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춘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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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평론]이미지시의 이미지확장법에 대한 생각(한룡운) 댓글:  조회:868  추천:21  2009-08-24
  이미지시의 이미지확장법에 대한 생각 중국 광동 한룡운 ㅡ음악의 선률이 빨대란 것을 통해 나의 몸을 얼기설기 구멍내고 있는데 음악이 나의 온 몸의 구석구석까지 닿아있다는 말 일 것이다.  시 역시 문학의 한개 쟝르에 속하지만 그 性格과 构造에 의해 여러 종류로 구분해 볼 수 있다.이 글에서 시의 구조에 의해 서정시로 구분 될 수 있는 짧은 시에 대해 얘기하련다. 짧은 시라면 엄격히 말하면 어쩌면 서정시보다 더 짧은 단마디식, 혹은 둬마디식의 짧은 시를 말 할 수 있으나 여기선 서정시类의 长短의 시들을 말하려 한다. 그럼 먼저 모더니즘이란 무엇인가를 사전적 해석으로부터 나아가 모더니즘시 중의 한 종류인 이미지시를 얘기해 보기로 하자. 이상의 해석에서 알수 있는바 모더니즘 시는 문학에서 전통과 对立되는 것으로 보면 되는 것이다. 하기에 서정시를 크게 전통시와 모더니즘시로 나누어 볼 수 있는 것이다.모더니즘시 역시 여러 종류로 분류해 볼 수 있겠으나 여기선 이미지시를 말하려하고 그 이미지시의 이미지확장법에 대해 말해 보련다. 그럼 이미지시란 무엇인가? 어쩌면 시의 회화성(绘画性)을 이미지로 생각 할 수도 있는데 이는 결코 그런것 만이 아님을 알아두어야 한다.전통시에도 현대시에도 회화성이 부여 될 뿐더러 시란 회화성으로 뜻을 전해야 시 예술법칙에 부함되는 것으로 영구불멸의 요구인 것이다. 그럼 회화성과 이미지의 구분은 무엇인가? 자명한바 회화성이든 이미지든 모두가 언어로 그린 그림이여서 추상적인 것은 공동하지만 그 표현방식에 의해 전통시와 이미지시로 구분 되는 것 이다.예를 들어 김소월의 하면 꽃을 즈려 밟고 가는 님의 형상이 화화성으로 우리의 눈에 선히 떠오르는데 그것이 바로 직설적으로 표현 된 전통적인 것 이다. 하지만 이미지 역시 같은 그림이지만 전통적인 그림과는 다르다.이미지는 현실 그대로의 직설적 표현인 것이 아니라 그것이 마음에서 변화를 보여 준 결과의 심상(心象)을 그려 보이는 것이다. 그럼 이 심상은 어떻게 생기는 것인가? 본대로 느낀대로의 그림을 그 모양대로 그려낸다면 전통적인 것으로 되지만 본대로 느낀대로의 그림을 한층 승화(升华)하여 본 모습과 다르게 표현하면 그것이 바로 모더니즘으로 되는 것이다. 다시말해 현실과 다른 심상으로서의 이미지가 탄생 되는 것 이다. 그 대표적인 것이 수사법을 인용한 상징적 수법이라 할수 있다. 예를 들어 고리끼의 이다. 폭풍전야를 통해 실물인 해연이나 펜긴 등등으로 현실 사회의 각 계층을 대표하여 폭풍전야의 그 심태을 형태로 그려 낸 것이다. 이외에도 비교(比拟), 비유(比喻) 등등의 수법으로 변형을 완성하지만 특히 추상적인 사물이 구체적인 사물로 전환 할 때의 련상(联想)이 련상(联想)을 낳으면서 그 이미지확장(扩张)이 진행 되는데 여기서의 관건은 그 연상을 어떻게 생활 론리적으로,자연 섭리적으로,리성(理性) 론리적으로 그 이미지의 확장을 꾀하는가에 의해 그 이미지시의 성패(成败)가 결정되는 것이다. 무형(无形)을 유형(有形)으로 전환 할 때 만약 그 이미지조합(组合)의 합리성(合理性)이 합리성을 잃게되면 그 이미지의 형상이 분산(分散)적인 경향(倾向)을 갖게 되여 그 이미지조합이 아무리 다채롭고 형상적이라도 그 형상은 결코 온정한 형상으로 되지 못하는 것이다. 만약 그 이미지들를 한 줄에 꿸 수 있게 합리하게 잇어 질 수가 있으면 그 이미지조합으로 표현된 관념(观念)은 하나의 다채롭고 멋진 완정한 그림으로 표현 되는 것이다.만약 이때 연상이 낳은 연상들의 조합이 그 합리성이 긴밀하지 못하면 그 이미지는 모호성을 띠게 되는 것이다. 우리의 많은 이미지시들을 보면 여기서 말하는 그 합리성이 긴밀하지 못한데서 이지미조합에 잘 어울리지 않아 반감을 주는 현상이 존재하는데 특히 이지지수법으로 시 짓는 이들은 이에 특히 주의를 주어야 할 것이다.만약 이를 극복하여 이미지의 모호함을 면한다면 그 이미지들을 한 줄에 꿸 수 있는 데서 표현 하려는 의미를 잘 파악 할 수가 있는 계기가 주어 질 것 이다.그렇지 않으면 곁 보긴 화려하나 실속없이 되여 버리는 현상이 나타나게 되는데 시 예술로서의 흠이 아닐 수 없다. 이러한 관계를 박춘월의 이란 시를 통해 분석 해 보기로 하자. 음악이 얼굴에 화사한 웃음을 지으며 레코트판으로부터 살금살금 기어 나왔다. 어느새 장미빛 입술로 내 볼이며 몸에 키스를 하다가 웃음의 열쇠를 빼앗았다. 내 몸의 자물쇠를 오락와락 열어젖히고 몸속에 록색 빨대를 뻗쳐가기 시작했다. 쪽빛 바다가 함성을 지르며 감격의 덩어리를 몰고 내게로 덮쳐왔다. 나의 창문이 채색 옷을 입고 하느작이며 공중에서 헤염을 쳤다. 음악은 내 영혼과 골수에 분홍가루 두어줌 뿌리다가 소금 몇알을 뿌리더니 영혼과 골수를 빨아먹었다. 갑자기 얼굴을 말끔히 씻고 빨대의 통로를 따라 꼬리까지 스르르 감추어 버리는 음악. 빈 빨대가 온몸을 얼기설기 관통한 채로 나는 구멍이 펑펑 뚫려있다. 나는 그 구멍으로 아름다운 마귀가 다시 나타나기만을 기다리고 있다. 시인은 이란 추상적인 사물을 구체화하였는데 너무나도 짜릿한 맛이 난다.이 짜릿한 맛은 시인이 노린 음악의 매력일 것이다.시에서 시인은 음악의 매력을 아름다운 마귀라고 한다.마귀인데 아름답다니 역설이 역동적이여 좋다.마귀처럼 처절한 파괴성을 갖게 되는 아름다음을 말 하는 것이다.다시말해 마귀처럼 아름다운 음악의 매력을 말한다. 의인화된 음악이 레코트판에서 살금살금 기어 나온다고 한다. 마귀이니 살금살금 다가오는 교활함이 있을 것이다.그러더니 음악을 듣는 나의 몸에 키스를 하다가 웃음의 열쇠를 빼앗았다. 다시말해 음악이 어느덧 내가 흥분 할 수 있을 정도로 키스를 퍼붙으며 나의 몸의 자물쇠를 와락와락 열어젖히며 나의 몸속에 록색의 빨대를 뻗쳐가기 시작했다고 한다. 마귀이니 파괴성적인면도 보여주는 것이라 하겠다.다시말해 음악이 나의 닿혔던 음악에 대한 감흥의 문을 열어 주고 록색의 빨대를 뻗치듯 나는 서서히 그 음악에서 록색의 기를 느끼게 되는 것이다.그리하여 음악에서 쪽빛의 바다같은 함성을 듣을 줄도 알고 감격의 덩어리를 느낄 수도 있는 것이였다. 하지만 는 이 구절은 지금껏 흘러 오던 사유의 흐름에 빗나가는 듯한 이미지로 안겨오고 이 부분이 전반 시의 이미지들과 어떻게 연관을 짓어야 할 지 짐작이 가지 않는다. 물론 이색적인 언어구사로 된 이미지여서 참 좋으나 이것이 바로 련상(联想)에 련상(联想)을 낳을 때 이미지시의 전반과 별로 상관없이 떠오른 연상의 흔적으로 생각 된다. 이어 음악은 내 영혼과 골수에마저 분홍가루같은 흥분을 두어줌 뿌리다가 소금 몇알을 뿌리는 어쩌면 좀 우울할것 같은 짠 느낌을 주면서 나의 영혼과 골수를 빨아 먹는다고 한다.그러다 음악이 말끔히 얼굴을 씻고 뺄대의 통로를 따라 꼬리까지 스르르 감춘다고 한다.다시말해 음악은 이렇게 나의 온 몸의 신경말초까지 자극하고 혼을 뒤흔들다가 선률따라 서서히 한마당 끝난다고 한다.참으로 악마같은 마력이 없이 음악이 한 인간의 골수까지 빨아 먹을 수가 있을가? 음악의 선률이 빨대란 것을 통해 나의 몸을 얼기설기 구멍내고 있는데 음악이 나의 온 몸의 구석구석까지 닿아있다는 말 일 것이다. 그래서 나는 그 구멍으로 다시 악마같은 아름다운 음악이 나타나기를 고대 기다리는 것이다. 2009.8.20 씀 (에서)
