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기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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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0    항일가족 99세 할머니의 간절한 원망을 들어본다 댓글:  조회:274  추천:1  2018-10-29
 “어찌하여 우리를 좋다, 나쁘다로 안 갈라주오?” 월전(9월 5일)에 필자는 한국 친구로부터 “나의 후배가 중풍에 걸렸는데 오선생이 쓴 책(시대의 맥박과 더불어 숨을 쉬는 사람들)의 587페지에 실린 김의사의 중풍치료약을 보내 주세요”라는 부탁을 받고 연길시 동아(東亞)진료소 김설희소장을 찾았다. 지난 세기 60년대에 김소장은 도문서 필자의 누님네와 길을 사이 두고 사이좋게 지낸 이웃이다. 볼일을 끝낸후 김소장의 “올해 99세인 친정어머니가 지금도 건강에 아무런 문제없이 정정히 보냅니다.”는 자랑에 호기심이 강한 필자는 김소장 따라 그의 저택으로 갔다. 10살 때 상한 손가락을 보이면서 가족항일사를 얘기하는 리남조할머니 “어머니, 손님이 왔습니다. 누군지 맞춰 보세요” 네쩨 딸이 어머님의 방문을 열며 하는 말에 백발이 풍성한 머리에 함박꽃 얼굴로 잔 웃음을 피우던 할머니가 한참후 “오기자구만!” 하면서 급히 침대에서 내려 필자의 두 손을 반갑게 잡아 주었다. “나를 이렇게 쉽게 알아 봄두?”  “정말 대단하꾸마!” “나는 오기자가 쓴 책들을 다 읽어 봤소, 정말 자랑스럽소!” 필자는 100세 할머니의 둘째 딸(김성희)과 도문중학교 동반동창이다. 그때 성희는 얼굴이 예쁜데다가 노래까지 잘하여 반에서 인기였고 그의 어머니(李南祚)는 도량이 넓고 선량하며 특히는 세상사에 박식한 것으로 동네의 인기였다. 필자를 만난 할머니는 소식이 없던 아들을 찾은 듯 그렇게도 기뻐하며 걸상까지 챙겨가지고 “오늘은 기자와 무릎말을  하껬소”며 웃음꽃을 피웠다. 할머니는 할아버지버지부터 아버지, 언니까지(사촌언니 李勤淑, 공산당원,  아버지가 언니네 생활난으로 언니를 부양했음)  항일활동으로 밖에서 돌다 보니 리남조는 열살 때부터 (형제 7남1녀) 어머니를 도와 가무며 농사일을 도와 나섰고 남편이 46년 전에 사망하다보니   혼자서 자식들의 뒤바라지를 하면서 5명의 자손들을 교수, 의사, 박사로 양성한 박사가정 어머니(할머니)였다. 할머니는 당신의 이름을 오얏 李, 앞 南, 복조 祚 라고, 原籍이 한국 경상북도 예천군 용궁면 무의리(慶尙北道 醴泉郡 龍宮面無依里)라고 더듬없이 말하고 나서 증조할아버지의 이름도 오얏 李 , 셀 數, 으뜸 元으로 리수원이라고 알려 줬다. 할머니는 근 백년전에 부모 따라 조선의 신의주를 거쳐 단동 ㅡ 심양 ㅡ해림 에서 살다가 나중에 동경성에 정착했다며 당년에 월강민들이 불렀다는 설음과 한에 넘친 “단동교”노래의 가사까지 술술 외웠다. 그리고 80년 전에 할아버지(리동락)를 따라 리향 30년 만에 고향에 가서 선조들의 산소를 찾아보았고 동네 친척에게 선조들의 산소를 잘 지켜달라며 두 마지기(2무)의 땅을 무상으로 주고 왔다는 이야기까지 곁들었다 할머니의 한어수평은 한족과 다름이 없다는 느낌을 주였다. 할머니에 따르면 항일독립군인 할아버지(리수원)는 “사람은 까막눈이 되여서는 안 된다”며 사비를 팔아 동네에6년제 사립학교를 세웠고 아버지(리대성)는 항일을 하다가 일본놈들에게 학살되였고 언니(리근숙)는28세 나이에 일본놈들에게 학살되였다고 한다.   “오기자, 나는 주덕해전을 통독하면서 한 가문, 한 사람의 좋고 나쁨을 잘 알게 되였소, 그런데 우리 가문은 지금까지 좋은 사람들인지 나쁜 사람들인지를 모르고 있소.” “지금까지 중국에서 알려주지 않으니 한국에 물어 볼가,  조선에 물어 볼가,  아니면 일본에 물어 볼가?”(뜻인즉 가문의 항일력사 기록이 없다는 것 ㅡ 편자) 이렇게 물어보는 할머니는 당년에 아버지 등 5명이 일본놈들에게 학살된 사실은 후에 주보중장군한테서 알게 되였고 언니의 사적은 주보증장군의 부인 왕일지가 썩 후에 당지 해당부문에 리문숙의 항일사적을 곁들어서야 언니의 약간한 사적이 세상에 밝혀지고 목단강에 리근숙렬사비가 세워졌다고 한다. 할머니는 어려서부터 어머니를 도와 가사를 맡았다면서 10살 때 일제놈들이 툐벌하려 온다는 소식을 듣고 피난을 가면서 큰 돌로 돼지굴 굴문을 받쳐놓다가 그만 오른쪽 셋 째 손가락을 돌에 상해 석달간이나 고생했다고, 지금도 상한 손가락의 상처를 만지면서 “너도 나와 함께 백살을 먹는구나!”며 그때 일을 떠 올린다며 손가락 “자랑”을 하였다. “나는 지금 자식들더러 납들지 말고 조용히  살라고 당부하오, 아니면 아버지가 항일렬사라고 해도 아무런 흔적이 없고 자식들만 고생을 시켰는데 납둬서는 무얼하오?”  “우리 집에 돈은 없고 자랑거리라면  나에게 박사자손이 5명이라는 것 뿐이요 ” … … “우리가 돈은 관계하자 말고 어머님의 치아를 몽땅 새롭게 바꿔드리자” 이날 자리를 같이한 자식들의 말참견에 필자는 고종명을 앞둔100세 로인에게 제철효도를 하는 자식들에게 머리가 숙여졌다. 영국의 유명한 력사가 에드워드핼릿카(E.H.카)는 “력사란 과거와 현재의 끊임없는 대화이다” “과거는 현재의 빛에 비춰졌을 때만이 비로소 리해될수 있으며 또한 현재도 과거의 조명속에서만이 충분히 리해될수 있다”고 하였다. 이에 비춰 필자는 한세기를 살아온 리남조의 눈물겨운 구술사가 대를 이을 영원한 력사로 기록되여 오늘에 살아가는 사람들은 물론 미래에 살아갈 후세들에게 빛과 호소력으로 될만한 민족의 교양서로 하루속히 세상에 태여 나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이날 필자를 만나 그만큼이라도 처음 마음속 원망을 토로 했다며  기쁘하는 할머니는 기어코 층집에서 내려와  대문밖 멀리까지 필자를 전송하였다. 오기활 사진설명’ 2, 대문밖까지 필자를 전송하는 100세 할머니와 함께 기념사진을 남겼다. 3, 이날 자리를 함께한 두 아들과 김설희부부  
269    날강도와 돌팔이 댓글:  조회:138  추천:0  2018-10-16
  피땀을 흘린 만큼 돈을 벌어 재산을 일구는 일은 너무나도 당당하고 자랑스럽다. 피땀으로 번 돈은 랑비하거나 탕진되는 법이 거의 없다. 그러나 남의 등을 쳐서 돈을 챙긴 인간들은 돈이 아까운 줄을 모르기에 검은 돈을 람용한다. 그러기에 사람들은  “그 사람이 돈을 쓰는 것을 보면 그 돈이 어떻게 왔는가를 알 수 있다.”고 한다. 정치와 장사꾼이 야합을 하면 백성들이 낸 세금을 갖은 수단으로 나누어 먹으려고 애를 쓰고 권세가 돈맛을 들이면 될 일을 못되게 해서 돈을 후려내고 안될 일을 되게 해서 더러운 돈을 챙긴다. 그래서 “지금은 물어보면 될 일도 안 된다고 하고 안 되는 일도 돈을 내면 되니깐 물어보지 말라”는 말이 있다. 뢰물을 챙기며 나라의 세금을 잘라내고 백성의 돈을 뜯어먹는 놈을 날강도라 하고 사람의 약점을 악용해 돈을 뜯어내는 놈을 돌팔이라 한다.  검은 돈, 더러운 돈, 그리고 사람을 잡는 돈이란 본래 살인강도의 것만이 아니다. 손에 칼을 들고 강도질을 하는 도둑놈은 내놓고 도둑질을 하기에 잡을 수 있지만 뒤로 뢰물을 챙기고 나라의 세금과 백성의 돈을 잘라먹는 날강도와 남의 등을 쳐먹는 돌팔이는 버젓하게 행세를 하면서 도둑질을 하기에 쉽게 눈에 뜨이지 않는다. 사회나 주변을 살펴 보면 날강도(부패관리)도 많고 돌팔이(의사, 집법자, 정상배..)도 많다. 해당 자료에 따르면 한심하기로 전국에서 상반년에 빈곤부축사업령역에서만 6만 1500명의 “날강도”와 “돌팔이”를 처리했다니 말이다. 호화롭게 살면서 출세했다고 으스대는 날강도와 돌팔이들의 꼴은  들통이 나고 천벌을 받게 마련이다. 오기활                
268    “조선족이 앵무샌가?” 댓글:  조회:163  추천:0  2018-10-15
 일전 훈춘서 아이 첫 돐생일에 참가하였다. 그런데 “자랑스런 우리 아이 첫 돌잔치”란 현수막이 방영되자 미리 준비가 있은 듯이 자리를 같이한 80대 할머니가 “조선족이 앵무샌가?”며 한바탕 불만을 토로하였다. 20대부터 교직에서 정년퇴직을 했다는 이 할머니는 ”우리는 ‘첫 돍’이라고 배워줬는데 왜’ 첫 돌’ 이라고 하냐?” “우리는 ‘려관”이라고 배워줬는데 왜 ‘여관’이라고 하냐? ...며 조선족이 앵무샌가며 한바탕 공소했다. 앵무새는 사람의 말 흉내를 잘 내기에 흔히 남의 말흉내를 잘 내는 자들을 앵무새에 비긴다. 필자는 “첫돌”이 맞냐, “첫 돐”이 맞냐를 판단하기 어렵지만 필자가 알기로는 건국후 “중국의 조선어문자는 평양을 기준으로 해야 한다”는 주은래총리의 지시에 따라 중국의 조선어문자규범을 평양을 기준으로 하였다.  이에 따르면 '돌'은 생일을 표하고 '돐'은 주기를 표하는 것으로 사용이 구분되였다. 한국도 예전에는 “돌”과 “돌”을 구분하여 사용하다가 후에  “표준어 6항에 근거하여 그 같은 구분이 불필요한 것으로 '돌'로 통일했다”고,  “려관”은 "북한어"라고 사전에 밝혀있다. 그런데 나라의 개혁개방과 함께 한중교류의 심화와 한류의 영향으로 상당한 부류의 조선족들이 한국을 따르고 한국을 흉내 내는 것이 류행으로 된 데서 연변의 조선족들이 앵무새마냥 한국말을 하느라고 말끝마다 어색할 정도로 “요”를 달았고 조선어문자규범도 한국을 본 땄다. 례하면 일제 때는 일제의 강압적인 “창씨개명”으로 조선인들이 부득불 일본성과 이름을 가졌다면 지금은 조선족인(朝鮮族人) 들이 누구의 강요가 없는데 스스로 자기의 리(李)씨 성을 이씨라 부르고 쓰며 수풀 림(林)씨를 맡을 임(任)씨로 부르고 쓰며 "창씨"를 했다. 훈춘할머니는 바로 이런 사람과 현상을  “앵무새”라며 비난했다. 필자의 눈에는 물론 “앵무새”도 거슬리지만 아예 우리의 말과 문자를  외면하는  “덜된 사람”도 눈에 거슬린다. 연변텔레비를 보면 한복차림을 한 인민(당)대표들이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우리 말을 버리고 한어를 하며 조선족을 대표한 부분적 지도자들마저 우리 말을 외면하는 것은 물론 아무런 꺼리낌도 없이 기자들 앞에서 “我根本不㸔朝鮮文”(나는 근본상 조선문을 안본다)라고 자랑을 했다. 