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기활
http://www.zoglo.net/blog/wujihuo 블로그홈 | 로그인
<< 2월 2020 >>
      1
2345678
9101112131415
16171819202122
23242526272829

방문자

홈 > 전체

전체 [ 314 ]

314    21세기의 "리시진" 김수철(련재 5) 댓글:  조회:21  추천:0  2020-02-19
                       5. 나의 첫 교직생활 1945년 12월, 내가 횡도자(横道子)에서 민주대동맹 태양지부 청년위원으로 한창 활약하고 있을 때 나의 소학교 2학년 동창생인 임철순(任喆淳)이 나에게 특별히 관심을 보이였다. 경상북도 이민의 아들인 임철순은 밤색 얼굴에 우뚝 선 코, 강직한 성격과 강한 결단성으로 하여 그에게서는 남성적인 기질이 다분히 느껴졌다. 게다가 음악, 미술, 체육 등 특장들까지 겸비한 데서 그는  태양구중심소학교의 둘도 없는 엘리트였다. 어느 날 철순이가 나를 찾아와 나에게 태양구중심소학교 교사로 가면 어떤가는 자기의  의사를 밝혔다. 나는 교육학이나 심리학 방면에 문외한이다보니 애들교학을 잘해낼 수 있을지 근심되면서도 마땅한 자리가 있다면 하고 싶다고 말하였다. 며칠후 철순이의 덕분이였는지 아니면 그 때까지만 해도 소학교교원이 많이 부족했던 사정에서였는지 아무튼 학교당국에서는 별말이 없이 나를 받아들였다. 내가 담임한 학급은 락제생학급으로 불리우는 1학년 2반이였다. 나는 락제생이 말 대로 그렇게 많다(25명)면 필경 담임교원의 문제일 수도 있다고 생각하였다. 1학년 1반의 담임은 리학림(李学林)선생이였는데 그는 이름 그대로 명실공히 훌륭한 교사로 되기에 손색이 없었다. 리선생은 교수안도 잘 짜고 학생들의 마음도 잘 헤아려주었기에 모든 학생들이 한결같이 그의 주위에 똘똘 뭉쳐 움직이였는데 나의 재간으로는 도저히 흉내도 못 낼 지경이였다. 나는 얼마간의 체험으로 유치원이나 소학교 저학년을 잘 가르치려면 사범교육을 받아야 함을 절실히 느꼈다. 어느 날 우리 학급에서 모 학생이 학용품을 도적맞힌 사건이 발생했는데 나는 경솔하게 아이들의 말만 믿고 한 학생을 의심하던 데로부터 엄벌하기까지에 이르러 그 학생 부모의 불만을 사게 되였다. 아무리 어린 학생이라고 해도, 또 설사 물건을 훔쳤다 해도 신중하게 일을 처리해야 했는데 나의 너무 경솔한 처사 때문에 일이 커지게 된 것이였다. 교사의 직책은 학생들을 가르치는 것이지만 나는 도리여 소학교 교직에 종사하는 과정에서 많은 것을 배웠고 또 턱없이 부족함을 느꼈다. 나는 지금까지도 이 학생의 이름이 권룡봉(权龙凤)이라는 것과 그의 아버지가 권춘길(权春吉)이라는 것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는데 이 글로써 그들에게 속죄하는 바이다. 내가 가르친 학급의 반장은 김주남(金柱男)이라고 부르는 녀학생이였는데 알고 보면 그 녀학생이 남자이름을 가진 것도 다 원인이 있었다. 주남의 부모님들은 련속 딸만 낳게 되자 주남이가 딸임에도 불구하고 남자이름으로 지었는데 그렇게 지으면 다음번에 낳는 애가 남자애일 가능성이 많단다. 나는 지금도 그 때 우리 학급에서 공부했던 김주남, 임응수(任应洙), 권룡봉 등 귀여운 학생들이 매우 그립고 또 지금은 어디에 있으며 무엇을 하고 있는지 무척 궁금하다. 만약 그네들이 나의 이 글을 읽는다면 찾아올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가슴이 부풀어오르기도 한다. 이 밖에 그 시절에 나와 함께 걸어서 출퇴근하던 엄화수(严和洙)라는 교사도 잊을 수 없다. 그 때 우리 두 남자는 출퇴근길에서 마치 사랑을 나누는 련인마냥 여러가지 끝도 없는 이야기로 웃음꽃을 피우며 서로 푸른 꿈을 키웠다. 엄화수는 나에게 가정생활 얘기도 허물없이 재미있게 들려주었다. 조양천중학교를 졸업하고 사회에 진출하게 된 그는 녀자친구를 사귀게 되였다. 그들 두 청춘남녀에게는 꿈도 많았을 뿐만 아니라 가끔씩은 함께 행복한 가정의 설계도도 그려나갔다. 그러던 어느 날, 엄씨가 녀자친구를 데리고 집에 갔는데 아버지와 두 형님이 결사코 반대해나서는 바람에 녀자친구는 울면서 돌아가는 수밖에 없었다. 엄씨는 그 때 울면서 뛰여가는 녀자친구의 뒤모습을 잊을 수 없다며 많이 안타까워했다. 나는 그의 사연을 듣고 난 후에야 그가 항상 서글픈 모습을 하고 있었음을 알게 되였다. 썩 후에 전해들었지만 엄화수는 교직을 그만두고 연변조선족자치주수리국에 전근하여 일하다가 또 안도복흥저수지에 전근해갔다는 것을 알게 되였다. 1년간의 소학교 교직생활이였지만 그 사이 정든 교사들의 이야기를 하려니 끝이 없다. 그 때의 많고 많은 얘기들중에서 한가지만은 빼놓을 수 없기에 마지막으로 보탬하려고 한다. 태양소학교 한계성(韩启星) 교장에 대한 이야기이다. 연길시중앙소학교에서 전근해온 한교장은 정말 팔방미인이였다. 1946년 8월 여름방학에 한교장은 교사들을 조직하여 태양구 중심인 횡도자거리에서 문예공연을 하였는데 이 때로부터 그에 대한 소문이 파다했다. 한교장은 작곡, 작사뿐만 아니라 교원들을 조직하여 라는 노래와 를 무대에 올렸으며 친히 바이올인반주까지 하였다. 그리고 15명의 교사들이 배역을 맡은 이라는 연극을 무대에 올리기도 했다. 그 연극에서 나는 일제의 통치하에 신음하는 가련한 농민들을 학대하는 경관역을 맡았다. 무대미술은 그의 지도하에서 내가 맡게 되였고 배우들의 화장도 처음에는 그가 하다가 나중에는 나에게 모두 맡겼다. 그 때 우리 학교에는 음악을 가르치는 김유신(金有信)이라는 선생이 있었는데 그는 한교장의 지시에 따라 무대음악활동을 전부 맡아하였다. 김유신선생은 성악도 잘했고 또 특별히 긴 손가락으로 손풍금도 아주 잘 쳤다. 그뿐만 아니라 쭉 빠진 체격에 얼굴 생김새 또한 톱스타형으로서 그가 만약 지금 시대에서 살았더라면 아마도 숱한 녀성들이 그의 팬으로 되였을 것이다. 우리들의 공연이 너무나도 성공적이여서 공연후 학생들과 학부형들은 물론 주변의 관중들까지도 태양소학교의 교장을 비롯한 교사들은 모두 재간둥이라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1946년 일년간의 교직생활은 나로 하여금 사상상에서 진보하고 실천 가운데서 교육에 관한 지식을 익히도록 하였다. 주안상을 차려놓고 서로 마음을 털어놓으면서 즐기던 그 때 그 시절이 70년후인 지금에도 그립기만 하다.
313    21세기의 "리시진" 김수철(련재 4) 댓글:  조회:67  추천:0  2020-02-10
4, ‘민주대동맹(民主大同盟)’ 청년위원으로 연길현 태양구 민주대동맹은 나에게 사회주의적 사상기틀을 마련해준 첫 혁명조직이였다. 지희겸(池喜谦, 연변대학 교수)이 연길에서 조직한 민주대동맹은 중국공산당 군중조직으로서 당을 옹호하고 당의 시정방침정책을 선전하며 국민당을 반대하여 사회의 치안을 유지하는 과도기적 기구였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 때 촌민주대동맹의 위원들로는 리희일(李喜日), 최일룡(崔日龙), 김봉섭(金风燮), 김춘식(金春植) 등이였다. 당시에 연길현 태양구에는 우수한 청년들이 아주 많았는데 그 때에 촌민주대동맹에서는 유일하게 나를 청년위원으로 임명하였다. 1945년 12월, 촌민주대동맹에서 조직한 사회주의사상교육강습반이 개최되였다. 촌민주대동맹 위원들이 각각 강습내용을 분담한 후 매번 강의를 끝내고는 토론회를 조직하였다. 태양구내에서 30여명이 입선되였는데 횡도자촌 민주대동맹 사무실에 집중하였다. 그번 강습반은 10여일간 열렸다. 강의교재는 당시 연변당정령도간부들이 정부사업일군대회에서 한 발언고를 내가 등사원지에 써서 등사기로 등사한 후 발급하였다. 학습내용은 중국사회주의혁명력사, 중국공산당 탄생, 당의 강령, 당의 혁명활동, 2만 5천리장정, 국민당력사, 국민당의 반민주 반혁명 진상, 국공합작 등 계렬적인 혁명기초지식이였다. 집체훈련은 위원들이 분공하여 강의하고 각자가 심득을 발표한 후 심득내용의 가부를 토론하였다. 대동맹의 사무실은 큰 온돌방에 이부자리까지 있어 합숙을 하면서 직접 가르침을 받고 토론할 수 있어 아주 편리하였다. 나는 강습반을 통해 혁명사업의 리론적 기초와 실천에 관한 기본리론을 터득하기 시작하였고 중국공산당은 맑스-레닌주의의 리론적 기초에서 건립되였다는 것을 인식하였다. 따라서 중국공산당의 령도하에 2만 5천리장정을 완성한 위대한 업적도 알게 되였고 모택동, 주덕, 주은래 등 동지들의 백절불굴의 위대한 혁명적 정신과 혁명적 실천도 알게 되였다. 이 강습반은 나를 놓고 말하면 그 수확이 아주 컸는바 당시의 통속적이고 대중적인 언어로 표현한다면 “팔로군의 사상으로 머리를 무장하고 국민당을 철저히 반대하는 사상을 수립”한 듯하였다. 그 때 위원들은 구역을 분담한 후 기층에 내려가 같은 학습방법으로 거듭하여 강습반을 조직하였고 또 그 강습반에서 강습을 받은 지방대표들 역시 기층에 내려가 상술한 방식으로 대중들에게 강습내용을 전수하였다. 이런 선전활동으로 하여 군중들은 공산당과 국민당의 구별점을 비교적 깊이 있게 인식할 수 있었고 오직 공산당만이 중국을 광명의 길로 이끌 수 있다는 도리를 알게 됨으로써 공산당을 따르려는 확고한 마음을 더욱 굳힐 수 있었다. 이 민주대동맹 조직활동은 군중들에게 토지혁명사업의 사상적 기초를 닦아주었다. 팔로군의 토지개혁공작대의 왕두(王斗)가 태양구에 파견되면서 토지개혁공작은 고조를 이루게 되였다. 나는 태양구에서 한동안 전개되였던 민주대동맹활동은 지방정권이 정식으로 수립되기까지 ‘8. 15’해방과 전란으로 어지러워졌던 군중들의 정견을 중국공산당의 주장 쪽으로 기울게 하였고 의식형태교육과 사회치안유지에서도 큰 영향을 끼쳤다고 확신한다. 따라서 민주대동맹에 참가한 것을 지금도 큰 영광으로 느끼군 한다.
312    21세기의 "리시진" 김수철 전(련재 3) 댓글:  조회:94  추천:0  2020-02-01
               3. ‘국민최고학부’를 졸업하니까… 들어가는 말로 일본의 교육제도를 곁들어본다. 일본은 자기들의 식민지로 동북에 ‘만주제국’을 세우고 여러가지 정책으로 ‘만주국민’을 부려먹었다. 그 때 소학교 6년 졸업생은 ‘우급문화국민’, 중학교 3년 졸업생은 ‘고등문화국민’이라 칭했는데 고중 이상부터는 공부길을 어렵게 만들어 대다수의 사람들로 하여금 중학교를 졸업한 후 전업적인 직업에 충실하도록 하였다. 이런 목적과 수단으로 중학교의 명칭을 ‘국민고등학교’라고 명명하였고 국민들이 중학교를 졸업하면 ‘최고학부’를 졸업한 것으로 하여 자부감을 느끼며 더 이상의 학업을 포기하고 전업적인 직업에 일심하도록 하는 것이 일본교육제도에 대한 나의 인식이다. 아래는 송우혜(宋友惠)가 펴낸 ≪윤동주평전≫(열음사 출판, 1988년)에서 일본교육제도에 대해 서술한 것이다. 일본은 명치유신이래 ‘고등학교’란 학제를 만들었다. 인생 전반에 대한 교양의 바탕이 없는 학문추구는 편파적이 될 수밖에 없으니 고등학교에서 교양과목을 이수하여 인격적인 바탕을 만들게 하고 그 우에다 대학의 전문지식을 쌓게 한다는 구상이였다. (≪윤동주평전≫ 152페지) 1897년에 세워진 숭실학교(평양)가 1908년에 대한제국 학부로부터 정식으로 ‘대학’으로 인가를 받고 대학부와 중학부를 갖춘 관서제일의 신교육기관으로 명성이 높았는데도 일제당국은 자기들의 교육제도로 조선인들에게 대학으로 ‘경성제대’ 하나만 두는 정책을 실시하여 ‘숭실대학’을 ‘숭실전문학교’로 격하시켰다. (≪윤동주평전≫ 294페지) 나는 일제 때인 73년전에 국민고등학교를 졸업했다. 그 때 국민고등학교에서는 기본상 보통교육이 아닌 직업기능교육을 실시했다. 내가 처음 다닌 연길국민고등학교도 농학과 축목을 전문으로 가르치는 중학교였는데 1943년에 왕청현을 축목현으로 건설한다며 연길국민고등학교의 축목전공생들을 모두 왕청에 집결시킴으로써 다시 다니게 된 학교가 왕청국민고등학교였다. 이 학교 역시 축목수의과를 전문으로 배우는 중학교였다. 그 때 내가 왕청국민고등학교로 가야 한다니 금방 결혼한 안해도 따라 가겠다며 울며불며했다. 하지만 중학생으로서 장가를 간 것만 해도 남들 앞에서 떳떳하지 못했는데 뻔뻔스럽게 안해까지 데리고 가 학교를 다닌다는 것은 말도 안되였다. 그리하여 처음으로 비밀 아닌 비밀을 세상에 밝히는 것이지만 내가 방학 때마다 집에 돌아가면 우리 부부는 남몰래 부부다툼을 하군 하였다. 1944년말에 내가 왕청국민고등학교를 졸업하게 되자 학교에서는 나를 도문시친화목재주식회사(亲和木材株式会社)의 역축보건지도원으로 배치하였다. 그 때 나의 직접 상급은 키가 작달막하고 아담진 도노이(殿井)라고 부르는 일본인이였는데 그는 나를 직접 그의 회사인 화룡현 팔가자출장소(出张所)에 데리고 가서 그 출장소에 부임시키는 것이였다. 주식은 직원 단체숙사에서 했는데 로동자들의 대우는 노예와 다름이 없는 최하층 대우였다. 때마다 풀기 없고 썩은 냄새가 나는 조밥에 장졸임무우반찬을 먹었으며 랭수로 겨우 갈증을 풀었다. 나는 난생처음 이런 푸대접을 받았다. 그런데 이렇게 스산한 곳마저도 나는 오래 머물 수 없었다. 글쎄 나더러 목재발구를 끌러 가란다. 어디로 어떻게 가야 할지 몰라 물으니 벌목장인 고동하작업터로 가란다. 자체로 이부자리를 준비해야 한다기에 이부자리를 마련하려고 횡도에 있는 집으로 가니 안해는 다른 이부자리는 너무 헐어 내놓기 부끄럽다며 결혼 첫날 이불을 가지고 가란다. 그 때는 팔가자에서 고동하로 가는 교통편이 려객용 소철이였는데 정각운행이 아니였기 때문에 나는 하는 수 없이 석탄검댕이투성인 목재운반용 소철에 앉아 가지 않으면 안되였다. 목적지에 도착한 후에도 비싼 비단이불을 마구 덮는다고 소문이 나는 바람에 나는 산골사람들의 뉴스인물로 되고 말았다. 고동하의 숙박과 식당 환경이 팔가자보다는 좀 났다고는 하지만 역시 거기에서 거기였다. 겨울이 오니 또 벌목시기라며 나를 고동하 상류인 로령(老岭)으로 가란다. 나는 고동하로부터 도보로 가면서 백설에 덮인 침활혼성림(针阔混成林)의 절경을 만긱하였다. 그 때는 21세 청춘이라 미에 대한 감수력이 뛰여났던 것 같다. 활엽수잎은 거의 모두 떨어지고 침엽수잎들만이 백설 속에서 독야청청하며 저 푸른 하늘을 향해 자랑을 떨치니 그 절경에 누구인들 매혹되지 않으랴! 채벌지역의 건물들은 모두 통나무로 지었고 붉게 달아오른 난로 안에서는 탁탁 소리를 내면서 토막나무들이 이글이글 타고 있었다. 하루세끼는 기껏해야 이밥에 마늘장졸임이였다. 피곤한 몸을 지탱하려고 잠자리에 들면 검정색 두루치기 이불이 람루하기로 말이 아니였다. 목재검사원은 왕등거(王登举)라고 부르는 한족이였는데 늘 나와 일어로 대화하면서 나를 허물없이 대해주었다. 이곳의 책임자는 와끼야마라는 일본인이였는데 그는 일본 북해도에서 벌목공으로 일하다가 여기에 와서 벌목기술까지 맡고 있었다. 와끼야마는 산으로 다닐 때 늘 옆구리에 큰 칼을 차고 다녔는데 아무튼 나무의 이름을 모르는 것이 없었다. 나는 그한테서 나무이름을 많이 배웠는데 지금에 와 생각해보면 그 때의 배움이 정말 다행스러웠다. 당시 벌목한 나무운반은 화룡현에서 온 20여명의 소발구군들이 전담하였다. 그런데 그 해에 전염성이 아주 강한 구제역(口蹄疫)이 돌아서 한동안 원목을 운반하지 못했다. 구제역이란 소나 돼지 따위의 동물들이 잘 걸리는, 전염성이 강한 바이러스 병으로서 입의 점막이나 발톱 사이의 피부에 물집이 생기며 체온이 급격하게 상승하고 식욕이 떨어지는 증상을 말한다. 비록 죽는 확률은 높지 않았지만 소들이 이 병에 걸리면 발톱이 빠져 부릴 수 없으므로 벌목운수에 있어서 그 손실이 막대하였다. 팔가자출장소의 역축보건원인 나는 방역과 치료를 담당했기에 약품을 구매하러 조양천으로 자주 다녀야 했다. 한번은 내가 조양천의 숙부가 발진질부사(发疹窒扶斯)에 걸려 치료중인 것을 모르고 숙부네 집에 갔다가 그 병에 감염되기도 했는데 잠복기여서 증상이 나타나지 않았지만 한동안 전염병이 감염된 몸으로 송강출장을 자주 다녀야 했다. 그 때에는 송강을 안도라고 불렀다. 그 때에는 뻐스에 승객이 넘쳐나면 큰 화물트럭으로 대리운송을 하였다. 내가 출장임무를 끝마치고 팔가자출장소로 돌아갈 때 마침 잠복기였던 발진질부사가 발작하여 하루에 2~3번씩 전신경련을 일으켰다. 하루는 아픈 몸으로 겨우 뻐스정거장에 이르니 뻐스에 자리가 없어 트럭을 타지 않으면 안되였다. 송강에서부터 명월구까지는 8시간 걸린다. 비좁은 트럭에 앉아 오다가 세번이나 전신경련을 일으키고 나니 입이 말라 말도 번질 수 없었다. 그래도 죽지 않고 겨우 명월구기차역에 도착하여 기차를 타고 조양천에 이른 후 다시 화룡으로 가는 기차를 갈아타서야 팔가자출장소에 도착할 수 있었다. 기진맥진한 몸으로 겨우 사무실문을 열고 들어간 나는 벽에 기대여선 후 혀가 꼬부라진 말로 이렇게 말하였다. “나는 발진질부사에 걸린 사람이오. 그러니 나한테 접근하지 마오. 빨리 나를 격리시켜야 하오!” 마침 출장소에 몇몇 사람들이 있었기에 다행이였다. 출장소에서는 아다찌라는 일본성을 가진 청년을 나에게 배치하여 그 날 저녁 기차편으로 나를 조양천에 있는 숙부네 집까지 데려다주게 하였다. 그 날(1945년 4월 1일)인즉 바로 조양천 숙부가 운명한 날이여서 아버지, 백부, 둘째아버지를 포함한 많은 친척들이 와있었다. 이런 북새판에 중환자인 나까지 갔으니 온 집안이 수라장이 되였다. 친척들은 나를 옆집에 보내였다. 나는 정신이 나간 사람처럼 헛소리만 치면서 온밤을 뜬눈으로 지새웠다. 1945년 4월 12일 10시경에 대양촌 류신툰에서 한 마차부가 우리를 태우려고 마차를 몰고 왔다. 마차부는 ‘아리랑’이라는 별명을 가진 한족 중년남자였는데 성은 장씨였다. 나는 백부, 둘째아버지, 아버지와 함께 마차를 타고 집으로 가게 되였는데 조양천 북쪽 태동 부근에 이르니 물도랑에서 쏴쏴 흐르는 물소리가 들리는 것이였다. 나는 고생스럽게 앓기보다는 오히려 죽는 것이 더 편하다는 생각으로 이불을 헤치고 물에 뛰여들려고 했다. 하지만 어른들이 이불을 꽁꽁 여며주며 꼼짝달싹도 못하게 하니 죽는 것도 내 마음대로 될 수 없었다. 후에 안 일이지만 나처럼 이 병에 걸린 사람들이 적잖게 물에 빠져 죽었다고 한다. 나는 이불 속에 파묻혀 이런저런 환각에 빠지군 했다. 내 몸이 때론 물이 되고 때론 돌이 되고 때론 흙이 되면서 말이다. 나는 반주검이 된 몸으로 어떻게 집으로 갔는지 기억이 나지도 않는다. 희미한 호롱불이 방구석에서 명멸하듯 사위가 어두워진 방안은 숨 쉬기조차도 너무 힘들었다. 온몸을 동강내여 온 방안에 뿌려놓는듯, 정신이 오락 가락하여 땅바닥에 잦아드는듯 무어라고 형언할 수 없는 환각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때론 전혀 아픈 느낌도 받지 못할 때가 있었다. ‘죽을 때는 아무런 감각도 느끼지 못하는 건가?’ 나는 삼수(氵)변에 혀(舌)를 붙인 살 ‘활(活)’의 뜻을 그 때에야 실감했고 사람이든 동물이든 혀가 젖어있어야 살 수 있음을 알게 되였다. 집에 돌아와 몇몇 의원들의 정성어린 치료로 나는 건강한 몸을 되찾게 되였다. 그리고는 곧바로 송강으로 돌아갔다가 다시 집으로 돌아와 ‘8. 15’해방을 맞이하게 되였다.  
