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은 찬란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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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아버지는 술주정 중 댓글:  조회:285  추천:0  2018-08-11
아버지는 술주정 중                                       김택만   우리 마을에서는 해마다 추석이면 소를 잡았었다.래일은 추석이라 오늘은 소를 잡는 날이다. 아침부터 온 마을이 기쁨으로 들떠있었다.어제부터  어느 소를 잡는다고 입소문이 돌고 있었다. 아버지도 좋아하시고 어머니도 기뻐하시고 나도  기분이 동동 떠있었다. 아버지는 아침 일찍부터 숫돌에 식칼을 시퍼렇게 갈고 계셨다. 어머니는 소고기를 담아 올 함지부터 씻느라 분주하시고 나는 구수한 고기 생각에 잠겨있었다.그 당시 생산대에서는 추석에 소를 년말 총결과 음력설이면 돼지를 잡았으니 일년가도 고기를 몇번 먹어 못본 시절이였다. “오늘 술을 많이 마시지 맙소!” 아침식사를 하면서 어머니는 아버지에게 신신당부를 하였다. “알았어,” 아버지는 그냥 심드렁하게 대답하셨다.그러면서 칼를 들고 강변으로 걸어가셨다. 나도 아버지의  뒤모습을 보면서 제발 술을 많이 마시지 말았으면 하고 빌어보았다. 마을 강가의 풀숲은 도살장인 셈이다. 어른들은 소를 잡아놓자마자 술병을 돌리며 술을 마셨다. 콩팥이나 췌장같은 것은 불에 구워 안주로 했다. 간도 날것으로 소금에 찍어서는 입에 넣군하였다. 경사가 난것처럼 구경하는 우리 조무래기에게도 고기 한점씩 입에 넣어주고 오줌개(방광)에 바람을 넣어줬다. 그러면 그것을 뽈처럼 차고 다녔다. 어른들은 소고기를 다 나누어주고 나서 아무개네 집에 가서 또 술추렴을 하였다.아마 그 날은 동네 남정들이 모두가 술이 거나하게 마이는 날이기도 하였다.하긴 일년에 한번만 소를 잡는 날이니 경사가 따로 없었다. 우리 조무래기들은 마당에서 실컷 뛰여놀다가 배가 촐촐해나고 때가 되였다 싶으면 집으로  달음박질쳐갔다. 어느 집에서나 연기가 몰몰 솟아올랐다. 나도 고소한 고기 생각에 숨 가쁘게 달려가다가도 집에 거의 도착할 무렵이면  오리걸음을 했다.소나 돼지를 잡는 날이면 아버지가 취하는 날이기도 하였다. 난 아까 강변에서 아버지가 술 마시는 것 보았고 또 술추렴하는 집에 가시는 것도 보았기 때문이였다.아버지가 술에 취한 날이면 대부분는  어머니하고 싸우는 날이기도 하였다. 집앞까지 거의 왔는데 그릇이 깨지는 소리인지 유리가 깨지는 소리인지 와닥닥 와닥닥 어지럽게 들려왔다. 가슴이 콩콩 뛰고 한줌만 해졌다. 다행이 우리집이 아니라 앞집이였다.우리앞집 아버지는 소문난 술주정뱅이였는데 그 집에는 반반한 집그릇이 없다싶이  하였다. 집마당에 들어서니 아버지의 코 고는 소리가 들려왔다. 고기를 삶느라 불을 지폈기에 출입문도 창문도 활짝 열어 놓아서 고소한 고기냄새가 내 주린 창자를 자극했다. 어머니는 익은 고기를 썰어놓느라 여념이 없었다.불을 때여 고기를 삶느라 이마에는 땀이  흘려내렸다. 배가 고픈 것도 있겠지만 아버지가 깨여나시기 전에 빨리 먹어야 한다는 생각부터 앞었다. 일어나시면 어떤 일이 일어날지 알수 없기 때문이였다. 어머니가 퍼주는 소고기 국물에 볼이 미여지게 먹으면서 어머니의 낯색부터 살펴본다. 좀 굳어지고 프르딩딩하시면 좋은 일이 없는것이다. 어머니의 얼굴 색갈과 직결되여 있기때문이다. 나는 어머니의 낯색갈을 보고 십중팔구는 맞출수 있었다. 아버지의 술냄새와 어머니의 낯색갈을 살피는 것이 나의 본능으로 되였다.그냥 아버지가 깨여나지 말고 주무셨으면 좋으련만. 아버지가 술에 취한 날이면 참 싫었다.우리 집에서는 아버지기 술에 취했을 때가 아니라 아버지가 술을 깨신 다음 다툼이 일어났다. 그 다툼도 항상 어머니가 먼저 걸었고 잔소리를 많이하기 때문이였다. 간혹 밖에서 놀다가 집에 돌아오는데 혹 집안에서 다투면 나는 울바자밑에서 고개를 숙이고 앉아서 나무가지로 땅바닥에 그림을 그렸다. 병아리도 그려보고 강아지도 그려보고 나비도 그려보고 비둘기도 그려보고 구름도 그려보고 아담한 집도 그려봤다. 비가 내리면 마루에 쫑그리고 앉아 비를 피했다. 어미닭의 날개속으로 병아리들이 파고 들면 어미닭은 따스하게 품어준다. 사실 아버지의 술 주량은 적었다. 아버지가 13살때 할아버지가 돌아가시는 바람에 할머니하고 세 동생의 가장이 되였다. 추석날이면 아버지는 할아버지, 할머니의 무덤앞에서 “할아버지, 할머니께 나는 죄인이야, 자식으로서 효도를 못한 못난 놈이지!” 하면서 아주 침통해 하셨다.   1945년  17살에 해방군에 참군하여 연변의 삼도만토비숙청전부터 장춘전역,료심전역 그리고  장강을 뛰여넘어 남경해방전역도,해남도해방전역도 참가하시였다.1949년 조직의 명령으로 조선인민군에 편입되였고 1950조선전쟁에도 참가하고 그해 10월 전략후퇴시기에 전쟁포로가 되여 전쟁협정이 체결되고 포로교환으로 돌아올때까지3년동안 거제도포로수용소에서 보냈다. 그후 조직의 엄격한 조사를 받고 군에서 모든 직무를 해직당하고 고향시골에 돌아와 농군이 되였다.농짝에는 천으로 꽁꽁 싼 군공메달(해방전쟁군공 3개.인민군공훈메달 1개)이 4개를 깊숙히 넣어두고 있었지만 언제 한번 깨내보지도 않았고 더구나 달고 다니지도 않았다.(그 4개메달이 포로수용소를 거치며 어떻게 간직하여 왔는지 말씀하여 주시지 않아서 오늘까지도 모른다). 간혹 공사간부들이 찾아와서 조사를 할때면 그때 포로소용소에서 폭동사건으로 많는 포로들이 목슴을 잃었다는건만 귀동냥으로 들은적이 있다. 늘 실면하시고 명절이거나 전쟁기념일같은 날이면 더 우울해 하시였다. 해마다 음력설이 되면 마을에서는 참군하였거나 혁명렬사유가족집앞에 붉은꽃을 달아주었지만 우리집앞에는 붉은꽃을 달아준적이 없었다. 동네 남정들처럼 밭갈이 논갈이 등 힘든 일은 못하여서 늘 생산대에서 아낙네들과 함께 잡일을 하여 받는 공수도 항상 적었다.아낙네들 일하는 무리에는 아버지의 모습이 끼울때가 많았다.입쌀이 쎈 아낙네들로부터 놀림도 당하시였다.그 속에 있는 어머니의 마음도 편하지는 않았다. 아버지는 술을 크게 반가워하지는 않았지만 동네사람들과 마실 때면 권커니 작커니하며 잘 도 마시였다. 남들이 권하는 술을 사양하는 법이 없었다. 그리고 제일 먼저 쓰러지는 것도 아버지였다. 술좌석에서 남들과 다투는 일은 한 번도 없었고 주정을 부린 적도 없었다. 다른 분들은 술에 취해 얼굴을 잘 붉히며 다투어도 말이다. 아버지는 좀 취기가 오르면 “옹헤야!”를 잘 불렀고 구들에서 춤도 잘 추셨다.   옹헤야 옹헤야 어절시구 옹헤야 저절시구 옹헤야 올해 대풍들어 옹헤야 아들에겐 운동화 옹헤야 딸년에겐 색동저고리 옹헤야 네편네겐 분통 옹헤야   술판에서 언제나 “옹헤야”를 부르고 또한 잘 부르셔서 별명이 “옹헤야”가 되였다.  술이 과하다 하면 주정을 부리기 전에 그 자리에 쓰려져  주무셨다. 술에 취하면 어디든지 불문하고 아무 곳에나 쓰려져 주무셨다. 남들은 술기운에 광기를 부리지만 아버지는 그냥 쓰려졌다. 그러면 남정들이 아버지를 부축해서 오거나  가끔은 아버지가 쓰려져 주무시게 되면 동네분들이 와서 알리기도 하였다. 어디서 쓰려져 잔다고. 그러면 어머니와 나는 녹초가 된 아버지를 겨우 모셔다 집에 눕혔다. 그날은 아버지와 어머니가 다투는 날이기도하였다.그때 난 술을 증오하였고 나 어른이 되면 술을 안마일것이라고 맹세도 하였다.  아버지가 취해서 들려오게 되면 술을 깬 후 어머니가 싸움을 건다.농사일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주제에 술에 취해 쓰러져 자는 꼴을 참 보기 싫어하시였다.어머니의 눈에는 남정으로 보이지않았었다. 싸움은 언제나 어머니의 승리로 끝났다. 아버지는 집을 나가거나 아무 말 없이 앉아 계셨다. 아버지는 어머니보다  8년 년상이신데 어머니가 20살에 시집을 왔었다. “이 병신아, 그렇게 꼬꾸라질 때까지 술을 퍼먹어? 동네가 창피해서 어디 살겠나?” 어머니의 넉두리와 욕설에 참고 계시던 아버지가 욱하고 다투셨다. 말씀이 적고 착한 아버지가,동네 그 누구하고도 다투지않는 아버지가 어쩌다 흥분하면 성난 소처럼 크게 싸우는것인데 식장아니면 유리창이 깨질때가 있었다. 어머니에게 손찌검을 하려는 아버지의 팔을 내가 잡았다. 예전에도 아버지가 어머니를 때려서 어머니의 얼굴이 퍼렇게 멍든 적이 있었다. 울면서 팔을 잡아 당겼다. 허름한 아버지의 속옷 어깨부위가 그만 찢어졌다. 난 더 서럽게 울었고 눈물이 마구 쏟아졌다. 아버지의 옷을 찢어놓은 죄가 무서워서가 아니라 찢어진 팔에서 흉물스러운 크나큰 흉터를 보았기때문이다. 전쟁터에서 파편에 맞은 흉터이였다. 불편해하시는 아버지의 손, 그 아픈 손을 내가 더 아프게 했는지도 모른다. 그 흉터는 아버지의 자존심이였다. 아버지가 그토록 외롭고 불쌍해보였다. 아버지는 돌아서서 두툼하고 껄껄한 손으로 나의 눈물을 닦아주었다. 그때 아버지의 눈가에 맺힌 눈물을 보았다. “아부지도 남자임더” 하고 나는 속으로 말하고 있었다. 아버지는 돌아서서 아무 말 없이 집을 나가셨다. 아마 집뒤 느릅나무아래에 앉아 계시리라. 그후 아버지는 술을 드시지 않았고 간혹 술을 드셔도 조금만 드셨고 쓰려져 자는 일도 없었다. 될수록 술자리를 많이 피하셨다. 그러시다가 일찍이 간암으로 세상을 떠나셨다. 나는 력사책를 즐거본다.그 중에서도 해방전쟁과 조선전쟁에 관한 책을 많이 본다.혹 텔레비죤이나 책에서 그 당시 전쟁에 참여하였던 분들의 사적을 볼때면 저 속에도 아버지도 있었겠지하는 나름대로 생각을 하여본다.포로라는 그늘에 모든 공로가 파묻혀있었다. 농짝 깊숙히 있던 군공메달이 한번도 빛을 보지못했었다. 옛날 남들은 술상에서 전쟁터에서의 말들을 많이 하지만 아버지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었다.가끔 어린 나하테는 술을 드시후면 조금씩는 하였다.전쟁터에서 보다 포로수용소에서 더 많은 사람이 죽었다고. 그리고 … 허약한 몸과 불편한 손으로 농사일을 하면서,자그막한 술잔의 포로에서 , 마귀처럼 따라다니는  그 그림자에서 뛰쳐나오기 싶어 몸부림쳤을지도 모른다. 어머니도 나도 그리고 많는 사람들이 그것을 알려고도 하지않고 외면한것인지도 모른다. 오늘도 나는 친구들과 함께 술을 마셨다. 그리고는 푹~ 잠이 들었다. 달콤한 꿈속에서 아버지는 술을 드시고 “옹헤야”를 성수나게 부르시며 너울너울 학춤을 추신다. 그러다가 그릇을 깨고 창문을 깨신다. 그리고는 아주 기뻐하신다. 속이 시원하고 거뿐한가 보다. 아버지는 오늘도 술주정 중이시다. 