이 밖에도 조선족들이 출연하는 ”가짜 연출”도 어색이 아닌, 창피할 정도로 필자의 눈에 거슬린다. 우리 민족은 예로부터 례복, 상(喪)복, 작업복이 분명한데 텔레비를 보면 조선족녀성들이 명절한복차림으로 벼가을 하고 사과배를 따는데 그래 이렇게 때를 모르고 옷을 입은 화면을 보고 욕설이 뒤따르지 않겠는가?  필자가 취재한 어느 화백은 조선족들이 평상시에 민족복장을 입지 않기에 아무 때나 소수민족의 복장을 그리기 위해 서장을 간다는데 말이다.  필자는 무척 대고 한국을 흉내 내는 “앵무새”, 자기 민족의 말과 문자를 외면하는 “덜된 대표”, “덜된 간부”, 그리고 “가짜 연출”을 만들어 내는 “무지한" 도연…등등의  주범들은 모두가 타민족이 아닌 우리 민족 자신이다고 감히 말한다.  이에 비춰 연변조선족자치주 제14기 인대상무워원회는 9차 회의에서 9월 2일을 《조선어문자의 날》로 결정하면서 “조선어문자의 날”을 제정함은 사회적으로 자치민족언어습관을 존중하고 조선어발전의 량호한 분위기를 조성하며 민족단결사업을 추진하고 민족전통을 계승하며 민족의 우수한 문화와 특색경제를 발전시키고 조선어 문자사업을 번영 발전시키기 위함이다”고  밝혔다. 이로보아 “조선어문자의 날”의 제정은 우리 민족이 자기민족의 문자와 언어를 홀시하고 잃어 버림을 반대하고 방지하기 위한 하나의 법적 조치라 하겠다. 조선언어문자의 규범화, 표준화 및 그 건전한 발전을 도모하는 것은 미룰 수 없는 문화적 책임이고 사회적 의무이다. 모종 의미에서 말하면 민족이란 언어문자의 공동체다. 언어문자를 상실하면 민족정체성이 사라진다. 청나라를 세우고 중국을 통치하던 만족은 본 민족의 언어문자를 쓰지 않은데서 만어가 소실되여 지금은 중국전역에서 만어를 아는 만족이 겨우 10여명밖에 없다니 만족이란 공동체를 운운할수 있는가? 지금은 글로벌(세계화)시대다. 글로벌 시대에 우리는 더욱 정신을 가다듬고 우리 민족의 전통문화 우수성과 자주성을 고수해야 한다. 글로벌시대에 우리가 자기 민족의 말과 글조차 모른다면 어찌 민족의 군체며 민족의 자질을 운운할수 있겠는가! 오기활                                                               
267    <<통일의 론리는 간단하다, 친하면 된다>> 댓글:  조회:490  추천:2  2018-10-10
 이 글은 필자가 2014년 4월 26일에 한국 영문월간 (디플로머시)잡지사 임덕규(任德奎)회장 인터뷰이다. 최근에 조한, 조미를 선두로 한 국제적인 평화대기후의 변화로 조선반도의 영구적인평화정착에 큰 가망이 현실로 다가 오니 필자는 당년에 발표를 안 했던 이 글을 떠올리며 오늘 그때 원고를 그대로 올린다. 그때 나이 79세인 임회장의 건강이 4년(2010년) 전과 다름없고 자애로움에 예지가 담긴  그의 실눈웃음은 그가 눈을 떴는지 감안는지를 분간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효(孝)를 백행지원으로 는 임회장은 스스로 자기는 전세계 평화를 창조하려 다니는 사람이다며 필자가 어리둥절할 정도로 큼직큼직한 세상일을 들려 줬는데 화제마다에 로 부언을 했다.  임회장은 전략으로 지금까지 에 세계 여러 나라의 정상들을 400여 명을 올렸는데 360여명은 그가 직접 인터뷰를 하였다. 그가 한 개 나라 정상을 수번 만난 차수로 합하면 그가 세계의 정상들을 만난 차수가 1000 번이 넘고 5대양 6대주를 넘나들며 찾은 나라가 100개를 넘는다고 하였다.  그의 사무실 한쪽벽은 완전히 그가 만난 여러 나라 정상들의 사진들로 도배되였다. 초심을 잊지 않고 임회장은 한국 논산시 부적면 탑정리의 열두마지기농가집에서 으로 태여났다. 그때는 조선이 일본식민지라 그가 초등학교 3학년 1학기를 다닐 때 까지 조선말을 못하고 한글도 못 배웠다 1945년에 > 해방을 맞고서야 2학기부터 자기나라의 말을 하며 자기나라의 한글을 배우기 시작했다. 그때 새로 태여 난 나라에 국회의원이 생긴다는 말을 듣고 일찍 초등학교 4학년 때 는 꿈을 간직했단다. 그는 국회의원이 되려면 고 생각하고 자기의 꿈을 실현하기 위해 열심히 뛰였다. 1년간 신문배달을, 8년간 가정교사를 하면서 동국대학교법과 석, 박사과정을 마치고 전략으로  임덕규박사는 1966년부터 동국대학에서 국제법을 가르쳤고 1968년부터 신화일보, 동화통신 론설위원을, 1981년에 11대국회의원(충남공주,국민당)으로 당선되여 초등학교 4학년때 품었던 꿈을 끝내 실현하였다.                           와의 인연 그가 를 꾸리게 된데는 독립운동가 출신으로 2대 외무장관과 유엔대사를 지낸 임병직박사를 만난것이 계기로 되였단다.  1960년에 동국대학을 졸업하고 법과박사과정이던 그는 1963년에 임씨네 집안에서 삼촌벌인 임병직박사가 귀국하자 자진해서 임박사의 시중을 들기 시작, 10년간에 임박사의 연줄로 당대의 거물급 인사들을 많이 알게 되였고 그들로부터 나라사랑을 배웠다.  임병직박사가 인도 주한대사로 지내며 를 창설, 임덕규가 간사로 일하며 국제외교를 경험하였다.  1972년 뮌헨 올림픽을 계기로 임박사가 세상에 한국을 홍보하기 위해 예술단을 이끌고 유럽순방을 떠나던 날 임덕규한테 이런 당부를 하였다. .  하늘 같은 어른님의 말씀에 임덕규는 그 자리에서 하겠다는 대답은 했지만 잡지를 꾸려 본 경험은 물론 영어수준, 자금 등으로 앞길이 막막했다. 그 때 한국에 영문으로 문장을 쓰는 인재도 몇이 없었다.  그러나 모든 걸 다 바쳐 독립운동을 하신 어르신들을 생각하니 말한 대로 안 하면 죄인이 될 것 같은 자책감이 앞섰다. 다행히도 4년간(1968-1971)신아일보 론설위원과 동화통신 출판부국장, 론설위원을 지낸 밑천으로 배짱이 생겨 전화를 잡혀 300만원의 자금을 마련하여 서울 무교동에 손바닥만한 사무실을 마련하였다. 그 때 합작동지라고는 지금 세계적인 사진작가로 활동하는 동화통신 사진부 차장 백남식이다. 둘이서 머리를 맞대고 3년 남짓이 아이디어를 짜낸 끝에 1975년 8월에 창간호를 발간, 창간호의 표지스토리는 한미 관계에 력점을 두고 미국포드대통령 가족사진을 싣고 성조기변천사, 력대 미국대통령의 친필서명, 력대 주한미국대사사진 등 내용으로 특집을 꾸렸다.  창간호가 나오니 미친 짓이라며 극구 말리던 사람들마저 니 죽자 살자 뛰여다녀도 힘이 드는 줄을 몰랐다. 광고를 얻기 위해 아침밥을 거르며 아침출근을 하는 기업체 사장들의 발목을 잡고
 필자는10여년간 일본을 나들며 “재일 조선족류학생 1세”를 취재하고 나서 “나는 조선족인이다”, “나는 동북아시아인이다”, “우리가 조선족이였기 때문에…”란  인터뷰채록을 다시 펼칠 때마다 감명이 깊어 진다. 일본의 조선족사회의 형성은 지난 80년대 “일본의 류학생 10만명 수용”정책에 띠라 중국 조선족류학생 도일(到日)을 시작으로30여 년의 력사를 갖고 있다.(일본은 외국 국적별통계만 있고 민족별통계가 없기에 재일 조선족수를 최대로 10만명으로 추정할뿐 정확한 수자는 파악하기 힘들다.)  “나는 조선족인(人)이다”의 대표적인 인물로 일본 BLUEDT주식회사 리동철회장이다. 동철씨는 중국인민대학 국민경제계획전업을 졸업하자바람으로 국가 로동부에 배치되여 2개월을 출근하다가  “먼저 희망을 품은 인간이 되는 길에 나서겠다”묘 1991년에 남들이 부러워하는 일터를 떠나 일본 류학길에 올랐다. 동철씨는 “우리가 개인적으로 조선족이라고 말하는 것은 틀렸다. 스스로를 조선족인(人)으로 칭해야 한다.”고 했다. 그에 따르면 人이 모여서 族을 이루기에 族이 人을 대체하지 못한다. 어느 전형인물이 그가 속한 민족을 대표하지만 어느 민족이 전형인물을 대표하지 못한다. 人을 알려면 “나는 누구인가?, 나는 어디에서 왔고 어디로 가야 하는가?”는 뿌리를 찾고 절대로 흔들리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우리가 “조선족인”의 뿌리를 잘 알고 개발하면 엄청난 힘을 갖게 된다. 모든 경쟁은 어느 사람이 하는 것이지 어느 민족이 하는 것이 아니다. 오바마는 “나는 흑인이라는 존재를 인식하고 그 속에서 희망을 찾고 자기를 개발한데서 대통령이 되였다.”고 한다. 인이 성공해야 그가 속한 민족이 부흥한다. 지금까지 구전(口傳)되는 “모주석이 없으면 새중국이 없다.’ “주덕해가 있었기에 연변조선족자치주가 있다.“가 이를 설명한다.   “나는 동아시아인이다”의 대표적인물로 재일 “조선족연구학회” 회장을 지낸 일본 후꾸리뀨(北陸)대학 리강철교수이다. 강철씨는 중앙민족학원 철학전업을 졸업하고 북경시위 당교 제1기 연구생, 중화전국총공회(中國工運学院)교수로 지내다가 “자유로운 학자의 길을 선택”하고저1991년에 일본류학을 선택하고 일본서 중국, 조선 한국, 로씨야, 몽골, 미국, 유럽을 드나들며 여러가지 국제무대에서 활약하였다. 그가 환일본해종합연구원 사무국장직을 맡고 “동북아시아개발은행 설립 및 일본대외정책”이란 연구테마로 세계 여러나라의 개발은행을 고찰하고 일본정부에 “동북아개발은행”설립관련보고서를 제출하여일본 내각부 산하 정책연구소에서 그를 사상 첫 외국인주임연구원으로 중용, 일본 전임수상 (후꾸다야스오(福田康夫)의 접견까지 받았다. “지금은 글로벌시대인만큼 초민족적, 초국가적 가치관이 수요된다. 나는 10전부터 나는 ‘동북아시아인다’며 일본을 발판으로 동북아 발전과 평화를 실현하는 것을 나의 인생가치와 목표로 했다.”, “나는 련합국위크숍(硏討會)에서 정식발언 먼저 “저는 동북아시안인입니다.”며 자아소개를 하여 한결 같은 인정을 받았다, 그는 동북아 6개국의 학술무대에서 “나는 동북아인”이라며 하는 일에 자신이 만만하다고 했다. 이밖에 필자가 만난 재일조선족 1세들은 거의 모두가 성공의 주원인을 “나는 조선족이였기 때문에…”라고 입을 모았다.  일본 건축업계의 거두인 일본 ㈜ JPM허영수사장은 “조선족들이 중국, 조선, 한국문화를 알고 일본문화를 배웠기에 일본이 아무리 선진국이라고 해도 세 가지 언어의 우세로 일본인들의 선배로 될수 있고, 창업, 취직률이 다른 민족보다 높다” 고 한다. 일본 “제1사진가”에 도전한 ㈜카와 변소화사장은 “나는 조선족이였기에 ‘중국가격+한국기술 +일본써비스 = 성공’이란 우리만의 경영공식을 모색하였다”고 하였고 일본 시즈오까대학 리련화 부교수는 “나는 조선족이였기에 중, 한, 일 3국을 대상한 동아시아사회보장연구에 선뜻이 나서서 거의 한눈으로도 아시아를 거시적으로 볼수있는 시야를 넓혔다”고 장담을 했다. 일본 조선족연구전문가인 와세다대학 권향숙박사(한국계일본인)는 “조선족들이 단시기내에 기업을 운영한다는 자체가 상당히 놀라운 능력이다. 조선족들이 일본의 주류사회와 상류사회에 진출하여 활동하는 인물들이 많은데 이런 현상은 동아시아에서 흔지 않다.”며 “형은 상해에서 비즈니스를, 부모님은 한국에서 막로동을, 나는 일본에서 류학생활을”이라는 조선족류학생들을 통해 이는 조선족들의 가족리산이면서도 가족련결이 잘 진행되는 것으로 이런 다국적인 가족이 어느 민족에게 또 있을가는 생각이 든다”고 감명이 깊게 말하였다.. 필자는 전 지구촌에 뿌리를 튼튼히 내리려는 모든 조선족들은 나는 “조선족인이다”, “동아시아인이다” “우리는 조선족이기 때문에…”를 반추하며 민족의 사명감과 자신감으로 지구촌의 평화 및 건설을 위한 튼튼한 생력군으로 되였으면 한다.  오기활
