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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이런때가 좋다 댓글:  조회:1079  추천:0  2018-02-21
이런 때가 좋다 구인숙 잡생각이 밀물처럼 밀려든다. 이럴 때 나한테는 걷는 것이 최고 처방이다. 초겨울의 쌀쌀함이 얼굴이 아리다. 그래도 좋다. 내 머리 속 잡생각이 줄어든다면 그냥 정처없이 걷고 싶다. 어두움이 내린 초저녁 길이지만 인적은 한적하다. 그래도 두려움없이 무작정 앞을 향해 걷는다. 발길이 닿는 대로 걷고 또 걷는다. 걷다 보면 내 마음의 짐, 머리 속 고민이 썰물처럼 체력소모와 함께 사라져 버릴 것 같다. 무슨 고민이 그렇게 많아서 라는 질문이 있다면 그냥 누구나 한두 번쯤 하는 고민중 하나라고 답할 것 이다. 그 고민이 그때는 시련으로 다가올지 언정 세월이 흐르고 보면 별치 않게 여겨지고 아팠던 기억도 추억으로 남겨진다는 것을 겪어 본 사람은 웃으면서 말을 한다. 하지만 현재 이 시각을 살아가는 우리들은 미래라는 시간이 가져다 주는 평온함이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현재 고민거리에서 가슴을 조이면서 허덕이고 있다. 나도 마찬가지이다. 그래서 빨리 해탈하려고 무작정 걷는다. 그리고 정처도 없다. 집에 가는 반대방향이 되더라도 상관없다. 걷다 보면 쌩쌩 지나가는 자동차소리도, 가끔 밟혀서 사각사각하는 낙엽소리도 멀리서 잔잔히 들려오는 듯한 느낌이 든다. 그리고 나도 모르게 입가를 살짝 올리며 실룩거린다. 고민덩어리 속에서 허덕이다 그제야 깊은 날숨을 쉬면서 안도감을 서서히 찾는다. 그때면 주변도 슬슬 안중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이렇게 걷는 길이 짧으면 한시간 길면 몇시간이 될 수 있다. 기억 속 기록으로는 거의 3시간을 묵묵히 걸은 적이 있다. 한여름의 황혼 녘을 가슴속에 담아두고 청도시내바다 해안선을 동에서 서쪽 끝까지 횡단했다. 하이힐의 괴로움을 벗기고 길가에서 슬리퍼를 사 신고 말이다. 신기한 것은 머리속에는 어떤 고민으로 걸었던 것 보다 걸었다는 사실만 기억에 남는다. 뭔가 괴로워서 걸었던 것은 확실하다. 하지만 그때 그 괴로움이 아마도 어제 먹었던 점심이 기억에 가물가물한 것처럼 중요하지 않았을 지도 모른다. 아무튼 나는 고민의 사유가 있으면 이렇게 걷는 습관이 있다. 오늘도 마찬가지다. 갑자기 순대국밥집 간판에 눈길이 멈춘다. 그 순간 허기증이 밀려온다. 걸으면서 이 순간을 고대했을지도 모른다. 군살이 빠진 몸처럼 몸과 마음이 홀가분하다. 혼자 먹는 밥이지만 적적하지 않다. 사실 나는 순대국밥은 비린내가 싫어서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오늘은 그것이 중요하지 않다. 그냥 허기증이 밀려왔다는 것이 필요하다. 그래서인지 어느 때보다 맛있다. 국밥과 반찬을 오가며 허기진 내 마음을 채운다. 초겨울 밤 쌀쌀한 공기를 두 눈을 지긋이 감고 마음껏 느껴본다. 청신한 공기를 가슴 깊은 곳까지 들이쉬고 내쉬면서 눈을 떠본다. 버스정류장이다. 디디택시를 부르려고 휴대전화를 찾던 순간 마침 버스가 한대 들어오고 있었다. 