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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상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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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2    몰랐던 버리는 재미 댓글:  조회:2481  추천:0  2015-08-17
몰랐던 버리는 재미       수련할 때 21일, 49일, 100일 이렇게 기간을 두고 하는데 그 런 숫자가 기적으로 의미가 있는 것인가요?      다 의미가 있는데 21일은 삼칠일이라고도 하죠.  21일은 세포가 다시 태어나서 바뀔 수 있는 기간입니다.  아이가 태어나면 21일 동안 줄 쳐놓고 못 들어가게 하는 이유가  21일 정도는 되어야만 세포주기가 다시 시작되어 체질이 바뀌고  기가 바뀌고 몸이 바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무슨 일이든 21일은 해봐야 효과가 나타나는 것이죠.         선생님 책에 “육성시의 방향”이라는 내용이 있는데요.  “육성시”라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겁니까?      육성시란 자기를 구축하는 시기입니다.  항상 나누는 시기가 있고 육성하는 시기가 있다고 말씀 드렸습니다.  육성하는 시기에 자꾸 남에게 나눠주려고 하면 안 됩니다.      항상 때가 있어요.  육성은 자신을 구축하는 시기인데 그 때의 방향을 얘기하는 것입니다.  이 수련도 구축하는 시기가 있고 버리는 시기가 있어서,  버리는 것 위주로 하다가 육성하는 것 위주로 하다가 이렇게 번갈아 합니다.          수련을 하다 보면 언제쯤 그 버린다는 것을 느낄 수가 있나요?  아직까지 버린다는 것을 잘 모르겠는데요.      그러니까 하나라도 버리고 난 다음에 얼마나 홀가분한지 얘기합시다.  경험하지 않은 얘기는 하지 말도록 하죠.      본인이 잘 몰라서 그러는데 지금 버리는 공부를 하고 있습니다.  항상 한 가지만 목표하십시오.  한꺼번에 여러 가지를 다 버리려고 하면 힘들어서 나중에 수련하기 힘들어져요.  부담스러워지죠.      한 가지씩 버리십시오.  제일 빠른 방법은 본인이 제일 버리기 어려운 것을 버리는 것입니다.  자질구레한 습관을 버리는 것은 쉽습니다.  예를 들어 과식하는 습관이 있다,  군것질하는 습관이 있다 하면 그걸 버리는 거예요.  그렇게 쉬운 것부터 시작하는 방법이 있고,  또 하나는 자나깨나 자기를 괴롭히는 중대사항 같은 큰 것,  자기한테 비중을 많이 차지하는 것을 버리는 방법이 있습니다.  큰 것을 먼저 버릴 수만 있다면 작은 것들은 버리기가 그렇게 힘들지 않아요.      그러므로 “나는 작은 것부터 차근차근 버리겠다” 할 수도 있고 “나는 큰 것부터 버릴 수 있다” 할 수도 있는데  빠른 방법은 큰 것을 버리면 나머지는 쉬워집니다.      버리면 일단은 편해지죠.  창고에 지저분하게 잡동사니가 다 쌓여 있을 때는 들어만 가도 끔찍해요.  치울 엄두가 안 나는데 거기다가 먼지까지 쌓여 있으면 더 하고요.      그런 것처럼 본인들의 마음상태도 많이 가지고 있다가  수련을 하면서 잘 정돈된 방처럼 되는 거예요.  들어가면 벌써 기분 좋고요.  그런 상태에서 가지고 있는 것들을 점점 줄여 가는 것입니다.  더 줄일 게 없나 자꾸 보게 되고,  나중에는 거의 줄일 것이 자기밖에 없어지는 그런 상태가 되는 과정입니다.      버리면서 기분 좋고 홀가분한 것은 버려보지 않으면 모릅니다.  버리는 재미를 알게 되면 “아, 뭐 버릴 것 없나” 하고  자기한테서 버릴 것을 자꾸 찾게 됩니다.  버리는 그 시원함이란 굉장하죠.  다 끌어안고 있을 때는 굉장히 머리가 아픕니다.  가진 것만큼 머리가 아프고 버린 것만큼 홀가분합니다.          불교에서 버린다는 개념은 저희가 버리는 것과 같지 않습니까?  저희는 호흡을 하는데 불교에서는 호흡을 하지 않고요.  그렇다면 불교에서 견성하고 다 버려서 모든 것이 여여하게 느껴지는 것과  저희가 호흡으로 우주와 일치를 이룬 것하고는 어떤 차이가 있는지요?      저는 불교전문가가 아니라서 그 경지는 잘 모르겠는데요.  불교전문가께서 한 마디 해주시죠.      결국은 의식으로 가느냐, 호흡으로 가느냐의 차이인데  불교는 의식으로 가는 거라고 생각합니다.  버리는 것도 불교에서는 의식으로 버리는 것이고,  우리는 호흡을 통해서 버리는 것이고요.  하지만 호흡을 통해서 가는 것이 훨씬 파워가 있고,  호흡에 의식을 싣는 것이 훨씬 빨리 간다고 여겨집니다.      마음만으로 뭘 하는 것은 더딥니다.  우리 수련은 호흡과 의식을 같이 하는 것이에요.                   
111    말세 3F의 시대 댓글:  조회:2276  추천:0  2015-08-11
말세 3F의 시대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일들을 보면  노스트라다무스의 99년 종말론하고도 전혀 무관하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어느 정도 일리는 있는 것 같고요.      문학작품을 보면 종말이라는 얘기가 참 많이 나옵니다.  옛 고전들을 읽어보아도 말세라는 말이 나옵니다. 그 때도 말세였는데 지금도 말세라고 하죠.  그렇게 말세라는 말은 항상 있어왔습니다.  단테의 작품을 읽어 봐도  “말세다, 요즘 아이들은 버릇이 없다” 이런 말도 있더군요.  그 때나 지금이나 얘들은 항상 버릇이 없었나 봐요.        “말세”란 뭐가 무너지고 지구가 망하고 이런 것이 아니라  사실은 다 정신적인 의미입니다.  기존의 가치관이 무너지고  새로운 가치관이 태동되는 시점을 말세라고 하는 것입니다.  지금 기존에 지배하던 가치관들이 힘을 잃고  새로운 가치관이 태동되고 있습니다.        앞으로의 세계는 어떤 세계가 될 것이냐를  여러 각도에서 조명하고 있는데,  어떤 분들은 21세기를 3F의 시대라고 이야기를 합니다.        3F가 뭐냐 하면 “Fiction, Feel, Female”의 시대를 말합니다.  이때까지 몽상이라는 것은 만화나 영화에서 통용되는 것이었는데  앞으로는 논리보다는 “Fiction”이 지배하는 시대라고 합니다.  또 모든 면에서 이성이 아니라 “Feel” 즉 감성이 지배하는 시대입니다.        지금 모든 것이 감성 위주로 가고 있잖아요.  오른쪽 뇌와 관련된 것인데,  기계 하나를 만들어도 전부 인공지능으로 되어 지고 산업도 과학이니 기존의 고정된 것이 아니라  감성 쪽으로 황당하게 발전되고 있습니다. 또 하나는 ‘Female” 이라고 해서  여성들이 많은 힘을 발휘하는 시대라는 얘기입니다.        그런 것들이 기존의 가치관하고는 반대되는 일이죠.  그리고 이렇게 보이지 않는 세계에 대해서 관심을 많이 가지게 되어,  전에는 보여야만 믿었는데  지금은 보이지 않아도 사람들이 많이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또 기존이 종교들이 힘을 잃고 있습니다.  요즘 매스컴에 보도되는 내용을 보면  종교에 대해서 좋은 쪽보다는 부정적인 견해가 많이 있어요.  과거 10-20년 전만 해도 있을 수 없는 일들입니다.        스님들이 각목 휘두르고 그런 것들이 감히 매스컴에 보도가 될 수 없었어요.  어떻게 언론이 그렇게 대단한, 신도가 천만 이상이 되는 불교의 그런 면을 보일 수 있었겠어요.  못 보였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그런 것을 공공연하게 보여줍니다.  그런 것들이 뭐냐 하면 기존의 것들이 힘을 잃어간다는 말입니다.        정치도 보십시오.  과거에 저는 정치 드라마를 쓰는 입장에서 관련 기록들을 많이 보았는데,  10-20년 전만 해도 기사들이 그렇게 적나라하지 않았어요.  요즘은 정치가들 아주 무자비하게 공격하지 않습니까?  정치가들은 그래도 기득권자인데 기득권이 있는 자들을 감히 그렇게 한다고요.  전에는 그런 것들이 한 귀퉁이에 가십으로 나왔었는데  요즘은 신문의 몇 면을 다 할애해서 정치인들을 막 공박합니다.        기업가도 마찬가지입니다. 대기업을 어떻게 감히 언론이 상대해서 그렇게 싸울 수 있었어요?  못 했죠.  대기업이란 하나의 왕국이지 않습니까?  그랬는데 이제는 다 파헤치죠.  그분들이 볼 때는 그런 것들을 말세하고 보는 거지요.  어떻게 우리를 이렇게 바지저고리를 만들며 코미디에까지 등장을 시키는가?  언제부터인가 정치가들이 풍자만화 단골이 되었는데  전에는 있을 수가 없는 일이었습니다.        또 아이들이 기를 못 폈는데 이제는 애들이 제왕이잖아요.  이런 것들, 기존의 가치관들이 확 무너지고  새로운 질서가 나온다는 것이 바로 말세라는 얘기이지  지구가 망하고 뭐 이런 뜻은 아닙니다.  말세다 하는 용어들은 대개 정신적인 용어입니다.                       