23    시작이 절반 댓글:  조회:382  추천:0  2018-01-26
                                                                         시작이 절반                                                                                               김택만         시작이 절반이라고 합니다.그래서 나는 필을 들고 글을 쓰기 시작했습니다.시작이 절반이란데 하며 필을 들면 절반인줄로 알았습니다.필을 들어 글을 쓰기 시작하면 그렇게 예쁜 글들이 슬슬 나오는 줄로 알았고 얼음우에 표주박이 미끝듯이, 소나기가 쏟아지듯이, 글이 물처럼 흘려 나오는 줄로만 알았습니다.누에 고치가 고운 비단실을 뽑듯이 아름다운 글들이 비단실처럼 나오는 줄로만 알았습니다.시작해서 몇년후이면 노벨문학상은 아니더라도 대상은 몇개쯤은 받는줄로만 알았고 명작은 아니더라도 수많은 사람들에게 감동과 사랑와 행복을 주는 작품이 슬슬 나오는줄로만 알았습니다.독자들로부터 피가 터지는듯한 박수갈채를 받는줄로만 알았고 나의 이름이 금빛이 되여 유명세를 타는줄로만 알았습니다.그렇게 몇년동안 쓴 글들이 시 십여수,단편소설 하나,수필 몇편,가사 하나 노래로 되여 발표되였을 뿐입니다.나의 글이 작품이 되여 나올 때면 하늘을 동동 날는 듯한 기분이 였습니다.아직도 나의 글은 절반도 안되는 시작일뿐입니다.    시작이 절반이라고 합니다.그래서 걸음마를 한걸음 두 걸음 떼였고 인생길의 절반은 걸은 줄로만 알았습니다.갓 시작한 동년은 참으로 즐거웠고 행복해었고 아름다웠습니다.(걱정하고,슬퍼하고,괴로워하고,탄식하고,번민하고)잡념도 없고 부담도 없고 근심걱정이 무엇인지 몰라서 참 좋았습니다.마냥 망아지처럼 뛰여놀는 것뿐이고 배고프면 밥을 먹고 그냥 누워 쿨쿨 자면 그만이였고 참 좋았습니다. 7살 때 다른 애들이 다 학교에 붙으니 나도 학교에 다니고 싶었습니다.그것이 그토록 부러웠습니다.부모님과 마을의 학교선생한테 떼질 쓰며 억지로 학교에 입학했습니다.갓 입학하니 그때는 날것만 같았습니다.그렇게 모두가 힘들다는 공부를 시작해서,시작하면 절반인줄로 알았는데 자그만치 18년을 했습니다.소학교 3학년까지는 반장이고 3호학생이여서 상장도 받았습니다만 그후 부터 선생님과의 불화로 공부는 뒤전이였습니다.선생님으로부터 욕도 줄기차게 얻어 먹기도 하고 벌도 많이 받았습니다.선생님이 싫어서 녀자선생님이 울정도로 애도 많이 먹이고 한하기의 절반은 뺑소리 쳐 상학도 하지 않고 어중이떠중이들고 함께 빈둥빈둥 놀기만 하였습니다.소학교 졸업은 물론 중학교 1학년까지 모든 학과 성적은 락제였습니다.X+Y=Z방정식이 무엇인지도 몰랐습니다.중학교시절에 무리 싸움에도 가담해 싸움한적도 있고 자작총도 만들어 책가방에 넣고 다녔습니다.술도 먹고 담배도 피우기도하며 어른들의 흉내를 내였습니다.마을의 닭을 도적해 먹다 발각되여 도피 생활도 했습니다..부모님들의 눈물도 선생님의 타이름도 나미아불타불이였습니다.희망도 전도도 없는 아주 몹쓸 아이로 사춘기를 시작하였습니다.그때 행운이라면 그래도 온동네에 한부밖에 없는 연변일보만은 하루도 빠짐없이 읽었습니다.그러던 중학교 2학년으로 진학하던 시기,이래서는 안되겠는데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그래서 1학년에 재학하였습니다.그때부터 공부에 열중하고 공부를 다시 시작하게 되였습니다.시작이 절반인지 그때부터 성적은 학급에서 앞자리를 찾지하였고 현성 중점고중도 무난히 진학을 하였습니다. 전현 물리시험에서 1등도 하였습니다.17살,어린나이에 이불짐을 메고 기숙사의 생활을 시작하였습니다.그렇게 시작한 숙사생활이 고중,대학을 걸치며 11년을 하였습니다.17살 그때부터 한 방에 남자애들 8명과 같이 어울러 살아가는 것을 배워가기 시작하였습니다.때론 화기애애하고 때론 다투기도 하면서 공동체의 생활을 ,그것은 사회성 생활의 시작이였습니다.사유와 공유를 조금씩 알았고 남들을 사랑하고 도와주고 아껴줘야함도 알아갔습니다.배고픔도 견더함을 알고 집처럼 배가 고프면 아무때나 먹을수 있는것이 아니고 내가 하고 싶은대로 할수 있는것이 아님을 알았고 나눠 먹어야하는것고 알았습니다.남들을 사랑하고 도와주고 아껴주고 남들을 존경하고 공정과 정의가 무엇인가와 독립적 능력도 조금씩 알아갔습니다.대학을 졸업하면서도 인생의 모든것을 아는것처럼 생각했고 남들보다 우월감을 가졌고 부모님들의 타이름도 “아는게 뭔데?”그냥 귀에 흘려보냈고 그것이 인생이 시작인줄을 몰랐습니다.썩 후날에야 부모님도 나보다는 아는게 있네하고 뉘우치기도 했습니다.          시작이 절반이라 합니다.그래서 사랑을 속삭였고 사랑을 시작하였습니다.사랑은 달콤하고 행복한줄로만 알았고 언제까지나 사랑이 뜨겁고 로맨스한줄로만 알았고 곧 결혼되는줄로만 알았습니다.학창시절 이름모를 소녀로부터 편지를 받고 가슴이 튀여날올듯 설레인적도 있었고 나를 좋아하며 항상 나만 수줍게 바라보는 한 소녀의 눈길을 받을 때 그리고 그 소녀의 눈길과 마주치면 웬지 저도 모르게 낯이 붉어짐을 느낀적도 있었습니다.좋아함의 야릇한 감정도 느껴보았습니다.사랑의 황홀함도 알았고 사랑이란 죽을만큼 마음이 고통스러운것임도 알았고 그렇게 달콤한 사랑도,아픈 사랑도 해보았습니다.숙명으로 아름다운 인연을 만나 결혼하였습다. 결혼하고 가정을 이루면 모든것이 행복하고 아름답고 향기로운 꽃밭에서 사는 줄로만 알았습니다.웃음이 찰찰 노래도 랑랑 나오는줄로 알았습니다.갓 결혼하고 세집살이 하면서 가난도 알았고 설음도 알았습니다.안해가 해산하고 예쁜 딸을 안고 무한한 감동과 행복을 느꼈습니다.어느날 호주머니에 두부 한모를 살돈밖에 없었을때 절만과 무능을 절감했고 집에서 맛나는 음식을 사들고 오나 기다릴 안해의 모습을 생각하며 거리가에 주저앉아 속으로 울면서 한 녀자의 남편으로 한 아이의 아버지로서 책임의 무거움를 느꼈습니다.남과 살를 섞으며 살면서 티걱티걱 다투기도 하였습니다.서로에 대한 배려와 리해과 아낌이 필요함을 알았습니다.손을 맛잡고 살아온것이 20여년, 아직 절반도 못 왔습니다.       아이를 낳으면 절반으로 키운줄로 알았고 저절로 쑥쑥 자라는 줄로 알았습니다.아이가 학교에 입학해서부터 학습성적에 근심해야 했고 인생의 도리,자립능력도 배워줘야 했고 대학에 붙지 못할가, 좋은 대학에 진학했으면 하는 부모의 욕망,모든면에서 1등하기를 바라는 부모의 허영심도 있었습니다.대학을 졸업하고 지금은 연구생공부를 하고 있지만 또 박사공부를 하기를 은근히 바라는 부모의 허영심,앞으로 좋은 직장을 근심하는 어떻게 살아갈가 근심하는 부모의 로파심도 있습니다.기실 자식으로 자신의 삶을 자신절로 잘 하고 있으면서도 자식을 믿지 못하는 부모들의 마음인가 봅니다.아직 절반도 못 키웠다고 생각되는 자식 ,영원히 키워야하는 자식ㅡ부모의 마음인가봅니다.      사랑의 달콤함도 가정의 귀중함도 자식의 소중함도 부모의 거룩함도 알았습니다.백세시대인 지금,몇십년을 살아와도 절반밖에 살아오지 못했습니다.절반밖에 살아오지 못한 인생,지금이 인생의 시작인가 봅니다 시작이 절반이다,시작은 시작일뿐 절반은 아닌것같습니다.참으로 아름다운 거짓말입니다.