나는 무작정 버스에 올랐다. 어디로 가던 상관없다. 이 동네 돌고 돌아도 내 사는 동네이니. 그냥 타고 싶었을 뿐이다. 문제는 갑자기 탄 버스라 잔돈준비를 하지 못했다. 온 가방을 다 뒤져도 일원한장 나오지 않는다. 하긴 요즘 세상 휴대전화 하나면 어디로도 갈수 있으니 잔돈 걱정 따위 생각하지 못했다. 위쳇이 다 해결해 줄 것이라고 믿었으니 말이다. 그런데 버스에서 위쳇페이가 안된다고 한다. 하지만 퀵패스라고 쓰여진 은행카드는 지불이 가능하다고 한다. 처음 알게 된 지식이다. 있는 은행카드를 다 뒤져보니 다행이도 그런 은행카드가 하나 있었다. 신기하게도 은행카드를 찍으니 정말로 1원이 빠져나갔다. 그 순간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성취감이 스쳐 지나갔다. 한참 버스 타고 돌다 보니 집방향은 아닌 듯 하다. 시간도 늦은 터라 집으로 가야겠다는 생각에 눈에 익숙한 곳에서 내렸다. 마침 그 버스정류장에 집방향으로 가는 버스도 있었다. 퀵패스 은행카드가 있으니 잔돈걱정은 할 필요가 없다고 나름 신났다. 나는 은행카드를 손에 쥐고 버스를 타자 마자 찍었다. 그런데 웬걸 찍히지 않는다. 기사한테 물어보니 이 버스는 그런 시스템이 없다고 한다. 이걸 어쩌나. 잔돈은 역시 없는데. 늦은 시간이라 몇몇 승객밖에 없다. 그래도 염치불문하고 잔돈을 바꿀 수 있나 요청했다. 나름 머리를 써서 위쳇으로 현금을 바꾸려고 애써봤다. 내 모습이 웃겼는지 앞에 있던 남자 승객이 1원짜리 한 장을 건넸다. 내가 연신 고맙다고 하면서 위쳇으로 주려고 하자 그 사람은 1원으로 그럴 필요 없다고 조용히 제자리에 앉았다. 솔직히 좀 난감했다. 전혀 모르는 사람한테 이렇게 도움을 받으니 어쩔 바를 모르겠다 .한편 마음한구석은 훈훈하다. 이렇게 받은 인정 다른 사람한테 돌려야지 하면서 차가운 버스의자에 엉덩이를 붙인다. 흔들거리는 버스안에서 이어폰을 끼고 오늘하루를 되새기며 그 순간을 음악으로 이완시킨다. 이렇게 타는 버스도 오래간만이다. 그러고보니 나란 사람은 이런 때가 주기적으로 있는 것 같다. 언젠가 방향없이 탄 버스로 인해 택시비를 몇 십원이나 지불하고 집으로 간 적도 있다. 그러나 그 택시비가 아깝지 않다. 나 나름대로의 선택이니 말이다. 그리고 돌고 도는 버스안에 내 마음의 짐도 다 내려놓고 내 몸만 내릴 수 있을 것 같아서 탈 만하다. 그리고 걷고 또 걸으면서 내 발자취 속에 내 머리 속 고민을 고스란히 남겨놓을 것 같아서 목적없이 정처없이 자주 걷는다. 사실 나도 안다. 무작정 걷는다고 해서, 내키는 대로 버스를 탄다고 해서 모든 고민이 해결 된다는 것은 아니라는 걸. 하지만 이러한 과정이 나에게 고민을 바라보는 마음 가짐을 바꿔줄 수 있기에 나는 이런 때가 좋다. 그리고 필요하다. 살다 보면 누구나 이미 아는 고민, 갑자기 찾아오는 고민, 그리고 그렇게 하면 찾아 올 것 같은 고민 등등 헤아릴 수 없는 고민들이 생겼다가 없어졌다가 심지어 나의 삶과 공존도 한다. 이런 고민에 하나하나 신경을 곤두세우고 응대한다면 얼마나 피곤 한 삶이 되겠나는 생각이 든다. 우리의 삶은 공기청정기처럼 수시로 내 머리속을 정화시킬 시스템이 필요하다. 간단한 고민은 더 간단하게, 복잡한 고민은 간소화 시키는 시스템을 만들어 가는 과정이 삶의 양념이다. 누구나 이런 때를 잘 만들어 가기 바란다.
