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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자의반 타의반' '몽니'…정계를 움직였던 김종필 어록 댓글:  조회:1418  추천:2  2018-06-24
한국 현대 정치사에 큰 획을 그은 김종필 전 국무총리는 오랜 정치 연륜에서 비롯된 은유적 화법을 구사했고, 수많은 일화도 남겼다. 김 전 총리의 말은 당대의 유행어가 되기도 했고, 시대의 정치 현실을 한마디로 꼬집은 명언은 정계를 움직이기도 했다.   김종필 전 총리가 지난해 자유한국당 홍준표 전 대표 예방 당시 자택에서 담소를 나누고 있는 모습. /이덕훈 기자 김 전 총리의 대표적 명언은 “자의 반 타의 반”이다. 지금은 일상 생활용어로도 많이 사용되는 이 말은 김 전 총리가 1963년 공화당 창당 과정에서 반대파의 공격을 받고 물러나면서 남긴 말이다. 1998년, 당시 김대중 대통령 당선인에게 “내각제 개헌 약속을 지키라”며 김 전 총리가 사용한 ‘몽니(심술궂게 욕심부리는 성질)’라는 순우리말도 유명하다. 김 전 총리는 당시 “하다가 안 될 때는 몽니를 부리는 것이다”라고 했다. 이후 정계에서는 몽니라는 단어가 일상적으로 사용됐다. 1980년 박정희 전 대통령 사후 ‘서울의 봄’이 왔지만 김 전 총리는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봄이 왔으나 봄 같지 않다)’이라는 고사를 빌어 당시의 갑작스러운 권력 공백의 불길함을 표출했다. 서울의 봄은 6개월 만에 끝났고, 김 전 총리도 정치행위가 금지됐다.   더보기 Click   1963년 한·일 국교 정상화 과정에서 남겼던 “제2의 이완용이 되더라도 한일 국교를 정상화시키겠다”는 말도 회자되는 말이다. 당시 일본과의 비밀 협상 사실이 김 전 총리 주도로 이뤄졌다는 사실이 알려지며 국민적 반발이 일었지만, 그는 자신을 ‘이완용’에 비유하며 한·일 국교 정상화에 힘을 보탰다.   1964년 3월 28일, 한일회담의 막후 지원 활동을 벌이다 귀국한 김종필 당시 공화당 의장이 김포공항에서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조선일보DB 항상 ‘2인자’의 위치에서 정계를 막후 조정했던 김 전 총리는 1990년 3당 합당 이후 당시 노태우 대통령을 언급하며 “나는 대통령의 그림자도 밟지 않는다”고 했다. 1980년 신군부 2인자였던 노 전 대통령이 김 전 총리를 찾아가 2인자로서의 노하우를 물었을 때도 “같이 걸을 때조차 그림자를 밟지 않도록 한 걸음 물러나서 걷는 것”이라고 한 것으로 알려졌다. 충청권의 맹주로 그는 이른바 ‘충청도 핫바지론’을 언급하기도 했다. 김 전 총리는 1995년 지방선거 유세에서 “경상도 사람들은 충청도를 핫바지라고 부르는데 이것은 아무렇게나 취급해도 아무 말 없는 사람, 소견이나 오기조차도 없는 사람들이라는 의미다”라고 했다. “지역감정을 부추겼다”는 평가도 있었지만, 김 전 총리가 남긴 핫바지론은 이후 충청권 인사가 정권을 잡아야 한다는 ‘충청 대망론’의 씨앗이 됐다는 의견도 있다. 골프 애호가였던 김 전 총리는 1961년 5·16 이후 “사치스러운 골프를 치게 해선 안 된다”는 일부 의견에 강하게 반대했다. 그는 “앞으로 우리나라에도 수백 개의 골프장이 들어설 것이고 골프가 생활화되는 날이 올 것”이라고 했고, 골프장은 유지됐다. 김 전 총리는 골프를 치며 정치권의 많은 인사들과 어울리는 ‘정치 9단’의 면모도 과시했다. 