22    못난 돌의 빈자리 댓글:  조회:1132  추천:0  2017-04-22
                                                                    못난 돌의 빈자리                                                                    김택만         여름날의 어느 오후,석양빛속에서 연변대학 뒤산의 숲속길을 걷고 있는데 고향에 계시는 어머니한테서 전화가 걸려왔다.      “류봉석을 알지?      언뜩 떠오르지 않았다.     “거..우리앞집에 살던 봉석이 말이다”     “아,예…”     “봉석의 아버지 류서기가 풍 맞았어,그래서 내일 너를 찾아갈거야.연길에 도착할무렴 너한테 전화할거니까 역에 마중 나가거라”       “예,알겠습니다”       그전에도 고향사람들이 내가 의사라고 잘 찾아온 적이 있었다.       봉석이네와 우리는 앞뒤집에서 살았다.그런데도 아버지와 어머니는  봉석이네 집에 마실을 간 적이 한번도 없었다.다만 일년에 두세번 봉석의 아버지나 어머니가 우리 집에 놀러 왔을뿐이다.혹시 맛나는 음식이 생기면 어머니는 그릇에 담아 나에게 주면서 앞집에 가져다주라고 하였다.그래서 나는 봉석이네 집에 몇번 가보았다. 봉석이네는 사냥개를 길렀는데 꽤나 사나웠다.(봉석 아버지가 사냥을 좋아해서 사냥총도 있었음).내가 다가가면 왕~왕~ 짖어댔는데 너무 무서워 머리카락이 쭈삣이 곤두섰다. 그리고 집안에서 퀴퀴한 냄새가 지독하게 났는데 땀냄새인지 발똥냄새인지 아니면 썩장냄새인지 코를 찔렸다.          봉석 아버지의 이름은 지금까지도 모른다.그냥 “류서기”로 통했다. 마을 어른들이 그렇게 부르니 우리 조무래기들도 따라서그렇게 불렀다.봉석 아버지는 신문도 읽을줄 몰르는 까막눈이였지만 정치를 어찌나 잘 론하는지 빈하중농대표도 울고 갈 정도였다.그래서인지 ‘문화대혁명’때 투쟁이나 비판을 받지않았다.아마 정치를 입에 달고 살아서 ‘류서기’라는 별명이 붙지 않았나 싶다.텁수룩한 수염, 희뿌연 머리카락 그리고 채양 있는 모자를 항상 옆으로 삐딱하게 쓰고 다녔는데 오른쪽 태양혈에 어릴때 불에 덴 흉터자국이 있었다.그것을 가리우느라 머리를 항상 오른쪽으로 비스듬히 빗어넘겼고 신은 언제나 뒤축을 꺾어 끌신으로 만들어 신고 다녔다.        봉석의 아버지가 술에 취해 공소부(공급판매합작사)마당에 나타나면 우리 조무래기들은 좋다서 란리였다. 멋진 구경거리가 생기기 때문이였다.       공소부는 대대사무실, 위생소, 로인독보실, 청년활동실과 함께 같은 벽돌집을 사용하였다. 그 옆에는 “ㄴ”자형으로 된 담배건조실이 두채 있었다. 앞마당은 운동장이였는데 꽤나 넓어 대대운동회도 영화도 거기서 상영했다.또 동네애들이 망아지처럼 뛰여노는 장소이기도 했다.       공소부와 담배건조실 사이에 몇십년 되는 느티나무가 두 그루 있었는데  가지가 무성하여 여름이면 선선한 그늘을 만들어주었다. 그곳은그 동네의 휴식터였고 어른들의 모여 한담하거나 술추렴을 하는 장소이기도 했다. 봉석의 아버지는 외상으로 술을 받아놓고 마당에서 뛰여노는 조무래기들에게 소리쳤다.       “얘들아, 거 마늘 뽑아오거라”      그러면 우리는 마당 옆에 있는 강가의  채소밭에 가서 마늘을 한움큼 뽑아서 내물에 훌훌 씻어 가져다 드렸다. 그 마늘밭이 누구네 것인든 상관없었다.가끔 거기에 우리아버지도 끼이군 했다.       봉석의 아버지은 쯥쯜한 미역 한 쪼각과 풋마늘을 안주로 술 얼큰히 마시고는 동네어른들과 큰 소리로 떠들어대다가 뜬금없이 노래를 부르군 했다.우리 조무래기들이 우르르 쓸어가서 빙 둘려서면 봉석 아버지는 더욱 신이 나했다.누런 이발에서 입냄새가 나고 침방울이 튕겼지만 우리조무래기들은 개이치 않고 재미있어 키득키득 웃었다. 봉석의 아버지는 엉덩이까지 축 처져내려온 허술한 바지의 가랭이를 무름까지 걷어올리고 맨발으로 춤을 추었다.   옹헤야 어절씨구 옹헤야 저절씨구 옹헤야 잘도 논다 옹헤야 철뚝넘어 옹헤야 메추리란놈이 옹헤야 보리밭에 옹헤야 알을낳네 옹헤야 두리둥실 옹헤야 밝은달이 옹헤야 휘영청 옹헤야 높이떴네 옹헤야         손바닥을 짝짝 마주치며 흥이 나서 타령에 맞춰 허리춤,엉덩이춤,닭춤을 추었는데 그 모양이 우습기 짝이 없었다.그리고 손으로 아래입술을 잡고 휘파람도 불고 참새소리,앵무새소리도 흉내냈는데 아주 청아하고 높았다. 때로는가락을 폈다굽혔다하며 일본어로 “이찌니산시고로…”하고또 로어로“빠쓰까드또끼…”하면서 아라비아수자를 외웠다.그러다가도 “바가야로” “또쯔께끼” “우라우라”를 웨쳐댔다.       어쩌면 저렇게 우리말, 일본말, 로씨아말을 잘 할수 있을가 부러워했다.언젠가 궁금해서 아버지한테 “저 봉석의 아부지는 어느 학교를 졸업했기에 외국말을 저렇게 말합두? ”라고  물어보았다.하지만 말수가 적은 아버지는 대답대신 담배만 피웠다.       봉석의 아버지는 아프다는 핑계로 생산대의 집체로동에 별로 참가하지 않고 집에서 술만 마시는 술주정뱅이였다. 그래도 생산대의 일에 적극 나설 때가 가끔 있었는데 바로 소나 돼지를 잡을 때였다.그런 날이면 시퍼렇게 날이 선 식칼과 도끼을 들고 동네의 도살장격인 운동장 옆 강가 풀숲으로 제일 먼저 나와있었다.동네에서 소나 돼지의 목줄에 칼을 박는 사람은 언제나 봉석의 아버지였다.        소도 도살당할 걸 아는지 퉁방울같은 눈을 뜨부럭뜨부럭 굴리 뿐 음메~하는 영각소리도 내지 않았다.다만 느침을 질질 흘리며 헉헉 입김만 내뿜고 있었다.소의 도살과정은 그다지 번거롭지 않았다.먼저 소의 네 발목에 바줄을 걸고 앞뒤에서 량쪽 방향으로 잡아당기긴다.그러면 다리가 한데 모여진 소가 평형을 잃는데 그때 한 사람이 다가가서 소의 오른쪽 옆구리를 밀어 왼쪽으로 넘어뜨리면 옆으로 벌렁 번져졌다.소는 왼쪽으로 넘어지면 다리만 허우적거릴 뿐 자기절로 일어나지 못하는 단점을 갖고 있다. 소가 널부러지면 사람들이 욱 달려들어 소를 깔고 네 다리를 바줄로 꽁꽁 묶었다. 그 다음 식칼로 목줄기에서 대동맥을 찾아 찌르면 흉심에서 빨간 피가 샘처럼 흘러나온다.        피는 큰 대야로 받았다.봉석의 아버지는 손으로 따끈따끈한 피를 훌훌 들이켰다.        “거 맛 참 좋다”        손이며 입이며 온통 피로 얼룩졌지만 개의치 않았다.        소의 가죽을 벗기는 것도 봉석의 아버지의 몫이였다.사냥꾼의 솜씨는 남달랐다.        소을 잡을 때만큼은 대장노릇을 하였다.모두가 그의 지휘에 따랐으니 말이다.소의 내장을 들어내기 시작하면 벌써 어른들은 울대뼈가 꿈틀댔고 우리 조무래기들도 입안에서 군침이 돌았다.        “에라,술충이 올라와 못 참겠다,”        술병을 먼저 잡는것도 봉석의 아버지였다.벌렁벌렁 들이키고는 간을 날것으로 칼로 쑥 베여서는 소금에 푹 찍어 먹었다.그때부터 가담가담 술을 마셔가면서 일했다.       “이봐,거 술을 그렇게 랭수를 들이키듯 먹으면 어쩌나?”       “아따 씨팔,목젖이 방아을 찧어대는데 어쩌겠나?애 젖을 빨듯 하겠나?”       “그러게 말이오,그렇게 들이키면 우리 먹을게 없잖소?       “씨팔,먼저 먹는게 임자지 무’       봉석의 아버지는 누가 뭐라하든 개의치않고 술을 쭉~쭉 들이켰다. 소의 내장을 다 들어내고 나면 콩팥과 취장은 버들나무가지에 꿰여서 장작불에 구웠다.우리 조무래기들은 빨리 구워지기를 눈이 까매서 기다렸다.콩팥과 취장이 익으면 우리에게도 한점씩 나눠준준다는것을 알고 있었기때문이였다.봉석의 아버지는 콩팥과 취장이 노랗게 구워지자 한점씩 베여 소금에 찍어서 애들의 입어 넣어주었다.마치 어미새가 새끼에게 먹이를 먹여주듯이.우리 조무래기들이 그보다 더 애타게 기다리는것이 또 있었는데 바로 오줌깨(방광)였다.봉석의 아버지는 오줌깨의 끄터머리에 입을 대고 훅 불어서 뽈처럼 크게 만들어주었다.그러면 우리조무래기들은 “우야-!”하고 웨치면서 뽈처럼 차고 다녔다.그런 날에는 너무 많이 뛰여다녀 밤중에 자다가 이불에 지도를 그려놓군 하였다.        봉석의 아버지는 동네애들하고도 잘 놀아주었다.얼음강판에서 쪽발구도 같이 타고 공치기도 같이 하였다.또 강변의 자갈우에 마른 나무가지를 주어다 놓고 모닥불을 지펴주기도 하였다.우리는 모닥불가에 빙 둘려앉아 봉석의 아버지의 구수한 이야기를 들었다.선생님의 강의보다 더 재미 있었는데 너무 우스워서 깔깔거리며 배꼽이 빠지도록 웃었다.        봉석네 집 앞뒤마당에는 자두나무, 살구나무, 앵두나무등 여러가지 과일나무가 참 많았다. 늦여름, 과일이 무르익어 갈 무렵이면 봉석이네 뒤울안의 과일나무 가지가 울바자를 타고우리 집 앞채소밭에 넘어와 있었다.나는 탐스러운 그 과일이 먹고 싶어  살금살금 다가갔다.그런데  키가 모자랐다.에라,모르겠다.먹다 죽은 귀신을 때깔도 곱다고 나는 바자를 타고 올라갔다. 사실 봉석이네와 우리 집 사이의 거리가 지척이여서 마당에 나가면 앞집에서 방귀 뀌는 소리도 다 들렸다.       “거긴 왜 올라가?다리 부러지려구!”       나는 그만 봉석의 아버지한테 들키고 말았다.내가 올라가지도 못하고 내려가지도 못해 어정쩡하게 울바자에 매달려 있으면 “얼른 내려 못 와?”하고 호통치며 몽둥이를 들고 달려왔다.평소에도 주정뱅이인 봉석의 아버지를 많이 무서워한 나는 겁이 나서 다리가 후들후들 떨려다.내가 울바자에서 멋적게 내려오면 봉석의 아버지는 몽둥이로 우리집 쪽으로 넘어온 과일나무가지를 툭 툭 쳤다.        “그 건 너네거다.먹어”        그러고는 뒤집을 지고 집으로 들어가버렸다.나는 신나게 주어 먹고도 모자라 옷섶에 가득 담기까지 하였다. 봉석의 아버지는 사냥도 좋아했다.