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기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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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2    옛 이야속의 인생조언 댓글:  조회:2016  추천:0  2021-01-27
                   수상을 벌금시킨 경찰관 어떠한 순간에도 흔들림 없이 자신의 일을 실천는 사람들이 있다. 아무리 힘든 일이라고 할지라도 자신의 책임과 신념을 바꾸지 않는다. 이런 사람들은 대방의 직책이 높다해서 굽실거리지 않고 또한 자신보다 낮은 신분의 사람들도 무시하지 앟는다.  이들은 늘 자신에게 주어진 일들에 최선을 다하는 사람들이다. 허나 주위를 살펴보면 상황에 따라 생각과 행동을 바꾸는 기회주의자들이 많다. 자신에게 리익이 된다고 싶은 사람에게는 온갖 아첨을 떨고 자신에게 그다지 리익이 없는 평범한 사람이라면 관심조차 가지지 않는다. 언제부터 우리가 이렇게 되였는지 모르겠지만 모든 사람들에게 친절할 뿐만 아니라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하는 사람, 이런 사람이 세상에 많았으면 이 세상이 더욱 살맛이 나겠는데 말이다. 이런 옛 이야기가 있다.   어느 날 처칠(영국의 정치가로 두번 총리에 취임, 1953년 노벨문학상 수상)이 시간에 쫓겨 운전기사에게 차속력을 내라고 했다. 운전기사는 보통 차들보다 훨신 빠른 속도로 내 달렸다. 그런데 교통 경찰관이 수상을 태운 자동차가 과속으로 달리는 것을 보고 재빨리차를 세우도록 했다. 그리고 면허증 제시를 요구하는데 운전기사가 경찰관에게 말했다. “수상께서 타셨소.” “알고 있소. 그러나 과속은 과속이요. 딱지를 떼겠으니 벌금을 물도록 하시오.”   운전기사의 말에 경찰관이 끄떡도 하지 않고 벌금을 재촉하자 이번에는 처칠이 특유의 여송연을 입에 물고 언성을 높혔다. “이봐, 내가 누군 줄 알아?”  “예, 얼굴은 우리 수상 각하와 비슷합니다. 그런데 법을 지키는 것은 비슷하지 않습니다.”  경찰관이 천연덕스럽게 대답했다. 결국 처칠은 벌금을 내야만 했다. 처칠은 의회에서 업무를 마치고 올라와 경찰총감을 불렀다. 그때 만난 경찰관을 격려하기 위해서였다. 그는 자초지종을 설명한 후 그 경찰을 찾아 특진시킬것을 명했다. 그러나 경찰총감은 과속차를 적발했다고 특진시키는 규정은 없다고 거절했다.   엄격한 자기 관리, 사회에 대한 책임, 출중한 자신감, 벼슬을 싫어하는 “생리”로 자신를 지키며 평생분투하는 이런 사람들로 세상이 하루하루가 가꾸어 진다.     오기활
361    21세기의' 리시진' 김추철 전(련재 30) 댓글:  조회:1443  추천:0  2021-01-26
                                            제 3부 ; 신문잡지료 읽는 김수철 3, 경영인을 찾으라 지난 3월28일 기자는 독자들이 민간약초에 관한 질문에 정답을 주고저 연변농학원 농학부 식물학교연실 정년퇴직교수 김수철 옹을 만났다. 교수님과 필자는 지난세기 70년대 사제간이다. 오후 4시경, 우리를 마중나온 교수님은 생각보다도 더 건강하셨다. 자애로운 실눈길로 두손을 힘껏 잡아주는 교수님이 아주 건강하다는 필자의 경탄에 며 너털웃음을 앞세웠다. 올해 87세인 교수님은 연변농학원 제1기생으로 1950년부터 1987년에 정년퇴직할 때까지 연변농학원 농학부 식물학교연실의 강사, 교수로 식물형태, 식물해부, 식물분류, 식물라틴어 등 과문의 교학과 식물연구에 전념하였다. 지금 교수님은 연변생물학회 명예회장, 길림성초원학회 고문, 대한민국자원식물학회 고문, 연변동광ALOE연구소 소장 등 직무를 맡고 석양을 빛내고있다. 교수님은 식물퀴즈이다. 1973년 김교수님이 우리를 이끌고 백두산아래 청산림장에서 15일간 중초약을 교학할 때 아무튼 어떤 풀이나 물어보면 학명, 별명, 생육지, 리용, 채집계절, 분포를 빠짐없이 알려줬다.  필자는 교수님의 높은명망을 한국에서 실증했다. 1999년 필자가 세계자연농업의선도사로 호칭받는 조한규박사님(한국)의 자연농업특강을 일주일간 수강했다. 어느 날 조박사가 필자를 데리고 서점에 가더니 이란 투터운책을(값 45,000원)을 사서 선물했다. 은 한,중두나라전문가들이 팀을무어 2년간 백두산의 유용자원식물을 탐사한 기초상에서 농학, 식물학, 약학, 림상학, 축산학 등 자연과학연구지침서로 세상에서 처음 출판을 했다. 그때 필자가 책값이 너무 비싸다니 조박사는며 특히 이 책은 김수철교수님이 집필한 값진 책이라고 하였다. 필자가 바로 김수철교수의  제자라고 하니 조박사는 오선생이 훌륭한 스승님을 만났다고 부언하였다. 교수님은 정년퇴직후14 권(편)의 귀중한 론저를 출간한 평생현역형교수였다. 교수님의 저택은 책으로 장식되였다. 심지어 광주리며 눈에 쉽게 띄우는 그릇에 마저 책으로 넘쳐났다. 교수님은 지금까지 안경을 모르며 2007년 일본 동경대학에서 주체한 국제학술대회에서 영문,일문발언고를  친히 컴퓨터로 타자 했단다.  건강비결을 얘기 하는 교수님은 주변에 개발할 중초약과 민간료법이 정말 많다면서. 값이비싸야 좋은 약이라는 편견을 청산해야 한다며 생당쑥, 익모초, 삽주, 골담초의 특별한 효능을 렬거 하면서 솔잎 한 가지로만으로도 많은 성인병을 막아낸다고 한다. 이렇게 말하는 교수님은 을 쓴 리시진은 장사군이 아니고 나와 같은 학자입니다. 학자들은 경영의식이 없지만 의식주가 해결되였기 때문에 돈욕심이 없습니다.>> 겸허에 유머까지 우리의 만남은 37년만이다. 교수님은 연변일보와 길림신문의 애독자라며 기자들의 이름도 곧잘 외웠다. 교수님은 우리와의 만남을 대단한 영광이라며 우리더러 교수님이 스크랩한 신문기사에 친필싸인을 해 달라고 하였다. 교수님의 겸허함은 자기을 멀리함에 집합되였다. 교수님은 필자가 요구하는 자료에서 수상편만은제공하지 않았다. 교수님은 인생에서 술이 없어서는 안된다며 이 좋은 만남에 술이 없으면 안된다며 손수 술상을 차리고 젊은에게 를 대접하였다. 한때는 60도 배갈을 한 근반은 마셨다는 교수님은 술은 정말 좋은 음식인데 술의 좋고 나쁨은 마시는 사람에게 달렸단다 ., 김수철교수님은 백두산의 정기를 받으며 책무지와 길가의 풀을 안주로 술과 동무하면서 평생을 식물과 함께 하는 건강장수학자라 하겠다. 긍정적 사고로 사는 인간에게  나이는 수자에 불과하다. 필요한 사람은 늙지 않는다. 제자는 김교수님의 백세장수에 따르는 그의 불타는 여열을 기대해본다. 오기활                   ( 길림신문ㅡ 2011-04-01)    
360    옛 이야기 속의 인생조언 댓글:  조회:1918  추천:0  2021-01-18
                                        노벨수상자의 유언    많은 사람들이 인생을 살아 가면서 여러가지 고품을 추구하려고 얘를 쓴다. 아름답게 세공된 보석, 고급 승용차, 궁궐 같은 집... ...등을, 그런데 사람들마다의 그런 추구가 진정 누구를 위함인지를 생각해 본 적이 있는지는 모를 일이다.   두루 살펴보면 물론 모두가 그렇지는 않겠지만은 상당수의 사람들의 추구가  자신을 위한 화려함이나 사치에 신경을 쓰는 것이 상당수이다.   세상에는  우리의 마음을 기쁘고 행복하게 해주는 것들이 많다. 그런데  눈에 보기에 멋이 있고 화려한 것에 사람들의 기쁨과 행복한 감정이  "견물생심"으로 얼마 못가   또 다른 것을 추구하기에   마음이 항상 공허함이 문제로 나선다.  .행복은 외부에서가 아닌 저마다의 마음속에서 찾아야 한 있다. 마음속에서  찾은 행복이야 말로   진정으로 느낄 수 있는 행복이다. 아래는 노벨수상자의 부탁(유언)이다 미국의 흑인 목사 마틴 루터 킹(1929. 1. 15ㅡ 1968. 4. 4.)이 암살 되기 바로 두달 전에 이렇게 설교했다. ㅡ 저는 가끔 저의 죽음에 대해 생각해 봅니다. 그리고 저의 장례식을 그려봅니다. 만약에 여러분 중에 어느분이 저의 장례식에 참가한다면 부디 장례식을 길게 하지 말라고 전해 주세요. 또 장례식 조사도 짧게 하라고 말씀해 주세요. 그리고 조사를 하는 사람에게 제가 노벨 평화상을 탄 사람이라는 것, 내가 3백 여차의 표창과 상을 받았다는 것을 말하지 않게 해 주세요. 왜냐면 그런 것들이 중요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다만, 내가 다른사람들을 섬기는 일에 삶을 바치려고 노력했다고 말해 준다면 감사하겠습니다. 사람들을 사랑하려고 노력했고 굶주린 사람을 먹이려고 했으며 그리고 헐벗은 사람에게 옷을 입혀 주려고 애썼고 감옥에 있는 사람들을 방문하려고 노력했고 사람을 사랑하고 인류에 봉사하려고 했썼던 사람이라고 말해 주시면 저는 행복하고 감사하겠습니다. 그리고 다음을 부언했다. “저는 남기고 갈 재물도 없습니다. 다만 헌신된 생애를 남기기를 원합니다”   오기활
359    “나는 오늘 또 놀랐습니다.” 댓글:  조회:2672  추천:0  2021-01-13
                           김수철 옹 “인생은 매일 놀라야 한다”고     다사다난의 경자년 쥐띠해를 보내고“수례멍에의 압력에 책임적인 노력이 없이는 성공을 기대할수 없다”는 신축년 소띠해를 마중해 필자는1925년 4월 생 소띠인 김수철 옹을 방문하였다. 김수철교수(연변농학원)는  90대 고령에 수년간을 연길시 조양천진 삼성촌 5대에 독거하면서 길림성 식물연구사업의 최고봉인“길림성식물지”(총3권)출판을 위해 열과 성을 다하는 평생현역교수이다.  12월 29일 오전 열시 이십분경,  우리일행(4명)을 만난 김 옹은“방금 연변대학 어른들이 이 늙은이를 위문하고 돌아 가자 오선생이 이 산골을 찾아왔구만,,,”하면서 힘찬 악수로 반겨주셨다.  열한시경, 김 옹이 전기열풍기로 금방 방을 덥혔다는 거실에서 인사르 나누던중 우리와 동행한 마동석 (马东锡, 66)씨가 20 여년 북경에서 화가로 활약했다는 소개와 지금 연변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는“연변 제 1 회 예술품박람회” 에 마화백의 작품이 전시되였다는 소개를 듣던 김 옹의 딸 혜란(63)씨가 말참견을 했다. “우리 아버지는 그림이라면 쌕ㅡ 합니다.  손님들이 오늘 점심을  좀 늦게 들더라도 아버지를 박람회에 모실 수 없을 가요? 아버지는 퇴직후에도 신문광고를 보고 만여 원을 팔면서  목단강미술강습반에 참가하였고 팔십고령에도 석달간이나 룡정 ㅡ 연길을 오가며 연길미술강습반에 참가 하였답니다...”   이에 김 옹은 묵직한 사진기를 챙겨가지고 지금 당장 떠자자며 우리를 재촉하였다.   연길로 가는 도중에 김 옹이 하는 말씀이다. “오늘이 진정 기쁨날이다...그림은 번역이 필요 없는 세계공통어이다,” “화가는 독자적인 안목으로 세상을 보며 자기나름에 따라 세상옛날을 재생기키고 래일의 세계를 창조한다. 나는 잘그린 그림을 볼때마다 새로운 세상을 내다 본다”, 이 날은 토요일이라  마화백이 전화로 주 미술관장에게 김교옹의 행차를 미루 알렸더니 회장문어구에서 서화(徐华)관장이 몇몇 직원들과 함께 우리를 대기하고 있었다.    회장에는 마화백의 미술작품이 1번, 석희만의 작품이 2번으로 배치되였는데 안내서에 마화백은 중국유화창작연구원 원사, 고 석희만은 연변대학 미술학부 창시인으로 소개되였다.  김 옹은 1,2번의 작품을 한점도 빠짐없이  렌즈에 담았다.   거의 열두시가 되자 김 옹이 하는 말씀이다. “내가 열두시전에 돌아 온다고 딸과 약속했으니 오늘은 이만 돌아갑시다. 내 욕심은 끝이 없으니 며칠후에 다시 와서 관람하게씁니다. ”      ㅡ나는 석화백과 몇번 술자리도 함께 했고 지금까지 석화백의 작품집을 소장하고 있소.  ㅡ석화백은 참 편안한 분이였소. 석화백은 룡정 동흥중학교에 다녔고 1935년(?) 쯤에 일본 도쿄미술학교에서 고학을 하고 다시 룡정에 돌아와 중학교 미술교사로 지냈소. 석화백의 아내는 일본인으로 말년에 석화백이 아내와 함께 일본에 가서 살다가 세상을 떠났소.” 돌아가는 길에서 김 옹이 하는 말씀이다. ...   ...   ... 김교수가 점심상에서 하는 말씀이다. ㅡ 나는 두 화백의“어머니”작품을 모두 롄즈에 담았다. 나는 세상의 모든 어머니를 사랑하고 존경하며 나의 안해도 사랑하고 존경했다. 우리는 언제나 부인을 동지섣달에 꽃본듯이 대해야 한다. 마원사가 저 사진(벽에 걸려 있는 부부사진)을 그려서 나에게 선물하겠다니 부탁한다. 사진과 그림은 다르니까 나는 좀 수수하게 그리고 부인은 사진보다 더 이쁘게 그려달라.   ㅡ 내가 가장 존경하는 스승님은 모든 것에 놀라라고 하였다. 사람들이 보통이라고 하는 일에도 놀라라고 하였다.우리는 매일 매일 평범한 속에서 기적을 발견하며 놀라야 한다. ㅡ 끝도 시작도 없는 광범한 대우주에서 우리의 오늘 만남이 얼마나 기적적인가! 나는 오늘도 놀랐고 행복하였다.     필자는 21세기의 “리시진”의 래일의 놀람이 궁굼하다. “길림성식물지”2, 3권 출판을 위해(1권은 지난해에 출판)  “일일신 우일신(日日新,又日新)”의 기백으로 매일매일 그려내는 식물표본을 즐감하면서 놀랄는지, 아니면...   오기활    
358    21세기의 "리시진" 김수철 전 (련재 29) 댓글:  조회:1646  추천:0  2021-01-11
                                  제 3부 ; 신문잡지로 읽는 김수철        2, 자연의 대문을 열어가는 사람                                                                                 (3) 당중앙에서 마련해주신 과학의 새봄은 여기 변강에도 찾아 왔다. 아, 얼마나 고대하던 새봄인가. 김선생의 가슴속에는 설음의 얼음장이 녹아 내리고 봄물결이 출렁인다 이근년에 늘 박해와 압제속에서 억울한 모자를 쓰고 피눈물을 삼키면서 해오던 사업이 아니였던가. 좋구나. 인젠 마음도 통쾌하고 몸을 내번지고 일할 때 로다. 버섯분류는 식물학에서 일종 난제로 제기되고 있다. 연변은 물론 국내 각 지와 조선에서도 버섯분류는 공백으로 되고 있다. 때문에 이 산마루를 점령하는 것은 과학령역, 대외무역, 인민생활 등 각 방면에 커다란 의의를 갖고 있다. 전인들이 올라보지 못한 산마루, 거기로 오르는 길이 험난한 줄 알면서도 만난을 물리치고 기어코 오르는 여기에 과학공자자들의 긍지와 사명이 있는 것이다. 김선생은 결연히 이 길을 선택하였다. 진균의 일종인 버섯은 참 까다라운 식물이다.  적지않는 버섯들이 해가 지면 돋아나기 시작하여 이?z날 해가 뜨면 늙어서 죽는다. 또 아주 섬세하고 연하게 생긴 이 식물은 어떤 것은 손을 대거나 뜯자 마자 원형체를 읽고 스르르 쓰러져 버리고 만다. 때문에 버섯을 정확하게 분류하고 그들의 특성을 잘 알아내기 위해서는 제때에 채색원형도를 정밀하고도 생동하게 그려야 한다. 날마다 푸름푸름 먼동이 터오면 어깨에 채집통을 멘 한 사람이 마을주변을 샅샅이 훑으며 하루일을 시작한다. 어떤 때는 날 밝기전에 마을 뒤에 자리잡은 모아산에 오른다. 그가 바로 식물연구를 위해집까지 농촌에 이사 온 김선생이다. 버섯원형을 보존하기위해 어떤 버섯은 따지않고 그자리에 세워둔 채로 두 세시간씩 공력을 들여 그린다. 어떤 버섯은 따자마자 가지고 집으로 달려와 분초를 다투며 그린다. 또 매 버섯의 특성을 정확히 밝히기 위해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고 버섯마다 먹어본다. 하여 남녀로소 할 것 없이 마을사람들은 모두 그를 존경하여“제일 부지런한 분”“버섯박사”라고 부른다. 국경절 전날 밤, 외지에서 공작하는 다섯 남매는 부모와 함께 명절을 쇠려고 모두 한자리에 단련히 모였다. 