그는 역대 대통령 중 노태우 전 대통령의 골프 실력을 가장 높이 평가했다. 김 전 총리는 후배 정치인들에게 ‘손때를 묻혀야 한다’는 말을 자주 해왔다. 공천에만 신경 쓸게 아니라 지역구에서 유권자들과 악수하며 소통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뜻이다. 그는 지인들에게 자신의 행보나 정치적 상황 등을 암시하는 서예작품을 선물하기도 했다. 1997년 자신의 대선 후원 조직 회보에 신년휘호로 ‘줄탁동기(啐啄同機)’라는 글귀를 보냈다. ‘병아리가 건강하게 부화하고자 알 속에서 나갈 때가 됐음을 알리면 어미 닭도 이때를 놓치지 않고 밖에서 알을 쪼아 껍데기를 깨 줘야 한다’는 말로, 모든 일은 시기가 적절해야 한다는 뜻이었다. 당시 대선 정국에서 적절한 시기의 결단이 필요함을 나타낸 것으로, 이후 김 전 총리는 김대중 전 대통령과 함께 정권 교체를 이뤘다.   1987년 선거관리위원회에 제출한 대통령 입후보자 포스터를 직원들이 검토하고 있다./조선일보DB 다음은 고인이 생전에 남긴 어록 ▲제2의 이완용이 되더라도 한일 국교를 정상화시키겠다(1963년, 일본과의 비밀협상이 국민적 반발에 직면한 뒤) ▲자의 반 타의 반(1963년, 공화당 창당 과정에서 반대파의 공격을 받고 물러나며) ▲춘래불사춘(1980년, 서울의 봄으로 찾아온 갑작스러운 권력 공백기를 우려하며) ▲파국 직전의 조국을 구하고 조국 근대화를 이루기 위해 5·16 혁명과 1963년 공화당 창당이라는 역사적 전기가 마련됐다(1987년, 저서 ‘새 역사의 고동’ 中) ▲나는 대통령의 그림자도 밟지 않는다(1990년, 3당 합당 이후 당시 노태우 대통령을 언급하며) ▲있는 복이나 빼앗아가지 마시라(1995년, 민자당 대표 시절 민주계의 대표 퇴진론을 거론하는 세배객이 ‘새해 복 많이 받으시라’고 하자) ▲경상도 사람들이 충청도를 핫바지라고 부르는데 이것은 아무렇게나 취급해도 아무 말 없는 사람, 소견이나 오기조차도 없는 사람들이라는 의미다(1995년, 지방선거 천안역 지원유세) ▲줄탁동기(1997년, 자신의 대선 후원조직인 ‘민족중흥회’ 회보에 사용한 신년휘호. 모든 일은 시기가 적절히 맞아야 한다는 뜻) ▲내가 제일 보기 싫은 것은 타다 남은 장작이다. 나는 완전히 연소해 재가 되고 싶다(1997년, 자민련 중앙위원회 운영위에서) ▲서리는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슬금슬금 녹아 없어지는 것이다(1998년, 총리 서리 당시 ‘서리’ 꼬리가 언제 떨어질 것 같으냐는 기자들의 질문에) ▲박정희 전 대통령을 깎아내리려는 못된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당신들이 오늘날 사람답게 사는 것은 박 대통령이 기반을 굳건히 다져 그 위에서 마음대로 떠들고 춤추고 있는 것이라고(2005년, 박정희 전 대통령 26주기 추도식에서) ▲정치는 허업(虛業)이다. 기업인은 노력한 만큼 과실이 생기지만 정치는 과실이 생기면 국민에게 드리는 것"(2011년, 안상수 당시 한나라당 대표에게) 조선일보 2018.6.24
6    사소한 생활 또한 얼마나 숭엄한가 댓글:  조회:1407  추천:0  2015-02-06