7    [평론]신진 신인들의 현주소 댓글:  조회:787  추천:17  2009-08-18
신진 신인들의 현주소 --제 21차 시 탐구회의 시들을 보고   금방 막을 내린 제 21차 두만강여울소리시탐구회(이하 여울소리로 약칭)의 신진 시인들의 시를 읽으며 그들의 담찬 발걸음 소리를 들었다. 그들의 사유는 소나기가 지나간 들판의 공기처럼 신선하였고 그들의 시는 이미지가 무지개처럼 싱싱하게 아름다웠고 그들의 시어는 잘 익은 참외처럼 향기로웠다. 아래에 구체적으로 살펴보기로 하자.   시적 사유에 대한 참신한 도전   시에서 가장 중요한것은 사유이다. 시인의 사유의 자세가 어떠한가 하는 것은 시의 운명을 결정한다. 우리의 시는 개혁개방 후에 사유를 바꾸기 시작하였다. 이 20여년전에 괴거의 경직된 시적 사유에서 시인들은 사상을 해방하고 옛날의 모시적 사유를 깨뜨리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한패의 청년시들이 재래의 시를 반역하고 새로운 시풍을 이룩하여 유례없던 시 수확을 하였다. 남영전, 한춘, 김정호, 김파, 석화, 김학송, 이임원, 이성비 등등 시인들을 중심으로 한 패의 시인들이 성장하여 우리 시단의 중견으로 부상하였다. 하지만 그들의 시에는 한계가 있었다. 현대적 기법을 받아들임에 있어서 대담성이 약하였고 초월정신이 약하엿다. 이번 여울소리에서 이 한계를 충격하려는 시들이 신진들에게서 나왔다. 박춘월의 , 최강의 가 바로 그러하다. 시는 일상적으로 말하면 시적 대상과 그 시적 대상을 표현할수 있는 시적 상관물을 설정할때에 그 어떤 비슷하거나 상사한 점을 찾아 표현하게 된다. 소리나 색깔이나 모양이나 움직임이나 성질 등등에 의거하여 사유하게 되는데 이들의 시는 아무런 연관도 없는것들을 마구 떠올리고 있다. 그들은 완전히 꿈과 같은 환몽상태에서 시를 펼치고 있는 것이다. 최강의 2연을 인용한다. 왜 2연만 인용하는가? 필자의 소견에는 1연과 3연이 없이도 이 시는 완전무결하다고 생각된다. 1연과 3연은 뱀한테 족대기를 붙여 놓은 것처럼 아무런 용처도 없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나는 파란 노트 한권을 꺼내들었다 노오란 하현달이 조용한 노트속에서 꽃구름 사이를 비집으며 어디론가 가고 있었고 가벼운 연줄같은 생각들이 잠자리처럼 쟁쟁 책갈피 사이를 파득이며 날으고 있었다 그리하여 빗줄기 같은 소리들이 쏴아 새어나와 내 이마에 물보라를 안기고 있었고 수북이 쌓이는 청록의 기억들이 분명 내 발목을 쉼없이 간질이고 있었다 최강의 노트는 노트인것이 아니라 마술쟁이가 마술을 부리는 옷소매나 모자이다. 마술쟁이의 옷소매 속이나 모자속에서 관중들서는 생각할수 없는 것들이 나오는 것처럼 노트속에서 꽃구름 사이를 비집고 어디론가 가는 하현달도 나오고 책 갈피사이를 파득거리며 날아다니는 잠자리 같은 생각들이 이마에 물보라를 안기는 소리도 나온다. 청록의 기억들은 발목까지 쌓여서 자꾸만 발목을 간질이고 있다. 박춘월의 을 보자. 음악이 얼굴에 화사한 웃음을 지으며 레코트판으로부터 살금살금 기어 나왔다. 어느새 장미빛 입술로 내 볼이며 몸에 키스를 하다가 웃음의 열쇠를 빼앗았다. 내 몸의 자물쇠를 와락와락 열어젖히고 몸속에 록색 빨대를 뻗쳐가기 시작했다. 쪽빛 바다가 함성을 지르며 감격의 덩어리를 몰고 내게로 덮쳐왔다. 나의 창문이 채색 옷을 입고 하느작이며 공중에서 헤염을 쳤다 음악은 내 영혼과 골수에 분홍색 흥분가루 두어줌 뿌리다가 소금 몇알을 뿌리더니 영혼과 골수를 빨아먹었다. 갑자기 얼굴을 말끔히 씻고 빨대의 통로를 따라 꼬리까지 스르르 감추어 버리는 음악. 빈 빨대가 온몸을 얼기설기 관통한 채로 나는 구멍이 펑펑 뚫려있다. 나는 그 구멍으로 아름다운 마귀가 다시 나타나기만을 기다리고 있다. 박춘월 양은 음악을 아름다운 마귀라고 한다. 빨간 입술로 내몸의 아무 곳에나 키스를 하는 마귀, 내 웃음의 열쇠를 빼앗아닥가 내 몸의 자물쇠를 와락와락 열어젖히는 마귀, 내 몸속에 녹색 빨대를  꾹꿀 찔러 넣는 마귀다. 마귀가 녹색 빨대를 찔러 넣는 바람에 푸른 바다가 감격의 덩어리를 나에게 마구 덮씌운다. 그 바람에 나의 창문이 채색 옷을 입고 공중에서 헤염친다. 나를 흥분시킨 마귀는 나의 영혼과 골수를 빨아 먹고는 사라진다. 빨대에 온몸이 구멍투성이로 된 나는 그 구멍으로 마귀가 다시 나타나기만을 고대한다. 최강씨는 노트를 톨하여 자신의 어떤 갈구를 그려보고 있는같고 박춘월 양은 음악이 주는 흥분과 감동을 읊조리고 있는 같다. 이 두수의 시는 의식의 흐름 수법을  우리 시에 도입하지 않았나 생각해 보게 되기도 하고 우리 시단의 공백으로 남아있는 초 현실주의 시의 서막을 열고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을 가져보게 한다. 그들은 시를 통하여 그들의 가슴에 응어리져 있던 심령을 뿜어내고 있는것이다. 그들의 사유는 어떤 제약도 약속도 받지 않고 자유자재로 거침없이 흘러내려 가고 있다. 무당이 시부렁거리며 주문을 외우는 듯하다. 완전히 어떤 사물속에 깊이 빠져서 그 사물에 폭 취하여 무슨 말을 하는지 자신도 모르면서 유창하게 이미지를 풀어내고 있는것이다. 최강씨는 싯줄을 만드느라고 애를 썼지만 춘월 양은 싯줄을 만드는것 같은 작업은 아예 염두에도 두지 않고 필이 나가는 대로 달리고 있다. 그들이 창출해 놓은 이미지들은 모두 충격적이고 신비한 것들이어서 우리들의 가슴에 싱싱하고 청신함을 몰아다 퍼붓는다. 무엇을 썼는지는 다는 알수 없지만 그들의 환각이 만들어 놓은 이미지들은 신선한 감동의 회오리를 우리들의 가슴에 쏟아 붓는다. 우리가 지니고 있던 모든 기성 관념들은 그들이 떠올린 자동기술에 파묻혀 무색해지고 색이 바래지고 무너진다. 한마디로 말하면 박춘월 양과 최강씨는 참신한 사유로 우리 시에 도전하고 있디고 하겠다. 필자는 누가 무어라든 시가 팔리든 안 팔리든 두 문학도가 계속 자신이 올라선 길로 줄곧 내 달리면  꼭 문학계의 인정을 받을 날이 있으리라 확신한다. (본문은 연변일보에 발표되였댔음.)  