은하수도 서천가에 기울고 이야기꽃을 피우던 가족식솔들도 잠자리에 들었건만 저녁상을 물리기 바쁘게 소박하게 꾸민 연구실에 들어간 김선생은 아직도 공작에 여념이 없다. 맏아들 상술이는 이리저리 망설이던 끝에 조용히 연구실문을 열고 들어섰다. 벽에 빈틈없이 붙여놓은 각종 버섯의 채색원형도, 천정주변을 돌아가며 빼곡히 박은 못에 줄지어 걸어놓은 버섯표본들, 창턱에 줄줄이 놓은 유리병버섯표본들… 그 어디를 보나 아버님의 탐구적 열정과 피타는 노력이 력력히 알린다. “아버님, 밤이 퍽 깊었습니다.” “엉?” 확대경으로 버섯을 비추며 원형도를 그리던 김선생은 머리를 돌린다. 아들을 보는 순간 그의 눈에는 자애로운 빛이 흐른다. “자지, 곧자지.” 그리곤 다시 필을 놀린다. 흰서리가 내리기 시작한 머리, 수척한 얼굴에 부채살처럼 퍼진 굵은 주름살, 아, 30년을 하루같이 식물연구에 온갖 정력을 몰부어 온 아버님! 연구실을 나서는 아들의 눈에는 맑은 이슬이 맺혔다. “이 버섯이름을 어떻게 단다?” 송이버섯 원형도를 다 그리고 그 옆에놓여 있는 흰색갈에 털이 보송보송한 버섯을 조심스레 쥐는 김선생의 입가에는 잔잔한 미소가 흐른다. “너 때문에 걸음도 적잖게 걸었지.” 이렇게 입속말로 되뇌이는 그의 머리속엔 그저께 베개봉에서 있은 일들이 생생하게 되살아 난다. 그가 청산대대에서 20리 떨어진 베개봉밑에 도착한 것은 아침 9시경이 였다.  양지바른 산밑에 양봉장이 산뜻하게 자리잡았는데 집앞에서 한 로인이 버섯을 말리우고 있었다. 부쩍 호기심이 든 그는 로인에게 다가가서 공손히 인사를 올리였다. “어디서 오시는 손님이시우?” “룡정에서 옵니다.” “사냥을 오시우?” 로인은 그를 아래우로 쭉 ?f어보더니 채집통에 눈을 박으며 묻는다. “아닙니다. 버섯을 채집하려구요.” 그는 소탈하게 웃으며 채집통을 열고 용처를 알려드리니 로인은 그제야 오해를 풀며 호탕하게 웃었다. 로인이 말리우는 버섯을 살펴보는 순간 그는 깜짝 놀랐다. “이게 무슨 버섯인가? 난생 처음 보는데.” 버섯을 들고 유심히 뜯어보는 그의 심사를 알아 차린 로인은“이 산꼭대기루 해서 구새먹은 나무통안에 서너잎 돋은 걸 뜯어 왔수다.”라고 알려주는 것이다. “로인님, 이 버섯이 저에겐 참 쓸모 있습니다. 그는 용기를 내서 말했다. “가져 가시우, 버섯을 구하려 불원천리하고 산에 오신분인데 무얼 아끼겠수” 로인은 참 시원시원한 분이였다. “로인님, 정말 감사합니다.” 그는 버섯이 손상받지않기 위해 베개봉에 올라갔다가 내려올 때 가지고 가겠다고 말씀을 드리였다. “아니, 혼자몸으로 말이우? 이 산에 올라갔다가 길을 잃구 돌아오지 못한 사람들두 적지 않은데…”로인의 얼굴에 근심의 빛이 짙게어렸다. “로인님, 안심하십시오. 그전에도 세번올라 갔댔습니다.” 그는 로인께 인사하고 산기슭에 붙었다. 백두산과 어깨를 겨루는 베개봉. 산기슭에 선 오미자덩굴, 머루덩굴이 밉살스럽다. 한걸음 두걸음 덩굴을 헤치며 오르노라니 어애와 잔태미가 살 때를 많났다고 옷에 착착 달라붙는다. 낯을 가리운 면사포에 붙은 놈들은 살에 들어 붙겠다고 바글바글 끓으며 악을 쓴다. 이를 악물고 첫 방선을 뚫으며 중턱에 이르렀다. 절묘한 기암들이 둬길되게 깎아지른 절벽이였다. 절벽틈 사이엔 바줄같이 굵은 넝쿨이 주렁주렁 드리워 있다. 넝쿨을 몇번 힘주어 당겨본후 꽉 틀어잡고 몸을 우로 솟구며 한번 또 한번, 발톱을 틈사이에 박으며 한번 또 한번… 온 몸엔 바늘 같은 신경이 돋고 옷은 땀에 물자루가 된다… 산마루다. 그 어떤 태풍에도 끄떡않는 왕사스레나무와 석송이 꽉 박아섰다. 산마루에 오르고 나니 온 몸이 햇솜처럼나른해 진다. 강대나무에 기대니 소르르 잠이 몰려든다. “쿵!” 진대나무가 넘어가는 굉장한 소리에 벌떡 놀라깨여 난 그는 지궂게 달라붙는 졸음을 쫓아버리며 몸을 털고 일어났다. 그가 갓 넘어진 진대나무 부근으로 다가갔을 때 였다. 그 옆에 서 있는 중둥이 부러진 강대나무에 인삼처럼 귀하다는 령지버섯이 달려 있지 않는가. 그는 날듯이 기뻤다. 그는 잽싸게 령지버섯을 뜯어 소료에 싸서 품속에 간직하고는 바삐바삐산을 내리기 시작했다. 백두산을 닮아 베개봉의 날씨도 변덕이 많았다. 난데없는 먹장구름이 꾸역꾸역 멍석말이로 밀려들더니 삽시에 구름 한점 없던 하늘을 삼켜버린다. 잇달아 허공에 불빛칼질을 하며 번개가 일고 꽈르릉ㅡ하늘이 무너지둣 우뢰가 운다. 쏴ㅡ일진강풍이 지나가고 창살 같은 소낙비가 억수로 쏟아진다. 회초리 같은 비살이 그의 몸을 마구 후려 갈긴다. “허참, 설상가상이로군.” 그는 입속으로 중얼거리며 발걸음을 다그친다. 쭈르르 미끄려 넘어지면 일어나고 나무에 걸려 뒹굴다가는 다시 일어서며 뽀얀 물보라를 헤쳐 나간다. 그가 산기슭에 이르렀을 때는 땅거미가 질 무렵이였다. 헌데 이게 웬일인가? 양봉장은 어디에 있는가? 주위를 한참 살펴보고서야 방향을 잃었다는 것을 알았다. 마음을 다잡은 그는 지남침을 꺼내들고 방향을 가렸다. 여기서 동쪽으로 한 10리 가면 림업마을이 있다. 몇 년전에 거기에 들린적이 있다. 그는 허리띠를 졸라매고 지팽이에 몸을 지탱하며 마을을 향해 걸었다. 마을부근에서 한 청년을 만났다. 청년은 몹시 놀라면서 사연을 묻는다. 자초지종을 들은 청년은 심히 감동되여 기어코 자기집에 주무시라고 한다. 허나 그는 청산초대소에서 지금 사고난 줄로 알고 몹시 걱정한다며 꼭 떠나야한다고 했다 청년은 만류하다 못해 길동무로 나섰다. 그가 청년과 함께 청산초대소에 도착했을 때는 밤 9시경이였다. 대대에서 한창 인원을 동원하여 그를 찾으려 떠난다고 법석이는 판이였다. 이 광경을 목격한 그는 눈귀가 축축히 젖어듬을 금할수 없었다. 잠자리에 누운 그는 이리뒤척저리뒤척하며 종시잠을 이를수 없었다.  래일 룡정에 도착해야 모례예 전대로 교학을 할수 있다. 헌데 양봉장의 이름모를 버섯은 꼭 가져가야 한다. 어떻게 할 것인가. 룡정방면으로 가는 뻐스가 래일 아침 8시에 있으니 그 전에 양봉장에 갔다와야 한다. 이튿날 새벽 3시, 그는 전날의 피로도 말끔히 잊은듯 다리에 휘휘감기는 젖빛안개를 헤치며 베게봉으로 뻗은 오솔길로 씨엉씨엉 걸어간다. 이른 새벽에 꿈같이 나타난 그를 바라보는 양봉장로인은 반가워 어쩔줄 모른다. 어둡도록 기다려도 산에서 내려오지  않으니 밤 늦게까지 홰불을 해 들고 산에서 그를 찾았다는 실로 고마운 로인이다. 소료에 싼 버섯을 그에게 주는 로인의 눈엔 물기가 흥건히 고이였다. “근 70년을 산에서 살면서 버섯을 이렇게 귀히 여기는 분을 처음 만났수다!” …… “청산ㅡ베개봉, 청ㅡ봉, 그렇지! 청봉버섯이라 달자!” 그는 무릎을 탁치며 벌떡 일어섰다. 100여가지의 버섯표본을 만들고 100여장의 버섯채색원형도를 그려 3년 계획을 금년 1년에 완성한 그 기쁨! 이 속도대로 해 나간다면 후년에 문제없이 버섯분류의 산마루에 오를수 있다! 새날이 밝아온다. 붉게 타는 아침노을을 거느리고 시월의 첫 태양이 온누리에 금빛주단을 펼친다.그는 창문을 활짝 열어 젖혔다. 얼마나 상쾌한 10월의 아침이냐. 당중앙에서 우리에게 두번째 생명을 주시고 과학연구의 광활한 천지를 마련해 주시니 일할수록 새힘이 솟구치고 일할수록 젋어만 진다. 아, 이한 몸을 깡그리 바쳐 과학기술현대화의 봉우리에 오르는 디딤돌로 되리라! 과학에는 평탄한 큰 길이 없다. 전인들이 걸어보지 못한 생소한 초행길. 이 길을 뚫고 헤치며 겪는 말못할 고생을 아무도 모르건만 실천과 노력의 열쇠로 자연의 대문을 하나 또 하나 열며 과학의 높은 봉우리에로 한걸음 또 한 걸음 톱아오르는 무명영웅들! 동지들이여, 우리 모두 그들에게 숭고한 경의를 드리자! 과학의 첨병들에게 영광이있으라! 김웅 (김호근) 연변문예 1979년제 3기
357    "21세기의 '리시진' 김수철 전"(련재 28) 댓글:  조회:1654  추천:0  2021-01-01
                            제 3부 ; 신문잡지로 읽는 김수철   2, 자연의 대문을 열어가는 사람                                      (2) 장검인양 창공을 뚫고 우뚝솟은 백두산. 끝간데 없이 눈뿌리 아득히 뻗어간 천리림해에 동이튼다. 산중턱에 아담히 자리잡은 백두산보호국벽돌집은 안개 이불속에 묻혔다. “엊저녁에 폭우가 내렸는데 묘칠후에 떠나 보시죠.” 국장동무가 길 떠날 차비에 여념이 없는 두 사람에게 권고하는 말이다. “아니,‘천마’는 이런 날씨를 더 좋아 하지요.” 김선생은 국장에게 사의를 표하며 신들메를 꽁꽁조인다. ”김선생은 그 수수께끼를 꼭 플어야 발편잠을 쉬겠답니다.” 동행하는 주 의약공사 김동무가 쾌활하게 웃으며 김선생을 두둔해 나선다. 며칠전에 있은 일이 였다. “연변중초약”책을 편찬하던 김선생은 한 가지 문제에 봉착하였다. 즉 연변에 반신불수와 고혈압에 쓰는 진귀한 약재인“천마”가 나는가 안나는가. 난다면 출생지는 어디인가. 종시 답안을 찾지 못해 모대기던 그는 어느 하루 김동무한테서 자기가 5.6년전에 백두산으로부터 몇십리 떨어진 무송쪽수림에서 “천마”를 보았다는 말을 들었다. 김선생은 날듯이 기뻤다. 헌데 김동무는 빙그레 웃음“하, 김선생님. 천마가 있다는 것이 확실한데 책에 적어넣으면 안됩니까?”하고 물었다. 이 말을 들은 김선생은 즉시 정색해지는 것이였다. “김동무, 과학이란 로실한 학문인 것 만큼 우리는 어디까지나 실사구시 해야 하오. 실물표본과 출산지등을 똑똑히 얻지 못하고 책에 기입하는건 과학에 대해 책임지지못하는 표현이요. 그리고 또 후대에 대해서도 책임지지 못하는 태도지.” 이리하여 그들은 부랴부랴 급한 길을 떠났던 것이다. 밖을 나서니 새벽안개가 천지림해에 이불을 쭉펴서 몇발자국 앞도 잘 보이지 않는다. 간밤에 쏟아진 폭우에 물벼락을 맞은 나무들은 스쳐지나가는 바람에 콩알 같은 물방울을 뚝뚝 떨군다. 물방울이 목덜미에 떨어 질 때 마다소름이 쭉 끼친다. 한참 걸으니 사품치는 백하가 길을 막았다. 강우에 무지개처럼 걸린 외나무다리, 두 사람은 손을 꼭 잡고 다리우에 천천히 올라선다. 얼음판처럼 미끌미끌하다. 그들은 온 몸의 신경을 발끝에 모아 바레무무용수처럼 한치한치 내디디며 다리를 건넌다. 전신에 땀이 빠직빠직 돋는다.…. 다리를 건넌 그들의 얼굴에는 안도의 빛이 흐른다. 한 20리 실히걷자 꼭 들어선 버드나무숲이 앞을 막는다. “엉?” 김동무는 무망간에 소리친다. “왜 그러오?” “길이 없어졌습니다.” 두 사람은 한창 돌아 보았으나 끝내 길을 찾지 못했다. “이상한데? 분명 5,6년전엔 길이 있었댔는데…” “허허, 길이 없으면 길을 내면서 가지. 이 길잡이가 있으니 념려 없소>” 김선생은 지남침을 꺼내들며 소탈하게 말한다. 길 없는 길을 찾아 가시덤불을 헤치며 앞으로만 나아가는 그들의 강행군. 몸집이 건장하고 힘꼴이 센 김동무가 저만큼 앞서서 간다.” “work harder! work harder!” (위오ㅡ크하ㅡ더! 위오ㅡ크하ㅡ더!)(힘을  냅시다! 힘을 냅시다!) 등뒤에서 들려오는 김선생의 힘찬 목소리에 김동무는“예?”하며 돌아섰다. 자기를 부르는 줄로 알았던 것이다. 김동무의 의혹에 찬 얼굴 표정을 보던 김선생은 저도모르게 허허 웃었다. “나의 학습이 동무에게 착각을 주었구만.” 김선생은 그를 바싹 따라서며 손에 쥔 단어카드를 넘겨준다. “아니? 영어단어카드?” 김동무의 눈은 화등잔이 되였다. 김동무의 표정에서 그의 내심을 낱낱이 들여다 본 김선생은“요기도할?Y 좀 쉴가?” 하더니 옆에 넘어진 진대나무우에 소료(비닐박막)를 펴는 것이였다. 붉은해가 아득하게 높이솟은 나무우듬지들 사이로부채살 같은 해살을 펴칠다. 김선생은 허리춤에 둘러찼던 밥보자기를 풀어 헤친다. 밥한줴기를 김동무에게 주고 다른 한 줴기를 자기가 쥐더니 맛나게 한입 뚝 뗀다. “실로 별미로군.” 산속에선 휴식의 한 때 이 멋이 좋다. “김선생님, 지금이 어느 땝니까? 지식이 많을수록 더 반동이란 고함소리가 판을 치는데… 그리고 또 몇 년전의 교훈도…” “뭐? 몇 년전의 교훈?” 미소가 흐르던 김선생의 얼굴엔 삽시에 도고한 기상이 비꼈다. 과학을 탐구한 것이 죄로 되여“자산계급전문가”란 모자를 쓰고 일어, 영어, 로어를 학습한 것이 죄로 되여“양노”란 감투를 쓰고 반년동안이나 인신자유를 박탈당한채 비판받고 투쟁받던 억울한 일. 허나 그 따위 압제와 박해는 도리여 그의 결심과 의지를 더 굳게 했을뿐이였다. “김동무, 작년에 열린 4기 인대에서 주총리께서는 모주석께서 구상하신 네가지현대화의 웅위로운 전망을 우리 앞에 펼쳐줬소. 그날을 앞당기기 위해 배움과 탐구의 길에서 티끌만한 동요도 있어서는 안된다고 보오.” “그런데 왜‘고린내 나는 아홉째’라는 모자가 지금도 날아 다닙니까?” “고린내 나는 아홉째?” 이렇게 되뇌이는 김선생의 입가에 경멸의 빛이 스쳐 지나간다. “그자들더러 지껄일대로 지껄이라하지요. 이 아홉째가 사회주의 락원의 꽃동산에 자신의 심혈로 아름다운 꽃, 향기로운 꽃들을 가꿔준다는 것을 력사는 증명할 것이니깐!” 그들은 다시 길을 떠났다. 앞에서서 인적 없는 태고연한 원시림에 길을 개척하며 앞으로만 나가는 김선생, 오늘 따라 그가 한결 더 돋보인다. 심산의 해는 노루꼬리처럼 짧기도 하다. 오후 3시에 접어들자 어디론가 자취를 감추고 망망한 천리림해에 황혼이 천천히 꿈자리를 편다. “김동무” 한 마장 앞에서 김선생의 부르는 소리에 김동무는 급히 달려갔다. 옆에 다가선 자취도 모르고 언제 불렀느냐 싶게 한자리에 뿌리내린 듯 정숙히 서서 앞을 응시하는 김선생. 이윽고 김동무의 시선도 그의 시선을 따라 한곳에 멎었다. 창공을 치뚫고 아득하게 솟은 분비나무. 세월의 풍상에 씻기고 또 씻겨도 힘 있게 씌여진 력력한 글발! “인민들이여, 한결 같이 항일의 성전에 떨쳐 나서자!” 그들의 가슴속엔 숭엄한 감정의 격량이 굽이친다. “우리도 여기서 하루밤을 묵지.” 이윽고 김선생은 격동된 음성으로 침묵을 깨뜨리더니 도끼로 주위의 잔나무들을 찍는다. 얼마후 간편하게 꾸린 막 앞에 우등불이 타오른다. 40년전에 항일의 봉화가 타올랐던 유서깊은 이 전적지에 오늘은 천추에 길이 빛날 항일영웅들의 영령을 지키며 우등불이 활활 밤하늘을 태운다. “선렬들이피와생명으로바꾸어온이강산, 우리에게물려준이강산, 여기에 숨어 있는 교묘한 대자연의 미지수들을 하나하나 풀어 인민에게 복을주고 강산을 굳게 다져가는 우리 과학일군들의 사명은 얼마나 중대한 것인가! “ 이렇게 사색을 무르익혀가는 김선생은 자기 어깨우에 놓인 짐이 얼마나 무겁다는 것을 심장으로 깊이깊이 느끼였다. 스산한 산바람에 랭기와 습기가 온몸에 스며들어도 엄동설한에서 밤을 지샜을 항일영웅들을 생각하는 그들의 마음은 한없이 후더워 났다. … 얼굴에 선뜩선뜩 떨어지는 물방울에 놀라 깨여나니 김동무의 몸엔 김선생의 소료가 덮어져 있을뿐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새날이 밝아오는 심산밀림속에서 그는 어디로 갔을가? “선생님ㅡ!” 그는 손나팔을 입에 대고 연거퍼 몇번 목청껏 불렀다. 그 소리는 메아리고 천리 림해에 울려간다. “여기요ㅡ!” 귀를강구니 남쪽 방향에서 화답하는 소리가 어렴풋이 들려온다. 김선생은 자기 한테로 급히오는 김동무를 향해 황옥색꽃이 피고 대꼭지 같은 뿌리에 탐스런 열매가 달린 식물을 쳐들어 보이며 환희에 넘쳐 높이 웨쳤다. “‘천마’요! 연변의‘천마’요!” 련연히 굽이쳐 간 장백산발도 메아리로 화답한다. “‘천마’요! 연변‘천마’요!” 여러 번 오르내린 백두산으로부터 내두산, 소골령, 대골령, 베개봉, 소팔령, 대팔령, 오랑캐령, 하발령…연변의 산과 들 마다에 별처럼 찍혀진 김선생의 발자국, 그 발자국마다에 풍만한 열매로 아롱진 과학탐구의 성과! 독자들이여, 400여가지 중초약을 생동한 그림과 상세한 설명으로 소개한 1130페지에 달하는“연변중초약”책을 펼칠 때 그대들은 이책의 매 한장의 그림. 매 한페지의 글자속에 속속들이 슴배인 김선생의 수십년간 피타는 노력과 심혈을 잊지 마시라.  
