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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해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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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다시 느껴 본 생명 댓글:  조회:560  추천:0  2018-02-21
   어느 여름날의 황혼에 바다를 마주하고 조용히 앉아 두 눈을 감고 시원히 불어오는 바다 바람을 폐부로 느끼며 복식호흡을 하다가 천천히 눈을 뜨니 시야에 안겨 오는 것은 모래를 파며 장난하는 우리집 쌍둥이와 무연한 바다뿐이다. 파도도 조심스레 해안에 닿는 이 조용한 저녁에 눈앞의 화면은 나로 하여금 온 세상이 다 내것 같게 한다.  ‘살아 있다는 게 이렇게 아름다운거구나! ’하는 느낌에 가슴이 뿌듯해진다.    언젠가는 유방암이라고 오진을 받고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아서 밤새껏 울어 본적도 있고 장자의 글 몇줄 읽고 나도 이제는 죽음을 겁내지 않고 초연히 속세을 떠날 수 있을것 같아서 남편에게 ‘유언’까지 남긴 적도 있다. 그러나 텔레비전에서 대지진의 처참한 장면이 나올 때마다 내곁에 붙어 앉으며     ‘엄마는 지진 나도 죽으면 안돼…’,     ‘다쳐서 병원에 가도 나하고 꼭 같은 병원에 가, 절대 날 잃어버리지 마…’      이렇게 걱정에 떠는 딸애를 보니 생명이란 원래 아무때나 초연할 수 있는게 아니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원래 내가 초연히 갈 수 있다는 것이 중요한것이 아니라 가야 할 때 가는 것이 중요한 것이었다.     며칠전 올해 89세 나는 한 고향마을 할머니를 만났었다. 그 할머니는 너무도 정정하시고 정신이 말끔하셔서 나는 ‘아름답게 늙으셨다’는 말이 무슨 말인지 알게 되었다. 그러면서도 저도 모르게 저 자그마한 체대에 어디서 에너지가 생겨서 여토록 이렇게 몸과 정신을 지탱할 수 있는 것일까하는 의문이 머릿속에 파고 들었다. ‘시집도 안 간 여자애를 혼자 밖에 내놓을 수도 없고 해서 이렇게 따라왔어…’.      손주들 다 키워주셔서 아들집에서 향수를 하셔도 되겠건만 이번에는 외손녀가 걱정이 되셔서 이렇게 오신거다. 아직도 할머니의 기력을 지탱하고 있는 그 에너지는 바로  이 책임과 의무였던 것이다. 할머니의 생명은  불타는 황혼처럼 아름다웠다.     동방구가(东方九哥)의 ‘헛되이 죽지 말자’란 말이 생각난다. 살아 있다면 꼭 죽을 거라는 것을 의미한다. 때문에 슬퍼할 것도 없고 무서워 할 필요도 없다. 태어날때부터 이미 죽음으로 방향이 정해 진 인생길이지만 착실하게 걸어 가고 아름다운 흔적을 남기자. 아니, 죽을 때까지 태양처럼 자신을 깡그리 불태워서 재가 돼서 아무런 흔적이 남지 않는다해도 괜찮다.     내 존재가 한때 누구에게는 행복이었고  내가 사라짐으로 해서 누구도 비참해 지지 않는다면 그때가  바로 내가 초연히 가도 될 때인 것이다. 아직 씩씩하게 살면서 부모와 자식을 위해 의무와 책임을 다 하는것이 오늘이다.     내가 있어서 하늘이 있고 내가 있어서 바다가 있고 내가 있어서 행복한 우리 집이 있다. 그래서 나도 즐겁고 행복하다.
