다고 여기어 모두 성을 굳게 지키었다. 제가 여러 군사들에게 공격하라 명하고, 또 여러 장수들에게 칙서를 내리니, '고려'가 만약 항복한다면, 곧 마땅히 위로하며 얻어야 하고, 병사들이 들어가 불을 놓지 못하도록 하라. 하였다. 성이 장차 함락되려 하자, 도적들이 문득 항복하려는 말을 하고, 교지를 받들고자 하나 감히 나아가질 못한다고 하였다. 먼저 나아가 아뢰고 이를 보고하자, 적이 또 갖추오 방비 하고 다시 나와 방어전을 하였다. 이와 같음을 세 번을 하였는데, 제가 깨닫지를 못하였다. 이로말이암아 식량이 다 되고, 병사들이 지치자, 보급도 잇지 못하니 여러 군사들이 많이 패하여, 반이 되었다. 이 행함에 오직 '요수'의 서쪽 '무려라'만 빼앗고, '요동군'에 소속시키고, '통정진'으로 돌아왔다. 구년 제가 다시 친히 정벌하여 칙서를 여러 군사들에 내려 따르게 하였다. 여러 장수들이 길을 나우어 성을 공격하는데, 적의 기세가 그 날로 사그라졌다. '양현감'이 무리를 모아 반란을 일으키자, 제가 크게 두려워 하여 곧 그날로 여섯 군대를 거느리고 돌아갔다. 병부시랑 '곡사정'이 망하여 '고려'에 들어갔는데, '고려'가 이 사실을 알고 정예군으로 뒤쫓으니 많은 군사가 패하였다. 십년 다시 천하의 병사를 일으켜 도적을 치려고 일어났는데 그 있는곳이 험하여 많은 군사를 잃어버렸다. '요수'에 이르자 '고려'도 역시 약해져서 사신을 보내어 항복을 빌고 '곡사정'을 보내며 속죄하였다. 제가 이를 허락하자, '회원진'에서 항복을 받고, 이어 사로 잡힌 병사들을 돌려 받았다. 도성에 도착하자 '고려'가 시신을 보내어 친히 사당에 고하자 이를 사로잡았다. 이에 '원'을 입조하라 하였으나, '원'이 오지 않았다. 제가 다시 후에 일어나길 꾀하였으나, 천하가 어지러워 다시 가질 못하였다.       隋書       高麗 (고려:고구려)       '고려'는 선조가 '부여'에서 나왔다. '부여왕'이 일찍이 '하백'의 딸을 얻어 실내에 가두어 놓았는데, 햇빛이 따라와 이를 비추니, 감화되어 아이를 배었다. 큰 알 하나를 낳았는데. 한 남자 아이가 껍질을 깨고 나오니, 이름을 '주몽'이라 하였다. '부여'의 신하들이 '주몽'을 보통 사람처럼 태어나지 않았다 하여 모두 이를 죽이기를 청하였으나 왕이 듣지 않았다. 장성하여 사냥을 따라 갔는데, 많은 짐승을 잡았다. 또 죽이고자 청하니 그 어미가 '주몽'에게 알리어 '주몽'이 '부여'를 버리고 동남으로 달아났다. 한 큰 물을 만나 깊어 가히 건널수가 없었다. '주몽'이 말하길 나는 하백의 외손이고 태양의 아들이다. 이제 어려움이 있어 병사들이 장차 이르려고 하니 어찌 하면 건널 수 있겠는가? 하니 이때 물고기와 자라가 포개어 다리를 만드니 '주몽'이 건널수 있었다. 기병이 가까이 왔으나 건널 수가 없어 돌아갔다.       '주몽'이 나라를 세우니 '고구려'라 하여, '고'씨로 성을 삼았다. '주몽'이 죽자 아들 '여달'이 대를 잇고, 그 손자 '막래'에 이르러 병사를 일으켜 '부여'를 아울렀다. 그 후손 '위궁'대에 이르러 '위''정시'중에 '서안평'을 침략하니, '관구검'이 이를 깨뜨렸다. '위궁'의 현손(손자의 손자)의 아들은 '소열제'인데 '모용씨'에게 깨졌다. '환도'에 들어가 궁실을 불사르고 크게 노략질 한 후에 돌아 갔다. '소열제'는 후에 '백제'에게 죽임을 당하였다. 그 증손 '련'은 '후위'에 사신을 보내었다. '련'의 육세손 '탕'은 '주'에 사신을 보내어 조공하자, '무제'가 '탕'에게 상개부 요동군공 요동왕을 내렸다. '고조'가 즉위하자 '탕'이 다시 사신을 보내어 궐에 이르러 대장군을 수여 받고 '고려왕'으로 봉함을 받았다. 해마다 조공이 끊이질 않았다.       그 나라의 동서는 이천리이고 남북은 천여리 이며, 도읍은 '평양성'으로 또한 '장안성'이라 부른다. 동서가 육리이고 산을 따라 굽어 있으며, 남쪽으로는 '패수'에 접한다. 다시 '국내성'과 '한성'이 있는데, 이 두 도읍은 번화한 곳으로 그 나라에서는 '삼경'이라 부른다. '신라'와 매양 서로 침략하니 전쟁이 끊이질 않았다. 관직은 태대형, 대형, 소형, 대로, 의후사, 오절, 태대사자, 대사자, 소사자, 욕사, 예속, 선인등 십이등급이다. 다시 내평, 외평, 오부욕살이 있다. 사람들은 모두 가죽관을 쓰고, 벼슬아치들은 새 깃털을 꽂는다. 귀한자는 관을 자줏빛 비단으로 하고 금은으로 꾸민다. 옷은 소매가 큰 윗도리에 구멍이 큰 바지를 입고, 흰색으로 허리띠를 매고, 황색 가죽으로 신발을 신는다. 부인은 치마저고리에 선을 두른다. 병기는 중국과 같으며 매양 봄 가을로 사냥을 가르치는데, 왕이 친히 이를 내려 본다. 인세로는 베 오필, 곡물 오석이고 떠돌아 다니는 사람은 삼년에 한번 세를 내는데, 열사람이 모아서 세포 한필이다. 조세는 호당 일석이고 다음은 칠두, 다음은 오두이다. 반역한 자는 기둥에 묶어서 불살은 후에 목을 베고 그 가족도 모두 죽인다. 도적질하면, 열배로 갚고, 형벌이 엄하여 범하는 자가 드물다. 악기에는 오현·금·쟁·필률·횡취·소·고가 있고 노를 불어서 화답한다. 매년 초에 '패수'위에 모여서 왕이 수레위에서  대열을 지켜본다. 일을 마치면, 왕이 옷을 물속에 넣고 좌우로 두부로 나누어, 물에서 돌을 던지면서  떠들썩하게 고함치며 쫓고 쫓기기를 세 번한 후에 그친다. 풍속에 걸터 앉는 것을 좋아하고 깨끗함을 즐기며, 달음질 치는 것을 공격하며, 다리하나를 뻗어 절을 하고, 서있을 때는 두팔을 깍지끼고, 움질일때는 반드시 팔을 흔든다. 성품에 거짓으로 복속함이 많다. 부자가 같은 내에서 목욕을 하고, 같은 방에서 잠을 잔다. 부인은 음란하여 풍속에 노는 여자들이 많다. 결혼은 남녀가 서로 좋아해야 하고 그런후에야 결혼을 한다. 남자집에서 돼지고기와 술을 보내고, 재물없이 찾아가는 것이 예이다. 혹 재물을 받는 자는 사람들이 함께 이를 부끄러워 한다. 죽은 자는 집안에서 염을 하고 삼년후에 길일을 택하여 장사지낸다. 부모나 지아비의 상에는 복을 삼년간 입고 형제는 삼개월을 지낸다. 처음부터 끝까지 슬피 우는데, 장사를 지내때에 북치고 음악을 하여 춤추며 이를 보낸다.  이에 이르러 시신을 묻는데 모두 죽은자가 살아있을때의 옷이나 수레 말등을 묘의 곁에 두는데 장사지내는데 모였던 자들이 다투어 취한후에 간다. 귀신을 공경하고 음사가 많다.     '개황'초에 빈번히 사신이 입조하였다. '진'의 평정이후 '탕'이 크게 두려워 하여 병사와 곡식을 준비하여 수비할 수 있도록 하였다. 십칠년 임금이 '탕'에서 서를 내려 말하길       짐은 천명을 받들어 기르기를 좋아하고 선비를 이끌었다. 왕을 바다 한쪽에 위임하니 베풀어 조정에 화되어 천지의 도를 쫓는 마음을 얻고자 한다. 왕은 매양 사신을 보내어 해마다 조공하니 비록 변방이라 칭한다 하더라도 정성에는 다함이 없다. 왕은 이미 남의 신하로, 모름지기 짐의 덕과 한가지로 하여, 이에 '말갈'을 내몰고, '거란'에 대비하여야 한다. 여러 변방들이 머리를 조아리며 나의 신하가 되는데, 선한사람들이 따르는 것을 분히 여기니 어찌 해치고자 하는 마음이 깊은가? 태부의 공인이 그 수가 적지 않으니, 왕은 반드시 아뢰어 들을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지난해 비밀히 재화를 가지고, 소인이 이를 따라 움직여 사사로이 활쏘는 자가 하국으로 숨게 하니 어찌 병기를 고치어 올바르지 못한 뜻을 품고 밖의 소문을 두려워하니 도둑질을 하는 것이 아닌가?. 이제 사자에게 명을 내리어, 왕과 신하를 위무하고, 본래 사람의 뜻을 묻고자 하고, 정치와 기술을 가르치려고 하였다. 그러나 왕은 공허한 객사에 앉아 엄히 방비하고, 눈과 귀를 막고, 영원히 듣고, 보려 하지 않으니, 가히 악함이 있어 사람들이 아는 것을 막고, 관리를 제도함을 막아 살피는 것을 두려워 하는가? 또 수차례 기병을 보내어 변방을 약탈하고, 모략을 꾀하고 간사한 말을 퍼트리며, 마음이 온당치 못하다.       짐은 모든 생명에 적자처럼 대하고, 왕에게 땅과 집을 주고, 관직과 작위를 주어 깊은 은혜로 윤택하게 하니 멀고 가까운 곳에서 분명하게 들어났다. 왕은 오로지 믿음을 품지 못하여 항상 시샘하고 의심하여 사신을 몰래 보내어 관찰하니, 순수한 신하의 뜻이 이와 같은 것인가? 이는 대개 짐의 가르침이 밝지 않아 왕이 죄를 어긴 것이니 한번 용서를 한다. 금일 이후로는 반드시 개혁하여 번신의 절도를 지키고, 조정의 법을 받들며, 스스로 신하가 되어 다른 나라를 거스리지 말면 곧 오래도록 부귀를 누릴 것이니 실로 짐의 마음이니라. 다른 나라들은 비록 땅이 좁고 사람이 적지만 널리 하늘아래에 있는 짐의 신하이니, 이제 만약 왕이 물리친다면, 가히 버려 둘수가 없어 끝내는 다시 관속을 뽑아 이들을 편안히 위무해야 한다. 왕이 맘을 씻고 바꾸어 법에 따르면 곧 짐의 좋은 신하아니 어찌 좋은 선비를 뽑아 보낼 필요가 있겠는가? 옛 제왕들이 법을 일으킬 때 어짐과 믿음을 먼저 하고 선함에는 받드시 상을 주고 악함에는 필히 벌을 주니 사해의 안쪽이 짐의 뜻을 듣고자 한다. 만약 왕이 죄가 없는데도 짐이 홀연 병사를 낸다면 나머지 번국들이 짐을 어찌 여기겠는가? 왕은 반드시 마음을 비우고 짐의 이 뜻을 받들어 의심하지 말고, 다른 생각을 하지 말도록 하라.       옛날에 "진숙보"란 자가 대를 이어 "강음"에 있으면서 사람들을 죽이니 놀라 움직이니 내가 경계하자 내 변방을 노략질 하였다. 짐이 앞서 경계하고 뒤에서 위로하니 십년에 이르러 저들이 "장강"의 바깥임을 믿고 무리들을 모아 교만해져 미쳐 날뛰어 짐의 말을 따르지 않으니, 장수들에게 명하여 저들을 베니 가고 오는데 달이 차지 않았고 병사는 수천을 넘지 않았다. 도둑들이 번갈아 달아나고 하루 아침에 깨끗이 쓸어 멀고 가까운곳을 베어 편안히 하니 사람과 귀신이 모두 기뻐하였다. 이제 왕이 한함을 탄식하고 홀로 슬퍼하고 상심하는 것을 들으니 내쫓고 올려 서는 것은 관리가 맡아 할 일이다. 왕을 죄 준대도 "진"처럼 멸망시키지는 않을 것이요, 왕을 상 준대도 "진"처럼 두지는 못할 일이다. 그런데 화를 즐겨하고 어지러운 것을 좋아하다니 이 무슨 까닭인가?  왕이 일컷길 "요수"의 넓음이 "장강"만 한가? "고려" 사람의 많고 적음이 "진국"만 한가? 