265    읽고 또 읽으면… 댓글:  조회:272  추천:0  2018-09-12
 성인 월리엄 존스는 200년전의 사람이다. 그는 어린 나이에 궁금증에 사로잡혀 자신과 어머님의 바람대로 끝없이 책을 읽기를 한데서 결국 세계 최고 학자들의 대렬에 올랐다.  영국의 왕은 그에게 백작의 칭호를 수여했고 성인 월리엄 존스라고 칭했다. 월리엄 존스가 많은 사람들로부터 주목을 받은 것은 상상을 뛰여넘는 그의 박식함 때문이다. 그는 더 많은 책을 읽고 싶은 욕심과 한 나라만의 책으로는 만족할수 없다는 욕구로 외국어공부에 열성을 다 바쳐 50여 개 나라의 말을 하고 글을 쓸수 있었다. 이하는 월리엄 모자간의 이야기다. “어머니. 도대체 구름은 어떻게 만들어져요? 왜 비가 내려요? 떨어진 빗방울은 모여서 어디로 가요?” .“정말 알고 싶어요! 세상 모든 것들을 알고 싶어요!” 어린 월리엄은 이렇게 늘 궁금증에 사로 잡혔다. 그의 어머니는 어린 월리엄의 끝없는 질문에 대답해주려고 최선을 다했다. 그러나 월리엄이 글을 읽게 되자 어머니는 책을 통해 월리엄의 궁금증을 풀도록 하였다. “어머니 왜 바람이 불어요?” “책을 읽으려무나 그럼 저절로 알게 되지.” “세상 저편엔 누가 살고 있을가요?” “책을 읽으려무나, 그럼 절로 알게 될 거다.” “왜 하늘은 푸르지요?” “책을 읽으려무나, 그럼 알게 된단다.” “어머니, 저는 정말 세상 모든 걸 알고 싶어요.” “그러나 너는 절대로 세상 모든 걸 알 수가 없을 것이다. 그렇지만 책들로 말미암아 사람이 알 수 있는 범위 안에서 세상의 대부분을 알 수 있게 되겠지.” “알았어요, 어머니! 저는 모든것을 알 때까지 끝없이 책을 읽을 거예요.” 이렇게 말한 월리엄은 아주 어린 소년이였다. 세 살이 채 되기도 전이지만 책을 읽을 수 었는 천재에 가까운 소년이였다. 월리엄은 여덟 살이 되기도 전에 유명한 학교인 해로우의 저명한 학자가 되였다. 그는 언제나 읽기를 좋아했고 소망했고 무엇이든 쉬지 않고 읽었던 것이다. 월리엄이 말했다. “나는 세상을 알고 싶다! 세상 모두를 알고 싶다! 내 소망은 단지 하나다.” 그런 아들에게 어머니는 쉬지 않고 말했다. “읽으려무나, 끝없이 읽으려무나. 네가 알고 싶은 걸 알 때까지 말이다.”  월리엄이 유명한 학자가 되였을 때 그의 나이는 아직 십대에 불과했고 그때까지 어머니의 설교를 들을 수밖에 없었다. 어머니도 역시 아들을 위해 좋은 책을 읽어 주듯 말했다. “진실한 책을 읽어라, 아름답고 훌륭한 책을 읽어라, 현명해지는 책을 읽으려무나.” 어머니의 설교는 계속되였다. “어리석음을 주는 책을 선택해 읽느라 절대로 시간은 허비해서는 안 된다. 절대로 나쁜 책은 읽지 말아야 한다. 좋은 책은 그 어떤 책이든지 네게 모두 도움이 될 것이다.” 월리엄의 “독서광”과 어머니의 바람, 그리고 설교는 월리엄을  세계 최고 학자정상에 오르게 하였다. 로마시대의 철학자, 정치인 키케르의 말이다. “책은 청년에게는 음식이 되고 로인에게는 오락이 된다. 책은 부자일 때는 지식이 되고 고통스러울 때는 위안이 된다.” 오기활
264    당신은 이에 자신이 있습니까? 댓글:  조회:256  추천:0  2018-09-06
 프랑스의 곤충학자 파브르는 사범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 교사로 지내면서 곤충에 대한 연구를 시작하다가 한 권의 책을 읽고 1871년에 교직을 그만두고 일생을 곤충 연구에만 바쳤다. 그의 저서 “곤충기”는 그가 30여년의 세월을 거쳐 완성한 세계적인 명작이다. 그로부터 파브르는 “한 선배의 책이 나로 하여금 정신적으로 기원(紀元)을 이룩해 내게 했다”며 “사람마다 남들에게 권해줄만한 책 한권쯤은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덕담을 남겼다. 파브르의 이 말은 그만큼 책이 사람의 운명을 좌우할만한 힘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책은 하나의 아름답고 풍부한 세상이다. 동기부여 연설가며 작가인 찰스 존스는 “두 가지에서 영향을 받지 않는다면 우리 인생은 5년이나 지나도 지금과 똑같을 것이다 그 두 가지란 우리가 만나는 사람과 읽는 책이다”고 하였다. 독서는 마음의 량식으로 결코 취미만이 아닌 생활의 일부분이며 인생의 필수다.   언젠가 필자는 돈을 잘 번다는 모 사장에게 책을 선물했더니 뜻밖에도 “이 두터운 책을 어떻게 읽습니까? 나는 책 읽기를 제일 싫어 하는데…”고 답하기에 상대의 무지(無智)함을 모르고 책을 선물한 필자가 오히려 무지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책은 미지인 세계로 가는 길을 찾게 하고 우리로 하여금 현실을 바르게 걷게하는 리정표이다. 한국 경기도 남양주시의 백복임씨의 얘기다.  7년전에 그녀는 암에 걸려 희망을 잃고 하루하루를 버티다가 남편의 헌신이 고마워서라도 건강해 지키겠다며  “책읽기”를 선택하였다. 그런데 혼자 읽기보다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하는지 서로 공유하며 힘을 얻고 싶었다. 그래서 독서 모임을 조직하고 여섯 명이 매주 책 한권을 골라 읽고 토론하는 시간을 만들었다. 그녀는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는 우크라이나 작가의 책을  시작으로 2년동안 70여권의 책을 읽으며 책과 함께 웃고 울며 분노하고 맞장구를 치면서 “아하! 이런 거였구나”며 자기를 깨달으며 “그동안 내가 사람과 세상을 너무 몰랐다”며 “이제는 책이 더 이상 활자로 보이지 않는다.” “책은 내게 무한한 힘을 불어넣는 없어서는 안 될 친구로 되였다”며 즐거운 인생을 산단다. 미국의 정치행동주의자 도리스 해덕은 “평화 순례자”라는 선배 행동주의자의 책을 읽고 1998년 88세 나이에 진짜행동주의 자로 데뷔하고 2004년엔 94세에 미상원의원에 출마하였다.   이는 책의 위대함, 독서의 위대함, 인간 집념의 현실성과 위대함을 말해준다.   우리는 항상 책을 가까이 하며 책향기로 마음을 살찌워야 한다. “전민열독”이 련속 5년 동안 “정부사업보고”에 들어간 것을 보아도 인터넷시대에서 우리는 특히 더욱 독서를 해야 한다. 책속의 지혜의 해빛은 우리의 시대, 우리의 인생을 찬란하게 비춰주고 더욱 나은 자신을 만날 수 있게 한다. 그렇다면 당신은 정신적으로 기원을 이룩할만한 책을 갖고 있습니까? 당신은 남에게 한 권의 책을 권할 자신이 있습니까? 오기활                                                                         
263    백부님을 그리며 혼란의 력사를 반추해 본다 댓글:  조회:592  추천:0  2018-08-12
오늘은(음력6월 25일) 나의 백부 오광준이 56세 나이에 도문시 홍광공사 수남7대(달라자)에서 “문화대혁명”폭도들에게 원을 품고 타살된 50주년이 되는 잊을래야 잊혀지지 않는 비참한 날이다. 그때 필자는 조실부모로 하여 큰집에 얹혀살던 22살 나이였다. 1968년6월 25일(음력) 아침, 달라자 한복판에 자리한 흑판보에 “오늘 저녁에 오광준투쟁대회를 한다”는 “자발군중전정소조”의 종이에 쓴 해보(海報)가 나붙었다. 소위 “자발군중전정소조”란 “문화혁명”후기에 대련합을 하라는 모주석의 최신지시에 따라 대대로부터 시급에 이르기까지 대련합의 시달로 군중조직간의 파벌싸움을  끝내고 대련합을 한 형세하에서 달라자에서 아래웃집으로 재내는 서춘권이 딴 심보를 품고 비공개적으로 친근을 사촉하여  “4인 자발군중전정소조”를 조직한 비법적인 조직이다. 이틑날 오광준의 사망소식을 접한 홍광공사의 책임자들이 즉시 현장에 내려와 반복적인 조사를 거쳐 “오광준의 사망은  타살이다”, “자발군중전정소조는 비법적인 조직이다”고 결론을 내리고 “자발군중전정소조”를 해제시켰다. “오광준투쟁대회”는 서춘권이 남양, 송림 등 외지마을 사람들을 조직하여 진행, 서춘권과 최동우(송림사람, 서춘권의 측근)의 발언을 이어 처음부터 “사람을 때리는 것을 락’(打人为樂)으로 삼는 망나들과 딴 심보를 품은 야심가들이 때리고 차고 쓰러 눕히고 찬물을 끼며 행패를 부린 사람잡이였다. 그때 필자는 투쟁대회에 참가할수 없자 투쟁대회마당의 뒤 집인 오송준(필자의 9촌숙부)네 집에 숨어서 이 모든 과정을 지켜보았다. 당일 저녁, 투쟁대회장으로 불려나가기 전에 백부님은 필자를 불러 “오늘 저녁에 서춘권이 정녕 나를 때려 죽이겠는데 나는1대1로 죽겠다”며 몸속에 칼을 품고 나갔다가 기회를 찾아 서춘권을 찔러 죽이겠다”고 말하는 것을 필자가 안된다고 말렸다. 그러니까  필자가 서춘권을 살린것이다. 