3    몸에 힘을 뺀다는것은 댓글:  조회:706  추천:0  2018-02-21
오래간만에 헬스장에서 웃몸 일으키기 운동을 해봤다. 거뿐하게 동작이 이어진다. 이런 추세이면 수십개는 문제가 없을 것 같다. 밥 나와라 뚝딱해도 배가 부르지 않았던 힘 넘치는 소녀시절에도 해내지 못했던 웃몸 일으키기를 나잇살을 없애려고 온갖 정성을 퍼붓는 40대중반에 와서 이렇게 가볍게 할 수 있다니. 소녀시절 체능시험에 필수인 이 항목은 나의 굴욕의 력사다. 한번도 당연하게 합격해본 적이 없다. 늘 두번이상 시험을 보고 체육선생님의 인심을 사야 겨우겨우 합격의 관을 넘는다. 거듭되는 좌절로 나는 스스로가 웃몸 일으키기 운동은 아예 못하는 사람으로 단정해버렸다. 10여년전에 요가를 배운 적이 있다. 처음에는 온몸에 힘이 들어가서 얼굴만 시뻘겋게 달아올랐지 동작은 전혀 나오지 않았다. 요가선생님은 지나가는 말로 힘을 빼라고 말한다. 도대체 어떤 상태가 힘을 빼는 것인지 도무지 알 길이 없었다. 사실 힘이 잔뜩 들어가 있는 느낌도 잘 몰랐으니 말이다. 나의 반복되는 질문에 선생님은 이렇게 답해줬다. 약간 의심쩍게 느껴졌지만 맥 풀린 상태를 상상하면서 흉내를 내봤다. 몇번을 반복해보니 무엇인지 알 것 같았다. 그리고 기적처럼 안되던 요가동작이 좀 크게 나오기 시작했다. 그렇게 서서히 몸에 힘을 빼는 것을 경험하기 시작했다. 그때부터 운동신경이 그다지 발달되지 못한 나도 예전보다 훨씬 편하게 운동을 할 수 있게 되였다. 문뜩 굴욕의 역사가 떠오른다. 혹시 내가 엉뚱한 곳에 힘을 넣지 않았을가? 궁금증에 온몸의 힘을 빼고 웃몸을 일으켜본다. 이것이 웬일인가 싶게 가볍게 웃몸이 올라간다. 깨달음의 기쁨은 사람을 흥분케 한다. 굴욕의 력사를 합리화시킬 근거가 생겼으니. 몸에 힘을 뺀다는 것은 모든 운동에서 적용되는 기본리론이다. 몸에 힘을 뺌으로써 필요한 곳에 에너지를 집중시켜 표출할 수 있고 최고의 운동효과를 이끌어낼 수 있기 때문이다. 리론은 이러하나 실제로 몸에 힘을 뺀다는 것은 오랜 시간동안 수많은 훈련을 거쳐 경험해봐야 경지에 오를 수 있다. 오죽하면 골프에서 힘 빼는데 3년이란 말이 있겠는가? 몸에 힘을 뺀다는 것은 운동뿐만 아니라 우리가 살아가는 삶속 곳곳에서 만날 수 있다. 우리가 이사할 때 찾는 이사짐센터, 그곳의 이사짐 달인들은 감탄이 절로 나온다. 거대 가전들을 혼자서 용케도 잘 나른다. 그 사람들은 짐을 메기전에 먼저 심호흡을 하면서 옮길 짐을 잘 쌓아서 튼튼하게 한다. 그리고 무게중심을 잘 잡는 동시에 몸에 힘을 빼고 자세를 바로 잡는다. 꼭 필요한 곳에 자신의 신체체중분산을 정확히 한다. 그리고 필요한 곳에 에너지를 집중해서 발휘한다. 그러지 않으면 큰 충격을 얻기 마련이다. 세상에는 자연의 물리적 법칙과 세상리치라는 것이 있다. 물이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르고 연기가 하늘로 오르는 것처럼 생활의 달인들은 힘으로 이런 세상리치를 억지로 거스르려 하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몸에 힘을 뺀다는 것은 위력을 발산하는 기본 바탕이기도 하다 인간관계도 살짝 짚어본다. 높은 자리에 오를수록 관록이 붙어간다.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고 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위치가 바뀌면 자연스럽게 몸에 힘이 들어간다. 힘이 들어갈수록 귀는 좁아져 가기 마련이다. 