고 은 시인 [고은의 편지2] 사소한 생활 또한 얼마나 숭엄한가 일조(一潮)에게.  한갓 악몽이라면 얼마나 좋겠는가. 어린 시절 한밤중 악몽에서 깨어나 아 꿈이었구나 하고 오그라든 가슴 쓸어내린 적이 여러 번 있었지.  그런데 어제오늘의 우리에게 이것은 꿈이 아니라 현실이네. 수레바퀴는 진창에 처박혀버렸네. 꽉 막힌 현실이 우리 현실이네. 어제의 쓰레기만이 되풀이 들썩이고 있네. 번드르르한 미래학은 허황한 미래를 횡설수설하다가 말고 있네.  밤낮의 하루하루가 쌓이면 그것을 세월이라 했지. 그 세월을 예로부터 흐르는 물이라 해왔지. 바로 이런 흐르는 물이 꽉 막히고 만 것이네.  나는 너의 성벽이고 너는 나의 해자(垓字)이고 그 해자 물속의 독사이거나 맨땅 해자 안의 주린 호랑이가 되었네. 이것이 악몽이 아니고 무엇인가.  하지만 저 태양계가 편성된 뒤로 우리가 살아오는 세상에는 단 한 번도 막힌 적 없는 낮과 밤이 흐르고 흐르는 세월 45억 년을 지나왔으니 새삼 경탄하지 않을 수 없네.  막히지 않는 것, 닫혀버린 나만의 세상은 세상이 아닌 상태로 이 우주 광대무변의 소통은 하루도 어긴 적 없을 것이네.  그 누가 이 유구한 밤낮을 거스르겠는가. 그 무엇이 이 흐르는 세월의 원리를 제멋대로 바꾸겠는가.  태양의 불행은 정작 태양에는 이런 하루의 낮과 밤이 없다는 것이네. 하루 속의 한 쌍의 밤낮이 번갈아 가며 마침내 그 하루를 완성하는 운행의 오묘한 명암은 그것을 주재하는 태양에는 없는 일이네.  저 200만 년 전부터 이 지상의 삶을 영위해 온 태고 인류는 이토록 진귀한 하루하루로 낮에는 눈 뜨고 밤에는 눈을 감는 방식으로 쌓아왔네.  180만 년 전에는 그동안 머물렀던 고향을 떠나서 이곳저곳의 낯선 내일들을 펼쳐왔네. 해 뜨는 아침과 해 지는 밤은 그 시간 속의 운명에 대한 숙명이었네.  오로지 이 밤과 낮으로 인류 사는 바람으로 산을 넘고 물로 벌판을 가로지르는 활동을 마다하지 않았네. 뒷날 ‘존재’라는 정(靜) 개념보다 ‘행(行)’ 또는 ‘제행(諸行)’이라는 동(動) 개념이 훨씬 더 실감을 낳았던 이유이기도 하겠네.  항성인 태양이 가지지 못한 밤낮을 그 행성인 지구가 가진 이 태양계의 공전 자전의 축복이야말로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을 것이네.  만약 이 세상이 환한 대낮만이면 어쩔 것인가. 그 반대라면 어쩔 것인가.  이런 밤낮의 일상이야말로 인간에게 삶의 율동을 부여한 것 아닌가. 해가 내 목숨과 삶을 낳았다면 달은 내 마음을 낳아준 것 아니겠는가. 일월상조(日月相照) 그 아래에서 내 몸에는 넋이 들고 얼이 박히지 않았겠는가.  한곳에서 꼼짝달싹 못하고 뿌리내린 풀이나 나무는 바람의 덕택으로 그 내음을 퍼뜨려 벌·나비를 부르고 그 씨앗을 먼 곳에 날려보내네. 저 심심삼천 골짝의 한줄기 가느다란 시냇물의 띠가 흘러 흘러 마침내 바다에 이르는 그 긴 행로를 누가 차단한단 말인가.  아득한 어느 시절이었네. 중앙아시아 어디쯤에서 인류의 한 갈래로 떠나고 떠나는 몇 백 세대로 해 뜨는 지평선 이쪽 부여 땅에 이르렀을 때 그 편력(遍歷)의 영광으로 태양 숭배의 자손이 되고 말았네. 그 태양족의 후예가 우리 아닌가.  이런 역정이 바로 흐르는 삶의 사명을 다하는 것 아닌가.  대기 속의 바람도 한곳에서 썩어진 적 없지. 바람이라는 뜻은 어디에서 어디로 가는 기체의 현상에 있지 않는가. 저 바닷가의 조석(潮汐)은 바다로부터 강 쪽으로, 강 쪽에서 바다 쪽으로 나아가는 지구와 달 사이의 가운(氣運) 놀이 아닌가. 저녁 밀물은 얼마나 관능적인가. 아침 썰물은 얼마나 적나라한가.  이런 연안의 조류 놀이와는 달리 휑한 난바다 해류 또한 한군데서 훌쩍이지 않고 먼 곳의 미지를 향해서 정처 없는 발길로 떠나지 않던가.  