어느해 겨울, 봉석의 아버지는 산을 타고 한정없이 가다 나니 웃마을의 뒤산에까지 이르렀다. 까만 돼지가 산에서 먹이를 찾고 있었는데 살집이 아주 좋았다.봉석이 아버지는 살금살금 돼지 가까이에 다가가 총을 겨누었다.돼지는 먹이를 찾는데만  열중하다 나니 방어에는 예민한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땅!드디여 방아쇠를 당겼다.명중이였다. 총알을 맞은 돼지는 쓰러지지 않고 마을쪽을 향해 줄행랑을 놓았다.봉석의 아버지는 메돼지를 잡았다고 좋아서 그 뒤를 쫓아갔다. 그 당시 시골에서는 겨울이면 돼지를 우리에 가두지 않고 방생하였다.겨울에 좁은 우리에 가두어 놓으면 돼지가 추위에 시달려 살이 찌지 않아지만 방생하면 곡식을 거둬들인 밭에서 자기절로 먹이를 찾아 먹을수 있었던것이다.헌데 봉석의 아버저의 총에 맞은 돼지는 메돼지가 아니라 새끼를 밴 집돼지였다.돼지값을 보상해줄 돈이 없어 할수없이 돼지임자한테  집에서 기르던 돼지를 갖다주고 마무리 지었다. ”산돼지 잡으러 갔다가 집돼지를 잃는다”고 결국 봉석의 아버지가 그 꼴이 되고 말았다. 하지만 그 후에도 봉석의 아버지는 여전히 총을 메고 사냥을 다녔다.       “메돼지 잡으려가니 집돼지 잡으려 가니?”       “메돼지인가 집돼지인가 물어보고 총을 쏴라”       “이번에는 사람을 잡겠다.”        그런 봉석의 아버지를 이렇게 놀려댔다.        봉석 어머니는 키가 작달막하고 감실감실했다. 일자무식이라 돈 계산은 물론 돈의 액수도 모르는 녀자였다.    그리하여 도회지에 남새같은 걸 팔려가면 동네아낙네들의 뒤를 졸졸 따라 다녔다. 물건을 팔고사는것은  옆에서 다 계산해 주었다.얼마를 벌었는지도 몰랐다.그래서 봉석의 아버지가 두부 썰썰이가 날때마다  “래일이 내 생일이오”하면 콩을 갈아 두부를 앗군 했다. 아무튼 봉석의 아버지는 일년에 생일 몇번 쇠였는지 모른다. 한번은 봉석 아버지가 술을 마시고 동네아낙네들과 앉아서 잡담을 하였는데 그만 찢어진 바지틈사이로 남자의 거시기가 빠금히 나왔다. 넉살 좋은 아낙네들한테 한바탕 놀림을 당했지만 봉석의 아버지는 아무렇지도 않은듯 “걔도 답답해 바람을 쏘일러 나온 모양이요”하고 능청을 떨었다.하여 아낙네들은 마을길에서 봉석의 아버지를 만나면“바람 쏘일러 나왔슴두?”하고 놀려주었다. 그때부터 봉석 아버지는 팬티를 안 입고 다닌다는 소문이 났다. 그 넉살 좋은 아낙네들 정희라는 녀인도 있었다.바로 봉석이네 옆집 아줌마였다.그녀는 타향에서 시집을 왔는데 남편이 고자였다.그래서 결혼한지 십년이 되도록  아이가 없었다.정희는 키도 크고 몸도 실팍하고 엉덩이도 펑펑짐하고 성격도 시원시원했다.       요즘 봉석의 아버지는 낫을 들고 뒤산 골짜기로 뻔질나게 다녔다.그 뒤로 사냥개가 따랐다. 어느날,나는 산딸기를 따려  뒤산 골짜기로 올라가었다.산언덕을 오르는데 봉석이네 사냥개가 난데없이 나무숲 속에서 꼬리 저으며 달려나왔다.      ”엉?봉석이네 개가 왜 여기 있지?별 일이네…”      나는 궁금해서 개의 뒤를 따라 숲속으로 들어갔다.아!나무그늘 아래에 봉석의 아버지와 정희아줌마가 나란히 누워있었다. 옷은 벗어서 깔았는데 두 사람 다 알몸이였다.나는 무더위에 옷을 모두 벗어나 보다하고 생각하였다헌데 봉석의 아버지는 거친 손이 정희아줌아의 하얗고 큰 젖무덤을 만지고 있었다.여자의 몸은 참 예뻤다.어린 나이에 여자의 몸을 처음 훔쳐봤고 또 이성지간의 정사도 목격하였다.야릇하고 신기해서 심정이 콩콩 뛰였다.문득 인기척에 고개를 든 봉석의 아버지하고 눈길이 딱 마주쳤다. 정희아줌마는 당황해서 얼른 옷으로 몸을 기리우며 어쩔바를 몰라했다.나는 그만 조용히 돌아섰다.이런 일을 아버지, 어머니하고 말을 할수도 없었다.그렇게 비밀이 되여 지금까지 지켜왔다.       언제가부터 정희아줌아는 배가 좀씩 아파나고 토하기 시직했다.입맛도 없다면서 밥도 먹지를 못했다.도회지 병원에 몇번 다녀오더니 병도 치료하고 보약도 쓰겠면서 타곳에 있는 친정집으로 떠나갔다.정희아줌아는 근 일년만에 다시 돌아왔는데 태여난지 서너달 되는 여자애를 품에 안고 있었다.말로는 양딸을 입양했다고 했다.근데 정희의 젖통이 해산을 한 녀자처럼  사발만큼 부풀고 녀자애도 입양한 남의 자식치고는 “양엄마”를 많이 닮았었다.그 여자애를 봉석의 아버지가 남달리 고와했다.아마 자기 자식보다 더 고와하는것 같았다.동네의 군일에 갔다가도 사탕을 호주머니에 넣어가지고 와서 쥐여주군했다.        그러던 어느 날,고사리를 캐러 갔던 정희아줌마가 손잡이뜨락또르를 타고 오다가 사고로 허리를 크게 다쳐  운신이 힘들게 되였다.봉석의 아버지가 들락거리는 차수가 많아질수록 정희아줌아네 부부간의 싸움도 잦아졌다.때로는 우리집까지 다투는 소리가 들려왔다.나중에 부부가 리혼하였는데 정희아줌마는 애를 데리고 친정집으로 가버렸다.정희아줌아가 떠나는 날,마을사람들이 바래주었다.배웅하러 나온 사람들속에는 봉석의 아버지도 있었는데 두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고여있었다.그날 술에 취한 봉석의 아버지는 여느때와 달리 주정을 부리지 않고 조용히 집으로 들어갔다.        후에 봉석이네는 마을의 제일 뒤쪽 작은 언덕우에 새집을 짓고 이사를 갔다.집주위에 자두나무 살구나무등 과일나무를 가득 심었는데 채소를 심을 땅도 남기지 않고 창문앞까지 점하였다.집 주위에 울바자를 둘려 세우지 않아 닭과 개들이 자유로이 드나드는 곳이 였고 여름더위를 피해 가는 곳이기도 하였다.바람도 자유롭게 드나들었다.봄이면 꽃이 만개하여 집이 마치 꽃속에 들어 앉은것 같았다.몇년이 지나자 과일나무숲에 가리워 아예 집이 잘 보이지 않았다..무더운 여름날이면 과일나무  그늘아래에 돗자리를 펴놓고 낮잠을 자는 봉석의 아버지를 자주 볼수 있었다.언제부터인가 하모니카 소리도 들려왔다.그다지 잘 불지는 못했지만 어딘가 구슬픔이 묻어있었다. 봉석네는4형제였는데 그 어느 누구도 중학교을 졸업하지 못했다.        봉석이는 나보다 한살 더 많았지만 나와 한 반을 다녔다.그는 공부를 못해 늘 같은 또래의 애들한테 따돌림을 당했다.하지만 나보다 키는 한 뽐이나 더 커서 주먹으로나 힘으로 나는 그의 상대가 못되였다. 소학교 2학년 여름 방학이였다. 문득 봉석이가 자기네 집에 아버지가 마시다가 남은 술이 있다고 했다. 어른들이 마시는 술이 도대체 무슨 맛인지 궁금했던 차라 우리는 술을 마져보기로 했다. 봉석이가 집에 가서 집의 술을 훔쳐오고 나와 경수는 자기 집 터밭에서 오이며 도마도며 마늘이며를 가득 가져왔다. 마침 닭우리에 들어가니 닭알도 두알 있었다. 우리 셋은 술과 안주를 챙겨가지고 강변으로 달려갔다. 동네형들이 하는것을 본따서 닭알에 진흙을 두텁게 발라 모래에 살짝 파묻었다.그리고는 마른 나무가지를 주어다가 그우에 불을 피웠다.        닭알이 익기를 기다리는 사이 우리는 강물에 풍덩풍덩 뛰여들어가 미역을 감았다.한참 물속에서 노닐다가 나와서 불 꺼진 모래를 파헤치고 진흙속의 닭알을 꺼내보니 신통히도 잘 익었다. 우리 셋은 알몸뚱이로 빙 둘려 앉아 어른들이 하는식대로너한모금 내 한 모금씩 병나발을 불었다.        “이보게, 빨랑빨랑 들라우”        “쭉~쭉~ 마이우”        “거 술 맛 좋구만”        “요럴 때 류서기(봉석이 아버지)가 있었으면 영 좋겠다이”        “킥~킥~”        훔쳐온 초담배도 한대씩 물고 연기를 푸푸 뽑아댔다. 술맛이 그렇게 달콤하지않고 쓴것임을 처음 알았다. 얼마간 마시니 머리가 뗑해났다. 우리 셋은 뜨거운 모래우에서 널부러져 얼마나 오래 잤는지 몰랐다. 청개구리가 사타구니의 알쪽을 물어도, 메새가 알쪽을 부리로 쪼아대도 모르고 정신없이 잤다. 깨여나니  해가 이미 서쪽으로 기울고 땅거미가 지기 시작하였다.우리의 몸뚱이는 해빛에 감실감실하게 그을었다. 그 일로 봉석의 아버지한테 욕을 먹을가봐 두려워했는데 오히러 허허 웃었다.         “술맛이 어떻더냐?술 먹으니 좋더니?털도 안 난 빨간 놈들이 벌써부터 술을 쳐먹고,못된 자식들!,술이란 말이야,좆이 발가진 다음 먹는거여”         그후 나는 외지에 가 고중을 다니고 대학을 다니게 되면서 오래동안 봉석네를 보지 못했다. 가끔 풍문으로 소식을 들었을 뿐이였다. 봉석의 어머니가 돌아간 이듬해에 정희아줌마가 딸을 데리고 고향마을에 다시 나타났다. 그리고 얼마전에 돌아간 고자남편의 묘지에도 갔다 왔는데 그날 봉석 아버지는 또 취했었다고 한다. 이것은 오랜전의 일이 아니였다…        이튿날, 나는 차를 가지고 역에 마중을 나갔다. 봉석의 아버지는 반신이 마비상태여서 운신이 힘들었다. ”택…택…” 하고 내 이름을 부른다는 것이 발음이 잘되지 않아 떠듬거렸지만 반가워서 한 손으로 내 손목을 꽉 잡았다. 그리고는 엄지 손가락을 치켜들었다. 반가움 때문였을가, 아니면 그 옛날 내가 정희아줌마와의 비밀을 지켜준 것에 대한 고마움 때문이였을가? 봉석의 아버지는 입은 삐뚤어졌지만 한줄기 미소를 띠고 있었다. 텁수룩한 수염 사이로 누런 이발을 드러내고 말이다.        어제 신경내과에 근무하는 동창생한테 부탁해놨더니 준비하고 기다리고 있었다. 앞뒤로 뛰여다니며 검사와 입원수속을 해드리고 나니 점심시간이 다되였다. 나는 신세를 졌다면서 식당으로 가자고 팔목을 잡아끄는 봉석이를 만류하고 돌아와 직장의 구내식당에서 혼자서 늦은 점심식사를 꾸역꾸역 하였다. 며칠후 봉석이가 찰옥수수쌀 한자루를  낑낑거리며 메고 왔다.       “옥수수죽을 해먹어, 맛 좋을 거야.”        봉석이는 이마에 돋은 땀을  훔치며 어눌하게 말했다.        나는 봉석이를 데리고 병실로 찾아갔다. 가는 도중에 구내상점에 들려 과일을 한 바구니 샀다. 