110    지구가 제대로 가고 있는지요? 댓글:  조회:2054  추천:0  2015-08-06
지구가 제대로 가고 있는지요?          선생님, “다큐멘터리 한국의 선인들” 6권에 보면  “지금 지구가 제 방향대로 가고 있다” 이런 말씀이 있는데 맞는 것인가요?  지금 지구가 제대로 방향을 잡고 가고 있는 건가요?      시각의 차이인데요.  아닌 쪽으로 보면 굉장히 위험하기 짝이 없고  좋은 쪽으로 보면 그래도 살 만한 곳이고 그렇습니다.  어느 쪽으로 보느냐에 따라 달라요.        지금은 본인의 생활이 즐겁지 않은 분들은  저러다 금방 어떻게 될 것 같고 이 세상이 꼭 망해가는 것 같지요.  반면 “살만하다” 하고 즐겁게 보는 사람들도 참 많습니다.        본인이 어느 쪽으로 보느냐가 문제죠.  자기 생활이 행복하지 않는 분들은  항상 무슨 일이 일어나기를 바랍니다.  평화시대를 견디지 못해요.  늘 “세상이 뒤집어졌으면 좋겠다.  지진이라도 났으면 좋겠다.  혁명이라도 났으면 좋겠다”  이렇게 바랍니다.  태평성대를 견디지 못하는 것이죠.  본인들이 감정적으로 평온하지 않고 자꾸 일을 저지르고 싶은 분들이죠.  그런 분들이 많으면 그런 쪽으로 갑니다.  바라는 대로 되기 때문이에요.        그런데 그런 분만 있는 게 아니라  반대로 “아, 이런 상태가 계속 유지됐으면 좋겠다” 하는 분들도 많아요.  “세상 참 살맛 나고 너무너무 재미있다” 이런 분도 많다고요.  그렇게 반반입니다.        항상 주도하는 분들은 앞서가는 분들이잖아요.  선계에서나 우주인들도 역사를 주도하는 분들은  방향을 좋은 쪽으로 틀려고 계속 노력하고 있기 때문에  아무리 부정적으로 가는 것 같아도 그렇지 않아요.        항상 중간입니다.  이쪽 저쪽이 다 있되 그 방향은 정의 방향으로 잡혀 있어요.  망해 가는 쪽으로 가는 것 같이 보여도  그렇게 되는 의도는 다분히 경고, 각성시키는 수준이지  실제로 그렇게 가도록 내버려두지 않습니다.                   
109    여기서 선계를 이루어야 댓글:  조회:1859  추천:0  2015-07-31
여기서 선계를 이루어야          매일 저녁 하루의 생활을 정리하는 시간을 가지면서  “내가 나를 드러내려고 했는가? 남을 깔아뭉개려고 했는가?”  그런 것을 점검해 주십시오.  소리 없이 남의 결점을 보충해주면서 있는 듯 없는 듯 하는 것이  바로 선계에서 가장 바라시는 사회인의 자세입니다.        그런 것을 늘 점검해주시고, 아니라면 고쳐주시고  또 수련 면에서도 본인의 노력이 부족하다면 계속 노력하시기 바랍니다.        수련에도 소질이라는 것이 있어서,  소질은 있는데 노력을 안 하는 분들이 있고  노력은 열심히 하는데 수련에는 소질이 없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런 것을 알아내서 부족한 점을 갖추도록 하시고요.        수련으로 인해서 빚어지는 인간관계도 마찬가지로 해결해야 될 숙제거든요.  선계 수련하는 분들은 능력도 갖추고  일에 있어서나 수련에 있어서나 매사에 노력도 하고,  또 같이 일하는 분들하고 원만하게 지내는 것을 목적으로 하셔서  매일매일 부족한 면을 고치도록 스스로 노력해주시기 바랍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지향하는 선계입니다.        특히 수선재 일을 하는 분들 간에 마찰이 있다면 수련할 자격이 없습니다.  마찰이 빚어지는 이유는 대개 사소한 것입니다.  서로간에 약점이나 자존심을 건드려서 그런 거예요.        그런 것을 왜 건드리느냐?  남의 부족한 점을 건드려야 직성이 풀리는 것도 본인의 약점 때문입니다.  감추고 싶은 열등의식이 있기 때문에 굳이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능력 면에서나 노력 면에서나 자신 있는 사람들은  굳이 그렇게 드러내려고 하지 않아요.        또 능력 있고 노력하는 분들은  누가 자기를 건드려도 아무렇지도 않습니다.  그 두 가지가 갖추어지지 않은 상태에서는 발끈하고 상당히 상처받지요.  그러므로 각자 부족한 면을 갖추어주시면 되겠습니다.        여기도 하나의 사회이다 보니까 자꾸 이런 저런 일들이 불거질 수 있어요.  그런데 여기 얼마 되지 않는 우리 회원들이 선계를 이루지 못하고  아옹다옹한다면 굳이 수련해서 선계에 갈 필요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매일같이 그렇게 선계를 이룰 수 있도록  서로 노력하는 자세로 수련해 주시기를 바라는 마음 그지없습니다.        수련하는 분들은 솔직하게  “나는 그릇이 작다”라고 말할 수도 있어야 해요.  “나는 그것밖에 안 된다” 그렇게 다 공개하고  앞으로 크게 하도록 노력해야지  꽁꽁 감추고 큰 척하는 것도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108    직장에서 이상적인 사람 댓글:  조회:1850  추천:0  2015-07-27
직장에서 이상적인 사람         직장에서 원하는 사람은 대게 세 가지를 갖추어야 하는데,  첫째는 능력, 다음에는 노력, 그리고 대인관계 이런 순서입니다.  능력이 있는데 노력도 하고 게다가 대인관계도 좋다면  두말할 나위 없이 유능한 분입니다.  한편 능력은 있는데 대인관계가 원만치 않으면 반쪽이고,  능력도 없고 대인관계도 좋지 않고 노력도 하지 않는다면  더 이상 볼 것 없는 사람들이죠.      선계에서 원하시는 것은 능력도 있고 노력도 하고  또 대인관계도 원만한 분들입니다.  능력은 있는데 대인관계가 뾰족해서  아무도 좋아하는 사람이 없는 상태에서도 안 되고,  능력은 없는데 인간관계만 좋아서도 안 되고,  능력은 있는데 더 이상 노력을 안 하고  가지고 있는 것만 활용하려는 것도 안 됩니다.      예술 하는 사람의 경우는  판단기준이 “능력이 있는가? 그리고 노력도 하는가?” 입니다.  둘 다 있으면 금상첨화죠.  대인관계는 안 따집니다.  그런데 대개 보면 재능은 있는데 노력은 안 하거나  노력은 엄청 하는데 재능이 없어요.  예술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내려면  위의 두 가지를 반드시 겸비해야 합니다.  노력만 하고 재능이 없다거나 재능은 있는데 노력을 안 하면  어느 정도까지밖에 갈 수가 없어요.     예술가 이외의 다른 모든 조직, 단체에서는  세 가지를 다 구비해야만 전인(全人)이라고 볼 수가 있습니다.  능력도 있고 노력도 하고 대인관계도 좋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본인들이 스스로 생각해서 자신이 갖추지 못한 면을 갖추십시오.      이 수련하는 분들은 어디서나 항상 환영 받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저 사람은 좀 없었으면 좋겠다”, ”있으나 없으나 그냥 매한가지다”,  “꼭 있어야 된다” 중에서  반드시 있어야 되는 사람이 되거나  그것이 안 되면 차라리 조용하게 있는 듯 없는 듯 하는 사람이 되어야지  “없었으면 좋겠다” 그런 사람은 절대 되어서는 안 됩니다.      한편 능력은 있고 대인관계도 좋되  그 일하는 스타일이 옆 사람을 깔아뭉개면서  “내가 여기 있다”", 내가 이런 일을 한다” 과시하고  자기가 한 일을 자꾸 내세우는 사람이 있습니다.  상당히 인격적이지 못한 태도죠.      그런 것을 “그릇이 작다”고 표현을 합니다.  그릇이라는 것은 “덕(德)”이라고 말씀 드렸습니다.  “덕”은 하늘이 베푸는 것이고 타고난 것이기 때문에  후천적으로 갖추기는 상당히 어려운데  수련을 통해서 그릇을 아예 없애면 덕도 구비할 수 있습니다.      본인들이 스스로 생각해 볼 때  “나는 내가 하는 일을 끊임없이 과시해야 하고  옆 사람이 하는 일을 비판해야만 직성이 풀린다”  하는 사람은 덕이 부족한 것입니다.      그릇이 크면 같이 일하는 사람의 결점을 지적하지 않고  본인이 보충하고 채워줍니다.  그렇게 해서 남들이 자연히 알아주게 되어야지,  일은 요만큼 하고 말을 많이 해서 과시하는 것은 그릇이 작다고 봅니다.      옆 사람이 능력이 부족하다고 여겨지면 소리 없이 도와주세요.  그러면 상대방도 그걸 알고 다른 사람도 압니다.  그런데 끊임없이 지적하고 “내가 이만큼 잘 한다” 하고 과시하면  일을 다 해주고도 까먹는 결과가 됩니다.                       