짐이 만일 백성을 기를 생각을 하지 않고, 왕의 전날 잘못만 책한다면 한 장군에 명하면 될 것인데 어찌 많은 힘이 필요하겠는가?. 짐이 이렇듯 은근하게 타일러서 왕이 마음을 새롭게 하기를 기다리는 것이니, 왕은 마땅히 짐의 마음을 알아서 스스로 많은 복을 구하도록 하라 했다       "탕"이 서를 받고 두려워 하여, 표를 받들어 사죄하고, 병이 들어 죽었다. 아들 "원"이 이어 섰다. "고조"가 사신을 보내어 "원"을 상개부 의동삼사로 삼고, 요동군공을 봉하고, 옷을 하사하였다. "원"이 표를 받들어 은혜에 감사하고, 이 일을 치하하고, 아울러 왕으로 봉해주기를 청하였다. "고조"가 이에 "원'을 왕으로 봉하였다.       다음해 "원'이 "말갈" 만여기병을 이끌고, "요서"를 침범하자, "영주"총관 "위충"이 맞서니 도망하였다. "고종"이 이를 듣고, 크게 노하여 "한왕" "량"을 원사로 명하여 수군과 육군으로 정벌하고 그 작위를 취소하였다. 이때에 흉년이 들어 더 이상 일어나지 못하여 여섯군이 밥을 굶고, "임해관"에 이르렀을 때 질병이 돌아 왕은 더 이상 나아가지 못하였다. "요수"에 이르자, "원"이 역시 두려워 하여 사신을 보내어 죄를 빌며, 표를 보내기를 "요동"의 똥같은 신 "원"이라 말하였다. 임금이 이에 병사를 그치고, 처음과 같이 하니, "원"이 해마다 조공하였다.       "양제"가 즉위하자 천하의 전성기다. "고창왕", "돌궐"의 "계인가한"이 함께 대궐에 이르러 공물을 받쳤다. 이에 "원"도 입조하라 하였는데, "원"이 두려워하여 대궐의 예를 어기었다. "대업"칠년 제가 장차 "원"의 죄를 벌하려고 하여, 수레에 올라 "요수"를 건너, "요동성"에서 길을 나누어 나아가자 각각 병사들이 그 성아래에 모였다. "고려"도 병사를 이끌고 방어 하였는데, 전쟁에 불리하자, 성을 둘러싸고 굳게 지키었다. 제가 여러 군에 공격하길 명하고, 장수들에게 말하길 "고려"가 만약 항복하려고 하면, 곧 어루만져 병사를 이끌고 얻으려 하지 말라 하였다. 성이 장차 함락되려 하자 적은 거짓 항복을 청하고, 장수들은 표를 받들어 감히 나아가지 못하고, 먼저 아뢰었다. 이 보고가 이르르자. 적은 다시 준비하여 수비하였다. 이와 같음을 여러번 했으나, 제가 깨닫지 못하였다. 식량이 다되고, 병사들이 쇠하여 지고, 보급이 이어지지 못하며, 군사들이 많이 손상되어, 반밖에 안 남았다. 이렇게 하여 요수의 서쪽인 "무려라"만 빼앗고, "요동군" "통영진"을 설치하고 돌아왔다.       구년 제가 다시 친히 정벌하여 군사들에게 명하니 마땅히 따랗다. 여러 장수들이 길을 나누어 성을 공격하니 적의 기세가 사그라진 듯 했다. "양현감"이 난을 일으켰다는 소식이 이르자 제가 크게 두려워 하여 그날 여섯군대를 이끌고 돌아갔다. 병부시랑 "곡사정"이 "고려"에 항복하니, "고려"가 이 사실을 알고, 모든 군대로 뒤 쫓으니, 제의 군대가 많이 패하였다. 십년 또 병사를 일으켰으나 도적들이 일어나 사람들이 흩어지고 길이 끊어져 군사들을 많이 잃어 버렸다. "요수"에 이르렀는데 "고려" 또한 곤궁하여, 사신을 보내어 항복을 청하며, 죄인 "곡사정"을 보내면서 죄를 속죄하였다. 제가 이를 허락하여, "회원진"에서 그 항복을 받았다. 인하여 포로를 돌려 보내었다. 서울에 이르러 "고려"가 사신을 보내어 조정에 고하니 이에 잡아두어 머물게 하고, "원"을 입조하라 불렀지만, "원"은 끝내 가지 않았다. 제께서 군사들을 독려하여 엄히 다시 일어날 것을 꾀하자 천하에 큰 난이 일어가 다시 가지 못하였다.       唐書       고려(高麗)   고려는 부여로부터 나온 별종이다. 그 나라는 평양성(平壤城)에 도읍하고 있으나 곧 한나라 낙랑군의 옛 땅으로서 경사의 동쪽 5천 1백 리에 있다. 동쪽으로 바다를 건너 신라에 이르고 서북쪽은 요수(遼水)를 건너 영주(營州)에 이르며, 남쪽은 바다를 건너 백제에 이르고 북쪽은 말갈에 이른다. 동서가 3천 1백 리요 남북이 2천 리이다.   그 관직에는 큰 것을 대대로1)(大對盧)라 부르니 1품에 비견되며 나라의 일을 총괄하여 주재하는데 3년에 한 차례씩 교체함에 만약 그 직위에 적합한 자면 햇수의 제한에 거리끼지 않는다. 교체하는 날에는 혹은 서로 공경하여 복종하지 않으면 모두 군대를 이끌고 서로를 공격하여 이기는 자가 된다. 왕은 단지 궁문을 닫고 스스로 호위할 뿐 제어하지 못한다.   다음을 태대형(太大兄)이라고 하는데 정 2품에 비견된다. 대로(對盧) 이하의 관직은 모두 12등급이다. 지방에는 주(州)와 현(縣)에 60남짓의 성을 둔다. 큰 성에는 녹살( 薩) 한 명을 두니 도독(都督)에 비견된다. 모든 성에는 도사(道使)를 두니 자사(刺史)에 비견된다. 그 아래에는 각기 요좌(僚佐)가 있어서 관청의 일을 나누어 관장한다. 의상과 복식은 단지 왕만이 다섯 가지의 채색을 사용하며 흰 비단으로 머리관을 만들고 흰 가죽으로 작은 허리띠를 두르는데 그 관과 띠에는 모두 금으로 장식을 한다. 관직의 지위가 높은 자는 푸른 비단으로 관을 만들고 그에 버금가는 자는 붉은 비단으로 하고는 새의 깃털 두 개를 꽂고 더불어 금, 은으로 장식을 하며, 적삼에 대통소매를 하고 바지는 입구가 크며, 무두질한 흰 가죽으로 띠를 하고 무두질한 누런 가죽으로 신발 만든다. 나라 사람들은 거친 털옷을 입고 고깔(弁)을 쓰며 부인들은 머리에 머릿수건(巾 )을 쓴다.   바둑과 투호의 놀이를 좋아하며 발로 공을 차는 유희에 능하다. 음식을 먹을 때는 변두( 豆)와 보궤(  ) 및 준조( 俎)와 뇌세( 洗) 등을 사용하니 자못 기자(箕子)가 후세에 남겨준 풍습이 남아 있다.       그들이 거처하는 곳은 반드시 산과 계곡에 의지하여 모두 띠 풀로 집의 지붕을 이는데 단지 절과 신의 사당 및 왕궁과 관청 등은 기와를 사용한다. 민간에는 빈곤하여 초췌한 자가 많으며 겨울이면 모두 긴 아궁이를 만들고 아래로 숯불을 지펴서 따뜻하게 한다. 밭에 식물을 심고 누에를 치는 것 등은 대략 중국과 같다. 그들의 법에는 모반이나 반역을 한 자가 있으면 곧 군중을 모아 횃불을 가지고 다투어 불사른 뒤 온몸이 모두 불에 데어 살이 문드러진 연후에 머리를 베고 집안은 모두 관가에서 몰수하면 성을 지키다가 적에게 항복을 하거나 싸움에 임해서 패하여 달아나거나 또는 살인이나 강도를 한 자는 참수하며 물건을 훔친 자는 12배로 갚게 하며 소나 말을 죽인 자는 그를 잡아들여 노비로 삼는다. 대체로 법을 시행하는데 있어 엄격하게 하기에 범하는 자가 적으며 또한 길에는 떨어져 있는 물건도 줍지 않는다.   그 풍속에 함부로 지은 사당이 많으니 영성(靈星)의 신과 해의 신 그리고 가한신(可汗神)과 기자신(箕子神) 등을 섬긴다. 도읍 동쪽에 신수(神隧)라 이름하는 큰 동굴이 있는데 10월이면 언제나 왕이 몸소 제사를 지낸다. 습속에 서적을 좋아하는데 누추한 문에 땔나무를 해서 사는 집에 이르기까지 각기 큰 거리에 커다란 집을 짓고 이를 일컬어 경당( 堂)이라 하여 자제들이 혼인하기 전에 밤낮으로 여기에서 글을 읽고 활을 익히게 한다. 서책으로 오경(五經)과 사기(史記) 한서(漢書), 범엽(范曄)의 후한서(後漢書) 삼국지(三國志) 손성(孫盛)의 진춘추(晉春秋) 옥편(玉篇) 자통(字統) 자림(字林)등이 있으며 또한 문선(文選)이 있는데 이것을 매우 좋아하여 중히 여긴다.       그들의 왕 고건무(高建武)는 바로 앞선 왕 고원(高元)의 배다른 아우이다. 무덕(武德618-626) 2년에 사신을 보내 들어와 예방하였다. 4년에 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고조가 수(隋) 말기에 사졸들이 그 땅에 많이 묻힌 것을 생각하여 5년에 고건무에게 글을 내려 이르기를 [짐은 보배로운 명을 삼가 받들어 임금으로 온 세상에 임하였으니 천지인(天地人)의 신령에게 공경으로 따르며 만국을 평안히 할 것이오. 하늘 아래로 두루 사랑을 고르게 하여 어루만져 기르니 해와 달이 비치는 곳에는 모두 잘 다르셔져 편안한 것이요. 왕은 이미 요수(遼水)의 왼편을 도맡아 다스리고 대대로 번복의 땅에 거처하며 정삭(正朔)을 사모하여 받들고 멀리서 조공의 직분을 좇아왔소. 그런 까닭에 사자를 보내 산을 넘고 물을 건너 정성을 펼치니 짐이 매우 기쁘구료. 바야흐로 이제 천하가 편안히 화락하고 온 세상이 잘 다르셔 지니 패옥과 비단이 한껏 왕래를 하고 도로는 막히는 곳이 없소. 이제 한창 화목함을 펼쳐 초빙의 호의를 영원히 도탑게 하고 각자의 강역을 보존하니 어찌 훌륭하고 아름답지 않겠소? 단지 수나라 말년에 군사가 이어지고 환난이 얽어졌으니 전투로 공방을 치르던 곳에는 각자 자신의 백성들을 잃게 되었었소 마침내 골육들이 어그러져 멀어지고 가족들이 나뉘어 갈라지니 해가 많이 지났다지만 홀아비와 홀어미들은 가슴에 맺힌 한을 풀지 못하였소. 이제 두 나라가 평화롭게 왕래하여 간격이나 차이를 둘 이유가 없기에, 이곳에 있는 모든 고려인 등은 이미 영을 내려 찾아 모아 놓았기에 얼마지 않아 곧 보낼 것이니, 그곳에 있는 이 나라의 사람들은 왕이 놓아 돌려보내 줌으로써 어루만져 기르는 방안을 힘써 다해 인의로써 용서해 주는 도리를 함께 널리 펴야 할 것이오] 하였다. 그리하여 고건무는 중화 사람들을 모두 수색하여 모으고 예의로 인도하여 보내니 속속 이르는   자가 1만의 숫자가 되므로 고조가 크게 기뻐하였다.       7년에 전 형부상서 심숙안(沈淑安)을 파견하여 가서 고건무를 상주국 요동군왕 고려왕으로 책봉하고, 아울러 천존상(天尊像)과 도사(道士)를 데리고 그곳에 가서 그들을 위하여 노자(老子)를 강의하니 그 왕 및 도인과 속인 등 보고 듣는 자가 수천 명이었다. 고조가 일찍이 시위하고 있던 신하에게 이르기를 [명분과 실리 사이의 이치는 모름지기 서로 적합해야 한다. 고려가 수나라에 신하라 칭하였지만 끝내는 양제에게 저항하였는데 이 또한 어찌 신하라는 것이 있을 수 있는가! 짐이 만물로부터 존경을 받고자 하는 것은 교만하거나 귀하게 되고자 함이 아니라 단지 이 나라에 자리하며 힘써 베풂으로써 백성들을 편안케 하고자 한 것인데, 하필이면 그들로 하여금 신하라 일컫게 하여 스스로 잘난 체해야 할 것인가, 곧 조서로서 그들로 하여금 신하라 일컫게 하여 스스로 잘난 체해야 할 것인가, 곧 조서로서 짐의 이 마음을 서술하도록 하라] 하니 시중 배구(裴矩)와 중서시랑 온언박(溫彦博)이 이르기를 [요동의 땅은 주(周)나라 때는 기자(箕子)의 나라였으며 한나라 때는 현도군(玄 郡)일 뿐입니다. 