오광준이 56세 나이에 “조선특무”란 억울한 모자를 쓰고 망나니들에게 타살 된 데는 이런 억울한 사연이 얽혀 있었다. 1952년에 조선전쟁이 한창일 때 조선서 최남주라는 사람이 달라자에 있는 매부 (오세준)네 집에 밀수건으로 종종 다닌다는 말이 돌았다. (최남주는 해방전에 왕청현 석현구에서 살다가 해방후 조선으로 갔다) 당년에 새중국이 건국된지 3년밖에 안되고 게다가 조선전쟁이 한창 긴장하게 진행되는 형세에서 정치형세에 민감해야만 했던 촌과 지방간부들은 최남주의 소식을 듣고 “최남주가 조선특무”라며 다시 오면 체포하기로 하였다. 그때 오세준과 6촌형제인 오광준은 한마을인 오세준네집에 다니며 사돈간인 최남주를 만나 보았고 (오광준의 동생 오호준(필자의 아버지)도 함께 놀았다고 한다)오광준의 아들인 오기풍은 최남주를 도와 물수품을 제공해 주었다.    1952년 어느 날, 달라자의 생산대 대장과 빈하중농대표로 지내는 김철국이 한낮에 배앓이 병이 도져서 마을의 길옆에 있는 허룸한 널판자변소에 앉아서 일을 보고 있다가 최남주가 나타난 것을 보고 급히 바지춤을 올리고 나서 키가 크고 힘이 센 우세로 당장에서 그자를 체포했다.(김철국의 자술) 최남주는 체포되여 심문을 받으며 달라자로 나들던 과정을 실토하였다. 하여  간부들이 최남주의 제공에 따라 오세준, 오광준, 오호준을 불러 최남주를 만난 과정을 조사할 때 오세준이 먼저 최남주를 만난적이 없다고 말하니 오광준도 형제간인 당사자가 승인하지 않는데 내가 어찌 승인하겠는가는 단순한 생각으로 최남주를 만난사실을 승인하지 않았다.(동생인 오호준은 만났다고 승인) 그로부터 계속하여 촌간부들은 어느 날 저녁에 촌부가 있는 수남에서 “오광준투쟁대회”를 조직하고 오광준에게 “2년 지방관제” 라는 처분을 주었다(후에 정책에 따라 해제)  이 사건으로하여 오광준의 마음속에는 (최남주가 오세준네 집에 다녔는데 왜 오세준은 문제없고 나를 투쟁하고 관제까지 했는가)는 억울함으로 촌간부들에게 늘 불만이 있었다. 그러다가 1967년 초의 어느 날 “문화대혁명을 동원하는 생산대 대회”에서 오광준이 “이번 문화혁명에서 나의 억울함을 해명해 달라”는 발언을 하였다. 김철국은 실사구시하고 기억력이 상당히 좋았다. 하여 그는 비록 문맹이지만 대장을 지내면서 상급회의에 참가하여 회의기록은 못했지만 “회의정신을 한 글자도 빼놓지 않고 몽땅 전달한다”는 평판을 받았다.  지난 세기 60년대 초, 연변에서 “면(面)의 사회주의교육운동”이 한창일 때  김철국이 생산대 정치대장인 필자를 찾아 몇 번이나 이런 말을 하였다. “오대장, 신문이라고 다 믿을 것이 못 됩데, 신문이 도삽(거짓)입데…” “…그때 내가 최남주를 체포했는데 신문에는 수남촌민병련장인 안창렬(송림사람)이  오세준네 궤짝에 숨어 있으며 정찰하고 최남주를 체포했다”고 신문에 안창렬의 사적이 났습데…” 필자는 김철국의 이 말씀을 가슴깊이 간직하고  십수년 후에 “연변일보”기자로 된후 연변일보자료실에서 당년의 신문을 찾아봤더니 과연1952년 8월 16일자 “동북조선인민보”(東北朝鮮人民報)에 “길림성 1등 민병모범 안창렬”이란 제목으로 지승원련환화로 기사를 엮은 안창렬의 사적이 3기로 나누어 실리였다. 이하는 련환화에 배합된 신문기사내용다. “안창렬이 오가네 집에 가서 그가 없는 틈을 타 큰 꿰짝안에 밤낮 이틀을 숨어있으며 동정을 살폈다. 사흘되는 날 밤에 오가와 그의 안해의 말가운데 ‘모래 실으려 간다고 수레를 끌고가서 최특무를 데리고 오기로 한다”는 말을 들었다…” “이때 그는 궤짝에서 뛰여나와 오가네 부부를 다른 민병을 시켜 지키게 하고 다음날 민병네명과 함께 오가와 최특무가 약속한 지점에가서 숨어있다가 최특무를 잡았다. 그는 이와 같이 하여 악패지주와 반혁명분자 六명을 잡았다.(사진배합)  실로 어처구니 없이 황당한 날조였다. 이하는 필자가 백부님에게서 들었고 또 백부님을 지켜본 백부님에 대한 평가이다. 백부(1911,12,10ㅡ 1968, 6,25)는 지난세기 20년대 초에 원적(原籍)인 朝鮮 咸鏡北道 穩城郡 穩城邑 美浦面 長德洞 長德里에서 부모님과 함께 남자 3 형제가 두만강을 건너 중국 도문시 곡수2대에 잠시 삶터를 잡았다가 1927년 경에 물 건너 달라자에 이주하여 정착하였다. 백부는 문화가 있고 사상이 진보적이였다. 백부는 자식들에게 늘 석현지구의 오중하 등 항일투사들의 이야기와 고려툰(지금의 흥진)의 항일력사를 들려 주었다. (한번은 항일하는 사람들의 심부름도 했단다.) 백부는 독서를 즐겼다.  도문에 가면 꼭 서점에 들렀고 신라, 백제, 고구려 등 우리 민족의 력사책을 사서 읽었고 타살되기 전까지 모택동저작을 1권부터 4권까지 통독을하였다. 한번은 정치대장인 필자와 백부간에 생산대문제로 의견분기가 있었는데 필자가 모택동저작에서 “자유주의를 반대하자”는 문장을  읽어 드리며 해석하니 “그렇다면 나에게는 할말이 없다” 심복(心服)하였다. 백부는 경제의식이 높고 계산이 빨랐다.   50년대 해방초에 농촌서 생산합작사를 꾸리며 가가호의 소, 수례 등 많은 농구를 헐값으로 생산합작사에 입고시킬 때 백부는 소구유의 값을 3원으로 치니 그 좋은 자료로  칼판을 만들어 팔아도 한 개에 3원씩 받겠다며 끝내 작두와 소구유를 입고하지 않았다. 60년대에 정치적으로 비판하던 “소생산”을 “조카들까지 공부를 시키려면 15명이나 되는 대가정이 자력갱생을 해야 한다”며 수백마리나 되는 양계장을 경영했고 담배농사를 많이 해 도문시장에가 팔았다. 백부는 친척을 중히하고 부모없는 조카들을 그렇게도 아끼고 사랑했다. 그때 석현구(진)수남촌은 왕청현에 속하였기에 수남촌학구의 학생들이 중학교를 다니려면 먼저는 대흥구 중학교, 후에는 석현중학교에 다녀야 했다. 그때 연길현인 도문중학교에 전학을 하려면 문이 없이는 쉽지 않았는데 백부님의 노력으로 우리 오누이를 집가까이 도문중학교에 전학시켜 공부에 편리를 주었다.  60년대 가난한 시기에 필자가 도문중학교를 다닐 때 하루는 백부님이 필자를 데리고 장마당에 가서 꿩을 한자웅(암수두마리)을 사가지고 반주임인 권경혁(權慶赫)선생님네 집을 찾아가 “부모없는 조카를 선생님께 맡기니 잘 돌봐 주십시요”라고 부탁하였다.   가정경제형편이 곤난한 시기에도 필자에게 바일론을 사주겠다고 하였고 현금 22원을 팔아 명표스케트를 두 틀이나 사주었다. 그때 중국의 명표 인“장백산”표스케트가 14원이였다. 백부는 10여 리 밖인 송림툰에 홀로계시는 5촌숙부(오창근)를 종종 집에 모셔다 맛좋은 음식을 대접시켰다. 백부는 “끊어 질 지언정 후러들줄 모른다” 는 정도로 성격이 강하였다. 그래서 동네사람들로부터 “꼬재”(꼬쟁이)라는 별명을 가졌다. 백부는 늘 민족복장차림을 하는 민족주의자였지만 혼인에서는 “녀자는 데려다가 제집사람을 만들면 된다”며 “로박사의 부인도 일본녀자다”며 곤명에 있는 6촌동생(오철준)이 재혼으로 한족부인을 택하자 백부가 나서서 “제수에게 한복을 입히고 결혼잔치를 치려주겠다”고 하였다. 그리고 당신이 어디서 예쁜 한족처녀를 바뒀다며 필자더러 그녀와 결혼하여 빨리 아들을 낳아서 무남3녀인 형님에게(오기풍) 계자(鷄子)로 보내라고 하였다. 백부님은 사람욕심이 대단하였다. 그러기에 늘 “최대의 가난은 사람가난이다”며 3녀1남 자녀들에게서 4남 10녀의 손군을 보았다. 큰며느리가 부인병으로 3녀를 낳고 생육하지 못하자 백부가 며느리를 데리고 다시며 병치료를 시켰고 4녀를 낳은 큰 딸을 설복시켜 끝내 아들을 보게 하였다. 백부는 장기간 고혈압병으로 머리가 아파서 늘 헝겁댕기로 골을 동여매고 매일 안나가(安那咖)라는 약을 복용하며 생산대집체로동에는 별로 참가하지 못하며였다. 이렇게 백부가 집체로동에는 참가하지 못하면서도 자력갱생을 한다며 “소생산”을 하였으니 당년의 형세에서 정치를 앞세우는 촌간부와 “집체를 열애하는“ 사람들의 말밥에 오르기가 한창이였다. 그래서 당년에 억울한 모자를 쓰고 투쟁을 받았고 문화혁명의 대혼란속에서 딴 심보를 품은 음모가들에게 타살을 당했다고 필자는 인식한다. 단 백부님의 타살은 “문화대혁명”의 혼란 시대에 필자의 정적(政敵)들이 정치적으로 필자를 “죽이려는” 딴 심보를 품고 고의로 조작한 비법적이고 비인간적인 형사사건으로 필자는 정의한다. 영국의 유명한 력사가 에드워드핼릿카(E.H.카)는 “력사란 과거와 현재의 끊임없는 대화이다” “과거는 현재의 빛에 비춰졌을때만이 비로소 리해될수있으며 또한 현재도 과거의 조명속에서만이 충분히 리해될수있다”고 하였다. 이에 비춰 반우파운동, 대약진운동, 사회주의교양운동, “문화혁명”을 두루 겪은 필자는  “력사를 잃는 것은 오늘에 대한 배반이며 력사를 기록하는 것은 지나온 그릇된 력사를 반복하지 않기 위함”이라는 생각으로 필을 들었다. 이 글로 우리 가족과 후세들에게 지난 세대의 혼란했던 력사를 거울로 알려주고 다시는 그런 억울하고 혼란한 력사가 반복되지 않기를 바라면서 말이다. 돌이켜 보면 혼란년대에 피해자나 가해자나 모두가 시대의 피해자다.  이 글로 억울한 루명을 쓰고 원을 품고 타살된 백부님을 더없이 그리고 기리며 백부님께  행복하고 바른세상이 오늘에 왔음을 알리며 고인의  명복을 빌고 또 빈다. 2018년 6월 25일(음력) 도문에서
262    <<이웃절>>을 내오자 댓글:  조회:345  추천:0  2018-07-31