356    "21 세기의 '리수진' 김수철 전"(련재 27) 댓글:  조회:1599  추천:0  2020-12-30
                제 3 부 ; 신문잡지로 읽는 김수철 2, 자연의 대문을 열어가는 사람(1) 첫눈이 내린다. 목화송이 같은 소담한 함박눈이 너울너울 춤추며 수줍은듯 살며시 대지에 안긴다. 허나 여기ㅡ춘성의 전등불 눈부신 한 회장에는 철 아닌 따사라운 봄빛이 무르 녹는다. 당중앙에서 마련하여 주신 과학의 새봄을 맞아 길림성식물학회학술론문발표회에 참가한 과학공작자들의 얼굴마다에는 웃음꽃이 활짝 피였다. 아. 그얼마나 애타게 바라던 학술론문발표회인가, 사회자의 소개에 이어 60고개를 바라보는 한 조선족과학공작자가 뭇사람들의 시선을 한몸에 받으며 온건한 걸음으로 연단에 오른다. 머리에 흰서리가 내리기 시작하고 얼굴엔 굵은 주름살이 잡혔으나 중등키에 균형잡힌 강단있는 몸매, 탐구적 예지로 빛나는 두 눈은 사람들에게 깊은 인상을 준다. 그는“마가목의 현미경 감별 연구” 등 세편의 론문을 한조목 한조목 천천히 읽다가는 높은 정밀도로 그려진 쾌도를 짚어가며 조리 있고도 투철하게 해석한다. 식물연구에서의 그의 독창적인 견해와 투철한 분석은 장내가 떠나 갈듯한 한차례 또 한차례 박수를 받는다. 론문발표가 끝나기 바쁘게 과학공작자들은 서로 앞을 다투어 연단 앞에 모여든다. 그들은 찬사를 아끼지 않으며 그의 성공적인 론문발표를 진심으로 축하 한다. 그가 바로 길림성식물학회의 유일한 조선족리사이며 연변농학원 농학계식물학교연실주임인 김수철선생이다. 변강의 이름없던 한 보통교원이 어떻게 이런 파문을 일으키게 되였겠는가, 그 비결은 과연 어디에 있는가. 독자들이여! 우리 함께 그가 걸어온 근 30년간 비범한 로정의 발자취를 더듬어 보자.   1 연변산촌의 그윽한 청취를 자아 내는 7월의 용신감자골. 명주필 같은 아침 안개가 꿈자리를 툭툭 털고 기염기염 일어나더니 아담하게 자리잡은 마을을 어루만지며 버들방천을 야산으로 고요히 헤염쳐 간다. 수탉이 홰치는 소리에 잇달아 통나무굴뚝들에선 흰연기가 련이어 머리를 풀며 하늘로 타래쳐 오른다. 이윽고 마을 웃 쪽에 자리잡은 오통집 정지문이 열리다. “오늘만이라도 좀 쉬여요, 온 밤 앓음소리로 날을 밝히시고도…” 녀인의 애원에 가까운 말소리다. “괜찮소. 새벽에 뜬 뜸이 효과를 보는 것 같소” 김선생은 신끈을 단단히 졸리고 나서 채집통을 둘려멘다. “말씀이 휴양이지…” 안해의 목소리는 푹 젖었다. “허허, 여보 엊저녁 서쪽골집 아바이 말씀을 못 들었소? 양목산꼭대기에서 화태닥나무를 본적이 있다고. 그럼 내 오늘만 갔다오지.” 김선생은 화기 있게 말하며 어느새 성큼 사립문을 나섰다. “아버지, 밥!” 둘째 아들녀석이 깡충깡충 뛰여오며 고사리손으로 밥보자기를 내민다. 김선생은 그의 머리를 정답게 쓰다듬으며 사람좋은 웃음을 머금고 안해에게 고개를 끄떡해 보였다. 들에 나서니 간밤의 고통이 씻은듯 가셔지고 정신이 한결 말쑥해 진다. 길가에서 방긋방긋 웃는 각 가지 들꽃, 록음방초 우거진 버들방천밑으로 자갈을 굴리며 돌돌 흐르는 맑은 내물, 아름다운 목소리로 서로 내기하며 노래부르는 산새들… 아, 대자연은 그얼마나 청신하고 황홀한가. 한식경이나 걸어 양목산기슭에 이른 그는 왕모래알을 굴리며 퐁퐁용솟는 샘터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목이나 추겨야지.” 그는 채집통을 옆에놓고 무릎을 끓은 다음 두손으로 바가지를 만들어 샘물을 떠선 꿀꺽꿀꺽 마셨다. 뼈속까지 찡 저려들게 시원하다. 채집통을 다시 메려고 멜끈을 들자 시야에 확 안겨드는 끈에 씌여진“1950”년이란 글발! “허허, 너도 나를 따라 벌써 10년을 일했구나.” 이렇게 입속말로 되뇌이는 그의 머리속으로 지나온 일들이 조수처럼 밀려 든다.  20여세의 혈기 왕성한 청년으로서 그가 식물학계에 들어선 것은 1950년도였다. 식민지반식민지반봉건의치욕스런 모자를 벗어 동댕이친 새중국은 갓 돌이 지났다. 그 당시 중국에는 계통적인 식물학 교재가 없었고 연변의 식물학분야는 거의 공백이였다. 비록 대학을 일년간 다니다가 생활난으로 중퇴하여 기초가 박약한 그였으나 이런 현실에 직면한 청춘의 가슴속에서는 애국의 열정과 민족적자존심이 불길처럼 타올랐다. “4천 년의 찬란한 문화로 빛나온 조국이다. 근로용감, 슬기와 지혜로 세상에 이름 떨친 중화민족이다. 근 백년래 뒤떨어진 조국의 과학사업을 위해 내가 맡은 식물분야에 이 자그마한 존재나마 깡그리 바쳐 가리라.” 사람들의 사회적실천만이 외계에 대한 인식의 준확성을 검증하는 기준이다. 그렇다. 지식을 얻으려면 현실을 변혁시키는 실천에 참가 해야 한다. 이때로부터 그는 채집통을 메고 나섰다. 교학후의 여가에 일요일과 명절날에 그리고 여름방학에 들로 야산으로 심산속으로 식물을 찾아 부지런히 다녔다. 도대체 연변에는 어떤 분류의 식물들이 어디에 분포되여 있는가. 발견되지 않은 식물들은 어떤 것들인가. 쉼 없는 노력은 헛되지 않아 정성들여 채집하고 자체로 만든 식물표본들은 점점 가지수가 늘어갔다. 텅비였떤 식물표본실은 날이가고 해가감에 따라 점점 이채를 돋히였다. 인간은 모든 것을 일일이 직접 체험할수 없다. 사실상 많은 지식은 간접적경험에서 오는바 그것은 옛날부터 내려온지식과 외국에서 온 지식이다. 하여 그는 외국어학습에 검질기게 달라붙었다. 푸름한 새벽에, 출근길에, 퇴근길에, 식물채집의 길에 꼭꼭 단어와 문법카드를 가지고 다니며 잠시적 지구전을 벌리였다. 몇 년간의 고심한 노력으로 마침내 일어와 로어를 능숙하게 장악하였다. 시야갸 넓어지고 지식면도 넓어졌다. 하지만 그의 신체는 철로 빚어진 것이 아니였다.  밤에 낮을 이어가며 과학에로 돌진하는 그에게 의학은 신결핵이란 치명적인 언도를 내렸다. 조직에서는 그를 관심하여 여기 산촌으로 반년간 휴양을 보냈던 것이다. 허나 병마는 한 공산당원의 굳센 의지와 드팀없는 신념을 꺽을수 없었다. 식물학연구에 종사하는 사람에게 산촌이란 얼마 나넓고 풍부한 실험실을 펼쳐주는 것인가, 이 얼마나 얻기힘든 훌륭한 기회인가, 이 반년간 그는 하루의 휴식도 없이 성한사람처럼 용신의 산과 들을 메주밟듯 넘나들며 1000여가지의 식물을 정성들여 채집해선 표본을 만들었다. “푸르르릉ㅡ“ 멀지않은 숲속에서 장꿩 한 마리가 하늘로 날아 오른다.. 회억에서 깨여난 그는 지팽이 하나를 꺽어쥐고 왼손으로 해빛을 가리우며 해발 천 여메터나 되는 산꼭대기를 쳐다보았다. 어떻게하나 기어코 올라가야 할 봉우리. 그의 두 눈에는 굴할수 없는 의지의 빛이 번뜩이였다. 산은 기슭부터 순순히 길을 내 주지 않는다. 노박덩굴, 다래덩굴이 그물처럼 꽉 늘어서 여간 성가시게 굴지 않는다. 낫으로 덩굴을 끊이며 손으로 덩굴을 헤치며 한걸음 한걸음 톱아오른다. 한참 올라가노라니 또 가시나무숲이 앞을 막으며 낯이고 손이고 사정없이 찌른다. 간신히 숲을 헤치고 중턱에 오르니 가둑나무가 삼대처럼 꽉 박아들어 섰다. 난생청음 사람을 만났는지 등에 떼가 왕왕기를쓰며 달려든다. 예리한 침을 몸에 들이박고는 생사결단 하며 피를 빨아 먹는다. 그러거나 말거나 이를 악물고 앞의 나무를 틀어 쥐고는 몸을 앞으로 썩 주며 오르고 또 오른다. 병든 몸은 악렬한 자연환경에 점점 적응되지 않는다. 허리가 끊어지는 것 처럼 아프고 목에는 불이 펄펄이는 것 같다. 아름드리 가문비나무에 몸을 기대고 앉아 한참 숨을 돌린다. 온몸은 점점 땅속에 잦아드는 것 같다. 안된다. 계속 이렇게 있는다면 영영 일어나지 못한다. 지팽이에 의해 모지름을 쓰며 욱 일어난 그는 채집통을 우로 추스리고 한 발자국 또 한 발자국 봉우리로 톱아 오른다… 흰구름을 허리에 두른 산봉우리에 올랐을 때 불덩이 같은 해가 중천에서 그를 향해 환히 웃고 있었다. 운동장처럼 휘넓은 산마루다. 동쪽에서 서쪽에로 남쪽에서 북쪽에로 침엽림의 매 한치의 땅, 매 하나의 초목이라도 스쳐지나 갈세라 눈을 꼭꼭 박아가며 찾고 또 찾는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가. 아, 순간 그의 두눈은 유난히 빛났다. 눈앞에 안겨오는 빨간열매, 미풍에 하늘하늘 춤을 추는 푸른잎사귀ㅡ화태닥나무다! 쓰러질듯 비칠거리며 다가가서 조심스레 쓰다듬는 떨리는 손, 그의 얼굴엔 기쁨의 물결이 넘실 거린다. … 불타는 락조가 산천가에 비꼈다. 동구밖 길옆에 뿌리박 은아름드리 백양나무에도 저녁노을은 곱게 물들었다. 그는 병마와 피로에 시달릴대로 시달린 몸을 백양나무에 맡긴채 잠시 눈을 붙인다. “아버지!” 어디선가 웅석섞인 목소리가 귀전에 날아든다. 눈을 뜨는 순간 둘째아들녀석이 품에 확 안겨들며 채집동을 달라고 조른다. “응, 그래 고운열매보여 줄가.” 하며 그는 채집통을 벗는다. “얼마나 고생…” 어느새 마중왔는지 뒤에 섰던 안해가 채집통을 받아메며 일굴을 외로 돌리더니 옷고름을 눈굽에 가져간다. “고생한 보람이 있소.” 희열이 어린 얼굴로 안해를 보며 아들의 손목을 잡은 그는 허리를 지그시 누르며 집으로 향한다. 식물을 채집하기도 힘들거니와 표본을 만들기도 여간 조심해야 한다. 잎사귀 하나라도 떨어질세라 뿌리 한 오리라도 상할세라 종이와 종이사이에 잘 끼워서는 구들에 차례로 펴 놓는다. 다음 이불을 덮고 조심조심 밟아서 압착 시킨후 10일 가량 잘 말리운다. 그리고는 표본지 우에 펴놓고 반창고오리들로 잘 고정시킨다. 식물의 유산으로 세세대대물려 줄 표본이니 말이다. 비좁은 외통 집안이다. 정성들여 말리우는 식물표본들이 구들에 편 이불속에서 혼곤히 잠을 잔다. 안해는 그것을 조심스레 하나하나 옆에 쌓아 놓으며 밥상을 차린다. “어서 식사하세요.” 그는 안해의 말을 듣는둥 마는둥 화태닥나무를 종이사이에 잘 끼우고는 이불을 덮어준다. “자, 둘째야 살랑살랑 밟아보지.” 둘째아들녀석은 죄꼬만 발로 이불을 자근자근 잘도 밟는다. “식사하세요.” 안해는 눈을 곱게 흘기며 채촉한다. “그래그래.” 그제야 그는 앉은걸음으로 밥상에 마주 않는다. 벽에 빈틈없이 걸려있는 식물표본들, 구들에 두툼히 쌓인 식물표본들, 시렁우에 빼곡이 자리잡은 유리병식물표본들을 둘러보며 밥술을 드는 그의 얼굴에는 병색과 피로가 가뭇없이 사라지고 밝은 미소가피여 난다.  