한 해류가 지구상의 여러 대양을 거침없이 돌아다니다가 처음의 해역에 돌아오는 그 커다란 한 바퀴에는 2만 년의 밤낮이 채워진다네.  인간의 역사 단위로 근대사 시대 구분 따위에는 어림없는 1000만 년으로 삼는 장기지속사관이 있고 이것조차 뛰어넘어 1만 년을 한 거시역사관으로 설정한 파천황(破天荒)의 초연사관도 있네. 그러나 이런 인간의 시간 경률 이상으로 이 지구상의 모든 바다를 제 무대로 삼아 2만 년 세월의 순환을 한 단위로 삼는 해류에 대해서 인간 사회의 숨찬 시간 분화(分化)는 시간 속의 살벌한 간극을 만들어내는 빌미일 것이네.  내가 좋아하는 지난 시대 노르웨이의 한 시인은 제 나라를 박차고 나와 인도양 태평양의 적도 위 해류 전환점까지 떠돈 적이 있었네. 나 또한 동중국해 가을 흑조에 반해서 제주도 3년을 보냈네. 자네의 호()를 일조(一潮)라고 부르는 사연에는 한 인간의 전말(顚末)이 2만 년 해류의 일생으로 된 그 운명의 시공(時空)에 드리워진 바 아닌가.  삼척동자라도 지구 대부분이 바다로 채워진 것은 다 알고 있네. 이 바다 5대양에 비할 바 아닌 6대주라는 땅덩어리가 붙었다 떨어졌다 하며 솟아오른 융기가 지구 위의 육지 아닌가. 그래서 지구를 수구(水球)라고 고쳐 부르자는 소리도 있지 않은가.  이런 바다의 해류 순환만이 아니겠지. 한반도 백두대간 어느 분수령 밑 한 방울의 물로 시작한 시내 개울이 냇물로 나아가고 위 강 아래 강 거쳐 바다에 이르는 그 행방은 바다에서 끝나지 않고 바다 수면의 증발로 기체로 솟아올라 구름을 만들어내지 않는가. 그 구름의 어느 밤에 눈이 되고 어느 한낮에 비가 되어 지상을 적시지 않는가.  실로 이 무궁한 순환 유전의 공간 속에서 낮과 밤이라는 시간의 틀이 진행되고 이 시간의 운행 속에서 찰나와 영겁의 공간이 성·주·괴·공(成住壞空)과 생로병사로의 궤적을 그리고 있네.  이러저러한 삶의 기초 환경으로 인간의 문명은 자연의 야생에 대해서 얼마나 더 나은 가치의 단계인가를 회의할 의무도 나날이 강렬하다네.  인간에게는 천당 극락도 아틀란티스도 무릉도원도 선계(仙界)도 저 캄파넬라 ‘태양의 도시’도 유토피아도 한 특정 공간으로 설정되고 있네.  현실이라는 제한된 공간의 질곡을 탈출하는 망명의 장소가 바로 이상향이라는 1차원 내지 3차원의 지정된 공간이고 만 것이네. 그 공간은 첫째 이동의 자유가 끝난 곳이고 특별한 기획의 환경이고 자아 의지가 무효인 정지된 상태이기도 하네.  이런 유토피아 고정설에 대해서 가령 푸코는 ‘헤테로피아’라는 장소가 전도된 과정 자체로 유토피아 융통성을 내보이기도 하고 있네.  나는 인간의 꿈속에 담긴 이상세계란 밤에는 자는 집이 있고 낮에는 일할 곳이 있는 생존의 기본에서 시작한다고 믿네. 유토피아 하강설(下降說)이 곧 이것이네.  흐르는 행복과 흐르는 진리야말로 옛 조상의 유전자로 흘러오는 인류사의 꿈 아닌가. 자아나 국가라는 구성은 이 세계사의 미래와 우주의 불가사의 속에서 얼마나 더 버티겠는가. 오히려 전근대나 근대를 따질 까닭 없이 인간 각자의 사소한 생활과 세계의 자연성 개연성이 얼마나 숭엄한가를 문득 깨닫게 되네.  자네와 함께 현실을 놓지 않는 신념과 현실을 넘어서는 신념을 오래오래 나누고 싶네. 그리운 일조, 어째서 우리 당대는 금석(金石)에 아로새겨둘 의미를 찾기가 이다지도 어려운가. 고은 시인  한갓 악몽이라면 얼마나 좋겠는가. 어린 시절 한밤중 악몽에서 깨어나 아 꿈이었구나 하고 오그라든 가슴 쓸어내린 적이 여러 번 있었지.  그런데 어제오늘의 우리에게 이것은 꿈이 아니라 현실이네. 수레바퀴는 진창에 처박혀버렸네. 꽉 막힌 현실이 우리 현실이네. 