그 자리에 있으면 외로워지는 것도 이런 리유일 것이다. 능력자나 소유자들도 그 타이틀 자체로 몸에 힘이 들어간다. 몸에 힘이 들어가면 시각도 달라진다. 도도해지는 것도 이 때문이지 않을가? 어찌 이뿐이겠는가.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이 자기가 사는 방식대로, 생각하는대로, 보이는대로 몸에 힘이 들어간다. 그것이 잘못된 것은 아니다. 다만 몸에 힘이 들어간 것만큼 삶도 무거워지기 마련이다. 가끔은 살짝 몸에 힘을 빼고 가벼운 마음으로 주위를 바라보면 감지할 수 없었던 부드러운 인간미가 우러나오지 않을가? 내가 커피를 시작한지도 벌써 7년차이다. 커피 교육을 하면서 교육생들에게 어지간히 몸에 힘을 빼라고 한다. 커피 추출도 운동원리와 같다고 생각했다. 머리에 복잡한 생각을 하게 되면 동작은 한박자 늦어지기 일쑤다. 반복되는 기본동작은 가능하면 몸에 힘을 빼야 익숙해질 수 있다고 강조한다. 운전하는 것과 별다름 없다. 브레이크를 밟아야 하나 엑셀레이터를 밟아야 하는 것은 눈앞에 있는 상황이 직접 행동으로 이끌어가는 것이지 생각으로 고민하면 아찔하다. 날씬하고 자그마한 체구의 녀인이 1.5리터짜리 주전자를 들고 리듬을 타면서 가볍고 자연스럽게 핸드드립을 한다고 상상해보자. 아마 이 녀인은 몸에 힘을 빼고 커피를 내리고 있을 것이다. 커피에서 힘을 뺀다는 것은 어찌 이뿐인가? 커피를 시작해서 지금까지 커피에 대한 열정은 변함없었다. 커피에 대한 공부가 그 증거이자 나의 자부심이기도 하다. 그간 커피 관련 서적이란 서적은 거의 다 구매해서 보고 커피선생님을 찾아다녔다. 이것이 내가 걸어온 커피의 길이기도 하다. 이렇게 커피 관련지식을 쌓다 보면 나도 모르게 몸에 힘이 들어가고 목소리가 높아지기 마련이다. 어느 순간 나는 사람이 아닌 오로지 커피만 론하고 있었다. 커피에 관련된 것이라면 전문가 같고 다른 사람과 커피를 론할 때는 목소리가 높아진다. 내가 볶은 커피, 내가 만든 커피는 꼭 내가 말하는대로 먹어야 제 맛이 날것 같은 분위기였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이 업계에는 자기만의 스타일이 정답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사람들이 적지 않게 있다. 커피 공부를 하러 찾아다니다보면 업계의 숨어있는 고수들을 가끔 만나게 된다. 그 고수들은 그냥 고수가 아니다. 내가 커피만 바라보고 몸에 힘을 넣고 있을 때 고수들은 커피를 내려 놓고 사람을 론하고 있었다. 이것은 단순한 시각의 차이가 아니다. 내가 평면을 본다면 고수들은 립체를 보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주구장창 커피를 론해도 마셔주는 사람, 알아주는 사람이 없으면 무용지물이다. 한마디로 커피는 어디까지나 음식이고 사람을 떠날 수 없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커피만 바라보고 있었다. 깊게 생각해보면 커피는 인간관계의 매개체역할을 했을뿐인데. 4년전 일이다. 진눈깨비가 흩날리는 늦가을의 어느 일요일 아침이다. 일요일은 늘 나 혼자서 당직으로 서야 했다. 청소를 겨우 마쳤는데 녀자손님 세분이 꼬마 손님 한명을 데리고 머리 에 진눈깨비를 털면서 가게로 들어왔다. 모두가 초겨울의 변덕스러운 날씨에 대응준비가 잘 안된 듯 갑자기 추워졌다고 하소연한다. 나는 따뜻한 커피를 정성껏 내려서 손님한테 가져갔다. 