107    2000년 전 이스라엘에서도 댓글:  조회:1874  추천:0  2015-07-23
2000년 전 이스라엘에서도         옛날 2000년 전에 예수께서는 그 때 12제자라는 분들이  뭐라고 해도 안 믿으니까 여기 지상에서 천국을 이룬다고 그랬잖아요.  차별 받지 않는 지상 천국을 이룬다면서 세 가지,  즉 여자들이 차별 받지 않는 나라,  이스라엘이 너무 차별 받고 그러니까 종족간에 차별 없는 나라,  또 빈부의 차별 없는 사회를 만들겠다고 내세웠습니다.      그런데 그 따라다닌 분들이 그렇게 되면  다음에 나는 무슨 자리, 누구는 무슨 장관 해야지  이런 것에 현혹되어 따라다닌 것이었습니다.     그러니 예수를 팔고 그런 것이지요.  그 세계가 이루어지면 나는 뭘 맡겠다 이미 다 생각을 해 놓았는데,  예수님이 하시는 일을 아무리 보아도  싹수가 그렇게 될 것 같지 않으니까 배반한 것입니다.      그때 하도 믿지를 않으니까 예수께서 자꾸 이적, 기적들을 보여서 믿게끔 했는데  그렇게 뭘 보여줘서, 어떤 능력을 보여줘서  따라오는 사람들은 수준이 높다고 볼 수가 없습니다.      더군다나 이 선계수련은 그런 차원이 아니어서  조건부로 뭘 보여줘서 오고 그런 것이어서는 안됩니다.  예를 들면 여기서 공부하시다가 의통이 열려 보는 사람마다 치료가 된다면  사람들이 많이 올 수도 있겠지만  그런 사람들을 데려다가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그런 것 하는 데는 여기 말고도 많이 있지요.  여기는 선인이 되고자 하는 곳입니다.  아픈 것을 미리 졸업을 한 단계여야 합니다.      또 천도를 한다면 많이 오시겠지요.  그러나 천도라는 것은 원래의 뜻은 본인들 스스로 깨어서 하는 것입니다.  돈 낸다고 천도시키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는 거예요.  또 후손들이 이 계통에서 공부를 한다고 후손의 덕으로  본인은 아무 노력도 없는데 천도하는 것도 선계의 뜻이 아닙니다.      “다큐멘터리 한국의 선인들”에서 서경덕 선인이 천도를 시켜준 것은  그 기준이 본인들은 발전하고자 하는 의지가 있는데  방법을 몰라서 안타까운 분들을 모아서 해드린 것입니다.      무조건 “이 수련하는 분의 조상이니 천도해주십시오” 한다거나  돈을 내면 해주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는 거예요.  그런 것을 바라는 것이 아닙니다.      후손의 정성을 봐서 억지로라도 해드릴 수는 있고,  그렇게 해드림으로써 그분들이 조금 더 깨이기도 합니다.  주변이 다 깨인 데에 가면 보고 듣는 것이 있잖아요.  그래서 서로에게 영향을 받아서 발전하고자 하는 의지가 생기기도 하는데  원래 천도의 뜻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이와 같은 이유로 사람들은 많이 모을 수 있는 방편은 되도록 쓰지 않습니다.  여기는 아무 것도 주어지지 않아도 오직 맑은 기운을 받고 싶은 분들,  자신의 주변을 깨끗하게 청소하고 정리하고 싶은 분들,  진짜 나의 군더더기를 다 버리고 원래 자신으로 돌아가고 싶은 분들만 오기를 바라는 거예요.      그러니 여기에 무슨 사람을 끌려고 하는 유인책이 있겠습니까?  유인책을 쓴다면 벌써 어그러진 것입니다.  타락하는 것이라고도 볼 수가 있어요.  되도록이면 그런 방편은 안 쓰려고 합니다.      조상님들이 많이 모아지면 천도를 해드릴 수도 있죠.  공부하시는 분들이 많이 원하고,  그래야만 한이 풀어져서 공부를 잘 할 수 있겠다면 그럴 수도 있는데  원래 수련단체의 목적은 그런 것들이 아닙니다.      병 고치는 것도 아니고 천도시켜 주는 것도 아니고  오로지 자신들이 깨닫고 싶은 분들만 하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이 수련이 대중적이지 않아서 PR 을 많이 한다 하더라도  그렇게 호응을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니고요.  하여튼 제가 생각할 때 제일 좋은 홍보방법은  이 수련하는 분들이 모범적으로 생활하는 거예요.      주변에서 “저 사람은 왜 저렇게 좋을까? 사람이 다르다” 하다가,  알고 보니까 “수련을 하더라” 그렇게 해서 오는 것이  조금 더디더라도 제일 좋은 방법인 것 같습니다.                     
106    책가방만 들고 왔다 갔다 댓글:  조회:2134  추천:0  2015-07-19
책가방만 들고 왔다 갔다         어제 안테나를 점검해주셨다고 하던데, 상태가 어떻습니까?  다 망가지고 그랬습니까?    먼지들이 끼어 있어요.  텔레비전 안테나도 오래되면 먼지가 끼듯이  안테나도 평소에 안에서만 닦으면 먼지가 낍니다.  그렇게 한번씩 청소 해드리면 안팎으로 깨끗해지죠.  또 안테나가 스스로 자라는 분이 있고 그냥 제자리에 있는 분이 있습니다.  어제 보니까 수련하면서 많이 자라 있는 분도 계시더군요.        어제 하신 얘기를 듣고 싶은데요.    제가 막 하소연했습니다.  어떻게 하면 수련을 하시겠느냐고요?  그런데 뭘 보여줘서 하시는 건 재미없습니다.  밋밋한 재미, 무미건조한 재미, 버리는 재미,  그런 것 때문에 나와 주셨으면 좋겠다고요.    이 수련에서는 기운 받는 재미 외에 다른 재미는 없어요.    매일 하는 것들을 한번 “안 해보시라”고 하면서,  40-50년 그렇게 술을 많이 마셔왔으면서  왜 아직까지도 그렇게 술을 마시고 싶어하시느냐고 그랬죠.  남들 다 하는 것 하는 것은 재미없고 남들 안 하는 것 하는 재미가 있다고……    그랬더니 끝난 다음에 어떤 분이 따라 나오시면서,  “선생님은 수련 안 하는 재미를 모르시죠?” 그래요.  아니, 수련 안 하는 재미가 그렇게 재미있어요?        선생님, 이번 회지에 주신 글 “선계에 같이 가십시다” 너무 감명 깊게 읽었습니다.    그래서 같이 가실 건가요?  그 글을 읽고 같이 갔으면 하는 마음이 제 진심입니다.  같이 간다고 그러셨죠?    수선재에 책가방만 들고 왔다 갔다 하는 분이 많으셔서  어제 제가 하소연을 좀 했습니다.  지금 책가방만 들고 왔다 갔다 할 때가 아니거든요.  항상 때가 있다고 말씀 드리잖아요.  기회라는 것이 있는데 사실은 지금이 절호의 찬스입니다.  나중에 회원이 500명, 1000명 이렇게 되면  제가 개인적으로 그렇게 깊이 관여하지는 못할 것 같거든요.    선계에서도 마찬가지고요.  대개 초창기 창립멤버들한테 정성을 쏟고 관심을 가집니다.  여기 있는 분들이 씨를 뿌려서 잘 하면 계속 뻗어 나가겠지만,  선계는 절대로 무리는 하지 않아요.  선인들은 원래 최선을 다하되 때가 아니다 싶으면 하지 않습니다.  시간을 조금 늦추는 것은 아무 것도 아니에요.  50억 년 떨어진 은하가 이웃이라고 할 정도니까  그렇게 시간 가지고 따지지는 않지요.    이렇게 좀 해보다가 도저히 때가 아니라고 판단되면  그냥 씨를 뿌리는 단계에서 끝낼 수도 있습니다.  늘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반응하기 때문에  지금 저희들이 어떻게 하는가가 상당히 중요해요.  절대 무리하지 않습니다.                       