백성은 제 집안에서 등잔불을 밝혀도 안 되는가? (박춘월의 《록》을 두고 최삼룡, 최룡관씨와 토론함) 김 학 송 최삼룡 씨는《록색의 매력과 비반복적인 이미지》라는 평론에서 박춘월의 시를《자연을 제제로 한 시로서 자연의 마력을 만끽하면서 생명의 활력을 읊조린 한수의 현대주의적풍물시》라고 평가하였다. 박춘월의 시 《록》은 자연 제재의 시이고 시적주제는 《생명의 활력을 읊조린》데 있다고 했는데, 이는 아무런 객관적인 증거도 제시하지 않고 오로지 주관적으로 자의적으로 해석함으로써 이 시의 진의(眞意)를 왜곡한 평론이다. 이 시의 제재는 결코 최삼룡씨의 해석처럼 자연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다. 《태초 에덴의 잎사귀가 짜낸 도포》라는 첫 행부터 시작하여 《에덴동산에 들어설 때가 있다》는 마지막 행에 이르기까지 이 시는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기독교의 경전인 《성경》에 바탕을 둔 시이다. 말하자면 전통적인 기독교의 종교상징에 철저하게 기대인 종교시이다. 그런데 최삼룡 씨는 첫 행에 대한 분석에서만은 기독교의 《성경》과의 련관성을 시사하고 있다. 그러나 최삼룡 씨는 첫 행의 마지막에 등장하여 네 번이나 거듭하여 나타나는 가장 중요한 이미지인 《도포》에 대해서부터는 아무런 증거도 제시하지 않고 제 마음대로 주관적인 해석을 가하기 시작하여 론리의 일관성을 잃는다. 이를테면 최삼룡 씨는 제목《록》과 《도포》를 《화자의 상상에 의하여 록색은 산과 물이 떨쳐입은 례복의 겉옷으로 되였다》고 제 마음대로 분석하였다. 하지만 록색은 기독교의 상징에서는 여호와걸쳤던 도포나 성모 마리아가 걸쳤던 망토의 색깔이며 따라서 기독교상징에서는 푸른색 도포(또는 검은 색 도포)는 기독교의 상징으로 되였다. 이는 《성경》을 조금만 읽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아는 상식이다. 만일 최삼룡 씨가 이런 상식도 모르고 그런 주관적인 해석을 했다면 그것은 무지의 소산이였겠지만 아주 유식한 분이 이런 동에 닿지 않는 해석을 했으니 그 동기를 의심하지 않을 없다. 19세기 프랑스의 스탕달의 유명한 소설 《붉은것과 검은것》에서 《검은 것》은 당시 천주교의 신부나 수녀들이 입었던 《검은 색깔의 도포(黑色道袍)》를 뜻하고 또 이 《검은 색깔의 도포(黑色道袍)》는 기독교세력을 상징하는 것임은 주지하는 바이다. 이 시에서의 아주 중요한 이미지인 도포의 종교적인 상징의미가 밝혀지기만 하면 이 시는 리해하고 해석하기 아주 쉬워지며 결코 그다지 난해한 시만은 아님을 알게 된다. 그러므로 제1련에서 《테초의 에덴의 잎사귀가 짜낸 도포/ 몇천년을 걸어오며 나붓기다/ 그 펄럭임 강이 되고 바다가 되였다》는 것은 기독교가 몇 천 년의 발전과정을 거쳐서 오늘날에는 그 교세(敎勢)가 《강과 바다》 같이 되였음을 암묵적으로 표현한 것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제2련의 《강가에서 호수 같은 날개옷을 주어입고》는 기독교의 입교의식인 세례를 암시하는 것인데, 이는 《성경》에서 그 확실한 증거를 찾을 수 있다. 예수가 요단 강가에서 처음으로 여호와가 파견한 날개 달린 천사 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으려고 할 때 여호와의 성령이 흰 비둘기로 변하여 날아내려 예수의 정수리우에 머물렀다고 하니 이 시에서의《날개옷》은 지칭하는 바가 아주 분명하다. 속세에서의 더러운 때를 벗고 기독교 세계에로의 령적인 비상의 시작을 암시하는 것이다. 《도포속으로 걸어 들어간다》는 것은 더욱 명료하게 기독교에 입교함을 보여주는 대목이라 하겠다. 《현관에 놓인 풀꽃으로 엮은 신 신는다》는 이 제3련에서 《현관》은 기독교의 대문을 의미하며 《풀꽃》은 원죄로 인한 순간적인 인간의 생명과 부귀영화의 무상함을 뜻하며, 《신》은 그러한 무상한 인생의 길을 걸어가게 됨을 의미한다. 태초 에덴동산에서 인간의 조상이라는 아담과 이브가 여호와의 말을 거역해 지은 원죄로 인해 영원성을 상실한 인간들이 세례를 받고 기독교에 입교하여 기독교의 수련을 거치게 되는 것을 다음 행으로부터 보여주고 있다. 《도포의 서랍에는 새소리 많아》는 기독교의 언약궤 같은 서랍에는 하나님의 성령의 거룩한 소리가 많이 담겨 있다는 뜻이며, 《몇 알 꺼내여 호주머니에 넣고》는 하나님의 성령의 거룩한 목소리를 많이 들어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체질화한다는 뜻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제4련은의 첫 행인《도포 뒤울안 시원한 그늘 속》은 비기독교적인 이교(異敎)세력들이 살아가는 사회적공간을 암시한 것이다. 이런 사회적공간에는 하남님의 거룩한 성령의 소리와는 다른 더러운 《벌레울음》이 《무더기로 쌓여》있지만 그것을 파헤치면서 나아간다면 하나님의 구원과 가까운 《웬 오솔길 입구에 서게 된다》는 것이다. 이 련에서 《벌레》는 가장 관건적인 이미지로서 기독교 《성경》에서는 하나님의 말씀과는 배치되는 악하고 추한 대상을 상징하는바 이 시에서도 이렇게 해석해야만 이 시의 진의(眞意)를 파악할 수 있다. 제5련은 이 시의 결말이다. 즉 이시의 시적인 주제가 최종적으로 드러나는 부분이다. 《순간 / 오솔길에 깊이 빠져들 때가 있다》는 말은 기독교에 깊이 빠져든다는 뜻이다. 이렇게 되면 인간은 기독교적 수련을 거쳐서 다시 원죄를 하나님의 구원과 사랑을 받는 《에덴동산에 들어갈 때가 있다》는 것이다. 일언이페지하면 이 시는 13행밖에 안되는 함축된 시속에서 여호와에 대한 배반으로 인한 락원상실-실락원(失樂園)과 여호와에 대한 신앙의 회복으로 인한 락원회복-복락원(福樂園)의 기독교문학의 전통적인 원형상징패턴을 훌륭하게 재현한 종교시다. 주지하다시피 현대주의문학의 가장 중요한 철학 및 사상적 기초를 닦아놓은 독일의 철학가 니체가 《하나님은 죽었다》고 공언(公言)했다. 그런데 최삼룡씨는 독실한 기독교적인 신앙을 읊은 박춘월의 시에 현대주의라는 타이틀을 달아놓았는데, 이는 마치 늙은이에게 아기의 때때옷을 입혀놓은 것처럼 어울리지 않는다. 우에서 본바와 같이 박춘월씨의 시 《록》은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전통적인 기독교의 종교상징에 바탕을 둔 종교시이다. 최룡관씨가 《기독교시면 어떻단 말입니까? 지금도 시를 쓰는데 령역제한이 있습니까?》라고 반문을 했다. 그렇다, 종교신앙은 중국헌법에 규정된 공민의 자유권리이기 때문에 종교를 신앙하고 또 종교시를 쓴 것 역시 자유이다. 다만 말하고 싶은 것은 필자가 자신의 리해와 해석에 좇아 종교시를 종교시라고 평가하는 것도 헌법에 규정된 공민의 자유의 권리다. 최삼룡 씨나 최룡관 씨처럼 종교적인 냄새가 짙은 박춘월의 시《록》을 거듭거듭 칭찬하고 또 중국공산당 연변조선족자치주위원회의 기관지에 버젓하게 실어주고 대상 만원까지 안겨주는 자유만 있고, 이에 대해 어쩌다가 반론을 제기하는 자유는 없단 말인가? 원님은 남의 집에 불을 싸질러도 괜찮고 백성은 자기 집안에서 등잔불을 밝혀도 안 된단 말인가? ( 2006년 6월 15일 연길에서) (이 글은 에 실렸댔음.)  