위(魏)나라와 진(晉)나라 이전에는 피봉된 강역(彊域) 안쪽으로 가까이 있었으니 신하라고 칭하지 않음을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더욱이 중국이 이적(夷狄)에 대해서는 마치 늘어선 별들에 대한 태양과도 같으니 존귀함을 낮추실 이유가 없으며, 머리를 숙이는 것은 번신의 강역과 같아짐을 말하는 것입니다.] 하니 고조가 이에 그만 두었다. 9년에 신라와 백제가 사신을 보내 고건무를 송사하여 이르기를 길을 폐쇄하여 조정에 들어올 수 없다고 하였다. 또 서로 더불어 틈이 있으면 누차 서로를 침략하였다. 조서를 내려 원외산기시랑 주자사(朱子奢)가 가서 그들을 화해시켰다. 건무가 표를 올리고 사죄하며 신라와 더불어 사신을 마주하고 회맹(會盟)할 것을 청하였다.       정관(貞觀677-649) 2년에 돌궐의 힐리가한( 利可汗)을 격파하니 고건무가 사신을 보내 표를 올리고 하례하였으며 아울러 피봉받은 강역의 지도를 올렸다. 5년에 조서를 내려 광주도독부사마 장손사(長孫師)를 파견하여 가서 수나라 때 전사한 해골을 거두어 매장하고 고려가 세운 경관(京觀)을 허물었다. 건무는 그 나라가 정벌당할까 두려워하여 이에 장성을 쌓으니 동북의 부여성(夫餘城)으로부터 서남의 바다에 이르니 1천여 리가 되었다. 14년에 그들의 태자 환권(桓權)을 들여보내 예방하고 아울러 토산물을 바치니 태종이 후하게 대접하고 노고를 위로함에 있어 매우 지극하였다.       16년 서부대인 개소문(蓋蘇文)이 관직을 거머쥐고 왕을 범하려 하자 여러 대신들이 고건무와 더불어 논의하여 그를 주살하고자 하였다. 일이 누설되자 소문이 이에 통솔하고 있던 병사들을 모두 소집하여 사열을 펼친다고 말하고 아울러 성의 남쪽에 술과 음식을 성대하게 차려 놓으니 여러 대신들이 모두 와서 사찰하였는데 개소문이 병사들을 부려 모두 살해하지 죽은 자가 1백여 명이었다. 창고를 불사르며 왕궁으로 달려들어가 건무를 살해하고 건무의 아우인 대양(大陽)의 아들 장(藏)을 세워 왕으로 삼았다. 스스로 자리에 올라 막리지(莫離支)가 되었는데 중국의 병부상서 겸 중서령의 관직과 같은 것이니 그로부터 나라의 정치를 마음대로 하였다. 개소문의 성씨는 천씨(泉氏)인데 수염이 많은 얼굴에 매우 장대하고 형체가 걸출하며 몸에는 다섯 자루의 칼을 차고 있기에 좌우에서 감히 우러러보지도 못하였다. 항상 그의 부하에게 땅에 부복하게 하고는 그를 밟고 말에 오르며, 말에서 내릴 때도 역시 그렇게 하였다. 길을 나설 때는 먼저 호위대를 풀어놓고 길을 인도하는 자가 길게 호령하여 길 가는 사람들을 물러나게 하는데 백성들은 두려워 피하며 모두 스스로 구덩이나 골짜기로 뛰어든다.       태종이 고건무의 죽음을 듣고 그를 위하여 애도식을 거행하고 사신에게 부절을 주어 조문하게 하였다. 17년에 자리를 이은 왕인 장(藏)을 봉하여 요동군왕고려왕으로 삼았다. 또 사농승 상리현장(相里玄奬)을 파견하여 새서를 지니고 가서 고려를 말로 타일러 신라를 공격하지 말도록 하였다. 개소문이 상리현장에게 말하기를 [고려와 신라는 원한으로 틈이 진 지 이미 오래오. 예전 수(隋)나라 왕실에서 침략해 올 때 신라가 기회를 타고 고려 5백 리의 땅을 약탈하고 그 성읍들을 신라가 모두 차지하고 있소. 스스로 땅과 성을 돌려주지 않으면 이번 싸움은 아마도 그칠 수 없을 것이오] 하였다. 그러자 상리현장이 이르기를 [이미 지나간 일인데 어찌 뒤쫓아 논할 것인가?] 하였으나 개소문이 끝내 따르지 않았다. 태종이 시위하고 있던 신하를 돌아보며 이르기를 [막리지는 그의 주인을 해치고 대신들을 모두 살해하였으며 형벌을 시행하는 것이 구덩이에 파묻고 함정에 빠뜨리는 것과 같을 뿐이니 백성들은 더욱이 자칫하면 번번이 죽임을 당하기에 원한과 고통을 마음에 담아두고 길거리에서는 눈짓만 하고 있다. 무릇 군사를 출정시켜 백성을 위로하고 반역자를 문죄하여 토벌하면 모름지기 그 명분이 있을 것이요, 임금을 시해하고 백성을 학대하였기에 패퇴시키기는 매우 쉬울 것이다.] 하였다.       19년 명을 내려 형부상서 장량(張亮)을 평양도 행군대총관(平壤道 行軍大總官)을 삼아 장군 상하를 거느리고 강(江), 회(淮), 영(嶺), 협( ) 등지의 굳센 병사 4만명과 전선 5백 척을 통솔하여 내주(萊州)로부터 바다를 건너 평양으로 향하게 하였으며 또 특진영국공 이적(李勣)을 요동도 행군대총관(遼東道 行軍大總官)을 삼고 예부상서 강하왕(江夏王) 도종(道宗)을 부관으로 삼아 장군 장사귀 등을 거느리고 보병과 기병 6만 명을 통솔하여 요동(遼東)으로 향하게 하였으며 양군이 세력을 합하여 태종이 친히 거느린 천자의 군대와 모이게 하였다.       여름 4월에 이적의 군대가 요수를 건너 나아가서 개모성(蓋牟城)을 공격하여 빼앗고 포로 2만명을 노획하였으며 그 성에 개주(蓋州)를 설치하였다. 5월에 장량의 부장 정명진이 사비성을 공격하여 빼앗고 그곳의 남녀 8천여 명을 노획하였다. 이날 이적은 요동성으로 군대를 나아가게 하였다. 제께서 요택(遼澤)에 머무르며 조서를 내려 이르기를 [지난날 수나라 군대가 요수(遼水)를 건넜으나 그때는 하늘이 돕지 않아 종군하던 사졸들은 해골이 된 채 서로를 바라보며 드넓은 들녘에 두루 흩어져 있으니 진실로 애석하고 탄식할 일이다. 백골을 덮어 주는 도의는 참으로 무엇보다 우선되어야 하니 명령으로 모두 거두어들여 매장하도록 하라] 하였다. 국내성(國內城)과 신성(新城)의 보병과 기병 4만 명이 와서 요동을 도왔으나 강하왕 도종이 기병 4천 명을 거느리고 되받아쳐서 크게 격파하고 1천여 급의 머리를 베었다. 제께서 요수를 건넌 뒤 조서를 내려 교량을 치움으로써 사졸들의 의지를 굳게 하였다. 제께서 요동성(遼東城) 아래에 이르러 사졸들이 흙을 져서 해자를 매우는 것을 보고 제께서 그 중 제일 무거운 것을 나누어 친히 말 위에 실었다. 시종하던 관리들이 송구하여 어쩔 줄을 모르다가 다투어 흙을 지고 성 아래로 옮겼다. 이때 이적은 이미 군사를 거느리고 요동성을 공격하였다. 고려는 우리에게 3백 근의 돌을 1리 밖까지 날리는 투석수레가 있다는 것을 듣고 매우 두려워하여 성 위에 나무를 쌓아 전투누각을 만들어 그것으로 날아오는 돌을 막게 하였다. 이적이 수레를 열 지어 놓고 돌을 쏘아 그 성을 공격하니 맞는 곳은 모두 무너졌다. 또 충차(衝車)를 밀어 그 누각에 부딪치니 기울어져 넘어지지 않는 것이 없었다. 제께서 친히 기갑 1만여 명을 거느리고 이적과 더불어 회맹하여 그 성을 에워쌌다. 급작스레 남   풍이 매우 맹렬하기에 그 서남쪽의 누각에 불을 놓을 것을 명하니 연이어 성 가운데로 연소되어 가옥들이 모두 타버렸다. 전사들이 성에 오르니 적들이 크게 무너지고 불타 죽은 자가 1만여 명이었으며, 그들의 날랜 군사 1만여 명을 포로로 하고 그 성을 요주로 삼았다. 처음에 제께서 정주로부터 매 수십 리마다 봉화대 하나씩 설치를 명하여 요동성까지 이어지게 하고 태자와 약조하기를 요동을 극복하면 봉화불을 올릴 것이라 하였다. 이날 제께서 봉화를 올릴 것을 명하니 그 불길이 전달되어 변방의 요새로 들어갔다.     군대를 백애성(白崖城-백암성)에 자리하고 공격을 명하니 우위대장군 이사마가 쇠뇌의 화살에 맞았기에 제께서 친히 피를 빨아 주었더니 장군과 사졸들이 이를 듣고 감동하여 격려되지 않는 이가 없었다. 그 성은 산에 의자하고 물에 임하여 사면이 험난하게 단절되어 있었다. 이적이 충차로 부딪치고 돌을 날리며 화살을 성 가운데로 빗발같이 집중시켜 쏘았다. 6월에 제께서 그 서북쪽에 이르자 성주 손벌음이 몰래 사신을 보내 항복을 청하며 이르기를 [신이 이미 항복을 원하였으나 그 중에 두 마음을 품은 자가 있습니다.] 하므로 조서로서 기치(旗幟)를 하사하여 이르기를 [반드시 항복할 것이면 이것을 성 위에 세워라] 하였다. 손벌음이 성 위에 기치(旗幟)를 세우니 고려는 당의 군사가 성에 오른 것이라 여기고 이에 모두 항복하였다.   이보다 앞서 요동이 함락되자 손벌음이 항복을 구걸하였다가 중도에 후회하여서 제께서 그가 언행이 이랬다 저랬다 한다고 노여워하여 성 안의 사람과 물건들을 전사들에게 나누어 줄 것을 허락하였었다. 항복을 받기에 이르자 이적이 제에게 여쭙기를 [전사들이 분발하여 앞을 다투며 화살과 돌에 신경 쓰지 않는 것은 노획물을 탐하기 대문일 뿐입니다. 이제 성을 거의 빼앗았는데 어찌하여 다시 그들의 항복을 허락하여 까닭 없이 장군과 사졸의 마음들 저버리십니까?] 하였으니 제께서 이르기를 [장군의 말이 옳다 그러나 병사를 풀어놓아 살육하게 하고 그들의 아내와 자식들을 포로로 삼게 하는 것은 짐이 참을 수 없는 일이다. 장군의 휘하에 공이 있는 자는 짐이 곳간의 물건으로 상을 줄 것이니 바라건대 장군은 이 한 성의 죄를 면해 주도록 하라] 하였다. 마침내 항복을 받아들이니 남녀 1만 명과 날랜 병사 2천 4백 명을 노획하고 그 성에 암주를 설치하였으며 손벌음을 암주자사에 제수하였다. 우리의 군대가 요수를 건너자 막리지가 가시성(加尸城)의 700명을 보내 개모성을 지키게 했는데 이적이 그들을 몽땅 사로잡으니 그 사람들이 모두 군대를 따르며 스스로 공적을 세울 것을 청하였다. 태종이 이르기를 [그 누가 너희들의 힘을 사용하고자 하지 않겠는가 마는 너희들의 가족들은 모두 가시성(加尸城)에 있으니 너희가 나를 위하여 싸우면 저들은 장차 죽음을 당할 것이다. 한 집안의 처자를 파산시키면서 한 사람의 힘이 사용되기 바라는 것은 내가 참을 수 없는 것이다.] 하며 모두 놓아 돌아가게 하였다.       천자의 수레가 나아가서 안시성(安市城)의 북쪽에 머무르며 영을 펼쳐놓고 군사를 진격시켜 공격하였다. 고려의 북부녹살(北部 薩) 고연수와 남부누살(南部 薩) 고혜정이 고려와 말갈의 무리 15만 명을 거느리고 와서 안시성을 도왔다. 적중에 대로(對盧)가 있어 나이가 많고 일에 익숙하였는데 고연수에게 이르기를 [내 듣기로 중국이 크게 어지럽자 영웅들이 함께 일어났다고 합니다. 진왕(秦王)은 뛰어난 무예로 향하는 곳에는 적이 없었으며 마침내 천하를 평정하고 남면하여 황제가 되니 북쪽 오랑캐는 항복을 청하고 서쪽 오랑캐는 정성을 바쳤습니다. 