355    옛 이야기속의 인생조언 댓글:  조회:1783  추천:0  2020-12-21
                                   알렉산더 대왕의 유언   2015년 01월 06일 필자는  주영강, 소영, 서재후 등“호랑이”들이 염낭에 챙긴 검은 돈으로1000여척의 미국항공모함을 살수 있다는 기사를 읽고 분노에 앞서 '그네들이 그 돈을 제 돈이라고 생각했을가?'는 천진한 의문이 앞섰다. 아니면 많은 자영업자들이 하는 말이 “재산이 날따라 커지니까 그 재산이 내 재산이라고 생각되지 않습니다. 우리는 하느님을 대신해 그 재산(돈)을 관리할뿐입니다.”고 하니 말이다.  그런데 오늘(12월 19일) 필자는  도문시 당위서기(부서기), 시장, 주인대주임, 부주임을 지낸 민광도와 조룡호가 거액의 자금을 수뢰한 죄로 민광도에게 유기도형 12년, 조룡호에게 유기도형 7년을 언도 했다는 소식을 접하고 당년에 많은 시(市)민과 주(州)민들 앞에서 두손을 내저의며 “이렇게 해야 한다, 저렇게 해야 한다”를 외쳐대던 그들에 비춰 그제날에 읽었던 이 글을 다시 찾아 읽었다.    ㅡ알렉산더 대왕(위대한 영웅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자란 알렉산더는 세계를 하나의 제국으로 통일하려는 원대한 꿈을 꾸며 20세에 왕위에 올라 13년만에 그리스, 페르시아, 인도에 이르는 3개의 대륙을 정복해 대제국을 건설하고. 33세에 생을 마감) 의 병세가 날이 갈수록 심해지자 왕실은 깊은 시름에 빠졌다. 대왕의 병을 고치기 위하여 이름난 명의들이 하루에도 수없이 다녀 갔지만 아무런 차도가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슬픔에 빠진 주변 사람들과는 달리 대왕은 오히려 침착했다. 그는 타고난 강한 정신력으로 조금씩 자신의 주변을 정리하면서 죽음을 준비했다. 신하들이 대왕더러 자리에 누워 휴식할 것을 권하니 대왕이 이렇게 답했다. “내 걱정은 하지 말게, 사람이란 죽으면 잠을 자게 되는 법, 살아 눈뜨고  있는 이 순간 어찌 잠을 잘수 있겠는가. 얼마 남지 않은 귀중한 시간을 가장 충실하게 보내리라.”   날이 갈수록 대왕은 병이 점점 깊어져 자리에 앉아 있기 조차 힘들었다. 왕실에서는 병색이 짙은 그를 거의 포기한 상태로 ‘그의 마지막 유언이 무엇일가?’에 궁금했다.   하지만  알렉산더 대왕은 사경을 헤매면서도 좀처럼 유언을 말하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마침내 대왕은 궁궐의 사람들을 불러놓고 힘겹게 입을 열며 천천히 말했다. “내가 죽거든 묻을 때 두손을 밖에 내놓아 남들이 볼 수 있도록 하시오.”  이에 대왕의 유언을 초조히 기다리던 신하들이 놀랐다. 부와 권력을 한 손에 쥐였던 대왕의 유언으로 적절하지 않기 때문에.  놀라하는 신하들을 보며 계속하여 대왕이 이렇게 부언했다. “나는 단지 세상 사람들에게 천하를 쥐였던 알렉산더도 떠날 때는 빈손으로 간다는 것을 보여 주고자 하는 것 뿐이요” 알렉산더 대왕은 인간은 "공수래 공수거"(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간다)는 생과 사의 도리를   후대들에게 대왕의  유산으로  남겼다. .  이 지구상에서 가장 욕심 많은 존재를 혹자는 짐승(동물)이라고 한다. 그런데 짐승들은 배고플 때만 사냥을 하고 절대로 과식을 하지 않는다.   명심보감에 “견물생심 정심응물(見物生心 定心應物)”이란 경구가 있다.물건을 보면 마음(물욕)이 생기므로 마음을 바로 잡고 응하라는 것이다.   물건을 보면 집착하는것은 욕심이고 마음이 흔들리는것은 마음에 동요심이 꼬리치기 때문이다.부동심이면 물질에 흔들리지 않고 련꽃처럼 진흙속에서도 오염되지 않는다. 부동심은 현실을 피해 외부 세계와 단절하는 것이 아닌, 수련을 통해 욕망과 집착을 자제하고 정심(正心)을 찾는다. 부동심은 물리적용기(血氣)가 아닌, 비도덕을 배격하고 정의를 실천하는 도덕적 용기이며 물욕을 치료하는 으뜸 비방이다. 남북조시대의 학자 안지추(顔之推)는 “고금천지는 끝이 있지만 사람의 필요는 끝이 없다. 욕망을 줄이고 만족할 줄 알면 자신의 한계를 정할수 있다.”를 “안씨가훈(顔氏家訓)”으로 하였다.   욕심은 풍선과 같다. 풍선에 공기를 적당히 불어 넣으면 터지지 않지만 물욕에 빠진 민광도와 조룡호는 자기의 몰렴치한 풍선에 공기를 더 불어넣다가 끝내 터져버리는 무정한 심판을 면치 못했다. 혹시 이 두 "어른"에게 알렉산더 대왕의 유언을 들려주면 무어라고 할가? 절대로 믿어지지 않는다고?  아니면 언녕 들려 줄게지...라며 투성을 부릴가? 옛날 로인들이 전하던 명언이다. “바람이 들어오지 않고 비가 스며들지 않을 정도로 스스로 자제할 줄 아는 부동심(不動心)을 가지면 귀가 조용하고 영혼이 평혼하니라.”  오기활 2020.12.19
354    [수기 62]잊을 수 없는 할아버지의 사랑 댓글:  조회:1546  추천:0  2020-12-10
[수기 62]잊을 수 없는 할아버지의 사랑 편집/기자: [ 홍옥 ] 원고래원: [ 길림신문 ] 발표시간: [ 2020-12-09 11:23:38 ] 클릭: [ ] 우리 할아버지는 (1892―1978) 훤칠하게 큰 키에 름름한 체격이셨는데 얼굴에는 수염까지 멋지게 드리워 제법 풍채가 름름한 분이시였다. 하지만 할아버지는 일찍 할머니를 저세상에 보내고 젊은 홀아비로 어린 두 아들과 젖먹이 딸을 키웠다. 어린 것들이 새 엄마와 살기 싫다고 하여 재혼했던 할머니까지 돌려보내고 할아버지는 혼자서 자식 셋을 키우고 시집장가까지 보냈다.                                                                       필자의 할아버지 하늘의 뜻이였는지 장가 보낸 두 아들집에서는 귀여운 손자손녀들이 줄줄이 태여나 고생하시던 할아버지는 세상에 부럼 없듯이 손군들을 금지옥엽으로 보듬으며 정성을 몰부었기에 손군들은 할아버지의 사랑을 듬뿍 받으며 자랐다. 세월이 흘러 할아버지께서는 저세상에 가셨고 손군들도 70~80세를 바라보는 로인으로 되였다. 하지만 따뜻했던 할아버지의 사랑은 잊혀질 줄 모르고 손군들 가슴마다에는 할아버지의 사랑이 깊이 새겨져 애틋한 그리움을 자아낸다. 우리 사촌 형제자매들은 명절 때나 집안 군일이 있어 모여 앉으면 저마다 할아버지의 사랑을 더 많이 받았노라 자랑하며 웃고 떠들며 행복한 추억속에서 할아버지를 그려보 군 한다. 어린 시절 우리 집과 삼촌네 집은 몇 발자국도 안되는 아래웃집이였는데 두 집 손군들은 문턱에 불이 날 지경으로 들락거리며 뛰놀았다. 엄마들은 분주스럽고 구들 까래가 다 판난다고 귀찮아 했지만 할아버지는 천진하게 뛰노는 손군들이 마냥 귀엽고 대견스러워 만면에는 언제나 웃음끼가 돌았다. 때로는 어린 것들이 마구 뛰놀며 다칠가 걱정되여 개구쟁이들의 잔등을 뚝뚝 두드려 주저 앉히군 하였다. 그럴 때면 어린 것들은 할어버지 앞에 둘러앉아 히히닥닥 재롱도 피웠고 응얼응얼 응석도 많이 부렸다. 사촌동생 순금이와 나는 어렸을 때 할아버지 잔등에 쌍둥이마냥 같이 업혀 다녔다고 자랑하면 두집 막둥이들인 신숙이와 송욱이도 할아버지 잔등에 같이 업혀 다녔다고 자랑한다. 어릴 때 두집 손군들은 옷단추가 떨어 졌거나 양말에 구멍이 나면 엄마에게 청들지 않고 할아버지 앞에 내놓았기에 할아버지는 제때에 꿰매주고 살뜰히 보살펴 주었다. 사탕과자가 흔치 않던 시절이라 우리는 콩이나 옥수수를 닦아서 간식으로 즐겨 먹었는데 엄마는 식량이 랑비되고 집에 먼지 난다고 해주지 않았다. 하여 우리는 엄마가 군일 집에 가거나 장마당에 가는 날이면 엄마가 문밖에 나서기 바쁘게 할아버지와 콩, 옥수수를 볶아 달라고 졸라대며 응석부렸다. 그럴 때마다 할아버지는 빙그레 웃으시며 부엌에 내려가 불을 지펴놓고 가마에 넣은 콩, 옥수수를 솔비로 슬슬 저었다. 가마에서 콩이랑, 옥수수랑 탁탁 튀며 구수한 냄새를 풍길 때면 우리는 한없이 즐겁고 행복했다. 이 세상에서 우리 할아버지가 제일 좋다고 짝짜꿍을 쳤고 할아버지께서 큼직한 바가지에 떠주는 볶은 콩과 옥수수를 꿀맛으로 실컷 주어 먹고는 호주머니에 불룩이 넣고 동네돌이 하며 으시대기도 했다. 어릴 때 우리는 할아버지 밥상에서 밥 먹겠다고 서로 투정질도 많이 했다. 어머니는 맛난 음식과 색다른 음식이 있으면 언제나 할아버지 밥상에 먼저 올렸는데 할아버지는 한입 맛 보시고는 일부러 입맛에 맞지 않는다며 손군들에게 넘겨 주었기에 우리는 볼이 메지게 먹었다. 그럴 때마다 할아버지는 “그래그래, 너네들이 많이 먹고 어서어서 쑥쑥 크거라”라고 하시며 즐거워하셨다. 나는 어릴 때 집에서 멀리 떨어진 수남소학교에 다녔는데 눈보라치는 겨울 아침이면 할아버지는 나를 붙잡아 앉혀놓고 낡은 천으로 감발싸개를 하여 신을 신겨 주었고 할아버지가 만든 각반으로 발목까지 꽁꽁 감싸 주었기에 추운 줄 모르고 학교에 다녔다. 그 때 철부지였던 나는 할아버지가 나를 앉혀놓고 매무시하는 것이 귀찮고 투박스럽다고 투정부리며 울상을 했다. 그러나 할아버지는 나를 달래며 발목에 눈이 들어가면 온몸이 얼어들고 추워서 병이 난다고 하시며 기어코 붙잡고 매무시해 내놓았다. 지금 할머니로 된 나는 그 때 할아버지의 따뜻했던 사랑이 가슴으로 느껴지며 할아버지가 점점 더 그리워 진다. 우리는 어릴 때 할아버지가 세상에서 제일 좋고 제일 미더운 분이라고 생각해서인지 서럽고 바쁜 일이 있을 때면 엄마를 찾는 것이 아니라 할아버지를 찾았고 울어도 유별나게 “아바예! 아바예!” 하면서 울었다. 그래서였던지 내가 16살 쯤 되던 어느 여름날에 도문에서 혼자 걸어서 집에 오는데 (그 때는 모두 걸어 다녔다) 길옆 산기슭에서 책을 보던 청년남자가 갑자기 같이 놀자고 하며 나의 앞을 가로 막았다. 당황했던 나는 엉겁결에 “아바예! 아바예!” 소리치며 “저 앞에서 우리 아바이가 나를 가다리는데…” 하면서 정신없이 앞을 향해 뛰였다. 그 위기일발의 시각에 마치 신화 속 이야기마냥 진짜 할아버지 한분이 멜대에 짐을 메고 나를 향해 우줄우줄 걸어오고 있었다(옛날 홀롱재라고 불렀다). 그 분이 우리 할아버지인 줄 알았던지 그 청년은 어디로 사라지고 나는 무사히 집까지 달려왔다. 하지만 누구에게도 말 못하고 가슴만 벌렁벌렁하며 몇날 며칠 밤잠을 설치였다. 60여년전 그 아슬아슬했던 순간에 나의 앞에 나타났던 그 ‘홀롱재’할아버지는 영원히 잊을 수 없는 나의 은인이였고 그 할아버지는 정녕 우리 할아버지의 뜻을 알고 나를 마중하러 온 ‘신선’할아버지였다고 믿고 싶다. 나는 고중을 다닐 때 왕청에서 기차 타고 곡수역, 도문역에 와서 몇리길을 걸어 집까지 갔다. 우리 할아버지는 겨울방학이면 곡수역에서, 여름방학이면 도문역에서 나를 마중했다. 1962년 겨울방학 때라고 기억된다. 나는 방학 날자를 미리 편지로 집에 알렸는데 예상 외로 학교에서 열흘이나 더 늦게 방학하게 되여 할아버지는 열흘 내내 곡수역에서 나를 기다렸다. 열흘 지나 끝내 나를 마중한 할아버지는 마치 잃어 버렸던 손녀를 다시 찾은듯 기뻐하시며 나를 안아 주었다. 1965년 내가 연변사범학교에 갈 때에도 할아버지는 녀자애들이 침대에서 차게 자면 랭병이 생겨 큰일 난다고 하시며 할아버지 잠자리에 깔았던 노루가죽을 나에게 내주셨다. 그 때 철없고 매정했던 나는 별란 거 다 가져가라고 한다며 짜증내며 두덜거렸다. 그러나 나의 속내를 알고 있던 할아버지는 노루가죽에 천을 씌워 곱게 다듬어서 끝내 나의 이불 짐에 넣어 주었다. 효자였던 아버지께서 차가운 웃방에서 쉬는 할아버지에게 랭기 들지 않게 깔아드렸던 노루가죽이였는데 그것을 나에게 내주시고 할아버지는 차가운 방에서 얼마나 춥게 겨울을 지냈을가?! 지금 할머니로 된 나는 생각할수록 가슴 아프고 목이 멘다. 그래서인지 할아버지는 만년에 잠자리에 오줌을 자주 흘렸고 바지춤에도 오줌이 흘러 자주 빨래하는 며느리에게 민망해하시던 모습이 눈앞에 선히 떠오른다. 그 때 할아버지께서 노루가죽을 나에게 내주시고 차가운 잠자리에서 주무셔서 그런 병에 걸린 것 같아 나는 너무 죄송스럽고 가슴 쓰려 눈굽이 적셔진다. 할아버지는 손군들이 귀여워 애지중지하였지만 례의범절을 지키지 않거나 함부로 말썽 부리며 싸움 질 하면 추호의 용서도 없이 불호령을 내리시며 엄벌을 주었다.                                         달라자로인협회 활동에 참가할 때 기념사진을 남긴 필자(중간) ) 사촌인 태욱이와 영욱이는 어릴 때 마당에서 딱지치기를 하다가 싸움이 붙어 서로 밀고 닥치고 했는데 터밭에서 일하시던 할아버지는 손에 들었던 삽을 메고 당장 찍을 듯한 기세로 달려와 그 놈들의 목덜미를 잡아끌고 삽으로 엉덩이를 두들겨 팼다. “세상에서 제 종자끼리 싸우는 놈이 어디 있다더냐!” , “제 종자끼리 싸우는 놈은 개보다 못한 놈이다.” “ 다시 이렇게 싸우면 네놈들은 집에 들어올 생각도 말아라”고 하시며 노여워 야단치셨다. 난생처음 당한 봉변에 태욱이와 영욱이는 엉엉 울면서 다시는 싸우지 않겠다고 맹세했다. 이와 같은 할아버지의 대바른 교육과 사랑이 있었기에 손군들은 례절을 지키며 정직한 마음가짐으로 잘 자랐다. 우리 할아버지는 어린 손군들에게 사랑과 정성을 몰부었을 뿐만 아니라 성인으로 자란 손군들에게도 아낌없는 관심과 사랑을 주었다. 부지런한 할아버지는 매년 집 뜰안에 담배농사를 하였는데 겨울이면 아버지, 어머니는 담배 묶음을 이고 지고 장마당에 가서 팔아 푼돈을 만들어 할아버지에게 드렸다. 할아버지는 한푼도 쓰지 않고 차곡차곡 모아서는 60년대초에 대학생이였던 큰 손자에게 쏘련제 손목시계를 사줬다. 그 후 차례로 둘째 손자에게도 똑 같은 쏘련제 손목시계를 사줘서 사업하는 직장인들도 시계를 찬 사람이 별로 없던 그 시절에 할아버지 손자들은 팔목에 시계를 차고 시뚝해했다. 뿐만 아니라 1967년도에 처음 사업에 참가한 나에게까지 국방패 자전거를 사주셔서 나는 씽씽 자전거를 타고 출근하면서 뭇사람들의 부러움을 자아내기도 하였다. 우리 할아버지는 이렇게 손군들을 보배마냥 쓰다듬고 아끼고 사랑하며 건실하게 성장하도록 했다. 손군들이 출세하는 모습을 지켜 보시며 평생의 락으로 삶고 살아오신 그이였다. 하기에 할아버지의 사랑 속에서 자란 우리 손군들은 저마다 건강한 신체와 건전한 정신력으로 사회활동에 참가했고 고향마을 동년배들중에서도 우리 형제들은 비교적 건강하고 장수하는 편이다. 나는 사람들에게 우리 할아버지를 마음껏 자랑하고 싶다. 우리 할아버지는 세상에서 제일 존경스러운 분이라고, 우리 할아버지는 세상에서 제일 자랑스러운 분이라고. 하늘나라에 계시는 우리 할아버지는 영원히 우리 마음속에 살아 계신다. 할아버지 사랑합니다! 하늘나라에서는 할머니를 만나 못다한 사랑을 나누며 행복하세요! / 최정금
353    "21세기 '리시진' 김수철 전"(련재26) 댓글:  조회:1510  추천:0  2020-12-08