어제의 쓰레기만이 되풀이 들썩이고 있네. 번드르르한 미래학은 허황한 미래를 횡설수설하다가 말고 있네.  밤낮의 하루하루가 쌓이면 그것을 세월이라 했지. 그 세월을 예로부터 흐르는 물이라 해왔지. 바로 이런 흐르는 물이 꽉 막히고 만 것이네.  나는 너의 성벽이고 너는 나의 해자(垓字)이고 그 해자 물속의 독사이거나 맨땅 해자 안의 주린 호랑이가 되었네. 이것이 악몽이 아니고 무엇인가.  하지만 저 태양계가 편성된 뒤로 우리가 살아오는 세상에는 단 한 번도 막힌 적 없는 낮과 밤이 흐르고 흐르는 세월 45억 년을 지나왔으니 새삼 경탄하지 않을 수 없네.  막히지 않는 것, 닫혀버린 나만의 세상은 세상이 아닌 상태로 이 우주 광대무변의 소통은 하루도 어긴 적 없을 것이네.  그 누가 이 유구한 밤낮을 거스르겠는가. 그 무엇이 이 흐르는 세월의 원리를 제멋대로 바꾸겠는가.  태양의 불행은 정작 태양에는 이런 하루의 낮과 밤이 없다는 것이네. 하루 속의 한 쌍의 밤낮이 번갈아 가며 마침내 그 하루를 완성하는 운행의 오묘한 명암은 그것을 주재하는 태양에는 없는 일이네.  저 200만 년 전부터 이 지상의 삶을 영위해 온 태고 인류는 이토록 진귀한 하루하루로 낮에는 눈 뜨고 밤에는 눈을 감는 방식으로 쌓아왔네.  180만 년 전에는 그동안 머물렀던 고향을 떠나서 이곳저곳의 낯선 내일들을 펼쳐왔네. 해 뜨는 아침과 해 지는 밤은 그 시간 속의 운명에 대한 숙명이었네.  오로지 이 밤과 낮으로 인류 사는 바람으로 산을 넘고 물로 벌판을 가로지르는 활동을 마다하지 않았네. 뒷날 ‘존재’라는 정(靜) 개념보다 ‘행(行)’ 또는 ‘제행(諸行)’이라는 동(動) 개념이 훨씬 더 실감을 낳았던 이유이기도 하겠네.  항성인 태양이 가지지 못한 밤낮을 그 행성인 지구가 가진 이 태양계의 공전 자전의 축복이야말로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을 것이네.  만약 이 세상이 환한 대낮만이면 어쩔 것인가. 그 반대라면 어쩔 것인가.  이런 밤낮의 일상이야말로 인간에게 삶의 율동을 부여한 것 아닌가. 해가 내 목숨과 삶을 낳았다면 달은 내 마음을 낳아준 것 아니겠는가. 일월상조(日月相照) 그 아래에서 내 몸에는 넋이 들고 얼이 박히지 않았겠는가.  한곳에서 꼼짝달싹 못하고 뿌리내린 풀이나 나무는 바람의 덕택으로 그 내음을 퍼뜨려 벌·나비를 부르고 그 씨앗을 먼 곳에 날려보내네. 저 심심삼천 골짝의 한줄기 가느다란 시냇물의 띠가 흘러 흘러 마침내 바다에 이르는 그 긴 행로를 누가 차단한단 말인가.  아득한 어느 시절이었네. 중앙아시아 어디쯤에서 인류의 한 갈래로 떠나고 떠나는 몇 백 세대로 해 뜨는 지평선 이쪽 부여 땅에 이르렀을 때 그 편력(遍歷)의 영광으로 태양 숭배의 자손이 되고 말았네. 그 태양족의 후예가 우리 아닌가.  이런 역정이 바로 흐르는 삶의 사명을 다하는 것 아닌가.  대기 속의 바람도 한곳에서 썩어진 적 없지. 바람이라는 뜻은 어디에서 어디로 가는 기체의 현상에 있지 않는가. 저 바닷가의 조석(潮汐)은 바다로부터 강 쪽으로, 강 쪽에서 바다 쪽으로 나아가는 지구와 달 사이의 가운(氣運) 놀이 아닌가. 저녁 밀물은 얼마나 관능적인가. 아침 썰물은 얼마나 적나라한가.  이런 연안의 조류 놀이와는 달리 휑한 난바다 해류 또한 한군데서 훌쩍이지 않고 먼 곳의 미지를 향해서 정처 없는 발길로 떠나지 않던가.  한 해류가 지구상의 여러 대양을 거침없이 돌아다니다가 처음의 해역에 돌아오는 그 커다란 한 바퀴에는 2만 년의 밤낮이 채워진다네.  