311    인생의 지혜가 담겨있는 이야기들 댓글:  조회:105  추천:0  2020-01-29
어느 날 려행자 다섯 명이 하늘 문 앞에 도착했다. “당신들은 누구요?” 하늘을 지키는 문지기가 려행자들에게 물었다. “나는 종교입니다.” “나는 청춘입니다.” “나는 리해입니다.” “나는 지성입니다.” “나는 지헤입이다,” 이에 하늘의 문지기가 말했다. “각자가 하는 일을 말해 보시오,” 그러자 종교는 무릎을 끌고 기도를 했다. 청춘은 깔깔 웃으며 노래를 불렀다. 리해는 가만히 않아 이야기를 들었다. 지성은 분석해서 견해를 이야기했다.“ 그리고 지혜는 한 편의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이야기 안에는 인생의 지혜가 담겨 있었다.    1, 대왕의 선물이야기   먼 옛날에 성왕으로 소문난 대왕이 백 세를 맞이하게 되었다. 모두가 대왕을 사랑하고 존경했기에 즐거운 마음으로 대왕의 생일례를 성대히 치르기 로 하였다. 생일날 밤. 그 나라와 이웃 나라의 고관대작들이 모두 생일례에 초대 되였는데 초대연의 입구는 선물로 산더미를 쌓았다. 만찬이 한참이던 중 대왕이 신하들에게 선물을 두 그룹으로 나누라며 선물을 보낸 사람들의 이름이 쓰인 선물과 이름이 없는 선물로 가르라고 명했다. 대왕은 후식을 들면서 두 그룹으로 나뉘어져 있는 선물들을 모두 가지고 오도록 명했다. 한쪽에는 크고 값진 선물들이 수백 개가 쌓였고 다른 한쪽에는 초졸한 선물이 몇 개 달랑 있었다. 대왕은 가득 쌓인 선물부터 풀어 보면서 그 선물을 보낸 사람들을 불러오게 했다. 왕은 한 사람씩 왕좌 위로 올라오게 한다음 이렇게 말했다. “선물 고맙네, 하지만 되돌려 주겠네. 나는 이제 자네에게 빚진 게 없네.” 왕은 선물이 뭐가 됐던지 일체 상관하지 않은 채 선물을 원주인에게 모두 되돌려 주었다. 대왕은 “산더미선물”을 모두 처리한 후 다른 선물 쪽으로 가서 이렇게 말했다. “이 선물들에는 보낸 사람의 이름이 없다. 이 선물은 아무 부담도 없으니 받도록 하겠다. 이제 이 나이가 되어 빚지고 싶지는 않다.” * * * 우리 모두가 두루 살아가면서 누구한테서 뭔가를 받을 때가 있게 되는데 그 때마다 본인과 상대방의 마음속에는 그것이 빚으로 남아 있을 수 있다. 만일 그렇게 빚으로 남는다면 아무것도 받지 않는 게 백번 편안 할 것이다. 하지만 당신이 아무것도 바라지 않고도 뭔가를 줄 수 있다면, 그리고 아무런 부담이 없이 내가 받을 수 있다면 절대로 빚진 마음으로 남지는 않을 것이다.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이 아무도 당신에게 빚을 지지 않았기 때문에 모두 당신을 위해 발 벗고 나설 수 있게 된다.  오기활
310    21세기의 "리시진" 김수철 전 (련재 2) 댓글:  조회:187  추천:1  2020-01-22
                                                 2, 배움의 길에서 일곱살에 사당에 다니다 우리 태양촌 횡도마을에 김재원한문서당(金载源汉文书堂)이라는 작은 글방이 있었다. 이 서당은 70여평방메터 되는 초가집 온돌방으로서 15명 정도의 학생들이 책상도 없이 구들에 앉아 글을 배웠다. 김재원 훈장님은 늘 한복차림에 상투를 쪽지고 상투 아래는 망건으로 동였다. 외출할 때에는 두루마기에 갓을 쓰고 고무신이나 삼으로 삼은 초신을 신고 다니셨다. 어느 날, 장가전이였던 숙부가 일곱살 나는 나를 데리고 서당에 갔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그 날은 시험을 치고 성적이 우수한 학생들에게 상으로 백로지를 주는 행사가 있었다. 당시에는 시험을 보는 것을 선생님의 강의를 받는다고 하였다. 교과서는 명필이신 재원선생님이 백로지에 친히 붓으로 써서 만든 였다. 시험내용은 주로 배운 글을 암송하는 것이였는데 평점은 우수(顺通), 급격(通), 락제(不) 세가지로 나누었다. 누가 락제를 맞으면 훈장님이 문푸레나무로 만든 회초리로 그의 종아리를 사정없이 때렸다. 나는 그 날 서당에 붙었다는 리유로 백로지를 한장 받았다. 이것이 내가 출생후 훈장님한테서 처음 받은 영광으로서 어린 마음에도 서당이란 참 좋은 곳이라는 인상을 가지게 되였다. 나의 상급생들은 ≪계몽편(启蒙篇)≫, ≪동몽선습(童蒙先习)≫, ≪통감(通鉴)≫ 등을 배웠다. 그 때 17세 가량 되여보이는 김재관이란 학생이 중국 고대력사교과서인 ≪통감≫을 배웠는데 한번은 배운 과문을 암송하지 못해 종아리를 걷어올리고는 훈장님께 “훈장님, 잘못했습니다. 되게 때려주십시오! 다시는 안 그러겠습니다.”라고 말하며 후회의 눈물을 흘렸다. 훈장님은 그의 반성하는 모습을 보고는 처벌을 면해주었다. 전체 생도(生徒)들은 이 광경을 보고 모두 감격해하였다. 휴식시간은 종을 울리는 것으로 알리였다. 서당 뒤에는 깊이 세메터에 달하는 우물이 있었는데 철따라 달라지는 타래붓꽃들이 아름다운 모습으로 우물가를 장식해주어 어린 생도들의 가슴에 꿈을 심어주었다. 타래붓꽃잎을 입에 물고 빨면 “빼― 빼―” 하는 소리가 났으므로 그 때 이 풀을 ‘뺄꽃풀’이라고도 불렀다. 이 꽃은 잎이 탈리면서 자란다고 하여 타래붓꽃이라고 불리우다가 ≪마란꽃 필 때≫라는 영화가 나오면서부터 마란꽃으로 알려졌다. 90 고개를 넘긴 지금에 와서도 나의 머리 속에는 김재원 훈장님에 대한 기억이 날따라 깊어만 간다. 그이는 나에게 처음으로 책을 안겨주었고 붓글씨를 쓰는 재간을 배워주었으며 군자다운 거룩한 행실을 어떻게 키워야 함을 알려주셨다. 김재원 훈장님은 경상남도에서 오신 학자였으므로 말씨가 경상도의 구수한 사투리였다. 어린 나이였지만 나는 훈장님의 말씨에서 종조의 옛모습을 보는 것 같았다. 그이는 ≪통감≫을 ≪옥편≫ 한장도 번지지 않고 막힘없이 학생들에게 가르치셨다. 훈장님 하면 그가 친필로 쓰신 가 눈앞에 생생하게 떠오른다. 그이는 나의 길고 긴 학습려정에서 첫걸음을 떼주신 잊지 못할 스승이다. 김재원 훈장님은 붓으로 친히 쓴 교과서를 나한테 선물해주셨다. 나는 이 교과서를 시작으로 오늘까지 86년이란 긴 배움의 길을 걸어왔다. 한국지페에 찍힌 인자하신 세종대왕의 모습이 김재원 훈장님의 모습과 너무 비슷한 데서 훈장님이 더욱 그립다. 훈장님이 나에게 주신 교과서는 중국 량나라의 주흥사(周兴嗣)의 저작인 ≪천자문(千字文)≫인데 이 ≪천자문≫은 “天地玄黄, 宇宙洪黄”으로부터 시작된 4언고시(四言古诗)로서 자연과 사회 현상을 아무런 문자중복도 없이 간결하게 개괄한 대단한 명작이다. 주흥사가 하루밤 사이에 이 대작을 쓰느라고 너무 골몰한 데서 검던 머리가 백발이 되였다고 하여 ≪천자문≫을 ≪백수문(白首文)≫이라고도 불렀다. 우리는 ≪천자문≫을 하루에 두줄씩 배웠다. 그 때 우리가 번마다 손가락 끝에 침을 묻혀 책을 번지다보니 책 한쪽 머리가 닳아서 볼모양이 없었다. 그래서 다 배우고 나서는 그 책을 버릴 수밖에 없었다. ≪천자문≫은 지금 배워도 리해하기 어려운 글인데 어린 나이에 배운다는 것은 정말 쉬운 일이 아니였다. 훈장님의 가정생활은 아주 어려웠다. 서당과 약 1,000메터 떨어진 곳에 그의 집이 있었는데 훈장님은 서당의 한쪽 방에서 독수공방을 하였다. 때로는 사모님과 동거하기도 했는데 어린 나도 눈치를 챌 수 있었다. 나는 서당에서 한문공부를 1년 반 정도 하다가 신학사숙(新学私塾=阳兴私塾)이 서자 거기로 전학을 하였다. 열살에 소학교에 입학 일제 때 소학교 교수는 일어로 했다. 열살 때인 1934년에 나는 양흥사숙을 다녔다. 그 때 나의 첫 일어선생님은 김진하(金珍河)선생님이였고 1935년에 중흥사숙(中兴私塾)을 다닐 때에는 리명엽(李明烨)선생님이 가르쳤다. 교수방법이 김진하선생님보다 더 우수하였고 지식면도 넓었으며 그림과 야외스케치까지 배워주었다. 리명엽선생님은 숙제를 특별히 많이 냈는데 그 날에 배운 과문을 25번씩 쓰게 하여 일상생활에서 잘 활용하게끔 강조하였으며 이미 배운 지식들을 철두철미하게 리해하도록 가르쳤다. 그 때 김진하선생님은 년세가 많은 로인으로서 술을 즐겨 마셨고 리명엽선생님은 총각으로서 술담배를 멀리하는 뜻이 있는 유망청년이였다. 그 후 중흥촌(仲兴村)에 정규적인 학교가 서게 되자 중흥사숙이 해산되였다. 하여 리선생님은 다른 고장으로 갔다. 나는 일어회화기초를 김선생님한테서 닦았고 리선생한테서 더 능숙하게 배웠다. 나는 지금까지도 리명엽선생님을 숭배한다. 그는 교육구국(教育救国)의 정신으로 조선인의 출로를 찾아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리선생님은 교실의 한곳에 일어동화집들을 가져다놓고는 과외독서를 장려하였다. 나는 3학년 때에 일문으로 된 ≪서유기≫를 흥미진진하게 읽을 수 있었고 일문으로 된 소년잡지도 읽을 수 있었다. 리명엽선생님은 조선의 뜻있는 청년으로서 교육으로 민족의 출로를 찾아야 한다는 사상으로 1934년에 이곳 북방에 온 유지인사인 듯하였다. 그는 산설고 물 선 이역땅에서 친인도 없이 모든 사랑을 학생들에게 몰부은 교육열정가였다. 나는 지금도 유지청년이였던 리명엽선생님을 숭배하고 있다. 17세에 국민고등학교를 다녔다 1942년—1943년에 나는 연길국민고등학교 1학년—2학년을 다녔다. 그 때 일어를 조선인인 최선생님이 가르쳤다. 최선생님은 당시 고등관(高等官)시험 합격자로서 수준이 높았다. 그 때는 교과서가 없어 강판글을 써서 등사해 교과서로 하였는데 최선생님이 나더러 강판글을 쓰라고 하여(학급에서 나는 필체가 좋았다) 나는 학급의 등사판 교과서를 전담하였다. 3학년—4학년에는 왕청국민고등학교에 이관되여 왕청에 가서 축산수의과(畜产兽医科) 공부를 하였다. 그 때도 나는 일어교과서를 강판글로 써서 사용하였다. 이러한 리유 때문에서인지 나의 일본어성적은 비교적 좋았다.  일어공부 나는 해방전에 소학교부터 국민고등학교까지 일어로 교수를 받은 외에 해방후에 연변대학 농업학과 1학년을 다닐 때에도 일본인선생님한테서 일어로 화학교수를 받았다. 그리하여 나의 일어수준은 일본의 교수들마저도 “김수철 교수는 일어수준만으로도 교수자격이 당당하다.”고 말할 정도이다.  로어공부 내가 로어공부를 시작한 것은 외조부의 지도를 받으면서부터였다. 외조부는 젊어서 공부를 많이 하여 매우 유식하셨다. 무남8녀를 두었던 외조부는 아들이 없는 것으로 하여 속이 상해 늘 술과 친구하며 류랑생활을 하셨다. 그 때 오죽했으면 사람들이 외조부를 공부를 너무 많이 해서 정신병에 걸렸다고까지 말했겠는가! 외조부는 외손군들이 보고 싶으면 우리 집에 오셨는데 나를 만나 처음 하시는 일이 나의 학습통신부를 보는 것이였다. 외조부는 나의 학습성적을 보고는 대단히 기뻐하며 “을록(乙录, 애명)이가 또 우등을 했구나! 정말 장하다! 꼭 훌륭한 사람이 될 것이다!”라고 말씀하셨다. 외조부는 나에게 로어단어를 잘 가르쳐주셨다. 로어수준의 여하를 막론하고 어쨌든 나의 로어공부의 첫걸음은 외조부가 떼주신 것이였다. 후일에도 외조부는 나의 로어공부의 지지자였고 감독자였다. 나는 연변대학 농업전과 수의축산전업 1학년 때에도 로어공부를 하였다. 해방후에도 처음엔 류경룡선생님의 사모님인 리나선생님한테서 배웠고 하학기부터는 백계로인인 다위 또브로선생님한테서 배웠다. 당시 나는 매부네 집에 류숙했는데 여름이면 새벽 세시 반에 일어나 연길공원다리 부근의 강기슭에서 로어교과서를 랑독하였다. 소리를 내여 읽을 때면 곁에 사람이 있고 없고를 관계치 않았다. 이런 학습방법으로 나는 교과서의 모든 내용들을 암송하였다. 일년간 이렇게 열심히 노력하였더니 그 때 매부의 집으로 옷을 사러 오는 쏘련홍군들과도 능히 대화를 나눌 수 있을 정도였다. 1950년대는 중국에서 한창 ‘쏘련을 따라배우’는 시기였다. 1953년 겨울방학에 농학원에서 로어수준이 상당한 일본교사 오바라겐지를 모시고 50일간의 교사들을 대상으로 한 로어학습반을 조직하였다. 그 학습반에 나도 참가하였다. 로어학습반이 끝난 후 연변대학 림민호(林民镐) 교장이 시험관을 파견하여 25명 교사들의 로어실력검정시험을 엄하게 진행하였다. 그 때 25명 교사들중에서 단 두명인 나와 김병진선생만이 합격되여 교내에서 큰 화제로 되였다. 그로부터 나는 학교에서 달마다 5원씩 발급하는 로어수당금을 받아 가난한 집살림에 보태군 하였다. 당시에 나는 교수를 할 때면 늘 쏘련참고서를 리용하였다. 그리하여 중국내의 문헌에도 없는 ‘가시상추(Lactuca seriola Torner)’란 식물을 채집하고 이 식물이 동북에서 처음 발견되였음을 ≪연변농학원학보≫에 발표하였다. ≪쏘련식물지(苏联植物志)≫는 나의 식물연구에서 아주 중요한 길잡이로 되였다.  영어공부 1) 연길국민고등학교를 다닐 때인 1941년에 영어교과서 한권을 공부하였다. 2) ‘문화대혁명’ 때 연변농학원 농학과에서 조직한 교사단기영어강습반에 참가하였다. 3) ‘문화대혁명’ 때 농학과의 7명 교사들이 룡정에서 룡정3중의 영어교원을 초청하여 10여일간 영어강연을 수강하게 되였는데 나도 참가하였다. 4) 식물채집을 하는 과정에서 계획적으로 여러가지 형식의 영어공부를 견지하였다. 5) 영문필기장을 준비하고 필기련습을 부지런히 하였다. 이는 내가 식물학명(学名)을 배우며 필기하는 데 아주 큰 도움을 주었다. 6) 1980년부터 록음기로 영어 발음, 회화를 열심히 공부했다. 7) VCD와 텔레비죤화면으로 영어학습을 견지하였다. 8) 평소의 영어학습(력사기초, 공구서적 준비 및 재정돈, ≪中医学≫ 영문서적, ≪中医学汉英对译本≫, ≪중영사전≫, ≪영한중사전≫ 등)을 바탕으로 울며 겨자 먹기로 겨우 영문론문을 쓰기 시작했는데 2002년부터는 국제심포지엄에서 세편의 영문론문을 발표하였다. 총적으로 나의 외국어수준은 일어는 ‘通’이고 로어는 문헌을 볼 수 있는 정도이며 영어는 론문을 발표할 수 있는 정도이다. 라틴어는 식물명을 떠올리면 우선 라틴어로 그 명칭이 떠오르고 사전과 씨름하면서 식물의 새 종류 쯤을 발표할 수 있는 정도이다. 나에게 있어 외국어공부의 노하우라면 “길을 걸으면서 읽고 암송하는 ‘길공부’를 부지런히 견지하는 것”이다. 나는 혼자서 다니기를 즐긴다. 부득이한 경우 누구와 같이 가더라도 먼 목적지까지는 동행을 하지 않는다. 리유라면 ‘길공부’를 하는 데 동행자가 있으면 지장이 되기 때문이였다. 한국의 법정스님도 홀로 있기를 즐기였다. 도가들이 도를 닦는 산중수양도 아마 보제수나무 아래서 고행을 하면서 홀로 도를 닦는 것일 것이다. ‘길공부’ 역시 조용해야 한다. 나는 늘 혼자서 길을 걸을 때 외국어단어카드를 입으로 중얼거리며 암송하는 ‘미친 사람’이다. 조용한 곳에서는 소리를 내여 읽고 사람이 많은 곳에서는 묵독을 한다. 길을 걸으면서 공부를 하면 정신집중이 정말 잘된다. 나는 로어, 영어, 라틴어 공부를 길을 걸으면서 견지해왔다. 길은 나의 학교이다. 특히 식물채집은 많은 시간을 길에서 보내야 하는데 이런 시간을 나는 외국어공부를 하는 데 돌리였다. 내가 길에서 얻은 공짜배기 외국어학습시간은 “티끌 모아 태산”이라고 한입으로 말할 수 없이 많다. 내가 평생 해온 ‘길공부’는 등록금도 없고 학비도 없는 “꿩 먹고 알 먹기”식의 공부로서 부지런하다면 누구나 다할 수 있는 것이다.
