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림장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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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사진으로 보는 그 때 그 시절 댓글:  조회:672  추천:0  2021-02-04
  1992년 12월 15일, 북경지사 설립 기념 촬영. 중국기자협회서기처 리현덕 서기 (뒤줄 좌3)외 본사 파견 중견기자 편집들인 앞줄 좌1 김삼, 좌2 박수산, 뒤줄 좌1 리영식, 좌2 김천, 좌4 림장춘, 좌5 방홍국, 좌6 오인철    1992년말, 해외판 주간지 북경진출 운영에 관련, 주간지 팀 멤버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한국적 미국인 박영 회장 (앞줄 좌1)과 합작협의서에 조인하고 있는 림장춘 부사장 겸 부주필 (앞줄 중)  "일요경제" 시범호 출간후 외국인 파트너 박영 회장이 북경'보배원'에서 베푼 축하파티의 한 장면    
3    무한도전이 남기는 그라프 댓글:  조회:491  추천:0  2021-02-03
무한도전이 남기는 그라프 -쉼없는 언론인 림장춘선생의 거침없는 질주     안려홍      림장춘선생을 다루는 글을 쓰려고 키보드를 두드리기 앞서 텔레비죤에서 자주 나오는 〈무한도전(无限挑战)〉이라는 프로그람이 느닷없이 떠올랐다. 림장춘선생의 언론인생애가 이 명사와 신통히도 맞물린다는 판단에서였다. 견물생심이라 할가, 이 참에 흔히 쓰는 이 어휘의 뜻을 보다 정확히 알고 싶어 사전을 뒤적여보았다.       무한—한이 없음.   도전—비유적으로 어려운 사업이나 기록 갱신에 맞섬.   이번에는 ‘한’을 따로 찾아보았다.   한—넘지 못하게 정하거나 이미 정해진 정도의 범위.     이 해석들을 퍼즐같이 맞춰보면 ‘무한도전’의 뜻을 대체적으로 추려낼 수 있다.       주인공의 허락도 받지 않고 그가 걸어온 생애와 이루어놓은 무훈담을 보고 우리 스스로 지어낸 이름의 ‘쉼없는 언론인’은 일찍 연변일보사 부사장, 부총편집을 맡고 조선문판을 주관해온 림장춘선생이다.      림장춘선생이 불꽃 튀는 언론현장을 떠난 지도 어느덧 20년이 다가온다. 1942년생이니 어언 팔순을 지척에 두고 있다. 다만 팔순을 지척에 둔  로인답지 않게 젊음이 넘쳐흐른다. 첫만남이라면 누구도 그를 팔순 로인으로 짚기 힘들다. 그만큼 ‘쉼없는 언론인’, ‘청년 림장춘 총편집’이라고 부르는 게 가슴에 편안하게 와닿는다. 사실상 그는 오늘도 현역에 짝질세라 신문 관련건으로 분주히 동서남북을 가리지 않고 뛰고 있다. 퇴직후 2013년부터 《연변일보》 조문판편집부의 고문을 맡고 기자들의 신문기사 원고평의를 맡아함과 동시에 2014년부터는 연변일보사의 리퇴직부서(190명) 당지부서기직까지 맡고 있다.      림장춘선생은 1942년 4월 29일, 훈춘현 마적달향(지금은 하다문향) 탑자구촌에서 태여났다. 1958년 9월부터 1959년 8월까지 훈춘현 춘화중학을 다니였다. 춘화라면 훈춘에서도 치벽진 변경향이고 오지인 연변에서도 또 오지에 속한다. 교통이 숨막히던 그 시절, 연길에서 도문, 훈춘을 거쳐 춘화에 이르자면 뻐스를 타도 세시간 반이나 걸린다. 이 깊숙한 산골중학교에서 당시 16세 나이에 글쓰기를 무등 즐겼던 소년 림장춘은 《춘화중학보》의 집행부주필을 맡게 된다. 하긴 지금 보면 초라하기 그지없는 등사신문이였음에도 그의 글쓰기 싹수가 인정받았다는 대목이다.        1964년부터 1967년 8월, 중앙민족학원(지금의 중앙민족대학) 한어문 문학학부에 입학하고 졸업하는 그 과정에도 림장춘선생은 학교 벽신문—《단결보》의 편집을 맡고 글쓰기 기량을 꾸준히 닦았다. 아무튼 오지 시골에서 수도 북경에 와서 거친 대학공부는 림장춘선생의 시야를 틔워주었고 넓은 세상으로 진출해야만 오지의 미래도 밝다는 상상을 키워주었음에 분명하다. 북경에서의 대학공부에서 그는 향후 사회에 진출하여 맞게 될 무수한 불가능을 가능으로 바꿔놓을 의욕을 다지게 되였다.        대학을 졸업하고 1970년 2월부터 훈춘현 외사판공실에 배치되여 신나게 일하던 와중 억울하게도 대학시절 문화대혁명시기의 ‘전과’라는 얼토당토 않는 ‘로동개조’를 감내했어야 했다. 하지만 그는 그렇듯 어려운 역경 속에서도 글쓰기라는 초심만은 잊지 않았다. 1975년에 ‘무죄’로 시인되여 훈춘현 선전부에 전근되여 보도과장을 맡게 되면서 언론과 보다 가깝게 다가가게 되였다. 1980년에 《연변일보》의  훈춘주재기자로 있으면서 림장춘선생은 조선문판, 한문판에 보다 전방위적이고 보다 심층적인 개방을 서두르고 있는 동북아의 삼각주—훈춘과 관련된 수많은 기사를 쏟아냈다. 지금도 당년의 《연변일보》를 펼쳐보면 림장춘선생이 부지런히 뛰여다니며 써낸 기사를 어렵잖게 찾아볼 수 있다.       1983년, 림장춘선생은 당시 연변주위의 후비 간부임명에서 내놓은 혁명화, 전문화, 년소화 등 기준을 딛고 연변일보사의 일반 편집기자로부터 부총편집, 부사장으로 전격 임명되였다. 