5    [평론]박춘월의 시 <록>에 대한 나름의 해석(허동식) 댓글:  조회:759  추천:22  2009-08-18
  박춘월의 시 에 대한 나름의 해석 허동식   록   태초 에덴의 잎사귀가 짜낸 도포 몇천년 걸어오며 나붓긴다 그 펄럭임 강이 되고 바다가 된다   강가에서 호수같은 날개옷 주어입고 도포속으로 들어간다   현관에 놓인 풀꽃으로 엮은 신 신는다 도포의 서랍에는 새소리 많아 몇알 꺼내 호주머니에 넣고   도포 뒤울안 시원한 그늘 속 무더기로 쌓인 벌레울음 파헤치면 웬 오솔길 입구에 서게 된다   순간 오솔길 깊이 빠져들어 갈 때가 있다 에덴동산에 들어갈 때가 있다   詩는 오독(誤讀)이 되기도 한다 하지만 오독이 아니기를 바라면서 에 대한 나름의 평을 시도해 본다   태초 에덴의 잎사귀가 짜낸 도포 몇천년 걸어오며 나붓긴다 그 펄럭임 강이 되고 바다가 된다   의 기록으로부터 보면 에덴동산은 열대지역의 오리브나무가 자라는 온화한 지역으로 추정되며 아담과 이브는 추위를 막기 위한 몸가림은 전혀 없었다 (혹은 태초에 아담과 이브의 몸에 방한용 身毛가 아주 무성하였을지도 모를 일이다) 헌데 그들은 나중에 뱀의 유혹으로 善惡果를 따먹고 눈을 뜨면서 부끄러움을 타고 올리브 나뭇잎으로 몸의 부끄러운 동네를 가리우게 된다 인류의 인류문명(윤리도덕 종교 그리고 가정과 사회제도 등)의 발생과 발전은 물질생산과정과 직접적인 연관성 그리고 의존성을 지니고 있지만 또 상대적인 독립적인 성장과장을 보이여 왔다 또 나날이 양상되는 물질문명과 背道되기도 하면서 인간의 자연속성이 살해되는 과정을 이루기도 하였다 시인은 이 련에서 바로 올리브 나뭇잎으로부터 연역되는 도포와 도포에서 연역되는 인류의 인류문명 상생과 발전과정을 시적으로 敍時적으로 표현하였다 올리브 나뭇잎이 도포로 변하고 그 도포가 수천년 나붓기여 인류문명의 하천으로 바다로 됨은 아주 형상적인 간략적인 시적표현이고 시적판단이다   강가에서 호수같은 날개옷 주어입고 도포속으로 들어간다   인류문명이 多元化적이면서도 交接적인 크고도 두터운 그물상태를 이룬 오늘날에 있어서 그 누구도 인류문명의 절대적인 지배하에 생존과 생존보람을 이룬다 하지만 소위 자연의 만물인 인간은 인문문명에 대한 반성과 사색을 종래로 멈춘적이 없다 시인은 바로 부처님과 독일 철학자 칸트를 대표자로 수많은 인문문명에 대한 회고자 또는 사색자의 한 사람으로서 인문의 강가에서 을 주어입고 라는 인문문명을 자맥질한다 이 련은 바로 시간중의 역행이며 자연속성으로의 회귀이며 강가로부터 도포에로의 상징물의 역 배렬이다 이 련에서 리해를 진행하기 어려운것은 이다 언어습관으로 보면 호수는 필경 수액의 집합체로서 무겁다 하지만 그 무거운 호수로 가벼운 날개옷을 지어입으려면 누구든지 웬간한 용기와 재간이 없이는 성공하기 힘든 일이다   현관에 놓인 풀꽃으로 엮은 신 신는다 도포의 서랍에는 새소리 많아 몇알 꺼내 호주머니에 넣고   도포 뒤울안 시원한 그늘 속 무더기로 쌓인 벌레울음 파헤치면 웬 오솔길 입구에 서게 된다   여기에서 시인은 인간과 인문문명을 역행하는 여행에서 끝내는 첫 목적지에 이르러 일련의 행위를 감행한다 첫 목적지에서 원초의 때묻지 않은 풀꽃으로 신발을 엮어서 신고 (화자의 새로운 여행을 암시한다) 또 저장된 새 소리를 몇알 꺼내 호주머니에 넣고 (생소하면서도 재미있는 시어의 표현으로서 새소리를 아직 부화되지 못한 새알처럼 다루면서 인문문명과정에 포기되었거나 저장만이 된 인문요소거나 인문성과의 부활을 희망하는 암시이다 ) 뒤울안의 그늘속 벌레울음을 파헤치고 하나의 오솔길을 발견한다 (화자가 가고싶은 또는 가야할 길이지만 오솔길로 적혀있음은 그 험난함을 암시한다)   순간 오솔길 깊이 빠져들어 갈 때가 있다 에덴동산에 들어갈 때가 있다   이 련에서는 강가에서부터 도포속으로의 역행을 이어서 다시 도포속으로부터 에덴동산으로의 역행이 제시되고 진행된다 하지만 그 역행은 에 지나지 않는다 이란 돌연적이고 짧은 시간이다 그러므로 화자는 그 누구나 자신이 원하든 원하지 않든 현존의 인문문명의 지배를 완전히 떨칠수 없음을 암시하는듯도 하다   을 읽으면서 우리가 묻혀있는 인문문명이 우리들더러 인간의 천진함과 자연속성을 많이 감추게 하고 잃게 함을 다시 생각해 보개한다 인문문명사는 어떻게 보면 인류가 자신의 그림다를 실체로 만들기 위하여 인류가 지닌 천성적인 그림자를 매장하는 과정으로 보여진다 그 과정이 얼마나 고난스럽던지 또 그 성과가 얼마나 거대하든지 우리의 그림자는 아직 실체로 변하지 못하고 있으며 우리의 꽁무니를 졸졸 추구한다   을 읽으면서 위대한 인간은 반드시 인문반성을 하리라는 생각도 해본다 그리고 영국시인 앨리트의 장편시 과 중국소설가 賈平凹의 소설 를 다시 생각해본다 (본문은 에 계제돼 있음.)  
4    [평론]박춘월의 시 《록(綠)》을 보고서(金海龍) 댓글:  조회:686  추천:15  2009-08-18
박춘월의 시 《록(綠)》을 보고서  延邊大學 敎授 金 海 龍 이 시는 종교를 선전하는 이미지종교시이다. 이미지시는 감성 구체적인 대응물들 및 그 것들간의 관계 대한 묘사를 빌어 그 어떤 추상적인 관념, 지어는 그 어떤 심각한 철리를 화폭적으로 보여주거나 시사한다. 그러면 무엇 때문에 이 시를 종교를 선전하는 이미지시라고 말하게 되는가를 살펴보기로 하자. 이미지시에서의 대응물들은 상징성을 띠게 된다. 대응물은 객관적인 그 어떤 물상일수도 있고 또는 시인이 상징성을 원만히 보여줄 수도 있도록 임의대로 빚어서 만들 수도 있다. 《록》이라는 이 시에 《성경전서 · 창세기》편에 나오는 무화과 나뭇잎을 상기시키는《잎사귀》가 론급된 것으로 미루어보면 이 시에서의 《도포》는 예수교 교인들의 도포를 말할 것이다. 하지만 시에서는 일반적인 승복(僧服)으로서의 도포가 아니라 예수교에 대한 상징으로 쓰이고 있다. 따라서 제1편 《태초 에덴의 잎사귀가 짜낸 도포 / 몇 천 년 걸어오며 나붓긴다/ 그 펄럭임 강이 되고 바다가 된다》는 예수교가 날따라 흥성하여 감을 뜻한다고 보겠다. 그리고 2련에서 《도포속으로 걸어 들어간다》고 한 것은 사람들이 예수교에 입교함을 시사하고, 3련에서의 《도포의 서랍》이란 예수교의 성경이나 찬송가 같은 것을 간직하고 있는 문갑(文匣)을 시사하고, 그 서랍에서 새알 《몇 알을 꺼내 호주머니에 넣는다》는 것은 예수교의 교의를 얼마간 받아들임을 뜻하고, 4련에서의 《도포 뒤울안》이란 예수교회(예배당)를 뜻한다. 그리고 5련에서의 《에덴동산》은 락원을 이른다. 이렇게 보면 4련에서의 이른바 《무더기로 쌓인 벌레울음》이란 예수교에 배치되는, 지어는 예수교를 망라한 모든 종교를 반대하는, 련속 부절히 자꾸만 들려오는 속세의 듣기 싫은 소리를 암시한다. 그러면 이 듣기 싫은 벌레울음 소리가 과연 무엇인가? 무신론사상일수도 있고, 유물론 지어는 맑스주의일수도 있다. 또 혹여는 우리당의 목소리일 수도 있다. 만약 이러한 분석이 옳다면, 또는 가히 이렇게도 분석할 수도 있다면, 이 시는 예수교를 믿으면 에덴동산, 즉 락원으로 갈수도 있다는 종교적관념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처럼 감성구체적인 대응물을 빌어 모종 관념을 상징적으로 시사하는 관념성, 상징성 이미지의 가장 주요한 두가지 특징으로 된다. 둘째, 이 시에서 《도포 속으로 걸어들어간다》든가, 도포에 서랍이 달렸다고 한다든가 또는 벌레울음을 파헤친다고 한 것과 같은 것은 그야말로 황당하기 그지없다. 그런데 이미지는 바로 이렇게 생활의 론리로는 해석치 못할 황당성을 자기의 다른 하나의 특징으로 한다. 셋째, 작자는 종교적관념을 보여주고저 그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줄수도 있는 그러한 대응물을 찾기도 하였거니와 또 임의로 빚어만들기도 하였다. 전자의 례로는 도포나 벌레울음을 들 수 있고, 후자의 례로는 《도포의 서랍》,《도포 뒤울안》같은 것을 들수 있다. 그리고 작자는 도포의 펄럭임이 강이 되고 바다가 된다든가, 오솔길로 에덴동산에 들어간다는 등으로 관념적인 것을 감성구체적인 것으로 보여주었다. 이러한 것은 작자가 이 시를 쓰기 위하여 이미지사유 즉 추상적인 관념으로부터 감성구체적인 형상에 이르는 사유를 진행하였음을 말한다. 이러한 것은 작자의 이미지사유 또한 이미지창조과정에 나타나는 시인의 사유특징으로 된다. 이상과 같이 이 시는 이미지의 관념성, 상징성, 황당성의 특징을 가지고 있는 외에 또 작자의 이미지사유 특징도 보여준다. 필자는 바로 이 시의 이러한 네가지 큰 특점을 감안하여 이시는 이미지시라고 결론하게 된다. 다음, 이 시의 사상과 관련하여 한두가지만 더 언급하기로 한다. 우리나라에서 신앙은 자유이다. 그러므로 우리나라에서는 종교를 믿거나 믿던 종교를 포기하는 것은 죄다 자유이다. 그러나 예배당을 제외하고서는 그 어디에서도 종교가 어떠어떠하게 좋으니 믿으라고 선전할 의무도 없거니와 자유도 없는 것이다. 그런데 박춘월은 이 시에서 예수교를 믿으면 락원으로 갈수도 있다고, 또는 갈수도 있다고 공공연히 선전하였다. 뿐만 아니라 예수교를 푸른색이라고 하였다. 이것은 예수교가 《푸르러》있을 것이라는 그 뜻을 상징하는 것이다. 이 사상은 작자가 제1련에서 이 푸르름이 나날이 이 대지를 더더욱 넓게 넓게 물들이고 있다고 시사한데서 한결 더 강조되고 있다. 이것은 중화인민공화국 공민으로서는 하지 말아야 했을 소위이다. 그리고 우리당은 1980년 1월 26일부 《인민일보》사설을 빌어 《문예는 인민을 위하여 복무하며 사회주의를 위하여 복무해야 한다》고 호소하였다. 이로 보면 박춘월의 이 시는 우리당의 문예총방침에도 직접적으로 배치된다. 이러므로 필자는 이 시를 널리 선전할 것을 없다고 본다. 따라서 이 시를 찬미할 리유는 더욱 없다고 본다. 반대로 이 시는 이상 그러한 리유로 하여 응당 비판받아야 한다고 본다. (2006 · 6 · 6) (이 글은 에 실렸댔음.)  