가정은 사회의 기본세포단위이다. 가정과 가정, 이웃과 이웃사이의 화목은 사회주의 조화로운사회를 건설함에 있어서 홀시할수 없는 기본적인 사회조성부분건설의  하나로 마땅히 온 사회의 중시를 불러일으켜야 한다. 또한 이웃사이에 서로 돕고 관심하며 화목하게 지내는 것은 중화민족의 전통이며 미풍량속이다. 미풍량속은 시대가 발전한 오늘에도 계속 발양하고 발전해야 한다. 허나 도시의 거주문화가 변천을 가져오고 사람들의 생활절주가 빨라짐에 따라 한아빠트, 한지붕을 쓰고사는 이웃사이가 서로 래왕이 없고 지어 상사가 있어도 관계하지 않고 무감각할 정도로 이웃관계가 랭대해지는것이 오늘의 현실이다. 농촌에서도 호도거리농사의 실시로 한개농호가 하나의 생산단위로 된후 이웃관계, 마을관계가 이던 전에 비해 많이 랭담하고 약화된것이 사실이다. 이는 인간들의 단결, 우애, 협조의 공동책임의식과 정신을 약화시키고 있다. 이런 실정에서 이웃관계를 개선하는 것은 조화사회건설에서 마땅히 온사회의 중시를 불러일으켜야 한다. 이에 필자는 법적으로 을 제정하고 전 사회적으로 조화로운사회 건설에 유익한 활동을 벌려 단결, 우애적인 이웃관계를 새롭게 확립할것을 창의하는 바이다. 법적으로 이웃절을 정하면 특히 다음과 같은 몇가지가 리롭다고 본다. 1, 사회공덕을 지킴에 리롭다. 이웃절이 있게 되면 법규의 약속성이 있게 되며 이를 발판으로 일종의 사회적책임감을 지키려는데서 이웃간에 서로 거래하고 호조호애하면서 새로운 인간관게를 이룩하게되여  이 , 으로 발전하여 사회가 부단히 정화되고 문명해지기에 사회주의 조화로운 사회건설의 바탕이 마련되게 된다. 2, 후대교양에 리롭다.  이웃절이 있게 되면 학교부터 가정에 이르기까지 존로애유, 호경호애, 호방호조의 교양을 앞세우게 되여 중화민족의 미풍량속이 천추만대로 이어지게 될것이다. 3, 민족단결에 리롭다. 우리 나라는 다민족국가이다. 이웃절이 있게 되면 이웃간의 여러가지 유익환 활동으로 하여 다민족이웃간의 우정이 돈독해지여 민족단결진보를 더욱 강화하게 된다., 4, 부모나 자식이 외롭지 않다. 지금은 세대마다 자식을 거의 하나만을 낳는 현실에서 이 맺어지면 외자식이 외롭지 않고 부모도 부모로 외롭지 않게 된다. 특히 지금 은 핵가족으로 되여가는 실정에서 이웃자식들간에 서로가 다정해지고 로인들이 고독하지 않으며 자식들의 뒤근심을 덜수 있다. 5, 간부와 백성간의 관계가 밀접해질수 있다. 이웃사이가 밀접하면 주변의 간부들이 백성들의 질고를 료해하는데 리롭고 백성들이 주변의 간부를 찾아서 여러가지 문제를 구속이 없이 실사사구적으로 반영할수 있어 당과 대중과의 거리차이를 줄이는데서 혈연적 련계를 강화할수 있다 6, 빈부차이를 줄임에 리롭다.                                                  이웃간에는 빈부차이가 있기 마련이다. 이웃간에 화목하면 서로간에 어려운 일을 함께 풀려는데서 이웃간에 선각자가 후각자를 이끌며 비기고 배우고 따라잡고 릉가하면서 더불어 살아가는 조화사회형성에 리롭게 된다.   필자는 이웃절을 1년 24개 절기의 첫 절이인 립춘날로 정했으면 한다. “1년지계는 재어춘”이라 봄은 1년의 시작이니 새봄을 맞는 기분으로 이웃절을 맞이하면 우정을 돈독히 하기위한 시작으로 서로서로가 확실하고  준비있게 마중할것이다.                   발족인 오기활 2005년 10월 10일 (지부생활 2005년 제 11호)
261    진찰의사들이 개소리를 하다니… 댓글:  조회:390  추천:0  2018-07-27
최근 몇 년간 단위(연변일보사)에서 해마다 잊지않고 집체적으로 신체검사를 조직해주어 너무나 감사하다. 근 3년간을 지켜보니 연변병원의 신체검사담당 의사와 간호원들의 인간미가 풍기는 봉사에 마음이 기뻤다. 특히 안내를 담당한 의무일군들의 정다운 봉사는 동지섣달에 꽃을 본듯 즐거웠다. 그런데 옥에티라고 할가? 어제(7월 25일)오전 신체검사때다. 안내자가 “彩照”를 하라며 3호실 문어구에서 대기하라고 하기에 문어구에 마련한 걸상에 앉아서 순서를 기다리는데 “샤이거런 찐라이”(下一個人 進來)라는 녀성의 또랑진부름에 따라 조용히 진찰실에 들어 서니 컴퓨터와 마중한 녀성의사 옆에 자리한 젊은 녀의사가 한어로 “무슨 소리를 그렇게… 나는 개가 짖는가 했어요…”하면서 허물없이 웃음보를 터뜨리며 둘이서 서로간 개얘기를 시작했다. 그런데 문제는 둘이서 컴퓨터 화면을 보면서 언제는 누구네 개가 어떻고…하면서 진찰을 끝날 때까지 계속하여 개소리를 하는것이였다. 이에 필자는 의사들의 진찰에 믿음이 안가 검사가 끝났다니 일부러 검사결과를 물었더니 “지방간이 두텁고…”하며 검사결과를 대충 알려주었다. 물론 의사던 교사던 모두가 인간이기에 누구나 우습던 일을 떠 올리면서 롱담을 하고 큰 웃음도 지을수 있다. 문제는 때와 장소를 가려야 하고 직업도덕을 지켜야 한다. 그런데 오늘 만난두 분의 의사는 손님이 진찰실에 들어가기 전부터 개소리로 시작한 롱담이 진찰이 끝날 때까지 당사자 앞에서 “개소리”를 해대니 마음이 언잖았다. 진찰결과가 어떻게 나올지는 잘 모르겠지만 아무튼 이날 “彩照”진찰이 어수선했다는 느낌이다. 오기활
260    “헝그리정신” 만세! 댓글:  조회:535  추천:0  2018-07-26
사브라는 선인장의 열매로 겉은 가시가 많지만 속은 붉은색이며 아주 달다. 유태인들은 자녀를 “사브라”라고 부르며 자녀들에게 어릴 때부터 “아빠처럼 사브라가 되라”는 말을 입버릇처럼 한다고 한다. 뜻인즉 자녀더러 한 방울의 비도 없이 땡볓이 내리 쬐는 열악한 사막에서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는 사브라마냥 역경을 이기고 강인하게 살아 남으라는 것이다. 현대의 랍비로 불리는 마빈토테이어는 (미국 유태교신학자) “아무리 절망적이고 위태한 순간에도 우리 눈앞에는 언제나 희망의 끈이 내려져 있다. 절대 굴복하거나 포기하지 않겠다는 신념과 자신에 대한 절대적인 신뢰만 있다면 새로운 령역에서 선 구자로 우뚝 설수 있다. 무슨 일이든 쉽게 체념해서는 안 된다. 인생은 변화무쌍하며 얼마든지 변화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다”고 하였다. 재일 조선동포로 남아공월드컵에 출전한 “눈물의 스타” 정대세의 어머니 (이정임)는아들의 성공비결을 한마디로“눈에 보이지 않는 차별과 장벽을 이겨내고 월드컵까지 나간 비범한 마이너리티(소수자)의  ‘헝그리 정신이다’ ”며 “재일동포들이 일본 땅에 발을 붙이고 사는 한 소수자일 수밖에 없는데 이를 극복하고 당당하게 살려면 뭘하든 열심히 하는수밖에 없었다”고 하였다. “헝그리정신”이란 빈곤하고 굶주린 상태에서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이 빈마음으로 무엇이든지 열심하는 정신을 말한다. 한 사람의 사로(思路)가 그 사람의 출로(出路)이다. 이런 얘기가 있다. 사형을 선고받고 죽음에 립박한 한 사나이가 국왕에게 이런 탄원서를 올렸다. “1년의 여유를 주신다면 왕께서 가장 아끼는 말에게 하늘을 날게하는 방법을 가르치겠습니다. 만약 약속을 지키지 못한다면 그때는 사형을 달게 받겠습니다.” 이에 왕이 말했다. “좋다, 하지만 약속을 어길 경우에는 즉시 사형을 집행하겠다.” 하여 사나이는 요행 사형을 모면하고 감옥으로 돌아왔다. 많은 죄수들이 그에게 모여들었다.  “말이 어찌 하늘을 날수 있단 말이오?” 곁군들의 물음에 사나이가 태연하게 말했다. “물론 말이 하늘을 날 거라고 장담하기는 어렵지요. 하지만 1년 안이 왕이 죽을 수도있고 내가 죽을 수도 있고… 미래의 일을 누가 알겠는가. 1년 안에 말이 죽을 수도 있고 또 하늘을 날지도 모르지 않는가.” 주변을 보면 같은 돈 1원을 놓고 부정적인 사람은 (1원밖에 없다…)며 겁을 내고 좀자르지만 긍정적인 사람은 (아직도 1원이 있다구?…)하면서 그 1원을 가지고 또 무엇을 할 궁리를 한다. 성공자들은 “희망을 잃지 않는다면 역경이야말로 최고의 기회다”고 말한다. 오기활
259    사람 됨됨이의 순서 댓글:  조회:604  추천:0  2018-05-29
 어느 사회에서도 좋은 사람이 있고 나쁜사람이 있기가 마련이다. 그래서 아무개는 어떤 사람이냐고 묻는 경우가 허다하다. 또 무슨 일을 하자면 사람이 제일 문제라면서 일을 맡길 사람을 찾을 때 먼저 그 사람의 됨됨이를 알려고 한다. 그런데 오늘에는 인품에 앞서 그 사람의 능력을 먼저 따지려는 풍조가 앞서는듯 하다. 이런 풍조에 너무 매달리다 보면 뒤끝이 별로 신통찮게 끝나는 경우가 빈번하다. 능력은 재주에서 비롯되고 인품은 덕에서 비롯되는 까닭으로 사람의 인품과 능력은 서로 다르다. 덕은 베푸는 마음을 앞세우고 능력은 요구하는 마음을 앞세운다. 옛날에는 스포츠를 놀이로 했지만 지금은 커다란 기업이 되고 있다. 그래서 엄청난 거금을 팔면서 선수들을 사들인다. 년봉을 얼마나 받느냐를 놓고 그 사람의 몸값을 따지게 된다. 스포츠만이 아닌 전문경영인의 경우도 그러하다. 사업수완의 능력에 따라 고임금을 받기도 하고 그렇지 않기도 하다. 이 또한 월신을 얼마나 받느냐를 두고 그 사람의 몸값을 따지는 경우다. 이런 때의 사람값은 능력을 기준으로 삼지 그 사람을 인품으로 따지지 않는다. 흔히 재주가 앞서면 덕이 모자란다고 한다. 재주만 믿고 저만 잘났다는 착각에 사로잡힌 사람은 남을 얕보고 존중할 줄을 잘 모른다. 모든 것을 지식의 량으로 따지려고 하고 사람들과의 사이에 있어야 할 도리를 저버리는 경우가 많다. 이는 모든것을 리용의 대상으로만 보기 때문이다. 그러나 유덕한 사람은 주변을 살펴서 무엇이 사람들을 불편하게 하는가에 신경을 쓴다. 덕은 사람의 허물을 용서하며 덮어 주고 약한 사람을 감싸 주면서 힘을 붇돋아 서로 함께 살맛을 나누게 한다. 덕이란 사람을 리용하지 않고 돕는다. 선을 위하여 리롭게 하는것이 덕이므로 덕은 사람을 외롭게 하지 않는다. 그런데 왕왕 사람들은 알게 모르게 재주만 앞세워 세상을 얕잡아 보려고 한다. 이런 성품 탓으로 사람들은 서로 팽팽히 삶의 줄을 당기면서 제 몫만 챙기려고 한다. 공자는 덕행을 삶의 근본으로 삼아햐 한다며 나라를 잘되게 하려고 했지만 군왕아 공자의 뜻을 들어주지 않으니 56세에 자기의 로나 라를 떠나 진나라, 제나라 등 나라를 돌아다니며 덕으로 나라를 다스리는 왕도를 설파했다. 그러나 힘으로 세상을 얻은 군왕들이 공자의 말에 아무도 귀를 기울여 주지 않기에 수많은 고생만 하고 69세에 다시 로나라에 돌아왔다. 공자는 그간 고생만 시키고 아무런 권세도 얻지못한 제자들에게 미안을 표하며 제자들의 됨됨이를 이런 순서로 밝혔다. 덕행으로는 안연(顔淵)이 뛰여 났고 언변은 자공(子貢)이 뛰여났다. 큰일을 처리하는 데는 염유(苒有)였고 박학하기로는 자유(子游)가 였다. 공자는 이렇게 서로 더불어 살아야 하는 인간들에게 덕을 근본으로 삼았다. 바로 습근평주석이 당 19차당대표대회에서 제출한 당이 간부를 관리하는 6개 원칙에서 덕재를 겸비하되 덕행을 우선하는 원칙을 첫째라고 하듯이. 오기활
258    야합, 담합, 그리고 총명이란? 댓글:  조회:572  추천:0  2018-05-18