309    21세기의 “리시진” 김수철 전(련재 1) 댓글:  조회:208  추천:0  2020-01-16
21세기의 “리시진” 김수철 전(련재) 오기활 저 인생은 한권의 책입니다. 당신의 이름이 책제목입니다. 당신의 가슴이 먹이고 당신의 걸음이 종이며 당신의 발이 연필이고 당신의 하루가 페지입니다. 페지는 당신의 시도, 노력, 즐거움 그리고 성취에 대한 매일을 기록합니다. 인간사랑, 자연사랑을 바탕으로 쓴 ‘김수철’의 비범한 인생사에는 그가 “세상에 태여난 리유와 목적이 가슴 뛰는 일을 하고 가슴 뛰는 삶을 사는 것이다.” 라고 기록되였습니다. 차 례 머리말 / 1 나는 하늘의 속셈을 진작 알았다 / 7 추천사: 가슴을 뛰게 하는 한권의 책 / 9 부언: 책의 저자에 관하여 / 14 제1부 가슴 뛰는 효사랑 제1장 고성김씨를 말한다 / 19 1. 고성군 / 19 2. 고성김씨 창세기(创世记) / 20 3. 고성김씨의 원류 및 그의 소종파(小宗派) / 22 4. 고성김씨 명천파 시조 김경현 / 25 5. “왕릉에 고합니다!” / 26 6. 연변고성김씨족보 발간사(发刊词) / 30 7. 연변고성김씨종친회 / 33 제2장 못 말리는 ‘갓바위집’이야기 / 37 1. ‘갓바위집’ / 37 2. ‘갓바위집’에서 울리는 400년 숨소리 / 40 3. “최씨네 과부를 어디에 숨겼소?” / 43 4. ‘갓바위집’ 팔주(八柱) / 46 5. 600리 길을 걸어서 찾은 삶터 / 49 6. 아버지의 ‘선견지명(先见之明)’ / 53 7. ‘갓바위집’ 계자 / 56 8. 신랑은 , 신부는 / 58 9. ‘지(池)진사댁 셋째사위’ / 64 10. ‘갓바위집’의 ‘경영학박사’ 리영숙 / 68 12. 증조부 탄신 137주년 기념회 / 70 제2부 가슴 뛰는 일 가슴 뛰는 삶 1. 배움의 길에서 / 75 2. 저주로운 성분‘딱지’ / 84 3. ‘민주대동맹(民主大同盟)’ 청년위원으로 / 86 4. ‘국민최고학부’를 졸업하니까… / 88 5. 나의 첫 교직생활 / 94 6. 의학과 맺은 인연 / 98 7. 식물이야기 / 102 8. 버섯이야기 / 114 9. 비 내리는 야밤에 도적으로 몰려 / 118 10. 송림 속에서 무명렬사를 만나다 / 121 11. “후날에 봅시다!” / 126 12. 장백산표 ‘특효감기약’ / 128 13. 후반전에 ‘멋진 꼴!’을 / 130 14. 박사연구생 반욱(槃旭)이와 함께 / 134 15. 못 잊을 기생 / 141 16. “당신은 길림성에서 식물표본동정의 제1인자요!” / 144 17. 숙제가 아닌 숙제로 / 147 18. 나, 일본학자 그리고 일본행 / 153 19. 93세에 동년을 회억하다 / 165 20. “나의 노력과 힘의 15%를 회보합니다.” / 168 21. “아니, 오늘이 생시요 꿈이요!?” / 170 22. ‘3인방’의 핍박으로 량산에 오르다 / 179 23. 명리를 위한 소작(小作)이 아닌 인생철학 대작(大作)으로 / 182 24. 잠자는 공주 / 185 후기 / 191 부 록 부록 1: 1. 감동의 스승 김수철 교수님 / 199 2. 김수철 년보(친필) / 203 부록 2: 신문, 잡지로 읽는 김수철 숨소리 1. 자연의 대문을 열어가는 사람 / 214 2. 경영인을 찾으라 / 231 3. 조선족 ‘리시진’은 125살은 산다고 / 235 4. 그 날, 또 다른 젊음을 보다 / 241 5. 얼굴이 뜨거워졌다 / 244 6. “한족이 해야 할 일을 조선족이 하니 영광이지요.” / 246 7. 불로송 / 251 8. 90대 고령의 ‘구멍난 양말’ 례찬 / 257 9. 래일을 생의 마지막 날로 삼고 / 260 부록 3: 연변농학분야의 반짝이는 별 —— 전임 연변대학 농학부 김수철 교수에 대한 이야기 / 262 제 2 부 가슴 뛰는 일 가슴 뛰는 삶 (제 2, 3부를 련재합니다) 1 , 600리 길을 걸어서 찾은 삶터 연길서역(西站)에서 동북방향으로 약 5리 쯤 가면 백석구(白石沟) 4대 마을이 있다. 백석구는 동서로 뻗은 골짜기의 북쪽에 자리한 마을이다. 수양버들이 늘어선 우물가에서 아낙네들이 청자가 누군지를 따질 새도 없이 너도나도 화자(话者)가 되여 손시늉을 하면서 마을 안팎의 일들을 늘어놓던 그 옛날의 고향모습이 어제 일 마냥 생생하다. 이 마을은 지난 세기 초에 조선족들이 모여서 오순도순 살면서 개척한 마을로서 이름을 백석두구(白石头沟)라고 불렀다. 백석구는 우리 할아버지가 두만강을 건너 중국땅에 온 후 보따리를 풀어놓은 첫 고장이기도 하고 또 할아버지가 연변땅에 올 때 조선 함경도 명천에서 고성김씨 시조인 친부(亲父)의 유골을 등에 지고 와서 이장(移葬)한 곳이기도 하다. 1903년 6월, 할아버지는 32세 젊은 나이에 부인 강릉최씨(35세)를 잃고 독신으로 되였다. 게다가 1905년 10월에는 하늘처럼 믿고 의지하던 아버지가 55세의 나이로 별세하고 동생인 김병도(金秉涛, 23세)까지 돈벌이를 간다며 로씨야로 가버렸다. 이런 불운 속에서 살아가던 할아버지는 다행히도 상처(丧妻)를 한 이듬해(1906)에 친구들의 도움으로 청상과부인 리순애(23세)를 후처로 맞아들이고 또 그 이듬해에는 딸 김증봉(金曾凤)을 보기까지 하였다. 1904년에 로일전쟁의 승리로 득세를 하게 된 일본은 단숨에 조선을 먹어버릴 생각으로 강박적으로 한일의정서(韩日议定书)를 체결하고 보호국이라는 이름으로 조선의 식민지화를 촉진하였다. 일제의 정치적 압박과 경제적 착취, 그리고 해마다 이어지는 흉년으로 하여 조선땅에는 굶어죽는 사람들이 늘어만 갔다. 이 때 한발 먼저 동북지역 연변땅으로 이주한 고성김씨 명천파들은 할아버지에게 그냥 한 고장에서만 살지 말고 연변땅에 이주해오라고, 연변에 오면 먹을 것은 문제가 없다고 말하였다. 그 때 할아버지는 어린 식솔들을 데리고 600리 길을 걸어 연변땅으로 가려면 적어도 20일은 걸려야 하니 어떻게 갈 것인가를 밤을 지새우며 고민하였다. ‘아무렴, 그냥 여기에 있다가는 일본놈들의 총칼에 맞아 죽거나 굶어서 죽을 판인데 가는 길에 죽더라도 살길을 찾아 연변땅으로 떠나자…’ 37세의 나이에 이런 비장한 결심을 내린 할아버지는 1909년 음력 7월초의 어느 날 친부인 김규언(金奎彦)의 묘를 파헤쳐 유골을 파내여 등에 지고 다른 간단한 짐은 당나귀의 등에 실은 후 일행 10명을 이끌고 조선 함경북도 명천에서 연변을 향해 떠나는 고행난행을 시작하였다. 그 때 일행으로 할아버지의 어머니, 후처인 리순애(28세), 장남인 김룡천(金龙川, 20세), 차남인 김창옥(金畅玉, 15세), 3남인 김창구(金畅九, 13세, 나의 아버지), 녀동생인 김련옥(金莲玉, 9세), 장녀인 김증봉(金曾凤, 3세), 동생인 김병완(金秉浣, 19세), 제수인 리분녀(李粉女, 15세)였다. 할아버지는 주린 배를 안고 가도가도 끝이 없는 고행길을 시작하였다. 눈물범벅이 된 어린 자식들의 손목을 잡고 ‘략탈혼’의 징벌로 병신이 된 다리를 끌면서 험난한 무산령을 넘고 두만강을 건너 산적들이 행패를 부리는 오랑캐령을 무릎걸음으로 겨우 넘어서야 조양천 백석 4대에 이르러 짐을 풀 수 있었다. 70여년전 이 마을에는 20여호 농가들이 동서향 골짜기를 따라 집을 짓고 조, 옥수수, 콩, 수수 농사를 하면서 상대적으로 편안하고 즐거운 생활을 할 수 있었다. 천수해(川水海, 조양천) 동북쪽 산골인 백석구에는 10여호의 친척들이 살고 있었다. 그들은 고대했다며 반갑게 맞아주었을 뿐만 아니라 서로부둥켜안고 울음보를 터뜨렸다. “여기에는 친척들이 많으니까 잠자리도 먹을 것도 근심할 필요가 없단다.” “여기서는 노력한 만큼 소득을 얻을 수 있으니 부지런히 일만 한다면 얼마든지 잘살 수 있어.” “해진 옷을 벗고 우리가 주는 옷을 바꿔입어.” “우리를 믿고 여기까지 왔으니 새 환경에 적응될 때까지 우리가 도울 테니 아무 근심걱정을 안해도 돼.” “배고프다고 너무 급하게 많이 먹으면 오히려 탈이 날 수 있으니 천천히 먹어.” “…” “…” 말과 같이 피는 물보다 짙었다. 친척들의 진심어린 한마디 한마디가 할아버지를 비롯한 모든 가족들에게 큰 힘이 되였고 큰 위안이 되였다. 할아버지는 동생과 자식들을 이끌고 괭이로 나무뿌리를 파내면서 묵밭을 일구었고 또 밭머리에 토굴을 지은 후 할머니와 함께 둘이서 지냈다. 기타 식솔들은 친척집에 얹혀살면서 한동안을 지내지 않으면 안되였다. 2년후 온전한 토굴집을 짓게 된 할아버지는 식구들과 함께 한집에서 오손도손 살 수 있게 되여 얼마나 기뻤는지 모른다. 지금 백석구에 남아있는 선조들의 생활의 흔적들을 살펴보면 정말 아름답고 다감하다. 벌거숭이던 백석구 마을 동쪽 골짜기에 춘하추동 사계절 푸른 옷을 입고 서있는 락락장송은 아버지 년대의 조상들의 산소 주위에 심어놓은 솔들이 씨를 떨구어 자라난 것이다.