3    [평론]"록"과 종교시(이 수나) 댓글:  조회:765  추천:16  2009-08-18
"록"과 종교시 ㅡ박춘월 시인님의 시  "록"은 종교시인가 뉴욕 신학대학 이 수나 G. B. Tennyson과 E. E. Ericson은 “문학은 종교에서부터 발생”했다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문학을 통시적으로 원시 종합 예술의 유추적 개념에서 출발했다고 인정할 때 종교성의 잠재력과 그 영향을 배제 할 수 없지않겠나요. 중국동포 문학 학자들은 서구문학에서는 성경을 한편의 문학저서로 보고있는데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한번 문의드려봅니다. 성경을 한편의 문학저서로 보는데 반해서 두번째 성경으로 꼽히는 문학작품이 바로 우리가 너무나도 익숙한 Víctor Hugo의 "레미 제라블"입니다. 산맥과도 같은 방대한 분량의 고난이 쌓이고 수난을 점철하면서 마지막에 사랑으로 용서로 승리로 이어지는 것이 "레미 제라블"이 아닙니까. 우리는 "레미 제라블"을 읽을 때 누구도 이 위대학 작품을 두번째 성경이라고까지 생각한 사람이  없으며 그렇게 불리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이 작품속에서 주인공과 함께 승화하는 예수의 인간사랑, 원수도 사랑할수 있고 사랑이 원수도 용서할수 있는 큰 힘을 로마제국 시대에 태어나 인간들의 죄를 위해 죽임을 당하였다가 사흘만에 부활하여 하늘에 오르는 예수 그리스도의 정신을 보게 됩니다. 그러나 당장 "레미 제라블"의 마지막 폐이지를 덮을 때 우리는 기독교가 무엇인지 성경이 무엇인지 이런 것이 머리속에 하나도 없습니다. 우리를 감싼 것은 그냥 사랑과 용서 그리고 힘입니다.성경도 문학작품이고 "레미 제라블"이 두번째 성경이라는 것도 다 학자들이 가져다붙인 말씀이고 그렇게 연구를 거듭해오면서 이론적으로 만들어진 것입니다.   이렇게되어 서구문화의 기본 바탕을 형성하고 있는 가장 위대한 종교가운데 하나인 기독교는 우리 모두의 생활에 영향을 아니 끼친 곳이 없다는 것을 승인하여야 합니다. 인류 근현대 문학에서 가장 큰 영향을 끼친 기독교는 불교의 영향권하에 있었던 중국을 제외하고 한국 일본 나아가 동구권에서도 거대한 파급을 계속해오고 있습니다. 특히 한국 근현대 문학에 있어서 기독교는 가장 큰 영향을 끼쳤습니다. 개화기 때에 서구에서 수용되어 들어와 한국의 근현대 문학의 기틀을 세우는데 큰 역할을 한 그리고 현재 우리나라에 가장 널리 퍼져있고 큰 영향력을 끼치고 있는 종교가 기독교임을 살펴볼 때 문학과 기독교에 대한 논의는 논의자체가 불필요할 만큼이나 우리 모두의 문학작품에서 사랑과 용서로 나아가 사랑이 모든 것을 이기고 증오가 언제나 사랑 앞에서 무력해지는 얼마나 많은 작품들과 만나게 되었습니까. 이런 것을 생각하면 우리가 실제로 가장 두려워해야하는 것은 아무 작품이나 기독교작품이다거나 또는 기독교의 사상을 선도하는 작품이다는 평가를 함부로 내릴수가 없게 됩니다. 종교가 문학작품의 생활바탕이 되어 그것이 다시 문학작품속에서 인간의 삶으로 융합하고 변화하여 수많은 히스토리에 업히고 자기자신만의 키워드를 안고 우리 앞에 나타날 때에 우리가 읽는 것은 그 작품이 주는 감동만 생각하여야 합니다. 어떤 사람이 썼기 때문에라던가, 어떤 사람이 어떤 환경하에서 썼기 때문에 작품의 키워드를 그쪽으로 접근하려고하거나 임의적으로 몰아가는 것은 문화비판에서 절대 있을수 없거니와 있어서도 안되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실례로 박춘월님의 "록"을 이야기하여보기로 합니다.   제가 읽은 "록"이라는 시는 말그대로 한편의 보통시입니다.   "록"이라는 푸름의 키워드를 제목에서 나타내고 있듯이 자연과의 대화를 시사하는 한편의 풍물시라고 부를수도 있겠지요. 그런데 이 시에서 저는 아무런 성서의 설화적 모티프나 작품속에 투영된 기독교 의식을 발견할수가 없습니다. "에덴"이라는 지명 이름은 구약성경의 창세기에서 나오는 이상향입니다. "녹(록)야원"이라고 부릅니다. 영원한 푸름과 아름다운 자연의 상징이 되기도 하기 때문에 오늘의 현실생활에서 "에덴"이라는 명칭을 빌어다 사용하는 가게들과 커피샵들도 부지기수로 많습니다. 실제로 에덴이라는 지명이 어디 있는가를 놓고 미국에서는 일부 기독교인들 사이에서 논쟁이 끝없습니다. 대체로 메소포타미아와 페르시아 만의 티그리스 강과 유프라테스 강 상류에 있는 것으로 추측하지만, 또 다른 기독교인들 사이에서는 비유로 만든 가공의 존재라고 보고 있습니다.  때문에 성서도 한권의 문학서적으로 볼 때 우리는 "록"에서 사용된 "에덴"과 "동산"이 던지는 의미는 먼저 자연과 영원한 푸르름에다가 詩的 사상이 지향하는 높이와 詩的 사상이 내재하는 깊이에다가 사색을 조준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그리하여 이 시에서 사용된 단어들이 풍기는 이미지, 예하면 "도포"라던가 "날개옷"이라던가 "신" "새소리"같은 allegory적 사물 인식을 다만 이 시의 평면적 수직성과 수평성의 의미영역으로 확대하기에도 사실은 역부족입니다. 왜냐하면 이 시가 한편의 보통시로도 너무 잘 된 시는 아니기 때문입니다. 만약 중국 동포 학자분들이 굳이 이 시를 기독교시로 나아가 기독교사상을 선도하는 종교시로 보려고 한다면 무엇보다도 기독교시의 특질을 이야기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기독교와 시가문학과의 상관 관계와 기독교시의 본질을 파고 들어야 합니다. 그러나 한편의 시를 뜯어맞추기하는 식으로 아무런 영적 감동을 받을수 없는 길지않은 시에서 기독교의 사상을  찾아본다는 것은 말그대로 찾아보고자하는 사람이 억지로 "지어내기"를 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오히려 무엇이 기독교의 사상을 전도하는 종교시"인가를 이론적으로 해석하려면 우리가 종교생활속에서 빠뜨릴수 없는 성서 번역과 찬송가의 보급을 이야기하지 않을수 없습니다. 찬송가의 가사들을 음악이 없이 시로 읽을 때와 음률을 달아 노래로 부를 때에 받게 되는 감동은 이와 같은 시적 변모 과정을 가장 생동하게 보여줍니다. 그런데 "록"을 두고 종교를 선전하는 이미지 종교시로 몰아가는 중국 동포 학자분들의 평론을 몇편 읽었습니다. 1-[박춘월의 시 《록(綠)》을 보고서 / 延邊大學 敎授 金 海 龍 ] 2-[백성은 제 집안에서 등잔불을 밝혀도 안 되는가?] [박춘월의 《록》을 두고 최삼룡, 최룡관씨와 토론함) 김학송] 이 2편의 평론에서 "록"을 종교시로 분석하는 이유를 한번 돌아보기로 하겠습니다. -《록》이라는 이 시에 《성경전서 · 창세기》편에 나오는 무화과 나뭇잎을 상기시키는《잎사귀》가 론급된 것으로 미루어보면 이 시에서의 《도포》는 예수교 교인들의 도포를 말할 것이다. 하지만 시에서는 일반적인 승복(僧服)으로서의 도포가 아니라 예수교에 대한 상징으로 쓰이고 있다.] - 따라서 제1편 《태초 에덴의 잎사귀가 짜낸 도포 / 몇 천 년 걸어오며 나붓긴다/ 그 펄럭임 강이 되고 바다가 된다》는 예수교가 날따라 흥성하여 감을 뜻한다고 보겠다. 그리고 2련에서 《도포속으로 걸어 들어간다》고 한 것은 사람들이 예수교에 입교함을 시사하고, 3련에서의 《도포의 서랍》이란 예수교의 성경이나 찬송가 같은 것을 간직하고 있는 문갑(文匣)을 시사하고, 그 서랍에서 새알 《몇 알을 꺼내 호주머니에 넣는다》는 것은 예수교의 교의를 얼마간 받아들임을 뜻하고, 4련에서의 《도포 뒤울안》이란 예수교회(예배당)를 뜻한다. 그리고 5련에서의 《에덴동산》은 락원을 이른다.] - 이렇게 보면 4련에서의 이른바 《무더기로 쌓인 벌레울음》이란 예수교에 배치되는, 지어는 예수교를 망라한 모든 종교를 반대하는, 련속 부절히 자꾸만 들려오는 속세의 듣기 싫은 소리를 암시한다. - 그러면 이 듣기 싫은 벌레울음 소리가 과연 무엇인가? 무신론사상일수도 있고, 유물론 지어는 맑스주의일수도 있다. 또 혹여는 우리당의 목소리일 수도 있다. 이상은 1-[박춘월의 시 《록(綠)》을 보고서 / 延邊大學 敎授 金 海 龍 ]에서 평론하시는 분이 주장하는 이유입니다. - 박춘월의 《록》을 두고 최삼룡, 최룡관씨와 토론함) 김학송]에서 주장하는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 제1련에서 《테초의 에덴의 잎사귀가 짜낸 도포/ 몇천년을 걸어오며 나붓기다/ 그 펄럭임 강이 되고 바다가 되였다》는 것은 기독교가 몇 천 년의 발전과정을 거쳐서 오늘날에는 그 교세(敎勢)가 《강과 바다》 같이 되였음을 암묵적으로 표현한 것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 제2련의 《강가에서 호수 같은 날개옷을 주어입고》는 기독교의 입교의식인 세례를 암시하는 것인데, 이는 《성경》에서 그 확실한 증거를 찾을 수 있다. 