105    영혼을 노크해주는 글이어야 댓글:  조회:1930  추천:0  2015-07-15
영혼을 노크해주는 글이어야           선생님, 이번 회지에 주신 글 “선계에 같이 가십시다”를 보고 많이 울었거든요.  여러 번을 봐도 다른 글들과는 느낌이 다르던데요.  본성이 반응을 해서 그런 건가요?    글이라고 다 글이 아니에요.  글을 보면 쓴 사람의 파장이 느껴지기 때문에  어떤 수준에서 나온 글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제일 좋은 글은 본성(本性), 즉 “성”을 때려주는 글입니다.  두 번째는 영혼을 울려주는 글, 영혼을 노크해주는 글입니다.      그런 글이 자연스럽게 나오는 거예요.  저는 글을 쓸 때 생각을 많이 안 합니다.  그냥 무심으로 있으면 퍼뜩 떠올라서 쓰는 데는 한 10분 정도 걸려요.      제가 파장으로 텔레파시 할 때도  누구를 만나면 어떤 질문을 해야지 하고 벼르고 한 적이 별로 없습니다.  누가 “꼭 이런 질문을 해주십시오” 하고 부탁한 경우에는  잊어버릴까 봐 기억하고 있기는 한데  대개는 그냥 파장이 딱 맞으면 질문이 저절로 나와요.      그리고 그분들도 대답이 즉석에서 나오는 것이지  생각해서 답변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랬을 때 본성으로 바로 울려주는 것입니다.      그 글도 그런 식으로 본성을 때려주는, 공감해서 울려주는 글이지요.  말하자면 그렇게 울림이 있어라 해서,  노크하고 싶어서 본성을 때려주고 싶어서 썼던 글이에요.  그 글에 실린 파장도 그렇고요.  울고 싶은 분들은 우십시오.          저는 그 글을 보니까 열심히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러세요?  그런데 대충 들어서는 안 되고요.  수련을 열심히 해야겠다는 생각은 확실히 들어야 돼요.  어떻게 하면 그런 생각들이 들 수 있을까 저도 고민입니다.  어떻게 본보기를 보이면 그런 마음이 들까요?          선계수련이 뭐 하는 거냐 하고 누가 질문을 던지면  한 마디로 어떻게 얘기를 해주면 될지요?    책을 한 번도 안 읽어본 사람같이 얘기를 하시네요.  저렇게 우문을 하시는데 현답을 해야 됩니까?      선계수련이란 무슨 수련이냐?  깨달음으로 가는 수련이라고 이미 말씀 드렸습니다.  그러면 깨달음이란 뭐냐?  깨닫는다는 것은 “안다”는 얘기입니다.      그러면 안다는 것은 무엇이냐?  아는 것은 상단에서 하는 일입니다.  지혜의 소관은 상단인데,  그 알기까지의 과정은 하단에서부터 올라와야 합니다.  그렇지 않은 상태에서의 앎이란 아무 의미가 없어요.  그냥 아는 것이 아니라 근본적인 것은  하단에서부터 축적되어서 아는 것이어야 합니다.      과정은 우선 몸에 대해서 알고  다음에 마음에 대해서 알고  그 다음에 지혜의 눈이 열리는 깨달음입니다.                       
104    공주와 하녀 댓글:  조회:1837  추천:0  2015-07-09
공주와 하녀       재능이 뛰어난 사람은 타의 귀감이 되어 영성을 깨는 역할을 하고,  수련을 하는 사람들은 지극히 평범하게 태어난다고 하셨는데요.  그런 것이 정신적인 면에서도 적용이 되는지요?  즉 수련하는 사람은 인격이나 성격도 중간으로 태어나는지요?    그런 면에서는 괴팍한 사람들이 많아요.  공부를 위해 나온 경우에는 아주 치우쳐서  중용으로 가는데 애를 먹는 사람이 많습니다.  대답이 잘 안 됐나요?  그 질문을 하게 된 배경이 무엇인지요?        생(生)이 여러 번 되풀이되는데, 부지런하다가 게으르다가 하고  머리가 좋다가 나쁘다가 하는 것처럼 연속성이 없어지면 좀 허무하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태어날 때 4 가지 인자를 선택해서 내보낸다고 전에 말씀 드렸죠.  그 중 영성, 지혜 이런 것은 비슷한 수준에서 나오더군요.  전에 영성이 어느 정도까지 진화됐으면 다 음 생에서는 좀더 진화된 상태로 나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부지런하고 게으른 것은 다른 차원인 것 같아요.  기운이 없고 몸이 따라주지 않아서 게을러지는 경우가 있고,  의욕이 없어서 게을러지는 경우가 있고,  또 의욕이 없는 이유도 꿈은 너무 높은데 현실이 너무 안 따라서  그냥 의욕이 안 생기는 경우 등 여러 가지가 있어서  일률적으로 말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면 성격이 한 쪽으로 많이 치우쳐 있어서 대인관계에 문제가 많은 사람은  난이도가 높은 코스를 선택해서 나온 건가요?  공부를 위해서라지만 일부러 그런 성격을 선택해서 나오는 사람도 있습니까?    그것이 본인이 선택한 것인지 주어진 것인지는 더 연구해보아야 됩니다.  “혼 좀 나 봐라” 해서 그렇게 치우친 성격이 주어질 수가 있거든요.  그런데 질문의 핵심이 무엇이지요?        가끔 내 성격은 왜 이럴까, 과연 내가 공부 차원에서 이렇게 된 것인지  아니면 그냥 모자라서 그런 것인지 궁금할 때가 있습니다.    수선회지에 보니까 왕자 병이라고 나와 있던데……  공부하면서 항상 분수를 보면 될 것 같아요.  자신의 분수에 맞게, 즉 학생이면 학생에 맞게 분수를 지키면 됩니다.  “겉 넘는다” 하는 표현이 있죠.  “주제 넘는다”고도 할 수 있고요.  이 수련하는 분들은 그렇게 확 뛰어넘는 사고 방식을 가지기가 쉽습니다.  1차원에서 5차원으로 갑자기 도약할 수 있는 사람들이 대개 수련을 합니다.  한발 한발 가는 분들은 참 드물어요.    이렇게 앉아 있다가도 어느 날 갑자기 휙 날아가는 거예요.  황당한 사람들이죠.  다들 그런 성격들이 좀 있기 때문에  항상 분수를 보면서 한발 한발 간다고 생각하면 실수가 없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자신에 대해서 왕자다, 공주다 하는 것은 좋습니다.  희망을 갖는 것이잖아요.  “나는 하녀다” 하는 것보다는 낫죠.  너무 거기에 도취되어 남들이 병이라고 놀리는 수준이라면 곤란하겠지만  “왕자”가 되어야지 “왕자병”이 되면 곤란합니다.                   
103    수련은 필연인가요 댓글:  조회:1990  추천:0  2015-07-02
수련은 필연인가요         선생님, 저만 해도 나이도 있고 세상적으로 볼 때 산전수전 다 겪었다고 말할 수 있는데  지금 여기 있는 20대 분들은 이렇게 선뜻 수련을 한다는 것이  참 대견하기도 하고 의문스럽기도 합니다.  그런 것이 시대상황인가요?      시대상황으로 보면 그렇지 않은 쪽으로 가는 경향이 훨씬 많지만, 지금 신세대 중에는 수련을 해야 하는 인연을 가진 분들이 많아요.  아직 대세는 그렇지 않고 아주 소수에 불과하지만  인연이 수련을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분들에게 수련은 필연인가요?     본인들은 여기 올 때 왜 왔는지 몰라요.  우연이라고 보여질 수도 있는데 사실은 다 필연으로 오신 거예요.        질문이 있으면 선생님께 질문을 드리려고 하다가도,  그냥 좀 지내다 보면 해결되기도 하고 수련을 하다 보면 알게 되기도 하는데요.  그렇게 하는 것이 옳은가요?      그렇죠.  스스로 해보는 것이 제일 좋은 방법이에요.  저는 질문이 들어오면 일단 검토를 합니다.  조언을 드리기도 하지만 기로에 서있다든지 꼭 대답을 해드려야 하는 분들한테만 드리고,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어떻게 하는지 두고 봅니다.        “다큐멘터리 한국의 선인들” 6권에 보면 정(情)이 최고의 관문이라고 말씀하셨잖아요.  그 말씀이 참 공감이 가면서 정말 어렵다는 생각이 듭니다.      “정” 공부가 언제 끝나느냐고 물어보는 분도 있는데  정이라는 것은 상당한 수준이 될 때까지 공부가 끝나지 않더군요.  그래서 정 공부를 마스터했다면 상당한 수준입니다.      본인이 끝났다고 얘기하는 차원이 아니라 진심으로 그 공부가 끝났다면 말입니다. 상대가 반드시 이성인 것만은 아닙니다.      저도 “아! 난 이 공부 끝났어” 한적이 여러 번 있었는데  1단일 때는 1단이 오는 것이더군요.  내가 2단이면 2단이 오고 9단이면 9단이 와서  점점 강적을 만나는 것입니다.        저는 지금까지 최선을 다해서 “베풀자”하면서 살아왔거든요.  그런데 그렇게 하면서 상처를 받지 말아야 하는데  베푼 만큼 기대를 하기 때문에 항상 상처를 받더군요.      “내가 이만큼 하면 상대방은 더 해줄 것이다” 하는 계산이 있기 때문입니다.  반드시 물질적으로가 아니라 내가 생각해주는 만큼 상대방도 해줄 것이라는 기대 말입니다.      “도둑을 맞아도 아무렇지도 않아야 된다” 이런 것은 오히려 쉽습니다.  도둑은 모르는 상대에게 당하는 거니까 감정이 이입되지는 않는데,  가까운 사람으로부터의 배신감 같은 것은 굉장히 어렵습니다.  한번 털어 버리면 그 다음에는 쉬워지는데요.  정 공부를 위해서 자꾸 그런 일이 생기기도 하니까 아무 조건 없이 주세요.                 