훈춘 오지로부터 연길로의 진출로 그는 보다 넓은 세상으로 나아갈 수 있는 첫 정거장에 이르게 되였다. 아니, 첫 단추를 끼웠다 할 수 있었다. 다만 어디까지나 종착지는 아니였다. 이 때로부터 2002년에 퇴직할 때까지 림장춘선생은 일개 지구급 소수민족 당기관지인 《연변일보》의 위상을 대내외에 알리고 《연변일보》를 무게 있고 독자들이 반기는 신문으로 꾸릴 의욕으로 정열을 불태워왔다. 언론인 생애에서 이룩한 성취를 인정 받아 1994년에 고급편집 직함을 받고 조선족으로는 유일하게 제4기 중국기자협회 리사로 당선되는 영예도 누렸다. 또 중국소수민족신문연구회 부회장, 길림성신문계렬고급직함심사위원 등 묵직한 사회직무를 력임해왔다.    언론인생애에서 림장춘선생이 이룩한 성취들은 하도 많기에 일일이 거론하지 않고 여기에서는 다만 동료들과 손 잡고 《연변일보》의 위상을 대내외에 알리고 《연변일보》가 국내, 국외로 진출하는 처녀지를 열어가면서 힘든 가시밭길을 헤쳐온 몇몇 이야기에만 펜을 대볼가 한다. 그 과정은 어쩌면 한편의 드라마같이 짜릿하면서도 흥미롭다.        당시 《연변일보》는 관련 규정에 따라 연변을 벗어난 타지역의 뉴스를 보도할 수 없는 국한성을 갖고 있었다. 지역에만 한정되다 보니 독자들을 확 끄당길 만한 뉴스거리가 적었고 꽤 단조로웠다.     마침 1991년, 북경아시안게임이 열리게 되였다. 그 때까지만 해도 지역신문이 국제적인 행사를 현장에서 취재하여 기사화한 사례는 없었다. 일찍 4년전인 1988년 상반년, 상해 복단대학 신문학부에서 개최한 전국 언론사 총편집연수에 참가해 계통적으로 신문리론 지식을 터득한  림장춘선생은 북경아시안게임이야말로 천재일우의 돌파구라고 판단하게 되였다. 판단은 판단이고 그 가능성은 한치 앞도 내다보기 어렵게 안개속에 가리워져있었다. 우선 그는 친분이 있는 신화통신사 장국량(张国良) 비서장한테 련락하여 취재권을 따줄 것을 간곡히 청구했다. 림장춘선생의 간청에 감화된 장비서장이 직접 전국체육총회에 제기하는 한편 해당 일군을 파견하여 교섭하여 드디여 북경아시안게임 취재권을 거머쥐게 되였다. 이어 《연변일보》는 장정일 부총편집이 단장을 맡은 5명의 취재팀을 북경에 급파했다. 모든 부서가 아시안게임보도를 주축으로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북경 쪽에서 취재팀이 팩스로 원고를 전송해오면 신문사에서는 이튿날 바로 신문을 찍어서 렬차로 북경에 보내 아시안게임촌에 송달하는 수순으로 이루어졌다. 당시 북경아시안게임촌에 배송된 조선문신문으로는 《연변일보》 하나뿐이였다. 물론 어벌 크게도 지역신문으로도 유일하였다. 북경아시안게임 기간에 《연변일보》가 매일 경기장 안에 들어가면서 수많은 한국언론사 기자들도 놀라움을 금치 못하면서 《연변일보》의 위상을 현지에서 일별하게 되였다. 이 역시 그 뒤 《연변일보》의 해외진출에 멍석을 깔아둔  셈으로 되였다.      독자군이 제한되여있고 정보원천이 적은 등 소수민족신문으로서의 아쉬움을 장점으로, 우세로 활용할 수 있는 지름길이 없을가 하고 림장춘선생은 고민에 고민을 멈추지 않았다. 타지역에 기자소를 세우자는 발상도 이 고민 속에서 나오게 되였다. 여기에서 뚫어야 할 첫 관문은 당연히 수도 북경이였다. 당시만 해도 북경에 기자소를 세운다는 건 하늘의 별따기라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가능성이 전무하다 할 아츠란 벽이였다. 심의가 하도 까다로워 상해, 천진 등 일부 대도시외 기타 지역은 일률로 비준받을 수 있는 길이 막혀있었다. 길림성에서도 그 때까지 북경에 기자소를 세우지 못하고 있었다. 이런 어려운 상황에 림장춘선생은 소수민족신문이라는 어딘가 불리한 조건을 리로운 조건으로 내세우는 역사유로 부딪쳐보았다. 그는 선후로 중공중앙선전부, 신화통신사, 북경시당위를 일일이 찾았다. 중공중앙선전부의 친분이 있는 인사들을 찾아 반복적으로 설득하고 간곡히 부탁하여 그나마 통과하고 보고문을 작성하여 북경시당위를 찾아갔을 때는 문턱에 걸렸다. 북경시당위 선전부 책임자들은 연변의 지리적 위치도 모르거니와 《연변일보》를 섬서성의 《연안일보》로 착각하고 있었다. 나중에 《연변일보》라는 작은 지역 신문인 걸 알고 나서 소수민족신문이 무슨 기자소냐고 어림도 없다는 태도로 나왔다. 그러자 림장춘선생은 소수민족일수록 더 배려해줘야 되지 않느냐, 왜 차별대우를 하느냐 하고 거세게 밀어붙였다. 그렇게 북경시당위에서는 《연변일보》가 북경에 기자소를 세우도록 특별비준하였다. 1993년, 북경에 기자소를 세운 데 이어 1~2년 사이에 천진, 청도, 심양, 영구, 목단강 등 기타 지역에도 기자소가 일사천리로 세워지게 되였다. 뿐만 아니라 한국 서울의 정치중심이라 일컫는 종로구에 《연변일보》 서울지사라는 큼직한 간판까지 버젓이 내걸었다. 이로 《연변일보》는 새로운 정보원천을 개척하고 대외련락네트워크를 확장하고 대외영향력을 극대화할 수 있게 되였다.     1992년, 림장춘선생은 몸소 북경에 진출하여 미국적 한국인 박영 회장과 손 잡고 《일요경제》라는 《연변일보》 해외판을 꾸리게 되였다. 〈외국인 투자, 신문사 편집출판, 광고 공동경영〉이라는 구도로 판을 짜고 발행대상은 북경, 천진 및 연해 개방도시 3자기업(중국내의 외국독자기업, 중외합자기업, 중외합작기업의 통창)으로 잡았다.     