그리고 꽃바구니도 샀다. 문득 예전에 봉석네 자두, 살구가 참 맛이 있었는데… 하는 생각이 들었다. 병실에 들어서는 순간 나는 그만 굳어지고 말았다.  나에게 가장 먼저 여자의 알몸을 보여 주었던 여자 – 정희아줌마가 와있었다. 그녀는 나를 보고 매우 반가와했다. 얼굴에 고된 세상살이 흔적이 남아있었다. 그녀는 지금 연길의 근교에 살고 있는데 외국에 가서 몇년 있었다고 한다. 봉석의 아버지는 머리결도 말끔하고 텁수룩하던 수염도 깨끗이 밀었다. 병실에는 생화향기가 풍겼다.  옛날 마당밭의 꽃향기를 그리워하는 것 같았다. 봉석의 아버지의 눈에서는 실날같은 정기가 돌았다.      나는 병실을 나오면서 병상에 누워있는 봉석의 아버지한테 작별인사를 하였다.      “치료를 잘 받고 얼른 일어납소. 건강을 되찾아서 반기던 술도 드셔야 합지.”       그러자 그는 고개를 끄떡이며 손가락으로 오케를 내밀었다. 봉석의 아버지는 웃고 있었다. 그 모습이 마치 백합꽃 같았다. 옛날에 술을 마이고 노래하면서 허리춤, 엉덩이춤, 닭춤을 훨훨 추던 봉석의 아버지를 보는 듯 했다. 문득 봉석의 아버지아 정희아줌마가 정을 나누었던 그 나무숲이 떠올랐다. 내 손목을 잡고 있는 봉석의 아버지 – 류서기도 옛날을 갈망하고 애원하고 있음을 읽을 수 있었다. 그런 날이 다시 올 수 있을는지? 그의 가냘픈 웃음 뒤에 숨겨진 게슴츠레한 눈빛에서 나는 분명히 엿보았다. 퇴색하기 싫어하는 희나리 같은 마음을…      어머니가 전화를 걸어왔다.      “요즘은 로인회관이 썰랑한 게 별나다. 그래도 류서기가 있을 때는 화투치기라도 해서 웃을 일이 많았었는데… 지금은 웃을 일이 없어. 재미 슬해…”  
21    가을 향기/김택만 댓글:  조회:493  추천:0  2017-03-17
가을 향기/김택만 꽃의 향기는 꽃잎에서 난다 가을 향기는 들에서 언덕에서 산에서 난다  바람에 날려 구름에 실려간다  그리고  하늘가에 노을 곱게 비껴놓는다 그 노을 빛에  나도 빨갛게 물든다
20    푸른 들에 가을이 온다/김택만 댓글:  조회:461  추천:0  2017-03-17
푸른 들에 가을이 온다/김택만  달콤한 햇빛 한껏 먹고  남실거리는  풀잎들과 벼와 옥수수 사이로 나는 바람인냥 걷는다 울바자 모퉁이에 외롭게  피여있는 할미꽃과 인사를 곱게하며  꿈속을 걷듯 걸어 간다  참새 제비아 반갑다  옛날 나하고 숨박곡질한던 너들이든가 할배가 만들어 준 보삽으로 아부지가 밭갈이하던 밭고랑  땡빛에 엄마가 기음 매던  논밭은 어디메오  아부지 쓰던 낫을 손에 쥐여다오 키 넘게 자란 풀들을 베겠소 향기로운 땀을 흘리고  흙이 이 옷에 흠뻑 묻게 하겠소  엄마 저 내가에 내옷을 빨아주오 이리저리 손목 시리도록  빨래방치로 두드러주오 그 소리에 맞춰  내가에서 첨벙첨벙 뛰여 놀리오  철수야 순희야  짜개바지 그대로 입고 나오라 하얀 저고리에 까만 치마 두른 까치가 떠난 자리에 까마귀들이 둥지를 틀고 나풀거린다 풀잎에 맺힌 이슬이  똑똑 떨어져 신발 적시고 옥수수는 옷섭을 잡고 노래를 불려달라고 애원한다 그 전 그 전날처럼, 다리맥 없어 걸을수가 없다  새파아란 어린 추억이 잠자리따라 가려고 발버둥친다  푸른 들에 가을이 오는가 
19    꽃의 맛/김택만 댓글:  조회:388  추천:0  2017-03-09
   꽃의 맛                   김택만  입술을 감빨면 신맛이 돈다 웃으며 한들한들  춤추는 꽃 , 가슴에 가득 넘치는 꽃향기 흔들릴수록 눈망울이 촉촉하다  꽃의 맛은 감미로운 맛인지 눈물만큼 짠맛인지  설레이는 가슴을 안고  마음으로 맛본다   향기가 가득한 꽃잎의 맛은 사랑의 입술을 빠는 맛 그것은 첫사랑의 짜릿하고 가슴 두근거리던 맛
18    그리움이 머문자리/김택만 댓글:  조회:330  추천:0  2017-03-09
그리움이 머문자리                    김택만 혼자 걸어요 우산 들고 빗속을, 비방울 하나하나가 사랑이 되여 그리움의 소리내며 우산에 살며시 내려앉아 아름다운 이야기를 들려줘요  사랑이 지나간 곳 그리움이 머문 자리 슬픈 비물에 젖어 하느작하느작 나무잎처럼 흘러갈가봐  우산으로 가려주며  붙잡고 놓지않니하려합니다  비가 몇번을 더 내리고 그런 계절이 몇번 더 바뀌고 비가 더는 내리지 않을 때면  웃으며 잊을수 있는데 사랑이 지나간 곳 그리움이 머문 자리를 (연변문학 2016년11월호)
17    집을 지으렵니다/김택만 댓글:  조회:426  추천:0  2017-03-09
집을 지으렵니다                  김택만 저 들판위에 아닌 당신의 아담한 가슴에 샘물이 흐르는 그 옆에 화려한 집을 지르렵니다 당신이 끊여준 커피를 마시며 마주치는 눈빛으로 등불을 밝히고 당신의 얼굴에서  남실남실 피여나는 장미꽃을 마당에 심으렵니다 저 산아래 아닌 나의 넓은 마음에 숲이 우거진 나무그늘에 예쁜 정자를 지으렵니다 내 무릅 베고 장미꽃 향기에 취해 쌔근쌔근 자다가 자다가 내 이름 부르는 당신의 잠꼬대소리가 음악되여 흐르게하렵니다 (2016년11월호 연변문학)
16    꽃송이같은 어머니 손목 잡고/김택만 댓글:  조회:1403  추천:0  2016-10-30
     (대상수상작)                   어제 밤에 눈이 내려 길은 상당히 미끄러웠다. 얼굴을 스치는 바람도 훨씬 차거웠고 거칠었다. 자가용을 몰고 역에 나가 시골에서 올라온 어머니를 마중해가지고  집앞에 있는 주차장에 도착했다. 주차창에서 집까지 가려면 몇십메터는 더 걸어야 했다. 나는 이렇게 춥고 미끄러운 날에 왜 부득부득 오시지요, 하고 어머니를 나무람하였고 어머니는 어머니대로 잔소리를 했다. 동네에서 있어던 일을 쉼없이 얘기하셨다. 2년전 겨울날, 어머니는 넘어지면서 손목을 크게 상해 고생한적 있었다. 그래서 나는 항상 눈이 내리는 날에는 마실을 나가지 말라고 신신당부했다. 허지만 어머니는 아침에 통화할 때만 해도 우리 집으로 온다는 말씀이 없었다. 그런데 이렇게 갑자기 올라오시니 나는 좀 당황하였다.  길은 좀 경사가 지기까지 해서 한결 더 미끄럽고 걷기가 불편했다. 앞에서 궁둥방아를 찧는 사람도 가끔 보였다. 나는 어머니의 손을 잡고 미끄러운 길을 조심스레 걸었다. 엎어지거나 넘어져서 상하면 큰 일이다.혹시라도 미끄러져 상하면 어쩌랴 한발작 한발작에 신경을 곤두세우고서 말이다. 나는 어머니의 손을 더욱 으스러지게 잡았다. 어머니의 손은 차겁고 꺼칠하고 나른했다. 옛날에는 봄날의 햇살마냥 참으로 따스하고 부드럽던 손이였다. 아무튼 어머니의 손을 얼마만에 잡아보는지 모르겠다. 어릴적에 어머님은 늘 내 손목을 잡고 걸었다. 지금은 기억이 한밤중처럼 아리숭하지만 어머니는 손으로 나에게 세수도 시켜주고 목욕도 시켜주고 밥도 먹여주고 빨래도 해주셨다. 내가 조금 철이 들었을 때다. 어두운 밤에 길을 걸을 때면 어머니의 손을 잡았고 어머니의 손을 잡으면 마음이 든든했다. 간혹 무서운 일을 당하면 마치 병아리가 어미닭의 품에 뛰여들듯이 나는 어머니의 손부터 잡았다. 그때 어머니의 손이 부드러웠던지, 거칠었던지, 따뜻했던지 지금은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저 어머니의 손을 잡으면 든든하고 무섭지 않았다. 지금까지 아버지의 손을 잡아본 기억은 없다. 그 손이 부드럽던지, 두툽하던지 더욱 모른다. 저 하늘나라에 가신지 벌써 25년이나 되는데 아무튼 아버지의 손을 잡은 기억은 없다. 어머니의 손은 약손이였다. 어릴 때 배가 아프다고 하면 어머니는 “엄마손은 약속이야”하면서 손으로 배를 살살 문질러주었다. 그러면 깜쪽같이 배가 홀가분해졌다. 또 머리가 아프다고 하면 어머니의 손으로 내 머리를 살살 긁어주었다. 그러면 아프던 머리도 거짓말처럼 아프지 않았다. 더러운 옷가지들도 어머니의 손을 거치면 깨끗하게 변했고, 음식도 어머니의 손을 거치면 그렇게 맛있을수가 없었다. 어머니의 손맛은 일품이였다. 어머니의 손은 천사의 손이였다. 가난하고 힘들었던 지난 세월에 어머니는 언제나 밝은 모습으로 더울세라 추울세라 나에게 따스한 손길을 보내주었다. 철없던 개구쟁이시절에 진종일 강변이며 산에 가서 놀다나니 옷은 진흙이 묻고 어지러워졌다. 이런 옷들을 어머니는 말없이 씻어주었고 기껏해야 “이 철딱서니가 없는 자식아!” 하고 내 엉덩이를 살짝 때려주었다. 옷이 헤여지면 깊은 밤에도 쉬지 않고 바늘로 한뜸한뜸 기워주었다. 소학교 졸업하는 해에 내가 너무 장난질만 하다보니 몽땅 낙제를 맞게 되였다. 엉엉 우는 내 얼굴의 눈물도 어머니는 두 손으로 닦아주었다. 그리고 어머니도 자신의 눈가에 맺힌 눈물을 손으로 닦는것을 나는 보았다. 내가 어릴적에 어머니는 세상에서 제일 멋있고 아름다왔다. 그런 어머니의 손을 잡지 않은것이 언제부터인지 잘 기억나지는 않는다. 아마도 내 스스로 철이 들었다고 느꼈을 때부터일것이다. 아무튼 사춘기를 맞으면서 나는 어머니의 손을 잡기는커녕 어머니가 묻는 말에도 동문서답으로 대꾸하기가 일수였다. 어머니의 손을 잡는것이 부끄럽고 유치하다고 생각했다. 현성에 있는 중학교 기숙사에 주숙하면서 한주일에 한번 꼴로 고향집에  내려갔는데 그 시간에 맞추어 어머니는 동구밖에서 기다렸다. 하지만 나는 어머니의 손을 잡을줄 몰랐다. 어머니도 구태여 내 손을 잡으려고 하지 않았다. 나는 나대로 어머니의 손을 잡고 걷는것이 어색하다 못해 나쁜놈처럼 여겨졌다. 시골에서는 봄이면 고사리도 캐고 민들레도 캤다. 어머니는 전화로 싱싱한 민들레를 많이 캐놓았으니 어서 가져가라고 했다. 거칠거칠한 손으로 한 뿌리, 두 뿌리 캔 민들레를 고추장에 찍어 먹으면 별미였고 그건 그야말로 밥도둑이였다. 어머니는 가을이면 감자며 옥수수며 고추며를 보내주었다. 