6    사랑의 기술 댓글:  조회:362  추천:0  2017-12-06
  사랑이란 내가 하나 주면 그쪽에서 하나 받을 수 있는 사과같은 것이 아니다. 물론 이심전심이라는 말도 있지만 사람들이 꼭 같은 경력, 꼭 같은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지 않으면 서로 눈빛만 보고 상대의 마음을 알 수 있다는 것은 불가능한 것이다. 때문에 사랑에는 기술이 필요한 것이다. 부모는 대개 거의 다 자기 자식을 사랑한다. (물론 특수한 예도 있지만) 하지만 사랑하는 방법이 제각기여서 똑같이 자신의 사랑을 다 베풀었다고 생각해도 어떤 사랑은 기적을 창조하지만 어떤 사랑은 응당히 있어야 할 효과를 보지 못하는 것이다. 물론 부모의 사랑은 그 어떤 보답을 위한것은 아니지만 응당 사랑받는 자식들로 하여금 그 사랑의 따뜻함과 행복을 느끼게 하고 또 그것이 그들의 생활에 버팀목이 될수 있게 해야 하는 것이다.  에히리 프롬의 에는 이런 말이 있다. ‘당신의 사랑이 사랑을 낳을 수 없는 사랑이라면 당신의 사랑은 무능한 사랑이며 불행한 사랑이다.’ 고중입학시험을 앞둔 아들이 공부는 안하고 텔레비전을 본다고 야단을 쳤다가 아들이 수면제를 먹고 자살을 시도해 온 가족의 질책 대상이 된 한 어머니를 만난적이 있었다. ‘저는 자신의 모습이 얼마나 가련하게 느껴지는지 몰라요. 저를 이해해 주는 사람도 없고 어디가서 누구한테 하소연하면 되겠는지도 모르겠어요.’ 기실 그녀에게 아들은 생활의 전부이고 꿈이었다. 하지만 그녀의 불행은  그녀의 이러한 사랑을 아들은 그것을 사랑이라고  받아들일 수가  없다는데 있는 것이다. 우리 동양문화에서는 사랑의 기술보다는 ‘엄’을 더 숭배해 왔다. 중국에는 ‘엄사출고도(严师出高徒),곤봉출효자(棍棒出孝子)’라는 말이 있는가하면 또 때리는 것은 사랑이고 욕하는 것은 친절이라는 말도 있다. 그래서 가정교육이나 학교 교육에서 자녀나 학생들에게 엄격한것이 널리 찬송을 받아 왔다.             그리고 동양사람들은 감정이나 내심세계를 쉽게 드러내지 않는 특징을 가지고 있어 부모가 자식에게 ‘사랑한다’라는 말을 하는 것을 아주 쑥스럽게 생각한다. 자식이 커감에 따라 사랑한다는 말은 부모들의 입에서 멀어져 가고  부모들은 부모의 권위로 자식의 일체를 지배하려고 한다. 깊숙이 뜨겁게 지니고 있는 부모의 사랑은 자식이 다 커서 어른이 된 후에는 차차 이해할 수 있지만  어린 자식들은 성장과정에서 그 이성적인 사랑을 이해하고 받아들이 기는 너무나도 힘들다. 나의 친구인 대학교 교수 김여사는 이렇게 자신의 경력을 이야기했다. ‘고중을 졸업할 때까지 나는 우리 아버지가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얼마나 상심했던건지 몰라요. 나는 온 세상 사람들이 다 나를 싫어해도 부모만은 나를 사랑해주기를 바랬어요. 그러나 우리 아버지는 한번도 사랑한다는 말을 하지 않았거든요. 그래서 몇번이나 학업을 포기할 생각도 해 봤고 심지어는 가출할 궁리까지 해봤었어요…… ’ 부모에게  효성이 지극한 그녀에게도 이러한 고통이 있었다는 것이 좀 뜻밖이었다.   중학교를 다닐 때 기숙사에서 한두달 지내고 나면 너무 집생각이 나서 선생님한테 이핑게 저핑게 대서 겨우 청가맡아 밤차를 타고 무서운 밤길을 걸어서 집에 가면 문에 들어서기 바쁘게 떨어지는 것은 아버지의 훈계였다고 한다. 하라는 공부는 안하고 뭣때문에 돈팔며 집에 오느냐고…, 그때마다 그녀는 방구석에 돌아누워 얼마나 소리없이 울었는지 모른다고 한다. 어린 자식의 여린 심정을 이해해 주지 않고 돈밖에 모르는 아버지가 너무 야속하고 무정하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대학교를 다니면서부터 차츰 아버지의 심정을 이해할수 있고 부모의 진정한 사랑을 체득할수 있었지만 그전에는 정말 힘들었어요’. 그녀의 경력을 듣고나니 나도 그녀의 심정을 얼마만큼 이해할 수 있을것 같았다. 사실 나도 대학교를 다닐 때 한 기숙사 친구가 ‘사랑하는 나의 딸에게…’라고 쓴 부모의 편지를 받는 것을 보고 얼마나 부러워 했던건지 모른다. 