                                제 3 부 ; 신문잡지로 읽는 김수철 1, 청산을 두루 밟아 연벼농학원 농학계식물식생교연실 김수철주임(공산당원)은 20여년간 연변에 있는 식물의 채집, 정리사업을 꾸준히 진행하여 중대한 성과를 이룩했다. 그는20여년간 채집정리한 식물표본으로 “장백산야생식물지”를 편찬해 한창 출판중에 있는 “장백산야생경제식물지”에중요한 기초를 제공하였다. 그는 또 자기가 수집, 정리한 식물로 “연변중초약”을 편찬해 연변인민출판사에서 출판하였다. 그는 지금 연변지구의 버섯에 대한 연구를 하고 있는데 멀지 않은 장래에 기꺼운 성과가 알려질 것이다. 김수철선생이 이미 써냈고 또 앞으로 쓰는 책들은 단순한 “식물지”가 아니다. 여기에는 그가 고향의 식물을 연구하여 조국의 사회주의건설에 기여하려는 그의 마음과 리상, 그리고 그 리상을 실현하기 위한 깐지고 드팀없는 의지가 기록되여 있다   1 김수철선생이 연변농학원농학계식물교원을 담임한 것은 1951년부터다. 그때 학교에 식물교수에 필요한 표본이 하나도 없었다. 당의 민족정책의 따스한 해빛 아래 대학교교원의 자랑을 한가슴에 받아안은 그는 자기가 맡은 사업을 어떻게하나 잘 해보려는 굳은 결의를 다지며 크나큰 포부를 품었다.  (우리 연변에는 어떤 식물이 몇가지나 있을가, 어떤 특성을 가지고 있을가?  연변은 식물학의 미개발지이다. 이 천지를 개발하여 연변인민들에게 “식물학”을 보급하리라!) 김수철선생은 이런 뜨거운 마음과 탐구의 리상을 품고 산을 찾고 들을 찾아 떠났다. 20여년 동안 두만강하류의 경신수리봉으로부터 장백산 상상봉인 백두산천지에 이르기까지 그는 연변의 높고 낮은 산들을 하나하나씩 거의다 찾아 다녔다. 이 과정에서 그가 겪은 고생은 한두가지가 아니다. 때로는 깊은 산속에서 채찍같이 내리는 작달비를 맞고 때로는 가파른산을 톱다가 허궁미끌어 떨어지기도 하였다. 잠자리는 얼마나 스산했던가! 알맞춤한 데를 가면 인가를 찾을수 있었으나 그렇지 못할 때는 음산한 숲속에서 홀로 밤을 새워야 했다. 언젠가 김선생은 장백산남석에 천마가 난다는 말을 들었다. 새로운 식물이라면 언제나 금은 보화를 얻은 것처럼 기뻐하는 그는 호기심을 못이겨 그 곳을 찾아 갔다. 가도가도 끝없는 산판, 인가는 찾을래야 찾을수 없었다. 그는 숲속에 연추장막을 만들어 놓고 산판에서 지냈다. 한번은 훈춘현 까올령꼭대기에서 돌연한 폭우를 만났다. 그때 그는 비를막을 유포를 가지고 다녔지만 채집한 식물이 비에 후질러 질가봐 유포로 채집상자를 꽁꽁싸고 자기는 고스란히 비를 맞았다…. 그러나 그는 이 모든 것을 고생으로 여기지 않았다. 1959년 그는 장기간을 앓던 신념이 신결핵병으로 이전되여 용신에 있는 자택에서 휴양하게 되였다. 그런데 견물생심이라 산이라고 하면 펄하는 그는 약을 쓰는 몸에 진 병마를 잊은채로 또 산을 찾아 나섰다. 그는 해발 1.000메터나 되는 양목산상상봉까지 오르내리며 식물을 채집하였다. 식물채집에 혼신을 빼앗긴 그는 동무들과의 사귐, 가정식구들과의 단란한 모임도 외면하였다. 김수철선생님의 고명딸인 혜란의 회상이다. ㅡ이전에는 명절이나 구경이 있을 때 남의 애들은 아버지, 어머니의 손목을 잡고 구경을 다녔는데 나만은 그런 기회가 없어 매우 부러웠다. 그러던 어느날 아버지가 식물채집을 떠나자 나도 가겠다고 졸라댔다. 이래서 아버지와 같이 산으로 식물채집을 한번 갔다왔을뿐 구경은 같이 다녀보지 못했다. 고심을 기울이고 지성을 몰부어 채집해 가지고 집에 돌아와도 그는 한시도 쉴사이가 없었다. 채집해 온 식물은 압착을 잘 하고 건기를 잘 들여 표본을 만들어야 하고 게다가 어떤 식물은 원색, 원형을 그려놓아야 하였다. 이러한 뒤일들은 시간을 더 많이 소모하는 로동이였다. 하여 김선생은 한시도 자기의 식물표본실을 떠날수 없었다. 그는 자기가 맡은 교수를 끝내고는 표본실에 들어가면 나올줄을 몰랐다. 저녁에도 표본실로 나갔다. 일이 정 딸릴 때는 아예 집에서 이불을 가지고 가서 표본실에서 밤을 지새운 일도 푸술하였다. 김선생에게는 일요일도 없었다. 산처럼 쌓인일, 엄청난 학습임무는 그를 조금도 쉴수 없게 하였다. 특히 학습은 그의 사업을 진척시킴에서 돌파하지 않으면 안될 중요한 내용이였다. 정리하는 내용의 과학성을 위해서는 외국의 많은 서적을 참고 하여야 했다. 그래서 짬 시간마저 아껴야만 했다. 그가 로어, 영어, 등 외국어를 학습할 때 일이다. 그는 학교로 오가는 행길에서 한 전선대와 한 전선대사이에 암기해야 할 단어량을 정해 놓았다. 한 전선대사이에서 암송해야 할 단어를 다 암송하지 못하면 그 자리에서 서암송을 다 하고서야 다음 전선대사이로 걸어 갔다. 그는 이렇게 금싸락 같이 분초를 아끼며 고심 히학습하여 한어, 영어, 일어, 로어 등 네가지 언어를 능숙하게 장악하였다. 기나긴 나날 그가 이렇듯 긴장히 사업에 몰두하고 연구에 정진한 탓으로 성미마저 변하였다. 그는 말수가 적어지며. 하냥 조용한 것을 좋아했다. 그는 자기집에 쌀, 땔나무와, 애들의 옷 등 가정생활에 뒤전이였다. 남들은 터전에 각 가지 남새를 심었으나 김선생은 그리 많지도 않는 터밭에다 참나리, 함박꽃, 둥글레 등 야생식물 을옮겨다 심었다. 어느날 혜란의 친구가 울타리를 지나다가 식물종류를 헤여 보았더니 50가지도 넘더라고 하였다. 20여성상, 김수철선생은 가정도, 건강도, 행복도 모두 식물채집과 정리에 바쳤다.  20여년간 그가 만든 압착식물표본은 1만여 점이나 되였다. 식물종류는 (초보적인감정을 통과) 1,290여 종이다. 이런 식물중에는 연변지구의 식물종류로 기록되지 않았던 “신기록식물”이 많았는데 그중에는 채집을시작하여 9년만에 훈춘현 큰 따발령동남부에서 발견한 참개별꽃(太子參))과 훈춘현 이도포자대대에서 발견한 중대가리풀과 갈근(칡)이 있다. 이런 기초로 문화대혁명전에 이미 “장백산야생경제식물지”의 초고를 다써 놓았다.   2 김수철선생이 이제 그 순박한 연구의 마음, 소박한 라상을 힘차게 이룩해 나갈 때 무산계급문화대혁명이 일어 났다. 김수철선생은 “走白专主义道路分子”라는 모자를 쓰고 비판을 받았다. 실로 터무니가 없었다. 청춘도 가정도 다 바치며 고심을 기울인 것이 그래 죄란말인가? 그는 자기사업의 정당성을 믿었기 때문에 절대로 굽어들지 않았다.학교에서 일하기 불편하니 “연변중초약”을 편집하기 위하여 자기 집에다 볼품없는 사무실을 꾸렸다. 부엌자리를 방으로 고쳤다는 좁은 방에다 애들이 공부할 때 쓰던 앉은뱅이 네모상 하나를 갖추어 놓고 그 우에다 탁상전등 하나를 갖추어 놓았다. 탁상등은 갓이 없어 종이고깔을 만들어 씌웠다. 그리고 손으로 들고보는 확대경을 준비하였다. 책들은 방이 너무 좁아서 허덕간에 “서재”를 잡았다. 그러나 이런 “사무실”보다도 더 중요한 것은 공구서적을 마련하는 것이였다. “연변중초약”을 편찬하자면 다른 공구서적을 많이 보아야하는데 도서관에도 없고 또 마련해 줄 사람도 없었다. 집일에 뒤전인 그는 또 자기의 로임에서 돈을 잘라 내여 각종 공구서적을 샀다. “중약대사전”, “전국중초약휘편”, “간명중의학”, “중약식별수책”, “중국고 등 식물도감”…30책…60책…. 자력갱생으로 꾸린 초라한 “사무실”에서 그는 편찬사업에 달라 붙었다. 그에게는 실로 밤과 낮이 따로 없었다. 밤이면 밤마다 하늘의 별은 졸아도 김선생의이 “사무실”불빛은 졸줄을 몰랐다. 초저녁을 푹자고 소변보려 나왔던 이웃집할아버지는 그 불빛을 보고 감탄해 마지않았다. “허허, 저선생이 또 장밤을 하는군!” 1973년, 김선생이 꼬박 3년동안 간난신고를 겪으며 편찬한 “연변중초약”이 출간되였다. 이는 연변식물채집정리사업에서 김수철선생이 쌓아올린 또 하나의 성과로 연변조선족의학위생사업에 매우 커다란 기여를 하였다.   3 “4인방”을 몰아내고 신주의 땅에 새봄이 왔다. 주, 성우수교원대회에 참가했던 김수철선생은 무등 기뻤다. (한껏 날아보자! 영명한 수령께서 이끌어 주시는 과학의 고봉을 향하여!) 어느덧 52세였지만 그는 매양 장백산고산대의 왕사스레나무와도 같이 검질기고 열정이 비등 했다. 하여 오늘은 모아산, 래일은 삼합령, 다음은 베개봉, 그 다음은 하발령으로 드나 들었다. 이 새로운 장정의 길에서 김수철선생에게는 자기행동을 지도하는 하나의 좌우명이 있는데 그것은 “하루 밀림은 일년 간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하루에 해야 할 일을 오 직앞당겨야 할뿐 한순간도 늦추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김선생이 버섯을 채집하려 해발1.700메타 되는 화룡청산베개봉으로 갔을 때다. 이른 아침에 베개봉마루로 휘적휘적걸어올라가다가 깊숙한 산속의 아담한 곳에 자리잡은 양봉장을 먼발치로 지나가다가 앞마당에 널어 말리는 호함진 버섯이 눈에 띄였다. “아? 소버섯이 아닌가?” 그는 이 산에 소버섯이 있다는 말을 들었던 것이다. (내려올 때 들려서 하나 얻어 가야지…) 그도 그럴것이 버섯이란 쉽게 상하므로 그때 가지고 가면 헛수고를 할수 있기 때문이였다. 그런데 방정맞게도 이날 그는 산에서 길을 오껴 온 저녁 산속에서 헤매다가 날이 저물어서야 청산골로 온다는 것이 왕청같이 허가장골에 가 버렸던 것이다. 그가 청산려관에 왔을 때는 밤이 이미 깊었다. 이?z날 꼭 청산을 떠나야 교수에 지장이 없는 것이였다. (어떻게 하는가? 후날로 미루는가?... 아니다. 기어코 얻어 가야 한다…) 그 이?z날 아침이 였다. 그는 4시에 일어나 끝내 양봉장에 가 그 버섯을 얻어 왔다. 이리하여 버섯 하나를 위하여 새벽부터 세시간이나 급한 길을 걸었던 것이다. 올해 김수철선생은 버섯채집과 연구에서 이미 적지 않는 성적을 거두었다. 그가 이미 그려놓은 버섯그림만해도 150장인데 종류는 적어도 100여 종이나 된다. 연변에는 어떤 버섯이 있을가? 얼마나 있을가? 어떤 용도가 있을가? 김수철선생은 새로운 장정의 길에서 멀지 않는 장래에 우리에게 연변버섯의 실정을 알려 줄 것이다. 윤효식기자 “연변일보”   1978년 10월 17일  
352    옛이야기속의 인생 조언 댓글:  조회:1598  추천:0  2020-12-02
“사람을 외모로 판단하지 말라”   사람을 외모로만 판단하는 사람은 참으로 어리석은 사람이다. 사람에게 있어서 외모보다 더 중요한 것음 마음이다. 외모가 아무리 아름답고 매력적이라고 하더라도 마음이 아름답지 못하면 아무런 소용이 없다. “마음이 아름다운 사람”은  결코 남을 업신여기거나 무례하게 대하는 법이없다. 사람이란 존재는 이 세상에서 가장 고귀한 존재이니깐.    간혹 재물에 눈이 어두운 사람이나 교양이 갖추어져 있지 않은 사람들을 만나게 된다. 이러한 사람들은 세상에서 가장 값진 것이 보석이나 돈이라고 생각한다. 이는 참으로 어리석은 생각이다. 이런 사람들의 곁에는 그들이 지니고 있는 배경이나 재산을 탐하는 사람들로 득실거린다. 만일 그들이 그런 배경이나 재산을 잃게 되면 어떻게 할가? 아마 그 많던 사람들은 하나 둘 뿔뿔히 흩어지고 대신 그 빈자리에는 외로움이 빗물처럼 고여 있을것이다.    이런 이야기가 있다. 미국의 어느 돈 많은 재벌 로인 부부가 가지고 있던 전 재산을 교육사업에 헌납할 생각으로 하버드 대학을 방문하려 갔다. 때마침 정문 총장실 앞에는 수위가 있었다. 하지만 수위는 허름한 옷차람의 이들 로부부를 불친절하게 대했다 이들 로부부는 불친절한 수위에게 총장을 만나게 해달라고 부탁했다. “총장을 만나려 왔으니 꼭 좀 만나게 해주시오.” 하지만 수위는 용건만 물을 뿐 총장을 만나게 해주지 않았다. 로부부는 이 무례한 수위를 향하여 다시 물었다. “그러면 이런 대학 하나를 설립하려면 얼마나 듭니까?” 수위는 로부부를 더욱 없신여기며 들은 척도 않고 비웃었다 너무나 실망한 로부부는 별수없이 집으로 돌아와 전 재산으로 대학 재단을 세워 학교를 설립했다. 이 대학이 그 유명한 스탠포드대학이다. 이런 사연을 뒤늦게야 알게 된 하버드 대학에서는 아쉬웠지만 이미 때가 늦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 이후부터 하버드 대학은 정문앞에 항상 “사람을 외모로 판단하지 말라”는 글귀를 써 붙여 놓았다.   오기활
351    당신은 친절한 기자인가? 댓글:  조회:2206  추천:0  2020-12-01
친절해 보려고 애쓰지만 기자직업이 친절한 직업이 되기 힘들다는 생각이 종종 든다. 최대한 상대를 겸손하고 례의있게 대한다고 해도 취재 대상자가 거칠게 대해주면 저도 모르게 암담해지기가 일쑤다. 그가 뭐라해도 어쩔수 없는것이 그에게는 나의 질문에 꼭 대답해야 할 의무가 없고 또 그가 꼭 나한테 정보를 알려줘야 한다는 법이 따로 없는것이다. 그래서 번마다 “친절”이란 단어로 욱하는 감정을 누르며 상대를 상냥하게 대하느라 무척 애를 쓴다. 그렇다면 공무원도 아닌 내가 왜 친절을 심각하게 말하는지? 물론 공무원만 친절해야 하는것이 아니다. 기자사업을 하면서 느낀것이 모든 일은 백성을 중심으로 돌아간다는것, 그에 따라 공무원은 누구보다도 친절해야 한다는것을 심심히 느꼈다. 공무원들에 대한 백성들의 갖가지 평을 들으면서 필자는 친절이 사업열정과 업적에 비례됨을 알았고 사업에 열정적인 사람은 자기를 찾은 사람을 최대한 친절하고 적극적으로 대함을 알게 되였다. 가끔씩 기자를 찾아와 제보하는 사람들의 대부분은 민원에 대한 공직자들의 외면과 행정오류에 대한 불만, 고발이였다. 물론 누구를 칭찬해달라는 청탁도 많다. 불만으로 찾아오는 사람들의 대부분은 공무원들의 불친절에 대한 투정이였다. 기자, 신문사까지 찾아와 고소할 정도니깐 그들의 가슴은 멍이 들대로 들었다. 한번은 친구가 찾아와서 자기 딸이 일본서 아이를 낳아 키우다가 애가 유치원에 다닐 나이가 되자 그래도 자식을 조선족으로 만들겠다며 귀국, 아이의 호적을 올리려고 관계부문을 찾으니 책임자가 그녀의 민족애를 찬양하거나 친절히 대할 대신 그 애는 지표가 없이 낳은 “흑인”이라며 벌금을 하라고 엄포를 놓더란다. 또 모 공장장은 정부관원들의 비리로 공장이 당하고있는 억울함을 해결받고저 몇년째나 여러 부문을 다니며 고소장을 올리다 못해 친절은 말고도 모두 묵묵부답이니 언론계를 찾았단다. 고발자들의 사정을 인내있게 들어주면 줄수록 그들은 오만가지 원성을 토했다. 그래서 필자는 “인내가 친절이다”며 최대한 자신을 단속하기에 애를 쓴다. 물은 배를 띄우기도 하고 번지기도 한다. 공무원들의 말 한마디, 표정 하나가 공중(公众)들의 빛이 아니면 그림자로 된다. 그렇다면 친절을 이렇게 말하는 필자에게 “당신은 친절한 기자인가?”를 물으면 필자는 감히 “옳다”는 화답을 못한다. 왜냐하면 언녕부터 공무원은 무조건 친절해야 한다고 강조했지만 지금까지 친절하지 못한 공무원이 생각보다 많을라니 하물며 사람들로부터 특수직업이라 불리는 기자의 불친절이 불보듯 할것이니 말이다. 루즈벨트 미국대통령(26기)의 일기에서 지도자의 유감을 정의해 본다. “국가 지도자로서 제일 유감이 무엇일가? “ “내가 죽은후 매년 기일 때마다 가족과 정치인들만 나의 무덤앞에서 애도하고 단 한명의 최하층 백성들도 없다면 그것이 제일 유감스러운 치욕이다.” 루즈벨트대통령의 유감에서 그의 고귀한 정치적아량과 넓은 흉금, 인간됨됨이를 알수 있다. 오기활 (《길림신문》2011.11.4.)
350    (수기) 잊을수 없는 조선보따리장사이야기 댓글:  조회:1498  추천:0  2020-11-27
                                                            잊을수 없는 조선보따리장사이야기       두마강공원을 산책하다 보면 강건너 조선 남양의 모습이 한눈에 안겨온다   세월따라 도무은 물론 남양의 용모가 크게변해  지난 80년대 우리가조선 보따리장사로 땀흘리며 분주히 오가던 중국 - 조선  국경다리의 바로 남쪽에에  한결 멋스럽고 웅장한 국경다리가 새로 일떠기까지 하여 오늘의 도문과 남양은 더욱 더 새로운 모습으로 세인을 부른다.    나는 30여년전인 40대 초반에  보따리 장사군으로   저 국경다리를 흽쓸느며 다녓었는데 지금 그때를 생각만해도 마음설레이고  웃음이 절로난다.       무거운 짐보따리를  일럭거에 꽉 박아싣고  저 다리를  건너  중국(도문)  - 조선(남양) 해관을  넘나들며 고생도 많았고 울지도 웃지도 못했던  사연들도 많았기에  잊을수 없는 추억으로 떠 오르며  그래도 그때 그시절이  좋았다며 그리워 지기도 한다 때로는 기적소리 울리며  지나가는 조선 렬차를 볼때면  내가 무거운 짐보따리를 둘러메고 저 렬차에 앉아   남양에서 종성으로, 종성에서 온성으로 오르내리며  장사했던 일들이  머리에서 맴돌이친다   80년대 연변의 많은 조선족들은  조선 보따리 장사를 했는데  학교선생님들까지 방학이되면 이 장사에 나서다보니 나까지 덩달아 나섰다.   세상 물정도 모르고  장사경험도 없는 나는 걱정과 두려움도 많았지만  남들이 다하는 장사인데 나라고 못할까? 는 생각에 무조건 물건구입에 나섰다.   조선시장에서 라면, 목천, 이불등이 제일 잘 팔린다고하여 나는 첫장사로 붉은색 바탕에 무궁화꽃이 그려진 이불등을 단번에 20개나 구입했다.  그런데 조선해관에서 3개이상 초과되면 나머지는 돌려 보내고  눈에 거슬린 행동하면  몰수한다고하기에 나는 걱정하고있는데 마침  친정어머님이 우리집에 오셨다.  손재간있는 어머니는  이불등 2개씩 척척겹치더니  두다리 두팔  허리둘레  앞뒤가슴에  나누어 붙혀놓고  바느실로 듬쑥둠쑥 꿴매여  내몸에  딱 맞는 속옷을 만들어 나에게  입히고  겉에는 널찍한 내복(조선에 가면 잘 팔리는 내복적삼)까지 걸쳐 입으라고 하기에  나는 시키는 대로 하였다. 누가 내가 속옷으로 이불등 12개를 입은 줄 알랴!  전혀 티나지 않아 제격이였다.  그리고 나머지 이불등도  여러곳에 분산시켜  다른물건 사이에 끼워 짐을 쌌더니  천만다행으로 무사통과되였다.   그때 장사군들이 너무 많았기에  해관 검사원들도 지치고 헷갈리여서  대충 검사를 할때도 있었는데  요행  나는 그날 운이 닿은것 같다.   하지만 도둑이 제발등 저리다고  이불등을 감싸입고  검사원앞에 나선 나의 속은 속이아니였다.  황차 내앞에서 검사받던 왕청아줌마는 속에 아무것도 감추지 않았는데  옷속에 뭘 감췄는가 의심했기에  화난김에  속옷을 훌떡 걷어올린 흉물스러운 모습에 나는 오늘 죽었다고  가슴이 쿵쿵,  팔다리가 후들후들거리면서  정신이 아찔했다.   