인간의 역사 단위로 근대사 시대 구분 따위에는 어림없는 1000만 년으로 삼는 장기지속사관이 있고 이것조차 뛰어넘어 1만 년을 한 거시역사관으로 설정한 파천황(破天荒)의 초연사관도 있네. 그러나 이런 인간의 시간 경률 이상으로 이 지구상의 모든 바다를 제 무대로 삼아 2만 년 세월의 순환을 한 단위로 삼는 해류에 대해서 인간 사회의 숨찬 시간 분화(分化)는 시간 속의 살벌한 간극을 만들어내는 빌미일 것이네.  내가 좋아하는 지난 시대 노르웨이의 한 시인은 제 나라를 박차고 나와 인도양 태평양의 적도 위 해류 전환점까지 떠돈 적이 있었네. 나 또한 동중국해 가을 흑조에 반해서 제주도 3년을 보냈네. 자네의 호()를 일조(一潮)라고 부르는 사연에는 한 인간의 전말(顚末)이 2만 년 해류의 일생으로 된 그 운명의 시공(時空)에 드리워진 바 아닌가.  삼척동자라도 지구 대부분이 바다로 채워진 것은 다 알고 있네. 이 바다 5대양에 비할 바 아닌 6대주라는 땅덩어리가 붙었다 떨어졌다 하며 솟아오른 융기가 지구 위의 육지 아닌가. 그래서 지구를 수구(水球)라고 고쳐 부르자는 소리도 있지 않은가.  이런 바다의 해류 순환만이 아니겠지. 한반도 백두대간 어느 분수령 밑 한 방울의 물로 시작한 시내 개울이 냇물로 나아가고 위 강 아래 강 거쳐 바다에 이르는 그 행방은 바다에서 끝나지 않고 바다 수면의 증발로 기체로 솟아올라 구름을 만들어내지 않는가. 그 구름의 어느 밤에 눈이 되고 어느 한낮에 비가 되어 지상을 적시지 않는가.  실로 이 무궁한 순환 유전의 공간 속에서 낮과 밤이라는 시간의 틀이 진행되고 이 시간의 운행 속에서 찰나와 영겁의 공간이 성·주·괴·공(成住壞空)과 생로병사로의 궤적을 그리고 있네.  이러저러한 삶의 기초 환경으로 인간의 문명은 자연의 야생에 대해서 얼마나 더 나은 가치의 단계인가를 회의할 의무도 나날이 강렬하다네.  인간에게는 천당 극락도 아틀란티스도 무릉도원도 선계(仙界)도 저 캄파넬라 ‘태양의 도시’도 유토피아도 한 특정 공간으로 설정되고 있네.  현실이라는 제한된 공간의 질곡을 탈출하는 망명의 장소가 바로 이상향이라는 1차원 내지 3차원의 지정된 공간이고 만 것이네. 그 공간은 첫째 이동의 자유가 끝난 곳이고 특별한 기획의 환경이고 자아 의지가 무효인 정지된 상태이기도 하네.  이런 유토피아 고정설에 대해서 가령 푸코는 ‘헤테로피아’라는 장소가 전도된 과정 자체로 유토피아 융통성을 내보이기도 하고 있네.  나는 인간의 꿈속에 담긴 이상세계란 밤에는 자는 집이 있고 낮에는 일할 곳이 있는 생존의 기본에서 시작한다고 믿네. 유토피아 하강설(下降說)이 곧 이것이네.  흐르는 행복과 흐르는 진리야말로 옛 조상의 유전자로 흘러오는 인류사의 꿈 아닌가. 자아나 국가라는 구성은 이 세계사의 미래와 우주의 불가사의 속에서 얼마나 더 버티겠는가. 오히려 전근대나 근대를 따질 까닭 없이 인간 각자의 사소한 생활과 세계의 자연성 개연성이 얼마나 숭엄한가를 문득 깨닫게 되네.  자네와 함께 현실을 놓지 않는 신념과 현실을 넘어서는 신념을 오래오래 나누고 싶네. 그리운 일조, 어째서 우리 당대는 금석(金石)에 아로새겨둘 의미를 찾기가 이다지도 어려운가.   2015.2.6 중앙일보
5    참을 길 없을 땐 여기로 신고하라- 저장해두세요 댓글:  조회:1754  추천:1  2014-04-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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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죽음 직전의 사람들 수백명을 인터뷰했더니… 댓글:  조회:1521  추천:0  2014-01-06