꼬마친구는 서비스로 따뜻한 음료를 만들어 입천장에 화상 입지 않도록 얼음 두조각을 넣어 어린이가 마시기 적합한 온도로 맞춰서 내놓았다. 어른 세명은 알고보니 자매였다. 이런저런 말이 오가다보니 금세 친해졌다. 본인들은 시내에 살고 있고 부모님 댁이 커피숍 근처에 있어 자주 들린다고 했다. 그리고 나름 만족하고 가게를 나섰다. 이것이 인연의 시작이다. 그 큰언니는 근처로 올 때마다 꼭 나를 찾아왔고 나에게 늘 포옹으로 인사를 해주었다. 4년간 우리는 서로 전화로 안부를 전하는 사이가 아니지만, 그녀는 올때마다 한결같이 나에게 진심이 묻어나는 따뜻한 포옹을 넘겨주었다. 후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그날 큰언니가 나의 배려와 섬세함에 너무 감동했다고 한다. 내가 부끄러울 정도로 말이다. 그동안 나는 내가 내린 맛있는 커피가 인연을 이어준 것으로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리고 나의 커피에 자부심이 가득 들어있었다. 그런데 세월이 흘러 지금 커피를 놓고 되돌이켜보면 그때 그 커피는 인연을 연결시키는 매개체였을 뿐이다. 우리의 인연이 이어진 것은 다름아닌 진심였다. 그동안 넓혀온 커피지식이 베일을 덮어쓴 듯 내 시야를 차단시켜 놓았다. 그리고 몸에는 잡다하게 힘이 잔뜩 들어있었다. 커피지식을 넓혀간다는 것은 결국은 사람을 더 깊게 리해하기 위해서이지 않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몸은 지식이란 힘에 휘둘려 사람이란 중요한 연결고리를 잊고 있었다. 6년동안 열심히 힘주어 커피 공부를 해왔는데 자연의 리치는 돌고돌아 다시 몸에 힘을 빼도록, 그리고 다른 사람과 자연을 바라볼 수 있도록 눈과 귀를 만들어 주었다. 다시 한번 몸에 힘을 빼고 주위를 돌아본다.
2    낮별 댓글:  조회:686  추천:0  2018-02-21
오래 전 이야기다. 청도 와서 처음으로 로산 바닷가에 새해 해돋이를 보러 간 적이 있다. 새벽 4시에 출발하여 5시전에 목적지에 도착했다. 한 겨울의 해가 상대적으로 늦게 뜬다는 것 쯤은 다 알고 있는 상식이다. 허나 상식은 상식이고 심정은 심정인가 보다. 결국 해는 7시가 넘어서야 떴다. 요즘 같은 스마트한 시대와는 사뭇 대조된다. 일행은 해돋이가 잘 보일 것이라는 어느 로산 산자락에 차를 세웠다. 누가 려명전의 암흑이라 했지 않았나? 정말로 한치 앞이 보이지 않았다. 동트고 보니 우리가 주차한 위치가 낭떠러지였다. 차량 전조등으로도 바다와 산자락을 분별할 수 없을 만큼 캄캄했다. 생각만해도 아슬아슬하다. 허나, 한겨울의 새벽5시쯤, 그리고"해상제일명산"으로 불리우는 로산 산자락은 쏟아지는 별들에게 묻혀 그야말로 감동과 환상 그 자체였다. 맑고 차디찬 한 겨울 새벽공기는 총총한 뭇별들을 한결 더 돋보이게 한다. 시골에서 태여난 나는 늘 밤하늘을 바라보며 별들을 즐겨왔다. 하지만 고개를 들지 않고 눈앞에서 별을 보는것은 태여나서 처음이다. 손을 내밀면 잡힐 것만 같은 가까운 거리다. 뭇별들과 속삭이며 호흡할수 있을것만 같았다. 쏟아져 내리는 뭇별들이 그토록 반짝이고 밝을 수가 없다. 영화에서 나오는 한 장면 같았다. 요즘 시대 언어로 VR를 체험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쏟아져 내린 뭇별들의 대집결을 경험했다. 감탄을 금치 못했다. 그리고 감동의 순간이였다. 행여 해돋이를 놓칠까 로파심에 일찍 서둘러 간 그 두시간이 나에게는 평생 감동의 추억거리가 됐다. 그 감동에 밀려 해돋이 구경은 별로 기억에 남지 않게 되였다. 