예수가 요단 강가에서 처음으로 여호와가 파견한 날개 달린 천사 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으려고 할 때 여호와의 성령이 흰 비둘기로 변하여 날아내려 예수의 정수리우에 머물렀다고 하니 이 시에서의《날개옷》은 지칭하는 바가 아주 분명하다. 속세에서의 더러운 때를 벗고 기독교 세계에로의 령적인 비상의 시작을 암시하는 것이다. 《도포속으로 걸어 들어간다》는 것은 더욱 명료하게 기독교에 입교함을 보여주는 대목이라 하겠다. -《현관에 놓인 풀꽃으로 엮은 신 신는다》는 이 제3련에서 《현관》은 기독교의 대문을 의미하며 《풀꽃》은 원죄로 인한 순간적인 인간의 생명과 부귀영화의 무상함을 뜻하며, 《신》은 그러한 무상한 인생의 길을 걸어가게 됨을 의미한다. 태초 에덴동산에서 인간의 조상이라는 아담과 이브가 여호와의 말을 거역해 지은 원죄로 인해 영원성을 상실한 인간들이 세례를 받고 기독교에 입교하여 기독교의 수련을 거치게 되는 것을 다음 행으로부터 보여주고 있다. 《도포의 서랍에는 새소리 많아》는 기독교의 언약궤 같은 서랍에는 하나님의 성령의 거룩한 소리가 많이 담겨 있다는 뜻이며, 《몇 알 꺼내여 호주머니에 넣고》는 하나님의 성령의 거룩한 목소리를 많이 들어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체질화한다는 뜻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 제4련은의 첫 행인《도포 뒤울안 시원한 그늘 속》은 비기독교적인 이교(異敎)세력들이 살아가는 사회적공간을 암시한 것이다. 이런 사회적공간에는 하남님의 거룩한 성령의 소리와는 다른 더러운 《벌레울음》이 《무더기로 쌓여》있지만 그것을 파헤치면서 나아간다면 하나님의 구원과 가까운 《웬 오솔길 입구에 서게 된다》는 것이다. 이 련에서 《벌레》는 가장 관건적인 이미지로서 기독교 《성경》에서는 하나님의 말씀과는 배치되는 악하고 추한 대상을 상징하는바 이 시에서도 이렇게 해석해야만 이 시의 진의(眞意)를 파악할 수 있다. - 제5련은 이 시의 결말이다. 즉 이시의 시적인 주제가 최종적으로 드러나는 부분이다. 《순간 / 오솔길에 깊이 빠져들 때가 있다》는 말은 기독교에 깊이 빠져든다는 뜻이다. 이렇게 되면 인간은 기독교적 수련을 거쳐서 다시 원죄를 하나님의 구원과 사랑을 받는 《에덴동산에 들어갈 때가 있다》는 것이다.  이 2편의 평론에서 제가 묻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물음 1)- 무슨 근거로 잎사귀가 꼭 무화과 나뭇잎을 상기시키는거가 되어야 하는가요? 물음 2)- 무슨 근거로 무화과는 꼭 "성경 창세기"에서만 나오는 것이여야 하는가요? 물음 3)- 이상 1) 2)의 근거를 설명하지 못하였으면서 어떻게 "...에서 미루어보면 "이 시에서의 '도포'는 '예수교 교인들의 도포를 말할 것이다."로 근정하시나요? 물음 4)- 무근거를 근거로 삼는 평론도 있으십니까?  방금 위에서 저는 "물음 4)- 무근거를 근거로 삼는 평론도 있으십니까?" 라고 질문했습니다. 대답은: "없습니다."입니다. 적어도 제가 알기에 무근거를 근거로 삼는 평론은 없습니다. 평론의 전문을 하나하나 묻고 대답하고 질문하고 풀이할수는 없겠습니다. "록"의 이미지를 기독교시로 확장시켜갈 때의 첫 단추가 "에덴"이라는 지명과 "잎사귀" "도포" 이런 낯설은 단어들을 임의대로 가져다가 유순호선생님의 표현을 빈다면 exaggeration, twists, misleading, - 夸大하고,歪曲하고,误导하는데서부터 잘못 끼어지기 시작합니다. 이럴 때 "록"을 기독교를 선도하는 시로 보지 않는 분들은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하여야 했습니다. A - 세상에는 무화과만 잎사귀가 있나?  B - 세상에는 성경에서만 무화과가 나오나? C - 세상에서 도포는 예수교인들만 입나? 그리고 "록"을 "기독교를 선도하는 시"로 평론하는 학자분들의 무근거를 근거로 하는 평론에서 이상과 같은 질문에 대답하게 하여야 했습니다. 그리하여 참으로 "세상에는 무화과에만 잎사귀가 있다는 것"을 증명하였을 때, "세성에서 무화과는 성경에서만 나오는 것"임을 증명하였을 때, 또 그리고 "세상에서 도포는 예수교인들만 입는다."는 것을 증명하였을 때, 이분들의 평론은 결코 무근거를 근거로 하는 평론이 아님을 승인하여 드릴수가 있게 됩니다. 이와같은 질문은 아마 수백개라도 드릴수가 있을 것 같습니다. 다음은 2- 백성은 제 집안에서 등잔불을 밝혀도 안 되는가? "박춘월의 《록》을 두고 최삼룡, 최룡관씨와 토론함) 김학송"에서도 한단락을 뽑아 같은 질문을 드려볼수가 있습니다. - 제2련의 《강가에서 호수 같은 날개옷을 주어입고》는 기독교의 입교의식인 세례를 암시하는 것인데, 이는 《성경》에서 그 확실한 증거를 찾을 수 있다. 예수가 요단 강가에서 처음으로 여호와가 파견한 날개 달린 천사 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으려고 할 때 여호와의 성령이 흰 비둘기로 변하여 날아내려 예수의 정수리우에 머물렀다고 하니 이 시에서의《날개옷》은 지칭하는 바가 아주 분명하다. 속세에서의 더러운 때를 벗고 기독교 세계에로의 령적인 비상의 시작을 암시하는 것이다. 《도포속으로 걸어 들어간다》는 것은 더욱 명료하게 기독교에 입교함을 보여주는 대목이라 하겠다. 여기서 제가 드리고 싶은 질문은 다음과 같은 것입니다. 물음 1)- 《강가에서 호수 같은 날개옷을 주어입고》(a) 강물에 비낀 자신의 그림자를 상상할수도 있잖을가요? (b) 비를 막기 위하여 벼짚으로 만든 도포를 걸치고 낚시는 태공을 상상할수도 있지않을가요? (c) 강물에 비낀 산자락이나 나무 그림자를 상상할수도 있잖을가요? (d) 녹음방초가 우거진 강기슭에서 석양이 질 때에 하늘을 날으는 기러기나 비둘기를 상상할수도 있지않을가요? (e) 비속을 달리는 13인의 아해(이상)이 강옄으로 달린다고 상상하면 어때요? 물음 2)- 이미 앞에서 잠간 말씀드린바 있는 "무근거를 근거로 하는" "잎사귀"와 "무화과"의 확장적 twists로부터 비평가들이 굳이 수십 수백가지로 상상할수 있는 이 시구절의 수직적 또는 수평적 이미지를 한편의 히스토리처럼 만들어가는 원인에 대하여 문의드립니다. A-기독교의 세례를 암시한다는 이유와 근거? B- 날개옷이 날개달린 요한이라는 이유와 근거? 여전이 이 평론속에는 이유와 근거를 제출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고로 답은 역시 "무근거를 근거로 하는 평론"입니다.  이와같은 "무근거를 근거"로 하는 위에 몇분들의 평론에서 저는 무더기로 질문을 드릴수 있지만 생략하고자 합니다. 다음 아래에서 읽을수 있는 "무근거를 근거로 하는 평론"의 진위가 가장 생동하게 나타나있기 때문입니다. - 이렇게 보면 4련에서의 이른바 《무더기로 쌓인 벌레울음》이란 예수교에 배치되는, 지어는 예수교를 망라한 모든 종교를 반대하는, 련속 부절히 자꾸만 들려오는 속세의 듣기 싫은 소리를 암시한다. (박춘월의 시 《록(綠)》을 보고서 / 延邊大學 敎授 金 海 龍) - 그러면 이 듣기 싫은 벌레울음 소리가 과연 무엇인가? 무신론사상일수도 있고, 유물론 지어는 맑스주의일수도 있다. 또 혹여는 우리당의 목소리일 수도 있다.  (박춘월의 시 《록(綠)》을 보고서 / 延邊大學 敎授 金 海 龍) 여기서 "듣기 싫은 벌레울음 소리가 과연 무엇인가" "우리당의 목소리일 수도 있다"는 무슨 뜻인가요? 분명한바 이들 비평가들은 먼저 "록"이라는 시에 대하여 "무근거를 근거로 하는 평론"에서 "록"의 수직적 수평적 이미지를 exaggeration, twists, misleading, - 夸大하고,歪曲하고,误导(유순호 작가님의 "김관웅현상과 문화대혁명지향의 연변인) 하고 확장해석한 것입니다. 