308    [수기 30] 가장 뜻 깊었던 신변의 영웅 취재 댓글:  조회:218  추천:0  2020-01-14
“인생 칠십고래희”라더니 어느덧 내가 73살 나이를 먹었다. 그러니 내가 하늘나라에 계시는 량 부모의 합한 나이(어머니32, 아버지40)보다 1년을 더 살았으니 이만하면 나의 명운이 좋은 셈이다고 하겠다. 지난 인생년륜을 손꼽아보면 농민으로 9 년, 당정기관에서 11년, 《연변일보》기자로 22년, 정년퇴직후 《길림신문》특별 기고인으로 있으니 나의 천직이 기자인셈이다. 지금까지 기자생활을 돌이켜보면 가장 뜻깊은 취재가 1986년부터 30년을 이어온 신변의 ‘라성교’ 고만길에 대한 취재이고 가장 뿌듯했던 취재가 1990년 제11차 아시아경기대회(북경)취재이며 가장 벅차게 일했던 시기가 ‘백성의 신문’으로 ‘연변25시’(《길림신문》부간)을 꾸리던 3년이다. 오늘 30년을 이어온 고만길 취재길을 반추해본다. 첫번째 취재 1986년 12월 24일 오후 2시 30분 경, 도문시교통국 도로관리단의 20여명 양로공들이 현지 시공원 고만길(34살, 조선족)의 인솔하에 도문-훈춘 도로 ‘K+700m’구간의 길닦이공사를 막날로 마무리를 할 때 북강 남쪽강변에서 몇몇 어린애들이 도문 북강물에 개구리가 있다면서 아직 채 얼어붙지 않은 강물옆 얼음판에 엎드려 물밑을 살펴보다가 림철섭(6살), 리동환(7살)이 그만 강물에 빠졌다. 마침 이 정경을 지켜보던 양로공들이 “아이가 물에 빠졌소!”라며 급한 소리를 지르고 있을 때 만길이는 아무런 주저도 없이 입었던 등산복을 벗어 팽개치고 맹호같이 강변으로 달려가더니 긴 목이 달린 솜신을 신고 장갑을 낀 채로 사품치는 강물 속에 뛰여들어 60여메터나 떠내려 간 철섭이를 구하고 거꾸로 들어서 물을 토하게 한 후 철섭이를 업고 가파롭기로 65도가 넘는 높은 강뚝을 톱아올라 1,000메터도 더 되는 도문시방송국 종업원주택구의 어느 집에 철섭이를 맡기고 다시 강변으로 달려왔다. 다행히도 구원된 동환이를 업고 철섭이를 맡긴 집에 눕혀놓았다. 애들이 정신을 차리자 그는 슬그머니 자리를 떴다.   1987년 2월 고만길 취재를 마치고 도문 북강 현장에서 물에 빠진 애들과 함께 기념사진을 남겼다(뒤줄 좌로부터 고만길, 필자, 양로단 당지부서기 박봉구).   그날 저녁 동네 사람들이 위문하러 만길이네 집을 찾아와서야 그의 안해가 알게 되였다. 이 소식을 접한 나는 도문시당위 오명일 부서기를 만나 상황을 소개하고 고만길을 도문의 살아있는 ‘라성교’로 도문시 정신문명건설의 훌륭한 본보기로 수립하기로 했다. 1987년 1월 3일부터 나는 근 40여 일 동안 고만길의 부모, 형제, 고만길이네 동네 분, 학교동창, 고만길이 하향했던 촌, 그가 일하는 공사현장과 부근 마을, 고만길의 도움으로 사경에서 벗어난 사람들, 고만길의 도움을 받은 사람들과 기타 많은 목격자 등 120여명을 찾았으며 좌담회도 조직했다. 석자두께의 얼음이 하루저녁에 언 것이 아니였다. 지난 15년간 고만길은 사경에 처한 사람을 5명이나 구했고 만난 사람들마다 고만길을 ‘걱정도감’, ‘의무리발사’, ‘수리공’이라며 무슨 일에서나 한몫 하는 사람이라고 한다. “고만길은 남을 위해 태여난 사람같다”며 감동을 먹었고 그는 선후 5차례 본 단위와 도문시교통국의 선진생산자로 평선되였다. 나는 고만길의 감동적인 사적을 제때에 도문시당위에 회보했다. 1987년 3월 10일, 도문시 당위와 정부에서는 전 시 문명건설 동원대회를 열고 고만길에게 ‘자기를 잊고 남을 구원한 훌륭한 로동자’라는 칭호를 수여하고 그에게 1등공을 기입했다. 1987년 3월 13일 《연변일보》(조, 한문)는 고만길의 사적을 〈생사를 가늠하는 천평우에서〉라는 제목으로 장편통신을 발표하였다. 그 뒤를 이어 1987년 8월 7일 연변조선족자치주 당위와 정부에서는 대회를 열고 고만길에게‘자기를 잊고 남을 구원한 훌륭한 로동자’라는 칭호를 수여했고 1988년 5월 28일에 길림성교통청에서는 도문에서 전 성 교통계통표창대회를 열고 고만길에게 ‘뢰봉학습 우수로동자’라는 칭호를 수여하였다. 하여 지난 세기 80, 90 년대에 전 사회적으로 뢰봉학습 운동과 함께 고만길을 따라배우는 열조가 일어났다. 1988년 2월 14일 도문시인민정부에서는 전 시 년말 사업총화대회에서 나에게 공을 기입, 표창했고 아울러 《연변일보》 사상 처음으로 기자가 지방정부의 표창을 받은 소식을 1면에 발표하였다. 두번째 취재 2012년 2월 29일, 나는 모주석이 ‘뢰봉을 따라배우자’고 호소한 49주년, ‘뢰봉학습 우수로동자’고만길을 따라배우는 학습열조를 일으킨 25주년을 기념하여 두번째로 고만길을 취재하였다. 그런데 내가 여러 곳을 수소문하여 겨우 찾은 고만길은 뜻밖에도 뇌출혈로 대수술을 받고 병마에 시달리고 있었다. 언어장애로 겨우 말을 이었는데 2011년 5월 12일, 왕청-라자구간 도로건설 시공현장에서 갑자기 급성 뇌출혈로 쓰러져 왕청현병원에 호송되였다. 그 후유증으로 오른쪽 팔다리가 마비되고 언어장애가 왔다. 고만길은 지난 80년대에 조직의 배치로 연변교통학교에서 3년간의 학업을 마치고 돌아오니 도문시건설국 시정관리처 기술자로 있었다. 그런데 단위가 경영불황으로 몇년간 로임조차 주지 못하다 결국 파산된데서 고만길은 58 세에 연변교통관리소의 림시 기술원으로 초빙되여 밥벌이를 하는 신세가 되였다. 고만길은 자기네 생활이 궁핍한데도 “자기네보다 더 가난한 사람들이 많다”며 기초생활보조를 신청하지 않아 녀동생이 보다 못해 최근에야 신청했다 한다. “지금 큰병에 걸리고보니 당년에 그 많은 좋은 일을 한 것이 후회되지 않는가?”는 기자의 물음에 고만길은 “아무런 후회도 없습니다. 죽는 사람을 보고 누가 살리려고 하지 않겠습니까?”고 했다. 고만길의 안해에 따르면 수술후 고만길은 몸을 좀 움직일 수 있게 되자 병원복도층계의 손잡이에 의지하며 하루에도 몇번씩 1층부터 12층까지 오르내리며 재활치료를 견지하였다. 그리고 화장실이 불편하여 시내 아빠트를 세집을 맡을 때도 신체단련을 위한다며 4층을 선택했다고 한다. 고만길은 강철같은 의지로 “나는 병마를 꼭 이겨낼 것입니다.”며 몇번 반복해서 말했다. 취재후 필자는 고만길의 현황을 시당위 해당 부문 책임자에게 회보하고 시당위와 정부에서 수립한 도문의 산 ‘뢰봉’을 방문할 것을 건의하였다.(알아본데 의하면 방문을 조직하지 않았다) 세번째 취재 2012년 3월 31일은 해외로 진출한 고만길의 아들(고청남)의 결혼식 날이다. 필자는 이를 계기로 또 한번 고만길 가정과 고만길이 구원한 림철섭의 어머니를 취재하였다. 생각밖으로 25년전에 고만길의 사적을 제공했던 장정구씨를 만났다. 장정구는 “만길이가 남을 돕는 ‘병’은 못 고칩니다. 2년전에 만길이 친구의 병문안으로 병원에 갔다가 내 동생이 덮개 없는 하수도 구멍에 빠져 척추며 턱이며 골절되여 병원치료를 받는 것을 보고 ‘반드시 확실한 사고분석을 해야 한다’며 주동적으로 나서서 당사자가 제공한 선색에 따라 며칠 동안 조사를 하더니 그 덮개 없는 하수구가 도문시 모 회사의 하수구라는 것을 확인하고 회사를 찾아다니며 수차나 교섭한 끝에 회사에서 책임을 지고 수만원을 배상했습니다. 우리는 하수구에 빠진 것이 본인의 탓이라고 생각했는데 만길의 덕분으로 동생이 경제적인 보상을 받게 되었습니다.”고 했다. 고만길의 아들 고청남은 “당과 정부에서 우리 아버지에게 큰 영예를 주어 우리도 영광스럽습니다. 아버지는 늘 국가의 유용한 인재가 되여 가치 있게 살아야 한다고 당부합니다. 사경에 처한 사람을 구원하는 것은 응당한 일입니다. 나도 그런 환경에 띄우면 선뜻이 나설 것입니다.”고 했다. 림철섭의 어머니 류영희는 “그날 철섭이가 물에 빠졌다는 소식을 듣고 너무 놀라 임신 수개월 된 애를 잃었습니다. 철섭이가 사고를 당한 후 아이하나만 키우는 것이 불안하여 둘째로 딸을 낳았는데 벌써 23살입니다. 고만길의 덕분에 우리는 아들 살리고 딸까지 얻었으니 그를 잊을 수 없습니다.” 고 했다. 네번째 취재 2016년 6월 25일, 도문시 천남화장터 유체고별식에서 고만길(1954,2,2.ㅡ 2016.6.21)의 추도식이 있었다. 이날 고만길이 하향했던 도문시 석현진 송림촌의 촌주임과 당년의 집체호 정치호장 허송철이 소식을 듣고 고인을 추모했다. 조문객들이 줄을 이었고 이들의 비통과 함께 비까지 내렸다. “..고만길동지는사망전까지 부인에게 위탁하여 당비를 제때에 납부한 훌륭한 당원입니다.....고인의 죽음에 하늘도 눈물을 흘립니다.” 도문시 향상가 부유사회구역 당사업 책임자의 추도문중의 한구절이다. 림철섭의 어머니(류영희)에 따르면 림철섭은 대련민족학원을 졸업하고 일본에서 연구생공부를 마친 후 지금 일본 모 회사의 영업경리로 있습다. 철섭이는  고만길을 잊지 않으려고 1986년 12월 24일의 1224를 핸드폰번호 꼬리수로 선택했다. 지나온 30년간 고만길취재는 그가 자기가 한 일을 말을 내지 않기 때문에 그야말로 힘든 취재였고 감동적인 취재였다.  30년간의 취재에서 그가 자기로 자기의 사적을 말한 시간이 모두어 보면 기껏해야 한 시간이 푼한 정도로 기억에 남는다. 장정구씨의 말이다. ㅡ   만길이는 조만에 자기가 한 일을 말하지 않습다 1971년에 그가 오공5대 저수지에 물에 빠진 동렬이(간질병환자)를 구해내고서 만길이가 다른 아이들에게 하는 말이 이 일을 알면 아이들이 동렬이를 놀려줄 것이니 누구도 말을 내지 말라고 당부를 한데서 동렬이가 죽은후인 15년만에 그 일이 공개되였습다...   고만길취재는 필자에게는 영웅을 따라 배우는 과당이였다. 부언으로 필자는 각급 당과 정부에서 당년에 수립한 영웅(모범)인물에 대한 경상적인 중시와 관심은 당과 정부에서 초심을 잊지않고 사명을 명기하는 중요한 내용임을 밝힌다. 필자는 고인의 명복을 빌고 또 빈다.   / 오기활                                                        [ 길림신문 ]  2020-01-09              
“문자기록은 인류를 망각에서 구출하는 유일한 방도이다”(김수철전 7)     편자후기 김수철교수는 연변대학농학원의 1기생이고 필자는 지난 70년대 김수철교수의 제자이다. 필자는 스승님의 명성이 높음을 한국에서 알았다.. 1999년에 필자는 “세계자연농업전도사” (사단법인) 한국자연농업협회 회장 조한규박사가 실시하는 제113기 자연농업기본연찬과정을7일간 이수하였다. 하루는 조박사가 필자를 데리고 서점에 가더니 “原色白頭山資源植物”이란 두터운 화책을 사더니 나한테 선무로 주었다. “이 비싼 책을 받으려니(책값 5만4000원,한화)과분합니다” 는 필자의 말에 조박사는 “어디가나 책값이 비싸다는 말은 하지 마세요. 이 책은 한국과 중국의 식물전문가들이 2년 동안 백두산유용자원식물을 탐사하고 농학, 식물학, 약학, 림상학, 축산학연구의 지침서로 세상에서 처음 보는 보귀한 책입니다.”며 이 책은 연변농학원 김수철교수님이 주필하였다고 하였다. 이에 필자가 김수철교수님의 제자라고 소개하니 “오선생이 훌륭한 스승을 만나 얼마나 행복한가”며 부러워 하였다. 2011년3월28일, 필자는 독자들의 질문에 답하고저 룡정시 조양천진 삼성촌에 게시는 김수철(87세)교수님을 방문하였는데 37년 만에 만난 스승님의 신체가 의심할 정도로 건강하셨다. 그래서 수인사로 건강비결을 물었더니 “나는 길옆의 풀을 먹으면서 지금까지 병원을 모르고 건강하게 삽니다”고 하였다. 그후부터 필자는 가끔씩 스승님을 만났는데 번마다 싱싱한 신문소재가 있었다. 어느 하루 김교수의 신문기사를 읽던 부인이 나에게 “이렇게 대단한 분을 그의 생전에 책으로 쓰라”는 건의했다. 부인의 건의에서 령감(灵感)을 얻은 필자는 일부러 스승님을 찾아가서 스승님의 자서전을 쓰겠다는 의향을 밝혔더니 교수님이 “감사는 한데 김수철이란 평민에게 무슨 남들에게 읽혀질 글거리가 있겠소이까…”며 보기좋은 웃음으로 거절하였다. 그러나 필자는 포기하지 않고 필자의 독자팬인 연변농업과학연구소 서규철연구원(87), 황영수(87) 등 농학원원로들의 적극적인 배합으로 끝내 스승님으로부터 “핍박에 못 이겨 량산에 오른다“는 답복을 받아냈다. 2016년 10월 5일, 필자는 언녕 준비했던 40여가지 취재 질문제강을 스승님께 드린 뒤를 이어 2017년 5월초에 봄에 일찍 꽃을 피우는 식물조사로 훈춘을 단다는  교수님을 이틀간을 동행하였다. 그사이 필자가 제일 놀랍고도 감동된 것은 90대 고령인 스승님이 “오기자가 낸 ‘숙제’를  내가 제때에 필답으로 완성하겠다”는 약속이였다. 2016년 11월 30일에 필자는 약속대로 무게가 9근이나 되는 스승님의 “숙제책”을 받아 가지고 12월4일에 일본에 왔다. 스승님의“숙제책”은 페지마다에  자연과 인간에 대한 그의 무한한 사랑, 조상과 민족에 대한 효와 충성이 슴배여 있었고 평생을 현역으로 식물연구와 집필에 열과 성을 다하는 스승님의 위상이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는듯 하였다. 스승님은 대자연이 낳은 김수철이고 백두산이 배육한 김수철이며 대자연을 거울로 자신을 비추며 평생을 대자연에 보답하는 백두대간의 불로송이였다. 필자는 스승님의 “숙제책”에서  스승님이 세상에 태여난 리유와 목적이 “가슴이 뛰는 일을 하고 가슴이 뛰는 삶”을 살기 위함임을 일목료연하였다. 스승님은 “이미 출판한 “길림성식물명록”에 빠진 것이 많아서 내가 보충해야 한다”며 자기가 평생 수집한 25000여 종의 식물표본에서 2300종을 선택하여 도문병무(圖文幷茂)한 “길림성식물도감”을 출판하고저 식물사진을 보충하고저 90고령에 혼자몸으로 3년간 내몽골까지 다니며 고군작전을 하였다. 스승님은 식물학연구에서 국가급수상자, 길림성로동모범, 연변주우수당원으로 손색이 없는 명불허전의 동아급식물학자의 본보기였다. 그러기에 연변대학의 모책임자는  “연변대학당안관에 ‘김수철인물관’을 세우겠다”고 밝혔다. 필자는 이렇게 예상치 못한 비범한 인물의 자서전을 쓴다는 것으로 긴장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게다가 스승님이 “자서전이 나 개인의 명리를 위한 소작이 아닌, 인생철학의 대작으로 쓰라”는 부탁에 진정 망설이게 되였다. 한동안의 추고 끝에 필자는 “피할 수가 없으면 즐긴다” , “가장 어려운 일을 가장 값진 일로 한다”는 긍정적인 사로(思路)로 대담히 필을 들었다 … 필자는 자서전의 편집원칙을 두가지로 정하였다.   첫째, 90대인 김교수가  60대건뇌(健腦)로 완성한 “숙제”의 내용과 편폭을 거의 모두 올린다. 둘째, 교수님의 서화술(書畵術)을 독자들과 함께 공감하고저 90대 고령에 그린 교수님의 자화상, 삽화, 간력을  原圖와 親筆로 올린다. 선현(先賢)들은 한 사람의 고하평가의 기준을 “身, 言, 判, 書””4”자로 하였다. 이 기준에 비춰 보면 스승님은 조목마다 우수한 대재이다. 그러기에 어느 유명박사는 김교수님의 사적을 읽고 “김수철교수는 6개 나라의 언어와 문자를 활용하는 동아급(東亞급)식물학자로 당년의 리시진보다 더 위대하다”며  “21세기의 ‘리시진’ 김수철 전’이란 책 제목을 다시 선택하라고 건의하였다.  이번 집필기회에 필자가 더욱 감동을 받은것은 스승님이 90대 고령에 그린 자화상이였다.  자화상은 자신의 안에 있는 무언가를 끄집어 내 진실을 드러내는 작업이다.  화가들의 ‘자화상’에는 인생의 희로애락이 담겨있다. 타인에게 쉽게 꺼내지 못한 고백을 자신의 얼굴에 담아 스스로를 다독이며 스스로를 응시하는 동안 또 다른 자신을 ‘발견’하고 현재의 겉모습뿐만아닌, 지나온 삶의 과정을 검색하며 자신을 반성한다. 스승님이 그린 자화상을 보고 그의 딸님이 “아버지, 눈섭이 없습니다”며 눈섭을 그려 넣으세요”는 권고에 스승님이 “눈섭을 그려 넣으면 딴 사람이 된다”고 거부하는 것이였다. 스승님은 이렇게 자기의 “부끄러움”을 감히 밝히고 자신을 미용할줄 모르는 순박하고 진실한 인간이였다. 이 밖에 금상첨화라고 할가. 필자가 본 편집을 거의 마무리를 할 때 “길림신문”사 홍옥편집선생이 필자가 김교수를 모델로 쓴 칼럼(래일을 생의 마지막 날로 삼고)이 “길림신문”우수칼럼으로 평선되였다는 소식을 보내주어 “백두대간의 불로송”에 푸른색을 덧칠을 하였다. “가슴이 뛰는 일을 하고 가슴이 뛰는 삶”을 살아온 김수철교수는 중화민족의 재산이며 우리민족의 자랑이다.  김교수는.“사회생활의 문자기록은 문명의 산물이다. 문자기록은 인류를 망각에서 구출하는 유일한 방도이다”고, 영국의 유명한 력사가 에드워드핼릿카(E.H.카)는 “력사란 과거와 현재의 끊임없는 대화이다” “과거는 현재의 빛에 비춰졌을 때만이 비로소 리해될수 있으며 또한 현재도 과거의 조명속에서만이 충분히 리해될수 있다”고 하였다. 민족의 바탕이 민족문화인만큼 민족문화를 지켜야 할 마지막 보루가 바로 민족문화와 민족력사를 기록하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근 한 세기를 살아온 김수철의 빛나는 력사를 기록하는 것은 우리민족의 문화와 민족력사의 기록하는 것이다.  필자는 이 기록은 정치나 종교와 관계없이 오늘에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에게는 물론 미래에 살아갈 누구의 삶에도 도움이 될 한부의 력사교과서와 인생교양서로 될것이라 확신한다.  끝으로 이 책을 쓰도록 제안한 부인, 필자의 집필에 적극 협력해 주신 서규철, 황영수 원로와 아들 오무송,  그리고 연변과 동경을 이어준 “교두보” 최명림씨, 책의 출판에 무척 애를 쓴 연변대학출판사 김미숙편집선생에게 감사한 마음을 전한다.   일본동경에서 吳基活 2018년 5월,   