외국인과 손 잡고 신문을 꾸리는 극히 민감한 문제에서, 심수나 광주 등 남방에서는 가능한데 왜 북방은 안되며 한족은 가능한데 왜 우리 조선족은 안되는가 라는 것이 림장춘선생이 당시 이 아이디어를 면밀하게 타진하며 과감히 추진하게 된 결정적 근거였다. 이 결정은 당시 연변조선족자치주당위 선전부 책임자와 새로 부임된 연변일보사 강룡운 사장의 지지를 받았다. 《일요경제》는 당시 시대의 흐름에 알맞게 대외경제와 외상 관련 보도를 위주로 다루었는데 중국기자협회 서기처 리현덕 서기의 지지를 받았고 국내외적으로 긍정적 평가를 받게 되였다. 《일요경제》는 그 때 흔치 않게 북경에 김천 편집부 주임(현임《연변일보》  부사장, 부총편집)이 이끄는 편집기자팀을 두고 현지에서 취재, 편집하여 연길본사에 보내여 출간하는 방식으로 운영되였다. 그만큼 정보량이 많고 신선하고 내용이 광의적이였기에 독자들의 절찬을 받았다. 그 시대 독자들에게는 추억과 향수를 주는 특간이였다. 특간이라는 개념도 그 무렵에 정착되였다고 추정하게 되는 대목이다.     림장춘선생의 머리에서는 언제나 ‘파격’이라는 두 글자가 떠난 적 없었다. 개혁개방이 파격적으로 이루어지는 시점에서 그 앞에서 리드해나가야 할 언론이 뒤꽁무니를 따른다면 시대에 부끄럽다는 맥락에서 홀제 ‘만리기행’을 머리에 그려보게 되였다. 그 때 주관적, 객관적 원인으로 우리 나라 동남부연해지대와 서북부발전은 불균형적으로 이뤄지고 있었다. 매체로 말하면 이 테마는 그 때까지 사각지대나 다름없었다. 개혁개방의 열기로 끓어오르는 대표적 연해지역과 중점도시들을 답사하여 기사화하면 연변의 경제발전에도 소중한 ‘경서’를 제공할 수 있고 독자들에게도 신선한 뉴스거리를 선물할 수 있다는 장미빛 청사진 앞에서 림장춘선생은 편안히 앉아있을 수 없었다. 취재팀을 묶은 시리즈보도가 필수적인 만큼 만만치 않은 인력, 물력, 재력이 따라가야 하는, 《연변일보》 력사에서도 전례 없는 대역사였다. 다만 안타깝게도 자금이 발을 묶었다. 지방재정에 기댈 수 없는 상황이기에 스스로 자금을 해결해야만 기획을 차질없이 추진해나갈 수 있었다. 당시 일찍 개방한 《심수특별구보》 등 신문매체에서 이미 외국자본을 리용한 선례는 림장춘선생에게 황금 같은 정보였다.     마침 1995년 여름에 림장춘선생은 중국—로씨야 량국동포언론인방문단 단장의 신분으로 한국을 방문하게 되였다. 그 기회에 지인인 《중앙일보》 경제부 박병석 부장(현임 한국 국회의장)을 찾아갔고 그 인맥으로 삼성그룹과 련락이 닿아 취재차 한대를 지원해줄 것을 요청했다. 삼성그룹에서는 흔쾌히 답복하면서 취재차에 ‘삼성그룹 협찬’이라는 광고를 걸어달라는 협찬조건을 내놓았다. 방문기간에 계약을 맺고 속이 든든하여 귀국했지만 정작 외자도입과정은 말처럼 순탄하지만은 않았다. 다국적기업인 삼성그룹을 놓고 말할 때 인민페 20만원 정도는 거뜬히 내놓을 수 있었음에도 꼬박 1년이 걸려서야 비로소 받을 수 있었다. 자금이 해결되자 취재차 한대를 구매하고 정경락 부총편집을 선두로 4명의 기자를 취재팀으로 묶어 미리 짜놓은 취재코스 대로 ‘만리기행’의 시작을 알렸다. 뒤미처 이를 알게 된 당시 연변TV방송국 채영춘 국장도 기자를 급파하여 ‘만리기행’ 취재팀에 합류하면서 문자, 사진, 영상을 포괄적으로 갖춘 종합실력을 갖추게 되였다.     안해와 더불어 출간의 희열을   1996년 9월부터 1997년 1월까지 5개월 동안 취재팀은 우리 나라 최동단 훈춘 방천에서 출발하여 최남단 삼아에 이르기까지 8만리를 달리면서 취재해 근 40개 특집면을 줄줄이 내놓았다. 가는 곳마다에서 취재도 하고 연변을 홍보하면서 《연변일보》의 대외영향력을 크게 넓혔다.   취재차가 북경에 들어설 무렵 림장춘선생도 북경에 이르렀다. 그는 조선족으로서는 유일하게 중국기자협회 리사였기에 발언권을 가지고 있은 만큼 중국기자협회와 교섭하여 중국기자협회의 명의로 소식공개회를 가졌다. 《인민일보》, 《광명일보》 등 수도 12개 주요언론매체 기자들이 참석한 기자회견장에서 중국기자협회 서기처 소동승(肖东升) 서기는 “연변일보사와 연변TV가 조직한 ‘만리기행’ 보도는 우리 나라 신문분야에 하나의 새로운 길을 개척했다”라고 극찬하였으며 중공중앙선전부 신문국의 책임자는 “‘만리기행’이야말로 일대 장거이다”라고 높이 평가했다. 기자회견을 통해 ‘만리기행’취재활동은 전국에 쫙 알려지게 되였다. 당시 조남기 상장(전국정치협상회의 부주석), 리영태 중장(공군 부사령원) 등 지도자들도 취재팀을 접견하고 따뜻이 격려해주었다.     전통관념, 관행 대로라면 지역 신문사이자 소수민족신문사인 《연변일보》가 국외에 진출하여 신문을 꾸린다는 것은 절대 불가능하였다. 림장춘선생은 경제분야 뿐만 아니라 《인민일보》나 《남방일보》 등 언론매체들도 미국에 진출해 해외판을 꾸린 사례가 있는데 《연변일보》가 안된다는 법이 어디에 있느냐고 또 파격적인 제안을 내놓았다.      1998년 하반년부터 사전준비작업에 들어가 이듬해초 편집위원회의 토론을 거쳐 드디여 한국에 진출해 《연변일보》 한국판을 꾸리기로 결정을 내렸다. 해당 준비사업을 마친 후 림장춘선생은 직접 서울에 나가 지사장을 맡은 김영옥기자와 함께 《연변일보》 한국판 출간을 서둘렀다. 