오랜 세월이 지난 지금도, 가끔 그때 그 감동을 생각하면 자연계가 신비로울 따름이다. 한편 엉뚱한 생각도 들곤 한다. 동화속에서는 별들은 해빛이 쨍쨍한 낮에는 잠자고 있다고 표현하던가? 내가 그토록 감성을 쏟아부었던 그날의 별들, 밝디밝은 낮에는 과연 어떤 모습일까? 자꾸 궁금해진다. 나의 무지함의 세계는 참으로 무한계인 것이 틀림없다. 우연히 이란 글을 읽게 됐다. 그동안 무지함으로 얼어붙은 나의 궁금증이 싹 녹아내렸다. 처음으로 낮별의 존재를 알게 된 것이다. 우주에는 성간흡수(星际吸收)현상이라는 것이 있다고 한다. 별빛은 언제나 변함없이 존재하지만, 더 밝은 천체의 빛에 흡수되면, 미약하게, 혹은 보이지 않게 되는 현상이다. 낮별이 그렇다고 한다. 찬란한 태양빛속에 가려져 별빛이 보이지 않게 된다. 성간흡수현상은 낮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달빛이 넘치는 밤에도 별빛은 미약하게 느껴진다. 그래서 다른 빛이 없는 맑고 캄캄한 밤은 별들이 유난히 총총하고 반짝이는 것이다. 별빛은 언제나 변함없이 존재한다고 한다. 중요한 단서이다. 나는 왜 그 생각을 못했을까? 그때 감동을 주었던 그 뭇별들의 대 집결도 성간흡수라는 현상으로 인해 낮에는 보이지 않는 별들로 존재했을 터이니 말이다. 따지고 보면 려명전에 암흑 같은 어두움이 있어서 쏟아지는 뭇별들의 진경이 이루어졌을 것이다. 눈을 감고 보이지 않는 낮별들을 한번 상상해본다. 존재를 알리지 못하는 낮별들도 려명전의 별빛처럼 쉴새없이 한결같이 빛을 내고 있을 것이다. 책에서 나오는 한구절이다. 왠지 모르게 짜릿한 느낌이다. 그러고보니 인간은 참으로 자연스럽다. 밝은 햇빛속에서는 낮별의 존재를 거의 모르고 태양에만 의존한다. 달빛이 흐르는 밤이면 인간은 온갖 미사여구로 달만 노래한다. 달빛이 없는 캄캄한 그믐의 밤이여야 별을 특별히 바라보게 된다. 이런 것이 다 이유가 있어서 였을까? 인간도 별과 닮은 꼴이 많다. 그래서 높은 인기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을 별이라고 부르는가 보다. 그 별들의 유형도 다양하다. 인생의 최고의 순간을 빛내는 별이 있는가 하면 달밤의 호수가처럼 은은하게 빛을 내는 별도 있고, 낮별처럼 존재하지만 보이지 않는 별들도 많다. 낮별처럼 보이지 않는 별속에는 "나"라는 별들도 존재한다. 사람들은 누구나 할 것없이 자기인생의 별이고 누군가에게 별이 된다. 이 귀한 존재를 우리는 스스로가 소홀히 하거나 잊고 살 때가 많다. 그래서인지 무엇인지 모르게 살짝 아쉬운 마음이 든다. 내게는 청도에서 알게 된10년지기 낮별같은 한국친구가 있다. 오래전에 영어학원에서 공부를 한적이 있다. 그때 그녀를 알게 됐다. 서로가 끌리는 곳이 있었나 보다. 처음에는 목례로 인사하다가 언젠가부터 자연스럽게 전화번호도 주고 받고, 가끔은 만나기도 하면서 서서히 친분을 쌓아왔다. 둘다 빠르게 열정을 불태우는 성격은 아니다. 그냥 설정된 온도처럼 식지도 않고 오르지 도 않으면서 좋은 관계를 쭉 이어 왔다. 그런 세월이 10년이다. 서로가 표현이 필요 없는 편하고 믿음 직한 관계다. 좋은 글에서 많이 나오는 것처럼, 좋은 일 있을 때 전해 주고 싶고, 가끔은 만나서 수다도 실컷 떨어보고 싶고, 그녀가 사는 집 부근을 지나가게 되면 그냥 은근스레 그녀가 궁금해 지곤 한다. 사실 누구에게나 한 사람 즘은 있는 친구관계이다. 그 어떤 가식과 수식이 필요 없는 진실한 그런 친구 관계가 소중할 따름이다. 그녀의 전공은 미술이다. 