 옳은 것이면 감출것이 없고 선한 것이면 숨길것이 없다. 옳지 않은 것을 알면서도 그것을 범하고 악한것을 알면서도 그렇게 하면 죄는 이미 씨앗되여 뿌리내려 터를 잡는다.  법을 어기는 것만이 죄가 아니다. 도둑질, 강간, 살인이 큰 죄지만 부정부패를 일삼는 탐관오리도 죄를 범하는 원흉이다. 특히 높은 위치나 큰 자리에 있는 특권자들이 죄를 범하면 다른 죄보다도 온 나라가 큰 화를 당한다 . 특권자는 특자만큼 눈귀가 밝아야 한다 . 높은 위치에 있는 자가 곁눈질을 하면 간사한 무리들이 그의 눈길을 맞추게 되고 큰 자리에 있는 자가 귀가 얇으면 그 귀에다 소곤거리며 리득을 챙기려는 무리들이 모이게 된다. "력사는 밤에 이루어진다"는 말이 있다. 이는 력사적으로 부덕한 다스리는 자들이 숨길것이 많아서 밤이 돼야 서로 귀를 맞대고 눈길을 훔치면서 서로간 수를 부려서 리권(利權)을 챙기려고 끼리들이 은밀히 야합(夜合)하여 입을 마추는 담합(談合)을 비꼬는 말이라 하겠다.   어느 친구의 말이다. " X X 텔레비를 보면 국회위원들이 손찌검을 하면서 의(義)는 양보 할지언정 이(利)는 절대로 양보를 안(못)하는 것 같다." 당순(黨順), 당리(黨利)를 살펴봐도 먼저 내당을, 다음에 네당을, 그 다음에야 “우리 당을 챙기는것 같았다. 공동한 리익을 위하여 큰면에서 공동한것을 찾고 작은 일은 보류(救大同存小異)하고 나라와 국민을 위하여 영예와 치욕을 함께 해야 하는데 ...   실상의 여하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그저 듣고 지날 얘기는 아닌것 같다.  공자는 "총명하다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는 제자(자장)의 물음에 " 물처럼 스며드는 말을 멀리하고 피부에 느껴질 만큼 솔깃한 말을 멀리하면 총명해진다"고 했다. 공자의 이 말은 총명한 인간이 되려면 야합하거나 담합을 하지 말고 측근의 말을 조심하라는 경고며 충고이다.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은 그 나름의 측근이 있게 마련이다. 은근한 측근의 말을 믿고 놀면 멀리 보는 눈이 멀어지고 듣는 귀가 막혀게 된다. 그렇게 되면 대통령을 포함한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들이 어리석음을 범하고 그 뒤탈은 다른 사람들이 앓게 된다.   한국의 모 대학교 윤교수의 말이다 . "력대의 대통령들을 보면 번번히 뒤끝이 좋지 못했다. 왜 그렇게 되는가? 총명하지 못한 탓으로 그렇게 되였다. 야합이나 담합을 무서워했더라면 높은 자리에서 내려온 다음에 원성을 사지 않았을 터이다." 그렇다면 총명이란 무엇인가? 총명은 죄라는 병을 앓기 전에 미루 예방을 할줄 아는 밝은 귀와 맑은 눈이라 하겠다.. 오기활
257    어머니의 마음 댓글:  조회:573  추천:0  2018-05-13
“어머니절”에 “어머니의 마음”을 읽어본다.   어느 동네에 방랑벽(放浪癖)이 심해서 몇 해를 걸러서 잠간씩 집에 들리는 아들을 둔 로모가 있었다. 방랑벽아들이 오랫만에 돌아 오면 다른 식솔들은 모두 방랑벽을 나무리면서 좀씩이라도 효도를 하는 형국이라도 해보라며 성화를 부렸다. 그러나 로모는 오랜만에 얼굴을 보게 된 아들을 속상하게 하지 말라며 손발을 만져보고 머리를 쓰다듬어 주면서 밥은 제때에 먹을수 있었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방랑벽이 병이였던 아들의 눈에서 눈물이 주르르 흘렀다. 로모는 옷깃으로 아들의 눈물을 거두어 주면서 사내가 이런 일로 울것까지 있느냐며 따스한 사랑의 두손으로 아들의 등을 다독여 주었다. 로모는 네가 없는 동안에 보고 싶었다는 말을 하지 않고 다만 네가 객사만 하지 않고 건강히 살아 있기만 빌었다는 말만 하였다. 로모의 말을 듣고 방랑벽 자식은 고개를 푹 떨구었다. 이에 로모는 풀기 없이 축 처진 자식을 어느 에미가 좋아할 것이냐면서 고개를 들라고 헸다. 그리고는 수척해진 아들의 얼굴을 보면서 그간에 제때에 밥을 먹을 수 있었느냐고 물었다. 아들은 대답을 못했다. 로모는 다시 어디 아픈데는 없느냐고 물었다. 아들이 없다고 말하자 로모는 긴 한숨을 내 쉬면서 이렇게 말했다. ㅡ 네가 나가 있어도 너는 항상 내 옆에 있었다. 다만 내 눈 앞에 없는 네 몸만 성하기만을 바랬다. 오랫만에 만난 아들에게 이렇게 말하는 로모의 마음은 아들 생각이 간절했음을 일러준다. 생각이 진정해 진실하다면 어찌 멀고 가까움이 따로 있겠는가. 아들만을 생각하는 어머님의 간절한 마음속에는 항상 멀고 가까움이 따로 없었다. 오기활/ 2018년 5월 13일
256    인재양성에 도움이 될 인터뷰 둘 댓글:  조회:557  추천:0  2018-05-10
"유태인이 없었다면 현대 문명도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는 어느 학자의 말이다. 이 말속에 세계를 만든 것은 유태인이라는 자부심이 가득히 담겼다. 세계인구의 0,25%에 불과한 유태인이 력대 노벨상 개인수상자의 22%를 점했고 미국 억만장자의 40%가 유태인이 점한다니 유민족이 정말 대단하다. 미국 최대의 시사주간지 “US뉴스엔드 월드리포트”는 천재들의 비밀 ㅡ “20세기를 조각한 3명의 위인”이라는 특별호 표지를 유태인인 아인슈타인, 프로이트, 맑스로 장식했다. 최근 필자는 “아이들을 ‘한국식 모범생’으로 키우고 싶지 않다”는 한국일보 론설원 고재학씨가 “탈무드”의 저자 마빈 토케이어, 주한 이스라엘 대사 투비아 이스라엘리과의 서면 인터뷰를 읽고 나 혼자만이 아닌, 더 많은 독자들과 공감을 하고저 두편인터뷰를 두번 나누어 올린다. 1, 질문과 토론이 핵심이다 마빈 토키이어(Marvin Tokayer.74세)는 일본과 미국 뉴욕의 유태인 회당에서 랍비로 활동했고 2년간 한국에서 미공군부대 장교로 지냈다. 그는 일반인들로 하여금 “탈무드”를 쉽고 재밋게 읽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탈무드의 지혜”. “탈무드의 처세술”, “탈무드의 웃음”등 20여편의 “탈무드”자매편을 출간하였다. 문: 세계인구의 0.25%밖에 안되는 유태인이 노벨상 수상자의 3분의 1을 차지할만큼 뛰여난 인물을 배출한 원인은? 답: “토라”와 “탈무드”에 바탕을 둔 신앙교육덕분이다. 유태인 가정에서는 아이들이 어릴 때부터 책을 읽고 함께 토론하는 문화가 있는데 이것이 훌륭한 인재를 배출한 비결이다. 부모의 역할은 바로 이 과정을 주도적으로 이끄는 데 있다 . 문: “탈무드를 더 자세히 소개 한다면? 답: 누구나 인류의 가장 현명한 지혜를 얻고 싶을 때 현인들의 말씀을 찾게 된다. 현인들의 말씀에는 가족, 평화, 전쟁, 죽음, 친구, 종교, 행복, 유머 등 인생과 관련된 폭넓은 지혜가 담겨 있다. “탈무드”는 5천년이 넘는 세월에 걸쳐 정리된 현인들의 대화가 담겨 있는 정보와 지혜의 보고이다…. 유태인의 부모들은 아이가 세 살 때부터 “탈무드”를 가르친다. 한마디로 ”탈무드”는 대표자녀교육서로 유태인의 삶 자체다. 문: 5천년 전의 규범과 지혜가 어떻게 현재까지 관통할까요? 답: “탈무드”는 완결된 책이 아닌 계속 현재진행형의 책이기 때문이다. “탈무드”는 첫 장과 마지막 쪽이 공란으로 비워져 있다. 첫 장이 공란인 리유는 “우리는 항상 중간(과정)에 있으며 탈무드공부는 따로 시작이 없다”는 의미로 누구나 자신의 현재 삶이 놓여 있는 바로 그곳에서 시작하여 “탈무드”를 리해하고 배울수 있다는 것이고 마지막 쪽이 비워진 것은 “당신의 삶에서 얻은 지식과 경험으로 계속 “탈무드”를 채워나가라”는 의미다. 아무리 뛰여난 지혜라 해도 매일 새롭게 살아가는 삶으로 새롭지 않으면 의미가 없다. 문: “탈무드”를 활용한 교육방법은? 답: “탈무드식 토론”이다. 아버지는 아직 학교에 다니기 전의 자녀와 “탈무드”를 펴놓고 서로간 번갈아 가며 관련 내용을 읽고 론리적 공격과 방어를 반복한다. 지고 이기는 건 없다. 상대방의 론리를 반박하기 위해 갖가지 아이디어를 떠올리고 치밀하고 빈틈없는 방어 론리를 개발하는 동안 지혜와 사고력을 풍부하게 하는 것이 목적이다. 문: 부모가 자녀교육에서 제일 강조하는 덕목은? 답: 질문이다. 자녀한테서 답을 얻으려면 아버지가 자녀 스스로 생각해야만 하는 질문으로 자녀들의 지능을 계발시킨다. 또 아이들도 질문을 자주 하도록 격려한다. “오늘 학교에서 뭘 배웠니?”라고 묻지 않고 “오늘 선생님께 무슨 질문을 했니?”라고 묻는 부모 밑에서 자라는 아이들은 질문하는것을 두려워 하지 않기 때문에 지식을 얻는 과정을 재미로 느낀다. 수업을 잘 듣는 것도 중요하지만 궁금한 걸 묻고 토론하는게 더 중요하다. 유태인 학교에서 좋은 질문을 하는 학생이 그 학급의 리더로 된다. 평생동안 이런 질문교육이 이뤄지면 유태인의 탁월한 교육이 완성됐다고 본다. 한국의 부모들도 자녀에게 “끊임없이 질문하라”고 독려하였으면 좋겠다. 문: 유태인의 학교 교육방식은? 답: “탈무드식 토론”이다. 열여덟살인 나의 손자의 례로 손자는 매일 “탈무드”를 공부한다. 일반적으로 오전에 “탈무드”를 공부하고 오후에 일반 교과 과목을 배운다. 이때 교사가 일방적으로 강의하지 않고 협력수업 방식을 활용한다. 교사가 주제를 주면 두세 명의 학생들이 토론을 한다. 강의가 끝나면 아이들은 복습을 하면서 자신들의 생각한것과 선생님의 가르침에 어떤 차아가 있는가에 대해 또 다시 토론한다 . 문: 유태인들은 맞벌이 부부가 많은데 육아 분담은? 답: 육아는 부모 공동의 책임이다. 유태인 부모는 자녀와의 시간을 가장 소중하게 여긴다. 안식일인 토요일은 완전히 자녀교육에 투자한다. 특히 유태인 아버지는 자녀들의 가장 좋은 친구이자 선생이다. 아이에게 숙제를 하라고 시켜놓고는 텔레비를 보는 유태인 아버지는 없다. 아버지는 자녀에게 공부하라고 다그치는 것이 아니라 아이를 가르치기 위해 자신도 함께 공부를 한다 . 문: 한국의 자녀교육을 말한다면? 답: 한국과 이스라엘은 공통점이 많다. 둘 다 단일 민족으로 고유문화를 지녔고 오랜 세원 침략에 시달렸다…. 그래서 그런 악조건을 인적자원으로 극복하기 위해 높은 교육열을 보인다. 그 결과 두 나라가 모두 당당히 강대국의 반렬에 올랐다. 그런데 내가 안타까워하는 것은 한국이 선조들의 지혜를 점점 잊어가고 있다는 것이다. 한국이 lT강국으로 비약적인 경제성장을 이어가고 있지만 물질이 풍요로워진 대신 령혼을 잃고 있는 것이 아닌지? 한국사람들은 조상이 물려준 훌륭한 정신적 유산을 잃고 있지 않는가를 돌아봐야 한다고 생각된다. 오기활