떠나기 앞서 림장춘선생은 중층급 이상 간부들을 소집해놓고 “이번 길의 성공 여부는 예측하기 어렵지만 모든 책임은 나 스스로 감당하겠다는 것을 오늘 약속한다. 후배들에게 길을 열어줄 수 있다면 나는 기꺼이 신문개혁의 희생양으로 되겠다.”라고 비장하게 각오를 밝혔다. 《중앙일보》의 협조와 한국기업들의 후원을 딛고 1999년 5월 31일, 드디여 20개 컬러면으로 된 《연변일보》 한국판 시험호를 내놓았다. 이는 우리 나라로서는 최초로 한국문화관광부에 등록하고 한국에서 출판, 발행된 첫 중국 조선문신문이였다. 당시 연변조선족자치주당위 주관 책임자는 해외판의 출간을 격려, 긍정하였고 남상복 주장, 전평선 부주장 등 연변조선족자치주위원회, 연변조선족자치주인민정부 책임자들도 선후하여 《연변일보》 서울지사 간판 앞에서 기념사진을 남겨 고무해주었다. 《중앙일보》, 《동아일보》등 한국의 메이저매체들도 《연변일보》한국판의 출간을 대거 보도하였다.    아시안게임 보도, 북경기자소 설립, ‘만리기행’취재, 《일요경제》, 《연변일보》 한국판  창간 등 굵직굵직한 행사들은 림장춘선생이 무에서 유를, 불가능을 가능으로 바꿔놓은 획기적 의미를 가지고 있는 사건들이다. 이처럼 림장춘선생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흔들림없는 집념과 파격적인 도전으로 하나 또 하나의 신화를 이루어놓았다.    퇴직한 후에도 림장춘선생의 하루하루는 분주하다. ‘쉼없는 기자정신’을 끈끈히 이어오고 있다. 일찍 재직시절에 펼쳐낸 신문학 저서 《신문학강좌》(1985년, 공저)를 비롯한 《연변일보 50주년기자작품선》(1998년, 주필), 《연변일보 50주년 통신원작품집》(1998년, 주필)에 이어 정년퇴직후에도 부지런히 붓을 놀려 《중국어간체자 쉽게 배우기》(2001년, 서울 출판), 《간체자 천자문》(2004년, 서울 출판), 《간체자와 번체자 대조해석》(2004년, 서울 출판), 《세기를 주름 잡는 〈연변일보〉》(2015년) 등 도서들을 펴내였다. 그중 한국 체류기간 성공회대학의 첫 외국인교수로 초빙되여 교수를 하는 동안 내놓은 《중국어간체자 쉽게 배우기》(430페지)는 여덟번 재판될 만큼 베스트셀러로 떠올라 인기가 식지 않고 있다.    이젠 퇴직후여서 집에도 사랑을 쏟을 여유가 있게 되였다. 그 하나가 손녀의 일기쓰기지도이다. 현재 중학교 3학년생인 손녀는 8년 동안 하루도 거르지 않고 현재까지(12월 20일) 무려 2,970편의 일기(80여만자)를 써왔다. 지난 2018년에는 소학교졸업기념으로 일기작품집 《중국꿈, 나의 꿈》까지 묶어내게 되였다.   지금 림장춘선생은 느닷없이 들이닥친 병마를 이겨내면서 한뉘 신문이라는 한 우물만 파온 일생을 정리한 신문작품집과 자서전 출판 준비를 다그치고 있다. 이번에도 역시 안해 김정희(76세)씨가 이미 35만여자에 달하는 원고 타자를 마무리한 상황, 래년 출판을 앞둔 막바지 작업으로 꽤나 드바쁜 일정을 소화하고 있다. 한편 그는 태여난 마적달 탑자구촌 촌사 편찬을 인생의 마지막 도전, 마지막 작업으로 밀고나가고 있다. 누가 쓰라고 해서가 아니라 촌 력사의 진실을 기록해서 후세에 넘겨주려는 사명감에서이다. 자료수집, 정리도 태반이 된 상황이다. ‘쉼없는 언론인’ 림장춘선생은 촌사쓰기로 기자리레를 멋지게 이어가고 있다. 무한도전의 종착지가 과연 어디까지일지 심히 기대된다.     2021년 제1기 
2    林长春:跨世纪延边新闻史的见证人 댓글:  조회:1478  추천:0  2016-06-03
林长春:跨世纪延边新闻史的见证人   本报记者 陈颖慧     当你捧起散发着清新书香、刚刚出版发行的《跨世纪的(1998-2013)》这本书,阅读书中那些真实的记录,品味字里行间那流淌的真挚感情,每一位曾经或正在从事延边新闻事业的人也许会不由自主地将目光投向本书的编著者——林长春。     林长春可以称得上是延边日报社“老报人”了。他曾于1984年1月至2002年8月担任延边日报社副社长兼副总编辑工作,亲历了延边日报社在世纪交替、改革发展岁月中的一段历史;见证了延边日报社在反映社会民生、记录时代变迁、宣传改革开放、推动社会进步方面所发挥的不可替代的历史作用;而今又编著了《跨世纪的(1998-2013)》一书,真实记录了世纪之交阶段珍贵的历史。林长春说,这是他此生最引以为自豪和欣慰的一件事。      《跨世纪的(1998-2013)》,是一部继《延边日报新闻志(40年史)》、《延边日报50年史》,续写跨入新世纪前后(1998年∼2013年)阶段《延边日报》发展历史的又一本“社志”。 此书同时收录延边各族人民跨入新世纪前后年代团结进步、奋力推进改革开放全过程的“大事记”,犹如一部延边“地方志”。此书不局限于本地区,还收录我国(包括本省)政界重要人事变动、重大决策以及在国内外享有一定名气的全国范围内朝鲜族知名人士事迹和活动,故具有一定的收藏、实用价值。 《延边日报》创刊于1948年4月1日,至今67年来,始终坚持正确的舆论导向,努力宣传党的路线、方针、政策,为维护国家统一、民族团结,促进民族经济、社会、文化事业的发展,积极向海内外宣传延边等方面作出了重大贡献;同时及时反映广大群众的呼声,成为党联系群众的桥梁和纽带。《延边日报》一直是延边地区乃至中国朝鲜族社会公认的主流媒体。书写延边日报社“社志”,真实记录延边日报社的发展历程,意义重大。     外表总是谦和儒雅的林长春,工作起来真有股子“拼命三郎”的劲头。