306    오기활기자와의 인터뷰 <기자문집>을 출간하면서 댓글:  조회:225  추천:0  2019-12-28
을 출간하면서        오기활 략력 1947년 5월 9일, 왕청현 석현진 수남대대 달라자 출생 1974년 연변농학원 축목수의학부 졸업 1986년 연변대학 정치학부 본과졸업(통신학부) 1974~1984년 도문시 홍광향축목수의소 소장,홍광향 당위선전위원, 조직위원, 경제위원회 부주임, 도문시당위 정책연구실연구원 1984~2006년 연변일보 도문주재 기자, 해외부 기자, 대외사업부 부장, 중국저널(한국), 중앙경제신문(한국) 연변지사장 2006년 정년퇴직후 현재까지 길림신문 기자 저서로는 화집- 《성공을 향하여》,  《부자로 가는길》,《일하는 멋 베푸는 삶(정경락 오기활 공저)》    기자문집-《시대의 맥박과 더불어 숨쉬는 사람들》,《기자는 사회의 병을 진맥하는 의사이다》 등  “후반전에 더 멋진 꼴”을 넣겠다며 젊음의 기백으로 제2의 인생을 설계하고 멋지게 그려가는 이가 있다, 그가 바로 60 대 중반에 《시대의 맥박과 더불어 숨쉬는 사람들)》, 《기자는 사회의 병을 진맥하는 의사이다)》는 두권의 묵직한 기자문집을 펴내 주위의 시선을 한몸에 지닌 오기활기자이다.  오기활기자를 통해 기자정신이 무엇이며 왜 기자는 사회의 병을 진맥하는 의사라 하는지 그의 견해를 들어본다.   기자직업에 대한 열망은 언제부터? 조실부모로 큰집에 얹혀살 때 백부님은 나의 무슨 장점을 발견하고 그랬는지 장차 변호사가 되라고 늘 말씀하였다. 그때는 백부님의 기대를 리해할수 없었다. 그후 1963년에 연길현4중(그후 도문시1중)제 16기 졸업식때 학교에서는 저를 본기졸업생대표로 발언하게 했다. 그 졸업식에서 당년 역시 도문시 1중의 제 2기(? 확실한 기억이 나지 않음) 졸업생인  김동기(당시 길림일보 연변주재기자)선배님도 졸업생대표로 발언을 하였는데 김동기선배님의 발언내용이 장백산에서 국민당특무를 잡던 취재과정과 생동한 내용이여서 전체 사생들의 환영과 존경을 받았다.  그때 본기졸업생대표로 장차 농촌서 문학가가 되겠다고 결심발표를 한 저로서 기자사업이 그렇게도 영예롭고 책임심이 중한 간고한 사업임을 처음으로 가슴깊이 새기게 되였다. 그후1964년 전국적인 사회주의 교육운동때 우리 마을에 온 사회주의 공작대원인 연변인민방송국 서명준기자의 영향으로 기자를 더욱 동경하고 (나도 기자가 되였으면…) 하는 꿈을 간직하게 되였다. 그런데 하느님이 나에게 하사하신 선물이라고 할가? 서명준선생님을 만난 꼭20년만에 나는 연변일보사 도문시주재기자로 연변일보사에 입사하여 근 10년간의 도문시주재기자부터 시작하여 연변일보 일요경제부, 경제부, 대외사업부부장으로 활약하다가 퇴직후 지금까지 길림신문 초빙기자로 활약하고있다. 그간 나는 도문서 승진의 기회도 서슴없이 버리고 기자직업을 선택한데 대해 후회한적이 없다. 나를 놓고 말하면 직업중에서 신문기자이상 더 좋은 직업은 없다고 본다. 왜냐하면 내가 머리 숙이면서 남한테 굽실거릴 필요없이 중립자세로 사회의 이모저모를 파헤치고 반영할수 있기때문이다. 기자로 활약한지 30년, 그동안 수백명인물들의 사적을 다루었고 400여편의 칼럼을 쓰면서 기자로의 책임감이 무엇인지를 확고히 다지게 되였다.   2권의 기자문집을 펴내게 된 계기가 있다면? 신문사에 있으면서 많은 칼럼을 썼고 인물취재도 많이 했다. 특히 길림신문 ‘일사일언’코너에 매주 미니칼럼을 발표하면서 칼럼쓰기에 전념했다.그런 과정에 나더러 기자문집이나 칼럼문집을 펴내라는 친지나 동료의 권고도 몇번은 있었지만 나는 선뜻이 나서지 못했다. 원인은 내가 남들에게 읽혀지는 책을 출간할수 있겠는가는 신심부족에서였다. 그러던중 ‘가물에 단비’라고나 할가. “길림신문”사에서 출간한 “중화인민공화국 창건 60주년에 만난 60인” 출판,발행식에서 국가민족사무위원회 리덕수 전임주임은 “이 60인은 건국후 사회주의 건설과 개혁개방에서 조선족을 위해 기여를 한 분들이다. 책의 출간은 민족형상을 보여주는 한차례 ‘민족공정’이다고 말했다. 리덕수동지의 평에서 깨우침을 받고 나도‘민족공정’에 적극 참여하리라 마음먹었다.     책에 대해 설명 부탁드린다면? 《시대의 맥박과 더불어 숨쉬는 사람들》은 30년간 인터뷰한 300여명의 인물중 130명을 선정해 책속 모델로 등장시켰다. 50만자에 달하는 이 책은 11개 장절로 나뉘였으며 인터뷰한 내용에 사실을 더욱 생동하게 하기 위하여 부분적적으로 가필 혹은 생략을 하였고 또 독자들의 궁금증을 풀어 주고저 문장의 뒤부분에 부언으로 주인공의 오늘을 밝혔혔다. 그리고 독자들의 구독에 휴식의 여가를 마련하고저 장절에 따른 개관과 시대성을 엿볼수 있는 “짧은 글(일사일언)”을 가미했다. 《기자는 사회의 병을 진맥하는 의사이다》는 그동안 나름대로 보고 느낀 생각을 ‘사색의 여울목’, 일사일언, 오늘의 화제 등 코너에 발표했던 졸작들이다. 특히 길림신문 일사일언 코너에 6년간 매주 발표했던 글이 큰 폭을 차지했다.   왜 ‘기자는 사회의 병을 진맥하는 의사’라 하는가? 지난 6월 18일 출간기념좌담회 소식이 조글로 등 인터넷 신문들에 실리자 이런  댓글이 올랐다. ㅡ 참 별 회괴한 제목을 다 봤다. 뭘 "기자는 사회의 병을 진맥하는 의사라구? 기자가 어떻게 사회의 병을 진맥하냐? 기자는 가치중립의 차원에서 평의하게 국민이 알 권리를 취재하는것인데… ㅡ 의사는 진맥만이 아니고 병을 고쳐야 하는데... 사회가 발전하려면 기자는 사회를 파헤치고 정부는 기자가 파헤치는 문제를 메우면서 나가야 한다. 즉 기자가 찾아내는 문제를 정부가 해결해나가야 한다는 말이다. 바로 이런 론리에서 필자는 기자를 사회의 병을 진맥하는 ‘의사’로, 정부는 사회의 문제를 치료하는 ‘의사’라 한다. 의학에는 생리학과 병리학, 진단학과 치료학이 따로 있다. 또 의사도 진맥을 잘하는 의사와 치료를 잘하는 의사가 다르다. 고로 기자는 진단을, 정부는 그 진단에 따라 치료하는 ‘의사’라는 말이다. 기자의 활동무대와 활동능력은 전 사회를 대상하여 존재하는 문제를 발견, 폭로, 비평하는 정도이다. 기자의 폭로와 비평을 제때에 받아드리냐 외면하냐, 기자가 폭로한 문제를 제때에 개정(치료)하느냐 안 하느냐는 정부의 몫이고 정부의 힘에 달렸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만약 기자의 진단에 따라 정부가 “치료”를 제때에 했다면 “기자덕분에 그문제를 해결했다”는 것으로 “기자는 사회의 병을 치료하는 의사다”는 말이 된다   자신만의 인생철학이 있다면? “먼저 인간이 되고 후에 일을 한다” 로 “인간답게 살려면 불의에 도전하고 편안하게 살려면 불의를 외면하라”는 김학철선생의 말을 좌우명으로 삼고 백성의 리익을 위해 사회의 비리를 폭로하기에 노력해왔다. 이를테면 량수탄광에서 소비자의 리익을 침해한 사건을 련속 보도해 피해자의 합법적인 리익을 보호하여 주었고 한국에서 한국인의 사기피해를 당하고 귀국한 녀성의 사건을 한국 매체를 통해 폭로까지 하면서 그녀성을 재입국 하도록 도와주는 등 여러가지 실질적인 일들을 많이 해주었다. 좀 싱겁다는 말을 들을 정도로 말이다. 나는 백성들이 제기하는 문제를 신문에 내기 위해서가 아니라 문제 해결을 목적으로 하고 많은 걸린문제들을 제때에 해결해 주었다.  향후에도 사회와 백성을 위한 책임감으로 생활에 밑줄을 그어가며 단순히 신문기사를 쓰는 기자가 아닌 백성의 “입”과 “눈”이 되는 기자로 민생(民生)과 민설(民舌)을 다루는 “평생기자”로 활약하고저 한다.   전하고싶은 메시지가 있다면? 이미 2권의 머리말에서 하고픈 말을 올렸으니 머리말에서 못다한 말을 하련다.  첫째, 감사한 마음 전하고싶다. 기자생활을 시작하여 오늘 이 책의 출판에 이르기까지 저에게 활동무대를 마련해준 연변일보사, 길림신문사, 연변인민출판사 및 지부생활잡지사 등 언론잡지사에 충심으로 되는 감사를 드린다. 특히 연변인민출판사에서 저를 “30년기자직에 충성한 명기자”라며 저의 칼럼집(기자는 사회의 병을 진맥하는 의사이다)을 무료로 출판발행한것에 너무도 감사하다. 둘째, 두려운 마음이 앞선다.  길림신문에서 연변특간인 “연변25시”를 꾸리며 저를 초빙하였다. 그 때로부터 “연변25시”에 일사일언 코너에 “고급기자” 오기활로 실렸다. 이에 필자는 당년의 “연변25시”주필인 박금룡주임을 찾아서 제때에“나는 고급기자가 아니니 절대 “고급기자”라고 달지 말라. 량심이 가책된다”며 몇번이나 청원했으나 박금룡은 “나는 고급기자만을  초빙한다”면서 그냥 고집하였다. 하여 나는 본의 아니게 “고급기자”의 가마를 타게 된것이다. 나는 이런 과정을 독자들에게 전달할수가 없었다. 그래서 이번 2권의 책 출간도 “고급기자도 아닌데 무슨 출간이냐?”며 독자들이 비웃을가봐 두렵고 또 나의 이 두책이 독자들에게 읽혀지는 책으로 될수 있을지 걱정이 앞섰다. 그러던 중 얼마후에 연변일보사 군중사업부 주임으로 지낸 김승길선배님이 어느 도서실에서 나의 출간작품을 봤다면서 나의 두 손목을 굳게 잡고서 “오선생은 확실히 고급지자자격이 있습니다”며 “진심으로  축하합니다!”고 하니 그만큼이나마 다행으로 느끼였다. . 셋째로 아쉬움을 전하는바이다.  책 출판이 근 3년이란 시간을 소요한데서 저의 책 출간소식을 알고 축하하고 기뻐하며 책을 보내달라고 부탁했던 고 오태호연변일전임주필님, 책출판을 적극지지한 고 박금룡 길림신문연변지사장, 그리고 왕청현하마탕뱀술공장 고 최석준공장장, 저의 글을 보고 후반전에 멋진 꼴을 넣겠다며 80고령에 나무뿌리조각품을 다루던 고 리인규할아버지 등 타계한 6명 고인들이 나의 책을 보지못한데서 안타까움을 표하며 이 글을 빌어 고인들의 명복을 빈다.        문인숙기자                                                                                        
305    분수 있는 삶 댓글:  조회:201  추천:0  2019-12-26
분수(分數)란 , 을 말한다.  분수의 은 몫이란 뜻이다.  사람은누구에게나 자기의 몫이 있고 자기의 형편과 처지, 자기의 실력과 정도가 있다. 거기에 맞게 사는 것이 분수를 아는, 분수있는 삶이다. .  분수를 삶의 자대라고 말한다.  그러니까 그사람의 삶의 척도에 따라 그 사람을 로 평가한다. 이로 보아 분수는
304    국가는 초심 국기는 사명 댓글:  조회:237  추천:1  2019-12-19
중화인민공화국헌법 제136조에 “중화인민공화국 국가는 ‘의용군행진곡’, 중화인민공화국국기는 오성붉은기다’고 밝혔다.   필자는 국가, 국기, 국휘를 시작으로 진행되는 중앙텔레비뉴스프로를 시청할 때마다, 특히는 올해 국경70주년행사마다에서  국가로 이어지는   펄럭이는 오송붉은기,국민들이 한결같이 웨치는“조국만세!”화면을 시청할때마다  국가의 노래말은 중화민족의 초심이고 신주의 중화땅에 나붓기는 오성붉은기는 중화민족의 사명임을 절실히 느낌했다.. “중화인민공화국 국가”의 한어노래말이다. 起来! 不愿做奴隶的人们! 把我们的血肉 筑成我们新的长城! 中华民族到了最危险的时候, 每个人被迫着 发出最后的吼声! 起来!起来!起来! 我们万众一心,冒着敌人的炮火 前进, 冒着敌人的炮火, 前进!前进! 前进!进!! 이 노래말은 총 84자로 국민들에게 “일어나 나라의 주인이 되라”는  호소가 10자, 중화민족이 이룩하려는 목표가 14자 , 이 목표의 실현을 위해 “전진,전진진”의 동원령이 29자로 국가노래말은 중화민족 혁명의 초심이라 하겠다.   전투에서의 승리는 전투고지정상에 나붓기는 군기를 꼽는것으로 상징하고 새나라정권의 성립은 국기의 계양으로 상징한다. 우리 나라의 국기는 중국공산당의 령도하에 중화민족이 대단결하여 사회주의와 공산주의대업을 완성하기 위햐여 끝까지 분투하려는 중화민족의 사명이 새겨져있다. 건국전야(1949년 9월 25일)에 모택동동지는 오성붉은기의 도안은 “우리나라 인민의 대단결을 표현, 지금 대단결을 해야할뿐만 아니라 장래에도 더욱 단결하여 끝까지 혁명을 진행해야한다”고 국기도안으로 중화민족의 사명을 해석하였다. 국기는 국가, 민족 존엄의 상징이며 모든 중국국민을 대표하기에 언제 어디서나 모욕을 당해서는 절대로 안된다. 우리나라 “국기법”(1990년 10월 1일부터 시행)은 “중화인민공화국국기는 중화인민공화국의 상징과 표지로서 매개 공민과 조직에서는  국기를 존종하고 국기를 애호해야 한다(제 3조)”고 제정하였다. 지난 8월 3일 향항의 일부 극단급진분자들이  모 건축물 앞에 걸린 중화인민공화국 국기를 끌어내리고 바다에 내버린 악렬한 행위에 향항 각계가 분개하여 민중들이 국기를 재차 게양하고 국가존엄을 수호하고 국기수호행동으로  향항 네티즌들이 ‘국기수호행동’까지 발기했다. 중화인민공화국주석 습근평동지는 전당의 동지들에게 “ 초심을 잊지 말고 사명을 명기하려면 반드시 강렬한 자아혁명 정신이 있어야 한다. 자아정화, 자아보완, 자아혁신, 자아향상에 공력을 들여야 한다. 당의 자아혁명은 임무가 무겁고 갈길이 멀기에 절대로 멈추거나 쉬였다 가려는 생각을 가져서는 안된다.”고 호소하였다.(8월 1일《구시》잡지 제15호)  필자는 “국가를  높이 부르고 국기를 높이 계양하고 수호하는 것”은 절대로 형식만이 아닌“초심을 잊지말고 사명을 지키는것”의무의 하나로 엄숙히 대하자는 바람이다. (국경절기간 란잡하게 취급된 국기현상 유감) 오기활 
303    명리를 위한 小作 아닌 인생철학大作으로(김수철 전 6) 댓글:  조회:254  추천:1  2019-12-08