전통적이고 보수적인 그 시대에 나서 자란 우리도 이러했거늘 생활의 품질을 요구하는 오늘의 신세대는 감정에 대한 기대치가 더 높은 것이다. 때문에 옛날처럼 많이 낳지도 않고 한 둘만 낳아 기르는 오늘의 부모들은 자식을 몸도 마음도 다 튼튼하게 키우려면 사랑의 기술을 가지고 있어야 하는 것이다. 하지만 어느 분야나 막론하고 ‘기술을 자기 것으로 만들려고 한다면 자신의 생활 전부를 이에 바치지 않으면 안된다.’ 유명한 화학가로부터  멋진 피아니스트까지 성공한 이들을 살펴보면 이처럼 하지 않고 성공한 사람은 하나도 없다. 때문에 진정으로 자식의 버팀목이 될 수 있는 성공적인 부모가 되려면 자신의 생활 전부로 열심히 노력하여 자식에게 많은 것을 줄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하지만 ‘준다는 것 가운데 가장 중요한 영역은 물질적인 면보다 인간적인 영역이다.’ 애들을 오늘은 할머니집 내일은 큰집 나중에는 보모에게 맡겨서 키우며 돈벌이를 하는 부모들 가운데 물론 자식이 성공하는 예도 있지만 더 많은 것은 자식들이 자신의 비전을 상실한채 돈 쓸줄 밖에 모르는 건달이 되는 경우나 배워야 할 나이에 바로 잡아주는 사람이 없어 기회를 놓히고  때늦게 뉘우치고 고생하는 경우다.   ‘어떠한 활동도 사랑과 같은 크나큰 희망과 기대를 가지고 시작한다면 결코 실패로 끝나는 일은 없을 것이다’. 아무리 생계를 위해 바삐 돌고 있어도 자식과 가족에 대한 사랑의 희망과 기대를 잊지 말고 열심히 일하는 만큼 사랑의 기술을 파악한다면 예린 심령들이 사랑에 고갈들지 않게 할수도 있는 것이다. 애들과 아무런 상의도 없이 훌쩍 떠나서 몇날 몇달 아무런 소식도 없다가 불쑥 나타나서 돈 한줌 흠뻑 쥐어주는것 보다 어디서 무슨 일을 하든지 열심히 일하는 모습으로 자식의 방향이 되어주고 자주 연락해 몸은 같이 있어주지 못해도 마음만은 언제나 자식을 감싸줄 수 있다면 역시 훌륭한 부모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시시로 옆에서 따뜻한 눈길로 격려해주고 포근한 손길로 이끌어 주는 부모의 사랑은 결코 화려한 선물이 아니라 온실안의 화초같은 어린 자식들이 그 나이 그 시절에 마땅히 누려야 할 조건이다. 사랑의 참된 함의를 알고 사랑의 기술을 가지고 자식을 뜨거운 감정을 지닌 진정한 인간으로 키운다면 이들은 또 자신의 사랑을 세상에 널리 뿌려 사회를 더욱 아름답게 꾸며 갈 것이다.
5    당신과 함께여서 감사합니다 댓글:  조회:889  추천:0  2016-07-15
당신과 함께여서 감사합니다   6월의 세번째 일요일이 부친절이라고 한다. 언제부터 생겨난 명절인지는 모르겠지만 매년 이렇게 아버지 사랑을 헤아려 보고 또 감사해 할수 있는 이 날이 있어서 참 좋다는 생각이 든다. 왜냐하면 언제나 자식을 보살펴주고 따뜻이 감싸주는 익숙한 어머니 사랑과 달리, 깊고 넓은 아버지 사랑은 름름한 산처럼 변함없이 자식을 지켜주지만 산속에 있으면 그 산이 안 보이듯 자식들은 너무 오래 그 사랑을 무시하게 되기 때문이다. 男남자는 열 입을 먹여 살리는 능력이 있어야 한다고  가족의 책임을 온몸으로 떠메고 험한 세월 헤쳐 가는 아버지들은 일에 바쁘고 사랑표현은 서툴어서 자식들이 아버지라는 산이 보일 때까지 멀리 가기 전에는 알 수가 없다. 이심전심이라는 말은 있지만 제대로 표현할 줄 모르는 아버지때문에  사춘기에 힘들었던 자식도 있고 실망과 오해를 하는 가족들도 많다. 하지만 실패와 좌절에 돌아서서 혼자 탄식하고, 힘든 일 있어도 내색 내지 않고, 처자들 앞에서는 언제나 꿋꿋한 모습만 보여주는 이 세상 아버지들의 이러한 사랑이 있어서 우리의 인생에 신념과 용기가 있게 되는 것이다. 버트 헬링거는 이렇게 말헸다. ‘자신의 부모를 자랑스러워 해라. 부모의 원래 모습으로 그들을 경애하고 받아 들여라. 우리가 대지의 원래 모습을 사랑하고 받아들이며  자랑하듯이. 부모의  생과 사, 건강과 질병, 시작과 끝을 포함하여…모든 것을 받아 들이고 또 자신의  모든 것을 드려라. 사랑으로…’ 이달에는 산처럼 나무처럼 가정을 지켜주는 아버지들의 지친 어깨에  따뜻한 손 얹고 말씀 드리자. 이 생에 당신과 함께여서 감사합니다. 아버지, 수고하셨습니다.  