하지만 하느님 덕분이였던지 다행이  내몸은  의심하지 않았고 다른 물건들도  다 무사통과 되였다.  지금생각해도 그때 아찔했던 순간에 가슴 쪼인다.               그때  조선에서 잘 팔리는 물건을 많이 가진 장사군들은  대방해관검사원들에게 술, 담배, 식품을 례물로 주고  통과하는 일은 관행으로 되였기에 나도  우선 검사원의 코밑치성부터 해야만이  그날의 액운을 때게되는줄로 믿어였다.   그때 조선장사는 친형제간도  돈별이를 같이하고는 흔히 서로간 티각태각했는데  나는 나보다 10살아래인 영애와 오랜 친구사이로 서로믿고 친절했기에  조선장사도  같이하며  돈을 벌었는데 우리는 서로간의 믿음과 덧보이는  인성품격으로  주위 사람들의  찬사와 부러움을 자아내기도 하였다.         어느 한번은 영애와 나는  개산툰  - 삼봉 해관을 통해  장사를 했는데  두집 남편들까지 도우미로나서 장사짐을 자동차에 싣고  개산툰까지 가서  우리들의 해관검사까지 지켜 봤다.   우리가 짐을밀고  조선삼봉해관에 들어서자  해관검사원으로  바로  이 자리에서 10년넘게  근무했다는 ××검사였는데  오랜 장사군들은  그를 “늙은 여우”라고 수근거렸다. 모두가 그의 구미를 맞추려  애쓰는 모습에  우리도 신경을 도사려야 했지만  별다른 묘책이 없어 끙끙거리다가  아예 죽지 않으면 살것이라 믿고   로실하게 속사정을 털어놓고 살려줍시사 하며 갈비를  드리대기로 했다.  과연 ××검사원은  장사군들과 무언의 암시로  자기의 안속을 채우면서  초과된 물건을 눈을 감아주며  건너게하는 모양새였다.  언제나 생글생글거리며 잘도 웃는 영애는 ××검사원의 안중에 있는뜻했고 나역시  고지식 하기는해도  믿음성 있어 보였던지 우리더러 천천히 기다리라는   그의 암호가 감지되여  영애와 나는  검사 순서를  다른사람에게  양보하면서  어물어물 뒤로 물러서군했다.   마침내  그 검사원은  맨 마지막 순서로  리영애, 최정금을 부르며 시간이 없는데 빨리빨리 들어오라고 하기에 우리는  그많은 짐을 낑낑거리며 끌고  검사원 앞에 나섰다.  아니나 다를까 무슨짐이  이렇게 많은가며 트집을 잡기 시작하더니  최정금이는 아직 들어오지 말고 저쪽켠에 가서 기다리라고 하기에  나는 곱살이 시키는 대로 저쪽에  가서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그는 영애와 이것저것 튕기며 물어보기 시작하는데 때를맞춰 영애는  생긋이 웃으며 속사정을 실토했다. 자기는  일부러 아저씨가 근무하는 날을 택하여 오늘 왔는데  여러가지 물건도 많지만  고무장화(고무공장 판매처에 있는 친구를 통해  불합격 장화를 싼 값으로 많이 가지고 갔다)를   다섯상자나 가져 왔기에 아저씨의 신세를  져야겠다고 갈비를 드리댔다 ××검사원은  높은소리로  물건이 너무 많아 다 못 건간다고  거들먹 거리며  고무장화 세상자를 발로 툭툭차면서  돌려 내가라 호통했다.  그리고는 롱담인뜻 진담인뜻  중국에서 청도맥주와 장백산 담배가  유명하다던데  그 좋은것들은 하나도  안 가져왔네… 하면서 공개적인  암시를 보내왔다. 이에  영애는 알았다는뜻  저뒤에 있는 촤정금 언니가  빡스채로 가지고 왔는데  가다리라고  구미을 맞춰 놓고 퇴짜맞은 고무장화 세상자를 밀고나와  나에게 넘겨주면서 중국쪽에 가서 청도맥주와 장백산 담배를 사오라하기에 나는 해관밖에서 기다리고있는  두집 남편들에게  그대로 전했다. 하여 그들이 불티나게  달려가 부탁하는 물건을 사왔기에  나는 얼른 받아싣고  다시 조선해관에 갔다.   척하면 착이라고  영애가 밀고 나왔던 고무장화 상자위에  맥주와 담배를  보기좋게 올려놓고  다시밀고 ×× 검사원 앞까지 갔더니   그는 반죽이 척척 잘 맞는다는뜻  흡족해 하면서   짐짝은 거들떠 보지도 않고  술 담배만 제 몫으로 챙겼기에  우리는 그많은 물건들을  다가지고 건넜다.  뜻밖의  작전에 성공한 우리는 신심이 생겨  또 삼봉에 있는  ×× 검사원의 집에 까지 찾아가 밀담하여  뭉치돈이 되는 명태, 해삼, 낙지를  그가 시키는대로  상자마다 꽉꽉채워넣고  그위엔  다른 물건들을 눈가림하여 덮어 가지고 건너왔기에  그번 장사수입은 참으로 짭짤했다            나는 80년대  련속 몇년동안 조선장사를 다녔어도  줄곧 종성에 있는 고모네 집에 주숙하면서 장사했기에  고모네 집은 온통 수라장이였다.  그러나 70대 중반이였던 고모님과 아들며느리 손자손녀  다섯삭구는  크지도 않은 단층 줄집에서 살면서도 장사군인 나를 언제나 반갑게 열정적으로 대하였고  열심히 도와 줬기에  나는 편하게 장사했고  종성시내 사람들도 나를  익숙해 하는 편이였다   고모네는 평민의 집이였기에  빠듯한 배급으로  식량고생이 많았고  생활도 넉넉치 못했기에  나는 매번 갈때면  해관에서 허용하는 범위내의  밀가루, 입쌀, 과자, 빵, 사탕 등 먹을것들을 성의껏 챙겨가지고 갔고  또 우리가 조선에가면 외국인 대우로  체류기간에  입쌀 기름까지  배급받았기에 고모네는 그동안은 식량보탬이 되였기에 번마다  온집식구들의  옷을 챙겨 드렸기에  동네사람들의 부러움을 사기도했다     그러나 장사하며 뛰여 다녀서인지  조선에 가서 2~3일만 지나면 몸이  허해지면서  먹어도 배고프고 썰썰이가 나서  무엇이나  게걸스레 다먹었다.   어느한번 영애와 나는  고모네 웃방에서 장사하고 있는데  정주간에서 잠자던 손자놈이 깨여나 가마목에 덮어놓은 말가루반죽을  열어제끼고  맨손으로 주물러대며 머리부터 얼굴,  다리, 엉덩이에 까지  마구 태비를 하여  발라놓았다,  영애와 나는 눈만 판들거리는 손자놈을 보고  뒹굴며 웃으면서도  저 아까운 밀가루를 다  버렸구나며 걱정했는데   생각외로 고모는 숱가락에 물을 뭍혀 그놈의  얼굴부터  엉덩이에 까지 붙었던  밀가루 반죽을  살살 긁어모아  그릇에 다시 담더니  노르슴하게  떡을 구워  저녁상에 올렸다. 생각만 해도 메스겁고  께름직한 이떡을 어떻게 먹느냐고  영애와 나는  서로 눈짓하면서도 배고파 안 먹을수도 없어  울며 겨자먹기로  한입 두입 께적께적 뜯어 먹었다.   웬걸!  토하기는 커녕  꿀떡꿀떡  잘도 넘어갔고  그맛  진짜 꿀맛이였다.  중도 사흘 굶으면 딱정 벌레도 잡아  먹는다고  손자놈의 엉덩이에 붙었던  떡이라도 배불리 먹고나니  정신이나고 기분도좋아  손자놈의 어덩이를 살살 만져줬더니 그놈도 좋다고 야단아였다.       또 어느한번은  고모네 집에서 장사하다가  엄중한 정치사건을  일으켰다 중국에서 5~6살 어린애들이 입을  런닝적삼을 30여개 가져다 팔았는데  색갈도 곱고  앞가슴에 어린애들이 좋아하는 그림도 있어  종성에서 불티나게 팔렸다.  그런데 2~3일 지난 어느날,  종성안전부 사람들이  우리가 팔았던  런닝적삼을 들고와서  이집에 중국 손님이 왔는가?  아줌마들 이  적삼을 팔았는가?  모두 몇개 팔았는가? 어디에서 구입했는가? 등등을 물으며  엄숙한 표정으로  수첩에 일일이 기록하기까지 하였다.  그리고  이 런닝적삼을 땅에 쭉  펼쳐놓고  엄중한 정치사건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런닝그의 그림에서 애들이 뭘하고 있는가고 묻기에  영문도 모르고 우리는 자세히 드려다  봤더니  두 남자어린이가  군대 철갑모를 벗어서   모자 끈을 긴 막대기에 걸고  량쪽 막대기 끝을 어깨에 메고 활개치며 걸어가고 있었다.   문제는 이 철갑모에  씌여있는 "USA" 란 글자였다.  아줌마들 이글자가 무엇을 의미 하는지 아세요?   이글자는 미국이란  표시인데   이 애들이 지금  "USA"를 메고  좋다고 어디로 가고 있어요?  미국이 좋다고  웃으며 활개치며 가고있잖아요?    하느님 맙시사!  나는 가슴이 덜컥 하며 정신이 어찔했다  년로하신 고모님의 얼굴도 어둡게 변하며 무서워 하는  기색이 넉넉했다.  조선에서 사무치게  증오하며  필사적으로 반대하는  미국을 좋다고 선전했으니  고모네도 우리도  반혁명으로  감옥살이 할거 아닌가?  또 고모와 아들까지  안전부에 불러갔고  우리에게는 강제명령이 내렸다.   오늘내로  종성시내에 팔았던 런닝적삼을  몽땅 걷어드리고  돈도 돌려주고  즉시 안전부에 수자까지 회보할껏,   이 적삼은 조선어디에 가서도  팔지 못하며  다시 팔다가 붙잠히면 용서 없다고 엄포까지 놓았다  천만에 말씀 우리가 어찌 이  엄중한 반혁명  적삼을  다시 팔겠씀니까?   감옥에 붙잡아 넣지않고  이렇게  관대하게 용서 해 주신것 만으로도  감사하여   절이라도  꾹뻑 하고 십은데  …   이튼날 종성 안전부에서  통령을 내려  고모네 집엔   정치적삼을 들고온 손님들이  줄을 섰고  우리는 찍 소리도 못하고  돈을 돌려주고 다른 물건을 대신해 주기도 했다.   그날 저녁 고모는 손자손녀에게 선물로 준  런닝적삼을 농짝에서 꺼내여  펼쳐 보다가  적삼앞에"USA" 란 글자만 가위로 오려내고 그 자리에 다른 천을 대고 깁어 입혀도 되겠다며  다시 농짝밑에 감춰넣었다  나는 가슴이  찡하며  장사고 뭐고  저물건을 다 고모네를 주고  갔으면 하는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당시  우리네 생활도 조선보다는  나은편이지만   초중 고중 대학생 자식들의   공부 뒷바라지도 쉽지않아  이 장사길에 나선 신세였으니  계속  남은 물건을 다 팔았다.    집에 돌아오는 출국 수속을하려 온성출입국 사무소에 가던날 나는 담대해서인지 둔해서인지   종성안전부에서 통령까지 내린"USA"  적삼을 또 온성 장마당에가서 은밀히  팔려고 시도했다.  영애는 겁나 울상이되여  다시 붙잡히면  모두다 끝장이라고 하는데… 나도 조금은 두렵기는 했지만  오늘 팔고 래일  중국에 들어가면 누가 붙잡는대?  하는 생각에  온성  장마당 구석에 앉아 전문 중국 물건을 구입하는 외지에서 온  할머니와   소근소근 흥정하여 몽땅 팔았다.  그리고 이 적삼을  절때 여기에서 펼쳐 놓지말고 외지에 가서  팔라고 재삼재삼 부탁까지  했다. 할머니도   여기에서 팔지 않겠으니 나를 시름  놓으라 했지만  죄진놈이였기에  우리는  남양해관을  건널 때까지  속이 조마조마하여  우리뒤에 누가 걸어 오기만 해도  당장  우리 뒤덜미를 잡는것 같아   제정신이 아니였다.  이렇게 조선  보따리장사에 나는  몸도 마음도 피곤하게  고생도 많이 했지만  돈도 벌었기에   살림에 큰 보탬이 되여  남편과 자식들의  칭찬도 받고 긍정도 받았다.  뿐만 아니라  내가 40대의 젊은 기백으로  중조 국경을 넘나 들며  희극배우마냥  울지도 웃지도 못할  드라마를 연출하며  돈을 벌었던  보따리장사의 사연들은   마치 한편의 소설마냥  나의 인생사에 각인되여 잊을수 없는 영원한 추억으로  남을것  같다               (최정금, 도문)   2020년 7월 30일         
349    "21세기 '리시진'김수철전"련재(25) 댓글:  조회:1532  추천:0  2020-11-25
고성김씨네3大“땅소나기” 갑자기 창살같은 비가 세차게 쏟아지다가 곧 그치는 소낙비의 먼저 들려오는 높은 굉음을 “소나기운다”고한다. 누구의 목소리가 굉장히 높고크면 그사람을 소나기소리에 비춰“땅소나기” 라고 부른다. 문자기록이 시작되여 고성김씨가문에 세기 42년부터 3대“땅소나기”이야기가 오늘까지 구전되고있다. “땅소나기”의 맏이로 소가야왕의 34세 손인 절세의 애국명장김빈길(金斌吉)장군이시다. 장군님은 朝鮮李太祖洪武丁丑年에 倭賊을 전멸시켜 三道水軍都節制使,정승(政丞)벼슬까지하신분이다. 왜적과 싸울때의 그 “땅소나기”군령이 위력이 높기로 부근의 海域을 진동했고 왜군들은 벌벌떨게했다고한다. 둘째 “땅소나기”는 소가야왕의 37 대 세손으로 김빈길장군의 증손인 김경현(金慶賢)이다. 公은 오위장(五衛将)의 벼슬로 14세기 大將魚有沼의 부하로 직무하다가 반란을 이르킨 李滿住를 토벌하기위하여 咸吉道로 원정을하게 되였다. 公은 高敞에서 떠나 원정하던도중 逆賊인 리만주가 산험을 리용하여 잠복하고있었기에 공격이 매우 어럽던 시각에 魚有沼대장이“누가火箭으로 적굴에 불을 달수있느냐?”고 물으니 김경현공이 앞장에 나서며 “내가 할수있습니다”고 “땅소나기”로 답하였다. 어유소대장의 “급히 행하라!”는 명령에 경현공은 시위에 물렸던 화전을 온몸의 힘을모아 힘껏당기다가 “씽ㅡ!” 소리를 내며 火箭을 날렸다. 火箭은 산더미처럼 쌓아올린 적군의 마초에 꼽혔다. 마침 붓는불에 부채질을 하는듯 삽시에 북풍이 불어치더니 적진이 불바다로일거에 리만주무리들을 격파하였다. 한번은 경현공이 변을 보다가 달려드는 호랑이를“땅소나기”로 놀래우고 맨주먹으로 호랑이를 때려잡았다는 전설같은 이야기가있다. 셋째“땅소나기”는 소야국왕 51대손 김병인(金秉仁)이다. 김병인은 1923년 9월 10일 연변고성김씨 제2회 종친회를 소집하였고 연변 고성김씨종친회의 2대회장으로 추대되였다. 김병인의 사연은 지금 룡정에있는 그의 손자 김삼철(현임연변고성김씨종친회 회장)이 2018년 3월 29일 “길림신문”에 발표한 “땅소나기할아버지”란 제목의 기사로 소개한다   “땅소나기’할아버지”지금부터 60여년전 연길현 태양공사 중흥대대 제7생산대(지금연길시조양천진중평촌제7촌민소조)에 김병인이라는 로인이 계셨는데 목소리가 류달리높아 그소리가 10리를갔고 마을사람들은 그를 ‘땅소나기’라 불렀다. ‘땅소나기’는 30여 세되던때에 태양구백석골안에서 농사를 지었는데 당시마을에는 울바자가없이 터밭채소농사를 지었다. 30여호마을에서 집집마다 닭, 오리를 키웠는데 이전에는 여름이면 닭들이 채소를 쪼아먹어 절단하였지만 ‘땅소나기’가 이사를오면서 마을의 닭, 오리등 도깨비짐승들이 꼼짝못했다고한다. ‘땅소나기’가산비탈에서 “독수리여!-”, “독수리여!-” 하고 소리칠때면 10리골안이쩌렁-쩌렁- 진동하여 하촌까지 들리였고 닭, 오리들은 무서워 모두제굴로 들어가 떨었다고한다. 심지어 날아가는 산새들도 기겁하여 멀리피신했다고하니 그야말로 믿기어려운 이야기다. “땅소나기’의 셋째손자인 나는 할아버지를 잘알고있다. 할아버지의 음성은 어찌나 높은지 집안에서 조용히 말해도 밖에까지 다들려 우리집에는 비밀이없었다. 좀만 성이나면 큰소리로 호령하는데그때면 온마을이 쩌렁쩌렁하여 우리집에서 큰싸움이 벌어졌는가하며 마을분들이 모여오군하였다. 내가 10여살 되던 해부터는 내가 보이지않으면 할아버지가 나를 찾느라고 내이름 을불렀는데 2리밖 아랫마을에 놀러갔다가도 그 부름소리를 듣고 인차달려오군하였다. ‘땅소나기’ 소문이 퍼지면서 태양구 구정부간부들은 우리할아버지를 모르는사람이 없었고 연변주정부의 정용선이란분은 태양구에 하향할때면 꼭꼭 할아버지를 찾아보군 하였다. 할아버지가 회갑이 되는해에 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저세상으로먼저 보내고 속을태웠는데 몇 년 지나지않아 또 로친까지 앞세우다보니 심병에 걸려 우울증이심각했다. 한번은 독약으로 자살까지시도한것을 맏형님이 요행 독약을 빠앗아 물도랑에 던져버린 일도있다.. 그러다가 맏손자가 결혼하고 증손들이 다섯이나 생기면서 화기를 찾았고 얼굴에 웃음이피였다. 증손녀에 증손자까지 련이어 안아보게되니 너무반가워 매일 증손군들을 번갈아업고다녀 마을에서는 ‘보모할아버지’라고 친절히 불렀다. 그때는 큰형님을 따라 가정이 룡정시교 광신촌에서 생활할때라 ‘땅소나기’라면 모르는 사람이없었다. 4대 식구가 한집에서 생활하다보니 세손자의 자식들이 10여명으로 늘어나면서 할아버지의 목소리는 더욱 높아지는것 같았다. 증손군들을 번갈아 불러들이다보니 자주 소리를쳐서그런지 할아버지소리는 그 진동력이 더욱컸다. 년세가 80이 넘었는데도 터밭채소전을 알뜰히 가꾸었고 보통음성도 남보다 한 옥타브높아 처음 대하는 사람은 성부터낸다고 좋아하지 않았다. 마을에서는 사람찾는 일이 생기면 의례 우리할아버지를 찾았다. 그러면 우리할아버지가 한번 아무개- 하고 부르면 그분들은 인차달려왔다. 한번은 증손녀 영순이가 4리 밖의 룡지촌 학교에 놀러갔는데 할아버지가 “영순아!” 하고 소리치니 영순이가 인차 달려왔다. 그런데 우리할아버지는 목소리만 높은것이아니라 방귀소리도 유별나게 높아 집에서 뀌는방귀소리가 뒤집까지 들리여 마을사람들을 웃기였다. 한번방귀를 뀔때면 마치 기관총을 쏘는것처럼 련발하는데 그소리가 높아듣는 사람마다 놀라하였다. 그러나 할아버지의 방귀는 건강의 상징이였다. 방귀가심하다고 병원까지 가보았으나 할아버지의 신체에는 아무런 이상이없다고 하였다. 1965년겨울, 할아버지의 셋째손자 즉 나의 약혼녀가 처음 집에놀러왔었다. 모두들 점심을 먹고있는데 할아버지가 방에서 점심상을 받으며 방귀를뀌였다. 그소리가 어찌나 요란하였던지 나의 약혼녀는 손에쥔 숟가락까지 놓치고 배를끌어안고 웃었다. 그러나 곁에있는 10여명식구들은 모두 말없이 조용하였다. 약혼녀가 머리를 들어 식구들을 둘러보니 모두들 소리없이 웃고있었다. 우리집식구들은 자주듣는소리라 례사로왔지만 새손비에게는 난생 처음 듣는 놀라운소리였던 것이다. 내가 할아버지방귀력사를 이야기하니 약혼녀는 또 죽겠다고 웃어대였다. 그날오후 집으로 돌아가면서도 그녀는 할아버지방귀소리를생각하며 길에서 실신한사람처럼 계속 웃으며 걸어갔다고하였다. 이이야기는 후에 안해가 자식들에게까지이야기를 한데서 지금도 나의 자식들은 방귀소리만 나면 옛날 어머니가 로할아버지의 방귀소리에 놀랐던 이야기를하며 한바탕 웃음판을벌린다. 할아버지의 ‘땅소나기’ 음성과 방귀는 확실히 할아버지의 건강비결이였던지 90세까지 병원한번 가보지않고 건강하게 생존하시였다. 돌아가시던그해여름에도 오전에 한전기음을 매고 점심에 오이랭국에 점심을 잘잡수시고 목침을 베고 점심낮잠을 주무셨다. 오후 3시가되여도 깨여나지않으니 큰아주머니가 방에들어가 깨웠는데할아버지는 이미사망하시였다. 병원의의사를 불러확인하니 할아버지는 자는중풍을 맞아 사망하였다고하였다. 할아버지는 이렇게피한방울 보이지않고 깨끗이조용히 이세상을 떠나였다. 1976년에세상을 뜬 우리 할아버지는 당시 사회에서도 매우보기드문 장수로인이였다. ‘땅소나기’로 이름을 날렸던 우리 할아버지는 일찍 청소년때부터붓글씨를 잘써 표창을 받았고 례의범절이 밝아 촌군중들의 존경을받았는데 1950년대에는 중흥촌로인회의 총책임 ‘조니’(지금의회장직함)로 김주사라고불렸다. 할아버지의 ‘땅소나기’ 유전자는 셋째손자인 나에게전해졌는지 나는 지금 79세나이에도 신체가 아주건강하고 음성이 보통사람보다 몇갑절높아 처음대하는 사람들은 모두성을 낸다고 오해한다. ‘땅소나기’ 별칭으로 많은사람들에게 깊은인상과 웃음을 남기며행복했던 시절은 인제 아름다운추억으로만 남았다. 김삼철