직업도 디자이너이다. 예술가라서 인가 늘 안목이 남다르다. 한편 낯가림을 많이 하는 성격이기도 하다. 언젠가부터 그녀는 오랫동안 내버려뒀던 꿈을 찾아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여유시간에 꾸준하게 그림 그리러 다녔다. 가끔은 그림 그리는 기쁨을 나와 공유하기도 했다. 그리고 첫 작품전시회가 열렸고, 나에게 초청장을 보내왔다. 청도에서 일과 상관없이 만난 첫 사회친구에게 일 번으로 보내는 초청장이라 한다. 고마울 뿐이다. 그리고 그녀가 자랑스럽기도 했다. 그녀가 별이 된 듯한 느낌이다. 그녀는 무엇인가를 시작하면 꾸준히 하는 성격이다. 그후 전시회도 매년 열렸다. 그러던 어느 날, 그녀가 채팅방에 자기가 그린 그림이 국제무대에서 특별상을 받았다고 문자를 보내왔다. ‘친구한테 자랑 질 해야겠다’고 농담까지 하면서 말이다. 그토록 반가울 수가 없다. 내가 수상하는 것처럼 들뜬 마음이다. 국제무대에서 상을 받는다는 것은 엔간한 경사가 아니다. 있는듯 없는듯 한결같은 그녀의 존재가, 뭇별속에서 서서히 낮에도 보이는 낮별이 되여 가고 있는것일까? 사실 그녀는 원래 존재하는 별임에 틀림없다. 그리고 나름의 리듬속에서 끊임없이 빛을 내고 있었던 낮별였을 것이다. 그 별이 오랜 세월 꾸준히 에너지를 축적해 왔기에 오늘날 반짝이는 낮별이 되였을 것이다. 그렇다. 그녀라는 낮별처럼 누구에게나 “나”라는 별은 늘 자기 인생을 빛내려고 노력하는 존재이다. 인생을 빛내는 것은 남에게 알리는 존재 보다, 자신이 잘 살아가고 있다는 것의 증거이다. 가끔은 달빛속의 별빛처럼 미약할 때가 있을 것이고, 가끔은 강한 햇빛속의 낮별처럼 존재하지만 보이지 않아 사라 진 존재가 될 때도 있을 것이다. 때로는 여명 전의 별처럼 자신을 빛내는 인생의 최고의 순간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보다 더 소중한 것은 변함없이 자기 인생을 빛내려고 노력하는 그 자체인 것이다. 그녀도 별들처럼 쉴 새없이, 변함없이 자기를 빛내는 존재였을 것이다. 그리고 그 변함없는 존재로 인해 스스로 반짝이는 낮별이 되고 있다. 나도 그런 낮별이 되고 싶다. 2017년 5월31일
1    스쳐가는 생활어록들 댓글:  조회:755  추천:0  2018-02-21
차세대 직업연수가 시작 된 지 2주차다. 올해가 벌써 2년차다. 올해는 지난해 보다 인원이 좀더 많다. 나름 보람 있는 프로젝트이다. 연수생 중 한명이 개인사정으로 꼬마친구를 데리고 수업하러 왔다. 6살 여자애 원생이라고 한다. 깍듯이 인사를 하더니 엄마 따라 쪼르륵 2층으로 올라갔다. 얼마 되지 않아 살금살금 일층으로 내려왔다. 역시 예상대로였다. 어른들 수업보다는 그래도 일층이 매력이 있는 곳 이지… 신기한 애기다. 낯가림이란 그 애 하고는 거리가 먼 것 같다. 그냥 해맑은 웃음을 보이면서 나에게 다가왔다. 애기 다루는 데는 서툰 나 이지만 마시는 것으로 친해져야지 라고 생각했다. 약간 서툴지만 우리말을 제법 잘 한다. 의사 전달이 확실히 되고 있으니 말이다. 옆에는 어린이 심리를 잘 아는 한족친구가 마침 커피 마시러 와 있었다. 나는 재빠르게 그녀에게 꼬마친구를 소개해줬다. 나는 애들 심리를 잘 모르니 잘 놀아 줄 친구가 있어서 다행이라 생각했다. 아니나 다를까 둘은 초 스피드로 화제가 왔다 갔다 한다. 그 사이 난 오렌지주스 만들고 있었다. 꼬마가 지난 휴가(짐작컨대 설연휴 같다)때에 엄마 아빠 언니 그리고 고모네 랑 태국에 놀려가려고 했는데 고모여권이 기한이 지나서 못 갔다고 한다.