4    차 한잔에 하늘을 날다 댓글:  조회:475  추천:0  2016-03-16
                                             오늘 일기예보에 요즘 위해의 기온이 30년래 제일 추운 고봉에 달했다고 초저온폭설경보가 나오고, 우리애들 고중도 토요일에 학교 나가서 하는 자습도 날씨 원인으로 취소했다고 메시지가 들어 왔다. 고작 영하 12도까지밖에 안 내려가는구만 다들 야단이다. 이때 쯤이면 흑룡강에 있는 우리고향은 더 많이 추울 거다. 흑룡강성에서 거의 40년 살다 나왔지만 지금 다시 그 추운 곳에 돌아가면 적응할 수 있을런지 의문이다.   그러나 돌이켜보면 그 추운 곳에 아주 많은 따뜻한 기억들이 있다. 겨울날 문을 떼고 들어서면 더운 김에 감싸여 아무 것도 안보이는 부엌간에 밥하는 엄마가 있었고, 방구들이 뜨거워 잠 못자는 날에는 맛있는 음식을 먹었고, 떵떵 어는 창고에는 겨우내 녹여 먹을 수 있는 엿이 있었다. 그래서 제일 추울 때는 기온이 영하 30도까지 내려가도 거기는 종래로 가 얼어죽은 그 겨울처럼 춥지 않았던거 같다. 아무리 추운 계절이라도 마음속에 따뜻한 정이 있으면 어디서나 따뜻하게 살 수 있는 것 같다.     다행이 이미 겨울방학을 해서 나는 추운날 외출을 적게 해도 된다. 그래서 쇼핑도 될수록 적게 나가고 집근처가게에도 수다떨로 안 나간지 오래다. 그러나 친구 청설이 ‘나 지금 차 끓이고 있는데…’하고 메시지만 오면 참지 못하고 달려 간다. 한번 앉으면 반나절 시간이 후딱 지나가 버린다. 친구 사무실은 심리상담실이라 샘물이 솟고 안개 감도는 선경과는 비할 바 못 되지만 그래도 분위기가 아늑한 편이다. 그래서 그렇게 반나절 여유롭게 차를 논하고 인생을 담하다나면 정말 어느 정도 속세를 벗어난 듯 하기도 하다.     한번 앉으면 이 차 저 차 맛보다나니 오후내내 마실 때가 많다. 그렇게 차를 마시다가 문뜩 의 묘옥이 ‘한잔 하는거는 맛보는거고, 두잔하는거는 갈증을 푸는 바보고, 석잔하면 물 먹는 소나 당나귀다’라는 말이 생각나 마주 보며 웃기도 한다.  차에 대해 잘아는 묘옥의 뜻은 차를 마시는 것은 향수고 어떤 경지인만큼 아주 자세히 음미해야지 꿀꺽꿀꺽 아무렇게나 마시지 말라는 뜻이겠지만 일상에서 그렇게 하기란 참 불가능하다.        오늘 책을 보다 당조唐朝시인 노동卢仝의《七碗茶诗》를 보고 ‘소나 당나귀’ 니 우려할 것 없이 당당하게 차를 실컷 마셔도 되는 이유를 찾아냈다.       당조시인 노동은 《走笔谢孟谏议寄新茶》란 시에서 필묵을 날려 음다의 좋은 점에 대해 후세사람들이 절찬하는 글을 남겼는데 첫잔을 마셔서부터 일곱잔까지 부동한 느낌과 기분을 적어 《칠완다시七碗茶歌》란 이름이 생겼다.   이 시에서 시인은 친구 맹간의가 보내온 차를 받고 매우 기뻤지만 찻잎을 뜯어서 차로 만들기까지의 노고를 생각하고 소중히 여겨 문을 닫아걸고 혼자 조용히 맛보았다고 한다. 차의 정화가 우러나 맑고 아름다운 차탕에 구름같은 흰김이 서려 올라 맴돌며 실내에 향기 그윽하자 시인은 필을 날려 일곱잔을 마신 느낌을 단숨에 써 냈다고 한다.     첫잔은 목을 달콤히 적시고, 둘째잔은 답답한 가슴을 틔우는구나 셋째잔이 마른 창자 들추니 거기에는 5천권의 글이 들어 있더라 넷째잔에 가볍게 땀이 나니 평생에 불평한 일들 모공으로 흩어지고 다섯째잔에 온몸이 거뜬하고 여섯째잔에 선기가 통하더라 일곱째잔에는 겨드랑에 바람이 이는 게 먹지 말았어야 했구나 봉래산은 어디메냐? 