348    옛이야기속의 삶의 조언 댓글:  조회:1582  추천:0  2020-11-15
그 무엇도 대체 못할 인간사랑   인간은 때때로 지신의 일부와 또 다른 자신의 일부가 대립되는 모순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그래서 두 가지 중 한 가지를 선택해야 하는 괴로운 순간이 있게 된다. 한 가지를 선택하면 다른 한 가지는 포기해야 하니깐. 그래서 인생은 괴로움의 련속이라고 하는지...   그리고 살다 보면 사랑은 인간에게 자신을 잊고 사는 법을 가르치는데 그 결과로 인간하여금 고통에서 구해낸다.   생활이 고통스럽고 어떤 일에 대한 판단이 서지 않아 망설일 때 당신은 자신을 향해 어떻게 할것인가? 이에 대한 답안은 바로 “나와 더불어 살아가는 사람을 사랑하자”이다.   이 답엔데 따라 행동하고 노력한다면 모든 괴로움이 사라져 아무도 두렵지 않고  별다른 욕망으로부터 벗어나게 될것이다.      자신에게 다가온 황금 같은 기회를 버리고 기꺼이 사랑하는 사람을 택하는 사람, 이런 사람이 진정 아름답다.   아무나 그런 결단을 쉽게 내릴 수 없기에 그 사랑이 더욱 아름답고 한층 고귀하기에 마음에 와 닿는 것이다.   마음을 밝혀주는 사랑의 이야기다.   사랑과 평화의 제전 올림픽에서 목에 금메달을 걸려는 것은 모든 운동원들의 평생의 꿈이고 최고의 영광이다.   1924년 조정경기에서 당시 세계 최고 기록을 보유하고 있던 미국의 빌 헤이븐이 금메달을 위해 밤낮이 따로 없이 땀을 흘리며 마침 꿈에 그리던 파리 올림픽출전이 눈앞에 다가왔다. 하지만 그는 미국대표팀이 파리고 떠나는 날 공항에 나타나지 않았다.   바로 그 즈음에 그의 안해가 출산을 앞두고 있었기 때문이다. 처음에 빌은 올림픽에 출전해야 할지, 아니면 안해 곁에 남야야 할지를 망설이였다. 올림픽에 출전하면 그가 메달을 따내는것은 어렵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시각에 코치나 동료 선수들은 물론 안해와 담당의사마저 올림픽에 출전해야 한다고 설득하였다. 하지만 빌 헤븐즈는 평생의 꿈인 올림픽금메달을 포기하고 안해 곁에 남아서 아이가 태여나기까지의 산고를 안해와 함께 지냈다. 이로 하여 빌은 비록 금메달은 목에 걸지 못했지만 자신의 선택을 절대로 후회하지 않았다.   그로부터 28년 후, 제15회 헬상키 올림픽 남자 조종 성글 10.000메터 경기가 끝난 뒤 빌에게 이런 전보 한 통이 날아왔다.   “사랑하는 아버지, 제가 세상에 태여날 때 어머니 옆에서 저를 기다려주신 것에 진심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저는 아버지가 28년 전에 받으셨을 금메달을 목에 걸고 집으로 갑니다. 아버지의 사랑하는 아들, 프랭크로부터.”   금메달을 포기하고 기다렸던 그의 아들 프랭크가 28년 전 빌이 출전하려고 했던 종목인 조정 싱글 10.000메터 경기에서 당당하게 금메달을 따낸 것이였다.   세상은 이렇게  빌 헤이븐즈와 같은 남편, 아버지, 그리고 그의 아들 프랭크와 같은 진실한 사랑을 하는 사람들이 있기에, 그리고 그들처럼 마음을 비춰주는 사랑의 소유자들이 있음으로 하여 아름다움에 아름다움이 이어지는것이다.   오기활        
347    기자정신만세! 댓글:  조회:1588  추천:0  2020-11-07
기자정신만세! 편집/기자: [ 오기활 ] 원고래원: [ 길림신문 ] 발표시간: [ 2009-11-11 15:44:00 ] 클릭: [ ]    지난 3일 《길림신문》은 배낭을 메고 《조선족의 새 터 새 삶 찾아》 관내에 진출한 김태국기자를 소개했다. 김태국은 2007년에 한국방문취업제가 시작되자 조선족 한국행에 동참해 조선족의 삶의 현장을 찾아 좌충우돌 하면서 《방취자 우리는 누구인가?》 를 25회 시르즈로 조명하며 우리민족의 어제, 오늘, 래일을 묵직히 다뤄 사회적인반향을 크게 일으킨 《일꾸러기》기자다.   10월 30일 연변일보는 오태호의 글 《기자정신》을 실었다. 이글에서 오태호는 범정의(중국), 파라치나(이딸리아)기자와 일본 리쿠르트사건을 취재한 기자팀을 글에 소개하며 그들은 《투철한 기자정신이 있었기 때문에 사물의 본질을 깊이 파악하고 보다 무게있는 기사를 쓸수 있었다.》 《철저한 기자정신은 사회발전을 추진하는 원동력이다》로 글을 마무리했다. 《기자정신》은 여러모이다. 민족의 슬기와 용기, 실사구시, 권욕 물욕에 젖지 않고 역경을 이겨내는, 사회의 소금이 되여 부패를 폭로하는 것 등 모두가 기자정신이다.   오태호는 연변일보 전임주필이며 지금 80고령에 중병으로 몸을 움직이기도 힘들어 한다. 허나 그는 지금까지도 시들지 않고 《피 속에 잉크 흐르는》 기자정신을 갖고 있다.   필자의 짐작에 오태호의 원고는 친필원고라고 (아니면 친필원고를 다른 사람한테 청탁해 타자해서 메일로 보냈는지) 짐작되는데 궁금한 것은 번마다 원고를 볼때마다 모두가 오태호의 글쓰기를 《기자정신》으로 터득 하느냐 아니면 《,,, ,,,?》이다 한국을 대표하는 언론인 홍종인(1903-1998)은 중학교를 졸업하고 22살 나이에 언론계에 입문하여 95세에 일생을 마감한 《평생언론인》, 《영원한 현역기자》였다. 그는 20세기 40년대 《조선일보》 주필과 부사장으로, 60년대는 한국신문연구소 초대 소장을 지낸 한국언론의 상징으로 활약했는데도 《무덤 속에서도 신문기자로 행세할 것을, 또 주필이나 부사장이 아닌 평기자로 인정해 주기를 바란다》며 《평생언론인》을 지켰다. 그는 중학생에서 평생공부로 《대기자 홍박(박사)》을 따냈다. 그는《나는 대학의 심사나 정부의 인가절차도 없었고 박사라고 불러 달라는 청탁도 없이 친구들이 좋아서 불러주는 박사다. 상아탑이 아닌 거리의 박사, 민중이 붙혀준 박사 칭호가 이 이상 자연스럽고 명예스러운 것이 없다.》며 생의 마지막까지 흐뭇한 평생기자, 현역기자로 지냈다.   김태국, 오태호의 독자적인 당찬 발상과 강렬한 취재욕, 선배님들의 평생기자정신은 하루 아침에 얻은 것이 아닌, 엄격한 자기관리, 사회에 대한 책임, 출중한 자신감, 벼슬을 싫어하는 《생리》, 거기에 평생분투가 이한 기자정신과 이네들을 태생시킨다.   《언론은 길고 인생은 짧다.》 김태국, 오태호, 그리고 홍종인의 늘푸른 기자정신은 그들이 한눈 팔지 않고 당당한 기백으로 신문을 생활화 한데있다. 팔자는 기자절을 맞으며 《비문 없는 벼슬》의 선배기자님들을 본보기로 《평생기자》에 도전한다. 기자정신만세!    오기활  
346    "21세기의 '리시진'김수철전"(련재 24) 댓글:  조회:1490  추천:0  2020-11-01
24. 잠자는 공주 이런 이야기가 있다. 먼 옛날 하늘의 신(神)이 천사(天使)더러 지상에 내려가서 지상에서 가장 아름답다고 여겨지는 세가지를 선택한 후 가져오라고 했다. 천사는 지상에서 보고 들은 것에 의해 가장 아름다운 세가지로 꽃, 아기의 웃음, 어머니의 사랑을 선택하였다. 천사가 지상의 세가지 아름다움을 가지고 하늘의 신 앞에 갔을 때는 아름답던 꽃은 시들어버렸고 아기는 자라서 더는 아기가 아니였다. 그래서 신은 변함이 없는 어머니의 사랑만을 지상의 가장 아름다운 것으로 받았다. 어머니의 사랑은 동그라미처럼 돌고 돌아도 끝이 없고 한없이 커지기만 한다. 받지는 않고 한없이 주기만 하면서도 기뻐하는 어머니는 언제 한번 자식들 앞에서 그 공로들을 따졌던가! 어머니의 손은 자애의 손이고 어머니의 눈은 사랑의 눈이며 어머니의 마음은 자비의 마음이다. 어머니의 따뜻한 한마디 말에서 자식들은 얼었던 마음을 사르르 녹일 수 있다. 세상의 그 누구라도 숭고한 어머니의 사랑을 그대로 본딸 수 없다. 어머니는 우리를 비춰주는 태양이며 우리를 지켜주는 마음속 기둥이며 우리를 감싸주는 안식처이다. 나는 세상의 모든 어머니를 사랑하고 존경하는 마음으로 역시 어머니인 나의 안해도 사랑하고 존경한다. 아래의 글은 내가 안해(맹영자)의 탄신 93주년 생일파티에 올린 축하문이다. 맹모 생신 93주년에 올리는 축하문 오늘은 맹모의 93주년 생신일입니다. 오늘의 행사를 위해 참여하고 또 수고하신 귀빈 여러분과 온집식구들이 너무너무 고맙습니다! 로약한 몸인지라 자신의 일상생활을 자립할 수 없는 장모님을 부양하느라 수고를 아끼지 않는 현서(贤婿) 최명림(崔明林), 딸 김혜란(金蕙兰)과 가정부, 그리고 맏아들 김상술(金相术) 부부를 비롯한 자녀, 자부와 손자, 손녀, 증손 일동에게 맘속으로 깊이 간직해오던 치하의 말을 올립니다! 맹모가 산출한 4남 1녀와 그의 자손으로 이뤄진 27명의 대가정은 모두 맹모의 잉태와 양육의 노력으로 이룩되였습니다. 그만큼 맹모는 위대한 녀성이며 나의 둘도 없는 ‘록색로친’입니다! 인생의 자연적인 산출과 사회생활, 찬란한 문화, 문명 그리고 절대적 사랑, 꿈, 행복 등 인류세계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바로 어머니가 창조한 걸작들입니다. 저의 손녀 영화의 박사지도교사인 한국의 안영희 박사는 훈춘 경신의 방천에서 사막공원과 련꽃늪 등 아름다운 중, 조, 로 3국의 풍경을 만긱하면서 찬탄을 금치 못했는데 “어머니가 저를 낳아주셨기에 저는 오늘 세상에서 보기 드문 절경을 보게 되였습니다!” 하며 몸을 낳아준 어머님께 감사를 드렸습니다. 저도 50대 중반에 천신만고 끝에 두번째 장백산으로 불리우는 화룡 청산 베개봉의 절정에 올라가 만물을 굽어보며 베개봉암석에 ‘어머니’라는 위대한 세 글자를 새겼답니다. 어머니의 사랑은 절대적인 것입니다. 어머니는 사회의 그 어떤 여론도 아랑곳하지 않고 자식의 허물을 덮어감추면서 모자간 혹은 모녀간의 절대적인 은정을 유지합니다. 엄마를 잃은 젖먹이보다 더 큰 비극이 없습니다. 이 순간 엄마를 잃은 아이가 부르던 노래가 떠오릅니다. 쓸쓸한 가을바람 불어오며는 사랑하는 우리 엄마 보고 싶어요 엄마 죽어 나비 되고 내가 죽으면 꽃이 되여 필 때마다 안아주세요 동생아 울지 말고 어서 자거라 네가 울면 내 눈에서 피가 흐른다 … 눈물이 앞을 가려 계속 읽어내려갈 수 없습니다… 맹모는 문화교육의 혜택도 받지 못하며 백석(白石)에서 순진하게 자랐고18세에 ‘갓바위집’ 김룡천의 큰며느리로 시집을 와서 철이 없는 남편의 랭대를 받으면서도 수십년을 힘겨운 수전농사에 종사하였습니다. 맹모는 젊은 나이였지만 조상들의 성묘로 가는 길에 늙으신 시아버님을 업고 구수하강을 건너면서 시부모에 대한 효도를 다하였습니다. 맹모는 4남 1녀의 잉태와 양육에서 갖은 생활난에 맞띄웠지만 용케도 이겨냈으며 매서운 양력설날 추위에도 홑옷 바람으로 남편과 함께 산에 가 땔나무를 하면서도 군말이 없었습니다. 맹모는 가지가지의 어려움을 이겨내면서 한마디 불평도 없이 자식들의 뒤바라지를 해온 손색 없는 참된 어머니이자 용사였습니다. 이처럼 참된 어머니의 품에서 자란 자식들도 어머니와 할머니의 은혜에 보답하면서 단결, 화목, 우애와 지극한 효성으로 우리 대가정의 창성발전의 길을 펼쳤습니다. ‘사랑’은 인생의 비운을 구원해주는 유일한 수단입니다. 우리가 항상 몇십년을 갈라졌던 가족이 상봉하는 것처럼 서로 그리워하고 쓰다듬어주고 아끼면서 산다면 그 인생의 길은 비단의 길이며 만화방초로 가득한 삶의 아름다운 길로 될 것입니다. 오늘의 비단길 개척자 맹영자 만세! 위대한 어머니 맹영자 만세! 만만세!! 여기에 오신 여러분의 건강, 행복 만세! 김수철 2016년 추석 잠자는 공주 하느님이 인간에게 내린 최대의 선물은 바로 래일의 일을 오늘에 모르도록 한 것이라고 한다. 2017년 5월 7일에 내가 훈춘 경신에 가서 이른봄에 피는 식물꽃 사진을 찍고 돌아온 이틀후인 5월 9일에 안해가 94세의 나이로 고종명을 하였다. 안해의 93주년 생신에 올린 나의 축수문이 일년도 못되여 부인의 추도문으로 될 줄을 누가 알았으랴?! 그 때 만약 내가 욕심을 버리고 그 축수문의 “맹영자 만세!”를 “맹영자 백세!”로 표했더라면 혹시 백세를 살았을지도 모르는데 아무튼 후회막급이였다. 내가 안해와 함께 한 인생사는 안해를 통해 머리 속의 오점을 지워낸 인생사이며 서로가 함께 파란곡절을 겪으면서 부모가 정해준 운명을 그대로 받아들이며 분수에 넘치는 나의 욕망을 실천한 인생사이기도 하다. 나는 만약 내가 아버지의 선택에 불복하고 안해와의 약혼을 거절했다면 어떻게 되였을가 하는 상상도 해본다. 아버지의 ‘선견지명’으로 맺어진 우리 부부의 연을 내가 만약 끊어버렸다면 그 징벌로 후세에 불구자녀가 생겼을지도 모른다. 생각만 해도 머리카락이 곤두선다. 나는 안해인 맹영자씨를 평생의 동반자로 존중했다. 그래서 안해가 세상을 뜬 후에도 삼성촌 자택의 주방에 안해의 사진을 정히 모시고 늘 보면서 감사한 마음을 표하기도 했다. 올해(2017년) 추석에 나는 자녀들과 상의한 후 안해의 묘지에 비석을 세웠다. 그 때 나는 비문으로 의 가사를 선택하였는데 자녀들이 ‘子女一同立碑’라고 쓰니 늙은 나이에 토를 달지 못하고 묵묵히 자녀들이 하는 대로 따라주었다. 이런 아쉬움으로 나는 이 글의 제목을 로 하고 의 노래로 이 글을 맺는다. 앵두빛 그 고운 두 볼에 살며시 키스를 해주면 그대는 잠에서 깨여나 나에게 하얀 미소 지을가 그대여 어서 일어나 차가운 가슴을 녹여요
345    100세 리남조 “아직도 몇 십년은 문제없다”고 댓글:  조회:1702  추천:0  2020-10-17