记得那是2013年春天,在延边日报社办公大楼里,见到了已退休多年、年逾七旬的林长春,他面带笑容地告诉记者,准备编撰一本记录延边日报社近16年发展历程的一本书。当时这本书还没有名字。从那以后,每天都能看到他不知疲倦的身影。不论风霜雨雪,他像一位在职员工一样,早晨和大家一起上班,中午在食堂就餐,埋头在卷帙浩繁的资料中挑选着、整理着,撰写着。他把整理好的素材拿回家,又求年过70的老伴儿帮他打字,形成书的初稿。历时一年,林长春每天坚持工作六七个小时,翻阅了自1998年至2013年间《延边日报》朝、汉两个文版3万多个版面,以及自1948年创刊以来的所有历史档案资料。一本37万字,时间跨度达16年的《跨世纪的(1998-2013)》终于脱了稿。回首编撰细节,林长春激动地说:“说实话,刚开始着手编这本书,我有所顾虑,生怕自己年迈力衰,力不从心,半途而废。可这一年的紧张工作,我有机会翻阅跨世纪前后延边发展的历史记录,抚摸改革开放时代的脉搏,受益匪浅,同时也对自己的体力、精力及记忆力进行了自检,经过‘实战’检验,这‘三力’都过‘关’,而且比我想象得还要好。”    《跨世纪的(1998-2013)》一书承接过往,将延边日报社66年的历史完整地接续起来,成为人们了解《延边日报》,再现延边新闻史发展的一面真实的“镜子”。     这部志书分为21章,但内容主要由“概况”、“大事记”两大模块组成。在编写过程中,林长春忠实于历史,恪守实事求是原则,按照新闻规律和新闻价值要素原理,将历史事实客观地记录下来,既肯定了主流,又没回避问题。至于其中一些是非曲直,则留待后人去评说。     《旧唐书·魏征传》中有这样一段话:夫以铜为镜,可以正衣冠,以史为镜,可以知兴替,以人为镜,可以知得失。林长春编著的这本《跨世纪的(1998-2013)》告诉人们,只有改革创新,与时俱进,延边日报社才能适应当今多媒体激烈竞争中继往开来,谱写出更加辉煌的新篇章。 刊于2015年10月16日《延边日报》(汉文版)第6版
세상에 어려운 일 없어라 모든 일은 하기에 달렸거늘  ㅡ림장춘 연변일보 전임부사장 인터뷰 지난 세기 후반 격변의 년대인 1984년부터 16년간 연변일보 조선문판 주관 부사장 겸 부주필로 신문개혁의 최전선에서 지휘봉을 잡았던 림장춘선생은 항시 새로운 사유로 참신한 아이디어를 창출하면서 어렵고 민감한 문제를 풀어나감으로써 그 당시 지구급 소수민족신문사로서는 거의 실현불가능한 일들을 하나하나 슬기롭게 성사시킨 주인공이다.   그와의 인터뷰를 통해 위태롭지만 안정된 그의 고공줄타기와 같은 사업과정에서의 희로애락을 편린으로나마 더듬어보았다.   ㅡ신문운영에서 새로운 사유로 신문의 가독성과 뉴스성을 강조한다고 했는데 낡은 신문운영의 틀에서 어떻게 벗어날수 있었는가?   1986년 10월에 불을 지폈던 “신문관념갱신에 대한 대토론”은 전 편집부를 뒤흔들어놓았다. “관념을 바꾸고 새로운 사유로 창조적인 사업을 전개하자”는것이 당시 내건 슬로건이였다. 이는 연변일보 편집부가 오랜 전통적인 신문관념에서 헤여나와 신문법칙에 좇아 신문을 꾸리는 력사적인 대전환이였다. 당시 조선문판을 주관하던 나는 전국소수민족신문사업회의에서 돌아온후 사상해방에 관한 대토론을 조직하였다. 이 토론은 사내의 호응과 지지를 받았고 사원들의 관념은 전례없는 활약을 보였으며 많은 고정된 틀들이 깨여지기 시작했고 신문의 모습도 커다란 전변을 보이기 시작했다. 뒤미처 11월부터 가독성이 향상된 “주말특집”, “사회생활”, “사색의 여울목” 등 새로운 전문란들이 생겨났고 좋은 제목 달기, 짧은 뉴스 쓰기 등 활동들도 이어졌다.   ㅡ지방의 작은 신문은 국제성적인 활동을 보도하지 못한다는 관례가 있지 않은가. 그런데도 1991년 북경아시안게임촌에 유일한 조선문신문을 배송시킬수 있은 비결은 무엇인가?   연변일보사에서 신문관념을 갱신하고 현지보도에 치중하고있을 무렵인 1991년 북경아시안게임을 맞이하게 되였다. 이는 국제성적인 현지보도를 체험할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그러나 그때까지만 해도 지방신문이나 소수민족신문이 국제성적인 활동을 직접 보도한 사례는 없었다. 연변일보는 지방신문이고 소수민족신문이지만 또한 당보에 속하므로 참여할 자격이 있다. 조건이 없으면 만들어야 한다. 일은 사람이 하기 나름이 아닌가. 문제는 적극적으로 쟁취하느냐에 있다. 주견이 서자 나는 안면이 있는 신화사 비서장 장국량씨에게 련락해 아시안게임 취재권을 따줄것을 청구하는 한편 사람을 북경에 급파하여 따라다니며 교섭하게 하였다. 끈질긴 공작끝에 장국량씨는 사람을 아시안게임촌과 국가체육총국에 보내여 끝내 취재권을 얻어내였다.   신문사에서는 즉시 장정일부총편집을 단장으로 하고 오기활, 오인철 등으로 구성된 취재단을 북경에 파견하여 처음으로 팩시를 리용해 원고를 전송해와 밤도와 찍어서는 이튿날 전문인원을 보내여 아시안게임촌 뉴스센터에 신문을 송달하였다. 이렇듯 북경아시안게임기간 연변일보는 지방의 소수민족신문으로는 유일하게 아시안게임의 취재권을 따내였을뿐아니라 매일 신문을 경기장에 들여보내였다. 아시안게임장내의 유일한 조선문신문으로 연변일보의 해외영향력을 넓혔다. 많은 한국언론 기자들은 아시안게임장에서 연변일보를 보고 놀라움을 금치 못하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ㅡ통념상 언론은 외자와 외상을 리용하지 못한다는 규정이 있다. 그러나 북경에서 연변일보 해외판 《일요경제》(주간)을 꾸릴수 있었던것은?   