[책속의 이 한줄] "진정한 자신이 된다는 것은 자신의 인간적인 자아를 존중하는 것을 말한다. 때로 감추고 싶은 자아의 어두운 부분까지도 포함해서. 우리는 흔히 사람들이 선한 마음에 이끌린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진정한 인간의 모습에 이끌리는 것이다." -인생 수업(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 외·이레·2006) 정신의학자인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와 그녀의 제자 데이비드 케슬러는 죽음 직전의 사람들 수백 명을 인터뷰했다. 생의 막다른 길목에서 그들이 말하는 '인생에서 꼭 배워야 할 것들'을 받아 적어 이 책을 펴냈다. 마지막 장을 덮을 때까지 저자를 포함해 수많은 사람들이 털어놓는 내면의 인생 이야기가 펼쳐진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자기 자신부터 사랑하라'는 말을 많이 듣는다. 어떻게 해야 자신을 사랑할 수 있을까? 많은 사람들이 자신에 대한 사랑을 자기도취나 이기주의와 혼동한다. 저자는 자신에 대해 너그러운 마음을 갖는 것부터 시작해야 한다고 조언한다. 그래야 자신의 어두운 면과 결점에 보다 솔직해지고 진정한 자신에 가까워질 수 있다. 사람들은 솔직한 사람에게 끌린다는 인생 교훈을 전하려고 그녀는 자신의 일화를 들려줬다. 저자는 시카고 의대에서 학생들에게 가장 인기 있는 교수로 뽑힌 적이 있다. 그녀가 상을 받는다는 발표가 나던 날, 동료 교수들은 평상시처럼 친절했다. 하지만 상에 대해 언급하는 교수는 단 한 명도 없었다. 이날 저녁 아동 심리학자인 동료 교수가 꽃다발을 보내왔다. 카드에는 이런 말이 적혀 있었다. "질투가 나서 죽을 지경이지만, 어땠든 축하해요." 저자는 "그 순간부터 '나는 이 남자만은 믿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가 가식적이지 않아서 좋았다"고 회상했다. 죽음을 앞둔 사람들이 가르쳐 주는 가장 중요한 교훈은 무엇일까? 저자가 들려준 답은 의외로 쉽고 평범하다. "모든 날들을 '최대한으로' 살아라." 단지 실천이 어려울 뿐이다. 책장을 덮을 때쯤 저자는 독자에게 이렇게 묻는다. "우리 모두 별 아래 살지만 가끔이라도 하늘을 올려다보나요? 평범한 것 속에서 특별한 것을 보고 느끼나요? 이번 생과 같은 생을 또 얻지는 못합니다. 삶의 마지막 순간에 바다와 하늘과 별 또는 사랑하는 사람들을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볼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하지 마십시오. 지금 그들을 보러 가십시오." 동아일보 신수정 기자
3    북경대학 총장의 10마디 댓글:  조회:1702  추천:0  2013-12-29