오기활선생에게; 2016년 10월15일에 선생이 작성한 질문제강을 감사히 받았습니다. 이 고령자에게는 전화나 면전질문보다도 이런 문자질문제강이 편리합니다. 인제는 사유력이 퇴화되고老腦로하여 어순배렬기능도 많이 못해졌으니 오선생의 취재때 수차나되는 질문을 받을때마다 답안이 틀릴가봐 걱정을 했는데 오선생이 미루 질문제강을 짜서 주니 다행이였습니다. 내가 질문제강에 따라 고심히 연찬하면서 선조들이 걸어온 력사로부터 시작하여 나의 개인생활과 사회활동을 계통적으로 쓴다면 후세에 대한 책임감으로 내용이 확실하고 체계적이며 시간적으로도 퍽 효과적일 것입니다. 기실 나는 오선생이 나의 자서전을 쓰겠다니 처음에는 막무가내로 거절하다가 오선생의 부인(金今福)까지 나의 기사를 읽고 김교수와“3同”(吃,住,行)을 하면서 사적을 채록하여 김교수의 생전에 책을 출판하라는 부탁과 오선생이나더러 “부끄럽지 않게 살아온 자연인의 인생사를 쓰고 싶은대로 다 쓰라”는 권고에 생각을 바꾸고 “시름을 놓고 마음대로 쓰겠다”고 필을 들었습니다. 오선생이 작성한 질문제강은 저의 앞길을 훤히 밝혀주는 리정표입니다. 저의 글에는 지금 젊은세대들이 볼수없는 당년의 자연환경, 사회환경과 력사인물, 력사사실을 쓸것이니 나의 傳記는 후세교육에 대한 교양서로 될 것으로 자신합니다.  저의 글에는 내가 걸어온92년(1925ㅡ2016년)동안의 인생사도 많겠지만 근400년전의 우리 민족의 력사도 있습니다. “못말리는 갓바위집이야기” 속에는 근400년전의 살아있는 戶口簿에 슴배인 사람냄새가 풍기는 이야기가 있는데 이는 저의 생각으로는 지금까지 살아온 중국조선민족의 血緣史에서 처음보는 史料로 眞品名品이 될것입니다. 지금 조선족실업가들이 많고 그들에게 재산도 많겠지만 이렇게 력사를 기록한 살아있는 비물질재산이나 宗親記錄이 거의 없다고 생각됩니다. 나의 傳記는 다만 학습, 학교생활, 교육생활, 과학학술활동에 국한된 것만이 아닌, 평범한 생활속에서 평범하지 않은 인생 생활사의 “回味無窮”를 인생철학의 경지에 상승시킨것이라는 엉뚱한 생각도 해 봅니다. 오기자와 나의 宿命적인 만남과 인연도 역시 나의 아버지의 “先見之術”로 이어진 것이 분명하다는 생각도 해 보았습니다. 이런 인연과 운명의 체험을 위해서는 “尽人待天命”이 賢明人士의 소행임을 어찌 할바없습니다. 나는 더 큰 것을 위해서 나를 고달피는 오기활선생을 사랑해야하는 것만이 나의 참다운 인도주의라고 판단을 하였습니다.  오선생역시 오선생에게 많은 페단을 끼치는, 오선생의 金蘭같은 시간을 훔쳐내는 김수철을 “미워”함이 “理之所在”라고 짐작을 하지만 “김수철이 天時를 잘 맞난 덕분에 얻은 생명”이니 오선생이 어디까지나 나를 건져야지요, 허,허, 허,.. 끝으로 김수철의 傳記를 “김수철 개인의 명리를 날리는 小作이 아닌 인생철학의 大作”으로 되게끔 쓰기를 부탁합니다. 나는 평생을 장자의 ”至人無己 神人無功 聖人無名”을 인생의 좌우명으로 지켜왔습니다. 장자는 수천년전에 벌써 至人은自己라는 것이 없고 神人은 功績이라나는 것이  없으며 聖人은 名譽라는 것이 없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저의 시각으로 상당한 부류의 현대인들이 자기를 맨 앞자리에 놓으려고 욕심을 부리며 겸손을 잊고 타인들 앞에서 고개를 숙이는 것을 패배라고 여기며 자신만이 제일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이한 사람들은 자기를 앞세우지 않는 지인(至人)을 알 수가 없습니다. 그들은 명예와 출세를 위해 땀을 흘리고 명예를 출세와 동반하는 부산물로 여기며 안하무인으로 자신의 인격이 점점 황페화되는 것을 모릅니다.  지인은 명예를 쫓지않습니다. 지인은 욕심과 명예를 모르기에 행복합니다. 자연은 왜 사람을 행복하게 할가요? 그것은 자연에는 명예나 욕심 같은 것들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상을 부언하면서 오선생의 아낌없는 로고를 부탁합니다. 김수철  (2016년 10월 25일 밤 12시)  x           x                x                    x 그랜드모스는 71세에 그림을 시작했고  갈릴레오는 74세에 최후의 저서를 출간하였습니다. 파블로카 찰스는 85세 때 백악관에서 연주를 하였고 김수철은 이미 출판된 “길림성식물지”가 빠진것이 많아서   내가 보충해야 한다며 94세에 圖說“길림성식물지”를출간하였습니다. 긍정적인 생각을 하는 사람에게는 나이가 숫자에 불과합니다.   오기활
302    감동의 스승님 김수철교수(김수철전 5) 댓글:  조회:312  추천:3  2019-12-01
나는 연변농학원 제3기 졸업생이다. 나는 김수철교수의 제자로 연변농학원을 졸업한후 연변농업과학원에 배치되여 연구원으로 사업하다가 정년퇴직을 하였다. 나는 “길림신문”에 실린“감동인물”을 즐겨보는 독자인데“감동인물”이 어떤 경로와 추천을 통해 신문에 발표되는지를 모른다.  나는 “감동인물”을 읽을 때마다 아쉬움이 있었다. 왜냐면 우리 조선족의 동아급(東亞級)식물학자로 “21세기의 리시진”이라 불리는 김수철교수는 왜 “감동인물”에 오르지 못하는가는 의문 때문이였다. 김교수는 93세를 넘은 고령학자로서 학자의 책임감과 식을 줄 모르는 사업 열정으로 “내가 죽기전에 못다한 일을 끝까지 마무려야 한다”며 사모님마저 불편하다며  딸집에 보내고 혼자서 자취하면서 식물을 채집하고 연구하며 많은 저서를 출판한 저명한 식물학자이다. 1947년에 김수철은 룡정의과대학 입시시험에 합격되였다가 정치심사에서 가정성분이 “규편중농”라는 원인으로 학생자격을 취소당했다. 그후 연변대학이 선후 연변대학 농학부 수의학과에 입학 하였는데 모종 윈인으로 연변대학 농학부를 농업전과로 격을 낯주니 학생들이 동맹휴학을 하면서 반대한 원인으로 학교당국에서 농학부를 취소하고 농학부학생들을 다른 학부로 전학시켰는데 그때 김수철선생은 다른 한 친구와 함께 할빈에 있는 동북농학원에 입학하고 얼마간을 다니다가 동행한 친구가 한어교학이 힘들다며 중퇴하려니 부득불 함께 연변으로 돌아 왔다. 얼마후 연변대학 농업전과 학부에서 김수철을 식물학 실험원으로 배치하였다. 김수철선생은 대학공부를 1년밖에 못하고 말단 실험원으로 열심히 독학을 하면서 식물을 채집하여 실험표본을 만들고 그림도면을 그리면서 식물학을 전공 하였다. 노력의 뿌리는 쓰지만 노력의 열매는 달았다.  1952년 학교지도부에서는 김선생을 교단에 올려 식물분류학을 강의하게 하였다. 식물분류학은 많은 식물을 세분하게 갈라야하고 영어, 라틴어, 중국어, 조선어, 로씨아어, 일본어 등 여러 나라의 언어를 장악해야 하는 과목인데 그때 김선생은 로어공부를 하면서 교학을 시작하였다.  그는 밤을 새우면서 공부하며 열심히 비과를 하였기에 우리가 강의를 받을 때 그의 얼굴을 보면 늘 수척해 보였고 두눈이 침침한 상태였다. 그때의 나의 인상에 (저 선생님이 교학을 위하여 얼마나 열심히 준비하였기에 저렇게 피곤해 보일까?) 는 느낌이 머리속에 자리를 하였다. 나에게는 식물분류학과목이 제일 어려웠다. 왜냐면 식물분류학은 소유의 식물종류의 분포, 식물이 속하는 과, 속, 식물의 학명, 특성… 등을 암기해야 할 내용이 너무나 많기 때문이다. 나는 김선생님의 강의를 두 학기를 받으면서 시험에 겨우 통과되였다. 그래도 그만한 기초가 있었기에 공작에 참가한후 1956년에 길림성수리보편조사단의 단원으로 주내 하류량안의 토양조사임무를 맡고 전 주내를 답사하면서 연변의 토양류형, 식물피복, 지질모질(地質母質)을 훌륭히 집필하여 해당부문의 충분한 긍정을 받았다. 허나 졸업후의 세월은 김선생님과 나의 연구분야가 다르기에 자주 접촉할 기회가 없었다.  세월은 흘러 지금은 스승님은 93세, 나는 86세의 로인이 되였다. 지난 2016년의 어느하루, 나는 연변대학 농학원 리퇴직교원 몇몇 분들과 함께 김수철선생님의 평생연구기지인 룡정시 조양천진 삼성촌을 처음 방문한 적이 있다.  그때 몇 십년만에 만났는데 그의 옥체가 너무나도 건강하기로 정말 감동적이였다. 교수님은 비록 허리가 구불었으나 정신상태, 기억력, 눈정신은 모두가 우리 제자들보다도 훨신 좋았다. 방안의 네 벽은 몽땅 책무지로 막혔고 구들도 온통 책무지와 식물그림으로 널려 있었다. 그는 로친이 곁에 있으면 불편하다며 딸집에 보내고 혼자서 자취를 하면서 계속하여 식물연구를 하였다. 나는 그때 김선생님이 왜 이렇게까지 자기의 사업을 열애하고 그렇게도 열심히 일을 할가!? 그는 만년에 왜 아빠트를 떠나서 이 산골의 외딴집에서 고생을 찾아 하는가에 정말 믿어지지 않았다. 선생님은 여태껏 중국에서 이름난 교수도 아니고 신문지상에 뻐젓이 소문난 학자도 아니건만 90고령에도 아직 하려는 일을 못 끝냈다면서 그렇게도 열심히 일을 할가? 는 생각으로 선생님을 쳐다보기마저 부끄러웠다. 정년퇴직후 나를 포함한 많은 사람들이 무슨 일을 할 념을 안하고 그럭저럭 세월을 보내는데 저 로인의 꿈은 도대체 무엇일까?  나의 머리속에는 이런저런 미지의 물음들이 줄지어 떠올랐다. 김생님은 평생 남들의 앞에서 자기를 나타내지 않았고 꼬물만치의 승급욕이 없는 사람으로 그의 인생철학을 어떻게 평가하면 좋을지 나로서는 답이 없다. 김선생님은 지난세기 5, 60년대 우리나라 경제곤난시기에 얼마도 안되는 봉금으로 집살림을 유지하면서 자식들을 뒤바라지를 하였고 한눈도 팔지않고 교학에만 정력을 몰부었다. 후에 생할이 펴워도 남들처럼 편히 행복한 생활을 하려는 생각은 추호도 없이 식물학에 미쳐버렸다. 길을 가면서 길가의 식물에만 눈을 팔았고 약용식물을 찾는데만 정신을 팔았다. 김교수는 꾸준한 독학으로 국제학술론문발표회에서 영어, 일어, 한어, 조선어로 학술론문을 발표하고 장백산자원식물연구로  세계식물학술계의 중시를 받았다. 김교수는 명문대학도 다니지 못했고 말단 실험원으로부터 강사, 부교수, 교수로 부상 되였다. 교수님의 바람은 오직 하나 ㅡ “내가 아직까지 채 하지 못한 일을 끝까지 하고 죽어야  한다”는 학자의 고상한 책임감을 지키고 실현하는 것이다. 스승님은 진정 사람을 감동시키는 교수, 식물학자로 우리 삶의 영원한 본보기이다. 제자는 스승님의 건강장수를 기원한다.   서규쳘                                 2018년 3월 20일
301    가슴을 뛰게 하는 한권의 책(김수철전4) 댓글:  조회:1278  추천:1  2019-11-15
                 추천사                                             가슴을 뛰게 하는 한권의 책(김수철전4)                                                                                                        신봉철     지난해 하반년, 유명기자이며 오랜 벗인 오기활선생이 나에게 연변농학원의 93세의 고령인 김수철 교수의 인생스토리를 얘기해주었다. 당시 비록 구두로 한 얘기였지만 아래의 세가지 점은 나에게 잊을 수 없는 인상을 남겨주었다.  첫째, 김교수는 ‘21세기의 리시진’이라는 것이다.  둘째, 93세의 고령임에도 안경을 모르고 산천을 누비며 식물채집을 한다는 것이다.  셋째, 김교수를 ‘길림성감동인물’, 나아가서는 ‘중국감동인물’로 추천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 날 오선생은 상론조로 이미 김교수의 자서전(전기)을 썼는데 나에게 추천서를 써줄 것을 청탁하였다.  이에 내가 “김교수는 중량급 인물인데 내가 추천서를 쓰는 것이 타당하지 않습니다.”라고 하니 오선생은 “연변농학원이 당년에 룡정시에 자리했고 당신이 룡정시당위서기를 담임하였기에 비교적 상황에 익숙하니 쓰는 것이 합당하겠습니다.”라고 하는 것이였다.  하여 나는 다른 토를 달지 않고 승낙하였다. 얼마후에 오기자는 두툼한 원고를 나의 이메일로 보내왔다. 나는 지대한 흥취를 가지고 진지하게 김교수의 사적을 열독하였는데 읽을수록 맘속의 감동을 금할 수 없었고 김교수의 인생경력, 탁월한 성과, 드넓은 흉금, 고상한 정조, 지칠 줄 모르는 탐구정신에 탄복되여 오래도록 펜을 잡을 수가 없었다. 그러다가 오기자의 ‘지청구’에 어쩔 수 없이 93세의 고령인 당대 ‘리시진’에 ‘평어’를 쓰기로 하였다. 빛나는 인생 김수철, 1925년 4월 1일, 룡정시 태양향 횡도촌 향양툰의 농민가정에서 출생하였다. 7살 때부터 당지의 한문서당에서 계몽교육을 받았다. 10살 때에는 양흥사숙(阳兴私塾)에서 교육을 받았고 11살 때에는 중흥사숙(中兴私塾)에 전학하였다.  천성이 총명한 김수철은 소학교 3학년 때 일어로 된 고전명작 ¡ì서유기¡í를 읽을 수 있었고 미술을 배우면서 야외스케치를 할 수 있었다. 17살—18살  때(1942년—1943년), 연길국민고등학교 1년급—2년급에서 공부하고 3년급—4년급은 왕청국민고등학교에서 축목수의와 일어, 영어를 배웠다. 해방초기에는 가정성분이 부농으로 획분되였다가 2년후에 ‘규편중농(纠ø¶ñé农)’으로 규정되였다. 김수철은 이 성분‘딱지’로 하여 고통스러운 정신생활을 하게 되였다.  1944년에 왕청국민고등학교를 졸업한 그는 도문시친화목재주식회사 역축보건지도원으로 배치받고 선후로 팔가자출장소, 고동하벌목장, 로령벌목장에 출근하다가 심한 전염병에 걸려 정신상, 육체상의 고통으로 하여 자살까지 시도했다. 1946년 1월부터 김수철은 1년 동안, 룡정시 태양구중심소학교에서 무보수로 교직으로 지내다가 1947년에 시험을 거쳐 룡정의과대학에 합격되였지만 ‘규편중농’ 때문에 ‘정치심사’에서 락방되고 참군도 불허되였다.  그로부터 4년 동안 농업생산로동에 종사하면서 촌의 민주대동맹활동에 참가한 김수철은 유일한 청년위원으로 선거되여 활약하면서 다방면의 재능을 보여주었다. 50년대초에 연변농학원의 생물실험실의 실험원으로 배치를 받은 김수철은 1950년—1958년 기간에 여름방학과 공휴일을 리용하여 연변 각지와 장백산구를 답사하면서 3,000여종의 식물표본을 채집하였다. 그 후 연변농학원에서 조교로 교직에 있으면서 1959년—1965년 사이에 여름방학을 리용하여 동북3성을 누비면서 25,000점의 식물표본을 채집하였다. ‘10년내란’ 때에는 백전(白专)로선을 걸었다는 ‘죄명’으로 비판투쟁을 받고도 동북3성과 내몽골, 산서, 해남도의 50여개 산봉우리를 돌면서 2,500여종의 식물표본을 채집하였다.  김수철은 연변농학원 강사, 부교수, 교수로 있었고 1987년에 정년퇴직을 하였다. 김수철은 퇴직후 30년 동안, 시종 식물 채집과 연구를 견지하면서 17권의 전문저서와 론문(조선어, 한어, 일어, 영어)을 출판하고 발표하였다. 그리고 퇴직후 원시자료, 회화, 사진 및 동영상으로 3,200여종의 식물삽도를 제작하고 조선어, 한어, 영어, 라틴어로 몇천가지 식물의 학명, 별명, 산지, 약효 등을 기록하고 정리하여 명실공히 당대의 ‘리시진’으로, 동아급(东亚级) 식물학자로 부상되였다. 연변조선족자치주우수당원, 길림성로력모범, 길림성 중약자원보충조사 선진사업일군으로 된 김수철은 1990년에 국가농업부로부터 ‘전국초원자원조사우수상’을 받았다. 김수철은 선후하여 연변생물학회 명예회장, 길림성초원학회 고문, 대한민국식물자연학회 고문, 연변알로에연구소 소장직을 지냈다. 김수철옹의 포인트 김수철은 중국뿐만 아닌 아시아 식물학령역에서 널리 전해지고 칭송되는 식물학계의 거인이다.  그렇다면 그의 신상에서 어떤 보귀한 정신적 재부가 체현되였는가?  첫째, 탐구정신 400년전에 리시진은 30년을 거쳐 1,892종의 식물로 ¡ì본초강목¡í을 집필하였다. (후에 374종의 새 품종을 첨가함.) 그러나 400년후 김수철은 60여년(퇴직후 30년)이나 산을 넘고 재를 넘으며 2만 5천점의 식물표본을 소장한 생물실험실을 건립하였다. 90고령엔 ¡ì길림성식물채색도감¡í을 출판하기 위하여 3년 동안이나 로친을 딸집에 보내고 혼자서 산골초가집에서 자취하면서 산과 재를 넘나들었으니 그의 탐구정신은 ‘산신(山神)’임에 틀림없다. 둘째, 평생학습정신 김수철 교수는 여섯개 나라의 언어를 장악했다. 한어, 조선어, 일어, 영어로 자유롭게 대화하고 론문을 쓰며 식물표본에 주석을 달고 문학작품까지 열독할 수 있는 수준이다. 이런 결과는 그의 말씀 대로 산을 다니며 식물표본을 채집하는 배움의 길을 통해 이룬 것이다. 그리고 식물표본을 그리기 위해 50~60세에 스승을 모시고 회화, 촬영을 배워 전업수준에 이르렀다. 그가 만년에 컴퓨터를 세번이나 바꿨다니 그의 평생학습정신을 알 수 있다. 셋째, 유머와 락관정신 김수철 교수는 평소에는 말수가 적지만 대화를 시작하면 유머감이 넘친다.  94세의 고령임에도 몸건강이 50대로서 책이나 신문을 볼 때에 안경을 쓰지 않는다. 건강비결을 물으면 “일생동안 길섶의 풀과 산속의 식물을 먹었기에 오늘까지 건강하게 살며 병원이 어딘지 모른다.”고 말한다. 그는 “큰병은 뜸이다.”라고 하며 ‘뜸’으로 여러가지 잡병은 물론 가족들의 암까지 치료하였다.  넷째, 사심 없는 겸허함 김교수의 업적과 공헌에 비기면 그가 받은 영예는 새발의 피라 할가. 