옥천자가 구름타고 가겠노라.     아름다운 시구는 시인의 도고하고 아치한 의지를 나타내 후세문인들의 사랑을 많이 받았다. 차는 당조 초기 유명한 ‘4걸’ 시인 로조령의 직계후손으로 유가의 정통을 명으로 여겨 春秋摘微 네권이나 써내고도 당인의 권력다툼과 조정의 부패에 크게 실망하여 벼슬을 버리고 시에 몰두하여 있던 시인에게 있어서 단순히 목을 추기는 음료인 것이 아니라 드넓은 정신세계를 펼쳐주고 있다. 일곱째잔까지 마시고 시인은 크게 깨닭고 세속을 벗어나 마음이 하늘을 날게 된다   노동의 를 다 읽고나니 커다란 찻잔이 밑굽을 들어내고 나의 사색도 옥천자를 따라 봉래산을 찾는다.   
3    눈길 댓글:  조회:437  추천:0  2016-03-01
눈 길 웬 영문인지 금년 겨울에 위해에 눈이 무지로 잘 내린다. 불과 몇 분도 안되는 사이에 길에 눈이 한치도 넘게 쌓인 것 같다. 누구 발자국도 없는 새 길을 걸으면서 누군가가 바닷가에서 발자국이 보고 싶어서 돌아서서 걸었다는 말이 생각났다. 그래서 나도 몇 번이나 뒤돌아 눈위에 찍힌 내 발자국을 본다. 그저 앞으로 나갈욕심으로 걸어 온 발자국은 정연하지도 멋지지도 않았다. 성큼성큼 걸어 온 것 같은데 발을 끌고 걸은 것 같이 스쳐서 길쭉길쭉한 게 하나도 우아하지 않았다. 언제나 깨끗한 눈위에 아무렇게나 찍혀있는 발자국을 볼 때마다 맹랑해했던 자신이 우습게 여겨진다.   누구도 지나가지 않은 생눈판을 보면 그 눈판이 아까워서 발자국으로 그 위에 꽃도 찍고 벌렁 누워눈 위에 몸사진도 찍어 놓던 시절이 생각난다. 누구도 지나가지 않은 그런 생눈판이 왜 그렇게도 좋던지…  심술쟁이가 막대기만 둬번 휘두르면 깨어지고 언젠가는 그 위로 차 바퀴가 지나가고 또 발자국들이쌓여서 내 발자국은 흔적조차 찾을 수 없게 되도 매번 생눈길에 내 발자국을 제일 먼저 찍어 놓을 때면 그래도 가슴이 뻐근했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지 그런 생눈길이 두려워졌다. 눈판에 미끄러 넘어질까봐 눈 치기를 기다려 나가고 눈 치는 사람이 없는 길에서는 다른 사람이 남겨 놓은 발자국을 조심조심 따라 밟으며 나간다.그리고 아무리 좋은 생눈판을 만나도 벌렁 나가 누워 볼 엄두는 더욱 못 낸다. 이렇게 발밑의 눈길을 두려워하다나니 발 앞만 내다보며 걷게 되고 내 시선은 재빛구름 사이로 빼꼼이 보이는 푸른 하늘도, 두터운 눈모자를 쓰고도 여전히 열심히 꿈 방울을 흔들고 있는 길가의 플라타너츠도 볼 겨를이 없다. 넘어지는게 뭐가 대단해서…어렸을 적에는 이렇게 눈이 많이 오면 못나게 만든 썰매를 가지고도미끌고 가파로운 곳만 찾아다니며 넘어지며 뒹굴며 놀았는데… 겨울 눈판에 넘어지는 것은 옷 더럽혀 엄마한테 혼 날 염려도, 그리고 많이 입어서 다칠 걱정도 없어서 아무런 부담도 없었다. 그리고 누구나 다 넘어지고 뒹굴 때가 있어서 서로 창피한 느낌같은 것은 더욱 없었다. 그러나 이젠 넘어지면 사람들이 웃을까봐, 넘어지면 햇빛을 피하고 살아 온 골기 부족한 뼈가 부러질까봐 두려워하는 자신이 비겁하게 느껴진다. 이렇게 눈이 펑펑 내리는 날엔 일찍 돌아가신 할머니가 생각난다. 