102    어울리기 싫은 술자리 댓글:  조회:1915  추천:0  2015-06-26
            어울리기 싫은 술자리     수련을 하다 보면 학교 친구들이나 선배들이랑 술자리 같은 데서 어울리는 것을 잘 안 하게 되는데, 그러다 보니 사회생활에 있어서 손실이 있는 것 같거든요?      무슨 손해를 본다는 말이죠?      사회생활을 하려면 꼭 알아두어야 할 사람도 있는데, 그런 자리를 계속 회피하니까 안 좋을 것 같아서요. 자꾸 혼자가 되는 느낌이 들고 친구들하고도 멀어지는 것 같습니다.      어쩔 수 없이 술자리에 가야 되고 어울려야 된다고들 이야기하는데  사실은 본인이 하고 싶어서 하는 거예요.  어울리고 싶으면 어울려야지요.  스스로 하고 싶어서 하는 것이니까 핑계를 대지는 마십시오.      그런데 수련을 계속 하다 보면 어울릴 수 없는 상황이 됩니다.  왜냐하면 기적으로도 맞지 않고, 파장도 맞지 않고  탁기 받고 그러니까 만나는 것이 괴로워집니다.  나중에는 사람 만나는 것이 너무너무 괴로워서  금촉을 하지 않을래야 않을 수가 없어요.  아무리 중요하고 나의 출세의 열쇠를 지니고 있는 사람이 만나자고 해도 마찬가지입니다.  탁기 때문에 몸이 괴롭고 즐겁지가 않아서 도저히 못 만나게 됩니다.      지금은 그냥 어울리고 지내세요.  금촉은 그러다가 문득 며칠만이라도 혼자 있고 싶어질 때 하세요.  수련이라는 것은 혼자 있고 싶어서 하는 것이잖아요.  본격적으로 수련에 들면 그렇지 않은데,  아직도 사람들 만나고 싶고 미련이 있다면 만나십시오.  그러면서 평소 하는 수련하고 몸 기반 조성하면 됩니다.      지금 수련해서 손해 보는 것은 아니잖아요?  할 것 다 하셔도 되는데 그러다가 문득 일주일이나 보름이나 얼마 동안이라도  한번 본격적으로 해보겠다 싶으면 그렇게 하시라는 말씀입니다.      지금 젊고 앞날이 창창한데 뭐가 그렇게 급하세요?  나중에 개인적으로 000수사님에게  술자리에 안 어울려도 사회생활에 지장이 없으시냐고 한번 물어보셔요.  술 안 드시고 수련해오셨어도 주변에 친구 많으시고 출세하시고 그랬잖아요.  그 비결을 여쭈어보라고요.      어제도 누가 그런 질문을 해서 제가 노선을 분명히 하라고 말씀 드렸는데,  색깔을 분명히 하면 주변 사람들도 헷갈리지 않아요.  그런데 이랬다 저랬다, 술자리에 끼기도 했다 안 끼기도 했다  그러면 주변 사람들도 헷갈립니다.  그러니까 자기가 방침을 정했으면 아예 분명히 하십시오.  “나는 술을 못 먹는다” 그렇게 선언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처음에는 서운해하고 이해하지 못할지라도 점차 인정을 해요.  학생이면 공부 잘 하면 되고 직장에서는 일 잘하면 됐지 술 안 먹는 것은 아무 상관없어요.     일을 못하면서 그러면 술도 못 먹고 안 어울린다고 따돌릴 수도 있지만  자기 할 바를 잘 하면 왜 그러겠어요?  괜히 일 못하는 사람들이 술자리 빠지면  혹시 소외되지 않을까 해서 자꾸 빌붙고 그런 거예요.  자기 분야에서 당당하면 그렇게 눈치 볼 필요가 없습니다.      오히려 술 안 마시니까 참 좋은데 당신도 한번 끊어 보라고 그렇게 권할 수도 있어요.       끌려가지 않습니다.  담배 안 피우니까 날아갈 것 같다고 권해보세요.  다 따라 합니다.  “ 저 사람이 담배 안 피우는 걸 보니 뭔가 있을 거다” 이렇게 돼야 합니다.      수련을 하니 참 좋은데 한번 해 보라고 했을 때  “아 000씨가 수련하는 것 보니까 거기는 참 괜찮은 데인 것 같다” 이렇게 돼야 하는데  반대로 “000씨가 다니는 것 보니까 거기 참 별 볼일 없는 데구나” 그러면 안 됩니다.             
101    비할 수 없는 자신감이 생기다 댓글:  조회:1942  추천:0  2015-06-21
비할 수 없는 자신감이 생기다       누차 말씀 드리지만 저도 도전적인 편이어서 여러 가지 많이 해봤습니다.  나이 오십이 다 되어 가는데 무얼 안 해봤겠습니까?      그런 데 이 수련이라는 것……  한번 목숨 걸고 해볼 만합니다.  경험담입니다.      제가 이 세상에 태어나서 이렇게 성취감이 많은 것이 없었거든요.  무엇이든 하다 보면 늘 성에 안 차고 했는데  이 수련이야 말고 대단히 성취감이 있는 일이었습니다.      극기란 자기를 이겨보는 것이죠.  금촉을 통해 얻어지는 수확은 자신감입니다.  내가 해냈다는 자신감이에요.  그래서 일 주일이라도 해내면 대단한 것입니다.      별 것 아니지만 말을 안 해야겠다고 마음을 먹고  일 주일을 그렇게 해보면 아주 자신감이 생깁니다.  그런데 그걸 어기고 실수로 말을 하게 된다든지  제대로 못 해내면 패배감도 대단하죠.      금촉수련에서 제가 얻은 수확은 그것입니다.  자신감,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저도 참 어려운 분야의 금촉이 있었는데 그런 것을 해내면서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기니까 스스로를 믿게 되더군요.  못해내면 자신을 못 믿어요.  자신을 불신하는 것처럼 비참한 것은 없습니다.  남이 자기를 못 믿어주는 것보다  내가 생각해도 나를 못 믿겠다 하는 것은 굉장히 비참한 거예요.  한편 그것을 해내면 남이 알아주는 것보다 스스로 해냈다는 자신감이 생기게 됩니다.      일 주일 성공하고, 한 달 성공하고 이렇게 해서 자신감이 계속 쌓이면  그것이 엄청난 자신감으로 자신에게 비축이 됩니다.  그러면 그걸 가지고 뭐든지 할 수 있어요.  못 하는 것은 대개 할 수 없다고 생각해서 못 하는 것입니다.  할 수 있다고 생각하면 합니다.      “난 못해, 내가 어떻게 그걸 하냐” 그러면 못 하고 “할 수 있다” 그러면 하는 거예요.  못 한다는 말에 벌써 기운이 반으로 깎입니다.  그런데 “아, 해보지요” 하면 되건 안 되건 기운이 부추겨집니다.      이 수련하는 사람들은  남이 자기를 격려해주고 부추겨주는 것을 기대하지 말고  스스로 자기를 부추겨야 합니다.  스스로 격려하면서 자가발전 해야 돼요.      또 남이 뭐라고 그런다고 꺾이면 안 되죠.  남이 나를 부추긴다고 우쭐대는 것도 우습고요.  남이 왜 나를 좌우합니까?  스스로 생각해볼 때 자기를 믿고 격려할 수 있다면 대단한 파워인 것입니다.                       
100    새로운 차원으로의 도약 2 댓글:  조회:1766  추천:0  2015-06-15
    새로운 차원으로의 도약 2     전에 인간에게는 열 가지 감각이 있다고 말씀하셨는데 어떻게 해서 열 가지인지요?    오감(五感)이라고 하면 시각, 청각, 후각, 미각, 촉각 이렇게 다섯 가지를 말합니다.  나머지 다섯 가지는 뭐냐 하면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눈, 들리지 않는 귀를 듣는 귀,  만져지거나 느껴지지 않는 것을 느끼는 감각 그런 것들입니다.      여기서 본다는 것은 눈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보는 것을 말합니다.  공기도 맛을 봅니다.  어떻게 공기를 맛 보냐고요?  공기가 참 맛이 있습니다.      그런 감각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열 가지인데, 그런 것을 트이게 하는 방법은  기존의 감각을 다 잠재우고 안 해보는 것입니다.      일단 눈으로 보는 것을 안 해보면 보이지 않는 세계를 볼 수 있고,  들리는 것을 듣지 않아 보면 들리지 않는 소리를 들을 수 있게 됩니다.  이 수련이 묘한 이치가 있어서 그런 방법으로 새로운 감각을 터득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아주 미세하고 예민한 감각을 갖게 됩니다.      얼마나 미세하게 감각이 발달되느냐 하면 모래가 숨쉬는 소리까지 들립니다.  인간이 가지고 있는 감각이 최대한으로 발휘되는 상태가 되는 것이죠.  화초가 숨쉬는 것도 볼 수 있어요.  벌떡벌떡하고 이파리 숨쉬는 것이 보입니다.      기존의 길들여진 것을 잠재우면 새로운 감각이 열린다는 말씀이시죠?    안 해보면 그렇게 됩니다.  변증법이란 것이 그런 것이죠.  기존에 계속 긍정하던 것들을 부정해보면  또 다른 차원으로 넘어가고 그런 식으로 됩니다.  다시 부정해보면 제 3의 현상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선생님, 수련도 그런가 봅니다. 며칠 동안 안 하다가 수련을 하면 새로운 맛을 알 수가 있고..   새로운 맛을 보기 위해서 수련도 안 해봐요?  수련을 금촉하지는 마십시오.       