1992년 나는 미국적 한인 박영회장과 함께 북경에 진출해 연변일보 해외판 《일요경제》(주간)을 꾸림으로써 북경, 천진 등 지역에서의 외상, 외자기업에 대한 연변일보의 영향을 넓혀보려 했다. 당보와 외국인이 손잡고 신문을 꾸린다는것은 당시로서는 절대 불허사항이였다. 그러나 나의 생각은 달랐다. 개혁개방시대 경제부문에서 외상, 외자를 리용할수 있는데 문화부문은 왜 안되는가? 경제토대가 앞서고 상부구조가 뒤따르는것은 법칙인만큼 조만간에 실행될 사항이다. 이런 신념하에 우리는 편집위원회를 소집하여 외상과 손잡되 우리가 책임지고 신문을 꾸리며 외상은 광고를 책임지고 북경에서의 신문운영경비를 책임지도록 토의결정했다. 연후 우리는 편집판공실 김천주임(현임 부총편집)이 박수산, 김삼, 방홍국, 리영식 등을 이끌고 북경에 들어가 현지취재를 하고 김경석주임이 집에서 편집, 출판을 맡도록 했다. 이 결정은 당시 연변주위선전부장이였던 장룡준의 지지를 받았다. 이 신문은 대외경제와 외상에 대한 보도를 위주로 하였는데 내용이 새롭고 본간과 뚜렷하게 구별되여 중국기자협회 서기처 리현덕서기의 지지를 받았으며 국내외의 호평을 받았다.   이 신문은 후에 《월요경제》로 고쳐 줄곧 1999년까지 꾸려왔다. 이는 연변일보에서 사상 처음으로 당보의 전통관념을 깨뜨리고 과감히 외자와 외상을 리용해 자체의 내실을 다졌고 본지역을 떠나 새로운 보도령역을 개발하는 유익한 시도를 하였다.   ㅡ어려운 고비를 뚫고 북경 등 여러곳에 지사를 세울수 있게 된 경험을 소개한다면   대외영향을 확대시키고 새로운 광고자원을 개척하기 위해 우리는 1992년부터 선후하여 북경(지사장 박수산), 천진(지사장 방홍국), 청도(지사장 김삼), 심양(지사장 전관룡) 등지에 지사를 세웠다. 이런 지사들은 중앙선전부, 중국기자협회, 신화사의 지지와 유관 각 지역 당위 선전부문의 방조하에 합법적으로 세워진것이다. 이런 지사들의 설립은 당시 지구급 신문으로서는 유일무이한것이였다. 따라서 애로도 컸다. 이를테면 북경지사를 설립할 때 처음에는 북경시위 선전부에서 연변의 지리적위치조차 모르고있어 연변일보를 연안일보로 오인하기도 했다. 북경에서는 상해, 천진 같은 일부 대도시들만이 지사를 특설할수 있고 기타 지역은 일률로 비준하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내가 직접 나서서 소수민족신문이라는 “카드”를 꺼내들고 중국기자협회, 중앙선전부 신문국 등을 찾아다니며 지지와 협조를 간절히 부탁하며 설득한 끝에 마침내 특허증을 얻어냈다. 드디여 연변일보 북경지사가 맨처음으로 간판을 내걸었다. 잇따라 천진 등 기타 지역의 설립은 비교적 순조로왔다. 이와 동시에 1999년에는 또 한국 서울의 중심구역에 있는 중앙일보사 울안에도 연변일보 서울지사(지사장 김영옥)의 간판을 내걺으로써 남상복, 전평선, 리득룡 등 연변주위 책임자들의 칭찬을 받았다.   ㅡ여러 차례에 걸쳐 적지 않은 외자를 도입해 “조국변경만리행”취재활동 등 대형 행사를 조직한바 있다는데   1990년대 후기 개혁개방의 심입과 더불어 우리 나라에는 발달한 동남부와 상대적으로 락후된 서북지역의 발전이 불균형적인 현상이 나타났다. 당시에는 아직 이 방면에 관련된 심층적인 계렬보도가 없었다. 나는 이런 광활한 변경지역이 신문보도분야로 말하면 사각지대이므로 많은 가치있는 뉴스거리가 있을것이라 생각했다. 또한 연변일보가 생존발전할수 있는 공간이 생길지도 모르므로 취재단을 보내여 계렬보도를 해볼만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지금은 장비도 없고 자금도 없다. 어떻게 할것인가? 지방신문으로 재력이 딸리기때문에 자체로 길을 개척해야만 했다.   언론에서는 외자를 리용하지 못한다고 했지만 경제부문이나 일찍 개방한 심수특구신문 같은 언론들에서 이미 외자를 리용한 사례가 있지 않은가. 우리도 외자를 도입하여 “만리행”취재활동을 조직해볼수 있다. 1995년 여름 나는 중로 량국 동포언론인대표단 단장의 신분으로 한국을 방문하였다. 이 기회를 빌어 나는 지인인 중앙일보 경제부 박병석주임(현임 한국국회의원)을 통해 삼성그룹과 련락을 취해 취재차 한대를 지원해줄것을 요구했다. 대방에게는 취재차에 “삼성그룹찬조”라는 광고패를 내걸어주기로 했다. 그러나 외자도입과정은 어렵기만 했다. 그렇게 큰 대재벌이 20만원을 내는것은 소털 한대를 뽑아내는것처럼 쉬웠지만 이리저리 따지면서 번복하군 해 1년이 걸려서야 20만원을 받아낼수 있었다. 뒤이어 취재차를 구입하고 동남변경만리행 취재로선을 확정한후 정경락(부총편집)의 인솔하에 김창진, 허성, 민춘호 등 기자들로 취재활동을 시작했다.   1996-1997년기간 취재단은 최동단 훈춘 방천에서부터 해남도 삼아에 이르기까지 5개월에 걸쳐 8만리를 행군하면서 30개의 특집면을 편집해내여 조선문 연변일보의 대외적영향을 넓혔으며 젊은 기자들을 단련시켰다. 이번 행동에 대해 중국기자협회 서기처 소동승서기는 수도에서 개최된 기자회견장에서 “연변일보에서 조직한 만리행 보도는 우리 나라 신문분야에서 새로운 길을 열었다”고 칭찬했고 중앙선전부 신문국의 책임자는 “‘만리행’은 일대 장거”라고 평가했다. 