지금 어머니의 손을 잡고있지만 모두다 이 거치른 손으로 지은 농산물들이였다. 이 힘없는 손으로 농사지은것이죠.내가 여러 잡지에 “어머니의 청춘”, “강물에 뜬 달”, “아버지 삶만큼 살고 싶다”와 같은 글을 내자 어머니는 잡지를 손에 꼭 받아쥐고 동네방네 다니며 자랑하였다. 안해와 련애하던 시절, 처음 그녀의 손을 잡았을 때 가슴이 뛰고 눈앞이 황홀하였다. 그녀의 손은 부드러웠고 따뜻했다. 나는 이 세상의 모든 사랑과 행복을 다 가진 느낌이였다. 지금도 우리 부부는 지천명의 나이를 넘었지만 공원의 꽃길이나 프르하통하 유보도를 걸을 때면, 또 영화관에 갈 때면 서로 두 손을 꼭 잡는다. 남 보란듯이 서로 손을 잡고 잘도 걷는다. 사랑하는 사람의 손을 잡고있는것은 응당한것이고 또 그래야 한다고 생각한다. 나는 또 고사리 같은 딸의 손을 잡고 걷기를 좋아한다. 어린이집에 갈 때나 공원을 산책하거나 강변의 유보도를 거닐 때, 온갖 재롱을 다 부리고 노래까지 부르는 딸의 모습을 볼 때면 얼마나 행복한지 모른다. 나는 고사리같은 딸애의 손을 꼭 잡아준다. 하지만 지금 80세 고령의 초췌한 어머니의 손을 잡고 걸어가는 내 이 거동은 다른 사람들의 눈에 어떻게 비추어질가? 이때까지 안해와 자식의 손만 많이 잡아주었다. 어머니의 손은 잡아보지 못한것이 새삼스럽게 미안하게 느껴진다. 이제부터라도 어머니의 손을 많이 잡아주어야 하게다. 다시 슬그머니 어머니의 손을 내려다보니 문득 빨간 메니큐어를 바른 어머니의 손톱이 얼른거린다. 난생 처음 보는 메니큐어를 바른 어머니의 손톱이다. 어머니이기 이전에 당신은 녀자라는것을 내가 왜 여태껏 모르고있었던가. 나는 무심한 자신이 미웠다. 어머니도 녀자이고 한송이 꽃이다. 그리고 어머니의 꽃다운 청춘을 도둑질한 놈이 바로 내다. 좋은 세월은 갔지만 한껏 멋을 부려보고 싶어하은 어머니의 마음이 리해되고 존경이 갔다. “어머니, 우리 손 잡고 어머니 손, 내 손을 사진 한장 찍읍시다요.” “뭐, 손도 사진을 찍나? 이 못 생긴 손 사진을 찍어서 뭘 해?” 나는 이 멋지고 아름다운 어머니의 손을 영원히 기억하고 남기고 싶었고 가슴에 품고 싶었다. 나중에, 아주 먼 나중에 어머니가 하늘나라에 가시면 더는 만질수도, 그 체온을 느낄수도 없는 어머니의 손을 이제부터라도 자주 만져보고 느껴보리라 다짐하면서 나는 핸드폰을 꺼내들고 사진을 찍었다. 이제부터 사진속에 있는 어머니의 손을 보면서 내 손도 어머니의 손처럼 더더욱 아름다운 손이 되야 하겠다고 나는 생각했다. 그날 밤 나는 어머니의 손을 잡고 만화방초 우거진 들길을 그야말로 구름에 달 가듯이 걷는 꿈을 꾸었다.
15    비가 내리는 날 창가에는 댓글:  조회:549  추천:0  2016-05-26
비가 내리는 날에는 가슴에도 비가 내린다 잊었다 싶었던 이가 나의 뇌리에서 서성이고 멀쩡하던 가슴이 그리움과 외로움에 젖고 떠나갔던 이가 느닷없이 창가에 서있다 비가 내리는 날 창가에는... 나즈막히 부르던 첮사랑 같은 그대 이름이 흐린 하늘로 나있는 저 길 끝에서 오고 한폭의 수채화로 그려진다 바람의 입술을  빌려 나를 부르는 이가 있고 바람의 귀를 빌려 그 소리를 들을수 있다 사랑하지 말자 그리워도 말자 외로워도 말자 하던 굳은살 박힌 나의 다짐은 다 사라지고 내리는 비보다 더 많은 비가 가슴으로 내리는 것은 잊다 잊다 아직 채 잊지못한 젖은 이름하나 아직도 가슴에 있기 때문이다
14    아버지 삶만큼 살고 싶다/김택만 댓글:  조회:1351  추천:0  2016-05-15
올해 어느 화창한 봄날,아내,딸을 데리고 룡정시 개산툰진 회경촌으로 향했다.만물이 소생하는 봄을 맞은 대지인양 어쩐지 마음은 마냥 설레이고 저으기 흥분되고 기대로 부풀었다.회경촌은 나한테 태를 묻은 고향도 ,언제 한번 가본적도 없는 그냥 낯선 타향이다. 그래도 찾아가는 마음이 잔뜩 부풀어오르는것은 옛날예적에 할아버지와 아버지께서 한때 산적이 있는 ,조상들의 얼이 서려있는 곳이기때문이였다.게다가   할아버지께서 직접 짓고 생활하고 아버지가 태여나서 5살까지 살았다는 집이 아직도 그 고장에 있그곳에 있다는것이 가슴을 여울치게 하는 또 하나의 리유였다..올해로 90세 넘은 고모님의 아득한 회억에 의해서 몇번 걸음에 지금의 회경촌 제2촌민소조에 있는 옛집을 찾아냈다는 반가운 소식을 접하고 찾아가는 길이다. 개울을 지나고 시골의 달구지길을 따라 한참 올라가니 마침내 집 한채가 지나온 력사의 흔적을 그대로 보여주기라고 하는듯 고풍스럽게 안겨왔다.대략 100년이 되는 팔칸집이였다.지금 이 집을 소유하고있느 주인은 외국에 가고 빈집만 남아있었다.하지만 돌담장은 였것 그대로 오롯이 남아 이집의 지나온 세월을 말해주는듯싶었다.그런데 앞마당에 있었다는 석마간은 온데간데 종적이 없었다.두터운 널판자로 된 마루에 걸터앉아 명상에 잠겼다.그 옛날 할아버지,아버지의 그림자를 찾으며 그리고 어쩌면 당금이라고 풍겨나올지도 모르는 그 내음을 맡으며 지나온 력사의 장하에 고즈넉이 묻혀있는 옛일들을 상상해보고 진지하게 음미해본다.가지고 간 커피도 한잔 마시며 나는 저기 저 먼듯하면서도 가까이 우렷이 안겨오는 산자락에 시선을 팔며 깊은 사색에 빠진다.그렇듯 낯선 집이고 지금은 볼품없이 많이 낡은 집이지만 나에게 너무나도 다정하게 안겨지는 어머니의 태집처럼 따슷하고 푸근한 집이다.그래서인지 보면 볼수록 도저히 눈을 거둘수 없가ㅗ 가슴 깊이에서 울컥 치밀어오르는 감동,감격과 함께 묻어오르는 희한때문에 눈가가 젖어오는것을 어쩔수 없다. 증조할아버지,할아버지 세대에는 밭도 꽤 많이 차지하고있었고 생활도 어지간히 유족했단다.증조할아버지는 딸만 아흡을 보다가 열번째로 할아버지를 보셨단다.고모님이 10살 쯤 되였을 무렵에 할아버지는 집과 땅을 청산하고 조선 청진으로 이주하셨단다. 그뒤 몇년후 다시 안도현 차조구(지금의 석문진)로 이사하셨다가 이름모를 전염병으로 할아버지는 세상을 떠나셨다.그래서 그때 12살이던 아버지는 당시 조선 청진에서 다니던 학교를 그만 두고 차조구로 돌아와서 가정의 중임을 짊어지게 되였다. 아버지는5남매중 항렬로 둘째였지만 누님되분은 이미 출가한 때였다.그 때 차조구에는 할아버지 명의로 된 땅도 있었는데 아버지외삼촌 되는분이 조선에 가서 살자며 땅을 몽땅 팔고 그 돈을 갖고 종적을 감춰버리는 바람에 아버지네는 하루아침에 빈털터리신세가 되였다.그 때로부터 가난이 시작되였다.하지만 그 화가 나중에 복이 될줄이야.그때 그 땅이 없었기에 아버지네는 “문화대혁명”때에 빈농으로 획분되여 화를 면하게 되였다.만약 그 땅이 고스란히 남아있어서 성분을 나눌 때 부농이나 지주로 획분되였더라면 티끌이라도 끄집어내여 없는 죄도 만들어서 마구 족치던 “문화대혁명”때에 어떤 고역을 치를지 누구도 모를 일이였다. 아버지는 1945년에 참군하여 조국해방전쟁에 참전하였다.그뒤에는 인차 항미원조전쟁에 나갔다가 귀국했다.귀국후 조직에서는 아버지를 되시에 있는 직장에 배치하였지만 그 직장을 그만두고 여태껏 부모님께 하지 못한 효도를하려는 일념으로 할머니가 계시는 안도현 차조구 룡흥촌으로 외서 농촌생활을 시작했다. 아버지는 거기에서 어머니를 만나 결혼하고 우리4남매를 보았다.아버지는 술은 잘 마시지 못하셨지만 노래와 춤에 장기가 있었다.하여 촌의 문예활동에서는 늘  선줄군이였다.술 좀 거나하게  마시면 노래를 부르고 춤판을 벌렸는데  저가락반주에 맞춰 구성지게 가락을 넘기는 “옹헤가”는 아버지의 “18곡”으로서 빠지는 법이 없었다.그래서 아버지의 별명이 “옹헤이ㅑ”였다. 어릴적에 그 별명을 들을 때마다 그렇게도 싫었다.아버지는 글씨도 잘 쓰고 그림도 아주 잘 그렸다.당시 어려운 살림에 화투를 살수 없는 형편에서 아버지는 직접 두툼한 종이에다 화투를 하나하나 그려서는 우리가 놀게 했다.아버지는 말수가 아주 적다못해 무뚝뚝했는데 자식들한테 “공부해라 ,숙제해라”는 말 언제 한번 한적이 없다.하지만 우리자식들은 다들 알아서 공부만은 잘했다. 대학입시가 회복된 첫해에 형님이 대학에 입학했다.그리고 형님이 졸업하는 해에 내가 대학에 입학하고 바로 그해에 세살 터울로 아래인 남동생이 현성에 있는 고중에 입학했다, 3년후 동생도 대학에 입학했다.그 때는 내가 대학을 졸업하기전이라서 시골에서 얼마 안되는 수입으로 대학생의 뒤바래지를 한다는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였다.그무렴에 안도현에서 삼형제가 모두 대학에 간것은 아마 우리형제뿐이였것이다. 지금 그때 당시에 아버지,어머니가 겪었을 마음고생,돈고생을  회억하노라면 가슴이 미여진다.변변치 않은 농사수입으로 우리 형제를 공부시키느라 아글타글했을 아버지와 어머니는 그때 얼마나 고생이 많으셨을가.너나가 거의 엇비슷했을 돈고생은 제쳐놓고라도 마음고생으로 얼마나 시름겨웠을가? 지금 내가 안해와 나 두 사람의 월급으로 딸 하나의 공부뒤바라지를 하면서도 가끔 힘들다고 푸념할 때가 많은데 세 대학생을 그것도 평시에는 돈이 나올데도 없고 가을에 타작을 해야 쥐꼬리만한 수입을 쥘수 있는 아버지와 어머니는 어떻게 우리 셋을 공부시켰을가? 그 척박한 시골에서 세 대학생의 뒤바래지를 하며 꿋꿋하게 살아온 아버지와 어머니,두 분은 세상을 놀래울만한 큰일을 한것도 없다.하지만 너무나도 우러러 보인다.어릴적엔 시내에 있는 직장을 마다하고 시골에서 농사 짓는 아버지가 원망스럽기도 했지만 오늘날 되돌아보노라니 척박한 시골에서 살아온 생존능력,가난을 이겨내고 극복해온 지혜와용기, 그리고 가난속에서도 비관과 실망, 원망 없이 락관적으로 살아온 정신에 탄복하게 된다.나라면 그렇게 할수 있었을가?지금 같아서는 할수 없었을것 같다.전혀 자신이 없다.내가 아버지의 지혜와 능력만큼,그리고 그 삶만큼 살수있을가?더도 말고 덜고말고 아버지 삶만큼 살고 싶다.  