北大校长王恩哥 十句话值得分享  第一句:结交“两个朋友”:一个是运动场,一个是图书馆。不断 地“充电”、“蓄电”、 “放电”。   第二句话,培养“两种功夫”:一个是本分,一个是本事。做人靠本分,做 事靠本事,靠“两本”起家靠得住。 第三句话,乐于吃“两样东西”:一个是吃亏,一个是吃苦。做人不怕吃亏, 做事不怕吃苦。吃亏是福,吃苦是福。 第四句话,具备“两种力量”:一种是思想的力量,一种是利剑的力量。思想的力量往往战胜利剑的力量。这是拿破仑的 名言。一个人的思想走多远,他就有可能走多远。 第五句话,追求“两个一致”:一个是兴趣与事业一致,一个是爱情与婚姻一致。兴趣与事业一致,就能使你的潜力最大限度地得以发挥。恩格斯说,婚姻要以爱情为基础。没有爱情的婚姻是不道德的婚姻,也不会是牢固的婚姻。 第六句话,插上“两个翅膀”:一个叫理想,一个叫毅力。如果一个人有了 这 “两个翅膀”,他就能飞得高,飞得远。 第七句话,构建“两个支柱”:一个是科学,一个是人文。 第八句话,配备两个“保健医生”:一个叫运动,一个叫乐观。运动使你生理健康,乐观使你心理健康:日行万步路,夜读十页书。 第九句话,记住“两个秘诀”:一个是健康的秘诀在早上,一个是成功的秘诀在晚上。爱因斯坦说过:人的差异产生于业余时间。业余时间能成就一个人,也能毁灭一个人。 第十句话,追求“两个极致”:一个是把自身的潜力发挥到极致,一个是把自己的寿命健康延长到极致。
2    관작루에 오름(登鹳雀楼) 댓글:  조회:2281  추천:0  2013-06-28
관작루에 오름 登鹳雀楼 (당) 왕지환 王之焕 번역 김택 저녁해 산 넘어 사라져 버리고                                白日依山尽 황하는 아득한 바다로 흘러드네                             黄河入海流 눈 보이는 끝까지 천리허 보자면                            欲穷千里目 한 다락을 더 높이 올라야 하리라                           更上一层楼 * 2013년 6월 28일 중국 국가주석 습근평과 부인 팽려원은 북경 조어대 국빈관에서 방중한 한국 대통령 박근혜에게 도자기와 서화작품 각기 한점씩 선물했다. 그 서화작품의 내용인즉 곧 "관작루에 오름"중의 뒤 두 구절이다.
1    직장인, 회사에서 가장 하고 싶은 말 1위는? 댓글:  조회:1561  추천:0  2013-05-28
한국 직장인이 회사에서 가장 하고 싶은 말로 ‘(퇴근시간 정시에) 퇴근하겠습니다’가 1위에 꼽혔다. 취업포털 커리어(대표 강석인)가 지난 16일~22일 직장인 679명을 대상으로 ‘직장에서 가장 하고 싶은 말’에 관한 설문조사를 실시한 결과, 가장 많은 직장인들이 ‘(퇴근시간 정시에) 퇴근하겠습니다’(30.8%)를 선택했다. 2위는 ‘직접 해보세요’(20%)였으며, ‘너나 잘하세요’(16%), ‘휴가 다녀오겠습니다’(12.6%), ‘회사 그만 두겠습니다’(9.9%), ‘(프로젝트나 과업을) 저 혼자 다했습니다’(6.5%), ‘이것 밖에 못합니까?’(3.8%)가 뒤를 이었다. 그 대상으로는 ‘직속상사/선배’가 전체의 50.2%로 가장 많은 비율을 차지했다. 이 외에는 ‘임원/간부’(25.1%), ‘동료’(16.5%), ‘후배’(5.9%) 순이었다. 그 말이 가장 하고 싶을 때는 언제인가라는 질문에는 ‘업무 중 무리한 요구를 받았을 때’(36.6%), ‘회사 사람과 마찰이 일어났을 때’(26.1%), ‘피곤하거나 아플 때’(16.1%), ‘항상’(16.1%) 등의 의견이 있었다. 그렇다면 하고 싶은 말을 모두 해버렸을 때 예상되는 결과는 어떨까? 58.4%로 절반 이상의 직장인들은 ‘회사사람과 사이가 불편해질 것이다’라고 대답했다. 16.3%는 ‘사직서를 써야 할 상황이 발생할 것이다’, 7.2%가 ‘오히려 돈독할 사이가 될 것이다’라고 응답했으며 6.6%의 직장인은 ‘동료들 사이에서 영웅이 될 것이다’라고 응답했다. K모바일 13-05-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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