255    인재양성에 도움이 될 인터뷰 둘 댓글:  조회:466  추천:0  2018-05-10
2, 책이 물고기라면 토론은 낚시법 2008년 8월에 한국에 온 이스라엘 대사 투비아 이스라엘리(Tuvialsraeli.55세) 는 히브리 대학에서 정치학을 전공한 직업외교관이다. 그는 유태인의 특성을 한마디로 “교육에 대한 열정”이라고 설명했다 . 문: 이스라엘은 적국(敵國)에 둘러싸인 협소한 공간에서 생존하면서 정치적인 민주와 경제적인 번영을 누리고 있는데 그 비결은? 답: 한국과 이스라엘의 현대사가 매우 류사하다. 두 나라가 우여곡절 끝에 1948년에 건국을 했지만 곧바로 전쟁이 일어나면서 많은 희생을 치렀다. 이후 한국은 “새마을 운동”을 통해 “한강의 기적”을 일궜고 이스라엘은 키부츠(집단생활공동체)를 통해 경제성장의 토대를 닦았다. 이 과정에서 이스라엘의 특징이라면 대학설립을 국가 설립만큼 중요하게 추진한 점이다. 건국되기 30년 전에 이미 세계적인 대학부터 설립했다. 1918년 인구가 10만 명도 안 되고 도로 등 기본적 인프라도 없던 예루살렘에 히브리 대학을 설립했다. 인재를 키우는 교육기관을 먼저 만들어야 산업을 발전시키고 국가도 세울 수 있다는 확신 때문이였다. 이 대학 상임리사회에 아인슈타인, 프로이트, 바이츠만(초대 대통령)등이 참여했다. 뒤이어… 당시 인구 200만 명의 작은 나라에(현재는 710만 명)세계적인 대학을 4개나 갖게 되였다. 이러한 교육열정이 소국을 세계적인 하이테크(최첨단의 앞선 기술)국가로 성장시킨 비결이다. 문: 거의 2천년 동안 나라 없이 류랑한 유태민족이 고유의 전통과 문화를 지킬수 있은것은 “탈무드”의 힘이라는데 지금의 유태인 사회에서 “탈무드”를 교육에 활용하는지? 답: 유태이라면 누구나 “토라”와 “탈무드”를 공부한다… 토론을 통해 특정한 현상에 계속적인 의문과 질문을 제기하고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는 대신 더 좋은 해결책을 끊임없이 찾고 탐구하는 유태식교육을 “탈무드식 토론교육”이라고 한다. “탈무드”는 학교 교육과정에서 비중이 크다. 학교마다 차이는 있지만 졸업 후 랍비의 자격을 얻게 되는 예사바와 같은 종교학교에서는 핵심과목으로 가르치고 종교적 색채가 없는 일반 학교에서는 일반 과목 중의 하나로 다룬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탈무드”는 유태인들의 “해야 할 것”과 “해서는 안될 것”을 가려주는 설명서다 . 문: 유태인 가정은 맞벌이 부부가 많은데 육아에서 엄마와 아빠의 역할 비중은? 답: 육아는 부모가 공동책임을 진다. 맞벌이가 대부분인 젊은 부부들을 위해서 국가적 차원의 지원이 뒷받침한다. 남편이 출산한 아내를 보조하기 위해 3개월간의 휴가를 낼수 있고 영, 육아보육시설을 수준 높게 유지하고 있으며 엄마들이 양육과 직장일을 병행할 수 있도록 탄력시간근무제도를 운영한다. 아빠들도 엄마만큼 교육에 관한 중요한 결정과 상담 과정에 빠짐없이 참여 하며 아이들과 재밋고 유익한 시간을 보낸다 . 문: 요즘 많은 전문가들이 조기교육을 강조하고 있는데 유태인의 조기교육은? 답: 조기교육은 지구촌의 공동 관심사로 떠오르고 있다. 유태교육은 아이가 어릴 때부터 “토라”와 “탈무드”를 읽게 하고 읽은 내용에 대해 토론하고 그 과정에서 정리된 생각을 글로 표현하니까 오래전부터 조기교육을 실시해 온 셈이다 . 문: 유태인의 교육에서 제일 강조하는 덕목의 세가지는? 답: 첫째는 독서다. 독서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둘째는 모든 것에 의심을 품고 기존 권위에 도전하며 끊임없이 질문하는 자세다. 질문은 창의적인 혁신을 만드는 원동력이다. 셋째는 독립심과 자기희생,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는 자세다. 문: 한국인들의 자녀교육에 조언을 한다면? 답: 한국의 경제적 성공에 교육제도가 핵심역할을 했다는 것은 의심할바 없다. 다만 한가지 개선을 바란다면 유태인의 전통 교육법이 강조하는 “질문교육”이 강화되였으면 한다. 질문을 두려워하지 않고 항상 더 좋은 답변을 찾기 위해 노력하는 것, 이것은교육의 핵심요소다. 책이 물고기라면 질문과 토론은 낚시법이다 다음으로 지적할 점은 독서이다. 요즘 한국인의 독서 시간이 급격히 줄어들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이는 위험한 일이다. 최근 20년간 우리가 새로운 형태의 문맹(文盲)에 놓여 있음을 발견할수 있다. 젊은 세대가 력사와 문학, 예술, 등을 계속 공부할 수 있도록 교육시크템이 균형을 잡아줘야 한다. 우리가 3D, 4D 등 우수한 하이네크 기숙ㄹ을 갖춘다고 한들 그 안에 담을 콘텐츠가 훌륭하지 않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오기활
254    인재를 구하는 지혜 댓글:  조회:622  추천:0  2018-04-28
연변주인재봉사중심과 연길시인재중심의 공동 주최로 “2018년 연변주 및 연길시 겨울방학 귀향 고등학교 졸업생 전문공익초빙회”가 거행되였다는 기사를 읽고 글을 올린다. 중국 전국시대의 일이다. 연나라가 제나라에 패하여 제나라의 지배를 받던 중 연나라 소왕(昭王)이 즉위하자 실지회복(失地回復)과 국위 선양을 위해서 수선 인재를 구하기에 주력하였다. 어느 날 소왕이 재상 곽외(郭隗)에게 어떻게 하면 국권회복에 능한 인재를 구할수 있는가고 물었다. 이에 곽외가 “신은 일찍이 이런 얘기를 들은바 있습니다만…”며 주저하니 소왕이 “그게 무슨 말인데?”하며 문촉하자 곽위가 답했다. 옛날 어느 군왕이 천금을 내놓으면서 천리마를 구하려고 하였는데 3년이 되여도 구하지 못했다. 그런데 하루는 궁중에서 허드렛 일을 하는 궁졸이 자기가 천리마를 구하겠노라고 자진해 나섰다. 궁졸이 천리마를 구하려고 떠나 3개월 쯤 되여서 천리마가 있다는 어느 곳을 갔더니 안타깝게도 일전에 천리마가 죽었다고 한다. 그런데 궁졸은 무슨 생각으로 5백금을 주고 천리마의 뼈를 사가지고 돌아왔다. 이에 소왕이 노하면서 “내가 살아있는 천리마를 사오라고 했지 5백금이나 주고 죽은 말의 뼈따귀를 사오라고 했느냐?” 며 야단을 쳤다. 소왕의 진노에 궁졸이 태연하게 말하였다. “잠시 소신의 말씀을 들어 주옵소서. 천리마라면 죽은 뼈도 5백금이나 주고 사는데 산 천리마라면 얼마나 많은 돈을 줄것이냐는 소문만 퍼지면 됩니다. 그러면 멀지 않은 날에 반드시 원하는 천리마를 구할수 있을 것입니다.” 과연 그말이 옳았다. 그일이 있은지 1년도 못되여 천리마를 가진 사람이 셋이나 나타났다. “따라서 대왕님께서 지금보다 더 훌륭한 인재를 구하시려면 우선 저를 스승(師)으로 세워 보심이 좋을 듯 합니다. 그러면 저같이 부족한 사람에게도 그토록 대우를 하니 더 훌륭한 사람은 더욱 후한 대우를 줄 것이라는 기대감으로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 것입니다.” 소왕은 그의 말이 그럴만하다고 생각하고 곽외에게 황금대(黃金臺)라는 궁전을 세워주고 사부(師父)의 대우를 했다. 이 소식이 알려지자 정말로 천하의 인재들이 모여 들었다. 하여 소왕은 바라고 바라던 국토를 회복하게 되였다. 물론 물질자극이 인재문제를 해결한다는 정답은 아니지만 우리들 스스로가 지난날 인재를 구하는 방법이 과연 어떠했는가를 비춰볼 거울이라 하겠다. “먹은 소가 똥을 눈다”는 속담이 생각힌다 . 오기활
253    가슴 아픈 추억 댓글:  조회:1075  추천:0  2018-04-18
                                          “하늘나라 백모님께 지금까지도 후회됩니다!” 요즘 “길림신문”서 펼지는 응모 작품 “아름다운 추억”이 독자들의 눈맛을 챙긴다. 그런데 필자는 “아름다운 추억”을 읽고 나면 번마다 타들과는 달리 “가슴 아픈 추억”이 떠 오르며 종종 밤잠을 설치군 한다. “저 도깝들을 맡깁니다! ” 필자는 1947년 음력 5월 9일 왕청현 석현진 달라자(현 도문시)에서 태여났다. 당년에 아버지가 병으로 하여 농사일을 못하다 보니 30대의  ㅇㅓㅁㅓ니가 혼자몸으로 네자식을 살피며 농사일을 전담하다보니 집생활이 궁핍하기로 말이 아니였단다. 오죽하면 누님들이 여름에 어머니가 신을 신고 다니는 것을 보지 못했다고 지금까지 외우겠는가.. 그렇게 세대주로 지내던 어머니가 1948년에 동네분들의 도움으로 마을에서 제일 마지막으로 가을 탈곡을 끝내고 급병(촉한?)에 걸려 일주일을 지탱하다가 12살짜리 이하 3녀 1남을 남겨 놓고32살 나이에 하늘나라에 갔다. 림종전에 어머니는 혀가 움직이지 않아서 겨우 이 세 마디 말을 남기고 눈을 감으셨단다. ㅡ 물남(곡수)서 시아버지가 이 둘째 며느리를 빨리 오라고 부른다(그때 시아버지는 언녕 사망 했다) ㅡ 형님(필자의 백모)에게 저 도깝들을 마끼꾸마, 얼마나 고생 하겠습두… ㅡ 기활이를 한번 더 보고 가겠습꾸마!(그날 동네 청년의 참군 환송으로 큰 누님이 필자를 데리고 갔음) 세상에 둘도 없는 백모님 그런데 업친데 덮친격으로 어머니가 사망한후 8년 만에 아버지까지 사고로 세상을 떠날 줄이야! 둘째누이까지 결혼하자 우리 3남매는(동부이모인 남동생까지)이 큰집에 얹혀살았는데 그때 큰집식구는 우리까지12명이 였다. 우리 나라가 제일 곤난한 시기였던1960년에 나는 수남소학교를 졸업하고 석현중학교에 입학하였다. 그때는 돈 때문에 학교 숙사에 들어가지 못 하고 매일 왕복 50리를 걸어서 통학하였다. 그때 몇 원짜리 사발시계마저 없다 보니 매일 백모님(최어복, 1911 ㅡ 1987)이 이른 새벽에 뜨는 샛별과 수탉울음의 홰수를 시계와 자명종으로 삼고 새벽조반을 해놓고 필자를 깨웠다. 