13    어머님의 청춘 댓글:  조회:610  추천:0  2016-05-03
어머님의 청춘/김택만   어머니는 올해80세이시다. 햐얗게 센 머리을 염색했고 허리도 꼿꼿해서  모두들 70세미만으로 짐작하신다. 지난 겨울에 어머니가 손목을 상해 우리집에 머문적이 있었다.그때 어머니의 머리를 감겨드리며 보노라니 곱던 얼굴에 주름살이 깊어졌고 날씬하던 몸매가 축 쳐져있어 많이 늙으셨구나하는 생각이 들고 마음의 한구석이 슬펴졌다. 시골에서 온갖 고생을 다하고 자식공부 뒤바라지에 혼신을 바쳐온 어머니는 55세에 아버지를 먼저 저 세상으로 떠나보내고 할수없이 도회지에 들어와 아파트생활을 하게 되였다.어머니는 자꾸 고향시골을 그리워 가끔 고향에 내려가서 마을어르신들하고 어울리면서 며칠씩 머물다가 올라오곤 하였다.한번씩 고향에 갔다오면 동네의 이야기들을 구수하게 들려주었고 향수에 젖어 그렇게 기뻐하였다. 그러다가 5년전에 어머니가 오매에도 그리는 고향마을에 집 한채를 지어드렸다.어머니는 고령에도 불구하고 기어코 혼자 시골에 내려갔다. 그 큰 앞마당에 터밭을 가꾸어 고추 오이 가지 감자 옥수수 호박 열콩 등 여려가지 작물을 심고  농약을 치지않은 록색채소라며 나눠주는것을자식들에게 주는것을 큰 락으로 삼았다.동네활동실에서 로인들과 어울려 노는것을 더없이 즐거워하였다.새벽 3시면 벌써 자리에서 일어나 한시간동안 산길을 산채한다.또 봄이면 그년세에 어울리지 않게 잽싸게 야산을 타고 고사리도 뜯는다. “내가 열살만 젊어도 얼마 좋겠니.저 깊은 골짜기에 가면 고사리를 한 마대는 뜯어 오겠는데”. “이제 철이 지나면 옥수수랑 호박이랑 맛없어.내가 가지고 가자니 무거워 못 가겠으니까 휴식날 내려와 가져가거라” 어머니의 소박한 말씀을 뒤로 할수없어 초가을날, 친구부부들을 거느리고 시골로 내려갔다.집앞에는 무연한 들과 맑은 강이 있고 뒤에는 산이 병풍처럼 막아있어 친구들은 오붓한 동네라며 환호했다.어머님의 시원시원한 성격에 친구들은 제집처럼 편해했다.우리는 내가로 고기잡이를 갔다. 어릴적 물장구치던 큰 강이 이젠 물이  많이 줄어있었다.그래도 오래많에 하는 고기잡이라 신났다.다들 시골태생이라  개구쟁이시절 물장구치고 고기잡이하던 옛추억이 새록새록 살아나 하나같이 소년소녀로 되여  즐거워했다.다들 옷이 흠뼉 젖었지만  랑만에 젖고 추억을 주으며 흥이 났다 어머니는 우리한테 먹이겠다며 두부도 앗아놓고 윤끼 흐르는  옥수수도 한 가마 져놓았고 달콤한 호박이며 감자를 삶아서 내놓았다.그것도 모자란지 토닭 한마리를 삶아 밥상 중간에 올려놓았다.어머니의 손맛은 그대로 살아있었다. 저녁식사때 마을의 로인 몇분도 모셔왔다.맛 있는 음식에 술이 들어가자 다들 도도한 기분에 취했고 어느새 오락판이 벌어졌다. 모두들 저가락장단에  바가지을 두드리며 천정이 떠나갈듯 노래가락을 뽐았고 구들이 꺼질세라 춤 추며 신나게 놀았다. 육십 세에 저 세상에서 날 데리러 오거든 아직은 젊어서 못 간다고 전해라 칠십 세에 저 세상에서 날 데리러 오거든 할 일이 아직 남아 못 간다고 전해라 팔십 세에 저 세상에서 날 데리러 오거든 아직은 쓸만해서 못 간다고 전해라     내가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어머니를 모시고 오락판을 벌인것은 처음인것같다.그날 어머니는 한창 젊었을 때의 춤과 노래 실력을 그대로 과시하였다. 내가 아주 어릴 때 어머니는 동네아낙네들과 술상을 벌이고 흥에 넘쳐 온 밤 노래하고 춤을 추며 놀군 하였다.일도 잘 하였지만 술도 잘 마시고 노래도 잘하고 춤추며 놀기도 잘하였다.혹독한 가난속에서, 힘든 일상속에서 젊으신 어머니는 그렇게 놀음판을 휘쓸고 다니면서 지금말로 스트레스를 풀었던같다.동네의 술잔치엔 꼭 어머니의 모습이 삐쳐고 아낙네들과의 술모임엔 어머니의 노래가락이 빠지지않았다. 흥이 나서 음악에 취해있는 어머니를 보니 젊어을 때의 어머니의 모습을 보는것같았다.겉모습은 많이 늙었지만 마음만은 늙지 않았구나 하는 생각이 들며 가슴이 저렸다.. 언제인가 내가 :어머님 꿈은 무엇이였습니까?”고 물은적이 있었다. ”내 자식들이 이 시골을 벗어나는거였지.다 대학에 척척 붙고 시내에서 출근하니 그 보다 더좋은일 어디 있겠니.그 때는 힘든줄 몰랐어.지금 시내 활동실이랑 홍보관이랑 다 다녀봐도 내만큼 자식농사 잘된 집이 많지않더라.남들은 아들며느리, 딸사위을 외국에 보내고 손군들 돌보느라 힘들어하는데 난 아들며느리를 다 곁에 두고 있으니 나만큼 팔자좋은 로인도 없을걸 ” 어머니는 그렇게 소박한 꿈에 청춘을 바치신것이였다. 청춘을 흘러보내고 파뭍힌 시골을 택한것은 어쩌면 젊은 시절이 그리워서인지도 모르겠다.흘러간 청춘을 그토록 갈망하면서도 가슴속에 감추어두었을 어머니이다..내가 어머니의 청춘을 외면하고 알려고하지도 않고 모른척했을 따름이다.어머니는 늙었다고,인젠 랑만은 없을거라고 착각한 내가 참 어리섞었다.나만 청춘을 간직하고 있는것이 아니라 어머니의 넓고 따뜻한 마음속에도 청춘의 불꽃이 아직 살아있고  랑만을 갈망하고 즐기고싶어하는 마음이 있다는것을 나는 뒤늦게 깨달았다.난 어머니에게 청춘을 되돌려드리고 찾아드리고 가꾸어드리고 싶다. 본문은 연변여성 5월호에 발표되였습니다
12    강물에 뜬 달/김택만 댓글:  조회:551  추천:0  2016-04-14
강물에 뜬 달 / 김택만   여름 밤,나는 강변을 거닐었다. 산들산들 불어오는 강바람은 얼굴을 부드럽게 어루쓸어준다. 이 부드럽고 향기로운 바람결은 마치도  어린 시절에 무더운 여름이면 자주 나에게 부채질하여주었던 누나의 부채바람결 같다. 하늘에 떠있는 휘영청 밝은 달은 환히  웃는다. 나를 보고 다정히 웃는다.그래서인지 웃는 달이 한결 시원해보인다. 강물 속에도 달이 있다. 강물 속에는 하늘도 있고 구름도 있다. 천갈래 만갈래 강물을 비추는 달빛이지만 저 강물속의 달이 더 밝은것같다. 달이 저 강가에서 미역을 감나보다. 저 달과  물장구도 치며 놀고 싶다만 달이 부서질가봐 차마 그러지 못하겠다. 엄마야 누나야 강변살자 들에는 반짝이는 금모래빛 뒷문밖에는 갈잎의 노래 엄마야 누나야 강변살자 누나 생각이 간절히 난다. 피는 물보다 짙다고 하는데 형제의 정이 바로 이런것인가?. 아마 누나의 따슷한 사랑이겠지. 나에게 있어서 엄마가 해라면 누나는 달이다. 사실 4살우인 누나와 같이 한집에서 살아온 시간은 길지는 않다. 17살에 내가 현성에 있는 고중기숙사에 들어가면서 함께 있지을 못했다. 내가 첫돐때쯤 마을에 도는 전염병에 걸려 무려 3개월동안 입원치료를 받을정도로 많이 아팠고, 그후 미열로  어릴적 내내 아팠던 기억이 많이난다. 아버지, 어머니가 밭일에 나가면 누나가 나를 항상 데리고 놀았고 보살펴주었다. 어린 누나의 손에 이끌러 유치원에 가던 기억, 누나가 냇가에서 빨래하면 개구쟁이 나는 신이 나서 물장구치며 놀던 기억이 삼삼하다. 내가 살던 마을은 시골이여서 소학교가 있는 진소재지마을과 5리정도 떨어져있어 소학교때부터 걸어다녀야 했다. 그때면 학교가는 길에 누나가 나의 무거운 책가방을 대신 메주었고 겨울이면 반급에서 난로불 피우는 땔나무도 누나가 이고메고 날라다 주었다. 그때 겨울이면 왜 그리도 춥던지. 날이 채 밝기전에 집을 나서야 해었다. 마스크 끼고 털모자 쓰고해도 추웠다. 기침을 콜콜해대는 나에게 누나는 그 추운 겨울날에 자기 목도리를 풀어 내 목에 꽁꽁 감싸주었다. 그때 나는 누나가 추워하지않는줄로만 알았다 약골인 나는 중약도 꽤나 많이 먹었다.부모님들께서 일찍 일밭에 나가면 중약 달이는 일은 누나의 몫이였다.화로불에 약달이는 일은 금방 중학교에 올라간 누나에게는 힘든 일이지만 얼굴을 한번 찡그리않고 마다하지않고  열심히 달여주었다.약 냄새가 달콤한 냄새는 아닌데도 말이다.쓰디쓴 약 먹기싫어하는 나에게 누나는 어떻게 해서라도 먹게 하였다. 무더운 여름날 맥없이 누워있는 나에게 부채질도 하여주었고 그 부채바람은  은근히 부드럽게 시운하게 감싸주었다.그 바람은 정녕 향기로웠다.