그래서 언니가 화났다고...정확히는 모르지만 나름 논리성 있게 열심히 한족 이모한테 설명한다. 그들 둘은 친구가 틀림없다. 대화 꽃이 피여 나고 있다. 난 다 만들은 오렌지주스를 꼬마한테 넘기면서 물었다. 참 놀라운 일이다. 6살 원생이 유치원에 안가는 이유를 정확히, 그리고 떼질 없이 말 해준 셈이다. 역시 난 애들과 대화가 서툴다. 내가 잠깐 화장실로 간 사이 꼬마도 따라왔다. 꼬마와 나는 화장실에서 재미있는 대화를 하게 된다. 나는 순간 당황했다.애 엄마들이 자주 하는 질문을 어떻게 이렇게 자연스럽게… 이때는 뭐라고 해야 하나~한참 고민하고 있는데 또 애 어른 같은 질문이다. 내가 한 말이지만 스스로 픽 웃었다 .6살 원생 앞에서 내가 뭐하고 있는 것이지… 갑자기 궁금해 졌다. 과연 남편이란 뜻을 이 꼬마는 어떻게 알고 있는지? 이 답을 듣는 순간 하고 말았다. 그 와중에 이라고 하이파이브까지 해줬다. 6살 원생은 정확히 알고 있다. 자기의 아빠가 엄마의 남편 이라는 것을. 하지만 나를 충격에 빠뜨린 것은 이런 촌수관계로, 더구나 자기가 아닌 제3자의 관계로 남편이란 뜻을 정확히 설명한 것이다. 기가 막힐 정도로... 나이는 6살, 얼굴도 나이에 맞는 동안, 하지만 꼬마의 논리성은 틀에 박힌 어른들보다 거짓없고 확실해 보인다. 내 나이 6살 때는 어떠 했을까?별로 상상하고 싶지는 않다. 한편 그때 태여 나서 천만 다행이라는 생각도 든다. 어이 없는 생각이지만 요즘 애들이 험악한 경쟁속에서 넘 힘들어 보일때도 많지 않은가. 얼마전 친구부부가 1학년생 딸을 데리고 우리 가게에 놀러 왔다. 그 꼬마 또한 나를 충격에 빠뜨리고 어록을 남기고 간 애 이다. 대화가 막 이어지던 와중에 아빠가 딸애에게 이렇게 말한다. 친구 딸애는 아주 담담하게 말했다. 겨우 1학년생이다. 의미심장 한 말을 그토록 자연스럽게 말할 수 있다니. 스쳐가는 어록집에 수록 하고 프다. 어른 세명이 수초동안 눈동자를 있는 대로 키웠다. 오늘 귀염둥이 꼬마와의 대화는 여기에서 끝난 것이 아니다. 나를 당황 시키는 질문이 연속이다. 갑자기 나 손을 꼭 잡더니 허걱~나의 꿈? 별 것이 아닌 것 같지만 별 것이다. 딱히 말하자면 불과 1년전만 해도 나한테는 꿈이라는 것을 생각하지 않고 살았다. 아마도 내 나이는 꿈과 크게 상관 없다고 생각했을 지도 모른다. 우연한 기회에< 나의 꿈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나는 방망이에 얻어 맞은 것 같이 머리가 휭 해졌다. 그 충격 받았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그래서 나는 어색하게 … 마침 그때 손님이 들어와서 우리들이 대화는 잠시 중단 됐다. 그 꼬마의 꿈을 물어보지 못한 것이 유감이다. 6살 아이를 그냥 유치원생으로 생각하면 큰 오산이다. 요즘 아이들은 우리 세대와 달리 어렸을 때부터 각종 루트를 통해 많은 정보를 받아드린다. 대화의 선이 이루어 지려면 어른들도 생각의 전환이 필요할 듯싶다. 우리 어른들은 어른이라도 셈 치고 논리성 없이 쉽게 말할 때가 많지 않은가? 오늘 뜻 하지 않게 순수한 동심을 체험 할 수 있어서 행복했다. 이런 묘한 즐거움 아마도 오래 기억될 것 같다. 언젠가부터 생활 속 어록들을 기록하는 습관이 생겼다. 그래서 오늘도 이렇게 스쳐가는 어록 들을 기록 하고저 필을 든다. -수기 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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