인민일보, 광명일보 등 수도 12개 언론들에서도 이에 대해 보도를 했다. 이기간 나는 외자를 도입하여 취재활동을 진행한 연변일보의 행위를 합법화하려는 의도로 중국기자협회에서 나서서 뉴스발표회를 갖게 하였는데 그 결과 기대 이상의 성과를 거두었다.   이와 동시에 1996-1999년기간 한국의 지인 변선생을 통해 선후하여 한국 대한항공, 제일제당 등 기업으로부터 20여만원의 외자를 쟁취하여 꽃씨를 사고 연변주교통국, 주공청단위 등과 손잡고 “연길-장백산 도로에 코스모스심기활동”을 조직하여 연길-장백산, 연길-훈춘의 천리꽃길을 조성함으로써 연변을 미화하였다. 듣자니 이 꽃길은 아시아에서 가장 긴 꽃길이라고 한다. 그러나 한편 이에 대해 한국일보는 “평양으로 통하는 길”이라고 왜곡했고 외교부의 추궁을 받았다. 당시 길림성위서기였던 장덕강(현임 국무원부총리)은 연변주위에 엄중히 조사처리할것을 요구했고 심어놓은 코스모스를 밀어버리게 했다. 이번 사실의 전후시말을 잘 모르는 주위선전부장 리득룡과 연변일보사 강룡운사장은 나의 정치적전도에 대해 걱정을 했다. 그러나 나는 두려울것이 없었다. 내가 한 일은 내가 책임지고 문제가 있어도 내가 담당한다. 잘못한 일이 없는데 두려울것이 무엇이란 말인가. 이튿날 나는 외교부에 보고를 상정하여 이번 활동의 동기와 외자도입경로 및 구체적인 활동조직 등 전반 과정을 여실히 밝혔다. 내가 보고를 제출한후 기세등등하던 추궁은 사라져버렸고 코스모스심기활동은 저지되지 않았으며 나의 “벼슬”도 무사했다.   ㅡ한때 서울에서 “연변일보 한국판”을 꾸린적도 있다는데   중한간 경제개방과 문화교류가 확대됨에 따라 본 지역, 본국 울타리를 넘어 한국에서 신문을 꾸림으로써 선전을 확대하고 광고시장을 넓힐 필요성을 느끼게 되였다. 정례대로라면 지방신문으로, 소수민족신문으로 국외에 나가 신문을 꾸린다는것은 절대불가능이였다. 그러나 나는 이렇게 생각했다. 경제분야에서는 국외에 회사를 차릴수 있고 인민일보나 남방일보 등 언론계에서도 미국에 나가 해외판을 꾸린 사례가 있지 않은가. 우리 신문은 왜 안되는가? 모두 당보로서 규모차이가 있을뿐 연변일보도 국외에서 신문을 꾸릴수 있는 권리를 누려야 한다. 이리하여 1998년 하반년부터 준비를 거친후 내가 직접 서울로 건너가 김영옥지사장과 함께 연변일보한국판을 꾸리기로 하였다. 떠날 때 나는 이렇게 말했다. “이번 걸음의 성공여부는 짐작키 어렵지만 나는 책임을 질것이요. 신문개혁의 희생양으로 되여 후배들에게 길을 열어주는것도 나쁘지는 않을 것 같소.”   서울에 도착한후 중앙일보의 협조와 한국기업의 후원을 받아 자금을 해결하고 본사의 돈은 한푼도 쓰지 않았다. 5월 31일 드디여 20개면 칼라판 《연변일보한국판》 시험호가 출간되였다. 전국의 공백을 메운 이 일은 주관 주위서기 김진길의 찬양을 받았다. 주장 남상복, 부주장 전평선 등은 선후하여 중앙일보사 별관에 내건 연변일보서울지사 간판앞에서 기념사진을 남겼다. 중앙일보 등 한국의 10여개 언론사들에서도 한국판의 출간에 대해 보도하였다.  ㅡ언론사에서는 국제성적인 학술활동을 조직할수 없다고 들었는데 1998년 연변일보사 창간 50주년 행사기간 조직한  “제3회두만강지역개발국제학술회의”는 어떻게 된것인가?   일반적으로 언론사에서는 국제성적인 학술활동을 조직할수 없다는것이 국내의 불문률이다. 하지만 지난 1998년 연변일보사 창간 50주년 경축행사기간 우리는 신문사의 돈을 쓰지 않고 “제3회두만강지역개발국제학술회의”를 성공적으로 치렀다. 그 회의에는 중국, 일본, 한국, 미국, 몽골 등 나라의 50여명 학자와 관원들이 참가해 연변일보의 대외영향을 넓혔다. 언론기관으로서, 더우기 지방성 신문으로서 이런 활동을 조직한다는것은 당시로서는 허용치 않았다. 그러나 최종적으로 주위선전부와 김진길 주관서기의 지지를 얻어냈다. 그보다도 지방신문과 소수민족신문으로서 자금래원도 없고 대외초청권도 없는 상황하에서 대규모 국제성적인 학술회의를 조직한다는것은 어려움이 컸다. 공식적인 절차대로라면 외사, 공안, 안전 등 부문은 그만두고라도 가장 익숙한 선전 주관부문에서도 동의하지 않을것임은 자명한 일이였다. 나는 관광초청 등 실시가능한 융통성있는 조치를 대여 신문사의 지지를 얻었으며 최종적으로 학술회의를 성공적으로 치러냈다. 이처럼 나는 재직시 선전부, 외교부, 중국기자협회, 신화사 등과 교섭하면서 지원을 받았고 미국적한인, 한국재벌들, 일본학자 등 외국인들과 사귀면서 찬조를 쟁취하였다. 이런 와중에도 자신이 당보의 주요책임자라는 신분을 잊지 않고 당성원칙과 신문법칙에 따라 처사하였으며 또한 이러한 신분에 얽매이지 않고 외사규률을 지키면서 새로운 사유로 창조적인 사업을 전개하니 좋은 결과를 볼수 있게 되였다.   ㅡ오래동안 한국에 체류한걸로 알고있는데 그기간 주로 어떻게 활동해왔는지?   한국체류기간 나는 강의를 하는외 한국언론계와의 인맥관계를 리용해 적극적으로 연변일보를 위해 찬조를 쟁취하고 광고를 유치하였으며 남상복, 김진길 등 연변주위, 주정부 책임자들의 방한을 위해 연줄을 달아주는 등 일을 하였다. 2000년 여름 남상복주장이 270명의 대형 투자유치단을 인솔하고 한국을 방문할 때 서울에서 고층차의 뉴스발표회를 조직해줄것을 요구하였다. 