99    새로운 차원으로의 도약 댓글:  조회:1778  추천:0  2015-06-11
          새로운 차원으로의 도약       금촉수련을 왜 해야 되는가?  이런 질문을 지금까지 한 번도 하신 적이 없었는데요.  의문을 가질 수 있어요.  입이라는 것은 말하라고 기껏 만들어 놓은 것인데  왜 말을 안 하는 수련을 해야 되는가?     말이라고 다 말이 아니지요.  사람들이 하는 말이 그렇습니다.  또 본다고 해서 다 보는 것이 아니고요.  금촉은 그런 것들을 제대로 하고 있는가,  내가 말다운 말을 하고 있는가?  다시 한번 검토해보는 시간입니다.      듣는 것도 그래요.  귀가 있다고 해서, 내가 청력이 있다고 해서,  귀머거리가 아니라고 해서 과연 소리다운 소리를 듣는가?  그것이 의문입니다.  정말 들어야 할 소리는 안 듣고,  듣지 않아야 할 쓰레기 같은 소리만 듣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지감을 해서 공부를 마친 다음에 듣는 소리는  그런 소리가 아닙니다.  정말 들어야 하는데 그 동안에 듣지 못했던  새로운 소리를 들게 됩니다.  차원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한번씩 그렇게 해보십시오.      먹는 것도 그래요.  금식을 왜 하느냐?  잘 먹어야지 왜 안 먹느냐?  금식을 몇 번 하고 나면 음식을 보는 안목이 달라지고  상당히 까다로워집니다.  맛있다고 다 좋은 음식이 아니죠.  보기만 해도 본능적으로 좋은 음식인지 아닌지 알아요.  아무리 맛있어 보이게 포장을 해도  좋은 음식인지 아닌지 판단이 섭니다.      그런 것은 저절로 되는 것이 아니라,  안 해봄으로써 터득되는 공부입니다.  모든 분야가 다 그렇습니다.  성적인 것도 안 해보는 시도를 몇 번 해서 성공하면  다음에는 전과 달라집니다.  전혀 다른 차원에서 접촉을 하게 됩니다.      수련이라는 것은 그렇게 새로운 눈을 뜨는 것입니다.  눈을 뜬다는 것은 몸의 눈을 뜬다는 얘기가 아니라  다른 차원의 안목을 가진다는 뜻입니다.  그렇게 되려면 안 해봐야 됩니다.  하던 대로 계속하면 익숙해져서 모르는데 안 해보면,  그것도 아주 충분히 안 해보면 새로운 눈이 열리거든요.      촉각도 그래요.  피부로 접촉하는 것도 너무 익숙해져서 만성이 되어  아무 느낌이 없을 수도 있는데,  안 하다가 해보면 아주 다른 차원으로 와 닿습니다.  이 수련을 하시면서 그런 감각들을 전부 새롭게 하시기 바랍니다.   
98    주부가 어떻게 금촉을? 댓글:  조회:1545  추천:0  2015-06-07
          주부가 어떻게 금촉을?            가정에서 주부로서 생활하면서 어떻게 금촉을 할 수 있었는가?  그런 질문을 자주 받는데, 할 것은 다 하는 거예요.  밥도 하고 가족들과 식사도 하고 그러면서 반응하지 않는 것, 그것이 금촉입니다.      예를 들어 아이들에게 무슨 일이 있거나,  남편이 술을 많이 하고 늦게 들어오는 상황일 때  그것을 제가 보지 않는 것은 아니에요.  다 보고 “그렇다” 할 뿐 거기서 더 이상 들어가지 않아요.  그냥 “그렇구나”하지 반응하지 않습니다.  반응해서 계속 주고받고 하면 벌써 접촉을 하는 것이거든요.  기(氣)를 섞는 것입니다.     차라리 아무도 없는 산 속에 들어가서 수련하면 훨씬 더 쉽지요.  속가(俗家)에서 할 것 다 하면서 반응하지 않는다는 것이  어떻게 보면 참 잔인한 일이에요.      그런데 할 수만 있다면 이 방법이 훨씬 빠른 길입니다.  다 버리고 산 속에 들어가서 기껏 수련을 했다고 해봐요.  그렇게 해서 어느 경지까지 가더라도 속(俗)에 내려오면 그런 공부,  사람들 사이에서 살아가면서 아무 반응하지 않는 공부를 또 해야 됩니다.  그러니까 두 번 공부를 해야 하는 것입니다.      “선계에 가고 싶다” 책의 서두 4에 섰듯이  테니스 칠 때 백 보드로 혼자서 아무리 연습을 해도  선수를 만나면 상대에 따라 치는 것이 다릅니다.  백 보드 치는데 아무리 능숙하고 스타일이 멋져도  특정 선수에게는 대책이 없는 경우가 많이 있잖아요.      다양한 선수들하고 연습을 해서  공이 어떤 선수로부터 어떤 식으로 넘어와도  자기가 맞받아 칠 수 있는 것이 고수입니다.  혼자서 연습하면 그 벽을 못 넘습니다.  선계수련은 고수를 만들어 내는 수련이므로  대상 없이 혼자 벽에다 아무리 잘 해도 소용이 없어요.  금촉이라는 것은 바로 그런 것, 반응하지 않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과연 얼마나 작정을 하고 이 수련을 하시는 지 모르겠습니다만,  앞으로 평상시 수련을 쭉 해 나가다가  어느 시점이 되어 “아! 내가 금촉수련을 한번 제대로 해봐야겠다” 할 때가 있을 거예요.      그 때의 주제는 매번 달라질 수 있습니다.  금해야 될 분야가 너무 많거든요.  사람이 참 복잡한 동물이기 때문에 금해야 될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사회생활 하면서 단번에 모든 것을 다 금촉 할 수는 없으므로 기간을 정해서 하는 거예요.  예를 들어 일 주일 금촉을 하는데 이번 주제는 “말을 하지 말아야겠다” 하는 거예요.      기본 적인 말 외에는 일체 하지 않는 것이죠.  일 주일 동안은 그 공부를 하는 것입니다.  그런 금촉이 있습니다.  그렇게 해서 내가 이제 아무리 말이 목구멍까지 나와도 넘길 수 있고  아무렇지도 않게 넘어갈 수 있으면 그 다음에는 또 다른 공부로 넘어가는 거예요.  다음 번에는 듣지 않는 것이라든지  아무 것도 생각하지 않는 것 등을 주제로 해서 하는 것입니다.      남에게 참견하는 것을 금해야겠다. 하면 옆에서 누가 무슨 짓을 하건 참견을 안 하는 거예요.  그런데 그 공부할 때는 옆에서 한 술 더 뜹니다.  사실은 공부시키느라고 그런 것인데 거기에 반응해서 넘어가면 백날 공부 못 해요.  이를 악물고 한번 안 해야겠다 하면 하는 거예요.      일 주일 해서 넘어가면 21일을 해보세요.  또 성공하면 40일, 그렇게 해서 100일이 넘어가고  자기가 어떤 분야에서 자신 있다고 생각되면 끝납니다.  즉 “안 듣는 것에 대해서는 내가 자신 있다” 하면 그 공부는 끝나는 거예요.  그리고 다음 번에는 다른 것을 시도하는 것이죠.               
97    웅녀와 호랑이 댓글:  조회:1774  추천:0  2015-06-03
웅녀와 호랑이       이제는 상당히 공부가 많이 되셔서 수준 높은 질문들을 하십니다.  어려운 문구를 써서 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체험에서 우러나오는 질문이 고차원적인 질문입니다.  그런 질문을 받으면 상당히 반갑습니다.      금촉이 뭐냐는 질문도 많이 하시는데 금촉수련을 하지 않은 상태에서는  제가 아무리 얘기를 해드려도 와 닿지가 않습니다.  실제로 해보면 아주 구체적인 질문들이 나올 수가 있는데,  아직 이 수련에 들어서 완벽하게 금촉수련을 하신 분이 안 계셔서  그런 질문들이 안 나오는 거예요.      단군신화에 웅녀와 호랑이에 대한 신화가 있는데  100일이라는 기간을 정해 놓았다 뿐이지 실제로 100일이 아닐 수도 있어요.  어떤 수준에 도달하기까지의 과정을 애기한 것입니다.  그 두 경우를 보면 알 수 있듯이  금촉에 있어서의 장애가 사람마다 똑같지는 않습니다.  근기가 낮으면 대개 도중에 뛰쳐나가게 되는데,  그 뛰쳐나가는 이유들이 일률적이지 않고 사람마다 다 다른 것입니다.      예를 들면 조금 기운이 장해지면 자꾸 과시하고 싶어하는 사람이 있어요.  자신의 능력을 남들이 알아주기를 바라서 누구를 앉혀놓고 수련시키고,  기운을 다 열어놓고 상대방이 완전히 제압 당할 때까지 해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 분은 금촉에서 가장 장애물이 바로 그것입니다.  과시하고 싶은 것을 꾹꾹 누르는 것이 그분에게는 금촉이에요.      다른 사람하고 얘기하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무슨 일이 일어나면 해소하는 방법이 여기저기 막 전화 걸고 대화하는 거예요.  물론 몸은 집에 있지만, 나가지 않고 집에 있다고 금촉하는 것이 아니죠.  그런 분은 입을 다무는 것이 금촉이에요.  계속 해서 대화로 풀려고 하는 것이 금촉에 가장 큰 장애가 되죠.      또 먹는 것을 아주 즐기는 분도 있습니다.  식도락 하는 분들은 대충 먹지 않고 꼭 맛있는 것을 찾아 다닙니다.  금촉수련 한다면서 지방으로 원정도 가고 기운을 그쪽으로 막 분출하는 거예요.     눈에 대해서 사치하던 분들도 있습니다.  뭔가를 계속 보는 거예요.  책이라도 보고 아이쇼핑하고, 번화한 것을 좋아해서  인사동이라도 거닐어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들은 보는 것을 금하는 것이 금촉입니다.  보되 반응하지 않는 것, 그냥 보는 것으로 끝내는 것입니다.  그런 것이 그분에게는 금촉의 가장 중요한 장애가 되는 거예요.      듣는 것을 굉장히 즐기시는 분도 있습니다.  가만히 있지 않고 하다못해  새소리라든지 낙엽 떨어지는 소리라도 들어야 사는 것 같은 분 있죠.  늘 음악 틀어 놓고 지내죠.     제가 아는 어떤 분은 차만 타면 무조건 클래식 음악을 틀어요.  같이 탄 사람의 의사에 상관없이……  음악을 듣는 것이 상당한 취미라는 것과  자신이 고상한 취미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드러내 보이고 싶어서 그런 것인데,  그런 분들은 그것이 금촉해야 될 대상이 되는 거예요. 듣지 않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는가?  음악이 들이면 그냥 듣는 거예요.  흘려 보내는 것이죠.  거기에 반응해서 “아! 좋다” 하고, 저 음악은 무슨 4 중주이고 작곡자는 누구이고 하면서  계속 거기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그냥 흘려 듣는 것입니다.      이런 식으로 금촉해야 될 요인들이 사람마다 다르기 때문에  각자 자기가 기존에 에너지를 분출해왔던 것들을 금하는 것이고,  설사 한다고 하더라도 반응하지 않는 것입니다.      흔히 생각할 때는 금촉이란 성적인 접촉만 안 하면 다 되는 줄 알거든요.  그래서 그것 안 하니까 금촉한다고 하면서 에너지를 다른 쪽으로 자꾸 씁니다.               