그리하여 짜깁기와 꿰맞추기식 방법으로 가독교시가 아닌  한편의 순수한 보통 풍물시를 "기독교시"로 만들고, 다시 "기독교시"를 "우리 당이 싫어하는 시"로 비약시키고, 나아가 기독교와 "우리 당"을 적대적 대립관계에 마주세운 것이 "록"의 비평자들이 "무근거를 근거"로 하는 exaggeration, twists, misleading, - 夸大하고,歪曲하고,误导 (유순호 작가님의 "김관웅현상과 문화대혁명지향의 연변인) 하는식의 평론에서 도달하고자하는 목적이었음을 어렵지 않게 보아낼수가 있습니다. 그러면 이제 남은 것은 왜 이렇게 하지 않으면 안되었는가는 마지막 질문을 드려볼 차례입니다. 그러나 이 질문은 하지않겠습니다.  이미 유순호작가님의 논문  "김관웅현상과 문화대혁명지향의 연변인"에서 잘 소개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말 속담에 '코에 걸면 코걸이' 되고 '귀에 걸면 귀걸이' 된다는 말이 있습니다. 비평가들이 어떤 목적을 가지고 한편의 시에다가  "무근거를 근거로 하는 평론"을 제출하면서 순수한 일반 독자들을 오도하기는 참으로 식은죽 먹기입니다. 모르는 사람들은 정말 "기독교를 선도하는 종교시였구나."고 깜빡할수 있겠으며 "우리 당이 좋아하지 않는 시"로 여론을 만들고 나아가 "우리 당"으로 지칭된 공산당에 고발하고 이런 시를 발표한 신문사나 잡지사 또는 편집관련자들을 추궁할수 있다는 것은 이미 교대되어 있는 사실에서 잘 알수 있습니다. 이럴 때 이렇게 "귀걸이식" "코걸이식". 그리고 "무근거를 근거로 하는 평론"이 보통 비평가들도 아닌 대학의 전문학자나 교수들의 손에서 나왔다는 자체가 보다 사회에 일으킬수 있는 나쁜 영향은 치명적이라고 보지않을수 없습니다. 우리는 아름다운 시일수록 좋은 쪽으로 상상하여야 합니다. 고의적으로 나쁜 쪽으로 확장해석하는 습관을 가져서는 안됩니다. 더구나 "우리 당"을 운운하는 쪽으로 확장해석하고 exaggeration, twists, misleading, - 夸大하고,歪曲하고,误导하는 행위는 참으로 학자적인 양심에서 어긋나는 행위라고 하지않을 수가 없습니다. 이런 행위는 비판하여야 합니다. 건강하고 아름다운 문학쟁명을 만들어가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언제던지 반론을 환영합니다. 뉴욕에서 이 수나 올림. (본문은 에서 퍼왔음)
문학평론은 론리의 합리성을 추구하여야 한다 중국 광동성 한룡운 문학평론은 론거의 증명을 요구하지만 론문처럼 그런 증명이 아니라 리성적 론리의 보편성이 어느 정도 합리한가를 요구할 뿐이다. 문학평론은 필경은 론문과 다르다.  문학자체가 론리의 합리성에 의해 현실이 재구성 되는 것이지 현실 자체가 아니다.만약 그것이 현실자체라면 그것은 문학성이 뛰여 난 역사일 뿐이다.사마천의 에서 문학성이 뛰여 난 글들이 그렇다. 하다면 의 그런 문장은 문학작품이기전에 역사인것이지 역사를 둘째로하는 문학작품이 아니다.하물며 역사마저 작자의 주관적 의념도 함께 전달함에랴.  문학평론 역시 그러하다.문학작품에 근거하여 론리적인 합리성을 찾는것이지 현실의 근거를 찾아 그 증명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다.다시말해 문학평론은 그 합리성이 중요한것이지 그 증명이 증요한것이 아니다. 아래에 박춘월의 을 들어 풀이 해 본다.                     록 / 박춘월        태초 에덴의 잎사귀가 짜낸 도포        몇천년 걸어오며 나붓긴다        그 펄럭임 강이 되고 바다가 된다        강가에서 호수같은 날개옷 주어입고        도포속으로 들어간다        현관에 놓인 풀꽃으로 엮은 신 신는다        도포의 서랍에는 새소리 많아        몇알 꺼내 호주머니에 넣고        도포 뒤울안 시원한 그늘 속        무더기로 쌓인 벌레울음 파헤치면        웬 오솔길 입구에 서게 된다        순간        오솔길 깊이 빠져들어 갈 때가 있다        에덴동산에 들어갈 때가 있다! 이 시를 읽는 사람들은 아니,좀만 문학 상식이 있는 사람들은 인츰 을 떠올릴것이다.왜냐하면 시 내용에 태초의 에덴이요 잎사귀요 도포요 하는것들이 등장하는데 이런 이미지들은 보편적으로 성경에서 나오는 현상으로 많이 알고 있기때문이다. 단 여기서 이러한 단어들의 상징성 의미가 중요한것이지 과 연관을 짓는다고 꼭 종교시일수는 없는 것이다.또한 종교와 연관을 짓는들 어떤가?종교시로 연관을 짓는다고하여 꼭 정치적으로 몰아가야만하는가?  그럼 계속하여 분석으로 넘어 가자.        태초 에덴의 잎사귀가 짜낸 도포        몇천년 걸어오며 나붓긴다        그 펄럭임 강이 되고 바다가 된다  태초의 에덴의 잎사귀가 짜낸 도포가 오랜 세월을 나붓끼다 그것이 강이 되고 바다가 됏다고 한다.여기서 가 성경의 선악을 가리는 그 잎사귀를 상징한다면 선악을 구분하는 역사가 오랜세월을 걷쳐 그 내용이 바다같이 됐다는 말 일것이다. 만약 를 푸름을 상징하면 그것이 에덴의 동산의 잎사귀든 우리집 바자울타리의 콩잎이든 상관없이 그 푸르름이 마지막에 바다같은 푸르름을 만들었다고 하는것 일 것이다.다시말해 푸르다고 하는 그 상징 자체가 중요한 것이다.        강가에서 호수같은 날개옷 주어입고        도포속으로 들어간다 누군가 선악을 구분하는 내용속에서 호수같은 날개옷을 주어입고 다시 원초에 접근하는 도포속으로 들어간다고 한다.혹은 누군가 그 푸른 바다에서 호수같은 날개옷을 주어입고 원초에 접근하는 도포속으로 들어간다고 한다.        현관에 놓인 풀꽃으로 엮은 신 신는다        도포의 서랍에는 새소리 많아        몇알 꺼내 호주머니에 넣고 그 누군가 선악을 구분하는 시초로 돌아 와 그 현관에 놓인 풀꽃들로 엮은 신을 신고 그 시초에 어느 서랍에 있는 새알 몇알 주어 호주머니에 넣는다.혹은 그 누군가가 푸르름이 커가기전의 그 시초에 돌아 와 비록 단촐하지만 그 어느 서랍에서 새알 몇알 주어 호주머니에 넣는다. 그럼 이 새알은 구경 무엇을 상징하는가?        도포 뒤울안 시원한 그늘 속        무더기로 쌓인 벌레울음 파헤치면        웬 오솔길 입구에 서게 된다 그 누군가가 선악을 구분할줄아는 그 시초에 그 구분을 정시하는 후면에 깔린 다른 견해들인 무더기로 쌓인 벌레울음을 파헤치면 웬 오솔길 입구에 서게 된다고 한다.그럼 이 오솔길은 무엇인가? 바로 선악을 구분할 줄 아는 인간세상에서 남다른 견해의 입구가 있다는것을 시사하는 것 일 것이다. 혹은 그 누군가가 푸르름의 그 시초의 그 후면에서 무더기로 쌓인 벌레울음 파헤치면 웬 오솔길 입구에 서게 된다고 한다.여기서 푸르름의 후면에 깔린 벌레울음소리나 오솔길은 무엇을 말해주는가?        순간        오솔길 깊이 빠져들어 갈 때가 있다        에덴동산에 들어갈 때가 있다! 순간 오솔길에 깊이 빠져들어 갈때가 있다고 한다.다시말해 선악을 구분하는 그 시초의 옳고 그름 외에 또 다른 견해가 있음을 발견하여 그 오솔길에 들어서게 되는 것이고 태초의 선악구별이 없는 시초의 에덴동산에 들어갈 때도 있다고 한다.다시말해 속세의 번잡한 견해에서 방황하지 말고 원초의 그 단순함을 노래한것이 아닐가? 혹은 그 원초적인 푸르름이 순간에 웬 오솔길에 빠져들어가고 태초의 단순한 푸름에 닿게 된다. 이상으로 선악구분과 푸르름의 의미로 분석해보았는데 선악구분의 상징성이 더 명확한 것이고 푸르름의 상징은 해석하기 어려운 이미지들이 적지 않다.하지만 선악구분이든 푸르름이든 공통점이 있으니 바로 시 작자의 회귀과정에 있다는 것이다. 시 작자는 이런 반추의 과정에 무언가 암시의 의미를 전달하려는것이다.그것이 바로 선악구분에서 현대인들의 불확정적인 해답으로하여서의 그 실질을 찾으려고하는 모습이 아닐가 한다.이 시의 시적 상상이 잎사귀에서 펼쳐졌으니 제목이 으로 되였을 것이다. 이상의 분석의 합리성이 어느 정도 긍정이 된다면 문학평론은 그 문학작품의 합리성을 분석하고 평론하는 것이지 그 작품의 이미지들에 대한 증명이 아님을 보여준다는 일종의 증명으로 될 것이다. 그리고 두편으로 갈리는 평론진들의 평론에서 잘못된 점이라면 한편에서는 정치적으로 몰고가는 것이 잘못인거고 다른 한편은 이미지들로 짜여진 한편의 평범한 시를 너무 높이 평가하는 데서 문제가 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당시로선 아마 새롭게 안겨오는 시일것으로 판정된다.알고보면 그렇게 대단한 시도 아닌것이다.단지 뛰여난 이미지 확장법이 돋보 일 뿐이다.하지만 우리는 이미지 확장법을 쓸 때 이미지의 모호한 점도 고려해야 할 것이며 이해 해 주는 기초에서 해석을 해야 할 것이다.이미지의 시가 국한성이 있다면 이런 점이 국한성 일 것이다. (본문은 미국 에서 퍼왔음.)