게다가60년대 초 나라가 3년 재난으로 량식이 없어 백모님은 매일 삶은 호박과 풀뿌리 등 대식품(代食品)으로 점심밥을 마련할려니 얼마나 힘들었겠는가… 1969년 봄 백모님은 생산대의 양돈장에서 몇년간 돼지사양원으로 설명절도 없이 고생는 필자한테 몸 보신을 해 주느라 40근짜리 황둥개를 잡아 개엿을 만들어 일곱식구중 필자만을 따로 대접하였의니 말이다. 이 밖에도 백보님은 필자 부모들의 제사도 잊지 않고 30년을 명심하여 지내다가 1975년에 필자가 결혼하여 분가하게 되자 “너의 아버지의 환갑제사부터 너에게 시름을 놓고 맡긴다”고 하였다. 1980년대 말부터 백모님은 치매로 집식구들도 알아보지 못하는 형편에도 필자만은 잊지 않고 기억하였다 1987년 9월 어느 날, 필자는 백모님을 찾아 뵙고 나서 떠나려는데 백모님이 겨우겨우 몸을 지탱하며 일어서더니 밖에까지 따라 나와 채석돌에 돼지사료로 쌓여 있는 늙은 오이무지에서 좋아 보이는 오이를 골라 손으로 싹싹 비비더니 “기활아 오이를 더 먹고 가라”는 마감인사로 근로하고 자상한 인생을 마감하였다. 백모님의 정치흉금 백모님은 낫을 앞에 놓고 “ㄱ” 자도 모르는 일자무식이다. 무식하기로 지난 60년대에 처음 전등불을 불어서 죽이느라 애썼다니 말이다. 그런데 한번도 생산대 회의에 참가하지도 않는 백모님의 정치적 흉금이 집식구들을 놀라게 하였다. 문화혁명 때(1968년 8월) 백부님이 “조선특무”라는 억울한 루명을 쓰고 하루저녁 투쟁대회에서 타살되였다. 망나니 살인배들은 흉악하기로 이미 입관한 백부님의 시체를 “조선특무에게 관에 관채를 못쓴다”며 시체를 꺼내 가마니에 싸서 묻도록 강행했다. 그때 백모님은 억울해도 소리내여 목놓아 울수도 없었고 마음속에 한만을 깊이 품었다. 그런데 백부님이 타살된 후 얼마 안 되여 중국에서 “윁남전선지원”활동을 벌렸는데 어느 날 저녁에 백모님이 집식구들을 모아 놓고 윁남전선에 지원하라며 량표를 30근이나 내놓았다. 그때는 전 국민들이 나라에서 정한 ”3정량(3定量)” 표준으로 량식을 공급받는 때라 량표는 곧 쌀이였다. 지금까지 생각해도 글쎄 집에 신문방송도 없었고 생산대 회의에 한번 참가하지 않는 문맹인 백모님이 어떻게 알고 집식구들도 모르게 한량 두량 모았던 그 많은 량표를 윁남전선을 지원하라며 주동적으로 내놓았다니 실로 모를 일이다 이 밖에도 1975년에 필자가 연변농학원을 졸업하고 돌아와 백모님께 농학원에서 입당을 했다니 “네 입당이 대학졸업장보다 더 반갑다”며 그렇게도 기뻐할 줄이야! 실로 억울하게 남편을 읽은 백모님의 정치흉금이 바다보다 넒었다. 하늘나라 백모님게 지금까지도 후회 됩니다! 1976년 봄이다. 도문시에서 시민들의 음료수문제를 해결하고저 봉오동저수지를 건설을 결정짓고 봉오동대대(촌)를 파가이주를 하게 되였다. 그때 필자는 홍광향 축목수의소 소장직에 있으며 홍광향정부의 파견으로 봉오동 파가이주민 배치사업을 책임지게 되였다. 그때 이주민배치사업을 마무리를 하고 나니 대대부(촌부)에 걸려있던 벽시계가 임자가 없었다. 그래서 필자는 그 시계를 단위에 걸려고 갖고 오다가 아무튼 무슨 일로 하여 달라자 큰집에 맡겨놓고 이 후에 가져간다고 하였다. 그래서 큰집에서 처음 “땡 땡” 울리며 시간을 알리는 벽시계를 걸게 되였다. 그후 몇 달이 지난 후에 필자는 그 벽시계가 생각되여 가져 왔는데 그날 백모님이 너무나도 아쉬워서였던지 “그걸 가져가니?”고 물었는데 필자는 아무런 생각 없이 “예”하고 대답만을 남겼다. 그런데 지금 생각하면 그때 백모님이 그 벽시계를 큰 재산으로 그렇게 아끼였겠는데 가져간다고 하니 얼마나 아쉬웠으면 “그걸 가져 가는가?”고 물었겠는가!. 필자는 그 벽시계만 생각하면 지금까지도 하늘나라에 계시는 백모님이 떠오르며 못할 짓을 했다는 죄책감으로 후회되고 죄송하기로 형언할수가 없다. 속담에 “사랑은 내리 사랑이지 올리 사랑은 없다”고 했는데 이는 정녕 필자를 두고 하는 말인 듯 하다. 오늘 필자가 남들의 “아름다운 추억” 의 상대로 “가슴아픈 추억”을 함은 늦게나마 하늘나라에 계시는 백모님게 죄송한 마음을 표함과 함께 후세들에게 문자로 전하기 위함이다. 후세들에[게 당부한다. “너희들이 남한테 준 것은 다 잊고 남에게서 가진 것만을 기억하라” 백모님의 조카사랑은 천, 만, 억…. 이라고 수자로는 표현할 수가 없다 하늘나라에 계시는 백모님의 명목을 빌고 또 빕니다! 조카 오기활 올림. 2017년 12월 26일 , 일본에서
252    기자 그리고 꽃 댓글:  조회:1168  추천:0  2018-04-18
지난 8일은 기자절이다. 아침에 출근하니 연길시당위에서 보내온 생화묶음이 기자를 반갑게 맞아주었다. 기분이 좋았다. 16년전 도문시 김종수시장이 년말총화대회에서 “오기활기자를 표창할데 대한 도문시정부 문건”을 읽고나서 기공(記功)표창을 하던 날만큼 기쁘고 감사했다. 나는 언저부턴가 기자와 꽃을 대비하며 련상한다. 지난 60년대이다. 그때 우리 마을에 서명준(연변인민방송국)이라는 기자가 사회주의공작대로 왔는데 그는 우리에게 많은 세상사를 흥미진진하게 얘기해 준데서 너무나 인상이 깊었다. 나는 정말 기자기 부러웠다. 그런데 좋은 꿈을 꾼 덕분이라 할가? 서기자를 만나서 꼭 20년 만에 나는 승진의 기회를 포기하고 “연변일보”기자로 입선되였다. 기자는 무엇인가? 기자는 사회의 제1목격자, 공익과 민의를 뒤받침한 “백성의 고발자”, 미움을 사랑으로 이끄는 조애사, “신”의 뜻과 인간 “기원”을 서로 전달해주는 “천사”이다. 바로 내가 기자였기때문에 지난 80년대에 도문양로단 고만길의 영응사적을 써내 전 성적으로 “뢰봉학습 우수로동자 ㅡ 고만길”을 따라배우는 열조를 일으킬수 있었고 내가 기자였기때문에 거금을 주고 살수 없다는 미국고추종자(황관)를 산동성에서 기증받아 도문시 향양촌 남새기술원(리명달)한테 보내줘 그의 원을 풀어주었다. 또 내가 기자였기때문에 여라가지 비리를 다스릴수 있었고 기자였기 때문에 한국에서 사기를 당한 룡정 녀성을 다시 출국시킬수 있었다. 또 기자였기 때문에 연변의 “이웃절”을 발기하였다. 기자사업은 나로 하여금 사업 먼저 인간이 되도록 하였다. “참다운 언론인이 되자, 금전과 권력의 꼭두각시가 되지 말자. 독자들의 가슴속에 메아리를 치는 글을 쓰며 꿈틀거리는 사건현장에서 십자가의 참된 “천사”로 되겠다. 나는 바다물에서도 절지 않을 것이다” 이것은 내가 기자사업에서 줄곧 지켜온 맹세였다. 나는 기자를 꽃과 비긴다. 옛날에 하늘의 “신”이 천사를 불러 “지상에서 3가지 아름다음을 보고 돌아오라:고 명했다. 천사는 천상과 손색 없는 아름다운 꽃, 어린아아의 웃음, 어머니의 사랑을 지상의 3가지 아름다움으로 선택하였다. 꽃은 지상과 천상의 “미의 상징”이다. 꽃은 웃어도 소리가 없다. 곷은 묵묵히 향기를 뿜는다. 꽃은 철을 어길줄 모르며 음지와 양지를 탓할줄 모른다. 눈속에서도 탈없이 약속대로 핀다. 아름다운 련꽃은 흙탕에서 피지만 오염을 모른다. 사람들이 고통스럽고 삭막하고 어두울 때 곷을 보면 저도 몰래 부드러운 위로를 받는다. 사색, 사랑, 희망, 용기를 주는 꽃은 영원한 인생의 오아시스이다. 필자는 꽃을 가꾸는 아름다운 마음과 흙을 만지는 소박하고 부지런한 손이 되여 언제 어디서나 오염을 모르는 “련꽃기자”가 되려는 다짐으로 오늘도 이 밤을 설친다. ( “길림신문” 2006.11.21.)
251    [오기활] “이는 제 탓입니다” 댓글:  조회:584  추천:0  2018-04-13
우리말에 ‘잘되면 내 탓이요, 못되면 조상 탓이다’는 말이 있다. 예나 지금이나 사람들은 잘되고 좋은 일은 자기가 챙기려 하고 못되고 귀찮은 일은 남에게 미는 것이 상례인상 싶다. 모 우정국 J국장의 이야기다. J는 26살에 우정국에 취직하여 정년퇴직을 하기까지 근무년한이 30년이 넘는다. 엄격한 집안에서 자란 J는 어릴 때부터 자기가 한 일을 끝까지 책임지는 강직한 성품을 지니였다. J가 중학교에 다닐 때 친구들이 공놀이를 하다가 그중 한 친구가 그만 교실 유리창을 깼다. 그런데 그 친구네 집생활이 가난하고 부모들도 ‘제노릇’을 못하다 보니 남들의 축에서 빠지는 처지였다. 친구의 이런 가정형편을 잘 아는 J는 그 친구가 유리값을 물 형편이 못될 것 같아서 주동적으로 선생님을 찾아가 자기가 유리를 깼노라며 그 친구를 대신해 유리값을 내기도 하였다. 그가 우정국에 취직하여 국장으로 있을 때 한 부하직원이 도박에 빠져 가산을 축내자 가정불화가 잦아졌다. 개별적으로 여러번이나 그한테 충고주고 타일렀으나 그는 국장의 교육과 권고를 마이동풍으로 흘려듣다가 결국 도박으로 진 빚을 갚으려고 공금을 빼돌린 착오를 저지르고 해당 처분을 받게 되였다. 이에 J국장은 부하가 착오를 진 것은 자기가 국장책임을 바로하지 못했다며 사직서를 쓰고 스스로 국장직에서 물러났다. 주변을 보면 사업단위나 회사의 임직원들이 자기가 맡은 일을 하다가 알게 모르게 잘못을 저지를 때가 있다. 그런데 문제는 잘못을 저지른 당사자가 원망이 없이 그 잘못이 자기 때문임을 인정하는지, 그리고 그 당사자의 상관이 부하의 잘못을 자기의 직책범위내의 일이라고 생각하고 그 잘못을 감히 자기의 책임이라고 인정하느냐 안하느냐에 있다. 이런 실례가 있다. 지난 세기 80년대 모 향의 ‘5.7’(하향지식청년) 책임간부 S가 농전비(農傳非) 문제로 상급 부문으로부터 행정처분을 받게 되였다. 그런데 실제 조작과정을 조사하니 농촌호구를 도시호구로 천이시킨 사람들의 대부분이 C향장의 지시로 한 것이다. 그래서 S가 C를 찾아가서 과정을 말하며 상급 부문에 설명해달라며 ‘도움’을 청했더니 C어른이 푸르뎅뎅해서 “그 때 내가 당신이 할만하면 하라고 했지 정책을 위반하면서 억지로 하라고 했소?”라며 성을 내는 통에 별수없이 S가 고스란히 처분을 받고 직무에서 물러나야 했다. 상관이라면 자기의 부하가 알게 모르게 일단 잘못을 저질렀다면 상관으로서 그 부하를 믿고 “이는 내 탓입니다”며 그 잘못의 책임을 자기의 탓으로 분담하는 상관이 부하를 아낄 줄 아는 존경받고 믿을 만한 상관이라 하겠다. “이는 내 탓입니다”는 처세술을 갖춘 상관은 직업도덕을 갖춘 준비된 상관이며 명지한 상관이라 하겠다. / 길림신문 기고인 오기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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