할머니는 해볕에 반짝이는 눈비탈에서 미끄럼 타는 하얀 한복의 외태머리 소녀이기도 하고 짐보따리를 이고 대여섯살 아들의 손목잡고 막막한 눈길을 헤쳐가는 젊은 아낙네기도 하다. 눈이 점점 더 세차게 퍼붓는다. 이제는 큰 길에 힘들게 가던 차들도 안보이고 시선을 찌르던 빌딩들도 보이지 않는다. 세상을 뒤덮은 뽀얀 눈보라와 산처럼 보이는 가로수 아래에서 세상은 다 내 것이 되었다. 나는 두팔을 벌리고 눈꽃들의 세례를 받는다. 앞에 할머니의 뒷모습이 보인다…  
2    도토리 댓글:  조회:549  추천:0  2016-02-25
                                                                                        화분에 심은 도토리가 이젠 제법 숲을 이루기 시작한다.  내 창턱에서 이루어질 청신한 수림을 꿈꾸며 산에서 도토리를 주워다 싹을 틔우고 또 그것들을 화분에 심을 때까지 나는 내가 원하는 것이 꼭 도토리수림이어야만  한다고 생각한 적은 없었다. 그저 산동대학 뒷산에 산책갔다가 같이 갔던 친구가 도토리인지도 모르면서 화분에 심어 분경(盆景)을 만들겠다고 열심이 줍길레 나도 덩달아 시작했던 것이다.     그전에 수림 분경을 만드는데 유자씨나 용안씨를 종자로 쓸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별로 마음이 동하지 않았다. 아마 그것들을 과일로는 알고 있어도 식물로는 너무 낯설었기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도토리만은 나에게 너무 익숙해서 이렇게 자연스럽게 다가올 수 있었다.     처음 위해에 전근해 왔을 때 마흔이 넘어서 직장을 바꾼 탔인지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기가 좀 어려웠었다. 수업시간만 맟추면 되서 출퇴근 시간이 자유스러워졌지만 다들 자기수업만 끝나면  바로 퇴근해버려 동료들 사이에도 서로 얼굴 부딫칠 기회가 별로 없었다. 그래서 일년이 넘도록 누구나 서먹했고 나 자신 또한 외롭기 그지없었다.  그때 나에게 가장 친하게 다가온 것이 바로 토끼풀과 도토리였다. 땅까지 동북과 달리 낯선 황토였지만 길옆 가로수 아래, 캠퍼스 잔디밭에 흔하게 심어져 있는 토끼풀과 제일 가까운 산동대 뒷산이나 집앞 공원에서까지도 쉽게 볼 수 있는 도토리는  내가 어려서부터 알고있는 식물이어서 마치 고향친구 같았다.  그리고 도토리라는 단어는 내가 한족학생들에게 한국어 발음교육을 시킬 때 꼭 사용하는 단어이기도 하다. 현실생활에 별로 이용도가 높지 않은 단어이지만  ‘ㄷ’음과  ‘ㅌ’의 발음을 구별시켜 주는데 제일 적합한 단어라고 고집하는 나 자신 역시  의 다람쥐 스크랫처럼 도토리에 특별한 애착이 있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그러나 요즘 도토리 분경을 만든다고 분주를 떨지 않았더라면 나는 자신이 이렇게 도토리를 좋아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까맣게 모르고 살뻔 했다. 모르고 살았다기보다는 아마 도토리를 너무 하찮게 여겨 왔기에 전혀 생각해 보지 않았다고 해야 더 적합할것 같다. 