내가 익숙한 사람들에게 물어보니 이구동성으로 “김교수는 머리 숙여 일만 하는 늙은 황소이다.”라고 답했다.  그는 매체의 취재에 별로 나서지 않기에 매체들이 그에게 접근하기가 하늘의 별따기였다. 다행히도 오기활기자가 김교수의 제자로서 이 책을 쓰기 위해 무진 애를 썼는데 결국 김교수의 동료들의 도움으로 끝내 승낙을 받게 되였다.  이런 겸손과 부드러움은 오직 마음속에 사업밖에 없고 명리를 탐내지 않는 인테리의 이미지에서만 찾아볼 수 있다. 다섯째, 대의를 위한 봉사정신 김교수는 일생동안 한눈 팔지 않고 신념, 의지, 탐구, 분투로 대업을 이룩하고 대의를 실현하였다. 중국꿈과 민족꿈을 실현하기 위한 한길에서 우리에게는 이러한 대의를 도모하는 정신, 의연한 분투, 고집스러운 탐구, 각고의 노력, 불후의 업적이 소요된다. 필자는 이 책이 김수철옹에 대한 가장 권위적인 ‘평가서’로서 모든 분발하는 사람들에게는 ‘격려’와 ‘거울’로, 그리고 ‘모듈의 책(模块书)’으로 되며 중국꿈을 실현하는 ‘안내서’로 되기에 손색이 없다고 믿으면서 독자들에게 얻기 힘든 김수철옹의 대작을 추천하는 바이다.   ¦ 부언 책의 저자에 관하여   오기활씨는 신문계에서 쟁쟁하게 이름이 나있다.  이하는 몇십년 동안 익숙하게 지내온 오기활씨에 대한 나의 소견이다. 첫째, 풍부한 경력을 갖고 있다.  비록 농학원을 졸업했지만 자기의 능력을 잘 알고 한평생 신문사업에 종사하면서 자아를 실현하였다.  둘째, 많은 작품을 출산하였다. 몇십년래 무수한 신문원고를 발표했는데 그중에는 적지 않은 경전적인 가작들이 있다. 셋째, ‘과감히’ 쓴다. 특히는 사회의 부조리에 대해서 직언직설(òÁåëòÁ说)하며 백성들을 위하여 목소리를 높인다. 넷째, 유쾌한 사람이다.  70대에도 술상에서 반근 술은 거뜬히 하는데 그 이미지가 마치 어느 위인과 근사하다.  다섯째, 의리를 중히 여긴다. 사람됨이 의롭고 감히 성을 내고 울고 웃으며 감히 의협심이 강한 말을 쏟아낸다. 이렇게 투명한 사람이 김수철이란 호인(好人), 기인(奇人), 대인(大人)을 좋은 책으로 펴냈으니 저자는 나라와 민족을 위하여 좋은 일을 하였다고 생각한다.  이를 진심으로 축복하며 부언한다!                           신봉철 (원 길림성 인력자원 및 사회보장청 부청장, 현임 중국 ‘단군문학상’리사회 회장) 2019년 1월 21일 해남도 금전심성(金典心城)에서 
300    이런“무명”씨에게 숭고한 경의를 드립니다! 댓글:  조회:502  추천:2  2019-11-13
월전에 필자는 두발로 항일(독립, 반일)유적지를 찾아 전국 방방곡곡을 뛰여다니며 우리민족 선렬들의  숨결을 답사하면서 책으로 력사 에 남기는 리광인선생이 “도문혁명로근저지건설 촉진” 사업을 함께 상론해 보자는 제의로 하여 자택에서 리선생을 만났다.   1982년에 연변대학 조문학부를 졸업하고 선후로 연변일보사 기자, 연변력사연구소 연구원, 절강월수외국어대학교수를 지낸 리선생은 사비를 팔며 동북3성은 물론, 중국 혁명의 성지 연안을 비롯하여 2만 5천리 장정의 발자국까지 답사를 하면서 (전4권), (전 2권), , , 평전 《홍군장령 양림》, 평전 《백포 서일장군》, 평전  등 33여부를 출판하였고 한다. 그런데 그가 일전에 화룡시에서 “화룡혁명로근거지발전사업촉진회” 책임자(한족)와 함께 사업을 연구하던중 그 책임자가 “리선생이 그많은 책을 펴냈다고 해도 우리는 지금까지 한문으로 된 책을 한권도 못밨기에 아무것도 모릅니다”고 말하니 너무나도 서운했다며 “우리민족을 세상에 알리는 일(조선문작품을 한문으로 번역하는)을 우리민족의 미룰수 없는  대업으로  삼고 적극 추진해야 한다”고  재삼 부언했다. 리선생은 특히 무정장군을 곁들면서 “무정이 팽덕회가 이끄는 홍군 제3군단 포병지휘관으로 있을 때주덕은 모택동, 주은래, 팽덕회와 토론하고 무정을 군위직속 홍군포병퇀 퇀장으로 제발시킨 뒤를 이어 중앙군사위원회 제1야전종대 제3제대 사령원 겸 정치위원으로 임명하였다... “  “그리고 장정때 무정이 팽덕회사령원을 받들어 장국도와의 투쟁에서 불멸의 기여를 하였다는것을 알게 된 주덕은 이 조선혁명가 무정에 대하여 탄복해마지 않았다...”  “...우리민족에게는 이러한 우수한자료들이 아주 많으니 우리민족의 위상을 더욱  높이기 위하여 “조역한”(朝譯漢)사업을 적극 촉진해야 한다”고 특별히 강조하였다.  필자는 리광인선생의 관점에 100% 동의다.    2005년 8월 5일, “김학철, 김사량항일문학비”를 태항산에 설립하는 행사에  참가한 필자는 그날 중국작가협회주석이 참가한 모임에서 김학철선생은 당대의 로신으로  그의 작품들을 한문으로 번역되여 전 국민들에게 알려야 한다는 건의을 제의하였다.   그 후로부터 필자는 “조역한””(朝譯漢)사업이 어떻게 진행되는가를 늘 지켜보던 와중에 일전에 채영춘선생이 쓴 “애국과 점철된 민족정감”을 읽고 다행히도 이사업 시작의 희망을 보게 되였다.  재영춘선생은 글에서 “우리 주변에는 우리 민족의 자랑찬 혁명력사를 대대손손 전승하고저 말없이 묵묵히 일하는 공화국 충신들이 많다. 이번에 공화국 창건 70돐에 당중앙으로부터 ‘가장 아름다운 분투자’ 영예칭호를 수여받은 왕청현 새일대관심사업위원회 주임 김춘섭이 바로 전형적인 인물이다.”    “... 이 선행의 사례 또한 그 부름을 계속하는 도미노 현상으로 이어지고 있음을 필자는 경건한 마음으로지켜 보고 있다...그중 한 사람(본인이 이름을 감추려 하기에 필자는 그의 이름을 한동안 가슴속에 묻으려 한다.)은 일찍 조선의용군 최후의 분대장이며 조선족문학의 거장인 김학철옹의 평전을 비롯하여 단 한권의 한어문도서도 출간된 것이 없다는 사실을 안타까워하며 자기로 출판비용을 마련해 김학철옹의 첫 한어문도서 《철 협장으로 찍어낸 발자취(铁拐下的足迹)》를 출간한 뒤를 이어 일전에 또 본인이 출판비용을 구하여 을 살고 있는 김춘섭의 업적을 다룬 실화문학집 《동만항전 발자취를 추적하는 로병(一个追寻东满抗战足迹的老兵)》을 한문으로 출간해냈다.”고 밝혔다.   자기의 이름을 감추고 필요한 사업을 하는 “필요한 사람”이 “타민족에게 조선족을 알리는’ 일을 조용히 벌려가는 것은 실로 남들이 볼수 없는 땅속에서 땅을 적져수는 수맥이라 하겠다,    필자는 이런 “무명”씨에게 충심으로 되는 경의를 드린다!   그리고 우리는  이러한 보람차고 숭고한 사업은 단 한두명의 “무명”씨에게만 의탁할것이 아니라 각급 당과 정부, 그리고 여러 사회단체(기업가협회, ‘단군문학상’리사회 등)에서 “조역한” 사업을 애국애족이라는 미룰수 없는 사업의    일사일정에 올려놓고 힘차게 추진할 것을 겅의한다. 오기활
299    그의 인생철학은 “상선약수(上善若水)” (김수철 전 3 ) 댓글:  조회:771  추천:5  2019-11-01
연변대학 건교 70돌에 즈음해 오기활선생의 편저로 된 《21세기의 ‘리시진’김수철전》(이하 김수철전)이 연변대학출판사에서 최근 출판되였다. 《김수철전》은 연변대학 농학원 원로교수이며 석학인 김수철교수(95세)의 자서전이다. 이 자서전에는 김수철교수의 도전과 배려의 삶과 끈끈한 효사랑과 가족사랑, 그리고 무엇보다 진정한 학자의 마음으로 후학양성과 학술연구에 림한 경험담이 진솔히 담겨져 있다. 21일 오후에 있은 《김수철전》 출간좌담모임에서 《김수철전》의 오기활선생은 지난 3년간의 집필과정은 바로 인생공부 3년의 보람찬 시간이였다고 회고했다. 오기활선생은 집필을 통해 김수철교수님의 인간과 자연에 대한 무한한 사랑을 배웠고 김수철교수님이 지내온 가슴뛰는 일과 가슴뛰는 삶을 가슴깊이 느꼈다고 말했다. 더욱이 김수철교수님은 연변대학 농학원의 자랑이자 조선족의 자랑이며 중국꿈의 실현을 위해 정년을 모르고 일생을 현역으로 분투하는 중국지식분자의 본보기라고 높이 평가했다. 출간좌담모임에서 참가자들은 《김수철전》은 근 한세기를 살아온 김수철교수님의 인생사 기록이며 우리 민족의 백년력사 기록이며 우리민족의 문화사 기록이라고 인정했다. 또한 《김수철전》은 오늘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물론 미래에 살아갈 누구의 삶에도 도움이 되고 힘이 될 한부의 력사교과서와 인생교과서로 될것임을 확신한다고 입을 모았다. 한편 《김수철전》은 한문으로도 번역되여 출간된다. 길림신문 안상근 김성걸기자 (발표시간, 2019.9.21)   《김수철전》에 연변대학 농학원 량성운원장이 머리말을 썼다. 량성운원장은 머리말에서 “김수철교수의 인생철학은 ‘상선약수(上善若水)’입니다”며 “ ‘상선약수’란 로자사상에서 물은 만물을 리롭게 하면서도 다투지 않는 이 세상 최고의 선이라고 이르던 말입니다.”고 부언하였다. 이하는 《21세기의 ‘리시진’김수철전》의 ”머리말” 이다. ㅡ마침내 연변대학 농학원 교수이고 석학이신 김수철 교수님의 자서전이 출간되였습니다. 이 자서전은 김수철 교수님이 남긴 업적일 뿐만 아니라 한 인간으로서의 김수철도 보여줍니다. 무더운 여름날 시원한 바람을 쐬는 것마냥 김수철 교수님의 자서전을 손에 들고 단숨에 읽어내려가며 김수철 교수님의 삶을 마주하는 행복을 누렸습니다. 자서전은 어떤 사람이 자신의 생애를 기술한 전기 또는 회고록으로서 어렵고 위험을 수반하는 작업입니다. 그 원인은 개인의 기억은 제한성이 있고 기술함에 있어서도 오류가 생길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또 자신의 치부와 말하고 싶지 않은 과거도 감추거나 미화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김수철 교수님의 자서전은 도전과 배려의 삶과 끈끈한 가족의 사랑 그리고 무엇보다 진정한 학자의 마음으로 후학양성과 학술연구에 임한 경험담이 진솔하게 담겼습니다. 우리는 자서전을 통하여 그동안 김수철 교수님에 대해 궁금했던 점과 그에게 여쭤보고 싶었던 질문들의 답을 얻을 수가 있습니다. 례를 들어 그의 성장과정은 어떠하였는지, 그의 꾸준하고 왕성한 농업연구와 활발한 인재양성의 원동력은 무엇인지, 그가 어떠한 마음으로 인생과 사람을 대하였는지, 그는 어떠한 방법으로 우여곡절을 이겨냈는지에 대하여 알 수 있습니다. 김수철 교수님은 리론과 실험을 모두 능숙하게 해내는 만능형 농업학자입니다. 그는 연구실에서 리론연구를 진행하는 동시에 현대적인 조사설비와 분석기계가 없는 시대에 두 발이 닳도록 다니며 조사하고 한 글자 한 글자 필사하여 오늘날 농학연구의 초석을 다졌습니다. 김수철 교수님은 공적인 일을 우선시하고 사적인 일을 뒤로 하는 선공후사(à»Íëý¨Þç)의 정신으로 나라와 당의 사업을 최우선 순위에 놓았습니다. 김수철 교수님은 언제나 당과 정부의 각종 사업과 정책의 실행에 앞장섰기에 ‘길림성로력모범’, ‘연변주로력모범’, ‘우수공산당원’ 등등의 영예로운 칭호를 수여받았습니다. 그리고 ‘초지자원 조사사업’과 ‘중약자원 조사사업’에서 걸출한 공헌을 하여 ‘우수사업일군’의 명예로운 칭호를 수여받았습니다. 김수철 교수님은 옛것을 본받고 옛것으로 시대에 걸맞은 창조력을 발휘하는 ‘법고창신(Ûöͯ创ãæ)’의 정신으로 연구에 임하였습니다. 그의 대표적인 연구성과인 은 ‘길림성 축목업 과학기술진보 3등상’의 영예를 수여받았습니다. 김수철 교수님은 농업전문가로서 농업리론의 발전뿐만 아니라 농업리론을 실제의 농업현장과도 결합하여 우리 나라 특히 연변지역의 전반적인 농업발전에 기여했습니다. 나아가 연변대학 농학원에서 교편을 잡은 몇십년 동안 나라와 민족의 농업발전에 기여하는 우수한 후속 연구일군들을 양성했습니다. 김수철 교수님의 자서전을 통하여 그의 인생철학은 ‘상선약수(上善若水)’라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상선약수’란 로자사상에서 물은 만물을 리롭게 하면서도 다투지 않는 이 세상 최고의 선이라고 이르던 말입니다. 김수철 교수님은 곧 물과 같이 생활, 연구, 교육, 사업 여러 방면에서 가정, 학교, 사회에 리로운 사람이 되려고 노력하였으며 궁극적으로 ‘상선약수’의 인생을 이룩했습니다. 저처럼 이 책을 읽은 모든 독자들이 김수철 교수님의 인생을 통하여 자신만의 울림이 있을 거라 굳게 믿어 의심치 않으며 이를 바탕으로 자신의 삶을 현명하게 살아가길 바랍니다. 여러 방면에서 눈부신 성과와 업적을 이룩하고 인생의 후배들을 위해 자신의 파란만장한 일생을 한권의 책에 집약하기 위하여 노력해주신 김수철 교수님의 로고에 감사와 축하의 인사를 올립니다. 무더운 7월의 어느 날 연변대핵 농학원 원장 량성운  부록: “김수철 전” 출판 발행좌담회 발언고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21세기의 ‘리시진’ 김수철 전"의 저자 오기활입니다. 오늘의 만남이 정말 반갑습니다.  저는 이 자리에서 수선먼저 지난 세기 70년대 연변농학원(축목수의계)졸업생,  80년대 연변대학(통신학부, 정치계 사회반 제1기 본과) 졸업생의 신분으로 자랑스러운 모교의 70주년 생일을 열렬히 축하합니다! 그리고 신주의 중화 땅에 연변농학원의 튼튼한 자리매김을 위하여  70년간 동이 땀을 흘리신 모든 원로분들과 지금 한창 현직에서 맡은바 사업에서 열과 성을 다하는 연변농학원의 전체 임직원들에게 가장 충심으로 되는 경의와 성원을 보냅니다!  그리고 건교 70주년 기념행사에 맞춰 오늘의 행사를 뜻깊게 마련한 연변농학원 원부에 뜨거운 감사를 드리며 95세의 고령에 “길림성식물지”를  출판한 김수철교수님께 충심으로 되는 축하를 올립니다.  아래에 이런 순서로 여러분께 말씀을 올리렵니다.  먼저는 책의 출품을 발기하고 도움을 주신 이런 분들에게  순서적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1, 필자의 제1독자로 저더러 몇 달이고 김교수님과 함께 생활하면서 김교수의 생전에 그분의 자서전을 꼭 출판하라고 건의한 저의 부인 김금복씨에게 감사를 드립니다.    2, 신문잡지에서  김수철교수님의 많은 기사를  읽고 독자로서 제일 먼저 저에게 김수철교수님을 “길림감동인물”로 추천하자는 전화를 보내온 연변농업과학연구소 서규철 연구원(88)에게 감사를 드립니다.    서규철님은 여러면으로 김교수의 사적을 저에게 제공했고 또본 책에 “감동의 스승님 김수철 교수”라는  제목의 글을   올렸습니다.  3, 연변농학원 황영수교수(88)님게 감사를 드립니다.   황교수님은 서규철교수님의 부탁에 따라 주변의 원로분들로 “희망조”를 조직하여 김교수의 자서전 출판을 위하여 적극 활동하면서  농학원지도부의 협조와 지지를 쟁취하였습니다. 그사이 황수님은 김교수를 만나려 룡정ㅡ조양천을 오가다가 교통사고를 당해 병원치료까지 받으셨답니다. 4, 하는 사업이 그렇게도 분망하면서도 “김수철 전”에 머리말을 쓰신 연변농학원 량성운 원장님게 감사를 드립니다. 5, 다망중에서도 저의 원고를 열심히 읽으시고 본 책의 추천서를 쓰신 중국 “단군문학상” 리사회 신봉철회장님께 뜨거운 감사를 드립니다.  다음은  본 책이 출판되기까지 지나온 3년은 저의 인생공부  3 년이였음을 특히 밝힙니다.  저는 김수철교수님의 제자입니다.  저는 이번 집필을 통해 김수철스승님의 인간과 자연에 대한 무한한 사랑을 알게 되었고 김교수님의 가슴뛰는 효사랑, 가슴뛰는 일, 가슴뛰는 삶에 깊은 감동을 받았습니다.   김수철교수님은 21세기의 “리시진”, 동아급(東亞級)식물학자, 백두대간의 불로송입니다.  김수철교수님은 연변대학(연변농학원)의 자랑이며 조선민족의 자랑이며 중국꿈의 실현을 위해 정년을 모르고 일생의 막날까지 현역으로 분투하는 중국지식분자의 본보기입니다.   제가 이런 비범한 인물을 문자로 력사에 남길 수 있음은 저에게는 둘도 없는 행운이며 영광이였습니다.  김수철교수님은 저의  삶의 평생본보기이며 참된 라침판이며 저의 삶의 질의 방부제로 될 것입니다.   끝으로 이번 과정을 통하여 력사문자기록의 중요성을 한층 깊이 터득 하였습니다.    “사회생활의 문자기록은 문명의 산물이다.”   “문자기록은 인류를 망각에서 구출하는 유일한 방도이다”   이는 김수철교수님의 명언입니다.   “력사란 과거와 현재의 끊임없는 대화이다. 과거는 현재의 빚에 비춰졌을 때만이 비로서 리해될수 있으며 또한 현재도 과거의 조명속에서만이 충분히 리해될 수 있다”  이는 영국의 유명한 력사가 에드워드 헬릿카의 명언입니다.   근 한 세기를 살아온 김수철교수님의 인생사 기록은 우리 민족의 백년사기록이며 우리 민족의 문화사기록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저는 “연변대학출판사” 편집선생님이 “연변농학원에서 요구하는 출판시간(9월 10일)을 보증하려면 원고내용을 퍽 줄여야 한다”는 요구에 할수 없이 원래 준비한 본책의 출판원고에서 20여 편의 원고를 줄이였습니다. 그리고는 김수철교수님의 백년력사와 우리 민족의 문화사를 문자기록으로  후세에 남기기 위하여 3천 여원의 인쇄비를 더 투자하여  “백두대간의 불로송 ㅡ 김수철”을 비매품 책으로 출판 하여  “김수철 전”의 전부 내용을 문자기록으로 세상에 남겼습니다. (이 책은 문법, 문자, 기호에 틀림이 있음을 밝힘)  그러니까 “21세기의 “리시진” ㅡ 김수철전”은 김수철의 선집(選集),  “백두대간의 불로송 ㅡ 김수철”은 김수철의 전집(全集)으로 우리 민족의 력사에 영원히 남게 되였습니다.    필자는 “김수철전”은 정치나 종교와는 관계없이 오늘에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에게는 물론 미래에 살아 갈 누구의 삶에도 도움이 되고 힘이 될 한부의 력사교과서와 인생교양서로 될 것임을 확신합니다.   끝으로 연변대학출판사 김미숙편집선생의 로고에 감사패를 드리는 것으로 뜨거운 감사를 표합니다!  김수철교수님 건장장수하세요! 감사합니다!  오기활 .  2019년 9월 21일(연길국제호텔에서)  