96    영이 없는 아이들 댓글:  조회:2167  추천:0  2015-05-29
          영이 없는 아이들     요즘 신문에 보면 유전자 조작한 식품이 상당히 문제가 되고 있는데…… 하여간에 가려서 먹다 보면 먹을 음식이 없어요.  음식 하나하나 스트레스 받고 신경 쓰고 그러는데,  여기서는 생식이나 특별음식을 권장하지 않습니다.  생식도 좋지만, 하루에 한끼 정도 또 간식으로 하는 건 괜찮아도  그것만 먹을 경우 영양의 불균형이 생기기 때문입니다.      또 음식이라는 것은 다 먹기 위해서 있는 것인데,  일일이 다 신경 쓰는 건 너무 어려운 일이에요.  식품 위생이나 여러 가지 면을 다 고려해야 하기 때문이죠.      수련하는 분들은 자체 면역이 있고, 또 수련을 계속하면 고도의 감각,  즉 음식을 보는 시각이라든가 후각, 미각 이런 것들이 상당히 발달되어  음식을 먹을 때 스스로 “아, 이건 좋지 않다” 라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게 됩니다.  보기만 해도, 안 보이면 느낌으로라도 좋은 음식인지 아닌지 알아요.      무의식적으로 먹었다 하더라도 몸 안에서 아주 귀신같이 알아서  불필요한 음식, 해로운 음식이 들어오면 20-30 분 안에 금방 해소시키고 내보냅니다.  그러니까 어떤 것을 먹을까 그런 것에 스트레스 받고 신경 쓰지 마시고  그냥 먹고 싶은 것 드시고, 수련을 열심히 해서 몸이 알아서 처리해주도록 하면 될 것 같아요.      사실 어느 것 하나 먹을 수가 없어요.  솔잎은 먹을 수 있나요?  솔잎 좋은 줄은 다 아는데, 양 의사들은 한약이라면 아주 기겁을 하면서  중금속 덩어리라고 하잖아요.      대추차도 좋은 것 같지만 대추가 나오는 과정을 보십시오.  대추에 얼마나 농약이 많이 들어있는지 알면 먹을 수가 없어요.  그러니까 그냥 먹되 몸이 알아서 해주도록 하면 되겠습니다.      요즘 유전공학이 발전해서 생명을 조작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다른 종류의 생물을 접합시켜서 제 3의 생물이 나오고 그런 일을 어떻게 봐야 하는지요?  좋은 일일까요?      사람들은 좋은 쪽으로 한다고 하지만 상업적인 이유가 많이 들어가 있어요.  아주 피치 못하게 유전자 변형을 해야 될 경우가 아니면 좋지 않습니다.  의학적인 목적이 아니라 상업적인 목적으로 많이 하기 때문입니다.      유전자 조작한 것은 원래의 것보다는 나쁘죠.  하여튼 신의 영역을 침범해 들어가는 것인데 제 생각에는 안 하는 것이 좋다고 봅니다.  제일 중요한 것은 물질이 아니라 영(靈)적인 면인데, 영혼이라든가 그런 것은  과학으로 할 수 없고 DNA도 과학으로 할 수 있는 것이 있고 없는 것도 있어요.      복제양 돌리 같은 것도 많이 만들 수가 없는 것이 양이라는 것,  동물의 특성을 구분 지어주는 것은 영이거든요.  그런데 영은 그렇게 인간의 힘으로 무한대로 늘릴 수가 없어요.  그러니깐 영이 빠진 양이 탄생되는 것이죠.  한둘 정도는 들어갈 수가 있겠지만……      영이라는 것은 하늘에서 연결되는 것이어서,  영이 분리되고 복합될 수는 있어도 한계가 있어요.  많이 허용하지 않습니다.  복합 영이나 분리 영도 있을 수 있는데 무한정으로 하지는 않고,  조물주 입장에서 반드시 의학적인 측면이라든지 이런 분야에서  필요한 경우에만 허용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이 돌리는 아무리 많이 만들어낸다 하더라도  한둘까지는 허용이 되는데 그 이상은 영이 없는 동물이 된다고요.  혼이 빠진 동물이 되는 거예요.  몇 달 있다가 불구가 드러나게 되므로  더 이상 인간들이 거기에 대해서 시도를 하지 않을 것 같습니다.      사람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영은 조물주의 영역이어서 하늘에서 연결이 돼야 하는 것이지,  인간의 힘으로 영을 그렇게 많이 분리시킬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인간들이 그런 일을 계속 한다면 영이 없는 아이가 나오게 되죠.      겉보기에는 다 사람이니까 처음에는 모르는데,  몇 달 지나면 금방 불구가 드러나게 됩니다.  영이 없는 인간이기 때문에……  그런 식으로 될 것입니다.      그러니까 자연히 안 하게 될 거라는 말씀이시죠?      지금은 시험 단계이고 과학자들이 시행착오를 많이 하고 있고  성공한 것처럼 보여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어느 정도까지는 성공할 수 있지만  제일 중요한 핵을 주지 않기 때문에 더 이상은 창조를 못하게 됩니다.   
95    제라드 드 빠르디유가 작품을 고를 때 댓글:  조회:1956  추천:0  2015-05-24
제라드 드 빠르디유가 작품을 고를 때       항상 “때”라는 것이 있어요.  책에도 보면 때에 대해서 많은 말씀을 하셨는데  항상 기회를 잡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성경에도 늘 깨어 있으라는 말씀이 있죠?  항상 준비하고 있으라고 하는데, 무슨 뜻이냐 하면,  기회가 나의 뜻과는 별개로 늘 그냥 왔다 가더군요.      우주의 섭리는 나의 뜻을 기다려 주지를 않더군요.  그저 내가 그 안에 들어가는 수밖에 없더군요.      우주로 돌아가는 것, 섭리를 알면 내가 거기에 편입을 해야지 날 따르라고 할 수는 없어요.   일단 그 “때”라는 걸 아시면 그 속으로 자기가 들어가는 방법 밖에는 없어요.      보면 시대와 타협하지 못하는 분들이 있잖아요.  시대의 희생자 이런 말도 있는데 지식인들이 흔히 그렇죠.  하지만 사실 시대를 볼 줄 아는 안목이 필요한 거예요.      “제라드 드 빠르디유”라는 프랑스의 배우가 있어요.  모르시나요?  키 크고 코가 이렇게 크게 생기신 분이죠.  중학교 중퇴하신 분인데 프랑스에서 몸값이 제일 비싼 분이에요.  한번 출연하면 출연료를 우리나라 돈으로 50억 정도 받는대요.      그분이 외국잡지와 인터뷰한 것을 보았는데,  자기는 작품을 선택할 때 항상 시대를 대변하는 역할,  역사성이 있는 인물이 아니면 안 한다고 그러더군요.      무슨 말인가 하면, 21세기를 눈앞에 두고 있는 이 시점에 사는 사람이  고대인 같은 사고방식을 가지고 시대에 역행하면서 사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다는 거죠.      그렇습니다.  제가 볼 때 안에 들어와서 일원이 되어 같이 돌아가는 사람이 지식인이에요.  밖에서 보면서 비판하는 사람은 많죠.  비판적인 안목으로 그렇게 하는 것이 지식인이라고 여겨서 그러기도 하고,  문학이나 철학 하는 분을 관찰자라고 합니다.  지식인이라면 수레바퀴 안에서 같이 돌아가지 않고,  떨어진 상태에서 보아야 한다고 얘기하는 분도 있습니다.      저는 그렇지 않습니다.  항상 시대의 바퀴 속에 들어가서, 같이 움직이는 것이 지식인이라고 보거든요.  같이 움직일 뿐 아니라 두 눈을 똑바로 뜨고 보는 거예요.  그것이 지식인입니다.      시대의 아픔을 같이 느끼고 그 안에서 같이 호흡하는 것이 지식인이지,  떨어져 나와서 비판하고 이탈한다면 지식인이 아니라고 봅니다.      지금 21세기 이 시점에 한국에 태어나서  나이라든지 환경적인 요인, 역사적인 요인들을 100% 활용할 수 있어야 인물이라고 봐요.  때를 안다는 것, 때를 탄다, 기회를 잡는 다는 것은 그런 것입니다.  항상 환경을 최대한으로 활용하면서 취해야 할 점은 취해야지,  이탈해 나와 어찌할 바를 모르고 낙오자 또는 시대의 희생자같이 구는 것은 안 됩니다.       수련하는 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시대에 소외되는 분들이 아니라 같이 호흡하면서 해결책을 자신에게서 찾는 분입니다.  남을 탓하거나 나라를 탓하지 않고,  또는 사회, 경제를 주도하는 분들에게서 원인을 찾지 않고  스스로 자신에게서 해법을 찾는 분들입니다.      그리고 자기 스스로 모범을 보이시는 분들이  바로 수련하는 분들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스스로 자기만이라도 본을 보여주셔야 합니다.  하다못해 쓰레기 처리하는 문제 같은 사소한 일에서도 폐 끼치지 말고  자기 문제는 자기가 해결하고, 자기 집 쓰레기는 자기 집 대문 안에서 다 처리하고  이렇게 하면서 사회에 피해주지 않고 문제를 스스로 해결하는 분들이 수련을 하셨으면,  또 그런 마음자세로 수련을 하셨으면 하는 바람을 가지고 있습니다.                   