인간은 흔히 자기 주변에 있는 존재들의 소중함을 모르고 사는게 일쑤이니까…     어려서 우리동네 산에서 나는 모든 열매는 다 관심을 받을만 한 가치가 있었다. 개암이나 가래추자는 까먹을 수 있고 산포도는 술에 담그고 오미자는 약으로 쓸 수 있었는데 유독 도토리만은 그렇지 못했다. 신이 조각해 놓은 것처럼 정교롭게 생긴 깍정이에 말끔하고 매끈한 도토리가 너무 예뻐서 어렸을 적에 한우큼 주워 와서 할머니께 먹을 수 있냐고 물었더니 할머니는 ‘옛날에 먹을거 없을 땐 묵해서 먹었었는데…’ 하시면서도 도토리를 잡수신 기억이 좋은 기억이 아닌 표정을 지으셨다. 그 때도 먹을 것이 별로 넉넉치 않았지만 분명 그 정도만 되도 도토리를 먹지 않는다는 뜻이었다.     그리고 도토리와 관련있는 속담을 찾아보아도  '도토리 키재기',  '개밥에 도토리' 이런 말들 뿐이다. 도토리와 행복한 기억이라든가 아름다운 소원 따위는 아무런 인연이 없는 것 같다. 물론 지금은 건강식품이라고 중국에서도 한국상점에 가면 도토리가루나 도토리묵을 흔히 살 수 있지만 내가 어렸을 적에 도토리는  누구도 거들떠 봐 주지 않는 고독한 열매였다.     한국사람들은 도토리를 모르는 사람이 거의 없지만 중국에서는 조선족말고 도토리를 아는 사람이 별로 많지 않은 것 같다. 그 유명한 의 다람쥐 스크랫의 도토리도 중국의 인터넷 통합검색 百度에 榛子(개암)이라고 번역되어 있고 내가 매번 도토리라는 단어를 가르칠 때마다 학생들의 표정 역시 막연했다. 하지만 그럴수록 나는 도토리가 나만 알고 있는 보물 같아서 괜히 흥분되곤 한다.     인간은 고독을 참지 못하면 자신을 망가뜨리고  인정을 받지 못하면 삐뚤어 진다. 하지만 도토리는 이 땅에서 누가 알아주든 말든 개의치 않고  갈채없는 세월에도  비록 자그마해도 깍정이까지 완벽하게 예쁜 열매를 맺고 지며 세월을 반복한다. 그래서 우리 조상들이 도토리 나무를 참나무라고 했을까? 도토리를 참나무라고 한 우리 조상들의 지혜에 탄복하지 않을 수 없다.     고독을 이겨내며 생명에 충실하는 참나무는 또 종래로 자포자기하지 않는다. 아무리 척박한 땅에서 자라도 억척같이 무성한 잎으로 자신을 단장하고 찬란하게 가을 끝까지 벋치다가 한파에 시달려 잎이 다 말라버려도 겨우내 풍성한 갈색 깃발을 흔들며 생명의 찬가를 부르면서 봄을 기다린다. 우리 민족의 강인한 생명력이 참나무를 참 많이 닮았다고 느껴진다. 너무나도 치밀할 정도로 완벽한 도토리를 보면서 나는 도토리를 닮고 싶어 진다.   참나무를 닮으면 나도 참인간이 되겠지 하는 마음에서…  
1    황혼 단상 댓글:  조회:1219  추천:5  2016-01-28
    어려서 시골에서 살 때 매번 서쪽 하늘이 빨갛게 불타다가 해가 산뒤로 넘어갈 때면 나는 그 산너머에는 아직 해가 있을 거라고, 산때문에 해가 안 보인다고 생각했었다. 그때 산골에서 지는 해는 언제나 아직 빛을 낼 수 있는 빨간 해였던 것 같다. 그리고 황혼도 아주 황홀했던 것 같다.그러나 몇해전부터 연해도시인 위해에 나와 살면서 바닷가에 앉아 망망한 바다에서 지는 해를 보고 황혼의 서글픔을 알게 되었다.     어느 무더운 여름날, 해수욕을 가자고 조르는 애들의 성화에  저녁을 일찍 먹고 바닷가에 갔었다. 6시가 넘어서 이제는 해가 져서 햇빛에 탈 염려가 없을 줄 알고 같던 것이  웬걸 서쪽 바다위에는 해가 아직 덩그러니 있는 것이였다.    