지금은 국력을 기울여 이곳에 도착하였기에 용맹한 장수와 날랜 병졸들이 모두 여기에 모여 있으므로 그 날카로운 기세는 가히 막아서지 못할 것입니다. 지금 계략이 될 만한 것은 만약 군사를 조아려 싸우지 않고 오래도록 지켜 버티며 날래고 굳센 군사를 나누어 보내 그들의 군량로를 끊으면 열흘을 넘기지 못하고 군량이 반드시 다할 것이니 싸우고자 하여도 싸울 수 없고 돌아가고자 하여도 길이 없을 것인즉 이는 싸우지 않고서 승리를 쟁취하는 것입니다.] 하였으나 연수가 따르지 않고 군대를 이끌고 바로 나아갔다. 태종이 밤중에 모든 장수를 불러 몸소 친히 지휘하였다. 이적(李勣)을 파견하여 보병과 기병 1만 5천 명을 거느리고 성의 서쪽 고개에 진을 치게 하였으며 장손무기(長孫無忌)는 우진달(牛進達) 등 정병 1만 1천명을 거느리고 기습군이 되어 산의 북쪽으로부터 좁은 계곡에서 나와서 그들의 후미를 들이치게 하였으며 태종은 직접 보병과 기병 4천을 데리고 북과 뿔피리를 숨기고 깃발과 표지를 가로누이고서 적 병영 북쪽의 높은 봉우리 위로 향하고는 모든 군대에 명령하여 북과 뿔피리 소리가 들리면 일제히 군사를 나아가게 하였다. 그리하여 해당관리에게 명을 내려 조당(朝堂)의 곁에 항복 받을 막사를 차리게 하고 이르기를 [내일   오시(午時)에 여기에서 오랑캐의 항복을 받을 것이다.] 하고 마침내 군대를 거느리고 나아갔다.       다음날 고연수가 단지 이적(李勣)의 군사만을 보고 더불어 싸우려 하였다. 태종이 무기(無忌)의 군대에서 먼지가 이는 것을 머리서 바라보고 영을 내려 북과 뿔피리를 함께 불게 하며 기치를 일제히 들게 하였다. 적의 무리가 크게 두려워하며 창을 지닌 보병 1만 명으로 그들을 공격하니 고연수의 무리가 패하였다. 무기가 군사를 풀어놓아 그들의 후미로 타고 오르게 하고 태종이 또 산으로부터 내려와 군대를 이끌고 그곳에 다다르니 적들이 크게 무너졌으며 1만여 급의 머리를 베었다. 고연수 등이 그 나머지 도적들을 거느리고 산에 의지하여 스스로 지켰다. 그리하여 무기와 이적 등에게 명하여 군사를 이끌고 그들을 애워싸고는 동쪽 하천의 교량을 치워 돌아갈 길을 끊었다. 태종이 고삐를 당기고 서서히 나아가며 적의 진영을 바라보고는 시위하고 있던 신하에게 이르기를 [고려는 국력을 기울여 왔기에 존망이 달여있는데 한번 패하였으니 하늘이 우리를 도운 것이다.] 하며 말에서 내려 두 번 절을 올리고 하늘에 감사하였다. 고연수와 고혜진 등이 15만 6천8백 명을 거느리고 항복을 청하니 태종은 원문(轅門)으로 인도하여 들였다. 연수 등이 무릎으로 기며 앞으로 나와 깊이 절하고 명을 청하였다. 태종이 녹살( 薩) 이하 추장 3천5백 명을 가려내어 군대의 벼슬을 수여하고 내지(內地)로 옮겼다. 말갈 천3백 명은 거두어들여 모두 구덩이에 파묻고 나머지 무리들은 놓아 주어 평양으로 돌아가게 하였다. 말 3만 필과 소 5만 두 및 명광갑(明光甲) 5천 벌을 노획하였으며 다른 장비들도 그만큼은 되었다. 고려국이 깜짝 놀라 두려움에 떨더니 후황성(后黃城)과 은성(殷盛) 등은 모두 스스로 발을 빼고 도망하여 수백 리에 사람과 인가의 기척이 없었다. 그리하여 천자가 행차하였던 산을 이름하여 주필산(駐 山)이라 하고 장작(將作)에게 영을 내려 파진도(波陣圖)를 작성하게 하였으며 중   서시랑 허경종(許敬宗)에게 명하여 글을 짓게 하고 돌에 새겨 그 공로를 기록하였다. 고연수에게 홍려경(鴻 卿)을 그리고 고혜진에게는 사농경을 제수하였다. 장량(張亮)이 또 고려와 더불어 건안성(建安城) 아래에서 다시 싸워 모두 격파하니 길게 늘어서서 에워싸고 공격하게 되었다.       8월에 진영을 안시성(安市城) 동쪽으로 옮기자 이적이 마침내 안시성을 공격하며 고연수 등 항복한 무리들의 진영을 그 성 아래로 끼워 놓고 그들을 불러내었다. 성 안의 사람들은 견고하게 지키고 움직이지 않으며 매번 태종의 지휘 깃발이 보이면 반드시 성에 올라 북을 치고 시끄럽게 굴며 저항하였다. 제께서 매우 노여워하자 이적이 이르기를 [적을 격파하는 날 남자들을 모두 주살하고자 합니다.] 하니 성 안에서 이 말을 듣고 사람들이 모두 죽음으로 항거하였다. 이에 강하왕 도종에게 영을 내려 흙산을 쌓게 하여 성의 동남쪽 모퉁이를 공격하게 하였더니 고려 역시 성가퀴(치-雉)와 성벽의 담을 더욱 올려 저항하였다. 이적이 그들의 서쪽을 공격하여 발석거와 충차로 그들의 망루와 성가퀴(雉)를 허물어 버리자 성 안에서 담이 붕괴됨에 따라 즉각 나무를 세워 목책(木柵)을 만들었다. 도종이 나뭇가지에 흙을 싸서 땅을 만들고 이를 언덕에 쌓아 올려 산을 이루고는 그 중간에 다섯 길을 내어 나무를 대로 흙으로 그 위를 덮으며 밤낮을 가리지 않으니 점차 성에 가까이 다다르게 되었다. 도종이 과의도위 부복애(傅伏愛)를 보내 군대의 병력을 거느리고 산꼭대기에서 적을 막게 하며 흙산을 점차 높이 올려 그 성을 밀치니 성이 붕괴되었다. 마침 부복애가 사사로이 통솔하던 곳을 떠나 있었더니 고려인 1백 명이 스스로 성을 무너뜨리고 싸웠으며 마침내 흙산을 점거하여 구덩이를 끊고 불을 쌓아 방패를 둘러 스스로 지켰다. 태종이 크게 노하고 부복애의 머리를 베어 두루 돌려보게 하였다. 모든 장수에게 명하여 공격하게 하였으나 사흘이 되도록 극복할 수 없었다.       태종이 요동의 곳간에 쌓여 있는 것이 얼마 없고 사졸들이 추위에 떨고 얼어죽으니 이에 조서를 내려 군대를 돌렸다. 그 성을 지나치자 성 안에서 모두 소리를 죽이고 깃발을 가로뉘었으며 성주가 성에 올라 손으로 절을 하며 받들어 배웅하였다. 태종이 그들의 견고한 수비를 가상히 여겨 명주 1백 필을 하사하고 이로써 임금을 섬기는 충절을 격려하였다. 처음에 요동성을 공격하여 함몰시킨 뒤 그 성이 천자의 군대에 항거한 까닭에 응당 노비로 몰수된 자가 1만 4천 명이었는데 모두 앞서 모아 유주(幽州)로 보냈다가 장차 장수와 사졸들에게 나누어 주려고 하였다. 태종은 그들이 부모와 처자가 하루 아침에 흩어질 것을 가엾게 여겨, 벼슬아치에게 영을 내려 그들의 값어치에 준하여 베와 비단으로 속 값을 치르게 하고 사면하여 백성으로 삼았다. 그 무리들이 환호하는 소리가 3일이 되도록 그치지 않았다. 고연수는 스스로 항복한 뒤 항상 탄식을 거듭하다 얼마지 않아 병으로 죽었다. 고혜진은 결국 장안에 이르렀다.       20년에 고려가 사신을 보내와 사죄하고 아울러 두 미녀를 바쳤다. 태종이 그들의 사신에게 일러 이르기를 [돌아가서 너희 군주에게 이르라. 미색이라는 것은 사람이 소중하게 여기는 것이다. 너희가 바친 것은 실로 아름답고 곱다. 그러나 본국에서 부모형제와 떨어져 온 것을 가련하게 여기기에 그들을 머물러두게 하는 것은 그들의 친지를 염두에 두지 않는 것이요, 그들의 미색을 사랑하는 것은 그들의 마음을 상처 입게 하는 것이기에 나는 취하지 않을 것이다.] 하며 모두 돌려보냈다.       22년에 또 우무위장군 설만철(薛萬徹) 등을 파견하여 청구도로 가서 그들을 정벌하니 설만철은 바다를 건너 압록수로 들어가 진격하여 박작성(泊灼城)을 격파하고 노획한 포로가 매우 많았다. 태종이 또 강남에 명하여 큰 배를 만들게 하고 섬주자사 손복가(孫伏伽)를 보내 용감한 사졸들을 불러 모집하게 하였으며 내주자사 이도유(李道裕)에게 군량과 장비를 운송하여 오호도(烏胡島)에 쌓아두게 하고는 장차 크게 거사하여 이로서 고려를 정벌하고자 하였다. 미처 시행하지 못하고 제께서 세상을 떠났다. 고종이 제위를 잇고 또 병부상서 임아상(任雅相)과 좌 무위대장군 소정방(蘇定方) 및 좌 효위대장군 계필하력(契苾何力) 등에게 명하여 속속 그를 토벌하게 하였으나 모두 큰 공 없이 돌아왔다.       건봉(乾封-666~668)원년에 고장(高藏)이 그의 아들을 들여보내 예방하고 태산 아래서 시중들게 하였다. 그해 개소문(蓋蘇文)이 죽자 그의 아들 남생(男生)이 대를 이어 막리지(莫離支)가 되었는데 그 아우 남건(男建) 및 남산(男産)과 화목하지 못하고 각기 붕당을 수립하여 서로 공격하였다. 남생이 둘째 아우에 의해 축출되자 국내성(國內城)으로 달아나 자리잡고 죽음으로 지켰으며 그의 아들 헌성(獻誠)은 궁궐로 찾아들어 구원하여 줄 것을 애원하였다. 조서를 내려 좌 효위대장군 계필하력(契苾何力)에게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그를 맞아들이게 하였다. 남생이 몸을 탈출해 도망하니 조서를 내려 특진?요동대도독 겸 평양도 안무대사에 제수하고 현도군공에 봉하였다. 11월에 사공, 영국공 이적에게 명하여 요동도 행군대총관으로 삼고 비장 곽대봉등을 거느리고 고려를 정벌하게 하였다. 2년 2월에 이적이 요수를 건너고 신성에 이르러 모든 장수에게 이르기를 [신성은 고려의 서쪽 경계에 진영을 둔 성으로 가장 요해지이니 만약 먼저 도모하지 못한다면 나머지 성 역시 쉽게 항복시킬 수 없다.] 하고는 마침내 군사를 이끌고 신성의 서남쪽에서 산에 의지하여 목책을 쌓아 놓고 공격도 하고 수비도 하니 성 안에서는 곤궁하고 급박하여 몇 차례 항복하는 자가 있었으며 이로부터 향하는 곳마다 극복하여 크게 승리하였다. 고장과 남건이 태대형(太大兄) 남산을 보내 수령 98명을 데리고 흰 깃발을 가지고 나와 항복하며 또한 들어가 알현할 것을 청하니 이적이 예의를 갖추고 불러들여 만나보았다. 남건은 여전히 문을 닫고 굳게 지켰다. 총장(總長-668~670)원년 9월에 이적이 또 진영을 평양성의 남쪽으로 옮기니 남건이 번번히 군사를 보내어 나와 싸웠으나 모두 크게 패하였다. 남건 휘하의 착병총관승 신성(信誠)이 비밀리에 사람을 보내 군중을 찾아들고 성   문을 열어 안에서 호응할 것을 허락하였다. 5일이 지나자 신성이 과연 문을 열게 하여 이적이 군사를 거느리고 들어가 성에 올라 북을 치고 떠들썩하게 하며 성문의 누각을 불사르니 사면에서 불길이 일어났다. 남건이 곤궁하고 급박해지자 자신을 찔렀으나 죽지 않았다. 11월에 평양성을 쳐서 빼앗고 고장과 남건 등을 포로로 하였다. 12월에 경사에 이르러 함원궁(含元宮)에 포로를 바치고 승리를 알리는 의식을 치렀다. 