94    우주에서 나를 부르는 소리 댓글:  조회:1766  추천:0  2015-05-20
      우주에서 나를 부르는 소리     제가 머무는 곳에서 차로 10분 정도 가면 저수지가 있는데 아주 기가 막힌 절경이에요.  저수지 주변만 40km가 되고, 차로 운전해서 가도 1시간 10분이 꼬박 걸립니다.  차 한대 간신히 지나갈 정도의 폭인데,  그 길에 들어가면 중간에 빠지는 길도 없고 돌아 나올 길도 없어요.  그래서 “가다가 적당히 빠지면 되겠지” 이렇게 생각하면 안 되고,  일단 들어가면 내처 출발한 지점까지 돌아올 수밖에 없는 저수지입니다.      그 길을 가면서, 선계로 가는 길은 바로 이런 길과 같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빼도 박도 못하겠더군요.  전진하거나 그 자리에 서 있지 않으면 추락하는 것밖에는 선택이 없어요.  되돌아오지는 못해요.  되돌아오는 길은 더 힘들어요.  후진해서 가는 것은 너무 힘들죠.  저도 수련하면서 마음속 어떤 부분은 되돌아가고 싶고, 추락하고 싶고,  거기서 머물고 싶을 때도 있었는데, 내처 왔습니다.      도저히 되돌아가지 못해요.  발동이 걸리니까 이 길은 그냥 계속 가야만 되는 길이더군요.  그리고 그 흡인력이라는 것은 상당해요.  우주에서 나를 부르는 소리, 그 빨아들이는 힘이 너무 커서  다른 데 눈을 돌릴 만한 비교되는 가치가 없었어요.  이 길밖에 없다는 생각이 계속 들었어요.      고통스러운 것도 많이 느꼈는데 다른 선택이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그 길이 좋다는 것, 비교할 수 없는 가치라는 것을  제 마음이 너무 깊이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어요.      엊그제 텔레비전을 보니까 독일에서 유학 온 어떤 분의 이야기가 나오더군요.  세 사람이 같은 부엌을 쓰고 공동 화장실을 쓰는 데서 유학생활을 하고 있어요.  집안도 부유하고 독일에서 상당한 위치에 계시던 분이에요.  역사를 공부하는 분인데 한국사 특히 왠지 고려사를 알아야  세계 역사를 안다는 신념을 가지고 계시더군요.  그래서 고려사에 흠뻑 빠져 있어요.      게다가 석사도 아니에요.  나이가 삼십이 넘으셨나 그쯤 되시는 분이 이제 한국말 겨우 배워서 학사를 하는 거예요.  여기서 학위를 받지 못할 수도 있어요.  좋은 직장을 버리고 왔는데 여기서 공부해서 석사, 박사 된다는 보장도 없고,  독일 사람이 한국 역사 특히 고려사를 한다고 해서 아무 보장이 없는 일이죠.      그래서 인터뷰하는 분이 “왜 이렇게 사서 고생을 하시느냐?” 그래요.  그랬더니 선뜻 “가치 있는 일이기 때문에 한다” 이렇게 얘기하더군요.  자기는 가치 있다고 여기는 일은 고생이 즐겁다고 해요.  그래서 참 반가움을 느꼈습니다.      살아가면서 제일 고통스러운 일은  내가 별로 가치를 느끼지 못하는 일을 마지못해서,  호구지책으로 또는 다른 누구 때문에 할 때입니다.  비참하고 초라하죠.  별로 하고 싶지 않은 일, 가치가 느껴지지 않는 일을 가족들을 부양하기 위해서  또는 어떤 변변치 못한 이유 때문에 해야 될 때 그렇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고통스럽고 고생스러운 일도  본인이 스스로 가치 있는 일이라고 남에게 말할 수 있고  스스로에게 당당할 수 있다면 얼마나 당당합니까?      만일 여기서 수련하면서 “아, 나는 나의 청춘을 여기다 바쳐도 여한이 없다” 하신다면,  “선계수련 하는 일에 내 청춘의 거의 대부분, 또는 내 인생의 거의 대부분을 바쳐도  가치 있는 일이기 때문에 여한이 없다” 이렇게 생각이 드신다면 내처 하시고,  만일 가치를 느끼지 못한다면 밖에서 할 일을 충분히 하시다가 때가 되면 오셔도 좋습니다.   
93    안 해보는 재미 댓글:  조회:1783  추천:0  2015-05-15
안 해보는 재미         지난 주 중급반 수련에서도 안 해보는 재미가 있다고 말씀 드렸는데,  저는 그 재미를 알기 때문이에요.  이 세상에 태어나서 남들 다하는 거 하는 재미 말고,  남들 안 하는 거 하는 재미, 남들 다하는 거 안 하는 재미가 참 있습니다.  그 재미를 알게 해드리고 싶거든요.      어떤 분이 저보고 “선생님은 수련 안 하는 재미가 얼마나 재미있는지 모르시죠?” 하셔서  제가 집에 가면서 “그러고 싶으실까?” 했습니다.      마음은 늘 이팔청춘이죠.  게다가 수련을 하면 세상에 대한 욕구 이런 것들이 더 왕성해져요.  전에는 시시하게 하는 일 없이 보냈던 사람도  수련을 하면 없던 정열이 생기면서 이런 저런 것들이 막 하고 싶어져요.      자신의 청춘을 돌아보면서 10대, 20대 때가 너무 끔찍하다고까지 하는 사람이 있어요.  너무나 시시하게 보냈기 때문에……  그랬던 분들도 새삼스레 미련이 생기고 그래요.      그런데 제 경험에 의하면 수련 “안 하는”재미는 없더군요.  책에 보면 “수련을 왜 해야 되는지요?” 이런 질문들이 있잖아요.  수련이 하고 싶지 않아서 그런 질문을 하는 상태까지 간 적이 있었는데  제 선생님 말씀이 “그러면 수련에 방학을 한번 권해본다” 하셨어요. 선가에서 수련하다가 속가에서 한번 자유롭게 살아보라고 하셨어요.      저도 온갖 것을 다 겪어보지 않은 상태에서  수련의 계율에 묶이다 보니까 그랬던 적도 있었습니다.      저도 그렇게 한탄을 하면서 항의하고 버텨보고 했습니다.  그런데 답변이 나오시면 그것으로 끝이에요.  “수련을 좀 안 해보겠습니다” 하면  늘 “그렇게 해라. 쉬어라” 그런 말씀을 하셨거든요.      그러면 제가 수련을 얼마나 쉬었는가?  아무리 많이 쉬어도 3일을 넘긴 적이 없습니다.  하루 이틀은 즐거워요.  수련 안 하는 재미가 있었어요.  그런데 3일쯤 되면 수련 안 하는 것이 편치 않고 즐겁지 않고,  오히려 막 괴로워지더군요.      그래서 “어쩔 수가 없구나” 했습니다.  제일 오래 안 했던 것이 3일이었는데  그러다가 다시 앉으면서 “아, 나는 어쩔 수가 없다. 별 수 없다”  그렇게 스스로 생각을 했습니다.      수련 안 하는 재미는 없습니다.  이미 수련 안에 들어오신 분들은  아무리 밖에서 즐겁게 놀아본 들 즐겁지가 않아요.  왠지 고통스럽다고요.      전에는 즐거웠던 일들이 그렇지가 않아져요.  밖에 나가서 똑 같은 행동을 해보십시오.  절대 안 즐거워요.  안 즐겁다 못해 괴롭습니다. 마음속 깊이 괴로워요.  왜 그럴까요?  생각을 좀 해보십시오.      왜 전에는 즐거웠는데 이제는 진심으로 즐겁지가 않은가?  만일 지금도 전에 하던 대로 하는 것이 진심으로 즐겁다면  계속 그렇게 즐기셔도 좋습니다.  그런데 진심으로 즐겁지 않거든요.  즐거운 것 같은데 찡그리고 있는 자신을 봅니다.  이 수련 안에 들어오면 어쩔 수 없어요.  왜냐하면 자기 마음 속은,  본성은 더 즐거운 것을 이미 알고 있기 때문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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