할머니네 가족사는 중국조선족 100년사의 축소판     언제부터 시대의 화제로 오가던 “지금은 고령화시다”가 오늘(10월3일) 에 “지금은 백세시대다”로 확실해 졌다.  이날 연길 카이락스수정궁에서 펼쳐진 “백세수연례”의 주인공은 리남조(李南祚,延吉市北山亍丹城委42组5单元201)로 이날  “수연례”먼저 방영한 동영상에서 모든 하객들이 리남조할머니의 독서, 필기. 바느질. 설겆이. 두손을 높이 쳐들었다가 허리를 굽혀 두손으로 땅을 짚는 운동을 하는 믿기어려운 화면을 보고  “확실한 백세시대다!”고 찬탄하였다.   “백세수연례”는 리남조네 가족사를 소개하는 록화방송으로 막을 올렸다.  리남조할머니의 원적은 한국 경상북도 예천군 용궁면 무의리이다. 할머니는 할아버지, 아버지, 언니 3대가 반일투사이고 형제 8남매(7남1녀)인 리남조는 10살때부터 어머니를 도와 가사와 농사일을 했고 결혼후 54세에 남편을 잃고 혼자몸으로 자식들(2남 6녀)의 뒤바라지를 하여 슬하에 박사, 석사, 의사, 대학교수 등 5명인재를 키워낸 자랑스러운 어머니로 지금 5대에 53명(큰딸 80세)의 대가족이 중국, 한국, 미국, 오스틀리아 4개국서 살고있는 존경스럽고 행복한 할머니이다. 리남조의 할아버지 리수원(数元,1874-1959)은 어린나이에 서당공부하며 신동이라 불렸다. 리수원은 어느날 마을에서 조직한 시(诗)발표모임에서 반일(反日)시를 발표했다는 죄명으로 일본경찰들이 체포령을 내렸다는 소식을 듣자 1913년에 가족들을 데리고 신의주를 통해 중국으로 망명한후 “사람은 까막눈이 되여서는 안된다”며 자비를 출자하여 유하현 삼원포에 생물동학교를 설립, 우수한 학생을 반일무관을 양성하는 신흥무관학교에 추천하였다. 그리고 명신년토벌을 피해 흑룡강성 녕안 밀강에 이사한 후에도 그곳에 학교를 세우고 촌장으로 일했다.  1923년 가을에 리수원은 동경성으로 이사, 1924년에 처음으로 대종교의 제3주교인 윤세복을 만나 대중교에 입교하고 아들 리대성도 입교시켰다. (大倧教란 1909년에 창교된 우리 민족의 고유의 종교로 1910년ㅡ 1920년까지 독립무장투쟁을  활발히 전개, 1911년에 만주독립운동 단체인 중광단을 조직, 후에 교단중앙본부를 만주로 옮기고 군관학교를 설립하여 항일무장세력을 양성, 일제는 “종교통제안”이란 명목으로 대종교를 탄압ㅡ 편자) 리수원은 대종교 동경성교당의 전무, 상교를 력임하면서 대종교 2인자로 활약, 1928년부터는 전직 대종교요인으로 대종교의 운영비, 대종교총본사사업, 대종학원운영으로 큰공을 세웠다.   리남조의 아버지 리대성(大成)은 1923년초에 간목성공사(垦牧城公司)가 설립되였는데 동북군집단군 10군 부군장 곽송령이 공사주임이였다. 1924년에 리대성은 간목성공사의 한국인대표로 있다가 공사경리로 발탁하여 곽송령의 소개로 민국지방군 기병중대장인 마해산을 알게되고 그와결의형제를 맺고 간목성공사산하의 500여쌍의 수전을 경영하는 실업가로 된후 동경성,할빈을 나들며 곡식무역을 담당하였다. 리대성은 1925년에 김좌진장군이 영안에서 신민부를 설립할때 동경성대표로 참석하여 회의 장소와 식사까지 전담하였다. 1931년 만주사변후 일제가 중국의 조선인을 전면적인 타격을 시작하자 리대성은 마해산에게 군자금을 후원하는 등으로 영안현내의 4000여명의 한국인들이 위기를 넘기는데 큰 도움을 주었다. 1932년초에는 마해산과 공동으로 작전하여 소룡만과 잉가령에서 일본군 천야부대 기습에서 성공, 당년 12월에는 한국독립군의 차도선과 함께 경박호반대첩을 하였다. 1932년부터는 독립자금을 모으기 위하여 농장을 운영하면서 딸 리근숙이 유격대를 조직하는데 10만원의 자금을 해결해 주었다.  1933년 10월에 영안에서 체포되여 할빈관동군 사령부에 7개월 감금되였다가 신의주형무소로 이감되여 지방형 3년재판을 받고 고향으로 돌아왔다가 후에 일본놈들에세 참살당했다.   리남조의 사촌언니 리근숙(根叔)은 리대성의 큰형님 리만석의 딸인데 그녀가 출생 1년후에 생모가 죽자 리대성이 입양한후 이름을 선오(善吾)로 개명하고 친딸로 되였다. 리근숙은 어려서부터 중국말을 잘하고 웅변능력이 좋고 독서를 아주 즐겼다. 9.18사변후 항일구국운동에 뛰여들고 1930년에 입당, 1934년에 참군한후 정치사업을 하다가 항일독립 제4군 부녀주임겸 선전처 처장을 담임했다. 리근숙은 1940년대 초에 쏘련에가 모스크바대학에서 공부하고 만주로 돌아와 동경성 사라진에서 지방사업을 하였다. 그러다가 어느날 뻐스안에서 일본 사복경찰에게 발각되여 체포된후 참혹한 고문을 당하고 불구가 되여 잠시 석방되였다가 다시 체포되여 일제놈들에게 참살당했다.   리남조가족사소개 록화방영이 끝나자 선임국가민족사무위원회주임 리덕수와 주당위선전부 선임부부장 채영춘이 축사를 올렸다. 리덕수는 축사에서 “조선족 100력사의 견증인인 리남조할머니의 건강장수비결은 ‘화목+건강=애심’이다”  “리남초할머니는 많은 각고(各苦)를 이겨내고 나라와 가족, 이웃을 위하여 기여하었다”고 말하였고 채영춘은 “리할머니의 가족사는 우리 민족력사의 숙영이며 중국조선족100년사의 축소판이다”,  “리남조할머니의 100년인생은 많은 사람들의 원망을 오늘의 실천으로 증명했다.”  “리남조할머니는 우리 모두 의 교오이고 자호이다!”고 말하였다. 축사를 이어 리남조할머니가 자리에서 일어나 두손을 높이 흔들며 기쁨과 감사를 표하고 나서 이렇게 답사했다.   ... 나의 오늘의 있음은 나라의 덕분이고 자식들이 효도한 덕분입니다. 우리집의 모든 사람들이 나쁜일을 절대 안했습니다. ... 지금은 글을 써도 글씨가 삐뚤어서 쓰고싶은 글도 방정하게 못써서 아주 아쉽습니다. ...여러분들도 자식들의 효도하에서 건강장수하십시요!   이날의 “백세수연례”는 실로 모든 하객들의 기쁨과 행복의 현장, 배움의 현장, 감동의 현장이였다.   필자는 리남조할머니의 수연례 먼저 그를 인터뷰했는데 그때 인터뷰채록 요약으로 이 글을 마감한다.   문; 언제 중국에 오셨습니까? 리: 우리의 원적은 한국 경상북도 예천군 용궁면 무의리다. 백년전에 할아버지가 온가족을 데리고 신의주에서 압록강을 건너 단동, 심양, 해림서살다가 나중에 동경성에 정책했다. 나는 심양태생이다. 문: 문화정도는? 리: 할아버지한테서 한글(韓文), 한자(漢字)를 배우다가 할아버지가 사비로 6년제 소학교를 세운후 4년간 그학교들 다녔다. 그리고 초혼후 7년간을 혼자지낼 때 대정원에 다니며 공부하고 중학교도 대수 다녔다.  문: 결혼은 언제 하였습니까? 리: 결혼을 말하자니 힘들다. 이때까지 비밀로 지켰다. 내가 18살 때 8남 1녀네집의 막내아들의 눈에 들어 부모들이 그를 만나본후  그가 병자인것을 모르고 한달후에 나를 그와 결혼시켰다. 그런데 결혼하자부터 앓는 남편을 의사가 보더니 부부생활을 하면 안된다기에 7년간을 혼자지냈다.  25세에 5년 년상인 김병훈이란 남자와 결혼하고 2년 터울로 6녀 2녀를 출산하였다. 문: 지금의 건강상황은 ? 리: 안경이 없이 신문을 보고 바늘귀도 꿴다. 썩 오래 전에 딸집을 가다가 물도랑에 넘어져서 무릅뼈가 탈골했던 후유증으로 가끔씩 무릎이 아픈 외 아무런 이상이 없다. 단 이발이 부실하여 십년 전에 8500원을 팔아 치료를 하고 요즘에 불편해 3000원을 팔아 틀이를 했다. 나의 몸에 로인반점도 없다. 건강은 우리 집에서 누구도 나를 못 따른다.  문: 건강비결은? 리: 나는 늘 편안한 마음으로 남을 잘 받아 준다.  40세부터 의학서적을 보면서 스스로 여러가지 건강운동을 만들고 그운동을 50년견지해 왔다. 얼마 전에 큰아들이 나에게 발운동을 어떻게 하면 좋다며 알려주니 나는 그운동을50년간 하루도 빼 놓지 않고 견지했다니 놀라 하였다. 문: 이제 몇 년을 더 살수 있다고 자신합니까? 리:. 운동원처럼 건강하지는 않지만 먹을 것을 제대로 먹으니 지금 생각에 아직도 몇 십년은 문제가 없을 것 같다.(환한웃음) 문: 지금까지 잘했다고 하는 일이 있다면? 리: 잘했다고 생각되는 일이 아무것도 없는데 재혼 때 둘이 털털 이로 만난 것은 잘한 것 같고 자녀들을 잘키운 것이 자랑스럽다. 문; 아쉬웠던 일이 있다면? 리: 생활이 그렇게 가난하면서도 없다는 말을 안하고 너무 간고하고 고지식하게 살아 온 것이다.  그밖에 내가 가장 존경하는 어머니를 소설로 쓰지 못한 것이 매우 아쉽다. 문; 억울한 일이 있다면? 리: 내가 가도에서 련조장, 선전워원으로 공작하다가 감독원을 시키니 나는 남을 감독할 자격이 없다며 사양을 했다. 그런데 오빠가 아버지가 일본놈들에게 총살 당한후 원쑤를 갚겠다며 집을 나갔는데 후에 보니 토비로 되였다. 하여 오빠의 문제로 가도에서 “可疑分子”로 몰려 모든 사업을 박탈당한 것이다. 할아버지, 아버지, 언니가 항일렬사인데 오빠문제로 렬사가족을 묵과당하고 “가이분자”로 몰리니 그때 정말 억울 하였다. 문: 반성되는 일은 없는지요? 리: 이때까지 “예, 예”하면서 살아왔기에 반성할 일이 별로 없다. 마음에 가책되는 일이 한 점도 없다. 문: 하고 싶은 말씀이 있다면? 리: 지금까지 우리가문이 좋은 가문인지 아니면 나쁜 가문인지를 알려줬으면 좋겠다.(뜻인즉 할아버지, 아버지, 언니의 항일력사를 기록한 책이 없다는데서의 서운함이다 ㅡ편자) 문: 효도란? 리: 효도란 부모님이상 조부, 증조부…를 대상해 쓰는 말이다. 녀자가 절개를 지키면 렬녀, 훌륭한 안해를 조강지처, 훌륭한 어머니를 현처량모라고 말한다. 문: 자식들에게 할말이 있다면? 리: 아무런 요구가 없다. 저희들끼리 잘 살면 된다. 문: 그 년세에 이성에 대한 생각이 나는가요? 리: 나는 이성을 말하면 듣기도 싫다. 나는 총명한 증손들에게 빠진 재미로 산다. 실로 리남조할머니로 말하면 마음은 진짜고 나이는 수자에 불과하다. 오기활   (길림신문 2020년 10월 17일)
344    "21세기의 '리시진'김수철 전"(련재 23) 댓글:  조회:1827  추천:0  2020-10-15
23. 명리를 위한 소작(小作)이 아닌 인생철학 대작(大作)으로 오기활선생에게: 2016년 10월 15일에 선생이 작성해준 질문제강을 감사히 받았습니다. 이 고령자에게는 전화나 면전 질문보다도 이런 문자질문이 더 편합니다. 인제는 사유력도 점점 떨어지고 두뇌도 점점 퇴화되여가므로 어순배렬기능이 많이 못해졌습니다. 오선생의 취재 때 수차나 되는 질문을 받을 때마다 답안이 틀릴가 봐 걱정을 많이 했는데 오선생이 미리 질문제강을 짜주어 참 다행이였습니다. 제가 질문제강에 따라 선조들이 걸어온 력사로부터 시작하여 나의 개인생활과 사회활동을 계통적으로 쓴다면 내용이 확실하고 체계적일 뿐만 아니라 시간적으로도 퍽 효과적일 것입니다. 기실 저는 오선생이 저의 자서전을 쓰겠다고 할 때 처음에는 딱 잘라 거절했지요. 그러다가 오선생의 부인(김금복)까지 저의 사적들을 하나하나 읽으면서 그 사적들을 채록하여 저의 자서전 출판에 도움을 주었고 또 오선생의 “부끄럽지 않게 살아온 자연인의 인생사를 쓰고 싶은 대로 다 쓰세요.”라는 권고에 저는 생각을 바꾸고 “시름을 놓고 마음대로 쓰겠다”고 필을 들었습니다. 오선생이 작성한 질문제강은 저의 앞길을 훤히 밝혀주는 리정표였습니다. 저는 자서전에 지금 젊은 세대들이 알 수 없는 당시의 자연환경, 사회환경과 력사인물, 력사사실들을 쓸 것이니 후대들에게 교양서 역할을 할 것이라고 자신합니다. 저의 자서전에는 제가 걸어온 92년(1925년—2016년) 동안의 인생사도 많겠지만 근 400년전의 우리 민족의 력사도 들어있습니다. 속에는 근 400년전의 에 슴배인 사람냄새가 풍기는 이야기가 들어있는데 이는 저의 생각으로는 중국 조선민족의 혈연사에서 처음으로 되는 사료인 동시에 진품 혹은 명품으로 되기에 손색이 없을 것입니다. 저의 자서전은 학습, 학교생활, 교육생활, 과학학술활동에만 국한된 것이 아닌, 평범한 생활 속에서 평범하지 않은 인생사의 의미심장하고 무궁무진함을 인생철학의 경지에 상승시킨 것이라는 엉뚱한 생각도 해봅니다. 오기자와 저의 숙명적인 만남과 인연도 역시 저의 아버지의 ‘선견지명’으로 이어진 것이 분명하다는 생각도 해보았습니다. 이는 인연과 운명의 체험을 위해서는 최선을 다하는 현명한 인사들의 소행임을 어찌할 바 없습니다. 저는 더 큰 것을 위해서 저에게 채찍질하는 오기활선생을 사랑해야 하는 것만이 저의 참다운 인도주의라고 판단을 하였습니다. 오선생 역시 오선생에게 많은 페를 끼치는, 오선생의 금쪽 같은 시간을 훔쳐내는 이 김수철을 ‘미워’함이 ‘당연’하겠지만 ‘김수철이 좋은 인연을 만난 덕분에 얻은 생명’이니 오선생이 언제까지나 저를 고무격려해주어야지요. 끝으로 저의 자서전이 ‘나 개인의 명리를 날리는 소작(小作)이 아닌 인생철학의 대작(大作)으로’ 되게끔 쓰기를 부탁합니다. 저는 평생을 장자의 ‘지인무기(至人无己)’, ‘신인무공(神人无功)’, ‘성인무명(圣人无名)’을 인생의 좌우명으로 지켜왔습니다. 장자는 몇천년전에 벌써 “경지에 오른 사람은 자기를 내세우지 않고 신의 경지에 이른 사람은 공을 내세우지 않으며 성인은 이름을 구하지 않는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제가 보건대에는 상당한 부류의 현대인들이 맨 앞자리에 오르려고 욕심을 부리고 있으며 겸손을 잊고 타인들 앞에서 고개를 숙이는 것을 패배라고 여기면서 자신만이 제일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이러한 사람들은 ‘지인무기’, ‘신인무공’, ‘성인무명’이라는 것을 알 수가 없습니다. 이들은 명예와 출세만을 위해 땀을 흘리고 명예와 출세를 갈라놓고 생각해본 적이 없습니다. 자연은 왜 사람들을 행복하게 할가요? 그것은 자연에는 명예나 욕심 같은 것들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상을 부언하면서 오선생의 아낌없는 로고에 감사를 드릴 뿐입니다. 김수철 2016년 10월 25일 밤 12시
343    "21세기의 '리시진'김수철전"(련재 22) 댓글:  조회:1867  추천:0  2020-10-01
22. ‘3인방’의 핍박으로 량산에 오르다 나, 황영수(黄永秀), 김론범(金论范) 교수는 지난 50년대에 한동네(룡정현광신향 광신대대)에서 동고동락하면서 함께 자란 친구들로서 농학원을 다닐 때 주변의 사람들로부터 ‘3인방’이라고 불리웠다. 하지만 필자가 오늘 말하는 ‘3인방’은 우리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오기활, 서규철, 황영수 등 세 사람을 이르는 말이다. 2016년 여름, 연변농업과학연구소 연구원으로 지내다가 정년퇴직한 서규철옹이 ≪길림신문≫에서 오기활기자의 기사를 읽고 전화로 오기자한테 나에 대해서 언급하게 되였다. 그러자 오기자는 지금 한창 나의 자서전에 대해 구상하고 있는데 내가 동의하지 않는다며 서규철옹한테 도움을 청하였다. 이에 서규철옹은 연변농학원 황영수 교수한테 련계를 취해 오기활기자의 뜻을 전달하였다. 황교수는 아무런 토도 달지 않고 발벗고 나서서 연변농학원의 몇몇 원로들을 조직하여 소위 ‘희망조’라는 소조를 내왔다. 그런 후 또 자기가 직접 나서서 연변대학로간부사업 사무실, 연변로교수협회 등 관련 부문을 찾아가 내가 개인적으로 한창 마무리중인 ≪길림성식물채색도감≫ 편집과 출판에 관한 사항을 회보하고 관련 부문과 함께 직접 우리 집을 방문한 후 ‘김수철자서전’을 쓸 데 관한 건의를 하였다. 그 후 연변대학로간부사업 사무실 유관 일군들로부터 연변농학원 원장에 이르기까지 나를 방문하며 정황을 료해했고 ≪길림성식물채색도감≫과 ‘김수철자서전’의 출판을 나의 개인사업이 아닌 연변대학 연변농학원의 중요사업으로서 오기활기자에게 집필을 맡길 것을 부탁하였다. 황영수 교수는 년로하고 쇠약한 몸이였지만 사처로 다니면서 내가 자서전을 쓰는 데 많은 도움을 주었을 뿐만 아니라 또 적지 않은 힘도 보태주어 나는 항상 그에 대한 고마운 마음뿐이였다. 한번은 그가 부인과 함께 룡정에서 자전거를 타고 조양천에 있는 우리 집으로 일보러 오다가 그만 넘어져 얼굴에 큰 상처를 입고 병원에 가서 봉합수술까지 받았다. 사실은 그전에도 학교측에서 학교의 수요라며 나에게 자서전을 쓸 것을 요구한 적이 있었다. 그 때 나는 자서전을 쓴다는 것이 나로 놓고 말하면 아주 힘에 부치는 일이고 또 큰 부담으로 여겨져 뚝 잘라 거절해버렸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황영수 교수 등이 고생도 마다하지 않고 적극적으로 도와주는 데서 어쩔 수 없이 ‘핍박에 못이겨 량산’에 오른 것이였다. 나는 나의 자서전이 나 개인의 일뿐만이 아니라 학교 나아가 사회의 수요임도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이 내가 여생을 더욱 보람 있게 사는 데 추동력이 될 것이라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하여 나는 학교와 사회의 수요에 좇아 고령임에도 불구하고 이 과중하고 험난한 일을 떠맡기로 결심하였다. 마치도 다빈치가 절세의 명화 를 자기가 제일 하고 싶은 일로 여기고 열심히 그렸듯이 말이다. 2016년 10월부터 나는 오기자가 작성해준 질문제강에 따라 열심히 자서전을 쓰기 시작했다. 아마도 80세 이상인 다른 로인들 보고 나처럼 글을 쓰라고 하면 언녕 쓰러졌을지도 모른다. 따라서 나에게 건강한 몸을 주신 부모님이 얼마나 감사한지 몰랐다. 나의 자서전은 연변대학 농학원의 위상을 떨치고 또 농학원이 배출한 한 인물을 만방에 알리는 데 큰 역할을 할 수 있는 것인 만큼 나는 연변대학 농학원의 존엄이나 품위를 위하여 만단의 준비로 이 자서전을 훌륭히 완성할 것이다. 육체적으로 가장 힘든 일이 정신적으로 가장 즐거운 일로 될 때가 있다. 어쩐지 나를 두고 하는 말인 것 같다. 이 글로 ‘3인방’의 로고와 관련 부문의 배려에 감사를 드린다. 김수철 2017년 11월 조양천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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