저녁 해였지만 하루종일에 달아서 더위가 가셔지지 않은 모래위에서 비록 강하지는 않아도 여전히 그 열기를 느낄 수 있었다. 그래서 저녁이라고 양산을 가지고 나오지 않을 것을 좀 후회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열기가 다 빠져버린 해는 지친듯 점점 희미해지기 시작했다. 탈데로 다 타 버리고 식을데로 다 식어가는 바다의 황혼은 시골의 황혼보다 길었으나 서글펐다.     이때의 해수욕장은 수영고봉이다. 바닷물도 아직 따뜻하고 저녁도 든든히 먹은 수영객들은 이 황혼에 해수욕으로 하루의 더위를 가시느라 정신이 없다. 그러는 사이에 하늘도 바다도 차츰 밀려오는 재빛속에 잠기기 시작했다. 애들을 보느라고 잠깐 눈 뗀 사이에 희미하던 해는 더는 찾아 볼 수 없게 사라져 버렸다. 그 날의 황혼은 이렇게 불타는 노을도 없이 그저 하늘을 약간 벌겋게 하려다가 서서히 밀려오는 재빛속에 사라지고 말았다.     나는 매번  그런 황혼을 볼 때마다 동네 단화할머니가 머릿속에 떠오른다. 걸어서 10분밖에 안되는 지척에 살고 계시지만 나도 겨우 명절 때밖에 못 가 봤다.  뭐가 그렇게 바쁜지? 아니 바쁘다는 것은 그저 양심을 위안하는 핑게인지도 모른다. 연세가 90이 넘으셨지만 정신력도 좋고 깨끗하신 할머니는 내가 갈 때마다 내 손을 붙들고 하시는 말씀이     ‘나 이거 안 죽어서 어떡하니?’     이 말씀이다.     ‘할머니는 언제나 이렇게 깨끗하시고, 정신력도 좋으셔서 얼마나 좋아요? 할머니 이게 바로 복이예요!’     내가 이렇게 말씀 드릴 때마다    ‘어이구, 복은 무슨 복…’     하고 중얼거리시며 얼굴을 돌리시는 할머니의 눈길은 더없이 고독하고 쓸쓸하다. 할머니는 이제는 기력이 모자라서 밖에 나가지 못하시고 많이 누워 계신다고 한다. 몸이 마를대로 말라서 우리11살짜리 딸애의 몸집보다도 더 적으신 것 같다. 해외에 간 자식들이 언제 오냐고 물으면 더 외로워 하실 것 같아서 물어 보지도 못하고 그저 동생 곁에 가 계시는 우리 엄마 아버지 소식에 할머니네 북경에서 공부하고 있는 손주들의 이야기를 하다가 온다.     그러나 이번 추석에 갔을 때 할머니네 보모가 한 말이 지금도 짜꾸 내 귀전을 두드린다.    ‘제가 들어 온지 석 달 됐는데 이렇게 와 봐주는 사람은 처음이예요… 집은 좋은 거 샀어도 자식들이 다들 힘든가 봐요… 오늘 명절이라고 처음 과일을 샀어요. 평일에는 이런것도 못 사 드려요…’     세상도  더 커지고 발길도 더 먼데까지 닿는 오늘, 도시의 아파트는 더 높아지고 현대화한 교통수단으로 세상의 거리는 더 짧아지고 있으나 현시대 인간의 정은 점점 더 멀어지고 있지 않는가 싶다.    ‘부모재 불원유(父母在,不远游)란 전통은 현실의 새로운 개념속에 점점 희미해져가고 오늘날 노인들에게 자식들의 만년의 보살핌과 임종의 배려는 사치한 꿈으로  되어 가고 있는 것 같다.    그래서 서쪽 하늘의 황혼은 매일 그리움과 고독으로 불타고 지고 하는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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