조서를 내려 고장은 그 정치가 자기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라 하여 사평태상백을 제수하고 남산(男産)을 선봉으로 섰기에 사재소경에 제수하고 남건(男建)은 검주(黔州)에 유배시켰으며 남생(男生)은 길을 인도한 공이 있기에 우위대장군에 제수하고 변국공(卞國公)에 봉하였으며 특진 등의 관직은 예전처럼 하였다. 고려국(高麗國)은 예전에 다섯 부로 나뉘어져 성이 1백76개, 호구가 69만 7천이었으니 이에 그 땅을 나누어 9개 도독부(都督部)와 42개 주(州) 그리고 1백여 개의 현(縣)을 설치하였으며 또 안동도호부(安東都護府)를 두어 통치하게 하였다. 우두머리로 공로가 있는 자들을 뽑아 도독(都督)과 자사(刺史) 및 현령(縣令)을 제수하고 중화인과 더불어 백성들을 가지런히 다스리게 하였다. 이에 좌무위장군 설인귀를 파견하여 군사를 총괄하고 진정시키게 하였으나 그 후에 도망하여 흩어지는 자가 제법 있었다.       의봉(儀鳳-678~679)연간에 고종이 고장(高藏)을 개부의동삼사, 요동도독에 제수하고 조선왕에 봉하여 안동에 거처하게 하며 본지의 오랑캐들을 진압하여 군주가 되게 하였다. 고장이 안동에 이르자 몰래 말갈과 더불어 서로 왕래하며 반역을 꾀하였다. 일이 드러나자 불러 소환하고 공주(恐州)에 유배하였으며, 아울러 그의 사람들을 나누어 옮겨 하남(河南)과 농우( 右) 등 여러 주로 흩어지게 하고 빈약한 자들은 안동성(安東城) 부근에 머무르게 하였다. 영순(永淳-682~683)초 고장이 죽자 위위경에 추증하고 조서를 내려 운구하여 경사에 이르게 한 뒤 힐리( 利)의 묘 좌측으로 매장지를 하사하고 겸하여 비석을 세워 주었다. 수공(垂拱-685~688)2년에 또 고장의 손자 보원(寶元)을 봉하여 조선군왕으로 삼았다. 성력(聖曆-698~700)원년에 좌응양위대장군으로 올려 제수하고 충성국왕으로 봉하여 안동의 옛 가구들을 통솔하여 다스리도록 위임하였지만 결국에는 실행되지 않았다. 2년에 또 고장의 아들 덕무(德武)를 제수하여 안동도독으로 삼고 본지의 오랑캐들을 거느리게 하였다. 이로부터 고려의 옛 가구로서 안동에 있는 것이 점차 줄어들었으며 나뉘어져 돌궐과 말갈 등에 의지하여 머무르니 고씨 임금은 마침내 단절되었다.       의봉(儀鳳-676~679)초에 남생(男生)이 장안에서 죽으니 병주대도독에 추증하였다. 아들 헌성(獻誠)은 우위대장군 겸 영우림위상하에 제수하였다. 천수(天授-690~692)연간에 즉천(則天)이 일찍이 안 대궐로부터 금은 보물을 내어 재상 및 남북 관청의 문무관으로 하여금 은밀히 활을 잘 쏘는자 다섯 명을 가려 뽑게 하여 함께 내기를 하였다. 내사 장광보가 먼저 헌성에게 제일의 자리를 사양하자 헌성이 다시 우옥검위대장군 설토마지(薛土摩支)에게 사양하였으며 설토마지가 또 헌성에게 사양하니 헌성이 아뢰기를 [폐하께서 활에 능한 자 다섯 명을 가려뽑을 것을 명하셨는데 간택되는 자가 대부분 한나라의 관리가 아닙니다. 신은 이후로부터 한나라의 관리가 활 쏘는 기술에 뛰어나다는 명성이 없을까 두려우니 엎드려 바라건데 명궁을 가려뽑는 일을 중도에 그만두었으면 합니다.] 하니 즉천이 가상히 여기고 그의 말을 따랐다. 이때 혹독한 내준신이 항상 헌성에게 재물을 요구하였는데 헌성이 거절하고 답하지 않으니 마침내 준신이 그가 반란을 꾀한다고 거짓을 꾸며 목을 옭아 죽였다. 즉천이 후에 그의 억울함을 알고 우우림우대장군에 추증하고 예절로서 장례를 다시 치러 주었다.      
66    朝鲜族 댓글:  조회:252  추천:0  2021-05-21
朝鲜族 分类: 中国少数民族 文化百科 朝鲜族简介 朝鲜族,是东亚主要民族之一。朝鲜族主要分布在朝鲜半岛及临近的中国东北和俄罗斯远东地区等地区,是朝鲜和韩国的主体民族,两国共有七千多万人口的朝鲜族人;朝鲜族人口过百万的国家有中华人民共和国和美国,人口均在两百万以上。 在中华人民共和国境内的朝鲜族是中国官方认定的一个少数民族,也被称为中国朝鲜族。在美国境内的朝鲜族属于美国亚裔少数民族,被称为韩裔美国人,根据2006年美国社区人口调查,韩裔美国人约有152万人。 起源 朝鲜族是古亚洲人和新亚洲人在新石器时代到青铜器时代之间陆续从欧亚大陆迁徙到朝鲜半岛后形成的。 朝鲜族是多起源民族,虽然今天的朝鲜族早已成为血缘高度统一的单一民族,但在历史上确是从石器时代开始就在东北亚繁衍生息的原住民和陆续从西伯利亚迁徒到朝鲜半岛的各部落和民族融合形成的民族。早在石器时代,朝鲜半岛就有人类居住遗迹,朝鲜半岛也是除欧洲大陆以外,青铜器时代人类遗迹支石墓被发现最多的地区。老亚洲人在旧石器时代,最先到达朝鲜半岛,之后一直到青铜器时代,以阿尔泰人为主的新亚洲人陆续从欧亚大陆迁徙到朝鲜半岛,形成了今天的朝鲜族。 朝鲜半岛第一个国家,古朝鲜在遭受汉的侵略后灭亡,之后在朝鲜半岛出现了无数个大大小小的国家,有扶余,沃沮,东濊,三韩,耽罗等,而三韩细分的话,总共有76国 辰韩12国,马韩54国,弁韩12国。其中斯卢国统一了辰韩成为新罗,伯济国统一马韩成为百济,弁韩统一后成为了伽倻。在北部,扶余贵族解慕漱带领族人离开扶余,建立了高句丽,在灭掉沃沮,东濊的残部后,最终朝鲜半岛形成了高句丽、百济、新罗并存的三国局面,迎来了原三国时代。 朝鲜半岛在原三国时代,时而联合,时而争战,互相牵制,保持了相当长久的三国割据状态,这其中高句丽的势力在广开土太王时代,不断壮大,致使新罗和百济改变策略,引外部势力,与之对抗,百济与倭国合作,新罗与唐合作,先后使百济和高句丽灭亡,之后新罗和唐又互相争战,这样持续了几十年,最终唐势力又逐渐退出了朝鲜半岛。 朝鲜族舞蹈 高句丽在灭亡时,有69万户,近350万人口,灭亡时,大部分高句丽人居住于朝鲜半岛中北部,即首都平壤周围,史书记载,高句丽有60万户,即大约300万高句丽人被唐迁移到了唐,因此可以得到的结论是,高句丽的大部遗民都去了唐朝,这也成为朝鲜族来源的一部分。 新罗灭后,三国遗民曾经一度恢复各自的国家,分别出现了后高句丽、后百济、后新罗,但很快就被后高句丽统一,成为了朝鲜族第一个统一的国家高丽。 蒙古曾经一度对高丽用兵无果,此期间大量女真和契丹人遗留在此。 元帝国出现内乱时,高丽曾派兵协助蒙古平叛,不料高丽派出去的将军李成桂发动政变,推翻了高丽,建立朝鲜。 当代的朝鲜族在16世纪基本形成。在这个形成过程中,朝鲜半岛北部的夫余、沃沮、东濊、鲜卑、高句丽人、渤海人、女真、契丹及汉族等东北亚民族也有一部分融合进朝鲜族中。与他们最近的民族是尼夫赫人及科里亚克族。经过基因、文化、民俗证明,扶余、高句丽、百济、新罗是朝鲜族的直系祖先. 文化 朝鲜半岛最初的原始宗教是巫教。随着当地与中国的交往,佛教和儒教后来由中国传入朝鲜半岛。佛教在高丽时期曾红极一时。但在李氏朝鲜时期,佛教曾受到限制,佛教寺院和佛教徒只能在乡村存在,不许在城市出现,取而代之的是儒教。儒家思想一度成为朝鲜的国家理念。直到现在儒家思想对朝鲜还有着很深的影响,尊敬长辈的儒家思想依然是朝鲜家庭的重要部分。但在当今的韩国,天主教和基督新教等基督宗派有着更大的影响力。  
65    되는 집안과 안되는 집안. 댓글:  조회:179  추천:0  2021-05-21
되는 집안과 안되는 집안. 01.되는 집안은 웃음 꽃이 가득하고          안 되는 집안은 근심걱정이 가득하다. 02.되는 집안은 감사와 기쁨이 주식이고    안되는 집안은 불평과 원망이 주식이다.   03.되는 집안은 돌똘뭉쳐 하나가 되고       안되는 집안은 뿔뿔이 흩어져 콩가루 된다.   04.되는 집안은 어른을 공경하고             안되는 집안은 자식을 공경한다.   05.되는 집안은 가정을 위하고 안되는 집안은 가옥을 위한다.   06.되는 집안은 온기가 가득하고 안되는 집안은 냉기가 가득하다.   07.되는 집안은 잘 될 이유를 말하고 안 되는 집안은 안될 이유만 말한다.   08.되는 집안은 나눔의 즐거움을 알고 안 되는 집안은 돈세는 즐거움만 안다.   09.되는 집안은 마음을 뜯어고치고 안되는 집안은 얼굴만 뜯어고친다.   10.되는 집안은 자신을 위해 관리비를 쓰고 안되는 집안은 아파트 관리비만 사용한다.   11.되는 집안은 칭찬과 격려에 침이 마르고 안되는 집안은 원망과 비난에 밤을 새운다.   12.되는 집안은 나은 방법을 찾아 행동으로 옮기지만 안 되는 집안 그 날이 그 날이다.   13.되는 집안은 ‘성실’이 가훈이고 안되는 집안은 ‘실성’이 가훈이다.   14.되는 집안은 적극적인 언어를 사용하고 안 되는 집안은 부정적인 언어를 사용한다.   15.되는 집안은 대상을 가려서 싸우지만 안 되는 집안은 아무하고나 부딛힌다.   16.되는 집안은 ‘고마워’가 통용어이고 안되는 집안은 ‘이게 뭐야?’가 상용어다.   17.되는 집안은 할말 안할 말 가려하고 안 되는 집안은 싫어하는 말만 골라서한다.   18.되는 집안은 사람이 들끓고 안되는 집안은 해충만 들끓는다.   19.되는 집안은 ‘잘해보자’고 말하고 안되는 집안은 ‘해보나마나 뻔하다.’고 말한다.   20.되는 집안은 자신을 바꾸고 안 되는 집안은 상대를 바꾼다.   21.되는 집안은 계획세워 살아가고 안 되는 집안은 대충대충 뒤죽박죽 살아간다.   22.되는 집안은 하루하루를 금쪽같이 사용하고 안되는 집안은 휴지처럼 낭비한다.   23.되는 집안은 사랑과 의욕이 불타고 안 되는 집안은 증오와 원망이 불탄다.   24.되는 집안은 좋은 글 좋은 말이 보물이고 안되는 집안은 연속극이 보물이다.   25.되는 집안은 ‘위하여’살아가고 안 되는 집안은 건배할 때만 ‘위하여!’다. 26.되는 집안은 좋은 친구가 많고 안되는 집안은 나쁜 친구가 많다. 27.되는 집안은 상대의 말에 귀기울이고 안되는 집안은 혼자 열변을 토한다. 28.되는 집안은 노래소리 드높고 안되는 집안은 고함소리 드높다. 29.되는 집안은 ‘나부터 잘해야지’하는데 안 되는 집안은 ‘너나 잘하라’한다. 30.되는 집안은 가슴을 맞대고 안 되는 집안은 등을 맞댄다 31.되는 집안은 보람으로 일하고 안되는 집안은 죽지 못해 일한다. 32.되는 집안은 팥으로 메주쑨대도 믿어주고 안되는 집안은 콩으로 쑨대도 안믿는다.   33.되는 집안은 절망도 희망이고 안되는 집안은 희망도 절망이다.   34.되는 집안은 좋은 방법을 행동으로 보여주고 안 되는 집안은 말만 무성하다.   35.되는 집안은 약속이 생명이고 안되는 집안은 부도가 생명이다.   36.되는 집안은 하늘을 두려워하고 안 되는 집안은 하늘에 대고 삿대질을 한다.   37.되는 집안은 감사와 기쁨으로 살아가고 안되는 집안은 외면하고 살아간다.   38.되는 집안은 남이 잘할때 박수치고 안되는 집안은 남이 못될때 통쾌한 웃음을 날린다.   39.되는 집안은 친절이 상표이고 안 되는 집안은 교만이 상표다.   40.되는 집안은 문제를 개선하여 향상하고 안되는 집안은 문제를 덮어둬 속으로 썩게된다.