1    [평론]록색의 마력과 비반복적인 이미지 (최삼룡) 댓글:  조회:575  추천:14  2009-08-18
록색의 마력과 비반복적인 이미지  ㅡ박춘월의 시 《록(綠)》을 평함  최삼룡 자연이란 이 거편의 저술을 독해하는것은 인류의 가장 기본적인 과업의 하나이며 또 영원한 과업의 하나이다. 왜냐하면 자연은 인류의 물질적재부의 기본적인 래원이며 역시 정신적창조의 중요한 대상의 하나로 되기때문이다. 자연은 시에서도 시종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는바 영국의 중세기 시인 드라이든 죤 (dryden john)이 말했듯이 시란 자연의 이미지이기 때문에 시에서 자연을 다룬다는것은 어느 의미에선 시 전체를 다룬다는것과 같다. 그래서 모든 시리론들은 어쩔수 없이 이미지와 자연이라는 두가지 요소를 항상 론의하게 된다. 그중 자연의 개념은 시리론의 주재인 동시에 제재로서 시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있다. 시의 제재로서 자연은 수천년의 시발전사에 수많은 산시(山詩)와 풍물시(風物詩)를 남겼으며 현대에 와서도 쇠락하는 조짐은 보이지 않고 있다. 박춘월의 《록(綠)》(《연변일보》2005년 11월 4일) 이 바로  자연을 제재로 한 시로서 록색의 마력을 만끽하면서 생명의 활력을 읊조린 한수의 현대주의적 풍물시라고 칭할수 있다. 모두 5련 14행으로 된 이 시에서 우리는 록수청산에 몸을 담그고 록색을 만끽하는 화자를 만나볼수 있다. 시는 군더더기가 없이 첫구절부터 청산록수를 바라보는 화자의 느낌을 《태초 에덴의 잎사귀가 짜낸 도포》라고 자기의 느낌을 터쳐놓는다. 여기서 에덴의 동산의 잎사귀란 바로 아담과 이부가 부끄러운곳을 가리웠던 올리브나무잎을 가리키는데 바로 그 색깔이 록색이다. 이 잎사귀로 짜낸 도포(道袍. 포도가 아님을 명심할것―필자 주, 이 필자 주는 신문에 나갈 때 삭제당했음. 필자주 2009,6,22 )는 바로 화자가 몸을 담그고 있는 청산록수를 파랗게 물들인 록색의 은유적인 표현이다. 여기서 화자의 상상에 의하여 록색은 산과 물이 떨쳐입은 례복의 겉옷으로 되였다. 아래에서 시인은 《몇천년 걸어오며 나붓긴다/ 그 펄럭임 강이 되고 바다가 된다.》고 하면서 생명의 원색으로서 록색의 의구함과 록색과 더불어 강처럼 흐르고 바다처럼 설레이는 생명의 활력을 읊조리였다. 화자는 시의 2련. 3련. 4련에서 도포속으로 들어가면서 즉 다시말하면 록색의 마력에 빠져들어가면서 자연을 망끽하는 자신을 쓰고있다. 제2련. 푸름속으로 들어가는 화자의 마음은 푸른 날개옷을 떨쳐입고 날아간다. 누구라도 한번쯤 한여름철에 산과 물의 푸르름에 몸을 담궈본 사람이라면 록색의 날개옷을 입고 날아가는듯한 화자의 즐거운 마음을 리해할수 있을것이다. 제3련. 한걸음 한걸음 산속으로 들어가는 화자의 발밑에는 숫한 풀꽃이 밟히우는데 화자는 이것을 《현관에 놓인 풀꽃으로 엮은 신 신는다.》라고 표현하였다. 여기서 《현관(玄關)》은 집채의 정면에 낸 문간이니 아직 집안에 채 들어가지 못한 장소 즉 청산록수의 깊은 곳까지 가기전의 길임을 은유적으로 나타냈으며 《풀꽃으로 엮은 신》은 바로 풀빛이 신까지 곱게 물들게 했음을 은유적으로 표현하였다. 제4련. 시원한 나무그늘에서는 가지각색 벌레들의 울음소리가 들려오는데 화자는 《벌레울음》을 《무더기로 쌓인》이라는 시각적이미지로 형용했으며 통감으로 소리를 듣는다고 하지 않고 파헤친다고 표현하였다. 제5련. 오솔길을 따라 산으로 깊이 들어가는데 어느 순간 갑자기 호젓하고 무서운 느낌이 들만큼 쓸쓸한 생각이 들기도 하고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에덴의 동산. 생명이 탄생하는 태초의 경지에 들어서기도 한다. 이렇게 시의 마지막 련에서 화자는 록색의 황홀경에 깊이 빠지면서 생명의 원색과 생명의 신비에 대하여 깨달음을 얻기도 한다. 이와 같이 시인은 이 시에서 자연의 마력을 만끽하면서 폭발하는 시인의 생명의 활력과 시적순발력, 자연의 다양하고도 오묘한 언어를 읽어내려가는 능력 그리고 다양한 수단과 기교로 느낌과 깨달음을 시적으로 포장하는 재간을 보여주었다. 대체적으로 자연을 외면하면서 살아가며 또 자연과 등지고도 행복하게 살수 있다고 생각하는 현대인들에게 이 시는 약간의 느낌과 깨달음을 줄수있을것이다.    이 시에서 돋보이는것은 시인은 성공적인 낯설게 하기이다. 낯설게 하기란 이 명제는 로씨야의 형식주의자들의 주장중에 관건적인 명제인데 한마디로 예술이란 대상을 낯설게 하여 독자들에게 신선한 충격을 주어야 한다는것이다. 이 명제는 후에 사실상에서 많은 현대주의자들의 주장으로 되였다. 박춘월의 시 《록》에서 《도포》,《날개옷》,《신》,《현관》,《호수》,《도포의 서랍》,《새소리…몇알》 등 시어는 모두 낯설게 하기의 결과이다. 이러한 낯설게 하기는 이 시의 이미지를 비반복적인것으로 되게 하였으며 전편 시로 하여금 새롭고도 신선하고 감칠맛이 나게 하였다. 어떤 의미에서 시적성공의 성패를 좌우하는 중요한 관건의 하나는 시인이 얼마나 새롭고 적절한 이미지를 창조하느냐에 달린다. 이런 의미에서 이 시에서 이미지의 창조는 성공적인 실험이였다고 평가할수 있다. 그러나 중국조선족에게는 아직까지 모더니즘시에 길들여진 독자가 많지 못하다. 그러므로 《록》에 대한 의론도 분분하고 찬사보다 비난이 더 많을수 밖에 없다. 프랑스의 작가 프루스트(PYOUST)는 《실험주의에 대하여 》라는 글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바 있다. 《모든 실험의 가치는 서로 같지 않다.가장 많은 사람들의 주목을 끄는 실험이 왕왕 가장 가치가 있는것이 아니다. 하지만 가장 가치가 없는 실험이라도 전혀 쓸모가 없는것이 아니다.》  이러한 말씀에 힘입어 나는《록》의 시적인 성공에 대하여 기뻐할뿐만아니라 여기서 박춘월시인의 창조적 노력과 실험정신을 높이 평가하고싶다. 2006년 3월 2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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