간혹 꼬꼬~댁 암닭우는 소리가 나면 곧장 닭장으로 달려가 갓 낳은 닭알을 가져올 때면 누나는 그렇게 좋아하였는데 웃음이 남실거렸다.닭알을 삶아서는 나만 가만히 먹이였다. 학교다닐 때 공부도 퍽 잘 한 누나였지만,  형님이 대학에 입학하게 되여 누나는 형님의 학업을 뒤바라지하려고 대학입시를 포기하였다. 그렇게 시골의 농사군이 되였다. 그리고 내가 현성의 고중에 입학하고 기숙사생활을 하게되니  뒤바라지는 더욱 힘겨워졌다.. 마을에서 일욕심쟁이로 이름이 있었고 그만큼 부지런했다. 농군의 일이 힘들고 고달파도 힘들단말 한마디 없었다. 내가 대학에 입학하고 3년후 동생도 대학에 입학하게 되였고 4형제중에서 누나 혼자만 농사군이 된것이다. 이것으로 내내 가슴이 아려온다.학교시절 누나에게도 꿈이 있었고 빨갛고 파랗고 노란 꿈을 꾸었을것이다.희망과 뜨거움으로 부풀어있었을것이다. 우리 3형제의 대학공부엔 누나의 희생이 있었고 ,누나의 고달픔과 땀 그리고 배려와 덕택이 깔려있었다. 좋은 형제자매가 있는 사람은 얼마나 운이 좋은지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15년전, 누나는 나이 어린 자식 둘을 어머님께 맡기고 한국으로 떠나갔다. 나는 누나가 이국타향에 가서 어떻게 고생하겠는가하는 생각에 마음이 얼어붙어 떨고있었다. 기적소리 울리며 떠나가는 렬차를 보며 두 줄기 눈물이 두 볼을 타고 흘러내려  두 줄기 레루를 따라 저 멀리로 흘려갔다. 남자라는 자존심도 부끄럼도 모두 버린채 한참 울었다. 하나밖에 없는 누나를, 우리 형제를 위해 희생한 누나를 저렇게 고생속의 한국으로 떠나보내야만 하냐고!? 누나를 보살펴주지 못하고 지켜주지 못하고 도와주지 못하는 나의 무능과 자책감와 부끄러움이 한꺼번에 몰려와 울었다.눈물이 방울방울 떨어졌다.그토록 마음이 아프게 울기는 처음인것이다. 누나야,미안해…이 뜨거운 눈물은 형제애의 눈물이였고 가족애의 눈물이였다. 누나는 지금도 한 달에 두세번 꼭 전화를 걸어온다. 잘 있었니? 아프지 않니? 일은 잘 되고있니? 잘 있다는 나의 말에 흡족해하며 또 전화할게라고한다. 언제나 시름을 놓지못하는 누나다. 지금도 난 누나에겐 시름못놓는 동생이고,어제도 오늘도 그리고 래일도 누나의 어리광스러운 동생이고 싶다. 옷섶을 한방울 두방울 적신다.아마 맑은 하늘에서 한방울 두방울 떨어지는 빗물이겠지.달에게는 눈물이 없다는것을 나는 알고 있다.달님의 눈가의 잔주름이 더 늘어났는지 살펴보고 싶고 손은 더 거칠어지지 않았는지 만져보고 싶고 몸은 더 축가지 않았는지 안아도 보고 싶다. 저 강가에서 밤낚시를 즐기는 낚시꾼이여, 달은 낚지 마소서. 달을 괴롭히지 마소서. 저 강물에 뜬 달에 술 한잔 따라주고싶다. 너도 한잔 나도 한잔 마시며 오손도손 지나간 일과 재미있는 얘기를 나누면서 취하고싶다. 강물은 달빛 싣고 하늘가로 유유히 흘러간다. 추억과 그리움을 싣고 흘러간다. 강물은 쉼 없이 쉼 없이 흘러흘러 가도 강물에 뜬 달은 물결따라 그 품에 그대로 안겨있다. 향기로운 이름- 누나, 누나와의 추억도, 누나의 인자한 모습도, 누나의 따뜻한 사랑도 세월의 강이 수없이 수없이 흘러 가도 저 강물에 뜬 달처럼 내 가슴에 아련히 남아있을것이다.
11    나만의 하늘/김택만 댓글:  조회:548  추천:0  2016-04-14
나만의 하늘 김택만   나만의 한쪼각 하늘에는 나만의 해와 달이 있고 별이 있다   구름이야 칭얼대든말든 나만의 하늘 향기에 나만의 세월 포개며 언제나 해맑은 화선지에 칠색무지개 색칠한다 꽃과 풀과 나무와 강물의 사연 수놓는다   그리고 나만의 하늘을 안고 바람과 함께 눕는다 (2016년 '연변문학'제4월호)
10    나는 어머니의 꽃다운 청춘을 도둑질 했네 댓글:  조회:853  추천:0  2016-01-21
사실 나는 도둑놈이 맞네 어머니의 사랑을 도둑질하고 어머니의 꽃다운 청춘을 도둑질하고 어머니의 웃음을 도둑질 했네 나는 도둑놈이 맞네 그리고 대신 어머니에게  나는 근심을 한 아름 안겨주었네 평생을 어머닌 그 근심 하나로 살았네 그래서 어머닌 늘 아팠네 가슴이 아팠네 ----최돈선시에서
9    우리 서로 마주보는 찻잔이 되자 댓글:  조회:710  추천:0  2016-01-21
각자의 빛깔과 향기는 인정하면서 남아 있는 모든 것을 그 안에 담아 줄 수 있는 꾸밈없는 순수로 서로를 보는 블랙의 낭만도 좋겠지만 우리 딱 두 스푼 정도로 하자 첫 스푼엔 한 사람의 의미를 담아서 두 번째엔 한 사람의 사랑을 담아서 우리 둘 가슴 깊은 곳에 가라앉은 슬픔이 모두 녹아져 없어질 때까지 서로에게 숨겨진 외로움을 젓는 소중한 몸짓이고 싶다. 쉽게 잃고 마는 세월 속에서 지금 우리의 모습은 조금씩 잊혀져 가고 있겠지만 이렇게 마주보고 있는 것만으로 모자람 없는 기쁨일테니 우리 곁에 놓인 장미꽃이 세상의 무엇보다도 우리를 부러워할 수 있도록 언제까지나 서로를 마주보는 찻잔이 되자 각자의 빛깔과 향기는 인정하면서 남아 있는 모든 것을 그 안에 담아 줄 수 있는 서로에게 숨겨진 외로움을 젓는 언제까지나 서로를 마주보는 찻잔이 되자.
8    눈이 온 날/연이 댓글:  조회:1024  추천:0  2016-01-20
어제와 오늘,하얗게 내리고 쌓인 눈으로 눈도 마음도 황홀하기만 합니다.아무의 흔적도 없는,내 발도장조차 찍기 아까운 하얀 눈길우에,마음은 아직도 늙지 않아 어릴적 개구쟁이마냥 뚜벅뚜벅 오리발자국 찍어갑니다.한참 찍다가 뒤돌아 보고 빙긋레 웃습니다. 이렇게 많은 발자국을 나는 이제 또 얼마나 찍어나가 될가...바르게도 그리고 비뚤게도.저 수많은 발자국에 찍히고 얽힌 사연들이 모이고 모이면 내 인생이런가.하나 둘씩 모여서 만들어진 눈부신 저기 저 앞길처럼 내 인생도 앞은 알수없지만 꼭 눈부신 래일들이라 믿고 싶습니다.그리고 갈망합니다.오늘도 휘몰아치는 눈보라,인생의 채찍으로 간주하고 더  열심히 뛰라는 하늘의 뜻을 눈의 메세지로 전달 받으며 나의 수많은 발자국을 찍어나갑니다.수많은 발자국을 찍어나가렵니다.눈 발자국은 아름답습니다.삶의 발자국도 아름답습니다.
7    心好不如德好 댓글:  조회:813  추천:0  2016-01-20
머리 좋은것이 마음 좋은것만 못하고 마음 좋은것이 손 좋은것만 못하고 손 좋은것이 발 좋은것만 못한법입니다. 착하다는것은 다른 사람을 배려할줄 안다는 뜻입니다. 배려한다는것은 그사람과 자기가 맺고 있는 관계를 소중히 여기는것입니다 心好不如德好  돕는다는것은 우산을 들어주는것이 아니라 함께 비를 맞는것입니다 함께 비를 맞지않는 위로는 따뜻하지 않습니다
6    몸을 던질때 댓글:  조회:1193  추천:0  2016-01-08
빗방울이 한두방울 떨어질 때는 조금이라도 젖을가봐 피하려 합니다 하지만 온몸이 젖으면 더 이상 두렵지 않습니다 비에 젖으면 비를 두려워하지 않듯이 희망에 젖으면 미래가 두렵지 않습니다 사랑에 젖으면 사랑이 두렵지 않습니다 일에 젖으면 일이 두렵지않고 삶에 젖으면 삶이 두렵지 않습니다 무엇을 하든지 거기에 온몸을 던질 때 마음이 편해지고 삶이 자유로워 짐을 느낍니다.
5    당신을 가져가겠습니다! 댓글:  조회:829  추천:0  2015-12-15
당신을 가져가겠습니다 내 손등에 작은 상처를 어루만지며 안쓰러워 하던 당신의 따뜻한 눈길을 제가 가져가겠습니다. 나를 만나 행복하다며 소리내어 크게 웃어 주던 당신의 밝은 웃음은 제가 가져가겠습니다. 지루했던 불면의 밤을 편안하게 잠재워 주었던 당신의 낮은 목소리 제가 가져가겠습니다. 항상 강한척 하고 당당한척 하는 당신의 그림자에 어린 서러움 마져 이제 제가 가져가겠습니다. 어둡고 쓸쓸하게 마디마디 새겨진 당신의 기억 속에 작은 흔적 마져 이제 제가 가져가겠습니다. 이세상에 당신이 아파해야 할 고통이, 당신이 울어야 할 눈물이 남아 있다면 제가 모두다 가져가겠습니다. 당신을 가져가겠습니다. 연변중서의병원 치질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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