한국인인  우리는 한민족(韓民族)입니다.  한민족(韓民族)은 근원은 한반도 이남에 존재했던 마한(馬韓),진한(辰韓),변한(弁韓)의 삼한(三韓)입니다.  대한민국 역사학계는 마한은 지금의 경기, 충청, 전라도 지방, 진한은 낙동강 동쪽의 경상도 지방, 변한은 낙동강 서쪽의 경상도 지방에 해당한다고 보고 있고, 삼한이 한반도 이남지역에 기반한다고 보고있습니다.  따라서, 삼한(三韓)을 세운 한민족(韓民族)과 고구려를 세운 북방민족은 같은 민족이 아닙니다.  우리는 남한(南韓)과 북한(北韓)이 같은 한민족(韓民族)인줄 알고 있지만, 실제로 북한은 한민족(韓民族)이 아닙니다.  우선, 북한(北韓)이라는 명칭 자체가 남한측에서 일방적으로 붙인 명칭입니다.  북한의 국호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朝鮮民主主議人民共和國)"입니다. 북한 사람들은 북한을 "북조선(北朝鮮)"이라고 부르고, 남한을 "남조선(南朝鮮)"이라고 부릅니다.  남한의 국호는 "대한민국(大韓民國)"입니다. 남한 사람들은 북한을 북한(北韓)이라고 부르고 남한을 남한(南韓)이라고 부릅니다.  남한(대한민국)은 삼한(三韓)의 정통성을 계승한 남방민족인 한민족(韓民族)이기 때문에, 韓을 집어넣어, 국호를 대한민국(大韓民國)이라 지은 것이고,  북한(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고조선(古朝鮮)의 정통성을 계승한 북방민족이기 때문에, 北朝을 집어넣어, 국호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朝鮮民主主議人民共和國)이라 지은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북한 사람들은 우리와 같은 한민족(韓民族)이 아니라 북방민족입니다.  다만, 오늘날 남한인들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북한(北韓)이라 부르며, 북한이 한민족(韓民族)의 일부라고 일방적으로 주장하고 있는 것이고,  북한인들은 남한을 남조선이라 부르며, 남한이 북방민족의 일부라고 일방적으로 주장하고 있는 것 뿐입니다.  북방민족이 세운 고조선과 고구려는 한반도가 아닌 요동지역에서 태동했으며 요동지역을 주 근거지로 삼았으며, 고조선과 고구려를 세운 북방민족은 한반도 이남의 우리 한민족과는 전통적으로 적대적 관계에 있었습니다.  고조선과 고구려가 우리 한민족의 역사가 아닌 근거는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북방민족이 세운 고조선, 고구려, 발해는 우리 한민족이 지배하던 한반도 이남지역을 단 한번도 지배하지 못했고(일부 영토의 점령이 아닌 완전한 지배), 한민족 또한 한반도를 벗어난 적이 없습니다.  현존하는 모든 고조선의 강역도들을 보면 한결 같이 고조선의 영역에는 한반도 이남지역이 제외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고조선이 건국될 때부터 시작하여 고조선이 멸망할 때까지 한반도 이남지역에는 고조선을 세운 북방민족이 넘볼 수 없었던 강력한 우리 한민족(삼한인)들이 지배하고 있었다는 것을 증명해주는 것입니다.  고조선이 멸망하고 난 뒤 고조선 유민들이 한반도 이남으로 내려와 나라를 세웠다???  고조선의 강역도를 보면 고조선의 영토는 정말 광대했습니다. 그렇게 강력했던 고조선이 건국할 때부터, 멸망할 때까지 그 긴 세월동안 단 한번도 지배하지 못했을 만큼 강력했던 한반도 이남지역이, 고조선이 멸망하고 난뒤 허겁지겁 보따리 싸서 쫒겨온 일부 고조선 유민들에 의해 지배되었다는 것은 이치에도 맞지 않으며 사실이 아닙니다.  북방이민족이 세운 고조선, 고구려, 발해가 멸망할 때마다, 우리 한민족은 그들 북방민족들 일부를 받아주었습니다.  그러나 우리 한민족은 그들 북방이민족들과 융화될 수 없었습니다. 우리 조상들은 발해 멸망 이후, 천년 동안 발해를 우리 역사로 여기지 않았습니다.(발해를 우리 역사로 쓰기 시작한 것은 조선 후기 유득공 때부터입니다) 즉, 우리 조상들은 고구려와 발해를 한민족이 아니라, 북방이민족으로 보았던 것입니다.  통일신라시대, 고려시대, 조선시대를 거치면서, 한반도 이남지역의 우리 한민족들은 한반도 이북지역의 북방 이민족들을 차별하고 멸시해왔습니다. 우리 한민족은 오랜 시간을 거치면서 한반도 이북의 북방 이민족들은 조정에 출사도 못하게 만들었고, 그들 북방이민족들을 한반도 이남의 한민족과 철저하게 분리하여 차별해왔습니다. 그래서 한반도 이북지역의 북방 이민족들은 한반도 이남의 한민족으로부터 분리 독립하고자 무수한 반란을 일으키기도 했습니다.  일례로 조선시대의 벼슬아치나 관리들 중에 한반도 이북지역 출신은 거의 없습니다.  오늘날까지도 이러한 경향은 이어져서, 우리 한반도 이남의 한민족(한국사람)은 한반도 이북지역의 북방 이민족(북한사람)을 차별하고 멸시하고 있습니다.  국경을 접하고 있고, 같은 언어를 쓰고 있고, 피부색이 같다고 것이 같은 민족이라는 근거가 될 수는 없습니다.  이란과 이라크의 예를 들면, 이란인과 이라크인은 피부색도 같고, 이란과 이라크도 남북한과 마찬가지로 국경을 맞대고 있고, 같은 언어인 아랍어를 쓰고 있습니다. (그들의 언어가 이란어, 이라크어로 따로 불리고 있지만 서로 의사소통이 가능합니다. 남북한의 방언 차이 정도로 이해하면 될 것입니다)  그러나 이란은 페르시아문명의 발상지이고, 이라크는 바빌로니아문명의 발상지입니다. 즉, 그들은 피가 다르고 뿌리가 다른 민족들입니다. 그래서 수천년 동안 오늘날까지도 서로 싸우고 있는 것입니다.  남북한도 마찬가지입니다. 고구려, 발해가 멸망한 이후 북방민족 일부가 한반도 이북지역에서 한민족이 세운 나라에 속해서 살기는 했지만 천년이 넘도록 서로 섞이지 못하고 오늘날까지도 서로 싸우고 있는 것입니다.  남과 북은 민족성이 확연히 다릅니다.  남한의 민족성은 삼한인(신라)들의 민족성을 계승했기 때문에, 강대국에 굽히고 강대국과 교류하며 살아가는 민족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북한의 민족성은 북방민족의 민족성을 계승했기 때문에, 강대국에 굽힐줄 모르고 강대국과 대립하며 살아가는 민족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당나라에 굽히고 당나라와 교류하여 번영을 누렸던 삼한인(신라)의 민족성이 오늘날 미국에 굽히고 미국과 교류하며 살아가고 있는 한국인들의 민족성으로 나타나는 것이며,  당나라에 굽히지 않고, 당나라와 대립하여 결국 나라를 멸망에까지 이르게 했던 북방이민족(고구려)의 민족성이 오늘날 미국에 굽히지 않고, 미국과 대립하여 결국 나라를 멸망 일보직전에 놓이게 만든 북한인들의 민족성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역사는 속일 수가 있어도, 피는 속일 수가 없습니다.  흔히들 한민족이 고구려와 발해 유민을 받아주었다고 해서, 우리가 고구려와 발해의 역사를 계승했다고 주장을 하는 데 이 또한 전혀 근거 없는 이야기 입니다.  고구려와 발해유민들은 중국으로 더 많이 갔습니다.  또한 백제 멸망 이후, 백제의 지배계층들과 백제 유민들 상당수가 일본으로 건너갔습니다.  지배계층이나 유민들을 받아주었기 때문에 그 나라의 역사를 계승할 수 있다는 논리라면, 일본이 백제의 역사를 계승하는 것도 가능한 것입니다.  또한 고려가 고구려를 계승했다고 하는 것도, 전혀 근거 없는 이야기입니다.  국호를 고려라 했다하여, 고려가 고구려를 계승했다는 논리는 역사적으로 근거 없는 이야기입니다.  미국에 있는 뉴 잉글랜드(New England)가 잉글랜드라는 명칭을 사용한다고 하여, 영국(England)을 계승할 수는 없습니다.  근대에 들어, 유럽인들은 동양을 탐험하면서 동양의 정보를 삽화로 그려 유럽사회에 퍼뜨렸습니다. (당시에는 사진기가 없었으므로)  이중에는 조선에 대한 삽화도 있었는데, 삽화에 나온 조선인은 중국인이나 동남아인의 복장을 하고 있습니다.  즉, 서양인들의 눈에는 동양인들은 다 그놈이 그놈인 것처럼 보였던 겁니다.  오늘날에도 한국이 어디에 붙어있는 줄도 모르고, 한국인을 보면 중국인이나 일본인으로 아는 서양인들이 많습니다.  또한 오늘날 서양에는 심지어 한반도를 중국영토나 일본영토로 표시해 놓은 지도도 많이 있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당시의 중국인과 외국인의 눈에는 만리장성 동쪽에 있는 사람들은 다 고구려인으로 보였던 겁니다. 