298    사명감이 없이는 도저히 할수 없는 일(김수철 전 2) 댓글:  조회:847  추천:2  2019-10-28
미국의 R.E.Perdue같은 학자는 이미 5만종의 식물을 훌터서 그가운데서 암세포에 대하여 파괴작용을 지닌 2200종의 성분을 발견해 내기로 하였으나 아직도 완전한 특효약이 개발될려면 전도요원한 감이 든다. 그런데 본초학의 역사적 전통을 지닌 중국에서 소중한 문헌이 발간되였으니 “常敏毅 編著.抗癌本草”1989年板. 湖南科學技術出版社刊이 그것이다. 그와 같이 좋은 문헌이 나왔으나 언어의 장벽, 더군다나 “簡化字”로 기술되여 있어서 읽기가 어려워서 곤란이 있었는데 금반 “延邊農學院植物學 敎授 金洙哲 先生”에 의하여 한국어로 번역되였을 뿐만 아니라 자상스러운 주해(註解)까지 마련되여 있으니 금상첨화(錦上添花)라고  아니할수 없다. 이와 같은 역작(力作)을 이룩한 김 교수는 비록 중국에 계시는 교포이기는 하지만 한국인으로서의 긍지와 모국에 이바지할려는 드높은 사명감이 없이는 도저히 될 수 없는 일이다. 더군다나 우리나라의 출판사 “바람과 물결”의 사장이신 구윤서 선생의 물심양면의 협력이 없었더라면 번역사업이 이룩될 수 없었을 것이다.  하루 속히 활자화되여 연구자들의 손에 들어오게 되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이와 같은 학술서적의 번역이란 실로 어려운 일이며 특히 본초서에 있어서는 기원식물(基源植物)의 동정(同定)이 문제가 되며 동물실험이나 화확적 연구에 있어서 항암효과의 단서가 보인다고 하여 그것이 곧바로 인체에 대한 치료제가 된다는 보증은 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번역된 원고를 보니 고증과 주해가 번역자에 의하여 추가되였고 식물의 도해(圖解)까지 들어 있어 번역본의 책이름도 “註解圖說抗癌本草”라고 되여 있다. 듣건대 원본을 이미 대만에서는 간화자(簡化字)아닌 정자(定字.繁體字)로 인쇄된 것이 출판되였으며 미국학자에 의하서 영문판도 준비되고 있다고 하니 이 책에 대한 내외의 기대가 얼마나 큰가를 짐작할수 있다… . 고국의 암 연구 발전을 위하여 우리말로 번역의 노고를 스스로 맡으신 번역자에게 심심한 감사를 보내고자 한다. 1992.1 서울대학교 명예교수, 약학박사 洪 文 和 識 (“註解圖說抗癌本草” 서문에서 )  
297    “이 위대한 사업을 누가 완성할수있는가?”(김수철 전 1) 댓글:  조회:994  추천:0  2019-10-21
                                                                                                       (오른쪽 김수철교수) 연변농학원의 정년퇴직교수, 21세기의 “리시진” 김수철교수(95)는 식물학자의 량심과 사명감으로 “길림성식물지”를 출판하여 후세에 전하고저 수년간을 고군작전을 하던중  2017년6월18일에 이렇게 자기한테  두번째 동원령을  내렸다.     ㅡ 나는 자연이 낳은 김수철, 백두산이 배육한 김수철, 자연을 거울로 생명에 대한 존중과 인류에 대한 사랑으로 자연에 보답하려는 김수철이다. “吉林省植物誌”출판은 길림성식물연구사업의 위대한 고봉으로 지금까지 누구도 이 고봉을 등반한 사람이 나타나지 않았다. 이 위대한 사업의 완성자를 중국의 5천년력사가 기다리고 있다. 20년전까지 매우 어려웠던 이 프로젝트가 지금에 와서는 상대적으로 수월하게 완성할 수 있는 조건이 갖추어졌다. 그렇다면 누가 이 위대한 사업을 책임지고 완성할수있는가? 평상시에 이 방면에 뜻을 두고 남모르는 노력으로 때를 기다리던 사람에게만이 이 위대한 사업을 완성할 수 있는 챤스, 권리, 의무가 부과된다. “하늘 땅에 감사하다(謝天謝地)”고 할가, 아니면 다행이라할가.   하늘은 준비된 文獻자료가 수두룩하고 식물분류학 기초가 있고 꾸준히 한 우물을 판, 몸 건강 상태가 좋은 金洙哲에게 이 프로젝트를 완성해야할 의무와 권리, 그리고 선택의 자유를 주었다. 즉 하늘이93세의 이 老軀에 건강, 정신, 활기를 注入하여 나더러 이 사업을 완성하도록 “미캐니즘”을 설치하여 작동하는 “로보트”로 만들어 놓고 이 “로보트”가 정말 이 일을 참답게 해낼수 있을가를 여러모로 試驗하고 있다. 하늘은 내가 갖은 애로를 물리치고 끝까지 완성할수 있는가를 시험한다. 나에게서 “머모리디스크”도 훔쳐내고 디스크의 기록도 지워 버리기도 하면서 내가 악렬한 조건에서도 힘을 내여 전진, 또 전진 하는가를 지켜 보면서 나를 고험한다. 그리고 만약에 내가 試驗에서 락제를 하면 필경 나를 금밖으로 밀어 낼 것이다.  나는 하늘의 이런 속심을 언녕 짐작하였다. 그러나 나는 절대로 락심하지 않고 아무리 악렬한 조건이라도 웃음으로 넘기고 아홉번을 넘어지면 열번 일어서는 “오또기”(不倒翁)정신으로 기필코 敢當해 낼 것이다. 내가 신심있게 “하면 된다!”면 많은 사람들이 “되면 한다!”며 적극 따라 나서서 나를 협력할 것이 분명하다. 나는 자아 보건법으로 건강한 신체를 보존하면서 담대포천(膽大包天)의 정신과 의력으로 계속 한 우물만 팔 것이다. 나에게는 조선족으로, 연변대학의 일원으로, 다른 민족에 못지 않게 사회의 발전에 유익한 일을 추진하겠다는 경쟁심도 있다. 지금 우리가 연변축구의 사회적 경쟁심을 피부로 느끼듯이 나도 식물학이란 “축구장”에서 풀 뽈을 차는 조선족 스포츠맨으로 비록 기교는 다르겠지만 기필코 승부하려는 경쟁심만은 같을 것이다.  저 하늘의 뭇별들이 백번 넘어지면 천번 벌떡 일어서는 나를 향해 반짝이며 나에게 크낙한 용기와 희망을 준다. 그리고 태양은 나더러 하늘의 시련을 웃음으로 받아 넘기며 종전보다도 더 강한 특수 강철이 되라고 뜨거운 불덩이로 이 몸을 담금질을 한다.   나는 꼭 잘 해 내겠다! 오직 잘 해 내는 것만이 나의 사명이고 운명이다. 김수철 2017년6월18일 (이 밤도 연구비 결핍으로 고민을 하면서) “그렇다면 누가 이 위대한 사업을 책임지고 완성할수 있는가?” 이에 “길림신문”사 김성걸, 안상근기자가 소식을 전해 왔다.  ㅡ 연변대학건교 70돌계렬행사의 하나인 《길림성식물지》 발행식이 9월 21일 오후, 연길에서 있었다. 《길림성식물지》는 연변대학 농학원의 원로교수인 김수철과 그의 손녀이며 현임 연변농학원 교수인 김영화가 주필을 맡았다. 식물지는 한 나라와 지역의 식물종류를 기재하는 분류학 전문저작으로서 식물학분야 과학연구와 지역생태문명건설에서 모두 중요한 의의를 가지고 있다. 올해 95세 고령인 김수철교수는 연변대학 농학원의 제1대식물학 전문가로서 60여년 긴 세월을 길림성 실지고찰을 통해 식물표본 수만종을 수집하면서 비교적 전면적으로 길림성식물자원분포와 종류를 장악했다. 이번에 출간된《길림성식물지》에는 김수철교수의 60년간의 과학연구심혈과 성과들이 깃들어 있어 출간의미가 크다.  료해에 따르면 현재 우리 나라의 길림성과 섬서성을 제외한 기타 지역들에는 모두 성, 시, 구의 식물지가 있다. 길림성은 북반구유라시아대륙에서 가장 큰 물종유전자고인바 식물자원이 풍부하고 야생식물종류가 전국총수량의 13%나 차지할뿐만아니라 자연생태자원이 전국적으로도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있다.  이날 《길림성식물지》의 출간을 길림성의 식물지편찬의 공백을 메웠을뿐만아니라 중국식물지편찬의 공백을 메웠다는 평가를 받았다.   이번 출간식과 함께 연변대학교에서는 지난 70년간 식물분류학연구에서 중대한 기여를 한 김수철교수의 업적을 기리여 그에게 “길림성식물분류 백과전서”라는영예칭호를 수여했다. 연변대학 농학원 책임일군은 출간식 축사에서 “김수철로교수의 초심을 잊지 않고 열심히 사업하는 정신은 후학들을 깊이 감동시킨다”면서 “김수철교수는 연변대학의 자랑일뿐만아니라 후학들이 따라배울 새시대의 모범”이라고 말했다. (길림신문, 2019. 9.21)  지난 10월 11일 몇몇 원로교수들의 축하모임에서 김수철교수는“길림성식물지”(총6집)와 “길림성식물도감”(3권)을 끝내자면 아직도 6년 남짓한 시간이 수요된다. 그러니까 내가 죽으려고 해도 시간이 없어서 못 죽는다”. “나는 지금  매일 ‘그림알’을 낳는다”며 두손들어 자신감을 표했다. 오기활
296    듣기 좋은 소리 댓글:  조회:517  추천:0  2019-10-01
남의 외모에 관한 질문을 받는 경우가 있다. 대개의 경우가 듣기 좋은 소리를 하는 것이 보편적이다. 그러나 그것이 진상이 아니라면 차라리 구체적인 언급을 피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남의 면전에서 지나치게 아부하고 칭찬하는 말을 하는 것은 차라리 돌아서서 그를 욕하지 않는 것만 못하다.  더구나 그 대상이 당신의 상사나 최고 경영자라면 말이다.   이런 사화가 있다.   제나라 상국(재상) 추기는 키가 팔 척이나 되고 외모가 출중했다. 어느 날 아침 그가 옷을 잘 차려입고 거울 앞에 서서 부인에게 물었다. “부인, 나와 성 북쪽에서 사는 서공을 비교하면 누가 더 잘났소?” (서공은 제나라에서 유명한 미남자다.) “당연히 당신이 잘났죠. 어찌 서공을 당신에게 비기겠어요?”  추기는 자기가 서공보다 잘났다는 부인의 말이 믿기지 않아서 다시 첩에게 물었다.  “나와 서공을 비기면 도대체 누가 더 잘났소?”  “서공을 어떻게 나의리에게 비기겠습니까?”  첩도 같은 대답이였다.  다음 날 한 손님이 찾아왔다. 그와 담소를 나누던 중 추기는 또 그에게 물었다.  “나와 서공을 비교하면 어느 쪽이 잘났소?”  “서공이 상공보다 못합니다.”  손님의 대답이다.  또 며칠이 지나 서공이 찾아왔다. 추기는 그를 자세히 살펴보았는데 아무리 살펴보아도 지신이 서공보다 잘났다는 말이 수긍이 가지 않았다. 그래서 거울 앞에 서서 곰곰히 자신을 뜯어보니 스스로 보기에도 자신이 서공에게 비길 바가 못되였다.  밤에 추기는 침대에 누워 속으로 중얼거리며 이리저리 생각해보니 마침내 스스로 모든 것이 리해가 되였다. (부인의 듣기 좋은 소리는 나를 편애하기 때문이요 첩이 그러는 것은 나를 두려워하는 때문이며 손님이 나에게 듣기 좋은 소리를 하는 것은 바로 나에게서 얻을 것이 있기 때문이로다!)  추기가 곰곰히 생각해 보니 스스로 이미 알고 있는 대답들이였다.  필자는 꼭 9년전에 “길림신문”에 “손금이 없는 간부”라는 글을  올렸다.   글에서 필자는 “백성의 질고를 고려하지 않고 다만 ‘상급지도자’의 정서를 고려하며  ‘상급지도자’의 “애착”을 바라며...  상급에 아부하는  사람(간부)들을 “손금이 없는” “지체장애자”라고 칭했다. 이네들은 상급지도자의 앞에서 그저 허리를 굽실굽실거리며 “예, 예”하며 손바닥만 싹싹 비벼대다 보니 손금이 달아서 없어 졌다는 뜻에서  말이다.  필자는 스스로 자신을 발견하고 “이미 알고 있는 대답”을 그나마 제때에 찾은  추기의 “재상맛”이 감미스럽다.  오기활
295    “실패학” 유감(有感) 댓글:  조회:683  추천:0  2019-09-01
일본 도꾜대학  하타무라요타로(畑村 洋太郞)교수는 “실패학”이란 학문을 처음 정립한 사람이다. 그가 쓴 “실패학의 권유”는 유명한 저술로 “새로운 가치의 창조는 실패를 통해서만 가능하다”고 역설했다.  일본의 세계적인 경영자 혼다 소이치로(本田 宗一郞)는 회사에 “실패상”을 설치하여 독창적인 기술의 개발을 독려하였다. 그는 기술자들이 당당하게 실패한 프로젝트에 대해 그 원인이나 경로를 정확히 밝혀내면 책임을 묻는 대신에 상을 주며 격려함으로써 그들의 사기를 고무해 주었다. 이런 노력의 결실을 맺어 혼다 기술 연구소는 자동차 엔진 기술분야에서 세계 제일의 경쟁력을 지닐 수 있었다.  또 lBM의 설립자인 톰 왓슨은 정당하게 실패한 일에 대해서는 결코 그 담당자의 책임을 추구한 일이 없다. 이것은 그의 인재관리 성공비결 중 하나라고 할수 있다.  한번은 젊은 부사장이 매우 모험적인 신제품 개발계획을 보고했다. 톰 왓슨은 과연 이 사업이 성공할 수 있을지를 그에게 물었다. 부사장은  위험부담이 큰 사업일수록 큰 수익을 가져올 가능성이 높다며 계획의 실행을 강력히 주장했다. 그러나  그 신제품 개발사업은 회사에 1천만 딸라에 달하는 거액의 손해를 입히고 실패하고 말았다. 톰 왓슨이 부사장을 불렀을 때 부사장이 “회사에 막대한 손해를 끼친 책임을 통감하며 사직서를 제출합니다.”고 말했다  이에 톰 왓슨이 정색을 하며 말했다. “무슨 소린가! 나는 자네를 교육하는 데 무려 1천만 딸라를 들였는데...다시 시작하게” 톰 왓슨의 격려에 고무된 부사장은 다시 한번 도전해 마침내 그 사업을 성공의 궤도에 올렸다. 우리는 성공 사례를 무척 좋아한다. 그러나 성공 사례에 못지 않게 중요한 것이 실패 사례이다. 우리는 다른 사람의 성공을 통해 배우듯이 실패를 통해서도 배울수 있어야 한다. 실패로부터 얻는 교훈은 창조적인 발전의 계기로 활용할 수 있다. 이런 점을 하나의 학문으로 발전시킨 것이 바로 실패학이다.  실패학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어떤 실패든 그것을 감추지 말고 있는 그대로 공개하는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기업의 구성원들이 그 실패의 과정과 교훈을 공유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오기활
‹처음  이전 1 2 3 4 5 6 다음  맨뒤›
조글로홈 | 미디어 | 포럼 | CEO비즈 | 쉼터 | 칼럼 | 문학 | 사이버박물관 | 광고문의
[조글로]조선족네트워크교류협회(潮歌网) • 연변두만강국제정보항(延边图们江地区国际信息港) •아리랑주간(阿里郎周刊)
地址:吉林省延吉市光明街89号A座9001室 电子邮件: postmaster@zoglo.net 电话号码: 0433) 251-7898 251-8178
吉林省互联网出版备案登记证 [吉新出网备字61号] | 增值电信业务经营许可证 [吉B-2-4-20080054] [吉ICP备05008370号]
Copyright C 2005-2016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