1996년 “만리행”취재활동시 북경에서 중국기자협회를 통해 인민일보, 신화사 등 10여개 주요 언론사가 참가한 뉴스발표회를 조직한 경험이 있는 나는 한국언론계의 인맥을 리용해 중앙일보, 조선일보, 동아일보 등 15개 주요 언론사가 참가한 뉴스발표회를 성공적으로 조직하였다. 중앙일보에는 남상복주장의 인터뷰가 실렸고 3분의 1의 가격으로 연변을 소개하는 전면광고가 실렸다. 이에 남상복주장은 “지방의 소수민족신문사 책임자로서 이렇게 넓은 인맥관계와 뛰여난 조직능력이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라고 칭찬하였다.   ㅡ행정적으로 출세할 기회도 많이 있었을텐데   신문사업에 20여년간 몸담아있으면서 나에게도 행정적으로 발전할 기회가 있었다. 그러나 여러번 그 기회를 포기했다. 1993년 신문개혁에 열을 올리고있을 무렵 연변주위선전부장 리정문이 나에게 주위선전부 부부장으로 전근해 함께 일을 해보지 않겠느냐고 여러번 제의했었다. 그때마다 나는 사절했다. 정치에 자신이 없었고 행정쪽 일을 할 마음이 없었기때문이다. 그것은 문화대혁명후기 “516”혐의로 수감되고 로동개조를 했던 일이 나의 마음속깊이 깊은 상처를 남겼기때문이기도 했다. 그때의 억울함이 깊이 맺혀서일가 나는 “정치”하면 혐오감을 느꼈고 평생 행정정치를 하지 않겠다고 마음먹었다. 이런 연고로 1975년 “516” 력사문제가 해명된후 현위조직부에서 모 공사 당위부서기로 임명하는것을 사절하고 중학교 부교장직을 선택했으며 1980년에는 훈춘현위 선전부 부부장으로 임명하는것을 사절하고 연변일보 기자직을 선택했다. 이에 대해 나는 일말의 후회도 없이 20여년간을 시종여일하게 신문사업에만 매달렸고 지어 집착한 나머지 피곤한줄도 몰랐다. 노력은 결실을 맺기 마련이다. 1994년 나는 고급편집으로 평의되였고 선후하여 연변주기자협회 부주석, 길림성보도부문고급직무심사위원, 중국지구급신문연구회 부회장, 중국기자협회 리사를 담임했다. 1991년 중국언론대표단 일원으로 조선을 방문했고 1995년에는 중로해외동포언론대표단 단장으로 한국을 방문했으며 1995년에는 일본동아연구소의 초청으로 일본을 방문했다. 이렇듯 나는 국내외 언론계에서 많은 친구를 사귀였고 연변일보의 대외영향력을 넓혔다.   ㅡ퇴직후의 생활은?   지난 한때 오직 “신문”이라는 한우물만 파오다 여생의 마무리단계에서도 신문을 손에서 놓지 못하고 단순한 기사읽기가 아닌 평보에도 시간을 할애하면서 후배들에게 귀띰해주는것을 선배로서의 자신의 의무로 간직하고있다. 독보, 독서외 매일 인터넷과 함께 하는 시간은 하루 네시간 정도, 이 시간에는 몇몇 고정된 사이트를 훑어보는외에 8년 동안 줄곧 한국 한자총련합회 월간지에 송고하는 한자 중국어 관련기사 원고 작성 그리고 후세에 넘겨줄 자서전 출판준비 등으로 재직시절 못지 않게 바쁜 만년을 보내고있다.   퇴직생활을 더 이야기하자면 1999년 내가 서울에 나가 연변일보한국판을 창간할 때의 과정을 언급하지 않을수 없다. 당시 나는 제2선에 물러서게 되여 본의아니게 계속 남아서 일을 해야 했다. 초빙에 따라 나는 한국성공회대학에서 중국어학과를 새로 개설하고 이 학과의 첫 외국인교수로 되였다. 일을 맡았으니 잘해야 한다. 한국내에서 한창 붐을 일으키고있는 중국어열조에 부응하기 위해 나는 2년여 동안 저녁시간을 리용해 중국어 및 중국문화에 대한 책 3권을 편찬, 출판했다. 나는 저녁마다 책을 만들기에 골몰하느라 밤가는줄도 몰랐다. 나를 동반해 한국에 나온 부인이 타자를 하는 등 일손을 도왔다. 책이 출판된후 서점에서의 반응은 좋았다. 그중 《중국어간체자쉽게배우기》라는 책은 편폭(430페지)이 크고 가격(한화 2만원/책)이 비쌌지만 7차나 재판되였으며 한국 각 서점의 잘 팔리는 책으로 되였다. 나는 이 3권의 책이 출판된것에 대해 자부심을 느낀다. 그것은 이런 책들이 한국인들이 중국어를 배우고 중국문화를 리해하는데 필요한것이고 또한 중한 두 나라의 교류와 발전에 약간이나마 기여할수 있었다고 믿기때문이다. 나는 이미 《중국어간체자쉽게배우기》와 《간체자천자문》을 위해 저작권을 신청해놓은 상태다. 이것이 자녀들에게 남기는 유물이 되였으면 더 바랄것이 없겠다.   ㅡ후배언론인들에게 바라는 점이 있다면?  한마디로 요약한다면 언론인으로서 독서, 특히 신문업무리론공부에 게으름없는 노력을 경주하라고 거듭 당부하고싶다. 신문은 역시 하나의 학문이다. 기본적인 업무리론토대가 결핍한 명기자, 명편집은 나올수 없고 또 창의적으로 대담히 사업을 추진하는 현명한 지도자도 나올수 없다. 《신문학개론》, 《취재학》, 《편집학》 원리공부는 기본이고 《신문전선》(인민일보사 출판), 《중국기자》(신화사 출판) 등 국내 언론미디어분야의 권위성간행물을 필수리론공부도서로 정하고 열심히 공부하라. 그러면 곧바로 관념이 갱신되고 사유가 새로워지며 아울러 국내외 언론발전추이정보를 정확히 파악할수 있어 참신한 아이디어가 창출되는것은 물론 담략이 커지고 지혜가 늘고 방법도 생기게 될것이다.    윤재윤 기자 인터넷료녕신문 2010.9.25 원문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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