그래서, 중국인들과 외국인들은 우리 한민족을 고구려(COREA, KOREA)인으로 착각하여 불렀던 것입니다. (마치 오늘날에도 외국인들이 한국인을 일본인이나 중국인으로 착각하여 부르는 것처럼)  확실한 사례로는, 신라왕족 출신인 궁예가 고구려를 계승한다며 후고구려를 건국한 것을 들 수 있습니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고구려의 피가 단 한방울도 섞이지 않은 신라왕족이 어떻게 고구려를 계승할 수 있을까요? 말이 안되는 것이지요. 궁예도 찔리는 것이 있었는지 국호를 곧, 마진, 태봉으로 바꿉니다.  궁예는 신라왕족 출신으로 신라왕실의 버림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궁예는 신라에 대한 병적인 증오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궁예는 자신이 고구려를 계승할 수 없는 신라왕족 출신이면서도, 신라의 가장 큰 적이었으며 신라가 가장 두려워했던 고구려를 계승한다고 표면적으로 내세웠던 것입니다.  고려를 건국한 왕건은 그러한 궁예의 신하였으며, 신라의 호족 출신입니다.  궁예의 신하였던 왕건 또한 궁예와 마찬가지로 신라를 멸망시키고 새로운 국가를 건국하기 위해서, 신라의 가장 큰 적이었던 고구려라는 명분이 필요했던 것 뿐이지, 실제로 고려가 고구려를 계승한 것은 아닙니다. 즉, 왕건 자신이 고구려를 계승할 자격이 안되는 신라 호족 출신이지만, 신라를 부정하고 새로운 국가를 건국하기 위해서는 왕건 자신 부터 신라인의 후예가 아닌 고구려의 후예라고 내세울 필요가 있었던 것입니다. 즉, 만일 왕건이 고구려인의 후예라고 자처하지 않았다면, 과거 고구려의 연개소문이 꼭두각시 보장왕을 앞에 내세우고 막후에서 통치할 수 밖에 없었던 것처럼, 왕건은 꼭두각시 신라왕을 앞에 내세우고, 신라라는 국가를 유지한 채로 막후에서 통치할 수 밖에 없는 상황에 직면했던 것입니다. 왕건이 고구려가 아닌 백제의 후예라고 자처할 수도 있었겠지만, 이미 왕건이 제거한 견훤이 백제의 후예임을 먼저 자처했기 때문에 왕건은 백제의 후예를 자처할 수는 없었습니다.  이와 유사한 사례로는 중화민국을 건국한 손문의 예가 있습니다.  손문은 만주족이 세운 청나라를 멸망시키고 중화민국을 건국하면서 멸만흥한(滅滿興漢)을 내세웠습니다. 즉, 어떤 식으로든 만주족이 세운 청나라를 부정해야만 만주족이 세운 청나라를 멸망시킬 대의명분을 내세울 수 있는 것입니다. 만주족이 세운 청나라를 부정하고 새로운 국가를 건국할 유일한 명분은 만주족의 적이었던 한족을 전면에 내세우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신라를 부정하고 새로운 국가를 건국할 유일한 명분은 신라의 적이었던 고구려를 전면에 내세우는 것입니다.  만일 손문이 멸만흥한(滅滿興漢)을 내세우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우선 청나라의 종묘사직을 접을 명분이 없습니다. 청나라의 마지막 황제인 부이에게서 황제의 자리를 박탈할 명분이 없습니다. 즉, 손문이 할 수 있는 일은 부패한 청나라를 개혁해서 깨끗한 청나라를 만드는 일 뿐입니다. 그래서 만주족이 중국인들이고 만주족의 역사가 중국의 역사임에도 불구하고, 만주족을 멸하고 한족을 부흥시킨다는 극약처방을 내릴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고려도 마찬가지입니다.  (통일)신라는 국가의 일반적인 평균수명을 훨씬 넘어 천년이나 지속된 왕국입니다. 그래서 신라말기에는 극심한 부패현상과 말기현상이 나타났던 것입니다. 한마디로 백살 넘게 산 노인이 치매에 걸려 죽지도 않고 벽에 똥칠을 하며 살아있었던 겁니다.  만일 왕건이 고구려를 내세우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우선 벽에 똥칠하고 있는 신라의 종묘사직을 접을 명분이 없습니다. 신라의 경순왕에게서 왕의 자리를 박탈할 명분이 없습니다. 즉, 왕건이 할 수 있는 일은 부패한 신라를 개혁해서 깨끗한 신라를 만드는 일 뿐입니다. 그래서 신라인들이 한민족이고 신라의 역사가 한민족의 역사이고, 고구려인들이 북방이민족이고 고구려의 역사가 북방이민족의 역사임에도 불구하고, 신라가 아닌 고구려를 내세우는 극약처방을 내릴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따라서, 실제로 고려가 고구려를 계승했다는 것은 전혀 근거없는 이야기입니다.  조선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성계도 고려왕조를 부정해야만 했습니다.  고려가 나라 이름만 고려였지, 실상은 북방이민족이 세운 고구려와는 관계없고, 한반도 이남 삼한의 한민족이 세운 나라라는 것을 당시의 고려인들은 모두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성계는 자신이 대대로 한반도 이남 전주지역에서 뿌리내린 골수 한민족인 전주 이씨임에도 불구하고, 고조선을 계승한다며 나라 이름을 조선이라 지은 것입니다. 고구려를 계승한다는 뻥은 이미 고려가 써먹었으므로, 이성계는 고구려 이전의 고조선을 계승한다는 뻥을 쳤던 것입니다.  그러나 고려시대와 조선시대를 걸친 이러한 뻥의 부작용은 의외로 심각했습니다.  울며 겨자 먹기로 한민족의 정서와 맞지 않는 북방이민족이 세운 국가를 계승한다고 뻥을 치고, 고구려와 발해 멸망 이후, 일부 북방이민족과 함께 흘러 들어온 북방이민족의 기질(일명 고구려병(高句麗病)) 때문에 한민족은 심한 병을 앓았고 피고름을 짜내며 병을 치유해야만 했습니다.  고려시대에는 고구려병이 든 묘청이라는 작자가 우리 한민족의 정서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북벌을 운운하면서 우리 한민족을 위험에 빠뜨렸습니다. 김부식을 비롯한 우리 한민족은 가까스로 묘청의 난을 성공적으로 진압하고, 관련된 인물들과 그 삼족을 멸함으로써 1차로 북방민족(고구려인)들의 씨를 말렸습니다.  고려시대 말기에는 고구려병이 든 최영 등의 작자들이 또다시 우리 한민족의 정서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북벌을 운운하면서 우리 한민족을 위험에 빠뜨렸습니다. 이성계를 비롯한 우리 한민족은 위화도 회군으로 가까스로 최영 등의 북벌을 성공적으로 진압하고, 관련된 인물들과 그 삼족을 멸함으로써 2차로 북방민족(고구려인)들의 씨를 말렸습니다.  이로써 우리 한민족은 고구려병을 치유하고, 원래의 한민족의 기질을 되찾아 명나라를 섬기면서 임진왜란 이전까지 200년 태평성대를 누릴 수 있었던 것이고, 임진왜란 때에는 명나라의 도움을 받아 가까스로 나라를 멸망의 위기에서 구해낼 수 있었던 것입니다.  조선말기에 접어들면서 외세의 침탈이 극심해지자 조선의 마지막 왕이었던 고종은 고려, 조선 양 시대를 이어온 뻥의 한계를 깨닫고, 조선이라는 국호를 버려버리고 원래 우리 한민족의 정통성을 되찾는 의미로 대한제국(大韓帝國)을 건국했던 것입니다.  한반도 이북의 북방민족들은 북방이민족들의 기질과 맞지 않는, 남쪽의 한민족 따위에게나 어울리는 사대주의가 튀어나올 때마다, 그들의 핏줄 속에 흐르는 백혈구(민족성)가, 침투한 세균(사대주의)을 제거하는 방향으로 자연스럽게 흘러가는 것이고,(예 : 영류왕의 사대정책에 반발한 연개소문의 쿠데타)  한반도 이남의 한민족들은 한민족의 기질과 맞지 않는, 북쪽의 북방이민족 따위에게나 어울리는 북벌이 튀어나올 때마다, 우리의 핏줄 속에 흐르는 백혈구(민족성)가, 침투한 세균(북벌)을 제거하는 방향으로 자연스럽게 흘러가는 것입니다.(예 : 묘청, 최영 등의 북벌을 진압)  즉,‘조선 역사상 일천년 안에 제일 큰 사건’이 일어났었다는 사실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우리 한민족은 ‘조선 역사상 일천년 안에 제일 큰 사건’을 성공적으로 진압했다는 사실이 중요한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한반도 이남에서 이미 오래전에 뿌리뽑힌 줄로만 알았던 고구려병이 다시 만연하고 있습니다.  북방이민족의 역사인 고구려, 발해의 드라마가 판을 치고, 우리 한민족을 위협하고 있는 북방민족이 세운 고구려와 북한을 옹호하고 그들과 합치려는 불순한 분위기가 곳곳에서 감지되고 있습니다.  역사는 이상이 아닌 현실을 기반으로 해석되어져야 하는 것이며, 현실은 언제나 달콤한 것만은 아닙니다. 
63    고구려어 댓글:  조회:494  추천:0  2021-03-29
  뜻 고구려어 돌궐어족 몽골어 고대 일본어 현대 일본어 백제어 신라어 중세 국어 현대 한국어 퉁구스어 여진어 만주어 예빈키어 君主 kʌi 가이/ kai개(皆) kai-sɐ가이사 개차(皆次) qaγan(可汗) kagan kaγan(可汗) ki1mi1("king, emperor, monarch") kimi("you") ka(瑕) kisi(吉支) nirimɯ(君) kan(干) kɯm(今) kahan kɯi긔(王) nim kɯm nim kɯm *** *** han *** 善射 jumong,chumo 주몽(朱蒙,鄒牟) *** jəmə("noted bow"), Jobe-Mergen tomo("shooter's tool") tomo("friend, follower") tama("excellent,important,soul") tuma("tip") tomoe(emblem of tomo) tomo- tama tsume("nail,claw") *** *** *** *** *** *** jolin-manga , julil-muəl(卓琳莽阿) *** 金 so(蘇) 소 sol 솔,소시(召尸, silver) *** *** *** *** so (所) so 素 ("gold") *** sö("metal") söh 쇳 *** *** sele("iron") šun("sun") sigūn("sun") 鉛 nəi- 내  납, miuət/namer (乃勿) 내물,나물 *** *** namari namari *** *** *namɔr nap/납 *** *** *** *** 復舊土 ta mul 타물,다물 (多勿) *** *** tabi (度:time; whenever) tabi/tambi tamlo *** *** taɕi ("again") tø- ("re-") tam *** *** tabu-(to divide,to tear) *** 北(背後) je제 (提) jwat절(絶) 椽那部,提那部,絶奴部,後部 arka("back") hoina (布里亚特语huainə) utara umara tʃe("back") se("back,height") *** *** tuih tui ("back, behind") xama *** amargi amasi("back") *** 南(前方) kuan관(灌) (灌奴部) kuzey,Ön(front) *** kaɸo("face") kan-(予:"pre-") kao("look, face") kana-(叶:to serve,to get one's wish) 久知下(kujiha) *** *** kət("surface, look") *** *** julergi *** 東(左) źwən전,sun순 (順), (順奴部)순노부 doğu,sol(left) źeü , źegün a-dʒuma/a-duma("east") azuma 得安(dɯkan) *** *** ön("left") sae("east") źun *** dergi jun jəgin("left") 西(右) yən연 (涓), 연노부(涓奴部) batı ürüne , barun yo-(善:"good") ya-(否:"no,foul") yo-/i-("good,correct,suitable,agreeable") iya/ya-(disagreeable) *** *** *** orɯn("right") parɯn("right") hanɯi(west) xangid *** wargi anŋū(right) 石 *** taš cilaɣu(n) (古蒙古语) culuu (喀尔喀蒙古) šuluu(n) (布里亚特语) isi ishi turak(珍惡) *** tōlh tōl *** *** tahan("steppingstones") *** 巖,峴,岑 pa파-・ιəi,pua-・ιəi*pàI,pa'i /pua-斤ei,*paxe 파의, 파희,바위 巴衣,波衣,波兮 *** *** iɸa / iɸaɸo (probably unrelated) iwao ("great rock, bedrock") *** *** pahoy(巖)巴衣,바회 pawi pax(石・崖) (尼夫赫语) *** wehe *** 土地 no 노  내 内/奴~弩/惱 nori 노리 奴閭 *** ńurū nu/no(野"land") no no nu¨~nu¨ri/nε (世) *** nuri na (土地) na na(土地),noro(-n) *** 國 (nua) > na / no 나라 내,나,노,뇌,內,那,奴,惱 ra라(羅) ili ulus(* kolci/ko-ts‘ii (忽次/古次/串) *** 훌츠qurc(喀尔喀蒙古)("skewer, spit" 串) kutu~kuti/kuti < *kutui kuchi *** *** koj 곶 ("skewer, spit; promontory" 串) kulrε (Jeju dialect) kul (South Jeolla dialect) *** *** *** *** 進入 ・ιi/*i (伊) *** ire- 来 ir- 进入 ir- *** *** ip(口)/ip(門戸) ir-(to arrive; to come) ip i-(入) *** ibe-("to get foward") *** 新 ʃιəu/*sü 首수 *** *** zu("new, present, developing,a gleam") suga-("fresh") suga-suga-s- *** say say (새) sɛ *** iche ice *** 牛 ʃιəu/*sü 首수,소 *** *** usi ushi *** *** ʃyo/쇼 so *** *** eje("castrated cow") *** 豬 o-sie/o-s^i¨ʌŋ 烏斯/烏生오스,오샹 *doŋuz > domuz *** usi ("ox; cattle") wi ("swine") *** *tɕo-nʲi (猪耳) *** totʰ 돝 twɛːji, toyaji(dialect), tochi(dialect) *** *** ulgiyan("pig") ulha("domestic animal") *** 鹿 kosya고스야,구스야 (古斯也) *** *** kuzika shika *** *** *** korani 고라니 ("Manchurian elk") kōrɛŋi, korɛi (Gyeongsang dialect) *** *** kandahan ("a kind of deer") *** 馬 *** *** mori~muri uma~muma uma *** *** mʌl/(馬) mal mori (Nanai) *** morin *** 斧 ・ιo-sie , nərə-si (於斯) *** *** wono2 ono *** *** *odzgɔy (烏子蓋) ("ax") nɔlh 날ㅎ ("blade") nal (칼)날 ("blade") nas ("sickle; scythe") tōkki ("ax") *** *** anjikū ("hatchet") *** 廣 nərə-si, ə-si, (於斯) *** osy/esy 阿斯(寬大:gererous, tolerant) nalai naras-u("roll,to level off") os-u("transcend, surpass") e-si("right,wide,noble,enough") naras-u("to level off") os-u("to transcend, to press, to push") *** *** 어위 (< *어쉬) nəlbɯn 넓은 nəlb nərɯn *** očo 我撮(寬) ončo(廣:wast) *** 翼 nərəgi əji(於支) *älig > el ("hand") *** tadamgi(arm) atʃi(foot,walk,rain,money) ashi *** *** nʌlgɛ narɛ, nalgɛ 날개 *** *** asχa *** 横 ・ιo-sie/*es (於斯) *** *** yo2ko2(横)/yo2k-(避) yoko/yokeru *** *** əs/엇 əs *** *** *** *** 谷 tan/tuən/t‘ən (旦,頓,呑) *** *** tani tani *** *** tʌn~tuʌn("village", 村) *** *** *** *** *** 榖 niəŋ-biuʌt 仍伐녕벌 *** *** ina-ɸo("ear of rice") mi2("fruit, seed, grain") nebar-("stickiness of rice") inaho nebar- *** *** pyə("rice plant; unhulled rice") nuy("grains of unhulled rice amongst hulled rice") *** *** *** *** 粗 kuət-・ιəi (骨衣)골희 굴희 *** *** kata-("tough,firm") katai("tough,stiff") *** ka¨cʰɔ¨l kəcʰɯl- (荒) kəchil- kud- *** *** kata-("to become hard, to become rough") *** 耕 ka-ʃιi가시 (加尸) 갈시 kerci-("to cut, to dig trenches") *** kar-("to plow") kar- *** *** karai(木[木+欠]・鍬, kal-(plow) kal(刀) kal- gerbe-("break, snap") (Nanai) *** halhan(犂先)/halhan~halgan(犂[金+華]) gerbe-("break, snap") 邊 ka-(・a) (加阿)가.아 kera *** ha("edge, blade")kari("edge") ha kari *** *** kʌs kā *** *** kaja-("to cut") huwesi-("cutter, small blade") *** 圓 toŋ-pιuəi (冬非)동비,  *** *** tubura(丸)/maro(丸:"round") tsubura *** *** tuŋgɯl-(圓) tuŋgɯl-(圓} *** *** torho-("to roll,to circle") *** 丸 anʃi, 안시anʒip,ɣwando 안십,완도(安市,安十,丸都) *** ənduhə (达斡尔语) azi("reason,value") aji(taste) *** *** *** al 알 (x)elū- *** umhan muheren elū 足 tor 돌(廻) *** *** tar-(足る:"enough,last,to reach") tarir- *** *** tʌri tari 다리 *** *** juru(numeral for something pair up) *** 毛 tʰjʌr 탈,털(鐵) *** *** *** *** *** *** tʌri tʰʌr 털 *** *** *** *** 重 biar/bιεt (別) 별 *** *** ɸe *** *** *** pʌl *** *** *** fe("ex-, past, former") *** 松 pιu-sie부세,부스 부소/pιu-so (扶蘇/扶蘇) *** *** matu matsu bu(扶,負) so(蘇) *** sol(松)/pos(樺) sol,sonamu,so *** *** bahiya("pine cone") *** 深 bιuk-sie/puk (伏斯)복세,복스,푹 폭 *** *** ɸuka-si/puka- fuka- *** *** kiph u·n kiph- puk ("deeply") *** *** *** *** 狌 yia-ʃιi (也尸) 야시 *** *** itatʃi(weasel) itachi(weasel) *** *** yezï ~ yezɣ- ("fox") yəu ("fox") 여시yəsi(dialect) *** *** *** *** 隣 ιi-bιuʌt (伊伐)이벌 *** *** iɸa("residences") iɸa-udo/iɸa-ɸito("family,genealogy") iɸawi/iɸewi("domiciles,houses") i-ba-sho("one's whereabouts" sho is a loan word) *** *** *** iut (隣) *** *** imiya-("to gather togather") *** 霜 sat 살  (薩) *** *** sai, see, zai, zae (dialectal Japanese words for "icicle" or "ice on the branches of trees or on the surface of a body of water") *** *** *** səri səri *** *** juhe *** 菁 ka-tʃιe가세 (加支)가지  *** *** kati/katʃin(brown/lush),katute(in the past) katʃte *** *** *** kəch-(蕪) kis- ("lush, overgrown with weeds, overrun with plants") *** *** *** *** 鵠 ko-・ιəi고레이,고의,고니 (古衣) qoγu *** kukuɸi1~kubi1("swan") kukui/kugui("swan") *** *** kohay kon koni *** *** gaha("bird, raven") gasha("big bird") *** 群落 ul 울,우시(于尸) uruk ("clan") ulus ("people, nation, tribe, horde") udi ("clan, family; the standing of one's family, the social status of one's family, lineage, birth; surname") uchi("me, home, family") *** *** ul("relations; relatives; kinsfolk; clan") uri ("we, us; the Korean people, Koreans") *** *** *** urse ("people") uce("entrance") *** 牙 kʌi-ʃιi가이시,개시 (皆尸) *** *** ki1 ("fang; tusk") *** *** *** *** *** *** *** *** *** 平 pii-lιεt비렬 (比烈)비례 biri *** ɸi1ra-(比良:flat,level) taira("flat") hirata- taira *** *** *** pʌl *** *** ba("field, district") pile-("to confirm, to criticize") tehere-("to flat, to be equal") *** 母親 ya chi야츠 (也次)야차,야치 Ana *** ɸaɸa("mother")/oya("parent") haha, oya *** *** 어ᅀᅵ əzi 어미əmi 아매,에마 ame,ema(north dialect) *** eniyen a ja *** 嬰兒 gιəu-sie / kus / kyus (仇斯)구스 koto(儿子,匈奴語) kız (女孩、女儿) O'gul *** ko1 (子) kodomo *** *** *** koma(童) koma-(小-) *** omo jui("kid") kuŋa ("child") 熊 komok고목 (功木) *** *** kuma kuma koma *** kom kōm *** *** *** *** 兔 u-sie-həm우세험 우스함오사함 투시커머,툿이  (烏斯含) tawïsγan *** usagi1 / wosagi1 usagi *** *** thos-gi 톳기 tho-ggi 토끼 *** *** *** *** 見面 pʌk/*pak (伯) 박 bak-("to see, to look; to find") *** mak-(設:"to obtain,to prepare,to make") ɸak-(別:"to see, to know,to understand")>*wakar- ɸakar-(諮・計:"to consult,to talk, to obtain") mōker- wakar- hakar- *** *** poizʌp- ("to humbly show oneself, to meet (an honored person)") po-("to see, to look")/ poyp-("to have an audience with, to meet (an honored person)") pak *** baka- ("to look for, to seek, to search") baha-("to get, to obtain") baka-("to find") 難 ma 마 (馬) *** *** ma- ("truely, really") ma- *** *** modir- mōjir- ("harsh; severe; cruel") *** manga(難:hard) maŋga(堅、難"hard") maŋa 心/胸 kιo-sιi겨시,겨시 (居尸)거시 göğüs kökün ko2ko2ro2("heart")/koro("oneself") kokoro *** *** *** kogäŋi (核心)/ kasʰɯm (胸、心) *** *** huhun (乳、乳房) *** 韮 mai-tʃιi마이시 (買尸)매시 *** maŋgirsun(野蒜) mi1ra(韮) nira ("garlic chives") *** *** manʌl (蒜) manɯl *** *** maca ("garlic chives") *** 根 tsʌm잠 (斬) *** *** tukene("root,knot,joint") tʃukene *** pul?(根) pulhuy(根) ppuri tʃamγ(根株) (尼夫赫语) *** da *** 文 kɯl/kιən-ʃιi 글 근시 (斤尸) *** *** kak-(to write) kuk-/*kurum-(to collect, to form,to bind) ko2to2("word, speech, language") kak- kukur-/kurum- koto *** *** kɯl kɯl *** herse hergen *** 玉 ko-ʃie고스 구스 구셰,구슬(古斯) *** gas kusiro2("bracelet") kushiro *** *** kusɯl ("jewel") kusɯl *** γun gu *** 孔 dzei〈tsei〉-ts‘ii 斉次/濟次 *** *** tʃuk-(透), tʃuki(隙) suki ("chink, gap, vulnerable point") *** *** *** t’ul-(透), tɯm(隙)*** *** *** *** *** 穴 kap,kap-pii 甲,甲比 qapca("gorge, ravine"), qapi¨γ("Gate") *** kaɸi1 ("gorge, strait, narrow valley") kubomi *** *** *** kul (穴) *** *** *** *** 三 mir, mil (密) siet/s^ïei (悉/史) bis(5) gurav mi1 mi *** mil sei/səih 셋 sʰet̚ *** ilan ilan *** 五 ütsi,uci,üc, uca,uchha (于次,弓次) üç(3) tabun itu itsu *** *** tasul (打戌) tasət 닷 tah dügün sunja sunja *** 七 nan-・ιən, nanən,nanun, nanin (難隠) Yeti *** nana nana *** *** (n)ìlgɯp(一急) (n)ìlgúp nadan nadan nadan *** 十 tək,duk (德) on toquz(9) arav to2/to2wo tō- *** *** *** 열 yəl(10) 온on(100) 즈믄chɯmun(1000) juwa juwan juwan ʒuwan 黑 *kəmər, kəmhək (今勿) Qara *** kuro1 kuro *** *** kəm-/검- 검 kʌm *** *** kara *** 白 nə γei ʃιi-lap (奈兮 / 尸臘) Aq *** sira(白) shiro *** *** hʌy-(白) hʌy- hin hayan *** *** šara-("to become white") šeyen("white") šanggiyan("white") *** 紅 s^a-bιuk s^a-pιuəi-kιən sa(i)puk, sa(i)pikon sapi 沙伏, 沙非斤 Qyzyl *hulaɣan > ulaan so2ɸ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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